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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4

20대 경종실록

 

1. 비운의 왕 경종의 등극과 노소론의 당쟁 격화(1688-1724, 재위기간 17206-17248, 42개월)

 

정계 일선에서 남인 세력의 힘이 극도로 약해지고 조정이 서인 일색으로 되자 노론과 소론의 대립이 더욱 첨예화되는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아버지에 의해 어머니가 죽는 것을 목격한 비운의 왕 경종이 즉위한다. 희빈 장씨의 아들 경종의 등극은 희빈 장씨를 죽음으로 몰고 간 노론에 대한 정치적 박해를 예고하고 있었다.

경종은 1688년 숙종의 맏아들로 태어났으며, 희빈 장씨 소생이다. 이름은 균, 자는 휘서이며 태어난 지 두 달 만인 1689년 원자로 정호되었다. 그가 원자로 정호되자 노론의 영수 송시열은 인현왕후가 젊기 때문에 후궁의 아들 균을 원자로 삼는 것은 시기상조라고 주장하다가 유배되어 죽었으며, 이때 많은 서인들이 대거 축출되고 남인이 조정을 장악했다(숙종 편 '기사환국' 참조).

원자로 정호된 왕자 균은 16903세 때에 다시 세자에 책봉되고, 그의 어머니 장씨도 빈으로 승격하였다가 인현왕후가 폐출되자 왕비에 책봉되었다. 하지만 장씨는 갑술환국으로 폐비 민씨가 복위되자 1694년 다시 빈으로 강등되었다. 그리고 1701'무고의 옥'으로 사사되었다(숙종편 '무고의 옥' 참조).

어머니 희빈 장씨가 사사될 때 세자 균의 나이는 14세였다. 그는 이 사건 이후 줄곧 병환에 시달렸으며, 후사도 얻지 못했다.

일설에는 그가 아이를 얻지 못한 것이 희빈 장씨 때문이라고 한다. 희빈 장씨는 사약을 받으면서 마지막으로 아들을 보고 싶다고 숙종에게 애원하게 되는데, 숙종은 처음에는 이를 거절하다가 결국 인정에 끌려 그녀의 청을 들어주게 된다. 하지만 막상 세자를 그 자리에 데려다 놓았을 때에 돌발적인 사태가 터지고 말았다. 장씨는 자신의 아들을 보더니 재빠르게 달려와서는 다짜고짜 그의 하초를 움켜쥐고 잡아 당겨버렸다. 그 때문에 세자는 그 자리에서 기절을 했고, 이 사건 이후 항상 시름시름 앓으며 남성 구실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숙종은 1716년 소론을 배척하고 노론을 중용한 후(병신처분), 1717년 세자가 병약한 데다가 자식을 낳지 못한다는 이유로 당시 좌의정이던 노론 영수 이이명에게 숙빈 최씨의 소생인 연잉군(영조)을 후사로 정할 것을 부탁했다(정유독대). 또한 그해에 연잉군으로 하여금 세자를 대신하여 세자대리 청정(세자를 대신하여 편전에 참석하여 정사를 배우는 것)을 명했다.

연잉군의 대리 청정이 결정되자 소론 측이 '흠을 잡아 세자를 바꾸려 한다'며 반발하고 나섰다. 그래서 이때부터 세자 균을 지지하는 소론과 연잉군을 지지하는 노론 간의 당쟁이 격화되었다.

이같은 논란 속에서 세자 균은 1720년 숙종이 죽자 왕위를 이어받아 조선 제20대 왕으로 등극하게 된다.

경종 즉위 초년에는 여전히 노론이 정권을 잡고 있었다. 그들은 경종의 건강이 점차 악화되는 데다, 후사마저 없다는 이유를 내세워 거저(세자를 세우는 일) 할 것을 주장한다. , 경종이 너무 병약하여 언제 죽을지 모르니 연잉군을 세제로 삼아 왕위가 흔들리지 않게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경종은 소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721년 노론 측의 주장에 따라 연잉군을 세제에 책봉하였다. 그런데 노론 측은 두 달 뒤인 그해 10월 경종이 병약하여 정사를 주관할 수 없다며 이번에는 연잉군으로 하여금 대리 청정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곧 경종에게 정사에서 손을 떼라는 말이었다.

노론 측이 대리 청정을 주장하자 소론 측이 왕을 보호해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거세게 반발하였다. 하지만 경종은 와병 중이어서 세제청정을 받아들였다가, 소론 측의 반대로 다시 거둬들였다. 이후 경종은 세제청정을 명했다가 다시 거둬들이기를 반복한다.

이 바람에 노, 소론 간에 당쟁만 더욱 격화되었다. 그리고 172112월 경종의 지지를 받은 소론은 과격파인 사직 김일경을 우두머리로 한 7명이 앞장서서 세제대리 청정을 요구한 집의 조성복과 청정 명령을 받들어 행하고자 한 노론 4대신 영의정 김창집, 좌의정 이건명, 영중추부사 이이명, 판중추부사 조태채 등을 '왕권 교체를 기도한 역모자'라고 공격하는 소를 올렸다.

이 상소로 인하여 1716년 병신처분 이래 지속되던 노론의 권력 기반이 무너지고 대신 소론 정권으로 교체되는 환국이 단행되었다. 이 결과 노론 4대신은 파직되어 김창집은 거제부에, 이이명은 남해현에, 조태채는 진도군에, 이건명는 나로도에 각각 안치되었고, 그 밖의 노론 대신들로 삭직, 문외출송 또는 정배되었다. 그리고 소론파에서 영의정에 조태구, 좌의정에 최규서, 우의정에 최석항 등이 임명됨으로써 소론 정권의 기반을 굳혔다.

조정을 장악한 소론은 과격파를 앞세워 노론 측 인사에 대한 축출 작업을 더욱 가속화한다. 3개월 뒤인 17223월 소론의 강경론자들이 노론의 과감한 처분을 요구하고 있을 때 남인의 서얼 출신 목호룡은 노론 측에서 경종을 시해하고자 모의했다는 이른바 '삼급수설'(대급수: 칼로 살해, 소급수:약으로 살해, 평지수:모해하여 폐출함)을 들어 고변하였다.

이 고변에 따르면 음모 관련자는 정인중, 김용택, 이기지, 이희지, 심상길, 홍의인, 김민택, 백망, 김성행 등이었는데 이들은 모두 노론 4대신의 아들 또는 조카이거나 아니면 추종자들이었다.

이 고변은 숙종의 죽음 전후에 당시 세자였던 경종을 해치려고 모의하였다는 것인데 이때에 와서 드러난 것이다. 목호룡은 남인 서얼로서 풍수를 공부하여 지관이 된 사람이다. 정치적 야심을 품고 있던 그는 풍수설을 이용하여 노론에 접근하여 처음에는 왕세제편(영조)에 섰으나, 정국이 소론의 우세로 돌아서자 배반하여 이 같은 음모 사실을 고변하였다.

이 사건은 노론에 엄청난 타격을 안겨 주었다. 목호룡의 고변이 있자 국청이 설치되어 역모 관련자들을 잡아와 처단하였고, 노론 4대신도 다시 한성으로 압송되어 사사되었다.

국청에서 처단된 사람 중에 법에 의해 사형된 사람이 20여 명, 맞아서 죽은 이가 30여 명, 그 밖에 그들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체포되어 교살된 자가 13, 유배 114, 스스로 목숨을 끊은 부녀자가 9, 연좌된 사람이 173명에 달하였다.

반면에 권력을 잡은 소론파에서는 윤선거와 윤증을 복관시키고 남구만, 박세채, 윤징완, 최석정 등을 숙종 묘에 배향하였으며, 목호룡에게는 동지중추부사의 직이 제수되고 동성군의 훈작이 수여되었다. 이 대대적인 옥사가 신축년과 임인년에 연이어 일어났다고 해서 '신임사화'라고 한다.

신임사화 후 정권은 소론에 의해 독점된다. 하지만 경종이 병이 악화되어 1724년에 죽고 영조가 들어서면서 소론의 짧은 정권 독점기는 끝나고 만다.

생모의 죽음을 목격하고 또 생모에 의해서 생산 능력을 상실한 채로 어렵게 왕위에 올라 병석에서 4년을 보내다 죽은 경종 시대는 이처럼 노론과 소론의 치열한 정권 다툼으로 조정이 항상 피바람에 휩싸였던 시기였다. 때문에 경종 재위 4년 동안 뚜렷한 치적을 남기지도 못했다.

다만 이 시기에 서양의 수총기(소화기)를 모방하여 제작했으며, 독도가 우리 영토임을 밝힌 내용을 담은 남구만의 '약천집'이 간행되었다.

경종은 17248월 재위 42개월 만에 37세를 일기로 죽었으며, 슬하에 자녀를 두지 못했다. 그는 두 명의 부인을 두었는데, 정비는 심호의 딸 단의왕후였고, 계비는 어유구의 딸 선의왕후였다. 능은 의릉으로 서울 성북구 석관동에 있다.

 

 

2. 경종의 부인들

 

단의왕후 심씨(1686-1718)

청은부원군 심호의 딸이다. 1696년 세자빈으로 책봉되었으나 경종이 즉위하기 2년 전에 병으로 죽었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덕을 갖추어 어린 나이에도 대전, 중전 그리고 병약한 세자를 섬기는 데 손색이 없었다. 1720년 경종이 즉위하자 왕후에 추봉되었다. 능은 혜릉으로 경기도 양주에 있다.

 

선의왕후 어씨(1705-1730)

영돈녕부사 어유구의 딸이다. 1718년 세자빈에 책봉되어 가례를 올렸으며, 1720년 경종이 즉위하자 왕비가 되었다. 이후 1724년 경종이 죽자 2년 뒤에 경순왕대비에 올랐다가 173026세를 일기로 죽었다.

그녀는 매사에 조심스럽고 온유하였으며, 경종이 병약한 탓에 소생이 없었다. 죽은 후 경종이 묻혀 있는 의릉에 함께 묻혔다.

 

 

3. '경종실록' 편찬 경위

 

'경종실록'은 총 157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17206월부터 17248월까지 경종 재위 42개월 동안의 역사적 사건들을 편년체로 기록하고 있다.

편찬 작업은 17268월에 시작되어 17322월에 완료되었다. 하지만 실록청 의궤가 남아 있지 않은 관계로 편찬 과정을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영조실록'에 의하면 좌의정 이집과 우의정 조문명을 총재관으로 하고, 대제학 이덕수, 부제학 서명균, 판중추부사 이의현, 지춘추관사 김재로, 승지 윤봉조 등 소론 측 인사들이 도청당상이 되어 편찬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실록의 내용은 노소론의 대립과 신임사화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기사 가운데 사건이나 인물에는 '사신 왈' 또는 '근안'이라는 논평을 달았다. 그 논평에서 신임사화에 대해서는 대체로 긍정적이고, 노론 대신들에 대해서는 혹평하였다. 그 때문에 경종실록 찬수에는 처음부터 논란이 많았다.

실록의 교정을 맡은 주서 이수해는 17293월 사국의 뒷면에 농간이 있다고 상소하였다가 당습을 버리지 않는다고 유배당했다. 그리고 172912월에는 도청당상 이덕수를 불러 '신사의 처분(장희빈의 죽음)'에 대한 범례를 정했으며, 17315월에 실록이 완성되어 시정기의 세초가 논의되었고, 17323월 춘추관의 요청에 따라 네 곳의 사고에 봉안하도록 하고 시정기와 중초를 세초하였다.

하지만 17324월에 헌납 민정과 사간 한덕후 등이 실록에 '이진검 옥사'가 실려 있지 않다고 문제를 제기하며, 마땅히 내용을 더해서 다시 봉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1741년 헌납 이천보도 소를 올려 경종실록의 잘못된 점을 바로잡고, 빠진 것을 보충해야 된다고 주장했다. 이후 노론의 정치적 기반이 탄탄해져 신임사화가 무옥으로 규정됨에 따라 수정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하지만 수정 실록의 편찬 작업은 영조 대에 이루어지지 못하고 정조 시대에 가서야 시작될

수 있었다.

1777'영조실록'을 편찬하게 되자 노론인 이사렴, 유당 등이 상소하여 '선조수정실록''현종개수실록'의 예에 따라 '경종실록'도 수정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자, 정조는 이를 받아들여 17782월부터 작업에 들어갔다.

수정 실록은 즉위년과 재위 4년간을 각각 1권씩으로 편찬하여 총 53책으로 구성되었다.

기사 내용을 살펴보면 즉위년부터 신임사화에 대한 부당성을 의식하고 기록한 흔적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 경종실록이 노론 측 인사에 대해 악평을 한 것에 반해 수정실록에서는 이러한 악평을 삭제하고 신임사화를 일으킨 소론 측 인사들을 일방적으로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들에게 불리한 내용은 모두 개수하였다.

수정 실록의 편찬 목적은 신임사화를 무옥으로 단정하고 수정, 삭제하였으므로 시정기의 기사 내용이 대폭 축소되었다. 1779년 경연관 송덕상은 '경종실록'의 수정본이 마련되면 구본은 없애버리자고 하였으나 정조는 고례에 의하여 양본을 함께 보존하도록 했다.

이 수정 실록 편찬 작업에 참여한 인원은 총재관 정존겸을 비롯 도청당상 6, 도청낭청 4, 분판낭청 12명 등 도합 23명이었다. 이들은 모두 노론 측 인사였다.

 

경종 시대의 세계 약사

경종 시대의 동아시아 정세를 보면 일본은 1720(경종 원년) 종교 서적 외 서양 책의 수입을 허가하였으며, 청은 성조가 죽고 세종이 즉위하여(1722) 기독교를 엄금했다.

한편 유럽에서는 프랑스와 스페인이 혼인동맹을 체결했으며(1721), 같은 해 영국에서는 월폴 내각이 성립되었고, 또 영국, 프랑스, 스페인간에 방수동맹이 체결되었다. 이때 러시아의 표트르 대제는 페르시아를 침공하여(1722) 흑해 진출을 기도하고 있었다.

 

 

21대 영조실록

 

1. 연잉군 금의 멀고도 험한 재위의 길

 

숙종은 인경왕후, 인현왕후, 인원왕후 등 세 명의 왕비를 맞이 했지만 그들에게서는 아들을 얻지 못했다. 숙종에게 아들을 안겨다준 사람은 천비 소생의 두 후궁이었다. 나인 출신의 희빈 장씨와 무수리(나인들에게 세숫물을 떠다 받치는 종) 출신의 숙빈 최씨가 바로 그들이다.

희빈 장씨가 낳은 아들은 왕자 균이고, 숙빈 최씨가 낳은 아들은 왕자 금이었다. 균은 1688년에 태어났고, 금은 1694년에 태어났으니 그들의 나이 차이는 여섯 살이었다.

왕자 균은 14세가 되던 1701년 생모인 희빈 장씨를 잃었다. 부왕 숙종에 의해 어머니가 사사되는 것을 본 그는 그 때부터 병을 얻었다. 또한 생모 장씨가 사약을 받는 자리에서 균의 하초를 못 쓰게 만들어 생산 능력마저 상실했다. 왕자 균의 이같은 결점은 이복동생 금에게 왕위에 오를 수 있는 기회를 안겨 주었고, 한편으로는 그에게 몇 번이나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게 했다.

왕자 균은 생후 2개월이 될 무렵에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의 양자로 입적되어 원자 정호를 받았으며 3세 때 세자에 책봉되었다. 그리고 희빈 장씨가 사사된 14세 때부터 병을 얻어 세자로서의 의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

세자 균이 제왕 수업을 제대로 받을 수 없는데다가 자식을 낳지 못하자 1717년 노환으로 병약해진 숙종은 당시 좌의정이던 노론의 영수 이이명과 독대하여 연잉군 금을 세자 균의 후사로 결정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자신은 병약하여 정사를 돌볼 수 없으니 세자로 하여금 대리 청정을 시켜야 하겠지만 세자 역시 건강이 좋지 못하므로 연잉군이 세자를 대신하여 세자 대리 청정을 하라고 명했다.

연잉군의 세자 대리 청정이 결정되자 세자를 지지하고 있던 소론 측은 세자를 바꾸려 한다고 비난하며 거세게 반발하였다. 이 때부터 조정은 세자를 지지하는 소론과 연잉군을 지지하는 노론에 의해 일대 당쟁에 휘말렸다.

그런 우여곡절 끝에 1720년 세자 균이 33세의 나이로 즉위했으니 그가 경종이었다. 경종은 왕궁의 법도에 따라 즉위하긴 했으나 병으로 인해 제대로 정사를 돌볼 수가 없었다. 이에 당시 집권당이었던 노론 측은 숙종의 유명을 받들어 그의 이복동생 연잉군을 세제로 책봉할 것을 건의했다. 그리하여 금의 세제 책봉이 거의 확실해졌지만 연잉군은 소를 올려 왕세제의 자리를 극구 사양하였다. 이는 왕위를 탐하지 않고 있다는 뜻을 전달하기 위한 연잉군 나름의 자구책이었을 것이다. 만약 선뜻 왕세제 자리를 욕심내게 된다면 왕위를 넘보고 있었다는 의심을 받게 될 것이고, 그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연잉군의 왕세제 책봉이 조정의 주요 현안으로 떠오르자 소론 측의 대대적인 반대 상소가 이어졌다. 우의정 조태구를 비롯해 사간 유봉휘 등도 시기 상조론을 펴며 왕세제 책봉을 극구

반대했다.

그러나 집권당인 노론 측의 대세에 밀려 소론 측의 주장은 묵살되었고, 연잉군은 왕세제에 책봉되었다. 이때가 경종 즉위 1년 만인 1721년이었다.

연잉군이 왕세제에 책봉되자 노론은 실권을 더욱 굳건히 다지기 위해서 이번에는 경종의 병약함을 이유로 세제 연잉군의 대리 청정을 주장하고 나섰다.

노론 측이 이러한 주장을 펴자 경종은 일단 비망기를 내려 왕세제로 하여금 대리 청정을 하도록 허락했다. 그러자 소론의 찬성 최석항, 우의정 조태구 등은 대리 청정의 허락을 취소시켜줄 것을 경종에게 강력하게 간언했다. 이어 중앙 조정은 물론 지방의 수령, 감사, 찰방과 성균관 학생 및 각 도의 유생들까지도 소를 올려 대리 청정의 회수를 간청하고 나섰다. 또한 대리 청정 명령을 받은 왕세제 연잉군도 네 번이나 청정 명령의 회수를 청하였다.

상황이 여기에 이르자 노론 측 중신들도 의례상 백관의 청정을 베풀고 대리 청정의 회수를 청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럼에도 경종은 자신의 말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병이 언제 나을지 몰라 세제에게 대리 청정을 시키겠다고 하교를 내렸다.

시실 경종은 이때 노론 측 백관들이 한 번 더 대리 청정의 회수를 청할 것을 기대했다. 관례상 세 번에 걸쳐 이같은 청이 왔을 때 왕은 못 이기는 척 자신의 말을 거둬들이곤 했던 것이다. 그렇게 해야 왕의 체면이 서기 때문이다.

그런데 노론 측은 대리 청정이 왕의 확고한 의지라고 판단하고 청정 명령을 거두라는 의식을 파해버렸다. 그리고 곧장 왕명을 쫓는다는 명분을 내걸며 숙종 말년의 세자 대리 청정의 절목에 따라 왕세제의 대리 청정을 청하는 의례적 차서를 급히 올렸다.

노론의 태도가 이같이 급변하자 당황한 경종은 소론 대신 조태구를 불러들여 사태를 수습할 것을 지시했다. 당시 우의정으로 있던 조태구는 1717년의 세자 대리 청정은 숙종이 연로하고 병이 중하여 부득이하게 내린 조처였지만 경종은 불과 34세밖에 되지 않았고 즉위한 지도 1년밖에 되지 않았기에 왕세제에 의한 대리 청정은 부당하다고 극간하였다.

이같은 조태구의 주장에 노론 측 역시 별다른 반박을 하지 못했다. 그 때문에 노론 대신들은 종전에 대리 청정을 허락해줄 것을 청하였던 연명차서가 잘못임을 인정하고, 또다시 청정 명령의 환수를 청하게 되었다.

노론 측은 이같은 일관성 없는 행동 때문에 소론 측으로부터 엄청난 비판을 받으며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 처음에 대리 청정을 요구하였다가 전국 유생과 관료들의 반발이 있자 청정 명령을 거두라는 청을 하고, 다시 청정 명령의 하교가 내려지자 청정을 요구하였다가 명분이 좁아지자 또 다시 청정 요구를 거둬들이고 청정 명령 취소를 요구했던 것이다. 노론의 이같은 행동은 결국 소론의 입지만 강화시켜주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이 일로 왕과 백성들의 신임을 얻어 입지를 다진 소론은 대리 청정에 앞장섰던 노론 4대신을 탄핵하여 귀양을 보내는 신축옥사를 일으켰다. 그리고 이 기세를 몰아 이듬해에는 남인 목호룡을 매수하여 노론 측 일부 인사가 경종의 시해를 도모했다는 고변을 하게 해 임인옥사를 일으켰다.

임인옥사를 주도한 소론 대신들은 노론 4대신을 포함한 60여 명을 처형시키고, 관련자 170여 명을 유배시키거나 치죄하여 축출시켰다. 이때 임인옥사의 사건 보고서에 왕세제도 모역에

가담했다는 내용이 기록되었다.

전례로 봐서 모역에 가담한 왕자가 살아남은 경우는 없었다. 하지만 연잉군 외에는 왕통을 이을 왕자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그는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사건 때문에 연잉군은 갖가지 고초를 겪게 된다. 자신이 수족처럼 부리던 장세상이 소론 측 사주를 받은 내관 박상검, 문유도 등의 모함으로 쫓겨나고, 소론 측 대신들에 의해 경종을 문안하러 가는 것도 금지당했다.

연잉군은 자신의 지지 기반이던 노론이 신임사화로 대거 축출되고, 거기다 신변의 위협마저

느끼게 되자 대비 인원왕후 김씨를 찾아가 왕세제 자리를 내놓는 것도 불사하겠다며 자신의 결백을 호소했다.

김 대비는 평소 노론 측 입장에 서서 왕세제를 감싸왔던 터여서 왕세제의 간절한 호소를 담은 언교를 몇 차례 내려 소론 측의 전횡을 누그러뜨렸다. 그 덕택으로 연잉군은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2. 영조의 탕평 정국과 조선 사회의 변화(1694-1776, 재위 기간 17248-17763, 517개월)

 

, 소론의 치열한 당쟁의 틈바구니 속에서 생명의 위협마저 느끼며 가까스로 왕위에 오른 영조는 등극하자마자 붕당의 폐해를 열거하며 탕평 정국을 열어 인재를 고루 등용하려는 노력에 박차를 가한다. 하지만 그의 이러한 탕평책에도 불구하고 일부 정권 지향적인 무리들에 의해 당쟁은 지속되고, 급기야 왕권에 도전하는 변란이 발생하기도 한다. 영조는 이같은 난국을 비상한 정치 능력으로 타개하며 지속적으로 조정을 탕평 정국으로 이끌고 나가는 데 성공한다. 한편, 영조의 탕평 정국이 안정기에 접어들면서 재야에서는 실사구시의 학문이 일어나 사회 전반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 일으킨다.

영조는 1694년 숙종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무수리 출신 화경숙빈 소생으로 이름은 금이다. 이후 1699년 연잉군에 봉해지고, 1717년에는 숙종의 명에 따라 대리 청정을 한 바 있으며, 1721(경종 1) 왕세제에 책봉되었다. 그리고 17248월 이복형 경종이 죽음에 따라 조선 제21대 왕으로 등극하였다.

영조는 왕위에 오르자 가장 먼저 자신을 곤경에 몰아넣고 수많은 대신들을 죽게 했던 신임옥사에 대한 책임을 추궁했다. 이에 노론 측의 이의연이 경종 집권 당시 연잉군의 세제 책봉을 주장하다 처벌된 대신들을 신원해야 한다는 성급한 주장을 펴다가 소론 측의 탄핵을 받아 오히려 유배되고 말았다.

또한 노론의 송재후는 김일경이 주동이 되어 일으킨 임인옥사에 대한 진상 조사 결과를 기록한 교문의 초고 중에서 3건의 문건을 들어 세제 시절의 영조를 모욕한 것이니 단죄할 것을 상소했다. 3건의 문건이란 종무(노환공자가 자신의 형을 죽인 것), 사구(진시황제가 맏아들 부소를 죽이고 작은 아들 호해를 세운 것), 접혈(당태종이 형과 아우를 죽인 것) 등으로 모두 영조에 관련된 내용이었다. 김일경의 이 같은 문건은 사실 세제 연잉군이 경종을 죽이려 한 극악무도한 인간으로 몰고 가는 것이어서 김동필 같은 소론 내부의 인물에 의해서도 비판을 받기도 했다.

송재후의 상소가 있자 김일경의 교문 문제에 대한 상소가 전국 각 처에서 빗발쳤다. 그래서 영조는 김일경을 잡아들여 친히 국문하였으며, 김일경은 끝까지 불복하여 사형되었다. 또한 고변으로 임인옥사를 유발하여 공신이 된 목호룡의 문건 중에도 영조에 저촉된 사실이 있었기 때문에 그 역시 국문당하였고, 끝까지 불복하다가 처형되었다.

영조는 소론의 영수 김일경, 남인의 목호룡 등 신임옥사를 일으킨 대신들을 숙청한 다음 1725년에는 김일경이 노론 4대신을 역적으로 몰아 상소할 때 이에 동조한 이진유 등 6명을 귀양보냈다. 그리고 노론 측의 소론에 대한 잇따른 논핵에 의거해 영의정 이광좌, 우의정 조태억 등 소론 대신들을 내몰고 민진원, 정호 등의 노론 인사들을 등용하였다. 이것이 '을사처분'이다.

을사처분으로 노론이 정권을 잡게 되자 신임옥사 때 처단된 노론 4대신과 그 밖의 관련자들에 대한 신원 문제가 다시 논의되어 4대신이 복관되고 시호를 받았다. 하지만 노론 측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정호, 민진원 등이 임인옥사에 대한 보복을 주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조는 즉위 초부터 송인명, 조문명 등의 조언을 받아 각 정파의 인사를 고르게 등용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탕평책을 펴고자 했기 때문에 노론 측의 소론에 대한 정치적 보복에 반대하고 나섰다. 그래서 정호, 민진원 등의 노론들을 대거 파면시키고 초년에 파직했던 이광좌, 조태억을 기용하여 정승으로 삼고 소론을 불러들여 조정에 합류시켰다. 이 사건이 '정미환국'이다.

정미환국으로 정권을 잡게 된 소론 측은 다시 임인년 사건을 들고 나와 4대신의 잘못을 논핵하였다. 이에 영조는 그들 4대신의 죄명은 씻어주고 관작만 삭탈하는 선에서 소론 측과 타협을 보았다.

그런데 이듬해인 1728년 소론의 일부 인사와 남인의 급진 세력이 경종을 위한 보복을 명분으로 왕권 교체를 기도하는 사건을 일으켰다. 이것이 '이인좌의 난'이다.

이 사건은 경종이 갑자기 죽자 정치적 기반을 위협받게 된 이인좌, 이유익, 심유현 등의 과격 소론 세력들이 갑술환국 이후 정권에서 배제된 남인들을 포섭하여 밀풍군 탄 (소현세자의 증손자)을 추대하고 무력으로 영조와 노론을 제거하고자 한 모반이다.

군사 동원 계획까지 마련되었던 이 역모 계획은 1727년 정미환국으로 다시 노론이 밀려나고 온건 소론 세력이 기용되자 동조자가 줄어들고 모의가 노출되어 최규서, 양성인, 김중만 등의 고변으로 탄로 나고 말았다.

모반 계획이 탄로 나자 이인좌를 비롯한 역모 세력들은 반군을 일으켜 청주성을 함락시키고 각 읍에 격문을 띄워 병마를 모집하고, 경종을 위한 복수의 깃발을 앞세우고 한성으로 진군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안성, 죽산, 청주, 상당성 등에서 대패하여 궤멸되고 말았다.

이인좌가 반군을 일으켰을 때 영남의 정희량, 호남의 박필몽 등이 이에 호응하여 반군을 일으켰으나 안성, 죽산 싸움에서 이인좌, 권서봉, 목함경 등이 생포됨에 따라 타격을 입어 관군에게 패하여 궤멸되었다.

이 난의 평정에는 소론 정권이 앞장섰으나 주모자의 대부분이 소론 측 인사였기 때문에 이후의 정국에서 소론의 입지가 약화되었다. 반면에 영조는 이 사건으로 탕평책의 명분을 강화시킬 수 있었으며, 왕권의 강화와 정국 안정을 도모할 수 있었다.

그 결과 1729년에는 기유처분으로 노, 소론 내의 탕평 세력들을 고르게 등용하여 탕평 정국의 기초를 다졌다. 이 때 영조가 취한 정책은 쌍거호대였다. , 노론의 홍치중을 영의정으로 삼고, 소론의 이태좌를 좌의정으로 삼아 상대하게 하고 이조의 인적 구성에서도 판서에 노론 김재로를 앉히면 참판에 소론 송인명, 참의에 소론 서종옥, 전랑에 노론 신만으로 상대하게 했던 것이다. 영조는 그 뒤 자신의 의도대로 정국을 수습하자 한층 강화된 왕권을 바탕으로 쌍거호대 방식을 극복하고 유재시용(惟才是用), 즉 인재 중심으로 인사 정책을 펼쳐나갈 수 있었다.

이처럼 탕평책은 초기에는 재능에 관계 없이 탕평론자를 중심으로 노론과 소론만 등용하다가 탕평 정국이 본궤도에 오르자 이 정책을 제도적으로 정착시키게 되었다. 영조는 이러한 정국 구도에 따라 노론, 소론, 남인, 소북 등 사색 당파를 고르게 등용하여 탕평 정국을 더욱 확대시켜 나갔다.

그런데 탕평 정국이 오래 지속되자 각 당파들은 다시 정권을 독점하기 위한 계략을 꾸미기 시작했는데, 그 대표적인 사건이 '사도세자 사건'이다.

영조는 정성왕후 서씨와 계비 정순왕후 김씨에게서 아들을 얻지 못하고, 정빈 이씨와 영빈 이씨에게서 효장세자와 사도세자를 얻었다. 하지만 큰아들 효장세자는 세자 책봉 후 요절했기 때문에 둘째 아들 사도세자 선이 세자에 책봉되었다.

1749년 영조는 건강상의 이유로 세자 선으로 하여금 대리 청정을 하게 한다. 그런데 세자가 대리 청정을 하게 되자 남인, 소론, 소북 세력 등은 그를 등에 업고 정권을 장악하려는 움직임을 보였고, 이에 노론 세력과 그들에 동조하던 계비 정순왕후 김씨, 숙의 문씨 등이 세자와 영조 사이를 벌여 놓기 위해 이간질을 하였다.

