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가을 강가에서
간이역 푸른 불빛
겨울 숲에서
고고(孤高)
구계(龜溪) 할아버지
국화 이야기
낙과(落果)
녹음
눈엽(嫩葉)
단풍
달맞이꽃
또 한 여름
매화
문(門)
바다에서
발화(發花)
백운대(白雲臺)를 우러러
봄날
부부(夫婦)
북어(北魚)
사군자(四君子)의 어느 것처럼
산벚꽃 지고 나면
새벽 뜰에서
설날 아침에
설야
성탄제
소
솔개
슬픈 가을
아버지의 마음
아침 등반
아픔
어미의 초상
여울
역설(逆說)
연둣빛 날개
오천년(五千年)
외등
용문사에서
은행 가는 길
자전차
저녁별
첫서리
초록은 동색
춘니(春泥)
팔순이 되는 해에
평사리
풀꽃
핏줄
하회에서
해가 머물러 있다
황락(黃落)
황사현상(黃沙現象)
가을
김종길
먼 산이 한결 가까이 다가선다
사물의 명암과 윤곽이
더욱 또렷해진다
가을이다
아 내 삶이 맞는
또 한 번의 가을!
허나 더욱 성글어지는 내 머리칼
더욱 엷어지는 내 그림자
해가 많이 짧아졌다.
가을 강가에서
김종길
엷어진 것은
이마에 와닿는 햇살만이 아니다.
한여름 뙤약볕이 남기고 간
저 강변의 건조한 조약돌과
희멀건 갯바람
그 물비린내조차도 가시어지고,
식어가는 모래둑에 피어 남은
들마꽃의 빛바랜 연분홍.
빛도 무게도 부피도
모조리 담수채로 엷어져
수묵으로 저물기 전,
적멸의 애끓는 피리 소리인가,
잠시 비끼는 진한 노을 한 자락.
간이역 푸른 불빛
김종길
누워 있는 강허리 너머
자는 듯 깨는 듯
어딘가에 닿으면
간이역 푸른 불빛
역무원이 흔드는 깃발
조용히 닫히는 문
종착역은 어디쯤일까
잠들지 못하는 사람들.
겨울 숲에서
김종길
붉은빛을 머금은
은은한 금빛!
늦가을 숲속 나무들은
박물관에 진열된 금동불상들.
불상들에게도 육탈이 있는 건지,
그것들은 지금 뼈와 실핏줄을
부챗살처럼 무수히
추운 하늘에 펼치고 있다.
허나 머지않아
그것들은 다시 살이 찌리라.
신록이 금빛으로 눈부실
회춘의 그날!
고고(孤高)
김종길
북한산이
다시 그 높이를 회복하려면
다음 겨울까지 기다려야만 한다.
밤 사이 눈이 내린,
그것도 백운대나 인수봉 같은
높은 봉우리만이 옅은 화장을 하듯
가볍게 눈을 쓰고
왼 산은 차가운 수묵으로 젖어 있는,
어느 겨울날 이른 아침까지는 기다려야만 한다.
신록이나 단풍,
골짜기를 피어오르는 안개로는,
눈이래도 왼 산을 뒤덮는 적설로는 드러나지 않는,
심지어는 장미빛 햇살이 와 닿기만 해도 변질하는,
그 고고한 높이를 회복하려면
백운대와 인수봉만이 가볍게 눈을 쓰는
어느 겨울날 이른 아침까지는
기다려야만 한다.
구계(龜溪) 할아버지
김종길
구계(龜溪) 할아버지
금강산(金剛山) 구경 가시던 해,
어느 고갯길에서였던가,
꾀꼬리가 그렇게 울어 쌓던 것은.
「청산(靑山)은 사람과 함께 늙질 않는데
꾀꼬리 어찌 나그넷길 바쁜 줄을 알리」
이렇게 읊으신 구계(龜溪) 할아버지
금강산(金剛山)에서 돌아오시던 길,
어디서였던가,
또 이렇게 읊으신 것은.
「나도 이젠 속되지 않네,
산(山)인들 어찌 정(情)이 없으랴.
바람 부는 창(窓) 아래 낮잠이 들면
꿈속에 돌아오는 금강산(金剛山) 모습」
국화 이야기
김종길
작년 가을
동네 꽃집에서
들고 온 토종 국화분
꽃이 시든 다음
담장 밑에 엎어 놨더니
그 국화포기가 흙에 뿌리를 내려
아직 늦더위가 한창인데도
벌써 꽃망울을 차례로 맺어
한 송이. 두 송이 피기 시작하지 않는가!
