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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의 세계 일주

100년 전의 세계 일주

이종응

 

광무 6년, 임인년(1902) 여름 5월은 대영제국의 대군주께서 즉위하고서 대관의 예식을 거행하는 때이다. 황제께서 의양군 이재각으로 하여금 미리 가 대관식을 치하하게 하셨는데 나 또한 동행하면서 비서의 책무를 맡게 되었다. 수행하는 과정에서의 공적, 사적인 문서와 크고 작은 비용, 거쳐 간 곳의 산천과 인물·풍속 등에 관한 특이한 견문 가운데 장관이어서 견문을 넓히기에 족한 것들은 적어두지 않을 수 없었 다. 심지어 흐리거나 맑거나 바람이 불거나 비가 오는 날씨까지도 빠짐없이 기록하였다. 기록한 글이 비록 더할 수 없이 천속하고 비루하지만 백방으로 바쁜 가운데 생각을 모아둔 것이라 마침내 이를 책으로 엮게 되었다. 집안의 젊은이들이 보고서 당시 신고가 어떠했는지를 알게 하고자 준비한 것이다.

임인년 7월 그믐, 이종응 광무 6년 1월 30일, 사신을 파견하는 조서가 철회되었다. 이 무렵에 완순군 이재완에게 미리 가 대관식을 치하하도록 명하였으나 일이 있어 그러지 못하게 되자 다시 이재각에게 조서를 내려 명하였다. 조서에서 말하기를, "대영제국 대군주 겸 인도 황제께서 즉위하실 대관의 예식을 거행하는 경사스러운 날이 멀지 않으므로 짐이 의양군 이재각을 특명 대사로 삼아 때에 맞추어 미리 가 하례의 의식에 참여하게 하노라"고 하였다.

광무 6년 2월 3일(음력 임인년 2월 13일) 특명부영대사 이재각 3월 22일(음력 임인년 2월 13일) 특명부영대사 수원1) 정삼품 이종응 예식원 번역2)과장 고희경 참리관3) 김조현.

○ 4월 5일(음력 임인년 2월 27일) 맑음. 출국 이틀 전날 밤에 대궐에 들어가 폐하께 하직 인사를 드리려 하였으나 네 사람이 대궐에 들어갈 무렵에 때마침 다른 공무가 있어 서로 만나지 못해 들어가 모실 수가 없었다. 오후 7시 반에 외부4)에서 청첩이 있어 네 사람은 함께 그리로 갔는데 주조선 영국 공사 주이전씨 또한 오셨다.

외부서리대신 유기환, 협판5) 최영하, 교섭국장6) 이응익씨 등과 만나 함께 양식을 들며 인사를 나누고 정회를 편 뒤에 작별 인사를 했다. 또 궐문으로 나아갔으나 바깥문이 이미 닫혀있었다. 얼마 후에 표신7)을 받들고 안으로 들어가 폐하를 알현하였다.

○6일(28일) 밤에 비가 오다가 개임 오전 2시에 네 사람은 폐하께 사직하고 친서 한 통을 받들었다. 나는 대사와 함께 칙명을 받들어 곧바로 표훈원8)으로 가서 친서를 봉안하고 1박하였다. 11시에 돈의문 밖 정거장으로 나와 12시에 기차를 탔는데 외부대신 유기환, 협판 최영하 두 분과 고관들께서 전송해주셨다. 친지 10여 명과 함께 기차를 타고 오후 2시에 인천항에 도착하였다. 본서의 감리 하상기씨의 영접을 받고 이태여관에 들어가 짐을 정리하였다. 이날 밤에 중추원9) 의장 김가진, 참서관10) 서병숙 께서 비를 무릅쓰고 오시어 간단하게 회포를 푼 뒤에 각기 숙소로 돌 아가셨다.

