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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붕당정치(朋黨政治)의 형성과 전개

조선시대 붕당정치(朋黨政治)의 형성과 전개

 

조선왕조는 개국 이후 중앙집권적 양반 관료제를 바탕으로 새로운 통치질서(統治秩序)를 확립해 나갔다. 이는 중소 지주층이 확대되는 당시의 사회경제적 변화를 정치체제 운영에 반영시킨 것이었다. 즉 중소지주적 경제기반을 가진 자들이 과거를 통해 중앙관계에 진출함으로써 관료공급원으로서의 지방사회의 기능이 전에 비해 크게 높아졌다.

이와 함께 조선 초기 양반 관료제의 운영은 양반사대부 가운데 세습적 지위를 확립한 부류, 즉 훈구파(勳舊派)의 형성도 가져왔다. 이들은 15세기 중반 이후 향상된 농업경제력을 바탕으로 국내 상업과 중국·일본 등과의 국제교역을 통해 사적인 경제기반의 확대에 열중하였다.

한편 재지(在地) 중소지주층의 자제들은 향교(鄕校)와 서재(書齋) 등의 교육을 통해 교양과 지식을 습득하면서, 현직에 나아가지 않더라도 높은 정치의식을 지닐 수 있었다. 원래 조정의 사대부들을 가리키던 사림(士林)이라는 말이 15세기 말엽 이후 재야의 선비들을 가리키는 호칭으로 바뀌었다.

사림세력은 성리학의 공도론(公道論)에 입각한 언론 활동, 성종 대의 향사례(鄕射禮)와 향음주례(鄕飮酒禮), 중종 대의 향약(鄕約) 보급 운동 등을 통하여 훈구파(勳舊派)의 치부행위와 수탈을 비판하고 그들이 각 향촌 사회에 구축한 정치적 기반을 변혁시키고자 하였다.

15세기 말부터 16세기 중엽에 걸친 4차례의 사화(士禍)는 이들 사림세력의 도전에 대한 훈구세력의 정치적 보복에 다름아니었다. 그러나 사림세력은 거듭되는 사화에도 불구하고 쉽게 그 기세가 꺾이지 않았다. 그들은 중종 대 말엽 서원(書院) 건립 운동을 펼쳐 사회적·정치적 입지를 넓혀 나갔고, 이를 배경으로 선조 초년에는 사림 계열의 인사들이 조정에 대폭 진출할 수 있었다.

본격적인 붕당의 계기는 이조 전랑(銓郞)의 추천문제로 나타났다. 기존 척신정치체제의 잔재 척결과정에서 전배(前輩)로 불리던 노성한 사류(士類)와 후배(後輩) 사류간에 입장 차이가 나타난 것이다. 후배사류는 김효원(金孝元)의 이조전랑 추천을 반대한 심의겸(沈義謙)을 용납하려는 선배사류에 대해 불만을 표하였다. 척신인 심의겸을 받아들이면 척신정치의 잔재를 청산할 수 없다는 강경한 입장을 취한 것이다.

 

품계 봉작(封爵) 직책 부인 호칭
문산계 무산계
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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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
1품 大匡輔國崇祿大夫 堂上官 영의정
좌, 우의정
부부인
輔國崇祿大夫
崇祿大夫 좌찬성
우찬성
정경부인
崇政大夫
2품 正憲大夫 판서
좌, 우참판
정부인
資憲大夫
嘉靖大夫 참판
관찰사
정부인
嘉善大夫
3품 通政大夫 折衝將軍 참의 목사
도호 부사
숙부인
통훈대부 어모장군 당하관
참상관
숙인
중직대부 건공장군 집의 사관 숙인
중훈대부 보공장군
4품 봉정대부 진위장군 군수 사인
장령
영인
봉렬대부 소위장군
조산대부 정략장군 경력 첨정
조봉대부 선략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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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품 통덕랑 과의교위 현령 판판
지평
공인
통선랑 충의교위
봉직랑 현신교위 정랑 교리
봉훈랑 창신교위
6품 승의랑 돈용교위 좌랑 감찰
승훈랑 진용교위
선교랑 여절교위 현감 찰방
선무랑 병절교위
7품 무공랑 적순부위 참하관 박사 직장
계공랑 분순부위
8품 통사랑 승의부위 저작
승사랑 수의부위
9품 종사랑 효력부위 정사 훈도
참봉
장사랑 전력부위

 

 

이같이 정치적 결단 및 시국관의 차이로 일어난 사림 내의 대립은 끝내 후배 사류를 중심으로 한 동인과 전배 중심의 서인으로 나뉘었다. 당시 동인은 이황(李滉)과 조식(曺植)의 문인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었고, 서인도 이이(李珥)가 참여하면서 학연의 폭을 넓혔다. 사림 내 최초의 붕당인 동인과 서인은 이처럼 학연을 바탕으로 형성되었고, 붕당 성립 후 중앙정치는 대개 이를 정치세력의 기본적 범주로 삼아 운영되었다.

붕당은 본래 유교 왕정에서 부정적으로 인식되었으나 16세기에 중국 송(宋)대의 새로운 붕당관이 수용되면서 그 인식이 달라졌다. 구양수(歐陽脩, 1007년∼1072년)는 《붕당론(朋黨論)》에서 정치에서 붕당의 존재를 부인할 수 없는 점을 주지시키는 한편, 붕당을 공도(公道)의 실현을 추구하는 자들의 ‘군자당(君子黨)’과 개인적 이익의 도모를 일삼는 ‘소인당(小人黨)’으로 구분하였다. 주희(朱熹, 1130년∼1200년) 역시 군자의 당이 있다면 정승도 군주와 함께 그 당에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후 선조 대에 이르러 구양수나 주자의 붕당론이 정설로서 자리를 잡았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 이후로는 서인·남인 두 정파의 상호 공존체제가 추구되는 가운데, 붕당정치체제에 대한 인식은 보다 발전하였다. 어느 한 붕당의 인사들만을 등용하거나 배격하는 것은 옳지 않으며, ‘공론(公論)’에 입각한 상호비판 견제의 필요성이 강조되었던 것이다. 당시 재야 사림의 공론은 학문적 명성이 높은, 이른바 ‘산림(山林)’이라 불리는 인사에 의해 주도되었고, 이들 산림은 왕으로부터도 특별한 예우를 받아 공론의 주도자로 존경받았다.

선조와 광해군 대의 붕당정치는 그 정치적 기반을 확고히 다지지 못한 상태였다. 동인에서 갈라진 북인은 강고한 학연을 확보하지 못한 채 분열을 거듭하였고, 광해군 대 들어 대북(大北) 또한 다른 붕당과의 공존관계를 정립하지 못한 까닭에 정치적으로 불안정하였다.

 

 


훈구파(관학파) 사림파(사학파)
연원 급진개혁파(정도전, 조준, 권근), (정인지, 한명회, 신숙주) 온건개혁파(정몽주, 길재, 이색) -> 조광조)
집권기 15세기 16세기 이후
정치적 입장 적극적인 역성혁명
유교 국가 운영에 학문적 이론 제공
소극적이며 고려 왕조에 충성 표시, 의리와 명분
출신 성균관, 집현전 사학, 서원
학문 사상적 성향(문물 정비) 경학적 성향
사상 타 사상도 수용 – 불교, 도교 성리학 중시
정치 이상 중앙집권, 왕도정치, 패도정치 수긍, 부국강병, 기술학 중시, 주례가 이념 향촌 지지, 왕도정치 주장, 패도정치 비판, 도덕과 의리, 성리학적 이념, 소학 중시, 형벌보다 교화에 의한 통치 강조, 언론 활동 활성화
성향 자주적 민족의식, 단군 중국 중심 세계관, 존화주의적(기자존중)

대농장 중소지주

 

 

이후 대북의 독주에 비판적이던 서인과 남인이 인조반정을 일으켜 북인세력을 제거한 뒤, 붕당의 상호비판과 공존의 기틀을 마련하면서 붕당정치의 궤도가 잡혔다. 이후 두 붕당은 각각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의 학문적 이념을 정치에 구현한다는 기치 아래 서원제도와 산림제도를 정착시켜 붕당정치의 발달을 가져왔다.

 


초기(15세기, 관학파) 중기(16세기, 사학파)
개관 왕성한 민족적 자각과 전통문화에 대한 자부심에서 근세 민족 문화를 창조 사림의 정치적 성장과 함께 지방 문화가 발달

성리학 관학파 주도, 경제적 기능 강조, 다른 사상에 관대, 부국강병⋅영토 확대 사림파 주도, 관념적 이기론 치중, 왕도 정치의 실현 추구
역사관 민족적 자각, 왕실과 국가 위신 고취 단군 숭상 존화주의적, 왕도주의적, 정치의식과 문화의식, 기자 숭상
과학 부국강병, 민생안정을 위해 과학 기술 장려, 격물치지의 경험적 학풍 이기론, 심학 등 관념적 학풍으로 기술 천시
도자기 분청사기 백자 -> 조선 후기 청화백자
회화 진취적인 시대 분위기를 반영하여 인물, 산수를 씩씩하고 낭만적으로 묘사 선비들의 정신세계 표현, 사군자
건축 궁궐, 성, 학교 서원
음악 궁중 음악인 아악의 기초 확립 서민들의 속악 발달

 

 

붕당정치는 사족양반이라는 특정한 신분층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는 시대적 한계를 지니지만, 교육기회를 누린 중소지주층의 대부분을 포용한 정치형태라는 점에서 높이 평가된다. 붕당정치의 저변을 이룬 재지 사림은 각 지방의 서원을 중심으로 향회(鄕會)를 구성하여 해당 지역의 향권(鄕權)을 주도하여 수령의 일방적 횡포에 맞설 수 있는 체제를 갖추어 나갔다.

17세기 말에 이르러 붕당정치는 점차 한계를 나타냈다. 즉 붕당간의 공존의식이 무너지고 일당전제(一黨專制)가 나타나면서 정쟁이 격화된 것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종래의 붕당정치에서 크게 억제되었던 척신의 비중이 높아지고, 이를 중심으로 한 벌열(閥閱)세력이 붕당의 자리를 독점해갔다.

붕당정치(朋黨政治)의 중요한 기반이었던 서원의 지나친 건립도 공론 결집을 어렵게 만든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이는 당시의 경제적 변동과 깊은 관련을 가진다. 대동법(大同法) 시행 이후 새로운 재부 획득의 기회를 둘러싼 이해관계가 붕당 간의 공존의식에 균열을 일으키고, 정파의 가장 중요한 요소인 학연(學緣)마저 퇴색시켰던 것이다. 붕당의 허울(겉모양)은 존속하였지만 실제 정치운영은 개인이나 가문의 입장을 우선하였고, 산림제도(山林制度)마저 권세가의 인척 또는 왕실의 외척을 중심으로 운영되어 사림의 공론을 반영하기 힘들었다.

숙종 대 노론과 소론, 남인 사이에 벌어진 환국(換局)은 이 시기 정치의 파란을 잘 보여준다. 잦은 환국으로 정치적 입지가 불안해진 각 정파는 서로 특정한 왕위 계승(王位繼承)권자를 지지하였고, 실패하였을 때는 반란을 일으키는 경우까지 나타났다.

이처럼 왕실의 권위마저 크게 손상하는 형태로 정쟁이 격화되자, 왕권은 이를 무마하는 개혁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18세기 영조(英祖)·정조(正祖)대에 실시된 탕평책(蕩平策)은 이러한 정치적 폐단을 극복하려는 노력의 산물이었다. 탕평책은 군주가 붕당의 존재를 부정하면서 모든 정사를 직접 주재하여 붕당정치의 폐해를 시정하려는 정책이었다.

영조 대의 탕평 정책은 붕당 간의 화합을 꾀하여 ‘조제보합(調劑保合)’을 추구한 반면, 정조대에는 의리를 앞세워 군주에 대한 충성 외에는 일체 용납하지 않는 강경함을 띠었다. 한편 탕평책을 추구한 군주들은 왕정의 새로운 시대적 과제로 소민(小民) 보호를 제시하는 보다 진보적인 인식을 보였다.

그러나 탕평 정치는 기성 벌열세력으로부터 강한 반발을 받았고, 실제 19세기에 군주들이 잇따라 어린 나이에 즉위하자 이들이 담합하여 군주권을 억제하는 반동적인 정치형태가 나타났다. 바로 세도정치(勢道政治)가 출현한 것이다.

19세기 초·중반에 계속된 세도정치는 노론계 벌족을 중심으로 한 것으로 이들은 왕실과의 외척관계를 권력 기반 확보·유지의 수단으로 삼았다. 이들은 탕평 군주들이 추구한 소민 보호정치보다 사적 치부에 모든 권력 장치를 악용하였기 때문에 일반민으로부터 광범한 저항을 불러일으켰고, 이것이 19세기 중반에 전국적으로 일어나 민란으로 이어졌다.

붕당에 참여한 정치세력은 초기에 학연성을 바탕으로 공론을 형성하고 정국운영을 주도하는 등 긍정적 정치형태를 형성한 바 있다. 그렇지만 점차 붕당 간의 대립이 배타적일 뿐 아니라 주로 복상(服喪) 문제, 세자 책봉 문제 등 민생과는 관련 없는 문제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어 국력을 약화시켰다는 부정적인 평가 또한 적지 않다.

붕당을 중심으로 조선 시대 정치사를 시기별로 구분하여 살펴보면, 첫째 왕조 초기인 15세기에 양반관료제가 확립된 시기, 둘째 16세기 들어 붕당이 성립하는 시기, 셋째 17세기는 붕당정치가 정립한 시기, 넷째 17세기 말 이후 붕당정치의 파행과 이를 국왕에 의해 탕평 정치가 꾀해진 시기, 다섯째 19세기는 탕평 정치의 소민 보호주의에 반발하는 벌열세력(閥閱勢力)의 반동(反動)의 세도정치기(勢道政治期) 등으로 이해된다.

여기서 16∼17세기에 집중적으로 나타난 붕당정치는 조선 시대의 정치세력과 이념이 변화하는 가운데 중소지주 출신의 지식인들이 성리학적 이념 실현을 목표로 구현한 정치형태였다.

 안향(安珦, 1243년(고종 30)∼1306년(충렬왕 32))은 경상북도 흥주(興州: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 출신.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사온(士蘊), 호는 회헌(晦軒). 초명은 유(裕)였으나 뒤에 향(珦)으로 고쳤다. 조선 시대에 들어와 문종의 이름이 같은 글자였으므로, 이를 피해 초명인 유로 다시 고쳐 부르게 되었다. 회헌이라는 호는 만년에 송나라의 주자(朱子)를 추모하여 그의 호인 회암(晦庵)을 모방한 것이다. 아버지는 밀직부사부(孚)이며, 어머니는 강주 우씨(剛州禹氏)로 예빈승(禮賓丞) 성윤(成允)의 딸이다. 우리나라에 성리학을 최초로 도입하였다.

 이제현(李齊賢, 1287년∼1367년)은 고려 후기의 시인·문신·성리학자·역사학자·화가이다. 초명은 지공(之公), 자는 중사(仲思), 호는 익재(益齋), 역옹(櫟翁), 실재(實齋)이고, 시호는 문충(文忠)이며, 본관은 경주(慶州). 검교정승(檢校政丞) 이진(李瑱)의 아들이다.

과거에 급제한 후 연경궁녹사(延慶宮錄事), 예문춘추관(藝文春秋館), 사헌부규정(司憲府糾正)을 거쳐 1319년 충선왕의 초빙으로 원나라로 건너가 만권당(萬卷堂)에서 연구하였으며, 충선왕이 모함을 받고 유배되자 그 부당함을 원나라에 간하여 1323년 석방되게 했다. 1320년 단성익찬공신(端誠翊贊功臣)에 책록(策錄)되었고, 그 뒤 밀직사(密直司), 정당문학(政堂文學), 삼사사(三司使) 등을 거쳐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에 봉작되었고, 1357년 문하시중에 올랐으나 기철(奇轍, ?∼1356년) 등 친원파 암살 사건을 중재하려다가 실패하였다. 이후 사직하고 은퇴,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 저술에 몰두하였다.

고려 초기의 유학자이자 성리학자이며, 공민왕의 후궁 혜비 이씨의 친정아버지였다. 고려 말 신진사대부와 조선의 사림파의 학문적 선조로서, 성리학을 들여와 발전시켰으며, 그의 문하생 목은 이색(牧隱 李穡, 1328년∼1396년)은 후일 정도전, 조준, 남은, 정몽주, 길재로 학파가 나뉘게 된다. 그림과 서예에도 능하여 그림과 서예작도 남겼고, 평론서인 역옹패설(櫟翁稗說) 등과 많은 산문, 시문 등을 남겼다. 백이정(白頤正, 1247년∼1323년), 권부(權溥, 1262년∼1346년)의 문인이다.

 

 고려말의 급진개혁파(急進改革派)

 정도전(鄭道傳, 1342년∼1398년)은 조선 초기 성리학자의 한사람이며, 자는 종지(宗之). 호는 삼봉(三峯, 三峰), 조선 사회에 성리학을 정착, 국교화시키는 데 공을 세웠다. 신덕왕후 강씨와 함께 세자 책봉에 공을 들였던 정도전은 제1차 왕자의 난 이후 조정에서 철저히 배격되었다. 태종은 그를 역적으로 만든 뒤 정몽주를 추상(推尙)하였으며, 이후 그는 포은 정몽주와 달리 역적으로 매도되어 오다가 고종 때 복권되었다.

 조준(趙浚, 1346년∼1405년)은 고려 말기와 조선 초기의 문신(文臣), 시인(詩人), 무신(武臣), 정치가(政治家) 제1차 왕자의 난에 협조하여 그 일파를 제거하는 데 앞장섰다. 조선 시대 초기를 통하여 그는 도통사·문하우시중·좌정승 등을 거쳐 1403년 음력 7월 16일 영의정부사가 되었다. 조선 태종 이방원은 조준을 가리켜 항상 조정승이라 칭하고 이름을 부르지 않았으며, 그의 아들 조대림은 경정공주와 혼인하여 평녕군(平寧君)에 봉해지는 등 왕실의 총애를 받으며 권세를 누렸다. 시문에 능하였고 1397년(태조 6년) 하윤(河崙) 등과 함께 《경제육전(經濟六典)》을 편찬하였다.

 권근(權近, 1352년∼1409년)은 고려 말 조선 초의 학자·문신이다. 본관은 안동(安東), 초명은 진(晉), 자는 가원(可遠)·사숙(思淑), 호는 양촌(陽村),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이색, 정몽주의 문인이다. 그가 지은 《입학도설(入學圖說)》은 한국 최초로 그림을 넣어 학문을 설명한 책으로 후에 이황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그는 이색 밑에서 학문을 배웠으며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고 문장에 능하였으며, 경학(經學)과 문학의 양면을 잘 조화시켰다.

 

 고려말 온건개혁파(穩健改革派)

 정몽주(鄭夢周, 1338년∼1392년)는 고려 말기의 문신. 역성혁명에 반대하다가 이성계, 정도전 일파를 제거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오히려 이방원 일파에 피살되었다. 암살 직후 역적으로 단죄되었으나, 후에 1401년(태종 1년) 태종의 손에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부사에 추증(追贈)되고, 익양부원군(益陽府院君)에 추봉되었다.

 길재(吉再, 1353년∼1419년)는 고려후기의 문신이자 고려 말 조선 초의 성리학자. 조선이 건국된 후인 1400년(정종 2년)에, 전부터 친하게 지내던 세자 이방원이 그에게 태상박사의 벼슬을 내렸으나, 두 왕조를 섬길 수 없다 하여 거절하고 고향인 경상북도 선산(善山)에서 후학 양성에 힘썼다. 세종이 즉위하던 해인 1419년에 6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문하에 김숙자(金叔滋), 배인경(裵仁敬), 최운룡(崔雲龍) 등의 문하생을 길러냈다. 그의 성리학은 김숙자, 최운룡, 김종직, 김굉필, 조광조 등에게 이어졌다.

 이색(李穡, 1328년∼1396년 경상북도 영해군)은 고려 말기의 문신이자 정치가이며 유학자, 시인이다. 본관은 한산(韓山)이고, 자는 영숙(潁叔), 호는 목은(牧隱),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성리학을 고려에 소개, 확산시키는 역할을 하였으며 성리학을 새로운 사회의 개혁, 지향점으로 지목하였다.

찬성사(贊成使) 이곡(李穀)의 아들이며, 이제현의 제자로서 그의 문하에서 성리학자들은 다시 역성 혁명파와 절의파로 나뉘게 된다. 정도전, 유창(劉敞) 등의 스승이었다. 이성계 일파의 역성혁명에 부정적으로 보고 협조하지 않다가 의문의 최후를 맞이한다. 그는 이종학(李種學)의 아버지이고 박상충(朴尙衷)의 손윗 처남이며 박은(朴誾)의 외숙부이고 고려 말 삼은(三隱)의 한 사람이다.

 

 계유정난(癸酉靖難, 1453년 단종 1년)은 세종(世宗)의 뒤를 이은 병약한 문종(文宗)은 자신의 단명(短命)을 예견하고 영의정 황보인(皇甫仁, 1387년∼1453년), 좌의정 남지(南智, 1392∼1454), 우의정 김종서(金宗瑞, 1383년∼1453년) 등에게 자기가 죽은 뒤 어린 왕세자가 등극하였을 때, 그를 잘 보필할 것을 부탁하였다. 세 사람 중 남지는 병으로 좌의정을 사직하였으므로 그의 후임인 정분(鄭笨, 1394년∼1454년)이 대신 당부를 받았다.

그러나 수양대군(首陽大君)은 1453년 문종의 유탁(遺託)을 받은 삼공(三公) 중 지용(智勇)을 겸비한 김종서의 집을 불시에 습격하여 그와 그의 아들을 죽였다. 이 사변 직후에 수양대군은 ‘김종서가 모반하였으므로 주륙(誅戮)하였는데, 사변(事變)이 창졸(倉卒)간에 일어나 상계(上啓)할 틈이 없었다.’고 사후에 상주(上奏)하였으며, 곧이어 단종의 명이라고 속여 중신을 소집한 뒤, 사전에 준비한 생살(生殺)계획에 따라 황보인, 이조판서 조극관(趙克寬), 찬성 이양(李穰) 등을 궐문(闕門)에서 죽였으며, 좌의정 정분과 조극관의 동생인 조수량(趙遂良) 등을 귀양 보냈다가 죽였으며, 수양대군의 친동생인 안평대군이 ‘황보인·김종서 등과 한패가 되어 왕위를 빼앗으려 하였다.’고 거짓 상주하여 강화도로 귀양을 보냈다가 후에 사사(賜死)하였다.

수양대군은 10월 10일의 정변으로 반대파를 숙청한 후 정권을 장악하였는데, 그는 의정부영사와 이조 ·병조 판서, 내외병마도통사(內外兵馬都統使) 등을 겸직하였고, 정인지(鄭麟趾)를 좌의정, 한확(韓確)을 우의정으로 삼았으며, 집현전(集賢殿)으로 하여금 수양대군을 찬양하는 교서(敎書)를 짓게 하는 등 그의 집권태세를 굳혀갔다.

이 정변이 계유(癸酉)년에 일어났으므로 이를 계유정난(癸酉靖難)이라 하는데, 이 사건에 공이 있다 하여 수양대군·정인지·한확·이사철(李思哲)·박종우(朴從愚)·이계전(李季甸)·박중손(朴仲孫)·김효성(金孝誠)·권람(權擥)·홍달손(洪達孫)·최항(崔恒)·한명회(韓明澮) 등 37명은 정난공신(靖難功臣)이 되었다.

 

 관학파(官學派)는 훈구파(勳舊派)와 같은 의미로 혼용되기도 하지만 엄밀하게 말하자면 관학파가 훈구파보다 넓은 개념이다. 훈구파는 세조의 집권과 즉위 과정에서 찬위(簒位)를 도와 공신이 되면서 성종대까지 정치적 실권을 장악한 정치세력을 뜻하는 말이다. 반면에 관학파는 사상적으로나 정치적으로 훈구파와 일치되는 경향을 보이지만 시기적으로 세조 이전까지도 포함된다. 사상적으로 볼 때 관학파에 속하는 인물들 역시 나중에 등장하는 사림파 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주자학(朱子學)에 그 기반을 두고 있었지만, 주희(朱熹) 이전의 성리학(性理學)적 경향에 보다 가까웠다. 그 때문에 그들의 사상에는 어느 정도 탄력성이 있었으며, 일정 부분은 주자학으로부터 일탈되어 있었다. 또한 정치적으로는 사회통치 방법론으로서 부국강병책과 중앙집권화 정책을 지향하였으며, 따라서 실용주의적 경향도 많이 띠고 있었다.

 한명회(韓明澮, 1415년∼1487년)는 조선 시대 전기의 문신, 군인, 정치인이며 외척이다. 본관은 청주, 자(字)는 자준(子濬), 호는 압구정(狎鷗亭)·압구(狎鷗)·사우당(四友堂)이며, 별칭은 칠삭동이, 시호는 충성(忠成)이다. 두 딸은 예종비 장순왕후(章順王后)와 성종의 정비 공혜왕후(恭惠王后)이다. 세조의 최측근이자 책사로, 세조로부터 나의 장량(張良)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수양대군의 책사로 계유정난을 주도하여 수충위사협책정난공신(輸忠衛社協策靖難功臣)이 되고, 수양대군을 왕으로 즉위시키는 데 기여하여 동덕좌익공신(同德左翼功臣)이 되었다.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그 때문에 과거에 번번이 실패해 38세가 되던 1452년에야 겨우 문음(門蔭)으로 경덕궁직(敬德宮直)이 되었다. 1456년 사육신(死六臣) 등의 단종 복위 운동을 사전에 적발하여 좌절시키고, 사육신과 관련자들의 처벌에 가담하였다. 병조판서로 있으면서 여진족의 토벌과 북방의 수비를 견고하게 하는데 공을 세웠다. 1466년과 1469년∼1471년, 1474년∼1475년 세 번 의정부 영의정을 역임했으며 1457년 상당군(上黨君)에 봉군되고 1461년 진봉하여 상당부원군이 되었다. 만년에는 권신이자 외척으로서 정권을 장악하였으나 명나라 사신을 사사로이 접대한 일로 삭탈 당하였다.

 

 훈구파(勳舊派)-조선 초기 세조 때 이후 공신세력을 중심으로 형성된 관료집단을 이르는 말로 훈구파란 성종 때 이후 등장한 신진 정치세력인 사림파(士林派)에 대비되는 용어로서 오랜 기간 왕 옆에서 관리로 있으면서 공을 많이 세웠다는 의미의 일반 용어였으나 세조의 왕위찬탈 과정에서 공을 세워 정치권을 장악한 정치집단을 이르는 용어로 정착되었다. 관학파라고도 한다. 이 세력들은 새 왕조의 문물제도를 정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여 큰 업적을 남겼고, 실용적인 학문에 능하였으며, 편찬사업에 종사하여 많은 서적을 편찬하기도 하였으나 학문적으로는 사장(詞章)에 치중하여 성리학 본연의 철학적인 면은 소홀하였다.

어린 단종으로부터 선양의 형식을 빌어 왕위에 오른 세조는 사육신의 단종복위사건(端宗復位事件)이나 금성대군(錦城大君, 1426년∼1457년)의 역모사건 등의 시련을 거치면서 자신의 정권교체에 공을 세운 인물들을 중심으로 왕권 강화를 추진하였다. 1453년의 정난공신(靖難功臣)과 1455년의 좌익공신(佐翼功臣)에 오른 한명회(韓明澮)⋅권람(權擥)⋅정인지(鄭麟趾)⋅신숙주(申叔舟)⋅정창손(鄭昌孫)⋅최항(崔恒)⋅구치관(具致寬) 등은 국가로부터 공신전(功臣田)과 과전(科田)을 부여받아 대토지를 소유하는 경제적 기반을 마련했으며, 정부의 요직인 의정부 정승과 판서 등 요직을 독점하면서 인사권과 병권(兵權)을 바탕으로 강력한 정치세력으로 부상하였다. 훈구파의 대표적인 인물인 한명회는 직전과 공신전 등을 합하면 총 820결, 신숙주는 690결, 정인지는 570결의 토지를 지급받았다.

이들은 1467년 세조 말년 발생한 이시애의 난(李施愛-亂) 때 공을 세워 공신으로 등장한 신진 세력인 남이(南怡) 등에게 한 때 정치적 도전을 받았으나, 유자광(柳子光)의 고발로 남이가 제거된 이후에는 더욱 정치 권력화가 강화되면서 권귀화(權貴化, 권세가 있는 귀족)되었다.

나이 어린 성종이 즉위한 이후 세조 비(妃) 정희왕후(貞熹王后, 1418년∼1483년)에 의해 섭정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훈구세력의 권력독점은 보다 강화되었고, 1471년(성종 2) 이루어진 좌리공신(佐理功臣, 임금을 잘 보필하고 정치를 잘한 공신) 책봉과정에서는 더욱 많은 수의 훈구세력이 양산되었다. 이들 가운데는 왕실과의 혼인을 통해 외척으로 성장한 인물들도 다수 존재하며, 훈구세력 가문들끼리의 결혼을 통해 자신들의 권력을 보다 강화하여 나갔다. 그리하여 정치 권력의 비대화와 집중화 경향을 보이면서 세습적 지위를 확보해갔다.

이들은 왕권 강화를 추진한 성종에 의해 등용된 사림세력의 도전을 받으면서 정치적⋅경제적으로 대립 국면을 조래하였고, 그 결과 조선 중기 사화(士禍)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 권람(權擥, 1416년∼1465년)은 조선 초의 문신, 역사학자, 작가, 문인이다. 자(字)는 정경(正卿), 호는 소한당(所閑堂) 또는 소한당(所閒堂), 후주당(後週堂)이다. 본관은 안동(安東)으로 권근의 손자이다. 남이(南怡)와 신승선(愼承善)이 그의 사위다. 부모의 이혼으로 불우한 청년기를 보내다가 한명회와 교유했고, 그를 통해 신숙주 등을 소개받고 수양대군의 측근이 되었다.

1450년(문종 즉위년)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사헌부감찰을 지냈으며, 그 이듬해에는 수양 대군과 함께 《역대병요(歷代兵要)》를 편찬하였다. 1453년(단종 1년) 김종서를 몰아낼 때 앞장섰던 공으로 정난공신 1등관으로 녹훈되고, 승정원 우부승지에 특진되었다. 1455년 세조 즉위 후, 수충위사협책정난동덕좌익공신(輸忠衛社協策靖難同德佐翼功臣) 1등관으로 이조 참판 길창군이 되었고, 1458년(세조 4년)에는 수찬관으로 신숙주 등과 함께 《국조보감(國朝寶鑑)》을 편찬하는데 참여하였다. 그는 활을 잘 쏘았을 뿐만 아니라 문장에도 뛰어났으나, 횡포가 심하고 많은 축재를 하여 여러 번 탄핵을 받았다. 우찬성과 좌찬성,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이르렀으며 길창부원군(吉昌府院君)으로 진봉되었다.

5촌 당조카딸 권영금이 백촌(白村) 김문기(金文起)의 며느리로서 사육신 사건 이후 노비가 되었으나 자신이 권영금을 분배받는 형태로 하여 노비 신세를 면하게 하였다. 그러나 다른 친척인 단종의 후궁 소의 권씨의 재산을 차지하여 비난을 받기도 했다. 태종의 외손자 남이(南怡) 장군과, 훗날 연산군의 처남이자 중종의 장인이 되는 신수근(愼守勤)이 모두 그의 사위였다. 시호는 익평(翼平)이다. 한상환(韓尙桓), 류태재(柳泰齋)의 문인이다.

 정창손(鄭昌孫, 1402년∼1487년)은 조선시대 전기의 문신, 언어학자, 유학자이다. 집현전 학사의 한사람이었으며 훈민정음 창제 당시 훈민정음에 반대한 집현전 학사의 한사람이었다. 1456년 수충경절좌익공신(輸忠勁節佐翼功臣), 1468년(예종 1년) 익대공신(翊戴公臣), 1471년(성종 2년) 좌리공신(佐理公臣) 등에 세 번 녹훈되었다. 봉원군(蓬原君)에 봉군되었다가 1456년 봉원부원군(蓬原府院君)으로 진봉됐다.

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 학사가 되었고, 1449년 부제학으로 춘추관 편수관, 수사관(修史官)을 겸직하며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세종실록(世宗實錄)》, 《치평요람(治平要覽)》 편찬에 참여하고 세 번 과거에 합격했다. 1443년 집현전교가 되었는데 재직 중인 이듬해 한글의 제정을 반대하다가 파직, 투옥되었다가 풀려났고 1446년에는 세종이 불경(佛經)을 간행하려 하자, 왕실의 불교 숭상을 강력히 반대하다 다시 좌천되었다.

계유정난(癸酉靖難, 1453년)과 세조 반정에 협력하였으며, 사위인 김질이 사육신과 세조 제거에 가담한 것을 설득하여 고변하게 했다. 익대 공신 2등에 녹훈되었고, 1468년에는 남이의 옥사를 다스린 공로로 좌익공신이 되었으며 1471년에는 성종의 즉위를 지지한 공로로 좌리공신 2등에 책록(冊錄)되었다. 익대공신 3등에 책록되고 1469년 원상, 1471년 좌리공신 2등에 책록되었으며 궤장을 하사받았다. 1458년부터 1459년 1461년부터 1462년, 1475년부터 1485년 의정부 영의정을 지냈다.

관직은 대광숭록대부 영의정 부사에 이르렀다. 사후 청백리에 녹훈되었다. 광해군과 인조 때의 청백리 이원익의 외가 선조이기도 하다. 본관은 동래이고, 자는 효중(孝仲), 호는 동산(東山)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 구치관(具致寬, 1406년∼1470년(성종 1년))은 조선 초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능성(綾城)이고, 자는 이율(而栗), 시호(號)는 충렬(忠烈)이다.

