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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부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 제1장 상사별곡(相思別曲)

6부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 1장 상사별곡(相思別曲)

 

1568년 선조 원년 춘 3.

도산서당 정문 앞에 행색이 남루한 노인 하나가 이제 막 도착하여 문 안을 이리저리 기웃거리며 서 있었다. 아직 초봄이라곤 하지만 한기가 가시지 않은 쌀쌀한 날씨임에도 노인의 이마에 땀이 배어 있었고, 피로한 기색이 역력하였다.

허리에 메고 있는 걸망에는 해질 때 갈아 신을 짚신이 대롱대롱 매어 달려 있는 것으로 보아 먼 길을 내쳐 걸어온 모양이었다.

정오가 지나고 어느덧 짧은 해가 뉘엿뉘엿 기울어가고 있었다.

이 무렵 도산서당은 이퇴계가 완전히 퇴거계상(退居溪上)하여 살고 있었던 은둔처였다. 단양과 풍기군수를 끝으로 고향으로 돌아온 퇴계는 고향에 계상서당을 지어서 제자들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계당시대는 10여 년간 계속되었는데, 청년 이율곡이 스승 퇴계를 만나러 와서 23일의 운명적인 상봉을 하였던 바로 그곳이었다. 그러나 계당은 좁고 허술하였으므로 제자들을 가르치는데 적당치 않았으므로 퇴계는 그의 나이 57세 되던 1557년 도산 남쪽 기슭에 서당을 새로 짓기로 결심하였던 것이다.

여기는 작은 골짜기가 있어 앞으로 산과 물을 굽어보고 있고 골짜기 속은 깊숙하고 넓으며 바위기슭이 선명하고 돌우물의 물이 감미로워서 머물러 살기에 아주 적당한 곳이다.”

퇴계 스스로가 쓴 도산기에 나와 있는 묘사 그대로 머물러 살기에 아주 적당한 땅을 발견한 퇴계는 그 안에서 밭농사를 짓고 사는 농부가 있어 대금을 치르고 사서 토지를 확보한 후’ 15583월 도산서당을 짓기 시작하는 착공식을 거행하였던 것이다.

서당을 짓는 일은 퇴계 집안의 종택으로부터 서쪽으로 4지점에 자리 잡고 있는 용수사라는 절의 법연스님이 도맡아 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사이 퇴계는 잠시 명종에게 불려 한양에서 공조판서라는 중책을 제수하고 있었는데, 퇴계는 그동안에도 법연에게 서당의 설계도를 그려 보이는 등 서당의 건립에 온갖 정성을 쏟아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서당을 맡아 짓던 법연은 1년 만에 입적하고, 뒤를 이어 역시 용수사에 있던 정일 스님이 뒤를 이어 공사를 이끌어가게 되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신유년(1561)에 이르는 5년 동안 서당인 도산과 살림집인 농운정사 두 집이 대강 이루어져 퇴계는 마침내 평생소원이었던 자신의 서원을 얻을 수가 있었던 것이었다.

퇴계는 온 식구들을 이끌고 정사로 이주하였으며, 그의 가문을 비롯하여 모든 제자들이 머물면서 공부하는 대학사(大學舍)를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때의 즐거움은 퇴계가 지은 도산서당이란 시에 다음과 같이 묘사되고 있다.

순임금은 그릇을 구우면서 즐겁고 편안했고,

도연명은 농사를 지으면서 즐거운 얼굴이었네.

성현의 마음을 내 어찌 알겠냐만

백발의 나이에 돌아와서 숨어 사는 즐거움을 맛보노라.”

스스로 노래하였던 대로 퇴계가 꿈에 그리던 도산서당으로 돌아와 숨어사는 즐거움을 맛보게 된 것은 그의 나이 61세 때의 일이었다.

문 안을 기웃거리던 노인은 문 위에 내걸린 도산서당이란 편액글씨를 발견하자 비로소 마음이 놓인 듯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마침내 제대로 찾아와 마음이 놓이긴 했지만 서당이라면 분명히 글 배우는 소리가 문 안에서부터 들려올 것이고, 오가는 서생들의 인기척 소리도 들려와야 하지만 서당 앞뜨락은 왠지 빈 절간처럼 적적하고 적요하였다.

그 순간 노인은 무엇을 발견한 듯 천천히 지친 걸음을 움직였다. 마당 한구석에 돌로 쌓은 우물이 있었다. 우물 앞에는 화강석이 우뚝 서 있었는데, 그곳에는 다음과 같은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洌井

직역을 하면 맑은 우물이란 뜻으로 그런 이름을 지어주고 돌우물 앞에 이름을 새긴 화강석을 세운 것도 퇴계 자신이었다.

퇴계가 10년 동안의 계당을 버리고 도산서원을 짓기로 결심하고 남쪽 기슭에 터를 점지한 것도 바로 이 돌우물 때문이 아니었던가. ‘도산기에서 퇴계가 돌우물의 물이 감미로워 머물러 살기에 아주 적당한 곳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보면 퇴계가 얼마나 이 샘물에 심취되어 있었던가를 미뤄 짐작하게 하는 것이다.

아마도 이 우물은 퇴계가 터를 확보하기 전에 이곳에서 밭을 부쳐 먹던 농부가 사용하던 것으로 보여지는데, 퇴계는 이 샘을 만나 물의 진미를 비로소 알게 되었고, 또한 이름모를 우물은 퇴계를 만나 자신을 알아주고 이름을 붙여주는 은인을 얻었다고 생각함으로써 서로가 서로의 마음을 얻었다.’라는 인연을 맺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퇴계의 마음은 맑은 우물(洌井)’이란 시 속에 다음과 같이 나타나 있다.

서당의 남쪽

돌우물의 물은 달고 맑네.

천년 오랜 세월은 산안개 속에 묻혀 있었으니,

이제는 언제까지나 덮어 놓지를 말게나.

돌 사이 우물물이 너무 맑고 차가워 저 혼자 있어도 어찌 측은한 생각이 들 것인가.

세상으로부터 물러난 사람 여기 터 잡고 엎드려 사니,

한 바가지의 물로 샘과 내가 서로의 마음을 얻었구나.”

한갓 돌우물에 불과한 열정을 두고 서로 마음을 얻었다.’라고 노래한 퇴계의 마음은 일찍이 맹자가 진심장구상(盡心章句上)’ 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던 데서 비롯된다.

하고자 함이 있는 사람이 비유해 말하면 마치 우물을 파는 것과 비슷하다. 우물 파기를 아홉 길이나 파 내려갔다 하더라도 샘솟는 데까지 이르지 못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우물을 포기한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인 것이다(掘井九 而不及泉 猶爲棄井也).”

맹자의 이 말은 일찍이 공자가 자한(子罕)’편에서 학문하는 것을 비유하건대 산을 쌓아 올리는 것과 같다. 돌과 삼태기가 모자라는 데서 그만두었다면 그것은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다.’라고 가리킨 내용을 부언하여 설명하였던 것이다.

즉 우물을 깊이 파들어 가더라도 수맥(水脈)에 도달하기 전에 그친다면 그것은 우물을 포기한 것과 마찬가지라는 맹자의 가르침은 이 무렵 위기지학에 전념하고 있던 퇴계의 좌우명이었던 것이다.

퇴계가 특히 이 돌우물을 사랑하고, 그 샘물의 맛을 달고 맑다.’라고 극찬하고, ‘서로의 마음을 얻었다.’라고 노래하고 있는 것은 바로 맹자의 말처럼 자신의 학문이 아홉 길이나 팠으나 아직 수맥에 이르지 못하였으며, 남은 인생을 바로 이 돌우물이 위치한 도산서원에서 제자들을 가리키며 진리의 근원에 이를 때까지 여생을 거경 궁리할 것을 결심하는 단심가(丹心歌)였던 것이다.

분황(焚黃).

조선시대에 있었던 사후의식으로 죽은 사람에게 벼슬이 추증되면 조정에서 추증된 관직의 사령장과 황색 종이에 쓴 부본(副本)을 주는데, 이를 받은 사람은 추증된 선조에게 고하고 황색종이 부분을 그 자리에서 태우는 의식을 분황이라고 하였다.

퇴계는 이미 59세의 나이 때 이 분황 의식을 치렀었다.

넷째 형 해()가 사화에 휩쓸려 유배 도중에 장독으로 급사하게 되었으며, 훗날 조정으로부터 억울하게 죽어 사후에 벼슬을 받게 되었으므로 퇴계는 자신이 직접 분황의 제사를 올려 주었던 것이다.

그때 퇴계는 가장 사랑하였던 형 온계의 무덤에서 조정에서부터 내려온 황색 부본을 태우며 울면서 생각하였다.

이 종잇조각이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죽은 후에 정민공이란 시호가 내려지고 추증으로 대사헌감사란 벼슬이 내려진다 한들 그게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퇴계가 67세 때 명종이 승하하고 인산이 끝나기도 전에 고향으로 내려가서 여론이 분분하였음에도 끝내 이를 물리치고 서당에만 머물러 있었던 것은 이미 자신에게 내려지는 벼슬이 죽은 사람에 내려지는 분황에 불가하다는 자의식 때문이며, 여생 동안 진리의 원천인 수맥에 도달하기까지 계속 한 우물을 파겠다는 결심 때문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도 남아 있는 도산서원 앞마당에 있는 돌우물, ‘열정은 퇴계의 마음을 닦는 심경(心鏡)이었던 것이다.

노인은 돌우물 곁에 내려진 두레박을 천천히 들어 올려 우물 속으로 집어 던졌다.

첨벙바위틈을 뚫고 지표로 솟아오른 샘물의 깊이는 아득하였다. 두레박 가득 물을 담은 노인은 끈을 잡아당겼다.

이윽고 노인은 두레박에 입을 대고 벌컥벌컥 들이키기 시작하였다. 갈증이 해소된 듯 남은 두레박의 물로 손과 얼굴을 씻고 있는데, 갑자기 서당에서부터 인기척이 있었다.

갓 쓴 유생 하나가 서당 쪽으로부터 물동이를 들고 걸어오고 있었다. 아마도 마실 물을 떠갈 요량 같았다. 우물가에서 더러워진 손과 얼굴을 씻던 노인은 화들짝 놀라서 물러서며 물어 말하였다.

여기가 도산서당이 맞습니까.”

그렇습니다만.”

퇴계 선생님이 계시오신 서당이 맞습니까.”

그렇소이다.”

유생은 의심쩍은 눈빛으로 남루한 차림의 노인을 쳐다보면서 심드렁한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하오면

노인은 등에 메었던 걸망을 벗어 내려놓으며 말하였다.

퇴계 선생께오서 서당에 계시옵니까.”

무슨 일이오.”

유생은 우물 속에 두레박을 던져서 물을 길어 올리고 있었다. 두레박에 든 물을 물동이에 가득 채우면서 여전히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을 받았다.

한눈에 보아도 서당 안을 드나들 수 있는 선비도 아니고, 그렇다고 상놈도 아닌 중인의 행색을 하고 있었으나 선생의 안부를 물을 만한 위치의 사람은 더더욱 아니어서 유생의 말투는 자연 시비조로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나으리께 드릴 물건이 있어서 그러나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노인은 벗은 걸망에서 무엇인가를 꺼내어 우물가에 놓았다. 유생은 노인이 꺼낸 물건을 쳐다보았다.

그것은 분매였다. 그러나 얼핏 보기에도 그 매화는 여느 매화가 아니었다. 흔히 흰눈이 내리는 엄동설한에 피는 매화를 설중매(雪中梅)라고 하였고, 섣달에 피는 매화를 기우(奇友), 봄에 피는 매화를 고우(古友)라 하였는데, 노인이 꺼내놓은 매화는 고우 중의 으뜸인 백매(白梅)였던 것이다.

유생은 매화에 문외한이었으나 퇴계 선생이 유난히 매화를 사랑하여 평소에 매화를 매형(梅兄), 매선(梅仙)으로 의인화해 부르면서 하나의 인격체로 대접할 정도로 유난히 매화를 사랑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뿐인가.

스승께서는 서당 서동쪽에 절우사(節友社)의 단을 쌓고 솔, , 매화, 국화를 심고 이들과 함께 절의를 맹세하는 결사를 이루지 않았던가. 이때 스승은 다음과 같이 노래하지 않았던가.

솔과 국화는 도연명 뜰에서 대와 함께 셋이더니

매화형(梅兄)은 어이해서 참가 못 했던가.

나는 이제 넷과 함께 풍상계를 맺었으니,

곧은 절개 맑은 향기 가장 잘 알았다오.”

풍상계(風霜契). 문자 그대로 함께 바람과 서리를 견디는 결사를 맺은 스승 이퇴계. 스승은 이들 중에서 매화를 가장 사랑하여 매화를 형으로까지 부르고 있지 아니한가.

어디서 온 누가 보내는 물건이라고 여쭙는단 말이오.”

남루하기 짝이 없는 걸망에서 나온 화려한 분매를 보자 유생의 태도는 한결 누그러졌다.

그것은 일일이 말씀드리지 않더라도 나으리께서 이 분매를 받아보시면 자연 누가 보낸 것인가 알아보실 것이나이다. 쇤네는 이 우물가에서 기다리고 있겠나이다. 나으리께서 매화꽃을 받아보신 후 쇤네를 부르시면 들어가서 문안 인사를 여쭐 것이옵고, 부르시지 않으시오면 그대로 이 우물가에서 찬물이나 몇 잔 더 마시며 날이 저물기 전에 서둘러 돌아갈 것이나이다.”

알겠네.”

유생은 선뜻 한 손에는 물동이를 다른 한 손에는 노인으로부터 받은 분재를, 들어 올리며 대답하였다.

유생은 황급히 서당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방금 선생으로부터 열정의 물을 떠오라는 분부를 받고 물동이를 들고 서당 앞뜰로 나온 길이었다.

도산서당은 세 칸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중 중간의 한 칸인 완락재(玩樂齋)에 퇴계는 거처하고 있었다. 완락재 앞에는 여느 집의 대청마루와 같은 기능을 가진 암서헌(巖栖軒)이란 넓은 마루방이 있었다.

완락재란 이름은 퇴계가 주자의 명당실기에 나오는 생명이 다하도록 즐기며 감상하여도 싫증이 나지 않을 만하다.’라는 문장에서 취한 것이고, 몸소 제자를 가리키던 암서헌이란 마루방의 당호도 주자의 학문에 대한 자신을 오래도록 갖지 못하였더니 바위에 깃들어 살자 조그만 효험이라도 얻을 수 있었다.’라는 글에서 인용하여 온 것이었다.

퇴계는 언제나 완락재에 기거하며 학문을 연구하였고 암서헌에서는 제자들에게 학문을 가르쳤던 것이다.

지금은 휴식시간, 서당에 머물고 있는 제자들은 각자 자신의 숙소에 유하면서 바깥나들이를 삼가고 공부에 전념하고 있을 시간이었던 것이다.

완락재.

