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美 - 최고의 예술품을 찾아서
담양 소쇄원
청자 참외모양병
인왕제색도
선암사 승선교
하회 병산서원
백제 금동대향로
고구려 무용총 수렵도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안견의 몽유도원도
안동 도산서원 도산서당
단원 풍속도첩
불국사 다보탑과 석가탑
현대 한국의 금속 공예
구례 운조루
고려 수월관음도(일본 대덕사)
종묘
국보 83호 반가사유상
개운사 목조아미타불좌상
담양 소쇄원
가지에 스치는 바람, 잎새에 머문 햇살, 그 한적함과 넉넉함
천득염
원림이란 교외에서 동산과 숲의 자연상태를 그대로 조경삼아 적절한 위치에 정자와 정원을 조성한 곳을 말한다. 조선의 선비들은 산수가 빼어난 곳에 원림을 지어두고 학문과 예술을 즐겼다. 많은 전문가들은 담양의 소쇄원을 한국 최고의 원림으로 꼽아왔다. 큰 암반으로 이루어진 자그마한 계곡에 집이며, 나무며, 바람이며, 햇살이 서로 어울려 기막힌 시각적 아름다움과 청각적 즐거움을 전해주기 때문이다.

눈 내리는 겨울, 좌측에서 바라본 광풍각 모습이다.
전남 담양에 위치한 소쇄원(사적 제304호)은 1530년경에 梁山甫(1503-1557)가 조영한 별서(別墅)원림이다. 별서란 선비들이 세속을 떠나 자연에 귀의하여 은거생활을 하기 위한 곳으로 저택에서 떨어져 산수가 빼어난 장소에 지어진 別邸를 지칭하는 말이다. 원림이란 정원과 혼용해서 사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정원이 주택에서 인위적인 조경작업을 통하여 동산의 분위기를 연출한 것이라면 원림은 교외에서 동산과 숲의 자연상태를 그대로 조경으로 삼으면서 적절한 위치에 집과 정자를 배치한 것이다.
소쇄원을 조영한 양산보는 15세에 조광조를 만나 그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는데, 스승이 기묘사화로 유배당한 후 화순 능주에서 사약을 받고 세상을 뜨자 큰 충격을 받아 벼슬길의 무상함을 깨닫고 고향에 은둔하게 되었다. 이때 양산보의 나이 17세였으니 창암촌의 계곡에 소쇄원을 꾸미게 된 계기가 된 것이다.
소쇄원은 당대 최고의 선비들이 풍광을 관상하며 여유를 즐긴 장소요, 이상을 토로하던 문화 담론의 산실이었다. 김인후를 비롯하여 송순, 정철, 송시열, 기대승 등 최고의 지식인들이 이곳을 드나들며 사유와 만남의 지평을 넓힌 곳이다. 조선시대 선비들에 있어서 수양과 학문뿐 아니라 풍류와 사귐을 통한 선비문화의 형성 또한 중요한 일이었으니 그를 위한 장소인 정자나 별서를 경영하는 일은 그들의 정신세계를 나타내는 산물인 것이다.

소쇄원 제월당 뒷편으로 산 능선이 보인다.
이러한 대표적인 예로서 무등산 원효계곡에는 소쇄원을 비롯하여 식영정, 환벽당, 독수정 등의 정자원림이 있는데 그중에서도 소쇄원은 주거기능을 갖춘 별서로서 한국 최고의 별서원림이라 할 것이다. 양산보에서부터 3대에 걸쳐 조영된 소쇄원에 대한 예전의 모습은 송시열이 그린 그림을 1755년에 板刻한 ‘瀟灑園圖’가 있어 짐작할 수 있었으나 목판자체는 안타깝게 분실되고 말았다. 특히 이 목판화에는 양산보의 사돈인 김인후가 1548년 당시 소쇄원을 보고 쓴 48수의 시제가 새겨져 있으니 이를 ‘소쇄원48영’이라 한다.
그렇다면 소쇄원은 어떻게 구성되어 있으며 우리는 왜 소쇄원을 최고의 원림이라고 칭하는가. 소쇄원은 우선 큰 암반으로 이루어진 계곡과 그 사이를 흘러 떨어지는 물줄기, 수많은 나무와 화초, 몇 단의 축대와 단아한 건물들로 이루어진 아담한 공간으로 인지된다. 그러나 이들 이외에도 ㄱ자로 꺾인 담장과 조그마한 草亭, 계곡을 건너는 나무다리, 물을 흘러가게 하는 홈이 파인 통나무, 네모난 연못 등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것들로 가득하다.
축대 위에 있는 조그마한 초정은 소쇄원에서 가장 오래된 터에 근래에 옛 모습을 본 따 새로이 지은 것이다. 이를 待鳳臺라 한다. 봉황을 기다리는 곳이라 하니 귀한 손님 오기를 기대하는 정겨움이 가득하다.
대봉대 뒤쪽은 담장에 박힌 愛暘壇이란 글씨처럼 따뜻하게 담으로 둘려 쌓여진 마당이다. 부모님의 따뜻한 정을 느끼게 하는 효의 공간으로 겨울에 눈이 내리면 가장 빨리 녹는 따뜻한 곳이다. 애양단을 지나 계곡을 건너려면 조그마한 통나무 하나로 줄타기하듯 지나야 하기 때문에 사람들을 겸손하게 한다. 떨어질까 하여 양반 걸음 위엄을 갖추면서 걸을 수 없다.
통나무 다리 밑으로는 五曲門이라는 글이 새겨진 담장 밑으로 흘러 내려온 물길이 다섯 번 굽이쳐 돌면서 작은 소(沼)를 이루기도 하고 일부는 갈라져 통나무 홈통을 타고 작은 연못으로 내려간다. 한복판에 있는 커다란 바위는 위에서 바둑을 두고 차를 마시며, 거문고를 탈 수 있을 정도로 넓고 여유롭다.
계곡물은 소쇄원의 영역을 둘로 나누어 놓는다. 풍부하지 않지만 면면히 이어져 소쇄원의 생기를 돋우는 생명수가 되고 있다. 조그마한 연못이라 칭하는 조담(槽潭)에서 머무르고 小瀑을 만들어 떨어져 십장폭포를 이룬다. 계곡물은 굽이굽이 오곡류를 이루며 흐르다 떨어지나 일부는 통나무홈통으로 연결되어 두 개의 네모난 연못에 이른다. 이 물은 물풀과 물고기를 키우고, 넘치면 계곡으로 떨어져 조그마한 水車를 돌리기도 하였다.
소쇄원의 사랑채와 같은 光風閣에 이르는 길은 위와 아래로 통한다. 손님이 저 아래 버드나무에 말을 매고 광풍각 아래에 이르러 霽月堂에 있는 주인을 부른다. 광풍각은 온돌방의 따뜻함과 협소함, 마루의 시원함, 작지만 당차고 아담한 공간의 핵심으로 모든 것이 모이고 확산되는 정점이 되는 곳이다. 여기에 앉아서 외부공간을 느끼며 주변을 바라보는 것은 소쇄원의 백미이다.
제월당은 몇 개의 단을 올라 높이 위치하는데 梅臺의 길다란 담장을 따라 자연스럽게 이른다. 제월당은 구들방과 루마루가 있어 안채와 같다. 높은 기단을 오르는 단이 있고 넓지 않은 토방에는 신방돌이 가지런히 놓여있다. 마루 위에 걸린 각종 詩文에는 시간의 흐름이 쌓여 있다.

소쇄원 계곡. 낮게 흐르는 계곡물은 넘실넘실 흐르다 떨어진다.
특히 김인후가 1548년에 지은 소쇄원48영이 돋보인다. 이 시에 등장하는 소재들은 대숲의 바람과 소쩍새 울음, 엷은 그늘과 밝은 달, 그리고 취중에 나오는 시와 노래다. 청각적인 소리, 시각적인 빛과 그늘의 대조, 그리고 관람자의 문학적인 감수성으로 소쇄원의 진가를 포착한 것이다. 소쇄원의 구성과 영역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입구 아래에서부터 뒷산인 옹정봉에 이르기까지 무한히 넓고 가득하나 이를 아는 사람은 드물다.
이처럼 자연한 가운데 있으며 소박하고 개인적인 정서가 농축된 소쇄원에 비하여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는 창덕궁의 후원은 궁궐의 정원답게 다양한 시설들이 있어 호화롭고 다소 인위적이며 세련미가 가득하다. 창덕궁 후원은 금원이라 하였는데 이는 왕실만의 것으로 일반인들의 출입을 금한다는 뜻이었으며, 일제가 일반인들의 출입을 통하여 왕조의 권위를 떨어뜨리고자 창경궁에 동물원을 만들면서 비원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창덕궁의 후원은 부용지, 애련지, 옥류천 등의 물을 중심으로 주변에 수많은 정자와 사계절의 변화를 느낄 수 있는 활엽수가 많이 자라고 있다.
우리 전통원림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물과 나무를 중심으로 자연과 조화를 이룬 것이다. 특히 우리의 연못은 전통적으로 중앙에 둥근섬을 만들었는데 이는 天圓地方의 음양오행설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이에 비하면 중국과 일본은 타원형이거나 굴곡이 많은 모습이다. 규모에 있어서도 우리연못은 중국의 연못처럼 턱없이 넓어서 위압감을 주거나 일본의 것처럼 적고 인공적이어서 답답함을 주지 않는다.
소쇄원은 건물이나 나무, 계곡을 단순히 보고 느끼는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 출렁이는 나뭇가지, 나뭇가지를 스쳐 지나가는 바람소리, 지저귀는 새소리, 떨어져 구르는 낙엽, 계곡을 흐르는 물소리, 가득한 푸르름, 위로 속삭이듯 빛나는 햇빛 등을 비롯하여 자연 속에 녹아난 한적함과 넉넉함, 이러한 아름다움은 결코 하나 둘에 한정되거나 끝나지 않는다.
당대 최고의 시인묵객들이 드나들었던 소쇄원은 시각적 차원을 넘어선 청각적인 정원이며 궁극적으로 시적 감응을 불러일으킬 문학적인 정원이다. 자연의 기운과 인간의 마음이 하나로 합치하는 곳, 그곳을 만들기 위해 동원된 청각과 음영의 효과, 이제는 우리도 문학적인 감수성을 가지고 소쇄원의 건축적 가치를 찾아야 할 것이다.
< 참고 >
소쇄원의 아름다움과 함께 학자들의 찬사를 받은 곳이 창덕궁의 후원이다. 최고의 원림으로는 소쇄원을 꼽았지만 창덕궁 후원 또한 우리 한국의 미를 가장 탁월하게 표현하고 있기 때문에 한국의 정원을 언급할 때 빼놓을 수 없다. 소쇄원보다 먼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1997년)으로 지정되었던 것도 창덕궁 후원의 가치를 더해준다.
15세기 초에 조성된 창덕궁 후원은 13만 5천여평의 넓이로 자리하는데 건물의 위치 등을 고려할 때 부용지 주변, 애련지 주변, 관람정 주변, 옥류천 주변으로 크게 나누어 볼 수 있다. 연못과 그 주변에 방형, 육각형, 다각형, 부채형의 ‘건축기법이 특이하고 기묘한 정자가 여러 동 있으며’ 건축들은 ‘소박하고 꾸밈이 없어 그 주위의 자연 경치와 잘 어울린다’(장경식)는 평가를 받고 있다.

창덕궁 후원. 친자연적인 경향을 띠며 인공적인 요소가 최소화되어 있다.
즉 창덕궁의 후원은 낮은 야산과 골짜기등 본래의 지형적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며 꼭 필요한 곳에만 다양한 연못, 정자, 괴석 등의 인공을 가하고 있지만 주변과 괴리되지 않고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있는 아름다움은 결국 한국인의 전통 미의식과도 맥을 잇고 있다.
한국인의 미의식, 즉 친자연의 경향을 가장 적절하게 표현한 곳으로 ‘인위적인 기교나 정형화된 규칙성 장식, 겉치레 등의 인공적인 요소가 최소화 된’(임석재) 창덕궁 후원을 앞세워도 부족함이 없을 듯하다.
창덕궁 후원은 한국 정원의 典型으로 ‘중국이나 일본에 있는 정원을 만드는 전문 책이 우리나라에 없는 것은 우리나라 정원의 특징을 역으로 증명하는 것’(이수학)이라는 주장도 설득력을 얻는다. 또한 그 역할 면에서 창덕궁의 후원은 ‘왕가의 휴식을 위한 공간만이 아니고 후원조성의 원리상 정사에 집중할 수 있도록 원기회복과 재충전의 공간’(이종호)이었다.
청자참외모양병
“밤이슬 함초롬히 머금은 꽃봉오리”
정양모

▲청자참외모양병, 국보 94호, 높이 22.6㎝ 입지름 8.4㎝ 밑지름 7.4㎝, 12세기, 국립중앙박물관. ⓒ
조형감각과 翡色의 은은한 스밈
이 화병은 조형상 입과 목 부분(상부), 몸체 부분 (중부), 다리 부분(하부) 등 세 부분으로 이루어졌다. 몸체가 참외 모양을 본딴 데서 참외 모양(과형) 화병이라고 한 것이다. 몸체 위의 입과 목은 활짝 핀 나팔꽃같이 생겼으며 몸체 밑의 다리(받침) 부분은 마치 짧은 주름치마를 두른 것 같다. 잎과 목 부위는 달리 생각해보면 참외꽃 같기도 하다. 참외꽃이 예쁘게 피어나면 얼마 있다 꽃과 줄기 사이에 새끼손가락 반쯤이나 될 듯 한 참외가 달렸다가 참외가 조금 자라면 이내 꽃은 떨어지고 만다.
참외꽃이 핀 찰나 표현

참외꽃 ⓒ
나는 이 화병의 잎과 목은 참외꽃이 예쁘게 핀 모습이고 몸체는 물론 참외라고 생각해보기도 한다. 나팔꽃도 참외꽃도 아주 활짝 핀 모습은 조금은 지나쳐서 곧 더 벌어져서 밖으로 쳐지다가 오므라들게 된다. 이 화병의 꽃잎은 꽃이 활짝 핀 바로 그 순간이거나 활짝 피기 바로 전 순간이라고 생각한다. 그 순간은 몇 초 일수도 찰나 일수도 있을 것이다. 이 화병을 만든 사람은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가장 아름다운 그 순간의 모습을 가슴에 품어 숨겨두었다가 이 화병의 꽃잎을 만든 것이다.
도자기는 불의 예술이고 자연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다. 그 자연을 누구보다 사랑하고 깊이 관조하고 그 이치를 깨달아 자연의 순리대로 우리 조상님네는 살았다. 이 화병의 꽃잎도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자연 속에서 순간의 아름다움을 가슴에 담을 수 없었다면 이 세상에 태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목 부분(상부)
청자는 불길에 지극히 민감하다. 불길 속(가마 속) 산소의 함량에 따라 비색청자도 되고 황색 청자도 갈색 청자도 된다. 그뿐 아니라 불길의 온도(가마 내 온도)에 따라 자화가 될 수 있는 적정한 온도일 때는 작가가 원하는 형태가 되지만 불과 10도, 20도, 30도 차이에서 쳐지고 주저앉고 일그러지는 등 바라지 않는 여러 가지 상황이 전개된다.
더구나 이와 같이 화병의 꽃잎이 얇을 경우에는 순간 온도 상승에 따라 처지고 말기 때문에 이와 같이 아름다운 꽃잎을 청자로 만든다는 것은 신기라고 할 수밖에 없고 결국은 바람과 불길이라는 자연에 맡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자연의 순리를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이루어 낼 수 없는 것이다.
아무리 화병의 꽃잎 모양이 아름다워도 꽃잎과 목 부위의 크고 작음이 서로 잘 어우러져야 하고 몸체인 참외 모양의 크기가 적절하여 잎과 목 부위와 또한 잘 어우러져야 하고 다시 주름치마 같은 화병 받침과도 서로 잘 어우러져야 한다. 이 화병은 입과 목 부위와 몸체와 받침 등 각 부위의 높이와 크기 등 비례가 아주 적절하여 서로가 흔연히 어우러져 아름다운 균형미를 발산한다. 그렇다고 여기에 그쳐서는 이 화병이 그렇게 아름답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깨 바로 위의 약간 퍼진 목 밑 부위에서부터 조금씩 줄어들어 목 가운데에 이르러서 다시 점점 퍼지면서 목부위의 중앙에서 약간 좁아졌다가 다시 퍼지면서 꽃잎의 끝에 이르는 선의 유려, 유연함이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아름다운 자태를 들어내고 있다.
이와 같이 곱고 고운 선을 지닌 병의 상부를 참외 모양의 몸체 어깨 위에 사뿐히 얹어 놓았다. 곱고 고운 상부에 비해 참외모양 몸체는 참외골이 깊고 튀어나온 등성이가 힘이 있어 서로가 좋은 대조가 되며 꽃잎 끝에서 어깨에 이르는 선과 참외모양 몸체의 선이 S자형으로 상반되게 이어져서 부드러운 가운데 역동적인 힘이 있다. 이러한 병의 몸체전부를 받치고 있는 주름치마 받침은 곡선의 변화 없이 밖으로 直斜線으로 조금 넓게 퍼져 의젓하고 안정된 자세를 하고 있다.
부드럽지만 맺고 끊음 분명
조금 설명이 긴 듯하지만 이뿐만이 아니다. 한국미술은 친근감 있고 부드럽지만 각 부위의 기·승·전·결의 변화하는 점을 중요시하여 얼른 눈에 보이지 않지만 맺고 끝냄을 중요시한다. 화병이 시작되는 꽃잎은 절묘하며 복부의 중간에 석줄 음각선을 그어 길지 않은 병목 중심에 조금은 지루할 수 있는 시점을 애교 있게 어루만져주고 있다.
목 아래 조금 굵은 한 줄 음각선을 다시 긋고 2~3mm 간격을 두어 그 아래는 참외의 골진 곳과 볼록한 등성이와 마주치면서 양각의 橫帶線이 자리하게 하여 목과 어깨 사이를 자연스럽게 연결해주고 있다. 참외 몸체의 밑 부위도 하부의 주름치마와 마주치면서 여기는 좀 더 의도적으로 양각 橫突帶를 만들어 연결부위를 재미있게 들어내주고 있다.
이러한 표현양식은 자칫 그냥 넘어가서 밋밋할 수 있는 부위에 畵龍點睛의 효과를 나타내었다. 한국미술은 조화미와 균형미의 아름다움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 화병에서 잎과 목부위, 몸체와 하부의 기막힌 어우러짐과 균형미와 곱고 역동적면서 의젓한 선의 흐름에서 한국미의 아름다움을 본다.

몸체 부분(중부)
청자 비색의 아름다움은 또 하나의 생명이다. 이 화병은 고려 인종(1123~1146)의 장릉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해 내려온다. 인종 초에 고려에 온 중국사신 徐兢이 펴낸 宣化奉使 高麗圖經에 의하면 “고려 사람은 푸른 도자기를 비색(翡色)이라고 불렀으며 근년 이래 그 제작이 공교(工巧)해졌으며 색택이 더욱 아름답다(色澤尤佳)”고 하였다. 당시 중국의 汝官窯 청자가 중국인의 자존심이요 지금도 세계인이 그 비색(翡色)의 아름다움을 찬탄하여 마지않는다.
당시 중국의 안목이 높은 큰 학자가 고려청자의 비색을 드높이 평가한 바로 그 시점에 만들어진 명품청자가 바로 이 화병이고 이 화병의 비색이 12세기 전반기를 대표할 수 있는 아름다운 비색이다. 이때의 비색은 안개 넘어 사물을 보듯 하나 유약 밑으로 가는 음각선도 잘 보이지만 완전한 투명도를 지니지 아니한다. 유약에는 빙렬이 거의 없고 크고 작은 기포가 많다. 이 시대 고려청자의 형태와 비색의 아름다움은 고려가사와 같이 은은하고 연연하여 길고 긴 여운이 언제까지나 가슴속에 깊이 스며있게 마련이다.
청자 상감 이전의 소위 순청자를 대표할 수 있는 청자가 이 과형화병이라면 그다음 시대의 청자 상감 시대를 대표할 수 있는 청자는 청자상감운학문매병(간송미술관 소장)을 들 수가 있다.
한층 더 유려해지는 상감청자
이 매병은 작지만 예각이 있고 기품 있는 입 부위 바로 밑에 아주 낮은 목이 있고 바로 여기서부터 넓게 퍼져 내려 풍만한 어깨를 이루고 좀 더 퍼져 내려가 윗 몸체를 이루다가 점점 유연한 선을 이루면서 좁아져 긴 허리가 되다가 허리 중심에서 다시 퍼져 내려 바닥에 이른다. 고려에는 11세기로부터 많은 매병을 만들어냈지만 유려한 선의 흐름을 지닌 고려적인 형태로 세련된 것은 12세기 전반기였다.
이 매병은 12세기 말 13세기 초경의 작품으로 유약은 상감 시기의 밝고 명랑한 비색청자를 대표할 수 있으며 형태 또한 선의 흐름과 변화가 한층 유려하여 상감시기 고려 매병을 대표할 만하다.
이 매병에는 고려청자 문양을 대표할 수 있는 운학문으로 인해 능숙하고 자연스러워 마치 한 떼의 학의 무리가 푸른 하늘에 점점이 흩날리는 구름 사이를 훨훨 나는 것 같다. 청자과형화병은 밤이슬을 함초롬히 머금은 꽃봉오리가 아침 햇살을 받아 갓 피어난 모습이라면 청자상감운학문매병은 한낮까지 햇살을 받아 흐드러지게 피어난 모습일 것이다.
고려미술은 과학이 뒷받침이 되는 뛰어난 기술 수준이 뒷받침하여 이루어질 수 있었다. 그러면서 과학은 뒤에 숨고 비색과 조형의 아름다움만이 우리에게 다가선다. 이 화병이 지니는 각 부위의 흔연한 어우러짐과 각 부위간의 적절한 균형미는 12세기 전반기 바로 그 시대의 조형정신의 산물이고 그 시대의 법도이다. 이미 11세기 초경부터 시작된 이러한 화병류는 처음 각 부위의 비례가 서로 어울리지 않고 꽃잎이 너무 벌어지고 쳐진 것이 있는가하면 목이 좀 가늘고 긴 것도 있고 어깨가 지나치게 과장된 것도 있고 받침이 너무 높거나 낮은 것 등이 있다.
이러한 예들이 12세기에 들어 각 부위의 비례가 적절해지고 서로 절묘한 균형이 이루어져 바로 이 화병에 이른 것이다. 13세기에 이르면 큰 화병이 많아지면서 각 부위가 너무 비대해지는가 하면 또한 각 부위 간의 비례가 서로 맞지 않아 균형이 잡히지 않고 조화를 상실하고 만다. 따라서 이시기에는 이와 같이 각 부위의 비례와 선의 흐름과 비색이 아름다운 예쁘고 잘생긴 화병은 찾아볼 수 없다.
정선의 ‘인왕제색도’
조선 산수화의 開闢 … 만년의 난숙한 기량 발휘
홍선표

