1. 산령(山靈)의 희생
2. 멋있는 사수(射手)
3. 죽음의 환영(幻影)
4. 범의 밤
5. 식인호(食人虎)
6. 마적(馬賊)
7. 사냥개들
8. 밀림의 법(法)
9. 방황하는 사람들
10. 곰사냥
11. 노 마적(老馬賊)의 복수
12. 첫 탄(彈)
13. 밀림의 비극
14. 뱀 할아범
15. 가장 위험한 동물
16. 식인(食人) 사자(獅子)
17. 미친 코끼리
18. 용감한 마사이족(族)
19. 야생(野生) 물소
20. 난쟁이 부족(部族) 피그미
21. 사나운 코뿔소
22. 아가씨 수렵가(狩獵家)
1. 산령(山靈)의 희생
<귀를 기울여보시오. 들립니까? 들리지요? 저 눈보라 소리가. 저 울부짖는 소리가 그리고 들끓는 당신 자신의 맥박 소리가 ….> 바이콥의 시(詩).
돈링 할아범의 산막(山幕)에 도착했을 때는 캄캄했다. 멀리서 우리들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돈링 할아범이 뛰어나왔다.
‘안녕하시오? 보보신, 코안경 나리.’
보보신과 가끔 코안경을 끼는 나는 단칸방인 할아범의 집으로 들어갔다. 진흙을 두껍게 쌓아 올려 만든 그의 방에 불이 활활 타고 있었고 불 위에 걸어놓은 냄비에서 익어가는 고기만두 냄새가 구수하게 퍼져 나왔다. 돈링 할아범이 사슴고기를 넣어 만든 주먹만 한 만두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배가 부르니 체면 없는 손님들은 난로 앞에서 곯아떨어져 버렸다.
정말 잘 잤다. 몇 주일 동안의 피로가 한꺼번에 풀렸다. 그러나 나는 아직 어두운 새벽에 잠을 깼다. 무엇인가 심상찮은 기운이 방안에 감돌고 있었으며 보보신도 눈을 뜨고 있는 것 같았다. 희미한 불빛에 돈링 할아범의 웅크린 동그란 등이 보였다. 돈링 할아범이 문에 귀를 대고 바깥을 살폈다.
‘할아범, 뭐야?’
할아범은 손짓으로 입술을 가리며 귓속말로 속삭였다.
‘큼직한 대장(大將)이 순시(巡視)를 하고 있어요. 산신령(山神靈) 두 분이 우리 집 부근을 순시하고 있어요. 소리를 내지 마시오. 산신령은 성미가 급해 이내 노(怒)하니까요.’
정말이었다. 무거운 발자국에 눈이 눌려 뿌지직! 뿌지직! 하는 소리가 들렸고 가끔 뱃속에서 짜내는 듯한 산신령의 숨소리가 들렸다. 산신령이 집 울타리까지 접근했다. 그들이 곧 방안까지 들어올 것 같아서 옆으로 스르르 누우면서 총을 당겼다. 할아범이 머리를 좌우로 흔들며 경고했다.
‘나리, 안 돼! 산신령을 화나게 하면 안 돼!’
물론 나도 그런 어둠 속에서 범과 대결하려던 것은 아니었고 만일의 경우에 대처했을 뿐이었다. 날이 밝아오자 범들의 발자국 소리가 멀어졌다. 범이 사라지자 돈링 할아범이 침착성을 되찾았다. 범들이 나타난 것은 마을 사람들에게 희생물을 제공하라고 독촉하기 위해서라고 주장했다.
예로부터 이 마을 사람들은 범에게 1년에 한 번씩 사람 한 명을 제공했다고 한다. 사람이 스스로 희생물을 제공 안 하면 범은 열 명 이상을 잡아갔다고 한다. 이래서 마을 사람들은 마을에서 나쁜 짓을 한 사람, 노동력을 상실한 사람을 선정해두었다가 희생물로 제공했으며 범은 그 희생물에 맛을 들여 사람고기 생각만 나면 마을 부근을 돌아다닌다고 했다.
여명(黎明)의 빛이 밀림에 숨어들고 바위산이 햇볕을 받아 흑금색(黑金色)으로 반짝이기 시작할 때 보보신과 함께 범의 뒤를 쫓았다. 범의 발자국을 따라 4km쯤 갔을 때 우리들은 곤경에 빠졌다. 우리 앞에 러에린산맥의 화강암 절벽이 거의 수직으로 앞길을 막았다. 북만주, 지금의 동부 중국의 길림에는 광대한 원시림이 있다. 몽골 영토만 한 원시림은 태고의 신비가 있었다. 그 삼림은 100km나 뻗어 있었으며 산과 계곡과 고원들이 어두운 녹색으로 뒤덮였고 그 녹색은 언제나 거친 바람으로 파도쳤으며 그 안에서 뭇 짐승들의 포효가 쉴 새 없이 들려왔다. 그 삼림을 사람들은 슈하이(樹海)라고 불렀다.
북만주철도는 그 삼림을 서북에서 남동으로 횡단하였는데 철도도 그 광대한 슈하이의 원시 생태는 아무런 변화를 주지 못했다. 가끔 사냥에 미친 포수들이 들어가는 것 외에는, 그러나 들어간 포수는 많아도 나온 포수가 드믈었다. 그 원시림에는 태고(太古)의 삼림의 신(神)이 살고 있었으며 그 신의 절대절명(絶大絶命)의 의지가 모든 생물을 지배했다. 동물들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도 신의 의사(意思)가 뚜렷하게 작용했다. 몸이나 마음 어느 쪽 하나가 약하면 이곳에서는 살 수 없다. 신은 그런 사람은 가차없이 도태(淘汰)시켜버린다. 굶어 죽거나, 얼어 죽거나 아니면 짐승의 밥이 된다. 또한 게으름이나 부도덕(不道德)도 안 된다. 그것도 바로 죽음을 의미한다. 밀림에는 죽음과 삶이 교차되고 있었으며 밀림의 사람들은 그 교차되는 가운데 살고 있었다. 밀림의 생활은 인류가 아직 사회라는 것을 모르는 시대에 있었던 독특한 풍습이 지배한다. 그것은 불문율(不文律)이기는 하나 준엄(俊嚴)하고 자비(慈悲)스러웠다. 야릇한 법률이다. 밀림에서 가장 무거운 죄는 살인이 아니고 절도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삼림에서는 살인은 그다지 큰 의미가 없었으나 절도는 절대로 용서하지 않았다. 절도에 대한 형벌은 사형(死刑)이다. 밀림의 재판은 신속하게 내려지고 집행된다. 피해자는 입회인이고 가장 가까운 곳에 사는 이웃사람이 재판관이 되어 판결이 내려지고 판결이 내려지면 곧 집행된다. 집행 방법은 생매장(生埋葬)이다. 산채로 땅에 묻는다. 영하 40도가 되는 겨울에는 땅이 지하 2m까지 얼어붙어 땅을 팔 수가 없다. 이럴 때는 할 수 없이 다른 집행 방법을 따른다. 밀림의 수호신(守護神) 범이다. 절도 피의자는 범의 다니는 길목의 나무에 산채로 묶인다. 주민들은 나무 밑에 촛불을 켜고 기도를 드린 후 사라진다. 산신령님이 어김없이 나타나 한 끼의 식사를 맘껏 즐긴다.
나는 오래도록 만주의 삼림을 떠돌아다니면서 그런 나무들을 많이 보았고 주민들의 생활풍속을 잘 알고 있었으나 언젠가~아마도 1934년 1월이라고 기억되는 날에 겪었던 일은 잊을 수가 없다.
우리들~나와 오랜 사냥 친구며 조수(助手)인 아긴진과 보보신은 산돼지사냥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2주일 동안 이린혜강 상류에 있는 울창한 밀림을 돌아다니다가 점점 서쪽으로 갔는데 우리 눈앞에 피라밋 형(形) 산봉우리가 석양빛을 받아 붉게 빛나고 있었다. 친구 보보신은 그 아름다운 자연경관에는 관심이 없는 듯 독한 냄새가 날리는 파이프를 물고 2m가 넘는 육척장신(六尺長身)이 길게 그림자를 끌며 가파른 산길을 묵묵히 걸었다. 돈링 할아범의 산막까지는 아직 4km가량 남아 발길을 재촉하고 있었는데 앞서가던 보보신이 발길을 멈췄다. 그리고 나에게 턱과 파이프로 땅을 가리켰다. 눈 위에 쟁반만 한 발자국들이 선명하게 찍혀있었다. 그 거대한 도장은 산신령님의 경고장이었다.
(여기는 내가 지나갔으니 뭇 생명들은 가까이 오지 마라!)
보보신은 간담(肝膽)이 크기로 이름난 사냥꾼이었으나 그는 표정이 침울해졌으며 걸음이 빨라졌다. 날이 더 어둡기 전에 돈링 할아범의 산막에 도착해야 할 것 같았다. 어둠 속에서 산신령님과 해후(邂逅)는 죽음이니까. 산마루를 하나 넘자 아직 잔광(殘光)이 남아있는 참나무밀림에 200마리가 넘는 산돼지들이 떼지어 놀고 있었다. 젊은 놈들은 장난을 치고 늙은 놈들은 낙엽에 묻혀 잠을 자고 있었다. 나는 총을 쏘기 싫었다. 그런데 보보신이 쏘았다. 한 발 또 한 발, 두 마리가 쓰러지자 산돼지들이 몰려왔다. 내가 쏠 차례였으나 나는 총을 내리고 큰 나무 뒤로 숨어버렸다.
‘왜, 쏘지 않았어?’
보보신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물었으나 내 대답을 들으려고 묻는 말이 아니었다. 보보신이 죽은 산돼지의 배를 갈라 내장(內臟)을 꺼냈다. 내장을 꺼내지 않으면 꽁꽁 얼어 운반하기 힘들었다.
‘바이콥 형, 그놈의 범이 이 부근에 있는 것 같아.’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산돼지를 따라 움직인 발자국이 있었다.
‘보보신, 시시한 산돼지사냥을 그만두고 범을 잡자!’
보보신이 빙그레 웃었다. 산돼지는 버려두고 범을 따라갔다. 범은 울퉁불퉁한 돌길을 타고 산등으로 가고 있었다. 높은 곳에서 아래를 감시하려고 한 것이다. 8시간을 추적했으나 범을 따르지 못했다. 피로했다. 그래서 보보신이 예부터 알고 있는 단골 여관에 들었다. 돈도 받지 않는 무임숙소(無賃宿所) 동굴(洞窟)이었다. 동굴은 입구가 허리를 굽혀야 들어갈 수 있었으나 내부는 3평 남짓한 크기였다. 동굴 입구에 담요를 쳐서 바람을 막고 불을 피우니 훌륭한 숙소였다. 검은 빵과 산돼지고기구이로 저녁을 마친 뒤 우리는 폭신폭신한 낙엽 위에 누웠다. 서너 시간 푹 잤다. 오랜 습성으로 잠이 깨어 밀림의 심야(深夜)음악을 듣고 싶었다. 심야 음악이 연주되고 있었다. 바람 소리와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 이름 모를 소리에 섞여 범의 포효(咆哮)가 들렸다. 그러자 우리 숙소에서 약 1km 이내에서 다른 굵은 포효가 터졌다. 멀리서 들리는 포효는 레놀처럼 아름다웠으나 가까이서 들려오는 포효에는 등골이 싸늘해졌다.
‘저놈이야, 바로 저놈.’
어느새 보보신이 일어나 파이프에 불을 붙이면서 중얼거렸다. 범들의 포효는 밤새 계속되었다. 수놈은 암컷을 찾고 암컷은 수놈에게 자기 위치를 알려는 것이다. 새벽녘, 우리는 뜨거운 차를 한 잔 마시고 장미색으로 물든 산봉우리를 따라 다시 추적을 시작했다. 산봉우리를 넘는데 보보신이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낯이 창백했다. 사람이 죽어 있었다. 벌겋게 피로 물든 주변에는 범의 발자국이 흩어져 있고, 두터운 솜옷은 걸레 조각처럼 찢겨졌는데 그 알맹이는 없었다. 털모자가 뒹굴고 검고 긴 머리카락만 남아있었다. 머리카락의 주인공은 허리뼈와 두개골로 남아 5m쯤 떨어진 눈 위에 뒹굴고. 그중국인은 밀림의 희생자였다. 밀림의 법을 어겨 사형이 선고되어 범의 밥이 되었다. 나무에 꽁꽁 묶였던 그 사내는 영하 30도의 추위에 몸을 떨었고, 죽음을 앞둔 불안과 공포에 떨었으며, 법이 나타났을 때도 고통을 당했다. 피에 굶주린 범은 우선 사내의 옷을 벗기려고 몸을 물어뜯었다. 우리는 밀림의 법칙에 따라 사형당한 사내의 유품(遺品) 곁에서 오래도록 뜨지 못했다. 신경이 굵은 보보신이 견디지 못하고 세상의 욕이란 욕을 모두 동원하여 저주(咀呪)를 퍼부었다.
‘그 무지한 년놈들이 할 일이 없으면 X이나 할 것이지 이런 짓을 해? 사람을 그것도 살아있는 만물의 영장(靈長)을 범에게 먹이다니 …. 오냐, 그 년놈들이 미워서라도 그들의 왕대(王大)를 잡아 죽일 테다.’
왕대는 범의 존칭(尊稱)인데 범의 이마에 <임금 왕 자>가 그려져 있는 데서 유래했으며 주민들은 왕대를 신으로 섬겼다. 나의 성미 급한 친구는 그 자리에서 떠나 한참을 걸어가면서도 욕설을 그치지 않았다. 동부 중국의 태양은 유난히 밝았으며 무심한 푸른 하늘은 투명했다. 우리들이 떠난 곳 하늘에서는 까마귀가 날고 ….
보보신은 파이프에서 마치 기관차처럼 연기를 뿜어내며 걸었다. 입을 꽉 다물고 눈에는 증오가 가득 찼다. 산정(山頂)에 오르자 범의 발자국이 나뉘어졌다. 우리는 수놈을 추적했다. 범은 우리의 추적을 눈치채고 우리를 따돌리려고 빨리 뛰어가거나 험한 산정으로 올라갔으나 우리는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범과 사람의 의지력의 싸움이었다. 범이 초조해졌다. 우리들 때문에 굶주리게 된 왕대는 철도선로에 있는 삼림마을로 달아났다. 그곳은 중국인 쿠리(노무자)들이 재목 운반을 하고 있었는데 범보다 하루 늦게 도착한 우리들이 거리에 들어섰지만 낮인데도 모두 문을 닫아걸고 거리에는 인기척이 없었다. 범이 말 두 마리를 죽이고 주인도 죽였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왕대가 희생을 요구한 걸로 보고 마을 밖에 신전(神殿)을 차려 촛불을 켜고 기원을 하고는 모두 집 안에 숨어버렸다. 마을 사람들은 우리가 거리를 걸어도 나오지 않았다. 총을 멘 사나이들과 어울리다가는 산신령님의 노여움을 사 죽는다고 믿고 있었다. 마을 끝에 왔을 때 한 사내가 따라왔다.
‘코안경 나리, 안녕하십니까?’
전에 내가 곰을 잡았을 때 운반을 맡았던 사내였다.
‘내 말도 한 마리 죽였어요. 내 말은 씩씩한 종마(種馬)였는데, 왕대님이 암컷을 죽이는 것을 보고 놀라서 앞다리를 들어 올렸지요. 천지신명(天地神明)께 맹세하지만 왕대님에게 항거를 하려는 뜻은 아니었는데 왕대님이 노하셨지요. 왕대님은 별안간 천둥 같은 노호(怒號)를 지르면서 불쌍한 내 말을 덮쳤습니다. 난 벌벌 떨면서 문틈으로 봤는데 왕대님은 대뜸 뛰어올라 말의 머리를 치더니 말과 함께 넘어지면서 말의 목줄을 물어뜯었습니다.’
사내의 눈에 눈물이 베였으나 보보신이 냉랭하게 말했다.
‘그래, 그때 자네들은 뭣을 하고 있었지? 또 도둑놈이나 잡아서 그놈에게, 그 범에게 제공할 계획을 하고 있었나?’
사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왕대님에게 그놈 범이라니요.’
‘왕대인지 신령(神靈)인지 모르겠지만 그놈의 살인 호랑이놈은 내가 죽일 거야. 내가 그놈의 목줄을 물어뜯어 죽일 테니 그때 위령제나 지내시오.’
사내는 와들와들 떨면서 달아났다.
우리는 그 마을 밖에서 왕대를 따를 수 있었다. 왕대는 추적에 신경질이 되어 천천히 한군데를 돌면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보보신이 총의 안전장치를 풀었다. 보보신은 웃고 있었으나 낯은 창백했다. 턱을 꽉! 다물었다. 태양이 중천에 높이 떠 삼림이 찬란하게 빛났다. 우리는 사방을 살피면서 천천히 추격했다. 10m 정도 떨어진 언덕 너머에서 까치가 울었다. 신경질적인 울음이었으며 거기 범이 숨어있다는 경고였다. 심장박동이 빨라졌다.
(안 돼! 흥분하면 안 돼!)
마음을 달래면서 걸음을 늦추었다. 언덕을 넘어서니 까치들이 보였다. 잘려진 큰 나무 위에서 까치들이 날고 있었다. 보보신과 내 눈이 마주쳤다. 왕대는 잘린 나무둥치 뒤에 몸을 바짝붙여 숨었다. 그 큰 덩치가 나무에 밀착되어 거의 완벽한 은신술이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여러가지 불리한 것이 있었다. 까치가 머리 위에서 울고 있었고, 태양 빛이 너무 밝았으며, 땅에 하얀 눈이 내렸다. 그래서 그 얼룩덜룩한 무늬가 하얀 눈에 그림자를 만들었고 기다란 얼룩 꼬리가 길게 뻗쳐 신경질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거리는 약 20m, 범은 우리가 더 접근하기를 기다렸다. 우리는 서너 발 더 전진하고 멈췄다. 우리도 거기에서 왕대의 공격을 기다릴 작정이었다. 결정적인 시간은 3, 4초 정도다. 범은 그 이상 참지 못한다. 그는 양 귀를 뒤로 딱 붙이고 몸을 길게 뻗어 도약을 했다. 그의 탄력 있는 근육이 강철처럼 뻣뻣해졌다. 첫발부터 도약이었다. 범의 몸이 공중에 떠오른 순간 보보신이 발사했다. 구식(舊式)이긴 하나 구경(口徑)이 넓은 총탄은 범의 앞이빨을 부러뜨리고 목을 뚫고 나갔다. 왕대는 그 강렬한 총탄의 충격을 무릅쓰고 몸을 앞으로 내밀었으나 산이 울리는 포효소리와 함께 옆으로 쓰러졌다. 왕대는 즉시 몸을 일으켜 다시 도약을 했다. 나는 그의 몸이 공중에 떠올라 유선형(流線型)으로 쭉 뻗는 순간을 기다려 심장을 겨누어 발사했다. 범은 충격과 고통에 미친 듯이 포효하더니 쭉 뻗은 자세 그대로 땅에 떨어졌다.
‘어때, 왕대님!’
보보신이 파이프에 담배를 쑤셔 넣으면서 능청스럽게 말했다.
‘할 말 없지? 만물의 영장인 사람의 피를 빨아먹더니 이번에는 자네 차례가 되었어. 자넨 그 겁쟁이 주민들을 협박하여 부귀영화富貴榮華를 누렸지만 이젠 자네가 우리에게 그 껍질을 줘야 되겠어.’
왕대의 황록색의 눈동자에 맑게 개인 하늘이 투사되어 있었다.
2. 멋있는 사수(射手)
어두운 밀림 속의 밤, 하늘에는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으나 그 빛은 밀림에는 스며들지 못하고 나뭇잎 위로만 흘러갔다. 그래서 밀림의 밤은 검었다. 란트호 강물도 검었으며 잔잔하게 흘렀다. 우리들이 탄 통나무배가 거대한 참나무 가지 밑으로 흘러가고 있었는데 뱃머리에 달아놓은 횃불 빛이 돌멩이투성이 강바닥을 비췄다. 나는 배 뒷전에 앉았고 장숍이 하나밖에 없는 왼손으로 긴 창을 들고 강물 속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강변의 밀림이 마치 검은 절벽처럼 늘어서고 숲에서는 개똥벌레들이 날고 있었으며 늪에서 우는 부엉이 맑은 울음소리와 새들의 소리도 들려왔다. 배는 조심스럽게 강가의 바위를 피하거나 수초를 헤치면서 전진했다.
‘없는데, 여긴 없어요. 상류로 갑시다.’
장숍이 배를 돌렸다. 그때 물속에서 철썩! 고기가 튀었다. 배가 멈췄다. 장숍이 물속을 가리켰다.
‘가물칩니다.’
장숍이 창을 던졌다. 슛! 소리와 함께 창이 물속으로 들어갔고 장숍이 창대를 부여잡고 있었는데 배가 요동을 쳤다.
‘이 새끼, 곱게 잡히지 않고!.’
장숍이 혀를 차면서 창을 끌어 올렸다. 120cm가 넘는 가물치였는데 그놈은 배에 끌어 올려와서도 요동을 쳐서 배가 기우뚱거렸다. 첫 수확 후 우리는 큼지막한 놈으로 여섯 마리를 잡았는데 가물치의 무게로 배가 가라앉을 위험이 있어 강 사냥을 마쳤다. 강둑에서 불을 피웠다.
‘코안경 나리, 좀 주무시지요.’
그는 내가 담배 한 대를 태우는 동안 가물치를 구웠다. 대꼬챙이에 끼워 모닥불 옆에 세워놓고 소금을 뿌리면서 빙빙 돌리니 구수한 냄새를 피우며 맛있게 익었다. 강에서는 고기들이 튀어 오르는 물장구 소리가 요란했으나 밀림은 조용했다. 풀향기에 꽃향기가 섞인 향기로운 밤공기가 몸을 감쌌다. 하늘에서는 별들이 쏟아져 내리는 것 같았다.
‘산양들의 울음소리가 들립니까? 전에는 산양을 잡았지만 요즘에는 잡지 않아요. 돈이 되지 않아서.’
장숍이 나뭇가지를 모닥불에 던져넣으면서 말했다.
‘그래서 지금은 사슴을 잡지요. 특히, 5월이 되면 그놈들이 뿔갈이를 했을 때 잡으면 꽤 큰 돈벌이가 됩니다.’
녹용이었다. 녹용은 강장제로 중국부호들이 좋아했다.
장숍은 환갑이 가까운 노인이었으나 어깨가 떡 벌어지고 피부에도 윤기가 있었다. 그는 밀림의 파수꾼이었다. 밀림에서 수십 년을 살았으며 강철 같은 의지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북동 중국의 백계 러시아인인데 결혼하여 딸을 낳았으나 사냥에 미쳐 맨날 삼림에서 사는 동안 다른 사내와 눈이 맞아 달아버렸고, 딸도 죽었다. 장숍은 자포자기 상태에서 술로 세월을 보냈다. 술에 취해 기차에서 떨어져 오른손 손목이 절단되었다. 그는 오랫동안 병원 생활을 했다. 집도 처자(妻子)도 돈도 없었다.
‘그래서 난 자살하기로 결심했습니다.’
혼자 삼림에 들어가 나뭇가지에 목을 매달았는데 삼림에 혼자 사는 중국인 할아버지가 실신한 장숍을 살려 자기 집에 데리고 왔다. 자식처럼 살폈다. 사냥기술을 전수 받았다. 노인으로부터 짐승, 새, 고기들의 습성을 배운 장숍이 차츰 포수로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왼팔의 키다리가 별명이었다. 밀림에서 사는 법을 터득했다. 랑가링의 울창한 삼림에서 노인과 장숍은 정답게 살았다. 동거한 지 8년 만에 노인이 죽자 살림을 물려받았다.
장숍이 교미기(交尾期)에 든 범 두 마리를 추적한 일이 있었다. 3일간 추적하여 범을 절벽으로 몰아넣었다. 그런데 우연히 나도 그 범들을 추적하고 있었는데 범이 멀리 내 시야에 들어왔을 때 먼저 온 장숍이 총을 쏘았다. 장숍은 오른손으로 총을 올리는 동시에 손목이 없는 왼손으로 총신을 받쳐 겨냥을 했다. 두 마리의 범 중 수놈은 장숍의 일격으로 쓰러졌는데 암논은 탄환을 심장 부근에 맞고도 장숍에게 덮쳤다. 장숍은 총신으로 범을 후려쳤으나 범이 그런 공격으로 타격을 입지 않았다. 총신으로 범을 후려친 후유증으로 장숍이 비틀거리며 몸의 중심을 잃었는데 그때 범이 앞발로 장숍을 때려눕힌 다음 발톱으로 배를 할퀴고 장숍의 목줄을 더듬었다. 그러나 장숍은 침착함을 잃지 않고 칼로 범의 배를 찔렀다. 범은 고통으로 무서운 신음 소리를 내며 일단 물러섰다. 그리고 다시 장숍에게 도약을 하려고 했을 때 내가 발포했다. 50m나 떨어진 상황에서 한 발사였지만 충분히 겨냥을 했으므로 탄환이 범의 이마를 뚫었다. 장숍은 난데없는 총소리와 범이 꼬꾸러지는 것을 보더니 어리둥절하고 사방을 살폈다.
‘당신이 쐈소?’
그는 피투성이가 되어 누어서 나에게 말했다.
‘결과로 봐서 고맙기는 하지만 앞으로는 남의 사냥을 방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
나는 그의 어처구니없는 항의를 무시하고 그를 등에 업고 집에 데려다주었다. 상처를 조사해보니 그의 오른쪽 팔꿈치와 어깨뼈가 부러졌다. 나는 그의 대담무쌍한 사냥 태도가 맘에 들어 2주일간 머물면서 상처를 치료했다. 장숍은 중상을 입고도 손에서 일을 놓지 않았다. 산돼지나 사슴고기로 맛있는 국을 끓였고 틀에 걸린 작은 짐승들의 껍질을 손질했다. 잘 손질된 짐승껍질은 서너 달 만에 찾아오는 상인들에게 총탄, 화약, 밀가루, 설탕, 성냥들과 바꿨다. 장숍과 2주일은 그의 사냥 경험담을 듣는 재미로 즐거웠다. 뿐만 아니라 장숍은 새나 고기 요리를 잘했다. 국을 끓여도 구워도 맛있었다. 삼림에서 혼자 살고 있었지만 그의 생활은 다채롭고 유쾌했다. 나는 그 후에도 틈만 나면 장숍의 집에 들렀다.