○7일(29일) 맑은 뒤 짙은 안개 오전 9시에 네 사람은 여관을 나와 부두에 도착하였다. 영국 영사 칼복이 일행의 고문관 자격으로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악수하고서 인사를 나눈 뒤에 윤선11)에 오르자 총세무사 백탁안씨 및 여러 친지들이 조그마한 배를 타고서 로니호라는 러시아 윤선이 정박하고 있던 곳까지 와 전송하여 주었다. 작별을 하고 돌아간 뒤에 기적 소리가 두 번 울리자 배는 출발하였다…. 이에 네 사람은 각자의 선실 안으로 들어갔는데 선실의 침상과 휘장의 배치가 자못 정결하였다. 약간 쉬고 나서 선실의 높은 곳으로 올라가 한가하게 거닐며 배에 장착된 웅장한 기계와 빈틈없는 구조를 찬찬히 살펴보았으나 어설픈 글로는 비슷하게도 묘사할 수가 없다. 얼마 후에 두 번 방울을 흔드는 소리가 들렸는데 영사 갈복씨가 와서 식사 시간이라고 일러주었다. 이에 의관을 정제하고 식당에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식탁은 가지런하게 정돈되어 있었으며, 그릇이 정갈하게 놓여 있었다. 서양인 남녀, 아이들 수십 명과 함께 모여 앉자 음식이 수 차에 걸쳐 제공되었으며 차를 내고는 식탁을 치웠다.

식당을 나가 흡연실에 앉아 한 차례 답답한 마음을 풀었다. 이와 같은 일이 하루에 세 번씩 있었다.

매번 기계가 움직이는 소리를 듣노라면 부지런히 애쓰며 밤낮으로 쉬지 않는 것이 마치 지극한 정성을 멈추지 않는 도에 견줄 만하였다.

"하늘이 하는 일을 사람이 대신한 것"이라 말할 수 있을 뿐이리라!.

○8일(음력 3월 초하루) 맑음. 오후 1시쯤 큰비가 동이로 퍼붓듯 하였다. 네 사람이 선실의 높은 곳에서 왔다 갔다 하다가 남쪽께에 몇 개의 봉우리가 파도 위로 출몰하는 것을 보았다. 선원에게 물으니 제주도 한라산이란다.

○9일(초이틀) 흐린 후 맑음. 오전 8시에 일본 나가사키항에 도착하였다. 이 항구의 순사가 군의 관 한 사람을 대동하고 배에 올라 여객들에게 의심스러운 병이 있는지 여부를 살핀 뒤에야 하선을 허락하였다. 11시에 배에서 내려 주장기서 양인 여관에 들러 대궐로 전보를 쳐서 보고드리고 집으로 보내는 편지를 부쳤다.

○10일(초사흘) 맑은 가운데 바람. 해가 기운 뒤에 네 사람은 거리로 나가 한가하게 돌아다녔는데 도로에는 한 점의 먼지나 오물이 없었다. 작은 도랑과 큰 도랑의 구획이 분명하고, 진귀한 나무와 아름다운 화초들이 가지런하게 정열되어 있었으며, 맑은 그늘은 땅에 가득하였다. 저자의 가게들은 서로 잇닿아 있었는데 물건들이 매우 많았다. 노래 부르며 노는 곳에서는 남녀가 즐거워하며 기상이 태평스러워 보였다. 항구 안의 배들은 갈대처럼 열립하여 밤이면 선상과 수면에 수백, 수천 개의 등불이 번쩍거리며 눈을 어지럽게 하였다.

○ 6월 9일(5월 초나흘) 흐리다가 비 오후 3시에 네 사람은 영국 주재 공사 민영돈과 함께 마차를 타고 유람하였다. 층루와 고각이 티끌 세상을 우뚝 벗어나 가지런하여 그저 수십 길의 석벽이 연이어져 있는 것과 같았다. 여관은 궁궐에 비할 만하였으며 도로는 모두 반석으로 포장되어 있었다. 사람의 어깨가 부딪치고 수레바퀴가 서로 닿으니 옛날의 임치(전국 시대 제나라의 수도)도 이를 능가하지는 못했으리라.

도성의 거리 위, 다니는 길에도 법이 있다. 큰길의 중간으로 마차가 왕래하는데 각기 다니는 길이 정해져 있었다. 좌우편의 돌계단 위로는 보행하는 사람들이 다닌다. 길을 건너가려는 사람들이 길가 표지 기둥 아래에 서 있으면 순사가 큰길을 향하여 손을 들고 손가락으로 마차에게 신호를 보내 앞에 가는 마차는 빨리 지나가게 하고 뒤에 오는 마차는 멈추어 서게 한다. 잠시 마차의 운행이 끊긴 후에 사람들이 건너갈 수 있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수레바퀴나 말발굽 아래에 깔려 죽 는 일이 허다하게 생길 것이라 한다.