인왕제색도 ⓒ
고려 때 북송으로부터 영향을 받고, 조선시대 가장 활발히 그려진 산수화 중에서 미술사가들은 초기의 안견과 후기의 겸재를 ‘최고의 산수화가’로 꼽았다. 안견은 곽휘풍에 영향을 받았으면서도 독창적 화풍을 확립했다는 점에서, 겸재는 진경산수화의 대표작가라는 점에서 그렇다. 이번호에서는 겸재의 산수화를 먼저 짚어보기로 한다.
仙界와 靈地를 상징하는 산악문에서 발생한 산수화는 지형이나 지세를 도상화하는 단계를 거쳐, 자연의 조화경 그림을 보면서 유람하는 문사들의 臥遊物로 가장 성행했다. 문사들의 중세적 감상화인 와유물 산수화는 고전화된 경관을 다룬 정형산수화와 이상적인 실물 경관을 그린 진경산수화로 나눠 볼 수 있다.
정형산수화와 진경산수화는 내셔널리즘과 모더니즘과 같은 근대 이데올로기에 의해 전자를 모화주의와 관념경, 후자를 주체의식과 현실경으로 규정하고 양자를 대립적 관계로 인식해 왔다. 그러나 문사들의 중세적인 문화 관습과 상식으로 보면, 고인을 배우고 조화를 배웠듯이(‘師古人 師造化’), 고전적 조화경인 정형산수화와 실물적 조화경인 진경산수화는 탈속의 古意를 습득하고 이를 직접 실행해 ‘自得’하는 상보적인 관계로 기능한 것이 실상이다. 문인화가와 화원화가 모두 이들 산수화를 겸비해 그리는 것이 하나의 화습이었으며, 당시 동아시아 회화조류의 공통된 현상이었다.
겸재 정선(1676~1759)은 정형산수와 진경산수를 모두 즐겨 그렸으며, 이런 풍조가 조선후기를 유행하는데 선도적 역할을 했다. 특히 그는 17~18세기 동아시아 미술의 조류로 풍미한 서화 애호풍조와, 천기론과 결부된 창생적 창작의 실천과 남종문인화를 정통으로 삼은 신고전주의 화풍을 토대로 조선의 산수를 문사취향의 와유물로서 새롭게 창출하고 ‘동국산수화의 개벽자’로 화명을 날렸다. 정선의 미술사적 명성은 이처럼 조선후기 진경산수화의 대성자로 더욱 각별하며, 그 중에서도 ‘인왕제색도’가 최고의 명작으로 손꼽힌다.
비온 후의 인왕산 경관을 제재로 삼은 ‘인왕제색도’는 정선이 76세 되던 해인 영조 27년(1751) 윤 5월 하순에 그린 것이다. 진경산수화에서 정선은 중장년 시절을 통해 주로 금강산을 비롯한 강원도와 영남 지방의 명승명소지를 다루다가, 노년을 보내게 되는 인왕산 바로 아래 동네 순화방 인왕곡(지금의 옥인동 군인아파트 자리)으로 이사한 후인, 60대 무렵부터 거주지 주위의 한양 경관을 그리면서 자신의 화풍 확립과 함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인왕제색도’의 창작 경위에 대해서는, 제작일이 이병연의 타계일 며칠 전이었다는데 의거해, 수십년간 시화를 교환하며 친숙했던 그와의 평생 추억을 함축하고 쾌유를 비는 마음으로 평상시 함께 노닐며 내려다보던 북악산 줄기에 올라, 그 아래 쪽 육상궁 뒤편에 있던 이병연의 제택을 바라보며 그린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그림은 정선이 자신의 제택인 인곡정사와 그 주봉인 인왕산의 경관을 기념비적 와유물로 남기기 위해 제작한 것이 아닌가 싶다. 정선은 1745년 1월, 5년여 간의 양천현령직에서 물러나온 후, 그동안 그림값 등으로 벌어 모은 재부로 솟을대문을 세우는 등, 명문가 부럽지 않게 증축한 다음, 퇴계 이황과 우암 송시열의 필적이 있는 외조부댁 소장의 ‘주자서절요서’를 물려받은 것을 계기로, 이황과 송시열의 유거처와 함께 외조부의 ‘풍계유택’과 자신의 ‘인곡정사’를 그려 합철함으로써 그동안 벌열가에 비해 차별되어 온 명문의식을 드높게 표명한 바 있다. ‘인왕제색도’는 그 연장선상에서 속진을 씻어내듯 비가 쏟아진 후 인왕산의 우렁찬 기세와 비안개 걷히는 인곡정사의 유현한 운치를 그린 것으로 생각된다.
정선은 이와 같이 자신의 세거지 경관을 주문화가 아닌 문인화 본령의 자오자족적 차원에서 다양한 기법과 절정에 이른 만년의 난숙한 기량을 마음껏 발휘해 불후의 명작을 탄생시키게 된다. 세거지 주변은 내려다 본 시각으로, 인왕산은 그곳에서 올려다 본 ‘상관하찰’의 역상적 방식으로 경관을 포착함으로써, 과학적인 일점투시법과 달리 보는 사람에게 그린 사람이 받은 감흥을 더 생생하게 전해준다. 구도는 명말청초 소운종의 ‘태평산수도’에 수록된 명산도와 원림도들처럼 화면 가득히 배치함으로써 천하의 조화경으로 이상화해 나타내려 했다. 그리고 한 덩어리의 거대한 흰색 화강암으로 이뤄진 주봉을 중량감 넘치는 逆色의 짙은 먹으로 힘차게 칠해 내려, 비에 씻겨 말쑥해진 상태로 압도할 듯 눈앞에 성큼 다가선 괴량감의 감동을 극명하게 살려냈다. 소운종도 즐겨 사용한 넓고 긴 붓자국의 장쾌한 묵면들이 경관의 박진감과 생동감을 더 해주며, 부드럽고 성글게 구사된 남종문인화법의 피마준과 태점이 조화로운 대비를 이루고 있다. 산허리를 감도는 비안개를 여백으로 처리하고, 세거지 주변의 송림을 정선 특유의 물기 배인 횡점들과 함께 빠른 편필로 나타낸 다음, 담묵으로 번지듯 우려서 유현한 정취와 운치를 자아냈다. 대상물의 자연적 취세와 교감하고 이를 우주적 생성화육의 원리인 음양의 조화로 구현한 창생적 창작의 극치로, 자연의 경치를 인위가 아닌 천취처럼 그리려 했던 작가의 창작관을 여실히 보여준다.
‘인왕제색도’에서 달성한 정선의 예술적 성과는 당시 창생적 창작론의 주창자였던 이하곤의 평처럼, 기존의 한가지 방식으로만 거의 상투적으로 획일적이고 좁은 안목에 의해 그리던 조선 산수화의 병폐와 누습을, 여러 명승지를 두루 유람하면서 무덤을 이룰 만큼 많은 붓을 사용해 직접 그 기세를 실사하며 체득한 ‘自家胸中成法(자신의 가슴 속에 이룩한 법)’으로 바로잡은 ‘조선 산수화의 개벽’과 같은 것이었다.
자연에서의 실물 상태가 아닌 이상적으로 정형화된 산수의 이미지를 조합해 그림으로 해서 대상물과 자아 간의 직접적인 교류가 배제된 채 형식과 기교에 치중한 조선초기의 명작 ‘몽유도원도’와는 창작관을 달리하는 것이다. 정선의 동네 지기로 이웃해 살던 문인화가 조영석도 그가 인왕산 아래 유거하면서 산을 마주 대하고 준법과 필묵법 등을 자신의 가슴으로 직접 터득하여 그린 것이라고 증언한 바 있다.
‘인왕제색도’는 이와 같이 ‘熟覽’과 ‘凝神’에 의한 물아일체의 경지를, 새로운 동아시아 문예사조로서 대두된 반모의적 차원에서 직접 실천한 창생적 창작물로서의 의의를 지닌다. 그리고 ‘形神不相理’의 원리에 의해 형상을 닮게 묘사해 그 신을 옮겨내는 形似的 傳神法의 가장 뛰어난 사례로도 각별하다. 정선의 성공에는 ‘通變’론에 의거해 ‘古’의 인습화와 세속화를 회복하기 위해 고전의 습득에 의한 ‘통’과 자득적 체득에 의한 ‘변’을 통해 ‘古’를 계승하고 ‘今’을 타개하려는 의도도 작용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인왕제색도’는 정선의 이러한 국제조류 수용에 대한 전진적 자세와 역사적 성찰력이 자존적인 명문의식과 결부되어 집약된 그의 작가 생애 최종의 득의작이라 하겠다.
中·日 산수화와의 비교
충실한 묘사 vs. 사생풍 산수
문인화가들에 의해 주도된 16~18세기의 동아시아 진경산수화는 산천을 탐승하고 주유하는 유람풍조와 雅會풍조를 배경으로 성행했으며, 소주 중심으로 활동한 명대 오파의 紀遊圖와 원림도에서 확산된 것이다. 그리고 명말 동기창이 제창한 ‘고전을 배우고 자연을 배우라’는 화론에 따라 진경을 그리는 화습이 보편화되기 시작했고, 명말청초의 명산 및 명승도와 원림도 판화집으로 출판돼 조선과 일본 등지로 널리 보급됐다.
정선의 ‘인왕제색도’는 남종문인파의 필묵법으로 승경의 객관적 지형성을 특색에 맞게 재현해 와유물로 삼았던 오파 이후의 명청대 진경산수화풍을 재창출한 것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안휘파 문인화가 소운종이 고향인 태평부의 全圖를 비롯해 이백과 황정견, 미불 등 명사들과도 관련있는 명승명소처 42곳을 그리고, 각공이 판각해 1648년 출간한 ‘태평산수도’와 비교해 볼 수 있다.

소운종 작, 吳波亭圖, 판화 부분, 1648. ⓒ
두 작품 모두 작가 자신의 세거지 경관을 그린 것이지만, ‘태평산수도’가 외지로 떠나는 관리의 와유를 위한 주문화이고, ‘인왕제색도’는 자존적 명문의식에 의한 자오자족의 소산이란 점에서 다르다. ‘인왕제색도’와 구도상으로 ‘신산도’, ‘북원도’ 등이 비슷하고, 짙은 먹을 묻힌 붓을 옆으로 뉘어 쓸듯이 암석 표면에 가한 쇄찰법의 묵면은 ‘태평산수전도’와 ‘경산도’, ‘황망산도’ 등과 닮았다. ‘오파정도’는 구도와 검은색 묵면으로 표면 처리한 것이 ‘인왕제색도’와 공통점이 많으며. 산허리를 감은 띠구름을 동기창의 전례에 따라 여백으로 나타낸 것도 유사하다. 그러나 ‘오파정도’가 묵면의 준찰을 음영으로 사용해 경물의 명암을 나타내는 등, 시각적 이미지 재현을 위한 묘사적 기능에 치중한 데 비해, ‘인왕제색도’에서는 바위 전체를 塗抹해 자연에서의 취세와 존재적 특질의 조형감을 보여준다.

시바 코간 작, 후지산도, 종이에 수묵담채, 18세기 후반. ⓒ
일본에서도 진경산수화의 前史는 헤이안시대까지 올라가지만, 富士山을 비롯한 명승과 명소지를 남종문인화풍과 결합해 그리는 풍조는 에도시대부터였다. 진경도나 탐승도, 경관도 등의 화목명으로 지칭되는 에도시대의 진경산수화는 소묘풍의 필치로 대상물의 인상을 간일하게 포착해 나타내는 寫意風과 서양화의 투시원근법을 사용해 시각적 이미지 재현에 충실한 사생풍으로 나뉘어 전개됐다. 문인화가 이케노 다이가는 동기창이 제창한대로 명산·명승지를 두루 유람하면서 경관에서 받은 특색을 南畵的이고 逸格的 인 필묵법을 통해 사의풍 진경산수화를 대성시켰으며, 蘭學者이며 양풍화가인 시바 코간은 사생풍 진경산수화를 통해 일본 근세 풍경화를 정립시킨 바 있다.
‘인왕제색도’와 마찬가지로 실물 산의 거대한 괴량감을 다룬 ‘富士山圖’는 화면 하단에 배치한 전원의 정취와 대조를 이루며 구성했다는 점에서도 서로 공통된다. 그러나 ‘부사산도’는 그리는 사람의 고정된 위치와 시점에 의해 경관을 포착하고, 선원근법과 공기원근법, 명암법과 같은 서양의 과학적 기법을 사용했다는 점이 다르다.
선암사 승선교
반원형 아치 물에 비춰 큰 원으로·· 도가적 의미 스며든 신비스런 정취
천득염

승선교의 모습. 반원형의 아치가 물에 비친 반원과 어울려 큰 원을 이룬다. 특히 물에 투영되어 비친 강선루와 주변풍관은 한 폭의 그림 같다.
선암사의 경내에 들어서면 주산인 조계산의 맑은 溪流를 건너지르는 2기의 아름다운 아치형 虹霓石橋가 있는데 그 중 더 크고 위에 있는 것을 흔히 昇仙橋라고 한다. 전형적인 단칸 홍예교인 승선교는 1707년(숙종 33) 건립된 후 1713년에 중수된 것으로 보물 제400호로 지정되어 있다. 우리나라의 돌다리를 소개하자면 누구나 주저함 없이 승선교를 제일로 지칭할 정도로 신비스러운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예로부터 우리나라 산지 사찰의 주 통로에는 양쪽 계곡을 연결하는 무지개 모양의 홍교가 설립된 경우가 많다. 佛家에서 말하는 다리는 聖界와 俗界를 구분하는 단절된 경계로 禁川을 건너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물이 깨끗함을 뜻하기 때문에 속계의 때 묻은 마음을 버리고 성스러운 곳으로 진입하게 되는 연결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다리이기도 하다.
승주지역의 평균기온은 14도이고, 강수량은 1천5백 밀리미터 정도인데 선암사 일대는 해발고도가 높아 주변의 평지보다 강수량이 많은 지역이다. 선암사를 출입하려면 반드시 계류를 건너야 하며 지형적인 특성상 안전한 다리가 필요하였을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과 같은 홍예교를 가설하려면 재력과 기술력을 필요로 하는 일이라서 처음에는 간단한 나무다리를 가설하였을 것이고 나중에 가서야 바로 이러한 돌다리를 시설하였을 것이다.
승선교가 가설된 곳은 하천의 폭이 10미터 내외로 좁은 지역이다. 하천바닥은 화강암계의 편마암석이 바닥을 이루고 그 위에 직경 8.8미터인 반원형의 육중한 홍교가 올라가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여천 흥국사의 홍교가 11.3미터로 가장 넓은데, 수나라 때 중국 하북지방에 건립된 安濟橋는 단칸 홍교임에도 불구하고 37.4미터나 된다. 승선교의 위를 걷는 다리 폭은 약 3.6미터로 두 사람이 스쳐지나가기에 충분하다. 또한 아치를 이루는 홍예돌은 40개이며 내부의 돌까지 포함하여 전체 석재의 수는 1백40개 정도가 된다.
한국에는 많은 홍예다리가 있지만 이처럼 넓은 아치를 튼 예가 없다. 基底部에는 별다른 시설물 없이 자연암반을 이용하여 육중한 무게를 떠받치고 있다. 자연암반이므로 큰 홍수가 나도 끄떡없이 견고한 천혜의 기초를 이룬다. 홍예는 지면에 면한 하부부터 원형으로 내쌓기하여 완전한 반원형을 이룬다. 결구방법은 잘 다듬은 장대석을 종으로 1단씩 빈틈없이 밀접시켜 스스로 무게를 지탱할 수 있도록 하였다. 기저부에는 큰 돌로 쌓고 위로 오르면서 꼭대기 부분에는 다소 작은 돌들을 끼워 넣었다. 정교한 홍예석 주변 양측면에는 잡석들을 쌓아 양쪽 언덕과 연결시켰으며 윗면에는 흙을 덮어 평평하도록 하였다. 중국의 홍예다리는 사람들이 걸어 다니는 윗면이 경사가 급하나 우리나라의 홍예다리는 평평하게 하여 걷기에 편리함을 우선하였다. 특히 중심돌(要石) 아래는 조그마한 석재를 빼내어 신기한 모습을 이루고 있으며 기하학적으로 무게중심을 이룬다. 돌출시킨 석재는 용머리인데 재앙을 막고자 하는 邪施設이다. 이는 우선 다리의 안전을 기하는 동시에 고통의 세계에서 부처의 세계로 건너는 모든 중생들을 보호, 수용하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왜 승선교를 우리나라 최고의 돌다리로 치는가. 아마 돌로 이룬 인공적 곡선미가 주변의 경승과 어울려 아름다울 뿐 아니라 거친 석재를 조립하여 이룬 형태와 결구미가 빼어나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밑을 흐르다가 잠시 머무는 계곡 물이 돌다리와 함께 어울려 조형의 아름다움을 더하고 있다. 실제로는 반원형의 아치이지만 물에 비친 또 하나의 반원이 합치되어 가득한 원을 이룬다. 반원이기 때문에 부족한 것이 아니라 두 개의 반원이 하나의 원으로 가득 찬 것이다. 특히 계곡물에 투영되어 비친 강선루와 주변의 경관이 함께 어우러져 더욱 아름답다.
흔히 불가에서는 건축물의 이름에 仙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데, 이곳 승선교 부근은 강선루와 함께 마치 신선이 드나들었던 공간인양 도가적 의미가 스며있는 것 같은 이색적인 공간이다. 특히 선녀가 오른다는 승선교의 이름이 뜻하는 것처럼 속계에서 선계로 오르는 신비로운 정취를 자아낸다.

