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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부 격물치지(格物致知) 제3장 천도책(天道策)

5부 격물치지(格物致知) 3장 천도책(天道策)

 

1558년 명종 13년 겨울.

성균관의 문묘 뒤쪽에 설치된 명륜당(明倫堂)에서는 별시해(別試解)가 거행되고 있었다.

별시란 정기적으로 3년에 한 번씩 열리는 식년과(式年科)라 불리는 과거시험과는 달리 세자의 탄생, 책봉과 같은 나라의 경사가 있거나 10년에 한 번 당하관(堂下官)을 대상으로 한 중시(重試)가 있을 때 시행하던 일종의 부정기적인 과거시험이었다.

식년시에는 33명의 인재가 선발되고, 10년 만에 한 번씩 치르는 중시 때는 조의(朝儀)를 행할 때 당상의 교의(交椅)에 앉을 수 없는 서얼(庶孼)과 같은 특수한 신분의 낮은 계층 사람들이 참석할 수 있었으나 이번의 별시는 주로 성균관 유생에 한정되어 치르는 별시문과(別試文科)였다.

율곡은 이 특별시험에 참석하기 위해서 강릉을 떠나 시험 이틀 전에야 한양의 수진방에 도착하였다.

그해 봄 퇴계를 만나 23일의 짧은 상봉을 끝낸 후 율곡은 줄곧 강릉에 머물며 학문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율곡이 별시에 응시하기 위해서 한양으로 돌아온 것은 거의 10개월 만의 외출이었던 것이다.

율곡으로서는 세 번째의 과거시험이었다.

이미 율곡은 불과 13세의 어린 나이로 진사과에 초시로 합격하였다. 두 번째 시험은 금강산으로 출가하였다 환속한 다음 해였던 155621세 때의 일이었다.

한성부에서 실시한 것으로 한성시(漢城試)라고 불렸던 초시였다. 이 시험에서 율곡은 장원으로 뽑혀 널리 문명을 떨쳤으나 최고 학부인 성균관에 유학할 수 있는 특권을 얻은 것에 지나지 않았을 뿐 여전히 백면서생에 불과하였던 것이다.

율곡에게 있어 세 번째 별시는 각별한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이제 율곡은 더 이상 홀몸이 아니라 아내까지 거느린 가장이었고, 양반의 신분으로 태어난 율곡이었지만 이제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이 과거에 급제한 뒤 입신양명함으로써 가족을 부양하고, 자신의 자아를 실현하기 위해서라도 과거제도에 얽매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뿐인가.

율곡은 스승 퇴계를 만나고 강릉으로 돌아간 10개월 동안 스승으로부터 점지받은 거경궁리에 혼신의 힘을 다하여 몰두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율곡이 평생 동안 공부하였던 학문의 양보다 이 짧은 10개월 동안에 더욱 깊이 침잠하였던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율곡의 철학과 지적수준이 이 무렵에 거의 완성되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얼마나 많은 시간을 학문에 투자하느냐 하는 사실보다 비록 짧은 기간이더라도 얼마나 집중하고 몰두하느냐 하는 것이 학문에 있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하는 사실을 율곡의 모습을 통해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장면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세 번째의 과거시험이었던 별시해는 율곡의 학문을 객관적으로 시험해 볼 수 있는 바로미터였던 것이다.

율곡이 이 별시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고 있었던가 하는 것은 뜻밖에도 율곡이 스승 퇴계에게 자신이 과거시험에서 실패하였음을 고백하는 장면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율곡이 9번이나 과거시험에서 장원급제하였던 천재로만 알고 있을 뿐 그 역시 과거시험에 실패하였던 사실은 간과하고 있다.

그러나 천하에 영재였던 율곡도 한번 과거시험에서 낙과하였던 것은 엄연한 사실. 이에 대해 퇴계는 율곡의 상심한 마음을 위로하며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내고 있다.

옛 사람이 이르기를 젊은 나이에 과거에 오르는 것은 하나의 불행이다.’라고 하셨으니, 자네가 이번 과거에 실패한 것은 아마도 하늘이 자네를 크게 성취하려는 까닭인 것 같으니, 자네는 아무쪼록 힘을 써 공부에 정진하시게나.”

퇴계의 이러한 위로는 맹자의 고자장구하편(告子章句下篇)’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인용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하늘이 큰 임무를 그 사람에게 내리려 하실 적에는 반드시 먼저 그 심지를 괴롭히며, 그 근골(筋骨)을 수고롭게 하며, 그 몸과 피부를 굶주리게 하며, 그 몸을 궁핍하게 하여 그의 하는 것을 어그러뜨리고 어지럽히는 것이니, 그렇게 함으로써 마음을 분발시키고 성질을 참게 하여 그 능하지 못한 부분을 증익시키기 위한 것이다(天將降大任於是人也 必先苦其心志 勞其筋骨 餓其體膚 空乏其身 行拂亂其所爲 所以動心 忍性 增益其所不能).”

퇴계의 편지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율곡이 퇴계를 만난 후부터 그해 겨울 별시해에 참석할 때까지 그 중간에 과거시험에 한 번 더 응시하였던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시험에서 율곡은 낙과하였던 것이다.

자존심이 유난히 강했던 율곡으로서는 씻을 수 없는 치욕이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절치부심. 그해 겨울에 열리는 별시해를 율곡은 자신의 명예를 회복하는 배수의 진으로 삼는 한편 자신의 학문을 총정리하는 청우계(晴雨計)로 삼았던 것이었다.

율곡은 검은빛을 띤 짙은 남색의 모시 청포를 입고, 검은 띠에 유건(儒巾)을 쓴 전형적인 유생의 차림새로 시험장인 성균관으로 들어섰다.

그때였다.

한 떼의 유생들이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성균관을 들어서려는 율곡을 막아섰다.

그들의 면면은 성균관에서 함께 공부하였던 낯이 익은 학우들이었는데 뜻밖에도 그들의 기세는 험악하였다.

이미 금강산에서 하산하여 치렀던 과장에서도 겪었던 경험이었으므로 율곡은 크게 놀라지 않았으나 기세는 전보다 훨씬 더 등등하였다.

네 이놈, 네가 감히 어딜 함부로 들어가려 하느냐.”

덩치 큰 유생 하나가 율곡의 앞을 가로막으며 소리 질러 호통쳤다.

그러자 유생들을 따라온 선접군(先接軍)들이 막대기와 같은 무기들을 들고 삽시간에 율곡을 에워쌌다. 이 선접군들은 원래 각 유생들마다 고용한 힘깨나 쓰는 건달들이었다. 이들은 한양의 뒷골목을 휘어잡고 못된 일만을 골라 하는 건달패들이 대부분이었다.

과장은 각각 정해진 좌석이 없으므로 과장에 들어서면 우선 좋은 자리를 잡아야 했다.

좋은 자리는 현제판(懸題板)이라 불리는 시험문제를 가장 빠르게 볼 수 있는 곳. 또한 답안지를 빨리 낼 수 있는 곳이 으뜸으로 그 좋은 자리를 확보하려면 남들보다 먼저 입장하여야 하는데, 이때는 자연 치열한 몸싸움이 벌어지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과거장에 입장하는 부문(赴門)에는 각 유생들이 고용한 선접꾼들이 자리 잡고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서 있기 마련이었던 것이다.

주로 한양에 사는 세도가의 자제들인 유생과는 달리 율곡은 변방에 사는 서생이었고, 또한 선접꾼들을 고용할 만한 여력도 없었으므로 혼자서 부문 앞에 서서 과장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들이 합세하여 율곡을 에워싼 것이었다.

네 놈은 일찍이 사도에 빠져 석씨를 숭상하던 잡놈이 아니더냐. 그러한 네가 어찌하여 성인들의 신위가 모셔진 문묘에 함부로 드나들 수 있단 말이냐.”

유생의 말은 사실이었다.

원래 성균관의 대성전(大成殿)은 조선의 태조 이성계가 처음으로 세운 건물이었다.

그 후 불에 탄 것을 태종 7(1407)에 다시 세워 공자를 비롯하여 증자, 맹자, 안자, 자사 등 4대 성인과 공자의 뛰어난 제자들인 10철의 신위를 모신 거룩한 사당이었던 것이다. ‘대성전이라는 당호도 중국 곡부(曲阜)에 남아있는 공자의 묘당에서 그대로 따온 것으로 유교를 국교로 삼고 있던 조선에서는 함부로 드나들 수 없는 신성한 성전이었던 것이다.

율곡은 이미 2년 전에 한성시에서 그러한 수모를 당하였으므로 크게 놀라지는 않았으나 이번에는 선접꾼까지 합세한 행패였으므로 나아갈 수도 물러갈 수도 없는 사면초가의 형국이었다.

물론 부문 앞에는 수협관(搜挾官)이 눈을 부라리며 서 있었다.

과장에서는 수협관의 힘이 가장 막강하여 과거를 보는 거자(擧子)들에게는 저승사자라고 불리던 관리들이었다. 이들은 거자들이 시험장 안에 종이와 붓, , 벼루 이외에는 그 어떤 물건도 갖고 들어가지 못하도록 감시하였다. 만약 책 따위를 숨기고 들어가다 들키는 경우에는 몇 년씩 응시자격을 박탈하는 조치를 내렸던 것이다.

또한 수협관은 응시생의 몸수색을 철저히 할 뿐 아니라 과거 시험장 안에 응시생과 종사자 이외에는 그 누구도 들어가지 못하도록 하였다.

양반의 자제들은 선접꾼 이외에도 평소에 수종을 드는 하인을 데리고 다녔는데, 특히 이번 별시는 성균관의 유생들만 치르는 특별시였으므로 선접꾼은 물론 하인들의 입장이 허락되지 않았던 것이다.

천하의 왈패들인 선접꾼들도 수협관을 두려워하였는데, 왜냐하면 자칫 눈 밖에 났다가는 누구든 즉시 체포되어 수군(水軍)으로 보내어질 위험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막강한 권한을 가진 수협관이었지만 그는 부문을 지키고 있었을 뿐 세도가의 자제들인 유생들의 말다툼을 말리거나 참견하여 비위를 건드릴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짐짓 못 본 체 한눈을 팔고 있었던 것이다.

그 순간 율곡을 막아 세운 유생이 큰소리로 꾸짖어 말하였다.

네놈이 정히 성균관 안으로 들어가려면 내 가랑이 사이를 개처럼 기어가거라. 그러하지 못한다면 감히 한 발자국도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유생의 말은 참을 수 없는 모욕이었다.

원래 이러한 모욕은 과하지욕(跨下之辱)이란 말에서 나온 것인데, 일찍이 유방을 도와 천하를 통일하였던 명장 한신(韓信)의 고사에서 비롯되었다.

천하제일의 한신이었으나 청년시절에는 비참하고 불우한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워낙 집이 가난하여 동네에서 놀림감이 되었으며, 용모도 신통치 않아 남으로부터 업신여김을 당하고 있었다. 더욱이 그는 스스로의 손으로 농사를 짓지 않아 천하의 게으름뱅이로 손가락질까지 받고 있었다.

왜 가난하여도 농사를 짓지 않는가.’하고 사람들이 물으면 한신은 농사를 짓는 일은 농부가 할 일이다.’라고 대답하고 천민의 신분으로는 어울리지 않게 허리에 칼을 차고 다녔다.

이를 불쌍히 여긴 빨래하던 노파가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가 밥을 주자 한신은 사양하지 않고 맛있게 먹었다. 그 뒤부터 한신에게는 노파에게 밥을 빌어먹은 한신이란 별명이 붙어 더 한층 멸시의 대상이 되었는데, 이는 말이 밥을 얻어먹은 것이지, 실은 밥을 구걸한 거렁뱅이의 행각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한신이 칼을 차고 다니는 모습을 보고 동네의 불량배들이 한신을 크게 조롱한다. 불량배 중의 우두머리가 한신이 거리를 지나가려하자 길을 막고 갈 수 없다고 엄포를 놓았다. 정히 가고 싶다면 자신의 가랑이 사이로 지나가라고 명령하였던 것이었다.

그러자 한신은 태연한 얼굴로 몸을 굽히고 개처럼 기어서 무뢰배의 두 가랑이 사이로 기어갔던 것이다.

수과하욕. ‘다리 사이를 기어가며 욕을 참는다.’라는 뜻의 고사성어는 바로 천하의 명장 한신의 이러한 모습에서 탄생된 것. 과하지욕((跨下之辱)으로도 불리는 이 장면은 영원한 승리를 거두기 위해서는 한순간의 치욕쯤은 대수롭지 않다고 생각한 한신의 깊은 야망을 엿볼 수 있는 명장면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율곡이 한신의 고사를 모방하여 유생의 명령대로 가랑이 사이를 기어갈 수는 없음이었다.

더구나 그 유생은 당대 제일의 세도가였던 동고(東皐) 이준경(李浚慶)의 아들. 이준경은 그 무렵 병조판서를 거쳐 우의정과 좌의정을 두루 제수하고 있었던 최고의 권신이었다.

언젠가는 영의정에 오를 만큼 명종으로부터 큰 신망을 얻고 있었던 원로대신으로 큰 명망이 있었으나 그 아들은 아버지와 달리 파락호(破落戶)였던 것이다.

율곡은 기세등등한 유생을 상대하지 않고 몸을 비켜 다른 길로 가려 하였다. 그러자 선접꾼들이 재빠르게 율곡을 포위하였다. 선접꾼들은 자른 도포를 젖혀 매어 옷매무새를 단단히 하고 우산과 빈자리, 그리고 말뚝과 막대기 같은 도구들을 들고 과장이 열리면 쏜살같이 안으로 들어가 현제판에서 가장 가까운 자리를 차지하려는 왈패들이었다.

이들이 그러한 이상한 도구들을 들고 다닌 것은 쟁접(爭接)을 통해 자기가 차지한 자리를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표식을 하기 위함이었다.

왜냐하면 현제판 근처에 자리 잡으면 장막을 치고 자리를 깔고 우산을 씌움으로써 자신을 고용한 주인에게 좋은 자리를 선점하였음을 알릴 수 있었던 것이었다.

따라서 숙연하여야 할 과거시험장은 이들에 의해서 삽시간에 난장판으로 변해 버리기 일쑤였다.

그러나 이번의 과거는 성균관 유생들만 치를 수 있는 별시문과.

따라서 이들은 부문 안으로 출입이 엄격히 통제되고 있었으므로 그렇지 않아도 자신이 고용한 주인의 눈치를 보고 있었던 선접꾼들은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몽둥이를 들고 율곡을 당장이라도 난장질할 듯 포위하고 에워쌌던 것이다.

일촉즉발이었다.

그때였다. 지나가던 과유(科儒) 하나가 이를 보고 소리쳐 말하였다.

이 무슨 일인가.”

지나가던 유생은 선접꾼에게 포위된 율곡의 앞으로 뛰어들었다.

도대체 무슨 일들인가.”

뛰어든 유생은 율곡과 세도가의 아들도 잘 알고 있었던 송강(松江) 정철(鄭澈)이었다.

정철은 율곡과 동갑내기로 당대 최고의 라이벌이었다.

그러나 율곡이 몰락한 양반의 가문으로 시골 출신의 서생인데 반해 정철은 집안도 좋은 편으로 그의 큰누이가 인종의 숙의(淑儀)여서 어릴 때부터 궁중에 자유롭게 출입하여 당시 대군으로 있던 명종과도 같이 놀며 친숙하게 지냈던 명문가의 출신이었다.

정철이 훗날 장원급제하자 명종은 크게 기뻐하며 특별히 주찬(酒饌)을 내려줄 만큼 임금과 가까운 사이였으므로 그 누구도 무시할 수 없었던 신분이었던 것이다.

어서 오시게나, 송강.”

율곡에게 가랑이 사이로 지나가라고 억지를 부렸던 유생이 거들먹거리며 말하였다.

저자가 한때 머리를 깎고 석씨의 문중에 들어가 사도에 빠졌었는데, 어느 안중이라고 성인들의 신위가 모셔진 문묘에 함부로 드나들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내가 들어가지 못하도록 출입을 막고 있었네.”

순간 정철은 그 유생이 실은 율곡에게 질투심을 느끼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과장에서는 너나 할 것 없는 누구나 적수. 한 사람이라도 낙과할 수 있다면 그만큼 급제할 수 있는 확률은 높아지기 마련인 것이다. 더구나 온 나라에 천재로 익히 평판이 자자한 율곡이 아니었던가.

누구보다 당대 최고의 문장가였던 정철이었으므로 그 자신도 율곡에게 호적수(好敵手)의 경쟁심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유생의 억지는 대의명분 때문이 아니라 실은 적개심에서 나온 행동임을 꿰뚫어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이보시게나.”

정철이 만류하여 말하였다.

율곡이 한때 불문에 귀의하였다는 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이제는 방향을 바꾸어 옛길로 돌아왔으니 그것이 무슨 허물이 될 수 있겠는가.”

정철은 율곡과는 달리 평소에 술을 좋아하고 여색을 가까이 하는 호방함이 있었다. 정철은 율곡을 쳐다보며 크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한번 유건을 벗어보시게나. 자네가 여전히 삭발하였다면 아직 사도에 있는 것이고, 유발하여 상투가 있다면 이미 궁향에서 벗어난 것이니, 자유롭게 문묘를 출입하여도 무방할 것이 아니겠는가.”

눈치가 빠른 정철로서는 절묘한 절충안을 내놓은 것이었다.

율곡이 파락호의 가랑이 사이를 개처럼 기어간다는 것은 천부당만부당한 일이었고, 그렇다고 유생의 기세도 녹록지 않아 쉽사리 물러설 태세가 아니었으므로 유건을 벗어 유발을 보여주는 것으로써 상호 원만하게 마무리하자는 타협안을 제시한 것이었다.

그러나 자존심이 강한 율곡이 그렇다고 제 손으로 유건을 벗을 수는 없는 노릇. 더구나 검은 유건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신체발부(身體髮膚) 중에서 가장 중요한 머리칼을 가리는 유일한 보호막이 아닐 것인가.

이러한 사실을 모를 리 없는 정철은 율곡에게 다가가 손을 올려 율곡의 유건을 슬며시 벗기려 하였다. 율곡이 물러서며 반발하려 하자 정철은 빙그레 웃으며 눈을 끔쩍끔쩍하였다.

정철의 눈짓은 자존심이 상해도 잠깐만 그대로 있어달라는 무언의 신호였다.

보시게나.”

율곡의 유건을 벗기자 큰 상투가 그대로 드러났다.

그 무렵 율곡은 머리를 깎지 않고 그대로 길러 선 채로 머리를 빗을 만큼 기르고 있었다고 기록은 전하고 있다.

전해오는 야사에 의하면 율곡에게 글을 가르쳤던 어숙권(魚叔權)은 율곡이 금강산에서 하산한 이튿날 찾아와 문안 인사를 올리자 무엇보다 율곡이 삭발을 하였는지의 여부를 알고자 억지로 관을 벗겨 머리카락을 확인하였다고 전해오고 있다.

관을 벗기자 길게 늘어진 머리가 몇 척이나 되어 어숙권이 손뼉을 치며 크게 기뻐하였다는 사실이 같이 글을 배운 동문 이붕상(李鵬祥)의 목격담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었는데, 아마도 그 무렵 율곡은 결혼을 한 성인이었으므로 머리털을 끌어올려 잡아맨 전형적인 상투를 하고 있었을 것이다.

자네가 율곡이 한때 머리를 깎고 석씨의 문중에 빠져 중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보다시피 유발하고 어른 주먹만한 상투가 있지 않은가. 그러니 성인들의 신위가 모셔진 문묘에 드나든다 한들 무슨 허물이 있겠는가.”

정철은 호방하게 웃으며 다시 한번 율곡을 향해 눈을 끔쩍끔쩍하였다.

정철은 16세에 당시 거유였던 김인후(金麟厚)에게 학문을 배우고, 뒤에는 고봉(高峰) 기대승(奇大升)에게도 글을 배워 도학에도 조예가 깊었으나 술을 좋아하고 여자를 가까이하던 천부의 풍류기질 때문에 평생 반목의 대상으로 파란만장한 일생을 보낸다. 그러할 때마다 율곡은 직접 나서서 정철을 변호해 주었고, 정철 역시 율곡을 아끼는 친구로서의 의리를 잊지 않았는데, 이러한 사실은 율곡이 정철에게 보낸 몇 편의 시에도 잘 나타나 있다.

정철이 호남의 외직으로 떠나려 하자 율곡은 가엾기도 해라. 오늘 밤의 저 달이 서로 헤어져 먼 곳으로 떠나게 하니(隣今夜月 相送到天涯)’라고 이별을 슬퍼하였고, 정철의 집을 방문하여 함께 술을 마시다가 시선을 마주치니 맑은 생각 엉키고(擊目凝淸思)’란 오언율시를 지은 것으로 보아도 두 사람의 우정은 눈빛만으로도 서로의 청사(淸思)를 꿰뚫어 볼 수 있을 만큼 각별하였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두 사람의 우정은 바로 별시해가 열렸던 성균관의 부문 앞에서 보여준 정철의 따뜻한 배려에서부터 싹튼 것이었다.

눈을 끔쩍끔쩍하면서 율곡의 유건을 벗기는 뛰어난 임기응변을 통해 율곡은 사면초가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그의 일생에서 가장 빛나는 문장인 천도책(天道策)을 시지(試紙)를 통해 과거시험의 답안지로 써 올림으로써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이니, 그런 의미에서 보면 정철은 율곡의 평생 은인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그 이후부터 두 사람은 눈빛만 보고도 상대방의 의중을 헤아릴 수 있는 관포지교(管鮑之交)의 우정을 쌓아가게 되었던 것이다.

이제 되었는가. 문묘에 출입하여도 무방하겠는가.”

정철은 크게 웃으며 유생의 어깨를 툭툭 건드리면서 말하였다.

율곡을 에워싼 유생의 무리들도 이제 더 이상 떼를 쓸 수는 없음이었다. 그러나 패거리의 우두머리였던 파락호는 그냥 물러설 수는 없다는 듯 손으로 먼지를 털며 대답하였다.

좋다. 네 놈이 과장에 들어가는 것은 허락하겠다. 하지만 현제판이 가까운 앞자리에 앉아서는 아니 된다. 여봐라.”

그는 주위에 진을 치고 있는 선접꾼들을 쳐다보면서 소리쳐 말하였다.