1429년(세종 11년)에 생원시에 급제했다. 1434년(세종 16년)에 문과에 급제, 승문원정자, 예문관검열, 예조정랑, 호조좌랑 등을 지내고 동부승지, 좌승지, 이조참판, 예조참판, 병조참판을 거쳐 도승지, 대사헌을 지내고 우의정을 지냈다. 1466년(세조 12년)에는 영의정을 지내게 된다. 그리고 다시 호조판서, 병조판서, 이조판서, 예조판서도 겸임하였다. 1467년 건주위 토벌에 출정하여 공을 세워 그해 12월 군공 3등(軍功三等)에 녹훈되었다.

 

 집현전(集賢殿)은 정이품아문으로, 고려 말 조선 초의 학문 연구 및 국왕의 자문 기관이자, 왕실 연구기관이다. 중국에서는 한나라·위나라 이래 설치되어, 당나라 현종(玄宗) 때 완비된 기관으로서 이곳에 학사(學士)를 두어 경적(警籍)의 간행과 서적의 수집 등을 맡아 보게 하였다. 우리나라에도 옛날부터 이 제도가 수입되어 많은 영향을 끼쳤으나, ‘집현전(集賢殿)’이란 명칭이 사용된 것은 1136년(고려 인종 14)에 연영전(延英殿)을 집현전(集賢殿)이라 개칭한 데서 비롯한다. 그러나 고려 때와 조선의 건국 초기까지에도 별다른 활동은 없었다.

1356년(공민왕 5년) 고려 공민왕이 집현관과 우문관을 없애고, 수문전(修文殿)·집현전(集賢殿) 학사를 두었다고 한다. 이후에도 간간이 폐하고, 다시 설치하던 것을 조선 세종 2년(1420년)에 확대·개편하였다. 이전까지는 관청도 없고, 직무도 없었으나 이때부터 청사를 가지고, 경전과 역사의 강론과 임금의 자문을 담당하였다. 이후에 1456년(세조 2년) 단종 복위 운동을 한 사육신을 비롯한 반대파 인물이 집현전에서 많이 나왔으므로 음력 6월 6일에 집현전을 파하고 경연을 정지시키면서, 집현전에 소장한 책을 예문관에서 관장하게 하였다. 그러나 문신들이 벼슬에만 욕심을 내고 공부를 게을리 하는 폐단이 생겨서 1459년(세조 5년) 이후 3품 이하의 문신으로서 젊고 총명한 사람을 뽑아 예문관의 관직을 겸임시켜 연구하게 하였으나 별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한편 1460년(세조 6년) 음력 5월 22일에는 이조에서 사관 선임 규정을 강화하고, 경연·집현전·보문각 등은 직함이 비고 직임이 없으니 혁파하기를 청하였으므로 윤허하였다. 이로써 집현전은 완전히 폐하게 되었다. 1478년(성종 9년) 음력 3월 19일 집현전에 의거해서 예문관 부제학 이하의 각원을 홍문관(弘文館)의 관직으로 옮겨 임명하게 하여 예문관을 분리·개편하였다. 대우를 극진히 하였으나 세종 때의 집현전에는 따르지 못하였다.

 성삼문(成三問, 1418년∼1456년)은 조선 전기의 문신·학자로서, 사육신의 한 사람이다. 세종대왕을 도와 집현전에서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하였고, 단종 복위 운동을 추진하였다. 자는 근보(謹甫)·눌옹(訥翁), 호는 매죽헌(梅竹軒), 시호는 충문(忠文), 본관은 창녕이다. 성승(成勝)의 아들이며, 성달생의 손자이다. 생원으로 1438년 과거에 급제하여 집현전 학사의 한사람으로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했고, 1447년 중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1450년 어린 세손을 부탁한다는 세종의 유지를 받들다가 세조 찬위 이후 단종 복위 운동을 주관하였으나, 신숙주, 정인지 등이 세조의 편에 서고 김질 등이 밀고함으로써 실패하고 만다.

그는 세종이 훈민정음을 만들 때 신숙주와 함께 당시 요동에 귀양와 있던 명나라의 한림학사 황찬(黃瓚)을 13회나 찾아가 왕래하며 그로부터 정확한 음운(音韻)과 언어 연구를 배워오고, 명나라 사신을 따라 명나라에 가서 음운과 교장(敎場)의 제도를 연구하는 등 1446년 훈민정음 반포에 기여하였다.

 이개(李塏, 1417년∼1456년)는 조선시대 전기의 학자이자 관리이며, 성삼문, 신숙주 등과 함께 훈민정음의 창제에 참여하였다. 또한 사육신 중의 한 사람이기도 하다. 본관은 한산(韓山)이며, 자는 청보(淸甫) 또는 백고(伯高), 호는 백옥헌(白玉軒)이다. 고려시대 말기의 학자 목은 이색의 증손자이다. 토정비결의 저자 토정 이지함은 그의 종증손이고, 조선 중기의 동인, 북인의 당수 아계 이산해는 그의 종고손이 된다.

 박팽년(朴彭年, 1417년∼1456년)은 조선 전기의 문신 겸 학자로 사육신의 한 사람이다. 본관은 순천(順天). 자(字)는 인수, 호는 취금헌(醉琴軒),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의 학사로 활동했고, 관직은 형조 참판에 이르렀다. 손자 박일산이 생존하여 사육신 중 하위지가와 함께 후손이 전한다. 중종 때의 권신 박원종(朴元宗)의 일족이기도 하다.

 하위지(河緯地, 1412년∼1456년)는 조선시대의 전기의 문신, 정치인, 학자이며 조선 단종 때 사육신의 한 사람이다. 세종 때의 학자로 최만리(崔萬理), 정창손(鄭昌孫) 등과 함께 훈민정음 창제에 반대하였다.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은 예조판서에 이르렀다. 단종이 숙부 수양대군의 측근들에 의해 강압을 받아 양위하자, 성승, 유응부, 성삼문, 김질 등과 함께 세조 3부자를 타살하고 단종 복위를 거사했다가 회유 또는 실패를 예상한 성균관사예(成均館司藝) 김질(金礩, 1422년∼1478년)의 밀고로 발각되어 처형당했다. 세조는 그의 재능을 아까워하여 친히 국문을 하면서도 여러 번 그에게 회유를 권고하였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자(字)는 천장(天章), 중장(仲章), 호는 단계(丹溪), 적촌(赤村), 연풍(延風)이다. 시호는 충렬(忠烈)이며, 본관은 진주(晋州). 사육신 중 박팽년과 함께 후손이 전한다.

 정인지(鄭麟趾, 1396년∼1478년)는 조선 초기의 문신·성리학자이며 한글학자, 역사가, 정치인이다. 본관은 하동, 자는 백저(伯雎), 호는 학역재(學易齋)이다.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성리학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고려사, 고려사절요 등을 정리, 편찬하였고 용비어천가의 작곡자의 한사람이기도 하다.

포은 정몽주의 학통을 사사하고, 1414년(태종 14년) 문과에 급제하여 세종 때 집현전 대제학으로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하였다. 1424년 집현전관(集賢殿官)에 선발된 뒤 집현전에서 근무하며 훈민정음 연구에 참여하였고 1448년 이조판서가 되어 삼남 지방에 토지 등급을 정했다.

1452년부터 1454년까지 《세종실록(世宗實錄)》의 편찬과 감수를 맡았으며, 세조를 지지하여 계유정난(癸酉靖難), 세조반정 등에 적극 동조하였다. 1453년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주도한 계유정난에 협력한 공로로 특별승진하여 좌의정에 발탁되고, 정난공신(靖難功臣) 1등에 책록 되면서 하동부원군(河東府院君)에 봉군되었다. 1455년(세조 1) 영의정부사에 승진하고 세조 반정을 지지한 공로로 좌익공신(左翼功臣) 2등에 책록(策錄) 되었다.

1455년부터 1458년까지 영의정부사를 지냈으며, 역사와 고전에도 능하여 《고려사(高麗史)》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의 편찬과 감수, 《태조실록(太祖實錄)》의 수정에도 참여하였다. 1468년, 예종 때 한명회, 신숙주 등과 함께 남이·강순의 옥사를 다스린 공으로 익대 공신(翊戴功臣) 3등관이 되고, 예종 사후 원상으로 서정을 주관하다 의경세자(懿敬世子)의 차남 자을산군(者乙山君)을 지지한 공로로 좌리공신(佐理功臣) 2등에 책록되었다. 그의 장남 정현조(鄭顯祖)는 세조의 사위였고, 손자 정승충(鄭承忠)은 세조의 서자 덕원군(德源郡)의 사위가 되어 이중으로 사돈관계를 형성하였다. 증손녀 하동부대부인(河東府大夫人 鄭氏, 1522년∼1567년)은 선조의 생모가 된다. 또한 중종의 후궁 희빈 홍씨의 외증조부가 되기도 하다. 권우(權遇)의 문인이다.

 최항(崔恒, 1409년∼1474년)은 조선의 문신이자 학자이다. 자(字)는 정부(貞父), 호(號)는 태허정(太虛亭), 동량(㠉梁), 시호(諡號)는 문정(文靖)이며, 본관은 삭녕(朔寧)이다.

1434년(세종 16년) 알성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집현전 부수찬이 되었다. 1443년에는 집현전 학사로 정인지 등과 《훈민정음(訓民正音)》을 한글로 옮겨 풀었으며,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에 주를 달아 풀이하였다.

1453년(단종 1년) 승지로 있을 때, 절재 김종서를 제거한 수양대군을 맞이하여, 단종에게 보고한 공으로 정난공신 1등에 책록되었다. 이듬해에 이조참판이 되어 《공신연곡(功臣宴曲)》 4장을 지어 바쳤다.

1455년(세조 1년) 좌익(左翼) 공신 2등에 책록되고 공조 판서에 승진하였으며, 1459년(세조 5년) 《육전(六典)》의 편찬을 비롯하여 《관음현상기(觀音現相記)》, 《십이준도(十二駿圖)》 등을 찬하였고, 중추원사로 《명황계감(明皇誡鑑)》의 가사(歌詞)를 한글로 번역하는 한편, 《동국통감(東國通鑑)》을 찬수하였으며, 신숙주 등과 같이 《어제유장설(御製諭將說)》 3편을 주해하였다. 1464년(세조 10년) 좌찬성으로 어제구현재시(御裁求賢才試)에 1등으로 합격하고 가자(加資, 정삼품(正三品) 통정대부(通政大夫) 이상의 품계(品階)로 추천하는 일)를 받았으며, 《병장설주(兵將說注)》를 산정(刪定)하였다. 1466년에 우의정·좌의정을 지냈으며 영의정에 이르러 영성군(寧城君)이 되었으며, 《소학(小學)》, 《주역구결(周易口訣)》, 《예기구결(禮記口訣)》 등을 정하고 세조의 행장을 초집하였다. 1467년에 영의정에 이르렀으며 이듬해 영성부원군에 봉해졌다.

한편 1461년(세조 7년)에는 왕명으로 《경국대전(經國大典)》 편찬에 착수하여 조선 초기의 법률과 제도를 집대성하였다. 1469년(예종 1년) 상정소제조(詳定所提調)로서 《경국대전(經國大典)》을 찬수하였으며, 1471년(성종 2년) 좌리(佐理) 공신의 호를 받고 좌의정이 되어 《세조실록(世祖實錄)》, 《예종실록(睿宗實錄)》을 찬수하였다.

 강희안(姜希顔, 1419년∼1464년)은 조선의 명신이며 서예가, 화가, 시인이다. 자는 경우, 호는 인재(仁齋), 본관은 진주이다. 심온(沈溫)의 외손자이자 소헌왕후의 조카로 세종은 그의 이모부이며 문종, 세조 등은 사촌이다. 친동생으로 강희맹이 있으며 또다른 사촌으로 노사신(盧思愼), 박중선(朴仲善) 등이 있다.

1441년(세종 23년) 문과 식년시에 정과 13등위로 급제하여 집현전 직제학 등을 지냈으며, 그림에 능했을 뿐 아니라 글씨도 잘 썼다. 세종이 옥새의 글씨를 맡길 정도로 당시에 그를 따를 만한 사람이 없었다.

세조 때에는 사육신 사건에 연좌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하기도 하였으나, 성삼문이 그의 뛰어난 재능을 아낀 나머지 변호해 주어 목숨만은 건졌다. 만년에는 시·서·화로 소일하였으나 천기(賤技)라 하여 타인의 청에는 응하지 않았다 한다. 그는 집현전에서 신숙주, 성삼문, 정인지 등과 함께 훈민정음에 대한 해석을 붙이는 일에 직접 참여하였으며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에 대한 주석을 붙이는 일에도 참여하였다. 그는 시·글씨·그림의 3절로서 이름이 높았다. 대표작으로 《고사관수도(高士觀水圖)》가 있으며, 저서로 《청천양화소록(菁川養花小錄)》이 있다.

 신숙주(申叔舟, 1417년∼1475년)는 조선 전기의 성리학자·문신·정치가이며 언어학자, 외교관이다. 본관은 고령(高靈), 자(字)는 범옹(泛翁), 호는 희현당(希賢堂) 또는 보한재(保閑齋)이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신장(申檣)의 아들이자 윤회의 손녀사위이기도 하다.

1438년(세종 20년) 생원, 진사시에 모두 합격하고 1439년(세종 21년) 친시문과(親試文科)에 급제하여 세종 때 집현전의 학사로서 성삼문, 박팽년, 정인지 등과 함께 훈민정음의 창제와 연구에 기여하였다. 1447년(세종 29년) 문과 중시(重試)에 4등으로 합격하여 당상관이 되었으며, 이후 계유정난과 세조반정을 적극 지지하였고, 세조의 최측근으로 활약했다. 문신의 신분이었으나 병력을 이끌고 여진족과 왜구 토벌에 여러 번 출정하였으며 1461년부터 1464년, 1471년부터 1475년까지 의정부영의정을 역임했다.

사육신과 함께 세종의 유언을 받들어 단종을 보필하기로 약속했으나 변절하여 수양대군(세조로 즉위)의 편에 가담하였다. 단종 복위 운동 실패 후 단종과 금성대군의 처형을 강력히 주장하여 관철시켰으며, 남이의 옥사 때 남이의 처형에도 적극 참여하여, 사후 사림파 도학자들로부터 비판과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1910년(융희 4년) 이후 그의 한글 창제에 대한 공적 재조명 여론이 나타났으며, 1980년대 이후부터 그에 대한 재평가 노력이 진행되었다.

뛰어난 학식과 글재주로 6대 왕을 섬겼고,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국조보감(國朝寶鑑)》, 《동국정운(東國正韻)》 등의 편찬에도 참여하였으며, 농업과 축산업 기술에 대한 서적인 《농산축목서》를 편저하였다. 생전에 정난공신, 좌익공신, 익대공신, 좌리공신 등 4번 공신에 책록되었다. 사육신과 생육신 김시습(金時習), 그 밖에 한명회(韓明澮), 권람(權擥) 등 다양한 인맥을 형성한 인물이기도 하다. 윤회(尹淮), 정인지(鄭麟趾)의 문인이다.

 

 사육신(死六臣)과 생육신(生六臣)

1456년 세조 2년 6월 창덕궁에서 명나라 사신을 향응하는 기회를 타서 거사하기로 하였으나 계획이 어긋나자 김질·정창손 등은 사태가 불리하자 거사를 밀고하였다. 세조는 곧 성삼문 등에게 참혹한 고문을 가했으나 모두 굴하지 않았으므로 성삼문·박팽년·유응부·하위지등은 거열형에 처해져 찢겨져 죽었고 유성원은 자기 집에서 자살한 후 역시 거열형을 당했다. 이들을 사육신이라 부르며, 이에 연루된 자로 권자신·김문기 등 70여 명도 모두 처벌되었다.

사육신(死六臣)은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세조에게 죽임을 당한 여섯 명의 신하를 이르는 말이다. 사육신과 생육신 등의 신하들을 통칭하여 다른 훈구파와 구별하여 따로 절의파(節義派)로 부르기도 한다. 이들의 시신은 노량진 근처에 매장되어 있다.

사육신이 세조와 덕종, 예종 삼부자를 연회장에서 척살할 계획으로 유응부, 성승, 하위지를 별운검(別雲劍)으로 세조 3부자의 뒤에 세웠다가 3부자의 목을 벨 계획을 세웠으나, 거사 동조자 중 김질(金礩, 1422년∼1478년)이 장인 정창손의 설득으로 거사를 폭로함으로써 실패로 돌아간다. 단종복위운동의 실패로 관련자 500∼800여명이 처형, 학살되었으며, 사육신 중 현재 박팽년과 하위지만이 직계 후손이 전한다. 그밖에 사육신 가문의 가까운 친인척 중 살아남은 인물은 이개(李塏)의 종증손인 토정비결(土亭秘訣)의 저자 이지함(李之菡, 1517년∼1578년)이고 종고손은 북인당수 이산해(李山海, 1539년∼1609년)였다. 생육신의 한사람인 성담수가 사육신 성삼문의 6촌 동생이었다.

사육신 가문의 여성들은 공신들의 종과 노리개, 첩으로 분배되었으며 권영금 같은 이는 권람의 친족인 덕에 욕을 모면하였다. 사육신은 성종 때부터 도학을 좇는 분위기가 나타나 동정의 대상이 되다가 숙종 때부터 영조 때 노론 강경파들에 의해 복권되었다.

1456년(세조 2년)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가 죽은 사육신(死六臣)에 대칭하여 생육신(生六臣)이라 하였다. 곧 김시습(金時習)·원호(元昊)·이맹전(李孟專)·조려(趙旅)·성담수(成聃壽)·남효온(南孝溫)을 말한다. 이들은 세조 즉위 후 관직을 그만두거나 아예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세조의 즉위를 부도덕한 찬탈행위로 규정하고 비난하며 지내다 죽었다. 중종반정 후 사림파가 등장, 사육신에 대한 새로운 평가가 나오게 되면서 이들의 절의 또한 새로운 평가를 받게 되었다.

 

 사림파(士林派)의 동서분당(東西分黨)은 조선 선조 8년(1575년)에 사림(士林)이 동서(東西)로 분열한 사건이다. 이조전랑(吏曹銓郞) 자리 문제를 놓고 신진 사류 김효원(金孝元)을 지지하는 일파와 명종 왕후의 아우 심의겸(沈義謙)을 지지하는 일파 사이 반목ㆍ대립에서 비롯했다. 이 논쟁이 점차 확대되어 결국 사류(士類)가 두 패로 나뉘게 되었다.

김효원 집이 도성 동쪽 낙산 밑에 있었기 때문에 그 일파를 동인(東人)이라 하였고, 심의겸 집은 도성 서쪽 정동에 있었기 때문에 그 일파를 서인(西人)이라 부르게 되었다. 사림(士林)은 전원의 산림(山林)에서 유학을 공부하던 문인·학자로서 15세기 이후 조선 중기 중앙 정계를 주도한 정치집단이다. 고려 말기의 유학자 길재(吉再)가 은퇴하여 고향에서 후진 양성에 힘쓴 결과 영남 일대는 그의 제자가 많이 배출되어 조선 유학의 주류를 이루었으며, 훈구파에 대립하여 사림파(士林派)라고 불리기도 한다. 또한 사림은 유림이라고도 불리기도 한다. 온건파 사대부를 계승했다.

길재의 제자 김숙자와 그의 아들 김종직은 영남 유학의 사종(師宗)으로, 그의 문하에서 김굉필·정여창·김일손 등이 배출되어 성종 때에는 중앙의 정치무대에 대거 등장했다. 이들을 사림파라 하는데, 관학자들과는 학문의 경향을 달리하고 있었으며, 주로 삼사(三司) 계통에서 언론문필을 담당하였다. 이들은 대개 유교의 이상 정치 실현을 위해 노력하였는데, 종래부터 정계에 뿌리박고 있던 훈구파와 불화가 생겨, 조선 사회에 새로운 활기와 파란을 불러 일으켰다. 이들의 진출로 사화가 되풀이되어 일시적으로 큰 타격을 받기도 했지만, 서원과 향약을 토대로 한 사림파는 꾸준히 그 학통을 계속하면서 발전하여 갔다.

 김숙자(金叔滋, 1389년∼1456년)는 조선 전기의 문신·학자로 본관은 선산(善山), 자는 자배(子培), 호는 강호(江湖)·강호산인(江湖散人)으로 불렸다. 선산 출신의 도학자이자 유학자이다. 광위(光偉)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김은유(金恩宥)이고, 아버지는 김관(金琯)이며, 어머니는 유인귀(兪仁貴)의 딸, 유씨이다. 김숙자는 12세 때부터 길재(吉再)로부터 『소학(小學)』과 경서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역학에 밝은 당시 조선 유학자 윤상(尹祥)이 황간현감으로 내려와 있다는 소식을 듣고 걸어가서 배움을 청하자 윤상은 그 열의를 보고 『주역(周易)』의 깊은 뜻을 힘써 가르쳐주었다.

1414년(태종 14) 생원시에 합격하고, 1419년(세종 1)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고령현감을 거쳐, 1436년에 경명행수(經明行修)의 선비 추천에서 첫 번째로 꼽혀 세자우정자(世子右正字)가 되었다. 그러나 얼마 후 선산의 교수관으로 나갔다가 개령현감이 되었다. 그 뒤에 사예(司藝)가 되었으나, 1456년 사직하고 처가가 있는 밀양으로 내려가서 그 해에 죽었다. 16세기에 사림에 의해 확립된 도통(道統)의 계보에서 길재의 학문을 아들 김종직(金宗直)으로 하여금 잇게 하였고 성리학의 계보 중, 정주학(程朱學)을 발전시켰다.

효성이 지극해 『소학(小學)』의 법도를 따라서 어버이를 모셨다. 그리고 남을 가르치기를 권태롭게 여기지 않아, 친상(親喪) 중에 여막 곁에 서재를 만들어 조석을 올린 뒤에 가르치기까지 해, 학업을 받는 자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가르칠 때에는 처음에 『동몽수지(童蒙須知)』 유학자설정속편(幼學子說正俗篇)을 모두 암송시킨 다음 『소학(小學)』에 들어가고, 그 다음에 『효경(孝敬)』·『사서오경(四書五經)』·『자치통감(資治通鑑)』 및 제자백가의 순을 밟았다. 『소학(小學)』을 앞세우면서 실천을 중시하는 학문 자세는 고려의 유학자 길재에게서 물려받았으며, 16세기에 이르러 사림 사이에 일반적인 것이 되었다. 선산의 낙봉서원(洛峯書院)에 제향 되었다.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 김종직(金宗直, 1431년∼1492년)은 조선시대 전기의 문신이자 사상가이며, 성리학자, 정치가, 교육자, 시인이다. 자(字)는 계온(季溫)·효관(孝盥), 호는 점필재(佔畢齋), 시호는 문충(文忠), 본관은 선산(善山, 일명 일선)이다. 세조 때에 동료들과 함께 관직에 진출하여 세조∼성종 연간에 동료, 후배 사림파들을 적극 발탁하여 사림파의 정계 진출 기반을 다져놓았다. 1459년(세조 5년) 문과에 급제하여 출사하여 성종 초에 경연관·함양군수(咸陽郡守)·참교(參校)·선산부사(善山府使)를 거쳐 응교(應敎)가 되어 다시 경연에 나갔으며, 승정원도승지·이조 참판·동지경연사·한성부 판윤·공조 참판·형조 판서·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재지사림(在地士林)의 주도로 성리학적 정치질서를 확립하려 했던 사림파의 사조(師祖)의 한사람이자 중시조격(中始祖格)이다. 그러나 세조의 즉위를 비판하여 지은 《조의제문(弔義帝文)》이 무오사화(戊午史禍, 1498년)를 불러일으켰다. 조선왕조 수립 이후 성리학을 전승한 것은 길재(吉再), 권우(權遇)였고, 사림파 출신으로 처음 조선정계에 진출한 이는 정몽주(鄭夢周), 권근(權近, 1352년∼1409년)이었으나, 세조 이후 조선 조정에 본격적으로 출사한 것이 김종직과 그의 동료, 제자들이었으므로 김종직을 사림파의 실질적인 중시조(中始祖)로 간주한다. 김종직은 자신을 전별(餞別)하는 문인들을 ‘우리당(吾黨)’이라고 불렀는데 김종직을 종주로 삼았던 정치세력이 사림(士林)이다. 이를 통상 붕당 정치의 시원으로 간주한다. 정여창(鄭汝昌, 1450년∼1504년), 김굉필(金宏弼, 1454년∼1504년), 이목(李穆), 권경유(權景裕, ?∼1498년), 김안국(金安國, 1478년∼1543년), 김정국(金正國, 1485년∼1541년), 김일손(金馹孫, 1464년∼1498년) 등이 모두 그의 제자였고, 조광조(趙光祖, 1482년∼1520년)는 김굉필의 제자로서 그의 손제자였으며, 남효온(南孝溫, 1454년∼1492년)과 남곤(南袞, 1471년∼1527년), 송석충(宋碩忠. 1454년∼1524년), 김전(金詮, 1458년∼1523년), 이심원(李深源, 1454년∼1504년) 역시 그의 문하생이었다. 그는 세조의 찬탈을 비판하고 이를 항우의 초 회왕(楚 懷王, ?∼기원전 296년) 살해에 비유한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지어 기록에 남겼으나 그 자신은 1459년(세조 5년)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가 벼슬이 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 정여창(鄭汝昌, 1450년∼1504년)은 조선전기의 문신, 성리학자, 작가이다. 율정(栗亭) 이관의(李寬義)의 문하에서 수학하다 1456년(세조 11년) 이시애의 난 으로 아버지 정육을(鄭六乙)이 전사하자 세조의 특명으로 의주판관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 그 뒤 점필재 김종직(佔畢齋 金宗直)의 문하에서 수학하며 1490년(성종 20년) 학행으로 관직에 나갔으나 그해의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연산군의 스승이었으나 무오사화(戊午史禍)에 연루되어 배소에서 사망한다. 그 뒤 갑자사화(甲子士禍)로 부관참시(剖棺斬屍)된다. 사후 복권되고, 중종조(中宗朝)에 이르러 동국도학(東國道學)의 종(宗)으로 숭상됨에 이르러 문묘에 종사되었다. 자는 백욱(伯勗), 호는 일두(一蠹), 수옹(睡翁), 시호는 문헌(文獻), 본관은 하동(河東)이다. 학역재 정인지(學易齋 鄭麟趾), 하성위 정현조(河城尉 鄭顯祖), 정숭조(鄭崇祖, 1442년∼1503년), 선조임금의 생모 하동부대부인 정씨(河東府大夫人 鄭氏, 1522년 ∼1567년)은 그의 일족들이었다. 연산군(燕山君)의 세자 시절 스승이기도 하다.

 김굉필(金宏弼, 1454년∼1504년)은 조선 전기의 문인, 교육자, 성리학자로 호(號)는 한훤당(寒暄堂)·사옹(蓑翁), 또는 한훤(寒暄)이며 자는 대유(大猷),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점필재 김종직의 제자로 김일손(金馹孫), 김전(金詮), 남곤(南袞), 정여창(鄭汝昌) 등과 동문이었다. 《소학(小學)》에 심취하여 스스로 ‘소학동자’라 자칭하였고, 《소학(小學)》의 가르침대로 생활하였다.

1480년(성종 11) 초시에 합격하고, 1494년(성종 25년) 훈구파 출신 경상도관찰사 이극균(李克均)에 의해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출사하여 주부(主簿),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형조좌랑(刑曹佐郎) 등을 지냈다. 1498년 무오사화(戊午史禍)가 일어나자 평안도 희천에 유배되었는데, 그곳에서 지방관으로 부임한 조원강의 아들 조광조(趙光祖)를 만나 학문을 전수하였다. 그 자신도 조광조(趙光祖, 1482년∼1520년)·이장곤(李長坤, 1474년∼?)·주계정(朱溪正)·이심원(李深源, 1454년∼1504년)·김안국(金安國, 1478년∼1543년)·이연경(李延慶, 1484∼1548) 등의 제자들을 배출했으며 이들은 서인학파(西人學派)를 이루게 되었다. 《소학(小學)》을 행동의 근간으로 삼아 《소학(小學)》을 알지 못하고는 사서육경(四書六經)을 알 수 없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 이목(李穆, 1471년∼1498년)은 조선의 문신이다. 자는 중옹, 호는 한재,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연산군 때 문과에 장원 급제하였으며, 일찍이 김종직에게 글을 배웠다. 태학(太學, 성균관)에 있을 때, 성종이 병이 있어 대비가 무녀를 시켜 벽송정(碧松亭)에서 기도를 베풀자, 이목이 태학생들을 데리고 가서 무녀에게 곤장을 쳐서 쫓아냈다. 후에 성종이 이 사실을 알고 노하여 당시의 유생들을 기록하게 하였다. 유생들은 모두 도망하였으나, 이목 홀로 도망하지 않아서 성종의 칭찬과 술을 받았다. 그는 늘 바른말 잘 하기로 유명하였는데, 이로 인해 공주에 유배된 적도 있다.

무오사화(戊午史禍) 때, 윤필상(尹弼商)의 모함을 받아 김일손(金馹孫)·권오복(權五福) 등과 함께 사형을 받았는데, 형장에 나갈 때 조금도 안색이 변하지 않고, 스스로 절명(絶命)의 노래를 지어 죽으니 그때 그의 나이 28세였다. 그는 일찍이 공주에 귀양 갔던 인연으로 공주의 인사들이 충현서원(忠賢書院)을 세우고 제사하였다.

 권경유(權景裕, ?∼1498(연산군 4)년) 조선의 문신. 자는 君饒(군요)·子汎(자범), 호는 癡軒(치헌), 判官(판관) 권질(權耋)의 아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 進士(진사)로 1485년(성종16)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1490년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연산군 때에 교리(校理)·제천현감(堤川縣監) 등을 지냈고, 김일손(金馹孫)과 함께 사관(史官)으로 있을 때 스승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초(史草)에 실은 사실을 그 후 1498년(연산군 4) 류자광(柳子光)·이극돈(李克墩)이 연산군에게 말함으로써 무오사화(戊午史禍)가 일어나 국문을 당한 끝에 아들 연(沇), 김일손 등과 함께 사형되었다. 중종반정(中宗反正, 1506년) 후 도승지(都承旨)에 추증(追贈)되었다

 김안국(金安國, 1478년∼1543년)은 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학자이다. 자는 국경(國卿), 호는 모재(慕齋), 시호는 문경(文敬), 본관은 의성(義城)이다. 예조판서, 대제학 등을 지냈다. 박학하고 문장에 능한 성리학자로서 저서에 《모재집(慕齋集)》·《모재가훈(慕齋家訓)》·《동몽선습(童蒙先習)》, 편서(編書)로는 《이륜행실도언해(二倫行實圖諺解)》·《성리대전언해(性理大全諺解)》·《정속언해(正俗諺解)》·《농서언해(農書諺解)》·《잠서언해(蠶書諺解)》·《여씨향약언해(呂氏鄕約諺解)》·《벽온방(辟瘟方)》·《창진방(瘡疹方)》 등이 있다.

 김정국(金正國, 1485년∼1541년)은 조선중기의 문신이자 철학자, 성리학자, 서예가, 작가이다. 자는 국필(國弼), 호는 사재(思齋)와 팔여사가, 시호는 문목(文穆), 본관은 의성이다. 김굉필(金宏弼)의 문하에서 수학하다 1509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승지, 황해도관찰사로 재직 중 1519년 기묘사화(己卯士禍)에 연루되어 화를 당하였으나 그 뒤 복직하여 형조참판에 이르렀다.

 김일손(金馹孫, 1464년∼1498년)은 조선 성종·연산군 때의 문신이며 학자, 사관, 시인이다. 본관은 김해, 자는 계운(季雲). 호는 탁영(濯纓), 소미산인(少微山人)이다. 시호는 문민(文愍)이다. 성종 때 춘추관의 사관(史官)으로 있으면서 전라도관찰사 이극돈(李克墩) 등의 비행을 그대로 적었고, 윤필상(尹弼商) 등의 부패 행위도 사서에 기록했다. 1498년에 《성종실록(成宗實錄)》을 편찬할 때 앞서 스승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초(史草)에 실은 것이 이극돈(李克墩)을 통하여 연산군에게 알려져 사형에 처해졌고, 다른 많은 사류(士類)도 함께 화(禍)를 입었다.

 조광조(趙光祖, 1482년∼1520년)는 조선시대 중기의 문신, 사상가이자 교육자, 성리학자, 정치가이다.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효직(孝直), 호는 정암(靜庵)이며,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김종직의 학통을 이어받은 김굉필의 문하에서 수학하다 유숭조(柳崇祖, 1452년∼1512년)의 문하에서도 수학했다. 사림파의 정계 진출을 확립하였다. 중종의 훈구파 견제 정책에 의해 후원을 받아 홍문관(弘文館)과 사간원(司諫院)에서 언관 활동을 하였고, 성리학 이론서 보급과 소격서(昭格署) 철폐 등을 단행하였다. 성리학적 도학 정치 이념을 구현하려 했으나 훈구 세력의 반발로 실패한다. 1519년 반정공신(反正功臣)들의 사주를 받은 궁인들에 의해 나뭇잎에 주초위왕(走肖爲王)이란 글자가 나타나게 함으로써 역모로 몰려 전라남도 화순으로 유배되었다가 사사된다. 후에 기묘명헌(己卯名賢) 중 한 사람이다. 개혁 정책을 펼치다가 희생된 개혁가라는 시각과 급진적이고 극단적이라는 평가가 양립하고 있다. 관직은 가선대부(嘉善大夫) 사헌부대사헌겸(司憲府大司憲兼) 동지경연성균관사(同知經筵成均館司)에 이르렀고, 사후 인종 때 복관되고 명종 때에 몇 번의 논란이 일다가 선조 초에 기대승(奇大升) 등의 상소로 증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영의정(議政府領議政)에 추증된다.