비록 꽃송이는 보잘것없이 작지만
짙푸른 잎새 사이로 내미는
샛노란 국화 송이들.
그것들이 얼마만큼 조바심을 떨었길래
아직 제철은 멀었는데도 저렇게
안달하듯 피어나는 것일까
대낮에도 새벽하늘에 별을 쳐다보듯
작은 설래임 속에 자주
눈길 머무는 그곳.
낙과(落果)
김종길
우리 집 뜰에는 제법 큰 감나무가 한 그루 있다. 작년에는 많이 열려 늦가을에 서너 접가량 감을 수확할 수 있었다. 올해는 해거리를 하는 것인지 여름 내내 자잘한 땡감을 무시로 떨군다. 아침에
자고 일어나 뜰에 나서면 밟히는 것이 땡감들이다.
해거리는 감나무에만 있는 것도 아닌 것 같다. 오늘 아침 청탁받은 시를 쓰면서 이것이 역시 때이른 낙과 같은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근래에 쓴 나의 작품들이 우리 집 뜰에 나뒹구는 저 땡감들과 크게 다를 것도 없을 것 같다.
그래도 올가을에는 푸른 하늘을 배경 삼아 가지 끝엔 붉게 익은 감들이 많든 적든 달려 있겠지. 이 한 해 동안 내가 쓴 시 가운데도 그와 같은 것들이 한 두 편이라도 섞여 있을런지.
녹음
김종길
봄볕이 데운
묵은 잔디 풀 사이
보랏빛 제비꽃과 노란 민들레가 필 땐
잔잔한 현악기의 선율이더니,
목련, 영산홍, 모란이 잇달아 필 땐
관악기에 타악기까지 가세하여
뜰은 제법 쿵쿵거리기까지 했다.
그러나 지금은 깊은 바닷속 같은
짙은 녹음의 침묵 -
이따금
까치나 비둘기들이
심해어(深海魚)처럼 헤엄쳐 들어올 뿐,
바람 한 점 없다
눈엽(嫩葉)
김종길
게으른 신(神)이
녹두빛 크레용으로
아무렇게나 문질러놓고는
바람 쐬러 갔거나
낮잠을 자러 간 모양이다
햇살에 눈이 부시어
어디 등(藤)꽃 그늘이라도 찾아간 것일까?
게으른 신이
한나절 그려놓은 풍경 속을
춘천행 동차(動車)가 정각에 지나가고 있다
종암국민학교의 점심 종소리가
한가롭게 울리고 있다
* 눈엽(嫩葉) : 새로 나온 어린잎
단풍
김종길
올해도 무엇을 하며 살아왔는가?
작년 이맘때 오른
산마루 옛 城터 바위 모서리,
작년처럼 단풍은 붉고,
작년처럼
가을 들판은 저물어간다.
올해도 무엇을 하며 살았는가?
작년에도 스스로에게 물어보았던 물음.
자꾸만 세상은
저무는 가을 들판으로
눈앞에 떠오르고,
다람쥐 쳇바퀴 돌듯 사는 동안
덧없이 세월만 흘러가고,
어이없이 나이만 먹어가건만,
아직도 사위어가는 불씨 같은 성화는 남아
까닭 없이 치미는 울화 같은 것.
아 올해도
무엇을 하며 살아왔는가?
저무는 산마루 바위 모서리,
또 한 해 불붙는 단풍을 본다.
달맞이꽃
김종길
임하댐 준공으로
고향 마을은 거의 비어버리고,
장 보러 넘어 다니던 황산재 옆구리를
새로 뚫린 도로가
능구렁이처럼 감고 있었다.
덜컹거리는 봉고차로
상처난 산허리의 쓰린 흙빛을
눈으로 밟으면서 넘은 삼십 릿길,
달맞이꽃만 길가에 지천으로 피어
마을 사람들 대신 맞아주었다.
또 한 여름
김종길
소나기 멎자
매미 소리
젖은 뜰을
다시 적신다.
비 오다
멎고,
매미 소리
그쳤다 다시 일고,
또 한여름
이렇게 지나가는가.
소나기 소리
매미 소리에
아직은 성한 귀
기울이며
또 한여름
이렇게 지나 보내는가.
매화
김종길
해마다 새해가 되면
매화분엔 어김없이 매화가 핀다.
올해는 바로 초하룻날 첫 송이가 터진다.
새해가 온 것을 알기라도 한 듯,
무슨 약속을 지키기라도 하듯,
설날에 피어난 하얀 꽃송이!
