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세 번째 이야기 서양 과학과의 조우
동아시아의 역사에서 17세기는 서양의 등장으로 크게 흔들리기 시작하는 시기가 된다. 앞서 소개한 것처럼 우리가 실학이라 부르는 17세기 이후의 새로운 학문 경향이란 어느 의미에서는 바로 서양의 과학기술에 눈뜨려는 17세기를 전후해 과학이 폭발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고, 그것은 때마침 '지구상의 대발견'을 계기로 서양의 힘이 해외로 뻗어나가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서양 사람들이 동양에 침투하기 시작한 초기에는 과학기술의 새로운 발달보다는 상업의 발달이 더 중심적인 힘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렇게 시작된 동양에로의 진출은 곧이어 서양 과학기술의 힘에 의해 탄탄하게 뒷받침되어 나갔다. 사실 16세기 중반부터 서양 지식을 대표하는 선교사들이 중국과 일본에 처음 도착하기 시작할 때만 해도, 서양인들의 자연과학 수준이란 그리 높은 것은 아니었다. 그저 전통적인 동양의 과학과는 질적으로 다르다는 것만이 더 눈에 띄는 특징이던 정도였다. 처음에 동아시아의 지식인들은 서양 과학이 그들의 전통과는 다르다는 데 일단 가벼운 관심을 가질지언정, 그것이 앞섰기 때문에 배워야겠다고는 느끼지 않았다. 그런 수준의 관심 속에서 조선의 18세기 실학자들은 중국에 번역되어 나온 서양 학문을 소개하는 책들을 통하여 극히 부분적인 서양 과학 지식을 흡수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대표적 경우로 앞에서 우리는 18세기까지 중국을 다녀왔던 연행사들이 서양 과학 또는 서양에 대해 어떻게 반응했던가를 살펴보았고, 당시의 대표적 학자 이익이나 홍대용이 얼마나 띄어난 노력을 보여주었던 가도 살펴보았다.
박제가의 선교사 초빙 계획
그러나 이익과 홍대용의 생각은 관념적인 수준에서 그다지 벗어나지 않았다. 그저 '서양 과학이 상당히 발달했구나!"하고 감탄하는 정도의 수준이었다는 말이다. 그들은 아직 적극적으로 서양 과학을 배워 들이거나 수용하기 위해 구체적인 어떤 조치를 취해야겠다고는 느끼지 않았던 것이다. 서양 과학기술의 문제에 보다 적극적인 자세를 취한 최초의 경우로 우리는 박제가를 들 수 있다. 그는 서양 과학기술이 우리보다 앞섰다는 자각을 가지게 된 것은 물론이고, 이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자고 주장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는 서양 사람인 선교사를 국내에 초빙해 들여오자고까지 주장하고 있을 정도였다. 아마 서양 선교사를 초빙하자는 주장은 박제가의 경우가 한국 역사상 유일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의 "북학의"에 붙여져 있는 '병오년(1786)의 느낌'이란 글에는 그의 선교사 초빙 계획을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신이 듣기로는 중국의 흠천감에서 역법을 다루는 서양인들은 모두 기하에 밝고 이용후생의 방법에 능통하다고 합니다. 나라에서 관상감에 쓰는 비용 정도를 써서 그들을 초빙하여 두고, 나라의 젊은이들에게 천체의 운동 법칙, 종률의기의 도수, 농사와 의약, 한발과 홍수의 이치, 벽돌을 만들어 건물과 성곽과 다리를 세우는 법, 구리와 옥을 캐고 유리를 만들며, 화기를 제조하는 법, 관개법, 수레와 배를 만드는 법, 나무를 베고 돌을 멀리까지 나르는 법 등을 배우게 하면 몇 년 되지 않아서 세상을 경륜하는 훌륭한 인재가 될 것입니다. 혹시 이론을 제기하여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즉, 한나라에서 불교를 받아들인 일이 천고의 폐해가 되었다는 점입니다. 무릇 구라파란 곳은 중국에서 9만 리 떨어진 곳인데, 천주교란 것을 받들고 있어서 서로 종류는 달라도 여러 이민족들이 서로 통할지도 모르는데, 그들의 마음을 측량하기 어렵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신이 생각하기로는 그들 수십 명이 한 곳에 산다 한들 그들이 난리를 일으키지는 못할 것입니다. 게다가 그들은 결혼이나 관직을 거부하고 욕심도 버린 채 포교를 위해 멀리 왔다고 합니다. 비록 그 가르침은 천당과 지옥을 말하는 것이 불교와 비슷하지만 후생의 방법을 갖춘 부분은 불교에 없는 것입니다. 그 좋은 점 열을 취하고 나쁜 것 하나만 금한다면 독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단지 그들에 대한 대우가 알맞지 않으면 초빙해도 오지 않을 것이 걱정일 뿐입니다.
1786년에 박제가는 중국에 와 있는 서양 선교사들이 온갖 과학기술 분야에 유능하다는 점을 들면서 그들을 수십 명 초빙해서 한 곳에 살게 하고 그들로부터 서양 과학기술을 배우자고 주장한 것이다. 그는 불교를 부정적으로 말하고, 선교사들의 서양 종교와 불교가 비슷한 점이 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불교에는 없는 후생의 기술을 서양의 가톨릭이 지니고 있음을 주목하고 있다. 따라서 가톨릭의 전파 한 가지를 막고, 온갖 후생이용의 수단을 십분 배워 들인다면 그만큼 득이 많다고 결론 내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박제가의 이런 제안은 정조 10년(1786) 1월 22일 아침에 임금에게 말할 기회에 한번 그의 뜻을 밝힌 것일 뿐이다. 당시의 "실록"에 의하면 정조는 그날 인정문에 나와서 그때까지 여러 신하들이 제출한 상소문을 점검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 가운데 21개는 길고 짧게 내용이 "실록"에 소개되어 있기도 하다. 하지만 박제가가 낸 상소문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또 이 날짜의 기록 끝에는 이 때 군인, 의사, 역관, 천문가 등 온갖 부류의 사람들 3백 명 이상이 상소문을 냈다고 적혀 있다. 그런데 그 가운데 바른 말이나 지당한 의론을 제기한 경우는 없었다고 논평되어 있다. 이 때 상소문이 이렇게 쏟아져 들어온 것은 1786년 정월 초하루에 일식이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다른 날도 아닌 정월 초하루에 일식이 일어나자 정조는 원조에 일어난 일식의 불길함이 과연 무슨 잘못 때문인지 느낀 대로 아뢰라고 구언했던 것이고, 그 이재 구언에 답하여 온갖 상소문이 들어왔던 것이다. 박제가의 상소문은 바로 그런 경우의 하나였고, 아마 당시 아무에게도 전혀 주목받지 못한 글이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선교사를 초빙하자는 그의 주장이 주목받기는커녕 그와는 정반대의 주장이 그날의 "실록"에는 기록되어 남아 있을 지경이다. 그 정반대의 주장이란 대사간 심풍지의 것으로 거리의 천민이 사대부의 복장을 하고 다니거나, 거리에서 아이들이 재상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기도 하는 등 기강이 해이해졌으므로 이를 바로 잡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어서 중국에 간 사신들이 서양 사람들을 만나 필담과 선물을 나누는 등의 폐단까지도 금기시키자고 그는 건의하고 있다. 임금은 이 건의를 따랐다고 "실록"은 전하고 있다.
박제가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여러 가지 주장을 내세운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재물은 마치 샘물과도 같이 퍼내야만 다시 생기는 법이라면서 소비를 악덕으로만 보지 말자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박제가는 상업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농업 일변도의 산업 정책에 비판적이었다. 또 북경에서의 온갖 교통수단이나 성곽, 교량, 도로, 수레 등의 우수성을 보고하면서 청나라 문물 가운데 많은 것을 배워 오자는 '북학'의 주장을 강조하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북학자로 분류되기도 하는데, 그의 대표적인 저작이 바로 '북학을 논의함'이라는 뜻의 "북학의"이기도 하다. 그는 또한 서양과 중국의 앞선 기술을 배워 오기 위해서는 우연히 우리 연안에 표류해 들어오는 서양이나 중국의 배들을 그냥 돌려보내지 말고 그들이 알고 있는 기술이며 지식들을 모두 알아낸 다음 보낼 것을 주장했다. 또 중국에서 나온 책들을 통해 새 지식과 기술을 넓히고, 기술 유학생의 파견도 주장했다. 이런 주장은 모두 선교사 초빙을 주장한 이래 일관성을 가지고 제기된 생각들이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북학을 외치는 박제가의 목소리는 당시로서는 아마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또 실제로 1786년이라는 시점에서 조선왕조의 관리가 중국에 와 있는 서양 선교사를 초빙해 들여오자고 주장한 것은 아주 특이한 동시에 전혀 실현 가능성이 없는 주장이었다고 평가받을 만도 하다. 실제로 그들을 초빙해 온다고 해도 그들을 기독교 활동은 금하고 과학기술만 배울 수 있다는 생각 역시 상당히 성급한 기대였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정약용의 이용감 제의
물론 서양 과학기술을 배워 와야겠다는 의견은 박제가만이 가진 것도 아니었다. 그보다는 조금 후대의 학자인 정약용 역시 서양의 앞선 과학기술을 배우기 위해 어떤 구체적 조치가 필요하다고 느끼고 있었음을 우리는 곧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박제가보다는 좀 더 구체적인 것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박제가가 서양 선교사들을 초빙하자고 주자한 것과는 달리 정약용은 우리나라 사람들을 보내 서양과 중국의 과학기술을 배워다가 국내에 옮겨심도록 하자는 주장이 중심이었다. 정약용은 그의 이상정부론이라 할 수 있는 "경세유표"라는 책에서 '이용감'이라는 관청을 세우자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는 바로 서양과 중국의 과학기술을 배워 오는 기구를 의미한다. 그에 의하면 이용감은 나라의 부를 축적하고 군사를 강화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정부 기관인데, 이 관서에는 수리에 밝은 간부들을 두는 동시에 손재주 있는 직원도 두어야 하지만, 특별히 연구원 4명을 둘 것을 건의하고 있다. 이들 연구원은 사역원과 관상감에서 각기 2명씩 수리에 밝고 중국말에 능통한 사람을 추천하여 뽑자는 것이었다. 여기서 사역원이란 통역관을 양성하고 외국어 통역을 담당하는 기관이며, 관상감은 천문과 음양오행, 그리고 풍수지리와 복서를 담당하는 조선 시대의 기관이었다. 이들 기관에서 해마다 2명씩 모두 4명씩을 중국에 파견한다면, 몇 해만 지나도 상당히 훌륭한 과학 기술의 기반 구축이 가능할 수도 있을 것이었다. 정약용은 이들이 최신 과학기술의 기반 구축이 가능할 수도 있을 것이었다. 정약용은 이들이 최신 과학기술을 배워다가 국내에 성공적으로 보급했을 때에는 그들을 신분상으로 특혜를 주자고까지 건의했다. 즉, 중인에게도 양반의 자격을 주어 지방관으로 임명하자고 건의한 것이다. 사역원과 관상감의 인력이라 함은 당시로서는 당연히 중인을 뜻한다. 중인으로서 서양 문물 도입에 기여한 사람은 양반처럼 지방 관서의 책임자로 발령하자는 뜻이니 상당히 사회 개혁적인, 적어도 신분 타파를 향한 초기 단계에 해당하는 조치를 언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가톨릭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정약용은 그로 인해 서학에 심취했던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게도 한다. 그러나 1801년 신유사옥으로 기독교가 심한 박해를 받게 되자 그는 기독교를 버리고 학문에 전념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4형제 가운데 막내였고, 그의 셋째 형 정약전은 1790년 여름에 과거에 합격했다. 그 형이 풀었던 시험 문제는 오행에 대한 것이었는데, 서양의 4행설을 이용해 그 답을 하여 장원을 한 것으로 밝혀져 있다. 이런 일면은 1790년 당시 조선의 정신적 분위기가 어떤 것이었던지를 짐작하는 데 도움이 된다. 정약용은 자기가 젊었을 때에 서학에 관한 책을 읽는 것이 일대 유행이었다고 써 놓고 있기도 하다. 그가 젊었을 때란 1780년 이후를 가리킨다.
서양의 4행설이란 그리스 시대부터 서양인들이 믿고 있던 4원소설(불, 공기, 물, 흙)을 가리킨다. 정약용은 그의 형의 영향으로 5행만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밖에도 많은 전통 사상의 부분들을 수정하고 가감하려 했다. 그의 원소설은 분명히 서양의 그것에 영향받은 것으로 보인다. 정약용은 서양 과학지식을 받아들여 알게 된 지식을 여러 가지 자랑하고 있는데, 빛의 굴절 현상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그는 대기의 굴절 현상 때문에 일어나는 천체의 위치에 대한 현상에 대해 알고 있었기에 지평선 아래 실재하는 달이 우리 눈에 보이는 까닭을 '적기'가 띄워 주는 그림자라고 파악하고 있다. 또 대야바닥에 동그라미를 그려 놓고 보이지 않을 때까지 물러난 다음 다른 사람에게 물을 붓게 하면, 그 동그라미가 떠올라 보이게 되는 이치도 마찬가지라고 옮게 설명하고 있다. 정약용은 렌즈의 두 가지 종류 및 우리 눈이 바로 렌즈의 원리에 따라 근시와 원시가 된다는 이치도 설명하고 있다. 특히 그는 '어두운 방에서 그림 구경하기'이라는 짤막한 글에서 '바늘구멍 사진기의 원리'를 설명하고 있기도 하다. 대낮에 어두운 방에서 밖을 향한 문에 바늘구멍 하나만 뚫어 놓으면 그 구멍을 통해 들어온 빛이 맞은편 벽에 바깥에 경치를 거꾸로 선 모양으로 환하게 보여준다는 것을 설명한 내용이다. 바로 이것이 라틴어로는 'camera obscura'라 부르는 바늘구멍 사진기의 원리이자, 광학의 기초가 되는 사진기의 원리를 말한다. 지금 중학교에서 이것을 가르치고 있는데, 중학교 과학책에는 이 원리가 아무 역사적 배경 없이 설명되어 있을 뿐이다. 필자는 이를 가르칠 때 정약용의 이런 글로 이용하면 훨씬 교육 효과가 높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런 과학 교육 방법도 필자가 말하는 '민족과학'에 속하는 것이 아닌지.
그는 또 서양에서 처음 시작하여 중국에 도입된 우두 기술을 국내에 소개하는 데에도 남다른 열정을 보인 것으로 드러났다. 어쩌면 그는 스스로 우두를 실험해 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이미 동아시아 사람들은 그 전부터 인두법으로 천연두를 예방하려는 노력을 시행하고 있었다. 그것은 천연두 환자가 만드는 분비물의 극소량을 건강한 사람에게 주입해 면역성을 높이는 수단으로 천연두 균을 그대로 다른 사람에게 옮겨 주는 셈이라 할 만하다. 효과는 있었지만 위험하기도 한 방법이었다. 이와 달리 영국의 제너가 1798년 성공한 우두법은 소에 전염된 천연두균을 가지고, 병균을 약화시켜 건강한 사람에게 접종시키는 방법이기 때문에 훨씬 안전하고 효과적이었다. 정약용이 지은 "마과회통"은 인두법을 소개하면서, 그 끝에 1828년에 중국에서 출판된 피어슨의 우두법을 그대로 베껴 놓고 있다. 정약용 자신이 우두법을 실험했는지는 아직 확정적으로 말하기 어렵지만, 그가 서양의 우두법을 도입하는 데 큰 몫을 한 것은 분명하다. 정약용이 서양식 기계 장치를 참고하여 거중기를 만들고, 그것이 1792년 수원성을 쌓을 때와 1789년 한강에 배다리를 놓을 때 활용되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그는 정조로부터 서양 선교사들이 지은 "기기도설"을 받아 참고하여 이 장치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의 거중기는 그리 복잡한 장치가 아니며, 꼭 서양 기술서를 보아야만 만들 성질의 것이라 하기는 어렵다. 다만 당시 사람들이 그가 이런 장치를 만든 것이 서양 기술서를 참고하고서야 가능했다고 느낄 정도로 이미 서양 기술에 눈을 떠서 우월성에 주목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정약용 역시 기술은 시대가 지날수록 더욱 발달한다는 기술발전론을 말하고 있다.
신유사옥과 서양 과학의 위축
바로 그 정약용이 1801년 신유사옥에 의해 천주교에 관련되었다는 이유로 처벌을 받게 된다. 그동안 약간의 통제만 가해 오던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새로운 정권의 출판과 함께 아주 강화되기에 이른 것이다. 학문 발전에 개인적으로도 관심이 높았던 정조가 1800년 세상을 뜨자, 그 자리에 이은 임금은 12살의 순조였다. 안동 김씨를 중심으로 하는 소위 세도정치가 시작되는 시기였다. 그리고 1800년을 중심으로 그 전의 반세기와 그 후의 반세기를 비교해 보면 아주 흥미 있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즉, 앞의 반세기가 영조와 정조라는 두 임금에 의해 상당히 강력하고 안정된 정권이 유지되었던 시기라면, 후의 반세기는 12살짜리 순조가 즉위하고 8살 짜리 헌종이 왕위에 오르는가 하면, 그 뒤에는 어느 날 갑자기 '강화도령'이 업혀 들어와 왕위에 오르는 등 왕권이 허약하기 이를 데 없는 가운데 세도정치가 계속되는 시기였다. 세도정치가 지속되는 동안 나라의 권력 구조는 취약하기 그지없어서, 서방 세계가 밀려들고 있는 새 시대를 맞아 급속한 개혁 정리가 요구되던 시기였음에도 그런 방향으로 나라를 이끌 주도적 세력은 나타나지 않았다. 당시는 이미 동아시아에서는 근대화 또는 세계화가 시작되는 그런 시기였다. 그러나 조선왕조는 1800년을 경계로 급속도로 보수화하면서 외국과의 교류를 차단하기 시작했다. 1801년의 신유사옥은 신정치 세력에 의한 보수화 운동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정조대에도 가벼운 기독교 탄압은 이미 존재했었다. 1785년에 이미 정조는 천주교를 사교라 규정하고 중국에서의 서적 수입을 금한 일이 있고, 1791년에는 어머니 신주를 없앴다 하여 천주교도를 처형한 일도 있다. 주로 남인 지식층 사이에 퍼진 천주교는 이 시기쯤에는 상당히 빠르고 강력하게 퍼져나가고 있었고, 자생적 천주교회가 국내에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남인의 한 사람이던 정약용은 정조가 넘겨주는 궁중의 서양 기술서를 참고하여 거중기를 만들기도 했으며, 박제가는 서양 선교사를 초빙하여 기술을 배우자고 나서기까지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경향을 1801년의 사옥과 함께 한동안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우선 정약용은 경상도로 유배되었다가 바로 전라도 강진으로 유배지가 바뀌어 1818년 고향으로 돌아올 때까지 그곳에 머물러야 했다. 천주교에 대한 박해는 계속되어 1839년에는 프랑스 신부 세 사람 (샤스탕, 모방, 앙베르)이 처형되어 국내에 잠입했던 외국인 최초의 신부가 되었던 김대건도 당진에서 활동하다가 1846년 순교했다. 서양 과학이 서양 종교와 동일시될 수는 없음에도 불구하고, 서학은 전반적으로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언제 쓴 글인지 분명하진 않지만, 정약용의 오행에 대한 그의 태도에서는 무언가 주저하는 듯한 기미가 보이기 시작한다. 마찬가지로 그는 서양의 우두법을 그의 책 끝에 덧붙이긴 하지만 역시 이에 대한 태도가 모호하다. 그의 저작인 "마과회통"의 끝에는 서양인 피어슨이 쓴 우두에 대한 설명이 그냥 그대로 덧붙여져만 있을 뿐, 이에 대한 논평도 없고, 그 글의 저자가 피어슨이라는 사실도 밝혀져 있지 않다. 물론 그가 우두를 직접 실행했던지도 확실히 알 길은 없다. (그의 자식 9명 가운데 6명은 일찍 죽었는데, 필자의 생각으로는 그 가운데 몇은 천연두로 죽었을지도 모르고, 그렇다면 그가 직접 우두를 실험했을 가능성은 더욱 높다)
이런 서양 학문에 대한 지식인들의 주저하는 태도는 다른 경우에서도 알 수가 있다. 중국에 파견되는 사신들은 해마다 어김없이 북경으로 떠나갔지만, 1800년 이후의 연행사들 가운데에서는 아무도 서양 선교사들을 찾아가 만나려 하지 않은 것 같다. 홍대용이나 그 밖의 많은 조선 학자들이 서양인들을 찾아가 만나고 필담을 즐기거나 또 물물교환을 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양상이었다. 서양 과학기술에 대한 정보는 이렇듯 더욱 위축되어 가고 있었다. 1800년은 조선의 근대 과학 수용의 역사에서 어두운 시기의 시작이었다.
박제가(1750~1805)
밀양 박씨로 승지 박평의 서자였다. 호를 초청 또는 정유 등으로 불렀고, 규장각 검서 등의 자리에서 13년 동안 근무했다. 1801년 신유사옥과 함께 일어난 기독교도 등 서학파의 탄압 과정에서 연루되어 함경도 종성에 유배되었다. 1804년 2월에 유배에서 풀려났으나. 이듬해에 죽었다. 시, 서화 등에 두루 능하였으나, 서얼 출신이어서 큰 벼슬에 오르지 못하였고, 연행사로서 1778년, 1790년에는 두 번, 그리고 1801년 등 네 번이나 청나라에 다녀오며 중국의 앞선 문명에 주목하고 이를 수용할 것을 주장했다.
정약용(1762~1836)
1790년에 과거에 급제했다. 정조 시대에는 학자로서 크게 활동했으나, 신유사옥으로 형 약종이 사형당하고, 그의 셋째 형은 흑산도로, 그리고 그는 전라도 강진으로 유배당했다. 1818년 고향인 지금의 경기도 양주군 마현(양수리)으로 돌아와 "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 등 수많은 책을 써서 남겼다. 실학의 대표학자이자, 19세기 초반의 최고의 학자라 할 수 있는 그의 500권이 넘는 작품들은 "여유당전서" 묶여 있고, 상당 부분은 한글로 번역되어 있기도 하다. 흑산도로 유배 갔던 셋째 형 정약전은 그곳의 어류를 조사 연구하여 "자산어보"라는 훌륭한 책을 남겼다.
열네 번째 이야기 무엇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
1800년까지의 조선왕조에는 아직 충분히 강력한 서양 과학이나 서양 문화의 충격이 미치지 않고 있었다. 서양 세력의 직접적인 위협 때문에 지식인이나 지배층이 각성할 이치도 없었다. 그저 이웃 나라 중국이나 일본에서 벌어지고 있던 서양과 충돌을 간접적으로 조금씩 느끼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 시기는 인류 역사상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위기이자, 근본적으로 다른 두 가지 문명이 만나는 결정적인 시기였건만 조선의 식자들 사이에서는 그런 위기의식이란 아직 찾아볼 수가 없었다. 아니 그것은 앞으로 다른 나라(일본이나 중국)와는 달리 더욱 급박하게 닥칠 수밖에 없었던 이국 문명과의 충돌을 앞둔 '폭풍 전야의 고요함'과도 같은 것이기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세기 전반기에서 중기에 걸쳐 조선의 지식층 사이에는 조용히 그 나름대로 접할 수 있었던 서양 문명에 대한 안내 책자들을 국내로 소개해 가는 과정이 아주 천천히 진행되었다. 그런 과정을 주도하던 대표적 학자들로는 이규경과 최한기를 들 수 있다.
이규경, 백과 사전적 지식의 흡수
아직도 그 전부가 번역되지는 않았지만, 19세기 전반에 완성된 우리나라의 책 가운데 가장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은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일 것으로 보인다. 오주란 지은이 이규경의 호를 가리킨다. 역사 시간이면 학생들은 이 제목을 억지로 외우기도 하지만, 그 뜻을 제대로 알 턱이 없다. '오주가 쓴 늘어진 글, 덧붙여 놓은 글, 그리고 산만한 글 등을 모은 책'이란 정도의 겸양의 뜻이 한자로 이렇게 표현된 것이다. 여하튼 이 책을 보면 당시 중국 또는 일본에 알려졌던 서양 과학기술에 대한 지식이 이규경에게도 상당히 전해져 있었다는 걸 알 수가 있다. 이 책은 1830년 전후에 쓰여졌다고 추정되고 있는데 이는 그 속에 들어있는 여러 기사로부터 짐작할 수 있다. 정확히 언제 이 책이 완성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1500여 개나 되는 여러 가지 항목의 기사 가운데에는 이르게는 1837년에 쓴 기사도 있고, 또 가장 나중의 것으로는 1844년의 기록으로 보이는 것도 있다. 아마도 여러 해 동안 쌌던 것들을 뒤에 모아 내 놓은 책으로 보인다. 여담으로, 어이없는 일일지 모르지만, 이 책은 사실 한국전의 소란 속에 엿장수에게 팔려 넘어가 파지가 될 뻔하다가 겨우 구출된 기구한 운명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이규경은 이 책에서 천문학, 역산학, 수학, 의학, 음양오행, 동물과 식물 등 과학의 모든 분야와 함께 교통, 교량, 금속, 무기 등의 기술 분야에 이르기까지 과학기술에 대한 많은 정보를 모아 남겼다. 그러나, 사실 이규경이 구체적인 과학기술상의 업적을 남겼다고는 말하기 어렵다. 다만 1840년 이전에 완성된 것으로 보이는 이 책을 통해 당시 그가 과학기술에 대단한 관심을 보였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시기는 바로 서양 근대 과학이 조금씩 국내에 알려지고 있던 시기와 맞물리고 있다.
그는 아직 우리나라에 근대적 과학기술 지식이 제대로 도입되지 못하던 시절에 그런대로 서양의 과학기술을 흡수하려던 선각자로서의 노력을 잘 보여준다. "오주연문장전산고"에는 모두 1,417항목의 기사가 들어 있다. 각 기사는 몇십 줄도 안 되는 짧은 것에서부터 수백 행을 넘는 긴 것까지 섞여 있는데, 모두 해서 150만 자가 넘는 엄청난 분량이다. 물론 모두 한자로 써 있는데, 최근 들어 일부가 번역되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는 마치 새로운 지식에 굶주린 사람처럼, 과학기술만이 아니라 모든 새로운 지식에 대해 글을 썼고, 여러 분야의 문제들에 대해 나름대로의 정보를 수집, 정리하고, 도 판단을 내려 글로 남겼다. 그러나, 바로 이와 같은 이규경의 뛰어난 노력을 통해 우리는 지금 역설적이게도 19세기 초의 우리나라 과학기술 수준이 일본에 얼마나 뒤지기 시작하고 있었던가를 확인하게도 된다. 예를 들어 그의 기사 가운데 하나로 '뇌법기변증설'이란 글이 있다. 그의 기사는 모두 '...변증설'이란 제목으로 되어 있으니, 이 기사는 뇌법기에 대해 변증하는 글이란 말이 된다. 여기서 뇌법기란 무엇일까? 내용을 읽어보면 이것이 바로 정전기 발생장치를 가리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소위 우리나라 최초의 발전기에 대한 기록인 것이다. 글에 의하면 뇌법기는 서울의 강이중의 집에 있는데 둥근 유리 공모양을 하고 있고, 이것을 돌려주면 불꽃이 별 흐르는 듯 나온다고 적고 있다. 그는 또 서양에서는 이 불을 질병의 치료에도 쓰고 있다고 소개하고, 수십명이 손에 잡고 이 장치를 만지면 사람들이 '소변을 참는 듯한' 자극을 받는다고도 기록하고 있다. 이 정전기 발생기구는 부산의 초량에 있던 왜관에서 1800년을 전후한 언젠가 우리나라 사람에게 전해져 서울까지 올라온 것으로 적혀 있다. 조선 초부터 초량에는 왜관이 있어서 일본 사람들이 살고 있었고, 이들은 주로 대마도에서 건너와서는 쌀을 비롯한 식량을 수입해갔고, 또 우리의 문화를 배워 가기도 했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고 서양 과학기술에 먼저 눈뜨게 된 일본은 바로 이 경로를 통해 우리나라에 거꾸로 서양 문물을 전해주기 시작했던 것이다. 일본에서 처음으로 이런 전기 발생 장치가 만들어진 경우로는 평하원내(히라가 겐나이, 1723~1779)라는 사람에 의해 1768년에 만들어진 '에레키테루'란 것을 들 수 있다. 전기를 뜻하는 서양말을 일본식으로 바꾸어 표현하여 이런 이름이 붙여졌던 것이다. 그 후 일본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이 정전기 발생장치에 관심을 갖고 많은 장치를 만들어냈으며, 19세기 초의 대판(오사카)과 경도(교토) 일대에서는 이미 이런 것들 가운데 하나가 부산의 왜관을 거쳐 서울까지 전해졌을 것이다.
이 사실 하나만 보더라도 전기에 대한 조선 시대의 지식은 일본의 그것에 훨씬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세기 초만 해도 이미 일본은 과학기술 수준에서 크게 조선을 앞서기 시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규경의 글이 1830년 무렵에 쓰여졌다고 본다면, 그보다 반세기도 더 전에 이미 일본에서는 이런 발전기를 만들었고, 그것을 판매하여 의료용으로 또는 호기심 어린 사람들의 장난감으로 사용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전기에 대해 서양에서 근대적인 과학지식이 생기기 시작한 것은 일본에서 정전기 발생장치를 만들기 불과 몇 년 전 밖에 되지 않는다. 화란 상인들을 장기(나가사키) 앞에 살게 허락해 주면서 일본과의 무역을 허락했던 일본에서는 바로 이들 서양인들을 상대로 하는 가운데 화란 말을 배워 화란 학문을 배워 들이는 소위 난학자들이 생겨났고, 이들을 통해 서양의 과학기술이 즉각 일본에 전달되고 있었다. 서양에서 처음 이런 발전 장치를 만들어 낸 것은 독일의 게리케에 의한 것으로 일본보다 1세기 앞선 일이었다. 그 후 서양에서는 전기에 대한 지식이 발전을 거듭해서 1750년 무렵에는 유명한 미국의 벤자민 프랭클린의 연 실험이 있었고, 또 프랑스에서는 호위병 180명이 손에 손을 잡고 발전기의 양 끝에 손을 대게 해서 전기 쇼크를 받고 펄쩍 뛰는 모습을 보고 즐기는 실험도 행해졌다. 이규경이 전하는 이야기의 한 대목은 바로 이 실험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이 땅에 일본제 발전기를 들여다 준 부산 초량의 왜관은 이미 이보다 훨씬 앞서 기계식 시계가 우리나라로 들어온 통로이기도 하다. 1650년대에 밀양 사람 유흥발은 일본인에게서 얻은 자명종을 스스로 연구해서 그 이치를 터득했다는 기록이 우리 옛 글에 보이는데, 그가 밀양 사람인 것을 보아 그가 서양식 시계를 얻은 것은 바로 초량의 일본인에게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조선 사람이 일본인을 만날 수 있는 곳은 초량의 왜관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유흥발이 얻은 자명종이란 지금과 같이 일정 시각에 울려 주는 시계가 아니라 종이 달린 시계를 가리키는 말로, 지금의 괘종시계에 더 가까운 것이다. 그리고 이보다 거의 1세기 뒤인 19세기 말, 지석영이 우두를 일본인에게서 처음으로 배워 국내에 보급하기 시작한 것은 유명한 사실이다. 이 역시 초량의 일본인 거류지인 왜관을 통해 가능했던 일이다.
이규경의 책을 읽노라면 우리는 우리의 전통 과학이 중국의 영향을 상당히 받았음을 확인할 뿐 아니라 심한 쇄국의 시대에도 근대 과학기술의 지식이 이 땅에 조금씩 흘러들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특히 19세기 초에는 일본으로부터 서양 근대 과학기술의 지식이 조금씩 들어오고 있었다는 사실은 지금까지의 역사에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그 당시 이미 일본은 과학기술에 있어 우리를 훨씬 앞서 있었고, 우리는 서양과의 직접적인 접촉을 할 수 있는 기회조차 갖지 못한 채 근대 과학기술의 열매를 구경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최한기의 새로운 천문학과 중국의 "담천"
이규경의 바로 뒤를 이어 활약한 대표적 실학자로는 최한기를 꼽을 만하다. 최한기를 접하게 되면 누구라도 당장 깨닫게 되는 놀라운 사실은 그가 평생동안에 너무나 많은 책을 써서 남겼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가 다루고 있는 분야는 천문학과 의학, 물리학, 수학, 농학, 지리학을 비롯해서 행정학, 정치학, 세계정세 등에 이르기까지 없는 것이 없다고 할 만할 지경이다. 그가 이런 책들을 쓴 기간은 처음 1830년에 "농정회요"를 쓴 것을 시작으로 마지막으로는 1874년에 "강관론"을 썼다고 알려져 있다. 최한기의 수많은 저술을 통해 우리는 당시 중국에 알려져 있던 수많은 서양 과학기술에 대한 지식을 수용해 두고 있음을 확인할 수가 있다. 그 가운데 우선 눈에 뜨이는 분야는 단연 천문에 관련된 부분일 것이다. 최한기가 1836년에 쓴 "추측록"과 "신기통"에는 지구가 둥글고 그 둥근 지구는 하루 한 번 자전하여 낮과 밤이 생긴다는 설명이 나와 있다. 반세기 전에 홍대용이 처음 분명하게 설파한 지전설이 이제는 상식으로 장착해 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또 1500년쯤에는 이미 서양의 포르투갈 사람 '가노'가 처음으로 그 둥근 지구를 한 바퀴 돌았다고 소개하고 있다. 마젤란을 가노라 표기한 것인지, 그렇다면 어디서 그가 이런 이름을 얻었는지는 아직 밝혀내지 못했다. 또한 "추측록"에는 행성 운동이 타원을 그린다는 학설도 소개되어 있다. 최한기는 1836년의 글에서는 아직 지구 중심의 자전설만을 말하고 있으나, 1857년에 쓴 "지구전요"에서는 자전만이 아니라 공전까지 소개하고, 그림으로 지금의 우리에게는 익숙하게 알려진 우주관을 설명하고 있다. 그 학설을 처음 주장한 코페르니쿠스의 이름도 '가백니'라는 표기 아래 등장한다. 또 타원궤도설은 케플러의 학설이라고도 밝혀져 있다. 태양에서 각 행성이 얼마나 떨어져 있으며, 그 크기는 서로 어떻게 다른가 하는 점들이 설명되어 있고, 목성에는 달이 4개나 있고, 토성에는 5개나 있다는 등의 지식도 알려지기 시작했다. 양력에 대한 소개도 처음으로 보인다. 2월만 28일이고, 다른 달은 모두 30일이나 31일이라는 사실, 그리고 달 이름을 모두 소개했는데, 영어 이름을 한자로 표기하였으니 이는 중국에서 설명해 놓은 것을 그대로 인용한 것임이 분명하다. 내용 중에는 3월에 윤일을 둔다고 한 것, 양력이 아랍 역법과 같다고 한 것, 그리고 동지 후 10일을 새해 시작으로 한다는 것 등의 잘못된 정보들이 포함되어 있기도 하다. 1857년의 "지구전요"에는 아직 천왕성, 해왕성의 존재는 소개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1867년의 "성기운화"에는 이 두 행성들이 상세하게 소개되어 있다. 물론 서양에서도 아직 명왕성을 발견하고 있지 못할 때니까 명왕성에 대한 언급은 없다. 아직 잘 비교해 보지 못했지만, 최한기의 "성기운화"는 9년 전인 1858년 중국에서 나온 "담천"을 토대로 한 것으로 보인다. 이 대목에서 필자는 최한기의 천문학 사상이 중국학자들에게 영향을 미쳤다고 판단했던 종전의 평가에 대해 반박할 필요를 느낀다. 지금은 고인이 된 박종홍 교수는 철학자로 유명하고, 또 최한기 연구의 개척자로도 인정받는 분이다. 후학들에게 널리 존경받는 학자로서 그는 최한기의 중국에 미친 영향에 대해 이렇게 쓴 일이 있다.
