팍스 로마나
시오노 나나미
제1장 통치 전기 기원전 29년-기원전 19년[아우구스투스 34세~44세]
젊은 최고 권력자
기원전 31년 9월, 그리스 서해안 앞바다에서 치러진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연합군은 패배했다. 이듬해인 기원전 30년 8월, 이집트로 달아난 두 패배자 가운데 한 사람은 칼로 자결하고, 또 한 사람은 스스로 독사에 물려 자살했다. 그리고 기원전 29년 8월, 승리자 옥타비아누스를 맞이한 로마에서는 웅장하고 화려한 개선식이 사흘 동안 거행되었다. 개선식은 외적 이집트에 대한 승리를 신들에게 알리고 시민들과 함께 경축하기 위한 것이었다. 시민들은 한껏 열광했다. 로마인이라면 철부지 어린애까지도 그 의미를 알고 있었다. 이번의 개선식이야말로 오랜 내전의 종식을 알리는 행사였다. 전쟁의 신 야누스를 모시는 신전의 문도 닫히게 된다. 이 문이 열려 있는 한 로마는 전쟁 상태에 있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베르길리우스나 호라티우스를 비롯하여, 시대의 흐름에 남보다 훨씬 민감한 시인들도 되찾은 평화에 대한 기쁨을 소리 높여 노래했다. 그런 가운데 옥타비아누스는 34세를 맞이하고 있었다.
개선식도 끝난 9월, 옥타비아누스는 양아버지이기도 한 카이사르에게 바치는 신전을 포로 로마노 중심부에 짓겠다고 공표했다. 동시에 카이사르가 생전에 기획한 원로원 의사당(쿠리아)을 카이사르의 의도대로 포로 로마노의 연장 부분으로 세워진 '카이사르의 포룸'에 잇대어 짓겠다고 공표했다(지금 남아 있는 원로원 의사당은 후대에 개축한 것으로, 원래의 위치에서 조금 벗어나 있다). 또한 팔라티노 언덕 위에 아폴로 신에게 바치는 신전도 세우기로 결정했다. 전쟁과 복구의 신 마르스에게 바치는 신전을 중심으로 하는' 아우구스투스의 포룸'은 한창 건설되고 있는 중이었다. 이 신전 건립의 목적은 기원전 42년에 브루투스와 대결한 필리피 회전을 앞두고 마르스 신에게 서약한 것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한편 아폴로 신전을 건립하는 것은 안토니우스와 대결한 악티움 해전을 앞두고 아폴로 신에게 승리를 기
원했기 때문이다.
팔라티노 언덕은 고급 주택가라서 서민들이 발을 들여놓는 일은 거의 없었지만, 거기에 세워지는 아폴로 신전은 고립된 성역이 아니었다. 문예의 신 아폴로에 걸맞게 신전 가까이에 국립도서관이 세워졌기 때문이다. 그리스어 서적과 라틴어 서적을 소장한 국립도서관은'카이사르의 포룸'안에 있는 것과 아폴로 신전에 병설된 도서관을 합하여 두 개가 되었다. 로마인들이 공공사업으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인프라스트럭처'(사회간접자본)를 정비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말이 나온 김에 한마디 덧붙이자면, '인프라스트럭처' 자체에 해당하는 라틴어 낱말은 없지만, '밑에'나 '안에'를 뜻하는 '인프라'는 그대로 라틴어이고, '스트럭처'는 구조를 의미하는 라틴어 '스트룩투라'에서 나왔다. 사회간접자본의 개념은 고대 로마에서 생겨난 것이다.
사회간접자본의 중요성을 아는 민족은 그것의 보수와 유지의 중요성도 알고 있다. 옥타비아누스가 최고 권력자가 된 직후에 시행한 사회간접자본 정비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공사는 로마에서 북상하는 두 개의 간선도로 가운데 하나인 플라미니아 가도의 전면적인 보수공사였다. 이 대공사에 들어간 비용은 모두 옥타비아누스가 자기 돈으로 충당했다.
이것까지는 개선장군이 전통적으로 하는 일이었다. 승리를 거둘 수 있도록 도와준 신들에게 감사를 표하고 승리로 얻은 명예를 공동체에 환원하기 위해 공공사업을 벌이는 것은 개선식을 거행할 수 있을 만큼 훌륭한 업적을 이룩한 사람의 책무로 여겨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원전 29년 당시의 옥타비아누스는 단순한 개선장군이 아니었다. 기원전 82년의 술라, 기원전 46년의 카이사르와 마찬가지로 절대 권력자의 자리에 올라 있었다. 그리고 술라는 패배한 마리우스 파 사람들의 명단을 손에 넣었고,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 파 잔당들의 편지를 비롯한 증거서류를 손에 넣었듯이, 옥타비아누스도 안토니우스 파 가담자들에 대한 모든 정보를 손에 넣었다. 하지만 그런 증거서류를 활용한 방법은 세 사람이 제각기 달랐다.
술라는 그것을 토대로 정적에 대한 철저한 숙청을 단행했다. 4천700명이나 되는 로마의 유력자들이 살해되고 재산을 몰수당했을 뿐 아니라, 그들의 자손까지도 공직에서 추방되었다.
카이사르는 증거서류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태워버렸다. 그리고는 폼페이우스 파였다는 게 분명한 비밀 동조자들도 모두 용서했다. 카이사르의 '관용'(클레멘티아)은 공직 복귀까지도 허용하는 것이었다.
카이사르의 이같은 조치를 그의 후계자로 자타가 인정하는 옥타비아누스도 답습했다. 안토니우스를 끝까지 추종한 자들까지도 다시 원로원 의석에 앉게 되었다. 증거서류도 카이사르처럼 불태웠다는 소문이 퍼졌지만, 그 장면을 실제로 목격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34세의 절대 권력자는 안토니우스 파였던 자들의 은밀한 두려움을 그대로 방치하는 쪽을 선택했다.
군비 삭감
로마 전체가 '화합'(콘코르디아)의 회복을 기뻐하는 가운데, 젊은 최고 권력자는 그 기쁨을 갑절로 늘리는 정책을 발표했다. 군비 삭감이 그것이다. 이 조치는 군대를 실제로 지휘하여 승리를 거둔 아그리파의 동의와 협력이 없었다면 이룰 수 없는 것이기도 했다. 기원전 29년 당시, 유일한 승자가 된 옥타비아누스에게는 막강한 군사력이 남아 있었다. 그 자신이 기록한 바에 따르면 50만 명이 넘는다. 이렇게까지 늘어난 것은 안토니우스 진영에 붙었던 장병들까지 가세했기 때문이다. 투항한 병사는 승장에게 충성을 맹세하면 포로가 되는 것을 면할 수 있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육상전도 치르지 않고 패했기 때문에, 적병 대부분이 고스란히 투항하게 되었다.
젊은 권력자는 50만으로 늘어난 군사력의 대폭 삭감을 단행한다. 하지만 로마군 병사인 만큼 빈손으로 제대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일자리를 마련해주고, 직업을 바꾸는 데 필요한 밑천도 마련해줄 필요가 있었다. 일종의 퇴직금이다. 이를 게을리 하면 사회 불안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문제는 재원이다. 클레오파트라가 남긴 '프톨레마이오스 왕가의 보물'을 팔아서 그 돈을 모두 투입했지만, 그래도 부족했다. 결국 옥타비아누스 자신이 개인 재산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병역 지원자의 대다수는 무산계급(프롤레타리)에 속하거나, 재산은 조금 있지만 차남이나 삼남인 사람들이다. 고향에 돌아가기로 작정한 사람이나 속주에 건설될 식민도시에 가기로 작정한 사람들을 위해 정착지를 선정해주고 땅을 사주는 것은 모두 옥타비아누스의 책임이었다. 어디에 어떤 규모로 이주민을 정착시키느냐 하는 것은 국가의 정략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이유로 군사력 삭감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질 수 없는 대사업이다. 그런데도 옥타비아누스는 서두른 게 분명하다. 50만이나 되는 병력을 유지하는 비용만 생각해도 '군축'을 서두를 필요가 있었다. 이 대사업이 언제쯤 끝났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최종적으로는 28개 군단 16만 8천명 까지 군사력을 줄였다.
그러나 젊은 최고 권력자는 평화가 회복되었으니까 군비를 줄인다는 식의 단안적인 생각으로 군사력을 줄인 것은 아니었다. 병사 개개인의 생산성을 높인다는 말은 좀 이상할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그것을 목적으로 한 군제개혁도 실행한다. 하지만 내가 '리스트럭처'라는 말에 어울린다고 감탄한 군사력 재편성에 관해서는 나중에 다시 설명하고자 한다.
옥타비아누스는 수단은 달랐지만 목적에서는 카이사르와 똑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로마 국가는 이제 영토 확장의 시대에서 영토 유지의 시대로 들어갔다는 인식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카이사르가 그 목적을 향해 걸어갈 수 있게 된 것은 50대 중반이 가까워서였다. 반면에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보다 스무 살이나 젊은 나이에 그 길에 들어서는 행운을 얻는다. 위장이 약한 옥타비아누스는 건강에서는 카이사르를 따라가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50대와 30대는 사용할 수 있는 시간에 대한 사고방식이 다르다. 옥타비아누스가 천천히 느긋하게 해나 갈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국세조사
이듬해인 기원전 28년, 그해의 담당 집정관(콘술)이었던 옥타비아누스와 아그리파는 국세 조사를 실시했다. 지난번 국세조사는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가 집정관이던 기원전 70년에 이루어졌으니까, 42년 만의 '켄수스'다. 이것도 로마에 평화가 돌아온 증거라고 사람들은 기뻐했다. 하지만 이해에 실시된 '켄수스'는 지금까지의 것과는 달랐다.
현대에도 '켄수스'가 각국 언어로 국세조사를 의미하는 낱말의 어원이 되어 있는 것으로도 알 수 있듯이, '켄수스'는 국력의 종합적인 조사였다. 종래의 국세조사에서는 재산과 17세 이상의 성년 남자의 수만 조사했는데, 그것은 조사 목적이 병역 해당자의 수를 아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조사 대상도 본국에 사는 로마 시민권 소유자로 한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옥타비아누스가 살아 있는 동안만 해도 세 차례-기원전 28년, 기원전 8년, 서기 14년-에 걸쳐 실시된 국세조사에서는 여자와 어린애, 노예까지도 조사 대상이 된 모양이다. 하지만 오늘날까지 역사적 사실로 남아 있는 것은 역시 가장 중요한 항목으로 여겨지고 있던 17세 이상의 성년 남자로서 로마 시민권 소유자의 수였다.
옥타비아누스가 직접 남긴 기록에 따르면 그 숫자는 다음과 같다.
기원전 28년 - 406만 3천명
기원전 8년 - 423만 3천명
서기 14년 - 493만 7천명
이 유권자 수는 옥타비아누스에게 생전의 카이사르가 간파한 로마식 공화정 체제의 한계를 재인식시켰을 게 분명하다.
로마식 공화정 체제에서 최고의결기관은 시민권을 가진 유권자의 모임인 민회인데, 이처럼 유권자 수가 늘어나면 수도 로마에 와서 선거권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의 비율은 계속 줄어든다. 이래서는 시민의 의견을 반영한다고 해도 극히 일부의 의견밖에 반영할 수 없다. 또한 기원전 1세기의 로마 통치자들에게는 로마 시민권을 갖고 있는 본국인만이 아니라 그보다 열 배나 많은 속주민을 다스리는 일도 부과되어 있었다.
그거야 어쨌든, 42년 전의 조사에서는 유권자 수가 90만 명에 불과했다. 그 수가 이처럼 크게 늘어난 이유는 우선 카이사르가 주민 전체에 로마 시민권을 부여한 북이탈리아 속주가 이번 조사부터 본국 이탈리아에 추가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두 번째 이유는 속주까지도 조사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국세 조사가 시행된 뒤에는 속주세도 그 결과를 토대로 부과되었다. 무슨 일이든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는 현재 상황부터 정확히 파악하는 것을 기본자세로 삼는 게 당연하다.
국세조사 결과가 가장 빨리 나온 것은 본국 이탈리아와 로마 시민이 이주하여 정착한 식민도시(콜로니아)였다. 로마인들은 이런 종류의 조사에 익숙해져 있었고, 지방자치단체(무니키피아)를 중심으로 이런 조사에 필요한 조직이 만들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 못한 속주에서는 본국과 같은 효율성을 요구할 수 없고, 따라서 결과가 올 때까지 몇 년이 걸린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 시기의 옥타비아누스는 1500년 뒤인 르네상스 시대의 정치사상가 마키아벨리의 권고-"새로운 정책을 단행해야 할 경우에는 사람들에게 생각하고 비판할 시간을 주지 않도록 잇달아 해야 한다."-를 미리 받아들인 것 같았다. '군축'이 진행되는 동안 속주까지 대상을 넓힌 국세조사를 시작했을 뿐 아니라, 같은 해인 기원전 28년에 자신과 가족을 위한 무덤도 건설하기 시작했다.
영묘 건설
피라미드는 이집트 파라오들의 내세에 대한 집착을 보여주고, 오리엔트의 전제군주들은 웅대한 영묘를 지어 권세를 과시하는 습관이 있었지만, 고대 로마의 지도자들에게는 이런 집착도 습관도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무덤에 무관심했던 것은 아니다. 오늘날에도 아피아 가도 양쪽에 늘어서 있는 무덤 유적이 그것을 증명한다. 이집트를 흉내 내어, 본집에 비하면 개집 정도밖에 안되는 축소판 피라미드를 세운 괴짜도 있었다. 하지만 그 수수한 규모로 보나 부장품이 일상용품으로 한정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도, 고대 로마인은 내세에 별로 집착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무덤도 죽은 뒤의 안식처를 넘어서지 않았다.
훗날 '황제묘'(마우솔레움 아우구스티)라고 불리게 된 그 영묘는 포로 로마노에서 북쪽으로 곧장 뻗어 있는 플라미니아 가도와 그 언저리에서 물줄기가 크게 휘돌아 남쪽으로 흐르는 테베레 강 사이에 세워졌다. 오늘날에는 강기슭에 제방이 완비되었을 뿐 아니라 그 위로 자동차도로까지 달리고 있지만, 그 당시에는 테베레 강에 상당히 근접해 있었을 것이다. 그곳은 구불구불 흐르는 테베레 강에 둘러싸여 예로부터 '마르스 광장'(캄푸스 마르티우스)이라고 불리는 지대의 북쪽 끝에 해당하는 곳이었다. 카이사르가 여기저기를 파괴했지만 그래도 아직 개념상으로는 온전하게 남아 있던 '세르비우스 성벽' 바깥쪽이니까, 도심부에는 무덤을 두지 않는다는 공화정 로마의 방식에 어긋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3단으로 우뚝 솟은 지름 90미터의 원형 영묘는 사람들의 눈길을 끌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벽에는 온통 하양 대리석을 발랐고, 각 단마다 심어진 노송나무들이 1년 내내 무덤을 푸른빛으로 장식한다. 원형 영묘의 바깥쪽도 역시 대리석으로 사방을 둘러싸고, 맨 윗단의 노송나무보다 더 높이 이 영묘 주인의 동상이 우뚝 솟아 있다. 입구는 남쪽, 그러니까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로마 시민들이 모이는 '마르스 광장' 쪽으로 열려 있었다.
이 '황제 묘'는 우리 집에서 도보로 2분밖에 걸리지 않는 거리에 있다. 따라서 날마다 그
옆을 지나게 되는데, 그때마다 나는 이런저런 상념에 잠기곤 한다.
35세의 젊은 권력자가 벌써 무덤을 염두에 두다니, 왜 그랬을까, 허약한 체질이었다고는 하지만, 그때는 아직 큰 병을 앓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가 이 영묘를 지을 때까지 로마에는 이만큼 규모가 큰 무덤을 지은 사람이 없었다. 200년 뒤에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테베레 강맞은 편에 오늘날'카스텔 산탄젤로'라고 불리는 영묘를 지었지만, 그때까지는 이 '마우솔레움'이 로마에서 가장 크고 가장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묘소였다.
팔라티노 언덕 위의 저택이 그토록 소박한데, 무덤만은 왜 웅장하고 화려하게 지었을까 평생 동안 내세보다 현세를 중시한 그의 생활방식으로 보아도 내세에 더 강하게 집착하는 타입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무덤에 무관심했던 카이사르의 양자로서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카이사르의 후계자라는 지위를 과시한 옥타비아누스가 왜 무덤 짓는 일을 그렇게 서둘렀을까. 그리고 왕정복고에는 본능적인 거부반응을 보인 로마인들에게 영묘 건설이 의혹을 불러일으킬 거라고 걱정하지는 않았을까.
하지만 '마우솔레움'을 건설한 것은 순전히 정치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그리고 35세의 건축주는 이런 행위에 가장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기 쉬운 원로원을 회유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정보 공개
로마에서는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집정관에 처음 취임한 기원전 59년에 제정한 법률이 기원전 28년까지 30년 동안 그대로 시행되고 있었다. '악타 디우르나' 또는 '악타 세나투스', 직역하면 '일보'또는 원로원 의사록'이라고 불리는 이 법률은 원로원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토론이나 결의를 이튿날 포로 로마노의 벽면에 게시하도록 규정한 이른바 '정보 공개법'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원로원 회의는 말하자면 배타적인 회원제 클럽 같은 것이어서, 토의나 의결은 닫힌 문안에서 이루어 졌고, 일반 시민들은 회의장 밖으로 나온 의원들의 입을 통해서나, 또는 원로원 결의가 민회의 승인을 얻기 위해 제출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그 내용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카이사르는 그것을 심의 단계에서 공개해버린 것이다. 시민-유권자-도 정보를 얻을 권리가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속으로는 불만을 품었던 원로원 의원들도 찬성표를 던질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불만을 품는 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비밀이란 그것을 소유하는 자의 권력을 강화하는 데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기 때문이다. 카이사르의 정보 공개법은 정보 공개의 필요성을 공인시킨다는 목적을 갖고 있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원로원이 누리고 있던 기득권의 한 모퉁이를 무너뜨리려는 목적도 갖고 있었다.
이런 카이사르의 양자로서 자타가 그의 후계자로 인정하는 옥타비아누스는 이 법을 고치는 조치를 취한다. 원로원 의사록이 로마의 도심 중에서도 도심인 포로 로마노에 그 이튿날 당장 나붙는 일은 없어졌다. 원로원 의원들이 기뻐한 것도 당연했다. 카이사르의 아들은 '원로원 체제'를 타파하는 데 전념한 카이사르와는 달리 원로원의 권위를 인정할 작정인 모양이라고 그들은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옥타비아누스는 처음 실시되었을 때부터 평판이 좋아서 그 후 30년 동안이나 지속되어온 법률을 완전히 폐지해버리는 방식은 취하지 않았다. 그는 세간에서 쓰이는 호칭인 '악타 디우르나'와 '악타 세나투스'를 내용에 따라 분리했다.
'악타 세나투스'는 전과 마찬가지로 속기로 기록되어 모두 '공문서 보관소'(타불라리움)에 보관되고,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언제든지 읽을 수 있는 자유를 보장했다. 이것으로 정보 공개라는 이념은 지켜졌다. 하지만 서민들이 틈만 나면 모이는 포로 로마노에 나붙어 의식하지 않아도 저절로 눈에 들어오는 정보 공개가 아니라, 알고 싶은 사람이 일부러 찾아가서 읽어야만 비로소 실현되는 정보 공개다. 원로원 의원들로서는 자기 발언이 그 이튿날 당장 서민들의 입에 오르내리지 않게 된 것만으로도 환영할 만한 개혁이었다.
그러면 '악타 디우르나'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옥타비아누스는 이것을 '일보'라기보다는 '관보'로 번역하는 편이 어울리는 것으로 바꾼다. 수도 로마에서 결정된 모든 공지 사항, 즉 원로원 의결 사항이나 공직 선거 결과를 자세히 기록하여, 본국의 지방자치단체나 속주의 식민도시에 거주하는 로마 시민들에게 알리는 '관보'가 된 것이다.
제 2대 황제인 티베리우스 시대부터는 원로원에서 토의한 내용까지 요약하여 게재했고 내용도 더욱 충실해졌기 때문에, 이것을 근대 신문의 효시라고 말하는 학자도 있다. '악타 디우르나'라는 이름으로 독립하여 발행된 지 100여 년 뒤에 활동한 역사가 타키투스의 저술에도 다음과 같은 기술이 나온다.
"악타 디우르나는 로마 시민이 많이 사는 로마군 기지나 식민도서만이 아니라 속주민들 사이에도 널리 읽히고 있다."
'악타 세나투스'와 '악타 디우르나', 그리고 500년아 넘도록 계속 기록된 국가 로마의 공식 기록인 '아날레스 막시미'(최고 제사장 연대기)가 로마인에 관한 공식 정보원이다. 정확한 정보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던 로마인인 만큼. 이 세 가지는 로마 제국이 존재하는 동안 계속 존속하게 된다.
원로원 '재편성'
'벽신문'을 폐지하여 원로원의 호감을 산 옥타비아누스는 뒤이어 원로원 재편성에 착수했다.
원로원 의원들로서는 기득권이 개혁의 파도에 노출되는 것이므로 환영할 리가 없지만, 35세의 최고 권력자는 그 의원들까지도 환영할 만한 방식으로 개혁을 추진했다. 또한 아무리 완고한 수구파라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기원전 28년 당시의 원로원은 난맥 상태에 빠져 있었다.
기원전 45년, 폼페이우스를 비롯한 원로원 체제 고수파를 물리치고 최고 권력자가 된 카이사르는 술라의 개혁 이후 600명이 정원이었던 원로원 의원수를 900명으로 늘려, 원로원 개혁을 단행했다. 이에 따라 새로 원로원 의석을 차지하게 된 사람들 중에는 속주에 거주하는 로마 시민권 소유자 이외에 얼마 전에 카이사르에게 정복된 중북부 갈리아의 부족장들도 적지 않았다. 패배자를 동화시키는 데에는 오랜 전통을 갖고 있는 로마인들조차도 놀랄 정도였다. 본국 태생의 지도층에 속한다는 사실에 자긍심을 가진 키케로나 브루투스 같은 의원들이 이런 카이사르의 개방노선을 불쾌하게 여긴 것은 당연했다.
그런데 카이사르가 암살된 뒤 실권을 탈취하려던 안토니우스는 세력을 강화하기 위해 원로원 의원수를 더욱 늘렸다. 이때 의석을 얻은 자들을 서민들은 '저승에서 임명된 의원'이라고 부르며 비웃었다. 제 이름으로는 효과가 약하다고 생각한 안토니우스가 카이사르의 이름을 내세워, 카이사르가 생전에 결정해둔 인사라면서 강행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안토니우스를 물리친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 편에 선 원로원 의원들도 모두 용서하고 공직 복귀를 허용했다. 덕택에 내전이 끝나 평화를 되찾은 로마의 원로원은 의사당에 다 들어가지도 못할 만큼 많은 의원을 떠안게 되었다. 당시의 의원 수는 1천 명이 넘었다고 한다. 옥타비아누스는 그것을 600명까지 줄일 생각이었다.
젊은 최고 권력자는 먼저 일부 의원에 대해서는 자신이 직접 설득하여 의원직을 사퇴하게 하는 방법을 택했다. 이들이 뜻밖에 순순히 설득을 받아들인 것으로 미루어보아, 그가 직접 설득한 일부 의원은 카이사르가 등용한 갈리아인이 아니었나 싶다. 조상 대대로 로마인이었던 사람들에 비해, 그들의 처지는 역시 약했다. 그리고 이들을 원로원에 들여보낸 것이 카이사르가 암살된 진짜 원인이었다는 말이 나왔을 정도니까, 옥타비아누스에게는 그 원인을 제거할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이로써 속주민의 등용은 클라우디우스 황제 시대까지 90년 동안 완전히 중단되었다. 이 사건은 후세 학자들이 카이사르에 비해 옥타비아누스가 보수적이라고 주장하는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
어쨌든 이 '권고 사퇴'로 원로원 의원을 70명 정도는 줄일 수 있었다. 하지만 형식적으로는 자진 사퇴니까, 젊은 권력자도 대가를 내놓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래서 국가가 주최하는 경기대회나 연극 공연에는 원로원 의원과 동등한 자리를 확보해주는 것을 조건으로 내세웠다.
옥타비아누스는 140명의 의원에 대해서는 강경 수단에 호소했다. 원로원 의석을 강제로 박탈한 것이다. 카이사르가 암살된 직후의 혼란기에 권력자의 환심을 사서 의원이 된 노예까지 있었다니까, 의원에 어울리지 않는 자를 추방하는 것은 조상 대대로 원로원 계급에 속하는 사람들로서는 환영을 할망정 반대할 이유는 없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이들 140명에 대해서는 보상도 해주지 않았다.
이렇게 하여 210명의 의원을 줄이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아직도 200명 정도가 남아돈다.
그래서 옥타비아누스는 다음과 같은 수단으로 '감량'에 도전했다.
그해의 집정관인 옥타비아누스 자신과 아그리파가 우선 30명을 고른다. 이 30명이 다른 30명을 고른다. 선택된 30명이 또 30명을 고른다. 이 방식은 원로원 의원수가 정원인 600명에 이를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리하여 정원을 600명으로 되돌려 놓은 것도 원로원의 호감을 사는데 도움이 되었다. 건국 이래 줄곧 300명이었던 원로원 정원을 600명으로 늘린 것은 술라였다. 그것을 다시 900명으로 늘린 것이 카이사르였다. 하지만 술라가 정원을 늘린 이유는 원로원을 강화하기 위해서였던 반면, 카이사르가 증원한 이유는 원로원 체제를 타도하기 위해서라는 점이 달랐다. 정원을 600명으로 되돌린 옥타비아누스의 행위는 공화주의자들의 눈에도 젊은 권력자가 원로원을 존중하고 있다는 증거로 보였다, 그리고 이듬해에 젊은 권력자는 공화정 신봉자들을 그야말로 미칠 듯이 기쁘게 하는 일을 해냈다.
공화정 복귀 선언
기원전 27년 1월 13일, 원로원을 가득 메운 의원들 앞에서 35세의 절대 권력자는 공화정 체제로의 복귀를 선언했다.
옥타비아누스는 즉흥 연설에 자신이 없고, 특히 중요한 의안을 다룰 경우에는 미리 준비한 원고를 낭독했다고 한다. 그날의 선언도 원고를 낭독하는 형태로 이루어졌을 게 분명하다, 그가 죽은 뒤에 공표되었기 때문에 '신격 아우구스투스 업적록'이라고 불리는 업적록에서 그 자신도 여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내가 일곱 번째 집정관이 된 해(기원전 27년)에, 그때까지 시민 모두의 동의에 의해 절대력을 부여받아 내전을 종식시켰으므로, 이제 나는 그동안 행사했던 권력들을 포기하고 원로원과 로마 시민의 손에 되돌려주었다."
다른 역사가들의 기술에 따르면, 브루투스를 비롯한 반대파를 쳐부수고 안토니우스라는
경쟁자도 물리치고 로마 세계의 유일한 절대 권력자가 된 35세의 옥타비아누스는, 마치 싸움을 끝낸 전사가 무기를 내려놓고 갑옷을 벗어던지기라도 하듯 의사당에 줄지어 앉은 원로원 의원들에게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고 한다.
"내 한 몸에 집중되어 있는 모든 권력을 여러분 손에 돌려주겠소. 무기와 법률, 로마의 패권 하에 있는 모든 속주를 원로원과 로마 시민의 손에 되돌려줄 것을 선언하는 바이오."
군사와 내정과 외치를 모두 원로원과 로마 시민에게 돌려주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의사당은 순간 얼어붙은 듯이 조용해졌다. 하지만 곧 의사당은 환호의 소용돌이에 말려들었다. 평소에는 그저 엄숙하고 무게 있게 행동하는 것밖에는 염두에 없는 원로원 의원들도 이 예상치 못한 사태에 저도 모르게 어린아이로 돌아간 것이다.
공화정 체제로의 복귀는 로마에서는 원로원이 정책을 세우고 민회가 승인하는 것으로 성립되는 과두정(올리가르키아), 즉 소수지도체제의 부활을 의미했다. 말하자면 '원로원 체제'라고 불러도 좋은 정치체제였다. 그런 카이사르의 후계자가 보여준 이 변모에 원로원 의원들이 환성을 지르며 기뻐한 것은 자기네가 다시 로마라는 큰 배의 조타수가 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로마는 권력 집중을 막기 위해 국가의 최고위직인 집정관도 두 명을 두었을 정도지만, 그래도 전권을 장악한 사람이 그때까지 세 명 있었다. 술라와 카이사르, 그리고 기원전 30년 당시의 옥타비아누스였다.
술라는 반대파를 단호히 숙청하고 무기한 독재관(딕타토르)에 취임한 뒤, 원로원 강화를 골자로 하는 국정 개혁을 단행했고, 그것이 끝나자마자 스스로 독재관을 사임했다. 위기관리체제이기도 한 독재관을 사임함으로써 공화정 체제 고수를 분명히 한 것이다. 하지만 거기에 이르기까지의 숙청이 너무나 무자비했기 때문에, 원로원 체제 고수파조차도 이 권력 회복에는 오랫동안 피비린내가 나는 듯한 인상을 받게 되었다.
카이사르는 전권을 장악한 뒤에도 반대파를 용서하고 공직 복귀도 인정했다. 숙청의 피바람은 불지 않았지만, '종신 독재관'(딕타토르 페르페투아)에 취임하여, 원로원 체제 부활을 기대하고 있던 키케로나 브루투스 같은 공화주의자들의 꿈을 산산이 깨뜨려버렸다.
옥타비아누스는 절대 권력을 장악한 뒤에도 반대파를 숙청하지 않았다. 패배자들의 공직 복귀도 인정했다. 그리고 이제는 공화정 복귀까지 선언했다. 내전 시절에 누리고 있던 모든 특권을 원로원과 로마 시민에게 되돌려주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그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인 원로원 의원들이 뛸 듯이 기뻐한 것도 당연했다.
한 몸에 집중되어 있던 모든 특권을 포기한다고 선언한 것은 공화정 체제의 로마 시민으로서는 칭찬받아 마땅한 행위였지만, 실제로 옥타비아누스가 누린 특권은 무엇이었을까.
1. 삼두정치권(트리움비라투스)
2. 이탈리아 서약(코뉴라 디오 이탈리에)
3. 세계적 합의(콘센수스 우니베르소룸)
첫 번째 특권인 삼두정치권이란 기원전 43년 말에 당시 실력자인 안토니우스와 레피두스 및 옥타비아누스가 결성한 공동투쟁체제, 즉 '제 2차 삼두정치' 체제의 수립으로 얻은 권리를 말한다.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 및 카이사르의 '제 1차 삼두정치'가 개인적인 공동 투쟁체제였던 반면, 제 차 삼두정치는 민회의 승인을 얻었으니까 합법적인 '위기관리체제'라고 말할 수 있었다.