한참을 가서 동물원에 이르렀다. 수목이 빽빽하게 열을 지은 가운데 도로는 반듯반듯하여 절도가 있었으며, 꽃과 풀은 땅에 가득하고 그 향기는 흠씬 풍겼다. 쇠로 만든 우리와 망 안에는 날짐승과 길짐승, 물고기며 갑각류 족속들이 모여 한 편의 금수부를 만들었다. 영웅호걸인 호랑이와 표범, 흉포한 사자와 곰, 사나운 무소와 코끼리, 건장한 낙타, 민첩한 원숭이며 바다코끼리, 돌고래, 사슴, 노루, 여우, 이리는 물론 고양이와 쥐, 개구리와 두꺼비 족속도 있었다.

뿔이 하나인 짐승이 있었는데 뿔 끝에는 살이 있고 소꼬리에 말의 발굽을 한, 크기가 소만 한 기린(성인이 나면 나타난다는 상상의 동물로, 아프리카 일대의 기린과는 다르다. 글쓴이는 영국의 문명을 찬탄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동일시하였다)이라는 동물이었다.

이 기린은 인도산인데 서방에 성인이 있다는 것인가?.

날짐승의 족속으로는 원앙, 공작, 앵무새. 물총새, 각지의 꿩과 닭은 물론 산새와 물새 등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이 많았다. 연못 속에 바위만큼이나 큰 어별의 족속이 있었는데 따로 돌로 만든 연못에 네 마리가 있었다. 몹시도 흉포하고 표독스럽게 보여 자세히 살펴보았더니 네 발에 눈빛이 푸른 듯하면서도 붉은 놈이었다. 동물원 관계자에게 물어보았더니 악어라고 하였다. 그제쯤 한유의 <제악어문>을 상기하고서 그 짐승은 길들이기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또 큰 뱀이 한 마리가 있었는데 길이가 3, 4간(한 간은 여섯 자)이 넘고 허리는 기둥만 하며 몸에는 오색이 영롱하고 눈빛은 횃불과 같았다. 오로지 육류만 먹으며 한 번 고기를 배불리 먹으면 6, 7일씩이나 잔다고 하였다. 이 녀석은 열대지방의 산물인 까닭에 증기를 쐬주며 온도계를 달아두고 그 기온을 조절한다.

○6월 10일(5월 초닷새) 흐림 네 사람이 큰 거리를 걷다가 보석상가에 들르게 되었는데 금옥과 보석이 되나 말로 세어야 할 정도로 많았다. 패물과 노리개에 깃든 수공의 기묘함이란 글에 귀신이 아니고서는 묘사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한 가게가 80여 개나 된다고 한다.

오후 7시에 서커스장으로 갔다. 누각은 매우 컸으며 5층으로 된 난간이 있었다. 난간은 둥글기가 반달이 비스듬히 누워있는 것과 같았는데 황금빛과 푸른빛, 붉은빛 비취빛이 사람의 눈을 어찔하게 하였다. 수백, 수천의 관람객들은 난간 안쪽에 요술에 홀린 듯이 앉아있었다. 앞쪽에는 무대가 마련되어 있었으며 음악은 바뀌어가 며 연주되었는데 웅장하고 호방하면서도 맑고 밝았다.

수 십 명의 미녀들이 금은보석에 아름다운 옷을 입고서 서로 마주 서서 재주를 선보였는데 잠깐 앞으로 나왔다가 잠깐 뒤로 물러나는가 하면, 혹은 몸을 펴고 혹은 몸을 굽히며 모여도 어지럽지 않고 흩어져도 산만하지 않아 무척이나 절도가 있었다. 노랫소리는 간드러져서 숱한 가지 드리운 버들 위에서 한 무리 꾀꼬리가 다투어 노래하는 듯하였으며, 춤추는 소매는 나풀나풀하여 복숭아꽃 오얏꽃 위를 봄바람 맞으며 나비들이 하늘하늘 날아다니는 것과 같았다.

관객이 뿌리는 은화가 검광처럼 번뜩였는데 마치 배꽃이 바람에 나부끼며 떨어지는 것과도 같았으며 쇳소리가 짤랑짤랑 울렸다. 잠시 후 한 무리의 낭자군이 나왔다. 앞뒤로 진퇴하는 낭자군의 모습은 질서정연하였는데 이들의 출현은 적에게 승리한 기쁨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다.

다시 얼마 후에 대여섯 명의 건장한 사내들이 서로 마주 보며 섰다가 한사람이 홀연 몸을 튕겨 마주 선 사람의 어깨 위로 뛰어올랐다. 또 한 사람이 나와 수 차례 왔다 갔다 하더니 불현듯 몸을 날려 뛰어올랐던 사람의 어깨 위로 올라섰다. 열두셋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가 다시 그 앞에서 왔다 갔다 하더니 문득 가장 꼭대기에 선 사람의 어깨 위로 몸을 날렸다.