‘코안경 나리, 이제 좀 주무시오. 아무리 봄이지만 아직 바람이 차니까 ….’
밤새 그의 얘기를 듣고 있었던 나는 새벽 무렵 개구리 울음소리를 들으면서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아주아주 편하게 잤다. 장숍은 불을 지키면서 밤새 내 곁에 있었다. 내가 그의 손길을 의식해서 잠이 깨었을 때는 태양이 산 위로 올라와 있었다. 찬란한 햇살이 산마루에 퍼져나갔다.
‘코안경 나리, 아침 먹읍시다.’
어젯밤 우리가 고기를 잡았던 강에서는 중국인들이 진주를 찾고 있었다. 수십 명의 남녀들이 강바닥에서 조개를 캐냈으므로 강변에는 조개무지가 산더미 같았다. 우리가 구경하는 사이 늙은 여자가 별안간 고함을 치면서 춤을 추었다. 그녀는 한 개에 20원(현재 가치 50만 원)이나 되는 콩알만 한 진주를 발견했다. 보고 있는 사이에 햇살이 내리고 바람은 없었다. 벌써 여름인가? 매미가 울고 있었다. 우리는 서너 시간 자고 난 뒤 총을 들고 다시 나섰다. 사슴을 잡을 작정이었다. 장숍은 일본군대 총을 사용했다. 3연발식 총인데 개조하여 사용했다. 개머리판에는 장숍이 잡은 범의 이빨이 박혀 있었다. 모두 8개였는데 올해만 벌써 두 개가 늘어났다. 춥고 얼어 죽을 위험이 있었지만 나는 겨울 사냥을 좋아했고 여름 사냥이 싫었다. 무더위의 추적이 싫었다. 이때의 사슴사냥도 그랬다. 장숍과 나는 한 무리~아마도 여섯 마리 혹은 일곱 마리의 사슴들이 지나간 발자국을 발견하고 추적을 시작했는데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도 사슴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 우리는 다시 야영을 했다. 장숍이 또 얘기를 시작했다.
작년 늦가을 10월 말이었으니까 초겨울이었는데 장숍은 숲에서 세 사내를 만났다. 모두들 두껍고 더러운 옷을 입고 있었고 털보들이었다. 그들은 산속에서 꽹과리를 치고 고함을 지르면서 달음박질을 했다. 장숍은 그들이 산족(山族) 혹은 마족(馬族)인 줄 알고 총의 안전장치를 풀었으나 그들에게 총이 없는 걸 알고 경계를 풀었다. 그들 중 한 사내가 토막 중국말로 자기들은 한국인 포수라고 했다. 세상에 총 없는 포수도 있다는 말인가? 한국인들이 웃었다. 그들에게도 총이 있지만 필요가 없어 가지고 오지 않았다고 했다. 그들은 총이 아니라 사슴을 사로잡으려고 쫓고 있으며 추적을 시작한 지 벌써 9일이라고 했다.
‘아니? 총도 없이 추적을 하면 뭘 해! 손으로 잡으려는 작정인가?’
한국인들은 손으로 사슴을 잡겠다고 말했으며 이제 몇 시간 후에는 틀림없이 사슴 두 마리가 잡힐 것이라고 단언했다. 그 말을 듣고야 조금 전에 몹시 비틀거리며 산정으로 달려가던 사슴 두 마리가 생각났다. 부상을 입은 것일까? 외상(外傷)은 없었다. 사슴들은 외상은 없었으나 몸과 마음이 모두 쇠약해져 있었다. 한국인들이 9일 동안이나 꽹과리를 치면서 쫓고 있었기 때문에 마음이 약한 사슴은 신경쇠약 상태로 허덕이고 있었다. 사슴은 외적이 나타나면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마구 달아나는데 나쁜 버릇이 있어 외적과 일정한 거리가 멀어지면 정지를 하고 뒤를 돌아다본다. 사슴은 그때 포수들의 사격을 받는데 이 사슴들은 돌아설 때마다 요란스러운 꽹과리 소리를 듣고 혼비백산 다시 달아났다. 그리고 또 십 리쯤 달아나다가 멈추고 쉬고 있으면 꽹과리 소리가 따라오고 …. 이래서 9일 동안 사슴은 제대로 자지도 먹지도 못해 비틀거렸던 것이다. 장숍은 그 한국인 포수들 뒤를 따라갔다. 사슴들은 절벽 밑에 우두커니 멈춰있었다. 이제 달아날 생각도 기력도 없는 듯 눈을 크게 뜨고 와들와들 떨고 있었다. 한국인들이 꽹과리를 요란스럽게 두드리면서 접근하더니 7, 8m쯤에서 꽹과리를 던져버렸다. 그리고 집 강아지를 다루듯 다정한 표정으로 사슴에게 다가갔다. 사슴들은 마술에 걸린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한국인들이 2, 3m 거리에까지 접근하더니 미국 서부의 카우보이들처럼 줄을 던졌다. 줄이 목에 걸리자 사슴들이 발악을 하였으나 목과 다리에 줄이 감겨서 쓰러졌으며 한국인들이 달려가 꽁꽁 묶어버렸다. 한국 사냥꾼들이 잡은 사슴은 두 마리 모두 수사슴이었으며 1m 가까운 뿔을 가지고 있었다. 한국 사냥꾼들이 검은 천으로 사슴의 눈을 가렸다. 공포를 덜어주려는 배려였다.
‘대단하오.’
늙은 사내~아마 두목(頭目)인 한국인이 말했다.
‘저놈들을 사로잡은 일 보다 살려서 끌고 가는 게 더 어렵지. 이제 제법 추워지는데 ….’
장숍이 <왜, 사슴을 꼭 사로잡아야 하며 살려서 끌고 가야 되느냐?>고 물었다. 동물원에 팔 계획인가? 그게 아니었다. 사슴뿔은 녹용이라고 하며 곰쓸개(熊膽)처럼 영약이었다. 따라서 그 값도 엄청나게 비싸 그 몸값보다도 더 값이 나갔다. 그러나 모든 사슴뿔이 값나가는 건 아니고 초여름~5, 6월에 잡은 사슴뿔만 녹용이다. 그 시기를 놓치면 고작 응접실의 트로피가 될 뿐이다. 사슴은 1년에 한 번 뿔을 간다. 묵은 뿔은 저절로 떨어지고 떨어져 버린 자국에서 물렁물렁한 새 뿔이 자란다. 발그스레한 연분홍색의, 뿔이라기보다는 얇은 가죽에 담긴 피주머니다. 피주머니가 커져서 뿌리가 굳을 무렵이면 녹용이다. 한국인들에게 10월에 죽여서 잡는 사슴은 어리석다. 녹용 없는 사슴은 고작 돼지고기값이다. 사슴을 사로잡아 사육하면 이듬해 녹용을 얻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해마다 녹용을 얻을 수 있고, 잘하면 번식을 할 수도 있다. 장숍은 한국인들의 원대한 계획과 집념에 감탄했다.
‘도대체, 여러분은 이제까지 사슴을 몇 마리나 사로잡았소?’
늙은 사내가 손가락을 꼽았다.
‘저놈까지 합해서 열네 마리, 그러나 살려서 끌고 간 것은 여덟 마리뿐이지.’
장숍은 그들이 좋아졌다. 그래서 둘씩 사슴을 엮어 매고 자기 집으로 안내했다. 9일 동안 쌀가루와 물밖에 먹은 것이 없다는 한국인들은 숯불에 잘 구은 산돼지의 뒷다리를 보더니 환성을 질렀다. 그들은 기갈병(당뇨병)에 걸린 것처럼 고기를 뜯었다.
‘이 산돼지는 누가 잡았소?’
‘누군 누구요. 내가 잡았지.’
‘아니! 한 손밖에 없는데 어떻게 총질을 ….’
장숍이 웃었다. 그리고 옆 방문을 열었다. 며칠 전에 잡았던 범의 껍질이 벽에 걸려있었다.
‘저것도 당신이 잡았소?’
한국인들이 눈이 휘둥그레져서 장숍과 범껍질을 번갈아 보았다.
‘아하, 당신이 그 유명한 외팔이 포수구만!’
그들은 장숍으로부터 그 범을 잡은 경위를 듣고는 감탄했다.
‘멋있는 사수(射手)구만.’
외팔로 범을 잡은 것보다 사슴을 사로잡은 것이 더 멋있는 사수라고 장숍이 대꾸했다. 그날 밤 장숍은 한국인 포수들로부터 한국 범 얘기를 들었다. 한국의 범들도 동북부 중국에 사는 범들과 같은 계통이었다. 인디아나 자바, 보르네오에 사는 종족보다 훨씬 더 크고 용맹스러운 시베리아 한 대 지대의 범들이었다. 한국에까지 퍼져나갔던 범들은 한때 한국의 산야를 누비면서 횡포를 부렸으므로 한국 포수들과 대결했다. 몇백 년 동안 서로 죽이고 죽는 혈투를 벌였는데 좁은 한국 땅에서는 범들이 불리했다. 한국은 사람들이 너무 많았고 범들에게 땅이 너무 좁았다. 그래서 한국 범은 멸종에 이르렀다. 표범처럼 숨어서 기습을 했으면 살아남았을 것이나 범은 그런 비겁한 짓은 하지 못한다고 장숍이 말했다. 나도 동의했다.
3. 죽음의 환영(幻影)
1910년 겨울, 동북 중국에 무서운 전염병이 창궐했는데 피해가 엄청났다. 병균의 전파는 중앙아시아의 들판, 시베리아 남부 그리고 몽골에 서식하는 몰모트였다. 몰모트가 죽은 부드럽고 윤택이 뛰어나고 보온성이 좋아서 비싼 값으로 팔렸기 때문에 몰모트 산업이 성행했다. 늦은 가을 몰모트가 포근한 겨울털을 입으면 수천 명의 포수들이 집결했다. 보통 동물에서 발병한 병균은 동물에서 동물로만 전염되는데 이번에 몰모트에서 발병한 그 병균은 몰모트에서 발병하여, 사람의 임파선, 기관지에 침범하여 인간에게 전염되었고 5~7일 만에 질식하여 사망률이 100%였다. 더구나 그 병균은 영하 40도의 추위에서도 끄떡도 하지 않았으며 한겨울에도 맹렬하게 퍼져나갔다. 이 병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는지 공식적인 기록은 없다. 그러나 몰모트병이 창궐한 1910년~1911년 사이에 약 50만 명 이상 희생되었으리라 추정한다. 전염병은 동북 중국 뿐만 아니라 한국 북쪽, 몽골까지 휩쓸었다. 각국 정부가 전염을 막으려고 조치를 하였으나 실패했고 1911년 5월에 자연 소멸했다.
1910년 1월, 나는 전염병이 가장 심했을 때 포수 고지마셀콥하고 가오린 지역에서 북동쪽 엘러헤져강의 상류에서 맹수사냥을 했다. 평소에 잘 아는 밀림을 우리는 이틀 동안 70km나 걸어 중국인 포수들이 기거하는 움막에 도착했다. 중국인들은 네 명이 기거했는데 우리는 매우 친했고, 중국인들은 우리들이 잡은 짐승을 운반해주고 설탕을 받았기 때문에 그때도 설탕을 가지고 갔다. 그날 우리는 대환영을 받았고 맛있는 잡탕 수프를 대접받았다. 잡탕 수프는 새, 짐승고기, 물고기를 섞어 끓였는데 거기에 이름 모를 산채를 넣어 맛있고 향기로웠다. 곁들어 내놓은 양념을 발라 구운 들새고기도 일품이었다. 겨울의 짧은 해가 지고 우리들은 짐을 정리하고 있다가 문득 중국인 두 명이 없는 걸 알고 물었는데 중국인들은 대수롭지 않게 사냥을 나갔다고 했다. 멀리 갔기 때문에 사나흘 걸릴 것이라고도 했다. 우리는 중국인들이 마련해준 두꺼운 솜이불과 좀 더러웠으나 포근한 담요를 덮고 잤다. 그 이튿날 이른 새벽에 셀콥이 나를 깨웠다. 창백한 얼굴로 말했다.
‘큰일 났어, 큰일!’
잠에서 덜 깬 나는 셀콥의 표정에서 불안을 읽었다. 셀콥은 모험을 즐기는 밀림의 용사였고 웬만한 일은 눈썹도 까딱 않을 사나이였다. 그런 그가 백지장처럼 얼굴이 하얗게 질렸고 그 눈에 공포가 가득했으며 입술마저 떨리고 있었다.
‘일어나요, 전염병이야!’
셀콥이 방바닥의 짐을 정리하려고 하였으나 그의 양손은 전혀 머리와 따로 놀았다. 전염병이란 한마디 말에 나도 벌떡 일어났다.
‘전염병! 어떻게 된 거야?’
움막에는 네 명의 중국인들이 살고 있었는데 그중 두 명이 전염병으로 죽었고, 우리는 그들이 죽은 자리에서 죽은 중국인들의 피를 빨아먹은 이와 벼룩, 빈대가 드글거리는 이불을 덮고 잤던 것이다.
셀콥이 아침 일찍 움막 부근을 산책하다가 사람의 발 네 개가 눈밭에 묻혀 있는 것을 보았다. 눈을 치웠더니 멀리 사냥을 나갔다는 중국인들의 시체가 눈으로 덮여 있었다. 그래서 남아있었던 중국인들을 추궁하여 동료가 전염병에 걸려 죽은 것을 알아냈으며, 동료가 전염병으로 죽은 것이 알려지면 움막이 불태워질 것을 염려하여 거짓말을 했다는 걸 자백했다. 그 말을 듣고 나도 절망감에 사로잡혔다. 그 병에 전염되면 100% 죽는다는 걸 나는 잘 알고 있었다. 확인하기 위해 두 중국인의 시체가 묻혀 있는 곳에 가보았다. 그들의 얼굴은 고통에 일그러져 있었고 눈동자에는 공포가 어려있었다. 양손도 경련으로 뒤틀려졌다. 입에서는 피를 토했다. 시체를 많이 봤지만 이렇게 참혹한 시체는 처음이었다. 나도 공포에 사로잡혔다. 피를 빨아먹었을 이나 빈대가 우글거리는 전염병에 걸려 죽은 사람의 이불을 덮고 잤으며, 그들이 먹었던 그릇에 수프와 고기를 먹었으니 우리가 전염병에 걸렸다는 것은 확실했다. 전염병은 몰모트를 잡은 포수, 가공한 기술자 그리고 사고판 상인들이 모두 걸렸다.
‘여보게, 이들이 죽은 지 3, 4일이 되었는데 같이 생활한 다른 중국인은 건재하지 않은가? 우리가 죽는다고 단언하는 것은 소란이야.’
셀콥이 생기를 되찾았다. 그러나 우리는 급하게 짐을 챙겨서 그 죽음의 집을 떠났다. 남쪽으로 남쪽으로 거의 달리다시피. 우리는 단숨에 산을 두 개나 넘고 하이린해강을 따라 하이린 역으로 갔다. 그날 오후 더우라허자강 주변에서 모닥불을 크게 피우고 벌거숭이가 되어 옷과 소유물을 불에 쬐어 살균했다. 옷에서 이가 기어 나왔는데 그걸 본 셀콥은 또 절망하여 울쌍이 되었다. 그날 밤새 셀콥은 저주와 헛소리를 해서 나는 그가 미친 것이 아닌가 의심할 정도였다. 그래서 화주를 마셨다. 독한 화주를 한 병 다 마시고 나니 세상이 달라져 보였다.
‘좋다, 나는 도박을 한다. 승패는 모르겠으나 질 때 지더라 이긴다는 희망을 갔겠어.’
‘그래야지 친구여, 우리 힘을 내자!’
셀콥은 술김에 용기를 얻었다.
‘전염병이 뭐야? 그까짓 것 겁나지 않아!’
고함도 쳤다. 우리는 서로 격려하며 다시 사냥을 시작했다. 표범을 쫓았다. 표범은 철도 마을을 습격하여 젖먹이를 물고갔다. 표범에 대한 증오도 죽음의 공포를 털어내지 못했다. 전염병의 잠복기간은 10일이기 때문에 10일이 지나가기 전에는 안심할 수 없었다. 표범을 따라다니다가 저녁에 모닥불 옆에 누웠을 때도 우리는 전염병 이야기는 삼갔으나 서로 불안한 눈이 마주칠 때가 있었다. 이럴 때는 나도 고함을 치고 싶었으나 우리는 술을 마시면서 고통을 참았다. 5일이 지났으나 우리 몸에는 이상 증상은 없었다. 이튿날 새벽에 생생한 표범의 발자국이 참나무숲에서 맴돌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표범은 교활했다. 몇 분 전에 난 발자국이었다. 표범은 이제 더 쫓기면서 추적당하지 않고 맞붙을 조짐이었다. 표범이 인내심의 한계에 도달했다고 판단했다. 언제까지나 쫓겨 다닐 맹수가 아니다. 나는 셀콥 보다 2m 정도 앞서 걸으면서 온 신경을 집중하여 주위를 살폈다.
‘없어, 없는 것 같은데 …. 놈이 우리가 따라붙는 걸 눈치채고 멀리 튄 모양이야.’
셀콥의 말이 끊어지자 전방 10여 미터 나무 그늘에서 기다란 그림자가 스쳐 가는 것을 봤다. 땅에 납작 붙은 그림자였고 그림자가 지나간 끝에 노란색이 어른거렸다.
(표범이다!)
그렇게 판단했을 때 총소리가 났다. 나보다 늦게 표범을 발견한 셀콥이 발사한 것이다.
‘맞았다!’
셀콥이 소리쳤다. 그리고 쏜살같이 튀어 나갔다. 나도 원호하기 위해 뒤를 따랐다. 표범은 없고 핏자국만 있었다. 핏자국을 조사했는데 앞발에 맞았다. 발자국이 세 개만 찍혀있고, 앞발자국 부근에는 핏자국만 있었다. 셀콥은 나무 뒤에서 다른 나무 뒤로 이동하는 표범을 보고 무의식중에 발포했다고 해명했다. 날이 어두워졌기 때문에 동굴을 찾아 야영했다. 셀콥은 밥을 먹지 않고 피곤하다며 누워버렸다. 혼자 밥을 먹다가 셀콥의 신음소리를 들었다. 셀콥은 목이 탄다고 중얼거리면서 물을 찾았다. 눈이 마주치자 둘이 같이 전기에 감전된 것처럼 놀랐다. 전염병의 초기증세는 목이 타는 듯한 갈증이었다.
‘아니야, 셀콥 그 건 아니야!’
당황하여 소리쳤는데 셀콥은 이미 유령처럼 창백한 낯으로 일어섰다.
‘그거야 그거, 바로 그거야! 이봐, 손등에 붉은 점이 나왔어.’
셀콥의 손등에는 붉은 점이 나타나 있었다.
‘헛허허, 드디어 올 것이 왔구만! 코안경 친구, 자네는 어떤가?’
나도 절망감에 싸였다.
(셀콥이 전염병에 걸렸다는 과학적인 증거는 아직 없지 않은가?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것뿐이지 전염병에 걸렸다는 징조도 없지 않은가?)
나는 셀콥을 안심시키려고 벼라별 말을 다 했다. 무슨 말을 했는지는 나도 몰랐다. 내 말을 듣던 셀콥이 깔깔 웃다가 침묵했다. 공포에 일그러진 얼굴이 의심으로 변했다. 그때 아주 가까운 곳에서 표범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목쉰 고양이 울음소리를 마이크에 걸어놓은 것 같은 앙칼진 울음소리였다. 심야, 깊은 산중, 동굴에서 모닥불을 피워놓고 야영하는 포수, 그것도 전염병에 걸렸다는 절망감에 사로잡힌 우리에게 그 소리는 결정적인 자극이었다.
(너희들은 이제 곧 죽겠지만 난 살아있어.)
야유하는 것 같았다.
‘저 새끼가!’
말릴 틈도 없었다. 셀콥이 총을 움켜쥐고 밖으로 튀어 나갔다.
‘셀콥, 셀콥, 돌아와!’
그러나 셀콥은 미친 듯이 고함을 지르면서 표범의 울음소리가 나는 곳으로 달려갔다. 캄캄한 밤중에 표범에게 덤벼든다는 것은 자살행위다. 아니, 셀콥은 자살하려고 한 것이다. 주저할 때가 아니었다. 나도 전등을 찾아 쥐고 밖으로 나갔다. 전등 빛은 불과 5, 6m 뻗치고는 어둠에 녹아버렸다.
‘셀콥, 셀콥!’
발자국을 더듬으며 외쳤으나 대답이 없었다. 잠시 후 표범의 독기어린 포효와 총소리가 연거푸 났다. 한 발, 두 발. 계속해서 네 발 모두 여섯 발이었다. 셀콥의 벨기에 6연발은 이제 다 발사되었다. 여섯 발의 총성이 사라지고 무서운 침묵이 흘렀다. 총소리가 난 방향으로 달려갔다.
‘셀콥, 셀콥. 살아있으면 대답해!’
미친 듯이 전등을 휘둘렀다. 셀콥이 있었다. 표범도 있었다. 사람과 짐승은 껴안고 누워있었다. 가까이 가서 보니 둘 다 피투성이였고 셀콥은 아직도 표범의 목을 조르고 있었으며 표범은 고통스러운 듯 아가리를 벌리고 죽어 있었다.
‘셀콥!’
어깨를 흔들었는데 탄력이 느껴졌다. 얼굴과 아랫배를 표범에게 할퀴어 중상을 입었으나 숨을 쉬고 의식도 있었다. 그를 업고 가장 가까운 마을로 달렸다. 몇 번이나 돌에 차여 넘어지고 숨이 차서 쓰러졌으나 이를 악물고 기다시피 달렸다. 어둠이 가시기 전에 오두막을 발견했다. 중국 사람들의 움막에는 두 사람이 죽어 있었다. 손발이 뒤틀린 것으로 보아 전염병이었고 얼굴을 쥐가 갉아 먹어 해골만 남았다. 결국 셀콥을 업고 의사가 있는 마을까지 갔으며 의사가 셀콥을 면밀하게 진찰하더니 3, 4일만 치료하면 곧 낫는다고 했다.
‘전염병? 이 사람에게는 전염병의 징후가 없소. 몸살기가 좀 있기는 하지만 ….’
셀콥은 그 후 20년이나 더 살았다.
4. 범의 밤
범의 밤, 도시 사람들에게는 상상도 못 할 무서운 밤이다. 아브로나 역에서 북쪽으로 20km쯤 떨어진 밀림에서 사냥을 했다. 해가 지고 있었으므로 포수의 산막을 찾아갔다. 친절한 주인은 향기로운 차를 대접하며 환대했다. 12월이었으므로 나무들이 하얗게 얼어붙었고 하늘도 얼어서 별들이 얼음에 박힌 것 같았다. 산막은 쾌적했다. 따끈따끈한 온돌방 아랫목에서 사슴 털 이불을 덮고 누었으니 3, 4일 동안 범을 쫓아다녔던 피로가 풀렸다. 온돌방은 옛 고조선의 옥저인들이 발명했다고 하는데 취사와 난방을 겸한 한대지방의 난방으로써는 인간이 불을 발견한 이후 최고의 발명품이다. 산막 주인은 화로의 숯불을 뒤적거리거나 긴 담뱃대를 태우면서 바깥을 살폈다. 산막에서는 습관적으로 하는 일이다.
‘너무 조용한데 …. 늑대 소리조차 없어.’
‘조용히! 늑대란 놈 오늘 같은 날에 방정맞게 울다가는 뼈도 추리지 못합니다.’
‘……?’
‘들어보세요. 이제 들려옵니다.’
산막 주인이 귀를 가리며 말했다. 과연 들려왔다. 밤의 울부짖음 소리였다. 꽤 먼 곳에서 우는 가물가물 들렸지만 여운과 산울림 소리가 여운으로 남았다.
‘이봐, 지금 곧 여기를 떠나야겠어!’
‘아니, 이 쾌적한 산막을 버리고 어디로 가잔말야.
‘사냥을 집어치우고 되돌아가는 거지.’
나는 이순과 산막 주인에게 범의 밤 얘기를 했다. 생물학적 의견을 곁들어서 설명했다. 때는 범의 교미기였다. 사방 100km 내외의 영역을 가진 암수 범들이 모여들어 쟁탈전을 벌이는 무서운 시기다. 이때 암컷은 수범을 미치게 하는 암내를 풍기고 수컷을 유혹하는 포효를 한다. 왕대는 수컷들에서 가장 강한 놈이기에 경쟁 상대가 없다. 왕대가 산이 찌렁찌렁하게 포효하면 젊은 수범들도 감히 도전하지 못한다. 왕대는 마음에 드는 암컷을 독점한다. 싸움은 나머지 졸개들이 벌인다.
‘자, 오페라가수군. 오늘 저녁을 여기서 지내겠다는 거야?’
이순이 한참 뜸을 들이더니 대답했다.
‘정직하게 말하면 난 무서워. 그러나 호기심도 있어. 생애에 단 한 번 범의 밤에 초대되었는데 거절할 수 없지 않나? 그리고 무엇 보다 난 지금 움직일 수가 없어. 눈길 산길을 20km나 걸어와서 발이 퉁퉁 부었고 전신이 흐느적거린단말야. 범이 당장 잡아먹는다고 해도 움직일 수가 없어.’
하는 수 없었다. 그 친구의 고집을 나는 잘 알고 있었으므로 친구와 함께 죽기로 했다. 그래서 우리들 네 명은 집 주변에 울타리처럼 마른 나무를 산더미처럼 쌓았다. 범이 두려워하는 유일한 것이 불이다. 산막도 손질했다. 벽은 굵은 통나무로 받치고 문에는 통나무를 덧댔다. 작업을 끝내고 페치카에 불을 활활 피워놓고 산돼지를 구워 화주(火酒, 알코올 도수 60도 이상의 중국산 독주)를 마셨다. 화주 몇 잔을 마신 이순은 곯아떨어졌다. 도시에서만 살았던 친구는 20km의 눈길 산길에 기진맥진했던 것이다. 밤이 깊어지고 밀림에 요기(妖氣)가 떠돌자 우리는 잡담을 멈췄다. 돌연 가까운 아주 가까운 데서 벼락같은 범의 포효가 터졌다. 화가 난 소리였다. 곧이어 다시 한번 노호가 터졌다.