하지만 기원전 30년에 안토니우스가 죽고, 레피두스는 그 전에 이미 은퇴했기 때문에, 제2차 삼두정치는 유명무실해져 있었다. 게다가 제 2차 '삼두정치'는 결성된 이듬해에 '살생부'까지 만들어 2천 300명이나 되는 반대파를 숙청했기 때문에, 숙청 대상이 된 로마인들의 피와 원한이라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줄곧 따라다니고 있었다. 옥타비아누스는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우스를 이긴 뒤, 그 승전보를 원로원에서 발표하는 역할을 키케로의 아들에게 맡겼다. '살생부'의 맨 윗자리에 오른 키케로는 희생자들 가운데 가장 유명하고 가장 존경받던 인물이었다. 처벌자 명단 작성에는 옥타비아누스도 참가했으니까 키케로를 숙청한 책임은 그도 똑같이 짊어져야 할 테지만, 안토니우스를 물리친 옥타비아누스에게 모조리 전가하려하고 있었다. 어쨌든 '삼두정치권'은 이제 포기하는 편이 오히려 유리한 특권이었다.
두 번째 특권인 '이탈리아 서약'은 기원전32년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를 상대로 마침내 결전을 벌일 때가 왔음을 깨달은 옥타비아누스가 로마 국가의 본국인 이탈리아반도에 사는 모든 시민에게 요구한 서약이다. 여기에 응한 이탈리아의 모든 지방자치단체는 옥타비아누스를 추대하고, 그에게 충성을 서약했다. 따라서 이것도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임시로 주어진 특권이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가 죽은 뒤에도 계속 갖고 있으면, 공화국(레스 푸블리카)을 사유화한다고 오해받을 우려가 있었다.
세 번째 특권인 '콘센수스 우니베르소룸'은 '세계적 합의'라고 어설프게 직역할 수밖에 없었지만, 이것은 두 번째 특권인 '이탈리아 서약'을 본국인 이탈리아만이 아니라 속주에까지 확대하여 옥타비아누스에게 부여한 특권이다. 로마 세계의 동쪽 절반은 안토니우스 휘하에 있었으니까, '세계적'이라 해도 로마 세계의 서쪽 절반에 불과했지만, 속주민까지 일치단결하여 옥타비아누스를 지지했다는 의미를 갖고 있었다.
다만 '이탈리아 서약'이 단순한 언약에 그치지 않고 병사 모집권과 임시 특별세 부담까지 인정하겠다는 서약인 반면, '세계적 합의'를 요구받은 속주민에게는 그런 의무가 없었다.
속주세도 올리지 않았다.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를 상대로 결전을 벌이기 위해 동쪽으로 떠나면서 그들과의 싸움이 결판날 때까지 자신의 배후, 즉 로마 세계의 서부가 평온해주기만을 원했을 뿐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 세 번째 특권도 위기에 대처하기 위한 임시 특권인 건 마찬가지다. 특히 두 번째 권리는 임시 과세권까지 인정하고 있으니까, 계속 갖고 있으면 로마의 여론이 나빠질 우려가 있었다.
이처럼 옥타비아누스는 실제로는 내놓는 편이 오히려 유리한 특권을 포기한 데 불과했지만, 이 세 가지 특권이 로마식 공화정 체제와는 걸맞지 않는 권리인 것도 분명하다. 따라서 그것을 포기하고 공화정으로 돌아가겠다는 35세의 최고 권력자가 모든 기득권을 포기하고 원로원의 일개 의원이 되겠다고 선언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가 내놓지 않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우선 집정관직을 사임하지 않았다. 옥타비아누스는 기원전 43년에 19세라는 이례적인 젊은 나이로 처음 집정관에 선출된 뒤, 기원전 31년부터는 연속하여 집정관에 취임했다.
기원전 27년에 공화정 복귀를 선언했을 당시, 그는 통틀어 일곱 번째로 집정관직을 맡고 있었다. 그리고 그 후에도 기원전 23년까지 해마다 집정관으로 선출된다. 공화정 체제에서국가의 최고위직인 집정관에 연임되는 것은 위법일 수도 있다. 옥타비아누스는 법률을 위반할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그 지위를 계속 유지한다.
이것을 깨달으면, "무기와 법률과 로마의 패권 하에 있는 모든 속주를 원로원과 로마 시민의 손에 되돌려 주겠다"는 옥타비아누스의 선언은 공화정 복귀를 기뻐하는 이들에게 전혀 다른 인상을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연임했다 해도 집정관은 정규 관직이고, 비정규적인 특권은 포기하겠다는 그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옥타비아누스가 포기하지 않은 두 번째 권리는 '임페라토르'라는 칭호를 항시 사용할 수 있는 권리다. 로마에서 임페라토르는 개선장군을 부르는 경칭이었다. 이 칭호를 항시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인정받은 것은 카이사르였지만, 카이사르라면 위와 같은 의미에서도 어울리는 칭호였을 것이다. 하지만 옥타비아누스가 전쟁에서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아그리파가 지휘를 맡았기 때문이고, 로마인이라면 누구나 이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긴 해도 로마인들에게 '임페라토르'라는 칭호가 갖는 중요성은 카이사르와 마찬가지로 옥타비아누스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양아버지인 카이사르한테 물려받은 세습 권리로 '임페라토르'를 항시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유지하기로 했다. 그후 그가 세운 건축물에는 'IMPERATOR'의 약자인 'IMP'가 그의 이름 앞에 반드시 새겨지게 되었다. 하지만 옥타비아누스는 신중한 사람이다. 군사력을 연상시키는 '임페라토르'라는 칭호를 그 자신은 되도록 사용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업적록에도 이 칭호는 쓰이지 않았다.
'임페라토르'라는 칭호를 세습 권리로 유지한 것은 사실 커다란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종신 군통수권과 그것을 후계자들에게 물려줄 세습권을 보유하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이것만으로도 사실상의 제정이다. 옥타비아누스가 공화정 복귀를 선언한 기원전 27년 당시, 임페라토르가 언젠가는 '황제'를 의미하게 되리라는 것을 깨달은 로마인은 과연 몇 명이나 되었을까.
옥타비아누스가 포기하지 않은 세 번째 권리는 '프린켑스'(제일인자)라는 칭호였다.
'프린켑스'라는 고대 로마에서는 공화국 시민들 가운데 으뜸이라는 의미밖에 갖고 있지 않았다. 또한 이 의미가 연장되어 지도자라는 의미로도 쓰인다. 기원전 29년에 원로원은 안토니우스를 무찌르고 돌아온 34세의 옥타비아누스에게 이 칭호를 주었다. 오랜 내전 상태를 종식시킨 공로에 보답하는 의미였지만, 이것이 '임페라토르'라는 칭호를 되도록 사용하지 않으려 한 옥타비아누스에게 참으로 편리한 방패막이를 제공하게 되었다.
'임페라토르'는 공화주의자들에게 도발적으로 들렸지만, '프린켑스'는 그렇게 들릴 염려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프린켑스'라는 칭호는 한니발을 무찌르고 제 2차 포에니 전쟁을 승리로 이끈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에게도 부여된 선례가 있었다.
이 방패막이는 보기 좋게 효과를 발휘하여, 로마 시대 역사가들은 곧 아우구스투스가 될
옥타비아누스를 언급할 때 '카이사르'(그는 카이사르의 양자였다)나 '프린켑스'라고 부르게 되었다. 옥타비아누스도 업적록에서 자신을 언급할 때 세 번이나 이 칭호를 사용했다. 그 때문인지, 현대 연구자들 중에도 앞으로 전개될 시대를 '제정'이라고 부르지 않고 '원수정'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을 정도다.
35세의 옥타비아누스는 동시대 로마인들을 속였을 뿐 아니라, 후세의 고지식한 연구자들까지도 속였다고나 할까. 어쨌든 이것이 공화정 복귀가 선언된 기원전 27년에 젊은 권력자가 포기하지 않은 권리다. 문제는 공화정 복귀를 선언한 35세의 권력자가 그 대신 얻은 것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아우구스투스'
공화정 복귀가 선언된 날부터 사흘밖에 지나지 않은 1월 16일, 원로원은 옥타비아누스에게 '아우구스투스'라는 존칭을 부여할 것을 만장일치로 결의했다.
옥타비아누스는 업적록에서 이 일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공화정 복귀를 선언한 공적에 대해, 원로원은 앞으로 나를 아우구스투스라고 부르기로 결의하고, 다음과 같은 명예도 주기로 결정했다. 우리 집 현관 양쪽에 서 있는 기둥은 월계수로 장식하고, 현관문 위에는 '시민관'을 놓는다. 그리고 이번에 내가 보여준 결단과 관용, 공정함과 자애에 감사하는 원로원과 로마 시민이 그 사실을 새긴 황금 방패를 원로원 의사당에 안치한다. 그 후 나는 권위(아우크토리타스)에서는 누구보다도 우위에 있었지만, 권력(포테스타스)에서는 내 동료 집정관들을 능가하지 못했다."
수사학적인 표현은 흔적도 보이지 않는 단순소박한 문장이다. 거짓말을 쓰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마지막 문장에는 진실이 담겨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로서는 이렇게 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때 옥타비아누스는 상상력이 뛰어난 카이사르조차 칭찬했을 것으로 여겨지는 일대 정치 드라마를 연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절묘하다고밖에 말할 수 없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공화정 복귀 선언과 아우구스투스라는 존칭 부여 사이의 간격을 사흘밖에 두지 않았다는 점이다. 둘째, 그에게 아우구스투스라는 존칭을 부여하자고 제안한 사람의 선정이다. 셋째, 다름 이름이 아니라 '아우구스투스'라는 존칭을 선택했다는 점이다.
사흘은 한몸에 집중된 특권을 모두 포기하고 공화정 체제로 돌아가겠다는 최고 권력자의 선언을 기뻐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예상치도 않았던 일이기 때문에, 그 참뜻까지 탐색하기에는 불충분한 시간이었다. 결국 사흘은 너무 이르지도 너무 늦지도 않은 적당한 시간이었다.
제안자의 선정이라고 말한 것은 이 드라마가 주도면밀하게 짜여진 각본에 따라 전개되었다고 확신하기 때문이지만, 그 제안자도 결코 우연의 결과는 아니었을 것이다.
평소에는 아흐레 만에 소집되는 원로원 회의가 그때만은 무엇 때문인지 사흘 만에 소집되었고, 이 회의에서 옥타비아누스에게 '아우구스투스'라는 존칭을 부여하자고 제안한 것은 원로원 의원들 중에서도 동료들의 존경을 받고 있는 폴리오였다.
무인인 동시에 교양인으로도 알려진 아시니우스 폴리오라는 인물은 기원전 76년에 태어나 기원전 27년 1월에는 48세를 맞이하고 있었다. 지방 유력자의 아들에 불과한 폴리오가 '명예로운 경력'(쿠르수스 호노룸)이라고 불리는 고위 관직에 취임하여 출셋길에 들어설 수 있었던 것은 카이사르에게 발탁되었기 때문이다.
기원전 49년 1월, 당시 26세의 폴리오는 루비콘을 건넌 카이사르를 따랐다. 키케로의 표현을 빌리면 '로마의 젊은 과격파' 가운데 하나였던 셈이다. 카이사르가 내전기에서 전혀 언급하지 않았던 루비콘 도하 상황을 후세의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폴리오가 그 기록을 남겨주었기 때문이다.
같은 해 4월, 카이사르는 시칠리아를 장악하기 위해 35세의 쿠리오를 파견했고, 그때 폴리오도 쿠리오의 부관으로서 카이사르의 전략에 따라 시칠리아와 북아프리카를 제패하러 갔다.
8월에 참패의 책임을 지고 자결한 쿠리오 대신, 약간 남은 패잔병을 모아서 시칠라아까지 데리고 돌아온 것은 당시 27세인 폴리오였다.
이 폴리오를 카이사르는 휘하 군단장으로 승진시켰다. 그 후 폴리오는 총사령관 카이사르 밑에서 계속 일하면서 폼페이우스 파를 쳐부순 북아프리카의 탐수스 전투와 폼페이우스의 아들을 무찌른 에스파냐의 문다 회전에도 참전했다.
기원전 44년, 카이사르는 동방에 있는 파르티아로 원정을 떠나기 직전에 폴리오를 서부 에스파냐 속주 총독으로 임명한다. 카이사르가 암살된 뒤에도 그가 결정한 인사는 그대로 존중되었기 때문에, 폴리오는 정세가 불온한 로마를 떠나 임지인 에스파냐로 갔다.
그러나 카이사르의 유언이 공개된 뒤,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가 서로 견제하는 미묘한 상황이 생겨나자, 폴리오는 분명히 안토니우스파에 가담하여 행동한다. 카이사르 휘하에서 함께 싸운 동지로서, 같은 체험을 공유한 사람들 사이에만 생겨나는 유대감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의 연합군이 브루투스와 카시우스의 군대와 대결한 필리피 회전에도 폴리오는 안토니우스 휘하로 참전한다.
그후 안토니우스에 대한 클레오파트라의 영향력이 점점 강해지고, 결국 옥타비아누스가 이끄는 로마군과 대결하기에 이르자, 폴리오도 안토니우스를 버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안토니우스에게 창끝을 들이댈 마음은 나지 않는다는 그의 심정을 옥타비아누스도 존중해주었다. 안토니우스가 악티움 해전에서 패배하고 이듬해 자결했다는 소식도 이탈리아에 있는 폴리오는 들어서 알고 있었다.
옥타비아누스는 마지막까지 안토니우스를 따른 로마인조차 용서하고 공직 복귀를 인정했다. 폴리오도 일단 떠났던 공직 생활을 다시 시작할 수 있을 터였다. 나이도 46세, 아직 훌륭한 현역이다. 그런데도 폴리오는 카이사르가 준 원로원 의석은 버리지 않았지만, 다른 공직은 모두 사퇴하고 교양인의 우아한 인생을 선택한다. 이로써 그는 대세에 아부하지 않는 결백한 사람이라는 평판을 얻게 되었다.
이런 인물을 주목한 옥타비아누스는 35세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다. 자파가 분명한 사람을 제안자로 선택했다면 원로원 의원들도 의심을 품었을 테고, 아직도 속으로 브루투스를 존경하고 있는 공화주의자에게 부탁하면 제안의 행방 자체가 불안해졌을 것이다. 이런 일은 잽싸게 제안하고 잽싸게 결의하지 않으면 실패로 끝나기 쉽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놀랄 만한 옥타비아누스의 정치 감각은 아우구스투스라는 존칭을 선택한 것이었다. 나는 이것도 존칭을 부여받는 그 자신이 치밀하게 생각하여 고른 명칭이라고 확신한다.
로마인들은 개인이라도 별명으로 부르기를 좋아하는 민족이었다. 키케로의 친구 가운데 아티쿠스라는 인물이 있는데. 아티카 사람이라는 의미의 아티쿠스는 본명이 아니라 그가 그리스의 아티카 지방을 유난히 사랑한 데서 나온 별명이다. 이런 경향이 중요인물에게 적용되면 존칭이 된다.
한니발을 무찌른 스키피오는 카르타고의 지배하에 있던 아프리카를 제패한 자라는 의미에서 아프리카누스라는 존칭으로 불렸다. 그가 속한 코르넬리우스 씨족은 명문이고, 그 가운데 스키피오 가문만 해도 많은 요인을 배출했기 때문에, 존칭을 붙여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라고 부르면 다른 스키피오들과 구별할 수 있다는 이점도 있었다.
코르넬리우스 씨족에 속하는 술라도 폰토스 왕 미르라다테스를 제압한 업적을 비롯하여 국가에 많은 공을 세운 인물이다. 그만하면 충분히 존칭을 부여받을 수 있을 정도지만, 마리우스 파를 무찌르고 절대권력을 손아귀에 넣은 뒤 단행한 숙청이 너무 냉혹하고 처참했기 때문에, 아무도 존칭을 부여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허영심에서는 자유로웠던 술라지만, 그래도 존칭이 전혀 없는 것은 불만이었는지, 행운아를 뜻하는 '펠릭스'라는 존칭을 스스로 자신에게 부여했다.
하지만 자기편이나 제삼자가 보기에는 통쾌해도 적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던 그가 죽은 뒤에는 아무도 그를 술라 펠릭스라고 부르지 않게 되었다. 술라 자신은 '행운아'였을지 몰라도, 그의 숙청으로 목숨을 잃고 재산을 몰수당하고 후손까지 공직에서 추방된 이들에게는 조금도 '펠릭스'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폼페이우스도 존칭을 부여받은 사람이었다. 위대한 사람을 뜻하는 '마그누스'가 그의 존칭이었다. 확실히 술라 가문의 걸출한 인물로서 젊은 나이에 뛰어난 활약을 보여, 해적 소탕작전과 지중해 동부 제패를 달성했을 무렵의 폼페이우스는 무장으로서 눈부시게 빛나는 존재였다. 마그누스는 영어의 'The Great'와 마찬가지니까,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동등한 대우를 받은 셈이다.
생전의 카이사르에게는 별명도 존칭도 없었다. '위대한 폼페이우스'(폼페이우스 마그누스)를 이긴 사람에게는 그것을 뛰어넘는 존칭을 붙여야겠지만, 그런 존칭이 생각나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죽은 뒤에 신격화되어 '신격 카이사르'(디부스 카이사르)가 그의 존칭이 되었다.
이같은 로마인 특유의 관습으로 볼 때, 조국에 공을 세운 사람에게 존칭을 부여하는 것은 결코 특별한 대우가 아니었지만, 문제는 어떤 존칭을 주느냐 하는 것이다. 옥타비아누스에게는 내전을 끝냈다는 엄연한 공적이 있었지만, 실제로 전투를 지휘한 것은 아그리파였다. 따라서 용맹을 강조하는 우락부락한 존칭은 어울리지 않았다. 그리고 옥타비아누스 자신도 선배들이 얻은 단순한 존칭으로 만족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고대 로마에서 아우구스투스(Augustus)는 신성하고 경배를 받아 마땅한 인물이나 장소를 의미하는 말에 불과했고, 무력이나 권력을 연상시키는 의미는 전혀 없었다. 신성하다는 뜻이긴 하지만, 다신교 세계인 로마에서는 유일무이한 절대적 권위는 아니다. 길가에 서 있는 사당조차도 신성하고 경배를 받아 마땅한 존재였다.
35세의 옥타비아누스가 자신을 위해 고른 존칭이 이 '아우구스투스'였다. 권력에 아부하지 않는 결백한 인물로 평판이 높은 폴리오를 시켜 그것을 제안하게 했을 뿐 아니라, 공화정 부활을 선언한 뒤 아직 그 흥분이 채 가시지 않은 사흘 뒤에 그것을 결행함으로써, 자기가 말을 꺼낸 게 아니라 원로원 의원들이 주었기 때문에 받는다는 형식을 취했다. 기원전 27년
1월 16일 회의에 참석한 의원들은 '아우구스투스'라는 존칭이라면 권력과는 결부되지 않는다고 믿어 혼쾌히 찬성표를 던졌을 게 분명하다.
그런 생각은 그들이 이 존칭과 함께 35세의 권력자에게 부여한 명예에도 나타나 있었다.
집의 현관 양쪽에 서 있는 기둥을 월계수 가지와 잎으로 장식하는 것, 현관문 이에 '시민관'을 놓는 것, 그리고 절대 권력자가 되었으면서도 공화정 복귀를 선언한 공로를 높이 평가하여 그 사실을 새긴 황금 방패를 원로원 의사당에 안치하는 것, 그 중에서도 '시민관'과 '방패'가 깊은 의미를 갖고 있었다. 우선 '방패'는 공격보다 수비를 의미한다. 그리고 승리자를 의미하는 '월계관'은 월계수로 짜지만, 로마에서 '시민관'이라고 불린 것은 같은 상록수인 떡갈나무 잎으로 짠다. 이것은 로마군단에서는 아군 전우를 구조한 공로에 대해 수여되는 '훈장'이었다. 흥미롭게도 로마 군단에서는 적지에 가장 먼저 들어가 받는 훈장보다 이 '훈장'이 더 높은 포상으로 되어있었다. 아우구스투스가 바란 것도 월계관보다는 시민관이었다. 그로서는 전투에 서투른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 월계관보다 내전을 수습하여 로마 국가를 자멸에서 구한 공로를 나타내는 '시민관'으로 자신의 이미지를 더욱 강화하고 싶었을 것이다.
실제로 많이 남아 있는 아우구스투스 초상 가운데 월계관을 쓴 것은 극히 적다. 이 책 표지로 고른 초상도 '시민관'을 쓴 모습이다. 시민관을 쓴 초상이 압도적으로 많은 것은 그 자신이 월계관보다 시민관을 더 좋아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원로원이 만장일치로 결의한 '아우구스투스'라는 존칭은 실제로는 그들이 생각한 만큼 권력과 무관하지는 않았다.
아우구스투스라고 불리게 됨으로써 옥타비아누스가 얻은 것은 권력이 아니라 권위다. 그것은 단순한 위신이 아니라 14년에 걸친 권력투쟁에서 유일하게 승리한 취고 권력자의 위신이다. 말 한마디를 하더라도 무게가 달라지는 것은 당연하다. 게다가 지금까지 말했듯이 그가 포기한 권리는 포기하는 편이 오히려 유리한 것뿐이고, 군통수권은 전혀 포기하지 않았다.
그런 인물에게 권위까지 더해지면 어떻게 될까. 의사당에서는 발언이든 정책이든, 그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은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무게를 갖게 될 것이다. 원로원 의원에서부터 일반 시민에 이르기까지 그 무게를 느낄 것이다. 아우구스투스 자신은 "그 후 나는 권위(아우크토리타스)에서는 누구보다도 우위에 있었지만, 권력(포테스타스)에서 는 내 동료 집정관을 능가하지 못했다."고 기록했지만, 이론상으로는 그럴지 몰라도 실제로는 달랐다. 그의 동료 집정관은 아그리파인 경우가 많았지만, 그의 충성스런 오른팔이었던 아그리파는 옥타비아누스가 아우구스투스라는 존칭을 얻은 권위를 갖고 있지 못했다. 권위를 뜻하는 영어 낱말 'authority'의 어원인 '아우크토리타스'를 나타내는 칭호를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능가하지 못했다'는 것은 당치 않은 소리다.
나도 전적으로 동감이지만, 어느 연구자는 이 시기의 아우구스투스를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
"철저히 합법성을 획득하는 아우구스투스의 탁월한 수완."
왜 '탁월한 수완'인가 하면, 하나하나는 완전히 합법적이지만 그것을 서로 연결해가면 공화정 치하에서는 비합법이 될 수밖에 없는 제정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기원전 27년은 당시의 많은 로마인들이 공화정 복귀를 경축한 해였다. 하지만 그로부터 불과 반세기쯤 뒤에 살았던 후세인들에게 기원전 27년은 제정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해가 된다.
그해부터 옥타비아누스의 정식 명칭은 다음과 같이 변한다.
'임페라토르 율리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Imperator Julius Caesar Augustus)
이것이 공화정 복귀를 선언한 사람의 이름이 되었으니, 참으로 얄궂은 일이다.
상상하건대, 35세의 아우구스투스는 이 의미를 완벽하게 자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스스로 확립하고자 한 신생 로마가 어떤 이미지로 소개되어야 하는 지에도 배려를 아끼지 않았기 때문이다. 35세라는 나이를 생각하면, 무서울 만큼 깨어 있는 정신이다.
이미지 작전
아우구스투스는 보기 드문 미남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우락부락한 용모를 가진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가 17세의 아우구스투스를 후계자로 지명한 것은 그가 미소년이었기 때문이라고 험담했을 정도다. 소년 시절의 미모는 30대에 들어선 뒤에도 시들지 않았다. 시들기는커녕, 30대 시절의 모습이 오히려 '남자다운 매력'을 더욱 느끼게 한다. 18세의 나이에 느닷없이 무대로 끌려나온 이후 14년 동안 처음에는 브루투스를, 다음에는 안토니우스를 이긴 자신감이 타고난 미모를 더욱 보강해준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하지만 그의 매력은 겉보기만의 아름다움은 아니었다. 그 얼굴은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에도, 남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을 때에도 무한한 조용함과 밝음을 흐트러뜨리지 않았고, 그것이 그를 만나는 사람들에게 용모의 아름다움을 뛰어넘는 매력을 느끼게 해주었다.
고대 로마의 역사가인 수에토니우스는 아우구스투스가 보기 드문 미남이었지만 멋쟁이는 아니었다고 말했다. 타고난 미남이었기 때문에 멋 부리기에 신경 쓸 필요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자신은 30대 후반에 최고조에 도달한 매력의 효력을 잘 알고 있었다.
고대 로마의 조각상들 가운데 세월에 따른 풍화와 훼손, 기독교도의 파괴를 거치고도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것은 초대 황제인 아우구스투스의 초상이다. 로마 제국 전역에서 출토되고 있는 것도 그만큼 많이 만들어져 제국 전역에 배포되었기 때문이고, 따라서 남아 있을 확률도 가장 클 게 분명하다.
그런데 그 조각상들은 모두 30대의 아우구스투스를 본뜬 것이다. 훗날의 아우구스투스로 여겨지는 두상이 하나 있지만, 나머지는 40세 이전의 아우구스투스다. 아우구스투스는 77세까지 장수를 누린 사람이다. 노년 시절은 그렇다 쳐도, 로마인들이 남자의 한창 나이로 인정한 장년기인 40대와 50대의 아우구스투스를 본뜬 조각상은 당연히 있어야 할 텐데,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그런데 아우구스투스의 장년기는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가장 많은 열매를 거둔 시기였다. 자랑스럽게 자신의 원숙한 모습을 유형의 조각으로 남기는 게 오히려 자연스럽다. 미모에 뒷받침된 매력은 늙어도 시들지 않았다고 수에토니우스는 말하고 있다.
상상하건대 아우구스투스는 일부러 저신의 공적인 이미지를 로마인들이 청년기로 여기는 30대로 한정한 것 같다. 그의 책무는 카이사르가 남긴 청사진을 실천에 옮기는 것이었다. 카이사르는 공적 생활을 늦게 시작한 탓도 있어서, 50애 시절의 조각상밖에 남기지 않았다. 그런 카이사르에 대해 존재의 차별성을 주장하려면 젊음을 활용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 아닐까. 그리고 그가 확립하려 한 신생 로마의 이미지로도 30대가 어울린다. 30대는 조용하면서도 밝기 때문에 공격적인 느낌을 주지 않으며, 젊음에서 오는 활기도 충분하다. 안토니우스를 무찌르고 로마 세계의 최고 권력자가 된 아우구스투스가 그 권력을 이용하여 확립하려 한 새로운 질서의 성격은 얼핏 무관하게 여겨지는 조각상이나 화폐에도 나타나 있는 것 같다.
작가가 본 아우구스투스
로마 역사에서 아우구스투스의 중요성은 카이사르에 버금간다. 아니 카이사르와 거의 맞먹는다. 오늘날 각자의 전문 분야에서 지배적 권위를 가진 학자들의 논고를 모은 로마통사에서도 아우구스투스는 카이사르와 맞먹는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따라서 상세한 전기를 쓸 만한 가치는 충분하다. 또한 매력도 부족하지 않다. 그런데도 전기가 아주 적다. 카이사르의 10분의 1이나 될까. 학자가 쓴 전기가 그 정도다 작가가 쓴 전기는 없다고 해도 좋지 않을까. 적어도 작가로서 이름이 알려진 사람은 아무도 그의 전기를 쓰지 않았다. 거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게 분명하지만, 내 짐작으로는 다음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을 것 같다.
첫째, 아우구스투스는 작가의 흥미를 강렬하게 촉발하는 타입의 인물이 아니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매력이 없는 것은 아니다. 매력은 충분히 있다. 다만 그 매력은 작가의 가슴을 뜨겁게 해주는 매력이 아니라, 작가의 머리를 맑게 해주는 매력이다. 전자는 작가를 감동시키는 매력으로 바꿔 말해도 좋다. 시대의 흐름을 바꾼 인물과 그 후에 나타나 변화를 확고하게 만든 인물의 차이일까.
문장을 표현 수단으로 선택한 사람이라면 가슴을 뜨겁게 해주는 매력이 작가에게 얼마나 중요한가를 잘 알고 있다. 강렬하게 촉발을 받아야만 그때까지 자신이 갖고 있던 자질을 뛰어넘는 작품도 쓸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카이사르에 비해 아우구스투스 전기를 쓰기가 어렵다는 이유도 빼놓을 수 없다. 아우구스투스는 훗날 지위가 안정되자 회고록을 쓰기 시작했다지만, 도중에 붓을 던져버렸다. 카이사르의 문장력과 비교를 당하는 게 싫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지만, 내 생각으로는 그 자신이 자기 생애를 쓰기가 너무 어려운 데 질려서, 차라리 쓰레기통에 던져버리는 쪽을 택한 게 아닌가 싶다.
그러면 왜 쓰기가 어려운가.
그것은 아우구스투스가 차례로 과제를 처리해가는 타입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화가에 비유하면 다음과 같이 될 것이다.
카이사르는 넓은 벽면에 그만이 할 수 있는 '속공'전술로 프레스코화를 그린다. 완성되면 당장 바로 옆의 벽면에 도전한다. 감탄하여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앞에서 이런 식으로 프레스코화가 착착 완성되어가고 넓은 거실은 화려하고 훌륭한 프레스코화로 둘러싸인다.
아우구스투스에게는 유화를 완성할 만한 시간 여유가 있었다. 넓은 거실에는 크고 작은 수많은 이젤이 늘어서 있다. 하지만 아우구스투스는 하나를 완성하고 나서 다음 그림으로 옮아가는 방식을 택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많은 캔버스에 가볍게 데생만 그린다. 하지만 때로는 단번에 그림을 완성하는 경우도 있다. 유화로 완성하여 관중에게 보여주는 편이 좋다고, 다시 말해서 이번 기회에 기정사실화하여 보여주는 편이 낫다고 판단한 경우다. 공화정 복귀를 선언하고 '아우구스투스'라는 존칭을 부여받았을 때의 연출은 여기에 해당한다. 다른 경우는 완성하는 데 시간이 걸린다. 바람직하다고 여겨지는 시기에 이젤 앞으로 돌아와서 잠깐 그림을 손질하는 듯한 느낌이다. 이런 일을 되풀이하고 있으니까 사람들의 관심을 지속시킬 수가 없다. 따라서 관중은 금방 염증을 낸다. 관중의 관심이 느슨해졌을 때가 아우구스투스에게는 오히려 좋은 기회다. 유화는 아무도 알아차리기 전에 어느새 전부 완성되어 있다.