세자에 대한 정순왕후, 숙의 문씨 등의 무고에 따라 영조는 자주 세자를 불러 질책하였으며, 이 때문에 세자는 정신적 압박으로 인해 심한 고통을 받게 되었다. 그래서 함부로 궁녀를 죽이거나 왕궁을 몰래 빠져나가는 등 돌발적인 행동들을 하였다. 영조는 더 이상 그로 하여금 대리 청정을 시켜서는 안 되겠다는 판단을 하기에 이르렀는데, 1761년 세자가 임금도 모르게 관서 지방을 유람하고 돌아온 일이 발생했다.

이 일과 관련하여 세자를 제거할 기회를 노리고 있던 노론 측의 윤재겸 등이 세자의 행동이 체통에서 벗어났다는 주장을 담은 소를 올리자, 영조는 세자의 관서 순행에 관여한 자들을 모두 파직시켰다. 그 후 세자에 대한 영조의 불신은 더욱 격화되었는데, 계비 김씨의 아버지 김한구와 그 일파인 홍계희, 윤급 등의 사주를 받은 나경언이 세자의 비행 10조목을 상소하였다.

이 때문에 영조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세자에게 자결을 명하였다. 하지만 세자가 이에 응하지 않자 그를 폐위하여 서인으로 강등시킨 후 뒤주 속에 가두어 굶어 죽게 하였다.

하지만 영조는 이 사건 이후 세자를 죽인 것을 후회하고, 세자의 죽음을 애도한다는 뜻으로 그에게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리고 친히 신주에 제주를 하면서 아들을 죽인 자신의 행동이 나라의 앞날을 위해 행한 부득이한 조치였음을 알리기도 하였다. 한편 사도세자 사건으로 조정은 그의 죽음을 당연시한 벽파와 동정한 시파로 분리되어 새로운 당파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이후 영조는 정치적 신념으로 이끌던 탕평 정국의 입지를 더욱 다지기 위해 붕당의 근거지로 활용되던 서원, 사우의 사사로운 건립을 금지시켰으며, , 1772년에는 과거 시험으로 탕평과를 실시하는 획기적인 조치를 단행했다. 뿐만 아니라 탕평책을 강화하기 위해 같은 당파에 속한 집안 간의 결혼을 금지시킨 이른바 '동색금혼패'를 집집마다 대문에 걸게 함으로써 당색의 결집에 대한 우려를 환기시켰다.

영조의 이같은 철저한 탕평 정책으로 왕권은 강화되고 정국은 안정되었다. 이에 따라 조선 사회 전반에 걸쳐 여러 분야에서 많은 발전이 있었다.

이 시기에 가장 돋보이는 것은 죄수의 인권에 대한 새로운 접근이었다. 우선 1725년에 주리를 틀어서 국문하는 압슬형을 폐지했으며, 사형을 받지 않고 죽은 자에게 죄를 추죄하여 죽이는 형벌을 금지하였고, 1729년에는 사형수에 대해서는 반드시 초심, 재심, 삼심을 거치게 하는 삼복법을 엄격히 시행하도록 하여 사형에 신중을 기했다.

또한 1774년에는 사가에서 형벌을 가하는 것을 금지시켰으며, 판결을 거치지 않고 죽이는 남형과 남성의 포경을 자르는 경자 등의 가혹한 형벌도 금지시켰다. 그리고 신문고 제도를 부활시켜 백성의 억울한 일을 왕에게 직접 알리게 하였다.

영조 시대의 경제 정책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균역법의 시행이었다. 양민들이 국방의 의무를 대신해 나라에 세금으로 내던 포목을 2필에서 1필로 줄이는 것을 골자로 하는 균역법의 시행으로 일반 양민들의 의무인 양역의 불균형에 따른 백성들의 군역 부담이 크게 감소되었다.

그리고 1725년부터 각 도의 방죽을 수축하여 가뭄 피해에 대비했고, 1729년에는 궁궐에 속한 전답과 병영의 둔전에도 정해진 양 이상을 소비했을 경우 세금을 부담시켰다. 한편 오가작통 및 이정의 법을 엄격히 준수하도록 해 탈세를 방지했다(오가작통은 다섯 집을 한 통으로 묶은 마을의 최소 단위를 말하며, 理正은 마을의 책임자가 자신이 책임지고 있는 마을의 사건이나 인적 변화를 관아에 반드시 알릴 의무가 있게 한 제도였다).

이 밖에도 영조는 각 도에 보고되지 않은 은결을 면밀히 조사하게 하고, 애초에 국가 비축미로 빈농을 구제하기 위해 마련된 환곡이 백성에게 세금을 부과하는 방도로 전락한 것에 따른 폐단을 방지하는 데에도 각별한 관심을 쏟았다. 1763년에는 통신사로 일본에 갔던 조엄이 고구마를 가져옴으로써 흉년이 들었을 때 굶주린 사람들을 위한 구황식량 수급에 획기적인 전환을 꾀할 수 있었다.

이 시기의 사회 정책으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신분에 따른 국가에 대한 의무 사항을 더 분명히 한 점이다. 양인들의 불공평한 양역에 따른 폐단을 개선하기 위해 균역법을 실시하는 한편, 천민들에게도 공사천법을 마련해 신분에 맞는 국가에 대한 의무를 부담시켰다.

또한, 양인의 숫자를 늘려 양역의 증가를 꾀하였는데, 1730년에는 양인 어머니와 천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나면 양인이 되게 하기도 하였다가 이듬해에는 남자는 부모 중 아버지의 신분을 따르게 하고, 여자는 어머니의 신분을 따르게 하였다. 또한 서얼 차별로 인한 사회적 불만 요인을 해소하기 위해 서얼 출신도 관리로 등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국방 정책을 살펴보면 1725년 화폐 주조를 중지하고 군사 무기를 만들도록 했으며, 1729년에는 김만기가 만든 화차를 고치게 하였고, 이듬해에는 수어청에 명하여 조총을 제작하게 했다. 그리고 전라 좌수사 전운상이 제조한 해골선을 통영 및 각 도의 수영에 제작, 배치하도록 하여 임진왜란 때 맹위를 떨쳤던 해군력을 증강시켰다.

이같은 국방 정책은 변방에도 적용돼 요새 구축을 늘리는 한편, 1727년에는 북관군병에게 총을 나누어주고 훈련시켰으며, 1733년에는 평양중성을 구축하게 하였다. 1743년에는 강화도의 외성 개축 작업을 시작하여 이듬해 완료했다.

여러 분야에서 시도된 이같은 변화 이외에도 영조 시대에는 문화적인 성과도 많았다. 영조는 자신이 학문을 즐겼기 때문에 스스로 서적을 찬술하기도 하고, 인쇄술을 개량하여 많은 서적을 간행하여 민간에 반포시켜 일반 백성이 볼 수 있도록 하였다.

1729년에는 '감란록'을 만들고, 이듬해 '숙묘보감'을 편찬하였으며, 1732년에는 이황의 학문 세계를 담은 '퇴도언행록'을 간행케 하였다. 그리고 1736년에는 '경국대전'을 보강했으며, 여성들을 위해 네 권의 책을 묶은 '여사서'를 언역하고, 1742년에는 '천문도', '오층륜도', 이듬해에는 균역의 전형인 '양역실총'을 인쇄하여 각 도에 배포했다.

이외에 '경국대전'을 보수한 뒤 새롭게 제도적으로 바뀐 것들을 반영한 '속대전', 1747년의 '황단의 궤', 관리들의 필독서인 '무원록', 1749년에 만들어진 '속병장도설', 1753년에 편찬된 '누주통의', 영조 자신의 왕위 승통의 정통성을 천명하는 1754년의 '천의소감', 1747년의 '삼국기지도', '팔도분도첩', '계주윤음' 등과 1765년의 '해동악장', '여지도서',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 사전인 1770년의 '동국문헌비고' 등이 있다.

영조 자신이 친히 쓴 글로는 '악학궤범 서문', 자서전인 '어제자성편', 무신들을 위해 쓴 '위장필람', 그리고 '어제경세문답', '어제경세편', '백행원' 등 십여 권의 책이 있다.

한편 이 시기에 재야에서는 실학이 확대되면서 신학문에 조예가 깊었던 영조의 후원을 받아 실학자들의 서적도 편찬, 간행되었다. 1765년 북학파 홍대용의 '연행록'이 편찬되고, 1769년에는 실학의 선구자로 평가되는 유형원의 '반계수록', 신경중의 '도로고' 등이 편찬되었다.

영조는 왕세제 때부터 숱한 당쟁에 휘말리며 온갖 고초를 겪었으나 자신이 처한 위치를 슬기롭게 극복하고 정국을 탕평책으로 주도하면서 이처럼 각 방면에 걸쳐 부흥기를 마련했으며, 177638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그는 조선 27왕 중 가장 오랫동안 왕위에 있었으며(517개월), 가장 장수한 왕이었다. 그는 83세를 사는 동안 정성왕후 서씨를 비롯한 6명의 아내에게서 27녀의 자녀를 얻었다. 능은 원릉으로 현재 경기도 구리시에 있다.

 

 

3. 영조의 가족들

 

영조는 6명의 부인에게서 27녀의 자녀를 얻었는데 정비 정성왕후 서씨와 계비 정순왕후 김씨 등은 아이를 낳지 못해 적출이 없었고, 정빈 이씨가 효장세자를 비롯 11(화순옹주), 영빈 이씨가 사도세자를 비롯 13(화평옹주, 화협옹주, 화완옹주), 귀인 조씨가 1(화유옹주), 숙의 문씨가 2(화령옹주, 화길옹주)를 낳았다.(이들 중 정성왕후 서씨, 정순왕후 김씨 등의 왕후와 효장세자, 사도세자 등의 아들들을 살펴보고 참고로 사도세자의 빈 혜빈 홍씨의 삶을 약술한다).

 

정성왕후 서씨(1692-1757)

달성부원군 서종제의 딸이다. 170413세의 나이로 숙종의 둘째 아들 연잉군과 가례를 올려 달성군 부인에 봉해지고, 1721년 경종이 병약하여 후사가 없어 연잉군이 세제로 책봉되자 동시에 세제빈에 봉해졌으며, 1724년 영조가 즉위함에 따라 왕비에 봉해졌다.

1740년 혜경이라는 존호가 올려졌으며, 175766세의 일기로 세상을 떴다. 소생은 없으며 능은 홍릉으로 경기도 고양시에 있다.

 

정순왕후 김씨(1745-1805)

오흥부원군 김한구의 딸이다. 영조의 정비 정성왕후가 죽자 175915세의 나이로 왕비에 책봉되어 66세의 영조와 가례를 올렸다. 그녀는 소생은 없었고, 영빈 소생의 사도세자를 미워하여 아버지 김한구의 사주를 받아 모함했으며, 나경언이 사도세자의 10가지 비행을 상소하자 그를 서인으로 폐위시켜 뒤주 속에 가두고 굶어죽게 하는 데 지대한 역할을 하였다.

그 후 조정이 사도세자를 동정하는 시파와 그의 치죄를 당연시했던 벽파로 나누어지자 시파를 미워하고 벽파를 옹호하였다.

정조가 죽고 순조가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수렴청정을 했으며, 이 때에 벽파인 공서파와 결탁하여 시파의 신서파 대신들을 모함하였고, 또한 시파 인사들이 많이 관여했던 천주교에 일대 금압령을 내리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이가환 등 천주교 신앙의 선구자들이 옥사당하고 정약종 등이 처형되었으며, 정약전, 정약용 형제는 전라도 지방으로 유배되었다. 그리고 종친 은언군과 그의 부인 및 며느리 등도 같은 이유로 사사시켰다.

그녀는 이렇게 정계의 중심에서 당파와 어울리다가 18056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죽은 후 영조와 함께 경기도 구리시에 있는 원릉에 묻혔다.

 

효장세자(1719-1728)

영조의 맏아들이며 정빈 이씨의 소생이다. 비는 좌의정 조문명의 딸 효순왕후이다. 1724년 경의군에 봉해지고 이듬해 왕세자에 책봉되었으나 172810세의 나이에 병으로 죽었다.

양자인 정조가 즉위한 후 진종으로 추존되었다. 능은 경기도 파주에 있는 영릉이다.

 

사도세자(1735-1762)

영조의 둘째아들이며 영빈 이씨의 소생이다. 이복형인 효장세자가 일찍 죽고 영조의 나이 40세가 넘어서 출생한 탓으로 2세 때 세자에 책봉되고, 10세 때 홍봉한의 딸 혜빈 홍씨와 가례를 올렸다.

그는 3세 때 이미 부왕과 대신들 앞에서 '효경'을 외웠고, 7세 때 '동몽선습'을 독파했다. 또한 서예를 좋아해서 수시로 문자를 쓰고 시를 지어서 대신들에게 나눠줬으며, 10세 때 이미 소론 측이 주도한 바 있는 신임옥사를 비판했다고 한다.

174915세 때 부왕을 대신하여 서정을 대리하였는데, 이때 그를 싫어하던 노론들과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김씨, 숙의 문씨 등이 그를 무고하였다. 성격이 과격하고 급하던 영조는 수시로 그를 불러 꾸짖었고, 이로 인해 그는 정신 질환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는데 궁녀를 죽이고, 여승을 입궁시키거나 몰래 왕궁을 빠져나가 관서 지역을 유람하기도 했다.

장인 홍봉한은 그의 병증에 대해 무엇이라고 꼭 꼬집어서 말할 수 없고, 병이 아닌 것 같은 병이 수시로 발작한다고 하였다. 이같은 말에 비추어 볼 때 사도세자는 일종의 조울증에 시달리고 있었던 듯하다.

그의 돌발적인 행동이 계속되자 1762년 계비 김씨의 아버지 김한구와 그 일파인 홍계희, 윤급 등의 사주를 받은 나경언이 세자의 비행 10조목을 상소하였다. 이에 영조는 분개하여 세자를 죽이기로 결심하고 그를 휘령전으로 불러 자결하라고 명했다. 하지만 그가 부왕의 명을 거부하자 영조는 그를 뒤주에 가둬 8일 만에 굶겨 죽였다. 이때 그의 나이 28세였다.

그가 죽은 뒤 영조는 세자를 죽인 것을 후회하며 그의 죽음을 애도한다는 의미로 그에게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린다. 이후 그의 아들인 정조가 즉위하자 장헌으로 추존되었다가 다시 장조로 추존되었다.

그의 무덤은 처음에 경기도 양주 배봉산 아래에 있다가, 정조 때 수원 화산으로 이전되어 현륭원이라 하였다가 장조로 추종된 뒤 융릉으로 정해졌다.

 

혜빈 홍씨(1735-1815)

영의정 홍봉한의 딸이며 정조의 어머니이다. 1744년 세자빈에 책봉되어 사도세자와 가례를 올렸으며, 1762년 사도세자가 죽은 뒤 혜빈에 추서되었다. 1776년 아들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궁호가 혜경으로 올랐고, 1899년 사도세자가 장조로 추존됨에 따라 경의왕후에 추존되었다.

아버지 홍봉한과 숙부 홍인한은 외척이면서도 세자의 살해를 지지하는 입장에 있었던 까닭에 그녀는 세자의 참담한 운명을 그냥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1795년 남편의 참사를 중심으로 자신의 한 많은 일생을 자서전적인 사소설체로 적은 '한중록'을 남겼다. 이는 궁중 문학의 효시가 되고 있다.

 

 

4. 이인좌의 난

 

이인좌의 난은 17283월 정권에서 배제된 소론의 일부 세력과 남인의 과격 세력이 연합하여 무력으로 정권을 탈취하려 했던 사건이다. 이 사건은 무신년에 일어났다고 하여 무신란이라고도 한다.

이 사건의 원인은 1717년의 정유독대에서부터 비롯된다. 당시 숙종은 희빈 장씨의 아들 세자 균(경종)이 병약한 점을 이유로 왕위가 불안해질 것을 염려하여 노론 당수 이이명과 독대하여 연잉군(영조)으로 하여금 경종의 대를 이을 수 있도록 해달라는 부탁을 한다. 숙종이 죽고 나서 노론 측은 그의 탁명을 받들어 연잉군을 세제에 책봉한다. 그리고 경종이 죽자 연잉군이 왕위에 오르니 그가 영조였다.

경종이 갑작스럽게 죽자 소론은 정치적 기반에 위협을 받게 되었고, 그 때문에 박필현, 이유익, 심유현 등의 과격 소론 세력은 숙종 대의 갑술환국 이후 정권에서 배제된 남인 세력을 포섭하여 영조와 노론 측 대신들을 제거할 계획을 세운다. 그들은 경종의 갑작스런 죽음에 독살 의혹이 있다는 것과 영조가 숙종의 친아들이 아니라는 소문을 퍼뜨리고, 이를 명분으로 영조를 폐하고 밀풍군 탄(소현세자의 증손자)를 왕으로 추대하여 모반을 도모한다. 그들의 이같은 계획은 당을 결속시키고, 모반을 정당화하여 민심을 얻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 일을 위해 1725년부터 박필현 등은 자파 세력으로 간주되는 각 지방의 인물들을 선별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 결과 한성 내부와 각 지방을 대표하는 인물들이 가담하였고, 평안병사 이사성, 금군별장 남태징 등과도 내통하였다.

이들은 경종의 사인에 대한 의혹을 그의 임종을 지켜보았던 경종비 심씨의 동생 심유현의 말과 결부시켜 영조가 경종을 독살했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그래서 전국 곳곳에서 이같은 내용이 흉서나 괴서로 돌아다녔고, 이들은 이를 근거로 양민, 노비, 화적 등을 군사로 모집하였다.

그러나 모반 계획은 1727년 정미환국으로 소론 정권이 들어서면서 약화되었다. 동조자가 줄어들기 시작했고, 급기야 최규서에 의해 모반 계획이 고변되기에 이르렀다. 또한 양성 사람 김중만 등은 역모 세력들의 취군 동태를 파악해 고발하기도 했다. 이에 영조는 모반 가담자들을 색출하는 작업에 돌입했다.

모반 계획이 발설되었음을 안 반역 세력은 먼저 선수를 쳤다. 반란은 1728315일 이인좌가 청주성을 함락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이인좌는 스스로를 대원수로 자칭하고 상여에 무기를 싣고 청주에 진입하여 충청병사 이봉상, 군관 홍림, 영장 남연년 등을 살해하고 청주성을 접수했다.

청주를 장악한 이인좌는 군서봉을 목사로, 신천영을 병사로 삼고 여러 읍에 격문을 보내어 병마를 모집하고 관곡을 풀어 민심을 동요시켰다. 이들은 또 경종을 위한 복수의 깃발을 세우고, 경종의 위패를 설치하여 조석으로 곡배함으로써 반란의 명분을 세웠다.

이인좌를 대원수로 한 반군은 청중에서 목천, 청안, 진천을 거쳐 안성, 죽산으로 향하였다. 이때 권서봉은 안성으로 진출했으며, 신천영은 청주성을 그대로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북상하던 반란군은 안성과 죽산에서 도순무사 오명항이 이끄는 관군에 대패하였다. 또 청주성의 신천영은 창의사 박민웅 등에 의하여 청주성에서 밀려 나와 상당성에서 패하였다. 이로써 이인좌의 반란은 실패로 돌아갔고, 반란을 주도했던 이인좌를 비롯 권서봉, 목함경 등이 생포되었다.

한편 이인좌가 반란을 일으키자 영남 지방과 호남 지방에서도 이에 호응하여 반란이 일어났 다. 영남 지방은 정온의 4대손인 정희량이 장례를 구실로 모병하여 이인좌의 동생 이웅보와 더불어 320일 안음의 고현차에서 일어났다. 이들은 안음현감과 거창현감을 투서로 위협하여 쉽게 이 두 지역을 점령했다. 이어서 합천에 거주하는 정희량의 친척 조성좌 일족의 도움으로 합천, 함양 등 4개 군현을 석권하였다.

사태가 이렇듯 심각한 양상을 띠자 경상감사 황선은 성주목사 이보혁을 우방장으로, 초계군수 정양빈을 좌방장으로 삼아 주변의 관군을 통솔하여 반군을 토벌하기 시작했다. 반군은 거창에서 함양을 거쳐 전라도를 돌아 충청도의 반군과 합류하려 했으나 실패하였다.

그리고 호남 지역의 반군은 태인현감 박필현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는데, 그는 무장에 유배 중이던 박필몽 등과 내통이 되었으나, 전라감사와의 연결에서 실패하였다. 그래서 박필몽은 상주의 촌리에서 체포되어 참형되었고, 박필현은 고부군 흥덕을 거쳐 죽도에 잠복하였으나 곧 체포되어 처단되었다.

이로써 반란군은 진압되었고, 진압에 성공한 관군은 그해 419일 도성으로 환군하였다. 이때 영조는 친히 숭례문까지 나가 진압군을 영접하였다.

이인좌의 반란은 이후 정계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소론 측은 비록 진압에 앞장섰으나 반란군 주모자가 대부분 소론 측 인물이었기 때문에 조정 내에서 입지가 약화되었다. 하지만 영조에게는 탕평책을 더욱 강화시킬 수 있는 명분을 주었기 때문에 왕권은 오히려 강력해졌다. 이인좌의 반란은 결과적으로 영조의 탕평 정국의 기반을 다지게 하는 구실이 되었으며, 영조는 이를 바탕으로 왕권을 강화하고 정국의 안정을 도모할 수 있었다.

 

 

5. 실학의 선구자들

 

역사학의 아버지 순암 안정복(1712-1791)

안정복은 오위도총부부총관을 지낸 안극의 아들로 성화 이익의 문인이다. 그는 1712년 충북 제천에서 태어났으며, 1717년에 외조모상을 당하여 어머니를 따라 외가인 영광의 월산에 갔다가 그곳 농장에서 2년간 생활한다. 그리고 1717년 조부 안서우가 중앙에서 벼슬을 하게 되어 남대문 밖 남정동으로 이사와서 10세가 되던 1721년부터 학문을 시작한다.

그는 그 뒤 할아버지의 임지를 따라 여러 지방을 전전하다가 173625세 때 선영이 있는 경기도 광주 경안면 덕곡리에 정착하였다.

그의 집안은 전통적인 남인 가문이었기 때문에 다른 남인들과 마찬가지로 아버지 때부터 당쟁에 휘말려 벼슬길이 끊겼다. 하지만 그는 어려서부터 경학은 물론 역사, 천문, 지리, 의약 등 다양한 부분에 걸쳐 깊은 식견을 가지게 된다. 그렇지만 과거에는 단 한 번도 응시하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 닦은 학문을 바탕으로 26세 때 '치통', '도통' 등의 책을 엮었다. 전자는 우리 나라 역대 왕조의 변천을 기록한 것이며, 후자는 유교 사상의 계승 계통을 기록한 것이다. 그리고 3년 뒤에는 그동안 연구해온 고전에 관한 연구서로 '하학지남'이라는 저서를, 31세 때에는 여성의 행동 규범에 관한 책인 '여범'을 저술하였다.

이같은 저서를 만든 이후에 그는 자신의 학문이 미진함을 깨닫고 35세에 스스로 남인 집안 출신인 이익의 문하에 들어간다. 이익의 문하에 들어가기 전에 그가 심취하였던 학문은 이황의 사상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황의 보수적 경향이 한계가 있음을 발견하고, 다시 새로운 학문을 추구하며 많은 인재를 양성하고 있던 이익을 찾게 되었다.

안정복은 비록 늦깎이로 이익을 찾았지만 그의 학자적 기풍과 사상의 위대성을 흠모하였기에 진지하고 성실한 자세로 배움에 임했다. 그가 이익의 문하로 찾아들었을 때 이익은 이미 66세의 고령이었지만 학구적 열정만은 대단했다. 그리고 성실한 자세로 자신에게 학문의 진리를 구하는 제자에게 열정을 쏟아부었다.

이익은 그의 질문에 대해 세세하고 정확하게 대답했으며 혹 대답이 부족하다고 느껴지면 여지없이 그에게 편지를 썼다. 그는 이익의 이러한 세밀하고 성의 있는 가르침 덕분으로 학문의 연구 방법을 터득하였으며, 인간 존재에 대한 깊은 사고와 사회에 대한 통찰력, 그리고 실천적 행동의 범위 등에 대한 가치관을 정립할 수 있었다.

비록 재야에 묻힌 생활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사회 전반에 대해 당시의 어떤 학자보다도 정확한 진단을 내리고 있었다. 그동안 익혔던 사학, 천문, 지리, 의약, 종교 등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그는 자주 교류하는 유생들을 놀라게 했다.

그의 뛰어난 자질과 학구적 능력에 대한 소문은 어느새 한성에까지 퍼져 그는 174938세의 나이로 처음 관직에 나갈 수 있었다. 이 때 그가 받은 직책은 강화도에 있는 영조의 별장인 만령전의 참봉이었으며, 이어 내직으로 들어가 조정의 식량 창고의 참사, 중종의 묘를 지키는 직장, 사헌부 감찰, 익위사익찬 등을 역임하고, 다시 외직으로 나와 65세 때 목천현감이 되었다.

관리 생활 중 특히 한직에 속했던 중종의 묘지기(직장) 시절에 그는 왕릉이 있던 경기도 광주의 역사 및 지리에 관한 자료를 모아 '광주지' 두 권을 저술하였다. 이 책은 이익의 영향을 받아 집필한 최초의 실학적 성과로서, 상세하고 정확하게 작성되었기에 전국 각 부와 군, 현의 지방지 편찬에 커다란 자극을 주었다.

이 기간에 그는 또한 역사학에 심취하여 '임관정요'를 완성했다. 이 책은 지방 행정에 관한 위대한 정치가와 학자들의 교훈을 담은 정어, 지방 행정의 모범적인 실례를 기록한 정적, 그리고 현실 속에서 지방 행정의 이상형을 묘사한 시조 등 세 편으로 되어 있다. 그는 이 책에서 실학자들의 정책론을 집약하는 한편, 부패한 지방 관리의 범죄적 행위에 대해 통렬한 비판을 가하고 있다.

그러나 안정복의 획기적 성과는 '동사강목'의 집필이었다. 175645세에 집필에 들어간 이 본격적인 역사서에는 그의 사상뿐만 아니라 이익의 사상도 포함되었다. 그는 이 책을 쓰기에 앞서 여러 번에 걸쳐 스승 이익과 역사 문제에 대해 토론했으며, 스승의 호응 속에 집필을 진행하였다.

집필 도중 그는 종이값이 모자라 작업을 중단해야 하는 지경에 처하기도 했다. 그때마다 그는 스승 이익의 격려를 구했다. 물론 이익 역시 엄청난 가난에 허덕이고 있었으므로 제자에게 경제적 도움을 줄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가 목차를 만들어 결점을 지적해 달라고 하면 마다않고 이에 응해 주었고, 초고를 보내 잘못된 곳을 지적해 달라고 하면 역시 정성을 다하여 이에 응해 주었다. 스승의 극진한 애정과 격려로 가까스로 집필을 이어가던 안정복은 작업을 시작한 지 3년 만인 1759년 드디어 20권의 '동사강목'을 완성하게 된다.

'동사강목'은 상고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의 역사를 다루고 있는데 그 서술 내용이 과거의 것과는 판이하다. 우선 이전의 역사서들이 한결같이 '삼국사기''고려사', '동국통감' 같은 정사를 베끼거나 추려낸 것인데 비해 '동사강목'은 이 정사에 잘못 기록된 내용들을 찾아내 통렬하게 비판하는가 하면, 그때까지 일개 스님의 저작으로 사서 편찬에 전혀 참조조차 하지 않았던 일연의 '삼국유사'의 내용과 고대사에 관련된 야사들을 과감하게 인용하였다. 그리고 각 책들을 대조하며 그 문헌의 출처를 명확히 하고 내용에 관한 비판을 곁들였다. 한 예로 전라도에 사는 기씨가 기자의 자손으로 기술되어 있는 역사서를 통렬히 비판하며, 전라도의 기씨와 기자와는 전혀 무관하며 이는 기씨 자손들이 스스로 기자의 자손인 것처럼 꾸며 역사를 위조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는 이 책을 완성한 후 다시 한번 대단히 위험한 작업에 착수했다. 그것은 당시 일체 금지되어있던 조선의 역사에 대한 책을 집필하는 일이었다. 말하자면 기존의 역사 학자들이 전혀 시도하지 않았던, 당시로 보면 현대사의 기술에 착수했던 것이다. 이 책의 이름은 '열조통기' 였다. 조선 태조부터 영조까지의 조선사에 해당하는 이 책의 편찬을 위해 그는 9년 동안 자료를 모으고 그 사료들을 기초로 176756세 때 집필에 들어갔다. 그는 역대의 각종 저술에 있는 논설을 발췌하여 그대로 인용하고 필자의 주관적인 견해를 전혀 첨가하지 않는 방법으로 이 책을 편찬하였다. 말하자면 철저한 객관적인 시각을 고수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는 이미 이익이 세상을 떠나고 없었기에 그를 격려할 사람도 없는 상태였다. 그렇지만 그의 고독한 작업은 계속되어 마침내 이 책을 완성할 수 있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 위대한 저서가 세상에 유포되지도 못한 채 초고 상태로 묻혀버리고 말았다. 다만 그의 독특한 편찬 방법은 세간의 학자들에게 큰 충격을 주어 역사서 편찬 방법에 일대 전환을 가져다주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 밖에 야사적인 측면이 강한 '잡동산이', '성호사설유선' 등도 안정복을 이해하는데 빼놓을 수 없는 저작들이다. 또한 그의 문집에 수록되어 있는 '천학고', '천학문답' 등은 그의 주변을 위협하였던 천주교 박해와 그와 비슷한 전통적 조선 학자의 서학에 대한 인식을 살펴보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18세기 후반에 살면서 사상적으로 무던히도 고민하였던 그는 이같은 많은 저서들을 남겨놓고 17918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조선의 전통적 봉건 체제가 위협받고 중국으로부터 서학이 밀려들어 가치관이 혼재되고 세계관이 충돌하는 가운데, 그는 유교적 견지에서 제도적 모순을 해결하고 사회를 합리적으로 개선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위대한 학자였다. 하지만 세계의 변화에 아주 민첩하지는 못했고, 여전히 유학에만 매달려 있었기에 자체적인 한계를 드러내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의 끈질긴 실학 정신은 후대로 이어져 민족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사회에 대한 새로운 가치관 형성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새 하늘을 연 홍대용(1731-1783)

홍대용은 서인 노론파로서 목사를 지낸 바 있는 홍역의 아들로 1731년에 태어났으며, 자는 덕보, 호는 담헌, 홍지이다. 그는 지구가 움직인다는 지전설과 우주무한론을 주장하였으며, 이 같은 사상을 바탕으로 인간도 대자연의 일부로서 다른 생물과 다를 바없는 존재라고 주장했다.