앞으로 뛰어오르고 뒤로 뛸 때의 모습이 나는 새가 오르락내리락하는 것과 같아서 정말 볼 만하였다.

장내가 문득 우레와 같은 바닷소리로 가득 차고 망망한 창파 위에는 윤선들이 오간다. 평원과 광야, 깊은 산과 깊은 골짝을 기차가 세차게 달린다. 경마장에서 말들이 앞을 다투자 거기서 구경하던 사람들이 열광적으로 환호한다.-이것은 활동사진인데 전기가 그렇게 하는 것이다. 원숭이가 사람의 지시에 따라 묘기를 보이기도 하고, 앵무새가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기도 한다. 금수를 길들이는 것이 지극한 이치가 아니라면 이와 같을 수 없으리라.

마지막으로 영국 황제의 사진이 화면 위로 엄숙하게 나타나자 사람들이 일제히 일어나 공경스럽게 예를 표하고는 자리를 떴다. 이것은 아마 자기 군주의 은혜를 잊지 않겠다는 뜻일 것이다.

○6월 13일(5월 초파일) 비 오후 2시에 영국 장례원의 경이 황실의 마차를 이끌고 와서 왕궁에 들어가 폐하를 알현할 것을 청하였다. 이에 네 사람은 민영돈 공사와 함께 예복을 갖추어 입고 왕궁으로 향했다. 여러 관리들이 에워선 가운데 장례원의 안내로 사중의 문을 지나 잠시 휴게소에 머물렀다. 이곳의 조각한 옥과 실 같은 금은 사람의 안공을 아찔하게 하였다.

잠시 후에 장례원의 경이 들어오기를 청하여 다시 이중의 문을 지났다. 지나는 문마다 장수들이 고깔을 쓰고 창을 쥔 채 고니처럼 고개를 쳐들고 부동자세로 서 있었다. 황제 집무실로 나아가자 황제께서는 자리 아래에 내려서서 계셨는데 외부대신과 시위하는 사람 너댓 명이 배석하고 있었다. 이에 문 안으로 들어가 국궁하고 머리를 조아렸다. 또 몇 걸음 나아가 처음처럼 예를 행하였다. 황제 앞에 나가 서서 또 예를 행하고 국서를 받들어 올렸다.

영국 황제께서 악수를 건네며, "몇만 리 바닷길을 편하게 오셨는지요?"라 하시기에 "황제의 신령스러움에 힘입어 일행이 편안히 왔습니다"라 대답하였다. 황제께서 또, "귀국의 대황제께서는 옥체가 편안하신지요?"라 하시기에 "편안합니다"라고 말하였다. 또 말씀하기를, "귀국의 대황제께서 특별히 대사를 파견하시어 먼 곳에 와 안부를 묻게 하시니 감복스러움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양국의 우의가 더더욱 돈독해지기를 바랍니다"라 하셨다. 영국 황제는 넉넉한 얼굴에 백발이었는데 덕스러운 기운이 얼굴에 가득하였다.

영국의 황궁은 광대하고 훌륭하였다. 옛날에 맹자가 제나라 왕의 거처를 보고 탄성을 지르며 말하기를, "위대하도다, 거처여!"라 하였는데 그 옛날 제나라가 바로 오늘의 영국이리라.…

○6월 16일(5월 11일) 흐림 오후 2시에 영국의 궁내대신 삼빛들낭과 그의 부관 잎늬쓰가 왔다가 문밖에 명함을 두고 갔다. 오후 3시에 황실 마차에 올라 유람하였다. 국립은행에 이르자 병정 30명이 문밖을 지키고 있었다.

철문은 매우 컸는데 아래위로 두 개의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다. 두 사람이 각자 열쇠를 가지고 동시에 문을 열어야만 비로소 들어갈 수 있다. 어두운 동굴은 마치 칠흑과도 같았다.

잠시 후에 전등을 켜자 사면이 십여 간은 됨직하였다. 3층으로 된 시렁이 있었는데 윗 시렁에는 금화가, 가운데 시렁에는 은화, 아래 시렁에는 지폐가 있었다. 또 금괴도 있어 크기가 목침만 한 것이 시렁 위에 올려져 있었는데 그 수효를 알 수 없을 정도였다. 좌우 양 곁에는 철궤와 목궤가 줄지어 놓여 있었다. 궤 하나에 들어있는 돈이 얼마쯤 되느냐고 물었더니 2억 9,000여만 원이라 하였다.