말라 죽은 것만 같은 검은 밑둥걸,
메마르고 가냘픈 잔가지들이
아직 살아 있었노라고,
살아 있는 한 저버릴 수 없는 것을
잊지 않았노라고, 잊지 않았노라고,
매화는 어김없이 피어나는데,
밖에선 눈이 내리고 있다.
매화가 핀 것을 알기라도 한 듯,
밖에선 매화빛 눈이 내리고 있다.
오천년도 너에겐
한나절 낮잠에 불과했던가.
네게도 소리칠 마지막 절규는 있었던가.
문(門)
김종길
흰 벽(壁)에는-
어련히 해들 적마다 나뭇가지가 그림자 되어 떠오를 뿐이었다. 그러한 정밀(靜謐)이 천년(千年)이나 머물었다 한다.
단청(丹靑)은 년년(年年)이 빛을 잃어 두리기둥에는 틈이 생기고, 볕과 바람이 쓰라리게 스며들었다. 그러나 험상궂어 가는 것이 서럽지 않았다.
기왓장마다 푸른 이끼가 앉고 세월(歲月)은 소리 없이 쌓였으나 문(門)은 상기 닫혀진 채 멀리 지나가는 바람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밤이 있었다.
주춧돌 놓인 자리에 가을풀은 우거졌어도 봄이면 돋아나는 푸른 싹이 살고, 그리고 한 그루 진분홍 꽃이 피는 나무가 자랐다.
유달리도 푸른 높은 하늘을 눈물과 함께 아득히 흘러간 별들이 총총히 돌아오고 사납던 비바람이 걷힌 낡은 처마 끝에 찬란(燦爛)히 빛이 쏟아지는 새벽, 오래 닫혀진 문(門)은 산천(山川)을 울리며 열리었다.
- 그립던 기(旗)ㅅ발이 눈뿌리에 사무치는 푸른 하늘이었다.
바다에서
김종길
차운 물보라가
이마를 적실 때마다
나는 소년처럼 울음을 참았다.
길길이 부서지는 파도 사이로
걷잡을 수 없이 나의 해로(海路)가 일렁일지라도
나는 홀로이니라,
나는 바다와 더불어 홀로이니라.
일었다간 스러지는 감상(感傷)의 물거품으로
자폭(自暴)의 잔(盞)을 채우던 옛날은
이제 아득히 띄워 보내고,
왼 몸을 내어 맡긴 천인(千?)의 깊이 위에
나는 꽃처럼 황홀한 순간을 마련했으니
슬픔이 설사 또한 바다만 하기로
나는 뉘우치지 않을 나의 하늘을 꿈꾸노라.
발화(發花)
김종길
알을 깨고 나오는 한 마리 어린 고니
올봄 내 작은 뜰에 저절로 벌던
백목련꽃
첫 송이!
북한산 그늘에선 사월 중순에도
눈이 향기로 남아
바람이 찬데,
겨우내 단단히 닫힌 채 은밀히 벙글던 것이
마침내 소리 없이 터지기 시작하는
꿈 같던 하루
얼었던 산이 젖빛 운애 속에 몸을 풀고
내 입술에도 노래가 되살아난 것은
그날부터다. 천지에 훤히
봄이 온 것은 그날부터다.
백운대(白雲臺)를 우러러
김종길
이백의 금릉 봉황대에는
봉황이 놀다 갔지만
우리의 북한산 백운대에는
흰 구름이 놀다가 가고
갔다간 또 돌아와 논다
우람한 인수봉을 짝하여
서울의 동북을 지키는 수문장
거기 몇억 년을 버티어 서 있었는가
흰 화강암 살결이라 더욱 잘 어울리는
무시로 머물다 가곤 또 돌아오는
흰 구름 두세 송이
지금 너의 이마를
장밋빛으로 물들이며 비쳐오는
새천년 첫 아침 햇살
천년도 네겐 한나절에 불과한가
우리는 너를 우러러 영원을 본다
흰 구름 한가로이 오가는
새천년 첫 아침에
영원을 본다
봄날
김종길
골목의 흰 목련 꽃송이
수틀 위에서처럼
눈을 뜨고,
한나절 젖빛 운애 속에
몸 풀고 돌아누운
북한산.
번데기에서 나온 애벌레인가
나도 꿈틀거린다.
눈을 뜬다.
부부(夫婦)
김종길
어두운 부뚜막이나
낡은 탁자 위 같은 데서
어쩌다 비쳐 드는 저녁 햇살이라도 받아야
잠시 제 모습을 드러내는
한 쌍의 빈 그릇.
놋쇠든, 사기이든, 오지든
오십 년이 넘도록 하루같이 함께
붙어 다니느라 비록 때 묻고 이 빠졌을망정,
늘 함께 있어야만 제격인
사발과 대접.