부문이 열리거든 여기서 지키고 있다가 모든 유생들이 출입한 뒤에 이 자를 맨 나중에 들여 보내도록 하거라. 만약 남보다 조금이라도 먼저 들어가려 하거든 당장이라도 태질하여 쫓아내 보내도록 하거라. 알겠느냐.”

예에-”

건장한 선접꾼들이 굽실거리며 대답하였다.

원래 계급사회에서 선접꾼과 같은 상민들이 양반집 자제의 행동을 막거나 행패를 부리는 것은 국법을 어기는 엄중한 죄였으나 명령을 내린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삽시간에 살벌한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마침내 부문이 열리고 과장이 시작되었다.

조금이라도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유생들이 한꺼번에 부문으로 몰려들었다. 그러나 문을 지키고 있던 수협관들은 한 사람씩 한 사람씩 엄격하게 몸수색을 하고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모든 시험에는 부정부패가 따르는 법. 하물며 입신양명을 향한 절호의 기회가 보장되는 과거시험에 있어서야.

인간이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부정한 방법이 총동원되었는데, 예를 들면 예상답안지를 미리 만들어가는 것, 시험지를 바꾸는 것, 채점자와 짜고 후한 점수를 주는 것, 입고 가는 옷 안쪽에 사서삼경의 내용을 깨알같이 적어 커닝페이퍼를 만드는 것, 합격자의 이름을 바꿔치는 것, 출제자와 채점자가 공모하거나 서리를 매수하는 것, 특정 정파가 자파 세력에게 의도적으로 후한 점수를 주거나 친인척을 뽑는 것,.

특히 재미있는 것은 마치 오늘날 수험생들이 휴대전화와 최첨단 전자 장비를 동원하여 부정시험을 치르듯 과거시험에도 첨단기술이 동원되었다는 기록이 나와 있다는 점이다.

숙종실록에는 당시로서는 이러한 부정방법이 나오고 있다.

숙종 때의 일이었다.

어느 날 성균관 앞 반촌(泮村)의 한 아낙네가 나물을 캐다가 땅에 묻힌 노끈을 발견한다.

아낙네는 신기하게 생각하고 노끈을 잡아당겼는데, 끈은 대나무통과 이어져 있었고 그 대나무통은 과거 시험장인 성균관의 반수당(泮水堂)으로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미리 반수당 담장의 밑을 파 지하도를 만들고 대나무통이 자유롭게 통과할 수 있도록 터널을 파 놓은 것이었다.

시험장 안에서 통 속에 시험문제를 넣어 신호를 보내면 담 밖에 있던 자가 줄을 당겨 시험문제를 확보하여 답안지를 작성한 후 다시 노끈에 묶어 들여보낸 것이었다. 조사를 했으나 범인은 잡을 수 없었다고 실록은 기록하고 있는데, 어쨌든 과거시험이 열렸던 반수당은 바로 율곡이 별시를 보던 바로 그 자리.

이런 첨단기술의 부정방법은 그 당시에도 대리시험을 봐주는 전문가가 있었다는 산 증거이며, 실제로 거벽(巨擘)이라 불리는 전문적으로 과거 답안지를 대신 지어주는 전문가가 있었으며, 또한 사수(寫手)라고 불리는, 글씨를 대신 써 주는 사람도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성균관에서 유생들만 모여서 치르는 별시문과는 다른 과거와는 달리 오직 응시자만 출입할 수 있었으므로 자연 일일이 신분을 확인하며 당사자만 과장 안에 들이는 저승사자, 수협관의 감시가 그만큼 엄중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수협관은 한 사람씩 몸을 더듬어 일일이 확인하였다. 거자들이 들고 갈 수 있는 허락된 문방구는 오직 시지라 불리는 종이와 붓, 그리고 벼루와 먹뿐이었다.

과거시험을 치를 때는 따로 문제를 인쇄한 답지를 나눠주지 않았으므로 거자들은 각자 별도의 종이를 마련하고 있어야 했다.

그러나 세도 있는 명문가의 자제들은 은밀히 복중(腹中)에 적서(積書)를 몰래 감추고 들어가거나 노골적으로 행담(行擔) 속에 자신들이 보던 책들을 넣어 들어가곤 하였다.

행담이란 싸리나 버들로 만든 작은 상자로 책가방과 같은 것인데, 이 가방 속에 자신이 읽던 책이나 예상답안지를 미리 넣어 들어가는 것이었다.

이러한 방법은 가장 고전적인 커닝 방법으로, 이를 협서(挾書)’라고 하였다.

이수광이 지은 지봉유설(芝峰類說)’에는 법이 해이해져서 과장에 드러내놓고 책을 갖고 들어가 과거장이 마치 책 가게와도 같았다.’라고 기록하고 있을 정도였던 것이다.

특히 과장의 법이 극도로 문란해진 것은 임진왜란 이후부터였고, 율곡의 시대에는 비교적 공정하고 엄격하게 시행되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족벌과 파벌에 의한 부정행위가 난무하고 있었던 것이다.

수협관은 한 사람씩 수색하여 과장 안으로 들여보냈는데, 율곡은 순서가 다 되어도 입장할 수가 없었다.

주인으로부터 명령을 받은 선접꾼들이 눈을 부라리고 서서 행여 율곡이 조금이라도 먼저 안으로 들어가는가를 감시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막대기와 말뚝을 손에 세워 들고 서서 여차하면 당장이라도 태질을 할 듯 잔뜩 벼르고 서 있었다.

그 순간.

시종여일 침착한 태도를 보이고 서 있던 율곡이 갑자기 뚜벅뚜벅 부문을 향해 걷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오히려 당황한 것은 선접꾼들이었다.

이들은 자신을 고용한 유생들로부터 모든 거자들이 들어간 뒤 맨 나중에 들여보내라.’라는 엄중한 경고를 받은 터였으므로 일시에 몽둥이를 들고 율곡을 막아섰다.

그 순간이었다.

네 이놈들, 썩 물러가지 못하겠느냐.”

줄곧 침묵을 지키던 율곡의 입에서 대갈일성이 터져 흘렀다.

난데없는 고함소리에 선접꾼들은 흠칫 놀라며 몇 발자국 물러섰다. 그러자 율곡은 그 가운데로 빠져서 걸어가기 시작하였는데, 잠시 후 태세를 정비한 선접꾼들이 한층 더 사나운 기세로 율곡을 에워쌌다. 파락호의 명령대로 당장이라도 태질을 할 듯 험악한 상황이었다.

네놈들이 내 몸에 손이나 까딱하면 당장이라도 수협관에게 고하여 네놈들을 수군으로 보내버릴 것이다.”

율곡은 손을 들어 수협관을 가리키며 말하였다. 율곡은 선접꾼의 치명적인 약점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었다.

수군(水軍).

이는 마치 한때 폭력배들을 따로 압송하여 노동현장에 투입하거나 혹은 따로 교도소에 가둬버리는 것과 같은 특별한 형벌이었다.

오늘날의 해군(海軍)에 해당되는 병졸로 수사(水師), 혹은 주군(舟軍)으로도 불렸는데, 그 무렵 왜구의 빈번한 침입으로 수군이 재정비됨으로써 군액(軍額)이 차츰 확산되고 있었으므로 이를 충원하기 위해서 주로 세력과 재산이 없는 하층민들이 수군으로 입속되었던 것이다.

원래는 노 젓기에 익숙한 연해민(沿海民)만으로 충당시켰으나 워낙 힘든 육체노동이 요구되는 병력이었으므로 나중에는 선접꾼과 같은 건달들을 차출하여 강제로 입영시켰던 것이다.

원래 수군은 해상근무를 통하여 해상의 방어를 담당하는 군제의 특성상 항상 병기와 군량을 병선에 싣고 해상에서 대기 근무를 해야만 했었다. 따라서 대부분의 양민들은 수군징집을 기피하여 하는 수 없이 조정에서는 수군들에게 용역을 면제해주고, 부자완취(父子完聚) 등 여러 혜택을 주었으나 그래도 수군들이 모자라게 되자 양천불명자(良賤不明子) 혹은 죄인들을 징발하여 수군으로 충원하였던 것이다.

그 순간 선접꾼들은 불에 덴 듯 한꺼번에 물러섰다.

어서 썩 비켜서지 못하겠느냐.”

재차 율곡이 호통치자 선접꾼들은 약속이나 한 듯 투덜거리며 길을 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조정에서는 일단 수군에 편입되면 일정한 군액을 유지하고자 세전(世傳)으로 세습하는 규제정책을 펼치고 있었던 것이다.

즉 한번 애비가 수군에 들어오면 아들 역시 자연 수군이 될 수밖에 없어 이 무렵 수군에 징발된다는 것은 칠반천역(七般賤役)으로 간주되고 있었던 것이다.

율곡은 유유히 선접꾼들의 사잇길을 걸어 계단을 올라 부문으로 다가갔다. 입장 시간이 마감되기 직전이었다.

율곡이 기지를 발휘하여 위기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더라면 과장에는 입장조차 못하고 응시할 기회조차 박탈당할 아슬아슬한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박제가(朴齊家·1750~1805)북학의(北學議)’에서 이 무렵의 과거장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유생들이 마실 물과 불, 짐바리와 같은 물건을 시험장 안으로 들여오고, 힘센 무인(선접꾼)들이 들어오며, 심부름하는 노비들이 들어오고, 술 파는 장사치까지 들어오니, 과거 보는 뜰이 비좁지 않을 이치가 어디 있으며 마당이 뒤죽박죽이 안 될 이치가 어디에 있겠는가.

심한 경우에는 마치로 상대를 치고, 막대기로 상대를 찌르고 싸우며, 부문 앞에서 횡액을 당하기도 하고, 길거리에서 욕을 얻어 먹기도 하며, 변소에서 구걸을 요구당하는 일까지 발생한다.

하루 안에 치르는 과거를 보게 되면 어느새 머리털이 허옇게 세고, 심지어는 남을 살상하거나 압사당하는 일까지 발생한다. 온화하게 예를 표하여 겸손해야 할 장소에서 강도짓이나 전쟁터에서나 할 짓거리를 행하고 있으므로 옛사람이라면 반드시 과거장 안에는 들어가지 않을 것이다.

박제가의 생생한 묘사처럼 율곡은 부문 앞에서 당한 횡액을 아슬아슬하게 모면하고 마침내 아수라장을 벗어나 거장 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던 것이다.

수협관은 율곡의 몸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하였다.

붓주머니를 뒤져 붓통 속까지 훑어보았다. 많은 거자들이 반드시 휴대하여야 할 붓 대롱 속에다 깨알 같은 글씨로 커닝페이퍼를 말아 놓고 들어가는 경우가 왕왕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 수협관은 율곡이 입고 있는 옷의 소매 속까지 검사하였다. 이는 혹시 옷소매 속에 수진본이 들어있을까 수색하기 위함이었다.

수진본(袖珍本).

이는 소매 속에 넣고 다닐 수 있을 만한 작은 책을 의미하는 것으로 평소에는 암기용, 혹은 휴대용 학습서로 유생들이 자주 이용하던 일종의 메모노트였는데, 몰래 거장 안으로 갖고 들어가 시험을 볼 때 틈틈이 훔쳐보기에는 안성맞춤의 책이었던 것이다.

심지어 수협관은 율곡의 얼굴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많은 거자 중에는 콧구멍이나 귓구멍 속에 깨알 같은 글씨로 예상 답을 적은 종이를 말아 끼우고 입장하는 부정행위가 적발되는 사례도 자주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단 수협관에게 발각되면 6년간 과거시험을 치를 수 있는 응시자격을 박탈당하기 때문에 유생들은 수협관을 저승사자라고 부르며 두려워하기 마련이었던 것이다.

모든 수색을 끝낸 율곡은 마침내 반수당 안으로 들어섰다.

시험장인 명륜당 뜨락에는 이미 입장한 거자들이 여섯 자의 거리를 두고 질서정연하게 앉아 있었다.

시험장은 일소(一所)와 이소(二所)로 나뉘어져 있었다. 이는 부자, 형제, 혹은 가까운 친척들이 한자리에서 시험을 보지 못하도록 하려는 조치였다. 형제들이 같은 시기에 시험을 볼 경우 각기 다른 장소에서 치르게 하기 위해서 구역을 두 개로 미리 갈라놓은 것이었다.

이를 상피제(相避制)라 하였는데, 율곡이 앉은 자리는 이소 중에서도 자연 가장 후미진, 지금도 남아있는 은행나무의 밑둥이었다.

율곡이 자리를 잡고 앉자 동시에 부문이 닫혔다.

율곡으로서는 운명적인 과거시험이 시작된 것이었다.

그러나 자리만을 놓고 보면 율곡은 가장 불리한 조건을 가지고 응시한 셈이었다. 왜냐하면 율곡의 자리는 과장에서도 가장 후미진 곳으로 현제판까지 다가가 다른 유생들이 다 보고난 뒤에야 시험문제를 확인할 수 있었으며, 또한 답안지를 다 작성한 후에도 가장 늦게 시험지를 제출할 수밖에 없는 자리였기 때문이었다.

답안지를 빨리 내는 것은 조정(早呈)이라 하였는데, 조선 후기의 과거관련 사료를 보면 이 조정의 폐단을 수없이 지적하고 있다. 그러면 왜 거자들은 답안지를 한결같이 빨리 내려고 했던 것일까. 그것은 모든 과거시험이 주관식이었고, 주관식 답안지는 다 읽어보기 전에는 평가할 수 없으며, 또 채점하는데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경기 잡가인 한양가(漢陽歌)’에는 남보다 빨리 시험지를 제출하고 제출한 답안지를 한데 묶어 채점하는 풍경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한 장 들고 두 장 들어 차차로 들어간다

백 장이 넘어서는 일시에 들어오니

신기전(神機箭) 모양이요, 백설(白雪)이 분분하다

수권수(收卷數) 몇 장인고 언덕 같이 뫼 같구나

사알 사약 무감 별감 정원사령 위장군이

열 장씩 작축(作軸)하여 전자관(塡字官) 전자(塡字)하고

주문(主文) 명관(命官) 시관(試官) 앞에 수없이 갖다 놓네

차례로 꼰을 적에 비점(批點) 치고 관별(貫別)한다

그 외의 낙고지(落考紙)는 짐짐이 져서 낸다.”

한양가에 나오듯 언덕 같고 뫼 같은엄청난 양의 시험답안지를 꼼꼼히 읽어보고 점수를 매긴다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었으므로 조금이라도 채점관의 눈에 들고 높은 점수를 받기 위해서는 남보다 빨리 납권(納卷)하는 것이 상책이었기 때문이었다.

과거 시험장을 시위라 하고, 시험답안지를 제출하는 것을 납권이라 하였는데, 과거 시험장 안에서 시위납권할 때의 유생들은 평소의 안정된 걸음걸이는 찾아볼 수 없고 조금이라도 남보다 빨리 내기 위해서 경솔하고 천박하게 미친 말 같이 날뛰기 마련이었던 것이다.

유생들이 선접꾼을 고용해서 현제판에서 가까운 자리를 선점하려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고, 특히 알성시(謁聖試)의 경우에는 한층 더 심하였다.

알성시는 임금이 성균관의 명륜당 앞뜰에서 직접 보는 부정기적인 과거시험으로 창덕궁의 춘당대(春塘臺)에서 보는 전시(殿試)와 더불어 임금이 직접 친림(親臨)하는 특별시험이었다.

원래 알성시란 임금이 성균관을 찾아 문묘에 술잔을 올리고 공자를 비롯한 성인들에게 배알(拜謁)을 하는 알성의식을 치를 때 그 기회를 이용해서 왕이 직접 참가하는 과거시험이었던 것이다.

그 후 나라의 큰 경사가 겹쳤을 때 시행하는 증광시(增廣試). 심지어는 왕이 온천 목욕을 갔을 때 그곳 현지에서 치르거나 정조의 경우 화성 행궁에서 치른 외방별시(外方別試) 등 인재 등용이란 과거 본래의 목적보다는 외방 유생들에게도 국경(國慶)의 기쁨을 나누어 주고 변방에 있는 유생들의 노고를 위로하기 위해서 거행됐던 별시였던 것이다.

임금이 친림하였으므로 오래 자리를 지킬 수 없는 형편상 고시시간도 짧아서 촉각시(燭刻試)란 별명을 얻을 정도였다.

촉각시란 고시시간이 짧아 마치 초 한 자루가 다 탈 때까지 답안지를 작성해서 내야 한다.’라는 의미에서 비롯된 별명인데, 그런 탓으로 시험문제도 간단하게 채점할 수 있는 주로 세시(歲時)에 관한 상식적인 내용이 대부분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알성시에서는 실력보다는 운이 작용한다 하여 응시생들이 점점 구름처럼 몰려들었으며, 기록에 의하면 영조 15년에 거행한 알성시에 응시한 거자가 2만여 명으로 추정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한양의 성안 인구가 20만에서 30만 정도였던 것으로 생각해보면 실로 어마어마한 숫자의 유생들이 과거시험을 보기 위해서 성균관으로 모여든 것이었다.

그러므로 유생들이 선접꾼을 고용하여 현제판에서 가까운 좋은 자리를 확보하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고, 또한 남보다 빨리 답안지를 제출함으로써 채점관의 눈도장을 찍어야 할 긴박한 사연이 있었던 것이다.

즉일방방(卽日放榜).

문자 그대로 시험 당일날에 결과를 공포한다.’라는 즉일방방은 하루 만에 모든 시험지를 검토하고 합격자를 발표하는 판이니 속전속결. 따라서 채점이 부실해질 수밖에 없고 대충 답안지의 앞머리만 훑어보고 채점하는 기현상이 발생되는 것이었다.

실제로 정조실록에 의하면 일찍 제출한 답안지 중에 합격자가 나오는 확률이 높아서 정조 21년 가을 감시(監試)의 이소(二所)에서 행한 과거시험의 합격자는 먼저 낸 3백 장 안에서 거의 대부분 나왔던 것이다.

이는 채점을 하는 시관이 일찍 낸 답안지 약간만 보고 채점을 하고 나머지 대부분의 답안지는 채점의 대상조차 되지 못했음을 드러내는 산 증거인 것이다.

이렇게 일찍 제출한 답안지에서 합격자가 나오자 거자들은 답안지의 서두만 대충 써서 일찍 제출하는 임기응변이 속출되었던 것이다. 여기에서부터 답안지를 빨리 내는 소위 조정의 폐단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물론 그해 겨울 율곡이 본 별시문과는 알성시와는 달랐다.

성균관은 조선시대 최고의 교육기관으로 유생들은 전원 기숙사에서 생활하면서 교육을 받았다. 명륜당(明倫堂)은 공자를 비롯한 옛 성인들의 정신을 본받아 새로운 역사창조의 바탕을 마련하려는 곳이며, 백성들의 도의 정신을 함양하고, 사회정의 정신을 뿌리내리려는 유생들의 강학 장소였는데, 이번에는 유생들만 따로 응시하게 하는 특별 전형이었던 것이다.

원래는 성균관의 유생들과 3품 이하의 조사(朝士)에게만 응시자격을 주었으나 이번에는 지방의 유생들에게도 응시자격을 주었으므로 먼 변방의 강릉에 살고 있던 율곡도 별시에 참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마침내 어악(御樂)이 일어났다.

과거시험이 시작된 것이었다.

과거시험 문제를 낸 시관이 문제판을 들고 현제판에 임한 후 홍마삭(紅麻索) 끈을 매어 일시에 올림으로써 만장(滿場)에 시험문제를 공표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순간 과장 안은 물을 끼얹은 듯 숙연해졌다.

그러나 그런 정적은 일순간 사라지고 한꺼번에 유생들이 들고 일어나 현제판 안으로 몰려들어 종이 위에 문제를 베끼기 시작하였다.

시험 문제를 출제한 시관의 이름은 정사룡(鄭士龍)과 양응정(梁應鼎).

이들은 과거시험의 출제관으로 선택되자 몇날 며칠을 출제하는데 전념하느라 끙끙 앓았으며, 또한 시험문제의 유출을 막기 위해서 집에 들르지도 못하고 격리되기도 했던 것이다.

출제관이었던 정사룡(14911570)은 별시문과의 합격자로서 일찍이 황해도 관찰사를 역임하고 부제학을 지냈으며, 1554년 대제학을 지냈던 당대 최고의 문인이었다.

또한 양응정 역시 식년 문과의 합격자로서 공조좌랑에 이르렀다가 한때 윤형원에 의해서 파직되었으나 다시 복권되어 대사성에까지 이른 대학자였다.

또한 이들은 시험을 치르는 유생들의 직계 선배이기도 했었다.

아이로니컬한 것은 그해 봄에도 정사룡은 과거시험의 출제자였는데, 그는 신사헌(愼思獻)에게 뇌물을 받고 시험문제를 미리 가르쳐줌으로써 부정행위를 저질렀던 것이다.

신사헌은 당대의 권신이었던 신수근(愼守勤)의 손자였는데, 은밀히 시관이었던 정사룡에게 뇌물을 주고 시제를 미리 알고 차술(借述)케 함으로써 그해 별시문과에서 을과로 급제하였던 것이었다.

훗날 부정행위가 드러나자 대간의 공박과 공론의 압박으로 정사룡은 파직되고 부정행위로 합격한 신사헌은 삭과(削科)되었지만 어찌된 일인지 정사룡은 곧 복직이 되어 공조판서가 되었으며 그해 겨울에 열린 별시문과에서도 다시 출제자로 위촉되었던 것이다.

그뿐인가.

부정행위를 저지른 신사헌도 당대 최고의 권신이었던 이량(李樑)의 배려로 곧 복과되었으니, 예나 지금이나 권력의 어두운 그림자는 이처럼 독버섯처럼 횡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시험의 출제관이었던 정사룡과 양응정은 출제자인 동시에 채점자였으므로 명륜당 계단 위에 앉아서 처음부터 끝까지 과장을 관장하고 있었다.

맨 후미에 앉았던 율곡은 좀체로 현제판 가까이 다가갈 기회를 잡을 수가 없었다.

좋은 자리를 선접하고 있던 거자들은 이미 종이 위에 답안지를 작성하기 시작하였으므로 마음이 급해진 거자들은 우왕좌왕하였으나 율곡은 제자리에 앉아서 벼루에 먹을 갈고 있을 뿐이었다.

한겨울이었으므로 은행잎들도 모두 떨어져 헐벗은 나목이었으나 몇 점 남은 낙엽이 바람에 실려 침착하게 먹을 갈고 있는 율곡의 벼루 위에 떨어져 내렸다.