한때 그와 가까웠으나 뒤에 그의 정적이 된 남곤(南袞)과, 그의 정적 중 한사람이기도 했던 김전(金詮) 역시 김종직(金宗直) 학파 사람이었다. 그의 사상은 그의 문하생 백인걸(白仁傑)을 통해 율곡 이이(栗谷 李珥)에게 전해졌으며, 명종 말엽에 사림파(士林派)는 훈구파(勳舊派)를 몰락시키고 집권에 성공하면서 성인화, 성역화 된다. 1591년(선조 24) 광국원종공신(光國原從功臣) 1등관에 추서되었다.

 남효온(南孝溫, 1454년∼1492년)은 조선 전기의 문신이고 생육신 중의 한 사람이다. 본관은 의령(宜靈), 자는 백공(伯恭), 호는 추강(秋江)·행우(杏雨)·최락당(最樂堂)·벽사(碧沙)이다. 세상에서는 원호(元昊)⋅이맹전(李孟專)⋅김시습(金時習)⋅조려(趙旅)⋅성담수(成聃壽) 등과 함께 생육신으로 불렀다. 개국공신 남재의 후손으로, 병조판서를 지낸 장군 남이, 영의정을 지낸 남곤, 문신(文臣) 남포(南褒, 1489년∼1570년)의 친족척이다. 문신(文臣) 한산군(韓山君) 이손(李蓀)의 사돈으로 남효온의 딸이 이손의 3남 이온언의 부인이며 한산군(韓山君) 이손이 남효온의 집안을 보살펴줘서 추강집(秋江集)에 감사함을 기록했다.

 남곤(南袞, 1471년∼1527년)은 조선시대 전기의 문신, 유학자이며 정치인, 교육자, 작가, 시인이다. 초기 사림파 정치인이었으며 성리학의 지식에 해박하였으며, 사장학과 경서 해석에도 재주가 있었다. 자(字)는 사화(士華), 호는 지정(止亭)·지족당(知足堂)·지족(知足), 시호는 문경(文敬), 본관은 의령(宜寧)이다. 사림파 출신 인사 중 김전 등과 함께 심정·홍경주 등이 기묘사화를 일으키는 것을 묵인, 동조하였다.

1494년(성종 25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부제학, 이조참판, 사헌부대사헌, 이조판서, 홍문관대제학, 의정부좌찬성과 우찬성, 예조판서를 거쳐 기묘사화 이후 대광보국숭록대부로 승진하여 의정부좌의정과 영의정을 지내고 영중추부사에 이르렀다.

사림파의 일원으로 갑자사화로 유배되었다가 1506년 중종 반정 이후 복귀했다. 그 뒤 김전과 함께 신진 사류의 급진적인 개혁정책에 반대하였다. 1519년 훈구파와 손잡고 기묘사화에 협력하여 조광조 일파를 숙청하는데 가담, 방조하였으나, 남곤도 김종직 학파의 한사람이었다. 문장이 뛰어나고 글씨도 잘 썼으며 청렴하였으나, 조광조 등을 처형하는 데 동조, 묵인했다는 이유로 사림의 집권 이후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사림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배신자와 변절자로 몰려 지탄을 받았다. 후일 그의 외손자 송인은 조선 중종의 서녀 정순옹주의 부마가 되었다. 그의 고모부는 임원준이고, 경상남도 출신이다.

 송석충(宋碩忠, 1454년∼1524년)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야로(冶爐). 자는 원로(元老), 호는 눌재(訥齋). 아버지는 현령 윤(綸)이며, 어머니는 영의정 한창(韓昌)의 딸이다. 영천(榮川)에 거주하였다. 1478년(성종 9) 진사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입학하여 과거를 준비하는 한편 김굉필(金宏弼)⋅최보(崔溥)⋅박담손(朴聃孫)⋅신희연(申希演) 등의 학자들과 교유하면서 학문과 덕행을 닦았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가 일어나 교유하던 인물들이 화를 입어 처벌받게 되자 평소 이들과 왕래하였던 서간을 강물에 던지고 병을 빙자하여 향리에 내려가 서사(書史 : 경서와 역사공부)에 몰두하였다고 한다. 남효온(南孝溫)이 그를 평하기를 “성품이 강결하고 정직하며 명성과 영달을 구하지 않았다.”고 한다. 영천 산천서원(山泉書院)에 제향되었다.

 김전(金詮, 1458년∼1523년)은 조선 전기, 중기의 문신, 학자로 자는 중륜(仲倫), 호는 나헌(懶軒)⋅능인(能人), 시호는 충정공(忠貞公)이다. 본관은 연안(延安)이다. 연산군 때 무오사화(戊午士禍)에 휘말려 남해로 유배당했으나 중종이 집권하자 다시 등용되어 여러 벼슬을 거쳐 의정부 우의정이 되었고 곧 영의정에까지 올랐다. 1513년 조광조(趙光祖) 등 신진사림파가 정계에 진출한 이후 급진적인 개혁 정책을 펼치자 반대하였다.

《성종실록(成宗實錄)》과 《속동문선(續東文選)》의 공저자의 한사람으로 청렴하여 집 한 채 없었고, 전답하나 없이 오직 거문고와 술로서 스스로를 즐길 정도로 청렴결백(淸廉潔白)하였고 문장도 잘했으나, 기묘사화(己卯士禍, 1519년)를 일으킨 배후 인물의 한사람으로 지목, 남곤과 함께 사림파로부터 배신자로 낙인찍혀 많은 비판을 받았다. 김안로(金安老)의 삼촌이자 영돈녕부사 연흥부원군 김제남(金悌男)의 증조부이고, 선조의 계비 인목대비의 고조부가 된다. 또한 문정왕후의 남동생인 소윤(小尹)의 윤원형(尹元衡)이 그의 손녀사위였다. 조카인 김안로(金安老)와 손녀사위 윤원형은 왕실의 인척인 훈구파였지만, 그는 김종직의 문하생인 사림파였다.

 이심원(李深源, 1454년∼1504년)은 조선 중기의 왕족, 문신이자 성리학자이다. 자는 백연(伯淵), 호는 성광(醒狂), 默齋(묵재), 太平眞逸(태평진일)이다. 연산군 때 동생과 함께 화를 당한 대유학자이다. 효령대군 보의 증손으로 보성군 갑의 손자로서 평성도정 위(사후 평성군에 추증)의 장남이다. 김종직의 문하에서 수학하다가 그의 제자인 김굉필의 문하에서도 수학하였다. 정암 조광조와는 동문수학한 선배였다. 성종 때부터 훈구파의 퇴진과 사림파의 등용과 양심적인 지역 은거 인사들의 등용을 주장하였으며, 고모부 임사홍(任士洪, 1445년∼1506년)의 비행과 비리를 성종에게 고했다가 할아버지 보성군으로부터 고소당하였으나, 성종이 그의 충심을 이해하고 반려하였다. 사림파에 대한 지지 선언으로 인사들의 단종 정순왕후 복권 여론을 이끌어냈다. 그 뒤 갑자사화(甲子士禍, 1504년)에 연루되어 두 아들과 함께 사형 당했다. 1519년(중종 14년) 조광조(趙光祖)⋅정광필(鄭光弼) 등의 상소로 죄를 면하고, 주계군(朱溪君)으로 증직되었다. 이후 홍록대부(興祿大夫)로 추증되어 그의 충절을 기리는 정려문(旌閭門)이 세워졌다. 그의 행적은 『명신록(名臣錄)』, 『삼강행실(三綱行實)』, 『국조보감(國朝寶鑑)』등의 책에 기록하여 학문과 충절을 돋보이도록 하였다.

 

 이시애의 난(李施愛-亂)은 1467년(세조 13년) 5월부터 8월까지 함경도 길주의 호족 이시애 등이 세조의 집권 정책에 반대해 일으킨 반란이다. 당시 이시애는 길주 출신의 호족 토반으로 1458년 경흥진병마절제사(慶興鎭兵馬節制使), 1461년 행지중추부사(行知中樞府事)를 역임하고, 1463년 회령부사(會寧府使)로 있다가 어머니의 상을 당해 관직에서 물러나 있었다.

함길도(咸吉道)는 이성계의 고향으로 조선왕조의 주요 연고지 중의 하나였으며, 지리적으로 북방 이민족과 접해 있는 특수 사정을 고려해 지방관은 인망 있는 호족 중에서 임명해 대대로 다스리게 하였다. 그러나 함경도인에 대한 지역차별과 외지에서 부임한 관리들에 대한 반발로 함경도 내 유향소(留鄕所) 세력을 규합, 1467년 5월 이시애(李施愛) 등은 함경도인에 대한 지역 차별과 단종 폐위 등을 반역으로 규정하여 거병하였으나 거병 3개월만에 내부 분열로 이시애의 처조카 허유례(許惟禮)가 관군과 내통함으로써 진압되었다.

 

 남이(南怡, 1441년∼1468년)는 조선시대 전기의 장군, 정치인, 시인, 척신이다. 할아버지는 의산군(宜山君) 남휘(南暉)이고, 할머니는 태종과 원경왕후의 넷째 딸인 정선공주(貞善公主)이며, 부인은 좌의정 권람(權擥)의 딸이다. 본관은 의령이다. 무예에 능하였으며 세조의 총애를 받아 20대의 나이에 병조판서에 이르렀으나 해임당한 것에 불만을 품던 중 그가 지은 시조 한 수를 문제삼은 유자광(柳子光)과 한명회(韓明澮), 신숙주(申叔舟) 등의 공격을 받고 처형되었다. 순조(純祖) 때인 1818년(순조 18년) 후손 우의정 남공철(南公轍) 등의 상소로 복권되었다.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 류자광(柳子光, 1439년∼1512년)은 조선의 초기의 무신, 군인, 교육자, 유학자, 작가이다. 본관은 영광(靈光), 자(字)는 우복(于復), 우천(宇天)이다. 1467년 이시애의 난의 토벌에 참여하여 공신이 되었다. 이후 이시애의 난, 남이의 옥 등으로 익대공신에 책록(冊錄) 되었고 1506년에는 중종반정(中宗反正)에 참여하여 정국공신(靖國功臣)이 되었다. 서얼(庶孼) 출신으로서 무사가 되었다가 이시애의 난의 진압 때 세운 공로로 세조의 총애를 얻어 1468년(세조 13년) 병조정랑(兵曹正郎)으로 온양별시문과(溫陽別試文科)에 장원으로 급제하였으며, 관직은 병조판서, 판한성부사, 황해도와 경상도의 관찰사 등을 지냈다.

그 뒤 의정부 좌찬성 등을 거쳐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행의정부좌찬성(行議政府左贊成), 겸 영경연사, 충훈부 당상에 이르렀으며, 무령군(武靈君)에 봉작되었다가 무령부원군(武靈府院君)으로 진봉되었다. 남이를 시기하여 그에 시를 문제 삼아 사형까지 이르게 하였다. 학자 김종직과 벌인 감정싸움이 발단이 되어 이극돈 등의 무오사화(戊午史禍)에 동조했으며, 이후 사림파 공격에 가담했다. 특히 임사홍(任士洪, 1445년∼1506년) 등과 함께 연산군의 갑자사화를 도왔다. 사림파 집권 이후 역적으로 단죄되었으나 1910년 이후 그를 옹호하는 견해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의술, 음악, 지리에도 등했다. 두음법칙으로는 유자광이다.

 

 무오사화(戊午士禍)는 1498년(연산군 4년) 음력 7월 유자광과 연산군이 김일손 등의 신진세력인 사림파를 제거한 사화이다. 사건이 일어난 1498년이 무오년이기에 무오사화라는 이름이 붙여졌으며, 사초가 원인이 되었다하여 ‘史(사)’자를 넣어 한자로 무오사화(戊午史禍)라고도 표기한다.

 

 갑자사화(甲子士禍)는 1504년(연산군 10년) 연산군의 어머니 폐비 윤씨의 복위 문제로 인하여 일어난 사화이다. 폐비 윤씨의 복위를 추진하려는 연산군의 정책에 사림파 관료들이 반대하는 과정에서 비롯되었으며 궁중파 임사홍 등이 부중파 훈구세력까지 일망타진하려 하면서 사태가 확대되었다. 이때 희생된 사람들은 중종반정 직후 대부분 복권된다.

 

 기묘사화(己卯士禍)는 1519년(중종 14) 음력 11월에 남곤(南袞), 심정(沈貞), 홍경주(洪景舟), 김전(金詮), 중종(中宗) 등이 조광조(趙光祖), 김식(金湜) 등 신진사림의 핵심인물들을 몰아내어 죽이거나 혹은 귀양 보낸 사건이다. 조광조 등의 세력 확장과 위훈 삭제에 대한 불만이 원인 중 하나였다. 신진 사림파의 급진적인 개혁정책 역시 그들을 지지하던 정광필(鄭光弼), 안당(安瑭, 1460년∼1521년) 등의 반감을 사면서 지원받지 못하였다. 남곤(南袞), 심정(沈貞), 김전(金詮), 홍경주(洪景舟), 고형산(高荊山) 등은 후궁과 궐내 세력을 이용하여 조광조 일파의 제거 여론을 조성하여 제거하는데 성공한다. 이때 희생된 인물들은 후일 기묘명현(己卯名賢)으로 부른다. 중종은 당시 승지들도 모르게 대소신려들에게 갑자기 입궐명령을 내렸고, 홍경주(洪景舟), 김전(金詮), 남곤(南袞), 심정(沈貞), 정광필(鄭光弼), 안당(安瑭) 등은 갑자기 소환명령을 받고 경복궁의 북쪽 문이었던 신무문을 통해 들어와 승지들 모르게 회의를 열었다. 일명 북문지화(北門之禍)라고도 부른다.

 

 을사사화(乙巳士禍)는 1545년(명종 즉위년) 조선 왕실의 외척인 대윤(大尹)⋅소윤(小尹)의 반목으로 일어난 사림(士林)의 화옥(禍獄)으로 소윤이 대윤을 몰아낸 사건이다. 중종은 제1계비 장경왕후(章敬王后) 윤씨에게서 인종(仁宗)을 낳고, 제2계비인 문정왕후(文定王后) 윤씨에게서 명종(明宗)을 낳았다. 이들 두 계비는 같은 파평 윤씨(坡平 尹氏)인데, 장경왕후의 오빠 윤임(尹任)과 문정왕후의 아우 윤원형(尹元衡)이 대립하기 시작했다. 윤임과 윤원형은 같은 종씨(宗氏)이면서 서로 국구(國舅)가 되어 세력을 잡으려고 일찍부터 반목하여 세간(世間)으로부터 윤임을 대윤(大尹), 윤원형을 소윤(小尹)이라 불렸다. 중종이 승하하고 인종이 즉위하게 되자 윤임이 득세하여 사림(士林)의 명사를 많이 등용하여 이언적(李彦迪)⋅유관(柳灌)⋅성세창(成世昌) 등을 정부의 대관(臺官)으로 임명하는 등 일시 사림은 그 기세를 회복하였다. 당시 뜻을 얻지 못한 이들은 윤원형(尹元衡)의 밑에 모여서 사림과 반목하고 윤임(尹任) 일파에 대한 반격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 서원(書院)의 명칭은 당나라 현종 때 여정전서원(麗正殿書院)⋅집현전서원(集賢殿書院) 등의 설치에서 유래하였다. 원래 내외의 명현(名賢)을 제사하고 청소년을 모아 인재를 기르는 사설기관이었는데, 선현을 제사하는 사(祠)와 자제를 교육하는 재(齋)를 합하여 설립되었다고 한다.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유교 중심 정책을 써서 고려의 사원(寺院)을 대신하여 서재(書齋)⋅서당(書堂)⋅정사(精舍)⋅선현사(先賢祠)⋅향현사(鄕賢祠) 등을 장려하였다.

그러나 이때의 서원은 재와 사의 두 기능을 겸한 것이 못 되었으니 1542년(중종 37년)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 1495년∼1554년)이 순흥에서 고려의 학자 안향을 모시는 사당을 짓고 이듬해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이라 한 것이 조선 최초의 서원(書院)이었다. 그 후 전국 각지에서 많은 서원이 생겼으며, 1550년(명종 5년)에는 퇴계 이황의 건의로 임금이 백운동서원에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액(額, 간판)을 하사하고 책⋅노비⋅전결(田結) 등을 주어 장려하였다. 이것이 사액서원(賜額書院)의 시초가 되었으며 마침 황폐해 가는 향교에 대신하여 국가의 보조를 받는 서원이 각처에 설치되었다.

 

 향약(鄕約)은 조선시대 향촌 사회의 자치규약으로, 조선 중기 지방 사림이 농민⋅노비 등 하층민의 지배를 강화하기 위하여 유교 윤리를 기반으로 향촌의 공동 조직을 재구성한 것이다. 서원과 함께 향촌 사회에서 사림의 지위를 강화하는 데 기여하였다. 중종 때 조광조 일파가 처음 시행한 향약은 훈구 대신의 비리를 시정하기 위해 그들과 연결된 지방 토호들의 향권을 빼앗아 정치 이상을 실현하고자 하는 데 목적을 둔 것이다. 그래서 조광조 일파는 신분보다 나이를 존중하는 《여씨향약(呂氏鄕約)》을 《소학(小學)》과 함께 국문으로 번역하여 전국적으로 보급하고, 관권보다 더 강력한 처벌권을 발동하여 토호들의 횡포를 막으려 했다. 그러나 그러한 급진성 때문에 도리어 보수 세력의 반발을 받아 조광조 일파의 몰락과 함께 폐지되고 말았다.

 

 중종반정(中宗反正)은 1506년 연산군이 폐위되고 진성대군(晉城大君) 이역(李懌)이 옹립된 사건을 말한다. 연산군은 무오사화(戊午史禍)와 갑자사화(甲子士禍)를 일으켜 많은 선비들을 제거하였다. 또한 경연(經筵) 폐지⋅신언패(愼言牌) 실시⋅성균관(成均館)을 연락(宴樂)의 장소로 이용⋅도성 밖 30리 내의 민가 철거⋅언문 도서의 폐기 등 폭정을 일삼았다. 그리고 원각사(圓覺寺)를 폐하여 연방원(聯芳院)으로 고치고, 흥청(興淸)들과 기거를 함께하며, 채청사(採靑使)를 각 지방에 보내 미녀를 끌어들이고, 유희와 안락으로 세월을 보내며 국정을 도외시하자, 이에 훈구 세력을 중심으로 반정의 움직임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전 이조참판(吏曹參判) 성희안(成希顏)은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박원종(朴元宗), 이조판서(吏曹判書) 유순정(柳順汀), 군자감부정(軍資監副正) 신윤무(辛允武) 등과 함께 왕이 장단(長湍) 석벽(石壁)을 유람하는 날을 기하여 거사할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왕의 행차가 취소되면서 거사에 차질이 생겼고, 이때 호남 지역에서의 연산군 폐위 거사 격문이 서울에 나돌게 되면서 결국 당초 계획을 강행하였다. 그리하여 1506년 9월 1일, 박원종⋅성희안⋅유순정을 비롯하여 전 수원부사(水原府使) 장정(張珽), 군기시첨정(軍器寺僉正) 박영문(朴永文), 사복시첨정(司僕寺僉正) 홍경주(洪景舟) 등은 훈련원(訓鍊院)에서 무사를 규합한 뒤, 왕비 신씨의 오라버니 신수근과 그의 아우들인 신수겸(愼守謙)과 신수영(愼守英) 그리고 임사홍(任士洪) 등 연산군의 측근을 제거한 뒤,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경복궁에 들어가 자순왕대비(慈順王大妃, 貞顯王后 尹氏)의 윤허를 받아 연산군을 폐위하여 강화도 교동(喬桐)에 안치하였다. 그리고 다음날 진성대군(晉城大君)이 경복궁 근정전에서 왕위에 오르니 그가 조선왕조 제11대 왕인 중종이다.

중종반정은 신하들이 주체가 되어 그들의 뜻대로 왕위를 교체한 사건으로, 조선왕조 개창 이래 장자(長子) 상속의 왕위세습제에 새로운 변화를 가져왔다. 반정 자체가 철저하게 신하 주도로 이루어짐에 따라 중종이 실질적인 왕권을 행사하기는 어려웠다. 갑자기 왕위에 오르게 된 중종은 공신이 중심이 된 정치에 이끌려 갈 수밖에 없었고, 집권 초기 권력은 이들에게 집중되었다. 중종반정을 통해 새로운 정치세력이 등장한 것이 아니라, 이미 연산군대에 공직에 있던 인물이 왕을 교체한 후 다시 기득권을 유지하는 상황이 펼쳐졌다.

 

 붕당(朋黨)은 조선 중기 이후 특정한 학문적⋅정치적 입장을 공유하는 양반들이 모여 구성한 정치 집단이다. 또한 붕당정치(朋黨政治)는 학문적 유대를 바탕으로 형성된 각 붕당들 사이의 공존을 특징으로 하는 조선의 정치운영 형태이다. 공론에 입각한 상호 비판과 견제를 원리로 하는 붕당정치는 현대의 정당정치와도 유사점을 찾을 수 있지만 정치적인 이해관계는 물론 구성원 사이에 학문적 유대 또한 공유했다는 점이 조선 시대 붕당의 특수한 성격이다. 16세기 중엽 동인과 서인 사이의 대립을 최초의 붕당 성립 시기로 본다. 이 시기의 붕당은 특정 가문의 권세가 정치에 개입하는 것을 막고, 공론에 입각한 상호 비판을 통해 조선 중기 정치 발전에 기여하였다. 그러나 정조가 승하하고 순조가 즉위한 19세기 초엽 이후 붕당정치 체제는 사실상 막을 내리고, 특정 양반 가문이 권력을 쥐고 독재하는 세도 정치로 변질되었다. 붕당정치를 당쟁(黨爭) 또는 당파싸움이라고도 부르나, 이 용어에 대한 역사적 근거는 없다. 다만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조정에서 이루어지는 의견의 교환과 대립에 대해 당의(黨議)라고 표현하였다.

 

 이조전랑(吏曹銓郞)은 조선 시대에 이조의 정랑(정5품)과 좌랑(정6품)을 함께 이르던 말이다. 이조의 정랑과 좌랑은 관원을 천거⋅전형(銓衡)하는 가장 큰 권한을 가진 직책으로 전랑(銓郞)이라고 불렀다.

조선시대에는 관원을 선발하는 벼슬이 3공[고려 시대의 태위(太尉)⋅사도(司徒)⋅사공(司空)]에게 있지 않고 오로지 이조에 속하였다. 또한 이조의 권한이 무거워짐을 염려하여 3사 관원의 선발은 이조판서에게 돌리지 않고 낭관(郞官, 정랑과 좌랑)에게 오로지 맡겼다. 이에 따라 이조의 낭관이 3사의 언론권(言論權)을 주관하게 되어 큰 실권을 잡았다.

전랑에는 3사 가운데 특별히 명망이 높은 사람이 선발되었고, 그 후임은 전랑이 추천하도록 되어 있었으며, 전랑을 거치면 대개 재상까지 될 수 있었다. 동서분당을 초래한 심의겸(沈義謙)과 김효원(金孝元)의 싸움도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선조는 중종과 청빈 안씨 소생인 덕흥군(德興君)의 셋째 아들로서 방계혈통으로 국왕에 오른 첫 번째 군주였다. 정통성을 주장할 수 없는 군주였기 때문에 우유부단하고 도량이 넓지 못했다. 사림파의 동서분당은 선조의 기질과 많은 관련이 있으며, 명종 시기에 훈구파를 제거하는데 앞장선 심의겸의 이조전랑 추천권으로 불거진 사림파의 동서분당은 조선시대의 후기 역사를 가름하는 거울이었습니다.

이조전랑(吏曹銓郎)은 정5품의 정랑직(正郎職)인데 자신의 후임자를 천거할 수 있는 자대낭천권(自代郞薦權)이 있었으며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의 3사의 대간을 선발하는 통천권(通薦權)이란 권한이 있었다. 특히 통천권(通薦權)은 의정부의 3정승까지 견제할 수 있는 점에서 요직 가운데 매력 있는 자리라고 할 수 있다. 낭천권(郎薦權)과 통천권(通薦權)은 관리를 추천하거나 천거할 때 사용되던 권리로 낭천권(郎薦權)과 통청권(通薦權)이라고 한다. 사헌부(司憲府, 관리, 감찰), 사간원(司諫院, 간원, 탄핵), 홍문관(弘文館, 왕의 국정자문)은 조선시대의 언론기관으로 정사를 감시하고 비판하며 감찰기능을 갖춘 기관은 사헌부(司憲府), 사간원(司諫院), 홍문관(弘文館)으로 이를 3사로 불렀다. 자대권(自代權)으로 현임전랑이 후임전랑을 천거하는 권리. 통청권(通薦權)으로 당하청 요직을 선발할 수 있는 권리. 낭천권(郎薦權)으로 이는 전랑이 과거에 급제하지 않은 현사(현명한 선비)를 추천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선조 때에 중앙권력을 장악한 사림들은 척신들의 제거에 적극적인 신진사림과 소극적인 기성 사림으로 입장의 차이가 드러났다. 이때 관리의 선발권을 가진 이조전랑의 자리를 두고 기성 사림은 심의겸을 신진사림은 김효원을 지지하면서 기성 사림은 서인, 신진 사림은 동인으로 갈라서고 사림은 드디어 동서 분당이 되었다.

심의겸의 이조전랑을 김효원이 반대하고 훗날 김효원이 천거되자 심의겸이 반대하면서 중앙조정은 두 사람을 지지하는 사람들로 나뉘게 되었습니다. 이런 우여곡절을 거처 김효원이 이조전랑이 되자 김효원을 지지하는 젊은 사림들이 심의겸을 공격하면서 갈등은 더해갔습니다. 구세력을 대표하던 심의겸을 지지하는 세력은 서인으로 기호학파와 노론, 소론이었습니다. 신진세력의 구심체였던 김효원을 중심으로 하는 세력은 영남학파로 북인과 남인으로 구성된 동인이었습니다.

율곡이이가 죽고 서인이 집권하던 시기에 3사를 중심으로 동인들이 세력을 넓히자 서인에 속해있던 정여립이 동인으로 옮겨갔다. 정여립은 배신자로 낙인 찍혀 서인들이 공격을 받자 진안으로 낙향하여 그곳에서 대동계를 조직하고 군사훈련을 시켰는데 이를 본 선조는 정여립을 역모자로 규정하고 서인계통 이었던 정철에게 사건수사를 맡겨 보복수사를 강행하였고 기축옥사(己丑獄事)를 일으킨다. 하지만 서인의 집권은 정철이 세자책봉 문제로 실각을 하여 물러나고 동인들이 다시 정권을 잡는 계기가 되었다.

 

 사림(士林)은 전원의 산림(山林)에서 유학을 공부하던 문인⋅학자로서 15세기 이후 조선 중기 중앙 정계를 주도한 정치집단이다. 고려 말기의 유학자 길재(吉再)가 은퇴하여 고향에서 후진 양성에 힘쓴 결과 영남 일대는 그의 제자가 많이 배출되어 조선 유학의 주류를 이루었으며, 훈구파에 대립하여 사림파(士林派)라고 불리기도 한다. 또한 사림은 유림이라고도 불리기도 한다. 온건파 사대부를 계승했다.

 이지함(李之菡, 1517년∼1578년)은 조선 중기의 학자이다. 본관은 한산이며, 호는 토정(土亭)⋅수산(水山)이다. 사헌부 감찰, 우봉현령을 지낸 이치의 아들이다. 친형 성암 이지번의 문인이다. ‘토정’이라는 호는 그가 마포 나루에 ‘토정’이라는 흙집을 짓고 가난한 사람들과 같이 살았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동인과 북인의 당수인 아계 이산해(李山海)는 그의 문인이자 조카였다. 사육신의 한사람인 백옥헌(白玉軒) 이개는 이지함의 종증조부가 된다. 목은 이색의 후손으로 세조 때의 공신 이계전(李季甸)의 4대손이다. 이지함은 맏형인 이지번(李之蕃)과 개성의 서경덕(徐敬德)으로부터도 글을 배웠다고 한다.

선조 때 뛰어난 행실로 벼슬에 올라 포천 현감을 거쳐 아산 현감을 지냈다. 그 성품은 기위(奇偉)하고 효성과 우애가 돈독했다고 한다. 재물에 욕심이 없어 평생 가난한 생활을 하였고, 항상 베옷과 짚신을 신었다. 의약⋅복서⋅천문⋅지리⋅음양 등에 통달하였으며 괴상한 행동과 예언 등의 일화가 많다. 이이와 친하여 성리학을 배우라는 권고를 받았으나 욕심이 많아 배울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고 한다.

숙종 때에 문강(文康)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조헌은 이지함을 ‘마음이 깨끗하고 사욕이 적어서 고결한 행실은 세상에 모범이 되었다.’고 평가하였다. 1713년(숙종 39년) 학덕이 인정되어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 심통원(沈通源, 1499년∼1572년)은 조선 중기의 권신, 척신이다. 두 번 과거에 급제하여 1537년(중종 21년) 별시문과에 급제한 뒤 1546년(명종 1년) 문과중시에 병과로 급제했다. 관직은 승지, 대사헌, 한성부 판윤, 공조판서, 예조판서, 의정부 우찬성, 좌찬성, 이조판서 등을 지내고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 영중추부사 겸 약방 도제조에 이르러 기로소에 들어갔다. 자(字)는 사용(士容), 호는 욱재(勖齋), 만취당(晩翠堂)이고, 본관은 청송(靑松)이다. 별칭은 심상공(沈相公)이다.

1565년 왕의 외척으로 윤원형 등과 함께 권력을 남용했다는 탄핵을 받고 사직했으나, 1567년 선조가 즉위한 후 율곡 이이 등의 탄핵을 받고 관직을 삭탈 당했다. 서인의 초대 당수 심의겸, 심충겸 형제 및 명종의 왕비인 인순왕후의 종조부이다. 이량, 김안로, 윤임, 윤원형, 윤원로 등과 함께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척신 세력이었으며, 특히 이량, 윤원형 등과 함께 3흉으로 불렸다.

 정여립(鄭汝立, 1546년∼1589년)은 조선중기의 문신이자 사상가, 정치인, 개혁가, 공화주의자이다. 1570년(선조 2년) 식년 문과 을과로 급제하여 예조좌랑, 홍문관부수찬과 수찬 등을 지냈다. 정당은 서인이었으나 서인을 탈당하여 동인으로 가면서 논란의 대상이 되었고, 스승이었던 이이를 비판한 일로 서인의 반발을 샀다. 정여립은 본래 서인 세력이었으나 수찬이 된 뒤 당시 집권 세력이던 동인 편에 들어가 이이를 배반하고 성혼, 박순을 비판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선조가 그의 이당을 불쾌히 여기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해버린다. 선조는 그의 탈당을 불쾌히 여겼으며, 이후 관직을 단념하고 낙향, 지역에 은거하며 학문 연구와 대동계(大同契)를 결성해 왜구 토벌에 앞장섰으나, 반역을 획책한다는 고발이 있어 피신하던 중 자살하였다. 서인은 그가 역모를 꾸몄다고 했고, 동인과 그 후신인 남인에서는 그가 모반을 하지 않았다고 주장하여 팽팽히 맞섰으며, 이후 사건은 기축옥사[己丑獄事, 1589년(선조 22)]로 확대되어 천여 명의 희생자를 낳았다. 자(字)는 인백(仁伯), 호는 죽도(竹島), 본관은 동래(東萊)이다. 이이와 성혼의 문인이며, 전라북도 출신이다.

 

 서인(西人) 기호학파(畿湖學派)는 조선 성리학에 이이(李耳)의 이기설(理氣說)을 지지하고, 이황(李滉)의 주리설(主理說)이 중심이 된 영남학파에 대립한 학파. 주기파 또는 율곡학파(栗谷學派)라고도 한다. 이이의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지지하고, 이황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비판하였다. 김장생(金長生)ㆍ송시열(宋時烈)ㆍ권상하(權尙夏)ㆍ한원진(韓元震)등은 이 파에 속하는 인물로서 기(氣)만이 발(發)할 수 있다는 이이의 학설을 지지하여 영남학파와 오랜 논쟁을 벌이고 당쟁(黨爭)을 가열시켰다. 이 학파에 속한 학자들 대부분이 기호(畿湖 : 경기도, 충청도)지방에 속하였기 때문에 기호학파로 지칭되었다. 특히 한원진이 이황의 학설을 비판하기 위하여 쓴 『주자언론동이고(朱子言論同異考)』는 이 학파의 대표적인 저술이다. 한편 임성주(任聖周, 1711년∼1788년)는 주기설(主氣說) 입장을 극단화하여 유기론(唯氣論)으로 발전시켰다.

 김효원(金孝元, 1542년∼1590년)은 조선 중기의 학자이며 문신이다. 이황과 조식의 문인이다. 본관은 선산(善山, 일선)으로, 자는 인백(仁伯)이고 호는 성암(省庵)이다.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나 윤원형의 사위 이조민의 친구인 탓에 한때 윤원형가의 식객으로 있기도 했다. 그 뒤 훈구파가 몰락하고 사림파가 크게 진출할 때 소장파 관인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심의겸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조정랑이 되었으나 다음해 심충겸이 이조전랑에 천거되자 외척임을 들어 적극 반대하여 사림을 자신을 중심으로 한 동인과 심의겸을 중심으로 한 서인으로 갈라지게 하였다. 노수신과 이이의 조정책으로 외직으로 전출된 후 10년 간 한직(閒職)을 전전했다.

김효원은 심의겸의 동생 심충겸이 이조전랑직에 천거되자 외척이 인사권을 장악해서는 안 된다며 반대하였다. 심의겸과 심충겸은 명종비 인순왕후의 동생들로, 선조가 명종의 양자 자격으로 임금이 되었으므로 그의 주장이 인정되었다. 사후 이조참판에 증직되었다가 다시 이조판서로 추증(追贈)되었다. 교산 허균과 허난설헌의 인척으로, 허균은 그의 사위이며 허균의 형 허봉의 딸이 그의 맏며느리였다. 동인과 서인의 붕당 분열의 원인을 제공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지만, 생전에는 청렴한 선비로서 신진 인사들의 존경을 받았다. 이황, 조식의 문인이다.

