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홍준 문화강좌
1. 고려청자와 상감청자
중국 도공 스카우트 '고려청자'로 꽃피웠다
지금 우리가 미술품으로 얘기하는 고려청자는 흙을 빚고 유약을 발라 섭씨 1300도가 넘는 불에서 구워낸 자기입니다. 인간이 만든 밥그릇 중 아직 자기를 능가할만한 좋은 것을 못 만들어 냈습니다. 나무와 금속기, 유리, 알루미늄, 플라스틱 등 여러 가지로 만들어 봤지만 아직 세라믹보다 사용하기 좋고 위생적인 게 없습니다. 잘 깨져 계속 만들어 낼 수 있는 것도 자기의 상품적인 가치입니다. 그런데, 청자의 빛깔을 내는 것이 1000년 전에는 고난도의 기술이었습니다. 중국 사람들이 약 1500년 동안 연구 노력한 결과로 나온 게 청자입니다. 중국도 AD 3~4세기 월주가마(越州窯)에서 나온 누런빛 나는 초기 청자에 이어 9세기가 넘어서야 완벽한 청자를 만들어 냅니다.
중국 사람들이 청자를 완벽하게 만들어 낸 다음 고려사람들이 그것을 계속 역추적해 11세기 고려청자를 만들어 냈습니다. 중국 청자는 12세기 송나라 휘종 황제 때 전성기를 맞는데, 우리도 12세기 인종 때 피크를 달립니다.
중국 사람들이 1500년 동안 연구 노력 끝에 만들어 낸 결과를 우리는 역추적해 200년 만에 따라잡은 것입니다. 기원후 1000년부터 1600년 사이 600년 동안 전 세계에서 자기를 만든 나라는 중국과 한국밖에 없습니다. 일본도 못 만들었고 베트남의 경우, 안남(安南) 자기란 것이 있는데, 이는 15세기 청화백자로 질이 떨어집니다. 유럽에선 '차이나(China)'란 단어가 중국이라는 뜻과 함께 자기를 의미하듯 중국에서 수입해 쓰다가 18세기에 처음 자기를 만들었으며 일본도 임진왜란 때 우리 도공을 데리고 가 17세기부터 백자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렇다면 왜 청자일까요.
도자기는 운명적으로 청자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령 백제 토기 가마에 토기를 집어넣고 장작을 때면 재가 날려 태토 위에 얹히게 됩니다. 온도가 1100도로 올라가면 재가 태토 속의 광물질과 화학반응을 일으켜 허옇게 더께가 끼고, 다시 1200~1300도로 올라가면 잿물과 태토가 결합해 반짝이는 유리질(glaze)화 현상이 나타나는데, 이게 자연유(自然釉)입니다.
중국 사람들이 잿물을 가지고 계속 실험해 유리질 현상을 발전시켜 나온 것이 3~4세기 월주가마 청자입니다. 누런빛이 나지만 황자(黃磁)라고 부르지 않고 청자라고 부른 것은 운명적으로 청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화학적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모두 중학교 때 물상 시간에 산화 제2철의 황변(黃變) 현상과 산화 제1철의 녹변(綠變) 현상에 대해 배운 적이 있을 겁니다. 청자의 비밀은 흙 속에 들어있는 미량의 철분이 불의 작용에 어떻게 변화하느냐에 있습니다. 원소기호로 Fe인 철분이 산소와 같이 결합해 Fe2O3의 단계에 있는 것을 산화 제2철이라고 하는데 이 단계에서 구워지면 황자라고 말하고 싶은 누런색을 띱니다. 이 단계에서 가마의 불구멍을 막고 불을 계속 지피면 흙 속의 산소를 빼앗겨 Fe2O3가 산화 제1철(FeO)로 환원되는 데 바로 이때 초록빛으로 변하는 녹변 현상이 나타납니다. 1350도를 24시간 유지시켜줘야 녹변 현상을 일으킬 수 있으니 굉장히 어려운 기술입니다.
중국에서도 9~10세기 제대로 색깔이 난 월주가마의 청자와 구별해 누런빛 나는 청자를 고월자(古越磁)라 부릅니다. 중국 북방에선 올리브빛이 나는 등 청자의 색깔이 다양해 보이지만, 청자의 기본적인 색깔은 파란빛(blue)의 청색이 아닌 초록빛(green) 나는 청색입니다.
고려에서 청자를 본격적으로 만들기 시작한 10세기 후반 대표적인 청자가 993년 제작된 '순화 4년 명 청자 항아리'입니다. 고려 태조의 묘실 제1실에서 사용하는 항아리로 최길회(崔吉會)가 만들었다는 기록이 항아리 밑바닥에 쓰여 있습니다. 이 기록으로 최길회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이름이 알려진 도공이 됐습니다. 그런데, 이것도 색깔이 노랗고 유약은 완전히 용해되지 않아 줄줄 흘러내려 있는 등 청자로 보기 어렵지만 청자로 불러줍니다. 993년 수준에서는 굉장히 발달한 청자였기 때문에 고려 태조의 사당에서 사용했던 것입니다.
해주와 고양, 인천, 시흥, 용인 등 당시 수도인 개성 주변과 전남 강진 및 전북 고창 등 서해안에서 각각 청자를 만들려고 경쟁했는데, 결국 강진 용운리가마의 승리로 귀결됩니다. 강진에는 지금까지 알려진 가마만 250여 개에 달합니다. 12세기 중엽 전북 부안 유천리가마에서 상감청자가 제작되는데, 이후 고려 명품은 강진 용운리, 사당리와 부안 유천리에서 만들어졌습니다.
강진 용운리 10-1호 청자가마(康津郡 龍雲里 10-1號 靑磁窯) : 전라남도 강진군 대구면 일대(全羅南道 康津郡 大口面 一帶)는 고려 시대(高麗時代) 청자제작의 중심지 가운데 하나이다. 이곳에 복원된 가마(窯)는 대구면 용운리 발굴조사(發掘調査)에서 발견된 10-1호 가마이다. 이 가마는 굴뚝 부분이 파괴되어 남아 있지 않으나 불을 때는 봉통 부분과 가마벽(窯壁) 그리고 불창구멍 등이 남아 있어 청자가마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이 가마는 고려전기에 운영된 것으로 보이며 초기 청자가 제작되었다. 요즘 가스가마와 달리 당시 가마의 성공률은 20%도 안 됐으며 청자 가마터에서 보이는 10~15m 되는 퇴적층을 통해 실패작이 얼마나 많았는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초기 청자는 밑에 해무리굽을 한 대접(찻잔)이 중심을 이루는데, 이 해무리굽은 11세기 중국 월주가마에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고려청자의 기원과 관련, 신라 토기에서 자체 발전해 9세기에 청자가 만들어졌다는 애국적인 해석에서부터 당나라가 망하고 5대 10국의 혼란기 때 월주 도공이 피난와 기술을 전해줬다는 설 등 다양한 주장이 있지만 제가 수긍하는 설은 초기 청자의 기법과 문양이 월주가마의 것과 유사점이 많은 것으로 보아 월주의 중국 도공을 스카우트해오지 않았을까 하는 겁니다.
12세기가 되면 비로소 제대로 된 청자가 만들어집니다. 청자하면 고려 시대부터 조선 시대를 거쳐 현재 박물관에 수장된 전세품(傳世品)으로 생각하는데 그런 청자는 없고 모두 근, 현대에 들어와 무덤이나 바닷속에서 발굴하거나 건져낸 것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저승 갈 적에 청자그릇 하나라도 무덤 속에 넣어주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저승에 가 부처님을 만났을 때 그분께 차 한잔 공양할 찻잔을 만들어 넣어준 것이지요. 조상들의 이 고마운 풍습 덕분에 고려청자의 세계를 뒤늦게나마 알게 된 것입니다. 사실 1350년쯤 청자가 사라지고 분청사기와 백자가 사용되고 이어 조선 시대가 시작되면서 청자라는 단어조차 잊어지고 일부 지식인들만 존재를 알았을 뿐입니다.
그러다가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고 경의선 서울~개성 구간을 건설할 당시 고려 무덤에서 청자가 나오면서 다시 세상에 알려지게 됐습니다. 한 농민이 진상한 청자 그릇을 처음 본 고종황제가 "세상에 이렇게 파란 그릇이 있느냐? 이게 어느 나라 사람이 만들었느냐? 뭐라고 부르느냐?"고 했다는 일화가 이를 입증합니다.
고려청자를 소개하는 어떤 책이든지 간에 제1장, 제1절, 첫 페이지에 소개되는 것은 1146년 세상을 떠난 인종의 무덤인 장릉에서 출토된 '청자 참외모양 꽃병'입니다. 도자기를 보는 아름다움은 3가지로 형태미와 빛깔, 문양을 듭니다. 화려하다, 야무지다 등의 감정을 주는 형태미와 피부(때깔)가 고와야 제대로 살아나는 빛깔, 문양이 그것입니다. 이 꽃병은 임금을 위한 꽃병인 만큼 궁중문화가 가질 수 있는 권위가 들어있습니다. 이 청자는 목이 좀 길다는 느낌을 받는데 이렇게 목을 잡아 뺀 과장은 왕이 가질 수 있는 권위를 보여줍니다.
12세기 고려청자는 음각이나 양각 무늬를 넣는 문양효과가 신통치 않자 복숭아, 참외, 거북이, 오리, 표주박, 죽순, 대마디 무늬 등 조각적으로 발전한 다양한 형태의 상형(象形) 청자가 많이 만들어진 것이 특징입니다. 일본 오사카 시립 동양도자미술관의 '청자상감 죽학무늬 매병'이나 야마토분카칸(大和文華館)의 '청자흑유 표주박 모양 병', 미국 프리어갤러리의 '청자 음각 연꽃무늬 표주박 모양 주전자' 등 12세기 전성기 때 고려청자는 멋진 젊은 여인의 몸매에 비유할 때 설명이 잘 들어맞는 경우가 많습니다.
고려청자 중 가장 양이 많은 것은 찻잔인데 기록은 없지만 차문화가 번성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쨌든 고려청자는 1123년, 고려 인종 원년에 송나라 휘종 황제가 보낸 사신으로 왔다가 이듬해 돌아가 <선화봉사 고려도경>이란 책을 남긴 서긍(徐兢)이 비색(翡色)을 내는 고려청자를 송나라 휘종 황제가 만든 관요(官窯)인 여요(汝窯)의 청자와 비슷하다고 평가할 정도로 국제적으로 인정받았습니다. 송나라의 태평노인도 <수중금(袖中錦)>이란 저서에서 '고려 비색이 천하제일이다'고 했습니다. 너무도 귀하고 아름다워 궁중에서만 사용되는 비밀스러운 색깔이란 뜻을 가진 중국 월주의 '비색(秘色)'과 달리 우리는 비취색 '비(翡)'자를 쓴 것이 다른 점입니다.
청자를 버리고 곧 청백자(靑白磁)의 길로 간 중국에 비해, 고려사람들은 청동 그릇에 홈을 파고 은실을 밀어 넣어 무늬를 그린 '청동 은입사'나 나무에 조개껍데기를 박아넣고 옻칠을 한 '나전칠기' 기법에서 영감을 얻어 상감(象嵌)청자를 만들게 됩니다. 양각이나 음각이 아니라 문양을 새겨넣는 상감청자 중 가장 오래된 것은 1159년에 죽은 문공유(文公裕)의 무덤에서 출토된 것으로 전해지는 '청자상감 보상당초무늬 대접'입니다.
상감청자와 분청사기는 중국에는 없는 우리가 이룩한 위대한 발명입니다. 늦어도 13세기 초 상감청자의 시대로 들어선 뒤에는 고려청자의 90%가 상감청자로 만들어집니다. 연꽃과 연판, 연당초, 모란꽃, 모란당초, 국화꽃, 국화당초, 국화 절지(折枝), 봉황, 학, 구름, 운학(雲鶴), 버드나무와 물새를 그린 포류수금(蒲柳水禽) 등 고려인들의 서정을 읽을 수 있는 다양한 무늬가 상감청자의 문양으로 나타납니다.
상감청자의 최고 명품으로 손꼽히는 것은 '청자상감 운학무늬 매병'입니다. '꽃병이냐 술병이냐'로 한국꽃꽂이협회와 한국 주류협회 사이에 논쟁까지 벌어졌던 청자 매병(梅甁)을 푸른 하늘로 생각하고 거기에 새털구름과 학으로 가득 찬 모습을 문양으로 담은 것입니다. 상감청자로 발전할 때 갈색이 나타나는 철유(鐵釉), 검은색이 나타나는 흑유(黑釉), 백자, 산화동을 사용한 붉은 무늬의 동화(銅畵) 청자도 함께 만들어져 고려청자의 다양성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양식도 생성과 발전, 쇠퇴의 길을 걷듯이 고려청자도 14세기에 들어와 원나라의 간섭을 받는 동안 서서히 쇠락의 길을 걷게 됩니다. 실용성은 강화됐지만 기형이 무디고 둔중해지며, 빛깔은 탁해지고, 무늬도 소략해집니다. 특히 1350년 무렵 왜구가 쳐들어오자 고려 정부가 해안에서 50리 이내에 백성들이 살지 못하도록 하자 강진 가마와 부안 가마가 문을 닫게 됩니다. 결국 청자를 만들던 도공들은 전국으로 다 흩어져버리고 고려청자의 시대도 막을 내리게 됩니다.
2. 조선 시대 분청사기와 백자
자유 창작 의지가 빚어낸 ‘빛나는 소박함’
우리나라 역대 왕 중에서 요즘 말로 가장 위대한 문화 대통령이라 할 수 있는 사람은 세종대왕입니다. 이 분이 전국의 토지 조사를 실시해 만든 것이 ‘세종실록지리지’로 국가를 통치하기 위해 각 시 · 군 등의 국내총생산(GDP)을 전부 다 계산할 수 있게 만들어 놓은 종합 지리책입니다. 예를 들어 충남 공주에서 나오는 쌀은 얼마고 거기서 나오는 밤이 얼마고 등 각지의 생산물과 특산물이 다 세세하게 조사돼 있습니다. 또 현청(縣廳)으로부터 서쪽 30리 가면 자기소와 도기소가 있는데 거기서 나오는 것은 품질이 상 · 중 · 하 중 어느 것이다 하는 식으로 품평까지 해놨습니다. 여기서 자기소는 분청사기라고 불려지는 자기를, 도기소는 질그릇을 생산하는 곳으로 이 책에 나오는 전국의 도기소와 자기소를 모두 모아보니까 324곳에 달했습니다. 이중 도기소가 185곳이고 자기소가 139곳입니다. 지난번 강좌에서 말했던 고려말 전남 강진과 전북 부안 등 관요(官窯)에 있던 도공들이 왜구의 게릴라적인 침입을 피해 내륙으로 들어가 전국에 퍼지면서 이 같은 상황이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전국 각지로 흩어진 도공들은 곳곳에서 다시 청자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옛날 방식대로 만든다고 만들었는데 푸른빛이 안 나오고 시멘트 빛깔이나 회색, 아니면 누런색이 나오는 것이에요. 가마와 태토, 유약만 있으면 어디서나 청자를 만들 수 있지만 좋은 흙과 유약을 구할 수 없었고 제작여건도 예전처럼 국가가 지원해 주는 일이 없으니 어려웠던 것입니다. 도공들의 입장에선 속상할 수밖에 없지만 이제 청자가 갖고 있는 바탕의 의미는 없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상감할 때 쓰던 백토로 하얗게 분장한 사발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이 같은 그릇을 사기그릇이라 불렀는데 나중(일제시대)에 미술사학자 고유섭 선생이 ‘분장한 회청색 사기’란 뜻의 분장회청사기(粉粧灰靑沙器)란 이름을 붙였고, 우리는 다시 이를 줄여 분청사기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관요가 아닌 민요(民窯)에서 제작된 분청사기는 조선 초기 새로운 나라를 만들어가는 국가의 기풍과 의지, 관의 간섭으로부터 완벽하게 배제된 지방 가마가 갖고 있는 순박하고 소박한 성격이 반영됩니다. 문양도 새털구름이나 학, 갈대와 해오라기, 청순한 국화꽃 등이 아니라 부귀를 상징하는 모란꽃을 큼직하게 만들어 조선 후기 민화처럼 서민화 경향을 보이게 됩니다.
분청사기는 제작 기법에 따라 종류가 나눠집니다. 15세기 전반쯤에 상감분청사기와 인화(印花)분청사기가, 15세기 후반에 박지(剝地) 분청사기와 선각(線刻) 분청사기, 철화(鐵畵) 분청사기 등이 제작됐으며, 16세기 전반에는 귀얄분청사기와 덤벙 분청사기가 만들어집니다.
이중 제작 기법이 똑같고 연장선상에 있는 상감청자와 상감분청사기는 도자사 전공자들 사이에서도 고려 상감청자로 부를지 조선 상감분청사기로 할지 논란이 있을 정도로 비슷합니다. 인화분청사기는 상감무늬를 넣을 때 국화꽃이나 우점(雨點) 무늬를 도장으로 찍어 쉽게 무늬를 새긴 것으로 15세기 궁중에서 실제 사용된 그릇 중에는 이와 같은 인화무늬가 제일 많았어요.
‘분청사기 장흥고명 인화무늬 항아리’나 ‘분청사기 인화무늬 진해(鎭海)명 접시’에서 보듯, 인화분청사기 중에는 요즘 조달청에 해당하는 장흥고(長興庫)나 왜 사신을 접대한 내섬시(內贍寺), 인수부(仁壽府) 등의 관사명이나 지명을 새긴 게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언양장흥고’라 써 있는 것이 있다면 경남 언양 지역에서 만들어 언양 지방조달청에 집어넣은 것입니다.
국가에서 직접 가마를 운영하지 않았던 조선 초기에는 세금의 하나로 각 지방에서 제작된 분청사기를 거둬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거둔 도자기가 서울로 올라오는 과정에서 중간에 관리들이 빼먹는 게 태반이나 되자 아예 그릇에 조달청(장흥고)으로 가는 것이라고 찍어놓게 된 것입니다. 또 각 도에서 들어온 그릇들의 질이 천차만별이어서 경남 합천군 삼가(三嘉)니 진해니 하는 지명, 나아가 김씨, 이씨 등 도공의 성씨까지 박아넣게 되지요.
선각 분청사기는 태토에 백토를 바른 다음 음각선으로 무늬를 새기는 것이고 박지 분청사기는 반대로 백토를 바른 다음 문양을 제외한 부분을 모두 대나무칼 같은 것으로 긁어내는 기법입니다. 선각 분청사기와 박지 분청사기 중에는 항아리와 병을 만들면서 양쪽 면을 납작하게 만든 편호(扁壺)와 편병(扁甁)이 많습니다. 특히 망태기에 넣어 어깨에 들쳐메고 다닐 수 있는 야외용 술병으로 쓰인 편병 중 ‘분청사기 선각 물고기 무늬 편병’처럼 음각선으로 옆 둘레에는 변형된 모란꽃 잎을, 양쪽 면에는 물고기를 새긴 게 있어요.
청자와는 전혀 별개의 세계를 보여주는 분청사기 문양 중에는 물고기 무늬가 많이 유행하는데 그 이유를 아직 확실히 알지 못합니다.
분청사기에 열광했던 일본 사람들이 일제시대 때 경매를 통해 사갈 때 병에 새겨진 물고기 숫자에 따라 값이 두세 배 뛰고 그랬습니다. 물고기도 그렇지만 잘 그리고 못 그리고의 경지를 떠난 나뭇잎 무늬를 새겨넣은 것이나 현대미술에서 볼 수 있는 추상성을 보여주는 휙휙 붓자국을 돌리다 만 것 같은 선무늬 편병 등이 분청사기의 특징입니다. 우리에게 위화감을 주는 완벽한 형식보다는 민화나 어린이 그림에서 찾을 수 있는 천진난만함, 그리고 여기에서 오는 소박함과 친숙함 등이 분청사기의 큰 매력 중 하나예요.
20세기 최고 도예가였던 영국인 버나드 리치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도자 학교인 알프레드 도자 학교에서 기념 강연을 하면서 “20세기 현대 도예의 나아갈 길은 500년 전 조선 도공의 길을 배우고 찾아가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가 쓴 <동과 서를 넘어서(Beyond the east and west)>란 책 속에도 이런 생각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한국도자기의 아름다움에 이끌려 1936년 서울 덕수궁에서 개인전도 가졌던 그가 강조하는 것은 분청사기를 만든 도공이 기법적으로 굉장히 탁월한 사람이었는데도 억지로 잘하겠다는 의지를 전혀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에요.
세계 각국의 공예품들이 모인 영국 ‘빅토리아 앤 알버트 뮤지엄’의 소장품들은 모두 당대 왕이나 귀족들이 쓰던 것입니다. 그런데 15~16세기 조선 도예는 왕실 등 국가의 간섭으로부터 완전히 배제된 서민이 갖고 있는 자유 창작 의지의 산물이란 점에서 극히 예외적입니다.
15세기 후반에는 ‘분청사기 철화 어조(魚鳥)무늬 장군’처럼 충청도 공주지방 ‘계룡산 가마’를 중심으로 석간주(石間?)라는 일종의 녹물로 추상적인 문양을 그린 철화 분청사기가 유행하며, 16세기에 들어서면 중국 명나라에서 들어온 백자의 영향을 받아 별다른 문양 없이 백토로 하얗게 분장한 분장분청사기가 많이 만들어집니다. 귀얄자국을 그대로 살린 귀얄분청사기와 그릇에 백토를 바르는 것이 아니라 아예 백토통에 덤벙 담갔다가 꺼내 유액이 줄줄 흐른 채로 구워진 덤벙 분청사기가 대표적인 분장분청사기입니다.
15세기 일본의 무로마치(室町)시대에 연극의 노(能), 음악의 렌가(連歌), 차로 대표되는 일본 특유의 미의식의 세계가 확립됩니다. 무로마치 문화가 지향한 미적 목표는 적막함, 쓸슬함, 스산함의 미학이었습니다. 또 그런 미의식을 추구한 다도인들에게 가장 어울리는 다완(茶碗)이 조선 분청사기였습니다.
‘고려다완’이라고 부른 분청다완은 일본인들이 적막의 미에서 ‘사비(寂)’와 ‘와비(侘ぴ)’의 미학으로 나아가면서 더욱 더 좋아하게 돼 아예 조선에서 주문생산으로 수입해 갔을 정도입니다.
정유재란은 일본에서 ‘도자기 전쟁’이라 부를 정도로 조선의 도공을 마구잡이로 잡아갔습니다. 우리는 분청사기로 뭉뚱그려 말하는 것을 일본인들은 미시마(三島), 하케메(刷手目), 가타데(堅手), 계룡산 등으로 세분해 얘기합니다. 이처럼 분류하는 언어가 다양한 것은 그것을 보는 시각도 발달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편 중국에선 원나라를 거쳐 명나라 초기에 오면 도자기를 구울 때 녹변 현상을 일으키는 철분이 완벽하게 제거된 백토, 이른바 카올린(kaolin)이라 부르는 고령토(高嶺土)와 페르시아에서 나오는 코발트 안료인 청화(靑畵)로 문양을 낸 청화백자를 새로 발명하게 됩니다.
백자는 청화백자와 함께 발전을 하는데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21세기도 청화백자의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지금 저는 분청사기를 훨씬 좋아하지만 이를 사용하던 당시 조선사람들에겐 <세종실록>에 중국 사신이 왔을 때 백자 반상기 한 세트를 갖고 왔다는 기록이 보여주듯 청화백자가 선망의 대상이었습니다. 15세기 후반에 나온 ‘백자청화 홍치(弘治)명 송죽무늬 항아리’는 우리가 중국 것을 모방해 만든 대표적인 청화백자입니다.
조선백자는 500년간 각 시기별로 특색 있는 아름다움을 보여줍니다. 초기에는 상감분청의 전통에 따라 백자에 상감으로 무늬를 넣은 상감백자가 만들어지며, 16세기에는 왕주발이나 왕사발로 흔히 불리는 ‘백자 반합(飯盒)’과 ‘백자 대접’이 정중하면서도 우아한 백자의 위용을 대표합니다.
청화백자도 중국 것의 카피에서 벗어나 ‘백자청화 망우대(忘優臺)명 잔받침’처럼 우리 것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의 등장으로 성리학도 조선 성리학으로 발전하듯이 조선화된 눈부신 백자를 만들어내게 되지요.
기술과 재료를 완전히 장악해 실력이 완벽해지면 여유가 생기고 그때부터 유머가 들어가게 됩니다. 백자병은 노끈을 맨 뒤 걸어넣고 썼는데, ‘백자철화 끈무늬 병’처럼 한 도공이 아예 끈무늬를 그린 병을 만든게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특히, 조선백자는 국가에서 1467년쯤 경기 광주에 조선 시대 궁중음식을 담당한 관청인 사옹원(司饔院)의 분원을 설치하면서 발전하게 됩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실린 139개의 자기소 중 상품(上品)을 만들어 낸 곳은 경북 고령(1곳)과 상주(2곳), 경기 광주(1곳) 등 4곳에 불과했습니다.