이윽고 모든 유생들이 문제를 베껴온 후에야 율곡은 일어서서 천천히 현제판 앞으로 다가갔다.

시험문제는 ()’이었다.

이란 과거시험의 한 종류로서 사안을 질문하고 이에 대한 대책을 서술토록 하는 형식 중의 하나였다. 일반 세시에 대해서 기술하는 평소의 시험문제와는 달리 꽤 까다로운 질문 중의 하나였던 것이었다.

특히 이번의 은 천문이나 바람의 순행과 이변 등에 대한 책론으로 하늘의 길’, 천도(天道)’에 관한 질문이었으므로 난해하기 짝이 없는 철학시험이었던 것이다.

이 글은 시험관인 집사(執事)가 질문하고 거자들이 대답하는 문답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이른바 천도책(天道策)’이라고 불리는 과거시험은 조선 역사상 가장 까다로운 시험문제 중의 하나로 손꼽히고 있는 것이다.

그 질문의 요지는 대충 다음과 같다.

하늘의 도는 알기도 어렵고 또 말하기도 어렵다.

해와 달이 하늘에 걸려서 한번 낮이 되었다가 한번 밤이 되었다가 하는데, 더디기도 하고 빠르기도 한 것은 누가 그렇게 시키는 것인가.

간혹 해와 달이 한꺼번에 나와서 때로는 겹쳐서 일식과 월식이 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오성(五星)이 씨줄(:가로)이 되고, 뭇별(衆星)이 날줄(:세로)이 되는 것을 또한 자세히 설명할 수 있겠는가.

경성(景星)은 어떤 때에 나타나며 혜성(彗星)은 또한 어떤 시대에 보이는가.

혹은 말하기를 만물의 정기가 하늘에 올라가면 별이 된다.’ 하였으니, 이 말은 또한 무엇에 근거하는 것인가.

바람이 일어나는 것은 어느 곳에서 시작하며, 어디로 돌아가는가. 어떤 때는 나무 가지가 흔들리지 않을 정도로 불기도하고, 어떤 때는 나무가 부러지고 지붕이 날아갈 정도로 불기도하여 잔잔한 바람(少女風)이 되기도 하고, 구모풍(颱風)이 되기도 하는 것은 어째서인가.

문제에 나오는 오성(五星)은 목성(木星), 화성(火星), 토성(土星), 금성(金星), 수성(水星)을 말하는 것으로 이 다섯별은 모두 하늘에서 오른쪽으로 운행하고 뭇별은 28(宿)를 의미하는 것으로 하늘에 부착되어 움직이지 않는 붙박이별로 알려져 있다.

이 구절이 나오는 것은 좌씨(左氏)세재성기(歲在星紀)’에 나오는 말로 밤하늘에는 움직이는 5성의 씨줄과 28수의 날줄이 서로 교차되며, 운행하고 있음을 뜻하는 구절인 것이다.

또한 경성(景星)은 덕성(德星)을 가리키는 말로 사기의 천관서(天官書)’에는 그 모양이 일정치 않고 도가 있는 나라에 나타난다고 알려진 상서로운 별을 가리키고 있다.

반면에 혜성(彗星)은 경성의 반대말로 요성(妖星)을 가리킨다.

태양을 중심으로 긴 꼬리에 광망(光芒)을 거느리고 쌍곡선의 궤도를 그리며 운행하는 꼬리별을 의미하는 것으로 예부터 중국을 비롯한 모든 왕조에서는 이 혜성이 나타나면 왕조가 바뀌는 재앙이나 천재지변이 일어난다고 불길하게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문제에 나오는 소녀풍은 비가 오려고 할 때 솔솔 부는 미풍을 가리킨다. 이처럼 인간에게 유익한 바람을 소녀풍이라고 부르게 된 데에는 유래가 있다.

일찍이 삼국시대 때 점을 잘 치는 관로(管輅)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때 위나라에 큰 가뭄이 들어 청하태수(淸河太守)가 관로를 찾아와 언제쯤 비가 오겠느냐고 묻는다.

이때 관로는 대답한다.

수상(樹上)에는 이미 소녀풍이 불고 있고, 수간(樹間)에는 음조(陰鳥)가 화락하게 울고 있으며, 또한 서남풍이 일어나고 뭇새가 함께 날고 있으니, 얼마 안 있어 반드시 비가 올 것입니다.”

소녀풍이란 말은 이처럼 점을 잘 치는 관로가 말하였던 비를 부르는 상서로운 미풍을 말하는 것으로 위지(魏志) ‘관로전(管輅傳)’에 나오는 일화였던 것이다.

그에 비하면 구모풍태풍의 어머니라는 말이니, 동서남북 가리지 않고 어느 방향에서나 불어오는 강한 바람이 될 가능성을 모두 갖추고 있다는 의미인 것이다.

율곡은 다시 멈췄던 시험문제를 종이 위에 베껴 나가기 시작하였다.

시험문제는 다음과 같이 이어지고 있었다.

구름은 어디에서 일어나며 흩어져 오색이 되는 것은 어떤 징조인가. 간혹 연기 같으면서도 연기가 아닌 것 같기도 한 것이 뭉게뭉게 일어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안개는 무슨 기운으로 발하는 것이며, 그것이 붉은색이 되기도 하고, 파란색이 되기도 하는 것은 무슨 징조인가. 혹은 누런 안개가 사방을 덮고, 혹은 짙은 안개가 끼어 대낮에도 어두운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천둥과 벼락은 누가 주관하는 것이며, 또 섬광(閃光)이 번득이고 소리가 혁혁하여 두려운 것은 어째서인가. 간혹 사람이나 물건이 벼락을 맞는 것은 무슨 이치인가.

서리는 풀을 숨죽이고 이슬은 만물을 적시는데, 서리가 되고 이슬이 되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겠는가.

남월(南越:지금의 광둥과 광시지방을 이르는 말로 남쪽지방을 가리킨다.)은 땅이 따뜻한데도 7월에 서리가 내려 변괴가 혹심하였으니, 그 당시의 일을 상세하게 말할 수 있겠는가.

비는 구름으로부터 내리는 것인데 간혹 구름만 자욱하고 비가 오지 않는 일이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신농씨(神農氏:중국 고대 전설에 나오는 제왕. 전설에 의하면 농업의 발명자이자 의학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다.) 때에는 비를 바라면 비가 왔으며, 태평한 세상에는 열흘에 한 번씩 1년에 36번의 비가 온다고 하니, 하늘의 길(天道)도 선인(善人)에게만 사사로이 후하게 하는 것이 아닌가.

간혹 군사를 일으키면 비가 내리고, 혹은 옥사(獄事)를 판결할 때에 비가 내리는 것은 도대체 무슨 까닭인가.

초목의 꽃술은 다섯 잎으로 된 것이 많은데, 어찌하여 눈꽃(雪花)만이 유독 여섯 잎으로 된 것은 무엇 때문인가.

눈 위에 눕고(臥雪), 눈 속에 서 있는 것(立雪), 손님을 맞는 것(迎賓), 친구를 방문하는 것(訪友)의 일을 또한 두루 말할 수 있겠는가.

우박은 서리도 아니고 눈도 아닌데 무슨 기운이 모여서 된 것인가. 어떤 것은 말머리만큼 크고, 어떤 것은 달걀만큼 커서 사람과 새, 짐승을 죽인 일은 어느 시절에 있었던 일인가.

천지가 만물(萬象)에 대하여 각각 기()가 있어서 그렇게 된 것인가, 아니면 하나의 기가 유행하여 흩어져서 만 가지의 변화(萬殊)가 되는 것인가.

만일 올바른 길에 어긋나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천기(天氣)가 어그러져서인가, 아니면 인간의 일(人事)이 잘못되었기 때문인가.”

시험문제는 결론으로 치닫고 있었다. 이와 같은 철학적인 질문은 천지자연의 운행과 그에 따른 인간관계를 묻는 것으로 대체로 농경사회의 철학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생산과 소비가 전적으로 농토에 의지하고 있던 농경사회에 있어서는 그 문화적인 소산물인 사상도 농민의 사유체계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농업의 질서를 방해할 수 있는 천재지변인 가뭄, 홍수, , 바람, 서리, 벼락, 혹은 비와 같은 자연현상을 어떻게 바로잡고 하늘의 질서를 회복할 수 있는가를 다음과 같이 최종적으로 묻고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하면 일식과 월식이 없을 것이며, 별들이 제자리를 잃지 않을 것이며, 우레와 벼락이 치지 않고, 서리가 여름에 내리지 아니하며, 눈과 우박이 재앙이 되지 아니하며, 모진 바람과 궂은비가 없이 각각 그 진리에 순응하여 마침내 천지가 제자리에 서고 만물이 잘 자라나게 할 것인가. 여러 수험생들은 여러 경전에 통달하였을 것이니, 이에 대해 잘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각각 마음을 다하여 대답하도록 하여라.”

율곡은 침착하게 종이 위에 시험문제를 모두 베낀 후 제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뜻밖의 문제가 출제되었으므로 유생들은 모두 술렁거리며 마음의 안정을 취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런 식의 철학적인 책문(策文)은 지금까지 한 번도 과거시험에 등장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대부분의 단골시험 문제는 세시풍속이나 혹은 부()와 같은 문학에 관한 것이었고, 임금이 직접 친림하여 스스로 시험문제를 내는 알성시에서도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뜻밖의 문제였던 것이다.

알성시의 시험문제는 대부분 임금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王若曰)’라는 서두로 시작되는데, 이는 임금 스스로가 문제를 내고 거자들은 시대의 물음에 대답하는문답형식을 취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찍이 1515년 중종 10.

임금이 직접 석전제(釋奠祭)에 거동하여 공자께서 만일 누가 나에게 나라를 맡아 다스리게 한다면 1년이면 그런대로 실적을 낼 것이고, 3년이면 반드시 정치적 이상을 성취할 것이다 하셨다. 성인께서 헛된 말씀을 하셨을 리는 없을 것이니, 아마도 공자께서는 정치를 하기 전에 반드시 정치의 규모와 시행하는 방법을 미리 정해 놓으셨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 방법을 하나하나 지적하여 말해 보라.’라는 내용으로 그대가 공자라면 어떻게 정치를 하겠는가.’라는 질문을 던진 것은 그 대표적인 예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문에 조광조(趙光祖)하늘과 사람은 근본이 같으므로 하늘의 이치가 사람에게 유행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또한 임금과 백성은 근본이 같으므로 임금이 다스리는 도가 백성에게 적용되지 않은 적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옛날 성인들은 하늘과 땅을 하나로 여기고 수많은 백성을 하나로 여겼습니다.’로 시작되는 그 유명한 문장으로 2등으로 합격함으로써 마침내 벼슬길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이었다.

이처럼 임금이 친림하는 알성시에서는 그때그때의 정치적 상황에 따른 질문을 던지는 책문이 대부분 출제되고 있었던 것이었다.

따라서 지금까지 남아 있는 알성시의 책제(策題)들은 대부분 정치와 관련된 질문들이었다.

예를 들면 그대가 공자라면 어떻게 정치를 하겠는가.’하고 조광조에게 물었던 중종의 책문을 위시하여 세종대왕은 법의 폐단을 고치는 방법은 무엇인가.’, 혹은 어떻게 하면 좋은 인재를 구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정치적인 질문을 알성시를 통해 묻고 있는 것이다.

또한 명종은 육부의 관리를 어떻게 개혁하여야 하는가.’를 묻고 있는가 하면 교육이 나아갈 길은 무엇인가.’라고도 묻고 있다. 그리고 임진왜란을 치른 후 선조는 ‘(일본과)화친하는 것이 좋으냐, 정벌하는 것이 좋으냐.’는 나라의 생사가 걸린 양자택일의 책문을 던지고 있고, 가장 책문을 즐겨했던 임금은 조광조를 총애하다가 마침내 사약을 내려 죽게 하였던 중종으로 알려져 있다.

중종은 그대가 공자라면 어떻게 정치를 하겠는가.’ 하는 책문 이외에도 외교관은 어떤 자질을 갖추어야 하는가.’,‘처음부터 끝까지 잘하는 정치란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정치적인 질문을 던졌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조광조를 발탁하였던 이듬해 1516별시문과에서는 다음과 같은 시험문제까지 내고 있다.

술의 폐해는 참으로 오래되었다. 술의 폐해가 문제되었던 것은 어느 시대부터인가. 우임금은 향기로운 술을 미워했고, 무왕은 술을 경계하는 글을 지었으며, 위나라의 무공은 술 때문에 저지른 잘못을 뉘우치는 시를 지었다. 이토록 오래전부터 술의 폐해를 염려했으나 아직까지 뿌리를 뽑지 못한 까닭은 무엇인가.’라는 술의 폐해를 논하라.’라는 내용의 책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임금이 내린 책문 중에서 가장 유니크하고 독창적인 것은 광해군이 내린 책문이다. 훗날 반정으로 폐위가 된 광해군은 그로 인해 후세의 사가들로부터 변덕스러운 군주로 낙인찍혀 죽은 후에도 임금의 칭호를 받지 못하고 폭군 연산군과 더불어 ()’으로 격하하였지만 광해군은 실제로 개혁에 투철한 선각자였다. 그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지금 가장 나라에 시급한 일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러나 1616년 겨울 증광회시에서는 조선 역사상 가장 돌발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가면 반드시 돌아오니 해이고, 밝으면 반드시 어두워지니 밤이로다. 그런데 섣달 그믐밤에 꼭 밤을 지새우는 까닭은 무엇인가. 또한 소반에 산초를 담아 약주와 안주와 함께 웃어른에 올리고 꽃을 받치는 풍습(椒盤頌花:두보의 시에 나오는 노래의 한 구절)과 폭죽을 터트려 귀신을 쫓아내는 풍속은 섣달 그믐밤에 밤샘하는 것과 무슨 관련이 있는가. 침향나무를 산처럼 얹어서 쌓고 거기에 불을 붙이는 화산(火山)풍습은 언제부터 생긴 것인가. 섣달그믐 전날 밤 하던 액막이행사인 대나(大儺)는 언제부터 시작되었는가.

함양의 여관에서 주사위 놀이를 한 사람은 누구인가(두보는 今夕行이란 시에서 홀로 긴 밤을 지새우며 여관에서 주사위 놀이를 하며 자신의 고독을 달래었다고 노래한 적이 있다). 여관에서 쓸쓸하게 깜빡이는 등불을 켜놓고 잠을 못 이룬 사람은 왜 그리하였을까.

광혜군의 감성적인 책문은 다음과 같이 어지고 있다.

왕안석(王安石:1021~1086 북송의 정치가로 정치개혁에 따른 신법을 제창하였던 뛰어난 개혁가)은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는 것을 탄식했다. 소식(蘇軾:1036~1101)은 도소주(屠蘇酒)를 나이순에 따라 젊은이들보다 나중에 마시게 된 서러움을 노래하였다. 이것들에 대해 상세히 말해보라.

어렸을 때는 새해가 오는 것을 다투어 기뻐하지만 점차 나이를 먹으면 모두 서글픈 마음이 드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세월이 흘러감을 탄식하는 것에 대한 그대들의 생각을 듣고 싶다.”

이 질문에 이명한(李明漢)은 그 유명한 인생은 부싯돌의 불처럼 짧습니다.’라는 답변으로 급제한다.

이처럼 대부분의 과거시험은 현란한 미사여구를 대구형식으로 구사하면서 자신의 시적 능력을 표현하는 문학의 한 장르인 부()나 마치 제갈량이 위나라를 정벌할 때 올린 출사표(出師表)처럼 임금에게 자신의 생각을 건의할 때 쓰인 글인 표()가 대부분 출제되었던 것이다.

이밖에도 표는 시사적인 일을 논하거나 간언할 때 남을 추천할 때, 특별한 공을 세웠을 때, 탄핵할 때도 쓰였으며, 그 이외에는 주로 책()이었던 것이다.

원래 책문은 한나라의 무제 때 지방수령의 추천으로 뽑힌 인재를 등용하려고 대책을 물은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한무제는 지방 수령들에게 조서를 내려 품행이 반듯하고 덕행이 있으며 어질고 문장과 경전에 밝고 재능이 뛰어난 선비를 추천하라고 명령했다.

이들 가운데 동중서(董仲舒:기원전 170~120)가 있었다.

그는 세 차례에 걸쳐 춘추의 의리(義理)를 주제로 대책을 올린다. 이것이 지금까지도 남아있는 현량대책(賢良對策)’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책문은 임금이 직접 출제했든 임금을 대리한 관리가 집사가 되어 출제를 했든 출제의 주체자는 임금인 것이다. 따라서 대책의 최종 독자도 원칙적으로는 임금인 것이다.

그러나 율곡이 본 별시문과의 과거시험은 지금까지는 한 번도 볼 수 없고 앞으로도 있을 수 없는 전무후무한 매우 이례적인 문제였던 것이다.

거자들은 대부분 예상 시험문제들을 서너 개 설정하고 그에 따른 모범답안지를 미리 작성해 두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었다.

그러나 전혀 예상과는 다른 난해한 철학 문제가 출제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시험장 안이 당황한 유생들에 의해서 술렁거리고 심지어 몇몇 유생들은 붓조차 들지 못하고 일어서서 거장을 나가버려 퇴장하는 결과까지 초래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율곡으로서는 천우신조(天佑神助)였다.

왜냐하면 지난 봄 스승 퇴계를 만나고 강릉 외갓집으로 돌아온 후부터 줄곧 스승이 내려준 화두 거경궁리(居敬窮理), 즉 정신을 통일하여 추호의 흐트러짐 없이 경 속에 살며, 그리고 이()를 궁극하여 성리학에 전념함으로써 실제로 줄곧 하늘의 길(天道)’에 몰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율곡은 한순간에 문제의 핵심을 꿰뚫어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즉 과거시험의 전반부와 중반부에 나온 밤과 낮, 일식과 월식, 경성과 혜성, 바람과 폭풍, 구름과 안개, 우레와 벼락, 서리와 이슬, 비와 눈과 같은 일기현상이 어째서 생기는가 하고 묻는 것은 서두에 불과하였고, 실제로 핵심은 어떻게 하면 그러한 재앙이나 천재지변이 없이 각각 그 질서에 순응하여 천지가 제자리에 서고 만물이 잘 자라나게 할 수 있겠는가.’를 묻는 질문이었던 것이다.

이는 ()대의 공자라고 불리던 동중서(董仲舒)가 주창한 천인감응론(天人感應論)’에서 비롯되었던 대표적인 유가 사상이었다.

동중서는 바로 한나라의 무제가 지방 수령에게 내린 책문에 의해서 공자가 쓴 춘추를 주제로 오늘까지 남아있는 현량대책이란 문장을 써서 재상으로 발탁되었던 역사상 최초의 인물.

동중서는 전한(前漢)대의 유학자로 하북성 광천현(廣川縣) 출신이다.

젊은 시절 3년 동안이나 정원에조차 나가지 않을 정도로 학문에 열중하였으며, 후에는 제자들을 가르쳤는데, 장막을 치고 가르쳤기 때문에 그의 얼굴을 모르는 제자들이 많았다는 일화가 남을 만큼 독특한 사상가였다.

유교가 공자로부터 시작되어 맹자, 순자를 거치는 동안 크게 발전하였지만 마침내 진시황이 저지른 분서갱유(焚書坑儒) 사건으로 인해 모든 경전들을 불태우고 500여 명의 유생들을 산 채로 땅에 파묻어버림으로써 한순간 멸문지화를 맞게 되는 것이다. 이때가 기원전 223. 그러므로 기원전 479년경 공자가 죽음으로서 시작된 유가의 물줄기는 260여 년 만에 그 맥이 끊기게 되는 것이다.

동중서는 이 끊긴 유가의 맥을 50, 60년 만에 다시 부활시킨 유가의 중시조.

만약 동중서가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동양 정신의 골수인 유가 사상은 멸절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동중서가 이처럼 크게 활약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당시의 시대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전한의 7대 황제였던 무제는 북방의 흉노족을 제압한 뒤 마침내 천하를 통일하고 한나라를 건국한다. 이때 무제는 지방 제후의 왕권 위협을 말살하고 백성의 동요를 막기 위한 치세책을 책문(策問)’으로 공모하였던 것이다.

이때 동중서는 한나라를 일사불란하게 통치하기 위해서는 학설이 분분하고 정견이 다양한 백가쟁명의 시대는 통일시대의 대원칙에 어긋나 다시 혼란스러운 춘추전국시대로 돌아갈 수밖에 없음이니, ‘백가를 축출하고 오직 유가만을 섬길 것을 무제에게 현량대책이란 책문을 통해 건의함으로써 한나라가 사상적 통일을 이루는데 기여한 거유였던 것이다. 이러한 동중서의 주장은 결국 무제에게 받아들여짐으로써 유교는 정식으로 국교로 선언되었으며 모든 관리는 유교 교리에 의한 지식의 정도에 따라 임용되고 승진되었던 것이다.

이로써 한대는 물론 이후 2천 년 이상 유가는 중국에서 정통사상으로 계승되었을 뿐 아니라 유교는 중국문화의 전파와 함께 한국, 일본, 베트남 등에서 국가를 통치하는 정치사상으로 발전되었으며, 동양문화는 곧 유교 문화를 의미할 정도로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이다.

동중서의 이러한 유가사상이 중국에서 계속 계승 발전될 수 있었던 것은 유가를 정치적 이데올로기로 강조함으로써 전제군주확립에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동중서는 맹자로부터 내려오던 기존의 삼강오륜을 폐지하고 새로운 삼강(三綱)을 제시하였는데, 그것은 군위신강(君爲臣綱)’,‘부위자강(父爲子綱)’,‘부위부강(夫爲婦綱)’이었다.

특히 임금은 신하의 근본이라는 군위신강을 제일 첫 조항으로 확정함으로써 동중서는 지배와 존속의 관계를 하늘과 땅의 관계로까지 비화하였던 것이다.

임금을 하늘과 동일시하는 동중서의 신학설이 백성들에게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유가가 하나의 신앙으로 자리를 잡아야 했으므로 동중서는 유가를 사상이 아닌 종교(宗敎)로 승화시킬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동중서는 유가의 종교성을 확립하기 위해서 하늘()’을 빌려온 것이었다.

공자도 하늘에 죄를 지으면 빌 곳도 없게 된다.’ 혹은 내게 잘못이 있었다면 하늘이 버리실 것이다. 하늘이 버리실 것이다.’라고 한탄하고 있었지만 여기서 공자가 말하였던 하늘은 신앙으로서의 대상이 아니라 사람의 힘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운명을 가리키는 대명사였던 것이다.