적잖은 자식 낳아 길러
짝 지워 다 내어보내고
이제는 둘만 남아,
이렇게 이따금 서로의 성근 흰 머리칼,
눈가의 잔주름 눈여겨 바라보며,
깨어지더라도
함께 깨어질 수는 없는 것일까,
부질없이 서로 웃으며 되새겨보면,
창밖엔 저무는 날의 남은 햇빛,
그 햇빛에 희뜩이는 때아닌 이슬방울
북어(北魚)
김종길
퇴근길 무던히 지쳐
버스에서 내려서 접어든 골목,
과일가게며 채소가게며 생선가게 앞
길바닥에 앉아 순대나 콩나물을 파는 아주머니들,
손수레를 세워놓고 강냉이를 튀기거나 솜사탕을 말아내는 아저씨들.
벌어 먹고사는 길도 가지가지―
나는 교실에서 손에는 책과 백묵을 들고,
입으로는 연신 지껄여대며, 때로는 유식한 서양말도 섞어가며,
별것도 아닌 물건을 자랑하며 외쳐대는
저 넉살좋은 장사꾼처럼 신나게 떠드는 것으로
월급도 받고 상여도 받고 곧잘 살아가고 있다.
노동력도 상품이라면
나 자신이 바로 상품이 아닌가!
정년을 코앞에 두었으니, 그것도 폐품 직전의 상품.
저 생선가게가 팔다 남긴,
꽂이에 꿰인 비쩍 마른 북어.
그 감지도 못한 흐릿한 눈깔에 얼비친
겨울 하늘,
찬바람 이는
해 질 녘 겨울 하늘.
사군자(四君子)의 어느 것처럼
김종길
화장(化粧) 냄새가 아니라 사람됨이 풍기는 향기를 그래도 어떤 여선생(女先生)님들은 풍길 것만 같군요
몸매나 옷차림의 그것이 아니라 사람됨이 지니는 오롯한 매무시를 그래도 어떤 여선생(女先生)님들은 지니고 있을 것만 같군요
우리네 안방 미닫이에 그려져 있는 매난국죽(梅蘭菊竹)의 어느 것과도 같은, 고운 때 묻고 조금은 빛바랬을지라도 그와 같은 향기와 매무시를 다소곳이 간직한 여선생(女先生)님들이 아직도 틀림없이 계시겠지요
자라는 것들의 열띤 눈망울, 웃음 짓는 보조개, 또는 울먹이는 울대에 햇살로, 바람결로, 빗물로 스며드는 맑은 위엄을 우리네 사군자(四君子)의 어느 것처럼 말없이 지닌 여선생(女先生)님들이 틀림없이 아직도 계시겠지요.
산벚꽃 지고 나면
김종길
산벚꽃 지고 나면
황사 자욱하던 산골짝마다
오늘은 황사 대신 꽃구름 자욱하다
연한 새잎 사이사이 구름처럼 피어 있는
저 산벚꽃 지고 나면,
머지않아 북한산은 온통 비취빛 젖무덤들을
한껏 부풀리며 초여름 깊은 잠에 빠져들리라.
새벽 뜰에서
김종길
밤사이 꽃들이 궁거워
잠이 깨자마자 내려선 뜨락,
아직은 좀 싸늘한 맑은 바람 속에
언제나 그렇듯 낯익으면서도 낯선 손님처럼
새벽이 나보다 먼저 내 뜰에 와서 서성거린다.
선잠을 깬 백목련(白木蓮) 꽃송이들이
부시시 눈을 뜨며 하품을 한다.
목단(牧丹) 꽃망울들은
그 현란한 너털웃음을 단단히 숨긴 채,
아직도 한참은 더 자야 할 모양이다.
기지개를 펴는 라일락 가지 끝마다
숨 가쁘게 향그러운 입김을 내뿜는
쌀알만 한 흰 꽃알갱이들.
모두 다 입 맞추고 볼 비비고
어루만져 주고 싶은 귀여운 것들.
이렇게 봄철 새벽 뜰에는
또 한 무리의 애타는 식구들이
바깥 잠에서 깨어나고 있는 것을.
설날 아침에
김종길
매양 추위 속에
해는 가고 또 오는 거지만
새해는 그런대로 따스하게 맞을 일이다.
얼음장 밑에서도 고기가 숨쉬고
파릇한 미나리 싹이
봄날을 꿈꾸듯
새해는 참고
꿈도 좀 가지고 맞을 일이다.