‘코안경 나리, 저 건 왕대요. 저놈은 우리의 불을 보고 화가 난 것입니다. 우리가 그들의 잔치판을 방해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곧 습격할지도 모릅니다.’
산막 주인의 말소리가 떨렸다. 그러나 범의 밤 첫날은 아무 일 없이 지나갔다. 이튿날 이순의 제지를 뿌리치고 총의 안전장치를 풀어놓고 부근 숲을 돌아다녔다. 숲에는 개미 새끼 한 마리 없었다, 눈 위에 찍힌 솥뚜껑만 한 발자국 외에는 살아 숨 쉬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발자국은 세 마리였다. 발자국이 산막 앞산으로 모였다. 전율을 느꼈다.
(오늘 밤은 범의 잔치판 한가운데서 지내게 되었군.)
산막에 돌아오니 절친한 친구 이왕이 와있었다. 그는 도시의 방랑자였으며 술과 노름의 명수였다. 전도가 유망한 오페라가수였는데 술과 노름 때문에 출세를 하지 못했다. 한더헤자 역에서 만나 꼭 사냥에 데리고 가달라고 졸라서 산막을 가르쳐주었더니 포수 마이를 고용하여 찾아온 것이다. 때가 좋지 않았다. 가까이에서 왕대가 울부짖었다. 멀리서 왕대에게 호응하는 울음소리가 이어졌다. 멀리서 들리는 울음소리는 꼬리가 길었고 애조를 띄었다. 왕대가 다시 포효했다. 그러나 포효는 부드러웠고 자기를 찾아오는 암컷들에 대한 애정이 담겨있었다. 멀리서 호응하는 소리에도 뭔가 갈망하는 느낌이 들었다. 이왕은 초조했다. 담배를 물고 방안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나지막하게 노래를 불렀다. 마음의 동요를 억제하려는 노래였으나 점점 노랫소리가 커졌다. 마침내 범들의 포효와 경쟁이라도 하듯 목소리가 커졌다. 오페라에서 불렀던 노래들이 이것저것 두서없이 흘러나왔다. 중국인들이 놀라 제지하려고 했으나 내가 눈짓으로 말렸다. 이윽고 이왕은 벌떡 일어나더니 부드러운 바리톤으로 오페라의 아리아를 두 개 세 개 연거푸 불렀다. 특히 죄수들이 부르는 <밀림>이라는 노래와 <밤>은 훌륭했다. 원래 천부적인 소질이 있었던 가수의 노래는 깊은 감동으로 밀림으로 힘차게 퍼져나갔다. 밀림에서 범들에게 포위당한 체 노래를 부르는 오페라가수가 부르는 노래는 밀림 구석구석에 메아리쳤고 범들도 울음을 멈추고 조용해졌다. 나는 총을 들고 노래를 듣고 있었고 중국인들은 기가 막힌다는 듯 입을 벌리고 멍하니 앉아 있었다. 이왕이 노래를 멈췄다. 3, 4분의 고요를 깨고 범들이 다시 우엉! 우엉! 울었다. 범은 공격하지 않았다. 다음 날 범들의 싸움판에 가보니 털이 빠지고 피가 흘렀다.
‘이왕, 수수께끼가 풀렸네. 여기서 수놈들 끼리 싸움판은 결판이 났어. 패자는 쓰러졌고 승자는 암컷을 데리고 떠났어.’
이왕은 대단히 흥미를 느낀 듯 범을 더 추적해보자고 졸랐다. 두 개 반으로 편성을 해서 우리는 승자를 쫓고 중국인들은 패자를 쫓았다. 추위를 무릅쓰고 1시간가량 추적을 했을 때 그들은 참나무가 우거진 숲속으로 들어갔다, 사방이 탁 트인 곳이 신방으로 적합하지 않기 때문에 숲을 선택했다. 신방은 참나무의 낙엽이 두껍게 깔린 곳이었으나 범의 첫날밤은 격렬했다. 마치 전쟁터 같았다. 여덟 개의 다리가 어지럽게 흩어지고 흥분한 발톱이 얼어붙은 눈과 얼음을 파헤쳤다.
‘신부가 난폭하게 굴었군.’
‘신랑이 미쳐서 날뛴 거지.’
면밀하게 조사해보니 사랑의 싸움은 격렬했지만 한편으로는 행복했다.
‘이왕군, 여기를 보게.’
나는 눈이 덮인 땅의 한 곳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범의 발자국이 뚜렷하게 찍혀있었다.
‘네 다리의 간격이 비정상적으로 넓게 벌어져 있는 게 보이지?’
암컷은 수컷을 받아들이려는 수동태세를 취했으며 암컷이 넓게 벌린 뒷다리 간격이 그것을 말해주었다. 또한 수컷의 앞다리는 암컷의 등위로 올라갔고 그래서 수컷의 발자국은 뒷다리 두 개만 찍혀있었다. 털이 빠져있었고 흥분한 암컷과 수컷의 입에서 토해낸 거품이 얼어있었다.
‘브라보!’
이왕이 웃었다. 우리는 추적을 여기서 끝냈다.
‘어딜 갔다 왔어요? 큰일이 벌어졌는데 ….’
‘부상한 범이 저쪽 산에 숨어있어요.’
‘동굴이 수상해요.’
패자를 추적했던 중국인들은 범이 비틀거리고 피를 많이 흘리는 것을 봤다. 20여 미터 앞에 동굴이 있었고 동굴에서 살기가 퍼져나오고 있었다. 중국인들은 낡은 총을 가지고 있어서 그들이 해결하기에는 무리였다. 우리는 부상한 범을 따라갔다. 중국인들의 말대로였다. 범은 출혈이 너무 많아 죽었든지 아니라고 해도 우리에게 덤벼들지 못할 거라고 판단했다. 피의 색깔로 동맥~아마도 목줄에서 나온 피였고 100m나 가면서도 멈추지 않았다. 범의 핏자국은 동굴로 가고 있었으며 동굴 안에는 요기가 떠돌았다.
‘나리, 어떻게 하지요?’
‘여기서 불이나 피우게. 범도 범이지만 저 광대 나리가 얼어 죽겠어.’
오페라가수는 덜덜 떨고 있었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혼자서 범을 잡아 올 테니. 범고기 불고기를 먹세.’
중국인 포수가 어이없다는 듯 경고했으나 나는 혼자 동굴 앞으로 갔다. 핏자국은 동굴까지 있었다. 동굴 속으로 돌멩이를 서너 개 던졌으나 아무 반응이 없었다. 총을 겨냥하고 입구로 전진했다. 동굴에서는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
(죽었군.)
범이 죽었다고 확신했다. 3~4분 동안 눈을 감고 있다가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캄캄했다. 조용했다. 피비린내가 났다. 끈기 있게 2~3분을 더 기다렸다. 범뿐만 아니라 맹수는 상대편의 움직임에 따라 공격을 하며 정지 상태에서는 공격을 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나는 돌처럼 굳은 자세로 2~3분을 서 있다가 다시 2~3m를 전진했다. 극도로 긴장을 하여 내 심장 소리가 내 귀에 들렸다. 까딱하는 소리만 있어도 발포할 자세로 전진했다. 나는 다시 전지했다. 눈을 크게 뜨고 어둠 속을 뚫어지게 응시하다가 깜짝 놀랐다. 하마터면 발포를 할 뻔했다. 칠흑같이 검은 어둠 속에 빛이 있었다. 두 개의 노란빛이었다. 범의 눈이었다. 숨 막히는 긴장감 속에서 나는 범과 눈싸움을 했다. 1초, 2초, 3초. 내 가슴은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쿵쾅거렸으나 노란불은 움직이지 않았다. 1분, 2분.
(이상한데 ….)
나는 총구를 내리고 다시 3~4분을 기다렸다. 불빛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그제야 그 불빛이 새파란 불이 아니고 노란 불이며 죽은 범에게서 나오는 불빛이란 걸 알아차렸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전등을 켰다. 범은 온몸에 상처가 났으며 치명상은 목줄이었다. 그놈은 강한 연적에게 끝내 항복을 거부하다가 사랑에 목줄이 뜯겨 죽었다. 6세 정도 되는 젊은 수컷이었다.
‘코안경 나리! 나리!’
음악가 선생의 목소리에는 울음에 배어 있었다. 나는 대답 대신 범을 끌고 나왔는데 음악가는 신파배우(新派俳優)처럼 나를 껴안고 키스 세례를 퍼부었다. 천진난만한 가수였다. 그러나 그는 그 후 러시아와 오스트리아 전쟁의 최전선에서 전사했다. 그는 범의 밤에서 받은 감동을 작품으로 남기겠다고 말했으나 그는 작품과 함께 묘지 속에서 영면했다.
5. 식인호(食人虎)
11월, 첫눈이 내려 라오닌의 산은 엷은 흰 보자기를 덮은 것처럼 보였다. 사냥꾼들이 기다리던 날이었다. 손질이 되어 반질반질한 총을 들고 사냥꾼들이 사냥터로 모여들었다. 그들 포수들 중에 나의 오랜 친구인 알세냅과 바이콥도 있었다. 두 사람은 같이 사냥을 했고 라오닌산 밑의 선로 옆 움막을 근거지로 삼았다. 한 무리의 산양들이 산중턱의 바위에서 보일 듯 말 듯 도망쳤다. 집에서 기르는 양과 달라 산양은 바위에서 살았고 바위를 평지 다니듯 뛰어다녔다. 산양의 발 밑바닥에는 고무 스펀지 같은 특별한 덧살이 있었고 덧살 주변은 털이 나 있어 급경사의 바위를 자유자재로 뛰어다니거나 딱 붙는 재주가 있었다. 산양이 바위를 내려오는 걸 보면 산양은 직벽에서 주르르 미끄럼을 타는데도 떨어지기는커녕 발바닥도 아무렇지도 않다. 기름 덩어리로 되어 있는 발바닥의 고무 스펀지가 마찰을 줄이고 열을 방지한다. 산중턱에서 산양이 두 갈래로 나뉘어 도망가는 걸 보고 바시콥은 산정으로 쫓고 알세냅은 계곡으로 내려갔다. 바시콥이 산정으로 산양을 몰아 올려 계곡으로 내려가는 산양을 위에서 내려 쏘아 세 마리를 잡은 후 그 장을 빼내고 눈 속에 묻었다. 그리고 헤어진 알세냅과 만나기로 한 산중턱으로 갔다. 태양은 이미 바위산 위로 떨어져 어둠이 스물스물 기어 내리고 바시콥이 폭풍에 쓰러진 나무뿌리에 기대앉았을 때는 밀림의 그늘은 점점 짙어졌다. 바시콥이 다섯 대째 담배를 태울 때까지도 알세냅이 돌아오지 않았다. 완전히 어둠이 주위를 감싸고 하늘에 별이 총총이 빛날 때까지도 알세냅이 돌아오지 않아 바시콥은 알세냅이 너무 멀리 갔다가 길을 잃어버린 것이라 짐작하고 묻어놓은 산양을 질질 끌며 움막집으로 돌아왔다. 친구는 집에도 없었다. 이튿날 바시콥은 같은 장소에 가서 사냥할 생각도 버리고 하루 종일 친구를 기다렸으나 역시 친구가 돌아오지 않았다. 불안해진 그는 마침 철도 마을에서 쉬고 있는 나를 찾아왔다.
‘별것 아닌 얘기 같지만 난 좀 불안하네. 아마 길을 잃은 모양 같은데 ….’
나는 딱 잘라 말했다.
‘이 봐, 알세냅이 길을 잃을 바보 같아? 그는 사냥 경험 15년의 숙련포수(熟練捕手)야!’
바시콥은 내 말을 듣고 고개를 숙였다.
‘그렇다면 ….’
‘사고가 난 거야, 사고! 거기는 범들이 자주 출몰하는 곳이야!’
바시콥이 잠시 침묵하고 있다가 힘없이 말했다.
‘바시콥 형, 나와 같이 수색해주지 않겠나?’
‘사실 나는 그 산에서 범의 발자국을 봤어. 아주 생생한 발자국이야.’
‘불길한 얘기는 그만두고 나하고 수색을 하세.’
‘좋아, 그러나 개를 한 마리 데리고 가세.’
그날 밤 잠을 잘 수 없었다. 우리들의 얘기를 종합해보면 알세냅이 위험했다.
(알세냅이 죽을 리 없어.)
15년 동안 같이 사냥을 했으며 알세냅은 범도 서너 마리 잡았다. 그런 그가 범에게 당했다고는 믿기 어려웠다.
(알세, 죽은 게 아니지?)
이튿날 동이 트기 전에 나와 바시콥은 벌써 라오닌산에 도착했다. 우리는 사냥개 윌조크를 데리고 갔는데 윌조크는 알세냅의 발자국을 따라 냄새를 맡으면서 앞섰다. 며칠 전에 내린 첫눈은 바람에 날려 발자국이 희미하게 남아있었다. 윌조크는 몇 발자국 걷다가 잠시 생각하는 듯 멈췄다가 걷기를 반복했다. 정오께 윌조크가 한 곳에 정지하여 우리를 기다렸다. 그곳에는 사람 발자국과 범의 발자국이 교차된 지점이었다. 사람 발자국을 범이 옆질러 간 것이다.
(….)
우리는 서로 얼굴을 마주 봤다. 나는 일부러 불안을 숨기고 윌조크를 독촉했다. 윌조크는 맹수사냥 경험이 풍부한 개였으나 이번에는 흥분상태였고 좀 불안했다. 바람이 나뭇가지를 스치는 소리에도 민감하게 반응하고 우리 곁을 떨어지지 않으려고 했다. 발자국은 2, 3일 전에 난 것이었고, 상세히 살펴본 결과 알세냅이 범을 따라갔다. 알세냅이 범을 추적했다. 그러나 잠시 후 무서운 사실을 발견했다. 범이 추적을 눈치채고 멀리 돌아 알세냅을 앞세워놓고 오히려 알세냅을 추적하고 있었다.
‘재미없는데 ….’
바시콥이 중얼거렸다.
‘바이콥 형! 이놈의 범은 보통 범이 아니라 아주 영리한 범이야.’
나도 그 말에 동의했다. 범은 고원지대에서는 무서운 것이 없다. 그래서 산마루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천천히 움직인다. 숲속의 작은 생물도 범의 눈을 피할 수 없다. 알세냅에게 추적을 당한 범도 산마루를 타고 가다가 자기를 추적하는 알세냅을 발견하고 자기를 추적하는 알세냅의 뒤로 돌아 오히려 알세냅을 역추적 한 것이다. 나는 그런 상상을 하면서 산마루로 올라갔다. 알세냅은 가끔 정지를 하여 주위를 살핀 흔적도 발견했다. 노련한 사냥꾼이었기에 철저히 경계를 하면서 추적을 했다. 그의 치밀한 행동에 다소 마음이 놓였다. 산마루로 향하던 발자국이 산 정상으로 향했다. 푸른 하늘 밑에 산 정상이 보였다. 나무들이 띄엄띄엄 서 있었으나 바위산이었다. 산 정상이 가까워졌을 때 윌조크가 갑자기 뒷발을 접고 주저앉아버렸다. 개는 처음에는 작은 소리로 으으 … 하며 몸을 떨더니 차차 호소하듯 짖었다. 우리도 걸음을 멈추었다. 나는 총의 안전장치를 풀었다.
‘왜 그래, 윌조크!’
개는 야속하다는 듯 나를 빤히 쳐다보며 여전히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이 녀석, 좋지 않은 냄새를 맡았어.’
나는 산정에 서 있는 큰 고목에 주의했다. 나무는 우리가 서 있는 곳에서는 윗부분만 보였는데 아무래도 그 나무 밑이 수상했다. 바시콥에게 따라오라고 눈짓을 하고 천천히 전진했다. 벨기에 3연총은 언제라도 발사할 태세였다. 거대한 나무는 참나무였다. 올라감에 따라 차차 나무의 밑둥이 보였다. 허리를 굽히고 한 발 한 발 천천히 걸었으나 나는 계속 전진했다. 나무의 뿌리가 보였다. 나무뿌리 부근에 모자가 떨어져 있었다.
‘알세냅의 모자야, 저 건.’
따라오던 바시콥이 신음하듯 말했다. 뒤통수를 강타당한 것처럼 아찔했다.
‘그놈의 범이!’
바시콥이 고목 나무로 돌진했다. 나도 달렸다. 우리는 고목나무 밑에 멈췄다. 장승처럼 서 있었다. 아수라장이었다. 사람과 범의 발자국이 뒤엉켜 벌겋게 피로 물든 눈바닥이 마구 짓밟혔다. 총은 한 발도 발사되지 않은 체 눈밭에 뒹굴고 있었다. 알세냅을 앞질러 간 범은 고목 나무 뒤에 고목 나무에 몸을 밀착시켜 딱 붙었다. 고양이과 동물들의 은신 기술이다. 추적을 하고 있던 알세냅은 단 한 그루 고목 나무를 의심하지 않았다. 설마, 범이 숨어있을 만한 곳이 아니었기에 무심코 다가갔던 것이다. 충분한 거리까지 알세냅을 당겨놓은 범이 기습을 했다. 알세냅은 속수무책이었다.
‘이 새끼가!’
범은 알세냅을 물고 계곡으로 내려갔다. 윌조크의 눈에 공포가 서렸다. 범이 알세냅을 끌고 내려간 계곡은 가파른 낭떠러지였다. 계곡 옆 큰 바위에 알세냅의 유품이 있었다. 두개골과 가죽장갑을 낀 손목 그리고 골반뼈 일부와 담배갑 뿐. 바시콥의 얼굴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 알세냅이 이 꼴이 되다니. 범을 쫓아다니던 용사가 범의 밥이 되다니!)
나는 슬픔보다 증오가 타올랐다. 범은 마음껏 포식을 하고 그 자리에 누워 잠을 잤다. 누운 자국으로 봐서 320kg이 넘을 것으로 추정했다. 나는 그놈을 잡아 죽이고 싶어 맹목(盲目)이 되었다.
‘가자, 따라가자!’
바시콥이 머리를 흔들었다.
‘안 돼! 이 발자국으로는 추적이 되지 않아.’
그 발자국은 이미 3일 전에 찍힌 것이고, 따뜻한 곳에서는 녹아버렸을 거고 바람에 날려 흔적을 찾지 못할 것이다. 그래도 나는 고집을 부려 수백 미터를 추적하다가 포기해야 했다. 바시콥도 울지 않았으나 벙어리가 되었다. 나는 그 범을 잡기 위해 정보를 수집했다. 나흘 동안에 범이 이동할 수 있는 행동반경을 계산하여 그 반경에서 사냥을 하고 있는 모든 포수들에게 범을 보거나 발자국을 보면 알려달라고 전보를 치고 사람을 보내 통지했다. 홀로 떠돌아다니는 범의 행동권은 방대했으나 산양이 서식하고 있는 라오닌에서 떠날 것 같지 않았다. 나의 예측은 옳았다. 그 이튿날~그러니까 사고 닷새 후에 범이 인근 마스러 마을 인근에 나타났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마을 사람들은 전날 밤에 산양 세 마리가 미친 듯이 마을로 뛰어들었다고 했다. 범에 몰려 평소에 무서워하는 마을로 뛰어든 것이다. 산양의 발자국을 거꾸로 추적했다. 산양의 대가리가 하나 전날 내린 눈 위에 뒹굴고 있었다. 인근에 범의 발자국이 있었는데 상세히 조사한 결과 바로 우리가 쫓는 그놈이라는 확신이었다. 범은 식사를 하고 나면 잠을 잤다. 만복이 되어 뒤룩뒤룩한 배를 끌고 걸어다니는 걸 싫어했다. 그놈도 그랬다. 잠을 자고 난지 몇 시간도 되지 않았다. 발자국이 생생했다. 우리는 발자국을 따라 산봉우리에 올라갔다. 별안간 바시콥이 총을 들어 올렸다. 나는 그 총구가 노리는 곳~계곡을 사이에 둔 북쪽 산마루에 범이 스쳐 가는 것을 보았다. 범은 전속력으로 산을 넘고 있었다. 하얀 눈 위에 얼룩덜룩한 무늬가 언뜻 스치는가 했더니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거리가 너무 멀고 범의 행동이 너무 빨라 바시콥은 방아쇠를 당길 기회를 놓쳤다.
‘그놈이 우리를 눈치챘어.’
범이 추적을 눈치채고 도망간다면 추적이 어려워진다. 범이 전속력으로 달리면 한 시간에 20km쯤 달린다. 우리는 그날 밤 동굴에서 잤다. 꿈에 범에게 쫓기는 꿈을 꾸었는데 잠에서 깨어나니 멀리서 봄의 포효가 들렸다. 이튿날 어둠이 가시기도 전에 추적을 시작했으나 좀체 거리가 좁혀지지 않았다. 그날 태양이 떨어질 무렵 또 한 마리 희생된 산양을 보았다. 갈비뼈 일부만 없어지고 통째로 남아있었다.
‘옳지, 이놈도 초조해졌어. 모처럼 잡은 먹이를 다 먹지도 못하고 도망을 칠만큼.’
어느 쪽이 더 견디느냐에 승패가 달려있었다. 공교롭게도 그날 밤에는 눈이 내렸다.
‘에잇, 빌어먹을.’
새로 내린 눈으로 발자국이 없어져 버렸다. 그러나 노련한 사냥꾼에게는 감이 있었다. 범이 지금까지 가고 있는 방향에 선을 그으면 범의 방향을 예측할 수 있었다. 범은 정확히 동남향으로 가고 있었다. 그리고 범의 길도 알고 있었다. 범은 돌멩이 길을 좋아했고 산마루 길을 즐겨 다녔다. 바시콥은 반신반의하며 따라왔으나 내 예측은 옳았다. 그날 오전 10시께 범의 발자국을 되찾았다. 뚜렷한 범의 발자국을 발견하자 오랜만에 바시콥이 웃었다.
‘이젠 되었어. 이놈은 도가니에 든 쥐야.’
우리는 온통 하얀 눈으로 덮인 고원지대를 빠르게 걸었다. 범은 배가 고파서 몇 번이나 다른 짐승을 노린 흔적이 있었으나 쫓기는 몸이라 실패했다. 그날 오후 2시께 또 범의 모습을 보았다. 약 300m쯤 떨어진 산마루에 동상처럼 우뚝 서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하얀 눈에 비쳐 범의 새파란 눈동자가 뚜렷하게 보였다. 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바시콥이 발포를 했다. 총소리가 울렸으나 범은 살짝 산을 넘어가버렸다. 그리고 총소리에 대항하듯 노호가 들려왔다. <따라오지 마라!>는 경고였다.
‘저놈은 산 너머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어. 자네는 천천히 저 산을 넘게, 발포 준비를 하고. 나는 돌아서 저 산 뒤로 돌아갈 테니. 등 뒤에서 쏠 거야.’
바람이 바시콥에서 범에게로 불고 있었으므로 나는 안심하고 범의 등 뒤로 돌아갔다. 목표한 산밑에 닿아 산정을 보니 바시콥이 천천히 산 밑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산정과 바시콥 사이에는 참나무숲이 있었는데 그 숲이 수상쩍었다. 나는 기다싶이 산정으로 올라갔다. 바시콥도 사방을 살피면서 총을 어께에 매고 산정을 내려오고 있었다. 참나무숲은 정적이었다. 새도 울지 않았다.
(새가 울지 않는다는 건?)
그런 생각을 하는데 참나무숲에 노란빛이 움직이는 걸 봤다. 큰 참나무 뿌리 부근이었고 노란 물체는 뱀처럼 길었다. 범의 꼬리였다. 나는 울렁거리는 심장을 꼭 누르고 한 치 한 치 위치를 바꾸며 기었다. 바시콥이 범의 위치를 짐작 못 하고 태연히 걸어 내려오고 있는 것이 안타까웠다.
(바시콥, 천천히 좀 천천히 내려와!)
마음속에서 절규하며 이동했다. 참나무를 비켜 바위를 지나자 범의 모습이 보였다. 범은 나무뿌리에 납작 엎드려 땅에 발톱을 박고 허리를 움츠려 한 번의 도약으로 바시콥을 공격할 수 있게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바시콥은 범을 발견할 수 없었다. 나는 겨냥을 했다. 그러나 발사하지 않았다.
(참아, 참아라!)
이윽고 범이 상체를 일으켰다. 뒷발로 눈을 차면서 불과 7. 8m까지 다가선 바시콥에게 도약했다. 탕! 어깨의 강한 반동과 함께 납덩어리가 날아갔다. 단 한 발, 범은 공중에 날아오르는 자세로 사지를 쭉 뻗고 눈 위에 털썩 쓰러졌다.
‘브라보!’
총소리에 어리둥절한 바시콥이 달려와 나를 껴안고 춤을 추었다.
6. 마적(馬賊)
6월이었다. 6월은 사슴사냥에 가장 좋은 시기다. 장마는 아직 오지 않았고 더위도 심하지 않다. 나는 수사슴을 유인하기 위해 한다도헷자 역에서 북동쪽으로 20km 정도 되는 곳에 잠복소를 두세 개 만들었다. 뿔이 굳지 않은 수사슴을 기다려 녹용을 채취하면 중국인들에게 선약(仙藥)으로 비싼 값에 팔 수 있었다. 지대가 험악하고 바위산에는 참나무가 밀생했다. 참나무숲 맑은 개울이 흐르는 잠복소에서 사슴을 기다렸다. 사슴이 안 온다고 하더라도 밑질 게 없었다. 맑은 물, 상쾌한 공기, 향기로운 풀냄새, 새들의 명랑한 지저귐 그리고 덫을 놓아 잡아 구은 토끼고기가 맛있었다. 황혼이 짙어졌다. 태양은 라오닌산맥 저편으로 숨어버렸고 밤의 그림자가 산등성이를 타고 내려와 벌판으로 퍼졌다. 밤이 되자 더위는 사라지고 냉기가 흘렀다. 잠복소 옆에 모닥불을 피웠다. 밤하늘 서편에 별이 빛나기 시작했다. 내가 잠잘 준비를 끝내고 일어서려고 했을 때 사람 소리가 들렸다. 나는 조심스럽게 귀를 기울이며 엄한 밀림의 규율에 따라 총의 안전장치를 풀고 땅에 엎드려 살살 기어 나무뿌리에 숨었다. 오래지 않아 모닥불 옆에 사람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불 옆에 장승처럼 서 있는 사나이는 엄청나게 키가 컸다. 모닥불과 잠복소를 둘러보던 사내가 어깨에 멘 배낭을 벗어 던지며 고함을 쳤다.