최한기가 1867년, 그러니까 65세 때 저술한 "성기운화"라는 책 서문을 보면, 거기에 중국에서 간행된 후실륵이라는 사람이 지은 "담천"이라는 책 속에 측험이니 신기니 운화니 하는 것이 다루어지고 있음을 소개하여 언급하고 있다. 이 후시륵의 "담천"이라는 책은 함풍 8년, 즉 1858년에 간행되었다고 하였으니, 최한기 자신의 저술인 "기측체의"가 1836년에 저작된 것에 비하면 22년이나 뒤떨어지고 있다. 다시 말하면, 최한기의 저술이 "담천" 보다 22년 앞선 셈이다. 그리고 "기측체의"는 북경 인화당에서 간행되었은즉 후실륵이 혹은 최한기의 저술을 이미 읽어서 영향을 받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박종홍 '최한기의 "기측체의" 현암사(편) "한국의 명저" 1968, p. 1096.
거의 30년 전의 글을 가지고 지금 크게 탓할 것은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바로 이런 학문적 태도가 때로는 오해를 일으키는 수가 많은 것 같아 한 번 더 지적해 두고 싶다. 게다가 지금도 계속되는 최한기의 독창성을 높이 평가하는 모습은 초기에 박종홍의 이런 평가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위에 인용한 것처럼 과연 최한기의 생각이 중국 사람 후실륵에게 영향을 줄 수 있었을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우선 후실륵은 중국학자가 아니라 영구의 천문학자이고, "담천"이라는 책은 중국에서 저술된 책이 아니라 영국의 천문학책을 중국어로 번역해 낸 것이었다. 이 책의 저자 '후실륵'이란 이름은 '존 허셸(John Fredrick William Herschel, 1792~1871)'을 중국식으로 표기한 것이다. 한자의 중국 발음이나, 또 서양 천문학자 이름 등에 대한 충분한 고려가 없었던 탓이다. 아마 박 교수 같은 철학자로서는 이런 일을 짐작하기란 어려웠을 것이다. 여하튼 박교수는 중국 사람이 아니라 영국인 천문학자가 조선의 최한기에게서 한 수 배웠다고 짐작한 셈이니, 그 짐작이 맞을 이치가 없다. "담천"은 영국 천문학자 허셸의 책을 당시 중국에 와 있던 영국인 선교사 와일리(Alexander Wylie, 1815~1877)와 중국인 수학자 이선란이 협조하여 번역해 1858년 책으로 낸 것이다. 이 책의 지은이는 해왕성의 발견자로 이름난 윌리엄 허셸(William Herschel, 1738~1822)의 아들이기도 한데, 바로 이런 연유로 이 책에는 자기 아버지 윌리엄 허셸의 해왕성 발견이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최한기의 "성기운화"에는 서문에서부터 윌리엄 허셸의 이야기가 상세하게 실려 있으며, 본문에는 해왕성 발견 과정이 잘 나와 있다. 이것만 보더라도 최한기는 바로 중국에서 1858년에 나온 "담천"을 보고 그를 바탕으로 그의 책 "성이운화"를 1867년에 낸 것임을 알 수가 있다. 말하자면, 최한기가 허셸의 영향을 받은 것이지, 허셸이 최한기에게서 한 수 배운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최한기의 다른 세상 구경
최한기는 이 밖의 저술에서도 서양 과학기술을 소개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 천문학 이외의 부분에 대해 그 대강을 훑어보자.
1. 물리학
앞에 소개한 그의 천문학책 "성기운화"에는 뉴튼의 이름이 처음 등장한다. 물론 중국에서 만든 한자 이름으로 뉴튼이 '나단'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이미 전에도 소개한 케플러의 타원궤도 법칙을 비롯한 케플러의 3법칙을 설명하면서 그것이 뉴튼의 역학 이론에도 맞는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근대 물리학의 몇 가지 내용은 이미 1836년에 쓴 "신기통"이나 "추측록"에서 설명되어 있다. 고대의 대표적 물리학자라 할 수 있는 아르키메데스에 대한 기로도 적지 않은데, 그의 공훈 세 가지로 거대한 거울을 만들어 적선을 불태웠던 것, 12겹의 자동 혼천의를 만들어 천체 운동을 잘 나타낸 것, 소나 낙타 수천 마리로도 움직일 수 없던 커다란 배를 임금 혼자의 힘으로 움직이는 장치를 만들었던 일화를 들고 있다. 이 마지막 이야기는 그가 도르래를 이용하는 장치를 만든 것을 의미한다. 덧붙여 아르키메데스가 지레의 원리를 알아낸 점을 높이 평가하고 있기도 하다. 1836년의 책에서 최한기는 온도계와 습도계를 각각 '냉열기', '음청의'라 부르고 설명했는데, 이것들을 1867년에는 '한서침'과 '풍우침'으로 이름 붙이고 있다. 최한기가 유일하게 주장한 경우는 아니지만, 공기와 물 사이에서의 빛의 굴절이나 렌즈 등에 관해서도 언급되고 있다. 이 책에서 최한기는 빛을 비롯해서 소리나 냄새 등을 모두 파동 현상으로서 설명하고 있다. 그는 파동을 '훈'이란 말로 나타내고 있다. 전기에 대한 비교적 상세한 지식을 국내에 소개한 것도 최한기가 처음으로 보인다. 1866년에 쓴 의학서 "신기천험"의 뒷부분에는 '전기'란 제목의 글이 있어서 전기의 인력과 척력, 전기통신으로 런던과 파리가 연결된 이야기 등이 적혀 있다.
2. 화학
최한기는 바로 앞의 책 "신기천험"에서 이 세상에는 원소가 56가지 존재한다고 소개하고 있다. 19세기 초까지의 실학자들 사이에는 서양의 4원소설이 기껏이었고, 정약용 역시 그 정도에 머물고 있었던 점을 생각하면 이 또한 이 땅에 처음 알려진 근대적 원소설이 될 것으로 보인다. 글을 보면, 산소를 '양기', 수소를 '경기'라고 하는 식으로 중국의 당시 문헌을 바탕으로 원소 이름과 특징을 소개하였다. 물은 산소와 수소가 결합한 것으로, 전기로 이를 분해하면 산소가 3분의 1, 수소가 3분의 2가 된다는 식의 설명도 보인다. 또 영국과 프랑스에서 이미 사용되고 있던 도시가스를 소개하고, 황산, 질산, 염산 등의 물질에 대한 설명도 있다.
3. 의학
"신기천험"은 사실 의학서로 쓰여진 것이었다. 그리고 이 책은 중국에서 활동하던 영국 선교사이자 의사였던 벤자민 홉슨(Henjamin Hobson, 1816~1873)의 의학서 여러 가지를 참고해서 간추려 만든 책이다. 그가 사용했다고 밝힌 책만도 홉슨의 "전체신론", "내과신설", "서의약론", "부영신설" 등이 있다.
멀기만 한 근대 과학의 자생적 발달
이미 우리는 앞에서 19세기 전반기 우리나라 지식층이 어떻게 서양 근대 과학에 물들기 시작했던가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이런 신기하고 새로운 지식에 대해 많은 선구적 지식인과 학자들이 호기심을 가지고 열심히 이해하여 그 내용을 국내에 소개하려고 노력한 모습도 살펴보았다. 서양 과학과 기술은 이미 바다 바로 저쪽 일본과 중국까지 큰 규모로 밀려들기 시작하고 있었기 때문에, 만약 국내에 그럴 필요성을 강하게 느끼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더라면 과학기술을 배워들이겠다는 집단적 노력이 어떤 형태로든 시작될 수도 있었을지 모른다. 그런 노력이 시작된다는 것은 곧 이 땅에서 자생적 과학기술의 발달이 시작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자생적' 노력은 이미 19세기 초기의 일본에서는 일어나고 있었다. 19세기 초까지는 일본에는 서양 과학이 상당히 규모로 들어와 일본 학자들에 의해 소화되고 있었고, 이런 새로운 지식을 바탕으로 그 방면의 학습과 연구가 계속되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중국에서는 근대 과학에 대한 중국인 학자들의 자생적 연구와 학습 노력을 찾기 어려웠고, 조선에서는 더더욱 어려웠다. 최한기가 그 대표 주자로 앞에서 꼽혔지만, 그가 한 일은 주어진 어려운 상황에서나마 열심히 서양 과학기술을 소개하는 중국의 책을 수입해 읽고 그 내용을 국내에 소개하기 위해 책들을 써내는 일이었다. 그는 이 일을 열성적으로 했고, 또 그런 만큼의 성과를 얻었다. 이는 최한기 한 사람의 노력으로서는 대단한 수준의 일이라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그런 개인 최한기의 노력이 당시 조선의 근대 과학 수준을 실질적으로 높여주지는 못했다는 한계성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이웃 나라 일본의 과학기술 수용 수준에 비하자면, 최한기 한 사람의 업적만을 가지고 당시 조선 사회의 과학 수준을 일본의 그것과 비교하는 데에는 역부족이다. 역설적이게도 우리나라에서는 기독교는 신유사옥 이후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그야말로 자생적인 발달을 거듭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같은 서학의 일부라 할 수 있는 과학기술은 전혀 자생적 발달을 시작할만한 단계에 이르지 못하고 있었다. 1876년 나라의 문을 열 때까지 최한기 이상의 수준을 지닌 서양 근대 과학 수용에의 노력은 따로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수준이란 것도 아직 자생적인 발전을 기대할 만큼 충분한 힘을 모을 수 있는 정도에 이르지 못한 것이었다.
이규경(1788~?)
정조 때 규장각의 4검서 가운데 하나였던 이덕무의 손자이고, 역시 검서관이던 이광규의 아들이다. 19세기 전반의 어둡던 시절에 나라 안에 이렇게 뛰어난 근대 과학기술 소개를 하고 있던 과학기술의 선각자 이규경 개인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사실이 없다. 역시 실학자로 잘 알려진 이덕무의 손자였던 그는 전주 이씨였는데, 그의 박학은 할아버지 이래의 내력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의 국립도서관 겸 연구소라 할 수 있는 규장각의 검서였던 할아버지에 이어 아버지도 같은 직책을 맡았었다. 이규경은 그 덕택으로 평생을 책 속에서 살았다고 할 수 있다. 호를 오주라 했던 그는 "오주연문장전산고" 외에도 "오주서종박물고변", "백운필" 등을 남겼으나 그다지 방대한 것은 못 된다. 그러나, 다른 곳에서 찾을 수 없는 내용이 얼마든지 감춰져 있는 과학기술사의 보고를 남겨 놓은 것만으로도 이규경은 우리 과학사 연구에 영원히 그 이름을 남길 것이 분명하다.
최한기(1803~1877)
조선 후기의 실학자 가운데 가장 많은 저작을 남긴 인물이다. 본관은 삭령, 호는 혜강 또는 패동이며, 당호로는 명남루, 기화당 등을 사용했다. 개성에서 최치현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최광현에게 양자로 가서 평생을 서울에서 살았다. 부인 박씨와의 사이에 2남 5녀를 두었다. 그의 양부가 많은 재산을 그에게 넘겨주었던지 그는 평생 어떤 값비싼 책이라도 쉽게 값을 지불할 수 있을 정도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규경의 글에 그의 집에 책이 많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고, 지리학자 김정호의 지도 "청구도"의 제목은 그의 글씨이다. 김정호와 함께 세계 지도를 대추나무에 새기기도 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당대의 다른 기록에는 거의 보이지 않으며, 그의 실제 활동은 대부분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경험론적 방법론을 내세웠고, 서양의 역산과 기학을 중시하여 서양 과학을 소개하는 수많은 책들을 썼다. 이 책들은 현재 "명남루전집; 여강 출판사, 1986)으로 묶여 있다.
열다섯 번째 이야기 19세기, 우리는 일본에 얼마나 뒤졌던가
앞장에서 필자는 근대 과학의 '자생적 발달'에 관해 간단히 지적한 일이 있다. 근대 과학이란 17세기를 전후해 서양에서 급속히 발달하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고, 그것이 이어 다른 세계로, 결국은 동아시아에까지 전파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과학기술은 막강한 힘을 발휘하여 세계사를 주도하는 힘의 원천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따라서 근대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과학기술의 역사와 더불어 그것이 전 세계에 어떻게 퍼져나갔으며 역사를 형성하는 데 있어 어떻게 작용했던가를 생각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근대사와 근대 이후 우리 민족의 성쇠를 말하면서 이런 측면을 완전히 무시한 채 우리나라 사정만을 가지고 역사를 말하고 있다. 19세기 이후의 우리나라 역사를 우리나라 안에서 일어난 일들만 가지고 설명하는 우리의 역사 서술 방식은 그야말로 절름발이식의 역사 서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1910년 조선왕조가 일본에 의해 망하게 되는 과정만 해도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조선왕조 안에서 일어난 일들만 가지고는 설명이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특히 이웃 나라 일본과 중국에서 어떻게 과학기술이 발달하고 있었던가를 살펴보면, 조선왕조가 얼마나 뒤떨어져 있었던가를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실상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바로 우리 역사를 바로 아는 지름길이다. 과학기술이 제대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수준의 지식이 축적되어 있을 뿐 아니라, 그럴 필요성이 사회에서 널리 인정되고, 그런 분야에 종사하겠다는 인재 또한 어느 정도 축적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과학기술의 자생 능력이 만들어진 이후의 발전에는 저절로 가속도가 붙게 마련일 것이다. 그렇다면 서양에서 시작된 근대 과학과 기술이 동아시아에서 자생 능력을 길러가기까지 어떤 일들이 일어났던가를 세 나라를 비교해 살펴보자. 여기서 자생 능력을 갖추는 시기란 경제발전 단계론에서 말하는 '도약' 단계를 연상해도 좋을 것이다. 어차피 근대 과학은 서양에서 시작되어 세계로 퍼져나갔다. 그렇다면 그것을 빨리 받아들이는 틀을 먼저 만드는 나라가 그런 '도약' 단계, 또는 자생적 발전 단계에 먼저 들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 단계로 진입해 가는 데 우선 필요한 것은 서양 과학기술 서적을 번역해 국내에 보급하는 일이라 하겠다. 동아시아 3국에서 그런 번역이 어떻게 진행되었던가를 비교해 보면, 조선왕조가 직면하고 있던 상황을 보다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중국의 찬란한 서양 과학기술서 번역
역사적으로 볼 때 중국은 언제나 세계 문명의 집합지였다. 고대 서양 문명의 상당 부분이 중국에 전해지고 있었는가 하면 역시 고대부터 중세까지의 기간 동안에는 인도에서도 많은 것이 중국에 전해졌다. 원대에는 아랍 문명이 집중적으로 중국에 흘러들고 있었다. 특히 천문학 분야에 대한 지식의 전달이 활발했고, 의학지식도 적잖이 중국으로 흡수되고 있었다. 예를 들어, 아랍의 천문학과 천문 기구들은 원나라로 활발히 수입되었고, 그 영향은 바로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걸쳐 우리나라에까지 미쳤다. 그리고 명나라 말기에는 드디어 서양 선교사들이 중국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기독교는 당나라 때부터 조금씩 들어오고 있었지만 이제 앞서기 시작한 과학 문명을 바탕으로 하여 본격적인 기독교 문화가 중국으로 흘러들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1601년 이탈리아 출신의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Matteo Ricci)는 북경에 자리 잡아 그 후 서양 선교사들이 북경에서 활동할 토대를 만들었다, 그는 세계 지도를 만들어 당시 서양식보다 열등한 것이 드러나면서, 17세기 초부터는 서양 선교사가 과학자들이 중국 천문기구인 '흠천감'을 책임지게 되었다. 청나라 초기에는 약간의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 후에는 중국 천문학 기구를 지배하면서 중국에 서양 과학기술을 번역해 알리기 시작했다. 수많은 서양 과학기술서가 번역되어 나왔고, 그것은 중국 학자층에도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다, 청나라의 황제 감희(1654~1722)는 선교사와 친문을 가졌을 뿐 아니라, 유클리드의 기하학을 스스로 공부하기도 했고, 서양의 해부학책을 만주어로 번역시키기도 했을 정도로 서양 과학의 수용에 적극적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활발하게 발행된 서양 과학서의 일부는 조선의 학자들에 의해 수입되어 조선에도 영향을 미쳤다.
중국 학자들의 계산에 의하면, 처음 30년 동안에만 약 7천 부의 서양 서적이 중국에 들어왔다고 한다. 또 다른 조사에 의하면 중국에 번역된 서양 책은 1773년까지 모두 352종이고, 이가운데 천문학 종류가 71종, 수학 종류가 20종, 그리고 그 밖의 과학기술서가 91종이었다고 한다. 이렇게 많은 서양 과학기술서가 번역되었건만, 그 내용에 대해 우수성을 전폭적으로 인정하려는 중국학자는 거의 없었다. 대표적인 태도는 중국의 천문학자 매문정(1633~1721)이나 완원(1764~1849)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특히 완원은 중국이 서양에 개국하기 직전의 중국인들이 지니던 태도를 가장 잘 반영한다고 보이는데, 그는 중국의 고대 천문학과 역산학이 서양에 전해졌다가 오랜 세월에 걸쳐 약간 변형되어 중국으로 다시 들어오는 것일 뿐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즉 그는 서양 천문학이나 과학이 중국의 것보다 특히 우월한 것이 아니라, 중국의 것을 조금 더 변형시킨 것일 따름이라고 낮춰 보고 있는 것이다. 그는 "주인전"이라는 방대한 천문학사 책을 썼는데, 그 가운데, 갈릴레이, 케플러, 코페르니쿠스 등 서양 천문학자와 수학자들을 소개하고, 중국에서 활약한 서양 선교사 과학자들도 소개하고 있다.
이와 같은 '서양 과학의 중국원류설'은 청대의 중국인들이 서양 과학을 보는 시각을 잘 반영한다. 이런 태도가 지속되었기 때문에 아편전쟁 이전의 모든 서양 과학기술 서적 번역은 '서양 사람이 입으로 번역하면, 중국 사람이 붓으로 받아쓰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고 "중국과학문헌번역사고"라는 책은 설명하고 있다. 아주 올바른 평가다. 그리고 이런 태도는 사실은 아편전쟁이 끝나고 얼마 후까지도 지속될 수밖에 없었다. 1839년 시작된 아편전쟁이 중국의 분명한 패퇴로 끝나자 중국 지식인들은 경악하기 시작했고, 이제는 그냥 서양 문명을 얕잡아 보기만 할 수는 없다는 인식을 분명히 하게 되었다.
일본에서의 근대 과학서 번역
중국에서는 아편 전쟁 이전에 이미 막대한 분량의 서양 과학기술서가 번역되어 나왔다. 그리고 그 가운데 상당수는 일본으로 수입되었고, 일부는 조선에도 들어갔다. 그러나 일본에서도 서양 선교사들의 활약은 이미 16세기에 시작되었다. 1543년 처음으로 포르투갈 배가 구주 남단의 섬에 도착한 것을 시작으로 일본에도 서양 선교사들이 계속해 들어와 선교 활동을 시작했던 것이다. 그들은 작은 규모나마 포교를 위해 학교(꼴레지오; colegio)를 설립하고 병원을 열었으며, 서양 과학기술 서적을 번역하기도 했다. 이 초기에는 몇몇 포르투갈 선교사가 일본말을 배워 기독교를 소개하는 책과 서양 과학을 알리는 책을 내기도 했다. 고메즈(1535~1600)의 "요강"은 이미 서양의 중세 과학 내용을 조금씩 소개하고 있으며, 기독교 탄압이 시작되자 배교하고 일본 여성과 결혼한 페레이라(1580~1650)는 "건곤변설"을 써서 서양 천문학을, "남만류외과비전서"로는 서양 의학을 소개했다. 초기에는 중국에서와 마찬가지로 서양 선교사가 일본어를 배워서 서양 과학을 번역해 주는 모양을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포르투갈 선교사들의 활동은 오래가지 못하고 덕천(도쿠가와) 막부의 탄압으로 사그러들고 말았다. 그 대신 17세기 중반부터는 포르투갈인 대신 화란 사람들에게 일본에서의 무역이 허가되었고, 그들은 구주의 서쪽 항구 장기(나가사키)에 거점을 만들어 상업 활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특히 1716년에 제 8대 장국 덕천길종(도쿠가와 요시무네)이 스스로 천문역산에 흥미를 보이고, 막부의 관리들에게 화란 말 배울 것을 명하자 화란 학문은 그 위세를 크게 떨치기 시작했다. 삼국 시대 이후로 우리나라에서 문화를 수입해 가던 이래 언제나 외래 문물에 관심을 갖고 있던 일본 지식층은 서양 문명에서 새로운 것을 깊고 절실하게 느끼게 되었다. 장기에 허락한 화란 상관을 통해 배워 들인 것이 18세기에 꽃을 피운 화란 학문, 즉 '난학'이다. 그리고 그 학문적 열매가 바로 1774년 삼전현백(스기타 겜바쿠) 등 화란어를 배운 일본인이 번역한 화란 해부학책 "해체신서"였다. 화란에서 출간된 지 40년 뒤에 동양 사람에 의해 번역된 최초의 서양 과학서이다. 그 뒤를 이어 일본 난학자들은 다투어 서양 과학기술 책들을 번역, 번안해냈다. 그들이 직접 연마한 외국어 실력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장기의 화란어 통역이던 본목낭영(혼기 요시나가)은 1793년 지동설을 소개하는 영국인 과학책의 화란어 번역판을 다시 일어로 옮겼으며, 1802년에는 역시 통역 출신의 지축충웅(시즈쿠 타다오)이 화란 책을 옮겨 뉴튼의 역학을 상세하게 일본에 소개했다. 뉴튼의 중력과 관성, 원심력과 구심력, 보일~샬의 법칙, 케플러의 법칙과 칸트~라플라스의 성운설 등도 소개되어 있다. 물론 아직 지금과 같은 용어가 정립되기 전이기 때문에 용어나 개념의 혼란의 많았지만, 그런 과정을 거쳐 일본에는 근대 물리학이 자리 잡기 시작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을 배경으로 1776년에 평하원내(히라가 겐나이, 1728~1779)는 서양의 전기 연구 결과를 읽고 그것을 흉내 내어 최초로 정전기 발생장치를 만들기도 했다. 일본에서는 그 장치가 고질의 치료에 특효가 있는 것으로 선전되어 많이 보급되기도 했다. 1830년을 전후로 우리나라에도 이 발전 장치가 들어와 서울에서 구경할 수 있었다는 기록을 이규경의 글에서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은 앞에서 소개한 바 있다.
바로 이 평하라는 사람은 전기 발생장치만 만든 것이 아니라 온도계도 만들어 보고, 번개가 전기 현상이라는 것을 실험해 보기도 했다. 모두 서양 과학서를 참고해서 해 본 일이었음은 물론이다. 그는 또한 일본 역사에서 최초로 물산박람회를 개최한 박물학자로도 꼽힌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일본에는 1800년대 초에 이미 당시 서양에서 보급되기 시작한 물리학, 화학, 생물학 등 여러 분야의 과학지식과 일부 기술이 일본인 자신의 번역으로 소개되고 있었다. 오늘날 일본 과학사 학자들은 일본에 본격적인 근대 과학을 전달한 최초의 과학서로 대강 다음과 같은 책들을 꼽는다. 물리학에서는 1825년 청지가 쓴 "기해관란", 화학에서는 1837년에 우전천이 쓴 "사밀개종", 그리고 생물학에서는 1820년에 역시 우전천이 쓴 "보다니가경" 등이 그것이다. 여기 나오는 '사밀'이란 표현은 '화학(Chimie)'이라는 프랑스어를 중국식 표현으로 옮긴 것이다. 또 '보다니가'란 말 역시 라틴어로 식물학(botanica)을 뜻하는 단어를 음차해서 만든 표현이다. 초기의 서양 과학서들이 용어를 제대로 만들지 못한 상황에서 이런 식으로 급속히 번역되어 가고 있었음을 이런 표현에서도 짐작할 수가 있다. 19세기 초 일본에 서양 과학을 소개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인물의 하나로는 시볼트(Philip Franz von Siebold, 1796~1866)를 들 수 있다. 그는 1823년부터 1829까지 일본 장기의 화란 상관에서 의사로 근무한 독일인으로 당시 일본 청년들을 모아 놓고 서양의 의학, 생물학, 박물학 등을 가르쳤다. 그의 일본인 제자 여러 명이 일본 근대 과학의 개척자로 기억되고 있다. 이등규개(1803~1901)는 명고옥(나고야) 출신으로 일본 역사에서는 대표적 박물학자로 손꼽히고 있다. 1827년, 25살 때 이미 그는 시볼트를 직접 찾아가 그에게 교육을 받았다. 그는 시볼트에게서 얻은 스웨덴 학자가 쓴 일본 식물에 관한 책에 크게 감동을 받아 그 후 일본의 식물을 연구하고 세계에 일본 식물을 소개하는 학자로 성장하게 된다. 또 하나의 제자는 고야장영(1804~1850)이다. 1825년 시볼트의 제자가 되었던 그는 배운 것을 바탕으로 연구를 계속하여 1832년 "의원추요"라는 책을 냈는데, 이는 일본 최초로 서양 근대 생리학을 소개한 책으로 남아 있다. 또 그는 이 외에도 탈레스에서 라이프니츠까지의 서양 자연철학을 소개한 책을 쓰거나 병서를 쓰기도 했다. 요컨대 일본은 1800년 중반에 즈음해서는 이미 서양 과학의 대부분을 일본의 것으로 소화해 두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가장 중요한 원인은 중국 사람들이 서양 과학을 그리 대단치 않게 여기고 서양말을 배울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일본에서는 18세기 중반에는 이미 많은 일본인들이 화란 말을 익혀 화란 책을 일본어로 번역하기 시작했을 정도의 적극성을 보인 것 때문이다.
19세기 초, 우리의 실상
그러면 19세기 초 조선의 실상은 어땠을까? 과연 서양말을 하는 조선인은 몇이나 되었으며, 조선에서는 서양의 과학책 번역은 언제 얼마나 이뤄졌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우리나라에는 1883년까지 서양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마카오 지역에서 교육받고 귀국했던 가톨릭 신부 등 몇 사람이 프랑스어 등을 조금 할 수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사회적 영향의 측면에서 본다면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앞에서 소개한 것처럼 일본에선 1774년에 이미 여러 사람들이 협조하여 화란의 해부학책 한 권을 일본어로 번역하기까지 했다. 중국 지식층은 서양말 배우려는 생각을 거의 하지 않았지만, 아편 전쟁에 패하고 나자 일부 지식층은 생각을 바꾸기 시작했다 1850년쯤부터는 서양말 배우는 중국인이 부쩍 늘어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조선에는 1857년 최한기의 "지구전요"에 처음으로 영어 알파벳이 겨우 나타날 뿐이었다. 물론 최한기가 영어를 알지 못했고, 그런 상황은 1880년 초까지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당시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는 일화가 있다. 1862년 세계 일주 도중에 런던 호텔에 머물던 일본 문명개화 운동의 선두자이며 지금은 일본 화폐 1만 엔짜리를 장식하고 있는 복택유길(후쿠자와 유키치, 1834~1901)이 호텔에서 중국 학자를 만났다. 그가 중국에 서양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느냐고 묻자 그 중국인은 11명이라고 대답했고, 이에 대해 그는 일본에 몇백 명은 되리라고 응답했다. 사실이 그랬다. 1862년 당시 서양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은 중국에는 11명, 일본에는 아마 몇백 명 이상 있었지만, 조선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우리나라에서는 1883년 여름 윤치호(1865~1945)가 처음 영어를 배울 수 있었다. 당시 그는 일본에 있었는데, 김옥균의 충고에 따라 전부터 조금 공부하고 있던 영어를 1883년 초부터 적극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런 가운데 1882년 조미수호조약에 따라 최초의 주조선 미국 공사 푸트(L. Foote)가 5월 일본을 방문하여 일본 외무장관에게 자기의 통역을 구해 달라고 부탁했던 것이다. 일본 외무장관 정상은 동경에 있던 김옥균에게 물었고, 김옥균은 유일한 영어 사용자 윤치호를 추천했던 것이다. 이래서 그는 갑자기 주조선 미국 공사관 통역으로 취직하여 귀국하게 되었다. 물론 아직 영어가 짧아서 그를 도와주는 통역으로 일본인이 3개월 동안 그를 도왔다. 일본인 통역이 영어를 알아듣고 일본말로 통역하면 윤치호는 나름대로 알아들은 영어에다가 그의 일본어 통역 내용을 참고해서 한국어로 옮기는 식이었다. 그해에는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서양에 사절단을 파견하기도 했는데, 미국에 국교 수립에 대한 답례로 보낸 보빙사가 그것이었다. 보빙사는 민영익을 단장으로 8명의 사절단과 3명의 통역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통역 3명은 각기 중국인, 일본인, 미국인이 한 사람씩이었다. 미국에 사절단을 보내면서도 당시로서는 한 명도 영어를 통역할 조선인이 없었다. 영어 구사가 가능했던 단 한 사람 윤치호는 방금 일본에서 귀국하여 미국공사관에 근무하고 있을 때였다.
조선에 유달리 서양말을 하는 사람이 없었던 데에는 그럴 만한 까닭이 있었다. 그때껏 이 땅에는 서양 선교사가 한 명도 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중국과 일본에는 1500년대 중반부터 그렇게 많은 서양 선교사들이 찾아왔지만, 조선에는 단 한 명도 오지 않았던 것이다. 서양 선교사들은 이 땅에 무려 300년이나 지각한 셈이다. 그나마 1835년에 찾아온 프랑스 신부들은 1839년 모두 붙잡혀 처형되고 말았다. 샤스탕, 앙벨, 모방 등의 신부들은 이 땅에서 순교의 피를 뿌린 명예로운 이름으로 기념되고 있지만, 아쉽게도 그들에겐 이웃 나라에 왔던 선교사들처럼 과학기술을 보급할 조금의 틈조차 없었다.
동아시아 3국 간 비교 속에서의 한국사
우리가 19세기 말에 이웃 일본처럼 뚜렷하게 근대화에 성공하지 못한 까닭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외국어 실력이 없었던 때문이라고 필자는 주장한다. 통역은커녕 서양 언어를 어느 정도 구사할 수 있는 사람조차 없었으니, 서양 학술과 과학기술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19세기 동안의 세계사의 주된 흐름을 보면 당시는 바로 서양이 먼저 발달시켜 오고 있던 과학기술을 먼저 배우는 편이 한발 앞서 역사의 주역으로 등장할 수 있는 그런 시기였다. 그래서 필자는 계속해서 19세기 우리 역사는 꼭 동아시아 3개국의 역사를 함께 배경으로 생각하고 설명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동아시아 3국의 역사를 함께 생각하지 않은 채 우리나라 안에서의 역사 전개 과정만을 가지고 우리 역사를 설명하는 것은 도대체 말이 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런 필자의 주장을 오해하는 경우도 없지 않은 것 같다. 예를 들면 서양 선교사가 일본이나 중국에 비해 300년이나 늦게 들어와 우리의 근대 과학수용 그리고 근대화가 뒤지게 되었다는 주장에 대해 어떤 역사가는 "그러면 우리보다 서양 사람과 서양 선교사가 훨씬 먼저 들어온 인도나 필리핀이나 인도네시아, 기타 동남아 국가들은 왜 우리보다도 발달이 늦었던가?"라며 반박한 일이 있다.
이런 엉뚱한 항의에도 모두 대답을 해야 하는지 필자로서는 의아할 따름이다. 적어도 필자에게는 우리 역사를 인도나 동남아 국가와 비교하는 일이 별 의미가 없을 것 같기 때문이다. 중국이나 일본은 우리나라와 그 문화적 유사성이 너무나 높기 때문에 비교의 의미가 있지만, 이들 다른 나라들은 지리적 환경부터가 앞의 세 나라와는 너무나 판이하게 다르기 때문이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우리 역사를 오스트레일리아 또는 아프리카의 오지에 있는 어떤 나라의 역사와도 비교해 생각할 필요가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서양 과학의 동점 문제를 생각하는 데에는 먼저 동남아시아 3국의 상호비교가 절대로 필요하고, 그 비교에서 필자는 선교사가 이웃 나라보다 3세기나 늦게 들어와 우리의 근대화가 늦어졌다고 평가한 것이다. 앞에서 필자는 중국과 일본에서 1800년대 중반까지 나온 서양 과학서의 번역본 중 몇 가지를 소개했다. 그런데 그 많은 책이 나오는 동안 우리나라에서는 단 한 권도 서양 과학서가 번역되어 나온 적이 없었다. 아직 필자의 연구가 거기 미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우리나라에서 우리나라 사람의 실력으로 서양 과학서를 처음 번역해 낸 것은 일제 시기도 아닌, 아마도 해방 후가 아닐까 생각된다.
복택유길(후쿠자와 유키치, 1834~1901)
일본의 1만 엔짜리에 초상이 그려진 인물이다. 원래 장기에 가서 난학자가 되었던 그는 50년 초에 화란어보다는 영어가 더 필요하다는 인식을 갖게 되자 곧 자습하여 영어를 익혔다. 그 덕택에 그는 막부의 번역 일에 종사하고, 1854년 개국 후에는 1860년, 1861~2년, 1867년 등 3차에 걸쳐 서양 각국을 방문 여행하게 되었다. 이 경험과 지식을 활용해 그가 쓴 "서양사정"은 여러 권으로 출판되어 명치 초기 일본인의 문명개화에 절대적 영향을 미쳤다. 1858년 그가 동경에서 연 학원은 그 후 경응의숙을 거쳐 지금은 일본의 대표적 대학이 되었고, 1882년에는 "시사신보"를 창간했다. 김옥균과 친분을 맺어 그의 제자가 서울에 와서 "한성순보"의 발간을 돕기도 했다. 90년대에 특히 김옥균이 암살당한 다음부터는 '탈아론'을 주장하여 조선을 식민지화하자는 주장에 앞장서는 듯한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윤치호(1865~1945)
공주에 있던 충청감영의 중군이던 아버지 윤웅렬의 주선으로 1882년 신사유람단의 한 사람으로 일본에 파견되었다. 그대로 일본에 유학하여 동인사에서 공부했고, 1883년에 미국공사관 통역으로 귀국했다. 그 후 곧 중국 상해의 '중서서원'에 유학했고, 이어 미국에 가서 밴더빌트, 에모리 대학을 다녔다. 1885년부터 1894까지의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그는 학부와 외부의 협판을 지내기도 했고, 독립협회 회장과 "독립신문" 사장을 역임했다. 그는 상당히 상세한 일기를 남겼는데, "윤치호 국한문일기" 상, 하권이 번역되어 있고, 그 후의 영어 일기는 영인본으로 나와 있다.
열여섯 번째 이야기 대원군은 쇄국만 했는가
대원군의 개혁에의 꿈
조선 말기 '강화 도령'으로 흔히 불리는 철종은 자식을 여러 낳았지만, 그들은 하나도 제대로 성장하지 못하고 말았다. 어쩔 수 없이 다시 왕족 가운데 어린이 하나를 업어 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오른 사람은 12살짜리 이명복이었다. 그리고 그에게는 살아 있는 아버지 이하응이 있어 그에게는 '흥선대원군'이란 칭호가 주어졌다. 조선 시대 역사에서 대원군은 한 명이 아니지만, 보통 사람들은 '대원군' 하면 당연히 흥선대원군을 떠올린다. 그럴 정도로 그는 역사적 지명도가 높다. 흔히 흥선대원군은 쇄국정책을 무리하게 강행하여 나라의 근대화에 크게 장애를 가져왔던 지도자로 꼽히는 경우가 많다. 또 최근까지의 한국사 교재에는 그가 만들어 세웠던 '척화비'가 그의 가장 대표적 업적인 양 사진과 함께 나와 있는 수가 많았다. 당연히 이런 교육의 결과로 지금 나이깨나 든 사람들은 대원군이라면 척화비를 먼저 연상할 정도가 되었다. 하지만 이런 생각들은 조금씩 변해 가고 있다. 예를 들면 1997년에 발행된 한영우 교수의 "다시 찾는 우리 역사"에는 척화비 이야기가 쓰여있기는 하지만, 대원군의 정치개혁을 높이 평가하는 내용이 보인다. 외척과 벌열 정치를 바로 잡고, 서원을 개혁했으며, 재정 수입을 늘리고 세금을 공평하게 부과했다는 점 등이 그의 개혁 성과로 꼽혀 있다. '대원군의 10년에 걸친 내정 개혁을 굴절된 세도정치를 바로잡고 중앙집권 체제를 안정시키고, 부국강병을 강화하는 데 상당한 성과를 올렸다'는 것이다.