오늘 아침
따뜻한 한 잔 술과
한 그릇 국을 앞에 하였거든
그것만으로도 푸지고
고마운 것이라 생각하라.
세상은
험난하고 각박하다지만
그러나 세상은 살 만한 곳
한 살 나이를 더한 만큼
좀 더 착하고 슬기로울 것을 생각하라.
아무리 매운 추위 속에
한 해가 가고
또 올지라도
어린것들 잇몸에 돋아나는
고운 이빨을 보듯
새해는 그렇게 맞을 일이다.
설야
김종길
눈 오면 그리움
한결 더하여
눈 속에 차운 볼이
꽃으로 피네.
말없이 밟아 가는
어스름 길에
눈은 소리 없이
쌓여만 가고
서천엔 눈보라와
보랏빛 낙조
어디메 먼 곳엔
그리운 청산
성탄제
김종길
어두운 방 안엔
바알간 숯불이 피고,
외로이 늙으신 할머니가
애처러히 잦아지는 어린 목숨을 지키고 계시었다.
이윽고 눈 속을
아버지가 약을 가지고 돌아오시었다.
아 아버지가 눈을 헤치고 따오신
그 붉은 산수유 열매―
나는 한 마리 어린 짐생,
젊은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에
열로 상기한 볼을 말없이 부비는 것이었다.
이따금 뒷문을 눈이 치고 있었다.
그날 밤이 어쩌면 성탄제의 밤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느새 나도
그때의 아버지만큼 나이를 먹었다.
옛것이란 거의 찾아볼 길 없는
성탄제 가까운 도시에는
이제 반가운 그 옛날의 것이 내리는데,
설어운 설흔 살 나의 이마에
불현듯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을 느끼는 것은,
눈 속에 따오신 산수유 붉은 알알이
아직도 내 혈액 속에 녹아 흐르는 까닭일까.
소
김종길
너 커다랗게 뜬
검은 눈에는
슬픈 하늘이 비치고
그 하늘 속에서
내가 산다.
어리석음이 어찌하여
어진 것이 되느냐
때로 지긋이
눈을 감는 버릇을
너와 더불어
오래 익히었구나
솔개
김종길
병 없이 앓는,
안동댐 민속촌의 헛제사밥 같은,
그런 것들을 시랍시고 쓰지는 말자.
강 건너 임청각 기왓곡에는
아직도 북만주의 삭풍이 불고,
한낮에도 무시로 서리가 내린다.
진실은 따뜻한 아랫목이 아니라
성에 낀 창가에나 얼비치는 것,
선열한 육사의 겨울 무지개!
유유히 날던 학 같은 건 이제는 없다.
얼음 박힌 산천에 불을 지피며
오늘도 타는 저녁노을 속,
깃털을 곤두세우고
찬바람 거스르는
솔개 한 마리.
순종(純種)
김종길
응접실 창밖엔 몇 그루 장미가 심어져 있다. 이 집으로 이사 온 지 몇 해 안 되어 이웃에 사는 김 선생이 구해다 심어준 것들이다.
한 그루를 제외하고는 그것들은 다 잎도 무성하고 붉고 노란 꽃송이도 유난히 큼직큼직하여 활력이 넘쳐 보였다. 그러나 그것들은 꽃의 모양새로 보아 잡종들임에 틀림이 없다. 순종은 가장 약해 보이는 그 한 그루뿐이다. 그것은 가냘프지만 순수한 흰 꽃을 피웠다.
시인 릴케는 장미를 두고 '순수한 모순이여' 하고 외쳤지만 가장 순수한 것이 가장 약하다는 것도 모순이라면 모순이다. 그러나 올해는 봄에 비가 많이 온 탓인지 그 흰 장미 포기엔 새순도 많이 돋아 꽃도 전보다 더 많이 핀다. 대신 그 왕성하던 잡종들이 기가 꺾인 듯 꽃도 그리 요란스럽질 않다.
슬픈 가을
김종길
늦가을 접어드는데도
푸르기만 하던 내 뜰에,
드디어 조락(凋落)이 시작되나부다.
섯쪽 담장 한가운데쯤
어제는 노목 티가 나는 자목련,
그 나무 잎사귀가 누렇게 말라간다.
만리비추(萬里悲秋) 라더니,
슬픔 가을이 천지 사방(四方),
드디어 내 뜰에까지 다달았나부다
아버지의 마음
김종길
바쁜 사람들도
굳센 사람들도
바람과 같던 사람들도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된다.
어린 것들을 위하여
난로에 불을 피우고
그네에 작은 못을 박는 아버지가 된다.
