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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없음

김정환(1954~ )

가로등

가을

가을에

감상적

강남 스타일

거룩한 줄넘기

검붉은 눈동자

겨울, 너에게

겨울 복날

경운기를 타고

공해시

구두 한 짝

국광(國光)과 정전(停電)

그리고, 그러므로, 그러나

그리고 색의 자화상

금딱지 롤렉스

길을 돌아가다

길의 진리

나무

너에게 또 너에게

넋 걷는 노래

노동자의 벗

노부부

노을

눈, 나뭇가지, 너, 나, 그리고 고통

눈물 노래

늦가을 노래

닭집에서

대열

도둑고양이의 죽음 5

도미 대가리 매운탕

독수리

독재, 생애, 눈물, 광경, 음악

두 기자

레닌의 노래

마포, 강변 동네에서

맑은 집

맞아 죽을 노래

모가지의 노래

모내기

묘비명(墓碑銘)

무덤

밀물

바퀴벌레

반성

백년 동안 새로운 노년

별, 기타

별을 헤는 시인에게

봄밤

봄비, 밤에

비노래

빈 화분

사랑

사랑과 투쟁은 둘이 아니다

사랑 노래

사소한 참사

새벽

생가

생애

서시

선물과 명작

선지피

성탄

세상은 지금보다 찬란하리라

쉿, 바람 소리 – 산 아내가, 죽은 남편에게

스캔들 혁명사

시간에 대한 물증

심상치 않지?

씻음에 대하여

아름다운 절망

안 보여

어느 무명 코메디언에게

어두운 일산

어제

얼굴

얼음으로 죽은 자

여성 모델의 언어

연하장

야구

오월곡(五月哭)

우리들의 나라, 노동자 세상

우리들의 어머니는 아직

우리 이 투쟁과 생산의 민족해방세상에 동지여, 그대를 깃발로 세운다

원주 여자 – 아름다움에 대하여

유체 꽃밭

육체가 숯으로 탔을 때

이것들이 인간 죽음에 간섭

이별

이제 들판을 보리라

인생

인위적

인적(人跡)

전선은 눈물을 향해

전태일

절망에 대해서

절정

제설작업

조각의 언어

좋은 꽃

지울 수 없는 노래

지천명(知天命) 삼각(三脚)

지하철 정거장에서 1

쩨쩨한 영혼 진혼곡

책 쌓기

철길

철길 위에 쓴다

최고의 사랑은

취발이

타는 봄날에

탄생의 노래

티스푼

포옹

학림다방

한강 4

해방 서시(序詩)

핵 반대 노래

호미씻이

홍은동에서

환상적인 몸

휴식 노래

흐린 날

희망

희망의 나이

4. 19

10월

11월

2000-5

 

 

 

가로등

김정환

 

기다림이 쌓여

가로등 하나 서 있다

기다림보다 길고

기다림보다 강한

가로등 하나

그 밑엔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다

등불이 내려

몇십 년 기다려 왔던 것이

또 몇천 년 기다려 갈 것을

충혈된 눈동자로 비춘다

세월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쓰린 세월은 더욱 쓰라리고

아픔 보이지 않는다

가로등 하나

그 밑에

아아 평생이 보일 뿐이다

가로등 하나 서 있다

그 밖엔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다

 

 

 

가을

김정환

 

이제 초라히 헐벗은 자세와 낙엽 구르는 소리와

내 앞에서 다시 한번 세계가 사라져가는 모습을

내가 버리지 못하듯이

내 또한 그대를 사랑하는 것은

그대가 하찮게 여겼던 그대의 먼지, 상처 그리고 그대의 생활 때문일 뿐

그대의 절망과 그대의 피와

어느 날 갑자기 그대의 머리카락은 하얗게 세어져 버리고

그대가 세상에서 빼앗긴 것이 또 그만큼 많음을 알아차린다 해도

그대는 내 앞에서 행여

몸 둘 바 몰라 하지 말라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것은

그대의 치유될 수 없는 어떤 생애 때문일 뿐

그대의 진귀함 때문은 아닐지니….

 

 

 

가을에

김정환 

 

우리가 고향의 목마른 황토길을 그리워하듯이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것은

그대가 내게 오래오래 간직해준

그대의 어떤 순결스러움 때문 아니라

다만 그대 삶의 전체를 이루는,

아주 작은 그대의 몸짓 때문일 뿐

이제 초라히 부서져 내리는 늦가을 뜨락에서

나무들의 헐벗은 자세와 낙엽 구르는 소리와

내 앞에서 다시 한번 세계가 사라져가는 모습을

내가 버리지 못하듯이

내 또한 그대를 사랑하는 것은

그대가 하찮게 여겼던 그대의 먼지, 상처, 그리고 그대의 생활 때문일 뿐

그대의 절망과 그대의 피와

어느 날 갑자기 그대의 머리카락은 하얗게 새어져 버리고

그대가 세상에서 빼앗긴 것이 또 그만큼 많음을 알아차린다 해도

그대는 내 앞에서 행여

몸둘바 몰라 하지 말라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것은

그대의 치유될 수 없는 어떤 생애 때문일 뿐

그대의 진귀함 때문은 아닐지니

우리가 다만 업수임 받고 갈가리 찢겨진

우리의 조국을 사랑하듯이

조국의 사지를 사랑하듯이

내가 그대의 몸 한 부분, 사랑받을 수 없는 곳까지

사랑하는 것은

 

 

 

감상적

김정환

 

오늘도 지하도 내려가는

계단엔 지나가는

행인들의 발길이 쌓이고

동냥 그릇에 백동전 몇 개 없다

내 주머니 속에도

희망 몇 개 없다

나는 안다

희망은 그렇게

늘거나 줄지 않는다

눈이 내리고 내리는 것은

고층빌딩에서 아스팔트까지

하얗게 쌓이지 않는다

나는 안다

희망은 그렇게

쌓여서 녹지 않는다

나는 안다

희망의 뒷모습 같은 가슴에

더 선명한 음악 같은 것

가슴에 더 생생한 그림 같은 것

나는 안다

그것이 방황이고

또 결속이라는 것은

그것이 세계 속의 세계라는 것을

 

 

 

김정환

 

마침내, 시간이 보이지 않고, 저녁 강이

어둔 산기슭마다 번져간다. 슬픔보다

촉촉하게, 눈물의 속은 영롱하지. 때론

이성보다 냉철하다. 아, 너는 없고, 없는

너를 사랑하기 위하여 강이 흐르고….

 

 

 

강남 스타일

김정환

 

종말이 지나갔다. 더 다행히

희극적으로 지나갔다. 그게 좀 슬프지만

미쳤지만, 종말 지나갔다.

강남의 전세계에서 사람들 말춤 추고 있다.

섹스가 가장 절묘한 직전으로 흐트러지는

춤, 여성의 뇌쇄(惱殺)도 종말 직후다.

그건 좀 아쉽지만 권위가 있지. 말의 육체는

육체성의 권위가 있다.

목관(木管)의 행복도 없다.

양차 세계대전 사이 파시즘 발흥 앞에

어제의 죽음과 장차의 죽음 사이

서늘한 여인 위해 목숨 걸고 부르던

죽은 이 노래 속 나의 죽음은 전세계

조회수가 기껏 1천 남짓이고 1930년대

머릿기름 바른 번식 욕망이 흥건하다.

어떤 지휘자는 위키피디아에도 나오지 않는다.

맞아. 거대한 비유는 거대한 기우였어.

수천만 명 죽고 나서 코미디가 종말을 능가한다.

아직은 죽어본 적 없다는 거지.

지금

적그리스도가 착한 사람이다. 지금

없는 사람이 경악한다.

본토는 멀쩡하다. 성(聖), 그

호들갑이라니. 범죄 현장도 그런 범죄 현장이 없다.

수녀원이 뉘앙스와 냄새 사이 영원한 동안

그냥 전화번호 몇 개 지우고, 그것도 그만두고

수음. 그렇게 통달해간다. 음풍농월 아닌

진흙의 자연에.

없는 사람 얼마나 더 없어야 잊혀질 수 있나.

있는 사람 얼마나 더 있어야 사라질 수 있나.

수음만 경악한다.

가장 좋게 드러나는 배후다.

놀라지 않는 기적이다.

무슨 오이지처럼 붙어 있다 여섯이,

다섯 아니고, 모르는 사람 생일이.

귀신 부른다 마이너, 아웃사이더, 루저 들이

아직도 비명, 혹은 다른 세상의 활기로. 애꿎기는.

귀신 있다니 얼마나 다행인가.

우린 물속에 있다.

 

 

 

거룩한 줄넘기

김정환

 

프롤로그

 

사랑, 그 허리 끊어지는 말 혁명 그 회오리치는 말. 사랑, 갈수록 짧아지는 그 말, 혁명, 갈수록 지리멸렬해지는 그 말, 사랑, 갈수록 가혹해지는 그 말, 혁명, 갈수록 멸망을 닮아가는 그 말,  사랑, 청순한 죽음을 닮아가는 말, 혁명, 무기력한 노년을 닮아가는 말, 우리가 한 몸이듯 둘이 따로 떨어져 있고 우리가 떨어져 있듯 둘이 한 몸인.

 

결코 말할 수 없는, 말해지지 않는 불멸의 말. 사망과 혼동되는, 숱한 사망과 숱하게 혼동되는, 불멸의 형용사인지 주어인지 헷갈리는, 주어와 형용사는 각각 육체인지 정신인지 렛갈리는, 헷갈리는 것이 영혼인지 헷갈리는, 그래서 더 말해지지 않는, 그래서 더 시끄러운 불멸의 말.

 

첫사랑의 숫자 쏱아진다 무엇인지 모르는 숫자들이, 너보다 많은 숫자들이, 너보다 찬란한 숫자들이, 쏱아졌다 너의 내용보다 더 많은 숫자들이, 덜덜덜 떨리는 두려움보다 더 두려운 숫자들이, 더 찬란한 숫자들이, 수없이 많은 숫자들이, 코피보다 더 마구 쏟아지는 숫자들이.

 

1

마르두크, 최고의 신이자 모든 신.

얼음의 음식과 고독의 경악,

흔들리는 침묵,

푸르른 전율과

생명의 내파.
그것도

 

 

2

날개 대신 두 손을 택한

인간의 진화는

잘한 일일까.

 

굴러내리는 중력의 바위에서

인간이 발명한 바퀴는

더 가볍지만

더 단순한 설계였을까?

 

 

3

뉴질랜드의 원래 이름은 아오테아로아,

'긴 하얀 구름 땅'.

 

형용사 사이 '그리고'는 없었다.

거룩함과 인간은 그렇게 사이가 좋았다.

그때가 좋았다는 뜻은 물론

아니지.

 

 

4

기독 성서의 그발, 주바일.

 

내 안에

분명한 독(毒).

미사 통상문은 짧다.

음악은 여러 차례 가사를 반복한다.

포도주. 코르크 마개

따개는

허공에 몸을 누이는

지렛대로 딴다.

 

 

5

창백함은

육체가 육체를 벗는

의상이다.

주는 자 받는 자 모두

어쩔 수 없는

은총과도 같다.

창백해지다.

그게 영혼인지 모른다.

육체는 사랑에 떨지 않고

찢어질 뿐이다.

 

 

6

막대 돋보기를 샀다.

200 X 25mm. 반원통형.

유리가 아닌 신소재다.

 

 

7

울부짖는 공룡들은 또 다른 공포를 울부짖는다.

공룡들은 서로 같은 결 목소리 음정 차이로

의사 소통하는지 다른 결 음정 차이로 하는지 아니면

다른 결 음높이 차이로 그도 저도 아니면

 

 

8

무엇을 하던 이였을까. 무슨 생각으로

살던 이일까?

오랜 세월을 삭은 망자의

해골은 몸의 전생에

관심이 없다. 그와 더불어

 

 

9

우산에 우둑둑둑 듣는 빗방울은 장례식 가는 길이다.

산 자는 죽는 것도 어려운 일이지만

죽은 자는 참 어이없이 쉽게도 죽는다.

길동역 못 미처 상일동

경희대 동서신의학병원 영안실.

 

 

10

우는 것은 나의 울음이 아니다.

우리 모두의 울음도 아니다.

울음은

아주 낯선 것이다. 울음은

 

 

11

집은

아무리 화려하여도

가난의

형이상학이고

아무리 웅장하여도

장독대가 없어도

규모는 가난을 벗지 못한다.

간결하지 않아도 가장 아름다운

집은

가난의 보석이다.

 

 

12

서울이 고향인 서울살이다.

꿈속인 듯 내 고향,

와 있다면 기쁘지만

깨어나면 없는 듯

더 멀다.

 

숨겨진 것은 없다. 지워진 것이 있을 뿐,

기억의 창고를 뒤져도 숨겨진 것은 없다.

밤도 몸도 그 속은 마찬가지다

 

 

13

노래 속

이야기는 해체되지 않고

이야기가 해체다.

니미뽕, 니미뽕,

후렴으로 잘도 이어지는 발라드 이야기도 해체다.

'음반=세계'는

'응축=확산'한다.

'장르=역사'를, 바다 속은

아름답기 전에 아름다움이

요상하지. 합정동은

 

 

14

다고베르트,

오늘도 걷는다마는 강물이 흘러 흘러 어디로 가나.

목욕을 하면 몸에서 밀 내음 난다.

밀가루도 아니고 빵도 아닌

고대 로마 시민 병사 주식으로

밀은 그 내음이 온갖 전쟁의 고린내를

품으면서 품는 육으로 씻어낸다.

 

 

15

비다. 장마

비다

오른쪽 팔뚝이 왼쪽

팔뚝을 움켜쥐는

손가락이 굵고, 아름다운

 

 

16 

노래 속은 거울 속과 다르다.

차게 식힌 환타 오란씨 맛이 진하게 묻어난다

생명이 내파하는 분내도 묻어난다.

우스꽝스러운 것이 가장 슬프고,

 

 

에필로그

 

이별과 달리 별리는 흐리지 않고

평범한 꽝꽝 닫힌 그 속에서

삶은 어쩔 수 없이 흐르는 음악,

음악은 별리를 비추는 별리로 흐르고

슬퍼 마라,

그래서 네가 있고 내가 있었다.

울지마라,

울음이 흐르지 않고

그래서 거울이 있고 음악이 있었다.

따로따로 있지 않고

별리가 있었다.

 

별리와 달리 이별은 가장 짧고 황홀한 만남 속에도

그렇게 왕래가 있었다.

황홀한 순간은 없고 황홀했던 순간만 있었다.

기쁨의 가장 어두운 속살,

어둠의 가장 깜깜한 이면까지 바라보았다.

껴안았던 것은 죽음의 비유가 아니고 왕래였다.

별리와 달리 이별은 아주 짧지만,

헤어질 시간을 허락한다.

그때 이별은 모든 것이 순식간임을 안다.

슬픔을 알고, 모든 것을 안다.

같은 얘기다. 그 밖의,

치매도 같은 얘기다.

 

 

 

검붉은 눈동자

김정환

 

기차는 구식이다

음침한 시대가, 끝났다는 듯이

기름 묻은 이슬이 검게, 선로 위에서 반짝인다

아직 젖어 있는 것은 무엇인가

1950년대를 생각한다

강철이 강철과 부딪쳐

인간이 밥과 미래를 열망했던 시절

눈동자여 젖어 빛나던

검붉은 눈동자

이 매니큐어의 세상에서

기차는 구식이다

암울한 시대가

끝났다는 듯이

 

 

 

겨울 너에게

김정환

 

그대, 만남의 설레임 속 은밀한

기쁨의 내장까지 시리고 시린

아리고 아린 겨울 입맞춤의 바람,

그 깨물어대는 송곳니여

그대, 내 몸살의 이마에 와닿는

싱긋한 서릿발의 내음

끝으로

 

침묵이여 사랑이여

좀더 싸늘해다오

싸늘함의 진도를 알고 싶다

싸늘함의 끝장을 보고 싶다

이 모든 살아있음의 한계를

두려운 사랑의 입맞춤으로

사랑의 온몸 더듬기로.

 

 

 

겨울 복날

김정환

 

세검정 다리 밑에서 허름한 차림의 사내 둘이서

개를 두 마리씩이나 나무막대에 걸어

불에 끄슬리고 있었는데

왜 나는 무턱대고 그것이 훔친 개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했을까

생각했을까, 나를 올려다보는 그들의 눈초리는

내려다보는 나보다 더 의젓해 보였는데

늠름해 보였는데, 해볼 테면 해보라는 듯이

그들의 눈에는 광기가 아닌

또렷한 살기가 번득이고 있었는데

검댕이 묻은 그들의 아직도 배고픈 눈초리에서

내가 본 것은

측은함이었을까, 복수였을까

도대체 왜 나는 그 백주에 대낮에, 몰래, 슬쩍, 아니면

재빨리,……이런 따위의 음흉한 말들만 기억에 떠올렸을까

동정이었을까 부끄러움이었을까

하얗게 눈 내려 쌓인 벌판, 모처럼 개울물 풀린 자리 옆에서

끄슬려도 끄슬려도 개의 내장은 더욱 새빨갛고

이빨은 더욱 새하얗고

몸뚱이가 시커매진 개의 시체를 보면서

사내의 억센 두 손이 그 개의 내장 속을 자신있게 휘휘 저었을 때

개고기라면 질색하던 나의 자존심이

흔들렸을까, 왜 그리 침 흘렸을까

도대체 왜 그리 속이 후련했을까

아름다움이란 하나의 습관일 뿐일까

 

 

 

경운기를 타고

김정환

 

사람이 가난하면

이렇게 만나는 수도 있구나 털털거리는 경운기를 타고

너는 그쪽에서

나는 이쪽에서

오래도록 깊이 패인, 너의 주름살로 건너오는

터질듯한 그리움이여

너와 나 사이를 가르는 삼팔선 같은,

먼지의 일렁임이여

 

그러나 우리 어쩌다 이렇게 소중한 사이로 서로 만나서

피난 보따리만 한 애정을 움켜쥐고 있느냐

움켜쥐고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느냐

설움이여 울화의 치밈이여

흔들리면서

그냥, 마구 흔들리면서

 

 

 

공해시

김정환

 

1

오늘 내리는 이 눈이 아무리 아름답다 하더라도 이 눈이 그대의 집을 덮고 식구들을 덮고 마침내 그대의 육신과 잠마저 덮쳐 버린다면 아무도 눈을 아름답다 하지 않으리 온 세상을 덮고 발목 빠지는 눈이 말세처럼 차창 밖에도 간판에도 단말마 쏟아지는 이 눈발 속에 핵먼지가 끼여 있다면 눈사람의 흰둥이와 빨갱이 우리들 달디단 입맞춤에도 수은독이 묻어 있다면 날큼한 침처럼 진땀을 쥐며 헤어지는 우리들의 따스한 악수에도 이따이이따이 뼈가 녹고 있다면 우리들 서로 그리움에도 껍질처럼 납가루가 묻어 있다면 겨울 쓸쓸한 뜨락에서 축축히 젖는 눈망울에 농약이 뭍어 있다면 그대 우리들이 마시는 음료수와 우리들이 나들이하는 교통수단과 입 헤벌린 구두창과 주욱죽 내리는 산성비 잠들고 싶은 베갯잇에조차 아황산까스가 묻어 있다면 그래도 우리는 다시 만나 사랑하겠지만 징그럽겠지만 식초처럼 축 늘어진 육신과 살점이 녹은 액체로 흘러흘러서 허우적거리며 뼈가 드러난 팔다리로 그대를 껴안겠지만 갈비뼈는 갈비뼈끼리 백태깔은 까뒤집힌 채 곰배팔이도 끼리끼리 다만 눈물겹게 독하디독한 참사랑 오른팔 짤라 보낸 하느님처럼 에미애비보다 지지리 못난 자식 처절   복수로 키워 강대국이 우리를 죽여서 죽여 말살하더라도 우리 죽어도 죽어줄 수 없겠지만 징그러운 그러나 진하디진한 사랑으로 살겠지만 억센 희망 곁에서 시커먼 공장폐수가 흘러간다면 피피엠이 뭔지 모르지만 우리들 목숨과 사랑과 삶과 죽음과 미래를 위한 공동체 하다못해 오늘날 느그들의 선거공약도 헛된 독재와 같이 산업재해 인명살상의 피가 묻어 있다면 오늘도 주룩주룩 산성비 내리고

 

 

2

밥솥이다 이것이 우리들의 휴전선 혹은 동두천에서 몇십 년 흐른 세월 철조망 밑 녹슬은 철모처럼 철마는 달리고 싶고 밥솥 녹슬은 우리들의 밥솥이다 바닥을 이토록 갉아댄 이물질(異物質)은 우리들의 내장도 이렇게 갉았으리 밥솥 바닥을 갉고 내장바닥을 갉고 우리들 번식의 요도를 갉고 우리들 그리움의 목청을 갉고 아아 우리들 맑은 정신의 뇌세포까지 갉았으리 어떤 자가 독을 밥이라고 하는가 그리 참으며 우리는 밥을 먹고 살았다 독을 먹고 독을 품기 위하여 어떤 자가 수은을 우리들 생명의 식수라고 하는가 그리 참으며 우리는 물을 마시고 살았다 중금속 섞인 식민지 우리들의 식사 매판자본의 시대 때려 부수기 위하여 어떤 자가 도대체 어떤 자가 이 피눈물 나는 고물 철기 시대를 선진조국 참된 미래라고 하는가 뻔뻔스런 밥솥 뻔뻔스런 우리들의 위장 새빨간 거짓말이다 어떤 자가 우리를

선량한 백성이라고 일러바치는가

선량한 백성이라고 일러바치는가……?

 

 

3

너희들이 화려한 토요일 밤 텔레비 투나잇 쇼를 볼 때 매끈한 허벅지와 서구식 가랭이 벌리는 식민지 가여운 무희들의 광란하는 율동을 볼 때 너희들이 킬킬거리는 요정 기생의 허벅지를 베고 또다시 무료한 삶과 장미빛 인생에 대해 양줏잔을 들 때 우리들의 삶은 무엇이었던가 우리들의 허리 졸린 식구들은 무엇이었던가 우리들의 허벅지는 온통 고름투성의 쇠파리 끓고 너희들의 정액이 느믈덕지 묻은 쓰레기 배설물 처리장이 아니다 우리들의 넓적다리는 핵먼지 묻어 음흉한 버섯꽃 피는 제국주의 차마 눈 뜨고 못 볼 구석이 아니다 우리들의 왕 피부병은 아니다 너희들의 뇌리에 뇌리의 사지에 고문틀 압핀으로 꽂힐 치열한 사랑이다 싸움이다 너희들이 온갖 영화와 부귀와 고층 건물에 대해 꿈꾸고 있을 때 임대료를 계산하고 있을 때 우리들의 두 다리는 너희들의 죄값이다 돌아오지 못하는 다리 돌아오게 만드는 고통의 다리 남북 분단의 다리 너희들이 헐벗고 비천한 우리들을 경멸할 때 고름투성이 다리 우리들의 젖은 육신은 무서운 전염병이다 찬란한 그리움의 뼈대 헤어져 버팅기는 남북통일의 뼈대 식민지 거간이여 거간꾼들이여 그대 우리들 순결한 몸을 팔아 무엇을 얻었으며 무엇을 이루었는가 서럽고 휘황한 우리들의 도시? 화장품 내음 풍기는 우리들의 병든 고향? 그대 불쌍한 그대들이여 우리들의 대물린 땅과 인간된 권리를 짓밟고 그대들은 헛된 정신까지 팔아먹고

 

 

 

구두 한 짝

김정환

 

찬 새벽 역전 광장에 홀로 남으니

떠나온 것인지 도착한 것인지 분간이 없다.