17년 전에 쓴 논문 '대원군 시대의 과학기술'에서 필자는 그의 집권 시대에 대해 '대원군은 과연 서구의 과학기술에 대해 전혀 무지한 사람이었던가?'하는 의문을 표시한 적이 있다. 그가 근대적인 과학기술의 중요성을 전혀 인식하지 못한 인물은 아니었음을 우리는 오늘날 여러 가지 측면에서 확인할 수가 있다. 그렇다면 어째서 그는 과학기술의 수용과는 동떨어진 방향으로 나아가는 쇄국책을 내걸었던 것인가? 필자는 연구에 의해 대원군이 절대 과학기술에 대해 무지한 사람이 아니었고, 오히려 과학기술의 수용에 큰 관심을 가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집권 전에 그는 실학자들과 교분이 있었고, 실학에도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었으며, 집권 직후에는 프랑스 신부들을 만나 그들의 도움을 얻어 프랑스 함대를 동원하여 러시아를 견제할 길을 찾으려 하기까지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집권 후 그는 오랜 기간에 걸쳐 서양 기술을 어떻게든 배워 익혀 서양식 군비를 갖춰 보려는 노력도 했었음을 알 수 있다. 우선 대원군과 실학의 관계를 생각해 보자. 그는 집권 이전에 여러 차례 당대의 명필이며 실학의 전통을 어느 정도 계승한 추사 김정희(1786~1856)를 찾아가 만나고 교류했던 것으로 밝혀져 있다. 실학의 기수 박제가에게서는 직접 사사 받기도 한 김정희는 19세기 초의 실학적 흐름을 대체로 계승하고 있었고, 또 그런 흐름을 그의 제자들에게 전수했다. 그런 제자들로는 신관호, 김기수, 강위, 오경석 등을 들 수 있고, 이들 모두가 개화기에 적지 않은 역할을 담당했다는 사실에서도 김정희의 실학적 전통을 검증할 수 있다. 대원군 시대에 활동한 실학자들의 대표로는 신관호와 박규수를 예로 들러 설명할 수가 있다. 김정희 문하에 드나들던 신관호 (1810~1885)는 대원군 집권기 중에 형조, 병조, 공조판서, 그리고 한성판윤과 훈련대장 등을 지낸 인물로서, 서양식 수뢰포 제작을 주관했고, 갑옷을 만들기도 했다. 말하자면 당시 국방 기술의 개발을 담당했던 셈이다. 또 1867년에는 "민보집설"을 써서 민방위 체제 강화를 꾀하기도 했다. 이 책은 그가 정약용의 저술을 참고하여 쓴 것으로 그다지 창의성이 돋보이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되지만, 정약용을 참고하여 책을 썼다는 것부터가 그의 사상적 배경을 드러내 주는 것으로 보인다. 역시 대원군 치하에 여러 중임을 맡았던 박규수(1807~1876)는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대 실학자 박지원의 손자다. 특히 그는 특히 그는 1871년 신미양요 때마침 평안 감사를 맡고 있었는데, 바로 이 시기에 그는 평양의 대동강에서 좌초해 불타게 된 미국 배를 끌어다가 그 엔진을 이용하는 일에 나섰던 것으로 보인다(이 사건에 대해서는 뒤에 좀 더 그 내용이 소개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 남아 있는 그의 문집에서 그가 서양의 과학기술에 특별한 관심을 보였던 것 같은 증거는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그러나 1874년경, 그의 사랑방이 바로 뒷날 개화 운동의 지도급 인사가 된 사람들의 모임터가 되었다는 회고가 있는 것을 보더라도 그가 실학 전통을 계승하고, 새로운 개혁 사상에 마음을 두고 있던 사람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이렇게 대원군은 실학 전통에 가까운 입장을 지키고 있었고, 집권 뒤에는 그런 방면의 전통을 잇던 사람들을 중요한 자리에 앉히기도 했다. 게다가 대원군은 집권 직전까지는 천주교에 대해 오히려 호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도 보인다. 천주교단 측의 기록에 의하면 대원군의 부인과 딸은 천주교도였고, 고종의 유모는 세례까지 받은 천주교도로 이름을 박말타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는 당시 8명의 신부가 포교 활동을 위해 조선에 와서 머물고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특히 대원군은 집권 초기에 천주교도 남종삼을 만나 프랑스 신부들과의 면담 주선을 부탁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천주교 지도자였고, 한때는 조선 왕실에서 승지까지 지냈던 남종삼은 대원군에게 서양과의 교역을 권하고, 서양 과학기술의 습득을 통해 나라의 부강과 백성의 이익을 꾀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대원군도 호의적 반응을 보였다고 천주교측 기록은 전한다. 또 다른 자료에는 그의 반응이 호의적이었던지에 대해 분명하게 밝히고 있지 않지만, 남종삼과 대원군이 집권 직후 만났다는 사실과 그 자리에서 천주교와 대원군 정권 사이의 모종의 논의가 시도되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그 결과 1665년 12월 15일 남종삼은 운현궁으로 대원군을 찾아가 만나서 천주교 신부들이 서울로 돌아와 있다는 사실을 전하고, 그들과의 만남을 주선하려 했다. 하지만 이때에는 이미 대원군의 마음이 변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날 대원군의 태도는 아주 냉랭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보름 만인 새해 벽두부터 참혹한 천주교 탄압이 시작되었다. 당시 조선에는 12명의 선교사가 와 있었는데, 그 가운데 베르누 주교 등 9명이 붙잡혀 죽임을 당했고, 그 후 3년 동안 8천 명의 천주교도가 처형당한 것으로 역사는 전한다. 대원군이 갑자기 극단적인 보수주의로 태도를 바꾼 이유는 아직 자 밝혀져 있지 않다. 하지만 1860년 서방 연합군의 북경 함락 사건은 당시 조선 지식층과 지도층에게는 대단한 충격이었다. 북경의 원명원을 불태우고 중국을 서양의 발굽 아래 허리 굽히게 만든 이 사건은 조선의 지도층을 전전긍긍하게 만들었고, 언젠가 조선에도 들이닥칠 서양의 위협에 떨게 했던 것이다. 그런 가운데 그들이 택할 수 있는 길은 서양을 환영하든가 아니면 서양과 한번 대결하든가 둘 중 하나였다. 처음 느꼈던 극심한 서양 공포증이 가시자, 대원군 시대의 조선 지도층이 지니게 되었던 손쉬운 대안은 '한번 싸워 보자'하는 것이었다. 1865년 중국을 방문했던 조선 사신들은 중국에서는 서양 사람들을 죽이고 있다고 과장된 보고를 했고, 영의정 조두순 역시 천주교를 인정하면서 서양 과학기술을 배우겠다는 데에 반대 의사를 분명히 했다. 대원군뿐 아니라 당시의 모든 지식층은 대체로 천주교와 과학기술을 같은 것이라 여겼다. 천주교라는 종교와 과학기술이 서로 별개이어서 천주교는 막고 과학기술만 배워 올 수 있다고는 생각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당시 조선 지식인들에게 있어서 서양 사람이란 모두 천주교도였기 때문이다. 결국 대원군이 보수 세력에게 굴복하고 천주교를 탄압하기로 결심한 것은 천주교와 과학기술을 한 덩어리로 볼 수밖에 없었던 판단 때문이었다.
문 닫고 배우는 서양의 과학기술
대원군이 1865년 말에 내린 결론은 다음과 같았다. 정권의 유지를 위해서나, 당장 급한 조선 사회의 개혁을 위해서나, 서양의 천주교는 막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서양의 과학기술만은 어떻게든지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결국 대원군은 나라 문을 굳게 걸어 잠근 채 근대 과학기술을 배워 갈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 신부의 학살에 놀란 북경의 프랑스 공사와 동아시아의 프랑스군은 소규모 군대를 강화도에 파견하여 한때 섬을 점령하기도 했다. 이렇게 시작된 1866년의 병인양요에서 프랑스군을 격퇴하자 척화비를 세워 기세를 올리기는 했지만, 서양의 무기에 대한 두려움은 그만큼 커지기만 했던 것으로 보인다. 앞에 소개한 신관호의 "민보집설"은 그 내용이 얼핏 보기에 별로 특이할 것이 없으나 내용 중에 훈련대장 신관호가 국방 계획으로 군무육조란 것을 주장했는데, 그 가운데에는 화약 무기 또는 총포를 개발해야겠다는 사항이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서양의 우수한 대표에 대비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의지가 엿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래서 당시 주목받은 대포 기술은 주로 중국에서 출간된 위원의 "해국도지"에서 찾았던 것으로 보인다. 아편 전쟁 당시 임칙서 밑에 있었던 위원이 쓴 이 책은 아편 전쟁 직후의 해방 사상을 가장 잘 반영하고 있다. 이 책은 세계 각국의 사정을 소개한 다음 화약, 대포, 군함 등의 제조법을 소개하고 있다. 기술 그 자체를 상세하게 설명하기 위한 책은 물론 아니었지만, 그 설명과 그것의 실물이 함께 있다면, 해당 기술을 익히는 데에는 더할 수 없이 좋은 지침이 될 수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바로 이것이 대원군 시대 조선의 형편이었다. 그런대로 당시 조선의 연안에는 서양의 배들이 빈번하게 출입하고 있었다. 물론 거의 다 난파선이었고, 선원들이 사망하거나 부상한 수가 많았지만, 서양 물건들은 그대로 남아 있는 경우도 많았다. 시계, 망원경, 향수에서부터 대포, 그리고 부서진 배까지 여러 가지 실물을 구경할 기회가 생긴 것이다. 거기에 설명을 붙여 주는 "해국도지"가 있으니 이해하기는 훨씬 쉬울 수밖에 없었다. 이런 정보를 근거로 대원군은 서양식 대포 개발에 열성을 보이기 시작했다. 또 총포의 개발과 함께 새로운 포병 양성 제도도 만들기 시작했다. 병인양요 직후부터 시작된 화포과는 총수와 포군을 선발했는데, 조총을 쓰는 경우를 총수라 하고, 화포 담당을 포군이라 부른 것으로 보인다. 계속해서 서양식 대포를 여러 가지로 모방하려는 노력이 지속된 것은 물론이다. 그 밖에도 대원군은 신관호를 시켜서 '수뢰포'를 만들었다. '수뢰포'란 물 속 공격으로 적선을 침몰시킬 수 있는, 지금으로 치면 기뢰같은 것을 가리킨다. 병인양요에서 서양 대포의 위력을 경험한 지 꼭 1년 뒤인 1867년에 신관호가 처음으로 만들었는데, 역시 중국에서 나온 "해국도지"에 있는 것을 그대로 흉내 내어 만들었다고 기록되어있다. 신관호가 감독해 만든 수뢰포는 고종 4년(1867) 9월 10일 한강에서 시험 발사했었는데, 큰 배를 능히 파괴할 수 있었고, 그 덕택으로 훈련대장 신관호는 상을 받기도 했다고 당시의 "실록"은 기록하고 있다. 노량에서 시험 발사가 있던 날에는 임금과 대원군을 포함하여 고관대작들이 모두 나와서 구경했고, 일반 구경꾼도 많았다고 한다. 수뢰포의 시험에 대해서는 당시에 큰 성공이라고 기록한 공식 문서가 있는가 하면, 일부 개인에 의한 기록 가운데에는 별로 대단치 않게 평가한 듯한 경우도 보인다. 전자에 의하면 수뢰포가 발사되자 강물이 열 길이 이상 치솟아 올랐고, 작은 배가 하늘로 솟아올랐다가 부서져 떨어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후자에서는 이를 비웃어 "겨우 조그만 배나 부술 수 있을 따름이지, 거함이야 어찌 능히 공격하여 부술 수 있겠는가?"라고 의심했다는 것이다. 이런 비판적 기록은 박제형(혹은 박제경)의 "근세조선정감"이란 책에 보인다. 이렇듯 한쪽에서는 큰 배를 부쉈다 하고, 다른 쪽에서는 작은 배였다고 하여 종잡기가 어려워 수뢰포의 개발이 성공적이었던가 아니었던가도 확실하게 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그 후로 유사한 기록이 거의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면 1867년 개발한 수뢰포는 그리 성공적이지만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서양의 신무기를 그림이나 설명 정도만 보고 일단 개발하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실용화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을 것이라고 짐작된다. 그리고 비슷한 현상은 그 후에도 몇 가지 나타나는 것으로 보이는데 대원군의 기선 제작 실험을 그와 유사한 경우로 들 수 있을 것 같다. 대원군은 집권 초부터 전선의 제조에 열성을 보였는데, 특히 수뢰포를 실험했던 것과 거의 같은 시기인 1867년 9월 초에는 새 전선 3척의 시험 훈령이 역시 한강에서 실시되었다. 당시의 "승정원일기"에는 이 배들이 가볍고 튼튼해서 적을 방어하는데 이보다 나을 것이 없겠다는 칭찬을 받고 제작 책임자가 역시 상을 받았다고 적혀 있다. 그러나 수뢰포를 비판한 앞의 책에는 이렇게도 기록되어 있다.
이듬해 불국 군함이 평안도 해안을 측량하다가(중략)...대동강으로 거슬러 올라왔다. 평안 감사 박규수는 (중략).... 드디어 모든 뱃사람을 잡아 죽이고, 그 기선을 빼앗았다. 그러나 그 움직이는 법을 몰라 이를 보고했고, 이어서 그 배는 한강으로 끌어다 두었다. 대원군은 김기두 등을 시켜 그 배를 모방하여 철갑함을 만들고 숯을 땐 증기를 내어 그 기계 바퀴를 움직였다. 그러나 선체가 무겁고 큰 데다가 증기의 힘이 약하여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를 부숴서 다시 만드느라 수십 만의 비용이 들었고, 무기고에 보관 중이던 구리와 쇠는 바닥이 났다. 대원군은 친히 나와서 배를 진수시키고 백성들도 나와 구경하게 했다. 불을 지펴 기계 바퀴를 돌렸으나, 배의 움직임이 극히 더디어 1분에 겨우 열 발짝 남짓 움직일 정도였다. 끝내 어쩔 수가 없어서 작은 배 여럿을 동원하여 줄로 배를 끌어가게 했다. 구경꾼들이 웃으며 이 따위 물건을 장차 어디 쓰겠느냐고 할 정도였다. 대원군은 흥이 깨지고 말았으나, 끝내 후회하는 말은 하지 않았고, 뒤에 이 배를 부숴 대포 만드는 데 쓰게 하고 말았다.
여기서 '불국'이란 군함이라고 한 것은 사실은 불국(프랑스)이 아니라 미국 군함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미국 군함 제너럴셔먼호가 1866년 7월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까지 올라갔다가 좌초하여 평양 시민들에게 불태워진 사건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셔먼호의 엔진이 한강에 옮겨져 우리나라 최초의 기선에 다시 사용되었다는 말은 사실 조금 의심스럽다. 왜냐하면, 당시 박규수의 보고에 의하면 셔먼호는 거의 다 불타 버려서 그가 타버린 배에서 모아 평양 감영 무기고에 보관해 둔 것들은 고철 덩이뿐인 것처럼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드시 셔먼호가 아니더라도 당시 표류해 온 서양 배들이 더러 있었기 때문에 근대 선박의 엔진을 구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또 "해국도지" 등의 설명을 참고하여 기선을 만들고 실험해 보는 것이 가능했고, 실제로 그런 실험들이 실시된 것으로 보인다. 다만 너무나 참담한 실패였기 때문에 당시의 "실록" 등에는 기록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수뢰포의 제조 실험, 그리고 한국 최초의 기선 제작 실험에서 나타난 분명한 사실은 그런 방식으로 근대 과학기술을 수용할 수는 없었다는 사실이다. 대원군은 나라의 문은 닫아 정권의 안정을 유지하면서 서양 근대 과학은 수용해 보려는 태도를 보였으나, 그런 방식의 한계를 확인해 가고 있었던 셈이다.
비선과 배갑에 대한 엉뚱한 오해
아마 오늘 우리들에게 더욱 흥미로운 사실은 대원군이 처음으로 비행기도 만들어 실험했다는 일부 역사가들의 보고일 것 같다. 지금도 읽히고 있는 여러 가지 우리나라 책에는 대원군이 실험했던 비행기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예를 들면 진단학회에서 내놓은 "한국사" 최근 세 편에는 대원군의 기발한 신무기 개발을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다.
학우를 편조하여 수상용 비행선 제조에 착안한 것이다. 새 날개가 가벼우니 적함의 포탄을 받는다해도 날아 후퇴하게 될지언정 파손당하지는 않으리라는 착상 아래 한강 언덕에서 제조 실험했다고 한다. 그 결과 학, 두루미를 잡기에 전국 엽포수만 수고하고 실패하였다 하나, 이 점은 근대 세계 그 어느 나라의 비행기 발달사를 보아도 매일반이니, 오히려 기특한 일이라 아니 할 수 없다. 대원군의 이러한 실험이 병인양란 다음 해 정묘(1867) 경으로 짐작되는 바, 외국의 예를 보면 미국의 라이트(Wright)형제가 비행기의 전신으로 글라이더(glider) 제작에 착수한 것이 서기 1900년 경이요, 그 실험 비행에 성공한 것이 서기 1903년이었으니, 비록 실패는 했어도 36, 37년이나 앞선 이야기가 아니더냐.
이처럼 대원군의 비선을 비행선 또는 비행선의 원조처럼 생각하는 것은 1928년 이능화가 시작한 오해에서 비롯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능화는 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조선기독교급외교사"에서 이 비선을 비행선으로 잘못 소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잘못은 그대로 계승되어 여러 학술 논문에 그대로 따르는 상태가 되어서, 필자가 본 경우만도 1968년 "아세아연구"에 쓴 논문, 1977년 "한국학보"에 쓴 다른 학자의 논문 등이 앞에 인용한 진단학회의 "한국사"나 마찬가지 잘못을 범하고 있다. 우리 역사에 관한 글을 쓰는 이름난 대중작가 한 사람도 같은 실수를 하고 있다. 그러나 대원군의 비선은 날아다니는 장치와는 아무 상관도 없다. 비행선도 비행기의 원조도 전혀 아니라는 말이다. 그것은 학이나 두루미 깃털을 모아 보통의 배에 붙여서 만약 배가 적탄을 맞아도 물에 가라앉지 않게 해보겠다는 실험이었다. 하지만 아교로 붙인 깃털은 물에 들어가자 바로 떨어져 나가버려서 헛수고만 했다고 당시 기록은 전하고 있다. 앞의 기선이나 수뢰포 등이 대원군이 실험했던 서양 근대식 기술의 도입이라면, 이 비선 실험은 전통 기술의 응용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역시 같은 시기에 실험되었던 면포배갑이란 것 역시 비슷한 경우다. 무명이 총알을 잘 막아 준다는 말은 들은 대원군은 이를 실험하게 했다. 12겹의 무명에 솜을 두어 총알을 쏘았더니 드디어 관통하지 못했다. 그래서 대원군은 무려 13겹으로 이루어진 무명 갑옷을 만들게 했지만 이것 역시 실용하기는 어려웠다. 너무 무거웠을 뿐만 아니라 특히 여름에는 그 갑옷을 입고서는 열을 못 견뎌 코피를 흘릴 지경이었기 때문이다. 대원군이 활동한 시기는 대략 1864년부터 10년 동안이라 할 수 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실질적인 최고 권력자였고, 그 기간 동안 많은 개혁 사업을 벌이기도 했다. 그의 과학기술에 대한 태도 역시 적어도 초기에는 아주 개방적이어서 무엇인가 해낼 수도 있을 것 같다는 가능성이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집권 3년 이내에 이미 보수층과 협조하지 않고서는 자신의 권력 유지가 어려운 상황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갑자기 보수층과 손잡고 천주교를 탄압하고, 결국 열강의 간섭을 불러 서양과의 대결 국면으로 나라를 몰고 갔다. 그때까지 일부 실학자들이 서양 근대 과학에 대해 관심을 보였지만, 그런 일부 학자들의 학문적 태도 또는 심정적인 근대 과학 예찬만으로는 과학기술 수용의 실질적 효과를 얻기는 어려웠다. 물론 바로 같은 시기에도 여전히 그런 노력을 계속하는 최한기 같은 사람이 있기도 했다. 최한기의 마지막 주요작품 "성기운화"와 "신기천험"은 바로 대원군이 보수회귀하던 시기인 1866년과 1867년에 완성되었다. 어떤 의미에서 대원군은 그런 실학자들과는 달리 실권자로서 서양 과학을 수용하는데 직접적으로 크게 힘을 실어 줄 수도 있었던 시기에 집권했다. 하지만 결국 그는 정치 논리에 휩싸여 이렇다 할 공을 남길 수는 없었다. 다만 몇 가지 근대 과학기술의 실험적 모방이 기억될 뿐이다.
척화비
대원군은 1866년, 1871년에 미국과 프랑스의 침략을 모두 물리쳤다. 물론 그들 침략은 사실 아주 작은 규모의 지역 함대의 정찰 정도였지만, 대원군으로서는 우쭐한 기분이 들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들을 물리친 그는 전국에 척화비를 세워 서양 침략에 대한 항전 의식을 고취했다. 그 글귀는 "서양 오랑캐가 침입해 오니, 싸우지 않으면 강화해야 한다. 강화함은 곧 나라를 파는 일이다."라는 내용이다.
남종삼(1817~1866)
고종 때 천주교 순교자로 세례명은 요한이다. 그의 아버지는 1827년 북경에서 영세를 받고 입교했고, 그 자신은 중국에서 번역된 천주교 서적을 읽고 열렬한 천주교도가 되어 베르느 신부를 자기 집에 숨겨 줄 정도였다. 1838년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교리, 영해 현감을 거쳐 승지가 되었고, 고종이 즉위하자 왕족의 교육을 담당하여 대원군과도 친하게 되었다. 프랑스 신부들의 도움을 얻어 러시아의 남침을 막으려는 생각은 대원군과 같았으나, 천주교에 대한 두 사람의 견해차가 결국 대원국의 입장을 표변케 하여, 그는 1866년 3월 7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당하고 말았다.
해국도지
1844년 중국에서 위원(1794~1856)이 쓴 책으로 서양의 사정을 상세하게 기록한 것이다. 아편 전쟁 중 중국 측 책임자였던 임칙서가 세계 사정을 기록한 "사주지"란 책 등을 참고하여 새로 쓴 책이다. 1842년에 편찬하여, 1844년 50권으로 출판했고, 1847년에는 60권, 1852년에는 100권으로 증보했다. 배를 만들기 위한 조선창, 화약 무기 개발을 위한 화기국의 건설을 강력하게 주장하여 해방 사상을 고취했다. 그는 서양의 앞선 것 셋으로 군함, 화기, 군대 양성과 훈련을 들었다. 이미 최한기는 이 책을 참고하여 "지구전요"를 지었고, 대원군 시대의 해방 사상에 크게 영향을 주었다.
열일곱 번째 이야기 조선에는 어떤 과학이 있었나
1876년의 강화도 조약으로 조선왕조는 500여 년 동안 닫혔던 문을 열었다. 왕조의 개국은 근대 과학의 학습을 시작하게 된 것을 의미한다. 19세기 중반까지의 조선 지식층의 근대 과학에 대한 태도가 호기심 수준에 머물고 있었다면, 개국 후 19세기의 마지막 4반세기 동안 지식층이 가졌던 태도는 절실한 필요성 그 자체였다. 더구나 이양선의 보다 빈번해진 출몰은 그런 위기감을 한 것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대원군은 그런 위기의식에도 불구하고 마지막으로 오기를 부려 버티려 해보았지만, 이제 더 이상 그런 식으로 버티기 어렵다는 것은 아무리 뒷방에 갇혀만 있던 '은둔의 왕국' 백성들에게일지라도 명백해진 상황이었다. 특히 1860년 서방 연합군이 북경을 함락하는 사태까지 벌어지자 그 소식의 충격은 대단했다. 아직도 위정척사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없지 않았으나, 대세는 이미 부분적 개화로 기울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곧 '동도서기'라는 주장으로 나타났다. 마치 그 이전의 일본이 '화혼양재'를 말하고, 중국이 '중체서용'을 내세웠듯이, 비슷한 부분적 근대화의 주장이 조선에도 고개를 들었다. 척사파가 주장하는 것처럼 지나친 이익이나 부강의 추구란 전통적 가치관에서는 다름 아닌 '본을 버리고 말에 치우치는 오류' 그것이었다. 자칫하면 유교적 가치의 근본을 버리고 말폐만을 따르는 어리석음일지 모른다는 걱정이 지식층 사이에 퍼진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걱정 속에서도 과학기술을 배우겠다는 의지가 조금씩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개방 직후의 과학기술 탐방
개국과 함께 김기수는 처음으로 일본을 구경할 기회를 얻었다. 1876년 5월 한 달 동안 그는 일행 60명을 거느리고 명치(메이지) 시대의 개화 일본을 시찰하러 나선 것이다. 물론 이들 60명 인원 중 대다수가 하인들과 교자꾼으로 구성된 일행이었지만, 그들은 처음으로 화륜선을 타보고, 기차를 탔으며, 신문이란 것을 구경하고, 대포를 비롯한 근대식 병기에 감탄했다. 아마 김기수는 사진을 찍어 본 최초의 조선인이었으리라 짐작되며, 처음으로 양식을 먹어 보았고, 서양 음악을 들었을 것이다. 귀국한 다음 6월 1일 임금 앞에 나선 그는 고종 임금과 대강 이런 대화를 나눴다.
고종 : 흑전청륭, 정상형을 만났는가?
김기수 : 모두 만났습니다. 정상은 곧 서양 여러 나라에 가서 5~6년 뒤에나 돌아온다고 합니다.
고종 : 어째서 그리 오래 걸리는가?
김기수 : 기계를 공부하려는 것이랍니다.
고종 : 무슨 기계인가?
김기수 : 모든 기를 다 배운다 합니다.
고종 : 서양 여러 나라 가운데 어느 나라가 가장 재가 있는가?
김기수 : 영걸리(영국)가 제일이라 합니다.
고종 : 미리견(미국)은 어디에 있는가?
김기수 : 서양의 서쪽, 동양의 동쪽에 있습니다.
고종 : 화륜은 처음 어디서 시작된 것인가?
김기수 : 미리견이라 합니다.
고종 : 기계는 모두 어디서 나온 것이며, 일본은 지금 그것을 다 배웠는가?
김기수: 일본은 각국의 기계를 모두 다 배웠다고 합니다.
이 자리에서 특히 고종은 일본인들이 전선, 화륜, 농기 세 가지를 가장 열심히 발달시키고 있다는 것이 사실인지를 묻기도 했다. 전선이란 지금으로 치자면 전기통신을 가리킨다. 당시 아직 초보적이기는 하지만, 전신 기술이 발달하여 보급되고 있어서 전 세계가 이에 열중할 때였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등장하는 '화륜'이란 증기기관을 가리킨다. 물론 증기기관이 처음 발달한 곳은 영국으로 앞의 대화에서 김기수가 그것을 미국에서 처음 나온 것이라 소개한 것은 잘못이다. 증기기관은 한 개의 기관이 비롯된 힘이 여러 가지 기계를 움직이는 힘이 되어 준다는 사실로 인해 조선인들에게 놀라움의 대상이었다. 농기를 언급한 것은 일본이나 조선이나 당시로서는 거의 전 경제가 농업구조 위에서 있었던 시기였던지라 당연히 농사 기술에 관심을 가져서인 것으로 보인다.
1880년에는 미국과의 외교 관계 수립 문제를 살피기 위해 김홍집이 일본을 다녀왔다. 그의 보고를 들은 고종은 당시 일본의 외교 관계를 중심으로 여러 가지 질문을 했다. 그러나 이 문답에서는 과학기술에 관해 특히 질문한 것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때 김홍집이 일본은 다녀왔다. 그의 보고를 들은 고종은 당시 일본의 외교 관계를 중심으로 여러 가지 질문을 했다. 그러나 이 문답에서는 과학기술에 관해 특히 질문한 것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때 김홍집은 그 유명한 황준헌의 "조선책략"을 가져왔다. 당시 주일청국 공사관 참찬관이던 황준헝은 아라사(러시아)의 남하를 막아야 하는 일이 급하다면서, 이를 위해서는 조선이 중국, 일본, 미국과 연합하여 자강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고종은 김홍집에게 여기서 자강이란 말이 바로 부강을 뜻하는 것인가 묻고, 김홍집이 이를 조금 설명하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부강지술' 뿐이라고 단정하고 있다. 여기서 당장 느낄 수 있는 김홍집과 고종 사이의 차이는 흥미롭다. 김홍집이 여러 가지 서양 기구와 기술들을 설명하고 제도까지도 개혁할 필요성을 들먹이자, 고종은 그 말은 끊고 '부강지술'로 충분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참고로 덧붙이자면, 황준헌은 "조선책략"에서 당시의 세계정세를 설명하고, 조선이 개국하여 여러 나라와 관계를 맺고 무역을 할 것을 권하고 있다. 또 구체적 방법으로는 북경의 동문관에 학생을 보내 서양말을 배우게 하고, 군대를 훈련시킬 것이며, 상해의 제조국에서는 여러 기계를 습득하게 할 것이고, 복주의 선정국에서는 조선술을 배우게 할 일이라고 권장하고 있다. 또 일본의 조선소, 화약국, 군대에도 사람을 보내 배우게 해야 한다고도 말한다. 아울러 그는 서양 사람들의 천문학, 화학, 광학, 지학 등을 모두 배울 만하므로 부산 등 몇 곳에 서양인들을 초빙하여 학교를 열어 가르치고 군대를 훈련하는 것도 좋을 것이라 권고하고 있다. 중국에서 1860년대 이후 강력하게 추진하고 있던 이른바 '양무운동'을 조선에도 권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중국으로, 근대 기술 도입의 첫걸음 '영선사행'
1880년쯤이 되자 바로 그 부강지술을 배워야겠다는 의지가 확실하게 자리 잡게 되었고, 1881년에는 그를 위한 조치로 두 가지 중요한 시험이 실행에 옮겨졌다. 기술유학생의 중국 파견과 과학기술 시찰단의 일본 여행이 그것이다. 조선 정부는 이미 1879년부터 변원규를 청나라에 보내 중국에의 기술유학생 파견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었고, 그 결과 이홍장으로부터 이를 허락 받고 있는 상태였다. 이는 궁극적으로 조선 정부를 중국의 근대화 방향에 따라 선택적으로 개혁하려는 시도로도 생각된다. 조선에도 중국과 같이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고 선박, 무기, 서양어 등을 위한 근대적 여러 시설과 기구를 그 안에 갖추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기초인력의 양성이 필요했고, 기술유학생은 이를 위한 준비였다. 우리 역사에서는 이들 첫 기술유학생을 '영선사행'이라 부른다. 고종은 1881년 9월 김윤식을 영선사로 임명하고, 그가 알맞은 유학생을 선발하여 중국 천진의 기기창으로 인솔해 갔다. 그가 선발한 유학생은 학도 25명과 공장 13명, 모두 38명이었다고 그의 일기에 적혀 있다. 이들은 16살에서 40살까지 다양한 연령에의 사람들로 구성된 약간은 기이한 유학생단이었다. 사실 말이 38명이지, 실제로는 그들이 데리고 간 하인이 14명 따로 있었고, 사무직원과 통역, 그리고 의사 1명까지 수행하고 있어서 결국은 모두 83명이나 되는 규모였다. 그런데 이들 가운데 '학도'란 무엇이고, '공장'이란 어떻게 다른 것인지 분명하지가 않다. 다만 둘 다 중인층과 그 이하의 사람들만이 선발되었던 것으로 보여서 양반으로서 여기 가담한 인물은 없었다고 생각된다. 유학에 대한 불충분한 인식때문이었는지 지원자가 충분하지 않아서 김윤식은 중국으로 가는 도중에도 유학생을 선발하면서 갔던 것으로 보인다. 인솔을 책임지는 김윤식으로선 대단히 어려운 과업이었음이 분명하다. 정부는 그에게 유학생을 선발해 이끌도록 영선사라는 감투를 씌워 주긴 했지만, 실제로 그에 상당한 경제적 뒷받침은 해 주지 않았다고 한다. 게다가 만주 지방의 흙먼지를 쓰며 걷고 걸어서 연말에야 천진에 도착한 일행은 반수가 이미 풍토병 등으로 환자 신세가 되어 있어서, 5명 이상이 바로 귀국하게 되었다. 또 한 명은 광증이 일어나 귀국했으며, 몇 명은 간단한 적성시험 결과 '무재'라 판정받아 공부할 자격조차 박탈당하고 말았다. 그뿐 아니라 나머지 대부분 학생들은 기술 유학으로 선발되어 갔으면서도, 도착한 다음에는 외국어 공부를 자원하는 형편이었다. 아직 국내에서는 근대기술을 배우려는 유학생을 선발하여 미리 준비를 시킬 만한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야말로 마구잡이로 데리고 간 유학생들이었다 거의 모두가 양어 공부를 자원하자, 간단한 서양말의 발음시험으로 몇 명에게만 이를 허락하였고, 나머지 학생들은 화약, 전기, 제산, 무기, 제도 등의 여러 기술 분야 훈련에 배치되었다. 끼니를 걱정할 정도의 악조건 속에 유학하고 있던 이들에게 1882년 여름에는 고국에서의 임오군란 소식이 전해졌다. 이것이 결정적으로 유학생들의 학업 의욕을 꺾어 버린 것으로 보인다. 그 해 봄부터 시작된 귀국은 계속 이어져 가을 무렵에는 모든 유학생이 귀국하고 말았다. 그리고 다시는 중국에 그런 유학생이 파견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영선사행'은 실제로 겨우 20명 안팎의 유학생을 1882년 초부터 가을까지 반년 남짓 훈련시킨 정도로 끝나고 말았다. 이것이 조선 시대의 우리나라 사람이 근대기술 훈련을 받은 유일한 경우였다. 이 기회에 기술 훈련을 그런대로 마치고 귀국한 유학생은 모두 18명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이 그런대로 훈련을 받은 근대기술자였고, 1880년대에는 이런 제도저 훈련을 받은 기술자가 더 이상 없었다. 이들은 귀국할 때 62종의 기계와 약품, 53종의 과학기술 서적을 가져온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이들 가운데 그 후 특히 눈에 띄게 활약한 인물로는 상운을 들 수 있다. 그는 1882년 3월 22일 제1차로 학업을 마치고 귀국했는데, 백낙륜이라는 통역 한 사람과 수종 3명이 일행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로 보아 그는 중인층의 부유한 집 아들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21가지 전기 기기와 책 등을 가지고 귀국했는데, 그가 가지고 온 기구들 가운데에는 '덕률풍'이 2개 있었다. 덕률풍이란 '텔레폰(telephone)', 즉 전화기를 중국식 표기로 나타낸 것을 말한다. 상운은 귀국 후 기지국, 전보국 등의 위원으로 활약한 기록이 보인다. 그는 명실공히 우리나라의 첫 전기 기술자였다.