홍예를 중심으로 좌우의 계곡 기슭까지 사이사이에 자연 그대로의 냇돌을 사용하여 석벽을 쌓아 막았다.
선암사에서 승선교의 영역은 가람에 있어 일종의 과정적 공간이다. 속계에서 성계에 이르는 과정적 공간은 힘이 들고 멀기 마련이다. 그러나 부처님을 뵈러 가는 길은 즐거울수록 좋다. 더욱이 누구나 쉽게 개울을 건너도록 다리를 놓는 일은 불교에서 보시의 하나인 越川功德이라 해서 큰일을 한 것으로 손꼽았다. 다리 건설에 참여한 자들의 공력을 그들의 공덕으로 여겼을 것이고 튼튼하고 아름다운 돌다리는 결국 이러한 그들의 마음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우리나라 다리의 가설주체는 국가나 민간, 승려들이었다. 그러나 승선교에서와 같이 특히 고도의 기술을 필요로 하는 사찰의 돌다리 건설에 승려들이 많이 참여하였다. 그래서 이 다리가설에 참여하여 수고한 분들의 공덕을 잊지 않고 기리기 위하여 승교 북쪽에 橋碑를 마련하여 두고 있다.
우리나라의 교량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三國史記에 平壤州大橋(414)와 熊津橋(498)를 가설한 것이다. 현존하는 유구로서는 오래된 것은 신라 경덕왕 10년(751)에 가설된 불국사의 청운교와 백운교, 그리고 연화교와 칠보교가 있다. 계곡을 건너는 홍예교는 아니지만 우리나라에서 승선교에 버금가는 유명한 돌다리로서 불국사의 청운교와 백운교를 말하는 경우가 많다. 불국사는 산지사찰로 높은 축대로 만들어진 대지 위에 佛殿들이 자리한다. 특히 높은 축대를 오르기 위해서 좌우에 2단의 돌계단을 두었는데 동쪽의 것이 청운교와 백운교, 서쪽의 것이 연화교와 칠보교이다. 청운교와 백운교는 대웅전을 향하는 자하문과 연결된 다리로 홍예형식을 하고 있으며, 세속의 세계와 부처의 세계를 이어주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
이 다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돌다리로 신라시대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매우 귀중한 유구이다. 특히, 무지개 모양의 홍예로 이루어진 다리 아래 부분은 우리나라 홍예교의 원류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계단을 다리형식으로 만든 특이한 구조를 하고 있는데, 다소 급한 계단은 45도 정도의 경사를 이루고 있으며 양쪽에 손스침을 두어 난간을 대신하였고, 중간에 한번 쉬어가는 계단참을 두었다. 다리 아래는 무지개 모양의 아치로 만들어 직선으로 하였을 때 딱딱하거나 무거운 느낌을 부드럽고 생동감 있게 풀어주고 있다. 특히 다리가 있는 석축 아래쪽으로 예전에는 연못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도 계단 양쪽에 물이 떨어지도록 만들어 놓은 석루조가 남아 있다.
홍예교는 세계 여러 나라에 보편적으로 분포되어 있고 더욱이 상당수가 현존하고 있는 아름다운 역사적 조형물이다. 또한 지역에 따라 형태나 기술력의 차이가 클 뿐만 아니라 양식적으로 규모와 균형감에 있어 다른 구조물에 없는 특이한 경관을 지닌 구조물이다. 우리나라에는 홍예교가 그다지 많지 않지만 모두들 역학적 구조미와 형태적 조형미에서 절제된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선암사 승선교는 크기와 형태, 구조미, 주변경관과의 어움림 등에서 가장 아름다운 걸작품이라고 할 것이다.
하회 병산서원
건물과 공간의 빼어난 어울림
김봉렬
하회 병산서원은 뛰어난 조형미를 갖춘 건축물은 없지만 건물과 건물, 자연과 건물 사이에 빚어지는 텅 빈 공간들의 어우러짐으로 인해 독특한 아름다움을 구현하고 있다. 김봉렬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는 병산서원의 소박한 건축물들이 "뛰어난 집합적 관계를 성취했다"고 지적하면서 "명품이 없는 명작, 건물이 없는 건축"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1980년대까지 병산서원은 낯선 존재였다. 그저 시골 한구석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옛집의 하나로 여겨졌을 뿐이다. 이른바 신미존치(辛未存置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서 제외되어 살아남은) 서원 가운데 하나였고, 전시 재상으로 임진란을 극복해낸 류성룡 (柳成龍 1542 ~1607)의 기념서원 정도로 알려져 있었다. 그나마 그 역사적 가치를 인정해 문화재로 지정한 때가 1978년으로, 같은 고장의 도산서원이 1963년에 문화재로 지정된 것에 비해 한참 뒤늦은 때였다.
그러나 1990년경부터 일군의 건축가들은 병산서원을 가장 뛰어난 한국의 건축유산으로 꼽기 시작하여 지금은 일반인들에게도 꽤 알려진 서원건축이 되었다. 현재 사적 260호로 지정된 병산서원에는 뛰어난 문화재도, 명품이라 부를 건축물도 없다. 서원의 핵심 건물이라 할 수 있는 강당(입교당) 건물은 1930년대 다시 지어져 연대기적 가치도 낮고, 배흘림기둥을 가진 부석사 무량수전 같이 특별한 조형미도 찾아볼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고의 건축으로 꼽히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때 620여 개소에 달했던 서원은 1864년 서원철폐령으로 전국에 47개만이 남게 되었고, 그중에는 제사만 지냈던 사우들이 포함되어 정통 서원은 불과 27개소였다. 그나마 일제강점기와 한국 전쟁기를 거치면서 대부분의 원형이 훼손되어, 조선시대의 온전한 모습이 보존된 곳은 10여 개소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수의 현존 서원들은 예학에 근거한 건축적 규범을 따르면서도 서로 다른 개성들을 가진 창조적 건축들이다. 화이부동(和而不同)이라고 할까? 230여개 소에 이르는 관학인 현존 향교들은 4~5개 건축형식으로 환원될 정도로 획일화된 양상을 보이지만, 10여개 현존 서원건축들은 다양하면서도 뛰어난 건축적 가치들을 전하고 있다.
병산서원은 교육 부분과 제사 부분, 여타의 작업부분으로 이루어졌다. 교육 부분은 강의동인 강당,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 도서관이라 할 장서각으로 구성된다. 제사 부분에는 사당과 제사 음식을 준비하는 전사청이 있다. 서원 유생들의 음식과 잡일을 수발하는 서원노들의 작업건물이 동편에 부속되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병산서원을 병산서원답게 만들고 있는 누각인 만대루가 서원의 입구에 자리 잡았다. 건물의 종류와 기능들은 여타 서원들과 다를 바 없는 건축적 규범을 따르고 있다.
집합적 건축의 아름다움
이들 건물들은 규모가 크지도 않고 정교하거나 화려하지 않으며, 다른 서원의 건물들과 비교해도 결코 우수하다고 할 수 없다. 병산서원의 어떤 건물도 그 흔한 문화재로 지정되지 못했다는 사실만 봐도 그 실상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병산서원은 현존 서원건축을 대표할 뿐 아니라, 모든 건축을 통 틀어도 조선시대 최고의 명작으로 꼽히곤 한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뛰어난 건축이란 곧 뛰어난 건물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 옥시모론적 언술을 이해해야만 병산서원, 나아가 한국건축의 본질과 가치에 접근할 수 있다.
병산서원의 가치는 그 여러 동의 건물들이 얽혀지면서 만들어 내는 관계에 있다. 강당과 동서재가 만들어내는 텅 빈 마당, 강당마당과 사당 앞마당의 절묘한 이어짐, 누각 밑을 통과하면서 나타나는 신선한 광경 등이 그것들이다. 다시 말해서 건물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건물과 건물 사이에 형성된 비어있는 외부공간들에 참된 가치가 있다는 말이다.
마치 사군자 그림의 진면목이 유려한 선으로 그려진 난초의 잎 모양보다, 그 선들로 분할되는 흰 여백에 주목할 때 문인화의 참된 가치를 읽을 수 있는 것과 같다. 이러한 점에서 한국의 건축은 건물이 아니라 건물들이 형성하는 관계이며, 그러한 건축을 집합적 건축이라 부르기로 하자.
물론 개개 건물의 형태적 우수함도 중요하지만, 특정 건물이 지나치게 두드러진다면 오히려 다른 건물과의 관계성을 약화시킬 수가 있다. 병산서원의 소박한 건물들은 뛰어난 집합적 관계를 이루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러한 집합적 건축의 성취는 비단 병산서원만의 자산은 아니다. 도산서원이나 옥산서원, 통도사나 해인사, 창덕궁이나 종묘 등 한국의 명작들이 모두 도달한 보편적 성취이다.
안동지방의 동쪽에 자리 잡은 이황의 기념서원인 도산서원은 여러모로 병산서원와 비교된다. 류성룡은 이황의 수제자이며 정치적 계승자이기도 하다. 두 서원건축은 일단 형식적 유사점이 많다. 서원의 두 중심인 강당과 사당의 관계는 서원건축의 형식을 규정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대부분의 서원들은 사당이 강당의 바로 뒤편에 자리 잡아 매우 엄격한 중심축을 형성한다.
그러나 유독 이 두 서원만은 사당이 강당의 동쪽 뒤편으로 치우쳐 앉아있다. 피상적으로 본다면 비대칭적이고 예학적인 서원의 형식으로 어색할 것 같지만, 사당 앞의 독립된 제사마당이 강당 앞 교육용 마당과 유기적으로 연속되는 자연스러운 구성이다. 초기 성리학자들의 융통성이랄까, 또는 실용적인 여유랄까 하는 것이 두 서원에 스며있다.
그러나 도산서원의 건물들은 강당과 사당이 보물로 지정될 정도로 정교하고 견고하게 지어졌다. 투박할 정도로 질박한 병산서원의 건물들과는 다른 격식이며, 아마도 퇴계에 대한 범국가적 차원의 지원의 결과가 아닐까? 또한 경관을 대하는 태도도 다르다. 두 서원 모두 강변 경승지에 자리 잡았지만, 도산서원의 내부에서는 강변 풍경이나 멀리 전개되는 들과 산의 모습이 들어오지 않는다. 오히려 오붓하게 감싸여진 지형 속에서 오로지 학문에만 열중하는 퇴계와 제자들의 면학 분위기가 돋보인다.
자연을 수평 분할하는 누각기둥
그러나 병산서원은 한 단계 높은 차원의 집합적 관계를 이룬다. 강당의 대청에 앉아 밖을 내다보자. 양 옆의 동재와 서재는 안마당을 감싸면서 마당의 공간적 방향성을 앞으로 몰아간다. 그 앞에는 기둥과 지붕만 있는 이상한 건물 -만대루라는 기다란 누각이 걸쳐진다. 만대루는 앞에 펼쳐지는 자연의 풍경을 상하 3단으로 분할한다. 지붕 위로는 멀리 앞산의 절벽이 병풍처럼 펼쳐지고 -그래서 앞산의 이름이 병산이다- 누각 아래층으로는 사람들이 들락거리는 입구가 나타난다. 그리고 그 사이, 누각 마루와 지붕 사이로는 조용히 흐르는 낙동강이 가득히 담겨진다. 누각은 7칸의 긴 건물이다. 누각의 기둥들은 다시 낙동강을 수평적으로 분할하여 7폭의 병풍이 된다.
이 광경은 우연히 얻어진 장면이 아니다. 강당 대청 가운데는 서원의 최고 어른인 원장이 앉는 자리이다. 원장과 교수진들은 이 자리에 앉아 학생들을 바라본다. 자연스레 교수진의 시선은 만대루를 향하게 되고, 텅 빈 누각을 통해 낙동강과 앞 병산의 풍경을 보게 된다. 반면 학생들은 이런 경치를 대할 각도가 없다. 늘 학생들은 원장이 계시는 입교당을 쳐다봐야지 바깥의 경치를 보게 되면 한 눈 파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성리학적 세계는 군자-소인, 스승-제자, 장-유의 수직적 위계로 이루어진 종법(從法)적 질서의 세계이다. 제자들을 스승을 바라보며, 스승들은 그들보다 더 우위에 있는 자연을 바라본다. 늘 자신들보다 한 단계 위에 있는 존재들을 향하는 시각 구조이다.
만대루는 건물 자체로서는 별 의미를 갖지 못한다. 이 누각은 감상용 건물이 아니다. 그러나 만대루는 건물과 자연,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대할 나위 없이 아름답게 맺어주는 매개체이다. 작품의 액자와 같은 건물 -액자는 단순하고 간단할수록 좋다. 액자가 크고 화려하면 그 안에 담기는 작품이 죽는다. 카메라의 파인더와 같은 건물. 인간을 둘러싼 자연 환경은 무한하지만, 만대루를 통해 선택된 자연은 의미가 부여된 특별한 풍경이 된다.
건축은 공간을 연출하는 예술이라 한다. 공간은 눈에 보이는 실체가 아니다. 건물과 건물 사이, 기둥과 기둥 사이에 존재하는 여백과 같은 존재다. 그 비어있는 공간 속에서 인간의 생활이 가능하고, 그 공간을 통해 다른 풍경을 담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비록 작고 초라한 정자이지만, 그 위에 오르면 비어있는 벽을 통해 온 우주가 담겨진다.” 소식이 쓴 함허정기(涵虛亭記)와 같이 비어있기 때문에 채울 수 있다는 역설을 병산서원은 더없이 친절하게 이해시켜 준다. 이런 점에서 병산서원은 건축가들의 눈과 글로써 다시 태어난 작품이 명품이 없는 명작, 건물이 없는 건축이다.
백제금동대향로
백제 관념세계의 이토록 화려한 표현
신광섭

백제금동대향로, 국보287호, 높이 64㎝, 백제 7세기, 국립부여박물관.
금·은·동·철·청동 등 다양한 재료를 사용한 금속공예는 삼국시대에 들어와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도 삼국시대 후반 제작된 백제의 ‘백제금동대향로’와 통일신라시기 제작된 ‘성덕대왕신종’이 가장 뛰어난 것으로 꼽히고 있다. 이번호에서는 백제의 종교와 사상을 함축적으로 표현한 ‘백제금동대향로’의 아름다움을 짚어보았다. / 편집자주
다양하고 신비로운 圖像 상상력 자극
백제금동대향로는 사비시대 백제왕들의 무덤인 능산리 고분군에 인접한 백제 능사의 工房址에서 출토됐다. 전체 높이 61.8cm, 최대지름 19cm로 향로 뚜껑과 몸체 두 부분으로 이뤄졌으나 원래는 봉황·뚜껑·몸체·받침으로 만들어 조합한 것이다.

뚜껑 정상부에선 한 마리의 봉황(높이 12cm)이 턱밑에 여의주를 끼고 날개를 활짝 펴 막 비상하려 한다. 꼬리는 길게 약간 치켜 올라갔으면서 부드럽다. 뚜껑 아래에는 5단의 三山形 산악문양 띠로 장식되어 있다. 삼산의 외곽에는 集線文을 음각했고, 맨 윗 단에는 다섯 명의 奏樂神仙이 있다. 악기를 반주하는 이들은 5악사로 불리는데, 阮咸, 縱笛, 排簫, 玄琴, 북 등 5개 악기가 실감 나게 연주되고 있다. 완함, 종적, 배소는 서역에서 전해지는 악기로 보이며, 거문고는 고구려, 북은 남방악기에서 연원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악기는 연기비암사계유명아미타삼존석상(국보 제106호), 고구려 안악3호분, 장천1호분, 무용총, 집안 오회분 4·5호묘에도 등장해 그 기원을 짐작케 한다.
그 아래에는 다섯 개의 산을 두었고, 산꼭대기마다 신선의 음악을 감상하는 듯한 춤추는 기러기들이 있어 한폭의 아름다운 歌舞像을 이룬다. 5악사와 더불어 뱀을 물고 있는 짐승 등 상상의 동물, 호랑이, 코끼리, 원숭이, 멧돼지 등 현실세계의 동물 42마리, 주변인물 12명이 74곳의 봉우리와 계곡에 변화무쌍하게 표현돼있어 자세히 볼 수록 그 신비한 세계로 빠져들어간다.
머리는 봉황, 다리는 용
봉황은 聖人의 탄생과 임금이 치세를 잘해 태평성대를 이룰 때 출현하는 상서로운 새이다. 天鳥, 瑞鳥, 神鳥로 여겨져 온 이 봉황이 출현할 때는 뭇 새들의 영접을 받으며 내려오는데 이 때, 아름다운 음악으로 불리는 鳳鳴은 5음의 묘음으로서 주악신선으로 상징화 했다. 봉황의 턱밑 여의주 바로 아래에는 2개의 구멍이, 5악의 뒤쪽에는 5개씩 두 줄로 10개의 구멍이 있어 향 연기를 자연스럽게 피어오를 수 있게 했다. 실제로 대향로에서 피어나는 연기를 보면 動的인 자태로 그 아름다움이 배가된다.
향로 뚜껑에 있는 12명의 인물은 말을 탄 2명을 제하고는 발아래까지 내려오는 도포를 입고 있다. 그 중에서 폭포아래 머리를 감고 있는 인물이 눈에 띄는데 그는 산천의식을 준비하고 있는 듯하다. 말 탄 이 중 한 명은 후방을 향해 활을 당기는 듯 날렵한 몸동작을 보여주며 다른 한 명은 투구와 갑옷을 착용했고, 말은 안장과 각종 장식구로 꾸며졌다. 이런 기마인물상은 고구려 고분벽화와 신라·가야 토기의 것과 흡사하다. 또한 상상의 세계에서나 볼 수 있는 인간 얼굴에 새의 몸이나 짐승의 몸을 하고 있는 평화스런 모습들이 눈에 띄는데, 선계의 신선을 묘사한 것이다.
뚜껑에는 또 악귀를 막기 위한 포수도 있고, 여섯 종류의 신령이 깃든 식물이 있다. 뿐만 아니라, 길상, 서기의 상징으로 표현한 博山무늬가 있는데 박산무늬 테두리는 화염무늬로 장식했다. 산봉우리 사이사이에는 바위가 있는데, 2~4개가 중첩되어 깎아지른 듯한 험준한 형상을 나타내 문양들이 수직으로 쏟아져내리는 듯 향로의 맵시있는 몸체와 연결된다.
마치 활짝 피어난 연꽃인 듯

향로의 몸체인 爐身은 반구형 대접모양으로 삼단의 연꽃잎으로 덮여 있어 활짝 피어난 연꽃을 연상케 한다. 연꽃잎과 그 사이사이 여백에 27마리의 짐승과 두 명의 인물상이 있다. 그 중 한 명은 무예를 하는 듯한 동작이라 흥미로운데 이는 무용총과 안악1호분 벽화에서 보이는 인물과 유사하다. 27마리의 짐승 중에는 날개와 긴 꼬리를 가진 동물과 날개달린 물고기도 있다. 받침대는 몸체의 연꽃 밑부분을 입으로 문 채 하늘로 치솟듯 고개를 쳐들어 떠받들고 있는 한 마리 용으로 표현됐다. 한쪽 팔은 치켜들고 세 다리와 꼬리로서 표현된 용의 자태는 환상적이며 생동감 있다. 용은 마치 승천하는 듯한 모습인데 주변이 화염·물결·구름모양의 갈기, 연화문등으로 장식돼 분위기를 더한다. 용의 뿔은 두 갈래로 끝이 고사리모양으로 말려있으며 날카로운 이빨, 벼슬, 갈기는 고구려 집안 오회분에 표현된 용의 모습과 흡사하다.

금동대향로는 삼국시대나 그 주변문화에서 찾기 힘든 균제미와 다양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온갖 물상으로 인해 단연 압도적 걸작이라 하겠다. 단조로운 향로 받침 기둥을 용의 머리와 몸체로 대체한 것이나 다리 하나를 밖으로 돌출시켜 역동성을 표현한 것은 자칫 단조로울 수 있는 조형에 변화를 준 것으로, 구도상의 안정과 조형미를 추구했다.
이처럼 현존하거나 혹은 상상 속의 다양한 물상이 표현된 백제금동대향로는 출토 이후 고고학, 미술사 분야의 비상한 관심을 끌어 왔다. 특히 향로의 도상에 대한 사상적 배경을 추정하는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는데, 도교적 관점에서 연구한 것이 주목할 만하다.
‘삼국유사’에 보면 도성에는 일산, 오산, 부산의 三山이 있어, 국가가 전성기일 때 각 산에는 神人이 거주하며 조석으로 왕래했다 했고, 삼국시대에는 백제무왕 35년에 궁궐 남쪽에 연못을 파고 20여리에서 물을 끌어 들였으며 연못의 사방언덕에 버드나무를 심고 물 가운데에는 섬을 축조해 方丈仙山을 조성했다고 했다. 방장선산은 영주산·봉래산과 함께 고대인들의 이상향인 삼신산의 하나다. 또한 37년에 무왕은 조정 신료를 거느리고 기암괴석과 기이한 화초가 있어 그림과 같은 백마강의 북쪽 포구에서 성대한 연회를 베풀었으며, 같은 해 궁남의 연못가에 있는 망해루에서 신하들에게 연회를 베풀었다는 기록이 있다. 또 백제 문양전 8종에서 이 향로의 도상들과 일치하는 문양이 보여진다. 이 중 산수산경문전은 삼산형의 산들로 표현됐는데 이는 향로의 몸체와 같고 그 분위기는 향로의 뚜껑 도상과 유사하다. 봉황아래 펼쳐진 산 경치와 주변에 유유히 흐르는 서운과 서기는 향로 뚜껑에 있는 봉황, 그리고 그 주변에 전개된 도상과 의도하는 바가 같다. 대향로에 피운 향연이 피어올라 봉황주변과 뚜껑의 심산유곡으로 흐르는 형상이 산수봉황문에 그대로 나타난다.
‘5’의 상징화로 중국 박산로와 차별화
기존 연구들은 대부분 향로를 중국 박산로와 관련시키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좀 더 신중히 접근할 필요가 있다. 특히 봉황 아래 5개의 산, 5인의 악사를 보자.

삼국사기 온조왕 20년조에 왕이 大壇을 세우고 천지의 제사를 지냈는데 이상한 새가 다섯 마리가 와서 날았다는 기사가 있다. 또 이러한 제천의식과 더불어 백제 임금이 하늘과 5제에 대하여 제사했다는 기록이 있다. 백제가 출자한 부여도 일찍이 ‘5’라는 수의 개념을 기본단위로 하고 있었다. 그래서 백제에서도 도성을 5부, 전국은 5방으로 각각 설정해 통치하였다.
이와 관련해 백제 법왕은 불교와 산악사상은 결합하기 위해 성주사 터에 오함사를 창건하고 북악이라 칭하였다. 이렇게 볼 때 백제는 동·서·남·북에 중을 합하여 국가적으로 5악의 산악숭배사상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 더불어 봉황의 주변에 배치한 3산과 5악은 백제 숭천사상, 산악숭배사상이 강하게 표현되어 있다. 따라서 海中神山의 하나인 방장선산을 도성에 조성하고 그 해중신산을 바라보는 망해정을 건립하고 불로장생의 표상인 여러 신선과 신수, 신목들을 대향로에 표현한 것이다. 요컨대 대향로의 3산과 5악, 산천, 제사는 봉황과 더불어 성군의 출현과 태평성대를 기대하는 백제인들의 이상향의 표현이며 궁극적으로 백제관념세계의 복합적 총체로써 이 향로를 이해해야 할 것 이다.
궁남지, 3산, 숭천사상, 하늘과 5제의 개념, 백제문양전등에서 볼 수 있는 도교는 백제의 새로운 통치 체계를 강화하는 수단으로서 여겨져 무왕대의 국왕권위의 강화 분위기와 맞물려 있어서 향로는 백제 6세기말~7세기 작품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 이다.
이와 같이 발달한 백제의 공예기술은 면면히 이어져 신라에 전해졌고 우리나라 남북국시대 성덕대왕신종이 탄생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 금속공예를 대표하는 문화재로서 ‘성덕대왕신종’(국보 제29호)은 금동대향로와 쌍벽을 이룬다. 금동대향로가 출토하기 전만 해도 성덕대왕신종이야 말로 유일한 대표급 유물이었다. 비록 제작시기에 있어 2백여 년이라는 시간차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공통점과 개별적 특성이 있다. 성덕대왕신종은 현존하는 가장 큰 범종으로 높이 37.5m 지름 2.27m 무게 118.9t이다. 이 종은 신라 경덕왕이 부왕인 성덕왕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제작을 시도하였으나 혜공왕이 771년에 완성하였다.
통일신라의 문화적 역량의 총 집결된 금속공예품으로 규모, 제작기술, 예술적 표현, 음향적 특성에서 한국 전통 종의 대표작이다. 금동대향로 역시 백제인의 사상과 염원을 담은 백제 최고의 걸작으로 백제 금속문화를 대표한다는 공통점이 있고 당시로서는 최고의 금속공예기술이 적용되었을 것이다. 또 금동대향로는 백제 27대 위덕왕이 전장에서 전사한 성왕을 追福하기 위하여 지은 백제능사에서 출토하였다는 점에서 볼 때 모두 父王을 추모하기 위하여 조성한 점에서 그 제작 동기가 같다.
그러나 두 문화재 간에는 명확한 차이점이 있는데, 외형이 다를 뿐 아니라 내적 상징체계가 다르다는 점이다. 성덕대왕신종은 불교적 세계관이 표현된 불교예술품이고 대향로는 불교보다는 백제의 전통사상과 도교적 세계관의 혼합된 백제의 관념체계 그 자체이다. 또 성덕대왕신종은 그 예술적 표현과 함께 오묘한 음향적 특성으로 인하여 청각 예술을 가미한 소리로서 그 가치를 증가시켰다. 반면에 향로는 외연에 베풀어진 시각적 예술성과 향연이 함께 등장함으로써 향로의 停體와 향연이라는 動體가 조화를 이루는 형식이다.
요컨대 향로에 베풀어진 다양한 물상은 백제인의 관념체계를 확실하게 드러낸 걸작으로 앞으로 고구려 고분벽화의 의미와 기능과 비교 검토해야 할 것이다. 특히 향로가 출토한 백제능사는 고구려의 능사개념과 기술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여겨져 고구려문화와의 관련성은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무용총 수렵도
고구려 화공의 빼어난 묘사력 … 設彩法으로 공간감과 속도감 더해
전호태
고대사회에서 수렵은 먹거리를 얻기 위한 단순한 생산활동 이상의 의미와 기능을 지닌 행위였다. 정기적으로 열렸던 고구려의 ‘樂浪會獵’에서 미뤄 짐작할 수 있듯 수렵대회는 군사훈련이었을 뿐 아니라 종교행위이기도 했다. 수렵터의 상황에 대한 사전조사, 몰이꾼과 사냥개를 이용한 짐승몰이, 창을 쓰는 도보수렵, 활에 의존하는 기마수렵, 매를 이용한 매수렵 등이 한꺼번에 이뤄질 때의 수렵은 적진탐색과 정보수집, 전략·전술의 토의 및 수립, 수색, 기마전과 도보백병전의 효과적 배합과 전개, 전략적 전진과 후퇴, 매복, 역공, 다양한 기구를 이용한 攻城 등으로 이뤄지게 마련인 군사작전과 내용상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고대 문헌에 왕과 귀족이 참가하는 田獵기사가 수시로 등장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집안의 무용총 벽화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장면이 수렵도다. 수렵자와 짐승들 사이에 형성되는 수렵터 특유의 쫓고 쫓기는 급박한 흐름이 힘있고 간결한 필치로 잘 표현된 널방 오른벽의 수렵도는 고구려 고분벽화를 대표하는 것 중 하나다.
놀라 달아나는 호랑이와 사슴, 말을 질주시키며 정면을 향해, 혹은 몸을 돌려 활시위를 당기려는 기마인물의 자세는 굵기에 변화를 준 물결무늬 띠를 겹쳐 표현한 산줄기에 의해 한층 더 속도감과 긴장감을 부여받는다.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 불끈거리는 말 다리의 근육, 네 다리를 한껏 앞뒤로 뻗으며 내달리는 짐승들. 강약이 조절된 필치와 짜임새 있는 구성 속에서 짐승과 사람, 산야의 어울림이 크고 생생한 울림이 돼 바깥으로 터져 나오는 듯한 분위기가 화면을 가득 채운다.
현대인의 눈에 익숙한 단일 시점 중심의 원근법, 사물의 크기에 맞춘 비례표현 등이 무시됐다고 지적될 수 있으나, 중요시되는 것을 우선적으로 크게 그리던 당시 회화의 일반적 표현기법에 충실했던 결과일 따름이다. 화공의 사물묘사 능력이나 기법의 한계로 말미암은 것은 아니다. 화면 상단에 배치됐으면서도 한쌍의 자색 사슴이 호랑이보다 크게 그려지고, 두 마리의 사슴이 달아나는 방향과 엇갈리는 방향으로 말을 달리면서 몸을 돌려 활을 겨누는 인물이 다른 수렵자들과 별 차이없는 크기로 묘사된 것도 화면 안에서 이들이 지니는 의미가 유별난 까닭이다. 두 마리 사슴은 뒤이을 제의의 희생제물로 바쳐질 것이라는 점에서 이 수렵에서 얻어질 어떤 노획물보다도 귀중하며, 이들 짐승을 직접 사냥하는 인물은 머리에 쓴 절풍 위의 많은 깃털 장식에서도 드러나듯이 수렵터에서도 가장 고귀한 존재일 뿐 아니라 제의의 주관자로 예정됐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활시위를 당기거나 수렵자의 활을 피해 달아나는 짐승들의 자세와 표정이 사실적이고 정확하다 못해 생생한 데에서 고구려 화공의 빼어난 묘사력을 읽어낼 수 있다. 고구려 고분벽화의 수렵도 가운데 무용총 벽화의 수렵도에 특별히 세인의 관심이 집중되는 것도 이런 까닭이다.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수렵도는 무용총 외에도 안악1호분을 비롯해 덕흥리벽화분, 약수리벽화분, 감신총, 용강대묘, 동암리벽화분, 대안리1호분, 수렵총, 장천1호분, 삼실총, 마선구1호분, 통구12호분 등 다수의 생활풍속계 고분벽화에서 발견된다. 수렵장면이 고분벽화의 제재로 선호됐음을 알 수 있다. 고분벽화 속 수렵도는 구성과 기법이 매우 다채로워 고구려에서 행해지던 수렵의 종류와 방법, 수렵 대상 등을 파악하게 할 뿐 아니라, 시기별, 지역별 회화적 동향을 짚어내는 데도 큰 도움을 준다. 장천1호분 수렵도 속의 매수렵 부분은 안악1호분 및 집안 삼실총 매수렵 장면과 함께 현재까지 전하는 매수렵의 가장 오랜 표현사례에 속한다.
덕흥리 벽화고분에서 수렵도는 다양한 별자리 및 하늘세계의 존재들과 한 공간에 표현돼 고구려에서 수렵이 지니고 있던 종교, 신앙적 측면을 잘 드러낸다. 약수리벽화분의 수렵도는 산봉우리 사이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내며 짐승들을 넓은 들판으로 몰아내는 데에 열중하는 몰이꾼들을 묘사해 고구려에서 행해지던 몰이수렵의 실체를 잘 보여준다.