그렇게 구두 한 짝이 있다.

 

구겨진 구두 한 짝이.

저토록 웅크린 사랑은 떠나고

그가 절름발이로

세월을 거슬러 오르지는 못, 하지,

벗겨진 구두는 홀로 걷지 못한다.

그렇게 구두 한 짝이 있다.

 

그렇게 찬 새벽 역전 광장에,

발자국 하나로 얼어붙은

눈물은 보이지 않고 검다.

그래. 어려운 문제가 아냐.

기구한 삶만 반짝인다.

 

 

 

국광(國光)과 정전(停電)

김정환

 

어릴 적 국광 껍질 정말 타개졌는데 '타개지다'라는 말

어디론가 사라지고 내 생애의 껍질로 들어섰다.

 

저물녘 아이 부르는 소리 들렸다, 아직 날이 어두워지지

않았는데 어두워지는, 한, 오십 년 전 골목, 어머니.

 

 

 

김정환

 

가는 비는 세상을

씻어내리지 않고 세상을

적시지 않고, 가는 비는 세상의

귀지,

제 몸에 귀를 기울이는

귀지,

가는실잠자리 가는

장구채 위에 내리는

가는 비는

귀지.

 

 

 

그리고, 그러므로, 그러나

김정환

 

생각해 보면

역사가 발전을 안 해왔던 것은 아니다

헐벗음은 바뀌었다 의상뿐 아니라

의미도

헛된 것은 없다 처절한 죽음도 죽음의 영역을 넓히지 않고

우리 가슴에 역사의 무지개로 스며들었다

그리고 약동한다 밤은 수십만 촛불 시위를 화려하게 장식한다

 

생각해 보면

울화가 우리를 크게 좀 먹어왔던 것은 아니다

슬픔도 억울할 것은 없다 슬픔 끝에 성취된

보람을 끝내 슬픔으로 아름답게 한다

 

따져보면

희망이 빛을 바랬던 적은 없다

희망은 역사 바로 그 만큼

고전적으로 젊어져 왔다

젊음의 고뇌와 역사의 고뇌가

중첩되는

시대를 우리는 지나왔다

그리고

시대는, 젊음은, 시대의 젊음은

그것으로 더욱 찬란하다.

 

그리고, 그러므로, 그러나,

 

정치가 우리들 봄날의 대지를 갈아엎는

아름다운 미래 전망이던 때가 있었다

 

인간이 발명한, 인간적인, 인간적이므로 가장 찬란한

삶의 질을 높이는 첩경이었던

정치가 있었다

 

만인이 모여 만인의 의사로 정신의 바벨탑을 짓는

그리고 마침내 하늘을 능가하는

인류문명의 자긍심이었던

 

정치가, 있었다

 

한 사람의 죽음이 우리 모두를 진지하게 말들던

때가 있었다.

 

 

 

그리고 색의 자화상

김정환

 

서툰 연주는 악보를 드러낸다. 늙은

귀다. 저자도 내용도 요구도 불분명한

인용문 몇 개 허공에서 맴돈다. 얼핏

나를 인용하는 인용문이다. 늙은

눈이다. 그러니 내가 제정신일까

이, 액체의 투명은?

의식의 크기가 한없이 작아져서

아주 예쁜 생명체가 되는

슬픈 사연이 가당찮은 이,

볼록렌즈 속은?

눈을 가까이 댈수록 죽음도 먼지도

실하다. 트래직을 버텨야

다이어트가 시작되고

공공의 비용에서 해방된

알통이 내팽개쳐지는 쪽으로

몰켜 뭉치는

늙은 시작이다.

 

 

 

금딱지 롤렉스

김정환

 

 200만 원이라던 빌린 돈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400만 원으로 늘어났다

 그건 소문과 현실의 차이를 죽음이 깎아지른 것이지만

 깎아지른 것이 또한 슬픔인지, 그게 다행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어쩌니. 유품인데…찾아와야지…

 어머니의 한숨은 철썩이지 않고 그냥 기나긴

 강물의 이름처럼 지상 밖으로 이어지다가

 부의금 남은 것을 뭉턱 짜르신다

 흡사 죽지 않고도 남은 생애를 반너머 잘라낼 수 있다는 듯이

 어머니 표정에 잠시 기쁨이 무표정으로 머물다 가기도 한다

 그래. 누구보다 정확한 사업가셨던 아버지는

 장난감 같은 디지털 알람보다 정확치도 않고

 벤처 상품보다 투자가치가 훨씬 떨어지는 롤렉스 금딱지 시계를 차셨다

 살아생전을 생각해 보니 이제사 모를 일이다

 죽음 이후를 생각해 보니 더 모를 일이다 다만

 가난한 시절 시간은 황금과 같다

 그 사실이 말없이 그냥 황금의 광경으로 반짝이다가

 죽음도 그렇게 반짝인다

 영원은 아름다움의, 주소가 아니라 무게다

 아버지가 아버지의 죽음으로 반짝인다

 시신을 가득 채웠던 물은 온데간데가 없다(이 문장은 좀 늘어지는군. 그래그래…)

 아버지, 죽은 아버지, 아니면 나?

 그건 아버지가 돌아가신 다음, 아니면?

 의문부호도 그렇게 반짝인다

 뭐가, 황금이, 아니면 시신의, 눈물이?

 그렇게 아버지는 내가 되셨다

 그렇게 오랜 세월이 지났다

 그 사실이 말없이 그냥 황금의 광경으로….

 

 

 

길을 돌아가다

김정환

 

88고속도로에 차가 밀리면서

내 뚱뚱한 뱃속에도 길이 난다 꾸륵꾸륵 소리를 내는 설삿길

그때쯤이면 잠도 확 달아나버리고 반포 지나 한남대교 가는 길가

소음벽은 세상의 절벽이다.

나를 완전히 설사의 공포 속으로 격리시킨다

택시기사는 손님보다 먼저 투덜대며 숨통을 터주는 게 직업이지만

직업병이기도 해서 그게 설사를 막지 못한다. 아니 악화시키지,

한번은 너무 급해서 저 소음벽 사이를 꿰뚫은 적이 있다. 아파트

뒷동산 야트막한 숲, 그 속에서 엉덩이를 허겁지겁 까내리고 똥을 누다가

산책로를 심심하게 달리는 웬 평화로운 주부와 빤히 눈을 마주쳤었다

더 평화로운 무념무상의 표정으로. 숲은 야트막해서 내 백주대낮의 배설을

발각시키지만 주부와 나 사이 수치심을 어느 정도 무마시켜준다.

자연은 향그러운 내음과 분뇨 냄새 사이에 존재한다는 듯이

하지만 한 번뿐이다 그땐 모르고 들어가서 별천지였잖은가

아파트 뒷산인 줄 알면서 또 그러는 것은, 더군다나 두 번째도 그러리라고

믿는 것은 너무 파렴치하지 않은가. `에이 씨팔, 드럽게 밀리네,' 기사가

맞장구를 친다. '강 건너갔다가 다시 건너오는 게 빠르겠다.' 기사는 그게

직업병을 넘어 삶의 보람인 듯하고 나는, '맞아, 돈이 좀 들더라도……,

그렇게 마음의 고개를 끄덕였지만 기사처럼 `씨팔 소리'를 덧붙이지 못했다

마음으로도. 물론 설사 때문에…… 아니, 그게 아니고, 뭐지? 그때

가벼운 현기증이 아주 예리하게 내 설삿줄을 끊는다. 그래. 언제더라……

시내로 들어가, 광화문쯤 들렀다가 한남대교로 건너오는 게

덜 들었던 것 같아. 시간뿐 아니라, 차비까지도…… 이게 어쩐 일이지? 88

고속도로는 끊기지 않고 길이 아무리 굽었단들 건너갔다가 다시 넘어오는

삼각(관계)의 거리보다 길지는 않을 텐데?

설사는 어느새 자취가 없고 나는 더 예리한 통증을 찾듯이

서울시 교통노선표를 들여다보고 싶어진다

 

 

 

길의 진리

김정환

 

길은 스스로 많은 길을 걷는다

역사와 더불어, 역사의 흐름으로 여기까지 왔지만

그렇다 우리는 역사를 너머 여기까지 오기도 했다

시간은 숱하게 흐른다. 그러나 길은

밑바닥으로 기다가 어느 날 솟구치는 그런 것이 아니다

길은 스스로 침묵의 시간을 갖는다

그러나 어느 날 폭발하는 그런 것이 아니다

길은 그렇게 길 너머 길의 희망에 이른다

희망은 그렇게 희망 너머 희망의 자유에 이른다

침묵이 그렇게 침묵을 너머 길의 진리에 이르고

진리가 진리의, 혁명에 이른다.

보이지 않는 차원에서 길은 완벽하다.

 

 

 

나무

김정환

 

나무는 숨결이 꺼칠하다

충혈된 심장이

내 고단한 고막 속에서 할딱거린다

다시 돌아와도 마찬가지다

나무의 깡마른 어깻죽지가

어느새 새파란 하늘로 출렁여대면서

홀로 있을 때

그러나 나무는 나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는 투다

나무는 그냥 숨결이 꺼칠하다

우리가 뜨겁게 볼을 부빌 때까지

우리가 나무의 출렁이는 어깨를 잡아채 부여잡고

우리의 눈물로 이렇게 서서

아름다움은 배반이었다, 말할 때까지

나무의 호흡을 거칠게 두드릴 때까지

나무는 그냥 숨결이 꺼칠하다

나무의 충혈된 생애여, 우리들의 미학이여

 

 

 

너에게 또 너에게

김정환

 

너에게 또 너에게 다가가는 것은

너를 지나 또 어디로 가란 말인가

그리고 이정표처럼 서 있으란 말인가

너에게 또 너에게 다가가는 것은

너에게 또 너에게 부딪치는 것은

너를 너머 또 얼마나 멸망하란 말인가

그리고 찬연한 뒷모습 남기란 말인가

너에게 또 너에게 부딪치는 것은

사랑은 얼마나 더 무너지란 말인가

사랑은 얼마나 더 무너지란 말인가

너에게 또 너에게

 

 

 

넋 걷는 노래

김정환

 

그대가 날 세웠던 것은

한낱 증오의 비수가 아닙니다

그대가 이를 악물며 가른 것은

한낱 육신의 배때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늘입니다 바다입니다

온 산, 온 언덕이 허물어지는

한갓 사랑의 어깨의 출렁임보다도 깊은

온 세상, 쓰러짐의 한 모퉁이에서

쓰러지기도 전에 나는 그대의 쓰러짐 위로

와아 와아 분연히 일어서는

번득여대는 사랑의 칼솜씨를 봅니다

찢어진 하늘에서 별이 무수히 쏟아져내립니다

그대의 숙연한 죽음 앞에서

나는 이제야 모든 것이 환히 보입니다

그대의 죽음은 모든 사람의 살아 있음을

더욱더 살아 있게 하였습니다.

그대의 찢어짐으로 함성들이 눈물을 흘리며 모입니다

그대의 죽음 위로

살아 있는 것들이 더욱 살아

용솟음치고 있습니다.

찢어진 하늘에서 바다에서

이제는 아주 잘 보이는

상처를 꿰맨 아픔들이

모여서 인산인해를 이룹니다

 

 

 

노동자의 벗

김정환

 

국민이 원한다면 물러나겠다던

독재자가 있었다 국민이 원한다면

물러나는 것은 독재자가 아니지만

애시당초 모순은 그에게 있지만

또한 우리의 정신에도 있었다

자본의 논리는 자본가의 논리보다

더 참혹하다 정치에서는 더욱

물러간 것은 박정희지 군사독재가 아니며

사망한 것은 이병철이지

삼성 재벌이 아니다

독재자에게는 물러날 자유가 없고

재벌에게는 사망할 권리가 없다

그들은 돌연 사망한 것이 아니다

세상은 하루아침에 생겨나지 않았다

노동자 계급 또한 돌연 생겨난 것이 아니다

발전은 독재자의 업적이 아니듯이

경제개발 5개년계획은 유물론에서 예외가 아니다

시골도 타락할 권리가 있다고

당당하게 주장했던 어느 작가의 말은 최소한

농촌공동체만큼 체념적이되, 현실적이다

그러나 노동자 계급을 보지 못했으므로

자유를 보지 못했고

자유가 없는 권리란 환상이므로

왈 타락한 자유는

별들의 고향에서 수음으로 끝났다

참상을 봤으되 자본주의를 놓쳤고

자본주의를 봤으되 참상을 놓쳤다

둘 다 보지 못한 것은 노동자 계급

둘 다 본 것은 안방을 석권하는

텔레비전 뉴스였고 드라마였다

이제 노동자 계급을 보자는 사람은 많다

그러나 우린 무엇보다

우리가 이룩한 세상 속에 있다

흑백이 칼라로 바뀌고 재벌이 동남아로 진출하고

디스코 리듬이 착취와 노동요를 대치했건만

지금 노동자 계급을 팔아 노동자 계급으로서

부르조아 민주주의 혁명을 이루자는 자는 노동자의 벗인가

자본의 죄악을 빙자 죄악으로써

기계문명의 사회구성체를 부인하는

그럼으로써 결국 우리를 부인하는

지금 청년학도가 노도처럼 일어서고

국민이 원한다면 물러나겠다는

독재자의 말을 기대하는 자는

노동자의 벗인가 아니다

우리는 봉건주의자가 아니다

우리의 민주주의는 완성된

부르조아지의 민주주의보다 높다

반공 드라마 전에 방송 기재가

방송 기재 전에 우리가, 있었다

돌연한 것은 주관적일 뿐이다

 

 

 

노부부

김정환

 

가령

이런 부부가 있다

 

발굴하지 않았다면

무덤은

스스로 망가지는 것이

편안해서 망가지는 그

기억의

형식이다.

허물도 더께도

먼지도 없이

서로를 향해

냄새를 지우며 망가진다

개성도, 낯섦도 없이

서로를 여보라 부르는

모든 것에 익숙해지는

70을 닮은 60

 

누가 발굴하지 않았다면

이런 부부가 있다

 

그 후만큼 서러운 것은 없다. 생각해 보면

그 후는 그 후의 그 후고 그 후의 그 후의

그 후다. 곰팡이도 기억의 흔적, 그 후만 남긴

세월도 흔적의 그 후만 남긴

시간의 고운

살 내음

 

누가 발굴하지 않더라도

 

그런 부부가 있다.

 

 

 

노을

김정환

 

보이지 않는, 거대한, 누가 돌아눕는

저, 붉은, 뒤집히는 전모(全貌)

하늘 낭자하고

어둔 산 아래 목숨의 집 한 채

젖무덤의 고운 실핏줄, 뒤집히고 싶다

 

 

 

눈, 나뭇가지, 너, 나, 그리고 고통

김정환

 

우울한 날이시면

나무들을 보셔요. 눈 내린 아침.

나무들은 잘 하고 있어요.

나뭇가지의 짐은 하얗고 푹신하고 축 늘어지고

저렇게 환하게 서 있을 수가 있어요 글쎄

멋져요. 나뭇가지가 있는 아침은 춥고

화사하셔요. 눈이 펑펑 쏟아지는 아침은

온 산, 온 경치가 새하얀 이 아침에 온통

 

피를 생각하는 사람은 우리들뿐이라는 듯이

고통이 아름답지 않은 사람은 우리들뿐이라는 듯이

 

 

 

눈물 노래

김정환

 

1

그대는 어느새

혹시 그대도 모르게 외딴 들에 서서

그대의 육체는 그대의 설움은

혹시 내가 눈치 못 챈 사이에

세상의 고통을

더 안쓰러워하고 있는 것입니까

내 텅 비인 분노로 활활 껴안으면

그대도 또한 활활 타올라 뼈도 못 추리게

사라질 것만 같아 망설입니다

그대는 한 줌의 재가 될 수 없어

내 한 줌의 손아귀 속에서

나는 나의 눈물로 그대를 자꾸자꾸 적십니다

불은 점차 점차 매운 연기가 됩니다

그대는 그 매운 연기의 신열 속에서

어느새 눈물이 되고 고통이 되고

고통은 그대의 몸을 적십니다

눈물은 그대의 몸을 넘칩니다

온몸에서 온 뺨에서

그대와 나는 걷잡을 수 없는 홍수로 만나

이렇게 견디고 있습니다

그리고 견뎌야 합니다

 

 

2

그대 슬픔의 아랫도리를 적시는 물기.

아랫도리에 고인

그대 슬픔의 물방울.

아랫도리를 넘치는

그대

슬픔의

홍수

속에서

하늘은 마냥 맑습니다

푸르릅니다

변치 않고 언제쯤

사랑의 결실도 이렇게

푸르겠지요

저렇게 저렇게

마냥 하늘은 벌써부터

푸르기야 푸르지마는

 

 

 

늦가을 노래

김정환

 

저문 날, 저문 언덕에 서면

그래도 못다 한 것이 남아 있다

헐벗은 숲속 나무 밑, 둥치 밑에

스산한 바람결 속 한치의 눈물 반짝임으로

마지막인 것처럼, 가랑가랑 비는 내리고

그래도 손에 잡힐듯

그리운 것이 있다

살아남은 것들이여 부디

절규하라 계절이 다하는 어느 한숨의 끝까지

우리들 사랑노래는 속삭여지지 않는다

기억해다오 어느 외침의 미세한 부활과

절망과 거대와

그리고

어떤 질긴 사랑의 비린 내음새를. 안녕. 

 

 

 

닭집에서

김정환

 

닭 한 마리 발을 벌린 채 기름 속에 펄펄 끓는 동안

이상히도 고요한 밤하늘 바라보며

아내와 나는 우리네 살림살이에 대한 걱정을 한다

닭은 한 마리에 2천5백 원

하늘로 삐죽삐죽 솟아오른 노점상 천막들 사이로

바람이 불고 흔들리는 하늘에 별이 몇 개 간신히 반짝인다

아내와 나는 잠시 그것이 안타깝다

그러나 닭집 여편네는 임신 중

백열등 빛이 질펀하게 흐르는 시장바닥

그녀는 칼솜씨 하나로 닭 모가지를 싹둑싹둑 자르며

피에 범벅진 손으로 자신의 아이를 키우고 있다

우리는 또 잠시 소스라쳤지만

뱃속의 피에 또 엉겨 있을 그녀의 아이가

태어나서 자기를 낳아준 백정 어미를 탓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나는 그녀의 당당한 표정에서 읽을 수 있다

아니 그 표정에 섞인 어떤 안간힘 속에서 읽을 수 있다

바닥에 흩뿌려진 닭 내장 비린내

닭이 죽어 그녀의 아이를 살리지 않는다면

그 칼은 언제라도 우리를 찌를 수 있다

우리가 별을 보고 있는 순간에도

칼은 무참하게 닭 배때기를 찌르고

아내와 나는 살림살이에 대한 걱정을 상관없이 한다

질펀한 시장바닥을 흘러가는 백열등 빛

머리에 두른 수건에 묻은 비린내가 코를 찌르고

별은 이제 하나도 안 보였지만

나는 그 여편네와 우리네 사이에

어떤 인연처럼 끈끈한(혹시 핏덩이 같은) 그 무엇이 치밀어

우리들을 맺고 있음을

백열등 불빛밖에 남은 것 없어도 알아차릴 수 있다

증오이거나 사랑이거나

소매 스치는 인연이거나 닭 배때기를 함께 찌르는 목숨의 뜻이거나

 

 

 

대열

김정환

 

벌물 켜듯 기다리던 때가 좋았다

지상의

전철역 지붕은 반나마 열려 있다

이제 반쯤은 비를 피해야 한다

내가 남길 것은 생애이다

돌이켜보고 싶을 때 후회가 극성이다

이제 어깨를 적시리라 전철을

기다리는 사람들 속에서

행렬이 긴 것은

떠나간 것은 다시 오지 않는다는 뜻이다

 

 

 

도둑고양이의 죽음

김정환

 

대열의 뒷무리를 이룬 자는 또 이렇게 말할 것이다

우리들이 그 모든 제국의 군대를 타파해야 함은

그 모든 우리들의 노예근성을

우리들이 스스로 뿌리째 뽑아내기 위함이며

우리들이 그 모든 반동정치가들을 쓸어내야 하는 것은

그 모든 우리들의 봉건 잔재를

우리들이 스스로 뿌리째 말살하기 위함이며

우리들이 그 모든 자본가를 타파해야 하는 것은

그 모든 우리들의 불평등을

우리들이 스스로 제거하기 위함이다

동참하라, 이 해방의 대열에!

우리들의 노래는 비록 친근하지 않지만

결코 증오의 노래가 아니다

우리들의 노래는 비록 화려하지 않지만

결코 가난의 노래가 아니다

우리들의 노래는 비록 슬프지 않지만

결코 파괴의 노래가 아니다

동참하라 이 해방의 대열에!

동참하라 이 투쟁과 건설의 대열에!

갈쿠리 손 농민도 낫을 들고 대열에 동참하라

각목 정강이 철거민도 부삽을 들고 대열에 동참하라

울혈 가슴 학생도 짱돌을 들고 대열에 동참하라

백지장 얼굴 지식인도 펜대를 들고 대열에 동참하라

보다 진보한 경제와

보다 진보한 정치와

보다 진보한 도덕을 염원하는 자는 모두

보다 진보한 미래세상을 염원하는 자는 모두

아아 영원하고 아름다운 평화를 염원하는 자는 모두

동참하라 동참하라

우리 가진 것을 모두 모아

이 어둠을 쓸어내고 스스로

찬란한 우리들의 세상으로 우뚝 서자

우리 가진 것을 모두 모아

새 나라의 빛을 빚어내자

 

 

 

도미 대가리 매운탕

김정환

 

아내가 출근 전에 팔팔 끓여놓고 간

도미 대가리 매운탕 다시 끓여

나 홀로 점심 먹는다. 땀 뻘뻘 흘려도 도미 대가리 매운탕

새빨갛게 맵고 새까맣게 짜도

소용이 없다.