일본으로의 근대화 관광, '신사유람단'
고종이 생각했던 부강지술은 그리 쉬운 것이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영선사에 이어 일본에서 그 부강지술이 어떻게 활용되고 있는가 알아보려는 시찰단이 같은 1881년 일본을 향했다. 조선왕조가 해외에 파견한 최초의 근대 과학기술 시찰단이었던 셈이다. 나라 안 척사파의 반대를 고려하여 비밀리에 파견된 이들 "일본국정 시찰단"을 역사에서는 흔히 '신사유람단'이라 부른다. 모두 62명의 유람단은 12반으로 나뉘어 3개월 동안 근대 일본의 여러 구석을 모두 시찰할 수 있었다. 이들이 구경한 것은 화약, 대포, 유리, 도자기, 가죽, 선반, 양잠, 방적, 인쇄 등의 여러 분야의 근대기술이 관련된 공장 등이었다. 그리고 박물관, 신문사, 조폐국, 등대, 천문대, 각급 학교 등을 구경했다. 공부성을 주로 담당해 시찰한 승지 강문형은 시찰 기록을 상세히 적어 남기고 있는데, 그는 당시 일본 학교에서 가르치던 과학 과목들을 이학, 과학, 중학, 광학(빛), 전기학, 신학, 광학(돌), 지리학, 기기학, 동물학, 식물학 등의 이름으로 소개하고 있다. 또 그는 자석이나 라이덴병, 여러 가지 전기 기구, 피뢰침, 전신, 가스등을 비교적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기도 하다. 이것 외에도 상당히 많은 정보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는 당시 책으로 출판되지는 않았지만, 지식층 사이에서는 이런 글들이 베껴져서 널리 읽혔을 것이라고 짐작된다. 앞에 소개한 중국의 '영선사행'이 중인층 이하의 사람들을 억지로(?) 뽑아 파견했던 것과는 판이하게 일본에 보낸 '신사유람단'은 이름만큼이나 여유 있게 뽑혀 파견되었다. 각 반의 책임자는 당시의 내노라 하는 양반 고위 관리들이었고, 그 수행원들로는 양반 또는 중인층의 젊은 청년들이 뽑혔다. 중국에 갔던 영선사 행의 기술유학생들은 그 후의 역사에 뚜렷하게 그 자취를 남기지 않았다. 하지만 일본에 유람 갔던 젊은이들 대부분은 그 후 우리나라 개화기의 개화 운동을 주도하는 주역으로 활약했다는 것을 금방 알 수가 있다. 특히 이 가운데 윤치와 유길준이 개화기 이 나라의 대표적 지식인으로 길이 역사에 이름을 남긴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이렇게 볼 때 '영선사행'은 실패로 끝났고, '신사유람단'은 성공적이었다고 평가할 수도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간단한 평가란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다만 당시 조선왕조가 꾀하던 바는 구체적인 기술은 중국에 기술자를 파견해 배워오고, 그 발달의 실상은 일본에 가서 구경하고 돌아온다는 것이었고, 이런 두 갈래 목적을 우리 조상들은 그런대로 달성하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다만 유교 사회의 특징이 그렇고, 또 우리 역사가 더욱 그랬듯이, 전문적인 훈련보다는 교양주의적 태도가 지식인을 사로잡기 마련이었다. 바로 그런 교양주의가 결국 '영선사행'과 '신사유람단'이 서로 그렇게도 다른 결과를 낳을 수 있는 터전을 만들었다고도 생각된다.
"한성순보"의 과학기술 소개
1883년 10월 초하루에 창간호를 선보인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신문 "한성순보"는 바로 이런 교양주의적 과학기술 보급을 위해 세상에 나왔다고 보일 지경이다. 그럴 정도로 서양 과학기술의 국내 소개에 이 신문은 열성을 바치고 있다. 이 신문은 거의 대부분 외국의 과학기술을 소개하거나, 아니면 서양 여러 나라의 제도들을 소개하는 일에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이 신문을 발행하면서 첫 호의 앞에 붙인 '순보서'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교묘한 지혜가 날로 발전해 가고, 기선이 전 세계를 누리며, 전선이 사방을 이어주니...(중략)...서양의 돌아가는 모양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이를 모르고 지나칠 수 없다."면서 과학기술의 변천과 발달 과정을 아는 것을 지식인의 의무로서 강조하고 있다. "한성순보"는 1883년 10월 1일 자에서 시작하여 1884년 8월 21일 자까지가 모아져 영인되어 있는데, 그 구성을 보면 국내 기사가 407건, 외국 기사가 1, 019건이다. 이 기사들은 대체로 짧은 것이 특징이나, 그 후에 이어지는 '집록'이란 부분은 아주 길게 이어진다. 집록 기사는 모두 116건뿐이지만, 이 부분이야말로 당시 사람들을 문명과 개화로 안내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첫 호에 있는 집록 기사는 세 가지인데 지구도해, 지구론, 논주양이 그것이다. 동, 서반구의 지구가 그림으로 그려져 있고 지구에 대한 과학적이고 지리적인 정보가 모두 실려 있으며, 그것은 마지막 기사에 의해 다시 상세하게 보충되어 있다. 천문 지리에 관한 기본적 지식을 모두 망라하고 있는 셈이다. 사족이 되겠지만, 지난 1983년에 "한성순보" 발간 100주년을 맞아 국내 언론학자들 사이에서는 '신문인가, 아니면 잡지인가?' 하는 논쟁을 불러일으킨 적도 있다. 이들 집록 기사를 보면 대부분 지금의 잡지 기사 양식과 유사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1880년대 초의 그런 기사들은 당시 조선의 지식층에게 있어서는 최대의 뉴스였을 것이다. 그런 뜻에서는 지금 우리 눈에 잡지 적인 기사로 보인다고 해서 이를 잡지라고 평가하자는 의견이라면, 필자는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어떻든, 이러한 제한된 노력을 통해 국민에게 과학기술을 알리려는 운동이 일어난 셈이다. 이는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과학 대중화 운동의 첫 신호탄과도 같다. 기사를 계속 훑어보면, 제2호에는 지구의 운동이 설명되어 있고, 제4호에는 전기에 대한 지식을 소개하고 있으며, 제9호는 전보, 전신, 해저 전신 등이 상세하게 설명되어 전 세계의 실상을 알리고 있다. 과학기술에 대해 직접적으로 소개하고 있는 기사만 들어보아도, 지구의 운동과 계절, 서양의 교통 기관, 과학 발달의 역사, 기선의 역사, 천문학의 원류, 점성술의 옳고 그름, 새로운 철도 방식, 신무기, 기상 이변, 기술연구소, 과학연구기관, 가스등, 현미경, 우두의 역사, 행성, 망원경, 습도계와 온도계 등이 제20호에 이르기까지 설명되어 있다. 또 제21호 이후의 후반부에 이르면, 제철, 산소, 수소, 질산, 화산, 영국의 수정궁(Crystal Palace)과 정신병원, 탄소, 염소, 항성, 아리스토텔레스의 일생, 양잠 등에 관한 다양한 기사들이 이어진다. 기사의 성격을 한번 훑어보면, 후반부로 가면 갈수록 과학기술 그 자체를 기사화하기보다는 서양의 제도와 사정을 알리려는 내용이 중심이 되어 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첫 호에 나온 기사를 통해 아마 많은 조선인들이 처음으로 땅이 둥글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알게 되었을 것 같다. '땅의 모양은 귤처럼 둥글다'고 설명은 시작된다. 그리고 지구의 양 반구가 그려져 있고, 더 작은 글씨로는 몇 가지 지명, 적도, 북극, 남극 등이 표기되어 있다. 지구는 열대, 북온대, 남온대, 북한대, 남한대의 5개 구역으로 나눠진다고도 설명되어 있다. 또한, 경선과 위선에 대한 설명과 함께 서울은 북위 37도 39분이고, 그리니치의 동쪽 127도에 있다고도 설명해 놓았다. 지동설은 1541년 가리가란 사람이 망원경을 만들어 처음으로 확실해졌다고 써 있다(이 대목은 물론 잘못된 내용이다. 갈릴레이가 망원경을 만든 것은 60년 뒤인 1608년의 일로 알려져 있다). 천문학은 당시 가장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서양 과학 분야였던 것으로 보인다. 제16호 집록에는 '성학원류'라는 글이 있는데, 이는 탈레스에서 톨레미까지의 우주관을 설명하면서 서양 고대 천문학의 역사를 간단히 소개한 글이다. 이어서 실린 '점성변류'란 글은 동서양 점성술의 잘못을 비판한 글이다. 망원경의 발명 이래 어떤 천체는 태양보다도 크다는 사실도 밝혀졌는데, 어떻게 그리 큰 천체가 움직이는 데에 따라 인간 세상의 화복이 좌우되겠느냐고 의문을 말한다. 또 점성술이야말로 마치 인간이 켜 놓은 5색 등불을 보고 개미가 그것이 자기들을 위한 불이라고 착각하는 것과 똑같다고 말한다. 당연히 혜성 같은 것이 재이라 할 수도 없다고 그는 쓰고 있다. 유교 정치사상에서 핵심적인 자리에 있던 재이론을 거부하는 기사다. 글의 끝부분에는 원래의 인용이 어디서 이뤄졌던가를 설명하는 글이 적혀 있는데 이 기사들은 중국에서 나온 "중서문견록"의 인용이었다고 한다. 이시기에 일본에서는 이미 수많은 서양 과학기술자들이 살면서 일본인을 가르치고 있었고, 역시 수많은 서양 과학기술자들이 살면서 일본인을 가르치고 있었고, 역시 수많은 일본인 학생들은 유럽과 미국에 유학하여 과학기술을 공부하고 있었다. 또 중국에서는 역시 서양에 유학생을 파견하였고, 또 많은 공장과 교육기관을 만들어 서양 과학기술을 학습시키고 또 근대적 기계 등을 제작, 실습하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왕조에서는 이제 겨우 중국에서 나오고 있던 잡지를 들여다가 베껴서 지식층을 계몽하기 시작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883년 무렵 우리나라의 과학기술 수준이란 것은 아직 거의 아무것도 없는 상태였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한성순보"는 거의 백지에 가까웠던 당시에 서양 과학기술의 온갖 부분을 상세하게 소개함으로써 국내 지식층에게 과학기술의 모든 분야를 개괄적으로 소개하는 역할을 맡았던 것이다. 특히 처음 몇 호에 걸쳐서 소개한 천문 지리의 기사들은 당시 지식층이 잘 알지 못했던 지구와 태양계, 그리고 지구 각 지역의 정보를 소개해 주어, 처음으로 그들이 살고 있는 세계에 대한 보다 정확한 정보를 전달해 주었다고 할 수 있다.
김윤식(1835~1922)
서울 출신으로 호는 운양이다. 박규수의 문인으로 1874년 문과에 급제했다. 1881년 영선사로 38명의 기술유학생을 데리고 중국 천진에 가서 근대기술 습득을 독려했다. 이홍장을 7차에 걸쳐 만나 조미통상조약을 준비하여 1882년 이를 체결할 수 있게 했고, 임오군란에는 청을 도와 대원군을 제거하는 데 일조했다. 그 후 청나라와 협조적이었고 갑신정변에서는 개화파에 반대했으나, 갑오개혁에서는 주역의 한 사람이 되었다. 그 사이 5년 이상 유배된 일이 있고, 아관파천 이후 다시 제주로 유배되었다. 그의 제주 유배 중에 나라는 이미 실질적인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고, 1907년 10년 만에 70세 이상의 나이가 된 덕에 풀려 나왔으나, 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곧 일제에 합방 당하고 말았다. 일제 시기에도 소극적인 반항을 계속하여 기미독립운동 이후에은 일본에 독립을 원한다는 선언서를 내기도 했다. "운양집", "천진담초", "음청사", "속음청사" 등이 저서로 남아 있다.
상운
언제 어디, 어느 집안에 태어났는지 아직 알려진 바 없으나, 1881년 김윤식을 따라 영선사 행에 참가했다. 학도 25명과 공장 13명으로 구성된 이 일행에서 그는 학도에 속했다. 아마 중인계층의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전기기술을 배워 1882년 3월 22일 제1차로 귀국하여 우리 역사상 최초의 전기 기술자가 되었다. 1883년 삼청동에 기기국을 세우자 그 위원으로 임명되었고, 뒤에는 전보국 위원으로도 활약했다. 그 이상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중서문견록"
1872년 북경에서 창간된 종합 시사 잡지로 영어로는 Peking Magazine이라 불렀다. 1876년 이 잡지는 상해로 발행지를 옮기면서 그 책임자로 프라이어(John Fryer)가 등장했고, 잡지 이름도 "격치휘편(The Chinese Scientific Magazine)"으로 고쳤다. 당시 우리나라에도 계속 수입되어 많은 영향을 주었다.
열여덟 번째 이야기 100년 전에는 '과학을 무엇이라 불렀나
1876년 개국 이후 서양 과학기술에 대한 지식이 서서히, 때로는 빠른 속도로 이 땅에 밀려들기 시작했다. 아직도 '과학'이란 말이 나오기도 전의 일이었다. 이 기간 동안의 과학기술에 대한 글들은 대부분 전통적인 중국인들의 표현을 빌어 그 용어들을 표기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앞 장에서 필자가 소개한 중국의 과학잡지를 되생각해 보자. 그 잡지는 중국식 이름으로 "격치휘편"이란 말을 쓰고 있었는데, 그 영문 표시가 "The Chinese Scientific Magazine"이었다고 이미 설명한 바 있다. '격치'가 그 당시로서는 오늘의 '과학'에 해당하는 말로 사용되던 그런 시절이었다. 그러던 것이 지금은 동양의 세 나라가 모두 '과학'이란 말을 사용하고 있다. 이 말을 처음 만든 사람은 일본의 철학자라고 알려져 있다. 일본에서 1870년대에 등장한 이 표현은 그 후 서양의 'Science'를 번역하는 말로 정착했고, 그것이 중국, 그리고 우리나라에도 전해지게 된 것이다. 그뿐 아니라 언제부터인지 같은 한자문화권인 베트남에까지도 이 말이 들어가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은 1995년 베트남 방문 시 발견하고 깜짝 놀란 일이 있다. 물론 오늘날 베트남 사람들은 한자를 쓰지 않고 모든 그들의 말을 영자로 표기하고 있어서, 과학이란 말을 'khoa~hoc(코아혹)'이라 쓰고 있지만, 그것이 '과학'의 그 나라 표기라는 것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한성순보"의 근대 화학 소개
앞에서 이미 "한성순보"의 서양 과학기술 소개를 설명한 일이 있지만, 그 내용을 좀 더 설명해 둘 필요가 있다. 이 신문이야말로 이 땅에 근대 과학의 대체적인 개념을 소개한 최초의 매체라고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앞 장에서는 천문학 분야의 내용을 대체로 소개했는데, 여기서는 그 밖의 분야에 대해 생각해 보자. 우선 화학 분야부터 생각해 보자. "한성순보"는 제22호에서 산소, 수소, 질소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데, 이는 당시로서는 가장 앞선 지식이 분명하다. 이보다 거의 20년을 앞서서 최한기가 이미 "신기천험"에서 이들 새로운 기체에 대해 잠시 언급한 일이 있지만, 그 내용이 여러 사람에게 얽혔을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물론 "한성순보"에서는 당시의 용어를 써서 산소, 수소, 질소는 각기 '양기', '경기', '담기'라 표현하고 있다. '양기'는 그것이 생물을 길러 주는 공기라는 뜻에서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 영국의 목사 프리스틀 리가 이를 분리해냈는데, 이 공기의 특징을 밝혀낸 사람은 스웨덴의 셸레와 프랑스의 라부아지에였다. 라부아지에는 이 공기에 '산을 만들어 주는 것'이란 이름을 붙였었지만, 그 후 수소에도 그런 성질이 있음을 알게 되어 그 이름을 쓰지 않게 되었다. 다음으로는 산소 만드는 법을 수은 취환법에 이르기까지 상세하게 설명하면서, 물은 9분의 8이 산소이고, 공기 중에는 5분의 1이 산소임을 설명하고 있다. 수소는 물론 가장 가볍다 하여 '경기'란 이름을 붙였다. 처음에는 '물은 만들어 주는 것'이라고 부르면서, 물 가운데 9분의 1이 수소라면서 이를 만드는 방법을 설명하고 있다. 이어서 질소는 '담기'라 하는데, 원래는 이것도 역시 '초석을 만들어 주는 것'이라 했던 적이 있다. 공기 가운데 5분의 4를 차지하고 있으나 특히 어떤 기능을 하지 않기 때문에 '담기'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한성순보"의 이들 세 가지 공기에 대한 기사는 중국에서 발행된 "화학감원"에서 발췌한 기사임이 밝혀져 있다. "화학감원"은 중국에서 서양의 화학을 배워 중국 국내에 소개하기 위해 쓴 책으로 이 책을 쓴 서수(1818~1884)는 '중국 근대 화학의 아버지'라 꼽히는 인물이다. 상해에서 프라이어와 함께 서양 과학의 번역에 종사하다가 1863년에는 북경에서 스스로 영어를 배워 특히 화학 관련 서적을 번역하는 데 일생을 바쳤다. 그는 1870년부터 한두 해 사이에 이 책을 썼는데, 그 후로 다른 화학책들도 썼지만, 무엇보다도 이 책이 그의 대표작이다. 여기서 그는 이들 새로운 용어 외에도 중국에는 처음 알려진 대부분의 원소 이름을 원래의 서양식 발음에 맞춰 한 글자의 한자로 나타내는 방식을 시험했다. 지금 중국에서는 그의 방식이 채택되어 모든 원소가 한 글자로 나타내어지고 있다. 한국과 일본의 원소 이름과는 근본적으로 다른데, 그것은 중국식의 '민족 과학'이라 할 수 있다.
다 알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일본의 압제하에 있던 시절 일본인들의 방식을 받아들여 지금도 일본식의 원소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 한 자짜리 원소 이름(금, 은, 납 등)에서 6자짜리(아인쉬타니움 등)까지 길고 짧은 이름들이 아무 원칙 없이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중국은 서수 이후 몇 차례 약간의 병화를 거쳐 ~ 전후에는 일본식으로 바꾼 적도 있었다. - 이제는 완전히 서수의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과학사'를 소개하는 첫 기사
"한성순보"에는 우리 역사상 최초의 과학사의 개략적인 내용이 한 개의 긴 집록 기사로 실려 있다. 제 14호에 실린 '태서문학원류고'가 그것이다. 여기서 아주 흥미로운 사실은 이 글에서 말하는 '문학'이 오늘로 치면 '과학'을 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글은 당시 어느 중국 기사를 옮겨 놓은 것인지 분명하지는 않은데, 이 기사에 이어 같이 게재된 '화륜선원류고'라는 비슷한 성격의 기사를 "중서문견록"에서 옮겼다고 밝힌 것으로 보아 같은 곳에서 얻은 기사가 아닐까 생각된다.
글은 이렇게 시작된다. '서양의 문학은 비록 여러 분야로 나뉘어져 있지만, 요컨대 천문학, 산학, 격치학, 화학 등이다.' 문학이란 과학을 뜻하고, 그 과학 가운데에 천문학, 수학, 물리학, 화학이 있다고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기사에 의하면 화학은 중국의 방술에서 비롯한 것이고, 수학은 이집트에서, 그리고 천문학은 바빌로니아에서 시작했으며, 그리스의 피타고라스에 의해 지구 공전설이 나오고, 코페르니쿠스가 이를 다시 주장한 것이라는 잘못된 내용을 제법 많이 담고 있기도 하다. 그 외에도 케플러가 '행성삼강지설'을 내놓았다면서 그의 행성 운도의 3법칙을 간단하게 설명했다. 또 뉴튼이 발견한 인력의 법칙을 '흡력상인지리'라 하여 언급하기도 한다. 천체의 근원에 대해서는 라플라스의 성운설을 설명하여 당시 세계가 이를 어떻게 높이 인정하고 있었던가를 보여주기도 한다. 수학 발달에 대해서는 아르키메데스, 유클리드, 데카르트, 뉴튼이 소개되고 있다. 물리학에서는 그리스의 헤로가 수증기의 힘으로, 회전하는 장치를 만든 이야기며, 아르키메데스가 양수기를 만든 점을 기록하고 있다. 그 후 물리학이 갈릴레이, 데카르트, 파스칼, 라이프니트, 오일러, 베이컨, 뉴튼을 거치면서 발달하여 중학, 역학, 광학, 기학, 수화학, 전기학, 기학 등으로 전개되기에 이르는 과정을 기술하고 있다. 지금의 물리학 분야와는 이름들이 제법 다르게 나온다는 점이 흥미롭다. 지질학에 대한 설명도 조금 있지만, 구체적인 과학자는 거명되지 않는다. 다만 동식물학에 대해서는 최근에 이 분야가 크게 발전했다면서, 린네의 분류법과 라마르크의 주장을 소개했다. 라마르크에 의해 진화설이 나와 다윈이 이를 강력하게 뒷받침했다는 식이다. 당시의 진화설이 라마르크의 업적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고 설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물론 뒤에서는 다윈이 1859년에 "물류추원"이란 책을 썼고, 이것이 당시 중심 학설인 '순화설'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지금 우리가 "종의 기원"과 '진화론'이라 부르는 것들이다. 이런 식의 표현들은 과학사를 전공하는 필자로서는 아주 흥미 있는 기록이 아닐 수 없다. 여러분들에게도 재미있는 역사의 한 단면이 될 것 같다. 앞으로 이 글들의 정확한 출처를 밝히는 작업이 있어야 할 것이며, 그 관계들을 알아내는 과정이란 참 흥미로운 것이 될 것이다.
"한성주보"의 과학기술 수용 노력
지난 1983년 "한성순보"의 창간 100주년을 맞아 사진판으로 찍어 낸 "한성순보"와 "한성주보"의 복사판을 보면, "한성주보"의 경우 특히 수집되지 못한 부분이 아주 많다. 그러나, 그 후 수집이 더 되었다 해도 적어도 과학사 분야의 연구에 있어선 별 큰 차이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어차피 "순보"에 비해 "주보"는 과학기술에 대한 관심이 아주 급격하게 줄어든 상태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순보"가 1883년 10월부터 1884년 8월까지의 거의 모든 신문이 남아 있는 것과 달리 "주보"는 1886년 1월에서 1888년 7월까지 발행했던 신문 가운데 반도 못 되는 분량만이 영인되어 읽어 볼 수 있었다. 말 그대로 "순보"는 10일에 한 번 낸 신문이고, "주보"는 한 주일에 한 번 발행되어 그런 이름을 갖게 되었다. 그보다 더 두드러진 차이라면 "순보"가 순한문으로 기사를 쓴 것과는 달리 "주보"에는 순한글 기사도 더러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 순한글 기사 가운데 하나로는 1886년 5월 27일(양력 6월 28일) 자의 '텬문학'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들 수 있다. 이에 의하면 별들 가운데에는 4가지 종류가 있는데, 항성, 유성, 위성, 혜성이 그것이다. 항성 둘레에는 수많은 별들이 돌면서 '항성세계'를 만드는데, '태양세계'는 그 가운데 하나이다. 지금의 '태양계'란 말의 당시 표현인 듯하다. 태양 둘레에는 수성, 금성, 지구, 화성, 목성, 토성, 천왕성, 해왕성 등이 돌고 있다고 설명하고 그 거리까지 기록하고 있는데, 특이한 점이 몇 가지 뜨인다. 우선 명왕성이 보이지 않고, 또 태양이란 말을 순한글로 표기하면서 '해'라 하지 않고 '날'이라 하고 있다는 점이다. 명왕성은 아직 발견되지 않은 때이니 당연히 보이지 않겠지만, 태양을 '날'로 표현한 것은 유래 없이 특이하다. 다음 호, 즉 제23호(1886. 6. 4.)에는 역시 순한글로 '유셩이운전하는거시라'라는 제목의 기사가 보인다. 당시의 한글 철자법에 따라 띄어쓰기 없이 쓰여진 이 기사는 먼저 행성들의 공전주기를 수성 88일, 금성 225일 등으로 상세하게 써 놓고, 그들이 태양 둘레를 도는 '괴도(궤도의 오기)'가 '편원(타원)'이라고 설명했다. 전 호에서 한 것처럼 태양을 순한글로 '날'로 표기하고 있다. 기사 끝에는 다음 호에 계속한다고 쓰여 있는데, 실제로 이 기사는 계속되지 않았다. 혹 제25호(1886. 7. 24.)부터 게재된 '지리초보'란 국한문 혼용체의 기사가 그에 상당한 것으로 게재된 것일지 모르겠다. 그 기사는 새로 개설하는 소학교의 교재로 쓴 것으로 보이는데, 제1장에서 제2장까지는 천문지리학, 제3장은 지구 형상, 제4장은 경위선도 하는 식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제27호에 그 후가 계속되어 5장과 6장(공전)이 실렸고, 제28호에는 제7장이 제목 없이 실렸다. 그 내용은 지구상의 열대, 온대, 한대에 관한 설명이었다. 여기서 제30호를 보면 이번에는 순한문 기사의 형태로 항해하는 배 속에서 경도와 위도를 측정하는 것에 대해 설명하는 내용이 있다. 설명에 앞서 지구라는 원을 그리고 그 둘레에 12방향을 표시한 다음 12지를 글자로 써놓고 각각의 12지에 상응하는 동물 이름을 한자로 적어 놓고 여기에 '건곤경위합관도'란 제목을 붙였다. 기사 내용과 그림이 거의 상관없을 뿐 아니라, 12가지 동물 이름은 천문학과는 아무 관련도 없고, 별다른 설명도 없다.
5월에 순한글로 시작했던 천문학 관련 기사들은 그 후 점차 국한문 혼용을 거쳐, 8월에는 아예 순한문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이 기사는 제대로 계속되지 못하다가, 제68호(1887년 윤4월 29일)에는 순한문으로 다시 연재되기 시작했다. 그 후로 75가지 연재된 기사를 대략 제목만 훑어보면, 제1장 '해와 항성', 제2장 '달과 달의 운동', 제3장 '일식과 월식', 제4장 '달은 무엇인가?', 제5장 '태양계의 여러 천체' 등으로 이어지는데, 이 역시 그 이후의 부분이 영인본에서 빠져 있기 때문에 필자가 검증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요컨대 3년이나 4년 정도를 사이에 두고 발행된 "한성순보"와 "한성주보"의 과학기술 기사는 "순보"의 것이 "주보"에서 재탕되는 수가 많아 보인다. 또 "주보"는 몇 년 뒤에 쓴 기사임에도 불구하고 더 깊이 있는 기사가 되지 못한 채, 오히려 기사의 질이 떨어지는 듯한 인상을 준다. 두 신문이 다룬 과학기술 내용을 보면 이래저래 당시의 근대 과학 수용의 과정이 제자리걸음을 거듭하고 있었다는 점을 잘 알 수 있다. 이는 바로 당시 조선의 지식층이 당면해 있던 현실이기도 했다. 아직 체계적인 근대 과학기술의 도입이 진행되지 못하는 가운데, 우왕좌왕하고 있던 조선 지식층의 암울한 초상이 지금의 필자에게는 씁쓸한 여운을 남긴다.
안종수의 "농정신편" - 신사유람단의 유산
이 땅에 우두를 도입한 장본인으로 유명한 지석영은 1882년의 유명한 상소문에서 다음과 같은 책들을 추천하고 있다. 흔히 개화 상소라고도 알려진 이 글에서 그는 당시 개화에 필요하고도 중요하다고 여긴 책들을 임금에게 추천했던 것이다. 그 책들은 중국에서 출간된 책 가운데 6가지와 조선에서 나온 책 4종류 등 모두 10가지였다. 다 찾아 검토해 보지는 못했지만, 아주 짧은 글에서 본격적인 서적의 형태를 띤 것까지 여러 가지가 섞여 있는 형편이다. 그것들은 다음과 같다.
중국 책 : "만국공법", "조선책략", "보법전기", "박물신편", "격물입문", "격치휘편"
조선 책 : "기화근사", "지구도경", "농정신편", "공보초략"
이 가운데 과학기술서로는 중국에서 고른 6가지 가운데 뒤의 것 3가지와 조선의 책 4가지 가운데 "농정신편" 하나를 고를 수 있다. 바로 이 책 "농정신편"에 대해 조금 더 생각해 보자. 이 책을 지은 안종수는 1881년 신사유람단의 한 사람으로 승지 조병직을 수행하여 일본에 다녀 와 이 책을 지었다. 그는 일본에 있는 동안 당시 일본의 대표적 농학자 진전선(츠다 센, 1837~1908)을 만나 그로부터 근대 서양식 농사법에 대해 정보를 얻어 왔다. 진전선은 난학을 공부하다가 영어를 배우게 되어 영어 통역이 되었던 인물로 명치유신 직전에 이미 미국을 구경하고 농업의 개량을 결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1873년 비엔나 박람회에 참가하여 화란 농학자 호이브렌으로부터 근대 서양 농학책들을 얻어 온 다음에는 이를 연구하여 1875년 동경에 농장을 차리고 이어 농학사라는 일본 최초의 근대 농업학교를 세웠다. 안종수는 바로 이 사람으로부터 서양 농법을 배워 오기 위해 그가 얻어 온 책들을 집중적으로 연구하여 5개월 뒤에 "농정신편"을 완성했던 것이다. 아마 당시는 정식으로 간행되지 않은 채 필사되어 여러 사람 손에 들어 가 있었고, 그 때문에 지석영이 추천한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은 1885년 정식으로 간행되어 곧 재판되고, 일제 시기에는 1931년 한글판으로 다시 발행된 일도 있다. 아직 그 영향에 대해서는 연구된 일이 없지만, 흥미 있는 대목이라 하겠다. 특히 그는 이 책에서 소다, 마그네슘, 클로린(염소), 브롬인 같은 중국식의 화학 용어 표기를 일본 책으로부터 도입하고, 또 산화철, 유산, 인산 등의 용어도 사용하고 있다. 일본식 용어와 중국식 용어가 마구 섞여 들어오고 있던 당시 상황을 짐작케 하는 모습이다.
최경석의 '농무목축시험장'
안종수가 1881년 신사유람단으로 일본에 다녀 온 결과 근대 서양식 농학에 대해 책을 남겼다면, 조금 뒤인 1883년 미국을 방문했던 최경석은 미국에서 농업 기술을 도입하려 했다. 안종수가 책으로 그의 뜻을 펴려한 것과는 달리, 최경석은 근대식 농장을 이 땅에 처음 만들어 운영하여 서양식 농업을 실제로 시험했다. 두 사람은 두 가지 서로 다른 방법으로 이 땅에 근대 서양식 농업 기술을 도입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두 사람은 그들의 뜻을 제대로 펴 보지도 못한 채 비명에 세상을 떠났다. 서양 파견된 최초의 사절단이었던 보빙사행, 즉 1883년 9월 미국에 간 사절단은 민영익을 위시하여 8명의 젊은이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1882년 미국과의 우호조약을 체결했기 때문에 그 인사로 최초의 미국 사절단을 파견했던 것이다. 민비의 조카로 촉망받던 젊은이 민영익은 당시 겨우 24살, 그를 단장으로 하고 부단장에는 28살의 홍영식, 그리고 셋째로 높은 종사관에는 25살의 서광범이 선발되었다. 수행원이 5명이었는데, 28살의 유길준, 23살의 변수가 포함되어 있었고, 거기에 나이를 알 수 없는 고영철, 현홍택, 그리고 최경석이 들어 있었다. 사족 같은 이야기 한 토막을 붙이자면, 당시 보빙사행은 8명의 조선인 외에 통역이 미국인, 중국인, 일본인 등 3명이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어이없는 일이지만 이들 중 누구도 한국어를 할 줄 몰랐다. 아직 전 세계에 한국어와 영어를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미국 여행 동안 이들은 2중, 또는 3중 통역을 하고 다닐 수밖에 없었다. 그런대로 조선인들에게 익숙했던 산업이 농업이었기 때문인지 사절단은 미국의 농사 기술에 대해 크게 탄복하고 이를 도입할 계획을 가지게 되었다. 12월 귀국과 함께 홍영식과 함께 임금을 만난 최경석은 서양 농업 기술의 중요성을 역설하여 고종의 허락을 얻어 성 바깥 어딘가에 '농무목축시험장'을 세워 시험적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되었다. 그 자리가 정확하게 어디였는지는 아직 밝혀져 있지 않다. 아마 임금이 직접 농사를 시범해 보이던 적전 자리인 지금의 전농동이거나, "한성주보"의 기사에 보이는 것처럼 남대문 밖 어딘가였을지도 모른다. 여하튼 서양식 농업의 실험은 종자와 농기구 등이 계속 들어오면서 본격적으로 추진되어 1884년 늦봄에는 이미 여러 종류의 서양 채소가 생산되기 시작했다. 최경석이 여기서 생산한 농작물은 첫해에 이미 344종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가운데는 양배추와 셀러리도 들어 있었는데, 이들 서양식 채소들은 궁중과 서울의 외국인들에게 공급되었다. 그리고 그 종자들은 전국 305개 지역으로 공급되었다. 또 첫해에 돼지 64마리뿐이던 농장에 1885년에는 미국의 소, 말, 돼지, 양 등이 도착했다. 최경석은 앞으로 치즈와 버터도 생산하겠다고 기대에 부풀어 있었던 것으로 밝혀져 있다. 하지만 1886년 봄 그는 어이없게도 갑자기 병사하고 말았으며, 그의 죽음과 함께 시험농장은 곧 존재가 희미해져 사라져 버렸던 것으로 보인다.
안종수(1859~1895)
1881년 신사유람단의 반장 가운데 한 사람이던 승지 조병직을 수행하여 일본에 가서 일본을 시찰했다. 그 기간 동안 당시 일본의 대표적 농학자이자 기독교도였던 진전선을 만나 그로부터 근대 농학서들을 얻어 귀국했다. 이를 연구하여 1881년 12월에는 이미 "농정신편"을 완성하여 주변 사람들에게 돌려졌던 것으로 보인다. 1885년에는 갑신정변 이후 일본에 유학 가 있던 유학생들을 회유해 돌아오게 하라는 정부의 지시를 받아 실행한 일이 있고, 1886년 4월에는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의 주사로 일했으나, 김옥균의 여당으로 성토당하여 마도로 유배당하기도 했다. 1895년 을미사변 때에 나주부 참서관으로 있다가 의병에게 피살당했다.
최경석(?~1886)
호를 미산이라 했고, 본명은 최도민, 구한말에 무관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1883년 훈련원 주부로 있다가 6월 보빙사 민영익의 종사관으로 임명되어 조선 최초의 서양 방문단의 한 사람으로 미국에 갔다. 농장 등에 특히 관심을 가졌는데, 보스톤의 박람회와 근처의 월코트 농장에서 크게 감명을 받아 미국 농기구와 농작물 등의 도입을 계약하고 귀국했다. 12월 귀국하자 이듬해부터 서울 교외에 농무목축시험장을 세워 근대 서양식 농사와 목축을 시작했다. 1886년 그가 갑자기 죽자 이 실험도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열아홉 번째 이야기 양반은 나라가 망해도 양반인가
국내의 과학기술 교육
한국 최초의 근대적 교육기관으로는 흔히 1883년 문을 연 원산학사를 꼽는다. 일본의 의협 아래 개항한 다음 인천, 부산과 함께 외국인을 맞게 된 원산에서는 새로운 외국 사조가 밀려오는 데 적응하기 위해 전통적인 서당 교육을 새로운 교육으로 바꿔가야겠다는 의식이 자생적으로 일어났다. 그런 의식 하에 '서당'은 '근대식 학교'가 되었고, 거기에 문예반과 무예반의 두 학급을 두었다. 두 반의 학생들에게는 공통으로 산수, 격치, 기기, 양잠, 농업, 광산 등의 과목과 함께 만국공법(국제법) 등 당시 실학이라 여겨졌던 과목들을 가르쳤다. 또 이들 과목을 가르치는 과정에는 "영환지략", "만국공법", "기기도설", "농정신편" 등을 포함하여 일본어 등의 교재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 후 전국에는 이런 근대식 학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들 근대학교는 모두 원산학사가 그랬던 것처럼 근대의 실학이라 여겨졌던 과학기술과 일부 사회과학 과목들을 가르치려 했던 것을 발견하게 된다. 1886년 정부가 세운 근대식 학교 육영공원 역시 비슷한 취지를 가지고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초기의 교과과정을 살펴보면 산학, 격치만물 과목이 분명하게 명시되어 있다. 그리고 격치만물에 대한 설명으로는 의학, 지리, 천문, 화훼, 초목, 농리, 기기, 금수 등이 나열되어 있다. 원래 이 학교는 외국인을 선생으로 고용해 제대로 된 근대 교육을 시작하여 엘리트 근대인을 기르겠다는 각오로 출발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미국에서 3명의 젊은이들을 선발하여 교사로 데려오기도 했다. 그런 방법으로까지 정성을 들여 시작한 학교는 당시로서는 전무후무했을 것이다. 이때 초빙되어 온 교사는 1883~1884년 미국 동부에서 대학을 졸업한 헐버트, 벙커, 길모어 등이었는데, 이 가운데 헐버트(Homer H. Hulbert, 1863~1949)는 우리나라의 독립운동과도 관련이 깊은 인물로 역사에 남게 된다. 기록은 이 학교가 장래 고등교육 기관으로 확대되어 대학으로 개편될 예정이었다고 전한다. 하지만 그 학교의 영어 이름(Royal English School)이 이미 상징했던 대로 이 학교는 겨우 몇 년을 버티다가 8년 뒤에는 아예 영어교육만을 위한 학교로 전락했다. 교사들의 후원도 예정대로 되지 못했고, 조선 관리들의 열성도 시작할 때와는 전혀 달라졌을 뿐 아니라 학생의 기대도 과학기술의 교육과는 거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학교에는 양반의 자제나 양반 관리들만이 입학했던 것으로 보인다. 육영공원의 학생들 가운데에는 당시 영의정의 아들이 있었는가 하면, 뒤에 매국노로 후세에 이름을 남긴 이완용(1858~1926)도 있었다. 미국인 교사의 회고에 의하면 영의정의 아들은 점수를 잘 얻어 벼슬을 높이려 한 것 같지만, 그렇다고 미국인 교사들이 그에게 특별히 후한 점수를 주려 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완용은 1882년 과거에 합격한 관리로서 29세의 나이에 육영공원에 입학했다. 이들은 주로 영어 배우기를 희망하여 입학했으면서도, 금세 기대감이 사라져 버렸던 모양이다. 게다가 그 학교를 졸업하면 어떤 특별한 관직 상의 우대를 하겠다는 보장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들은 심지어 하인들을 데리고 학교에 나왔고, 공부에는 게으르기 그지없었다. 결국 우원과 좌원 가운데, 좌원의 학생들은 사흘에 한 번만 학교에 나오는 것이 허용될 지경이었다. 이런 식의 운영으로 학교를 오래 지탱할 수 없었던 것은 당연했다.