무용총 수렵도가 이뤄낸 독특한 미적 세계는 유사한 구성·내용을 보이는 덕흥리 벽화고분의 수렵도와 대비할 때 더 잘 드러난다. 무용총 수렵도가 벽면의 대부분을 화면으로 삼으면서 표현대상을 제한해 화면에서 일정한 역할과 효과를 자아내도록 배치함으로써 전체 구도를 간결하면서 짜임새 있게 한 것과 달리 덕흥리 벽화고분에선 천장고임 하단부의 좁고 긴 면을 화면으로 삼아 표현대상들이 천상의 존재들과 별다른 경계를 이루지 않은 상태로 등장하게 함으로써 수렵도가 천상세계 표현의 일부처럼 여겨지게 했다. 수렵터 특유의 분위기를 자아낼 여지를 극히 좁혀버린 것이다(위 그림).
덕흥리 벽화고분 수렵도에 묘사된 판지를 오려붙인 듯한 산줄기, 고사리순처럼 표현된 산봉우리의 나무는 산줄기 사이를 내달리는 기마수렵꾼들의 공간적 배경으로서의 의미를 충분히 살려내지 못한다. 이에 비해 보는 사람에게서 멀어짐에 따라 白-赤-黃의 차례로 채색하는 고대 設彩法의 원리를 바탕으로 가장 가까운 산은 흰색, 그 뒤의 산들은 붉은색, 먼 산은 노란색을 바탕색으로 한 데에 더해 물결무늬 띠 겹침으로 내부를 묘사한 무용총 수렵도의 산줄기는 수렵 배경으로서의 공간감에 속도감을 더하는 효과를 자아낸다. 활시위를 당기는 덕흥리의 수렵꾼의 자세는 수렵터에서의 정확한 관찰을 바탕으로 묘사됐지만 가늘고 부드러운 선 흐름은 수렵터의 긴박감을 드러내기에는 오히려 방해가 된다. 무용총 수렵도 수렵꾼과 말의 표현에 적용된 굵고 강한 필선이 수렵터 특유의 긴장된 분위기를 느끼게 하는 점과 비교된다. 수렵터의 말들도 덕흥리에서는 몸을 뒤로 틀면서 활시위를 당기는 수렵꾼의 자세를 본받아 앞으로 내달리면서 머리를 틀어 뒤를 돌아보도록 묘사됨으로써 수렵터의 실제 상황과 차이를 드러낸다. 튼튼한 다리와 발달된 근육을 지닌 것으로 그려진 무용총 벽화의 말들과 상체가 비대하고 다리가 가는 덕흥리 벽화고분 수렵도의 말들도 서로 대비가 된다.
5세기 전반으로 편년되는 무용총의 수렵도는 5세기 전반까지도 고구려에서는 새로운 예술장르로 여겨지던 고분벽화에 모습을 드러낸 고구려식 회화의 걸작 가운데 하나다. 내용과 구도, 기법상 408년경 제작된 덕흥리벽화분 수렵도에 고구려식 이해와 문화전통, 종교관념을 더해 만들어낸 고구려표 수렵도라고 할 수 있다. 무용총 벽화의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얼굴선이 깔끔하고 이목구비가 또렷한 고구려인 특유의 얼굴을 지녔으며, 왼쪽 여밈과 가장자리 을 특징으로 하는 고구려인 고유의 옷차림을 했다. 자연스러우면서도 강하게 뻗어나가는 필선, 제한된 표현대상 중심으로 화면을 짜임새 있게 구성하는 방식은 중국회화의 영향을 느끼게 하는 평양, 남포, 안악지역 고분벽화 수렵도에서는 쉽게 찾아지지 않는다. 5세기 내내 고구려의 집안과 평양지역 고분벽화에 여러 차례 모습을 드러내는 수렵도에서 무용총 벽화에서와 같은 짜임새와 기법, 분위기는 다시 발견하기 어렵다는 사실에서 무용총 수렵도가 지니는 미술사적 위치를 재확인할 수 있다.
부석사 무량수전
날아갈 듯 상쾌한 눈맛 … 놀라운 황금비율
김동현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에 자리한 명찰 부석사는 건축가들 사이에서는 한국 전통 건축의 특성을 가장 잘 나타내며 우수 전통건축의 첫 번째로 손꼽히는 작품이다. 그러나 부석사 여러 건물 중에서도 최절정에 달한 건물은 무량수전이다. 현존하는 우리나라 목조건축 중 두 번째의 오랜 것으로 14세기보다 앞선 시대의 양식이나 전형을 보여주는 가장 아름다운 건물임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전체 구조를 보면 앞면 5칸(18.75m), 옆면 3칸(11.57m)으로 측면 대 전면비율이 1 대 1.62의 황금비율을 나타내고 있어 놀랍다. 건물은 가구식 석기단 위에 세워졌고 기둥 머리에는 주심포식(기둥 위에만 공포를 얹은 양식) 공포를 얹어 지붕 하중을 받고 있는데 그 모습이 역삼각형을 이루고 있어 마치 꽃이 피어오르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래서 삼국시대에는 공포를 ‘花斗牙’라고 불렀던 것 같다. 지붕은 날렵한 팔작지붕 모양이다. 건물의 전면관 비례를 보면 기단 밑에서 처마까지 그리고 처마에서 용마루 윗선까지의 비례가 1 대 1로 되어 있어 입면관에서 느끼는 가장 안정된 비율이며, 지붕만을 보면 내림마루에서 귀마루로 꺾이는 변절점이 지붕 전체 높이의 2분의 1 지점이어서 이 역시 안정감을 준다. 여기에 기둥의 귀솟음, 안쏠림 기법은 다른 건축이 따를 수 없는 점이다.
텅 빈 공중에 선을 조각해 넣은 것 같은 이러한 공간적 안목 속에서 완성된 팔작지붕의 자태는 지극한 아취미를 자아내기 마련이다. 인적이 끊어지는 겨울 입구에서 이 잘생긴 이마가 新雪에 곱게 싸여있는 모습을 볼 때면 “호젓하고 스산하기” 이를 데 없다가도, 봄날 지붕 위로 날아온 풀씨가 꽃이라도 틔울 때는 곱게 나이 먹은 여인네가 외출 단장을 한 것처럼 주변의 적막이 화사해지니 이 무슨 시간의 作亂인가. 이리 보고 저리 보고, 멀리서 보나 가까이서 돌아보나 단정하고 날아갈 것 같은 아취는 천년 세월이 빗겨준 이 자분자분한 지붕에서 나온 것이 틀림없다.
혜곡은 무량수전을 일컬어 “꼭 갖출 것만을 갖춘 필요미”라며 지붕 추녀의 곡선과 그 기둥이 주는 조화, 문창살 하나 문지방 하나에도 나타나 있는 비례의 상쾌함이 이를 데 없다고 감탄한 바 있다. 또한 전체적인 느낌으로 봐서도 “근시안적인 신경질이나 거드름 없이 이 대자연 속에 이렇게 아늑하고도 눈맛이 시원한 시야를 터줄 줄 아는 한국인”이라며 그 아름다움의 뜻을 몇 번이나 자문자답하곤 했다.
무량수전의 묘미는 내부 설계에 대한 관찰과 이해를 통해 몇 번이나 새롭게 거듭난다. 전각문을 통해 건물 내부로 들어서면 아미타부처님이 건물 중앙에 자리하지 않고 서쪽에 안치되어 동쪽을 응시하고 있다. 이 또한 무량수전 내부공간의 의미 있는 발상이다. 이러한 전각은 마곡사 대광보전, 불갑사 대웅전, 고산사 대웅전 등에서도 보이지만 여백으로 남아있는 공간구성과 처리, 그리고 건물과의 조화라는 측면에서 무량수전에 비견할 수 없다. 내부에 배열된 열주는 서쪽에 모신 아미타여래상을 한층 더 장엄하고 깊이감 있게 만들었고 열주와 열주 사이의 주칸 크기의 1.62배 크기가 건물의 내부 높이로 되어 있어 이 역시 황금분할로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내부의 공간은 천정을 별도로 설치하지 않고 소위 연등천정으로 구조 전체를 보이도록 처리하였는데, 이는 구조재를 그대로 의장재화 할 수 있다는 공장으로서의 당당한 자신감을 보여준다.
이러한 기법은 고려시대의 건물에서 많이 볼 수 있어 당시의 대목들의 기술 수준을 가늠하기에 어렵지 않다. 현대건축에서도 의장을 위한 의장재보다 구조재이면서 의장재 역할도 겸하게 하는 기법이 최상의 기술이라고 말들을 하는데 이러한 기법이 당시에 이미 크게 주목 받았던 기법이 아니었나 생각하게 된다.
部材의 디테일에서 보면 현존하지 않는 앞선 시대 건물의 건축양식을 추정할 수 있는 부분들이 보여 건물의 조형미도 조형미이지만 한국목조건축의 뿌리를 찾는 중요한 요소들을 이 건물이 내포하고 있어 더욱 흥미로우며, 현존한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천만다행으로 여겨진다.
그 중요한 요소가 공포부재인 遮(고건축 구조의 柱頭[기둥머리] 또는 小[받침] 위에 도리[서까래를 받치기 위하여 기둥 위에 건너지르는 나무]와 평행방향으로 얹힌 짤막한 공포부재의 한 가지), 退樑머리의 조각문양에 보인다. 이 세부조각은 그 모양이 소의 혀 모양과 같다고 하여 ‘쇠서’(牛舌)라 부르는 부재인데 그 모양을 자세히 검토하면 불국사의 범영루 밑 석주에서 보이는 운문과 통하고, 시대를 좀 더 거슬러 올라가면 일본의 법륭사 금당이나 5중탑에서 보이는 雲形 첨차 모양을 연상케 한다. 우리가 쇠서라 하는 문양은 그 원조가 구름문양이며 고려시대에 들어와서 쇠서모양으로 퇴화한다. 그리고 이 문양은 수덕사 대웅전을 거쳐 조선시대의 무위사 극락전, 그리고 그 이후 익공이라는 한국건축에서만 보이는 독특한 건축조각으로 발전하게 된다. 따라서 무량수전은 구름문양이 익공식으로 전환하는 기준 위치에 있어 그 가치가 배가된다.
무량수전은 부석사 전체의 구조 속에서 살펴보면 안목의 뛰어남을 더 알게 된다. 伽藍(중이 기거하면서 불도를 닦는 곳)의 배치내용을 보면 산지가람이면서 종심형 공간구조를 이루었고, 축을 따라 입구에서 안쪽으로 들어가면 차차 높아지면서 공간의 분할이 이뤄지는데 제1공간에서 제4공간(일주문→사천왕문→범영로→안양로→무량수전)으로 이어지는 과정이 한국사찰 배치의 기본구성 요건으로의 특징이라는 四聖諦 苦集滅道로 되어있다. 그리고 이 구성은 축을 일직선축이 아닌 소위 절선축으로 축을 꺾어 건물들의 좌향이 일정하지 않아, 다른 사찰과 비교해 볼 때 이것이 부석사의 가장 큰 특징이라 말할 수 있다. 일직선축으로 된 건물들의 배치에서는 앞 건물에 가려서 뒷 건물이 보이지 않으나 절선축에 따른 건물 배치는 진입으로부터도 종국에 있는 건물까지, 그리고 종국의 건물에서 진입 방향으로 비스타(Vista) 기법의 전형과 같은 모습을 보여준다. 이 기법은 사실상 이 사찰을 한층 더 돋보이게 하는 요인이다. 반대로 각 건물들의 위치에서 전망하면 시원스럽게 앞이 트여 넓고 먼 전경이 한눈에 들어와 시선장애가 없다. 이러한 건물배치의 의도가 한 공장의 힘으로 이루어졌는지 아니면 사상가에 의해 계획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하여간 그 절묘함을 필설로 담기 어려울 뿐이다.
부석사의 창건은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전하는 내용에 따르면 통일신라시대인 676년(문무왕 16년) 2월, 의상대사가 문무왕의 뜻을 받들어 창건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지금의 모습이 그 당시의 모습은 아니고, 그 이후 경문왕대(861~874)에 신림(의상의 손제자)大德의 제자들인 법융, 진수, 순응, 질응 등 많은 인재들이 배출되면서 부석사 화엄종이 크게 중흥되었고 더불어 국가로부터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큰 규모의 사찰로 변모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현재 남아있는 대석단을 비롯한 여러 석물들이 그 당시의 것으로 보인다. 또한 고려시대에는 원융국사가 주석하였고 그의 비석이 남아있어 부석사의 변천을 알 수 있으며 고려 말에는 진각국사 원응이 이곳에 머물면서 현재의 무량수전과 조사당을 중건하였다. 조선시대의 부석사는 여러 차례의 화재와 중수가 있었음을 알 수 있고 무량수전과 조사당을 제외한 건물들의 건립연대도 중수기를 통해 파악할 수 있다. 또한 조선시대의 여러 시문들이 발견되어 당대의 부석사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근·현대에 들어와서는 무량수전, 조사당이 1916년에 해체수리가 이뤄지고 1977년부터 1980년까지는 전체 寺域에 대한 정화 중창공사가 이뤄져 일주문, 천왕문, 숭당 등이 새로 세워졌다.
안견의 몽유도원도
네 개의 景群 꿰는 독특한 구도 … 道家적 사상의 뿌리 구현
안휘준

안견 作 몽유도원도, 38.6×106.2cm, 견본담채, 1447년, 일본 天理대 중앙도서관 ⓒ

몽유도원도 왼쪽 부분 ⓒ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대표적인 화가 세 명만 꼽으라고 하면 신라의 率居, 고려의 李寧, 조선왕조의 安堅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들 三大家 중에서 유일하게 작품이 남아있는 인물이 안견이고 또 그를 대표하는 단 하나의 眞作이 ‘몽유도원도’이다. 따라서 ‘몽유도원도’가 지닌 역사적 의의와 회화사적 가치는 말할 수 없이 크다고 하겠다.
첫째로 ‘몽유도원도’는 詩·書·畵의 세 가지 예술이 어우러진 일종의 종합적 미술이며 우리나라 회화사상 최고의 기념비적인 걸작품이라는 점을 꼽지 않을 수 없다. 잘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이 작품은 안견이 1447년 4월 20일(음력)에 안평대군의 요청을 받아 그리기 시작해 3일 만에 완성한 그림으로 여기에는 안평대군의 제찬과 제시, 신숙주, 이개, 하연, 송처관, 김담, 고득종, 강석덕, 정인지, 박연, 김종서, 이적, 최항, 박팽년, 윤자운, 이예, 이현로, 서거정, 성삼문, 김수온, 천봉(만우), 최수 등 21명의 당대 명사들의 시문이 각기 자필로 쓰여져 있다. 즉 안견의 그림, 안평대군의 글씨, 20여 명의 대표적 문인들의 시문과 글씨가 함께 담겨져 있는 것이다. 안견은 당대 최고의 산수화가이고 안평대군은 중국에까지 필명을 날리던 그 시대 제일의 서예가였으며 찬시를 쓴 21명의 인물들 역시 대부분 일급의 명사들이다. 그 시대 시·서·화의 최고봉들이 어깨를 견주듯 참여해 만들어낸 작품인 것이다. 이러한 예를 현재 남아있는 우리나라의 문화재들 중에서 달리 찾아볼 수가 없다.

안평대군의 발문 ⓒ
둘째로 ‘몽유도원도’는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안견의 유일한 진작이며 우리나라 최고의 산수화라는 점이다. 안견은 수많은 작품을 남겼음이 이런저런 기록들에 의해 확인되나 현존하는 진작은 ‘몽유도원도’ 뿐이다. 안견이 평생의 정력을 다해 그렸다는 ‘靑山白雲圖’도, 안평대군이 젊은 시절에 모았던 30여 점의 작품들도 모두 없어지고 전해지지 않는다. 오직 몇 점의 傳稱作들이 알려져 있으나 진작으로 보기 어렵다. 그것들 대부분이 안견보다 후대의 것이거나 다른 사람의 것으로 추정된다. 국립중앙박물관의 ‘四時八景圖’가 화풍이나 제작연대로 보아 비교적 안견의 산수화풍에 핍진하여 크게 참고가 될 뿐이다.
셋째로 ‘몽유도원도’는 그것을 낳은 세종대 문화와 예술의 경향을 다른 어느 예술작품보다도 잘 드러낸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특히 도가적 측면과 고전주의적 성향이 주목된다. 그림에 곁들여진 안평대군의 글에서도 간취되듯이 ‘몽유도원도’는 도연명의 ‘桃花源記’에 그 사상적 토대를 두어 도가적 이상향의 세계를 담고 있다. 국초부터 강력한 억불숭유 정책을 펼치던 당시의 상황을 염두에 두면 이는 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국가의 통치와 국민의 통합을 위해 강성의 성리학적 숭유정책이 질서정연한 지배이념으로 확립되었던 그 시대의 물밑으로는 개인적 사유의 자유로움을 중시하는 도가사상이 단단히 뿌리를 내리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즉 표면적으로는 성리학적 통치이념과 도덕규범에 집단적으로 매여 살면서 내면적으로는 그것으로부터 탈피하여 개인적이고 자유분방한 사유의 세계를 추구하고 노니는 이중적 측면이 병립하였던 것이다. 억불숭유정책이 끈덕지게 영향을 미치던 유교적 조선시대 내내 도가적 측면이 강한 산수화가 가장 발달했던 것은 이러한 배경 하에서 이해된다. ‘몽유도원도’는 그 대표적 구현체인 것이다. 이와 함께 인간이나 동물보다 자연을 경외로운 생명체로 보아 크고 장엄하게 그리는 중국 五代말부터 북송의 초기에 걸쳐 유행했던 巨碑派的 경향이 엿보이는 것은 세종대의 문화를 지배하던 고전주의적 경향을 배경에 깔고 있었기 때문이라 하겠다.