어두봉미* 눈알을 파먹는 거

별거 아니고 잠깐이고

동굴이다.

춥고 끔찍하여 최소한

아내와 내가 있었지.

얼굴 살 뜯어 먹으면 서서히

드러나는 생선

두개골, 광년 너머

지질의 연대의.

특히 백악기의.

인간이 먹은 죄가

진화를 능가하고 그것이 참으로

빠른 시간의 먼

거리(距離)였구나. 아내와 나

순식간 멀리 떨어져

아내도 없고 나도 없다.

소름 끼치는데 소름이라는 낱말이 없는 그

백악기에 내가 있다. 아내는 어느 연대에?

그리운, 그리운

구석기여, 음식의

죽음이 보였던, 인간종(種)의

희망이여, 살갗이였던.

아내여, 이 모든 것이었던.

 

* 어두봉미(魚頭鳳尾).: 물고기는 머리 쪽, 새 고기는 꼬리 쪽이 맛있다

 

 

 

독수리

김정환

 

잘난 사람들은 모른다.

내 날개가 바로 어깻죽지의

운명이라는 것을.

날아오르는 날개는 없다.

내 무게보다 더 무거운 어떤

떠받침이 있을 뿐.

숭배보다 더한

그 무엇이 있을 뿐.

지상의

짐승의 시체를 파먹으며

내 날개가 느끼는 것은

유가족 집단의, 집단적인

위의(威儀).

산 귀 속 슬픈 노래

죽은 귀 속으로

살아남는 선율의.

그 사이 벽의.

그 벽인 나의.

꿈 언저리 머나먼

가족의 악몽의,

내가 산 개구리를 한입에 잡아먹지 않는 것은

털도 없이 뙤약볕을 받는

그의 점액질

면적이 죄다 생명이기 때문이다.

그의 면적은 그의 세계다.

아무리 생각해도 공간이

순서를 닮지 않는다. 오히려 내력의

그림이 공간을 닮는다.

현재는 시간의 질서지만

내 공포에 비린내가 없다.

날개로 하여

내 몸은 부사다.

삶이 삶이기 위하여 때로는

죽음의 껍질이 되고

죽음이 죽음이기 위하여 때로는

가장 떨리는 그

X-레이를

나는 안다. 비로소 퉁퉁 부은

발이 보일 때

때로는 비로소

발이 퉁퉁 부어 보일 때

나는 가위눌리는 식사

준비를 한다.

잘난 사람들은 원두커피나 끓일 때

내 식사에는 아무리 모여도 범죄의

구성이 없다.

잘난 사람들은 그것을 악기라 부른다.

 

 

 

독재, 생애, 눈물, 광경, 음악

김정환

   

어느 독재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눈물의 생애다

스스로를 키우며 원인(原因)보다 촉촉한 미래를 향해

몸을 뻗는 누구나 세례 요한 다음에 오고 눈물의

생애를 육화한다. 썩지 않고 온습(溫濕)한 생애, 전망은

눈물이 눈물을 씻어내는, 생애 이상의 어떤 것.

독재여 그것을 어찌 형용(形容)하겠는가.

  

생애를 위해 죽다…… 이 동어반복은 영원의

가상현실보다 위대하다. 광경은 언제나 지금의

광경으로 겹쳐진다. 음악이 흐르면 생애는 또한

영원에 겹쳐진다. 육체가 흐르고 육체의

다중성(多重性)이 흐르고 이상하지 음악은 제 혼자 흐르고

그 안에 나의, 역사의 모든 광경이 묻어난다.

모종(某種)의 생애가 흐른다. 그것은 죽음의 생애이다.

 

 

 

두 기자

김정환

 

그들은 닉슨을 탄핵했다.

사람들은 그들을 정의의 사도라고 불렀다.

언론의 권력은 언론을 자신의 입이라고 믿는 사람들의

권력이었으므로 두 기자는 영웅 대접을 받고

닉슨 일가와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스스로가 민주주의의

투사가 된 감격을 누렸다.

그것은 당연하고 또 자랑스런 일이다. 미국은 전세계

언론의 민주주의의 메카였다.

하지만 그렇다. 폭로는 배설의 허기진 아구에

그리고 일관성은 목표에 가깝다.

대통령을 쫓아내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흥분의 도가니는 식고 그 폭로 정신은

육체를 쾌락으로 강간하고 고문하고 신격화하는

헐리우드 연예정보지 기자와 점심을 같이 한다.

당연하게 시시덕거리며

킬킬대며 아주 기분좋게 미쳐가면서.

요는, 끊임없이 실패하는 사랑만이 볼세비키적이다.

실패가 운명적인, 그러므로 더 나은

운명의 완성을 위한 권력 지향을 포기하지 않는.

영웅적인 두 기자는 거대한 허기 속에 뿌리를 내리고

그 뿌리가 화려하게 산발한 비명소리로 남는다.

 

 

 

레닌의 노래

김정환

 

지워지는 것은 짓밟히는 것

지금도 거꾸로가 아니다

자동차 물결에, 헤드라이트 불빛에

2001년 4월 어느 날 봉천동 밤거리

인파가 자동차에 지워진다

사람이 사는 집도, 건물뿐이다

현실사회주의의 영광과 좌절, 그리고

멸망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노래는 그렇게 한국형 천민자본주의의

변두리 밤풍경 위로 부유하다가

조금씩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해 풍경 속으로 내려앉으며

겹치고, 덜컹댔다, 자동차 앞좌석이 겹침이

계단이. 그리고

광경과 음악의, 덜컹대는 겹침 속에,

드러났다, 모종의 사라짐이.

오 그렇다, 자본주의는 불야성

IMF 외환위기는 연필보다

일상적이고 전쟁보다 더 메마른 단어다

출근은 진한 화장뿐

퇴근하는 뒷모습의

어깨의 표정이 가장 솔직하다. 생계와 화해한

만큼만 그것은 가난하고 안온하다

레닌은 어디에

그의 노래가 그 위로 겹쳐진다

지워지는, 짓밟히는, 메마른

풍경과 질문 위로

레닌은 어디에 레닌은 어디에

그의 노래가 액화,

인간의 조직이 일순 너무나 아름다웠던

시절은 화음의 광채로만 남아

생애가 차라리 슬프다는 풍문에 달한다

레닌은 어디에

레닌은 어디에

그의 노래가 거리 풍경과 살을 섞으며

합쳐진다, 그것만이 위로가 된다는 듯이

그때 우리는 모두 레닌이다

지워진 것들의

윤곽이 슬픔으로 명징해질 때

그때 우리는 모두 노래다

그리고 레닌이 된 우리 모두가 묻는다

레닌은 어디에, 레닌은 어디에?

그 질문은 결코 메마르지 않는다

마치 그가 울음의, 실종의, 그리고 질문의

보편이라는 듯이

그것만이 법칙이라는 듯이

아직도 표정은 지워진다

물결도 지워진다

아직도 풍경은 지워진다

거리도 건물도 지워진다

눈물 한 방울.

밤도 낮도 지워진다

마치 이미 모든 것을 예감하고 있었다는 듯이

그리고 마침내 예감이 지워진다

남은 것은 슬픔이 촉촉한 질문뿐이다

 

 

 

마포, 강변 동네에서

김정환

 

해마다 장마때면 이곳은 홍수에 잠기고

지나간 물살에 깎인 산허리 드러낸 몸을 보면서

억새는 자란다 그 홍수 치른 여름 강가 태우는 땡볕

억새는 자란다 떠내려가는 흙탕물은 한없이

영영 성난 바다만 같아 보이고

움켜도 움켜도 움켜잡히지 않는 발 아래 한줌의 흙

뿌리는 이대로 영영 이별만 같아 보이고

죽음같이 빨려들어가고만 싶은 진흙탕 속으로

그러나 억새는 자란다 기어들 듯 말 듯

모기 같은 속삭임으로 땅에게 마지막 이별에게

가지 마셔요 저는 당신의 애시를 가졌어요 당신처럼 설움뿐이지만

당신처럼 활활 타오르는, 당신처럼 언제나 따나가고 싶어 하지만

단신처럼 제 뇌리에서 지워드릴 수 없는

질긴 생명의 씨앗이 제 안에서 꿈틀대고 있어요

모두 당신 거예요 이 흠뻑 젖은 제 뉵체의 꿈과 숙명

그리고 당신의 모질지 못해던 과거 이제 돌이킬 수는 없어요

 

억새는 자란다 그 여름 홍수 지난 온 몸이 뜨거운 검은 땡볕 의연히

알고 있는 걸까 억새는 물과 불이 만나서 생긴 제 육신의 상처를

알고 있는 걸까 억새는 알지 못할 고통이 주는 삶의 참뜻을

알고 있는 걸까 억새는 이젠 헤어져 있는 모즌 사람들의

다시는 헤어질 수 없음이

그녀의 가슴 속에서 만나서

다시 한번 그녀의 가슴을 도려내고

다시는 떠나갈 수 없음이

다시 한번 떠나가고 있는 줄……?

 

 

 

맑은 집

김정환

 

맑은 집은 없다 시냇물도 산새도 우짖지 않는다

헤매는 것은 너의 마음 속이다

맑은 집 뭔가를 뒤집어야 하다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니다

앞을 보라 세월 앞에 눈이 펄펄 내린다

뒤를 볼 때만 갈라지는 것이 정말로 갈라진다

눈이 펄펄 내린다

겉보기에, 어릴 때와 다름없이

깊은 것과, 만나는 것과 뒤집는 것이 더 밀집하다

그 속에 내 아이들이 있다 맑은 것은 역사다

 

 

 

맞아 죽을 노래

김정환

 

그래 아프다

네가 아프다 발길질하는 내 허리 내 갈비

내 척추뼈 마디마다

혁명의 골수까지 사무치고 쑤시고

다시 아프다

 

전신이 관절염으로 울어도

그러나 문제는 역시 사랑

미워하면 만나도 아프지 않고

미움은 아무것도 비롯하게 하지 못한다

맞아도 맞아도 내 아픔은 미워할 줄 모르고

뭇 세상 아픔의 배만 만삭이 된다

짓이겨 터질

탄생의 그날까지

그래 아프다

 

미움으로 아프지 않고

사랑으로 아프다

 

 

 

모가지의 노래

김정환

 

통과했을까 나는 다시 들었다 봄날에

두려움을 찢고 아름다움을 찢는

꽹과리 소리 깽맥깽맥깽맥깽맥 캥캐캐캥캥캐캐캥!

봄날 봄언덕 풀밭에서 보았다 교정을

꽹과리 캥맥캥 소리에 너희들이 가슴 설레며 모이고

모여서 마침내 시대의 장관을 이루는 것을

아지랑이 언덕 소나무 가지 위에 목을 매단 채

머리 풀고 맨문에 땡볕 받으며 바라보았다

눈부셔 신비한 꽹과리 소리는 하늘을 찢으며

저도 찢어져내릴 듯

그러나 너희들은 모였다 깽맥캥 깽맥캥

잔치굿판도 깽맥캥 망나니춤도 깽맥캥

그 소리는 오늘도 불현듯 두근거리며

아지못할 두려움의 정체도 두근거리고

백일하에 흩뿌린 속창자, 내팽개친 죽음의 깃폭

두려움에 사로잡혔던 사람 한둘이 아니라

아아 우리 전부가 이렇게 인산인해를 이루고 모이고 함께 흘러서

깽맥캥 깽맥캥 깽맥캥 깽맥캥

이 찬란한 대낮 같은 자유를 외친다

다시 살아 바윗덩어리에 엉덩이를 기댄 착각

그러나 죽어서 이미 너희들의 피묻은 미래

이제 군화발에 짓밟혀 너희들은 다시 흩어지리라

끌려 가리라 괜찮다 통곡하지 마라 너희들의 죄가 아니다

간직해다오 그 사소한 살아 있음의

두려움 속에

맨주먹 외치는 목젖 터지는 가슴 깊숙히 산맥과 마을

어깨동무 출렁임 그 드높이 하늘과 바다

깽맥캥 깽맥캥 깽깽맥캥 캥캥 깽맥깽맥캥캥

오늘의 이 피가 피를 부르는

두려운 두려운 삶의 떨림

그 소리의 분노와 환희와 설움과 해방을

헤어져 있어도 항상 같이 있을 수 있도록

갇혀서도 항상 자유로울 수 있도록

우리 언제나 함께 나아갈 수 있도록

 

 

 

모내기

김정환

 

이 세상 모든 것이 제 힘으로 사는 게 아니다.

 

흙 파먹고 농사나 지으리라

모를 심는다

살기 위해서 모는 벌써 심기 시작한 내 손아귀를 벗어나

논바닥에 물을 댄 진흙창 속에서

그 질펀질펀한 땅속으로 뿌리 내리기 위해서

한줌에 다섯 개, 여섯 개씩 뭉쳐서 떨어지지 않는다

그 뿌리의 안스런 엉켜 있음.

그래도 모는 그 허공같이 공허한 진흙창 속에서

공중곡예를 하면서 뿌리내린다

바람이 불수록 세상이 어수선할수록

모는 진흙창 속에서 살기 위해서

다섯씩 여섯씩 뿌리 내린다

 

연약한 뿌리가 꺾이지 않게

세 손가락에 빗대어 직각으로

사정없이 푹 꼽아줘야

사정없이 사랑해줘야 산다는

모.

그러나 논물 밑에 젖은 땅, 젖은 가슴이 푹신푹신 숨쉬며

흙 묻은 손으로 나를 사랑해 주소,

사랑해주소, 나를, 그대의 땀방울 맺힌 근육으로 하는

논바닥, 논바닥 아아 땡볕에 드러나

타는 갈증 갈라질 논바닥.

 

엄지와 검지 손가락 사이에 모의 털난 뿌리를 쥐어 잡고

진흙의 몸끝에 대기만 하면서

부끄럽게 살짝 대기만 하면서

나는 이제야 알겠다 모가 아슬아슬하게 공중곡예를 하면서

이쪽 바람에도 쏠리고 저쪽 소문에도 넘어지고

그래도 그래도 살아남는 것은 모의 재주가 아니라

내가 이렇게 살아 있는 것이 나의  잔꾀가 아니라

오히려 거대한 거대한 땅의 우매한 갈증,

우매한 사랑 때문이라는 것을

 

모는 단숨에 두세 줄쯤 건너

허공 같은 바탕 위에

벌써 굳건히 서 있다

뜨지 않고 눕지 않고 똑바로 서 있다

등이 타는 뙤약볕 밑에서

 

올해도 농사는 땅의 억센, 포옹의 힘에 달려 있다.

 

 

 

묘비명(墓碑銘)

김정환

 

1

그는 이 세상에서 열일곱 살 어린 나이에

독가스의 화공약품 냄새 허파를 가득 메우는

작업현장에서 2개월을 일하다 쓰러졌다 그가 만든 도자기는

단란한 살림그릇으로 쓰이고 행복한 커피잔으로 쓰였다

그는 쓰러졌고, 의식을 되찾는 데는 또 2개월이 걸렸고

우리들은 그가 만든 그릇으로 사랑했고 의논했고 어깨 겯었다

 

그는 치료불능 반신불수가 됐고 우리들은 서울에서 부산에서

광주에서 민주화를 외치다 몇몇 동지를 잃었다 의사는 빈혈이라 했고

회사는 산업재해가 아니라 했다 그는 7층 옥상에서 투신

꽃다운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그가 일어나지 않으면 사랑엔

현기증이 묻어 있고 비명소리가 묻어 있고 일어나지 않으면 우리들 행복에

화공약품 독가스가 묻어 있다 그는 노동자가 주인 되는 세상으로 일어날 것

가난한 때문 아니라 슬프기 때문 아니라 억울한 때문 아니라

우리를 위해, 만인을 위해 그는 살아나야 할 것이다 이 세상의 주인으로

권력은 이미 고난과 투쟁과 죽음을 통해 해방에 이르는

상부도 아니고 하부도 아니고 중심도 아니고 주변도 아닌

바탕과 본질에서 스스로 이루는

민중의 권력

그 권력은 민중해방―민족통일 이루기 위하여

피 흘려 죽어간 모든 전사들에 대한 기억과 생산―투쟁의 우리들이

우리들 노동자가 밥과 희망과 안방과 달력과 미래를 관장하는

숭고한 일상이 이루는 죽음의 권력

 

그는 투신자살했다 전태일 김경숙 김종태 박종만

홍기일 박영진 그 숱한 노동운동 전사자들 속으로

그는 투신자살했다 김상진 김의기 김태훈 이동수

김세진 이한열 그 숱한 학생운동 전사자들 속으로

운동의 운자도 모르는 그가 투쟁이란 말은 너무 살벌하다던 그

이름없는 그가, 그리고 이제 우리들이 갈 것이다

고난을 통해 투쟁을 통해, 흘리는 피땀과 눈물을 통해

이제 그가 일어설 것이다 이제는 이름없는 네가

그들을 천진난만하게 일으켜 세워라. 1987. 10. 12. 조성애.

 

 

2

잠이 안 와요, 머리가 아파요, 밥을 먹기 싫어요, 온몸이 아파요, 몸이 말을 듣지 않아요 불면­두통­식욕감퇴­전신통증­전신장애­고혈압­가려움증­헛소리, 아아 병으로만 어른의 삶을 살다가 그는 갔다, 문송면. 만 15세. 발바닥이 가려워 마구 긁어댄 손톱독 피멍이 발등을 전기고문처럼 새까맣게 태웠건만 끝내 돈, 돈! 외치며 그는 죽었다. 수은중독, 그가 만든 온도계는 여느 신혼 가정의 갓난애 겨드랑 속에서 분내랑 향수내랑 맡고 있겠건만 이 세상의 건강과 행복을 지키려고 그가, 당당한 노동자가 온도계를 만들던 공장은 수은이 밑바닥에 질척한 증기로 깔린 채 환풍시설조차 없는 인간 도살장이었고, 노동은 하루 열여섯 시간의 생지옥이었고, 삶은 짜고 쓴, 썩은 무말랭이 보리밥 한 끼의 아비규환이었다. 만 15세. 그 수은증기가 올림픽 쇼무대를 장식하는 신기한 구름파도였다고 해도, 그 공장이 용감무쌍한 람보의 베트남 정글지대였다고 해도, 그 삶이 무인도 톰소여의 모험이었다고 해도 곧이들었을 천진난만한 나이에 그는 수박을 같이 먹다가 간혹 천진난만하게 웃다가 마지막으로 숨을 헉헉거리다가 죽었다. 만 15세, 1973년 충남 서산군 양산리에서 가난한 농가의 6남매 중 넷째로 출생하여 중학교를 마치고 자력으로 고등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상경, 서울의 온도계공장 협성계기에 취직하고 2달 만인 1988년 7월 2일, 수은과 유기용제 중독으로 사망했다. 회사는 몸이 안 좋던 석 달 동안 산재처리를 하지 않았고, 노동부는 산재처리 신청을 기각했다. 회사와 노동부가 그를 죽이고, 가난한 조국이 그를 죽이고, 부르조아 매판정권의 악덕자본가가 그를 죽이고, 신식민지 교육제도가 그를 죽이고, 얄팍한 중산층 가정 행복이 그를 죽이고, 미제 침략의 음란광포한 대중문화가 그를 죽이고, 도시와 농촌의 불평등이 그를 죽이고, 우리의 무관심이 그를 죽였다. 이 썩은 세상 어른들의 모든 죄악이 그를 죽였건만, 그는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한 어린 나이에, 어른들을 탓하지 않고, 슬픔도 죽음도 모르는 채, 다만 한 장의 순결한 육체가 스스로 더럽혀져 자신을 더럽힌 이 세상의 모든 추악함을 증거하고, 끝내 천진난만한 채 갔다. 슬퍼 말라, 그는 죽음을 모르나니, 산 자의 온갖 슬픔의 무게도 그의 어깨를 억누르지 못하나니, 죽음의 자본가 예속세상이 삶의 노동자 해방세상으로, 슬픔의 미제(美帝) 식민지가 기쁨의 자주 통일 조국으로, 참혹한 노예의 전쟁이 환희로운 생산주체의 평화로 변혁되는 날 그는 우리 곁에 있을 것이다. 당당한 노동자로. 힘차고 아름다운 노동자로. 1988년 7월 2일 만 15세, 문송면.

 

 

 

무덤

김정환

 

음악이 끝나고 내 귀가 시간에 젖는다

흘러가되 무너지지 않는 형상이 언뜻

보이며 흘러간다, 고요. 흐름의 본질인

고요. 가슴에 무덤 하나 늘고, 소란스레

보이지 않던 것이 더 보이지 않는다.

 

 

 

밀물

김정환

 

밀려도 밀려 들어와도

종일, 내 키를 넘지 못하는 파도

가슴에도 못 차고

그러나 가슴은 벅차고

바다여 너도 종일을 이렇게 내 하찮은 사랑 뇌쇄시키는

폭력으로 물밀듯 쳐들어와도

왜 우리들 철썩거림의 경계는 이리도 확연

하냐. 까무라치지 못하냐.

너는 거대한 바다인 채로, 나는 한 마리 가여운 짐승인 채로

우리의 사랑도

출렁거리냐. 아아 투신도 못하게

넘실거려, 가까이 왔으면

우리의 만남도 손끝이 발끝이 닿을 수 있도록

마찰할 수 있도록

조금만 더

밀려왔으면

 

 

 

바퀴벌레

김정환

 

바퀴벌레 한 마리가 천정에서 떨어져

무참히 잠든 내 영혼의 이마를 때린다

달아난다, 잡히지 않으려고

바퀴벌레도 아닌 밤중, 바퀴벌레는 그도 홀로 깜깜해

저는 반짝이는

슬픔이라는 듯이

고요하고 그러나 억센

털난 다리로 씩씩거리며

달아난다

소스라쳐 내가 놀라는 것은

아직도 내게 돌려줄 것이 많기 때문이다 소름끼치는

동산 부동산.