다음에 예로 들 수 있는 과학 교육 기관으로는 1885년 시작된 '광혜원'을 들 수 있다. 갑신정변 때 크게 부상당한 민영익을 치료해 준 덕택에 특혜를 받은 미국 의사 알렌(Horace N. Allen ; 1858~1932)이 시작한 병원이다. 아니 이 병원은 알렌이 시작한 것이라기보다는 조선 왕실이 시작하고, 왕실과 친분이 있던 알렌을 책임자로 임명했다고 하는 편이 더 옳을 것이다. 여하튼 의료기관으로 시작한 이 병원에서는 조선 학생 몇 명을 뽑아 의학 교육을 실시했는데, 더불어 물리, 화학 등도 가르쳤던 것으로 밝혀져 있다. 하지만 의학 교육을 위한 부수적 조치에 지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 내용도 상당히 부실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런 과목을 제대로 가르칠 수 있도록 훈련받은 교사가 아직 전혀 없었던 때문이기도 했다. 생각해 보면, 1890년쯤까지 당시 조선에는 아직 아무도 일본을 포함한(이미 일본은 과학기술에서는 선진국에 접근해 있었다) 선진국에서 제대로 물리학, 화학, 생물학 등의 기초 과학을 가르칠 수 있을 만큼 교육받은 인재가 유입된 일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웃 일본과 중국에서 진행되는 근대화 작업을 흉내내어 과학기술의 교육에 손을 대고는 있었지만, 아직 제대로 교육할만한 준비는 없었음을 알 수 있다.
구한말의 외국 유학
당연히 국내에서 과학기술 교육이 제대로 진행될 수 없는 당시로서는 선진국에 유학생을 보내어 빨리 이를 습득해 오는 것이 첩경이었다. 1894년 갑오개혁과 함께 외국에 유학생을 파견하여 과학기술을 배워 와야 한다는 당위성이 다시 한번 강조되기 시작했다. 이미 "한성순보"와 "한성주보" 정도의 대중매체와 그 밖의 몇 가지 과학기술 소개 책자가 나와 과학기술에 대한 대중적 인식은 그래도 상당히 높아져 있었다. 또 원산학사 이후 여러 학교가 세워져 과학기술 교육이 실행되고 있기는 하였다. 하지만 갑오개혁 당시의 조선 지식층의 과학기술에 대한 인식이란 지극히 상식적인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극히 피상적인 과학기술 교육이 10년 이상 진행되고 있었지만, 아직 아무도 과학기술에 대한 탄탄한 지식 기반을 가지고 있는 조선인은 없던 시기였다. 이제 보다 분명하고 확실한 과학기술을 이 땅에 쌓아갈 필요가 있다는 인식이 조금씩 자라나고 있던 무렵이었다. 당시 다시 시작된 것 중 하나가 유학생을 외국에 파견하는 일이었다. 우선 갑오개혁의 '홍범 14조'의 규정에 따라 '똑똑한 젊은이를 외국에 유학시킨다'하는 계획이 실천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래서 처음으로 1895년 182명이나 되는, 당시로서는 최대 규모의 유학생단이 일본에 파견되었다. 당시의 학부대신 이완용과 일본 경응의숙의 사두 복택유길(후쿠자와 유키치)이 계약을 맺어 해마다 그 정도 규모로 유학생을 파견하기로 합의했던 것이다. 이 가운데 114명은 첫해 경응의숙으로 유학을 갔다고 밝혀져 있다. 대부분 초, 중등학교 수준의 유학생들이었고, 아직 대학에 진학하는 유학생은 있지도 않았다. 1895년 당시까지 조선에는 아직 외국의 대학 수준의 공부를 따라갈 수 있는 준비된 학생이란 단 한 명도 없는 지경이었기 때문이다. 원래 이완용과 복택유길은 해마다 300명 규모의 유학생 단을 보낼 생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첫해부터 일은 계획에서 빗나갔고, 그 이듬해에는 아예 실행되지도 못했다. 이 야심적인 갑오개혁의 유학 계획이 단 한 번만 실천되고는 실패로 끝났던 것이다. 1895년 114명이 유학한 경응의숙에는 1899년에는 단 한 명만이 남게 되었다고 기록은 전한다. 나머지 학생들은 다 어디로 갔던 것일까? 정확히 알 길은 없지만, 아마 귀국했거나 다른 학교로 진학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여하튼 이로써 정부가 주관하는 정식 국비유학생은 거의 사라져 버렸지만, 반대로 사비 유학생은 크게 늘기 시작했다. 1908년의 재일 유학생은 모두 493명이었고, 그들은 36%가 중등 교육 또는 그 이상의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는 통계가 있다. 하지만 아직도 대학을 다니는 조선 학생이란 여전히 극히 적었다. 아직 전체적인 모습은 밝혀지지 못한 채이지만, 조선이 일제 식민지로 전락하기 전에 일본에서 대학을 졸업한 사람은 몇 명이 채 되지 않는다. 그 가운데 과학기술 분야에서 처음으로 일본의 대학을 졸업한 사람으로는 상호를 꼽을 수가 있다. 지금까지 밝혀진 바에 따르면, 그는 조선이 독립국일 때의 유일한 이공계 일본대학 졸업생이었다. 상호(1879~?)는 20살에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바로 공수학교에서 들어가 공부하고, 이어 동경제국대학 조선과를 1906년 7월에 졸업했다. 이로써 그는 우리나라 유학생으로는 최초로 일본의 이공계 대학을 졸업한 인물이 된다. 그의 졸업 논문은 선박 기술에 대한 것으로 영문으로 꼼꼼하게 써 놓은 것인데 그 자신이 직접 쓴 것으로 보인다. 그의 이력서에는 그가 일본에 가기 전 서울에서 영어 학교를 나와 1898년 10부터 한 달 정도 모교 영어 교사를 한 것으로 적혀 있다. 1894년 영어 학교에 입학했으니 만 4년 동안은 영어를 공부한 인물이란 걸 알 수 있다. 상호는 귀국과 함께 만 27세에 벌써 농상공부 참서관 주임이 되었고, 다음 해에는 서기관으로 승진해 1907년 8월에는 경성 박람회 고문의 자리에 오른다. 그 시점에서 조선에는 그만큼 학식이 높은 사람이 거의 없었고, 게다가 이미 나라는 일본인들에 의해 좌우되던 시절이었으니, 일본의 일류대학을 졸업한 상호가 그렇게 대우받은 것이 이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같은 해 9월 그는 이미 농상공부 공무국장으로까지 승진했다.
당시 조선 지배층은 일본이 이공계 방면에서 크게 앞서 있다는 판단을 내렸기 때문에 우선 일본에 유학생을 보낼 것을 희망하게 되었다. 1890년대의 일본의 과학기술 수준은 당시의 조선에 비할 수도 없을 정도로 앞서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따라서 얼핏 보기에 이 결정은 전혀 잘못이 없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로부터 1세기가 지난 지금 당시를 되돌아볼 때 우리는 여기에 함정이 있을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일본의 과학기술이 조선보다 아무리 앞섰다 해도 그것은 서양의 과학기술을 도입한 결과였고, 아직 서양을 앞서기는커녕 당시에도 끊임없이 서양으로부터 지식을 들여오던 중이었다. 돌이켜보면, 당시 조선은 일본에서만 과학기술을 배워 오려 할 것이 아니라, 서양에도 같은 정도로 유학생을 파견하여 직접 서양의 과학기술을 배워 오려는 노력을 했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그런 노력은 거의 시도되지도 않았다. 아니, 그럴 만한 여유가 거의 없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대로 개인적인 연고로 서양을 향한 유학생도 아주 없지는 않았다. 그리고 미국에서 처음으로 농학 분야의 대학을 졸업한 변수(1861~1891)는 오히려 일본에서 이공계 첫 대학 졸업자가 된 상호보다 십여 년을 앞섰다. 원래 역관 집안 태생이었던 변수는 1882년 3월 김옥균을 따라 일본에 건너가 경도에서 양잠과 화학을 공부하기 시작했으나, 3개월 만에 임오군란 소식을 듣고 귀국했다. 군란이 끝나고 정부는 일본에 수신사 박영효를 파견했으며, 그는 이듬해 3월 귀국했다. 1883년 7월 그는 다시 바다를 건너 이번에는 일본이 아니라 미국을 향하게 되었다. 보빙사는 민영익을 우두머리로 하여, 박영효, 서광범이 정식 대표로 선정되었고 5명의 수행원이 따랐는데, 변수는 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보빙사는 둘로 나뉘어 귀국했는데, 박영효 등이 같은 길을 되돌아온 것과는 달리 변수는 민영익, 서광범을 따라 유럽 여러 나라를 돌아 귀국하게 되었으니, 그해 11월 16일 미국 군함 트랜튼호를 타고 뉴욕을 떠나 1884년 5월 31일 인천에 도착했다. 조선인으로는 최초의 세계 일주를 할 수 있게 된 셈이다. 그해 12월 4일 갑신정변을 일으키는 주동 세력의 한 사람이 되었다가 정변이 실패하자 변수는 바로 김옥균과 함께 일본에 망명했다. 1886년 1월 변수는 미국에 건너가 메릴랜드 농과대학에 입학, 4년 만인 1891년 6월 다른 미국 학생 4명과 함께 졸업하여 이학사 학위를 받았다. 변수는 졸업 후에도 미국에 남아 취직해 살려고 마음을 먹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졸업 직후 1891년 7월 시작한 그의 연구는 3개월 뒤인 그해 10월 '일본의 농업(Agriculture in Japan)'이란 보고서로 완성되어 미국 농무부의 월간 보고서 제89호(1891년 10월)에 남아 있다. 그러나 그는 1891년 10월 22일 모교에 들렀다가 돌아가는 길에 철도역에서 기차를 기다리다 그만 갑자기 달려든 급행열차에 치여 사망하고 말았다. 다음으로 미국 유학하여 학사학위를 받은 인물로는 유명한 서재필(1864~1951)을 꼽을 수 있다. 변수와 거의 같은 망명자의 입장에서 미국 유학생이 되었던 그는 1893년 컬럼비아 의대(지금의 조지 워싱턴대)를 졸업하여 미국에서 의사로 활동했으나, 1895년 말에 귀국하여 독립협회, "독립신문" 등에서 활동하다가 돌아간 인물이다. 미국 유학으로 처음 학위를 얻은 이들 두 사람이 모두 귀국하여 과학기술계에 기여할 수 없었던 것이 당시 조선의 형편이었다고 하겠다.
"독립신문"의 과학
1896년 4월 7일 창간된 "독립신문"은 우리나라 근대 신문의 시작으로 여겨진다. 이 신문은 1898년 5월 18일 서재필이 미국으로 돌아가기까지는 서재필 주도 아래 발행되었고, 당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한성순보"가 과학기술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보였던 것과는 판이하게 그보다 십여년 지난 다음의 "독립신문"은 과학기술에 대한 관심이 극히 미약하다. 이는 그사이 이미 조선 지식층에게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게 된 것은 이미 서양의 과학기술이 아니라 서양의 제도와 문물 등이었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더구나 이 신문의 발행인은 미국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귀국한 서재필이었다. 그는 조선인 가운데 최초로 서양에서 과학기술을 제대로 배우고 돌아온 셈이다. 그러나, 그가 과학기술을 국내 보급하고 교육하기보다는 제도 개혁을 위한 언론활동을 앞장서고, 게다가 언론을 통해서도 과학기술에 관심을 갖기보다는 정치적인 면에 열성이었던 것은 당시 조선 지식층의 경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면이라고도 할 수 있다. 과학기술 관련 기사가 거의 없던 "독립신문"에는 지금부터 약 100년 전인 1897년 6월부터 7월 사이에 적어도 14회에 걸쳐 생물학을 소개한 연재 기사가 있다. 자연물에는 금수, 초목, 금석의 세 가지가 있다면서, 이 기사는 주로 동물에 대한 소개를 계속한다. 이 신문은 표기에 있어 순한글을 고집했는데, 동물 이름으로는 전통적 이름을 따르면서도 때로는 서양식 이름을 그대로 한글로 표기해 넣기도 했다. 새, 뱀, 고양이, 개, 곰, 호랑이 등이 있는가 하면, 히포포타머스, 라이나세로스, 캥거루, 오퍼섬, 돌핀, 크로코다일, 카밀리온, 보아, 파이손, 코브라 등의 이름들이 섞여 있다. 물질명도 예외는 아니었으며, 특히 '산소'는 재밌게도 '악시진(oxygen)'으로 표기되고 있는데, 영어 발음을 그대로 따서 적은 것임을 알 수 있다. 재미있는 사실은 미국에서 의학을 공부한 서재필이 책임지고 신문을 편집하고, 실제로 대부분의 글을 그가 썼으리라 여겨지는 시기에는 과학기술에 관한 글이 거의 없고, 그나마 그런 글이 있을 경우에는 영어 발음을 그대로 우리 말로 표기하려 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가 "독립신문"을 떠난 다음에 오히려 과학기술 관계 기사의 양은 좀 더 많아지는데, 아주 특이한 사실은 서재필이 없는 시기의 과학기술 기사는 거의 중국 문헌을 옮긴 것이라는 사실이다. 산소란 말은 다시 중국식으로 '양기'라 표기되고, 다른 원소도 마찬가지로 '담기', '탄기' 등 중국식으로 표기된다.
1899년 5월 19일 자의 "독립신문"에는 '명현의 사업'이란 기사가 있는데, 서양 유명 과학기술자들의 업적이 소개되어 있다. 여기 등장하는 인물은 원시경(망원경)을 만든 알리리구(갈릴레이), 유레너스(천왕성)을 발견한 혁슬륵(허셀), 전기를 철통에 가둔 알법니(갈바니), 지동설의 고배니고(코페르니쿠스), 만유인력을 발견한 우탄(뉴튼), 증기력을 발명한 부와도(와트) 등의 이름과 업적이 순한글로 표기되어 있다. 괄호 속에 써넣은 것이 이들 인물의 오늘날 표기이다. "독립신문"은 서재필 이후 과학자 이름마저 원래의 서양 발음으로 밝힐 수가 없어서 중국 책에 있는 한자로 된 서양 사람들의 이름 그 한자의 한글 발음으로 적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독립신문"이라는 하나의 매체 내에서도 서재필 이전과 이후의 과학 용어가 판이해지고 있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어차피 과학기술 수용이 중국과 일본에 비해 늦은 조선으로서는 당시 세 가지 길 중 하나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용어를 따르거나, 중국 용어를 기준으로 삼거나, 아니면 영어 등의 서양어를 기준으로 삼는 방법이 그것이었다. 그러나, 1900년까지도 아직 조선은 이 세 갈래 길을 이리저리 오락가락하고 있었을 뿐 어떤 방향도 잡지 못한 채였다.
장지연의 과학관
결국 1900년대에 초에 이르러도 조선에는 과학기술의 내용에 관한 한 이렇다 할 발전이 없었다고 할 수 있을 지경이었다. 물론 초기의 실험적 학교 다음으로는 여러 가지 학교들이 잇달아 생겨나서 전국에 걸쳐 각종 근대식 학교들이 문을 열었다. 초, 중등학교들이 생겨나면서 그와 함께 각종 기술학교도 문을 열러, 기예(기술)학교, 전문학교, 외국어학교, 사범학교에서의 전문교육이 시작되었다. 기술계 학교로는 경성의학교(1899), 상공학교(1899), 광무학교(1900), 공업전습소(1902) 등을 대표적 기관으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또 1900년을 전후해서는 이 땅에 처음으로 전기가 들어오고, 전신과 철도가 도입되기도 했다. 두부, 담배, 성냥 공장 같은 초보적 공장도 세워졌다. 일본에서 단기간 기능 훈련을 받은 기능자들이 활약하는 그런 시대가 시작되려는 무렵이었다. 당시는 또한 조선인으로서 최초로 자직기, 양지기, 도련기, 전보기, 유성기, 사진판, 자명종, 측량기 등을 발명한 사람들에 대한 신문 보도가 심심찮게 화제가 되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과학기술에 대한 인식의 수준이란 극히 낮은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보자. 1909년에 출간된 장지연(1864~1921)의 "만물사물기원역사"는 그가 신문기자로 일했고, 1901년부터 사장으로 있던 황성신문사에서 발행한, 당시로서는 백과사전 형식의 상식 사전이다. 28장으로 구성된 이 책에는 과학기술 분야로 취급될 수 있는 부분이 천문, 과학, 군사, 위생, 공예, 역체, 농사, 어렵, 직조, 음식, 건축, 기계, 기용, 식물 광물 등 여러 항목이 들어 있다. 이 가운데 제5장인 '과학'의 내용을 살펴보자. 국한문 혼용인 이 책의 '과학'에 대한 서론 부분은 띄어쓰기가 되어 있지 않아 읽기 편하지는 않지만, 과학은 서양 사람들이 근대에 처음 만들었다 하나 사실은 동양에서 이미 옛 성현이 '격물'이니 '육예'니 하면서 연구하던 그것이라는 주장이다. 단지 서양 사람들은 있던 것을 재정리해서 여기에 '과학'이란 이름을 붙였다는 것이다. '과학' 장에는 모두 14항목이 설명되어 있으며, 화기, 수분자, 비중, 화, 전기, 마찰전기, 산술, 대수학, 기하학, 수학, 지도, 지구의, 천구의, 측지술 등이 그것이다. 첫 항목의 '화기'란 말은 '공기'란 말이 와전되어 쓰인 듯하고, 다음 항목 '수분자'에는 라부아지에가 물이 산소와 수소로 구성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는 기사가 있다. '비중' 항목은 그리스의 아르키메데스가 왕관의 순금 제작 여부를 알아내기 위해 실험하다가 목욕탕에서 그 방법을 알아내고 기뻐서 벌거벗고 뛰어나왔다는 고사를 소개하고 있다. 전기의 역사와 당시의 인식은 '전기'와 '마찰전기' 두 항목에 비교적 상세하게 소개되었고, '산술', '대수학', '기하학', '수학' 등 서로 관련되었을 법한 항목들은 중복의 여지가 없게끔 아주 간단하게 각 분야의 대표적 사실만 소개하고 있다. 1905년 11월 17일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20일자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이란 유명한 사설을 썼던 당대 언론인 장지연은 이 책에서 수많은 서양인의 이름을 전부 중국인들이 사용하던 방식을 따라 한자로만 표기하고 있다. 토리첼리, 파스칼, 라부아지에, 아르키메데스, 탈레스, 프랭클린, 갈바니, 볼타, 피타고라스 등이 그것이다.
아직 과학기술을 수용하기 위한 바탕이 전혀 마련되어 있지 않았음을 잘 보여준다. 그 후 우리나라는 결국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여 조선인들은 모두 일본식 과학기술 용어를 배워 익히게 되었다. 그런데 일제 식민지가 되기 1년 전에 발행된 장지연의 이 상식 백과사전에는 아직도 중국 용어만이 사용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장지연은 과거에 급제했던 인물로 전통적 교육만을 받았을 뿐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미 대세가 일본 및 서양의 학술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시점이었다면 이런 서양 인명만은 한글 표기로 바꿔 갈 수도 있었으련만, 그런 노력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계속해서 이전의 고루한 관행을 답습하기만 하고 전혀 실정을 받아들이지 못하던 당시의 소위 지식인 계층은 나라가 넘어갈 지경이 되었어도 여전히 위기의식을 갖지 못하고 있었다.
중인의식의 시작
지금껏 필자가 언급한 부분은 '양반은 나라가 망해도 양반인가?' 하는 의문이 떠오르게 하는 우리 역사의 대목이다. 우리는 흔히 이 대목에서 우리 선조들이 '동도서기'를 외쳤다고 말한다. 여전히 양반의 지배가 인정되는 사회에서 그 아래 신분에 지나지 않는 중인으로서는 사회 참여의 범위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일부 양반층 젊은이들 사이에 과학기술의 필요성이 논의되기 시작했지만, 그것은 대체로 그들 스스로 과학기술을 배워 익히겠다는 태도가 아니었다. 과학기술이 이 나라에 필요하다는 점만을 강조할 뿐, 그들이 실제로 크게 지향하고 있던 것은 여전히 권력, 그것이었다. 김옥균이나 서재필은 모두 양반 출신으로 그들은 스스로 근대 과학기술의 중요성을 관념적으로는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들 스스로 이 땅에 과학기술을 심거나 스스로 배우려는 데에는 인색하기 그지없었다. 그들은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잡아 개혁을 실행해보거나, 언론 활동을 통해 사회 개혁을 먼저 추진하려는 등 다분히 권력 지향형이었다. 그것은 과거의 관행에서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는 그런 태도였다. 당연히 과학기술을 실제로 접할 수밖에 없게 된 신분층은 중인이나 평민 등이었다. 1881년의 국가적 근대 배우기 계획에 따라 실제로 과학기술을 배우러 갔던 사람들은 중국 천진에 파견되었던 영선사행이 있고, 과학기술 문명의 구경을 위한 시찰단으로는 일본에 보낸 신사유람단이 있다. 신사유람단의 시찰은 양반이 할 일이었고, 천진에 가서 과학기술을 실습하고 돌아온 사람들은 중인 이하 계층의 사람들이었다. 당연히 귀국 후의 이들의 영향력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들이 배운 것을 이 땅에서 실현시켜 볼 사회적, 계급적 변혁이 함께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의 새 지식은 거의 무용지물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그들 스스로의 개인적 영달을 위해 그 지식을 이용하는 길 외에는 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것은 조선 시대 내내 중인층의 천문학자, 수학자, 의사들이 모두 정치적으로 거세되는 대신 경제적으로 윤택한 생활을 누릴 수 있었던 전통이 새 사회에서도 다시 계속되려 함을 예시하는 듯했다. 조선 시대 중인들이 발전시켜 놓았던 그런 '중인의식'의 한계가 여전히 새 시대의 가치 기준으로 살아남고 있었던 셈이다. 그래서 중인 출신의 상운은 천진에서 돌아와 기술 관리로서 살아가며 정치권의 외곽에 머물 수밖에 없었고, 최초의 미국 대학 졸업생이 된 변수는 그가 익힌 새 농업 기술을 고국에 돌아와 펼치기보다는 차라리 미국에 그대로 남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양반에게는 정권이 문제였고, 중인이나 상민, 천민이 새로 익힌 근대 과학기술의 지식은 그들 개인의 삶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이용될 뿐이었다. 둘을 하나로 묶어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는 길을 아무도 만들 엄두를 내지 못한 채, 이 땅의 시계는 20세기로 흘러들고 있었다.
상호(1879~?)
우리 역사상 최초로 일본에서 이공학 부문 학사학위를 받은 인물이다. 1906년 7월 상호는 일본 동경대 공과대학 조선과를 졸업했다. 원래 1894년 서울의 영어 학교에 입사한 그는 1898년 졸업한 후, 잠시 교사로 일하기도 했다.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다음에는 농상공부의 고위 관직을 두루 맡았는데, 1907년 공무국장이 되었다.
변수(1861~1891)
우리 역사상 최초로 근대식 대학에서 학사학위를 받은 인물, 1886년 미국에 유학하여 메릴랜드대에서 농학으로 학사학위를 받았다. 그러나 모교에서 농업연구원으로 일하다가 졸업한 해에 그만 철도 사고로 사망했다. 미국 유학 전에는 여러 차례 일본에 가서 공부했으며, 김옥균 등을 따라 갑신정변에 가담하기도 했다.
스무 번째 이야기 일제 하의 '과학의 대중화’
일제 시기의 과학기술을 어떻게 볼 것인가
결국 나라는 일본에 넘어갔다. 조선이란 나라가 없어져 버린 것이다. 그리고 일제 35년 동안 이 땅에서는 여러 가지 과학기술의 수준이 높아져 갔다. 학교 교육이 제대로 시작되어 초등학교와 중등학교에서 과학기술 관련 교육이 제대로 자리 잡은 것도 일제 기간 동안이고, 공장이 제법 세워지고 농업구조가 개선된 것도 모두 일제 기간 동안 일어났던 성과였다. 그래서 지금도 일본 사람들 가운데에는 이런 점을 식민지 시대의 업적으로 거론하는 사람들이 있다. 또 특히 일부 경제사를 연구하는 한국인 학자들 사이에도 이 부분에 주목하는 사람이 있다. 물론 이들 여러 가지 근대성의 지표들은 구한말에 모두 나타나기 시작하고 있었다. 다만 개화기 이래 시작되었던 근대화 과정이 일제 치하에서 보다 본격화했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런 35년 동안의 성과를 가지고 일제의 조선 지배를 합리화하거나, 조선 근대화에 대한 일제의 기여라고 말한다면, 이는 대단한 착각일 수밖에 없다. 이렇게 일제 35년 동안 경제 발전이 있었으니 그것은 일제 식민지 기간이 결코 조선에 해롭지 않았다거나, 또는 조선의 발전에 기여했다는 식의 평가는 명백한 오류다. 누군가 역사에는 만약이란 말이 있을 수 없다고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이것이 무슨 말인지 필자는 잘 이해할 수가 없다. 일제 시기의 공적(?)을 말하려면, 당연히 '만약'을 전제로 하여 그렇지 않았을 경우, 즉 만약 조선이 일제의 식민지가 되지 않았다면 한국 역사가 어떻게 전개되었을까를 생각해 보아야만 한다고 필자는 강력하게 주장하기 때문이다. 지금 돌이켜보자면 아주 시시하게 보일지도 모르지만, 구한말 조선인들이 시작했던 그런 근대화의 몸짓을 그대로 지켜갔다면 조선의 근대 사회로의 진입은 훨씬 빠르고도 순조롭게, 그리고 능률적으로 조화로움 속에 진행되었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일제 시기에 부분적으로 이룩된 근대화란 사실 왜곡된 근대화였다. 예를 들면 1945년 해방되었을 당시까지도 조선에는 과학자도 기술자도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대학을 졸업한 수준의 과학자가 수백을 헤아리기 어렵고, 기술자 역시 그랬다. 같은 시기 일본의 수준과는 비교도 할 수가 없을 지경이었음은 물론이다. 게다가 서양에서 교육받은 과학자나 기술자는 더구나 없었다. 아니, 해방 당시 가장 심각한 문제의 하나는 바로 서양말을 하는 사람조차 여전히 거의 없는 상태였다는 사실이다. 1910년에 나라가 일본에 넘어가지 않았더라도 그럴 수 있었을까? 역사의 대목에서나 경제적 지표의 비교만 가지고 역사적 평가를 내리는 일처럼 무의미하고 허망한 일은 없다. 역사적 평가란 사회 발전의 전반적 균형을 전제로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일제는 일제 기간 동안 조선에는 서양말 하는 사람도 있을 수 없게 만들었고, 과학자와 기술자를 양성할 수도 없게 했으며, 조선 출신의 과하자, 기술자가 일본에서조차 활동하지 못하게끔 잘도 막아 놓았다. 이것만 가지고도 일제 식민지 정책은 일본 입장과는 상관없이 조선인에게 있어 지극한 비극이었을 뿐임을 알 수 있다.
애국 계몽기의 다윈주의 ~ 과학주의의 시작
20세기 초반의 얼마 동안을 우리 역사에서는 '애국계몽운동' 기간이라고 부른다. 일제의 침략은 점점 노골화되고 있었고, 이에 항의하는 조선인들의 의병 활동이 시작되었으며, 다른 한 편에서는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애국계몽운동을 벌였다. 특히 정치적 자유가 날로 위축되면서, 그들은 학술 활동이란 이름을 내걸고 사실상 대중 운동이며, 자강운동이요, 궁극적인 독립운동을 펴기 시작했다. 이런 활동의 중심에 있던 사람들을 살펴보면 독립을 먼저 앞에 내세운 사람들은 보다 유교적 성향이 강했고, 개화를 앞세워 일본과의 협조를 신봉하려는 경향의 사람들은 신학문에 눈뜬 사람들이 많은 편이었다. 이들 당시 지식층의 시대 인식의 줄기를 이루는 사상은 사회적 다윈주의(Social Darwinism)라 불리는 것이었다. 이미 동아시아 지식인들에게 세상은 약육강식의 원칙이 지배하는 생존경쟁의 바다로 인식되기 시작한 지 오래였다. 서양 각국은 다투어 동아시아를 침략해 오고 있었고, 그런 서양 나라들 사이에서도 각축과 갈등은 그치지를 않았다. 그리고 일본은 잽싸게 그들의 뒤를 따라 조선을 넘보고 있었으니, 당시 조선 지식층에게 있어 서양 나라들, 일본, 청나라 등은 모두 싸움터에 들어선 싸움꾼들에 지나지 않았다.
본질적으로 세상이란 투쟁의 장소이며, 그 투쟁에서 강한 자는 살아남고 약한 자는 도태당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것이 하늘이 내린 율법이라고 해석하는 사상이 - 그것도 서양 과학의 이름 아래 - 동양 식자들 사이에 번졌다. 특히 1900년 초에 이미 국내에서 인기를 끌었던 청나라의 대표적 지성 양계초의 문집은 이런 사회진화론을 크게 환영하고 설명해 주고 있었다. 대체로 일본의 최고 지식층을 1880년대 사로잡기 시작한 사회적 진화사상은 1890년 말에는 중국 지식층에 큰 영향을 주기 시작했고, 1900년대 초부터는 주로 양계초의 통해 조선에 전파되고 있었다. 생존경쟁, 적자생존, 자연도태, 약육강식 같은 말들이 크게 유행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1906년 서우학회의 발기 취지문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무릇 세상 만물은 홀로는 위태롭고 무리 지으면 강하며, 합치면 이루지만 흩어지면 패하는 것이 이치이다. 지금 세상에서 생존경쟁은 천연이요, 우승열패는 공례라 하니, 이에 단체를 잘 만들고 못 하는 것이 문명과 야만을 갈라주고, 생존과 멸망을 갈라주나니...(후략) - 1906년 서우학회의 발기 취지문에서 (국한 혼용문을 현대문으로 풀어썼음)
여기서 우리는 명백한 사회진화론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1905년 12월 1일 자의 "대한매일신보" 논설문에는 이런 대목도 있다.
이 세상 지구상에는 억만 인류가 살고 있는데, 이들이 서로 경쟁함은 세가 이미 그럴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국토와 인민이 항상 약육강식과 우승열패를 면할 수 없으니, 지금 세계에서 자강력이 없는 자는 이름은 비록 사람이지만, 사람으로 대우받지 못하고 자유를 얻지 못한 채 남의 부림을 당하다가 필경에는 전멸하는 경우에 이르게도 된다. 이는 세계 사람들이 역력히 목도한 바이니, 그 비참한 정황을 어찌 말로 다 표현하리오. 대저 인류 가운데 자강력과 관련된 바를 생각해 보니 거기에는 무형의 자강과 유형의 자강이 있으니, 유형의 자강은 재력과 무력 등이 그것이며, 무형의 자강은 신교력이 그것이다.
- 1905년 12월 1일 자의 "대한매일신보" 논설문에서 (현대어로 바꿈)
생존경쟁의 세계에서 자신을 지킬 수 있는 힘(자강력)은 유형적인 것으로 재력과 무력을 꼽을 수 있고, 무형의 것으로 종교의 힘 또는 신념의 힘을 꼽을 수 있다고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미 나라의 재력과 무력은 너무 참담하여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하고 있었지만, 조선인으로서의 신념과 믿음 지킨다면 조선인은 망하지 않으리라는 바램이 여기 담겨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한 참 뒤에 조선의 역사를 쓰면서도 박은식(1895~1925)은 같은 논리를 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나름대로의 뚜렷한 역사관을 가지고 조선 역사를 썼던 그는 학회 운동 기간 동안 실학을 강조하면서 당시 조선인의 실학으로 농학, 무학, 의학, 광학, 화학, 공예학, 측산학, 회도학, 천문학, 지리학, 고아전학, 성학, 중기기학 등 과학기술에 해당하는 과목을 들고, 여기에다가 상학, 철학, 법률학을 덧붙이고 있다. 압도적으로 서양에서 들어오던 과학기술을 '실학'으로서 주목한 것을 알 수 있다. 그가 한참 뒤에 쓴 역사 속에는 바로 조선인의 신념 또는 정신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대목이 있다. 박은식에 의하면 비록 나라는 일본에 망했고, 그에 따라 조선의 물질적 재산은 모두 일본에 뺏기고 말았지만, 정신만이라도 살아 있다면 조선은 부활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조선의 혼을 지키자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나라는 멸할 수 있으나, 역사는 멸할 수 없다"면서 박은식은 1915년 발표한 "조선통사"에서 "대개 국교, 국학, 국어, 국문, 국사는 혼이요, 전곡, 군대, 성지, 함선, 기계는 백이다. 그러므로 국교, 국사가 망하지 않으면 그 나라는 망하지 않는다."고 선언하고 있다.
당시 다윈주의의 영향을 받은 대표적 조선 식자가 한 사람 더 있었으니, 그는 바로 신채호(1880~1936)였다. 유명한 그의 표현인 '역사는 아와 비아의 투쟁'이란 말은 바로 그가 양계초를 읽고 다시 구성해 표현한 사회적 다윈주의의 선언이었다. 이는 1931년 "조선일보"에 '조선사'란 제목으로 한국사를 연재하기 시작하면서 첫 줄에 내세운 말이다. 인류 역사는 투쟁을 통해 발전하며, 이제 그 투쟁의 수단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과학기술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지고 있었음을 반영한다. 하지만 그런 의식의 보급이 그와 비례하는 과학기술 수준의 향상으로 이어지지는 못하고 있는 것이 당시의 상황이었다. 아니, 오히려 그런 의식이 높아 갈수록 실제 과학기술의 수준을 높이는 일에 지식들이 직접 참여할 가능성은 점점 엷어지고 있었다. 그들은 다만 그런 원칙만을 되풀이 천명하면서 누군가 다른 사람들이 과학과 기술을 연구하고 그 수준을 높여 주기를 기대할 뿐이었다. 양반 의식은 여전히 이들 식민지 조선의 지식층을 과학기술로 직접 뛰어드는 일을 가로막을 따름이었다. 비록 과학주의는 자라기 시작하였으나, 그에 상당하는 실질적인 '과학'이 자라기엔 조선은 아직 척박하기만 한 땅이었다.