그는 당대의 유학자 김원행으로부터 배웠으며, 그의 사상은 북학파의 실질적 모체인 박지원에게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는 몇 번에 걸쳐 과거에 응시한 바 있으나 그 때마다 실패하였다. 177443세 때 음보로 종 9품의 선공감 및 세손익위사시직이 되어 처음으로 관직에 나갔다. 이어 1777년 사헌부 감찰이 되었으며 그 뒤 태인현감, 영천군수 등을 지내다가 178353세를 일기로 세상을 뜬다.

그가 이른바 북학론을 주창할 수 있었던 것은 1765년 겨울에 북경을 방문할 기회를 가졌던 덕분이다. 성인이 된 뒤 천문학 연구에 열을 올리고 있던 그는 선진의 학문과 서학을 접하고 싶은 욕구에 가득 차 있었고, 이 때문에 평소 청나라에 다녀와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차에 그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조정이 정기적으로 파견하는 청나라 사절단에 그의 숙부인 홍억이 서장관으로 지명되자 그는 홍억의 비서역으로 북경을 방문한다. 12월에 북경에 도착한 사절단 일행은 이듬해 2월까지 그곳에서 머물렀는데, 이 기간 동안 그는 그곳의 학자들과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홍대용과 교류를 나눈 사람은 육비, 엄성, 반정균 등 청나라 문인이었다. 그는 이들과 필담을 주고받으며 유학에 관한 이론적인 문제를 비롯하여 역사, 종교, 풍속 등에 관해 집중적으로 토론하였다. 그는 이 필담을 정리하여 '건정필답'이라는 한 권의 책으로 묶었다.

한편 그는 북경에 체류하면서 청나라의 국립 천문대인 '흠천감'을 방문하여 그 책임 부성에 있는 두 사람의 독일인에게서 서양의 지식을 직접 전해듣고, 자신이 홀로 연구해온 천문학에 관한 의견을 들려주기도 했다. 그리고 그들의 소개로 북경의 천주교 교회에 있던 많은 천문학 전문서와 천체 관측 시설을 돌아본다.

흠천감에서 특히 그의 눈길을 끈 것은 관상대였다. 그 내부는 외부인에게 공개될 수 없는 곳이었지만 그는 밤을 새우며 그곳 관리에게 부탁해 마침내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거기에는 중국 역대의 천제 관측 기구는 물론이고 유럽에서 들여온 것들도 많았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가 받은 충격은 매우 컸다. 그는 그 기구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새로운 세계를 발견한 듯한 감동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이후 북경에서 돌아온 홍대용은 청에서 사귄 친구들과 꾸준히 서신을 주고받으며 자신의 학문을 새로운 경지로 끌어올렸다. 자신의 경험담에 감동을 받아 북경 방문을 염원하던 이덕무, 박제가 등이 사절단으로 청나라를 방문할 때 북경 친구들에게 편지를 보내 그들의 안내를 부탁하기도 했다.

홍대용은 북경의 세 친구들과 주고받은 편지 내용들을 모아 '항전척독'이라는 제목으로 책을 엮었다. 그리고 북경 방문의 내용을 집약시켜 '연기'를 편찬했는데, 이는 박지원에게 영향을 미쳐 '열하일기'를 탄생시키게 된다.

또 그의 과학 사상을 담은 '의산문담' 역시 북경 방문에서 얻은 과학적 지식을 중심으로 서술한 것이다. 의무려산에 사는 실옹과 조선의 학자 허자 사이의 대화 형식으로 이루어진 이 글은 그가 북경 방문길에 들른 의무려산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처럼 그의 모든 저서들은 60여 일 동안 머물렀던 북경에서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다. 곧 그에게는 북경 방문이 새 하늘이 열리는 일이었고, 새땅을 꿈꿀 수 있는 기반이 되었던 것이고, 그런 그의 사상이 집약되어있는 문집이 '담헌서'이다. 여기에서 그는 지구가 움직인다는 지전설을 주장했고, 인간도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하나의 생명체에 불과하다는 생명론,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 아니라 우주는 무한하다는 우주무한론을 주장했다. 이러한 그의 사상은 상대주의적 자연관에 근거한 것으로 정치, 경제, 사회, 사상에 이르기까지 확대된다. 그는 세계를 바라보면서 중국과 서양을 모두 같은 선상에 놓고 상대화하여 서구에 대한 오랑캐 개념을 부정했으며, 인간과 자연은 어느 쪽이든 더 우월한 존재는 아니라는 주장을 펼침으로써 종래의 인본주의적 사고방식을 부정하고 인간과 다른 생명체를 상대화하여 평등한 존재로 보았다. 또한 사회의 계급과 신분적 차별에 반대하면서 교육의 기회는 누구에게나 균등하게 부여되어야 하며 재능과 학식에 따라 직업이 주어져야 한다는 사회 정치 이론을 펼쳤다.

그의 사상과 과학관은 당시로서는 독창적인 것이었다. 물론 서양 과학과 도교 사상의 영향이 컸겠지만 양반 가문에 태어난 학자가 계급 철폐를 주장하고, 균등한 교육과 능력에 다른 관리 등용을 주장한 것은 참으로 대단한 일이었다. 그리고 지전설과 우주무한론 등은 비록 그 감상주의적 일면에도 불구하고 후대의 과학 발전에 많은 긍정적 영향을 끼쳤다.

 

 

6. '영조실록' 편찬 경위

 

'영조실록'은 총 12783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17248월부터 17763월까지 영조 재위 517개월 동안의 역사적 사실을 편년체로 기록하고 있다.

편찬 작업은 17782월에 시작되어 17818월에 완료되었다. 편찬 인원은 총재관 김상철, 서명선, 이은, 이휘지, 정존겸 등 5인을 비롯하여 도청당상 17, 도청낭청 19, 각방당상 27, 각방낭청 58, 등록낭청 37, 분판낭청 30인을 합해 총 183인이었다.

 

영조 시대의 세계 약사

영조 시대의 세계 정세를 살펴보면 우선 동아시아는 서서히 유럽과의 무역을 허락하고, 인도는 영국에 의해 식민지로 전락해간다. 한편 유럽에서는 영국의 힘이 강성해지고 상대적으로 프랑스의 힘이 약화된다. 그리고 많은 근대 사상가들이 나타나 자본주의 정신을 형성하기 시작한다. 이에 따라 아메리카에서는 독립에 대한 열망이 가속화되어 마침내 대륙회의가 조성된다.

문화면을 살펴보면 문학적으로는 독일의 괴테와 레씽이 부상하고, 음악적으로는 모차르트, 바흐, 헨델, 하이든 등의 대가들이 활동한다. 한편 증기기관, 방적기 등의 산업 관련 발명품들이 쏟아지고, 화학적 원소들을 발견하는 등 과학 분야에서 많은 발전이 이루어진다.

 

 

22대 정조실록

 

1. 정조의 문화 정치와 실학의 융성(1752-1800, 재위 기간 17763-18006, 243개월)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항상 죽음의 위협에 시달리며 왕위에 오른 정조는 문예 부흥을 통해 새로운 정치를 구현하려 한다. 그의 이 같은 문화 정치를 가능케 했던 것은 규장각과 실학자들이었다. 하지만 이에 대한 노론 권신들의 반발도 만만치 않게 전개된다.

정조는 1752년 영조의 둘째아들 사도세자와 혜빈 홍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름은 산, 자는 형운으로 17598세의 나이로 세손에 책봉되었다. 그리고 1762년 아버지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자 횡사한 영조의 맏아들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되어 제왕 수업에 들어갔다. 이후 177582세의 연로한 영조가 대리 청정을 시켰고, 이듬해 3월 영조가 죽자 그는 25세의 나이로 조선 제22대 왕에 즉위했다.

아버지 사도세자가 당쟁에 희생되었듯이 정조 역시 항상 죽음의 위협 속에서 세손 시절을 보내야 했다. 그는 이 기간 동안 홍국영 등의 도움을 받으며 가까스로 목숨을 지켜나갔고, 철저히 내면을 숨기며 살았다. 그래서 '개유와'라는 도서실을 마련하여 청나라 건륭 문화에 열중하면서 전혀 정치적 발언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왕위에 오르자 그의 태도는 달라졌다. 11세 이후 줄곧 가슴앓이로만 간직했던 아버지에 대한 복수를 감행하는 한편, 파당을 배격하고 새로운 인물들을 대거 등용해 친위 세력을 형성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는 즉위하자마자 규장각을 설치하여 문화 정치를 표방하는 한편, 그의 즉위를 방해하던 정후겸, 홍인한, 홍상간, 윤양로 등을 제거하고, 사도세자의 존호를 장헌세자로 바꾸었다. 또한 세손 시절부터 줄곧 그를 경호하던 홍국영을 동부승지로 전격 기용했다가 다시 도승지로 승격시켰으며, 날랜 병사들을 뽑아 숙위소를 창설하여 왕궁을 호위하게 하고, 홍국영으로 하여금 숙위대장을 겸직하도록 했다.

이처럼 정조의 신임을 한몸에 받은 홍국영은 실권을 장악하게 되자 삼사의 소계, 팔도의 장첩, 묘염, 전랑직의 인사권 등을 모두 총괄하였고, 이에 따라 백관들은 물론 8도 감사나 수령들까지도 그에게 머리를 숙이게 되었다. 그리고 누이동생을 정조의 후궁이 되게 함으로써 정권을 한 손에 쥐게 되었다. 모든 관리들은 그의 명령에 따라 움직였으므로 이른바 '세도'라는 말이 생겨나게 되었다.

하지만 홍국영의 세도 정치는 오래가지 못했다. 그가 정조의 후궁으로 바친 누이동생 원빈은 입궁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죽었고, 정조 또한 그에게 권력이 지나치게 집중되는 것을 경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조는 그가 스스로 조정에서 물러날 것을 권고하기도 했다. 하지만 홍국영은 오히려 정권을 독점하기 위해 왕비 효의왕후를 독살하려는 계획까지 세웠다가 이것이 발각되어 1780년 집권 4년 만에 가산을 몰수당하고 전리로 방출되었다.

정조는 홍국영의 4년 세도정치 기간 동안 충실히 규장각을 확대하고 인재를 끌어모았다. , 모든 신하들의 눈을 홍국영에게 집중시킨 다음, 자신은 앞으로 펼칠 문화 정치를 위해 치밀한 준비를 했던 것이다. 이는 그가 고의로 홍국영의 세도 정치를 부추기거나 방치했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다.

그가 규장각을 설치한 것은 단순한 왕실 도서관을 얻고자 함이 아니었다. 그는 규장각을 통해 인재를 모아 외척과 환관들의 역모와 횡포를 누르고 새로운 혁신 정치를 펼치려 했다. 말하자면 규장각은 정조의 근위 세력을 양성하는 곳이었다.

1776년 설치된 이래 규장각은 급속도로 규모가 확대되었으며, 기능도 다양해졌다. 창설 초기에는 사무청사인 이문원 등을 내각으로 하여 활자를 새로 만들거나 편서, 간서 등의 업무를 주관하게 하고, 주로 출판의 일을 맡아보던 교서관을 외각으로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내, 외각의 기능이 정착되자 3년 뒤인 1779년에는 규장각 외각에 검서관을 두고 그곳에 박제가 등의 서얼 출신 학자들을 배치하여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개국 이래로 능력과 학식에 상관없이 입신의 길이 막혀 있던 서얼들에게 조정으로 진출할 수 있는 새로운 길을 터줌으로써 사회의 분위기를 집안과 당파 위주가 아닌 능력과 학식 중심으로 끌고 갈 수 있었다.

정조는 규장각을 운영하면서 당하관의 소장 관원 중 우수한 인재를 뽑아 초계문신이라 칭하고, 매월 두 차례 시험을 실시하여 상벌을 내리는 방법을 택했다. 또한 각 신하들은 초계문신의 시험관이 되게 했으므로 규장각은 실질적인 경연관으로 왕과 정사를 토론하고 교서 등을 대리 찬술하는 일에서부터 편서와 간서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업무를 수행했다.

1780년 홍국영이 제거될 무렵, 규장각은 어느 정도 제자리를 찾고 있었고 규장각에 모여든 인재도 적지 않았다. 그 무렵 정조는 친정 체제를 구축할 필요성을 느끼고 홍국영을 방출시킨다.

홍국영을 방출시키면서 친정 분위기를 정착시킨 정조는 그동안 시험 가동한 결과를 바탕으로 1781년부터 본격적으로 규장각 확대 작업에 돌입했다. 그가 후에 규장각 설립 취지에서 밝힌 바대로 '승정원이나 홍문관은 근래 그 선법이 해이해져 종래의 타성에 젖어 있으므로 왕이 의도하는 혁신 정치의 중추로서의 규장각'이 되기 위해 박차를 가했다.

1781년 규장각 청사는 모든 청사 중에서 가장 넓은 도총부 청사로 옮겨졌으며, 강화사고 별고를 신축하여 외규장각으로 삼았다. 또한 내규장각의 부설 장서각으로 조선본을 보관하는 서고와 중국본을 보관하는 열고관을 세워 내외 도서를 정리하여 보관하도록 했다. 한편 규장각에 속한 각 학자들은 승직 이상의 대우를 받으며, 아침저녁으로 왕을 문안하였고, 신하와 왕의 대화 시에는 사관으로서 왕의 언동을 기록하기도 했다.

이로써 정조는 규장각을 홍문관을 대신하는 학문의 상징적 존재로 부각시켜 홍문관, 승정원, 춘추관, 종부시 등의 기능을 점진적으로 부여하면서 정권의 핵심적 기구로 키워나갔다. 이른바 '우문지치(학문 중심의 정치)''작성지화(만들어 내는 것을 통해 발전을 꾀함)'라는 규장각의 2대 명분을 앞세우고 본격적인 문화 정치를 추진하고 인재를 양성하고자 한 것이다.

정조의 이 같은 규장각 중심의 정치는 영조의 탕평책을 계승하고 있었고, 이 때문에 당쟁은 사색당파에서 시파와 벽파의 갈등이라는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 영조 때 형성되었던 외척 중심의 노론은 끝까지 당론을 고수하며 벽파로 남고, 정조의 정치 노선에 찬성하던 남인과 소론 및 일부 노론이 시파를 형성하였던 것이다. 시파는 '시류에 영합한다'는 의미로 붙여진 이름이고, 벽파는 '시류는 무시하고 당론에만 치우쳐 있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정조는 학문적으로 육경 중심의 남인 학파와 친숙하였고, 예론에서도 왕권의 우위를 주장하던 남인 학파 내지 남인 정파와 밀착될 소지를 충분히 안고 있었다. 그리고 신권을 주장하였던 노론 중에서도 젊은 자제들이 북학 사상을 형성하고 있었으므로 그들의 학자적 소양에도 호응하고 있었다.

정조가 중용하였던 대표적인 사람은 남인 계열의 채제공을 비롯하여 실학자 정약용, 이가환 등과 북학파의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 등이었다.

이처럼 정조가 남인에 뿌리를 둔 실학파와 노론에 기반을 둔 북학파 등 모든 학파의 장점을 수용하여 정국을 이끌어가자 조정은 당연히 정조의 통치 이념에 찬성하던 시파 중심으로 운영될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벽파는 자신들의 위기 상황을 실감하고 종전보다 훨씬 더 똘똘 뭉치는 현상이 일어났다.

그러던 중 벽파는 1791년에 일어난 신해박해를 기점으로 서서히 힘을 회복하기 시작했다. 신해박해는 천주교 수용 여부에 대한 논란 끝에 결국 수용불가 결정이 나면서 일어났다.

전라도 진산의 윤지충은 양반으로서 천주교를 신봉하던 인물이었는데, 모친상을 당하자 천주교 의식에 따라 상을 치렀다. 이 일로 그는 맹렬한 비난을 받았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인척이자 같은 천주교인이던 권상연이 그를 비호하고 나서면서 이 문제는 정치 쟁점화되어 조정은 서구 문화 수입을 공격하던 공서파(벽파)와 천주교를 신봉하거나 묵인하던 신서파로 갈라져 정면충돌하였다.

이에 정조는 사태의 심각함을 인식하고 권상연과 윤지충을 국문케 하여 사형시켰다. 이 때문에 조정의 대세는 벽파 쪽으로 기울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4년 뒤인 1795년 중국인 신부 주문모의 밀입국 사건으로 벽파는 또 한 번 기세를 떨치게 된다.

이때 남인의 실학자로서 차기 정권의 주자로 인식되고 있던 정약용이 정치적으로 수세에 몰려 외직으로 나가게 되고, 채제공 등의 중신들도 입지가 크게 약화되었다. 1799년 채제공이 죽자 남인 세력은 완전히 위축되었고, 이듬해 정조가 죽음으로써 남인은 거의 축출당한다.

그나마 친위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시파들 역시 일부 노론 출신의 외척 세력만 남고 대부분 정계에서 밀려나게 된다.

이렇게 해서 24년 만에 정조의 문화 정치는 막을 내렸다. 그러나 그가 남겨놓은 크나큰 업적들이 있었다.

우선 규장각을 중심으로 임진자, 정유자, 한구자, 생생자, 정리자, 춘추관자 등의 새로운 활자들이 만들어졌고, 영조 때부터 지속적으로 추진되어 오던 문물 제도 정비 작업이 완료되었다. 그 결과물들이 이때 편찬된 '속오례의', '증보동국문헌비고', '국조보감', '대전통편', '문원보불', '동문휘고', '규장전운', '오륜행실' 등의 책들이었다.

한편 그의 문화 정치는 중인 이하의 평민들에게도 영향을 미쳐 위항 문학을 낳기도 했다. 인왕산의 경아전을 중심으로 형성된 중인 이하의 위항인들이 귀족 문학으로만 인식되던 한문학의 시단에 대거 참여하여 '옥계시사'라는 그들 독자의 시사를 결성하고 그들만의 공동 시집인 '풍요속선'을 발간하는 등 대단한 문화적 발전을 도모했던 것이다.

정조 시대는 이처럼 양반, 중인, 서얼, 평민층 모두가 문화에 대한 관심을 집약시킨 문예 부흥기였다. 그러한 문예 부흥을 가능하게 했던 근본적인 동력은 병자호란 이후 청을 오랑캐로 인식하던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 사상이 사라지고 민족주의가 고개를 들어 독자적인 문화를 이룩해나가는 과정에서 형성된 자긍심이었다. 이러한 경향은 18세기 문화의 전반에서 뚜렷하게 나타나는데, 이를테면 그림에서는 '진경산수'라는 국화풍, 글씨에서는 '동국진체'라는 국서풍이 유행했다.

이는 조선 성리학의 고유화에 따른 조선 문화의 독자성의 발로이며, 이러한 축적 위에서 정조의 학자적 소양에서 기인하는 문화 정챌의 추진과 선진 문화인 건륭 문화의 수입이 자극이 되어 조선 후기는 문화적 황금시대를 이룰 수 있었다.

이처럼 문예 부흥의 선봉에 서 있었던 정조는 18006, 49세가 되던 해에 지병으로 앓고 있던 종기가 도져 세상을 떴다. 그는 효의왕후를 비롯한 3명의 부인에게서 3명의 자녀를 얻었으며, 능은 건릉으로 경기도 화성에 있다. 대한 제국 성립 후 황제로 추존되어 선황제가 되었다.

 

 

2. 정조의 가족들

 

정조는 효의왕후 김씨를 비롯하여 3명의 부인에게서 3명의 자녀를 얻었는데, 효의왕후는 자식을 낳지 못했으며, 선빈 성씨가 문효세자, 수빈 박씨가 세자 공(순조)과 숙선옹주를 낳았다.

이들 중 문효세자는 어린 나이에 죽은 탓으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생략하고, 효의왕후의

삶을 간추려 적는다.

 

22대 정조 가계도

영조와 영빈 이씨의 차남인 장조(장헌<사도>세자)3명의 부인(혜빈 홍씨, 숙빈 임씨, 경빈 박씨)이 있으며, 혜빈 홍씨 사이에서 차남인 제22대 정조가 태어났다. 3명의 부인은 효의왕후 김씨(자식 없음)와 문효세자(일찍 죽음)를 낳은 의빈 성씨 그리고 제23대 순조와 숙선옹주를 낳은 수빈 박씨가 있었다.

 

효의왕후 김씨(1753-1821)

좌참찬 김시묵의 딸이다. 176210세 때 세손비로 책봉되어 정조와 어의동 본궁에서 가례를 올렸으며, 1776년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왕비로 진봉되었다. 그녀는 효성이 지극하여 시어머니 혜빈 홍씨를 지성으로 모셨기에 궁중에서 감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고 전해진다. 또한 우애가 극진하여 고모인 화완옹주가 그녀를 몹시 괴롭혔지만 조금도 개의치 않았고, 왕가의 자녀들을 돌보는 데 정성을 아끼지 않았다.

성품이 고결하고 사적인 감정에 치우치지 않아 사가에 내리는 은택을 매우 신중하게 처리하였다. 그래서 수진궁과 어의궁에 쓰고 남는 재물이 있어도 궁중의 물품은 공물이라 하여 일체 사가에 보내지 않았다 한다.

그러나 자녀를 생산하지 못한 채 18216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일생을 검소하게 보냈으며, 생전에 여러 차례 존호가 올려졌으나 모두 거절하였다. 능은 경기도 화성의 건릉이다.

 

 

3. 실학의 융성과 새로운 시대를 꿈꾸던 사람들

 

실학은 조선 후기에 대두된 일련의 현실 개혁적 사상 체계를 말하는 것으로, 정주성리학에 바탕을 둔 사회 체계의 한계성을 극복하고 현실 속에서 얻은 지식을 바탕으로 새로운 시대를 구현하려는 공통성을 갖고 있다.

이수광, 유형원 등을 선구로 시작된 이 같은 실학은 이익, 안정복, 박세당, 홍대용을 거쳐 박지원, 정약용, 이덕무, 박제가에 이르러 집대성되고 19세기 말의 개화 사상가들에 의해 재발견된다.

이들에게서 특징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무엇보다도 조선 사회의 정주성리학적 질서와 다른 새로운 것을 추구했다는 점이다. 이들은 모두 새로운 사회 건설을 통한 새로운 시대를 염원했다. 이들 중 대표적인 인물인 박지원, 정약용 그리고 박제가의 삶을 간단하게 알아보고자 한다. 실학의 범위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양에 달하기 때문에 실학 자체에 대한 분석과 소개는 생략한다. 또한 이들 세 사람에 대한 서술 역시 간단한 이력 소개의 차원을 넘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굳이 이들의 이력을 덧붙이는 것은 정조 시대를 이해하는 데 어느 정도 도움이 될 수 있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북학파의 거장 박지원(1737-1805)

박지원은 1737년 한성 서쪽 반송방의 야동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학자와 고관을 배출한 명문이었다. 5대조 박미는 문예 서도의 대가로서 선조의 부마이기도 했다. 그리고 할아버지 박필균은 정2품의 지돈녕부사를 지냈다. 하지만 아버지 박사유는 그가 어릴 때 미처

관직에도 임용되지 못하고 요절하였으며, 어머니 역시 일찍 세상을 떴다.

그는 부모를 일찍 여읜 탓으로 조부에 의해 양육되었다. 조부 박필균은 노론 측 인사였지만 당쟁을 싫어했던 탓에 당론 시비에 휘말리는 일이 없었고, 또한 청렴하여 축재에 관심이 없었으므로 가난하게 살았다. 이런 조부의 가르침을 받으며 그는 건강하고 영민한 청년으로 성장해 175216세 때 이보천의 딸과 혼인했다. 이보천은 비록 벼슬에는 나가지 않았지만 사람 보는 눈이 좋고 성품이 뛰어난 선비였다. 그는 박지원의 인물됨을 알아보고 교리로 있던 아우 이양천에게 부탁하여 그에게 학문을 가르치게 하였다. 그는 이양천에게 주로 사기를 비롯한 역사 서적을 배웠고, 문장 쓰는 법을 터득하여 많은 논설을 습작하였다. 그리고 처남 이재성과 학문을 교제하며 서로 충실한 조언자 역할을 하였다.

1760년 조부가 죽자 생활은 더욱 곤궁해졌다. 그리고 1765년 과거에 응시했으나 낙방하였고, 이후 과거에는 뜻을 두지 않고, 오직 학문과 저술에만 전념하였다.

1768년에는 집을 팔고 백탑 근처로 이사하였는데 그곳에서 박제가, 이서구, 서상수, 유득 공, 유금 등과 학문적 교유를 가졌다. 그리고 이 시기를 전후하여 당대 최고의 학자 홍대용, 이덕무, 정철조 등과 자주 토론하였고 또한 유득공, 이덕무 등과 어울려 서부 지방을 여행하기도 한다. 이 당시 정국은 홍국영이 세도를 잡고 있었고, 그 때문에 노론 벽파에 속했던 그의 생활은 더욱 어렵게 되어 생명의 위협까지 느끼는 상태가 되었다. 그는 위협을 피해 황해도 금천의 연암협에 은거하게 되었는데, 이때부터 그의 아호가 연암으로 불려지게 되었다.

그는 연암협에 있는 동안 농사와 목축에 대한 장려책을 정리하였다. 그리고 1780년 처남 이재성의 집에 머물러 있다가 삼종형 박명원이 청의 고종 70세 진하 사절 정사로 북경을 갈 때 수행하여 압록강을 거쳐 북경, 열하를 여행하고 돌아왔다. 이때 보고 들은 내용을 정리한 것이 열하일기이다.

그가 자원하여 청을 다녀온 것은 홍대용의 영향 때문이었다. 홍대용은 그에게 중국 여행담을 들려주면서 그곳의 산업과 과학, 그리고 신학문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시켰다.

그가 쓴 열하일기는 1780624일 압록강을 건너는 정면에서 시작된다. 요동의 성경(봉천)과 산해관을 거쳐 북경으로 가고, 거기서 다시 청황제의 피서지인 열하에 도착하였다가 북경으로 되돌아오는 820일까지 약 두 달 동안의 여행 체험을 날짜별로 기록하고 있으며, 특별한 부분은 별도 항목을 마련하여 덧붙여 놓았다. 이 저술로 인하여 그의 명성이 선비들의 입에 오르내리기도 하였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호된 비판을 받기도 한다.

그 후 1786(정조 10) 50세에 음서로 선공관 감역에 재수되면서 녹봉을 받는 관리가 된다. 1789년에는 평시서주부, 1791년에는 한성부 판관, 이듬해에는 안의현감, 1797년에는 면천군수 그리고 1800년에는 양양부사를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18056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그는 안의현감 시절에 북경여행을 토대로 실험적 작업을 시도했으며, 면천군수 재직 시에는 '과농소초', '한민명전의', '안설' 등을 저술한다. 열하일기와 더불어 이 책들 속에는 그의 현실 개혁에 대한 포부가 잘 나타나 있다.

북학 사상으로 불리는 그의 주장은 비록 적대적 감정이 쌓여 있긴 하지만 청의 문명이 우리의 현실을 풍요롭게 한다면 과감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다. 또한 청이 조선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인식의 잘못을 비판하면서 그 개선책을 제시하고 있으며, 역대 중국인들의 우리 민족에 대한 왜곡된 시각을 바로잡는 방법을 서술하기도 했다.

이 같은 그의 현실주의적인 사상은 노론들에 의해 많은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정조 대의 젊은 선비들에 의해 긍정적으로 수용되어 북학파를 형성하는 중심 사상이 되었다. 그의 현실 개혁적 사상은 '연암문집'에 수록되어있는 '허생전', '민옹전', '광문자전', '양반전', '김신선전', '역학대도전', '봉산학자전' 등의 소설 속에 잘 용해되어 당대와 후대 학자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이 소설들은 대개 시대상을 풍자하면서 새로운 시대에 접근하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는데. '양반전'에서는 조선 봉건 사회의 와해와 그 속에서 기득권을 주장하며 군림하는 사대부 계층이 처한 현실과 한계점을 잘 지적하고 있고, '허생전'에서는 허위적 북벌론을 배격하면서 중상주의적 사상을 통해 이상향을 추구하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소설들은 그의 사상을 나타내는 이론의 근거이자 배타적으로 인식한 조선 사회의 현실과 이상향으로 추구한 새로운 사회에 대한 염원을 표출한 것이다. 따라서 당대 지배층의 사고 방식과 많은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었고, 그것은 그의 저술들이 오랫동안 불온한 서적으로 취급된 이유가 되었다.

그의 문집이 처음 공간된 것은 그가 죽은 지 1백 년이 지난 1900년이었다. 손자 박규수가 우의정을 지낸 인물이었지만 내용이 불온하다는 이유로 '연암문집'은 그때까지 간행되지 못하다가, 20세기 벽두에 김만식을 비롯한 23인의 학자들에 의해 겨우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다.

 

실학의 최고봉 정약용(1762-1836)

정약용은 1762616일 경기도 광주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정재원은 진주목사를 지내다가 그가 태어날 무렵에 대다수의 남인들과 마찬가지로 당쟁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향리에 묻혀 살고 있었다. 그러나 1776년 정조가 즉위하여 정권에서 쫓겨난 남인들이 다시 등용되자, 정재원도 호조좌랑에 임명되어 한성으로 올라가게 되었다.

정약용은 아홉 살이 되던 1770년에 어머니 윤씨를 여의었다. 그리고 1776년 정조가 등극하던 해에 승지 홍화보의 딸과 결혼했다.

한양에 올라온 그는 외가를 자주 찾았다. 그의 외조부 윤두서는 문인으로 명망이 높았고, 잘 알려진 문인 화가이기도 했으며 장서가로도 유명했다. 정약용이 외가를 드나들었던 이유는 바로 윤두서가 소장했던 책들을 읽기 위해서였다.

그는 열정적인 독서를 통하여 고전을 섭렵하는 한편 친형 정약전과 그 친구들과의 교유를 통해 많은 지식을 쌓았다. 정약전의 친구 가운데 이승훈이 있었고, 또 이승훈의 소개로 이익의 종손 이가환을 알게 되었다. 이가환은 이익의 실학을 계승한 유능한 학자로 당시 젊은 유생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그들과의 교제는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다. 호조좌랑이 된 아버지는 곧 다시 전라도 화순의 지방관으로 발령이 났고, 그도 역시 아버지를 따라 화순으로 내려가야 했기 때문이다. 1781년 스무 살 때 과거를 치렀지만 떨어졌고, 이듬해 다시 응시하여 초시와 회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었다. 생원으로서 벼슬길에 오른 지 3년 뒤인 1784년 정조의 부름을 받아 경연석에서 '중용'을 강의하면서부터 파란 많은 삶이 시작된다.