 심의겸(沈義謙, 1535년∼1587년)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척신이다. 영의정 심연원의 손자이고, 좌의정 심통원(沈通源)의 종손이다. 김효원(金孝元)과의 알력으로 동인, 서인의 분당의 원인이 되었다. 명종국구 심강(沈鋼)의 아들로 이황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명종비 인순왕후의 친 남동생이었으나 사림인사들과 두루 사귀었다.

1563년에는 외척으로 전횡을 부리던 자신의 외삼촌 이량을 탄핵하여 퇴출시키기도 했다. 이황의 문인임에도 이이, 성혼과 어울린 탓에 자연스럽게 서인이 되었다. 그 뒤 심통원(沈通源, 1499년∼1572년)을 탄핵한 이이와 사감을 갖지 않고 계속 친하게 지냈다. 김효원이 한때 윤원형의 식객이었던 점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져 을해당론(乙亥黨論)의 빌미를 제공한다. 자(字)는 방숙(方叔), 호는 손암(巽菴), 간암(艮菴), 황재(黃齋)이고, 봉군호(封君號)는 청양군(靑陽君)이며, 본관은 청송(靑松)이다.

 이이(李珥, 1537년∼1584년)는 조선시대의 문신, 성리학자이며 정치가, 사상가, 교육자, 작가, 시인이다. 그의 관직은 숭정대부 병조판서에 이르렀다. 성혼(成渾), 송익필(宋翼弼), 김장생(金長生) 등과 함께 기호 지역이 기반인 서인(西人)의 종주로 추앙된다. 아홉 차례의 과거에 급제해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16세 때 어머니 신사임당이 죽자 3년간 여묘살이를 한 후, 아버지가 계모 권씨를 들인 뒤 금강산에 들어가 승려가 되었는데, 이 때문에 훗날 그가 죽은 후에까지도 머리 깎고 중이 되려다가 환속한 자라고 북인과 남인이 공격하는 빌미가 되었다. 이준경(李浚慶)이 죽기 직전 붕당의 폐에 관한 유차를 올리자 '죽음에 이르러 말이 악하다'고 공격하였으며 이후 이준경의 처벌까지 가기도 했다. 그러나 후일 당쟁이 현실화하자 스스로 크게 뉘우치고 동인, 서인 사이의 당쟁 조정을 평생 정치 이념으로 삼았다. 공납(貢納)의 폐단 시정책인 대공수미법(代貢收米法) 실시를 주장하고, 병조판서로서 여진족 이탕개의 침입을 격퇴한 후, 10만 양병설을 주장해 임진왜란을 예언했다는 명성을 얻었다. 분당을 조정하지 못한 한을 남긴 채 죽었으며, 사후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되고 1591년에는 광국원종공신(光國原從功臣) 1등에 추서되었다. 그 뒤 그를 문묘에 제향하는 문제를 놓고 인조반정 이후 50년간 논쟁의 대상이 되다가 숙종 때 경신환국(庚申換局, 1680년)으로 서인들이 집권한 후 문묘에 종사되었다. 본관은 덕수, 자는 숙헌(叔獻), 호는 율곡(栗谷)⋅석담(石潭)⋅우재(愚齋), 아명은 현룡(見龍),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강평공(康平公) 이명신(李明晨)의 5대손이며, 중종 때의 재상 이기, 이행 형제의 재종손이자 통덕랑 사헌부감찰을 지내고 사후 증 숭정대부 의정부좌찬성에 추증된 이원수(李元秀)와 정경부인 신사임당의 셋째 아들이었다. 휴암 백인걸(休菴 白仁傑)의 문인이다.

 성혼(成渾, 1535년∼1598년)은 조선중기의 문신, 작가, 시인이며 성리학자, 철학자, 정치인이다. 자(字)는 호원(浩原), 호는 우계(牛溪), 또는 묵암(默庵). 시호는 문간(文簡). 본관은 창녕. 성수침의 아들이자 문하에서 수학하다 휴암 백인걸 문하에서 배웠다. 이때 이이를 만나 평생 친구로 지냈다. 학행으로 천거되어 거듭 사퇴하였으나 이이의 권고로 출사했고, 이이 사후에 출사하여 의정부좌찬성에 이르렀다. 서인 영수로 진사시에 합격한 후 복시(覆試)를 포기하고 학문에 전념할 뜻을 세웠다. 선조 때 여러 관직에 제수되고도 나가지 않았으나, 이이의 거듭된 추천으로 출사했다. 이런 연유로 동인들로부터 서인으로 지목되어 공격을 받았다. 심의겸이 몰락한 뒤 서인을 지도하였다. 그 뒤 동인과 서인의 갈등을 중재하려 노력했으나 실패하였고, 정여립의 난(鄭汝立亂)과 기축옥사(己丑獄事) 당시 최영경(崔永慶), 정개청(鄭介淸)을 구원하려다가 실패하면서 역으로 동인들로부터 그가 최영경, 정개청 등을 죽게 했다는 누명을 쓰게 되었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세자인 광해군(光海君)의 부름을 받아 그를 돕고 평양에 올라가 선조를 만났으나, 왜란 초 선조가 피난할 때 행차하는 길목에 살면서도 호종하지 않았다 하여 동인 이홍로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이후 죽은 후에까지 동인들과 남인들의 공격을 받았다. 윤선거(尹宣擧)의 외할아버지이자 윤증(尹拯)의 진외증조부이다.

이황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과 이이(李珥)의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의 절충을 취하였으며, 학문 연구를 하다 생애 후반에는 관직에 투신하여 찬성(讚成)에 이르렀고, 서인의 당수로 활동했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광해세자를 모시었고, 1594년 의정부 좌참찬(議政府左參贊)에 임명되어 취임했다. 그해에 좌찬성으로 승진했고 비변사 회의에 참여하여 시무 12조를 올렸다. 1594년 좌참찬으로 있을 때 영의정 유성룡(柳成龍)과 함께 주화론을 주장한 일이 문제되어 매국노로 낙인찍혀 정계에서 은퇴한다. 율곡 이이(栗谷 李珥), 송강 정철(松江 鄭澈), 구봉 송익필(龜峯 宋翼弼)과 친분이 깊었다. 조헌(趙憲), 김덕령(金德齡), 정철(鄭澈), 윤황(尹煌), 황신(黃愼), 이귀(李貴), 김자점(金自點) 등이 그의 문하생이다. 아버지 성수침(成守琛)과 휴암 백인걸(休菴 白仁傑)의 문인이다.

 정철(鄭澈, 1536년∼1594년)은 조선시대 중기의 시인이자 문신, 정치인, 학자, 작가이다. 본관은 연일(延日, 또는 迎日), 자는 계함(季涵)이고, 호는 송강(松江)⋅칩암거사(蟄菴居士)이며 시호는 문청(文淸)이다. 별명은 총마어사(驄馬御史)이다. 돈령부 판관(敦寧府 判官)을 지낸 정유침(鄭惟沉)의 아들이며, 인종의 후궁 귀인 정씨의 남동생이다. 1562년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은 의정부좌의정에 이르렀으며, 인성부원군에 봉군되었다. 정여립의 난과 기축옥사 당시 국문을 주관하던 형관으로 사건 추국을 담당하였으며, 기축옥사 수사 지휘의 공로로 추충분의협책평난공신(推忠奮義恊策平難功臣) 2등관에 책록 되었다. 훗날 심문 과정에서 기축옥사로 동인과 그 일족들이 죽임을 당하였다 하여 동인들의 비난을 받았고, 정여립의 난을 조작했다는 의혹을 받기도 했다. 세자 건저문제(建儲問題, 1591년 선조 24년)를 계기로 귀양에 위리안치되었고, 임진왜란 직후 복귀하였다. 전란 초기에 양호체찰사 직을 수행하였으나, 복귀 후 명나라에 사은사로 다녀온 일로 모함을 받아 사직하고 강화도에 우거하던 중 사망하였다.

 김류(金瑬, 1571년∼1648년)는 조선중기의 문신이다. 자는 관옥(冠玉), 호는 북저(北渚), 시호는 문충(文忠), 본관은 순천. 인조반정의 공신이다. 아버지 김여물이 임진왜란 충주 탄금대 전투 때 전사했으므로 순절자의 아들로 참봉이 되었다. 서인의 영수이고, 인조반정을 기여한 공로로 정사1등공신에 책록되고 관직은 영의정에 이르렀으며 승평부원군(昇平府院君)에 봉작되었다.

 김자점(金自點, 1588년∼1652년)은 조선시대 후기의 문신이자 정치가, 군인, 성리학자이며 인조의 서녀 효명옹주의 시조부로 왕실의 인척이었다. 인조반정에 참여하였고 귀인 조씨의 인척이었으며 친청파 정치인이었다. 음서제로 관직에 올라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에 이르렀으며 낙흥부원군에 봉군되었다. 인조반정의 모의에 가담하였으며 1623년 3월 반정을 꾀해 군대를 모아 홍제원에서 이괄 등의 군사와 합류하였고 반정에 성공한 공로로 동부승지(同副承旨)로 특별 승진하고, 도원수가 되었으며, 정사공신(靖社功臣) 1등관에 녹훈되고 낙흥군(洛興君)에 봉해졌다. 이괄의 난 때에는 옥에 갇힌 기자헌 등 북인 인사 40명의 전격 처형을 건의하기도 했다. 그 뒤 도원수로 병자호란 당시 대처미숙으로 파면되었다가 복직하여, 병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이 되고 심기원 일파를 제거한 뒤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랐다. 이후 친명파이자 북벌론자인 임경업 등을 제거한 뒤, 효종이 즉위하고 송시열 등의 등용으로 북벌론이 대두되자 효종의 북벌을 청나라에 밀고하였다. 이후 유배되었다가 아들 김식의 역모사건이 발생하자 사형 당했다. 좌의정 쌍곡 김질(金礩)의 5대손이며 백범 김구의 20대 방조였다. 자(字)는 성지(成之), 호는 낙서(洛西), 본관은 구 안동이다. 당색으로는 서인으로, 그의 봉군호인 낙흥군의 이름을 따서 인조반정 이후의 서인 외척당을 낙당이라 불렀다. 그러나 그가 처형되면서 낙당은 몰락하게 된다. 성혼의 문인이다.

 김장생(金長生, 1548년∼1631년)은 조선의 유학자, 정치인, 문신이다. 동방 18현 중의 한 사람이며, 자(字)는 희원(希元), 호는 사계(沙溪), 본관은 광산이다. 아버지는 사헌부 대사헌 김계휘(金繼輝)이다. 처음에 구봉 송익필에게 예학을 배우고 후에 율곡 이이에게 성리학을 배워 예학파 유학의 거두가 되었으며, 그 뒤 우계 성혼의 문하에도 출입하여 수학하였다. 1578년(선조 11년) 학행(學行)으로 천거받아 관직에 올라 창릉참봉, 돈령부참봉 등을 지낸 뒤 순릉참봉(順陵參奉), 평시서봉사(平市署奉事)를 지낸 뒤 관직에서 물러나 송익필의 문하와 성혼의 문하를 출입하며 학문을 연마하였다. 이후 활인서별제(活人署別提)⋅사포서(司圃署)⋅사옹원(司饔院) 봉사가 내렸으나 모두 병으로 나가지 않았다. 정여립의 옥사 등으로 은퇴하였고 임진왜란 때는 호조정랑으로 군량미 조달에 노력하였다. 그 뒤 전란이 종결되자 단양군수,남양부사(南陽府使), 양근군수(楊根郡守), 안성군수, 익산군수, 철원부사 등의 지방관을 지내며 선정을 베풀었다. 인조 때는 호조참판과 형조참판을 지낸 뒤 가의대부 행용양위부호군에 이르렀으며, 관직에서 물러나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전념하였다.

인조반정 이후로는 서인 산림파(산당) 영수로 공신 세력에 대항하여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송익필과 이이, 성혼 등의 제자이자 계승자로 기호학파를 형성, 확장하는데 기여하였고, 예학에 정통하였다. 김집, 송시열 등을 길러냈다. 사후 이조판서에 증직되었다가 다시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되었다.

 김집(金集, 1574년∼1656년)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유학자, 작가이다. 본관은 광산, 자는 사강(士剛), 호는 신독재(愼獨齋), 신독(愼獨)이며,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학자 사계 김장생의 아들이며 율곡 이이의 서녀사위이다. 선조, 광해군, 인조 때의 서인 지도자로, 인조 반정 이후 비공신계 서인과 산림세력의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소현세자와 민회빈 강씨 등이 연이어 죽자 이들의 죽음에 의혹을 제기하고 복권 운동을 시작하였다. 그 뒤 청음 김상헌, 우산 안방준 등과 함께 북벌론을 제창하였다. 서인 산림의 당수로 송시열, 송준길, 이유태와 윤선거, 윤문거, 박세채 등이 그의 문하에서 배출되어 학문적으로는 노론과 소론의 공동조상이다. 효종 초에는 안방준과, 송시열, 송준길 등과 함께 김육의 대동법을 적극 반대하였다. 숙종의 계비 인경왕후의 종증조 할아버지이며, 양관대제학 김익희 광남군 김익훈의 숙부가 된다. 서포만필과 구운몽의 작가 서포 김만중은 그의 종손자였다.

 김육(金堉, 1580년∼1658년)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유학자, 실학자, 사상가, 작가이며, 효종⋅현종 연간에 대동법의 시행을 주장, 추진하였으며 화폐의 보급에 힘썼다. 1638년(인조 16) 충청도 관찰사에 재직 중 대동법을 제창 건의하였고, 수차(水車)를 만들어 보급하였으며, 전후복구 사업을 시도하였고, 《구황촬요(救荒撮要)》와 《벽온방(辟瘟方)》 등을 증보⋅재간행하였다. 인조반정 직후 학행으로 천거되어 관직에 나갔다가 그 뒤 과거에 급제하여 음성현감, 성균관전적, 사헌부지평 등을 역임했다. 그 뒤 충청감사 재직 중 충청도 지역에서 시범으로 대동법을 실시하게 했으며, 호서대동법이 실시될 때 호조 판서로서 실무를 지휘한 이시방과 함께 대동법 시행의 주역으로 꼽힌다. 병조참판, 형조판서, 의정부우참찬, 사헌부대사헌, 예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1643년과 1645년 청나라에 사절로 다녀온 뒤 화폐의 주조⋅유통을 건의하여 평안도부터 추진하였고, 수레의 제조, 보급을 확산시켰으며, 시헌력(時憲曆)의 제정⋅시행을 건의하고, 《유원총보(類苑叢寶)》 《종덕신편(種德新編)》 등을 저술하였다. 또한 그는 1636년(인조 14년) 성절사로서 명나라의 연경에 다녀왔는데, 그는 조선에서 명나라에 보내는 마지막 공식 사신이었다.

충청도에 대동법을 시행하는 데 성공하였고, 아울러 화폐 이용의 필요성을 역설하여 주전사업을 건의, 민간에 주전(鑄錢)의 유통에도 성공하였다. 대동법의 실시를 한층 확대하고자 《호남대동사목(湖南大同事目)》을 구상하고, 이를 1657년 7월에 효종에게 바치면서 전라도에도 대동법을 실시할 것을 건의하였다. 한국 최초의 태양력인 시헌력을 도입하여 양력 사용을 보급시키기도 했다.

 원두표(元斗杓, 1593년∼1664년)는 조선후기의 문신, 공신이다. 인조반정에 가담하였으며 서인 중진으로 원당의 당수였다. 자는 자건(子建), 호는 탄수(灘叟), 본관은 원주(原州)시중공계이다. 박지계의 문인이다. 광해군의 정치에 반대하여 아버지 원계군(原溪君) 원유남(元裕男) 등 여러 대신들과 힘을 합하여 인조반정에 성공하였다. 그 공으로 정사공신 2등에 뽑히고 평원군으로 책봉되었다. 또 이괄의 난에 공을 세워 전주 부윤을 지냈으며, 병자호란 때에는 왕을 남한산성으로 호위하여 어영대장을 지냈다. 그 후 효종 때 우의정, 현종 때 좌의정에 올라 내의원⋅군기시의 도제조를 겸하였다. 실록에서는 김자점의 옥을 두고 원두표가 빚어내 만든 일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 손자 원몽린은 효종의 다섯째 딸 숙경공주와 혼인하여 흥평위(興平尉)에 봉해졌다.

 송시열(宋時烈, 1607년∼1689년)은 조선 후기의 문신⋅성리학자⋅철학자⋅정치가이자 시인⋅작가로서, 유교 주자학의 대가이자 당색으로는 서인, 분당 후에는 노론의 영수였다. 본관은 은진(恩津)이고, 자는 영보(英甫), 아명은 성뢰(聖賚), 성래(聖來), 호는 우암(尤庵)⋅우재(尤齋)⋅교산노부(橋山老夫)⋅남간노수(南澗老叟)⋅화양동주(華陽洞主)⋅화양부자(華陽夫子),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효종, 현종 두 국왕의 왕자 시절 가르친 스승이었으며[2] 별칭은 대로(大老), 송자(宋子), 송부자(宋夫子)이다. 1633년(인조 10) 경릉참봉으로 출사하여 대군사부, 진선, 장령, 찬선, 세자사부, 이조판서, 의정부좌의정, 우의정, 영중추부사 겸 영경연사, 행판중추부사, 영중추부사 겸 영경연사에 이르렀다. 예송 논쟁 때 그는 주자가례에 의하여 효종이 인조의 차남이었으므로, 계모인 자의대비는 차남의 예에 따라 상복은 기년복을 입어야 된다고 하였다가, 남인과 오래 시비가 붙게 되었다. 당초 1차 예송에서는 허목과 윤휴의 3년복설을 이견으로 받아들이다가 윤선도가 그의 본심이 효종의 정통성을 부정하려는 의도라 비난하고, 허목이 그의 사형을 주장하면서 남인과 적대하게 된다. 그는 윤선도와 함께 효종, 현종을 가르쳤으나 그는 승승장구하고 윤선도는 한직에 머물렀으므로 이는 갈등의 불씨가 되기도 했다.

예송 논쟁 당시 송준길, 김수항과 함께 서인의 영수였으며, 기사환국으로 덕원부, 거제도 등의 유배지를 전전하다가 제주도에 유배됐으나 숙종 때 장희빈의 아들 원자 균을 세자로 지정하는 문제를 반대하다가 숙종의 진노와 남인의 사주로 국문을 받으러 오던 중 전라북도 정읍에서 사사된다. 1756년(영조 32년) 증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되었고, 그를 평소 존경하던 정조(正祖)에 의해 성인(聖人)으로 추숭되어 송자, 송부자(宋夫子)로 격상되고, 국가의 스승으로 추대되었다. 서인 성리학파의 종주로 송시열 역시 수많은 문하생을 배출하여 이단하, 윤증, 민정중, 민유중, 권상하, 이여, 정호 등을 길러냈으나, 이 중 윤증과는 그의 아버지 윤선거의 비문 문제로 절교하였다. 윤선거, 윤선도, 윤휴 등과 친구가 되어 교류하였으나 예송 논쟁 이후 모두 적대적 관계로 변한다. 노론의 정신적 지주로서 정조 때는 국가적 차원에서의 스승인 송자로 격상되고 유고는 역사상 가장 방대한 문집인 송자대전(宋子大全)으로 간행된다. 한국의 유학자 가운데 도통을 이은 성인을 의미하는 자(子) 칭호를 받은 유일한 인물로, 이는 1787년(정조 11년) 조선 정조가 《송자대전(宋子大全)》을 편찬함에 따라 공식화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 그의 이름이 3,000회 이상 등장하는데, 이는 조선조 인물 가운데 가장 많이 언급되는 것이다. 주자학의 대가로 조선의 정치사상계를 통일하여 지배원리를 제공한 조선의 가장 영향력 있는 대표적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송이창, 사계 김장생, 신독재 김집의 문인이다.

 송준길(宋浚吉, 1606년∼1672년)은 조선시대 후기의 문신⋅성리학자⋅정치가로서 유교 주자학의 대가였다. 노론⋅소론이 분당되기 전에 사망하였으나 사실상 그가 이끌던 문인들은 그의 사후 노론을 형성하였다. 성균관 문묘(文廟)에 배향된 해동 18현(海東十八賢)의 하나이다. 송시열과 함께 북벌론을 주장하였으며, 제1차 예송 논쟁 당시 송시열과 함께 주자의 성리학과 주자가례에 의거하여 자의대비의 복상 문제 때 기년복 설을 주장하였다. 일찍부터 김장생과 김집(金集)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1624년(인조 3) 진사로서 세마(洗馬)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고, 김장생과 김집의 문하에서 학문연구에 전념하였다. 인조 때 학행으로 천거되었으나 소현세자와 민회빈 강씨가 억울하게 죽었다고 보고 그들을 동정하였고, 소현세자 사후에게는 세자의 아들에게 계승권이 돌아가야 된다고 주장하다가 인조의 눈 밖에 났다. 그 뒤 학문 연구에 정진하다 1649년 효종 즉위 직후 스승 김집의 천거로 발탁되어 청요직을 역임했다. 그 뒤 1차 예송 논쟁 당시 송시열, 김수항과 함께 서인논객으로 활동하였으며, 이때 서인 온건파를 이끌며 남인에 대한 강경 처벌에 반대하는 입장에 섰다. 윤선도의 상소 이후 한때 윤선도의 구명운동을 펴기도 했다.

당색은 서인(西人)으로, 율곡 이이를 사숙하였고, 김장생, 김집의 문하생이며, 장인이기도 한 남인학자 정경세의 문하에도 출입하여 그를 사표로 받들었다. 친척인 우암 송시열과 함께 양송으로도 불렸다. 자는 명보(明甫), 호는 동춘당(同春堂), 본관은 은진. 영천군수를 지낸 송이창(宋爾昌)의 아들이며 딸 송씨는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 민씨와 민진원, 민진후의 생모이다. 사후 문묘(文廟)에 배향되었다. 우암 송시열의 친척이며 류성룡의 문인인 정경세의 사위이다. 남인의 영수 허적과는 먼 인척간으로 사위 민유중의 외외종숙이 된다. 명성황후(明成皇后)에게는 7대 외조부가 된다. 송이창(宋爾昌), 김장생(金長生), 정경세(鄭經世), 김집(金緝)의 문인이다.

 윤선거(尹宣擧, 1610년∼1669년)는 조선시대 후기의 유학자, 시인, 정치인이다. 자는 길보(吉甫), 호는 미촌(美村)⋅노서(魯西)⋅산천재(山泉齋)이다. 본관은 파평(坡平)이다. 신독재 김집의 제자이며, 인조 때 생원시에 급제하여 성균관에 들어갔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강화도로 피란하여 성문을 지키다가 점령당하였다. 이때 그의 아내는 자살하였고 그는 평민의 옷을 입고 성을 탈출하여 살았다. 그 후 비겁하게 살아남은 것을 후회하여 금산(錦山)으로 내려가 김집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스승 사후에도 출사하지 않고 평생을 학문 연구에 바쳐 성리학의 대가로서 이름을 떨쳤다. 그 뒤 여러 차례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살아남은 것을 자책하여 모두 사퇴, 학문에 정진하였다.

절친한 송시열(宋時烈)과 윤휴(尹鑴)가 학문적 문제로 대립하자, 중립을 취하여 오히려 오해를 산다. 그 뒤 예송 논쟁 직후에도 양자의 의견을 조정하려다가 송시열에게 윤휴와 결별할 것을 강요당하기도 한다. 송시열은 그의 오랜 친구이자 사돈이었으나, 병자호란 당시 혼자 피신한 것과, 예송 논쟁 당시 그가 윤휴의 의견을 두둔하면서 관계가 악화되었다.

죽은 후 증 이조참의에 증직되었다가 다시 아들 윤증의 현달로 증 의정부영의정(議政府領議政)에 추증(追贈)되었으나 1715년 유계(兪棨)와 함께 펴낸 《가례원류(家禮源流)》의 발문을 놓고, 노소론과의 싸움을 벌여 아들 윤증과 함께 관작이 추탈당했다가 1722년(경종 2) 복관되었다. 금산군 남일면 음대리에 산천재서원(山泉齋書院)이 건립되어 배향되었다. 이후 산천재서원은 영조의 서원 훼철령에 따라 1741년(영조 17년)에 훼철되었다. 저서로 《노서유고(魯西遺稿)》, 《노서일기(魯西日記)》 등이 있다. 충청남도 출신으로 김장생(金長生), 김집(金集)의 문인이다.

 

 동인(東人) 영남학파(嶺南學派)

영남학파(嶺南學派)는 조선시대 성리학에 대한 사유체계가 깊어지게 되면서 영남 지방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유파를 말한다. 이언적(李彦迪)을 창시자로 꼽는다. 이후 조식(曺植)을 중심으로 형성된 남명학파, 이황을 중심으로 형성된 퇴계학파, 장현광(張顯光)을 중심으로 형성된 여헌학파(旅軒學派)로 나뉜다. 영남학파 학풍의 특징은 이론 중심이 아니라 실천 중심에 있다. 조선 중기 유학자인 조식은 ‘경의(敬義)’를 몸으로 실천하여 학문과 덕행을 쌓았다.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절제된 가치관으로, 당시 사회 현실과 정치적 모순에 대해 적극적으로 비판하였다. 단계적이고 실천적인 학문 방법을 주장하였으며 이러한 실천궁행(實踐躬行, 실제로 몸소 이행)은 제자들에게도 그대로 이어져 경상우도의 학풍을 만들었다.

이러한 학풍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으로 참가하여 학문의 실천을 몸소 보여준 학인들의 모습에서 확인할 수 있다. 같은 시기 영남좌도에서 이황의 덕행을 우러러 그의 학문사상을 따르려는 유파가 생겨나며 이 학파를 퇴계학파라고 한다. 퇴계학파의 학자로 기대승, 김성일, 류성룡, 이덕홍, 조호맹, 정경세, 허목, 김흥락, 곽종석 등을 들 수 있다. 이 학파는 이황의 철학 사상을 이어받아 주리설(主理說)을 완성한다. 이황 철학의 기본적 성격은 이(理)에 절대적인 가치를 두고 기에는 상대적 가치를 두는 존리설(尊理說)이었으며, 본래 자리에서 실천 행동을 하지 못하는 이가 실천 행동을 할 수 있음을 주장하고 있다. 이것은 기호학파(畿湖學派)와 쌍벽을 이루는 대표적인 영남학파의 철학 특징이다.

 이황(李滉, 1502년∼1571년)은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 교육자, 시인이다. 본관은 진보(眞寶).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退溪), 퇴도(退陶), 도수(陶叟)이다. 그는 특별한 스승 없이 주희의 문집 등을 스스로 공부를 하여, 한국을 대표하는 성리학자가 되었다. 당시에 가장 성리학에 정통한 대학자로 인정되어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문의하곤 했다. 서인을 창시한 이이도 그런 사람 가운데 하나이다. 이황과 조식은 같은 해에 태어나서, 이황이 한 해 먼저 죽었다. 조식은 경상남도의, 이황은 경상북도의 대표적인 학자가 되었고, 그 지역의 유력 가문의 자제들은 모두 그들에게 배웠다. 이 학맥은 동서 분당 뒤에 동인의 핵심을 이루고, 다시 동인이 남인-북인으로 갈릴 때, 이황 제자들은 남인, 조식 제자들은 북인을 이룬다. 이황의 대표적인 두 제자는 학봉 김성일과 서애 류성룡이다. 벼슬은 류성룡이 더 높았지만, 김성일의 제자들이 더 많았고 세가 컸다. 임진왜란 당시 이황의 저서들이 일본군에게 약탈당했는데, 이때 약탈된 이황의 저서와 작품, 서한, 편지 등은 일본 유학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 기대승(奇大升, 1527년∼1572년)은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이다. 자는 명언(明彦), 호는 고봉(高峰)⋅존재(存齋), 본관은 행주이다. 광주광역시의 월봉서원(月峰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퇴계 이황과의 사단칠정(四端七情) 및 이기(理氣)논쟁을 통해 한국 성리학 수준의 제고에 기여했다고 평가받고 있으며, 율곡의 학풍에 영향을 주었다. 기대승은 1527년(중종 22년) 광주 소고룡리 송현동(現 광주광역시 광산구 신룡동)에서 태어났다. 1558년(명종 13년) 문과에 급제한 후 승문원(承文院) 부정자와 예문관(藝文館) 검열 겸 춘추관(春秋館) 기사관을 거쳐 1563년 3월 승정원(承政院) 주서(注書)에 임명되었다. 1563년 8월 외척이었던 명종비 인순왕후의 외삼촌 이량(李樑, 1519년 ∼1563년)의 주도하에 삭직(削職)되었다가 이후 복직되었다. 기대승은 32세에 퇴계 이황의 제자가 되었으며, 34세였던 1560년부터 스승인 이황과 사단칠정에 대한 서신을 주고받았는데 이것이 8년간의 사칠이기논쟁(四七理氣論爭)이다. 1572년 성균관(成均館) 대사성에 임명되었고, 대사간(大司諫)과 공조(工曹) 참의를 지내다가 병을 얻어 귀향하던 중 전라북도 고부에서 죽었다. 저서에 《고봉집(高峯集)》, 《주자문록(朱子文錄)》, 《논사록(論四錄)》이 있다.

 김성일(金誠一, 1538년∼1593년)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외교관, 학자이다. 본관은 의성, 호는 학봉(鶴峰), 자는 사순(士純)이다. 퇴계 이황의 제자. 시호는 문충공 서애 류성룡과 함께 퇴계의 학문을 이어받은 수제자로 임진왜란 때 초유사(招諭使)로 순절하였다. 1590년 일본에 통신사 부사로 갔다 와서 일본이 침략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잘못된 판단을 하여 보고함으로써 임진왜란 발발 이후 큰 비판을 받았다. 안동에 자리한 학봉종택은 안동의 대표적인 양반가옥의 전형으로 유명하다. 특히 학봉 문중에서는 학봉이 남긴 “3년 동안 금부도사가 찾아오지 않으면 선비 집안이 아니다.”라는 말을 가훈으로 여겨 왕에게 직언을 하는 문중으로 영남 유림의 중심 문중이 되었다.

1591년(선조 24) 종계변무(宗系辨誣)가 성사되었을 때 그는 광국원종공신(光國原從功臣) 1등의 한 사람으로 특별히 책록 되었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진주성 전투에 의병장으로 활약하다 전사한 공로로 사후에는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관에 추서되었다.

 류성룡(柳成龍, 1542년∼1607년)은 조선 중기의 문신, 인문학자, 의학자, 저술가이다.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이현(而見), 호는 서애(西厓)이고,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경상도 의성의 외가에서 태어났으며, 간성군수 류공작(柳公綽)의 손자이며, 황해도 관찰사 류중영(柳仲郢)의 차남이다.

이황의 문하에서 1590년 통신사로 갔던 조목(趙穆)⋅김성일(金誠一)과 동문수학하였으며 성리학에 정통하였다. 과거를 통해 관료로 등용되어 서인이 아닌 이산해(李山海)와 같은 동인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정여립의 난과 기축옥사를 계기로 강경파인 아계 이산해(鵝溪 李山海), 정인홍(鄭仁弘) 등과 결별하고 남인을 형성하였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직전 군관인 이순신을 천거하여 선조로 하여금 전라좌수사로 임명하도록 하였으며 이순신으로 하여금 임진왜란 당시 열세였던 조선의 전세를 역전시키는 데 공을 세웠고, 임진왜란에 4도 도제찰사, 영의정으로 어려운 조선 조정을 총 지휘하였다. 노량해전(露粱海戰, 1598년)과 같은 날인, 정인홍(鄭仁弘), 이이첨(李爾瞻) 등의 북인의 상소로 인해 영의정에서 관직삭탈하게 된다. 안동으로 내려가 선조의 부름에도 올라가지 않고 임진왜란 때 겪은 후회와 교훈을 후세에 남기기 위해 《징비록(懲毖錄)》을 저술하였다. 이 책은 대한민국의 국보 제132호이다. 죽을 때까지 청렴하고 정직한 삶을 살았던 청백리이면서 ‘조선의 5대 명재상(名宰相)’ 가운데 한 사람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이순신과는 어려서부터 같은 동네에서 함께 자란 절친한 사이로서 후견인 역할을 하였으며 이순신의 형 이요신과 친구사이기도 하다.

 이덕홍(李德弘, 1541∼1596) 조선 중기의 학자. 자는 굉중(宏仲). 호는 간재(艮齋). 어려서 이황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에 열중하였고 특히 역학에 능하였다. 벼슬은 세자익위사 부수 따위를 역임했다. 저서에 《주역질의(周易質疑)》, 《사서질의(四書質疑)》 따위가 있다.

 정경세(鄭經世, 1563년∼1633년)는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이다. 본관은 진주 어사공파(御史公派). 자는 경임(景任), 호는 우복(愚伏). 시호는 문장(文莊). 문충공 서애 류성룡의 문인으로, 학문으로는 퇴계 이황의 학통을 계승하였고 예학(禮學)에 뛰어났다. 류성룡의 아들 수암 류진의 스승이기도 하다. 1610년 전라감사로 재직하던 당시 정인홍 등 대북세력에 의해 탄핵 당하였고 인조반정이후에 다시 등용되어 홍문관 제학에 임명되었다. 후금의 침략에 대비하여 산성을 수축하고 군량미를 비축하며 또 뛰어난 장수를 선발하는 것과 군대의 정예화를 주장하였다. 여러 벼슬을 거쳐 1629년 이조판서 겸 대제학에 올랐다. 저서에는 《우복집(愚伏集)》, 《사문록(思問錄)》, 《주문작해(朱文酌海)》 등이 있다.