주자의 말처럼 생명이 다하도록 즐기며 감상하여도 싫증이 나지 않는 곳’, 주자 철학의 성실한 계승자이자 주자 철학의 가장 소중한 해석가였던 퇴계. 공자로부터 시작된 유가의 숲이 맹자와 주자를 거쳐 마침내 해동의 이퇴계에 의해서 성리학적 이치가 완성된 바로 그곳 완락재.

이 완락재에 대해서 퇴계는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공경을 주로 함은 의리를 길러 모으는 공력이 있네.

잃지도 억지도 기르지도 않는 이치를 차츰 통달하여 나가서

주렴계의 태극의 묘리를 깨우쳐 이르게 되니,

천년 이어내린 즐거움이 이와 같았음을 알겠노라.”

퇴계의 시속에 나오는 천년 이어 내린 즐거움’, 즉 천년 이어 내려온 유학의 정신을 바로 완락재에서 되새겨 퇴계는 바로 이곳에서 태극의 묘리를 깨우쳐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유생은 서당 서북편 부엌에 물동이를 놓아두고 방금 떠온 우물물을 종지에 담아 퇴계가 머무는 완락재로 다가갔다.

물을 떠왔습니다.”

퇴계는 서탁 위에 책을 놓고 안석을 벽에 세우고 비스듬히 몸을 기대고 앉아 있었다.

놓고 가거라.”

한번 독서에 열중하면 스승은 침식을 잊을 정도였다.

선생님

조금 전 노인으로부터 분매를 받아왔으므로 유생은 선뜻 물러서지 못하고 우물쭈물하였다.

무슨 일인가.”

웬 낯선 노인 하나가 선생님께 드릴 물건이 있다하여 가져왔나이다.”

그게 무엇이냐.”

바로 이것이나이다.”

유생은 분매를 조심스럽게 서탁 위에 올려놓았다.

서탁 위에 올려진 분매의 모습을 본 순간 퇴계의 입에서 작은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흰 매화꽃이 극채색(極彩色)의 요염을 드러내고 있었고, 또한 꽃들은 천진한 옥설(玉雪)향기를 뿜고 있었다. 매화불매향(梅花不賣香).

매화는 춥더라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라는 말은 퇴계가 매화를 가장 좋아하는 이유 중의 하나. 이 문장의 뜻을 통해 퇴계는 한평생 선비로서의 기개와 청빈을 지켜나갈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유생이 들고 온 매분에서는 낯익은 천향(天香)이 풍겨오고 있음이었다. 그 향기는 퇴계가 까마득히 잊었던 추억의 내음이었다.

언제였던가.

퇴계는 서탁 위에 놓인 매분을 쳐다보면서 생각하였다.

저 매화 꽃의 천향을 맡았던 적이 도대체 언제였던가.

그 순간 퇴계의 얼굴에 엷은 미소가 떠올랐다.

올해 퇴계의 나이는 68. 퇴계가 그 천향의 냄새를 맡았던 것은 까마득한 48세 때의 일이었으니 정확히 20년 전의 일이었던 것이다. 퇴계가 처음으로 매화의 향기와 같은 여인 향기를 맡은 것은 바로 두향(杜香)으로부터였던 것이다.

그때 두향의 나이는 18. 퇴계가 48세의 장년의 나이에서 어느덧 죽음을 바라보는 노년의 나이에 접어들었듯 두향이도 이제는 소녀의 나이에서 초로의 나이로 접어든 중년일 것이다.

퇴계는 알 수 있었다.

비록 화분에 심어진 분매이긴 하였지만 그 등걸은 기고(奇高)한 모습으로 용틀임 치고 있었다. 적어도 20년은 족히 되었을 매화 등걸이었다.

매화를 기르는 데에는 가지치기가 가장 중요한 것으로 가지치기에 따라서 매화의 모습이 고()하고, ()하고, 아름답게 보이는데, 그 요령으로 말하면 등걸은 드러나야 하고, 줄기는 구부러져야 하며, 가지는 성깃해야 하고, 꽃은 드문드문 붙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 특히 매화 중의 으뜸은 단연 백매지만 백매 중에서도 최고는 육화(六花)의 엽이 모두 흰눈처럼 새하얀 단엽(單葉)이 최고의 명품이었던 것이다.

평소에 매화를 좋아하는 퇴계로서도 그 꽃은 처음 보는 최고의 빙기옥골(氷肌玉骨)이었다.

문자 그대로 흰눈과 얼음 같은 살결과 옥과 같은 뼈대를 지닌 화괴(花魁)였던 것이다.

이런 매화를 가꿀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한 사람. 그것은 두향이뿐이었다.

두향이가 매화를 양매하는데 탁월한 솜씨를 지녔다는 것은 오늘날 두향의 묘비에 새겨진 다음과 같은 비문을 통해서도 잘 알 수 있지 않을 것인가.

성명은 두향. 중종조 시대의 사람이며, 단양태생. 특히 거문고에 능하고 난과 매화를 사랑하였으며, 퇴계 이황을 사모하였다.”

비문에 새겨진 대로 매화를 사랑하여 양매를 하는데 탁월한 재능을 지녔던 두향.

두향은 퇴계와 헤어진 20여 년 동안 오로지 임을 생각하는 상사(相思) 하나로 분매를 가꾸고, 가지 치고. 꽃을 피워 마침내 퇴계가 평생 동안 처음으로 볼 수 있는 아취고절(雅趣高節)의 매화 한그루를 이루어낸 것이다.

그 무렵 퇴계는 생과 사를 넘나드는 중병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 중병을 퇴계 자신은 극병(劇病)’으로 부르고 있을 정도였다.

또한 퇴계는 자신의 생애가 얼마 남지 않은 것으로 예감하고 있을 정도였다.

이런 퇴계의 심정은 퇴계 자신이 쓴 도산기(陶山記)’에 다음과 같이 나오고 있다.

신유년(辛酉年)에 이르기까지 5년 만에 당사 두 채가 다 이루어지니, 비로소 거처할 만하게 되었다. 당은 세 칸인데, 중간 한 칸은 완락재라고 부르고, 동쪽 한 칸은 암루헌이라고 부르며, 합해서 도산서당이라고 현판을 내붙였다.(중략)나는 오랜 병에 시달려 항상 앓고 있으므로 비록 산중에 살아도 마음껏 책을 읽지 못한다. 항상 속이 울적하고 숨을 조절하기 힘들다.

자신의 표현처럼 오랜 병에 시달려 항상 앓고 있었던 퇴계’.

그러한 퇴계에게 20여년 만에 두향이가 인편으로 붙여온 빙기옥골의 백매화분은 퇴계의 지친 심신을 쇠락하게 만드는 청량제(淸凉劑)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퇴계의 심정은 도산기에 다음과 같이 이어지고 있다.

때로 몸이 가뿐하고 정신이 상쾌해지는 때가 있다. 이럴 때에는 우주를 굽어보고 우러러보고 하면 감개가 저절로 생긴다. 그러면 곧 책을 던지고 지팡이를 짚고 나가서 난간에서 연못을 구경하기도 하고, 단에 올라 사()를 찾기도 하며, 혹은 밭을 돌면서 약초를 심기도 하고, 숲을 헤치며 꽃을 따기도 하며, 혹은 바위에 앉아 샘물을 희롱하기도 하고, 대에 올라 구름을 바라보기도 하며, 혹은 여울에서 고기를 구경하기도 하고, 배에서 갈매기와 친하기도 한다. 마음대로 걸어 다니며 시름없이 노닐다가 좋은 경치를 만나면 흥취가 저절로 일어나 한껏 즐긴다. 집에 돌아오면 고요한 방안에 책만이 벽에 쌓여 있고, 서탁 위에는 분매 한 그루가 놓여 있다. 책상을 마주하여 잠자코 앉아 마음을 휘어잡고 이치를 궁구한다. 이따금 얻는 것이 있으면 다시 반기어 흐뭇함에 음식도 잊어버린다. 혹 틀린 것이 있으면 벗을 찾아 물어보고 그래도 알지 못하면 분발하여 속으로 생각하여 본다. 그러나 억지로 통하려 하지 않고 우선 한쪽에 밀쳐 두었다가 가끔 다시 끄집어내어 허심탄회하게 생각하며 저절로 깨달아지기를 기다린다. 오늘도 이러하고 내일도 이러하다. 산새가 즐겨 울고, 초목이 우거지고, 바람, 서리 차가워지고, 눈과 다리 싸늘하게 빛을 내니 사시(四時)의 경치 서로 다르고 흥취 또한 끝이 없다. 너무 춥거나 너무 덥거나 바람이 너무 불거나 비가 너무 오는 경우가 아니면 어느 때 어느 날 나가지 아니함이 없다. 나가면 이러하고 돌아오면 또 이러하다. 이것이 한가롭게 병을 조섭(調攝)하는 하염없는 일이다. 비록 옛사람의 대문 안을 들여다보지는 못하지만 스스로 마음속에 느껴지는 즐거움이 결코 얕지 않도다.”

비록 간략하게 집으로 돌아오면 고요한 방안에 책만이 벽에 쌓여 있고, 서탁 위에는 분매 한그루가 놓여있다.’라고 표현하고 있지만 서탁 위에 놓인 분매 한그루는 바로 두향이가 퇴계를 위해 보내온 정표이니, 퇴계가 비록 옛사람의 대문 안을 들여다보지는 못하지만 스스로 마음속에 느껴지는 즐거움이 결코 얕지 않도다.’라고 도산을 영탄(詠嘆)하는 것은 두향이가 보내온 분매가 뿜어대는 천향(天香) 때문이 아니었을까.

도대체

물끄러미 분매를 완상하던 퇴계가 한 곁에 물러서 있던 유생을 쳐다보며 말하였다.

누가 이 매화를 가져왔더란 말이냐.”

그러자 유생이 대답하였다.

웬 낯선 노인 하나가 선생님께 드릴 물건이 있다면서 걸망에서 꺼냈나이다.”

그 노인은 어디 있느냐. 이 매분만을 전해주고 떠나버렸느냐.”

아니옵니다.”

유생은 대답하였다.

아마도 서당 앞 우물가에서 기다리고 있을 것이나이다. 선생님께오서 매화꽃을 받아보신 후 자신을 부르시면 들어와서 문안 인사를 여쭐 것이고, 부르시지 않사오면 그대로 날이 저물기 전에 서둘러 돌아갈 것이라 하였나이다.”

그러면 어서 가서 그 노인을 들어오도록 하게나.”

퇴계가 고개를 끄덕이자 유생은 알았다는 듯 물러서며 대답하였다.

알겠나이다. 가서 노인을 불러 대령토록 하겠나이다.”

유생은 서둘러 완락재를 벗어났다.

그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선생은 서당에서 함께 기거하고 있는 제자들이나 문인을 빼어놓으면 찾아오는 손님을 만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실제로 퇴계언행록에 보면 제자 김성일은 스승 퇴계가 손님이 찾아오면 손님 앞에서 말을 하지 않고 침묵을 지켰다.’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퇴계가 문인이나 제자들을 제외하고 찾아오는 손님들 앞에서 침묵을 지켰던 것은 오로지 마음을 휘어잡고 이치를 궁구하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퇴계의 이러한 침묵은 마치 화두에 전념하기 위한 불교적 묵언(默言)을 연상시키는 것이었다.

그런 스승께서 남루하기 짝이 없는 낯선 노인을 손님 대접하여 직접 자신의 완락재로 부르고 있음이 아닌가.

과연 노인은 우물가에 앉아 있었다. 노인은 이제라도 먼 길을 떠나려는 채비를 갖추듯 신고 있던 헌 짚신을 버리고 새 짚신으로 갈아 신고 있었다.

뭐라고 하시던가요.”

유생이 나타나자 노인은 일어서면서 물어 말하였다.

선생님께오서 잠시 들어오시랍니다.”

순간 노인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내 그럴 줄 알았다 하는 식의 자신만만한 웃음이었다.

노인은 유생을 따라 서당 안으로 들어섰다.

서당 안 동쪽구석에 조그마한 연못 하나가 있었다. 아직 철이 아니어서 연꽃이 피어 있지 않았지만 퇴계가 직접 땅을 파서 만든 연못이었다.

정우당(淨友塘).

퇴계가 스스로 지은 시속에 조용히 떠나는 모습 가만히 생각하니 진실로 어려운 친구로다.’고 표현하였던 것처럼 청정한 벗인 연꽃을 상징하는 정우당. 그 연못가에 퇴계가 홀로 서 있었다.

퇴계를 보자 노인은 그 즉시 무릎을 꿇고 문안인사를 올리며 말하였다.

아이고 나으리,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뉘시온지

퇴계는 미천한 사람을 만나도 결코 라고 부르는 식의 하대를 하지 않았다. 심지어 젊은 제자들을 만나도 공대를 하곤 하였다. 그러자 노인이 황송하여 몸을 굽히며 말하였다.

나으리, 쇤네를 모르시겠나이까.”

퇴계는 물끄러미 노인을 바라보았다. 분명 알 것 같이 낯이 익긴 하였으나 가물가물하여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잘 생각이 나지 않소이다만

나으리

노인은 읍을 하며 대답하였다.

쇤네는 나으리께오서 일찍이 단양에 군수를 하시 올 때 이방으로 있던 자이나이다.”

순간 퇴계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떠올랐다. 노인의 말을 들은 순간 희미한 옛 기억이 떠올랐던 것이다. 20여 년 전 퇴계가 9개월 동안 단양의 군수로 재직하고 있을 무렵 퇴계를 도와 인사와 비서 노릇을 하던 이방 아전이었던 것이다.

그대의 이름이 여삼이가 아니었던가.”

그렇습니다, 나으리. 나으리께오서 쇤네의 이름까지 아직 기억해 주시다니요.”

그뿐인가. 그대는 나에게 삼베까지 주려하지 않았던가.”

퇴계의 말은 사실이었다.

퇴계가 20여 년 전 명종 410, 단양군수를 사직하고 이웃한 풍기로 전근 가기 위해서 죽령고개를 넘고 있을 때 퇴계가 탄 가마를 관졸들이 헐레벌떡 쫓아왔었다. 그중에 앞장을 선 사람이 이방 여삼이었던 것이다.

그때 여삼은 손에 다발을 들고 뛰어오지 않았던가. ‘무슨 일이냐.’고 퇴계가 묻자 이방이 나서서 나으리, 이것은 삼베를 짜는 삼이옵니다. 이것은 아전에서 거둔 것인데, 퇴임하는 사또께서 노자로 쓰기로 전례가 되어 있어 가져온 것이기에 바칩니다.’하고 삼베다발을 내어 밀지 않았던가.

아전이란 관청에 딸린 밭으로 동원 근처에서 심은 삼이었던 것이다.

아전은 국가의 토지인 만큼 대부분 관아에서 사용하는 비용이나 특히 사또의 개인사비로 충당하는 관례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관례에 따라 이방을 앞세운 군졸들이 삼베를 거두어 퇴임하는 퇴계에게 가져온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퇴계는 이방이 가져왔던 삼다발을 단호하게 물리치지 아니하였던가. 이덕홍(李德弘)이 기록한 퇴계언행록에는 퇴계의 행동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그러자 선생은 내가 명령한 것도 아닌데 왜 그것을 가져왔느냐.’하고 물리치셨다.”