저울 두 개와 돈을 만드는 기계도 보였다. 기계 위에서 도는 침 은 반드시 화폐의 수량에 따라 움직이는데 이것으로 만든 돈의 수효를 안다고 하였다. 또 돈을 싣는 수레도 있었다. 수레 위에는 스물네 개의 금괴가 있었는데 금괴 하나는 400냥이며 이 전체가 하루에 환전되어 나가는 지폐의 어림수라 한다.

민간에 통용되고 있는 지폐가 비록 수재와 화재를 당했더라도 실표증(사실증명서)이 있고 혹 불에 탄 재나 물에 훼손된 찌꺼기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모두 그 실표증에 따라 환급하는데 실표증은 유리그릇 안에 넣어 훗날을 위한 표기로 보관한다고 한다. 관민 사이의 신용을 알 만하다….

○6월 17일(5월 12일) 흐리다가 맑음 …오후 2시에 네 사람은 문을 나서 마담슛소듸(마담탓소 박물관) 로 갔다.

흰 밀랍으로 사람을 만들어 두었는데 그 사람의 모습이며 얼굴 생김새, 두발과 수염은 물론 심지어 피부색까지도 마치 살아 있는 사람과 같다.

비단옷을 걸친 제1 반열의 사람은 당연히 지금의 황제와 황후, 태자와 태자비이다. 그 외의 반열에는 선대에 공이 있었던 황제와 황후 및 각국의 황제, 대통령, 영웅호걸, 유명인사들이 있었는데 이홍장과 나폴레옹, 비스마르크 등이 그러한 예이다. 당시 정부의 대신들도 모두 참여하고 있었다. 산골짝에서 전쟁을 하는 중에 죽거나 다친 사람들이 널린 모습이며 범죄인에게 형벌을 가하는 모습, 강도가 부유한 자를 죽이거나 상해를 입히는 모습, 전쟁에서 이겨 항복을 받아내는 모습 등등 과연 모두가 장관이었다.

…오후 9시에 외부 참서관 포선비가 와서 국회당으로 안내해 구경시켜 주었다. 국회당 의석 가운데 있는 아취형 약식 방은 의장이 앉는 곳이다. 이 자리 앞의 책상에는 국보 한 점이 놓여 있었다. 그 옆에 국표(나라의 상징물?)를 하나 두었는데 금으로 주조한 것으로 모양은 절구의 공이와 같았다. 책상 앞에 또 큰 책상이 하나 있었는데 각종 문서가 놓여 있었으며 서기관 세 사람이 앉아있었다.

의석 오른쪽에는 정부당이 줄지어 앉고 왼쪽에는 반대당이 줄지어 앉아있다. 할 말이 있으면 의식을 취하고 일어나 시의를 진술하고 굳세고 바르게 변론을 한다. 말이 끝나면 좌우의 당이 의논하였다. 만일 의논이 서로 일치하지 않으면 결국 투표를 하고 다수에 따라 시행한다고 하였다. 그 옆자리의 신문사 사원(기자)들은 말하는 것을 따라서 기록하고 있었다. 이때에 의논한 것은 모두 주세 한 항목이었다고 한다.

○ 6월 19일(5월 14일) 흐림 영국 예식원에서 미리 청첩이 있었다.

대관식 때 앉는 좌석이 제8좌로 정해다고 하였다.

영국 육군 대도독 로버스와 외부협판 크링본이 내방하였으나 우리들이 마침 외출 중이라 만나지 못하였다. 모두 명함을 남겨 두고 갔다.

오후 7시에 네 사람은 기차를 타고 수정궁으로 가서 불꽃놀이를 구경하였다. 이 큰 건물 주위는 넓이가 3,000만 평방미터라고 한다. 안팎과 아래위의 전등은 하늘 가득 별이 반짝이는 것과 같았다. 건물 뒤편에 큰 연못이 하나 있었는데 흰 돌에 괴이한 무늬를 새겨 난간을 만들었다. 연못 가운데도 괴석으로 산을 만들고 화초를 가득 심어두었다. 거기에 조그만 배들이 있어 남녀들이 다투어 타고 놀았다.

회사(수정궁)의 주인과 인접관의 인도를 받으며 조그마한 누각에 이르렀다. 8, 9인을 수용할 만한, 홍자색 비단을 깔아 놓은 곳이었다. 이곳은 영국의 황제가 불꽃놀이를 관람하는 곳이라고 한다. 이 누각 아래가 바로 불꽃놀이를 펼치는 장소이다. 장내에 가득한 전등은 화림(불숲)이라 할 만하였다.