 허목(許穆, 1595년∼1682년)은 조선시대 후기의 문신 및 유학자, 역사가이자 교육자, 정치인이며, 화가, 작가, 서예가, 사상가이다. 본관은 양천(陽川)으로, 자(字)는 문보(文甫)⋅문부(文父)⋅화보(和甫), 호(號)는 미수(眉叟), 태령노인(台領老人),대령노인(臺領老人), 석호장인(石戶丈人)이다. 별호는 미로(眉老), 희화(熙和), 공암지세(孔巖之世), 승명(承明)이고 별호로는 동교노인(東膠老人), 구주노인(九疇老人), 동서노인(東序老人), 이서포옹(二書圃翁),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과거에 급제하지 않고도 정승 반열에 올라 의정부우의정겸 영경연사(領經筵事)에 이르렀다. 당색은 남인으로, 남인 중진이며, 청남의 영수였다. 학행으로 천거되어 관직에 올랐으며 효종 사후 제1차 예송 논쟁 당시 효종은 장남의 예로서 3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채택되지 않았고, 제2차 예송 논쟁 당시 인선왕후의 1년복이 채택되자 사헌부대사헌(司憲府大司憲), 이조참판(吏曹參判)에 발탁된 뒤 1675년 의정부우참찬(議政府右參贊) 겸 성균관제주(成均館祭酒), 의정부좌참찬, 이조판서(吏曹判書)를 거쳐 특별 승진하여 그해 의정부우의정(議政府右議政) 겸 영경연사, 사복시제조(司僕寺提調)를 지냈다.

예송논쟁(禮訟論爭) 기간 중 송시열의 사형을 주장하였고, 송시열에 대한 온건 처벌론을 주장하는 탁남(濁南)의 허적(許積), 권대운(權大運, 1612년∼1699년) 등과 갈등하였다. 그 뒤 북인 윤휴를 포섭하여 청남을 이끌었다. 지패법(紙牌法), 체찰사부(體察使部) 설치 등을 반대하였고, 1678년 판중추부사에 이르렀으나 허견(許堅)의 옥사의 파편(破片)을 맞고 파면된다. 남인의 강경파 인사이자 윤선도(尹善道), 윤증(尹拯)과 함께 남인의 저격수로 유명하였으며, 동시대의 정치가 우암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 등의 주요 정적(政敵)이자, 예송논쟁 당시 남인의 논객이었다.

이황과 조식의 제자인 한강 정구(鄭逑)의 문하에서 수학하다, 정구 사후 그의 수제자인 모계 문위(文緯)와 여헌 장현광(旅軒 張顯光)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정구(鄭逑, 1543년∼1620년)에게 수학하였으나, 박지화의 제자였던 부친 허교(許喬, 1567년∼1632년)와 외조부인 임제(林悌, 1549년∼1587년)의 영향으로 천문, 지리, 도가 등에도 능통하였다 한다. 글씨에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조예가 깊어 자신의 독특한 필체인 미수체로 널리 알려져 있다. 남인에서도 청남에 속하며, 고결한 인품 덕분에 남인이 실각한 뒤에도 88세까지 천수를 누렸다. 서예의 대가였으며 전서체에 능했다. 사후 1689년 복관되고 왕명으로 저서가 간행되었으며, 1692년 증 의정부 영의정에 증직되었다.

 

 남인(南人)은 조선 붕당정치의 당파로, 조선 중기 이후 동인이 북인과 남인으로 분파되면서 발생했다. 남인과 북인은 서인에서 갈라진 노론, 소론과 함께 사색당파를 형성했다.

서인과 대립하던 동인은 조선 선조 때 일어난 정여립의 역모 사건을 계기로 서인과의 대결에서 상대적으로 온건론을 내세운 남인과 강경파인 북인으로 나뉘게 되었다. 결정적으로 1591년(선조 24년) 서인 정철이 건저 문제(建儲問題)로 파직되자 서인 배척에 온건했던 동인 중의 일파이다. 남인은 초기에는 우성전(禹性傳), 이덕형(李德馨, 1561년∼1613년), 류성룡(柳成龍), 김성일 (金誠一, 1538년∼1593년), 후기에는 윤휴, 허목(許穆)⋅허적(許積) 등이 영도하였다. 학문적으로는 조식을 따르는 선비들은 북인을, 이황의 학파는 남인을 구성했다.

북인은 선조의 사망과 광해군의 등극으로 집권당이 되었으나 인조반정으로 몰락하여 소수파가 되었고, 이후 동인의 전통은 인조 반정 때 서인을 지지하여 살아남은 남인이 대부분 잇게 되었다. 그러나 효종, 현종 연간에 율곡과 우계의 문묘종사 논쟁과 예송 논쟁 과정에서 남인 강경파인 허목(許穆), 윤선도(尹善道), 윤휴(尹鑴) 등은 송시열을 맹렬하게 공격하여 갈등을 증폭시켰다.

남인은 조선 숙종 시대에 예송에 참여하여 서인을 실각시켰으나 서인 배척 문제로 청남(淸南)⋅탁남(濁南)으로 분열되었다. 그 뒤 인현왕후 폐위, 장희빈 중전 옹립, 인현왕후 복위 등으로 서인과 남인 간 대결이 주를 이루는 정국을 주도한 바 있고, 영조와 정조 대에는 이들의 탕평책에 따라 등용되었다. 이 시기 남인의 영수는 채제공이었다.

그러나 1800년 6월 정조 사망 이후 세도 정치 아래서 중앙 정계에서 밀려났으며, 재야에 머물면서 17세기 이후 실학파 형성과 천주교 도입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인물은 이승훈(李承薰), 안정복(安鼎福), 정약용(丁若鏞), 권철신(權哲身), 이가환(李家煥) 등이 있다.

 윤선도(尹善道, 1587년∼1671년)는 조선시대 중기, 후기의 시인⋅문신⋅작가⋅정치인이자 음악가이다. 본관은 해남, 자는 약이(約而)이고, 호는 고산(孤山) 또는 해옹(海翁)이다. 시호는 충헌(忠憲)이다. 예빈시부정(禮賓寺副正) 윤유심(尹唯深)의 아들이며, 강원도관찰사 윤유기(尹唯幾)의 양자이다. 화가 공재 윤두서(恭齋 尹斗緖)의 증조부이며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의 외5대조부이다. 정철(鄭澈), 박인로(朴仁老), 송순(宋純, 1493년∼1583년)과 함께 조선 시조시가의 대표적인 인물로 손꼽히며, 오우가와 유배지에서 지은 시인 어부사시사로 유명하다. 풍수지리에도 능하여 홍재전서(弘齋全書)에는 제2의 무학(無學)이라는 별칭이 등재되기도 했고, 의사로 민간요법에 관련된 저서인 약화제(藥和劑)를 남기기도 했다.

1613년(광해군 6년)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광해군 조정의 임해군, 영창대군의 옥사 등과 북인(北人)정권의 전횡을 비난하고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1616년 30세에 성균관 유생으로 이이첨(李爾瞻) 등의 횡포를 규탄했다가 함경도 경원(慶源), 경상도 기장(機張) 등으로 유배되었다가 풀려났다. 1623년(인조 1년)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가 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낙향했다. 이후 인조 반정 이후에도 관직을 사양하고 학문 연구에 전념하다가 봉림대군(鳳林大君), 인평대군(麟坪大君) 형제의 대군사부로 발탁되었다. 사부는 관직을 겸할 수 없음에도 특명으로 공조좌랑⋅형조정랑⋅한성부서윤 등을 5년간이나 역임하였다. 1629년(인조 6년)부터는 세자시강원문학(世子侍講院文學)으로 발탁되어 소현세자(昭顯世子)를 보도하였다.

그는 남인 중진 문신이자 허목(許穆, 1596년∼1682년), 윤휴(尹鑴, 1617년∼1680년)와 함께 예송 논쟁 당시 남인의 주요 논객이자 예송 논쟁 당시 선봉장이었다. 서인(西人) 송시열과 함께 효종, 현종을 가르쳤으나 그는 승승장구하고 윤선도는 한직에 머물렀으므로 후일 갈등의 불씨가 되기도 했다. 1차 예송 논쟁 당시 송시열의 체이부정 주장과 서인이 당론으로 소현세자와 민회빈 강씨(愍懷嬪 姜氏, 1611년∼1646년), 김홍욱(金弘郁) 복권운동을 벌이는 점을 근거로 송시열이 효종의 정통성을 부정한다는 상소를 올렸다가 서인의 맹공을 받고 자신이 삼수(三水)에 유배되어 오랜 세월 유배생활을 하였다. 조선 효종과 현종의 세자 시절 세자시강원 사부의 한사람이었던 덕에 사형은 모면하고 유배를 받았다. 유배지에서 울적한 심사를 달래며 지은 어부사시사 등은 유명한 작품이기도 하다. 이는 유배지에서 가사문학과 저서를 남긴 송강 정철, 20여 년간의 유배지에서 수십권의 저서를 남긴 다산 정약용 등과 비견된다. 그의 학문과 시맥은 이서우(李瑞雨, 1633년∼1709년)를 통해 성호 이익(星湖 李瀷)과 채제공(蔡濟恭)에게로 이어졌다. 1667년(현종 9) 그의 나이 81세에 이르러 겨우 석방되고, 숙종 때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다.

 

 기축옥사(己丑獄事, 1589년)-조선 선조 때의 옥사로 1589년 10월의 정여립이 모반을 꾸민다는 고변으로부터 시작되어 정여립과 함께 3년간 그와 연루된 많은 동인이 희생된 사건이다. 정여립의 옥사로도 부른다. 정여립은 호남 지역에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하여 무술 연마를 하며, 1587년에는 왜구를 소탕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대동계의 조직은 더욱 확대되어 황해도까지 진출했다. 하지만 이들의 동정이 주목을 받게 되고, 마침내 역모를 꾸미고 있다는 당시 황해도 관찰사의 고변이 임금에게 전해지자 조정은 파란을 일으켰다. 고변의 내용은 정여립의 대동계 인물들이 한강의 결빙기를 이용해 황해도와 전라도에서 동시에 봉기하여 입경하고 대장 신립과 병조판서를 살해하고 병권을 장악하기로 하였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정여립은 아들과 함께 죽도로 피신하였다가 관군의 포위망이 좁혀지자 자살하고 말았다. 이 사건으로 동인들이 서인들, 특히 정철과 배후의 성혼(成渾, 1535년∼1598년)에 원한을 가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 북인(北人)은 조선 붕당정치의 당파로, 조선 중기 이후 동인이 분파되면서 발생했다. 동인을 뿌리로 둔 남인과 북인은 서인에서 갈라진 노론, 소론과 함께 사색당파를 형성했다. 붕당정치 초기부터 서인과 대립하던 동인은 조선 선조 때 일어난 정여립의 역모 사건을 계기로 남인과 북인으로 분파되었다. 서인 정철의 건저의 사건을 전후하여 정여립의 사형을 주장한 서인과의 대결에서 남인은 상대적으로 온건론을 내세웠고, 강경파는 북인을 형성했다. 중심인물은 정인홍(鄭仁弘), 정여립(鄭汝立), 이발(李潑), 이산해(李山海) 등이다. 이들은 유성룡(柳成龍)이 이끄는 남인과 대립하였으며, 학문적으로는 조식을 따르는 선비들이었다. 반면 남인에는 이황의 학문을 계승하는 유학자들이 참가했다.

 

 대북파(大北派)와 소북파(小北派)는 1602년에 임진왜란 때의 타협적 정책을 빌미로 정인홍(鄭仁弘)의 탄핵을 받은 유성룡(柳成龍)이 밀려나면서 북인이 정권을 장악했다. 북인은 고위 관료 중심의 대북과 신진 세력인 소북의 두 개 정파로 구성되었으며, 선조 말기에는 소북이, 광해군 대에는 대북이 집권했으며, 소북은 영창대군(永昌大君)을, 대북은 광해군(光海君)을 지지하였다.

1606년에는 인목대비가 선조의 유일한 적자인 영창대군을 출산하여 왕위 계승을 둘러싼 정쟁이 치열해졌다. 선조가 1608년에 세자 문제를 결정 짓지 못하고 사망하여 광해군이 등극하면서 광해군을 적극 지지한 대북이 집권당으로 부상했다. 이이첨(李爾瞻)과 허균(許筠), 홍여순(洪汝諄)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대북은 다시 육북(肉北)⋅골북(骨北)⋅중북(中北)으로 나뉘며, 소북은 청소북(淸小北)⋅탁소북(濁小北)으로 분열한다. 1623년에 서인이 주도한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성공하면서 북인은 몰락하였고, 특히 광해군 재위 당시 집권당이었던 대북은 거의 전멸하였다. 이후 동인의 전통은 서인의 보복을 피하여 살아남은 남인과 일부 소북이 잇게 되었다.

 이이첨(李爾瞻, 1560년∼1623년)은 조선시대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득여(得與), 호는 관송(觀松)⋅쌍리(雙里), 본관은 광주(廣州)이다. 연산군 시대의 문신 이극돈(李克墩)의 후손이다. 또한 이정립(李廷立, 1556년∼1595년)과 남인계열로 간 이덕형(李德馨, 1561년∼1613년)은 그의 일족이었다. 사상적으로 남명 조식의 영향을 받았으며 정인홍(鄭仁弘)의 문하생이다.

1594년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다시 1608년 중시(重試)에 장원으로 급제한 뒤 훗날 광창부원군(廣昌府原君)에 봉해졌다. 북인이었다가 북인이 대북, 소북으로 나뉠 때는 대북에 가담했으며, 대북의 지도자였다. 선조 말기에 영창대군을 세자로 세우려는 소북의 음모를 저지하였으며, 광해군 즉위 이후 류영경(柳永慶, 1550년∼1608년)과 임해군(臨海君), 영창대군(永昌大君) 등을 폐서인해 죽임과 동시에 소북파를 숙청하였고 1617년 정인홍(鄭仁弘)과 함께 인목왕후 폐모론(仁穆王后 廢母論)을 주장하여 이듬해 그녀를 폐비시켜 서궁(西宮, 덕수궁)에 유폐했다. 이후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정운공신(定運功臣), 익사공신(翼社功臣), 형난공신(亨難功臣) 등에 녹훈되었다.

 정인홍(鄭仁弘, 1535년∼1623년)은 조선중기, 후기의 문신이자 성리학자이며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이다. 선조⋅광해군 대에 북인과 남명 조식학파(曺植學派)를 이끌며 정국을 주도했으며, 조식의 수제자이자 남명 학파의 지도자였다. 당색으로는 동인이었다가, 정철의 처벌을 놓고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나뉠 때는 강경파로 북인이었다. 자(字)는 덕원(德遠), 호는 내암(來庵), 본관은 서산(瑞山)이다.

1573년(선조 6년) 학문과 덕행을 인정받아 황간현감으로 발탁되어 선정을 베풀었다. 제용감정 등을 지내고 임진왜란 때 합천에서 의병을 모아 합천, 성주, 대구 등지에서 활동하며 왜병을 격퇴하여 영남 의병장의 호를 받았다. 조식의 수제자로서 최영경(崔永慶), 오건(吳健, 1521년∼1574년), 김우옹(金宇顒, 1540년∼1603년), 곽재우(郭再祐, 1552년∼1617년) 등과 함께 경상우도의 남명학파(南冥學派)의 대표적 인물 중의 한 사람이다.

왜란이 끝난 후 북인과 함께 정권을 잡았으며 북인이 분열한 후에는 이산해와 함께 대북의 영수가 되었다. 전란 종결 후 대사헌, 중추부동지사, 공조참판 등을 거쳐 우의정과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이르렀고 서령부원군(瑞寧府院君)에 봉군되었다. 북인이 다시 대북과 소북으로 나뉠 때는 적극 간여하지 않았으나 그의 제자인 이이첨(李爾瞻) 등이 대북이었으므로 광해군 정권의 원로로 예우받았다. 그러나 이언적(李彦迪), 이황(李滉) 등의 문묘종사(文廟從祠)를 반대하다가 유생들에게 탄핵받아 청금록(靑衿錄, 儒籍)에서 삭제되는 등의 시비에 휘말리기도 한다. 1623년 능양군(綾陽君) 등은 80세 이상의 재상은 처형하지 않는 관례를 어기고 그를 참형에 처했다. 그 뒤 서인과 노론으로부터 광해군 실정의 책임자의 한사람으로 비판을 받아오다가 1908년 순종때 가서야 복권되었다. 임훈(林薰, 1500년∼1584년), 조식(曺植, 1501년∼1572년)의 문인이다.

 

 계축옥사(癸丑獄事, 1608년)는 광해군(光海君)이 즉위하자, 대북은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옹립하여 역모하였다는 이유로 소북의 영수(領首) 류영경(柳永慶)을 죽이고 소북 인사들을 축출하였다. 그리고 대북은 또 계속 왕권에 위협이 되는 영창대군과 그 측근들을 제거하고자 하였는데, 때마침 그 계획을 이룰 수 있게 된 사건이 계축옥사(癸丑獄事)이다.

1613년 박응서(朴應犀)⋅서양갑(徐羊甲)⋅심우영(沈友英) 등이 조령(鳥嶺)에서 은(銀) 상인을 죽이고 은 수백 냥을 강탈한 사건이 일어났다. 그 범인 일당은 모두 서얼(庶孼) 출신들로, 자신들을 강변칠우(江邊七友)라 일컫는 무리였다. 그들은 적서 차별을 폐지해 달라는 자신들의 상소가 거부당하자 불만을 품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화적질 등 악행을 일삼던 중 그런 사건을 일으킨 것이었다. 대북은 그들에게 ‘영창대군을 옹립하여 역모를 일으키려고 했다’는 허위자백을 시켰고, 결국 그들로부터 ‘인목왕후(仁穆王后)의 아버지 김제남(金悌男)이 자신들의 우두머리이고 인목왕후도 역모에 가담했다’는 자백을 받아냈다. 또한 사건을 취조하는 동안 김제남과 인목왕후 부녀가 의인왕후(懿仁王后)의 무덤에 무당을 보내 저주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이로 인해 김제남은 사사(賜死)되었고 그의 세 아들 역시 처형당했으며, 영창대군은 폐서인되어 강화도에 유배되었다. 뿐만 아니라 신흠(申欽)⋅이항복(李恒福)⋅이덕형(李德馨)을 비롯한 서인과 남인 세력이 대부분 몰락하고 대북이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 사건이 계축년(癸丑年, 1613년)에 일어났으므로 계축옥사(癸丑獄事)라고 한다.

 

 인조반정(仁祖反正, 1623년)은 1623년 4월 11일 서인 일파가 광해군 및 대북을 몰아내고 능양군(綾陽君) 이종을 옹립한 사건을 말한다. 광해군은 당론의 폐해를 통감하고, 이를 초월하여 좋은 정치를 하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이원익(李元翼), 이항복(李恒福, 1556년∼1618년), 이덕형(李德馨, 1561년∼1613년) 등 명망 높은 인사를 조정의 요직에 앉혀 어진 정치를 행하려 했으며,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어느 한쪽의 손을 들어주지 않고 실리를 취하는 중립외교 정책을 폈다. 그러나 이이첨(李爾瞻), 정인홍(鄭仁弘) 등 대북파의 무고로 친형 임해군(臨海君)을 사사했으며, 1613년(광해군 5년) 계축옥사가 일어나 이복동생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죽이고 인목왕후를 폐비시켜 서궁에 유폐하였다. 이와 같은 광해군의 패륜 행위를 명분삼아 서인 김류(金瑬), 김자점(金自點), 이귀(李适), 이괄(李适), 심기원(沈器遠) 등은 반정을 일으켰다.

 

 이괄의 난(李适—亂, 1624년 인조 2년)은 인조반정의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이괄은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는 무고를 당하자 난을 일으켜 한양까지 함락시켰다. 조선대의 내부 반란으로서는 처음으로 왕을 도성으로부터 피난시킨 전무후무한 난이기도 하다. 이후 길마재 전투에서 패배하여 진압되었다. 이괄은 1622년(광해군 14년) 함경도 병마절도사에 임명되어 임지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을 때 친분이 있던 신경유(申景裕)의 권유로 광해군을 축출하고 새 왕을 추대하는 계획에 가담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623년 음력 3월에 서인의 주도로 일어난 인조반정에서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를 즉위시키는데 공을 세웠다. 그러나 이괄은 2등 공신에 책록되었고 반정 뒤 평안도 병마절도사로 임명되어 불만이 컸다. 그러던 중 1624년 음력 1월 문회(文晦), 허통(許通), 이우(李堣) 등이 이괄(李适)과 이괄의 아들 이전(李栴), 한명련(韓明璉), 정충신(鄭忠信), 기자헌(奇自獻), 현집(玄楫), 이시언 (李時彦)등이 역모를 꾸몄다고 무고하였다. 하지만 역모의 단서는 찾지 못했고 대신 이괄의 아들 이전을 서울로 압송하기로 했다.

 

 북벌론(北伐論)은 소중화사상에 입각하여 문화수준이 낮은 청나라의 오랑캐에게 당한 병자호란(丙子胡亂), 삼전도(三田渡)의 굴욕등의 수치를 씻고, 임진왜란 당시의 조선을 도와준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지켜 명을 대신하여 복수하자는 주장이다.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적 가치관을 가졌던 서인계 붕당은 후금과의 실리외교를 추진하던 광해군을 패륜정책으로 규정하고 인목대비 폐모 사건과 함께 광해군을 축출하는 중요 명분으로 이용하였다.

이 주장의 발단은 삼학사(三學士)에 있으며, 뒤에 효종의 북벌 계획에 영향을 미쳤다. 주로 노론에서 주창하였다. 효종은 이완(李浣)을 훈련대장에 임명하여 비밀리에 군대를 훈련시키고 성지(城池)를 개수했다. 또한 제주도에 표착한 벨테브레, 하멜 등에게 신무기를 만들게 하고,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 등을 등용하여 군비를 확충하였다.

그 뒤에도 1674년 청에서 오삼계(吳三桂)의 난이 일어나 청나라 내, 내부혼란이 발생한 것을 이용하여 숙종 초에도 윤휴(尹鑴)⋅허적(許積) 등 남인을 중심으로 북벌론이 다시 제기되어 북벌을 담당할 기구로서 도체찰사부(都體察使府)를 설치한 뒤 산성을 축조하고 무과 합격자를 늘리고 전차(戰車)를 제조하는 등 병력과 군비를 증가시켰다. 그러나 청이 삼번의 난(三藩之亂)을 진압하고 1680년 남인이 실각함에 따라 사실상 실행에 옮겨지지 못하였다.

 

 노론(老論)은 서인과 같이 성리학적 명분론을 신봉하였지만 숙종 때 서인에서 노론과 소론으로 나뉜 붕당으로 알려져 있다. 서인에서 송시열을 중심으로 하는 사람들은 노론, 윤증(尹拯, 1629년∼1714년)을 중심으로 하는 사람들은 소론이 되었으며 숙종 이후 조선의 주요 집권 세력이었다. 조선 중기 이후 서인에서 분파하여 소론과는 대립하는 파벌이었다. 서인의 일파인 소론과 노론은 동인에서 갈라져 나온 남인, 북인과 함께 사색당파를 이루었다. 1694년 남인을 제거하고, 1728년 소론을 제거한 후, 김조순(金祖淳, 1765년∼1832년), 조만영(趙萬永, 1776년∼1846년) 일가의 세도정치가 등장할 때까지 72년간 정권의 중심을 형성하였다.

 노론의 초대 영수 송시열

경신환국(庚申換局)에서 남인은 1674년(현종 15)의 갑인예송(甲寅禮訟)에서 승리하여 정권을 잡았으나, 그 해 즉위한 숙종은 모후인 명성왕후 김씨(明聖王后金氏)의 영향으로 모후의 족질(族姪) 김석주(金錫胄)를 요직에 기용, 남인을 견제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러던 중 1680년 3월 남인의 영수인 영의정 허적(許積)이 할아버지 잠(潛)의 시호(諡號)를 맞이하는 잔칫날에 벌어진 이른바 유악(油幄, 왕실 사용의 기름칠한 천막) 사건이 그 발단이 되었다. 마침 이날 비가 내려 숙종은 유악을 허적의 집에 보내고자 하였으나, 이미 가져간 것을 알고 크게 노하여 패초(牌招, 나라에 급한 일이 있을 때 국왕이 신하를 불러들이는 데 사용하던 패)로 군권(軍權)의 책임자들을 불러 서인에게 군권을 넘기는 전격적인 인사조처를 단행하였다.

즉, 훈련대장직(訓鍊大將職)을 남인계의 유혁연(柳赫然)에서 서인계의 김만기(金萬基)로 바꾸고, 총융사에는 신여철(申汝哲), 수어사에는 김익훈(金益勳) 등 모두 서인을 임명하였다. 그러나 어영대장은 당시 김석주가 맡고 있었기 때문에 보직을 그대로 고수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남인을 멀리하는 숙종의 태도가 확실하게 드러난 뒤, 정원로(鄭元老)의 고변으로 이른바 ‘삼복의 변(三福之變)’이 있게 되었다. 즉, 허적의 서자 견(堅)이 인조의 손자이며 인평대군(麟坪大君)의 세 아들인 복창군(福昌君)⋅복선군(福善君)⋅복평군(福平君) 등과 함께 역모를 도모하였다는 것이다.

이들은 숙종이 초년에 자주 병을 앓는 것을 보고 왕위를 넘겨다보았고, 근자에는 그들에 의하여 도체찰사부(都體察使府) 소속 이천(伊川) 둔군(屯軍)의 특례적인 조련(操鍊)이 몇 차례나 있었다는 것이다. 도체찰사부 둔군에 관한 보고는 이 사건의 피해가 남인계 여러 인사에게 미치는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

서인의 분파는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청나라와의 관계를 놓고 명분론과 현실론이 대립하면서 싹텄으며, 조선 숙종 대에 이르러 1680년(숙종 6년)의 경신환국(庚申換局) 때 서인이 집권하게 되자 송시열도 적소(謫所)에서 돌아와,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로 입조하게 되었는데 서인 중 소장 측에서는 송시열의 논의에 불만을 품는 자가 모여지게 되었다.

1682년(숙종 8년) 남인 제거를 꾀한 김익훈(金益勳, 1619년∼1689년)을 놓고 소장파가 그의 엄중 처벌을 주장한 데 대해 송시열 등은 김익훈을 신구(伸救, 죄가 없음을 밝힘)하려 하였다.

1683년(숙종 9년) 송시열이 효종의 묘(廟)를 세실(世室)로 하고 태조에게 시호를 추상(追上)하자는 제의를 하자, 그의 문인 윤증과의 불화까지 겹쳐 소장파는 소론을, 또한 노장파는 노론을 형성하였다.

숙종 대에는 본래 서인과 남인이 정쟁의 양대 축이었으나, 장희빈의 몰락을 계기로 남인은 몰락했다. 이후 정국은 서인 내부에서의 노론과 소론 간의 대립으로 전환되었다. 숙종과 경종 대에 소론은 장희빈의 아들인 경종(景宗)을, 노론은 연잉군(延礽君, 영조)을 지지하면서 이 같은 대립이 격화되었다.

경종 즉위 후 소론이 집권하여 노론 4대신이 처형되었으나, 경종이 일찍 사망하고 연잉군이 영조로 즉위하면서 이번에는 소론 4대신이 제거되었다. 이에 소론은 남인과 손을 잡고 이인좌의 난(李麟佐亂)을 일으켰다가 도리어 밀려나게 되었다.

노론의 우위 속에 영조와 정조는 탕평책으로 소론 일부도 등용했고, 전통적인 대립 구도가 완화되면서 노론의 붕당으로서의 의미는 차차 퇴색되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노론은 사도세자를 죽이는데 가담을 하고, 사도세자가 죽자 그의 죽음을 동정하는 시파(時派)와 그의 죽음을 당연시하는 벽파(僻派)로 다시 갈라지게 되었다.

그러나 학자에 따라 노론 벽파가 이후 개화파를 형성하고, 남인, 노론 시파 등은 위정척사파(衛正斥邪派)를 형성하였다고 보기도 한다.

조선 후기에 서인으로부터 나누어진 당파로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 1680년(숙종 6) 남인이 정권에서 축출되고 서인이 정권을 잡은 사건, 경신환국이라고도 함) 이후 남인에 대한 처벌을 놓고 서인이 강⋅온 양파로 분리되면서 발생했다. 즉, 1683년 노장파인 김익훈(金益勳) 등이 남인을 강력히 탄압하자 소장층인 한태동(韓泰東) 등이 이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린 것이 직접적인 발단이었다.

소론이 남인의 탄압에 온건한 입장을 취한 것은 만약 남인이 재집권하게 되면 보복이 있을 것을 염려한 때문이었다. 그러나 노론과 소론의 대립은 한때 송시열의 문인이었던 윤증(尹拯)이 송시열과 절교하고 난 이후 양자 사이의 개인적 감정과 정치적⋅학문적 갈등도 하나의 원인이었다. 초기 노론의 영도자는 김익훈(金益勳)⋅송시열(宋時烈) 등이었으며, 소론의 영도자는 조지겸(趙持謙)⋅윤증(尹拯) 등이었다. 이후 당쟁은 주로 노론과 소론 사이에서 벌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조선 숙종 6년(1680)에 일어난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 이후 남인(南人)에 대한 처벌을 놓고 서인(西人)이 강, 온 양파로 분리되면서, 강경 입장을 취한 노장층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당파였기에 세상에서는 조선 붕당정치의 한 당파로 이들을 가리켜 강경 입장을 취한 사람들은 주로 노장층이었으므로 노론, 온건 입장을 취한 사람들은 소장층이었으므로 소론이라고 하였다.

유교와 특히 성리학적 대의사상을 당의 강령으로 삼았다. 이는 송시열(宋時烈), 김창집(金昌集), 김종수(金鍾秀, 1728년∼1799년) 등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며, 노론 내 벽파와 시파에게도 공통적으로 전하는 전승이었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3000번 이상 언급된 조선최대의 당쟁가로 알려진 송시열은 83세의 나이에 ‘죄인들의 수괴’라는 죄목의 사약단죄가 되었으나, 죽은 후 성균관 문묘에 공자와 함께 배향되고, 공자(孔子), 맹자(孟子), 주자(朱子)처럼 송자(宋子)로 불리는 영광을 누리고 있다.

학자들은 근본적인 사회변화가 요구됐던 당시 시대 상황을 무시한채 소중화(小中華)라는 명분론을 내세우고, 사대부 계급의 이익과 서인⋅노론이라는 당의 이익만을 중시했던 인물이라는 것이고 결국 명분과 당익만을 내세워 ‘그들의 나라’를 지키는 데 급급했던 송시열과 집권 노론세력이 이후 조선 전체의 비극을 불러왔다고 보는 것이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나라의 운명을 좌우했던 한 인물과 송시열에 얽힌 당시 정치 상황들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며 하나의 역사적 반성에서 사상적 기반이 된 송시열에 대한 평가와 붕당정치(朋黨政治)의 폐해를 점검하고 시대 변화를 거부했던, 보수적인 정치가의 모습의 송시열에 대한 후한 편견으로 조선 후기에 이미 그 기능을 다한 주자학을 정치에 잘못 적용한 시대착오였다고 반추한다.

세도정치 이후 노론의 힘은 급격히 약해졌다. 순조 때 외할아버지 김조순(金祖淳)이 사실상 대리청정을 하자 안동 김씨가 권력을 잡은 한편, 반면 노론은 안동 김씨를 당할 만큼의 힘이 없었다. 결국 세도 정치가 시행되어 노론은 몰락하였다.