이후의 그의 삶은 대체로 3기로 나눠질 수 있다. 1기는 정조의 총애를 한 몸에 받으며 벼슬살이를 하던 득의의 시절이고, 2기는 정권에서 밀려나 귀양살이를 하던 시절이며, 3기는 고향으로 돌아와 학문에 전념하던 시절이다.

정약용은 생원이 된 이후 17893월에 정조 앞에서 치른 전시에서 합격하여 초계문신의 칭호를 얻었으며, 그 해에 종7품의 부사정을 거쳐 정7품의 가주서에 임명되었다. 그는 이때 큰 배를 강에 나란히 띄워 가교를 만들 수 있는 설계도를 그리고 배다리를 준공해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리고 1791년 정6품의 사간원 정언에 제수되고, 이듬해에는 홍문관 수찬에 임명되었다. 이때 그는 수원성 수축에 동원되어 설계를 도맡았으며, 기중기를 제작해 공사 기간을 단축하기도 했다.

1793년 수원성 수축 도중에 아버지 정재원이 임지 진주에서 세상을 뜨자 그는 이듬해 7월까지 상을 마치고 다시 정5품의 성균관 직강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그해 10월에 왕의 특명을 받아 경기 암행어사가 되어 연천 지방의 서용보 일당의 범죄 사실을 보고하여 그를 해직케 했다. 하지만 이때 해직당한 서용보는 앙심을 품고 혈안이 되어 여러 차례 그를 죽이기 위해 모략을 꾸미게 된다.

암행어사 일을 마친 그는 1795년 정3품의 병조참의에 오른다. 하지만 이때 청나라 신부 주문모잠입 사건이 발생해 충청도 금정의 찰방으로 좌천되었다. 그 후 규장각 교서로 돌아와 편찬과 교정 업무에 종사했고, 천주교 문제가 다시 정쟁의 핵심으로 떠올라 17976월 재차 황해도 곡산부사로 임명되어 떠나야 했다. 이 곡산부사 생활을 하며 그는 뛰어난 목민관의 자질을 드러내어 곡산군민들의 추앙을 받게 된다. 또한 이때 전국적으로 천연두가 유행하자 서학에서 얻은 지식을 바탕으로 적절한 치료책을 세우고 '마과회통'이라는 의학서에 담아 편찬, 보급하였다. 그때까지 천연두에 대해 전혀 무방비 상태였던 민간에서는 그의 치료 대책에 힘입어 많은 환자를 구할 수 있었고, 이것이 조정에 알려져 전국적으로 이 책을 보급하게 되었다.

1799년 그는 다시 중앙으로 돌아와 병조참지에 올랐다. 하지만 그가 요직을 제수받는 것을 반대한 정적들은 그를 천주교인으로 몰아갔다. 이 때문에 그는 해명서인 '자명소'를 제출한다. 그는 자명소에서 자신은 천주교에 관심을 가졌던 것이 아니라 서양의 학문, 특히 천문, 농정, 지리, 건축, 수리, 측량, 치료법 등의 과학적 지식을 얻기 위해 서학에 접근했다면서 이를 위해 서학에 능통한 천주교 신부와 신자를 만났다고 밝힌다. 그리고 사퇴 건의서를 함께 제출했다. 정조는 애써 그를 달래어 조정에 머무르게 했지만 그의 사의는 완고하여 1800년 봄 처자를 거느리고 낙향했다. 그 후 정조의 재촉으로 일시 상경하였지만 정조가 그해 8월에 죽는 바람에 그는 다시 향리로 돌아왔다.

정조가 죽은 후 그의 제2기 인생이 시작되었다. 조정은 노론 벽파가 완전히 장악하였고, 1801년 신유사옥이 일어나 정약전, 정약종을 비롯한 이가환, 이승훈 등이 투옥되어 이가환,정약종, 이승훈 등이 죽고 서용보의 간언으로 정약용도 유배된다.

1801년 유배지에 도착한 그는 오로지 독서와 창작에 몰두하였다. 그리고 그해 10월 황사영 백서사건이 터져 다시 서울로 압송되어야 했다. 이 사건으로 대부분의 서학 관련자들이 사형당했지만, 정약용과 그의 형 정약전의 공적을 존중한 조정 내부의 사람들에 의해 유배형으로 끝났다. 그래서 정약전은 전라도 흑산도로 정약용은 전라도 강진으로 떠났으며, 정약전은 유배지 흑산도에서 생을 마감하게 된다.

유배지 강진에 도착한 그는 180111월부터 1805년 겨울까지 약 4년간 유배지의 주막에서 거처하게 된다. 이 기간 동안 그는 만덕사의 혜장선사와 인연을 맺는다. 1803년 봄 소풍길에 만덕사의 혜장선사를 알게 되어 유교와 불교를 서로 교환할 기회를 갖는다. 이후 혜장선사의 주선으로 1805년 겨울 거처를 고성사로 옮기고, 다시 9개월 후에 목래 이학래의 집으로 들어갔다가 그곳에서 1808년 봄 다산초당으로 옮길 때까지 약 1년 반 동안 머물게 된다.

1808년 봄 정약용은 다산에 있는 한 정자를 얻게 되었는데, 그곳은 윤박이라는 선비의 별장이었다. 거기에는 천여 권의 장서가 있어 그가 책을 집필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이 초당에 기거하면서 그는 자신의 아호를 '다산'이라고 붙였다. 그리고 자신이 머물던 곳을 '다산초당'이라 하였다. 이로부터 11년 동안 다산초당은 정약용 학문의 산실이 되었다.

이곳에서 그는 '목민심서', '경세유표' 등을 비롯한 '시경강의보', '춘추고징', '논어고금주', '맹자요의', '대학공의', '중용자잠' 등 수많은 책들을 저술하였다. 그리고 1818년 유배가 풀리자 고향으로 돌아왔다.

고향에 돌아오면서 정약용은 다시 제3기 인생을 맞이한다. 유배 생활 중에 쌓은 학문적 성과를 바탕으로 '흠흠신서', '상서고훈' 등을 비롯한 많은 책을 집필했다. 그의 저서는 '여유당집' 250, '다산총서' 246권과 나머지 책들을 포함하여 약 508권에 달했지만 지금은 대부분이 없어져 버렸고, 1934년에서 1938년에 걸쳐 신조선사에 의해 '여유당전서'가 출간되었다. 감히 한 마디로 업적을 평가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저작물을 남겨 놓은 정약용은 18367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1. 신세계를 염원한 석학 박제가(1750-1805)

1750년에 태어난 박제가는 승지를 지낸 박평의 서자이다. 소년 시절부터 시, , 화에 뛰어나 문명을 떨쳤으며, 박지원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익혔다.

그는 양반 가문에 태어났지만 첩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정신적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게다가 11세 때 그나마 바람막이가 되어 주던 아버지마저 사망하였기에 어린 그와 어머니는 버림받은 처지가 되고 말았다. 그는 어머니의 삯바느질로 가까스로 학업을 이어갈 수 있었다.

천부적인 소질을 타고 태어난 그는 일찍부터 고전에 밝았고, 남달리 시와 글씨에 두각을 드러내어 소년 시절에 쓴 글들이 명사의 서재에 장식될 정도였다.

하지만 서얼 차대로 인해 과거에 응시할 수 없었고, 다만 당대의 석학들인 이덕무, 유득공 등과 친분을 맺으면서 북학에 열을 올렸다. 그가 아홉 살 연상인 이덕무와 평생을 나누는 벗이 된 것은 그들의 출신이 모두 서얼인데다가 시와 북학에 대한 열정이 일치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인연을 맺은 뒤로 줄곧 함께 활동했다. 그리고 둘의 뜻이 북학에 있음을 깨닫고 박지원을 찾아가 제자가 되었다. 또한 북학파의 시조로 일컬어지던 홍대용의 가르침도 구했다.

당시 북학을 추구하던 무리들은 한결같이 북경을 방문하여 그곳의 선진 문명을 직접 눈으로 보고 배우는 것을 소원하였다. 홍대용과 박지원 주위에 많은 청년들이 모인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였다. 박제가는 그 청년 무리들 속에서 서얼 출신인 유득공과 양반 출신인 이서구를 만난다.

1776년 그의 나이 27세 때 영조가 죽고 정조가 즉위하자 그에게 뜻밖의 기회가 왔다. 왕위에 오른 정조가 즉시 규장각을 설치하여 많은 실력 있는 젊은 학자들을 그곳에 유치한 것이다. 이때 그는 이덕무, 유득공, 이서구 등과 함께 '건연집'이라는 사가시집을 출간하여 청나라에까지 그 명성을 얻는다. 이듬해 정조는 사회 문제로 대두되고 있던 서얼 차대를 없애기 위해 '서얼허통절목'을 공포했고, 이 덕택으로 박제가는 꿈에도 바라던 북경을 갈 수 있게 되었다. 1778년 그와 이덕무는 정조 등극 이후 영의정이 된 남인의 채제공을 수행해 청나라 사은사 행렬에 합류했다. 북학에 조예가 깊고, 학문이 뛰어나다는 정평이 나자 방문단의 수행원으로 간택되었던 것이다.

3개월에 걸친 여행을 하면서 박제가는 대단한 열정을 보이며 청나라의 문명을 살피기 시작했다. 홍대용의 소개로 이조원, 반정균 등의 청나라 학자들과 많은 대화를 나누며 그들의 안내를 받을 수 있었다. 꿈에도 그리던 문명의 이기들이 그의 눈앞에 펼쳐졌고, 그는 엄청난 충격과 감동으로 그것들을 접하며 체험한 모든 것들을 상세히 기록하였다.

그의 기록들은 귀국 후 '북학의'라는 대논문으로 묶여졌다. 내외 두 편으로 된 이 책의 내편에는 수레, , , , 궁실, 도로, 교량, , 말 등 생활에 필요한 기구와 시설 등이 서술되었고, 외편에는 전제, 농잠총론, 과거론, 관론, 녹제, 재정론, 장론 등의 정책과 제도가 서술되었다.

그는 이 논문 속에서 중국의 생활 도구와 조선의 것을 비교하기도 했지만 국가 정책과 제도에 대해 통렬한 비판을 가하기도 했다. 특히 과거 제도의 한계를 지적하며 능력에 따른 등용제를 적극 주장하였다. 또한 경제 문제에 관해서도 생산보다는 소비의 중요성을 피력하며, 국제 무역을 활성화해야 한다는 지론을 폈다.

'북학의'를 통해 북학의 개념을 정리한 그는 정조의 서얼 차대 폐지책에 의해 1779년 이득무, 유득공, 서이수 등의 서얼 출신들과 함께 규장각의 검서관이 되었다. 그는 이로부터 13년간 규장각에 머물면서 그곳에 비장된 서적들을 탐독하는 한편, 정조를 비롯한 국내의 저명한 학자들과 사귀면서 수많은 책들을 교정하고 간행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줄곧 정조에게 신분적 차별을 없애고, 국민 생활을 향상시키기 위해 상공업을 장려하여 국가를 부강하게 하고 이를 위해 청의 선진적인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1790년 건륭제의 팔순절에 정사 황인점을 따라 두 번째 중국길에 올랐으며, 돌아오는 길에 왕명에 의해 연경에 파견되었다. 원자(뒤의 순조)의 탄생을 축하한 청나라 황제의 호의에 보답하기 위해 검서관이던 그를 정3품 군기시정에 임시로 임명하여 별자 사절로 보낸 것이다.

하지만 정조의 이 같은 배려에 정권을 쥐고 있던 양반들은 강력하게 반발했다. 그들은 북학파가 청의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면, 여지없이 명나라의 은혜를 망각하고 침략한 만주족을 존중하는 것은 명분에 맞지 않는 일이라고 묵살해버렸다. 이에 그는 사대부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과거의 제도와 관습에 사로잡혀 안일한 행각을 벌이고 있다고 강력하게 비판하곤 했다.

권력층과의 이러한 대립은 결국 그의 말로를 불행으로 몰고갔다. 1800년 실학의 탄탄한 후원자였던 정조가 죽자 정권을 장악한 노론 벽파는 천주교 금지를 명분으로 남인 일파를 완전히 숙청하고, 청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고 천주교를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실학파 학자들을 대거 제거하였다. 박제가 역시 제거 대상의 주요 인물이었다.

노론 집권층은 윤행임 반역 사건(신유사옥)을 조작해 그를 가담 인물로 지목했다. 그는 반역 혐의를 끝까지 부정하며 묵묵히 고문을 받았으며, 결국 두만강변의 종성에 유배되었다. 그리고 1804년 유배에서 풀려나 향리로 돌아왔으나 이듬해 지병으로 사망하였다.

당시의 학자들은 박제가를 두고 지나친 개혁론자라고 비판하였다. 그것은 그가 봉건 사회를 부정하고 새로운 문물을 통해 조선 사회의 질서를 바꾸려고 했기 때문이다. 이 같은 그의 개혁론은 권신들에 의해 번번이 묵살되었지만 정조는 언제나 그의 의견에 동조해 주었다. 그러나 정조는 그의 개혁론을 전적으로 수용할 입장이 못 되었다. 그 때문에 박제가의 개혁론은 한낱 이상주의로 취급되고 말았다. , 지나치게 앞서갔던 탓으로 동조 세력을 많이 확보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당시의 많은 선각자들은 박제가와 같은 생각을 갖고 있었다. 신분 차별 타파는 시대적 사명이고, 새로운 세계관의 정립은 조선이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여겼다.

 

 

4. '정조실록' 편찬 경위

 

'정조실록'은 총 5656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17763월에서 18006월까지 정조 재위 243개월 동안의 역사적 사실들을 편년체로 기록하고 있다.

편찬 작업은 180012월에 시작되어 18058월에 완료되었다. 편찬 인원은 총재관 이병모, 이시수, 서용보를 비롯하여 도청당상 2, 각방당상 21, 교정당상 9, 교수당상 2, 도청낭청 20, 각방낭청 64, 분판낭청 10명 등 총 131명이었다.

 

정조 시대의 세계 약사

이 시기 중국의 청에서는 '백련교도의 난'이 일어나 전국적으로 혼란이 일어났고, 일본은 서양 문물을 새롭게 수용하면서 발전을 도모하고 있었다. 한편 유럽에서는 프랑스 대혁명이 발발한 후 나폴레옹에 의해 혁명 전쟁이 이어졌고, 미국은 독립을 쟁취하고 워싱턴, 제퍼슨 등을 대통령으로 세웠다. 이 시기는 무엇보다도 프랑스와 미국의 시대였다.

독일에서는 '슈투름 운트 드랑'적인 사상이 과격한 양상으로 치닫자 괴테와 쉴러 등에 의해 조화와 정제미를 추구하는 고전주의 문학이 모색되고 있었고, 베토벤이 등장하여 고전파 음악 의 완성과 함께 낭만주의 음악의 도래를 예고하고 있었다.

 

 

23대 순조실록

 

1. 순조의 등극과 정순왕후의 수렴청정(1790-1834, 재위 기간 18007-183411, 344개월)

 

19세기로 접어들면서 시작된 순조 대는 17, 18세기를 통한 상품 화폐 경제의 발달로 농민층의 사회의식이 성장하는 시기였다. 그런가 하면 세도 정치의 폐단으로 정치의 기강이 문란해져서 민생이 도탄에 빠졌고, 각종 비기와 참설이 유행하는 등 일대 사회 혼란이 일어났던 시기이다. 순조 대의 정치적 사건의 대표적인 예는 후에 외교적인 분쟁으로까지 비화하는 천주교 박해를 들 수 있다. 벽파인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맡으며 정적인 시파와 남인들을 치기 위해 천주교를 박해한 신유박해, 순조의 친정 뒤에 이어진 을해박해 등을 통해 전국적으로 수만에 달하는 사람이 목숨을 잃는 참사가 이어졌다. 또한 홍경래의 난을 시작으로 전국 각지에서 크고 작은 민란들이 끊이지 않았던 시기였다.

순조는 정조의 둘째 아들이며, 수빈 박씨의 소생이다. 1790618, 창경궁 집복헌에서 태어났으며, 이름은 공, 자는 공보, 호는 순재였다. 정조와 선빈 성씨 사이에 난 문효세자가 일찍 죽자 1800(정조 24) 정월에 왕세자에 책봉되고, 이 해 6월 정조가 승하하자 7월에 11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한다. 그러자 영조의 계비이며 대왕대비인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다. 정순왕후는 사도세자의 죽음에 찬동하였던 벽파의 실세 김귀주의 누이로 벽파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안 가리는 인물이었다. 옥새를 거머쥔 정순왕후는 우선 친정 6촌 오빠인 김관주를 이조참판직에 앉히고 벽파들을 대거 등용한다. 권력을 잡은 김관주, 심환지 등은 정조의 탕평을 보좌하였던 인물들을 대거 살육함으로써 벽파 정권을 수립한다. 그리고 정순왕후는 즉시 왕의 즉위를 공포하는 글에서 '척사'를 표방했다. 이는 곧 천주교에 대한 탄압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정순왕후가 천주교를 탄압하는 데에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그 첫째가 왕조 체제를 유지하기 위함이었다. 군신간의 상하 관계를 중시하는 조선의 지배 윤리인 유교 윤리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천주교의 위험성을 미연에 막는다는 것이요, 둘째가 천주교를 공부하거나 믿는 사람 중에 벽파의 반대파인 시파나 남인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천주교도를 잡아들이는 것은 곧 유교 윤리를 받든다는 명분도 얻을 뿐더러, 반대파인 정적을 제거하는 이중의 효과를 얻을 수 있는 일이었기에 실권을 잡자마자 척사를 단행하였던 것이다.

순조 1년에 들어서자마자 정순왕후는 곧 천주교 금지령을 내리고, 천주교도를 잡아들이기 위해 오가작통법을 썼다. 이는 본래 다섯 가구를 한 통으로 묶어서 서로 강도, 절도 같은 범법 행위가 일어나는지를 감시하고 규제하는 치안 유지법이었다. 그 방법을 천주교도 색출에 동원하여 다섯 집끼리 서로 천주교도가 있는지 감시하고 고발하게 하였다. 그중에 한 집에서라도 천주교 신자가 나오면 다섯 집이 모두 화를 입게 되는 악명 높은 오가작통법을 써서 전국을 피바다로 몰아넣었다. 이렇게 해서 죽은 사람이 전국적으로 수만 명이 넘었는데 이 중에는 진짜 천주교 신자도 있었지만 애매하게 연루되어 죽은 이도 많았다.

당시 잡혀 죽거나 귀양을 간 시파나 남인계 인물로는 이가환, 권철신, 이승훈, 정약종, 정약 전, 정약용 등이 있었다. 신유년에 일어난 이 사건을 가리켜 '신유사옥'이라 하는데 이 사건으로 정순왕후는 완전한 벽파 중심의 조정을 세울 수 있었다. 그러나 정순왕후가 막을 수 없었던 것은 시파였던 김조순의 딸을 순조의 비로 맞아들인 일이었다. 1800년 정조 24, 초간택, 재간택을 거쳐 정조의 뜻이 결정되었으나 정조가 갑자기 죽어 삼간택이 연기되었다. 이때 정순왕후의 6촌 오라비인 김관주와 권유 등의 방해가 있었으나 결국 1802년 순조 2월 왕비로 책봉되었다. 한편 왕의 친정 뒤에도 천주교에 대한 탄압은 계속되어 1815년 을해년에는 경상, 충청, 강원도의 신자들을 죽이고, 1827년에는 충청, 전라도의 교인들을 검거해 혹독한 탄압을 가하였다.

1804년 순조가 열다섯이 되던 해 대왕대비가 수렴청정을 거둠으로써 순조의 친정이 시작되었다. 그것은 곧 정조의 유탁을 받은 영안부원군 김조순 일문에 의한 안동 김씨 세도 정치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 김조순은 본래 정조 편에서 있던 시파계 일문이었으나, 규장각대교 당시 탕평을 건의하는 등 당색을 드러내지 않는 처신으로 벽파 세상이 된 정순왕후의 수렴청정 기간에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 정순왕후는 근 5년 동안의 수렴청정을 거두고 물러앉은 뒤 1년 만에 죽는데, 벽파의 기둥이었던 정순왕후가 죽자 벽파는 다시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동안 실권을 잡고 있던 김관주는 정조의 뜻을 배신한 죄와 왕비의 삼간택 방해를 방조한 죄목으로 귀양을 가다가 병사하고, 정순왕후의 오라비인 김귀주는 이미 죽고 없음에도 불구하고 정조를 해치려 한 죄목으로 역적의 율로 다스려졌다.

이후로 국왕의 장인인 국구가 된 김조순은 나이 어린 왕을 곁에서 모시면서 세도 정치의 첫 장을 열게 된다. 후대 사가들은 김조순이 그런 대로 청류임을 표방하여 어떤 종류의 벼슬도 사양하며 오로지 국왕의 보필에 전념을 다했다고도 하지만 벽파가 물러난 조정의 자리를 채운 것은 바로 김이익, 김이도, 김달순, 김명순 등 안동 김씨 일문이었다.

이들이 조정의 요직을 모두 차지해 버리니 그들을 견제할 세력이 없었다. 견제 세력이 없는 정권은 부패하게 마련이다. 안동 김씨 일문이 요직에 앉아 한 가문의 영달을 위해 갖가지 전횡과 뇌물 수수를 일삼으니 공평한 인사의 기본인 과거 제도가 문란해지고 매관 매직이 이루어지는가 하면 정치 기강이 무너지고 신분 질서의 급속한 와해와 함께 왕조 사회의 위기가 도래하게 되었다.

정치 기강이 문란해져 탐관오리 등이 횡행하고 농민층에 대한 수탈이 강화되자 농민층의 항거가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다. 세도 정권의 성립 초기부터 시작된 농민들의 민란이 전국 각지에서 5차례에 걸쳐 크게 일어났으며, 마침내 1811(순조 11) 홍경래의 난으로 발전했다.

서북인 차별 대우 철폐와 세도 정권의 가렴주구 혁파, 정도령의 출현 등을 기치로 내세운 이 반란은 몰락 양반과 유랑 지식인, 서민 지주층의 재력과 사상이 결합되어 나타난 대규모 반란으로서 단순한 농민 반란이 아니라, 체제 변혁까지를 도모하는 정치적 반란이기도 했다. 광산 노동자, 빈농, 유민들을 봉기군의 중심 부대로 삼고서 홍경래 스스로 평서대원수라 칭하고 각지에 격문을 띄워 출병했다. 그리하여 거병한 지 열흘만에 관군의 별다른 저항도 받지 않고 가산, 정주 등 청천강 이북 10여 개 지역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곧 관군의 추격을 받은 봉기군은 그 세력이 급속히 약화되어 정주성으로 후퇴해 들어간다. 정주성으로 퇴각한 농민군은 보급로가 끊긴 채 무려 4개월 동안 관군과 대치하다가 18124월 마침내 관군에 의해 제압되었다.

이씨 왕조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과 새로운 정치 제를 기치로 내걸었던 이 난은 비록 실패로 끝나긴 했지만, 당시 조선 사회에 끼친 영향은 자못 큰 것이었다. 홍경래의 난은 농민층의 자각을 가져왔고 조선 후기 사회의 붕괴를 가속화시킨 사건이었다.

이 밖에도 크고 작은 민란과 역모 사건이 끊이지 않았으며, 1821(순조 21)에는 서부 지방에 전염병이 크게 번져 10만여 명이라는 엄청난 숫자가 목숨을 잃었다. 또한 순조의 34년 재위 기간 중 19년에 걸쳐 수재가 일어나는 등 천재지변이 끊이지 않았다. 순조는 집권 초기에는 정순왕후를 둘러싼 경주 김씨 일문 아래 있었고, 친정을 하게 된 15세 이후로는 장인인 김조순을 비롯한 안동 김씨 일문 아래 있었다. 순조 역시 세도 정권의 전횡을 모를 리 없었기에 풍양 조씨 조만영의 딸을 세자빈으로 맞아서 풍양 조씨 일문을 중용하고, 1827년 효명세자에게 대리 청정을 하게 함으로써, 안동 김씨의 세도 정권을 견제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또 다른 외척 세력인 풍양 조씨 일문의 세도 정권을 만들어 냈을 뿐, 균형과 견제가 이루어지는 정계 개편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이처럼 당시의 세도 정권은 당쟁이 없는 대신에 반대파가 없는 독 정권으로서 민생과 사회 문제는 도외시하고 일문의 영달과 영예에만 관심을 쏟게 만들었다.

한편 학문을 좋아한 순조는 2020책에 달하는 개인 문집인 '순재고'를 남기기도 하였으며, 학문의 발전에도 관심을 기울여 '양현전심록', '대학유의', '정조어정홍재전서', '서운관지', '동문휘고' 등을 간행하게 하였다.

순조는 34년간의 치적을 남기고 1834114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그는 순원황후 김씨에게서 14녀를 두었으나 효명세자가 22세의 젊은 나이로 죽자 손자인 환으로 하여금 왕통을 잇게 한다. 그의 능호는 인릉으로 서울 강남구 내곡동에 있다.

 

 

2. 순조의 가족들

 

순조는 순원황후 김씨 외에 숙의 박씨가 있을 뿐이다. 순원왕후 김씨가 후에 익종으로 추존된 효명세자를 비롯하여 4녀를 낳고, 숙의 박씨가 1녀를 낳았다.

 

순원황후 김씨(1789-1857)

안동 김씨 세도 정권의 창조인 영안부원군 김조순의 딸이다. 1800(정조 24) 초간택, 재간택을 거쳐 삼간택을 앞두었을 때 갑자기 정조가 죽자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의 외척 김관주와 권유 등의 방해로 위기에 처하기도 하지만 마침내 1802(순조 2) 10월에 왕비로 책봉된다.

순원왕후 김씨는 아버지 김조순과 오라비 김좌근으로 이어지는 안동 김씨 일문의 집권에 지대한 공헌을 한다. 한때 세자비의 외척인 풍양 조씨 일문에게 정권의 주도권을 빼앗기다가 헌종 대에 이르러 다시 회복하지만 헌종이 젊은 나이에 갑자기 죽자 자손이 없는 헌종의 왕통을 누가 이을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나타났다.

 

23대 순조 가계도

정조와 수빈 박씨의 차남이 제23대 순조(1790-1834, 재위 기간 : 18007월에서 183411월까지 344개월이며 2명의 부인과 15녀의 자녀를 두었다. 순원왕후 김씨에게서 14(효명세자인 익종, 명온공주, 복온공주, 덕온공주, 일찍 죽어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한 명의 공주), 숙의 박씨에게서 1(영온옹주)를 두었다.

이때 순원왕후 김씨는 조대비 일문이 미처 손을 쓰기 전에 재빨리 원상에 권돈인을 지명하고 사도세자의 증손자인 강화도령 원범(철종)을 지목하여 왕위를 잇게 한다. 또한 자신의 외가인 김문근의 딸을 왕비에 책봉함으로써 안동 김씨의 세도 정권이 절정기를 맞게 한다.

순조와의 사이에 14녀를 두었으며 1857년 창덕궁에서 죽었다. 능호는 인릉으로 서울 강남구 내곡동에 있다.

 

효명세자(1809-1830)

순조와 순원왕후 사이에서 났으며 이름은 영, 자는 덕인, 호는 경헌이다. 1812년 순조 12년에 왕세자에 책봉되었으며 1819년 영돈녕부사 조만영의 딸을 맞아들여 가례를 올렸다.

1827년 부왕의 명으로 대리 청정을 하였는데, 이때 그는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어진 인재를 등용하고, 형옥을 신중하게 하는 등 백성을 위한 정책 구현에 노력했으나 대리 청정 4년만인 22세에 죽는다. 이때 그의 외척인 조씨 일파가 대거 등용되어 안동 김씨 일파와 정치적 세력 투쟁을 벌임으로써 정국이 혼란해지고 민생은 도탄에 빠지게 된다. 아들 헌종이 그의 뒤를 이어 즉위한 뒤 익종에 추존되었으며 1899년 고종에 의해 다시 문조익황제로 추존되었다. 능호는 수릉으로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있다.

 

 

3. 천주교 박해를 통한 벽파의 정권 장악

 

조선의 천주교는 숙종 이후 거의 정치권에서 소외되어 있던 남인 소장 학자들을 중심으로 지식층에 전파되었다. 16세기에도 소현세자나 홍대용 등이 들여온 천주학 서적들에 대한 연구는 있었지만, 종교로 받아들여 정식으로 신자가 생긴 것은 18세기에 들어와서였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이승훈이었으며, 다산 정약용 형제들과 이가환, 권철신 등 재야 남인 세력들 사이에서 천주교는 조심스럽게 퍼져 나갔다.

정조대에 급격하게 불어난 천주교도는 정조 말년에는 교인이 1만여 명에 달하는 등 교세가 확장되었다. 이러한 천주교의 확대에 대해 보수 지배층은 큰 불안을 느끼고 있었다.

군신 관계와 상하 관계를 주축으로 이루어진 성리학적 지배 원리는 조선 왕조를 지탱해 주는 중요한 사상적, 통치적 기반이었다. 그러나 천주교는 가부장적 권위와 유교적인 의례를 거부했으며 사람은 모두 평등하다는 평등 사상과 유일신 사상을 주장했으니, 그것은 유교 사회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었다. 또한 권력에서 소외된 지식인 양반층과 수탈과 횡포에 시달리던 서민층이 천주교 신앙을 통해 결합되는 것도 지배 체제에 대한 중대한 위협이었다.

이에 심환지를 중심으로 한 노론 벽파에 의한 상소와 박해 운동이 일어났다. 그에 대해 정조는 '사교는 얼마 가지 않아 자멸할 것이며, 이는 유학의 진흥으로 막을 수 있다'는 논리를 폄으로써 박해를 피하였다. 또한 당시 남인 시파의 실권자이자 삼정승을 두루 거친 채제공의 묵인도 천주교의 보전에 큰 역할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정조와 채제공이 죽고 정순왕후를 둘러싼 벽파가 정권을 장악하자 일대 박해가 벌어진다. 정순왕후 김씨가 어린 순조를 대신해 수렴청정을 하게 되자 정조 대에 수세에 몰렸던 벽파는 정적이었던 남인 시파의 세력을 꺾기 위해 즉각 정치적 대공세를 펼쳤고, 벽파의 충실한 후견인이었던 정순왕후는 1801년 언문 교지를 내려 천주교 박해령을 선포하고 전국의 천주교도들을 잡아들였다.

오가작통법으로 많은 교인들이 체포되었고 300여 명의 순교자가 생겼다. 이 중에는 초기 교회의 지도자였던 남인 시파 학자들이 많았는데 이승훈, 정약종, 이가환, 이벽, 권철신 등이 그들이었다. 또한 단지 연구를 목적으로 한 학자들도 연루되어 옥고를 치르거나 귀양을 가게 되었는데 정약용, 정약전이 그 대표적 인물이었으며, 직접적인 관계가 없었던 실학자 박지원, 박제가 등도 이때 관직에서 쫓겨난다.

