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대 예종실록
1. 정희왕후의 수렴청정과 예조의 짧은 재위(1450-1469, 재위 기간 1468년 9월-1469년 11월, 1년 2개월)
세조의 아들들은 몸이 유약해서 그리 오래 살지 못했다. 이를 두고 당시 사람들은 어린 조카를 죽이고 왕위를 찬탈한 세조가 그 죗값을 받은 것이라고도 했다.
세조의 맏아들은 의경세자였다. 그는 세조가 즉위하자 18세의 나이로 즉시 세자에 책봉되어 왕위 계승 수업에 들어갔다. 하지만 2년 뒤에 이유 없이 시름시름 앓다가 죽고 말았다. 일설에는 그가 낮잠을 자다가 가위눌림으로 죽었다는 말도 있는데, 당시 사람들은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의 살을 맞았다고 믿었다. 그래서 두 번째 세자에 책봉된 사람이 예종이었다. 하지만 예종 역시 수명이 길지 못했다.
예종은 1450년 태생으로 이름은 황, 자는 명조였다. 세조와 정희왕후 윤씨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난 그는 처음에 해양대군에 봉해졌다가 1457년 형 의경세자가 횡사하자 여덟 살의 나이로 세자에 책봉되었다. 그리고 1468년 9월 7일 세조로부터 왕위를 이어받아 수강궁에서 즉위하였다. 이때 나이 19세였다.
예종은 즉위하긴 했으나 왕권을 실질적으로 행사할 수 없는 처지였다. 아직 성년이 되지 않은데다가 건강마저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섭정과 원상제도라는 두 가지 형태의 지원을 받으며 왕권을 행사해야 했다.
섭정은 모후 정희왕후의 수렴청정으로 이뤄졌는데, 이는 조선왕조에서 행한 최초의 수렴청정이었다. 정희왕후는 성격이 대담하고 결단력이 강한 여자였기에 예종의 유약한 성품을 잘 떠받쳐주었다. 또 예종도 세자 시절에 왕의 서무에 참여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국사 처리가 전혀 생소한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예종 시대의 조정은 그다지 흔들림이 없었다. 하지만 왕권은 미약했다.
또한 왕의 업무 결재 능력의 미숙함을 보조하기 위해 원상제도가 마련되어 있었다. 이 원상제도는 세조가 죽기 전에 예종의 원만한 정사 운영을 위해 마련한 것으로 신하들에 의한 섭정 제도였다. 왕이 지명한 원로 중신들이 승정원에 상시 출근해 모든 국정을 상의해서 서무를 의결하고, 왕은 형식적인 결재만 하는 제도였기 때문이다. 세조가 원상으로 지목한 세 중신의 한명회, 신숙주, 구치관 등 측근 세력들이었다.
이러한 두 가지 형태의 정치 보조를 바탕으로 예종의 1년 2개월 동안의 짧은 치세가 이루어졌다. 1468년에 유자광의 계략으로 '남이의 역모 사건'이 발생하자 남이를 비롯하여 강순, 조경치, 변영수, 문효량, 고복로, 오치권, 박자하 등을 처형시켰으며, 이듬해에는 삼포에서 왜와의 개별 무역을 금지하였다. 또한 그 해 6해에는 각 도에 있는 군전(병영에 예속된 전답)을 일반 농민이 경작할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9월에 최항 등이 '경국대전'을 찬진했으나 반포하지 못하고 2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이처럼 예종은 14개월이라는 짧은 치세에다 정희왕후의 수렴청정과 원상들의 대리 서무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왕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한 왕으로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이 시기에도 세조 때와 마찬가지로 언관들에 대한 왕의 태도는 강경했다. 언관들에게 강경했다는 것은 왕권이 안정됐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것은 곧 정희왕후의 수렴청정의 결과이기도 했는데, 다시 말해 왕권은 미약했지만 정희왕후의 힘은 강력했다는 뜻이다.
예종의 정비는 영의정 한명회의 딸 장순왕후였다. 하지만 그녀가 17세에 요절하자 계비로 우의정 한백륜의 딸 안순왕후를 맞이했다. 예종의 능호는 창릉으로 현재 경기도 고양시 용두동 서오릉 묘역에 있다.
2. 예종의 가족들
예종은 정비 장순왕후와 계비 안순왕후 두 명의 부인을 두었는데 이들에게 2남 1녀를 얻었다. 세자빈 시절에 죽은 정비 장순왕후 한씨 소생으로는 인성대군이 있었고, 계비 안순왕후 한씨 소생으로는 제안대군과 현숙공주가 있었다. 하지만 정희왕후의 뜻에 따라 덕종의 둘째아들 자을산군이 세자에 책봉되었기에 예종의 아들은 아무도 세자가 되지 못했다.
인성대군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는 것으로 봐서 그는 유년 시절에 죽은 것으로 판단된다. 아래에 장순왕후, 안순왕후, 제안대군 등의 삶을 약술하여 예종의 가족사를 살펴보도록 한다.
장순왕후 한씨(1445-1461)
예종의 정비 장순왕후 한씨는 영의정 한명회와 부인 민씨의 큰딸이다. 성종의 비 공혜왕후의 친언니로 동시에 촌수로는 그녀의 시숙모가 되는 셈이다.
그녀는 1460년에 당시 세자로 책봉되어 있던 예종과 가례하여 세자빈에 책봉되었으나, 이듬해 원손 인성대군을 낳고 건강이 악화되어 17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그 후 1472년 (성종 3년)에 장순왕후에 추존되었다. 능은 공릉으로 경기도 파주에 있다.
공릉은 조성 당시 세자빈묘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난간은 없고, 봉분 앞에 장명등과 혼유석만 놓여 있으며, 능 앞 양쪽에 문석과 석마를 세우고 석양과 석호가 추가로 설치되어 능을 호위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안순왕후 한씨(?-1498)
안순왕후 한씨는 청주부원군 한백륜의 딸이며, 1460년 한명회의 딸이었던 세자빈이 병사하자 1462년 예종과 가례를 올려 세자빈에 책봉되었다. 그리고 1468년 예종이 즉위하자 왕비에 책봉되었으나, 이듬해 예종이 병사했기 때문에 1471년 인혜대비에 봉해졌다. 그러다가 1497년(연산군 3년)에 다시 명의대비로 개봉되었으며 그 이듬해에 죽었다. 그녀의 소생으로는 제안대군과 현숙공주가 있으며, 제안대군의 효성이 지극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녀의 능은 창릉으로 예종과 함께 경기도 고양시 서오릉 묘역에 합장되어 있다.
제안대군(1466-1525)
제안대군은 예종의 둘째 아들이며 안순왕후 한씨 소생이다. 4세 때 부왕인 예종이 죽자 왕위 계승의 첫 번째 후보로 올랐으나 세조의 정비 정희왕후의 반대로 세자에 책봉되지 못했다.
이후 1470년 5세의 나이로 제안대군에 봉해졌으며, 세종의 일곱째 아들인 평원대군의 양자로 입양되었다. 그리고 12세에 사도시정 김수말의 딸과 혼인하였으나 어머니 안순왕후가 그녀를 내쫓았기 때문에 14세에 다시 박중선의 딸과 혼인하였다. 하지만 그는 끝내 쫓겨난 김씨를 잊지 못해 1485년 20세 때 성종의 배려로 그녀와 다시 복합하였다.
1498년 안순왕후가 죽은 후로 홀로 거처하였으며, 평생 여색을 가까이하지 않았다. 그는 노래를 즐기고 사죽관현 연주에 뛰어났다. 그래서 연산군이 네 차례나 음률을 잘 아는 여자를 궁중으로 맞아들여 그에게 내렸지만 그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패관잡기'에서는 '그는 성품이 어리석었다'고 기록하는 한편 '그것은 몸을 보전하기 위해 어리석음을 가장한 것'이라고 적고 있다. 즉 왕위 계승전에서 밀려난 사람은 언제든지 죽음의 위협에 시달려야 했는데, 이를 모면하기 위해 고의로 어리석은 행동을 했다는 것이다. 이런 보신책 덕분이었는지 그는 1525년까지 천수를 누리다가 6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3. 예종 시대 최대의 옥사 '남이의 역모 사건'
재위 기간이 14개월밖에 안 된 예종 대에도 대대적인 숙정 작업이 있었다. 이 숙정 작업은 한명회, 신숙주 등의 승정원 원상 세력이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고 등장한 신세력들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 '남이, 강순의 역모 사건'으로 불린 이 사건으로 약 30명의 무인 관료가 죽고 그 가솔들이 노비로 전락했다.
이 사건의 주모자로 알려진 남이는 태종의 넷째 딸 정선공주의 아들로서 무과를 통해 등용된 인물이다. 그는 세조 시대 최대의 위기를 몰고 온 이시애의 난(1467년)을 평정한 공으로 적개공신 1등에 책록되었으며, 이어서 건주야인을 토벌한 전공으로 세조의 총애를 받으며 공조판서가 되었다. 이듬해 오위도총부도총관을 겸하였고, 병권의 수장 병조판서에 올랐다.
하지만 1468년 세조가 죽자 그는 한명회, 신숙주 등의 노골적인 견제를 받기 시작했다. 그들이 강희맹, 한계희 등의 훈구 대신들의 입을 통해 남이가 병조판서를 수행할 능력이 없다고 비판하자, 예종은 그를 병조판서에서 해임하고 겸사복장직에 임명했다.
예종은 원래 남이를 좋아하지 않았다. 무예에 뛰어나고 성격이 강직할 뿐 아니라 세조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던 그에 비하면, 예종은 유약하고 정사 처리에도 능하지 않았으며 세조의 신뢰도 두텁지 않았다. 예종은 그 때문에 촌수로 당숙뻘이나 되는 남이를 시기하고 질투했다. 그래서 훈구 대신들이 그를 비판하고 나오자 즉시 병조판서직에서 해임시켜버렸던 것이다.
남이가 병조판서에서 겸사복장직으로 물러났을 때 하늘에 혜성이 나타났다. 남이는 이 광경을 보면서 '혜성이 나타남은 묵은 것을 몰아내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징조'라고 말하였는데 이것이 화근이었다. 당시 병조참지로 있던 유자광이 이 말을 엿듣고 예종에게 남이가 역모를 꾀하려 한다고 고변해 그를 역신으로 몰아버린 것이다.
유자광은 서얼 출신으로 남이와 마찬가지로 이시애의 난에서 공을 세워 등용된 인물로 모사에 능하고 계략에 뛰어난 자였다. 그래서 자신과 함께 공을 세운 남이가 세조의 사랑을 더 많이 받는 것을 시기하고 있다가 마침 남이가 병조에서 밀려나자 그를 완전히 제거해버릴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유자광의 모함으로 졸지에 역모자로 전락한 남이는 즉시 의금부로 잡혀가 문초를 받았다. 이때 증인으로 나온 유자광은 남이가 '혜성의 출현은 신왕조가 나타날 징조로서 이때를 이용하여 왕이 창덕궁으로 옮기는 시간을 기다려 거사하겠다'라는 말을 했다고 진술했다. 유자광은 또 남이의 측근인 순장 민서도 남이의 집에서 북방 야인들에 대한 방어 계획을 논의할 때, '요즘 같은 천별은 반드시 간신이 일어날 징조이니 자신이 먼저 고변 당할까 봐 두렵다'라고 말하며 '그 간신은 한명회'라 했다고 덧붙여 진술했다.
사태가 여기에 이르자 남이 측근들에 대한 문초는 강해질 수밖에 없었는데 이 과정에서 당시 남이와 함께 겸사복장으로 있던 문효량이 역모를 시인했다. 문효량은 여진 출신 장수로 남이와 함께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인물이었다.
문효량은 '언젠가 남이의 침소를 방문한 적이 있는데, 그때 남이는 하늘의 변화를 기화로 간신들이 모란할 징조가 엿보이므로 자신과 함께 이들을 몰아내 나라에 은혜를 갚자는 제의를 했으며, 그리고 이 거사에 영의정 강순도 뜻을 함께 하고 있으니 왕이 산릉에 갈 때 도중에 두목격인 한명회 등을 제거한 다음 영순군과 구성군을 몰아내고 자신이 왕이 되겠다고 했다'라고 진술했다.
문효량의 이 진술은 남이로 하여금 역모를 시인하게 만들었다. 버텨봐야 문초만 더 당할 처지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이는 역모 관련 내용을 모두 인정했고, 영의정 강순 역시 시인했다.
이 사건에 관련된 자는 남이를 위시하여 강순, 조경치, 변영수, 변자의, 문효량, 고복로, 오치권, 박자하 등으로 모두 처형되었다. 또한 조경치의 장인인 김개가 관직에서 물러났고, 그들의 측근 30여 명도 함께 죽였다. 그리고 이 밖의 가솔들과 친분 관계가 있는 자들은 공신녹권이 몰수당하고 종으로 전락시키거나 변방에서 종군하게 하였다.
남이의 기질과 경력으로 볼 때 이 때의 역모 사건이 완전히 조작된 것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세조의 총애를 받고 있었고 27세의 나이로 병조판서에까지 오른 그가 예종이 즉위한 뒤 얼마 되지 않아 병조판서에서 밀려나자 울분이 컸을 것이다. 더구나 남이가 무인이었고 역모 사건 발각 당시에 가까이 지내던 영의정 강순을 비롯한 모든 인물들이 무인이었던 점을 고려할 때 한명회, 노사신 등의 훈구 대신들을 제거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사건은 임진왜란 이전까지는 역모 사건으로 인식되었지만, 그 이후 일부 야사에서는 유자광의 모함으로 날조된 옥사라고 규정하고 남이를 젊은 나이에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죽은 영웅적 인물로 기술하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남이의 옥을 날조 사건으로 기록한 대표적인 책은 <연려실기술>인데, 여기에서는 유자광의 계략에 의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와 같은 임진왜란 이후에 일부 야사에서 남이를 비극적 영웅으로 기술하고 있는 것은 조선 중기의 무오사화, 갑자사화의 책임이 유자광에게 있다고 보는 시각이 팽배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권선징악적인 가치관이 강한 조선 사학도들은 유자광을 참사를 획책하는 극악무도한 간신배로 인식하고 있었고, 그 연장 선상에서 '남이의 역모'는 단지 그 간신배 유자광의 날조극이라고 믿고 싶었다는 것이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남이는 순조 때 그의 후손 우의정 남공철의 상소에 의해 신원되었다. 현재 남이와 관련된 설화들이 많이 남아 있는데, 이 설화들은 그의 출생, 결혼, 입공, 죽음 등의 단계로 나누어져 있으며, 이 4단계는 모두 원혼들과 관계를 맺고 있다. 이를테면 남이가 귀신을 내쫓음으로써 다 죽어가던 낭자가 살아남았다는 등 대개는 그의 신통력에 대한 이야기다. 이 때문에 민간과 무속에서는 남이 장군신을 믿는 신앙이 형성돼 지금도 전승되고 있다. 이는 용맹을 떨쳤던 남이의 위용으로 귀신을 내쫓을 수 있다는 믿음에서 출발하고 있다.
4. <예종실록> 편찬 경위
<예종실록>은 총 8권 5책으로 되어 있으며, 원명은 '예종양도대왕실록'이다. 여기에는 1468년 9월에서 1469년 11월까지 예종 재위 1년 2개월 동안에 일어난 각 방면의 사건들을 편년체로 기록하고 있다.
다른 실록과 함께 현재 국보 제151호로 지정되어있는 <예종실록>은 예종이 죽은 다음 해인 1470년 2월에 내려진 왕명에 따라 사초를 꺼냈으나, 당시 <세조실록>이 아직 편찬되지 못한 관계로 편찬 작업이 연기되었다. 그리고 1471년 12월 <세조실록>이 완성되자 곧바로 편찬에 착수하여 반년 뒤인 1472년 5월에 완성되었다. <예종실록>편찬 작업은 신숙주와 한명회를 춘추관 영관사로 하여 최항의 감수 아래 강희맹, 양성지 등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당시 작성된 것 중 현재 남아 있는 <예종실록>은 전주사고에 봉안하던 것이다. 그리고 임진왜란 이후 필사하여 5부가 있었으나, 1624년 이괄의 난(인조2년) 때 춘추관본은 타서 없어지고 나머지 4부만 전해지고 있다.
#예종 시대의 세계 약사
예종이 즉위하던 1468년 독일에서는 서양 최초로 인쇄본을 간행한 구텐베르크가 죽었으며, 예종이 죽던 1469년에는 영국 작가 말로리가 <아더왕의 죽음>을 완성했다.
제9대 성종실록
1. 정희왕후와 한명회의 정치적 결탁을 통한 왕위 계승
예종은 불과 14개월이라는 짧은 치세를 남긴 채 요절하고 말았다. 그런데 예종이 죽던 날 세조비 윤씨는 자신의 장자인 의경세자(덕종)의 둘째아들 자을산군을 왕위에 앉혔다. 조선 역사상 왕이 죽은 날 곧바로 다음 왕을 앉힌 예는 없었다. 그 때문에 조정 대신들은 논란을 일으켰으나 윤비의 의지를 꺾지는 못했다. 더구나 그녀 뒤에는 한명회, 신숙주 등의 권신들이 버티고 있었기에 대신들이 미처 손쓸 틈도 주지 않고 조선 제9대 왕으로 13세의 자을산군(성종)이 결정되었다.
자을산군이 왕위를 계승하게 된 데에는 정치적 내막이 깔려 있었다. 예종의 아들 제안군이 엄연히 존재했고 또한 자을산군의 형 월산군도 있었다. 제안군은 4세밖에 되지 않은 어린아이였기에 제외될 수도 있었겠지만, 16세였던 월산군을 배제한 것은 납득할 수 없는 조치였다.
월산군은 명실상부한 세조의 장손이었고 세조의 총애를 받은 인물이었다. 때문에 제안군이 나이가 너무 어린 탓에 왕위를 계승할 수 없었다면 당연히 월산군이 왕위를 이어야 했다. 그런데 정희왕후 윤씨는 자을산군으로 하여금 왕위를 잇게 했다. 그런데 정희왕후 윤씨는 자을산군으로 하여금 왕위를 잇게 했다. 이는 왕위 세습의 관습에 비춰볼 때 정상적인 행위가 아니었다. 정희왕후는 이에 대해 세조의 유명이라고 말했지만 설득력이 없었다. 그래서 늘어놓은 변명이 월산군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월산군의 건강이 특별히 나쁘다는 근거 역시 없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단 하나, 바로 정치적 결탁 이었다.
정희왕후와 정치적 결탁을 한 사람은 한명회였다. 한명회는 당대 최고의 권력가인 동시에 바로 자을산군의 장인이기도 했다. 물론 신숙주, 구치관 등의 원상들도 이에 동조했을 것이다. 이는 정희왕후 입장에서도 크게 손해될 것이 없었다. 13세의 어린 자을산군이 왕이 되었을 경우 그녀는 수렴청정으로 왕권을 대신하게 될 것이고, 또한 그것이 왕권을 안정시키는 길이기도 했다.
사실 예종이 병약한 몸으로 왕위를 오래 지키지 못할 것이라는 판단이 들면서부터 정희왕후는 왕권 찬탈을 우려하고 있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이 세조의 유명을 받든 한명회를 비롯한 원상들과의 결탁이었다. 이 결탁 과정에서 그녀의 생각은 자신의 장자인 의경세자의 아들로 하여금 왕위를 계승케 한다는 것이었고, 한명회는 자을산군을 내세웠다. 논의 과정에서 정희왕후는 장손인 월산군을 지목했을 것이지만 한명회의 반대에 부딪혀 자을산군으로 낙착을 보았다. 정회왕후와 권신들은 이러한 선택이 종실의 반발을 불러일으킬 것이라는 판단에 따라 예종이 죽던 날 곧바로 자을산군을 왕위에 앉혔다. 그리고 왕실 세력의 중심이었던 구성군을 유배시켰다.
구성군은 세종의 넷째아들 임영대군의 아들로 문무를 겸비한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래서 세조는 그를 매우 총애하였으며, 이시애의 난이 발생하자 사도병마도총사로 임명했다. 구성군은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고 돌아와 오위도총부 총관에 임명되었다가 이듬해 영의정으로 특서되었다. 이때 구성군의 나이 불과 28세이었다. 그러나 막상 예종이 죽자 그는 위협적인 인물로 떠올랐다.
성종이 13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장성하고 재질이 뛰어나며 인망이 있는 종친은 왕권을 위협하는 인물로 간주되었고, 섭정을 하고 있던 정희왕후와 원로 대신들 역시 세조가 단종의 왕위를 찬탈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이를 몹시 우려했다. 이런 상황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던 대신, 대간들은 구성군을 집요하게 탄핵하기 시작했고, 1470년 (성종1년) 마침내 정희왕후는 그에게 유배령을 내리게 되었다. 그 10년 후 구성군은 유배지에서 생을 마쳤다.
이 사건은 성종 초의 왕권이 불안정하던 시기에 원로 대신들의 입김에 의해 일어난 것으로, 이후 종친의 관료 등용은 법으로 금지되었으며 <경국대전> 완성 이후 이 법은 정착되었다. 말하자면 구성군 사건은 신권 견제를 위한 왕의 종친 중용 정책의 종말을 고하는 동시에 신권이 정치를 주도하게 되는 계기가 된 셈이었다.
어쨌든 왕권 안정을 위한 정희왕후의 정치적 결단은 성공을 거두었고, 한명회, 신숙주 등의 권신들은 세조 대부터 누려오던 자신들의 권세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월산군이나 제안대군 등은 정치적 결탁에 의한 희생자로 남아야 했다.
2. 성종의 도학 정치와 조선의 태평성대(1457-1494, 재위 기간 1469년 11월-1494년 12월, 25년 1개월)
13세의 어린 나이로 성종이 왕위에 오르자 정희왕후는 곧 수렴청정을 시작했다. 그리고 성종이 성인이 되자 7년 동안의 섭정을 끝냈다. 비록 수렴청정으로 다져진 왕권이었지만 성종은 치세에 능했다. 권신을 견제하기 위해 사림 세력을 끌어들여 권력의 균형을 이룸과 동시에, 유교 사상을 더욱 정착시켜 왕도정치를 실현해나갔다. 그 결과로 그는 모든 기초를 완성시켰다는 뜻의 성종이라는 묘호를 얻었을 만큼 조선 개국 이래 가장 평화로운 시대를 열어갔다.
성종은 1457년 세조의 큰아들 의경세자(덕종으로 추존)와 세자빈 한확의 딸 한씨(소혜왕후로 추존)의 둘째아들로 태어났으며, 이름은 혈이다. 태어난 지 두 달도 못 되어 아버지 의경세자가 죽자 세조의 손에 의해 궁중에서 키워졌는데, 천품이 뛰어나고 도량이 넓었으며 사예와 서화에도 능하여 총애를 받았다.
어느 뇌우가 몰아치던 날 옆에 있던 환관이 벼락을 맞아 죽어 주위 사람들이 모두 혼비백산하였는데도 그는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았다고 한다. 세조가 이를 보고 그가 태조를 닮았다고 하면서 기상과 학식이 뛰어날 것임을 예견했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성종은 다섯 살이 되던 1461년에 세조에 의해 자산군에 봉해졌고 1468년 자을산군으로 개봉되었으며, 열한 살이 되던 1467년 한명회의 딸과 가례를 올렸다. 그리고 1469년 11월 숙부인 예종이 죽자 열세 살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른 성종은 성년의 나이인 스무 살까지 7년 동안 할머니 정희왕후의 섭정을 받아야 했다.
정희왕후는 성종이 왕위에 오르자 곧 왕위 계승권에서 밀려난 예종의 아들 제안군과 성종의 형 월산군을 대군으로 격상시켰다. 또한 귀양 보냈던 구성군에 대해서도 왕족임을 감안하여 가산을 적몰하지 않고 나라에서 양미식물을 지급하였다. 특히 월산대군은 성장하여 이미 19세의 나이였으므로 좌리공신 2등에 책봉하여 불만을 무마시켰다.
그녀의 이 같은 조치는 종실의 권위를 높이고 왕권을 안정시키려는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비록 한명회 등의 권신들과의 결탁을 위해 성종으로 하여금 왕위를 계승케 했으나, 그녀는 대의명분 없는 자신의 행동에 대한 반발을 조금이라도 무마시키려 했던 것이다.
정희왕후에 의한 7년 동안의 섭정기에 있었던 주요 사건을 살펴보면, 우선 성종 즉위 직후인 1469년 12월에 호패법을 폐지하여 민간에 대한 관의 감시를 줄였던 것을 들 수 있다. 또 통치의 총체적 규범인 <경국대전>의 교정 작업을 완료했고, 2품 이상의 관원이 도성밖에 거주하는 것을 금하여 조정 정책 결정의 신속성을 도모했다.
그리고 숭유억불 정책을 강화하여 불교의 장의 제도인 화장 풍습을 없애고, 도성 내에 염불소를 폐지하여 승려들의 도성 출입을 금지하였으며, 사대부 집안의 부녀자가 비구니가 되는 것도 금지했다. 한편 외촌 6촌 이내에는 결혼을 금하고, 사대부와 평민의 제사 이행에 차별을 두어 4대 명절에 이를 검사하였으며, 전국 교생에게 의무적으로 <삼강행실>을 강습케 하는 등 일련의 유교 문화 강화 정책을 실시하였다.
민간 경제의 안정을 위해서는 고리대업을 하던 내수사의 장리소를 560개에서 235개로 줄였다. 각 도에 잠실을 하나씩 설치해 농잠업을 융성시켰으며 영안, 평안, 황해도에 대대적인 목화밭을 조성하고, 경상, 전라도에 뽕나무 종자를 재배케 하여 의류업의 발달을 촉진시키기도 했다.
윤대비에 의한 이러한 일련의 유교 문화 강화책과 민생 안정책은 당시 영의정으로 있던 신숙주, 한명회 등이 주도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구성군 사건 이후 왕족들의 등용이 금지되었고 성종이 어린 나이로 섭정을 받는 처지였기에 정사는 신권 중심으로 이끌려갈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1476년 정희왕후가 수렴청정을 끝내고 성종이 편전을 장악하면서부터 상황은 급변했다. 성종은 우선 조정의 서무 결재에 원로 대신들이 참여하던 원상제도를 폐지하여 왕명 출납과 서무 결재권을 되찾았으며, 김종직 등 젊은 사림 출신 문신들을 가까이하면서 권신들을 견제했다. 또한 2년 뒤인 1478년에는 참판 이하의 모든 문무신을 교차시켜 권력의 집중 현상을 막았으며, 임사홍, 유자광 등의 공신 세력들을 유배시켜 사림 출신 신진 세력들의 진로를 열어 주었다.
성종의 세력 균형 정책은 1480년대로 접어들면서 더욱 확연히 드러났다. 고려말의 대표적 학자인 정몽주와 길재의 후손에게 녹을 주는 한편, 그들의 학맥을 잇는 사림 세력들을 대대적으로 등용하여 훈구 세력을 철저히 견제하였다. 이렇게 하여 신진 사림 세력은 왕을 호위하는 근왕 세력으로 성장했으며, 세조 때의 공신이 주축이 된 훈구 세력은 정치 일선에서 조금씩 후퇴하였다. 성종은 훈신과 사림 간의 세력 균형을 이룸으로써 왕권을 안정시켰으며, 또한 조선 중기 이후의 사림 정치의 기반을 조성했다.