이광수가 말하는 일제 초기의 과학
춘원 이광수의 대표작 "무정"은 우리나라 근대 소설의 효시로 꼽히는 작품이다. 1917년 1월 1일부터 "매일신보"에 6개월 동안 연재했던 그의 첫 소설이다. 당시의 상황에 어울리게 계몽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데, 그 마지막 장면은 일제 식민지 조선 초기의 조선인들의 과학에 대한 생각을 잘 나타내고 있다. 홍수 이재민을 위해 자선음악회를 마련한 주인공 젊은이들이 막 이 행사를 마치고 돌아와서의 장면이다. 주인공인 경성학교 영어 교사 이형식은 "과학, 과학"하고 혼자 부르짖는다. 그에게는 과학에의 무지가 조선인들의 고난의 근원이라고 생각되었나 보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조선 사람에게 무엇보다 먼저 과학을 주어야 하겠어요. 지식을 주어야 하겠어요."이는 바로 소설 주인공의 입을 통해 작가 이광수가 부르짖는 말이다. 그런데 바로 조금 뒤 장면에서 이형식은 이렇게 자기의 장래 희망을 털어놓는 대목이 있다. "나는 교육자가 되렵니다. 그리고, 전문으로는 생물학을 연구할랍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듣는 사람 중에는 생물학의 뜻을 아는 자가 없었다! 그렇게 말하는 형식도 물론 생물학의 참뜻을 제대로 알지 못하였다. 다만 자연과학을 중히 여기는 사상과 생물학이 가장 자기의 성미에 맞을 듯하여 그렇게 작정한 것이다. 생물학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새 문명을 건설하겠다고 장담하는 그네의 신세도 불쌍하고 그네를 믿는 시대도 딱하다는 생각이 드는 부분이다. 이광수라면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다. 그의 과학에 대한 지견이 이 정도였다는 사실만으로도 일제가 조선 민족에게 어떤 피해를 주었던가를 확인할 수가 있다. 바로 그 시점에 중국에서는 '과학과 인생관'이라는 주제하에 대토론이 벌어져 있었다. 과학이란 과연 인간의 문제를 해결해 주고 사회를 밝히는 열쇠가 될 수 있을까 하는 문제에 대해 중국의 지도급 인사들이 대거 참여하여, 중국 현대사의 중요한 부분을 형성하는 대논쟁이었다. 한편 일본은 이미 세계 굴지의 과학 대국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조선의 지식인은 이제서야 무엇인지도 모른 채 생물학 공부를 시작하겠다고 유학을 결심하고 있었으니 비교가 되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여기서 또 주목할 만한 사실은 이광수가 그린 이들 조선 젊은이들의 꿈이 장래 외국 유학에서 돌아와 조국의 문명개화를 위해 일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특히 형식은 마지막 장면에서 마침 그의 미국 유학 결심을 실행에 옮겨 미국으로 떠나는 참이었다. 어쩌면 주인공 이형식의 미국 유학이란 다름 아닌 작가 이광수의 꿈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당시 조선의 지식인들 사이에는 조금씩 미국이라는 나라에 대한 동경심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미국 같은 곳에 가서 본격적인 교육을 받아야 나라를 개화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되리라는 자각도 생겨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꿈과는 달리 미국 유학은 점점 힘들어지고 있었다.
일제 하의 과학기술 교육
일제 식민지 기간 동안 조선의 학제는 보통학교 - 고등보통학교 혹은 실업학교 - 전문학교의 3단계로 자리 잡아 갔다. 보통학교(초등학교)와 고등보통학교(중고교)에서 과학 과목을 가르쳤고, 실업학교에서는 지금으로 치면 기능 교육이 진행되었다. 전문학교는 초급대학에 가까운 수준의 교육기관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 경성 고등공업, 경성 의학전문, 수원 농림의 세 학교가 기본적으로 각각 공업, 의학, 농업의 초급 기술자를 양성하게 되어 있었다. 조선의 교육은 일본이 을사조약(1905)에 의해 조선을 실질적 식민지로 만들기 직전부터 이미 일본의 손에 넘어가 있었다. '한일의정서'에 의해 일본인 고문 시대가 열렸기 때문이었다. 학부 고문으로 1905년 2월 부임한 폐원탄은 동경제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1900년 11월 서울에 와서 교사로 있던 사람이다. 그는 식민지 조선의 교육 행정을 맡게 되면서 나름대로 식민지 교육이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연구를 했고, 그 결과는 어이없게도 조선에는 고등교육이 필요하지 않다는 내용의 것이었다. 그는 프랑스의 경우, 식민지를 본국의 연장으로 보고 있으면서도 식민지에는 대학은 세우지 않았으니, 조선에도 고등교육이 필요하지 않다는 결정을 내버렸다. 또 그는 미국은 필리핀에서 실과교육, 특히 수공업 교육에 역점을 두어 성공했지만, 영국은 인도에서 문학적 교육을 시행하여 식민지 정책이 실패했다는 이유를 대며 교육을 실과교육과 문학적 교육으로 양분한 다음, 조선인에게는 실과 교육만이 필요하고, 문학적 교육은 삼가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함께 식민지 조선 교육의 초기 구조를 다진 궁삭행태랑은 아주 솔직하게 "식민지 교육은 우선 본국어 보급을 주로 하고, 고등교육을 피해 실업교육에서 그쳐야 한다... 그 근거는 식민지 인민의 자각을 막는데 있다."고 1923년 발행된 그의 책 "조선의 교육"에서 밝혔다. 그에 의하면 식민지란 본국에 필요한 식료 또는 본국 공업에 필요한 원료를 용이하게 또는 유리하게 공급하거나 본국 제품의 확실한 판로를 얻기 위한 대상일 뿐이라는 것이다. 1919년 기미독립운동 이후 소위 문화정치를 표방하면서 일제의 통제가 조금은 느슨해지자 조선의 지식인들은 조선에도 대학을 세우자면서 민립대학의 건립 운동을 시작한 일이 있다. 1922년 시작된 이 운동은 당초 1차로 법과, 문과, 경제과, 이과를 세우고, 이어 2차로는 공과를, 그리고 마지막으로 농과와 의과를 세워 종합대학을 만들겠다는 야심 찬 계획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것은 실제로 조선인들의 힘으로는 아직 불가능한 일이었다. 당연히 일본은 협조하지 않았으며, 다만 1923년 말경 총독부로부터 앞으로 총독부 주도하에 대학을 세우겠다는 어정쩡한 약속을 받아 내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1926년에 경성대학이 설립되었다. 그러나 이 최초의 대학에는 법문학부와 의학부만이 있었을 뿐이었다. 당시 조선에 필요한 농학, 공학, 이학의 교육은 전혀 포함되지 않았고, 이런 분야를 공부할 사람은 여전히 일본에 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1916년 봄 문을 연 경성공업전문학교는 당시 조선에서 가장 훌륭한 공업교육 기관이었다. 초급대학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는 이 학교는 첫해에 조선인 47명과 일본인 61명을 선발했었는데, 지원자 수는 각기 161명과 90명이었다. 합격률로 치자면 조선인 30%에 일본인 68%라는 대조를 보인다. 그리고 이런 차별대우는 조선 땅 안에 세운 각급 학교 등에서 지속되고 있었다. 경성공전의 경우는 정책적으로 조선인 입학생 비율이 일본인의 3분의 1정도로 지켜졌다. 처음 염직, 요업, 응용화학, 토목, 건축과로 시작한 이 학교는 1917년 광산과를 추가했고, 1938년에 가서야 중국과의 전쟁이 심각해지자 전시동원령을 내리며 기계와 전기과를 신설했을 정도다. 그 밖에도 연희전문이 초급대학 수준의 이과 교육을 실시하고 있었다. 당시로서는 거의 유일한 조선인을 위한 이과 교육이 가능했다고 할 수 있다. 서양인 선교사들이 주관한 교육기관이었기 때문에 일제도 함부로 손대지 않았고, 또 규모가 작아서 굳이 마찰을 일으킬 필요가 없었던 것이 그 존속의 이유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대로 국내에서 뒤에 물리학, 천문학, 수학 등의 분야에 학자로 성장할 수 있었던 몇몇 인사들로는 바로 여기서 이과 교육을 받고 미국 유학을 갔던 이원철(천문학), 최규남(물리학) 등을 꼽을 수 있다. 어떻든 일제 기간 동안 이 땅에서는 한 번도 착실하게 과학 교육이 진행된 일이 없었다. 조선인은 일본에 유학하거나, 미국 같은 서양 나라에 가서 과학기술을 익히고 돌아와야 했으나, 그런 기회란 거의 원천적으로 존재하지 않았다. 특히 합방 초기의 일본 정책은 교육의 제도부터 유학 규정에 이르기까지 조선 유학생의 일본 입국 자체를 심히 제한하고 있었다. 당시 일본인들에게는 식민지에까지 막대한 투자를 해서 과학기술 교육을 시킬 가치란 전혀 없었다. 과학기술은 일본에게나 필요한 일이었지, 이미 식민지가 되어 버린 조선 땅에는 불필요한 사치품이었던 것이다.
1930년대 김용관의 과학 운동
1917년의 이광수가 극히 피상적으로 생각한 '과학'은 거의 같은 시기의 다른 조선 지식인들에게는 보다 절실한 민족의 문제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전문학교 졸업 정도의 지식을 갖게 된 인사들 사이에서 조선에 과학기술이 발달하지 않고서는 민족의 희생이란 불가능한 꿈이라는 자각이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한 것이다. 이들에 의해 보다 절실하고도 실질적인 과학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은 당연한 추세였다. 그 대표적인 경우로는 바로 이광수가 "무정"을 쓰던 그 시기에 경성공전 화공과를 들어갔던 김용관(1897~1967)에 의해 주도된 과학 운동을 들 수 있다. 그는 기미독립운동 때 일본 동경에서 고등공업학교 요업과를 마치고 귀국했다. 그리고 1924년에는 발명학회를 만들어 주도적 역할을 하다가 1930년에는 보다 본격적인 과학 운동을 벌였다. 그의 발명학회가 1933년 창간한 "과학조선"은 1944년까지 계속해 간행되었던 일제 시대의 가장 주목할 만한 종합과학 잡지였다. 이 학회를 중심으로 이끌던 과학 운동은 1934년 다시 '과학지식보급회'란 기구를 만들고 이를 중심으로 본격적 과학 대중화 운동이 펼쳐졌다. 이 단체는 그해 처음으로 대대적으로 열렸던 '과학 데이' 행사를 계기로 결성되었던 것이다. 첫 '과학 데이'는 4월 19일로 정해졌고, 그날에는 라디오 방송, 강연회, 좌담회, 활동사진 상연, 공장 견학 등의 행사가 있었다. 새로 조직된 과학 지식 보급회가 주관한 다음 해 1935년의 행사는 정말로 최고의 것이었다. 서울의 3대 일간지를 비롯한 언론기관들이 포스터를 만들어 주면서 이를 선전했고, 조선인의 과학진흥을 역설했다. '과학의 승리자는 모든 것의 승리자다'라는 등의 여러 가지 표어를 만들어 신문이나 포스터에 실었고, 김억(안서)이 작사하고 홍난파가 작곡한 '과학의 노래'가 연주되고 합창되었다. 다음은 그 가사이다.
1절 : 새 못되야 저 하늘 날지 못노라 그 옛날에 우리는 탄식했으나 프로페라 요란히 도는 오늘날 우리들은 맘대로 하늘을 나네 (후렴) 과학 과학 네힘의 높고 큼이여 간 데마다 진리를 캐고야 마네
2절 : 적은 몸에 공간은 넘우도 널고 이 목숨에 시간은 끗없다 하나 동서남북 상하를 전파가 돌며 새 기별을 낫낫이 알려주거니
3절 : 두다리라 부시라 헛된 미신을 이날 와서 그 뉘가 미들 것이랴 아름답은 과학의 새론 탐구에 볼지어다 세계는 밝아지거니
그날 당시 서울 시내에 있던 자동차란 자동차는 모두 동원된 듯 54대가 줄줄이 행렬을 이루어 종로에서 안국동을 돌아 을지로로 향했다. 깃발과 포스터, 그리고 군악대의 연주가 이들을 선도했다. 이날 밤 서울 YMCA에서 열린 기념식에는 합창단이 피아노 반주에 맞춰 '과학의 노래'를 합창했고, 여운형은 "과학자에게 고하는 일언"이라는 제목 하에 강연도 했다. 4월 19일을 '과학 데이'로 고른 것은 1932년의 그 날이 바로 다윈 50주기였던 때문이다. 찰스 다윈(1809~1882)은 사회적 다윈주의가 아직 풍미하던 당시로서는 가장 영향력 있는 과학자였다. 기미독립운동 이후 몇 가지 민족 운동에 실패하고 고민해 오던 당시 조선 지식층에게 이 과학 운동은 일종의 숨겨진 민족 운동이었다. 미신을 타파하고 과학을 보급하겠다는 명분은 일제도 막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런 명분을 이용하여 조선 민족의 자각과 계몽을 꾀하여 민족 능력을 높이려던 것이었다. 실무 책임자는 김용관이 맡었지만, 과학지식보급회에는 당시의 거의 모든 대표적 조선인이 참가하고 있었다. 회장은 윤치호, 부회장은 이인이 맡았고, 회원 명단에는 송진우, 방응모, 김성수, 이종린, 최규동, 조동식, 현상윤, 이하윤, 윤일선 등의 이름이 보인다. 당시의 언론, 교육, 실업, 학계 등의 대표가 모두 참여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전문적인 과학자, 기술자들은 거의 보이지 않고 다른 분야의 유명인사만 보인다는 사실부터가 당시 상황을 잘 보여준다. 실제로 아직 과학자나 기술자라 불릴 정도의 과학기술 고등교육을 받은 인사가 거의 없을 때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 운동도 곧 그 잠재적 위험성을 파악한 일제에 의해 탄압되기 시작했고, 5년 이내에 흐지부지되고 말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운동의 역사적 의미는 대단히 크다. 여전히 조선의 지도급 인사들은 양반적 태도를 벗어던지지 못한 채 스스로 과학기술을 공부하기보다는 누군가가 나설 것만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는 구한말 이래의 양반의 정치 과잉과 중인의식의 계승을 보게 된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 1930년대의 과학 운동은 이화학연구소를 세우자는 운동을 거론하기도 했고, 과학기술의 진흥 없이는 민족의 앞날도 있을 수 없다는 자각을 일으키는 데 상당히 기여한 것으로 보인다. 1930년대 과학 운동은 일제 시기 조선 지식인들의 국민 계몽 활동의 한 가닥이었고, 이 운동 역시 그 전의 여러 가지 과학 활동이나 마찬가지로 겉보기에 큰 효과를 얻지는 못했기에 실제로 과학기술의 수준을 높이는 일에는 거의 도움된 일이 없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핍박 속에 있던 조선 사람들에게 과학기술 문명의 시대를 알리고, 그 필요성을 역설하는 대중 계몽의 효과가 컸을 것만은 짐작하고도 남을 일이다. 필자가 '과학의 생활화', '생활의 과학화'를 슬로건으로 나섰던 60여년 전의 이 운동을 우리가 지금에 와서도 계승해야 한다고 오랫동안 강력히 주장해 온 것은 이 때문이다.
김용관(1897~1967)
1997년은 일제 시기 과학 운동의 대표자였던 김용관의 탄생 100주기이자, 서거 30주기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한국에서는 아무런 기념행사도 없었다. 김용관은 광산 김씨로 출생지는 황해도 재령이나 서울의 창신동으로 정확하지는 않으며, 1918년 경성 공전을 나와 일본에 가서 동경의 장전 고등공업학교에서 요업을 공부하고 1919년 귀국했다. 그 후 1924년의 발명학회를 주동했고, 1933년 "과학조선" 창간, 이어서 1934년부터는 과학 지식 보급회를 만들어 '과학 데이' 행사를 벌였다. 해방 후에는 요업학회, 발명학회 등에 관여했으나, 별 활동을 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과학 데이
지금의 '과학의 날'로 지정된 4월 21일은 1967년 그날 과학기술처가 간판을 달았던 데에서 유래한다. 그러나 필자가 생각하기에는 과학기술처 간판 단 일보다는 1930년대 김용관의 과학 운동이 더 중요한 우리의 과학 유산이 아닐 수 없다. '과학의 날'은 4월 19일로 고치는 것이 옳다. 필자는 독립기념관에 이 30년대에 과학 운동도 민족 운동의 하나로서 기념되어야 마땅하다고 주장하는 바다.
스물한 번째 이야기 식민지 종들에게 과학이라니
최남선의 천재 민족론
과학기술의 중요성은 널리 인식되기 시작했지만, 일제 기간 동안 실제 과학과 기술이 발달하거나 또는 그 과학기술이 조선인들의 수준을 높여 주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런 가운데 사람들은 점점 과학기술의 중요성을 말하면서, 그렇다면 조선 민족은 어떤 과학기술의 유산을 남기었던가 반성해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런 일제 시기의 반성의 결과가 지금도 한국인들 사이에 공공연하게 인식되는 첨성대와 측우기, 거북선과 금속활자 등에 대한 자랑인 것이다. 이런 자랑들은 언제, 왜 자랑으로 여기게 되었으며, 그런 자랑을 하기 시작한 이유는 어디 있을까? 이 문제는 그 자체로 아주 흥미 있는 과학사 서술의 근본적 문제가 될 수 있다. 19세기 말까지 우리 역사학계의 주류는 과학과 기술에 대해서는 그리 우호적이지 못했다. 당연히 19세기까지의 역사에는 과학기술에 대한 예찬이나 설명이 거의 없다. "삼국사기"에는 첨성대에 대한 단 한 마디의 기록이 없을 지경이다. 그러한 태도에 변화가 보이는 경우로는 우선 유길준의 "서유견문"을 들 수가 있다. 그 가운데 유명한 그의 글 "개화의 등급"에는 인류 문명이 점차 개화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앞으로도 끊임없이 발전해 가리라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그는 행실, 학술, 정치, 법률, 기계, 물품이 두루 개화되어야 훌륭한 개화를 이룰 수 있다면서 당시 세계에 있는 나라들은 개화, 반개화, 미개화로 등급을 나눌 수 있다고 말한다. 한 나라에 개화한 사람이 많으면 개화한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개화되지 못한 나라라는 것이다. 그는 여기서 실상 개화와 허명 개화를 나누어 실질적인 개화가 이뤄져야 한다고도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유길준은 글을 마무리하면서 지금 세상을 좌우하는 서양 나라들에는 기차, 기선, 전선 등 기계가 갖가지로 발달했다는 예를 들면서, 우리 선조들도 그런 일에 유능한 바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1885년쯤에는 이미 썼으리라고 생각되는 이 글에서 유길준이 고려자기, 거북선, 금속활자의 3가지를 들어 조선 민족의 과학기술적 창의성을 높이 평가하려 하고 있음은 주목할 만하다. 이 책이 출판되기는 1895년 동경에서였지만, 이 부분만은 보다 전에 쓰여진 글로 추정되고 있다. 특히 그는 이런 과학기술의 전통을 가진 조선 민족이 그 전통을 계승, 발전시켰다면 지금 세계가 우러러보는 조선이 되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렇게 우리 과학기술 전통에 대한 자랑은 아주 천천히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태도는 1909년 장지연의 "만국사물기원역사"에서도 발견된다. 그는 여러 가지 과학사적 유물들을 간단히 다루고 있는데, 그 가운데에는 세종 때의 간의, 혼의, 혼상, 측우기, 앙부일구, 일정정시의, 자격루, "칠정산 그리고 당시의 정초 장영실 등의 인명도 보인다. 그 밖에도 중종, 선조, 효종의 천문기구가 언급되어 있고, 금속활자는 태종이 처음 만든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기도 하다. 고려 때 최무선이 화약을 처음 만든 이야기도 나오고, 이순신의 거북선도 소개되어 있다. 지금 한국인들이 자랑삼는 내용들이 대개 여기서 이미 정리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배경 속에서 최남선 같은 일제 식민지하의 지식인들은 우리 과학기술 전통을 대대적으로 내세우기에 이르렀다. 1931년의 "조선역사"에서 최남선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조선의 역사는 사회 가치로 보다 문화 가치로 승한 기록이니 문화의 창조력에 있어서 조선인은 진실로 드물게 보는 천재 민족이라 할 수 있다. 고려의 활자, 자기와 이조의 정음, 측우기, 갑선, 비차 등은 이미 누구든지 아는 바이어니와 물상 아닌 방면에도 신라의 화랑 훈련법과 고구려의 오부군국제 같음도 사회력의 상에 나타난 - 독창으로 볼 것이다. 고정인이 측후에 능함은 지나의 실록에 전한 바이오 동양 최고의 천문학 실적이 이제 경주에 엄존도 하거니와 원시의 역법과 점성술에 이미 조선인의 독창력이 발휘되었을 것을 상상케 하는 증적도 적지 아니하다. 다만 혜성적으로 일시 섬광에 그치고 간헐적으로 계속무상한 혐은 있으나 조선인의 심해에 독창의 도군이 점점하여 있음은 누구의 눈에든지 뜨일 것이다.
일제 시기 동안 이렇게 역사 속의 과학기술 전통에 대해 자랑하기 시작한 데에는 그럴 만한 사연이 있다. 다른 방면으로 힘을 자랑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과학기술상의 자랑거리라도 찾아 앞세울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앞에서도 인용한 일이 있지만, 박은식이 말하는 민족의 혼을 살려 가는 길은 바로 이런 자랑거리를 지켜나가는 일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런 민족혼이 살아있다면 언젠가 조선 민족은 독립을 찾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그 밑에 도도히 흐르고 있었다. 이런 태도는 해방 후에도 그대로 지속되었다. 아무런 반성도, 재고도 없이 일제 시기에 자랑하던 그대로가 해방 이후의 자랑거리가 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져 왔다고 할 수 있다. 민족 존망의 위기에서 이런 자랑을 앞세웠던 태도는 당연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보다 자유로운 상황에서 한 번쯤 이런 자랑들에 대해 돌이켜 생각하는 태도가 필요했을 법도 하건만, 이런 반성은커녕 과학사에 대한 연구와 보급도 없는 채 우리는 벌써 반세기를 지내버리고 말았다.
일제 하의 과학 인력
그러면 이렇게 과학기술의 전통을 자랑하고 있던 일제 시기 이 땅의 과학과 기술은 실제로 얼마나 성장하고 있었던 것인가? 이미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일제 시기 조선에는 이공계 교육을 위해서는 아직 대학다운 대학조차 없었다. 전문학교 수준의 이과 교육은 약간 진행되었지만, 그 이상의 정규 대학 교육을 받기 위해서는 외국으로 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리고 당시의 외국이란 주로 일본을 이르는 것이었다. 그러면 당시의 일본 유학은 어떻게 진행되었던가? 조선이 일제 식민지가 되면서 일제는 조선인의 서양 유학은 물론이고, 일본 유학마저 크게 제약하여 실제로 이공계 유학이란 거의 불가능했다. 지금까지의 연구에 의하면, 1906년 상호가 조선 사람으로는 처음으로 동경제대에서 조선공학을 공부하여 졸업한 이후에는, 1911년 유전이 경도제대 제조화학으로 학사 학위를 받은 것이 1920년대까지의 유일한 경우가 될 지경이다. 특히 기미독립운동 이전 조선의 학제는 의도적으로 일본의 그것과 너무나 다르게 구성되어 있어서, 조선인 학생들은 일본 유학을 가려 해도 시간상의 손해가 너무나 컸다. 다른 차별이나 금전상의 어려움은 그만두고라도 학제가 서로 틀려서 감수해야 하는 손해 때문에 조선 학생의 일본 유학은 저절로 억제되고 있었던 것이다. 기미독립운동 이후의 완화된 조치 이후에서야 겨우 그 숫자가 늘기 시작하여 일제 기간 동안 일본에 유학하여 4년제 정규 대학을 졸업한 이공계 출신은 전부 해야 200명 남짓을 헤아린다.
이 수치는 대단히 놀라운 것이 아닐 수 없다. 이 조사는 1995년에서야 비로소 처음으로 시도되었는데, 그 결과를 보면 해방 전에 일본에서 이공계 대학을 졸업한 조선인은 모두 204명이다. 이들은 이학 63명, 공학 141명인데, 수학(16명), 물리(14명), 화학(13명), 생물(9명), 지질(11명) 등의 졸업생을 배출한 이학 분야에서는 수학을 전공하여 1925년 동경제대를 졸업한 최윤식이 처음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공학의 경우는 이미 앞에 소개한 상호(1906), 유전(1911) 이후에는 1923년 경도제대를 공업화학으로 졸업한 안재학이 세 번째였다. 일제 시기 이공계 정규 대학을 졸업한 조선인이라면 당시 조선에서는 대단한 과학자, 기술자로 대우받을 수도 있을 지경이었다. 그런 수준의 교육을 받은 사람이 35년 동안 204명밖에 나오지 않았으니 더 말할 것도 없다. 같은 시기 일본에서는 같은 자격을 가진 일본인이 얼마나 졸업했을까 계산해 보지 않아도 분명하다. 일본에서는 그 동안 적어도 수만 명 이상이 졸업했을 터이니, 일제가 식민지 조선에서 경제적 건설을 이루었다는 따위의 평가가 실로 웃음거리도 되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같은 기간 동안 고급 학위를 받은 조선인은 또 얼마나 되는지를 살펴보면 그 비참한 모습을 더 잘 알 수가 있다. 일제 치하에서 일본에 유학하여 이공계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사람은 다음과 같다.
이태규(1902~1992) 경도제대 이학부, 1931, 화학
김양하(1905~1996) 경도제대 공학부, 1939, 공업화학
김양하(1901~?) 동경제대 이학부, 1943, 화학
박철재(1905~1970) 경조제대 이학부, 1940, 물리
조광하(1907~1967) 대판제대, 1944, 화학
그러면 이들 당시의 최고급 과학기술 인력은 일제 기간 동안 어떠한 세월을 보내야만 했는가? 아직 조선에는 그들을 받아 줄 아무런 시설이며 기관이 없었으니, 일본에서 연구 기관에 종사하는 것이 보통이었다.(실제로 이 가운데 1943년과 1944년에 학위를 받은 김양하와 조광하는 바로 해방을 맞았으니 그들의 일제 시대의 활동을 따로 말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이태규, 이승기, 박철재 등 3명은 모두 경도대의 교수 또는 강사로 일하고 있었다) 일제 시기에 과학기술을 공부하러 일본에 유학 간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아직은 그 사회적 성분이나 그들의 성격에 대한 연구는 시도된 일이 없다. 하지만 몇 년 전 일본 구주(규슈) 대학교에 가서 찾아본 그 대학의 역사책에서 필자는 일본인들이 1930년 이후 조선에서 구주 대학으로 유학 온 학생들은 거의 압도적으로 법과를 공부하여 관직으로 나가려 한다는 사실에 일본인들이 놀라워했다는 기록을 읽은 일이 있다. 조선 시대 신분사회의 전통이 만들어 놓은 조선 식자층의 일반적 태도가 일본 유학생에게서도 잘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전통은 일제하에서도 역시 왜곡되어 소위 일제 당국의 고등문관 시험이 최고로 여겨지곤 했다. 나라가 망하고 일제의 압제 아래 신음하면서도, 조선의 지식층에게 있어서 과학기술을 스스로 공부하고 과학자나 기술자가 되려는 의지보다는 과거를 통해 관리로 입신하겠다는 의욕이 여전히 앞서고 있었음을 잘 보여준다. 그리고 매우 갑갑한 일이지만서도 이런 경향은 지금(1998년)까지도 계속되는 한국 사회의 고질적 특징이기도 하다.
일제 하의 서양 유학과 과학기술
그러면 일제 기간 동안 서양에 가서 과학기술의 교육을 받은 조선인은 또 얼마나 되었을까? 또 그들은 어느 나라에 몇 명이나 갔으며, 그 가운데 공부를 제대로 마친 사람은 얼마나 될까? 교육을 마친 후에는 어떻게 활동했던 것인가? 그 가운데 몇 명이 고국에 돌아와 어떤 일에 종사했으며, 나머지는 또 어디서 어떤 활동을 했던 것인가? 이런 질문에 우리는 아직 제대로 된 대답을 할 수가 없다. 창피한 일이긴 하지만, 이런 의문에 대해 아직 제대로 연구해 본 일이 없기 때문이다. 1세기 전 처음으로 정부 차원에서 외국 유학을 기획했을 때, 조선 정부는 서양에도 유학생을 파견할 예정이었다. 예를 들어 1903년, 정부는 실제로 13명의 유학생을 러시아에 파견한 일이 있고, 그 이듬해에는 영국과 프랑스에 각각 10명씩의유학생을 보낼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계획으로 끝나고 말았다. 러시아 유학생들 가운데 과학기술 유학생이 몇이나 있었던지는 아직 밝혀져 있지 않다. 따라서 조선이 일제 식민지로 전락한 다음의 서양 유학이란 더욱 어려운 상황이었고, 그런 기회가 있다면 그것은 순전히 개인 유학생이거나, 또는 주로 미국이나 캐나다에서 와 있던 서양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진행되는 유학생이었다. 그러면 일제 기간 동안 이렇게 서양에 유학한 조선인은 과연 얼마나 될까? 1996년 말 김근배 박사가 미국에서 연구해 밝힌 결과에 의하면, 지금까지 명단이 밝혀진 일제 시기 미국 유학생은 이학 38명, 공학 59명, 의학 80명, 농학 21명이다. 이 경우 의학이란 대체로 의사 자격을 얻기 위한 공부를 한 것을 뜻하기 때문에 순수 의학 연구를 목적으로 한 사람은 적었다. 따라서 미국 의과대학 졸업생 80명을 과학기술자로 분류하기에는 사실 약간의 무리가 있다. 이 연구를 진행하고 있는 김 박사에 의하면 앞으로 연구가 더 진행되면 이 숫자는 50% 정도 늘어나리라고 한다. 그 밖에 독일 등 유럽에서 대학을 졸업한 이공계 졸업자도 없지는 않지만, 의미있을 정도로 많지는 않다. 물론 서양 여러 나라의 경우를 비교하여 연구할 필요가 있기는 하다. 서양 이외의 유학생으로는 중국 유학생이 약간 있는데, 이 경우도 그저 몇 명 정도 있다는 사실만 밝혀져 있고, 그 소상한 내용은 모르는 상태이다.
사실 유학생의 가장 대표적인 경우는 선교사들이 가르치던 연희전문 졸업생으로서 미국 유학을 떠난 경우였다. 두 가지 예만 들면, 우선 이원철이 있다. 연희전문의 개교와 함께 처음으로 1915년 수물과에 입학했던 이원철은 1919년 졸업 후 모교에서 수학을 가르치다가 1922년 미국 미시간주의 앨비언 대학으로 유학을 떠날 수가 있었다. 1학기를 공부한 그는 미시간 대학으로 옮겨 1923년에는 석사 학위를 받고, 이어 박사 공부를 계속하여 1926년 조선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미국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시간 대학에서 그를 지도해준 교수는 바로 연희전문에서 이미 그를 가르쳤던 은사 칼 루퍼스(W. C. Rufus, 1876~1946)였다. 비슷한 경우로 최규남(1898~1992)을 들 수 있다. 1918년 송도 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모교 체육 교사를 하던 그는 1922년 연희전문 수물과에 입학했다. 1926년 졸업과 함께 모교 교사로 갔던 그는 1927년 도미하여 1929년에는 오하이오주의 웨슬리안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으로 진학, 1933년에는 미시간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원철은 우리나라 최초의 천문학 박사였고, 최규남은 최초의 물리학 박사였다. 이들은 둘 다 같은 미시간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했는데, 최규남 역시 앞서 언급한 루퍼스에게서 지도를 받았다. 일제 시기의 조선인 미국 유학이란 이렇듯 특별한 인맥 없이는 거의 불가능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렇게 미국 유학이 어려웠던 까닭에 해방 당시에도 한국에는 영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아주 적었다. 그리고 이런 언어 실력의 부족은 해방 이후 급격히 요구되던 서양 문물의 수용에도 큰 장애 요인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서양 과학기술의 수용에 한국인들이그리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없었다는 뜻이 되기도 했다.
이태규와 이승기, 석주명과 우장춘
일제 기간 동안 유학을 통해 이공계 근대적 과학자 기술자로 성장한 조선인들 가운데 그들이 배운 실력을 제대로 발휘하거나, 과학자 또는 기술자로서 계속 일할 자리를 얻은 사람은 아주 극히 적을 수 밖에 없었다. 국내에는 그들은 그런 자격으로 받아들일 기관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국내에 돌아와 그들이 일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기관이라면, 몇 개의 전문학교와 고등보통학교, 그리고 중앙공업연구 따위가 있을 뿐이었기 때문이다. 일제 시기에 능력을 발휘한 과학자로 흔히 지금 한국의 청소년들 사이에 널리 알려진 인물로는 석주명과 우장춘이 있다. 석주명(1908~1950)은 1926년 개성의 송도고보를 졸업하고 3년 만에 일본의 구주 남쪽에 있는 녹아도(카고시마) 고등농림학교에서 농학과를 졸업한 사람이다. 1929년 졸업과 함께 귀국하여 모교의 생물 교사로 있으면서 나비 연구에 특출한 재능을 발휘했다. 그는 학문적 훈련이 부족한 편이라 할 수 있는 고등농림학교 출신이면서도, 그 나름의 연구 방법을 터득하여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 그와 대조적이라면 대조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인물로 우장춘(1898~1959)을 들 수 있다. 석주명이 과학자로서의 교육을 정식으로는 받지 못했다면, 우장춘은 그보다는 고등의 교육을 받아 과학자로서 전형적인 길을 걸었던 사람이다. 그는 1936년 동경제대에서 당시 한창 연구가 활발하던 유전학 분야를 연구하여 1936년 농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일본의 농사시험장에 과학자로 취직하여 연구에 종사하던 그런 입장이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몇 가지 인간적 어려움이 있었다. 우선 그는 구한말 개화파의 한 사람으로 활동하다가 수구파의 칼에 쓰러진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고, 이러한 그의 태생적 고민은 평생 그를 괴롭혔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만년에 이르러 자식과 아내도 버리고 해방된 고국에 돌아와 한국 농학의 기초를 다지는 데 그 나름의 힘을 쏟고 고국에 묻혔다. 어느 의미에서는 석주명과 우장춘은 모두 결코 평탄한 과학자의 길을 걷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일제 시기 일본에 유학하여 가장 성공한 대표적 과학자 두 사람은 단연 이태규와 이승기이다. 같은 경도제대를 다녔고, 1931년과 1939년에 같은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두 사람은 화학자 또는 화학공학자로서 거의 비슷한 분야에서 크게 성공적인 학자로 일생을 살았다. 하지만 실제로 해방 이후 그들의 일생은 서로 크게 다른 모습을 보이며 전개되었다. 1902년 충남 예산에서 태어난 이태규(1902~1992)는 조선인으로서는 최초로 일본의 제국대학 교수가 되었고, 그 자격으로 미국 유학을 다녀온 일도 있다. 그러나 해방과 함께 일단 한국으로 귀국했던 그는 미국인으로 떠나 미국의 유타 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다가 1973년에서야 한국과학원 교수로 영구 귀국했다. 미국에 있을 때부터 한국 유학생을 데려다가 길렀던 그는 귀국 후에도 제자를 가르치며 존경받는 일생을 살았다. 전남 담양 출신의 이승기(1905~1996)는 서울 중앙고보를 나와 일본 송산고를 졸업하고, 1931년 경도대 공학부를 졸업했다. 졸업 후 고규 연구소에서 근무하다가 경도대에서 1939년에는 공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가 학위를 받은 분야는 바로 당시의 첨단 분야였던 인공섬유였는데, 그는 그 후에도 모교에 남아 그 연구를 계속했다. 해방과 함께 일단 서울로 돌아왔던 그는 1950년 월북하여 북한에서 화학연구소장을 맡아 그가 일본에서 개발한 비날론을 대량 생산하는 일에 매진했다. 그 결과 북한은 1960년대에는 인공섬유 생산에서 남한을 앞섰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 몇명의 일제 시기 한국 과학자들의 삶에서 보이는 사실은 바로 한국 과학계의 비극 그것이다. 이 모습들은 정상적인 과학기술자의 훈련, 교육, 성공을 보여준다고 하기 어렵다. 가장 유명한 대표적 과학자라는 석주명과 우장춘을 보아도, 또는 실질적으로 가장 성공적이었던 이태규와 이승기를 보아도, 그들의 일생과 한국의 운명과의 사이에는 비극적 연관의 기운이 감도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식민지 조선의 과학의 참모습이자 한국 과학계의 우울한 초상이 아닐 수 없다.
최윤식(1899~1960)
평북 선천 출신으로 1917년 경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관비로 일본 광도 고등사범에 유학했다. 1922년 동경제대로 가서 1925년 수학과를 졸업하여 겅성 고등공업학교 교사가 되었다. 해방 후 1946년 서울대 초대 수학과 주임교수가 되고, 조선 수학물리학회 초대 회장이 되었다. 또 1954년에는 대학 수학회 초대 회장이 되고, 이어 연세대 수학 교수로 자리를 옮겼다.
이원철(1896~1963)
1915년 연희전문 수물과에 입학하여 1919년 졸업했다. 미국 미시간주의 앨비언 대학을 거쳐 1926년 미시간 대학에서 연희전문 시절의 은사였던 루퍼스 교수가 아래서 천문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학 분야 한국인 최초의 박사 학위라 생각된다. 1926년 귀국하여 연전 교수가 되었고, 해방 후에는 초대 관상대장이 되어 16년 동안 그 자리를 지켰다. 그 후 인하대 초대 학장을 지냈고, 학술원 종신회원이었으며, 연세대 재단 이사장(1961~1963)을 지내기도 했다.