이를 퇴계는 20여년이 흘렀으나 노인의 행동거지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들어오시게나.”

퇴계는 노인을 완락재로 불러들였다. 그러잖아도 유생이 가져온 분매를 본 순간 퇴계는 그 매화꽃이 두향이가 보낸 것임을 꿰뚫어 보고 있었는데, 단양에서 온 아전을 확인하자 퇴계는 정확하게 전후 사정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정좌하여 앉고서도 퇴계는 한참을 말이 없었다. 유생이 떠온 열정의 우물물을 말없이 들이켜던 퇴계가 오랜 침묵 끝에 입을 열어 말하였다.

그래 언제 단양을 떠났는가.”

이틀 전에 떠났사옵니다.”

단양에서 안동까지의 거리는 200여 리. 도중에 소백산을 넘고 죽령의 고갯마루를 넘는 험준한 태산준령의 연속이었다. 이틀 만에 도착하였다는 것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먼 길을 내쳐 달려왔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쇤네가 나으리를 뵙기 위해서 불원천리하고 안동까지 달려온 것은 다름 아닌 두향 아씨의 청원 때문이었나이다.”

노인은 낮은 목소리로 먼저 말을 꺼냈다. 비로소 노인의 입에서 두향의 이름이 흘러나왔지만 퇴계는 묵묵부답, 아무런 대답 없이 물끄러미 서탁 위에 놓인 두향이가 보낸 매분을 바라볼 뿐이었다.

나으리께오서 단양을 떠나시자마자 두향 아씨는 신임 사또의 관아를 찾아가서 기적에서 빼어 달라 소청을 하시었고, 이것이 받아들여져 두향 아씨는 면천을 받아 관기에서 벗어나 상민이 되셨나이다.”

예부터 조선의 선비들은 구구소한도(九九消寒圖)’란 그림을 벽에 붙여두고 봄을 기다리곤 하였다.

동지로부터 날짜를 세기 시작하여 81일간이 구구에 해당하는 것이다. 흰 매화 81개를 그려놓고 매일 한 봉오리씩 붉은색을 칠하여 81일째가 되면 백매가 모두 홍매로 변하는 그림으로 이때가 대충 310일 무렵이 되는 것이다.

퇴계가 두향으로부터 받은 분매가 도착하는 것이 바로 그 무렵. 즉 두향이가 보낸 매화꽃과 더불어 입춘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입춘방(立春榜).

두향이가 보낸 20년 기른 고매는 그해의 봄을 알리는 일지춘심(一枝春心)이었던 것이다.

나으리

노인은 다시 말을 이었다.

두향 아씨는 기적에서 면천되자마자 강선대가 눈 아래 굽어 보이는 적성산 기슭에 조그만 초당을 짓고 그곳에서 종신 수절하고 계시나이다.”

강선대(降仙臺).

문자 그대로 신선이 내려와 노니는 바위.

노인의 입에서 강선대란 말이 나오자 시종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던 퇴계의 주름진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단양 제일의 절경 옥순봉(玉筍峰).

희고 푸른 암석봉 천여 척이 죽순 모양으로 우뚝 솟아올라 신묘한 형상을 하고 있는 단양팔경의 제1. 특히 단양의 풍광을 사랑하여 단양산수기란 기행문을 쓴 퇴계는 다음과 같이 옥순봉을 노래하고 있다.

구담봉에서 여울을 거슬러나가다가 남쪽 언덕을 따라가면 절벽 아래에 이른다. 그 위에 여러 봉우리가 깎은 듯이 서 있는데, 높이가 가히 천길 백길이 되는 죽순과 같은 바위가 솟아있어 하늘을 버티고 있다. 그 빛이 혹은 푸르고 혹은 희어 푸른 등나무 같은 고목이 아득하게 침침하여 우러러볼 수는 있어도 만져볼 수는 없다. 이름을 죽순봉이라 이름 지은 것도 그 모양 때문이다.”

불과 9개월의 짧은 재임 기간이었지만 희고 푸른 암벽이 비온 뒤에 죽순처럼 솟은 것 같다하여 퇴계가 직접 이름 지어 부른 옥순봉. 그 옥순봉이 마주 보이는 적성산 기슭에 있는 넓은 바위 강선대. 그 강선대야말로 퇴계와 두향이가 함께 술을 마시고 거문고를 타며 신선처럼 놀던 사랑의 바위가 아니었던가.

강선대가 굽어 보이는 곳에 초막을 짓고 종신 수절하고 있는 두향. 그 두향이가 오매불망하여 20여 년 동안 키운 매화꽃을 상사의 정표로 퇴계에게 보내온 것이었다.

조그만 움막을 짓고 그곳에서 홀로 수절하고 계시옵기에 쇤네도 그동안 어찌 지내시온지 통 몰랐사온데, 며칠 전 사람을 보내어 두향 아씨가 저를 찾으셨나이다. 뵈었더니 수고스럽지만 나으리께 이 분매를 전해 드려달라고 부탁하셨나이다. 쇤네 역시 나으리를 뵙고 싶은 마음 간절하던 차에 쾌히 승낙하고 이처럼 내쳐 달려왔나이다.”

잘하셨네.”

퇴계는 짧게 대답하였다.

주로 노인 혼자 말하고 노인 혼자 대답하는 형식이었지만 퇴계는 귀 기울여 경청하고 있었다. 퇴계의 눈치를 살피던 노인은 그제서야 생각난 듯 걸망 속에서 다시 물건을 꺼내며 말하였다.

그러고 나서 두향 아씨는 나으리께 분매와는 따로 다른 물건도 보내셨나이다. 아씨께오서는 나으리를 뵙지 못하면 분매만 전해드리고 오라고 말씀하시옵고, 혹여 친견하게 되면 따로 이 물건을 전해드리라고 하셨사온대, 황공하게도 나으리께서 이 천한 쇤네를 마다하지 않으시고 친히 맞아들여 주시매 두향 아씨로부터 받은 다른 물건을 전해드리게 되었나이다.”

노인은 걸망에서 꺼낸 물건을 두 손으로 퇴계에게 바쳐 올렸다.

노인의 손에는 접은 편지 하나가 들려 있었다. 안에 편지내용이 들어있는 태봉투(苔封套)였다.

태봉투는 편지지인 주지(周紙)를 넣어 봉한 서통(書筒)으로 남이 볼 수 없고 오직 당사자만이 뜯어 읽어볼 수 있는 친전(親展)의 의미를 담고 있었다.

놓고 가거라.”

퇴계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언제 단양으로 돌아가려 하는가.”

이제 나으리께 두향 아씨로부터 받은 모든 물건을 전해 드렸으니, 당장이라도 밤을 도와 돌아가려 하나이다.”

벌써 날이 저물었다.”

퇴계는 창밖을 내다보며 말하였다. 이미 뉘엿뉘엿 기울던 햇살은 저물어 곧 땅거미가 스며드는 저녁녘이었다.

하룻밤 자고 내일 아침 날이 밝으면 떠나시게나.”

마침 완락재 옆에는 작은 쪽방이 하나 있었다.

서당을 지을 때 대목수 역할을 맡아 하던 정일 스님이 머무르던 당직실이기도 하였다.

그곳에는 작은 부엌 아궁이가 하나 있었는데, 이는 취사용이 아니라 난방용 공간이었다. 몸이 쇠약하여 한여름에도 한기를 느끼는 퇴계를 위해 장작 같은 것을 쌓아두었다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곳이었다. 아궁이에 불을 때면 자연 완락재의 방바닥에 온기가 전달될 수 있도록 설계된 작은 쪽실이었다. 유생을 불러 노인을 그곳에서 하룻밤 유하도록 하게 한 후 퇴계는 묵묵히 완락재에 홀로 앉아 있었다.

서탁 위에는 노인으로부터 전해 받은 두향의 편지가 있었으나 퇴계는 피봉을 뜯지 않고 여전히 묵묵히 매분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퇴계는 평생 동안 매화를 사랑해오고 있었다. 이러한 퇴계의 매화사랑은 북송시대의 학자 임포(林逋)를 마음 깊이 사숙하고 있었던 영향 때문이기도 했었다.

임포는 서호(西湖) 고산(孤山)에 은거하면서 20여 년간 산을 내려오지 않고 일생을 독신으로 지냈으며, 오직 학을 사육하고 매화를 완상하면서 살았다.

매화를 아내로 삼고, 학을 자식처럼 길렀으므로 매처학자(梅妻鶴子)’라고 불렸다. 후세사람들은 매처학자란 말로 청빈한 선비 생활을 비유하였는데, 이 무렵 퇴계야말로 아내도 없이 오직 매화를 사랑하는 매처학자의 삶을 살고 있었던 것이었다.

평소에 임포와 일치된 삶을 본받고자 했던 퇴계였으므로 평생 동안 75107수에 달하는 매화시를 썼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퇴계는 평소에 매화를 매형(梅兄), 매군(梅君), 매선(梅仙)으로 의인화해 부르면서 매화를 하나의 인격체로 대접할 정도로 사랑하였다.

그러므로 퇴계는 살아생전 매화시첩(梅花詩帖)’이란 매화를 노래한 시집까지 편찬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두향이가 보낸 매화야말로 퇴계가 지금까지 보았던 매화 중에 으뜸이었다.

매화꽃을 꺾고 책상 위에 두고 바라보기도 하고, 뜨락의 매화를 바라보고 매화와 서로 묻고 화답하는 문답시까지 읊었던 퇴계. 때로 매화를 형이라 부르면서 찾아온 문인들과 술잔을 나누기도 하고, 매화가 겨울 추위에 손상되었음을 슬퍼하는 애상(哀想)의 시를 읊기도 했으나 두향이가 보내온 매화야말로 임포가 아내로 삼았던 매처(梅妻) 그 자체였던 것이다.

매화를 노래한 임포의 대표적 시는 산원소매(山園小梅)’라는 작품이다. 임포는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모든 꽃이 떨어진 겨울에 매화만이 홀로 볕 받고 아름답게 피어서

온갖 풍정을 독차지하며 작은 정원을 향해 서 있으니

성긴 그림자는 비스듬히 맑고도 얕은 물에 비치고

은은히 풍기는 향기는 으스름 달빛 아래 떠돌고 있다.

서리 속의 저 새는 아래로 내려 오르다가 꽃인지 아닌지 의심스러워 조심스레 보고 있고

흰 나비가 만일 이 매화꽃 핀 사실을 안다면 (기막힌) 그 향기에 놀라 혼비백산할 것이다.

다행히도 이 몸은 가만히 시를 읊으며 매화와 서로 친해질 수 있으니

저 세속의 돈 많은 인간들의 박자 치는 악기와 금 술잔(金尊)이 어찌 필요하겠는가.”

매화를 노래한 임포의 이 시중에서도 절창은 성긴 그림자는 비스듬히 맑고도 얕은 물에 비치고 은은히 풍기는 향기는 으스름 달빛 아래 감돌고 있다(疎影橫斜水淸淺 暗香浮動月黃昏)’라는 구절. 이 유명한 구절은 인구에 널리 회자되었던 문장으로, 이로 인해 매화가 횡사(橫斜)’라고도 불렸던 것이다.

마침 어둠이 내려 완락재로 스며든 으스름 달빛은 서탁 위에 놓인, 두향이가 보낸 매화를 향해 비치고 있고 꽃에서 풍기고 있는 은은한 암향은 임포가 노래하였던 대로 흰 나비가 이 매화꽃 핀 사실을 안다면 기막힌 그 향기에 놀라 혼비백산할 정도로 온 방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순간 퇴계는 마시던 열정의 우물물을 분매에 가득 뿌려주었다. 두향이가 보내온 사랑의 정표 분매는 이로부터 퇴계에게 있어 매처(梅妻)가 되었다.

그날 밤.

퇴계는 그 매처를 바라보며 다음과 같은 시를 짓는다. 평생 동안 백수가 넘는 매화시를 썼던 퇴계였지만 그날 밤 지은 퇴계의 시는 다른 시와는 달리 연애 시처럼 느껴진다. 따라서 퇴계가 말년에 지은 이 시 한 수는 퇴계가 두향이를 그리워하며 지은 단 하나의 상사별곡(相思別曲)’이라고 불려지고 있는 것이다.

옛날 책 속에서 성현을 만나보며/비어 있는 방안에 초연히 앉아 있노라.

매화 핀 창가에 봄소식 다시 보니/거문고 대에 앉아 줄 끊겼다 탄식마라(黃券中間對聖賢 虛明一室坐超然 梅窓又見春消息 莫向瑤琴嘆絶絃).”

이 시의 내용 중 처음 두 행은 비어 있는 방 완락재에 앉아서 옛날 책을 읽으며 학문에 정진하고 있는 퇴계의 근황을 노래한 것이지만 뒤의 두 행은 비록 만나지는 못할지언정 함께 매화를 보고 거문고를 타면서 꿈같은 운우지정을 나눴던 아련한 옛 추억을 반추해 보는 사랑 노래가 아닐 것인가.

절현(絶絃).

퇴계의 시 속에 나오는 절현은 중국 전국시대 때 거문고의 명인 백아(佰牙)가 자기 거문고의 가락을 알아주던 벗 종자기(鐘子期)가 죽은 후에는 거문고의 줄을 끊고 다시는 거문고를 타지 않았다는 고사에서 비롯된 말.

두향은 퇴계와 헤어질 때 거문고의 줄을 절현함으로써 다시는 거문고를 타지 않겠다고 맹세하였으며, 또한 퇴계가 잘라준 저고리의 옷섶을 강선대 바위 밑에 파묻음으로써 퇴계를 위해 종신 수절할 것을 맹세하지 않았던가.

이처럼 두향에 대한 상사를 매화꽃과 암향에 빗대어 은근히 노래한 퇴계의 정취와는 달리 율곡은 보다 적극적이며 노골적이다.

율곡도 황해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해주에 있을 때인 38세 때, 관기로 있었던 유지(柳枝)라는 기생과 로맨스를 펼친다.

버들가지란 뜻을 가진 그 기생에 대해서 박종홍씨는 당시 28세로서 몸이 가냘프고 자색이 수려할 뿐 아니라 영리하며 귀엽고 매력이 있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또 한편으로 당시 유지는 아직 16세가 채 안 된 소녀였다고도 알려져 있다.

율곡은 자신이 만났던 유지에 대해서 48세 때인 15839, ‘()를 지어서 그 정()을 깨우쳐 주는 글이란 헌사를 남긴다.