따라서 공야장(公冶長)편에서 자공(子貢)이 다음과 같이 스승에 대해서 말하였던 것은 의미 깊은 내용이다.

선생님의 학문과 의표(儀表)에 대해서는 들어서 배울 수가 있었지만 선생님의 본성과 천도(天道)에 관한 말씀은 듣고 배울 수가 없었다(夫子之文章,可得而聞也 夫子之言性與天道 不可得而聞也).”

철저한 현실주의자였던 공자는 자공의 표현대로 천도, 하늘의 길과 같은 형이상학적 문제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던 듯 보인다.

그러나 유가를 종교와 신앙의 대상으로 끌어올릴 필요가 있었던 동중서는 하늘을 자연과 인간사회의 양자를 주관하는 존재로 파악하였으며, 하늘을 인간의 일에 대해 감응하는 능력과 의지를 갖춘 인격신(人格神)으로까지 설정하였던 것이다.

여기에서 나온 것이 천인합일론(天人合一論).

자연과 사회의 모든 변화나 국가의 흥망, 재앙과 복은 결국 하늘에 의해서 결정되는데, 이러한 하늘의 인격신은 결국 전제군주로 의인화된 것이라는 천인상감설(天人相感說)’이 요지였던 것이다.

이러한 동중서식의 세계관은 곧 유가의 우주관으로 자리 잡게 된다.

즉 크나큰 우주는 하늘의 주재를 받는데, 작은 우주인 사람 역시 하늘의 주재를 받는다. 하늘과 사람은 서로 감응하는 것이다.

만일 군주의 인간적인 잘못이 있으면 하늘은 자연재해를 통해 이를 경고하고, 그래도 반성할 줄 모르면 천재지변을 일으켜 재앙을 드러내 보인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이유로 인해 조선왕조실록에는 그 숫자를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자연현상에 따른 기록이 전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별의 운행, 지진 등의 천문지리에 관한 사례가 절대다수이며, 특히 과거시험에도 나온 혜성(彗星)에 관한 기록은 예부터 전쟁과 관련이 있다고 여겨졌으므로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시험관이었던 정사룡과 양응정은 어째서 과거시험문제를 통해 이처럼 천지자연의 운행과 그에 따른 인간의 관계를 물어 천도책(天道策)에 대한 질문을 던진 것일까.

조선시대에는 일찍이 그 예를 찾아볼 수 없는 전대미문(前代未聞)의 철학시험을 출제하였던 것일까.

그것은 그 시대의 상황과 무관하지 않은 이유 때문이었다.

실록에 의하면 율곡이 과거시험을 보던 명종 13년에는 이상한 천재지변이 계속 일어나고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430일 밤에는 유성이 각성(角星)에서 나와 남방의 하늘가에 들어갔는데, 그 형상은 배()와 같았고, 꼬리의 길이는 1, 2척쯤 되었으며, 적색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각성은 28개의 별자리 중 첫 번째 별로서 그곳에서 붉은 별똥별이 흘러내렸다는 것은 지상에서 중요한 사람이 곧 죽게 될 것을 암시하는 불길한 전조였던 것이다.

또한 같은 해 720.

평안도 평양부에서는 혜성이 서북방 하늘가에 나타났는데 꼬리 길이는 3, 4척쯤 되었고, 그 모양은 흩어놓은 실과 같았다고 한다. 혜성은 살별(comet)이라고 부르는 별로서 예부터 천문에서는 전쟁이 일어날 수 있음을 예언하는 흉성(凶星) 중의 하나였던 것이다. 한낮에는 태백성이 수시로 나타났다는 기록까지 나와 있다.

태백성은 태양계 내에서 태양으로부터 두 번째에 위치한 행성으로 이를 보통 금성(金星)이라고 부르고 있다. 금성은 태양과 달 다음으로 밝은 천체인 것이다. 따라서 태백성이 보통 초저녁인 서쪽 하늘이 아닌 대낮에 나타났다는 것은 태양을 상징하는 임금과 달을 상징하는 왕비 이외에 제3의 인물이 역모를 꾸미고 있음을 알리는 징조였기 때문이었다.

보통 사기에는 왕이 신하에 의해서 시해를 당하거나 하극상에 의해서 왕조가 바뀔 무렵에는 으레 태백성이 한낮에 나타났었다는 기록이 나오고 있고, 태백성이 달을 범하였다는 은유적인 표현이 자주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그뿐인가.

이 무렵에 생명현상으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돌연변이도 자주 발생하였다.

이해 여름 815. 전라도 무장(茂長)에서는 갑자기 민가에서 암탉이 수탉으로 변하여 날개를 치며 새벽에 울었고, 금산(錦山)의 민가에서는 여인이 아이를 낳았는데, 왼쪽 겨드랑이로 출산하였다는 해괴한 현상이 일어나 민심이 자못 흉흉하였던 것이다.

실제로 황해도에서는 백정 출신의 도적이 일어나 불평분자들을 규합하여 황해도와 경기도일대의 창고를 털어 빈민들에게 나눠주는 민란이 일어나고 있었다.

도적의 이름은 임거정. 흔히 임꺽정이라고 불리는 이 도적은 홍길동, 장길산과 더불어 조선의 제3대 의적으로까지 불리고 있었는데, 임꺽정은 내가 도적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은 도적질이 좋아서가 아니라 배고픔과 추위가 절박하여서 부득이 그렇게 된 것이다. 백성을 도적으로 만드는 자는 도대체 누구인가.’하고 부르짖으며 황해도의 구월산을 중심으로 도적 활동을 시작하였던 것이다.

물론 연산군 이후부터 조선 전국에서 농민봉기들이 창궐하기 시작하였던 것은 무능한 관료들과 부패한 양반사회에 대한 어쩔 수 없는 염증 때문이었으나 특히 임꺽정의 난은 몰락한 농민과 백정, 천민들이 규합하여 지배층의 수탈정치에 저항, 전국을 위기에 몰아넣었던 대사건이었던 것이다.

물론 임꺽정이 본격적으로 민란을 일으킨 것은 이듬해인 명종 13(1559)이었다. 조정에서 파견한 개성의 포도관 이억근(李億根)을 잡아 죽임으로써 한때는 개성까지 점령하였으나 이 무렵 벌써 임꺽정이 일으킨 민란의 불길은 요원(燎原)의 들불처럼 번져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위기감을 이미 두 차례나 명나라의 사신으로 다녀온 정사룡은 하늘이 자연재해를 통하여 군주를 비롯한 인간에게 내리는 경고로 파악하고 이에 대해 어떻게 하면 천지가 제자리에 서고 만물이 잘 자라나게 될 것인가.’라는 준엄한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현제판에 걸린 시험문제를 모두 베낀 율곡은 천천히 제자리에 돌아와 앉았다.

뜻밖의 시험문제로 우왕좌왕하고 있는 다른 유생들과는 달리 율곡은 이미 시험문제를 본 순간 집사의 의중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지난 1년간 스승 퇴계를 통해 주자의 성리학에 정진하고 있었던 율곡이었으므로 율곡은 써야 할 답안의 내용이 선명하게 떠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율곡은 잠시 눈을 감고 마음을 안정시켰다. 문장의 내용이 일목요연하게 보였지만 율곡은 심호흡을 하고 써야 할 문장의 첫머리를 궁리해 보았다.

그 무렵 종이는 매우 귀한 것이었으므로 과거시험을 볼 때에는 거자들이 스스로 준비하여 시관으로부터 과거 답안지로 인정한다.’라는 표시를 받은 종이만을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이러한 표시가 없는 종이에 답안을 작성하면 실격당하는 것이 당연하였으므로 거자들은 문장이 틀리거나 첨삭할 때에도 다른 종이를 사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문장이 틀리면 붓으로 이를 지우고 다시 고쳐 쓸 수는 있었으나 자연 시험지가 지저분해짐으로써 채점관에게 나쁜 인상을 주어 감점당할 우려가 있었던 것이었다.

차츰 처음의 떠들썩한 소요도 가라앉고 거장 안은 답안을 쓰는 유생들의 정적으로 숙연해졌다. 아침이 지나자 해가 떠서 날씨가 다소 풀려 따뜻해졌다.

율곡이 앉았던 자리의 은행나무 위에서 사금파리 같은 노란 은행잎이 떨어져 내렸다.

오랜 침묵 끝에 마침내 율곡은 결심한 듯 눈을 떴다. 그러고는 붓에 먹을 듬뿍 묻혀 종이 위에 답안을 쓰기 시작하였다.

竊謂萬化之本 一陰陽而已

是氣 動則爲陽 靜則爲陰

一動一靜者 氣也 動之靜之者 理也

이율곡 일생일대의 최고의 명문장, 천도책은 그렇게 시작된다.

훗날 명나라로 건너가 중국학자들로부터 극찬을 받아 해동의 주자라고 일컬을 만큼 율곡의 천재성을 드러낸 천도책의 첫 문장이 마침내 시작되었던 것이다.

한글로 옮기면 오히려 그 깊은 뜻이 반감되는 첫 문장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개인적으로 생각하건대 만 가지 변화의 근본은 하나의 음양일 따름입니다. 이 기()가 움직이면 양()이 되고, 고요하면 음()이 됩니다. 한번 움직이고 한번 고요한 것은 곧 기이고, 움직이게 하고 고요하게 하는 것은 이()인 것입니다.

일단 첫머리를 열기 시작한 율곡의 붓은 더 이상 막힘이 없었다.

그는 엉킨 실타래에서 그 첫 실마리를 찾아낸 사람처럼 일필휘지(一筆揮之)하였다.

지금도 남아있는 율곡의 답안지를 보면 알 수 있듯이 한자도 덧붙이거나 한자도 뺀 것이 없는 완벽한 문장이었다.

율곡이 쓴 본론은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하늘의 일은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어서 그 이()는 지극히 미묘하며 그 현상은 지극히 드러난다 하는데, 이 말을 아는 사람과는 함께 하늘의 도를 논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질문을 하신 집사 선생께서 지극히 미묘하고 지극히 현묘한 도리로써 조목별로 깊이 연구한 논설을 듣고자 하시니, 하늘과 사람의 이치를 연구한 자가 아니고서는 어찌 더불어 의논할 수 있겠습니까.

율곡의 문장은 마치 하늘이 내린 옥음(玉音)을 받아 적는 듯하였다. 하나의 망설임도 없었고, 추호의 걸림도 없었다.

그리하여 율곡의 천도책은 다음과 같이 마무리된다.

원컨대 집사께서 천한 사람의 어리석은 말씀을 임금께 올려주신다면 가난한 선비는 움막 속에서도 남은 여한이 없을 것입니다. 삼가 대답합니다.”

모든 문장을 마친 율곡은 먹이 마르기를 기다려 자리에서 일어섰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율곡이 납권한 시험지가 세 번째 답안지였다고 전해지고 있을 만큼 속결(速決)이었다.

율곡은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시험지 오른쪽에 적힌 자신의 이름과 본관을 다시 한번 확인하여 보았다.

답안지에는 시험 보는 사람의 이름뿐 아니라 부, 조부, 증조부, 외조부 등의 품계도 차례대로 적는 것이 명문화되어 있었는데, 이는 시험을 본 사람의 이름을 가리고 채점을 한다고 해도 훗날 급제하였을 때 그가 어떤 집안 출신인가, 혹은 역모나 사화에 연루되었던 대역죄인의 후예가 아닌가를 확인하기 위한 예비책이었던 것이다.

실제로 김병연(金炳淵)은 향시에서 장원급제하였으나 과거시험에서 할아버지 김익순(金益淳)이 홍경래에게 투항하였던 대역죄인이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스스로 삭과하고 푸른 하늘을 볼 수 없는 죄인이라며 삿갓을 쓰고 일생동안 방황함으로써 김삿갓이란 별명으로 불리던 방랑시인이었다.

자진 삭과하지 않았더라도 김병연은 삭과되었을 것이니, 이러한 사실은 엄격한 계급사회를 반영하는 산 증거라고 말할 수 있음인 것이다.

율곡은 답안지를 작성하여 이를 시관(試官) 앞에 제출하였다. 이로써 율곡은 우여곡절 끝에 과거시험을 무사히 끝낸 것이었다.

율곡이 답안지를 제출하자 수권관(收券官)은 받는 순간 종이를 붙여 이름을 가렸다. 그리고 수권관은 이를 다시 등록관에게 넘겨주었다.

등록관은 이름을 가린 답안지를 받자마자 시험지의 맨 끝에 자호(字號)를 쓰고 도장을 찍어 그 가운데를 잘라 따로 보관하였다.

자호란 천자문의 순서대로 매긴 순번으로, 수험생의 수험번호와 같은 성격을 띠고 있었다.

이름 부분이 잘려진 시험지를 등록관이 다시 베껴서 이를 다시 시관에게 올렸다. 이러한 모든 일련의 작업은 시관이 채점을 할 적에 누구의 답안지인지 모르게 함으로써 공평무사하게 시험을 치르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이 별시문과의 시관은 출제자였던 정사룡과 양응정.

특히 정사룡은 지난해 봄 신사헌에게 시험문제를 누설했다가 파직되었던 아픈 전과가 있었으므로 이번의 기회가 자신의 불명예를 씻을 절호의 찬스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날 밤.

성균관의 별전에서는 시관들이 밤을 새워 시험지를 채점하고 있었다. 임금이 친림하여 치르는 알성시에서는 시험을 치른 당일에 합격자를 발표하는 즉일방방(卽日放榜)이 보통이었으나 그 이외의 시험에서는 삼일방방(三日放榜)이 대부분이었다.

삼일방방이라 하더라도 시간이 충분한 것은 아니었다. 보통 10장씩 무작위로 작축(作軸)된 시험지를 일단 명관(命官) 앞에 갖다 놓고 명관들이 이를 우선 예심(豫審)하였다. 명관들은 일종의 예선 심사원으로 이들의 기준에 통과하지 않으면 여지없이 낙고(落考) 되는 것이 보통이었던 것이다.

일단 명관들의 심사를 통과한 시험지만 시관인 정사룡과 양응정에게 넘겨지는데, 정사룡은 양응정보다 거의 30살이나 많은 노대신이었으므로 우선은 양응정이 먼저 비점(批點)을 치고 관별해낸 시험지를 최종으로 정사룡이 낙점하는 역할로서 분담하고 있었던 것이다.

비점이란 시관이 응시자가 지은 시나 문장을 평가할 때 특히 잘 지은 문구에 찍던 둥근 점을 의미하는 것인데, 따라서 명관과 시관을 통과하는 동안 비점이 많이 찍힌 답안지일수록 높은 점수를 받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던 것이다.

때로는 답안지에 붉은색으로 줄을 긋거나 점을 찍었는데, ‘춘향전에도 나오는 이몽룡의 과거시험답안지에 붉은 점이 바닷가에 찍힌 기러기의 발자국처럼 많았다.’라고 나와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채점의 특성을 말한 것이었다.

대감 어른

거의 날이 샐 무렵의 어둑새벽에 양응정이 시험답안지를 들고 정사룡을 찾아와 말하였다. 정사룡은 밤이 깊었으므로 침상에 몸을 기대고 깜빡 잠이 들어있었다.

무슨 일이오.”

정사룡이 묻자 양응정이 웃으며 대답하였다.

이 시험지를 관별하여 주십시오, 대감 어른. 신이 보기에는 군계일학이나이다.”

정사룡은 양응정이 내민 시험지를 받아들었다.

양응정은 정사룡이 천거한 젊은 시관이었다.

그는 2년 전의 문과중시에서 장원급제하였던 전도유망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윤원형에 의해서 파직되어 이 무렵 적수(赤手)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이미 시험문제의 누설로 한바탕 파직의 상처를 입었던 정사룡은 이번 기회에 과거시험에서 두 차례나 장원급제하였던 전도유망한 양응정을 구제하리라 결심하고 그를 시관으로 추천하였던 것이다.

정사룡은 양응정이 내민 시험지를 바라보았다. 과연 시험지 곳곳에는 양응정이 비점한 붉은 점이 안족(雁足)처럼 점점이 찍혀 있었다.

정사룡은 졸린 눈을 비비며 천천히 답안지를 읽어보기 시작하였다.

하늘의 일은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어서 그 이()는 지극히 미묘하며 그 형상은 지극히 드러난다 하는데, 이 말을 아는 사람과는 함께 하늘의 도를 논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질문을 하신 집사 선생께서는 지극히 미묘하고 지극히 현묘한 도리로써 조목별로 깊이 연구한 논설을 듣고자 하시니, 하늘과 사람의 이치를 연구한 자가 아니고서는 어찌 더불어 의논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평상시에 선각자들에게서 들은 바로써 밝은 질문에 조금이나마 대답하고자 합니다. 가만히 생각하건대 만화(萬化)의 근본은 한 음양(陰陽)일 따름입니다. 이 기가 움직이면 양이 되고, 고요하면 음이 됩니다. 한번 움직이고 한번 고요한 것은 기(), 움직이게 하고 고요하게 하는 것은 이()입니다. 대개 형상이 하늘과 땅 사이에 있는 것은 오행(五行)의 바른 기가 모인 것도 있고, 혹 하늘과 땅의 어그러진 기를 받은 것도 있습니다. 혹은 음양의 두 기가 서로 부딪치는 데서부터 나기도 하고, 혹은 두 기가 발산하는 데서 나기도 하기 때문에, 해와 달과 별은 하늘에 걸렸고, 비와 눈과 서리와 이슬은 땅 위에 내리는 것입니다. 바람과 구름이 일어나고 우레와 번개가 일어나는 것은 이 기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 하늘에 걸리는 까닭과 땅에 내리는 까닭, 바람과 구름이 생겨나는 까닭, 그리고 우레와 번개가 일어나는 까닭은 모두 이 이()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천천히 답안지를 읽어 내리던 정사룡은 차츰 몸을 일으켜 바로 세우며 정색을 하였다. 수험생이 쓴 문장의 내용은 정사룡의 잠을 단박에 쫓아낼 정도로 명징(明證)하였다.

어째서 양응정이 시험답안지 곳곳에 붉은색의 비점을 찍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특히 다음에 나오는 내용은 정사룡의 마음에 비수처럼 내리꽂혀 모골송연(毛骨悚然)하였다.

二氣苟調 則彼麗乎天者 不失其度

降于地者 必順其時 風雲雷電 皆 於和氣矣

此則理之常也 二氣不調 則其行也 失其度

其發也 失其時 風雲雷電 皆出於乖氣矣

此則理之變也

그 문장을 읽는 순간 정사룡은 자신도 모르게 붓을 들어 그 곁에 비점을 찍었다.

일찍이 시문과 음률에 뛰어나고 글씨도 잘 써서 호음잡고(湖陰雜稿)란 문집을 내고 조천록(朝天錄)’이란 책을 지어 지나치게 탐학하다는 비난을 받을 정도로 문장에 뛰어났던 정사룡이었으므로 그는 본능적으로 율곡의 문장에 매료당하였던 것이다.

특히 정사룡이 감탄하였던 문장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음양의 두 기가 진실로 조화가 되면 저 하늘에 걸려 있는 것이 그 정도를 잃지 아니하고 땅에 내리는 것이 그 알맞은 때에 순응하고 바람, 구름, 우레, 번개가 모두 조화로운 기(和氣) 속에 있는 것이니, 이는 곧 이()의 떳떳한 것입니다. 음양이 조화하지 않으면 그 행하는 것이 절도를 잃고 그 발산하는 것이 때를 잃어서 바람, 구름, 우레, 번개가 모두 어그러진 기(乖氣)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두 이()의 변함입니다.”

그러나 정사룡의 마음을 더욱 사로잡은 것은 그다음 문장이었다.

그 문장은 다음과 같다.

그러나 사람은 곧 천지의 마음입니다. 사람의 마음이 바르면 천지의 마음이 또한 바르고 사람의 기가 순하면 천지의 기도 또한 순하게 되는 것입니다(然而人者天地之心也 人之心正 則天地之心亦正 人之氣順 則天地之氣亦順矣).”

그 문장을 본 순간 정사룡은 자신도 모르게 무릎을 내리치며 옳거니, 하고 중얼거렸다.

천도책의 과거시험을 출제한 사람은 다름 아닌 정사룡. 그런데 정사룡이 바라던 주제의 핵심을 정확히 꿰뚫어 답안지가 작성되고 있음이 아닐 것인가.

하늘과 사람이 서로 감응한다.’라는 동중서의 세계관을 바탕으로 자연의 현상을 이()와 기()의 개념을 빌려서 설명한 이기론은 한나라 무렵의 원시 유교 사상을 형이상학적으로 전개시킨 송나라 시대의 세계관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북송의 주돈이(周敦頤)가 주창한 그 유명한 태극도설(太極圖說)’에서부터 확립된 유가적 우주론이었다.

즉 만물의 존재는 태극에서 음양의 기운이 생성되고, 음양이 변하여 , , 나무, , (火水木金土)’의 기운을 지니는 오행(五行)으로 발전한다. 오행은 모여서 하늘()과 땅()이 되고, 건곤은 각각 남성과 여성을 낳으며, 이 남성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이 곧 만물을 이루는 것이다.

그리하여 주돈이에 의해서 그 기틀이 마련된 송 대의 성리학은 마침내 이기론의 논리로 진화하게 되는데, 즉 우주 만물은 곧 기가 모여서 구성된 것이며, 이 기는 곧 이의 원리에 의해서 생겨나는 것이라는 이기론이 정립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이기론 위에 답안지는 마침내 사람은 곧 천지의 마음이란 핵심을 설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사람이란 최고 지도자인 임금을 말하는 것으로 천지를 안정시키고 모든 자연현상이 순조롭게 되기를 기대한다면 정치가 잘되어야 하고, 궁극적으로는 최고 지도자인 임금의 덕이 잘 닦여야 한다.’라는 본론으로 들어가고 있음이었던 것이다.

정사룡이 자신도 모르게 무릎을 내리치며 감탄사를 발했던 것은 바로 그러한 연유 때문이었다. 정사룡은 숨을 죽이고 답안지를 계속 읽어 내려갔다.