이승기(1905~1996)
전남 담양 출신으로 1931년 경도대 공학부를 졸업했다. 그 후 고규 연구소에 근무하며 비날론 연구를 계속했다. 1945년 11월 귀국하여 서울대 공대 회장이 되었으나, 1950년에는 월북하여 과학원 산하의 화학연구소 소장이 되었다.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지냈고, 1962년 레닌 상, 1980년 김일성 상을 받는 등의 활동이 기록에 보인다.
스물두 번째 이야기 '한국전 유학'과 '월남전 과학’
해방과 한국의 과학기술
1945년, 35년 동안 일제 아래 신음하던 조선은 해방을 맞았다. 그러나 해방과 함께 조선은 남과 북으로 갈리는 비극을 함께 맞이하게 되었고, 그것은 때마침 시작되는 세계의 냉전 구조의 최전방에서 마주 보고 선 한 민족의 한스러움이었다. 그것은 조선의 과학자 이태규와 이승기의 활동무대 또한 남과 북으로 갈리게 되는 모습에서도 볼 수가 있다. 일제 시기 동안 겨우 명목상으로만 과학자와 기술자가 주로 일본에서 훈련되었지만, 그들은 해방과 함께 남과 북으로 나뉠 수밖에 없었다. 한 나라의 과학기술을 근대적인 구조로 세워가기 위해서는 일정한 정도의 과학자와 기술자가 필요했지만, 1945년 당시 조선인의 과학자 기술자 총수는 바로 그런 기본적인 수요마저 채우지 못한 채였다. 하지만 그렇게 적은 수의 과학자와 기술자마저 남과 북으로 나눠지게 되었으니, 당시 한국과 북한의 과학기술 수준은 함께 형편없는 수준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조건은 혼란기를 몇 년 거치는 동안에도 나아질 줄 모른 채, 1950년이 되자 우리 강토는 한국전쟁이라는 비극에 말려들었다. 그사이 남과 북으로 갈라섰던 과학기술 인력은 다시 그 활동무대를 자의로 또는 타의로 바꾸게 되어 적지 않은 과학자와 기술자들이 전쟁 상황에서 월북하게 되었다. 그 혼란 속에서 순수 국내 출신의 과학자와 기술자를 생산할 형편이 되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결국 1953년 전쟁이 끝났을 당시 남과 북의 과학기술 수준은 여전히 다 함께 수준 이하의 것이었다고 밖에 할 말이 없다. 남과 북의 과학기술력을 키우는 길은 몇십 년의 시간을 거슬러 새로 시작하는 것밖에 찾을 길이 없었다.
'원자력 유학생'과 '한국전 유학'
이런 가운데 1950년대 후반에는 한국의 과학기술 발달에 중요한 전기가 준비되고 있었으나, 그것은 1957년의 원자력 사업의 시작이었다. 원래 원자력에 대한 인류의 관심은 1945년 원자탄이 일본에 투하되면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19세기 말부터 과학자들은 원자라는 물질의 입자가 안정된 최소 물질 단위가 아니라 분열되어 더 작은 입자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기 시작했고, 그것은 20세기 전반기 동안 여러 방면에서의 과학의 발달을 자극해 소립자 물리학의 발달로 나타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의 막대한 에너지 발생 가능성에 주목한 일부 과학자들의 주장으로 2차 대전 중에는 미국에서 원자탄이 비밀리에 개발되었다. 당시 한국인들이 지니고 있던 원자력에 대한 지식이란 형편없는 수준 미달의 것이었지만, 그 무한한 잠재력에 대해서는 이승만 당시 대통령부터가 높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북한의 남침으로 민족 최대의 비극을 경험한 한국의 정치가로서 이승만이 원자탄의 가능성에 주목했을 것은 지당한 일이었다. 당시 정치가들은 과학기술에 대해서는 거의 무지하기 짝이 없었건만, 원자력의 무기화 가능성에 대해서는 깊은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 가운데 미국과 소련의 냉전 속에서 소련의 원자력 개발 성공에 놀란 미국은 결국 원자력의 독점을 포기하고, 이를 우방국에 보급함으로써 인류가 발견한 새 에너지에 대한 실제적인 주도권을 계속 유지하려는 방향으로 정책을 바꾸기 시작했다. 그 결과가 미국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1953년 12월 8일 유엔에서 내세우기 시작한 '평화를 위한 원자력(Atom for Peace Program)'이었다. 당시 어느 한국의 국회의원이 1955년 국회에서 행한 연설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미국 원자 온실에서 시험한 결과 복숭아를 땅에 심어서 이것이 움이 트고 잎이 나서 꽃을 피우고 열매가 익는 데까지 15분이 걸린다는 얘기를 들었다. "원자력에 대한 당대 최고 지식층의 어처구니없는 이해 수준을 엿볼 수 있다. 이런 가운데 1955년 8월 제네바에서 '원자력 평화 이용을 위한 국제회의'가 열려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문교부 기술교육국장 박철재, 서울대 금속공학과 윤동석 교수, 미국 유학 중이던 서울대 문리대 이기억 교수 등이 한국을 대표하여 참가하고 논문도 발표했다. 아마 한국인 학자로서 서양에서 열린 국제회의에서 학술논문 같은 것을 발표한 최초의 경우라고 생각된다. 박철재는 귀국하자 곧 서울대 교수였던 윤세원에게 원자력 연구를 권하고, 이를 바탕으로 서울대 공대와 문리대 이학부 출신 30세 전후의 젊은이들이 모여 원자력에 관한 연구 그룹을 형성하였다. 당시 이들 청년 과학자의 일부는 국방과학연구소에 소속되어 있었는데, 이 연구소가 당시로서는 한국 유일의 연구 기관이었다. 이들은 원자력에 대한 과학적 연구뿐만 아니라 선진국의 원자력 제도나 법률에 대한 자료도 있는 대로 모아 번역해 보는 등의 노력을 하고 있었는데, 기존의 연구 성과나 정보라고는 아무 것도 없는 당시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어설픈 수준의 집단 연구가 한국 과학계에서 처음으로 시작된 셈이었는데, 이것이 그나마 당시까지 한국에서 시도된 첫 노력이라 할 만도 하다. 그만큼 1945년 해방 이후에도 여전히 한국 과학의 수준은 향상될 줄 모르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노력은 정부의 지원과 미국의 후원 아래 곧 열매를 맺게 되었으니, 그것은 1956년에 시작된 원자력 유학생의 파견이었다. 1956년부터 1963년까지 7년 동안 서양 몇 나라에 파견된 원자력 유학생은 모두 189명이었다. 다른 이유로 국비유학생을 서양에 파견한 일은 없다는 점을 보면 이들 가운데 3분의 2인 125명이 국비유학생이었다는 사실은 당시 얼마나 원자력이 대단한 관심을 끌었던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들 유학생은 공부를 마치고서도 귀국하지 않는 경우가 허다했다. 지금 그 통계를 정확하게 파악하기란 힘들지만, 초기 10년 동안에 파견되었던 유학생을 포함한 237명 가운데는 64%에 해당하는 150명이 귀국하고, 나머지 87명은 귀국하지 않았다는 통계 기록이 남아 있다. 그러나 일단 귀국했던 과학기술자들도 몇 년 안으로 다시 미국 등으로 출국하여 유학을 계속하는 일이 아주 많았다. 그것은 초기 원자력 유학이 원래 목표와는 동떨어진 결과를 낳았음을 예기해 준다. 그리고 1959년 1월에는 '원자력원'이 과학기술자가 아닌 정치가 김법린을 초대 원장으로 하여 발족되었다. 1957년부터 준비되고 있던 원자력법이 그 이듬해 통과되고, 이 법에 따라 1959년 초에 원자력원이 문을 연 것이다. 이는 한국 역사상 최초로 과학기술의 행정관서가 탄생한 것을 의미한다. 그렇지 않아도 이미 당시에도 이를 두고 과학기술부를 만들어야 한다는 논의가 있기는 했지만, 아직 과학기술이 충분한 기반을 가지고 있지도 못한 당시로서는 우선 원자력 중심의 과학기술 행정을 펼쳐가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 대체적인 공감을 얻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이렇게 발족된 원자력원은 1967년 과학기술처가 문을 열 때까지 이름은 '원자력'으로 달아 놓고서도 실제로는 한국 과학기술 행정의 중심역을 담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기간 동안 원자력원 아래 원자력연구소(초대 소장 박철재)를 위시하여 의학연구소, 농학연구소 등의 연구 기관들이 생겨났다. 1950년대 후반 시작된 원자력을 중심으로 한 과학기술 개발의 가장 중요한 내용은 유학생의 파견이었다. 한국 역사상 최초로 젊은이들을 과학기술의 현장이라 할 수 있는 미국을 비롯한 서양 각국에 파견하여 본바닥의 과학기술을 익혀 올 수 있게 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이미 적지 않은 한국 유학생이 미국으로 건너갔다. 전쟁 중에 병역을 피해 미국으로 간 젊은이들은 대체로 인문사회계 학문을 공부하게 되었고, 50년대 후반에 시작된 원자력 유학생들이 비로소 과학기술계 유학생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같은 시기 일본에도 적지않은 유학생이 건너갔는데, 이들은 일제 시대 그랬듯이 대개 인문 사회계 공부를 했고, 대체로 전쟁을 피해 떠난 불법 유학인 경우가 많았다.
이들 50년대 유학생은 길게 보면 한국의 역사상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특히 원자력 연구를 위해 정식으로 파견되었던 유학생들은 그 후 1960년대 말부터 귀국하기 시작하여 한국 과학기술계의 주역을 담당하여 오늘에 이른 것으로 평가된다. 초기의 원자력 연구란 이렇다 할 청사진 없이 마구 보낸 유학생 정책으로 거의 통제가 되지 않은 채였지만, 그런 멋대로의 유학 정책이 결국은 개인에 따라 과학기술계의 모든 분야로 인력을 분산시켜 놓았기 때문에 원자력만이 아니라 과학기술 전반에 걸쳐 인력이 양성되는 의외의 효과를 낳았다고도 평가할 수가 있다. 결국 1950년대 후반에 시작되었던 원자력 유학은 한국 역사상 최초의 '직접적인' 서양 과학의 학습이었다. 그동안 일본을 통해 간접적으로만 배워왔던 근대 서양 과학기술을 처음으로 한국 청년들이 그 본바닥에 가서 배우기 시작했던 일이다. 아직 그 사회적 영향에 대한 평가 같은 것이 제대로 이뤄진 적은 없는 것으로 보이지만, 한국 과학기술계를 미국 유학생이 주도하게 되는 과정은 바로 그때 이래로 지금까지 지속된 경향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따른 여러 가지 문제 등은 아직 반성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60년대의 '두뇌 유출'과 KIST
1960년대는 전세계에서 '두뇌 유출(brain drain)'에 대해 말들이 많던 시기였다. '두뇌 유출'이란 특히 개발도상국의 과학자, 기술자들이 당시 과학기술이 발달을 극하고 있던 미국에 집중되어 거기서 공부하고 학위를 얻은 다음에는 귀국할 생각조차 하지 않게 되던 현상을 말한다. 한국은 이런 두뇌 유출이 특히 심한 몇 나라 중의 하나가 되어 있었다. 한국전쟁과 원자력 유학으로 가속화된 미국 유학생들은 한 번 가면 돌아올 줄을 몰랐다. 조국의 정치 경제 조건이 너무도 떨어지기도 했을 뿐 아닐, 실제로 귀국해도 그들의 입맛에 맞는 일자리를 찾기란 어려웠다. 이는 한국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세계 각국의 불만을 불러일으키는 문제였다. 오히려 한국에서는 아무도 이런 데에 문제를 제기하는 일조차 없을 지경이었다. 그런 가운데 이미 선진국들 사이에서는 이에 대한 불만의 소리가 높아졌고 미국으로서도 어떤 조치를 취하지 않아서는 아니될 정도까지 되어가고 있었다. 1952년부터 1961년까지 10년 동안 미국에 흡수된 외국 과학자와 기술자는 모두 53,000명에 이르고 이들이 미국에 정착함으로써 미국이 얻은 경제적 이익은 20억 달러에 이른다는 계산도 발표되고 있었다. 말하자면 한국에서 대학 교육을 받은 후 미국의 연구 교육기관에 근무함으로써 그들은 미국의 발전에만 도움을 주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어 버린 것이다. 이런 불만의 소리가 가장 높은 곳은 후진국보다는 미국으로의 두뇌 유출이 가장 심했던 영국 같은 선진국들 쪽이었다. 게다가 미국 국내에서도 고급 인력의 실업이 문제되기 시작하면서 이에 대한 비판이 일기도 했다. 이래저래 미국으로서는 우방국의 두뇌 유출 문제를 풀어 가지 않으면 안 될 시점에 이른 것이 1960년대 중반이었다. 1965년 5월 18일 한미정상회담에서 미국 대통령 존슨이 한국에 '응용과학연구(an institute for industrial technology and applied science)' 설치를 돕겠다고 나선 것은 이런 배경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이것은 당시 쿠데타로 정권을 잡고 있던 박정희가 먼저 제안한 것은 아니었다. 미국 입장에서는 이왕 군사정권의 손을 들어 줄 것인 바에야 한국의 발전에 실질적 도움이 될 수 있으며, 세계의 관심이 되어 있는 두뇌 유출 문제의 돌파구를 한꺼번에 찾아보려는 계산을 바탕으로 존슨은 이런 제안을 하고 나선 것이었다. 게다가 미국은 당시 월남전에 대한 한국의 적극적 개입을 바라고 있었다. 물론 미국의 국익을 앞세운 제안이었으나 당시의 한국 입장에서는 반갑기 그지없는 일이기도 했다. 실제로 미국의 이런 제안은 한국인들 사이에 별다른 이론 없이 받아들여졌다. 다만 그러한 지원사업의 규모에 대한 한미간의 견해 차이가 약간 있었을 따름이었다. 그래서 조속한 실태 조사를 거쳐 1966년에는 한국과학기술연구소(소장 최형섭)가 문을 열게 되었다. 그리고 한국의 과학기술 행정은 이를 계기로 한바탕 탈바꿈하여 과학기술처(초대 장관 김기형)가 이듬해 4월 문을 열게 되었다. 해방 후 10년 동안의 공백기를 거쳐 다시 10년간의 원자력 중심 행정에서 벗어나 드디어 과학기술 활동이 정부의 한 구석을 정식으로 차지하기 시작했다는 데에 이 사건의 의미를 둘 수 있을 것이다. 1960년대 초의 한국 두뇌의 미국 유출에 대해서는 아직 구체적으로 연구된 일이 없는 것 같다. 그러나 바로 그 시기에 서울대 물리학과를 졸업한 필자의 동기생들을 예로 들어 그 일단을 짐작하는 것도 좋을지 모른다. 1957년 입학한 물리학과 필자의 동기생은 모두 39명인데, 그 가운데 미국 유학을 떠난 사람이 거의 3분의 2였다. 물론 그 가운데에는 필자처럼 물리학이 아닌 역사학을 공부하러 간 특이한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나의 동기생들은 물리학이나 공학 분야로 진학했다. 때마침 소련의 우주개발이 가시화하여 미국이 과학기술 교육에 박차를 가하고 있어서 한국의 이공계 대학 졸업자들은 비교적 쉽게 미국 대학의 조교급(assistantship)을 얻어 유학을 시작할 수 있었고, 그에 따라 수많은 한국 청년들이 미국으로 향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필자의 동기생의 경우 절반가량은 지금도 미국이나 캐나다에서 직장을 얻어 살면서 노후를 맞이하고 있다. 결국 한국 과학은 1960년대 말까지 미국에 종속적인 과학기술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상태였다. 일제 시기의 과학기술이 일본의 식민지 과학을 벗어날 수 없었다면, 해방 후 1960년대까지의 한국 과학기술은 미국에 완전 종속된 상태였다고 할만하다. 한국전쟁으로 인한 도피성 유학으로 물길이 뚫리기 시작한 미국 유학의 길은 그 후 원자력 유학생에 의해 더욱 확장되었고, 다시 미, 소 양대 진영의 우주 경쟁으로 가속화되었다. 1966년 과학기술연구소(KIST)의 발족은 그런 경향을 갑자기 변화시킬 만한 대단한 출발은 못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한국 과학을 독자적 수준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놓는 데 상당히 긍정적인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돌아오는 한국 과학기술자들, '월남전 과학'
원래의 기대와는 달리 KIST에 대한 미국의 원조는 그리 대단한 것은 못되었다. 한국이 요구한 2천만 달러의 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약속 아래 시작된 원조는 결국 명목상으로는 718만 달러를 제공한 셈이었다. 그러나 그나마 연구소 설립을 둘러싸고 그 자문 등을 담당했던 미국의 바텔 연구소에 제공한 용역비 317만 달러를 뺀다면 순수하게 우리나라에 투입한 돈은 얼마 되지 않았다고도 할 만하다. 미국은 1970년까지 4년 동안의 초창기 경비의 30%만을 제공하고 말았던 셈이다. 당연히 이 기간 동안 한국 정부는 그 경비 70%를 담당했다. 결국 이 기간 동안 한국의 과학기술 예산은 국가 예산의 16%에 해당하는 54억원 이상이 KIST로 흘러 들어갔다. 아직 그 영향을 뭐라고 단정하기 어려운 점이 없진 않지만 이렇게 집중적으로 추진된 KIST 육성이 현대 한국과학사의 중요한 한 장을 장식한 것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것은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연구 기관을 정부 직영 아래 두지 않고, 정부가 출연한 자금을 바탕으로 하면서 산업계와의 계약에 의해 자금을 공급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 연구자들이 행정기관의 지나친 간섭을 받지 않고 연구에 전념할 수 있는 길을 열려는 것이었다. 아울러 연구소를 특수법인으로 만들어 감으로써 한국 과학기술계는 연구자의 대우 수준을 파격적으로 높일 수 있는 길도 열게 되었다. 말하자면 한국 사회에서 처음으로 과학기술자가 대우받는 사회를 열기 시작했던 셈이다. 그 후 한국 사회에서의 이러한 기술 인력에 대한 대우의 파급 효과는 지금까지도 상당 부분 지속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본격적인 해외 과학자 기술자의 유치 귀국 작업이 계속되었다. 과학기술처의 통계에 의하면 1968년에 재외 과학기술자 겨우 5명을 유치 귀국시킬 수 있던 것이 그 숫자가 해마다 조금씩 늘어서 1968년에서 1979년까지의 연간 해외 과학기술자 유치 숫자는 5명, 8명, 8명, 12명, 13명, 18명, 19명, 9명, 23명, 32명, 37명, 54명으로 늘어갔다. 1976년부터 23명으로 늘기 시작하여 1979년에는 54명까지 거의 배로 증가한 것이다. 1960년대 후반 과학기술 연구소의 설치와 함께 시작된 재외 과학기술자들의 유치는 70년대 중반 이후 아주 활발해졌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게다가 일시 유치 학자까지 포함하면 훨씬 더 많은 한국의 재외 과학기술 인력이 조국의 과학기술과 연계되기 시작한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이는 재외 한국 과학기술자 전체의 숫자에 비교한다면 극히 작은 정도를 벗어나지 못한다. 1970년의 조사에 의하면 그 당시 미국에 있는 한국인 이공농학계 과학기술자의 총수는 약 1,000명에서 1,500명 정도라고 되어 있다. 이 가운데 반 이상은 박사 학위를 받은 것으로 밝혀져 있다. 그리고 이 숫자는 1979년까지는 거의 2배로 늘어났을 것이라 예측되어 있다. 따라서 1979년까지 유치된 재외 한국과학기술자 총수 238명은 재미 과학기술자 약 2,400명의 10분의 1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비록 그 숫자는 미미하지만, 바로 이렇게 주로 미국에서 훈련받은 한국 과학기술자들이 귀국하여 한국 과학기술계를 만들기 시작했다는 것만은 분명한 일이다. 그야말로 '원자력 유학'생들이 이제 '월남전 귀국'을 하게 되었다 할 만하다. 소위 '월남전 귀국'을 가능하게 해 준 원인으로는 여러 가지를 꼽을 수 있다. 우선 한국은 그동안 급속도의 경제적 성장을 계속하고 있어서 70년대에는 과학자 기술자들에게 있어 '일자리만 확실하면 살 만한 나라'로 바뀌어 가기 시작했다. 게다가 미국은 60년대 말부터 이미 두뇌 유출 문제를 해결하길 원했고, 70년대로 들어오면서는 경제적으로도 한국 과학기술자들의 미국에서의 직장 문제 등이 어려워지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조건 속에서 한국에서 새로 연구와 교육의 기회가 열리자 그들은 귀국할 마음을 쉽게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휘소 혹은 벤자민 리
몇 년 전에 크게 대중적 인기를 얻었던 소설로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란 작품이 있었다. 이 소설은 바로 50년대 초 미국에 유학갔던 한국의 물리학자 이휘소를 둘러싼 일들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이 소설은 미국에 유학하여 핵물리학자로 성공하여 세계적 물리학자가 된 주인공이 박정희와 비밀리에 접촉하여 한국에서 핵무기를 개발하려 했고, 그런 가운데 미국 정보기관의 간섭으로 서울에서 뜻밖의 사고를 당해 주인공은 사망하고 그와 함께 한국의 핵무기 개발 계획도 수포로 돌아간다는 그럴듯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 그를 개인적으로 알던 다른 한국 학자들의 증언을 들어보더라도 이휘소(또는 벤자민 리)가 훌륭한 물리학자였던 것만은 인정할 수가 있다. 어쩌면 한국인들이 그렇게도 바라는 것처럼, 그는 '노벨상' 수상의 가능성을 가장 크게 지녔던 물리학자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를 핵무기 개발과 연계 짓는 발상은 순전한 소설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의 전공 분야는 원자탄을 만드는 데 직접 대단한 도움이 되는 분야도 아닐 뿐 아니라, 이미 핵무기 개발은 종합 기술로 확립되어 있어서 원한다면 웬만한 나라는 다 만들 수가 있어서 어느 특정 과학자를 필요로 하는 분야도 아니었다. 따라서 박정희가 이휘소와 비밀 만남을 갖고, 그를 초청하려 했다는 등의 이야기는 전혀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이다.
이런 것은 음악과 미술, 바둑과 스포츠에서 한국인의 위상이 높아져 가면서 스스로 자신감을 갖기 시작한 80년대 말의 한국인에게 가장 신경이 쓰이는 분야가 과학이었기 때문에 일어난 웃지 못할 희극이라 할 수도 있다. 88올림픽으로 세계로 발돋움한 후 개인당 GNP 1만 불 시대를 눈앞에 두고 세계 11위의 무역국 운운하면서도, 한국인에게 노벨상은 멀고도 먼일처럼 보였던 것이다. 게다가 미국과의 관계는 가끔씩 한국인들의 자존심을 긁어 놓은 것이 틀림없는 사실이다. 이런 환경에 대한 자조 속에서 전혀 비과학적이고 불합리한 희망 사항이 과학적 상징물을 통해 표현되어 나타난 것이 벤자민 리의 "무궁화꽃...."이었던 셈이다. 그리고 그것은 80년대 말부터 일기 시작한 강력한 정부, 강력한 지도자에 대한 향수 같은 것과 의외의 상승작용을 보여 박정희 향수로 이어지기까지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해방과 함께 과학은 대중적 관심 분야로 자라기 시작했던 것은 사실이다. 일제 시기에도 어느 정도 지속되었던 과학의 대중화가 해방 직후에도 그대로 지속되었던 것이다. 많은 젊은이들이 잘 알지도 못하면서 과학을 공부해야 한다고 믿고 자연과학 전공의 길로 몰려들었다. 예를 들어 시골의, 전혀 교육을 받은 일이 없는 부모 밑에서 자란 소년이었던 필자에게 과학 공부를 해야겠다는 결심이 가능했던 것도 당시의 과학에 대한 국민적 열망들이 여러 매체들을 통해 전해졌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예를 들자면 1961년까지 전국에는 거의 20개의 종합대학교가 생겨났는데, 이들 모두에는 문리과 대학이 있고, 그 속에 이학부가 세워졌다. 하지만 공과대학은 그 가운데 3곳 밖에 없었다. 말하자면 1950년대 말까지는 과학자 양성에는 관심이 높았지만, 정작 기술자 양성에는 관심이 일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이는 유교적 전통으로 인한 강한 교육열 및 병역 특혜 덕분에 더 많은 젊은이들이 소를 팔아 대학에 진학하던 실정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래서 당시의 대학은 우골탑이라 불리기도 했을 지경이다. 과학을 말하면서도 기술은 아직 마땅치 않게 여기던 그런 풍조는 50년대 후반부터는 바뀌기 시작했다. 그 가장 중요한 이유는 취직의 길이 그쪽에 있었던 까닭이다. 그리고 이런 기술 중심적 태도는 해가 갈수록 강해져서 1966년의 KIST 발족은 그 결정적 전환점을 마련해 준 것이라 평가할 수가 있다. 그 후 지금까지 한국 과학기술계는 기술 주도의 경향을 강화시켜 오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휘소(1935~1977)
서울의 경기고 2년 때 서울공대 화공과에 합격하였으나, 서울대 재학 중이던 1954년 도미하여 1956년 오하이오주의 마이애미 대학 물리학과를 졸업했다. 이어 1958년 피츠버그 대학에서 석사 학위, 1960년에는 펜실바니아 대학에서 물리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곧 조교수가 되었고, 1965년에는 정교수로 승진했다. 1967년부터 1974년까지 뉴욕 대학교에서 근무했고, 1974년에 시카고 대학으로 자리를 옮겨 같은 곳의 페르미 연구소 물리학부장이 되었다. 이 시기에 그는 한국이 요청한 미국 AID 차관 800만 불 차관의 타당성을 조사하기 위한 조사단 4명의 한 사람으로 서울에 나온 일이 있다. 1977년 6월 16일 가족과 함께 운전하던 그는 교통사고로 그 자신만 사망했다. 미국 이름은 벤자민 리였고, 미국에 유학했던 '한국전 유학생' 가운데 가장 앞선 물리학자의 하나였다고 평가된다. 말레이시아 태생의 중국계 부인과 1972년 결혼하여 1남 1녀를 두었다. 그가 사망한 지 두 달 뒤 8월 24일 박정희는 그에게 보국훈장 '동백장'을 수여했다.
스물세 번째 이야기 과학 한국의 과학과 비과학
국산 과학기술자의 양산 시대
이제 광복 반세기 만에 한국은 해마다 몇만 명씩의 과학기술계 인력이 대학을 졸업할 정도의 나라가 되었다. 더 이상 한국을 과학기술의 후진국이라 부를 수는 없게 되었다 하겠다. 물론 이들 이공계와 의약, 농학 등 자연계 대학 졸업자들이 모두 과학기술계 인력으로 이 사회에 기여하는 것은 아니다. 그 대부분은 일반 직장인으로 진출하여 활약하고 있어서 이들 대부분을 과학기술계 인력이라 부르기는 어렵다. 그러나 반세기 전 이 땅의 과학기술계 인력이 거의 전무하던 시절에 비교하자면 이들이 이렇게 사회 전반에 퍼져 활동하는 것 자체가 이 나라가 대단히 급속도로 '과학화'되어 왔음을 알게 해 준다.
지난 1994년 말 현재 한국의 박사급 연구원은 모두 33,998명으로 밝혀져 있다. 그리고 이들 박사급과 함께 석사 및 학사급을 포함하여 연구 기관, 대학, 산업체에서 연구에 종사하는 인력을 합하면 한국의 연구 인원은 모두 12만 명에 가까운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해방 당시 30명도 채 되지 않던 박사급 과학기술자가 이제 3만을 넘었고, 그때 120명의 연구원도 안 된다고 할 수 있던 연구원 숫자가 12만을 넘어선 것이다.
이 숫자를 다른 나라의 경우와 비교해 보면, 한국은 인구 1만 명당 26.4명의 연구 인원을 가지고 있어서 미국(38명), 일본(45명), 독일(30명)보다는 조금 떨어지지만, 대만이나 영국보다는 앞서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기도 하다. 물론 이런 숫자만의 비교가 그렇게 큰 의미를 가지지는 못한다고 할 수도 있다. 게다가 한국 과학기술이 인력 양성에서 아직도 국내에서 양성된 과학기술자가 충분히 세계 과학기술계의 수준에 도달하고 있지 못하다는 점이 여전히 아직 풀지 못한 문제 중 하나로 남아 있다. 그래서 한국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도 많은 과학기술계 학위 수여자들은 미국 같은 나라에서 다시 '박사후(post-doc)'교육을 받으려 하는 수가 많다.
둘째로, 아직도 우리는 여성 과학기술자를 제대로 교육하고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 1994년 통계로는 12만 명의 연구자 가운데 7.7%만이 여성인 것으로 밝혀져 있다. 1951년 서울대에서 처음 여성 자연과학계 졸업생이 나오기 시작한 이래 과학기술계 여대생의 숫자는 폭발적으로 증가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지만, 그 상당수는 가정학과 간호학 졸업생들이 차지하고 있어 실질적으로 진정한 과학기술계 인력이라 말하기 어려운 측면이 없지 않다. 특히 기초 과학 가운데 남녀 대학 졸업생을 비교해 보면 재미있는 통계를 얻을 수 있다.
1981년부터 1988년까지의 기초과학계 대학 졸업생은 남성의 경우 화학(10,435), 물리(7,958), 수학(6,611명), 통계(5,465명), 생물학(4,606명), 지구과학(1,678명)의 순서로 되어 있지만, 여성의 경우는 수학(5,685명), 화학(5,513), 생물(5,505명), 통계(1,948명), 물리(1,884명), 지구과학(551명)의 차례로 되어 있다. 이 통계는 물리학의 경우 여학생들이 특히 이를 기피하고 있으며, 생물학 쪽은 남학생보다 여학생이 더 많다는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을 다시 한번 보여준다. 그러나 불균형의 문제도 있는 반면, 한국의 대학 졸업생이 아주 많고, 또 여성 졸업생도 적지 않다는 점도 확인하게 된다. 그러나 이 가운데 대학 졸업 후 대학원으로 진학하고, 또 궁극적으로 연구에 종사하게 되는 인력의 규모에 있어서는 여성의 경우가 특히 적다는 점을 주목할 일이다. 1994년 말 통계가 한국의 과학기술 연구자 12만 명 가운데 7.7%만이 여성이라고 밝히고는 있지만, 그 가운데 박사급의 고급 여성 인력은 훨씬 적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해방 후 반세기라는 짧은 시간 안에 이처럼 한국의 과학기술계 대학 교육이 팽창한 것은 그 내용이 상당히 부실하게 진행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한다. 실제로 대학의 과학기술 교육은 아직도 그 질에 있어서 상당히 낙후된 측면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바로 이런 문제를 해결하여 특별한 경우나마 미국 유학 없이 우리나라에서의 교육만으로도 질 좋은 과학기술자를 양성하겠다는 목표에서 1973년 문을 연 것이 과학기술원이다. 그리고 이후 포항공대가 1987년 개교하면서 과학기술계 고등교육은 더욱 자극받아 한국의 과학기술은 이제 질적 개선의 길로 접어들고 있다. 1983년 전국에 과학고등학교가 세워지고, 1986년에는 과학기술원에 대한 학부 격으로 과학기술대학이 문을 열었다. 과학기술계 영재교육이 고교와 대학을 거쳐 대학원으로까지 이어지는 일관성 있는 체계를 구축하게 된 셈이다. 이와 함께 많은 일반 대학들 역시 교육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한 치열한 경쟁에 접어들고 있다.
그 밖에도 해방 반세기의 한국 과학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그 발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대덕에는 70년대 이래 대규모 과학단지가 건설되기 시작하여 이제는 세계적 규모의 과학기술 연구 도시로 발전되어 있다. 연구소로는 28개의 국가 출연의 상당한 규모들의 기관 이외에도, 기업체들의 많은 연구기관들도 자리를 잡아가도 있다. 또 연구개발을 지원하 기금을 만들어 과학재단 같은 큰 규모의 지원기관이 활동하여 연간 예산 1천 5백억 원을 집행하고 있으며, 과학의 대중화를 위해서는 과학문화재단이 있고, 과학기술계의 단체 활동이나 공동보조를 맞추기 위한 기구로는 과학기술 단체총연합회가 있어 수백 개의 학회와 기관들이 참가해 있기도 하다. 이제 한국은 과학기술자가 적어서 문제가 되는 나라가 아니라 어떻게 더 유능한 과학자 기술자를 더 합리적인 숫자만큼 길러내느냐는 문제를 안기 시작하고 있다. 예를 들어 전국에는 지금 77개 대학의 물리학과가 있다. 이들 많은 물리학과가 해마다 길러내는 졸업생들을 한국의 과학기술계는 소화해 낼 도리가 없다. 이들 물리학과가 앞으로 어떻게 서로 특성화를 해가면서 그 졸업생들을 한국 사회가 요구하는 인력으로 길러내느냐 하는 문제는 과학기술계 고등교육계가 계속 안고 가야 할 숙제인 것이다.
한국 과학과 중인의식
이렇게 과학기술자들이 양산되고 또 사회 각계에서 중요한 일들을 맡기 시작하면서 드러나는 문제들도 적지 않다. 한국의 과학기술계도 한국 사회의 다른 분야나 마찬가지로 이런저런 갈등이나 문제들을 많이 내포하고 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그런 통상적인 문제 말고도 한국의 과학기술계는 두 갈래로 나눠 설명할 수 있다. 하나는 과학기술 선진국에서도 모두 나타나고 있는 '두 개의 문화'현상이요, 다른 하나는 우리나라에서만 독특하게 존재하는 '중인의식'의 문제이다.
'두 개의 문화(Two Cultures)'란 이미 1950년부터 특히 영국의 과학자이며 소설가인 스노우(C. Snow)가 제기하여 유명해진 문제로 현대 사회 지식층이 인문학 계열과 이공계열로 날카롭게 양분되어 여러 가지 문제를 야기시킨다는 사회 비평이다. 과학기술의 발달과 사회의 분화 현상이 심화되면서 전문화의 길로 내닫고 있는 현대 사회에서 사회를 이끌어가고 있는 지배층은 문과 출신이냐 이과 출신이냐에 따라 그 지식의 범위가 다르고, 사고방식이나 취미 등이 모두 서로 크게 달라 서로의 의사소통이 어려워지는 수가 많다는 것을 지적한 것이다. 이런 '두 개의 문화'현상을 한국의 중등 교육은 아주 고약하게 악화시켜 왔다. 교육 행정상의 편의주의에서 유래한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는 문과와 이과의 날카로운 구별이 그 한 가지 대표적 잘못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고교 1학년 때부터 문과와 이과로 진로를 나누고 그것을 하늘이 정해 준 신성불가침의 영역인 듯이 지켜 왔다. 한번 잘못 선택한 문과 또는 이과를 도주에 거의 바꿀 수가 없게 되어 있을 뿐 아니라, 한국에서는 대학의 문과 또는 이과 졸업생이 대학원을 다른 쪽으로 가기도 어렵게 분명하게 나눠 놓은 상태다. 필자가 같이 물리학과를 나와서 역사학과에 진학하기란 한국에서는 거의 불가능하게 되어 있다.