기록의 원문은 율곡전서에 전해지지 않고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된, 율곡이 직접 쓴 원문의 내용으로만 남겨져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유지는 선비의 딸이다. 신분이 몰락하여 황주 기생으로 있더니, 내가 황해도 감사로 갔을 적에 어린 기녀로 수종 들었으니, 날씬한 몸매에 곱게 단장하여 얼굴은 맑고 두뇌는 영리하므로 내가 가련하게 여겼으나 처음부터 정욕의 뜻을 품은 것은 아니다. 그 뒤 내가 원접사(중국사신을 맞아들이는 벼슬)가 되어 평안도로 오고 갈 적에도 유지는 언제나 안방에 있었지만 일찍이 하루도 서로 몸을 가까이하지는 않았다. 계미년(癸未年,1583년 율곡의 나이 48) 가을, 내가 해주에서 황주로 누님을 뵈러 갈 때에도 유지를 데리고 여러 날 술잔을 함께 들었고, 해주로 돌아올 때에 그녀는 조용한 절까지 나를 따라와 전송해 주었다. 그리고 이별하였는데 내가 밤고지(황해도 재령) 강촌에 묵게 되었는데 밤에 어떤 이가 문을 두들기기로 나가 보니 그녀였다.마침내 불을 밝히고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 기생이란 다만 뜨내기 사내들의 정을 사랑하는 것이거늘 누가 도의를 사랑하는 자가 있을 줄 알 것이랴. 게다가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보고도 부끄럽게 여기지 아니하며 도리어 감복하는 것은 더욱 보기 어려운 일이다. 아깝다. 여자로서 천한 몸이 되어 고달프게 살아가다니 그래서 노래를 지어 사실을 적어 정에서 출발하여 예의에 그친 뜻을 알리는 것이니 보는 이들은 그렇게 짐작하시라.”

율곡 자신이 직접 쓴 글의 내용을 보면 유지라는 기생은 날씬한 몸매에 곱게 단장하여 얼굴은 맑고 두뇌는 영리하였던 미인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곡은 자신이 유지에게 정욕을 품지 않았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심지어 한적한 강촌에 묵게 되었을 때 한밤중에 문을 두들겨 찾아온 유지를 맞아들였으나 불을 밝히고 밤새도록 이야기만 나누었을 뿐 유지를 받아들이지 않은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고 있는 것이다.

몸을 주러 왔으나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보고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도리어 감복하였다는 유지.

날이 밝아 유지가 남의 눈을 피해 율곡이 머물렀던 집을 떠나려 하자 율곡은 유지에게 이별시를 지어준다.

율곡이 유지에게 준 이별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예쁘게도 태어났네 선녀로구나/10년을 서로 알아 익숙한 모습/목석 같은 남자는 아니지만/병들어 늙었기로 사절함일세/길가에 버린 꽃 아깝다 말고/운영(雲英)은 언제 배항(裴航)을 만날까/함께 구슬 미음(瓊漿)’ 마시고 신선될 수 없네/헤어지면서 시를 써주니 부끄러운 마음뿐일세.”

율곡이 인용하였던 구슬 미음태평광기에 나오는 배항이라는 청년의 고사에서 비롯된 말.

어느 날 배항은 운교(雲翹) 부인을 만난다. 그때 그녀는 한번 구슬 미음을 마시고 나면 온갖 느낌이 일어난다오. 검은 서리(玄霜)라는 신선의 약을 찧어주고 운영(雲英)을 만나게 될 것이오.’라는 시를 한 수 지어준다. 훗날 배항이 남교 역을 지나면서 어떤 할머니에게 마실 것을 청하였더니 그 할머니가 절색의 미인 운영을 시켜서 마실 것을 가져다주었다. 배항이 그것을 받아 마셔보니 진짜 구슬 미음’. 이후 배항은 100일간 절구를 찧어주고 운영을 아내로 맞아들여 신선이 되었다는 고사를 인용하였던 것이다.

기생 유지와 함께 구슬 미음을 마심으로써 신선이 되고 싶었던 율곡. 율곡은 그런 내용의 이별시뿐 아니라 유지를 노래한 3편의 시를 더 읊는다. 그중의 한 편은 장시인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아아, 황해도 여성이여/맑은 기운 모았구나. 선녀가 따로 있나./곱기도 해라, 그 태도여/맑기도 해라, 그 얼굴이여./승로반(承露盤:새벽이슬을 받는 대야) 같구나. 이슬을 먹는가/어쩌다 버려졌나, 길가에/봄도 한창이구나, 꽃의 신선로처럼/황금의 집으로 옮기지 못함이여, 슬프다 일색이여./처음 만났을 때 언제런가. 아직 피지 않은 꽃이더니/마음의 정만 연달아 가는구나. 서로 가슴 통하니/파랑새는 가버렸구나. 중매도 없네.

(중략)

슬프다 인생의 녹음(綠陰)이러니/늙었구나, 나는 여색을 멀리해야 하네./이 몸의 욕망이여, 재같이 식어졌다네. 아득한 들이여 달은 어둡구나/범 우는구나 빈 숲속에서/나를 따라옴인가 무슨 뜻이랴/옛날의 명성을 그리워해서라네./문을 닫을 것인가 인정 없는 일/동침하랴 의리 없는 일/집어치워라, 병풍이여/자리도 달리 이불도 달리/마음을 거두어라, 근원을 맑게 함이여/처음으로 돌아가리라 청명함이여/3(전생, 금생, 내생)을 배회함이여/빈말이 아니라네./연꽃 핀 아름다운 나라에서 그대를 다시 만나리.”

평생 동안 성리학에 종사하였던 대학자로서 한갓 기생에 대한 이와 같은 헌시를 남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유지라는 기생을 노래한 율곡의 화려하고 기교적인 사장을 보면 오히려 그 어디에서도 두향에 대한 상사를 표현하지 않고 두향을 다만 매화꽃에 비유하여 거문고 대에 앉아 줄 끊겼다 탄식마라(莫向瑤琴嘆絶絃)’라고 노래하거나 원컨대 님이시여, 마주 앉아 생각할 때 청진한 옥설(玉雪) 그대로 함께 고이 간직해 주오.’라는 식으로 은유하여 노래한 퇴계의 마음이 훨씬 더 애절하고 진실되게 느껴지는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일까.

자신의 숙소를 찾아온 유지를 적극적으로 받아주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매정하게 뿌리치지도 못한 채 문을 닫을 것인가, 인정 없는 일. 동침할 것인가, 의리 없는 일(閉門兮傷仁 同寢兮害義)’이라고 노래하면서 병풍을 걷고 자리를 달리한 채 불을 밝히고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가을밤을 뜬눈으로 지새운 율곡.

그런 일이 있은 지 4개월 뒤인 1584116일 마침내 율곡은 한양의 대사동(大寺洞)에서 숨을 거뒀으니 이처럼 유지는 율곡에게 있어 마지막 불꽃이었던 것이다.

전해내려 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황해도에 있던 유지는 율곡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바람처럼 서울로 달려와 애통해하였고, 이후 3년 동안 상복을 입었다고 전해지고 있는데, 두향이가 보내온 분매 역시 퇴계가 죽기 2년 전의 일로서 그런 의미에서 분매는 퇴계와 두향이가 마지막으로 나눠 마신 구슬미음(瓊漿)’이었는지도 모른다.

한참동안 매화꽃을 바라보던 퇴계는 문득 생각난 듯 노인으로부터 전해 받은 편지를 집어 들었다. 피봉을 뜯자 안에서 접힌 주지가 나왔다. 퇴계는 종이를 펼쳐서 편지의 내용을 읽기 시작하였다.

나으리.

오랜만입니다. 그동안 나으리를 못 뵈온 지 벌써 십수 년이 흘렀사옵니다.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나으리.”

낯익은 필체였다. 필체를 본 순간 퇴계는 틀림없이 두향으로부터 보내온 편지임을 확신할 수 있음이었다.

소첩은 나으리와 함께 지내던 적성산 기슭에 작은 움막을 짓고 그 속에서 하루하루를 연명하고 있사옵니다. 바람이 전해오는 풍문을 통하여 나으리께서 그동안 어떻게 지내시온 가는 대충 전해 듣고 있사오나 며칠 전에 꾼 꿈은 너무나 흉몽하여 나으리의 옥체에 무슨 나쁜 일이 생기지나 않았을까 두렵고 송구하여 나으리께서 잘 알고 계시던 이방을 통하여 문안 인사를 드리게 되었나이다. 나으리, 옥체 만강하시나이까, 아니면 소첩이 꾼 꿈처럼 고황()에라도 병이 드셨나이까. 흉몽에서 깨어나 너무나 참람하여 통곡을 하며 울었사옵는데, 다음날이라도 신발을 거꾸로 신고 나으리께서 계신 곳을 향하여 달려가고 싶은 마음 간절하였사오나 차마 소첩의 몸으로 그럴 수는 없이 이처럼 인편으로 안부를 여쭙게 되었나이다. 나으리.”

퇴계는 읽던 편지를 멈추었다. 두향의 편지는 사실이었다.

그 무렵 퇴계는 심한 병에 시달리고 있었다.

퇴계 자신은 자신의 병을 극병(劇病)’이라고 지칭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영종이 승하하고 인산하는 것을 보기도 전에 고향으로 도망치듯 내려와서 여론이 분분하였을 때 기대승이 편지를 보내어 퇴계에게 벼슬에 나오기를 간곡히 청하자 퇴계가 자신이 벼슬자리를 차지하기에 맞지 않는 점으로 크게 어리석음(大愚)’,‘심한 병(劇病)’,‘헛된 명성(虛名)’,‘잘못 입은 은명(誤恩)’의 네 가지로 열거하고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보낸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퇴계가 기대승에게 보낸 편지는 답기명언(答奇明彦)’이란 제목으로 퇴계전집에 전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의 몸가짐이 또한 어렵게 된 까닭은 크게 어리석기 때문이요, 심한 병 때문이며, 헛된 명성 때문이요, 잘못 입은 은명(恩命) 때문입니다. 매우 어리석으면서도 헛된 명성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이것은 망령된 짓이요, 심한 병으로 잘못된 은명을 받아들인다면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이 됩니다. 대개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망령된 짓을 한다는 것은 의리와 덕에 있어서 상서롭지 못하고, 사람에 있어서 길하지 못하며, 나라에 있어서도 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퇴계가 기대승에게 보낸 편지는 답기명언(答奇明彦)’이란 제목으로 퇴계전집에 전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의 몸가짐이 또한 어렵게 된 까닭은 크게 어리석기 때문이요, 심한 병 때문이며, 헛된 명성 때문이요, 잘못 입은 은명(恩命) 때문입니다. 매우 어리석으면서도 헛된 명성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이것은 망령된 짓이요, 심한 병으로 잘못된 은명을 받아들인다면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이 됩니다. 대개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망령된 짓을 한다는 것은 의리와 덕에 있어서 상서롭지 못하고, 사람에 있어서 길하지 못하며, 나라에 있어서도 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퇴계는 20세 때 주역 공부에 몰두하다가 이때부터 건강을 상하여 평생 병으로 고생하였던 병약한 몸이었다. 특히 단양군수를 거쳐 풍기군수를 사직하기 위해서 감사에게 올린 글에서는 자신의 병 증세를 구체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저는 몸이 허약하고 파리한 데다 심기의 병까지 겹쳐 기침이 몹시 나고 가래가 끓으며, 허리와 갈비뼈가 당기고 아픈가 하면, 트림이 나고 신물이 오르며, 등에는 한기가 가슴에는 열기가 번갈아 발작하며, 때로는 눈이 어질어질하고 머리가 어지러워 넘어질 것만 같으며, 숱한 일을 그르치고 또 어제 일을 오늘 잊고, 아침의 일을 저녁에 잊으며, 밤으로 걸핏하면 악몽에 시달리며, 기혈이 마르고 정신이 흐리며, 헛땀이 줄줄 흐르고 눕기를 좋아하며 곯아떨어지곤 하였습니다.”

이러한 구절을 보면 퇴계가 칭병(稱病)을 통해 벼슬을 사직하는 수단으로 삼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지만 실제로 퇴계의 건강이 좋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이다.

특히 두향이가 흉몽을 꾸었던 그 무렵, 퇴계는 생사를 넘나드는 극병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미 68세의 나이로 노환까지 겹쳐 생사의 기로에서 헤매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퇴계가 선조에게 엎드려 원하건대 신의 사정이 어둡고 어리석은 것을 살피시옵고 신의 잔약하고 수척한 것을 불쌍히 여기시어 앞서 허락하신 대로 길이 시골에 물러나와 허물을 고치고 병을 조리하며 여생을 마치게 하여 주시옵소서.’라는 내용의 상소문을 올린 것을 통해 더욱 확연하게 드러나고 있음인 것이다.

자신의 상소문처럼 병을 조리하며 여생을 마칠 것을 준비할 정도로 극병에 시달리고 있었던 퇴계. 그러므로 흉몽을 꾸고 20여년 만에 문안편지를 보낸 두향의 불길한 예감은 그대로 적중되었던 것이다.

퇴계는 다시 편지를 읽기 시작하였다.

나으리께오서는 반드시 병에서 쾌차하실 것이나이다. 소첩이 생각하건대 나으리께오서는 아직 다북쑥 우거진 무덤에 묻히시지는 않으실 것이나이다.”

다북쑥 우거진 무덤.

단양에서 마지막 밤을 보낼 때 두향이가 읊었던 신라의 향가, ‘모죽지랑가(慕竹旨郎歌).’

두향은 그 향가 속에 나오는 눈 깜빡할 사이에 만나 뵈올 기회를 지으리이다. 님이여, 그리운 마음이 가는 길에 다북쑥 우거진 마을에 함께 잘 밤인들 있으리까.’라는 구절을 읊으며 퇴계와 더불어 다북쑥 우거진 무덤에 함께 묻힐 것을 맹세하지 않았던가.

두향이가 입던 갑사 저고리의 깃을 잘라 내어 이를 강선대 바위 밑에 파묻고 다시 다북쑥 우거진 무덤에 함께 묻힐 것을 맹세함으로써 이 지상의 황촌(荒村)에서는 영원히 만날 수 없음을 노래하였던 두향.

퇴계는 묵묵히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나으리께서 곁에 계시오면 소첩이 넓적다리의 살을 베어내서라도 드리옵고, 손가락을 단지해서라도 나으리를 살릴 것이오나 이처럼 멀리 떨어져 계시오니 대신 인편에 분매 한 그루를 보내 드리오리다. 이를 소첩 보듯 바라봐 주시옵소서.

나으리께서 떠나신 그날부터 소첩이 나으리를 생각하여 키운 매화꽃이온데, 어느덧 20년의 세월이 흘러 옥설의 골격에 빙상(氷霜)의 넋이 활짝 피었나이다. 나으리께오서 유난히 매화를 아끼시고 사랑하시는 마음 소첩은 여직 기억하고 있사오니 매화꽃을 보실 때마다 그곳에서 소첩이 피어 있는 것으로 생각하여 주시옵소서. 특히 올해 피어난 백매는 다른 해보다 빙자옥질(氷姿玉質)하여 소첩이 나으리를 상사하는 아취고절(雅趣高節)의 모습을 그대로 빼다 박았으니 소첩이 보내는 일지춘으로 병마에서 벌떡 일어나 쾌차하시옵소서.”

일지춘(一枝春).

중국의 양자강(陽子江) 남쪽에 있는 강남에서 매화나무의 가지 하나를 멀리 있는 친구에게 보낸다는 뜻으로 원문은 강남일지춘(江南一枝春)’이다.