국가에서 수요가 있는 만큼 직영사업으로 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해 서울과 가까운 광주에 분원(分院)을 내게 된 것이에요. 현재 광주 일대에선 약 290개의 가마터가 조사됐습니다. 물론 한꺼번에 290개의 가마가 사용된 것은 아니고 한번에 10개 정도의 가마를 사용한 뒤 10년마다 다른 곳으로 옮겨 다니는 방식으로 운용됐습니다. 도자기 굽는데 필요한 사방 10리 일대 땔나무가 떨어졌기 때문이지요. 이렇게 광주의 우산리, 번천리, 도마리, 무갑리, 관음리, 상림리, 선동리, 신대리, 오항리 등지로 옮겨 다니다가 1752년 금사리에서 분원리로 옮긴 다음부터 가마를 더 이상 이동하지 않고 1883년 민영화될 때까지 130년간 한 곳에서 운영됐습니다. 그래서 동네 이름도 분원리로 불리게 됐던 것입니다.
임진왜란의 전승국은 조선이었지만 국토가 황폐해졌으며 회색 빛깔이 난 백자의 제모습을 찾는데 다시 100년의 세월이 걸리게 됩니다. 회회청(回回靑)으로 불린 코발트 안료를 수입할 수 없었던 17세기에는 철사로 추상적인 문양을 그린 백자가 많이 만들어집니다. 그러다가 18세기 영 · 정조시대 문예부흥기를 맞으면서 금사리 가마와 분원 가마에서 사대부들의 정갈한 정취에 맞는 각병(角甁)이나 ‘백자청화 초화무늬 항아리’처럼 소탈한 무늬나 여백미가 있는 그림이 등장하게 됩니다.
이때 가장 아름다운 백자가 바로 금사리 가마에서 만들어진 달항아리예요. 대호는 높이가 대개 40~45㎝, 중항아리는 30~33㎝ 되는데, 조선 사람을 빼고 지구상의 어떤 나라에서도 이렇게 큰 둥근 항아리를 만들지 못했습니다. 수동식 물레로는 태토가 약하기 때문에 항아리 윗부분을 만들다 보면 주저앉고 말기 때문이죠. 그러나 달항아리를 만들겠다는 조선 도공의 조형 의지는 커다란 대접(왕사발)을 두 개 만든 다음 이것을 잇대어 둥글게 만드는 방식으로 결국 달항아리를 만들어 내고야 말았습니다. 따라서 모든 달항아리에는 가운데 이은 자국이 있고 이로 인해 달항아리의 둥근 선은 컴퍼스로 돌린 기하학적인 원이 아니라 둥그스름한 넉넉한 맛을 지니게 됐던 것입니다. 달항아리에 대해, 미술사학자인 최순우 선생은 “부잣집 맏며느리를 보는 것처럼 넉넉함을 느낀다”고 말했고 이동주 선생은 “조선 사대부의 지성과 서민의 질박함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있다”고 평가했습니다.
3. 조선백자와 한국문화의 정체성
문화유산을 보는 안목을 키우는 데는 훌륭한 작품을 좋은 선생님과 함께 보는 것만한 게 없습니다. 그리고 그때 좋은 선생이란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라 책인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낸 고(故) 최순우 선생의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나 김원용 선생의 ‘한국미의 탐구’ 등이 바로 그런 책입니다. 각각 1960~70년대 월간지 ‘여원’과 ‘한국일보’에 연재했던 에세이를 묶어서 책으로 낸 것이었어요.
백자 달항아리의 아름다움을 부잣집 맏며느리 같다는 말로 표현했던 최순우 선생은 자신의 책에서 “한국의 흰 빛깔과 공예미술에 표현된 어질면서도 어리숙한 둥근 맛, 부정형의 원이 그려주는 무심한 아름다움을 모르고 한국미의 본바탕을 체득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백자 달항아리를 수십 개 늘어놓고 바라보면 마치 시골 어느 장터에 모인 어진 아낙네들의 흰옷 입은 모습이 생각난다고도 했어요.
‘한국의 미’란 제목으로 신문에 매주 작품 하나를 골라 명품해설을 했던 김원용 선생은 반가사유상 등 다른 작품과는 달리 달항아리에 대해선 다음과 같이 ‘백자대호’라는 시를 썼어요.
조선백자의 미는 이론을 초월한 백의(白衣)의 미
이것은 그저 느껴야 하며 느껴서 모르면 아예 말을 마시오
원(圓)은 둥글지 않고, 면(面)은 고르지 않으나 물레를 돌리다보니 그리 되었고
바닥이 좀 뒤뚱거리나 뭘 좀 괴어 놓으면 넘어지지야 않을 게 아니오
조선백자에는 허식이 없고 산수와 같은 자연이 있기에
보고 있으면 백운(白雲)이 날고 듣고 있으면 종달새 우오
이것은 그저 느껴야 하는 백의의 민의 생활 속에서 저도 모르게 우러나오는 고금미유의 한국의 미 여기에 무엇 새삼스러이 이론을 캐고 미를 따지오. 이것은 그저 느껴야 하며 느끼지 않는다면 아예 말을 맙시다.”이화여대박물관에 소장된 ‘백자철화 포도무늬 항아리’는 우리나라 항아리 중 키와 볼륨감이 제일 큽니다. 원래 창랑 장택상이 소장하고 있었던 것인데 간송 전형필 선생이 등장하기 전에 정계로 진출해서 그렇지 일제시대 때 최고의 수집가였습니다.
백자의 표면을 캔버스로 생각하고 철사로 능숙하게 포도를 그린 솜씨가 일품이에요. ‘용재총화’ 등을 보면 화공들을 배에 싣고 분원으로 데리고 가 도자기에 그림을 그렸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작품도 도화서(圖畵署)에 소속된 궁중 화원이 그린 작품이 틀림없습니다. 경기 광주 일대를 10년마다 옮겨다니던 백자 가마가 1720년대쯤 금사리로 옮겨와 30여년 동안 유지되면서 백자 전성기가 다시 시작됐습니다. 조선 후기 문화 역량은 숙종 때 기본을 갖추고 영·정조 때 꽃을 피우는데 백자가 다시 전성기를 맞은 것도 이런 문화 능력의 뒷받침 때문이었어요. 금사리 가마 단계에 와서 도공들도 380명 체제로 전문화되며 1752년 분원이 고정된 이후 가마가 이동할 필요 없이 강줄기를 따라 백토와 땔나무를 운반해오면서 조선백자는 빛깔도 우윳빛 청백색을 띠는 난숙한 경지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릇의 형태는 몰라도 적어도 도자의 질로는 푸른 기를 머금은 분원 백자가 등장하면서 조선백자는 최고 전성기를 맞습니다. 분원 백자의 아름다움은 필통과 연적 등 문방구에서 드러납니다. 요즘으로 치면 좋은 만년필, 좋은 잉크와 같은 것으로 한 집에도 몇십 개씩 갖고 있었기 때문에 땅속에서 나온 다른 백자들과는 달리 전세품(傳世品)이 많습니다. 다양한 형태의 분원시대 연적 가운데 혜원 신윤복 그림에서 보이는 것과 같은 에로티시즘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게 복숭아 연적입니다. 여자가 보면 남자를 생각하게 하고 남자가 보면 여자를 생각하게 하는 형태로 꼭지를 동화(銅畵)로 빨갛게 칠해 ‘백자청화 동채 복숭아연적’이라 불립니다. 그러나 제 개인적으론 복숭아 연적보다는 무릎을 곧추세우고 앉아 있는 여인의 치맛자락을 벗겼을 때 드러나는 모습 같다는 무릎연적이 훨씬 더 높은 수준의 조형력을 보여준다고 생각해요.
‘백자 투각 파초무늬 필통’처럼 파초잎을 엇갈려 배치하고 여백을 투각으로 처리한 필통은 빛깔이 티 없이 맑고 빙렬(氷裂)도 없어 옥으로 만든 것 같아요. 조선 정조시대를 대표하는 백자 항아리 하나를 들라면 저는 서슴없이 일본 오사카 동양도자미술관 소장의 ‘백자청화 동채 연꽃무늬 항아리’를 꼽습니다. 정조가 사도세자릉에 행차할 때 머문 화성 행궁에 있던 것이 능 앞의 용주사에 보관돼 있다가 일제시대 때 일본으로 넘어갔다고 전해집니다. 도자기에 그려진 연꽃 그림은 단원 김홍도가 40대에 그린 것이란 설이 있는데 밑 부분이 산화돼 흠이 있지만 전체적으로 분원 백자가 최절정기에 있을 때 빛깔을 보여줍니다.
모든 문명이나 문화는 절정에 오른 그 순간부터 감성의 과소비 현상과 긴장을 잃으면서 퇴락의 길로 나아갑니다. 르네상스 미술을 연구한 독일의 미술사가 하인리히 뵈플린도 “르네상스란 산마루는 담배 한 대를 다 피우고 가기에도 가파른 정상이었다”고 말했습니다. 르네상스가 정점에 도달했다고 하는 순간부터 하강 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는 뜻이에요. 조선백자도 불과 50년 뒤인 19세기 중반에 오면 같은 현상이 나타나요. 물론 십장생을 그려 넣는 등 변형을 많이 하고 기발하게 만들어 사람들에게 어필하려는 노력은 하지만 우리가 볼 때 정조시대 김홍도가 그렸던 항아리가 갖고 있는 정서가 그리운 것입니다. 조선왕조의 도자기는 1880년대 왜사기가 대량으로 수입되면서 막을 내리게 됩니다. 값싸고 질 좋은 것을 사려는 소비자의 욕구에 부응하지 못한 분원은 6명의 민간업자 손을 거쳐 1920년 완전히 문을 닫고, 그 자리에는 분원초등학교가 들어서고 맙니다. 우리나라 백자가 갖는 아름다움은 중국, 일본의 도자기와 비교했을 때 더 명확하게 알 수 있어요. 중국 청나라 경덕진 가마에서 만들어진 ‘백자청화 모란무늬 병’ 등에서 나타나듯, 조선이 순백색의 달항아리를 만들어 낸 18세기 전반 중국과 일본은 오채영롱한 그릇으로 발전해나갑니다. 일본인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는 동양 3국의 도자기를 비교하면서 조형의 3요소를 형(形) · 색(色) · 선(線)이라고 할 때 중국 도자기는 형태에, 일본 도자기는 색채에, 한국도자기는 선에서 그 특징을 찾을 수 있다 평했습니다.
중국 도자기는 형태의 완벽성과 위엄, 일본 도자기는 색채의 화사함과 장식성이 특징이라면 한국도자기의 아름다움은 무엇인가 우리의 가슴을 저미게 하는 것을 곡선 속에서 느끼게 한다는 것이에요. 또 어떤 이는 중국 도자기는 보기에 좋고 일본 도자기는 사용하기에 좋지만 한국 도자기는 그것을 어루만지며 사랑하고 싶어진다는 명언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한국인, 한국문화의 정체성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한국인은 민족적 자부심과 애국심이 대단히 강하면서도 자기문화에 대한 열등의식을 갖고 있는 게 특징입니다. 한국인의 이런 열등의식은 전부 중국에서 유래한 것이에요. 이는 우리가 역사를 잘못 배운 탓도 큽니다. 사실 한국은 단군조선 이래 오늘날까지 단 1초도 세계문화를 주도해 본 경험이 없는 나라입니다. 물론, 지구상에서 문화를 주도해본 나라도 몇 안 되지만 우리는 분명히 동아시아 문화권 속에서 한 주변부 문화였을 뿐입니다. 그러나 이탈리아 피렌체와 베네치아에서 시작해 독일과 네덜란드, 프랑스, 영국 등지로 퍼져간 16세기 유럽 르네상스 시대 역사를 서술할 때 누구도 네덜란드와 독일이 이탈리아를 모방했다고 깎아내리는 일이 없듯이 우리도 중국 것을 다 모방했다고 폄훼할 필요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정확하게 말해 어느 나라, 어느 문화권이든지 그 나라 문화를 이끌어나가는 중심부 문화가 있고 거기서 수많은 노동력과 막대한 자원을 투자해 새로운 문명을 만들어 냅니다. 문제는 이들 중심부 문화의 사람들이 우리가 만들었으니 너희도 쓰라고 나눠준 경우가 한 번도 없다는 것입니다.
고려사람들이 중국 청자를 보고 중국인들이 1500년 동안 애써 연구해 만든 것을 역추적해 200년 만에 똑같은 질로 만들어 낸 게 고려청자입니다. 일본과 베트남, 위구르족 등 중국 주변뿐 아니라 세계 그 어느 나라도 청자를 못 만들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우리 민족은 중국이 주도하고 있는 동아시아 문명에서 끝까지 낙오되지 않고 오늘날까지 왔습니다. 그런 민족이 몇이나 됩니까. 우리와 일본, 베트남 정도뿐입니다. 문화의 정체성(identity)이라고 하는 것은 고유성(originality)과는 전혀 다릅니다. 굳이 우리 문화에서 고유성을 따지면 한글 정도 얘기할 수 있겠죠. 고유성에 대한 컴플렉스 때문에 우리의 불교미술도 인도에서 나온 게 아닌가라고 생각하며 배척하는 경향도 있는데 한국의 불교 문화는 한국문화지 인도문화가 아닙니다. 우리의 삶이나 문화를 풍요롭게 하고 세련되게 할 수 있다면 콩고제면 어떻고 우간다제면 어떻습니까. 20세기에 들어와 일본이 동아시아 문화를 주도할 기회가 있었는데 식민지 만들고 괴뢰정부 만들어 군사적으로 강압하고 경제적으로 수탈하다 태평양전쟁에서 지면서 모든 게 끝나버렸습니다. 지금도 아무런 반성 없이 도쿄 야스쿠니(靖國)신사에 참배하는 모습을 보면 일본은 당분간 아시아의 문화를 주도할 지도력을 상실했을 뿐만 아니라 포기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중국은 우리를 따라잡으려면 아직도 5~10년은 있어야 합니다. 최근의 한류(韓流) 열풍이 상징하듯, 결국 아시아에서 문화를 이끌어갈 수 있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세계문화를 지배했던 역사적 경험이 없어 지금 우리가 아시아문화를 이끌고 있다는 생각을 못 하고 있어요. 중국 선양(瀋陽)에서 ‘한국식 최신 공법 시공’이란 플래카드가 아파트에 걸려 있는 것을 봤습니다. 여기서 ‘한국식’은 우리가 옛날 ‘미제’, ‘일제’니 했던 것과 같은 뜻이에요. 노무현 대통령이 한국을 동아시아의 물류중심국가로 만들겠다고 말했는데 ‘물류(物流)’는 ‘문류(文流)’가 먼저 흘러갔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문화 저력을 국민들은 체감하지 못하지만 이미 한류가 동아시아에 흘러갔습니다. 이제는 동아시아 사람들이 왜 우리의 드라마 등 대중문화에 감동하는가를 인류학, 사회학 등 다각도로 분석해내는 노력이 필요할 때입니다.
4. 선사시대와 한민족의 뿌리
미술의 역사는 인간의 역사와 함께 시작하는데 인간의 역사라고 하는 게 참 매력적인 연구 분야입니다. 지구역사는 45억 년을 헤아리고 있지요. 이 중에서 인간의 역사는 불과 200만 년 전으로 얘기되고 있으며, 다시 선사시대에서 신석기시대로 들어온 게 1만 년 전입니다. 또 여기에서 역사시대로 진입한 게 불과 4000~3000년 전이니까 45억 년의 지구역사에서 인간의 역사가 차지하는 기간은 극히 미미합니다. 지구역사를 365일, 1년으로 봤을 때 12월 31일 오후 11시 50분대에 해당하는 기간만이 지구역사에서 인간의 역사에 해당한다는 계산이 나오게 됩니다. 인간의 기원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두 가지 설이 대립하고 있습니다. 아프리카 탄자니아에서 기원한 어떤 한 종이 지구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는 설과 지구상의 모든 동물들은 생명의 조건만 갖춰지면 어디에서나 자연발생적으로 등장할 수 있다는 주장이 그것입니다.
우리나라 전기 구석기시대의 대표적인 유적이 상원 검은모루 동굴입니다. 북한에서 도로공사를 하던 중 평양시 상원구역 흑우리의 검은 모루 동굴에서 큰곰, 동굴곰, 하이에나, 코뿔소 등 50만 년 전에 살았던 동물들의 화석이 확인됐는데, 일제 때 한국에는 구석기시대가 없었다고 말했던 일본인들의 주장을 뒤엎은 획기적인 발견이었어요. 북한에선 이후에도 평안남도 덕천의 승리산 유적과 함경북도 웅기 굴포리 등지에서 구석기 유적들이 계속 발굴됐습니다. 구석기시대 사람들은 떼어 만든 타제석기(뗀석기)를 사용했는데, 1960년대 들어와 남한에도 공주 석장리를 비롯, 구석기 유적들이 하나씩 발견됐어요. 이 중에서도 결정적인 유적이 1970년대 발견된 경기도 연천 전곡리 유적입니다. 미국 인디애나대 고고학과를 다니다 돈을 벌기 위해 군대에 입대, 한국 동두천에서 근무하던 미군 하사 보웬이 한겨울에 전곡리 한탄강변에서 데이트를 하다 우연히 발견한 것이 고고학 수업시간에 배운 아슐리안 주먹도끼였어요. 구석기시대 사람이 만든 유일하고 현재까지 가장 오래된 조각품이 오스트리아 빈 역사박물관에 있는 빌렌도르프의 비너스입니다. 19세기 중엽 철도 공사를 할 때 오스트리아와 독일 등지에서 11~15㎝ 정도 되는 조그만 돌조각들이 약 60개 발견됐는데, 그중 오스트리아 빌렌도르프 지역에서 나온 이 돌조각이 구석기시대 사람들이 갖고 있는 미인관을 반영했다고 해서 비너스라는 명칭이 붙여졌습니다. 다산과 풍요의 상징인 여체를 표현하면서 생산과 관계되는 부위, 즉 유방과 둔부, 국부만을 과장되게 표현한 것이 특징입니다. 일종의 주술적인 의미로서 조각을 시작한 것이지요. 아놀드 하우저가 쓴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를 보면 예술은 ‘내용이 먼저냐, 형식이 먼저냐’를 놓고 끊임없는 논쟁이 있어왔습니다. 그런데, 인류 역사에 나와 있는 명확한 사실은 예술은 형식보다는 내용이 먼저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유사(類似)가 유사를 낳는다는 ‘마술의 법칙’, 비슷하게 만들면 똑같은 것으로 실현된다는 신념이 결국 구석기시대 미술을 만들어낸 것이었고 인간에게 미술이라고 하는 것이 가지는 부적과 같은 기능에서 예술이 시작된 것입니다. 1만5000년 전 유적인 스페인과 프랑스의 경계선에 위치한 알타미라와 라스코 동굴 벽화를 보면 들소뿐만 아니라 소를 잡는 화살촉이 같이 그려져 있습니다. 알타미라 동굴에서는 돌멩이를 맞아 상처가 많이 난 들소도 보입니다. 어느 책을 봐도 동굴벽화 사진이 제대로 나온 것이 매우 드문데, 그 이유는 전부 다 그림이 그려진 장소가 동굴 안에서도 가장 깊은 곳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동굴이든 30m만 들어가면 빛이 완전히 차단되는데 알타미라 동굴의 경우 170m 속 가장 깊은 곳의 천장에 달리는 들소와 누워있는 들소, 상처 입은 들소 등 갖가지 들소를 그려 놓았습니다.
라스코 동굴 벽화도 미로 같아서 들어가면 길을 찾을 수 없는 어두운 곳에 그려져 있습니다. 따라서 예술은 장식이나 형식으로 한 것이 아니라 ‘마술’이라고 하는 내용으로 시작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어요. 한반도에서 제주도와 대마도가 떨어져 나간 게 불과 1만5000년 전의 일입니다. 서해 바다의 깊은 곳이라고 해봐야 75m 정도이고 평균 바다 깊이가 35m밖에 되지 않아요. 옛날 서해 바다는 큰 강일 따름이었습니다. 동해 바다 이쪽은 백두대간이 흘러내리기 때문에 별 차이가 안나지만 서해 바다의 경우에 간만의 높이 차가 10m나 됐습니다. 따라서 구석기나 신석기시대 초기 유적지들을 보면 강변이 아니라 해안에서 나오는 것들은 함경북도 웅기 굴포리나 강원도 양양 오산리 같이 동해안에서 나오고 서해안에는 안 나옵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한반도에 들어온 이주 경로가 동쪽을 통해서 왔다고 하는 설도 있지만 믿을 건 못돼요. 이다음에 바닷물이 많이 빠져버리는 사태가 나거나 수중 고고학이 발달하면 서해안 해저 속에서 구석기나 신석기시대 초기 유적들이 많이 나올지도 모릅니다. 세계사적으로 신석기시대에 들어오면서 사람들이 강변 주위에 모여 정착생활을 하게 되고 집도 짓게 됩니다. 성적 수치심과 사계절을 견디기 위해 옷도 해 입게 되며 도구도 간석기(마제석기)를 만들어 씁니다. 또 농업과 목축을 시작하게 되는데 이는 요즘 말로 하면 국내총생산(GDP)의 폭발적인 증가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와 함께 잉여곡물을 저장할 수 있는 토기를 제작하게 되면서 구석기인처럼 먹을 게 없으면 굶어 죽고, 추위와 싸우는 경쟁을 넘어서 인간이 자연을 경영하기 시작합니다.
한강변에 위치한 암사동 유적은 1925년 을축년 대홍수를 계기로 6000년 전 사람들의 집자리터(움집터)가 발견된 곳입니다. 오산리 유적과 부산 동삼동 유적, 암사동 유적 등지에선 덧무늬 토기와 함께 신석기시대를 대표하는 빗살무늬토기가 등장합니다. 빗살무늬토기를 만든 고아시아족들은 기원전 1000년 청동기 시대가 시작될 때까지 한반도의 주인공으로 살게 됩니다.
토기에 왜 빗살 문양을 쳤느냐를 놓고도 많은 해석이 있습니다. 단순히 멋으로 추상적인 문양을 넣었다고 얘기할 수도 있지만 덧무늬와 빗살무늬 등이 사람의 지문 같은 역할을 해 미끄러지지 않고 들기 편한 기능적인 측면도 무시할 수 없어요. 이밖에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공간에서 느끼는 인간의 공간 공포가 문양의 탄생을 낳았다는 해석도 있으며 빗살무늬를 생선뼈 무늬로 보고 강변에 살았던 신석기인들이 생선 같은 것을 많이 잡기 위한 주술적인 의미로 이와 같은 어골(魚骨) 무늬를 발전시켰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기원전 1500년 무렵이 되면 빗살무늬토기에 번개무늬(雷文·뇌문)가 들어가고 뾰족바닥이 납작바닥으로 바뀌는 과정을 살짝 겪게 됩니다. 곡식 수확에 쓴 반월형 석도는 이때 등장해 청동기시대 농경에서 가장 많이 사용된 도구 중 하나입니다. 빗살무늬토기는 반지하 움집 생활을 하면서 모래사장에다 묻기 좋게 하기 위해서 밑이 뾰족했던 것인데, 이게 납작해졌다는 것은 지상으로 올라왔다는 의미이고 뇌문이 등장한 것을 인간이 그냥 채취하는 단계에서 적극적으로 농사를 짓기 시작한 것을 나타내는 징표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기원전 1000년쯤 되면 민무늬토기라고 부르는 무문토기 시대로 넘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이 무문토기는 지역에 따라서 상당히 다른 편차를 보입니다. 빗살무늬토기 시대에는 빗살무늬토기 한 가지만 대종을 이루었던 것에 비해, 민무늬토기 시대에는 민무늬토기 외에 붉은 간토기(홍도)와 구멍무늬토기(공열문토기), 검은 간토기(흑도), 가지무늬토기(채문토기) 등 다양화돼 있는 게 특징입니다.
민무늬토기를 사용하고 있던 사람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죽음의 장식으로 고인돌을 만들었고 청동기를 사용했습니다. 이 사람들이 바로 우리의 직접적인 조상이 되는 퉁구스 계통의 예족과 맥족입니다. 이들은 한반도에서 평화롭게 장고한 세월동안 거의 매너리즘에 빠진 듯이 살아왔던 고아시아족 빗살무늬토기인들을 섬멸시켜버리고 이 땅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한민족은 한 번도 남을 침범한 일이 없는 것을 자랑처럼 얘기하지만 “우리는 한반도에서 살고 있던 빗살무늬토기를 사용한 고아시아족을 섬멸시키고 이 땅에 민무늬토기와 고인돌, 청동기를 갖고 들어온 위대한 퉁구스 예맥족이다”라고 쓰는 게 한민족의 기원에 대한 정확한 고고학적인 해석이 됩니다. 이들이 만든 나라가 바로 고조선과 부여입니다. 북방식과 남방식, 또는 탁상식과 바둑판형으로 구분되는 고인돌이 황해도 은율과 평양 등 북한에 1만4000기 정도 있고 강화도와 전남 화순, 전북 고창 등지를 중심으로 남한에 2만4000기 정도 있다고 하지만 실제 숫자는 훨씬 많을 겁니다.