저녁 바람에 문을 닫고
낙엽을 줍는 아버지가 된다.
세상이 시끄러우면
줄에 앉은 참새의 마음으로
아버지는 어린것들의 앞날을 생각한다.
어린 것들은 아버지의 나라다 아버지의 동포이다.
아버지의 눈에는 눈물이 보이지 않으나
아버지가 마시는 술에는 항상
보이지 않는 눈물이 절반이다.
아버지는 가장 외로운 사람이다.
아버지는 비록 영웅이 될 수도 있지만 ………
폭탄을 만드는 사람도
감옥을 지키던 사람도
술 가게의 문을 닫는 사람도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된다.
아버지의 때는 항상 씻김을 받는다.
어린것들이 간직한 그 깨끗한 피로………
아침 등반
김종길
새벽녘에 뿌리고 간 비로
한결 맑아진 대기 속에
산들이 성큼 다가선다.
아침 7시 10분 전,
진달래 능선에서 바라보면
건너편 인수봉 화강암 벽엔 이미
흰 누에처럼 사람들이 붙어 있다.
백운대 정상에도
개미 같은 형체들이 몇 움직인다.
저 사람들은 대체
몇 시에 집을 나선 것일까.
일요일인데도 새벽잠을 박차고
산행길에 올라,
어떤 이는 암벽을 밧줄로 기어오르고
어떤 이는 이미 정상에 섰다.
숨을 몰아쉬며, 땀을 흘리며,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찍어내는
짜릿하고 아슬아슬한 기쁨,
가슴이 터지도록 들이키는 신선한 공기―
그들은 거대한 화강암 벽을 뽕잎 삼아
환희의 은빛 김실을 뽑고,
알뜰히 산정의 아침을 물어 나른다.
아픔
김종길
사람들은 꽃을 좋아하지만
그것이 얼마만 한 아픔 끝에
피어나는지는 제대로 알지 못한다.
나도 이 나이가 되어서야
비로소 그것을 알았다.
초봄부터
뜰의 철쭉 포기에서
꽃망울들이 애처롭게, 애처롭게
땀나듯 연둣빛 진액을 짜내던
그 지루한 인내를 지켜보고서야
비로소 그것을 알게 되었다.
어미의 초상
김종길
굴리고
데워
녹인다
삼백 번 다듬고
삼백 날 촛불 켜도 마음 못 놓아
살점 뜯어 고이고
핏줄기로 기둥 세워
혼(魂)을 빚는 어미
어제
오늘
또 내일
무쇠 같은 날들 속으로
불을 안고 달려간다.
여울
김종길
여울을 건넌다
풀잎에 아침이 켜 드는
개학(開學) 날 오르막길
여울물 한 번
몸에 닿아보지도 못한
여름을 보내고
모래밭처럼 찌던
시가(市街)를 벗어나
길경(桔梗)꽃 빛 구월(九月)의 기류(氣流)를 건너면
은피라미 떼
은피라미 떼처럼 반짝이는
아침 풀벌레 소리
역설(逆暾)
김종길
가난과 고독이
없었던들,
생각이 저렇게
무사(無邪)할 수 있었을까.
아픔과 목마름이
없었던들,
꿈이 저렇게
화려할 수 있었을까.
연둣빛 날개
김종길
어린나무들은
연둣빛 날개를 달고
바람이 일 때마다 살며시
하늘로 날아오르려는 시늉을 하고,
큰 나무들도 역시 연둣빛,
그러나 더 우람한 날개를 펼쳐
어미 닭이 병아리를 품을 때처럼
어린나무들을 살뜰히 보듬으려 한다.
살아 있는 것들은 모두 저렇게
어린 것들을 보듬으며
대를 이어가는가.
내 새삼
여린 마음으로 느껴보는
온 누리에 충만한 생명의 섭리!
오천년(五千年)
김종길
사슴을 쫓다
한 발 헛디딘 것일까.
유황(硫黃)불 지글거리는 지옥(地獄)은 아니지만
눈굴헝 설흔 길이면 숨 거두기엔 족했으리라.
그로부터 오천년(五千年), 너는 육신(肉身)으로 버젓이 부활했다.
마흔다섯 살의 멀쩡한 사지(四肢), 동굴(洞窟) 모닥불 연기에 그을린 허파.
인스부룩 근방 어느 골짜기, 푸른 얼음 속이 오히려 따스했으리.
티롤의 솔바람에 감기운 너의 동공(瞳孔)이
마지막으로 바라보았을 알프스의 노을….
오천년(五千年)도 너에겐
한나절 낮잠에 불과했던가.