형주기(荊州記)’에 나오는 일화로 오나라의 육개(陸凱)가 절친한 친구인 범엽(范曄)에게 봄이 되어 갓 피어난 매화꽃 가지 하나를 인편을 통해 선물로 보내며 우정을 나눈 이야기에서 비롯된 말.

육개는 매화꽃 가지 하나를 보내며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매화나무 가지를 꺾다가 역부를 만나(折梅逢驛使)

몇 가지 묶어서 멀리 계신 그대에게 보냅니다(寄與嶺頭人)

강남에 살며 가진 것이 없어(江南無所有)

겨우 봄꽃 하나를 보내 드리오(聊贈一枝春)”

두향의 편지는 다시 이어지고 있었다.

나으리,

소첩 역시 강남에 살고 있으나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어 애오라지 봄꽃 한 그루를 보내 드리오니 소첩 보듯 맞아 주시옵고 암향부동(暗香不動)의 향기를 맡으시어 비록 멀리 떨어져 있사오나 나으리를 향한 침개와 같은 소첩의 마음을 헤아려 주옵소서.”

침개(針芥).

바늘과 개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여기서는 자석에 붙는 바늘과 호박에 붙은 개자를 가리킨다. 자석에 붙은 바늘이 떨어지지 않듯이, 호박 넝쿨에 기생하는 개자가 떨어지지 않고 밀착되듯이 퇴계를 향한 두향의 일편단심이 여전히 그리움에 떨고 있음을 가리키는 말.

편지는 끝맺음으로 치닫고 있었다. 퇴계는 묵묵히 편지를 읽어 내렸다.

마지막으로 소첩이 한 가지 청이 있어 나으리로부터 받은 정표로 함께 보내드리나이다. 비록 멀리 떨어져 있어 나으리의 존안을 직접 뵈올 수는 없사오나 소첩이 보낸 옥매를 잘 받았다는 표시로 일필하여 주시옵소서. 하오면 소첩은 나으리께서 살아계오신 체취와 훈향을 맡을 수 있어 하루하루 연명하는 불안 속에서 마침내 마음을 다잡고 안심할 수 있겠나이다. 나으리, 부디 옥체 만강하옵소서. 할 말이 태산처럼 많사오나 이만 줄이겠나이다.”

편지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보낸 사람의 이름도 없는 무명의 편지였다. 그러나 퇴계는 그것이 누구로부터 보내온 편지인가는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이미 날은 저물어 방안은 어두웠으나 퇴계는 불조차 켤 엄두도 못 내고 잠자코 완락재에 앉아 있었다.

선생님

문밖에서 인기척이 일었다.

선생님, 방안에 계십니까.”

분명히 방안에서 나들이 한 모습을 본 적이 없는데도 불을 켜지 않고 그대로 앉아 있는 스승의 안부가 걱정되는 듯 제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 있네.”

불을 밝혀 드릴까요, 선생님.”

그렇게 해주시게나.”

제자가 무릎걸음으로 들어와 부싯돌을 그어 초에 불을 밝혔다. 그러자 완락재는 홀연히 밝아졌다.

우물물을 더 떠다 드릴까요.”

됐네.”

짧게 퇴계는 대답하였다.

혼자 있고 싶으니 나가보시게나.”

알겠습니다.”

제자가 물러가자 퇴계는 노인이 가져온 물건을 끌어당겼다. 흰 치마였다. 퇴계는 그 치마를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두향이가 입던 흰 속치마가 아니었던가.

단양에서의 마지막 밤.

퇴계는 두향이가 입던 치마폭에 정표로 두보의 시 한 수를 적어 주었던 것이었다.

두보는 평소에 퇴계가 가장 좋아하던 시인.

두향의 이름이 비록 기명이었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두보의 성과 같음을 기억하고 있다가 헤어지는 별리의 정표로 다음과 같은 두보의 시 한 수를 적어 주지 아니하였던가.

死別已呑聲 生別常惻惻

퇴계는 두향이가 보내온 정표를 펼쳐 보았다. 비록 20여 년의 세월이 흐르기는 하였지만 치마폭에서는 여전히 낯익은 육향이 피어오르고 있었고 흰 속치마에는 마치 어젯밤의 일이련 듯 퇴계가 써준 별시가 생생하고 선명하게 묻어 있었다.

두보의 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죽어 이별은 소리조차 나오지 않고 살아 이별은 슬프기 그지없더라.”

순간 퇴계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흘렀다.

갑자기 부질없는 행위를 하였다는 지난날의 회한 때문이었다. 허락된다면 두향이가 보내온 치마폭을 불태워 없애버리고 싶은 느낌이었다.

그러나 그럴 수가 없음이었다.

두향은 편지에서 소첩이 보낸 옥매를 잘 받았다는 표시로 일필하여 보내 달라.’고 간곡히 청하지 않았던가. ‘하오면 나으리께서 살아 계오신 체취와 훈향을 맡을 수 있어 안심할 것이다.’라고 애원하지 않았던가.

그날 밤.

망설이던 퇴계는 마침내 두향이가 보내온 치마폭에 단시를 써 내린다.

相看一笑天應許 有待不來春欲去

두향이를 위해 쓴 퇴계의 문장은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서로 보고 한번 웃은 것

하늘이 허락한 것이었네.

기다려도 오지 않으니

봄날은 다 가려고 하는구나.”

퇴계가 쓴 그 구절은 논어에 나오는 낙연후소(樂然後笑)’란 문장에서 인용하여 온 것이었다. ‘유가귀감(儒家龜鑑)’으로 전해 내려오는 그 문장의 뜻은 다음과 같다.

옛날 현인은 때가 된 후에 말하여 사람들이 그의 말을 싫어하지 않았고, 즐거운 일이 있은 후에 웃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 웃음을 싫어하지 않았고, 옳은 의리가 있은 후에 취한지라 그 취함을 싫어하지 않았다(古賢時然後言 人不厭其言 樂然後笑 人不厭其笑 義然後取 人不厭其取).”

즉 두향이와의 사랑을 즐거운 일이 있은 후에 서로 보고 한번 웃은 것(相看一笑)’이므로 옛날 현인들의 일로서도 거리낄 것도 없고, 하늘의 뜻과도 어긋나지 않은 하늘이 허락한 것. 얼핏 보면 사사로운 것 같지만 하늘, 즉 천명이 허락한 운명적인 사랑이라는 의미심장한 내용을 담고 있는 문장이었던 것이다.

결론적이지만 그로부터 2년 후.

퇴계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두향은 강선대 위에서 몸을 던져 남한강 푸른 물에 낙화하여 죽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때 두향은 치마폭으로 얼굴을 가리고 물속에 뛰어들었다고 하는데, 아마도 두향이가 얼굴을 가렸던 치마는 퇴계가 두향에게 이별의 정표로 준 바로 그것이었을 것이다.

두향이가 뛰어들었던 남한강은 워낙 물살이 급한 천탄(淺灘)이라 두향의 몸은 사흘 만에 강물 위에 떠올랐다고 한다. 떠오른 두향의 몸은 아마도 퇴계가 써준 전별시가 마지막으로 감싸고 있었을 것이다.

캄캄한 밤이었다. 먹물을 부어내린 것 같은 어둠이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달이 있는가 하늘을 보아도 달도 보이지 않았고, 별이 있는가 헤아려 보아도 별빛조차 없었다.

두향은 어둠 속을 걷고 있었다. 아무것도 신지 않은 맨발이었다. 캄캄한 어둠이었으므로 이따금 돌부리에 차이기도 하고 가시덤불에 찔리기도 하였다. 극심한 고통이었으나 두향은 신음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방향을 모른 채 두향은 계속 어둠 속을 헤매고 있었다. 가야 한다 가야 한다고 두향은 소리를 내어 중얼거렸다. 빨리 가야 한다고 가야 한다고 서둘렀다. 그러나 두향은 막상 자신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 종잡을 수 없었다.

어둠 속에서 계속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세찬 바람이었다. 넘어져서는 안 된다고 두향은 이를 악물고 바람 속을 뚫고 걸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어둠을 밝히며 밤하늘의 별이 떠올랐다. 너무나 그 빛이 강렬하여서 두향은 그 별을 차마 쳐다볼 수가 없었다. 순간 온 벌판이 대낮처럼 밝아졌다. 그러나 그 모습은 살풍경하였다. 마치 죽은 사람이 헤매는 황천의 풍경처럼 보였다.

내가 지금 죽었는가 하고 두향은 생각하였다. 내가 지금 죽어 중음(中陰)을 헤매고 있는가 하고 두향은 생각하였다. 죽어서는 안 되는데, 아직 죽을 때는 안 되었는데, 하고 두향은 머리를 흔들었다. 아직 살아남아서 할 일이 많이 남아 있는데, 하고 두향은 머리를 흔들었다.

그 순간 갑자기 밤하늘에 떠있던 별이 떨어지기 시작하였다.

두향은 별이 떨어지는 방향으로 내쳐 달렸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가도 가도 아득하기만 하였다. 밤하늘에서 큰 획을 그으며 별이 떨어지고 있었는데도 가도 가도 제자리에서 맴돌고 있을 뿐이었다.

안돼요, 하고 두향은 울부짖었다.

별이 떨어져서는 안 돼요. 별을 내가 받아내야만 해요. 그래야만 별을 살릴 수 있을 거예요. 안돼 안돼요

자신이 울부짖은 소리에 두향은 소스라쳐 잠에서 깨어났다. 가위눌림에서 벗어나 기진맥진하였는지 온몸에는 식은땀이 흥건하였고 눈가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벌써 며칠째 꾸는 흉몽이었을까, 몇 날을 계속해서 같은 내용의 꿈만 꾸고 있다. 꿈으로써 길흉을 점치는 몽복에 의지하여 본 적은 없지만 몇 날 며칠을 계속해서 꿈을 꾸는 유성(流星)은 길몽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였다.

옛말에도 있지 아니한가. 하늘에서 별똥별이 떨어지면 지상에서는 큰 인물이 숨을 거둔다는.

그렇다면 그 떨어지는 별은 누구를 가리킴인가, 바로 나으리가 아닐 것인가.

그렇다면 나으리께서 벌써 연세(捐世)라도 하신 것일까.

꿈에 보던 그 별은 크기도 하려니와 그 광채 역시 온 누리를 찬연하게 비춰 주고 있었다. 나으리가 아니면 누가 감히 그런 큰 별에 해당될 수 있을 것인가.

두향은 가슴이 와랑와랑 뛰었다.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고 보니 아직 볕이 한참이나 남아 있는 석양 무렵이었다. 그새 잠깐 낮잠에 빠져든 모양이었다. 잠깐 든 낮잠 속에 그런 흉몽을 꾼 것이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된 것일까. 여삼이란 아전에게 매분 한 그루와 편지를 띄워 노잣돈과 함께 보낸 것이 닷새 전. 아무리 천천히 가고 온다 하더라도 닷새면 충분히 다녀올 수 있는 거리인 것이다. 그런데도 여직 아전으로부터는 소식조차 없다. 그렇다면.

두향은 불길한 예감으로 몸을 떨었다.

그새 나으리께서 연세하신 것일까.

아니다.

두향은 머리를 흔들며 중얼거렸다.

나으리께서 그렇게 덧없이 돌아가실 리가 없을 것이다.

한바탕 흥건하게 울어 눈가가 젖었으므로 두향은 무심코 방 한구석에 놓여있는 거울에 얼굴을 비춰 보았다. 나으리와 헤어진 것이 벌써 20여 년 전. 그동안 두향은 한 번도 분단장을 해본 적이 없었다.

반고가 쓴 한서(漢書)에도 나와 있지 아니한가.

남자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 여인은 자신을 사랑하는 남자를 위해 분단장을 한다.’.

옛말 그대로 사랑하는 남자와 생이별을 하여 살아도 산 목숨이 아니고 이미 죽은 목숨처럼 종신수절하고 있는 두향으로서는 뺨에 붉은 단지를 바르고 얼굴에 분칠을 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간혹 짓궂은 남정네들이 바람으로 떠도는 소문을 전해 듣고 일부러 강선대를 찾아와 유람하며 두향의 모습을 엿보기도 하였다.

두향은 집에서 나설 때면 반드시 전모를 쓰고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전모는 우산처럼 살을 만들고 기름먹인 종이를 위에 바른 쓰개로 이 전모는 자지갑사(紫地甲紗) 끈으로 턱 밑에 단단히 매었다.

원래 기생들이 쓰던 쓰개였는데, 두향은 퇴계가 단양을 떠난 직후 사또께 청원하여 기적에서 벗어나 상민이 된 순간 기생일 때 입었던 온갖 화려한 비단옷들과 비녀와 뒤꽂이를 비롯한 패물과 노리개 등을 모두 팔아 버렸으나 단 하나 전모만은 그대로 간직하고 이를 소중히 쓰고 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전모를 쓰면 자신의 얼굴을 완전히 가릴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외부로부터의 끊임없는 호기심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뿐인가. 두향은 거울조차 제대로 보지 않았다. 두향은 세월 따라 늙어가는 자신의 모습에도 무신경하였다.

그러나 석양빛이 반사된 거울 속에 선명하게 떠오르고 있는 오랜만에 본 자신의 얼굴은 이미 청춘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몽리청춘(夢裡靑春).

한바탕 꿈속의 청춘이란 말처럼 그 아름다웠던 젊은 날의 얼굴은 덧없이 사라지고 거울 속에는 잔주름이 무성하고 듬성듬성 흰 머리칼이 나 있는 중년 여인의 얼굴이 마치 유령처럼 떠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었던가.

두향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한숨을 쉬었다.

이것이 내 얼굴이었단 말인가.

18살에 나으리를 만났으니, 20여 년이 흘러 어느덧 마흔 살에 가까운 중년 여인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곱던 살결은 거칠어져 마치 창병에 걸린 듯하였으며, 부드럽고 윤기 있던 머리카락은 말라비틀어진 낙엽처럼 시들어 있었다. 빛나던 눈동자는 틀어져 정기를 잃었으며 그새 백발의 노파가 되어버린 듯 머리카락은 희게 변하였고, 얼굴에는 잔나비와 같은 주름이 가득하였다.

이것이 진정 내 얼굴이란 말인가.

물론 두향은 늙어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하루라도 빨리 늙어 다북쑥 우거진 무덤에 나으리와 함께 죽어 묻히는 것이 소원이었다.

또한 두향은 살아서는 영원히 나으리를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할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나으리를 또다시 만나게 될 것은 오직 저승에서만 가능한 일, 그러므로 두향이는 한시라도 빨리 세월이 가서 한시라도 빨리 늙고, 한시라도 빨리 죽기만을 소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연히 바라본 거울 속의 얼굴은 살아있는 사람의 모습이 아니었다. 거울 속에는 노쇠한 검은 그림자가 하나 떠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두향은 머리를 흔들며 홀로 중얼거렸다.

나으리께서는 얼굴만을 가지고 나를 사랑하여 주신 것은 아니다.

일찍이 한 무제 아내 이씨는 천하일색이었다. 그러나 병들어 죽어갈 때 이부인은 이불을 뒤집어쓰고 자신의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 무제가 한사코 얼굴을 보려 하자 이부인은 대답하였다.