 윤선거(尹宣擧, 1610년∼1669년)는 조선시대 후기의 유학자, 시인, 정치인이다. 자는 길보(吉甫), 호는 미촌(美村)⋅노서(魯西)⋅산천재(山泉齋)이다. 본관은 파평(坡平)이다. 신독재 김집의 제자이며, 인조 때 생원시에 급제하여 성균관에 들어갔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강화도로 피란하여 성문을 지키다가 점령당하였다. 이때 그의 아내는 자살하였고 그는 평민의 옷을 입고 성을 탈출하여 살았다. 그 후 비겁하게 살아남은 것을 후회하여 금산(錦山)으로 내려가 김집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스승 사후에도 출사하지 않고 평생을 학문 연구에 바쳐 성리학의 대가로서 이름을 떨쳤다. 그 뒤 여러 차례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살아남은 것을 자책하여 모두 사퇴, 학문에 정진하였다. 절친한 송시열(宋時烈)과 윤휴(尹鑴)가 학문적 문제로 대립하자, 중립을 취하여 오히려 오해를 산다. 그 뒤 예송논쟁 직후에도 양자의 의견을 조정하려다가 송시열에게 윤휴와 결별할 것을 강요당하기도 한다. 송시열은 그의 오랜 친구이자 사돈이었으나, 병자호란 당시 혼자 피신한 것과, 예송 논쟁 당시 그가 윤휴의 의견을 두둔하면서 관계가 악화되었다. 죽은 후 증 이조참의에 증직되었다가 다시 아들 윤증의 현달로 증 의정부영의정(議政府領議政)에 추증(追贈)되었으나 1715년 유계(兪棨)와 함께 펴낸 《가례원류(家禮源流)》의 발문을 놓고, 노소론이 싸움을 벌여 아들 윤증과 함께 관작이 추탈 당했다가 1722년(경종 2) 복관되었다. 금산군 남일면 음대리에 산천재서원이 건립되어 배향되었다. 이후 산천재서원은 영조의 서원 훼철령에 따라 1741년(영조 17년)에 훼철되었다. 저서로 《노서유고(魯西遺稿)》, 《노서일기(魯西日記)》 등이 있다. 충청남도 출신으로 김장생(金長生), 김집(金集)의 문인이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 기해예송(己亥禮訟, 1659년)

제1차 예송이라고도 하는 기해예송(己亥禮訟)은 1659년 효종이 죽자 계모 자의대비 장렬왕후 조씨(莊烈王后 趙氏, 1624년∼1688년)의 복상기간을 중자(衆子, 장남이 아닌 아들)의 예에 따라 기년복(1년)으로 할 것인가 장남의 예로서 3년복으로 할 것인가에 대한 논란으로 시작되었다. 1660년(현종 1년) 음력 3월 남인 허목(許穆) 등이 상소하여 조대비의 복상에 대해 3년 설을 주장하면서 들고 일어나 맹렬히 서인을 공격하여 잠잠하던 정계에 풍파를 일으켰다. 이에 대하여 서인 송시열, 송준길 등은, 효종은 인조의 제2왕자이므로 계모후(繼母后)인 자의대비의 복상에 대해서는 기년설(朞年說 : 만 1년)이 옳다고 대항하였고, 남인 허목과 윤휴 등은 또다시 이를 반박하여 효종은 왕위를 계승하였기 때문에 적장자(嫡長子)나 다름없으니 3년 설이 옳은 것이라고 반박하였다. 복제를 몇 년을 입느냐를 놓고 논란이 진행되면서 남인 허목은 효종이 일단 왕위를 계승하였으니 왕통과 국통을 이은 장자라고 해석했고, 소북계의 윤휴는 장자가 죽으면 적처 소생 제2자를 장자로 세운다고 한 의례의 경구를 인용하여 효종은 비록 둘째 아들이나 적자로서 왕위를 계승했기 때문에 차장자이고 3년상을 치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송시열은 《의례(儀禮)》의 사종지설(왕위를 계승했어도 3년 상을 치를 수 없는 이유) 중 체이부정(적자이지만 장자가 아닌 경우)에 입각하여 효종은 인조의 차자이므로 1년 상이 옳다고 반박했다. 송시열은 오히려 문종, 세조, 광평, 금성, 임영대군을 차례로 잃으면 세종대왕은 3년씩 열 번을 상복을 입느냐고 반박하였다. 허목과 윤휴는 누구든지 왕위를 계승하면 어머니도 일단 신하가 되어야 한다는 입장이었고, 송시열, 송준길은 효종이 자의대비를 지존(왕후)으로 받들었을 뿐더러 아들이 되어 어머니를 신하로 삼을 수 없다고 하자, 윤휴는 왕자의 예는 일반 사서와는 다르다며 반론을 제기했다. 영의정 정태화 등의 대신들은 송시열 시왕지제《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있는 모자간의 복식에 따라 기년복을 채택했지만, 1660년 허목이 상소를 올려 예송은 다시 일어나게 되었다. 허목은 윤휴의 차장자설에 입각한 3년상을 찬성하면서 첩의 자식으로 왕위에 오른 경우만 체이부정(體而不正)에 해당된다며, 효종은 정실이 낳은 차자이니 서자가 아니라고 했고, 송시열과 송준길은 주자가례에 적장자 외의 중자는 모두 서자로 본다고 했다. 허목은 송시열, 송준길이 효종을 첩의 자식으로 둔갑시켰다며 문제삼았고, 결국 자기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상복도(喪服圖)까지 첨부시켜 현종의 앞에서 송시열과 송준길을 공격했다. 그러나 송시열은 끝내 초지를 굽히지 않아, 결국 기년설이 그대로 채택되고 서인은 더욱 세력을 얻게 되었다. 이것이 소위 기해예송(己亥禮訟)이다. 허목, 윤휴와 송시열의 예론대결로 흘러가던 중 윤선도가 송시열은 효종의 정통성을 부정했다고 지적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예송은 토론에서 이념 대립으로 격화된다.

 

 갑인예송(甲寅禮訟)은 1674년(현종 15) 2월 효종(孝宗)의 왕비 인선왕후(仁宣王后)의 국상이 일어나자, 시어머니 자의대비(慈懿大妃, 趙大妃)가 입을 상복을 두고 일어난 예송(禮訟) 사건이다. 일명, ‘제2차 예송’이라고도 한다. 초상 직후 정권을 잡고 있던 서인들은 대공복으로 결정하였으나, 7월 6일 남인계의 대구 유생 도신징(都愼徵)이 상소하여 기년복의 복제(服制)의 오류를 지적하였다. 이에 현종은 조정의 대신과 중신들을 불러 대공복으로 정한 이유를 추궁하고 재검토할 것을 지시하였다. 서인들은 송시열의 ‘체이부정(體而不正)’ 논리에 따라 계속 대공복을 주장하였으나, 현종은 기해예송에서 장자와 차자를 구분하지 않는 ‘국제기년복(國制朞年服)’을 채택했음을 이유로 7월 15일 복제를 기년복으로 개정하고 서인 중심인물들을 처벌하였다. 그해 8월에 현종이 죽고 숙종이 즉위하자, 서인들을 대거 축출하고 남인들을 등용하여 인조반정 이후 50여 년 만에 정국이 개편되었다.

갑인예송은 기해예송의 재판으로서, 그 핵심은 인선왕후가 인조의 장자부로 볼 것인가, 중자부(衆子婦)로 볼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기해예송에서 공식적으로 채택된 것은 효종의 장자와 차자의 지위를 구분하지 않는 정태화의 ‘국제기년복’이었다. 그러나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장자와 차자에 대한 상복은 구분하지 않았지만, 장자부와 중자부에 대하여는 각기 기년복과 대공복으로 구분하고 있었다. 당시 서인들은 기해예송에서 기년복이 채택되었으므로 인선왕후를 중자부로 인식하여 대공복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도신징은 기해예송에서 효종을 중자로 간주한 적이 없다는 것을 지적하여 대공설을 비판하였다.

갑인예송은 도신징이 문제를 제기하였지만, 그해 7월의 복제 논란은 서인 고관들과 국왕 현종 사이에서 진행되었다. 현종의 뒤에는 외척 김석주(金錫冑)가 이론적으로 뒷받침하였고 제1차 예송의 주역들인 남인들, 즉 허목(許穆)⋅윤휴(尹鑴)⋅윤선도(尹善道)⋅권시(權諰) 등은 전혀 이 예송에 참여하지 않았다.

1674년(현종 15) 2월, 인선왕후의 초상 직후에 정권을 잡고 있던 서인들은 자의대비의 복제를 대공복(大功服, 9개월 복상)으로 결정하였다. 이는 송시열의 ‘체이부정(體而不正)’ 논리를 반영하여 인선왕후를 인조의 중자부로 본 것이었다. 그해 7월 6일 남인계의 대구 유생 도신징(都愼徵)이 상소하여 기년복의 오류를 지적하였다. 그 요지는 기해예송에서 효종을 중자로 간주한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에 현종은 조정의 대신과 중신들을 불러 대공복으로 정한 이유를 추궁하고 재검토할 것을 지시하였다. 그래서 왕과 서인들 간에는 네 차례의 논쟁이 왕복되었다. 그러나 서인들은 자신들의 입장을 바꿀 수 없었으므로 계속 대공복을 주장하였다. 이에 현종은 기해예송에서 장자와 차자를 구분하지 않는 ‘국제기년설(國制朞年說)’을 채택했음을 이유로 7월 15일 복제를 기년복으로 개정하고, 서인 중요 인물들을 송시열에게 빌붙은 죄로 처벌하였다.

현종은 효종의 종통을 비하하는 대공복의 논리에 분노하여 복제를 개정하고 서인 당로자들을 처벌하였다. 현종은 갑인예송의 복제를 개정한지 한 달여 만인 1674년(현종 15) 8월에 갑자기 승하하였다. 나이 14살에 즉위한 숙종은 현종의 장례를 마친 후, 과감히 서인들을 조정에서 축출하고 남인들을 등용하여 정국을 개편하였다.

 

 경신환국(庚申換局)은 1680년(숙종 6년) 남인 일파가 정치적으로 대거 실각한 일이다. 경신사화(庚申士禍), 경신출척(庚申黜陟)이라고도 한다. 1674년(현종 15년)의 복상 문제에서 승리하여 정권을 잡은 남인은 전횡이 심하였고, 숙종으로부터도 그다지 신임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또한 당시의 영의정 허적(許積)의 유악(油幄, 비가 새지 않도록 기름을 칠한 천막) 사건은 왕으로 하여금 더욱 남인을 꺼리게 하였다. 유악(油幄)사건이란, 허적의 조부 허잠(許潛)의 시호를 맞이하는 잔치를 연 날에 숙종의 허락도 없이 군사 용품인 유악을 빌려가자, 숙종이 분노하여 군권을 남인에서 서인으로 대거 교체한 것이다. 허적의 천막 유용과 허견의 옥사로 분노한 숙종은 정권을 교체해버린다. 이때 서인 중 김석주(金錫胄) 등은 허적의 서자인 허견(許堅) 등이 역모한다고 고발하여 옥사(獄事)가 일어나는데, 이를 ‘삼복의 변’이라 한다. 이리하여 종실인 복창군(福昌君) 3형제와 허견은 물론, 허적과 윤휴도 살해되었고, 허목은 파직되어 문외출송되었으며 나머지 일파는 옥사⋅사사⋅유배되었다. 이로써 남인은 큰 타격을 받고 실각하였다.

 

 윤선도(孤山 尹善道, 1587년∼1671년)의 상소-인조반정 후 서인은 낙당과 산당으로 나뉘었다. 이 중 김장생(金長生), 김집(金緝), 원두표(元斗杓),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 윤선거(尹宣擧) 등 서인 산당 세력은 소현세자(昭顯世子)와 민회빈 강(愍懷嬪 姜氏)씨가 억울하게 인조의 손에 죽었다고 확신하고 이들의 명예를 회복시키는 것을 당론으로 삼았다. 그 뒤 이괄의 난(李适-亂, 1624년)과 이귀(李貴), 김류(金瑬), 이서(李曙)의 죽음과 김자점(金自點) 일파의 역모 적발로 서인 낙당이 몰락하면서 정권을 독차지한 서인 산당은 이를 공론화시키고자 하였으나 효종의 강경한 거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황해도관찰사인 김홍욱(金弘郁)은 소현세자빈 강씨의 복권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효종의 손에 죽임을 당한다. 이후 서인 산당은 소현세자, 민회빈 강씨, 김홍욱 복권을 당론으로 정하고 틈틈이 이를 상소하여 관철시키려 했다. 남인 윤선도는 자의대비의 복제를 효종의 종통과 연결시켜 효종은 적통을 이은 왕인데 송시열 등의 기년복을 따른다면 효종의 종통은 애매하게 되고, 소현세자와 그의 자손들에게 적통을 주는 것이 된다. 그러면 효종은 가짜왕이냐 섭정황제냐라고 비판하였다. 여기에 서인이 당론으로 소현세자, 민회빈 강씨, 김홍욱 복권을 당론으로 정한 것도 문제 삼았다. 서인들은 이를 정치공세로 해석하고 격분한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서인들은 일제히 윤선도가 이종비주(종통을 둘로 나누고, 임금을 비천하게 함)를 내세워 송시열과 송준길을 공격한 것은 예론을 빙자한 흉악한 모함이라고 성토하여 윤선도를 삼수로 유배를 보냈다. 서인 부제학 유계(俞棨)는 윤선도의 상소를 불태울 것을 주장하여, 현종이 상소를 돌려주었는데도 결국 불사르게 한다. 그리고 윤선거(尹宣擧), 김수홍(金壽弘) 등 허목(許穆), 윤휴(尹鑴)의 원론이 맞다고 주장한 서인 내부를 당론통일에 협조하라며 단속하기에 이른다. 송시열의 사돈이며 윤선거의 사돈인 탄옹 권시(炭翁 權諰, 1604년∼1672년)는 송시열과 송준길이 장악한 조정에서 바른말을 하는 것이 무슨 죄냐며 옹호했다가 서인언관들의 성토로 관직을 잃고 낙향했고, 조경(趙絅)은 윤선도를 구원하면서 송시열을 공격하다가 좌천되었다. 남인 홍우원(洪宇遠, 1605년∼1687년)은 윤선도의 유배지가 너무 멀다고 선처를 호소했다가 파직당한다. 서인과 남인의 대립이 격화되었고, 1666년(현종 7) 영남 남인 선비 1700여 명이 송시열에 대한 비난 상소를 올리고, 성균관 유생 등의 반박 상소로 절정에 이르렀다.

결국 현종이 직접 중재에 나서 기해년 복제는 사실상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따른 것이지 고례를 채택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다시 복제를 가지고 서로 공격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며 기해예송을 다시 언급하는 자가 있으면 중형으로 다스리겠다고 하여 1차 예송은 일단락되었다. 그 뒤에도 예에 관한 논란이 약간 있었으나 이를 뒤집지는 못한다.

 김수항[金壽恒, 1629년(인조 7년)∼1689년(숙종 15년)]은 조선 후기의 문신, 학자, 정치인으로 당파는 서인이다. 서인당과 노론당의 중진이었고 예송논쟁 당시 서인의 주요 논객이었으며, 송시열의 주자가례(朱子家禮)에 의한 1년 복설을 지지하였다. 서인으로서 2차례의 예송 때 남인과 대립했으며, 뒤에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갈리자 노론의 영수가 되었다. 반시(泮試)와 진사시(進士試)에 입격하고 1651년에 알성문과에 장원(壯元)으로 급제하였다. 그 뒤 1654년 춘당대문과에 병과로 합격하고, 사간원정언, 홍문관교리, 이조정랑 등 청요직을 두루 거쳐 1656년(효종 7) 문과중시(文科重試)에 을과로 급제하여 다섯 번 과거에 급제했다. 대사간, 형조참의 등을 거쳐 1659년 이조참의, 승지 등을 두루 역임했다. 1661년(현종 2) 이조참판 등을 거쳐 제1차 예송 논쟁 당시 자의대비(慈懿大妃, 인조의 계비)의 복상문제 때 3년복설을 주장하는 윤휴, 윤선도, 허목, 허적 등에 맞서 송시열, 송준길의 1년 복설을 지지하였다. 그 뒤 송시열을 역모로 몰려는 윤선도를 탄핵하여 유배 보내고, 1662년 대제학(大提學)에 특진하였다. 1674년 효종비 인선왕후(仁宣王后)의 부음으로 때 자의대비(慈懿大妃, 인조의 계비)의 복상문제로 제2차 예송(禮訟)이 일어나자, 형 김수흥(金壽興), 송시열 등과 함께 대공복(大功服, 9개월설)을 주장했으나, 남인의 공세로 기년설(朞年說)이 채택되자 벼슬을 내놓았다. 1675년 숙종 즉위 후 좌의정에 임명되었다가 윤휴(尹鑴, 1617년∼1680년), 허적(許積, 1610년∼1680년), 허목(許穆, 1596년∼1682년) 등의 공격으로 관직이 삭탈되고, 강원도 원주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나왔다. 그러나 다시 영암에 부처되었다가 석방, 1680년 영의정이 되고, 1681년 현종실록의 편찬총재관을 지냈다.

서인의 중진이었다가 1682년 김익훈(金益勳)의 처벌을 놓고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질 때 그는 노론을 선택하였다.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남인이 재집권하자 전남 진도(珍島)에 유배된 후 위리안치되었다가 사사(賜死)되었다. 1차 예송논쟁과 2차 예송논쟁 당시 서인의 주요 논객으로 송시열을 지원, 보완하였으며 왕자 균(景宗)의 세자 정호를 반대하였다. 좌의정 청음 김상헌(金尙憲)의 손자이며 인목대비는 그의 이모할머니였고 영창대군과 정명공주는 이종숙과 외종이모였다. 숙종의 후궁인 영빈 김씨(寧嬪 金氏, 1669년∼1735년)의 종조부이다. 자(字)는 구지(久之), 호는 문곡(文谷), 시호는 문충(文忠)이며 본관은 (신)안동(安東)이다.

 김익훈(金益勳, 1619년∼1689년)은 조선 후기의 외척이며 문신, 군인, 정치인으로 숙종의 정비 인경왕후의 종조부이다. 본관은 광산으로 자(字)는 무숙(懋叔)이고 호는 광남(光南)이며 시호는 충헌(忠獻)이다. 음보(蔭補)로 출사하여 부총관, 병마절도사 등을 지내고 보사공신 2등으로 광남군(光南君)에 봉군되었다. 서인 중진이자 척신 계열의 정치인으로 남인을 공격하였으며, 1680년(숙종 6) 복창군⋅복선군(福善君)⋅복평군(福平君) 등이 허견(許堅)과 모역을 꾀한다는 고변으로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을 일으켜 김석주와 더불어 남인들을 몰아내는 데 적극 가담하였다. 허견의 비리와 부패행위 정보를 입수하여 사건을 확대, 숙종의 외당숙 김석주와 함께 역모 사건을 날조하여 남인들을 일망타진하려다가 서인이 노론, 소론으로 분당되는 원인을 제공하였다. 사계 김장생의 손자이자 김집의 조카이며, 우암 송시열의 문인이다.

 김창집[金昌集, 1648년(인조 26년)∼1722년(경종 2년)]은 조선 후기의 문신, 학자, 작가이다. 자(字)는 여성(汝成), 호는 몽와(夢窩), 시호(諡號)는 충헌(忠獻)이며, 본관은 (신)안동(安東)이다. 청음 김상헌(金尙憲)의 증손이며, 문곡 김수항(金壽恒)의 아들이다. 당색으로는 서인이었다가 노론, 소론 분당 후에는 노론에 가담하였다. 예조 판서 김창협(金昌協), 이조 판서 김창흡(金昌翕), 김창업 등의 형이다. 순조의 장인 김조순(金祖淳)은 그의 4대손이었다. 노론의 영수였으나 소론인 조문명(趙文命)의 처삼촌이기도 하다. 소현세자빈 민회빈 강씨 일족의 억울함을 상소하여 신원, 복권시켰다. 경종(景宗) 때 연잉군(후일의 영조)의 세제 대리청정을 주장했다가 소론에 의해 역모로 몰려 이이명(李頤命), 조태채(趙泰采), 이건명(李健命) 및 아들 김제겸(金濟謙), 손자 김성행(金省行) 등과 함께 사사된다. 이른바 노론 4대신으로 불리며, 창협(昌協), 창흡(昌翕), 창업(昌業), 창집(昌緝), 창립(昌立)등 육창(六昌)으로 불린다.

 신흠(申欽, 1566년∼1628년)은 조선의 문신이다. 자는 경숙(敬叔), 호는 상촌(象村), 본관은 평산이다.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학유감찰병조좌랑(學諭監察兵曹佐郎), 봉교(奉敎), 양재도찰방(良才道察訪) 등을 지냈다. 임진왜란 때에 삼도순변사(三道巡邊使) 신립(申砬, 1546년∼1592년)을 따라 조령 전투에 참가했으나, 신립이 패하자 강화에 들어갔다가 체찰사 정철(鄭澈)의 종사관이 되었다. 한때 명나라에 다녀오기도 했다. 동지성균관사, 예문관 대제학을 지내고 1608년, 한성부판윤, 예조판서를 거쳐 숭정대부가 되고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가 되었다. 광해군이 즉위하자 대사헌(大司憲)으로서 세자 책봉 주청사(奏請使)가 되었고 선조로부터 영창대군을 보필하라고 부탁 받은 7대신 중의 한 사람으로, 1613년 계축옥사(癸丑獄事) 때에 유배되었다. 인조반정 후 다시 등용되어 우의정을 지냈으며,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세자를 모시고 전주에 피난 갔다가 돌아와서 영의정이 되었다.

 이항복(李恒福, 1556년∼1618년)은 조선 중기의 문신⋅정치가⋅시인⋅작가이다. 본관은 경주, 자는 자상(子常), 호는 백사(白沙)⋅필운(弼雲)⋅청화진인(靑華眞人)⋅동강(東岡)⋅소운(素雲),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우참찬(右參贊)을 지낸 이몽량(李夢亮)의 아들이며, 도원수 권율의 사위이다. 이덕형(李德馨, 1561년∼1613년)과의 오성과 한음(鰲城과 漢陰)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 선조를 수행하여 의주까지 몽진(蒙塵)을 다녀왔으며, 호성공신 1등으로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참판,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1600년 영의정에 이르렀다. 광해군의 인목대비 폐모 및 영창대군, 임해군 처단을 반대하다가 유배되어 유배지에서 중풍으로 병사하였다.

 이덕형(李德馨, 1561년∼1613년)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 정치인으로 동인(東人)과 남인(南人)의 일원이다. 같은 동인이었다가 북인이 된 이이첨은 그와 10촌 형제간이었다. 본관은 광주, 자는 명보(明甫), 호는 한음(漢陰)⋅쌍송(雙松)⋅포옹산인(抱雍散人)이며,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이민성(李民聖)의 아들이다. 절친한 친구 이항복과의 평생에 걸친 우정은 ‘오성과 한음’으로 회자되었다. 한성부 출신이며 1613년 경기도 광주 사저에서 지병으로 사망하였다.

 

 기사환국(己巳換局)은 조선 숙종 15년(1689년) 때 소의(昭儀) 장씨 소생의 아들 윤(昀)을 왕세자로 삼으려는 숙종에 반대한 송시열 등 서인이 이를 지지한 남인에게 패배하고, 정권이 서인에서 남인으로 바뀐 일이다. 일명 기사사화(己巳士禍)라고도 한다.

숙종은 오랫동안 아들이 없었는데 장소의(張昭儀)가 왕자 윤(昀)을 낳았다. 왕은 크게 기뻐하여 원자로 삼고 장소의를 희빈(喜賓)으로 책봉하려 하였으나 서인들이 반대하므로 남인들의 도움을 얻어 왕자를 원자로 세우려 하니 서인들은 노⋅소론(老少論)을 막론하고 왕비 민씨(閔氏)가 아직 젊으니 후일까지 기다리자고 주장했다. 숙종은 1689년(숙종 15)에 서인의 요청을 묵살하고 원자의 명호(名號)를 정하고 장소의를 희빈으로 책봉하였다. 송시열은 상소를 하여 송나라의 신종(神宗)이 28세에 철종(哲宗)을 낳았으나 후궁(後宮)의 아들이라 하여 번왕(藩王)에 책봉하였다가 적자(嫡子)가 없이 죽음에 태자로 책봉되어 신종의 뒤를 계승하였던 예를 들어 원자 책봉의 시기가 아님을 주장하였다. 이 사건 후 남인 권대운(權大運) 등이 등용되었다. 이후 갑술옥사(甲戌獄事) 때까지 남인이 정권을 잡았다.

소의장씨(昭儀張氏) 소생의 원자를 정호(定號)했을 때에 찬성하여 발생된 했던 인현왕후 민씨(仁顯王后 閔氏) 폐출(廢黜)이다. 즉, 숙종은 이미 원자의 명호가 결정되었는데 그런 말을 한다는 것은 잘못이라 하여 분하게 여기던 차, 남인 이현기(李玄紀)⋅남치훈(南致薰)⋅윤빈(尹彬)⋅이익수(李益壽) 등이 송시열의 상소를 반박하여 왕의 의견을 좇으니 송시열을 파직시키고 제주도에 유배시킨 후 사사(賜死)하였다. 이 밖에 송시열의 의견을 따랐던 서인 김수흥(金壽興)⋅김수항(金壽恒) 등 수명이 파직 유배되었다.

 

 갑술환국(甲戌換局)은 1694년(숙종 20년) 4월 1일에 발생한 숙종 시대의 3차 환국으로, 기사환국이 발생한 1689년 2월 2일 이후로 정권을 집권해온 남인이 몰락하고, 기사환국 때 몰락했던 서인(노론⋅소론)이 재집권한 사건이다. 숙종 20년(1694년) 3월 23일, 민암(閔黯)이 한성 내 노⋅소론가의 자제들이 재물을 모아 환관(宦官)⋅폐인(嬖人)과 척가(戚家)에게 뇌물을 써서 거짓말과 허위의 풍문(風聞)을 만들어 내어 조신(朝紳)을 헐뜯고 인심(人心)을 불안하게 하여 음험하게 간악한 짓을 시행하려는 계획을 만든다는 함이완(咸以完)의 내부고발이 있음을 아뢰었다. 이에 숙종은 이들을 모두 체포하여 의금부로 하여금 엄중히 조사토록 허가하고, 특별히 엄한 형벌을 쓰라고 명하였다. 3월 25일, 왕비 장씨(喜賓 張氏)의 오라비인 우윤 겸 포도대장 장희재(張希載)가 소론과 친분이 있어 왕래해온 것을 사죄하며 사직서를 제출하였지만 숙종은 곡절이 있을 테니 작은 일에 불안해하지 말라며 위로했다. 장희재의 뇌물수수 혐의는 26일의 국문 과정 중에 장희재가 자리에 있었으나 뇌물은 받지 않았다는 죄인 측의 증언으로 무죄판결되었다. 3월 26일, 한중혁(韓重爀)⋅김춘택(金春澤)⋅이진명(李震明)⋅이후성(李後成)⋅이기정(李起貞)⋅김도명(金道明)⋅이동번(李東蕃)⋅변진영(邊震英)⋅유복기(兪復基)⋅이시도(李時棹)⋅이시회(李時檜) 등이 체포되었다. 이중, 지방 거부(巨富) 출신 무인(武人) 이시도가 ‘한중혁(韓重赫, 소론) 부자(父子)가 남인을 제거할 목적으로 남인의 삼대장(三大將, 훈련도감⋅수어영⋅금위영)이 종실 의원군을 왕으로 세울 역모를 꾸민다고 무고하려고 했다. 한중혁은 이 계획을 동평군(東平君)이 알면 반드시 기뻐할 것이다고도 했다.’고 거짓 토설을 하니, 숙종은 분개하여 이시도(李時棹)를 더욱 엄히 고문할 것을 허가하고 국청을 확대시킨다. 이 과정 중, 피의자들이 효종의 딸이자 숙종에겐 고모가 되는 숙안공주⋅숙명공주⋅숙휘공주가 노론의 대표인 김춘택(金春澤)과 손을 잡고 환국 도모에 동참했음을 내세우자, 민암민암(閔黯, 1636년∼1694년)을 위시한 남인이 세 공주를 엄히 다스릴 수밖에 없음을 일제히 상소하여 숙안공주(淑安公主) 자매는 물론 숙종의 여동생인 명안공주(明安公主)의 유가족조차 화(죽음)를 피하기 어려워졌다. 3월 29일, 유생 김인(金寅)이 고변서(告變書)를 올려 신천 군수(信川郡守) 윤희(尹憘)와 훈국별장(訓局別將) 성호빈(成虎彬) 등이 반역(反逆)을 도모하는데 장희재도 참여하였으며, 민암(閔黯)⋅오시복(吳始復)⋅목창명(睦昌明)도 서로 연결(連結)되어 있는 것을 직접 들은 것과 장희재가 1693년에 숙빈 최씨(당시 숙원)의 외숙모 일가에게 돈을 주고 회임 중인 최씨를 독살토록 사주하는 것을 자신이 목격했다고 고발했다. 이에, 민암⋅장희재 등이 숙종에게 억울함을 토로하였으며 숙종은 김인의 고변이 허황되어 믿지 않는다며 이들을 위로했다. 그러나 다음날인 4월 1일, 숙종은 돌연 민암 등 남인을 대거 정계에서 축출하고 서인에게 다시 정권을 주는데 이를 갑술환국(甲戌換局)이라고 한다.

 

 소론(少論)은 조선 붕당정치의 한 당파이다. 조선 중기 이후 서인에서 분파했으며, 노론과는 대립하는 파벌로서 윤증(尹拯)을 옳게 여기는 파벌이었다. 소론에는 조지겸(趙持謙)⋅오도일(吳道一)⋅박태보(朴泰輔)⋅남구만(南九萬)⋅박세채(朴世采) 등 대개 청의(淸議)를 주장하는 소장이 많다. 서인의 분파는 병자호란 때 청나라와의 관계를 둘러싼 논쟁에서 이미 단초를 보였으며, 조선 숙종 대에 이르러 상대적 보수파인 송시열의 노론과 송시열을 비판하는 소론으로 분파가 일어났다. 송시열의 제자였으나 ‘회니시비(懷尼是非)’ 논쟁으로 불화를 일으킨 윤증을 비롯하여, 남구만, 박세채가 소론의 중심이었다. 경신환국으로 정권을 잡은 서인들은 남인에 대한 처벌을 놓고 강경한 처벌을 주장한 노론과, 타협적 온건론을 주장한 소론으로 갈라졌다.

송시열과 윤증의 감정적 다툼은 1669년 윤선거의 죽음에서 비롯된다. 윤증은 스승인 송시열에게 윤선거의 묘갈명(墓碣銘)을 부탁했는데, 송시열이 윤선거의 병자호란 당시 행적과 주자학에 대한 선명성을 문제 삼았다. 송시열의 교조적인 태도에 대하여 윤선거는 생전에 《기유의서(己酉擬書)》를 남겨 비판한 적이 있어, 두 사람 사이의 대립이 사후 윤증을 통해 다시 촉발된 것이었다. 윤증이 소론에 속하면서 양 파벌의 분화는 촉진되었다. 숙종과 경종 대에 이르러 소론은 경종을, 노론은 연잉군을 지지하여 왕위 계승 문제를 둘러싼 대립이 극에 달했다. 경종은 숙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라 소론이 득세했으나, 후사가 없어 이복동생인 연잉군을 왕세제로 삼으면서 대리청정 논쟁, 목호룡의 역모 사건 등으로 정국은 복잡해졌다. 결국 경종은 일찍 사망하고 연잉군이 영조로 즉위하여 이번에는 노론이 정권을 장악했다. 영조 즉위 초에 소론의 핵심은 제거되었고, 일부는 남인과 연합하여 이인좌의 난을 일으켰다가 척결되었다. 이후 영조와 정조의 탕평책을 통해 집권당의 일부로 남아 있었다. 소론의 학문적 전통은 정제두(鄭齊斗), 이광사(李匡師)를 통해 이어져 강화학파를 형성했고, 이종휘(李鍾徽, 1731년∼1797년)와 이건창(李建昌, 1852년∼1898년)을 거쳐 정인보(鄭寅普, 1893년∼1950년)에까지 승계되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 조지겸(趙持謙, 1639년∼1685년)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광보(光甫), 호는 오재(迂齋). 광주(廣州) 출신이다. 소론 계열이었다.

 윤증(尹拯, 1629년∼1714년)은 조선 후기의 학자, 정치인, 사상가이다. 본관은 파평. 자(字)는 자인(子仁), 호는 명재(明齋)⋅유봉(酉峰),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당색은 서인, 소론의 영수이다. 윤선거(尹宣擧)의 아들이다. 서인 윤선거, 김집, 유계, 권시, 송시열의 문하생이다. 서인이 노론, 소론으로 분당할 때 소론의 영수가 된다. 유계(兪棨), 김집(金集)의 문하에서 수학하다가 권시의 문하에서도 수학했으며, 김집의 추천으로 김집 사후 우암 송시열의 문인이 되었다. 그러나 아버지 윤선거의 묘비문 문제로 발생한 회니논쟁과 김익훈(金益勳), 김석주(金錫胄)의 역모 날조에 염증을 느껴 후일 노론이 된 주류파와 갈등하였으며, 아버지 윤선거의 비문 문제를 계기로 송시열과 절교한 후 소론의 영수가 되었다. 효종 때 내시교관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현종 때 여러 차례 관직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다가 1682년 관계에 나가 판돈령부사(判敦寧府使)에 이르렀으나 사퇴하였다. 예론에 정통한 학자로 이름이 높았으나 1673년부터 아버지의 묘갈명(墓碣銘) 문제, 송시열 비난 서신의 전달 등으로 송시열과 절교하여 소론(少論)의 영수가 되었다. 1715년에는 아버지와 스승 유계의 공동 저서 《가례원류(家禮源流)》 발문속에서 정호(鄭澔)로부터 비난을 받아 당쟁이 격화되어 소론이 거세당하고, 우의정에 제수되었으나 사직하고 판중추부사로 전임되었다가 사망한다. 사후 좌의정에 증직되었으나 《가례원류(家禮源流)》 문제로 후에 그의 관직도 추탈 당하였다가 1722년에 복구되었다.

 남구만(南九萬, 1629년∼1711년)은 조선의 문신이자 정치가이다. 숙종 때의 소론의 거두로 자는 운로(雲路)이고 호는 약천(藥泉), 미재(美齋)이며 본관은 의령이다. 개국공신 남재의 후손으로 오달제의 처조카이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충청남도 홍성의 결성(結城)에 살다가 서울로 올라와 김익희(金益熙), 이경여(李敬輿), 송준길(宋浚吉) 등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다. 효종 때에 문과에 급제하여 1657년 정언(正言)이 되었다. 1664년 당시 중전이었던 현종비 명성왕후의 백부 김좌명을 탄핵하였다가 파직되어 3년 뒤인 1667년 승지로 복직되었다. 1679년(숙종 5) 한성부 좌윤을 지냈다.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윤휴가 소나무를 사사로이 베어 집을 지은 사실과 허적의 서자 허견의 비리 등 남인들의 횡포를 상소하였다가 오히려 거제도와 남해로 유배되었다. 1680년,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남인이 몰락하자 도승지로 조정에 복귀해 대제학, 병조판서,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까지 지냈다. 1681년 에도 막부의 제5대 쇼군 도쿠가와 쓰나요시의 취임을 축하하기 위해 일본에 통신사로 다녀오는 등 당시 대표적인 일본통이었다. 1683년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되자 소론의 영수가 되었다. 1694년 갑술환국(甲戌換局)이 일어나자 노론에 맞서 희빈 장씨를 두둔하였고 장씨가 인현왕후의 제거를 위해 장희재와 주고받은 언문 편지로 인해 장희재가 위기에 몰렸을 때에도 세자의 외숙임을 생각해 그의 목숨을 살리는데 일조하였다. 이로 인해 남구만은 서인 강경파인 노론을 비롯한 유생들의 공격을 받게 되었고 1701년 무고의 옥에 연루되어 파직되었다. 이후 고향으로 돌아가서 조용히 일생을 보내다 83세에 죽었으며, 숙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 박세채(朴世采, 1631년∼1695년)는 조선후기의 정치가이며 유학자이다. 자는 화숙(和叔), 호는 현석(玄石)⋅남계(南溪), 본관은 반남(潘南)이며, 시호는 문순(文純)이다. 당색은 서인이었다가, 후일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당될 때 소론이 되었다. 박의(朴猗), 청음 김상헌, 신독재 김집의 문인이다. 회니시비를 계기로 송시열과 윤증이 갈등하자 양자를 화해시키려 노력했으나 실패한다. 1694년부터는 대동법의 재실시를 주장하여 전국으로 확대시켰다. 그 뒤 허새의 옥사를 계기로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당되자 나량좌 등과 함께 소론] 결성하고 소론의 영수가 되었다. 보통 노론의 정치적 입장에 우호적이었으며, 유학자들의 학통을 서술, 기록한 《동유사우록(東儒師友錄)》을 집필하여 조선시대 성리학자, 유학자들의 계보를 신라시대까지로 소급, 파악하였다. 이는 유학의 뿌리를 송나라 이후로 보려는 조선후기의 통상적인 견해와 다른 것이었다.