1801년 순조 1년에 일어나 500여 명의 크고 작은 희생자를 낸 신유박해는 인륜을 무시하는 사교를 뿌리뽑아 나라의 기강과 윤리를 바로 세운다는 명분 아래 정적인 남인 시파와 진보적인 사상가들을 제거하기 위한 일대 정치적 숙청이었다.

신유박해 이후 남인 시파는 완전히 정치의 중심에서 멀어졌고, 벽파가 정권을 장악하면서 일당 독재인 외척 세도 정치가 시작된다.

 

 

4. 안동 김씨 세도 정권의 성립

 

세도는 본래 세상을 바르게 다스리는 도리라는 뜻으로서 중종조에 조광조 등의 사림들이 표방했던 통치 원리였다. 그것이 정조초에 이르러 세도의 책임을 부여받은 홍국영이 조정의 대권을 위임받아 독재를 하기 시작한 데서 변질되어 임금의 총애를 받는 신하나 외척들이 독단으로 정권을 휘두르는 것을 일컫는 말이 되었다.

정조 대는 실학 사상가들에 의해 북학적인 정책이 건의되고, 천주교와 서양 문명에 호의적인 진보적 지식인의 역할이 높아져 갔기 때문에 보수적 정치 세력들은 상당한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이와 같은 안으로부터의 변화와 도전에 불안해진 보수 정치 세력은 정조의 죽음과 어린 순조의 즉위를 계기로 정권을 완전히 장악하여 진보 세력인 실학 사상가 및 천주교에 대한 대대적 숙청과 탄압을 시작하게 된다.

이때부터 당파에 의한 시대가 종식되고 집권자의 일족만이 정권을 독점하는 세도 정권이 형성된다.

순조, 헌종, 철종에 걸친 60여 년 간의 정권을 독점한 안동 김씨 세도 정권은 정조로부터 순조를 잘 부탁한다는 유탁을 받은 김조순으로부터 시작된다. 정조가 죽고 180011세의 어린 나이로 순조가 즉위하자 그때까지 당색을 잘 드러내지 않았던 김조순은 시파계임에도 불구하고 벽파계인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에 협조함으로써 그의 딸을 왕비로 삼는 데 성공한다. 대비의 수렴청정 기간에는 대비의 외척인 경주 김씨를 중심으로 벽파계가 정권을 잡는다. 그러나 1804, 순조가 15세가 되던 해 김대비가 수렴청정을 거두고 다음 해에 죽자 순조의 외척이 된 안동 김씨 일문이 세력을 잡는 데 성공한다.

순조의 장인인 김조순을 중심으로 한 안동 김씨 일파는 시파의 대가인 풍양 조씨, 남양 홍씨, 나주 박씨, 여흥 민씨, 동래 정씨 등과 제휴해서 권력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순조의 아들인 효명세자의 빈으로 조만영의 딸을 간택한다. 이 때문에 효명세자가 대리 청정을 할 때 잠시 풍양 조씨 일문에게 권력을 빼앗기기도 하지만 효명세자가 일찍 죽고 그의 아들이 즉위하자 순조의 왕비이자 김조순의 딸인 순원왕후의 수렴청정이 시작되어 다시금 안동 김씨 일문이 정권을 잡게 된다. 또한 철종의 비까지 안동 김씨 일문에서 냄으로써 안동 김씨의 외척세도 정권은 대원군이 등장하기까지 60여 년간 이어진다.

순조 시대에는 김조순이 정권을 전단하다가 헌종대에는 김조순의 아들 김좌근에게로 넘어가고, 그것이 철종 대에 와서는 김좌근의 양자 김병기에게로 넘어간다. 세도 정권의 특징이라면 당쟁 시대와는 달리 견제 세력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나이 어린 왕을 정권에서 배제시켜버리는 세도 정권의 전횡을 가능하게 했으며, 그 결과 관료 사회의 부패와 백성을 상대로 한 수탈, 민생의 피폐가 나타났다.

이러한 독재 정권에 맞선 것은 그 피해를 고스란히 보게 되는 농민층이었다. 막바지에 몰린 농민들의 불만은 순조 11년에 일어난 홍경래의 난을 비롯, 19세기 중엽 이후 전국적인 민란으로 폭발했다. 이러한 민란은 안동 김씨의 세도 정권을 궁지에 몰아넣는 한편, 그에 불만을 품고 있던 조대비와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밀약으로 고종의 즉위와 함께 안동 김씨 세도 정권의 막을 내리게 한다.

 

 

5. 조선왕조와 세도 정권을 부정한 홍경래의 난

 

조선 사회는 19세기에 들어와 더욱 급격하게 변화되어갔다. 광범위하게 진행된 토지 겸병과 농사법의 발달로 농민층의 분해가 가속화되었고, 안동 김씨 세도 정권의 일당 전제로 삼정이 문란해져 농토에서 유리된 농민들은 유민이 되거나 임금 노동자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다. 반면에 일부 농민들은 농업 기술과 상업에 대한 지식을 이용하여 부농이나 지주가 되는 등 양극화 현상이 일어났다.

신분 질서가 급격하게 와해되어가던 당시에 이렇게 성장한 부농들은 지방의 유지로 활동하면서 사회 변동의 변수로 등장하게 된다. 또한 상업에서도 봉건적인 특권 상인에게 도전하는 사상인들이 등장하여 대상인으로 성장하는 사례가 늘어났다. 홍경래의 난에서도 지도층 가운데는 이렇게 성장한 부농층과 대상인이 다수 끼어 있었다.

세도 정권에 의한 과거 제도와 국가 기강의 문란, 삼정을 통한 관리들의 횡포 등에 대항하여, 몰락한 양반과 지식인 등이 사상적 기반을 마련하고, 새로 등장한 부농과 사상인들의 물력과 조직력 등을 결합하여 10여 년간의 준비 끝에 일어난 것이 홍경래의 난이다.

평안도 용강 출신인 홍경래는 본디 양반 출신으로 과거에서 수차례 떨어지면서 그것이 서북인들에 대한 부당한 차별 대우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고 과거를 포기한다. 당대의 제도적 모순에 눈을 뜬 그는 평안도 가산에서 서자 출신 지식인 우군칙과 만나게 된다. 현실에 대한 두 사람의 불만은 곧 변혁 의지로 바뀌어 봉기를 위한 구체적인 작업에 들어간다. 이들은 우선 평안도 내의 부농층에게 접근하여 그들과 제휴하였고 자금 마련을 위해 상인들과 자주 접촉하였다. 사상인들은 평소에 중앙 정부에 불만이 많은 계층이었다. 그들은 또 가산 다복동의 부호 이희저를 포섭하여 봉기를 위한 재정 기반을 마련하고 풍수적으로도 천혜의 요새인 그곳을 근거지로 삼는다. 또 봉기 병력을 충당하기 위해 운산 촛대봉에 광산을 열어 유민층을 흡수하여 군대로 삼는다. 이 밖에도 당시 세도 정권에 대하여 불만이 깊었던 재상 출신의 김재찬을 끌어들이는가 하면, 평안도 일대의 지역 실력자 및 지방 관속들, 그리고 유랑 지식인과 유민 계층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포섭하여 봉기 세력으로 조직했다.

18111220일을 거병일로 잡고 홍경래는 자신을 평서대원수라 칭하였다. 그러나 거사 계획이 사전에 새어나가자 거사일을 1218일로 앞당겨 출병한다.

그들이 출병에 앞서 내건 격문은 크게 세 가지로 첫째가 서북인에 대한 차별 철폐, 둘째가 안동 김씨 세도 정권의 타도, 셋째가 신인 정씨가 출현했으니 그를 참 임금으로 세우겠다는 것이었다.

남진군, 북진군으로 나뉜 봉기군은 거병한 지 열흘 만에 관군의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가산, 곽산, 정주, 선천, 철산 등 청천강 이북의 10개 지역을 점령하였다. 이는 특히 각 지역의 내응 세력들이 적극 호응해 준 결과였다. 내응 세력은 좌수, 별감, 풍헌 등 관리와 별장, 천총, 별무사 등 무장들이었다. 이들은 대개 부농이나 사상인들로 돈을 내고 신분 상승을 이 룬 계층들이었다.

그러나 곧 전열을 가다듬은 관군의 추격이 시작된다. 관군의 추격을 받은 봉기군은 박천, 송림, 곽산 전투에서 패배하고 정주성으로 후퇴하게 된다. 봉기군의 숫자가 급격하게 줄어들고 세력이 약화된 것은 봉기군 자체의 취약성 때문이었다. 붕기군은 대다수가 급여를 받는 임금 노동자 및 유민들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이들이 가지고 있는 이해 관계와, 봉기 지도층인 부호, 상인, 지식인층이 가지고 있는 이해 관계가 달랐기 때문이다.

소농, 빈민층이 삼정의 문란을 혁파하고 다시 정착 농민으로서 안정된 삶을 꾸려나가는 것을 바랐다면, 지도부는 단순한 제도 개혁 차원이 아닌 정권 전복을 바라고 있었다. 그러므로 당시 세도 정권의 횡포에 대해 일어선다는 공동의 이해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목표가 각기 달랐기에 하층민의 자발적인 유도를 얻어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일단 정주성에 들어간 봉기군은 이제까지의 소극적 참여자나 돈받고 고용된 군사들로 이루어진 군대와는 다른 적극적이고 사나운 군대로 변모하게 된다.

소극적이던 봉기군이 이렇게 강인한 군대로 변화된 것은 관군의 잔혹한 초토화 전술로 정주성 일대의 양민이나 농민들이 인적, 물적 피해를 입게 된 것에서 기인한다. 관군의 횡포와 무자비한 살육을 피해 정주성으로 들어온 농민들이 적극적인 반군 세력이 되어 싸웠고 봉기군 지휘부도 부자들의 재산에 대한 징발을 단행하여 농민 각자에게 평등한 분배를 제공했기 때문에 지휘부에 대한 농민들의 신뢰가 형성된 것이다. 비자발적 참여자로 이루어진 봉기군의 사기가 낮아지고 하나둘 정주성을 빠져나갈 때에 이렇게 주변 농민들이 합세하자 정주성의 봉기군은 순식간에 자발적 농민 봉기군으로 전환되었다.

여기서부터 홍경래의 난은 불만 세력의 정권 전복 기도가 아니라 자발적 농민 항쟁의 성격을 띠게 된다. 그렇게 결속된 농민 봉기군은 보급로가 끊기면서도 군비나 숫자 면에서 몇 배나 우세한 관군을 맞아 4개월간이나 밀고밀리는 공방전을 벌였다. 그러나 결국 관군의 화약 매설로 1812419일 성이 폭파되고 1917명의 농민군과 홍경래 등 주모자가 모두 잡혀 처형당했다. 이리하여 그 해 1월 초부터 시작된 정주성 전투는 3개월 15일로 마감되고 말았다.

홍경래의 난은 비록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이씨 왕조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과 새로운 정치 체제를 표방함으로써 조선 사회에 큰 타격을 가하여 그 붕괴를 가속화시켰다. 홍경래가 죽은 뒤에도 전국 각지에서 난들이 산발적으로 일어났는가 하면, 홍경래의 난에서는 소극적 입장을 취했던 소농, 빈민층들이 철종조에 일어나는 임술민란에서는 적극적인 주도층으로 성장해나가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 난에 대한 평가는 시기적으로 크게 두 가지로 나눠진다. 1950년 이전에는 당쟁사적 관점에서 파악하여 서북인의 푸대접에 대한 반발이라든가 홍경래 일파의 정권 탈취 기도로 평가했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에는 농민층 분해 과정에서 생긴 향촌 부호, 경영형 부농, 서민 지주, 사상인, 몰락 양반 및 지식인 등의 지도층이 임금 노동자와 빈농을 동원하여 일으킨 반봉건 농민전쟁으로 평가하고 있다.

 

 

6. '순조실록' 편찬 경위

 

'순조실록'은 전 32권 부록 2권 총36책으로 되어 있으며, 180074일에서 18341113일까지 재위 344개월간의 역사적 사실들을 편년체로 기록하고 있다. 부록에는 왕의 행록, 시책문, 애책문, 비문, 지문, 행장, 천릉지문 등을 수록했다.

편찬 작업은 1835년 헌종 15월에 시작하여 1838년 윤4월에 완성되었다. '순조실록'은 첫 부분에 '순종대왕실록'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는 순조의 원묘호가 순종이기 때문이다. 1857년 철종 8년에 그 묘호를 순조로 추존한 까닭에 '순조실록'으로 개칭하게 되었다. 본래는 부록이 1책이었으나 1865'철종실록' 편찬 때 추가 편찬하여 2권이 되었다.

이상황, 심상규, 홍석주, 박종훈, 이지연 등을 총재관으로 하여 만 3년에 걸쳐 완성되고 각 사고에 봉안되었다.

 

순조 시대의 세계 약사

순조 시대엔 동아시아의 청과 일본은 밀려오는 서양 세력의 문호 개방 요구에 직면해 있었던 반면에, 유럽은 한동안 나폴레옹의 통치하에 들어가게 된다. 한편 17, 18세기에 서구 열강들의 식민지로 전락했던 나라들은 각자 독립의 기틀을 마련하느라 분주했으며, 남아메리카의 많은 나라들이 이때 독립한다.

문화 예술 면에서는 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전환기를 거친다. 음악에서는 베토벤, 슈베르트 등이 활약했고, 문학에서는 괴테와 실러 등의 활동이 두드러진 시기였다.

한편 산업혁명의 여파로 과학 문명이 발달하여 증기기선과 증기기관차가 발명되었고, 운송의 혁신을 가져오는 교통수단인 철도가 놓여 본격적인 자본주의 상공업 체제로 돌입하게 된다.

 

 

24대 헌종실록

 

1. 헌종의 즉위와 조선 사회의 총체적 위기(1827-1849, 재위 기간 183411-18496, 147개월)

 

헌종 시대는 내우외환으로 후기 조선 사회의 붕괴 조짐이 드러나던 시기였다. 안으로는 순조 대부터 시작된 세도 정치의 여파로 관리 임명의 근간이 되는 과거 제도 및 국가 재정의 기본인 삼정(전정·군정·환곡)의 문란 등으로 정국이 혼란해졌으며, 재위 15년 기간 동안 9년에 걸쳐 수재가 발생하는 등 민생의 어려움이 그치지 않았다. 또한 순조 대부터 시작된 천주교 탄압은 '기해박해'로 이어져 훗날 외교 분쟁으로 비화되기도 했다. 이와 더불어 연안에 빈번하게 나타나기 시작한 이양선의 출몰로 민심이 소란해지는 등 내우외환이 그치지 않아 어린 나이에 즉위한 헌종으로서는 치세에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헌종은 순조의 손자이자 후에 익종으로 추존된 효명세자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풍은부원군 조만영의 딸 신정왕후다. 1827718일에 창경궁 경춘전에서 태어났으며, 1830년 순조 30년에 왕세손에 책봉되고 1834년 순조가 죽자 8세의 어린 나이로 경희궁 수정문에서 즉위하였다. 그러나 나이가 어린 관계로 순조의 비인 대왕대비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을 하다가 헌종이 15세가 되던 해인 1841년에야 비로소 친정을 하게 된다.

헌종 대에는 17, 18세기부터 시작된 사회 전반에 걸친 급격한 변화로 농민층의 분해가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이들은 도시나 광산으로 흘러들어가 임금 노동자가 되거나 도시 빈민이 되었다. 그런가 하면 부농층과 부상인들이 생겨나면서 천민에서 양민으로, 양민에서 양반으로 신분 상승을 꾀하는 일이 빈번해졌는데, 이는 조선 사회를 지탱해왔던 신분 질서와 봉건 제도 의 붕괴 조짐으로 나타났다. 또한 빈번하게 일어나는 수재와 전염병의 창궐로 민생이 악화되었으며, 삼정의 문란이 가중되어 살던 곳을 버리고 유랑하는 유민들이 급격히 불어났다.

헌종 1, 수렴청정을 시작한 순원왕후 김씨는 홍경래 난의 사후 수습 겸 민심 안정책으로 서북인에 대한 차별을 철폐하고 관리로 등용할 것을 교시한다. 헌종이 열 살이 되던 18373월 영흥부원군 김조근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고 4년 뒤에 가례를 올렸다. 그러나 왕비가 병에 걸려 돌연히 죽자 184410월 익풍부원군 홍재룡의 딸을 계비로 맞이한다.

한편 순조 대부터 시작된 천주교 탄압은 헌종 대에서도 계속 이어져 1838년 헌종 4년 봄부터 다시 천주교 탄압을 강화한다. 기해년에 일어난 박해라 하여 '기해박해'라 부르는 이 박해에서는 조선에 들어와 있던 앙베르, 샤스탕, 모방 등 프랑스 신부와 유진길, 정하상 등 천주교 신자가 다수 처형된다. 헌종은 이 해 11월에 천주교를 금한다는 척사윤음을 반포하여 백성들에게 공식적으로 천주교를 금하는 교서를 내린다.

1840년 헌종 612월에 순원왕후의 수렴청정이 끝나자 안동 김씨의 세력이 다소 위축되면서 풍양 조씨의 세력이 우세해진다. 풍양 조씨는 헌종의 모후 조대비의 일문으로서 조대비의 부친인 조만영이 그 거두이다. 조만영은 어영대장, 훈련대장 등을 역임하면서 헌종을 보호하는 한편, 그의 동생 조인영과 조카 조병헌, 아들 조병구 등을 요직에 앉혀 세도를 확립한다. 그 후 5, 6년 동안 풍양 조씨 일문이 현달하더니 일문의 내부 알력과 1846년 조만영의 죽음을 계기로 정권은 다시 안동 김씨 일문으로 넘어간다. 헌종 대에 정권을 잡아 안동 김씨를 견제한 풍양 조씨 일문은 정치 혁신 대신에 안동 김씨와의 정권 경쟁에만 급급하여 민생 문제와 사회 문제를 도외시함으로써 사회적인 모순을 격화시겼다. 그 결과 관리들의 부정부패는 물론이요, 그로 인한 삼정의 문란을 초래했다.

헌종 대에는 사회가 불안하고 민심이 이반되는 틈을 타서 두 번의 모반 사건이 일어난다. 헌종 2년에 있었던 남응중의 모반과 헌종 10년에 있었던 민진용의 옥이 그것이다.

1836년 헌종 2년에 충청도로 내려가 있던 남응중은 남경중, 남공언 등과 모의하여 정조의 아우인 은언군의 손자를 왕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도총집, 남경중을 좌총집으로 하여 청주성을 점령한다는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이 계획은 지방 이속의 고변으로 사전에 발각되어 남응중 등은 체포되어 능지처참을 당하고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만다.

1844년 헌종 10년에 있었던 민진용의 역모는 안동 김씨의 세도가 풍양 조씨 일문으로 넘어가는 권력의 공백기에 일어난 사건으로, 당시 왕조의 위엄과 권위가 어느 정도 실추되었나를 보여주는 예라 하겠다. 의원 출신인 민진용은 그의 뛰어난 의술로 이원덕, 박순수, 박시응 등을 포섭해 정조의 아우 은언군의 손자 원경을 왕으로 추대하기로 한다. 그들은 특히 하급 무관들을 동지로 규합한 뒤 자신들의 계획을 관철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 역시 사전에 발각되어 관련 주모자는 모두 능지처참을 당하고 은언군의 손자 원경은 사사된다.

별다른 정치적 세력도 없는 중인이나 몰락 양반이 일으킨 이 두 모반 사건은 당시의 상황이 누구나 왕권을 넘볼 만큼왕권이나 정치권이 우습게 여겨지고 있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헌종 11년에는 영국 군함 사마랑 호가 제주도와 서해안을 불법 측량하고 돌아가는 사태가 발생하자, 조정은 청나라를 통해 광동에 있는 영국 당국에 항의하기에 이른다. 또한 헌종 126월에는 프랑스 제독 세실이 천주교 탄압을 구실로 군함 3척을 이끌고 충청도 외연도에 들어와 왕에게 국서를 전하고 가는 사건이 발생해서 한때 조정을 긴장 상태에 몰아넣기도 했다. 이에 앞서 5월에는 조선 최초의 신부 김대건이 체포되어, 사교를 퍼뜨리고 국법을 어겼다는 죄목으로 7월에 새남터에서 군문 효수형에 처해진다. 조정에서는 이 사건에 대해 이듬해 청나라를 통해 프랑스에 답신을 보내는데 이것이 우리나라가 서양에 보낸 최초의 외교 문서가 되었다. 헌종 14년에는 이양선들이 경상, 전라, 황해, 강원, 함경도 등지에 빈번하게 출몰하여 백성들의 민심이 크게 동요되는 둥 국내외적인 위기가 조성된다. 이때부터 조선은 이양선을 앞세운 서구 열강들의 통상 위협과 문호 개방 요구를 맞게 되는 등 본격적인 외세 대응기로 들어서게 된다. 그러나 당시의 국제 정세나 주변 정세에 어두웠던 조정에서는 이양선의 출몰이나 위협에 별다른 방책도 세우지 않은 채 각각 권력의 장악에만 골몰하고 있었다.

한편 학문을 좋아하고 글씨를 잘 썼던 헌종은 재위 기간에 '열성지장', '동국사략', '문원보불', '삼조보감' 등을 찬수하게 하는 등 학문적 치적을 쌓기도 했다.

14년의 재위 기간 중 6년의 수렴청정 기간을 제하면 9년여의 짧은 친정기간을 갖게 되는 헌종은 그나마 이 기간중에도 세도 정권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정권을 잡기 위한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 일문의 권력 투쟁에 휘말리다가 적절한 민생 안정책도 세우지 못한 채 스물셋의 짧은 생을 마감하게 된다. 또한 급변하는 국내외 정세를 읽지 못하는 정치력의 부족으로 거기에 적절하게 대응하거나 대비하는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

헌종은 효현왕후 김씨를 비롯하여 두 명의 아내를 두었으나, 184966일 창덕궁에서 후사 없이 죽었다. 능호는 경릉으로 경기도 구리시에 있다.

 

 

2. 헌종의 가족들

 

헌종은 효현왕후 김씨를 비롯하여 계비 효정왕후 홍씨, 그리고 후궁 1명을 두었으나 후사가 없었다. 헌종 대에는 헌종의 어머니인 조대비의 위상이 커지면서 풍양 조씨 일문이 득세를 하게 되므로 헌종의 어머니인 신정왕후 조씨를 여기서 다루기로 하겠다.

 

24대 헌종 가계도

순조와 순원왕후의 장남인 익종(효명세자)과 그의 부인 신정왕후 조씨 사이에서 난 장남이 제24대 헌종이다. 헌종은 1827년에 태어나서 1849년에 죽었으며, 재위 기간은 183411월부터 18496월까지 147개월이었으며, 부인 3(효현왕후 김씨, 효정왕후 홍씨, 궁인 김씨)과 효정왕후 홍씨에게서 1녀를 두었는데 일찍 죽었다.

 

신정왕후 조씨(1808-1890)

익종의 비이며 헌종의 어머니로서 풍은부원군 조만영의 딸이다. 12세 때 효명세자의 비로 책봉되어 세자빈이 되었고 효부라는 칭찬을 들었다. 1827년 순조 27년에 헌종을 낳았다. 1834년 헌종이 왕위에 오르고 죽은 남편이 익종에 추존되자 왕대비에 봉해졌는데, 이때부터 풍양 조씨 일문이 정부의 요직을 차지하면서 세도를 이루게 된다. 1857년 순조비인 순원왕후가 죽자 대왕대비가 되었으며, 철종이 재위 13년 만에 후사 없이 죽자 왕실의 권한을 쥐게 되었다.

이때 조대비는 전부터 안동 김씨의 세도 정권을 못마땅해하던 흥선군 이하응, 조카 조성하와 손을 잡고 흥선군의 둘째아들로 왕위를 잇게 한다. 또한 안동 김씨의 세력을 더욱 약화시키기 위하여 고종을 아들로 삼아 철종이 아니라 익종의 뒤를 잇게 하였다. 18662월까지 수렴청정을 하였으나 실제 정권을 모두 흥선대원군이 잡도록 하교하고 있었다. 그 후 조대비가 대거 기용한 친정 세력들이 잇따른 정변에 희생되어 조씨 가문이 쇠락해지자 그것을 슬퍼하였으며 나라가 재난에 시달리자 자신이 죽지 않는 것을 한탄하였다고 한다. 18908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능호는 수릉으로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있다.

 

효현왕후 김씨(1828-1843)

안동 김씨 영흥부원군 김조근의 딸로서 1837년 헌종 3년에 왕비에 책봉되고 4년 뒤에 가례를 올렸다. 왕후가 된 지 2년 만에 병에 걸려 죽었다. 1851년 철종 2년에 경혜, 정순의 휘호가 내려지고 다시 단성, 수원의 존호가 더해졌다. 능호는 경릉으로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있다.

 

효정왕후 홍씨(1831-1903)

판동녕부사 익풍부원군 홍재룡의 딸로서 1844년 헌종 10년 왕비에 책봉되었다. 헌종과의 사이에 딸을 하나 두었으나 일찍 죽었다. 1849년 철종이 즉위하자 대비가 되었으며, 1857년 순조의 비인 순원왕후가 죽자 왕대비가 되었다. 능호는 경릉으로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있다.

 

 

3. '헌종실록' 편찬 경위

 

'헌종실록'은 총 17(부록 1)으로 되어 있으며, 183411월부터 18496월까지 재위 147개월간의 역사적 사실들을 편년체로 기록하고 있다. 부록에는 대비언교, 시책문, 애책문, 비문, 지문, 시장, 행장 등을 수록하였다.

'헌종실록'은 헌종이 죽은 6개월 뒤인 1849(철종 즉위년) 1115일에 편찬을 시작하여 18518월에 완성되고 9월에 인쇄하여 각 사고에 봉안되었다.

 

헌종 시대의 세계 약사

헌종 시대의 세계정세를 살펴보면 청나라는 영국과의 아편 전쟁으로 일대 혼란을 겪게 되고, 이를 계기로 서구열강들과 속속 통상 조약을 맺는다. 일본은 빈번해지는 이양선의 출몰에 비하여 해안 수비를 강화하는 등 좋든 싫든 서구 열강들과의 교류를 준비하게 된다.

유럽에서는 스페인, 포르투갈, 프랑스, 오스트리아 등지에서 혁명이 발발하면서 근대 국가로의 이행에 박차를 가한다. 한편 자본주의의 발전 과정에서 생겨난 임금 노동자들을 위한 노동자협회가 결성되고 마르크스, 엥겔스에 의한 공산주의의 이론이 만들어진다.

미국에서는 모스가 유선 전신을 발명하여 통신 부문에 일대 혁명을 가져오게 된다.

 

 

25대 철종실록

 

1. 농부에서 제왕이 된 강화도령 원범

 

철종 시대는 순조 대부터 시작된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가 절정을 이루던 때였으며, 세도 정치로 인한 탐관오리들의 전횡으로 삼정의 문란이 극에 달해 백성들의 생활이 도탄에 빠져 있던 시기였다.

안동 김씨가 계속 실권을 잡게 되는 배경에는 대왕대비인 순원왕후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했 다. 순조의 비인 순원왕후는 손자인 헌종이 후사 없이 죽자 조대비의 척족인 풍양 조씨 일파가 왕위를 세울 것을 염려하여 재빨리 손을 썼다. 그도 그럴 것이 헌종의 6촌 이내에 드는 왕족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7촌 이상의 왕족은 몇 명 있었다.

후대의 왕은 본래 항렬로 따져 동생이나 조카벌이 되는 자로 왕통을 잇게 하는 것이 원칙이다. 왜냐하면 종묘에서 선왕에게 제사를 올릴 때 항렬이 높은 이가 항렬이 낮은 이에게 제사를 올리게 해서는 안 된다는 법도 때문이다. 그러나 안동 김씨 척족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고 지위를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서는 헌종의 7촌 아저씨벌이 되는 강화도령 원범이 가장 적당하다고 판단했다. 이렇듯 안동 김씨 척족들은 기왕에 잡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왕가의 법도를 철저하게 무시하는 전횡을 저지른다.

철종은 사도세자의 증손자이자 정조의 아우 은언군의 손자이다.

사도세자가 죽고 정조가 세손이 되자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세력들이 정조가 왕위에 오르면 자기들의 위치가 위험할 것이 염려되어 새 왕자를 추대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그러나 이 일이 발각되자 정조의 이복동생인 막내아들 은전군은 자결하고 은언군과 은신군은 제주도에 유배되나, 은신군은 제주도에서 병사하고 은언군은 강화도로 유배지를 옮긴다.

사도세자와 숙빈 임씨 사이에서 태어난 은언군 인에게는 아들이 셋 있었다. 큰아들인 상계군 담은 1779년 정조 3년 홍국영의 음모로 모반죄로 몰려 강화도에 유배되었다가 자살하였다. 한편 은언군의 아내 송씨와 큰며느리 신씨는 1801년 순조 1년에 천주교 신자로 사사되면서 은언군 인도 사사되었다.

그러던 중 1844년 헌종 10년에 민진용이 반역을 도모하였다. 순조 말기부터 김유근과 김홍근에 의해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가 이루어지다가 헌종 10년에 이들이 물러나자 권력에 틈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 틈을 이용하여 반역을 꾀한 민진용은 우선 자신이 가지고 있는 뛰어난 의술로 은언군의 아들 이광과 은언군의 손자 원경의 신임을 받고 있던 이원덕을 포섭하였다.

그들은 은언군의 손자이자 이광의 아들인 원경을 왕으로 추대하기 위해 모의를 꾸미다가 발각되어 모두 능지처참을 당하고 마는데, 이것을 '민진용의 옥'이라 한다. 여기에 연루되어 전계대원군 이광의 첫째 아들 원경이 사사된다. 여기서 둘째 아들 경응과 셋째아들 원범만이 살아남는데 이들은 또다시 강화도로 유배된다. 이리하여 천애고아가 된 두 사람은 강화도에서 나무를 하고 농사를 짓는 농사꾼으로 살던 중 5년여가 지난 어느 날 갑자기 원범에게 왕통을 이으라는 교지가 내려진다.

그가 바로 후에 대왕대비 순원왕후의 명으로 왕위에 오르게 되는 철종이다. 이때 그의 나이 19세였으며 학문과는 거리가 먼 농부였다. 184966일 헌종이 후사 없이 죽자 별안간 명을 받은 원범은 봉영 의식을 행한 뒤 68일 덕완군에 봉해지고 이튿날인 69일 창덕궁 희정단에서 관례를 행한 뒤 인정문에서 즉위하였다. 나이가 어리고 학문을 연마한 바 없다는 이유로 1851년까지 대왕대비인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철종이 21세 되던 18519월에는 대왕대비의 근친 김문근의 딸을 왕비로 맞게 되었다. 그 뒤 김문근이 영은부원군이 되어 국사를 돕게 되니 순조 대부터 시작된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가 계속되는 셈이었다. 여기서 의문이 되는 것은 둘째를 제치고 셋째인 원범이 왕위에 오르게 된 내력이다. 남아 있는 기록이 없어서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으나 둘째 경응은 아마도 강화도에서 병사하지 않았나 싶다.