첩의 얼굴이 형편없게 되었으니 이러한 모습으로는 감히 황제를 뵈올 수가 없습니다.”

무제는 하는 수 없이 일어나 자리를 물러났으나 기분이 좋지 않은 기색이 역력하였다. 이를 본 이부인의 자매가 감히 황제께 그럴 수가 있느냐라고 책하자 이부인은 대답하였다.

내가 황제를 뵙지 않은 것은 바로 너를 길이 편안케 해주기 위함이었다. 얼굴을 가지고 사람을 섬기는 자는 얼굴이 쇠하면 사랑이 해이해지는 법이다. 황제께서 연연불망(戀戀不忘)하여 나를 그리워하고 잊지 못하는 것은 한때 아름다웠던 나의 얼굴 때문인데, 지금 내 얼굴이 예전과 같지 못한 것을 보면 반드시 두려워지고 싫어져서 나를 내쳐 버릴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나를 좇아 자매인 너까지 내칠 것이니, 내가 황제께 이불을 가리고 얼굴을 보여 드리지 않는 이유를 이제야 알 수 있겠느냐.”

그러나 아니다.

두향은 강하게 머리를 흔들며 생각하였다.

나으리께서 나를 연연불망하셨던 것은 나의 얼굴 때문이 아니다. 나으리께서는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있는 그대로 사랑하여 주신 것이다.

설혹 내가 갈대를 베어내 그 날카로운 잎으로 얼굴을 긁어내려 만신창이를 만들고 그 상처 위에 곤죽같이 된 흑감탕을 발라 일부러 성이 나게 하여 곯고 부어오른 추악한 귀신의 얼굴이 된다 하더라도 나으리께서는 이 두향이가 누구인지 알아보시고 나를 내치시지는 않으실 것이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강물을 거슬러 오는 듯한 뱃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평소에도 강선대가 마주 보이는 강 건너편에는 이조대란 바위가 있어 바위를 굽돌아가는 물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 소리는 바위에 부딪히는 물소리가 아니라 강을 거슬러 오는 나룻배의 소리임에 틀림이 없었다.

두향은 전모를 쓰고 집 밖으로 나가 보았다.

과연 호수 위로 나룻배 한 척이 노를 저으며 두향이가 있는 강선대 쪽으로 느릿느릿 다가오고 있었다.

아직 춘삼월이라 쌀쌀하였지만 겨우내 얼어붙었던 얼음들은 한꺼번에 해빙되어 물살들은 와랑와랑 성미 급한 물소리를 내면서 흘러가고 있었고, 마침 석양 무렵이었으므로 강물 위는 그대로 핏빛 천지였다.

나룻배 위에 탄 사람이 누구인가, 두향이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바로 닷새 전에 매분을 가지고 안동으로 떠났던 아전이었던 것이다.

순간 두향은 선 자리에서 그대로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방금 전 낮잠 속에서도 큰 별이 떨어지는 흉몽을 꾸었으므로 행여 공들여 키운 분매를 나으리께 전하지도 못하고 대신 나으리께서 돌아가셨다는 흉보를 전해 듣게 되는 것이 아닐까 노심초사하여 두향은 그 자리에서 망부석이 되어 버린 듯 꼼짝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윽고 나룻배는 강선대 바위에 닿았다.

아씨 마님.”

강 한복판에서부터 나와 기다리는 두향이를 보고 있었던 듯 배가 바위에 닿자 여삼이가 뛰어내리며 말하였다.

방금 안동에서 돌아오는 길입니다요, 아씨 마님.”

여삼이가 다가오자 두향은 전모를 눌러쓴 채 얼굴을 가리고 먼저 초막집으로 들어갔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여삼이가 한때 나으리를 모시던 아전이라 하더라도 두향에게 있어서는 엄연한 외간 남자. 두향은 먼저 방 안으로 들어가 방문을 걸어 잠근 후 창호지를 사이에 두고 내외하며 말하였다.

나으리는 만나 뵈셨습니까.”

물론입니다요, 아씨 마님. 만나 뵈었을 뿐 아니라 하룻밤 서당에서 황공스럽게도 쇤네를 유하게 해주시었기 때문에 지척에서 모실 수도 있었나이다.”

다시 긴 침묵이 왔다.

여삼은 툇마루에 앉은 채 답답한 마음으로 하회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오랜 침묵 끝에 방 안에서 두향의 목소리가 다시 흘러나왔다

지척에서 나으리를 뵈었으니 나으리의 신색을 살펴보셨을 것입니다. 어떠하시던가요.”

오랜만에 나으리를 뵈었으니 세월이 흘러 노쇠하신 것은 당연한 일이었으나 기체후(氣體候)는 여전히 만안하셨사옵니다.”

병색은 없으셨던가요.”

최근에 한양 길에 숙병이 도지셔서 상감께서 보내신 전의에게 치료받으시고 간신히 쾌차되어 일어나셨다 하더이다.”

여삼의 말은 사실이었다.

명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선조는 직접 이공, 지금 짐은 임금 자리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모르는 것이 너무나 많소이다. 이러할 때 이공과 같은 훌륭한 사람들이 짐을 도와주신다면 그 아니 기쁘겠소.’라는 친서를 써 보내고 퇴계를 예조판서로 임명하였던 것이다.

퇴계는 이를 간곡히 사양하였으나 선조로부터 재차 편지를 받고 더 이상 거절할 수 없어 그해 6월 한양으로 출발하였다. 그러나 워낙 건강이 좋지 않았던 터라 길 떠나는 도중에 객지에서 그만 쓰러진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선조는 친히 궁중 의사인 전의를 보내어 치료토록 하였던 것이다.

그것이 지난해 여름.

퇴계는 8개월 동안 잠시 한양에 머물렀으나 또다시 선조에게 사직원을 제출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쇠약한 몸을 달래고 있었던 것이다. 퇴계가 고향으로 돌아온 직후부터 두향은 큰 별이 떨어지는 흉몽을 계속 꾸기 시작하였으니, 실제로 퇴계는 이때부터 종명(終命)으로 치닫는 인생의 마지막 여생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이것이 퇴계가 49세가 되는 명종 4년에 풍기군수 사임장을 감사에게 올린 것을 시작으로 70세 되던 해인 선조 39월 최후 사장을 올리기까지 21년에 걸쳐 총53회의 사퇴원을 내기 직전의 마지막 벼슬이었던 것이다.

자신의 최후를 예감하였음일까, 마지막 벼슬을 끝내고 고향으로 가기 위해 한강에서 배를 타려 했을 때 마중을 나온 우의정 홍섬은 다음과 같은 고별시를 짓는다.

넓고 넓은 물 위에 나는 저 갈매기 누가 감히 잡아 길들일 것인가.”

자신을 넓고 넓은 물 위를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갈매기로 비유하며 노래한 이별시를 듣자 퇴계는 웃으며 그래도 항상 남산을 생각하매 위수가를 떠나가며 머리를 돌리오.’라고 화답한다.

퇴계가 노래하였던 머리를 돌린다.’라는 말은 여우가 죽을 때 머리를 제 살던 곳에 두고 죽는다는 수구초심(首丘初心)에서 나온 말로 자신은 비록 임금이 계신 남산을 떠난다 하더라도 마음은 항상 임금을 생각하고 있다는 충절의 마음을 나타내는 한편 이제는 여생이 얼마 남지 않아 고향으로 머리를 돌리고 죽고 싶다는 일종의 임종게(臨終偈)이기도 했던 것이다.

퇴계는 이처럼 미구에 다가올 자신의 운명을 예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계속해서 흉몽을 꾸었던 두향의 불길한 예감은 그대로 적중되었던 것이다.

그래, 나으리께 분매를 전해 드리셨습니까.”

틀림없이 전해 드렸습니다요, 아씨마님.”

여삼은 자신 있게 소리를 높여 말하였다.

나으리께서는 분매를 받고 굉장히 기뻐하셨나이다. 쇤네가 비록 길지는 않지만 나으리께서 사또로 계시올 때 나으리를 직접 모셨사옵기에 나으리의 심사를 잘 알고 있사옵는데, 그처럼 만면에 희색이 가득하였던 것은 처음으로 보았사옵니다. 나으리께서는 분매를 서탁 위에 놓으시고 직접 분매에 물을 주시기도 하고 밤새도록 꽃의 향기를 맡기도 하셨나이다.”

여삼의 말은 과장이 아니다.

평생 동안 매화를 사랑하였던 퇴계지만 그의 일생을 면밀히 살펴보면 유난히 애중하였던 수수께끼의 매화꽃이 한 그루 있다. 심지어 퇴계는 이 매화꽃을 매화의 신선, 즉 매선(梅仙)이라고까지 부르고 있었는데, 이 무렵 퇴계는 매화의 입을 빌려 다음과 같은 증답가(贈答歌)까지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임이 돌아간 뒤에 천향을 피우리라. 원컨대 임이시여, 마주앉아 생각할 때 청진한 옥설 그대로 함께 고이 간직해주오(待公歸去發天香 願公相對相思處 玉雪淸眞共善藏).”

퇴계가 이 시를 지은 것은 바로 죽기 1년 전. 노래에 나오는 임은 퇴계 자신을 이르는 말로서 임이 떠난 뒤에도 천향, 천하제일의 향기를 피우겠다는 말은 바로 매화를 의인화시켜 매화가 퇴계에게 했던 맹세였던 것이다.

또한 원컨대 임이시여, 마주 앉아 생각할 때라는 시구에서 사용된 상사처(相思處)’란 말을 직역하면 문자 그대로 마주 앉아 생각할 때란 뜻이 되지만 원래 상사(相思)란 말은 남녀 간의 사랑을 뜻하는 것으로 의역하면 다음과 같은 뜻을 지니는 것이다. “원컨대 임이시여 우리 서로 사랑할 때

또한 천향이란 말도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 원래 천향국색천하제일의 향기와 자색으로 모란꽃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절세의 미인을 가리킨다.

특히 삼국지에 나오는 왕윤의 가기(歌妓)였던 초선을 천향국색으로 불렀던 것이다. 왕윤은 간신 동탁을 죽이기 위해서 초선을 동탁에게 헌상하는 한편 동탁의 호위대장이었던 여포에게도 추파를 보냄으로써 삼각관계를 만들어 미인계로 동탁을 제거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로써 천향이라 함은 삼국지에 나오는 초선과 같은 절세의 미인을 가리키는 말로 퇴계가 유독 그 매분을 아끼고 사랑하고 있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뿐이었을까.

퇴계가 유독 그 수수께끼의 분매를 아끼고 그리워하였던 것은 다만 그 매화가 아름답고 향기롭기 때문만이었을까. 그 매화에 얽힌 사연 때문이 아니었을까.

임과 이별한 뒤에도 천향을 피우는 것은 매화가 아니라 실제로는 어떤 여인의 향기가 아니었을까.

어떤 여인의 향기. 그것은 20년 만에 종신수절하면서 홀로 매분을 키우고 길러 보내 주었던 두향의 향기가 아니었을까.

따라서 임이 돌아간 뒤에도 천향을 피우리라.’는 맹세는 매화꽃의 맹세가 아니라 실은 두향의 맹세가 아니었을까.

다시 긴 침묵이 왔다.

어느덧 핏빛 노을도 지고 날은 어두워지고 있었다. 땅거미가 스물스물 기어들고 있었다.

나머지 물건도 전해 드렸습니까.”

다시 방안에서 두향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전해 드렸나이다. 나으리께서는 쇤네에게 하룻밤을 자고 가라고 말씀하셔서 별채의 방에서 하룻밤을 자고 일어났더니, 나으리께서 아씨마님께 전해드리라 해서 걸망 속에 소중히 간직하고 왔나이다. 하룻밤을 유하지 않고 그냥 왔더라면 더 빨리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만 나으리께서 붙잡으시는 바람에 이제사 돌아왔나이다, 아씨 마님. 나으리께 받은 물건은 어떻게 할까요.”

툇마루 위에 놓아 주시지요.”

여삼은 걸망에서 퇴계로부터 받은 물건을 꺼내어 툇마루 위에 놓았다. 그러고 나서 다시 말을 이었다.

또한 나으리께서 막 길을 떠나려는 쇤네를 직접 서당 앞뜨락까지 마중해 주옵시고 그곳에서 아씨 마님께 드리라고 특별한 물건을 따로 챙겨 주셨사옵기에 함께 가져 왔나이다.”

그것이 무엇인가요.”

물입니다.”

여삼은 걸망에서 작은 항아리를 꺼냈다.

동이라고 부르는 양옆에 손잡이가 있으며 아가리가 넓은 질그릇이었다. 동이 속에는 물이 한가득 들어있는 듯 여삼은 조심스럽게 항아리를 꺼내어 툇마루 위에 함께 놓았다.

서당 앞에는 나으리께서 특히 아끼시는 우물이 하나 있사온데, 아무도 바깥나들이 하지 않은 신새벽에 나으리께서 친히 쇤네를 배웅해 주시 오며 길을 떠나려는 쇤네를 잠깐 막아 세우신 후 두레박으로 직접 물을 길어 올려 동이 한가득 물을 채워 이것을 아씨 마님께 전해드리라 하셨나이다.”

정화수(井華水).

아무도 깨어나지 않은 이른 새벽에 일어나 길어 낸 우물물.

온갖 정성을 들이거나 약을 달이는 데 쓰는 신성한 물. 그 정화수를 나으리께서 직접 두레박을 던져 물을 길어 여삼의 말대로 동이 한가득 물을 채워 나에게 보내 오신 것이다.

두향은 그 소리를 들은 순간 숨조차 쉴 수 없는 질식감을 느꼈다.

숨죽인 두향의 두 눈에서 어느덧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하였다.

나으리께서 내게 물을 보내 오셨다.

두향은 숨죽여 울면서 중얼거렸다.

나으리께서 내게 정화수를 보내 오셨다. 나으리께서 내게 생명수(生命水)를 보내 오신 것이다.

하룻밤을 머물고 여삼은 동트기 전 신새벽에 행장을 차리고 서당을 나섰다. 떠나기 전 나으리께 문안인사를 올려야 한다고 완락재 앞에서 여삼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나으리, 기침하셨습니까.”

아직 새벽이었는데도 방안엔 불이 켜져 있었다. 여삼은 누구보다 일찍 일어나는 퇴계의 일상생활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미 나으리가 잠자리에서 깨어나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누구신가.”

여삼입니다요.”

무슨 일인가.”

날이 밝기 전에 먼 길을 떠나야 하옵기에 문안인사를 여쭙니다.”

잠깐 기다리게나.”

퇴계언행록에 의하면 퇴계는 항상 날이 밝기 전에 반드시 일어나 갓을 쓰고 띠를 띠어서 서재에 나가면 얼굴빛을 가다듬고 단정히 앉아서 조금도 어디에 몸을 기대는 일이 없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그러한 퇴계의 율신(律身)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었던 것이다.

곧이어 서재의 문이 열리는데 과연 퇴계는 갓을 쓰고 띠를 두른 정제한 모습이었다.

아침은 드셨는가.”