네게도 소리칠 마지막 절규(絶叫)는 있었던가.
가슴에 남는 좋은 사람
외등
김종길
어두운 골목길을 밝히는
외등 불빛의 노오란 동그라미,
호젓하다 못해 외롭게까지 보인다.
그러나 어둠 속을 지나가는 사람들에겐,
그 불빛이 얼마나 따스해 보일 것인가.
두려움을 내몰고 아늑함을 안겨주는 것이니.
시(詩)도 외등 불빛 같은 것이나 아닐런지.
그 자체는 외롭고 슬프고 쓸쓸하지만,
사람들의 마음을 다사롭게 감싸주니.
용문사에서
김종길
용문사
천년 묵은
은행나무는
올해도
싱싱하게
잎이 피었네
백 년도
살지 못해
버둥거리는
사람을 비웃듯이
하늘로 솟아
지금도
정정하게
버티어 섰네
올해도
싱싱하게
잎이 피었네
은행 가는 길
김종길
은행 가는 길,
나는 보도를 걷고 있는데
비둘기들은 보도와 차도의 경계선에서
누가 뿌린 것도 아닌 먹잇감을
열심히, 잽싸게
쪼아 먹고 있다.
사람이나 비둘기나
이 세상에서 먹잇감을 얻는 것은
한갓 우연인가, 아니면 무슨 필연인가?
나도 말하자면 먹잇감을 얻기 위해 가는 길인데
문득 떠오르는 부질없는,
그러나 기실 거창한 물음.
자전차
김종길
내리막길에서는 가속이 붙는다.
페달은 밟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마음은 놓을 수 없다.
균형은 잡아야 하고, 뜻하지 않는
사태에도 대비해야 한다.
바큇살에 반짝이는 석양.
이따금 찌렁찌렁 울리는 방울.
언덕길 막바지에서 해가 지고
결국은 쓰러질 것을 알면서도
나는 지금 편안히, 제법 상쾌한 기분으로,
관성에 몸을 실어
가을 석양의 언덕길을 굴러 내려간다.
아슬아슬한 균형도 잡으면서
한가로이 이따금 방울도 울리면서.
저녁별
김종길
지금 서울에선
밤하늘에 별을 찾아보기 어렵지만
내 어렸을 적 시골에서는
마을 앞 물웅덩이에도
저녁별이 비쳐 있곤 하였다.
그땐 물도 바람도 참으로 맑았었다.
물웅덩이에 비친 저녁별이
풀꽃처럼 떨고 있었다.
물웅덩이 속에서도
하늘이 저물어가고
산들바람이 일고 있었다.
첫서리
김종길
오늘 아침엔 바람이 차왔어요.
밖에 나갔던 동생이 그랬어요.
웃는 두 눈에 눈물을 글썽이며
차운 두 손을 홀홀 불었어요.
벌써 그렇게 춥다고 하느냐고
놀려 줄래도 놀릴 수 없잖아요?
밤새에 내린 첫서리 시리다고
단풍잎새도 저렇게 붉었는데……
초록은 동색
김종길
새벽 산책길에 홀로 건너는 개울가에서
잠시 걸음 멈추고 잡아본 나뭇가지.
봄에 초롱 모양의 흰 꽃을 달고 있던
그 나무 이름을 나는 모른다.
그러나 꽃이 지고 신록이 어느덧
짙은 초록으로 변한 지금.
그것은 어느 다른 나무와도 잘 구별되지 않아
이름이 따로 필요치 않아 보인다.
초록은 동색 -
저 나무들이 어울려 녹음을 이루듯
우리도 어울려 이웃이 되면,
우리는 모두 이름 없는 저 나무들처럼
아늑한 숲을 이루어 어쩌면 이렇게
돌부리를 울리는 물소리도
곁들일 수 있을 것을.
춘니(春泥)
김종길
여자대학은 크림빛 건물이었다.
구두창에 붙는 진흙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알맞게 숨이 차는 언덕길 끝은
파릇한 보리밭 -
어디서 연식(軟式) 정구(庭球)의
흰 공 퉁기는 소리가 나고 있었다.
뻐꾸기가 울기엔 아직 철이 일렀지만
언덕 위에선,
신입생들이 노고지리처럼 재잘거리고 있었다.
* 춘니 : 얼었던 땅이 봄에 녹아서 된 진창
팔순이 되는 해에
김종길
연암이 말하듯 나이를 더해도
달라지지 않는 건
어릴 적 마음.
어느덧 팔순이라는 데 마음은
아직도 바닷가에서 노는
어린아이 같다.
