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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부 격물치지(格物致知) 제2장 거경궁리(居敬窮理)

5부 격물치지(格物致知) 2장 거경궁리(居敬窮理)

 

율곡이 퇴계를 만나기 위해서 계상서당을 찾았을 때에는 마침 봄비가 내리고 있었다. 이 봄비는 율곡이 머무를 때까지 줄곧 계속되어 율곡은 꼼짝없이 봄비에 갇혀 23일을 보낸 셈이었다.

더구나 율곡이 떠날 무렵 아침에는 흰눈까지 내렸다. 따라서 율곡이 계당에 머물러 있을 때는 봄은 왔으나 봄 같지 않은 불사춘(不似春)’의 봄날이었다.

이 무렵 퇴계는 자신이 태어난 온계(溫溪)의 동북쪽 초당골에 단칸 서당을 짓고 이를 계상서당이라 이름하고 그곳에서 학문에 정진하며 찾아오는 제자들을 맞고 있었다.

이 온계의 속명은 토계(兎溪). 이곳에 머물러 살기 시작하였던 것은 퇴계 나이 51세 때부터였는데, 이때부터 퇴계는 토계의 를 물러갈 퇴(退)로 고친 후 자기의 호를 퇴계라 정하였던 것이다. ‘물러선다는 뜻이니, 이후부터 벼슬에서 물러선다 하여 퇴거계상(退居溪上)’의 뜻으로 자신의 자호를 정하였던 것이다.

계상서당을 짓고 나서 마침내 청년 시절부터 갖고 있었던 자신의 꿈을 이루게 되자 퇴계는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자신의 심정을 술회하고 있다.

옛집 새로 옮겨 이 물가에 지으니/그대 허술한 집 찾아와서 어찌 견디느냐고 묻는구나.

도깨비와 지네는 누가 발이 더 많은지 알 수 없고/오리와 학의 다리를 어찌 비교할 수 있을 것인가.

만권 책의 훈기를 내가 경모하니/한 바가지 물로 사는 삶에도 진실한 기쁨을 느끼네.

스물여섯 해 전 마음먹었던 것을 오늘 되새겨보매/근심은 동해물로 밀려와 측량할 길이 없구나.”

이 시를 통해 퇴계가 20대의 청년 시절에 이미 만권의 책을 읽으며 한 바가지의 물로 사는 청빈한 삶을 꿈꾸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하기야 퇴계는 19살 때부터 이미 산림 숲 속 초당에서 만권의 책을 홀로 읽으며 다름없는 한 생각에 10년이 넘었도다(獨愛林廬萬卷書一般心事十年餘)’와 같은 시를 짓지 않았던가.

마침내 사나운 말처럼 이리저리 뛰면서 가시밭의 거친들에서 학문의 길을 잃고 방황하던 율곡은 계상서당에 이르러 퇴계를 만나자 스승으로서의 예를 갖춰 삼배를 올린 후 사제지간의 연을 맺는다. 이때 퇴계는 58세의 노인이었고, 율곡은 23세의 청년이었다.

인사를 올리고 난 후 율곡은 스승 퇴계에게 시 한 수를 헌사(獻詞)한다. 그 아름다운 헌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시냇물은 수사(洙泗)에서 나뉜 가닥이고

산봉우리는 무이산(武夷山)처럼 빼어났습니다.

살아가는 살림은 천여 권의 경전이고

거처하는 방편은 두어 칸의 집뿐입니다.

뵙고 싶었던 회포를 푸니 마음은 환히 갠 달 같고

웃음 섞인 말씀을 듣고 나니 거친 물결을 멈추게 합니다.

저로서는 도를 듣고자 온 것이지

반나절의 한가로움을 훔치려는 것은 아니라오.

(溪分洙泗派 峰秀武夷山 活計經千卷 行藏屋數間 襟懷開霽月 談笑止狂瀾 小子求聞道 非偸半日閒)”

율곡이 스승 퇴계를 뵙자마자 올린 헌시는 많은 뜻을 내포하고 있다.

시에 나오는 수사(洙泗)는 공자의 고향인 산동성 곡부를 가로지르는 수수(洙水)와 사수(泗水)의 두 강줄기를 말하고 있음이다.

따라서 시냇물은 수사에서 나뉜 가닥이란 구절은 퇴계의 학문이 공자의 도를 이어받고 있음을 은유하는 표현이었으며 또한 무이산(武夷山)’은 중국 복건성과 강소성에 걸쳐 있는 산으로 송나라 때의 대성리학자였던 주자가 살았던 산이었다.

주자는 이곳에 무이정사(武夷精舍)를 짓고 제자를 받아들여 강학을 펼쳤었다. 중국의 명차 우롱차(烏龍茶)의 원산지이기도 한 무이산은 유네스코가 정한 세계자연유산으로 손꼽힐 만큼 중국 최고의 절경을 자랑하는 명산인데, 주자는 바로 이곳에서 주자학을 성립하였던 것이다.

특히 주자는 무이산을 사랑하여 무이구곡가(武夷九曲歌)’란 유명한 시를 남긴다. 이 시에서 구곡에 다다르니 눈앞이 확연히 트이는데/상마(桑麻)에 맺힌 이슬 평천(平川)을 바라보네/뱃사공 다시금 무릉도원 가는 길을 찾지만/이곳이 바로 인간세계의 별천지라네.’라고 노래함으로써 무이산이 자신의 이상향임을 드러내 보였던 것이다.

따라서 율곡이 서당 앞을 흐르는 냇물을 수수와 사수에 비유하고, 서당 뒤의 산을 무이산으로 비유하였던 것은 퇴계가 바로 공자와 주자의 유림을 이어받은 유가의 종지(宗旨)임을 찬양하는 내용이었던 것이다.

그뿐인가.

율곡은 자신을 거친 물결(狂瀾)’이라고 의미심장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를 통해 그 무렵 율곡이 자신을 미친 물결처럼 광분하고 있다고 스스로 자조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난데없이 찾아온 젊은 청년 율곡을 받아들인 퇴계의 마음은 어떠하였음일까.

이미 퇴계는 해동공자라고 불릴 만큼 당대 최고의 성리학자. 그러한 퇴계가 23세의 청년 율곡을 알고 있기나 하였음일까.