성종은 이런 정치적 기반을 바탕으로 본격적인 도학 정치의 기틀을 잡아나갔다. 그 일환으로 불교에 대한 압박을 강화하는 한편 성리학의 발전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그래서 1489년에는 향시에서 '불교를 믿어 재앙을 다스려야 하다'는 내용의 답안을 작성한 유생을 귀양보냈는가 하면, 1492년에는 도승법을 혁파하고 승려를 엄하게 통제하였고, 일정 숫자의 사찰만을 남긴 채 전국 대부분의 사찰을 폐쇄하였다. 한편 성종은 성리학에 심취하여 도학적인 조예가 깊었으며, 경연을 통하여 학자들과 자주 토론하고 학문과 교육을 장려했다. 그는 심지어 경학이나 강의에만 능해도 관리로 등용하거나 자신의 벗으로 삼기도 했다.
성종은 이와 같은 도학 정치사상에 입각하여 1475년에는 성균관에 존경각을 지어 경전을 소장하게 했으며, 양현고에 관심을 가져 학문 연구를 후원하고, 1484년과 1489년에는 성균관과 향교에 학전(교육기관의 경비를 충당케 하기 위해 지급된 토지)과 서적을 나누어주어 관학을 진흥시키기도 했다. 또한 홍문관을 확충하고 용산 두모포에 독서당을 설치하여 젊은 관료들에게 휴가를 주고 독서 저술에 전념하게 하였다.
이 같은 정책은 편찬 사업을 융성시켰는데, 그 결과로 노사신 등의 <동국여지승람>과 서거정 등의 <동국통감>, <삼국사절요>, <동문선>, 그리고 강희맹 등의 <오례의>, 성현 등의 <악학궤범>이 간행되는 등 다양한 서적이 쏟아져나왔다.
성종은 1479년 좌의정 윤필상을 도원수로 삼아 압록강을 건너 건주야인들의 본거지를 정벌하였고, 1491년에는 함경도 관찰사 허종을 도원수로 삼아 두만강 건너 '우디거'의 모든 부락을 정벌하였다. 그 결과 조선 초부터 끊임없이 변방을 위협하던 야인 세력들을 완전히 소탕하여 변방을 안정시켰다.
이로써 성종은 태조 이후 닦아온 조선왕조의 전반적 체제를 완성시켰으며, 조선 백성들은 개국 이래 가장 태평성대한 세월을 맞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태평성대는 사회의 한쪽에 퇴폐 풍조를 낳기도 했다. 성종 자신이 후기에 들어서는 유흥에 빠져들었고, 이것이 확산되어 사회 전반에 유흥을 즐기는 풍조가 만연해가고 있었다. 성종은 궁을 빠져나가 규방을 출입하기도 했는데, 이 때문에 왕비 윤씨가 그의 얼굴에 손톱 자국을 내는 사건이 발생해 결국 폐비사건으로 비화되고 말았다. 이 폐비 윤씨 사건은 연상군 대에 이르러서 정쟁의 불씨로 작용해 결국 갑자사화를 일으킨다.
야사에 등장하는 어우동에 관한 이야기도 이 시기에 형성된 것이다. 어우동 야사에는 성종이 어우동과 함께 유흥을 즐겼다는 내용이 담겨 있어 당시 성종이 얼마나 자주 야행을 즐겼는지를 알게 해준다.
그러나 성종 후기의 이런 부분적인 병폐는 옥에 묻은 티에 지나지 않았다. 고려로부터 조선 초까지 100여 년간에 걸쳐 반포된 여러 법전, 교지, 조례, 관례 등을 총망라하여 세조 때부터 편찬해오던 <경국대전>이 1485년에 완성되었고, 각종 문화 서적들을 편찬해 민간 생활의 질을 높였다. 또 성리학자들을 정계에 진출시켜 학문과 정치를 하나로 묶었으며, 조선의 정치 이념인 유교를 완전히 정착시켜 민간 교화에 성공했다. 게다가 변방의 야인을 토벌하여 전쟁의 위협을 없애고, 남방의 왜구들은 외교적으로 관리하며 지배하였다. 이는 민생의 안정과 태평성대로 귀결되었다.
성종은 1494년 38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으며 능은 선릉으로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계비 정현왕후 윤씨의 능과 함께 있다.
3. 성종의 가족들
성종은 정비 공혜왕후를 비롯해 총 12명의 부인을 두었으며 이들에게서 16남 12녀의 자녀를 얻었다. 이 부인들 중 정비 공혜왕후 한씨는 17세의 나이로 소생 없이 죽었고, 폐비 윤씨가 연산군, 정현왕후 윤씨가 진성대군(중종)을 비롯 1남 1녀, 명빈 김씨가 1남, 귀인 정씨가 2남 1녀, 귀인 권씨가 1남, 귀인 엄씨가 1녀, 숙의 하씨가 1남, 숙의 홍씨가 7남 3녀, 숙의 김씨가 3녀, 숙용 심씨가 2남 2녀, 숙용 권씨가 1녀를 낳았다.
이들 가족 중 공혜왕후 한씨, 연산군의 어머니 폐비 윤씨, 중종의 어머니 정현왕후 윤씨 등의 삶을 약술하면서 가족사를 알아본다. 그리고 폐비 윤씨 사건의 이해를 돕는 측면에서 성종의 어머니 소혜왕후의 삶을 함께 다룬다. 연산군과 진성대군은 연산군 편과 중종 편에서 각각 다루기로 한다.
성종의 어머니 소혜왕후 한씨(1437-1504)
세조의 큰아들 의경세자(덕종)의 비 소혜왕후는 서원부원군 한확의 딸이며 좌리공신 한치인의 누이동생이다. 그녀는 1455년 세자빈에 간택되어 수빈에 책봉되었으나, 의경세자가 스무 살에 요절함으로써 왕비로 올라가지 못하고 사가로 물러났다.
이후 1469년 11월 둘째 아들 성종이 즉위하여 남편 의경세자가 덕종으로 추존되자 왕후에 책봉되었으며, 이어서 인수대비에 책봉되었다. 소생으로는 월산대군과 성종이 있으며, 성품이 곧고 학식이 깊어 성종의 정치에도 많은 자문을 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또한 경전에 조예가 깊어 불경을 언해하기도 했으며, 부녀자의 도리를 기록한 <내훈>을 간행하기도 했다.
성종의 계비 윤씨가 성종의 규방 출입에 질투하여 얼굴에 손톱자국을 내자 그녀를 폐비시켰으며, 이 사건으로 후에 연산군이 폐비사건에 관계한 사람들에게 박해를 가하려 하자 이를 꾸짖으며 만류하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병상에 있던 인수대비의 꾸지람을 참지 못한 연산군은 머리로 그녀를 받았으며, 그 며칠 뒤에 68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능호는 경릉으로 경기도 고양시 서오릉에 덕종과 함께 합장되어 있다.
공혜왕후 한씨(1456-1474)
성종의 첫 번째 왕비인 공혜왕후 한씨는 한명회의 딸이다. 한명회는 첫째딸을 예종에게 시집보내고 둘째 딸을 자산군에게 시집보냈는데, 그래서 이 두 딸은 자매이자 시숙모와 조카며느리가 되는 기묘한 관계를 이루게 된다.
1467년 12세의 나이로 한 살 어린 자산군과 가례를 올렸으며, 자산군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에 책봉되었다. 하지만 1474년 17세의 나이로 소생 없이 죽자 공혜왕후에 추증되었다. 능호는 순릉이며 경기도 파주에 있다.
폐비 윤씨(?-1482)
판봉상시사 윤기견의 딸이며 연산군의 어머니이다. 1473년 성종의 후궁으로 간택되면서 숙의에 봉해졌고, 성종의 총애를 받다가 1474년 공혜왕후 한씨가 죽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왕비로 책봉되던 해에 세자 융(연산군)을 낳았는데, 투기가 심해 성종을 난처하게 하는 일이 잦았다.
1477년에는 극약인 비상을 숨겨두었다가 이 일이 발각되어 왕과 왕 주위의 후궁들을 독살하려 했다는 혐의를 받고 빈으로 강등될 뻔했으나, 성종의 선처로 무마되었던 적이 있다. 이어 1479년에는 왕이 규방출입이 잦고 자신을 멀리한다 하여 왕의 얼굴에 손톱 자국을 내게 된다. 이 일로 성종과 모후 인수대비의 격분을 유발하여 폐비되고 만다.
세자의 친모라는 이유로 대신들이 폐비를 반대하였으나 인수대비와 성종의 입장은 단호했다. 그래서 윤씨는 친정으로 쫓겨난 뒤 바깥세상과 접촉이 금지되었다. 하지만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자 그녀는 자신의 행위를 뉘우치고 근신하며 지냈다. 그런데 1482년 조정에서는 그녀의 거처 문제가 새로운 정치 현안으로 떠올랐다. 즉, 장차 왕이 될 세자의 친모를 일반 백성처럼 살게 해서는 안 된다는 상소가 이어졌고, 한편에서는 이를 반대하는 무리들이 윤씨를 비방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폐비를 옹호하는 자들은 그녀에게 조정에서 따로 거처할 곳을 마련하여 주고 생활비 일체를 관부에서 지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를 반대하는 측의 태도도 완강했다. 특히 성종의 모후 소혜왕후(인수대비)와 계비 정현왕후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에 성종도 쉽게 폐비에 대한 거처를 마련해줄 수 없었다. 하지만 성종은 세자가 성장함에 따라 이미 폐비 윤씨에 대한 동정심을 갖고 있던 터였다. 그래서 내시와 궁녀들을 시켜 그녀의 동정을 살펴오라 하였다. 그런데 이들 나인들과 내시들은 인수대비의 명에 따라 왕에게 폐비 윤씨가 전혀 반성의 빛을 보이니 않는다고 허위 보고를 하였다.
성종은 이 말을 듣고 대신들에게 폐비 윤씨에 대한 문제를 논의하게 하여 사약을 내리기로 결정하고 그녀를 사사하였다.
사사한 이후 폐비 윤씨의 묘에는 묘비도 세우지 않았다. 하지만 성종은 세자의 앞날을 고려해 '윤씨지묘'라는 묘비명을 내렸다. 그리고 장단도호부사로 하여금 절기마다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성종은 자신이 죽은 뒤 100년까지는 폐비 문제에 관해 논하지 말라는 유명을 남겼다. 그러나 연산군은 이를 어기고 결국 갑자사화를 일으키고 말았다. 연산군은 즉위한 지 몇 달 되지 않아 윤씨의 폐비사건을 알게 되었고, 신원을 모색했다. 그래서 1497년 그녀의 묘를 개장하고, 1504년에는 성종의 유명을 어기고 제헌왕후에 추궁했으며 묘도 회릉으로 개칭하였다. 그러나 1506년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자 윤씨의 관작도 추탈된 뒤 다시는 신원되지 못했다.
폐비 윤씨는 세자를 낳은 왕비이면서도 투기심과 부덕함으로 인해 폐비 당했다가 결국 참극을 당하고 말았고, 이 폐비 윤씨 사건은 연산군의 폭정으로 이어져 급기야 조선 조정에 엄청난 살생극을 불러일으킨 원인이 된다.
정현왕후 윤씨(1462-1530)
성종의 세번째 부인이며 중종의 친모이다. 우의정 윤호의 딸로 1473년 성종의 후궁으로 들어가 숙의에 봉해졌으며, 1479년 성종의 두번째 부인이자 연산군의 어머니인 윤씨가 폐출되자 이듬해 11월 왕비에 책봉되었다. 이후 1497년 자순대비에 봉해졌으며, 1530년 68세를 일기로 죽었다. 소생으로는 중종과 신숙공주가 있다. 능호는 선릉으로 성종의 묘와 함께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있다.
4. 사림파의 등장과 조정의 세력 균형
성종 시대의 정치 세력은 훈구 세력과 근왕 세력으로 나누어진다. 훈구 세력은 세조 시대의 공신을 주축으로 형성되었으며, 근왕 세력은 이른바 도학 정치를 내세운 사림 세력으로 형성되어 있었다. 성종은 이들 세력간의 힘의 균형을 통해 왕권의 중심을 굳건히 다져나갔다.
구성군 사건 이후 왕족의 등용이 법으로 금지되자 성종은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훈신 세력들을 견제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성종이 정희왕후로부터 왕권을 넘겨받았던 1476년 당시, 세조의 오른팔격인 신숙주는 이미 사망했고 한명회 역시 연로한 탓으로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 있었다. 그 대신에 유자광 등 '남이의 옥'과 관련된 공신들과 인수대비의 친동생 한치인을 주축으로 한 척신 세력이 조정의 중역으로 부상해 있었지만, 그들은 세력권이 달라 힘을 하나로 합칠 수 없는 관계에 있었다. 따라서 성종은 이러한 역학 구도를 이용해 자신의 힘을 비축한 다음 그들 훈구 세력들을 견제할 사림 세력들을 빠른 속도로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사림의 거두는 김종직이었다. 그는 밀양 출신으로 고려말의 길재의 학풍을 잇는 영남 성리학파의 거두였다. 성종이 성년이 되어 비로소 편전을 넘겨받았을 때 김종직은 자신의 고향 선산의 부사로 재직중이었다. 성종은 그의 학식과 문장이 뛰어나고, 그의 문하들이 학풍을 드날리고 있음을 익히 알고 있던 터였다. 그래서 성종은 그의 학문과 사상을 흠모하게 되었고, 마침내 수렴청정에서 벗어나자 그를 중앙으로 불러올렸다.
사림파는 삼사를 중심으로 세력을 구축하고 자신들이 주자학의 정통적 계승자임을 자부하고 있었다. 또한 요순정치를 이상으로 삼는 도학적 실천을 표방하여 군자임을 자처하면서 훈구파를 불의와 타협하여 권세를 잡은 소인배들이라고 멸시하고 배척했다. 이에 대해 훈구파는 사림들을 홀로 잘난 체하는 야심배들이라고 지탄하며 그들을 배격하였다. 두 세력은 주의와 사상이 달랐기에 사사건건 대립하였고 이러한 갈등은 날로 심화되어 정치적으로나 학문적으로나 타협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김종직의 문하에는 김일손, 김굉필, 정여창, 유호인, 이맹전, 남효온, 조위, 이종순 등 당대 내로라 하는 문장가들이 집결되어 있었다. 때문에 김종직을 중용하는 것은 그들 모두를 중용하는 것과 같은 효과를 노릴 수 있는 것이었다. 이러한 성종의 사림파 중용책으로 인해 조정은 1480년대 중반에 이르러 사림파와 훈구파의 세력 균형이 가능해졌다.
중앙으로 진출한 사림파의 일차적인 비판 대상은 유자광, 이극돈 등의 훈구, 척신 세력이었다. 이들은 이미 자신들의 권력을 남용하면서 부패로 치닫고 있었고, 이러한 부패상이 신진 사림 세력들에겐 정치적 공략의 대상이 되었다.
사림의 공격에 대한 훈구 세력의 반발도 만만치 않았지만 성종의 후원 때문에 훈구 세력이 사림에 밀리는 현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사림 세력의 지나친 팽창에 위기를 느낀 훈구 세력은 연산군이 등극한 이후 자위책의 일환으로 무오사화를 획책하게 된다.
성종의 후원에 힘입은 사림파는 세력이 팽창되자 세조 말에 혁파된 유항소제도를 부활시켰다. 유향소의 부활은 당시 부패로 치닫고 있던 관료제 중심의 농촌 사회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조선 개국 이후 농촌 사회에서는 부의 축적이 꾸준히 지속되고 있었는데, 이는 곧 관료들의 부패로 이어졌다. 유향소는 이런 부패한 향리를 규찰하고 향풍을 바로잡기 위해 조직된 지방의 자치기구였다.
유향소는 고려말에 형성되었다가 왕권을 약화시킨다는 이유로 태종 때 혁파된 바 있었다. 하지만 세종은 유향소의 권한을 향풍을 바로잡는 일에만 한정시킨 후 부활시켰다. 그런데 세조가 등극한 뒤 권력의 중앙 집중화에 유향소가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다시 혁파되었고, 이를 1488년 성종이 다시 부활시켰던 것이다.
성종이 부활한 유향소 제도는 중앙 집권 체제의 보조 기구에 불과했지만 사림에게는 정치적 기반이 되었다. 이는 조정 내에서 사림의 힘을 키워 세력의 균형을 이루려고 했던 성종에게 크나큰 도움이 되었다. 그래서 적어도 성종 대에서는 사림 세력이 중앙의 비판 세력으로 성장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었으며, 이는 결국 성종이 노린 '힘의 균형'을 실현하는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즉, 성종이 왕도 정치를 표방한 것은 학문을 좋아하는 그의 천성에서 비롯되기도 했지만 사회적 모순과 병폐를 제거해야 한다는 시대적 요구이기도 했던 것이다(사림파에 대한 개념적인 규정과 형성 과정 등은 무오사화가 발생하는 연산군 대에 가서 자세히 설명하기로 한다. 여기서는 다만 사림파의 거두로 불리는 김종직의 삶에 대한 간단한 서술을 곁들이도록 한다).
5. 사림파의 거두 김종직
조선 중기, 정계의 가장 큰 변화는 중앙 정계에 사림 세력이 진출한 일이다. 고려말의 정몽주나 길재의 학풍을 잇는 이들은 스스로 도학적 실천을 구현하는 군자임을 내세우며 사회의 일대 개혁을 요구하고 있었다. 이 사림의 대표적인 인물이 김종직(1431-1492)이었다.
김종직은 경상도 밀양 출신으로 1453년 진사가 되고, 1459년 식년문과에 정과로 급제하여 1462년에는 승문원 박사가 되었다. 이후 경상도병마평사, 이조좌랑, 함양군수 등을 지내고, 성종이 성년이 되던 1476년에는 고향인 선산의 부사로 재직 중이었다.
정희왕후의 수렴청정이 끝나고 성종이 정사를 주관하게 되자 중앙으로 진출하였으며, 이때부터 영남 사학의 거두로서 또한 성종의 근위 세력으로서 성장하게 된다. 성종은 학문을 숭상하여 도학 정치를 꿈꾸었으며, 김종직을 자신의 그런 정치적 이념을 뒷받침해줄 적임자로 생각했다. 특히 김종직의 문하에는 김굉필, 정여창, 김일손 등의 당대 최고의 문장가들이 포진해 있었는데, 성종은 이들과 힘을 합해 훈구, 척신 세력의 독주를 저지하고자 했다.
1483년에 우부승지에 오른 김종직은 이어 좌부승지, 이조참판, 예문관제학, 병조참판 등의 요직을 두루 거치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그의 제자 김굉필, 유호인, 김일손 등도 등용되기에 이른다.
대의명분을 중시하던 김종직은 단종을 폐위, 살해하고 즉위한 세조를 비판하였으며, 세조의 불의에 동조한 신숙주, 정인지 등의 공신들을 멸시하였다. 그래서 대간에 머물고 있을 때는 세조의 부도덕함을 질책하고 세조 대의 공신들을 공격하는 상소를 계속 올려 훈구 세력을 자극하기도 했다.
세조에 대한 그의 비판은 단순히 상소에 그치지 않고 세조가 단종을 폐위한 것에 대한 반발로 <조의제문>을 남기게 된다. <조의제문>은 중국 진나라 때 항우가 초의 의제를 폐한 것에 세조가 단종을 폐한 것을 비유하여 은근히 단종을 조위한 글이었다. 이 글은 <성종실록> 편찬 과정에서 김종직의 제자에 의해 사초에 올려지고, 이것이 발단이 되어 무오사화가 일어나게 된다.
김종직은 남이를 죽게 한 유자광을 멸시하였는데, 함양군수로 부임할 때 유자광의 시가 걸려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을 철거하여 태워버리기도 했다. 이 때문에 유자광은 김종직에 대해 사적인 원한을 품게 되었고, 후일 이극돈과 손을 잡고 무오사화를 도모하게 된다.
김종직은 <조의제문>과 훈구 세력에 대한 비판적인 상소들은 그의 도학적인 식견과 절의를 잘 보여주고 있다. 비록 왕이라고 할지라도 도리와 덕을 지키지 않으면 당연히 비판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입장이었다. 성종 역시 김종직의 견해에 동조하여 스스로 도학적인 자세로 국사에 임하려 했다.
고려말의 정몽주와 길재의 학풍을 이어받은 아버지 김숙자에게 글을 익힌 김종직은 문장에 뛰어났으면 사학에도 두루 능통해 조선시대 도학의 정맥을 이어가는 중추적 구실을 하였다. 그의 도학을 정통으로 이어받은 제자 김굉필은 조광조와 같은 걸출한 인물을 배출하여 그 학통을 그대로 계승시켰다.
이처럼 그의 도학이 조선조 도통의 정맥으로 이어진 것은 <조의제문>에서 보여지듯이 그가 화려한 문장이나 시문을 추구하기보다는 궁극적으로 절의를 바탕으로 정의를 숭상하고 시비를 분명히 가리려는 의리적인 성향을 보였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 같은 정신은 제자들에게 전해졌고, 제자들은 절의와 의리를 내세우며 이를 저버린 훈구 척신 세력의 비리와 부도덕을 비판하고 나섰다.
김종직은 1492년 62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으며, <조의제문>이 발단이 되어 일어난 무오사화 때는 부관참시를 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중종 때 다시 신원되었다. 그의 저서로는 <청구풍아>, <점필재집>, <당후일기>, <이존론> 등이 전해지고 있으나 이 밖의 많은 저술들은 무오사화 때 훈구 세력에 의해 소실되었다.
6. <경국대전> 완성의 의미와 형성 과정
고려로부터 조선 초까지 100여 년에 걸쳐 반포된 법전, 교지, 관례 등을 총망라하여 세조 때부터 편찬해오던 <경국대전>이 수차의 개정 끝에 125년만인 1485년 완성되어 반포되었다. 이것은 조선시대 통치의 기본 법전으로 우리 나라에 전해져오는 법전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문헌적 가치가 대단히 크다.
이 책의 편찬 연혁은 세조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세조는 즉위하자마자 당시까지 산만하게 흩어져 있던 각종 법전들을 총체적으로 결합하는 새로운 법전을 마련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육전상정소를 설치하고 통일 법전 마련에 심혈을 기울였다. 당시까지 조선의 법전은 임시법의 형태를 띠로 있었다. 왕이 즉위하거나 사건이 생길 때마다 새로운 법령이 계속 쌓였고, 이에 대한 결함이 발견될 때마다 속전을 간행해 보완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통일 법전의 편찬 작업은 1460년(세조 6년) 7월에 시작되었다. 먼저 재정 경제의 기본이 되는 <호전>과 <호전등록>을 완성하여 이를 <경국대전호전>이라고 했다. 이듬해 7월에는 <형전>을 완성하여 공포 시행했다. 1466년에는 나머지 <이전>, <예전>, <병전>, <공전> 등을 완성하였으며 이미 만든 호전과 형전도 다시 전면적으로 재검토하여 1468년 1월 1일 부터 시행하였다. 그러나 세조는 이때 마련된 법전을 최종적인 것으로 확정하지는 않았다. 이 법전이 아직까지 미비한 것이라고 판단했던 까닭이다. 그래서 세조 대에는 통일 법전 작업이 거기에서 멈추었고, 나머지 작업은 예종 대로 넘어갔다.
예종도 육전상정소를 설치하여 1469년 9월까지 작업을 매듭짓고 이듬해 1월 1일에 반포하기로 결정했으나, 예종이 갑자기 죽는 바람에 그 일은 성종 대로 넘어가게 된다.
성종은 즉위하자 <경국대전>을 수정하여 1471년 1월 1일부터 공포하여 시행하도록 했는데, 이것이 <신묘대전>이다. 하지만 이 책은 누락된 조문이 많아 다시 개수하여 3년 뒤인 1474년 2월 1일부터 시행하였는데, 이 책이 <갑오대전>이다. 이 대전에 수록되지 않은 법령 중에 시행의 필요성이 있는 72개 조문은 따로 속록을 만들어 함께 시행하였다. 그러나 1481년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논의가 있자 감교청을 설치하고 대전과 속록을 대대적으로 개수하여 1485년 을사년 1월 1일부터 시행하였다. 이것이 <을사대전>이다.
<을사대전>을 시행할 때는 앞으로 다시는 개수하지 않기로 했기 때문에, 이 <을사대전>은 최종적으로 확정된 조선왕조 영세불변의 만세성전이 되었다. 125년 동안의 참으로 끈질긴 노력의 결실이었다.
오늘날까지 온전하게 전해오는 <경국대전>은 바로 이 <을사대전>을 가리키며, <신묘대전>, <갑오대전>을 비롯한 그 이전의 법전들은 전해지지 않는다. 그래서 <을사대전>은 현재까지 우리나라에 전해지고 있는 법전 가운데 가장 오래된 유일한 법전이 되는 셈이다.
<경국대전>은 경제육전과 같이 6분 방식에 따라 <이전>, <호전>, <예전>, <병전>, <형전>, <공전>의 순서로 되어 있으며, 각 법전마다 필요한 항목으로 분류하여 규정되어 있다. 또 조문은 경제육전과는 달리 추상화, 일반화되어 있어 유권해석이 가능하도록 되어 있다. 이는 120여 년에 걸친 탁마의 결정체로서 손상이 없는 것이며, 명실상부한 조선의 최고 법전으로 면모를 갖춘 것이라 할 수 있다.
각 법전의 내용을 살펴보면 <이전>에는 통치의 기본이 되는 중앙과 지방의 관제, 관리의 종별, 관리의 임명, 사령 등에 관한 사항이 마련되어 있다.
<호전>에는 재정 경제와 그에 관련되는 사항으로서 호적, 조세 제도를 비롯하여 녹봉, 통화, 부채, 상업과 잠업, 창고와 환곡, 종운, 어장, 염장에 관한 규정과 토지, 가옥, 노비, 우마의 매매와 오늘날의 등기 제도에 해당하는 입안에 관한 것, 그리고 채무의 변제와 이자율에 관한 규정이 마련되어 있다.
<예전>에는 문과, 무과, 잡과 등의 과거 규정과 관리의 의장 및 외교, 제례, 상장, 묘지, 관인, 그밖에 여러 가지 공문서의 서식에 관한 규정을 비롯하여 상복제도, 봉사, 입후, 혼인 등 친족법 규범이 마련되어 있다.
<병전>에는 군제와 군사에 관한 규정이, <형전>에는 형벌, 재판, 공노비, 사노비에 관한 규정과 재산 상속법에 관한 규정이, <공전>에는 도로, 교량, 도량형, 식산에 관한 규정이 마련되어 있다.
이러한 <경국대전>의 편찬, 시행을 통해 조선은 우선 법치주의에 입각한 왕조 통치의 법적 기초인 통치규범 체계를 확립하고, 다음으로 중국법에 무비판적으로 의존하던 관행을 없앰으로써 법치주의의 자주성을 이룰 수 있었다.
이 <경국대전>이 시행된 뒤에도 <대전속록>, <대전회통>, <대전통편> 등과 같은 법전이 편찬되어 이 조문이 실제로 개정되거나 폐지된 적도 있었지만 그 기본 이념은 사라지지 않고 면면히 내려와 조선 법치주의의 근간이 되었다. 따라서 <경국대전>은 조선인의 통치관과 인간관, 역사관을 한데 묶은 위대한 역사적 산물임과 동시에 조선인들의 법치주의적 염원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문화적 자산이라 할 수 있다.
7. 활발한 문화 서적의 편찬
성종 대의 업적 가운데 또 하나 주목할 만한 것은 역사, 지리, 문학, 음악 등을 집대성한 서적들을 편찬했다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책들이 조선 전기 대표적인 관찬지리지인 <동국여지승람>, 삼국시대 이후 전승된 4천3백여 편의 시문들을 한데 모은 <동문선>, 당시까지의 의궤와 악보를 총정리한 <악학궤범>, 고조선에서 고려에 이르는 역사를 집대성한 <동국통감> 등이다.