수몰 지구를 발굴하면서 바깥으로 옮겨놓은 고인돌 등 모두 계산하면 남·북한 합쳐서 5만기 이상 될 것이에요. 청동기시대 때 족장과 그 가족 묘역이라고 생각되는 고인돌에선 고조선의 상징적인 유물인 비파형 동검 등 많은 유물이 나왔습니다. 당시 대표적인 유적으로 경기 여주 흔암리· 충남 부여 송국리 마을유적, 전남 보성 봉릉리 고인돌 유적, 대전 괴정동 무덤 유적 등이 있습니다.
요녕식인 비파형 동검은 한반도에 들어와 자주적 양식인 세형동검으로 변합니다. 대전에서 출토된 것으로 전하는 농경문 청동기도 있어요. 조그마한 동판에 밭을 갈고 있는 사람과 도리깨질하고 타작하는 사람이 그려진 그 뒷면에 보면 나뭇가지 위에 새를 조각했는데, 이것은 충청도 지역에 있는 솟대, 소도의 전통을 보여줍니다. 성역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지요. 장승과 함께 소도가 갖고 있는 전통은 3000년 전부터 오늘날까지도 끈질기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고인돌 등 청동기시대 무덤에선 각종 문양을 넣은 방울과 거울 등이 많이 나오는데, 이와 같은 일련의 도구들은 오늘날 무당들이 사용하고 있는 연장과 똑같습니다. 오늘날 무당들이 쓰는 명두(明斗)라는 거울과 요령이라고 부르는 방울이 그것입니다.
나팔형동기와 팔주령, 쌍두령, 조합식 쌍두령, 간두령 등으로 구성된 청동방울 일괄청동기시대 제관(祭官)이 사용하고 있었던 모든 의식의 구조들이 오늘날 샤머니즘의 무당 세계로 전달됐다고 볼 수 있어요.
울산시 울주 반구대 및 천전리 암각화도 청동기시대를 대표하는 유적입니다. 이들은 모두 우리가 끝내 중국과 동화할 수 없었던 선사시대 우리 한민족의 뿌리를 이야기해 주는 미술사적·고고학적 물증입니다.
5. 삼국시대 고분미술
인간 삶의 아이러니이지만 옛날 사람들이 살았던 일상생활의 자취는 모두 없어져 버리고 죽음의 자취만 남아서 이를 통해 당시 사람들의 삶을 복원하는 것이 고고학의 큰 테마가 돼 버렸습니다. 삼국 시대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무덤이 존재하기 때문에 과거를 복원할 수 있게 됐으며 왕릉 때문에 서울의 녹지공간도 보호됐습니다. 그런데 인간 생활 중 가장 변하지 않는 것이 장례풍습입니다. 거꾸로 말해 장례풍습이 바뀌었다는 것은 그 문화가 완전히 바뀌었다는 것을 의미하지요.
기원전 1000년쯤(물론 북한은 청동기 시대의 개시를 기원전 2500~3000년 전으로 주장하지만) 이 땅에 고인돌이 등장한 것은 새로운 장례 풍습 제도의 등장이었고 고조선 · 부여시대의 상징적인 문화였어요. 그러다 기원 전후 무렵이 되면 고인돌이 이 땅에서 사라지고 삼국 시대 고분 미술이 등장하게 되며 이후로는 장례문화가 크게 변하지 않습니다.
통일신라와 고려 시대에 불교가 번성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에서만 화장을 했을 뿐 매장하는 풍습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잖아요. 이 점에서 한반도의 뿌리, 우리가 갖고 있는 삶의 뿌리는 삼국 시대 고분 미술에서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삼국 시대 미술은 크게 고분미술과 불교미술로 나뉩니다. 다른 나라는 고대국가를 얘기할 때 한 줄기로 얘기하는데 우리는 고구려의 강인한 문화와 백제의 우아미, 신라의 화려함같이 인류가 고전 문화를 만들어가던 시기 세 가닥으로 추구되던 문화가 통일신라에서 하나의 결실을 맺게 됩니다. 이는 한민족이 갖고 있는 정서의 발현을 다양화시킬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로 우리로서는 굉장히 큰 복이었던 셈이지요. 우선 한성백제의 초기 도읍지(하남 위례성)로 유력하게 떠오르는 풍납토성을 봅시다. 기원 전후 이렇게 토성을 중심으로 사람들의 집자리가 생기고 빗살무늬토기나 민무늬토기(무문토기)와 다른 단단한 회색의 와질(瓦質)토기가 나오며 삼국시대 전형적인 토기인 회청색의 경질(硬質)토기도 만들어지기 시작합니다.
노천에서 구우면 온도가 700도 이상 올라가지 않는데 지붕이 있는 굴가마(등요 · 登窯)가 등장해 1100도까지 올라가면서 가능하게 된 일이지요. 당시 토기를 보면 물레를 사용하기 전 그릇을 단단하게 하기 위해 새끼를 묶어서 만든 망치로 두드려 생긴 탄알 모양의 승석문(繩蓆文)이 많이 나옵니다. 삼국시대 초기 와질토기들이 우리나라에서 처음 발견된 곳이 김해지역입니다. 그래서 60, 70년대만 해도 당시를 김해 토기시대라고 했어요.
그런데 이런 토기들이 서울 암사동과 풍납동에서도 나오니까 김해식 토기로 바뀌었으며 다시 전국에서 발견되자 원삼국시대 토기로 이름이 변경됩니다.
박물관에 가서 원삼국시대란 용어를 보고 생소하게 여기는 분들이 많은데, 사실 고구려와 백제, 신라 세 나라가 솥발처럼 정족(鼎足)을 이뤘던 시기는 채 150년도 안 됩니다. 따라서 기원전 1세기부터 668년까지를 삼국 시대라고 쓰는 것은 굉장한 모순이 있어요. 부여, 동예, 옥저, 삼한 등 삼국시대 초기만 해도 10여 개의 부족연맹 국가가 있었습니다. 영어로 프로토(proto)란 뜻의 원(原)이 붙은 원삼국시대는 삼국으로 정립되기 이전의 상태인 기원전 100년부터 기원후 300년까지 약 400년의 기간을 부르는 용어로 고(故) 김원용 전 서울대 교수가 만든 것입니다.
원삼국시대 토기 중 소뿔 모양의 손잡이가 있는 항아리나 오리형 토기들은 파격적인 조형 의지를 보여줍니다. 일상생활 용도라기보다는 제의용으로 고대국가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지배층이 자신들이나 국가의 권위를 높이기 위한 의지가 그릇에 반영된 게 아닌가 생각돼요. 사실 오리모양 토기의 경우 서울 인사동과 장안평, 대구 건들바위 같은 고미술상점에 처음 나왔을 때 누구도 우리 것이라고 믿는 사람이 없었어요. 1985년 대구 임당동고분군에서 발굴될 때까지는 말이죠.
지금은 깨진 것까지 약 40개 정도 발굴돼 ‘오리형 토기의 시대’라고 부를 정도로 원삼국시대의 상징적인 유물이 됐습니다. 사실 오리라고 하지만 계관(鷄冠 · 닭의 볏)이 있는 등 오리도 닭도 아닌 상스러운 동물을 상징화했다고 보여집니다. 유장한 압록강 줄기를 따라가다 보면 날씨가 따뜻해 중국에서 동북 3성의 강남이라고 부르는 지안(集安)시 퉁거우(通溝) 평원에 흩어져 있는 피라미드와 유사한 적석총(積石塚 · 돌무지무덤)을 볼 수 있습니다. 일제 때 ‘남만주조사보고’에 의하면 우산하 지구에 2000여 기 식으로 여러 군데 2000~3000개씩 흩어져 있는 것을 합하면 1만2000여 기에 달합니다.
중국에서 ‘동방의 금자탑’이라 부르는 7층(단)으로 된 장군총(장수왕릉으로 추정)이나 광개토왕릉비, 그 뒤의 태왕릉(광개토왕릉으로 추정) 등이 대표적인 고구려 유적입니다. 고구려가 평양으로 천도(427년)하기 이전인 350년 무렵부터 평양과 대동강 남쪽, 황해도 안악 일대에서 벽화가 그려진 석실봉토분(石室封土墳 · 돌방흙무덤)이 등장합니다. 물론 돌방흙무덤이라고 모두 벽화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고구려에서 떨어져 나온 백제도 서울 석촌동 적석총에서 보듯 무덤형식이 처음에는 고구려식이었어요. 장군총에 비해 3층이지만 옆에다 돌멩이를 한 면에 3개씩 기대놓은 것 등이 고구려 무덤형식과 똑같습니다. 돌이 많은 마을이란 뜻의 ‘돌마리’라는 이름이 상징하듯 원래 석촌동에는 적석총이 많았지만 아파트를 지으면서 지금은 7기만 남아 있지요. 그러다 방이동으로 가면 고구려 무덤 형식으로부터 벗어난 흙무덤인 토광묘(土壙墓 · 널무덤)와 토광목곽묘(덧널무덤) 등이 만들어지며 웅진 천도 뒤에는 공주 송산리고분군의 무령왕릉에서 볼 수 있듯 중국 남조풍의 벽돌무덤인 전축분(塼築墳)이 등장합니다.
백제와 중국 남조 양(梁)나라 등과의 교류상을 보여주는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2000여 점의 유물 때문에 국립공주박물관이 탄생하지요. “사마왕(斯麻王·무령왕)과 왕비가 토지신에게 2만 냥의 돈을 주고 땅을 매입한다”는 내용의 무령왕릉에서 나온 일종의 토지매매 계약서인 매지권의 기록을 통해 ‘삼국사기’의 정확성이 입증된 것도 성과입니다.
경주 일대에는 왕과 왕비의 봉분 두 개가 남북으로 이어져 있는 표형분(瓢形墳)인 황남대총을 비롯해 155개의 고분이 분포하고 있어요. 고구려나 백제의 무덤과 달리 신라의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 · 돌무지덧널무덤)은 도굴이 어려워 일제가 고고학의 실험대상으로 발굴할 때까지 사람들의 손을 타지 않았습니다.
통일신라 시대로 들어오면 12지신상이 새겨진 호석(護石)을 두른 김유신묘와 원성왕릉으로 추정되는 괘릉(掛陵)이 만들어졌어요. 이중 괘릉은 동서남북 사방을 응시하고 있는 돌사자 2쌍과 서역인 형상의 무인석 등 화려한 능묘구조를 갖추고 있는 것이 특징인데 8세기 후반 조성된 어떤 불상에서도 이렇게 사실적인 조각을 찾을 수 없어요.
평지에 있는 신라의 무덤과 달리 석실분(石室墳 · 돌방무덤)인 가야의 무덤은 밑에서 위로 올라갈수록 무덤이 커지는 것이 특징입니다. 대가야 무덤인 고령 지산동고분군을 비롯해 함안, 창녕, 고령 등 어느 지역을 가도 가야 무덤은 산자락을 타고 올라가면서 만들었어요. 조상님들과 자기의 삶이 이어진다는 의미에서 신라가 평지에 무덤을 조성했다면 가야사람들은 조상들의 비호와 가호 아래 우리들의 삶이 영위된다고 생각한 것 같아요. 마한의 세력이 강했던 나주에선 옹관(甕棺 · 독무덤) 전통이 계속된 게 특징입니다. 고분에서 출토된 것 중 하이라이트는 역시 왕이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관과 관모, 관식 등입니다. 평양 진파리1호분에서 나온 관모형태의 고구려 금동투조금구와 백제 무령왕 및 왕비의 관식, 천마총 금관 등 신라의 금관을 보면 세 나라 문화가 갖고 있는 성격, 거칠게 얘기해 고구려 문화의 사나이다움과 강인함이나 여성스럽고 우아한 백제의 미, 신라문화의 화려함 등이 그대로 나타나지요.
고구려 금동투조금구와 백제 무령왕 관식의 경우 같은 불꽃무늬라도 선이 주는 느낌이 다릅니다. 신라 금관은 고대 일본에서 동경, 칠지도와 함께 신령스런 보물로 생각한 곡옥(曲玉)이 수십 개씩 달려 있어 대단히 화려합니다. 고려 시대 무덤에 청자 그릇 하나 넣듯이 삼국 시대 왕과 귀족의 무덤을 파면 금귀걸이가 다 나옵니다. 무령왕릉에서 나온 하트형을 비롯해 펜촉형, 총알형, 낙엽형 등 종류도 다양해요. 특히 금 알갱이로 장식하는 기법 등 신라사람들의 금속공예기술은 세계 어느 나라보다 앞서 있었습니다. 각종 금목걸이나 다리(多利)라는 장인의 이름이 새겨진 무령왕비의 은팔찌에선 요즘 크리스천 디오르 제품 못지않게 현대적인 감각의 디자인을 볼 수 있습니다.
경주 고분에서 나온 허리띠 장식과 식리총의 금동신발의 문양 등은 유럽 중세문화 속에서 보이는 다양한 장식문양을 능가해 신라 황금 문화가 대단히 다양하고 세련됐음을 보여줍니다. 성덕대왕신종(에밀레종)이나 백제 금동대향로는 실제 사용했을 때 그것이 갖고 있는 오리지널한 맛을 확인할 수 있지요.
사실 와당을 보면 고구려와 백제, 신라의 미감에 대해 제일 먼저 눈뜨게 됩니다. 똑같은 숫막새 기와의 연판문양에서도 삼국이 서로 다른 것을 확인할 수 있어요. 충청도 지역을 돌아다니다 솔밭들을 보면 백제 ‘산수문전’의 문양과 참 비슷한 곳이 많아요. 10여 년 전 성주사지를 발굴하던 이강승 충남대 교수가 저를 발굴현장에 초대하며 “바람도 돌도 나무도 산수문전 같다”고 한 말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삼국 시대 고분미술의 정수는 고구려 고분벽화입니다. 350년쯤부터 시작해 고구려가 멸망하는 668년까지 발달한 고구려 벽화고분은 지금까지 평양과 중국 지안 일대를 중심으로 100여 기가 확인돼 있습니다. 이렇게 많은 것은 왕의 무덤뿐 아니라 유주자사 진(鎭)의 무덤인 덕흥리고분처럼 고급 관료들의 무덤에도 벽화가 그려졌기 때문이에요. 고구려 고분벽화는 3시기로 나눌 수 있습니다. 안악 3호분이나 덕흥리 고분 등 350년에서 450년 사이 만들어진 벽화고분은 인물도가 벽화의 중심을 이루고 있어 이 사람이 피장자(被葬者)란 사실을 명확히 보여줍니다. 물론 357년에 죽은 동수(冬壽)란 이름이 적힌 명문이 전하는 안악 3호분의 경우 지금까지 피장자를 놓고 동수무덤이란 설과 동수는 당시 주인공을 모시고 있던 신하로 무덤의 주인은 미천왕이나 고국원왕이란 논란이 진행 중이지만 말이죠.
450~550년 사이가 되면 인물도에서 생활도 중심으로 바뀌게 됩니다. 무용총의 사냥하는 그림 등이 대표적인데, 당시는 고구려의 전성기인 장수왕 때로 벽화를 그리는 능력과 실력도 높은 수준에 도달합니다. 대개 실력이 있으면 여유가 생기고, 여유가 생기면 유머가 들어갑니다. 무용총 벽화에서 마지못해 사냥에 나서는 것 같은 말 탄 사나이의 모습이 바로 이런 유머의 산물입니다. 이때가 되면 무덤 주인공이 평상 위로 올라가고, 다시 무덤 위쪽에 그려지는 등 서서히 퇴조하는데, 이는 아무개의 무덤이라는 개인의 공간에서 죽은 자의 무덤이라는 상징의 공간으로 바뀌게 된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다 550년 이후는 주인공이 무덤의 공간에서 쫓겨나고 사신도(四神圖)가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게 되지요. 개인의 공간에서 공적인 공간으로 바뀌고, 마지막에 나타난 것은 영혼의 세계입니다. 이는 삶의 공간과 죽음의 공간을 동일시한 초보적인 영혼개념에서 이제 영혼의 세계는 영혼이 지배한다는 관념이 등장한 것을 의미합니다.
6. 불교미술의 원리와 삼국, 통일신라 불상
모든 고대국가가 형성되는 데는 3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영토의 확장과 율령으로 대표되는 강력한 통치체계의 확립, 그리고 이데올로기로서의 종교가 그것이에요. 샤먼의 전통으로 유지될 때만해도 제관(祭官)이 춤추고 주술적인 것을 행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지만 조직이 커지고 사회가 분화돼 왕과 귀족, 백성의 신분차별이 생겨나면서 이런 위계를 설명하는데 종교의 신세를 지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이와 함께 인간의 삶과 영혼의 문제, 두 가지를 다 해결해 줄 수 있는 이데올로기인 종교의 전파를 위해 고대 제왕들은 막대한 재력이 들어가는 신전과 사찰의 건립에 그렇게 열성적이었던 것이지요.
실제 삼국 시대 가람배치에서 남문, 중문, 탑, 금당, 강당, 승방 순으로 남북 일직선상에 배치돼 있는 경주 황룡사지 강당은 오늘날 정부종합청사의 강당이 아니라 로마시대 홀룸 같은 역할을 해 원효대사와 자장율사가 모두 이곳에서 강의를 했어요.
따라서 지금부터 강의하는 불교는 어느 특정 종교에 대한 얘기가 아니라 고대 우리 조상들이 국가 창출의 원동력으로 삼았던 불교, 이데올로기로서의 불상에 대한 내용입니다. 기원전 6세기에 활동한 고타마 싯다르타가 도를 깨달은 뒤 10대 제자를 통해 불교를 전파했지만 국가로부터 인정받은 것은 300년이 지난 기원전 3세기가 됐을 때입니다.
불상을 만들지 않아 무불상 시대로 미술사에서 얘기하는 당시에는 산치대탑과 같은 수트파(Stupa · 불탑) 외에는 불교적인 장치물이 없었어요. 서기 1세기 들어 오늘날 파키스탄 영토인 간다라 지역에서 비로소 불상이 출현하게 됩니다. 간다라는 알렉산더 대왕이 동쪽으로 진출한 마지막 지역이었지요.
헬레니즘 문화가 동쪽으로 진출하는 과정에서 간다라 지역에 살던 사람들이 인간의 모습을 빌어 신상(神像)을 만들던 그리스 사람들의 아이디어를 차용해 이때부터 불상이 제작되기 시작합니다. 원시 소승불교에서 대승불교로 전환하는 불교 교리상의 발전도 불상제작의 전기가 되지요.
“깨우친 자가 부처다”라는 대승불교의 교리에 따라 석가모니도 수많은 부처 중의 하나일 따름이 되며 경전이 찬술될 때마다 수많은 부처들이 탄생하게 됩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족보가 대단히 복잡해요. 부처 밑에 보살이 있고 보살 아래 천상의 세계를 지켜주는 제석천과 범천, 그리고 사천왕이 있으며, 다시 그 밑에 아라한과 나한이라는 고승, 그 아래로 승려와 대중이 있어 상하로 연결된 것이 불교의 위계(하이어라키)입니다.
석가모니가 성불하기 전 왕자일 때의 모습을 모델로 한 보살상은 귀공자의 모습, 또 남성도 여성도 아닌 중성의 모습을 띠게 됩니다. 불상의 조성을 보면 석가를 포함 우주에서 중생을 구하기 위해 다녀간 일곱 분의 부처(과거칠불)와 미래에 출현한다는 미륵불 등 시간개념의 부처가 있는가 하면, 방위개념이 들어가 있는 부처도 있답니다.
과거칠불 중 석가모니 직전에 지구에 다녀갔던 분이 다보불이기 때문에 석가와 다보불이 나란히 앉아 있는 이불병좌상(二佛竝坐像)이나 석가탑과 다보탑이 병립해 만들어집니다.
동서남북에 다 부처가 있을 것이란 믿음에서 사방불 개념이 퍼지고 사면석불이 조성돼요. ‘아미타경’이 찬술되는 2세기쯤 되면 인도사람들은 자신들이 남쪽에 있다는 생각에 남쪽에는 석가모니, 북쪽에는 미륵, 서쪽 극락세계는 아미타여래 하는 식으로 사방불 개념이 완전히 체제를 갖추게 됩니다.
또 부처의 좌우 양쪽에 부처를 보좌하는 보살상이 만들어지는데, 아미타여래의 경우 관세음과 대세지보살이, 석가모니의 경우 문수와 보현보살이 좌우에 배치됩니다.
‘화엄경’이 찬술되는 시점에 오면 불법 자체를 의미하는 비로자나불이 나타나게 됩니다. 말로는 간단하지만 불경으로 들어가면 아주 복잡한 구조를 갖는데, 사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당시 신앙형태가 어떠했느냐는 것일 겁니다.
동남아시아 각국의 불상을 소개한 ‘The Image of Buddha’란 책을 보면 불상들이 각각 그 나라 사람 중 가장 미남형이거나 이상적인 상으로 변해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인도는 인도 사람의 이상형으로, 캄보디아는 캄보디아 사람의 이상형으로, 그리고 우리가 인정하든 안 하든 경주 남산의 불상은 한국인이 갖고 있는 이상적인 상을 반영한 것이에요.
미국 하와이주의 호놀룰루에 ‘아카데미 오브 아트’라는 미술관이 있는데, 이곳 간다라 미술실에 전시돼 있는 불두(佛頭)를 보면 그리스 신전에서 떼어왔는지 불상에서 떼어왔는지 거의 구별이 되지 않을 정도로 헬레니즘을 통해 받아들인 그리스의 영향을 느끼게 됩니다.
부처님이 어떻게 생겼는가에 대해 설명한 것으로 32상 80종호란 게 있어요. 거의 모두 부처님의 이상적인 몸매와 보통사람과 다른 신체구조를 32가지, 80가지로 설명하는 내용입니다.
예를 들어 나중에 법륜(法輪)으로 형상화되는 평발인 발바닥에 있는 바퀴나 곱슬머리와 머리 위의 군살을 나타낸 나발(螺髮)과 육계(肉계), 두 눈 사이에서 희고 빛나는 털인 백호(白毫) 등이 모두 32상 80종호에 나옵니다.
이밖에 눈은 은행알처럼 생겼고 몸에서 금빛이 났다는 내용 등도 설명돼 있습니다. 그리스인의 모습이 아닌 인도인의 이상적인 모습을 담은 불상을 만든 굽타왕조를 지나 흰두교가 불교를 압도해버리면서 인도에서는 더이상 불교가 발전하지 않고 실크로드를 넘어 불상과 함께 동점(東漸)을 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4~14세기 1000년에 걸쳐 막고굴 등과 같이 중국 둔황(敦煌) 등 실크로드 각지에 석굴을 파고 그 안에 불상을 조성한 유적이 나타납니다. 19세기 중엽 모래바람에 덮였던 석굴이 하나하나씩 드러나면서 스타인이나 펠리오, 오타니 같은 서구와 일본의 탐험대(도적떼)가 들어가 벽화와 불상 등 유물을 가져갔습니다.
이중 펠리오가 막고굴 장경동에서 발견, 프랑스 기메박물관으로 가져간 돈황문서에서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이 발견됐으며 일본의 오타니(大谷)탐험대가 조선총독부 창고에 갖다놓은 수집품 때문에 우리나라는 중앙아시아 벽화의 세계 최대 컬렉터 중 하나가 됐지요.
중국 북위시대 윈강(雲崗) 석굴 만해도 불상이 중국화되기 전 간다라 양식을 보여줍니다. 선비족인 탁발씨(拓跋氏) 등 중국에 들어와 남북조시대를 연 북방 이민족들은 유교에 필적할만한 이데올로기로 불교를 적극 받아들였어요.
북위가 안정되면서 갸름한 얼굴에 미소를 짓고 있으며 추운 북방민족 출신답게 두툼한 옷을 입은 불상을 만들어냅니다. 또 똑같은 시대지만 남조 양나라에선 훨씬 더 부드럽고 유연한 모습의 불상을 조성하는데 각각 고구려와 백제 불상에 영향을 주게 됩니다.
우리 판소리에 “찡그리면 다 서시인줄 아느냐”란 대목이 있어요. 북위시대 불상의 아련하게 잔잔한 미소는 중국의 미인인 서시(西施)가 어금니가 아파 찡그렸는데 웃음이 나와 아픔을 무릅쓰고 웃을 때의 모습을 연상시켜줍니다. 이런 불상이 북주와 북제를 지나 당나라에 오면 육감적인 불상으로 바뀌게 되요. 당나라 불상의 극치를 보여주는 게 통일신라가 석굴암을 만들 당시 조성된 높이 약 40m짜리 ‘봉선사 비로자나불상’입니다.