 

 

2. 세도 정권하에서의 철종의 친정(1831-1863, 재위 기간 18496-186312, 146개월)

 

세도 정권의 막강한 힘과 독단 앞에 선 철종은 자신의 뜻을 마음대로 펼 수 없는 불우한 왕이었다. 빈민 구제책이나 이재민 구휼에 남다른 열정을 보이기도 하지만, 짧은 학문과 얕은 경륜에 대한 철종 자신의 자격지심과 순조 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막강한 세도 정권의 바람을 막아내고 삼정의 문란을 혁파할 개혁의 방도를 찾지 못한 채 임술민란 등 전국적인 위기 상황을 맞게 된다.

철종은 사도세자의 증손자이며 전계대원군 광과 용성부대부인 염씨 사이의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이름은 변, 초명은 원범, 자는 도승, 호는 대용재였다.

철종은 즉위 3년 후인 1852년부터 친정을 하게 되지만 정치의 실권은 여전히 안동 김씨 일족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있었다. 그러나 철종은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가 기승을 부리는 가운데도 민생을 돌보는 데 남다른 애정과 성의를 보였으며, 철종 말기에 일어난 민란의 수습과 삼정의 문란을 바로잡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친정을 시작한 다음 해인 1853년 봄에는 관서 지방의 기근 대책으로 선혜청전 5만 냥과 사역원삼포세 6만 냥을 민간에 대여해주도록 하였고, 또 그해 여름에 가뭄이 심하자 재물과 곡식이 없어 구휼하지 못하는 실정을 안타까이 여겨 재용의 절약과 탐관오리의 징벌을 엄명하기도 하였다. 1856년 봄에는 화재를 입은 1천여 호의 민간에 은전과 약재를 내려 구휼하게 하였으며, 함흥의 화재민에게도 3천 냥을 지급하였다. 그 해 7월에는 영남의 수재 지역에 내탕금 2천 냥, 단목 2천 근, 호초 200근을 내려주어 구제하게 하는 등 민빈 구제에 성의를 다했다.

그러나 여전히 정치의 실권이 안동 김씨 일파에 있었고 그들의 전횡으로 탐관오리가 득실거리고 삼정(전정, 군정, 환곡)이 문란해져 백성들의 생활이 도탄에 빠지게 되었다. 1862(철종13)에 드디어 진주에서 탐관오리의 학정에 반발하여 민란이 일어난 것을 계기로 전국적으로 민란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에 철종은 삼정이정청이라는 특별 기구를 설치하여 민란의 원인이 된 삼정구폐를 위한 정책을 시행하게 하는 한편, 모든 관리에게 그 방책을 강구하여 올리게 하는 등 민란 수습에 진력하였다.

그러나 삼정의 문란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우선 세도 정치의 뿌리를 뽑아야 하는데 안동 김씨의 강고한 세도 앞에 그 뜻을 펴지 못한다. 안동 김씨의 세도 정권이 절정에 달해 있던 철종 대는 그들에 도전할 만한 다른 정치 세력의 성장이 원천적으로 봉쇄되어 있었다.

안동 김씨 일문은 왕족 중에서도 나중에 왕위에 올라 자신들의 권력에 위협이 될 만한 자가 있으면 미리 처단하기를 서슴치 않았다. 대원군의 형 이하전의 죽음이 바로 그런 예라고 할 수 있다. 사정이 이러하기에 당시 철종은 이미 세도가의 첩자 등이 온 궁중에 퍼져 있었을 것으로 믿었고, 자칫하면 임금의 목숨이 위태롭다는 것을 감지하고 있었다.

철종은 이렇듯 계속되는 안동 김씨 일파의 전횡에 마땅히 대항할 방법이 없자, 자연히 국사를 등한히 하고 술과 궁녀를 가까이 했다. 술과 여색에 빠지게 되자 본래 튼튼한 몸을 가지고 있었던 철종은 급속도로 쇠약해져서 1863128일 재위 14년 만에 33세를 일기로 죽고 말았다. 혈육으로는 숙의 범씨 소생의 영혜옹주가 하나 있어 금릉위 박영효에게 출가시켰다. 철종은 죽은 뒤 경기도 고양의 희릉 오른편에 예장되었으며 능호를 예능이라 하였다.

 

 

3. 60년간 이어진 안동 김씨의 세도 정권

 

본디 세도 정치라 함은 조광조가 도학의 원리를 정치사상으로 심화시킨 데서 주창된 것으로 사람들이 표방했던 통치 원리였다. , 천리를 밝히고 인심을 바르게 하며 정학을 복돋는 일 등을 뜻하는 말이었다.

이러한 세도 정치가 성립되기 위한 운영의 기반은 무엇보다도 공정한 언론과 인재의 등용, 그리고 이에 대한 군주의 신임 내지는 위탁 등이었다. 이 때문에 각 계파 간에 시비와 분열이 일어났고 이것이 사화나 당쟁으로까지 비화되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군주의 신임과 위탁을 빙자한 변태적인 세도 정치를 낳았다. 이렇게 척신이 권력을 장악하는 정치를 세도 정치라 했는데, 이때의 세도는 사림 정치가 지향했던 본래의 '세도(세상 세, 길 도)'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독재 정치였기 때문에 '세도(권세 세, 길 도)'라 표기하였다.

1800년 정조가 죽고 순조가 11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게 되자 정조의 유탁을 받은 김조순이 영조의 계비이며 사도세자 죽임의 주역인 김귀주의 누이이기도 한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에 협조하면서 그의 딸을 순조의 비로 들이는 데 성공한다. 1804년 김대비가 수렴청정을 거두고 1805년 세상을 뜨자, 이때부터 안동 김씨가 본격적인 척족 세도를 시작하게 된다.

김조순은 본래 정조의 신임을 받던 시파이지만 벽파 정권에 협조하면서 겉으로는 전혀 당색을 드러내지 않은 채 모난 짓을 하지 않았다. 정순왕후가 죽자 정순왕후 편에서 세도를 휘둘렀던 벽파 일당이 몰락의 길로 접어들면서 순조의 외척인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가 힘을 쓰게 된다. 여기에는 안동 김씨 이외에 시파의 대가인 남양 홍씨, 풍양 조씨, 여흥 민씨, 동래 정씨, 나주 박씨 등이 제휴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순조의 아들인 효명세자의 빈으로 풍양 조씨 만영의 딸이 간택되는데, 효명세자가 일찍 죽자 그 소생인 헌종이 순조의 뒤를 이어 8세의 나이로 등극한다. 그러나 나이가 어린 탓에 순조의 비인 순원왕후의 수렴청정 아래 김조순의 아들 김좌근이 정권을 잡아 여전히 안동 김씨 일문의 독재가 지속된다. 한때 헌종의 외척인 풍양 조씨 일문이 정권에 접근했으나 김조근의 딸이 헌종의 비로 간택됨에 따라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는 그대로 이어진다. 그 이후 순원왕후의 근친인 김문근의 딸이 철종의 비로 간택됨에 따라 1864년 고종이 즉위하고 흥선대원군이 섭정을 하기까지 60여 년 동안 안동 김씨가 정국을 휘어잡게 된다. 60여 년 동안 안동 김씨의 세도가 어찌나 드셌던지 남자를 여자로 만드는 일 외에는 못하는 일이 없다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1851년 철종의 장인이 된 김문근은 철종을 보필한다는 핑계로 거의 모든 국사를 장악하기에 이른다. 그의 조카인 김병학이 대제학을 맡고, 병국이 훈련대장을 맡았으며, 병기가 좌찬성을 차지함으로써 조정을 장악한다.

이렇듯 왕권을 배제시킨 세도 정권은 정치적 견제 세력이 없는 조건하에서 삼정 문란으로 나타나는 수탈 정책의 극을 향해 치닫게 된다. 모든 법도가 안동 김씨 일파에 의해 좌우되고, 뇌물이 성행함은 물론이거니와 벼슬을 사고파는 매관매직이 공공연하게 이루어졌다. 관직을 산 수령들은 백성들을 착취하여 그것을 벌충했으며, 이 같은 수령의 부정에 편승한 아전들의 횡포 또한 백성들의 고혈을 짜는 것이었다. 도학을 논해야 할 서원은 세도 정치의 외형적인 지주로서 노론 측 당론의 소굴이 되었으며, 불법적인 수세권을 발동하여 백성을 괴롭히고 왕권을 침해하는가 하면 관령보다 더 위세가 당당한 묵패로 향촌민에 대한 착취를 서슴지 않았다. 또한 무관의 자제들은 활도 쏘아보지 않고 오로지 가문의 덕을 입어 벼슬길에 오르기도 했다.

반세기에 걸쳤던 안동 김씨 시파계 일문의 독재는 세도 정치의 온갖 병폐를 전형적으로 드러내어 전국적으로 삼정의 문란이 극심해졌고 잦은 민란이 발생했는데, 그것이 곧 세도 정권을 변질시키고 붕괴시키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4. 철종의 가족들

 

# 25대 철종 가계도

영조와 영빈 이씨 사이에서 난 장조(사도세자, 장헌)는 숙빈 임씨와의 사이에서 은언군과 은신군을 두었다. 은언군의 3남 전계대원군과 용성부대부인의 3남이 바로 제25대 임금 철종이다. 철종(1831-1863)의 재위 기간은 18496월부터 186312월까지 146개월이었다. 부인은 8명으로 철인왕후 김씨, 귀인 박씨, 귀인 조씨, 숙의 방씨, 숙의 범씨, 궁인 이씨, 궁인 김씨, 궁인 박씨이고, 자녀는 숙의 범씨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영혜옹주 하나뿐이었다.

철종의 자식들은 유난히 단명했다. 철인왕후 김씨가 아들 하나를 두었으나 일찍 죽었고, 그 외에 후궁과 궁인에게서 아들 넷을 얻었으나 어찌된 셈인지 모두 일찍 죽었다. 그의 유일한 혈육으로는 숙의 범씨에게서 난 영혜옹주가 한 명 있을 뿐인데 그 또한 박영효와 혼인한 지 3개월 만에 죽고 말았다.

 

철인왕후 김씨(1837-1878)

철종 대에 마음껏 권력을 휘둘렀던 영은부원군 김문근의 딸이자 대왕대비 순원왕후의 근친인 그녀는 1851년 열다섯의 나이에 왕비에 간택되어 궁으로 들어온다. 1858년 원자를 낳았으나 곧 죽었다. 왕비 김씨는 탐욕스런 그의 아버지 김문근과는 달리 말수가 적고 즐거움이나 성냄을 얼굴에 잘 나타내지 않는 등 부덕이 높은 것으로 칭송이 자자했다 한다. 1863년 철종이 서른셋의 젊은 나이로 죽자 명순의 존호를 받고 고종이 즉위하자 왕대비가 되었다. 1866년 휘성에 이어 정원, 1873년에 다시 수령의 존호를 받아 명순휘성정원수령대비가 되었다. 187842세의 나이로 창경궁 양화당에서 죽었다. 묘는 경기도 고양시 원당동 서삼릉의 예릉이다.

 

 

5. 삼정의 문란과 민란의 발생

 

철종 연간은 지배층에 의한 농민 수탈이 절정을 이룬 시기였다. 농민 수탈의 주내용은 삼정의 문란으로 요약되는데 전정, 군정, 환곡의 문란이 바로 그것이다.

토지세에 대한 징수인 전정은 본래 토지 1결당 전세 4두 내지 6두로 정해진 전세보다도 부가세가 훨씬 많았다. 부가세의 종류만 해도 총 43종류에 달했는데 본래 그것은 토지를 소유한 지주층이 물게 되어 있었으나 전라, 경상 지방은 모두 땅을 빌려 농사짓고 있는 농민들이 물고 있었다. 또한 지방 아전들의 농간으로 빚어지는 허복, 방결, 도결 등이 겹쳐서 전정의 문란이 고질화되었다.

한편 군정은 균역법의 실시로 군포 부담이 줄긴 하였으나, 양반층의 증가와 군역 부담에서 벗어나는 양민의 증가로 말미암아 계속 가난한 농민에게만 부담이 집중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을의 형세에 따라 차등을 두어 군포를 부과하는 백골징포나 어린 아이에게 부과하는 황구첨정 등을 강행했다.

환곡은 본래 관에서 양민에게 이자 없이 빌려주게 되어 있는 곡식인데 여기에 비싼 이자를 붙이거나 환곡의 양을 속여서 가을에 거두어들일 때 골탕을 먹이는 등의 수법을 사용해 농민 생활을 파탄으로 몰아넣는 관리들이 비일비재했다.

이 같은 일은 세도 정권의 공공연한 매관매직을 통한 관기의 문란과 더불어 세도 정권을 뒷받침하고 있는 토호 세력의 횡포 아래 빚어진 일이었다. 이런 삼정의 문란이 겹쳐 백성들이 부담해야 되는 결세가 높아져만 갔고 그것이 결국은 민란의 커다란 원인이 되었다.

1862년 철종 13년 단성에서 시작하여 전국에서 37차에 걸쳐 민란이 거세게 일어나는데 이 해에 일어난 민란을 통칭해 '임술민란'이라 한다.

당시는 조선 후기의 납속제 실시에 따른 신분제의 붕괴와 더불어 농민층의 분화가 일어나고 있었으며, 아울러 외척 세도 정치의 폐해가 전국 각지에 미치지 않는 데가 없던 시기였다. 또한 계속되는 재해로 수입은 감소하는 반면에 구휼 등에 쓰이는 재정 지출은 크게 늘어 국가 재정이 적자를 면치 못하였고, 이에 따른 세수 증가로 관리들의 수탈이 크게 늘어 농촌 사회는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져 있었다. 따라서 농민들은 집과 농지를 버리고 떠도는 유민이 되거나 유민 직전에 관에 항의하는 식으로 봉기하였다. 임술년에 일어난 민란이 삼정의 문란에서 비롯되었다고 하여 흔히 '삼정의 난'이라고도 하는데 그 직접적인 도화선이 된 것은 218일 진주에서 일어난 '진주민란'이었다.

진주민란의 직접적인 발생 계기는 경상우병사 백낙신의 탐학과 착취에 있었다. 백낙신이 민란이 일어나기 전 몇 년 동안 착취한 돈만도 약 5만 냥에 달했는데 쌀로 환산하면 약 15천 석이나 되는 엄청난 양이었다. 게다가 당시 진주목에서는 지금까지 지방 관리들이 불법적으로 축낸 공전이나 군포 등을 보충하기 위해 그것을 모두 결세에 부가시켜 해결하려 했는데 그 액수가 28천 석에, 축난 환곡만 해도 24천 석이나 되어 농민 부담이 급격하게 가중될 처지에 있었다. 이에 농민 봉기군들은 스스로 초군이라 부르면서 머리에 흰띠를 두르고 진주성으로 쳐들어갔는데 그 수가 수만 명에 이르렀다. 이에 당황한 그를 놔주지 않고 죄를 묻는 한편, 악질적인 아전 몇 명을 죽이고 원한을 샀던 토호의 집을 불태웠다. 6일간이나 계속된 진주민란은 그동안 23개면을 휩쓸었고, 120여 호의 집이 파괴되고 재물 손실이 10만 냥을 넘었다.

단성을 시작으로 진주에서 폭발한 이 민란은 곧 경상, 충청, 전라, 황해, 함경도의 5도와 경기도 광주에서 무려 37차에 걸쳐 일어난다. 크게는 수만 명에서 작게는 천여 명에 이르는 규모로 전국 각지의 농민들이 악정에 대항하여 민란에 참가했다.

다른 지역에서 일어난 민란의 경위도 대개 이 진주민란과 비슷했다.

농민 봉기는 보통 2일에서 7일간 계속되었으며, 민란이 3월에서 5월 사이 춘궁기에 집중되어 일어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농민들의 생존 문제와 직결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봉기한 농민들은 한결같이 관리들의 횡포와 경제적 수탈을 막고 삼정의 폐해를 거두어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들은 관아를 습격, 수탈의 원흉인 관리와 아전들을 처단하는가 하면 장부를 불태우고 창고를 탈취하였다. 또한 관리와 결탁해 농민을 못 살게 굴던 양반과 토호의 집을 때려부수고 곡식과 재화를 탈취하는가 하면 죄수들을 풀어주기도 했다. 임술민란의 피해 상황을 보면 지방 이속으로서 살해된 자가 15명 이상, 부상자는 수백 명에 달하고 가옥이 불타거나 파괴된 것은 약 1천 호, 피해 액수는 100만 냥을 넘었다.

이에 조정에서는 긴급 대책으로 안핵사와 선무사를 파견하여 난을 수습하고 민심을 가라앉히도록 하는 한편, 봉기 지역의 수령은 그 책임을 물어 파직시켰다. 진주에 파견된 안핵사 박규수의 상소로 시정책이 건의되고, 그 결과 1862526일 민란의 근본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조정 대신들로 구성된 '삼정이정청'을 설치하고 그 해 5월부터 윤8월까지 4개월 동안 '삼정이정절목' 41개조를 제정하여 반포, 시행하였다. 그 주요 골자는 전정, 군정은 민의에 따라 현황을 시정하고 환곡은 파환 귀결에 따르기도 한다는 것이었다. 이 교구책으로 민란은 한때 진정되는 듯했으나 5월과 6월의 가뭄과 7월의 심한 물난리 때문에 민심은 계속 흉흉하였다.

그 뒤 삼정이정청의 업무가 비변사로 넘어간 10월에는 새 정책을 페지시키고 삼정 제도로 돌아감으로써 농민군이 바라던 근본적인 제도의 개혁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후에도 창원, 황주, 청안, 남해 등지에서 항쟁이 끊임없이 이어진 것도 이 때문이다.

 

 

6. 조선 말기의 사상운동 - 동학의 탄생

 

철종 대는 안팎으로 변화가 휘몰아치는 격변기였다.

안으로는 삼정의 문란으로 민생이 도탄에 빠지고 홍수, 지진, 역질 등이 창궐하여 전국적으로 농민 반란의 양상이 나타나던 시기였으며, 밖으로는 이양선의 출현과 천주교의 전래로 왕조 질서가 흔들리고 있었다.

이와 같은 내외적인 위기 시대에 그에 대응할 만한 사상으로 일어난 것이 동학이었다. 민생은 뒷전에 있고 몇몇 세도가들에 의해 좌우되고 있는 왕조에 실망한 백성들에게 인간 평등과 존중의 길을 제시한 동학이 나타나자, 그것은 영호남 지방을 중심으로 급속도로 번지기 시작했다.

동학은 1860(철종 11) 4월에 최제우가 창도한 종교로서 그 교지가 시천주 신앙에 기초하면서도 보국안민과 광제창생을 내세운 점에서 민족적이고 사회적인 종교라 할 수 있다. 동학이라는 명칭은 교조 최제우가 서교인 천주교에 대항하여 동방의 도를 일으킨다는 뜻에서 붙인 이름이며, 1905년 손병희에 의해서 천도교로 개칭되었다. 창도 당시 동학은 시천주 신앙을 중심으로 모든 서민이 내 몸에 한울님을 모시는 입신에 의하여 군자가 되고 나아가 보국안민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나라 구제 신앙이었으나, 2대 교주 최시형에 가서는 '사람 섬기기를 한울같이 한다'는 사인여천의 가르침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는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산천초목에 한울님이 내재한다고 보는 범천론적 사상으로서, 백성들이 마음을 사로잡았다. 또한 3대 교주 손병희에 이르러서는 '사람이 곧 한울'이라는 인내천 사상을 교지로 선포하였다.

동학이 널리 서민층의 반왕조적 민심을 기반으로 하여 보국안민과 광제창생의 사회적 사상 운동이자 종교로 대두된 데에는 나라의 시운이 다하였다는 말세관과 사회 변동기의 불안이 크게 작용하였다. 양반 사회의 신분 차별과 적서 차별을 반대하던 서민층에서 신분 평등을 주장하는 동학에 대해 공명하는 자가 많았던 것은 시대적 상황으로 볼 때 당연한 귀결이었다. 최제우 자신 또한 몰락 양반가의 서출로 태어났으니 그러한 교리가 세워진 것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최제우는 1824년 순조 24년에 경주 최씨 옥의 서자로 태어났다. 몰락 양반 가문 출신인 그는 젊은 시절에 의술, 복술 등 여러 방면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세상의 어지러움이 바로 천명을 돌보지 않기 때문에 생긴 것임을 깨닫고 천명을 알아낼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시작한다. 1856년 천성산에서부터 시작된 그의 구도 노력은 1859년 구미산 용담정 수도에서도 계속 이어진다. 그가 파악한 당시의 사회상은 왕조의 기운이 쇠하여 개벽이 필요한 말세라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위기의식에서 최제우는 서학과 서교에 대한 대응으로 동학이라는 새로운 도를 제창하게 되었다. 그가 본래 이름인 제선을 제우로 고친 것도 종교적으로 구국과 제세의 길을 찾겠다는 자각에서 나온 것이다.

186045일 마침내 그는 득도 체험을 하고 동학이라는 새로운 종교를 창제하였다. 그로부터 1년간 가르침에 마땅한 체득하고 이치를 도를 닦는 순서와 방법을 만들어 1861년부터 본격적으로 새로운 신앙을 포교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경주 일대를 중심으로 신도가 많이 모여들었는데 동학이 가지고 있는 민간 신앙적 성격이 신앙적 결집을 촉진하였다.

동학은 기성 종교인 유교와 불교의 쇠운설을 주장하는가 하면, 유교 사상을 비판적으로 흡수하였다. 그는 서민들이 수학 기간을 거치지 않고도 입도할 수 있으며 입도한 그날부터 군자가 될 수 있다고 하여 서민이 군자의 인격을 갖추는 길을 열어놓았다. 또한 동학의 교지인 '시천주' 사상을 통해, 각 개인이 천주를 모시는 인격적 존재이자 각자 자기 안에 천주를 모신 주체임을 강조하였다.

이와 같은 동학 사상은 후에 일어날 동학 농민혁명에 사상적 영향을 끼쳤음은 물론이거니와 인간관계가 상하 주종의 지배, 복종 관계가 아니라 누구나 다 같이 천주를 모시고 있는 존엄한 존재이자 평등한 관계임을 가르침으로써 근대적 사상의 선구적 위치에 서게 되었다.

한편 동학교도들의 교세가 날로 커지자 조정에서는 동학도 서학과 같이 민심을 현혹시킨다 하여 나라가 금하는 종교로 규정하고, 18629월 교조 최제우를 백성을 현혹시킨다는 이유로 경주 진영에서 체포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수백 명의 제자들이 석방을 청원하여 무죄 방면되는데 이 사건이 곧 동학의 정당성 입증으로 받아들여져 그 후 교세가 더욱 커졌다. 신도가 늘자 그 해 12월에 각지에 접을 두고 그 지역의 접주가 지역 신도를 이끌게 하는 접주제를 두어 1863년에는 교인 3천여 명, 13개 접소를 확보하였다. 이 해 8월에는 최시형에게 도통을 전수하고 제2대 교주로 삼았다. 당시 관헌의 지목을 받고 있었던 최제우가 미리 후계자를 세워놓은 것이다.

한편 조정에서는 동학의 교세 확장에 두려움을 느끼고 최제우를 다시 잡아들일 것을 명하니 그 해 1120일 최제우는 선전관 정운구에 의하여 경주에서 체포되었다. 최제우가 서울로 압송되는 도중 철종이 죽자 18641월 대구 감영으로 이송되어 310일 사도난정의 죄목으로 효수에 처해졌다. 이때 그의 나이 41세였다. 그러나 한 번 일어난 동학의 불길은 2대 교주 최시형에 이르러 더욱 그 사상적 기반을 다지면서 조선 말기의 국내외 정세에 크나큰 영향을 미치는 민족 종교로 발돋움한다.

 

 

7. '철종실록' 편찬 경위

 

'철종실록'은 총 16(부록1)으로 되어 있으며 18496월부터 1863128일까지 철종 재위 146개월간의 사실을 편년체로 기술하고 있다. 부록에는 행록, 시책문, 애책문, 비문, 지문, 행장 등을 기록하였다.

이 책은 1864, 고종 1429일에 편찬을 시작하여 1865년 윤5월에 출판되고 각 사고에 봉안되었다. '철종실록'의 편찬을 담당한 실록청 당상은 총재관에 정원용, 김흥근, 김좌근, 조두순, 이경재, 이유원, 김병학, 각방당상에 김병기, 김병국 등이었다.

'철종실록'은 어느 면에서 보자면 조선왕조의 마지막 실록이라 할 수 있다. 뒤에 편찬된 '고종실록', '순종실록'은 일제 강점기에 일본이 설치한 이왕직에 의해 편찬됨으로써 사실의 취사 선택 기준이 이전의 실록과 달랐으며, 서술의 객관성도 결여되어 있다. 따라서 실록 본래의 편찬 방법 및 기준에 따라 편찬된 실록으로는 '철종실록'이 마지막이다.

 

편찬 담당자에 철종 대에 권세를 잡았던 안동 김씨 일문이 많아서인지 '철종실록'은 역대 어느 왕보다도 왕에 대한 일화나 칭송을 자자하게 싣고 있다.

 

철종 시대의 세계 약사

 

철종 대는 세계사적 전환기에 직면해 있던 시기였기에 수많은 전쟁들이 터지고, 서구열강의 식민지 침략이나 이권 쟁탈이 가속화되는 등 제국주의적 침략주의가 횡행했던 시기다.

청나라가 태평천국의 난 등으로 정국이 혼란에 빠지고 서구 열강들에게 이권을 넘겨주는 등 안팎 곱사등이의 위기에 놓이고, 베트남, 캄보디아 등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열강의 식민지가 된다. 일본은 서구 열강들과 화친을 맺고 문호를 개방함으로써 조선보다 근대화에 한발 앞서게 된다.

유럽에서는 작은 나라들의 합병과 독립전쟁이 끊이지 않고 일어나며, 영국, 프랑스 등의 열강은 새로운 식민지를 찾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미국에서는 남북전쟁의 발발과 더불어 북군의 승리로 노예해방이 선포되어 획기적인 변혁기를 맞게 된다.

한편 다윈의 진화론이 발표되어 세상을 충격 속으로 몰아넣었는가 하면, 파스퇴르의 미생물 분석 등 과학적 연구성과들이 많이 나타나 생활의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26대 고종실록

 

1. 수난의 왕 고종과 조선왕조의 몰락(1852-1919. 재위 기간 186312-19077, 437개월)

 

안동 김씨의 60년 세도 정치는 왕권을 극도로 약화시켰으며, 그것은 곧 사회의 혼란과 불안으로 이어졌다. 게다가 일본과 서구 열강이 점차 조선을 압박해 오고 있었다. 고종은 이 같은 어려운 시기에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라 몰락해가는 왕조와 풍전등화와 같은 국가를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지만 수난과 고통 속에 외세에 의해 강제 퇴위당하고 만다.

고종은 1852년 남연군의 아들 흥선군 이하응과 여흥부대부인 민씨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아명은 명복, 자는 성임이다. 이후 헌종의 모후 조대비에 의해 익성군에 봉해지고 186312월 조선 제26대 왕으로 등국했다. 이때 그의 나이 12세였다.

고종이 왕위에 오를 당시 조정은 안동 김씨으 손아귀에 있었다. 그들은 순조 이후 반세기 이상을 계속해서 권력을 독점하고 있는 상태였는데, 헌종의 어머니이자 효명세자(익종)의 부인인 신정왕후 조씨는 이 같은 권력 구도를 깨뜨리기 위해 남연군의 아들 이하응과 결탁하여 그의 아들 명복을 왕위에 앉히게 된다.

둘째 아들 명복을 즉위시키기 위한 이하응의 계략은 치밀했다. 안동 김씨 세력의 경계에서 벗어나기 위해 건달들과 어울려 지내는가 하면, 안동 김씨 가문을 찾아다니며 구걸을 하기도 했다. 이 같은 호신책 덕분으로 목숨을 부지한 그는 철종의 죽음이 임박하자 익종비 조대비와 연줄을 맺어 자신의 둘째아들 명복을 왕위에 앉히려 한다. 조대비 역시 그와 마찬가지로 안동 김씨의 세도에 짓눌려 지내던 처지였기에 이하응과 뜻을 같이하게 된다.

186312월 철종이 죽자 조대비는 이하응의 둘째아들 명복을 양자로 삼아 익종의 뒤를 잇게 하고, 자신이 수렴청정을 하였다. 그리고 흥선군 이하응을 흥선대원군으로 봉하고 섭정의 대권을 그에게 위임시켰다. 이로써 고종을 대신한 흥선대원군은 향후 10년 동안 권력을 쥐고 자신의 의지대로 정사를 운영하게 된다.

섭정의 대권을 위임받은 흥선대원군은 가장 먼저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를 분쇄하여 쇠락한 왕권을 되찾고 조선을 압박해오는 외세에 대적하기 위한 과감한 개혁 정책을 추진한다.

그는 우선 당색과 문벌을 초월하여 인재를 고루 등용하고 당쟁의 근거지가 된 사원을 철폐하는 한편, 토색을 일삼아 주구로 전락한 탐관오리들을 처벌하고 양반과 토호의 면세 전결을 철저히 조사하여 국가 재정을 충당했다.

이 밖에 민간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무명잡세를 없애고, 궁중에 특산물을 바치는 진상제도를 폐지했으며, 은광산을 개발하는 것을 허용하여 경제에 도움이 되도록 했다. 또한 사회의 악습을 개선하고 복식을 간소화했으며, 군포세를 호포세로 변경하여 양반도 세금을 부담하도록 했다.

한편 '대전회통', '유전조례', '양전편고'등의 법전을 편찬하여 법질서를 확립시켰고 비변사를 폐지하고 의정부를 부활시켜 삼군부를 두어 군국 기무를 맡게 함으로써 정무와 군무를 분리시켰다

흥선대원군은 이처럼 민심을 수습하고 국가 재정을 확립했으며 경제, 행정 개혁 등으로 세도 정치의 폐해를 완전히 일소하는 성과를 거두어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몇 가지 무리 정책과 세계정세를 정확하게 읽어내지 못한 채 지나친 쇄국정책을 폄으로써 어려움에 처하기도 한다.

우선 왕의 위엄을 세우고자 경복궁을 중건하는 과정에서 원납전을 징수하고 문세를 거두는 것도 모자라서 허락 없이 전국에서 거석과 거목을 징발하여 백성들의 원성을 사기도 했다.