몽유도원도 중간 부분 ⓒ
넷째로 무엇보다도 ‘몽유도원도’를 값지게 하는 것은 이 작품 자체가 보여주는 화풍상의 특징이라 하겠다. 우선 구성과 구도가 특이하다. 현실세계의 야산과 도원의 세계로 이어지는 바위산이 갈라지는 왼쪽 하단부에서 이야기가 시작되어 오른쪽 상단부로 가상의 대각선을 따라 전개되는 구성은 한·중·일 삼국의 회화를 통 털어 유일하다. 통상적으로는 오른쪽으로부터 왼편으로 횡적인 전개를 보여주는 것이 관례이다. 또한 왼편으로부터 오른편쪽으로 평상세계, 도원의 바깥 입구부분, 도원의 안쪽 입구, 널찍한 도원 등 4개 부분이 따로따로 떨어진 듯 이어져 있는 점도 독특하다. 왼쪽 하단부에서 시작해 오른쪽 상단부에서 절정을 이루는 대각선적 전개가 개별적으로 분리된 듯한 네 개의 景群을 꿰어주고 있는 것이다. 즉 유기적 연결보다는 시각적 연계가 화면 전체를 조화롭게 이어주고 있음이 괄목할만하다. 高遠, 平遠, 深遠의 3원이 높은 산, 넓은 도원, 깊숙한 골짜기 등에 갖추어져 있음도 엿보인다.
‘몽유도원도’의 네 개 경군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오른편의 도원임에 틀림없다. 본래 도잠의 ‘도화원기’에 적혀 있는 도원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넓은 곳인데, 일정한 화면에 이를 효율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사방을 산으로 둘러쌀 경우 내부 공간이 협소하게 보이고, 반대로 내부 공간을 넓게 표현할 경우 사방의 산이 작아 보이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안견은 이 두 가지 조건을 아주 효율적으로 충족시켰다. 도원을 비탈져 보이게 표현하고, 눈이 제일 먼저 닿게 되는 근경의 산들의 높이를 대폭 낮추거나 틔워서 광활한 시각적 효과를 높인 점이 그 해결방안으로 돋보인다. 안견의 창의성과 명석함이 드러나는 표현이기도 하다.

몽유도원도 오른쪽 부분 ⓒ
얹히고 받힌 기이한 형태의 암산들과 그것들이 자아내는 환상적인 분위기, 오른쪽 상단에 고드름처럼 매어달린 바위들이 시사하는 方壺와도 같은 도가적 신선세계로서의 도원의 모습, 특정한 준법을 구사함이 없이 붓을 잇대어 담묵으로만 표현한 바위와 산들이 드러내는 담백한 수묵화의 전형적 양상, 담묵의 수묵화적 표현과 대조를 보이는 청색, 녹색, 홍색, 금분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복사꽃들과 그것들 주변에 감도는 아득한 煙雲 등도 간과할 수 없는 특징들이다. 특히 복사꽃은 확대경으로 보면 표현의 정확함과 섬세함, 색채와 분위기의 영롱함에서 감탄을 자아낸다.
총체적으로 보면, ‘몽유도원도’는 실재하는 實景을 그린 실경산수화나 진경산수화가 아니라, 안평대군이 꿈에서 본 도원의 모습을 듣고 상상해서 그린 상상화 또는 일종의 이념산수화라고 할 수 있다. 화풍 상으로는 북송대에 형성된 郭熙派 화풍의 영향을 수용하여 창출된 것으로 흔히 얘기하는 北宗畵로 분류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조선 초기 안견의 이 ‘몽유도원도’는 조선후기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와 잘 대비된다. 먼저 안견이 조선 초기를 상징하고 정선은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거장이며, 그들이 그린 ‘몽유도원도’와 ‘인왕제색도’는 그 두 거장들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다. ‘몽유도원도’가 북종화를 바탕으로 한 도가적·이념적 산수화의 세계를 구현한 반면에 ‘인왕제색도는 남종화풍을 수용하여 특정한 勝景인 서울의 인왕산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진경산수화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뜻을 담아 그리는 寫意畵와 자연경관 등 사물의 형태를 그려내는 사실화의 세계가 대비되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안견의 ‘몽유도원도’에서도 왼편에 보이는 중부지방 특유의 야산의 모습에서처럼 사실적이고 실경적인 요소가 엿보이고 정선의 ‘인왕제색도’에서도 비실경적이고 이념적인 남종화의 측면이 엿보이는 것은 흥미롭고 참고할만하다. 두 가지 회화세계는 전체적으로는 달라도 부분적으로는 겹치는 바가 있음을 잘 보여준다.
도산서원 도산서당
절제되고 검소한 자연미
김지민
단촐한 맛배지붕의 공부방

도산서원 아래쪽에서 동쪽을 바라보면 조그마하고 단촐하게 자리 잡은 도산서당이 보인다. 도산서당은 퇴계의 자연관, 건축관, 학문적 이상을 엿볼 수 있는 건축물이다.
陶山書堂은 도산서원 내의 아래쪽 동쪽 편에 있는 작은 건물로 규모로 보나 자리로 보나 경내에서 그리 크게 눈에 들어오는 집은 아니다. 하지만 이 집은 退溪 李滉(1501~1570)의 높은 인격과 학문 세계를 엿 볼 수 있는, 그리고 도산서원의 토대가 된 의미 있는 건물이다.
현존하는 수많은 서원 중 한국 서원의 대명사로, 한국 서원의 메카로 꼽을 수 있는 서원이 있다면 우리는 주저함 없이 경북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에 위치한 陶山書院을 들 것이다. 그러한 까닭은 바로 이 서원의 중심에 퇴계선생이 있기 때문이다. 1973년 안동댐 건설로 인해 이제 강이 호수가 되고 서원으로 오르던 옛길도 사라졌지만 지금도 서원의 깊은 역사는 주변의 아름다운 풍광만큼 변함이 없다.
퇴계가 70세로 생을 마감한 후 그의 제자 및 유림들이 3년상을 치르고 바로 선생의 배움터였던 서당 뒤편에 땅을 고르고 사당과 강당을 지은 것이 바로 도산서원이다. 이때가 선조 7년(1574)이고 바로 다음 해에 賜額을 받았다.
이처럼 빨리 서원이 세워진 예는 없었다. 보통 당시 주향자가 세상을 뜬 후 몇 십년 후에나 가능했던 일을 생각하면 크게 비교가 된다. 예로 남계서원의 경우는 鄭汝昌 사후 48년 후인 1552년에, 옥산서원은 李彦迪 사후 19년이 지난 1572년에, 도동서원은 金宏弼 사후 1백1년이 지난 1605년에 건립됐다. 당시 후학들의 생각에는 퇴계선생의 학풍을 잇는데 한시라도 늦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잘 깨달았던 것 같이 보인다. 한편 선생이 생전에 서원 보급에 적극적이었던 점도 후학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퇴계는 분명 조선이 낳은 세계적인 대 유학자다. 생활태도 면에서 배운 것을 실천에 옮기는(知行竝進) 자세를 늘 지녔고, 자연을 사랑했으며, 스승으로서의 역할도 대단했다. 서애 유성룡, 한강 정구, 학봉 김성일, 고봉 기대승, 월천 조목도 퇴계 문하의 수제자였으며 이 외 수백 명의 제자들이 그를 따랐다. 여러 면에서 퇴계는 도학적 인격체를 갖춘 조선의 모범 선비상이라 할 수 있다.
16세기 조선의 선비들은 朱子에 대한 숭배열이 최고조에 달했다. 주자가 세운 白鹿洞書院이나 武夷精舍 같은 것이 하나의 모델이 되었다. 즉 사대부들은 살림집과는 별도로 풍광이 좋은 곳에 거처를 마련하여 그곳에서 풍류를 즐기면서 학문도 하고 벗들과 교제를 하는 작은 집을 지었다. 퇴계 역시 그러한 주자의 학문 경영 모습을 따른 것 같이 보인다.

퇴계는 도산서당을 짓기 전 가급적 관직에서 멀리하기를 원했고 틈이나면 고향에 내려와 배움터를 마련하였다. 그 대표적인 예가 46세이던 1546년 11월에 완공한 養眞庵이다. 이 해는 을사사화와 함께 부인 안동권씨가 별세한 매우 슬픈 해였다. 양진암은 兎溪라는 시내의 東庵에 건립하였는데 이때 토계를 자신의 호인 퇴계로 고쳤다.
1548년 48세에는(명종 3년) 다시 조정의 부름을 받고 상경하였으나 일부러 외직을 자청하여 단양군수가 되었다가 풍기군수로 전임되고 1550년 2월에 백운동서원에 소수서원이라는 편액을 명종으로부터 받아 최초의 사액서원으로 만들었다. 다시 퇴직하여 향리에 돌아와 50세에는 자운봉 밑에 서실을 경영하였으나 끝내지 못하고 竹洞으로 옮겼으나 협소하고 계류가 없어 다시 계상으로 옮겨 寒栖庵을 지었다. 율곡이 퇴계를 예방한 것도 이 한서암에 있을 때이다. 당시 초야에서 학문과 수양에 전념하고픈 퇴계는 다음과 같은 시 한 구절을 읊었다.
“身退安愚分 몸이 벼슬에서 물러나 분수대로 편안하나 / 學退憂暮境 학문이 퇴보하여 늙었을 때가 걱정이네. / 溪上始定居 비로소 시내 위에 자리할 곳 마련하니 / 臨流日有省 흐르는 물가에 와서 날마다 반성하네.”
이듬해인 1551년에도 한서암 가까운 계곡에 溪上書堂을 짓고 많은 제자들을 가르쳤다. 그러나 그곳은 계곡 가에 있어 너무 고요하고 적막하여 마음을 넓히기에 적당치 않았을 뿐만 아니라 제자들과 강학하기에 공간적으로 너무 좁았다.
퇴계 나이 57세이던 1557년에 그의 마지막 거처가 된 도산서당 터가 도산 기슭 남쪽에 마련되었다. 그곳은 강과 들이 바라다 보이고 초목이 무성하여 은둔하면서 강학하기에 매우 좋은 곳이었다. 설계는 평면부터 세부 부재 치수까지 직접 퇴계가 하였고 공사는 오래전부터 교류가 있었던 인근 龍壽寺 승려 法蓮과 그의 제자 淨一이 맡았다. 아마 만년의 안식처라는 기대감과 함께 그간의 건축적 경험이 새로운 서당을 짓는데 크게 도움이 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퇴계가 이 집을 짓는데 얼마나 많은 건축적 식견을 가지고 있는지는 그가 조정에서 1558년 7월에 李文樑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이문량은 지중추지사를 지낸 당대 명시인으로 노년을 고향인 퇴계집 근처에서 보냈다.
“… 當을 반드시 정남향으로 잡는 것은 禮를 행하는데 편리하도록 함이고, 齋는 반드시 서쪽 정원을 마주하도록 한 것은 아늑한 정취가 있기 때문이고, 그 나머지 방·부엌·곳집·대문·창호 등도 모두 뜻이 있는 것이니 이 구조가 바뀌어서는 안 될 듯싶습니다. 남쪽 변의 세 칸에 들보와 도리의 길이를 여덟 자로 하고 ….”

도산서당 평면도. 퇴계는 평면부터 세부 부재 치수까지 직접 설계했는데, 편지를 통해 방, 부엌, 곳집, 대문, 창호 등 모든 것에 뜻이 담겨 있다고 적었다.
이 서당은 땅을 구하고 4년여 만인 1560년 11월에 완공되었다. 그리고 다음해인 61세에도 도산서당 서쪽 편에 제자들의 숙소를 마련하였는데 그게 바로 雲精舍이다. 이 집이 퇴계가 지은 마지막 건물이며 건물형태도 ‘工’자형으로 매우 특이하다.
60세 되던 해에 완성한 도산서당은 퇴계가 말년까지 학문처로 삼은 곳으로 퇴계의 자연관, 건축관 그리고 학문적 이상이 모두 응축되어 있는 곳이다. 3칸의 기본구조에 우측으로 익첨 1칸을 덧대는 8평 남짓 정도밖에 안 되는 이 검소한 공간에서 원대한 성리학의 섭리를 밝혀낸 것이다. 3칸 8평 공간이란 일반 백성들이 살았던 민가만도 못한 규모이다.
이 건물을 짓기 전의 퇴계의 관리 경력(풍기군수·성균관 대사성, 홍문관 대제학 등)과 경제력으로 본다면 상당한 규모의 서당건축도 가능했을 것이다. 이러한 면이 바로 퇴계의 큰 가르침이 아닌가 생각한다. 퇴계는 동쪽의 대청 한 칸을 巖棲軒이라 하였고 그가 거처한 중앙의 방 한 칸을 玩樂齋라 하였다.
암서헌이란 “(학문에 대한)자신을 오래도록 가지지 못했다가 이제 바위에 깃들여 조그만 효험이라도 바란다"라는 주희의 雲谷時(自信久未能 巖栖冀微效)에서, 완락재란 역시 주희의 名堂實記(樂而玩之 足以終吾身 而厭不)에 나오는 “좋아서 구경하는 것을 즐기니 족히 여기서 평생토록 지내도 싫지 않겠다”라는 글에서 취해 만든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 서당은 자연에 최소한의 개입만으로 큰 우주를 그려낸 퇴계의 맑고 깨끗한 정신이 서려있는 곳이라 하겠다. 구체적인 서당의 건축적 모습은 다음과 같다.
기단은 자연석을 가공 없이 2벌대로 쌓았다. 초석은 자연석을 사용하였고 그 위에 각주를 세워 납도리와 보를 사괴로 얹혔다. 각주 위로는 반듯하게 곧은 보를 걸고 그 위에 짧은 동자주를 놓은 다음 용마루 도리를 놓았다. 용마루 도리만큼은 장혀 받침이 있는 굴도리를 걸어 주목이 된다. 지붕구조는 본래 맞배지붕이었던 것으로 여겨지나 후에 양측으로 작은 협간을 두면서 이곳에 빗대게 이어놓은 것으로 여겨진다.

대청마루. 퇴계는 대청마루 하나, 방 하나, 부엌 하나 등 최소한의 공간만을 추구했다.
퇴계는 도산서당이 완공된 후 1년쯤 후인 61세 겨울에 다음과 같은 시 한절을 읊어 인생의 노년을 자연과 함께하는 즐거움을 나타냈다.
“大舜親陶樂且安 순 임금은 친히 그릇을 구워 즐겁고도 마음이 편안했고 / 淵明躬稼亦歡顔 도연명은 몸소 농사를 지으니 얼굴 역시 기뻐 보였네. / 聖賢心事吾何得 성현의 마음을 내가 어찌 알겠냐만은 / 白首歸來試考槃 백발이 된 나이에 돌아와서 즐거움을 누려볼까 하노라.”
결론적으로 도산서당의 건축적 의미는 절제되고 검소한 자연미에 있다. 작은 부엌 하나, 방 하나, 대청 하나만을 둔 더 이상 줄일 수 없는 최소한의 공간만을 추구하였고, 구조 또한 흔한 익공식 마저도 배제한 채 민도리식을 고집하였다. 위엄 있는 팔작지붕 대신 단출한 맞배지붕으로 상부를 덮었다. 이 작은 3間집에 진정한 조선 선비의 참뜻이 있는 듯하다. 조선조 유교건축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도산서당이 아닌가 한다.
정신적으로도 퇴계로부터 진정한 삶의 방법, 학문적 자세를 배워야 한다. 퇴계는 비석에 글을 써넣는 묘비를 하지 말고 다만 조그마한 돌에 “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 쓰고 뒷면에는 단지 고향과 世系 등 대강만을 쓰라고 유언을 남기고 70세에 세상을 떠났다. 요즘 호화분묘와 큰 비석을 세우는 자들에게 교훈이 되었으면 한다.
단원풍속도첩
“정신이 법도 가운데에서 자유로이 훨훨 날아다니는 경지”
정병모

일상적인 삶의 모습을 표현한 그림. 우리는 그것을 ‘풍속화’라 부른다. 선사시대 바위그림으로부터 현대미술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삶을 표현하는 행위가 끊임없이 이루어졌다. 시대마다 표현방식이 다르고 유행의 정도가 다를 뿐, 풍속화가 제작되지 않은 시기는 없었다. 풍속화는 어떤 형태로든 간에 앞으로 인류와 운명을 함께 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인간이 살아가는 모습을 표현하는 행위는 본능이기 때문이다.
이른 시기부터 지금까지 그려져 온 풍속화는 시대에 따라 각기 다른 색깔, 각기 다른 모습을 선보였다. 선사시대의 암각화, 고구려 고분벽화, 고려의 수렵도, 조선의 삼강행실도와 경직도, 감로도 등 시대마다 유행한 주제가 다르다. 그 가운데 조선후기에 김홍도, 신윤복, 김득신과 같이 이름만 들어도 쟁쟁한 풍속화가들이 펼친 풍속화의 세계는 한국회화사에서 의미 있는 시대의 동향이다. 이 시기의 풍속화는 궁중뿐만 아니라 민간에까지 폭넓은 사랑을 받았기 때문이다. 조선 초기만 하더라도 대나무그림이 궁중 화원들이 익혀야 할 첫 번째 주제였지만, 조선 후기에는 풍속화가 가장 많이 그려지는 주제로 부각되었다. 또한 18세기 전반 민간의 생활상을 그린 풍속화가 사대부 화가들에 의하여 시작되다가 점차 민간 회화로 자리 잡았다. 더욱이 19세기에는 풍속화가 민화가 함께 발전하면서 민간 회화의 융성기를 맞이했다.
그렇다면 왜 이러한 변화가 일어났는가. 조선후기 풍속화의 유행은 일차적으로 신분구조의 변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 궁중을 비롯한 상류계층에서 하류계층의 삶을 포용해야 할 만큼 그들의 위상이 달라졌고, 이상적인 삶보다 현실적인 삶에 대한 관심이 드높아졌다. 이로 인해 그동안 숨죽여 왔던 민간의 문화가 역사의 전면에 부상하는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조선후기 풍속화를 대표하는 화가는 역시 김홍도(1745~1806 이후)이다. 풍속화에 대한 그의 명성은 이미 당대부터 높았다. 그의 작품 활동을 가까이서 지켜보았던 강세황(1713~1791)은 그의 풍속화를 “진실로 신령스러운 마음과 슬기로운 지식으로 홀로 천고의 묘함을 깨닫지 않았으면 어찌 이처럼 할 수 있으리오”라고 평가했다. 같은 시대 서화의 뛰어난 안목인 이규상(1727~1799)은 “정신이 법도 가운데에서 자유로이 훨훨 날아다니는 경지다”라고 극찬했다. 당시 평자들의 눈에는 그의 풍속화가 신묘하고 자유로운 작품세계로 비쳤던 것이다.
‘단원풍속도첩’(보물 제 527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은 풍속화가인 김홍도의 명성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다. 여기에는 일, 놀이, 관례, 생활상 등 다양한 삶의 모습이 25점의 화폭에 펼쳐져 있다. 그는 이 화첩에서 풍속화의 주제뿐만 아니라 기법에서도 새로운 세계를 창출했다.

타작 ⓒ
무엇보다도 이 화첩에서 높이 평가해야 할 점은 통속적인 주제를 다뤘다는 것이다. 그는 이미 이 화첩을 제작하기 이전인 30대부터 여러 풍속화를 통해 에로티시즘, 신분사회의 불공평한 관계 등 사회문제를 적극적으로 다루는 시도를 계속했다. 이러한 주제들은 전통적으로 화가들이 꺼리거나 금기시 했던 것들인데, 김홍도는 이들을 자신의 화폭 속에 담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이 화첩 가운데 ‘빨래터’를 보면, 점잖은 양반이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바위 위에 숨어 빨래하는 아낙들을 훔쳐보고 있다. 잘못 망신당하기 십상인 행동을 위험을 무릅쓰고 감행하는 그림 속 양반처럼 김홍도 역시 천박하다고 비판을 받을 만한 주제를 과감하게 자신의 작품 속으로 끌어들였다. ‘타작’에서는 벼 낟알을 털기에 여념이 없는 일꾼들이 즐거운 마음으로 고된 노동을 감내하고 있지만, 이를 감독하는 마름은 술에 취해 아예 비스듬히 누워버렸다. 상류계층인 마름과 하류계층인 일꾼들의 불공평한 관계에 대한 풍자가 돋보인다.
아울러 우리는 이 화첩을 통해 사실주의 화풍의 진수를 맛볼 수 있다. 이전에는 인물의 권위와 위엄을 나타내기 위해 옷의 실루엣을 풍선처럼 팽팽하게 부풀려 묘사했다. 그런데 김홍도의 풍속화에서는 그 ‘권위의 바람’이 빠지고 꾸불꾸불한 실루엣으로 나타난다. 실제 우리가 눈으로 보는 그대로의 사실적인 표현이다. 옷도 서민들의 거친 옷감에 맞게 딱딱한 선으로 묘사해 더욱 실감나게 했다. 또한 그림의 교과서라 할 수 있는 화보에 보이는 도식적인 얼굴이 아니고 현실에 기반을 둔 표정 있는 얼굴이 등장한다.