 

 강화학파(江華學派)는 1709년(숙종 35) 61세의 정제두가 강화도 하곡에 자리 잡은 후 형성된 학풍을 가리킨다. 강화학파의 학문적 경향은 조선 시대 주류 사상인 성리학과 달리 외부가 아닌 마음속에서 사물의 이치를 파악함으로써 실천을 강조한 양명학(陽明學)으로 규정된다. 이것은 강화학파의 마지막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정인보(鄭寅普)가 제시한 견해로, 정인보는 강화학파의 학맥이 정치적 탄압 속에서 드러나지 못한 채 이어져왔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강화학파로 분류되는 인물들의 사상을 분석해보면 양명학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경세학(經世學)적, 국학(國學)적 요소도 존재했다. 아울러 정치적 탄압을 받았다고 하지만 정제두는 영조(英祖, 재위 1724~1776) 때 산림(山林)으로 영조에게 영향력을 행사하였으며, 그의 제자들 중에도 영정조 대 탕평 정국에서 소론계 정파를 이끌며 활동한 인물이 존재했다.

강화학파는 양명학을 넘어서서 다양한 학문을 널리 섭렵하려는 박학풍(博學風)과 절충적 학문 경향으로 실천을 강조하는 실리적 학풍이 후대로 계승되어 정제두의 제자들은 다양한 방면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이광사는 시⋅서⋅화에 뛰어났는데, 특히 서예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이영익(李令翊)은 양명학과 성리학을 절충적으로 수용하여 실천을 강조하였으며, 『고문상서(古文尙書)』 위작설을 수용하기도 하였다. 유희의 한글 연구는 훈민정음 이래 가장 뛰어난 업적으로 평가받는 『언문지(諺文志)』의 편찬으로 이어졌다. 국학(國學), 특히 우리 역사에 대한 이해도 높아졌다. 예컨대 이긍익은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이종휘는 『동사(東史)』에서 조선의 독자적 유교 문화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냈다. 또한 1910 일제 강점이 시작되자 강화학파의 중심인물인 이건승(李建昇, 1858년∼1924년), 홍승헌 등은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하였고, 강화학파에 속하는 이동녕(李東寧, 1869년 ∼1940년), 이회영(李會榮, 1867년∼1932년) 등도 헌신적으로 독립운동을 하였다.

강화학파는 실천적 성향을 강조한 양명학을 기초로 하여 다양한 학문을 가능하게 하였다. 강화학파를 중심으로 한 독자적 유교 문화에 대한 자각은 이후 민족의식을 일깨울 토대로 작용할 수 있었으며, 식민지 시기 독립운동의 중심이 될 수 있었다.

 정제두(鄭齊斗, 1649년∼1736년)는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이다. 자는 사앙(士仰), 호는 하곡(霞谷)이다. 성리학자였으나 양명학에 관심을 갖고 양명학자가 되었으며 강화학파의 시초가 되었다. 윤증의 문인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뜻이 있어 백가(百家)에 통달하였고, 윤증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배웠다. 숙종 때에 6품(六品)⋅대성(臺省)⋅방백(方伯)의 벼슬을 받았으나 사퇴하고 전 생애의 대부분을 학문 연구에 바쳤다. 처음에는 주자학을 공부했으나 곧 주자학에 반기를 들고 20여세 때부터 양명학(陽明學)에 심취(心醉), 당시 학계와 정계에서 이단으로 몰려 배척당하면서도 조선 최초로 양명학의 사상적 체계를 완성, 그의 이러한 학문은 비판적인 그의 학풍과 함께 신작(申綽)⋅이광사(李匡師)⋅유희(柳僖) 등 실학자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그는 왕양명의 학설 중 제일의(第一義)라고 할 수 있는 ‘치량지설(致良知說)’의 ‘양(良)’이 ‘지(知)’에 대하여 주의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즉 ‘치지’의 ‘지(知)’가 지식의 ‘지(知)’가 아니라 선천적 지혜라고 했다. 그러므로 ‘양(良)’는 생래적으로 얻은 혜명(慧明)한 선천적 지성을 뜻한다고 했으며, ‘양지(良知)’가 있으므로 경험이 가능하고 지식을 지식으로서 받아들일 수 있다고 했다. 또한 성현의 말씀이 중요한 것은 그 말씀 속에 흐르는 논리가 중요한 것이요, 논리보다도 그 논리를 이해할 수 있는 양지가 더욱 귀하다고 했다.

그의 학풍은 조선과 한국의 학술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그의 학술사상의 본령(本領)은 양명학에 있었다. 그의 저서로는 《논어해(論語解)》, 《맹자설(孟子設)》, 《존언(存言)》, 《서(書)》, 《성학설(聖學說)》, 《대학설(大學說)》, 《중용해(中庸解)》 등이 있다.

 

 이인좌의 난(李麟佐亂)은 조선 영조(英祖) 4년(1728년) 소론 강경파와 남인 일부가 경종의 죽음에 영조와 노론이 관계되었다고 주장하면서 일으킨 반란이다. 난이 일어난 영조 4년이 간지로는 무신년이었기에 무신난(戊申亂)이라고도 하고, 난의 주요 지역이었던 경상도(영남)의 이름을 따서 영남란(嶺南亂)이라고도 한다. 신임사화(辛壬士禍) 이후 실각 당하였던 노론이 영조의 즉위와 동시에 다시 집권하고, 앞서 노론 4대신을 무고한 바 있는 소론파 김일경⋅목호룡이 죽음을 당하자, 그 당의 나머지는 불만을 품고 기회를 엿보고 있던 차, 1727년(영조 3년) 음력 7월 1일 노론의 일부가 실각함을 보고, 이듬해 음력 3월에 이인좌⋅김영해⋅정희량⋅박필현 등이 주동이 되어 밀풍군 탄(坦)을 추대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 신임사화(辛壬士禍)

연잉군을 보위하던 노론은 경종의 병을 앞세우며 연잉군을 세제로 책봉하려고 하였다. 이제 겨우 즉위한지 1년밖에 안된 경종에게 노론대신은 세제를 책봉할 것을 요구하였다. 노론은 경종의 어머니를 궁에서 몰아내더니, 이제는 경종까지 몰아내려고 도모하였다. 조성복이 왕에게 상소하였다.

“오늘날 동궁은 장성한 나이가 전하께서 선왕의 곁에 나가셔서 정사에 참석하실 때보다 갑절이 될 뿐만 아니니, 여러 정사를 밝게 익히는 것이 더욱 마땅히 힘써야 할 급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전하께서 신하들을 맞으실 때나 명령을 재결하는 사이에 언제나 세제를 불러 곁에 모시고 참여해 듣게 하고, 옳고 그름을 판단하여 일을 가르쳐 익히게 한다면 동궁께서 일에 밝고 익숙하게 될 것입니다.” 《경종실록 1년 10월 10일》

경종 역시 “내가 이상한 병이 있어 조금도 회복될 기약이 없다”면서 “만약 청정하게 하면 나라 일을 의탁할 수 있고, 내가 마음을 편히 하여 쉬면서 요양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하여 국사를 모두 세제에게 처리하게 하도록 하였다. 노론은 뜻밖의 성과를 거두게 되었다. 별다른 노력 없이 소론이 주도하던 정권을 뒤 엎은 것이다. 《경종실록 1년 10월 10일조 (신축)》

나라를 다스리는 분께서 편안할 생각만 하십니까? 노론이 경종에게 대리청정의 명을 받아 내자 당연히 소론의 반대가 빗발치기 시작했다. 삼사에서 먼저 왕을 찾아가 아뢰었다.

전하께서는 춘추가 한창이시고 신기가 왕성하십니다. 비록 병환 때문이라고 하교하시지만, 드러난 증세가 없으니 마땅히 더욱 분발하시고 힘쓰셔서 지극한 다스림에 이르기를 기약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전하께서는 편안하고 한적한 방법만을 위하여 이런 정무를 놓을 생각을 가지시니, 신 등은 전대에 일찍이 이런 일이 있었음을 실로 알지 못합니다. 바라건대 마음을 빨리 돌이켜 비망기(備忘記, 임금의 명령을 적어서 승지(承旨)에게 전하던 문서)를 도로 거두소서.《경종실록』 1년 10월 13일》

조태구는 “국가는 전하의 국가가 아니라 곧 조종의 국가입니다. 옥새를 가지는 자리는 사람이 사사롭게 결정하는 곳이 아닙니다.”라고 주장하면서 대리청정의 명을 거두지 않는다면 돌아갈 수 없다고 강경 대응하였다. 사실상 말도 안 되는 대리청정을 주장했던 노론들도 소론이 들고 일어서자 꼬리를 내렸다. 김창집은 “이제 여러 신하가 명을 도로 거두기를 청하니, 반드시 도로 거두시게 하려는 뜻이 신 또한 어찌 여러 신하와 다르겠습니까?”고 말하면서 집권할 수 있었던 아쉬움을 드러냈다.

노론이 쥘 듯 했던 정권은 소론이 더욱 확실하게 쥐게 되었다. 소론은 곧바로 대리청정을 주장했던 노론 4대신, 즉 이이명(李頤命), 이건명(李健命), 김창집(金昌集), 조태채(趙泰采)를 처단할 것을 주장했다.

저 무리들이 몰래 딴 뜻을 쌓아온 지 무릇 몇 해가 되었는데, 아침저녁으로 모의하고 밤낮 경영한 것은 모두 전하를 단속하고 하늘이 내릴 자리를 동요시키려 한 것이었으니 식자들이 전일의 일이 일어날 줄 안 지 오래 되었습니다. 만약 이 무리가 임금 아래에 하루라도 더 있으면 반드시 종사에 근심을 끼칠 것입니다. 청컨대 이들을 절도에 위리안치하고… 《경종실록 1년 12월 12일》

경종은 소론의 의견에 따라 영의정 김창집과 좌의정 이건명, 판중추부사 조태채가 유배되었다. 중국에 왕세제 책봉을 위해 가있던 이건명은 귀국하자마자 곧바로 의주에 유배되었다. 이 밖의 노론 인사들도 대거 숙청되어 소론이 완전히 정권을 획득하게 되었다.

《경종실록 1년 10월 13일조 (신축)》

《경종실록 1년 12월 12일조 (신축)》

숙종은 자신이 총애하는 희빈 장씨가 왕자를 낳자 3개월 만에 원자로 책봉하고 그가 3세가 되자 왕세자로 책봉하였다. 이에 대해 당시 집권세력이었던 서인은 정비인 민씨가 아직 나이가 어리므로 적자 계승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노론 대신 송시열은 “왕의 결정은 항상 여유 있게 천천히 하는 것을 귀하게 여겨야”한다며 여유를 두고 세자를 책봉할 것을 상소하였다.

지난해 11월 초에 지금의 영의정 김수흥이 글을 급히 신에게 보내어 알리기를, ‘후궁에게 왕자의 경사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쇠약하여 정신이 혼몽하고 귀가 어두운 가운데서도 저절로 기쁨에 넘쳐 입이 벌어졌는데, 오늘날에 이르러 듣건대, 윤의 세자 책봉이 너무 이르다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 송나라의 철종은 열 살인데도, 번왕의 지위에 있다가 신종이 병이 들자 비로소 책봉하여 태자로 삼았습니다. 이와 같이 천천히 한 것은, 제왕의 결정은 항상 여유 있게 천천히 하는 것을 귀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숙종실록 15년 2월 1일》

숙종은 “10년을 기다렸다고 한 것은, 반드시 내가 유언할 때까지 기다리라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격노하면서 송시열을 삭탈관직 한 후에 도성 밖으로 내 쫒으라고 명령하였다. 한편 왕과 서인의 갈등을 남인들이 이용하여 정권을 잡게 되었고, 인현왕후가 폐위되고 그 자리에 희빈 장씨가 오르게 되었다.

세자 윤은 숙종의 보호와 희빈 장씨의 보호, 남인들의 보호를 받으며 동궁에서 왕이 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숙종은 희빈 장씨에 대한 애정이 식기 시작하더니, 폐위된 민씨를 다시 중전의 자리에 앉혔다. 희빈 장씨는 무당을 들여 인현왕후를 저주하다가 발각되었다. 서인은 희빈 장씨의 처벌에 대한 논의에서 의견 대립을 보이며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졌다. 노론은 국모인 인현왕후를 모해한 죄를 물어 사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소론은 세자를 보호해야 한다며 사사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결국 노론의 의견이 받아들여졌고, 희빈 장씨는 사약을 받고 사사되었다. 희빈 장씨가 죽고 그녀를 죽이자는 노론이 집권하자, 그녀의 소생이자 세자인 윤도 주목을 받지 못하게 되었다.

숙종은 비밀리에 노론의 이이명과 김창집 등을 불러 후사는 연잉군으로 정할 것을 비밀리에 부탁하였다. 그러나 숙종의 죽음으로 4년간 대리청정을 하던 경종이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이에 따라 당시 집권하였던 노론은 정치적 입지가 약해지게 되었다. 정계는 경종을 보위하던 소론 측이 주도하게 되었다.

《숙종실록 15년 2월 1일》

《숙종실록 43년 7월 19일》

소론 정권은 노론대신의 처벌을 유배형에서 끝내지 않았다. 이듬해 3월 목호룡(睦虎龍, 1684년∼1724년)이 남인이 숙종 말년부터 경종을 제거할 음모를 꾸며왔다는 고변함으로써 노론의 비극이 또다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소론은 노론이 전년에 대리청정을 주도하고자 한 것도 이러한 경종 제거계획 속에서 나온 것으로 이해하였던 것이다.

목호룡이라는 자가 임금께 상소하기를, “역적으로서 전하를 시해하려는 자가 있어 혹은 칼로써 혹은 독약으로 한다고 하며, 또 전하의 폐출을 모의한다고 하니, 나라가 생긴 이래 없었던 역적입니다. 청컨대 급히 역적을 토벌하여 종사를 안정시키소서.”하고, 또 말하기를 “그 역적 중에는 동궁을 팔아 씻기 어려운 오욕을 끼치려 하는 자가 있습니다. 역적의 정상을 구명해서 국본을 안정시키소서.”하였다 … 목호룡이 말하기를, “저는 비록 미천하지만 왕실을 보존하는 데 뜻을 두었으므로, 흉적이 종사를 위태롭게 만들려고 모의하는 것을 눈으로 직접 보고는 감히 이처럼 상변한 것입니다. 흉적(凶賊)은 정인중(鄭麟重)⋅김용택(金龍澤)⋅이기지(李器之)⋅이희지(李喜之) 등 입니다.”하였다. 《경종실록 2년 3월 27일》

목호룡이 역모자로 지목한 인물들 중에는, 김창집(金昌集)의 손자 김성행(金省行)과 이이명(李頤命)의 아들 이기지(李器之), 조카 이희지(李喜之) 등이 있었다. 소론은 “백망(白望)이라는 자가 쓴 ‘양(養)’자는 곧 이이명의 자(字)였으니, 그를 몰래 추대하려는 뜻을 보인 것”이라며 이이명을 연루시켜 참형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건명은 “이이명의 사촌 아우로 김창집과 생사를 같이하는 무리”라며 처단할 것을 주장하였다.

고변에 따른 8개월간의 국문 끝에 김창집(金昌緝), 이이명(李頤命), 이건명(李健命), 조태채(趙泰采)는 결국 사사되었다. 또한 이들을 비롯한 노론의 대다수 인물이 대대적인 화를 입었다. 《경종실록 2년 3월 27일조 (임인)》

 

 탕평책(蕩平策)은 조선 영조가 당파 싸움을 막기 위해 당파간의 세력 균형을 위해 추진한 정책이다. 이러한 정책은 후대인 정조 대에도 이어졌다.

“탕평”이란 말은 서경(書經) 홍범조(洪範條) 중 5조인 황극설(皇極設)의 ‘無偏無黨王道蕩蕩 無黨無偏王道平平(무편무당왕도탕탕 무당무편왕도평평)’이라는 글에서 유래했다. 가장 첫 탕평의 언급은 숙종조의 언급인데, 박세채가 처음으로 주장하였다. 이후, 경종 때 빛을 보지 못하였다가 영조부터 본격적인 탕평이 들어섰다. 영조는 노론과 소론 인물들의 화해를 주선하는 등 노력하였으나 별로 효과를 보지 못하고 정조 대에 이르러 성과를 거둔다. 정조는 자신의 침실에 “탕탕평평실(蕩蕩平平室)”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편액을 걸기도 했다.

숙종의 뒤를 이어 소론의 지지를 받아 즉위한 경종이 4년 만에 죽고, 숙종의 넷째 아들 영조가 52년간 집권하면서 조선 왕조는 중흥의 꽃을 피웠다. 이 시기는 청나라가 강희(康熙), 건륭(乾隆)의 융성기를 맞이하여 조선과 청나라의 관계가 안정되면서 내치에 전념할 수 있었다.

 

 북학파(北學派) 또는 중상학파(重商學派)

영조는 집권 초기인 1728년(영조 4년)에 소론계 이인좌의 도전을 받았다. 이인좌는 소론⋅남인 세력과 중소 상인, 노비를 규합하여 청주 등지에서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지만 진압되었고, 1762년(영조 38년)에는 소론과 연결된 세자(思悼世子)를 노론의 주장에 따라 뒤주에 가두어 죽게 하는 비극도 있었다. 그리하여 찬성하는 벽파(僻派)와 이를 동정하는 시파(時派) 사이에 갈등이 있었지만, 숙종 시대에 비하면 정치적 참극은 적은 편이었다.

북학(北學)은 조선 후기 실학의 한 유파이다. 중상학파(重商學派)라고도 한다. 당시 실학자들 가운데 한양의 도시 분위기 속에서 자란 일파가 있었다. 이들은 한양의 상공업 발전과 직간접적 관계를 가지고 있어 주로 상품의 유통이나 생산수단의 발전을 주장했다. 이들의 사상은 이용후생(利用厚生)으로 요약된다.

호란을 경험한 한양 분위기는 원래 반청숭명(反淸崇明)의 북벌운동이 주류였고, 조선이야말로 중화문화의 유일한 계승자라는 소중화주의 및 주자성리학이 사상적으로 뒷받침하고 있었다. 물론 그들도 명나라를 높이는 데만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오랑캐인 청나라를 끝까지 정통으로 인정치 않고 삼전도의 굴욕에 대한 열등감을 떨치는 한편, 조선의 문화적 우위성을 확인하려는 자존심의 발로였다.

그 예로 1703년(숙종 29년) 우암 송시열의 유지(遺志)에 따라 만동묘(萬東廟)를 세워 명나라 신종(神宗)과 의종(毅宗)을 제사지냈고, 2년 후인 1705년에는 청나라와의 외교적 마찰을 무릅쓰고 창덕궁 내에 대보단(大報壇)을 세워 망한 명황제들에 대한 제사를 아예 공식화했다. 그리고 정조∼순조 때 《존주휘편(尊周彙編)》을 편찬해 왜란⋅호란 이후의 숭명반청운동을 총정리한 것도 그런 목적이었다. 아예 1728년인 영조 때는 이인좌의 난을 진압한 공신들에게 내린 녹권에 의종의 휘호(徽號)와 같은 분[4]자가 들어갔다고 같은 뜻의 양자로 바꿔넣고 당시 모든 교서들까지 글자를 고치도록 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18세기 중엽 이후 여당인 노론의 일각에서 시대의 변화를 능동적으로 수용하려는 새로운 학풍이 일어났다. 이 학풍은 청나라에서 배우자는 내용을 담고 있어 흔히 ‘북학(北學)’이라고 한다. 물론 이들 역시 어디까지나 노론으로 주자성리학의 프레임 위에서의 새 문화 수용을 말하는 것으로, 이때의 중국은 강희제(康熙, 1662∼1772)∼건륭제(乾隆, 1736∼1795)의 최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던 시기로, 중국 역대 문화의 정수가 총정리 되고 산업 성장과 서양 과학 기술 문명 도입이 이뤄지던 시기였다.

따라서 중국의 주인인 여진족은 여전히 멸시하되 그 안에 담긴 중국문화와 산업, 기술은 수용한다는 유연한 자세가 바로 북학(北學)이다. 정경 분리라 할 수 있는 이런 사상적 기반은 후일, 서양의 기술을 받아들이되 정신과 사상은 동양으로 것으로 해 야만적인 서양인을 감화시키자는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의 논리에까지 영향을 주게 된다. 이러한 북학의 대표자는 홍대용(洪大容)⋅박지원(朴趾源)⋅박제가(朴齊家)⋅이덕무(李德懋) 등이다.

 홍대용(洪大容, 1731년∼1783년)은 조선 후기의 문신, 실학자이자 과학 사상가이다. 자는 덕보(德保), 호는 담헌(湛軒)과 홍지(弘之)이며, 본관은 남양(南陽)이다. 북학파(北學派)의 학자인 박지원, 박제가 등과 우정을 쌓았으며, 학풍은 유학보다도 군국과 경제장려에 치중하였다. 은신군(恩信君), 추사 김정희와도 인척간이 되는데, 그의 사촌동생 홍담용의 딸이 은신군부인 남양홍씨와, 김정희의 큰어머니이자 양어머니인 홍씨 부인이 그의 사촌 여동생이다.

북학파의 선구자로, 당시 굉장히 혁신적인 철학자였다. 대표적으로 지구의 자전설을 처음 대중에게 설파했던 바 있다. 당나라 때 자취를 감추었고, 오랜 시간 농민들에게 고파왔던 두 제도, 농토를 균등하게 분할하는 균전제(均田制)와 부병제(府兵制)를 토대로 하는 경제 개혁을 주장했으며, 특히 신분 제도 개혁에 앞서 과거제를 없애고 공거제(貢擧制)에 의한 인재를 고루 등용하며, 지금의 초등학교 입학 조건 나이인 8세 이상의 모든 아동을 차별 없이 교육시켜야 한다는 내용의 과감한 개혁을 주장하였다.

홍대용은 그의 저서 《의산문답(醫山問答)》에서 보여 주듯이 인류의 기원, 계급과 국가의 형성, 법률⋅제도 등에 관한 이론 발표에서부터 시작하여 그에 입각해 “놀고먹는 귀족 계급이 나라와 백성을 좀먹는다(所謂遊民倖位耗國病民, 《계방일기(桂坊日記)》).”라며 노동하지 않는 것을 부끄러워 않는 양반 계급의 실체를 파헤쳤는가 하면, 그밖에도 천문⋅율력(律歷)⋅산수 등 과학에 이르기까지 뛰어난 이론을 전개했다. 천문 분야에서도 지구자전설을 주장하였는데, 17세기에 중국이 서양에서 이를 전해받았을 때 지지를 받지 못한 것과 대조된다.

 박지원(朴趾源, 1737년∼1805년)은 조선 후기의 문신, 실학자이자 사상가, 외교관, 소설가이다.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미중(美仲) 또는 중미(仲美), 호는 연암(燕巖), 연상(煙湘), 열상외사(洌上外史)이고, 시호는 문도(文度)이다. 1765년 처음 과거에 응시하였다가 낙방했으며, 이후 과거를 단념하고 학문 연구와 저술에 전념하였다. 과거에 여러 번 낙방한 후 학문 연구와 청나라의 신문물에 관심을 두었다. 정조 즉위 후 여러 번 학문과 문장력으로 추천받았지만 고사하다가 집안의 거듭된 권고로 1786년 문음으로 출사하게 된다. 1786년 음서로 선공감 감역이 되어 1789년 평시서주부(平市署主簿)⋅사복시주부(司僕寺主簿), 1791년 한성부판관, 1792년 안의현감(安義縣監), 1797년 면천군수(沔川郡守), 1800년 양양부사를 역임했다. 안의현감 재직 중 북경여행을 다녀왔으며 이때의 경험을 토대로 실험적 작업을 시도하였으며, 면천군수 재직 중 《과농소초 (課農小抄)》,《한민명전의(限民名田議)》, 《안설(按說)》 등의 저서를 남겼다. 사후에도 그의 문집과 저서는 간행되지 못하다가 1910년(융희 4년)에 가서야 간행되었다. 증 의정부좌찬성에 추증되었다. 당색으로는 노론이었으나, 노론의 한 분파인 북학파(北學派)를 세워 그 영수가 되었다. 홍대용(洪大容), 박제가(朴齊家) 등과 함께 청나라의 우수한 점을 배워야 한다며 상공업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중상주의를 주장하였다. 그의 제자로는 박제가(朴齊家), 유득공(柳得恭), 이덕무(李德懋) 등이 있다.

 박제가(朴齊家, 1750년∼1815년)은 조선 후기의 정치가, 외교관, 통역관, 실학자로 북학파의 거두이다. 자는 재선(在先), 차수(次修), 수기(修其), 호는 초정(楚亭), 정유(貞否) 또는 정유(貞蕤), 위항도인(葦杭道人)이며,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청나라의 선진 문물 수용과 중상주의 경제 정책을 주장했다. 1778년 청나라에 사은사로 파견되는 채제공의 수행원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779년 3월 정조에 의해 규장각검서관으로 특채되어 이후 청나라에 사신이 파견될 때 사신의 수행원으로 다녀왔다. 그 뒤 전설서 별제와 1791년 임시 군기시정(軍器寺正), 1792년 군기시정 등을 거쳐 1794년(정조 27년) 2월 춘당대 무과(春塘臺武科)에 장원으로 급제, 오위장, 양평현감, 영평현령, 부여현감 등을 역임하였다. 상행위와 무역을 적극 장려하고 밀무역에 대한 제재를 줄이며, 화폐를 유통할 것, 서양인들을 조선으로 초빙하여 화포 제작, 성곽 축조, 선박 건조, 양잠 등의 신기술을 적극 도입, 유치하자고 주장했다. 또한 맹목적인 근검절약은 병폐이며 상품화폐 경제의 발전이라는 현실을 인정한 기반을 쌓고 상업⋅수공업⋅농업 전반의 생산력 발전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국가경제를 일으킬 것을 역설하였다. 그러나 상업과 무역을 천시 여기던 당대의 사대부들에 의해 비판받게 된다.

박제가는 네 차례에 걸친 청나라 사행(使行)을 통해 100명이 넘는 중국 지식인들과 교유하면서 국제적 안목을 갖춘 글로벌 지식인이었다. 박지원(朴趾源, 1735년∼1805년)과 이관상(李觀祥, 1716년∼1770년)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정조와 윤행임(尹行任) 등의 배려로 청나라에 사신이 파견될 때 수행원으로 여러 번 다녀왔다. 정조의 서얼 중용 정책에 의해 규장각의 검서관으로 등용되었으나 정조 사후 1801년(순조 1년) 그와 친분이 있던 윤행임이 노론벽파의 공격을 받고 몰락하면서 유배되었다. 원래 당색은 소북(小北)이었으나 노론북학파로 전향하였다. 연암 박지원(朴趾源), 이관상(李觀祥)의 문인이다.

 이덕무(李德懋, 1741년∼1793년)은 조선 후기의 실학 북학자이다.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조선 제2대 임금 정종의 막내아들인 무림군 이선생의 10대손이다. 자는 무관(懋官)이며 호는 형암(炯庵), 아정(雅亭), 청장관(靑莊館)이다. 경사에서 기문이서(奇文異書)에 걸쳐 여러 방면에서 박식을 자랑하였으나 서얼인 관계로 관직에서 크게 등용되지 못했다. 일찍이 유득공(柳得恭)⋅박제가(朴齊家)⋅이서구(李書九)와 함께 사가시집(四家詩集) 《건연집(巾衍集)》을 내어 문명을 떨쳤다.

1778년(정조 2년)에는 서장관 심염조(沈念祖)를 수행하여 청나라에서 기균(紀均)⋅반정균(潘庭筠)⋅이조원(李調元)⋅이정원(李鼎元) 등의 석학과 교류하였다. 또한 청나라에서 여러 자료 및 고증학 관련 저서를 가져와 그의 학문을 발전시키게 된다. 귀국 후 북학을 제창하였다.

1779년 박제가(朴齊家)⋅유득공(柳得恭)⋅서이수(徐理修)와 함께 규장각 검서관이 되어, 그들과 함께 4검서관으로 이름을 떨쳤다. 또한 규장각의 도서 편찬에 적극 참여하여 《도서집성(圖書集成)》, 《국조보감(國朝寶鑑)》, 《대전통편(大全通編)》, 《규장각지(奎章閣志)》, 《홍문관지(弘文館志)》, 《규장전운(奎章全韻)》등 많은 서적을 정리⋅교감하였다. 그의 저술은 아들 광규(李光葵)에 의해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로 집성되었다.

 유득공(柳得恭, 1748년∼1807년)은 조선시대 후기의 실학자, 문신, 시인이며 조선 정조 당시의 실학자, 시인이다. 본관은 문화(文化), 자(字)는 혜보(惠甫)⋅혜풍(惠風), 호는 영재(泠齋), 영암(泠菴), 가상루(歌商樓), 고운거사 (古芸居士), 고운당(古芸堂), 은휘당(恩暉堂)이다. 생원시와 진사시에 입격하고, 1779년(정조 3) 규장각검서(奎章閣檢書)가 되었으며 포천, 제천, 양근 등의 군수를 거쳐 풍천부사에 이르렀다. 규장각 검서 당시 다양한 서적을 읽으면서 신라사 위주의 국사를 비판적으로 바라보았고, 이후 발해고와 사군지 등을 출간하였다. 외직에 있으면서도 검서를 겸임하여 이덕무(李德懋)⋅박제가(朴齊家)⋅서이수(徐理修) 등과 함께 4검서라고 불렸다. 서얼 출신 학자로 실학 사상가이면서 역사가로, 발해고의 저자로 신라와 발해를 남북국 시대로 인식한 학자이다.

 

 벽파(僻派)는 조선 정조시기 정조의 탕평책을 반대한 세력이다. 사도세자(思悼世子)로 널리 알려진 장헌세자(莊獻世子)는 영조의 둘째 아들로 효장세자(孝章世子)가 사망하자 세자에 책봉되었다. 영조와의 갈등으로 정신병을 앓고 비행을 저지르다 폐위된 뒤 뒤주에 갇혀 사망한다. 이후 조선의 조정은 장헌세자의 죽음에 대해 안타까운 죽음이라는 입장과 당연한 죽음이라는 입장으로 나뉜다. 벽파는 장헌세자의 죽음이 당연한 것이라 여겼다. 반대편에 선 사람들은 시파라 한다. 벽파는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 김씨의 처가인 외척을 중심으로 한 노론의 일부 세력이 그 중심을 이루었다. 시파와 벽파의 호칭이 처음 생겨난 건 문헌상의 언급을 종합하면 정조 12∼19년 사이이며 정조의 임오의리(壬午義理)에 대한 입장 차이를 배경으로 노론의 우위를 고수하는 부류가 벽파를 이루었다. 벽파는 정조 사후 순조가 어린나이로 즉위하여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면서 다시 권력을 장악했다. 권력을 장악한 벽파는 장헌세자의 추승을 건의하였다는 구실로 시파를 탄압하여 조정에서 몰아냈다. 노론 벽파는 노론 사이의 정파적 수준의 존재로, 정조 사망 시점에 핵심권력에 가장 근접해 있었지만 압도적인 세력이라 할 수 없었다. 심환지(沈煥之) 세력은 정조 사후 유리한 지위를 활용해 더욱 강력한 세력과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 강경한 행동에 나섰다고 보인다. 신유박해(辛酉迫害, 1801년)라는 도발적 양상은 벽파가 일반적 인식처럼 강고한 집단이 아니었다는 방증이며, 5년 후 병인경화(丙寅更化, 1806년)로 벽파가 숙청된 사실도 이를 뒷받침한다. 한편,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거두고 순조가 친정하게 되자 순조의 외척이었던 김조순(金祖淳)를 중심으로 세도정치가 시작되면서 벽파 역시 붕괴되고 만다. 김조순은 비변사를 중심으로 권력을 장악한 후 시파를 다시 중용하였다.

 사도세자(思悼世子, 莊祖, 1735년∼1762년)는 조선의 왕세자이자 추존왕이다. 영조의 둘째 서자로, 효장세자의 이복동생이며 정조의 생부이다. 흔히 사도세자(思悼世子) 또는 장헌세자(莊獻世子)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성은 이(李), 이름은 선(愃),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윤관(允寬). 호는 의재(毅齋)이다. 영조의 둘째 아들로 생후 1년 만에 세자로 책봉되었으며 1749년 왕명으로 대리청정을 시작하였으나 노론, 부왕과의 마찰과 정치적 갈등을 빚다가 1762년(영조 38년) 왕명으로 뒤주에 갇혀 아사하였다. 사후 지위만 복권되었고, 양주 배봉산에 안장되었다가 다시 수원 화성 근처 현륭원(顯隆園, 隆陵)에 안장되었다. 정조 즉위 후 장헌의 존호를 받았다. 정조는 재위 중 그를 왕으로 추존하려는 시도를 하였으나 노론계열의 반발로 무산되고 만다. 한편 부인 헌경왕후(獻敬王后)는 후일 저서 《한중록(閑中錄)》에서 그가 의대증(衣帶症, 강박장애)과 정신질환(精神疾患)을 앓았다고 진술했고, 실록에도 그의 병이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우울증이나 화병 같은 병을 앓고 있었던 것은 확실해 보인다. 시호와 존호는 사도수덕돈경홍인경지장윤융범기명창휴찬원헌성계상현희장헌세자였다가 후에 고종 때 왕으로 추존되면서 장종(莊宗)의 묘호를 더하여 장종신문환무장헌광효대왕(莊宗神文桓武莊獻廣孝大王)이라고 하였다. 대한제국 때 황제로 격상되어 장조의황제(莊祖懿皇帝)로 추존되었다. 비교적 근래의 무속 신으로, 무속 신앙에서 모시는 신의 한 사람으로 숭배되었는데, 이때의 호칭은 뒤주대감이었다.