또한 천주교도들에 대한 지나친 박해로 인해 자신의 정치 생명에 타격을 입기도 했다. 그는 한때 천주교도들이 건의해온 이이제이(오랑캐로써 오랑캐를 제압한다)의 논리에 흥미를 가진 적도 있었지만 이 때문에 도리어 정적들에게 탄핵의 빌미를 주게 되자 정치적 생명에 위협을 느낀 나머지 천주교 박해령을 내려 1866년부터 1872년까지 6년 동안 8천여 명의 신자들을 학살하였다. 이것이 바로 '병인박해' 혹은 '병인사옥'이라 불리는 사건이다.

천주교 신자에 대한 이 같은 박해로 프랑스 신부 9명이 죽자 프랑스는 그 보복으로 186610월 군함 7척에 총병력 1천 명을 승선시키고 강화도를 점령하였다. 이에 조선군은 강화도 수복 계획을 구상하고 그들을 공격했지만 화력이 밀려 실패하였다. 그러나 제주목사 양헌수의 전략으로 정족산성 싸움에서 승리하여 프랑스 군을 격퇴하였다. 이 사건을 '병인양요'라고 한다.

그리고 이 사건보다 2개월 먼저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온 미국상선 제너럴셔먼 호가 통상을 요구하다가 평양군민의 화공으로 불타버린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5년 뒤인 1871년에 '신미양요'로 발전하게 된다.

미국은 셔먼 호 사건이 발생하자 조선 개항 문제에 적극적인 관심을 표명하게 된다. 그리고 두 번에 걸친 탐문 항행을 실시하면서 셔먼 호에 대한 손해 배상을 요구하는 동시에 통상 관계를 수립하기 위해 두 번에 걸쳐 조선 원정을 계획했지만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하지만 그들은 18715월 조선 원정을 결행하기로 하고 군함 5, 병력 12백여 명, 함포 85문 등으로 무장하고 강화도 해협으로 침입해왔다.

미국 군함이 강화도로 접근해오자 조선군은 그들에 대한 기습 공격을 감행한다. 이것이 이른바 '손돌목 포격 사건'으로 조·미간의 최초의 충돌이었다.

이 사건 이후 미국은 보복 상륙 작전을 벌이겠다고 위협하면서 평화 협상을 제의했다. 하지만 조선의 거부로 평화 협정이 결렬되자 그들은 대대적인 상륙 작전을 감행해 강화도 초지진에 무혈 입성하였다. 이후 조선 수비병은 광성보에서 전투를 벌였지만 패하였고, 강화도는 완전히 미군의 손아귀에 넘어가고 말았다. 하지만 그들은 흥선대원군의 강력한 쇄국정책에 밀려 결국 점거 1달여 만에 강화도에서 물러갔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는 프랑스와 미국이 조선과 통상 무역을 하기 위해 벌인 침략 전쟁이었다. 이는 오히려 조선민들의 감정만 자극시켜 척화비를 세우는 등 흥선대원군의 쇄국 정책이 더욱 강화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하지만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12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한 고종이 어느새 20세를 넘겨 성인이 되면서 친정을 원하고 있었으며, 1866년에 입궁한 고종비 민씨가 대신들과 유럽을 앞세워 대원군 하야 공세를 벌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침내 1873년 고종이 서무를 친히 결재하겠다는 명을 내리고 통치 대권을 장악하게 되자 대원군은 정계 일선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자 정권은 왕비 민씨의 척족들이 장악했다. 민씨 척족들은 흥선대원군이 취했던 강력한 쇄국정책과는 달리 안으로는 일부 세력의 대외 개방 여론과 밖으로는 운요 호 사건 이후 무력 시위를 하고 있던 일본의 국교 요청을 받아들여 1876년 일본과 강화도에서 '병자수호조약'을 맺었다.

신미양요 이후 쇄국정책을 더욱 강화한 조선에서 대원군이 물러남으로써 점차 대외 개방에 대한 여론이 높아가자 일본은 18752월부터 군함을 이끌고 동해와 남해, 황해 등에서 무력 시위를 벌이게 된다. 그리고 결국 병력을 이끌고 강화도로 침입해오자 조선군은 영토에 대한 불법 침입을 이유로 발포한다. 일본은 이 조선군의 발포를 빌미로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해 영종도에 상륙했고 그에 대응하기 위해 조선군은 군사를 동원해 그들과 일전을 벌였지만 패배하고 말았다.

일본군은 한동안 영종도를 점거하고 있다가 조선의 감정이 악화되자 일단 물러났다. 하지만 조선 영해에 계속해서 군함을 진주시켜 무력 시위를 벌이며 개항을 요구했고, 마침내 18762월 강화도에서 조·일수호협약이 체결되면서 제물포항이 개항되고, 이후 부산과 원산항도 개항되었다.

일본과 수교 이후 고종은 미국, 프랑스, 러시아 등의 구미 열강과도 차례로 조약을 맺고 통상 관계를 가지는 개항 정책을 실시하였다. 또한 이러한 일련의 개화 시책을 실시하면서 한편으로는 관제와 군제를 개혁하고 젊은 개화파로 형성된 신사유람단과 수신단을 일본에 지속적으로 파견하여 새로운 문물을 학습하게 했다.

하지만 개항 이후 일본의 정치적, 경제적 침투가 가속화되자 국내에서는 개화파와 수구파의 대립이 심각한 양상으로 치닫기 시작했다. 1881년 황준헌이 '조선책략'을 유입하여 반포한 사건을 계기로 수구를 주장하던 위정척사파는 마침내 척사상소운동을 일으켜 민씨 정권을 규탄한다. 이때 안기영 등의 대원군 주변 세력은 고종의 이복형인 이재선을 왕으로 옹립하기 위해 국왕 폐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역모는 일부 관계자들의 고변에 의해 서전에 적발되었고, 고종과 민씨 일파는 이를 빌미로 척사상소운동을 강력히 제압하여 가까스로 정국을 수습하였다.

하지만 개화파와 위정척사파의 알력은 더욱 심해졌다. 그리고 마침내 1882년 구식 군대 폐지와 관련하여 5군영에 소속됐던 군인들에 의해 임오군란이 일어났으며, 이어 1884년에는 개화파의 갑신정변이 발생했다.

임오군란 때는 흥선대원군이 반란 세력을 등에 업고 궁중에 들어와 대권을 장악했다가 곧 청군에 의해 납치되었고, 1884년 갑신정변 때는 궁중을 습격한 개화 세력이 정권을 장악했다가 청군에 의해 밀려남으로써 왕권이 크게 실추되었다. 뿐만 아니라 청과 일본이 이 변란을 계기로 조선에 진주해 세력 다툼을 벌여 조선의 자주권은 치명적인 손상을 입게 되었다.

이 두 사건 이후 민씨 정권과 고종은 친청 정책을 펼치면서 새로운 국면을 모색했지만 급격하게 변화하는 동북아시아의 정세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해 혼란은 점차 가중되었고 전국 곳곳에서 반봉건, 반외세의 기치를 내건 민란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급기야 그것은 18943월 동학혁명으로 폭발되어 관군과 농민 사이의 전면전으로 발전하였다.

'보국안민''폐정개혁'을 기치로 내건 농민들의 기세가 걷잡을 수 없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고종과 민씨 세력은 청에 원병을 청하였고, 청이 이에 응하자 일본 역시 그들간의 조약을 빌미로 군대를 동원하였다. 이처럼 외세가 개입하자 농민군과 관군은 회담을 통해 화의를 약속하고 싸움을 중단하였다.

하지만 조선에 진주한 청·일 양국군은 돌아가지 않았다. 일본은 청에게 함께 조선의 내정 개혁을 실시하자고 제의하였지만 청은 이 제의를 거절했다. 그러자 일본은 단독으로 민씨 정권을 몰아내고 흥선대원군을 앉혀 꼭두각시 정권을 탄생시켰다. 그 뒤 개혁 추진 기구로서 군국기무처가 설치되었고, 김홍집이 중심이 되어 내정 개혁이 단행되었다. 이것이 갑오경장이다.

일본은 이처럼 단독으로 조선의 내정 개혁을 단행함과 동시에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청군을 공격하여 승리한 뒤 정식으로 청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7월에 시작된 청·일 전쟁은 두 달 만에 구미 열강의 지지를 등에 업은 일본의 승리로 끝났다.

·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정복을 위해 내정 간섭을 시작했다. 이 때문에 해산되었던 동학군이 '외세배격'을 기치로 내걸고 다시 소집되어 대일 농민전쟁을 감행하였다. 하지만 관군과 일본군의 화력에 밀린 농민군은 그해 12월 패배하여 동학 농민군의 봉기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이후 일본의 조선에 대한 내정 간섭은 더욱 강화되었다. 그러나 당시 일본은 청·일 전쟁에서 승리한 대가로 받은 요동반도를 러시아, 독일, 프랑스의 삼국 동맹군의 힘에 굴복해 다시 청에 돌려준 상태였다. 조선 조정은 이 같은 정세를 감지하고 배일친러 정책을 실시하여 일본군을 조선에서 몰아내고자 하였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일본은 18958월 대러 관계를 주도하고 있던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친일 세력으로 하여금 조정을 장악하게 하는 '을미사변'을 일으킨다.

을미사변으로 왕비를 잃은 고종은 일본의 압력으로 다시 죽은 명성황후를 폐위시켜 서인으로 전락시키는 조처를 취하게 된다. 그러나 일본의 을미만행은 국제 사회에 알려져 지탄을 받게 되었고, 일본은 이 사건을 사죄하고 형식적인 진상 조사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서인으로 폐위되었던 명성황후는 다시 신원될 수 있었다.

한편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일반 민간에 알려지자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 관군과 일본군에 대항하여 치열한 싸움을 전개했다. 이에 당황한 일본은 전국 각처로 주력 부대를 출동시켜 진압을 서둘렀지만 의병은 좀체 사라지지 않았다.

을미사변 후 신변에 위협을 느끼고 있던 고종은 일본 군대와 친일 세력의 어수선한 틈을 이용해 은밀히 러시아와 내통하고 18962월 러시아 영사관으로 몸을 옮긴다. 고종은 여기에서 친러 정권을 수립하여 친일 내각의 요인들을 역적으로 규정지으며 단죄하였고, 갑오경장 때 실시된 단발령을 철폐하는 한편 의병 해산을 권고하는 조칙을 내렸다.

그러나 친러 내각이 집권하면서 열강에 많은 이권이 넘어가는 등 나라의 위신이 추락하고 권익을 잃어 국권의 침해가 극심해진다. 이에 독립협회를 비롯한 국민들은 국왕의 환궁과 자주 선양을 요구하기에 이른다. 이 같은 여론에 밀려 고종은 18972월 아관으로 떠난 지 1년 만에 환궁하여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치고 황제에 올라 연호를 '광무'라 하였다.

대한제국이 성립되자 고종의 신변 위협은 더욱 심화된다. 18987월 안경수가 현역, 퇴역 군인들을 매수하여 황제 양위를 계획하다가 실패하였고, 9월에는 유배되어 있던 김홍륙이 차에 독을 타는 사건이 발생하는 등 고종을 위협하는 일이 연달아 일어났다. 또한 그 무렵 독립협회 회원들을 중심으로 만민공동회가 만들어져 맹렬하게 자유민권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그러나 고종은 보부상과 군대의 힘을 빌려 이들을 진압하였다.

1904년 러시아와 일본간에 전쟁이 일어나 일본군의 군사적 압력이 격해지는 가운데 장호익 등이 다시 황제 폐립 음모사건을 일으켰고, ·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고종에게 군사적 압력을 가하여 제1차 한·일협약을 강요했으며, 1905년에는 일본과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하고 말았다.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고종은 미국에 이 조약의 무효를 호소하기 위해 190511월 미국 공사로 있던 헐버트에게 밀서를 보냈다. 하지만 미국은 그 당시 이미 필리핀에서 미국의 우월권을 인정받는 대신 대한제국에 대한 일본의 지배를 용인하는 '가쓰라·태프트협정'을 체결한 상태였다. 따라서 미국이 고종의 밀서에 호응할 까닭이 없었다.

일본의 강제적인 보호 조약에 대한 무효를 선언했지만 미국의 호응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고종은 일본이 설치한 통감부에 의해 외교권이 박탈당하자, 대한제국 문제를 국제 사회에 알리기 위해 19076월 네델란드 헤이그에서 개최된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할 계획을 세웠다. 특사로 내정된 사람은 전 의정부참찬 이상설과 전 평리원감사 이준이었다. 이들을 특사로 파견한 고종은 다른 한편으로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에게 친서를 보내 이들 특사 활동을 지원해 줄 것을 요청한다. 그러나 영국과 일본의 방해로 고종의 밀사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이 사건으로 이완용, 송병준 등 친일 세력과 일본의 강요에 의해 고종은 이 해 720일 퇴위하게 된다.

고종은 순종에게 선위한 후 태황제로 물러났고, 1910년 일제가 대한제국을 무력으로 합방하자 이태왕으로 불리다가 1919년 정월에 6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이때에 전국 각지에 그가 일본인에 의해 독살당했다는 소문이 퍼져 민족의 의분을 자아냈으며, 국상이 거행될 때 3·1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고종은 명성황후 민씨를 비롯한 7명의 아내를 두었으며, 그들에게서 61녀를 낳았다. 능은 홍릉으로 경기도 미금시에 있다.

고종에 이어 순종이 즉위하긴 하지만 실질적으로 보면 고종이 조선의 마지막 왕이나 다름없다. 그것은 이미 그가 집권하던 시기에 일본에 의한 강제적인 보호조약이 이루어졌고, 또한 그가 일본의 강권에 의해 퇴위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도 경술국치를 보았고, 다시 9년을 더 살며 일본의 식민 통치를 목격했기 때문이다.

어느 나라든 망국의 상황에서는 많은 사건들이 벌어지게 마련이다. 조선의 멸망 과정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 사건들이 발생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불과 1백 년도 되지 않았다. 따라서 당시의 상황이 아주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게다가 그 사건들은 아직까지 우리 사회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실정이다.

 

 

2. 고종의 가족들

 

고종은 명성황후 민씨를 비롯하여 7명의 아내에게서 61녀를 얻었는데, 명성황후 민씨가 왕자 척(순종)을 낳았으며, 귀비 엄씨가 영친왕을, 귀인 이씨가 완화군 등 2남을, 귀인 장씨가 의친왕을, 귀인 정씨가 1, 귀인 양씨가 덕혜옹주를 낳았다.

이들 중 명성황후와 영친왕, 의친왕의 삶을 약술하고 참고로 흥선대원군의 약력을 함께 붙인다.

 

흥선대원군 이하응(1820-1898)

인조의 셋째아들인 인평대군의 6대손인 남연군의 넷째아들이다. 남연군이 어릴 때 사도세자의 둘째 아들 은신군의 양자로 입적되었기에 촌수로 따지면 흥선대원군은 영조의 고손자가 되는 셈이다. 그의 이름은 하응이며, 자는 시백, 호는 석파였다. 12세에 어미니를 여의고 17세에 다시 아버지를 여읜 뒤 사고무친의 상태에서 불우한 청년기를 보냈다. 21세가 되던 1841년 흥선정이 되었고, 1843년 흥선군에 봉해졌으며, 1846년 수릉천장도감의 대존관이 된 뒤 종친부의 유사당상, 오위도총부의 도총관 등의 한직을 지내면서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하에서 불우한 시절을 보냈다.

철종 시대에는 안동 김씨가 권력을 독점하며 왕실과 종친에 갖가지 통제와 위협을 가했으므로, 호신책으로 천하장안이라고 불리는 시정의 무뢰한인 천희연, 하정일, 장순규, 안필규 등과 어울려 파락호 생활을 하였다. 또 이때 그는 안동 김씨 가문을 찾아다니며 구걸도 서슴지 않았기에 궁도령이라는 비웃음을 사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시정잡배와 어울려 지내는 호신 생활을 통하여 서민 생활을 체험했으며, 민간의 바람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그러던 흥선군은 186312월 자신의 아들 명복이 왕위에 오르고 자신 또한 흥선대원군으로 봉해져 신정왕후로부터 섭정의 대권을 위임받자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하였다. 서원 정리, 무명잡세 폐지, 법전 편찬, 비변사 폐지 등을 시행하면서 안동 김씨의 세력을 눌러 왕권을 강화하고 외부적으로는 철저한 쇄국정책을 추진하였다.

그의 이러한 혁신으로 인해 조선 사회는 조금씩 제 모습을 찾아가고 있었지만, 한편으론 경복궁의 무리한 중건과 지나친 쇄국 정책으로 인한 천주교 박해 등으로 말미암아 안팎으로의 어려움이 초래되기도 했다.

그는 187311월 고종과 명성황후에 의해 대권에서 손을 떼야 했다. 외척세력을 두려워 한 나머지 영락한 향반 여흥 민씨 가문에서 왕비를 간택했지만, 오히려 그녀에 의해 정치적으로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

고종은 그 당시 이미 22세의 성년으로 친정을 원하고 있었고, 왕비 민씨는 대원군 축출 작업을 추진하여 마침내 최익현의 대원군 탄핵 상소를 이끌어내게 한다. 그 결과 187311월 창덕궁의 대원군 전용 출입문이 사전 양해 없이 왕명으로 폐쇄되었고, 대원군은 하야하여 양주 곧은골에 은거하였다. 하지만 타의에 의해 축출된 그는 이때부터 왕비에 대한 악감정이 생겨 끊임없이 정계 복귀를 꾀하게 된다.

1881'조선책략' 반포를 계기로 민씨 일파의 개화 시책을 비난하는 전국 유림의 척사상소운동이 격렬히 전개되자, 대원군 계파인 안기영은 고종의 이복형 재선을 옹립하여 민씨 척족 정권을 타도하려는 국왕 폐립 음모를 꾸몄다. 대원군은 재집정을 위해 이 계획에 가담하지만 사전에 발각되어 오히려 척사상소운동을 탄압할 빌미를 제공하였고, 대원군 자신의 입지도 더욱 위축되었다.

그러나 1882년 구식 군대 폐지와 봉량미 문제로 일어난 임오군란 때 난병들에 의해 정국 개입을 요청받아 왕명으로 사태 수습을 위임받고 재집권하였다. 이때 그는 명성황후의 사망을 공포하고 다시 정국을 주도하려 했지만, 명성황후의 요청으로 원세개가 이끄는 청국군이 개입함으로써 사태는 반전되어 청국으로 연행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는 청에 연행되어 3년 동안 중국 바오딩에서 유수 생활을 해야 했다.

그는 18852월 조선통상사무전권위원으로 부임하는 원세개와 함께 귀국한 후 여전히 정계 복귀를 노리다가 1886년 민씨 정권이 조·러조약을 체결하자 불만을 품은 원세개와 결탁하여 큰아들 재황을 옹립하고 재집권하려다가 실패하고,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농민 세력과도 연합하려 하였다. 하지만 이것은 동학 농민운동이 실패로 돌아가 실현되지 못하였고, ·일전쟁 이후 온건개혁파가 갑오개혁을 추진할 때 영입되어 군국기무를 총괄하기도 했다.

하지만 일본이 바라는 것과 달리 그가 자신의 소신대로 개혁을 추진하려 하자 은퇴를 강요당했고, 김흥집 내각에 의해 경장 사업 추진이 진행된다. 이 이후에도 그의 정계 복귀 노력이 계속되자 그의 행동을 제약하는 대원군 존봉의절이 제정되어 사람들과의 접촉을 제한받았을 뿐 아니라 외국 사신들과의 만남도 정부의 관헌 입회하에서만 가능해지게 되었다.

을미사변 때 일본의 요청에 따라 입궁하여 왕비 민씨가 죽은 후 일시적으로 재집권하였으나 고종이 러시아 공관으로 옮겨감에 따라 다시 실각하여 곧은골로 내려와야 했다. 그리고 3년 후인 189879세를 일기로 마침내 생을 마감하였다.

죽은 뒤 부대부인 민씨와 함께 공덕리에 안장되었다. 1907년 대원왕에 추봉되었다.

 

명성황후 민씨(1851-1895)

여성부원군 민치록의 딸이다. 8세에 부모를 여의고 혈혈단신이 되었으며, 흥선대원군의 부인 민씨의 천거로 왕비에 간택되어 1866년 한 살 아래인 고종과 가례를 올리고 입궁하였다.

그녀가 왕비로 간택된 것은 순전히 배경이 미흡하여 외척의 득세 가능성이 없다는 점 때문이었다. 흥선대원군은 외척에 의하여 정권이 장악된 순조, 헌종, 철종 360년간의 세도 정치의 폐단 때문에 왕실이 안정되지 못했다고 판단하고 있었고, 그래서 부인 민씨의 집안에서 왕비를 들여 왕실과 정권의 안정을 도모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왕비 민씨는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수완이 능란한 여자였기에 왕비에 오른 지 몇 년 지나지 않아서 왕실 정치에 관여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민비는 시아버지 흥선대원군과 정적 관계에 놓였고, 결국 그를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하기에 이른다.

민씨와 대원군의 사이가 벌어진 직접적인 원인은 궁녀 이씨의 몸에서 태어난 왕자 완화군을 대원군이 편애하여 세자로 책립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 배후에는 민씨를 중심으로 한 노론 세력과 새로 등용된 남인과 일부 북인을 중심으로 한 세력간의 정치적 갈등이 작용하고 있었다.

대원군과 사이가 악화된 이후 그녀는 끊임없이 그를 정계에서 밀어내려 하였고, 마침내 대원군의 정적 안동 김씨 세력과 대원군의 권력 독점을 염려한 조대비 세력, 그리고 대원군의 장자 재황의 세력 및 최익현 등의 유림 세력과 결탁하여 최익현의 대원군 탄핵 상소를 이끌어낸다. 1873년의 이 상소를 계기로 대원군은 실각하게 된다.

대원군이 실각한 후 그녀는 민씨 척족을 앞세워 정권을 장악하고 고종을 움직여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맺는 등 일련의 개화 시책을 추진했다. 그러나 그녀는 개화 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많은 위협을 받게 된다.

1882년 민씨 세력의 개화 정책에 불만을 품은 위정척사파와 대원군 세력이 봉량미 문제로 임오군란을 일으켜 그녀를 죽이려 하였으나, 그녀는 재빨리 궁을 탈출하여 충주목사 민응식의 집에 피신하였다. 그리고 비밀리에 고종과 접촉하여 청나라에 군사 지원을 요청하였다. 그녀의 요청으로 출동한 청국군은 대원군을 납치하여 청나라로 끌고 감으로써 위기를 넘겼다.

그 사건 이후 그녀는 친청 정책을 실시하였는데, 이 때문에 개화파의 불만이 높아져 갑신정변이 일어나고 일시적으로 개화당이 정권을 장악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때에도 민비는 청국군의 도움으로 다시 정권을 되찾는다.

이때부터 그녀는 외교에 눈을 뜨고 매우 민첩한 외교 능력을 발휘하였다. 1885년 거문도사건이 일어나자 묄렌도르프를 일본에 파견하여 영국과 사태 수습을 협상하는 한편 러시아와도 접촉하였고, 또한 청나라와의 관계에서도 흥선대원군의 환국을 묵인하는 등 유연성 있는 관계를 유지하였다.

1894년 동학교도를 중심으로 한 농민봉기가 일어나 조선의 정국이 혼미 상태가 되었을 때, 조선에 적극적인 공세를 펼치던 일본은 갑오경장에 간여하면서 흥선대원군을 내세워 그녀의 세력을 제거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그녀는 일본의 야심을 간파하고 친러 정책을 쓰면서 노골적으로 일본에 대항하였다. 이때는 이미 영국, 독일, 러시아 등의 삼국간섭으로 일본의 국제적 지위가 실추된 상황이었기에 그녀의 친러 정책은 효과를 볼 수 있었다.

이에 일본공사 미우라는 조선에서 밀려날 것을 염려한 나머지 일부 친일 정객과 짜고 민씨를 포함한 친러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을미사변을 일으켜 그녀를 시해하는데, 1895년 일본 군인과 정치 낭인들이 흥선대원군을 내세워 왕궁을 습격하고 민씨를 시해한 뒤 정권을 탈취한 사건이 그것이다. 민비를 살해한 일본인들은 그녀의 시체를 불사르는 등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질렀다. 그리고 고종으로 하여금 민비를 폐위하여 서인으로 전락시키도록 강요했다.

하지만 그해 1010일 그녀는 신원되어 태원전에 빈전이 설치되고 국장에 의해 숙릉에 안치되었다. 그리고 1897년 명성황후로 추책되고, 11월 양주 천장산 아래에 이장되어 홍릉이라 하였고, 1919년 고종이 죽자 2월에 미금시로 다시 이장되었다. 그녀의 소생으로는 순종이 유일하다.

 

영친왕 이은(1897-1970)

고종의 넷째아들이며 귀비 엄씨 소생으로 순종의 이복동생이다. 1897년에 태어났으며, 19008월에 영왕에 봉해졌고 1907년에 황태자에 책봉되었으며, 이 해 12월 조선 총독 이토 히로부미에 의해 유학이라는 명목으로 일본에 인질로 잡혀갔다.

1910년 국권이 상실되어 순종이 폐위되자 왕세제로 격하되었다. 19204월 일본 황실의 내선일체 정책에 따라 일본 왕족 나시모토의 맏딸인 마사코(방자)와 정략 결혼했다.

1926년 순종이 죽자 형식상으로 왕위 계승자가 되어 이왕이라 불리었으나 일본에 머문 채 귀국하지 못했다. 일본에 강제 체류하는 동안 철저한 일본식 교육을 받았으며, 일본육군사관학교, 육군대학을 거쳐 육군 중장을 지내기도 하였다.

1945년 해방이 되어 환국하고자 하였으나 국교 단절 및 국내 정치의 벽에 부딪혀 귀국이 좌절되었다. 한편, 일본의 패망으로 인해 황족의 특권이 상실되고 재일 한국인으로 등록하여 1963년까지 일본에서 보냈다.

그 후 196311월 당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의 주선으로 국적을 회복하고 부인 이방자와 함께 귀국하였다. 귀국 당시 뇌혈전증으로 인한 실어증에 시달리면서도 1966년 오랫동안 숙원하던 심신장애자 재활원인 자행회, 1967년에는 그의 아호를 빌린 신체장애자 훈련원 명휘원을 설립하여 운영하였다. 하지만 지병으로 19707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그가 죽은 후 부인 이방자는 영친왕기념사업회, 정신박약아 교육 시설인 자혜학교, 1982년 신체 장애아 교육 시설인 명혜학교 등을 설립하며 그의 유업을 계승하였다.

그는 부인 이방자 여사에게서 진과 구, 두 아들을 얻었으며, 맏아들 진은 어려서 죽고, 둘째 아들 구는 현재 생존해 있다.

능은 경기도 미금시 금곡동 홍유릉 내에 있으며, 1989430일 이방자 여사도 이곳에 함께 묻혔다.

 

의친왕 이강(1877-1955)

고종의 셋째아들로 귀인 장씨 소생이며, 순종의 이복동생이고 영친왕 이은의 이복형이다. 1877년에 태어났으며, 15세가 되던 1891년에 의화군에 봉해지고, 18939월 김사준의 딸을 맞아 가례를 올렸다.

1894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의 전승을 축하하는 보빙대사로 임명되어 일본에 갔다가 그해 10월에 귀국하였다. 이듬해 5월에는 특파대사에 임명되었으며, 8월에는 특파대사 자격으로 영국, 독일, 러시아, 이탈리아, 프랑스, 오스트리아 등을 차례로 방문하였다.

1900년에는 미국으로 유학하였고 같은 해 8월에 의친왕에 봉해졌다. 19054월 미국 유학을 마친 뒤 귀국하여 그해 6월에 적십자 총재가 되었다. 1910년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긴 뒤에는 항일 독립투사들과 접촉하여 1919년 대동단의 전협, 최익환 등과 상해 임시정부로의 탈출을 모의하였으며, 계획을 실행에 옮기던 중 그 해 11월 만주 안동에 일본 경찰에 붙잡혀 강제로 본국에 송환되었다.

그 뒤 여러 차례 일본으로부터 도일을 강요받았으나 거부하여 항일의 기개를 굽히지 않았고, 해방과 6.25를 경험한 뒤 서울 사가에서 곤궁한 생활을 하다가 19557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슬하에 우와 건, 두 아들을 두었다.

 

 

3. 떨어지지 않는 녹두꽃 전봉준과 동학혁명

 

동학이라고 하면 폐쇄적이고 고리타분한 단순한 민족 종교 단체로 잘못 인식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이 동학은 단순히 서학으로부터 민족의 문화와 국가를 지키겠다는 의미만이 아니라, 서학을 적극적으로 응용하여 새로운 세계를 구현하려 했다는 점에서 위대함을 가지고 있었다. 다시 말해서 동학은 외세의 영향 없이 조선 사회의 봉건 질서를 무너뜨림과 동시에 계급을 철폐하고 새로운 근대 국가의 형성을 통해 민족의 부강을 꾀한 가장 자주적인 정치 조직이었다.

뿐만 아니라 당시의 어떤 단체보다도 가장 탄탄한 조직과 힘, 그리고 이념을 가지고 있었기에 대다수의 농민과 선각적인 양반의 상당수를 참여시킬 수 있었던 거대한 민족 조직이었다. 따라서 동학은 그 어떤 이름보다도 민족적이며, 적극적인 민중 사회운동체였다고 단언할 수 있다.

만민이 평등하고, 인류애가 살아 있는 이상적 사회 건설을 목표로 하고 있던 동학들은 1894년 민란을 주도하면서 이른바 혁명적 농민봉기를 주도한다. 이 농민들의 봉기는 제도적, 정치적으로 근대화를 목표로 하였던 한국 역사상 최초의 시민 혁명이었다. 이 혁명을 주도적으로 수행한 사람이 바로 전봉준이다.

전봉준의 출생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1854년 전라도 고부군 궁동면 양교리(지금의 정읍시)에서 향교의 장의를 지낸 전창혁의 아들로 태어났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그의 초명은 명숙, 호는 해몽이지만 체구가 작았기 때문에 흔히 녹두라 불리었다.

그는 젊은 시절 생업을 위해 약을 팔기도 했고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무술을 배우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하는 일과 상관없이 늘상 버릇처럼 '크게 되지 않으면 차라리 멸족하는 것이 낫다'고 말하였다 한다. 그만큼 그는 젊은 시절부터 사회를 개혁하기 위한 원대한 포부를 품고 있었다.

그는 약을 파는 것으로 생계를 잇지 못하자 태인 산외리 동곡 마을로 이사하여 세 마지기의 전답을 소유한 소농으로 지내면서, 스스로 선비를 자처하며 동네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훈장 노릇을 겸하였다.