‘야, 누구냐? 여기 있었던 친구는 누구야? 이리 나와. 나오지 않으면 찾아 죽여버릴테다!’
굵고 벼락같은 목소리였으나 나에게는 매우 반가운 음성이었다. 나는 밝은 기침을 하며 서서히 걸어 나갔다. 거인(巨人)이 나에게 날카로운 시선을 던지더니 눈이 둥그레졌다.
‘코안경 나리, 당신이었소?’
그는 아까보다 더 큰 소리로 고함을 지르며 와락 달려들어 나를 껴안았다. 그는 나의 친구 보보신이었다.
‘여전하군, 보보신! 사슴사냥이냐?’
‘그렇죠. 나는 혼자가 아닙니다.’
보보신이 입술에 손가락을 대더니 휘파람을 불자 이내 10여 명의 사내들이 어둠 속에서 나타났다. 모두 총을 들었고 중국인들이었다. 마적들은 모두 15명이었다. 근육질 몸매에 총을 들고 어깨에 탄띠를 둘렀다.
‘야, 돈산!’
보보신이 두목으로 보이는 40대 사내~안광(眼光)이 매서운 사내는 보보신으로부터 중국말로 나의 소개를 듣더니 웃었다.
<코안경 나리의 얘기는 여러 사람으로부터 듣고 있었다.>라고 보보신이 통역했다. 그들은 내가 피워놓은 모닥불에 나무를 더 던져넣어 불이 활활 타게 만들어 놓고 저녁 식사를 준비했다. 사슴의 허벅다리를 굽고 쌀로 밥을 지었다. 큰 주전자에는 차를 끓였다. 그들이 맛있게 저녁식사를 하는 동안에 나는 차를 대접받았다. 향기로운 차였다. 마적두목 돈산은 차를 천천히 마신 뒤 모닥불 옆에 누워 파이프를 태웠다. 구릿빛으로 탄 얼굴은 준엄했으며 무표정하고 얼음처럼 차가웠다. 보보신은 돈산이 동지철도(東支鐵道, 동 만주 철도)의 연도(沿道)를 거의 모두 지배하고 있는 두목 중의 두목이라고 소개했다. 그 일대에는 수십 개의 마적단이 있는데 그들은 모두 돈산에게 공물(供物)을 바치고 명령을 받았다. 보보신과 돈산은 이상한 인연으로 만났다.
6년 전 어느 겨울, 보보신은 사슴을 쫓다가 너무 깊이 산속으로 들어갔다. 되돌아오기에는 날이 너무 어두웠고 길이 험해 봅신은 부근의 동굴을 찾았다. 동굴 앞에 선 보보신은 동굴 안에 온기가 있는 걸 느꼈다. 담대한 보보신은 사냥꾼인 줄 알고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동굴 안에는 숯불이 피워져 있고 그 옆에 중국인이 한 사람 앉아 있었다. 그 사내는 뜻밖의 침입자에게 무서운 시선을 던지더니 허리에서 비수를 끄집어냈다. 칼날이 30cm쯤 되는 날카로운 비수였다. 보보신이 순간적으로 뒤로 한발 물러서며 총구를 들어 올렸으나 이내 총구를 내리고 중국말로 말했다.
‘이봐, 자네는 일어날 수도 없는 형편 아냐. 일어나 덤벼들어 봐야 이길 것 같지도 않고 ….’
사내도 2m가 넘는 육척거구(六尺巨軀)였으나 보보신은 육척에 여섯 치가 더 붙어있는 초(超)거인이었으며 몸이 바위 같았다.
‘죽기 싫으면 빨리 없어져. 개새끼 같은 놈아!’
사내의 입에서 거친 쉰 소리가 터져나왔으며 생전 듣지 못한 욕설을 내뱉았다. 그러나 보보신은 없어지지 않았다. 그 중국인 사내의 거친 행동은 이미 겁을 먹었거나 항복을 했다고 판단했다. 사실 사내는 오른쪽 허벅다리에 총을 맞아 많은 피를 흘렸다. 사내는 부하들과 일본군대의 수송차량을 습격했다가 기습을 당한 것이다. 사내는 일본군대의 수송대가 경비 두 명과 물건을 가득 싣고 운반 중이라는 정보를 알고 수송차량을 습격했는데 이는 일본군의 함정이었다. 부하 여섯 명을 데리고 잠복했는데 트럭에는 일본군 30여 명이 숨어있었다. 길에 통나무를 가로질러 길을 차단해놓고 트럭이 급정차를 하자 잠복에서 튀어나왔으나 일본군이 트럭에서 뛰어내리며 무차별 사격을 했다. 부하들은 몰살당하고 사내는 무릎에 관통상을 입어 절벽으로 떨어졌다. 다행히 절벽 밑에 낙엽이 두껍게 쌓여 목숨을 건졌으나 동굴까지 기어 와서 이틀 동안 숨어있었던 것이다. 사내는 불의의 침입자를 보고 놀랐으나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아 욕설만 했던 것이다. 보보신은 포수의 본능으로 사내의 약점을 간파하고 유유히 행동했다. 사내의 손이 닿을락 말락 한 거리를 유지하며 앉았다. 파이프를 태웠다. 사내는 몇 번이나 덤벼들 기회를 엿보았으나 단념했다. 이길 것 같지 않았다. 싸움꾼의 직감이었다.
‘이봐, 난 사냥꾼이야. 범이나 사슴은 잡지만 사람은 잡지 않아. 더구나 자네처럼 부상한 사람은 말이야.’
보보신이 다소 난폭하다 싶을 정도로 담배쌈지와 파이프를 사내에게 던졌다. 등에 멘 배낭에서 사슴고기를 꺼내 요리했다. 소금을 슬슬 뿌리면서 불에 구워 한 점 잘라 사내에게 던져주었다. 이틀 동안 굶주린 사내가 칼을 집어넣고 고기를 받아먹었다. 보보신은 사내와 같이 잤다. 이튿날 보보신은 떠나면서 사내에게 사흘 치 식량을 나눠주었다. 보보신은 아무 말 없이 식량을 주었고 사내도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맙다는 말도 없었다.
보보신과 사내는 그 후 반년 만에 다시 만났다. 입장이 거꾸로 바뀌어서 다시 만났다. 혼자 러시아와 중국 사이 고원지대와 밀림을 떠돌아다니던 보보신은 산적을 만났다. 보보신이 하루 종일 추적한 사슴을 잡아 막 작업을 하고 있었다. 사슴의 뿔을 도려내는 일이었는데 사슴의 체온이 식기 전에 조심스럽게 도려내야 했다. 날카로운 칼로 사슴의 머리뼈를 가르고 있을 때 보보신은 인기척을 느꼈다. 아름드리 나무들이 밀생하였으며 햇빛조차도 어슴프레 변색되었는데 보보신은 등 뒤 20m쯤 떨어진 나무 그늘에 얼핏 뭣인가 스쳐 지나가는 것을 봤다.
(사슴일까, 곰일까?)
사슴이기에는 두 다리로 걷는 것 같았고 곰이라고 보기에는 몸체가 가냘펐다. 밀림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사람이다. 담대한 보보신도 등에 찬바람이 났다. 밀림에서는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동물이 되어버린다. 특히 러시아와 중국 국경 일대에는 포수를 노리는 산적이 있었다. 포수는 짐승의 발자국을 따라가는데 산적은 포수의 뒤를 밟았다. 포수가 짐승을 잡으면 산적은 짐승을 가로챘다. 포수를 죽이고 총까지 가로챘다. 보보신은 긴장하고 얼핏 사슴 뒤로 몸을 숨겼다. 미행자에게 보여주기 위해 총의 안전장치를 풀었다. 날카로운 눈으로 주변을 감시하면서 작업을 계속했다. 그림자가 있엇던 곳에서는 사슴이 방해되어 저격을 못 할 위치였다. 약 10여 분이 지났다. 보보신은 쓴웃음을 지었다.
(내가 착각했어.)
바로 그때 보보신의 무릎 옆 1cm 지점의 흙이 튀었다. 이어 총소리가 울려 퍼졌다. 보보신은 순간적으로 몸을 굴리면서 나무 뒤로 숨었다. 총소리가 들려왔던 곳에 한 발 쏘았다. 덮어놓고 쏜 게 아니라 나무 뒤에 어른거린 물체를 보고 쏘았다. 보보신은 명포수가 되기 전에 제정러시아의 군인이었으며 군인 사격 대회에서 우승을 했고 실제 전투 경험도 풍부했다. 보보신은 총탄이 사람의 피부를 뚫고 들어가는 소리를 감지했다. 그러나 아무 소리가 없었다. 잠시 후 남쪽으로 5m쯤 떨어진 바위 부근에서 총소리가 들리고 나무둥치에 맞았다. 적은 한 놈이 아니고 두 놈 혹은 여러 놈일 수도 있었다. 보보신은 바위로 총탄을 두 방 날리고 다른 나무 뒤로 옮겼다. 나무 세 그루가 삼각형으로 서 있어 세 방향에서 오는 사격을 막을 수 있었다. 조용했다. 30분, 1시간, 2시간. 보보신은 미동도 하지 않고 끈질기게 기다렸다. 사냥본능이다. 움직이면 표적이 된다. 범도 그 밝은 눈으로도 움직이지 않은 짐승은 발견하지 못한다. 어둠이 서서히 다가왔다. 보보신은 어둠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는 탈출이 쉽다. 캄캄해지자 발소리를 내지 않고 천천히 참나무숲을 벗어났다. 그러나 너무 조심한 탓인지 몇 발 못 가서 나무뿌리에 걸려 넘어졌다. 동시에 세 발의 총탄이 날아왔다. 그중 한 발이 왼손에 맞았다. 깨끗한 관통상이라 위험하지는 않았으나 피가 계속 흘렀다. 참나무 세 그루가 있었던 곳으로 되돌아왔다. 부상 당한 왼손의 출혈을 수건으로 묶었다.
(이 새끼들이!)
분노가 끓어올랐으나 불안감도 깊었다. 적은 적어도 여섯 또는 일곱쯤 되어 승산이 없었다. 보보신은 죽음을 각오했다. 날이 밝으면 등이 벌집처럼 난사 당할 게 분명하고 날이 새기 전에 당할 수도 있었다. 보보신은 기왕 죽을 바에야 적도 몇 놈 죽이겠다고 각오하고 어둠 속을 관찰했다. 말소리가 들렸다. 마적들은 적을 완전히 포위했다고 판단하고 자기들 끼리 작전을 논의하고 있었다. 중국말이었으나 일부를 알아들을 수 있었다.
‘동지를 한 사람 부상시킨 놈이니 잡아서 껍질을 벗기자, 불쌍하니 눈깔을 두 개 빼고는 살려주자.’
하면서 깔깔거리며 웃었다. 듣기만 해도 소름 끼치는 말이었는데 상대방에게 일부러 듣게 하여 사기를 꺾으려는 수작이었다. 마적들은 거의 한 시간 동안이나 지껄이더니 갑자기 대화가 뚝 끊어졌다. 굵은 목쉰 소리가 터져 나왔다.
‘열 놈이나 모여 단 한 놈을 처치 못 해!’
두목의 고함 소리였는데 그 소리를 듣자 보보신이 귀를 기울였다. 듣던 목소리였다. 어디서 들었을까? 그렇다. 반년 전 동굴에서 만난 사내였다. 보보신이 고함을 쳤다.
‘야, 이 개새끼들아! 일대일로 싸우자. 비겁하게 여러 명이 그것도 이 밤중에 한 사람에게 달려들어!’
잠시 침묵이 흘렀다. 반응이 없었다.
‘상대할 놈이 없으면 두목이 나와라. 동굴에서의 부상이 나았다면 나와 대결하자! 정정당당히 일대일로.’
또 침묵이 흘렀다. 대꾸가 없었다. 잠시 후 어둠 속에 불이 켜졌다. 환한 불빛이 한 사내의 얼굴을 비췄다. 어금니를 꽉 다문 준엄한 표정, 벼락이 떨어져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을 냉정한 모습이었다. 바로 그 사내~돈산. 보보신은 가랑잎을 모아 불을 붙였다. 그 불빛에 자기 얼굴을 드러냈다. 돈산이 부하들에게 짤막하게 명령했다. 적이 아니고 친구라는 말이었다. 돈산이 손에 불을 들고 왔다. 부하들을 시켜 불을 더 활활 타게 했다. 아무 말도 없었고 웃지도 않았다. 인사도 하지 않았다. 부하들이 보보신의 부상 당한 팔을 치료하고 곰 껍질을 깔아주었다. 돈산과 술잔이 오갔다. 독한 화주로 몸이 뜨거워졌다. 돈산이 물었다.
‘어떻게 된 거요? 대인!’
간단하게 사유를 얘기했다. 사슴을 쓰러뜨려 처리하고 있는 중에 사격을 당해 반격을 했을 뿐이라고 했다. 돈산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죽여!’
부하 두 사람이 일어났다. 그중 하나가 권총을 빼 들었고 마적 둘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총소리가 났다. 돈산에게 술잔을 돌리려던 보보신이 술잔을 떨어뜨렸으나 돈산은 태연하게 술잔을 받았다.
‘대인, 나는 부하들에게 사냥꾼을 습격하라고 지시를 내린 일은 없소. 내 지시를 어긴 자는 죽음뿐이요.’
보보신은 돈산이 단순한 마적두목이 아니라 밀림의 지배자라는 걸 알았다. 그는 밀림에서 법을 세우고 집행하는 최고의 절대자였다. 보보신은 그 후 3일 동안 마적들의 치료를 받고 길 안내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 후 보보신은 산적이나 마적으로부터 피해를 입지 않았으며 산속에서 가끔 정체 모를 사내들로부터 인사를 받았다. 마적들은 두목으로부터 키가 육척(六尺, 2m)인 백인 포수를 보면 도와주라는 명령을 받았던 것이다.
‘코안경 나리, 이래서 우리는 친구가 됐지. 당신은 나의 친구니까 그들의 친구고. 안심해!’
보보신으로부터 얘기를 듣고 나니 안심이 되었다. 보보신은 다정다감한 사나이였다. 그는 얼핏 보아서는 마른 체형이었으나 통뼈였다. 그는 독수리 코와 작고 날카로운 눈 그리고 저음의 위엄있는 음성. 언제나 가죽상의를 애용하고 호주머니에는 재크나이프와 수염을 깎는 면도날을 넣고 다녔다. 언뜻 40세 정도로 보였으나 실은 45세였다. 그는 자바이칼주의 농민 출신이며 아마추어 포수였다. 그는 군대에서 사격을 배웠고 실전에도 참가했다. 사병(士兵)이었지만 이름난 용사였다. 군대에서 제대하고는 동지철도의 감시인을 했다. 3, 4년 동안의 감시인 생활에 싫증이 나서 자유로운 포수가 되었다. 사격의 명수이며 담대하고 때로는 광인처럼 사나웠으나 본성은 따뜻한 사나이였다. 넓은 밀림을 자유롭게 돌아다니면서 많은 맹수를 잡아 돈을 벌었다. 그러나 성질이 거칠어 앞뒤 분간을 못 해 버는 돈 보다 쓰는 돈이 많았다. 그는 비싼 짐승을 헐값에 팔아 친구들과 술을 마셨다. 돈이 떨어지면 총까지 마셔버렸다. 또 싸움을 했다. 혼자서 서너 명을 상대로 싸웠고 때로는 부상도 입었다. 돈이 떨어지고 친구들도 떠나고 부상을 입으면 그는 자포자기하여 경찰서 신세를 졌다. 그에게 내가 필요한 때는 바로 그때였다. 그가 경찰에서 벌금이나 구류 선고를 받으면 나를 찾았다. 나는 그를 위해 경찰서장에게 머리를 숙이고 벌금을 마련하여 유치장에서 그를 빼내 집으로 데리고 왔다. 집에 오면 그는 언제나 죄를 뉘우치고 맹세를 했다. 내가 기억하는 그의 참회는 열 번 가까이 되는데 그 참회가 반년을 넘는 적이 없었다. 그러나 나는 그를 사랑했다. 언제든 총과 총탄을 마련해주었으며 그는 바로 밀림으로 들어갔다. 밀림에서 그는 왕자다. 보통 2, 3개월 동안 밀림을 돌아다녔으나 그에게 덤비는 짐승이나 사람은 없었다. 중국인 포수들은 보보신이 민족적 우월감이 없는 좋은 백인이며 곤경에 빠진 사람을 보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도와주는 호인으로 알았다. 보보신이 중국인 포수의 존경을 받게 된 유명한 일화가 있다.
보보신은 중국인들과 함께 부상 당한 범을 추적한 일이 있었다. 범은 화가나 바위 뒤에 숨어있다가 포수들에게 덮쳐들었다. 중국인 포수를 앞발 차기로 때려눕히고 그 위에 올라타 목줄을 노렸다. 포수가 목줄을 물리지 않으려고 필사적인 저항을 하였는데 동료들은 총을 쏠 수가 없었다. 범과 사람이 한 덩어리가 되어 뒹굴었기 때문에 겨냥조차 못 했다. 그때 보보신이 총을 던져버리고 칼을 쥐고 범에게 덤볐다. 보보신이 칼로 범의 어깨를 찔렀는데 화가난 범이 밑에 쓰러진 포수는 내버려 두고 보보신의 어깨를 앞발로 쳤다. 범의 앞발치기 위력은 황소의 목을 일격으로 부러뜨리는 힘이 있었다. 그 일격에 넘어졌으나 범의 앞발을 꽉 틀어쥐고 있었다. 보보신은 어깨의 중상에서도 이번에는 칼로 범의 배를 찔렀다. 칼자루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이 칼을 쑤셔박았는 데도 범은 죽지 않았다. 범은 크게 몸부림을 쳐 보보신을 떨어뜨려 놓고 마지막 치명타를 하려고 일어섰는데 그 틈에 중국인 포수가 발사를 했다. 총탄이 범의 머리에 관통, 비로소 죽었다. 먼저 넘어진 포수는 어깨뼈가 부러졌고 보보신도 어깨와 가슴에 열상(裂傷, 할퀸 상처)을 입었으나 치명상은 아니었다. 호랑이와 격투를 벌인 보보신의 무용담이 널리 퍼져 보보신은 영웅이 되었다.
나는 보보신과 자주 사냥을 했는데 보보신은 성미가 급해 가끔 터무니없는 모험을 하였으므로 나의 질책을 들었다. 사냥꾼에게 필수적인 침착성과 정확성 그리고 끈질긴 근성이 부족했다. 밀림을 사랑하고 자연을 존경하는 마음은 한결같았다.
어느 날 우리는 라오닌의 주(主)산맥에서 야수의 발자국을 추적하고 있었다. 우리는 승가리천(川)과 무란간천의 상류에 있는 산정(山頂)에서 추적을 멈췄다. 짐승을 몰아 잡으려는 순간에 추적을 포기한 것이다. 산정에서 내려다보이는 경치가 너무 아름다웠다. 남쪽에는 다 ‧ 도 ‧ 진자의 동그란 산정이 하얀 구름 위에 솟아있었고 서쪽과 동쪽에는 초록색 밀림이 바다처럼 퍼져 지평선이 되었다. 우리는 담배를 나누어 피우면서 황홀한 경치에 홀려 무아지경에 빠졌다.
‘코안경 나리, 멋있는데!’
‘알겠소, 내 말을. 난 이곳의 주인이란 말이요. 내가 이곳의 대장이다 이 말이요.’
‘난 여기서는 술주정뱅이가 아니지. 거지도 아니고 싸움꾼도 아니야.’
‘난 부자야. 산돼지, 사슴, 산양들 모두가 내 것이요. 수만 마리나 되는 저 짐승들이 모두 내가 기르는 가축이야.’
‘알겠소? 여기는 모두가 내 것이요.’
보보신의 그 이상한 대사는 점점 커져 나중에는 나팔소리처럼 멀리 메아리쳤다.
(미개(未開)한 밀림의 거인.)
조용한 밀림의 밤이 깊어갔다. 모닥불은 활활 타고 그 옆에 보보신이 노루 가죽 장화를 신은 두 발을 나무에 기대고 비스듬히 누웠다. 그 옆에 돈산이 동상처럼 부동의 자세로 앉아 있었다. 마적들은 밤새 향기로운 차를 끓여 계속 찻잔을 채웠다. 새벽이 되자 주위를 흔적 없이 깨끗이 정리하고 사라져버렸다. 한마디 인사도 없이.
아침 여덟 시께 나는 눈을 떴다.
‘코안경 나리, 뭘 좀 먹어야지.’
밀림의 성찬이 준비되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산돼지 뒷다리가 노란 기름을 흘리면서 다갈색으로 구워져 가고 산나물과 나무뿌리로 요리한 국물이 구수하고 향기로운 냄새를 풍기며 끓었다.
‘이 국물요리는 마적들에게 배웠어요. 한 그릇 더 하시오. 여기 아니면 맛볼 수 없으니까.’
식사가 끝나자 그는 짐을 챙겼다.
(어디로?)
‘한다미자에 가 사슴뿔을 팔아야지요.’
‘또, 술 마시면 안 돼!’
‘이제 난 술은 끊었어요. 맹세코 술은 마시지 않아요!’
그 맹세가 의심스러웠으나 더 설교하지 않았다. 그 거구가 밀림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나는 그의 모습을 보고있었다.
(잘 가, 키다리, 나의 친구여!)
7. 사냥개들
포수 이반 프레드뇹이 맹수사냥을 하자고 우수리에서 한다오햇자의 우리 집에 왔다. 그는 호랑이를 열 마리나 잡은 명포수다. 그가 우리 집에 오자 온 동네가 아수라장이 되었다. 프레드뇹이 사냥개 열 마리를 데리고 왔다. 프레드뇹이 시니컬하게 웃으면서 턱으로 사냥개들을 가리켰다. 나는 사냥개를 관찰했다. 세 마리는 순종 골드견이었으나 나머지는 모두 잡종이었다. 그러나 모두 대형 개들로 사나웠다.
‘몇 마리는 쓸만한데 ….’
‘요즘도 사냥만 하나?’
프레드뇹은 전형적인 동부 시베리아 포수다. 중키에 다부진 체구, 관자놀이가 튀어나오고 면도를 하지 않은 길고 굵은 수염 속 얼굴에서는 눈이 반짝였다. 검은 반점이 많은 얼굴과 하얗고 검은 머리카락은 인삼 색이었다. 몹시 추운 날이었으나 프레드뇹은 덥다면서 방에서 자는 걸 거절하고 창고를 선택했으며 창고에 스토브를 피우는 것도 사양했다. 주인은 그렇고 개들은 더 고약했다. 개들은 더워서 창고에 들어오는 걸 거부하고 영하 30도의 바깥에서 뛰어놀았다. 프레드뇹과 개들은 시베리아 산속에서 살았으며 눈 위에서 잠을 잤다.
‘나는 추운 것은 몰라요. 덥지 않은 것은 알지만.’
그는 한겨울 산속에서도 장갑을 끼지 않았으며 외투를 입지 않았다. 사향고양이 가죽으로 만든 구두를 신고 방수 바지와 점퍼만 입었다. 그는 술도 담배도 하지 않았고 말도 거의 하지 않았다.
‘담배나 술을 하면 몸에 냄새가 배어 짐승들이 싫어합니다.’
프레드뇹의 몸에서는 소나무 냄새와 풀 향기가 났다. 그는 소금과 설탕도 먹지 않았고 차까지 멀리했다. 인공적인 것을 싫어했다. 프레드뇹의 과거는 비밀이었다. 어두운 그림자가 있었으나 묻지 않았다. 프레드뇹의 개들의 두목도 주인처럼 입이 무거웠다. 두목은 ‘마녀’라 불렀고 에스키모견의 암컷이었다. 송아지만큼 컸으며 개들의 절대자였다. 프레드뇹은 마녀를 매우 사랑했으며 모든 명령이나 지시는 마녀를 통해 다른 개들에게 전달되었다. 마녀에게 잡은 짐승의 1/5을 제공한다는 청부계약을 맺었다. 마녀가 짐승을 잡으면 칼로 잘라 던져줬다.
‘자, 이 건 네 몫이야.’
나는 마녀의 싸움을 본 적이 있다. 중국인들은 집집마다 송아지만 한 개들을 키웠다. 치안이 불안하여 자기 집을 지키는 개들에게는 고깃덩어리를 먹였다. 때로는 사람의 시체도 주었다. 특히 땅이 얼어 시체를 매장할 수 없는 겨울에는 시체를 개들이 처리했다. 그래서 중국인들의 개는 잔인하고 사나웠다. 마녀가 세 마리의 부하들과 같이 중국인 마을에 들어섰다가 열 마리가 넘는 중국 개들에게 포위되었다. 중국 개들이 대뜸 덤볐다. 마릴 사이도 없이 중국 번견과 사냥개들의 지단 난투극이 벌어졌다. 싸움은 수나 덩치로 봐서 번견들이 우세했다. 텃세도 유리했다. 첫 번째 전투에서 번견들이 승리했다. 사냥개 세 마리가 피를 흘리며 비명을 질렀다. 사람들이 개를 말리려고 했으나 프레드뇹은 중재를 거절했다.
‘내버려 두시오. 싸움은 끝장을 봐야 해!’
‘마녀, 덤벼라!’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마녀가 번견들을 덮쳤다. 단신으로 열 마리의 개들에게 달려들었는데 눈에 야릇한 광채가 일고 있었다. 축견에게는 볼 수 없는 야수의 눈빛이었다. 번견들이 당황했다. 뿔뿔이 흩어지면서 마녀의 공격을 피하려고 했다. 마녀는 개들의 리더 격인 잿빛 개를 추격했다. 목표가 자기라는 걸 안 축견은 뒷발에 힘을 주고 버티면서 앞발로 일격을 하였으나 마녀는 몸체로 부딪쳤다. 전속력으로 달려온 힘이었기 때문에 번견이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는데 그 틈에 마녀는 번견의 코를 물었다. 번견이 비명을 지르면서 도망갔으나 마녀가 추격했다. 마녀는 번견을 담벽에 몰아넣고 목줄을 물었다. 마녀가 목을 좌우로 흔들면 목줄이 끊어져 번견은 죽었을 것이다. 프레드뇹이 마녀에게 소리쳤다.
‘마녀, 그만둬!’