인산인해를 이룬 가운데 군악대의 연주가 끝나자 갑자기 화포 소리가 몇 차례 들리더니 불화살이 평지로부터 숲을 이루어 하늘로 날아올랐다. 공중에서 포성이 어지럽게 피어나고 불화살이 갈라지고 흩어지며 내려오니 하늘 가득 오색의 불비(화우)가 내리고 연기와 불꽃이 하늘에 넘쳐났다.

이와 같은 상황이 반 시간 넘게 진행되었다. 누각 앞 좌우에는 10여 장(10척)이나 되는 쇠시렁(철가)이 있고 그 시렁에는 큰 쇠바퀴(철륜)가 달려 있었는데 다시 그 바퀴 안에는 무수한 소륜이 들어있었다. 주렁주렁 달린, 거위 알만 한 크기의 화등은 구슬을 던져두고 콩을 흩뿌려둔 것과 같았다. 흔들거리며 번쩍거리는가 싶더니 조금 있으려니 '탁탁'하는 소리가 들렸다. 천만 개의 화등이 터지며 불빛을 마구 쏟아내는 모양은 분수기에서 물이 뿜어져 나오는 것과 같았다.

이러한 상황이 그치자 화륜은 갑자기 변하여 한 마리의 거대한 코끼리가 되었다. 긴 코와 늘어뜨린 귀로 어슬렁거리는 것이 꼭 살아있는 것만 같았다.

또 한 차례 포성이 울리자 평지에서 불화살이 날아오르고 오른쪽 쇠 시렁의 큰 바퀴〔대륜〕 위에서 한 송이 모란이 피어났다. 잎은 푸르고 꽃은 붉은데 나비가 날며 노는 듯하였다. 또 그 앞에는 수백 간의 넓이에 높이가 10여 장이나 되는 큰 쇠시렁이 있었다.

갑자기 포성이 울리고 그 쇠시렁 위에 일제히 불이 켜지자 두 화인 이산처럼 우뚝 섰다. 자세히 보니 영국 황제와 황후였다.

잠시도 쉴새 없이 화포가 터지고 수백 간의 쇠시렁 위에서 '일'자 형의 긴 불이 피어났다. 그 불기운은 천길 절벽 위에서 폭포수가 떨어지듯 내리쏟아졌는데, 반쪽은 흰빛 폭포였고 반쪽은 누런빛 폭포였다. 물소리가 세차게 일어나고 날리는 눈발이 공중에 질펀하듯 하였으니 글에 귀신이 아니고서는 그 상황을 비슷하게도 형용할 수 없으리라.

이와 같이 하기를 한 시간이 되어서야 그쳤다.……

○ 6월 20일(5월 15일) 흐리고 비 …… 오전 11시에 영국 감옥소를 구경하였다.

벽돌로 5층 누옥을 짓고 높은 담으로 둘러쌌는데 이중의 철문이 있었다. 징역을 사는 죄수는 1,000여 명, 방 한 칸에 한 사람씩 가두고 남녀는 따로 수감하였으며 매우 깨끗하였다. 하루에 세 번 제공하는 식사는 모두 저울에 달아서 준다. 이는 먹는 것이 일정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감옥소 안에는 병을 고치는 의사가 있고, 매일 식사 후면 간수가 죄수를 데리고 감옥소 안의 운동장으로 가서 한 차례씩 운동도 시킨다. 이는 기분이 우울하여 병이 날까 해서이다.

죄수에게 각자 생업을 닦게 하되 정부에서 죄수의 평소 일의 양을 계산하여 그 반값을 지급해서 은행에 저금하도록 하여 출소 후의 생업 자금으로 삼게 한다.

감옥소 안에 교회를 두어 공일마다 죄수들에게 예배를 보게 하고 두 주마다 한 번씩 목욕하게 한다.

그 애민 입법의 도가 모두 이와 같다.

○ 6월 24일(5월 19일) 흐림. 영국 황제의 병환이 위중하여 대관 식을 뒤로 미루었다.……오후 2시에 황제의 병문안 차 네 사람이 황궁에 들어갔다가 명함을 남기고 돌아왔다.

…… 돌아오는 길에 대도를 활보하였다.