그를 다룬 전기가 적은 세 번째 이유는 카이사르 시대에 비해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대한 사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점이다.
먼저 시대의 주인공이 글을 남기지 않았다. 물론 아우구스투스도 업적록이라는 것을 남기기는 했지만, 그것은 일종의 목록에 불과하다. 그가 동시대인이나 후세인들에게 알려주고 싶은 것을 35개 항목에 걸쳐 나열했을 뿐이다. 거짓말은 씌어 있지 않지만, 진실이 모두 씌어 있는 것도 아니다.
게다가 이 업적록을 읽어보아도 무엇을 언제 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그것은 쓴 사람이 정치적 이유로 명확하게 밝힐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 시대를 제삼자의 눈으로 묘사한 리비우스의 로마사는 로마의 융성과 로마에 의한 평화에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기독교가 지배한 중세를 거치는 동안 소실되어버렸다.
게다가 카이사르 시대에는 히르티우스나 살루스티우스 같은 카이사르의 부하들이 증언을 남겼지만, 아우구스투스 시대에는 그런 증언도 없다. 정치를 좋아하고, 사방에 편지를 보내
열심히 정보를 수집한 키케로 같은 인물도 이 시대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 시대에 접근하려면 후세의 역사서, 금석문, 파피루스 문헌, 화폐 등 모든 분야에 걸쳐 역사적 사실을 찾은 다음, 그것을 정성껏 모아서 모자이크처럼 하나씩 끼워 맞추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래도 아우구스투스가 한 가지씩 차례로 일을 처리해가는 타입이었다면 편년체 기술이 가능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곤란하다.
그렇다면 로마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인물이기 때문에 다루지 않을 수도 없는 아우구스투스를 학자들은 어떻게 요리해왔을까.
종합해서 말하면, 정책별로 분류하여 기술하는 방식을 택했다. 정치개혁, 행정개혁, 화폐개혁, 사회개혁, 군제개혁만 해도 완전히 끝날 때까지 무려 28년의 세월이 걸렸다.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는 아우구스투스가 이룩한 몇 가지 업적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는 있을망정, 그의 심모원려까지는 헤아릴 수 없다. 그가 77세까지 장수했기 때문에 그처럼 먼 앞날을 내다보고 깊은 꾀를 쓸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어쨌든 심모원려는 그의 중요한 특징이다. 따라서 그것을 헤아리지 못하는 정책별 기술 방식은 아우구스투스라는 인간에게 접근하는 데에는 부적당한 방법이다. 학문은 그래도 좋을지 모르지만, 학자가 아닌 나는 그것으로 대충 때우고 넘어갈 수가 없다. 내 관심은 무엇이 이루어졌느냐가 아니라 어떤 인간이 무엇을 어떻게 이룩했느냐에 있기 때문이다.
그렇긴 하지만 내가 새로운 사료를 발견한 것도 아니니까, 나도 학자들과 같은 난감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되도록 편년체 서술법을 택하되, 업적도 적당하다고 여겨지는 시점에서 종합적으로 정리하여 서술하기로 했다. 따라서 데생만 그려진 시점에서 유화 전체를 서술하거나, 유화로 완성된 시점에서 다시 다루게 될지도 모른다.
이런 서술 방식을 채택하는 이상, 아무래도 이 시점에서 말해두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기원전 27년에 이미 데생 정도는 그려져 있었을 게 분명하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첫째는 중앙 정부에 관한 행정개혁, 둘째는 속주 통치의 기본방침 확립, 그리고 셋째는 군제개혁이다. 이 세 가지는 업적록에 한마디도 언급되지 않았다. 그렇게 된 까닭은 아우구스투스 자신이 언급하지 않는 편이 좋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세 가지가 모두 공화정 체제로 복귀하겠다는 선언과 모순되는 행위였기 때문이다.
'내각' 창설
600명으로 정원을 줄여 원로원 재편성을 결행한 직후, 아우구스투스는 36세가 되자마자 '콘실리움 프린케피움(제일인자 보좌위원회)을 창설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요즘말로 하면 내각인데, 그 구성은 프린켑스(제일인자)인 아우구스투스를 중심으로 집정관 두 명, 오늘날의 각부장관에 해당하는 법무관, 회계감사관, 재무관, 안찰관, 여기에 원로원 의원들 중에서 추첨으로 선발된 15명이 추가된다. 자문위원회를 뜻하는 영어 낱말 'council'의 어원이기도 한 이 '콘실리움'에서 이루어진 결정은 '원로원 권고'와 똑같은 가치를 갖게 되었다. '원로원 권고'는 원로원에서 결의하면 그대로 정책이 되기 때문에, '원로원 체제'의 강력한 무기가 되어 있었다.
내각 창설은 얼핏 보기에 대단히 민주적인 개혁으로 여겨진다. '제일인자'인 아우구스투스가 독단으로 결정하지 않고 15명의 원로원 의원까지 포함한 다수 구성원이 합의로 결정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 합의제라는 겉모습, 그리고 추첨이긴 하지만 15명이나 되는 원로원의원이 행정의 최고의결기관에 참여한다는 사실이야말로 '내각'의 결의가 원로원 결의와 같은 가치를 갖는다는 데 원로원이 반발하지 않은 이유였다.
이것이 결정되었을 무렵, '제일인자'인 아우구스투스는 집정관을 겸하고 있었다. 또 다른 집정관은 아그리파다 이 두 사람과 아우구스투스파로 생각해도 좋은 각부 장관을 합해도 고
작 6표밖에 안 된다. 내각에 참가하는 원로원 의원은 추첨으로 선발되니까, '제일인자'도 원로원의 15표를 마음대로 좌지우지할 수는 없다. 원로원 쪽으로서는 잘하면 15표와 6표의 역학관계가 된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되지 않는다는 것이 곧 분명해졌을 것이다. 권위를 나타내는 데 불과한 '제일인자'나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에는 권력을 상징하는 거부권(베토)이 인정되어 있지 않지만, 집정관에게는 거부권이 인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각'을 창설했을 당시의 아우구스투스는 집정관이기도 했다. 원로원에서 선발된 15명이 그의 생각과 다른 정책을 제출하려 해도, 거부권을 발동하면 눌러버릴 수 있다. 집정관 정원은 두 명이니까 거부권도 두 사람이 갖게 되지만, 아우구스투스의 동료 집정관은 아그리파다. 아우구스투스의 측근 중의 측근인 아그리파의 반대는 아예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따라서 '콘실리움'의 결의는 사실상 아우구스투스의 뜻대로였다.
하지만 '내각'의 결의는 원로원 결의와 동등한 가치를 가졌을 뿐, 그 이상의 가치는 갖지 않았다. 내각의 결의를 우위에 놓으면 원로원의 반발을 사기 때문이지만, 아우구스투스는 이 어려움도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돌파했다.
원로원 정례회의를 종래보다 줄여 매달 1일과 15일에 두 차례만 열고, 게다가 1년에 2개월의 휴회기간까지 두기로 결정한 것이다. 반면에 '내각'은 연중무휴다. 필요하면 소집되니까, 정책결정기관으로서의 중요성에 차이가 나는 것은 당연하다. 이리하여 결의의 가치는 사실상 동등하지 않게 되었다.
속주 통치의 기본방침
총독을 파견하여 행사하는 속주 통치권은 오랫동안 원로원이 독점해 온 권리였다. 술라의 국정개혁에 따라 집정관이나 법무관을 지낸 사람만이 속주 총독이 될 수 있도록 규정되었고, 집정관과 법무관이 되기 위해서는 우선 원로원 의원이어야 한다는 전제 조건을 충족시켜야 했기 때문에, 속주 총독은 원로원 의원에게만 허용된 공직이었다. 또한 공화정 치하의 로마에서는 군단 지휘권이 속주 총독에게만 주어져 있었기 때문에, 총독을 독점한다는 것은 곧 군사력을 독점한다는 뜻이었다.
이 체제를 파괴한 것이 바로 카이사르다. 카이사르도 총독의 자격이 원로원 의원이어야 한다는 전제조건은 존중했는데, 이것은 원로원이 국가 지도층의 집합소 역할도 맡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원로원이 갖고 있던 총독 임명권은 카이사르에게 박탈당했다.
기원전 27년에 이루어진 옥타비아누스의 공화정 복귀 선언에는 당연히 속주 총독 임명권을 원로원에 반환하는 것까지 포함되어 있어야 했을 것이다. 로마식 공화정은 군주의 일인 통치가 아니라 600명의 원로원 의원들이 이끌어가는 소수지도체제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젊은 권력자의 공화정 복귀 선언에 감격한 원로원 의원들은 옥타비아누스에게 아우구스투스라는 존칭을 부여했을 뿐 아니라, 평화가 확립될 때까지 속주의 군사도 맡아달라고 의뢰하기까지 했다.
카이사르에게 집요하게 반대했던 키케로나 브루투스는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원로원도 공화정이 어떤 것인가를 실제로 알고 있는 세대에서 이론적으로만 알고 있는 세대로 바뀌고 있었다. 야만족과 온종일 마주보며 지내는 불편한 병영 생활보다는 기후가 따뜻하고 쾌척한 본국이나 생활수준이 높은 속주에서의 생활이 훨씬 매력적이었을 것이다. 원로원 계급에 속하는 사람이라면 그것을 허용할 만한 경제력도 갖추고 있었다. 로마의 상류층이 벌써 타락했나 하는 지레짐작은 하지 말아 달라. 편안한 생활은 좋아하는 사람은 어느 시대에나 있게 마련이다. 시인들의 작품에도 나타나 있듯이, 이 시기에 로마인들은 내전이 끝난 뒤의 평화를 만끽하고 있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이런 분위기를 충분히 활용한다. 다만 원로원의 체면은 지켜주는 방식으로 활용했다.
로마 국가의 영토는 네 종류로 분류되었다.
첫째, 알프스에서 메시나 해협으로 이르는 본국 이탈리아.
둘째, 원로원이 임명한 총독이 통치하는 속주(프로킨비아). 역사에서는 '원로원 속주'라고 부른다.
셋째, 아우구스투스가 직접 통치하는 속주. 역사에서는 '황제 속주'라고 부른다.
넷째, 특수한 정세 때문에 정복자 아우구스투스의 개인 영지로 삼을 수밖에 없었던 이집트.
여기에 동맹국이라고 불리는 나라들, 즉 로마의 패권을 인정하고 외교와 군사에서 로마를 추종하는 나라들이 추가되어, 지중해를 둘러싼 로마 제국권이 구성된다.
그러면 두 번째와 세 번째는 무엇으로 구별했는가.
평범한 재능밖에 갖지 못한 권력자라면 경제적으로 유리하고 통치하기도 쉬운 지역을 맡는 쪽을 선택했을 것이다. 하지만 35세의 권력자는 정반대의 지역을 선택했다.
속주로 편입된 지 오래여서 로마화(로마인 자신은 문명화라고 불렀다)의 역사도 길거나, 로마 국가의 안전보장을 위한 전선이 아니라고 판단하여 군단을 주둔시킬 필요성도 인정하지 않은 지역을 '원로원 속주'로 분류한 것이다. 그 속주를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1. 시칠리아섬
2. 사르데냐 및 코르시카 섬
3. 이베리아 반도 남부에 있는 에스파냐의 베티카 지방
4. 남프랑스에서 스위스에 이르는 갈리아 나르보넨시스 속주
5. 그리스 북반부에 해당하는 마케도니아 속주
6. 그리스 남반부의 아카이아 속주
7. 소아시아 서부의 아시아 속주
8. 소아시아 북부의 비티니아 속주
9. 크레타 섬
10. 키프로스 섬
11. 이집트 서쪽의 키레나이카 지방
12. 옛 카르타고 영토였던 아프리카 속주
13. 옛 누미디아 영토인 누미디아 속주
문관 통치 지역이라고 바꿔 말해도 좋은 이들 속주는 종래와 마찬가지로 원로원이 임명한 전직 집정관이나 법무관이 역시 종래와 마찬가지로 1년 임기의 총독을 맡아서 통치한다. 원로원 의원은 법무관을 비롯한 정부 관직만이 아니라 속주 총독도 경험해야만 비로소 '명예로운 경력' 이라고 불린 공직을 완수할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에, 말썽거리가 적은 속주에서 그것을 경험할 수 있게 된 것을 오히려 환영했다.
속주 총독은 명예로운 경력을 쌓는 사람의 책무이기 때문에, 종래와 마찬가지로 무보수다. 다만 담당 속주에서 징수하는 속주세 가운데 일부를 경비로 쓰는 것은 인정되었다.
아우구스투스가 직접 담당하는 지방 - 제정이 명확해진 뒤에 로마인들이 '황제 속주'라고 부르게 된 지방-은 다음과 같다.
1. 이베리안 반도 서부의 루시타니아 속주
2. 이베리아 반도 동부의 히스파니아 타라코넨시스 속주
이것은 이베리아 반도 북구를 제패하는 사업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3. 남프랑스를 제외한 갈리아 전역(이 지방은 나중에 세 개의 속주로 나뉜다.)
더 이상 설명할 필요도 없겠지만, 이 지역은 라인 강 방어선인 동시에 배후지이기도 했다.
4. 일리리쿰, 달마티아 지방
도나우 강 방어선을 확보하는 작업은 카이사르 암살로 말미암아 중단되어 있었다. 따라서 도나우 강을 확보할 때까지는 이 지방이 최전방이었다.
5. 소아시아 남동부의 킬리키아 속주
6. 시리아 속주
킬리키아와 시리아는 가장 중요한 가상 적국인 파르티아 왕국과 인접해 있는 지역이다.
이 '황제 속주'들은 아우구스투스가 임명하는 장군이 통치한다. 변경이라고 불러도 좋은 이 지방들을 방어하는 것이 총독의 주요 임무였기 때문에, 군단 지휘까지 맡고 있는 그들은 당연히 무관이었고, 따라서 급여가 보장되어 공직으로 인정되었으며, 임기도 상황에 따라 아우구스투스가 결정한다. 이 무관들을 통활하는 아우구스투스는 그들에게 군단 지휘권을 주어야 하는 이상, 법적으로 그들보다 높은 권한이 인정된 지위를 갖지 않으면 제국 전체의 방위체제도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아우구스투스에게는 '임페리움 프로콘술라레 마이우스'(전군 총사령관)라는 칭호가 공식으로 인정되었다.
이로써 원로원은 군통수권까지 아우구스투스에게 넘겨준 셈이다. 책무를 싫어하면 권리도 주장할 수 없게 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지만, 아우구스투스가 군통수권을 장악하고 싶어서 속주를 이런 식으로 분류한 것은 아니었다. 시대가 그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안전보장'
방위나 안전보장이라는 개념은 로마 시대부터 있었다. 라틴어로는 '세쿠리타스'라고 하는데, 나중에 영어의 'security'의 어원이 된다. 공화정 시대가 비확장주의이고 제정 시대가 확장주의라고 생각하는 것은 로마사에서는 터무니없는 잘못이다. 공화정 시대야말로 팽창의 시대였고, 제정은 반대로 방위의 시대였다. 더 이상 통치 지역을 확대하는 것은 로마에 비현실적이라고 판단한 것은 카이사르였지만, 그의 후계자인 아우구스투스도 여기에 대한 인식에서는 카이사르와 완전히 일치했다. 국가의 목표가 침공에서 방위로 바뀌면, 방어선 확보가 가장 중요한 과제가 된다. 카이사르의 갈리아 정복도 그것을 염두에 둔 군사 행동이었다. 그리고 역시 안전보장의 필요성 때문에 아우구스투스는 로마 역사상 최초의 상비군을 창설하게 된다.
공화정 시대의 로마에는 최소한의 방위력인 4개 군단 규모를 넘는 상비군은 존재하지 않았다. 필요에 쫓길 때마다 징집한 병사들로 군단을 편성했기 때문이다. 국세조사가 로마에 생겨난 것도 이런 필요성 때문이었다. 병력을 쉽게 징집할 수 있도록 17세 이상의 성년 남자 수를 조사하는 것이 국세조사의 주요 목적이었다. 병역이 지원제로 바뀐 뒤에도 필요에 따라 군대를 편성하는 방식은 바뀌지 않았다. 로마군이 적의 선제공격에 뒤늦게 대응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도 상비군이 없었기 때문이다.
공화정 말기에는 카이사르 군단처럼 사실상의 상비군이 생겨났지만, 그것도 실제로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의 서약 관계였다. 이것은 국가와 병사의 서약 관계라기보다는 총사령관과 병사의 서약 관계라는 느낌이 강했다.
필요에 따라 군대를 편성하는 방식이 오랫동안 불편하지 않았던 것은 로마의 공화정 시대가 패권 확장 시대였기 때문이다. 적을 공격하는 것이므로, 목표가 정해지면 군단을 편성하고, 그 군단을 충분히 훈련시킨 뒤에 출정해도 늦지 않다. 아니, 군단을 편성하여 훈련시키는 동안 그 사실을 알아차린 적이 지레 겁먹고 체념해버리기 때문에, 군대를 출정시키기만 해도 적의 항복을 받아낼 수 있다는 이점이 있었다.
하지만 최대 목표가 방위로 바뀌면 종래의 방식은 불편해진다. 적은 언제 습격해올지 모른다. 따라서 거기에 대한 대응수단을 항시 갖추어두어야 한다. 아우구스투스는 오로지 방위를 목표로 하기 때문에 상설 군사력이 필수불가결하다는 점을 이해하고, 그것을 실천했다.
이 군제개혁이 군비축소와 병행하여 이루어진 점도 흥미롭다. 상비군이 되면, 되도록 적은 비용으로 최대의 효과를 올리는 조직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라의 경제력이 감당할 수 없게 된다. 감당할 수 없으면 조만간 속주세를 올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세금을 올리려고 하면 속주민의 불만이 폭발하여, 외적에 대한 방위는커녕 국내의 안전도 보장할 수 없게 된다.
이 정도가 기원전 27년 가을까지 35세의 아우구스투스가 착수한 정책인 것으로 여겨진다. 그에게는 카이사르가 남긴 청사진을 현실화하는 임무가 부여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청사진에 따라 당장 건물을 짓기 시작하면 독재라는 의혹을 초래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는 먼저 토대로 쌓는 일에만 충실하자고 생각한게 아닐까. 그렇긴 하지만, 건축물의 수명은 토대에 달려 있다. 그런 의미에서 주춧돌 위에 돌을 쌓기 전에 잠시 시간을 두기로 했다. 사람들의 눈에 명쾌해 보이고 평판도 높이는 일, 즉 업적록에 명기할 수 있는 그런 사업을 먼저 처리하기로 한 것이다. 명분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이베리아 반도의 완전제패'였다.
서방 재편성
기원전 27년 가을, 36세를 맞이한 아우구스투스는 로마를 떠났다. 아루렐리아 가도를 지나 남프랑스로 들어간 아우구스투스와 동행한 사람은 '오른팔' 아그리파였다. 그밖에 두 소년의 얼굴도 보였다. 16세의 마르켈루스와 15세의 티베리우스다. 아우구스투스는 누나 옥타비아의 아들인 마르켈루스와 아내 리비아가 데려온 아들 티베리우스에게 전쟁터를 처음으로 체험 시킬 작정이었다. 결혼한 지 10년이 지났는데, 이 결혼에서도 그는 아들을 얻지 못했다.
그해 겨울은 갈리아 나르보네시스 속주의 수도인 나르본에서 보냈다. 그렇다고 해서 놀거나 휴양하면서 보낸 것은 아니다. 카이사르는 무슨 일을 하든 하나의 목적만으로 하지 않았지만, 이 점에서는 아우구스투스도 마찬가지였다. 이베리아 반도의 완전 제패를 목표로 내걸긴 했으나, 이번 출정의 주된 목표는 로마 제국의 서반부를 재편성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현재의 에스파냐 북부에 사는 산악 민족을 제압하는 일은 군사행동이기 때문에 아그리파에게 맡겼다. 그래도 아우구스투스는 명색이 총사령관이니까, 남프랑스에 계속 눌러앉아 있을 수는 없다. 그는 이듬해 봄부터는 에스파냐의 타라고나로 이동했다. 타라고나는 바르셀로나에서 남쪽으로 50킬로미터쯤 떨어져 있는 지중해 연안의 항구도시다. 에스파냐 동부의 속주 이름을 히스파니아 타라코넨시스라고 지었을 정도니까, 라틴어로 타라코라고 부르는 이 도시의 중요성은 고대에는 바르셀로나와 비교가 되지 않았다. 타라코나는 이 속주의 수도이기도 했다.
타라코나로 이동해도 전쟁터에서는 400킬로미터 이상 떨어져 있다. 아무리 아그리파의 군사적 능력을 신뢰한다 해도, 힘든 전투라면 당연히 총사령관이 전쟁터 가까이에 있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이베리아 반도를 완전 제패하는 것은 총사령관이 구태여 가까이 있을 필요가 없을 정도의 군사행동이었다. 아그리파가 바다와 육지 양쪽에서의 공격에 전념하고 있는 동안, 총사령관은 계속 타라고나에 머물러 있었다. 두 차례의 전투로 에스파냐 북부의 산악 민족을 제압하는 데에는 2년도 걸리지 않았지만, 아우구스투스가 로마로 개선한 것은 기원전 23년이었다. 이 3년 동안 아우구스투스는 무엇을 했을까.
우선 기원전 27년 겨울에 그는 갈리아 문제를 처리하는 일에 착수했다.
로마가 내전에 시달리고 있던 14년 동안은 남프랑스를 제외한 갈리아 전역이 로마의 패권을 뒤엎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는데도 계속 로마의 속주로 남아 있었다. 그리스처럼 전쟁터가 되는 바람에 로마의 군사력이 집중해 있었던 것도 아니다. 다른 속주들처럼 오래 전에 정복되어 로마의 패권 하에 들어간 역사가 길었던 것도 아니다. 겨우 얼마 전에 카이사르에게 정복되었을 뿐이다.
카이사르가 암살된 뒤 14년 동안 갈리아에는 로마군 병사의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아니 내전이 끝난 뒤에도 아우구스투스는 다른 일을 먼저 처리하느라 기원전 27년까지 갈리아를 방치해두었으니까. 그것까지 합하면 17년이 된다. 그런데 로마는 그렇게 오랫동안 갈리아를 방치해두고도 갈리아인의 반란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카이사르의 전후처리가
그만큼 교묘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것은 어떤 것이었는가.
카이사르는 정복당한 민족이 반기를 드는 것은 민중이 자주적으로 봉기하기 때문이 아니라 지배층이 민중을 선동하기 때문임을 알고 있었다. 그는 또한 지배층이 불만을 품는 것은 타민족에게 정복당하여 자신들의 권위와 권력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카이사르는 갈리아 전역의 모든 부족을 완전히 보전했다. 뿌리째 없어진 민족은 하나도 없었다. 부족을 보전한다는 것은 부족의 근거지를 보전한다는 뜻이고, 부족의 지도층을 보전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종교도 언어도 생활 습관도 모두 정복당하기 전과 똑같은 상태로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갈리아를 불안정하게 만드는 요인을 제거하지 못했다. 갈리아에는 수십 개 부족들 사이의 다툼이 끊이지 않았고, 열세에 몰린 부족은 라인 강 동쪽에 사는 게르만족에게 도움을 청하곤 했다. 이것이 갈리아 전체를 불안정하게 만드는 요인이었다. 그래서 카이사르는 갈리아의 모든 부족들 가운데 가장 유력한 4개 부족에게 지도적인 지위를 주었다. 하이두이족, 오베르뉴족, 세콰니족, 링고네스족이 그들이다. 이들 네 부족의 우두머리에게 각각 자기네 산하의 중소 부족을 통합하는 역할을 맡겼다. 한때 카이사르를 막다른 궁지로 몰아넣은 적이 있는 베르킨게토릭스가 속한 오베르뉴족도 똑같은 대우를 받았다. 이것이야말로 카이사르의 합리성과 뛰어난 정치 감각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준다.
카이사르는 갈리아 전체 부족장 회의도 그대로 보전하고, 1년에 한 번씩 열리는 이 회의를 운영하는 책임도 네 부족의 우두머리에게 맡겼다. 네 부족이 멋대로 독립하여 서로 패권을 다투지 않도록 하기 위한 방책이었다.
이리하여 카이사르는 갈리아 지도층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부족장의 권력과 권위를 그대로 존속시키고, 율리우스라는 자신의 가문 이름도 하사하고, 자제들에게는 '풀브라이트 장학금'을 주어 로마 유학까지 시켰다. 카이사르가 암살된 뒤에도, 아니 제정이 확립된 뒤에도 율리우스 성을 가진 갈리아인이 사료에 자주 나오는 것을 보면 웃음이 나오지만, 가문 이름을 준다는 것은 고대 로마에서는 '클리엔테스' 관계를 맺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카이사르가 한 일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민중은 자주적으로 봉기하지는 않지만, 불만을 분출시키는 것은 자주적이다. 거기에 불을 붙이는 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경제적인 이유였다.
공화정 시대의 로마에서는 속주민에게 '10분의 1세'라고 불리는 직접세를 부과하는 것이 관례였다. 수입의 10분의 1을 일종의 안전보장비로 로마에 내는 것이다. 속주민에게는 병역 의무가 없고, 군단병은 로마 시민권 소유자로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속주세는 수입의 10분의 1이기 때문에 해마다 액수가 달라지다. 카이사르는 이 속주세를 일정한 액수로 고정시켰다. 갈리아 전체가 1년에 통틀어 4천만 세르테르티우스를 로마에 바치도록 결정한 것이다. 이 액수가 당시 어느 정도의 구매력을 갖고 있었는지는 제 4권에서 이야기했지만, 별로 부담스럽지 않은 액수였다고 단언해도 좋을 것이다.
또한 공화정 시대의 로마에서 속주세 징수제도의 특징은 국가가 속주세를 징수하는 것이 아니라 '푸블리카누스'라고 불린 사설 징수업자에게 맡겼다는 점이다. 그런데 카이사르는 이제도도 폐지한다. 푸블리카누스는 갈리아에서 속주세를 징수하는 일에 더 이상 관여하지 않는다.
그러면 누가 징수했는가. 사료가 없어서 추측할 수밖에 없지만, 카이사르의 방식으로 미루어보건대 이것도 역시 각 부족장에게 일임했던 게 아닌가 싶다. 중소 부족장들이 모은 세금을 네 부족장이 책임지고 관리하는 갈리아 전체 부족장 회의에서 통합하여, 그것을 카이사르에게 보내고 있었던 건 아닐까. 그런데 카이사르라는 인물은 사복을 채우는 데에는 무관심했지만, 자기 돈과 남의 돈을 구별하지 않았다. 공과 사를 엄격하게 구분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눈에는 곤란한 사람이기도 했다. 갈리아에서 들어오는 속주세도 카이사르가 폼페이우스와 싸우는 동안 전쟁 비용으로 사라져버렸을 가능성이 크다.
세금의 행방은 별무제로 하고, 갈리아인의 관점에서 보면 카이사르가 제패한 이후의 갈리아는 어떠했을까.
우선 각 부족들 사이의 다툼은 옛이야기가 되었다. 부족간 다툼이 없어진데다 카이사르가 두 번이나 라인 강을 건너 게르만족을 혼내준 덕에, 게르만족의 침략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그 증거로, 카이사르가 정복한 이후 갈리아 민족은 수렵민족에서 농경민족으로 바뀌었다고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지리학자인 스트라보는 말하고 있다.
약탈당할 염려도 없이 농경에 전념할 수 있게 되었지만, 각 부족의 내부의 구성은 전과 마찬가지였다. 지도층의 권위와 권력은 내정의 자치에서부터 세금 징수에 이르기까지 공인되어 있는 상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세금이 싸다. 본국 이탈리아에 대해서는 관세를 5퍼센트나 부과 했지만, 갈리아에 대해서는 관세율을 2.5퍼센트로 억제하고 있었다. 당시 갈리아는 경제적으로 후진국이었기 때문이다.
카이사르가 암살된 뒤 로마가 내전에 휘말려 있던 시대에도 갈리아가 평온을 유지한 이유는 이것이다. 일부 연구자들은 카이사르 개인에 대한 심취를 이유로 들고 있지만, 단지 그것만으로 17년 동안이나 평온이 지속될 리가 없다.
그런데 로마가 안정을 되찾은 기원전 30년부터는 갈리아에 불온한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아우구스투스가 보낸 해방노예가 그 원인이었다.
아우구스투스의 심복이었던 그 해방노예는 융통성없이 갈리아에도 다른 속주들과 똑같이 '10분의 1세'를 부과하려고 했다. 갈리아 부족장들이 여기에 반발했다. 아우구스투스는 직접 나설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기원전 27년부터 기원전 26년까지 나르본에 머무는 동안 그는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전념했다.
기원전 28년에 실시된 국세조사 결과를 보았다면, 갈리아 부족장들도 4천만 세스테르티우스의 속주세는 너무 싸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결국 갈리아도 다른 속주들과 같이 '10분의 1세'를 내기로 속주세 제도가 개정되었다.
하지만 세금을 늘리는 조치는 세금을 줄이는 조치와 짝을 이루어야만 실현하기 쉽다는 사실을 아우구스투스는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는 갈리아에서 2.5퍼센트였던 관세율을 1.5퍼센트로 인하했다. 이것도 사료가 없어서 추측의 영역을 넘어서지는 못하지만, 징세권은 전과 마찬가지로 당분간 부족장들에게 위임된 게 아닌가 싶다. 공화정 시대의 푸블리카누스 제도가 부활되었다는 증거 자료는 없고, 지방 세무서 같은 조직이 설치된 것은 10여 년 뒤인 기원전 15년경이었기 때문이다. '신중함'이야말로 아우구스투스의 평생을 지배한 성격이었다.
세제 개정에 이어 아우구스투스는 갈리아 전역을 재편성하는 작업에도 착수했다.
북쪽은 도버 해협과 북해, 서쪽은 대서양, 남쪽은 피레네 산맥과 지중해, 동쪽은 라인 강과 알프스 산맥으로 둘러싸인 갈리아 전역은 크게 다섯 지방으로 나뉘었다.
1, 갈리아 나르보넨시스라고 불리는 남프랑스 속주
이 속주의 수도는 나르보(오늘날 프랑스의 나르본), 주요 도시로는 톨로사(오늘날의 톨루즈), 마실리아(오늘날의 마르세요), 카이사르가 군항으로 개발한 포룸율리(오늘날의 칸과 상트로페 사이에 있는 프레쥐스), 그리고 북쪽으로 올라가 쿨라로(오늘날의 그르노블), 론 강 연안에 있는 발렌티아(오늘날의 발랑스)가 있다.