율곡이 훗날 9번이나 장원급제하여 구도장원이라고 불릴 만큼 천재였지만 아직은 이름 없는 백면서생. 이미 한성시에서 장원으로 급제하였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세상에 첫 얼굴을 내민 등장에 불과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퇴계는 이미 율곡에 대한 소문을 듣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훗날 퇴계가 자신의 제자였던 조목(趙穆)에게 보낸 편지에서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일전에 서울에 사는 선비 이이(李珥)가 성산으로부터 나를 찾아왔었네. 비 때문에 사흘을 머물고 떠났는데, 그 사람이 밝고, 쾌활하며, 기억하고 본 것이 많고, 자못 우리 학문에 뜻이 있으니 후생이 두려울 만하다라는 옛 성현의 말씀이 참으로 나를 속이지 않았네. 일찍이 나는 그가 아름답게 문장을 꾸미는 시문(詞華)’을 너무 좋아한다고 들었기에 이를 억제하고자 일부러 시를 짓게 하지는 않았었네.

떠나는 날 아침 눈이 내렸기에 시험 삼아 음영(吟詠)을 하게 하였더니 즉석에서 몇 수를 읊었다네. 시는 그 사람만은 못하지만 그래도 볼 만하여 지금 여기에 동봉하니, 읽은 후에 다시 돌려 보내주었으면 좋겠네. 학문이 날로 새로워지길 기원하며 이만 줄이네.”

월천 조목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퇴계는 율곡을 만나기 전에 이미 율곡이 아름답게 문장을 꾸미기를 지나치게 좋아하는 재기가 승한 청년이란 소문을 전해 듣고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그뿐인가, 청년 율곡을 만난 후에는 후생이 두려울 만하다라는 옛 성현의 말씀을 인용할 만큼 율곡을 법기(法器)로 꿰뚫어 보았음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젊은 후배들은 두려울 만하다라는 뜻의 후생가외(後生可畏)’란 말은 일찍이 공자가 학문과 덕행에서 가장 뛰어난 제자 안회를 두고 한 말. 공자는 안회를 보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고 논어의 자한편(子罕篇)’은 기록하고 있다.

젊은 후배들은 두려울 만하다. 장래에 그들이 지금의 우리들을 따르지 못하리라고 어찌 알 수 있겠는가. 그러나 40, 50세가 되어도 세상에 이름이 나지 않는다면 이를 두려워할 바가 없느니라.”

그러므로 비록 23일의 짧은 만남이었지만 퇴계가 율곡을 장래에 그들이 지금 우리를 따르지 못하리라 어찌 알 수 있겠는가(焉知來者之不知今也)’하고 인정하고 율곡을 후생가외라고 평가하였던 것은 그만큼 율곡의 재능을 평가하고 있음인 것이다.

퇴계는 율곡을 본 순간 그를 꿰뚫어 보았던 것이다.

그러한 사실은 율곡으로부터 헌시를 받자마자 퇴계가 다음과 같은 화답시를 읊은 것에서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병든 나는 문 닫고 있어 봄을 미처 못 보았는데

그대가 와서 이야기하자 내 마음은 상쾌해졌네.

이름난 선비에는 헛된 명성이 없다는 것을 비로소 알겠지만

지난날에 공경치 못한 몸가짐 심히 부끄럽구려.

좋은 곡식에는 강아지풀을 용납할 수 없고

먼지는 갈고 닦은 거울을 더럽힐 수 없네.

정에 겨워 과분한 표현의 말들은 모두 지워버리고

노력하고 공부하여 날로 새로워집시다.”

이 시를 보면 퇴계가 율곡이 이름난 선비라는 소문에 대해서 익히 전해 듣고 있었음을 잘 알 수 있으며, 율곡이 밝고 쾌활하며 기억하고 본 것이 많고 자못 유학에 뜻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퇴계는 율곡을 좋은 곡식에는 강아지풀이 있을 수 없고, 먼지는 갈고 닦은 거울을 더럽힐 수 없다(嘉穀莫容熟美 游塵不許鏡磨新)’라고 평가함으로써 율곡을 열매가 많이 달린 상스러운 벼인 가화(嘉禾)로 비유하였을 뿐 아니라 무엇이든 비출 수 있는 갈고 닦은 법경(法鏡)으로 비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나라가 낳은 최고의 철인 퇴계와 율곡의 만남은 마치 부처가 꽃을 들었을 때 오직 제자 가섭만이 미소를 지었던 것처럼 이렇듯 한순간에 서로가 서로를 알아본 이심전심의 염화미소(拈華微笑)와 같은 극적인 장면인 것이다.

그렇다면 퇴계와 율곡은 23일 동안 도대체 무슨 얘기를 나누었던가.

무슨 얘기를 나누었기에 율곡은 훗날 스승 퇴계와의 만남을 가시밭길의 거친 들에 있다가 방향을 고쳐서 옛길로 돌아오게 되었으니 이는 실로 퇴계선생의 계발에 힘입은 바이다.’라고 회고하고 있음일까.

훗날 퇴계는 명종이 어진 사람을 불러도 오지 않음을 크게 탄식하노라라는 제목을 주고 글을 쓰도록 하자 도산서당 주위의 자연을 노래한 도산 12을 써 올린다. 12곡의 잡영을 명종은 그림과 글을 쓰게 하여 병풍으로 만들어 자신이 거처하는 방에 걸어놓고 퇴계를 그리워하였다. 12곡의 시 중에 9번째 시는 특히 유명한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고인도 날 못 보고 나도 고인을 못 뵈었으니

고인을 못 뵈었어도 가던 길 앞에 있네.

가던 길 앞에 있거늘 아니 가고 어쩔꼬.”

퇴계가 쓴 시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이 시조는 비록 자신이 마음속으로 공경하는 공자와 맹자, 그리고 주자와 같은 고인(古人)들은 비록 뵈올 수는 없지만 그들이 남긴 가던 길은 앞에 있으므로 그 길을 끝까지 좇아가겠다는 학자로서의 결연한 의지를 나타내 보인 명시인데, 율곡이야말로 퇴계를 만남으로써 잠시 잃어버렸던 고인들이 가던 옛길을 발견한 셈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율곡은 무엇 때문에 학문의 길을 잃고 방황하고 있었던 것일까. 23세의 청년 율곡은 참스승 퇴계에게 무슨 고민을 털어놓고 자문을 구하였음일까.