마녀는 밀림에서도 용감했다. 무수한 상처가 있었다. 귀가 반쯤 잘려진 것은 산돼지에게 물린 것이다.
다음 날 우리는 밀림에 들어갔다. 나는 카메라를 목에 걸었다. 동물학자로부터 동물 사진을 찍어달라고 의뢰를 받았다. 11월에 우리는 다도진자산맥을 동쪽으로 따라갔다. 라오닌 고지대다. 고지대 밑은 돌투성이 계곡이고 개들에게 쫓긴 산돼지들이 우왕좌왕했다. 마녀는 산중턱이 있다가 산돼지들이 방향을 바꾸면 퇴로를 막았다. 50kg이 넘는 산돼지들을 민첩하게 통제했다. 우리들은 고지대 산정에서 잡담을 하며 마녀가 훌쳐 오는 산돼지를 쏘기만 하면 된다. 산돼지들이 우리가 대기하고 있는 산중턱의 숲으로 올라왔다. 순간 개 짖는 소리가 딱 멈췄다. 그리고 마녀가 한 번 크게 짖었다. 그 소리를 들은 프레드뇹이 달렸다.
‘저 건 산돼지를 쫓는 소리가 아니야!’
‘무슨 소리지?’
‘나 보고 빨리 와달라는 소리야. 원조를 청하는 소리야!’
‘큰 놈이 나왔다는 소리지.’
(큰 놈?)
범이다. 범이 숲속에 숨어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산마루를 따라 밑으로 내려갔는데 숲 가까이 가자 개들이 다시 짖기 시작했다. 우리가 도착하는 걸 알고 용기를 얻은 것이다. 프레드뇹이 술 앞에 정지했다. 숲속으로 들어가는 건 위험하다. 범이 어디에 숨었는지도 모르고 숲에 들어가는 건 자살행위였다. 개들이 범을 훌쳐 낼 것이다. 프레드뇹은 조그마한 바위 뒤에서 사격준비를 했고 나는 서너 발 뒤 나무에 숨어 카메라를 맞추고 있었다. 안전장치를 풀어놓은 총을 옆에 놓고. 개들이 점점 가까워졌다. 신경질적으로 짖는 개들과 굵은 소리로 짖는 마녀의 짖는 소리도 들렸다.
‘조심해, 범이야!’
프레드뇹이 고함을 쳤다. 개들이 짖는 소리에 섞여 범의 위협 소리가 들렸다. 우우욱! 우우욱! 하는 저음이었지만 살기를 느끼는 무서운 소리였다. 개들이 10m 앞에까지 왔으나 그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범이 사람의 냄새를 맡고 숲 밖으로 나오지 않은 것이다. 개들의 짖는 소리가 높아졌다. 범이 방향을 바꿨기 때문에 앞을 막아선 것이다. 범의 소리가 딱! 멈췄다. 동시에 킹! 하는 개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범이 앞을 막은 사냥개를 덮친 것이다. 그러나 개들은 굴복하지 않았다. 마녀의 짖는 소리가 한층 더 커졌다. 범의 모습이 보였다. 황갈색 옆줄이 나무를 스치고 지나갔다. 범은 우리들이 대기하고 있는 곳을 피하여 오른쪽으로 빠져나가려고 하다가 개들의 방해를 받아 왼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개들은 미친 듯이 짖었으나 범은 침착했다. 나무와 바위들 사이로 은폐를 하면서 도망가며 가끔 뒤따라오며 짖는 개들을 위협하여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나는 나무와 바위들을 통해 범과 개들의 모습을 확실하게 볼 수 있었으나 카메라의 셔터는 누르지 않았다. 범은 개들의 등쌀에 신경질을 낸 듯 정지하여 몸을 돌려 계곡에서 범을 위로 훌치던 개를 덮치려고 하다가 갑자기 방향을 바꾸었는데 그때 위에서 밑으로 범을 추격하던 마녀가 덮쳐 범의 뒷발을 물었다. 범이 대노했다. 웍! 소리를 지르며 마녀를 덮쳤다. 마녀가 재빨리 우리 쪽으로 물러서 위기를 모면했으나 범은 다시 마녀를 덮칠 태세였다. 범은 그 힘찬 머리를 수그리면서 몸을 움츠렸다. 수프링처럼 탄력이 넘치는 동작이었다. 귀는 찰싹 몸에 달라붙었고 눈에는 푸른 광채가 일어났다. 꼬리가 신경질적으로 흔들렸다. 기회였다. 마녀가 도살될 염려가 있었고 두 번 다시 없는 발사의 기회였다. 동시 카메라의 셔터를 누를 유일한 기회였다. 나는 셔터를 눌렀다. 동시에 총소리가 넓은 산에 메아리쳤다. 범은 뒷발로 땅을 차고 앞발은 이미 공중에 떠 있는 자세였는데 머리를 뚫고 들어가는 총탄의 충격으로 공중을 날던 몸이 수평이 되어 겨우 1m쯤 날더니 땅에 떨어졌다. 몸이 눈 속에 박혀 다리와 꼬리만 보였다.
‘내가 나설 무대가 없어졌어.’
프레드뇹이 웃었다.
‘대가리 속에 납덩이가 들어갔어요. 혼자 죽게 내버려 둡시다. 죽음이란 언제나 고독한 법이니까.’
개들이 아직도 요란하게 짖었으나 리더인 마녀는 사태가 어떻게 되었는지를 알고 범에게 다가가 냄새를 맡았다. 그리고 조용히 범의 꼬리 옆에 앉았다. 그걸 본 개들이 범에게 달려들려고 했는데 마녀가 화를 내자 조용해졌다. 범은 한국산이었다. 160kg의 대호였고 적갈색 털에 폭이 넓은 검은 띠무늬가 아름다웠다.
‘코안경 나리. 사진은 어때요?’
‘카메라 솜씨에는 자신이 없지만 잘 찍혔을 거야. 개들의 희생은 몇 마리지?’
‘두 마리, 한 마리는 늙은 놈이고 또 한 마리는 너무 젊은 놈이야.’
오랜 추적에 지친 개들이 모두 늘어졌다. 피를 흘리는 놈들도 있었지만 서로 핥아주고 있었다. 용감한 개들이었다. 그들은 산돼지를 추격하다가 역시 산돼지를 추격하는 범을 발견하자 산돼지를 버려두고 범에게 덤벼들었다. 그 용기가 가상했으나 프레드뇹이 던져주는 범고기는 먹지 않았다. 황혼이 다가왔으므로 우리는 산속에서 밤을 세웠다. 이튿날 프레드뇹이 범을 운반해줄 사람을 동원하려고 산을 내려가고 나는 개들과 산에 남았으므로 친해졌다. 특히 마녀는 나를 경계하는 듯했으나 사냥이 끝나고는 나를 잘 따랐다. 기다리는 중에 사냥을 했다. 개들이 짐승을 몰아오고 나는 바위 뒤에 숨어 짐승을 기다렸는데 사슴이 걸려들었다. 개들이 홀쳤다기보다는 몰고 왔다. 개들의 포위망에 걸린 사슴은 덮어놓고 개들이 없는 방향으로 뛰었는데 내가 앉아있는 바위 방향이었다. 개들의 묘기에 감탄했다. 내가 총을 들자 개들은 조용해졌다. 두목 마녀는 자기 주인이 아니라 총솜씨가 좀 의심쩍다는 표정이었으나 사슴을 쏜 후에는 존경의 표정이 되었다. 나와 개들이 사슴고기로 향연을 벌이고 있을 때 프레드뇹이 돌아왔다. 프레드뇹은 범을 500루불(현 시가 1,000만 원)에 팔았다. 나도 그때 찍은 사진으로 80루불의 수익을 올렸다. 내가 찍은 사진은 잘 된 건 아니었다. 솜씨도 서툴렀지만 배경이 하얀 눈이었던 것도 좋지 않았다. 그러나 하르빈의 사진점에서 그 필름을 아주 크게 확대하여 수정하여 팔았는데 미개의 원시림에서 산 범을 찍은 것이라고 하여 상당한 인기가 있었다.
우리는 다시 사냥을 하며 밀림을 돌아다녔는데 이런 사냥에서 곤란한 일은 잠은 짐승의 처리가 문제였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문제가 없었다. 프레드뇹과 코안경 나리가 짝이 되어 사냥을 하고 있다는 소문이 퍼져 우리가 잡은 짐승을 사려는 상인들이 경쟁이 붙었으며 두 사람의 유능한 상인이 현지까지 찾아와 짐승을 가져갔다. 쿠리(중국인 노무자)를 고용한 상인들이 두 바퀴 수레를 끌고 사냥터를 따라다녔다. 좀 헐값이었으나 편리한 거래였다. 한 달 동안 범 한 마리, 산돼지 열다섯 마리, 사슴 아홉 마리를 잡았다. 밀림을 수백km나 돌아다니다가 동지나철도 연선 사라햇자 역에서 사냥을 마무리했다. 사냥개는 두목 마녀와 에스키모견 두 마리만 살아남았다. 마녀는 풍부한 경험으로 에스키모견은 강인함으로 살아남았다. 헤어지기 전날 밤 개들이 범의 공격을 받아 한 마리를 물고갔다. 다음 날 다시 공격을 해서 개 한 마리의 앞다리를 물고갔다. 우리는 화가 났다. 프레드뇹이 식사도 하지 않고 범을 추격하려고 했다.
‘지금 추격하면 우리가 질 거야. 승산이 있나?’
프레드뇹이 대답을 못 했다. 한 달이 넘는 사냥으로 사람과 개들이 지쳤다.
‘코안경 나리, 범 사냥을 포기하잔 말이요?’
‘이보게, 자네, 중국의 삼국지를 읽었나? 제갈공명은 현명한 군사인데 그는 적을 유인하여 섬멸했어. 군세가 약했기 때문에 쳐들어오는 적을 기다렸다가 자연이나 지형을 이용하여 격멸시켰어. 나는 제갈공명을 존경하는데 그의 전법은 맹수사냥에도 적용되기 때문이야.’
‘….’
‘그 범은 이틀 동안 연달아 우리를 습격했어. 그러니 사흘째는 오지 않는다는 법도 없어. 더구나 어제는 개를 죽였으나 가져가지 못했으므로 오늘 밤에 다시 나타날 가능성이 많지. 그놈은 밤중에 오겠지만 다행히 오늘 밤은 보름달이야. 눈이 하얗게 쌓여있는 데다가 만월이면 범을 볼 수 있겠지?’
프레드뇹의 얼굴이 웃음이 떠올랐다. 우리는 범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우리들이 유숙하고 있는 집과 뒷산 사이에는 50평방미터 정도 되는 벌판이 있었다. 그 벌판은 하얀 눈이 쌓여있을 뿐 아무 은폐물이 없었다. 우리는 벌판에 참호를 파고 굵은 나무로 지붕을 덮었다. 프레드뇹은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았으나 나는 매우 추웠다. 그러나 하얀 눈이 덮인 밀림은 처절하게 아름다웠다. 범은 나타나지 않고 프레드뇹은 그 추위 속에서 잠이 들었다. 새벽 두 시께 개들이 짖었다. 경계하는 소리였다.
‘코안경 나리, 제갈공명은 현명한 전략가요. 녀석이 부근에 왔소.’
뒤산 숲속에 요기가 떠돌고 있었다. 우리는 맞바람 쪽에 있었으므로 냄새는 없다. 그러나 범은 나타나지 않는다. 무척 영리한 놈이었다. 새벽 3시, 곧 날이 밝을 것이다. 그러나 범도 우리도 초조하기는 마찬가지다. 드디어 범이 모습을 드러냈다. 가벼운 걸음이었다. 머리를 좌우로 흔들어 주위를 경계하면서 접근했다. 30m, 20m …. 아무리 밝다고 해도 야간사격은 부정확했다. 총솜씨가 문제가 아니라 시력의 문제다. 경험으로는 달빛의 사격은 조준보다 높이 올라간다. 우리는 범을 더 가까이 당기기로 했다. 18m, 17m …. 이제는 범의 눈빛이 보인다. 자동차의 헤드라이트처럼 밝고 환한 빛 때문에 몸체가 잘 안 보인다. 15m, 14m …. 범이 정지했다. 부동의 자세로 주위를 살피고 있다.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
(하나, 둘, 셋!)
두 발의 총소리가 마치 한 발처럼 울렸다. 범이 픽! 쓰러졌다. 다음 순간 2m나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총탄이 범의 신경을 건드린 것이다. 전등을 비췄다. 아가리를 크게 벌린 범은 악귀 같았다. 프레드뇹이 한 발 더 발사했다. 그걸로 끝. 제갈공명 선생은 위대한 전략가였다.
8. 밀림의 법
사슴사냥에는 항상 저격을 받을 위험이 따랐다. 산적이 아니라도 사냥꾼을 저격하는 무법자들이 산속을 돌아다녔다. 산속에는 법률도 없고 경찰도 없다. 무법자는 피해자가 스스로 죽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가 죽는다.
6월이었다. 밀림은 벌써 여름옷을 입었다. 색색가지의 아름다운 꽃이 피어 푸른 밀림에 찬란한 수를 놓았다. 새벽, 방금 떠오른 태양이 황금색 빛이 나무와 풀을 비추니 새벽이슬이 보석처럼 반짝였다. 나는 잠복소에서 나와 부근을 돌아다녔다.
(역시.)
빙그레 웃었다. 기대했던 결과가 나왔다. 바위산에 둘러싸인 이 삼림지대는 내가 좋아하는 여름철 사냥터다. 이유는 비밀이지만, 이 지대가 저습지여서 땅이 촉촉했다. 작은 동물들이 목을 축이기에 충분한 늪이 있다. 이런 지세는 동물들이 모여드는 조건이 된다. 그러나 더 특별한 이유는 이곳의 땅에 맛을 보면 짭짤한 소금기가 있다. 여름철의 동물들에게는 물 못지않게 염분이 필요했으며 뭇 동물들이 모여들었다.
몇 년 전에 범을 추격하다가 우연히 이곳을 발견한 후 매년 6월이 되면 혼자 이곳을 찾아왔다. 물론 비밀을 유지하기 위한 조지였으며 마치 수총각이 수처녀를 비밀리에 만나는 기분이랄까? 하필 6월에 찾는 이유는 6월이 사슴뿔을 얻는 황금 시기였기 때문이다. 사슴은 5월에 뿔을 갈고 6월에는 말랑말랑한 새 뿔이 솟는데 이것이 녹용이다. 그래서 여기에 왔는데 이미 밤이 어두워졌기 때문에 작년에 지어놓은 움막에서 푹 쉬고 새벽에 너온 것이다. 뭇 짐승들의 발자국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다. 거기에서 큰 수사슴 발자국을 발견했다. 민감하기 때문에 신중하게 추적을 했다. 사슴이 부근에 있는 것은 확연했다. 염분을 찾아 여기 오는 짐승들은 보통 3~4일간 머물렀다. 참나무숲의 비탈길을 올랐다. 사슴이 즐겨 찾는 코스였다. 바람 부는 방향에 주의하면서 천천히 걷다가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사슴이 아주 가까이 있다는 것을 감지하고 사슴을 잡을 작전을 세우다가 부지중에 바위에 사람 발자국이 찍혀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누굴까?)
불길했다. 바위에 찍힌 발자국은 중국 신을 신고 있었고 중국인치고는 발자국이 컸다. 불안했으나 큰 수사슴이 너무 욕심나서 추적을 계속했다. 이제는 사슴에게만 쏟았던 신경을 등 뒤에도 나누었다.
(설마 제까짓 것이 ….)
발자국이 단 하나라는 것도 좀 안심이었다. 밀림 추적에서는 눈 보다 귀가 더 중요하고 코도 사용했다. 나무 뒤에 사슴의 뿔이 보였다. 네 개의 가지가 난 뿔은 훌륭했다. 사슴은 뿔을 흔들면서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다. 거리는 약 70m. 사격을 할 수 있었으나 더 전진했다. 몸을 땅에 딱 붙이고 살금살금 기었다. 50m. 흔들면서 파리를 쫓던 뿔이 정지했다. 사슴의 귀가 섰다. 위험을 느낀 것이다. 한쪽 무릎을 꿇고 사슴의 심장을 겨냥하여 발사했다.
(잡았다!)
몸을 펴고 일어서다가 본능적으로 몸을 옆으로 굴렀다. 몇 년 전 산적에게 습격을 당했던 기억이 본능을 일깨웠다. 등 뒤에 인기척이 있었다. 누군가 나를 저격하려다 목표물을 놓쳐 당황한 것 같았다. 다시 한번 더 몸을 굴려 산포도 줄기 속으로 숨었다. 3연발총에 재장전을 했다. 3연발총은 고가였기에 누구나 갖지 못했다. 한 시간을 기다렸으나 아무 반응이 없었다. 총을 든 채 일어섰다. 사슴 쪽으로 걸어갔다. 총소리가 났다. 머리 위 5cm에서 나뭇가지가 부러졌다. 얼핏 나무 뒤로 숨었다. 배낭에서 8배짜리 망원경을 꺼내 총탄이 날아온 곳을 면밀하게 조사했다. 있었다. 사람은 보이지 않았으나 나무 뒤에 나온 총신을 발견했고 총을 쥔 손도 보였다. 죽느냐 죽이느냐! 그는 성능이 나쁜 단발총이고 나는 3연발이다. 그는 나를 볼 수 없으나 나는 망원경으로 그를 보고 있다. 총 쏘는 기술이 다르다. 침착하게 적을 관찰했다. 그리고 괴상한 판단을 내렸다. 그가 숨어있는 나무는 소나무였는데 그리 굵지 않았다. 내 영국제 총으로는 나무를 관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총탄을 강철탄으로 바꾸었다. 총을 들어올려 총신이 튀어나온 것을 기준으로 적의 심장의 위치를 짐작하여 겨냥했다. 방아쇠를 당겼다. 범을 쏠 때의 기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망원경을 들었는데 총신이 보이지 않고 아무 기척도 없었다.
(도망갔나?)
관찰점을 바꾸기 위해 오른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사람은 보이지 않앗다. 초조해서 포복으로 기어가서 쓰러져있는 사람을 발견했다. 약 30세 정도의 중국인이었는데 험상궂은 표정이었다. 묵묵히 시체를 보았으나 후회는 없었다. 그러나 내가 죽인 것이 짐승이 아니라 사람이었으므로 시체를 묻어주었다.
그 후 아퍼나센코하고 사냥을 했을 때 또 살인자와 대결했다. 아퍼나센코가 몇 년 전에 자기가 밀림 속에 만들어놓은 사냥막에 가서 사슴사냥을 하자고 해서 같이 갔는데 그 부근은 위험지대였다. 동물들뿐만 아니라 과일과 물이 풍부해서 범죄자들이 은거하고 있다는 소문이었다. 아퍼나센코의 움막은 별장 같았다. 우리는 과일과 술 그리고 수프로 식사를 마치고 밤 사냥을 했다. 그날 밤, 우리는 잠복소에서 모기에 뜯기다가 사슴 한 마리를 잡았다. 거리가 좀 멀고 어두웠기 때문에 사슴은 쓰러졌으나 곧 일어나 도망쳐버렸다. 핏자국을 확인했는데 배에서 나온 피였다.
‘이놈은 멀리 못 가. 고작 3~400m일 것이니 내일 찾자.’
우리는 다음 날 새벽에 핏자국을 수색하였다. 내가 예상한 대로 사슴은 부근 계곡에 쓰러져있었다.
‘저런 곳에 쓰러졌군. 가보자.’
(잠깐!)
아퍼나센코가 사슴에게 다가가는 것을 말렸다. 이상한 예감이었다.
‘조심! 누가 우리를 보고 있어!’
‘그런 것 같은데 …. 어젯밤에 우리 집 부근에서 인기척을 느꼈어, 우리가 오기 전에 집에 누군가가 머문 것 같았고.’
나는 긴 막대기에 모자를 씌워 나무 뒤에서 슬그머니 올렸다.
(피웅!)
날카로운 총소리와 함께 모자에 구멍이 났다. 온몸이 오싹했다. 첫 탄이 실패했다고 생각했던지 집중사격이 시작되었다. 탄환이 아퍼나센코의 구두를 스쳤다.
‘두 놈이야. 한 놈은 바위 뒤에 또 한 놈은 그 위 바위틈에 숨어있어.’
‘자넨 여기에 있어. 내가 저놈들에게 밀림의 법을 가르칠 테니.’
말릴 새도 없이 아퍼나센코가 달려 나갔다. 교묘하게 총탄을 피하면서 적들이 숨어있는 산 뒤로 돌아가 버렸다. 말릴 사이도 없었지만 말릴 생각도 없었다. 아퍼나센코는 20년 경력의 명포수였고 실수를 인정하지 않는 탐험가였다. 5분, 10분,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그래도 불안은 느끼지 않았다. 총소리가 들렸다. 연달아 두 발이었는데 각기 다른 방향에서 났다. 뒤에 발사된 것이 아퍼나센코의 총탄이었다. 총소리를 듣자마자 달렸다. 은폐물을 이용하여 지그재그로 달렸다. 두 발의 총탄 중 뒤의 총탄이 아퍼나센코의 것이라면 적은 한 명이 죽었고 아퍼나센코는 안전하며 다른 한 명의 적과 대치하고 있다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적의 등 뒤로 접근하여 적을 죽일 작정이었다. 20m 정도 접근했을 때 한 사내가 정상에서 뒷걸음을 치며 내려오고 있었다. 중국인이었다. 밀림의 법으로 나는 사내의 등 뒤에서 발사했어야 했다. 밀림은 미국의 서부가 아니며 사람을 죽이는데 도덕이나 관습을 따지지 않았다. 먼저 보고 쏘는 사람이 승자다. 그러나 나는 쏘지 않았다. 등 뒤에서 사람을 쏠 수 없었다. 나무 뒤에 숨어 사내가 더 다가오는 걸 기다렸다. 사내는 뒷걸음질 치면서 발사했다. 겁에 질려 무작정 발사한 것이다. 사내가 재빨리 재장탄을 하려고 하는 찰나 내가 튀어 나갔다.
‘동작 그만! 총을 버려!’
엉터리 중국어였으나 사내가 알아듣고 총을 떨어뜨렸다. 사내는 당황했으며 사로잡힌 늑대 같았다. 음흉한 표정이었고 필사적으로 도망이나 달려들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아! 그놈을 사로잡았구만.’
사내는 적이 둘이나 되었으므로 체념했다. 우리는 그 사내를 꽁꽁 묶었다. 양다리까지 묶어 눕혀놓았다.
‘난 그들을 죽이지 않으려고 했지. 지근거리까지 기어가 <손 들어!>하고 고함을 쳤는데 그놈이 대뜸 발사를 했어. 그래서 그만 ….’
총탄이 정확하게 심장을 뚫었기 때문에 즉사했고 풀 속에 묻혀있었다. 마흔 남짓의 중국인이었다.
‘녀석, 얌전하게 굴었다면 이 꼴이 되지 않았을 텐데 …. 지근거리에서 <손 들어>라고 고함을 쳤는데 녀석이 대뜸 발사하지 않아.’
‘그만둬! 이 녀석이 죽지 않았으면 네가 죽었겠지.’
시체에 흙을 뿌려 덮어주었다. 또 한 사내를 묶어놓은 곳에서 소리가 났다. 팔과 다리를 묶인 사내가 깡총깡총 뛰면서 도망을 가려고 했다.
‘죽여! 죽여! 빨리 죽여!’
사내를 다시 묶어두고 사슴을 해체했다. 해체를 끝내고 담배를 물었다. 사내에게도 담배를 물려주었다. 사내가 눈이 동그래졌다.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밀림의 살인자를 풀어주고 사슴고기를 넣은 포대를 맡겼다. 살인자의 눈에서 독기가 사라지고 생명에 대한 연민이 일어났다. 중국인에게 빵과 고기를 주고 차도 주었다. 그는 주먹만 한 빵을 네 개나 먹고 사슴 뒷다리 하나를 통째로 뜯었다. 사나흘 굶주린 것 같았다.
‘나리, 고맙습니다. 죽어도 한이 없습니다.’
그는 묻지도 않았는데 고백을 했다. 중국인 쿠리는 하루 벌어 하룰 먹다가 노름을 했다. 노름으로 파산했다. 재산이 없어 파산이라고 하기에는 어려웠으나 일거리가 없어져 버렸다. 노름꾼은 고용하지 않았다. 이것저것 전전하다가 사냥꾼의 몰이꾼이 되었다. 사냥의 기초지식이 없어 산돼지나 사슴을 잡을 수 없어 밀림 생활을 할 수 없게 되자 사냥꾼을 기습하여 총과 사슴을 강탈했다. 이를 시초로 아홉 사람의 사냥꾼을 기습했고 두 사람을 죽였다고 고백했다.
‘우리는 나리들을 기습하려고 했지요. 보통 사냥꾼이 아니라는 생각에 두려웠지만. 그런데 나리는 눈이 머리 위에 달린 것 같았지요. 기습을 하려다가 그만 기습을 당했구만요.’
‘우린 자네를 죽이지 않고 경찰에 넘기지도 않을 거야. 다시는 살인을 하지 못하게 총은 압수한다.’
그는 경악했다. 그렇다 그를 석방하는 것은 밀림의 법에 어긋난다.
‘잔소리 말고 빨리 가! 빵과 사슴고기를 갖고 꺼져!’
중국인은 뭔가 알아듣지 못할 말을 중얼거리더니 꾸벅! 절을 하고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우리는 유쾌한 기분이었다. 살인마의 얼굴에도 인간미가 있었다는 것이 즐거웠다. 몇 달 후 사냥에서 돌아와 소도시에 도착했을 때 또 한 번 즐거워졌다. 많은 노동자들이 재목을 운반하고 있었는데 그들 중에서 낯익은 얼굴을 발견한 것이다. 그는 우리를 발견하고 등에 매고 있던 재목을 내려놓고 꾸벅! 절을 했다.