로마의 속주로서 이미 200년이나 되는 역사를 가진 이 지방은 로마화가 많이 진행되어, 갈리아에서도 이곳 남프랑스만은 '원로원 속주'가 되어 있었다. 속주세는 수입의 10퍼센트, 관세율도 본국과 같은 5퍼센트였다.
카이사르가 정복한 것은 남프랑스 이외의 갈리아인데, 그것을 아우구스투스는 다시 네 지역으로 나누었다.
2, 아퀴타니아 속주
카이사르는 피레네 산맥에서 가론 강까지를 아퀴타니아 지방이라고 했지만, 아우구스투스는 이 범위를 더욱 넓혀 피레네 산맥에서 북쪽의 루아르 강에 이르는 넓은 지방을 아퀴타니아(오늘날의 아키텐)라고 불렀다.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었다.
안토니우스와의 싸움이 아직 마무리되지 않았을 때, 아퀴타니아 지방에서 작은 봉기가 일어났다. 아그리파가 간단히 제압하긴 했지만, 그런 일이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가론 강 이북의 강력한 부족인 오베르뉴족이나 비투리지족과 혼합하는 방책을 채택한 것이다. 이 속주의 수도로 결정된 것은 부르디갈라(오늘날의 보르도)였다. 가론 강 어귀에 자리잡은 보르도는 대서양 쪽에서 갈리아를 통제하기에 알맞은 이치에 있었다.
이 속주의 주요 도시로는 수도 보르도에 이어 리모눔(오늘날의 푸아티에), 아바리쿤(오늘날의 부르주), 아우구스토리움(오늘날의 리모주)등이 있다.
3, 갈리아 루그두넨시스 속주
갈리아의 중심부를 차지하고 있는 이 속주에는 루아르 강에서 센 강 유역까지, 남쪽으로는 손 강과 론 강의 합류점에 자리 잡은 리옹까지 포함된다. 수도는 루그두놈(오늘날의 리옹), 갈리아 루그두넨시스는 '리옹 속주'라는 뜻이기도 하다. 주요 도시는 카이사로두눔(오늘날의 투르), 케노마눔(오늘날의 르망), 로토마구스(오늘날의 루앙), 루테티아(오늘날의 파리)아겐디쿰(오늘날의 상스), 아우구스토두눔(오늘날의 오툉) 등이었다.
특히 로마인들이 그 지형의 유리함에 착안하여 개발한 리옹은 이 속주의 수도에 머물지 않고, 차츰 갈리아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게 된다. 이 지방의 유력 부족인 하이두이족은 알레시아 공방전에서는 잠시 로마와 사이가 벌어졌지만,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전통적으로 친로마 파였다.
4, 벨기카 속주
갈리아 전쟁기 첫부분에서 카이사르가 라인 강을 건너 갈리아로 이주하여 정착한 사람들, 즉 벨가이(벨기에)족이 사는 지방이라고 쓴 것은 센 강과 마른 강에서 북쪽으로 펼쳐져 있는 지역이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이 지방과 링고네스족, 세콰니족, 트레베리족이 사는 지방을 합하여 '벨기카 속주'라는 이름으로 재편성했다.
수도는 모젤 강 연안에 있는 아우구스타 트레베로룸(오늘날 독일의 트리어), 오늘날에는 독일의 서쪽 끝에 있고, 따라서 룩셈부르크 바로 동쪽에 자리잡고 있다.
주요 도시로는 사마로브리바(오늘날의 아미앵), 노비오두눔(오늘날의 수아송), 두로코르토룸(오늘날의 랭스), 그리고 나중에 다시 편성이 바뀔 때까지는 디비오(오늘날의 디종), 베손티오(오늘날의 브장송), 게나바(오늘날의 제네바)도 이 속주에 포함되어 있었다. 이 지방의 유력 부족은 카이사르에게 항복한 뒤로는 일관되게 친로마 파였던 레미족이다.
5, 게르마니아 속주
게르마니아라 해도, 라인 강 서쪽 연안 일대를 가리킨다. 라인 강 동쪽에 사는 게르만족한테서 갈리아를 지키는 최전방인 만큼, 이 속주의 수도로 라인 강을 눈앞에 바라보고 있는 콜로니아 아그리피넨시스(오늘날의 쾰른)였다. 로마인들이 이주하여 정착한 도시를 의미하는 콜로니아를 앞에 내세운 것이 보여주듯이, 오늘날 독일의 주요 도시인 쾰른도 원래는 로마의 군사기지로 태어났다.
수도 쾰른의 위치와 역할만 보아도 분명하지만, 이 속주를 편성한 주요 목적은 군사에 있었다. 이 속주의 주요 도시는 거의 다 로마군 기지에서 유래했다. 게다가 거의 모든 도시가 라인 강 연안, 즉 최전방에 자리 잡고 있다.
라인 강 방어선은 우선 카이사르가 선을 긋고 아우구스투스가 토대를 쌓기 시작한 뒤, 100여 년에 걸쳐 역대 황제들이 차츰 완성해갔는데, 그 방어선을 고수하는 것이 최대 목표였기 때문에 군단 기지를 건설할 때에도 지정학적 측면을 배려했고, 따라서 2천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제대로 기능을 발휘하는 도시들이 탄생하게 되었다.
아우구스투스가 갈리아 전역을 재편성한 것은 많은 점에서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첫째, 각 속주의 걍계선을 긋는 방식, 둘째, 각 속주 수도의 위치, 셋째, 주둔군의 배치.
아우구스투스는 분할하면 지배하기 쉽다는 단순한 생각으로 갈리아 전역(남프랑스 속주는 제외)을 기계적으로 사분한 것은 아니었다. 카이사르가 수십 개나 되는 갈리아 부족들을 4대 부족의 관할로 나누었듯이, 아우구스투스도 순수하게 군사적 속주인 게르마니아 속주를 제외한 3개 속주를 그 지방 유력 부족의 관할 아래에 두는 방식을 채택했을 것이다. 아퀴나이아 속주는 오베르뉴족, 갈리아 루그두넨시스 속주는 하이두이족, 벨기카 속주는 레미족이 관할하는 식이다.
물론 아우구스투스가 임명한 장관(레카투스)이 로마에서 파견되어 속주를 통치한다. 하지만 현지의 유력자를 '현지법인'의 관리직으로 기용하면 운영이 상당히 원활해지지 않을까. 그 증거로, 아우구스투스는 직할 속주로서 당연히 군단을 두어야 할 갈리아의 3개 속주에 1개 군단도 두지 않았다. 갈리아에 배치된 5개 군단은 모두 라인 강 방어선에 달라붙는 듯한 느낌으로 게르마니아 속주에 집중되어 있었다. 갈리아의 다른 지방에서는 무장한 로마 병사의 모습조차 볼 수 없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또한 각 속주 수도의 위치도 흥미롭다. 보통은 패배자의 '안방'을 빼앗아 '총독부'로 삼을 것이다. 그게 더 간단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우구스투스는 오직 지형만을 선택 기준으로 삼아 수도를 정했다. 보르도, 리옹, 트리어는 모두 교통의 요지에 자리 잡고 있다. 아니, 교통망을 정비하는 것은 로마인이니까, 교통의 요지가 될 수 있는 지형이라고 바꿔 말해야 할 것이다.
유력 부족인 레미족의 근거지인 랭스, 하이두이족의 근거지인 오튕은 로마의 갈리아 지배 기지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교통망-즉 로마인의 '사회간접자본' 정비-은 이들 도시도 배제하지 않았다. 배제하기는커녕 갈리아 원주민들이 사는 이 도시들을 이어주는 네트워크가 차례로 만들어져 간다. 절대적으로 우세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로마인들은 이런 배려를 잊지 않았다. 로마가 아직 이탈리아반도의 패권자에 불과했던 시대에 건설된 아피아 가도가 점차 로마의 패권 하에 들어온 부족들의 근거지를 누비며 꿰뚫고 나아가듯이, 그리고 그 결과 승자와 패자의 관계가 공동 운명체로 바뀌어갔듯이.
갈리아와 에스파냐의 공통점은 한 지방에 '황제 속주'와 '원로원 속주'가 동거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그리파가 에스파냐 북서부를 제압하는데 전념하고 있는 동안, 아우구스투스는 나르본과 타라고나에 눌러앉아 이 두 지방의 통치체제 구축에 전념하고 있었다. 두 종류의 속주가 동거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시기에 이루어진 통치체제는 로마의 지배를 받는 모든 지방의 모델이 되었다.
아우구스투스는 통일과 분리, 중앙과 지방, 중앙집권과 지방분권이라는 모순된 개념의 병립이나, 동거에 적합한 체제를 구축하는 것이야말로 다른 인종과 다른 종교와 다른 문화가 뒤섞여 있는 로마 제국 존속의 열쇠임을 인식하고 있었다. 얼핏 보기에 원로원에 일임한 느낌을 주는 '원로원 속주'도 공화정 시대의 방식을 그대로 답습하지는 않았다.
원로원이 선정한 집정관이나 법무관 경험자가 파견되어 1년 임기로 통치하는 것이 '원로원 속주'다. 이런 속주밖에 없었던 공화정 시대에는 모든 것을 총독이 도맡아 관할했다. 군사, 사법, 행정만이 아니라 푸블리카누스를 통한 속주세 징수권도 모두 총독이 장악하고 있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입으로는 공화정 복귀를 외치면서도, 행동에서는 그와 정반대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그의 머릿속은 통일과 분리의 병립으로 가득 차 있었다. '원로원 속주'도 그 모든 것을 원로원에 맡겨두면 단순한 분권이 되어버린다.
로마화가 진행된 지방이기 때문에 군단을 주둔시킬 필요가 없다 하여, '원로원 속주'에 총독을 파견하는 원로원으로부터 군사권을 빼앗은 것은 앞에서 이미 이야기했다. 아우구스투스의 생각으로는 군사야말로 분권해서는 안 되는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게다가 아우구스투스는 사법의 절반도 중앙집권화한다. 속주에 살아도 시민권을 가진 자에게는 항소권이 인정되어 있었고, 속주민에게도 총독을 고소할 권리가 인정되어 있었지만, 거기에 최종 제가를 내리는 것은 로마의 '제일인자' 아우구스투스의 임무가 되었다. 속주총독은 지방법원의 재판장, 아우구스투스는 대법원의 재판장이라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게다가 속주세는 물론 관세 같은 간접세 징수권도 총독한테서 빼앗는다. 아우구스투스가 이것만은 '황제 속주'와 '원로원 속주'의 구별없이 이 부문만 전담하는 관리를 임명하여 각 속주에 배치했기 때문이다.
'국세청' 창설
'프로쿠라토르 임페리알레'라고 불리게 된 이 관직을 신설한 것이야말로 아우구스투스가 확립한 속주 통치 체제의 요체라 해도 좋은 개혁이었다. 이 '황제 재무관'은 아우구스투스가 직접 임명한다. 출신 계급은 로마 사회에서는 원로원 계급 다음인 '기사 계급'(에퀴타스). 내가 줄곧 '경제인'으로 의역한 사람들이다. 바꿔 말하면,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보아도 경제에 밝은 사람들이다. 이들은 공화정 시대에도 '푸블리카누스'라는 이름으로 사설 징세업에 종사했지만, 아우구스투스는 그것을 자기가 임명권을 갖는 국가공무원으로 만든 것이다. 급료는 지불되지만, 징세액의 10퍼센트였던 수수료는 절약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것은 제국을 통치하는 데 유효했다.
'황제 재무관' 체제를 도입한 아우구스투스의 목적은 다음 세 가지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첫째, 속주에서 징세의 공정성을 확보한다.
공화정 시대에는 원로원이 파견한 총독이 도금업자인 '푸블리카누스'를 통해 징세권을 장악했을 뿐 아니라, 예산편성권까지 장악하고 있었다. 따라서 총독이 임기 중에 사복을 채우는 것은 공화정 시대의 속주통치의 암이기도 했다. 이 암을 제거하기 위해서라도 권력 분립은 필수불가결하다고 그는 생각했다. '황제 재무관' 설치로 말미암아 속주에서의 징세사업은 아우구스투스에게 속하고, 총독은 세금을 쓰는 일에만 전념하도록 바뀌었다.
둘째, 제국 통치라는 웅대한 청사진에 따라 세금을 배분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속주는 저마다 경제력이 다르다. 수입의 10분의 1이 속주세인 이상, 경제력에 차이가 있으면 각 속주의 세입에도 차이가 생긴다.
그런데 가장 많은 지출 필요로 하는 것은 방위비인데, 방위비를 쏟아 부어야 하는 지방은 경제력이 있는 시리아 속주를 빼고는 모두 저개발 지역이다. 저개발 지역이기 때문에, 필요한 방위비를 충당할 만한 세입은 기대할 수 없다. 이런 현실에서는 경제가 발달한 속주에서 거두어들인 세금도 저개발 속주로 돌리지 않으면 제국 전체를 방위하기가 불가능해진다.
아우구스투스는 '황제 재무관' 체제로 세제를 통일하여 이 과제를 해결할 생각이었다.
셋째, 통치의 연속성 확립이다. 황제 재무관의 임기도 아우구스투스가 결정하기 때문에, 10년 이상 근무하는 사람도 드물지 않았다. 1년밖에 안되는 '원로원 속주' 총독의 임기가 통치의 연속성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 점도 차츰 개선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했다.
'황제 재무관'들이 취합한 세금은 경비를 공제한 뒤 로마 국고로 들어간다. 하지만 나가는 돈도 많았다. 우선 안전보장비인 군사비, 그리고 속주를 포함한 제국 전체의 '사회간접자본' 정비에 드는 비용.
아우구스투스 시대는 속주의 가도 건설이 비약적으로 진행된 시기이기도 하다. 이 사업은 아그리파가 주도하여, 리옹 같은 곳은 4개 가도의 출발점이 되기도 했다. 하나는 서쪽의 아퀴타니아로 이어지는 가도. 또 하나는 북서쪽의 대서양으로 향하는 가도. 세 번째는 북동쪽의 라인 강으로 달리는 가도. 네 번째는 론 강을 따라 남쪽의 마르세유에 이르는 가도. 도로망 건설 붐이 일어난 것은 에스파냐도 마찬가지였다.
가도 건설 공사는 군단병이 맡았기 때문에, 로마에서 군사비와 사회간접자본 건설비를 분리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영어 낱말 'security'의 어원인 라틴어 '세쿠리타스'의 의미는 '안전보장'이니까, 군사비와 사회간접자본 건설비를 반드시 분리해야 할 필요는 없다.
하나의 목적을 위해 완벽하게 만들어진 것은 다른 목적에도 도움이 된다는 진리를 로마 가도만큼 뚜렷이 보여주는 예는 없다.
원래 군용도로로 건설된 가도망은 철저히 효율성을 추구했기 때문에, 민간 경제 진흥과도 연결된다. 한 가지만 예를 들어보자. 로마 가도는 무거운 공성기도 쉽게 운반할 수 있도록 지형이 허락하는 한 평탄하게, 그리고 가능한 한 직선으로 건설된다. 아니, 지형이 허락하지 않으면 터널을 뚫고 늪을 메우고 절벽을 깎아내어 지형을 바꾸기까지 한다. 이것은 전에 비해 더 많은 짐을 수레에 실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자 교류가 왕성해지면 사람의 교류도 왕성해진다. 사람의 교류가 왕성해지면 사람의 두뇌에 들어 있는 지식과 가슴에 들어 있는 생각도 교류되지 않을 수 없다. 이리하여 로마 문명을 기둥으로 하는 일대 문명권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아우구스투스는 갈리아와 마찬가지로 에스파냐에서도 카이사르가 편성한 속주를 재편성했다. 이베리아 반도는 동서로 양분되어, 동부는 가까운 에스파냐 속주, 서부는 '먼 에스파냐'속주로 되어 있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이베리아 반도를 남부의 '베티카'속주, 서부의 '루시타니아'속주, 동부와 제패를 끝낸 북서부까지 포함하여 이베리아 반도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타라코넨시스'속주로 삼분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베티카 속주는 '원로원 속주다. 로마화의 역사가 길어서 군단을 주둔시킬 필요가 없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타라코넨시스 속주도 로마회의 역사는 길다. 하지만 이 속주를 통치하는 데에는 이제 막 제압하는 데 성공한 북서부를 잠시도 방심하지 않고 두루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래서 타라코넨시스 속주도 루시타니아 속주와 함께 아우구스투스가 직접 관할하는 '황제 속주'가 되었다. 실제로 에스파냐에 주둔시키기로 결정된 4개 군단은 얼마 전에야 제패한 북서부를 에워싸듯이 '황제 속주'인 타라코넨시스 속주와 루시타니아 속주에 배치되었다.
아우구스투스가 설정한 3개 속주의 수도와 주요 도시는 다음과 같다.
타라코넨시스 속주 - 수도는 타라코(오늘날의 타라고나). 주요 도시는 남쪽의 카르타고노바(오늘날의 카르타헤나), 북쪽의 톨레툼(오늘날의 톨레도), 카이사르가 건설한 카이사르 아우구스타(오늘날의 사라고사), 폼페이우스가 건설한 폼파엘로(오늘날의 아스토르가), 레기오(오늘날의 레온), 대서양 연안의 브라카라 아우구스타(오늘날의 포르투갈의 브라가) 등.
루시타니아 속주 - 수도는 아우구스타 에메리타(오늘날의 메리다). 주요 도시는 북쪽의 살만티카(오늘날의 살라망카), 서쪽의 올리시포(오늘날 포르투갈의 리스본) 등.
베티카 속주 - 이 '원로원 속주'의 수도는 코르두바(오늘날의 코르도바). 주요 도시는 코르도바 남쪽의 말라카(오늘날의 말라가), 포에니 전쟁 시대부터 로마의 식민도시였던 이탈리카, 그 바로 남쪽에 있는 히스팔리스(오늘날의 세비야), 그리고 지브롤터 해협 근처에 있는 가데스(오늘날의 카디스) 등.
아우구스투스는 특히 사라고사와 메리다에 많은 제대 군인을 이주시켜 식민도시(콜로니아)를 건설했다. 갈리아 원주민과는 달리 에스파냐 원주민에게는 지도자가 될 만한 유력한 부족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때그때 경우에 따라 일을 처리하는 것은 로마인의 전통이기도 했다. 이주한 로마 시민들은 원주민과 동떨어진 존재가 되지는 않았다. 로마군에서 병역을 치르고 있는 현역 병사들은 독신 의무를 지켜야 한다. 만기 제대할 때에는 마흔 살 안팎이 된다. 이 나이의 독신 남자가 이주하여 현지 여자와 결혼하는 것이 로마의 식민 방식이다. 카이사르가 속주에서 시작한 민족 융합은 이렇게 제정 시대에 들어온 뒤에도 계속된다.
'행운의 아라비아'
갈리아 전역과 이베리아 반도를 재편성하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던 기원전 26년부터 기원전 24년까지, 아우구스투스는 딱 한번 전쟁을 한다. 국토방위의 필요성에 쫓겨 어쩔 수 없이 싸운 것은 아니다. 그것은 전쟁이라기보다는 원정이었고. 그것도 멀리 떨어진 아라비아 반도에서 이루어졌다.
그 전초전은 에티오피아 원정이었는데, 이 원정에는 속주로 편입된 이집트의 남쪽 방위선을 확립한다는 이유가 있었다. 이집트 주둔군은 나일 강을 따라 남하하여, 오늘날 수단 영토가 되어 있는 나파타까지 진격했다. 그 결과 에티오피아인과 강화도 이루어졌고, 남쪽 방위선도 확립되었다.
그런데 아우구스투스는 이 무렵 '아라비아 펠릭스'(행운의 아라비아)라고 불린 현재의 예멘까지 진격하려고 시도했다. 시도했다고 말한 것은 그 원정에 파견된 병력이 2개 군단도 채 안되는 소규모였기 때문이지만, 이 원정은 방위선 확립을 외치의 가장 중요한 목표로 삼은 그의 관점에서는 보기 드문 예외가 되었다.
'행운의 아라비아'는 거기에 사는 아랍인이 그렇게 자칭한 것이 아니라, 지중해 세계에 사는 그리스인이나 로마인이 붙인 이름인 것 같다. 향료와 몰약, 진주, 보석, 그리고 인도를 거쳐오는 중국산비단 같은 고급품을 거래하여 돈을 버는 행운을 타고난 아라비아라는 뜻이다.
왜 아우구스투스가 먼 아라비아 반도 끝에 있는 '행운의 아라비아' 까지 눈길을 돌렸을까. 그는 평생 동안 국민에게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지 않고 재원을 확보하기 위해 노심초사한 통치자이기도 하다. 홍해 입구를 장악하면 동방에서 들어오는 물자 교역에 따른 이익을 독점할 수 있을 거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가 직접 쓴 업적록에는 나르본에 머물고 있는 그에게 먼 인도에서 국왕 사절이 찾아왔다고 적혀 있다.
다만 '행운의 아라비아' 원정은 업적록에 기록된 것처럼 "저항한 자는 죽이고, 전투에서는 승리하여 많은 도시를 점령한" 식으로는 끝나지 않았다. 홍해를 건너 아라비아 반도에 상륙한 것까지는 좋았지만, 사베이족 수도인 마리바까지 사막을 행군하는 것은 여간 어렵지 않았다.
어쨌든 300킬로미터를 행군하는 데 무려 6개월이나 걸렸다. 그 때문에 마리바 성벽 앞에 이르러서도 공격할 여력이 없어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정복하러 간 것이라면 실패다. 그러나 로마는 홍해의 북부 3분의 1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나일 강 연안의 콥트에 세관을 설치했다. 로마의 관세는 본국 이탈리아에서는 5퍼센트, 저개발 지역인 갈리아에서는 1.5퍼센트였지만, 동방에서 들어온 고급품에 대해서는 무려 25퍼센트나 되는 관세가 부과되었다.
갈리아에 머물고 있었다면 해협 건너편의 브리타니아는 반드시 시야에 들어올 수밖에 없지만, 아우구스투스는 '아버지' 카이사르가 시작한 브리타니아 정복을 계승할 뜻을 밝히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하지 않겠다고 분명히 말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갈리아는 평온하다. 따라서 갈리아의 불평분자가 브리타니아로 도망친 뒤, 브리타니아 부족을 선동하여 갈리아를 위협하는 사태도 일어나지 않는다.
브리타니아인도 도발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도버 해협과 가까운 켄트 지방에 사는 두 부족은 아우구스투스에게 사절을 보내 복종을 맹세하고 있다. 따라서 브리타니아 정복은 절박한 과제가 아니라고 아우구스투스는 판단했을 것이다. 급히 해결해야 할 필요성에 쫓기지 않으면 행동에 나서지 않는다. -이것은 여론이 무르익기를 기다리는 타입의 정치가인 아우구스투스가 늘상 보여주는 방식이기도 했다.
또한 그는 군사력을 수중에 넣었으면서도, 굳이 속주로 만들 필요가 없으면 동맹관계를 지속하는 쪽을 선택하는 권력자였다. 고대에 '헤라클레스의 두 기둥'이라고 불린 지브롤터 해협을 사이에 두고 에스파냐와 마주보는 북서 아프리카의 마우리타니아 왕국에 대한 대책에도 그런 면모가 엿보인다. 그렇긴 하지만, 이런 외교 방침은 아우구스투스의 창안이 아니라 술라와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도 답습한 로마의 전통적인 대외 정책이었다.
마우리타니아 왕국으 왕조가 단절되자, 아우구스투스는 탑수스 회전에서 카이사르에게 패하고 자결한 누미디아 왕의 아들을 마우리타니아 왕위에 앉혔다. 왕위에 올라 유바 2세가 된 이 왕자는 다섯 살 때 로마에서 거행된 카이사르 개선식에 패배자의 대표로 참가한 뒤, 승리자인 카이사르의 개인 저택에 볼모로 잡혀 있었다. 카이사르가 암살된 뒤에는 아우구스투스가 옥타비아누스였던 시절에 살던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아우구스투스는 로마의 상류층 자제와 똑같은 교육을 받은 이 왕자를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 사이에 태어난 이집트 왕녀와 결혼시켰다. 이 클레오파트라 셀레네스도 부모가 자결한 뒤에는 아우구스투스의 누나이자 안토니우스의 전처인 옥타비아의 집에 맡겨져, 이복 형제자매들과 함께 자랐다.
이 결혼과 마우리타니아 왕가의 부흥은 성공했다. 젊은 왕과 왕비는 둘 다 교양을 갖추었고, 내정과 외교에서 로마의 충실한 동맹자가 되었다. 특히 어머니한테서 야심이 아니라 영리함을 물려받은 왕비의 주변에는 일종의 문화 살롱이 형성되어, 로마에서 찾아오는 사람들도 왕비에 대한 예방을 빼놓지 않는다는 말이 나올 정도가 되었다. 이리하여 북서 아프리카도 아우구스투스가 생각하는 '팍스 로마나'의 일익을 평화적으로 담당하게 되었다.
기원전 24년 말, 로마 세계의 서반부 재편성을 끝낸 아우구스투스는 수도 로마로 돌아왔다. 그는 이제 마흔 살이 되어 있었다.
3년 만에 '제일인자'를 맞이한 수도 시민들은 화려한 개선식이 열릴 거라고 믿었다. 군사행동을 벌인 곳은 한 군데뿐이었지만, 에스파냐를 완전 제패하는 위업을 달성했다. 전투에서 승리하는 것에만 관심을 갖는 일반 서민은 별문제로 하더라도, 원로원 의원 정도면 재편성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있다. 그 중요한 작업을 끝내고 귀국한 아우구스투스에게 원로원은 재빨리 개선식을 거행할 권리를 인정하고, 그 사실을 통고했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왜 사양했는지는 업적록에서도 밝히지 않았다. 전투는 아그리파가 도맡았고, 아우구스투스 자신은 전쟁터에서 400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에서 '외치'에 전념했으니까, 백마 네 필을 거느린 화려한 개선식은 삼가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개선식을 거행하지 않으면 서민층이 실망한다. 개선장군이 나누어주는 '선물'은 서민들의 낙이었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투스는 개선식은 거행하지 않고 '선물'만 나누어주었다. 호주 1인당 400세스테르티우스가 선물로 주어졌다. 대장부답다는 평판이 자자했던 카이사르가 나누어준 '선물'과 같은 액수였다. 그리하여 통이 크면서도 겸손한 사람이라는 평판이 확립되었다. 이 '겸손한 사람'은 탁월한 책략가이기도 했다.
'호민관 특권'
기원전 23년, 40세의 아우구스투스는 또다시 사람들이 예상치도 않았던 선언을 하고, 당장 그것을 실행에 옮겼다.
그때까지 연속해서 취임해왔던 집정관직을 동료 아그리파와 함께 사임하고, 앞으로 집정관은 공화정 시대처럼 해마다 민회에서 투표로 자유롭게 선출된다고 선언한 것이다. 집정관에 연속 취임하는 것이 로마 역사에 선례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마리우스를 비롯하여, 예를 들자면 끝이 없을 정도다.
1년 임기의 집정관이야말로 공화정 체제의 상징이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원로원 주도의 공화정을 최상의 정치체제로 믿고 있는 사람들은 또다시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감격한 의원들은 깊이 생각해보지도 않고 아우구스투스의 '겸손'한 제안에 찬성표를 던졌다.
그것은 아우구스투스에게 호민관 특권을 1년 기한으로 부여한다는 것이었다. 호민관 특권이란 호민관에게 주어지는 모든 권리를 말한다.
1. 신변 불가침권
2. 평민 대표로서 평민의 권리를 지키는 지위
3. 평민집회 소집권
4. 정책 입안권
5. 거부권(베토)
거부권은 위기관리체제로 여겨지고 있던 독재관에 대해서는 발동할 수 없지만, 그밖의 공적 기관이나 공적 결정에 대해서는 모두 발동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호민관은 원로원 결의나 집정관 결정도 거부권을 발동하여 백지로 돌릴 수 있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카이사르의 양자가 되어 귀족계급에 속하게 되었기 때문에, 평민계급 출신에게만 문호가 열려 있는 호민관에는 취임할 수 없다. 그래서 호민관이 되는 게 아니라, 호민관의 특권만 부여받겠다고 제의한 것이다.
연례적인 집정관 선거가 재개되자, 원로원 의원들은 이제 정말로 공화정 체제로 돌아가는구나 감격하고, 자기들한테도 집정관이 될 수 있는 기회가 돌아왔다고 기뻐했다. 그들은 집정관 임기를 종래와 마찬가지로 1년으로 하는 데 찬성했다. 하지만 이의가 없으면 임기가 연장된다는 단서가 붙었다. 도대체 어느 누가 최고 권력자의 임기 연장 요청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사실상의 종신제다. 그리고 호민관 특권은 종신 독재관이 된 카이사르의 법률 개정에 따라 전처럼 10명이 아니라 한 사람에게만 부여되도록 바뀌어 있었다. 카이사르로서는 호민관의 거부권 남발로 걸핏하면 국정이 마비 상태에 빠지는 종래의 폐해를 막기 위한 개혁이었고 아우구스투스도 그 생각을 답습했다. 이리하여 기원전 23년부터 로마 국가에는 카이사르가 암살되기 전에 잠시 존재했던 체제, 즉 단 한 사람이 거부권을 독점하는 체제가 부활되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카이사르처럼 로마의 정치체제에서는 이질 분자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종신 독재관'에 취임하지 않고도 사실상의 종신 독재관이 된 셈이다. 이것은 그가 늘상 쓰는 수법이다. 계속 갖고 있어봤자 아무 의미도 효력도 없는 권한을 반납하여 사람들을 기쁘게 해놓고, 그대신 얼핏 보기에는 의미도 효력도 별로 없어 보이지만 장래에 대한 포석으로는 대단히 중요한 권한을 획득하는 방식이다. 하나씩 따져보면 완벽하게 합법적이지만, 그것들을 연결시키면 소수지도체제인 로마식 공화정 체제에서는 비합법이 될 수밖에 없는 제정으로 서서히 바꾸어가는 수법이었다. 그것을 여기서 정리해두면 다음과 같다.
'카이사르'-이것은 17세에 불과한 옥타비아누스를 카이사르가 양자로 입적하여 후계자로 삼겠다고 유언했기 때문에 얻은 성이지만, 제정 시대가 진행됨에 따라 '황제'의 대명사가 된다. 2천 년 뒤의 카이저(독일)와 차르(러시아)는 이 의미를 계승한 것에 불과하다.