씨름 ⓒ
극적인 구성도 이 화첩에서 빠뜨릴 수 없는 매력이다. 별다른 배경도 없이 풍속장면만을 간략하게 부각시켜 묘사한 그림이지만, 우리는 쉽게 등장인물의 감정 속에 몰입하게 된다. 그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씨름’은 숨 가쁜 대결 속에 뜨겁게 달구어진 씨름판의 열기를 흥미롭게 표현한 작품이다. 그 와중에도 엿장수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어린이를 설정한 재치는 김홍도다운 해학이다. ‘서당’에서는 종아리를 맞은 한 학생의 울음이 서당을 한바탕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훈장도 점잖은 체면에 웃음을 참느라 얼굴이 찌그러져 있다. 울음과 웃음이 교차하는 순간을 절묘하게 포착하고 있다. 그의 풍속화에는 단순한 풍속의 묘사를 넘어 해학과 풍자가 피어난다. 그는 평범한 일상에서 웃음을 찾아내고 직접적인 비난보다는 간접적인 풍자로 날카로운 갈등을 풀어나갔다. 세상을 긍정적으로 보는 가치관이 그의 풍속화에서 밝게 빛난 것이다.
풍속화를 통해 보여준 김홍도의 조형세계는 신윤복, 김득신 등으로 이어지면서 조선후기 풍속화는 풍요로움을 누리게 된다. 신윤복은 김홍도에 의해 시도된 기생의 생활상을 그린 풍속화를 발전시켜 여성을 그린 풍속화에서 일가를 이루었다. 그는 섬세한 필치와 예민한 감성으로 표출한 여성의 아름다움을 통해 김홍도와 다른 세계를 구축했다. 반면 김득신은 김홍도의 그림 가운데 남성을 그린 풍속화의 영향을 받았는데, ‘파적도’에서는 역동적인 구성과 생동감 있는 인물묘사로 김홍도 못지않은 기량을 발휘했다.
‘단원풍속화첩’에 펼쳐진 사실주의는 단순히 현실을 사실적이고 해학적으로 표현한 데 의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동안 굳어진 권위와 위엄의 구각을 깨뜨리고 사실성의 진정한 모습을 우리에게 일깨워 줬다는 데 보다 큰 의의가 있다. 그러한 점에서 김홍도가 이룩한 사실주의의 성취는 조선시대 회화의 쾌거이다.
<참고>
한국 최고의 풍속화에 대한 설문결과
1위: 김홍도의 '단원풍속도첩' ★★★★★★★★★★★
2위: 신윤복의 ‘혜원전신첩’ ★★★★★★★★★★
3위: 김득신의 ‘파적도’ ★★★★★★★
회화분야 추천인 11명 가운데 10명이 총 30점으로 이뤄진 신윤복의 ‘蕙園傳神帖’(간송미술관 소장, 국보 135호)을 추천했다. 하지만 한 명을 제외하곤 모두 김홍도 다음가는 그림으로 평가했다. 김득신의 ‘파적도’도 7명이 추천했는데, 이 역시 김홍도 다음으로, 그리고 신윤복보다 앞선다고 평가한 이가 간혹 있긴 했지만, 대부분 신윤복 다음가는 이로 추천을 했다.
신윤복의 화첩에 대해 박은순 덕성여대 교수는 “신윤복의 인물들은 그 자체로 아름답고, 감각적이며, 상황은 구체적이어서 조선 후기를 곧장 만나게 한다. 조선 최고의 풍속화일 뿐 아니라 조선 최고의 그림이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라며 최고의 풍속화로 평가했다. 특히 김홍도와 견주어서는 “임금의 총애를 받고 출세했던 김홍도와 달리 여항에서 떠돌며 서성이던, 그러기에 서민들의 삶을 진솔하게 기록할 수 있었던 이방인 화가”로 달리 보았다. 특히 화첩가운데 ‘단오풍정’이 가장 대표적인 작품으로 여겨졌지만, ‘연당야유도’, ‘월하정인’, ‘목욕’, ‘청금상련도’가 가장 좋다고 추천한 이도 있었다.

김득신의 파적도 ⓒ
한적한 농가에서 병아리를 물고 달아나는 고양이와 당황해 날개 치는 어미닭, 혼비백산하여 달아나는 병아리, 병아리를 안 빼앗기려 하는 주인 부부의 거의 본능적인 모습 등을 실감나게 그린 김득신의 ‘파적도’(간송미술관 소장, 18세기. 종이 바탕에 담채. 22.5×27.1cm)는 구도 면에서 긴장감을 유발시키고 화면 전체에 해학적 분위기가 잘 드러나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 외에도 윤두서의 가전화첩 중 ‘나물 캐는 여인’과 ‘선거도’, 조영석의 사제첩 중 ‘바느질’, 강희언의 사인삼경 중 ‘서화휘호’, 유숙의 ‘대쾌도’, 신한평의 ‘자모육아’, ‘무진진찬도병’ 등이 조선의 풍속화 중 주목할 만한 작품으로 꼽혔다.
불국사 다보탑과 석가탑
불국정토 상징하는 기하학 세계
강병희
한국은 석탑의 나라이다. 벽돌로 탑을 만든 중국이나 목조식 탑을 쌓은 일본과 달리 우리 선조들은 견고한 화강암을 쪼아 단아하고도 자연스러운 석탑을 완성했다. 이중 최고로 치는 것이 불국사의 다보탑과 석가탑이다. 불국정토의 이상을 구현한 불국사 금당 앞에 나란히 서 있는 석가와 다보를 통해 석조예술의 한 절정을 발견할 수 있다.

□ 다보탑(국보 20호)은 개방적인 테라스 형태의 벽면구성을 통해 공중에 부양되는 듯한 기적 같은 종교적 출현을 조형화하였다. 실로 ‘돌을 떡 주무르듯’ 했던 장인의 솜씨나 장식적이되 지나치지 않는 조형미는 신라 석탑예술의 수준을 솜씨 있게 드러낸다.
불국사 대웅전 앞뜰의 두 탑은 기록에 석가탑과 다보탑이라 전한다. 관련 내용은 ‘법화경’ 견보탑품에 전한다. 즉 과거의 부처님이셨던 다보불이 장래 법화경을 설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가서 듣고 거룩함을 증명하겠음을 맹세하고 원하였는데 석가모니가 사부대중과 함께 법화경을 설하자 약속대로 그의 전신탑(온 몸이 모셔진 탑)이 땅 속에서 솟아나 공중에 머무르며 찬양하였다. 이어 석가모니가 탑문을 열자 자신을 증명한 뒤 자리를 나누어 함께 하였고 이 때 보탑에 공양하기 위해 모든 세계의 부처님들이 보살들과 함께 이르자 세상의 더러움이 사라지며 불국토로 정화되었다는 내용이 현장감 있게 묘사되어 있다.
두 탑은 이 내용의 두 주인공으로 이곳이 불국토임을 알려 주는 상징이다. 현재 현겁의 부처님으로 열반하신 석가모니는 원시불교시대부터 조성, 발전된 사리안치의 탑으로, 오랜 과거, 동방으로 한량없는 천 만억 아승지 세계를 지나 있었던 보정(寶淨)이라는 나라의 부처님인 다보불의 전신사리탑은 몸이 모셔진 공간이 있는 희귀한 양식의 전각 형태로 표현하였다. 그리고 석가탑에는 기단 주위에 8개의 팔방금강좌를 두어 사부대중에 둘러싸인 석가모니를 군더더기 없이 상징화시켰다.
이상세계의 건축들은 기하학적인 비례를 보인다. 완전한 세계를 표현하기 위해서다. 불국사는 43당척을 기준으로 각 건물의 위치와 크기의 비례를 정함으로서 정연한 질서를 보여주고 있다. 석가탑과 다보탑도 마찬가지다. 43당척의 1/3이 양 탑의 지복석의 길이와 근사하며 이를 기준으로 설계되었다.
석가탑은 7세기 감은사지탑 등에서 보이는 초기 전형양식의 장중함에서 씩씩함만을 거두어 수려함을 덧입혔다. 남성적이면서도 잘 생긴 미청년의 자태다. 삼국시대 중국에서 전래된 목탑과 전탑을 재현하는 것으로 시작된 석탑은 신라 통일 직후 이를 바탕으로 새롭게 창안되었으며 이것이 시대의 흐름에 맞게 다시 정리된 것이 석가탑으로 대표되는 8세기 전형양식이다. 이는 이후 우리 석탑의 보편 양식으로 계승되면서 우리의 미감을 대표하는 문화재의 하나가 되었다. 균형잡힌 비례는 반듯함을 이루며 날렵하게 뻗은 지붕돌은 탑의 견고함을 부드럽게 덮는다. 지붕의 경쾌함은 직선으로 뻗은 우동마루(사면의 지붕이 서로 만나는 곳)에서 기인한다. 이러한 감각을 더해 주는 것이 옥개석 위의 강조된 탑신 받침이다. 이는 오히려 백제탑에서 찾아 볼 수 있는 감각으로 삼국 통일이 신라를 중심으로 옛 백제와 고구려 문화를 통합시키는 계기가 되었음을 엿볼 수 있게 한다.
다보탑은 정토건축을 표현한 불국사의 상징적 조형물이다. 난간, 기둥, 지붕으로 구성된 누각식 건축은 이국적이며 공예적이다. 개방적인 테라스 형태의 벽면 구성은 시각적으로 건축물의 중량 감각을 줄임으로써 공중에 부양된 다보탑의 기적 같은 종교적 출현을 조형화시켰다.
탑은 기단부터 차례로 사각, 8각, 원형의 기하학적 평면이 균형 있게 감축하며 중첩되었는데 각 층은 다양한 모습의 난간, 기둥 등의 부재가 벽체로 막힘없이 결구되어져 내, 외 공간이 겹쳐진다. 더구나 각 부재의 선은 결구시 일정한 형태로 조합될 수 있게 유려한 곡선으로 세밀하게 다듬어져 있어 빛의 변화에 따라 아름다운 음영이 드리워진다. 실로 단단한 화강암으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모습이다. 이렇듯 기교 많은 여러 형태의 목조 건축 부재를 돌로 만들어 짜 맞춘 모습은 ‘돌을 떡 주무르듯 했다’는 누군가의 감탄사에 동의하게 한다. 불국토의 완전함을 설명해 주는 정교한 건축적 표현이다. 이런 모습은 범영루의 석축, 청운교 백운교의 홍예와 난간, 석축 전면의 긴 난간으로 이루어진 개방적 회랑, 안양문 앞 연화교의 연꽃잎 표현, 각 건물 계단 소매돌의 곡선 장식 등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당대의 불국사를 느끼게 하는 부분이다.

□ 석가탑(국보 21호)은 불국사 금당을 바라보고 왼쪽에 위치에 있다. 통일신라의 전형적인 3층 석탑 형식으로 균형 잡힌 몸매와 경쾌한 지붕선은 신라인의 단아하고도 조화로운 미의식을 잘 보여준다.
고등학교 수학여행 때의 일이다. 떠나기 전, 우리나라 문화를 대표한다는 두 탑을 실제로 본다는 생각에 조금은 가슴이 설레었다. 무영탑의 전설과 여러 소개 글들은 기대감을 더욱 부풀렸다. 그러나 불국사 관람은 들어서면서부터 평범했으며 ‘조금 더 가면....’ 하는 기대감은 대웅전 영역에 들어설 때까지 충족되지 않았다. 허전한 마음으로 도착한 두 탑은 아름답고 특이했지만 ‘이게 다야?’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하며 허겁지겁 비로전과 관음전을 올라 보았지만 이미 이들의 의미가 제대로 들어 올 상황이 아니었다. 불국사와 두 탑을 의미 있게 감상한 것은 한참 뒤의 일이었다.
감동은 불국사의 영역에 들어서면서부터 의도했던 예술적 환기를 일으키며 준비되어야 하며 청운교 백운교를 올라 두 탑에 도달한 순간 절정에 이르러야 자연스럽게 다가올 수 있다. 현재 불국사는 석재 유구를 제외하면 거의 모든 목조 건축물들이 17세기 양식이다. 또한 1970년대 복원공사는 대 석축 앞 구품연지를 재현하지 못하였다. 조선시대는 유교적 세계관 아래 자연적이고 절제 있는 단아한 공간이 선호되던 시대였다. 임진왜란 후 17세기 건축은 이전과는 다르게 장식적인 요소가 증가하고 있기는 하지만 중국 역사상 가장 국제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당나라 문화의 영향 아래, 외형적인 아름다움에 관심을 가지고 균형과 조화를 추구한 국제적이고 사실적인 통일신라시대의 세련된 문화와는 아주 다른 성향을 지니고 있다.
더구나 양 탑은 완전한 원형을 지키고 있지 못하다. 석가탑의 상륜부는 실상사삼층석탑 모습으로 복원되어 있어 다보탑과의 조화가 미묘하게 어긋나고 있으며 다보탑은 현재 난간이 있어 화려한 8각과 원형의 상층부와는 달리 사각의 하층부에는 사방 돌계단 양쪽에 기둥(법수석)만 남아 있다. 기둥 뒤의 흔적으로 보아 계단과 사각형 기단 위에도 난간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기단 위 사방을 지켰던 수려한 사자도 한 마리만 손상된 채 남아 있다.
내부적 상처도 치명적이다. 세계 최초의 목판본인 ‘무구정광다라니경’을 비롯한 금은 사리함이 출토된 석가탑과는 달리 다보탑은 일제강점기인 1925년에 완전 해체되어 복원되었으나 보고서도 없고 출토된 사리구도 사라졌다. 당시 작업에는 노무자도 한국인을 쓰지 않았으며 다만 소나무 언덕에 숨어서 바라본 지역민이 탑 속에서 하얀 보자기로 싼 꾸러미를 꺼내 옮기는 모습을 보았다는 내용만을 전할 뿐이다. 이런 저런 상황은 두 탑을 온전히 느끼기에 어려움을 주며 감동은 보물찾기와 오랜 응시 뒤에 찾아온다.
세월이 반영되는 것이 건축예술이다. 단아한 조선의 건축물들에 둘러싸인 석가탑과 다보탑은 정토의 꿈은 다소 탈색되었지만 불협화음을 일으키고 있지는 않다. 오히려 두 시대적 감각이 어우러져 새로운 미감을 창출하고 있기도 한데 부드럽게 반전하고 있는 추녀와 아담한 회랑 사이로 양 탑의 상층부가 솟아오른 모습은 흡사 우리들의 가슴마다 숨겨진 정토를 한 자락 펼친 듯, 막 벌어지기 시작하는 꽃봉오리처럼 경이롭다.
간다라 지역 답사 때의 일이다. 샌들을 신은 보살상의 아름다운 발 조각편을 보았을 때 아쉽게도 그 조각상이 온전하게 사원에 있을 때의 감동은 느낄 수 없었지만 그 작은 조각은 전체 보살상의, 아니 그 시대의 예술적 모습을 대변해 주고 있었다. 남겨진 불국사와 상처 입은 두 탑에 담겨진 신앙적 구현도 당시의 고양된 종교미술의 경지를 짐작해 보기에 충분하다. 한 예술품의 완전함은 작은 부분에도 그대로 담겨지기 때문이다.
한국이라는 ‘환상성’, 그 양달과 응달
[전시회 풍경]‘코리아 환상곡’展(치우금속공예관, 10.20~11.18)
이은혜

김정섭 作 ‘은제사군자상감화병’, 12×23cm, 은·오동, 1970년대, 김철주 소장.
미술에서 공예는 언제나 뒤켠에 물러나 있거나 가려져 제대로 조명된 바가 없었다. 지난 1세기 동안 정체성의 혼란을 겪기도 했지만, 실용성과 창조성 사이에서 나름대로의 균형감을 찾으면서 미술 장르의 하나로 정착해왔다. 하지만 아쉽게도 국내에서 공예의 ‘근대성’을 밝히는 전시는 그동안 없었다. 그러던 차에 치우 금속 공예관에서 개관 1주년 기념으로 현대공예의 뿌리를 찾아가는 작업을 보여줘 눈길을 끈다.
근대 공예의 여명은 이왕직미술품제작소에서 시작된다. 때문에 전시의 1부는 이왕직미술품제작소 시기의 금속장인들을 중심으로 금속공예의 전통계승 문제를 짚고 있다. 그 가운데 놓칠 수 없는 작품이 제작소의 조각장으로 있었던 김정섭의 ‘은제사군자상감화병’으로, 외부에 공개된 건 처음이다. 먼저 병을 조각했고 위에 오동으로 상감처리를 했다. 무늬는 조선조 미술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매란국죽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일본식 양식화의 영향을 드러내고 있는 게 특징이다. 즉 조선조 공예이후, 한국공예의 뿌리가 어디인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이왕직미술품제작소는 구한국황실에 의해 설립돼 수공예 기술전통의 복원을 표방해 ‘수구적 전통의 계승’이라는 한계점을 갖기도 했는데, 여기 전시된 작품들도 그런 성과와 한계를 고스란히 증명하고 있다.
‘개화’란 이름이 붙여진 2부로 들어오면 서울대를 비롯해 아카데미즘 내에서 근대 공예가 어떻게 정착돼왔는가를 본격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故 김기련 교수는 현대적인 칠보를 처음 보여줬고 1968년 현대 금속공예전시를 처음 열었던 작가인데, 일제시대를 계승하면서도 해방이후 새로운 영역을 찾아나가는 작품들을 보여준다. 특히 70년대에는 박정희 정권이 ‘한국의 美’ 정체성을 강조하는 덕에 두루미, 학 등 전통문양을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와 이를 어떻게 수출산업과 연결시킬 것인가를 고민했던 시기다. 1986년에 제작되긴 했지만, 2부에 포함된 유리지 서울대 교수의 작품 역시 민화에서 모티브를 얻어 연꽃과 못을 표현한 “한국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시대적 한계는 어쩔 수 없다. 전시를 기획한 장동광 큐레이터는 “해방이후 1970년까지 초기 금속공예들은 기법적으로 아주 단순하고 간단한 용접방법만을 보여줬다”며 금속공예가 아직 완전한 장르로 정착하기 전의 상황임을 암시한다.

김경환 作 ‘비정형의 물뿌리개’, 60×15×49cm, 22×16×56cm, 철·황동·적동, 2004, 작가소장.
3부 ‘창연’(Patina)은 70년대 이후 2000년대까지 ‘한국미’를 잘 담은 작품들을 선별했다. 이 작품들은 기예에서 미술로 넘어왔지만, 전통회화의 기법을 한쪽에 그려 넣으면서 동시에 질그릇 같은 ‘무기교의 기교’도 다른 한편에 살려놓았다는 느낌을 준다. 가령 김경환의 작품 ‘비정형의 물뿌리개’의 경우 線의 동양적인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
이번 전시의 테마는 작곡가 안익태의 ‘한국환상곡’에서 차용했다. 한국이라는 것이 어떻게 계승되고 있는지, 혹시 단순한 ‘환상’으로 번져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신의 내부를 향한 어떤 두려움을 담아 성찰하려는 기획이다.
구례 운조루
유교적 공간 분화....빼어난 자연과의 조화
주남철





구례 운조루는 조선시대 제택의 하나로, 전라남도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 103번지에 자리한 중요민속자료 제8호이다. 이 집이 완공된 것은 영조 52년(1776)인데, 처음 집터를 잡고 지은 사람은 유이주(柳爾, 1726~1779)라 전한다. 아들 德浩(1757-1815)의 일기수록에 의하면, 유이주는 관직으로 외지에 머물러 있어, 직접 집을 지을 수 없었다. 그러나 덕호에게 ‘全羅求禮五美洞家圖’를 보내어, 황무지를 개간하여 집터를 잡고 털끝 만큼이라도 계획과 틀림이 없이 1백여간의 집을 1776년 가을 9월에 완공하도록 하였다.
雲鳥樓는 북쪽으로 지리산 노고단 줄기의 하나인 삼태봉이 병풍처럼 둘려있고, 앞 남쪽으로 넓은 들과 섬진강이 흐르며, 남서쪽인 정방으로 안산인 오봉산이 있다. 이곳은 三台星 중, 上台인 ‘금구몰니(金龜沒泥)’, 中台인 ‘금환낙지(金環落地)’, 下台인 ‘오보교취(五寶交聚)’의 세 명당이 함께한 곳으로, 운조루는 바로 하태 오보교취에 자리하고 있는 세 명당 중 으뜸이라 한다. 실제로 집을 지을 때, 이 터에서 돌거북이가 나와 보관하여 오다가 분실하였다고 한다.
‘全羅求禮五美洞家圖’에는 솟을대문행랑채와 방형으로 둘러쌓은 담장 속에, 사랑채, 안채, 중대문간채, 사당채가 계좌정향(癸坐丁向)으로 자리 잡고 있다. 주산과 운조루 사이에는 소나무 숲이 우거지고, 집 앞 장방형의 연못 저 멀리 너머에 안산이 둘러 있다.
조선시대의 제택이 갖추어야 할 공간 모두를 어느 것 하나 소홀함이 없이 갖추고 있으면서 각 공간을 크고 작은 마당과 함께 적절하게 배분하였다. 남성적인 공간인 사랑채와 작은사랑채를 사랑마당을 중심으로 전체 집터의 서쪽에 두고, 여성적인 공간인 안채와 안사랑채를 안마당을 중심으로 동쪽에 두었다. 또한 상위의 공간인 몸채와 하위의 공간인 행랑채를 크게 북과 남, 안쪽과 바깥쪽으로 배치하였다.
장방형 연못 북쪽의 솟을대문간 행랑채는 대문간 서쪽으로 7간, 동쪽으로 11간이다. 솟을대문간 서쪽부터 청직이방, 아궁이부엌, 행랑방, 곳간이다. 본래 곳간에서 북쪽으로 꺾이어 초분처(草墳處)로 쓰던 2간이 돌출되어 있었는데, 지금은 없다. 동쪽으로는 3개의 헛간과 1간의 아궁이부엌, 본래 1간의 내측과 중문간이었던, 지금은 방으로 바뀐 모두 7개의 행랑방이 있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남성공간인 사랑마당이다. 이 마당 북쪽 높은 기단위의 사랑채는 정면 5간, 측면 2간의 장방형평면에, 북쪽으로 2간이 돌출되어있다. 사랑방은 정면 1간 측면 2간이나, 정면 1간은 실제적으로 2간 간살이다. 2간 간살의 도리에 기둥을 세우지 않아 1간이 된 것이다. 사잇장지를 들여 아랫방과 윗방으로 나누어 취침 때 아랫방을 침방으로 쓴다. 때문에 뒷벽 창호 중앙에 사잇장지 벽이 서있다. 긴 도리를 두어 기둥을 세우지 않은 것은 안정된 구조는 아니라 생각된다. 또 사랑방과 대청 전면에 툇마루가 붙어있어, 대청과 아랫방을 연결하는 통로 역할을 한다고 하나, 이 또한 잘못된 판단이다. 사랑방의 남면한 창호는 출입용 창호가 아니라 南窓인 것이다.
대청은 정면 2간 측면 2간이고, 대청 북쪽으로는 1간의 책방과 1간 齋室이 돌출되어 있고, 서쪽으로 정면 1간 측면 2간의 누마루가 연이어져 있다. 대청의 전후면, 사랑방과 누마루 사이에는 창호가 설치되어 겨울철 찬바람을 막아준다.
누마루의 삼면은 창호 없이 개방되었고, 또 계자난간을 설치하고, 추녀에는 활주를 세웠다. 북쪽에는 ‘二仙樓’, 서쪽에는 ‘足間亭(柳爾의 3대손 柳億의 호)’ 편액이 걸려있다. 이집의 堂號인 ‘雲鳥樓’ 편액은 사랑대청의 남쪽에, 사랑대청의 동쪽에는 ‘歸晩窩(유이주의 호)’, 사랑방 남쪽에는 ‘隨分室’ 편액이 걸려 있다. 사랑채는 굴도리 3량 가구이고, 홑처마 팔작지붕이다.
장남의 공간인 작은 사랑채는 안채로 출입하는 안중문간의 남쪽으로 西向하여 있다. 이것은 많은 제택에서 사랑대청을 중심으로 큰사랑과 작은사랑을 ㄱ자로 꺾이게 배치한 것과는 크게 다른 보다 격이 높은 공간계획이라 하겠다. 안중문간과 붙은 헛간 1간 남쪽으로 반간의 골방, 작은 사랑방(弄月軒) 1간, 누마루(歸來廳) 1간이 자리 잡고, 방과 누마루 서쪽 앞면으로 툇마루가 붙어 있다. 본래에는 누마루 남쪽으로 중대문간과 행랑방들이 솟을대문간 행랑채까지 연이어져 있었고, 이곳 중대문간으로 들어서면 안사랑 마당이었다.
사랑마당의 서쪽, 담장 아래에는 길이 22m, 폭 6m 크기의 화단이 있다. 매화, 동백, 감, 석류, 은행, 대나무 등이 식재되어 있고, 동백나무 밑에는 石床(길이 2.3m, 폭 1.3m)이 놓여 있다. 사랑채의 높은 기단 중앙에 6단의 디딤돌이 있는 돌계단을 놓고, 계단 좌우로 폭 1.4m의 화계를 조성하여 석류, 무궁화, 회양목 등을 심었다. 사랑방 앞마당에는 큰 소나무 한그루가 식재되었다. ‘家圖’에는 4그루의 붉은 꽃나무들과, 꽃나무 사이에는 괴석들이 그려져 있고, 사랑방 앞에는 큰 소나무가 자라고 있다.
사랑채 뒤로 돌출된 글방 북쪽벽선을 따라 동쪽에 담장을 세워 나무청 마당과 구분하였다. 담장과 사랑채 사이의 사랑 뒷마당에도, 꽃나무들과 괴석들이 그려져 있다. ‘三水公柳爾影幀’에는 운조루 서쪽으로 대나무 숲이, 그 북쪽으로 소나무들이 그려져 있다.
여성 공간인 안채는 사랑채의 동쪽 끝에 접해 있는 안중문간으로 들어선 안마당 북쪽에 ㄷ자형으로 자리 잡고 있다. 정면 2간 측면 1간반의 안방, 정면 2간 측면 1간반의 대청이 남향으로 자리 잡고, 서쪽으로 2간 부엌, 1간 찬광이, 동쪽으로 1간반의 건넌방, 1간의 아래건넌방, 1간 아궁이 부엌, 1간 광, 1간광이 남쪽으로 뻗어 있다.
안방은 안주인이, 건넌방은 며느리방이다. 때로 건넌방을 노모가 쓰고, 뜰아랫방을 며느리가 쓰기도 한다. 그러나 운조루에서는 본래 노부모가 쓰던 안사랑채가 남쪽 一 자형 광채 동쪽에 연이어 있었다.
ㄷ자형 안채는 작은사랑과 연이어진 一자형 곳간채와 마주하여 장방형 안마당을 형성한다. 이 안마당 안방 앞쪽 기단 아래에는 물확과 돌절구가 놓여 있고, 남쪽 곳간 앞으로 장독대, 연자방아, 맷돌이 있다. 안채의 서북쪽, 사랑채의 북쪽 담장 안으로는 우물과 나무청이 자리하고 있으나, 본래 ‘家圖’에는 2간의 종현각이 있었다. 안채는 굴도리 5량가구로, 홑처마인데, 네 모서리에 합각을 형성하고 있다.
안사랑채는 노부모의 생활공간으로, 안채 남쪽의 곳간채와 연이어져 있었다. 2간의 안사랑방과 1간의 누마루(石亭亭)로 구성되었었는데 지금은 소실되고, 내측 1간이 자리 잡고 있다. 안사랑마당 남쪽으로 솟을대문간행랑채에서 북쪽으로 돌출되었던 3간의 초당이, 그리고 동쪽 담장의 협문 밖으로는 초가집인 서당이 있었다. 초당은 큰애기들의 생활공간이었었다.
사당은 안채의 동북쪽, 따로 쌓은 담장 안에 있다. 본래 지금의 사당 자리는 영당(影堂)이 있었고, 사당은 앞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조선시대의 민가 중에서 대군, 공주, 군, 옹주의 집인 궁집과 사대부의 집을 말하는 제택은 한반도의 자연환경적인 영향과 더불어 조선시대의 정치, 사회, 사상 등의 인문환경적인 영향 모든 것을 가장 잘 들어내 주고 있는데, 전국적으로 많은 남아 있다. 이들 제택 중에서 구례 雲鳥樓는 보다 치밀한 계획과 합리적인 채(棟)와 間의 空間分化와 統合, 좋은 목재, 우수한 官營木手들, 그리고 긴 공사기간을 투입하여 이루어낸 빼어난 第宅인 것이다.
고려 수월관음도(일본 대덕사)
이례적 도상과 뛰어난 인물묘사…화엄과 법화의 융화
박은경