아닙니다요, 나으리. 가야할 길이 멀어 서둘러 떠나려 하나이다.”

그럼 잠깐 부엌에 가서 물동이를 들고 따라 오시게나.”

여삼이가 부엌에서 작은 물동이를 들고 서당 앞 뜨락으로 나서자 퇴계는 이미 우물 옆에 서서 여삼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물 옆 후박나무 옆에서는 시끄러운 소리로 까마귀가 우짖고 있었다. 제자들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 어둑새벽이었다.

여삼이가 물동이를 들고 오자 퇴계는 두레박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 우물 속에 집어던졌다.

아이구, 나으리.”

여삼이가 당황해서 퇴계의 손에서 두레박을 빼앗으려 다가서며 말하였다.

쇤네가 물을 긷겠나이다.”

아니다. 내가 직접 물을 긷겠다.”

퇴계는 천천히 두레박에 물이 가득 담겨지기를 기다려 이를 끌어 올리며 대답하였다.

아무도 깨어나지 않은 이른 새벽에 길어 올린 물을 뭐라고 하는지 알고 있는가.”

정화수라고 하지 않습니까요, 나으리.”

그렇다. 이른 새벽에 처음 길은 우물물을 정화수라고 부른다. 물의 성질이 평()하고 맛이 달고 독이 없어 물의 으뜸이라고 부르지.”

퇴계는 손수 길어 올린 우물물을 동이에 부었다. 한번 길어 올린 우물물로 동이가 가득 차지 않았으므로 퇴계는 다시 두레박을 던져 물을 길어 올렸다. 반쯤 찬 동이에 물이 흘러넘치도록 가득 따라 주고 나서 퇴계는 여삼을 쳐다 보며 말을 이었다.

이 물을 두향 아씨께 전해 드리게나.”

퇴계는 후박나무의 잎을 따서 직접 아가리에 닫고 물이 흘러넘치지 않도록 새끼로 단단히 여미며 말하였다.

알겠습니다, 나으리. 두향 아씨께 전해 드리겠나이다.”

여삼이가 물동이를 걸망에 집어넣고 일어섰다.

퇴계는 웃으며 말하였다.

그릇에 담아서 술이나 식초에 담아두면 언제까지라도 물맛이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전하시게나.”

알겠습니다, 나으리. 쇤네는 이만 물러나겠나이다. 부디 옥체 만강하옵소서.”

서당을 나와서 한참을 걸어가던 여삼은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서당 앞 우물 곁에 퇴계는 아직 서서 모퉁이를 돌아서려는 여삼에게 연신 손짓을 하고 있었다.

언제까지라도 물맛이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아직 동이 트기 전 몸소 여삼이를 문밖까지 배웅하며 직접 두레박을 던져 정화수를 동이에 한가득 채워 두향이에게 보낸 퇴계. 그 이상의 정표가 있을 것인가.

열정(冽井).

퇴계가 도산 남쪽 기슭에 서당을 옮겨 짓기로 결심하였던 것도 바로 이 우물물 때문이 아니었던가. ‘도산잡영에서 퇴계는 여기는 작은 골짜기가 있어 앞으로 산과 들을 굽어보고 있고, 골짜기 속은 깊숙하고 넓으며, 바위기슭이 선명하고 돌우물의 물이 달고 맑아서 머물러 살기에 아주 적당한 땅이다.’라고 노래하지 않았던가.

돌우물의 물이 달고 맑다(石井甘冽)’란 표현에서 퇴계가 직접 열정(冽井)이라 명명하였던 돌우물.

퇴계가 이 우물물에 심취하고 이 우물물을 만나 비로소 물의 참맛을 얻고, 또한 밭농사를 짓는 농부가 사용하던 우물 역시 자신을 알아주는 진인(眞人)을 얻었다는 상호교감의 심정은 퇴계가 지은 열정(冽井)이라는 시 속에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음인 것이다.

서당의 남쪽

돌 우물물은 달고 맑네.

천년 오랜 세월을 산안개 속에 가라앉아 있었으니,

이제부터는 언제까지나 덮지 말게나.(書堂之南 石井甘冽 千古烟沈 從今勿幕)

돌 사이에 우물물이 너무 맑고 차가워서

저 홀로 있어도 어찌 내 마음 슬프겠는가.

세상으로부터 물러난 사람 여기 터 잡고 엎드려 사니,

한 바가지의 물로 샘과 내가 서로의 마음을 얻었네(石間井冽寒 自在寧心惻 幽人爲卜居 一瓢眞相得).”

비교적 인생의 말년에 지은 퇴계의 이 시는 단순히 우물물을 예찬한 절구(絶句)는 아니다.

이 시의 내용을 살펴보면 퇴계가 이 무렵 얼마나 역학공부에 몰두하고 있었던가를 미루어 짐작케한다.

공자가 말년에 역을 좋아하여 주역을 읽는 사이 책을 엮은 가죽끈이 세 번이나 끊어지고 논어에서 나에게 몇 년을 보태주어 오십 세에 이를 때까지 주역을 공부할 수 있었다면 큰 과오가 없게 되었을 것이다.’라고 한탄하였던 것처럼 퇴계 역시 항상 몸이 마르고 쇠약해지는 평생의 지병을 얻은 것도 이십 세 때 이르러 주역을 읽고 그 뜻을 강구하기에 거의 침식을 잊을 정도로 몰두하였던 데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공자가 말년에 위편삼절(韋編三絶)’, 책을 엮은 죽간의 끈이 세 번이나 끊어질 정도로 주역에 열중하였다면 퇴계 역시 말년에 이처럼 주역에 심취하고 있었던 것이다.

열정이란 시는 그러한 말년의 퇴계를 꿰뚫어 볼 수 있는 의미심장한 절구 중의 하나인 것이다.

우선 이제부턴 언제까지나 덮지 말게나.(從今勿幕)’란 구절은 주역에 나오는 물과 바람의 정(水風井)’이라는 괘에 나오는 말이다.

이 괘의 상육(上六:제일 위의 음효)의 풀이에 우물물을 길어내니 덮지 마라.(井水勿幕)’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 구절을 주자는 주역 본연의 올바른 뜻을 주석한 주역본의(周易本義)’에서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은 길어서 취한다. 막은 가려서 덮는 것이다(收汲取也 幕蔽覆也).”

또한 돌 사이의 우물물이 너무 맑고 차가워(石間井冽寒)’라는 구절 역시 주역의 수풍정(水風井)’ 괘에 나오는 내용을 인용한 것이다. 이 괘의 구오(九五:아래에서 다섯 번째 음효)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오고 있다.

우물물이 너무 맑아 차가운 샘물을 먹는다(井冽寒泉食).”

이 내용은 ()은 달고 깨끗함이다. 우물은 차가운 것이 맛있다. 달고 깨끗한 차가운 샘물을 사람이 먹을 수 있다.’는 뜻으로 풀이되고 있음인 것이다.

또한 저 홀로 있어도 어찌 내마음 슬프겠는가.(自在寧心惻)’라는 시구절도 주역의 수풍정괘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인용한 말.

우물을 깨끗이 쳐 놓아도 먹는 사람이 없으니, 내 마음이 슬프다.(井渫不食 爲我心惻)”

이 구절 역시 주자가 지은 시 열헌(冽軒)’에 나오는 깊고 맑은 것 얼마나 다행인가, 갑자기 마음 슬플 이유 없네(何幸且淵澄 無路遽心惻)’라는 구절을 인용하여 표현한 것이다.

그뿐인가.

열정의 마지막 한 바가지의 물로 샘과 내가 서로의 마음을 얻었네(一瓢眞相得)’란 구절은 더욱 의미심장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일찍이 공자는 자신의 으뜸 제자인 안회를 향해 다음과 같은 말로 칭찬한 적이 있었다.

어질도다, 안회여. 한 그릇 밥과 한 쪽박 물을 마시며 누추한 거처에 살고 있지만 남들은 그 괴로움을 감당치 못하거늘 안회는 그의 즐거움을 변치 않으니. 어질도다, 안회여(賢哉 回也 一簞食一瓢飮 在陋巷 人不堪其憂 回也 不改其樂 賢哉 回也).”

퇴계는 바로 공자가 극찬하였던 한 그릇의 밥과 한 표주박의 마실 물로 청빈한 생활을 하였던 안회를 본받아 한 바가지의 우물물을 통하여 서로의 마음을 얻는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일생을 마지막으로 꿈꾸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

이 무렵 퇴계에게 있어 열정의 우물물은 혼탁한 세상을 씻는 정화수이자 도리천(利天)을 흘러내리는 감로수(甘露水)였던 것이다.

열정을 통하여 비록 곤궁에 처해 있다 하더라도 그 속에서 도를 즐기겠다는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정신을 표현한 퇴계는 일찍이 공자가 말하였던 거친 밥을 먹고 물을 마시며, 팔을 굽혀 베더라도 즐거움은 그 가운데에 있으니, 의롭지 못하고서 부하고 귀함은 내게 있어 뜬구름과 같으니라(飯疏食飮水 曲肱而枕之 樂亦在其中矣 不義而富且貴 於我如浮雲)’의 구절을 그대로 실천하고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마음은 퇴계가 도산잡영(陶山雜詠)’에서 돌우물은 달고 차서 은둔하기에 딱 알맞은 곳(石井甘冽 允宣肥遯之所)’이라고 표현한 내용에서도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비둔(肥遯)이란 말은 주역의 둔괘(遯卦)’에 나오는 용어로 풍성한 은둔생활이니 이롭지 않음이 없다(肥遯无不利)’라는 말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토록 말년에 퇴계는 한갓 돌우물에 불과한 열정을 통해 공자처럼 역경에 심취하고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비록 주역이 점을 치는 복서라 하더라도 그 원리를 논하자면 자연히 우주론에서 시작하여 자연의 섭리, 만물의 기원, 인생론, 음양론 같은 문제를 다루지 않을 수가 없었는데, 특히 송대에 이르러 성리학이 성행하고부터는 주역은 유가의 철학을 논한 경전으로 크게 각광을 받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퇴계는 그 무렵 열정의 돌우물을 우주의 중심으로 보는 한편 그 차갑고 맑은 물을 생명의 근원으로 보아 생명수로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퇴계는 여삼이가 떠나기 전 몸소 두레박으로 아무도 깨기 전에 가장 먼저 우물물을 길어 올린 정화수를 이제 다시는 만나지 못할 두향에게 보냄으로써 마치 기독교에서 물로 세례를 베푸는 것과 같은 정화의식을 펼쳐 보인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 한 동이의 물은 두향의 몸을 담그는 축성(祝聖)된 성수(聖水)이기도 했던 것이다.

아씨 마님

아무리 기다려도 방안에서 아무런 기척이 없자 오랜 시간을 기다리던 여삼은 할 수 없다는 듯 먼저 말을 꺼냈다.

먼 길을 오느라 쏟아지지 않으려고 부단히 애를 썼습니다만 아마도 많이 흘러넘쳤을 것이나이다. 이 물동이는 어디다 놓을까요, 아씨 마님.”

그대로

행여 소리가 바깥으로 새어나가지 않을까 손가락을 깨물며 눈물을 흘리고 있던 두향이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대로 마루 위에 놓아두시지요.”

그럼 쇤네는 이만 가보겠나이다, 아씨 마님. 벌써 날이 저물어 어두워졌사오니 더 늦기 전에 서둘러 배를 타고 돌아가야 하겠습니다요.”

수고하셨어요.”

담담한 목소리로 두향이는 작별인사를 하였다.

수고라니요. 아씨 마님 덕분에 십수 년 만에 나으리를 만나 뵐 수 있었사오니, 쇤네야말로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겠습니다요, 아씨 마님. 쇤네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언제든 심부름 시키실 일이 있으시거들랑 지체 없이 쇤네를 찾아 주십시오, 아씨마님. 오는 길에 장뇌삼 하나를 구해왔는데, 노잣돈도 충분히 남아 쇤네가 사서 가져왔으니, 나으리께서 주신 정화수에 달여 드시지요. 그럼 이만.”

여삼의 발자국이 멀어져갔다.

그래도 두향은 방안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아득히 멀어져간 발자국 소리 뒤에 호수를 가르는 나룻배의 물결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그래도 두향은 방안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불도 켜지 않은 방안은 점점 먹물을 퍼부어 놓은 것 같은 칠흑 같은 어둠으로 가득 찼다. 그러나 두향은 여전히 방안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옥순봉 저 너머에서 얼굴이 가리웠던 달빛이 쏟아져 방안으로 흘러들어왔다. 그래도 두향은 제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나으리께서 무사하시다. 연거푸 꾸었던 흉몽으로 나으리의 신상에 무슨 변고가 있을까 걱정하였지만 나으리께서는 무사하시다. 그뿐인가. 나으리께서는 손수 두레박으로 우물물을 떠서 정화수를 보내주셨다.

정화수.

정화수는 동의보감에도 기록된 물의 한 종류로 정안수라고도 불린다. 물의 으뜸으로 손꼽히는데, 물의 성질은 평()하고 맛이 달며, 독이 없다고 동의보감의 저자 허준(許浚)은 설명하고 있다.

입에서 냄새가 나는 것을 없애고, 얼굴빛을 좋아지게 하며, 눈가에 생긴 군살과 막이 눈자위를 가리는 병을 없애주고, 술을 마신 뒤에 생기는 설사도 그치게 하는 것으로 알려진 물.

그밖에 차를 넣어 달여서 마시거나 머리와 손을 씻는 데도 좋은 물. 따라서 먹고 마시는 것보다는 주로 정성을 들이거나 약을 달이는데 쓰는 물. 그 물을 내게 보내주신 것이다.

쏟아져 들어온 달빛으로 방안은 대낮처럼 밝아졌다.

그제서야 두향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방문을 열었다. 온천지에 흘러넘치는 달빛으로 바깥세상은 눈부신 백야였다.

툇마루 위에는 여삼이가 놓고 간 물건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두향은 우선 접혀진 치마폭을 집어 들었다. 두향이가 그 치마폭을 보낸 것은 여삼의 말을 통해서만은 나으리의 안부를 짐작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나으리께서 건강하시다면 나으리께서 드신 붓과 필체에 절로 힘이 넘치실 것이다. 만약 나으리께서 고환에 병이 들어 위독하시다면 자연 붓조차 드실 힘이 없으실 것이 아니겠는가.

두향은 떨리는 손으로 접힌 치마폭을 조심스럽게 펼쳐 보았다.

치마폭에는 예 그대로 낯익은 나으리의 시 한수가 적혀 있었다.

死別已呑聲 生別常惻惻

그 시는 두 사람이 헤어지기 전날 밤 하룻밤을 지새울 때 정표로 퇴계가 써준 정표였다. 그 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죽어 이별은 소리조차 나오지 않고 살아 이별은 슬프기 그지없더라.”

20여 년 동안 두향은 얼마나 그 별시를 들여다보고 어루만졌던가. 마치 살아있는 나으리의 육신을 대하듯 두향이는 열 자에 불과한 그 문장을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곤 하였던 것이다.