'제일인자'(프린켑스) - 원로원이 그에게 이 칭호를 주었을 때는 로마 시민 가운데 으뜸이라는 의미에 불과했지만, 사실상의 제정이 시작 된 것을 세상 사람들에게 숨기고 싶은 아우구스투스에게는 참으로 편리한 명칭이 되었다. 그가 자주 이 칭호를 사용한 것이 무엇보다도 좋은 증거일 것이다.
'아우구스투스' - 권력 냄새가 전혀 나지 않는 존칭에 불과했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권력투쟁을 초월한 지위를 의미한다. 생전의 카이사르는 체제(테제)를 무너뜨렸지만, 그는 체제에 반대해야만 비로소 힘을 얻을 수 있다는 특성을 가진 반체제(안티테제)의 불모성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질서(진테제)를 건설하고자 했다. 이 정치를 계승한 아우구스투스에게 테제와 반체제에서의 초월을 의미하는 '아우구스투스'가 참으로 편리하고 유용한 존칭이 된 것은 당연했다.
'임페라토르'-이것도 원로원 의원들이 보기에는 개선장군에 대한 존칭에 불과했다. 그래서 세상을 떠난 아버지 카이사르가 인정받고 있던 이 칭호 사용권을 자기한테도 인정해달라는 아우구스투스의 요청을 허락했다. 이 칭호 사용권이 아우구스투스가 이미 인정받고 있던 군통수권을 의미하는 '임페리움 프로콘술라레 마이우스'와 연결되면, '임페라토르'는 장군 총사령관이 된다.
게다가 아우구스투스는 전통적으로 군사력을 두지 않는 수도 로마에까지 이 '통수권'이 미치도록 법률을 개정했다. 따라서 그는 법적으로는 수도 안에서도 군사력을 행사할 권한을 갖게 된 셈이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의 자제력은 만점을 주어도 좋을 정도다. 그가 살아 있는 동안 병사들이 수도 안을 누비고 다닌 것은 휘하 장군들의 개선식 때문이다.
'호민관 특권'(트리부니키아 포테스타스)-호민관은 공화정 시대의 공직 중에서도 가장 민주적이고 자유주의적인 공직이었다. 귀족 출신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핸디캡을 짊어진 평민의 사회적 권리를 보호하는 것이 호민관의 역할이었기 때문이다. 귀족들의 반감에서 몸을 지키기 위해 신변불가침권을 인정받았고, 호민관을 죽이거나 상처를 입혀서 이 특권을 침해한 사람은 반국가범죄자로 재판을 받도록 되어 있었다. 따라서 호민관 특권을 인정받고 있던 카이사르를 죽인 브루투스를 비롯한 암살자들은 로마의 국법을 어긴 셈이 된다.
아우구스투스가 원로원에 출석할 때는 반드시 건장한 아우구스투스 파 의원들이 신변 경호를 위해 그의 주위를 에워쌌다고 한다. 그렇다면 '호민관 특권'을 위한 그의 참뜻은 신변 안전보다는 평민집회 소집권과 정책 입안권, 그리고 무엇보다도 거부권에 있었던 게 분명하다.
평민집회를 소집하여 그가 입안한 정책을 가결시키면, 원로원이 반대하더라도 평민 입법의 형태로 정책화할 수 있다는 것은 기원전 287년에 성립된 '호르텐시우스 법'이 인정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평민집회의 결의는 집정관이 소집권을 갖는 민회에서의 결의와 같은 가치를 갖는다. 게다가 거부권은 원로원 결의나 집정관이 입안한 정책도 백지로 돌릴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이다.
이런 대권을 왜 아우구스투스 한 사람에게 호락호락 넘겨주었을까. 그 이유는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첫째, 집정관 연임에 마침표를 찍은 것은 아우구스투스가 던진 미끼인데, 원로원 의원들은 그 미끼에 덥석 덤벼들었다.
둘째, 호민관 제도는 기원전 494년부터 500년 가까이 존속한 제도였기, 때문에, 로마 시민들에게는 익숙한 제도였다. 너무나 익숙한 나머지, 이 대권에 어떤 새로운 활용법이 있는지는 아무도 생각지 못했다. 새로운 활용법을 처음으로 깨달은 사람은 카이사르지만, 그는 활용할 시간을 얻기 전에 살해당했다. 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호민관 특권' 획득처럼 중요한 사항은 업적록에는 한마디로 언급되어 있지 않다. '호민관 특권' 가운데 거부권 행사의 특권이야말로 제정으로 옮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요체였기 때문이다.
그 증거로, 아우구스투스가 획득한 '호민관 특권'의 유효성은 그가 창설한 '내각'의 기능 향상에 반영되지 않을 수 없었다.
직역하면 '제일인자 보좌위원회'(콘실리움 프린케피움)라고 할 수밖에 없는 로마 시대의 내각은 '제일인자' 아우구스투스와 두 명의 집정관, 주요 '관청'의 대표, 그리고 추첨으로 뽑힌 15명의 원로원 의원으로 구성된다. '제일인자' 이외는 임기는 모두 1년이다.
이것은 결정했을 당시, 아우구스투스는 '제일인자'인 동시에 아그리파와 함께 집정관도 겸하고 있었다. 따라서 아우구스투스의 정책이 법에 보장되어 있는 집정관의 거부권 행사로
좌절당할 염려는 전혀 없었다.
하지만 집정관 연임을 그만두겠다고 선언한 기원전 23년부터는 '각의'에서 내려진 결정이 집정관의 거부권 행사로 좌절될 염려가 있었다. 여기서 거부권을 포함한 '호민관 특권'이 효력을 발휘하게 된다.
그렇긴 하지만, 로마법에서는 집정관의 거부권과 호민관의 거부권이 동등한 가치를 갖는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는 공화정 시대의 10명이나 되었던 단순한 호민관이 아니다. '호민관 특권'을 가진 유일한 자인데다 로마 시민 가운데 '제일인자'이고, 게다가 만인 위에 초연하게 서 있다는 의미를 가진 '아우구스투스'다
이렇게 되면, 그의 업적록에 나오는"그 후 나는 권위에서는 누구보다도 우위에 있었지만, 권력에서는 내 동료 집정관들을 능가하지 못했다"는 문장도 쓴웃음을 짓지 않고는 읽을 수 없을 것이다. 실제로는 각의도 그의 뜻대로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원로원 대표 15명은 이 무렵에는 20명으로 늘어나 있었지만, 수가 많은 것과 국정에 원로원의 뜻이 반영되는 것은 완전히 별개 문제였다. 그래도 원로원은 추첨으로 뽑힌 20명의 대표를 내각에 보내는 것으로 만족했다.
'호민관 특권'을 획득함에 따라 아우구스투스는 지도자로서, 아니 황제로서 공적 지위를 확립했다. 그 증거로, 그후 황제들의 공식 명칭은 아우구스투스의 명칭을 계승하게 된다.
'임페라토프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트리부니키아 포테스타스'
(Imperator Caesar Augustus Tribunicia Potestas)
여기까지는 모든 황제가 똑같고, 그 다음에 비로소 각자의 이름이 나온다.
평범한 황제라면 이제 비로소 날개를 펼 수 있게 됐다고 생각하여, 호화로운 궁전 건설에 착수했을 것이다. 그러나 40세의 아우구스투스는 이 점에서도 개인 재산을 모으는 일 따위에는 무관심했던 카이사르의 진정한 후계자였다. 로마의 고급 주택가라고는 하지만 지극히 소박한 집에 살면서, 아우구스투스는 우선 제국 전체의 경제를 충실하게 하기 위해 화폐제도를 근본적으로 개혁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경제 정책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이 화폐개혁도 로마 제국에서는 '안전보장'의 한 부문이었기 때문이다.
화폐개혁
로마에는 오랫동안 화폐라고는 은화와 동전밖에 없었다. 금화는 개선식이나 그 밖의 기회에 기념으로 만들어져 배포되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널리 쓰이는 것을 목적으로 한 통화는 아니었다. 물론 금화는 금의 함유량이 100퍼센트인 순금이니까, 갖고 있어도 나쁠 것은 없다. 하지만 이른바 '통화'는 아니었다.
이 금화를 통화에 편입시키는 것은 카이사르였다. 그는 금과 은의 상대적 가치를 1 대 12로 정하고, 동전 주조는 원로원의 권한으로 남겨두었지만, 금화와 은화 주조권은 종신 독재관인 자신의 권한으로 만든 단계에서 암살당하고 말았다. 화폐제도를 확립하려던 그의 시도도 암살로 중단되었다.
아우구스투스가 이 시도를 되살린 것이다. 아우구스투스는 그것을 추진할 권한과 개혁을 끝내는 데 필요한 시간을 갖고 있었던 만큼, 그의 개혁이 철저했던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덕분에 제국의 경제력 변화에 따라 금속 함유량은 달라져도, 제도 자체는 서기 4세기까지 300년 동안이나 계속 유지되었다. 기원전 말기, 즉 제정 초기에 화폐제도 개혁을 단행한 아우구스투스의 목적은 단 하나. 강력하고 신뢰할 수 있는 기축통화 확립과 그에 따른 제국 전체의 경제 활성화였다.
아우구스투스의 화폐제도 확립에는 경제에 문외한인 내가 보아도 몇 가지 흥미로운 점이 있다.
첫째, 금화와 은화와 동화의 관계가 참으로 단순명쾌하다는 점이다. 1아우레우스(금화)는 25데나리우스(은화) 및 100세스테르티우스(동화)와 같은 가치를 갖는다. 세월이 흐르면 복잡해지는 것이 제도의 숙명이므로, 기본은 항상 단순한 편이 좋다.
둘째, 카이사르가 착수하고 아우구스투스가 완성한 화폐개혁을 조사하면서, 내 사견이긴 하지만 오래 전부터 품고 있었던 생각을 확인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것은 경제인이라면 정치를 이해하지 못해도 성공할 수 있지만, 정치인은 경제를 몰라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아우구스투스의 화폐개혁을 떠받쳐준 기둥은 액면 가격과 실제 가치의 일치였을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것이 확립되고 유지되지 않으면, 로마의 통화가 계속 기축통화의 지위를 유지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투스는 알고 있었다. 통화는 황제한테도 군단에도 영향을 받지 않고, 오직 경제원칙에만 충실하게 움직이는 생물이라는 것을, 지폐가 존재하지 않았던 시대에 이 '생물'이 멋대로 행동하지 못하게 하려면 액면 가격과 실제 가치를 일치시킬 수박에 없었다.
셋째, 아우구스투스가 정한 뒤 300년 동안이나 존속한 이 통화는 어디까지나 로마 제국이 기축통화였고, 제국 전체의 공통 화폐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보다 100년 귀의 사람인 플루타르코스의 저서에서도 볼 수 있듯이, 로마 제국 시대에 그리스인이 쓴 저술에 나오는 화폐 단위는 그 전과 마찬가지로 항상 그리스 통화인 드라크마나 탈렌트였다. 저술에 기록되었다는 것은 곧 존재하고 통용되었다는 뜻이다.
그것은 로마가 자기네 패권하에 있는 다른 민족들에게 자기네 통화를 공통 화폐로 강요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으면서도 강요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로마는 자치도시나 자유도시로 인정한 지방에는 그 지방의 독자적인 총화 주조권도 인정하고 있었다. 국내 자치와 함께 통화도 그 나라 사람들에게는 경제적 의미를 뛰어넘는 독자적인 '문화'이기 때문일 것이다. 일본에서 엔화가 사라지고 일본 전역이 미국 달러에 파묻힌 경우를 생각해보라. 외국과의 경제 활동은 편리해질 것이다. 하지만 경제를 활성화한다 해도, 단지 경제만 생각해서는 일부의 활성화로 끝나지 않을까.
현재(1997년 봄) 유럽 각국은 체면 따위는 개의치 않고 많은 희생을 치르면서까지 유럽 공통 화폐인 '유로'의 실현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중이다. 나는 통화까지 공통으로 해야 하는 이유를 납득할 수 없지만, 이것은 실제로는 경제 대책이라기보다는 미국 달러에 대한대항을 내면에 숨긴 정치 대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다시 2천 년 전으로 돌아가서 내가 흥미롭게 느낀 네 번째 점을 살펴보자.
아우구스투스는 기념 화폐만이 아니라 실제로 통용되는 화폐에도 자기 옆얼굴이나 자기와 관련된 일을 새긴 카이사르의 방식을 답습했다. 게다가 그의 경우는 자신이 주조권을 가진 금화와 은화만이 아니라 원로원이 주조권을 가진 동전에까지 자기 얼굴을 새겼으니까. 기축 통화는 아우구스투스의 옆얼굴로 메어졌다고 해도 좋다. 그것이 현대의 영국 지폐와 다른 점은 금속과 종이라는 소재의 차이이기도 했을 것이다. 화폐가 닳아서 다시 주조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까지가 그 화폐의 통용기간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제정 시대 로마에서 반역자로 낙인찍힌 브루투스가 주조한 함유량 100퍼센트의 은화도 그대로 사용되었다. 로마 황제들은 선대 황제들의 옆얼굴이 새겨져 있는 화폐도 모두 거두어 들여 다시 주조하지는 않았다.
지폐가 존재하지 않았던 시대, 로마 통화의 액면 가격과 실제 가치의 변화는 그대로 로마 제국의 경제력 변화를 반영한다. 이 관점에서 보면, 경제적으로 '팍스 로마나'는 확실히 존재했다. 그리고 그것은 아우구스투스 시대부터 시작된다.
아우구스투스는 정치가로서는 카이사르보다 완벽하고 적절한 자질을 가진 인물이었다고 주장하는 연구자가 많다. 나중에 역사가 타키투스가 평했듯이, 아우구스투스는 유일한 승자가 된 뒤에도 "남들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오랜 시간을 들여 한 가지씩 권력을 수중에 넣어 결국 모든 권력을 장악한" 반면, 카이사르는 유일한 승자가 되자마자 당장 종신 독재관에 취임하고 억지로 혁명을 추진한 점이 다르다는 것이다.
나는 이 차이를 첫째는 두 사람의 성격 차이, 둘째는 카이사르가 54세에야 비로소 '혁명'을 시작할 수 있었던 반면에 아우구스투스는 33세부터 시작할 수 있었다는 연령 차이, 셋째는 카이사르 암살에 교훈을 얻은 아우구스투스가 절대로 죽음을 당해서는 안 된다는 의지를 갖게 된점에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여기서 또 한 가지 차이점도 생각해보고 싶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른바 '귀골'로 태어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다.
카이사르는 왕정 시대이래 7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명문 중의 명문자제로 수도 로마에서 태어났다. 한편 아우구스투스는 로마에서 태어나긴 했지만, 할아버지 대에는 무슨 직업에 종사했는지도 분명치 않고, 지방 소도시 벨레트리의 유지로서 경제적으로는 카이사르 집안보다 유복했지만, 아버지 대에 비로소 원로원에 들어온 집안 출신이다. 그 아버지도 원로원의 의원이 되긴 했지만,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인지 요직은 전혀 경험하지 못하고 일개 의원으로 끝났다. 그래도 어머니 아티아의 친정이 명문이라면 조금은 관록이 붙겠지만, 아티우스 집안도 로마사에는 이름 없는 집안이다.
카이사르가 '귀족계급'(노빌리스) 출신인 반면 아우구스투스는 로마 사회에서는 제2계급인 '기사계급'(에퀴타스) 출신이다. 카이사르와 혈연관계가 있다 해도, 카이사르의 누이동생 율리아의 땅 아티아의 아들이 아우구스투스니까 그리 가까운 관계는 아니다. 그런 관계를 전면에 내세우거나 하면 오히려 웃음을 사게 된다. 왕정 시대에는 300개나 되었던 명문도 공화정 말기에는 14개 씨족(겐스)으로 줄어들었다지만, 그래도 원로원에는 발레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코르넬리우스 같은 명문 출신들이 우글거리고 있었다. 아우구스투스의 주변을 살펴보아도 아내 리비아가 데려온 두 아이는 클라우디우스 씨족의 자손이다
이런 사정이 있었기 때문에, 카이사르는 옥타비아누스 시절의 아우구스투스를 후계자로 지명한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고 생각하여, 그를 양자로 삼아 카이사르 집안에 맞아들였다. 하지만 14개뿐이라 해도 '귀골'이 건재한 로마 지도층에서는 친자와 양자의 차이가 엄연히 존재했다. 특히 일반 대중을 상대할 때는 역시 '귀골'이 좋다. 카이사르라면 무슨 짓을 어떻게 하든 민중도 납득했겠지만, 아우구스투스는 신중하게 일을 추진해야 했다.
이 점에 대한 아우구스투스의 배려는 그 개인의 허영심을 만족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로마 국가의 안정과 번영을 확립하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나에게는 눈물겹게 보이기까지 한다.
무덤에는 무관심했던 카이사르와는 달리, 아우구스투스가 자신과 가족을 위해 마르스 광장 북쪽 끝에 지금까지 아무도 세운 적이 없을 만큼 웅장하고 화려한 '영묘'(마우솔레움)를 지은 것도 그런 배려에서 나온 행위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또한 포로 로마노 확장 계획의 첫 번째 사업인 '카이사르의 포룸'과 카이사르 암살자들을 무찌른 기념비이기도 한 '아우구스투스의 포룸'의 건설 계획에 나타난 차이에서도 이것을 찾아볼 수 있다.
'카이사르의 포룸'에 서 있는 조각상 가운데 중요한 것은 두 개뿐이다. 하나는 신전 안에 놓여 있는 비너스 여신상, 즉 카이사르 가문이 속한 율리우스 씨족의 수호신인 '위대한 어머니 베누스'(베누스 베니트릭)의 대리석상이고, 또 하나는 신전 앞에 펼쳐진 광장 한복판에 서 있는 카이사르의 청동 기마상이다.
한편 '아우구스투스의 포룸'은 그 전체를 장식하는 조각상 중에서 주요한 것만 열거해도 엄청난 수에 이른다.
우선 광장 한복판에는 말 네 필이 끄는 전차에 올라탄 아우구스투스의 청동상이 서 있다. '아우구스투스의 포룸'은 전쟁과 복수의 신 마르스에게 바쳐졌기 때문에, 이것은 납득이 간다. 또한 신전 안에는 마르스 신상, 그 왼쪽에는 베누스 여신상, 오른쪽에는 신격 카이사르 석상이 나란히 서 있는데, 이것도 이 '포룸'을 바친 이유를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주요한 조각상은 이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다. 베누스 여신의 아들이자. 율리우스 씨족의 처음에 살았던 알바롱가의 왕들, 로마가 공화정이 된 이후의 인물들에 이르기까지, 각 시대의 위인들이 퍼레이드를 벌이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아우구스투스는 이만한 '역사'를 등에 업을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리라. 아우구스투스의 요망에 따라, 알려져 있는 것만 해도 16개에 이르는 이 조각상들의 배치 문제를 포룸 양쪽에 '에세드라'라고 불리는 반원을 덧붙이는 방법으로 해결한 건축가의 재능에는 감탄할 수밖에 없다.
이처럼 '카이사르의 포룸'과는 달리 '아우구스투스의 포룸'은 상당히 위엄 있는 공간이 되었지만, 바로 그 때문에 로마 시대의 연인들한테 경원당하는 유쾌한 부산물도 낳게 되었다.
에세드라 부분은 넓은 광장에서는 아늑하고 차분한 공간이 된다. 그런데 거기에는 로마 건국 이래의 위인들이 늘어서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가 문제였다. 로마식 도로망의 창시자로서 아피아 가도를 건설한 것까지는 좋았지만, 이 인물은 시력이 떨어진 노년에도 기력만은 떨어지지 않았다. 마음이 약해진 원로원 의원들이 적과 강화를 맺으려 하자, 늙은 아피우스는 그들에게 호통을 쳤다.
"로마는 전쟁에 이기고 강화를 맺는 일은 있을지언정, 전쟁에 지고 강화를 맺은 적은 없다!"
그가 내려다보는 곳에서 사랑의 속삭임을 나누면, 머리 위에서 불벼락이 떨어질 것 같다. 로마의 연인들은 자연 밀회 장소를 바로 옆의 '카이사르 포룸'으로 옮겼다.
거기라면 사랑의 여신이기도 한 베누스와 역시 사랑의 달인이었던 카이사르가 지켜보고 있을 뿐이다. 제정 시대의 시인인 마르티알리스나 유베날리스가 쓴 시를 보면, 포로 노마노의 바실리카(회당)에서 열리는 재판에서는 청산유수 같은 변론 솜씨를 보이는 젊은 변호사가 사랑하는 여인을 '카이사르의 포룸'으로 꾀어 들인 것까지는 좋았지만 카이사르 기마상 밑에서는 사랑의 속삭임을 한마디도 못하고 쩔쩔매는 모습을 익살스럽게 묘사하고 있다. 말에 탄 카이사르도 이 꼴을 보고 웃으면서 "힘내라!"고 격려했을지 모른다.
연인들에게는 경원당했지만, '아우구스투스의 포룸'이 비인간적인 공간이 된 것은 아니었다. 로마에서 번창했던 학원 형식의 초중등학교 교실로 활용되었기 때문이다. 교실이라면 위인들이 지켜보고 있어도 야단 맞을 일은 없을 테고, 교재가 바로 옆에 있으니까 불편하기는커녕 오히려 편리했을 것이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가 되기 전,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였던 시절에 아우구스투스는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연합군과 악티움에서 대결하기 전날 밤 아폴로 신에게 승리를 기원했다. 그래서 개선하자마자 팔라티노 언덕 위에 아폴로에게 바치는 신전을 세웠다. 그때까지 아폴로는 로마 사회에서 중시한 신들 중에는 끼여 있지 않았다. 신들이 사는 성역으로 되어 있던 카피톨리노 언덕 위에 신전을 가진 것은 유피테르(그리스에서는 제우스), 그의 아내인 유노(헤라), 지혜의 여신인 미네르바(아테나)였다.
이들은 그리스에서 왔지만, 일찍부터 로마 본래의 신들과 융합하여 로마 종교의 주요 신을 이루고 있었다. 그밖에 전쟁의 신 마르스(그리스어로는 아레스)도 주요 신에 추가된다. 그런데 그리스에서는 주요 신이었던 빛과 시의 신 아폴로(아폴론)만은 로마인에게는 지나치게 추상적인 역할 탓인지 별로 중요한 지위를 부여받지 못했다. 그래서 오랫동안 아폴로 신전은 도심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세워졌다.
그런데 아우구스투스는 자기 집 바로 가까이에, 도심 중에서도 도심인 팔라티노 언덕 위에 아폴로 신전을 세운 것이다. 로마 최고 권력자의 수호신이 된 덕분에 로마의 신들 사이에는 아폴로의 지위가 높아졌지만, 카이사르처럼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수호신을 갖지 못한 아우구스투스의 고심 어린 선택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설령 결점이 있다. 해도 그것을 오히려 장점으로 바꿀 수 있는 재능은 창조자가 반드시 갖추고 있는 재능이기도 하다. 아폴로는 언제나 아름답고 깨끗한 젊은이의 모습으로 표현되어 왔다. 아우구스투스는 제 초상의 연령을 40대 이전으로 묶어놓은 사람이다. 그런 자신의 수호신으로도 젊은 아폴로는 잘 어울리는 신이라고 생각했던 게 아닐까.
선거제도 개혁
이미지가 선행하는 것 자체는 나쁘지 않다. 나쁜 것은 구체성은 전혀 동반하지 않은 채 이미지만 혼자 걸어가는 경우다. 집정관 선거가 재개되어 시민(유권자)의 정치의식도 다시 활기를 띠게 된 기원전 23년이 아우구스투스에게는 선거제도를 개혁할 좋은 기회로 여겨졌다.
오랜 시간을 들여 남의 눈길을 끌지 않는 방식으로 여러 가지 대권을 하나씩 손아귀에 넣고 있던 아우구스투스다. 대대적으로 벌어지는 선거가 위선이라는 것쯤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그에 비하면 억지로 대권을 손에 넣은 카이사르도 자유롭게 선거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사람들을 만족시키는가를 알고 있었다. 만족한 사람들이 기꺼이 따라와 주기 때문에 큰 사업도 성공한다. 라틴어의 콘센수스, 현대 영어의 콘센서스는 목적에 대한 동의보다 수단에 대한 동의인 경우가 많다. 카이사르가 건설하기 시작한 '사이프타 율리아'
(의역하면 율리우스 투표소)는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완성되었다.
판테온 동쪽에 인접해 있던 이 투표소는 새로 120미터, 가로 300미터의 넓은 회랑으로, 주위에는 원기둥이 늘어서 있다. 선거는 이 회랑을 선거구별로 칸막이하여 이루어진다.
선거 방식은 공화정 시대와 같았다. 즉 당락은 유효표 전체의 집계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각 선거구의 결과가 그 선거구의 '표'가 되고, 그 '표'를 집계하여 당락을 결정하는 방식이다. 이것은 로마가 공화정으로 바뀐 기원전 509년부터 계속된 로마의 독특한 선거 방식이었다.
아우구스투스의 선거제도 개혁이 '개혁'이었던 이유는 로마 역사상, 아니 세계 역사상 처음으로 수도 이외의 지역에서 투표하는 것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현대인이라면 각 지방자치단체에 사는 유권자가 거주 지역에서 투표하고, 그 집계 결과가 수도로 전달되는 방식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고대인들은 도시국가의 역사 때문에 선거는 수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아우구스투스의 개혁은 부재자 투표를 인정한 것과 같은 의미를 갖고 있었다.
유권자가 400만 명을 넘은 이 시대, 종전처럼 수도 로마에 올 수 있는 시민만 선거권을 행사할 수 있는 제도를 계속 유지하고 있으면, 원칙적으로는 국가의 최고위직인 집정관 선거도 단순한 위선으로 끝나버린다. 이 시대부터 속주에 사는 로마 시민권 소유자한테까지 부재자 투표를 인정했다는 증거 자료는 없지만 유권자 대다수가 살고 있는 이탈이라 본국에서는 부재자 투표로 선거권 행사가 평등해졌다. 말이 나온김에 한마디 덧붙이자면, 기술 발달이 눈부신 2천 년 뒤의 현대에도 해외에 거주하는 유권자의 부재자 투표는 아직 실현되지 않았다. 이것은 일본도 이탈리아도 마찬가지다.
선거는 활기찬 행사인 만큼, 그대로 방치해두면 선거법 위반 행위도 활기를 띠기 쉽다. 아우구스투스는 선거법 위반에 대한 벌칙도 법제화 했다.
후보자는 의무적으로 일정액의 공탁금을 내야 했다. 선거법을 위반하면 공탁금은 몰수되어 국고로 들어간다. 다만 후보자에게 선거자금을 지원해주는 것은 인정되었다. 사실 이것은 로마의 관례이기도 했다. 아우구스투스 자신도 자파 후보자들을 항상 원조했다. 그 액수는 일인당 1천 세스테르티우스. 병졸의 1년치 봉급이 900세스테르티우스였던 시대다. 최고 권력자가 이정도 액수밖에 지원하지 않았다면, 다른 사람도 그 이상을 지원하는 것은 삼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또한 '명예로운 경력'이라고 불린 무보수 요직에 입후보하려면, 최소한 백만 세스테르티우스의 재산을 갖고 있어야 했다. 말하자면 이것이 입후보 자격의 하한선이었다. 원로원 의원 자격을 얻을 수 있는 최소한의 재산과 같은 액수다. 이보다 모자라면 입후보도 할 수 없고 원로원 의원도 될 수 없지만, 경제력 외에는 모든 자격을 갖춘 삶이 있으면 아우구스투스는 자비를 들여서 지원했다.
이 정도 개혁으로 선거법 위반이 사라졌는지 의심스럽지만, 실제로는 거의 사라졌다. 표를 사고 파는 일이 횡행했던 카이사르 등장 시대에 비하면, 로마의 선거 풍토는 몰라보게 깨끗해졌다.
이 40년 동안, 로마 유권장의 윤리가 향상된 것은 아니다. 위반하면 몰수되는 공탁금이 아까운 것도 아니었다. 표를 사면서까지 얻은 공직의 경제적 이익, 즉 이권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회계감사관(콰이스토르)에 당선되어 임기가 끝난 뒤에는 원로원 의석을 얻고, 원로원 의원이 되면 법무관(프라이토르) 선거에 도전하고 다음에는 집정관(콘술) 선거에 도전하는 것은 그 다음 단계인 속주 총독을 겨냥한 것이었다. 그런데 아우구스투스는 '황제 재무관'이라는 세무 전담 관료를 속주에 보내, 그때까지 총독이 관할했던 징세권을 박탈해버렸다. 이래서는 공화정 시대의 총독처럼 속주에서 근무하는 동안 한몫 챙기기는 불가능해진다. '이권'을 잃은 것이 로마의 공직 선거가 깨끗해진 주요 원인이었다.
'명예로운 경력'의 이념은 아직 건재했다. 한재산 모으는 것보다 국가를 위해 봉사하기를 원하는 인물은 많다. 인간에게 항상 내재해 있는 허영심도 있었다. 그리고 대중은 선거를 축제로 생각하고 있다. 1년에 한 번 선거가 실시되는 며칠 동안은 광대한 '사이프타 율리아'가 사람들로 붐비는 성황을 이루었다.
아우구스투스의 선거개혁에서는 카이사르가 개정한 집정관과 법무관의 정원은 바뀌지 않았다. 집정관은 여전히 2명이고, 법무관은 16명이었다. 하지만 카이사르가 40명으로 늘린 회계감사관의 정원은 그 이전에 술라가 개정한 상태로 돌아가 20명으로 줄였다. 이것도 사실은 아우구스투스의 원로원 회유책 가운데 하나다.
술라가 여러 가지 평판이 있는 인물이었지만, 원로원 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애쓴 사람으로서 원로원은 그를 은인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다만 아우구스투스는 정원을 반으로 줄이는 대신, '명예로운 경력'의 출발점이기도 한 회계감사관의 자격 연령을 종래의 30세의 25세로 낮추었다. 요직에 앉는 사람을 전보다 더 젊은 층으로 바꾸기 위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회계감사관의 자격 연령이 30세면, 역시 30세가 자격 연령인 원로원에 들어갈 대까지 시차가 없어진다. 다시 말해서 임기를 마친 회계감사관은 자동적으로 원로원에 들어가게 된다. 그런데 25세로 연령을 낮추면 원로원에 들어갈 때까지 4년의 시차가 생긴다. 아우구스투스는 그 기간을 대상자가 과연 원로원 의원에 어울리는 인물인지 아닌지를 검토하는 데 사용할 수 있었다.
공화정 시대에도 일정한 공직을 거치면 자동적으로 원로원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재무관이 대상자를 검토하여 원로원 의석을 줄 것인가 말 것인가를 결정했다.