[편집자주] 한국 불화가운데 최고는 단연 고려시대 것으로 그중에서도 교토 大德寺 소장의 ‘수월관음도’가 꼽히고 있다. 관음의 묘사도 뛰어나지만 특히 하단에 표현된 인물군상이 매우 이례적이며, 상징성이 매우 풍부하다는 점 때문이다. 수월관음도의 선두 격인 대덕사 작품을 박은경 교수가 꼼꼼히 분석했다.
고려 후기 수월관음도는 현재 40여 점이 알려져 있다. 대개 이미지는 암굴을 배경으로 암좌에 앉은 관음상을 現前性이 강하게 화면 전체에 클로즈업해 배치하고, 관음의 발언저리 수면 건너편에 관음을 경배하는 선재동자를 배치한 구성이 패턴화 돼있다. 이처럼 정형화된 것 외에 이례적인 도상이 첨가된 작품이 존재한다. 일본 大德寺 소장으로, 228×125.8㎝ 크기의 비단바탕에 주색·녹청·군청·백색·금분 등을 베푼 화격이 높은 그림이다.

안정된 구도, 색채의 조화와 뛰어난 묘사력 등 완성도로 봐 14세기 초 경 제작된 걸로 보는데 이견이 별로 없다. 화면 우측 가장자리에 치우쳐 암반에 앉은 관음상은 오른 다리를 왼쪽에 걸친 반가좌 모습이며, 머리에서부터 전신을 감싸며 흘러내린 베일자락과 둥근 거신광에 에워싸인 관음의 聖身은 신비롭기까지 하다.

관음의 발언저리 수면으로부터 솟은 연봉오리, 물가의 금모래, 홍백산호, 홍백환주, 공양화 등은 신비로움을 가미한다. 우측 하단에는 雙竹이 뻗어 존재감을 나타내며, 좌측 모서리엔 만개한 꽃가지를 부리에 문 靑鳥 한 마리가 관음 쪽을 향해 나뭇가지에 앉아 있다. 포말을 일으키며 일렁이는 파도는 화면 2/3 높이까지 펼쳐져 있어 광활한 해면을 엿볼 수 있다. 우측 해수면 한켠에는 관음을 경배하는 선재동자가 연꽃잎 위에 떠있다. 한편, 해수면 위에 피어오르듯 瑞氣를 나타내고, 그 속에 供養人物群像이 관음을 향해 한쪽 방향으로 줄지어 다가가고 있다.

이처럼 대덕사 작품에서 보이는 공양인물군상의 행렬은 전형적인 고려 수월관음도(암좌에 앉은 관음상과 이에 대응하는 선재동자를 묘사)와는 구분되는 이색적 도상으로,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소장품과 더불어 2점만 존재한다.
공양인물군상에 대해 기존에는 ‘삼국유사’의 낙산성굴설화에 의거해 용왕과 권속들을 표현한 것이라는 견해가 주를 이뤘다. 하지만 실체와 상징하는 바를 구체적으로 따져야 한다. 선두에 다소 크게 묘사된 남성인물상(①)은 손에 병향로를 쥐고 머리에 흰 뿔장식이 있는 冠을 착용했다. 금색 당초운문이 장식된 大袖衣의 紅袍를 걸치고, 턱수염이 정돈된 모습은 제왕을 연상시키는데, 이 인물은 해중에서 해수면 위로 출현한 海龍王임에 틀림없다. 관 양쪽에 솟아오른 뿔장식이 海龍의 두부에 뻗어나온 뿔을 가리키는 모티브로, 俗人의 모습을 한 용왕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용왕 뒤를 따라오는 여성상(②)은 高?형식의 머리장식을 하고, 치전장식이 있는 大袖衣 위에 어깨로부터 雲肩을 걸쳤으며, 양손에 산호와 보화가 담긴 盤을 들었다. 이 여성을 기존엔 용녀로 봤다. 그러나 법화경과 다라니경 변상도에 의해 알려진 용녀 이미지는 양손에 摩尼珠가 담긴 盤을 들고 있으며 소녀이미지를 띤다. 그런데 이 여성은 보화가 담긴 반을 들고 있고 성숙된 여인상이란 점에서 구별돼 용녀라고 단정짓기 어려우며, 오히려 용왕부인으로 보는 게 타당하다. 용왕과 용왕부인이 등장하는 고려불화로 일본 親王院藏 미륵하생경변상도(1350), 知恩院藏 미륵하생경변상도(14세기) 등을 참조할 수 있다.
용왕부인 뒤를 잇는 홀을 든 남성 1인(③)과 공양물을 든 여성 2인(④⑤)은 앞선 인물들의 권속으로 볼 수 있다. 이어 뒤쪽에 남자아이를 업고 있는 인물상(⑥)을 주목하자. 이 인물은 사람같지만 부릅뜬 눈과 앞으로 돌출된 코와 입모양이 鬼形에 가깝다. 등에 업힌 아이(⑦)는 오른손을 관음을 향해 내밀고 있다. 두 인물은 독특한데 여태껏 주목되지 않았다. 그런데 이와 유사한 도상을 산서성 청룡사 원대 벽화 및 명대 귀자모상 경판화와 수륙화에서 볼 수 있다. 인물 ⑥은 鬼子母 권속도상이다. 귀자모는 법화경 陀羅尼品에 등장하는데, 子安·安産과 어린아이의 수호여신으로 중국 송원명대에 널리 확산 보급된 도상이다. 즉 인물 ⑥은 귀자모 도상의 권속이 고려 수월관음 도상에 습합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등에 업힌 어린아이(⑦)를 보자. 오른손에 광염을 뿜는 붉은색 摩尼寶珠가 있다는 것을 주목하자. 이런 도상은 일체 발견되지 않는다. 持物이 뜻하는 바는 대덕사소장본이 수월관음상이지 귀자모 도상 자체는 아니란 점을 말해준다. 마니주는 ‘一切障碍消滅所救如意’의 의미를 지닌 신통력있는 구슬로, 앞서 용녀의 지물로 특징지어진 모티브라고 언급한 바 있다. 법화경 권4 提婆達多品에 의하면, 사갈라용왕의 딸인 용녀가 8세에 불법을 듣고나서 남자의 몸으로 변신했다는 일화는 龍女成佛의 예로 유명하다. 여기서 용녀가 8세때 남아의 몸으로 성불한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대덕사 작품에 등장하는 남자아이는 용녀일 가능성이 있으며, 손에 쥔 보주는 용녀가 관음에게 바치는 마니주를 가리키는 것이다. 역으로 말하면 마니주가 용녀임을 증명해 주는 주요 모티브라고도 할 수 있다.

다음은 여러 권의 두루마리를 허리에 끼고 ?頭와 官服 차림의 건장한 인물(⑧)을 보자. 부릅뜬 눈, 뭉툭하면서 큰 코 등으로 봐 야성적 인상을 준다. 이와 극히 유사한 도상은 돈황 安西地區 東千佛洞 第2窟의 통로 南·北壁에 그려진 수월관음도(西夏時代)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인물은 鍾규를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종규는 보통 당대 북송의 도화견문지에 따르면 귀신을 쫓는 벽사적 의미로 읽히지만, 송원명대의 도상을 참조하면 벽사신의 한계를 넘어 권능이 확대된 것으로 해석된다. 대덕사 소장의 공양인물군상에 종규도상이 포함됐던 건 그 기능과 역할을 더욱 필요로 했기 때문이 아닐까. 즉, 善惡功過를 검찰하고 악을 징계하는 판관의 기능에서 나아가 惡으로부터 어린이를 지켜주는 역할로 수월관음도에 습합됐음을 짐작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공양인물군상 가운데 半裸狀의 鬼頭·獸頭形 도상들이 이어지고 있다. 먼저, 幡의 깃대를 쥔 半人半獸의 인물(⑨)에 이어 3명의 무리가 뒤따르고 있다. 셋 가운데, 앞쪽의 鬼頭形 도상(⑩)은 보화가 가득 담긴 大壺를 등에 졌으며, 옆의 獸頭人身形 인물(⑪)은 벌거벗은 상반신 어깨에 표면이 거칠고 울퉁불퉁한 공양물을 짊어지고 있다. 이어 바다동물 형상의 녹청색 도상(⑫)이 바다진주가 담긴 조가비를 머리에 짊어지고, 왼손엔 대형 홍산호를 허리에 끼고 따르고 있다. 이들은 용왕일행을 따르는 권속으로 공양물을 관음에게 바치기 위해 운반하는 무리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인물 ⑪이 짊어진 공양물은 과연 뭘까. 적갈색의 표면은 마치 고목에 보이는 옹이처럼 작고 둥근 형태들이 불규칙하게 묘사돼있으며, 가장자리는 돌기된 상태다. 즉 이 공양물은 양감과 중량감 있는 목재일 가능성이 크며, 공양물이라면 불교에서 중시하는 香木이 아닐까싶다. 실제 불상의 복장유물로 沈香, 丁香 등이 사용된 예가 많은데, 침향목의 연기는 신과 인간을 연결해주는 매개체로 이를 통해 소원을 빌면 성취된다고 해 14~15세기에 성행했다. 이로 미뤄 이 그림의 공양물도 침향목으로 추정해볼 수 있다.

앞서 언급한 대덕사 수월관음도는 ‘관음-선재동자’와의 만남에서 화면 하단에 용왕을 비롯해 공양인물군상들이 첨경으로 표현된 작품이다. 이처럼 화면에 이야기를 풍부하게 제공해주는 도상들의 비중이 조선시대에 이르러 더욱 두각을 드러내게 되는데, 그 대표적 사례로 ‘관음삼십이응신탱’을 들 수 있다. 화면 상단에 산수를 배경으로 관음상을 배치하고, 하단에는 관음이 모습을 바꿔 현신한 응신 장면과 여러 재난에 처한 중생들을 구제하는 장면들을 산수와 구름을 적극적으로 활용, 각 장면들을 구획해 표현했다. 장면마다 金書로 관음의 응신명과 현세이익에 관한 문구, 佛德을 찬양한 시구인 게송이 설명식으로 첨부돼있다. 하지만 단순한 예배대상 차원을 넘어 觀者들에게 신앙심의 고취와 그들을 교화시키는 데 최대의 효과를 누린 시각 예술품으로는 수월관음도를 꼽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처럼 대덕사 수월관음도는 고려시대 ‘관음과 선재’로 이뤄진 전형성에서 일탈해 해저에서 해수면 위로 등장하는 군상들을 설정, 상승효과를 시각적으로 연출했을 뿐 아니라, 설화성 짚은 장면으로 고려 수월관음도의 변화를 보인 대표작이다. 곧 공양인물군상의 상징성은 법화경과 화엄경의 융합이자, 도불습합의 도상으로서 의미가 크며, 수월관음도가 지니는 의미를 가장 풍부하게 만들어낸 선두격의 작품이라 할 수 있다.
中·日 불화와의 비교
中, 사실적 세부 묘사와 당당한 구도…日, 존재감 느껴지는 모습

공작명왕도, 비단에 채색, 11세기, 일본 인화사. ⓒ
중국의 대표적 불화로는 송대의 명작으로 알려진 孔雀明王圖다. 북송 11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며, 현재 국보로 지정돼있다. 공작명왕상은 독사를 먹는 공작을 신격화 해 표현한 것으로, 중생의 탐욕과 업장을 소멸하고, 천변지이와 같은 재난으로부터 구제를 본원으로 하는 뜻에서 신앙되었다.
공작명왕 관련 텍스트 중에 ‘孔雀王呪經’, ‘佛母大孔雀明王經’, ‘孔雀明王儀軌’ 등이 중시되고 있으며, 여기에는 공작명왕의 주문이 독사 퇴치나 물린 상처가 치유됨을 비롯해 여러 종류의 병 쾌유에 효과가 있음을 언급하고 있다. 특히, 不空譯의 ‘孔雀明王儀軌’에 기술된 공작명왕 도상은 공작 위에 타고 있는 도상은 팔이 네 개인 四臂像을 언급하고 있으나, 본 작품은 정면향의 얼굴 측면에 각각 붙은 얼굴이 세 개이고 팔은 여섯 개인 三面六臂像으로 매우 드문 도상이다.

공작명왕도 부분. ⓒ
화면 전체적으로 녹청과 군청과 같은 한색계의 고급 안료를 부드럽게 표현했으며, 탄력 있고 억양을 지닌 선묘와 날카로우면서 엄하게 비장한 모습을 띤 안면에서 북송시대 불화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공작의 펼쳐진 깃털묘사를 비롯해 세부 묘사가 극히 사실적이며, 화면 배경의 飛來하는 구름표현과 바림기법, 그리고 공장명왕상과의 거리감 묘사는 화면에 깊이감을 절묘하게 연출하고 있어, 과히 白眉라 아니할 수 없다. 이 작품은 속계에 마련된 청정도량에 강림한 공작명왕상을 좁은 화면에 시각적으로 당당하게 나타내고 있다.

공작명왕도 부분. ⓒ
일본에서는 헤이안·카마쿠라 시대에 아미타가 서방극락정토에서 俗界로 내영하는 아미타내영도가 성행했다. 다양한 아마타내영도 가운데 古風 도상이 바로 아미타가 산을 넘어 내영하는 모습을 담은 선림사의 산월아미타내영도로, 현재 국보로 지정돼있다.
이 작품은 산 정상부 너머 상반신 모습의 아미타와 구름을 타고 산을 넘어 강림한 관음과 세지보살로 구성된 아미타삼존상이다. 화면 상단, 즉 본존 뒤편에 널리 펼쳐진 해수면은 아미타가 멀고먼 서방극락정토 세계로부터 속계를 상징하는 산 가까이에 이르렀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아미타 본존은 제1지와 2지를 맞댄 양손을 가슴위로 올린 모습으로 마치 정토에서 설법인을 취한 모습으로 내영한 듯해 기존의 능동적인 모습의 아미타본존과는 차이를 보인다. 머리에 만월과 같은 둥근 원광을 배경으로 정면향을 취한 모습에서는 무척 존재감이 느껴진다. 이는 바로 산 너머에 위치한다는 존재감과 무관치 않을 것이며, 또한 산을 넘어 내영하는 적극적인 아미타의 모습과도 이질성이 있다.

산월아미타도, 138.7×118.2㎝, 비단에 채색, 13세기, 일본 선림사. ⓒ
하단부 양측에는 惡靈으로부터 왕생자를 지키는 사천왕상이 각각 2위씩 서있으며, 안쪽에는 양손에 구슬장식이 늘어진 幡을 쥔 동자 2위가 마치 길을 안내하듯 서로 마주보며 서 있다. 왕생자의 형체는 묘사되지 않았지만 동자가 쥔 번이 바로 왕생자의 영혼을 맞이하는 상징 모티브임을 알 수 있다. 화면 상단 향좌측 모서리에 작은 圓內에 적힌 梵字(‘아’로 발음)는 阿彌陀의 ‘阿’자임과 동시에 대일여래의 상징기호다. 이 점에 대해선 양자를 동일시하는 高野山 眞言淨土敎系의 사상이 반영돼있다고 전한다.
종묘
필요한 공간만을 담은 기품 있는 절제미
이상해
종묘란 조선왕조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유교 사당을 말한다. 많은 전문가들은 한국 최고의 사묘건축으로 단연 종묘정전을 으뜸으로 뽑았다. 조선왕조 5백년의 역사와 정신이 지금도 살아 숨 쉬는 종묘는 유교 건축으로서 사장 정제되고 장엄한 건축물 가운데 하나로 단순하고 절제된 기품있는 미를 보여준다.
서울에 있는 종묘는 조선시대 역대 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거나 왕실과 관련된 의식을 행하던 곳이다. 그 중에서도 악(樂), 가(歌), 무(舞)로 구성된 종묘제례악에 맞추어 행하는 종묘제례는 그 자체로 탁월한 무형유산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무형적 가치 이외에, 종묘는 외부공간이 자아내는 신성함과 엄숙함으로 종묘를 찾는 사람들에게 무한한 감동을 주는 건축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
종묘의 중심을 이루는 정전 일곽은 사방으로 네모나게 담장으로 둘러 싸여 있고, 남쪽 담장 중앙에는 신문(神門), 동쪽에는 제례 때 제관이 출입하는 동문, 그리고 서쪽에는 악공과 종사원이 출입하는 서문이 각각 나있다.