드디어 답안지는 본론으로 치닫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치의 떳떳함(常道)과 이치의 변함(怪變)을 한결같이 하늘의 도에만 맡길 수 있겠습니까. 원컨대 어리석은 저는 이 점에 대해서 답하고자 합니다. 홍몽(:혼돈)이 처음으로 갈라져 해와 달이 번갈아 밝으니, 해는 태양의 정기가 되고 달은 태음(太陰)의 정기가 되었습니다. 양의 정기는 빨리 움직이는지라 하루로서 하늘을 돌고 음의정기는 더디 움직이는지라 하룻밤에 다 돌지 못합니다. 양이 빠르고 음이 더딘 것은 기운이요, 음이 더디게 되는 것과 양이 빠르게 되는 것은 이치입니다. 저는 그것을 누가 그렇게 하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다만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自然而然爾)이라고 생각할 뿐입니다.

해는 임금의 상징이요, 달은 신하의 상징입니다. 그 가던 길을 같이하고 그 모이는 도()를 같이하기 때문에 달이 해를 가리면 일식(日蝕)이 되고, 해가 달을 가리면 월식(月蝕)이 됩니다. 저 달이 희미한 것은 오히려 변이 되지 않지만 저 해가 희미한 것은 음이 성하고, 양이 약하며, 아래가 위를 업신여기고, 신하가 임금을 거역하는 현상이 되는 것입니다. 더구나 두 해가 함께 나오고 두 달이 함께 나타나는 것은 그것은 비상한 변괴로 모두 어지러운 기운이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저는 일찍이 옛날 일을 살펴보니 재난과 이변은 임금이 덕을 닦은 다스려진 세상에는 나타나지 않고 일식과 같은 변괴는 모두 말세의 쇠한 정치에만 나타났으니, 하늘과 사람이 서로 함께하는 관계를 곧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저 하늘의 푸름은 기운이 쌓인 것으로 정말 색은 아닙니다. 참으로 별의 찬란한 이치를 말할 수 없으면 천기(天機)의 운행을 이미 밝혀낼 수 없을 것입니다. 저 밝게 반짝이며 각각 자리와 차례가 있는 것은 어느 것이나 다 원기(元氣)의 운행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뭇별은 하늘을 따라다니며, 스스로 움직이지 못하기 때문에 날()이라 말하고 다섯 별은 때를 따라 각각 나타나며 하늘을 따라다니지 못하기 때문에 씨()라 말합니다. 하나는 떳떳한 차례가 있는데, 하나는 떳떳한 도수가 없습니다. 그 대강을 말하면 하늘은 날이 되고, 다섯 별은 씨가 되지만 그 자세한 것을 말하려 하면 한 자쯤 되는 종이에 다 쓸 수 없을 것입니다. 별의 상서는 아무 때나 나타나는 것이 아니거니와 별의 변괴도 또한 아무 때나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상서로운 별은 반드시 밝은 시대에 나타나고, 요괴스러운 혜성은 반드시 쇠한 세상에만 나타납니다. 우순(虞舜)의 시대가 문명(文明)해지자 좋은 별이 나타났고, 춘추의 시대가 혼란해지자 혜성이 나타났습니다. 우순 같은 다스림이 그 한 시대만이 아니고, 춘추시대 같은 어지러움이 그 한 시대뿐이 아니니 어떻게 일일이 밝혀 말할 수 있겠습니까.”

천재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정사룡은 율곡의 답안지를 읽으며 연방 감탄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는 반()과 장()의 유().”

정사룡이 감탄하였던 반은 반고(班固)’를 가리키고, 장은 장형(張衡)’을 가리키는데, 두 사람은 모두 후한(後漢) 때 도읍을 노래한 도부(都賦)를 지음으로써 중국 역사상 가장 뛰어난 전설적인 문장가로 알려져 있던 사람이었다.

정사룡은 이미 기러기의 발자국처럼 점점이 찍혀 있는 답안지 위에 자신도 모르게 비점을 찍으면서 정독해 내려갔다.

만물의 정기가 올라가 뭇별이 되었다고 말하는 따위에 저는 적이 의심을 가집니다. 별들이 하늘에 있는 것은 오행의 정기로서 자연의 기운입니다. 나는 어떤 물건의 정기가 어떤 별이 되었는지를 모릅니다. 여덟 필의 명마가 방성(房星)의 정기가 되고, 부열(傅說)이 열성(列星)이 되었다고 하는데, 이와 같은 종류의 말은 이른바 산과 강과 땅이 그림자를 하늘에 보낸다.’라는 말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이것은 선비들이 믿을 것이 못됩니다.

옳거니.”

정사룡은 다시 무릎을 내리치며 탄식하였다.

답안은 비록 짧은 문장이었으나 거자의 높은 식견을 알아볼 수 있는 명문장이었다.

답안지에 나오는 방성(房星)천자의 수레를 끄는 말을 의미하는 것으로 일찍이 주나라의 목왕(穆王)이 쓰던 팔준마가 하늘에 올라가 별이 되었고, 은나라의 어진 재상 부열이 하늘에 올라가 열성이 되었다는 장자(莊子)의 말을 인용한 것이었다.

이러한 전설이나 신화는 일찍이 왕안석(王安石)이 노래하였던 달 속에 무엇이 있는 듯한데, 이는 산하(山河)의 그림자란 시의 내용처럼 선비로서는 믿을 수 없는 한갓 소문에 불과하다는 거자의 냉정함이 정사룡의 마음을 사로잡았기 때문이었다.

정사룡은 다시 읽기 시작하였다.

별의 기운됨은 속이 텅 비어 엉긴 것으로, 그것이 혹 음기가 맺히지 못해 혹은 떨어져 돌이 되기도 하고, 떨어져 언덕이 된다는 것을 나는 소자(邵子:송나라의 유학자. 소강절을 말함)의 말에서 보았었으나, 만물의 정기가 별이 된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또 하늘과 땅 사이에 차 있는 것은 기운 아닌 것이 없습니다. 음기가 엉기어 모여 있어 밖에 있는 양기가 들어오지 못하면 돌고 돌아서 바람이 됩니다. 만물의 기운이 비록 (:東北方)에서 나와 곤(:西南方)으로 들어간다.’라고 말하나, 그 음기가 모이는 것이 일정한 곳이 없는 만큼 양기가 흩어지는 것도 또한 방향이 없습니다.

큰 덩어리(大塊:땅덩이, 또는 하늘과 땅 사이의 자연)가 내뿜는 기운이 어떻게 한 방향에만 얽매여 있겠습니까.

동쪽에서 일어나는 것을 기르는 바람이라고 하는데, 그것이 동쪽에서 시작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서쪽에서 일어나는 것을 만물을 죽이는 바람이라 하는데, 그것이 서쪽에서 시작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탱자나무 굽은 가지에 새가 집을 짓고, 빈 구멍에서 바람이 분다.’라고 했으니, 그것이 빈 구멍에서 시작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정사룡은 잠시 고개를 들고 읽던 것을 멈췄다.

답안지에 나오는 탱자나무 굽은 가지에 새가 집을 짓고 빈 구멍에서 바람이 온다.’란 구절은 중국의 고대 문학가인 송옥(宋玉)풍적(風賊)’에 나오는 유명한 시구.

사마천의 기록에 의하면 굴원(屈原)의 제자였다고도 알려진 송옥은 특히 미인의 자태를 묘사하는 데 뛰어나 전통적인 중국시에 나타나는 통속적인 풍류재자(風流才子), 즉 비추문학(悲秋文學)의 개조로 알려져 있는데, 거자는 고금의 시들을 이처럼 자유자재로 인용하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누구일까.

순간 정사룡은 참을 수 없는 호기심을 느꼈다. 그래서 시험지의 맨 끝부분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답안지를 접수한 수권관이 받는 순간 종이를 붙여 이름을 가렸고, 등록관 역시 받는 순간 도장을 찍어 그 가운데를 잘라 따로 보관하였으므로 도저히 누구의 답안지인가를 가늠할 수 없음이었다.

신원이 누구인지는 몰라도 과거시험을 본 사람은 틀림없이 성균관에서 수학하고 있는 젊은 유생. 그러나 그 젊은 유생은 이미 정사룡의 식견을 뛰어넘고 있음이 아닐 것인가. 정사룡은 신음소리를 내면서 다시 답안지를 읽기 시작하였다.

정자(程子)의 말에 올해의 우레는 일어나는 곳에 일어난다.’라고 했는데, 저는 또한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것은 기운에 부딪혀 일어났다가 기운이 멈추면 그치는 것으로 처음부터 나가고 들어오고 하는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크게 다스려진 세상에는 음양의 기운이 커져 맺히지 못하기 때문에 그 흩어지는 것이 반드시 화하여 불어도 나뭇가지를 울리지 않고 세상의 도의(道義)가 이미 쇠하면 음양의 기운이 엉기어 퍼지지 못하기 때문에 그 흩어지는 것이 반드시 격하여 나무를 꺾고 집을 쓰러뜨리게 되는 것입니다. 순한 바람은 화하여 흩어지는 것이요, 회오리바람은 격하여 흩어지는 것입니다. 성왕(成王:주나라 무왕의 아들)의 한번 잘못된 생각으로 큰바람이 벼를 쓰러뜨리고 주공(周公) 시대 때에는 여러 해의 덕화로 바다의 파도가 일지 않았으니, 그 기운이 그렇게 된 것은 또한 사람이 한 일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산천의 기운이 위로 올라가 구름이 된 것이니, 좋고 나쁜 징조를 이로 인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옛 임금은 영대(靈臺:문왕이 세운 일종의 천문대로 천문과 기상을 살피던 곳)를 만들어 운물(雲物:구름의 빛깔)을 살펴보고 그로써 길흉의 징조를 살폈습니다. 대개 좋고 나쁜 일은 갑자기 그날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올 징조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름이 희면 반드시 떠나 흩어지는 백성이 있고, 구름이 푸르면 반드시 곡식을 해치는 벌레가 있습니다. 검은 구름이 어찌 수재(水災)의 징조가 아니며, 붉은 구름이 일어난다면 어찌 전쟁의 징조가 아니겠습니까. 누른 구름은 풍년이 들 징조이니, 이것은 곧 기운이 먼저 일어난 것입니다.”

율곡의 답안지는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저 연기도 아니고 안개도 아니면서 뭉게뭉게 보기 좋게 일어나 곱게 피어올랐다가 깨끗이 흩어진다면 홀로 지극히 환한 기운을 얻어 성왕(聖王)의 상서가 되는 것이니, 그것이 곧 상서로운 구름(慶雲)인 것입니다. 참으로 백성의 재물을 넉넉하게 해주지 못하고 노여움을 푸는 덕이 없으면 이것에 이르게 하기는 어렵습니다. 어찌 물과 흙의 가벼운 밝은 기운이 한갓 백의창구(白衣蒼狗)가 되는 것에 견주겠습니까.”

백의창구라.”

숨을 죽이고 답안지를 읽어 내리던 정사룡은 이 부분에 이르러서 입맛을 다시며 다시 한번 자신의 무릎을 내려쳤다.

백의창구백운창구(白雲蒼狗)’라고도 불리는 고사성어로, 직역하면 흰 구름이 한순간에 푸른 개로 변한다.’라는 뜻이 되는 것이다.

세상의 일이 급변하는 것을 비유하는 문장으로 당나라의 시인 두보(杜甫:712~770)가 친구인 시인 왕계우(王季友)를 위해 쓴 시 가탄(可嘆)’에 나오는 구절에서 유래한 성어인 것이다.

두보의 벗 왕계우는 가난하였지만 학문을 열심히 하고 타고난 성품과 행실이 매우 바른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의 부인이 어려운 살림살이를 참지 못하고 이혼하고 떠나버리자 집안 사정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은 왕계우를 매우 나쁜 사람이라고 비난하였다. 그러나 왕계우의 집안 사정을 잘 알고 있는 두보는 품성이 단정한 왕계우가 세상 사람들에게 비난받는 것을 분하게 여기어 탄식하면서 다음과 같은 시를 짓는다.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이 흰옷 같은데(天上浮雲似白衣)

잠시 푸른 개 모양으로 바뀌었네(斯須改幻爲蒼狗)

세상일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같은데(古往今來共一時)

인생만사에 일어나지 않는 일이 있겠는가(人生萬事無不有)”

두보의 시에 나오는 백운창구란 고사성어를 적재적소에 인용하는 답안지의 내용을 본 순간 정사룡은 다시 모골이 송연하여 중얼거렸다.

천재다. 이는 하늘이 주신 재능이다.”

어떻습니까, 대감어른.”

정사룡이 연방 신음소리를 내며 중얼거리자 옆자리에서 다른 답안지를 관별하고 있는 양응정이 넌지시 물었다.

군계일학이 아니겠나이까.”

일학(一鶴)이 아니라 국사(國士)일세.”

국사는 원래 국사무쌍(國士無雙)’이란 말에서 나온 것으로 나라 안에 둘도 없는 선비를 가리키고 있는 내용이었다.

일찍이 유방을 도와 천하를 통일하였던 한신을 가리키던 대명사로 정사룡은 감히 그 성어를 빌려 답안지를 작성한 율곡을 마땅히 온 나라가 섬겨야 할 높은 선비로까지 꿰뚫어 보고 있었던 것이다.

정사룡은 다시 답안지의 내용을 정독하여 읽어 내려갔다.

안개란 것은 음기가 새어나가지 못해 김이 서려서 된 것입니다. 만물의 음기가 모인 것도 또한 능히 안개를 만들어냅니다. 다 산천의 해로운 기운인데, 그것이 붉으면 병혁(兵革:무기)이 되고, 그것이 푸르면 재앙이 되는 것은 모두 음기가 성해질 징조입니다. 역적 왕망이 천자의 자리에 오르자 누른 안개가 사방을 둘러쌌고, 천보의 난(당 현종 때 일어난 안록산의 난) 때에는 큰 안개로 낮이 어두웠으며, 한고조가 백등(白登)에서 포위되었을 때와 문산(文山)이 시시(柴市)에서 죽을 때에는 모두 캄캄한 흙비가 내렸습니다.”

답안지에 나오는 왕망(王莽)의 황무(黃霧)는 서한의 역신을 가리키는 것으로 왕망이 제위를 넘보고 참람한 행동을 하자 누런 안개가 사방에 끼었다고 한서(漢書)가 기록한 데서 비롯된 말이며, ‘신당서(新唐書)’를 보면 안록산의 난이 일어났을 무렵 한겨울 석 달 동안 항상 짙은 안개가 끼어 10보 밖의 사람이 안 보이고 대낮이 한밤중처럼 캄캄하였다.’라는 기록에 의거한 내용이었다.

또한 사기에는 한고조가 스스로 군사를 거느리고 흉노를 치러 갔다가 평성의 백등에서 도리어 묵돌에게 7일 동안 포위당하였는데, 그때 7중의 달무리가 삼성(參星)과 필성(畢星)을 에워쌌다는 기록이 나와 있으며, 문산은 송나라 최후의 충신이었던 문천상(文天祥)을 가리키는 것으로 원나라의 군사와 끝까지 싸우다 패전하여 포로가 되었으나 세조의 회유에도 불구하고 끝내 굴복하지 않고 정기가(正氣歌)를 지어 자기의 충절을 드러내었던 의인.

문산이 마침내 북경의 시시에서 교수형을 당하던 날 바람이 크게 불어 모래를 날리고 대낮이 캄캄하여 지척을 분간할 수 없었다는 고사를 인용한 말이었다.

율곡의 답안지는 다시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혹 신하로서 임금을 배반하거나, 오랑캐가 중국을 침범하거나 하면 이 같은 일로 다 미루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저 양기가 발산한 뒤에 음기가 양기를 싸서 양기가 나갈 수 없으면 분격하여 우레와 번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레와 번개는 반드시 봄과 여름에 일어나는데 그것은 천지의 성난 기운입니다. 빛이 번쩍번쩍하는 것은 양기가 나와 번개가 되는 것이며, 소리가 우렁우렁하는 것은 두 기운이 부딪쳐 우레가 되는 것입니다. 옛 선비들이 말하기를 우레와 번개는 음양의 바른 기운이다. 혹은 숨은 벌레를 놀라게 하고, 혹은 바르지 못한 것을 친다.’고 했는데, 사람도 원래 바르지 못한 기운이 모인 사람이 있고, 만물도 바르지 못한 기운이 붙은 것이 있으므로, 바른 기운이 바르지 못한 기운을 치는 것은 또한 그러한 이치 때문입니다. 공자가 심한 우레 소리에 반드시 얼굴빛을 변한 것도 참으로 이 때문이었습니다. 더구나 마땅히 벼락을 칠 것을 친 것으로는, ()나라의 무을(武乙)과 노()나라의 이백(夷伯)의 사당과 같은 것이니, 어찌 이런 이치가 없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까.”

율곡의 답안지를 읽어 내리던 정사룡은 이 부분에 이르러 다시 옳거니하며 자신의 무릎을 내리쳤다. 답안지의 내용은 정곡을 찌르고 있기 때문이었다.

공자께서 심한 우레 소리(迅雷)에도 얼굴빛을 변하셨다.’라는 말은 논어의 향당(鄕黨) 에 나오는 유명한 장면으로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스승께서는)천둥이 치거나 바람이 세차게 불어도 반드시 정색을 하셨다(迅雷風烈必變).”

공자의 이러한 태도는 하늘에 대한 공자의 공경에서 나온 몸가짐이었다. 하늘은 말이 없지만 사철을 운행하게 하고 만물을 생성케 한다.’라고 믿었던 공자로서는 자연계의 이변에 대해 본능적으로 긴장과 엄숙한 태도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일찍이 중용에서 정성은 하늘의 도요, 정성되게 하는 것은 사람의 도이다(誠者 天之道也 誠之者 人之道也)’라고 말하였던 공자였으므로 도덕 그 자체는 하늘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도덕을 실천하는 것은 인간이라는 공자의 천도(天道)’ 사상을 나타내고 있음인 것이다.

공자는 언제나 하늘에 기도드리는 자세로 살아온 사람이었다.

이러한 태도는 공자가 마침내 심한 병이 들어 죽음에 이르게 되자 자로가 하늘에 기도를 드리기를 요청하였을 때 공자가 자로에게 그런 선례(先例)가 있느냐.’ 하고 물었던 데서도 드러난다.

이에 자로가 뇌문()에 그에 관해서 위의 천신(天神)과 아래의 지기(地祇)에게 기도드려 빌었던 선례가 있다.’라고 대답하자 공자는 이렇게 탄식한다.

나는 그렇게 빌어 온 지 이미 오래이다(丘之禱久矣).”

이러한 공자의 태도를 인용하여 율곡은 인류가 낳은 성인 공자를 심한 우레 소리에도 반드시 얼굴빛을 변하여 정색을 하였다.’라고 표현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바르지 못한 사람을 하늘이 친 예를 들어 무을(武乙)과 이백(夷伯)의 고사를 인용하였던 것이다.

무을은 상나라의 25대 임금으로 매우 무도하여 하늘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던 폭군이었다. 그는 허수아비를 만들어 그곳을 천신이라고 부르게 하고 우상을 섬겼다.

그 허수아비를 대신하여 자기와 장기를 두게 하고는 허수아비가 지면 온갖 모욕을 다 하였으며, 또 가죽 주머니에 피를 담아 공중에 매달아 놓고 활로 그 주머니를 쏘아 맞히고는 하늘을 꿰뚫었다고 자랑하곤 하였다. ‘사기에 보면 무을은 뒤에 하()와 위()나라 사이에서 사냥을 하다가 벼락을 맞고 죽었는데, 이는 하늘의 도를 거스른 죄 때문이었던 것이다.

또한 이백은 노나라의 대부로서 희공(僖公) 15, 이백의 사당에 벼락이 쳐서 불이 나 다 타버렸는데, 이는 예에 벗어나는 행위에 대한 하늘의 재앙이 내렸기 때문에 사당에 불이 났을 것이라고 예언하였던 공자의 원견지명(遠見之明)에서 비롯된 고사였던 것이다.

손오공의 여의봉(如意棒)이다.”

정사룡은 감탄하며 말하였다.

마음대로 길게도 짧게도 할 수 있고, 그것을 타고 하늘을 날 수 있는 신통력을 발휘하듯 거자는 적재적소에 적합한 고사를 이처럼 절묘하게 인용하고 있음인 것이다.

정사룡은 다시 답안지를 읽어 내리기 시작하였다.

만약 어떤 것이 (벼락을 치는) 권위를 가지고서 주관하는 곳이 있다.’라고 말한다면 이는 지나친 천착(穿鑿)에 가까울 것입니다. 또 양기가 펴지는 계절에 이슬이 만물을 적시는 것은 구름 기운이 내리는 것이요, 음기가 성할 때 서리가 풀을 죽이는 것은 이슬이 언 때문입니다. ‘시경에도 말하지 않았습니까.‘갈대는 푸르고 푸른데 흰 이슬이 서리가 된다.’라고 한 것은 이를 두고 이른 것입니다. 음기가 극성하면 서리가 혹 때를 잃게 됩니다. 위주(僞周)가 조정에 임하자 음양이 바뀐지라 남월(南越)은 극히 따뜻한 곳인데도 6월에 서리가 내렸습니다. 생각건대 반드시 온 천하가 다 음기의 해로운 기운에 갇혀 있었던 것입니다. 측천무후의 일을 말하려면 말이 길어져 이만 줄이겠습니다. 비와 이슬은 다 구름에서 나오는데, 젖은 기운이 많은 것은 구름이 되고, 젖은 기운이 적은 것은 이슬이 됩니다. 음과 양이 서로 어울리면 이에 곧 비를 내립니다. 혹 짙은 구름이 비가 되지 않는 것은 위와 아래가 어울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홍범전(洪範傳)에 말하기를 임금이 도리를 다하지 못하면 그 내리는 벌은 항상 음하다.’고 한 것은 바로 이를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또 양기가 지나치면 가물고, 음기가 성하면 홍수가 집니다. 반드시 음기와 양기가 조화를 이룬 뒤에야 비 오고, 햇볕 나는 것이 제때에 맞게 됩니다. 대저 신농씨와 같은 거룩한 마음을 가지고 순박하고 밝게 다스려진 세상에 있으면 해를 원하면 해가 나오고, 비를 원하면 비가 오는 것은 참으로 당연한 일입니다. 거룩한 임금이 백성을 다스리면 하늘과 땅이 서로 화합하여 5일에 한 번 바람 불고, 10일에 한 번 비가 오는 것은 또한 떳떳한 이치입니다. 이같은 덕이 있으면 곧 반드시 이 같은 하늘의 감응이 있는 것입니다. 하늘의 도에 어찌 사사로운 후함이 있겠습니까. 대개 원통한 기운이 가뭄을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한 여자가 원한을 품어도 오히려 땅을 타게 만든다 했으니, 무왕이 은나라를 쳐 이긴 것은 족히 그런 것을 천하의 원통한 기운을 녹여주었기 때문이며, 안진경이 옥사를 판결한 것은 족히 그로서 한 지방의 원통한 기운을 사라지게 했으므로 단비가 내린 것이 조금도 이상할 게 없습니다. 하물며 태평한 세상은 본래 한 지아비 한 지어미도 그 은택을 입지 않은 사람이 없음이지 않겠습니까. 저 크게 추울 때에 천지가 아무리 이미 닫히고 막혔다 하더라도 두 기운이 또한 어울리지 않을 수 없는지라 비 기운이 엉기어 눈꽃이 되는 것과 같은 것은 대개 음기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초목의 꽃은 양기를 받기 때문에 다섯 잎이 나오는 것이 많은데, 다섯은 양()의 수입니다. 또한 눈꽃은 음기를 받는지라 홀로 여섯 잎을 내는데, 그것은 음()의 수인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율곡의 답안지는 마침내 홍범전(洪範傳)’에까지 이르고 있었다.