두 사람이 서로 무슨 얘기를 나누었던가 하는 구체적인 내용은 지금까지 전혀 알려진 바가 없다. 23일의 짧은 만남 이후 두 사람은 또다시 만난 적도 없다.

두 사람은 헤어져 퇴계가 죽을 때까지 12년간 서로 편지를 나누고 있었을 뿐이었다. 주로 율곡이 편지를 써서 퇴계에게 보내면 퇴계는 답서형식으로 된 편지를 보냄으로써 총 10통의 서찰을 남기고 있다. 이 내용을 통해 간접적으로 추정해보면 율곡은 퇴계에게 우선 자신이 학문의 길을 잃고 불교에 귀의하였던 것을 고백하고 이에 대한 자문을 구하고 있었던 듯 보인다.

특히 율곡이 퇴계에게 올린 첫 번째 편지는 본문은 없어지고 별지만이 전해지고 있는데 그 내용은 자신이 한때 불교에 빠진 일에 대해서 반성하는 내용이었던 것이다.

퇴계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내용의 답신을 보낸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율곡이 불교 서적을 읽고 거기에 꽤 중독되었다.’라고 비난하고 있지만 오히려 그 실상을 감추려 하지 않고 그 잘못을 충분히 인정하고 있으니, 도에 함께 나갈 만하다고 아니할 수 있겠는가.”

또한 퇴계는 상심해하는 율곡을 따뜻하게 격려한다.

이 내용은 율곡 자신이 지은 쇄언()’에 비교적 상세히 나오고 있다.

쇄언이란 자질구레한 말들이란 뜻으로 율곡이 겸양하게 쓴 잡기 중의 하나이다. 글의 내용은 그가 23살의 약관 시절에 예안에 복거하고 있는 퇴계를 방문하여 여러 가지 학문에 관해 토론한 것들과 작별 후 강릉으로 간 뒤 서로 서신을 통해 유학을 논한 것들이 수록되어 있어 퇴계와 율곡 사이의 학문적 친분관계를 이해하는 좋은 자료인 것이다.

쇄언에 보이는 퇴계의 격려내용을 율곡 스스로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나는 예안에서 이틀을 유숙하고 작별을 드렸다. 강릉으로 돌아가 있을 당시 퇴계선생은 나에게 편지와 시를 보내주셨는데, 그 편지에 이르기를 다음과 같이 하셨다.

세상에 영명한 재질이 어찌 한정이 있을까마는 다만 옛 학문에 마음 두기를 즐겨하지 않음이 도도한 물결같이 모두가 그렇습니다. 그중에 스스로 이러한 세속에서 벗어난 자가 있어도 혹 재질이 미치지 못하거나 나이가 이미 늙거나 합니다. 그런데 그대는 높은 재주와 약관의 나이로 바른 길을 향하여 출발하였으니, 후일에 성취할 바를 어찌 측량할 수 있으리오. 바라건대 오직 천만 번 원대(遠大)해지기를 스스로 기약하고 소득(小得:문사나 부귀와 같은 도학에서 벗어난 공리적인 헛된 명성)에 스스로 자족하지 말아 주십시오.’”

그리고나서 율곡은 퇴계로부터 받은 다음과 같은 시 두 편을 전재하고 있다.

고래로 이 학문은 세상이 놀라고 의심했는데

()를 노려 경() 궁리 도는 더욱 멀어졌네.

, 그대 홀로 능히 추서(墜緖)를 찾아

말을 듣고 새로운 지식을 찾으려 함이오(從來此學世驚疑 射利窮經道益離 感子獨能尋墜緖 令人聞語發新知).”

퇴계가 율곡에게 보낸 첫 번째 시의 내용은 지금 세상이 혼탁하여 모든 사람들이 저마다 이익만을 탐하고 올바른 도에는 더욱 멀어지고 있지만 오직 그대만이 추서(墜緖:땅에 떨어진 도의 실마리)를 찾아 말을 듣고 온고지신(溫故知新), 즉 옛길을 찾아 새로운 지식을 찾는 데 몰두하고 있음이 참으로 가상하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음인 것이다.

퇴계가 율곡에게 보낸 두 번째 편지는 다음과 같다.

시골로 돌아와 오래할 바를 몰라 탄식하다가

고요한 가운데 틈새로 비치는 빛 겨우 엿보았소.

권하노니 그대는 제때에 바른 길 추구하고

궁향에 들었던 일 슬퍼하지 말아주오(歸來自歎久迷方 靜處才窺隙光 勸子及時追正軌 莫嗟行脚入窮鄕).”

퇴계가 율곡에게 준 이 시는 23일의 짧은 만남 동안 두 사람이 나눈 대화의 주된 내용이 무엇이었던가를 강렬하게 암시해주고 있다.

궁향(窮鄕).

두 번째 시 속에 나오는 궁향은 원래 궁벽한 시골을 가리키나 여기서는 불교를 말함이었던 것이다.

이 용어는 사기의 조세가(趙世家)’에 나오는 궁향은 괴이한 것이 많고 곡학은 말이 많다(窮鄕多異曲學多辨)’라는 구절에서 빌려온 것.

그러므로 궁향에 들었던 일을 슬퍼하지 말아주오.’라는 마지막 문장의 뜻은 불교에 심취하였던 과거를 너무 상심해하지 말라는 뜻이었던 것이다.

실제로 율곡은 19세 된 해 봄 3월에 홀연히 종적을 감추어 금강산으로 입산하였다. 이듬해 하산하여 강릉의 외갓집으로 돌아왔으니 그가 불교에 입문하였던 것은 이처럼 1년 반에 가까운 오랜 기간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1년 반 동안의 불교입문 전력은 율곡 일생에 있어 두고두고 무거운 짐이 되었다.