9. 방황하는 사람들
방향을 결정하는 능력은 사냥꾼이나 등산가들뿐만 아니라 교통망이 없는 지역연구가들에게도 아주 중요하다. 만주의 밀림 특히 그 동방東方의 삼림지대는 남아프리카의 밀림보다 넓다. 이런 지대에서 방향을 결정하지 못하거나 잘못 결정한 사람은 밀림의 미로를 헤매다가 결국 죽는다. 동부 삼림을 헤매다가 길을 잃어 죽은 사냥꾼을 수없이 봤다. 특히 겨울 눈 속에 쓰러져 죽은 사냥꾼들이 많았다. 사냥꾼이 행방불명되었다는 급보를 받고 수색을 한 일도 있었으나 겨울의 수색은 시체 찾는 일에 불과했다. 만주 동부 밀림에서 죽은 네 명의 사냥꾼은 잊을 수가 없다. 그들은 산양을 잡으려던 아마추어 포수였는데 안내인도 없이 밀림에 들어갔다. 그들 중 두 사람이 사냥 경험이 있다고 해서 안내인을 고용하지 않았다. 중국인 엽사 리엔의 산막에서 막 잠이 들려든 때 러시아 시냥꾼들에게 실종 소식을 들었다. 따끈따끈한 온돌에 등을 붙이고 있었는데 잠을 털어버리고 일어났다.
‘코안경 나리, 그 사람들은 벌써 1주일째 소식이 없는데 이 추위에 살아있을 것 같소?’
머리칼이 반백이 될 때까지 사냥을 했던 리엔이 참견을 했는데 동감이었다. 그렇지만 사람이 네 명이나 실종되었는데 모른 체할 수는 없었다. 이튿날 새벽 나와 리엔은 수색에 나섰다. 리엔이 이 지방에서 7~8년이나 살고 있었으므로 밀림의 지리는 환하게 알고 있었다. 그는 손수 만든 지도를 펴들고 밀림의 구석에서 구석까지 면밀하게 수색했다. 우리는 도중에 다섯 명으로 구성된 중국인 수색대와 합류하여 수색을 했는데 이틀째에 그들의 발자국을 발견했다. 정말 어이없었다. 그 발자국은 동쪽으로 갔다 서쪽으로 갔다 하면서 밀림을 빙빙 돌고 있었다. 귀로를 찾아가다가 바꾸고 제대로 방향을 잡았다가 포기했다. 갈팡질팡이었다. 야숙을 한 곳도 발견했다. 부랴부랴 얼기설기 만들었기에 얼어 죽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었다. 발자국을 따라다니는 우리도 지쳤다. 리더인 리엔은 얄밉도록 느렸다. 생목숨이 걸린 일이라면서 아무리 다급하게 독촉을 해도 그는 성급하고 경솔한 판단은 하지 않았다.
‘코안경 나리, 우리는 지금 시체를 찾는 중이며 시체를 찾으려다가 산 사람이 죽을 순 없소.’
그의 말대로였다. 첫 희생자를 발견했다. 젊은 대학생이었는데 낙오한 것 같았다. 큰 나무뿌리에 난 구멍 속에서 몸을 웅크리고 동사했다. 그런 구멍에서 영하 40도의 추위를 피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어리석음이 애처로웠다. 거기서 얼마 안 가 세 사람 중 한 사람이 떨어져 나갔다. 세 사람의 방향은 철도를 향하고 바로 가려고 했는데 한 사람이 반대하고는 반대쪽으로 갔다. 얼마 안 가서 반대쪽으로 간 사람의 시체가 있었다. 눈바닥에 쓰러져 숨졌는데 눈에는 절망이 어려있었다. 우리는 두 사람의 시체를 들것에 매고 나머지 두 사람의 발자국을 쫓았다. 두 사람의 발자국은 정확하게 코스를 잡아 철도역을 향하고 있었다.
(혹, 기적이 ….)
애석했다. 언덕 하나만 넘으면 철도와 인가가 보이는 지점에 숨져있었다. 영하 40도의 추위는 그들의 체온을 나흘 이상 유지 시켜주지 않았다.
몇 년이 지난 후 이번에는 워이샤헤 역 부근에서 실종사건이 발생했다. 9월 초 20세 남짓한 청년이 나를 찾아왔다. 전에 하르빈 부근에서 꿩과 오리 사냥을 했다면서 안내를 부탁했다. 친구의 소개장을 믿고 워이샤헤 지선(支線)에서 5km가량 떨어진 호산으로 안내했다. 그리고 서로 반대 방향으로 산을 돌아 경사지에서 만나기로 했다. 그곳에는 도끼를 모르는 수백 년 묵은 나무들이 울창했고 맹수들이 서식했다. 정오께 청년을 만나기로 약속한 경사지에 도착해서 청년을 기다렸다. 시간이 지났는데 청년이 오지 않았다. 총탄으로 신호를 했는데도 반응이 없었다. 밤이 되자 모닥불을 피우고 밤을 새우며 기다렸다.
(혹, 나를 찾아 기다리다 지쳐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나?)오후 4시께 야부로니야 역에서 기차를 타고 워이샤헤로 돌아왔다. 그는 집에도 없었다. 불길했다. 나는 즉시 러시아인과 중국인 포수를 고용하여 두 마리의 말을 끌고 호산으로 되돌아갔다. 호산에도 청년은 없었다. 그리고 두 마리의 새끼를 데리고 있는 암호랑이 발자국이 발견되었다. 중국인 포수는 그 발자국을 보더니 벌벌 떨면서 말을 데리고 돌아가 버렸다. 러시아인 포수와 하루 종일 돌아다니며 공포를 발사했으나 반응이 없었다. 절망적이었다. 청년의 부모에게 알리고 수색대를 증원하여 수색을 시작했다. 5일이 지나서 수색대가 급한 보고를 했다. 반죽음상태의 사람을 발견했다는 보고였다. 큰 나무뿌리에 쓰러져 누워있는 사람의 소지품을 뒤져보고 나는 그가 찾던 청년임을 알았다. 청년은 1주일 만에 몰라보게 변모했으며 반실신 상태였다. 그는 나도 몰라보고
‘어디고 동쪽이냐?’
고 중얼거렸다. 나는 그를 모스크바의 정신병원으로 보냈는데 청년은 1년 만에 회복되었다.
<나는 선생님과 헤어져 ….>
청년의 편지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나는 호산을 돌아 남쪽으로 남쪽으로 선생님의 지시를 따라갔습니다. 선생님과 약속에 늦을까 봐 빠른 걸음으로 갔는데 얼마 안 가서 밀림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그리고 방향을 잃었습니다. 나는 남쪽이라고 짐작되는 방향으로 걸었는데 밤이 되자 야영을 했습니다. 불을 피우면 안심이 될 줄 알았는데 불을 피우니 더 불안해졌습니다. 총을 쏘았습니다만 허허롭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날이 새자 나는 다시 방향을 정하고 달리다시피 걸었습니다. 오후에 쓰러진 나무와 도끼 자국을 보았습니다. 가끔 짐승을 만났습니다. 짐승에게는 관심이 없었는데 얕은 계곡을 건너다가 물을 퉁기는 소리를 듣고 돌아보니 커다란 호랑이가 물을 마시고 있다가 나를 보았습니다. 나는 와락 겁에 질려 총을 들고 나무에 기어올랐습니다. 범이 어슬렁어슬렁 내가 올라간 나무 밑으로 왔습니다. 범은 이상하다는 듯 오랫동안 올려다보더니 나무 밑에 누웠습니다. 나는 오들오들 떨었습니다. 범은 두 시간이 넘게 자고 있었습니다. 다행히 산양 몇 마리가 물을 마시러 오자 범은 나무 뒤에 숨었습니다. 그리고 산양들이 물을 마시기 시작하자 몸을 땅에 붙이고 기어갔습니다. 그 큰 몸이 소리하나 내지 않고 기어갔습니다. 7~8m까지 접근하자 땅을 차고 올라 산양을 덮쳤습니다. 산양들이 우왕좌왕하는 사이 범은 가장 큰 산양에게 덮쳐 앞발로 산양을 쳐서 쓰러뜨리고 순식간에 목줄을 물어 뜯어버렸습니다. 범은 산양을 물고 어디론가 사라졌습니다. 나무에서 내려와 또 걷기 시작했습니다. 며칠을 걸었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총도 성냥도 잃어버리고 옷은 찢어지고 구두도 잃어버렸습니다. 정신이 들면 <사람 살려라!> 라고 고함을 쳤는데 메아리만 들렸습니다. 기억이 없습니다. 다만 꿈꾸듯 사람의 얼굴을 봤으나 몹시 피곤해서 잠만 잤습니다. 모스크바 정신병원에 수용되어 1년 동안 치료를 받고 제정신을 찾았습니다. 바이콥 선생님, 심려를 끼쳐 죄송합니다. 방향을 결정하는 기초지식이 없이 밀림에 들어온 결과가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를 알려주는 사례다. 사냥 초심자의 필수지식인데 사냥경력 10년이 넘는 나도 밀림에서 방황, 구사일생을 한 적이 있다.
한겨울, 러시아와 만주 국경에 있는 습지 밀림이었다. 나는 표범 한 마리를 추적하고 있었다. 눈표범이라고 불리우는 희귀한 표범이었다. 완전히 흰색은 아니고 검은 반점이 희미하여 희게 보였으며 부드럽고 긴 털이 훌륭했다. 표범을 발견하자 욕심이 나서 덮어놓고 발자국을 따라갔다. 연이틀을 따라갔으나 표범과 거리가 줄어들지 않았다. 대개 맹수는 추적을 눈치채면 되돌아서 공격을 하는 법인데 그 표범은 도망만 쳤다. 추적 3일째가 되자 나는 손을 들고 말았다. 그러나 때가 늦었다. 무턱대고 추적을 하다가 밀림 한가운데 들어서 버렸던 것이다. 전날 밤부터 내린 눈으로 발자국조차 없어져 버렸다. 나는 동서남북 방향은 알았으나 어느 방향으로 빠져나가야 할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살을 에는 듯한 시베리아 강풍에 눈이 비스듬하게 퍼붓고 시야도 보이지 않았다. 절망적이었다.
(당황하면 안 돼. 침착해야 해. 바이콥, 네가 밀림에서 죽으면 사냥계의 웃음거리가 될 게 아니냐?)
나는 혼자 중얼거렸다. 나는 우선 커다란 고목의 구멍에 들어가 눈을 피한 후 담배를 물었다. 담배를 서너 대 태우면서 그저 방향을 정해놓고 일직선으로 가는 수밖에 없다는 결정을 했다. 입을 꼭 다물고 뼛속까지 스며드는 추위를 견디면서 남쪽으로 남쪽으로 걸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날이 어두워졌다. 미리 물색한 큰 바위 밑에서 야영을 했다. 눈으로 벽돌을 만들어 바람과 눈을 막고 속에서 불을 피워 식사를 하고 충분히 휴식을 했다. 다음 날 다시 행군을 시작했는데 가도 가도 밀림뿐이었다. 그러나 그날 오후에 도끼 자국이 난 나무를 발견했다. 빙그레 웃었다. 부근의 나무들을 면밀히 조사했다. 있었다, 분명히 있었다. 밀림의 기호가 있었다. 밀림에 드나드는 나무꾼들은 길을 잃지 않으려고 나무에 기호를 새겨놓는데 나무에 도끼로 가볍게 친 자국들이 있었다. 나는 진로를 바꾸어 기호를 따라갔다. 그날 밤 멀리서 반짝이는 불빛을 발견할 수 있었다. 중국 인마을이었다.
10. 곰사냥
넓은 삼림지대로 특정 지울 수 있는 만주-중국 동부 지대에도 산악지대가 있다. 한국의 백두산 부근도 그런 산악지대의 하나다. 나는 그곳에서 박물관으로부터 의뢰받은 생물수집을 했다. 3월이라 계곡의 얼음이 녹기 시작했으며 눈은 다 녹아버렸다. 눈이 녹아버리면 짐승들의 발자국이 사라져 추적이 어려워진다. 그래서 산막에서 게으름을 피우고 있었는데 어느 날 중국인 노인 한 사람이 찾아와 거래를 하고 싶다고 했다. 노인은 심마니였는데 부업이 있었다. 곰의 동면 굴을 찾아 포수들에게 정보를 팔았다.
‘굉장히 큰 붉은 곰입니다. 작년 가을 나무꾼이 두 명 죽었는데 그 범인이 누구인지는 뻔한 일입니다.’
‘여기는 포수들이 많은데 왜 하필 나를 찾아왔소.’
‘코안경 나리 밖에 그 곰을 죽일 포수가 없습니다. 워낙 사나운 놈이어서 다른 포수들은 겁을 먹고 있지요.’
나는 그의 제안을 수용했다. 노인은 한쪽 눈을 깜박이며 곰을 잡으면 자기에게는 곰의 내장 일부만 주면 된다고 했다. 나는 노인의 잔꾀를 다 알면서 속는 척했다. 곰의 내장 일부는 쓸개를 일컫는 것이고 곰의 쓸개-웅담은 곰 전체보다도 더 값이 나갔다. 노인의 제안을 두말없이 승낙하자 노인은 속으로는 쾌재를 불렀으나 그 걸 숨기려고 애쓰고 있었다. 노인은 약속대로 그 이튿날 새벽에 나타났다. 허리에 볶은 쌀자루를 매고 굵은 참나무 지팡이를 들었다. 그게 노인의 곰사냥 여장이었다. 웃었다. 그리고 나도 총 한 자루와 위스키 한 병 그리고 상비품 몇 가지를 챙겨 배낭에 넣고 출발했다. 노인은 마치 공원을 산책하는 것처럼 천천히 걸었다. 지팡이로 녹은 땅을 치면서 가끔 주위를 살피기도 했다. 늦게야 그 노인이 부업을 하면서도 본업을 같이 하는 걸 눈치챘다. 산삼을 찾기 위해 일부러 길을 돌아갔으나 나는 빙그레 웃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봄이 찾아온 만주 산악지대의 풍경이 즐거웠던 것이다. 눈이 녹아 얼음이 풀린 땅에서 구수한 흙냄새가 풍기고, 누런 풀들도 초록 잎으로 변했다. 바람은 차가웠으나 양지는 따스해서 견딜 만했다. 우리는 가끔 양지에서 휴식을 했다. 노인은 산삼 얘기를 했다. 산삼은 동양의 명약이라고 했다. 산삼은 극동의 우수리 지방, 만주의 길림성 그리고 한국에서 야생으로 자란다. 길이 약 75cm의 다년초며, 잎이 3~4개다. 산삼은 암수가 있는데 암수를 구별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고 하면서 웃었다. 노인과 걷는 것이 즐거워서 독촉을 하지 않았다.
‘노인, 어두워지는데 어디서든 자야 될 게 아니요.’
노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조금만 더 가면 좋은 여인숙이 있다고 했다. 서너 평 되는 동굴이었는데 입구에 문이 있었고 보드라운 풀이 양탄자처럼 깔렸다. 연기 잘 빠지도록 만들어진 난로도 설치되어 있었다.
‘내 집이요. 작은 마누라가 없는 게 좀 아쉽지만 ….’
노인이 난로에 불을 피우면서 웃었다. 봄 냄새와 향기로운 차로 인해 노곤해졌다. 나는 반쯤 눈을 감고 곰 얘기를 들었다. 붉은 곰과 검은 곰이 있는데 거기 사는 곰들은 초식 보다 육식을 좋아했으며 성질이 사나웠다. 영토권 다툼을 할 때는 400kg이 넘는 놈들이 싸우기 때문에 고함소리로 온 산이 찌렁찌렁 울리고 땅이 흔들렸다. 상대가 사람이나 호랑이라고 해도 예외가 없다. 3년 전쯤, 노인은 산삼을 캐러 다니다가 호랑이의 노호를 들었다. 두려워서 노안은 얼핏 나무 위로 올라갔다. 호랑이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는데 그사이에 웍! 웍! 하는 곰의 노호 소리도 가까워졌다.
(옳지, 왕대와 붉은 악마가 붙었구만.)
잠시 후 왕대와 붉은악마가 모습을 나타냈다. 붉은악마는 씨름꾼처럼 앞발을 내밀면서 뒷발로 서 있었는데 콧등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곰은 슬슬 뒤로 물러서고 있었는데 그것은 호랑이가 무서워서 아니라 호랑이가 곰의 주위를 빙빙 돌고 있었기 때문에 등을 보이기 싫어서였다. 등을 공격당하면 치명타를 입는다. 호랑이는 주위를 돌고 있다가 곰을 공격하려고 했는데 곰이 틈을 보이지 않았다. 무턱대고 덤볐다가는 곰의 억센 두 팔에 잡혀 찢어진다. 답답해진 호랑이가 포효했다. 곰은 꿈쩍도 하지 않더니 오히려 호랑이의 포효를 듣고 돌진했다. 호랑이가 몸을 돌려 피했고 곰은 등을 보였다. 호랑이가 날쌔게 곰의 등에 뛰어오르면서 앞발로 곰의 뒤통수를 치고 목덜미를 물었다. 호랑이의 일격에 곰이 비틀거렸으나 곰은 두 팔을 벌려 호랑이의 허리를 안았다. 호랑이는 곰에게 허리를 잡힌 것이 싫어 물었던 목덜미를 놓고 펄을 물었다. 그러나 곰은 허리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리고 입을 크게 벌려 호랑이의 머리를 깨물었다. 고통스러운 듯 호랑이가 크게 포효를 하며 네 발로 곰의 가슴을 차면서 곰에게서 풀려 나왔다. 곰이 계속 호랑이에게 덤볐으나 호랑이는 슬슬 뒷걸음질 치며 피했다. 그리고 어슬렁어슬렁 숲으로 사라졌다.
이튿날부터는 산이 높아지고 길이 험악했다.
‘도대체 얼마나 더 가야 되죠?’
‘뭐, 별로 멀지 않아요. 2~3일이면 충분해요.’
(2~3일?)
노인이 또 나를 속였다. 곰의 쓸개(웅담)를 내장 일부라고 속였고, 산삼을 캐려고 길을 속였고, 얼마 안 되는 거리라고 했던 것이 꼬빡 3일이 걸렸다. 그날 하오에 노인은 또 밉지 않은 짓을 했다. 고기를 좀 잡아먹자고 하더니 계곡으로 내려갔다. 계곡에는 무릎 정도 깊이의 물이 바위들 틈으로 흐르고 있었는데 노인이 물속에서 바위틈을 더듬어 고기를 잡았다. 30cm 남짓의 기괴한 모습을 한 고기를 한 시간에 열다섯 마리 잡았다. 나무꼬챙이를 만들어 고기를 꿰어 모닥불 주위에 꽂아놓고 꼬챙이를 빙빙 돌리면서 소금과 후추를 뿌리면서 구웠다. 고기는 기름 냄새를 풍기면서 누르스름하게 익었다. 생긴 것과 달리 뼈가 많고 살이 적었으나 아주 맛있었다.
‘이 건 곰이 좋아하는 물고기입니다. 곰이 잡는 것을 보고 배웠어요. 그래도 고기 잡는 솜씨는 곰을 따라가지 못해요.’
(곰이 어떻게 고기를 잡느냐고?)
노인은 몇 년 전에 여 왔다가 기겁을 했다. 쾅쾅거리는 소리가 나서 처음에는 지진이 났는가 의심했으나 검은 곰 한 마리가 고기를 잡고 있었다. 곰은 커다란 바위를 들어 올려 물속에 있는 바위를 내려쳤다. 그 충격으로 바위 밑에 잠자고 있던 고기들이 기절을 하여 떠올랐다. 기다리고 있던 새끼 곰들이 주워 땅 위로 던졌다. 한두 시간 동안에 물고기를 산더미처럼 잡았으며 세 마리 곰들은 포식을 했다. 나는 깔깔 웃었고 그날은 곰사냥을 잊어버리고 밤을 새웠다. 그날 저녁에는 노인이 가재를 잡아 왔다. 빨갛게 익은 가재는 구수했으며 고기 대가리와 뼈로 끓인 수프도 맛있었다. 노인은 거짓말쟁이였으나 멋이 있고 낭만이 있었다. 밤에 노인의 과거를 들었다. 노인은 가난한 나무꾼 아들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밀림과 산악지대를 돌아다녔다. 젊었을 때는 아버지를 따라 나무꾼이 되었으나 너무 힘이 들어 그만두었다. 40세 때부터 산삼과 약초를 캤다. 그가 18년 동안 캔 산삼만 50여 뿌리가 넘었으며 낭비를 안 했으면 큰 부자가 되었을 거라고 했다. 그는 도시 약종상의 부탁을 받고 산삼과 약초를 캐서 큰돈을 벌었다.
‘6년 전 일입니다. 약초를 캐면서 돌아다니다가 이상한 곳을 발견했습니다. 산삼지대였으나 여지껏 발견한 곳과는 좀 달랐습니다.’
‘어떻게 다르냐고요? 냄새가 났습니다. 산삼 냄새.’
노인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는 그때를 회상하면서 흥분했다. 한참 냄새를 추적하다가 주위를 살폈다. 새들이 조용히 울고 있을 뿐 적막했다. 눈을 감고 냄새를 따라갔다. 노인의 코에 강렬한 냄새가 스몄다.
(여기다!)
노인이 엎드려 풀을 헤쳤다. 있었다. 하얀 산삼꽃이 있었다. 숨을 한 번 크게 몰아쉬고 낫으로 주변의 잡초를 잘랐다. 잡초를 잘라내다가 또 놀랐다. 잘려진 잡초에 산삼꽃이 있었다. 1m 간격으로 산삼 두 뿌리가 발견되었다.
(됐다. 이젠 그놈의 약종상 영감의 빚도 갚고 몇 달쯤 계집을 끼고 술을 먹을 수 있겠다.)
노인은 흥분기가 사라지지 않은 기분으로 돌아섰다. 그런데 몇 미터쯤 가던 그가 돌아섰다. 어디서 냄새가 났다.
(설마, 그럴 리가?)
노인은 호미로 구덩이를 파서 산삼 망태기를 묻었다. 그래도 냄새가 머물고 있었다. 일대를 구석구석 조사했다. 있었다. 무려 네 뿌리가 더 발견되었다. 도합 여섯 뿌리다. 도시에서 대궐집을 사고도 남을 수확이었다.
‘그래서 대궐집을 샀소?’
내 물음에 노인은 슬픈 표정이 되었다.
샀습니다. 분명 대궐집을 샀는데 두 달 후에 팔았지요. 대궐집에 산다는 것이 얼마나 재미없는가를 깨달았습니다. 집 판 돈으로 한 반년 동안 술과 계집 그리고 노름으로 방탕한 생활을 하고 그리고 무일푼이 되자 다시 삼으로 들어왔습니다. 보시요!‘
노인이 별안간 벌떡 일어서더니 아랫도리를 벗었다. 그의 사타구니에는 생식기가 없었다.
‘하르빈에서 수술을 했습니다.’
눈을 또 깜박거렸다. 그는 이튿날 오후 뒤를 따르던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코안경 나리, 이제 정말 다 왔어요. 저기야요, 저기 ….’
그가 가리키는 곳은 구름 위였다. 험악하고 높은 산줄기에서 거장 높고 험한 곳이었다. 거기까지 가자면 아무래도 또 하루가 걸릴 것 같았다.
‘나리, 이제부터는 입을 다물어야 합니다. 곰이 들으니까.’
그날 밤 우리는 또 동굴에서 야영을 했다. 모닥불빛이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도록 나뭇가지로 입구를 가렸고 노인도 말없이 잠에 들었다. 새벽 4시께 밖은 어두웠는데 노인이 나를 깨웠다. 노인은 사람이 달라진 것 같았다. 곰은 100m쯤 떨어진 산중턱에 있었다. 산중턱에는 한두 평쯤 되는 평지가 있었고 그 구석에 동굴이 있었다. 살금살금 기어가던 노인이 동굴을 가리켰다. 나는 총의 안전장치를 풀었다. 굴 입구에는 나뭇가지와 낙엽들로 위장되었으며 아무 소리도 없었으나 요기가 떠돌고 있었다. 노인이 돌을 몇 개 주워서 굴속에 던졌다. 첫 번째 돌에는 아무 소식이 없었다. 두 번째 돌을 던지니까 이상한 소리가 났다. 노여움을 참는 신음소리 같았다. 세 번째 돌을 던지자 으으윽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이어 우억! 우억! 위협하는 소리가 들렸다. 노인이 막무가내로 연달아 돌을 던졌다. 화가 머리끝까지 뻗힌 곰이 무서운 노호를 지르면서 굴 밖으로 튀어나왔다. 큼직한 불곰이었다. 곰은 몸을 동그랗게 말아 큰 공처럼 나를 덮쳤다. 고개를 숙여 공이 구르듯 달려오기 때문에 조준점이 보이지 않았다. 2연총이라 단 두 발로 치명상을 입히지 못하면 내가 죽는다. 그래서 나는 곰을 7m까지 바짝 당겨놓고 첫 탄을 발사했다. 어깨를 뚫어 심장에 보낼 셈이었으나 곰의 몸이 동그랗게 되어 있었으므로 심장에 맞지 않았다. 그러나 어깨의 강한 충격으로 곰이 옆으로 벌러덩 넘어졌다. 그러나 이내 일어나 돌진했다. 5m 앞에서 벌떡 일어서서 양팔을 벌리고 덮쳐들었다. 어깨에서는 피가 줄줄 흐르고 눈은 악귀처럼 충혈되었다. 그때를 기다리던 나는 두 번째 탄환을 곰의 눈 위 이마에 보냈다. 픽! 하고 탄환이 두개골을 뚫고 들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곰이 주춤했으나 넘어지지 않았다. 그는 머리를 서너 번 흔들더니 터벅터벅 다가왔다. 뒤에 있던 노인이 아앗! 소리를 쳤다. 내가 위험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나는 서너 발 뒤로 물러섰을 뿐 도망치지 않았다. 곰은 이미 치명상을 입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곰의 충혈된 눈은 먼 허공을 보고있었고 걸음걸이는 몽유병자처럼 비틀거렸다. 곰은 내 앞 1m도 안 되는 코앞에서 쓰러졌다. 네 다리가 여덟 팔자로 벌어졌다.
‘노인, 끝났어. 다 끝났어!’
‘호화, 호화!’
노인이 웃었다.
‘코안경 나리 곰 쏘세지를 먹어봤소?’
‘곰 쏘세지?’
‘천하일미죠. 내가 만들 테니 불 좀 피우시오.’
노인이 시퍼런 호주머니칼로 곰의 뼈를 가르고 곰의 내장을 1m가량 잘라냈다. 동면 중이었으므로 내장이 깨끗했다. 노란 기름기만 흘렀다. 장의 한쪽 끝을 묶고 내장 속에 곰의 피와 쌀을 넣었다. 나뭇가지에 돌돌말아 불에 구웠다. 곰 소시지는 열기에 팽팽하게 부풀어 오르면서 노르스름하게 구워졌다. 기름이 뚝뚝 떨어져 불길이 푸지직거렸다. 우리는 따사한 봄볕 아래 풀밭에 앉아 화주를 마시면서 곰의 소시지를 먹었다. 과연 천하일미였다. 고소하고 향기로웠다. 나는 술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때만은 독한 화주를 서너 잔이나 마셨다. 그리고 노인이 재빠른 솜씨로 곰의 내장 일부~쓸개를 도려내는 것을 웃으면서 보았다.