자동적으로 원로원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호민관 역임자뿐이었다. 이것은 평민계급을 회유하려는 의미도 갖고 있었다.
원로원에 의석을 가직 수 있느냐 없느냐를 결정하는 사람이 재무관이었기 때문에, 공화정 시대에 재무관의 권력은 막강했지만, 재무관은 집정관만이 아니라 속주 총독까지 경험한 원로원 유력자가 차지하는 관직으로 되어 있었다. 말하자면 로마의 요직 예비군인 젊은이가 원로원에 들어갈 수 있느냐 없느냐를 원로원이 결정하는 체제였다. '원로원 체제'타도를 목표로 삼았던 카이사르가 이 체제를 눈감아줄 리가 없다. 카이사르는 재무관이 가부를 결정하는 제도를 폐지한다. 누구를 원로원에 들여보낼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종신 독재관인 카이사르 자신의 권한이 되었다.
아우구스투스도 카이사르의 방식을 답습한다. 다만 그 추진 방법은 달랐다. 카이사르는 임기가 끝났을 때 최소한 31세가 되어 있는 원로원 의원 후보자에게 그 시점에서 합격이나 불합격을 통고할 필요가 있었지만, 아우구스투스의 경우에는 4년의 유예 기간이 있다. 그 4년이 지나는 동안, 나중의 경력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는 원로원 의석을 주느냐 안 주느냐를 결정하는 막강한 대권도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상당히 약한 것처럼 보이게 된다. 아우구스투스는 먼 앞날을 내다보는 심모원려를 가려를 가진 사람이기도 했다.
그렇긴 하지만 집정과 2명관 법무관 16명과 회계감사관 20명, 모두 합해서 38명의 중요한 국가 공직자를 뽑는 선거다. 그보다 몇 배나 많은 사람이 겨루는 선거전이 활기를 띤 것도 당연했을 것이다.
로마 시대의 '노멘클라투라'
로마의 유력자들은 옛날부터 외출할 때는 '노멘클라토르'라고 부르는 노예를 동반하는 것이 관례였다. 유력자니까 포로 로마노를 걷고 있으면 다가와서 인사하는 사람이 끊이지 않는다. 그 많은 사람의 이름을 전부 다 기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저쪽에서 사람이 다가오는게 보이면, '노멘'(이름)을 '클라토르'(일러주는 자)의 역할을 맡은 노예가 얼른 주인에게 상대의 이름을 속인다. 그래서 유력자도 이런 대화를 할 수 있다.
"푸블리우스 바티니우스 아닌가? 참 오랜만일세."
선거운동 중에는 '노멘클라토르'가 기억해야 할 자료는 이름만이 아니었다. 또한 먼저 인사를 하는 사람만 상대하고 있으면 당선을 바랄 수 없다. 어쨌든 로마 유권자들 중에는 재산이 없기 때문에 날품팔이로 근근이 살아가는 '무산자'(프롤레타리)도 있고, 원래는 노예였지만 자유를 얻어 해방노예라고 불리는 사람도 있다. 해방노예도 어느 정도의 재산이 있고 자식이 있으면 로마 시민권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아무리 원로원 의원이라도, 25세의ㅡ 젊은이가 상대를 골라서 인사해서는 호감을 살 수 없다. '노멘클라토르'의 머릿속은 컴퓨터처럼 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가이우스 수에토니우스 씨, 오리엔트에서 장사를 하신다고 들었는데, 잘되고 있습니까? 그래요? 그거 참 잘됐군요. 후보자 명단을 보고 벌써 아시겠지만, 이번에 제가 회계감사관에 입후보했으니까 잘 부탁드립니다."
"퀸투스 타키투스, 여기서 당신을 만나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내가 남프랑스 속주에 근무하고 있을 때는 당신 친척한테 큰 신세를 져서 얼마나 고맙게 생각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이번에 내가 법무관에 입후보했으니, 잘 부탁합니다."
집정관 후보쯤 되면, 선거운동을 할 때에도 품격을 유지할 필요가 있다.
"티투스 플루타르코스, 자네 아들이 아테네로 유학을 갔다고 들었는데. 언제까지 거기서 공부시킬 작정인가? 오호, 그렇게 오래? 나도 집정관을 지낼 수 있다면, 그 다음에는 아카이아 속주 총독(아테네도 그 관할이다)을 희망할 작정이라네, 그때는 자네 아들한테도 여러 가지로 도움을 줄 수 있을 걸세."
'노멘클라토르'는 로마의 지도층에 속하는 사람에게 필수적인 존재였지만, 이 역할을 맡은 노예는 정보통인 만큼 또 하나의 임무가 있었다. 로마에서는 침대 같은 받침대 위에 옆으로 누워서 식사하는 것이 관습이었는데, 연회가 열릴 때는 손님들의 자리를 결정하는 것도 그들의 임무였다. 유력자와 친해지고 싶은 사람은 이 노예에게 팁을 건네주고 유리한 자리를 주선받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이 '노예에게 팁을 건네주고 유리한 자리를 주선받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이 '노멘클라토르'라는 말은 오늘날에도 어미만 조금 달라진 채 그대로 쓰이고 있다. 공산 국가의 특권층을 '노멘클라투라'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로마의 선거에서는 후보자들의 선거운동만이 아니라, '추천'이라는 형식으로 최고 권력자의 선거운동도 이루어졌다. 이것을 활용한 사람이 비민주적으로 여겨지는 정치체제인 제정을 추진한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였다는 점도 흥미롭다. 하지만 여기서도 두 사람의 방식은 서로 달랐다.
카이사르는 으레 다음과 같은 글을 보내곤 했다.
"독재관 카이사르가 A선거구 유권자 여러분에게, 여러분이 던지는 표로써 후보자 B와 후보자 C가 그들이 바라는 관직에 당선될 수 있기를 희망한다."
이 추천서는 선거구 이름과 후보자 이름만 바꾸면 모든 선거구에 통용된다. 과연 합리주의자인 카이사르가 생각해낼 만한 일이다.
아우구스투스는 추천서를 보내지 않았다. 선거 때가 되면 넓은 '사이프타 율리아'에 장막 따위를 쳐서 각 선거구별로 구획을 만들었는데, 아우구스투스는 자파 후보자를 거느리고 그 모든 구획을 일일이 돌아다니면 자기가 추천한 후보자에게 표를 던져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서기 8년 이후로는 이 방식도 그만두어버린다. 그때는 71세의 노인이 되어 체력이 떨어졌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 무렵에는 이미 '겸손한 사람'을 연기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다. 서기 8년부터 그의 선거운동은 카이사르 방식으로 바뀌었다. 그렇긴 하지만 투표장에 직접 나가서 한 표를 던지는 것은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의 공통된
습관이었다. 로마의 제정은 선거제도를 갖는 제정이었다.
제정으로 가는 길은 아우구스투스의 이같은 탁월한 수완으로 차츰 다져져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방식이 잠행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표면적으로는 공화정이 실시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또한 카이사르의 말대로 '많은 사람은 자기가 보고 싶은 현실밖에 보지 않는' 법이다. 덕분에 원로원 의사당에서 아우구스투스는 의원들의 거리낌 없는 언동을 꾹 참아야 할 때가 많았다.
만약 술라가 원로원 회의에 참석했다면, 의사당은 물을 끼얹은 듯이 조용해지고 감히 술라를 비난하거나 반론을 제기할 용기는 아무도 갖지 못했을 것이다. 술라가 차가운 시선으로 노려보기만 해도, 그것은 그 사람의 이름이 '살생부'에 오르는 것을 의미했고, 정치 생명이 문제가 아니라 육체적인 생명까지 끊기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만약 카이사르가 원로원 회의에 참석했다면, 유명한 '카이사르의 관용' 덕분에 무슨 말을 해도 '제거될 염려는 없었으니까 의사당은 활기에 넘쳤겠지만, 감히 카이사르를 비난하거나 반론을 제기했다가는 재치 있고 짤막하면서도 날카로운 카이사르의 경구를 뒤집어쓰고, 동료 의원들이 터뜨린 폭소 속에서 어쩔 줄 모르고 서 있는 꼴을 각오해야 했다. 소 카토 같은 사람은 몇 번이나 그런 꼴을 당하고 입술을 깨물었는지 모른다.
아우구스투스는 이 두 사람이 갖고 있던 카리스마는 갖고 있지 않았다. 카리스마를 갖는 데에는 육체적 조건도 중요한 요소가 된다. 아우구스투스의 키는 170센티미터 정도였다니까, 로마 남자로서는 큰 편은 아니지만 작은 편도 아니다. 하지만 많은 사료를 보면 술라와 카이사르는 180센티미터가 훨씬 넘는 장신에 당당한 체구를 갖고 있었다고 한다. 아우구스투스는 술라와 카이사르가 지극히 자연스럽게 주변 사람들에게 미치고 있던 위압감은 주지 못했을 게 분명하다.
원로원 의사당에게 아우구스투스가 법안을 설명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의원 하나가 거리낌 없이 야유를 퍼부었다.
"무슨 소린지 전혀 모르겠군!"
말로 설득하는 데에는 자신이 없었던 아우구스투스에게는 뼈아픈 타격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무례한 짓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다른 의원들도 큰 소리로 빈정거렸다.
"발언만 허락해주면 당신에 대한 반론을 하나하나 전개해 보이겠소."
아우구스투스도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의사당 밖으로 뛰쳐나온 그의 뒤에서 누군가가
외쳤다.
"국정은 원로원 의원들끼리 토의해서 결정해야 돼!"
밖에서 기분을 가라앉히기 전에, 아우구스투스도 돌멩이 하나쯤은 걷어찼을지 모른다.
그래도 처벌받은 사람은 물론, 좌천당한 사람도 없었다. 따라서 원로원 의사당에서 벌어진 자유로운 토론과 활발한 반론이 '제일인자'에 대한 예의를 뛰어넘는 일도 종종 있었다.
아내 리비아가 데려온 자식으로 어릴 적부터 아우구스투스의 집에서 자란 티베리우스에게 아우구스투스가 쓴 편지가 남아 있다.
"나의 티베리우스여, 젊은 너로서는 무리도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나를 나쁘게 말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분개해서는 안된다. 그들이 우리에게 칼을 들이대지 않는다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하지 않겠느냐."
자제력에서는 남달리 뛰어난 사람이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핏줄에 대한 집착
이 아우구스투스가 기원전 23년 말에 처음으로 집안의 비극을 겪는다. 누나 옥타비아의 아들인 마르켈루스가 느닷없이 병에 걸려 죽은 것이다.
40세의 아우구스투스는 조카이자 사위이며 가장 유력한 후계자 후보였던 인물을 잃게 되었다. 그가 외동딸 율리아를 시집보내고 지도자로 성장하기를 기대했던 젊은이는 20세의 젊은 나이에 자식도 남기지 않고 세상을 떠나버렸다. 장례식에서 조사는 아우구스투스가 직접 읽었다. 이 마르켈루스가 영묘에 매장된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그 영묘에서 발굴된 대리석판이 하나 있는데, 거기에는 마르켈루스의 이름과 함께 어머니인 옥타비아의 이름도 새겨져 있다. 한 장의 석판에 모자의 이름이 나란히 새겨진 것은 아들을 잃은 어머니가 상심한 나머지 자신의 무덤도 함께 만들게 했기 때문일 것이다. 스무 살의 아들이 먼저 떠났다면, 어떤 어머니라도 죽고 싶은 심정일 것이다.
외삼촌이자 장인인 아우구스투스의 심정도 참담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는 10년 두에 완공된 극장 이름을 '마르켈루스 극장'(테아트룸 마르켈리)이라고 지은 것에도 나타나 있다. '폼페이우스 극장'에 이어 로마에서는 두 번째 석조 극장인 이 건물은 카이사르가 착공하고 아우구스투스가 완성한 공공 건축물 가운데 하나이므로, '사이프타 율리아'(투표소)나 '쿠리아 율리아'(원로원 의사당)나 '아콰 율리아'(상수도)와 마찬가지로 당연히 '테아트룸 율리아'(율리우스 극장)로 명명되어야 할 건물이었다. 그런데 건물에 착공자의 이름을 붙이는 로마의 전통을 어기면서까지 '마르켈루스 극장'으로 명명한 것이다.
아우구스투스가 카이사르와 달랐던 점은 핏줄을 이어가는 데 끝까지 집착했다는 것이다.
16세에 미망인이 된 율리아는 남편의 상을 벗자마자 재혼했다. 새 남편은 17세 때 카이사르의 배려로 아우구스투스와 짝을 이룬 뒤 줄곧 협력관계를 유지해온 아그리파였다. 아그리파는 아우구스투스와 동갑이니까. 마흔 살에 신랑이 된 셈이다. 아그리파는 이미 옥타비아의 딸인 마르켈라와 결혼하여 딸 하나를 낳았지만, 아우구스투스의 요구에 따라 마르켈라와 이혼하고 율리아와 재혼했다. 이혼당한 마르켈라를 위해서는 이집트에서 죽은 안토니우스의 아들을 새 남편감으로 준비했다.
아그리파와 율리아의 결혼은 핏줄을 잇는다는 면에서도 성공이었다. 2년 위에 맏아들이 태어났고, 다시 3년 뒤에는 둘째아들이 태어났다. 아우구스투스는 마흔세 살에 할아버지가 되었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는 핏줄을 잇는 데 집착하면서도, 국익은 한순간도 잊지 않았다. 카이사르가 17세 때의 아우구스투스를 주목한 이유 중의 하나는 그의 확고한 책임감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것이 국정을 책임지게 된 이후 쉬지 않고 계속된 아우구스투스의 정치 생활을 지탱해준 활력의 원천이 아닐까. 수도를 덮친 식량 위기에 대해서도 아우구스투스는 신속하고 과감하게 대처했을 뿐 아니라. 장래까지 내다본 장기 대책을 수립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가정의 불행에 녹초가 된 사람은 사위 의 시신을 태우는 불길과 함께 사라진 것 같았다.
'식량 안보'
국가로서의 로마는 제1차 포에니 전쟁이 끝난 뒤부터 이미 200년 동안 식량의 자급자족 정책을 포기했다. 그 전쟁에서 로마는 시칠리아섬의 영유권을 카르타고한테서 양도받았는데, 시칠리아에서 재배되는 밀의 높은 생산성 앞에서 본국 이탈리아의 밀은 가격 경쟁력을 잃어버렸다. 그 후 이탈리아의 농업은 밀에서 올리브유는 수출할 수 있을 정도의 질과 양을 획득했지만, 주식인 밀은 수입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밀 확보는 총 인구가 100만 명에 이르게 된 수도 로마만이 아니라 이탈리아 본국에서도 항상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식량 확보는 공화정 시대에는 안찰관(아이딜리스)의 임무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식량 부족 사태가 심각해짐녀, 젊은이가 맡는 관직인 '아이딜리스'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권위와 신망을 가진 정계 거물이 임시로 임명되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통례로 되어 있었다. 기원전 57년 당시 이 임무를 맡은 폼페이우스가 그 좋은 예다.
카이사르는 이 중요한 임무를 전담하는 자리를 두기로 규정을 바꾸었다. 종래에는 정원이 4명이었던 안찰관을 6명을 증원하고, 그 가운데 두 명에게 '식량 담당 안찰관'(아이딜리스 케레알리스)이라는 직함을 주어 식량 확보를 전담하게 했다. 이 두 사람의 임무는 밀 수입처를 확보하고 빈민에게 밀을 무상으로 배급하는 것이었다. 다만 ' 식량 담당 안찰관'도 다른 관직과 마찬가지로 임기가 1년이었기 때문에, 항구적인 대책을 수립하고 실행하는 데에는 문제가 있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이 제도의 영구화를 생각한다. 하지만 무슨 일이든 단계적으로 시행하는 것이 그의 특징이다. 그래서 기원전 22녕 당시에는 근본적인 해결에는 착수하지 않았다. 처음 얼만 동안은 공화정 시대처럼 해마다두 명씩 선출되는 집정관의 활약을 조용히 지켜보고만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집정관은 공화정 시대의 집정관들이 누리던 권한에 충실하려면 국고에서 임시비용을 지출해도 좋다는 결정을 내려달라고 원로원에 요구해야 한다. 그런 요구를 받은 원로원에선는 600명이나 되는 의원들 사이에 갑론을박이 벌어진다. 그러는 동안 공황 상태에 빠진 시민들 사이에서는 아우구스투스가 독재관에 취임하여 사태를 단번에 해결하도록 애써달라고 요구하는 목소리가 일어났다. 독재관은 위기관리체제이고, 따라서 원로원과 상의 할 필요도 없이 독단으로 결정하고 실행에 옮길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우구스투스는 사양했다. 사실은 종신 독재관과도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대권을 이미 수중에 넣었기 때문이지만, 위장이 너무 교묘해서 대다수 사람들은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아우구스투스의 이같은 사양은 공화주의자들을 안심시켰다.
그렇다고 해서 아우구스투스가 공황 상태를 방치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자기 지갑을 털었다. 그는 자파 사람들을 해외까지 급파하여 밀을 대량으로 사들였다. 그가 업적록에 기록한 바에 따르면, "불과 며칠 사이에 수도 주민을 위기와 공포에서 구해주었다."
시민들이 감격한 것은 당연하지만, 감격하면서도 그들은 많은 사람들이 토론을 거듭한 뒤에야 결단을 내리는 공화정 체제의 한계도 깨닫기 시작했다.
아우구스투스는 이런 분위기를 활용하지 않았다. 위기를 벗어난 뒤에는 1년 임기인 '식량 담당 안찰관'에게 그 임무를 되돌려주었다. 여기에는 공화주의자들까지도 감탄했다. 어쨌든 '식량'관리를 수중에 넣은 군대를 수중에 넣는 것 못지않게 막강한 권력을 장악한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28년 뒤에 다시 닥쳐온 식량 위기 때는 아우구스투스도 더 이상 기다리지 않았다. 그는 식량청 장관으로 의역할 수 있는 관직을 신설한다. '식량청 장관'(프라이펙투스 안노나이)은 정치적 직위가 아니라 행정직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 원로원 계급이 아니라 '기사 계급'을 여기에 임명했다. 이 관직도 황제가 임명하는 행정 관료의 한 예가 된다. 따라서
임기도 길고, 이를 통해 드디어 로마도 식량안보체제를 확립할 수 있게 되었다.
이로써 '식량'조차도 황제의 권한이 되었다. 이리하여 원로원은 소유하고 있던 권한 하나를 또다시 내놓고 말았다.
'식량' 안보에 관해 이야기한 김에, 그것과 동시에 진행되지는 않았지만 수도 주민에게 공급하는 '물' 안보에 대해서도 언급해두고자 한다. 가도와 더불어 '사회간접자본'의 양재 지주인 상하수도에 관해서는 나중에 상세히 이야기할 작정이니까, 여기서는 문자 그대로 언급하는 정도에 그치고 싶다.
아우구스투스는 가도 건설과 마찬가지로 상하수도 건설도 아그리파에게 맡겨두었다. 최초의 판테온 건설자인 아그리파는 건축이나 가도나 수도 공사를 위해 기술자 조직을 만들어 놓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노예였다.
기원전 12년에 죽었을 때, 아그리파는 전 재산을 아우구스투스에게 남긴다. 노예도 재산에 포함된다. 그렇긴 하지만, 모두 '사회간접자본'공사의 전문가들이다. 아우구스투스는 그들에게 자유를 주었을 뿐 아니라, 원로원 계급, 기사 계급, 평민, 해방노예, 노예로 나뉘어 있는 로마 사회에서 한 단계를 건너뛰어 기사 계급에 포함시켰다. 그리고는 그들을 중심으로 '공공 사업청'을 신설했다.
그 중에서도 중요한 것이 '수도국'이다. 제정 중기에는 수도 로마에 물을 공급하는 수도가 십여 개에 이르렀는데, 그 가운데 두 개를 아그리파가 완공했다. '물'을 확보하는 것이 그만큼 중요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가 만든 기술자 조직 중에서도 수도 공사 전문가가 특히 뛰어났는지도 모른다.
아우구스투스는 원로원 의원 중에서도 집정관 경험자가 이 '수도국장'(쿠라토레스 아콰룸) 자리에 취임하도록 요구했다. '식량'은 자신과 후계자가 관할하게 했지만, '물'은 원로원에 맡긴 셈이다. 사회간접자본 정비는 로마에서는 전통적으로 사회 고위층이 생각하고 실시해야 하는 일로 되어 있었다.
기원전 22년, 41세가 된 아우구스투스의 국정개혁은 여기서 4년쯤 중단된다. 아우구스투스가 더 이상의 개혁을 추진하기 전에 다른 문제부터 해결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로마 제국의 동반부 재편성과 그 동안 미루어둔 파르티아 문제 해결이었다. 그리고 일반 대중은 수수한 국정 정비보다는 화려한 전과를 더 좋아한다. 또한 제국 동반부 재편성에 그가 직접 나설 만한 분위기도 무르익어 있었다.
동방 재편성
오늘날 터키의 수도인 앙카라를 중심으로 하는 소아시아 중앙부는 고대에는 갈라티아 지방이라고 불렸다. 로마가 공화정이었던 시대에는 동맹국, 로마인의 표현으로는 '로마 시민과 원로원의 친구'였다. 그런데 기원전 24년전 갈라티아 왕가의 혈통을 잇는 마지막 왕이 죽었다. 갈라티아 바로 동쪽에는 역시 로마의 동맹국인 카파도키아가 있다. 그리고 카파도키아 동쪽은 카스피 해에 이르는 광대한 아르메니아 왕국이다. 아르메니아도 역시 로마의 동맹국이었다.
로마 국가는 시리아 속주와 이들 동맹국으로 가상 적국 제1호인 파르티아를 서쪽에서 반원형으로 둘러싸는 전략을 채택하고 있었다. 따라서 갈라티아가 파르티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지는 않았지만, 갈라티아의 행방은 로마의 방위 전략상 대단히 중요한 문제가 된다.
갈라티아가 로마의 통제를 벗어나면, 이 지역에서의 방위 전략은 붕괴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갈라티아 왕이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당시, 아우구스투스는 에스파냐의 타라고나에 머물면서 서방을 재편성하는 작업에 한창 몰두하고 있었다. 그는 에스파냐를 제패하는 사업이 끝나자마자 아그리파를 재빨리 동방으로 보냈다. 그것도 실제로는 황제인 자신의 대리인이라는 지위를 주어서 파견했다. 말하자면 권위와 권력을 모두 갖춘 특명 전권대사다.
아우구스투스의 참뜻은 이번 기회에 갈라티아를 로마의 직할 속주로 만드는 것이었다. 다만, 군사력은 사용하지 않고. 동방에 파견된 아그리파는 군단을 거느리고 있지 않았다. 또한 문제의 땅 갈라티아에는 직접 들어가지 않고, 소아시아 서해안 근처에 있는 레스보스 섬에 머물면서 갈라티아를 평화적으로 속주화하려는 교섭을 시작했다.
아그리파가 전투에 서투른 아우구스투스를 대신하여 항상 전선에서 싸운 사람이라는 것은 로마에서는 어린애도 알고 있었다. 그런 아그리파가 군단을 거느리지 않았다. 게다가 행선지는 여류시인 사포의 시로 잘 알려져 있고 풍경이 아름답기로 이름난 에게 해의 레스보스 섬이다.
아우구스투스가 사위인 마르켈루스를 지나치게 중용하자, 오랜 동지인 아그리파도 화가 나서 결국 레스보스 섬으로 은퇴해버렸다는 소문이 돌았다. 나도 전에는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었지만, 지금은 자신 있게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시기의 아그리파는 레스보스 섬에만 틀어박혀 있지 않았다. 동방의 속주를 순행하는 것은 물론, 유대까지 출장을 다녔다. 아우구스투스가 직접 동방으로 갈 수 있게 될 때까지 동방 재편성의 기반을 마련한 것이 바로 아그리파였다. 동방 세계에 그의 이름으로 이루어진 사회간접자본의 수가 많은 것만 보아도, 그가 심술이 나서 레스보스 섬에 틀어박힌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는 최고 권력자의 '대리인'이었기 때문에, '주인공'이 등장하기를 기다리며 대사업의 기반을 마련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덕분에 아우구스투스는 그 동안 서방 재편성을 끝내고 수도로 돌아가 '호민관 특권'을 인정받고, 황제에 이르는 길을 완벽하게 다질 수 있었다. 카이사르의 배려로 17세 때부터 그와 고락을 함께 해온 아그리파는 아우구스투스에게는 참으로 둘도 없는 친구이자 동지이며 협력자였다.
기대를 걸고 있던 마르켈루스가 죽었을 때, 아우구스투스가 외동딸 율리아의 재혼 상대로 점찍은 사람은 아그리파였다. 여기에는 자신의 피와 친구의 피가 섞이기를 바라는 따뜻한 마음도 작용했을지 모른다. 그리고 아우구스투스는 사위가 된 아그리파를 공동 통치자로 삼기까지 한다.
아그리파는 자리를 비운 아우구스투스를 대신하여 '내각'을 책임지고 관리하게 되었다. 아우구스투스가 '제일인자'와 집정관 두 명, 각 부서의 대표 한 명, 추첨으로 선발된 원로원 의원 20명으로 이루어진 내각에 '제일인자'의 공동 통치자도 추가시켰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투스의 심중에는 자기한테 만약의 사태가 일어날 경우에는 제국을 아그리파에 맡기려는 생각도 있었을 것이다. 두 사람은 동갑이지만, 체격이 건장하고 병을 모르는 아그리파의 건강이 훨씬 믿을 만했다.
이 아그리파가 기반을 마련해주었기 때문에, 기원전 22년 전에 동방을 재편성하기 위해 수도를 떠난 아우구스투스는 길을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여행은 느긋하게 시작되었다. 최초의 행선지는 시칠리아섬이다. 시칠리아에 사는 그리스 계 주민들은 '제일인자'이자 카이사르의 아들인 아우구스투스의 방문에 큰 기대를 걸고 환영했다.
루비콘강 이북의 북 이탈리아 속주에 사는 모든 주민에게 '로마 시민권'을 준 것으로 유명한 카이사르는 시칠리아에 사는 모든 자유민에게는 '라틴 시민권'을 주었다. 라틴 시민권은 국정참여권, 즉 투표권만은 인정되지 않지만, 그 밖의 모든 권리에서는 로마 시민권과 동격이다. 따라서 라틴 시민권은 로마 시민권 취득의 예비과정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카이사르는 남프랑스 속주 주민한테도 이 라틴 시민권을 주었다.
그런데 북이탈리아 속주민에게 주어진 '로마 시민권'은 기원전 49년에 이미 정책화되어 있었다. 반면에 시칠리아와 남프랑스 속주에 '라틴 시민권'을 주기로 카이사르가 결정한 시기는 기원전 44년이었다. 이 결정이 내려진 지 불과 석 달 뒤에 카이사르는 암살되었다. 그리고 암살 직후부터 시작된 내전이 수습된 것은 기원전 30년에 이르러서였다.
시칠리아와 남프랑스 속주에 라틴 시민권을 주는 문제는 그 동안 줄 곧 방치된 상태였다. 아우구스투스는 정식으로 정책화되지 않았으니까 백지로 돌아간 거라고 주장했다. 그는 남프랑스와 마찬가지로 시칠리아에도 라틴 시민권조차 주지 않을 작정이었다.
시칠리아 사람들도 남프랑스에 머물러 있던 아우구스투스가 그곳 주민들에게 '라틴 시민권'조차 인정하지 않고 계속 속주로 남겨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갈리아 나르보넨시스'와 '시칠리아'는 로마의 속주로 편입된 역사가 달랐다. 그 역사는 시칠리아가 훨씬 길다. 게다가 시칠리아는 최단거리 3킬로미터인 메시나 해협을 사이에 두고 본국 이탈리아와 인접해 있다. 지정학적으로도 본국과 동등한 대우를 받아도 이상하지 않았다. 또한 시칠리아는 로마의 곡창이기도 했다.
하지만 아우구스투스의 관점에서 보면, 시칠리아는 타국이었다. 통용되는 언어도 그리스어다. 완성된 언어가 없는 갈리아인이나 에스파냐인 사이에서는 라틴어가 쉽게 침투했지만, 완성된 언어인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로마의 속주가 된 뒤에도 로마의 이중 언어 정책에 따라 그 언어를 계속 사용하고 있었다. 라틴어의 직계인 이탈리아어로 통일된 오늘날에도 그리스어가 많이 섞인 시칠리아 사투리를 들을 때마다 쓴웃음이 나온다. 고대 시칠리아에서 국어는 그리스어였고, 제1외국어가 라틴어였다.
시민권에 대한 아우구스투스의 사고방식도 시칠리아인에게는 불리했다.
로마 시민권에 대한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의 사고방식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 카이사르
1. 타민족 출신이라도 합당한 공적을 세운 사람에게는 로마 시민권을 부여한다. 카이사르는 충성을 다한 병사에게는 갈리아인이든 게르만인이든 상관하지 않고 로마 시민권을 주었다.
2. 로마 제국의 장래를 위해 로마 시민권을 주는 편이 상책이라고 여겨지는 사람에게는 로마 시민권을 준다. 피지배민족이라도 부족의 유력자나 발보처럼 재능 있는 속주민에게 시민권을 부여하는 데 카이사르는 대단히 개방적이고 적극적이었다.
- 아우구스투스
1의 경우에는 아우구스투스도 카이사르의 방식을 답습했다. 군제 개혁에 관해서는 나중에 이야기 하겠지만, 거기서 그는 속주민 지원병이라도 만기에 제대하는 자에게는 로마 시민권을 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2의 경우에는 신중하다기보다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그 이유 가운데 하나는 원로원의 반발을 사지 않으려는 데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두 번째 이유는 로마 본국인의
충실과 진흥을 우선해야한다는 것이 아우구스투스 자신의 신념이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도 '아버지'와 '아들'은 달랐다. 학자들은 카이사르가 혁신적이고 아우구스투스는 보수적이었다고 평가한다. 그래도 이 시민권 문제에서는 아우구스투스의 방침을 더 높이 평가하는 학자가 많다. 하지만 로마사 연구가 전통적으로 활발한 곳은 일찍이 제국주의의 역사를 가진 오늘날의 선진국들이다. 개발도상국 출신의 연구자라면 어떤 평가를 내릴까. 어쨌든 이 과거의 제국주의 국가들은 '타민족 출신이라도 합당한 공적을 세운 사람'한테 자기 나라 국적을 주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튼 시칠리아는 계속 속주 상태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는 로마의 곡창이기도 한 시칠리아의 생산성을 향상시키기 위해 그때까지 아무도 보여주지 않았던 열의를 보인다. 그대로 남겨두는 편이 상책인 것은 남겨두는 사고방식을 보수주의라고 한다면, 그의 방식은 보수적이고 따라서 로마인의 전통적인 방식이었다.