그렇게 세월을 보내고 있던 그는 19세기말로 접어들면서 사회가 급변하고 외세가 밀려드는 것을 보고 민족과 나라를 지켜야겠다는 신념으로 189037세의 나이로 동학에 입교하였다. 그리고 이때부터 그는 사회 개혁을 꿈꾸는 혁명가적인 기질을 발휘하게 된다.

입교한 직후 그는 동학 제 2대 교주 최시형으로부터 고부 지방의 동학 접주로 임명된다. 그의 인품과 지도력을 높이 평가한 주변 교도들의 추천에 힘입은 일이었다. 접주가 된 전봉준은 자신이 살던 곳에서 5리 정도 떨어진 말목장터에서 주로 포교 사업에 전념한다. 그는 포교의 일환으로 병자들을 고치는 일도 함께 하였다. 일찍이 읽은 의서들과 한때 약초를 취급한 경험을 바탕으로 환자들에게 처방전을 내릴 수 있었던 것이다.

1892년 그가 접주로 있던 고부군에 조병갑이란 자가 군수로 영전하여 왔다. 조병갑은 농민들에게 과중한 세금을 부과하는 것은 물론 무고한 사람의 재물을 빼앗아 갈취하고 이에 대항하는 사람들에게는 가차없는 형벌을 가하였다. 조병갑의 학정이 심해지자 고부 주민들을 대신하여 전봉준의 아버지 전창혁은 관청에 면세를 신청하는 탄원서를 제출했고, 이로 인해 심하게 매를 맞고는 귀가한 지 한 달 만에 장독으로 죽게 된다.

조병갑의 횡포는 비단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자신의 아버지 비각을 세우기 위해 농민들로부터 천 냥이나 되는 돈을 거둬들이기도 했고, 또 주민들에게 갖가지 죄를 뒤집어 씌워 2만 냥이라는 엄청난 돈을 벌금으로 긁어냈다. 게다가 대동미를 대신하여 돈을 거두고, 만석보라는 저수지를 만든답시고 쌀 700석을 착복하기도 했다.

학정에 시달리다 못한 고부 주민들은 189311월과 12월 두 번에 걸쳐 군수에게 감세 탄원서를 제출하였다. 하지만 조병갑은 진정서를 제출하려고 온 농민 대표들을 붙잡아 하옥시키고 고문을 가하는 것으로 탄원서에 대한 대답을 대신했다.

탄원과 진정으로 아무런 효과를 보지 못한 농민들은 결국 힘으로 군수를 내쫒아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고, 마침내 전봉준을 중심으로 한 20명의 농민 지도부는 동학교도들에게 사발통문을 돌렸다. 사발통문의 내용은 고부군수 조병갑을 처단하는 것은 물론이고 전주영까지 함락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이는 바로 농민과 관의 대대적인 전쟁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동학 농민군의 봉기는 1894110일에 시작되었다. 이날 새벽 1천여 명의 농민군은 이마에 흰띠를 두르고 죽창과 농기구를 무기로 삼아 말목장터에 집결하였다. 전봉준은 그 전날 밤에 태인의 최경선과 함께 3백여 명의 농민들을 이끌고 야음을 틈타 40리 길을 행군하여 말목장터에 미리 당도해 있었다.

대열을 가다듬은 농민군은 가장 먼저 고부 관아를 습격하여 점령하였다. 그리고 무기고를 부수고 무장한 후 그 동안 억울하게 빼앗겼던 세곡들을 창고에서 꺼내 농민들에게 나눠주었다. 그러나 고부군수 병갑을 생포하는 일은 실패하였다. 조병갑은 농민군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황급히 전주감영으로 피신하고 없었기 때문이다.

고부 관아가 농민군에게 점령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조정은 조병갑을 처벌하고, 새로 장흥부 사 이용태를 안핵사로 삼고, 용산현감 박원명을 신임 고부군수로 임명하여 사태를 수습하고자 했다.

이때 전봉준이 이끄는 농민군은 세를 확대하여 백산으로 이동하여 그곳에 주둔하고 있었다. 그리고 안핵사로 내려온 이용태가 동학교도들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자행하자, 그해 3월 전봉준은 인근 각지의 동학교도들에게 통문을 보내 봉기할 것을 호소하였다. 이에 따라 백산에 집결한 농민군은 일시에 1만으로 불어났다.

집결한 교도들에 의해 농민군의 동도대장으로 추대된 전봉준은 손화중과 김개남을 총관령, 김덕명과 오시영을 총참모, 최경선을 총솔장, 송희옥과 정백현을 비서로 삼고 조직적인 전투 준비에 돌입했다.

그는 싸움에 앞서 살인과 재물 탈취를 금지하고, 일본군과 권력 귀족들을 몰아내는 것을 목표로 하는 4대강령을 발표하고, 규범 12조로 농민군의 규율을 바로잡고 군사훈련을 강화하였다.

태세를 갖춘 농민군은 44일 부안을 점령하고, 47일 황토현에서 관군을 대파하는 한편 정읍, 흥덕, 고창 지역을 습권하였다. 그리고 영광, 함평, 무안 일대를 거쳐 마침내 427일 전주성을 점령하였다.

동학군의 힘이 점차 강성해지자 조정은 청국군을 요청하였고, 청국군이 인천에 상륙하자 텐진조약을 빙자하여 일본군도 조선에 진출하였다. 이렇듯 국가의 운명이 위태로워지자 동학군과 관군은 화의를 약속하고 교섭에 들어갔다. 교섭에 들어가 전봉준은 폐정 개혁을 골자로 하는 27개조에 달하는 조건을 내놓았고, 이에 관군 대표인 홍계훈이 무조건 수용함으로써 '전주화약'이 성립되었다. 그리고 동학군은 각 지방에 집강소를 설치하여 잘못된 정치의 개혁을 위한 행정 관청 구실을 하게 하였다. 말하자면 전라도 지역은 동학의 자치 구역이 된 셈이었다.

집강소의 행동 강령은 총 12개 조로 양반 중심의 봉건 사회를 혁파하고, 신분차별을 없애며, 인습에 갇혀 사는 여성들을 해방시켜 농민의 생활을 풍족하게 만든다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었다. 이 같은 집강소 행동 강령은 17세기 이래 진보적인 실학자들이 내걸었던 개혁안과 1884년 김옥균 등의 개화파가 주장했던 정책보다 훨씬 진보된 내용이었다.

그만큼 시대를 멀리 내다보았던 전봉준의 개혁 사상은 봉건 사회인 조선이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혁명적인 기치를 내걸고 있었다.

농민군이 해산되고 집강소가 설치된 후 전봉준은 20여 명으로 기마대를 조직하여 전라도 내 각지를 순회하며 집강소 설치를 지도하고, 개혁 정책의 실시 상황을 점검하였다. 그 결과 전라도 내에는 53군에 모두 집강소가 설치되었다. 전라도 관찰사 김학진은 집강소의 원만한 운영을 협의하기 위해 전봉준을 전주 감영으로 초청했고, 감영 내에 '대도소'를 설치하기로 합의하였다. 동학 세력의 힘을 두려워한 전라감사는 자신의 집무소인 선화당을 대도소로 내주고, 자신은 그 곁의 작은 건물로 옮겨갔다.

그러나 집강소의 설치과정에서 양반들의 강한 반발에 부딪쳤다. 그들은 집강소의 행동 강령 속에 들어 있는 '빈부의 차이를 없애고 산전과 노비의 구별을 없애고, 또한 양반과 유림의 방자함을 허락하지 않는다'라는 내용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집강소는 인륜을 저버리는 것이므로 양반과 유교의 적'이라고 규정했다. 특히 양반 세력이 강했던 나주, 남원, 운봉의 세 곳에는 좀처럼 집강소를 설치하지 못했다.

이에 전봉준은 마침내 무력으로 집강소를 설치할 것을 결심하고 김개남, 김봉득, 최경선 등에게 각각 3천 명의 병력으로 남원, 운봉, 나주를 접수하도록 했다. 남원과 운봉은 쉽게 함락시키고 집강소를 설치하였으나 나주의 저항은 완강하였다. 나주 관아에는 많은 동학교도들이 붙잡혀 있었고, 또한 나주목사의 저항이 만만치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최경선은 나주 입성을 감행하지 못했다. 이 보고를 들은 전봉준은 단신으로 나주 목사를 만나 그를 설득하고 동학교도들을 석방시킨 뒤 나주에 집강소를 설치할 수 있었다.

그러나 동학의 자치 행정은 오래가지 못했다. 청군과 함께 조선에 진주한 일본은 힘으로 내정 개혁을 단행하려 했고, 이 때문에 청일전쟁이 일어났다. 그리고 이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 조정을 장악하였다. 보국안민과 외세배격을 기치로 내걸었던 동학은 이러한 일본의 국권 침탈 행위에 분개하며 다시 한번 봉기했다.

동학 농민군의 제 2차 봉기는 그해 9월에 있었다. 전봉준을 중심으로 한 남접은 교주 최시형의 북접에 도움을 청해 연합 전선을 폈다. 2차 봉기에 동원된 농민군은 남접 10만과 북접 10만을 합해 약 20만 병력이었다. 하지만 동학 농민군은 숫적으로만 우세할 뿐 훈련을 받은 군인도 아니었고, 병기도 원시적이어서 신식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과 관군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10월 중순 10만 부대로 공주성을 포위하고 대공격전을 전개하였으나 패퇴하였고, 11월 다시 공주 부근의 우금치전투에서 패배하여 후퇴하게 된다. 그리고 나머지 농민군도 금구 싸움을 마지막으로 일본군과 관군에 진압되어 전봉준은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동학군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일본군과 관군은 전봉준을 생포하면 막대한 상금을 준다는 포고문을 내걸었다. 전봉준은 정읍과 순창 등지를 전전하며 몸을 피하다가 과거 자신의 부하였던 김경천의 밀고로 체포되어 122일 한양으로 압송되었다.

그리고 1895329일 손화중, 최경선, 김덕명, 성두한 등의 동지들과 함께 사형에 처해졌다. 이로써 동학 농민봉기는 완전히 막을 내리게 된다. 이때 그의 나이 41세였다.

이렇게 일본군에 의해서 동학군의 봉기는 실패로 돌아갔지만 전봉준은 영원히 민중의 영웅으로 남아 그 뒤에도 계속된 농민군과 의병의 항일 투쟁의 정신적 지주로 자리하게 된다. 그는 영원히 떨어지지 않는 민족의 녹두꽃이 되었다.

 

 

4. '고종실록' 편찬 경위

 

'고종실록'은 본문 4848책과 목록 44책을 합쳐 총 5252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186312월부터 19077월까지 고종 재위 437개월간의 역사적 사실을 일본의 조선총독부가 중심이 되어 기록하고 있다.

편찬 작업은 망국 이후인 19274월에 시작되어 19353월에 완료되었다. 이 책이 편찬된 것은 일제 통치 기간으로 1927'이왕직'을 설치한 뒤 임시 고용원 10명과 집필생 26명을 배치하고, 실록편찬에 필요한 자료인 '승정원일기', '일성록' 등 각종 기록 2,455책을 경성제국대학에서 빌려 자료를 추출하였다.

그리고 편찬 작업에 필요한 자료가 확보되자 19304월에 편찬위원을 임명하여 역대 실록 편찬의 예에 따라 실록 찬술 작업에 착수하였다.

편찬 초대 위원장은 일본인 이왕직 차관 시노다였으나, 그는 19327월 이왕직 장관에 임명됨에 따라 이왕직의 예식과장이던 이항구를 차관으로 승격시켜 부위원장에 임명하고 실록 찬술의 책임을 맡겼다. 그러나 실제 편수의 총책임은 감수위원으로 임명된 경성제국대학 교수 오다가 맡았다.

편찬실에는 위원장, 부위원장 밑에 편찬에 필요한 공·사의 문서를 수집하며 사적의 조사 및 관계자로부터의 사실 청취의 일을 맡는 사료수집부, 각 사료에 기초하고 역대 실록에 준하여 편년체의 실록편찬을 담당하는 편수부, 편집된 원고에 대하여 사실의 정확성을 기하고 문자 장구를 정리하여 실록 원고를 작성하고 간행할 때 교정하는 일을 맡는 감수부의 3부서를 두었다.

그리고 편집부만은 다시 1, 2, 3반으로 분리하고 각 부에는 위원, 보조위원, 서기를 두었다. 한편, 위원장 직할로 서무위원, 회계위원을 배치하고 편찬실 서무는 보조위원서기가 담당하였다.

편찬위원들은 기술, 체제, 편찬을 위한 역대 실록, 특히 <철종실록>의 예에 따른다는 작업 원칙을 세우고 <고종실록><철종실록>을 편찬하였다.

이 실록은 민족 항일기에 일본인들의 간여하에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사실이 왜곡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편찬 각 위원회에서 편찬된 원고가 편찬 총책임자인 경성제국대학 오다 교수에 의해 감색, 감증 등의 손질이 가해졌고, 또한 실록 원고는 일본인인 이왕직 장관의 결재를 얻어 간행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실록은 <승정원일기><일성록>, 그 밖의 관찬 기록들에서 중요한 내용을 채록하였기 때문에 고종 시대사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고종 시대의 세계 약사

고종 시대의 세계 정세를 살펴보면 우선 동아시아는 일본의 팽창이 뚜렷해져 조선에 대한 침략을 강화하는 한편, 중국과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감행해 전쟁에서 승리하고 동아시아의 주도권을 장악한다. 이 시기에 중국 내부에서는 만주족이 세운 청을 무너뜨리기 위한 한족의 독립운동이 전개된다.

한편 영국, 독일, 프랑스 등의 유럽 제국들은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대한 침략을 가속화해 아프리카 분할을 위한 회담을 개최하는 한편, 인도, 미얀마, 인도네시아, 베트남 등의 동남아 국가에 대한 신민 정책을 수립한다.

아메리카에서는 미국의 영토를 확장하기 위해 러시아로부터 알래스카를 매수하고, 내부적으로 남·북 전쟁을 종식시키면서 본격적인 대외 팽창 정책을 감행한다.

 

 

27대 순종 실록

 

1. 망국의 황제 순종과 대한제국의 식민지화(1874-1926, 재위 기간 1907719108, 31개월)

 

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 이후 일본은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순종을 등극케 한다. 이후 순종은 일본의 압력에 밀려 별다른 정치적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 채 군대를 해산당하고, 사법권을 강탈당하는 등 숱한 수모를 겪는다. 그리고 일본은 친일 매국노들을 앞세워 1910년 한일합병을 단행하고 한반도를 무력으로 강점해버린다.

순종은 고종의 장남으로 명성황후 민씨의 소생이다. 174년에 태어났으며 이름은 척, 자는 군방, 호는 정헌이다. 태어난 이듬해 왕세자에 책봉되었고, 9세가 되던 1882년 순명효태후 민씨를 세자빈으로 맞아들였다. 그리고 1897년 대한제국이 수립됨에 따라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1904년 순명효태후가 죽자 190612월 순정효태후 윤씨를 황태자비로 맞이하였으며, 19077월에 일제의 강요와 일부 친일 정객의 모략으로 왕위를 내놓게 된 고종의 양위를 받아 조선 제27대 왕이자 대한제국의 제2대 황제로 즉위하였다. 이때 연호를 광무에서 융희로 고쳤다.

그는 황제가 된 이후 이복동생인 영친왕을 황태자로 책립하였으며, 거처를 덕수궁에서 창덕궁으로 옮겼다.

이후 만 3년에 걸친 순종의 재위 기간은 일본에 의한 한반도 무력 강점 공략이 가속화되고, 마침내 송병준, 이완용 등 친일파 정객과 일본 정부의 야합에 의해 주권을 상실하게 되어 조선 27왕조 519년의 역사는 막을 내리게 된다.

순종 즉위 직후인 19077, 일제는 이른바 한일신협약(정미 7조약)을 강제로 성립시켜 국정 전반을 일본인 통감이 간섭할 수 있도록 하였고, 정부 각부의 장관을 일본이 임명하는 이른바 차관 정치를 시작하였다.

이렇게 내정 간섭권을 획득한 일본은 곧 재정 부족을 이유로 한국 군대를 강제 해산시켰으며, 19097월에는 기유각서에 의해 사법권마저 강탈해갔다. 이처럼 순종을 허수아비 황제로 만든 뒤 이토 총독이 자국으로 돌아가고, 소네 총독을 거쳐 군부 출신의 데라우치 총독이 부임하면서 일본의 대한제국 식민화 계획은 더욱 강화된다.

일제는 19097월 기유각서의 각의에서 '한일합병 실행에 관한 방침'을 통과시킨 뒤 러시아와 사전에 만주 문제를 협상하기 위해 이토를 만주에 파견하였다. 이때 하얼빈에서 안중근 의사가 이토를 포살하자 이를 기화로 한반도 무력 강점 계획을 실행에 옮기게 된다.

일제는 이를 위해 친일 세력인 이완용, 송병준, 이용구 등을 중심으로 형성된 매국 단체인 일진회를 앞세워 조선인이 원함에 따라 조선과 일본이 합병한다는 논리로 1910829일 한일합병조약을 성립시켜 대한제국을 멸망시켰다.

한편 일본의 조선 식민화 계획이 노골화되자 순종 즉위 원년부터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하여 일본군을 공격하는 한편, 민족의 저력을 키워 일제에 빼앗긴 주권을 회복하자는 취지에서 애국계몽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주권 회복운동은 강경파와 온건파로 분리되어 민족 저항의 역량이 하나로 결집되지 못하고, 일부 친일 매국노의 음모로 망국을 막지 못하였다.

또한 순종 주변에는 온통 인사들만 포진해 있어 그가 국가 최고 의사결정의 수렴자로서 왕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한 것도 망국의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일제의 강압적이고 집요한 조선 합병 정책이 망국의 가장 직접적인 요인이었다. 일제는 무력을 바탕으로 원색적인 침략 행위를 자행하였고, 교묘하게 친일 매국노들을 이용하여 민족의 저항 역량을 감퇴시켰다.

일본에 의해 대한제국이 무너진 뒤, 순종은 황제의 위치에서 왕으로 강등되어 해당하는 대우를 해주면서 왕위의 허호는 세습되도록 조처했다.

순종은 폐위된 후 16년 동안 창덕궁에서 머물다가 1926425일에 53세를 일기로 한 많은 생애를 마쳤다. 이 해 610일 그의 국장이 치러지게 되는데 과거 고종인산날에 일어났던 3.1만세운동에 이어 6.10 만세운동이 일어난다.

 

 

2. 순종의 가족

 

순종은 순명효황후 민씨와 순종효황후 윤씨 2명의 부인을 두었으나 슬하에 자녀는 없었다. 능은 유릉으로 경기도 미금시 금곡에 있다.

 

순정효황후 윤씨(1894-1966)

해풍부원군 윤택영의 딸이다. 순종의 첫번째 황태자비 순명효황후 민씨가 1904년에 사망하자, 190612월 황태자비에 책봉되어 입궁했다. 이후 1907년 순종이 황제에 오름에 따라 황후가 되었으며, 그 해 여학에 입학하여 황후궁에 여시강을 두었다.

1910년 국권이 강탈될 때 병풍 뒤에서 어전회의를 엿듣고 있다가 친일파들이 순종에게 합방 조약에 날인할 것을 강요하자, 이를 저지하고자 치마 속에 옥새를 감추고 내놓지 않았다 한다. 하지만 숙부인 윤덕영에게 강제로 빼앗기고 말았다.

망국 후 일제의 침탈 행위를 경험했으며, 해방과 6.25를 겪고 만년에는 불교에 귀의하여 대지월이라는 법명을 받기도 했다. 그리고 196671세를 일기로 낙선재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슬하에 소생은 없었으며, 죽은 뒤 순종과 함께 경기도 유릉에 묻혔다.

 

 

3. <순종실록> 편찬 경위

 

'순종실록'은 재위 기간 44책과 퇴위 후 기록 173, 목록 11책을 합쳐 총 228책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1907년에서 1910년까지 재위 4년간과 퇴위 후 1910년에서 1926년까지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이 실록은 '고종실록'과 함께 19274월부터 19353월까지 8년에 걸쳐 일본이 설치한 이왕직의 주관하에 편찬 작업이 이루어졌다.

총 책임 및 감수는 '고종실록'과 마찬가지로 일본인들에 의해 이루어졌기에 '순종실록' 역시 일제에 의해 많은 부분이 왜곡됐을 가능성이 높다.

 

순종 시대의 세계 역사

순종 즉위년인 1907년 중국에서는 손문 등의 한족 중국혁명동맹회가 결성되었으나 청군에 의해 와해되었으며,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제2차 만국평화회의가 열렸다. 한편 영국은 뉴질랜드에 자치령을 공포했고, 일본은 미국과 합작하여 축음기 제조 주식회사를 설립했다. 순종 1년인 1908년 청의 광서제와 서태후가 죽었고, 광무제의 조카 부의가 3세의 어린 나이로즉위했다. 순종 2년인 1909년 미국과 콜롬비아간의 협약이 조인되어 남미의 콜롬비아와 파나마가 독립을 쟁취하였으며, 중국 상해에서는 제2회 아편 금지 국제회의가 열렸다.

순종 3년인 1910년 프랑스가 콩고와 아프리카 적도 지역을 식민지화하였다. 한편 이 해에 릴케는 '말테의 수기'를 간행했고, 러시아에서는 대문호 톨스토이가 사망했다.

 

 

부록 조선 시대의 주요 관청들

 

의정부

의정부는 조선시대 백관의 통솔과 서정을 총괄하던 최고의 행정관청이다. 별칭으로 도당, 묘당, 정부 또는 황각이라고도 했다.

이 기관은 14004월에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정치적인 목적으로 고려시대 최고 관청인 도평의사사를 혁파하고 설치되었다.

1400년 이후 의정부는 의정부서사제가 실시되면서 국정을 총괄하였으나 1414년 태종이 왕권 강화를 위해 육조직계제를 도입하면서 정치적인 권력이 상대적으로 약화되었다.

그러나 1436년 의정부서사제가 다시 부활되어 국정을 주도하게 되었고, 세조 등극 이후 왕권 강화를 목적으로 다시 육조직계제가 부활하면서 1455년부터 1516년까지는 힘이 약했다. 또한 세조 말년에는 원상제도가 운영되면서 의정부나 육조를 제치고 일시적으로 원상들이 권력을 장악하기도 했다.

중종반정 이후 의정부서사제가 부활되면서 의정부가 중심이 되어 국정을 운영하다가 1554년부터 비변사가 설치되어 실권을 장악하자 1864년까지 유명무실한 형식상의 최고 기관으로 남아야 했다.

1865년 비변사가 의정부에 합속됨으로써 기능을 회복하였으나 1873년까지는 대원군의 섭정으로, 1873년 이후에는 민비 척족의 민씨 일파가 정권을 장악하여 다시 유명무실하게 되고 말았다.

의정부는 조선 개국 이후 10여 차례의 변천을 거치면서 정1품의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1품의 좌찬성, 우찬성, 그리고 정2품의 좌참찬, 우참찬 각 1인에다가 정4품의 사인 2, 5품의 검상 1, 8품의 사록 1인으로 구성되었다.

 

육조

육조는 고려와 조선시대에 국가의 정무를 나누어 맡아보던 이조, 호조, 예조, 병조, 형조, 공조에 대한 총칭이다. 별칭으로 육부 또는 육관으로 불리었다. 이 기관은 고려 성종 때인 982년 중국식 관제를 본떠 설치한 육관(선관, 민관, 병부, 의형대, 예관, 공관)995년에 상서육부로 개칭하면서 성립되었다.

육조는 각 조마다 정2품의 판서 1, 2품의 참판 1, 3품의 참의 1인에다가 정5품의 정랑이 2인에서 4, 6품의 좌랑이 2인에서 4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무운영에 있어서 상례사는 19개의 속사를 주관한 정랑, 좌랑이, 중대사 돌발사는 판서, 참판, 참의 등 당상관(3품 이상)이 중심이 되어 처리했다.

육조는 순서는 의례적으로 1418년까지는 이, , , , , 공조의 순서였고, 이후에는 이, , , , , 공조의 순서가 되었다. 즉 조선 세종 이후 무반이 중심이 된 병조가 약화되고 재무를 다루던 호조와 상례를 다루던 예조가 강화된 것이다.

육조의 기능을 보면 이조는 주로 인사를 담당하였으며, 호조는 재정 경제와 호적 관리를, 예조는 과거 관리 및 일반 상례를 담당했고, 병조는 군제와 군사를, 형조는 형벌 및 재판과 노비 문제를, 공조는 도로, 교량, 도량형 등을 관리했다.

육조의 실제 기능은 왕권 및 통치 구조와 연관되면서 수시로 그 세력이 조절되었지만 법제적으로는 국정의 가장 중심이 되는 기관이었다. 육조의 정랑, 좌랑은 임기를 미치면 승진되는 특혜를 받았으며, , , 병조의 정랑, 좌랑은 문관만 재직할 수 있도록 되어있었다.

 

삼사

삼사는 언론을 담당한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을 합해서 일컫는 말이다. 그래서 일명 언론 삼사라고도 한다.

사헌부는 백관에 대한 감찰,탄핵 및 정치에 대한 언론을, 사간원은 국왕에 대한 간쟁과 정치 일반에 대한 언론을 담당하는 언관으로서, 이 두 기관을 합해 대간 또는 언론양사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리고 홍문관은 궁중의 서적과 문한을 관장하였고, 경영관으로서 왕의 학문적, 정치적 고문에 응하는 학술적인 직무를 담당하였으며, 세조 대에 집현전이 없어진 뒤에는 그 기능까지 대신했다.

이들 기관은 독자적으로 언론을 행하지만 중요한 문제는 사헌부, 사간원 양사가 합의하여 양사합계를 하기도 하고, 때로는 홍문관도 합세하여 삼사합계로 국왕의 허락을 받을 때까지 끈질긴 언론을 계속하기도 했다. 그래도 언론이 관철되지 않을 때에는 삼사의 관원들이 일제히 대궐 문 앞에 꿇어앉아 국왕의 허락을 간청하는 합사복합을 하기도 했다.

따라서 이 삼사가 제대로 기능할 때는 왕권이나 신권의 전제를 막을 수 있었으나, 삼사의 언론이 특정한 세력에 의하여 이용될 때는 혼란을 면치 못했다.

삼사의 인적 구성을 보면 사헌부에 종2품 대사헌 1, 3품 집의 1, 4품 장령 2, 5품 대평 2, 6품 감찰 13인으로 조직되어 있다. 그리고 사간원에 정3품 대사간 1, 3품 사간 1, 5품의 헌납 1, 6품의 정언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홍문관에는 정2품의 대제학, 2품 도제, 3품 부제학, 3품 당하관의 도제학, 3품 전간, 4품의 응교, 4품의 부응교 각 1인과 정5품의 교리 2, 5품의 부교리 2, 6품의 수선 2, 6품의 부수선 2, 7품의 박사, 8품의 저작, 9품의 정자 2인 등이 있었다.

 

승정원

승정원은 왕명을 출납하던 곳으로 비서실에 해당한다. 별칭으로 정원, 후원, 은대, 대언사 등으로 불리었다.

조선 개국 때의 관제에 의하면 원래 왕명 출납은 중추원의 임무였다. 그러나 왕자의 난으로 정권을 장악한 태종이 집권하면서 사병의 혁파를 단행했는데 이 과정에서 중추원의 기능을 축소, 분할하여 군기의 사무는 의홍삼군부가 승추부로 개편되면서 승정원의 기능도 여기에 귀속되게 되었다. 그리고 1405년 승추부가 병조에 흡수되면서 승정원은 독립된 기구가 되었다.

승정원에는 도승지, 좌승지, 우승지, 좌부승지, 우부승지, 동부승지 각 1인씩 6인의 승지가 있으며 이들은 모두 정3품 당상관이었다. 그리고 승지 이외에도 정7품의 주서 2인이 있었고, 서리 28인이 있었다.

승정원의 핵심적인 구성 인원인 6승지는 동벽과 서벽으로 나누어졌는데, 도승지, 좌승지, 우승지는 동벽, 좌우부승지와 동부승지는 서벽이라 하였다.

이들 6승지는 분방하여 도승지는 이방, 좌승지는 호방, 우승지는 예방, 좌부승지는 병방, 우부승지는 형방, 동부승지는 공방을 맡게 하여 이들의 업무를 분할하였으나 반드시 이것이 지켜졌던 것은 아니다. 되도록이면 이 같은 원칙을 고수하였지만 이들의 능력에 따라 업무관장을 융통성 있게 변경하기도 하였다.

승지의 품계는 정3품이었지만 종2품이 승지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승지들은 그들의 고유 업무 이외에도 타 기관의 직책을 겸하기도 하였다. , 승지는 경연 참찬관, 춘추관 수찬관을 겸하는 것이 상례였고, 도승지는 홍문관 직제학을 겸하여 지제교가 되고, 상서원정을 겸하였다. 그리고 승지 중에는 내의원, 상의원, 사옹원의 부제조를 겸하기도 했으며, 형방승지는 전옥서 제조를 겸하였다. 이처럼 승지가 여러 직을 겸한 것은 왕의 보필을 위해 다양한 정보를 수집할 필요가 있었을 뿐 아니라 왕명 출납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이런 겸직은 승지가 여러 면에서 왕의 고문 역할을 수행했음을 말해주고 있다.

승정원에서는 왕명 출납과 제반 행정사무, 의례적 사항 등을 기록하여 만든 '승정원일기'가 있었으며, 이것은 실록 편찬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기록이었다.

 

 

그 외의 기관들

의금부 / 왕명을 받들어 죄인을 다스리는 곳으로 일명 순군, 의용이라고도 불리었다.

포도청 / 조선 중기 이후에 생긴 것으로 도둑이나 기타 범죄자를 잡기 위하여 설치한 경찰기관이며 좌,우청 둘로 나누어져 있었다.

중추부 / 군무의 최고 기관이었으나 세조 때부터는 실무가 없었고, 문무당상관을 우대하기 위한 명예기관으로 남아 있었다.

성균관 / 국가의 최고 학부로 유학의 진흥과 문묘 등에 관한 사무를 맡고 있었다.

예문관 / 왕의 칙명과 교서를 기록, 정리하는 곳이다.

오위도총부 / 의홍위, 용양위, 호분위, 충좌위, 충무위 등의 오위의 군무를 총괄하던 관청이었으나 중종 때 비변사가 설치되고 임진왜란 이후에 오위병제가 무너짐에 따라 실권이 없는 기관으로 전락했다.

상서원 / 옥새, 병부, 마패 등에 관한 사무를 맡아보던 곳이다.

훈련원 / 군졸의 능력을 시험하고 무예를 연습하던 곳으로 병서와 진영의 강습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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