종묘제례를 거행하는 모습. 종묘는 왕조의 상징이기도 하다.
유교문화권 가운데서는 종묘가 유일하게 보존되어 운영되고 있다.
남문인 신문을 통해 묘정으로 들어갈 때 받는 공간적 감동은 가히 충격적이다. 신문의 가운데 문은 원래 혼령이 다니는 통로이다. 이 신문에 들어서면 정전 일곽은 죽은 자의 공간이 어떠한 곳인가를 보여준다. 바로 눈앞에는 동서 109m, 남북 69m가 되는 넓은 묘정 월대가 펼쳐 있고, 멀리 북쪽에 길이가 101m인 정전 건물이 동서로 길게 서있다. 묘정 월대는 제관과 집례관들이 제사를 드릴 때 도열하는 공간으로, 아악과 여타 의식 절차가 이루어지는 공간으로 사용된다. 월대는 단(壇)의 일종인데, 지면으로 부터 단을 높여 종묘가 죽은 자의 혼이 머무는 천상의 공간임을 암시한다.
월대는 하월대와 상월대로 구성되어 있다. 하월대의 중앙에는 남북을 잇는 신로(神路)가 신문에서 정전 앞의 상월대 아래까지 연결되어 있다. 신로와 접한 동쪽 한 곳에는 검은 전(塼)을 깐 방석 모양의 부갈위판이 있다. 부갈위판은 궁궐의 혼전에서 3년상을 치르고 종묘로 이안되는 왕이나 왕비의 신위를 종묘에 모실 때 의식을 행하는 곳이다.
종묘 정전은 상월대 북쪽에 있는 기단 위에 서있다. 정전은 묘정을 향하는 앞면에 퇴칸이 나 있고, 나머지 세 면은 벽체로 감싸 내부를 어둠의 공간으로 만들어 신성함을 높이고 있다. 앞쪽의 퇴칸 기둥 사이는 벽체가 없이 묘정으로 트여있다. 정전 내부로 출입하는 문은 각 칸마다 두 짝씩 달렸는데, 그 맞춤이 정연하지 않고 한쪽 문짝이 약간 뒤틀려 틈새가 벌어져 있다. 이 틈새는 죽은 자의 혼이 드나들게 하기 위한 상징적인 장치이면서, 공기가 통하도록 해서 내부의 습기를 제거하는 역할도 한다.
정전 내부는 전체가 트인 하나의 공간으로 되어 있으며 뒷벽에는 각 칸마다 신주를 모신 감실을 두었다. 정전은 당(堂)은 같으나 실(室)은 달리하는 ‘동당이실제도(同堂異室制度)’를 따른 건물이다. 정면 내부 뒷벽에는 제상과 감실이 각 칸마다 배설되었으며, 감실과 감실 사이는 발을 늘어뜨려 칸을 구분하고 있다. 각 감실에 모신 신주는 서측에 왕, 동측에 왕비의 위치가 되게 봉안되었고, 감실 전면에는 신탑(神榻)이 있어 제향 때 신주를 모신다. 신탑 뒤에 있는 신주장(神主欌) 좌-우에는 각각 책보장(冊寶欌)을 배설하였다. 감실 주위에는 사방과 천정으로 황색의 망건장을 쳤으며, 앞에는 따로 황색의 외면장을 쳐서 마치 생전의 침상과 같이 꾸몄다.
종묘는 전주시 풍남동에 있는 경기전과 많은 점에서 다르다. 경기전은 조선 태조의 영정을 봉안한 곳이다. 역대 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신 종묘와 태조의 영정을 모신 경기전은 이런 점에서 다를 뿐 만 아니라, 경기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본전 건물 전면 가운데에 왕릉의 정자각(丁字閣)과 같은 건물을 덧달아 내어 제사를 지내는 점이 종묘와 다르며, 둘레에 회랑을 두르고 남쪽 회랑 가운데에 내삼문을, 다시 그 밖으로 외삼문을 둔 배치 형식도 종묘와 다르다.
동서로 긴 장방형 평면을 한 맞배지붕 건물인 본전의 공포가 다포인 점도 익공으로 지은 종묘와 다르고, 건물 내부에 두 개의 고주를 세우고 그 가운데에 단(壇)을 놓고, 단 양옆으로 일산과 천개를 세운 점도 종묘 정전의 내부와 다르다.

종묘제례와 종묘제례악은 유네스코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으로 선정되었다.
종묘 정전의 건물 배치는 개별적으로 대칭에서 벗어난 구성을 하고 있지만 전체적으로 대칭에 기반을 두고 있다. 예로서, 정전 동.서월랑을 보면, 남북축을 중심으로 대칭적인 배치를 하고 있으나, 그 세부 처리는 그렇지 않다. 동월랑은 트여 있으나 서쪽 것은 벽으로 막혀 있어 대칭 속에서 비대칭을 읽게 한다. 뿐만 아니라 종묘는 대칭적인 배치 속에서도 변화를 담고 있다.
정전 신로는 남문인 신문에서 시작되어 묘정을 이루는 상월대 계단에 가 닿아 있는데, 미묘하게 중심축에서 약간 벗어나 있다. 대칭인 듯하지만 정확하게 대칭이 되지 않게 처리하고 있다. 정(靜)을 통하여 동(動)을 느끼게 하는 배치를 해서 대칭적인 묘정 월대와 기단, 그리고 지붕에 동적인 기운이 감돌게 한다.
뿐만 아니라, 종묘건축에는 의례공간의 위계가 반영되어 있다. 건물의 기단과 처마와 지붕은 위계에 따라 높이를 달리하고 있다. 정전 신실과 좌-우 협실, 그리고 동.서 월랑 지붕, 처마와 기단 윗면의 높이는 신실, 협실, 월랑의 순으로 낮고, 기둥 지름과 높이도 마찬가지로 신실, 협실, 월랑으로 가면서 작고 낮게 처리되어 있다.
또, 종묘는 제례를 위한 공간이기 때문에 화려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종묘의 모든 건축 처리는 극히 단순하고 절제되어 있다. 묘정 월대와 기단 위의 건물은 신로를 표시하는 선, 몇 개의 판위, 그리고 장식이 배제된 건축 구조 등 과감하게 생략된 조형과 단순한 구성을 하여 종묘에 구현해야 할 건축 의도를 잘 성취하고 있고, 단청도 극도로 절제되었다. 이와 같이 종묘건축에는 신로, 월대, 기단, 담 등 꼭 있어야 할 것만 있고 그 속에 필요한 공간만 담고 있다. 이러한 구성, 구조, 장식, 색채의 간결함과 단순함은 종묘건축을 상징적인 차원으로 승화시킨다.

종묘 정전은 동시대의 단일 목조 건축물로는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로 추정된다.
하지만 유교 사상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인지 규모에 비해 검소한 모습이다.
종묘 건축에서 읽는 단순하고 절제된 건축구성은 종묘건축을 자체 완결적이고 기품 있는 건축으로 보여 줄 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내면 깊은 곳에 감추어져 있는 상징적인 의미까지 읽게 해준다. 그것은 마치 일상적인 시간의 흐름을 초월하여 그 속에 죽은 자와 산 자가 한데 어울려 영적인 교류를 가능케 하는 듯하다. 그것은 종묘에 신성한 힘이 항상 감돌게 하는 원천이다.
서울에 있는 종묘는 태조가 개성에서 한양으로 천도한 1394년 12월에 공사를 시작하여 이듬해인 1395년 9월 29일에 준공되었으며,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선조 41년(1608) 정월에 중건 공사를 시작하여 5개월 후 광해군이 즉위한 후에 완공하게 된다. 그 후 몇 차례 중건을 거쳐 현재의 규모로 되었다.
우리나라의 종묘는 기본적으로 중국 북경에 있는 명.청 때의 태묘와 같이 엄격한 좌우대칭적인 배치를 하지 않고, 오히려 자연 지세에 순응하도록 필요한 건축물들을 적절하게 배치하여 전체적으로 건물을 구성하는 축을 통일시키지 않고 있다. 중국의 태묘와 마찬가지로 예제(禮制)의 적용을 받아 종묘가 건립되었지만 중국의 그것과 건축 형식과 배치에서 다르다. 이는 예제에 대한 인식이 달랐다고 하기 보다는 이해는 같게 하지만 적용에 차이가 있음을 뜻한다. 이는 종묘건축제도의 한국적 수용으로 해석해야 할 부분이다. 뿐 만 아니라 북경의 태묘는 현재 그 기능을 상실하였지만, 종묘는 아직도 그 기능이 살아있어 1995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국보 83호 반가사유상
사색하는 모습 속에 강한 생동감이 일품
임남수 교수
환상적인 불상미를 선보이는 국보 83호 반가사유상이 어떤 이견도 없이 한국 최고의 금동 조각으로 선정됐다. 반가사유상은 왼쪽 무릎 위에 오른발을 얹고, 오른손 손가락을 뺨에 살짝 대어 명상에 잠겨있는 듯한 자세의 보살상을 말한다. 반가사유상은 현재 백제로 그 기원을 보는 설과 신라를 기원으로 보는 두 가지 학설이 있다. 학계에서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임남수 교수는 신라를 그 기원으로 보고 있다. 본지는 이러한 임남수 교수의 주장과는 관계가 없으며, 뛰어난 조형감과 형태미를 자랑하는 국보 83호 반가사유상의 미적 특징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 것임을 미리 밝혀둔다.
국보 83호 반가사유상. 이 불상은 적어도 해외출장을 5번이나 다녀왔다. 한국의 수많은 문화재 중에서도 가장 많은 출장 기록이 아닐까. 천진한 미소를 가득 머금은 얼굴은 물론, 보관에서 대좌에 이르기까지 모든 부분의 완성도가 높아 전시회의 얼굴이 될 수 있으며, 상의 높이가 93.5cm로서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기 때문에 운반과 전시에 적당하다. 또한, 재질이 견고한 금동불이기에 쉽게 파손될 염려도 적은 점 등이 이 像으로 하여금 해외출장을 하게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 像은 대좌에 걸터앉아 왼발을 내리고 오른발을 왼쪽 무릎위에 걸치고, 오른손은 손가락을 뺨에 대고 있어 마치 사유하는 모습이기 때문에 반가사유상이라고 불린다. 먼저 이 보살상의 형식상의 특징을 머리의 보관부터 살펴보자.

국보 83호 반가사유상
이 보관은 정면에서 좌우 측면으로 곡선을 그리며 뒤쪽으로 이어진다. 이 관은 마치 3개의 산모양이라고 하여 삼산관으로 불리기도 했고, 연꽃잎 모양과 비슷하다고 하여 연화관이라고도 불리고 있다. 이 보관에서 주의해야 할 것은 보관의 형태가 원형을 이루고 있는 크라운(crown)이라는 점이다. 보살의 보관은 이 보살상이 쓰고 있는 크라운 형식과 국보 78호 반가사유상이 갖추고 있는 티아라(tiara) 형식의 2종류로 나눌 수 있다. 궁정의 대관식이나, 연회에서 왕공 귀족들이 쓴 관을 상기해 보면 알 수 있듯이 크라운이 티아라보다 훨씬 격이 높음은 새삼 말할 나위도 없다.
이러한 크라운 형식의 보관은 83호상 이외에 국보118호 평천리 출토 금동반가사유상, 경주 성건동 출토 금동반가사유상, 일본 나가사키 현 26성인기념관 금동반가사유상, 일본 코류지(廣隆寺)의 보관미륵상 등이 있다. 일본의 예를 제외하면 크라운 형식의 보관은 고구려와 신라의 반가사유상에서만 보이며 백제에서 알려진 예는 없다.
이어서 오른쪽 무릎에 주목해보자. 83호 像의 무릎 끝은 매우 크며, 바깥쪽으로 호를 그리듯이 휘어져 튀어나왔다. 경쾌하여 상승감을 불러일으키기는 반면, 표현 그 자체는 과장되어 있다. 이와 같은 무릎 표현은 경주 성건동 출토 반가사유상, 경북 봉화군 북지리 출토 석조반가사유상 등 신라의 반가사유상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앞서 소개한 일본의 두 반가사유상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반면, 현재 출토지가 확실한 백제의 반가사유상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다음으로 오른쪽 정강이를 덮은 옷자락이 대좌의 상단에 늘어져 마치 언월도 모양으로 약간 걸려 있는 것도 주목할 만하다. 이러한 옷자락 표현은 앞서 소개한 신라의 반가사유상, 그리고 일본의 두 반가사유상과 공통되는 특징이다. 이에 비해 출토지가 명확한 백제의 반가사유상, 예를 들어 충남 서산 마애삼존불의 좌협시 반가사유상이나 부소산출토 석조 반가사유상 등은 오른쪽 정강이를 덮은 옷자락이 정강이에 마치 물결모양으로 휘감기는 모양으로 나타나 있어 83호상과는 전혀 다른 형태를 취하고 있다.
그리고 왼쪽 무릎 정강이 부분을 살펴보면, 정강이의 측면에는 J자 형태의 옷주름을 새긴 반면, 정면에는 옷주름을 새기지 않았다. 이 표현은 왼쪽 정강이의 양감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데, 이와 같은 예는 앞서 소개한 국보118호 금동반가사유상, 경주 성건동 출토 금동반가사유상과 일본의 두 반가사유상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상술한 바와 같이 83호상의 특징으로는 크라운 형식의 보관, 오른쪽 무릎과 그 밑의 옷자락, 왼쪽 정강이 표현 등을 들 수 있는데, 이 특징들은 국보118호 금동반가사유상, 경주 성건동 출토 금동반가사유상, 일본 나가사키현 26성인기념관의 금동반가사유상, 일본 코류지의 보관미륵상 등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따라서 이 불상들은 제작연대에 따른 양식의 차이는 있지만, 기본적으로 어느 특정한 계통에 속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더욱이 이 특징들은 서산 마애삼존불이나 부소산 출토 반가사유상 등 출토지가 확실한 백제의 반가사유상에서는 아직 확인된 바 없으므로, 83호상 계통의 반가사유상이 백제에서 유행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우며, 오히려 신라지역에서 조성되어 신앙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관점을 바꿔 83호상의 얼굴과 손, 발, 옷주름 등의 세부 표현을 살펴보며 양식상의 특징에 주목해보자. 83호상의 얼굴은 아직 젖살이 빠지지 않은 소년의 통통하면서도 둥근 모습이다. 입은 살며시 다물면서도 미소를 머금어 깨달음의 희열을 나타내며 조각적으로 높은 완성도를 보여준다. 이어서 양손과 손가락, 오른발의 발가락은 마디와 살집이 과장됨 없이 자연스럽게 표현되었으며, 오른발은 발바닥과 발가락의 연결이 살아있는 소년의 부드럽고 귀여운 손과 발을 잘 재현하였다. 이에 비하여 왼발은 경직된 모습이며, 연화대좌 또한 이질적이어서 후대에 보수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처럼 83호상은 부드러우면서도 자연스러운 인체 표현이 이뤄져 삼국시대 불상의 백미로써 7세기 중반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에 처음으로 불교가 전래된 것은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이며, 백제는 침류왕 원년(384)이었으므로, 83호상은 불교 전래부터 약 3백년 가까이 지난 후에 제작된 것이다. 3세기에 가까운 기간 동안 한국의 불상은 어떤 길을 걸어온 것일까.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불상으로 서울 뚝섬 출토 청동여래좌상을 들 수 있다. 양어깨에 법의를 걸친 통견 착의에 두 손을 배 앞에서 모아 선정에 든 모습이다. 이러한 형식은 인도의 초기 불상에서 많이 보이는 것이며, 중국에서는 3-5세기에 유행했으므로 뚝섬 출토상은 한국으로의 불교 전래 당시 성행하였을 불상의 모습을 잘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불상의 정면, 즉 머리의 육계에서 대좌에 이르는 수직선을 그어 보면 거의 정확히 좌우대칭으로 이루어진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비록 5cm정도로 작기 때문에 조형상의 제약은 있었겠지만, 불상의 신체 비례도 비교적 합리적인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측면에서 보면, 머리 부분의 두께에 비하여 가슴과 무릎의 두께가 매우 얇은 점은 주목할 만하다. 다시 말해 이 불상의 제작자는 불상의 정면 모습만을 중시하고, 측면은 거의 고려하지 않은 채 조성한 것으로 판단된다.
뚝섬출토상의 뒤를 잇는 불상이 국보119호 연가7년명 금동여래입상이다. 불상의 명문중 ‘己未年’ 간지와 불상의 양식 고찰에 의해 539년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像의 특징으로 오른손은 시무외인, 왼손은 여원인을 맺으며, 통견의 착의법을 취하되 법의의 끝이 왼팔에 걸쳐 몸 바깥으로 흘러내리는 형식을 들 수 있다. 광배에서 대좌까지의 높이 16.2cm, 불상의 높이 9.1cm로 작은 불상이기 때문에 간소한 표현이지만 두터운 법의와 좌우로 퍼진 옷자락, 대좌의 소박하고 도톰한 연화 등은 매우 강한 인상을 준다. 그러나 이 像 또한 광배에서 대좌에 이르기까지 좌우대칭 구도이며, 특히 육계에서 하반신의 옷자락에 이르는 부분은 이등변삼각형의 구도에 끼워 맞춘 듯하다. 또한 양발 위에는 옷주름이 마치 차곡차곡 접혀 있어 사실적이지 못하고 추상적이고 개념적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비해 83호상은 소년의 통통하면서도 둥근 얼굴, 양손과 발의 자연스러운 살집과 마디의 표현 등을 볼 수 있으며, 옷자락에도 천이 만들어내는 질감과 주름 등을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특히 83호상의 상승하는 오른쪽 무릎은 뚝섬 출토상이나 연가7년명상에서 신체를 구속하고 있었던 좌우대칭이나 이등변삼각형 구도를 시원스럽게 깨뜨리고, 새로운 조형예술의 세계를 알려주고 있다. 깨달음의 미소는 작가로서의 성취를 이룬 佛師의 희열을 나타낸 것으로도 해석하고 싶다.
개운사 목조아미타불좌상
戰亂뒤 亡者들의 극락왕생 기원하는 ‘追善’
최성은

개운사 목조아미타불좌상의 정면 모습.(조계종 불교중앙박물관)
고려 후기 불교 조각의 대표적인 기준작이라고 할 수 있는 서울 안암동 개운사의 목조아미타불좌상은 현재 대한불교조계종 불교중앙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이 불상은 앉은 높이가 118cm나 되는 비교적 커다란 상으로 지금까지 살펴보았던 삼국시대나 통일신라, 고려전기의 불상들과는 기본적으로 그 모습에서 차이가 느껴진다. 그리고 지금까지 여러 차례 改金되었기 때문에 원래의 모습을 그대로 지니고 있지 않아 우리들이 흔히 사찰에서 배관하게 되는 불상들처럼 평범하게 보인다.
불상의 세부를 살펴보면 머리와 육계는 그 경계가 뚜렷하지 않아 전체적으로 투구를 쓴 것 같이 보인다. 활처럼 휘어 끝부분이 아래로 처진 눈썹과 가늘고 길게 半開한 눈, 콧마루가 우뚝하면서도 매부리코처럼 콧날이 약간 휘어진 코, 크지 않은 입과 섬세한 입술선, 양 뺨과 턱 주위에 살이 많은 둥근 얼굴은 다소 세속화된 佛顔의 모습을 보여준다. 신체 표현에서도 머리 부분(頭部)에 비해서 넓지 않은 양어깨가 둥글게 처지고, 몸이 앞으로 굽어있어 건장하고 힘 있는 佛身은 아니다.
그러나 이 목조아미타불상은 몸속에서 발원문과 개금기 등의 腹藏物이 발견되어 고려후기 13세기 후반의 불교조각과 신앙의 경향을 알 수 있는 매우 중요한 像으로 밝혀지게 되었다. 발원문은 至元 11년(1274) 東深接 大師 中幹이 쓴 것으로 “南贍部洲 高麗國 東深接 大師 中幹願”이라는 대목에서 발원자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여기서 동심접은 『신증동국여지승람』 권 20 아산군 산천조에 “현에서 동쪽 5리 지점에 있다”고 기록된 동심산과 연관성이 있을 듯하다.
그런데 충렬왕 5년(1279)에 왕이 長子인 滋를 牙州(牙山) 東深寺에 보내 태자(後의 충선왕)를 피하게 하였던 記事가 보인다. 당시 江陽公 王滋는 貞信府主 王氏의 소생으로 충렬왕의 세 왕자 가운데 長子였으나 齊國公主의 소생이 아니므로 왕위에 오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충렬왕은 큰 아들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하여 아산 동심사로 피신시켰던 것이다. 이와 같은 기록을 통해 당시 수도 開京의 王室과 충청지역 사찰 사이의 긴밀한 연관성을 엿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아산 동심산에 동심사라는 이름의 사찰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중간스님의 발원문에서 보이는 ‘동심접’이라는 표현은 至治 3년(1323)에 제작된 <觀經變相圖>의 畵記에 보이는 ‘楊洲接’과 ‘中道接’의 ‘접(接)’이 그 지역의 향도조직 혹은 신앙모임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견해가 제기된 바 있다. 동심산 혹은 그 산에 있는 동심사를 중심으로 조직된 신앙조직을 가리키는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고려시대 무신정권 이래 불교결사운동이 전국적으로 활발하게 일어났던 것을 상기하면 중간스님은 아산지역 불교신앙조직을 이끄는 인물이었을 것이며 그 모임에서 아미타불상을 조성 혹은 보수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아산 일대에는 고려시대 12漕倉 가운데 河陽倉이 설치되어 충청도 여러 지역의 세곡을 수납하였다가 漕運으로 수도의 京倉으로 옮겼다. 고려 후기에 아산의 포구에는 稅穀을 실은 哨馬船들이 정박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조창 소재 지역은 몽고침입 때 주요 공격의 대상이 되었던 것으로 생각되는데, 특히 아산의 하양창은 江都와 가장 가까웠기 때문에 전란의 피해에서 벗어나기 어려웠을 것이다. 중간스님의 발원문에 “…古寺毁□…”라는 내용이 보이는데 아마도 牙山 연안에서 여몽간의 치열한 해전이 벌어졌던 고종 43년(1256)과 44년(1257) 무렵에 사찰이 훼손되었던 것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이 밖에도 아미타불상의 복장에는 至治 2년(1322)의 최춘(崔椿)의 복장조성문과 취봉사(鷲峰寺) 和光선사의 발원문 등이 조사되었다. 중간대사 발원문이 쓰여진 시기보다 약 50년이 경과해 이 불상이 개금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의 문헌기록과 지도를 살펴보면 동심산과 축봉사는 서로 다른 곳에 위치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이유로 아미타불상은 동심산에서 축봉사로 옮겨졌고, 개금할 때 복장조성문과 중수 발원문이 불상 복장 속에 넣어졌던 것으로 판단된다.
고종 18년(1231)부터 원종 14년(1273)년에 이르는 거의 40여년에 걸친 전쟁기간 동안 철저히 파괴적이었던 몽고군은 海島와 奧地에 이르기까지 고려 전역을 휩쓸었고 황룡사를 비롯한 전국의 많은 사찰이 이 시기에 파괴되었다. 현재까지 조사된 고려후기 목불과 건칠불들은 몽고군의 침입으로 전란 중에 훼손된 사찰을 보수하면서 조성된 상들일 가능성이 크다. 서산 개심사 목조아미타불좌상의 복장공을 막고 있는 봉함목에는 충렬왕 6년인 至元 17년(1280)에 보수되었다는 묵서명이 조사되었다.

나주 尋香寺 건칠아미타불좌상

화성 鳳林寺 목조아미타불좌상

서울 守國寺 목조아미타불좌상
나주 尋香寺건칠아미타불좌상과 화성 鳳林寺목조아미타불좌상, 서울 守國寺 목조아미타불좌상(철원 심원사에서 옮겨왔다고 전해옴) 등은 佛顔이나 옷주름의 세부표현에서 서로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대부분 나무로 만든 목불상들이다. 조각기법이나 착의형식 등에서 13세기 후반 조각의 특징을 보이고 있어 개운사 목조아미타불좌상과 같은 유형의 불상으로 분류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이 불상들은 거의 모두 아미타불로서 아미타신앙이 당시 화엄, 정토, 법상에 이르기까지 超종파적으로 성행하였다. 더불어 몽고와의 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亡者들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追善을 위한 목적으로 다수의 아미타불상이 조성되었다고 이해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