바퀴벌레는 내 이마에서 떨어져

털난 다리는 갑자기 커 보이고

내 몸통보다도 커진 다리의 근육이

무식하게 일자무식하게

내 신혼의 벽지 위를 짓누르고 다닌다

어떤 소중한 두려움 같은

그러나 그 자체로는 슬픈

흉악한 사랑의 깜깜 절벽

소름끼칠 여유도 주지 않는

그러나 바퀴벌레는 숨가쁜 진실이다

 

 

 

반성

김정환

 

꽃이 지고 내가 반성한다

몇번째인가 내가 슬퍼하는 것

몇번째인가 내가 경악하는 것

몇번째인가 내가 상실하는 것

오늘 꽃은 몇번째인가 꽃은 벌써

어제의 꽃이 아닌데 몇번째인가

내가 반성하는 것 내가 세수하는 것

내가 기다리는 것 내가 물러서는 것

꽃이 지고 반성의 꽃이 피고

또다시 꽃이 지는 것이 몇번째인가

꽃은 피고 지고 삶은 자꾸만

죽음을 향해 피어오르는데

 

 

 

백년 동안 새로운 노년

김정환

 

간밤에 비가 많이 왔네 아내는 그리고,

별로 오지 않았는데, 나는 그런다.

아내는 잠을 잤고 나는 밤을 새웠다. 이제 내가 잘

차례지만 한 몸인 우리는 그리 아득할 수가 없다.

간밤에 비가 많이 왔네, 별로 오지 않았는데.

자다가 자기 전 위치로 깨어났다는 게 어떻게 가능할까?

내 앞에 마구 펼쳐진, 나라는 어설픈 물건,

느낌 없이 주먹과 눈물의

의미가 분명하고

의미는 죽음의 영롱이다.

폭염은 밀가루 반죽 냄새였다.

물 뿌린 신문지로 통유리 덕지덕지 덮으며

아내는 태풍 너머 보금자리에 있다.

이단의 거룩은 음악으로만 신비로울 수 있고

그밖은 참지 못하는

짐승이라는 생각. 사브레, 사브레. 네 몸의

냄새의 이름 생각나지 않는다.

정말이라는 말 말고는 생각나지 않는다. 도기 찻잔

두개가 있다. 잠복인 현대가 있다. 미래의 문법이 아닌,

새로운 놀이가 있다. 수명의 반전 혹은 끌림이 있다.

제의 병풍이 있다. 고전적인 여관 주인이 있다.

악마는 망령도 명징하다. 세련이지. 악에는

우여곡절이 없고 모양으로는 선이 막장 드라마다.

나른한 나이의 계절에 오래된 것은

오래 견딘 것이라는 뜻의

예리한 비상(非常). 죽음은 미래의

관류(貫流), 그것 없이 정말로 뜯어보면

얼굴이 수습되지 않는다. 눈, 코, 귀, 입의

제자리가 없다. 죄를 짓다니, 죄씩이나․․․․․․ 그렇게

웃기는 일도 없지, 정말. 육체의 맑음과 흐림, 근육은

해체 너머로 흔들리고 그것을 우리가

성(聖)이라 불렀었다. 침묵보다 더 낮게 가라앉는 소란의

상자다. 고층 아파트에서 가까운 하늘에 잠자리

비행기의

위험한 다정, 여러가지 새들의 여러가지

설거지, 소아성애보다 더 어린 소아가 내는

수수께끼, 가랑이 삼위(三位). 포식자와 사냥감 사이

흔들리는 연민의 흔들리는 방향이 아니더라도

운명은 분명 늘 생명의 운명이었을 것.

누구나 요상한 소리를 내지. 이름에

묻어 있고 드물게 이름인 소리다.

뜻과 형식과 내용이 사이좋게 흐물흐물해지는

고무가 있다. 더 심한 숭늉이 있다.

의외로 앞선 것이 있다.

실처럼 가늘고 길어지는 몸과 생애

사이가 있다.

최대 혹은 미비가 있다. 유년과 동성의

창세기가 있다. 돌이켜보니

불안했었다는 창세기다.

저런, 쯪쯪, 이크․․․․․․예의가 괄호를

사슴처럼 껑충 뛰어넘는

마구 생몰년이 있다.

혁명만 우울증이다.

다음 세대인 아테나한테 뒤통수를 호되게

얻어맞았기에 제우스가 아직도

꼰대 아니 거, 아냐?

 

 

 

별을 헤는 시인에게

김정환

 

겨울이다 치마폭처럼 찬바람 받는

창문을 닫자

창문을 닫자, 이렇게 많구나 싶던 푸른 하늘이 퇴색하여

닫힌 창문 철창 저편으로 오그라들지도 모르다는 걱정을 하며

창문을 닫자

그리고 오늘 모두 그렇게 떠돌다 아주 작아져서

가야 할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창문을 닫자

창문을 닫자

그러나 별을 헤는 시인이여

하늘은 항상 벌어논 만큼 있다

소름이 돋는 삭발로 망설이며 기웃거려 보는

철창 저편에

우리가 벌어논 하늘이 있다

그리고 별을 헤어보지 않아도

그 하늘은 벅차디벅차다

갇힌 것은 땅에 발을 딛은

그대 몸

조금씩 사소한 것부터 이기고 싶은 마음으로

창문을 닫자, 고질적인 건성피부 살비듬을 긁으며

변변한 별똥조각이라도 줍고 싶은 마음으로

창문을 닫자

올 겨울은 좀더 억세게 춥기를 바라며

창문을 닫자

이 비닐 창문을 닫자

 

 

 

봄밤

김정환

 

봄밤은 아직 뒤채이지 않는다

바람이 불고 봄향기와 식초 내음이

아직 어울리지 않는다 좋은 일이야

봄에게도 밤에게도 뒤채임에게도

아직은 구별될 것이 더 많다 봄밤

너의 봄밤이 나에게 나의 봄밤이 너에게

아직은 더 아름답다 좋은 일이야 그 사이

세상이 쌓여가고 그 세상은 현실보다

초라하지 않다 좋은 일이야 너와 나 사이

몸과 몸이 아직 뒤섞이지 않는다

봄과 봄이 아직 뒤섞이지 않는다

봄밤과 봄밤이 아직 뒤섞이지 않는다

그러나 삶은 바람부는 봄이고

내가 뒤채는 밤이다 봄밤

 

 

 

봄비, 밤에

김정환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하고 예수께서 다시 물으시자 베드로가 나서서 '선생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 마 8장 29절

 

나는 몸이 떨려

어릴 적, 내 여린 핏줄의 엉덩이를 담아주시던

어머님 곱게 늙으신 손바닥처럼 포근한 이 비는

이젠 내 마음 정한 뜻대로

떠나도 좋다는 의미일까.

 

산은 거대한 짐승을 가린 채 누워 있고

봄비에 젖고 있어. 나는 몸이 떨려.

 

그러나 새벽이면 살레살레 앙칼진 개나리 피워낼

이 밤, 이 비의 소곤거림은

혹시

이젠 외쳐야 된다는 말일까.

이젠 외쳐야 된다는 말일까.

 

 

 

별, 기타                                         

김정환

 

네 가슴에 기대어 기타를 치면

별이 튀어나와

두 손은 그것을 붙잡을 수 없지마는

객석은 벌써 은하수 깔리는

은하수 너머 우리가 가 닿을 세상

네 가슴에 기대어 기타를 치면

손가락 사라져

노래는 그것을 붙잡을 수 없지마는

객석은 벌써 장대비 내리는

장대비 너머 우리가 가 닿을 세상

네 가슴에 기대어 기타를 치면

너는 사라지고

두 팔은 그것을 껴안을 수 없지마는

객석은 벌써 어깨는 겯는

어깨를 너머 우리가 가 닿을 세상

 

 

 

비                                                       

김정환

 

따스하게 마주 닿던 이마와 이마 그 사이

쏟아졌던 기쁨이 오늘 빗금 장대비 내리는

이별은 그런 것이어서 좋다 등과 등 사이

그것만이라도 작은 이별이 큰 이별을

낳았고 큰 기쁨을 낳지 않았다 대신 이별은

이토록 공허를 적셔오는 지상의 장마 홍수

하늘 끝에서 가슴속까지 차오르는 삶과 꿈

발 밑에서 척추뼈로 물오르는 식물의 성장

아아 나는 새로 살리라 수액을 이별로 흘려

보내고 껍질을 벗고 뿌리 두 팔을 뻗으리라

이별은 비 개이고 더 투명한 역사여서 좋다 

 

 

 

비 노래

김정환

 

하필이면

하필이면 이런 날 비가 와서

나는 저 비인 개천에 당장

붉덩물 흘러 넘치는 것 봅니다

비에 씻겨지면서 바라봅니다

홍수에 넘치는 사랑 속에서

아우성과 이름모를 울부짖음과

인파의 아비규환 속에서

거품의 이빨과, 회오리바람과 소용돌이가 씻겨져 내리고

그날 그 우뢰 같던 함성소리가

씻겨져 내리는 소리 들립니다

말하시오 무엇이 우리를

죽어 피 토하며 배앝은

한 떨기 꽃이 되게 합니까

그리고 누가 이렇게 늦은 4월에 살아 남아

살아 남은 한 떨기 꽃을 바치게 합니까

무덤 앞에 꽃을  드리는 여인의 머리카락이 비에 젖습니다

이런 날 다시 내리는 비는

이젠 적셔줄 것입니다. 우리의 가난과

투명한 아픔과

희망의 뿌리를

젖은 생선같이 싱싱한

우리네 삶의 뿌리.

흐느끼지 마시오

눈물은 더 이상 아무도 잠재워주지 못합니다

 

 

 

빈 화분

김정환

 

빈 화분이 이미 빈 화분 아니고 비로소 집이다

식물의, 식물적인 기억의.

바라봄이 없는 바라봄의 원형이 있다.

무엇이 원(圓)이고 어디가 원(原)?

질문도 그렇게 시끄러운 운명이 없고

운명도 그렇게 시끄러운 무늬가 없다.

도란도란이 두런두런으로 넘어가는 원형이다.

신대륙의. 공간이 죽음을

품기 위하여 펼쳐지려는 노력이었군.

시간이 저 혼자 간절하게 이어졌어.

그런 수긍도 이제 둘 다 먼저 그러지 않고

너무 많은 시간과 공간의

낭비도 고요한

신대륙이다, 빈 화분.

 

 

 

사랑

김정환

 

봄날 아름다웠지만 내 사랑은

투명한 인물화

눈물 고인 생애를 사랑한다

수많은 세월을 머금은 눈동자가

영원한 표정으로 축축한

 

 

 

사랑과 투쟁은 둘이 아니다

김정환

 

물론 그렇지 단순한 모순은 우리가

자본주의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게 만든다 그렇다

자본주의는 복잡하다

그러나 단순성에는 반동적인 것과

혁명적인 단순성이 있다 요는

단순성에도 계급성이 있다

이를테면 그것은 태권V와 외계 로보트의 싸움이 아니다

자본가는 괘씸해서, 나쁜 편이라서 단순한 것이 아니고

노동자는 선량해서 단순한 것이 아니다

노동자는 독점자본의 노동력이므로

자본보다 엄혹하고

노동자는 독점자본의 파괴자이므로

자본보다 강하다

그리고 노동자는 더 나은 세상의 건설자이므로

이미 사랑과 투쟁은 둘이 아니다

그것은 단순하기보다는 기본적이고

이를테면 지는 해와

찬란한 완성의 단순함이다

 

 

 

사랑 노래

김정환

 

1

날마다

그대 이리도 거리끼는 것은

우리들 사랑에 섞인

액체 때문일 거다 아마 그 어쩔 수 없음의 어마어마한 액체

 

멀리서

나는 그대의 가장 초라한 곳을 벗긴다

가난에 찌든 화려한 영혼을 보듯이

그대의 가장 부끄런 눈물을 들여다본다

헐벗은 사람들과 만난다 그대 몸 속의

가장 순수한

 

그리고 이제는 스스럼없는

그대 몸 바깥의

모든 세상의 헐벗음과 만난다

모든 습기와

모든 절망과

그대 몸 바깥의

가장 치열한

 

그대는 그대의 내장을 감추지 않고

나는 나의 내장을 감추지 않고

 

 

2

눈이 내린다 거세게, 내 뺨에 부딪히지 않고 그  눈,

그 바깥에 네가 있다

눈이 내린다 지워질 듯, 도시가 화려하다 그 눈,

그 바깥에 네가 있다

바깥은 이별보다 가깝다 사랑이여, 눈은 눈보다 가깝다,

육체여

매끈하고 육중한 자동차 전시장과 숯검댕 낀 초록색

공중전화 부스

눈이 내린다 무너질 듯, 내 몸을 파묻지 않는 그 눈,

그 바깥에 네가 있다

눈이 내린다 말살하 듯, 네 육ㅊ니가 화려하다

그 눈 바깥에, 네가 있다

 

 

3

먼 데서 가까운 데서

비오듯 태양이 타네요

찌는 듯한 더위를 저에게 주셔요

8월도 한나절 어느 한많은 광복절 같은

기쁨의 절정을 저에게 주셔요

그대가 또한 제게 바랐던 것은

아픔의 절정. 깨달음의 절정. 만남의 절정. 분단되어 있음의 절정

그리고 참음의 절정이었겠으나

지워지지 않아요 그대를 만난 여름. 자갈밭 뜨거운 땡볕.

제 끝에 묻은 채로 있을 그대의 신선한 입김은

그리고 제 발목에 새겨진 샌달 끈 자욱

그대는 혹시 몹시 지루해도 하실 겨울 해 긴긴 밤을 내내

제가 저 혼자 남은 온기로 지워내야 하듯이

부서지지 않아요 그대가 제게 빼앗겨버린

그대의 은밀한 신음이 밴 공기는

태양이 타는데

먼 데서 가까운 데서 태양이 타네요

찌는 듯한 불볕더위를 저에게 주셔요

그 활활 타오름의 세례를 저에게 주셔요

그대와 다시 만날 눈물 뒤범벅

아아 가르쳐 주셔요 그대

앙칼진 사랑의 무기를

태양이 타는데

그대와 진정 다시 만날 수 있도록

 

 

4

그대는 알고 있다 사랑이라는 말의 어두운 골목과

차지해야 될 또 하나의 존재의 침범과 불안의 식량을

알고 있는 그대가 내게 해드린 사랑이란 말은

칼날처럼 내 가슴을 파고들어 와

피 묻은 그대의 얼굴을 나는 가슴 속에 파묻고

나의 가슴은 그대를 받아들인 아픔으로 찢어진다

그대 칼날의 찌르는 사랑과 찢어지지 못하는 삶이여

 

그대는 알고 있다 사랑이란 말의 강한 자의 횡포와

소유본능과 파괴 근성과 서로의 살이 닳아빠지는 꿈의 상실을

알고 있는 그대가 그러나 내게 해드린 사랑이란 말은

칼날처럼 내 가슴을 헤집고 들어와

나의 심장은 치명적인 그대의 사랑을 받아들인다

받아들인다 그대 치명적인 칼날의 사랑과

그대를 위하여 살아남는

나의 노래여.

 

 

5

그대를 만나는 것은 항상

그 깎아지른 만남의 현기증입니다.

한 치의 잘못 디딤에도 발밑

무수한 돌멩이 굴러 내리는 소리!

텅 빈 내장 속에 가난한

아픔의 먼지까지도 바란다 합니다.

버려진 가슴 한구석에 녹슨

누추한 과거까지 바란다 합니다

낭떠러지 위에서

겁먹지 마셔요 그대,

만남은 항상 과격한 것

살아남기 위하여

사랑은 또 다른 혁명을 낳느니

그대, 만남의 체위는 항상 연습일 뿐

다만 중간쯤만 되는 연습일 뿐

 

 

6

입고 왔던 모든 옷 챙겨 빨아놨다는

그대의 흐느낌도 묻었을 편지가 왔다

따뜻한 내장까지 비추던 그대 투명한

환속에 빨래

일상의 빨래, 햇빛에 바싹바싹 오그라지고

헤어짐의 손끝에 아직 남은 그대 몸살의 향기에

나는 기진하여, 남은 사랑으로 습기차 지낸다

그대가 남겨주고 간 온 하루에

그러나 나의 일상은 피와 땀이다

달뜬 소근거림도 묻었을 빨래

그러나 나의 사랑은 참호전이다

두 발이 썩고

두 팔이 썩고

표적을 겨눈 두 눈이 썩는

 

 

7

멀리 있어도 그대는

제 지친 겨드랑을 만지는

보드란 젖가슴의 향긋한 무게로

항상 남아 있습니다 단 한번

낙엽이 마지막 바람에 뒤채이는

오늘 밤만큼은 저 하늘의 별이

수많은 것과 같이

그대를 생각합니다 수없이

헤어지는 연습을 위하여

죽어서 진정 살아남기 위하여

오늘 밤만은 정말 뜬눈입니다

 

 

8

헤어지는 너의 뒷모습

그 속에 가장 아름다운 두 연인이 다시 헤어진다

뒷모습에 박힌다 영원히

겹쳐진다.

 

 

 

사소한 참사

김정환

 

마지막으로 사소한 참사가

인생은 우연이므로

그리 소중하다는 것을 가르쳐주다.

그것이 뼈아프다.

 

 

 

새벽

김정환

 

새벽 귀가는 집이 저만치 보이고

희미한 옛날이 그 뒤로 바느질하는

헌 광목천 하늘

거기서부터 여기까지가 황천길이고

여기서부터 거기까지가 삶의 길이다

천근만근 쏟아지는 눈꺼풀이

닫히지 않고 나를 집어넣는 오늘

죽음 같은 잠 그리고 문이 열리고

내일 거기서부터 여기까지 다시

방황하지 않을 수 있을까 황천길과

삶의 길 사이 방황과 방황 사이

내일 여기서부터 거기까지 다시

귀가가 귀가할 수 있을까 세상이

내 등 뒤로 마구 뻗어나가고?

 

 

 

생가

김정환

 

오른손잡이 평생 처음으로 왼쪽을 기준 삼는다.

중요한 것을 주로 왼쪽에 두고 왼손으로 글을 쓰듯

세상을 보고 생활을 한다.

신경체제가 왼쪽으로 무너지면 왼쪽으로 누운 긴 직사각형

유리창만 왼쪽으로 누운

시야를 제공하지. 때때로 찢을 수 있으나 폭파할 수 없는

사진 풍경 속보다 그것은 생생하다.

애매가 끈질기다.

파킨슨병 옆에 누운 삼십 년 전 애인의 벗은 몸도 보았다.

그러나 더 깊이 봐야지. 그 속에

생가가 있다. 습도와 온도 없는 안온이 있는 자궁이

껍질을 제 겉모습으로 조금씩 허락하는 모양의.

그것을 위하며 키 큰 자작나무 전나무 허리 숙여

관목을 닮는 모양의.

[출처] 김정환 시인의 시 '생가'|작성자 시를 읽는 아침

 

 

 

 

생애

김정환

 

나의 생애는 너한테

너의 생애는 나한테

친근할수록 비리지 않고

반짝일 수 있을까

정물화, 정물화

 

 

 

서시

김정환

 

그대는 살과 뼈와 피비린 인간의 모습.

인간됨의 가장 비참한 모습.

사람들은 믿지 않는다

그대는 하늘 그냥 늘 푸른 하늘일 뿐

그대 못 박힌 손발의 상처에

갈수록 아픔이 생생한 살이 돋는 사랑을

사람들은 믿지 않는다.

그대도 어쩔 수 없다, 사랑의 힘은 그대를 다시 태어나게 하고

우리가 그대의 사랑을 확인할 때

(그것은 항상 너무 늦었을 때)

그대가 확인하는 것은 우리의 돌아선 뒷모습.

그것은 그대의 위대한 슬픔

그대는 슬픔의 시공을 초월하여 있으나

처절한 비참 속에 더욱 처절하게 있어

625전쟁이나

죽장, 도끼, 학살, 참상의 끝.

 

 

 

선물과 명작

김정환

 

사람이 죽는 줄 알고

죽을 줄도 알지만

죽은 줄은 모르지.

죽은 자가 스스로 죽은 줄 모르고

걸어가는 혹은 다가오는

거리의 사물 형상 빛이 약간 더 생기 있다.

살아 있는지 모르고 살아 있을 때 이따금씩

우리를 놀래키는 그 빛은

때로 약간 더 멀쩡하고 약간 더 본질적으로 보인다.

땅거미 직전 땅거미

예감의 빛.

예감인 빛.

차이인 빛.

짐승 소리가 아냐, 그 소리 우리가

죽어도 알 수 없다. 죽음에 무슨 반전? 무엇보다

죽음이 그렇게 노골적일 수 없다.

그건 선물과 명작의 차이랄까.

명작의 값어치를 능가할 수 없는

선물은 명작의 감동에 다가갈망정

끝내 명작일 수 없는

우리 생 속에 생의 일부로 있고 각각의 생애로 빛난다.

'그러나'가 갈수록 빛바래는 세계.

밤이 딱히 경건한 것 아니라 햇빛이란 게 정말

시끄럽기 짝이 없는 세계다.

밤 깊을수록 오디오 소리 크고 깊어진다.

선물 없다면 어떤 때는 아무리 낯익은 음악도

무섭지.

선물 있다면 죽음이란 살아온 생 거슬러

걸어가는 것일 수도.

명작은 선집을 선물은 전집을 읽는 것과 같다.

 

 

 

선지피

김정환

 

그때 온몸으로 그대 흩뿌리던 비가

해장국 속을 둥둥 떠다닌다

밤을 새운 새벽 작살낸 것은 쏘주뿐

혼탁한 하늘 그때 마지막으로 부릅뜨던 그대 눈동자 두 개

떠다닌다 똘똘 뭉쳐진 것들은 똘똘 뭉쳐서

우리를 노려본다

우리는 아직도 세상이 변하리라는

희망을 버리지 못해서 괴롭다

혼탁한 것들은 온통 혼탁해져서 우리를 노려본다

지치고 토하며 얼싸안고 비틀거리다 찾아온 어둔 새벽 시장골목

그러나 번뜩이는 노동의 핏줄 근육들

어두운 얼굴 어두운 피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이제 곧 아침이 온다는 것이다

그대가 마련한 아침

우리가 일어서야 할 아침

 

 

 

김정환

 

무명의 설움을 해소하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는 듯이 섬이 제 몸을 안개로 두른다

아니, 그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일이다.

섬이 무인도인지 아닌지 여부가 곧 속수무책이고

호들갑이다. 왜냐면 안개 속에서

섬이 홀로 된 것 너머 홀로인 것 너머 자신이 섬인 것을

아는 것 너머 섬이다.

그렇게 유구만 있다. 그렇게 있음만 있다.

안개 속 섬이 자신의

지명이다.

섬이 제 몸을 안개로 두르는

시작은 이미 모든 것이 발설되었다는

뜻이지. 누가 두려운 도강(渡江)에 빗댔던가. 죽음은

섬이 모르는 섬의 가장 편안한 지명이고

안개 낀 섬은 그것도 없다.