런던은 본시 큰 도회지이지만 이번 경사스러운 잔치를 맞아 대도의 양옆에 있는 고각과 층루에 꽃을 매달고 비단을 걸어두어 황금빛과 푸른빛이 찬란하게 비치는 가운데 길가에 수천 간이나 되는 긴 탁자를 층층 이 얽어두고, 홍색이며 자주색 양탄자를 깔아두어 춘풍화도 속을 지나는 듯하였다.

이 길은 예식 때 영국 황제께서 어가를 타고 지나갈 곳이고, 각국 의친왕(황제의 백·숙부, 형제와 아들들)과 대사 및 본국의 백성들이 앉아서 구경하게 될 곳인데 그 앉는 자리에도 귀천의 차서가 있었다.

그때 각국 사절단과 이곳 사람들이 운집하여 마차와 보행자가 숲을 이룬듯이 섰다가 유성처럼 내달으면 거리의 광경은 더없이 장관이리라.

○ 6월 27일(5월 22일) 맑음 …… 오전 8시에 네 사람은 반접관(빈객의 시중을 드는 관리)과 함께 가 구화총사(소방본부)를 구경하였다.

이 회사는 런던의 화재를 구제할 목적으로 설립한 것이다. 물 뿌리는 기계와 층으로 연결한 철사 다리가 있었는데 우리들이 구경할 수 있도록 불을 끄는 절차를 재현하였다.

갑자기 몇 층 건물에서 연기와 화염이 솟구쳐 일어나 경보가 들리자 여러 사원들이 각기 담당하는 기계를 가지고 나왔다. 먼저 몇 층의 철사 다리를 설치하고 한 사람이 불이 난 건물로 올라가더니 화상을 입은 사람을 어깨에 메고 그 사다리로 내려왔다. 그런 후에 폭이 넓은 보자기 하나를 불이 난 건물 아래에 펴더니 수십 명의 사람이 달려들어 사면을 빙 둘러서서 손으로 보자기를 잡고 힘껏 잡아 당겨 보자기가 땅바닥에서 몇 자 거리를 유지하게 하였다. 사람이 불이 난 건물 위에서 보자기 가운데로 뛰어내려도 다치지 않게 한 연후에, 물뿌리는 기계로 어떤 사람은 위에서 아래로 씻어내리고 어떤 사람은 아래에서 위로 치켜올려 물을 뿌렸다. 물의 기세가 매우 세어 소나기가 퍼붓는 듯하더니 불이 금세 꺼졌다.

설비의 규모나 신속한 처리는 평소에 익혀 두지 않았다면 불가능할 것이다. 멀거나 가까운 곳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회사 문 앞으로 급히 달려오거나 전화로 모처에서 화재가 발생했다고 급보를 전하면, 사장은 지도를 살펴보고 불이 난 곳을 명확하게 알고 나서 초인종을 눌러 모든 사원을 지휘한다. 모두가 머리에 투구를 쓰고 몸에 철갑을 걸치는데 마차에 불 끄는 기계를 싣고 일시에 나가 불을 끈다. 사장이 또 지사에 전화를 하면 80여 곳의 지사가 일시에 운집한다고 한다.

런던은 인구가 많아 거의 매일 경보가 있는데 경보가 없는 날이면 회사 안에서 사람과 말에게 훈련을 시켜 한가하게 쉬도록 하지 않는다. ……

○ 6월 30일(5월 25일) 맑음. 오래 앉아있으려니 기분이 울적하여 네 사람은 반접관과 함께 나가 한 놀이장(희장)을 구경하였다.

큰 건물 수만 간이 구불구불 굽이치는 가운데 전등이 별처럼 펼쳐져 비추니 밝기가 대낮과 같았다. 좌판과 늘어선 가게에는 금은보화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고, 흰 밀랍으로 옛사람의 모습을 본떠 비단옷을 입혀 둔 것은 그 형형색색을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었다.

놀이장 한가운데 넓직한 곳에 쇠시렁을 세워두었는데 그 높이가 몇백 척이나 되는지 알 수 없었다. 쇠시렁 위에 큰 쇠바퀴를 하나 달아놓았는데 그 크기도 헤아릴 수 없었다. 쇠바퀴 바깥에 돌아가면서 쇠로 된 가방을 달아놓았는데 기차의 상등실과 같은 것이 몇백 개인지 알지 못하였다. 사람을 그 가운데 앉게 해놓고 전기로 쇠바퀴를 돌려 올라가게 한다. 빙 돌며 올라갔다가 쇠시렁 꼭대기에 이르면 몸은 구름 가운데 있게 된다. 여기서 아래쪽의 사람들을 내려다보면 마치 개미 떼가 멧돌 위를 다니는 것과 같아 실로 장관이다.