조선조의 국시(國是)는 불교를 억압하고 유교를 숭상하던 배불숭유(排佛崇儒)정책. 특히 율곡이 입신양명 중이었던 명종조에는 수렴청정하던 문정왕후와 보우와의 유착으로 불교에 대한 비난 여론이 비등하던 무렵이었다.

보우(普雨)는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한학을 공부하다가 15세를 전후하여 금강산 장안사(長安寺)로 출가한 당대 최고의 명승이었다. 그가 처음 금강산에서 수륙대전을 올릴 때에는 여러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릴 정도로 법명이 널리 알려진 승려였다. 그는 문정왕후의 비호에 의해서 승과(僧科)를 다시 세워 승려들에게 도첩(度牒)을 주고 자신이 주지로 있는 봉은사를 선교양종의 종찰(宗刹)로 삼았다.

이 승과를 통해 서산대사와 사명당과 같은 고승들이 스님이 되는 등 수많은 업적을 거두었으나 보우는 요망한 이물(異物)’로 지탄받는 대상이 되었으며, 실제로 보우는 요승(妖僧)’으로까지 불리며 배척되었다.

훗날 문정왕후가 죽자 곧 잡혀서 제주도로 유배되어 그곳의 목사 변협(邊協)에 의해서 피살되는 비극을 맞았으나 보우는 지금 내가 없으면 후세에 불법이 영원히 끊겨질 것이다.’라는 사명감과 신념을 가지고 불법을 보호하고 종단을 소생시키는 일에 목숨을 걸었던 조선 제일의 순교승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 무렵 선비들은 지존(至尊)인 문정왕후 대신 보우에게 반감을 갖게 되어 역적 보우를 죽이라는 상소문이 75()에 이를 만큼 탄핵의 집중대상이었다. 이러할 때 율곡이 한때 불교에 입문하였던 것은 최고의 약점이 아닐 수 없던 것이다.

명종실록에 의하면 율곡이 생원시에 합격하고 알성과에 응시하고자 하였을 때 성균관에서 공부하던 유생들이 작당하여 율곡을 묘정(廟廷)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다고 한다. 이때 유생들은 율곡에게 다음과 같이 비난한다.

너는 한때 이단에 빠졌던 자이다. 그런 네가 어찌 공자를 위시해 여러 성인들을 모셔 놓은 이곳에 감히 발을 들여놓을 수 있겠느냐.”

과거로 입신하려는 율곡에게 유생들의 이러한 배척은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으나 율곡은 시종 표정이 변하지 않은 채 의연하게 행동하였다고 실록은 전하고 있을 정도이다.

율곡이 금강산에 입산하였던 1년 반 동안 삭발을 하고 정식 비구승이 되었다는 소문과 다만 유발거사로 불교에 심취하였을 뿐이라는 소문도 평생 동안 율곡을 따라다닌 무거운 짐이었다.

이에 대해 율곡 자신은 단 한마디의 변명도 하지 않았다.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금강산에 있을 때 율곡이 삭발을 하였는가, 아니면 유발거사로 지냈을 뿐인가 하고 물었을 때 율곡은 다만 이렇게 대답하였을 뿐이었다.

이미 입산하였으니 비록 외향을 변화시키지 않았다 하더라도 마음이 그에 빠졌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그러니 너의 질문에 대답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율곡은 1년 반에 걸친 금강산의 운수행각 중 실제로 삭발을 하고 승복을 입지는 않았다는 몇 가지의 증거는 있다.

한때 율곡에게 글을 가르쳤던 어숙권(魚叔權)의 목격담이 그 중 하나인데, 율곡이 금강산에서 하산한 이튿날 옛 스승이었던 어숙권을 찾아 인사를 올렸다고 한다.

이때 어숙권은 율곡이 머리 깎은 중이 되었다는 소문을 전해 듣고 있었으므로 그 사실을 확인하고자 직접 자신의 손으로 억지로 관을 벗겨 율곡의 머리를 보았다고 한다. 관을 벗기니 길게 늘어진 머리가 몇 척이나 되어 어숙권이 손뼉을 치며 크게 기뻐하였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또 하산한 후 강릉의 외가에 있다가 서울로 올라가 많은 친구들을 만났는데, 이때 율곡은 머리가 너무 길어서 선 채로 머리를 빗었다는 일화도 전해지고 있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율곡의 친지들이나 문인들은 율곡의 금강산행이 일시적으로 불교에 심취하였던 잠행(潛行)이었을 뿐이라고 두둔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율곡에 대한 비난을 어떻게 해서든 누그러뜨리려는 충정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1년 반의 금강산행에서 율곡이 과연 머리를 깎았는지 안 깎았는지는 율곡 자신의 말대로 마음이(불교에) 크게 빠졌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변명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훗날 율곡은 자신이 한때 불교에 크게 빠졌던 사실을 크게 뉘우치고 있었다.

율곡이 30세 되던 해 8월 보우를 논척하는 논요승보우소(論妖僧普雨疏)’란 상소문을 제출한 행동은 자신의 전력을 지워 버리려는 보상심리에서 쓰여진 강경책일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엎드려 생각하오니 벼슬에는 각각으로 그 직책이 있습니다만 정성이 마음에 사무치게 되오면 맡은 바 직분에만 구애될 수 없사오며, 의견을 말씀드리는 것이 반드시 그 때가 있사오니 해로움이 머리에 절박하게 되면 때만을 기다리고 기다릴 수는 없는 것이옵니다.’로 시작되는 상소문에서 율곡은 자신이 예조좌랑으로서 간언의 책임을 맡지는 않았으나 전하께오서 보우를 죄가 없다고 옹호하심으로써많은 중들이 말하기를 전하께오서는 우리 도를 높이시니 유생들이 간하고 다툰다고 해서 이간될 수는 없다고 할 것이니, 이로 말미암아 이단(異端)의 무리들은 뜻을 얻고, 선비의 기운은 더욱 꺾일 것입니다.’라고 간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한때 이단이었던 불교에 심취하였으면서도 이처럼 불교를 이단의 무리들로 매도한 율곡. 이러한 율곡의 태도를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또한 상소문의 마지막 구절은 다음과 같이 이어지고 있다.