성종은 이러한 서적의 편찬을 통해 자신이 추구하던 도학 정치의 이념을 확립하려 했는데, 특히 <동국통감>은 성종 자신이 적극 개입하고 신진 사림이 참여하여 만든 것으로서 성종과 사림의 역사 의식이 잘 반영된 역사서로 평가받고 있다.
<동국여지승람>
이 책은 1481년(성종 12년) 50권으로 편찬되었다. 내용은 1477년에 편찬한 <팔도지리지>에다 <동문선>에 수록된 동국문사의 시문을 첨가한 것이다. 편찬체제는 남송의 <방여승람>과 명의 <대명일통지>를 참고하였다.
<동국여지승람>의 1차 수교는 1485년 김종직 등에 의해 이뤄졌는데, 이때 시문에 대한 정리와 연혁, 풍속, 인물 편목에 대한 교정, 그리고 <대명일통지>의 구성에 따라 고적 편목이 첨가되었으며, 중국의 지리지에 없는 성씨, 봉화불을 꽂던 봉수의 양조 등이 신설되었다. 그 뒤 1499년 임사홍, 성현 등이 부분적인 교정과 보충을 가하였으나 내용상으로는 큰 변동이 없었다. 제3차 수정은 증보를 위한 것으로서 1528년(중종 23년)에 착수하여 1530년에 속편 5권을 합쳐 전 55권으로 완성되었다. 그리고 이를 '신증'이라는 두 자를 삽입하여 <신증동국여지승람>이라고 했다. 이 중종시대본은 임진왜란을 겪은 후 희귀해져, 현재는 일본 경도대학 소장본이 유일하며, 1611년(광해 3년)에 복간한 목판본이 규장각도서 등 국내에 소장되어 있다.
<동국여지승람> 책머리에는 진전문, 서문, 교수관원직명과 구본 <동국여지승람>에 수록된 노사신의 진전문, 서거정의 서문 및 교수관직명, 찬수관직명, 목록 등이 수록되어 있다. 또한 책의 끝에는 홍언필, 임사홍, 김종직의 발문이 실려 있어 간행 과정과 의도를 살펴볼 수 있게 되어 있다.
이 책의 몇몇 권에는 경도, 한성부, 경기도, 개성보,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황해도, 강원도, 함경도, 평안도 등 각 지방의 군현이 수록되어 있는데, 경도 앞에는 조선전도인 팔도총도가 실려 있으며, 각 도 첫머리에는 도별 지도가 삽입되어 있다.
이 지도들은 실측 지도와는 거리가 먼 것으로 지극히 단순한 형태를 띠고 있다. 그리고 한결같이 동서의 폭은 길고 남북의 길이는 짧아 기형적인 모양을 하고 있다. 그래서 팔도총서의 모양은 꼭 실제 지형을 위에서 꾹 눌러놓은 듯한 형상을 취하고 있다. 당시의 지도들이 이같은 모양을 띠게 된 것은 남북의 교통로에 비해 동서의 교통로가 전혀 발달되지 않았기 때문이라 추측된다. 한반도의 지형이 동고서저, 즉 서쪽에 평야가 모여 있고 동쪽에 산악이 집중되어 있기에 동서쪽의 거리는 멀게 느껴지고 남북 쪽의 거리는 가깝게 느껴졌을 것이다.
어쨌든 지도의 정확성 여부를 떠나 지리지에 지도를 첨부한 것은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편집이었다. 또한 내용에서도 각 도의 연혁과 총론에서부터 성씨, 인물, 풍속, 봉수, 능묘, 교량 위치 등 세세한 내용에 이르기까지 비교적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특히 인물 속에는 관원뿐 아니라 효자, 열녀 등이 포함되어 있고, 행정 구역에 관해서도 지역의 변천 과정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 주목할 만하다. 여기에는 세종 대의 지리지가 지녔던 장점인 토지의 면적, 조세, 인구 등 경제, 군사, 행정적인 측면이 약화된 반면에 인물, 예속, 시문 등이 강조되어 있는데 이는 세종 대에 비해 성종 대가 그만큼 평화스러웠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다.
<동국통감>
성종의 명에 따라 서거정 등이 신라 초부터 고려말까지의 역사를 편찬한 사서로 총 56권 28책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책의 편찬 사업은 1458년 세조에 의해 시작되어 1476년 성종 대에 와서 비로소 고대사 부분이 완성되었다. 이 고대사 부분은 <삼국사절요>라는 이름으로 따로 간행되었으며, 이후 1484년에 고려사를 완성해 <동국통감>으로 합본되었다. 하지만 이 책은 현재 남아 있지 않고 1485년에 성종과 사림 세력이 중심이 되어 개찬한 <동국통감>만 남아 있다.
이 책의 편찬 사업에 대한 세조의 원래 의도는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권근의 <동국사략>으로 대표되는 고대사 관련 사서에 탈락된 것이 많아 보완하려는 것이었다. 그래서 <삼국사절요>는 세조 때 이미 골격이 형성된 고대사 부분을 다시 손질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 <삼국사절요>는 원래 신숙주가 거의 완성했으나 그가 미처 완성을 이루지 못하고 죽자 노사신을 주축으로 하여 서거정, 이파, 김계창, 최숙정 등이 완성시킨 것이다. 그 명칭으로 보아 <고려사절요>와 연결시키려 했던 것으로 짐작되며, 이 속에는 <삼국사기>에서 누락된 많은 설화와 전설을 <삼국유사>, <수이전>, <동국이상국집> 등에서 채록하고 <동국사략>의 사론을 수록하였다.
이러한 내용은 세조가 중점을 두었던 상고사류들을 참고자료에서 제외시킨 상태에서 만들어졌다. 따라서 <삼국사절요>는 세조 때 골격이 잡힌 것이지만 세조가 의도하던 역사책과는 성격이 다른 책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책은 이전의 사서들이 신라 중심의 서술을 하고 있는 것에 비해 삼국을 대등한 관점에서 서술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한편 <동국통감>은 편년체로 되어 있으며, 단군조선에서 삼한까지를 외기, 삼국의 건국으로부터 신라 문무왕 9년(669년)까지를 삼국기, 669년에서 고려 태조 18년 (935년)까지를 신라기, 그 이후부터 1392년까지를 고려기로 편찬하고 있다.
삼국 이전을 외기로 처리한 것은 자료가 부족해 체계적인 왕조사를 서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신라기를 독립시킨 것은 신라통일의 의미를 부각시키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삼국이 대등하다는 균적론을 내세워 어느 한 나라를 정통으로 간주하지 않은 것은 권근의 <동국사략>에서 신라를 정통으로 내세운 것과 대비되는 점이다. 또한 왕의 연대 표기도 <동국사략>에서는 유년칭원법을 쓰고 있지만 여기에선 즉위년칭원법을 쓰고 있다.
그러나 <동국통감>의 사론이 지나치게 성리학적 관점에 치우쳐 있다는 것은 한계로 지적된다. 중국에 사대한 행적이 있으면 칭송되는 반면에 대항했거나 사대를 소홀히 한 행적이 있으면 철저하게 비판하는가 하면 불교, 도교, 민간신앙 등을 이단으로 배척하는 사론이 심해졌다. 또한 기자 조선과 그 후계자인 마한, 신라 등의 역사적 위치를 높이고, 반면에 단군조선, 고구려, 백제, 발해, 고려의 위치를 상대적으로 낮게 설정하고 있다.
이러한 지나친 유교적, 사대적 역사관은 낭만적이고 신화적인 역사관을 받아들여 조선사를 재구성하려 했던 세조의 의도를 매몰시키고 말았다. 이에 반해 신숙주 주도하에 만든 <삼국사절요>에는 낭만적, 신화적 서술체가 남아 있어 그나마 세조의 민족주의적 관점의 일면을 발견할 수 있게 한다. 따라서 1484년 서거정이 주도하여 찬진된 <동국통감>은 편자들이 훈신이었던 것으로 미루어 지나친 명분론에 입각한 사서는 아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하지만 성종과 사림 세력에 의해 개찬되어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는 1485년 판 <동국통감>은 엄격한 유교적 명분론에 입각하여 준엄한 포폄을 가진 것이 특징이다.
이는 세조 및 그를 보좌하던 훈신들을 공격하는 의미로 해석되며, 조선 초기에 추진되었던 부국강병책을 간접적으로 비판하는 의미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러한 비판은 상대적으로 사림 세력의 입지를 강화시키는 역할을 했을 것이며, 그것은 곧 훈신의 압력을 벗어나 왕권을 강화하려는 성조의 왕권 신장에도 이용되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동국통감>의 기초는 훈신들이 확립한 것이므로 비록 여기에 명분론 중심의 사론이 가해졌다 해도 이 책은 훈신과 사림, 그리고 성종의 합작품인 것만은 부정할 수 없다. 그때까지 조정 세력의 대립적인 양상으로 역사관이 하나로 모아지지 못했던 점을 감안한다면 <동국통감>은 조선 초기의 역사 서술의 완성품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동문선>
1478년 성종의 명으로 편찬된 우리 나라 역대의 시문선집으로 총 130권으로 되어 있는 방대한 문학 총서이다. 이 책은 목록만 해도 3권이나 되며 합본은 45책으로 되어 있다.
<동문선> 편찬 작업에는 서거정이 중심이 되어 노사신, 강희맹, 양성지 등을 포함해 총 23명이 참여하였다. <동문선>은 이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 외에도 신용개 등에 의해 편찬된 것과 송상기 등에 의해 편찬된 것이 있는데, 이 세 가지 중 서거정의 것을 <정편 동문선>, 신용개의 것을 <속동문선>, 송상기의 것을 <신찬 동문선>이라고 구별하여 부르기도 한다.
이 책에는 신라의 김인문, 설총, 최치원 등을 비롯, 고려를 거쳐 당대까지 약 500명에 달하는 작가들의 작품 4,302편이 수록되어 있다.
서거정은 취사선택의 기준을 '사리가 순정하고 치교에 도움이 되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또한 우리의 시문이 삼국시대에서 시작되어 고려를 거쳐 자신이 살고 있는 당대에 이르러 극에 달했다고 쓰고 있으며, 역대에 빛나는 시문이 중국의 것과는 확연히 다른 특질을 가진 우리의 것임을 강조하고 이를 집대성하여 후세에 전할 필요성이 있음을 역설하고 있다.
<동문선>에는 오언율시, 칠언율시, 오언절구 등 총 55종의 문체를 사용하고 있어 중국 <문선>의 39종보다도 많으며, 뒤의 <속동문선>의 37종보다도 많다. 그 가운데 단 1편의 작품만으로 된 단락도 있는 것으로 봐서 당시의 여건이 허락하는 한 많은 작품을 수록하려 했음을 읽을 수 있다.
작가의 경우에도 최치원 등의 신라 인물에서부터 이색, 권근 등 이 책의 편찬 시점에서 그다지 멀지 않는 시기의 인물들까지 차례로 싣고 있다. 이들 이외에 승려 29명과 저자를 밝히지 않은 작품을 포함해서 도합 500명에 육박하는 작가들의 작품이 실려 있다. 그중에 1편만 실린 작가가 220여 명에 이른다.
이 4,302편의 시문 가운데 시는 약 1천 편 정도이고 나머지는 모두 문장이다. 문장을 종류별로 구분하면 조칙, 축문, 첩 등 의례성이 강한 문장이 1,130여 편인데 특히 신하가 임금에게 올리는 글인 표전 한 분야만 460여 편에 이른다. 문장의 선택 방향에서 알 수 있듯이 <동문선>은 지배층의 봉건적 상하관계를 원만하게 유지하고 통치층의 권위를 드러내고자 하는 전형적인 관료적 문학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도량문, 재사, 청사 등 도교와 불교 관계의 의례문을 195편이나 싣고 있는 것으로 봐서는 당시 지배층의 이념이 철저한 유교주의에 입각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작품의 선정 기준에 내용은 포함되지 않은 것으로 판단되는데, 최충헌 부자를 미화하고 찬양하는 시문이 많이 실려 있기도 하고, 또 승려의 비명이나 탑명, 불교의 교리를 설파한 원효의 불서 서문이 승려의 시 82편과 함께 실려 있는 것도 특징이다.
<동문선>은 철저히 지배층의 시문만을 망라하고 있다는 한계가 있긴 하지만 삼국시대 이래 조선 초까지 문학 자료를 나름대로 책 한 권에 집대성했다는 점에서 커다란 의의를 가지고 있다. 동시에 우리의 문학 전통을 중국의 그것과 병행하여 독자적인 것으로 인식했다는 점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특히 신라, 고려시대의 기록과 도교, 불교 관계자료는 중요한 문화물로 인식되고 있다.
<악학궤범>
조선시대의 의궤와 악보를 정리하여 성현 등이 편찬한 악서이다. 총 9권 3책으로 되어 있으며 내용이 치밀하고 정확하여 조선 초기의 음악 전반을 자세히 이해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책이다.
<악학궤범>은 1493년 성종의 명에 의해 예조판서 성현, 장악원제조 유자광, 악원주 신말평 전악 박곤, 김복근 등이 편찬하였는데, 당시 장악원에 있던 의궤와 악보가 너무 오래되어 헐었을 뿐만 아니라 요행히 남은 것은 모두 잘못되어 있어 새로운 악규집을 편찬한다는 취지에서 작업이 이루어졌다.
수록 내용을 살펴보면 1권에서는 음조를 60가지로 나눈 60조도의 세부적인 사항들을 기록하고 있는데 궁, 상, 각, 치, 우의 오성의 높이를 한정 짓는 오성도설이나 연향에 쓰이는 당악의 28조를 악서에서 인용하여 5음 12율로 설명한 오음율려 28조도설 등이 독특한 일면으로 평가되고 있다. 2권은 아악진설도설과 속악진설도설을 설명한 것으로 당시 사용되던 제악의 구체적인 내용들을 설명하고 있으며, 3권은 당악과 속악을 설명하고 있고, 4권에서는 성종 대의 당악을 일괄시킨 당악정재도의 설명하고 있다. 5권은 주로 향악을 다루고 있어 속악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는 <처용가>, <동동>, <정읍> 등을 수록하고 있다. 6권에는 아부악기도설을, 7권에는 당부악기도설을 싣고 있는데 악기의 전체 모양을 그림으로 볼 수 있어 당시 악기를 재현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또한 8권의 당악정재의물도설은 당악정재에 쓰이는 복장을 그림으로 그려놓고 그 부분부분의 치수까지 기록하고 있어 당악에 사용되는 의상 복원을 가능케 하고 있으며, 양악정재악기도설은 당시에 사용하던 악기에 대한 그림, 악기에 쓰인 재료, 치수 등을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어 당시의 악기를 복원할 수 있도록 해준다. 마지막 9권의 관복도설은 악공들의 관복을 복원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이 9권의 악집에서 특히 5권에 실린 훈민정음으로 된 <동동>과 <정읍> 등은 <악장가사>에도 없고 오로지 <악학궤범>에서만 볼 수 있는 귀중한 국문학적인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이처럼 <악학궤범>은 당시의 음악에 필요한 사항들을 빠짐없이 총망라한 것이며 특히 아악, 당악, 향악 등에 차별을 두지 않고 잘 서술하고 있어 조선시대의 음악을 이해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자료로 인식되고 있다.
임진왜란 당시 악기와 악제가 모두 불에 타서 없어졌으나 요행히 <악학궤범>을 되찾은 덕분으로 모든 악기와 악제를 복원했던 역사적 사실이 바로 이 책의 중요성을 대변하고 있다 하겠다.
8. <성종실록> 편찬 경위
<성종실록>은 총 297권 150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1469년 11월부터 1494년 12월까지 성종 재위 25년 동안의 역사적 사실을 편년체로 기록하고 있다.
성종 사후 4개월 뒤인 1495년 4월(연산군 즉위년) 영의정 노사신 등의 건의에 따라 춘추관 안에 실록청을 설치하고 편찬 작업에 착수했다. 하지만 편찬 과정에서 성종 대에 사관을 지낸 김일손이 제출한 사초에서 세조가 단종을 폐하고 왕위를 찬탈한 사실을 비난하며 은근히 단종을 추모한 <조의제문>과, 이극돈이 정희왕후 상 중에 기생들과 놀아난 내용을 비판한 <화술주시>가 실려 있는 것이 직접적인 원인이 되어 무오사화가 발생했다.
<조의제문>과 <화술주지>는 김종직의 글로서 이를 사초에 실은 김일손은 그의 제자였다. 이 때문에 김종직 문하생이 중심이 된 사림 세력들이 일거에 숙청당하는 사화가 발생하게 된다.
그러나 무오사화가 일어나기는 했지만 실록 편찬 작업에 별다른 지장을 초래하지 않아 작업 시작 4년만인 1499년 3월 인쇄를 완료하여 네 곳의 사고에 나누어 봉안되었다.
실록 편찬 작업에는 영의정 신승선과 우의정 성준이 총재관을, 지관사 이극돈과 안침 등 15인이 실록청 당상을 맡았고, 그 외 74인이 실록청 낭청이 되어 실무를 담당하였다.
#성종 시대의 세계 약사
성종 시대의 유럽은 1474년 이탈리아의 토스카넬리가 처음으로 세계 지도를 제작한 것에 힘입어 콜럼버스, 바르톨로뮤 디아스 등이 새로운 신대륙을 찾아 나서는 시기였다. 콜럼버스는 1492년 아메리카에 도착하여 1494년에 서인도 제도의 자메이카 섬을 발견했고, 디아스는 1488년에 희망봉을 찾아냈다.
한편 이 시기는 종교사적으로 로마교회가 면죄부를 발행해 중세 시대의 종교가 위기를 맞고 있던 때였다.
제10대 연산군일기
1. 왕위를 이은 폐비의 아들 융
성종 시대는 조선시대 전체를 통틀어 가장 평화로웠던 시기였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성종의 정치력에 힘입어 조정이 안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평화의 이면에는 서서히 퇴폐 풍조가 고개를 들고 있었다. 성종은 도학을 숭상하고 스스로 군자임을 자처하는 인물이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호기가 넘치는 경향이 있었다. 이러한 호기는 그의 가족관계에서도 여실히 나타난다. 그는 12명의 부인을 거느리고 30명에 가까운 자식들을 얻었다. 결국 이런 호기가 평지풍파를 예고하는 불씨를 낳고 말았다. 그 불씨가 바로 희대의 폭군 연산이었다.
한때 성종의 총애를 독차지했던 왕비 윤씨는 성종이 다른 여자들과 밤을 보내는 일이 잦자 왕 주위의 후궁들을 독살할 요량으로 비상을 숨겨두었다가 발각되고 말았다. 이 때문에 그녀는 빈으로 강등될 지경에 처하게 된다. 숙의의 신분에서 내전 최고 위치이자 국모인 중전의 자리에 올라왔는데 다시 빈으로 강등된다는 것은 사형 선고나 다름이 없었다. 하지만 윤씨는 성종의 배려로 강등되는 수모는 겪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질투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급기야 만백성의 어버이인 왕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내는 사건을 일으키고 말았다. 국모의 체통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을 저지른 것이다. 중전으로부터 얼굴에 상처를 입은 왕의 체통은 말이 아니었다. 당시 법도로는 있을 수 없는 행위였던 만큼 왕의 분노도 컸지만 그녀의 시어머니인 인수대비의 격분은 더한 것이었다.
이 일로 조정에서는 폐비론이 대두되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신하들은 왕비를 폐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녀는 단순한 왕비가 아니라 바로 다음 왕이 될 왕자의 어머니였던 까닭이다. 따라서 폐비론을 내세웠다가는 다음 왕에 의해 보복당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런데 감히 누가 목숨을 내놓고 세자의 어머니를 폐하자고 하겠는가. 하지만 왕과 인수대비의 입장은 달랐다. 어쩌면 성종 자신은 부부의 정 때문에 왕비를 폐할 생각까지는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수대비는 폐비론을 굽히지 않았다. 여기에 한명회의 훈구 세력과 김종직 등의 사림 세력이 가세했다.
그 때문에 성종은 일부 중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윤씨를 폐비시키고 말았다. 사가로 폐출된 윤씨의 수난은 단순히 서인으로 전락한 것에 그치지 않았다. 폐출된 지 3년이 지난 1482년 왕자 연산군을 세자에 책봉해야 한다는 논의가 있자 조정 대신들 간에는 폐비 윤씨에 대한 동정론이 대두되었는데, 이것은 오히려 윤씨의 명줄을 재촉하는 결과를 낳았다.
폐비 윤씨가 왕위를 이을 세자의 어머니이기에 결코 사가에 방치해서는 안 된다는 윤씨 동정론에 위기를 느낀 인수대비는 몇몇의 후궁들과 모의를 하여 그녀를 더욱 위기 상황으로 몰아넣었다. 말하자면 윤씨가 사가에 나간 뒤에도 자신의 행동에 대해 전혀 반성의 빛이 없다는 내용을 꾸며 왕에게 고해바치기에 이르렀고, 이에 분개한 왕은 급기야 사약을 내렸던 것이다.
세자 융은 자신의 친어머니가 폐출당해 사사된 사실을 모르고 자라났다. 융은 윤씨가 폐출될 당시에 불과 네 살바기 어린 아이에 불과했고, 또한 성종이 폐비 윤씨에 대한 사건을 일체 거론하지 못하도록 엄명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세자 융은 어머니 윤씨가 폐출된 후 왕비로 책봉된 정현왕후 윤씨를 친어머니인 줄로 알고 자랐다. 그러나 천륜은 속일 수 없었던지 융은 정현왕후 윤씨를 별로 따르지 않았다. 물론 정현왕후 역시 폐비의 자식에게 사랑을 쏟아주지는 못했을 것이다. 게다가 할머니 인수대비는 융에게 지나칠 만큼 혹독하게 대했다. 자신의 손으로 직접 쫓아낸 며느리의 아들이 고울 리 없었던 것이다. 반면에 정현왕후의 아들 진성대군에게는 대조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는 융의 가슴에 응어리를 만들었다.
이런 성장 배경 탓인지는 몰라도 융은 결코 양순한 아이로 자라지는 않았다. 자신의 내면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 음험한 구석이 있었으며 괴팍하고 변덕스러웠다. 게다가 학문을 싫어하고 학자를 좋아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고집스럽고 독단적인 성향도 있었다.
성종은 이런 성격을 가진 융을 탐탁치 않게 여겼지만 1483년 그를 세자로 책봉한다. 이때 인수대비는 폐비의 아들을 세자로 책봉하면 후에 화를 부를 것이라며 반대했다. 하지만 이때는 진성대군도 태어나지 않은 때라 왕비 소생의 왕자는 융 한 명뿐이었다. 그래서 성종도 다른 선택의 여지 없이 그를 세자로 책봉할 수밖에 없었다.
성종과 주위 사람들이 세자의 다소 포악한 성품을 우려했던 일화들이 야사를 통해 전해지고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다음의 두 가지다.
성종이 어느 날 세자를 불러놓고 임금의 도리에 대해 가르치려 할 때였다. 부왕의 부름을 받고 온 융이 성종에게 다가가려 할 때 난데없이 사슴 한 마리가 달려들어 그의 옷과 손 등을 핥아댔다. 그 사슴은 성종이 몹시 아끼던 애완동물이었다. 하지만 융은 사슴이 자신의 옷을 더럽힌 것에 격분한 나머지 부왕이 보는 앞에서 사슴을 발길로 걷어찼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성종은 몹시 화가 나서 융을 꾸짖었다. 성종이 죽자 왕으로 등극한 그는 가장 먼저 그 사슴을 활로 죽여버렸다.
다른 이야기는 그와 그의 스승들에 관한 것이다. 융에게는 허침과 조자서 두 명의 스승이 있었는데, 그들은 당시 학문과 명망이 높아 성종이 친히 세자를 맡아달라고 부탁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이들 두 스승들의 성격은 사뭇 대조적이었다. 조자서는 엄하고 깐깐한 데 비해 허침은 너그럽고 포용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융은 장난기가 많은 아이였다. 그래서 자주 수업 시간을 비우기도 하였는데, 이 때문에 깐깐한 조자서는 툭하면 그 사실을 상감에게 고해바치겠다고 으름장을 놓곤 하였다. 하지만 허침은 언제나 웃으면서 부드럽게 타이르곤 하였다.
어린 세자는 당연히 조자서를 싫어하고 허침을 좋아했다. 그래서 하루는 벽에다 '조자서는 대소인배요, 허침은 대성인이다'라고 낙서를 해놓았다. 융의 이 낙서는 단순한 낙서로만 그치지 않았다. 융은 왕위에 오르자 조자서를 가장 먼저 죽여버렸던 것이다.
세자 융에 대한 이 두 가지 일화를 통해 그가 집요하고 끈질기며 자신의 잘잘못에 관계 없이 자신을 질책하고 위협하는 존재를 용서하지 않는 성격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성격은 그가 왕이 된 뒤에 두 번의 사화를 거치는 동안 더욱 적나라하게 표출된다.
2. 연산군의 등극과 광적인 폭정(1476-1506, 재위 기간 1494년 12월-1506년 9월, 11년 9개월)
어린 시절을 고독하게 보낸 연산군은 왕으로 등극하면서 자신의 내면에 숨겨져 있던 광폭한 성격을 어김없이 표출하기 시작했다. 12년 집권기 중 두 번에 걸친 사화를 통해 엄청난 인명을 죽이는가 하면, 자신을 비판하는 무리는 단 한 사람도 곁에 두지 않는 전형적인 독재군주로 군림했다.
게다가 여염집 아낙을 겁탈하고 자신의 사냥에 방해된다는 이유로 민가를 철거하는 등 극악무도하고 패륜적인 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이런 폭정의 결과로 그는 국민적 저항을 받는 희대의 폭군으로 인식되었고 마침내 박원종의 반란으로 폐출되기에 이른다.
연산군은 1476년 성종과 숙의 윤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같은 해 윤씨가 왕비에 책봉되자 그는 연산군에 책봉되었으며, 1479년 윤씨가 폐출된 후 5년 만인 1483년 8세의 나이로 세자에 책봉되었다. 1494년 12월 성종이 죽자 조선 제10대 왕으로 등극했다. 그때 그의 나이 19세였다.
그는 19세에 등극했지만 섭정을 받지는 않았다. 그가 왕으로 오를 때가 12월이었던 만큼 며칠만 지나면 성년이 되는 나이였기 때문이다.
1494년 12월 왕위를 이어받은 연산군은 적어도 무오사화를 겪기 전까지는 폭군의 모습이 아니었다. 즉위 초에는 그래도 성종조의 평화로운 분위기가 그대로 이어졌고, 인재가 많았던 덕분으로 민간은 질서를 유지하고 있었다.
연산군의 이 4년 동안의 치세는 오히려 성종 말기에 나타나기 시작한 퇴폐 풍조와 부패상을 일소하는 기간이었다. 그래서 등극 6개월 후에는 전국 모든 도에 암행어사를 파견하여 민간의 동정을 살피고 관료의 기강의 바로잡았다. 또한 인재를 확충하기 위해 별시문과를 실시하여 33인을 급제시키고, 변경 지방에 여진족의 침입이 계속되자 귀화한 여진인으로 하여금 그들을 회유케 하여 변방 지역의 안정을 꾀하기도 했다.