홍범전은 북송의 왕안석(王安石)이 지은 책으로 주로 자연과 사회를 분석한 명저 중의 하나이다.

화수목금토가 한 시공간에 존재하며 색, 소리, 냄새, 맛 등 물리적 성질을 지닌 다섯 오원소를 물질 원소로 보고 있다. 이 요소들이 서로 다른 요소와 함께 차별과 대립을 반복함으로써 상생(相生)하고, 상극(相剋)하며, 천지 만물이 생성하는 것으로 보고 있는 유가에 있어 대표적인 철학서인 것이다.

즉 자연계와 인간사회는 천도(天道)가 지배하는 곳으로 인간은 천도에 따라 성()이 이루어진다고 보고 있었다.

따라서 율곡이 인용하였던 측천무후(則天武后)의 고사는 이러한 하늘의 도를 어긋난 그 대표적인 예였던 것이다.

측천무후는 당나라 태종의 병을 시중들고 있었던 낮은 신분의 궁녀였던 미랑을 가리킨다. 아버지 태종뿐 아니라 세자였던 이치의 마음까지 사로잡은 경국지색. 마침내 아버지가 죽자 황제에 오른 고종은 미랑을 자신의 왕비로 삼고 이름을 무측천(武則天)이라 하였다. 태종이 죽자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되었던 미랑을 다시 궁중으로 불러들여 자신의 왕비로 삼았던 고종은 마침내 허수아비 왕으로 전락하고 만다. 고종이 죽은 후 중종과 예종을 차례로 폐하고 국호를 주라 칭하고, 자신을 신성황제(神聖皇帝)로까지 일컬었던 무측천은 그러나 오나라와 월나라 땅에 한여름에 서리가 내림으로써 하늘의 재앙을 불러일으켰는데, 이는 나라에 임금이 없기 때문에 양이 성한 계절에도 음의 결정인 서리가 내린 것이라는 당서(唐書)의 내용을 인용하였음인 것이다.

그 순간 정사룡은 자신도 모르게 붓을 들어 답안지 첫 장 한구석에 다음과 같은 글을 써 내렸다.

一之本

이 문장의 의미는 많은 문장 중에서 으뜸이라는 뜻이었다.

원래는 모든 답안지를 다 채점하고 났을 때 채점관들이 합의하여 장원이나 차석이 결정되어 최종시험관인 정사룡이 낙점하여 답안지에 써넣는 최종 판결문이었다.

물론 아직 답안지는 많이 남아 있었다.

남아있는 내용을 다 읽지도 않고 도중에 장원급제에 해당되는 일지본의 관별을 내리는 것은 상례에 맞지 않은 일이었으나 그 순간 정사룡은 더 이상 읽고 말고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정사룡이 그렇게 낙점을 내리자 곁에서 이를 지켜보던 양응정이 의아한 표정으로 정사룡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정사룡은 탄식을 하며 이렇게 말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이 이상의 답안은 없네. 만약 이 이상의 답안이 나올 수 있다면 이는 인간의 글이 아니라 신필일 것이네.” 지금도 전해 내려오는 이율곡의 천도책답안지에는 미처 다 읽기도 전에 정사룡이 감탄하여 적은 일지본이라는 글씨가 선명하게 남아있음이다.

그러나 정사룡이 더욱 크게 놀란 것은 그 다음 문장에서였다.

무릇 모든 출제관들은 시험문제 중에 자신들만의 난해한 걸림돌 하나를 장치해 놓는 습성이 있기 마련이다. 아무리 문장에 능하고 임기응변에 뛰어난 거자라 할지라도 총체적인 핵심을 꿰뚫지 못하면 절대로 뛰어넘을 수 없는 함정을 마련해 놓는 것이다.

그것은 정사룡도 예외는 아니었다.

방대한 독서량과 다방면에 걸친 풍부한 지식이 없고서는 절대로 독파할 수 없는 지뢰밭을 마련해 놓은 부분이 있었으니, 그것은 다음과 같은 질문이었다.

눈에 눕고(臥雪), 눈에 서고(立雪), 손님을 맞이하고(迎賓), 친구를 찾는(訪友) 이를 또한 소상히 말할 수 있겠는가.”

아주 단순하게 보이는 질문 중의 하나지만 실은 거자들의 발목을 잡는 그물이자 덫이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눈에 눕다라는 말에 얽힌 고사를 알지 못하거나 눈에 선다라는 문장의 유래를 알지 못하고서는 도저히 이 질문에 명쾌한 답안을 작성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원래 눈에 눕다라는 말은 원안(袁安)의 고사를 가리킨다.

원안은 후한(後漢)의 현신으로 자는 소공(邵公). 사람됨이 엄중하고 위엄됨이 있어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가 입신출세하지 않았을 때 낙양에 큰 눈이 내렸는데, 사람들은 모두 눈을 쓸고 나와 거리에서 걸식을 하였다. 그런데 한 집만은 눈이 한길 쌓여 있었고, 마침 순행을 나온 낙양령(洛陽令)이 얼어 죽었는가 하고 사람들을 시켜 눈을 치우고 집으로 들어가 보니 원안은 방안에 누워 있었다고 한다. 낙양령이 이를 보고 원안을 어질게 여겨 그를 효렴(孝廉)으로 천거하였다는 내용이 후한서(後漢書)’에 실려 있는 것이다.

또한 눈 위에 서다의 이야기는 북송 때 유명(游酩)과 양시(楊時)의 고사에서 비롯되었다. 유명과 양시 두 사람은 당대 최고의 유학자인 정이천(程伊川)을 처음 뵈올 때 정이천은 모른 체하고 눈을 감고 앉아 있었다. 그래도 두 사람은 모시고 서 있었더니, 얼마 뒤 정이천이 눈을 뜨고 아직도 서 있었는가, 그만 물러가라.’라고 하였으므로 문을 열고 나와 보니 문밖에 눈이 내려 깊이가 한 자가 되었다는, ‘주자어류(朱子語類)’에 나오는 내용이었던 것이다.

또한 손님을 맞이하다의 이야기는, 당나라의 왕원빈(王元賓)이란 사람이 겨울철에 눈이 많이 내릴 적마다 종을 시켜 눈길을 뚫어두고 주효를 갖춰 손님을 맞아들였다는 고사에서 유래된 말이다.

난한지회(暖寒之會)’란 고사성어는 바로 이러한 왕원빈의 행동에서 비롯된 말.

그리고 친구를 찾다란 이야기는 진나라의 왕자유(王子猷)가 산음(山陰)에 살 때 큰 눈이 내리던 날 밤 흥에 겨워 작은 배를 타고 강을 거슬러 친구 대안도(戴安道)를 찾아 그의 집까지 갔다가 막상 그의 집 앞에 다다르자 흥이 식어 친구를 만나지 않고 돌아왔다는 고사에서 비롯된 말이었던 것이다.

며칠 동안 골머리를 썩이며 과거시험을 출제한 정사룡은 반드시 대부분의 거자들이 이 함정에서 헤어나지 못할 것이라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니었다.

놀랍게도 거자는 정사룡이 쳐놓은 덫을 단숨에 타파하고 있음이 아닌가.

그뿐 아니라 그러한 시험 문제를 출제한 시험관의 탐학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질책까지 하고 있음이 아닌가.

원안이 문을 닫고 눈 속에 누워 있는 것과 양시가 눈 속에 서 있는 것과 난한지회(暖寒之會)와 산음의 흥(山陰之興)과 같은 것은 혹은 고요함을 지키는 즐거움이 있고, 혹은 도를 찾는 정성이 있으며, 혹은 호사(豪舍)에서 나오고, 혹은 방달(放達)에서 나온 것으로 이는 모두 하늘의 도와는 상관없는 것이니, 어찌 오늘날 말할 가치가 있겠습니까.”

정문일침(頂門一鍼)이다.

정사룡은 순간 정수리의 급소에 침을 한 방 맞은 것처럼 부끄러움을 느꼈다.

거자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러한 눈()에 얽힌 고사들은 현학(衒學)적인 호사취미일 뿐 하늘의 도와는 상관없는 질문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말할 가치가 없다.’라는 거자의 질책은 지극히 당연한 지적이었던 것이다.

한 방망이 얻어맞은 정사룡은 정신을 차리고 다시 답안지의 내용을 읽어내렸다.

또 우박이란 것은 거슬린 기운에서 나온 것입니다. 음기가 양기를 협박하기 때문에 그것이 나오면 자연 만물이 해쳐집니다. 지나간 옛일을 상고하건대, 큰 것은 말머리만 하고, 작은 것은 달걀만 하여 사람을 상하게 하고, 짐승을 죽인 일은 혹은 전란이 심한 세상에 나타나고, 혹은 화를 만드는 임금에게 경계가 되었으니, 우박이 족히 역대의 경계가 된 것은 반드시 일일이 말하지 않더라도 이를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아아, 한 기운이 운화(運化)하여 흩어져 만 가지 다른 것이 되니, 나눠서 말하면 천지만상이 각각 독립된 기운이요, 합쳐서 말하면 천지만상이 다 같은 기운입니다. 오행의 바른 기운이 뭉친 것은 해와 달과 별이 되고, 천지의 거슬린 기운을 받은 것은 흙비와 안개와 우박이 됩니다. 우레와 번개와 벼락은 두 기운이 서로 부딪치는 데서 나오고, 바람과 구름과 비와 이슬은 두 기운이 서로 합치는 데서 나옵니다. 그 나뉨이 비록 다르지만 그 이치는 하나인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거자는 마침내 정사룡이 던졌던 어떻게 하면 일식과 월식이 없을 것이며, 별들이 제자리를 잃지 않을 것이며, 우레가 벼락을 치지 않고 서리가 여름에 내리지 아니하며, 눈과 우박이 재앙이 되지 않고 모진 바람과 궂은비가 없이 각각 그 질서에 순응하여 마침내 천지가 제자리에 바로 서고 만물이 모두 잘 자라날 수 있겠는가.’ 하는 질문의 핵심에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거자의 결론은 다음과 같았다.

집사께서 편말(篇末)에 또 가르쳐 말씀하시기를 천지를 제자리에 있게 하고, 만물을 기르는 것은 그 도가 어디서부터 오느냐.’ 하고 물으셨는데, 저는 이 말에 깊이 느낀 바가 있습니다. 제가 듣건대 임금이 자기의 마음을 바로 하여 조정을 바로잡고, 조정을 바로 하여 사방을 바로잡고, 사방이 바르면 천지의 기운도 바르게 된다.’하였습니다. 또 듣건대, ‘마음이 화평하면 형체가 고르고, 형체가 고르면 기운이 고르고, 기운이 고르면 천지가 고른 기운에 응한다.’고 하였습니다. 천지의 기운이 이미 바르면 해와 달이 어찌 엷어지고 먹히는 일이 없고, 별들이 어찌 길을 잃는 일이 있으며, 천지의 기운이 이미 고르면 우레와 번개와 벼락이 어찌 그 위험을 드러내고, 바람과 구름과 서리와 눈이 어찌 그때를 이루며, 흙비와 거슬린 기운이 어찌 재앙을 일으키겠습니까. 하늘은 비와 별과 더위와 추위와 바람을 가지고 모든 것을 생성하고, 임금은 공경과 어짐과 슬기와 계획과 성스러움을 가지고 위로는 하늘의 도에 응하는 것입니다. 하늘이 제때에 비를 내리는 것은 공경함에 따르는 것이요, 하늘이 제때 추운 것은 계획함에 응하는 것이며, 때맞게 바람이 부는 것은 거룩함에 응하는 것입니다. 이를 가지고 보면 천지가 자리를 지키고 만물이 생장하는 것은 오직 임금 한 사람의 수덕(修德)에 달린 것이 아니겠습니까. 자사(子思)가 말하기를 오직 천하의 지극한 정성이라야만 화육(化育)할 수 있다.’고 하였고, 또 말하기를 크게 만물을 발육시켜 큰 덕이 하늘 끝까지 닿았다.’고 했습니다. 또 정자(程子)는 말하기를 하늘의 덕과 임금의 도의 요체는 다만 홀로 있을 때를 조심하는 근독(謹獨)에 있을 뿐이다.’고 했습니다. 아아, 지금 우리나라의 동물, 식물들이 잘 자라고, 솔개가 하늘에 날고, 고기가 못에 뛰노는 자연의 화육이 고무되고 있음이니, 이 어찌 성주(聖主)께서 홀로 삼가시는 것에 말미암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바라건대 집사께서 천한 사람의 어리석은 말씀을 임금께 올려 주신다면 가난한 선비는 움막 속에서도 남은 한이 없겠습니다. 삼가 대답합니다.”

마침내 답안지는 끝이 났다.

숨죽여 답안지를 모두 읽어 내린 정사룡은 그러나 손쉽게 눈을 뗄 수 없었다.

단 한 자의 오자도 탈자도 없는 이 완벽한 한갓 젊은 유생에 의해서 그것도 한 식경이라는 짧은 시간에 완성되었다는 사실을 정사룡은 도저히 인정할 수 없었다.

더구나 처음부터 끝까지 한 획도 고칠 수 없을 만큼 완벽한 문장이 아닐 것인가.

이것은

정사룡은 한숨을 쉬면서 홀로 중얼거렸다.

사람이 쓴 문장이 아니다. 이것은 귀신이 쓴 문장이다. 귀신의 솜씨인 것이다.”

조선왕조의 역사를 통틀어 율곡이 23세 때에 쓴 천도책의 내용은 최고의 명문장으로 손꼽힌다.

천도책의 내용은 명나라의 조정 사이에서도 널리 회자되어 많은 중국의 선비들이 율곡을 해동의 주자라고 일컬을 정도였다. ‘천도책의 내용이 얼마나 비중 있게 다루어져 있음인가는 출제자 중의 한 사람이었던 양응정의 문집인 송천유집(松川遺集)’에도 천도책의 내용이 전재되어 있음을 통해 잘 알 수 있다.

또한 이 천도책의 중요한 점은 율곡이 평생 동안 추구하였던 이기론이 23세의 젊은 나이 때 이미 정립되었으며, 이러한 철학관은 평생 동안 거의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잘 알 수 있음인 것이다.

평생 동안 성리학연구에 몰두하였던 율곡의 이기론은 ()가 아니면 기()는 근거할 데가 없고 기가 아니면 이는 의착할 데가 없다(非理則氣無所根 非氣則理無所依著)’라고 36세 때 절친한 친구 성혼에게 보낸 편지에서 주장함으로써 ()’()’는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음을 이미 주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율곡의 독특한 이기론은 이미 천도책의 내용에 그 단서를 보이고 있다.

이는 퇴계가 주장하였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 ()는 기()의 주재(主宰), ()는 이()의 자료로서 이와 기를 두 가지로 나누었던 사상과 정면으로 대비되는 것이었다.

훗날 자세히 언급하겠지만 퇴계의 이기이원론은 마치 말을 타고 출입하는 사람의 경우에 비유(人馬之喩)’할 수 있다. 퇴계는 사람이 말 위에 타고 있을 때, 사람은 이()이고, 말은 기()이므로 사람과 말이 함께 타고 있지만 말을 부리는 것은 사람이므로 사람과 말은 분별(分別)되어야 하듯 이와 기는 마땅히 분별되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훗날 퇴계와 조선조 사상 최대의 논전을 벌였던 고봉(高峰) 기대승(奇大升)과 같이 율곡은 사람이 간다하면 말도 간다하고, ‘말이 간다하면 사람도 간다라는 것이므로 이와 기는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일원론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여기에서 퇴계는 이와 기는 서로 나누어 생겨난다라는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주장하였다.

퇴계는 맹자가 말하였던 측은지심의 인()과 수호지심의 의()와 공경지심의 ()와 시비지심의 지()의 사단(四端)은 성선설의 요인이 되는 것으로 이는 이(), 즉 이성이 바라는 것이요, 기쁘고(), 화내고(), 슬퍼하고(), 즐겁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탐욕스러운 것()과 같은 7가지 감정은 기()가 발한 것으로 퇴계는 기()라는 말 위에 이()의 사람이 올라탄 것으로 칠정의 말사단의 이성을 가진 사람이 잘 다스릴 수 있다면 공자처럼 군자에 이를 수 있음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율곡은 이에 정면으로 도전한다.

율곡은 스승 퇴계가 주장하였던 이기이원론’, 즉 말과 사람을 분리하는 것은 일찍이 주자가 말하였던 숨바꼭질(迷藏之戱)’과 같은 말장난에 불과하다고 일축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율곡은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즉 사단과 칠정은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결국 하나의 정()이며, 따라서 사람이 탄 말이 함께 길을 갈 때 이를 사람이 간다.’라고 말할 수도 있고, ‘말이 간다.’라고 말할 수 있듯이 이성과 기는 동체라는 사상이었던 것이다.

퇴계는 이와 기를 선과 악의 대립으로 파악하는 데 반하여 율곡은 사단과 칠정, 즉 도덕성과 욕망은 모두 정에서 비롯된 것으로 엄격한 구분을 나눌 수 없다고 파악하고 있음인 것이다.

마치 오늘날 불교에서 근대의 선승 성철이 제기하였던 돈오돈수(頓悟頓修)’, 아니면 돈오점수(頓悟漸修)’냐는 치열한 논쟁과 흡사한 유가의 논쟁이 퇴계와 그의 제자 율곡을 통해 이미 500여 년간 계속되어 내려오는 것이다.

돈오돈수단박 깨치고 깨치는 순간 단번에 닦는다.’라는 뜻이라면 돈오점수단박 깨치더라도 그것을 지켜나가며 차츰차츰 닦아간다.’라는 뜻으로 그 어느 쪽이 절대의 불교적 진리일 수는 없듯이 불교에 있어 돈오점수를 연상시키는 퇴계의 이기이원론돈오돈수를 연상시키는 율곡의 이기일원론중 어느 쪽이 사람의 성리(性理)를 밝혀내는 궁극적 요체인가, 단정 지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23세의 청년 율곡이 쓴 천도책의 문장 속에 이미 그러한 율곡의 철학이 기초적으로 드러나고 있다는 점이다.

율곡은 천도책에서 사람의 기가 바르면 천지의 기도 역시 바르게 된다.’라고 주장함으로써 마음은 곧 기(心是氣)’임을 간파하고 있음인 것이다.

특히 정사룡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다음과 같은 문장이었다.

임금이 마음을 바로 하여 조정을 바르게 하고, 조정을 바르게 함으로써 사방을 바르게 하고, 이렇게 하여 사방이 바로잡히면 천지의 기운도 바르게 된다(人君正其心以正朝廷 正朝廷以正四方 四方正則天地之氣亦正矣).”

천지를 안정시키고 모든 자연현상이 순조롭게 되기를 기대한다면 우선 정치가 잘되어야 하고 궁극적으로 최고 지도자인 임금의 덕이 하늘의 길에 부합되어 잘 닦아야 한다는 율곡의 주장은 유가에 있어 최고의 군주론(君主論)’이었던 것이다.

물론 율곡의 천도책500여 년 지난 문명이 극도로 발달한 현대에서 보면 지극히 미신적이며, 전혀 과학적인 근거가 없다고 일축되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하늘과 사람이 서로 감응한다.’라는 천인상감설은 비록 정치 최고 지도자인 임금의 올바른 치도를 확립하는 데 기여하였다고 하더라도 자연현상과 인간사회가 서로 상응해야만 천지가 평안하다는 것은 과학적으로 믿어질 수가 없는 것이다.

만약 실로 그렇다면 연산군 때에는 가뭄이 별로 없었는데 비해 성군으로 일컫는 세종 때에 극심한 가뭄이 자주 있었다는 이조실록의 기록은 어떻게 설명되어질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23세의 청년 율곡이 쓴 천도책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제시하는 계시록(啓示錄)임에 틀림이 없다.

그런 의미에서 천도책21세기에 던지는 예언서이기도 한 것이다.

왜냐하면 오늘날 심각한 전 세계적인 사회문제 중의 하나로 등장한 각종 공해와 지구온난화 현상은 결국 율곡이 천도책에서 주장하였던 대로 사람의 마음이 바르면 천지자연의 모든 현상이 모두 바르게 나타날 것인데, 문명의 발달로 물과 공기를 더럽히고, 나무를 함부로 베어내고, 자연을 훼손함으로써 홍수와 흙비, 안개와 가뭄, 우레와 폭풍이 재앙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예언하고 있는 도참(圖讖)이기도 한 때문이다.

, ‘천지가 제자리에 바로 서고 만물이 모두 잘 자라게 하려면 그 도는 어디서 오느냐.’라는 질문에 하늘은 비와 별과 더위와 추위와 바람을 가지고 모든 것을 생성하고 임금(오늘날에 있어서는 자연의 주체인 사람)은 공경과 어짐과 슬기와 계획과 성스러움을 가지고 위로는 하늘의 도에 응하는 것입니다.(중략)이를 가지고 보면 천지가 자리를 지키고 만물이 생성하는 것은 오직 임금(사람)의 수덕에 달린 것이 아니겠습니까.’라고 대답하였던 율곡의 결론처럼 인간과 자연은 서로 친화하고, 자연을 두려워하고, 슬기와 장기적인 계획으로 자연을 보호할 때 천재지변과 같은 자연적인 재앙은 미리 막을 수가 있음을 선언하는 자연보호헌장인 것이다.

여기에서 율곡이 쓴 천도책의 내용은 율곡의 철학사상을 담고 있는 철학론이며, 또한 율곡의 정치철학을 담고 있는 왕도론이다.