 

 

 

성탄

김정환

 

그해 겨울, 그날의 부근 동안을

난 내내 청계천 6가에서 살았다

칠흑 같은 밤이 술렁거렸고, 땀에 찌든 막벌이꾼들의 치미는 근육 덩어리들이

반짝였다, 어물전에 산더미처럼 쌓인 생선의 비늘들이

진압치 못해 축축한 성욕처럼 온 세상 위를 꿈틀대며 기어갔다

그리고 밀어닥친 홍수처럼, 아님 밀려난 흥남 부두처럼

사람들이 파란 불도 없는 횡단보도를 마구 건너갔다

 

보따리가건너갔다비틀거리는어깨들이건너갔다물샐틈없는크리스마스캐롤들이건너갔다생계유지걱정무겁게매달린자식새끼들이덕지덕지건너갔다큼지막한헤드라이트불빛들이사방에서마구덮쳐얼굴을갈겼다도대체숨쉴틈을주지않는이땅은누구땅이냐핏발불끈솟아오른리어카꾼의험상궂은욕질이그틈을비집고건너갔다김이모락나는순대가건너갔다홍어찜이건너갔다이조시대민중의수탈을절인오줌냄새가건너갔다그북새통을쫓겨나못비킨다못비켜이자리는죽어도못비킨다아낙네가보따리를움켜쥐고길을건너갔다차량의홍수가흐르는밤거리희미한백열등밑에서맹인여가수의마이크목소리가축축히젖어들었다오늘도걷는다마는청계천6가내가쫓겨나는것이아니다좀더끈끈한삶그래도우리들의희망은희미한가로등과비린내내일의가난을어쩔수없을지라도성시반짝이는것은살아있는것들일뿐산다는것은얼마나위대한가물샐틈도없이사람들이횡단보도를넘쳐흘러갔다.

 

그해 겨울, 그날의 부근 동안을

난 내내 청계천 6가에서 살았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오늘도 가난의 뱃속에서 희망의 씨앗이 잉태됐고

나는 온통 시끄러운 아수라장 속에서 알았다

반짝이는 것은 비참이 아니라 목숨이라는 것을

목숨은 어떤 비참보다도 끈질기다는 것을

현실은 어떤 꿈보다도 더 많은 희망을 품고 있다는 것을

성스러움의 끈적끈적함을, 끈적함의 견고성을

 

 

 

세상은 지금보다 찬란하리라

김정환

 

산동네 골목길 돌면 눈에 밟힐

것이다 이따금씩 민들레도 펴 오르는

다닥 붙은 단칸방 길 밖 살림으로

그렇다 너는 세입자로 오순도순

애들이랑 고향 생각이랑 살았다 부디

똘똘 뭉쳐 둥지 지키려는 안간힘

주먹손이었다 이제 내내 눈에 밟힐

네 모습은 손수 미역국을 끓이던

양복점 아저씨가 더 이상 아니다

모습은 복부와 심장에 회칼 꽂히고

형용은 울다가 엉엉 부르튼 눈에

네 눈 속 우리 눈에도 회칼 꽂히리라

죽인 것은 칼이 아니고 사람이다

그렇다 슬레이트 가옥주, 돈 550만 원이

아니라 독점 아파트업자와 복부인이

너를 죽였다 충청남도 강경 고향길

억세게 가난한 농촌에 1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나, 살길 찾던 상경길

그 길을 배에 칼 꽂힌 채 되밟고 있진

않으리라 우리 눈에 칼 꽂힌 채 두고

홀로 고향 길 찾지는 않으리라 도시

빈민 달동네 세입자 단결투쟁 외치던

성북구 동구여상 후문 옆 벽돌 공터

여기에 남아 제국주의와 독점재벌이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을 보리라

그때 비로소 네 배에서 칼이 뽑히고

우리 눈에서 칼이 뽑히리라 그때

세상은 지금보다 찬란하리라 정상률

 

 

 

쉿, 바람 소리 - 산 아내가, 죽은 남편에게

김정환

 

오 우리애들 아빠, 난데없는 불에 타 죽으며 얼마나 뜨거웠으리

죽음은 시간을 벗어나 수천만 년도 잠깐이겠으나

수억 년 후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르니

기약도 없는 비명의 이별은 더 아뜩한 낭떠러지인 것이오,

벼락 같은 당신의 죽음으로 살아남은

나의 생 또한 살아남았달 게 없는 생이겠으나

당신이 떠난 자리 홀연 어지러운 세상이 되고

역사가 되고 가난한 사람들의 아우성이 된

자리로 내 몸 안에 들어서는 것이오,

죽은 당신의 의로운 명예를 되찾기 위하여

불타는 당신을 3백 5십 5일 동안 이 세상에 세웠으니

당신의 고통을 백 배 늘인 죄가 이 세상의 나에게 있겠으나

나와 우리애들은 라면 끓이는 생계의

곤로 불에도 당신의 아픔을 새길 것이고

많은 사람들한테 서울에 내린 백년 만의 26센티미터 폭설이

아무리 흩날려도 산발 같지만은 않을 것이오.

발이 푹푹 빠지지 않아도 우리가 태어나기 전 조선 역사의

시간은 저렇게 하얗소. 그렇소. 고통으로 아름답소,

고층아파트 창턱에 줄줄이 길게 얼어붙은

목숨도 당신의 죽음으로 아름답소. 비는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 같소.

하나님이 있다면 그 절대의

주제를 변주하는 게 위대한 작곡가라 했고

그 변주를 다시 변주하는 게 연주자라 했고 언제쯤

정말 듣는다면

듣는 자의 연주는 가장 위대하다 했소.

당신이 바로 그 언제쯤이오. 남일당 바람 소리

쉿, 여기 사람이 죽었다.

미래의 바람 소리 쉿,

여기 의로운 사람들이 죽었다, 쉿, 그 소리,

사람들에게 정말 들릴 것이오. 정말 널리 널리

퍼질 것이오. 가시오. 이제

편히 가시오. 이별의 물리 혹은 천문학이 아무리 슬프더라도.

가셔야 우리 다시 만날 수 있는 곳으로 당신은 갔습니다.

 

 

 

스캔들 혁명사

김정환

 

베스트셀러 신정아 고백록 주요독자가 50대라니

50대인 나 기성회비라는 말의 슬프고 장한 뜻 아는

마지막 세대였다가 시시껍절한 섹스 스캔들이 일약

정치적 과격으로 되는

최초의 지저분한 세대에 속하고 나의 혁명사

육체에 밴 추문을 씻어내는 식일 밖에 없다.

의식의 잔인은 얼마나 완화해야 기억되지?

자살을 뺀 들뢰즈와 알튀세르는 레닌 뺀 마르크스와

같다는 말이 고무줄 없는 빤스 운운으로 들린다.

왜 사람들이 명작 건축에서 자연사하지

않는가, 왜 자살하거나 피살되는가?

집을 나서면 우리 동네 제법 번듯한 건물 지하가

반 너머 성인용품 시뻘건 물감에 허리까지 잠겼고,

그것에 발 담그며 내가 되뇐다. 가장 야하고

청초한 말, '여자는 온몸이 악기다,'

가장 오래되고 언제나 개인적인 말, 가장

넘치나 가장 아껴 쓰는 말, 가장 육감적이지만

냄새와 상극인 말, '여자는 온몸이 악기다.'

혁명사보다 혁명 전후사가 더 혁명 실패사보다

혁명 살아남은 차르 귀족 딸 고생 얘기가 더 흥미로운

나의 사태에 나는 어디까지 찬성할 것인가.

오래전 죽은 벗의 오랜만 생가를 보았다. 동생 찾아

월남, 전쟁과 혁명 및 남한과 무관하게 오래 사셨던

큰아버지 문상하고('정환아 사는 게 정말 지겹다')

식구들과 함께 탔던 구포 시내 경전철 덜컹대는게

이승도 저승도 아닌 상자 속이고 그 앞에 철길

아무리 뻗어도 아기자기했고 더 멀리 안개 속 낙동강

철교, 참화를 벗고 다리가 미끈했다.

행군이 운명이라는 소리 빤하다.

생이 어떤 사태인지도.정치는 70년대 민주화 운동

주역들이 아직도 제일 잘 하니 80년대 아직 오지

않았고 죽었다. 정말 혁명사 쓰고 있구나. 벌써

미수꾸리나 하려 들고… 내가. 나 말야? 어긋난 데

익숙해져 세상 살 만하다 싶으면 세상이 더 어긋나

거기에 다시 맞추어 다시 살 만하다 싶으면 세상

어긋나는 속도에 가속도가 붙는 이 악화를

파탄으로 정화(淨化)할 밖에 없을까? 그것들도 분명

우주가 있을 것이다. 자기들의 무한대를 닮았으나 자기들

지능으로는 도저히 다 이해할 수 없는, 바다에

우렁쉥이나 이름 없는 수초들 말이다. '한 끗 더',

'조금만 더'는 그럴 수 없이 위대한 인간 언어지만

그정도로는 언감생심인 우주가 있기는 있을 것이다.

아파트 정원에 봄이면 어김없이 육덕 좋은

엉덩이를 까는,

왜 사냐면 웃는, 민낯과 큰 절의 맥문동 같은 것들 말이다.

이천십이 년 오월 현재 그 사내

밤 열두 시 넘은 전화 두 달째 없는 것 크게

기뻐하고 있다. 술 정신은 차린 모양이군. 정치와

시민 없고 정치 비판과 시민운동만 있는

세상 살 만한 동안.

그러나 세드나*. 오 냉혹한 풍요.

북극 얼음 바다 속 고래와 바다표범 포유류 낳은

성스러운 말씀, 명명은, 마디마디 잘린 냉동

아이스케익 손가락들. 카약, 카약, 갈가마귀,

카약, 갈가마귀, 카약, 딸, 애원하는, 애비,

겁에 질린. 애원도 단검도 너무 잔인하여

분노에 달할 수 없는 생명이 운명의 단어 같은

모든 걸 밀어내고 맥락도 그 밖도 모종도 없이

밀어닥치는 신화 아니라 직접성의 지옥, 빙하기

제의로서 육체가 그냥 견딜 밖에 없는, 악화와

심화로밖에는 종말을 앞당길 수 없는

혁명사 있었다. 다시 쓸 수 없다. 혁명 이전 혁명의

냉혈을 푸는

혁명사 쓰며 앉아있다.

 

* 이누이트 신화 바다여신

 

 

 

시간에 대한 물증

김정환

 

할머니가 쓰러졌다

시간이 가득 담겼던 가죽부대는 쉽게 구겨졌다

기다렸다는 듯 길 가던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가죽부대 속 구겨진 틈바구니에 갇혀 있던

몇몇 시간들 할머니의 앙다문 이빨 사이로 기어나왔다

고개를 주억거리며 서로의 눈치를 살피는 사람들

틈을 비집고 119구급대원이 순식간에 나타났다 사라졌다

사람들 꾹 다문 제 입가를 쓰다듬으며

느릿느릿 사라져간 골목길

할머니에게 끌려온 작은 손수레 하나

우두커니 서 있었다

학원 아이들 태우러 가던 내 차 앞에서

달팽이 처럼 끄리던 바퀴에

할머니를 쓰러뜨려 온 시간을 헐렁하게 감고

내 가슴 속 시간의 통로를 우두커니 가로막았다

 

 

 

심상치 않지?

김정환

 

그렇지?

오늘 부는 바람은 심상치 않지?

시커먼 연기와 불자동차 같은 것

그렇지?

바람은 보이지 않고 다만

심상치 않지?

문제는 바람은 바람 때문에

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야

바람은 누군가가 움직이는 것

어두운 수풀 얘기가 아냐

대낮 광명에 관한

시멘트와 콘크리트에 관한 얘기라고

오늘 부는 바람은 심상치 않지?

그런 만큼 우리는 아직 소시민이야,

그렇지?

 

 

 

씻음에 대하여

김정환

 

아침 숲 속 안개

샘물에 얼굴을 씻으며, 씻겨져

내리는 귓가에

보이는 것에 대한 그대의 자그마한

비명소리를 듣는다

땀 흘리고 분노하고 사랑하는 것

그게 후즐그레한 씻음의 행위라고,

나는 말했지만

그대는 믿지 않았다. 세상은 참

더러워요.

추워요. 치사해요.

아침 한기 온몸에 소름

바닥에 바위와 풀잎이 투명한

샘물에 얼굴을 씻으며

입김이 호호 냇물 위로 서리는 그 속에서

그러나 나는 오늘 다시

깨닫는다.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따스한 믿음을

결코 포기할 수 없음을

얼굴을 씻고 가슴을 씻고

가슴에 묻은 사랑의 소금끼를 씻고

다시 사랑하기 위하여, 빼앗겼던 것을

씻듯이

내 가슴에 묻었던 그대의 얇은 가슴마저

씻으면서

근육에 배인 아픔 만큼은

씻어 내릴 수 없음을 다시 깨닫는다.

그것은 정말 얼마나 벅차고 소중한가

추운 날 가난한 사람들의 입김이 그렇듯이

씻음은 결코 잊을 수 없는 것들은 생각케 한다.

어떤 갈길

같은 것.

 

 

 

아름다운 절망                                        

김정환

 

그때 아름다움이 나를

깜깜하게 했네

아 희망은 절망의 속살

절망은 희망의

의상인 것을

아름다운 것은 절망인 것을

아 희망은 겨드랑에

식초 냄새 지우지 못하는

줄기찬 삶 그 자체

화려한 노고와 백주 대낮의

교통과 고층빌딩과

생선 싱싱한 수산시장

절망은 두 손에 묻어나

검게 광택나는

글썽임

그때 아름다움이 나를

눈부셔 눈 못 뜨게 했네

아 희망은 고단한 육체

절망은 그 육체의

죽음 같은 눈화장인 것을

 

 

 

안 보여                                                 

김정환

 

안 보여 아직은 광란의

의상에 휩싸여

슬픔의 핵심이 보이지 않는다

노래를 노래이게 하는 것

사랑도 모른 채

이별에 젖게 하는 것

눈물로 적셔

희망에 젖게 하는 것

살아올 삶보다 울컥이지만

줄기차게 미래로 뻗어가는 것

안 보여 아직은 노래의

몸짓에 휩싸여

슬픔의 본질이 보이지 않는다

모든 것이 보이고 노래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야구

김정환

 

추억이 제의다. 맥락도 없이 불쑥불쑥 감동의 뼈대만 드러나고 그렇게만 그것이 비로소 과거고 비로소 과거가 안심이다. 당신은 선물하는 사람 마음을 몰라…… 그랬던 여자가 있었구나. 이것도 그녀가 사준 음악이다. 먼 옛날 추억이 제의를 낳았는지도. 제의가 아무리 피비려야 하는 것이었대도.

 

 

 

어느 무명 코메디안에게

김정환

 

어쩌면 남북통일보다도 힘든 일인데

어색한 조명, 텅 빈 무대의 공간 위에서

그대는 서투른 몸짓으로 막간의 어색함을 메꾼다

눈은 격고지 부대일수록 심하게 내려

그대와 우리를 가르고 있다

어색한 조명 속에서 눈발이 미친 듯 흩날려 댄다

그대는 아직도 서투른 말로써 막간의 어색함을 메꾼다

그것은 이미 오래된 숙명임을 알고 있으나

이 순간만은 배가 고파서가 아니라

이 순간만은 처자식이 딸려서가 아니라

거대한 숙명을 이기듯이

그대는 서투른 언사로 막간의 어색함을 메꾼다

북괴를 초전에 박살내야죠

근무태세는 똥도 누지 말아야 합니다

너는 너대로 우리는 우리대로

이렇게 어색한 만남에 진땀 흐른다

그러나 행여 허망하다는 생각은 하지 말거라

문선대 공연은 끝나고 눈발은 여전히 흩뿌리는데

삽시간에 전쟁비상이 걸린 듯이 우리가 각자 군용트럭에 몸을 싣고

병참은 병참으로 수색은 수색으로

3대대는 3대대로 1대대는 1대대로

온 천지에 경적을 빵빵 울리며 삽시간에 흩어지는

헤어짐의 장관을 보이더라도

그대는 헤어짐의 노래를 단원끼리 무대 위에서 아직도 부르며

안녕히 가십시오. 감사합니다. 눈발 흐트러지는 속에서

행여 허망하다는 생각은 갖지 말거라

낯익은 가난의 해진 옷감을 스스로 꿰매듯이

우린 우리의 상처를 스스로 바느질하리라

그대가 보여준 어색한 만남의 감동을

처절하게 기억하리라

눈발은 마침내 스스로도 장관이 되어 흩날리고

군용트럭에 실려 떠나는 우리들의

흔들리는 어깨 뒤에서

그대들이 부르는 서툰 노래는

뜨겁고, 뭉클하기만 하다.

 

 

 

어두운 일산

김정환

 

한 사내가 사랑을 잃고 우울한

일산 쪽이 온통 어둡다.

 

내 길눈은

그렇게 이어지고 길을 지운다.

 

한 여자가 사랑을 잃고

더 우아한

일산 쪽이 온통 슬프다.

 

내 길눈은

그렇게 끊어지고 길을 품는다.

 

 

 

어제                                                     

김정환

 

어제는 참으로 가슴이 아팠습니다

뭐,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므로

그리고 살았던 것은 또한 삶이므로

어제의 어제가, 어제의 가슴이 항상

어제인 것이 아팠던 것이겠지요

어떻게 보면 오늘은 아픈 가슴들이

오래도록 쌓여 이토록 휘황찬란한

것이겠지요 내일도 오늘처럼 아프지는

않겠지마는 오늘 살았으므로 내일

아픈 것은 오늘보다 더 크게

아프겠지요

뭐, 삶 또한 가슴보다 더 커 있겠지요

 

 

 

얼굴

김정환

 

저렇게 그대의 햇살, 쏟아지는구나

저 혼자, 나도 모른다고, 식초 냄새뿐

나도 모른다고, 그대도, 마구 웃는,

눈물겨, 울 틈 없이 활활 타는, 뙤약볕

얼굴, 활활 타는 가을 뙤약볕

 

 

 

얼음으로 죽은 자

김정환

 

트로츠키, 이름조차 살기 묻은 침이 튀는

그의 묘비명을 써줄 사람이 없다

그는

얼음으로 죽은 자,

그는 레닌과 싸우지 않고

스탈린과도 싸우지 않고

둘 사이에 얼음으로 살다가

얼음으로 죽었다.

그가 살던 시대 천재 예술가는

또한 스스로 빙하시대에 살았다.

 

 

 

여성 모델의 언어

김정환

 

자연미인이나 성형미인을 약간 비껴 여성 패션

모델의 언어가 있다.

그 비낌 아무래도 패션 자 떼어내야할 것 같은 느낌

의 각(角), 쇄골 S라인 쯤에서 출발하는 그 각을

따라가면 앙상해지며 움직이고 움직이며 앙상해지는

그 언어가 건축한다, 죽음 미화의

풍성의

응집 너머 육화를. 죽음을 능가하는 죽음

육화의 언어다.

지상에 건축되는 예언일 뿐 성폭행도 성욕도 없다.

패션과 패션의 몸 사이 문상과 장례의 누추가 삭제된다.

Death touch, 다이어트, 죽음 충동 같은 소리. 가난해서

달콤했던 삼립 크림빵 크림과 정반대 미학을 여성

모델의 언어는 구사한다. 육체의 반기(反旗)인

마임도 아니지. 죽음은 필경 어떤 액체, 어떤 거웃과도 무관하다.

간간이, 기웃기웃, 지상 것 아닌 광채를 내뿜는

기괴가 기괴하지 않는 것이 그렇게 섹시할 수 없는 여성

모델의 언어는

건축을 능가하는 건축성에 달한다.