문화 정책에서도 문신의 사가독서(유능한 문신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하게 하는 제도)를 실시하여 학문의 질을 높이고 조정의 학문 풍토를 새롭게 했으며, 세조 이래 3조의 <국조보감>을 편찬해 후대 왕들의 제왕 수업에 귀감이 되도록 했다.
하지만 이 4년 동안 연산군은 누차에 걸쳐 사림파 관료들과 신경전을 벌이게 된다. 명분과 도의를 중시하는 사림들은 사사건건 간언을 하는가 하면 연산군에게 학문을 강요했다. 원래 학문에 뜻이 없고 학자와 문인들을 경원시하던 연산군은 그 때문에 사림들을 귀찮게 여겼다.
이때 때마침 일어난 것이 1498년, 무오년의 이른바 무오사화다. 사림파의 거두 김종직에 대한 개인적 원한이 극에 달해 있던 유자광, 이극돈의 상소로 시작된 이 사건은 그렇지 않아도 사림 세력을 눈엣가시처럼 여기고 있던 연산군에게 사림세력을 제거할 절호의 기회가 된 것이다. 이에 이미 죽은 김종직은 부관 참시당하고 김일손 등은 능지처참에 그리고 다수의 사림 세력들이 귀양을 가기에 이르렀다(무오사화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뒤에서 다시 언급하였다).
연산군은 무오사화를 통해 집요한 간언으로 자신과 대립했던 사림 세력을 축출하는 한편 일부 훈신 세력까지 제거하게 되었고 왕권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연산은 급속도로 조정을 독점하게 된다.
조정을 장악한 연산군은 매일같이 향연을 베풀고 기생을 궁으로 끌어들였으며 심지어는 여염집 아낙을 겁탈하거나 자신의 친족과 상간하는 등 패륜적인 행동을 끊임없이 자행했다. 이때 궁중으로 들어온 기생들을 흥청이라고 했는데 여기서 마음껏 떠들고 논다는 뜻인 '흥청거리다'라는 말이 생겨났다.
연산군의 이 같은 사치 행각은 결국 국고를 거덜내고 말았다. 그래서 그는 국가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백성들에게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고 공신들에게 지급한 공신전을 강제로 몰수하려 했다. 하지만 조정 대신들은 이에 반발하여 왕과 대립하며 연회를 줄이고 국고를 아낄 것을 간청한다. 이때 정권을 장악하려던 임사홍은 폐비 윤씨 사건을 연산군에게 밀고하게 된다. 연산군은 자신의 친모가 폐비되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그 내막은 잘 알지 못했다. 하지만 임사홍의 밀고로 그 내막을 알게 되자 관련자들을 모두 죽이는 대살생극을 자행한다. 이것이 갑자사화이다.
갑자사화는 겉으로 보기에는 모친 윤씨에 대한 연산군의 복수극으로 비치지만 사실은 연산군과 임사홍 일파가 정권을 장악하려는 의도에서 벌인 고의적인 참살극이었다. 갑자사화로 인해 희생된 사람들은 사람 세력뿐만 아니라 연산군의 부당한 공신전 몰수 행위를 비판하며 향락적인 궁중 생활에 제동을 걸었던 중신들이었다. 이때 연산군은 대신들뿐만 아니라 인수대비의 머리를 받아 절명케 하는가 하면, 윤씨 폐출에 가담한 성종의 후궁들과 그 자손들, 그리고 내시와 궁녀들까지 모조리 죽였다.
그는 막상 모든 권력을 손아귀에 쥐게 되자 문신들의 직간이 귀찮다는 이유로 경연과 사간원, 홍문관 등을 없애버리고, 정언 등의 언관도 혁파 또는 감원하였으며, 기타 모든 상소와 상언, 격고 등 여론과 관련되는 제도들은 남김없이 철폐해버렸다. 또 성균관, 원각사 등을 주색장으로 만들고, 불교 선종의 본산인 흥천사를 마굿간으로 바꾸었으며, 민간의 국문 투서 사건이 발생하자 훈민정음의 사용을 금지하기도 하는 등 광적인 폭정을 일삼았다.
이렇듯 연산군의 폭정이 계속 이어지자 민심은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해 전국 각지에서 반정을 도모하는 무리가 늘어났으며, 급기야 1506년 박원종 등이 군사를 일으켜 연산군을 폐하고 성종의 둘째 아들 진성대군을 왕으로 옹립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연산군 폐출이 성공하자 박원종 등은 연산군을 왕자의 신분으로 강등시켜 강화도에 유배시켰는데 두 달 뒤인 1506년 11월 그는 그곳에서 31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연산군은 신승선의 딸 폐비 신씨와 다른 후궁에게서 4남 2녀의 자식을 얻었다. 능은 서울 도봉구 방학동에 있으며 능에는 '연산군지묘'라는 비석 이외에 아무런 장식도 없다(중종반정 과정은 중종 대에서 설명하기로 한다).
연산군이 반정에 의해 쫓겨난 왕이라는 이유로 그에 대한 자료는 대부분 악행에 대한 것만 기록하고 있다. 때문에 연산군에 대한 후세의 평가는 단적으로 '패륜적 행위를 일삼은 폭군'으로 한정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최근에 와서는 그의 행위를 왕권 강화를 위한 연산군 나름의 자구책으로 해석하기도 하고, 그의 인간적인 고통과 낭만적 성격을 부각시키며 동정론을 펴는 사람들도 있다.
물론 역사를 단순히 실록적인 시각으로만 바라보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연산군에 대한 이러한 평가들은 나름대로 가치있는 일일 것이다. 그렇지만 그의 광적인 폭정까지 인간적인 동정론으로 감싸는 것은 위험한 시각이다. 조선 중기 당시의 사고 체계와 삶의 방식을 감안한다면 연산군의 행동은 엄청난 범죄 행위였다. 또 혹자는 연산군의 행동을 왕권 강화책으로 이해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왕군이 강화된다는 것은 단순히 백성과 신하들 위에 군림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왕이 백성과 신하를 하나로 묶어주는 구심체 역할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연산군의 폭정은 왕권의 강화라기보다는 왕군을 볼모로 한 독재의 강권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연산군에 대한 동정론을 펴는 사람들은 흔히 조선왕조사에 또 한 명의 폭군으로 기록된 광해군과 비교하려 들지만 이 또한 위험한 일이다. 왜냐하면 광해군은 정치 역학의 희생자인데 반해, 연산군은 인륜과 민심을 배반한 독재자였기 때문이다.
3. 사림파의 개념과 존립 의미
사림파라 함은 일반적으로 16세기에 훈구파 내지 훈신, 척신 계열과 대립한 재야사류를 배경으로 형성된 정치 세력을 일컫는다.
이 사림이라는 용어는 고려말, 조선초에도 간혹 쓰이긴 했으나 무오사화 이후 사화가 거듭되면서 사화를 당한 선비 집단을 통틀어 표현하는 용어로 정착되었다. 그러나 사림파라는 용어는 근대 역사학의 성립 후에 비로소 쓰여지기 시작한 것이다.
한 사학자의 저술에는 조선 전기의 문인, 학자의 유파를 훈구파, 절의파, 사림파, 청담파 등으로 구분했는데 이 구분에서 사림파는 훈구파와 대비되는 존재로서 그 대상이 둘로 나누어지고 있다.
우선 성종 대에는 문장, 경술과 관련하여 영남 일대의 종주격이던 김종직 문하를 가리켰고, 다음으로는 김종직의 제자 김굉필의 밑에서 수업한 중종 대의 조광조 일파를 지칭했다. 김종직 문하들이 주로 문예를 중시한 영남학자들이었다면 조광조 일파는 도학의 비중을 절대시했던 영남, 기호학자들이라는 점이 둘 간의 차이다.
조선 초기까지만 해도 유학을 공부하는 선비들을 일컬어 사류 또는 사족이라고 불렀는데, 김종직 이후 도학에 중점을 둔 집단적인 학파를 이룬 사람들을 사림이라고 하기도 했다. 따라서 사림은 현직 관리보다는 재야 지식인을 중심으로 형성된 도학자들을 지칭한다. 이들의 학습은 관학인 사부학당이나 향교보다는 서원이나 서재를 통한 경우가 많았고, 사림파는 신유학(성리학) 중에서도 중국 송대의 정호, 정이 형제와 주희가 체계화한 정주성리학을 선호하는 경향을 보였다.
성리학은 송학, 정주학, 이학, 도학이 한 계통이고 명학, 육왕학, 양명학, 심학이 다른 한 계통을 이룬다. 우리나라에서는 전자인 정주계의 이학이 발달하고 상대적으로 육구연, 왕수인 등이 체계화한 육왕계의 심학은 별로 발달하지 못했다.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흔히 성리학이라고 하면 정주계의 이학을 가리킨다.
우리나라의 성리학사에서 볼 때 15세기 중엽부터 16세기 말까지는 사림파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이른바 사화기 시대라고 할 정도로 많은 사화를 겪으며 사림파 학자들은 15세기 중엽부터 약 1세기 동안 성리학 특유의 실천에 역점을 두고 성장했다.
이처럼 조선 성리학은 일종의 실천 성리학으로서의 도학적 특색을 지녔는데, 사림파 학자들이 성리학의 의리관을 실천에 옮기려는 경향을 흔히 사림파 정신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는
사회 운동 내지는 정치사상으로 연결된다. 따라서 당시 사림파 학자들이 체질화시킨 성리학의 규범은 도덕적 규범의 성격이 강했지만 동시에 정치적 성격을 지닌 규범이기도 했다.
사림파의 정치적 활동으로 가장 주목되는 것은 향촌 질서의 재확립과 관련되는 사회 운동으로, 일종의 지방자치 기구인 유향소 및 향약의 제도화라고 할 수 있다. 이 사회 운동은 관료제에서 나타나는 모순들을 혁신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사림파는 군주 정치에 대한 인식에서도 그 이전의 정주학자들과 현격한 차이를 보였다. 조선왕조 초기의 정치 주체는 군주로 인식되고 있었지만, 16세기 이후의 사림파 정신에서는 군주 역시 신하와 마찬가지로 스스로를 닦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때문에 군주가 도학적 인격을 갖추지 못하면 군주로서의 자격이 없다는 가치관이 성립되어 있었다. 주자의 <대학>정신에서 비롯된 이 같은 인식의 전환은 군주제 자체를 부정하기보다는 군주의 절대권을 부정하는 것으로서 도학적인 이념을 실천하는 군주를 요구하고 있었다.
사림파는 인재의 등용에서도 과거제보다는 천거제를 선호하였다. 그것은 과거제가 인간을 다스리는 능력을 측정하기에는 부족하다는 판단에서였다. 때문에 사림이 공인하는 인재들을 천거의 형태로 등용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실제 중종 대의 조광조 등은 현량과를 통해 이를 실천으로 옮기기도 했다.
16세기 사림은 정치적으로 훈척 세력과 대립하면서 하나의 정치 세력으로 규합되었다. 그러나 16세기 말 선조의 즉위를 계기로 척신 정치가 종식되자 사림은 내부적으로 학연과 파벌에 따라 나누어지게 된다. 이를 흔히 붕당이라고 하는데, 이는 정파간의 상호 견제를 통한 새로운 신권 정치를 낳았다. 따라서 사림은 일차적으로 훈척의 대립 세력으로 발생하여 몇 번에 걸친 사화를 겪은 다음, 선조 이후 훈척 세력이 거의 사라지자 내부적으로 파벌에 따라 나누어져 붕당의 형태로 발전하게 된다. 이와 같은 붕당 현상을 한쪽 파벌이 정권을 장악하지 않는 한 조선 조정을 균형 있게 끌어가는 동력으로 작용했다. 이는 곧 조선 후기의 정치에서 왕이 붕당의 조정자로 자리매김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4. 양대 사화를 통한 연산군의 권력 독점
사림과 훈척의 불가피한 대립
사화는 '사림의 화'의 준말로서 말 그대로 사림 세력이 화를 입은 것을 말한다. 사화는 당초 일으킨 쪽인 훈척 계열에서는 난으로 규정하였던 것이나 당한 쪽인 사림 측은 올바른 인물들이 죄 없이 당한 화라고 주장하여 '사림의 화'라는 표현을 쓰다가 사림계가 정치적으로 우세해진 선조 대부터 사화라는 표현이 직접 사용되었다.
조선조에 사화는 무오(연산), 갑자(연산), 기묘(중종), 을사(명종)사화 등 네 번에 걸쳐 일어났다. 이 사화는 주로 세조 시대에 형성된 공신과 외척, 인척 세력이 도학적 사상에 기반을 둔 사림 세력의 정계 장악을 저지시킨 정치적 사건들이었다.
사림 세력의 정계 진출은 성종 시대에 와서 본격화되는데 이는 성종의 훈척 세력에 대한 견제 정책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당시 성종이 등용시킨 대표적인 사림 세력은 김종직 문하의 김굉필, 정여창, 김일손 등의 영남사림파였다. 이들 사림 세력은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 등 주로 언론을 담당하던 삼사에서 활동하였는데 이 부서들의 역할을 살펴보면 사림들의 활동 범위를 알 수 있다. 사헌부는 백관에 대한 감찰, 탄핵 및 정치에 대한 언론을, 사간원은 국왕에 대한 간쟁과 정치 일반에 대한 언론을 담당하는 곳이었다. 그래서 이전에는 이 두 기관의 관원을 대간, 또는 언론양사라고 불렀다. 한편 홍문관은 궁중의 서적과 문헌을 관장하였으며, 정치 대화를 벌이는 경연관으로서 왕의 학문적, 정치적 고문에 응하는 학술적인 직무를 담당하는 곳이었다. 세조 대에 집현전이 없어진 뒤에는 그 기능까지 함께 맡았다.
사림 세력은 주자학의 정통적 계승자임을 자부하는 동시에 요순정치를 이상적 정치로 설정하고 도학적(정주성리학적) 실천을 표방했다. 그래서 훈신, 척신 세력을 불의와 타협하여 권세를 잡은 모리배로 몰아붙이며 자신들이 속한 삼사의 기능을 십분 활용하여 그들을 탄핵하곤 했다.
사림 세력이 언론과 경연을 점유하여 자신들을 비난하자 훈척 계열은 사림들을 '홀로 잘난 무리들'이라고 비방하며 반격을 가하였다. 그래서 이들 두 세력은 정치적, 사상적으로 서로 타협할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달아 마침내 철저한 적대 관계로 나아갔다.
겉으로 보기에는 이들 두 세력의 대립이 단순한 사상적, 정치적 대립이나 감정적인 반목으로 비칠지 모르지만 사실은 당시 사회 상황의 필연적인 귀결이었다.
세종대 이후 사전의 증가에 따르는 토지 사유화는 과전법의 모순으로 지배층의 토지 겸병 현상이 나타났으며, 이 현상의 극대화는 서민의 경제 생활을 압박하게 되었다. 그러나 기득권 세력인 훈구, 척신 세력은 인척과 벌족을 형성하고 정권을 독점하여 신진 사림의 정계 진출을 안팎으로 막았다. 그러므로 사림파는 이런 사회 구조를 혁신하지 않고는 자신들의 입지를 세울 수 없어 구질서를 혁파하고 새로운 질서를 구현하려 했고 이 과정에서 훈척 세력과의 대립이 불가피했던 것이다.
성종이 김종직 일파를 등용하여 유교적 왕도 정치를 펴려 한 것도 표면적으로는 학문적인 견지에서 이루어진 듯하지만 실상은 사회적 모순과 불합리성을 제거하려는 의도에서였다.
이렇듯 성종의 의도적인 지원을 받은 사림파의 공략에 훈척 세력은 속수무책으로 당하고만 있어야 했다. 사림이 언론을 점유하고 또한 왕의 고문역을 수행하고 있는 이상 훈척 세력으로서는 힘으로만 그들을 밀어붙일 수는 없는 난처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무오사화
하지만 성종이 죽자 상황은 급변했다. 성종에 이어 등극한 연산군은 학문을 싫어하고 언론을 귀찮게 여기는 인물이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사림을 배척하고 있던 연산에게 유자광을 중심으로 한 훈척 세력이 불을 붙이게 되었다.
사건은 1498년 무오년, <성종실록>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일어났다. 1498년 실록청이 개설되고 이극돈이 실록 작업의 당상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김일손이 작성한 사초 점검 과정에서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과 이극돈 자신을 비판하는 상소문을 발견했다.
<조의제문>은 진나라 항우가 초의 의제를 폐한 일에 대한 것이었는데, 이 글에서 김종직은 의제를 조의하는 제문 형식을 빌려 의제를 폐위한 항우의 처사를 비판하고 있었다. 이는 곧 세조의 단종 폐위를 빗댄 것으로 은유적으로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판하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나머지 상소문은 세조비 정희왕후 상 중에 전라감사로 있던 이극돈이 근신하지 않고 장흥의 기생과 어울렸다는 불미스러운 사실을 적은 것이었다. 당시 이 상소 사건으로 이극돈은 김종직을 원수 대하듯 했는데, 그것이 사초에 실려 있는 것을 발견하자 그는 분노를 금할 길이 없었다. 그래서 달려간 곳이 유자광의 집이었다. 유자광 역시 함양 관청에 붙어 있던 자신의 글을 불태운 일 때문에 김종직과 극한 대립을 보였던 인물이었다. 게다가 김종직은 남이를 무고로 죽인 모리배라고 말하면서 유자광을 멸시하곤 했다.
유자광은 <조의제문>을 읽어보고는 곧 세조의 신임을 받았던 노사신, 윤필상 등의 훈신 세력과 모의한 뒤 왕에게 상소를 올렸다. 상소의 내용은 뻔했다. <조의제문>이 세조를 비방한 글이므로 김종직은 대역 부도한 행위를 했으며, 이를 사초에 실은 김일손 역시 마찬가지라는 논리였다.
그렇지 않아도 연산군은 사림 세력을 싫어하던 차였다. 그래서 즉시 김일손을 문초하게 하였다. <조의제문>을 사초에 실은 것이 김종직의 지시에 의한 것이라는 결론을 얻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의도하던 바대로 진술을 받아내자 연산군은 김일손을 위시한 모든 김종직 문하를 제거하기 시작했다. 우선 이미 죽은 김종직에게는 무덤을 파서 관을 꺼낸 다음 시신을 다시 한번 죽이는 부관참시형이 가해졌으며, 김일손, 권오복, 권경유, 이목, 허반 등은 간악한 파당을 이루어 세조를 능멸하였다는 이유로 능지처참 등의 형벌을 내렸고, 같은 죄에 걸린 강겸은 곤장 100대에 가산을 몰수하고 변경의 관노로 삼았다.
그밖에 표연말, 홍한, 정여창, 강경서, 이수공, 정희량, 정승조 등은 불고지죄로 곤장 100대에 3천 리 밖으로 귀양보냈으며, 이종준, 최보, 이원, 이주, 김굉필, 박한주, 임희재, 강백진, 이계명, 강혼 등은 모두 김종직의 문도로서 붕당을 이루어 국정을 비방하고 <조의제문>의 삽입을 방조한 죄목으로 곤장을 때려 귀양을 보내 관청의 봉수대를 짓게 하였다.
한편 어세겸, 이극돈, 유순, 윤효손, 김전 등은 수사관(실록 자료인 사초를 관장하는 관리)으로서 문제의 사초를 보고도 보고하지 않은 죄로 파면되었으며, 홍귀달, 조익정, 허침, 안침 등도 같은 죄로 좌천되었다.
이 사건으로 대부분의 신진 사림이 죽거나 유배당하고 이극돈까지 파면되었지만, 유자광만은 연산군의 신임을 받아 조정의 대세를 장악했다. 이에 따라 정국은 노사신 등의 훈척 계열이 주도하게 되었다.
이렇게 사초가 원인이 되어 무오년에 사림들이 대대적인 화를 입은 사건이라 해서 이를 무오사화라고 하는데, 이 사건을 다른 것과 구별하여 굳이 사화가 아닌 사화라고 쓰는 것은 사초가 원인이 되었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의도에서이다.
갑자사화
무오사화로 언론 기관의 기능이 완전히 상실된 상황에서 연산군의 국정 운영은 방만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이제 사림이 완전히 제거된 마당이라 그에게 학문을 권하는 이도 없었고, 간언을 하는 이도 없었다. 더군다나 대신들은 한결같이 연산의 비위에 맞는 인물들로 구성되었다.
조정을 완전히 손아귀에 넣은 연산군은 향락과 패륜 행위를 일삼았다. 매일같이 궁궐에서는 연회가 벌어졌으며, 전국 각지에서 뽑아올린 수백 명의 기생들이 동원되었다. 게다가 자신의 큰어머니인 월산대군의 부인 박씨를 겁탈하는 등 종친간의 상간을 범하기도 했고, 여염집 아낙을 궐내로 불러들이기까지 했다.
이렇게 연산군의 사치와 향락이 심해지자 점차 국가 재정이 거덜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대신들은 그의 행동을 비판하지 못했다. 오히려 연산군의 폭정을 기화로 권신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나 연산군이 국고가 빈 것을 알고 이를 메우기 위해 공신들에게 지급한 공신전을 요구하고, 노비까지 몰수하려 하자 대신들의 태도는 급변했다. 왕이 향락과 사치에 마음을 빼앗겨 급기야 자신들의 경제 기반까지 몰수하는 것을 더 이상 묵과할 수 없다고 판단하게 된 것이었다.
그들은 막상 왕의 요구가 자신들의 이해 관계와 맞물리자 왕의 처사가 부당함을 지적하면서 그동안 못마땅하게 여겨오던 왕의 지나친 향락을 자제해줄 것을 간청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신하들 모두가 연산군에게 반발했던 것은 아니었다. 무오사화 이후 조정은 다시 외척 중심의 궁중파와, 의정부 및 육조 중심의 부중파로 갈라져 있었다. 따라서 공신전을 소유하고 있던 부중파 관료들은 연산군의 공신전 몰수 의지에 반발하고 있었지만, 궁중파는 일단 왕의 의도에 부합하자는 논리를 펴고 있었다.
이런 대립을 이용하여 정권을 잡으려는 인물이 바로 임사홍이었다. 그는 일찍이 두 아들을 예종과 성종의 부마로 만든 척신 세력 중에 하나였다. 임사홍은 성조 시대에 사림파 신관들에 의해 탄핵을 받아 귀양을 간 적이 있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사림을 싫어한 그는 연산군과 신하들의 대립을 이용해 훈구 세력과 잔여 사림 세력을 일시에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미게 되었다.
임사홍은 우선 연산군의 비 신씨 오빠 신수근과 손을 잡고 음모를 꾸미던 끝에 성종의 두 번째 부인이자 연산군의 친모였던 윤씨의 폐비 사건을 들추어낸다. 폐비 윤씨 사건은 성종이 차후에는 거론하지 말라는 유명을 남긴 적이 있어 그때까지 아무도 그 사건을 입에 담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임사홍은 이 사건의 내막을 연산군이 알게 될 경우 윤씨의 폐출을 주도했던 훈구 세력과 사림 세력에게 동시에 화를 입힐 수 있다는 계산을 한다. 임사홍의 밀고로 윤씨의 폐출 경위를 알게 된 연산군은 엄청난 살인극을 자행한다.
연산군은 우선 윤씨 폐출에 간여한 성종의 두 후궁 엄귀인과 정귀인을 궁중 뜰에서 직접 참하고 정씨의 소출인 안양군, 봉안군을 귀양보내 사사시켰다. 그리고 윤씨 폐출을 주도한 인수대비를 머리로 들이받아 부상을 입혀 절명케 했으며, 비명에 죽은 생모의 넋을 위로하고자 왕비로 추숭하고 성종 묘에 배사하려 하였다.
이때 연산군의 행동을 감히 막으려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다만 응교 권달수와 이행 두 사람만이 성종 묘에 배사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반론을 펴다가 권달수는 죽임을 당하고 이행은 귀양길에 올랐다. 하지만 연산군의 행동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막상 신하들이 자신의 행동을 저지하지 못하리라는 판단을 한 그는 윤씨 폐위에 가담하거나 방관한 사람을 모두 찾아내어 추죄하기 시작했다.
이 결과 윤씨 폐위와 사사에 찬성했던 윤필상, 이극균, 성준, 이세좌, 권주, 김굉필, 이주 등 10여 명이 사형당하였고, 이미 죽은 한치형, 한명회, 정창손, 어세겸, 심회, 이파, 정여창, 남효온 등은 부관참시에 처해졌다. 이 밖에도 홍귀달, 주계군, 심원, 이유녕, 변형량, 이수공, 곽종번, 박한주, 강백진, 최부, 성중엄, 이원, 신징, 심순문, 강형, 김천령, 정인인, 조지서, 정성근, 성경온, 박은, 조의, 강겸, 홍식, 홍상, 김처선 등이 참혹한 화를 입었으며, 이들의 가족 자녀에 이르기까지 연좌시켜 죄를 적용하였다.
이처럼 1504년 3월부터 10월까지 7개월에 걸쳐 벌어진 이 갑자사화는 희생자의 규모뿐 아니라 그 형벌의 잔인함이 무오사화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무오사화는 신진 사림과 훈구 세력 간의 정치 투쟁이었지만, 갑자사화는 왕을 중심으로 한 궁중 세력과 훈구, 사림으로 이루어진 부중 세력의 힘의 대결이었기 때문이다.
5. <연산군일기> 편찬 경위
<연산군일기>는 총63권 43책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1494년 12월부터 1506년 9월까지 연산군 재위 11년 9개월간의 역사적 사실을 편년체로 기록하고 있다.
편찬 작업은 연산군 사망 직후인 1506년 11월에 시작되었는데, 폐위된 왕의 사실을 편찬하는 것이므로 일기 수찬이라는 명목하에 일기청을 설치하였다. 이 작업에는 대제학 김감이 감춘추관사에 임명되었으나, 이듬해 1월에 김감이 대신 암살 사건에 연루되어 유배되자 편찬 작업이 일시 중단되기도 했다. 그러다가 대제학 신용개가 다시 감춘추관사가 되면서 재개되었는데, 3개월 후에 편찬의 공정을 기하기 위해 연산군 때 신임을 받던 인물들은 교체되어야 한다는 주장에 따라 편찬관이 교체되었다.
교체된 편찬 책임자는 총재관 성희안, 이하 도청당상 2인, 가방당상 4인, 색승지 1인이 임명되어 본격적인 작업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때 참여한 편찬 실무자들의 이름은 부기되어 있지 않지만, 당시 기관사로 참여했던 권벌의 후손이 소장하고 있는 현존의 <일기세초지도>에 의해 그 전모가 파악되고 있다.
이에 의하면 편찬 과정에서 또 다시 책임자의 변동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감수 책임자 성희안은 변동이 없었지만, 지춘추관사가 성세명, 신용개 등 6인, 동지춘추관사가 조계상, 이유청 등 8인으로 나타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수찬관으로 강경서, 이세인 등 5인, 편수관으로 유희저, 김근사 등 24인, 기주관으로 이현보, 이사균 등 7인, 기사관으로 이말, 성세창 등 16인이 참여하여 <연산군일기> 편찬 작업에는 총 66인이 동원되었다. 하지만 이 66인의 편찬 작업은 어려움이 많았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당대 사료가 부족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작성된 사료의 신빙성이 문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연산군 대의 시정기는 자주 검열을 받았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쉽게 직필을 하지 못했고, 사관이 경연이나 청정에 참여하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또한 사관으로 임명된 인물들이 연산군의 측근이 많아 사료의 신뢰성을 떨어뜨리기도 했다. 게다가 연산군 폐출 이후 사관들의 활약이 지나치게 위축되어 <연산군일기> 편찬 작업의 기초가 되는 사초를 제출하지 않았다. 이는 무오사화에 대한 여파로 사초 제출 이후에 닥칠 후환을 염려했던 까닭이다.