또 한 곳에 이르니 몇 척의 작은 배가 있었는데 사람들이 다투어 올라타고 있기에 나도 올라타 앉아 보았다. 배는 전기로 움직였는데 저절로 운행하여 석벽의 동굴 가운데로 들어갔다. 물길은 겨우 배 한 척이 빠져나갈 정도였지만 들어갈수록 점점 가경이었다. 좌우 석벽에 산천과 초목, 인물과 금수를 새겨 놓았는데 전기로 비추면 영락없이 진짜와 같았다.

그 설계가 참으로 기묘하다.

○ 7월 3일(5월 28일) 흐린 후 맑음. 오전 11시에 반접관이 사복 시궁중의 가마나 말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청)에 가서 황제가 사용하는 의장을 보기를 청하였다.

황제가 타는 마차는 매우 질박하였지만 황금으로 장식한 것이었다. 이는 120년 전에 제작한 것으로 마차 네 귀퉁이에 금인을 세우고 내부는 비단과 보석으로 꾸민 것이다. 덩치가 크고 무거워서 여덟 마리의 말을 메어 운행한다고 한다. 이번 예식 때 사용한 마차는 신식과 구식을 두루 참고해서 만든 것인데 금으로 장식하고 주칠을 하여 눈을 황홀하게 하였다.

황후와 태자가 사용하는 마차도 큰 차이가 없었다. 마굿간에는 마차용 말 여덟 필이 있었는데 우윳빛의 백마로 몸 어디에도 한 올의 잡스러운 털이 없었다. 발굽에서 등골까지가 한 장 남짓하고 꼬리에서 머리까지도 한 장 남짓하였다. 빛깔이 가을 물처럼 깨끗한 더할 수 없이 훌륭한 말이었다.

…….

○ 7월 7일(6월 초사흘) 맑음. 오전 11시에 네 사람은 영국을 떠나고자 정거장에 이르러 기차를 탔다.

영국의 궁내부와 외부의 관원들이 전송해주고 칼복(갈복)과 포선비 ,민영돈 공사와 이기현이 따라왔다. 오후 1시에 힝바항에 이르러 서로 악수를 나누고 눈물을 흘리며 작별하였다.

네 사람은 배를 타고 2시경에 칼틔(칼레)항에 도착하였다. 이 항구는 영국과 프랑스 두 나라의 경계를 이루는 한계 지역이다. 해협 동서의 양쪽 해안에 각기 포신을 받쳐주는 다리를 설치하고 대포 수십 좌를 걸어두었는데 경비가 매우 삼엄하였다.

여기서 여관에 들어가 점심을 먹은 뒤 기차를 타고 파리 정거장에 도착하였다. 주불공사 민영찬이 참서관과 주사를 대동하고 마중 나왔으며, 프랑스 장례원 소경과 외부대신도 환영해주었다.

여관에 들어가 저녁을 먹은 뒤 함께 기차를 타고 한 정거장에 도착하여 작별하고 차 안에서 하룻밤을 잤다.

대체로 프랑스 문물의 번화함은 영국보다 더하다. 그리하여 영국의 노인네들은 젊은이들을 망치게 하려거든 파리로 보내라고 버릇처럼 말한다고 한다.


1) 외국에 가는 사신을 따라가던 관원. 수행인

2) 번역과는 구한국 때 외국어를 번역하기 위하여 설치한 부서임

3) 구한국 때 궁내부 예식원의 한 벼슬. 외국어 통역과 번역에 관 한 사무를 맡아 보았음.

4) 조선 고종 32년(1895) 외부아문을 고친 이름. 광무 10년(1906) 에 폐하고, 그 사무를 의정부 외사국으로 옮겼음

5) 구한국 때 궁내부와 각 부의 차관

6) 교섭국은 외부에 딸린 한 국이었으며, 그 수장은 참의(정3품)이었다.

7) 조선조 때 궁중에 급변을 전하거나 궁궐을 출입할 때 사용하던 문표

8) 구한국 때 훈장, 기장, 상여 등의 업무를 맡아본 관청

9) 구한국 때 의정부에 딸린 관아로, 내각의 자문기관이었음.

10) 구한국 때의 벼슬. 각 부서에 두었던 주임관

11) 수레바퀴 같은 것을 양 옆구리에 붙인 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