 

 

 

연하장                                                  

김정환

 

우리가 망한 건 망한 거다 壬申年 우리만

그런 게 아닌들 몇백 년 전 세한도가

우리들 열광의 추억으로 남을 턱이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당선하세요 꼭, 형

난 형 세대가 출마하는 것에 찬성이에요

과거를 보는 게 아니라면 우린 다음을 위해

갈라질망정, 번듯하게 살 의무가 있어요

다행히도 자리가 여럿이라니까. 우린 그만큼

찢어진 것은 아니잖아요 당선하세요 꼭, 형

세한도 소나무가 가라오케를 틀고 있다

대통령보다 힘든 게 국회의원 선거라는데

동네 한량 몇십 명 앞에서 아직 囹圄의

소나무가 차마 제 혼자 춤추진 못하고

악수를 청한다

몇 년 전

결별할 때도 그랬지만 피눈물 난다, 정말

 

 

 

오월곡(五月哭)

김정환

 

푸르디푸른 조선의 하늘 아래서

우리는 끝까지 우리의 인간성을

배반하지 않았습니다

젖가슴 잘리고 대포 총칼에 흐트러진 살점으로

낯익은 거리에 피바다로 흐르면서도 우리는

끝까지 배반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소망을

끝까지 배반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믿음을

끝까지 배반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근육을

우리를 배반한 것은 백주의 대낮이었습니다

그 대낮에 끔찍한 일이 저질러졌던 것입니다

은밀한 죄악의 밤조차 진저리쳤던 대낮이었습니다

그러나 쓰러진 자는 다시 살아 이렇게 외칩니다

그해에 우리는 무엇을 보았는가 쓰러진 자의 거대함

상처투성이 목숨의 찬란함 보았는가 그해에

무엇을 보았는가 쓰러지고 또 쓰러지는

목숨 다해 피 철철 흐르는 붉은 태양 보았는가

자유여 가난이여 목숨이여 공동체여

무엇을 보았는가 이 골목 저 신작로에 쌓인 시체더미

그 위로 치솟는

반역이며 총칼의 이빨이며 웃음소리며

보았는가 어둠의 얼굴을 어둠의 정체를

어둠의 개백정을 어둠의 양민학살을

찬란함이여 비린내여 펄펄 살아 뛰는 목숨의 비명소리여

지치고 지친 목숨의 끝

죽음이 끝내 한줌 남은 목숨보다 위대한 시간

쓰러짐이 인산인해로 나뒹구는 피비린내 끓는 학살의 끝

그렇다 우리는

결코 더 이상은 물러설 수 없는

우리들 가난의 힘이 스스로 죽창으로 치솟아

푸르디푸른 하늘을 이루는 것 보았다

우리들 쓰러짐이

정의와 간사한 도배들 확연히 갈라놓는 것 보았다

쓰러지고 일어서고 또 일어서는

우리들 가난의 공동체여, 짓밟힘이여, 신음소리여

차라리 목놓아 울부짖을

맨땅이 갈라질 함성소리여

아아 그렇다 우리는

피맺힌 굶주림이 스스로 불끈불끈 솟는 근육을 이루는 것 보았다

피맺힌 것은 분노뿐 아니라 사랑뿐 아니라

굶주린 목숨 그 자체인 것 보았다

그것이 백성임을

그것이 우리임을 보았다

아아 피맺힌 자유, 피맺힌 제3세계여 공동체여

피맺힌 평야, 핏발 서린 눈동자여

아아 피골상접이여 사막이여 위대한 싸움터여

 

푸르디푸른 조선의 하늘 아래서

우리는 끝까지 우리의 인간성을

배반하지 않았습니다

젖가슴 잘리고 대포 총칼에 흐트러진 살점으로

낯익은 거리에 피바다로 흐르면서도 우리는

끝까지 배반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소망을

끝까지 배반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믿음을

끝까지 배반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근육을

우리를 배반한 것은 백주의 대낮이었습니다

그 대낮에 끔찍한 일이 저질러졌던 것입니다

 

은밀한 죄악의 밤조차 진저리쳤던 대낮이었습니다

 

 

 

우리들의 나라, 노동자 세상

김정환

 

이 세상의 맨 처음에

우린 우리들의 부모를 떠났고 우리들의 고향을 떠났다

이 세상의 맨 처음에

손발이 댕겅 잘리는 프레스 작업대에서 하꼬방 다락방 할미꽃으로 허리 꺾인 여공 시다로

우린 이 세상을 만들었다

 

이 세상의 맨 처음에

우린 배가 고파 밥을 달라고 하였다

우리가 만든 밥, 우리가 만든 옷을 나눠 달라고 하였다

춥고 배고파요 견딜 수 없어요, 제발 조금만 주세요 애원하였다

몇 사람이 무참히 피를 흘렸다, 몇 사람이 개같이 끌려갔다, 살진 돼지처럼 맞아 죽었다,

 

그리고 몇백 만의 눈물이 이 세상을 홍수로 넘치게 하고서야

저들은 우리들의 헐벗고 발가벗은 몸을 겨우겨우 가려주었고

우리들의 주린 배를 겨우겨우 채워 주었다

우리들이 지은 밥, 우리들이 만든 옷, 우리들이 쌓은 벽돌, 아아 우리들이 건설한 나라

 

우리들이 이 세상의 주인이므로

우리들 몇 사람이 피 흘렸을 때 세상은 앞장서서 피를 흘렸고

몇 사람이 끌려갔을 때 세상이 앞장서서 끌려갔다

수백만이 눈물 흘렸고 부모와 처자식과 동지와 고향과 조국이, 온 세상이 더불어 눈물 흘렸다

 

우리들이 조금 더 많은 것을 저들에게 부탁했을 때

우리들은 기계가 아녜요, 우리들은 짐승이 아녜요, 인간답게 살고 싶어요 애원했을 때

저들은 왜놈의 장도칼로 우리들의 배를 쑤셨고, 파쇼 경찰의 몽둥이로 우리들의 골통을 빠갰고, 미제의 총으로 우리들의 심장을 꿰뚫었다

수많은 사람이 피를 흘렸고 수많은 사람이 끌려갔고 수많은 사람이 업수임 당했고 수많은 사람이 능욕 당했다

 

우리들이 지은 밥, 우리들이 만든 옷, 우리들이 쌓은 벽돌, 아아 우리들이 건설한 나라

 

우리들이 이 세상의 주인이므로

우리들 수많은 사람이, 사람다운 노동자가 피를 흘렸을 때 세상은 온몸으로 피를 흘렸고

우리들 수많은 사람이, 사람다운 노동자가 끌려갔을 때 세상은 온몸으로 끌려갔다

 

이제 상처투성이 세상인 우리가 나서야 한다

떨쳐 일어나, 갈비뼈 부러지고 내장이 쏟아져 나온 이 세상을

세상인 우리가 뜯어 고쳐야 한다

우리가 일어서지 않으면

세상이 일어서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해방되지 않으면

세상이 해방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힘으로 피 흘리는 세상의 상처를 닦아 내지 않으면

세상은 피 흘리기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우리들이 지은 밥, 우리들이 만든 옷, 우리들이 쌓은 벽돌, 아아 우리들이 건설할 나라

 

보다 나은 세상, 보다 나은 우리 스스로 다시 한 번 건설하기 위하여

우리는 전태일의 순결한 피로 평화의 세상을 이룰 것이다

우리는 김경숙의 꽃다운 피로 해방의 세상을 이룰 것이다

우리는 김종태 박종만 박영진 김장수 오범근 아아 억울한 투쟁의 피로

만인의 전쟁에서 만인의 평화로

만인의 참혹함에서 만인의 아름다움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빛에서 피땀의 찬란한 삶으로 나아갈 것이다

우리는 우리들의 투쟁으로 우리를 해방시키며

민족통일세상으로 나아갈 것이다

 

아아 우리들의 나라, 노동자가 주인 되는 세상

아아 우리들의 나라, 만백성이 주인 되는 세상

 

 

 

우리들의 어머니는 아직

김정환

 

제국주의는 관념이 아니다

독일어나 영어가 아니더라도

대우자동차 광고가 아니더라도

그것은 얼마든지 주어가 될 수 있다

그것은 살아서 움직이고 우리들의

이마빡을 후려친다

그렇다 이것은

단지 감정의 문제가 아니고

우리들의 착취에 관한 것이고

우리들의 조직에 관한 문제이다

그러나 우리들의 어머니는 아직

통속적인 고향의 눈물 콧물 속에 있고

영화 속에 있고 오락 속에 있다

우리들의 정신인 어머니는 아직

인민주의 속에 있다

어머니가 아니라 우리들의 정신이다

제국주의에 맞서면서

기차는 민족이다가, 인민이다가, 근로인민이다가

마침내 노동자 계급으로 달린다

물론 이것은 남으로 떠나는

피난열차 얘기가 아니다 천구백십몇년

고리끼의 어머니 얘기도 물론

 

 

 

우리 이 투쟁과 생산의 민족 해방 세상에 동지여, 그대를 깃발로 세운다

김정환

 

네가 이 땅에 피비린 살점으로 펄펄 살아 있었을 때

신림동 시장은 여전히 바닥을 기는 민중들의 눈물 바다였고

미국은 여전히 우리들의 삶이었고 사슬이었고 운명이었다

우리들의 행복이었고 화사한 장래였고 보금자리 목적지였다

 

네가 이 땅에 향기로운 한 떨기 꽃으로 살아 있었을 때

세상은 여전히 철부지로 지켜야 할 주인과 지켜줄 국민의 군대를 혼동했고

자기 편 가슴에 총구를 겨눴다

민족 모순과 계급 모순

먹고 사는 문제와 이산가족은 하나가 아니고 둘이었다

 

네가 여전히 식구의 희망이고 명문 대학교 수재였을 때

미국은 여전히 힘과 장미빛 꿈의 나라였고

민중은 여전히 방향감각 없이 서로에게 살기등등했다

 

그날, 최저생계의 시장바닥에 최루탄이 터지고

눈물바닥에 다시 매운 눈물 바람이 휘몰아쳐

고여 있던 눈물이 커다랗게 동요할 즈음

네가 외쳤다, 불기둥으로, ?반전 반핵 양키 고홈,? ?양키 용병 교육 전방 입소 결사 반대!?

 

그리고 그 불기둥은 위로 치솟다가,

남은 생의 무게로, 혼신의 힘으로

신림동 그 매운 연기와 눈물의, 최저생계의 시장바닥으로, 마침내 민중 속으로 곤두박질쳤다

그리고 육중한 숯 한 덩이로 새까맣게 탔다

 

'반전 반핵 양키 고홈' '전방 입소 결사 반대'

외침은 숨을 거두지 않고 온 누리로 번져갔다

그리고 온 누리 반전 반핵의 함성 속에서

숨을 거둘 수 없는 네가 또한 외친다

 

꽃이었던 숯덩이가 미국에게, 행복에게 외친다

이것은 추락인가 이것은 비상인가

열혈육체였던 숯덩이가 미국에게, 장미빛 핵폭탄에게 외친다

이것은 폭력인가 이것은 평화인가

창백한 지식인이던 숯덩이가 미국에게, 보금자리 목적지에 외친다

절규한다 이것은 사랑인가 이것은 증오인가

이것은 정치적인가 이것은 지고지순한가

 

육체가 숯으로 탔을 때

민중이 불을 위해 망망대해로 굽이쳐 흐르고 넘쳤다

한 떨기 꽃이 참혹한 화상으로 숨을 거두었을 때

우리 투쟁과 생산의, 찬란한 민족해방세상의 예감이, 눈먼 사람들로 하여금 눈부셔, 차마 눈뜨게 하고

압제자로 하여금 부끄런 제 눈을 스스로 뽑게 했다

그 나라는 꽃보다 아름답고 육체보다 치열했다

민중의 빛이 환호작약하며 온 누리를 흘러 넘쳤다

민중은 짐이 아니고 벅찬 어깨였다

미국은 더 이상 우리의 장래가 아니라 추악한 과거였고

힘이 아니라 죄악이었고 한 떨기 장미가 아니라 진물고름이었다

 

폭력과 평화의 이분법을 부순 사람

사랑과 증오의 이분법을 부순 사람

해방세상의 예감을 이룬 사람

 

그는 누구인가?

아아 김세진!

 

추락했으되 동시에 치솟은 사람

가장 정치적이되 동시에 가장 순정했던 사람

해방세계의 예감을 이룬 사람

 

그는 누구인가?

아아 이재호!

 

아아 그날

찬란한 투쟁과 생산의, 민중해방세상의 예감 속에서

마침내 죽음조차, 외길이기를 멈추고

혁명의 어깨동무를 허락하리라 했다

마침내 미국도, 죽음도, 항복하리라 했다, 1986년 4월 28일.

 

분단조국 민중해방운동 44년 4월 28일 오늘,

김세진, 우리 이 투쟁과 생산의 민족해방세상을 위해 동지여,

죽은 그대를 산 자의 깃발로 세운다

이재호, 우리 이 투쟁과 생산의 민족해방세상을 위해 동지여,

죽은 그대를 산 자의 깃발로 세운다

 

민족해방과 함께 영원불멸하라

민족해방과 함께 영원불멸하라

 

 

 

원주 여자 - 아름다움에 대하여

김정환

 

너는 나보고 개새끼라고만 그러는구나

몸 파는 너를 보고 불쌍하다는 나를 보고 막무가내

불쌍히 여기는 그 못된 버릇을 버리라는구나

여자야 어두운 원주역 학성동 길

비 내린 가로수처럼 늘어섰던 여자야

여자야 거대한 미움의 응어리 속 가까울 수 없는 외딴 섬

질퍽이면서, 여자야, 그러나 내가 무슨 영혼주의를 하겠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대가 삶에 대해 지치고 아프고 설워 보일 때

우리가 미움과 위선과 교활함에 대해 이야기 할 때

이 습기찬 하숙집에서 돈에 대해

몸 팔음과 안 파는 입술, 사랑의 가능성에 대하여

한 개인의 비극적인 생애에 매달려 있을 때

내가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것은

사랑은

전쟁처럼 온다는 것이다

우리가 절망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절망은 보다 억척스러운 꿈과 맞닿아 있기 때문

우리가 뇌세포 묻어나는

불안에도 지쳐 있을 때

우리가 고향집 풀밭 때묻은 치마폭에도

매달려 있을 힘이 없을 때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아름다움에 대해, 무기에 대하여

......

너는 나더러 개새끼, 개새끼라고만 그러는구나

 

 

 

유채꽃밭                                               

김정환

 

내가 그대의 허망함을 눈치채기도 전에

그대가 나의 미망(未亡)의 눈앞에 펼쳐논 온통 샛노란 불볕, 벌판

그대는 내 앞에서 그대의 몸가짐을 흐트리며 출렁이면서

그대의 마음도 눈이 부시게 흔들리고 싶을 때

그러나 그대가 일용의 양식으로 머금고 배앝아 낸

입술에 배인

고운 피, 거친 숨결이

나는 보일 것도 같애 반란으로도 모자란, 학살로도 모자란

그대는 아직도 동용하지 않는 한라산 슬하에서

이제껏 조바심내며 출렁거리며 바람에 몸 식혀 왔나니

아아 그대가 내 앞에 마련해논 광대한 벌판은 벌써 미쳐버린 색깔로

내 앞에서 끝도 없어라

내 앞에서 끝도 없어라

마침내 강심장으로 돌아온 사랑 앞에서

 

 

 

육체가 숯으로 탔을 때

김정환

 

민중이 불을 위해 망망대해로 굽이쳐 흐르고 넘쳤다

한 떨기 꽃이 참혹한 화상으로 숨을 거두었을 때

우리 투쟁과 생산의, 찬란한 민족해방세상의 예감이, 눈먼 사람들로 하여금 눈부셔, 차마 눈뜨게 하고

압제자로 하여금 부끄런 제 눈을 스스로 뽑게 했다

그 나라는 꽃보다 아름답고 육체보다 치열했다

민중의 빛이 환호작약하며 온 누리를 흘러 넘쳤다

민중은 짐이 아니고 벅찬 어깨였다

미국은 더 이상 우리의 장래가 아니라 추악한 과거였고

힘이 아니라 죄악이었고 한 떨기 장미가 아니라 진물고름이었다

 

폭력과 평화의 이분법을 부순 사람

사랑과 증오의 이분법을 부순 사람

해방세상의 예감을 이룬 사람

 

그는 누구인가?

아아 김세진!

 

추락했으되 동시에 치솟은 사람

가장 정치적이되 동시에 가장 순정했던 사람

해방세계의 예감을 이룬 사람

 

그는 누구인가?

아아 이재호!

 

아아 그날

찬란한 투쟁과 생산의, 민중해방세상의 예감 속에서

마침내 죽음조차, 외길이기를 멈추고

혁명의 어깨동무를 허락하리라 했다

마침내 미국도, 죽음도, 항복하리라 했다, 1986년 4월 28일.

 

분단조국 민중해방운동 44년 4월 28일 오늘,

김세진, 우리 이 투쟁과 생산의 민족해방세상을 위해 동지여,

죽은 그대를 산 자의 깃발로 세운다

이재호, 우리 이 투쟁과 생산의 민족해방세상을 위해 동지여,

죽은 그대를 산 자의 깃발로 세운다

 

민족해방과 함께 영원불멸하라

민족해방과 함께 영원불멸하라

 

 

 

이것들이 인간 죽음에 간섭

김정환

 

1 - 모기, 내가 간섭

너는 이상한 나라 이상한 체위를

무슨 결심하듯

경배하듯 허공에 단 한번

손뼉 짝 박수를 치고

속도와 방향의 운이 좋은 그사이 나는 죽는다.

눈 깜짝할 사이고, 합장이다. 운이 나쁘면 내가 긴 다리를

더 쭉쭉 뻗으며 죽음의 고통을 맛볼 수도 있다.

착하다면 네가 연민을 가질 수 있지만

그건 '뒤늦은'보다 '하마터면'에 더 가까울 것.

그렇지 않더라도 내 다리의 기나긴 경련은

너나 나나 속수무책일 것이다.

바퀴벌레 같은 소리.

네 말마따나 목숨은 기계와 같다. 다만

거기까지만 너의 말,

나의 정신을 보지 못한 네가 정신을 잃는 나의

순간을 보았을 리 없다. 그 순간

너의 시간은 흘러간다. 위태하다. 째깍째깍 나의 육신을 찢어발기는

의성과 의태 모두.

나의 시간은 명멸한다. 그 명멸 속으로 나도 명멸한다. 명멸이

원래 나의 삶이기도 하였다는 생각. 정신을 잃으며

시간은 누구에게

빛인가.

너는 이상한 장소 이상한 시간이다.

너의 계단은 불안하지만 불안은 나의 계단이다.

 

 

2 - 거미, 그렇다면 나도 간섭

기억은 호시탐탐 육체의 지위를 노린다.

육체보다 더 똘똘 뭉치고

내 생각에 여기서 죽음이 삶과 갈라진다.

너무 똘똘 뭉쳐 확연한 기억의 바깥과 접근

불가능한 기억의 핵심이

모두 죽음이라는 거지.

그러느니 나는 파경의 좌우도 포함해서

기억의 실타래 풀어

집을 짓겠다는 거지. 신경망보다는

살림 가재도구 배열에 더 가깝게. 그리고

시간을 끝없이 줄이는 망원경(광년, 별빛은 언제

어디서 오고 우리는 어디로 어느 만큼)으로

그것을 곰곰 들여다보는

것과 일이 죽음이라고 한번 해보자는 거지.

아무래도 집은 불가사의할 수 없다.

과학도 배꼽이거니 할밖에 없다.

바람은 이따금씩 불어

내 집 내 줄 내 몸을 스친다. 그건 나의 연주다.

나를 연주하는 것 아니라

내가 연주하는 나의 연주다.

우주 같은 소리.

 

 

 

이별

김정환

 

유리창 하나 두고 안쓰러웠다

가슴에 든 허허벌판이 보였다

서로의, 그 뒤의 허허벌판도 유리창

네 눈 속에 든 내 눈 속에 허허벌판

그 속에서 벌써 밤거리가, 화려한 생애가

흘러간다 눈물 벽이 바깥

유리창에 덧씌워진다 울지 마라

우린 벌써 몇 겹으로 만나고 있는가

 

 

 

이제 들판을 보리라

김정환

 

이제 들판을 보리라 장대비 내리는

식량과, 동맹의 대지를

눈동자여 가뭄과 같이

애타는 눈동자

이제 너를 보리라 처음 보듯이

우리가 우리를, 처음 보는, 눈망울로

 

 

 

인생

김정환

 

마음 속에 고요히 강물 흐르는 소리 귀는

스스로를 기울여 혼자 듣는다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는 세월의 정물화 파도 소리를 묻지

않는다 그리움은 어디로 가는지 죽어서 그대

등을 적시는 장마비의 흐느낌이 명료한 耳順

옛날이여 가슴을 뭉클히 적시는 흘러감이여

헛되지 않는 것이 남아 거침없이 흘러가는

이 순간 누가 또다시 나를 부르고 있는가

누가 또다시 참신, 세월로 스며들고 있는가

 

 

 

인위적

김정환

 

가장 끔찍한 것이 죽음의 치정이다. 그래서

40년 뒤

명작이 있다.

여러 겹 의미심장이 여러 겹으로 이상하다.

죽음이 발굴하는 거지 생 아닌

생의 죽음을.

역사 아닌 역사의 죽음을. 육체 아닌

육체의 죽음을. 언어가 끝없이 (네?) 몸 향해

기울고, 언어 아닌 언어의 죽음을.

화 아니라 뿔 난 죽음이 자신의 죽음을.

정액도 궤도를 벗어난 영롱한 슬픔이다.

세고비아가 기타 이름이었나? 북한이

청소년이다. 인위적이라

난폭이 더 난해하지.

낙화생 기름, 사탕, 낙화생, 낙화생,

그게 일본말 땅콩이었나.

적을 바로 마주하고 있는 전방(前方),

그게 앞으로였고 미래였으니

어디까지 말랑말랑해지면 생이 불길(不吉)을

벗을 수 있냐고 묻는 것이 상처의 따스한

낙관이었나. 죽음의 치정에 맞서

지리멸렬해지는 육체의

지옥은 Innamoraya, innamorate, 아름다움의

성욕이 그리 끈질길 수 없다. 그,

뼈대가

그리 노골적일 수 없다

더 노골적인 것이 같이 있을 수 없는 것들의

병존이고, 그 옆에서 죽음과 음식의

그것은 오히려 유구의 자연이다. 자연의

자연이지. 모든 파란만장이 제 안에

암전(暗轉)을 키우며 보통명사에 달한다는 거.

흐린 열망 너머 명징한 아름다움의 현재로서 미래라는 거.

이해 못하지, 죽음의 치정은 이응의 혹은 리을의 투명 밖으로

설레는 파국, 내용이 다분한 창세기, 세상의 세상 밖으로

뒤흔들림도 없이, 위안의 뜻을 과격하게

가까스로 가누는 것이 죽음의

치정이라는 듯이,

'인위적',

기악과 연기의, 그 둘의

병존의.

운명도, 결국 우리 살 뜯어 먹고 산다는 듯이.

들숨 날숨만 남을 때까지 말이지.

 

 

 

인적(人跡)

김정환

 

그대를 만나고 돌아오는 밤은

번화간데도 인적이 드물었다

나는 안다 인적 없는 인파가 얼마나

성난 물고기떼 비늘 파닥이는 파도 같은지

김치 비린내 사라진 사무실마다

외롭게 모인 사람들이 이 시간

비슷한 처지가 없을까 전화를 돌릴 것이다

든든하지 않고 씁쓸한 확인을 위해

애시당초 우리가 밥을 위해

가난해서, 이 일을 시작했던 것은 아니었다고

막말로 본전 아니냐고, 돈벌려면 이 짓 했겠느냐고

쓸쓸하게 웃다가, 힘을 내서 시시덕거렸지만

그럴수록 더욱 을씨년스럽고

컵라면 국물로 잠시 뜨거운 가슴이

이내 궁상맞게 식는

거의 폐쇄된 사무실을 나는 안다

괘념치 말아다오 너의 행동을

너뿐만이 아니고

나 또한 네게 무언가를 거절한 것임을 나는 안다

인적이 드문 것은 내가 아직 무언가를

찾고 있다는 뜻이다 너 또한.

나는 남아 있는 사람들이 더 걱정이다

너로 하여, 사무실 또 하나 폐쇄된 듯한데

너로 하여 팔 하나 잘린 듯한데

왼쪽이 뭉툭할 뿐 아프지 않은 내가 더 걱정이다

내 가슴 속 인적마저 왜 이리 드문가

나는 기다림만으로 황폐해져갔던

그리고 뻔뻔스럽게 그것을 옹호했던

역사가 반복될까봐 두렵다

 

 

 

전선은 눈물을 향해

김정환

 

전선은 눈물을 향해 있다

과학은 해방을 향해 있다 물론

슬픔이 나쁜 것만은 아니다

눈물에도 화살이 들어 있다

동맹은 착취를 향해

혁명은 기쁨을 향해 있다 물론

그때도 우리는 기차에 대하여

말해야 한다 우리의 슬픔은

기차보다 과한 것이 아니었던가

그래서 우리의 열정은

기차만 못한 것이 아니었던가

전선은 눈물을 향해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법칙을 향해

가고 있다 그 둘은 같지만

같지 않고 같지 않지만 같다

화살은 두 개의 방향을 갖고 있다

그 둘을 끝내 진보하게 하는 것

그때 인간은 자유이며 당이다

기차가 빠를수록

농촌의 물가는 교통비만 싸지는 것이 아니지?

라면값도 싸지고 해산물도 싸지고

심지어 채소값 쇠고기값 쌀값도 싸진다 자본주의는

착취하면서 동시에 발전을 강요하다

이건 교통문제가 아니고 기차와

무덤에 관한 얘기야 농촌의 교통비가 싸진다는 것은

그만큼 농촌이 착취당한다는 얘기고

기차가? 아니 자본주의가!