이런 어려운 상황 속에서 <연산군일기> 편찬 작업은 시행 3년 만인 1509년 9월에 완료되어 제반 의식을 간단히 치른 다음 실록이 아니라는 이유로 외사고에 봉안되었다.
<연산군일기>는 봉안, 관리에서는 실록과 큰 차이가 없었지만 내용과 체제는 실록과 현격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 책은 대개 한 권에 1, 2개월분의 사실을 수록하고 있지만 부분적으로 6, 7개월분을 수록한 것도 있다. 특히 내용 면에서는 무오사화의 후유증으로 사초가 거의 없는 상태에서 만들어졌다. 때문에 부실하기 짝이 없다.
여기에 사용한 사초는 정희량과 이종준이 작성한 것이 대부분이다. 나머지 사초는 아예 제출도 되지 않았다. 그래서 각 사건에 대해 정확한 서술을 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사건 자체도 제대로 파악되지 않은 채 실린 것이 대부분이다. 또한 사초의 내용도 편자들에 의해 많이 윤색된 흔적을 보이고 있는데, 이는 연산군이 폭정을 행한 부분을 지나치게 강조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또 실록에는 의당 사건에 대한 관점, 평, 의미 등을 적은 사론이 따라붙게 마련인데 <연산군일기>에는 사론이 25개 정도밖에 수록되어 있지 않아 실록으로서의 가치를 떨어뜨리고 있다. 그나마 이 사론들도 연산군의 패륜적인 비행에 대한 것뿐이어서 객관성을 의심하게 하고 있다.
내용을 부분적으로 살펴보면 무오사화 이전까지는 왕도 정치, 사원전, 내수사 정리 등에 대한 대간들의 상소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데 비해, 그 이후부터 갑자사화가 일어나던 1504년까지는 대간의 상소와 왕의 전교가 거의 반반을 차지하고 있고, 그 이후 폐위 시까지는 무오사화와 갑자사화에 연관된 인물들의 치죄와 연회에 대한 왕의 전교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대외 관계를 살펴보면 대명 관계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이 안 된 것에 비해 북방 야인에 대한 회유 문제와 왜인의 토산물 진봉에 대해서는 상세하게 다루고 있다. 또 왕의 시문 및 그에 화답한 관료들의 시가 많이 실려 있는 것이 또 하나의 특징이다.
개인에 대한 서술에서는 사림파 성향의 인물에 대해서는 간략하게 기록하고 있는 데 비해, 왕의 총애를 받던 궁중파 신하들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서술하며 비교적 많은 사론을 첨가하고 있다.
이 같은 내용을 종합해 볼 때 <연산군일기>는 정확한 사료를 바탕으로 작성된 것이 아니라는 점과 연산군의 폭정에 대해 다소 과장된 서술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겠다. 또한 연산군의 폭정에 많은 부분을 할애하다 보니 정작 기록해야 할 구체적인 사건들을 너무 소홀히 다룬 감도 없지 않다. 그리고 다른 실록 편찬 과정과는 달리 조정이 <연산군일기> 편찬에 너무 소극적이었다는 점도 지적될 수 있겠다.
#연산군 시대의 세계 약사
연산군 시대의 유럽은 콜럼버스, 아메리고 베스푸치, 바스코 다 가마 등의 탐험에 힘입어 아메리카 대륙, 인도, 남아프리카 등에 상륙하여 침략을 준비하던 시기였다. 또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등이 <최후의 만찬>, <다비드상> 등의 작품을 생산한 시기이며, 이탈리아에서는 이른바 문예부흥이라 불리는 르네상스 운동이 일어나는 시기였다.
또한 로마교회가 면죄부를 판매해 세인들의 원성을 사고 있었고, 종교개혁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었다.
제11대 중종실록
1. 연산군의 폐출과 진성대군의 등극
갑자사화 후 연산군의 폭정은 더욱 노골화되고 있었다. 그동안 자신의 행동에 제동을 걸던 세력이 모두 없어진 만큼 그가 못 할 일은 없었다. 우선 자신의 잘못을 지적하는 신하는 모두 죽이거나 유배를 보냈으며, 언론의 주축이 되던 사간원을 없애버렸고, 정치 논쟁을 금하기 위해 경연을 폐지시켰다.
학문을 싫어하고 학자를 배격하던 그는 조선 학문의 전당이라고 할 수 있는 성균관을 폐지하여 자신의 유흥장으로 만들었으며, 조선 불교의 산실인 원각사를 없애고 그곳에 장악원을 개칭하여 만든 연방원을 두고 기생들의 모임 장소로 사용하였다.
게다가 전국에 채청채홍사를 보내어 전국의 미녀들을 선발(이를 운평이라한다)하고 그중에서 뽑힌 기녀를 흥청이라 하여 궁중에 불러들여 연회를 거들게 하였다. 또한 사냥을 즐기기 위해 도성을 기준으로 30리 내에 있는 민가를 철거하기도 했다.
왕의 학정이 여기에 이르자 전국 각지에서 한글 투서가 날아들기 시작했는데, 연산군은 백성이 언문을 이용하여 왕을 욕되게 한다면서 훈민정음 사용을 금지하고, (언문구결) 등 한글 관계 서적을 불태웠다.
연산군의 행동이 이렇듯 광적인 양상을 띠면서 민생과 국정이 뒷전으로 밀려나게 되자, 전국 각지에서 그를 축출하려는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다.
거사 계획을 가장 먼저 준비하던 사람은 성희안이었다. 성희안은 성종의 총애를 받던 인물로 학식이 깊고 치밀하며 대담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는 종사관, 형조참판 등을 거쳐 1504년에는 이조참판직에 올라 있었다. 하지만 연산군이 망원정에서 연회를 즐기고 있을 때, 그의 방탕한 국정 운영을 비판하는 시를 지어 올렸다가 종9품 부사용이라는 미관말직으로 좌천된 상태였다.
성희안이 가장 먼저 접근한 사람은 박원종이었다. 박원종은 한때 연산군의 신임을 받아 동부승지, 좌부승지를 거치면서 주로 국가의 재정 문제를 맡았던 인물이었다. 때문에 연산군의 사치 행각을 비판하는 간언을 하기도 했는데, 이 과정에서 연산군의 미움을 사서 평안도 병마절도사로 좌천되기도 했다. 하지만 곧 동지중추부사, 한성부윤을 역임하고 1506년에는 경기도 관찰사로 있다가 다시 연산군의 미움을 받아 삭직되었다.
박원종이 연산군의 미움을 사게 된 것은 그의 누이 박씨부인 사건 때문이었다. 박원종의 누이는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후실이었는데 인물이 절색이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평소 그녀에 대해 흑심을 품고 있던 연산군은 마침내 큰어머니인 그녀를 궁으로 불러들여 겁간하였는데, 이 때문에 박씨부인은 자결하고 말았다. 이후로 박원종의 연산군에 대한 감정은 극도로 악화되었고, 결국 삭직되었던 것이다. 성희안은 박원종의 원한과 불만을 이용하여 군사력을 얻고자 했다. 그는 거사를 도모할 지략은 있었지만 군사력을 동원할 힘이 없었다. 하지만 박원종은 원래 무신 출신이었으므로 병력을 동원할 연줄을 가지고 있었다.
그 후 이들은 거사에 참여할 인물들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당시 인망이 높았던 이조판서 유순정을 끌어들였으며, 연산군의 신임을 받고 있던 신윤무와 무장 출신 장정, 박문영 등의 호응을 얻어냈다. 거사일은 1506년 9월 연산군이 장단의 석벽으로 유람을 계획한 날로 잡았다. 하지만 연산군의 석벽 나들이는 갑작스럽게 취소되고 말았다. 이 때문에 거사 계획은 일시 유보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그때 호남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던 유빈, 이과 등이 거사를 알리는 격문을 보내오자 박원종, 성희안 등은 혹 선수를 뺏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서둘러 군사를 모아 예정일에 거사를 결행했다.
거사에 돌입한 반란군들은 먼저 진성대군에게 거사 사실을 통보하고, 신수근, 신수영 형제와 임사홍을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 반란군들은 사전에 대궐로 진입하여 내응하기로 약조되어 있던 신윤무 등의 도움을 얻어 쉽게 궐내를 장악하였다.
거사에 성공하자 성희안 등은 성종의 계비이자 진성대군의 어머니인 정현왕후 윤씨를 찾아가 연산군을 폐하고 진성대군으로 하여금 왕위를 잇도록 하라는 교지를 내려줄 것을 간언한다. 정현왕후는 처음에는 이들의 청을 거절하다가 결국 연산군을 왕자의 신분으로 강등시켜 강화도 교동에 안치하도록 한다. 그리고 이튿날 진성대군이 근정전에서 즉위식을 거행함으로써 거사는 완결되었다.
사실 이 거사가 있기 전에 박원종이 신수근을 찾아간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왜냐하면 신수근은 연산군의 처남이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진성대군의 장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급적이면 신수근을 거사에 가담시켜 안전을 도모하려고 했던 것이다. 박원종이 신수근을 만난 것은 그를 끌어들일 의향보다는 그의 마음을 떠보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만약 신수근이 거사에 호응한다면 무혈 입궐이 가능하다는 사실도 배제하지 않았기 때문에 신수근이 협조하리라는 기대를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박원종은 마지막 담판을 짓기 위해 그를 찾아갔던 것이다.
박원종은 신수근에게 누이와 딸 중 누가 더 중요하냐고 돌려서 물었다. 머리 회전이 빨랐던 신수근이 그 물음의 의도가 무엇인지 모를 리 없었다. 그러나 신수근은 이 말을 듣고 버럭 화를 내며 '비록 임금이 포악하긴 하지만 세자가 총명하니 염려할 바가 못 된다'라고 못 박았다. 박원종은 신수근의 이 말을 듣고 거사 이전에 그를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성희안, 박원종 등이 중심이 된 이 반정거사는 예상보다 쉽게 성공리에 끝났고, 이로써 12년 동안의 연산군과 궁중 세력의 독재 정치는 종식되었다. 학정은 끝나고 정치의 주도권은 훈구 세력에게 돌아갔다. 이는 곧 조선의 정치 형태가 성종 이전으로 되돌아간 것을 의미한다.
2. 중종의 개혁 정책 실패와 정국의 혼란(1488-1544, 재위 기간 1506년9월-1544년11월, 38년 2개월)
박원종 일파의 연산군 폐위 사건으로 중종은 왕위에 올랐지만 반정 공신 세력에 밀려 조정의 주도권을 장악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들 공신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신진 사림 세력이자 급진 개혁론자였던 조광조를 끌어들인다. 하지만 조광조의 급진적 경향에 염증을 느낀 중종은 훈신, 척신 세력의 간언을 받아들여 그를 숙청시키고 만다. 이후 조선 조정은 훈신, 척신간의 치열한 권력 다툼이 전개되어 정국은 극심한 혼란에 빠져들게 된다.
중종은 1488년 성종과 그의 계비 정현왕후 윤씨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이름은 역, 자는 낙천이다. 1494년 진성대군에 봉해졌으며, 1506년 9월 박원종, 성희안 등이 연산군을 폐출하고 그를 옹위하자 조선 제11대 왕으로 등극했다. 이때 그의 나이 19세였다.
중종은 등극한 뒤 가장 먼저 연산군의 폐정으로 말미암아 문란해진 나라 기강을 바로 잡고 정치 수준을 끌어올리는 데 역점을 두었다. 왕의 자문을 담당하던 홍문관의 기능을 강화하고, 경연을 중시하여 정책 논쟁의 강도를 높였으며, 문신의 월과, 춘추과시, 사가독서, 전경 등을 엄중히 시행하여 문벌 세가들을 견제하려 하였다.
중종의 이 같은 정책은 왕도 정치를 앞세워 훈신과 척신들의 세력 팽창을 견제하려는 의도에서 이루어진 것인데 초기에는 거의 실효성을 거두지 못했다. 이는 중종반정에 성공한 공신 세력의 힘이 너무 막강하여 왕의 입지가 미약한 데서 비롯된 결과였다. 게다가 공신들 대부분이 기득권을 누리려는 훈신 세력이었기 때문에 중종의 사림 성향의 왕도 정치 추구는 항상 그들의 저지와 도전에 직면해야 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상황은 조금씩 달라졌다. 중종 즉위 4년 후인 1510년 영의정직에 있던 박원종이 죽어 공신 세력의 위세가 많이 위축되었고, 한편에서는 반정 이후 지속된 개혁적 분위기가 사회에 확산되면서 정치도 새로워져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가고 있었다.
개혁에 대한 목소리는 대개 갑자사화로 정치 일선에서 밀려났던 사림을 위주로 형성되었다. 당시 사림의 대표적인 인물은 조광조였다. 그는 무오사화로 유배중이던 김굉필에게서 학문을 배웠으며, 1510년 사미시에 장원으로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한 인물로서 당시 급진 개혁 세력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중종은 공신 세력을 견제할 방도를 모색하던 끝에 1515년 급기야 조광조를 정치 일선으로 끌어들인다. 엄격한 도학 사상가인 조광조를 앞세운 중종은 그때부터 도학적 사상에 근거한 철인 군주 정치를 표방하며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공신 세력을 견제하는 동시에 철저한 유교 정치를 펼쳐나가기 시작했다.
조광조의 주장에 따라 중종은 민간에 유교적 도덕관을 심기 위해 여씨향약을 전국적으로 실시하였다. <여씨향약>은 원래 송나라 학자 여대충의 저작이었는데 후에 주희가 첨삭하고 주석한 <주자증손 여씨향약>이 널리 유포되었다. 이는 유교 사상을 기반으로 한 일종의 민간 자치 규율이었다.
또한 과거제가 인재를 등용하는 데 한계가 있다면서 사림들의 천거에 의해 인재를 등용해야 한다는 주장에 따라 천거 등용제인 현량과가 실시되어 신진사류 28명이 요직에 배치되었다.
조광조의 이 같은 정책은 이른바 사림파를 중심으로 한 지치주의적 이상 정치를 행하려는 시도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조광조 일파의 개혁 정책은 지나치게 급진적이고 과격해서 훈구 세력의 엄청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더군다나 조광조 일파가 도학적 정치 이념을 내세워 임금에게까지 압박을 가하기 시작하자 중종 역시 조광조의 급진적 경향에 염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중종의 이런 심중을 헤아린 훈구파의 남곤, 심정, 홍경주 등은 1519년의 반정 공신 위훈 삭제사건을 계기로 조광조 일파를 몰아낼 계획을 세우고, 조광조 일파가 붕당을 만들어 중요한 자리를 독차지하고 임금을 속여 국정을 어지럽히니 죄를 밝혀 바로잡아야 한다고 상계를 올렸다. 조광조 일파의 지나친 도학적 언행에 염증을 느끼고 있던 중종은 이들 훈신들의 상소를 받아들여 조광조, 김정, 김식 등 신진 사림 세력을 숙청하였는데, 이를 기묘사화라 한다.
이로써 조광조를 통한 4년 동안의 중종의 개혁 정치는 종말을 고하였다. 이후 심정 등 훈구파의 전횡이 자행되면서 중종 중반기 이후에는 정치적 혼란이 거듭되었으며, 각종 옥사 등이 끊이지 않고 일어났다. 1521년 기묘사화의 여파로 심정, 남곤의 일파인 송사련의 신사무옥이 일어나 안처겸 등의 사림파가 다시 숙청되었다. 1542년에는 심정, 남곤 등에게 쫓겨났다가 기묘사화 이후에 정계에 다시 복귀하였던 권신 김안로가 파직되고, 이듬해 3월에는 윤세창 등의 모역 사건이 일어나는가 하면, 1527년에는 김안로의 아들 김희가 심정, 유자광을 제거하고자 일으킨 동궁의 작서의 변이 일어나 관련도 없는 경빈 박씨와 복성군이 쫓겨나 죽었다.
이렇듯 정국의 혼란이 가속화되던 중에도 1531년에는 그동안 정권에서 소외되었던 김안로가 다시 집권하게 되자 정계는 한치 앞을 가늠할 수 없는 상황으로 변했다. 이에 중종의 외척 윤원로 형제가 등장하여 김안로와 대립하게 되자 정계는 훈신과 척신 사이의 정권 쟁탈전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정국의 불안은 국방 정책에서도 많은 혼란을 야기시켰다. 성종, 연산군 대에만 해도 비교적 잠잠하던 왜구들이 대마도의 지원을 받아 세력권을 넓혀 나가더니 기어코 폭동을 일으켜 한때 제포, 부산포를 함락시키고 웅천을 공격하는 등 삼포왜란이 일어나 경상도 해안 일대가 막대한 피해를 입기도 했다. 이 난으로 조선과 일본의 통교가 중단되었으나, 일본의 아시카기 막부의 간청에 의하여 1512년 임신조약을 체결하였다. 임신조약 후 조선은 종래 쓰시마에서 보내던 무역선인 세견선과 그에 대한 응답으로 조선 조정에서 보내던 세사미두를 반감하는 동시에, 상주하던 왜인들의 삼포 거주를 엄금하고 제포 하나만을 개항하는 등 왜인들의 출입을 엄격히 제한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엄격한 통제에도 불구하고 왜인들의 변란은 자주 일어났다. 1522년 5월에는 추자도 왜변, 동래염장 왜변 등이 있었고, 1529년에는 전라도 왜변, 1544년에는 사량진 왜변 이 발생했다. 그리고 이 사량진 왜변으로 조선은 왜인들의 내왕을 완전히 금지시켰다.
한편 북방에서는 야인들의 내침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1512년 그들은 갑산, 창성 등지를 침입하여 인마를 살상했는데, 이를 계기로 조정에서는 4군 지대에 거주하는 야인들의 퇴거를 권유하고, 6진 지대에 순변사를 파견하는 동시에 의주산성을 수축하여 북방 방어벽을 형성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야인들의 4군, 6진 지역에 대한 노략질은 계속되었다. 그래서 만포첨사가 피살되는 사건이 발생하는 등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이와 같이 남쪽에서는 왜구가, 북방에서는 야인이 극성을 떨자 조정은 왕권 호위를 강화하기 위해 정로위를 설치하는 한편, 왜구에 대응하기 위해 외침에 대비한 임시 합좌회의 기관인 비변사를 설치하였다.
비변사는 이후 영구적인 합좌기관으로 발전하여 군사적 기능뿐 아니라 정치 기관의 성격도 띠게 되었다. 그리고 이 밖에도 무술을 가르치는 무학과를 설치하였으며 편조전이나 벽력포 등의 무기를 제작하여 국방력 강화에 노력하였으나, 정치적 불안으로 군사 기강이 무너져 그다지 큰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사회면에서는 조광조의 개혁 정치의 여파로 유교주의적 도덕 윤리가 더욱 정착되어갔다. 미신을 타파한다는 이유로 도교적 요소가 강한 소격서를 폐지하고, 불교의 도승제도를 철폐했으며, 도성 안의 무당들을 단속하는 한편 절을 새롭게 짓지 못하도록 했다.
이런 일련의 유교적 조치에 이어 향약을 실시하여 유교주의적 향촌 질서를 조성하기도 했다. 한때 조광조 일파가 숙청되자 이런 양상은 주춤하는 듯했지만, 그 뒤 다시 강력하게 추진되어 <소학>, <이륜행실>, <속삼강행실도> 등의 책을 간행하여 민간에 유포하고 교화하였으며, 후반기에 접어들어서는 안향의 영전을 모신 백운동서원을 세워 유교 정신의 고착에 더욱 주력하였다.
문화면에서는 인쇄술의 발달과 더불어 많은 편찬 사업이 전개되었다. 1516년에는 주자도감을 설치하여 많은 동활자를 주조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각종 서책이 편찬되었다. 최세진, 신용개, 이행 등을 중심으로 <사성통해>, <속동문선>, <신동국여지승람> 등이 편찬 간행되었으며, 1536년에는 찬집청이 설치되어 권선징악을 주제로 한 서적들을 찬수 또는 번역하기도 했다.
경제면에서는 저하와 동전 사용을 적극 권장하고, 도량형의 통일을 꾀하였다. 또한 의복, 음식, 혼인 등과 관련된 사치를 금지하였으며, 신임 관리자들에 대한 환영 배례를 금하는 등 민생 안정을 위한 노력을 가하였다. 하지만 이런 노력들은 정치적 혼란과 국방의 불안 탓으로 별로 효과를 올리지 못했다.
이 밖에 1530년부터 시작된 서양의 세면포 무역이 지배층의 의복 생활에 커다란 변화를 일으킨 것도 특이할 만한 사실이다. 또한 농업 관련 기술도 발달하였는데, 관천기목륜, 간의혼상을 새로 만들어 비치하고, 1534년에는 명나라에 기술자를 파견하여 이두석, 정청의 조작법과 훈금술을 습득해 오도록 했다. 1536년에는 창덕궁 내에 보루각을 설치해 누각에 관한 일을 보고하게 했으며, 1538년에는 천문, 지리 등에 관한 서적을 명나라에서 구입하여 이 분야에 대한 연구 개발에 박차를 가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와 같은 각 방면의 진흥 정책들은 정치적 혼란에 영향을 받아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는 곧 중종의 개혁 정치가 실패로 돌아갔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것은 인재 활용의 미숙함과 뚜렷한 정치 철학의 부재에서 기인한다.
중종은 조광조 같은 급진 개혁파를 등용하여 단시일에 사회 개혁을 단행하고 정치 혁신을 도모하려 했으나, 이는 당시의 상황에서는 무리한 조치였다. 개혁이 급진전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왕 자신이 개혁의 방향에 대해 뚜렷한 입장을 가지고 있어야 했는데 왕은 조광조를 뒤따라가기에 급급했고, 마침내는 조광조의 지나친 도학적 언행에 염증을 느껴 훈구파에 의한 그의 제거에 동조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는 조광조 입장에서 보면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 꼴이된 것으로 개혁을 시작하지 않은 것보다 못한 결과를 낳고 말았다.
비록 조광조가 급진적인 성향을 보였다 하더라도 중종은 일정 수준에서 개혁의 강도를 조절하고, 다른 한편으로 훈구 대신들의 입지를 마련해주는 정치적 능력을 발휘했어야 했다. 그는 자신의 부왕인 성종의 정치 형태를 모범으로 삼아 균형 정치를 통한 조선의 영화기를 희망하고 있었지만 성종만큼 뛰어난 정치력을 소유하지는 못했다.
38년 2개월이라는 긴 시간을 왕위에 머물렀던 중종은 1544년 11월 14일 세자에게 왕위를 넘겨주고 그다음 날 5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그는 계비 장경왕후를 비롯 총 10명의 부인에게서 20명의 자녀를 얻었다. 그의 능호는 정릉으로 현재 강남구 삼성동에 있다.
3. 중종의 가족들
중종은 원래 신수근의 딸 단경왕후 신씨와 결혼했으나, 반정이 성공하여 등극한 뒤에는 공신들의 반대로 그녀를 폐위시켜야 했다. 그 후 2명의 황후와 7명의 후궁을 두게 되었는데 그들에게서 총 9남 11녀의 자녀를 얻었다.
장경왕후 윤씨가 인종과 효혜공주를, 계비 문정왕후 윤씨가 명종을 비롯 1남 4녀를, 경빈 박씨가 복성군 등 1남 2녀를, 희빈 홍씨가 2남, 창빈 안씨가 덕흥군(선조의 아버지) 등 2남 1녀를, 숙의 홍씨가 1남, 숙의 이씨가 1남, 숙원 이씨가 2녀, 숙원 김씨가 1녀를 낳았다.
아래에 중종의 가족 중 세 왕후의 삶을 약술한다. 인종과 명종, 덕흥대원군 등은 각각 해당
왕조에서 다루기로 한다.
단경왕후 신씨(1487-1557)
단경왕후 신씨는 익창부원군 신수근의 딸이며, 연산군의 비 신씨의 외질녀이다. 그녀는 1487년에 태어나 1499년 12세의 나이로 진성대군과 가례를 올렸다. 1506년 진성대군이 왕으로 추대되자 왕비에 올랐으나, 고모가 연산군의 비이고 아버지가 연산군의 매부라는 이유로 폐위되었다.
반정 세력들은 신씨가 왕후가 될 경우 그녀가 죽은 아버지 신수근의 원수를 갚을 것을 염려하여 중종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신씨를 폐위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결국 중종도 공신들의 힘에 밀려 그녀를 폐위하고 말았다.
그녀는 처음에 하성위 정현조의 집으로 쫓겨났다가 본가로 돌아갔는데, 1515년 장경왕후 윤씨가 죽었을 때 한때 그녀를 복위시켜야 한다는 여론이 일기도 했으나 이행, 권민수 등의 반대로 성사되지 못했다.
신씨의 폐위와 관련해서는 치마바위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공신들의 압력에 못 이겨 신씨를 폐위하긴 했지만 그녀에 대한 중종의 애정은 남달랐던 모양이다. 그래서 중종은 그녀가 보고 싶으면 자주 높은 누각에 올라가 그녀의 본가가 있는 쪽을 바라보곤 했다. 신씨의 집에서는 그 사실을 전해듣고 중종의 애틋한 그리움의 정을 달래기 위해 집 뒷동산에 있는 바위 위에다 신씨가 궁중에 있을 때 즐겨 입던 분홍색 치마를 펼쳐놓았다. 왕은 바위에 펼쳐진 그 치마를 바라보며 신씨를 보고픈 마음을 삭히곤 하였다는 것이다.
이런 치마바위 전설을 남긴 신씨는 홀로 자식도 없이 외롭게 한평생을 보내다가 1557년 7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영조 때 복위되어 단경왕후라는 시호를 받았다. 그녀의 능호는 온릉으로 현재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일영리에 있다.
장경왕후 윤씨(1491-1515)
장경왕후 윤씨는 영돈녕부사 윤여필의 딸로 1491년 호방현 사제에서 태어나 고모인 월산대군의 부인에 의하여 양육되었다. 1506년 중종의 후궁이 되어 숙의에 봉해지고, 1507년 중종비 단경왕후 신씨가 폐위되자 왕비에 책봉되었다.
이후 1515년 세자(인종)를 낳았으나 산후병으로 엿새 만에 25세를 일기로 경복궁 별전에서 죽었다. 소생으로는 인종 이외에 효혜공주가 있다. 능호는 희릉으로 경기도 고양시에 있다.
문정왕후 윤씨(1501-1565)
문정왕후 윤씨는 영돈녕부사 윤지임의 딸로 1501년에 태어났다. 1517년 왕비에 책봉되었으며, 1545년 명종이 12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르자 8년 동안 수렴청정을 하며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다. 그녀는 동생인 윤원형에게 정권을 쥐게 하고 인종의 외척 윤임 일파를 제거하기 위해 을사사화를 일으켜 윤임을 죽이고 윤원로를 귀양보내기도 했다.