‘노인, 그 게 웅담이요? 산삼보다 더 비싸다는 ….’
노인은 장난하다 들킨 아이처럼 놀라더니 이내 한쪽 눈을 찡긋 감으면서 웃었다.
11. 노 마적의 복수
푸른 하늘이 거울처럼 뚜렷하게 미잔헤 호수에 비쳤다. 흰구름이 한가롭게 떠 있고 초원은 녹색 페르시아 주단을 펼친 듯 아름다웠다. 아침 공기는 차갑고 투명했다. 9월의 미잔헤호수 길을 말을 탄 두 사내가 질주했다. 주인은 환갑이 가까운 나이의 중국인이었으며 훌륭한 안장을 갖추었다. 그의 손등과 하인의 손등에는 매가 한 마리씩 앉아있었다. 매는 날갯짓을 하며 울음소리를 냈다. 머리 위에는 철새들의 긴 행렬이 지나갔다. 앞선 주인은 백마를 타고 푸른 비단옷에 표범 가죽으로 만든 털모자를 썼다. 넓은 얼굴이 가면을 쓰고 있는 것처럼 무표정하고 위로 쭉 째진 검은 눈은 날카롭게 빛이 났다. 옛 중국 그림의 도사 같은 얼굴이었으며 악이든 선이든 극에 달한 표정이었다. 그는 이 고장에서 베이찬 나리라고 불리우는 유복한 지주였다. 그는 다양한 곡물을 러시아나 일본에 반출하고 공장에서 기름을 짜고 수수로 화주도 제조했다. 최근에 크게 한몫 번 듯 거액을 은행에 예금하고 매사냥을 즐겼다.
‘나리, 백조가 울고 있습니다.’
‘응, 그런 것 같다.’
기사들은 기복이 심한 습지를 빠른 속도로 달렸다. 몽고 말은 이런 곳에서 잘 적응하여 쏜살같이 속력을 냈다. 거울처럼 맑은 호수에서 세 마리 네 마리씩 헤엄을 치고 있던 백조가 위험을 감지한 듯 두목 백조가 나래를 치며 긴 목을 세워 울었다. 기사들은 호수 가까이에서 말을 내렸다. 매의 사슬을 풀어주고 손등을 치켜올렸다. 매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백조를 발견했다. 매는 힘차게 나래짓을 하며 날아올랐다. 당황한 백조가 물을 차며 날아올랐다. 백조들은 한 덩어리가 되어 수직으로 공중으로 치솟았다. 매가 백조의 작전을 알아챈 듯 백조무리의 중간지점을 뚫고 들어갔다. 매의 목표가 된 백조가 비명을 지르면서 옆으로 빠져나갔다. 그러나 그건 매의 작전이었다. 두 마리의 매가 백조를 아래 위에서 협공했다. 그들은 거의 동시에 백조에게 덮쳤으며 한 마리는 백조의 날개를 또 한 마리는 백조의 목을 찍었다. 백조는 있는 힘을 다하여 공중으로 솟아오르려고 했으나 매 두 마리의 중량에 눌려 슬픈 소리로 울면서 떨어져내렸다. 기사들은 그 처참한 공중의 싸움을 보고 있다가 백조가 떨어진 곳으로 말을 달렸다. 그들은 말을 달리면서 <로~로~다~타!>라고 고함을 질렀는데 매의 용기를 북돋아 주는 격려였다. 승부는 이미 끝났다. 두 마리의 매가 숨이 끊어진 백조를 날카로운 발톱으로 누르고 있다가 주인들이 들이닥치자 목을 굴리며 승리의 개가를 올렸다. 베이찬은 백조의 심장을 꺼내 두 개로 나누어 매에게 먹였다. 베이찬은 3년 전에 알에서 막 부화한 매를 둥지에서 잡아와 손수 길러 훈련을 시켰다. 베이찬과 매들은 한 방에서 기거했고 식사도 함께 했다. 베이찬은 매들을 자식처럼 길렀다. 베이찬은 백조를 말안장에 묶고 달리다가 또 말을 멈추었다.
‘저 숲속에 꿩이 있어. 두서너 마리가 있어. 고이지 넌 저리로 가서 꿩을 몰아.’
하인이 사라지자 베이찬은 말에서 내려 숲속으로 들어갔다. 그때 꿩 한 마리가 숲속에서 날아올랐다. 꿩은 움직임이 느렸다. 꿩의 움직임을 보면서 매를 놓아주었다. 꿩은 날아갈 방향을 잡기도 전에 매의 습격을 받았다. 아름다운 깃털이 흩어지면서 꿩이 비명을 질렀다. 꿩은 매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날카로운 발톱으로 움켜쥐고 부리로 서너 번 공격하자 숨이 떨어졌다.
‘호, 저놈 봐. 제법 솜씨가 빨라졌어.’
베이찬은 꿩의 심장을 매에게 주었다. 베이찬은 총사냥은 싫어했다. 훌륭한 사수였으나 총 쏘기를 싫어했다. 그런데 멀리서 총소리가 났다.
‘나리, 너무 덥습니다.’
충복 고이지 노인이 은근히 돌아갈 것을 권유했다.
‘저건 뭐냐?’
‘러시아 사냥꾼입니다.’
베이찬은 시무룩한 표정이었다. 저쪽 들판에 사냥꾼이 보였다. 40대였으며 양어깨에 잡은 꿩을 주렁주렁 매달았다. 사냥꾼이 개를 데리고 있었는데 사냥개가 베이찬들을 보고 달려들며 짖었다.
‘돌아와, 쥬크!’
사냥꾼이 불렀으나 개는 주인의 명령에 아랑곳없이 베이찬에게 달려들었다. 베이찬이 개가 달려오는 쪽으로 말을 몰았다. 버릇없는 개를 징벌하려고 했다. 그때 말과 개 사이 숲에서 꿩이 날아올랐다. 당황한 꿩이 베이찬의 머리를 스치듯 날아갔다. 베이찬의 손등에 앉아있던 매가 그걸 놓칠 리 없었다. 매가 번개처럼 날아 꿩의 배를 발톱으로 찍었다. 그런데 그때 총소리가 울렸다. 꿩이 날아오르는 것을 포수가 반사적으로 겨냥을 하여 꿩과 매를 한꺼번에 쏘았다.
‘어때, 내 솜씨가. 한꺼번에 두 마리를 잡았어.’
러시아 포수가 자랑스럽게 말하며 재장탄을 했다. 베이찬은 멍! 하고 서 있었다. 그러나 개가 떨어진 매한테 달려가는 것을 보자 미친 듯 고함을 치며 말을 달려갔다. 개가 한발 빨랐으나 아직 숨지지 않은 매의 무서운 눈을 보고 달려들지 못했다. 매의 노란 눈은 마치 불이 타는 듯했다. 베이찬은 미친 듯 양손으로 매를 안고 상처를 조사했다. 날개 밑에 총탄 자국이 났다. 매가 점점 힘을 잃었고 다리와 날개가 경련을 일으키더니 끝내 눈을 감았다. 베이찬은 죽은 매를 옷소매에 넣고 일어섰다. 표정이 없었다.
‘당신 매였구만. 그 따위 매가 뭣이라고 너무 슬퍼 마시오. 당신은 또 매를 잡아 훈련 시킬 수 있잖소. 많이 있으니까 한 마리 더 잡으시오. 우리나라에서는 매를 잡으면 상금을 받소.’
베이찬은 한 마디도 대꾸를 하지 않았다. 중궁인 대인은 자기 감정을 밖으로 드러내는 것을 금기시하였다. 러시아인은 중국인의 풍속이나 관습을 몰라 베이찬이 어떤 심정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넉살 좋게 말했다.
‘노인, 나는 하르빈에서 왔는데 오늘 밤 잘 곳이 없소. 노인 집이 부근에 있다면 하룻밤 유숙할 수 있겠소? 물론 적당한 숙박비를 지불하겠소.’
<적당한 숙박비>란 말도 좋지 않았다. 베이찬이 러시아인을 한참 바라보다가 말했다.
‘누추한 집이지만 ….’
러시아 포수는 기뻤다. 꿩을 너무 많이 잡아 무거웠고 배도 고팠다. 그는 고이지를 따라 마을에 들어갔다. 고이지가 방으로 안내했다. 러시아인과 그의 개들은 지쳐 쓰러졌다. 중국인들은 손님을 극진하게 대접했다. 예를 중요하게 여겼다. 그러나 러시아인은 중국의 예를 몰랐다. 여덟 팔자로 누워있다가 베이찬을 맞았다. 베이찬이 향기로운 차를 대접했다. 무표정이었다. 러시아 포수가 몇 번이나 매를 쏜 게 자기의 잘못이 아니라고 해명하려고 했으나 베이찬은 부지도(모른다)라고만 되풀이했다. 향기로운 차에 독한 화주가 섞여 있었기 때문에 러시아 포수는 베이찬이 돌아가자 말자 쓰러져 잠이 들었다. 베이찬은 그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들판을 산책하며 기다렸다. 사슴 우는 소리와 부엉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베이찬이 집에 돌아왔을 때 집안 사람들은 모두 잠이 들었다. 오직 하인 고이지는 눈을 감고 있었으나 주인의 동정을 살폈다. 고이지는 주인을 30여 년간 모셨다.
베이찬이 지금은 무역업을 하지만 10여 년 전에는 유명한 마적두목이었다. 7파(派)의 마적-총 400여 명의 마적을 지휘하는 총두목이었고 고이지는 심복이었다. 베이찬은 마음이 넓고 너그러웠으나 한 번 화를 내면 끝장을 보는 무서운 성격이었다. 어느 날 부하들이 마을을 습격했을 때 부두목이 마을 처녀를 능욕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부두목은 그와 20여 년을 같이 한 사이였으며 부하들이 보는 앞에서 무릎을 꿇고 손가락을 자르면서 용서를 빌었으나 베이찬은 용서하지 않았다. 얼음같이 차가운 표정으로 아무 말 없이 자기 권총을 부두목에게 던져주었다. 총살하지 않고 자살할 기회를 준 것이 베이찬이 부두목에게 베푼 온정이었다. 고이지는 아까 매가 죽었을 때 베이찬의 표정을 보았다. 자살한 부두목을 떠올렸다. 베이찬이 마당 한구석에 앉아있었다. 작은 무덤을 만들었고 죽은 매가 있었다. 베이찬은 죽은 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깊은 사념에 잠겨있었다. 베이찬은 푸른 하늘에서 나래짓을 하는 매를 사랑했다. 매는 나이를 먹었으나 그 사냥기술은 더 원숙해졌다.
(좀 더 살았으면 노후를 편안히 해줄 작정이었는데 ….)
베이찬이 담뱃대를 털고 일어나 매를 무덤에 넣고 흙을 덮었다. 그의 눈에 새파란 불이 일었다. 베이찬은 러시아 포수가 자고 있는 건물로 산책이나 하는 것처럼 다가갔다. 아무렇게나 걷는 것 같아도 발소리가 전혀 없었다. 마적의 동작이었다. 베이찬은 러시아 포수가 처마에 매달아 놓은 꿩을 풀어 방안에 던졌다. 러시아 포수는 여전히 골아 떨어졌다. 베이찬이 한참 동안 잠든 러시아 포수를 내려다보았다.
(하기는, 억울하겠지. 매 한 마리 때문에 죽는다는 건 억울할 거야. 그러나 너는 매뿐만 아니라 나도 죽였어.)
베이찬이 창고로 가서 석유통을 들고 왔다. 고이지가 말했다.
‘나리, 바깥바람이 찹니다.’
잠깐 그 자리에 서 있다가 머리를 가볍게 흔들면서 석유통을 들고 갔다. 고이지는 화석처럼 몸이 굳었다. 석유를 뿌리고 샤벨로 석탄을 퍼 날랐다. 푸른 불길이 치솟았다. 베이찬은 문을 밖에서 걸어 잠그고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붉은 불꽃이 연기와 함께 솟구쳤다. 검은 하늘이 붉게 물들었다. 베이찬은 방문을 열고 불꽃을 보고 있었다. 입언저리에 악마 같은 웃음이 배었다. 눈에는 살기가 가득했다. 집 한 채가 타면서 온통 주위가 대낮처럼 밝아졌는데도 집안에서는 아무런 인기척도 없었다. 집안사람들이 불길에 미동도 하지 않은 것은 고이지의 소행이었고 만족했다. 약 20여 분만에 불이 사그라졌을 때 건물은 재만 남았다. 한참 뒤에 베이찬이 화재 현장을 조사했다. 아무것도 없었다. 뼈 한 조각도 없었다. 뼈까지도 없는 것은 또 고이지의 소행이었다. 고이지가 포대를 들고 들판으로 나가는 것을 보았다. 러시아 포수는 잠에 취해 숨지고 뼈도 들판에 버려졌다. 불 때문에 한쪽이 열렸던 어둠이 다시 내려앉고 베이찬도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왔다. 그러나 좀 슬픈 기색이 있는 것 같았다. 복수를 했으나 매는 다시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 매와 인연도 사라졌고 노후의 즐거움까지도 사라져버렸다.
(사냥도 이제 그만두어야지. 내 나이 벌써 환갑이 넘었는데 ….)
베이찬은 싸움터에서 잃은 그의 유일한 아들 생각에 마음속으로 흐느끼고 있었다.
12. 첫 탄
밝은 겨울의 대낮이었다. 기운차게 곧게 뻗은 나뭇가지 사이로 눈부신 2월의 햇빛이 반짝였다. 햇볕이 하얀 눈에 반사되어 연분홍색으로 변해 햇솜 이불 같은 눈 위에서 춤췄다. 입으로 하얀 입김을 내뿜으면서 계곡을 가로질러 산을 하나 넘고 도라헤자강으로 내려갔다. 강가에 산돼지들이 모여들었다는 정보였으므로 빠른 걸음으로 험한 경사를 타고넘었다. 울창한 나무들이 무성한 좁은 계곡을 지나 강으로 나갔다. 무수한 산돼지들의 발자국이 어지럽게 찍혔고 수십 헥타르나 되는 벌판이 산돼지들에 의해 파헤쳐졌다. 개를 데리고 오지 않았으므로 최근에 난 선명한 발자국을 탐색했다. 까마귀 우는 소리가 들렸다. 밀림의 까마귀 소리는 시체가 있다는 것을 말한다. 강 상류에 도착해서 큼직한 범 발자국을 발견했다. 아주 선명했으며 아마도 한 시간 이내에 찍힌 것이다. 범은 돌멩이가 많은 계곡을 지나 산 위로 올라갔다. 부드러운 발자국이 뚜렷하게 찍힌 것으로 미루어 범은 뭣인가 운반을 하고 있었다. 범의 발자국 옆에 분홍색 피가 흘러있었으므로 산돼지를 물고 가고 있다고 판단했다. 사태가 이렇게 판명되자 잠시 망서렸다. 나는 수십 번이나 범과 대결했으나 단독으로 대결한 것은 불과 여나무 번뿐이다. 또 범을 잡으려고 만나는 것과 우연히 만나는 것은 아주 딴판이 된다. 대비도 문제려니와 마음가짐도 다르다. 그러나 두려움보다는 정열이 드셌다. 총을 언제라도 발사할 수 있게 대비하고 산돼지를 버리고 범을 추적을 했다. 갈수록 밀림이 어두웠고 까마귀는 머리 위를 날았다. 걸음을 멈추었다. 냄새를 맡았다. 동물원에 가면 맡는 그 시금털털한 냄새다. 엎드려서 기었다. 덤불을 손으로 치우면서 한 치 한 치 기었다. 범이 부근에 있는 것은 확실하다. 내가 먼저 범을 발견하느냐 범이 나를 먼저 발견하는가에 승부가 달려있다. 범이 부근에 있다는 정보만이라도 알고 있는 내가 유리하지만 범에게는 예민한 코와 눈이 있으니 안심은 못 한다. 밀림의 왕자에 대한 공포가 있다. 그러나 공포에 비견되는 또 하나의 감정이 있다. 억지로 비유하자면 노름으로 벼락부자가 되느냐 이 한 판으로 망해 거지가 되느냐는 올인의 심정이다. 다른 점은 노름은 돈이지만 범과의 대결은 목숨이 담보라는 것이다. 앞에 있는 돌이나 덤불을 하나하나 치우면서 천천히 전진했다. 저주받은 까마귀들이 범에게 내 위치를 알려주는 듯 나의 머리 위에서 깍깍거렸다. 증오에 찬 눈으로 까마귀를 보면서 초조했다. 그 큰 범이 어디에 숨어있을까? 전방 약 100m에 나무가 없는 공터가 있었다. 공터 가장자리에 거대한 백양나무가 있었고 밑에는 쓰러진 나무가 가로로 누워있었다. 보이지는 않았으나 오랜 사냥 경험으로 누워있는 나무가 수상했다. 공터를 옆으로 돌아서 쓰러진 나무에 접근했다. 이제 백양나무와 거리는 약 60m. 그 이상 전진할 수 없었다. 한 쌍의 까마귀가 내 위치를 범에게 알려주려고 머리 위에서 시끄럽게 짖으며 날았다. 까마귀에게 한 발 발사하고 싶은 욕망을 간신히 누르며 백양나무를 주시했다. 소리가 났다. 오도독오도독. 뼈를 씹어 부수는 소리였다. 눈을 감았다가 떴다. 움직임이 보였다. 시커먼 물체와 노란빛이 보였다. 노란 색깔-줄이 움직이고 있었다. 범의 거대한 대가리가 보였다. 앞발로 산돼지를 누르고 아가리로 갈비를 뜯었다. 갈비를 물고 머리를 흔들어 찢었다. 그리고 갈비를 통째로 먹어 삼켰다. 다행히 먹기에 열중한 범은 코의 감각이 흐려졌기 때문에 눈치를 채지 못했다. 바람도 범이 있는 곳에서 불었다. 나는 다소 안심했다. 거기서 발사도 가능했지만 그 위치에서는 범의 상체만 보여 실수를 할 수도 있었다. 나는 첫 탄으로 범을 눕혀야 했다. 첫 탄을 실패하면 범이 덮쳐들거나 도망가버린다.
(첫 탄으로 승부를 내자!)
범의 눈을 응시하면서 공터로 나왔다. 범의 눈에 조금이라도 이상이 있을 때는 눈 위에 납작 엎드렸고 범의 눈에 의심이 사라지면 또 기었다. 위험한 모험이었다. 5m, 10m. 범은 포식에 만족 눈을 지그시 감고 동그랗게 뜨고 하늘을 보기도 했다. 그때 방정맞은 까마귀가 범이 식사하는 자리에 내려앉았다. 부근에 흩어져있는 산돼지의 살점을 먹으려고 했다.
(이 버릇없는 것이 ….)
범은 피투성이 입으로 하얀 숨을 내뿜으며 으으윽! 하고 위협했다. 그리고 엉덩이가 들썩거렸다. 기겁을 한 까마귀가 후다닥 날아올랐다. 찌꺼기를 나눠주지 않는 범의 탐욕을 항의하듯 꺄악! 꺄악! 시끄럽게 소리를 질렀다. 내가 누워있는 곳이 저지대라 총을 발사하려면 일어서야 했다. 일어서면 범이 보게 된다. 범과 눈을 마주치면서 대결하는 것이 싫었다. 두 번째는 총을 위에서 아래로 겨냥하면 명중률이 떨어진다. 총구를 수평으로 쏘고 싶었다. 그래서 좀 더 기어가려고 했는데 범과 눈으로 대결하는 스릴을 좀 더 맞보고 싶은 생각도 있었다. 10m를 더 접근했다. 범과의 거리는 이제 30m 정도. 사냥 상식을 무시한 상황이다. 신경질적으로 떨고 있는 범의 수염도 보였다. 사소한 소리도 내지 않고 필요 없는 동작도 하지 않으면서 한쪽 다리를 끌어당겨 무릎을 세웠다. 반쯤 일어난 자세로 잠시 눈을 감았다가 총을 들어 올렸다. 심장은 파도치고 손이 떨렸다. 깊은숨을 몰아쉬면서 겨냥을 했다. 조준은 귀와 눈 사이 자그마한 동전 크기의 반점이었다. 고양이과 동물의 뇌수였다. 조준이 딱 맞춰졌을 때 범이 머리를 들었다. 별안간 범의 잿빛 눈에 노란 광채가 떴다. 나를 발견한 것이다. 범은 공터 아무 은폐물도 없는 곳에 사람이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한참 노려보았다. 한참이라고 했어도 불과 1초 정도, 불청객을 노려보고 있었다. 범의 눈에 의심이 사라지고 분노가 떠올랐다. 범이 일어서려고 했다. 조준이 맞춰진 귀와 눈 사이에 있는 반점을 겨냥하여 발사했다. 반동이 심했으나 다시 자세를 가다듬어 제2탄의 발사 준비를 했다. 총소리는 굉장했다. 조용하던 밀림이 요동쳤고 까마귀가 불에 데인 듯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범은 치명상을 입고 산돼지 위에 쓰러져 바둥거렸다. 꼬리가 땅을 치고 앞발이 허공을 치며 치명상을 입은 머리가 땅에서 떨어지지 않아 바둥거렸다. 10여 초 후에 범이 축! 늘어졌다.
(내가 이겼다!)
통쾌한 승리감이 온몸에 흘렀으나 다리가 마비된 듯 일어설 수가 없었다. 총을 지팡이 삼아 일어나 범에게 갔다. 적갈색의 아름다운 털을 지닌 수놈이었다. 400kg이 넘는 거구가 하얀 눈 위에 쓰러져있었다. 언제나 하는 버릇으로 범 위에 걸터앉아 담배에 불을 붙였다. 신경이 가라앉자 산돼지를 점검했다. 500kg이 넘는 놈이었다. 범이 도망치는 산돼지를 추격하여 공중에 날아오르면서 앞발로 산돼지의 목을 가격했다. 그 일격으로 산돼지는 정신을 잃고 쓰러졌으며 이내 범은 목줄을 물어 죽였다. 400kg이 넘는 범이 긴 다리를 쭉 뻗으면서 풀 스피드로 달리면 100m쯤은 열서너 발로 뛴다. 범이 달린다기보다는 날아간다는 표현이 더 적합하다. 범이 그런 무서운 스피드로 달리면서 그 여세로 3m쯤 공중에 뜨는 것은 약과다. 그래서 산돼지는 범과 만나면 끝이다. 나는 첫 탄으로 범과 산돼지를 잡아 만족했다. 불을 피웠다. 어느새 해가 떨어져 추위가 엄습했고 또 불을 피워 중국인들에게 내 소재를 알려야 했다. 어둠이 내렸으나 밀림의 왕자를 깔고 앉은 나는 두려움이 없었다. 범이 먹다 남은 산돼지의 갈비 서너 대를 도려내 불에 구웠다. 산돼지 갈비구이로 식사를 마치고 차를 마시고 있을 때 사람들의 소리가 들렸다. 불을 더 활활 태웠다.
‘코안경 나리, 산돼지를 잡았습니까? 사슴을 잡았습니까?’
네 명의 중국인들이 달려왔다. 그들은 거대한 산돼지를 보고 환성을 올렸으나 이내 코안경 나리가 걸터앉은 물체를 보고 기겁을 하여 도망쳤다.
‘왕대야 왕대, 산신령님이야!’
그들은 내가 범은 죽었다고 몇 번이나 고함을 질렀어도 가까이 오지 않았다. 나무 뒤에 숨어 벌벌 떨었다. 나는 그들에게 맛있는 산돼지고기를 구워주고 술을 주었다. 그들은 산돼지 갈비 모두와 뒷다리 하나를 먹었으나 범의 운반은 고집스럽게 거부했다. 설득에 지친 나는 좀 당황스러웠다. 400kg이 넘는 범을 나 혼자 끌고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중국인들이 제안을 했다. 범의 머리에 박혀있는 총탄을 꺼내서 주면 범을 무료로 운반하겠다고 했다. 위대한 산신령님을 죽인 탄환은 액운과 악령을 쫓는 부적으로 중국인들에게는 매우 비싼 값으로 거래된다.
13. 밀림의 비극
어느 해 겨울, 나는 친구 아퍼나센코와 함께 소만(러시아와 만주) 국경에 있는 빠이린 밀림 속에 들어간 적이 있었다. 우리는 밀림의 주인 없는 움막에서 쉬고 있었다. 움막은 땅속을 60cm가량 파서 지었고 온돌이 되어 있었다. 온돌 아궁이에 불을 피우고 모포를 머리에까지 덮고 추위를 견뎌야 했다. 온돌은 더디 더워졌으나 한 번 열기를 머금으면 밤새 따뜻했는데 추위에 지친 우리는 금세 잠이 들었다. 막 잠이 들었을 때 문 옆에 누워있던 사냥개 세빌릿이 털을 세우고 맹렬하게 짖었다. 총의 안전장치를 풀고 밖으로 나왔다. 누군가 오고 있었다. 우리는 전투준비를 했다.
‘누구야? 거기 서!’
아파나센코가 소리쳤다. 2~3초의 침묵이 계속되다가
‘우린 사냥꾼이요. 하룻밤 지내려고 왔소.’
‘러시아인이요?’
‘예, 우리는 애호역에서 왔소, 둘입니다.’
그들에게 차를 대접했다. 러시아인들은 30세 전후였고 몸매가 단단했다. 동국인(同國人)이라 경계를 늦췄고 차를 대접했으나 그들의 눈매가 좋지 않았다. 표정이 없는 회색 눈이었는데 그런 자들은 범죄자가 많았다. 아파나센코과 얘기를 하는 동안 나는 그들을 면밀하게 관찰했다. 첫째 총이 좋지 않았다. 네덜란드제 7연발총이다. 사냥에 7연발 총이 필요할까? 연발총은 구조가 복잡해서 고장이 잘 나고 한 번 고장이 나면 고치기도 어려운 법인데 젊은이들은 그런 총을 가지고 다니는 이유가 뭣일까? 두 번째, 그들이 여행 배낭을 풀었는데 검은 족제비 가죽 수십 매가 들어있었다. 7연발 총은 한 번 발사에 총알이 한 개 나가는 라이플인데 그런 총으로 족제비를 잡았을까? 족제비 같은 작은 동물은 한 번 발사에 총탄이 여러 개 나가는 산탄총으로 잡는다.