 

 

 

전태일

김정환

 

그대의 몸은 지금도 온통 화염에 싸여 길길이 뛰고

우리들의 한반도와 강산과 공장과 안방은 온통 생살이 타는

석유 냄새다 마침내 그대,

항상 싸움하는 노동이여

그대를 생각하며

시푸르딩딩한 식칼을 보는 두 손은 떨린다

저것으로, 저 스스로도 몸 떨고 있는 역사의 살기로

우리는 그대를 죽인 누군가의 심장을 찌르거나

분하디분한 우리의 가슴을 찔러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들 짓밟혀 이리 처참한 함성으로도 그대는 돌아올 수 없고

우리들 핏줄 목메인 그리움으로도 그대 대답할 수 없는 것은

단지 웬수 같은 가난만이 그대를 죽인 것이 아니라

단지 허리를 꺾는 비참한 작업환경만이 그대를 죽인 것이 아니라

저질러진 역사 전체가, 그 가위눌린 신음 속에서,

그대를 죽음으로 선택했기 때문이다

그대 죽음의 화염병이여

그대의 몸은 지금도 온통 화염에 싸여

길길이 뛰고

우리들의 낯익은 거리와 휘황찬란한 매판의 빌딩과

처저생계의 하꼬방은 온통 생살이 타는

석유 냄새다 마침내 그대, 항상 싸움하는

노동이여 역사의 에너지여

싸우게 하라 종로에서 청계천에서 해진 작업복을 입은 채

지하상가에서 잘린 젖가슴 피 묻은 꽃으로 피는 광주 금남로에서

싸우게 하라 기름 묻은 주먹으로 쇳가루 섞인 핏줄로

폐결핵 피묻은 가래 마산에서 부산에서 그 이름모를 근육의 아우성으로

그대의 몸은 지금도 온통 화염에 싸여

길길이 뛰고

우리들의 공장과 직장과 학교와 법원과 면회는 온통 생살이 타는

석유 냄새다 마침내 그대

오오 그립고 그립고 처절하게 그립더라도 그대여

불평등과 착취 앞에서

부자유와 억압 앞에서

군사독재와 부정부패 앞에서

남북분단과 식민잔재 앞에서

그 모오든 현재의 저질러진 죄악 앞에서

이루지 못한 미래

완성되지 못한 그리움 앞에서 그대

싸움하는 노동이여 역사의 에너지여 죽음의 화염병이여 그대

추억도 그리움도 핏발 서리게 하라 혓바닥까지 타는 우리들의 생계 속에서

지나간 날들이여 죽창 들고 일어서라

일어서서 꽂혀라 저 거짓과 신음소리와 분노의 땅 위에

외쳐라 강인한 팔다리로 오지 않는 미래를 향해

굽이굽이 피 흘릴 길일 갈 길을 향해

추억이여 핏발 서려라 대대로 이어져온

전통이여 가문과 가문이여 노동자여 노동자여 죽창 들고 하늘을 보라

전태일 열사 그가 비리디비린 인간의 하늘이다 마침내 그대

전태일! 그대 항상

싸움하는 노동이여 역사의 에너지여 죽음의 화염병이여, 그렇습니다 여러분

 

 

 

절망에 대해서

김정환

 

자동차 헤드라이트는 눈도 없고 코도 없고

발설의 입도 없고

다만 나는 아직도 어두운 밤 뒷골목길에서

뒤에서(혹은 앞에서) 오는 자동차 헤드라이트를 두고 차분히

걷지 못한다

돌아보면 자동차 헤드라이트는 내 왜소한 그림자를 삽시간에 삼켜 버리고

다시 토해내고, 토해낸 그림자는 갑자기 산더미만해지고

헤드라이트와 내 그림자는

골목 저편 끝으로 아주 조그맣게 사라져가는 것을

보면서 나는 게가 된다 담벼락 끝으로 설설 기어 오르는

헤드라이트는 다만 번쩍거릴 뿐인데

뻔뻔스레 번쩍거릴 뿐인데

헤드라이트의 절망과

내 몸 속, 그립고 또한 아주 왜소한 나의 절망이

그리고 절망의 절망이

일순의 거대한 시대를 지나

골목 저편으로 어둠을 몰고 사라져가는 것을

나는 다만 한 마리 비겁한 게처럼 설설 기면서

지켜볼 수 있을 뿐이다

나는 아직도 어두운 밤 뒷골목길에서

뒤에서(혹은 아무데서) 오는 자동차 헤드라이트를

그대로 두고

안심하지 못한다. 참지 못한다.

 

 

 

절정

김정환

 

가파른 속도가 정지한, 깎아지른 절벽

그 아래 있는가 없는가 음악의 방처럼

무한한 시공간이 있는가 강물에 들며

전철은 아연 긴장한다 그대여

우리 사이 그토록 현기증나는 것을

 

 

 

제설작업

김정환

 

살아도 오히려 힘에 또 겨울

벅찬 아픔과 감동의 시대였니라

연병장에 엄청나게 쌓인 눈산더미를 보며

일요일 제설작업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넉가래를 밀면

우리 힘만으로는 암만해도 모자랄 것 같은

눈은 지금도 쌓이며 넉가래 끝에서

묵직한 사랑의 감동이다

시력만으로는 감당하지 못할 하얀 반짝임. 눈물.

살아도 내사 다는 못 살고 돌아갈 시대

80년대까지 이렇게 산사태로 밀려오는 눈을 치면서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죽어도

밀어도 밀어도 80년대까지 밀려드는 눈은

우리 자라다 만 키의 어깨를 넘칠 듯, 넘칠 듯

우리 서툰 넉가래질을 덮쳐 삼킬 듯,

그러나 눈발 속에서 아이가 운다 배가 고파서

살려주셔요 소리같이 그러나 이대로 물러서지 마셔요

소리같이 윙윙대는 눈보라 현수막 흩날리는 전쟁구호

뒤에 저희들이 있다는 듯이

눈은 아직도 쌓이고, 넉가래질은 서툴고

땀에 흐려진 시야 주먹으로 닦아내면

담벼락에 엉겨붙은 하얀 잔설

풍경엔 핏자국이 묻어 있다

아름다움엔 피와 살기가 묻어 있다

온통 하얘지는 세상에 일렬종대

그대는 아직도 고통에 갇혀 지내고

연병장에 쌓인 눈을 밀면서 생각한다

우리가 우리로 살아 남은 것은

우리의 앞이 무언가를 했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안 했기 때문이 아니다

 

 

 

조각의 언어

김정환

 

흐르는 음악에서

건축인 음향을 뺀다면(그러니까 당신, 너무

덜컹대면 곤란하지. 무너진다.) 네 눈동자에 어린

내 얼굴 보고 내 눈동자에 어렸을 네 얼굴

생각하는 순간

그것은 탄생한다.(그러니까 당신, 너무 토라지만

곤란하지. 등 돌리면 평면은

아무리 깊어도 표정이 될 수 없다.)

나는 내 차원에서 너는 네 차원에서

움직일 수밖에 없지만 네 맘대로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이 내 차원이고 네 맘대로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이 네 차원이기에 그것은

끊임없이 세계의 주인공

모성 속으로 운동하는

중력의 댓가로 입체를 입는다.

피그말리온의 온기는 이미

발과 발.

말은 생각의 목소리이고 언어는 생각이 말로 되는

순간의 생각이고

언어는 조각이다.

말씀의 생애가 펼쳐지기도 전에 말씀의

육체가 에로틱하다.

금이 귀하고 아름답다는

말이기도 전에(은은 말이 될 수

없어서 대낮보다 더 깊은 세월의 빛을 내지)

생각의 무늬를 만들고 조각을 모아

집을 지을 수도 있다. 건축이 아예 침묵을

거룩하게 만들기 전에

용어가 양식이고 장르이기 전에

우리는 어느새 시간을 조각한

광경이고 언어다.

그렇게 목구멍, 소리를 내고

음성, 그대를 알고

우리는 말이 된다.

그렇게 생명은 생명의 가상현실을 벗고

서로의 손은 서로의 그릇 너무 벌써

거푸집이다.

 

 

 

좋은 꽃

김정환

 

이렇게 생생할 수야 전생의 그대, 욕망의 흔적이

이길 수 없는 싸움에 지쳐 흐려진 내 이생의 눈망울을 때리는

그대 잎사귀의 원색,

그 순결한 운명에 짐 지워진

피할 수 없는 충동을

피 흘려 지금은 다만 그대를 건드려보기 위한

손가락의 마구 떨림과 그대의 그 아직도 의연한 자태 사이

내 비인 주먹과 그대의 그 복수심 같은 아름다움 사이

숨이 막히는 공간 속에 갇혀서

나는 와들들 떨려 그대의 그 진한 향기도 참지 못하고

그대도 아아 조금씩 눈물 반짝이며 흔들리며 섰나니, 그대의 꽃잎

자꾸자꾸 벗어버리는 고운 살결 같은

그대의 경련 벌써 끝없이 들키고 있음!

 

설운 몸, 수습하기도 전에

경미한 흔들림으로 그대가 내 발에 흘린

그대의 향기 그 피비린 맛에

나도 막강한 설레임만으로

그대를 사랑하기

훨씬 이전에

앙칼진 복수심으로 내 눈을 때리는

아름다운 꽃,

좋은 꽃,

 

 

 

지울 수 없는 노래

김정환

 

불현듯, 미친 듯이

솟아나는 이름들은 있다

빗속에서 포장도로 위에서

온몸이 젖은 채

불러도 불러도 대답 없던 시절

모든 것은 사랑이라고 했다

모든 것은 죽음이라고 했다

모든 것은 부활이라고 했다

불러도 외쳐 불러도

그것은 떠오르지 않는 이미 옛날

그러나 불현듯, 어느 날 갑자기

미친 듯이 내 가슴에 불을 지르는

그리움은 있다 빗속에서도 활활 솟구쳐 오르는

가슴에 치미는 이름들은 있다

그들은 함성이 되어 불탄다

불탄다. 불탄다. 불탄다. 불탄다

사라져버린

그들의 노래는 아직도 있다

그들의 뜨거움은 아직도 있다

그대 눈물빛에, 뜨거움 치미는 목젖에

 

 

 

지천명(知天命), 3각(三脚)

김정환

 

열혈이 과했던 내 선배 채광석은 어느 날 나를 점심식사

일행에서 떼어내더니

'너랑 나랑는 따로 우족탕 먹자,

쟤들은 지들끼리 설렁탕 먹으라 그러구',

그러구서는 같은 장소에서 굳이 따로

우족탕 시켜먹고 나도 떼어내고 허청대다가

그날 밤 엉뚱한 데서 술 취한 교통사고로

비명에 갔다.

 

신중이 과했던 내 친구 김도연은 어느 날 실로 오랜만에

전화를 걸어 술이 덜 깬 내 몸의 귀만 깨우더니

'너랑 나랑은 오늘 춘천 가자,

내가 운전수 노릇이고 뭐고 다 할 테니까.'

그러구서는 별로 조르지도 않고 혼자 갔다가

그날 밤 엉뚱한 데서 과로한 교통사고로

비명에 갔다.

 

잘 웃지 않았지만 한번 웃으면 단추 구멍 눈웃음이

얼굴 전체를 넘쳐나던 내 단골 술집 섬 여주인

류향숙은 분명 스스로 죽을 줄 알았다.

평소답지 않게 전어구이 가시를 발라주며 이것 좀 드셔요

이것도 좀 드셔요 하고 나를 특별 대접한 후

헤어진 지 두 시간 만에 쓰러졌다. 의사는 벌써 내장 기능이

남아 있는 게 별로 없더라고 했다.

 

참 인사 한번 제대로 받았구나.

그래서 평소 안 하던 짓 하면 죽는 거지만

죽음은 나이가 수십만 년 넘게 슬픈 일이고

식구끼리의 죽음은 유전과 같은데

그들로 하여 내가 죽음에 디딘 발이

세 개나 되는 것은 고마운 일이다.

 

 

 

지하철 정거장에서

김정환

 

말하라 우리가 이젠 벅찬 한줌의 먼지로 서서

열차가 도착하는, 발 밑의 지축을 울리는 경적소리

그 몰고 오는 풍파의 장엄이나마

온전히 온전히 가슴 설레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는가

 

열차는 기다림 속 무언가 가여운 떨림을

산산조각 내는 속도와 방향으로 들어온다

 

이 조그만 도착의 운동에도 흩날려대는

갈채 같은, 환호 같은 슬픔의 나부낌!

 

그러나 진실은

훨씬 더 우람하고 시끄럽고

두려운 소리로 온다

 

아직도 버팅겨 있음의 뿌리를 송두리째 뒤흔드는

전율의 함성으로 온다

 

기다려라, 우리가 바라는 것은

훨씬 더 아픈

훨씬 더 심장이 터질 듯 벅찬

감격으로 오리라

 

 

 

쩨쩨한 영혼 진혼곡

김정환

 

들어본 적 있는 소리가 언제나 쩨쩨하지만

영혼의 구성은 언제나 들어본 적 있는 소리다.

영혼은 들어본 적 없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고

들어본 적 없는 소리가 들어본 적 없는 소리를

들어보았을 리 없다.

그래서 쩨쩨한 영혼을 진혼하는 건지

쩨쩨한 영혼이 진혼인지 영혼은 도무지

무슨 소린지 알 수가 없다 쩨쩨한 영혼의

진수인

죽음 속에서 말고는,

그것에 귀 기울이는 것을 우리가

영혼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어지는 영혼은 쩨쩨한 영혼이다.

자신을 진혼하는 영혼은

너무 차가운 영혼이다.

얼어붙지,

쩨쩨함이 없다면.

쩨쩨한 영혼은

죽음을 견딜 만한

습관으로 만든다.

쩨쩨한 영혼은 쩨쩨함 말고 다른 모든 것이

호들갑이다, 죽음을

경각시킬 수 있는.

쩨쩨한 것은 쩨쩨하지만 쩨쩨한

영혼은 위대하고 진혼곡이 언제나 쩨쩨한

영혼 진혼곡이고 그러니,

앙코르, 앙코르.

짧을수록, 여러 곡 여러 번일수록 좋은

앙코르, 앙코르.

죽음이 생에 씐 영혼의

가면일 때까지.

그 다음은 죽음의 일.

영혼은 들어본 적 없는 소리를 들을 뿐이다.

영혼은 들어본 적 없는 소리일 뿐이다.

들어본 적 없는 소리가 들어본 적 없는 소리를

들어보았을 리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그렇게 영혼이

살아생전 단 한 번

눈을 부릅뜰 것이다.

350년쯤 된

주목(注目) 자세로

그때 모든

열광이 천박하다, 죽음에 앞서

쩨쩨한 영혼 앞에.

그리고 평생의 추락에 앞서 죽음의

미완(未完) 앞에.

영혼의 녹음(錄音) 아니라 쩨쩨한

녹음인

영혼 앞에

가장 터무니없는 것이 박수갈채의

형해(形骸)다.

 

 

 

책 쌓기

김정환

 

몸이 일그러지는 기쁨이

뒷모습 아니라 앞모습으로 사라지는

그 모양의 형식이 아름다움이라는

전언이 일상이고 상식이고

그것을 깨는 것은 선배다,

훗날에 아니라 훗날의, 그리고 훗날이라는.

책을 세워놓지 않고 쌓아놓는 그

선배의 연륜 앞에서 내 가슴

그 너머 나의 훗날로까지 뜨겁지만,

실제로 그럴 수는 없을 터. 다만

그렇게 내가 나의 미래를 거리와 깊이의

언어로 파악할 수 있게 된다.

나의 것 선망 아니듯 그것 연륜의 아름다움,

온화 아니다. 책쌓기의

기쁨 아니라 즐거움이 앞모습으로 사라지는

거리와 깊이다.

흔들리는 것과 탄력의 차이만큼 탄력을 부르는

거리와 깊이의 매혹이다.

가끔씩 새 책들도 쌓아놓는다.

안 본 책들도 안 볼 책들처럼 쌓아놓는다.

수직이 수평의 유혹이다,

치열이 없는.

그렇게 이전의 이후가 늘 내앞에 있다,

누구나 후배다.

 

 

 

철길

김정환

 

철길이 철길인 것은

만날 수 없음이

당장은, 이리도 끈질기다는 뜻이다.

단단한 무쇳덩어리가 이만큼 견뎌오도록

비는 항상 촉촉히 내려

철길의 들끓어오름을 적셔주었다.

무너져내리지 못하고

철길이 철길로 버텨온 것은

그 위를 밟고 지나간 사람들의

희망이, 그만큼 어깨를 짓누르는

답답한 것이었다는 뜻이다.

철길이 나서, 사람들이 어디론가 찾아나서기 시작한 것은 아니다.

내리깔려진 버팀목으로, 양편으로 갈라져

남해안까지, 휴전선까지 달려가는 철길은

다시 끼리끼리 갈라져

한강교를 건너면서

인천 방면으로, 그리고 수원 방면으로 떠난다.

                                            

아직 플랫포옴에 머문 내 발길 앞에서

철길은 희망이 항상 그랬던 것처럼

끈질기고, 길고

거무튀튀하다.

철길이 철길인 것은

길고 긴 먼 날 후 어드메쯤에서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우리가 아직 내팽개치지 못했다는 뜻이다.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길이 이토록 머나먼 것은

그 이전의, 떠남이

그토록 절실했다는 뜻이다.

만남은 길보다 먼저 준비되고 있었다.

아직 떠나지 못한 내 발목에까지 다가와

어느새 철길은

가슴에 여러 갈래의 채찍 자욱이 된다.

 

 

 

철길 위에 쓴다

김정환

 

무쇠와 근육을 부딪쳐

근육과 눈물을 부딪쳐

울컥이며 가자 만국의 노동자

덜커덩거리는 것은 시대일 뿐

우리들의 심장은 촉촉하고 강하다

음침한 것은 또한 화려하다

대낮 햇빛 밝은 시절의

영롱한 인간이여

미래여 우리가 걸어온

함성 위에 굵은 눈물로

더욱 강인한

철길 위에

드디어 우리는 자유라고 쓴다

갈 길 위에 쓴다 오 진정한 자유

 

 

 

최고의 사랑은

김정환

 

끝끝내 아내는 운다 전교조(全敎組)의 아내

우리는 쁘띠 아니냐고, 애새끼들은

어쩔거냐고, 일순 기차는

덜컹대고 그 틈에

핑 돌던 것이 흩뿌려

차창 밖에 비가 내린다 그러나

아내여 어차피 자본주의에서

최고의 사랑은 계급동맹이다

덜컹대며 기차는 달리고

세상은 영화처럼

차창 밖에 있지 않다

자유는 자급 자족에 있지 않고

평화는 농촌 풍경에 있지 않고

사랑은 차창 밖에 있지 않다

오늘밤 우리가 이렇게 엄청난

몸과 몸을 섞듯이

몸을 섞으며 덜컹덜컹 달리듯이

 

 

 

취발이

김정환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대 슬픔도 한숨도 다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제 내 곁에 돌아와

아직도 차마 두 눈 감지 못하는 그대여

그대가 떨며 은밀히 키워온 그대 몸 속의 치명적인 씨앗에 바치는

그대 슬픈 짓밟힘 앞에

그대 짓밟힌 육체의 화려함 앞에 바치는

나의 이 한 줄기 분노를

어찌 맨주먹으로 훔쳐내리고 서 있을 수밖에 없으랴

못 견뎌 저승에서 끝내 살아온 듯만 싶게

부석한 얼굴 밤새 뜬눈으로 돌아와

아직 내 곁에서 무너져내리지 못하는 그대여

그대여 또한 그대가 내 품에서 두 눈 부릅뜬 상처로

나의 무딘 가슴 방망이질할 때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대의 절망도 비참도 남은 몸짓도

다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혼자서

나는 그대 눈물의 끝장을 기다린다

또한 그대 몸 안의 숨은 부끄러움에 몸둘 바 모르는

나의 이 한 불꽃 분노를

어찌 눈물로 식혀낼 수밖에 없으랴

어찌 눈물로 재울 수밖에 없으랴

내 곁에 누운 것은 눈물이 아닌

분명한 그대의 몸이다

지울수 없게 살아 남은

뼈아픈 그대와 나

거대한 생명의 폭포수다

 

 

 

타는 봄날에

김정환

 

타는 봄날에

가랑비나 기다릴 일이 아니다

아니다 가랑비는 적셔주지 못한다

힘없는 눈물일 뿐, 힘없는 사랑일 뿐

적셔주지 못한다 빼앗긴 대지의 한을

그래도 오늘 이렇게 내리는

가랑비여 저 힘없는 사람들을 보아라

청계천 어물시장에서, 걸찍한 욕지거리 속에서

네가 베푸는 아주 사소한 사랑 속에서

가난한 얼굴들이 갑자기 눈동자 반짝이는 것 보아라

기름 묻은 근육에 핏줄 불끈불끈 솟는 것 보아라

타는 봄날에

가랑비나 기다릴 일이 아니다

아니다 다만 가랑비는

가랑가랑 내려서

아스팔트에 깔려 들끓던 수많은 것들이

이제사 다시 설운 김을 내뿜고

설움이 모여 사랑이 되고 사랑이 모여서

분노가 되고

우리는 애국가라도 부르며 일송정 부르며

우리는 우리의 맺힌 한을 모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맺힌 사랑을 키워야 한다

 

 

 

탄생의 노래

김정환

 

나는 쭈그리고 있었다

색깔도 땀도 없는 사타구니 밑으로 미열(微熱)의 이마

나는 아무 냄새도 맡지 못했다

사람들이 나를 격려했지만

그들은 이미 별이 된, 깜깜한 우주의 일부분이었다

(그들의 웃음은 음흉해 보였다)

나는 쭈그리고 있었다

다 자란 기성복과 발보다 큰 구두를 신고

나는 헐벗지 않았지만

모든 건 아직 끝인 것처럼 보였다 그때―네가 왔다

처음은 여린 핏줄의 통증으로

그리고 온몸에 번지는 뜨거움으로

너는 수동적이었지만

끈끈했던 탯줄의 입김은 아직 내 덜미에, 너는 소근거렸지만

소근거림이 내 굽어진 척추신경을 타고 내려가

나는 소스라쳤다, 온몸을 펴면서

몸에 걸쳐진 것이 너무 무거웠으나

나는 피묻은 우주 속에서 내가 사는 동네를 찾아냈고

내가 살 수 있는 집을 찾아냈고

내가 사랑할 수 있는

아니 결코 양보할 수 없는 내 사랑의 영역을 금그을 수 있었다

그것은 너와

네가 그 설움의 문이 되는 것들, 그러나

이제는 네가 다시 웅크리려 한다

이제는 네가 다시 거부하려 한다

좀 더 헐벗고

좀 더 자유롭기 위해서

나는 헛된 목숨을 버려 끈질긴 생애를 얻었다

괴로움과 싸움과 더러움과 일상의 생애.