그뿐인가, 미래의 환경론을 예언하고 있는 묵시록(默示錄)이기도 한 것이다.

도대체 누구인가.”

답안지를 읽어 내리는 동안 어느새 어둑새벽은 물러가고 동이 트는 신새벽이었다.

정사룡은 이러한 문장을 쓴 주인공이 도대체 누구인가 알아보고 싶은 참을 수 없는 호기심을 느꼈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한 일이었다.

이미 답안지를 받는 순간 수권관이 시험지에 종이를 붙여 이름을 가렸으므로 그 종이를 벗겨내기 전에는 신원을 밝혀낼 수 없음이었다.

모든 채점이 끝나고 시험관들끼리 답안지를 다섯 개로 분류해낸다.

우선 ()’의 판정을 받으면 급제로 분류된다. 급제의 숫자가 적으면 그다음 단계인 ()’에서 선발하여 다시 뽑아 올린다. 그다음은 ()’, 마지막은 ()’방외(方外)’인 것이다.

일단 급제할 답안지를 고르고 다시 성적순으로 등급을 나누어 관별한 후에야 종이를 떼어 거자의 이름을 확인한 후 또는 조부와 증조부의 품계를 살펴 성적이 좋더라도 혹 나라에 대역죄를 지은 가문인가를 최종적으로 확인한 후 방방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정사룡은 그러한 절차를 참을 수 있는 인내를 이미 상실하고 있었다.

그는 천재에 대한 호기심과 또 한편의 불같은 질투심을 느꼈다. 그래서 한순간 정사룡은 이름을 가린 종이를 찢어 내렸다. 그곳에는 다음과 같은 이름이 적혀있었다.

李珥

그로부터 사흘 뒤.

율곡은 아침 일찍 집을 떠나 성균관으로 향하였다.3일 전에 본 과거시험에 대한 결과를 직접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그 무렵 율곡은 한마디로 상심의 계절이었다.1년 전에 결혼하여 한참 꿀맛 같은 신혼생활을 보내야 할 시절이었지만 아내 노씨는 지병인 폐병으로 병약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결혼하던 해 절친한 친구 성혼의 아버지였던 청송선생에게 보낸 율곡의 짤막한 편지에도 그대로 드러난다.

금년 봄에 혼씨(渾氏:성혼)와 함께 공부를 하고자 했건만 아내의 병이 심하여 서울에 올라가지 못하니 한탄할 뿐입니다.”

율곡의 집안과는 달리 처가 노경린의 집안은 비교적 넉넉하여 서울에 있던 집도 처가에서 장만하였지만 그 무렵 율곡의 집은 가세가 기울어 형제들이 모두 굶주림을 면치 못할 정도로 궁핍하였다. 어머니 신사임당이 죽고 나자 무능한 아버지는 더 이상 집안을 돌볼 여력이 없어 유일한 방법이라고는 율곡이 과거에 급제하여 입신양명에 오르는 길뿐이었던 것이다.

그 무렵 얼마나 율곡이 고통스러웠던가는 조익(趙翼)이 상소한 다음과 같은 글을 통해 미뤄 짐작할 수 있다. 인조실록 13년 조에 실려 있는 상소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율곡의 집이 가난하여 형제들이 모두 굶주림과 추위를 면치 못하였는데, 그의 처가는 재산이 조금 있어서 장인 노경린이 서울에 집을 사주어 살도록 하였습니다. 그러자 형제들의 가난함을 차마 못 보아서 곧바로 그 집을 팔아 무명을 사다 나누어 주었으며, 끝내는 한 고랑의 터전도 없게 되었으며,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갈 수 없게 되었으므로 형제들을 모두 불러와 같이 살며 죽을 쑤어서 함께 나누어 먹었습니다. 그의 아내는 어린 시절부터 폐질을 앓았으나 죽을 때까지 예의와 공경을 다하고 죽은 뒤에는 자제들을 불러 모아 예절을 다하였습니다. 집안에서의 몸가짐이 이와 같았으니 인륜을 다하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실록에 기록된 대로 굶주림과 추위를 면치 못하는 대가족들을 위해 처가에서 마련해준 집까지 팔아 그 당시 물물교환의 척도로 삼던 무명을 나누어 줄 수밖에 없었던 청년 이율곡.

그뿐인가.

율곡은 가족을 위해 반드시 급제했어야 할 과거시험에서 낙방까지 하였던 것이다. 사람들은 9번이나 과거에서 장원급제하여 구도장원이라는 별명으로 불릴 만큼 조선 최고의 천재였던 율곡도 과거시험에서 한번 낙방하였다는 사실에서는 거의 모르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스승 퇴계를 만나고 돌아간 직후 그해 봄에 치르는 과거시험에서 그대로 낙방하였던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사실은 퇴계가 율곡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은 위로의 구절이 있음을 통해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옛 사람이 이르기를 젊은 나이에 과거에 오르는 것은 하나의 불행이다.’라고 하였으니, 자네가 이번 과거에 실패하였던 것은 아마도 하늘이 그대를 크게 성취시키려한 까닭인 것 같으니 아무쪼록 힘을 쓰시게나.”

물론 퇴계의 위로는 맹자가 고자장 하편에서 하늘이 장차 큰 인물을 이 사람에게 내리려 할 때에는 반드시 그 마음을 괴롭게 하며, 그 신세를 수고롭게 하며, 그 몸을 굶주리게 하며, 그 몸을 궁핍하게 하여 행하는 바를 어그러지게 함이요, 이것은 마음을 분발시키고 성질을 참게 하여 그 능하지 못한 바를 보태주고자 함이다.’라고 한 말을 상기시킴으로써 율곡을 오히려 분발하게 하려는 뜻이었으나 이 무렵 율곡은 실로 사면초가에 봉착하고 있었던 것이다.

폐병을 앓는 아내와 굶주림과 추위에 떨고 있는 가족들을 위해서라도 과거에 급제해야 하는 절박한 처지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절박한 심정은 이 무렵 율곡이 지은 시에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강릉에 머물고 있을 때 율곡은 지정(智正)이란 산인(山人)을 만난다. 아마도 율곡이 금강산에 입산수도하고 있을 때 만났던 사람으로 스님은 아니었고, 산중에 살고 있던 거사처럼 보여진다.

두 사람은 함께 술을 마시다가 서로 불교와 유교에 대해서 토론을 하는데, 이 토론의 내용이 산인 지정에게 주다(贈山人智正)’라는 시 속에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우리 유가에는 본래 참된 낙지(樂地)가 있어

외부의 물질을 꺾지 않고도 능히 본성을 기른다네.

고원(高遠)하거나 기이한 길, 다 중도(中道)가 아니라

자신에 돌이켜 성실하면 성인에 이를 수 있다오.

이 구절을 통해 이율곡은 이미 불교와 완전히 단절하고 스승 퇴계가 내려준 유가적 화두인 거경궁리에 완전히 몰입하고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즉 불교에서 말하는 욕계(欲界)와 색계(色界)와 무색계(無色界)의 삼계와 지옥(地獄), 아귀(餓鬼), 아수라(阿修羅), 축생(畜生), 인간(人間), 천상(天上)의 육도를 벗어나기 위해서 굳이 불교적 중도(中道)를 취하지 않더라도 자신에게 돌이켜 성실하면 성인에 이를 수 있다(反身而誠可醒聖)’라는 유교적 진리를 주장하고 있음인 것이다.

토론 중에 율곡은 지정과 함께 술을 마시며 담소한다.

국화꽃 꺾어 꽃잎을 띄우며 술을 마셨는데, 이러한 풍습은 일찍이 도연명이 읊은 동쪽 울타리 밑에서 국화를 딴다(採菊東籬下)’란 시구절을 인용하여 그대로 풍류를 즐긴 것이었다.

또한 전국시대 초나라의 비극적인 시인이자 정치가였던 굴원(屈原)이 남긴 저녁에는 국화의 낙화를 먹는다(夕餐秋菊之落英)’는 사()를 그대로 인용한 행동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국화 꽃잎을 술잔에 넣어 마시던 청년 율곡은 문득 다음과 같은 시를 남긴다.

서리 속의 국화를 사랑하기에(爲愛霜中菊)

노란 잎 따서 술잔에 가득 띄웠네(金英摘滿觴).

맑은 향내는 술맛을 돋우고,(淸香添酒味)

수려한 빛은 시의 창자를 적셔주기도 하네(秀色潤詩腸).

도잠(陶潛)이 무심히 잎을 따고(元亮尋常採)

굴원(屈原)이 잠시 꽃을 맛보았으나(靈均造次嘗)

어찌 정담만 나누는 일이(何如情話處)

시와 술로 서로 즐기는 것만 하겠는가(詩酒兩逢場).”

별시해를 보기 직전인 그해 가을, 산림거사인 지정과 술을 마시며 국화를 술잔에 띄우고란 즉흥시를 지은 율곡은 자신을 서리맞은 국화(霜中菊)’로 비유함으로써 자신의 심정을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또한 초나라의 불우한 정치가이자 비극시인이었던 굴원이 쓴 초사(楚辭)아침엔 목란의 추로(墜露)를 마시고 저녁엔 가을국화의 떨어진 꽃(落英)을 씹는다.’라는 구절을 인용함으로써 자신의 처지를 굴원처럼 불우하고 비극적인 것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뿐인가.

율곡은 강릉에 낙향하여 본의 아니게 은둔생활을 하고 있는 자신의 처지를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 비유하고 있음인 것이다. 그리하여 시 속에 도연명의 음주시 한 구절을 인용하고 있다.

일찍이 귀거래사를 읊고 고향으로 돌아와 청빈을 달게 여기고 전원에서 밭을 갈며 고풍청절하게 지내던 전원시인 도연명은 어느 날 다음과 같은 시를 짓는다.

사람들이 많이 사는 곳에/작은 집 한 채를 마련한다.

그러나 마차나 방울소리는 없다/그럴 수가 있냐고 물을 것이다.

마음이 떨어져 있으면 땅도 자연히 멀다.

동쪽울타리 아래서 국화를 자르다가 유연히 남산을 바라본다.

산공기가 석양에 맑다. 날던 새들은 떼 지어 제 집으로 돌아온다.

여기에 진정한 의미가 있으니/말하려 하다 이미 그 말을 잊었노라.(피천득 번역)”

율곡은 도연명의 동쪽울타리 아래서 국화를 자른다(採菊東籬下)’란 한 구절을 인용함으로써 이 무렵 서리맞은 국화와 같은 자신의 곤궁한 처지를 자조적으로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번 별시에는 율곡으로서는 배수의 진을 치고 치른 과거시험이었다.

율곡이 성균관에 도착하자 반수당 안은 이미 결과를 보려는 수많은 과유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대부분의 유생들은 심부름하는 종자들까지 데려오고 또한 이들을 상대로 한 술 파는 장사치들까지 판을 벌이고 있었으므로 반수당 안은 그야말로 야단법석이었다.

그들 중에는 전번에 과거시험을 치르기 위해서 부문을 통과하려 하였을 때 율곡의 앞을 막아세웠던 세도가의 모습도 보였으므로 율곡은 한 곁에 멀찌감치 물러서서 방방(放榜)을 기다리고 있었다.

율곡은 이번 별시의 결과에 은근히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

지난봄의 과거와는 달리 이번 별시의 책제는 천도책이란 철학 시험문제로 난해하고 까다로운 것이었으나 율곡에게는 오히려 족집게처럼 집어낸 예상문제와 같은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왜냐하면 율곡은 지난 일년 동안 스승 퇴계로부터 점지받은 거경궁리의 화두에 전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율곡은 자연 한대 유학에서 제기되고 있었던 사람의 마음은 천지의 마음(人者天地之心也)’이기 때문에 사람의 마음이 바르면 천지의 마음도 바르게 되고 사람의 기가 순하면 천지의 기도 역시 순하게 된다(人之氣順則天地之氣亦順矣).’천인상감설에 대해서 이미 깊은 궁리를 끝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율곡이 그토록 빠르게 답안지를 작성할 수 있었던 것도 또한 일필휘지로 조선조 최고의 명문장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도 그런 내공의 결과였던 것이다.

이윽고 시간이 되었는지 어악이 일어나며 모대(帽帶)한 시관이 방을 고이 들고 앞으로 나와 홍마삭 끈을 일시에 올려 달았다. 그러자 종이가 펼쳐지며 마침내 시험결과가 발표되었다.

순간 그 앞으로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선접꾼들이 눈알을 부라리며 주먹을 휘두르며 세도가의 자제들을 위해 일시에 달려들어 길을 열었으나 율곡은 한 곁에 물러서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자 결과를 보고 낙방한 과유들이 침통한 얼굴로 차례차례 물러갔다. 삽시간에 반수당 뜨락은 썰물처럼 빠져 나간 유생들로 철지난 바닷가와 같았다.

그때였다.

누군가 은행나무 밑에 서 있는 율곡 앞으로 큰 소리를 치며 달려오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 도대체 어디 갔었는가. 한참을 찾고 있었네.”

송강 정철이었다. 정철은 율곡과 동갑내기로 벌써부터 상대방의 문재를 인정하고 있었던 당대의 라이벌이었다.

특히 지난번 세도가 자식들이 합심하여 율곡에게 행패를 부릴 때 기지를 발휘하여 율곡을 위기에서 구해줌으로써 무사히 과거시험을 치르게 하였던 은인이기도 하였다.

방을 보았는가.”

정철이 빙그레 웃으며 율곡을 쳐다보았다.

아직 보지 못하였네. 자네는 보았는가.”

나야 보았지. 나야 보기 좋게 낙방하였네.”

훗날의 이야기이지만 율곡이 29세 되던 1564년에야 대과의 명경과에 장원으로 급제함으로써 마침내 마지막 관문을 통과하고 호조좌랑에 임명되어 벼슬의 출발점에 설 수 있었다면 정철은 그보다 2년이나 빨리 역시 장원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던 것이다. 물론 율곡이 정철보다 2년이나 늦었던 것은 뜻밖에도 아버지 이원수가 율곡의 나이 26세 때인 그해 5월 갑자기 병사함으로써 3년 동안 율곡은 과거공부를 중단하고 3년 동안이나 파주의 선영에서 시묘살이를 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율곡도 진즉부터 정철에 대한 소문을 친구 성혼을 통해 듣고 있었는데, 두 사람이 평생 동안 친교를 맺고 지낼 수 있는 벗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이처럼 성균관 앞에서 정철이 율곡을 위기에서 구해준 기지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게 무슨 대수겠는가. 도대체 천도책이라니, 그따위 과거시험 문제를 내는 사람이 도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 하늘의 길이라니, 무슨 빌어먹다 죽은 씻나락 까먹는 귀신의 소리란 말인가.”

정철의 몸에서는 이미 술 냄새가 진동하였다. 아마도 술을 파는 장사치로부터 술을 사서 거나하게 취할 만큼 마신 모양이었다.

자 가세나.”

정철이 율곡의 손을 잡고 방 앞으로 나아가며 소리치며 말하였다.

물럿거라, 쉬잇- 물럿거라. 장원급제 나가신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소리쳐 벽제(辟除)하는 정철을 바라보았다. 그중에는 이준경의 아들 무리도 있었다. 불과 사흘 전에 율곡을 가랑이 사이로 개처럼 기어가라고 수모를 주었던 파락호들이었다. 이때 정철은 율곡의 유건을 벗겨 율곡이 유발하였음을 보여줌으로써 간신히 문묘에 출입할 수 있는 임기응변을 발휘하였던 것이다.

- 물럿거라. 홍패어사 나가신다.”

술 취한 정철은 신이 나서 춤을 추면서 율곡의 손을 잡고서 소리쳐 말하였다.

홍패(紅牌)란 대과의 복시에 급제하였을 때 임금이 내리는 합격증서.

이때 과유는 모화(帽花)를 머리에 꽂은 채 거리를 활보하게 되는 것이다. 3일이나 5일 동안 시가를 행진하고 친척이나 친지를 방문하는 것으로 급제자가 지방 사람인 경우에는 도문(到門)이라 하여 귀향 당일 그곳 관민의 환영 속에 부모나 친지를 찾아뵙고 문묘에 절하여 제사를 올리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철은 이미 홍패를 받고 모화를 머리에 꽂은 채 거리를 행진하는 유가(遊街)를 예행연습하고 있음인 것이었다.

당황한 쪽은 율곡이었다.

이 사람 도대체 무슨 일인가.”

율곡이 극구 만류하였으나 정철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짐짓 그런 행동을 취하는 듯 율곡에게 수모를 주었던 과유 앞을 지나면서 더욱더 소리높여 외치는 것이었다.

정철은 이미 방을 통해 율곡이 급제하였음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장원급제하였음을 미리 확인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반수당을 뒤져 멀찌감치 떨어져 있던 율곡을 일부러 찾아 나섰던 것이다.

평생 동안 술을 좋아하고 여자를 가까이하였던 풍류객 정철.

율곡과는 당대 제일의 문장가를 다투던 호적수였으나 뛰어난 정치적 영향을 펼쳐 보였던 율곡과는 달리 평생을 가사 문학에만 매어 달렸던 풍류시인 정철. 그는 평생의 벗인 율곡이 보기 좋게 역경을 딛고 과거에 장원급제하였음을 만방에 고하기 위해서 일부러 술에 취해 구종별배(驅從別陪)를 하였던 것이었다.

정철의 말은 사실이었다.

이때 별시에 급제한 사람은 모두 17. 그중 율곡이 일지본(一之本)’, 즉 장원이었던 것이다.

국가에서 시행하는 과거시험에서 당당히 장원급제하였으니 아무리 세도가의 자제들이라 하더라도 더 이상 율곡을 만만히 보고 함부로 행패를 부릴 수 없음이었다.

17명의 급제자들은 계단 밑 뜨락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임금이 있는 궁궐을 향해 사은숙배를 올렸다. 그중 맨 앞자리에서 숙배를 올린 사람은 당연히 장원급제의 영광을 얻은 이율곡.

스승인 퇴계로부터 점지된 유가적 화두, ‘거경궁리의 공안이 타파되는 초견성(初見性)의 바로 그 순간이기도 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장원급제한 율곡의 명문 천도책은 스승 퇴계가 내려준 거경궁리의 화두를 타파한 율곡의 오도송(悟道頌)이기도 한 것이다.

이처럼 23세 때 질풍노도의 계절에 23일의 짧은 만남이었으나 율곡이 스승 퇴계로부터 받은 영향은 실로 지대하였던 것이다.

첫 상면이 있은 지 12년 후 율곡은 퇴계 선생이 돌아가시자 퇴계 선생을 곡하다(哭退溪先生)’란 만사를 짓고 스승에 대한 예로 흰 띠를 두르고 심상(心喪)을 하였다. 그러고 나서 율곡은 퇴계 선생으로부터 자신이 얻은 학문의 결과를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내가 학문의 길을 잃고 방황하고 있을 때 사나운 말처럼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여 가시밭의 거친 들에 있다가 방향을 고쳐서 옛길로 돌아오게 되었으니, 이 모든 것은 실로 퇴계 선생의 계발에 힘입은 것이다.”

율곡은 그 후에도 스승 퇴계를 한번 만난 적이 있었다.

그것은 명종이 승하하고 선조가 막 즉위하던 과도기였다. 그때 마침 퇴계는 서울 한양에 올라와 있었다. 명나라에서 새로운 황제 목종이 등극하여 이 사실을 우리나라에 알리고자 사신을 보냈는데, 퇴계가 이들을 맞는 임무를 부여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한양에 당도하여 정식으로 명을 받기도 전에 명종이 승하하고 말았으므로 퇴계는 즉시 명종을 추모하는 글을 짓고 가급적이면 빨리 한양을 떠나 도산서원으로 돌아가고자 하였다.

이때가 1567, 퇴계의 나이는 66세였고, 그는 깊은 병중에 있었다.

명종의 부르심을 받고 상경하는 도중 풍기에 머물면서 사퇴하는 장계를 올렸으나 임금은 윤허하지 않고 오히려 각 지방관에게 퇴계를 호송하고 전의는 가서 치료하여 모셔와 제수토록 하라고 어명을 내렸다. 명종은 퇴계에게 공조판서와 예문관의 제학(提學)을 겸임시켰는데, 이때의 상황을 판관 우언겸(禹彦謙)의 아들 우추연은 다음과 같이 보고하고 있다.

병인년(1562)에 왕명에 따라 퇴계 선생은 예천까지 가셨으나 병환이 너무 깊어서 상경하지 못하고 장계를 올린 후 안동 산사에 머물면서 왕명을 기다렸다. 모든 접대를 받지 않으시고 모두 뿌리치셨다. 다만 중에게 밥을 시켜서 드시니 그 소연하심이 정말 빈한한 선비 같으셨다. 봉화 현감께서 그때 안기찰방(安奇察訪)으로 있었기 때문에 가서 시중을 들고자 하였으나 물리치시고 하인들도 보내지 못하게 하였다.”

이때 퇴계가 머물렀던 곳은 안동시 태장리에 있는 천등산 봉정사. 골수에까지 깊은 병이 든 퇴계는 이곳에서 다음과 같은 감상적인 시를 짓는다.

예 와서 공부한 지 오십 년이 흘렀구나(此地從遊五十年)

백화 앞에 고운 얼굴 봄을 즐겼더니 (韶顔春醉百花前)

함께 왔던 그 친구들 지금은 어디 가고(只今携手人何處)

창암에 폭포 물만 예대로 흐르는가(依舊蒼巖白水懸)”

간신히 한양에 도착한 퇴계는 그러나 뜻밖에도 명종이 승하하자 인산(因山)이 끝나기도 전에 황급히 도산으로 돌아가려 하였다.

그러자 선왕이었던 명종 못지않게 퇴계를 마음 속 깊이 존경하고 있던 선조는 즉시 퇴계에게 예조판서를 제수하고 퇴계를 자신의 곁에 붙잡아두려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종의 인산이 끝나기도 전에 퇴계가 낙향하려 하자 조정에서는 여기저기서 퇴계를 비난하는 소리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였다.

원로대신 이준경은 퇴계를 가리켜 산속에서만 살고자 하는 고상한 척하는 위선적인 산새(山禽)’에 비유하였고, 퇴계의 문인 중의 한 사람이었던 남언경(南彦經)까지도 퇴계의 학문을 자신만을 위하는 위아지학(爲我之學)’이라고까지 비난하였던 것이다.

퇴계를 스승으로 존경하고 있던 율곡은 이때 한양의 숙소로 퇴계를 찾아가는데, 두 사람이 처음으로 만난 지 거의 10년 만의 일이었다.