오호라. 국가에 참혹한 화가 오늘날보다도 더욱 심한 시기는 없었으며, 백성들의 여리고 쇠약함이 오늘보다 더한 때가 없었습니다.(중략)시전비유하건대 저 배의 흐름이여, 미칠 바를 알지 못하는 도다. 마음에 근심함이여, 옷을 입은 채로 잘 겨를도 없도다.’ 하였으니, 신의 근심이 진실로 이와 같사옵니다. 신이 본래 지극히 어리석고 고루한 자질로 외람되게 나라를 구경하고 왕께 손 노릇하는 관국빈왕지렬(觀國賓王之列)’에 채워졌더니 다행히 전하의 버리지 않으시는 은혜를 입어서 뽑아 장원 자리에 두시었으니 주상전하의 은혜가 깊고도 무거워서 갚을 바를 알지 못하다가 눈으로 나라를 병들게 하는 기미를 보고 마음에 감격한 정성이 간절하여 감히 침묵을 지키지 못하고 이미 미치고 어두운 말씀을 올렸사오니 직분을 뛰어넘은 죄를 엎드려 청하옵니다.”

물론 율곡은 이 상소문에서 한때 자신이 심취하였던 불교의 교리에 대한 비난은 자제하고 있다. 어디까지나 이 상소는 요승 보우의 악행에 대한 논척(論斥)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불교를 이단이라고 분명히 못 박음으로써 한때 자신이 이단에 빠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역설적으로 맹비난을 퍼붓고 있는 것이다.

율곡의 이러한 태도는 율곡이 가진 남다른 엘리트의식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점은 퇴계와 율곡 두 거인의 차이점이기도 하였다.

만약 퇴계가 율곡처럼 한때 궁향(窮鄕)에 들었더라면 설혹 불교의 폐단을 알고 있다 해도 퇴계는 불교를 이단이라고 못 박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쨌든 퇴계가 율곡에게 권하노니 그대는 제때에 바른 길을 추구하고 궁향에 들었던 일 슬퍼하지 말아 주오.’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낸 것을 미뤄보면 율곡은 그 무렵 자신이 불교에 심취했던 것을 슬퍼하고 그러한 고민을 사흘 동안 퇴계에게 모두 털어놓은 것처럼 보인다.

율곡이 이처럼 한때 불교에 심취하였던 것은 아버지의 영향 때문이기도 하였다. 율곡의 아버지 이원수는 불경을 좋아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율곡의 아버지가 벼슬에 관심이 없고 유유자적한 청빈생활을 즐겨하였던 것은 이처럼 불교의 영향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율곡은 불교와 많은 인연을 맺고 있었는데, 그의 호가 율곡, 밤나무계곡이라고 불린 것도 본가가 있는 파주의 노추산에 밤나무가 많다고 해서 율곡리에서 불리는 데서 따온 것이지만 노추산에 밤나무가 많게 된 것은 율곡과 한 스님과 맺은 불교적 인연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 일화는 다음과 같다.

율곡이 다섯 살 무렵, 외할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강릉에서 성장하고 있던 율곡에게 어느 날 스님 한 사람이 찾아온다. 이집 저집 돌아다니면서 탁발을 하고 있던 스님에게 외할머니 이씨는 얼른 광으로 가서 쌀 한 되를 퍼서 스님에게 시주하였다고 한다.

복 받으십시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스님이 합장하고 인사를 할 때 현룡이 할머니를 부르며 뛰어왔다. 현룡은 율곡의 아명. 뒤로 돌아서려던 스님은 그 소리를 듣고 현룡을 쳐다보았다. 한참을 쳐다보던 스님은 할머니에게 말하였다.

참 총명해 보이는 아이로군요.”

스님의 말에 외할머니는 기분이 좋아서 웃으며 대답하였다.

네 아주 똑똑한 아이랍니다.”

그러나 스님은 잠시 머뭇거리다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런데 우리나라를 위해서는 꼭 살아있어야 하는데, 쯧쯧.”

혀를 차는 스님의 말에 외할머니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물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신가요.”

그러자 스님은 다시 합장을 하며 말하였다.

저 아이는 분명 영특한 아이지만 하늘이 가만히 놓아두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스님은 말을 마치고 벼랑을 꾸며 훌쩍 길을 나섰다. 그러나 그 말의 뜻이 너무 궁금하였던 외할머니는 스님을 차마 보낼 수가 없었다. 외할머니는 곧 스님의 뒤를 쫓아갔다. 그러나 스님의 행방은 묘연하였다.

마을 동구 밖에서 간신히 스님을 따라잡을 수 있었던 외할머니는 스님에게 다가가 말하였다.

스님, 저희 집으로 가셔서 자세히 말씀해 주십시오.”

스님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선선히 대답하였다.

알겠습니다, 가시지요.”

두 사람은 오죽헌으로 돌아왔으나 스님은 한참 동안을 마당에서 놀고 있는 현룡을 쳐다볼 뿐 말이 없었다.

말씀하여 주십시오, 스님. 저 아이를 하늘이 가만히 놓아둘까 그것이 걱정되다니요.”

외할머니가 채근하자 스님이 무거운 입을 떼었다.

저 아이가 지나치게 똑똑하여 하늘의 천기를 해칠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액을 막을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마침 소문을 전해들은 현룡의 아버지 이원수도 이 자리에 참석해 있었다.

저 아이를 위해 밤나무 천 그루를 심어야 합니다.”

밤나무 천 그루라는 말에 기가 막힌 외할머니가 한숨을 쉬며 말하였다.

밤나무 천 그루를 한꺼번에 어떻게 구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것도 다른 사람이 아닌 저 아이의 아버지가 혼자서 심어야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아닌 아버지 혼자서 밤나무를 심어야한다는 스님의 말에 이원수가 따지듯 물어 말하였다.

아니, 무슨 이유로 밤나무 천 그루를 심어야 한단 말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저 아이의 재능을 탐낸 하늘이 호랑이를 보내어 잡아갈 것입니다.”

하필이면 밤나무여야 하는 연유는 무엇입니까.”

그러자 스님은 목탁을 두드리며 말하였다.