그녀는 성질이 독하고 질투가 심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래서 인종 집권시에는 툭하면 인종을 찾아가 '우리 모자(그녀와 명종)를 언제쯤 죽일 거냐'고 하면서 괴롭혔다고 한다. 일설에는 인종이 그녀가 건네준 독이 든 떡을 먹고 죽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또한 명종을 대신해 섭정을 펼칠 때에는 왕권을 완전히 장악하여 왕을 허수아비로 만들었으며, 수렴청정에서 손을 뗀 뒤에도 명종의 정사 운영에 지나친 간섭을 해 조정을 뒤흔들어놓기도 했다. 심지어는 왕이 자신의 청을 들어주지 않는다고 매질을 하거나 독설을 쏟아놓기도 했다. 그녀의 이런 지나친 집권욕은 결국 명종 대의 혼란을 가중시키는 원인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그녀는 불교의 부흥을 꾀하기도 했는데, 1550년에 선교 양종을 부활시키고 폐지되었던 승과, 도첩제 등을 다시 실시하기도 했다. 그리고 승려 보우를 총애하여 병조판서직에 제수하는 바람에 대신들의 불만을 사기도 했다. 명종은 그녀의 이런 지나친 정권욕에 불만을 품고 한때 을사사화 때 죽은 선비들을 신원하고 신진 사림 세력들을 등용시켜 외척 세력을 견제하려 했으나 번번이 그녀의 방해로 실패하고 말았다.
이렇듯 조선 조정을 패권 다툼의 장으로 몰아갔던 희대의 악후 문정왕후는 1565년 6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그녀의 소생은 명종을 비롯, 의혜공주, 효순공주, 경현공주, 인순공주 등 1남 4녀이며, 능은 태릉으로 현재 서울 노원구 공릉동에 있다.
4. 신진 사림의 재등장과 조광조 일파의 개혁 정치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은 연산군의 악정을 개혁하고 훈구파의 과대한 세력 팽창을 막기 위하여 신진 사림 세력을 다시 등용한다. 이는 성종의 균형 정치를 모방한 것으로서 사림파를 근위 세력으로 양성하여 왕의 입지를 높이고 조정의 힘을 한쪽으로 쏠리지 않게 하려는 정치적 계산에 따른 것이었다.
중종이 끌어들인 사림파의 거두는 조광조였다. 조광조는 김굉필 문하에서 수학한 정통적인 도학자로서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당시 사림학자들 사이에서 추앙받는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조광조가 김굉필을 만난 것은 17세 때였다. 지방 관리로 나갔던 아버지를 따라 희천에 갔다가 무오사화로 인해 그곳에 유배중이던 김굉필을 처음 대하게 되었다. 김굉필은 순천으로 이배되기 전가지 2년 동안 그에게 철저한 도학주의적 실천 사상을 가르쳤다. 조광조는 김굉필의 도학적 탁견에 매료되어 미친 사람처럼 학문에 빠져들었고, 그 결과 젊은 나이에 사림파의 영수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하지만 당시는 무오사화의 영향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성리학을 꺼리고 있을 때였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성리학에 심취한 조광조를 보고 '미친 놈'이라거나, 화를 잉태하고 있는 놈이라 해서 '화태'라고 손가락질 하기도 했다. 그러나 조광조의 성리학에 대한 열정은 식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욕하는 모든 친구들과의 교류도 끊은 채 철두철미한 도학적 실천 운동에 주력했다. 의관을 단정히 한 것은 물론이고, 행동에서도 절제와 절도를 분명히 했고, 언어 생활에도 규범을 두어 어기는 일이 없었다.
그는 이러한 실천 운동이 익숙해지자 드디어 세상으로 나왔다. 그래서 29세가 되던 1510년 사미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그해에 성균관에 입학했다. 그리고 1515년 성균관 유생 200명의 천거와 이조판서 안당의 추천으로 조지서사지라는 관직에 임용되고, 그해 가을 증광문과 을과에 급제하여 전적, 감찰, 예조좌랑을 역임하게 된다.
이 과정을 거치면서 조광조는 중종의 두터운 신임을 받게 된다. 이때부터 4년 동안 중종은 조광조를 앞세워 급진적인 개혁 정치를 펼쳐나갔다. 조광조는 중종에게 성리학을 민간 교화의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며 철저한 도학 사상에 입각한 왕도 정치를 실현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러한 조광조의 의견을 수렴한 중종은 그를 정언에 앉혀 언론을 통해 훈구 세력을 견제하고자 하였다.
조광조에 대한 중종의 신임은 단순히 신하와 임금 사이를 넘어 동지적 성향을 띠고 있었다. 중종은 조광조의 분명한 사리 판단과 절도있는 행동, 그리고 눈치를 살피지 않는 직언을 좋아하여 그 자신도 도학 정치의 실현을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중종의 신임을 바탕으로 조광조는 우선 훈구 세력들에 대해 포문을 열었다. 그 역시 김종직과 마찬가지로 훈구 세력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 불의와 타협한 모리배로 인식하고 있었기에 훈구 세력의 척결이 곧 정치 개혁의 기초가 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조정은 어느새 반정 공신파와 신진 사림의 대립 양상을 띠게 되었으며, 1517년 조광조는 드디어 그 동안 형성한 세력을 기반으로 중종과 함께 본격적인 개혁을 단행하기에 이르렀다.
첫번째 개혁 작업은 향약의 실시였다. 향약은 성리학적 이상 사회, 즉 중국의 하, 은, 주 삼대에 걸친 이상 사회를 민간 속에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향약은 지방의 자치를 설정한 민간 규약으로 유학적 도덕관의 실천과 도학적 생활을 몸에 익히도록 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말하자면 모든 백성을 성리학적 규범으로 교화시켜 왕도 정치의 기반이 되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두 번째 개혁 작업은 현량과의 도입이었다. 조광조는 종래의 과거 제도가 본질적인 모순으로 인해 학업을 모두 시험 준비에만 한정하도록 하는 폐단을 노정하고 있을 뿐 아니라 개개인의 인품과 덕행을 판단할 수 없게 한다면서 이를 폐지하고 학문과 덕행이 뛰어난 사람을 천거하는 제도를 통해 인재를 등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천거 제도가 바로 현량과였다. 조광조가 신광한, 이희민, 신용개, 안당 등의 찬성을 얻어 추진한 현량과는 훈구파의 엄청난 반대에 부딪쳤지만 중종의 지원에 힘입어 1519년 전격 실시되었다. 현량과는 중앙에서는 성균관을 비롯한 삼사와 육조에 천거권을 주고, 지방에서는 유향소에서 천거하여 수령과 관찰사를 거쳐 예조에 전보하도록 했다. 천거 근거로는 성품, 기국, 재능, 학식, 행실과 행적, 지조, 생활 태도와 현실 대응 의식 등 일곱 가지 항목이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천거된 사람은 전정에 모여 왕이 참석한 자리에서 시험을 치른 뒤에 선발되었다. 그래서 후보자 120명 가운데 현량과를 통해 급제한 사람은 28명인데, 그들의 천거 사항을 종합해 보면 학식과 행실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것으로 나타난다.
또한 이들 28명의 연고지를 살펴보면 경상도 5명, 강원도 1명, 그외 1명 등 7명을 제외하고 나머지 21명은 모두 기호지방 출신이었다. 그들은 조광조의 추종자들로 학맥 또는 인맥으로 연결되어 강한 연대 의식을 지닌 신진 사림파였다.
향약과 현량과 실시 이외에도 조광조는 전통적인 인습과 구태의연한 제도를 혁파하고 궁중 여악을 폐지했으며 내수사의 고리대금업을 중지시키기도 했다. 또한 성리학적 윤리 질서와 통치 질서를 세우기 위한 주자의 <가례>와 <삼강행실>을 보급하고 이교적 이념이 담긴 기신재, 소격서 등을 없애고 <소학> 교육을 장려하여 유교 사회의 질서를 세우려고 하였다.
하지만 조광조의 이같은 일련의 개혁 정치는 너무나 과격하고 성급하게 실시된 나머지 부작용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성리학적 왕도 정치 실현의 전초 기지이자 사림 세력의 정치적 기반이 될 것으로 예상했던 향약은 실시 초기부터 난관에 부딪치고 있었다. 당시 실시되었던 향약은 전통과 조화된 자치적인 것이 아니라 이상에 치우친 당국자들에 의해 선도되는 관 주도적 성향을 띠고 있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조광조 자신도 지적하였듯이 향약의 실시를 관에서 철저히 규제하고 강제하였던 것은 향약의 근본 취지에 어긋나는 것이었고, 이런 강제성은 오히려 민간의 반발을 사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다음 문제는 비록 향약이 유포되긴 했으나 이를 지도하고 이끌 만한 인재가 양성되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방의 자치가 가속화되고 향약이 절대적인 규범으로 자리할 경우 역으로 관리들의 통치력이 약화되어 민간을 다스릴 수 없다는 것이었다.
향약의 실시에 따른 이 같은 문제들은 조광조 자신의 지적처럼 너무 급작스럽게 민간에 유포하려 한 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래서 조광조는 관이 주도하는 것을 비판하면서 민간 주도의 향약을 위해 보완책을 마련하려 했으나 기묘사화의 발발로 무산되고 말았다.
향약 이외에 현량과에서도 부작용이 나타났다. 현량과 실시를 통해 등용된 인물이 한결같이 조광조를 추종하는 신진 사림파였기에 등용 기준이 공평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훈구파의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림 세력의 힘이 강화됨에 따라 조광조의 개혁 방향이 더욱 극으로 치닫게 되었다.
이런 극단적인 개혁 성향은 마침내 중종의 정치 행위에까지 간섭하게 되어 왕을 철저하게 성리학적 규범에 맞춰 생활하도록 강권하게 되었다. 때문에 중종은 점차 조광조의 경직된 도학 사상에 염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러나 조광조의 압박은 그칠 줄을 몰랐다. 그 압박은 마침내 중종 초기에 형성된 정국 공신이 너무 많다는 비판으로 치달았다. 이는 사림파가 훈구 세력 축출을 위해 벌인 정면 대결이었다. 그 때문에 조정에는 일대 파란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사림 세력이 이길 경우 조정은 완전히 사림파에 의해 장악될 판국이었다. 이는 중종 자신도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중종은 사림, 훈구 어느 쪽도 권력을 독점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사림은 중종을 압박하며 자신들의 의지대로 밀어붙였고 결국 중종이 밀리고 말았다. 훈구 대신들의 막강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전 공신의 4분의 3에 해당하는 76명의 훈작을 삭탈했던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훈구 세력은 더 이상 사림파의 급진적 성향을 두고 볼 수 없다는 판단을 하고 중종에게 조광조 일파가 붕당을 조직해 조정을 문란케 하고 있다고 탄핵했다. 마침 무서운 기세로 세력권을 팽창하고 있는 사림에게 위기 의식을 느끼고 있던 중종은 훈신들의 탄핵을 받아들여 대대적인 사림파 숙청 작업을 감행하였다. 이것이 곧 기묘사화다.
이로써 4년 동안의 조광조의 개혁 정치는 막을 내리고 말았지만 그의 도학적 왕도 정치는 후대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의 개혁 작업에 대한 평가는 후대의 명재상 이율곡의 <석담일기>에 잘 드러나고 있다. 율곡은 이 책에서 조광조를 비롯한 신진 사림파의 정치적 실패의 원인을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그는 어질고 밝은 자질과 나라를 다스릴 재주를 타고났음에도 불구하고 학문이 채 이루어지기 전에 정치 일선에 나간 결과, 위로는 왕의 잘못을 시정하지 못하고 아래로는 구세력의 비방도 막지 못하였다."
이처럼 후대의 학자들은 그의 사상보다는 미숙한 정치력과 극단적인 개혁성을 비판하고 있다. 이는 후세 사람들이 그의 사상은 따르되 그의 극단적인 개혁성은 따르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조광조의 개혁 정치는 비록 실패로 돌아갔지만 그의 개혁 방향만은 옳게 평가되어 명종 대를 거쳐 선조 대에는 사림이 정치 세력의 중심이 되는 데 지대한 역할을 하게 된다.
5. 기묘사화와 사림 세력의 후퇴
현량과를 통해 도학정치 구현의 터전을 마련한 조광조 일파는 마침내 본격적인 훈신 제거 작업에 돌입하게 된다. 이 때문에 훈구 세력의 반발이 거세게 일어났고, 마침내 1519년에 이른바 반정 공신 위훈 삭제 사건을 계기로 그 반발이 폭발하고 말았다.
조광조는 반정 공신에 올라 있는 신하들 가운데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고 지적하면서 이들의 공신 자격을 박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광조의 이런 주장이 전혀 근거 없는 것은 아니었다. 반정 초기에 대사헌 이계명 등이 원종 공신이 많아 외람되므로 그 진위를 밝힐 것을 주장한 일이 있었다. 하지만 이계명의 주장은 반정 공신들에 의해 묵살되고 말았다.
조광조는 훈구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서는 우선 공신들의 세력을 위축시킬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고 과거의 반정 공신 시비를 다시 꺼낸 것이다. 반정 공신의 위훈을 삭제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면서 조광조는 성희안, 유자광 등을 신랄하게 비난하였다. 성희안에 대해서는 반정을 하지도 않았는데 공신으로 책록되었다고 했고, 유자광에 대해서는 척족들의 권력과 부귀를 위하여 반정하였으므로 이러한 류의 반정은 소인배들이나 꾀하는 일이라고 비난했다.
조광조의 이런 위훈 삭제 주장에 대해 중종은 반정 공신은 한번 정한 것이니 수정할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조광조의 설득은 집요했다. 즉, 반정 공신들의 대다수가 자신의 이익과 권력을 위해 거사를 도모한 자들이므로 이들이 계속 공신으로 머물러 있는 한 조정은 끝없이 이익과 권력만 추구하는 소인배들에 의해 점유당할 것이고, 따라서 이런 현실을 타파하지 않으면 국가를 유지하기가 곤란하다는 주장이었다.
조광조의 강력한 설득에 중종도 지쳐가고 있었다. 개혁이라는 대의명분을 앞세운 조광조의 논리를 중종은 당해낼 재간이 없었던 것이다.
조광조는 위훈 삭제의 실천 대안을 간단하게 제시했다. 우선 반정 공신 2, 3등 중 일부를 3, 4등으로 개정하고, 4등 50여 명은 모두 공도 없이 녹을 받아먹고 있으므로 삭제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이러한 실천 대안은 받아들여져 시행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전체 공신의 4분의 3에 해당되는 76명의 훈작이 삭탈 일보 직전에 놓이게 되었다.
사태가 여기에 이르자 훈구 세력들은 강하게 반발하기 시작했고, 중종도 조광조의 급진적인 개혁 정치에 염증을 내고 있던 터였다. 현실적으로 정치 원로의 자리를 굳히고 있는 공신 세력을 일거에 몰아내려고 하는 것은 자칫 조정에 엄청난 파란을 몰고올 수 있다는 판단을 한 중종은 더 이상 조광조의 급진적인 행동을 방치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중종의 이런 내면을 잘 읽고 있던 훈구 세력은 조광조를 제거하기 위한 계략을 짜고 실행하였다. 조광조를 몰아내는 데 앞장선 사람은 사림파로부터 소인배로 비난받던 남곤과 공신 자격을 박탈당한 심정, 그리고 한때 조광조의 탄핵을 받아 실권할 지경에 처했던 희빈 홍씨의 아버지 홍경주 등이었다.
이들은 경빈 박씨 등 후궁을 이용해 중종에게 '온 나라의 인심이 모두 조광조에게 돌아갔다'고 하면서 조광조가 왕권을 넘보고 있음을 피력했다. 그리고 궁중에 있는 나뭇잎에 과일즙으로 주초위왕이라고 쓰고 벌레가 그것을 갉아먹게 한 다음 궁녀를 시켜 왕에게 바치도록 하였다. 주초는 조를 분리한 글자이므로 '조씨(조광조)가 왕이 되려 한다'라는 뜻이었다. 이는 비록 미신에 불과했지만 조광조에게 염증을 느끼고 있던 중종은 몹시 불쾌해했다.
한편 홍경주와 남곤, 김전, 이장곤, 고형산, 심정 등은 밤에 은밀히 왕을 만나 조광조 일파가 붕당을 조성하여 중요한 자리를 독차지하고 임금을 속여 국정을 어지럽히고 있기에 이를 엄히 다스려야 한다는 상소를 했다. 이들의 상소가 있자 중종은 조광조를 비롯한 일단의 사림 세력을 치죄하도록 했다. 그 결과 조광조, 김정, 김구, 김식, 윤자임, 박세희, 박훈 등이 투옥되었다. 이들이 투옥되자 남곤, 홍경주 등의 훈구 세력들은 그들을 당장에 처벌해야 한다고 했으나 이장곤, 안당, 정광필 등이 반대하였고, 성균관 유생 1천여 명은 광화문에 모여 조광조 등의 무죄를 호소하였다.
치죄 결과 조광조는 능주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훈구파인 김전, 남곤, 이유청 등이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에 임명되자 곧 사사되었다. 김정, 기준, 한충, 김식 등도 귀양 갔다가 사형되거나 자결했으며, 그 밖에 김구, 박세희, 박훈, 홍언필, 이자, 유인숙 등 수십 명이 귀양길에 올랐다. 아울러 이들을 두둔한 안당과 심안국, 김정국 형제 등은 파직되었다.
이 사화가 일어난 해가 기묘년이었으므로 이를 기묘사화라 하고, 이때 희생된 조신들을 기묘명현이라고 한다. 이 사화는 1515년 폐비 신씨 복위 문제와 관련해 일어난 조신들 간의 알력이 발생한 이후, 조광조 일파가 도의론을 앞세워 사장파를 소인배로 취급하여 배타적인 태도를 보이자 감정 대립이 심해졌고 여기에다 삭훈 사건이 직접적인 원인으로 작용하여 발생한 사건이다. 그러나 기묘사화는 조광조의 급진적 개혁 정치에 위기를 느낀 훈구 세력이 지나친 도학적 요구에 염증을 느낀 중종과 모의하고 벌인 일종의 친위 쿠데타적 성격이 짙다.
대개 조광조의 왕도 정치 실패의 원인을 정치 이념의 진보성과 실현 방법의 과격성에서 찾으려고 한다. 하지만 더 본질적인 원인은 당시의 정치 체제가 왕도 정치를 실현할 만큼 성숙되지 못한 것에 있다고 보는 것이 옳다. 그것은 중종이 분명한 왕도 정치 이념에 입각한 성숙된 판단을 하지 못하고 기묘사화와 같은 친위 쿠데타를 일으켰다는 것과, 조광조의 개혁 정치가 실패로 돌아간 뒤에 오히려 성리학이 학문적으로 더 발전했다는 사실을 통해 알 수 있다.
6. 중종 시대를 풍미한 사람들
숲속의 대학자 서경덕(1489-1546)
서경덕은 지방의 하층 관리직인 수의부위로 있던 서호번의 아들이며, 자는 가구, 호는 화담이다. 그의 어머니가 공자의 사당에 들어가는 태몽을 꾸고 그를 낳았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으며, 19세 때 선교랑 이계종의 딸을 아내로 맞이했고, 평생을 은둔생활을 하며 학문을 즐기다가 5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그의 어린 시절에 대한 기록은 별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는 영특하였으나 가계가 빈곤하여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하다가 14세가 되어서야 비로서 처음으로 유학 경전인 <상서>를 접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는 어릴 때부터 대단히 사색적이었던 모양이다. 그가 (상서)를 공부할 때 서당의 훈장은 '선생도 잘 알지 못하는 것을 홀로 깊이 생각하여 15일 만에 알아내고 말았으니 너는 <상서>를 사색으로 깨우친 것이다'라는 말을 했을 정도였다. 또 어느 날 어머니가 밭에 나가 푸성귀를 좀 뜯어오라고 하자, 그는 광주리의 반도 차지 않을 정도의 푸성귀만 가지고 돌아온 적이 있었다. 어머니가 푸성귀를 제대로 뜯지 못한 연유를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새가 땅에서 날아오르는 것을 보고 하루 종일 그 이유만 생각하다가 그만 푸성귀 뜯는 일을 잊어버렸습니다.'
<화담집> 서문에 나오는 이 이야기는 그의 엉뚱한 일면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지만, 여기에서 향후 그가 전개해나가는 독특한 학문 수행 방법의 모태를 확인할 수 있다.
이 같은 그의 학문 수행 방법은 <연보>에 전해지고 있는 다음과 같은 기록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선생이 18세가 되었을 때 (대학)의 '격물치지'장을 읽다가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 눈물을 흘리면서 중얼거렸다. '학문을 하는데 먼저 격물을 하지 않는다면 책은 읽어서 어디에 써먹겠는가.' 그 뒤부터는 세상의 모든 사물들 이름을 다 쓰더니 풀을 발라 벽에 붙여놓고 날마다 그것을 하나하나 규명해내는 것을 일로 삼았다."
이 기록은 그가 얼마나 실험적이고 과학적인 인간인가를 잘 드러내고 있으며, 또한 평생을 두고 일구었던 유물론적 주기철학의 방법론이 무엇이었는지를 가르쳐주고 있다.
그는 이 같은 학습 방법과 지나친 독서와 사색 탓으로 과로에 지쳐 다시는 책을 손에 잡을 수 없을 만큼 몸을 상했고, 이 때문에 21세 때에는 어쩔 수 없이 학업을 포기하고 1년여 동안 전국의 명산을 돌아다니며 건강을 회복하는 데 주력해야만 했다.
이후 그는 31세 때 조광조에 의해 채택된 현량과에 응시하도록 수석으로 추천을 받았으나 사양하고 개성 화담에 서재를 세우고 학문 연구와 교육에만 매달렸다. 1531년 어머니의 간청으로 43세의 나이로 생원시에 응시하여 장원으로 급제하였으나 벼슬에 나가지 않았으며, 1544년 (인종 즉위년) 김안국 등이 후릉 참봉에 추천하였으나 사양하고 계속 화담에 머물렀다.
그가 이처럼 은거생활을 고집하고 있었던 것은 시대 상황과 무관하지 않았다. 그가 살았던 15세기 말에서 16세기 중엽은 사회가 심한 혼란기에 있었고, 정치적으로 사림과 훈척 세력의 대립이 극으로 치닫고 있었다.
관료와 지주 계급은 토지 겸병과 사치 행각을 일삼았고, 이로 인해 농민들은 계속해서 토지를 상실해갔다. 또한 통치 계급 내부에서도 토지와 정권을 위한 대대적인 유혈 투쟁이 전개되어 사림들이 대거 숙청되는 4대 사화가 일어난 것도 바로 서경덕이 살았던 이 50년 동안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적 불안은 결코 그를 불행으로 몰고가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는 사회에 나가지 않고 은둔을 고집한 덕분에 많은 학문적 업적을 쌓을 수 있었고, 학문 수행의 결과물인 <화담집> 같은 저작들은 조선 성리학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할 수 있었다. 게다가 만년에는 천하의 명기이자 시인인 황진이와 함께 자연을 향유하면서도 선비로서의 인격을 잃지 않는 고고한 학자로서 이름을 떨칠 수 있었다. 사람들은 그와 황진이, 박연폭포를 일러 송도삼절이라 부르기도 했다.
그는 조선의 많은 성리학자들 중에 스승이 없는 특이한 인물로, 겨우 서당에서 한문을 깨우치는 정도의 교육밖에 받지 못했다. 그의 스승은 자연과 책뿐이었다. 그 때문에 서경덕은 아주 독특하고 진귀한 학문적 업적을 일궈낼 수 있었다.
그의 학문적 요체는 물질에 대한 끊임없는 사색에 있었다. 그는 물질의 힘이 영원하다고 믿었으며, 물질의 분리는 단순이 형체의 분리이지 힘의 분리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곧 서구 물리학에서 말하는 에너지 보존의 법칙과 비교되고 있다. 그는 심지어는 죽음조차도 생물에 일시적으로 머물러 있던 기(에너지)가 우주의 기에 환원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말하자면 생사일여를 주장함으로써 우주와 인간, 우주와 만물이 둘이 아닌 하나라는 이론을 정립시켰던 것이다. 그의 이 같은 독특한 학문과 사상은 이황과 이이 같은 학자들에 의해 그 독창성을 인정받아 조선 기철학의 중심으로 자리하게 된다.
그는 1546년(명종 1년) 58세를 일기로 생을 마친 후 1575년 우의정에 추증되었으며, 1585년에는 신도비가 세워져 개성의 숭양서원, 화곡서원 등지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화담집>이 있는데, 이 책에서 '원이기', '이기설', '태허설', '귀신사생론' 등의 글을 통해 자신의 학문과 사상을 밝히고 있다.
시대를 앞선 여성 시인 황진이
황진이에 대한 확실한 생존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서경덕, 벽계수 등과 교류한 것으로 봐서 중종 때 사람인 것만은 분명하다. 본명은 진, 기명은 명월이며 개성 출신이다.
그녀의 전기에 대해서 상고할 수 있는 직접적인 사료는 없기에 간접 사료인 야사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야사에 전해지고 있는 그녀에 대한 기록은 분량은 많지만 각양각색으로 다른 이야기라 내용의 신빙성이 적은 것이 흠이다. 신비화시킨 흔적이 많고 전해 내려오면서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보태진 경우도 있어 그 허실을 가리기가 매우 어렵다.
기록들에 따르면 그녀는 황진사라는 양반과 진씨 성을 가진 현금이라는 여인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말도 있고, 맹인의 딸로 태어났다는 말도 있다. 이 두 내용 중 황진사의 서녀로 다룬 기록이 숫자적으로 더 우세하지만 그녀가 기녀로 살았다는 사실 때문에 오히려 맹인의 딸로 태어났다는 설이 더 유력시되고 있다.
그녀는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랐지만 양반집 딸 못지않게 학문을 익히고 예의범절을 배운 것으로 봐서는 물질적으로 큰 어려움이 없었던 것 같다. 여덟살 때부터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열 살 때 벌써 한문 고전을 읽어내고 한시를 지을 정도로 재능을 보였으며, 서화에도 능하고 가야금에도 뛰어났다고 한다.
이렇듯 아름답고 뛰어난 규수로 자란 그녀가 기생이 된 이유를 야사는 동네 총각 하나가 그녀를 연모하다가 상사병으로 죽은 사건 때문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인물이 출중하기로 소문난 황진이를 연모하던 순진한 한 젊은이가 그녀에게 속마음을 고백하지 못하고 혼자서 속앓이만 하다가 그만 자리에 눕게 되었다. 이를 지켜보다 못한 젊은이의 어머니가 황진이의 어머니 진씨를 찾아와 자신의 아들을 사위로 맞아달라고 간청을 하지만 진씨는 이 애원을 냉정하게 거절하고 딸에게는 일체 말하지 않았다. 이 사실을 전해 들은 젊은이는 마침내 상사병으로 죽고 말았다. 나중에서야 이 사실을 알게 된 황진이는 스스로 기생이 될 것을 결심하고 기생 교육을 받는다. 그리고 기계에 투신한 지 오래지 않아 명성을 얻게 되어 서울에까지 그녀에 대한 소문이 자자하게 되었다.
용모가 출중하고 노래, 춤, 악기, 한시 등에 두루 능했기 때문에 당시 선비들은 그녀와 하룻밤을 보내는 것을 대단한 자랑거리로 여기게 되었다. 그래서 그녀와 당대의 내노라 하는 선비들에 대한 많은 일화들이 남게 되었다.
당시 생불이라 불리던 지족선사를 10년 동안의 면벽 수도에서 파계시키는가 하면, 호기로 이름을 떨치던 벽계수라는 왕족의 콧대를 꺾어놓기도 하고, 당대 최고의 은둔학자 서경덕을 유혹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서경덕을 유혹하는 데 실패하고 오히려 그의 학문과 고고한 인품에 매료되어 사제 관계를 맺기도 한다.