그 시는 날이 샐 무렵 두향이가 전별시를 썼을 때 그 답장으로 나으리가 치마폭에 써 주었던 두보의 시였다. 두향이가 지은 즉흥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찬 자리 팔베개에 어느 잠 하마 오리.

무심히 거울 드니 얼굴만 야위었고야.

백 년을 못 사는 우리 인생

이별만이 더욱 설워라.

(轉輾寒衾夜眠 鏡中憔悴只堪憐 何須相別何須苦 從古人生未百年)”

방 안으로 스며든 월색은 더욱 교교해졌다. 그래서 굳이 촛불에 불을 밝힐 필요가 없음이었다. 두향은 자신이 보낸 치마폭 다른 여백에 새로운 시 한 수가 적혀있음을 발견하였다. 두향은 순간 가슴이 뛰었다. 나으리께서 또 다른 시 한 수를 적어 주셨다. 나으리께서는 친히 운필(運筆)하시어 20여 년 만에 문안 인사를 보내주신 것이다.

두향은 치마폭을 펼쳐 그 내용을 읽어보았다.

서로 보고 한번 웃은 것 하늘이 허락한 것이었네.

기다려도 오지 않으니 봄날은 다 가려고 하는구나(相看一笑天應許 有待不來春欲去).”

예전 그대로의 필체였다. 다소 기력이 떨어지신 듯 붓은 흔들려 필체는 예전보다 가늘어지고 떨린 듯 보였으나 붓놀림은 여전하였다. 그 힘찬 붓놀림을 보자 두향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 피어올랐다.

나으리께서 무사하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으리께서는 무사하시다. 어두운 하늘에서 큰 별이 떨어지는 계속된 흉몽에도 불구하고 나으리께서는 여전하시다. 나으리께서 이승에 무사히 살아계신 것으로 보아 아직까지는 다북쑥 우거진 무덤에 함께 묻힐 때는 아닌 것이다.

그보다도. 두향의 얼굴에 가득 미소가 떠오른 것은 퇴계가 보내온 다음과 같은 시의 내용 때문이었다.

서로 한번 웃은 것 하늘이 허락한 것이었네.”

낙연후소(樂然後笑).

즐거운 일이 있은 후에 웃는다.’는 말로 유가귀감에서 전해 내려오는 유명한 문장. ‘옛날 현인은 때가 된 후에 말하여 사람들이 그의 말을 싫어하지 않았고, 즐거운 일이 있은 후에 웃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 웃음을 싫어하지 않았고, 옳은 의리가 있은 후에 취한지라 그 취함을 싫어하지 않았다.’라는 내용에서 비롯된 말.

나으리께서는 우리들의 사랑을 서로 마주 보고 한 번 웃은 것(相看一笑)’으로 비유하고 있음인 것이다. 충분히 서로 즐거운 일을 함께 누렸으니 더 이상 거리낄 일도 없고, 하늘의 뜻과도 어긋나지 않는 천명이 허락한 것. 그러므로 옛 추억 생각하며 빙그레 웃는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다.

그뿐인가.

나으리의 전별시는 드디어 20여 년 만에 완성되는 것이다. 20여 년 전에 치마폭에 써준 나으리의 시는 다만 두보의 단시를 인용한 것이었으나 마침내 새로운 두 줄의 문장을 덧붙임으로써 다음과 같은 절구(絶句)로 완성되는 것이다.

나으리께서는 마침내 전구(轉句)와 결구(結句)를 새로이 보내오심으로써 매듭지으신 것이다.

그러므로 20여 년 만에 완성된 전별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죽어 이별은 소리조차 나오지 않고 살아 이별은 슬프기 그지없더라.

서로 보고 한번 웃은 것 하늘이 허락한 것이었네.

기다려도 오지 않으니 봄날은 다 가려 하는구나.”

실로 20년 만에 완성된 절묘한 연애시. 그중에서 기다려도 오지 않으니 봄날은 다 가려하는구나(有待不來春欲去).’라는 문장은 미구에 닥쳐올 인생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 그리하여 봄날이 다 가면 다북쑥 우거진 무덤에 함께 묻힐 것을 기약하는 맹세가 아닐 것인가.

두 손을 합장한 채 새로 쓴 나으리의 시구를 묵묵히 들여다 보던 두향은 그제야 생각난 듯 툇마루 한 곁에 놓인 물동이 쪽으로 다가갔다.

뚜껑을 벗기자 비록 먼 길 오느라 엎질러지긴 하였지만 아직도 가득 채워져 있는 정화수가 드러났다. 맑은 정화수 위에는 달빛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지고 있었다.

아무도 깨어나지 않은 신새벽에 나으리께서 직접 두레박을 던져 길어 올려준 우물물.

그러나 해가 뜬 후의 정화수는 빛으로 인하여 감로수로 변해 버린다.

한방에도 나와 있지 않던가.

정화수는 해가 뜨기 전에 처음으로 길어온 물을 말하는 것으로 입에서 냄새나는 것을 없애 주고, 얼굴빛을 좋게 하며, 눈에 생긴 군살을 없애 준다고 하지 않았던가. 또한 추로수(秋露水)는 가을철에 이슬을 아침 해가 뜨기 전에 받은 것을 말하는데, 소갈증을 낫게 하고, 몸을 가볍게 하며, 피부를 윤택하게 하고, 지장수(地漿水)는 석자쯤 판 양질의 황토 흙에서 나오는 물을 골고루 저은 후 가라앉힌 맑은 물을 이르는 것으로, 독버섯이나 중금속에 중독된 것을 풀어 주는 해독제로 황토수(黃土水)라고 불리는 명물인 것이다.

또한 한천수(寒泉水)는 맑고 찬 샘물로 소갈증, 열성이질, 열림(:소변에서 피가 나오는 것) 등을 치료하며, 대소변을 잘 나오게 하는 물로 알려져 있다.

그뿐인가.

한겨울에 내린 서리를 동상(冬霜)이라고 하는데, 이를 모은 물을 마시면 평소에 술을 많이 마셔서 생긴 열을 풀어준다.

동의보감 탕액(湯液)편의 수부(水部)에는 물의 종류를 33가지로 분류하고 있다. 섣달 납향에 눈 녹은 물을 납설수(臘雪水)라 하여 돌림병을 치료하는 데 특효가 있으며, 춘우수(春雨水)는 정월에 내린 빗물로 부부간에 각각 한 잔씩 나눠 마시고 성생활을 하면 임신하게 되는 사랑의 묘약으로도 알려져 있다.

이밖에도 몹시 휘저어서 생긴 물인 감란수(甘爛水)와 볏짚 지붕에서 흘러내린 물인 옥류수(屋流水), 조개껍질을 밝은 달빛에 비추어서 그것을 받은 방제수(方諸水), 국화 밑에서 나오는 국화수(菊花水), 매화 열매가 노랗게 될 때에 내린 빗물을 매우수(梅雨水), 짠 바닷물인 벽해수(碧海水), 멀리서 흘러내리는 물인 천리수(千里水),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깊은 산골짜기에 새로 판 웅덩이에 모인 빗물인 무근수(無根水), 끓는 물에 생수를 탄 생숙탕(生熟湯) 등이 약수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물의 으뜸은 정화수.

정화수에는 하늘의 정기가 몰려 떠 있기 때문에 여기에 보약을 넣어 달여서 오래 살게 하는 알약을 만들기도 하고, 깨끗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매일 이 물에 차를 넣고 달여서 마시고 머리와 눈을 깨끗하게 씻는데, 아주 좋다고 알려진 영수(靈水)인 것이다.

두향은 표주박으로 정화수를 조금 떠서 조심스레 마셔보았다. 옛말에 이른 대로 물맛은 달고 그리고 평하였다.

그러나

두향은 한 모금 물맛을 보고 나서 머리를 흔들며 생각하였다.

나으리께서 보내주신 물을 어떻게 마셔 없애버릴 수 있겠는가. 이것으로 약을 달이거나 차를 끓여 마실 수도 없을 것이다. 이 물은 오직 나으리를 위한 정화수로만 사용할 것이다. 천지신명께 나으리를 위해 비는 정화수(淨化水)로만 사용할 것이다.

그날 밤.

두향은 강선대에 나아가 목욕을 하였다. 아직 춘삼월이라 강물은 얼음장처럼 차디찼지만 두향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강물속에 들어가 몸을 씻었다.

보름을 지난 둥근달이 시작도 끝도 없이 흘러내리는 강물 위에서 은빛으로 부서지고 있었다. 그 빛의 비늘은 강물에서 마치 흰 메밀꽃처럼 흐드러지게 피고 있었다. 헤살거리는 강물은 두향의 몸을 구석구석 핥듯이 애무하였고 순간 두향은 언젠가는 이 강물이 자신의 몸을 집어삼킬 인당수와 같다는 예감을 느꼈다.

인당수(印塘水).

공양미 삼백석에 몸이 팔려 마침내 치마를 뒤집어쓰고 용왕의 진노를 달래기 위해 풍랑 속의 바다로 던져진 심청이가 빠져죽은 인당수.

자신도 언젠가는 심청이처럼 인당수 속에 치마폭을 뒤집어쓰고 떨어지는 꽃잎처럼 낙화할 것이다.

보름달은 점점 더 떠올라 온 강물은 월광으로 찬란하게 부서지고 있었으며, 온 누리는 월색으로 충만하였다.

두향은 정성 들여 머리를 풀어 감고 온몸을 깨끗이 씻었다. 그리고 방안으로 들어와 불을 밝히고 오랜만에 거울을 들여다보며 참빗으로 꼼꼼히 머리 빗어 쪽을 지었다. 뒤통수를 땋아 틀어 올린 후 비녀를 꽂고 나서 두향은 문밖으로 나아갔다.

촛불을 밝혀들고 행여 불어오는 바람에 촛불이 꺼질까 등롱에 담아서 장독대로 나아갔다.

장독대위에 조그만 소반을 하나 받쳐놓고 그 위에 등롱을 놓은 후 두향은 퇴계로부터 받은 정화수를 한 사발 떠서 올려놓았다.

이제 공중으로 치솟은 달은 두향의 정수리를 찌르고 있었다. 두향은 물끄러미 만월의 보름달을 쳐다보며 생각하였다.

보름달 속에는 전설 속에 나오는 대로 계수나무가 한 그루 서 있었고, 그 밑에서는 옥토끼가 먹으면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불사약을 찧고 있었다. 그 곁에는 달의 여신이 살고 있다는 선궁이 보였다.

항아(姮娥).

선궁 속에 살고 있다는 항아. 중국의 신화에 나오는 달의 여신으로 원래는 천계의 선녀였다. 그녀는 고대에 있어서 활의 명인이었던 예( )의 아내로 어느 날 남편에게 서왕모(西王母)를 찾아가 불사약을 구해오라고 재촉한다. 곤륜산 서쪽에 살고 있던 서왕모라는 여신은 불로불사약을 갖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예는 아내 항아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서왕모를 찾아가 불로불사약인 복숭아를 얻어온다. 서왕모는 평소 용맹스러웠던 예를 좋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선뜻 복숭아 두 개를 내주며 두 사람이 하나씩 나누어 먹으면 함께 불로불사할 것이며, 한사람이 욕심을 내어 두 개를 먹으면 천신이 될 수 있다고 가르쳐준다. 예는 굳이 다시 천신이 되고 싶다는 생각도 없었고, 지상에서의 생활에서도 만족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내와 더불어 하나씩 나누어 먹어 지상에서 행복하게 살아가고 싶어 하였다. 그러나 항아의 생각은 달랐다. 그래서 남편이 잠시 집을 비운 틈을 타서 천도(天桃) 두 개를 한꺼번에 먹어버린다. 그리고 달 속에 있는 광한궁으로 도망쳐 버린 것이다.

이러한 신화 때문에 달의 여신 항아는 수많은 시나 소설 속에서 아름다운 여인의 상징으로 표현되고 있으며 월궁항아(月宮姮娥)’란 고사성어는 절세미인을 비유해서 이르는 말로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당나라 최고의 시인 이상은(李商隱)이 지은 시속에도 다음과 같이 등장하고 있다.

운모 병풍 앞 촛불 그림자 깊어만 가고(雲母屛風燭影深)

은하수 너머 새벽별 기울어 갈 때(長河漸落曉星沈)

항아는 영약 훔친 일 후회하고 있으리(嫦娥應悔偸靈藥)

푸른 하늘 밤마다 홀로 지새우는 마음(碧海靑天夜夜心)”

그러므로.

두향은 보름달 속에 들어 있는 월궁을 쳐다보며 생각하였다.

그 월궁 속에 들어 있는 달의 여신을 보며 생각하였다.

그 월궁 앞의 계수나무 밑에서 불로약을 찧고 있는 옥토끼를 쳐다보며 생각하였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두향은 두 손을 모아 합장한 채 달을 쳐다보며 치성을 드리기 시작하였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천지신명께 비나이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월궁항아께 비나이다. 불로불사의 영약을 나으리께 내리소서. 계수나무 아래에서 찧고 있는 옥토끼가 만든 불사약을 나으리께 내리소서. 비나이다, 비나이다.”

원래 정화수를 떠놓고 비는 치성은 부엌의 조왕신에게 드리는 것이 보통이었다.

조왕신은 민속에서 부엌을 맡은 신으로 부엌의 모든 길흉을 관장한다고 알려진 민간신인 것이다.

주방의 살강 위에 가지런히 지푸라기를 깔아 사기 주발에 정한수 한 그릇을 올려놓고 치성을 드리는 것이 관례였는데 두향은 이와는 달리 장독대 위에 정한수 받쳐놓고 치성을 드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달님에게 치성하여 나으리의 건강과 장수를 기원하기 위함이었으니.

비나이다, 비나이다.”

두 손을 모아 손바닥을 비비며 두향은 쉴 새 없이 달을 향해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였다. 그리고 소리를 내어 중얼거렸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천지신명께 비나이다. 나으리의 무사안녕을 진정소발(眞情所發)하나이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월궁월신 항아선녀께 비나이다. 여신께서 가져오신 불로장생 천도복숭아를 나으리께 내리도록 달님께 비나이다. 소첩의 기도를 들어주시어 나으리께서 무병장수하시기를 운예지망(雲霓之望)하나이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천지신명께 비나이다. 행여 나으리께서 연세종명(捐世終命)하시거들랑 이 소첩도 한날한시에 숨을 거둘 수 있도록 사원무위(使願無違)하나이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소첩이 드리옵는 이 소원소망을 가엾이 여기시어 서기지망(庶幾之望)이 될 수 있도록 천지신명은 도우소서. 월궁항아는 이 소첩을 불쌍히 여기시어 소원성취하도록 도우소서. 비나이다, 비나이다. 천신지기(天神地祇)께 비나이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일월성신께 비나이다.”

그날부터 시작된 정화수의 치성은 전해오는 전설에 의하면 퇴계가 죽는 그날까지 2년여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그대로 계속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선조3, 1570128.

오후 5시에서 7시 사이인 유시(酉時) 초에 이퇴계가 마침내 숨을 거둔 바로 그 순간에는 두향의 부엌 한구석에 보관된 정화수가 갑자기 붉은 핏빛으로 변해버렸다고 전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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