옛날 원효(元曉)대사께오서는 압량(押梁:지금의 경산군)의 남부 불지촌(佛地村)의 북쪽에 있는 율곡(栗谷)의 사라수(娑羅樹) 아래서 태어났습니다. 대사의 어머니께서 원효를 잉태, 만삭이 되어 마침내 그 율곡 골짜기의 밤나무 아래를 지내다가 홀로 해산을 하셨습니다. 창황 중에 집으로 돌아갈 수 없고 해서 남편의 옷을 나무에 걸어두고 그 아래서 해산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밤나무를 사라수라고 불렀습니다. 사라수는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셨을 때 부처님을 편안하게 모셨던 상서로운 나무로 이 아이를 보호해주기 위해서는 원효대사의 가피(加被)가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마침내 할 말을 마친 스님이 합장을 하고 사라지자 외할머니는 사위에게 말하였다. “여보게, 어서 저 스님이 시키는 대로 하게나. 저 스님은 보통 분이 아닌 것 같으네.”

장모의 말을 듣고 이원수는 하인을 불러 모아 밤나무 묘목 천 그루를 구해오도록 하였다. 하인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여기저기 돌아다녔으나 밤나무 천 그루를 일시에 구하는 것은 어려운 것이었다.

간신히 구한 것은 밤나무 오백 그루. 나머지는 할 수 없이 밤톨로 심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원수는 오백 그루의 묘목과 오백 개의 밤톨을 가지고 하인들과 함께 파주의 노추산으로 갔다. 스님의 말은 그 누구의 도움 없이 아버지 혼자서 이 모든 나무를 심어야 한다는 것이었으므로 이원수는 혼자서 땅을 파고, 혼자서 밤나무를 심기 시작하였다.

전해오는 야사에 의하면 이원수는 꼬박 사흘 낮 사흘 밤을 쉬지 않고 오백 그루의 밤나무와 오백 개의 밤톨을 혼자서 심었다고 한다. 이원수는 기진맥진하여 쓰러졌으나 노추산은 이로부터 원효가 태어난 밤나무계곡, 율곡(栗谷)’으로 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1년 후.

다시 강릉의 오죽헌 집에 탁발승 하나가 찾아들었다. 외할머니는 정성껏 담은 쌀 한 되를 가져다 바랑에 넣어다 주는 순간 그 스님이 1년 전에 찾아왔던 바로 그 스님이란 사실을 알아볼 수 있었다.

아니, 스님께서는 작년에 오셨던 그 스님이 아니신가요.”

그래, 밤나무는 모두 심으셨는가요.”

스님의 말씀대로 더도 덜도 아닌 꼭 천 그루의 밤나무를 심었습니다. 지금 잘 자라고 있습니다.”

그럼 이 아이의 아버지는 어디에 있습니까.”

밤나무를 심은 파주의 노추산에 있을 것입니다.”

스님은 그 즉시 파주의 노추산을 찾아간다. 노추산에서는 이원수가 땀을 흘리며 밤나무를 가꾸고 있었다. 인기척을 느낀 이원수가 스님을 쳐다본 순간 스님은 다짜고짜로 밤나무의 숫자를 세어보기 시작하였다.

한 그루, 두 그루,.”

스님은 지팡이로 밤나무를 일일이 확인해 나가면서 숫자를 헤아리고 있었다.

“998,999,.”

하나하나 밤나무의 숫자를 헤아리던 스님의 지팡이는 마침내 땅위에서 멎어섰다.

한 그루가 모자라는군요.”

한 그루가 모자란다는 말에 이원수는 깜짝 놀라며 다시 세어보았다. 그러나 과연 스님의 말대로 꼭 한 그루가 모자랐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분명히 오백 그루의 밤나무 묘목과 오백 개의 밤톨을 심었는데, 한 그루가 부족하다니.

그러자 스님이 웃음을 지으면서 말하였다.

이제 당신의 아이는 하늘의 것이요. 곧 하늘이 당신의 아이를 데리고 갈 것이요.”

그때였다. 낙심하던 이원수는 땅에 떨어진 낙엽을 헤치다 이제 막 땅을 뚫고 솟아 나오는 새싹을 발견하였던 것이다.

여기도 있습니다.”

이원수는 소리쳐 말하였다.

분명히 밤나무 새싹입니다.”

스님은 두 손을 모아 합장하며 말하였다.

내가 졌습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순간 스님은 호랑이로 변하여 울부짖으며 하늘을 박차고 사라졌다고 하는데, 어쨌든 이로부터 파주의 노추산은 밤나무가 많은 율곡리로 불리게 되었던 것이다.

물론 이러한 이야기는 한갓 야담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율곡의 호는 이러한 야담의 본거지인 율곡리에서 따온 것이었으며, 실제로 원효가 태어난 곳이 율곡의 사라수아래였다고 삼국유사가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보면 율곡이란 이름도 이처럼 원효와 깊은 인연을 가진 불교적 숙연에서 비롯된 것임이 분명한 것이다.

율곡의 호가 이처럼 원효대사가 태어난 율곡의 사라수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율곡은 태어났을 때부터 불교와 속세의 인연을 맺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율곡은 어렸을 때부터 불경을 읽기 좋아했다고 기록은 전하고 있다. 율곡이 가장 좋아했던 경전은 능엄경(楞嚴經)’.

능엄경은 한국불교의 기본경전 중의 하나로서 깨달음의 본성이 무엇인가 밝히고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밝힌 소화엄경(小華嚴經)’이라고 불리면서 널리 독송되었던 경전 중의 하나였다.

훗날 율곡의 문인이었던 김장생(金長生)에게 글을 배웠던 우암 송시열은 율곡의 행장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을 정도였다.

가만히 생각하건대 문성공 이이는 타고난 재질이 매우 높아 5, 6세 때 이미 학문하는 방법을 알았습니다. 또한 10세도 못 미쳐서 각종 유교 경전을 통달하였습니다. 그리고 성인의 도가 다만 이것뿐인가.’라고 한탄하면서 불교와 도교 서적도 널리 읽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좋아하였던 것은 능엄경한 책이었습니다. 대개 그 내용은 안으로 마음과 본성을 말한 것이 매우 정미(精微)하고 밖으로는 하늘과 땅의 치수가 광활한 것을 말한 내용인데, 이이는 타고난 자질이 아니라면 어린 나이에 어떻게 그 내용을 능히 알 수 있었으며, 또한 어떻게 능히 그 맛을 알았겠습니까.”