살찐 사람 목처럼 목에 3도, 즉 세 줄이 가 있는데, 불상 중에서 가장 이상적인 인간상에 다가간 것으로 이 불상을 꼽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당나라를 끝으로 신유학의 시대로 다시 넘어가는 송나라 이후로는 고전을 파괴하는 파격적인 불상들이 출현하게 됩니다. 현재 우리나라 고구려 불상은 20여 개 밖에 남아있지 않아요. 그나마 석불은 남기지 않았고 옮겨다닐 수 있는 조그만 금동불이어서 양식을 가지고 설명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중 경남 의령에서 발견된 ‘연가(延嘉)7년명 금동여래입상’은 뒤쪽에 539년 고구려 동사(東寺)라는 절에서 천불을 만들어 유포했는데, 그 중 제29번째 불상이라는 기록이 전하고 있어 확실한 고구려 불상임을 알 수 있지요. 옷자락이 무릎에서 X자로 교차하고 있는 평남 ‘원오리 출토 소조보살입상’은 고구려 기왓장에서 보이는 것처럼 연꽃대좌를 포함한 전체적인 선이 강하고 날카로운게 특징입니다.
반면, 충남 부여 ‘규암면 신리 출토 금동보살입상’은 연꽃대좌의 양식을 보면 600년 무렵 백제에서 만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이렇게 당시 유행했던 양식을 통해 시대를 감별해내는 것이 미술사가 갖고 있는 큰 힘 중 하나입니다. 가장 백제다운 모습을 보여줘 ‘미스 백제’로 불리는 부여 ‘군수리 출토 금동보살입상’이나 같은 곳에서 나온 고개가 6시 5분 방향인 ‘납석제여래좌상’은 절대자가 갖고 있는 친절성을 보여줍니다.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지만 삼국시대 불상 중 미소를 띠고 있는 불상들의 경우 입상이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대부분 좌상이면서 아주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는 통일신라 불상과는 달리, 우리와 동일한 지평 속에서 우리를 극락세계로 맞이하고 구제하러 온 절대자가 갖고 있는 친절성을 극대화시킨 게 삼국 시대 불상의 공통적인 특징이라고 봐요.
‘서산 마애삼존불입상’처럼 은행알 같은 큰 눈을 하고 활짝 웃는 불상은 세상에서 보기 힘듭니다. 서산 마애불이나 석굴암 본존불, 창녕 관룡사에 있는 불상 등은 모두 동동남 15도 방향, 즉 동짓날 해 뜨는 방향을 바라보고 있어요.
그런데, 동지는 일 년의 끝이 아니라 시작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서울 경복궁 국립중앙박물관이 지난 10월 문을 닫기 전 국보 78호와 83호 ‘금동반가사유상’을 함께 전시해 근래에 드문 히트를 쳤지요. 지금도 국적을 갖고 논란이 있지만, 거의 등신대에 가깝고 조선 사람의 이상적인 모습을 모델로 해 절대자가 갖고 있는 친절성을 극대화한 이들 반가사유상이 있기 때문에 삼국 시대 불상의 위대함을 얘기할 수 있게 됐습니다.
이들 반가사유상과 거의 흡사한 일본 코류지(廣隆寺)의 ‘목조 미륵반가사유상’을 본 독일 철학자 칼 야스퍼스는 “모든 실존적 고뇌로부터 완벽하게 해방된 절대자의 모습을 읽을 수 있다”고 극찬했지요.
바로 이 점이 뒤늦게 불교를 받아들인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룰 수 있었던 기반인지도 모르는데, 절대자의 모습을 이웃집 아저씨와 아줌마 같은 평범한 상에서 찾은 것이 특징이에요. 원효의 대중불교가 갖고 있는 성격과도 일맥상통합니다. 신라의 불상, 특히 경주 남산자락에 있는 100여 군데의 불상 중 삼국통일 전에 조성된 것은 ‘배리 석조삼존불입상’과 ‘남산 부처골 감실 마애불’, ‘삼화령 석조미륵삼존불상’ 등 3개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들 석불상은 여타의 다른 신라 불상과는 모습이 달라 백제 석공을 불러 만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신라불교는 점점 세속화되면서 삼국통일의 밑바탕이 됩니다.
삼국통일 뒤 가장 먼저 만들었다고 생각되는 경북 군위 팔공산의 자연 석굴을 이용해 조성된 ‘군위 삼존석불’을 보면 아련한 미소를 짓던 삼국 시대 불상의 미소는 사라지고 뻣뻣하다 못해 목에 깁스를 한 채 높은 좌대 위에 앉아 군림하는 모습이에요. 삼국 시대에서 통일신라 시대 불상으로 나아가는 전환을 보여주는데, 불상의 미소는 점점 없어지다가 경주 남산 보리사 불상을 마지막으로 이후 이땅에서 만들어진 불상에선 미소가 완전히 사라지게 됩니다.
720년 김지성이 부모를 위해 만든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 및 ‘석조아미타불입상’은 전남 장흥 보림사와 강원도 철원 도피안사의 철불과 함께 제작 연대를 알 수 있는 몇안되는 불상 중 하나입니다. ‘군위 삼존불’에서 보이는 뻣뻣한 목의 불상이 100년 동안 세련돼 그 정점에 나타난 것이 경덕왕(재위 742~765) 때 만들어진 석굴암 본존불입니다.
옷자락이 몸에 밀착돼 있는 것을 표현할 정도로 돌을 다루는 솜씨가 세련됐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지요. 목에 3도가 있는 것이나 젖꼭지 표현, 엉덩이 등을 보면 당나라 때 불상과 마찬가지로 육감적입니다. 아잔타 석굴을 원용해 만들었다고 볼 때 전실은 없었고 빛을 받아들이는 광창이 있었다는 게 석굴암에 대한 제 생각입니다. 11면 관세음보살상과 제석천 · 범천 등의 조각에서 보이는 인체비례나 도들새김을 표현한 두께에 따라 이상향과 현실감을 표현해낸 점이나 석굴사원 조성과정에서 1000분의 1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은 완벽한 기술 등을 볼 때 한반도에서 모든 것이 사라져도 석굴암 하나가 남아 있다면 이 땅에 살았던 민족은 위대한 민족이었다고 사람들이 기억해줄 것입니다.
석굴암을 비롯, 불국사와 석가탑, 다보탑, 성덕대왕신종(에밀레종), 안압지 모두 신라문화의 전성기로 고전이 완성되는 8세기 3·4분기인 경덕왕 때 만들어진 게 특징입니다. 경주 남산의 불상조성도 경덕왕 때 들어와 본격화됩니다. 혜공왕 이후 신라하대에 조성되는 불상들에선 긴장감이 빠지면서 감정의 과소비 현상이 나타나며 하향곡선을 걷게 됩니다.
반면, 지방에서 일어난 호족들이 구산선문을 중심으로 자신들의 자화상이라 할 수 있는 철불을 조성하기 시작하며 이런 사람들에 의해 세상이 바뀌게 됩니다. 보림사와 도피안사, 광주 춘궁리 철불이 대표적인 예지요. 이렇게 봤을 때 불상은 어느 한 종교의 신상이 아니라 우리 역사의 산물이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절대자의 모습도 시대에 따라 친절성을 극대화시킨 모습으로, 혹은 석굴암처럼 이상적인 인간상과 신의 인격화가 절묘하게 조화돼 근엄의 극치를 보여주는 모습으로, 다시 능력있는 자만이 절대자가 갖고 있는 현실파괴 능력과 변형능력을 기원하는 모습 등으로 바뀌게 되는 것을 확인하게 되지요.
7. 삼국, 통일신라 석탑의 등장과 발전 과정
절에 가면 보이는 것이 거의 다 석탑이기 때문에 석탑이 불교를 믿는 나라의 공통적인 형식이라고 알기 쉬운데, 사실 석탑은 우리 고유의 양식입니다. 인도에서 동점(東漸)한 불교가 중국과 한국, 일본을 거치면서 어느 시점부터 자기화하는 과정에서 불교 건축의 핵심을 이뤘던 탑도 각 나라의 사정에 따라 ‘중국은 전탑(塼塔)의 나라, 한국은 석탑의 나라, 일본은 목탑의 나라’식으로 다른 길을 걷게 되지요.
조선의 연행사신들이 랴오둥(遼東)반도를 한참 걸어가다 보면 나타나는 것이 랴오닝(遼寧)성 베이닝(北寧) 시에 있는 중국 요나라 시대 폐사지의 쌍탑이었습니다. 흙을 구워 만든 벽돌로 조성한 중국의 가장 전형적인 전탑이지요. 경주 황룡사 9층 목탑도 이 쌍탑과 같은 그런 모습이었을 거예요. 자동차를 타지 않고 걸어가다가 들판 위에 랜드마크처럼 우뚝 솟아 있는 탑을 만났을 때 어떤 느낌을 받을까요.
외국인으로 근대 일본 미술사를 처음 쓴 미국의 미술사가 어네스트 페널로사는 일본 나라(奈良) 교외의 야쿠시지(藥師寺)를 지나다가 목탑을 보고 “들판에 서서 호수에 비친 모습이 얼어붙은 소나타와 같았다”고 말했습니다. 쇼팽의 소나타가 얼어붙어 나와 있는 모습이었다는 얘기지요.
랴오양(遼陽)을 지나 선양(瀋陽)에 들어가기 전에 우뚝 솟은 요동백탑(遼東百塔)은 벽돌로 쌓은 중간중간 탑신부가 정교한 조각이 들어간 대리석으로 장식돼 있습니다. 조각할 때 정으로 쪼아야 하는 우리 화강암과 달리, 유럽과 중국의 대리석은 연질이기 때문에 조각도로 얼마든지 새길 수 있는 게 특징이에요. 따라서 우리 석탑이나 석조문화재들은 1000년의 세월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강인함을 보여주지만, 대신 세부적인 것을 장식하는 측면에선 유럽처럼 발전하기 힘들었습니다. 물론 디테일을 생략한 가운데 형체가 갖고 있는 힘을 묘사한 것은 우리가 훨씬 강했지요. 서양의 로코코미술이 보여주는 화려한 장식성에 비해 고전 미술이나 르네상스 미술의 차분함이 더 위대하듯, 저는 우리 석조문화재처럼 조금 덜 조각한 것이 더 멋있다고 생각합니다.
국내에는 삼국 시대 사찰이 하나도 남아 있는 게 없지만 일본에는 호류지(法隆寺)가 있어요. 그곳의 5층(중) 목탑은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물이지요. 남북 일직선상으로 남문과 중문, 탑, 금당, 강당, 승방이 배치된 삼국 시대 일반적인 가람배치와 달리 호류지의 경우 금당과 탑이 좌우로 늘어서 있는데, 이는 입지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봐요. 우리도 남북 일직선상이란 가람 배치가 당시 모든 사찰에 적용되진 않았으니까요. 그래서 호류지에 가면 우리의 잃어버린 부여나 경주의 옛 사찰 모습을 찾을 수 있지요. 국립경주박물관을 가면 남문, 중문, 탑, 3개의 금당, 강당, 승방으로 이어지고 회랑이 둘러져 있는 옛 황룡사의 모습을 50분의 1 축적으로 상상 복원한 모형을 볼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그려진 황룡사 9층 목탑의 상상 복원도를 보면 모두 경주 남산 탑곡의 바위에 새겨져 있는 9층탑과 일본 호류지(法隆寺) 5층 목탑의 구조를 기초로 하고 있지요. 어쨌든 이렇게 만들어진 목탑의 전통은 석탑으로 바뀌면서 사라졌지만 조선 시대 만들어진 5층 목탑인 보은 법주사 팔상전과 3층 목탑인 화순 쌍봉사 대웅전을 통해 명맥은 유지됐었죠.
특히 체감률이 급격한 법주사 팔상전에 비해, 쌍봉사 대웅전은 삼국시대 목탑형식을 가장 잘 보존했던 집인데 1984년 4월 초파일 화재로 잿더미가 됐다가 86년 복원됐어요. 한편 중국에서 받아들인 전탑은 경북 칠곡 송림사 5층 전탑을 비롯, 안동 신세동 7층 전탑과 동부동 5층 전탑, 조탑동 5층 전탑 등 안동지역에 가야만 볼 수 있는 것도 특징입니다. 석탑의 등장은 현재 국립문화재연구소가 해체 중인 익산 미륵사지 서석탑에서 시작합니다.
흔히 미륵사지를 3탑 3금당 양식이라고 하는데, 황룡사처럼 목탑을 가운데 두고 남북 일직선상으로 가람을 배치했다가 나중에 양쪽에 별원을 만들면서 목탑형식의 석탑을 세운 것이 석탑의 시원이 된 것이지요.
세키노 다다시(關野貞) 등 일본 관학자들이 1915년 6층까지 남아 있던 미륵사지 서탑의 붕괴를 막기 위해 뒷부분을 시멘트로 보강했지만, 최근 다시 붕괴 위험성이 제기되면서 해체작업중입니다. 2층까지 제거된 상태에서 가운데 사각 형태의 심초석(주춧돌)이 깨져 있는 것이 확인돼 서둘러 해체하지 않았다면 위험할 수 있었던 상황임을 알 수 있지요.
익산 왕궁리 5층석탑의 연대를 놓고, 고려 초부터 시작해 통일신라, 백제말기 등 학자들마다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고 있지만 지금은 백제탑으로 보는 견해가 많아지고 있습니다. 저도 목탑을 흉내낸 미륵사지 서탑이 왕궁리 5층석탑 단계에 오면 석탑으로서 필요한 부재만 남기고 나머지들은 다 없어지며, 부여 정림사 5층석탑에서 석탑의 형식으로 완성된다고 생각해요. 익산 왕궁리는 백제 무왕이 천도를 위해 왕궁을 만들었던 곳임이 최근 발굴조사 결과 드러나고 있습니다.
정림사지 5층 석탑은 실제 현장에서 보면 그렇게 늘씬한 탑일 수가 없는데 슬라이드로 보면 스케일이 작아져 오종종한 느낌을 줍니다. 우리 문화재 중 가장 사진발을 안받는 문화재가 바로 이 탑이지요. 백제의 탑은 여기서 막을 내리고 신라에서 처음 만들어진 석탑은 경주 분황사 모전 석탑입니다. 멀리서 보면 벽돌로 쌓은 전탑 같지만 실제는 돌을 하나하나 벽돌 모양으로 깎아서 만든 ‘전탑을 모방한 석탑’이란 의미에서 모전(模塼) 석탑이라고 부른 것이지요.
의성 탑리 5층 석탑과 빙산사지 5층 석탑도 모전 석탑이지만 이들 두 탑은 지붕의 옥개석(지붕돌)만 마치 전탑을 쌓았을 때처럼 계단식으로 만든 것으로 그냥 석탑이라고 보는 것이 더 맞습니다.
언뜻 보면 정림사 5층 석탑과 분황사 모전 석탑을 합친 모습이지요. 통일신라 시대에 들어오면 경주 사천왕사지에서 비롯된 쌍탑식 가람배치가 성행하게 됩니다. 특히 사천왕사지는 목탑이었던데 비해, 감은사에서 동·서 석탑이 만들어지면서 3층 석탑과 통일신라 시대 쌍탑 가람배치의 기준이 여기에서 생기게 됩니다. 감은사탑은 찰주가 남아 있어 다른 탑보다 훨씬 더 조형적인 매력을 주는 게 특징이지요. 2층의 기단과 3개의 탑신부를 갖고 있는 감은사탑은 탑이 갖고 있는 상승감과 건물의 안정감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며
이후 통일신라에서 만들어지는 탑의 기본이 됩니다. 통일신라 3층 석탑의 전형이 창조된 것이지요. 본래 탑은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시기 위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시점부터 석가모니의 사리는 한정돼 있는데, 절은 지어야겠고 사리가 없으니까 대용품으로 모신 것이 불상과 불경 등입니다. 절대자의 분신이 있는 공간에서 절집을 의미하는 상징탑으로 바뀌게 된 것이지요. 영어로 말하면 스투파에서 파고다로 전환을 한 것이에요. 이러면서 장중한 목탑에서 절이라는 상징성을 나타내고 제작기간은 비교적 짧은 대신 오래갈 수 있는 석탑으로 바뀌게 됩니다. 이게 목탑에서 석탑으로 옮아가는 가장 큰 이유지요. 이와 함께 탑과 금당의 가치전환도 일어나고 불상이 갖고 있는 비중이 커지게 됩니다.
2층의 기단과 3개의 탑신부를 가진 통일신라 시대 3층 석탑의 전형을 창조한 경주 감은사지 동서 석탑 국립경주박물관에 가면 지금은 덕동호에 수몰된, 원효대사가 주지 스님으로 있었던 경주 고선사지 3층 석탑이 있습니다. 볼륨감이 매우 강하고 넉넉한데 이것이 더욱 세련돼 나타난 것이 8세기 3·4분기인 경덕왕 대에 만들어진 불국사 석가탑입니다. 하나의 고전의 완성으로 이후의 모든 탑들은 석가탑의 변형일 뿐이에요.
그렇지만 답사를 다니거나 예술감상의 측면에서 볼 때 오히려 석가탑보다 감은사지 동·서 3층 석탑과 고선사지 3층 석탑이 우리에게 더 많은 감동을 줍니다. 이는 정점에 도달한 결과물보다 정상을 눈앞에 두고 계속 더 높은 것을 추구하려는 의지가 담겨있을 때 더 아름답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또 석가탑 옆에 다보탑이 있는데, 이처럼 3층 석탑의 전형 속에 다보탑과 구례 화엄사 사사자3층 석탑, 경주 정혜사지 13층 석탑, 중원 탑평리 7층 석탑과 같은 변형의 존재가 석가탑이 갖고 있는 전형의 힘을 더욱 빛내주고 악센트가 되지요. 경주 남산 용장골 3층 석탑 등 8~9세기 만들어진 3층 석탑만도 100개 이상 늘어놓을 수 있을 겁니다. 모든 고전 미술이 갖고 있는 고전적 규범으로 비례와 균형, 조화의 3가지를 들 수 있습니다. 이 3가지를 가졌을 때 고전인데 어느 나라 고전이든 이런 요소를 다 가지고 있고, 우리 불국사와 석굴암도 예외가 아닙니다.
일본인 건축가 요네다 미요지(米田美代治)가 쓴 ‘조선 상대건축의 연구’에 나오는 불국사 평면도를 보면 백운교와 청운교, 회랑, 석가탑과 다보탑 등이 부분과 전체를 이루는 비례의 미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축대를 쌓으면서 땅에 박힌 울퉁불퉁한 자연석에 맞춰 인공석의 밑부분을 파낸 것이나, 대웅전 올라가는 계단에 보이는 직선에서 살포시 소맷자락 같이 들려 있는 선을 살린 조각, 연꽃잎을 조각해 놓은 연화교 등 모든 명작들은 정말로 디테일이 아름답지요. 항공사진 외에는 어디에서 봐도 전체를 볼 수 없는 안압지도 마찬가지입니다.
통일신라 불상이 하대에 들어오면 철불로 바뀌는 것과 똑같은 현상이 탑에서도 나타납니다. 구산선문 중 가지산문의 개조로 알려진 도의선사가 주석했던 양양 진전사지의 3층석탑은 9세기 석탑의 전형을 보여줍니다. 크기도 8m에서 5m 정도로 줄어들어 아담하고 귀여운 모습으로 바뀌고 기단과 탑신부에 8부신중과 사방불이 새겨져 있어요.
이웃한 선림원지 3층석탑과 마찬가지로 전형에서 탈피하면서 장식성이 강해지는 것이 특징이지요. 일종의 매너리즘과 로코코 현상이 일어난 것입니다. 쌍탑인 남원 실상사 3층석탑과 장흥 보림사 3층석탑은 탑의 상륜부가 그대로 남아 있어 석가탑 복원 때 참고가 됐으며 보령 성주사지 석탑 3개는 다른 곳에서 옮아온 것으로 추정됩니다.
“부처님은 자기 자신의 마음 속에 있다”거나 “깨우친 자는 부처가 된다”고 주장한 도의선사의 가르침은 지방호족이라도 능력있는 자는 왕이 될 수 있다는 이데올로기를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깨우친 고승들의 경우 죽었을 때 부처님에 준하는 예우를 갖추게 했지요. 이렇게 해서 등장한 것이 사리탑인 부도와 부도비로, 진전사지와 여주 고달사지, 곡성 태안사, 남원 실상사, 쌍봉사 등 곳곳에서 도의선사와 적인선사(혜철), 증각대사(홍척), 철감선사 등의 부도와 부도비가 조성됩니다.
이중 화강암을 떡 주무르듯이 주물러 비천상을 새긴 철감선사 부도가 단일 조각품으로는 가장 화려합니다. 돌거북이에 비를 세우고 용(이무기)머리 지붕돌을 붙인 부도비도 철감선사의 것이 오른쪽 앞발을 살짝 들고 있어 가장 생동감을 주지요.
8. 고려 시대 불상과 석탑
지금 여기서 말하는 고려 시대 불상은 고려 시대 때 제작된 불상을 말하며 미술사에서도 그렇게 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고려사람의 입장에서 봤을 때는 고려 시대 제작된 불상은 물론 그 이전 시대에 만들어진 불상까지 다 사용했던 것이지요. 이것은 굉장히 어려우면서도 중요한 문제입니다.
“왜 고려 시대에는 석굴암 같은 것이 없었을까”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당시에는 통일신라 시대에 조성된 석굴암이 석굴암으로 기능을 하고 있었어요. 익산 미륵사도 그렇습니다. 따라서 단순히 고려 시대에 만들어진 문화유산의 양만 가지고 “고려 시대 불교 문화는 이랬다”고 정의내리는 것은 모순되는 측면이 있어요. 고려 시대 때 불상들이 주로 지방에서 파격적이고 서민적인 것이 많이 만들어지는 이유 중의 하나는 이전 시대에 만들어진 궁중적이고 왕권적이며 중앙집권적인 유물들이 그대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에요.
따라서 이것들에 더해서 다른 것의 의미로, 또 문화를 누리는 혜택이 지방까지 더 퍼져나갔다는 데서 의미를 찾을 수 있지요. 이런 의미를 빼버리면 우리가 교과서에서 흔히 본 “고려 시대 사람들은 조각기술이 떨어져 ‘은진미륵’으로 불리는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 같은 황당한 것을 만들었다”는 얘기가 가능해져요.
기존 미술사 관련 책들을 보면 거의 모두 석굴암과 논산에 있는 은진미륵을 비교하면서 “고려 시대 조각 수준은 통일신라에 비해 떨어졌다”고 써 있는데, 이는 비교의 대상이 잘못된 것입니다.
한 시대는 그 시대가 주도하고 있었던 문화의 흐름이 있어 불상을 갖고 말하면 21세기 사람들은 통일신라 사람들을 따라갈 수가 없어요. 지금 시대는 불상 대신 자동차와 컴퓨터 등을 만들어 쓰고 있는데, 이를 단순 비교해 조각기술이 떨어진다고 말하는 것은 우리 문화유산을 크게 잘못 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려 불상은 경기도 광주 춘궁리에서 나온 철조석가여래좌상부터 얘기를 시작하지 않을 수 없어요. 통일신라 하대 호족들의 자화상과 같은 구산선문 시대 만들어졌던 불상이 고려 초에 들어와 이처럼 젊고 씩씩하며 당당하고 능력 있는 절대자의 모습으로 조형됐고, 그런 절대자 중의 한 사람인 왕건에 의해 고려가 통일을 이룹니다.
호족 연합으로 정권을 잡은 태조 왕건도 통일 뒤에는 중앙집권화 정책을 쓸 수밖에 없었으며 과거제도 도입 등 광종의 개혁을 거쳐 11세기를 넘어서게 되면 중앙집권의 귀족문화를 만들어내게 되지요.
고려 초기 문화는 그래도 호족 연합세력적인 성격 때문에 지방성이 강하게 나타나며 귀족문화가 꽃피는 인종(재위 1123~46년)과 의종(재위 1146~70년) 연간인 12세기 3·4분기까지 문화 담당 계층은 중앙 귀족이었어요.
경기 광주 춘궁리에서 나온 철조석가여래좌상. 학계 일각에서 절대권력자였던 태조 왕건의 모습을 조형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다 무신난이 일어나 귀족문화의 중심세력이 무신귀족으로 넘어가면서 문신들이 갖고 있었던 자기 절제성, 인문적 · 도덕적인 것을 지키고자 했을 때 나타나는 검소하고 질박한 풍이 사라지고 상감청자의 등장 등에서 보듯 공예가 굉장히 화려해지는 특징이 나타납니다. 원나라의 간섭을 받을 때는 다시 문화의 주도층이 요즘 말로 하면 ‘매판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 원나라를 등에 업은 권문세족들로 또 한 차례 바뀌며 고려말에는 정도전 등 신흥사대부 계층이 새로운 세력으로 등장하지요.
이처럼 470여 년 지속된 고려왕조도 지배층이 100년, 150년 단위로 끊임없는 변화가 있었고 이에 따라 문화의 성격도 조금씩 바뀌어 나갔습니다. 어쨌든 고려 초기는 왕권 중심적이고 규범적이며, 아카데믹한 것 등으로부터 철저하게 벗어난 불상들이 조형됩니다.