로마와 마찬가지로 700년의 역사를 가진 그리스 이민의 정착지 시칠리아에는 이미 시라쿠사, 카타니아, 메시아, 팔레르모, 트라파니, 마르살라, 아그리젠토 등 7개 도시를 잇는 도로망은 섬을 일주하는 해안도로와 내륙을 횡단하고 종단하는 도로로 이루어져 있었다. 내륙 도로를 건설한 것은 그리스인이 거의 관심을 갖지 않은 내륙지방을 진흥시키기 위해서였다.
또한 카이사르가 생전에 이미 계획해둔 것을 이어받았을 뿐이긴 하지만, 이 7개 주요 도시 이외에 전략 요충마다 제대 군인을 이주시킨 식민도시를 7개 건설했다. 물론 이런 '핵'들도 도로망에 편입되었다.
이리하여 내륙지방에서 산출되는 농산물도 항구까지 효율적으로 운송할 수 있는 체제가 확립되었다. 식량 위기는 생산량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라기보다. 산지에는 식량이 있는데 운송이 순조롭지 않아서 일어나는 경우가 많다. 유통체제가 효율적으로 기능을 발휘하게 되면, 농업 종사자의 수익은 많아지고, 주식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는 본국 이탈리아의 주민들도 안심할 수 있다. 시칠리아에 머무는 동안 아우구스투스는 사르데냐 섬과 코르시카 섬의 도로망도 계획했고, 이 두 섬에서도 시칠리아와 마찬가지로 당장에 공사가 시작되었다.
다만 시칠리아는 사르데냐 섬이나 코르시카 섬보다 아우구스투스의 속주 통치 정책의 혜택을 많이 받게 된다. 어쨌든 시칠리아는 아프리카와 가깝다. 그리고 카이사르가 재건 계획을 세우고 아우구스투스가 완성한 카르타고가 뱃길로 불과 하루 거리에 있다. 재건된 카르타고에는 다시 북아프리카의 물산이 집중되기 시작했다.
시칠리아인도 그리스 계다. 그리스 민족의 상재는 유명하다. 시칠리아는 농업지대인 동시에 물산의 중계기지로도 부흥하게 되었다.
포에니 전쟁 당시의 로마인들은 신선함을 잃지 않고 뱃길로 사흘 만에 로마에 도착하는 카르타고의 무화과에 위협을 느꼈다. 하지만 그 시대부터 150년이 지나 이 무렵, 아우구스투스가 확립한 '팍스 로마나'는 과거의 위협을 생활의 충실함으로 바꾸어놓았다. 시칠리아는 지중해 한복판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강대국 사이의 싸움판이 되기 쉽다는 단점을 갖고 있었지만, 이 같은 단점이 '팍스 로마나'의 확립으로 인해 오히려 장점으로 바뀌었다.
아우구스투스의 속주 통치체제 확립은 시칠리아 사회를 안정시키는 데에도 도움이 되었다.
'원로원 속주'가 된 시칠리아를 통치하는 것은 총독으로 부임한 원로원 의원이다. 하지만 아우구스투스가 개혁한 속주 통치체제는 총독에게 징세권을 인정하지 않는다. 가장 공정해야 하는 징세업무는 아우구스투스가 직접 임명하는 '재무관'(프로쿠라토르)이 맡는다. 아무리 속주 총독이라 해도, 통치권을 휘둘러 세금을 마구 거두어들일 수는 없게 되었다. 공화정시대에 키케로의 고발을 받아 재판에 회부된 시칠리아 총독 베레스 같은 존재는 모습을 감추었다(이 고발 사건 덕분에 키케로는 일약 유명인사가 되었다.)
속주로 남은 시칠리아 주민들은 수입의 10분의 1인 속주세를 내야했다. 하지만 수입이 많아지면 세금을 내고도 남는 액수가 많아진다. 이 시칠리아 속주만이 아니라 사르데냐와 코르시카에도 군대는 1개 군단도 주둔해 있지 않다. 주둔시킬 필요도 없을 만큼 사회가 안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듬해인 기원전 21년, 아우구스투스의 순행지는 그리스로 옮아가 있었다.
그리스는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의 대결,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의 연합군과 옥타비아누스의 대결 등, 로마의 내전중에 일어난 모든 주요 전투의 무대가 되는 불행한 20년을
경험했다.
쇠퇴기에 접어든 지 오래인 그리스에는 이것이 마지막 일격이 된 것 같았다. 경작지는 황폐해지고, 유사시에는 양떼를 몰고 쉽게 피난할 수 있는 목축업만 살아남을 거라고 그리스인들조차도 체념하고 있었다. 당연한 결과지만, 인구 유출이 늘어나 인구가 줄어들었다. 그것도 인구 유출이라기보다는 두뇌 유출이라고 말하는 편이 적절했다. 그리스인이 어디서나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었던 것도 하나의 원인이었다.
우선 그리스어 자체가 지중해 세계의 국제어가 되어 있었다. 게다가 로마인들이 교양과목으로 생각한 철학, 논리학, 수사학, 역사, 수학, 지리, 천문학은 원래 그리스의 '학문'이다. 카이사르가 이런 학문을 가르치는 교사에게는 민족에 관계없이 로마 시민권을 주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그 특전을 활용하는 사람이 늘어났다. 직장을 얻고 로마 시민이 될 수 있다면, 속주세라는 이름의 직접세를 내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로마까지 가지 않아도 가까운 로도스 섬에서 강좌를 열면, 로마에서 유학생들이 몰려드는 형편이었다.
건축과 조형미술은 그리스인의 독무대라고 해도 좋았다. 수요는 로마인, 공급은 그리스인이라는 분업 형태가 가장 훌륭한 결실을 맺은 것은 바로 이 분야였다.
의학도 고대에는 그리스인의 전문직이라고 해도 좋은 분야에 속한다. 로마에서 병원을 개업하거나 로마 시민으로 이루어진 식민도시나 로마군 기지의 병원에 근무하면, 역시 카이사르 덕분에 로마 시민권을 취득하여 속주세를 면제받을 수 있었다.
장사하는 재능이 뛰어날 경우, 지중해 세계의 항구 도시들은 모두 그들이 활약할 무대를 제공한다. 그리스인은 선원으로도 우수했기 때문에, 지중해만이 아니라 홍해와 인도양까지 진출해 있었다. 이 무렵 몬순 현상을 발견한 것도 그리스 선원이었다. 오늘날의 영국인과 마찬가지로, 고대 그리스인은 고국을 떠나도 생계수단이 없어서 어려움을 겪을 염려는 없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을 방치해두면 그리스 본국이 텅 비어버리는 사태를 피할 수 없다. 그렇게 되는 것은 그리스 문화를 존중하는 로마의 지도층에게는 참을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리스 로마의 방위 전략으로 보아도, 그리스가 풍요로워지고 인구도 늘어나고 우수한 인재가 활약할 수 있는 곳으로 돌아가는 편이 바람직했다. 북부 그리스야말로 도나우 강을 방어선으로 만들고 싶은 로마가 신뢰할 수 있는 후방기지였기 때문이다.
카이사르는 그리스를 마케도니아 속주와 아카이아 속주로 나누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이 두 개의 속주를 '원로원 속주'로 분류했기 때문에, 그리스에 대한 통치권은 본래 원로원이 갖고 있다. 따라서 법적으로는 아우구스투스나 나설 자리가 아니겠지만, 권력을 장악하는 그의 방식이 워낙 교묘했기 때문에, 속주 통치권은 원로원이 갖고 있더라도 통치의 기본방침을 정하는 속주 재편성은 당연히 아우구스투스가 할 일이라는 느낌을 주었다.
그런데 아우구스투스는 그리스에 있으면서도 총독이 주재하는 아카이아 속주의 수도 코린트나 마케도니아 속주의 수도 테살로니키에는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그가 그리스에 있는 동안 머문 곳은 처음부터 끝까지 아테네였던 모양이다. 카이사르와 달리 아우구스투스는 선뜻 말을 몰고 자기 눈으로 직접 확인하러 가는 타입이 아니었다. 코린트를 방문했다면 코린트 지협을 뚫어 이오니아 해와 에게 해를 연결할 필요성을 틀림없이 인정했을 텐데, 자기 눈으로 직접 확인하지 않았기 때문인지 그 계획에는 전혀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코린트 운하도 원래 계획은 카이사르가 세웠지만 19세기 말에야 실현된 토목공사의 한 예다.
아테네에 머물고 있던 아우구스투스가 학자들을 초빙하여 교양을 높일 기회를 가졌다는 증거 자료는 없다. 18세에 벌써 정치투쟁의 소용돌이에 말려들었으니 교양을 쌓을 시간 여유도 없었겠지만, 42세가 되었어도 그에게는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을 것이다. 아우구스투스의 그리스 재건 구상은 자치도시와 식민도시, 그리고 그 도시들을 잇는 도로망 건설로 이루어져 있었다.
자치도시란 도시국가로서 완전한 자치를 인정받고, 독자적인 화폐 주조권도 가지며, 당연한 일이지만 속주세도 면제되는 도시를 가리킨다. 그리스에서는 아테네와 스파르타, 그리고 아우구스투스가 건설한 니코폴리스를 포함하여 열 개가 채 안 되는 자치도시가 특별지구로 존재했다. 아테네와 스파르타에 이런 특전이 인정된 것은 이 두 도시국가의 역사를 로마의 역대 통치자들이 존중했기 때문이다.
식민도시란 로마 군단에서 만기 제대한 퇴역병들이 이주하여 정착한 곳으로, 주민은 로마 시민이니까 속주세를 낼 의무도 없다.
그리고 오늘날의 고속도로로 생각할 수 있는 로마식 가도는 그때까지는 이그나티아 가도 하나뿐이었지만, 이것이 이들 자치도시와 식민도시를 잇는 도로망으로 차츰 발전해간다.
아우구스투스가 경제 부흥이야말로 그리스 재건의 열쇠라고 믿었다는 증거는 아테네 북부에 기둥으로 둘러싸인 넓은 시장을 지어서 아테네 시민에게 기증한 것에도 나타나 있다. 이에 대해 아테네 시는 로마와 아우구스투스에게 비치는 신전을 아크로폴리스에 세우고, 아우구스투스와 아그리파의 조각상을 만들어 그 신전 안에 세우는 것으로 보답했다.
'무역 센터'를 기증하는 로마인과 그 답례로 신전과 조각상을 바치는 그리스인. 지중해 문명의 주인공인 이 두 민족의 성향 차이가 여기에 뚜렷이 드러나 있는 것 같아서 흥미롭다.
두 사람의 조각상이 나란히 안치된 것으로 미루어보아, 아우구스투스와 아그리파는 기원전 21년에 아테네에서 합류하여 오리엔트 대책의 인수인계를 끝낸 게 아닌가 싶다. 아그리파는 그리스에서 동쪽으로 가는 아우구스투스와 동행하는 대신, 인수인계를 끝내자마자 수도 로마로 돌아갔다. 그후 아우구스투스의 동방 순행에는 그리스까지 동행한 젊은 티베리우스가 따라가게 된다. 건강에 자신이 없는 아우구스투스의 유일한 건강법은 무리를 하지 않는 것, 즉 남에게 맡길 수 있을 때는 맡기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아테네는 여름에는 덥고 여울에는 춥다. 아우구스투스는 그해 겨울을 기후가 온난한 사모스 섬에서 보낸다. 사모스 섬은 소아시아 서해안 가까이에 있는 섬이라서, 기원전 20년 초부터 오리엔트 대책에 착수하기에도 그리스 본토에 있는 것보다 편리했다.
고대에 '아시아'라고 불렸던 오늘날의 소아시아는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면 황량한 산지만 줄곧 이어져 있어서, 이 지방이 뺏고 빼앗기는 역사를 가졌다는 것 자체가 이상하게 여겨진다. 하지만 자동차로 여행해보면, 넓은 평야는 없지만 경작지가 산재해 있고, 물도 풍부하고, 산악지대 이외에는 기후도 온난하여 꽤 생산력이 풍부한 지방이었다는 것을 납득할 수 있다. 특히 그리스인들이 개발한 해안지역인 흑해 연안과 에게 해에 면한 이오니아 지방, 그리고 시리아와 이집트를 향해 펼쳐져 있는 소아시아 남부의 경제력은 시리아나 이집트에 못지않은 수준이었다.
기원전 5세기의 페르시아 전쟁부터 시작하여 200년 뒤에 알렉산드로 대왕의 원정으로 결말이 난 역사가 반영하듯, 민족 구성부터 복잡하기 이를 데 없다. 농업에 종사하는 원주민인 아시아계, 오래 전에 이주하여 상공업에만 전념하는 그리스인, 역시 이주 민족인 페르시아계도 건재한데다. 용병으로 왔다가 그대로 눌러앉은 켈트계 주민도 있고, 소아시아 동부 일대에는 아르메니아와 파르티아계 주민들까지 자리 잡고 사는 형편이다. 다인종, 다민족, 다종교, 다문화로 이루어진 로마 제국의 축소판 같은 지방이었다. 이 복잡하고 잠재력이 풍부한 지방을 어떻게 통치하느냐는 로마인들에게 항상 중요한 문제였다. 더구나 소아시아는 전략적인 중요성도 갖고 있었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술라, 루쿨루스, 폼페이우스, 카이사르 등 로마가 낳은 뛰어난 장수들이 모두 이 소아시아로 군대를 출동시킨 사실이 그것을 실증하고 있다.
그런데도 공화정 시대 로마의 소아시아 정책은 동맹관계를 축으로 삼고 있었다. 기원전 2세기에 페르가몬 왕이 죽으면서 나라를 로마에 맡기자 그것을 속주화했을 뿐, 소아시아의 각 왕국과 동맹관계를 맺는 것으로 일관했다. 다시 말해서 로마는 우세한 군사력을 갖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이용하여 소아시아 전역을 속주화하는 것을 되도록 피해왔다.
로마의 동맹국인 각 왕국은 군주제를 시행하고 있다. 군주정이 오리엔트인의 기질과 결부되면, 왕위 계승을 둘러싼 내분으로 이어지기 쉽다. 로마인의 내분은 로마인들 사이에서 결말이 나는데, 오리엔트 국가에서는 각 왕국의 왕가들이 혼인으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인지, 다른 나라의 개입을 불러일으켜 싸움이 확대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래서는 로마의 패권 밑에서 소아시아를 안정시키는 것이 목표였던 로마의 소아시아 정책도 바뀌지 않을 수 없다. 폼페이우스가 앞장섰고 카이사르가 확립한 소아시아의 로마 직할 속주는 3개-아시아, 비티니아, 킬리키아-로 늘어나 있었다.
이런 상태를 물려받은 아우구스투스는 3개 속주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갈라티아 왕국의 왕이 죽었다는 소식을 받았다. 왕위 후계자도 남기지 않고 죽었다. 내버려두면 가까이에 있는 강대국 아프메니아나 파르티아의 개입을 초래할 것이다.
아우구스투스는 갈라티아를 직할 속주로 만들기로 결정했지만, 이웃 나라들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라고 군단을 이용하지 않고 그 일을 끝내고 싶었다.
특명 전권대사에다 아우구스투스의 '대리인' 자격까지 얻어 실제 교섭에 나선 아그리파는 다음 세 가지 조건을 약속하여 갈라티아 유력자들과의 교섭을 성사시켰다.
1. 부채 상환 기간의 연기, 채무자는 갈라티아인, 채권자는 로마인인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니까, 이것은 아우구스투스의 권한으로 로마의 금융업자를 압박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2. 속주세의 공정 과세, 속주세는 수입의 10분의 1이었지만, 그때까지 왕에게 내던 세금보다 적었으니까, 공정한 과세란 세율이 10분의 1을 넘지 않게 한다는 의미인 게 분명하다.
3. 속주 총독의 통치 지역을 명확하게 한다.
로마의 속주가 된 지방에는 통상을 주로 하는 그리스 계 도시가 많다. 로마인들은 공화정 시대부터 이런 도시를 '자유도시'라고 부르며 자치를 인정했다. 아우구스투스도 이것을 답습한다. 자유를 존중했다기보다 그 지방 일대에서 이루어지는 경제활동의 '핵'으로 인정한 것이다. 주민이 로마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지 않는 한 이들 '자유도시'에는 로마군이 들어가지 않고, 총독의 통치권도 미치지 않는다. 자치를 인정받고 있기 때문에 세율도 자유롭게 결정할 권리가 있겠지만, 실제로는 10퍼센트의 속주세율을 넘어서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세제의 통일성은 유지할 수 있었다. 주변 지역에 부과되고 있는 세율보다 높은 세금을 부과하면, 자유도시라 해도 주민의 유출을 막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4. 군단을 상주시키지 않는 대신, 제대 군인을 이주시켜 식민도시를 건설한다.
소아시아의 나머지 두 속주-아시아, 비티니아-는'원로원 속주'라서 군단이 주둔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제 막 속주가 된 갈라티아는 아우구스투스의 직할인 '황제 속주'가 된다. 군단을 상주시키는 것이 당연하지만, 아우구스투스는 시리아에 정규 군단을 두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라인 강 연안에 군단을 상주시키기 때문에 다른 지역에는 군대를 두지 않는 '황제 속주' 갈리아이 경우와 마찬가지다.
게다가 로마 시민이 이주할 '식민 도시'도 그리스 계 원주민과 이해관계가 충돌하지 않는 지방을 골라서 건설되었다. 모두 갈라티아 내륙지방에 건설된 식민도시는 6개, 퇴역병들이 정착할 토지도 몰수한 것이 아니라 아우구스투스가 자기 돈으로 사들였다. 식민도시가 내륙지방에 집중되어 있는 것은 그리스인이 통상에 재능이 있는 반면 농업과 목축업을 잘하는 로마인의 자질까지 고려한 선택이었다.
경제 부흥도 균형이 이루어져야만 영속화를 기대할 수 있다. 그리스인과 달리 로마인은 내륙지방을 부흥시키는 데에도 열심이었다. 갈라티아 속주의 수도도 앙카라로 결정했다. 이제 더 이상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지만, 이런 '핵'을 연결하는 가도와 다리로 이루어진 로마식 '사회간접자본'의 네트워크가 형성되어갔다. 이리하여 소아시아 중앙부의 갈라티아는 평화적으로 로마의 속주에 편입되었다.
레스보스 섬을 근거지로 삼은 아그리파의 활동 범위도 넓었지만, 사모스 섬을 근거지로 한 아우구스투스도 광범위하게 순행을 다녔다. 사모스 섬에는 겨울에만 돌아와서 지냈던 같다. 둘 다 40대 초반의 한창 나이다. 게다가 제국의 기반을 굳히는 과제는 이 두 사람의 어깨에 달려 있었다.
오늘날로 치면 터키 남동부의 일부에다 시리아와 레바논을 합해야만 겨우 로마 시대의 시리아 속주가 된다. 이렇게 땅이 넓은 만큼 민족 구성도 복잡해서, 그리스 계와 페니키아 계와 셈족으로 나뉘어 있다. 알렉산드로스 대와의 부하 가운데 하나가 창건한 셀레우코스 왕조는 내분으로 자멸했고, 폼페이우스가 이 시리아를 로마의 속주로 삼았다.
이 속주는 대국 파르티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었다. 따라서 군단을 상주시킬 필요성 때문에 아우구스투스는 시리아를 '황제 속주'로 삼고, 평시에도 4개 군단을 주둔시키기로 했다.
시리아 속주의 수도는 셀레우코스 왕조 시대부터 수도였던 안티오키아였다. 이곳을 방문한 아우구스투스는 이미 이곳의 중요성을 알고 있던 카이사르가 정비해둔 극장과 수도ㅡ 목용탕, 회당 등으로 가득 메워진 도시를 보고, 자기가 할 일은 그런 건축물들이 온전한 상태로 유지되도록 도와주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그 대신, 아우구스투스에게는 카이사르가 미처 손을 대지 못한 다른 요지를 정비하는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시리아 속주의 진정한 특징은 국경을 맞대고 있는 파르티아 왕국이 강력한 적인 동시에 강력한 교역 상대국이기도 하다는 점이었다. 따라서 적이라 해도 국경에 방벽을 쌓아 관계를 끊어버릴 수는 없다. 그런 짓을 하면 시리아 속주의 경제가 숨통이 막혀버린다. 그렇기 때문에 군단 주둔지를 정비하고 사막의 오아시스에서 비롯된 각 도시를 진흥하는 문제까지도 고려할 필요가 있었다. 이 도시들의 안전이 보장되지 않으면 대상들은 다른 길로 가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투스는 헬리오폴리스(오늘날 레바논의 발베크)에 군단기지를 건설하고, 병사들이 변경에서도 쾌적한 일상생활을 할 수 있도록 많은 공공시설을 갖추도록 명령했다. 이리하여 레바논의 산악지방에도 로마의 문명이 침투하게 되지만, 로마인은 주민들의 마음속까지 간섭하지 않았다. 주민들은 전과 마찬가지로 바알 신을 믿는다. 그리스 식 이름인 헬리오폴리스가 나중에 발베크로 바뀌는 것도 바알 신앙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는 증거다.
대상로를 고려하여 그 연변에 있는 도시들을 진흥시키는 정책이 추진되었는데, 아우구스투스 시대에는 먼저 다마스쿠스와 팔미라에 진흥책이 집중되었다. 이 부근의 사막지대에는 다섯 개나 되는 작은 왕국이 산재해 있어서, 로마는 이 왕국들과 동맹관계를 맺고 있었다. 로마는 시리아 속주와 파르티아 왕국 사이에 끼여 있는 이 작은 동맹국들을 파르티아와 시리아 속주의 완충지대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 '완충지대'를 다잡고 있는 '핵'으로서, 또한 교역로가 충분히 기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도 다마스쿠스와 팔미라는 가장 적합한 위치에 자리 잡고 있었다.
안티오키아와 팔미라 사이, 팔미라와 다마스쿠스 사이, 다마스쿠스와 베리투스(오늘날 레바논의 수도 베이루트)사이, 베이루트와 안티오키아 사이, 발베크와 다마스쿠스 사이를 있는 도로망이 정비된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의 정책은 그때까지의 로마 정책을 답습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경제를 더욱 진흥시키는 것만은 아니었다. 베이루크에서 남쪽으로 50킬로미터 떨어진 지중해 연안에 페니키아 시대부터 존재한 고대 도시 시돈과 티로가 있다.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일대를 로마의 패권 밑으로 흡수한 최초의 인물인 폼페이우스도, 그 후 패권을 확립한 카이사르도 이 두 도시를 '자유도시'로 지정하고, 자치를 인정해왔다. 하지만 카이사르가 암살된 뒤의 혼란기에 이 두 도시에는 로마에 반대하는 기운이 일어났다. 아우구스투스는 이 두 도시에서 '자유도시'의 자격을 박탈하고, 시리아 속주에 속하는 일개 도시로 격을 낮추었다. 아우구스투스와 그 후의 로마 제국은 로마에 반대하지만 않으면 모든 점에서 자유를 인정한다는 것을 통치의 기본방침으로 삼았다.
유대 문제
시리아 속주 남쪽에는 유대 왕국이 자리잡고 있다. 오늘날에는 국경을 간단히 통과하는 게 꿈이 되었지만, 고대의 베리투스(오늘날의 베이루트)와 고대의 요파(오늘날의 텔아비브)는 200킬로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베이루트 시내에 '텔아비브, 200킬로미터'라는 도로 표지판이 있는 편이 자연스럽다. 하지만 고대에도 눈에 보이지 않는 경계선이 존재했다.
시리아 속주는 헬레니즘 세계에 속하지만, 유대 왕국은 유대 세계다. 다신교 사회 와 일신교 사회의 차이다. 바꿔 말하면, 수도 로마에도 유대인을 위한 예배당이 있으니까 유대 지방에도 다신교 민족을 위한 신전이 있어도 좋지 않으냐고 생각하는 로마인과, 로마에 유대인을 위한 신전이 있어도 좋지 않으냐고 생각하는 로마인과, 로마에 유대인을 위한 예배당이 있든 없든 관계없이 유대 왕국에 다른 신들을 모시는 신전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유대인의 차이다. 이런 지방을 통치하는 것이 로마에 가장 어려운 일이 된 것도 당연했다.
이 유대 왕국에 대한 대책을 살펴보면, 기원전 63년에 예루살렘을 정복한 폼페이우스도, 기원전 48년에 이곳에다 로마의 패권을 확립하기 위해 애쓴 카이사르도 유대를 속주화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로마의 패권을 인정하는 동맹관계, 즉 로마의 우방이 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특히 카이사르는 헬레니즘 세계이기 때문에 그리스 계 상인이 특권을 누려온 이 세계에서 그 동안 줄곧 제 2위를 감수해온 유대상인에게도 그리스 계 상인과 동등한 권리를 부여하여, 유대인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다.
실제로 유대인의 생활환경은 그리스인이 지배한 시대보다 로마인이 지배한 시대에 훨씬 개선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사리를 아는 사람들한테만 통하는 사고방식이다. 그리고 경제 활성화는 필연적으로 빈부격차를 낳을 수밖에 없다. 또한 모든 유대인이 교역에 종사하고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래도 아우구스투스는 나주에 대왕이라고 불리게 된 헤롯 왕(라틴어식 이름은 헤로데스)을 유대 쪽에 가질 수 있었다.
헤롯 왕은 기원전 73년에 태어났으니까, 아우구스투스보다 열 살 위다. 내분이 일상다반사인 오리엔트의 전형적인 군주로서, 친족끼리 죽고 죽이는 가운데 반생을 보낸 인물이다. 기원전 40년, 유대를 침공한 파르티아군은 당시의 왕을 생포하고 친파르티아 파인 왕의 동생을 왕위에 앉힌다. 퇴위당한 왕의 고관이었던 헤롯은 로마로 망명했다. 당시 로마는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의 공동 통치 시대였다. 둘 다 파르티아와 친한 현재의 왕을 인정할 수는 없었다.
33세의 헤롯은 명석한 두뇌와 현실적인 사고방식과 강한 의지로 로마 지도층의 호의와 신뢰를 얻고 있었다.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지적 능력과 신체적 활력이 충분한 30대의 헤롯이 로마의 힘을 정확히 간파했다는 점이다.
헤롯은 곧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한테서 받은 '로마 시민과 원로원의 친구이자 동맹자'라는 칭호를 갖고 조국으로 돌아간다. 반격은 성공하여, 그는 유대 왕위에 올랐다. 유대 왕 헤롯을 로마가 얼마나 높이 평가하고 있었는지는 클레오파트라가 그토록 간절히 원했는데도 안토니우스가 유대 왕국만은 클레오파트라에게 넘겨주지 않은 사실로도 입증될 것이다. 안토니우스가 죽은 뒤에도 헤롯의 유대와 아우구스투스의 로마는 아주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거기에 이바지한 사람 가운데 다마스쿠스의 니콜라스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는 다마스쿠스 태생의 그리스인으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의 가정교사였다. 교양인으로도 뛰어나고, 저서도 많다. 이 사람이 헤롯 왕의 고문이 되었다.
이 두 사람은 유대인과 그리스인으로 민족은 달랐지만, 유대 왕국은 로마의 '클리엔테스'로 존속함으로써 독립을 유지하는 것이 최선책이라는 데에는 의견이 일치했다.
로마 시대의 클리엔테스는 단순한 피보호자에 머물지 않고 보호자를 후원하는 입장이기도 했다는 것은 이미 이야기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유대의 안전은 보호자(파트로네스)인 로마가 책임지지만, 피보호자(클리엔테스)인 유대도 제국의 안전보장에 일익을 담당한다. 로마로서는 동쪽의 파르티아와 남쪽의 아라비아에 대한 방어선의 일부를 유대가 맡아주는 셈이다. 로마가 유대의 독립을 존중해준 것은 거기에 대한 당연한 교환조건이었다.
물론 유대인은 완전한 신앙의 자유를 누렸다. 예루살렘 신전을 재건하는 것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헤롯 왕의 친로마 정책도 철저했다. 유대 국내에도 그리스, 로마의 신들을 모신 신전이 세워졌다. 아우구스투스에 대한 감사 표시로 사마리아를 세바스티아로 이름을 바꾸기까지 했다. 카이사레아라는 항구도시도 건설되었다. 카이사레아가 '카이사르의 도시'라는 뜻인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이 카이사레아에는 로마와 아우구스투스에게 바쳐진 신전도 세워졌다. 예루살렘에는 아우구스투스의 아내 리비아와 사위 아그리파가 기증한 공공 건축물이 건설되고 있었다.
그러나 유대 민족은 선민의식을 가진 민족이다. 자기들이야말로 신의 선택을 받은 민족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관점에서 보면, 다른 민족은 신의 선택을 받지 못한 열등한 민족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그런데 아무리 공공을 위한 건축물이라 해도 열등 민족인 로마인과 관련된 건축물이 나라 안에 세워지고, 왕의 통치가 친로마 노선으로 기우는 것은 그들에게는 견디기 어려운 현상이었다. 더구나 헤롯왕이 오리엔트 군주답게 국내에서 강경책을 쓰자, 그들은 더욱 견디기가 어려워졌다. 일신교와 선민의식이 결부되면 폭발이 일어난다. 하지만 그것이 언제 어떻게 불을 뿜을 것인지는 일신교나 선민의식과는 정반대의 극에 있었던 로마인이 쉽게 예상하고 대책을 세울 수 잇는 문제가 아니었다.
50대에 접어든 헤롯의 왕위는 아직 확고했다. 그리고 헤롯보다 열살 아래인 아우구스투스는 잠재적인 문제를 스스로 자진해서 파내는 타입이 아니었다. 아우구스투스의 이런 성향은 그의 동방 순행에 가장 큰 과제인 파르티아 문제 해결에도 나타나게 된다.
파르티아문제
지중해 세계의 패권자가 된 뒤에도, 로마가 훨씬 동쪽에 있는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을 거점으로 하는 파르티아 왕국에 신경을 써야 했던 것은 파르티아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로마의 동쪽 방어선이 확립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기원전 1세기 당시, 로마의 적은 대부분 작은 군주국이나 야만족이었고, 왕국으로서 대규모 정규군을 출병시킬 수 있는 나라는 클레오파트라의 이집트를 무찌른 뒤로는 파르티아 하나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런데 그 파르티아를 로마는 한 번도 이기지 못했다. 루클루스도 폼페이우스도 유프라테스 강까지는 진격했지만, 파르티아와 정면 대결은 하지 않았다. 기원전 53년에 당시 '삼두정치'의 일원인 크라수스가 처음으로 파르티아와의 정면 대결에 도전했지만, 그가 거느린 4만 병력 가운데 도망칠 수 있었던 것은 1만 명도 채 안되고, 포로가 된 사람이 1만 명 남짓, 나머지 2만 명은 전사하는 참담한 패배를 맛보았다. 총사령관 크라수스를 비롯한 지휘관급에서 살아남은 것은 나중에 카이사르 암살 주모자가 된 카시우스 한 사람뿐이었다. 로마군의 가장 큰 굴욕은 군단기를 적에게 빼앗기는 것인데, 은독수리 깃발이라고 부르는 군단기도 모조리 적의 손에 넘겨주었으니, 그야말로 완전한 참패였다.