전날 백면서생이었던 율곡은 이때 이조좌랑이라는 중책을 맡고 있었다. 10년 만에 스승 퇴계를 만난 율곡은 삼배를 올려 제자로서의 예를 올린 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고 기록은 전하고 있다.

어린 왕이 처음 들어서고 시사에도 어려움이 많으니, 분의(分義)를 헤아려 보시더라도 스승님께서는 물러가실 수가 없습니다.”

새로이 왕 위에 오른 선조는 일찍부터 퇴계의 학덕을 듣고 있었으므로 문교를 주관하는 예조판서가 퇴계에게 가장 적합한 자리라고 판단하고 있었던 것이다.

선왕이었던 명종이 후사 없이 죽자 덕흥군의 셋째아들이었던 하성군이 15살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는데, 그가 곧 선조였다.

선조는 새 왕이 즉위하는 새 시대에는 낡은 폐습을 물리칠 수 있는 인격자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퇴계를 이조판서에 제수하였는데, 퇴계는 한사코 모든 것을 거절하고 물러가려 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율곡은 선조의 어명을 받고 퇴계를 설득하러 나선 특사 자격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퇴계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신하된 도리로서는 비록 물러설 수는 없으나 내 자신을 보면 물러갈 수밖에 없소이다. 몸에 이미 병이 많고 재주도 무능하기 때문이오.”

율곡의 직책인 이조좌랑은 관리의 등용을 주관하는 직책’. 비록 정6품의 당하관에 속하는 낮은 직책이었으나 인사권이 막강하여 제도적으로 상관인 이조판서도 추천권을 함부로 빼앗을 수 없는 요직이었던 것이다.

비록 선조는 15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였으나 매우 침착하고 사려가 깊어 행동하는 것마다 예절에 맞았다고 한다.

즉위하자마자 그를 키운 유모가 수를 놓아 꾸민 호화 가마를 타고 대궐을 찾아와 개인적으로 청원을 하자 네가 어찌 감히 가마까지 탈 수 있느냐.’하고 불호령함으로써 유모는 울면서 걸어 집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는데, 이를 본 명나라 사신들이 이러한 현군을 얻은 것은 동국의 복이다.’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율곡은 새 임금 밑에서 새 시대를 열고 싶은 야망으로 간곡히 찾아와 스승에게 참정을 권유하였던 것이었다.

그러나 스승 퇴계가 또다시 칭병을 하며 물러나려 하자 율곡은 다시 다음과 같이 간곡히 청원한다.

만일 스승님께서 경연의 자리에 계신다면 나라의 이익됨이 매우 클 것입니다. 벼슬을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남을 위한 것이지 어찌 꼭 자신만을 위한 것이겠습니까.”

그러자 퇴계는 다시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벼슬을 하는 것이 진실로 남을 위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 이익됨이 남에게 미치지 못하고 자신의 몸 걱정만 더해진다면 어쩔 수 없는 것이오.”

스승의 이 말을 들은 율곡은 다시 말을 덧붙인다.

스승님께서 조정에 계시면서 설령 하는 바가 없으시더라도 왕이 무겁게 의지하고 인정도 기뻐함이 있다면 이 역시 이익됨이 남에게 미치는 것입니다. 스승님의 학문이 어찌 위아지학(爲我之學)이겠습니까.”

위아지학.

일찍이 맹자가 선포하였던 양주(楊朱)의 자신만을 위한 위아주의를 뜻하는 말.

맹자는 양주는 자신만을 위하는 학문이니 임금이 없고, 묵적의 겸애는 아버지가 없음이니 아버지가 없고, 임금이 없는 것은 새나 짐승과 다름이 없는 것이다(楊氏爲我 是無君 墨氏兼愛 是無父 無父無君 是禽獸也)’라고 위아주의를 비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은 그 무렵 많은 사람들이 퇴계를 헐뜯는 구절로 인용되고 있었던 것이다.

당대의 원로대신이었던 이준경은 맹자의 말을 인용하여 퇴계를 산새라고 비난하였으며, 심지어는 퇴계의 제자였던 남시보(南時甫)까지도 스승 퇴계를 위아주의자라고 비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비난을 모르고 있을 퇴계가 아니었다. 그러나 율곡의 간곡한 청원에도 퇴계는 묵묵부답으로 침묵을 지켰을 뿐 아무런 대답도 변명도 하지 않았다.

훗날 퇴계는 기대승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러한 자신을 향한 비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변명하고 있다.

이 문장은 퇴계가 유일하게 자신에 대한 변명을 하는 단 하나의 장면인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요새 들으니 남시보가 나를 일러 위아(爲我)의 학문을 한다고 하는데, 대저 나는 위아의 학문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형적(形跡)은 위아와 흡사하다고 할 수 있으니, 그런 말을 듣고 보니 실로 부끄러운 일이다.”

퇴계는 자신의 학문이 위아주의가 아닌 위기주의(爲己主義)’임을 명백히 밝히고 있다.

원래 위기지학은 성리학에서 군자학으로까지 불리는 것으로 자기의 인격, 학식, 덕행의 향상과 증식을 목적으로 하는 학문인 것이다. 퇴계는 자신의 위기지학이 제자 남시보가 주장하였던 양주의 위아지학은 아니라 하더라도 그 형적에 있어 위아와 흡사하니, 실로 부끄러운 일이라고 변명하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자신의 학문은 우리 인간으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로서의 지, , 행을 실천궁행하는 위기지학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에 비하면 율곡은 위인지학(爲人之學)’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두 사람이 나눈 최후의 대화에서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위인지학(爲人之學).

이는 퇴계가 자신을 변명하였던 위기지학과 반대되는 말로서 지, , 행의 생활을 떠나 남에게 자기를 알리는데 힘쓰고 이름과 명예를 추구하는 학문을 말한다.

따라서 유가에게 있어 경학(經學)과 성리학, 심학 등은 위기지학을 가리키고, 사장지학(詞章之學), 과거지학(科擧之學), 공명지학(功名之學) 등은 위인지학을 가리키는 것이다.

물론 퇴계도 처음에는 위인지학을 꿈꾸었었다. 그러나 48세 때 단양군수를 끝으로 죽령고개를 넘으면서 위인지학을 버리고 오직 위기지학에 몰두해야겠다고 발심하였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소백산의 죽령고개는 퇴계에 있어서 위인지학의 학문에서 위인지학의 학문으로 넘어가는 대발심의 분기점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퇴계의 결심은 52세 때 조식(曺植)에게 보낸 다음과 같은 편지에서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저는 어려서부터 옛사람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었으나 집이 가난하고 어버이가 늙고 친구들이 강권하였기 때문에 과거로서 녹리(祿利)를 취하는 길을 걷게 되었던 것입니다. 저는 그때에는 실로 아는 것이 없어서 그 말에 곧 마음이 동하여 우연히 천서(薦書)에 이름이 오르게 되면서부터 티끌 세상에 빠져 들어가 날마다 분주히 지내다 보니 다른 것이야 말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 뒤로 병이 더 심하여지고 또 스스로 헤아려 보니 세상에서 아무런 한 일도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되고 비로소 머리를 돌리고 발을 멈추고 옛 성현의 글을 더욱더 얻어 읽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로부터 척연히 깨닫고 늦게나마 길을 고쳐 잡고 방향을 돌이켜서 늘그막 볕이나 거두어 볼까 하여 벼슬자리를 사양하고 책을 메고 산중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이루지 못한 것을 더욱 구하여 혹 하늘의 신령이 도와서 한알 두알, 한치 두치 쌓고 또 쌓는 도중에, 만의 일이라도 얻는 것이 있게 되면 이 일생을 헛되이 보내게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이것이 제가 10년 내로 원하는 바이온데, 성상께서는 사람을 가리지 않으시고 빈이름만 가진 저를 불러들이심에 계묘(癸卯)로부터 임자(壬子)에까지 10년 사이에 무릇 세 번이나 물러나 사양하였으나 세 번 소환을 당하고보니 늙고 병든 몸으로 공부에 전일하지 못하온즉 이러고서야 어찌 성공이 있기를 바라겠습니까.”

조식에게 보낸 이 간절한 내용의 편지는 퇴계가 얼마나 위인지학에서 위기지학의 방향으로 길을 고쳐 잡고 일생을 헛되이 보내지 않으려고 책을 메고 산중(도산서원)으로 들어가 늙고 병든 몸으로 공부에 전일(專一)’하였는가를 미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이에 비하면 퇴계를 설득하러 온 율곡의 대화 내용은 철저히 위인지학의 소산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특히 벼슬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남을 위한 것이지 어찌 꼭 자기만을 위한 것이겠습니까.’라는 율곡의 권유는 위인주의자로서의 면모를 엿보게 하는 장면인 것이다.

우리나라가 낳은 최고의 사상가인 이퇴계와 이율곡의 차이점은 이처럼 위기주의자와 위인주의자로 나누어지는데서 비롯되는 것이다.

물론 유가사상을 낳은 공자도 처음에는 위인주의자처럼 보였다.

공자는 68세 때에 이르러 마침내 13년에 걸친 주유열국을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올 때까지 천하의 제후를 만나며 왕도정치를 펼치기 위해 갖은 간난신고(艱難辛苦)의 계절을 보냈던 것이다. 그러나 고향으로 돌아온 이후부터 공자는 오로지 제자들을 가르치며, 위기지학에만 전념하였다.

그러면서도 공자는 병이 들었을 때 임금이 문병 오시면 머리를 동쪽에 두고 조복을 위에 덮고 큰 띠를 그 위에 걸쳐놓고 맞았으며, 임금이 오라는 명을 내리면 수레가 준비되기를 기다리지 않고 떠나셨다.’라는 논어의 기록처럼 군신의 예를 반드시 지켰다.

임금이 부르면 수레를 기다리지 않고 바삐 간다.’는 의미의 불사가(不俟駕)’란 말은 바로 이런 공자의 태도에서 비롯된 말.

그러나 48세 때에 풍기군수를 끝으로 죽령을 넘은 이후로 퇴계는 자신의 인생을 앞과 뒤로 이분하고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나의 인생에 있어 나아가고 물러감에 있어서 앞과 뒤(前後)’가 다른 듯하다. 전에는 임금의 명령을 듣기만 하면 곧바로 달려갔으나 뒤에는 부르시면 반드시 사양하였으며, 나아가더라도 굳이 머무르지 않았다.”

이에 비하면 율곡은 성리학에 관한 명저들을 저술하였으면서도 또한 평생 동안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지 않았다.

특히 율곡이 158449세의 나이로 죽기 직전인 선조 16, ‘십년이 못가서 반드시 화란(禍亂)이 있을 것입니다.’라고 예언하면서 미구에 닥쳐올지도 모르는 왜의 흙이 무너지는 화(土崩之禍)’에 대비하여 십만양병설을 주장하였던 것을 보더라도 율곡은 시대의 징표를 꿰뚫어볼 수 있었던 경세가이자 대정치가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새삼스레 이제와서 퇴계의 위기지학이 옳은지, 율곡의 위인지학이 더 옳은지 분별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그러나 공자가 일찍이 옛날에 배우고자 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위하여 공부하였으나 오늘날 배우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이기기 위해서 공부한다(古之學者爲己 今之學者爲人)’라고 말하였던 것을 보더라도 유교의 학문은 결국 서양철학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인간수양론(Self-Cultivation), 즉 몸과 마음을 다듬어 인()을 완성하기 위한 위기지학인 것이다.

퇴계가 한때 율곡에 대해서 사람됨이 명랑하고 시원스러울 뿐 아니라 지식과 견문도 많고 우리의 학문에 뜻이 있으니, 후배가 두렵다는 전성(前聖:공자)의 말이 나를 속이지 않았다.’고 제자 조목에게 보낸 편지에서 극찬하고 있으면서도 다만 그가 지나치게 사장(詞章)을 숭상한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어 이를 억제하고자 시를 짓지 않도록 당부하였다.’라고 평가하고 있는 것은 율곡의 천재성이 학문에 전념하기보다는 지나치게 다방면에 화려하여 결국 공자가 말하였던 다른 사람을 이기기 위해서 공부한다.’라는 사장지학이나 공명지학(功名之學)에 빠질 것을 염려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위인지학은 결국 입신양명의 출세를 위한 학문적 도구로 전략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갖고 있으므로.

퇴계는 자신이 위인지학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형적은 위아와 흡사하여 자칫 오해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큰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었던 듯 보인다.

따라서 율곡이 스승님의 학문이 어찌 위아지학이겠습니까.’라는 마지막 질문에 묵묵부답으로 침묵을 지키고 있었던 퇴계는 마침내 다음과 같은 말로 끝을 맺는다.

일찍이 이연평(李延平)이 말하기를 오늘날에 있어서는 벽촌에 고요히 거하여 초근목피로 살면서 본업을 힘써 닦을 수밖에 없다.’라고 하였으니, 이러한 이연평도 위아지학이란 말인가. 또한 주자 역시 장차 몸과 마음을 속세의 절에 머물고 있으리니 이는 부처의 마음을 섬겨 이름을 얻기 위함이 아니다(將此身心奉塵刹 是則名爲奉佛思)’라고 말하였으니, 이러한 주자의 마음이 위아지학이란 말인가. 나는 굳이 이연평의 말이 아니더라도 또한 주자의 말이 아니더라도 본원처(本願處)를 찾기 위해서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함이니 숙헌께오서는 나를 붙들려 하지 마시오.”

기록에 의하면 이 자리에는 퇴계와 율곡 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함께 앉아 있었다고 한다.

퇴계에게 간곡히 청원하는 율곡의 태도를 보다 못해 누군가 한 사람이 그렇다면 성혼은 어찌하여 참봉벼슬을 받고서도 아니 나오는가.’하고 묻자 율곡은 성혼은 병이 많아 벼슬을 감당할 수 없으니 만약 강제로 벼슬을 시킨다면 이는 그를 괴롭히는 것입니다.’라고 변명하였다고 한다.

이 말을 들은 퇴계는 크게 웃으며 숙헌은 어찌하여 성혼에게는 대접을 후하게 하면서 내게 대한 대접은 이처럼 박한 것이오.’하고 묻는다. 이에 율곡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고 기록은 전하고 있다.

그렇지 않습니다. 성혼의 벼슬이 만약 스승님과 같다면 성혼도 일신상의 개인적인 형편은 돌보지 않고 벼슬에 나설 것입니다. 그러나 성혼은 말단 관직에 불과하니 성혼이 나서지 않는다 하더라도 나라에 무슨 손실이 있겠습니까. 하오나 스승님께오서는 다르십니다.”

그러고 나서 율곡은 마지막으로 읍소한다.

지금 민력이 다하고 국가의 재정이 바닥 나서 만약 개혁을 하지 않는다면 장차 나라가 나라답지 못하게 될 것이오니 이를 생각하면 한밤중에라도 벌떡 일어나 앉게 되어 식은땀이 온몸에 흘러내리나이다. 만약 스승님께오서 한양에 머물러만 계셔도 민심은 안정될 것이옵니다.”

그러나 며칠 뒤 퇴계는 율곡의 이러한 간곡한 청원에도 홀연히 한양을 떠나 안동으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다. 놀라운 것은 명종의 장례가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여론이 분분하였고, 기대승이 퇴계에게 편지로 나아가고 물러가는 대의(大義)가 심히 의심된다.’라고 은근히 비난할 정도였던 것이다.

4년 뒤인 12, 퇴계가 죽을 때까지 두 사람은 편지로 짧은 의견을 나누었을 뿐 두 번 다시는 상면하지 못하였으니, 이때 나눈 두 사람의 대화는 더 이상 스승과 제자가 아닌 두 위대한 사상가가 벌인 의미심장한 이중창인 것이다.

마치 인류가 낳은 최고의 성인이었던 노자와 공자의 만남을 연상시키는 퇴계와 율곡의 만남을 통해 우리나라가 낳은 위대한 사상가가 벌인 이 이중창의 대화는 짧지만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1세기를 맞는 우리민족에게 가장 중요한 사회문제는 바로 교육.

굳이 아리스토텔레스의 국가의 운명은 청년의 교육에 달려 있다.’라는 금언이 아니더라도 교육이야말로 국가의 먼 장래를 내다보고 계획을 세우는 백년대계(百年大計)인 것이다.

그러한 백년지계인 교육정책이 중심을 잡지 못하고 갈팡질팡 흔들리고 있는 이즈음 퇴계와 율곡이 나눈 마지막 대화를 통해 우리가 나아가야 할 교육의 지표를 설계하는 것은 매우 현명한 일일 것이다.

위기주의자로서의 퇴계와 위인주의자로서의 율곡의 대화는 앞으로 나아가야 할 우리의 교육이 남과의 경쟁에서 이기고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한, 명예와 권력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공자가 주장하였던 옛날에 배우고자 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위하여 공부하였다(古之學者爲己)’라는 군자학에서 비롯된 위기지학임이 명백하게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퇴계가 율곡의 간곡한 청원에도 불구하고 임금의 장례가 끝나기도 전에 결연히 고향으로 낙향하였던 것은 이러한 위기지학으로서의 학문적 태도를 극명하게 드러내 보인 태도인 것이다.

우리 교육의 목표가 남을 이기기 위한 경쟁과 명예를 높이기 위한 도구로서의 공명주의에서 벗어나 자기의 인격, 학식, 덕행의 향상과 증식을 목적으로 하는 위기지학의 원론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오늘날의 교육적 위기는 자연스럽게 극복될 수 있을 것이다.

퇴계와 율곡이 16세기의 현실에 맞추어서 나눴던 짧은 대화가 오늘날 우리의 현실이 가진 통시성과 일치되는 것을 발견하고 그 속에서 역사적 교훈을 얻을 수 있다면 이는 위대한 철인이 남긴 위대한 유산이라고 단언할 수 있을 것이다.

감히 비교할 순 없겠지만 퇴계가 뛰어난 성리학자였으면서 대정치가였던 율곡보다 한층 더 위대한 사상가라고 평가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위기주의자로서의 면모 때문이었던 것이니, 퇴계는 그로부터 4년 뒤인 선조470세의 나이로 숨을 거둔다.

이때 율곡도 병환으로 벼슬을 사직하고 잠시 처가가 있는 해주의 야두촌으로 돌아가 야인생활을 하고 있었는데,157012월 퇴계가 별세하였다는 부고가 오자 율곡은 신위를 만들어 놓고 곡을 하였다.

소대(素帶)를 차고 외실에서 거처하였으며, 동생 우를 시켜 제문을 바치도록 하는 한편 머리에 흰 띠를 두르고 심상하였다.

비교적 자대하는 면이 있어 고집이 세고 남을 비평하기를 잘하여 여간해서는 타인을 대단하게 평가하지 않았던 율곡이었는데, 유독 퇴계만은 존경하고 높이 평가하여 평생동안 스승으로 섬겼던 것이다.

그러한 스승 퇴계가 마침내 70세의 나이로 유명을 달리하였던 것이다.

율곡은 제문에서 퇴계를 일러 천지사이에 뛰어난 기질을 모아서 타고나 은연함이 옥과 같고 모습이 순박하다.’고 칭송하였으며,‘행실은 가을 물처럼 맑고 깨끗하다.’고 표현하였다.

또한 스승의 학문에 대해서는 뭇 학설에 서로 다른 점을 절충하여 하나로 모으되 주자를 스승으로 하였다.’고 추모하였던 것이다.

그러고 나서 율곡은 퇴계 선생을 곡하다(哭退溪先生)’란 추도시를 지어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좋은 옥 정한 금처럼 순수한 정기 타고 나시어,

참된 근원은 관민()에서 갈려나왔다.

백성들은 위아래로 혜택 입기를 바랐건만,

자신의 행적은 산림에서 홀로 몸을 닦으셨네.

호랑이 떠나고 용도 사라져 사람의 일 변했건만,

물결 돌리고 길 열으시니 저서들이 새롭구나.

남쪽 하늘 아득히 저승과 이승이 갈리니,

서해 물가에서 눈물 마르고 창자 끊어집니다.”

만사(輓詞)에 나오는 관민()은 각각 관중(關中)과 민중()을 가리키는 것으로 송나라의 유학자인 장재(張載)와 주희가 각각 여기에서 거주하였기 때문에 전의되어 장자와 주자를 가리키는 것이다. 이는 스승 퇴계가 바로 장자와 주자의 학통을 이어받았음을 가리키는 것이며, 또한 백성들은 위아래로 혜택 입길 바랐건만 자신의 행적은 산림에서 홀로 몸을 닦으셨네(民希上下同流澤 迹作山林獨善身)’라고 노래함으로써 위기지학으로서의 스승을 칭송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율곡의 만사는 율곡이 질풍노도의 시절 23일의 짧은 만남을 통해 방황의 길을 저버리고 옛 학문의 길로 다시 나아갈 때 퇴계가 내려준 잠언의 내용을 떠올리게 하는 장면인 것이다.

이때 퇴계는 율곡에게 거경궁리란 유가적 화두를 결택해 주는 한편 소자가 평생 좌우명 삼을 수 있는 잠언(箴言)을 한 말씀 내려주십시오.’하고 율곡이 청원하자 다음과 같은 유명한 잠언을 율곡에게 주었던 것이다.

마음가짐에 있어서는 속이지 않는 것을 귀하게 여기고

벼슬자리에 올라서는 일을 좋아하기를 경계하라(持心貴在不欺 立朝當戒喜事).”

이 잠언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퇴계는 유학의 본원을 위기지학인 입언수후(立言垂後)’에 두고 있고, 율곡은 유학의 본령을 위인지학출세행도(出世行道)’에 두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퇴계가 율곡에게 남긴 잠언은 어찌 율곡에게만 국한된 일일 것인가. 그 잠언이야말로 천고에 빛나는 영원불변의 대진리일 것이니.

퇴계가 죽자 율곡은 제문에서 아아, 물어볼 데를 잃고 부모를 잃었도다. 물에 빠져 엉엉 우는 자식을 뉘라서 구해줄 것인가.’ 하며 슬퍼하는 한편 아아, 슬프도다. 나라의 원로를 잃으니 부모가 돌아가신 것 같고, 용과 호랑이가 망했으며 경성(景星)이 빛을 거두었도다.’라고 탄식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율곡에게 비친 경성, 퇴계의 상서로운 별빛은 23세 때 율곡이 지은 천도책의 명문장에서 그대로 이어지고 있음이니, 퇴계야말로 우리나라가 낳은 가장 위대한 사상가이자 참스승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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