예를 들어 충남 보령 성주사지(터)에서 나온 테라코타(소조) 불두(佛頭)들은 통일신라의 불상처럼 이상적인 것이 아니라 현세적인 고려초기의 전통을 반영하고 있지요. 서산 보원사지에서 발견된 철불은 석굴암 본존불과 분위기가 상당히 비슷해 8세기 작품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는 등 논란이 많은 불상이에요.
그러나 귓불이 바깥으로 휘다가 어깨까지 닿은 것이나 코를 대패로 밀듯이 반듯하게 만든 것 등은 고려 시대인 10세기에 나타나는 양식입니다. 입의 길이가 눈의 1.5배 되는 그리스의 인체 비례와는 정반대로 눈의 길이가 입의 1.5배 되는 것도 10세기 고려 시대 양식입니다.
시대를 측정하기 힘든 이 불상에 대해 삼불(三佛) 김원용 선생은 “10세기에 만든 8세기 풍의 복고적 작품”이라고 해석했지요. 고려 시대 철불들의 경우 팔이 빠져나가고 없는 게 특징입니다.
남원 실상사의 철조약사여래불상도 그렇고 중국이나 일본의 경우도 마찬가지인데, 이는 대개 속을 텅 비게 주조를 한 뒤 별도로 나무를 조각해 끼워 넣은 손목 아래 부분이 시간이 지나면서 대부분 빠져 없어졌기 때문이에요. 경남 창녕 관룡사 용선대 석조석가여래좌상이나 팔공산 갓바위에 있는 경북 경산시 관봉석조여래좌상 등 산 위에 있는 불상들은 대개 10세기에 만들어지는데, 서산 마애삼존불 · 석굴암과 마찬가지로, 이런 부처님들이 전부 바라보는 곳은 동짓날 해 뜨는 쪽인 동동남 15도 방향입니다.
해방 이후 가 본 사람이 없어 우리 미술사 책에는 소개가 안 돼 있지만 금강산 내금강에 가면 묘길상이라 부르는 고려 시대 마애불 중 가장 걸작인 높이 15m짜리 아미타여래좌상이 있어요. 원래 묘길상암이라고 하는 보살상을 모셔놓은 암자가 있다가 없어진 뒤 사람들이 보살과 부처를 구별하지 못하니까 그냥 묘길상이라고 부른 것으로 정확하게 얘기하면 묘길상터 석조마애여래좌상이라 불러야 됩니다. 당당한 호족들의 이미지를 가지고 인자함을 표현하려 했던 기풍과 서산 보원사의 복고적인 기풍이 함께 이어져 온 것이 10세기 무렵 불상의 특징입니다.
태조 왕건이 후백제와 격전을 치른 뒤 세운 논산 개태사지 석불입상(삼존불)은 현재 손하고 얼굴의 이미지가 맞지 않아요. 원래 얼굴도 손도 굉장히 험악한 이미지였는데, 절에서 성형수술하듯 얼굴을 세척하고 글라인더로 밀어 전혀 다른 이미지가 됐습니다. 경북 영주시 부석사 무량수전의 소조여래좌상도 부처님 얼굴이 심술궂은 모습으로 삼국시대 반가사유상이 보여주던 실존적 고뇌로부터 해탈된 모습이나 친절성 같은 것을 전혀 찾을 수 없어요.
충남 부여 대조사와 관촉사의 석조미륵보살입상에서 보이듯 불상의 모습에선 지방성도 강하게 나타나지요. 둘 모두 거의 같은 형식으로 장승을 만들 때처럼 인체비례를 무시한 게 특징이지요. 또 이마가 지나치게 길어 기이하게 보이는 은진미륵의 경우, 실제 구리장식이 떨어져 나간 모자 부분을 제외하면 3.8 등신, 4 등신의 어린아이 모습입니다.
칠갑산 장곡사의 석조대좌 위에 나무광배를 한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은 우리나라 불상 중 가장 불량끼가 많은 부처님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옛날 경복궁 회랑에 있다가 지금은 박물관 전시실로 들어간 철불 등 고려 시대 불상의 매력은 서민의 모습을 보여주는 평범성에서 찾을 수 있어요.
10~11세기가 되면 이런 종류의 불상들이 전국 곳곳에서 만들어집니다. 강릉 한송사 석조보살좌상과 평창 월정사 8각 9층 석탑 앞에 있는 석조보살좌상같이 원통형 보관을 쓴 불상은 라마교의 영향을 받은 강원도 지역에서 나타나는 특징이지요. 대포집 경력이 30년쯤 된 질퍽한 인상을 주는 ‘성주풀이’의 고향인 안동 제비원의 마애보살상 등 고려 불상들은 나름대로 매력이 많습니다.
북한에서 불교 문화센터로 만든 금강산 보현사를 가면 화려하기 그지없는 모습부터 가랑이를 쫙 벌리고 앉아 있는 파격적인 것 등 금강산 일대에서 출토된 고려말 불상들의 다양함을 확인할 수 있어요. 납작한 얼굴을 입체화시킨 현대조각의 기법이 보이는 수안보 미륵리 석불입상에선 백제 불상이 갖고 있는 순정 같은 것이 느껴져요.
화순 운주사 천불천탑동에 있는 불상은 고려 시대 민중불교가 지향했던 마지막 모습을 보여줍니다. 운주사 와불이 유명한데 와불은 원래 소승불교에서 부처님 열반상을 가리키는 것이기 때문에 불기립불(不起立佛)이나 미기립불(未起立佛)로 부르는 것이 맞아요. “천불천탑을 만들면 서울이 이곳으로 옮겨온다”는 일종의 반역 내지 혁명사상 때문에 조성된만큼 불상도 개체가 아니라 하나의 덩어리로서 총 양, 총합적인 이미지가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하나하나가 개별적인 얼굴을 가진 것이 아닌 스테레오타입의 전형적인 모습이지요.
탑의 경우 불국사 석가탑에서 변형된 것으로, 9세기의 전형이 된 실상사의 쌍탑에 이어 고려 시대로 접어들게 되면 역시 지방적인 특색이 강하게 나타납니다. 특히 서산 보원사지 5층 석탑이나 부여 장하리 3층 석탑 등 옛 백제지역에서 만들어지는 석탑의 경우 부여 정림사지 5층 석탑을 모델로 한 게 많은 것이 특징이에요.
서천 비인의 5층 석탑이나 정읍 은선리 3층 석탑 모두 정림사지 5층 석탑을 기본으로 하면서 변형시킨 것입니다. 월정사의 8각 9층 석탑이나 묘향산 보현사의 8각 13층 석탑처럼 고구려 영향권에 있었던 지역들은 고구려 사찰 8각 탑의 전통을 이어받아요.
운주사에는 도넛 모양이나 그냥 삐죽하게 돌을 쌓아 만든 탑들이 수십 개 늘어서 있습니다. 금강산에서 고려 불상들이 마지막으로 화려하게 꽃을 피우듯 탑은 내년 10월 개관예정인 서울 용산 새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될 경천사지 10층 석탑이 조형미의 절정을 보여줍니다.
부도로는 서울 경복궁 옛 국립중앙박물관 야외에 전시된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 현묘탑과 비가 단일 석조물로는 가장 화려합니다. 커튼을 늘어뜨린 것 같은 모습까지 조각해 놓았는데, 한국전쟁 때 폭격을 맞아 1만2000조각 난 것을 이어붙인 것이지요. 원주 법천사지의 부도비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조각을 갖고 있는 비중의 하나이지요. 부도는 고려말 석종형으로 다시 조선 시대에 들어가면 종형으로 모습이 바뀌게 됩니다.
9. 산사의 미학
우리가 산사의 전통을 갖게 된 것은 9세기 이후의 일입니다.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된 황룡사 모형도에서 볼 수 있듯 초기 시내(왕도)에 조성된 절은 높은 탑을 중심으로 건물이 만들어지고 주변에 회랑을 두른 구조였지요.
의상대사가 화엄사나 부석사 등 국경선 가까운 곳에 국방의 목적으로 대찰인 화엄십찰을 짓는 것에서부터 기원한 산사(山寺)는 하대 신라인 9세기에 구산선문이 열리면서 본격적으로 전개됩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산사의 개념에 맞는 절은 장흥 보림사와 해주 심원사 같은 곳입니다. 이처럼 산속에 그윽하게 들어가 있는 절들은 당시 호족들의 발원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여러분은 ‘산이 있는 곳에 절이 있으면 산사로, 이는 일본과 중국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중국과 일본에선 산사의 의미가 우리와 완전히 달라요.
중국과 일본의 산사가 삼각형의 높은 산 꼭대기에 있는 것과 달리, 우리는 순천 선암사처럼 ‘높은 산’이 아닌 첩첩이 겹쳐져 있는 계곡을 따라 들어가는 ‘깊은 산’에 아늑하게 자리를 틀고 앉아 있습니다. 우리의 산사는 언제부터인가 일주문을 지나 사천왕이 지키고 있는 천왕문을 들어가면 중앙에 정원을 놓고 ‘ㅁ’자 형태로 건물을 배치하는 ‘산지중정형(山地中庭形)’ 가람 구조를 특징으로 하고 있지요.
그런 다음 절의 사세에 따라 주변 환경에 맞게 전각들을 증축해 나갔습니다. 야외법당으로 사용되는 만세루란 2층 누각을 아래로 통과해 계단을 올라서면 탑이 서 있는 정원과 대웅전이 나타나고 좌우에 선방인 적묵당과 부엌인 심검당이 배치돼 있는 게 산지중정형이며 절에 따라 이름을 달리하지만 기본적으로 대웅전, 적묵당, 만세루, 심검당으로 구성돼 있는 것이 산사의 기본구조예요.
그다음에 목적에 따라 나한과 지장 · 관음보살을 모시는 응진전과 명부전, 관음전, 산신각 등이 조성됐습니다. 이처럼 사찰은 처음부터 마스터플랜에 의해 지어진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 사정에 따라 증축됐지만 창녕 관룡사의 예에서 보듯 증축된 건물들이 주변 환경과 잘 맞아떨어져 현대 건축가들의 찬사를 받는 곳도 상당히 많습니다.
그러나 이런 훌륭한 전통도 20세기 후반, 정확히 1980년대 들어 굴착기(포클레인)를 동원해 군대 연병장처럼 큰 마당을 만드는 풍조가 산사에 밀려오면서 우리 옛 사찰이 갖고 있었던 고즈넉한 맛은 다 사라져버렸어요. 주변의 동백나무 느티나무와 조화를 이룬 단아한 맞배지붕 집이었던 강진 무위사 극락전은 양 옆을 다 트고 앞마당을 넓히면서 집만 덩그러니 서 있는 느낌을 주며 예산 수덕사는 소림사 무대를 방불케 합니다.
그래도 학이 날갯짓하고 내려앉을 때 그 날개의 모습을 보여주는 수덕사 대웅전 측면 지붕의 기울기는 일품입니다. 부안 내소사 주차장에서 보면 일주문만 눈에 들어오고 그 안은 보이지 않습니다. 어느 절이나 그렇지요. 우리나라 절들은 속이 깊기 때문에 내소사의 경우 중간중간 단풍나무가 포진한 전나무 숲길로 1㎞를 들어가고 벚꽃나무 길을 지나서야 천왕문으로 이어집니다. 산사로 진입할 때 우리가 느끼는 감동과 편안함은 바로 매표소에서 표를 사서 일주문을 지나 길을 꺾어 들어갈 때부터 시작되는 것으로 사실 거기서부터가 하나의 건축입니다. 이처럼 건축적인 컨셉트를 가지고 조형된 길을 무시해버리고 자동차로 홱 들어가버리고 나면 출입하면서 속세와 성역이 갖고 있는 시간적 · 공간적 거리감을 느끼게 조형된 우리 사찰건축의 묘미를 이해할 수 없지요. 또 이렇게 해서 들어와도 대웅전을 바로 보여주는 일은 없습니다.
내소사의 경우 돌계단을 지나 봉래루(만세루) 밑 계단을 통해 올라서야지 준봉(峻峯)인 능가산의 기세에 지지 않게 높이 쌓은 축대 위에 팔작지붕의 날개를 활짝 뻗어 올린 대웅보전이 보이지요. 이와 같은 산세 속에 무위사 극락보전 같이 단아한 집을 지어놓았으면 집이 산세에 눌려서 아마 기운을 쓰지 못했을 거예요.
최치원이 쓴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 적조탑비문’에도 지증대사 생전의 6가지 잘한 일 중 하나로 “기와집을 짓고 사방으로 추녀를 드리워 (희양산의) 지세(地勢)를 눌렀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내소사 대웅보전은 집이 화려한 만큼 공포장치나 창살문양도 예사롭지 않아요. 우리나라 사찰은 대개 4가지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는데, 그중 첫째로 구례 화엄사 각황전처럼 궁궐에 준하는 위엄을 갖춘 사찰이 있습니다.
부처님을 궁궐과 같은 건물에서 왕과 같은 위상으로 모신 것입니다. 반면에 무위사는 아주 고즈넉한 산사로 선방과 함께 깊은 산속에 들어가 있는 형상이며 부석사는 일망무제(一望無際)로 파노라마처럼 전개되는 경관을 전제로 호방한 기상을 보여주는 절이지요. 마지막으로 선암사는 옹기종기 건물들이 모여 앉아 있는 것이 마치 경주 양동 민속마을이나 안동 하회마을 같은 분위기예요.
돌계단과 시누대 숲을 지나는 서산 개심사의 옛 길에서 만나게 되는 것이 경지(鏡池)예요. 영지(影池)와 함께 ‘거울 못’이란 뜻으로 상왕산의 그림자가 비치기 때문에 얻은 이름인데 청평사와 불국사 등 절에는 이런 이름의 연못이 많습니다. 통나무 외나무 다리를 건너 올라가면 큰 배롱나무와 함께 해강 김규진이 쓴 ‘상왕산개심사(象王山開心寺)’란 만세루의 현판이 나타나고 안쪽에 대웅보전과 심검당, 적묵당이 만세루와 함께 정사각형을 이루는 구조로 돼 있지요.
불국사와는 달리 앞마당에 꽃밭이 있는데, 아무 곳에나 꽃밭을 만들어 놓는 것이 아닙니다. 절대자가 갖고 있는 친절성을 극대화할 것이냐, 아니면 절대자가 갖고 있는 존엄의 가치를 극대화할 것인가 하는, 절이 지향하고 있는 가치에 따라 정원에 대한 계획 자체가 달라져버리는 거지요.
금강산 법기봉 낭떠러지 중턱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는 내금강 보덕굴은 화려한 자연에 화려하게 대응한 산사의 미학을 보여준다.
화려한 자연에 화려하게 대응했던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고구려 때 창건된 내금강 보덕굴입니다. 7.2m높이의 구리기둥 위에 건물을 세우고 쇠줄을 둘러 허리부분을 붙잡아 맨 보덕굴은 세 사람만 들어가도 흔들리지요. 멀리서 보면 3층 집처럼 보이지만 위에 있는 집들은 멀리서 볼 때 외롭게 보이지 않게 하거나 빗물이 내릴 때 물받이 역할을 하는 장치일 뿐입니다. 그렇지만 이 집은 눈썹지붕, 팔작지붕, 맞배지붕, 우진각지붕 등 어떤 식으로 지어도 4가지 이상 나올 수 없는 한옥의 지붕유형이 모두 다 들어있는게 특징입니다. 은행잎이 깔린 박석길을 따라 들어가는 영주 부석사의 진입로는 산사가 가진 고즈넉한 멋을 대표합니다. 천왕문을 오르는 돌계단을 시작으로 9개의 석축 맨 마지막에 무량수전이 들어 앉아 있는 부석사의 건물배치는 9품 만다라의 전개를 구현한 것이지요.
미술사학자 최순우 선생의 저서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를 통해 널리 알려진 부석사 무량수전은 학이 날갯짓하고 올라가는 형태를 보여주는 팔작지붕의 기울기와 군더더기 하나 없는 주심포 집의 간결미가 지켜주고 있는 엄숙성 등 건축적인 특징 외에도 무엇보다 그것이 위치한 자리가 주는 의미가 중요합니다.
교토(京都)의 기요미즈데라(淸水寺)가 절 그 자체보다도 절에서 내려다보는 교토의 경관 때문에 유명한 것처럼 말이죠. 소백산맥이 펼쳐진 대자연을 정원으로 삼은 부석사 하나로 우리 산사가 갖고 있는 시원한 눈맛에 대한 설명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고려 시대 건축의 백미인 무량수전(오른쪽)과 소백산맥의 능선이 한눈에 들어오는 안양루(왼쪽) 등으로 이뤄진 경북 영주 부석사는 대자연을 정원으로 삼아 관람객들에 시원한 눈맛을 느끼게 해주는 명소다.
사람들의 사용을 금지한 이후 오히려 보수공사를 되풀이하고 있는 승선교를 지나 순천 선암사 입구에 들어가면 삼인당(三印塘)이란 연못이 있는데, 이곳에는 토목공학적, 종교적, 미학적인 여러 가지 조건이 다 들어가 있어요. 장마 때 물을 가둬두었다가 속도를 줄여서 밑으로 빼는 역할과 함께 종교적으로 마음을 비춰볼 수 있는 거울이란 의미를 가진 연못입니다. 연못 가운데 작은 섬은 장마때 물을 유도하는 회로 역할뿐 아니라 연못이 커보이게 하는 장치이기도 하지요.
일주문을 들어서면 바로 앞에 중국 육조시대부터 내려온 오래된 절, 달마시대부터 내려오는 절이란 뜻으로 ‘육조고사(六朝古寺)’라는 추사풍의 현판이 걸린 만세루가 있습니다. 선암사에는 현재 23채의 당우(건물)가 있지만 원래 50여 채가 있었어요.
물론 처음에는 대웅전과 만세루, 심검당, 적묵당 4채로 시작했다가 차차 명부전, 관음전, 응진전, 선방 등으로 한 채 한 채 절집을 지어 들어갔는데 그것이 아주 자연스럽게 배치돼 있어 유서 깊은 마을에 온 것 같은 그런 편안함을 느끼게 해줍니다. 겨울철 꽃이 피는 동백나무와 아열대성인 파초 등 사찰 경내에 80종의 나무가 있어 1년 365일 꽃이 지는 날이 없는 것도 자랑거리입니다.
‘대변소 뒷간’으로 쓰인 변소와 큰 석조로 교체하지 않고 당우가 늘어날 때마다 조그만 석조를 옆에 붙여 놓은 달마전의 4단 석조 등도 선암사의 미학을 대표합니다. 지난 95년 제1회 광주비엔날레 커미셔너로 있을 당시 방한한 미국의 미술평론가 캐서린 할브라이시(미니애폴리스 워크 아트센터 관장)와 함께 선암사에 간 일이 있어요.
자연과 어우러진 선암사를 본 그는 “피라미드는 네모뿔, 타지마할은 상자 위에 양파 하나 얹혀 있는 모양 등 세계의 모든 건축에는 고유 이미지란 것이 있는데, 선암사는 전후좌우로 건물이 계속 겹쳐서 나오면서 건축의 전모가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는다”며 “한국에선 이런 건축을 ‘깊은(deep)’ 건축이라고 하느냐”는 질문을 제게 해왔습니다.
‘깊은 산속에 깊은 절’, 아마 이것이 우리 산사의 미학이 갖고 있는 핵심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10. 고려 불화
일제 강점기 때 활약한 미술사가 우현 고유섭 선생의 유고를 모은 ‘한국미술사급(및) 미학논고’ 중 고려 시대 그림에 대해 쓴 글에서도 고려 불화로 소개된 것은 일본 도쿄 센소지(淺草寺)에 소장된 혜허(慧虛)스님이 그린 ‘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 한 점뿐이었어요. 나머지는 영주 부석사와 예산 수덕사의 벽화 등과 그 밖에 전해 들은 내용들에 관한 것입니다.
“고려 불화는 섬세하고 화려하다”거나 “섬려하기 그지없다”는 중국 원나라 곽약허(郭若虛)와 탕구(湯垢)의 평가에서 보듯 문헌 기록을 통해 국제적인 평가를 받은 고려 불화의 아름다움은 알려졌어도 우리가 실물로 본 것은 없었던 것이지요. 그러다 일본의 미술사가 구마가이 노부오(熊谷宣夫)가 1967년 ‘조선학보’ 제44집에 실은 ‘조선불화징’이란 글을 통해 고려 및 조선 초기 탱화 70여 점이 일본에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공개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1973년 동주 이용희 선생이 일본 속의 한국 그림을 찾는 탐방기를 ‘한국일보’에 연재했는데, 이번 강의의 제목 ‘아, 아름다워라 고려 불화여’는 제게 깊은 인상을 남겨준 당시 글의 제목이에요.
마침내 1978년 일본 나라(奈良)현의 야마토분카칸(大和文華館)에서 52점의 탱화와 17점의 사경변상도(寫經變相圖)가 출품된 ‘고려 불화 특별전’이 열려 고려 불화가 일반에게 처음으로 공개된 동시에 대대적인 각광을 받는 전기가 됐습니다. 1981년 일본 아사히(朝日)신문사에서 ‘고려 불화’라는 두꺼운 화집을 발간하고 같은 시기 중앙일보사에서도 ‘한국의 미’시리즈 중 하나로 ‘고려 불화’편을 냈지요. 그 후 일본 규슈대에서 고려 불화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정우택 동국대 교수가 1997년 펴낸 ‘고려 시대의 불화’가 현재 가장 많은 정보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고려 불화는 현재 일본을 중심으로 전 세계에 160점 정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정작 우리에겐 제대로 된 게 한 점도 없었어요. 그러나 1980년대 호암미술관이 두 점을 구입한 뒤 지난해 태평양박물관이 사들인 것을 포함해 현재 9점 정도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고려 불화는 일본 가가미진지(鏡神寺)에 있는 큰 탱화(높이 419.5㎝, 폭 254.2㎝)를 제외하면 대개 높이가 120~180㎝, 폭이 100~120㎝ 정도되는 작은 두루마리(권축 · 卷軸) 그림이에요.
따라서 고려 시대 사찰에서 어떤 특정 목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그려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데, 총 160여 점 중 화기(畵記)가 있어 연도와 제작자를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은 20점 정도지요. 고려 불화는 1286년 만들어진 니혼(日本) 은행 소장품 등 몇 점을 제외하면 거의 모두 14세기 전반(1300~1350년)에 만들어졌습니다.
문신 귀족과 무신 귀족이 각각 고려의 지배층이던 시기에 화려하게 꽃핀 청자와 상감청자처럼 고려 불화도 중국 원나라 간섭기 지배층이었던 권문세족의 독특한 문화 속에서 나온 것입니다. 권문세족들이 가문의 안녕을 바라며 당시 사찰에 지어놓은 개인 원당(願堂) 격인 암자에 걸어놓기 위한 특수한 형식으로 나온 게 고려 불화란 것이지요.
고려 불화가 일본에 많이 있는 것은 당시 일본인들의 주문으로 수출됐을 가능성과 함께 고려말 왜구와 임진왜란 때 많이 유출됐기 때문이며, 정작 일제강점기에 약탈된 것은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지옹인(知恩院)과 사이후쿠지(西福寺) 같이 일본 교토를 중심으로 한 명찰들에 주로 소장돼 있는데, 제사용 초상화 등이 100년, 200년이 지나 벌레가 먹고 습기가 차서 떨어지게 되면 새로 임모본(臨摸本)을 만든 뒤 불태워 없애버리는 우리와 달리 일본에선 개칠(改漆) 외에는 고쳐 써온 전통 때문에 지금까지 많은 고려 불화가 남게 된 것이에요. 불교와 관련된 그림 중 가장 시기가 이른 것으로 755년, 호암미술관 소장 ‘신라백지묵서 대방광불화엄경(新羅白紙墨書 大方廣佛華嚴經)’에 실린 사경변상도(寫經變相圖)가 있습니다. 불경을 쓰는 형식 중 하나로 12세기가 돼서야 나오는 아코디언 접듯이 접게 된 첩(帖)의 형태가 아니라 두루마리 형태인 게 특징인데, 맨 앞에 경을 수호하는 의미로 사천왕과 제석천, 범천 같은 수호신상과 보상당초화문이 그려져 있지요.
'변상'이라고 하는 것은 경의 내용을 그림으로 바꿨다는 뜻입니다. 맨 마지막 부분에 제작 연대(1006년)와 함께 첫 번째와 두 번째 교정자의 이름이 기재돼 있는 감지(紺紙)에 금물로 쓴 ‘대보적경’이나 현재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된 ‘직지심경’과 ‘훈민정음’ 등을 보면 우리가 활자매체와 언어에 대해 각별한 문화전통을 갖고 있었으며, 바로 이 점이 주변국 문화이면서도 강력한 문화력을 가질 수 있는 토대였음을 자부할 수 있게 되지요.