한국에서 이런 '두 개의 문화'현상이 더욱 악화될 수밖에 없는 까닭은 우리 전통에서 유래하는 한국 특유의 '중인의식' 때문이다. 우리 역사가 전통적으로 과학기술을 천시한다고 할까 아니면 관심이 없었다고 할까-그런 경향이 조선 시대 양반사회의 중심으로 전해져 온 것은 사실이다. 조선 시대에는 신분을 양반, 중인, 상인, 천인의 4계층으로 나눴는데, 과학기술자는 양반 바로 아래의 신분인 중인에 속하게 되어 있었다. 예를 들어 천문학자와 수학자들이 주로 활동한 관상감(서운관) 등이 중인으로 이루어진 대표적 기관이었고, 의사나 법률가, 통역 등도 모두 중인 계급이었다. 이들은 과거에 합격하여 나라의 정치를 좌우하는 양반층처럼 고위 정치가로 나갈 길이 막혀 있었다. 조선 사회는 세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만큼 유교적 이념에 투철했던 유교 사회였기에, 모든 지식층은 나라의 운영에 참여하는 것이 곧 이상이었고, 목표였으며, 또 희망이었다. 양반들만이 권력을 독점하는 그런 사회에서 신분 상승의 기회를 거의 박탈당한 채 대대로 기술직으로 봉사해야 하는 중인층이란 명백히 차별받는 계층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중인층이 양반보다 '실질적으로' 크게 손해를 입은 계층이었던지는 분명하지 않다. 조선 시대에는 양반과 함께 중인만이 교육을 받을 수 있던 계층이었는데, 실제 관직의 수는 모든 양반을 수용할 수 없는 것이어서 양반 가운데는 가난한 집안이 아주 많았다. 하지만 중인층은 그 숫자가 아주 적었고, 또 그들 스스로의 엄격한 통제하에 그들끼리의 결혼 관례를 유지해 온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전통 때문에 그들은 경제적인 혜택을 대대로 독점하면서 비교적 윤택한 생활을 누릴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 대표적인 예를 우리는 당시 중국에 왕래하면서 공사 무역을 장악하여 막대한 이익을 얻고 또 세계 조류에 가장 민감할 수 있었던 조선 후기의 중인층 지식인들에게서 볼 수 있다.
세계적인 '두 개의 문화'현상과 한국적인 '중인의식'은 이 땅의 과학기술계의 특징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어 왔다고 판단할 수 있다. 그 결과로 우리는 몇 가지 예를 들 수 있다. 한국에서는 고위 관직에 과학기술자가 임명되는 일이 유난히도 드물다. 심하게 표현하자면, 과학기술처 장관 자리 하나만을 이과 출신에게 할애하고 나머지 장관 자리는 모두 문화 출신이 차지한다고 할 수도 있다. 또, 실제로 한국의 과학기술자들은 일찌감치 문과적 소양이 부족하게끔 교육되고, 또 그런 성향을 스스로 기르고 있는 듯하기도 하다. 이러한 편중 현상을 사소한 것으로 보는 사람도 있겠지만, 실제로 우리 사회의 갖가지 모순들의 근본적인 원인이 되고 있음을 깨달아야만 한다.
과학과 신과학 - 과학의 한계와 동양 사상 예찬
몇 년 전의 초여름, 경기도의 어느 대학에서는 신과학에 관한 국제회의가 열렸고, 이를 보도하면서 한국 언론은 기성 과학계가 신과학을 받아들인 조짐이라 해설하고 있었다. 필자로서는 아직 신과학이 기성 과학계의 입학 자격을 얻었는지 어떤지 확신할 수가 없다. 여하튼 우리 사회에 신과학에 심취한 과학기술자와 지식인들이 상당히 많다는 것만은 사실이다. 신과학이란 무엇인가? 꼭 특정한 것을 신과학이라 단정하여 정의할 수는 없다. 하지만 70년대 이후 한국에서도 상당히 호응을 받으며 성장하고 있는 이 운동은 기성 과학에 대한 비판에서 시작한다. 17세기 '과학혁명' 이후의 과학기술 발달은 20세기 후반에 들어와 몇 가지의 시련을 겪고 있다. 우선 그전까지 극적으로 발전으로 계속하여 사람들을 깜짝깜짝 놀라게 하던 극적인 요소가 시들해졌다. 말하자면, 20세기 초 아인슈타인의 발견 이후 이제는 사람들도 둔감해졌는지 아무도 과학기술의 발전에 놀라는 경우가 없게 된 것이다. 게다가 지금까지 과학 발달의 주류를 이뤄 왔던 뉴튼, 데카르트 등에 의한 서양 과학의 기계론적 세계관은 잘못된 생각이라는 비판이 강하게 일고 있다. 환경 파괴와 공해 등으로 막다른 골목으로 몰리고 있는 인류의 장래를 위해서는 우리는 보다 생태학적이고 유기체적인 세계관을 가지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깨달음이 많은 지식인들에게 퍼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런 상황 속에서 동양 전통 사상에 눈뜨게 된 서양 학자들 사이에서 일부 동양의 전통 사상이 주목 대상이 되고, 그 가운데 지금의 것보다 바람직한 과학적 사고들이 있었다는 점이 높이 평가받기 시작했다. 이런 배경을 두고 한국에도 70년대 이후 신과학 운동이 고개를 들게 된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 신과학이란 이미 '과학'이 아니다. 그것은 과학 운동이 아니라 일종의 생활 운동이라고 필자는 평가한다. 여하튼 한국 현대 사회에서 이런 운동이 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히 앞으로 한국 과학사에서 한 장을 차지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사상적 변화를 배경으로 현대 한국사에는 많은 '신과학적' 운동이 전파되어 가고 있다. 한국인들이 특히 좋아하는 보약에 대한 믿음 같은 것도 신과학의 추구에서 그리 멀지 않다고 생각되고, 풍수지리 같은 전통 과학의 부분이 최근에 더욱 대중적 인기를 끄는 것도 비슷한 지적 경향에서 유래한다.
과학기술자들이 신과학에 심취하는 경우는 그리 문제될 것이 없을지 모르지만, 그런 태도의 대중적 영향은 반이성적 경향을 자극하고 있는 것 같아 조금은 걱정스럽다. 최근(1998년 8월) 서울대 물리학과의 장회익 교수는 "삶과 온 생명"(솔, 1998)이라는 책을 내놓았다. 이 책에서 그는 "도대체 카프라는 어떠한 점에서 동양 사상이 현대 물리학과 흡사하다는 것인가?"라면서 카프라와 그를 추종하는 신과학 지지자들을 신랄하게 꾸짖고 있다. 그들의 노력은 "개념들 사이에 나타나는 외형상의 유사성을 논의하는 치기어린 지적 유희"일 뿐이어서 아무 의미도 없다고 그는 단언하고 있다(그의 책 385페이지를 보라). 이와 같은 그의 신과학 비판에 대해서는 필자도 전적으로 비슷한 의견을 가지고 있음을 이번 기회에 다시 밝혀 두고 싶다. 물론 장교수가 말하듯이 '온 생명적 관점'에서 현대의 과학 이론을 한 차원 높은 곳으로 끌어 올릴 수 있는 '메타 과학'이란 것이 가능한지에 관해서도 필자는 의문을 품고 있다. 현대 과학의 부작용과 모자람을 뛰어넘으려는 일체의 노력이 나에게는 이미 과학이 아닌 일종의 종교 운동으로만 보이기 때문이다. 일체의 종교적 운동은 자칫하면 반이성적으로 흐르기 쉽지 않던가. 이 부분이 필자에게는 인류의, 그리고 특히 한국의 미래를 위해서 걱정스럽다.
한국인의 과학적 재능에 대한 과신
지금도 우리 주변에서는 한국인의 과학기술에 대한 특별한 재능이 거론된다. 한국인은 다른 민족에 비해 과학적 창조성이 더욱 높고, 창의성이 뛰어난 민족이라는 믿음이 그것이다. 필자에게도 바로 이런 주제로 글을 써 달라는 부탁이 꽤 많다는 사실만 보아도 그런 의식이 우리 민족에게 강하게 뿌리내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우리 민족이 꼭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 창조성이 뛰어난 민족일 이치는 없다. 이 세상의 수많은 나라와 민족들 가운데 한국인만이 유별나게 똑똑하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그렇게 똑똑한 한국인이라면 어찌하여 한국은 지금 세계를 주도하는 민족이 되지도 못했더란 말인가? 그렇다면 누가, 왜, 언제부터 우리 민족의 우수성을 내세우면서 첨성대며 석굴암, 금속활자, 측우기 등을 자랑하기 시작했단 말인가? 돌이켜보면 이런 과학 유물들을 가지고 우리 민족의 과학적 창조성을 자랑하기 시작한 것은 1세기도 되지 않는다. 조선 시대까지 우리 선조들은 과학기술 유산에 대해 자랑할 줄을 몰랐다. 당시에는 그런 것들은 자랑거리에 들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자연의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동방예의지국임을 긍지로 여겼을망정 과학기술에 대해 크게 주목한 일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던 중 1895년, 일본에서 출간된 유길준의 "서유견문"에서 그는 고려자기, 거북선, 금속활자 등을 세계에 자랑할만한 우리 유산이라 꼽고 있다. 이런 태도는 일제 시기로 접어들면서 보다 더 적극적인 논의의 대상이 되었다. 예를 들어 최남선은 1831년의 글에서 신라의 첨성대, 고려의 자기와 활자, 조선의 한글, 측우기, 거북선, 비차를 들어 조선인의 천재 민족임을 자랑했다. 해방 이후에도 이런 경향은 지속되어 그동안에는 세종 때의 장영실이 실제 이상으로 위대한 과학자로 높임을 받게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런 경향은 과학기술의 중요성이 자꾸 높이 평가되면서 저절로 생겨난 경향이기는 하지만, 특히 우리나라가 일제 식민지 경험을 하는 동안에 이런 과장된 평가가 더욱 심해졌다고 지적할 수 있다. 암울한 식민지 상황에서 민족의식을 일깨우기 위해서는 민족 문화에 대한 자긍심을 고취하는 수밖에 없었던 까닭이다. 그때는 우리 민족의 존속에 있어서 최대의 위기이자 세계사적으로 민족주의가 빛을 발하던 시대였기 때문에 '민족'이야말로 지상 최고의 가치였다. 당연히 민족을 되살리기 위해서는 약간의 과장은 애교였고 설사 거짓말이라도 용납될 법한 그런 시기였다. 그러나 해방과 함께 우리는 좀더 냉정을 되찾았어야 마땅했는데, 그만 그러지 못한 채 우리는 지금까지도 이런 과다한 민족의식에 휘둘리고 있다. 우리가 지금 갖고 있는 지나친 민족의식이야말로 우리가 하루속히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될 식민지 시대의 유산이다. 우리 사회에서 병적으로 나타나는 '노벨상'에 대한 집착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과학 천재를 기르겠다고 나라가 법석을 떠는 것도 지나치다. 어느 대학의 교정에는 미래 한국의 노벨상 수상자를 모시겠다는 동상 없는 동상 받침대만 세워져있다. 그 옆에는 뉴튼, 맥스웰, 에디슨, 아이쉬타인 등 이미 인류 문명을 대표함직한 과학자들의 동상이 서 있고, 그 가운데 미래 한국의 과학자 상의 자리가 준비되어있는 것이다. 사람에 따라서는 이 정도를 애교로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때로 우리들의 노벨상 집착은 너무 지나친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그 집착이 한국인의 유별난 과학적 천재성을 믿는 데서 비롯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더욱 허망하기 짝이 없는 태도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미신적인 양력, 과학적인 음력
앞에서 필자는 최근 한국 과학기술계의 발전상을 간단히 살펴보고, 또 우리 사회가 갖고 있는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될 몇 가지 의식의 문제를 소개했다. 그런 잘못된 의식의 대표적 오류 한가지로 필자는 양력과 음력에 대한 우리 한국인들의 상식을 되짚어 보려 한다. 우리는 대체로 서양 사람들이 쓰이는 양력은 과학적이고, 동양에서 오랫동안 사용해 온 음력은 미신적이려니 짐작하고 있다. 과학이라는 학문이 서양에서 발전해 왔기 때문에 우리는 알게 모르게 서양 사람들이 쓰는 것은 과학적이고, 우리가 써 온 것은 미신적이거나 불합리하다고 생각하기 쉽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선입견은 그야말로 선입견에 불과하다. 오히려 동양사람들이 줄기차게 지켜 온 음력이야말로 과학적이고, 서양이 사용해 온 양력이야말로 미신투성이인 것이다. 음력은 날이 가는 것은 달의 운동으로 기준을 삼고, 계절의 변화는 24절기로 나타내어 달과 해의 움직임을 그대로 나타내려고 노력해 만든 순전히 과학적인 역법이다. 당연히 우리는 음력을 사용할 때면 계절을 알기 위해서는 24절기를 보며, 날짜는 달 모양을 알기 위해서만 사용할 일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양력을 오래 쓰는 동안 익숙해진 대로 날짜로써 계절의 변화를 예측하려 하며, '토정비결'을 비롯한 전통적 역술 행위(흔히 미신으로 치부되어지고 마는)가 모두 음력을 기준으로 지켜지는 것에 주목하곤 한다. 그 때문에 사람들은 음력은 미신투성이고, 양력이야말로 과학적이거니 지레 판단해 버리고 마는 것이다. 하지만 양력은 아무 의미도 없이 정해진 1월 1일이 새해 시작의 날이 된다. 또 양력에서는 구태여 한 달의 날짜 수를 지금처럼 불규칙적으로 바꿀 필요가 없는데도 7월과 8월은 연속으로 31일씩인가 하면, 2월은 평년인 경우 28일밖에 되지 않는다. 이것은 로마 황제 율리우스 시저와 아우구스투스의 출생월을 하루라도 더 길게 기념하기 위해서 생긴 전통 때문이다. 자연의 어느 것이 새로 생겨나거나 새로운 주기가 시작되는 날도 아니건만 양력 1월 1일을 우리 전통적 설날 대신 기념하여 3일씩이나 쉬던 것은 잘못된 일이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다행히 이런 점들에 대한 문제 제기들이 관철되어 1989년부터 우리는 '민족의 날' 대신 '설날'이란 말을 되찾고 음력 설날 3일 연휴를 즐기게 되었다. 내친김에 필자는 음력 속에 들어 있는 양력 성분인 24절기를 널리 보급하여 일상적으로 활용할 것까지도 권장한다. 이렇게 다소 엉뚱하게 양력과 음력에 대한 이야기를 덧붙이는 것은 우리가 흔히 가지고 '과학적'이라는 말에 대한 개념을 다시 정리해 보려는 뜻에서다. 우리가 '과학'의 기준으로 흔히 쓰는 잣대중 하나는 바로 서양 것은 '과학적'이고 우리의 전통적인 것은 '비과학적'이라는 태도이다. 바로 이러한 잣대가 항상 옳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앞에서처럼 양력과 음력의 간단한 비교를 통해 설명해 보려 한 것이다. 세계가 이미 양력으로 통일되어 버린 지금, 우리가 새삼 음력으로 세상의 역법을 바꿀 수는 없을 것이 뻔하긴 하다. 하지만 만약 동양이 서양을 지배하는 가운데 세계화 과정이 진행되어 오늘에 이르렀다면 우리는 지금쯤 다른 시간 속에 살고 있지 않을까?
스물네 번째 이야기 과학에는 진정 국경이 없는가
과학에도 국경은 있다
과학에는 국경이 없다고들 말한다. 다만 과학자에게 국경이 있을 뿐이라고 하면서 자주 인용되는 이 말은 프랑스의 애국자이며 과학자인 루이 파스퇴르의 말로 전해진다. 베토벤이 나폴레옹에게 헌정하려던 교향곡의 표제를 찢어 버리고 '영웅'이라 바꿔 불렀다는 그때보다 반세기 뒤에 파스퇴르는 독일 정치가를 비난하면서 프랑스 과학을 찬양했다. 나폴레옹의 시대가 가고 비스마르크의 시대가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파스퇴르가 정말로 이런 말을 했다면 그의 말은 잘못된 것이다. 과학자에게 조국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과학과 기술에도 국적이 있고 조국이 있기 때문이다. 이 글을 쓰던 당시(1997년 8월 11일) 나라 안은 온통 괌에서의 한국 비행기 추락 사건으로 들끓고 있었다. 200명이 넘는 한국인의 목숨을 한꺼번에 앗아간 사고를 놓고, 한국인들 그 원인 조사와 관련하여 한 가지도 스스로 처리할 수가 없었다. 블랙박스 읽기에서부터 사고 원인 조사에 이르는 일체의 과정에는 기술적 문제들이 많이 있는데, 관련 분야의 전문가들이 절대 부족한 한국은 그 과정을 일체를 미국에 기대야 하는 형편이었다. 당연히 미국측 관련자들의 한 마디 한 마디에 희비가 갈리게 되었고, 그러면서도 한국인들은 모두 뭔지 석연치 않다는 느낌을 받게 마련이었다. 그래서 어느 신문 보도에 의하면, 지금까지의 한국 비행기 사고는 모두가 한국인 조종사의 잘못이라는 판단이 내려졌다고 한다. 물론 그런 판단을 내린 사람들은 한국인이 아니었고, 만약 한국인이 조사했다면 다른 결론이 났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뜻이 함축된 보도였다. 그럴 수도 있다. 비행기 사고를 조사하는 사람의 국적에 따라 그들은 각기 그 나름대로의 편향된 시각을 갖게 마련이고, 그것이 사고 원인을 밝히는 데 일정한 영향을 미칠 수 밖에 없다. 비행기 제작사와 항공회사, 희생자, 그리고 관제사가 조종사, 그리고 승무원들의 입장이 모두 서로 다르고 이해가 상충되는 데다가 관련된 정부나 국민까지 연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현재 중국은 과학사 연구 보급에 지극히 열성적이다. 30권짜리 "중국과학기술사"를 기획해 추진하고 있는가 하면, 세계의 과학기술자 인명사전을 세계 최대 규모로 만들고 있다. 지금 까지 세계 최대의 과학자 기술자 인명사전은 미국에서 1980년 16책으로 완간된 것인데, 살아 있는 사람은 빼고 모두 5천 명을 싣고 있다. 그런데 중국에서는 생존자까지 포함하여 8천 명의 사전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1988년 시작된 이 계획에 의한 연구의 결과로 이미 여러 권의 단행본들이 나와 있는데, 수학, 물리, 화학, 생물, 천문 등의 분야에서 저명한 과학자들의 전기를 연구해 쓴 것을 분야별로 여러 책으로 내놓았다. 특히 여기에는 중국의 과학자와 기술자 전기를 연구하는 계획도 진행되고 있는데, 이미 1992년과 1993년에는 "중국고대과학가전기"라는 상, 하권으로 된 책이 나왔으며, 여기에는 235명의 중국 전통 과학기술자 전기가 실려 있다. 다 아는 것처럼 현재 중국은 세계의 최고 수준의 과학 국가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이 이런 노력을 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그들이 과학사에서 어떤 문제에 더욱 열성적인가를 살펴보면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중국 과학사 학자들은 흔히 세계를 근대화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던 나침반, 화약, 종이, 인쇄술 등의 4대 발명을 강조하고, 그것이 바로 중국에서 처음 발명되었음을 특히 강조한다. 이런 시각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중국 과학사학자들은 이런 역사 해석을 통하여 중국 문명이 인류 문명의 원류임을 강조하려는 것이고, 서양 근대 과학기술도 따지고 보면 중국에서 기원했음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말하자면 중국은 지금 다시 그 옛날의 중화사상을 되살려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 되는 세상을 꿈꾸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우리에게도 자랑스런 역사가 있다.
다시 기세 좋게 일어나고 있는 중국을 보고, 일본의 세계 속의 위치가 날로 높아져 가는 모양을 확인하면서 우리 한국인은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 것일까? 자원, 인구, 국토만 비교해 보아도 한국은 결코 낙관할 수 없는 처지에 있는데, 게다가 남북으로 갈라져 있기까지 한다. 앞으로의 세계에서 한국인은 일본인, 중국인과 더 잘 사귀면서 살아갈 수밖에 도리가 없을 것이지만, 그 사이에 여러 가지 갈등 또한 더 많아 질 것도 분명하다. 이런 관계 속에서 살아가야 할 한국인들에게는 그런대로 세상에 내놓아 자랑할 수 있는 우리의 전통을 발굴하고, 교육하며, 이웃에게도 알려 갈 필요가 있다. 그런 노력 가운데서 자연스럽게 우리는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살려 갈 수 있고, 그래야만 우리는 치열한 국제 경쟁 속에서 한 민족으로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의 과학기술사 부분에서도 그런 자랑스런 요소들은 적지 않다. 5천 년의 역사에 자랑스런 일이 없다면 그것이야말로 이상한 일일 것이다. 때로는 그런 자랑을 간직하고, 또 자랑스런 마음을 뽐내는 수도 있을 만한 일이다. 첨성대나 측우기와 수표, 거북선도 그런 자랑스런 일들의 예가 된다. 1442(세종 24년)년 "칠정산"이 완성되었을 때 조선의 천문학 수준은 중국, 아랍에 이어 세계 제3위쯤의 수준이었을 것이다. 1743년에 조선의 학자 박안기는 조선통신사 일행으로 일본에 갔다가 일본의 천문학자에게 천문 계산법의 어떤 문제를 풀어 준 일이 있다. 그 일본 학자의 제자로서 그 후 오랫동안 천문 계산법을 연구한 삽천춘해는 1683년 드디어 '일본인에 의해 처음으로 완성된 일본에 맞는 천문 계산법'인 '정향력'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박안기가 일본의 천문학자를 깨우쳐 준 내용이 무엇이던가를 정확하게 알아내기란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는 세종 때 이미 조선에서 밝혀냈던 어떤 천문 계산의 방법을 일본에 가르쳐 준 것이라고 생각된다. 일본에서는 그보다 2세기 이상 뒤에서야 그런 수준의 전통 천문학에 도달하고 있음을 이 에피소드는 밝혀주고 있다. 세종대의 천문학 발달은 지금도 "실록" 속에 많은 기록으로 남아 있다. 경회루 연못 둘레에만도 간의, 혼의, 혼상, 규표 등의 천문기구가 세워졌고, 또 장영실의 자격루가 세워진 것도 그 근처였다. 세종대에 앙부일구를 비롯한 여러 가지 해시계, 몇 가지 물시계와 일성정시의 등이 만들어졌다는 사실도 이와 관련된 일이다. 유명한 측우기가 창제된 것도 이때의 일이며, 한강과 청계천의 수위를 측정하기 위해 수표가 발명된 것도 이때였다.
그런데 우리는 불과 15년 전까지도 박안기에 대한 이야기를 알지도 못하고 있었다. 일본 천문학사를 읽는 한국인이 없었으니 일본의 천문학사와 과학사 책에는 모두 나오는 이 이야기를 막상 한국인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숨겨진 자랑스런 과거가 얼마나 더 있는지도 우리는 지금 알 수가 없다. 그런 자랑스런 일들을 발견하는 중요한 일은 과학사 연구가 보다 널리 행해질 때 가능한 것이다. 물론, 이렇게 발견된 자랑스런 과거는 우리의 역사교육을 통해 우리 자손들에게 보급될 필요가 있다. 그런 자랑스런 과학기술에 대한 조상들의 자랑거리는 우리 후손들에게 과학기술에 대한 자신감을 심어주는 데 크게 기여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한국인은 과학기술에 보다 자신감을 갖게 되어 앞으로 과학기술 개발에 보다 부응하는 국민정신을 갖출 수 있을 것이다. 과학기술에 대한 국민적 자신감을 기르는 데에는 과학기술사의 연구와 보급 이상 가는 수단이 없다. 물론 한국의 과학기술사를 더 연구하고 알리자는 필자의 뜻은 단순히 우리 한국인의 과학기술에 대한 관심을 높이는 데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과학기술사의 발전 과정을 이해하면 세계역사의 전개가 더 잘 눈에 띄게 마련이다. 특히 동아시아 세 나라의 서양 과학기술 수용 과정을 잘 비교해 살펴 보면, 왜 한국이 근대화에 뒤져 식민지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고, 그와는 달리 일본은 휠씬 앞설 수 있었던가를 잘 이해할 수가 있다. 정치 경제 사회 측면의 역사만 가지고 절름발이 설명을 하려던 과거의 역사 서술 방식은 과학기술사를 함께 고려하여 바로잡지 않으면 안 된다. 물론 이런 부분의 한국과학기술사는 자랑거리로서가 아니라 객관적 사실로서 그 중요성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과학 교육의 틀을 바꾸자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말이 있다. 아주 사소해 보이는 차이도 크게 다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것이다. 하물며 같은 과학기술사라지만, 동양과 셔양의 역사적 전통은 아주 크게 다르고, 당연히 그 사이의 모든 것이 서로 다르다. 하물며 한국은 일본과도 다르고, 중국과도 다르다. 서양 과학기술이 그대로 한국에 맞아 떨어질 이치가 없다. 우선 우리는 한국어를 쓰지만 오늘의 과학기술은 거의 영어를 기본으로 해서 구성되어 있고, 그것을 일본어로 번역해 놓은 용어들이 지금의 한국 과학계에 절대적 영향을 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지난 반세기 동안 과학 교육을 어떻게 해 왔던가? 그전까지 일제가 식민지 조선에서 실시하던 그 방식에서 근본적으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일제가 번역해 사용해온 과학기술 용어가 그대로 사용되고 있으며, 과학 과목들의 교과과정이나 그 주요 내용도 모두 일본 것들을 기준 삼아 정해지고 있다. 그리고 일본 것들은 대체로 서양의 그것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특히 개탄스런 사실은 과학 교재를 만드는데, 그것이 국어 교재나 국사 교재와는 어떤 점에서 상보적이고 또 상충적인지-교과서 사이의 상호관련성을 한 번도 검토해 본 일조차 없는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그러니 국어 시간에 가르치는 내용이 아무리 비과학적이어서 과학 시간에 가르치는 내용과 상충되어도 아무도 관여하지 않으려 하는 와중에, 학교 교육은 무사히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필자는 여러 차례에 걸쳐 우리 교육이 종합적이고 유기적인 교육과정을 외면한 채, 과학 따로, 국어나 국사 따로 그 교과과정이 구성되어 진행되는 것이 지극히 위험하다고 지적해 왔다. 어느 의미에서 지금 우리는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가치 체계를 구성하는 법을 학생들에게 알려주기는커녕 과학이 가르치려는 가치 체계를 국어, 국사 교육이 모두 망가뜨리고, 국어나 국사가 가르치는 가치관은 과학 시간에는 잊어야만 하는 비효율적인 교육을 해 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 책의 서두에서도 말했지만, 역사나 과학책에는 우리 과학기술자 이름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물론 서양 과학자 이름은 여럿 소개된다. 물론 과학이란 서양 문명의 산물이니 어느 정도 당연함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고 치자. 하지만 '세종의 카메라'를 언급한다면, 우리는 우리 전통을 과학 교육에도 활용할 수 있다. 교육의 각 과목이 유기적으로 연계되어야 할 당위성을 필자는 여기서 찾고 있다. 우리 둘레에는 서양 과학을 배워 오기에만 급급하여 우리의 전통을 깡그리 잊고 있는 경우도 많다. 예를 들면 우리 선조들이 익히 알고 있던 용어를 버린 채 우리는 직각삼각형의 세 변의 관계를 '피타고라스의 정리'라 부른다. 그러나 피타고라스란 이름을 알기 천년도 더 전부터 우리 선조들은 그 관계를 알고 있었고, 그 이름을 '구고법'이라 했다. 지금이라도 우리는 중학교 수학책에서 '피타고라스의 정리'를 몰아내고 '구고법' 또는 '구고의 정리'를 되찾는 것이 마땅하지 않을까. 그러지 않아도 우리의 책들은 서양 사람들 이름으로 가득하지 않는가. 같은 수학 용어로 '무리수', '유리수'를 예를 들어보자. 이것은 원래 '무비수', '유비수'로 옮겼어야 마땅할 것이 잘못 번역된 것이다. 일본 수학자들이 100여년 전에 영어가 짧아 그릇 번역한 용어를 우리는 덮어놓고 맹종하고 있으니 이 아니 안타까운가! 원래 영어로 'rational numbers', 'irrational numbers'라고 썼던 것을 일본 학자들은 'rational'이라는 단어의 한 가지 뜻만을 알았기 때문에 '합리적인 수', '무리한 수'라는 뜻에서 '유리수', '무리수'라 옮긴 것이다. 하지만 수학에서 어찌 무리한 수가 있을 수 있겠는가? 이는 번역의 오류로 인한 대표적인 예인 것이다. 지금이라도 영어 사전을 찾아보면 rational이라는 영어 단어에는 그 두 번째 의미로 '비례적인'이라는 뜻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ratio(비율, 비례)'의 형용사인 rational로 쓰인 것이다. 원래 그리스 시대 이전 개념이 생겨난 원인은 바로 숫자 가운데에는 정수의 비율로는 나타내지는 않는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말은 원래 '비율로 표시되는 수'와 '비율로는 표시되지 않는 수'라는 뜻이다. 그런 뜻이라면 중학생들은 금방 그 뜻을 이해할 수 있다. '유리수', '무리수'라는 말을 '유비수', '무비수'로만 고치면 당장 수많은 한국인들이 보다 쉽게 이해하게 될 것을! 안타까울 일이 아닐 수 없다.
과학기술도 외교의 시대
1996년 여름 서울에서는 제8차 동아시아 과학사 국제회의(The 8th International Conference on the History of Science in East Asia)가 열렸다. 우리 과학사 학자들이 여기저기 부탁하여 많은 돈을 모아 겨우 성공적으로 마쳤는데, 거기서 엉뚱하게도 프랑스의 젊은 여성이 동아시아 과학사학회의 새 회장으로 선출되어 버렸다. 사실은 거기서 선출된 것이 아니라 서울에 오기도 전에 이미 그렇게 결정되었던 것을 나중에야 우리는 알게 되었다. 원래 1996년까지의 회장은 일본의 중산무(나카야마 시게루)였는데, 한국에서 1996년 회의를 주재하게 되니 한국에서 회장이 나오는 것이 좋겠는데 의견이 학회 간부들 사이에서 나온 일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후보로 물망에 올랐던 전상운 교수는 한국에서 회의를 하면서 한국인이 회장을 맡기보다는 인원도 훨씬 많은 중국의 석택종 같은 학자에게 양보하는 편이 좋겠다고 사양하는 동안, 회장 선거는 우편투표로 진행되었다고 한다. 그 투표에 한국 회원들은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고, 필자도 그런 선거를 통해서 프랑스 학자가 회장이 된 줄은 알지도 못하고 있었다.
1997년 여름 벨기에의 리에즈 대학에서 열린 제20차 국제 과학사회의에서도 비슷한 사건이 있었다. 작년 서울에서 열었던 동아시아 과학사회의와는 달리 거의 80년의 전통을 가진 이 세계적 과학사회의는 서양 과학사 전공의 서양학자들이 중심이다. 그런데 그 간부를 뽑는 데 있어 한국에서는 아직 한 번도 회계나 감사 정도의 작은 자리나마 올라 본 일이 없다. 마침 올해는 출마자가 적어 누가 추천만 해도 감사 자리에는 선출될 수 있었는데, 그만 한국학자들은 그런 준비를 하지 않고 그 회의에 참석했다가 역시 아무 성과를 얻지 못했다. 필자 역시 한국 과학사학회 회장이라서 과학재단의 여비 보조를 받아 회의에 참석했지만, 그런 생각을 미리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준비하지 못한 채였다.
과학기술계에서는 해마다 수많은 학술회의가 열리고, 또 수많은 학술지가 간행된다. 그리고 그 회의 때마다, 또 학술지마다 그 방면 전문가들로 이런저런 위원회도 만들고 모임도 갖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런 모임을 통해 '과학기술의 국제정치'가 행해지는 것이다. 우리도 이제는 과학기술자들의 영어와 그 밖의 외국어 실력도 향상시키고, 또 그런 과학기술 국제정치에 적극 참가하도록 권장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결국 이런 모임을 통해 과학기술자들의 능력이 평가되고, 또 그 과장에서 논문의 채택 여부도 좌우되는 수가 많기 때문이다. 아무리 훌륭한 과학기술자도 국제정치에 너무 무심해서는 국제 학술지에 논문을 싣기조차 어려워지고 있다. 과학기술의 외교라 할 만한 노력은 앞에서 소개한 일이 있는 중국 과학사가 우리 과학 문화재를 빼앗아 가는 문제에 적극 대처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하다. 중국은 우리 국보로 지정된 시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물 '다라니경'을 중국이 신라에 보낸 것이라 주장하고 있으며, 세종대의 발명품인 측우기가 중국과 대만의 과학사에서는 중국의 발명으로 둔갑해 있다. 보다 더 문제가 되는 것은 이런 중국의 주장이 세계 과학사학계에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일은 다른 분야에서도 앞으로 더욱 확대될 것으로 보인다. 교육을 통해 이런 사실이 국내에서 널리 알려져야 하리라고 생각된다. 필자는 1996년 여름 서울에서 열린 '제8차 동아시아 과학사 국제회의'의 개막 연설에서 이 문제에 대해 발표하면서 중국 측 잘못을 지적해 둔 일이 있다. 그러나 그 정도로는 어림도 없는 일인 것은 물론이다. 이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상당 기간 동안 끈질기고도 지속적인 한국 과학사학계의 '외교적이고 국제정치적' 노력이 필요하다.
민족 과학을 말한다.
과학 지식의 '보편성'은 많은 사람들을 헷갈리게 만든다. 과연 과학이 밝혀내는 진리란 영원불변의 보편적 지식일까? 과학 지식은 절대적이고도 보편적인 진리의 세계로 인간을 안내한다고 인정하더라도, 그 '보편적'지식을 체계화하여 표현해내고, 또 교육하는 틀을 민족에 따라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 예를 들면 산소의 발견자로 프랑스 사람은 라부아지에를 들겠지만, 스웨덴에서는 셸레를 발견자라고 말하려 할 것이다. 산소의 발견지는 나라에 따라 다른 사람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논쟁에서는 어느 쪽의 손을 들어주어야 한다는 과학적 법칙이 있을 수 없다. 같은 한자로 원소 이름을 짓는데도 중국인들과 일본인들은 같은 표현을 쓰지 않는다. 예를 들어 산소와 수소를 한국과 일본에서는 산소와 수소라고 쓰지만, 중국인들은 양기와 경기라 쓴다. 아니 이런 관행을 고쳐 지금은 아예 두 글자를 묶어 한자씩의 새 글자를 만들어 나타내고 있다. 중국에서 산소는 양 수소는 경으로 표기된다. 말하자면 과학은 그 지식으로서의 보편성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나타내고 체계화하는 방법은 민족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당연히 과학을 체계화하고 교육하는 길은 민족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이런 일체의 특성 ~ 즉, 과학의 특수성 ~을 필자는 '민족 과학'이라 부른다. 그리고 그런 특성을 잘 반영하는 '한국 민족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과학기술의 체제'를 만들지 않고서는 서양에서 시작되어 전해지는 과학과 기술을 효율적으로 받아들이는 데에도 어려움이 훨씬 많을 수밖에 없다고 강조한다. 한국 과학의 미래는 바로 '민족 과학'이 제대로 자리 잡아야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그런 방향의 몇 가지를 지금껏 소개해 왔다. 자랑스런 우리 과학기술의 역사를 찾아내고, 또 가르치며 지키자는 운동은 말하자면 필자의 '민족 과학' 운동인 셈이다. 이상에서 간단히 소개한 몇 가지 말고도 우리 전통 문화 가운데 계승해야 할 과학적이거나 합리적인 부분들은 아직도 많다. 우리는 서양 문명을 배우고 흉내 내기에 바쁜 나머지 우리 것이 훨씬 과학적이며 합리적인 경우마저 잊고 지내는 일이 많다. 앞서 말한 음력과 양력의 예도 그 한 가지이다. 요컨대 과학사에서만이 아니라 역사 전반 또는 문화 전반에 걸쳐 우리는 우리나라 역사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시야를 동아시아 전체, 나아가서는 세계사적 안목으로 확대하여 그 바탕으로 모든 것을 새로 보려는 노력을 시작할 때가 되었다. 과학사를 중심으로 생각한다면, 우리에게 오늘 절실히 요구되는 것은 바로 '민족 과학' 의식의 확산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이런 필자의 주장에 대해서 국내에서는 아직 제대로 동조하는 학자가 없다. 다만 일본에서 활동중인 우리나라 과학사학자 한 사람이 통일 이후 한국과학의 장래가 민족 과학적 방향에 있다는 데에 동의를 표하고 있다는 사실이 작은 출발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임정혁
일본에서 활동중인 우리나라 과학사 학자. "조선 과학문화사에의 어프로치"(1995)의 마지막 장인 제9장, '전통 과학에서 민족 과학으로'라는 글에서 그는 필자의 "민족 과학의 뿌리를 찾아서"(서울, 동아출판사, 1991)에서 주장하는 민족 과학론에 전적으로 동조하면서, 분단 극복을 위한 길 중 하나로 민족 과학을 언급하고, 진실로 '민족을 위한, 민족에 의한, 민족의 과학'이야말로 통일 시대의 과학이 될 것이라 예측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