그러나 그것은 너와

네가 그 불멸성의 문이 되는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을 위해서

 

 

 

티스푼

김정환

 

티스푼은

접시 위에 앙증맞게 있어요

티스푼은

홀로 한 개가 있는 적이 없어요

작고 강하고 예쁜

티스푼은

맞은편이 있다는 소리거든요

그렇지 않으면

그렇게 작고 강하고

예쁠 수가 없어요

티스푼은

그때까지 쌓여온 모든 생애가

무척 아팠다는 소리거든요

소리가 굳어 단단한

티스푼이 되었다는 소리거든요

앞으로 우리 사랑도

티스푼과 티스푼 사이

그렇게 작고 강하고 예쁜

소리로 남을 것이거든요

 

 

 

포옹

김정환

 

그대 보이지 않고 내 얼굴이 찢어지지

않으려 기를 쓴다. 찻잔, 누가 벌써 부서진

찻잔을 추스린다.

투명한 몸이 더 투명한 몸 속으로

떠나는 이여. 발자국도 보인다.

몇 그루 헐벗은 나무들도 보인다

그것에 생애 전체가 흔들린다.

눈물을 벗고는 네게 갈 수가 없다.

어둠은 미리 전등불 켜진 지상으로 내리고

발등을 적시는 울컥, 종소리.

아름다운 이여 눈물의 표정을 닮은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비수(匕首)를, 품나니.

 

 

 

학림다방

김정환

 

그곳 사장은 사진작가고 그것 아니라도

그곳에 가면 나는 오래된 사진 속에 있는

것 같고 `오래된`과 `이미` 사이가 그렇게

멀리 떨어진 지 또한 오래된 것 같다. 낭독의

발견이라는 TV 심야프로가 있었다. 낭독은

이미 오래전에 발견되지만 그 무대는

진행자가 너무 예쁘고 조명이 너무 화려해서

실연의 베토벤 만년 현악4중주

아다지오로로도 늘 창밖에

비가 내리는 듯한

느낌이 없었다.  비 내리는 옛날 영화

필름 얘기가

`아니지. ` 카메라 앵글 전체를 차지했지만

늘 빈 자리가 있을 것 같은

느낌이 없었다. 고독 얘기도

아니다. 앞서 간 자와 뒤에 올 자의

음악의 혈연 얘기다. 오래된 음악가의 오래된

4B 연필 초상들은 미래를, 탄노이 스피커는

과거를 향해 진지하고 정답다.

 

그렇군.

창 밖으로

옛 문리대 교정에 간신히 살아남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건물도 고색과 공무를 벗는

학림다방은 4B 연필이군.

 

광란의

젊은 시절을 이곳에서 보냈다는 사실이

정말 사실일까. 모든 것이 당연하고

당연한 것은 점잖고, 점잖은 것은

편안하다. 이곳에서 시작된

첫사랑의 서툰 단내는 사실일까. 이곳에서

가장 어색한 말은 시작이다. 그것은

목조계단이 늘 삐그덕거린다는 문장과

같은 뜻이다. 계단을 오르며 우리는 백 년 전

당인리 발전소를 짓던 시절의 등을 밟고

백 년 뒤 모든 것이 무사한

세계로 들어선다.

무사한 것이 정말 다행이야

죽은 자도 산 자도 실연의 자살도

자기 자리에 앉아

정말 다행인 추억의

안식과 안식의

미래 속으로 발을 들여 놓는다.

 

파란만장은 없다 파란만장의

목적지가 이미 있을 뿐이다.

 

6.25 이전에도 학림다방은

그랬을 것 같은 느낌이다.

 

1975년 유신헌법의 와중

문리대는 관악산 서울대학교

허허벌판으로 옮겼고 반체제

시위는 박정희 의도와 달리

황량해졌을 뿐 줄지 않았다.

학림다방은 남았다.

 

잘 한 것 같은 느낌이다.

여러 차례 주인이 장르별로 바뀌다가

사진작가가 맡은 지 10년이 넘는다.

잘 된 것 같은 느낌이다.

 

 

 

한강

김정환

 

어제 억수처럼 비 내리고 나는 한강에 나갔었다

비 내려도 한강은 아직 온통 말라 갈라진 터진 입술 젖가슴 흩어진

시선으로 한강은 이부자리를 채 개지 않은 채

어지럽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어제 비 내리고 그래도 나는

붙잡고 늘어질 것이 누님의 치맛자락 밖에

없었다, 꿈이 깨지 않았나봐, 눈뜨면 한강은

온통 젖은 슬픔의 모습

늘어져 지친 하이얀 기나 긴

끈질김, 으시시, 떨리는, 오한이 들어, 아파요 누님?

그래, 토해도 토해도 속이 개운치를 않구나, 몸 속에 온통

꾸정물이 들어 있는 것 같아, 누님, 새벽인데요

누님, 충혈된 눈동자 같은 해가 꾸정물 배때기 위로 마구마구 솟아요

곤두 솟아오르는데요 누님,

누님, 누님? 누님!

 

새벽도 살내음이 비릿하고 상긋할까?

목숨의 냄새, 오염의 냄새, 살아감의 냄새, 버팅김의 냄새

새벽의 피도 차츰차츰 썩어가고 있을까, 그래도 목숨은 여전히

그 무엇보다도 찬란할까?

 

햇살 따라 일렁대는 은빛 잔물결

그곳에 황금빛 잉어떼 살고 있을까

 

신선한 야채장수가 강둑을 지나갔다

예비군이 지나갔다 생선장수가 강둑을 지나갔다

신선해지기 위하여

그들은 슬픔의 내장을 한강에 퍼질러 버렸다, 위대함이란

온갖 썩은 것들을

받아마신 역사였을까 썩어감의 역사 사람들은 그날그날을

근근이 살아갔고

한강은 토해내도 토해내도 꾸정물

새벽바람에 속이 울렁거렸다

어릴 적 예방주사를 맞던 뇌리처럼

자갈밭개울물흐르는소리마저얼어붙은한강

풀잎에바람스치는소리조차쇳내를풍기는한강

직할하천한강 두 개의 한강, 슬픔으로 내 키를 넘치는 한강,

신음소리로 말라붙어 내 발바닥을 핥는 한강

누님, 누님? 누님!

 

피를 보여주셔요 당신의 산 피 죽은 피

목숨을 보여드릴게요 저의 죽은 목숨 펄펄 산 목숨

핏소리의 신선함을 보여주셔요

목소리의 앙칼짐을 보여주셔요

앙칼짐 속에 갇힌

빼앗긴 굶주림의 목소리를 보여주셔요

 

그래, 누님의 눈물 속에는

참고 견뎌온 오욕의 역사가 잠겨 있었는데

햇님은 반짝

병아리는 짹짹

나는 왜 거기에 내 하찮은 슬픔만 보탰던 것일까

그래, 누님의 눈물 속에는

견딜 수 없는 아픔이 아픔만으로 견디며

아직도 잠겨들고 있는 중이었는데

왜 나는 하찮은 눈물 글썽임 따위로

온 세상을 뒤흔들려고 했던 것일까 슬픔의 수위가 차오를수록

비명소리는 낮게 무겁게 내려 쌓이고

살기랄까 어떤 복수심 같은 거

아니면

후회랄까 어떤 죽음 같은 거

어떤 돌이킬 수 없음의 힘없는 아름다움 같은 거

 

얘야 얘야 내가 몸이 성치를 않구나

내가 어서 일어나야 할 텐데

일어서서

이 모든 아비규환의 동란의 비명소리만이라도 네게 들려줘야 할 텐데

지금은 보이지 않는 들리지 않는

내 하이얀 광란의 배에 잉태된

사랑의 더러움의, 더러움의 구원의

구원의 앙칼짐의

굶주림의 비명의 칼날의

사랑소리. 학살소리. 아아 다시 살아나는 소리.

 

 

 

해방서시(序詩)

김정환

 

우리는 대대로

푸르디푸른 하늘만을 섬기며 살고 싶었습니다

날새면 해 노래 들판에서 평야 노래 호미 씻으며 호미 노래

우리는 대대로

휜옷에 흙 묻히고 맨발로 사는 순박한 백의민족이고 싶었습니다

봄이면 모심기 노래 가을이면 추수 노래 보름마다 달 노래

그러나 우리의 바다는 피바다

우리의 삶은 피 묻은 삶이었습니다

지금 우리들의 노래에는 살기가 묻어 있습니다

젖가슴 같은 어머니 대지 위로 침략의 창칼이 꽂히고

외국산 탱크가 가죽군화가 허리를 짓밟으며

마침내 도려냈습니다

땅에서 솟아나온 피가

우리의 억눌림과 흰옷과 빼앗김과 가난을 적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허리 잘린 한반도에서 피 묻은 목숨 다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다는 절대로 절대로 아닙니다

우리는 농토와 양식과 처자와 순결한 삶과

아름다운 추억마저 빼앗겼지만

억눌리면서 희망의지와

빼앗기면서 구원의지와

헐벗으면서 가난의 근육 불끈불끈 솟는 힘과

피묻어 처참하게 아름다운 흰옷을 얻은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외세의 침략에 맞서 싸우는 것은

더 이상 빼앗길 무엇이 있어서가 아니라

더 이상 억눌릴 무엇이 있어서가 아니라

더 이상 간직해야 할 무엇이 있어서가 아니라

버림받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싸우는 것만이 구원하는 길입니다

해방된 공동체를 위하여 통일을 위하여

우리는 이 두 동강난 한반도에서 피묻은 발 버팅겨 싸우며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땅에 밭갈고 씨뿌리며

이 땅을 우리 아픈 몸의 일부로 삼고

살면서 명심해야 합니다

싸우는 것만이 사랑하는 길입니다

탐욕과 학살의 비린 살점 묻은 쇠붙이 그 위에

물들어 썩은 제국주의의 세상천지이기 때문입니다

 

 

 

핵 반대 노래

김정환

 

그러나 우리는 살아 남는다

제3차 세계대전 핵폭탄이 터져도

그러나 우리는 살아 남는다

물집 생긴 살갗으로 포도송이로

뒤틀린 얼굴 두려운 눈빛 그러나 빙신같이 빙신같이 침흘리며 껴안는

사랑도 처절한 사랑, 그러나 좀더 구원인 사랑

외눈박이로 팔병신으로 앉은뱅이로 곱사등이로

사랑하리라 우리 헐벗은 마음으로 잿빛 허허벌판으로

사랑하리라 우리 헐벗은 몸으로 헐벗음으로

헐벗고 빼앗긴 자는 살아 남는다

 

강한 힘이 약한 힘을 쓰러뜨리는 저 백열의 하늘

아아 힘이 힘 스스로를 쓰러뜨리는 저 적열의 하늘

삽시간에, 온 천지가, 오 산천초목이, 뜨거움과, 목마름과, 헐벗음으로 바뀌고

그러나 죽어도 우리의 가난은 살아 남는다

그러나 죽어도 우리의 약함은 살아 남는다

그러나 죽어도 우리의 짓밟힘은 살아 남는다

 

발기발기 찢어진 살점 피눈물로 꿰매며

강한 자여 그대의 힘으로 우리의 약함을 없앤다고 생각하지 말라

힘이 쓰러뜨리는 것은 그대 스스로의 힘뿐

힘이 스스로 무너져 처참할 때

가장 헐벗은 자는 살아 남는다 강한 자여

힘으로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백두산에서 한라산까지

마침내 우리는 헐벗은 사람으로만 살아 남는다

 

아프리카 검붉은 핏줄 고통에 일그러진 얼굴로

아시아 굶주린 노동 파리한 얼굴로 강한 자여

힘으로 그대 향수 뿌린 탐욕의 얼굴을 숨길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그대도 마침내 살아남는 것은

살거죽 벗겨진 헐벗은 사람으로만 살아 남는다

 

강한 자여 그대의 뉘우침으로

짓밟는 자여 그대의 발바닥으로

빼앗는 자여 그대의 손아귀로

침략하는 자여 그대의 총칼로

가진 자여 그대 그 썩은 재물의 악취로

핵전쟁을 막으라 헐벗음을 막으라

 

 

 

호미씻이

김정환

 

씻어도 호밋날에는 묻어 있다 할배 얼굴이

육신 썩은 땅내음 이슬 묻은 풀내음

씻어도 호밋날에는 묻어 있다 검은 땀이

등덜미 터진 논밭 무쇠 근육 타는 해

씻어도 호밋날에는 묻어 있다 비린 살점이

붉은 피 묻은 곡식 죽창의 땅 적신 피

씻어도 호밋날에는 묻어 있다 산과 들판이

일과 밥과 자유와 평등과

씻어도 호밋날에는 묻어 있다 흙 가슴이

씻어도 호밋날에는 묻어 있다 눈물 콧물이

씻어도 호밋날에는 묻어 있다 우리들 미래가

 

내내 풍요롭도록

내내 즐거웁도록

다시는 빼앗기지 않도록

다시는 살륙 없도록

내내 평화롭도록

 

타는 해에 호미 씻어라 무쇠 근육에 호미 씻어라

솟는 살기에 호미 씻어라 죽은 얼굴에 호미 씻어라

빼앗긴 땅에 호미 씻어라 흙 가슴에 호미 씻어라

우리들 목숨 호미 씻어라 우리들 무기 호미 씻어라

 

 

 

홍은동에서

김정환

 

아무래도 이 축대는 무너져 내릴 것 같다

산의 허리를 빠수어서 바윗덩어리 양 옆으로 밀어붙인

밀어붙여 간신간신히 내놓은

이 길은 길이 아니다

배반이다 쌓아올려진 흙, 바위, 나무뿌리들은 출렁출렁 넘쳐

철책을 넘어 흘러내리고

흐른다는 것은 자세히 보면

살벌하고 뜨겁게 내리치는 함성

길은 다시 길이 되려고 외치고

이쪽 바위와 저쪽 바위가 만나 산산이 부서지는 함성으로

지체야 낮아도 좋다

못나도 좋다 한데 어울려 살 수만 있도록

만나게 해다오 껴안게 해다오 철책 사이로 수없이 양팔을 내어 흔들며

아무래도 이 축대는 무너져내릴 것 같다

한데 모여라 모여라 모여라 소리 어디선가 들리고

와르르 쿵쾅 우지끈  뚝딱

헐벗고 쫓겨난 것들이 끼리끼리 만나

서로를 파묻고 서로의 품에 파묻히는 소리 들리고

먼데서 부릅뜬 주먹이 부릅뜬 주먹을 만나는

주먹의 아비규환의 사랑소리도 들리고

아무래도 이 축대는 무너져내릴 것 같다

흐른다는 것은 자세히 보면

무섭고 아찔한 저 꼭대기

낭떠러지 산사태인데

아무래도 아무래도 이 축대는

 

 

 

환상적인 몸

김정환

 

내가 아는 가장 우스꽝스러운 것

가운데 하나가 백지다.

백지가 공간 아니라 물질이다.

씻김과 무관해 보인다.

아무 것도 씌어지지 않은, 혹시

슬픔에 대해 백지 자신이 그리 무심할 수가 없다.

아무것도 씌어질 수 없는, 혹시 절망에 대해서도

그리 느긋할 수가 없다.

닥나무도 아닌 식물성 섬유 결이 인간 표정을

인간 표정이 그 결을 닮는 과정이 보이지 않는

과정의 표정이 무수하다.

비극과 희극 사이 백지 한장 차이라는 것보다 더

문명이 운명인 인간과 운명이 문명인 자연 사이

백지 한장이라는 거다.

너무 멀쩡해서 더욱 우스꽝스러운 우스꽝이다.

뭔가 버티는, 완강한 것들만 슬픔이라는 거지.

모든 색깔의 합이 검정이라는

소리까지 우스꽝스럽다. 백지에서.

그 우스꽝의 국적을 우리가 고전이라고 부른다

환상적인 몸이라고도 부른다.

 

 

 

휴식 노래                                         

김정환

 

밤은 언제나 술렁거린다

생계비 키를 넘고 임금은 오르지 않는

노동자들의 밤

밤은 언제나 술렁거리고

뼈가 시린 추운 날씨 솟구치는 고향생각

쉴 새 없는 기아수출 야간작업 특별잔업

하여 밤은 언제나 술렁거린다

백열등 밑에서 헝겊더미 속에서

힘을 내라 흥부야 착한 흥부야

노동자들의 밤은 언제나 술렁거린다

재봉틀에 손마디 문드러지는 달밝은 밤

졸림과 절망과 깜깜함의 밤이 지나면

피흘려 싸우는 나라, 태양의 세상이 온다

그때는 눈부신 노동으로 온다

그때는 우리 그 착한 눈물과 땀과 피

그 황홀한 얼룩짐 밟으며 온다

밤은 언제나 술렁거린다

집채만한 파도처럼, 산더미만한 해일처럼

 

 

 

흐린 날

김정환

 

날이 흐리고 봐, 흐린 눈에 세상이 혹시 기죽은 것처럼 보였다면 두 번 속은 거야 세상은 봐, 독버섯처럼 잔뜩 흐리고 성나 있다구 눈먼 껄떡쇠가 따로 없지 흐린 날 세상을 사랑하는 자의 눈은 더 흐려지기 때문야 흐린 날 세상을 측은하게 여기지 마 몰매 맞기 십상이야 하물며 꿈은 뚝뚝 젖어서 흐린 날보다 먼저 땅으로 떨어지기 십상이야 뚝 그쳐 정신 똑바로 차려 슬픔은 사로잡을 뿐이거든 사로잡힌 네가 들어 있는 세상은 얼마나 멀쩡하다구 ## 세상은 얼마나 멀쩡하다구 네 앞에서만 흐린 척 하는 거라구 하루

 

 

 

희망

김정환

 

전철 들어온다 희망역

철길 한가운데 길안내 파란 불 하나

서 있고 아, 짓뭉개도 도착하는 거대한

속도 속에 파란 불 지워지지 않는다 그래,

희망은 끊어진 것은 단지 다시 잇는 게

아니라서 이토록 발뒤꿈치 무겁고 아픈

희망역 플랫폼 절망은 쏜살같이 지나가고

시시닥거리고 앞날을 예언하지만 이마를

때리는 것은 새로운 희망이라서 무거운

걸 거야 길안내 파란 불 하나 이제 이젠 정지해

있지 않고 의도하지 않아도 희망은 오고

오는 희망과 그 뒤의 희망 사이 파란 불

아, 너무 벅차서 절망의 꼬리 보이지 않는다

 

 

 

희망의 나이

김정환

 

이제 알지 계단은 오를 때보다

내릴 때 더 힘이 든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열광이 식는다 역사가

계단이어서가 아니다 오르막이

있었다면 이토록 숨차지 않으리라

물려주어야 할 무게 때문이다

고층건물도 뒤집어보면 계단이다

네가 따르고 네가 앞서간다

 

 

 

4. 19

김정환

 

살다 보면 오는구나 이런 날이 다시

어둠 뚫고 백일하에 드러난 기나긴 행렬에 섞여

내 등어리는 쏟아져 내리는 자유에 흠뻑 젖는다

진압대는 페퍼포그를 마구 쏘아 대고

우리를 포위하고 밀고 밀리고

그러나 밀려도 밀려도 밀려날 수 없는

외침이 이리 길구나 짓밟혀 세멘바닥에 코피를 쏟으며

한없이 쓰러지면서 분단된 나라 그래도 푸른 하늘 치솟아

그래도 그래도 한결같은 자유의 행렬이 이리 길구나

찢겨진 맨살이 드러난 어깻죽지를 맞잡고

우는 것은 몽둥이에 맞아 터진 내 얼굴 아니라

우는 것은 구둣발에 짓밟혀 찢어진 내 귓창, 네 입술 아니라

조국이다 부모형제다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것 지금은 너무도 멀리 있는

지금은 숨죽여 흐느끼고 있는

상처투성이 우리의 나라

진압대는 페퍼포그를 쏘아대고 마구 포위하고

닥치는 대로 우리의 성난 가슴을 두드려댄다

비여 비여 백일하에 쏟아지는 해방이여 우리의 기쁨이여

쓰러지고 또 일어서리라 짓밟히고 또 부둥켜안으리라

비는 억수로 내리고 마구 흩어지는 대열 흔들리지 않게

하나가 되자 노래 속에서 앞서서 가노니 외침 속에서

쓰러진 자 일으키며 땅을 치며 흩어졌던 봇물이 다시 줄기를 이루며

거세디거센 해일로 덮칠 때

아아 우리가 바라는 정의만큼은 이렇게 끝도 없이 외치고 싶다

우리가 바라는 통일만큼은 이렇게

백일하에 드러나 외치고 싶다

자유여 정의여 진리여 우리밑도 없이 끝도 없이

눈물 흐르는 춤을 추며 전진하리라

 

 

 

10월

김정환

 

우수수 낙엽진다 추억이 헐벗고

내 사랑 춥겠다 가슴이 더 좁았으면

좋겠어 그 속에서 내 사랑 춥겠다

겨울보다 더 춥지, 봐 떨어지는 것들이

지들끼리 두 손 호호 불고 있잖아

이상하지 가을은

가을옷이 없어 제 혼자

땅을 향해 내릴 뿐이지 사랑도

알몸으로 겨울을 맞아야 한다

봐, 눈물도 한꺼풀 벗겨진다

온기가 남은 것은 그리움뿐야

하지만 봐, 너를 만나는 것은

내가 너를 만나러 가는 것이고

시간이 흐르고 그 속에 네가

나를 만나러 오는 것이잖니

그 사이에 겨울이

다리처럼 놓여 있잖니

만남도 한꺼풀 벗겨진다

이별은 얇게 얼음 낀

개울에 지나지 않는다

 

 

 

11월

김정환

 

겨울도 고통을 넘어

이젠 준비해야 해

이젠 누구나

추위가 춥지 않고

혼자 있는 게 춥거든

겨울엔 누구나

절망 앞에 혼자다

봄은 오지 않을 때만 희망이었다

11월은

희망을 단련시키는 계절

1대1로

그리움과 대면해야 한다

나무들도 1대1로 있다

제 혼자 두 손을 부비는 연습

절망 뒤에 절망을 너머

절망의 역사를 견디는 연습

11월은 을씨년스런

공원이 있고 벌써 더 차가운

기다림이 1대1로 있다

 

 

 

2000-5

김정환

 

흩어짐의 線.

울음의 흔들림.

웃음의 깊이.

눈물의 표면장력.

이것이 나의 사랑노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