12세기 이후로는 부와 권력의 상징으로서 7권짜리 ‘묘법연화경(법화경)’과 ‘대방광불화엄경’ 80권 본을 금물로 쓴 사경이 유행하게 됩니다. 이중 법화경을 금물과 은물로 써서 7층 보탑을 그린 일본 교고고쿠지(敎王護國寺) 소장 ‘법화경서사 보탑도’는 참 끔찍스러운 느낌을 주는 작품입니다. 비천상 등 일부 도상을 제외하고 지붕골 등 7층 보탑 전체가 법화경 글씨로 이뤄진 이 작품을 보면 한국인이 규모가 작다거나 정치함이 부족하다는 것이 전혀 근거가 없음을 알 수 있게 되지요. 부석사와 수덕사 같은 고려 시대 절에 일부 남아 있는 벽화와 강진 무위사의 조선 초기 벽화는 고려 시대 벽화 수준을 역추적할 수 있는 자료입니다.
족자 형태로 된 고려 불화의 도상은 전부 구복(求福)과 관련된 아미타 신앙에 국한된 것이 특징이에요. ‘아미타여래도’와 관음보살을 그린 ‘수월관음도’, ‘지장보살도’ 등이 대종을 이루며, ‘정토삼부경’ 중 ‘관(觀)무량수경’과 미륵이 중생을 제도해나가는 과정을 설명한 ‘미륵하생경’의 그림이 변상도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극락세계를 주재하는 아미타여래의 경우 ‘단독상’과 관음·세지보살을 거느린 ‘삼존(三尊)상’, 8대 보살을 모두 거느린 ‘구존(九尊)상’에다 이들이 다시 각각 좌상과 입상으로 표현돼 모두 6가지 유형으로 그려지면서 당시 인기를 끌었지요.
비교적 이른 시기인 13세기 말에 그려진 니혼은행 소장 ‘아미타여래상’과 달리 14세기 전반에 그려진 고려 불화들은 도상과 연꽃 등의 문양이 고려식으로 변형된 것이 특징입니다. 1306년(충렬왕 32년)에 그려진 일본 네즈(根津)미술관 소장 ‘아미타여래상’ 화기에는 당시 부자간 왕위 다툼으로 원나라에 불려간 충렬왕과 충선왕, 충선왕의 왕비 등 세 전하가 하루 속히 귀국하기를 기원하는 내용이 기록돼 있습니다.
그런데 권문세족의 문화 속에서 나와서 그런지 고려 불화의 도상 중 얼굴 부분은 인상이 하나같이 권위적인 게 특징입니다. 다른 것은 다 마음에 드는데 굉장히 근엄하고 상하구도도 엄격하게 짜여 있는 얼굴은 제 마음에 안들어요. 또 초본(밑그림)을 놓고 윤곽을 그린 다음 채색하고 문양을 넣는 작업 등이 철저하게 분업으로 이뤄진 고려 불화의 제작 특성상 옷주름은 물결을 치는데 문양은 아무런 변화 없이 그려지고 있습니다. 바로 이 점이 고려 불화가 거의 몇가지 패턴으로 계속해서 그려진 내력이기도 하지요.
모든 중생의 구제를 자임한 지장보살 외의 모든 보살은 보관(寶冠)을 쓰고 있으며 협시보살은 부처님 무릎 위로 머리가 올라오지 못하게 그려집니다. 속살이 투명하게 비치는 보살들의 ‘시스루(Seethrough)’ 패션이나 모자를 썼을 때 앞 머리의 가는 머리카락이 팔(八)자로 날리는 맵시까지 표현해 낸 섬세함도 대단하지요. ‘아미타삼존도’의 입상은 대개 정면보다 4분의 3 방향의 측면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호암미술관 소장 ‘아미타삼존도’는 세지보살 대신 지장보살을 그려 구복 신앙의 정수만 모아놓은 그림으로 고려 불화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작품이지요.
‘물방울 관음’으로도 불리는 일본 센소지 소장 ‘수월관음도’는 지금까지 한 번도 공개된 일이 없고 단지 사진만 전할 뿐입니다. 고려 불화 중 최고의 인기품목은 남인도 바다에 면한 보타락가산에 앉아 반가부좌를 틀고 용맹정진하고 있는 수월관음과 그 앞에 선재동자가 물음을 구하는 모습을 그린 것이지요. 그중에서도 버드나무 가지가 꽂혀있는 청자정병이 함께 나오는 수월관음도의 정형은 1323년(충숙왕 10) 내반종사(內班從事) 서구방(徐九方)이 그린 일본 스미토모(住友)은행 소장품이에요. 관세음보살의 전신을 감싼 흰 사라를 단순하게 흰색으로 칠하지 않고 미세한 흰선을 무수하게 반복적으로 그어 속살이 훤히 비치는 시스루 패션이 되도록 표현하기 위해 들어간 공력과 섬세함은 고려 불화가 당시 세계미술사에서 당당하게 1등이 될 수 있었던 이유를 설명해줍니다.
모든 명작의 공통점은 디테일이 아름답다는 것인데, 고려 불화도 예외가 아닙니다. 일본 다이도쿠지(大德寺) 소장 ‘수월관음도’는 동해 용왕과 의상대사의 낙산사 전설이 담겨있는 게 특징입니다. 여의주와 육환장을 손에 든 ‘지장보살도’의 경우 단독상 외에 명부의 구세주답게 무독귀왕(無毒鬼王)과 도명존자(道明尊者), 사천왕, 범천과 제석천, 시왕(十王), 판관과 사자 등 권속들을 거느린 도상이나 무독귀왕과 도명존자만 협시한 삼존도 등으로 그려졌지요.
인도 마가다국 빈비사라왕 부자의 갈등과 부처님이 일러준 극락세계에 도달하는 16가지 방법을 설명한 ‘관무량수경’ 서품 변상도는 고려 불화 중 가장 내용이 많고 화려합니다. 도솔천의 미륵이 하생해 중생을 구제하는 ‘미륵하생경’ 변상도와 함께 그림에 담긴 건축과 병풍 등의 세부 내용들은 단순한 불화를 넘어 고려 시대 풍속화로서의 의미도 크지요. 우리는 고려 시대 하면 청자만 얘기하며 문화능력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는데
14세기 전반기 고려사람들이 이룩한 불화는 당시 세계문화사 속에서 당당히 1등을 차지한 품목입니다. 프랑스의 기메박물관과 독일의 베를린미술관, 미국의 메트로폴리탄박물관 등 세계 유수 박물관에서 고려 불화를 소장하고 있는 것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11. 조선은 초상화 왕국
조선을 ‘초상화의 왕국’이라고 제가 표현하는 이유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우리나라에서 초상화가 많이 제작됐고 지금까지도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양이 남아 있기 때문이지요. 조선 시대 회화사를 전공한 저의 어림짐작에 전신(全身) 또는 반신상(半身像)으로 돼 있는 것과 50장 내지 30장씩 묶어놓은 초상화첩까지 모두 합치면 아마도 3000점 정도의 초상화를 갖고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이 중 국보와 보물로 지정된 것이 각각 4점과 31점이 있지요. 초상화의 종류도 여러 가지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게 ‘어진(御眞)’이라 부르는 임금님의 초상화이고 국가의 큰 변란을 수습한 뒤 공신을 책봉하게 되면 초상화를 그려주게 돼 있는 전통에 따라 대례복을 입은 공신상이 남아 있지요.
이와 함께 서원이나 주로 가묘(家廟)에 집안에서 불천위제(不遷位祭 · 나라의 허락으로 4대 봉사가 끝나도 신주를 사당에서 옮기지 않고 영원히 매년 기일 받드는 제사)를 지내는 중시조되는 분들의 초상화를 모셔다 놓은 것이 우리 초상화의 대종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즘 앨범북처럼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들의 초상화들을 모아 화첩으로 갖고 있는 풍조가 유행했는데, 현재 수십첩이 전해지고 있어요. 영조대왕은 선왕인 숙종의 초상화를 그리면서 군신회의를 열어 “머리카락 하나 다르게 그려도 내 조상이 아니라 남의 조상이 된다”며 극도의 사실성을 강조했습니다. 살아계실 때 초상화를 그린 것도 있지만 임금님이 일찍 돌아가셨을 경우, 비슷하게 생긴 종친을 모델로 그림을 그린 뒤 근신(近臣)들이 모여 요즘 범인의 몽타주를 만들듯이 ‘눈썹을 좀 올려라’ ‘눈을 조금 크게 해라’하는 식으로 수정을 해 ‘됐다’고 하면 그것을 초본(草本)으로 초상화를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초상화(어진)는 경복궁과 창덕궁, 덕수궁 등 각 궁궐에 마련된 선원전(璿源殿)에 모셔졌지요. 그러나 지금까지 남아 있는 어진은 태조 이성계와 영조의 초상화 두 개 뿐입니다. 이밖에 철종과 영조가 왕위에 즉위하기 전 연잉군 시절의 모습을 그린 초상화가 있지만 한국전쟁 때 불타 반쪽만 남았지요.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임금의 초상화를 그릴 때는 어진도감이란 임시기구를 만든 뒤 예조판서와 당대 최고 가는 감식안을 갖춘 인물이 감독관이 되고 주관화사(主管畵師)와 동참화원(同參畵員), 수종화원(隨從畵員) 등으로 최고의 화가 5명을 뽑아 그림을 그려 바치게 했습니다.
태조 이성계는 기마상을 포함해 전부 14개의 초상화가 그려져 평양 숭녕전과 함흥본궁 등 여러 곳에 모셔졌는데, 지금 남아 있는 것은 1900년 무렵 옮겨 그려 전주 경기전에 전하는 한 폭 뿐이에요. 임진왜란 등 각종 전란 당시 소실이 된데다 초상화가 지금은 유물이지만 옛날에는 실제 사용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100~200년 쓰다가 낡게 되면 새로 그려놓고 한국인들의 독특한 습성상 이전 것들은 불태워 없애버려 원본이 남아있지 않아요.
그런데 직접 데생을 한 뒤 그린 초상화 원본하고 그려놓은 것을 보고 다시 그리는 이모본(移摹本)하고는 품격과 생동감 등 여러 가지 측면에서 하늘과 땅 차이가 납니다.
정면상(正面像)인 태조 이성계 초상화를 보면 이 분의 키가 작은 것을 보완하기 위해 비례를 맞추고 밑에서 위로 우러러보는 형상으로 그렸어요. 영조대왕의 초상화를 보면 ‘좌안(左顔)7푼(分)’이라고 해 왼쪽 뺨과 귀는 보이는데 오른쪽 귀는 안 보이게 그려졌습니다. 서양에서도 르네상스 시대 초상화가 등장하면서 얼굴이 4분의 3 정면을 바라보게 그리는 게 그 사람이 갖고 있는 인간적인 측면을 가장 잘 포착할 수 있다고 해서 초상화의 정형이 된 것과 마찬가지예요.
지금은 위패를 대개 모시지만 서원에서도 한 때 초상화를 모시던 전통이 있어 소수서원에는 고려 시대 안향 선생의 초상화가 그대로 남아 현재 국보로 지정돼 있지요. 이 초상화가 낡아서 소수서원에서 이모본을 제작한 것이 있는데, 비교하면 원본과 이모본의 차이를 극명하게 느끼게 해줍니다. 안향 선생의 초상화는‘우안9푼’ 정도로 왼쪽 귀만 안보이게 몸을 약간 비튼 예외적인 방향을 취하고 있지요.
강감찬 장군의 부관으로 진주강씨의 시조격인 강민첨 장군의 초상화는 조선 정조 때 이모된 것이지만 사모(문무백관이 관복을 입을 때 갖춰 쓴 모자) 꼬리(날개)를 비녀처럼 길게 해 중국 송나라 초상화가 갖고 있던 특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파주염씨 집안에 전하는 염제신 초상화는 목은 이색 선생 문집에 “공민왕이 염제신의 초상화를 그려주었다”는 내용이 나와 ‘전 공민왕 필 염제신상’이란 이름으로 보물로 지정돼 있습니다.
목은 이색 선생의 초상화와 함께 조선 시대 초상화가 보여주는 대상을 평면화시킴으로 해서 품격이 더 살아나오는 전신(傳神)수법에 가까운 명작이지요.
국보로 지정된 익재 이제현 초상화는 원나라 화가 진감여가 그린 것으로 중국식 초상화 형식으로 그려진 것이 특징입니다.
포은 정몽주 선생은 전신상 두 폭과 반신상 한 폭이 전하고 있는데, 19세기 고종 때 이한철이란 화가가 이모한 초상화를 보면 옷주름에 집어 넣은 음영과 얼굴 주름 때문에 안향이나 염제신 초상화에서 보이는 품격을 전해주지 못합니다.
얼굴 주름은 조선 시대 초상화를 채색할 때 앞에서 채색하는 것이 아니라 비단 뒤쪽에서 채색을 해 은은하게 배어나오게 했는데, 이것이 떨어져버리고 나면 선만 남아 얼굴 주름처럼 보이는 것이지요. 초상화가 남쪽을 향하고 있기 때문에 이처럼 뒤쪽에서 칠하는 기법을 북쪽에서 칠했다는 의미로 ‘북채(北彩)’라고 합니다. 여러 폭이 남아 있는 조선 시대 황희 정승의 초상화는 길고 잠자리 날개 모양인 사모꼬리 등 15세기 초상화 패션의 전형을 보여줍니다. 사모꼬리는 신숙주 때 가면 빳빳해지며 16세기가 되면 넓적한 홑사모를 썼다가 18세기가 되면 겹사모로 바뀌고 꼬리도 안쪽으로 휘는 등 시대 패션을 민감하게 반영해주고 있지요.
여성에 대한 차별이 심했던 조선 시대 세종 때 대신을 지낸 하연과 박연, 조반 등은 부인 초상화도 함께 전하고 있어 오늘날까지 조선 초기 여인 초상화 3폭이 남아 있게 됐습니다.
보물로 지정된 장말손과 신숙주의 초상화는 관복을 입고 의자에 앉은 공신상의 전형을 보여주지요. 의자의 손잡이가 팔꿈치 아래쪽에 있고 발은 11자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관복의 꾸겨진 자국을 옆으로 각이 지게 표현한 것 등에서 15세기 새 국가를 건설한 사람들의 기상과 이상주의적 성격 같은 것을 느끼게 됩니다.
반면 16세기로 넘어가 약포 정탁 선생의 초상화를 보면 의자 손잡이가 팔꿈치 위로 올라가고 발은 팔(八)자 모양으로 벌리게 되며 옷도 옆으로 꺾이던 것을 일직선으로 해놓는 등 바뀌게 됩니다. 의자 밑에 깔리는 것도 처음엔 채단을 사용하다가 사치스럽다고 금지령이 내린 17~18세기에는 강화도 화문석을 까는 걸로 바뀌게 되며 18세기에는 의자 뒤에 호피를 얹는 것도 유행하게 되지요.
서원이 생기기 시작한 16세기에는 각 집안의 중시조를 중심으로 선비상의 초상화가 유행합니다. 의성김씨 집안을 일으킨 청계공 김진이나 농암 이현보 선생의 초상화 등 경북 안동지역을 중심으로 학자상의 초상화를 만드는 전통이 일어나게 되고, 17세기에 하나의 정형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조선 시대 초상화 중에 손이 보이는 것은 18세기에 그려진 4~5폭 밖에 없어요. 그래도 당시 초상화가 오른손을 드러낸 강세황 초상화와 비교해 사실성은 떨어져도 나름대로 깊이감을 갖고 있어요. 17세기로 들어오면 몸집이 대비되는 우암 송시열 선생 초상화나 미수 허목의 초상화에서 나타나듯 낭만적 과장이 들어가면서 그 이전이나 이후 시대에 비해 예술적으로 뛰어난 초상화가 그려져요. 백사 이항복의 초상화를 보면 주독이 올라 코가 빨갛고 눈 꼬리에 장난기가 덕지덕지 어려 있는데, 옷주름을 대담하게 하나 그어놓고 말은 것이 조선 시대 초상화 아니면 어디서도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선을 몇 개 그어놓은 것으로 옷주름을 표현한 17세기 백사 이항복의 초상화. 대담한 조형적인 생략이 옷주름을 치밀하게 표현했던 18세기 초상화와 비교된다.
초상화는 ‘유탄약사(柳炭略寫)’라고 하듯 버드나무 숯으로 스케치를 한 뒤 얼굴이 완성되면 ‘유지초본(油紙草本)’이라고 기름종이에다 얼굴을 그려보고 채색까지 해 본 뒤 마지막으로 비단에 정식으로 그리게 됩니다.
다른 종이에 그렸다가는 먹물이 배어 수정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먹물을 지울 수 있는 기름종이를 사용하는 것이지요. 17세기에서 18세기로 넘어가는 시기의 공재 윤두서 자화상은 서양의 렘브란트와 얼마 차이가 나지 않는 시기의 그림으로 당시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초상화가 있었다는 것을 자랑할 수 있게 해주는 작품입니다.
18세기의 초상화를 대표하는 것은 도암 이재 선생과 그의 손자인 이채의 초상화입니다. 옷주름 표현과 얼굴의 육리문(肉理文 · 살결문양) 등 사실성의 극치를 추구하면서 정신적인 기품까지 드러내는 전신에 성공한 작품이지요.
신금임의 초상화나 추사 김정희의 초상화에서 나타나듯 얼굴의 간반이나 곰보자국 하나 빼지않는 등 예쁘게 그리기보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려고 노력한 게 우리나라 초상화의 특징입니다.
얼굴은 이명기가, 몸은 김홍도가 나눠 그린 서직수 초상은 몸을 사실적으로 잘 그려 얼굴이 죽고만 사례입니다. 김홍도가 그린 옷의 사실성에서 서양 유화에서 느꼈던 콤플렉스를 떨쳐주게 만드는 작품이지요. 동네에서 70세가 넘은 노인들이 잔치를 벌인다음 초상화를 그리고 첩을 만들어 나눠 가진 ‘기사회첩’과 신윤복의 ‘미인도’ 등에서 나타나듯 18세기에 들어오면 초상화의 유형도 다양해집니다. 그러나 18세기 정조 때 피크를 이룬 초상화 전통도 한 50년간 여운을 남긴 뒤 흥선대원군의 초상화에서 보듯 19세기 후반에 가면 완전히 조선 시대가 갖고 있던 긴장미를 상실하면서 쇠퇴하게 됩니다.
12. 동양화의 원리와 조선 전기의 회화 - '詩書一致' 바탕 위에 개성적 화풍 창출
제임스 케일이 쓴 ‘중국회화사’에도 나오지만 동양화의 특징은 서양화보다 무려 700년이나 이른 10세기 무렵 인물화에서 산수화로, 채색화에서 수묵화로, 실용화에서 감상화로 주류가 바뀌었다는 것이에요. 이 때 ‘서화일치(書畵一致)’ 또는 ‘시화일치(詩畵一致)’라고 하는 독특한 개념도 들어와 서양미술을 봐왔던 미적 기준으로 동양미술을 이해하기 불가능해집니다. 특히 산수화와 수묵화가 합쳐진 수묵산수화는 동양화의 핵심 장르이면서도 그림에 대해 감상안을 갖고 싶은 사람들을 곤혹스럽게 해왔지요. 종래 초상화나 벽화 등 기록화를 그릴 때 전부 광물성 안료를 사용해 청록채색을 진하게 썼는데, 수묵과 담채라고 하는 번지기 기법을 쓰게 되면서 지(紙) · 필(筆) · 묵(墨)이 같이 어우러지는 미적 효과까지 덧붙여 산수화가 발달하게 됩니다. 계속해서 수정이 가능한 서양의 유화와는 달리 동양화는 일필로 그려야 하며 ‘기운생동(氣韻生動)’과 격조, 문기(文氣)가 있어야 한다는 독특한 평가 기준이 등장합니다.
지 · 필 · 묵의 특성 때문에 ‘서(시)화일치’라는 개념이 생기면서 소동파가 8세기 왕유의 그림을 평하면서 “그림 속에 시가 있고 시 속에 그림이 있다(화중유시 시중유화·畵中有詩 詩中有畵)”라고 한 것이 이후 동양화의 빼놓을 수 없는 특징이 되지요. 반면 서양미술사에서 감상화란 장르가 등장한 것은 17세기 들어와 네덜란드 화가들이 풍경화를 그리고 같은 시대에 정물화가 등장하면서부터예요. 이전에는 미켈란젤로나 레오나르도 다빈치 등이 교회당이나 수도원 식당 등에 벽화로 그린 기록화거나 모나리자 그림처럼 초상화가 있을 뿐이지요. 동양화가 중국에서 발달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또다른 중요한 특징은 직업화가와 선비화가, 화원화가와 문인화가의 작업이 분리된 점입니다. 때때로 직업화가가 문인화가와 같은 풍의 그림을 그릴 수 있고, 정반대의 경우도 나타나지만 엄연히 화원으로서 나아가는 길과 문인으로서 그림을 그리는 일은 달라 북종화와 남종화란 서로 다른 미학을 갖게 됐지요. 이것이 17세기 명나라 동기창이 나와 ‘문인화인 남종화가 직업화가들인 화원이 그린 북종화보다 훨씬 더 뛰어나고 동양미학의 본질을 갖고 있다’는 남종화 우위론을 내세우면서 문인화가 절대적 우위를 차지하며, 동양화가 현대에 들어와서도 사실적인 가치를 뛰어넘어 사의(寫意), 즉 뜻을 쏟아내 보여주는 그림으로 가게되는 배경이 됩니다. 중국미술사에서 동양화는 8세기 청록산수를 그렸던 화원화가인 이사훈과 왕유가 등장해 쌍벽을 이루면서 각각 북종화와 남종화의 조종이 되지요. 그러나 두 사람이 그림이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것은 한 점도 없습니다. 이보다 앞선 4~5세기 동진시대 고개지가 궁중의 사녀들이 지켜야 할 덕목을 그린 ‘여사잠도(女史箴圖)’가 영국박물관에 소장돼 있는데, 화장하는 여인의 얼굴이 거울 속에 비치게 구도를 잡은 솜씨가 굉장합니다. 산수화는 11세기 곽희가 등장하면서 양식의 통일이 이뤄지고 굉장히 철학적인 의미가 부여됩니다. 대만 국립고궁박물원에 소장된 곽희의 ‘조춘도(早春圖)’나 곽희 부자가 지은 화론집인 ‘임천고치(林泉高致)’는 동양사람들의 자연 인식을 살필 수 있는 교본이에요. 봄·여름·가을·겨울 등 사계절에 따른 나무의 변화와 아침 · 점심 · 저녁 때 안개의 모습 등은 물론 산수화의 기본이 되는 고원(高遠) · 심원(深遠) · 평원(平遠)의 삼원법(三遠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고원은 높고 험한 산악의 기세를 표현하기 위해 산 아래서 산 위를 올려다보는 시각으로, 심원은 앞뒤로 겹겹이 들어선 산악의 깊은 형세를 표현하기 위해 산의 앞에서 실제로는 보이지 않는 산의 뒤쪽을 조감하듯이, 평원은 평탄하고 광활한 공간감을 느끼게 하기 위해 가까운 산에서 먼 산에 이르기까지 거침없이 트인 공간으로 시선이 뻗어나가도록 그리는 방법을 각각 말하지요. 산수화를 그릴 때 한 화면 속에 삼원법을 다 집어넣은 곽희의 그림은 소실점이 있는 사실주의와는 어긋나지만 전체 속에서 산수가 갖고 있는 장엄한 모습을 모두 보여줘요. 이밖에 임금과 신하의 관계처럼 산수화에도 주봉을 중심으로 다른 봉우리들을 배치하는 봉건적 위계질서를 산수화에 반영한 것도 곽희에서 비롯된 것이에요. 그러나 사람이 냇가를 걸어가는 모습 등이 개미만하게 표현돼 있는 그의 ‘조춘도’를 보면 거룩한 자연 속에서 인간 존재의 의미가 그림 속의 돌맹이나 폭포, 나무보다 결코 더 귀한 존재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바로 얼마 뒤 북송의 휘종황제가 그린 ‘문월도’나 ‘송하관월도’처럼 달을 보고 손짓하는 선비가 나오는 그림에서 보이는 인간이 사용하고 자기 낭만을 반영하는 자연을 그리는 태도와 너무도 달라요. 이 같이 자연의 의미가 바뀌면서 남송 대에 들어오면 화면의 절반 내지 3분의 1을 여백으로 처리하는 경향이 강조되고 심한 경우 강변에서 낚시하는 모습을 일각(一角)구도로 그린 마원의 ‘한강조어도’처럼 여백이 전체 화면의 5분의 4를 차지하기도 합니다. 이와 함께 북송 때 미불이 창안한 여름 산수를 그릴 때 점을 많이 쓰는 미점법(米點法)이나 남송 때 양해가 붓으로 몇 가닥의 선을 그려 이태백을 표현한 백묘 또는 감필법, 파묵(破墨) · 발묵법(潑墨法), 몰골법(沒骨法) 등 동양화의 각종 기법들이 이때부터 하나씩 형성되기 시작하지요. 원나라 때 조맹부는 자연을 이웃집 동산처럼 친숙하게 화면에 끌어들여 표현했어요. 이처럼 위대한 존재인 자연을 그린 산수에서 서정적인 산수로, 다시 조맹부에 의해 친숙한 자연으로 바뀐 산수의 표현을 한층 더 발전시킨 것이 강남지방에 은거한 황공망·예찬 등 원말 사대가들의 문인화였습니다. 먼 산과 앞 강, 나무, 선비가 사는 집이나 인물 등 18세기 우리나라에서 그려진 남종문인화의 전형이 이 때 형성됐지요.