‘좋은 가죽인데 …. 총으로 잡은 게 아닌데 함정이나 덫으로 잡았나?’
‘총으로 잡았소.’
‘총으로, 어떻게?’
그들이 웃었다.
‘보자 하니, 여러분도 동업자 같은데 그런 어려운 질문은 하지 맙시다.’
(동업? 무슨 동업?)
나는 비로소 그들이 어떻게 족제비 가죽을 얻은 것이지 알아차렸다. 그들은 다른 사람이 덫으로 잡은 족제비를 강탈했다. 그들은 밀림을 돌아다니며 족제비를 잡은 사냥꾼을 강탈했다. 러시아 강도들이 출몰하여 중국인 포수 한 명이 죽고 5명이 부상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범인이 바로 이놈들이구만.)
‘며칠 전에 중국인 포수 한 명을 죽인 일이 있소?’
그들이 웃었다. 그들은 우리가 저희들과 같은 강도로 알고 중국인 강탈을 털어놓았다.
‘중국 놈들은 엉큼해요. 족제비 가죽을 감추고 불지 않아요. 그래서 정보를 캐내려고 몽둥이질을 했어요.’
다른 놈이 받았다.
‘아무리 고문을 해도 불지 않은 놈이 있어. 화가 나서 총대로 갈겼더니 그만 피를 토하고 죽었어.’
‘젊은이들은 언제부터 그 장사를 시작했지?’
‘올봄부터 시작했지. 그전에는 맹수사냥을 했으나 돈벌이가 되지 않았어. 그래서 이 사업을 했는데 보시다시피 돈벌이가 되지. 이것만도 범 열 마리 값은 돼요.’
‘그건 그렇고. 당신들에게 족제비 가죽을 빼앗긴 사냥꾼들이 억울하지 않겠소?’
아파나센코가 끼어들었다.
‘뭐가 억울해, 밀림에서는 강자생존의 규율뿐인데 …. 그리고 우리는 그들이 가진 족제비 가죽을 모두 몰수한 것도 아니요. 질이 나쁜 건 빼앗지 않소. 중국인들은 또 잡으면 될 거 아니요.’
내심 화가 났다. 생각 같으면 당장 이들을 중국인들에게 넘기거나 바깥으로 쫓아내고 싶었으나 다른 생각이 떠올라 참았다.
‘자네들 참 대단하군. 과거에도 그런 짓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나 모두 죽었어. 경찰은 없지만 중국인 포수들이 조직한 자치대는 무서운 살인 집단이야.’
러시아인들의 낯빛이 창백해졌다.
‘정말이요?’
‘이봐, 나는 여기서 10년이 넘게 살았고 이곳에서 일어나는 일은 모두 알아. 10년 동안 이 밀림에서 처형된 사람들이 20여 명이야.’
‘그럼 우리는 내일이라도 이 밀림을 빠져나가야 되겠는 걸.’
‘이미 늦었소. 중국인 포수들이 자치대를 조직했다는 말을 벌써 2~3일 전에 들었으니까.’
다음 날 러시아인들은 잠을 자지 못해 퉁퉁 부은 눈으로 아침 식사도 제대로 하지 않고 떠났다. 바깥에는 바람이 일고 있었다. 눈이 올 것 같았다. 우리는 의논 끝에 오늘 사냥은 쉬기로 했다. 오후에 여덟 명의 중국인들이 우리 집에 왔다. 모두 총을 가지고 있었고 구두를 신은 채 방으로 들어섰다. 그들 중의 한 사람이 나를 보더니 인사를 했다.
‘코안경 나리 아니십니까?’
그들은 사과를 하고 차를 마신 뒤 두 사람의 러시아인을 찾는다고 했다. 그들 가운데는 포수들도 있었으나 포수가 아닌 자도 있었다. 말도 없었고 차가운 표정이었다. 총도 사냥용이 아니었다. 그들은 중국인 포수들이 고용한 살인청부업자들이었다. 분위기가 너무 심각했으므로 일부러 웃으며 말했다.
‘보자 하니 여러분은 두 사람의 러시아인에게 흥미가 있는 것 같은데 나는 그 이유를 알고 있소. 그리고 정당하다고 생각하오. 그들은 나와 동국인이지만 나는 그들을 보호하지 않을 거요.’
그리고 어제의 방문자들을 상세하게 말해주었다.
‘코안경 나리, 나리는 이곳 밀림의 보안관입니다. 우리는 나리가 동국인에 대한 정보를 우리에게 알려준 것에 감사드립니다.’
그들은 차를 마시고는 빠르게 우리가 가르쳐준 대로 떠나갔다.
‘코안경 나리, 저들은 러시아인을 잡을 수 있을까?’
‘시간문제야. 러시아인들은 살지 못해. 러시아인들은 아무리 도망쳐도 이 밀림을 빠져나가지 못해.’
‘그래, 그건 그렇고 눈이 오겠는데 ….’
연 3일 동안 무서운 폭풍과 함께 폭설이 내렸다. 밤새 움막이 눈에 파묻힐 염려가 있어 집 주위에 나무를 쌓아놓고 불을 질렀다. 그리고 온돌방 아궁이에도 계속 나무를 넣었는데 그만 사고가 일어났다.
‘불이야, 불!’
아퍼나센코가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나도 일어났는데 아퍼나센코가 방안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미쳤어, 이 친구가!)
나는 곧 아퍼나센코의 웃옷에 불이 붙어 타고 있는 걸 발견했다. 이불에도 불이 붙었다. 눈을 녹여두었던 물통을 아퍼나센코의 머리에 들어부었다.
‘자, 이젠 방의 불을 끄자. 눈을 퍼부어. 빨리!’
방문을 열어놓고 삽으로 눈을 퍼 방안에 던졌다. 약 15분 후 불이 잡혔다. 그러나 참담한 꼴이었다. 온돌방은 진흙으로 만들었으므로 눈을 퍼붓자 진흙탕이 되었다.
‘아, 이젠 얼어 죽겠네.’
아파나센코가 벌벌 떨면서 비명을 질렀다.
‘얼어 죽기 전에 흙집을 보수해야 해!’
다행히 나는 온돌방의 구조를 잘 알고 있어서 복구작업이 가능했다. 온돌방은 원래 고조선 시대 옥저인들이 창안하여 전승되었으므로 한국인이면 누구나 다 구조를 알았다. 나는 하르빈에서 한국인에게 배웠다. 집 주변에 불이 활활 타고 있었으므로 그 불빛 속에서 작업을 했다. 새벽 6시께 보수작업이 끝났다. 아궁이에 다시 불을 지폈으므로 온돌방은 빨리 말랐다. 날이 밝아오자 우리는 서로 얼굴을 보고 웃었다. 굴뚝 청소부처럼 눈만 남겨 놓고 진흙투성이였다. 우리는 우선 마른 산돼지고기로 식사를 마친 다음 밀림을 떠났다. 매림역까지 40km를 3일 동안 걸었다. 도중에 우리는 몇 번이나 인기척을 느꼈다. 주변에 사람들이 숨어 우리를 감시했으나 우리는 모르는 척 지나갔다.
‘밀림 강도를 감시하고 있어. 모른 체하고 지나가자.’
무서운 분위기였으나 무사히 매림역에 도착했다. 한 달을 지내면서 러시아인 강도들의 소식을 물었으나 행방불명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 모피를 거래했던 중국인 모피상도 행방불명이 되었다. 어느 날 거래를 하자고 찾아온 중국 포수 세 명과 나간 후 행방이 묘연했다. 경찰에 신고를 했으나 2~3일 수소문하고 끝났다. 그래서 지방의 유명한 포수를 찾아갔다. 지방 포수는 우리를 환대했는데 방으로 안내한 뒤 극진히 술대접을 했다. 술이 몇 잔 돌고 주객이 취할 때쯤 내가 넌지시 물었다.
‘행방불명된 모피상은 어떻게 됐지?’
‘부지도(모른다.).’
그는 입언저리에 얇은 웃음을 띠었다. 알고 있는 것이다.
‘모피상은 거래만 했으니 죽일 필요까지는 없잖느냐?’
‘부지도. 밀림의 법은 죽음이 아니면 무죄니까 그에게 죄가 있다면 죽음이었겠지.’
1개월 후 우리는 다시 밀림으로 들어갔다. 2월 말이었다. 겨울이 끝나가고 있었다. 태양이 힘을 얻고, 바람은 한결 부드러워졌으며, 양지에는 눈이 녹았다. 구수한 흙냄새가 올라왔다. 새들이 지저귀고 다람쥐들도 부산하게 움직였다. 우리는 천천히 걸었고 사냥개는 맹수의 냄새를 맡으려고 귀를 세웠다. 갑자기 개가 걸음을 멈추더니 맹렬히 짖었다. 큰 나무 밑에 하얗게 색이 바랜 뼈가 흩어져있었다. 신발과 안경도 있었다.
‘중국인 모피상이야.’
중국인은 무서운 민족이었다. 한 번 죽이겠다고 결심하면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다. 모피상은 장물 매매죄였는데 러시아인과 공모하여 동족인 중국인을 괴롭힌 죄였다. 시체가 겨울인데도 뼈만 남은 것은 호랑이 짓이었다. 모피상은 산채로 나무에 묶여 호랑이 밥이 되었다.
‘러시아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아퍼나센코가 말했다.
‘죽었겠지.’
거기서 얼마 안 가 작은 판잣집이 있었는데 판잣집이 불타버렸다. 불탄 자리에 러시아인들의 타다 남은 시체가 있었다. 그들은 바보였다. 밀림에는 굥찰이 없다고 판단하여 장난처럼 포스를 죽이고 모피를 강탈했는데 그게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몰랐다. 우리는 그들을 묻어주었다. 그들은 나쁜 사람이었고 죽어 마땅했지만 그래도 인간이고 동족이었기에 묻어주었다. 그날 밤 중국인 포수를 만났다.
‘안녕, 코안경 나리.’
‘안녕, 자치대대장.’
중국인이 웃으면서 밀림이 평화를 되찾았으므로 자치대는 해산했다고 했다. 담배를 권하고 러시아인들을 어떻게 잡았냐고 물었다. 중국인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말했다. 러시아인 강도를 잡기 위해 조직된 자치대는 모구 20명이었다. 20명 중 12명은 두 명씩 짝을 지어 6개 조로 나뉘어 밀림을 포위했고, 8명이 수색했다. 예측대로 그중 3명은 하르빈에서 고용한 살인청부업자였다. 러시아인들은 무서운 폭설과 자치대를 피하기 위해 10일간이나 밀림을 방황했다. 눈이 내리면 동굴이 숨었으나 날이 개이면 발자국을 추적당했다. 아무리 빨리 도망을 해도 추적대는 따라붙었고 밀림을 빠져나가려고 하면 잠복조들이 난사를 했다. 그래서 그들도 마지막 결전을 하기 위해 판잣집에서 농성을 했다. 그러나 추적대는 성급하게 습격하지 않았다. 판잣집을 포위만 해놓고 기다렸다. 그 포위 속에서 러시아인들은 죽음보다 더한 공포를 느꼈고 굶주림에 발광을 했다. 러시아인들이 미쳐 판잣집을 뛰쳐나오자 침착한 하르빈의 암살자들이 단 두 발로 저격했다. 밀림의 사형을 감추기 위해 판잣집에 불을 질렀다.
‘죽이지 않고 잡아서 경찰에 넘길 수 없었나?’
중국인 포수가 엷게 웃었다.
‘그런 방법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나리도 알고 있잖아.’
14. 뱀 할아범
라오에린정맥의 산마루를 타고 산정에 섰다. 이럴 때는 사냥꾼도 등산가의 기분이 된다. 정복감과 승리감이다. 내 눈앞에는 산맥에 따른 계곡溪谷들이 있고 미잔헤강의 줄기가 있었다. 고함을 치고 싶었다. 사냥꾼인 나는 등산가들이 느끼지 못하는 즐거움도 있었다. 내려다보이는 계곡은 꿩의 낙원이었다. 수천수만 마리의 꿩들의 산란지였다. 보고 있는 사이에도 꿩들이 날아다녔다.
(좋아! 좋아!)
그러나 무심한 나의 동반자는 하품만 했다. 검은 반점이 있는 골든 계통의 사냥개(이름 라륩)다. 그는 주인인 내가 파노라마의 장관을 완상하고 있을 때 바위 위에 앉아 하품만 했다.
(자, 이제 시작하자.)
나와 라륩은 천천히 계곡으로 내려갔다. 계곡에서는 라륩이 선두다. 그리고 나를 힐끗 쳐다보고는 꼬리를 친다.
(이제부터는 내게 맡기시지요.)
라륩의 재주는 훌륭했다. 눈은 땅만 보고 코를 땅에 대고 냄새를 맡으며 전진한다. 그러나 꿈틀거리는 귀는 쫑긋 세우고 사방을 살핀다. 그놈은 눈보다 코와 귀에 의존한다. 라륩이 정지했다. 한쪽 발을 들어 올리고 고개를 갸우뚱한다.
(뭐가 있다. 발사 준비를 하라는 뜻이다.)
나는 총신을 들어 올렸다. 라륩이 전진한다. 네 다리로 트롯트처럼 움직이는 게 아니라 두 다리를 모아 껑충껑충 뛴다. 숨어있는 꿩에게 위협을 주자는 의도다. 잡초 밑에 숨어있던 꿩이 당황했다. 숨바꼭질에서 진 것이다. 꿩은 도망쳤다. 꿩은 두 다리로 달려도 상당한 속도를 낸다. 그러나 네 다리의 개에게는 당하지 못한다. 라륩이 쏜살같이 달려 꿩의 진로를 막아버린다. 꿩은 숨바꼭질에서 지고 달리기에서도 졌다. 그래서 최후 수단으로 날개에 의존한다. 꿩이 푸드득푸드득 요란하게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나의 시야에 꿩이 들어왔다. 꿩의 비상은 닭보다는 좀 나았지만 형편없다. 거기에 알록달록 화사한 몸체가 또 탈이다. 푸른 하늘에 꿩이 떠오르면 아름다운 색깔이 선명하게 부각된다. 꿩이 하늘에 떠올랐지만 나는 지켜보고만 있다. 꿩의 나래짓을 업신여기는 것이고 자신의 총솜씨에 자신이 있기 때문이다.
(한 번 날릴 대로 날려보자.)
2m, 3m, 4m. 비스듬히 하늘로 오르던 꿩이 수평으로 몸을 바꿨다. 위기에서 벗어나 전속력을 내기 시작했다. 찬스다. 날아가는 꿩의 대가리 몇 센티미터 앞 지점을 겨냥하고 발사한다. 탄환이 꿩을 따라가서 맞추는 게 아니라 꿩이 탄환에 와서 맞는다. 순간 꿩이 주춤거린다 싶자 꿩 털이 몇 개 흩어지고 꿩은 일직선으로 낙하한다. 라륩이 달려가서 꿩을 물어왔다. 또 얼마 안 가서 푸드득 나의 발밑에서 날아올랐다. 전혀 예상치 못해서 총을 들지도 못하고 놓쳐버렸다. 라륩도 날아가는 꿩을 쳐다보고만 있다.
(할 수 없어. 누구든 실수는 하는 법이니까. 꿩은 얼마든지 있어, 라륩군!)
라륩이 전진했다. 이번에는 앞발을 들어 발견 신호를 하고 충분히 사격준비시간을 준 다음에 숲속으로 뛰어들었다. 두 마리가 한꺼번에 뛰어올랐다. 나는 올렸던 총을 내렸다. 둘 다 까투리다. 라륩이 화가 났다. 그는 내가 발포하는 것을 기다리다가 발포를 하지 않자 실망했다. 웡! 웡! 짖었다.
‘임마, 꿩 사냥터에서 짖는 멍충이가 어디 있어. 내가 까투리를 쏘지 않는다는 것쯤은 알게 아냐?’
그러나 그는 납득을 하지 않는다. 개의 논리와 사람의 논리는 맞지 않는 법이다.
이럴 때는 반 위협을 해서 굴복을 시켜야 한다.
‘가, 앞으로 가!’
화난 표정으로 명령했다. 라륩은 불평을 억눌렀다. 전진했다. 계곡을 빠져나와 늪으로 왔다. 자그마한 늪이고 초지였기에 거기서 노는 꿩들이 보였다. 수를 세지 않았지만 100 마리가 넘었다. 100마리의 꿩들은 초록 비단에 수를 놓은 것처럼 화사했다. 라륩은 곧장 뛰어들고 싶어 안달했으나 내가 정지를 하고 구경을 하고 있는 것을 알고는 체념한 듯 내 옆에 누워버렸다. 꿩들이 우리를 발견했다. 내가 천천히 전진하니까 꿩은 머리를 숙이고 꼬리를 쭉 뻗으면서 한 마리 두 마리 날아올랐다. 라륩이 신경질적으로 뛰어나가려다 주인의 표정을 보고 주저앉았다. 라륩은 꿩 말고 또 수난을 당했다. 초지를 빠져나와 다시 계곡에 들어갔는데 라륩은 한 마리 꿩에게 조롱을 당했다. 꿩 한 마리가 참나무 가지에 앉아 개를 놀렸다. 약이 오른 라륩이 뛰어갔으나 라륩이 뛰어오르기에는 가지가 너무 높았다. 화가 난 라륩이 미친 듯이 짖었다. 그 꼴이 우스워서 보고만 있었으나 라륩이 가여워서 발사를 했다. 라륩은 떨어진 꿩의 대가리를 물고 늘어졌다. 꿩은 피투성이가 되었다.
우리는 개울을 건너 야생동물 서식지로 들어갔다. 꿩 두 마리가 한꺼번에 날아올랐다. 2연총을 발사했다. 내가 선호하는 동시사격이다. 실수했다. 한 마리는 떨어졌다가 다시 날아올랐다. 라륩이 숲에 떨어진 꿩을 찾으러 숲속으로 뛰어들었는데 승리의 환호성이 아니라 비명소리가 났다. 달려갔더니 라륩이 2m 전방을 응시하고 있었는데 엉거주춤한 자세였다. 몸의 중심이 앞다리가 아니라 뒷다리였다. 여차하면 도망칠 자세였다. 총신을 들어 올렸다.
(호랑이? 표범?)
그런데 라륩을 그토록 놀라게 한 것을 보고는 웃음이 나왔다. 뱀이었다. 습지대라 뱀이 많았다. 3m나 되는 큰 뱀이었다. 뱀이 꿩을 물고 있었다. 통째로 삼키는 중이었다. 나는 흥미롭게 뱀의 식사를 관찰했다. 뱀은 꿩의 날개에 침을 묻혀가며 삼키고 있었으나 부피가 커서 고통스러운 것 같았다. 꿩이 뱀의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것이 보였다. 꿩을 삼킨 뱀은 만족스러운 듯 탈골된 턱뼈를 맞추고 냅킨 대신 나뭇잎으로 입을 닦았다. 식사와 화장을 마친 뱀은 주위를 살피더니 숲속으로 기어 가버렸다.
(오냐, 너 할 일은 끝났지만 내 할 일이 남았어.)
개머리판으로 뱀의 목덜미를 치자 뱀이 머리를 쳐들었다. 얼핏 목을 움켜잡았다. 뱀이 내 팔목을 칭칭 감았다.
(사람의 팔목을 감아봐야 별 볼 일 없다는 걸 모르는군.)
뱀이 약이 올라 힘을 주자 팔목이 찌르르하고 압박감이 왔다.
(제법 까불어?)
뱀의 대가리를 졸랐다. 뱀이 아가리를 벌리며 힘을 푼다.
(오냐, 이제 알았지? 까불면 교살당한다는 걸.)
이 광경을 빤히 바라보고 있던 라륩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눈알을 굴린다. 그러나 주인과 뱀의 싸움은 주인이 승리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꼬리를 힘차게 흔든다. 이로써 이날 사냥은 끝났다. 길이 3m의 뱀을 들고 무슨 사냥을 더 하겠는가? 나는 뱀을 들고 뒤자지 할아버지의 움막으로 갔다. 뱀 할아버지로 더 유명하다. 중국인이지만 러시아말을 하고 일생을 밀림에서 살았다. 별명과 같이 뱀을 좋아했기 때문에 선물을 들고 찾은 것이다. 뱀 할아범의 움막은 진흙을 두껍게 발라 지었으며 밀림에서는 움막이 아니라 호텔이었다. 큰 방이 두 개, 응접실, 부엌과 창고가 있었다. 집만 호화로운 게 아니고 생활이 호화로웠다. 창고와 방 안에 갖가지 곡물이 쌓여있고 마른고기도 풍부하게 저장되어 있다. 뱀 할아범은 큰 집과 곡물을 지키기 위해 뱀을 사육했다. 큰 뱀이 서너 마리 집안에서 자유롭게 돌아다녔는데 뱀은 집 안팎을 경비하며 곡식 도둑 쥐를 잡아먹었다. 주인이 집을 비우면 도둑들도 지켰다. 할아버지는 꿩을 삼킨 뱀을 들고온 나를 대환영했다. 뱀 할아범은 얼핏 보면 60이 채 되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60을 훨씬 넘겼다. 단정한 얼굴에 유대인 코, 몽고인 턱이었다. 키가 크고 인디언처럼 낯빛이 검었는데 태양 탓이었다.
뱀 할아범이 어렸을 때는 부친을 따라 뱃사람이었다. 부친이 바다에서 익사하자 부친의 유언을 지켜 바다를 버리고 산으로 들어왔다. 열아홉 살에 들어와 평생을 보냈다. 따라서 이 부근의 지형을 꿰뚫었고 중국 관리나 마적들도 영치권을 인정했다. 주위 약 10km를 지배하고 있는 할아범은 동물을 사랑했다. 사냥꾼들이 사냥을 하는 것은 인정했으나 남획은 싫어했다. 할아버지는 사냥꾼을 환대했으나 1주일 이상 체류하는 것은 허락하지 않았다. 숙박을 거부했다. 까투리, 암사슴, 산돼지도 암톳을 잡으면 사냥 협조를 하지 않았다.
‘그런 사냥꾼은 사냥꾼이 아니라 살욱자야.’
어느 겨울 산돼지를 마구 잡았던 일본인 사냥꾼 두 사람은 할아범으로부터 숙박을 거부당해 하마터면 동사할 뻔했다. 할아범은 올무나 함정사냥을 싫어해서 사흘에 한 번 순회를 하면서 발견되는 대로 철거했다.
할아범의 세 번째 기행은 뱀 사랑이다. 할아범이 기거하는 곳이 저지대라 땅이 습했으며 뱀이 많았다. 할아범의 말대로라면 뱀은 사람을 해치지 않는다. 가끔 독사에게 물리는 일이 있으나 그 건 사람이 부주의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뱀은 놀라거나 자기방어를 하기 위해 사람을 물었으나 결코 사람을 잡아먹으려고 하는 게 아니다. 반면, 뱀은 사람에게 유익한 일을 한다. 곡식을 훔치고 전염병을 전파하는 들쥐를 잡아먹어 피해를 막아준다. 동감이다. 방안에도 뱀이 돌아다녔다. 마루 밑이나 온돌 밑, 천정에도 뱀이 돌아다녔는데 그래서 이 집에는 쥐가 들어오지 못했다. 뱀은 쥐에게서 주인을 보호할 뿐만 아니라 외적으로부터 주인을 지켰다. 할아범이 외출했던 겨울밤, 늑대 세 마리가 침입을 했다. 늑대들은 창고의 마른고기를 노렸으나 창고에 들어서자 창고 천장에서 기어 다니던 길이 5m의 뱀이 늑대에게 떨어져 내려 늑대의 몸을 감았다. 불의의 습격을 받은 늑대가 비명을 지르며 도망가려고 했으나 뱀이 몸을 칭칭 감아 놓아주지 않았다. 나머지 두 마리의 늑대도 창고 구석에서 기어 나오는 뱀을 보고 혼비백산하여 도망쳤다. 이튿날 할아범이 귀가했는데 뱀이 늑대를 반쯤 삼키고 있었다.
‘뱀은 나의 친구지요. 그들도 주인의 애정을 알고 있어요. 뱀은 내가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을 알고 싫어하는 짓은 하지 않아요,’
이른 새벽에 할아범과 산에 올랐다 도중에 발견한 함정은 파괴했다. 산중턱에 이르자 할아범이 멈췄다.
‘이상한데?’
할아범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주위를 살피더니 속삭였다.
‘코안경 나리, 날 좀 도와주시오. 저쪽 계곡 일대가 수상해서 조사를 해야겠소.’
할아범이 엎드려 살살 기었다. 계곡이 가까워지자 내 코에도 이상한 냄새가 났다. 아편이었다. 계곡 주위 약 1정보나 되는 면적에 아편이 자라고 있었다. 할아범은 주위를 살피고 인적이 없는 것을 확인한 다음 주변의 마른나무를 모아 아편 밭에 불을 질러 태웠다.
‘나쁜 놈들입니다. 이 꽃은 사람의 머리를 마비시켜요.’
산정에 도착했다. 산정에 할아범이 불당을 지었다. 불당이라고는 해도 부처님, 공자님, 삼국지의 제갈공명과 관운장의 초상도 있다. 할아범은 불단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했다. 오래도록 눈을 감고 있었다. 그때 불단 뒤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다. 싯! 싯! 하는 소리였다. 독사의 위협 소리였다. 나는 독사들의 포위 안에 있었다. 뛰어나가고 싶었으나 자칫 잘못하면 독사의 공격을 유발할 위험이 있어 꼼짝도 하지 못했다. 다행히 할아범의 기도가 끝났다. 할아범이 불단 뒤에 숨어있는 뱀에게 손을 내밀었다. 뱀은 주저 없이 할아범에게 기어와 할아범의 손을 타고 팔, 어깨, 머리로 올라갔다. 그러자 그 방에 있던 다섯 마리의 뱀들이 할아범에게 기어갔다. 마치 시샘을 하는 것 같았다. 다섯 마리의 뱀들에게 몸을 내맡긴 할아범은 만족스러워 눈을 게슴츠레 뜨고 말했다.
‘코안경 나리, 이놈들은 언제나 이런 짓을 해요. 나는 이놈들에게 해주는 것이 없는데. 이놈들은 날 좋아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