해가 저무는 줄도 모르고
조개껍질이나 줍고
게 새끼랑 어울리다 보면,
갑자기 거센 파도가 덮쳐와
이 한 몸 나뭇잎인 양
쓸어갈 날 있으련만,
그런 건 아랑곳하지 않고
놀이에만 몰두하는
어린아이.
아직은 잔잔한 바다,
하늘에는 하나둘
별이 돋기 시작한다.
평사리
김종길
1.
포구의 물이 거슬러 강물을 부풀리면
은어 떼 그리움 안고 약속처럼 모여든다.
평사리 너른 들녘에 잔잔한 물결이 일고
치마폭 같은 밭뙈기 뜯어먹고 살았던
서로 몸 부비며 피붙이로 살았던
검푸른 노송 두 그루 가족사처럼 서 있다.
2.
언 땅에 서릿발 딛고 잠들어 섰구나
자운영 터뜨리던 추억을 간직한 채
밟혀야 뿌리내리는 튼실한 보리가 되어
켜켜로 쌓인 설움 한마디씩 잘라내며
한눈에 볼 수 없었던 청보리의 꿈들이
대지를 끌어안은 채 노을처럼 타오른다.
풀꽃
김종길
민들레꽃을
30분의 1로 축소하면
저 꽃이 될까.
잔디풀 사이로
가늘게 치밀어 올라
이제 막 피어난 자잘한 풀꽃!
별보다도 작은 꽃둘레건만
별처럼 또렷한 샛노란 꽃잎,
사나흘이면 소멸해 버릴 이름도 없는 저 별은
몇백 몇천 광년의 기약 끝에
드디어 여기
나타났는가.
그 가늘디 가는 천공의 선율은
적막한 내 뜰을 한껏
설레이게 한다.
핏줄
김종길
수만 년 전
빛, 어둠 넘실거릴 때
어디서
사람의 종자 날아와
모닥불 피우고
짐승처럼 살던 자리
어디 있을 텐데
새끼 낳다 숨진
암컷들의 서리치는 한(恨)
한(恨)의 씨
갈대로 피어
가을마다 하얗게 머리 푼다
설익은 하늘과 땅
여무느라 천둥 번개 치는 밤마다
겁 먹었을 조상들
찬 서리 비바람 속
이어온 피 내림
잘 익은 노을 앞에
사람으로 서 있다
고독한 눈빛 간직한 채.
하회에서
김종길
냇물이 마을을 돌아 흐른다고 하회.
오늘도 그 냇물은 흐르고 있다.
세월도 냇물처럼 흘러만 갔는가?
아니다. 그것은 고가의 이끼 낀 기왓장에 쌓여
오늘은 장마 뒤 따가운 볕에 마르고 있다.
그것은 또 헐리운 집터에 심은
어린 뽕나무 환한 잎새 속에 자라고,
양진당 늙은 종손의 기침소리 속에서 되살아난다.
서애 대감 구택 충효당 뒷뜰,
몇 그루 모과나무 푸른 열매 속에서,
문화재관리국 예산으로 진행 중인
유물전시관 건축공사장에서
그것은 재구성된다.
해가 머물러 있다
김종길
해가 머물러 있다
뜰악과 태와(苔瓦) 마루에 긴 풀이 자랐다.
한 모퉁이에 자근 발자욱이 나 있었다.
풀밭이 내다보였다. 풀밭이 가끔 눕히어지는 쪽이 많았다.
옮아간다는 눈치였다.
아직
해가 머물러 있다.
황락(黃落)
김종길
추분(秋分)이 지나자,
아침저녁은 한결
서늘해지고,
내 뜰 한 귀퉁이
자그마한 연못에서는
연밤이 두어 개 고개 숙이고,
널따란 연잎들이
누렇게 말라
쪼그라든다.
내 뜰의 황락을
눈여겨 살피면서,
나는 문득 쓸쓸해진다.
나 자신이 바로
황락의 처지에
놓여 있질 않은가!
내 뜰엔 눈 내리고
얼음이 얼어도, 다시
봄은 오련만
내 머리에 얹힌 흰 눈은
녹지도 않고, 다시 맞을
봄도 없는 것을!
황사현상(黃砂現象)
김종길
그날 밤 금계랍 같은 눈이 내리던
오한(惡寒)의 땅에
오늘은 발열(發熱)처럼 복사꽃이 핀다.
목이 타는 봄 가뭄,
아 목이 타는 봄 가뭄,
현기증 나는 아지랑이만 일렁거리고.
앓는 대지를 축여줄 봄비는
오지 않은 채,
며칠째 황사(黃砂)만이 자욱이 내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