그녀는 많은 선비들과 이 같은 관계를 즐기면서 전국을 유람하기도 했고, 그 가운데 수많은 시들을 남기기도 했다. <해동가요>와 <청구영언>에 '청산리 벽계수야', '동짓달 기나긴 밤을' 등 주옥 같은 시편들이 전해지고 있다.
그녀의 죽음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마흔 전후에 죽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죽기 전에 자기가 죽거든 관을 짜지 말고 개미, 까마귀, 솔개의 먹이가 되도록 해달라고 부탁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 말은 세상의 여자들에게 교훈이 되게끔 하기 위해 한 말이라고 하지만 황진이의 자유스런 삶을 생각해보면 그것이 오히려 그녀 자신의 시적 근성을 잘 표현한 것이라 여겨진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녀가 죽은 후에 개성 근처의 장단에 묻어주었다. 지금도 장단 판교리에는 황진이의 무덤이 있으며, 그녀가 살던 입우물 고개에는 약수가 나오고 있다.
7. (중종실록) 편찬 경위
<중종실록>은 총 105권 102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1506년 9월부터 1544년 11월까지 중종 재위 38년 2개월 동안의 역사적 사실을 편년체로 기록하고 있다. 원래 명칭은 <중종공희휘문소무흠인성효대왕실록>이다.
이 책의 편찬 작업은 1545년 2월 대간의 건의에 따라 실록청을 설치하고 당상과 낭관을 결정하여 착수하려 했지만 순조로운 진행을 보지 못하고, 같은 해 7월 인종이 재위 9개월 만에 죽음에 따라 중단되었다.
명종이 즉위한 후 1546년 가을에야 비로소 춘추관에 실록청을 설치하고 <인종실록>과 함께 편찬에 착수하게 되었는데 이때에도 기묘사화와 관련하여 총재관이 자신의 해임을 신청하는 바람에 어려움에 봉착했다. 실록편찬 총재관으로 임명된 우의정 정순붕이 이듬해 2월 사직할 뜻을 밝혔는데, 그 이유는 기묘사화 이후의 사실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고 시비가 그치지 않아 편찬관들 사이에 의견 대립이 심하게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다시 심연원이 총재관으로 임명되었지만 그도 오래 버티지 못하고 이기로 바뀌어야 했다.
이러한 우여곡절을 겪으며 어렵사리 편찬 작업을 진척시킨 끝에 1550년 10월에 완성을 보았고, 이듬해 3월 <인종실록>과 함께 최종 마무리 작업을 끝낸 뒤 사초의 세초와 실록 봉안이
이루어졌다.
편찬 작업에 참여한 사람은 감춘추관사 총재관을 맡았던 정순붕, 심연원, 이기 등이었고, 지춘추관사는 윤개 등 12인, 동지춘추관사는 박수량 등 25인, 편수관은 심통원 등 45인, 기주잠은 유관 등 17인, 기관사는 정순우 등 37인이었으며, 총 134인이 편찬 작업에 참여했다.
그러나 <중종실록>은 완성 이후에도 사실의 공정성을 의심받았기 때문에 <연려실기술>에서는 기묘사화에 대한 기록이 당시의 실상과 많은 차이가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왜냐하면 기묘사화 때 사관들이 비밀 정사에 전혀 입시하지 못하여 훈구 세력들에 의해 사실이 왜곡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중종 이후의 일반적인 견해였기 때문이다.
#중종 시대의 세계 약사
중종 시대의 유럽은 1517년 독일의 마르틴 루터가 로마교회의 면죄부 판매에 항의하며 95개조 항조문을 발표하면서 종교혁명이 본격화되었고, 이 때문에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서유럽은 종교전쟁에 시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종교개혁의 영향을 적게 받은 스페인, 포르투칼 등은 남아메리카, 인도, 인도네시아 등을 침략하여 제국주의 시대를 열고 있었다.
이 시기에 폴란드의 코페르니쿠스는 지동설(1543년)을 주장했으며, 마젤란은 세계일주 여행을 떠나고, 스페인의 로욜라는 예수회를 창립해 반종교개혁을 일으킨다. 한편 영국의 토마스 모어는 <유토피아>를 발표하고, 네델란드의 에라스무스는 <우신예찬>을 편찬했다.
#제11대 중종의 가계도
성종과 정현왕후 윤씨의 차남으로 태어난 중종(진성대군, 1488-1544)의 재위 기간은 1506. 9-1544. 11까지 38년 2개월이며 부인 10명과 자녀 9남 11녀가 있다
첫 번째 부인 단경왕후 신씨와의 사이에서는 자식이 없었으며 두 번째 부인 장경왕후 윤씨와의 사이에 1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제12대 인종이고 딸은 효혜공주이다. 세 번째 부인 문정왕후 윤씨와의 사이에서는 1남 4녀를 낳았으며 아들은 제13대 명종(경원대군)이며, 의혜공주, 효순공주, 경현공주, 인순공주가 있었다. 네 번째 부인 경빈 박씨와의 사이에는 1남 2녀가 있었으며 아들은 복성군, 딸은 혜순옹주, 혜정옹주이다. 다섯 번째 부인 희빈 홍씨와는 2남이 있으며 첫째는 금원군, 둘째는 봉성군이다. 여섯번째 부인 창빈 안씨와는 2남 1녀이며 영양군 덕흥대원군(선조 아버지), 정신옹주이다. 일곱 번째 부인 숙의 홍씨와의 사이에 해안군이 있고, 여덟 번째 부인 숙의 이씨와은 덕양군이 있다. 아홉 번째 부인 숙원 이씨와의 사이에는 2녀가 있는데 첫째가 정순옹주, 둘째가 효정옹주이다. 열 번째 부인 숙원 김씨와의 사이에 숙정옹주가 있다.
제12대 인종실록
1. 인종의 짧은 치세(1515-1545. 재위 기간 1544년 11월-1545년 7월. 윤정월 포함해 9개월간)
인종은 조선의 역대 왕들 가운데 가장 짧은 치세를 남긴 왕이다. 8개월 보름 남짓 왕위에 머물러 있다가 원인 모를 병으로 드러누워 시름시름 앓더니 후사도 하나 남겨놓지 않고 훌쩍 세상을 떠나버렸다. 하지만 당시 사람들은 그를 성군이라 일컬었다. 지극한 효성과 너그러운 성품, 금욕적인 생활 등이 전형적인 선비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인종은 1515년 중종과 장경왕후의 맏아들로 태어났으며 이름은 호, 자는 천윤이다. 1520년 여섯 살의 어린 나이로 세자에 책봉되어 무려 25년간이나 세자로 머물러 있다가 1544년 중종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그는 성품이 조용하고 효심이 깊으며 형제간의 우애가 돈독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또한 3세 때부터 글을 읽을 정도로 총명하여 1522년 여덟 살의 나이로 성균관에 들어가 매일 세 차례씩 글을 읽었다.
게다가 철저한 금욕 생활을 추구했던 듯 동궁에 머물 당시에는 옷을 화려하게 입은 궁녀는 모두 내쫓았으며, 일체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았다 한다. 이는 그가 도학 사상에 깊이 매료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의 이러한 성품은 계모 문정왕후의 표독하고 사악한 성격을 방치하는 요소로 작용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생명을 단축시키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생모 장경왕후 윤씨가 그를 낳고 7일 만에 죽었기 때문에 그는 문정왕후 윤씨의 손에서 자라야 했다. 그런데 문정왕후 윤씨는 성질이 고약하고 시기심이 많은 여자였기 때문에 전실 부인의 아들인 인종을 무척이나 괴롭혔다.
야사에 따르면 윤씨는 몇 번이나 인종을 죽이려 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인종이 세자로 있을 때 그와 빈궁이 잠들어 있는데 주위에서 뜨거운 열기가 번져 일어나보니 동궁이 불에 타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당황하지 않고 빈궁을 깨워 먼저 나가라고 했다. 그리고 자신은 조용히 앉아서 타 죽겠다고 했다고 한다. 그가 그렇게 말한 것은 불을 누가 지른 것인지 알았기 때문이다. 문정왕후는 이미 몇 번에 걸쳐 그를 죽이려 했는데 그때마다 요행히도 그는 죽음을 면하곤 했다. 비록 계모이긴 하나 어머니인 문정왕후가 자신을 그토록 죽이려고 하니 자식된 도리로 죽어주는 것이 효를 행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그는 조용히 불에 타 죽겠다고 작정한 것이다. 세자의 말을 들은 빈궁은 자신 혼자는 절대 나갈 수 없다고 하면서 자리를 지켰다. 그래서 두 사람 모두 졸지에 화형을 당할 지경에 처했는데, 그때 밖에서 다급하게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세자를 애타게 부르는 중종의 목소리였다. 인종은 그 소리를 듣고 죽는 것이 문정왕후에겐 효행이 되나 부왕에겐 불효이자 불충이라고 말하면서 빈궁과 함께 불길을 헤쳐나왔다고 한다.
이 불은 누군가가 꼬리에 화선을 단 여러 마리의 쥐를 동궁으로 들여보내 지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불을 지른 장본인이야 구태여 따져보지 않아도 알만한 일이었다. 하지만 인종은 범인을 뻔히 알면서도 입을 굳게 다물었고, 그래서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이 사건은 유야무야 없던 일로 처리되고 말았다.
이렇게 몇 차례 죽음의 위험을 겪어내면서 인종이 왕위에 올랐을 때는 그의 나이 이미 30세였다. 그는 즉위하자 곧 조광조를 비롯한 기묘사화 때 피해를 입은 사림 세력들을 신원하고 현량과도 복구시켰다. 그리고 그간 자신이 익히고 배운 도학 사상을 현실 정치에 응용하려는 의도에서 다시 사림들을 등용시키기 시작했다. 그래서 정계에 진출한 사람이 이언적, 유관 등 사림의 대학자들이었다.
하지만 인종은 미처 뜻을 펼쳐보지도 못하고 재위 9개월 만인 1545년 7월에 31세의 짧은 일기로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인종이 그렇게 빨리 죽은 것은 문정왕후 윤씨의 시기심 때문이라고 한다. 인종은 계모이긴 하지만 자신을 키워준 어머니인 문정왕후에게 효도를 다하기 위해 극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윤씨는 항상 인종을 원수 대하듯 했고, 문안 인사차 들른 인종에게 자신과 아들 경원대군 (명종)을 언제쯤 죽일 것이냐고 말할 정도로 막말을 해댔다고 한다. 그러나 인종은 그녀를 미워하거나 싫어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효성이 부족함을 개탄하면서 죄책감에 시달리며 지냈다. 그리고 문정왕후의 뜻에 부합하기 위해 심지어는 자신의 이복동생이자 문정왕후의 아들인 경원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기 위해 자식을 두지도 않았다고 전해진다.
인종이 앓아누워 죽게 된 것도 문정왕후가 내놓은 독이 든 떡이 그 원인이라고 야사는 전하고 있다. 어느 날 인종이 문안 인사차 대비전을 찾아갔는데, 그날따라 문정왕후는 평소와 다르게 입가에 웃음을 흘리며 인종을 반기는 것이었다. 그리고 왕에게 떡을 대접했다. 인종은 난생처음 계모가 자신을 반기는 것을 보고 기분이 좋아 아무 의심 없이 그 떡을 먹었다. 그런데 그 이후로 인종은 갑자기 시름시름 앓기 시작하더니 얼마 못 가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사실 여부에 관계없이 이 야사가 시사하는 것은 문정왕후의 인종에 대한 멸시와 시기가 얼마나 극악하였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문정왕후의 극악스러움이 먹혀들었던 것은 인종이 너무나 유약하고 선하기만 했기 때문일 것이다.
능은 경기도 고양시 원당동에 있으며, 그의 효행을 기리는 뜻으로 능호는 효릉이라 했다.
인종은 인성왕후 박씨와 귀인 정씨 두 명의 부인을 두었다. 인성왕후 박씨는 금성부원군 박용의 딸로 1514년에 태어났다. 1524년 11세의 나이로 세자빈에 책봉되었으며, 1544년 인종이 즉위하자 왕비가 되었다. 슬하에 자녀는 없었으며 인종이 죽은 후에도 32년을 더 살다가 1577년 6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죽은 후 인종과 함께 효릉에 묻혔다. 귀인 정씨는 정유침의 딸이며, 정철의 큰 누이다. 소생은 없었으며 생몰연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다.
#제12대 인종의 가계도
중종의 두번째 부인 장경왕후의 장남으로 인성왕후 박씨와 귀인 정씨가 인종의 부인이며 슬하에 자식은 없었다. (1515-1545) 재위 기간은 1544.11-1545년 7월로 윤정월 포함하여 9개월 이었다.
2. (인종실록) 편찬 경위
(인종실록)은 2권 1책으로 구성되었으며 1544년 11월부터 1545년 7월까지 9개월간의 역사적 사실을 편년체로 기록하고 있다.
인종이 죽은 뒤 일어난 을사사화로 인해 그의 외가, 처가 및 가까운 신하들이 큰 희생과 탄압을 겪어야 했기에 (인종실록)은 편찬 계획조차 수립되지 않았다. 다만 1546년 (중종실록) 편찬에 부수되어 4년 후에 겨우 완성을 보았다. 이 때문에 편찬에 참여한 인물은 모두 (중종실록)의 편찬자들이다. 또한 즉위년의 11월, 12월 기사가 (중종실록)에 실려 있어 (인종실록)에는 고작 7개월간의 역사가 실려 있을 뿐이다.
제13대 명종실록
1. 눈물의 왕 명종의 등극과 끝없는 혼란(1534-1567, 재위 기간 1545년 7월-1567년 6월, 22년)
인종이 죽자 12세밖에 안 된 경원대군이 왕위를 이었다. 그는 비록 나이는 어렸지만 학문을 좋아하고 총명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모후 문정왕후의 극악스러움에 눌려 평생 눈물로 왕위를 지켜야 했다.
명종은 중종의 두 번째 계비 문정왕후 윤씨의 아들이다. 이름은 환, 자는 대양이며 태어나자마자 경원군에 봉해졌다. 이후 인종이 즉위하자 1544년 경원대군에 봉해졌으며, 이듬해 인종이 재위 9개월 만에 병사하자 왕위를 이었다. 문정왕후는 원래 자녀를 5명 낳았으나 그중에 아들은 명종 하나뿐이었다. 그것도 35세라는 늦은 나이에 어렵게 얻은 아들이었다. 그녀가 명종을 낳았을 때 중종의 첫 번째 계비 장경왕후의 아들 인종의 나이는 이미 20세였다. 때문에 명종이 왕이 될 수 있는 확률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인종에게는 후사가 없었으므로 만약 인종이 그대로 죽게 된다면 명종의 왕위 계승이 가능한 상황이었다. 문정왕후는 그런 결과를 노리고 있었고, 마침내 그것은 이루어졌다.
명종은 12세라는 어린 나이에 즉위했기 때문에 8년 동안 모후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을 받아야 했다.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으로 왕권을 대신하게 되자 조정의 대세는 윤원형 일파에게 돌아갔다. 윤원형은 문정왕후의 친동생으로 1537년 (중종 32년) 김안로가 실각한 뒤 등용된 인물이었다. 그는 중종 시대부터 장경왕후의 오빠 윤임 일파와 왕위 계승권을 둘러싸고 치열한 권력 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세간에서는 이들을 가리켜 윤임 일파를 대윤, 윤원형 일파를 소윤이라고 했다.
인종 즉위 당시에는 한때 대윤파가 득세하여 이언적 등 사림 세력을 등용하여 기세를 떨쳤으나, 명종이 즉위하고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자 사태는 반전되었다. 윤원형은 명종이 즉위하자마자 곧바로 윤임 세력의 제거 작업에 착수했다. 윤원형은 윤임이 중종의 여덟째아들 봉성군에게 왕위를 옮기려 했다고 무고하는 한편, 인종이 죽을 당시에는 윤임이 성종의 셋째아들 계성군을 옹립하려 했다는 소문을 퍼뜨리게 했다. 그리고 이를 구실 삼아 문정왕후에게 이들의 숙청을 강청하여 윤임, 유관, 유인숙 등을 사사케하고, 이들의 일가와 그 일파인 사림 세력들을 유배시켰다. 명종 즉위년인 1545년에 일어난 이 사건이 을사사화이다.
을사사화로 조정을 장악한 윤원형은 미처 제거하지 못한 정적들을 제거하기 위해 다시 '양재역 벽서 사건'을 일으킨다. 이 사건으로 윤원형을 탄핵하여 삭직시킨 바 있는 송인수, 윤임 집안과 혼인 관계에 있던 이약수 등이 사사되고, 이언적, 백인걸 등 사림 세력 20여 명은 유배되었다. 또한 윤원형은 자신의 애첩 정난정을 궁중에 들여보내 중종의 아들 봉성군을 역모와 연루되었다고 무고하여 사사시키고 사건 조사 과정에서도 많은 인물들을 희생시켰다.
윤원형 일파가 이렇게 정적들을 모두 제거하고 조정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자 이른바 '외척 전횡 시대'가 도래했고, 이때부터 명종은 그들의 횡포에 시달리며 눈물로 세월을 보내야 했다.
윤원형은 막상 권력을 독점하게 되자 그동안 자신에게 불만을 토로하던 친형 윤원로를 유배시켜 사사시키는가 하면, 자신의 애첩 정난정과 공모하여 정실부인 김씨를 독살하고 노비 출신인 그녀를 정경부인의 자리에 올려놓았다.
또한 정난정은 윤원형의 권세를 배경으로 상권을 완전히 장악하여 전매, 모리 행위로 부를 축적하였다. 이 때문에 윤원형의 집에는 뇌물이 폭주하여, 한성 내에 집이 15채나 됐으며 남의 노예와 전작을 빼앗은 것은 이루 헤아릴 수도 없었고, 죽고 사는 것이 그의 손에 달렸다는 말이 오갈 지경이었다. 당시 권력을 탐했던 조신들은 정난정의 자녀들과 다투어 혼인줄을 놓았다고 전해진다. 또한 정난정은 봉은사의 승려 보우를 문정왕후에게 소개시켜 병조판서직에 오르게 하였는데, 이 때문에 일시적으로 불교가 융성하기도 했다.
윤원형의 이런 세도가 명종이 친정을 한 이후에도 계속되자,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명종은 드디어 윤원형을 견제하기 위해 친위 세력을 형성하려 했다. 명종이 윤원형을 견제하기 위해 중용한 인물은 이량이었다.
이량은 명종의 비 인순왕후 심씨의 외숙이었다. 하지만 이량 역시 청렴한 인물은 아니었다. 명종이 자신을 신임하자 그는 이감, 신사헌, 권신, 윤백헌 등과 결당하여 세력을 기르고 정치를 농단하기 시작했다. 한때는 자기 편인 김명윤을 재상으로 삼아 자신의 세력을 키우고자 우의정 이준경의 사직을 간언하기도 했다. 게다가 축재에도 열을 올려 그의 집앞은 항상 시장처럼 사람들이 들끓었다고 한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그를 윤원형, 심통원 등과 함께 '조선의 3흉'이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호랑이를 내쫓으려다 호랑이 한 마리를 더 키운 격이 된 명종은 그를 한때 평안도 관찰사로 내쫓기도 했다. 하지만 윤원형의 극심한 권력 독점을 염려한 나머지 1562년 다시 이조참판에 제수하여 중앙으로 불러들였다. 그러자 이량은 한층 더 세도를 부리기 시작했고, 예조, 공조판서를 거쳐 이조판서가 된 뒤에 그의 권력 남용은 극에 달했다.
이량의 부정부패가 극에 달하자 사림 세력들은 그를 탄핵하기 시작했지만 그는 오히려 기대승, 허엽, 윤근수 등의 사림 세력을 제거할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하지만 이 음모가 그의 조카 심의겸에게 발각되어 사화를 획책했다는 죄목으로 삭탈관직되었다. 이때가 1563년이었다.
이처럼 권신들의 횡포에 시달리고 있는 명종에게 설상가상으로 문정왕후는 툭하면 떼를 쓰며 왕을 괴롭혔다. 문정왕후는 자신이 원하는 일을 종이에 적어 보냈다가 그것이 수용되지 않으면 왕을 불러 면상에다 대고 반말로 욕을 해대는가 하면 심지어는 말을 듣지 않는다고 왕의 종아리를 때리거나 뺨을 때리기도 했다.
문정왕후는 독실한 불교 신봉자였던 듯 봉은사 승려 보우를 병조판서에 앉히는 등 해괴한 인사를 행하기도 했고, 선종과 교종을 모두 부활시키고 승과를 부활하는 한편 보우를 도선사 주지로 삼고 도대선사에 올려놓기도 했다.
왕의 권위는 이처럼 땅에 떨어지고 조정 대신들은 권력을 독점하며 사리사욕을 채우기에 급급해 있었기에 자연히 사회는 어수선하고, 민심은 병들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흉년이 계속되고 있었다. 당시 민간의 태반이 굶주림에 시달려야 했고, 나라 구석구석마다 도적떼가 난립하였다.
특히 양주의 백정 출신 임꺽정은 이들 도적떼의 두령들을 끌어모아 관군을 괴롭혔고, 그 때문에 관리들은 그를 잡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임꺽정 무리의 활동은 황해도, 경기도 등 전국 5도를 누비며 1559년부터 1562년까지 무려 3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하지만 그는 백성들 사이에서 의적으로 통하고 있었기에 그를 잡으러 다니는 관군이 오히려 민간의 원흉으로 취급되는 양상을 띠고 있었다.
사회가 이렇듯 혼란스러운 지경에 이르자 자연 국방이 허술해졌고, 그 틈을 타서 왜구가 기승을 부렸다. 중종 시대의 삼포왜란 이래 세견선의 감소로 곤란을 당해오던 왜인들은 1555년 배 70여 척을 이끌고 전라도에 침입하여 한때 전라도 일부를 점령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그들은 결국 이준경, 이경석, 남치훈 등이 이끄는 군사에 의하여 격퇴되었지만 을묘왜변으로 불리는 이 사건으로 민간은 막대한 피해를 입어야 했다. 그래서 조선 조정은 중종 때 임시로 설치된 비변사를 상설 기구화하고 외침에 대비하는 방안을 마련하도록 했다.
이 같은 조선 혼란의 근본 원인은 문정왕후에게 있었다. 그녀는 '여왕'으로 불리울 정도로 왕권을 마음대로 쥐고 흔들었다. 자신의 권력을 이용하여 친정 동생 윤원형의 폭압적인 권력 독점과 남용을 후원하고 있었고, 유교 사회를 표방하고 있는 조선에서 승복을 입은 승려를 병조판서에 올릴 정도로 정사를 개인적인 감정으로 처리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녀가 죽기 전에는 조선 사회가 제 위치를 찾을 가망은 전혀 없었다. 때문에 명종을 포함해 대부분의 신하들과 백성들은 그녀가 죽기만을 학수고대하고 있는 상태였고, 마침내 1565년 그녀가 죽자 조선은 급속도로 평화를 되찾기 시작했다.
그녀가 죽자 가장 먼저 철퇴를 맞은 것은 승려 보우와 윤원형 일파였다. 승려 보우는 유림들의 탄핵을 받아 병조판서에서 밀려나고, 다시 승직을 박탈당해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죽었으며, 윤원형 역시 그의 애첩 정난정과 함께 강음에 유배되었다가 자살하였다.
문정왕후와 윤원형 일파가 사라지자 명종은 인재를 고르게 등용하고 선정을 펴는 데 주력하였다. 그러자 조정은 안정되고 사회도 점차 질서를 되찾아갔다. 하지만 명종은 그 동안 너무 국정에 시달린 탓인지 병을 얻고 말아 문정왕후가 죽은 2년 뒤에 세상을 떠났다. 이때 명종의 나이 불과 34세밖에 되지 않았다.
명종은 인순왕후 심씨에게서 순회세자를 얻었으나 그는 13세의 어린 나이에 죽고 말았다. 때문에 후사를 하나도 남기지 못한 채 죽어 왕위는 중종의 아홉째 아들 덕흥군의 셋째아들 하성군이 이어받았다. 하성군의 즉위로 조선은 후궁에게서 태어난 서얼 출신인 방계 혈족이 왕위를 잇는 상황에 처해졌고, 이 때문에 이후부터 왕의 권위는 한층 떨어지게 되었다.
명종의 능호는 강릉이며 현재 노원구 공릉동에 있다.
2. 명종의 가족들
명종은 부인이 인순왕후 1명뿐이다. 게다가 자식도 순회세자 하나뿐이었는데 그마저도 13세에 요절하여 결국 후사를 잇지 못했다.
인순왕후 심씨(1532-1575)
인순왕후 심씨는 청릉부원군 심강의 딸로 1532년에 태어나 14세 나던 1545년, 왕비로 책봉되었다.
1551년 순회세자를 낳았으나 그는 13세의 나이로 요절했고, 더 이상 후사를 이을 왕자를 낳지 못했다. 이후 1567년 명종이 죽자 대비가 되어 16세 된 선조를 대신해 수렴청정을 하였다. 하지만 1568년 선조에게 친정을 시키고 물러났으며, 1575년 4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죽은 후 명종의 능인 강릉에 묻혔다.
순회세자(1551-1563)
순회세자는 1551년 명종과 인순왕후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이름은 부, 아명은 곤령이다. 1557년 일곱 살의 나이로 세자에 책봉되었으며, 윤원형의 추천으로 참봉 황대임의 딸과 혼담이 오갔으나, 그녀가 병약하여 1년이 넘게 가례를 미루자 1559년 호군 윤옥의 딸로 세자빈이 교체되어 가례를 올렸다.
그러나 순회세자는 가례를 올린 지 얼마 되지 않아 후사도 잇지 못하고 1563년 13세의 어린 나이로 세상을 떴다. 이 때문에 명종의 대를 이어 중종의 서손자 하성군이 대통을 이어야 했다.
#제13대 명종 가계도
중종과 문정왕후의 차남으로 제13대 왕이 되었다. 경원대군이며 1534년에 태어나 1567년에 3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재위 기간은 1545년 7월부터 1567년 6월까지 22년이며 부인은 1명에 자녀는 1남만 있었다. 부인은 인순왕후 심씨이고 아들은 순회세자인데 순회세자는 13세의 나이로 요절을 했다.
3. 명종 시대의 주요 사건들
을사사화
을사사화는 무오, 갑자, 기묘사화와 더불어 조선 4대 사화 중 하나로 1545년 (명종 즉위년) 왕실의 외척인 대윤 윤임과 소윤 윤원형의 반목으로 일어나, 소윤이 대윤을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한 사건이다.
기묘사화 이후 사림이 정계 전면에서 후퇴하자 심정, 이항 등의 세력과 김안로 세력이 치열한 권력 다툼을 일으켰다. 이때 김안로는 심정의 탄핵으로 귀양을 갔으나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들과 내통하여, 심정 일파가 유배 중이던 경빈 박씨를 왕비로 책립할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탄핵하여 그들을 사형시키고 다시 정계에 복귀했다.
정권 장악에 성공한 김안로 일파는 반대파를 몰아내고 허황, 채무택 등과 결탁하여 권세를 부렸으며 뜻에 맞지 않는 사람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몰아내겠다고 위협해 조정을 공포에 떨게 했다. 이들은 문정왕후를 몰아내려고 음모를 꾸미다 문정왕후의 숙부 윤안임의 밀고로 발각되어 유배된 뒤 사사되었다. 이때 허황, 채무택 등도 함께 처형되었는데 이들 셋을 정유삼흉이라 했다.
김안로가 실각한 뒤 정권 쟁탈전은 권신에서 척신으로 넘어갔다. 이들 척신들의 세력 다툼은 먼저 세자 책봉 과정에서 발생했다.