 

 시파(時派)는 조선 정조 시기 정조의 탕평책을 지지한 세력이다. 사도세자로 널리 알려진 장헌세자는 영조의 둘째 아들로 효장세자가 사망하자 세자에 책봉되었다. 대리청정을 맡길 정도로 영조의 신임이 두터웠으나 노론을 지지하는 영조와의 갈등으로 폐위 된 뒤 뒤주에 갇혀 사망한다. 이후 조선의 조정은 장헌세자의 죽음에 대해 안타까운 죽음이라는 입장과 자업자득이라는 입장으로 나뉜다. 시파(時派)는 장헌세자의 죽음이 안타까운 죽음이라 여겼다. 반대편에 선 사람들은 벽파(僻派)라 한다. 시파에는 남인과 소론, 그리고 노론의 일부가 가담하였다. 시파와 벽파의 입장차는 장헌세자의 죽음으로 생겨난 것이나, 정조가 즉위한 뒤 숙위소가 설치되고 홍국영(洪國榮)이 숙위대장으로 세도정치를 편 1778년 이후 본격적인 대립이 시작되었다. 정조는 자신의 탕평책을 지지한 시파를 중용하여 개혁 정치를 실현하고자 하였다. 정조시기 중용되었던 시파는 정조 사후 순조가 어린나이로 즉위하여 정순왕후 김씨(貞純王后 金氏)가 수렴청정을 하면서 벽파를 중용하자 몰락하였다. 한편,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거두고 순조가 친정하게 되자 순조의 외척이었던 김조순를 중심으로 세도정치가 시작되면서 벽파 역시 붕괴되고 만다. 김조순은 비변사를 중심으로 권력을 장악한 후 시파를 다시 중용하였다.

 채제공(蔡濟恭, 1720년∼1799년)은 조선 후기의 문신, 정치인이다. 영조 후반과 정조대의 남인의 영수로 정조의 최측근 인사 중의 한사람이며, 정약용, 이가환 등의 정치적 후견자였다. 강박과 오광운(吳光運)의 문인이며 사도세자를 가르친 스승이자 세자궁의 측근신하의 한 사람이었다. 본관은 평강, 자는 백규(伯規), 호는 번암(樊巖), 번옹(樊翁),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영조조와 정조조의 남인 지도자로 사도세자의 측근이자 스승이었으며 세자의 사후에는 세손의 측근이었다. 정조 즉위 후 남인의 영수로 중용되어 요직을 역임하였다. 제도의 개선과 개정에 관심을 가졌고, 1781년 서명응(徐命膺)과 함께 《국조보감(國朝寶鑑)》을 편찬하였으며, 가톨릭교에 대하여 온건 정책을 폈다. 1790년에는 영의정직의 공석으로 단독으로 국정을 보좌하기도 했다. 충청남도 출신.

 정약용(丁若鏞, 1762년∼1836년)은 경기도 광주부에서 태어난 조선 정조 때의 문신이다. 실학자⋅저술가⋅시인⋅철학자⋅과학자⋅공학자이다. 본관은 나주, 자는 미용(美庸), 호는 다산(茶山)⋅사암(俟菴)⋅탁옹(籜翁)⋅태수(苔叟)⋅자하도인(紫霞道人)⋅철마산인(鐵馬山人)⋅문암일인(門巖逸人), 당호는 여유당(與猶堂)이며, 시호는 문도(文度)이다. 중농주의 실학자로 전제 개혁을 주장하며 조선 실학을 집대성하였고, 수원 화성 건축 당시 기중가설(起重架說)에 따른 활차녹로(滑車轆轤 : 도르래)를 만들고 그를 이용하여 거중기(擧重機)를 고안하여 건축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또한, 유교 경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통해 당대 조선을 지배한 주자학적 세계관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을 시도하였다. 문집으로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가 있다. 정조의 생모 혜경궁 홍씨, 정조의 다른 최측근인 홍국영과 인척관계이기도 하다.

 김정희[金正喜, 정조 10년(1786년)∼철종 7년(1856년)]는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서예가, 금석학자, 고증학자, 화가, 실학자이다. 본관은 경주이고, 자는 원춘(元春), 호는 완당(阮堂)⋅추사(秋史)⋅예당(禮堂)⋅시암(詩庵)⋅과파(果坡)⋅노과(老果)⋅농장인(農丈人)⋅보담재(寶覃齋)⋅담연재(覃硏齋)⋅천축고선생(天竺古先生)등이다. 노론 북학파 실학자이면서 화가, 서예가였다. 한국 금석학의 개조(開祖)로 여겨지며, 한국과 중국의 옛 비문을 보고 만든 추사체가 있다. 그는 또한 난초를 잘 그렸다.

1809년(순조 9) 생원이 되고, 1819년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에 급제하고 세자시강원설서, 예문관검열을 지냈다. 그 뒤 삼사의 언관을 거쳐 효명세자의 사부로써 보도하였으며, 1823년 규장각대교가 되었다가 충청우도암행어사로 나갔다. 이후 의정부의 검상(檢詳), 1836년(헌종 2년) 성균관대사성과 병조참판, 이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1830년 생부 김노경(金魯敬)이 윤상도(尹尙度)의 옥사에 연루되어 고금도(古今島)에 유배되었다가 순조의 배려로 풀려났으나 헌종이 즉위 초, 김정희 자신도 윤상도의 옥사(尹尙度 獄事)에 연루, 1840년(헌종 6)에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1848년 석방되었다. 1851년(철종 2)에 헌종의 묘를 옮기는 문제에 대한 영의정 권돈인(權敦仁)의 예론(禮論)으로 예송논쟁이 벌어지자 이에 연루되어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었다가 1853년 풀려났다.

추사와 완당이라는 호를 많이 사용했으나 그밖에 100여개 넘는 별호를 사용했다. 당색으로는 노론으로 외척이었지만 벽파나 탕평당에 들지 않고 북학파가 되었다.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의 친족이었고, 양어머니 남양홍씨를 통해 남연군과 이종사촌(姨從四寸)간이 된다. 실학자 박제가의 문인으로 연암 박지원의 학통을 계승하였으며, 흥선대원군과 박규수, 효명세자는 그의 문인들이었다.

 

 세도정치(勢道政治)는 조선시대 왕의 신임과 직접적인 위임(委任)을 받는 형식으로 정권을 잡고 나라를 다스리던 일이다. 세도정치는 그 형태에 따라 정조 이전과 이후 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영조⋅정조와 같은 뛰어난 군주가 탕평책을 쓰고 있는 동안은 어느 정도 정치의 안정을 기할 수가 있었다. 영조 말년부터 정조 초년에는 정조를 보호한 공이 있는 홍국영이 도승지로 있으면서 정권을 농단하였으나, 그리 오래 가지 않아 정권에서 배제되었다. 그러나 정조가 승하하고 순조가 11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외척세력은 왕권을 압도하고, 이른바 세도 정치가 시작되었다. 즉 순조 초에 정조의 유명(遺命)으로 안동 김씨인 김조순이 국구(國舅)로서 정치를 전담하다시피 하였는데, 이에 따라 그의 일족은 모두 영달하여 노론인 안동 김씨는 많은 관직을 차지했다. 이렇게 권력을 독점하던 안동 김씨의 전권 시대는 풍양 조씨라는 강적을 만나 일시 후퇴하였다. 그것은 익종(翼宗)의 비(妃)가 신정왕후 조씨(神貞王后 趙氏, 1808년∼1890년)가 조만영의 딸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리하여 헌종 때에는 조씨 일문이 정권을 장악하게 되어 조씨는 많은 관직을 역임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철종이 즉위하면서 비가 철인왕후 김씨(哲仁王后 金氏, 1837년∼1878년)가 김문근(金汶根)의 딸이었으므로 다시 세도가 안동 김씨에게로 돌아가게 되었다.

이러한 형세였으므로 종실(宗室)이라하더라도 김씨 일문의 세력에 억눌려 살아야 했으며, 다른 세력이 안동 김씨의 힘을 빌리지 않고서 정치에 참여할 기회 또한 희박해졌다. 따라서 정치 기강이 극도로 문란해져서 유교적인 관료 정치라는 무너지고, 붕당 사이의 세력 투쟁 시대로부터 척족(戚族)이 정권을 농단하는 시대로 변화한 것이다. 왕실의 외척이 정권을 독차지함으로써 척족의 가문이 고위 관직을 독점하여 정치 기강이 더욱 문란해졌다. 그로 말미암아 농민들의 피해는 더욱 커졌으며, 많은 뇌물을 바치고 관직을 얻은 관리들은 그 대가를 농민에게서 짜 내어 자신의 이익만을 얻어 갔다. 당시 재정을 확충하는 제도는 전정(田政)⋅군정(軍政)⋅환곡(還穀)이었으며, 통틀어 삼정(三政)이라 한다. 세도 정치와 맞물려, 삼정은 날로 문란해졌다. 전정에서는 삼수미⋅대동미⋅결작⋅도결 등의 폐해가 극심했고, 군정에서는 황구첨정⋅백골징포⋅족징⋅인징 등의 각종 편법이 생겨서 농민을 괴롭혔다. 환곡 또한 고리(高利)로 이익을 착취하는 수단이 되었으며, 반작⋅허류 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농민을 괴롭혔다.

이러한 삼정의 문란(三政-紊亂)은 농민에게 과중한 부담이 되었을 뿐 아니라, 국가의 재정까지 위협했고, 곳곳에서 민란이 발생하게 되었다.

 홍국영(洪國榮, 1748년∼1781년)은 조선 영조, 정조대의 세도 정치가. 본관은 풍산(豊山)이며, 자는 덕로(德老)이다. 즉위 초기의 권력투쟁 과정에서 홍국영을 내세워 안정적 권력 기반을 구축한 정조는 홍국영을 ‘의리의 주인’이라고 부르면서 총애했다. 정조는 홍국영을 권좌에서 내치기 전까지 도승지의 직책을 겸임시켰다. 도승지는 오늘날의 대통령 비서실장과 같은 직책으로서, 국왕의 뜻을 신하들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홍국영은 당쟁의 세력관계를 교묘히 활용해서 힘있는 세도가들을 하나씩 제거해 나갔다. 처음에 홍국영은 노론의 청명당 계열인 김종수(金鐘秀)ㆍ정이환(鄭履煥) 등과 합세하여 노론 탕평당 계열의 홍인한(洪麟漢)ㆍ정후겸(鄭厚謙)ㆍ윤양후(尹養厚)ㆍ홍계능(洪啟能) 세력을 제거했고, 이후 정순왕후의 친오빠인 경주 김씨의 외척 김귀주(金龜柱, 1740년∼1786년)와 함께 혜경궁 홍씨의 아버지 홍봉한(洪鳳漢)을 공격했으며, 다시 김귀주에 공격의 초점을 맞추어 김귀주를 흑산도로 유배시키고 그 세력을 와해시켰다.

구 정치세력을 하나씩 제거하면서 홍국영은 자신이 노론의 주도권을 장악했다. 이 과정에서 홍국영은 노론의 주장을 앞장서서 펴 나갔다. 그는 정조가 즉위하던 해가 병신처분(丙申處分)을 내린 지 60주년 되는 해라는 점을 내세워, 노론의 정신적 지주인 송시열을 효종의 위패 옆에 추가로 배향하여 그 뜻을 기릴 것을 주장했다. 결국 홍국영은 다음 해에 이를 관철시킴으로써 스스로를 노론의 지도자로 부각시켰다. 뿐만 아니라 홍국영은 정조에게 노론의 신임의리를 주장하다 죽음을 당한 이의연(李義淵)의 벼슬을 높여줄 것을 청하여 허락을 받았고, 노론계 학자 김창흡(金昌翕)ㆍ이재 등의 벼슬도 다시 높였다. 또 송시열의 후손 송덕상ㆍ송환억 등을 조정에 불러 올려서 정권의 정통성을 강화하는 동시에 노론 내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강화했다. 반면에 홍국영은 노론 내에서 자기에게 적대적인 홍계능(洪啟能)ㆍ홍양해(洪量海)ㆍ김한록(金漢祿)ㆍ송능상(宋能相) 등에 대해서는 비록 송시열 계라 할지라도 제거 또는 그 힘을 약화시켰다. 홍국영은 노론의 지도자로 위상을 강화하는 동시에 소론을 심하게 압박했다. 그는 송시열의 정적이었던 윤선거(尹宣擧)ㆍ윤증(尹拯) 부자의 관직을 박탈했으며, 정조로 하여금 공개적으로 소론이 잘못되었다는 점을 강조하게 하였다. 이로써 소론의 정체성을 약화시켰으며, 소론계 인사들이 노론계 학자에게 학문을 배우게 유도하는 동시에 소론으로부터 노론으로 아예 당을 바꾸도록 종용하기도 했다.

나아가 홍국영은 정조의 신임을 바탕으로 관직에 대한 실질적 임면권을 장악하는 동시에 영조 때 폐지된 통청권(이조전랑이 스스로 후임자를 추천하는 제도)을 부활시켰다. 이는 영조가 특정 붕당이 관직을 독점할 우려가 있기 때문에 탕평정책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폐지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홍국영은 자기중심의 일사불란한 관직 독점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이 제도를 부활시켰다. 뿐만 아니라 이로써 주자의 성리학을 토대로 송나라의 국가운영체제를 따라야 한다는 노론의 오랜 숙원이 실현될 수 있었고, 홍국영은 노론의 지도자로서의 위상을 강화할 수 있었다.

홍국영은 궁중에까지도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했다. 그는 1778년(정조2년) 당시까지 정조에게 소생이 없다는 점을 들어서 자기 누이동생을 정조의 측실로 들여보내 정조와 외척관계를 맺었다. 그녀의 작호는 원빈(元嬪)이었다. 이는 “왕실과의 혼사를 놓치지 않는다.”는 서인의 기본적인 정략관에 충실히 따른 것이었고, 이로써 홍국영은 왕위계승을 둘러싼 차기를 노리는 권력투쟁에도 관여하게 되었다.

홍국영은 정조의 신임을 바탕으로 이와 같은 계책을 하나씩 실행할 수 있었고, 마침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를 수 있게 되었다. 이로써 궁궐에 들어가 국왕을 만나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홍국영을 찾아보아야 했고, 홍국영의 집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당시 노론의 지도자였던 김종수조차 “홍국영과 갈라서는 자는 역적이다” 라고 말했을 정도로 홍국영의 위세는 하늘을 찔렀다. 사실상 김종수의 이 말은 정조의 의중을 반영한 말이다. 정조는 그만큼 홍국영을 믿고 총애했던 것이다. 그러나 홍국영의 세도는 3년을 넘기지 못했다. 1779년(정조3년) 9월 26일, 7년 전 정조와 홍국영이 처음 만난 바로 그 날에, 정조는 홍국영을 불러들였다. 정조를 만나고 나서 홍국영은 곧바로 “신이 한 번 대궐문을 나가서 다시 세상에 뜻을 둔다면 .... 하늘의 신이 반드시 죄를 줄 것입니다.”라는 정계은퇴의 상소를 올리고 권좌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그리고 정조는 이 상소를 받아들여 “이전과 이후 천 년에 걸쳐 이와 같은 군주와 신하의 만남이 언제 있었고, 언제 또다시 있을 수 있겠는가.... 옛날부터 흑발의 재상은 있었지만 흑발의 봉조하(奉朝賀)는 없었는데, 드디어 흑발의 봉조하가 생겼도다.”라는 말로써 홍국영의 낙향을 허락했다. 홍국영이 권좌에서 물러나 정계 원로가 된 것은 그의 나이 32세 때였다.

좋은 말로 정계 원로요 봉조하지 홍국영은 정조로부터 버림받은 것이었고, 권력을 상실한 홍국영은 한 곳에 머물지 못한 채 여기 저기 떠돌았다. 그는 경기도 해변가를 비롯해서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니다가 마침내 강릉 근처의 동해안에 거처를 정했다. 그곳에서 홍국영은 매일 술을 마시고 산에 뛰어올라 바다를 바라보며 통곡하다가 권좌에서 물러난 다음 해(1780년) 33세의 나이로 병을 얻어 죽고 말았다. 권력의 무상함을 느끼게 해주는 사례이다. 차기 정권까지를 겨냥했던 홍국영은 자신이 철저히 믿고 있었던 정조에 의해 3년 만에 권력으로부터 배제 당했다. 정조가 아무도 예기치 못했던 상황에서 홍국영을 정계에서 은퇴시켜 버린 것은 그가 왕권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했기 때문이다.

사실상 홍국영이 물러난 직접적인 계기는, 1779년(정조3년) 5월에 그의 누이 원빈이 사망한 후 그가 정조의 왕비인 김시묵(金時默)의 딸 효의왕후(孝懿王后)를 의심해서 핍박한 사건 때문이다. 정조는 이를 자신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으로 해석했던 것이다. 혜경궁 홍씨의 기록에 따르면, 홍국영은 자신의 누이 원빈이 사망하자 내전의 나인들을 여럿 잡아다가 칼을 빼들고 혹형을 가했다고 한다. 그는 원빈이 독살을 당했다고 믿어 그 증거를 찾아내기 위해 멋대로 취조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당시의 많은 사람들은 사소한 일에도 혹독하게 보복하는 홍국영의 성격에 비추어 왕비까지 죽이려 한다고 우려했다.

그 결과 왕대비, 혜경궁 홍씨, 왕비를 포함한 궁궐 내의 모든 세력이 홍국영을 적으로 규정하여 공격했다. 정조는 이들의 의견에 동조하여 홍국영을 권력에서 배제하기로 판단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홍국영은 왕위계승과 관련한 차기 권력투쟁에까지 관여함으로써 외척의 정치개입을 근절해야 한다는 정조의 통치철학을 위배했다. 더욱이 홍국영의 누이 원빈의 이름에 들어있는 ‘원(元)’이라는 글자는 ‘근본’이라는 뜻으로 왕위계승권을 잇는다는 의미를 담고 있어 후궁은 사용할 수 없는 글자임에도 불구하고 감히 사용했다는 것은 궁중의 질서를 깨는 행위였다. 나아가 원빈이 사망한 후에 효의왕후(孝懿王后)가 아이를 갖지 못하게 되었다는 유언비어가 널리 퍼짐으로써 홍국영에 대한 정조의 의구심이 증폭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홍국영은 사도세자의 서자 은언군(恩彦君) 인의 아들 상계군 담을 원빈의 양자로 삼아 완풍군(完豊君)이라는 작호를 주었는데, 여기에서 ‘완(完)’은 전주 이씨, ‘풍(豊)’은 풍산 홍씨의 관향을 의미한다. 그런데 왕실에서는 작호에 어머니 쪽의 관향을 사용한 경우가 없을뿐더러, 이 작호 역시 정조의 후계자라는 의미로 붙여진 것으로 오해할 소지가 있었다.

이와 같은 과정에서 벽제역에 내용을 알 수 없는 괘서(掛書, 대자보)가 붙어 민심이 흉흉해졌다. 이를 계기로 친 홍국영계의 송환억(宋煥億)ㆍ송덕상(宋德相) 등이 상소를 올려 소론이 반란을 일으킬 기미가 보인다고 주장했다. 이는 정조가 신임하던 정조 즉위를 위한 일등공신 서명선(徐命善)을 제거하려는 시도였다. 이로써 정국은 매우 혼미해졌다. 당시 시전상인 일부가 철시하고 피난을 갈 정도로 사태는 심각해졌다. 송덕상은 이 틈을 타서 다시 상소를 올려, 국세가 외롭고 고단하므로 가시적인 조치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지칭하지는 않았으나, 왕위계승권자를 빨리 책봉하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일련의 과정에 대해 정조는 왕권과 자신에 대한 홍국영의 월권으로 이해할 수 있었고, 결국 홍국영을 사직시켰던 것이다. 이로써 정조는 세도정치의 폐해를 불식시키고 '탕평정치(蕩平政治)'라는 새로운 정치개혁을 시작할 수 있었다.

 김조순(金祖淳, 1765년∼1832년)은 조선 후기의 문신, 정치가이다. 본관은 (신)안동(安東)이며, 자(字)는 사원(士源), 호(號)는 풍고(楓皐), 시호는 충문(忠文)이다. 영의정을 지낸 충헌공(忠獻公) 김창집(金昌集)의 현손이며 서흥부사(瑞興府使) 김이중(金履中)의 아들이다. 노론이었으나 시파에 속하였으며, 정조의 신임이 바탕이 되어 딸인 순원왕후가 순조의 왕비로 책봉되면서 어린 순조를 도와 국구(國舅)로서 30년간 순조를 보필하여 군덕(君德)을 함양시키는 일에 진력하여,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순조 즉위 후 영돈녕부사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에 봉해졌고 정순왕후 사후 노론 벽파를 숙청하고 정권을 장악하였으며, 사후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 영의정에 증직되었다. 저서로는 풍고집이 있고 소설인 오대검협전을 쓰기도 했다.

 조만영(趙萬永, 1776년∼1846년)은 조선 후기의 정치가⋅문신이다. 자는 윤경(胤卿), 호는 석애(石崖), 시호는 충경(忠敬), 본관은 풍양(豊壤)이며, 조진관(趙鎭寬)의 아들이다. 1813년(순조 13년) 능원량(陵園郞)의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이 된 뒤, 지평(持平)⋅사간원정언, 겸문학 등을 역임하고, 1816년 전라도 암행어사로 나갔다. 1819년 부사직으로 있을 때 딸이 세자빈(世子嬪 : 순조의 장남인 추존왕 익종비)으로 간택되자, 풍은부원군(豊恩府院君)에 봉해졌다. 이후 그 일파인 풍양 조씨가 정계에 등장하자, 그 중추적 인물로서 안동 김씨와 세도를 다투게 되었다. 이듬해 행 이조 참의가 되고 1821년 금위대장(禁衛大將), 이어 이조⋅호조⋅예조⋅형조의 판서와 한성부 판윤, 판의금부사 등 요직을 역임, 1845년 궤장(机杖)을 하사받고 영돈녕부사가 되었다. 특히 글씨를 잘 썼다. 사후 영의정에 추증(追增)되었다.

 홍봉한(洪鳳漢, 1713년∼1778년)은 조선 말기의 대신으로, 혜경궁 홍씨의 아버지이며 장헌세자(莊獻世子, 思悼世子)의 장인이다. 딸이 세자빈으로 뽑힌 이듬해인 1744년 문과에 급제한 뒤 사관이 되었다. 그 뒤 여러 벼슬을 거쳐 광주 부윤⋅어영대장 등을 지내고 좌의정, 영의정에 이르렀다. 1761년(영조 37년) 세자의 평양 원유사건으로 이천보(李天輔), 민백상(閔百祥) 등이 갑자기 의문의 최후를 맞이하자 일약 승진, 우의정에 발탁되었다. 그 뒤 영의정에 재직 중 사도세자의 처형을 목격하였으나 반대하지 않았다. 영조의 탕평책에 부응하여 당쟁의 폐해, 인재의 발탁 등의 내용을 담은 시무 6조를 제시하는 등 국정 쇄신에 노력하였다. 영조의 탕평을 따르는 탕평파의 우두머리였고 노론측에서는 노론의 당론을 외면하고 임금의 뜻을 쫓아 아부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조선 고종 때 사도세자가 장종으로 추존되면서 홍봉한도 부원군의 증직이 내려져 영풍부원군에 추봉되었다. 고구마를 처음 도입한 조엄은 그의 매부였으며, 그의 누이는 익종비 조대비의 증조할머니가 된다. 자는 익여(翼汝), 호는 익익재(翼翼齋), 시호는 익정(翼靖)이며, 본관은 풍산(豊山)이다.

 

 신해박해(辛亥迫害)는 1791년(신해년, 정조 15년) 조선 최초의 로마 가톨릭교회에 대한 박해 사건이다. 신해교난(辛亥敎難) 또는 신해사옥(辛亥邪獄), 진산 사건(珍山事件)이라고도 부른다.

로마 가톨릭교회가 조선의 해서(海西)⋅관동(關東) 지방의 일반 민중 사이에 신봉되고 있는 동안은 아무런 문제도 일어나지 않았었다. 당시 조선 천주교회는 북경 교구에 속하였는데, 북경 교구장인 구베아(Alexander de Gouvea) 주교가 조선 로마 가톨릭교회에 제사 금지령을 내리자(1790년), 전라도 진산군에 사는 선비 윤지충 바오로와 그의 외종사촌 권상연 야고보는 함께 이 가르침을 따르고자 집안에 있던 신주를 불살랐다. 1791년 여름 윤지충이 모친상을 당하여 권상연과 함께 어머니의 유언대로 유교식 상장(喪葬)의 예를 쓰지 않고 조문을 받지 않았으며, 로마 가톨릭 예식으로 장례를 치러 종친들을 분노케 했다.

그의 외사촌이자 같은 천주교인인 권상연이 윤지충을 옹호하고 나서고, 이에 대한 소문이 조정에 전해짐으로써 이 문제는 당쟁으로 비화되었다. 당시 서학 탄압에 앞장서온 홍낙안(洪樂安)은 좌의정 채제공에게 보낸 글에서 “저들 지충의 무리는 제사를 폐한 것도 부족하여 부모의 상을 당하고서도 혼백을 세우지 않았고 부모가 죽었음에도 조문을 받지 않으니 천지가 생겨난 이래 어찌 이와 같은 변괴하고도 사악한 일이 있을 수 있을까? 그 죄는 살인한 것과 같다”고 주장했다. 그는 윤지충의 체포와 사형을 요구하고 나섰다. 정조는 천주교 탄압을 주장하는 노론 벽파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어, 진산군수 신사원을 시켜 “윤지충과 권상연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진산군수는 윤지충의 집을 찾아 사당에서 위패를 넣어두는 주독을 발견하고 열어보았으나 위패는 없었다. 피해 있던 윤지충과 권상연은 윤지충의 숙부가 감금됐다는 소식에 1791년 10월 진산 관아에 자수했다. 그러나 그들은 로마 가톨릭 신앙을 버리라는 말을 듣지 않았다. 진산 군수는 자신의 힘으로는 두 사람을 회유할 수 없다는 판단이 들자 두 사람을 전주의 전라 감영으로 이송했다. 윤지충은 전라감사 정민시의 심문을 받는 가운데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거듭 말씀드리거니와 천주교를 신봉함으로써 제 양반 칭호를 박탈당해야 한다 해도 저는 천주께 죄를 짓기는 원치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신주를 모시지 않는 서민들이 그렇다고 하여 정부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과, 또 가난하기 때문에 모든 제사를 규정대로 지내지 못하는 양반들도 엄한 책망을 당하지 않는다는 것을 고려하여 주십시오. 그러므로 제 낮은 생각으로는 신주를 모시지 않고 죽은 이들에게 제사를 드리지 않으면서도 제 집에서 천주교를 충실히 신봉하는 것은 결코 국법을 어기는 것이 아닌 듯합니다.” 그러나 윤지충의 항변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전라 감영에서 갖은 문초와 혹독한 고문에도 두 사람은 끝까지 신앙을 버리지 않자, 전라 감사는 조정에 장계를 올려 두 사람에 관해 보고했으며 조정에서 두 사람을 처형해야 한다는 소리가 커지자 결국 임금은 처형을 윤허했다. 이로써 윤지충과 권상연은 두 사람이 사회도덕을 문란케 하고 무부무군(無父無君)의 사상을 신봉하고 난행(亂行) 하였다는 죄명으로 1791년 12월 8일(음력 11월 13일) 전주 남문 밖(현재 전동성당 자리)에서 차례로 참수형에 처해졌다. 정조는 한편으로는 천주교 탄압을 반대하는 노론 시파의 의견을 받아들여 천주교의 교주로 지목받은 권일신(權日身) 같은 인물은 귀양 보내는 데 그치고 천주교도에 대한 박해를 더 이상 확대시키지는 않았다. 그러나 조정은 이를 둘러싸고 남인 계통이면서 당시의 상국(相國)인 채제공을 중심으로 한 소위 신서파(信西派)와 이에 반대하는 홍의호 등의 소위 공서파가 대립, 1801년 신유박해로 신서파가 결정적 타격을 입을 때까지 10여 년간 암투가 계속되었다.

이 사건으로 중국 천주교회는 선교사 파견을 보류하였다가, 1794년 주문모 신부를 선교사로 보냈다.

 

 신유박해(辛酉迫害)-신유박해(辛酉迫害)는 1801년(순조 1년)에 발생한 조선의 로마 가톨릭교회 박해 사건이다. 시파⋅벽파의 정치 투쟁에서 시파의 제거를 오랜 숙원으로 한 벽파가 천주교 탄압을 명분으로 일으킨 사건이다. 신해박해(1791년, 정조(正祖) 15년) 이래 “정도(正道)인 유학은 ‘사학(邪學)’인 천주교를 소멸시킬 것”이라면서, 로마 가톨릭교회에 대해서 온화한 정책을 써 오던 정조가 승하하였다[1800년 8월 18일(음력 6월 28일)]. 이어서 순조가 11세로 왕위에 오르면서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가 55세의 나이로 수렴청정을 시작하였으므로[1800년 8월 23일(음력 7월 4일)] 정순왕후의 친오라버니 김귀주(그는 이미 1786년에 사망하였다)가 주축을 이루었던 벽파가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후 벽파가 정순왕후를 움직이면서 조선 천주교회에 대한 박해가 일어나게 되었는데, 박해의 진짜 이유는 벽파와 대립하였던 남인⋅시파의 숙청이었다. 야당인 남인 중에서 천주교 신앙을 가진 이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1801년 음력 1월 10일 정순왕후는 천주교 엄금에 관해 하교를 내렸다. 그 내용은 “천주교 신자는 인륜을 무너뜨리는 사학(邪學)을 믿는 자들이니, 인륜을 위협하는 금수와도 같은 자들이니 마음을 돌이켜 개학하게 하고, 그래도 개전하지 않으면 처벌하라”는 것이다. 정순왕후는 이 하교에서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을 언급하였는바, 다섯 집 중 한 집에서 천주교 신자가 적발되면 모두 처벌하는 가혹한 연좌제를 예고한 것이었다.

 

 기해박해(己亥迫害)는 조선 후기 1839년(기해년, 헌종 5년)에 발생한 천주교 탄압을 말한다. 순조의 수렴청정을 행하던 정순왕후가 주도한 신유박해[辛酉迫害, 1801년(순조 1년)]로 천주교의 교세는 몹시 위축되었으나, 정순왕후가 승하하고 이어서 권력을 누린 국구(國舅) 김조순이 등용한 안동 김씨 시파들 중에는 천주교 신자들이 많았으므로,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누그러졌다.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는 1831년 9월 9일 천주교 조선대목구를 설정하여 독립된 교구가 탄생하였다. 그리고, 서양인 천주교 신부로서는 처음으로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신부 피에르 모방(1836년)과 자크 샤스탕(1836년), 주교 로랑마리조제프 앵베르(1837년) 등이 들어와서 천주교의 교세가 회복되고 신도는 증가되어 갔다. 이에 놀란 조정에서는 다시 박해 의논이 일어났고, 드디어 1839년(헌종 5년)에 제2차 박해를 전개하였다. 당시 조정에서는 헌종의 할머니인 명경대왕대비(明敬大王大妃 金氏, 純元王后) 김씨를 중심으로 한 안동 김씨에 대립하여 헌종의 모후(母后)인 효유왕대비(孝裕王大妃) 조씨의 척족 풍양 조씨의 벽파가 새로 등장하면서 무자비한 박해 선풍이 휘몰아쳐 3인의 서양인 천주교 신부를 비롯한 119명의 천주교인이 투옥⋅처형되었다. 당시 조정에서는 서세동점(西勢東漸) 곧 서양의 동방에서의 세력진출을 막자는 생각이 중요한 과제로 등장되었고, 따라서 서양종교인 천주교에 대한 박해와 살육도 무자비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헌종은 사학(邪學)을 배척한다는 뜻의 척사윤음(斥邪綸音)을 내리고, 한 집에서 천주교 신자가 나오면 나머지 네 집도 처벌하도록 하여, 백성들이 서로 감시케 한 오가작통법을 강화하여 천주교에 대한 탄압을 계속했다.

 

 병인박해(丙寅迫害)는 1866년(고종 3년) 조선 말기 흥선대원군 정권의 대규모의 천주교 탄압을 말한다. 병인사옥(丙寅邪獄)이라고도 하며, 당시 6천여 명의 평신도와 프랑스 파리 외방전교회 출신의 선교사 등이 처형된 사건이다. 1831년 교황청이 조선을 독립교구로 선정하여 앙베르, 모방, 샤스탕 신부를 조선에 파견해 몰락한 양반을 중심으로 천주교를 전파해갔다. 하지만 조선의 양반들은 서구 열강들의 제국주의와 기독교가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우려하여 천주교를 금지하였으며, 1839년에는 천주교 박해사건 중 하나인 기해박해를 일으켜 3명의 프랑스 천주교 신부를 처형했다.(하지만 이러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은밀히 천주교는 확장되었다.) 흥선대원군 자신은 본래 천주교를 탄압할 생각은 없었고, 반감도 없었다. 오히려 서양에서 전래된 서학인 천주교를 통해 프랑스등의 서구 열강들과 교류를 할 생각을 했고, 개인적으로도 천주교는 부인 여흥부대부인 민씨의 종교이기도 했다. 천주교를 이용해서 프랑스와의 주선을 통해, 남하하는 제정 러시아를 막으려고 하였던 것도 흥선대원군이 천주교를 묵인한 이유 중 하나이지만 국외 정세에 의해 천주교를 부정할 수밖에 없었다. 영국-프랑스군이 청나라의 베이징을 점령한 사건으로 청나라에서 천주교를 탄압한다는 소식이 들렸기 때문이다. 이는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천주교를 부정할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