명나라에 들어오면 대진 등 저장(浙江)성 출신들이 주축이 된 ‘먹을 강하게 쓰고 자연을 단지 인물의 배경으로 사용한’ 절파(浙派)가 등장하면서 자연과 인간의 관계가 완전 역전되지만 심주 등 오파(吳派)의 문인화가들로부터 미친사람 그림 같다고 해서 ‘광태사학(狂態邪學)’이란 비판을 받고 동기창에 의해 남종화우위론이 나오면서 쇠퇴하게 됩니다.
17∼18세기에 오면 사왕오운(四王吳惲)으로 불리는 직업화가들까지 모두 문인화를 지향하게 되는데, 만권의 책을 읽고 만리를 여행하며 쌓아놨던 교양을 바탕으로 격조높은 정신세계가 우러나온 왕유와 곽희, 황공망, 동기창 등의 문인화가에 비해 직업화가들은 그와 같은 학식이 없이 남종화를 지향하다 보니 그저 형식만 따라가는 것이 돼버리고 말았어요.
19세기 조선에서 박규수가 도화서 화원까지 문인화를 그리는 세태를 비평한 것도 같은 맥락이지요. 반면 명나라 서위나 주원장의 후손으로 청나라 때 팔대산인(八大山人)이란 호로 활약한 주탑, 같은 시대 상업도시 양주(揚州)에서 활약한 8인의 화가를 지칭하는 양주팔괴(揚州八怪)와 석도 등은 주류 문인화와는 다른 개성을 발산한 그림으로 유명합니다. 국내로 돌아와 고려말 공민왕이 그린 것으로 전해지는 ‘천산대렵도’ 잔편은 ‘화원별집’이란 궁중 도화서 소장 화첩에 있던 것으로 조선 시대 회화 중 18세기 이전 그림들은 대개 이를 통해 전해진 것들이 많습니다.
일본 덴리(天理)대 중앙도서관에 소장돼 있는 ‘몽유도원도’는 안평대군이 박팽년 등 집현전 학사들과 같이 꿈속에서 복숭아꽃밭을 거닐었던 일을 안견에게 얘기해 그리게 한 것이지요. 곽희풍의 영향을 많이 받은 그림과 안평대군의 발문 및 시, 박팽년 · 신숙주 등의 시문까지 포함해 전부 펼쳐놓으면 10m 정도 됩니다. 비단 속에 먹이 스며 들어간 것이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안견의 그림은 여러 개 전하고 있지만 어떤 그림도 이런 필력을 보여주지 못해 ‘전 안견(傳 安堅)’으로 표현하고 있지요. 같은 시대 강희안이 그린 ‘고사관수도’는 중국 절파화풍의 그림과 똑같습니다. 명나라 절파보다 출현 시기가 빠르고 17세기 중국 미술 교과서라 할 수 있는 ‘개자원화전(芥子園畵傳)’에 실린 도상과 같아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중국 사신을 통해 다양한 정보의 교류가 있었고 이 책에 실린 도상이 10세기부터 쭉 내려온 것들을 모아놓은 점을 감안하면 얼마든지 이 같은 그림이 나오는 게 가능하다고 봐요.
자연보다 인간을 중시한 중국 명나라 절파화풍의 그림과 매우 유사한 강희안의 ‘고사관수도’일본 교토 다이겐지(大源寺) 스님 손카이(尊海)가 1539년 조선에 사신으로 왔다 선물로 받아간 병풍은, ‘소상팔경도’ 중 늦가을 동정호에 둥근 달이 뜬 ‘동정추월(洞庭秋月)’과 늦겨울 꽁꽁 언 겨울산하인 ‘강천모설(江天暮雪)’을 그린 것입니다. 중국 후난(湖南)성 둥팅(洞庭)호 남쪽 소강(瀟江)과 상강(湘江)이 만나는 아름다운 경치를 사시팔경(四時八景)으로 묘사한 ‘소상팔경도’는 조선초기부터 많이 그려졌지요. 재일교포 고(故) 김용두씨가 진주박물관에 기증한 것 중에도 ‘소상팔경도’ 8폭의 그림이 있습니다. 남송풍의 그림에 시정적인 것을 집어넣고 곽희풍의 필치가 결합된 이런 그림들을 통해 성리학을 받아들이는 과정과 마찬가지로 동양화의 전통을 받아들이면서 하나하나 자기화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15세기부터 1550년 무렵까지의 그림은 우리의 개성을 찾아가는 과정이기 때문에 대단히 심심하고 변화가 없다고 볼 수도 있지만 이 과정이 있었기 때문에 겸재 정선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이지요. 조광조의 제자인 양팽손의 그림이나 1540년(중종 35년) 이황 등 미원(薇垣 · 사간원)에 근무한 관리들이 야외에서 연 계모임 광경을 그린 ‘미원계회도’, ‘호조낭관계회도’ 등도 이 당시 대표작입니다. 16세기초 중국 마원의 화풍을 닮은 노비출신 이상좌의 ‘송하보월도’는 소나무 아래를 걸어가면서 달을 보는 광경을 그린 훌륭한 그림이지만 그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제 생각에 전남 영암 도갑사에 있다가 왜구가 훔쳐 간 ‘관음 32응신도’를 그린 이자실이 이상좌일 가능성이 80% 정도는 됩니다. 15세기 산수화 전통을 불화형식으로 그린 것이지요.
강아지 그림에 있어선 오늘날까지 조선 중종 때 이암을 능가하는 사람이 없을 겁니다. 신사임당의 ‘초충도’는 정숙한 여인의 기품과 함께 우리 정서를 표백해주는 느낌을 주지요. 1550년을 넘어 조선중기가 되면 절파화풍이 본격적으로 도입됩니다. ‘동자견려도’와 ‘한림제설도’등을 그린 양송당 김시를 효시로 이숭효 · 이흥효 · 이경윤 등이 나와 인간이 자연보다 앞서는 절파화풍이 유행하고 임진왜란으로 제동이 걸리지만 개성적인 그림들이 등장하게 됩니다.
13. 화인열전 - 연담 김명국. 공재 윤두서 - 시대를 추월한 화법 '神品과 妙品'
조선 후기 화가 8명의 전기인 ‘화인열전’(전 2권)을 쓰게 된 것은 저 자신을 비롯, 우리나라에서 미술사를 공부하는 사람들이 반 고흐나 파블로 피카소에 대해서는 몇 마디 언급을 하면서도 단원 김홍도에 이르면 조선 시대 대표적인 풍속화가라는 사실 외에 별로 아는 게 없는 현실이 잘못됐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또 미술사를 공부하는 사람들은 최근 학문 조류에 따라 양식분석을 통해 아주 현학적이고 수준 높은 분석력을 보여주는 것을 미술사가의 일로 생각하고 너도나도 그렇게 해서 각광 받는 논문을 쓰고 싶어 하지요. 그러나 서양에서 그런 정신사로서의 미술사와 형식사로서의 미술사, 도상학으로서의 미술사가 발달하게 된 근저에는 르네상스시대 이후 축적된 인물사로서의 미술사가 밑바탕에 깔려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외국에 나가 반즈앤드노블스 같은 대형서점에 가 보면 인기 있는 책들을 쌓아놓고 ㄱ자로 꺾어진 코너를 볼 수 있는데, 여행책과 전기, 자서전을 모아놓은 곳이지요. 물론 여행책은 단순한 가이드북이 아니라 괴테의 ‘이탈리아 기행’ 같이 수준 높은 기행문학들이 꽂혀있는 곳이며, 전기와 자서전 코너를 통해 오늘날까지 서양 출판시장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인물사또는 전기에 대한 전통과 관심을 느끼게 됩니다. 반면 우리 교보문고나 영풍문고에 가 서점 속에 있는 전기를 다 찾아 꽂아 놓는다해도 한 쪽 벽 책꽂이를 채울까 말까 하는 양일 거예요. 우리는 이상하게 전기에 대한 관심이 없습니다. 소설이나 아동문고 외에 이순신을 비롯, 이황, 이이, 박지원, 정약용 등에 대한 제대로 된 전기가 없지 않습니까. 이 점에서 인문학하는 사람들이 그동안 주장해온 인문학 푸대접론은 사실 스스로 초래한 측면이 상당히 많습니다.
인문학의 기본은 인간을 얘기하는 것인데 인간을 빼버리고 퇴계의 ‘이기이원론’만 말한다거나 단원 김홍도와 겸재 정선의 삶을 빼놓고 생경한 사물로서 미술작품만 언급한다면 현실감도 떨어지고 올바로 이해하는 길도 아니어서 일반에게 외면당할 수밖에 없지요. 인간의 최고 관심은 인간에 대한 것입니다. 제가 ‘화인열전’을 쓰면서 연담 김명국부터 시작한 것은 17세기가 됐을 때 비로소 전기로 쓸 만한 작가들을 만났기 때문이에요. 그 이전 시대 안견의 경우, ‘몽유도원도’를 그렸다는 사실 외에 전기로 쓸만한 삶 등이 알려진 게 거의 없어요.
17세기(조선 중기)에 들어오면 고려대에 소장된 학림정 이경윤의 ‘고사탁족도’ 등에서 볼 수 있듯, 절파화풍의 개성적인 산수인물도가 등장하게 됩니다. 농담의 처리와 강약의 대비, 몇 가닥으로 표현한 옷주름 등 필묵을 구사한 솜씨가 돋보이며 선비가 냇가에서 발을 닦는 여유와 한가로움 그리고 고결함을 지키려는 의지를 이 그림을 통해 볼 수 있지요. 이 그림의 도상 자체가 ‘선비가 발 닦는 것은 이렇게 그려라’는 중국 화본에서 비롯됐기 때문에 이를 결점으로 얘기하는 경우가 있는데, 저는 이를 흠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지금은 남이 하지 않는 새로운 소재를 개발해 무엇인가 만들어내는 것을 개성적인 작가라고 하지만 당시(16세기말~17세기초) 화가들은 ‘고사탁족도’와 같이 누구나 공통으로 갖고 있는 이상인 그림(도상)을 누가 어떻게 더 잘 묘사하느냐를 기준으로 화가의 재능을 평가하던 시대였어요.
동양사상을 흔히 주소(注疏) 철학이라 얘기하지만 주희가 집주를 한 사서를 읽어보면 공자 · 맹자의 말이라기보다 이들을 빌려 주희 자신의 얘기를 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주역’에 수많은 사람들이 주석을 달았지만 공자와 정이천, 주희가 단 주만 인정받듯이 ‘탁족도’도 조선 시대 수많은 사람들이 그렸지만 이경윤의 그림을 능가하지 못해요. 따라서 그의 그림을 가지고 개성을 발휘하지 못했다고 얘기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며 굳이 한계를 지적한다면 이경윤 개인보다는 당시 시대 · 문화적 환경에서 찾아야 한다고 봅니다. 실제 소나무 아래서 바둑을 두거나 많은 동자를 데리고 폭포를 보는 그의 산수인물도를 보면 인간의 삶이 주제로 올라가기는 하지만 여기서의 인간은 고고한 선비 또는 지배층을 형성하고 있는 양반계층일 수밖에 없어요. 왕손으로 뛰어난 기량과 고고한 인품을 갖고 있지만 화가로서 얘기할 수 있는 대작이 없는 것도 아쉬운 점입니다. 나이 서른도 못돼 요절한 나옹 이정도 천재적이고 개성적인 화풍으로 유명한데, ‘홍길동전’을 쓴 허균이 지은 ‘나옹애사’란 애절한 추도사가 전하고 있지요. 17세기 들어오면 조선 문인사회에서 ‘일인일기주의’라고, 한 사람이 한 가지 주특기를 갖는 것을 멋으로 받아들이는 새로운 회화적 환경이 생겨납니다.
호가 탄은으로 종실인 석양정 이정은 대나무 그림의 대가이며 휴휴당 이계호와 홍수주는 포도에 능했지요. 삼학사 중의 한 명인 오달재와 어몽룡은 매화를 잘그렸고 양송당 김시의 손자인 퇴촌 김식은 죽으나 사나 소만 그렸습니다. 창강 조속은 까치 등 새그림으로 유명해요. 이러한 풍조는 조만간 개성이 강조되는 사회로 가는 준비기로 볼 수 있는데, 바로 이 시기 연담 김명국과 허주 이징이라는 산수화 대가 두 사람이 나타납니다. 학림정 이경윤의 서자인 허주 이징은 아버지와 함께 인조의 총애를 받아 궁중에 불려가 그림을 그리곤 했습니다. 비단에 금물로 그린 그의 ‘이금산수도’를 보면 개별적인 개성보다는 대관적(大觀的)인 구도의 안견파 그림이 보여주는 삼라만상의 모든 것을 담재한 자연으로 돌아가는 풍을, 또 스케일도 크고 왕가가 지닐 수 있는 존엄성 같은 것을 담고 있지요.
이는 궁중화가의 특징으로 이징에게 있어 중요했던 것은 개성이 아니고 기량일 뿐이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기량은 매우 출중한 화가였습니다. 바로 동시대에 정반대되는 사람이 연담 김명국입니다. 그는 나무줄기나 옷주름, 신선 등 할것 없이 괴발개발로 마구 그렸는데, 바로 이 점이 그의 진정한 개성이었어요. 우리나라 미술평론 중 최초의 글다운 글이 남태응(1687~1740)이 쓴 ‘청죽화사(聽竹畵史)’입니다. 바로 여기에 김명국에 대한 평가가 나옵니다.
“김명국은 그림의 귀신이다. 그 화법은 앞 시대 사람의 자취를 밟으며 따른 것이 아니라 미친 듯이 자기 마음대로 하면서 주어진 법도 밖으로 뛰쳐나갔으니, 포치(布置)와 화법 어느 것 하나 천기(天機) 아님이 없었다. (…) 그 역량이 이미 웅대한데 스케일 또한 넓으니, 그가 별격의 일가(一家)를 이룬즉, 김명국 앞에도 없고, 김명국 뒤에도 없는 오직 김명국 한 사람만이 있을 따름이다.”
이것이 남태응이 김명국에 대해서 보낸 최고의 찬사입니다. 모름지기 평론은 이 정도 했을 때에 그것이 미술평론이고 미술사였다 얘기할 만한 것이지요.
1600년 무렵 태어난 김명국은 1636년 30대 중반 통신사 수행 화원으로 일본에 가게 됩니다. 당시 그가 그린 ‘달마도’라는 것이 지금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는 것이지요. 선승화(禪僧畵)가 대유행이던 당시 일본에서 김명국은 통신사 숙소에 사람들이 그림을 받기 위해 줄을 설 정도로 큰 환영을 받았습니다. “그림을 청하는 왜인이 밤낮으로 몰려들어 괴로움으로 김명국은 울려고까지 했다”는 기록이 전할 정도예요.
1643년 다시 통신사를 파견할 때도 일본측의 요청으로 김명국과 한시각 등 두 명의 화원이 가게 되는데 12번의 조선통신사 행차에서 화원이 두 명 간 예와 한 화원이 두 번 간 예는 김명국밖에 없습니다.
김명국은 우리 미술사에 등장하는 인물 중 술을 잘 마신 화가 중의 한명답게 ‘명사도(冥司圖 · 지옥도)’와 일본 대갓집의 벽화 이야기 등 수많은 일화를 남겼지요. 남태응은 “김명국이 술에 취하지 않으면 재주가 다 나오지 않았고, 또 술에 취하면 취해서 제대로 잘 그릴 수가 없었다. 오직 술에 취하고 싶으나 아직 덜 취한 상태에서만 잘 그릴 수 있었으니, 그와 같이 잘된 그림은 드물고 세상에 전하는 그림 중에는 술에 덜 취하거나 아주 취해버린 상태에서 그린 것이 많아 마치 용과 지렁이가 서로 섞여 있는 것과 같았다”는 평가를 전하고 있습니다.
김명국의 선승화는 일본에서 그렸던 게 전해져 들어온 게 대부분이고 국내에 전하는 그림들은 남태응의 말대로 용은 몇 개 없어요. 이 중 제가 ‘화인열전’을 처음 쓸 때 지팡이를 짚고 가는 도사를 그린 것으로 이해한 그림의 시를 연세대 철학과의 이광호 교수가 다시 해석한 결과 연담 자신의 ‘죽음의 자화상’으로 밝혀졌습니다. 술꾼으로 천한 인생을 살았던 김명국이 “내가 가봐야 지옥밖에 더 가겠느냐”는 심정으로 그린 것으로 그의 기개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되지요.
1668년 태어나 1715년 세상을 떠난 공재 윤두서(1668~1715)의 자화상은 후대 보수하는 과정에서 옷주름을 빼버려 얼굴만 남게 됐는데, 그림으로서의 효과가 더 크게 부상하면서 우리나라 초상화 중 드물게 국보로 지정됐지요. 해남 윤씨인 윤두서는 고산 윤선도의 증손자이고 다산 정약용의 외증조 할아버지가 됩니다. 노론 전권시대로 들어가 남인의 출사가 배제되면서 진사로 일생을 마치는데 파란만장한 삶을 살게 됩니다.
성호 이익의 형인 옥동 이서와 매우 친해 해남에 있는 ‘녹우당(綠雨堂)’ 현판도 이서가 써 준 것이지요. 공재가 그린 ‘동국여지지도’나 두 권 중 한 권만 전하는 그의 저서 ‘기졸(記拙)’을 보면 병법 · 천문 등 백과전서적인 실학의 학풍을 그가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그가 가지고 있던 관심사가 성호 이익의 저서 속에 많은 양으로 나오게 되지요. 반계 유형원에서 성호 이익을 거쳐 다산 정약용으로 이어지는 우리나라 실학의 줄기 중 반계와 성호 사이에 공재 윤두서가 있었던 거예요.
해남 윤씨 종갓집에 있는 목기 깎는 기계를 그린 그림에서도 실학적인 관심을 엿볼 수 있습니다. ‘군마도’ 등 말의 갖가지 형태도 즐겨 그렸지요. 남태응의 증언에 따르면 공재는 그림을 누구한테 배운 바 없고 ‘고씨화보’ ‘당시화보’ 등 중국에서 나온 남종문인화의 성과를 담은 목판본의 그림책을 보고 스스로 익혔어요. 또 마구간에서 하루종일 말을 보면서 스케치하고 나무 그림자의 변화를 탐구하며 머슴을 모델로 세워 미세한 것까지 스케치하고 중국의 세필로 그린 인물화를 연습하면서 자기 기량을 닦았습니다.
45세에 해남 녹우당으로 낙향한 뒤 그린 짚신 삼는 노인 그림은 한국미술사에서 서민이 주인공으로 탄생한 첫번째 그림이지요. 다만 노인 뒤에 ‘고사탁족도’에 보이는 나무가 그대로 있는 점을 볼 때 공재는 현실을 그렸다기보다는 그림 속에 현실을 집어넣은 화가였습니다. 그러나 당시만해도 엄청난 리얼리티를 갖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서민의 모습을 그리되 상황설정에 맞지 않는 관념적인 산수화의 배경까지 전부 없애 서민적인 분위기를 낸 것은 60~70년 뒤인 단원 김홍도에 와서 이뤄져요. 비록 한계는 있지만 저는 윤두서를 18세기 우리 회화의 전성시대로 가는 과정에서 중기의 작가라기보다는 후기 그림의 선구자로 평가하고 싶습니다. 남태응의 ‘청죽화사’ 중 ‘세 화가를 비유하여 평함’이란 유명한 글이 있지요. “김명국은 신품(神品)에 가깝고, 이징은 법품(法品)에 가깝고, 윤두서는 묘품(妙品)에 가깝다”는 평가를 내린 뒤 세 화가의 특징을 우리나라 서예가에 비유하고 각각의 폐단과 장점을 말하고 있는데 ‘화인열전’에 전문이 번역돼 있습니다.
14. 화인열전 - 조영석, 정선, 심사정, 이인상, 최북
조선회화의 전성기인 18세기의 문을 연 것이 공재 윤두서냐 관아재 조영석이냐를 두고 논란이 있지만 저는 윤두서가 문을 열어놓았고 조영석이 그 길을 닦았다고 생각합니다. 조영석(1686~1761)은 함안조씨 집안의 문인으로 겸재 정선보다 10세 연하이면서도 서울 순화동에 함께 살며 서로 존경하는 친구이자 그림과 시의 벗으로 지냈어요. 원래 조영석 자신보다 당대에는 큰형인 조영복이 역사상 훨씬 더 유명했는데 나중에 예술로 이름을 크게 남겨 ‘조영복은 조영석의 형이다’라는 식으로 알려지게 됐습니다. 조영복이 영춘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던 1724년 조영석이 찾아 뵙고 형의 초상화를 그렸지요. 선비화가가 그린 초상화이기 때문에 평상복에 두 손을 모두 표현해 인간적인 면모를 드러내는 등 화원화가가 초상화를 그릴 때 나타나는 공식적인 룰로부터 벗어나 있는 게 특징이에요. 그런데 당시 사회에서 그림을 그려 먹고 사는 것은 환쟁이의 일이었어요. 따라서 지식인들이 시 · 서 · 화를 함께 즐기는 교양의 하나로 할 때는 그 그림의 가치가 올라가지만 이것을 쟁이의 것으로 보면 떨어지기 때문에 이를 확실하게 구별해 놓는 게 당시 조선 시대 사회의 분위기였고 딜레마이기도 했습니다. 예술과 기능을 천시한 당시 선비들에게 이쪽에 종사하거나 그러한 재주를 보이는 것은 흠이 되기 때문에 조영석도 그 점에서 상당히 조심했지요. 결국 세조와 숙종의 어진(御眞)을 그리는 과정에서 문제가 터지고 말았습니다. 1735년 의령 현감으로 있던 조영석은 영조가 세조 어진 감동(감독관)으로 올라오라는 명령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지체하며 올라가지 않아 의금부에 하옥됐다 풀려났으며 1748년 숙종의 어진을 모사할 때도 끝까지 붓을 잡는 것을 거부했지요. 당시 조영석의 이런 행동을 놓고 말이 많았는데, 그는 자신이 아무리 미관말직이라도 선비로서 할 일이 있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이 있다며 취미로 그림을 그릴 수는 있지만 환쟁이가 하는 일을 하고서 어떻게 사대부들과 이빨을(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겠느냐고 주장해 인정을 받기도 합니다. 함안조씨 집안에 조영석이 그린 스케치 14점을 모아 엮은 ‘사제첩(麝臍帖)’이 전합니다. ‘사제’는 ‘사향노루의 배꼽’을 의미하지요. 사냥꾼에게 잡히면 자신의 배꼽에서 나오는 향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배꼽을 물어뜯는다는 사향노루처럼 이 스케치북이 조영석 자신에게는 향기로운 것일지 몰라도 남에게 책을 잡히게 될 소지가 있다는 뜻에서 썼던 것이에요. 제목 바로 옆에 ‘남에게 보이지 말라. 범하는 자는 내 자손이 아니다''勿示人 犯者 非吾子孫(물시인 범자 비오자손)’라는 준엄한 경고를 해놓은 것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여기에 들어 있는 스케치 중 제가 가장 인상적으로 본 것은 ‘새참’이에요. 한 줄로 나란히 앉아 오순도순 새참을 먹고 있는 장면을 그린 것으로 서민들의 삶을 바라보는 애정이 느껴집니다. 양반들이 작당해 소젖을 짜고 있는 ‘우유짜기’는 모성애를 자극해 어미소의 젖이 나오게 하기 위해 송아지를 붙잡아와 어미 얼굴에 들이밀고 있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지요. 수평으로 길게 늘여놓은 구도에서 조영석의 뛰어난 조형감각을 엿보게 되며, 밥먹는 모습뿐만 아니라 않아 있는 자세 모두에서 다양한 표정을 모색하고 있는 것에서 그의 생동감 있는 인물묘사를 볼 수 있다.
다섯 명의 갓 쓴 사람들(내의원의 의원)이 우유를 짜는 그림으로, 한 사람은 코뚜레를, 또 한 사람은 뒷다리를 묶어 잡고 두 사람은 젖을 짜고 있다. 다른 한 사람은 송아지를 붙잡고 있는데, 그 이유는 암소의 젖은 송아지를 보여주어야 나오기 때문이다. 어미 소는 송아지를 보고 있고, 송아지는 젖이 먹고 싶어 어미에게 가려고 발버둥치고 있다. 달려드는 송아지를 한껏 붙잡은 사람의 허리가 휘어 있고, 어미소의 눈이 송아지 쪽으로 향하고 있는 것이 아주 재미있고 정확하게 묘사되어 있다.