율곡의 부친이 평소 불경을 탐독하였다는 사실은 그대로 율곡에게 유전되어 율곡은 이처럼 어렸을 때부터 능엄경을 애독하였으며, 이를 통해 깨달음에 이르는 묘심(妙心)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음을 잘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불교적 관심은 율곡의 성장과 더불어 자연스럽게 확산된다.

따라서 율곡은 어려서부터 산사를 자주 찾아다니면서 선()을 통해 한순간에 진리를 깨우칠 수 있다는 돈오(頓悟)적 수행법에 점차 매력을 느끼기 시작하였던 것은 매우 당연한 일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율곡이 한때 봉은사(奉恩寺:지금 서울 강남에 있는 절)에 머물고 있으면서 불문에 귀의할 것을 결심하는 장면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율곡의 제자였던 김장생은 행장기에서 이 무렵의 율곡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하루는 봉은사에 가서 불교서적을 보고 그 생사의 말씀에 깊이 감명을 받았으며, 또 그 학문이 간편하고 고묘(高妙)한 점이 좋아서 세상을 떠나 이를 구할 것을 시도하려고 하였다.”

율곡의 이러한 불교적 관심은 마침내 19세 되던 해에야 결실을 맺게 된다.

그 무렵 율곡은 사랑하는 어머니 신사임당이 죽자 3년 동안 심상하였으며, 마침내 관례를 올리고 성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어머니의 죽음은 율곡에게 견딜 수 없는 인생의 무게였으며 왜 사는가. 나고 죽는 생사는 어디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며, 어릴 때 능엄경에서 읽었던 만법이 여래장묘진여성(如來藏妙眞如性)이라 하여 마음은 영원불멸이라는 진리는 과연 무엇인가.’ 하는 철학적 사색에 깊이 침잠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율곡은 마침내 금강산에 입산하기를 결심하게 된다.

이때 율곡은 자신의 심정을 여러 친구들에게 보낸 작별의 편지에서 대충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학문은 배운다고 능할 수는 없어도 기()는 길러 이룰 수 있네. 이와 기(理氣)는 사람마다 함께 가진 것으로 기를 잘 기르면 마음의 부림을 받지만 제대로 기르지 못한다면 마음이 기의 부림을 받게 되네. 기가 마음의 부림을 받게 되면 몸에 주재하는 바가 있어 성현도 가히 기약할 수 있으나 마음이 기의 부림을 받게 되면 희······욕의 7정에 통제가 없어 우매하고 황망하게 됨을 면치 못할 것이니와 옛날 사람으로 기를 잘 기른 이는 맹자일세. 공자께서 슬기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어진 이는 산을 좋아한다.’라고 말씀하셨는데, 산과 물을 좋아한다는 것은 그 흘러가는 것이나 그 우뚝함 만을 취할 것이 아니라 움직이고 조용한 가운데에 본체를 배워야 할 것이네. 어진 사람과 슬기로운 사람이 이른바 기를 기르는데 산수를 버리고 도대체 어디서 이를 구하겠는가.”

이 편지에서 율곡이 지적한 ()’란 바로 맹자가 그 기됨이 지극히 크고도 굳세어 길러 해로움이 없다면 하늘과 땅에 가득하게 된다(其爲氣也 至大至剛 以直養而無害則 塞于天地之間)’고 말하였던 호연지기(浩然之氣)’인 것이다.

그러나 율곡이 금강산에 입산하였던 직접적인 동기는 맹자가 말하였던 호연지기, 떳떳한 기상을 키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보다 구체적인 이유가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친구들에게 호연지기를 기르기 위해서 금강산으로 들어간다고 편지를 썼던 것은 명목상의 이유였을 뿐 실제로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서모와 큰형과의 사이가 좋지 않아서 집안에 불화가 끊이지 않자 끝내 화합하지 못하면 차라리 아무도 없는 곳에서 죽는 것이 낫다.’라는 편지를 쓰고 강릉의 외갓집으로 현실을 도피하였던 율곡의 고민에서 엿볼 수 있듯, 그것이 직접적인 이유였을 것이다.

이때 율곡은 한 스님을 만나게 된다.

그 스님의 이름은 알려진 바 없으나 그 스님은 율곡에게 다음과 같이 유혹하였다고 한다.

죽은 사람의 영혼을 위해서 복을 비는 데에는 불교를 당할 도가 없습니다.”

천도(遷度).

죽은 사람의 영혼을 극락으로 인도하는 길은 오직 불교밖에 없다는 스님의 말을 들은 순간 율곡의 마음은 크게 움직인다.

명종실록에는 이 장면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이이는 어려서부터 이미 문장으로 나 있었고, 일찍 모친상을 만나 장례를 치르는데 정성이 지극하였다. 그 부친의 첩이 그를 사랑하지 않았고, 또 부친은 일찍부터 경전을 좋아하였다. 이이의 나이 16, 17세 되던 때 어떤 사람이 찾아와 죽은 사람의 영혼을 위해서는 복을 빈다는 이야기로 그를 유혹하였다. 그는 이 말을 듣고 가족에게 알리지 않고 의복을 정돈하여 그대로 금강산으로 숨어 들어갔다.”

그 연유야 어떻든 호연지기를 기르기 위해서든, 마음의 영혼불멸성을 깨닫기 위해서든, 가정의 불화에서 초연하기 위해서든, 죽은 어머니의 천도를 위해서든, 율곡은 마침내 19세 되던 해 3, 그 누구에게도 다 알리지 않고 홀연히 금강산으로 출가를 단행한다.

이때 지은 출가 시 하나가 오늘날 남아 전하고 있다. ‘동문을 나서면서(出東門)’라는 제목의 이 출가 시에서 율곡은 자신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하늘과 땅은 누가 열었으며,

해와 달은 또 누가 갈고 씻었는가.

산과 냇물은 이미 무르녹아 어우러져 있고

추위와 더위는 다시 서로 또 엇갈리는구나.

우리 인간은 만물 가운데 있어

지식이 제일 많도다.