기원전 44년 3월 15일에 살해된 카이사르는 파르티아 원정을 떠나기 직전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파르티아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제국의 동쪽 방어선이 확립될 수 없을 뿐 아니라. 로마인은 패배를 설욕하지 않은 채 그대로 방치해두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카이사르 암살과 그후에 이어진 내전 상태에서 설욕은 계속 뒤로 미루어졌다. 기원전 36년에 안토니우스가 파르티아 원정에 도전하긴 했지만, 그때 거느린 병력은 동맹국에서 참가한 군내를 합하여 11만 명, 그런데 이때도 8개월에 걸친 원정에서 2만 명이나 되는 병사를 잃고, 궤멸적인 참패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실패로 끝났다. 카이사르의 후계자 자리를 노리고 있던 안토니우스의 야심도 이 실패로 큰 타격을 받았다.
이 안토니우스를 최종적으로 무찌른 아우구스투스가 로마 세계의 유일한 최고 권력자가 된 것은 기원전 30년이다. 로마인들은 내전이 끝난 것을 기뻐하면서, 이번에야말로 아우구스투스가 파르티아에 설욕 해주리라고 기대했다. 악티움해전에서 이긴 아우구스투스는 실제로 안토니우스를 뒤쫓아 오리엔트까지 갔다. 그는 병역을 거느린 상태였고, 거기서 파르티아까지는 한 달이면 충분히 갈 수 있는 거리였다. 영국의 한 연구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만약 악티움에서 승리한 사람이 카이사르였다면, 그때 이미 파르티아 원정을 실행에 옮겼을 것이다. 파르티아 문제가 명쾌하게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생기는 오리엔트 일대의 불안정한 상태는 방치하면 할수록 로마에 불리한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카이사르였다면 되도록 빨리 문제를 해결하려 했을 테고, 아르메니아를 비롯한 동맹국들에 대해 로마의 위신을 회복하는 일도 더 이상 미루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아우구스투스는 카이사르와는 다른 성격의 소유자였다."
아우구스투스도 파르티아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오리엔트의 평화를 유지하는 열쇠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로마는 파르티아에는 단 한 번도 이기지 못했을 뿐더러, 크라수스와 안토니우스가 두 번이나 패배를 맛보았다. 세 번째 패배는 절대로 허용할 수 없었다. 이번에도 패배하면 제국의 동방은 완전히 무너진다. 오리엔트 군주와 주민들은 반드시 강자에게 달라붙는다.
아우구스투스에게는 총사령관의 품격은 있지만 전투를 지휘하는 재능은 없었다. 아그리파는 용장이지만 천재적인 사령관은 아니었다. 아그리파에게 맡겨도 반드시 이긴다는 보장은 없었다. 카이사르와의 성격 차이 외에도 아우구스투스가 신중해지지 않을 수 없는 요인은 많았던 셈이다. 또한 기원전 30년 당시 파르티아는 로마의 속주를 위협하는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결국 아우구스투스가 파르티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뒤였다.
이렇게 늦어지긴 했지만, 문제 해결을 위한 움직임은 아우구스투스다운 치밀한 준비로 시작되었다.
파르티아에서도 왕족들 사이의 내분은 일상다반사라 해도 좋다. 프라테스 4세가 노령에 이른 것이 내분에 불을 붙였다. 왕의 동생인 티리다테스는 왕세자를 붙잡아 로마로 보냈다. 파르티아를 적대시하는 로마니까 틀림없이 죽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는 파르티아 왕세자를 죽이기는커녕 후하게 대우했다.
그런데 늙은 왕의 측근들이 곧 반격에 성공하여, 패배한 티리다테스는 시리아 속주 총독한테로 도망쳤다. 로마는 이 사람도 죽이지 않고 살려둔다. 로마가 쓸 수 있는 카드는 두 장이 되었다.
파르티아는 왕의 이름으로 로마에 강화를 제의했다. 두 인질을 돌려 달라는 것이 강화 조건이었다. 인질을 돌려주면 한 사람은 왕위에 오르고, 또 한 사람은 망나니의 손에 넘겨질 게 뻔했다.
아우구스투스는 강화 제의를 받아들였다. 로마가 내건 조건은 두 번 패했을 때 빼앗긴 은독수리 깃발을 돌려주고, 크라수스가 완패했을 당시 포로가 된 1만 명의 로마 병사를 돌려달라는 것이었다. 파르티아는 이 조건을 수락했다.
아우구스투스는 조건을 수락한다는 뜻을 전하기 위해 로마를 방문한 파르티아 사절에게 왕자를 넘겨주었다. 하지만 티리다테스는 넘겨주지 않았다. 로마인을 믿고 몸을 의탁해온 사람을 그의 뜻과는 달리 파르티아에 넘겨주는 것은 신의를 중시하는 로마인의 정신에 어긋나기 때문이라는 것이 아우구스투스가 거부한 이유였다.
조국에 돌아가자마자 왕자는 왕위에 올랐지만, 무엇 때문인지 그것을 계기로 파르티아는 로마와의 강화에 응하지 않게 되었다. 보통은 아우구스투스의 체면이 구겨지겠지만, 이시기에 제국의 동방을 재편성하러 떠난 그는 파르티아 문제 해결에 아르메니아 카드를 쓰려는 생각을 가슴에 품고 있었다.
당시 아르메니아 왕은 아르탁세스였다. 안토니우스가 퇴위시킨 선왕의 아들이다. 퇴위시킨 이유는 왕이 파르티아에 접근했다는 것이었다. 로마가 두 번이나 파르티아에 패한 영향은 이런 형태로 나타나고 있었다. 따라서 아버지 대신 아들을 왕위에 앉혀서, 아르메니아의 친파르티아 정책은 바뀌지 않았다. 친파르티아는 곧 반로마라는 뜻이다. 아르메니아로 가는 로마 상인들은 냉대를 받고, 심지어 살해당하는 경우까지 나오는 형편이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아르메니아 대책과 파르티아 대책을 연관시켜, 두 가지 문제를 단번에 해결하려고 했다.
기원전 21년, 아테네에서 사모스 섬으로 이동한 아우구스투스는 동행한 티베리우스에게 시리아 속주에 주둔하고 있는 4개 군단을 이끌고 아르메니아로 진격할 것을 명령했다. 얕보고 있던 로마의 생각지도 못한 행동에 깜짝 놀란 아르메니아 궁정은 아르탁세스 왕을 죽이고, 사절을 급파하여 로마에 복종할 것을 맹세했다.
아우구스투스의 명을 받은 티베리우스는 살해된 왕의 동생인 티그라네스를 왕위에 앉히고, 로마외의 동맹관계를 경신하게 한 다음, 군대를 이끌고 철수했다. 새 왕은 로마에서 오랫동안 볼모 생활을 한 사람이기도 했다. 물론 볼모라 해도 '풀브라이트 유학생' 같은 처지였지만.
아우구스투스가 친히 동방에 진입했을 때부터 국경을 맞대고 있는 우방 아르메니아가 로마 쪽으로 돌아섰다. 아르메니아에서 철수한 로마군이 남쪽으로 진로를 바꾸기만 하면, 그곳은 이미 파르티아 영토였다. 파르티아 왕 프라테스 5세는 로마가 제시한 조건을 모두 수락하고, 그 동안 방치해둔 강화조약을 맺기로 결정했다.
기원전 21년 5월 12일, 로마와 파르티아 사이에 맺어진 강화조약 조인식은 유프라테스 강에 떠 있는 작은 섬에서 열렸다. 무대장치도 만점이었던 셈이다. 로마 측 조인자는 21세의 티베리우스. 파르티아 측 조인자는 누구였는지 분명치 않지만, 왕족 중에서 지위가 높은 사람이었을 것이다. 조인식이 끝난 뒤, 티베리우스와 수행원들은 유프라테스 강 동쪽 연안에 열린 잔치에 초대를 받았고, 이튿날은 파르티아 측 대표와 수행원들이 유프라테스 강 서쪽 연안에서 열린 로마측 연회에 초대받는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두 강대국의 적대관계는 일단 막을 내렸다.
33년 전의 크라수스 군대와 15년 전의 안토니우스 군대가 빼앗긴 은독수리 깃발은 모두 반환되었다. 하지만 33년 전에 포로가 된 로마 병사들의 귀환은 실현되지 않았다. 파르티아 측의 의도 때문이 아니라. 생존자가 한 명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 대신 파르티아 군이 전사자한테서 빼앗아 전리품으로 보관하고 있던 로마 장병들의 갑옷과 무기는 반환되었다.
기원전 54년 당시 크라수스의 파르티아 원정에 참가한 병사들의 평균 연령이 32세나 33세 정도였다면, 33년 뒤에는 60세가 넘었을 것이다 포로가 된 이들의 운명은 노예로 팔리는 것이 아니라. 파르티아 변경 요새인 메르프에서 평생 동안 병역에 종사하는 것이었다. 메르프는 오늘날의 투르크멘 공화국에 있는 마리다. 혹독한 기후와 척박한 토지로 유배당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기원전 216년에 칸나에 회전에서 압승한 한니발은 포로로 잡은 로마 병사 8천 명을 그리스에 노예로 팔았다. 20년 뒤인 기원전 196년, 그리스인들은 그리스에서 철수하는 플라미니누스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그의 부탁을 받아들여, 그리스 전역에서 찾아낸 1천 200명의 로마인 포로를 고국으로 돌려보냈다.
이 경우에는 각지에 흩어져 있던 사람을 찾아내야 하는 불리한 상황이었지만, 그래도 20년의 노예 생활을 견디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사람이 8천 명 가운데 1천 200명이나 되었다. 파르티아에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의 경우는 한 군데 모여서 유배 생활을 했는데도, 33년 뒤에는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했다. 한 사람이라도 로마로 데리고 돌아갈 수 있었다면, 파르티아 문제 해결을 그토록 열망했던 아우구스투스인 만큼 업적록에도 반드시 기록했을 것이다. 그런데 한마디도 언급되어 있지 않은 것을 보면, 생존자를 조국으로 데리고 돌아가는 것은 실현되지 않았던 게 분명하다.
카이사르가 암살되지 않고, 그래서 파르티아 문제가 기원전 44년에 해결되었다면 어땠을까, 혹한의 땅 메르프에서 유배 생활은 10년으로 끝났을 것이다. 10년 뒤라면 1만 명의 대부분을 조국으로 데리고 돌아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르메니아와 파르티아 문제 해결에 대해 아우구스투스는 업적록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아르메니아는 아르탁세스 왕이 살해되었을 때 속주로 삼을 수도 있었지만, 나는 조상이 쌓은 전통에 따라 내 의붓아들인 티베리우스를 통해 티그라네스를 왕위에 앉히는 쪽을 선택했다."
"나는 파르티아가 지난 세 차례의 전쟁(크라수스의 패배와 안토니우스의 패배 사이에 또 한 차례 가벼운 패배가 있었다)에서 빼앗은 전리품과 군기를 반환할 수밖에 없는 상태로 몰아넣었을 뿐 아니라, 파르티아 쪽에서 로마 시민과의 우호관계 수립을 요구해 오도록 만들었다."
아우구스투스는 병사를 한 명도 잃지 않고 파르티아 문제를 해결한 공적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선전했다. 유프라테스 강에서 강화조약을 맺은 날인 5월 12일은 해마다 축제를 여는 국경일이 되었다. 그 장면이 새겨진 흉갑을 입은 자신의 전신상도 만들게 했다. 원로원도 그의 뜻을 받아들여, 포로 로마노 한복판에 서 있는 카이사르 신전 옆에 파르티아 문제 해결을 기념한 개선문을 세우기로 결의했다.
은독수리 깃발이 적의 수중에 있는 한 로마의 굴욕은 계속된다. 그 은독수리 깃발이 돌아온 것이 원로원 의원에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모든 로마인에게 얼마나 커다란 기쁨이었는지는 쉽게 상상할 수 있다. 현대 연구자의 대부분도 이일을 '아우구스투스 외교의 걸작'이라고 칭찬한다.
모든 문제가 외교 교섭으로 해결되었다면, 인류의 이성을 얼마나 신뢰할 수 있으랴.
하지만 "전리품과 군기를 반환할 수밖에 없는 상태로 몰아넣었을 뿐 아니라, 파르티아 쪽에서 로마 시민과의 우호관계 수립을 요구해 오도록 만들었다."는 아우구스투스의 말은 로마인에게 한 말이다. 이것은 아우구스투스라면 틀림없이 설욕해줄 거라고 기대하는 로마인에게 전하는 교묘하고 고심 어린 표현이었다. 그렇게라도 말하지 않으면 로마인은 결코 승복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일이 파르티아인의 붓을 통해 전달되었다면 어떤 식으로 표현되었을까. 사료가 없기 때문에 인용할 수 없지만, 만약 사료가 남아 있다면 정반대의 표현이 되지 않았을까.
예를 들면 "군사 행동에 호소하기를 체념한 로마는 외교 교섭으로 관계를 개선하는 쪽을 선택했고, 유프라테스 강에서 강화조약이 조인되었다. 파르티아는 로마의 요구에 따라 로마 군기와 전사자들의 무기와 갑옷 따위를 돌려주었다."는 식으로 말했을지도 모른다.
파르티아가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면, 아르메니아를 비롯한 오리엔트 국가들도 모두 똑같 생각했을 것이다.
아우구스투스는 차츰 서방의 지배자가 되어가고 있는 로마인의 가치관에 따라 행동했다. 그러나 가치관은 유감스럽게도 만인 공통이 아니다. 서방에 서방의 가치관이 있으면, 동방에는 동방의 가치관이 있다. 유대인에게도 나름대로 가치관이 있다. 서방의 가치관이 현실에 대한 통찰에 바탕을 두는 경우가 많은 반면, 동방의 가치관은 힘에 좌우된다는 점이 다르다. 이것은 우열의 문제가 아니라. 그냥 다를 뿐이다.
오리엔트 사람들이 알렉산드로스 대왕 앞에 무릎을 꿇었던 것은 인종을 초월하여 민족이나 언어나 풍속의 벽을 뛰어넘은 국가의 창설이라는 이상에 공감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알렉산드로스가 파르티아의 전신인 페르시아의 왕 다리우스를 완벽하게 격파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세 번씩이나.
카이사르는 파르티아 원정을 떠나기 직전에 암살당했지만, 그 원정 목적은 파르티아 정복이 아니라 파르티아를 격파한 뒤 유프라테스 강 방어선을 확립하는 것이었다.
이집트
로마에 정복된 피점령국이면서도 통치가 순조롭게 이루어진 나라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멸망한 뒤의 이집트였다. 제5권에서 클레오파트라가 이집트를 통치하던 시절의 특수한 사정에 대해 이야기했듯이, 이 나라만은 아우구스투스 개인 영지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이것은 이집트인들을 납득시키기 위한 형식에 불과했고, 아우구스투스 자신은 물론 당시의 로마인들도 이집트를 로마 국가의 소유지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표면상의 형식이라 해도, 공적인 형식이다. 로마인들은 그때그때 경우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을 전통으로 삼는 민족이기도 하다. 이집트를 실제로 통치하는 사람이 아우구스투스가 임명한 기사계급 출신의 '총독'(프라이펙투스)인데도, 공화정에 동조하는 원로원 의원들조차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아우구스투스의 허가가 없이는 원로원 의원이 이집트에 발을 들여놓을 수도 없었지만. 이것도 이집트의 복수한 사정을 배려했기 때문이다.
가치관 가운데 공유할 수 없는 것이 있다 해도, 그것을 인정하는 편이 통치에 유리하다면 인정하는 것이 로마인의 사고방식이었다. 신격화한 파라오의 지배를 받은 역사가 긴 이집트에서는 시민 공동체인 로마국가의 지배를 받는 것보다 아우구스투스-그는 카이사르가 신격화되었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신의 아들'이 되었다-가 다스리는 편이 마찰도 적다. 그렇긴 하지만 '신의 아들'인 아우구스투스의 통치 자체는 지극히 인간적이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정복된 뒤 300년 동안 이집트 지도층을 형성한 것은 정복자와 함께 들어온 그리스인이었다. 로마는 그리스 계 주민을 피정복민으로 억압하지 않고, 그들이 로마인과 공유하고 있는 가치관에 착안하여 그것을 활용하는 방식을 채택했다. 즉 이집트 경제를 활성화하는 것이다.
이집트 경제도 총체적으로는 농업과 공업과 상업으로 이루어져 있다. '상업'은 원래 이 방면의 전문가인 그리스계 주민에게 맡겼다. 동양에서 들어오는 값비싼 물품에 25퍼센트의 관세를 부과한 것 정도가 로마의 새로운 정책이었지만, 이것도 통상을 쇠퇴시키지는 않았다. 로마 제국이라는 큰 시장과 직결되어 교역량 자체가 늘어났기 때문이다.
'공업'도 로마에서 일어난 공공건축 건설붐을 타고 더욱 활발해졌다. 이집트에 모이는 아프리카산 유색 대리석이 이탈리아산 하얀 대리석과 경쟁하면서 대량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도 제정 시대에 들어온 뒤였다.
그러나 이집트 경제의 토대는 나일 강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농업'에 있다. 파라오 시대부터 이집트의 풍요로움이 유명했던 것은 농업 생산성이 그만큼 높았기 때문이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역대 왕들도 농업을 진흥하는 데에는 열심이었다.
그러나 왕실이 음모에 휘둘리는 시대에 접어들면, 아무도 그런 수수한 정책에 관심을 가질 수 없게 된다. 농업 정책은 지속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효과가 없게 된다. 농업 정책은 지속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효과가 없다. 나일 강물을 활용하기 위한 관개시설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말기에는 황폐해진 상태로 방치되어 있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안토니우스를 뒤쫓아 이집트에 들어왔을 때부터 관개시설을 근본적으로 개혁해야 할 필요성을 깨닫고 있었다. 그로부터 10년 가까이 지난 지금, 이 개혁에 착수할 수 있는 체제가 마련되었다. 아우구스투스의 명으로, 나일 강물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수로망 정비 공사가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이집트에 주둔하고 있는 3개 군단의 병사 1만 8천 명을 동원했지만, 공사가 로마식으로 워낙 철저하게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 정도 인원으로는 도저히 공사 계획을 따라갈 수 없었다. 정규 군단의 보조 병력인 이집트 병사 9천 명을 추가로 투입해도 모자라서, 이집트 민간인을 대량 징용하여 공사를 진행했다. 이리하여 관개 공사는 파라오 시대의 피라미드 공사와 마찬가지로 이집트인들에게 일자를 제공하게 되었다.
관개 공사가 피라미드 공사와 다른 점은 첫째 한 사람의 내세를 위해서가 아니라 많은 사람의 현세를 위한 공사라는 점, 둘째는 완성된 뒤에도 유지와 보수를 게을리 할 수 없기 때문에 항상 고용 인력을 필요로 한다는 점이었다.
아우구스투스의 명에 따라 건설된 이집트 관개시설이 얼마나 뛰어난 효율성을 갖고 있었는지는 완성된 직후에 그것을 직접 본 지리학의 창시자 스트라보의 기술에도 나타나 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말기에는 나일 강의 수면이 14쿠비토(약 6미터 30센티미터) 올라가지 않으면 작황이 좋지 않았고, 3미터 60센티미터면 흉작이 되었지만, 로마 시대에는 5미터 40센티미터면 풍작이고 3미터 60센티미터만 올라가소 흉작이 되지는 않았다."
나일 강이 불어나면, 불어난 물은 수로망으로 흘러 들어가 경작지를 적시고, 풍부한 일조량의 도움을 받아 작물이 자란다. 따라서 수로망은 만들어놓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고, 끊임없이 손질을 해줄 필요가 있다. 로마인들은 가도나 그 밖의 '사회간접자본"을 정비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아우구스투스는 이집트에 토지 사유제를 도입하기로 했다.
토지는 파라오나 왕의 소유라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 이집트인들은 토지가 사유재산이라는 개념을 갖고 있지 않았다. 농부는 지주인 왕한테 땅을 빌려서 작물을 재배한다. 지주가 신전인 경우도 많았다. 따라서 농민은 모두 소작농이었고, 자작농은 하나도 없었다.
클레오파트라를 무찌르고 이집트 '왕'이 된 아우구스투스는 신전 소유지를 제외한 이집트 전역의 경작지를 소유하게 된 셈이다. 그런데도 그는 자신의 소유지를 불하하여 자작농을 장려하는 정책을 실시했다. 국영기업의 민영화를 연상시키는 정책이다.
그런데 기대와는 달리 이 정책은 순조롭게 추진되지 않았다. 돈을 가진 그리스 계 주민들은 '상업'과 '공업'의 융성을 눈앞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농업'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수천 년 동안 사유지라는 개념을 갖지 않고 살아온 이집트인들에게는 느닷없이 그런
말을 해도 먹혀들 리가 없었다. 로마인이라면 빚을 내서라도 경작지를 구입하러 달려갔을 것이다. 사유재산 개념이 확립되어 있는 사유재산 보호를 법의 기본이념으로 삼는 나라의 주민과 그렇지 않은 나라의 주민은 그렇게 달랐다.
그래도 아우구스투스에게 방법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농업 민영화라는 관점에서 로마의 원로원 의원들에게 땅을 팔 수도 있었다. 그들은 재산의 기반을 토지에 두고 있을 뿐 아니라, 땅을 살 자금도 부족하지 않았다.
아우구스투스는 이 방법을 쓰지 않았다. 원로원 의원이라도 그의 허가가 없이는 이집트에 들어오지 못하게 한 것은 로마 영토가 된지 얼마 안된 이집트 땅에서 로마인의 존재가 주는 인상을 엷게 하기 위해서였다. 국제도시화한 알렉산드리아에서는 로마인이 눈에 띄지 않지만, 나일강 유역의 농경지에서는 눈에 띈다. 아우구스투스는 당분간은 이집트에 있는 로마인을 정규 군단병과 징세업무 따위를 담당하는 관료로 제한하고 싶었다.
그렇긴 하지만, 경작지를 사유화하지 않고는 농업이 효율적으로 운영되기를 바랄 수 없다. 경작지 사유화가 순조롭게 진행되려면 누군가가 모범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그는 아그리파와 마이케나스를 비롯한 측근들과 원로원 계급에 속하지 않는 친구들에게 땅을 사게 했다. 덕분에 아그리파와 마이케나스는 이집트의 대지주가 되었지만, 아우구스투스는 자기 집 노예로 있다가 자유인이 된 해방노예한테까지 땅을 사게 했다니까 처음에는 그도 몹시 난감했던 모양이다.
관개 공사와 가도망 정비, 그리고 속도가 느리긴 했지만 농경지 사유제의 도입은 이집트의 농업 생산성을 비약적으로 향상시켰다. 경작지에 부과되는 토지세는 돈이 아니라 밀을 물납하기로 결정되었는데, 기름진 땅이냐 척박한 땅이냐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2천 제곱미터의 밭에 대해 30리터 내지 60리터의 밀을 세금으로 부과했다고 한다. 수확량이 어느 정도였는지 분명치 않기 때문에 이 세율이 높은지 낮은지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사유화가 성공하는 것은 자본과 노력을 투자한 만큼의 이윤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토지세로 물납되어 알렉산드리아로 운송되어오는 곡물만으로도 수도 로마에서 필요로 하는 양의 3분의 1을 충당할 수 있게 되었다.
'사회간접자본' 정비와 경작지 사유화 다음으로 아우구스투스가 이집트에 도입한 마지막 개념을 정교분리였다.
독립된 성직자 계급이 없는 로마와 달리, 이집트 신관들은 독립된 사제 계급을 이루고 있었으며, 신전 소유지에 명의를 빌려준 대지주이기도 했다. 그들이 정신적인 지도자일 뿐이라면, 갈리아의 사제 계급과 마찬가지로 독립된 계급으로 계속 두어도 별문제가 없다. 그러나 이집트의 성직자들은 사람들의 마음을 지배할 뿐 아니라 실생활까지 지배해왔다. 다시 말해서 권위만이 아니라 권력까지도 갖고 있었다. 토지세도 신전 소유지마다 제멋대로 결정했다. 또한 권위가 권력을 함께 갖는 사제 계급이 국정에까지 참견하는 일이 많았고, 이것이 이집트 국정을 불안정하게 만드는 요인이기도 했다.
아우구스투스도 다신교 민족인 로마인이다. 이집트의 전통 종교를 폐지하는 것은 꿈에도 생각지 않았다. 이집트 국내 정세의 안정 여부를 결정하는 중대 요소인 종교를 자신의 통제 아래 두는 것만 생각했을 뿐이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파라오들이 앞다투어 땅을 기증했기 때문에, 각 신전의 영지는 광대해져 있었다. 아우구스투스는 그 영지들을 몰수했다. 덕분에 토지 사유화 장려책으로는 그 많은 땅을 도저히 처리할 수 없어서, 한동안은 소작인들이 나라에서 땅을 빌려 농사를 짓는 임차 형식이 일반화되었다. 로마의 성직자들은 시민의 명예직이기 때문에 생계 수단까지 배려해줄 필요는 없다. 그러나 이집트의 신관들은 독립된 계급이어서, 신전 소유지를 몰수하면 다른 생계 수단을 마련해주어야 한다. 아우구스투스는 이집트를 통치하는 정부가 신관들에게 봉급을 주도록 했다. 그렇게 하면 통제의 실효성이 더욱 높아진다.
또한 각 신전의 독자적인 운영을 인정하지 않고, 알레산드리아에 거주하는 최고 신관이 모든 신전을 감독하도록 결정했다. 즉 신관들은 누구나 최고 신관에게 복종해야 했다. 로마 측으로서는 여러 사람보다 한 사람만 통제하는 편이 훨씬 쉽기 때문이다.
각 신전은 매년 한 번씩 최고 신관에게 신전의 재정 상태에서부터 신관의 수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의무적으로 보고해야 했다. 그리고 신전에서 봉직하는 신관의 수도 정해졌다. 신관의 수가 규정보다 많아도 처벌을 받지는 않았지만, 규정 이상의 잉여 신관들은 신관에게 인정된 면세 혜택을 받지 못하게 되었다.
아우구스투스가 시작했고 그의 후계자들이 이어받은 이집트의 정교분리 정책은 정치와 종교를 분리했을 뿐, 종교를 배제한 것은 아니다. 배제하기는커녕 이집트 신전 수리와 신축 공사는 차츰 로마 황제들의 일거리가 되었다. 구태여 예수 그리스도가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신의 것은 신에게"라고 말하지 않더라도, 로마인들은 그것을 실천하고 있었다.
수도 로마에 돌아오다.
이 모든 것이 기원전 22년부터 기원전 19년까지 동방을 순행하는 동안 아우구스투스가 이룩한 업적이다. 그리스를 거쳐 귀국길에 오른 아우구스투스는 잠시 들른 아테네에서 베르길리우스를 만난다. 그보다 일곱 살 위인 이 시인은 아우구스투스의 심복이자 오늘날의 '메세나 운동'의 시조인 마이케나스의 후원을 받고 있는 문인이었기 때문에, 아우구스투스와는 전부터 아는 사이였다. 황제는 병에 걸린 시인을 데리고 그리스에서 배를 타고 이탈리아로 갔다.
이탈리아 남부의 항구도시인 브린디시에 상륙했을 때는 시인의 병세가 악화되어, 로마까지 동행하는 것은 무리였다. 기원전 19년 9월 21일, 로마의 국민시인으로 추앙받게 된 베르길리우스는 브린디시에서 세상을 떠났다. 서사시 아니네이아스는 아직 퇴고가 끝나지 않은 상태였다. 시인은 그게 마음에 걸렸는지 원고를 태워버리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었지만, 황제는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아우구스투스가 수도 로마에 돌아온 것은 그해 10월 21일이었다. 그는 아피아 가도를 지나 수도로 가는 길에 마흔네 번째 생일을 맞았다.
3년 만의 귀환은 아우구스투스 자신의 기술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이루어졌다.
"원로원의 결의로, 집정관 퀸투스 루크레티우스를 비롯한 원로원 의원들과 법무관, 호민관을 포함한 일행이 캄파냐(나폴리를 중심으로 하는 지방)까지 마중나와 나를 영접했다. 이런 명예는 나말고 이제껏 아무도 받은 적이 없다."
"카페나 문(아피아 가도에서 수도 로마로 들어가는 관문) 근처에는 명예와 용기를 찬양하는 신전이 있다. 원로원은 내 귀환에 경의를 표하여, 그 신전 앞에 귀환자와 귀환을 도운 운명의 여신에게 바치는 제단을 세웠다. 그리고 그 제단에서는 그 후 해마다 사제와 여사제(베스타)들이 퀸투스 루크레티우스와 마르쿠스 비니키우스가 집정관이었던 해(기원전 19년)에 이루어진 내 귀환을 기념하여 산 제물을 바치는 의식을 올리게 되었다. 이 의식은 내 이름을 따서 '아우구스탈리아'라고 불렸다."
정작 중요한 일은 아무것도 쓰지 않는 아우구스투스도 이런 일은 업적록에 자세히 남기는 것이 미소를 자아낸다. 전투도 하지 않고 정복한 땅도 넓히지 않은 채 돌아온 황제를 이렇게 열렬히 환영하는 로마인이 많았던 것은 아우구스투스의 행운이기도 했다. 로마는 불과 반세기전까지만 해도 전투에서 죽인 적병의 수에 따라 개선식을 거행할 것인가의 여부를 결정했다. 그걸 생각하면 참으로 금석지감이 든다. 카이사르가 착상하고 아우구스투스가 착착 실현하고 있는 안정성장 노선이 여론의 지지까지 받기 시작한 것이리라.
원로원의 완고한 공화주의자들조차 환영할 수밖에 없는 성과를 거두고 돌아온 아우구스투스는 이번 기회에 국가의 지도층인 원로원 계급의 반발을 살 게 뻔한 법률을 제정하려고 한다. 그것은 수도 로마에서 태어났지만 정신은 지방 출신자나 마찬가지였던 아우구스투스라는 남자가 제국 통치에 대해 어떤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예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