조영석의 명작 중 ‘설중방우도’는 눈 덮인 겨울날 방한모를 쓰고 찾아온 친구와 서재에서 고담준론을 하고 있는 선비들의 품위있는 모습과 머슴들끼리 반가워하며 손님이 타고 온 소를 끌고 가는 서민들의 풍경이 조화를 이룬 그림입니다. 환쟁이들만이 가질 수 있는 기법과 지식인들이 갖고 있는 고아한 품격이 함께 담겨있지요.
이규상이 지은 18세기 인물지 ‘일몽고(一夢稿)’에서 화가를 원법(院法·화원의 화법)과 유법(儒法·선비들의 화법)을 구사하는 두 파로 나눈 뒤 “조영석은 원법을 갖고 유화(儒畵)의 정채함을 제대로 펼쳐내고 있다”며 “우리나라 그림은 조영석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크게 독립된 모습을 갖추게 된 것 같다”고 말한 것도 바로 이런 맥락에서지요. 금강산 그림은 이전에도 많이 그려졌지만 실제 금강산을 모티브로 조선 산수화를 정형화한 것은 시작도 끝도 겸재 정선(1676~1759)의 몫이었습니다. 그가 1711년 처음 금강산에 갔다 온 뒤 그린 ‘신묘년 풍악도첩’의 그림들은 헬기를 타고 아래를 내려다본 것 같은 부감법(俯瞰法)에 의한 시각구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비로봉·혈망봉·월출봉 하는 식으로 봉우리마다 이름도 써놨지요. 그러다가 이것을 더욱 세련되게 하고 중국의 화법들을 자기화해 59세때(1734년) ‘금강전도’를 그리는데 같은 작가가 그린 그림이라고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경지로 나아가게 됩니다. 동주 이용희 선생이 진경산수와 실경산수를 구분해야 한다고 말했지요. 실경은 있는 것을 사진 찍듯이 그린 거라면 진경산수는 그 산에서 봤던 감동까지 회화로 옮겨놓는 것을 의미합니다. 화가들은 실경에 얽매여 정작 좋은 진경산수를 그리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한데, 정선과 금강산에 동행했던 시인 사천 이병연의 얘기를 들으면 그는 금강산을 그리기 위해 갔으면서도 붓은 하나도 안가지고 있었다고 해요. 가슴 속에 진경을 담아 화폭에 펼쳐낸 것, 아마 이 점이 좋은 진경산수를 그리는 요체였는지 모르겠습니다. 몰락한 양반출신의 선비화가인 정선과 단원 김홍도의 우위를 비교하는 것이 쉽지 않은데, 60세 무렵에 죽은 것으로 보이는 김홍도와 달리 정선은 60세가 될 때 비로소 진경산수의 경지에 오른 뒤 이후 84세에 세상을 떠날때까지 노필(老筆)로 무르익은 그림들을 그리는 게 특징이에요.
낙관 자체를 겸재 노인이란 뜻으로 겸로(謙老)라고 한 ‘정양사도’를 보면 근경의 정양사와 원경의 일만이천 봉우리가 대비되면서 사실상 ‘금강전도’가 됐습니다. 섬세하고 치밀힌 필치를 보여주는 중년과 달리 노년으로 갈수록 정수만 묘사하고 색채도 밝은 것 몇가지만 사용하지만 원숙한 경지와 함께 중년의 작품을 능가하는 감동을 주지요.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장쾌한 시선으로 화면 왼쪽 아래 장인사에서부터 가운데 꼭대기 비로봉까지 일만이천 봉우리들이 도열하듯 장대하게 펼쳐져 있다. 화면 오른쪽의 골산(骨山)과 왼쪽의 소나무가 많은 부드러운 육산(肉山)은 각각 선과 먹을 중심으로 표현돼 있으며 흑백과 명암 등 주역의 원리인 음양의 조화가 절묘하게 대비된다.
사실 저는 정선이 젊은 시절부터 천재성을 보여준 김홍도처럼 타고난 화가였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갈고 닦고 훈련하고 자기의 혼을 집어넣어 환갑이 됐을 때 자기 형식을 만들어낸 뒤 다시 20년 동안 자신의 모든 역량을 다해 원숙한 그림을 그려낸 대기만성의 모습이 그에 대한 존경심을 더 낳게 하는 것이지요.
먹의 번지기 등이 막 그린 것처럼 보여도 디테일이 매우 섬세하고 아름다운 것이 정선 그림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겸재의 ‘구학첩(丘壑帖)’에 부친 발문에서 “새로운 화법을 창출해 우리나라 산수화가들이 한결같은 방식으로 그리는 병폐와 누습을 씻어버리니, 조선적인 산수화법은 겸재에서 비로소 새롭게 출발하게 된 것이다”라고 평한 조영석의 찬사가 그의 그림이 갖고 있는 역사적 의미를 잘 보여줍니다. 산수를 그리는데 다양성이 부족했다는 평가를 무색케 하는 ‘노백도’ ‘함흥본궁도’ 등의 소나무 그림과 70대 중반 그렸을 것으로 보이는 ‘인왕제색도’와 ‘박연폭포’는 정선의 원숙한 기량이 발휘된 대표작입니다.
현재 심사정(1707~1769)은 정선의 제자라고 했지만 그를 하나도 배우지 않고 자기 나름의 세계를 개척한 분인데 참 불우했어요. 인조반정의 일등공신으로 영의정까지 지낸 만사 심지원의 증손으로 태어났지만 할아버지 심익창이 과거부정 사건과 왕세제였던 연잉군(후에 영조) 시해 미수사건에 연루되면서 명문가에서 하루 아침에 패륜가에 대역죄인의 집안이 돼버렸기 때문입니다. 출세를 할 길은 막혔지만 그림 재주가 있어 이로 이름을 남겼는데 자신의 처지처럼 어두운 분위기에 애잔한 그림을 많이 남겼지요. ‘강상야박도’ 같은 산수화나 ‘파초와 잠자리’ ‘딱따구리’ 등의 화조 · 조충도 등이 모두 이런 분위기를 전합니다. 심사정의 그림을 모화사상에 젖어 있다고 하며 폄하한 때도 있었지만 세계적인 수준에서 봤을 때 심사정처럼 보편적인 가치를 추구한 화가가 있었다는 것이 18세기 우리 조선 화단이 갖고 있었던 건강성이라고 할 수 있지요.
능호관 이인상(1710~1760)은 당대의 명문 중 명문인 전주이씨 밀성군파로 백강 이경여의 현손이었지만 증조부가 서출이었습니다. 그러나 고조부인 이경여가 노론에서 알아주는 선비였기 때문에 당대 일류 문인들과 교유할 수 있었지요. 43세 때 음죽 현감을 그만둔 뒤 단양에 은거하려다 노친의 반대 때문에 지금의 장호원에서 살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눈 덮인 낙랑장송을 그린 ‘설송도’를 보면 그림이 담박하고 고아할 뿐만 아니라 기교는 조금도 강조되지 않는 묘한 인상을 풍깁니다. 선비 그림의 본도(本道)는 그림에 기량·솜씨가 보이면 속하고 천하다고 봤습니다. 따라서 그림에 능하면서도 절대 기교가 능하지 않은 인상을 줘야 하는 것이지요. 문인화가 화풍이 아니면서 문인화의 경지를 완전히 자기 삶 속에서 녹여서 만들어낸 것이 이인상이었다고 보입니다. 최고의 높은 경지라고 할 수도 있을 겁니다.
호생관 최북(1712~1786)은 당대의 기인으로 ‘공산무인도’와 ‘풍설야귀인’처럼 기이하고 개성적인 그림을 많이 그렸지요. 중인 출신으로 자신의 이름인 북녘 북(北)자를 둘로 쪼개서 칠칠(七七)을 자로 삼아 스스로 ‘칠칠’이라고 했던 그는 술을 많이 마시고 성격이 모질어 싸움도 자주 했습니다. ‘붓으로 먹고 사는 사람’이란 뜻의 호생관(毫生館)이란 호를 스스로 지은 그는 말 그대로 그림을 팔아먹고 사느라 작품을 남발했어요. 그러나 그림을 모르는 사람이 그림을 사러오면 팔지 않는 등 그의 비위를 맞추기도 참 힘들었습니다. 어느날 한 귀인(貴人)이 부탁한 그림을 그려주지 않는다고 최북을 협박하자 자기 문갑 위에 있는 필통에서 송곳을 꺼내 한쪽 눈을 찔러 애꾸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때부터 돋보기 안경도 한 알만 사서 끼고 그림을 그렸다고 합니다. 통신사를 따라 일본을 여행하고 만주벌 너머 흑룡강까지 들어갔다 오는 등 수수께끼 같은 행적을 보인 그는 어느 겨울날 술에 취해 돌아오는 길에 성벽 아래에서 잠들었다가 폭설이 내려 그만 얼어죽고 말았어요. 도저히 세상이 갖고 있는 룰 속에 못들어간 것이 그의 인생이었지만, 미술사에서 이런 분이 있었기 때문에 재미도 있고 다양성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15. 화인열전 - 산수·인물·풍속 망라··· 장르 초월한 ‘神筆’
표암 강세황, 단원 김홍도, 오원 장승업
공재 윤두서에서 겸재 정선까지 그동안 얘기해온 18세기 영조 때의 기라성 같은 화가들은 전부 화원 출신이 아닌 사대부 출신 화가들이었습니다. 동양화를 보면 선비화가와 직업화가란 화가의 두 줄기가 있지요. 그런데 중국의 경우, 새로운 화풍을 만들어내는 것은 다 선비화가였고 이를 일반인들이 공유하게 됐을 때 직업화가들이 나와 하나의 양식으로 완성을 해놓고 이것이 하나의 사조를 형성하곤 했습니다.
회화라고 하는 것이 단순히 베껴서 그리는 손놀림 솜씨가 아니고 그 속에 무엇을 담을 것인가, 어떻게 담을 것인가 하는 것은 고차원의 인문정신의 소산이라고 볼 때 당연히 그것을 창출하는 사람들은 선비화가일 수밖에 없지요. 산수화라는 장르 자체를 만든 곽희나 원나라 때의 조맹부, 명나라 말기의 심석전(심주)과 동기창 등은 대학자였고 이를 나중에 직업화가들이 받아갔던 것입니다. 중국과 마찬가지로 선비화가들이 만든 조선 시대 회화를 화원들의 세계로 넘겨준 역할을 한 인물로 표암 강세황(1713~1791)이란 분이 있습니다. 그림보다는 시와 글씨로 더 유명했던 표암이 역사상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바로 단원 김홍도(1745~1805?)라는 화가를 발견해냈기 때문이지요.
단원이 어린 나이에 궁중 도화서 화원으로 들어간 것도 표암의 추천으로 이뤄진 것으로 생각됩니다. 명나라 화가인 심석전의 그림을 모방해 벽오동 밑에서 더위를 식히는 ‘벽오청서도’와 개성 영통동을 실경산수로 그린 ‘영통동구도’ 등이 표암의 대표적인 그림들입니다. 특히 둥근 바위에 양괴감을 표현한 ‘영통동구도’는 서양화법으로 그린 것으로 전통 동양화법에선 전혀 없었던 시도를 한 것이에요. 북인계통으로 출세에 뜻이 없어 처갓집이 있는 안산과 서울 회현동에서 시·서·화를 하며 지냈던 표암은 두 아들이 과거에 합격해 출세하고 국가에 공을 세운 덕분에 영조의 배려로 환갑이 넘은 나이에 여주 영릉참봉으로 첫 관직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늙은이들을 위한 과거시험에 장원급제를 해 지금의 서울특별시장격인 한성부판윤으로까지 일약 승진하지요. 청나라 건륭제가 칠순을 맞아 주변 나라의 축하사절로 70세가 넘은 사람을 요구하자 뽑혀서 베이징(北京)에 다녀온 뒤 이곳 성당에서 벽화를 보고 서양화법에 대한 유명한 글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김홍도는 1781년 37세 때 비로소 ‘단원(檀園)’이란 호를 스스로 짓게 됩니다. 단원은 원래 김홍도가 좋아했던 ‘개자원화보’의 밑그림을 그린 명나라 말기의 유명한 화가인 이유방의 호였어요. 김홍도가 가져온 단원이란 호를 보고 표암이 그대로 하면 좋겠다고 하니까 김홍도가 이를 현판으로 써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러나 표암이 생각해보니 김홍도가 ‘단원’이란 현판을 달 정원은커녕 집도 없는 무주택자이기 때문에 큰 글씨로 현판을 써주기보다는 작은 글씨로 단원이 갖고 있는 의미와 그가 누구인가를 써주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해 ‘단원기(檀園記)’란 글을 지어줍니다. 그리고 이를 써놓고 보니까 좀 고치고 싶어서 ‘단원기 우일본(又一本)’을 다시 썼는데, 두 글이 단원의 37세 때까지의 일생을 얘기하는 가장 정확한 정보를 담은 글이 됐지요. 두 글에서 표암은 단원을 지칭해 ‘근대의 명수(名手)’ ‘무소불능의 신필(神筆)’이라 하고, 인물 · 신선 · 화조 · 산수 · 풍속 등 어떤 장르를 갖다놓아도 다 자기가 원하는 대로 그려낸 고금에 드문 화가라고 극찬하고 있습니다.
단원은 정조 어진을 제작한 공로로 안기찰방으로 나가기 전 궁중의 채마밭을 관리하는 사포서에서 표암과 함께 근무한 적도 있습니다. 이와 관련, 표암은 단원을 세 번 다른 형태로 만났다는 글을 남깁니다. 7~8세 때 이를 갈 무렵에 나에게 와 그림을 배웠으니 처음에는 사제지간으로 만났고, 훗날 뒤늦게 출사해 사포서의 책임자(별제)로 있을 때 단원이 임금의 초상화를 잘 그려 내 부서에 와 근무했으니 중간에는 직장의 상하관계로 만났고, 세월이 지나서 단원의 화명(畵名)이 높아지자 사람들이 그에게 그림을 부탁한 뒤 다시 내게 가져와 여기에 시(詩) 또는 제(題)를 써달라고 했으니 나중에는 예술로써 만났다는 내용이에요.
이렇게 사제간에 합작한 작품 중에 소나무 아래 호랑이를 그린 ‘송호도’란 작품이 있습니다. 소나무는 표암이 문인화풍으로 그리고 호랑이는 김홍도가 그린 것인데 수만 번의 붓질로 호랑이의 털 하나하나를 표현한 것을 보면 프로정신이 무엇인가를 느낄 수 있지요. ‘명작은 디테일이 아름답다’는 얘기가 여기에서도 그대로 통합니다. 단원은 32세 때 정조의 명을 받아 기록화인 ‘규장각도’와 ‘군선도’ 등을 그렸는데, 사실 단원이 처음 이름을 날린 것은 신선그림 때문이었지요. 지금도 교과서에 단원은 조선 시대 풍속화가라는 식으로 소개돼 있는 데, 이는 정말 잘못된 것입니다. 표암의 얘기대로 단원은 시대가 요구하는 모든 장르를 다 소화해낼 수 있었던 분이었어요. ‘군선도’에서 선녀의 옷을 표현하며 거칠게 획을 그은 것이나 붓의 운필(運筆), 강약이 들어가 있는 박진감 넘치는 필치 등이 천상이라기보다는 지상의 현실 속에 있는 선녀를 그린 느낌을 줍니다. 이처럼 어떤 소재를 주어도 자기식으로 소화를 하고 당시 현실이 요구하고 있는 수준보다 더 높은 차원 속에서 제시를 했기 때문에 정조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단원에게 관심을 갖고 여러 가지 일을 시켰던 것이지요.
단원의 그림 중 유명한 ‘속화첩’은 공재 윤두서에서 관아재 조영석을 거치며 50여 년 동안 꾸준히 개발돼 온 우리들의 삶의 표정을 담아놓는 그림 장르가 단원에 와서 드라마틱하게 꽃을 피운 것입니다. 카메라로 찍힌 재미있는 사진을 보고 웃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떤 상황의 찰나를 포착한 그림을 보면서 그 상황을 추체험하며 즐거움을 찾는 효과가 단원의 그림 속에 있는 것이지요.
‘속화첩’ 중 ‘새참’을 보면 치열하게 밥을 먹는 사람들과 이를 하염없이 부러운듯 바라보는 개의 모습이 잘 표현돼 있습니다. 가지런히 줄지어 앉아 새참을 먹는 조영석의 ‘새참’과 비교가 되는데, 관아재가 지식인으로 애정을 갖고 농민의 삶을 표현한 것이라면 단원은 농민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그림을 그린 것이지요. 민중미술적인 시각으로 봤을 때 단원이 훨씬 민중미술에 가깝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지식인에 의해 관조적으로 봐오던 새참 장면이 농민의 심성에 들어가 그린 것으로 바뀐 것은 50년 동안 세월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일 뿐이며, 그것이 관아재와 단원 그림의 어떤 차별성을 얘기하는 것은 전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춤사위를 역동적으로 포착한 ‘무동’이나 혜원 신윤복의 주특기인 빨래하는 여자를 지나가는 나그네가 훔쳐보는 ‘빨래터’, 관중들의 표정으로 누구를 응원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씨름’ 등을 보면 신문지 반면도 안되는 크기의 그림 속에 시각도 정면이 아닌 부감법으로 그리면서 이처럼 작은 인물들을 극명하게 표현한 솜씨에 놀라게 됩니다.우람한 가슴을 풀어헤치고 물 한 바가지를 달라는 나그네와 물을 떠주면서 내외하느라 고개를 살짝 돌린 아낙의 모습 등을 표현한 ‘우물터’ 등에서 보이듯 단원이 그린 속화(풍속화)는 연극의 한 장면, 또는 영화 속의 한 장면 같은 상황을 만들어놨기 때문에 어떤 것보다 큰 감동을 주지요.
대상에 대한 리얼리티를 강조하기 위해 속화에 배경을 그리지 않은 것도 단원 그림의 특징입니다. 반면 단원과 속화에서 쌍벽을 이룬 혜원은 완연히 다른 세계를 보여줍니다. 춘화를 그리다가 도화서에서 쫓겨났다는 얘기가 전해지는 혜원은 당대나 후대 사람들이 그에 관해 증언해 놓은 것이나 그림을 평가해놓은 것이 하나도 없어요. 그래서 그림의 도상을 가지고 얘기할 수밖에 없는데, 단원은 필치가 거칠고 주변 배경을 생략한 데 비해, 혜원은 부드러운 필치에 주변 배경을 치밀하게 묘사한 점 등에서 정반대입니다.
1788년 44세 때 단원은 정조의 명을 받아 복헌 김응환과 함께 40여일 동안 관동팔경과 금강산 등의 스케치여행을 다녀옵니다. 이때 정조에게 바친 수십 m 되는 장폭의 두루마리 그림은 오늘날 전하지 않고 이를 위해 밑그림으로 그린 ‘금강사군첩’ 70폭 중 60폭만 전하고 있지요. 이 중 ‘구룡연’ 등의 그림에 대해 단원의 그림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는 여러 가지 제작여건이나 나이를 감안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일찍이 동주 이용희 선생은 “김홍도의 작품으로는 예외적으로 꼼꼼하고 치밀한 그림”이라며 “아마도 임금의 명으로 그린 그림이기 때문에 자기의 불성실한 것 같은 개성을 발휘하기 힘들었을 것”이란 평가를 내렸습니다. 반면 50대 중반에 그린 ‘구룡폭도’는 단원의 필치를 한껏 맛볼 수 있지요. 단원의 작품은 30대에서 60세 무렵까지 계속 변하고 있으므로 50대 그림만 본 사람들은 30대 후반의 작품에 대해선 그의 작품이 아니라고 얘기할 소지가 있습니다. 수원 용주사의 ‘후불탱화’를 그리고 정조 어진 제작에 참여한 단원은 1791년 12월 연풍현감에 발령받아 부임했지만 1795년 을묘년 정월 만 3년 만에 “남의 중매나 일삼고 겨울에 사냥한다며 군정을 징발해 원성이 자자하다”는 죄목으로 파직당합니다.
상경하자마자 단원은 ‘능행도’로 알려진 ‘원행을묘정리의궤’ 삽화와 8곡 병풍을 그리는 일을 맡게 되지요. 단원의 50대 산수화가 지닌 서정성 넘치는 진경산수의 진면목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기념비적 명작인 ‘총석정도’. ‘을묘년화첩’에 실린 것으로 단원이 연풍현감에서 파직된 1795년 가을에 그린 것이다.
그러나 이런 불명예 제대를 계기로 평민으로 돌아온 50대의 단원은 이후 궁중의 화사(畵事)에 차출되지 않고 자신이 그리고 싶은 그림을 마음껏 그릴 수 있게 됩니다. 특히 후원자였던 대부호 김경림의 집에서 좋은 작품들을 많이 그렸는데, ‘을묘년화첩’의 ‘총석정도’는 실경산수가 갖고 있는 박진감과 남종문인화가 가지고 있는 그윽함이 동시에 한 화면 속에 들어가 있는 명작입니다. 을묘년 다음 해인 병진년에 단원이 그린 ‘병진년 화첩’에 산수화 10폭, 화조화 10폭이 들어 있습니다. 이중 충주댐으로 허리춤까지 물에 잠긴 옥순봉을 그린 ‘옥순봉도’와 헬기를 타고 가며 사진 찍은 듯 그린 ‘도담삼봉도’ 등이 단원의 산수화를 대표하는 명작이지요.
나귀를 타고 가다 버드나무 가지 위에서 우는 꾀꼬리 소릴 듣기 위해 멈춰선 나그네를 표현한 ‘마상청앵도’는 한국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서정을 표현한 그림이며 60세인 1804년 9월 개성 노인 64명이 옛 고사에 따라 고려 궁궐터인 만월대에서 계회를 벌인 장면을 그린 ‘기로세련계도’는 단원의 마지막 대작입니다. 연꽃 대좌에 앉아 서쪽 극락세계로 염불을 외며 입적하는 노승의 뒷모습을 그린 ‘염불서승도’는 단원이 자기의 바람을 표현한 듯합니다.
조선 후기에 오면 산수화 인물화 화조화 신선화 외에 책거리 그림도 많이 유행했는데 단원은 이 방면에서도 아주 뛰어난 기량을 보였습니다. 지금까지 있었던 남종문인화와 진경산수, 속화 등 세 줄기의 그림이 표암을 통해 단원이란 호수 속에서 종합됐기 때문에 이후의 모든 화가들은 그를 따라가기만 하면 됐습니다. 그리고 이런 단원의 위대함보다 바로 단원 같은 화가를 낳은 정조 시대가 더 위대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지요. 조선 사회가 가지고 있던 민족주의적인 화풍이 단원 이후 매너리즘에 빠져있던 1830~40년대 국제주의자였던 추사 김정희가 나와 청나라의 고증학에 입각한 새로운 화풍을 도입하면서 ‘세한도’ 같은 고담한 문인화가 유행합니다.
추사의 8대 제자들이 퍼져나가면서 조선화단은 진경산수나 속화가 아닌 문인화풍으로 다시 돌아가게 됩니다. 소치 허련이나 자하 신위, 우봉 조희룡 등이 이런 경향을 대표했지요. 북산 김수철과 흥선대원군 이하응 등 19세기 후반으로 가면서 파격적이고 개성적인 그림들이 유행하면서 진짜 옛날 그림처럼 리얼리티가 있는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없을 때 등장한 것이 오원 장승업이었지요. 오원의 신화는 바로 거기에서 생겨났던 것인데, 노비 출신으로서의 신분적 제약과 자기 관리를 못한 탓에 타작을 많이 만들어낸 게 그의 불행이었습니다.
조선 후기가 되면서 왕실과 양반뿐만 아니라 여염집에서도 경제적 여유를 가지고 집안 장식을 하게 되고 각 지방에서 그림을 그려 파는 사람들이 나타나면서 민화들이 나오게 됩니다. 단원의 ‘총석정도’나 ‘소상팔경도’를 민화로 옮겨놓은 것들을 보십시오. 우리가 예술의 세계를 접하다 보면 그것이 갖고 있는 미적 가치의 척도가 얼마나 다양한지를 알 수 있는데, 민화가 갖고 있는 매력은 어린애의 그림이 갖고 있는 천진성이나 단련된 천진성을 추구했던 대가들의 그림과는 다른 애시당초 창작 동기에서부터 모든 정서가 그저 있는 그대로, 기량 그대로 그려도 이를 개의치 않을 수 있는 데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대가들은 절대 따라할 수 없는 것이지요. 아프리카 원시조각을 보고 피카소나 마티스가 거기에 매료된 것도 자기네들은 도저히 흉내낼 수 없는 별도의 예술세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효제충신예의염치(孝悌忠臣禮義廉恥)’ 등의 한문자와 그 의미를 형상화한 그림인 문자도(文字圖)와 까치와 호랑이 그림 등의 민화에서 지배층의 문화를 본받으면서 피지배층이 갖기 시작한 자기만의 문화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