중종에게는 왕비가 3명 있었는데, 정비 신씨는 중종 즉위 직후 간신의 딸이라 하여 후사 없이 폐위되었고, 첫째 계비 장경왕후 윤씨는 세자 호(인종)를 낳고 7일 만에 죽었다. 그 뒤 왕비 책봉 문제로 조신 간에 일대 논란이 벌어졌는데 그 결과 1517년 윤지임의 딸이 두 번째 계비로 책봉되었다. 그녀가 곧 문정왕후로 경원대군(명종)의 어머니였다.
문정왕후가 경원대군을 낳자 그녀의 친형제인 윤원로, 윤원형은 경원대군을 세자로 책봉할 계략을 세웠다. 하지만 세자의 외숙 윤임이 이를 저지해 그들은 뜻을 이루지 못했다. 여기서부터 윤임(대윤)과 윤원형(소윤)의 대립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때문에 조신들 또한 각각 대윤파와 소윤파로 갈라지게 됐는데, 이 양세력의 다툼은 날로 심해져 극단적인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중종이 죽고 인종이 즉위하자 인종의 외척인 대윤파가 득세하기 시작했다. 윤임의 주변 세력은 대개 이언적 등의 사림파가 많았던 관계로 인종 재위 시에는 다시 사림파가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인종은 즉위 9개월 만에 세상을 떴으며, 12세밖에 안 된 명종이 왕위를 이어받았다. 명종은 나이가 어린 탓에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을 받아야 했고, 때문에 조정의 권력은 자연히 소윤파에게 돌아갔다.
소윤파는 윤임 등이 역모를 획책하고 있다고 무고하여 대윤파를 궁지로 몰아넣어 제거하는 데 성공한다. 이 결과 윤임 및 그 일파인 유관, 유인숙 등을 비롯하여 계림군, 김명윤, 이덕응, 이휘, 나숙, 나식, 정희등, 박광우, 곽순, 이중열, 이문건 등이 처형되었다. 이때의 사건을 흔히 을사사화라 하는데 그것은 윤임 일파에 사림 세력이 몰려 있다가 한꺼번에 참변을 당했기 때문이다.
윤원형은 이 사건으로 정권을 장악한 뒤에도 나머지 사림 세력과 윤임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양재역 벽서 사건'을 기화로 다시 정미사화를 일으켜 조정을 완전히 장악하기에 이른다.
그 후 윤원형은 문정왕후가 죽는 1565년까지 약 20년 동안 왕권을 능가하는 권세를 부리며 온갖 학정을 자행하게 된다.
양재역 벽서 사건
양재역 벽서 사건은 을사사화의 2년 뒤인 1547년에 일어난 것으로 윤원형 세력이 윤임파의 잔당과 사림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고의적으로 정치 쟁점화 했던 정적 숙청 사건이다.
1547년 9월에 부제학 정언각과 선전관 이로가 경기도 과천의 양재역에서 '위로는 여왕, 아래로는 간신 이기가 권력을 휘두르니 나라가 곧 망할 것'이라는 익명의 벽서를 발견하여 임금에게 보고했다. 윤원형 일파는 이 사건이 윤임파에 대한 처벌이 미흡해서 생긴 사건이라고 주장하며 그 잔당 세력을 척결할 것을 간언헀다.
이 말을 들은 문정왕후는 명종으로 하여금 윤임의 잔당 세력과 정적들을 제거하도록 한다. 그 결과 한때 윤원형을 탄핵하여 삭직케 했던 송인수와 윤임과 혼인 관계에 있던 이약수를 사사하고, 이언적, 정자, 노수신, 정황, 유희춘, 백인걸, 김만상, 권응정, 권응창, 이천계 등 20여 명은 유배되었다. 그중에는 특히 사림계 인물이 많았다. 또한 중종의 아들인 봉성군 완도 역모의 빌미가 된다는 이유로 사사되었으며, 그 밖에도 애매한 이유로 많은 인물들이 희생되어야 했다. 그러나 1565년 문정왕후가 죽고 소윤 일파가 몰락하자 이때 희생되었던 사람들은 모두 신원되었으며, 이 사건 자체도 소윤 일파의 무고로 처리되어 노수신, 유희춘, 백인걸 등 유배되었던 사람들이 다시 등용되었다.
이 사건은 사실 익명으로 쓰여진 벽보를 소윤 일파가 정치적으로 이용한 것에 불과한 일이었다. 그다지 대단치도 않는 일을 소윤 일파가 정치적 목적을 이루기 위해 고의로 확대시킨 사건이었다.
임꺽정의 난
임꺽정은 사회가 혼탁하고 민심이 흉흉하여 도적이 들끓던 명종 시대의 대표적인 도적 두목으로 백성들 사이에서 의적으로 통하던 인물이다. 양주의 백정 출신인 임꺽정의 출생에 대한 기록은 별로 남아 있지 않다. 다만 힘이 장사인 데다가 날쌔고 용맹스러우며 당시의 양반 중심 사회에 불만이 많았던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다.
임꺽정이 출몰하기 시작하던 1559년은 척족 윤원형의 일파와 이량 일파가 발호하여 온 나라가 그들의 세도에 눌려 있었고, 반대로 왕의 권위는 땅에 떨어져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니 사회는 온통 부정과 부패로 얼룩질 수밖에 없었고, 민간은 학정과 수탈에 시달리며 고통을 호소해야 했다. 거기에다 설상가상으로 몇 년째 흉년이 계속되어 거지가 늘어나고 도적 떼가 할거하였으며, 남쪽에는 왜구가 침입하여 민가를 불지르고 약탈을 자행하였다. 그야말로 조선 사회는 아수라장이나 다름없었다.
임꺽정은 이 아수라장을 이용해 자신의 처지를 타개하려는 인물 중의 한 사람이었다. 처음에 그는 도당 몇 명과 함께 민가를 돌아다니며 도둑질을 일삼았다. 그러다가 세력이 커지자 황해도로 진출하여 구월산 등에 본거지를 두고 주변 고을을 노략질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경기도와 황해도 일대의 관아를 습격하여 창고를 털어 백성에게 나눠주는 의적으로 둔갑했다.
이러한 의적 행각은 백성과 아전들의 호응을 얻어, 백성들이 관아를 기피하고 오히려 임꺽정 무리와 결탁하는 양상이 벌어졌다. 이 때문에 관아에서 그를 잡으려고 병력을 동원하면 백성들은 그들을 숨겨주거나 달아나도록 도와주었다. 일이 여기에 이르자 조정에서 선전관을 보내어 그들을 정탐하게 했는데, 되레 선전관이 그들에게 잡혀 죽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때부터 조정은 임꺽정을 잡기에 혈안이 되었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관아에서는 임꺽정이 도적의 괴수라는 사실조차도 파악하지 못한 단계였다. 그러는 가운데 임꺽정 무리는 개성에 나타나기도 했으며, 1560년에는 마침내 서울에까지 출몰하였다.
1560년 8월 임꺽정 무리를 쫓던 관원들은 그의 아내를 잡는 데 성공하여 그녀를 형조 소속의 종으로 삼게 하였다. 그리고 이 해 10월에 들어서는 서울로 진입하는 길을 봉쇄하고 삼엄한 경비를 펼쳤다.
그러나 이들 도적 무리는 봉산에 중심 소굴을 두고 평안도의 성천, 양덕, 맹산과 강원도의 이천 등지에 출몰하여 더욱 극성을 떨었다. 이들은 황해도에서 빼앗은 재물을 개성에 가서 팔기도 하고, 서울에도 근거지를 마련하고 약탈을 일삼았다. 이 때문에 황해도 일대는 길이 막히는 지경이 되고 말았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전 병력이 임꺽정 무리를 잡기 위해 나섰다. 이 해 12월에는 엄가이라는 도둑 두목이 잡혔는데, 그는 임꺽정의 참모인 서림이라는 자였다. 관아는 서림의 입을 통하여 임꺽정 일당이 장수원에 모여 있으면서 전옥서를 파괴하고 임꺽정의 아내를 구출할 계획을 짜고 있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그리고 그들이 평산 남면에 모여 자신들을 여러 번 잡아 그 공으로 영전한 봉산군수 이흠례를 죽일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이에 조정에서는 평산부와 봉산군의 군사 500명을 모아 평산 마산리로 진격시켰다. 그러나 관군은 오히려 그들에게 패하여 후퇴하였고 부장 연천령이 죽고 군마를 모두 빼앗기고 말았다.
사건이 이렇게 커지자 임금이 직접 황해도, 경기도, 평안도, 강원도, 함경도 등 각 도에 대장 한 명씩을 정해 책임지고 도둑을 잡으라는 엄명을 내렸다. 이 무렵 서흥부사 신상보가 도둑 무리의 처자 몇 명을 잡아 서흥 감옥에 가두었는데, 한낮에 도둑떼가 들이닥쳐 옥사를 깨고 그들의 처자를 구출해간 사건이 발생했다. 그러자 관군은 본격적으로 도적 소탕 작전에 돌입하여 그해 12월에 황해도 순경사 이사증이 임꺽정을 잡았다는 보고를 했다. 하지만 그가 잡은 사람은 임꺽정이 아니라 그의 형인 가도치였다. 그래서 이사증은 이 허위 보고에 책임을 지고 파직당해 옥에 갇히기까지 했다.
이와 같이 5도의 군졸들이 모두 임꺽정을 잡기 위해 나섰지만 번번이 실패하였다. 1561년 9월 평안도 관찰사 이량은 의주 목사 이수철이 임꺽정을 잡았다고 보고했으나 그들은 임꺽정을 가장한 가짜였다. 이 때문에 이수철은 허위 보고로 파직당했다.
그해 10월에 임꺽정 무리에 의해 해주의 민가 30호가 불타는 화재 사건이 발생했고, 이때부터 관군들은 서림을 앞세워 임꺽정을 체포하기 위해 나섰는데 수상해 보이면 무조건 체포하여 옥에 가두고 구타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서울은 온종일 호곡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모든 관청은 일을 중단하고 임꺽정을 색출하는 작업에 투입되었고, 5도의 전 시장들을 휴업하게 하였다. 또한 황해도에서는 양민들이 도둑에 가담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전세를 전부 탕감시켜주었으며, 평안도에서는 전세의 절반을 깎아주기도 했다.
이렇게 소란이 심화되자 군민은 피로에 지치고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그래서 조정에서는 토벌 대장인 토포사를 다시 서울로 올라오게 하고 임꺽정 무리를 잡는 일은 평안도, 황해도의 병사와 감사가 맡게 하였다.
그 후 1562년 정월, 군관 곽순수와 홍언성이 임꺽정을 체포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이번에는 진짜 임꺽정이었다. (기재잡기)는 임꺽정이 잡힐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민가에 숨어 있던 임꺽정은 주인 노파를 위협하여 '도둑이야'라고 소리치게 한 다음 자신이 뛰쳐나가 도둑이 달아났다고 소리쳤다. 이 말을 믿고 관졸들이 임꺽정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몰려가자 그는 군졸들의 말을 뺏어 타고 달아났다. 그때 서림이 저 사람이 임꺽정이라고 소리쳐 끝내 상처를 입고 생포당하고 말았다."
임꺽정은 조정에서 체포령을 내린 지 3년 만에 붙잡혔고, 체포된 지 15일 만에 처형당했다.
명종실록은 임꺽정 무리에 대해 '그들이 도둑이 된 것은 왕정의 잘못이지 그들의 죄가 아니다'라고 쓰고 있다.
이 기록은 당시의 사람들이 임꺽정을 단순한 도적 괴수로 생각하지 않고 민심을 대변하는 의로운 사람으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의적으로 추앙했으며, 무수한 설화와 소설로 그의 행적을 그리기도 했다.
하지만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임꺽정을 가리켜 앞 시대의 홍길동과 후세의 장길산과 더불어 조선의 3대 도둑이라고 했다.
임꺽정은 평민과 몰락한 양반들에게는 의인으로, 그리고 양반들에게는 도적으로 평가되었다. 어쨌든 그의 도적 행위가 단순히 자기 자신의 사리사욕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또한 그의 활동이 3년 동안이나 조선의 행정을 마비시킬 정도였다는 점에서 '임꺽정의 난'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었다.
을묘왜변
을묘왜변은 1555년에 일어난 사건으로 왜구가 전라남도의 강진, 진도 일대에 침입하여 약탈과 노략질을 통해 민간에 엄청난 피해와 고통을 준 사건이다.
이 사건은 조선과 일본의 원활하지 못한 외교 관계와 일본 내의 혼란으로 말미암아 발생했다.
당시의 조,일 관계에서 보면 1544년 사량진 왜변으로 조선에서는 왜인의 내왕을 금지시킨 바 있었지만, 대마도주의 사죄와 통교 재개 허용을 바라는 간청을 받아들여 1547년 정미약조를 맺고 왜인들의 통교를 허용하였다. 하지만 정미약조는 왜인들에 대한 통제가 강화된 내용을 담고 있었다. 때문에 왜인들은 조선과의 무역에서 여러 가지 규제를 받게 되었고, 거기에다 일본 전역이 전운에 휩싸여 있던 터라 내부의 무역 사정도 좋지 못해 결국 명나라 해안과 조선 해안 지방에서 노략질을 감행하게 되었다.
1555년 5월 왜구는 선박 70여 척을 앞세우고 전라남도 남해안 쪽에 침입하여 성을 포위하였고, 또한 어란도, 장흥, 강진, 영암 일대를 횡행하면서 노략질과 약탈을 감행하였다.
이에 조선은 왜구 토벌대를 전라남도로 급파하였지만 절도사 원적, 장흥부사 한온 등이 전사하고 영암군수 이덕견이 포로가 되는 등 패전하고 말았다.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한 조정은 호조판서 이준경을 도순찰사, 김경석, 남치훈을 방어사에 임명하여 토벌대를 다시 급파했다. 이들에 의해 왜구가 섬멸되자 대마도와의 무역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조선과의 무역 관계가 악화되자 난처해진 대마도주는 조선을 약탈하고 만행한 왜구의 목을 잘라와 사과하며 세견선의 증가를 간청해왔다. 이에 조선은 대마도의 생활 필수품을 돕고자 식량 사정 등을 고려하여 세견선 5척을 허용하였다. 그러나 이 사건 이후에도 일본 내의 혼란은 더욱 심화되었고, 왜구의 침입도 줄어들지 않았다. 드디어 도요토미가 일본을 통일시키자 왜구는 단순한 노략질 차원을 넘어 대규모 전쟁을 감행해왔다. 이것이 곧 임진왜란이었다. 이 난 이후 조선과 일본 양국간의 통교는 거의 중단되고 말았다.
4. 명종 시대를 이끈 사람들
주리철학의 선구자 이언적(1491-1553)
이수희의 손자이자 이번의 아들인 이언적은 1491년(성종 22년)에 태어났다. 본명은 적이었지만 중종의 명으로 '언'자가 더해져 언적이라 하였으며 호는 회암, 주희의 학문을 따른다는 의미에서 회재라고 하였다.
그는 24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갔다. 이조정랑, 사헌부장령, 밀양부사를 거쳐 1530년에 사간이 되었다. 이때 김안로의 등용을 반대하다가 관직에서 쫓겨나 경주의 자옥산에 들어가서 성리학 연구에 전념하였다. 이후 1537년 김안로 일당이 몰락한 뒤에 종부시첨정으로 불려나와 홍문관교리 응교 직제학이 되었고, 전주부윤으로 나가 선정을 베풀어 송덕비가 세워졌다.
중앙으로 올라온 뒤에 다시 이조, 예조, 형조판서를 거쳐 1545년에 좌찬성이 되었다. 이 해에 윤원형 등의 척신 세력이 을사사화를 일으키자 사림들을 심문하는 추관을 맡았으나 자신도 이때 관직에서 물러났다.
1547년 윤원형 일당이 조작한 양재역 벽서 사건에 연루되어 강계로 유배되었고, 그곳에서 6년을 보내다가 1553년 6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을사사화와 같은 시련기에 이언적은 판의금부사라는 중책을 맡고 있으면서 윤원형 일파에 의한 사림의 피해를 막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지만 힘이 부족하여 자신도 결국 사화의 희생자가 되고 말았다. 이를 두고 이이는 그가 을사사화에 곧은 말로 항거하지 못했던 점을 들추면서 절개를 지키지 못한 우유부단한 학자로 비판하고 있지만, 그는 불의와 타협하지 않으면서도 온건한 해결책을 강구하던 치밀한 인물이었다.
그는 조선조의 성리학을 정립한 선구적인 인물로서 유학의 방향과 성격을 밝히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스승도 제대로 없던 그는 주희의 주리론적 입장을 확립하였으며, 이황의 성리학 연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27세 때 당시 영남 지방의 선배 학자인 손숙돈과 조한보 사이에 토론되었던 성리학의 기본 쟁점인 무극태극 논쟁에 뛰어들어 주희의 주리론적 견해에서 손숙돈과 조한보를 동시에 비판하면서 자신의 학문적 견해를 밝혔다. 그의 견해는 이황에게로 계승되는 영남학파 성리설의 기초가 되었다.
그는 만년의 유배 생활 동안 자신의 일생에서 가장 큰 업적이 되는 중요한 저서들을 남겼다. (구인록), (대학장구보유), (중요구경연의), (봉선잡의) 등이 그것이다. (구인록)은 유교 경전의 핵심 개념으로서 인에 대한 그의 관심이 집약되어있는 책이다. 이 책에서 그는 유교의 여러 경전과 송대 도학자들의 설을 살피면서 인의 본체와 실현 방법에 관한 유학의 근본 정신을 탐구하고 있다. 이 탐구를 살펴보면 그는 주희를 추종하긴 했으나 주희가 강조했던 '격물치지'의 내용을 거부하고 철저한 주리론적 입장을 고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같은 그의 학문적 관점은 이황에 의해 집대성되어 영남학파를 이루는 근거가 되었다. 도학적 수양론과 실천을 강조한 그는 군자의 길을 닦는 것이 곧 학문이라고 강조하면서 조선 성리학의 우뚝한 봉우리가 되었다.
조선 성리학의 큰 산 이황(1501-1570)
이황은 경상도 예안현 온계리(지금의 경북 안동시)에서 좌찬성을 지낸 이식의 7남 1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생후 7개월 만에 아버지를 여의었다. 그러나 후실이었지만 현부였던 생모 박씨의 가르침으로 총명한 자질을 키워나갔다. 12세에 숙부 이우로부터 (논어)를 배웠고, 14세 때부터 혼자 독서하기를 좋아하여 도연명의 시를 즐겨 외웠으며, 20대에 들어 침식을 잊고 (주역)에 몰두하다 건강을 해쳐 병약한 사람이 되고 말았다.
27세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어머니의 소원에 따라 과거에 응시하기 위해 성균관에 들어가 이듬해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그리고 33세에 재차 성균관에 들어가 김인후 등과 교류하고 (심경부주)를 입수하여 탐독, 심취하였다.
34세(1534년)가 되던 해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사가 되면서 관계에 발을 들여놓았으며, 37세에 모친상을 다하자 고향에서 3년간 복상하였고, 39세에 홍문관 수찬이 되었다가 곧 사가독서에 임명되었다.
중종 말년에 조정이 어지러워지자 김인후가 낙향하는 것을 보고 성묘를 핑계 삼아 사가를 청하여 고향으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을사사화 후 병약함을 핑계로 모든 관직을 사퇴하고 고향인 낙동강 상류 토계의 동암에 양진암을 짓고 산운야학을 벗 삼아 독서에 전념하는 구도 생활에 돌입하였다. 이때 토계를 퇴계라 개칭하고 자신의 아호로 삼았으니, 그의 나이 46세 때의 일이다.
그 뒤에도 그는 몇 번에 걸쳐 임관의 명을 받게 되자 중앙을 떠나 지방으로 외직을 지망하여 48세에 충청도 단양군수, 경상도 풍기 군수 등을 지냈다. 풍기 군수 시절에는 전임 군수 주세붕이 창설한 백운동서원에 서적, 편액, 학전 등을 마련할 것을 조정에 청원하여 허락을 받아냈다. 하지만 49세가 되던 해에 그는 다시 모든 관직에서 물러나 퇴계의 서쪽에 한서암을 짓고 다시금 구도 생활에 침잠하다가 52세에 성균관대사성에 제수되자 취임하였다. 이후 홍문관 부제학, 공조참판 등에 임명되었으나 여러 차례 고사하고, 낙향하여 도산서당을 짓고 학문 정진에 전념하였다. 이때 그는 아호를 도옹이라고 개칭하고 7년간 서당에 기거하면서 독서, 수양, 저술 등에 매진하는 한편 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다.
명종은 그의 학문과 인품을 높게 보고 자주 그에게 조정으로 나올 것을 종용했지만 듣지 않자, 가까운 신하들과 함께 '초현부지탄(현인을 초빙했으나 오지 않으니 한탄스럽구나)'라는 제목으로 시를 짓고 몰래 화공을 도산으로 보내 그 풍경을 그리게 하였다. 그리고 그 위에다 송인으로 하여금 (도산기) 및 (도산잡엽)을 써넣게 하여 병풍을 만들고는, 그것을 밤낮으로 쳐다보며 이황을 흠모했다고 한다.
명종은 그 이후에도 자헌대부, 공조판서, 대제학 등의 현직을 내려 이황을 초빙하려 했지만 그는 그때마다 고사하고 고향을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67세 때 명나라 신경의 사절이 당도하여 조정에서 상경을 강권하자 그는 마지못해 한양 길에 올랐다.
이후 명종이 돌연 병사하고, 선조가 즉위하여 그를 부왕의 행장수찬청당상경 및 예조 판서에 임명했으나 신병 때문에 부득이 귀향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황의 명망은 조야에 높아 선조는 그를 숭정대부 의정부우찬성에 임명하여 간절히 초빙하였고, 그는 여러 차례 고사 끝에 선조의 간청을 물리치기 어려워 68세의 노구에 대제학, 지경연의 중임을 맡고 선조에게 통치 철학이 되는 (무진육조소)를 올렸다. 선조는 이 소를 천고의 격언, 당금의 급무로서 단 한순간도 잊지 않을 것을 맹약했다고 한다.
그 뒤 이황은 선조에게 (논어집주), (주역) 등을 강의했고 노환 때문에 여러 차례 사직을 청원하면서 왕에 대한 마지막 봉사로 (성학집도)를 저술해 선조에게 바쳤다. 이듬해 69세에 이조판서에 제수되었으나 번번이 사직을 간청하여 마침내 낙향을 허락받았다. 낙향한 후 이듬해 11월 평소에 아끼던 매화에 물을 주게 하고, 침상을 정돈시킨 후 일으켜달라 하여 단정히 앉은 자세로 세상을 떴다. 이때 그의 나이 70세였다.
그가 죽자 선조는 3일간 정사를 폐하고 애도하면서 그를 영의정의 예로 장사 지내도록 했다.
이황이 학문에 본격적으로 정진한 것은 (주자대전)을 읽고 난 다음부터였다. 그가 이 책을 입수한 것은 43세 때였다. 하지만 그는 풍기 군수를 사퇴하고 퇴계에 칩거하고 있던 49세 때에 비로소 이 책을 탐독하기 시작했다. 이때 그는 이미 (심경주부), (태극도설), (주역), (논어집) 등을 공부한 이후였기에 주자학의 대강을 이해하고 있던 터였다. (주자대전)을 섭렵함으로써 그는 성리학에 대한 깊고 새로운 시각에 눈을 뜨게 되었다.
따라서 그의 본격적인 학구 활동은 50세 이후부터 시작된 것이다. 이황은 53세에 정지운의 (천명도설)을 개정하고, (연평답문)을 교정하였다. 54세에 노수신의 (숙흥야매잠주)에 관한 논문을 썼으며, 56세에 향약을 기초하고, 57세에 (역학계몽전의)를 완성하였다. 또 58세에 (주자서절요) 및 (자성록)을 거의 완결하여 서문을 썼고, 59세에 황중거의 물음에 답하여 (백록동규집해)에 관하여 논의하였다. 또한 기대승과 더불어 사단칠정에 관한 질의에 응답하였고, 61세에 이언적의 (태극무변)을 읽고 크게 감동하였다. 이후 그는 70세에 죽을 때까지 이언적의 유고와 행장을 정리하는 한편, 성리학에 관한 숱한 논문들을 작성하였다.
이황은 이 같은 만학을 통해 조선 성리학의 최고봉에 이르는 한편, 동양 유학의 한 산맥을 이룰 수 있었다. 젊어서는 학문을 위한 준비에 게으르지 않았고, 중년에는 스스로의 가치관을 실천했으며, 노년에는 이를 바탕으로 학문을 쌓고 제자를 길러 맹자가 말하던 인생삼락을 철저히 즐긴 사람이었다.
그의 학풍을 따른 학자로는 당대의 유성룡을 비롯하여, 김성일, 기대승, 조목, 이산해, 이강이, 황준량 등을 위시한 260여 인에 달하고, 나아가서는 성혼, 정시한, 이현일, 이재, 이익, 이항로 등등을 잇는 영남학파 및 친영남학파 사류 모두이다. 이는 조선 주리철학의 한 산맥을 형성하였으니 실로 한국 유학사상 일대 장관이 아닐 수 없다. 그만큼 이황의 산은 골이 깊고 봉우리가 높았던 것이다. 산이 높아야 골이 깊고, 골이 깊어야 넓은 강을 낼 수 있다는 이치가 바로 이황에 적합한 말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5. (명종실록) 편찬 경위
(명종실록)은 총 34권 34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1545년 7월부터 1567년 6월까지 22년 동안의 역사적 사실을 편년체로 기록하고 있다.
(명종실록)의 편찬 과정에 대해서는 실록에 정확하게 적혀 있지 않고, 다만 (선조실록)에 1568년 8월 춘추관에서 영의정 이준경, 우의정 홍섬의 주재하에 편찬 회의가 개최되고 총재관 홍섬 이하 당상, 낭청의 임명이 있은 3년 뒤인 1571년 4월에 완성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그러나 당시 편수관으로 편찬 작업에 참여했던 유희춘의 (미암일기)에는 더 자세한 내용이 실려 있어 당시의 편찬 과정이 파악되고 있다.
편찬 작업에 참여한 인물은 감춘추관사 홍섬, 지춘추관사 오겸, 이황 등 9인, 동지 춘추관사 박순 등 10인, 편수관은 이제민 등 20인, 기주관은 유도 등 17인, 기사관은 홍성민 등 20인으로 총 77명이었다.
(명종실록)의 특징은 여타 실록과 달리 보기에 편하게 편찬되었다는 것인데, 예를 들자면 사실의 기록을 연대순으로 배열하되 날짜가 바뀌면 줄을 바꾸어 기록했다든가, 또는 같은 날의 기사도 대체적으로 국왕 및 왕실에 대한 일, 대외관계, 국정 집행 및 이에 대한 의정부, 삼사, 육조의 상서, 지방 행정, 천문 지리학 등의 순으로 배열하여 놓았다는 점, 그리고 사론을 본문과 분리시켜 그 위치를 명확히 했다는 점 등이다.
#명종 시대의 세계 약사
명종 시대의 중국 명나라는 지진과 기근으로 인해 혼란이 가중되어 세력이 약해졌으며, 일본은 전국시대의 혼란이 더욱 가속화되어 조선과 명의 해안 지방에 대한 왜구들의 노략질이 한층 심해졌다.
한편 유럽은 대부분의 국가에서 신교가 인정되어 종교 전쟁기에서 벗어나 평화 시대를 맞이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