어찌 조롱박 같은 신세가 되어

쓸쓸히 한 곳에만 매어 있겠는가.

온 나라와 지방 사이에 어디가 막혀 마음껏 놀지 못할까.

봄빛 무르익은 삼천리 밖으로

지팡이 짚고 나 장차 떠나려 한다.

나를 따를 자 누구일까.

저녁나절을 부질없이 서서 기다리네.”

시 속에 나오는 어찌 조롱박과 같은 신세가 되어 쓸쓸히 한 곳에만 매어 있겠는가(胡爲類匏瓜 戚戚迷處所)’란 구절은 바로 공자가 말하였던 내 어찌 조롱박인가. 한 곳에만 매어 있어 먹히지 아니하는 그러한 식물과 같을 수 있겠는가.’라는 구절을 그대로 인용한 문장. 포과, 즉 조롱박은 별로 쓸모없는 물건이므로 율곡 자신은 쓸쓸히 한 곳에만 매어 달린 포과처럼 쓸모없는 존재가 될 수 없다는 강력한 의지를 암시하고 있음인 것이다.

율곡이 1년 반 동안의 금강산 운수 행각 중 무엇을 하였는가 하는 기록은 오늘날 그 어디에도 남아 전하지 않고 있다. 율곡이 훗날 이때의 기록을 부끄럽게 여겨 그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않았으므로 자연 공백 기간으로 남아 있을 뿐인데, 다행히 이때 율곡이 지은 시들이 20여 편 정도 남아 전하고 있다.

따라서 이 시들을 면밀히 살펴보면 대충 율곡의 산중일기(山中日記)’를 미뤄 짐작할 수 있음인 것이다.

금강산으로 가는 도중에도 율곡은 또 다른 시를 한 수 더 짓는다.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밥 짓는 연기 나고 한낮의 닭은 우는데/유인이 지팡이 짚고 시냇물에 다다랐다.

산 집이라 사월에도 봄이 다 가지 않아/울타리 둘러싼 나물꽃이 한창 푸르고 붉다.

사잇길엔 뽕 따는 여인 때로 있고,/남쪽 들엔 들밥 나오는 걸 자주 보겠네.

석양의 부슬비에 외진 마을 찾아들자,/목동 피리 나무꾼 노래가 장단 맞춰 일어나네.

사립문 두드려 주인을 불러내니,/늙은이 나를 보다 반갑게 맞이하는 듯,

소나무 평상 대자리가 너무나 말끔해서,/비단 따위 인간 사치 알 바 아니었네.”

시에 나오는 유인(幽人)’이란 말은 세상과 인연을 끊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으로 여기서는 바로 율곡 자신을 가리키고 있음인 것이다.

금강산으로 입산하는 도중에 지은 율곡의 시는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늙은이 하는 말이, 지나온 세상 햇수조차 기억 못 해/편하고 괴로움과 슬프고 기쁨을 다 맛보았다오.

인정은 얄팍한 매미 날개 무상도 하여라,/ 말하고 웃는 그 속에도 칼날이 감춰 있더군.

나는 이제 옹졸한 생활로 여생을 보전하노니,/본래 칭찬이 없는데 누가 헐뜯을 것인가.

그대 만난 김에 세상일들 묻고 싶노니,/시국 운수가 몇 번이나 통했다 막혔다 했는고.

부디 이름 갖고 속세에 퍼뜨리지 말기를,/나는 지금 숨어 사는 사람이라오.

그리고는, 닭 잡고 기장밥하여 나를 배불리고,/함께 빈 집에 누워 자면서 성리(性理)를 이야기하였네.

기이한 말과 험한 이야기 가끔 상도에 벗어나,/장자(莊子), 열자(列子)쯤은 개미처럼 내려다 보기도,

이른 아침 잠 깨어 보니 사람은 간데없고,/단지 빈 뜰에 벗어둔 신만 보이네.”

피의자(被衣子), ‘세상을 피해 숨어 사는 사람’. 금강산으로 들어가는 도중에 지은 이 시를 통해 율곡은 자신의 입장을 세상과 인연을 끊은 피의자로 노래하고 있음인 것이다.

금강산에서 율곡은 자신을 의암(義菴)’이라고 불렀다. 그런 의미에서 의암은 율곡의 불교적 법명이었다.

또한 율곡의 화두는 만법귀일 일귀하처(萬法歸一 一歸何處)’였다.‘ 모든 것은 하나로 돌아간다. 그런데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라는 것이 율곡의 화두였던 것이다.

원래 이 화두는 불가에서 최고의 선승이었던 조주(趙洲)의 유명한 선화에서 비롯되었다.

어느 날 학승 하나가 고불(古佛) 조주를 찾아와 다음과 같이 물었다.

모든 것은 하나로 돌아갑니다. 그러면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갑니까.”

그러자 조주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내가 청주에 있을 때 한 벌의 마의(麻衣)를 만들었다. 그런데 그 옷의 무게가 자그마치 7근이나 되었어.” 제자의 질문에 조주가 대답한 청주는 오늘날 산동성에 있는 조주의 고향이었다. 7근은 4.2쯤 되는 무게로 옷 한 벌의 무게가 4이 넘는다면 이는 보통 무거운 옷이 아닌 것이다. 이 화두는 1700개가 넘는 화두 중에서도 가장 까다롭고 난해한 공안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화두는 또 다른 조주의 선화와 유사하다.

어떤 중이 조주에게 물었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기를 스님께서는 그 유명한 남천(南泉) 스님을 여러 해 동안 시봉하였다 하는데, 그것이 사실입니까.”

그러자 조주가 대답하였다.

진주에서는 큰 무(蘿富)를 캘 수가 있다.”

조주가 말하였던 진주는 하북성의 정정(正定)의 땅을 가리키는 말로 예로부터 큰 무가 나오는 명산지로 알려져 있다. 여기서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조주가 대답하였던 청주에서 만든 7근이 넘는 베옷이나 진주에서 나는 큰 무와 같은 말은 정답이 아니고 그 어떤 언구에도 얽매이지 말고 오직 모든 것은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러하면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라는 의단(疑團)에 집중하라는 가르침이었던 것이다.

원래 화두는 본인 스스로 결택(決擇)하지 않고 스승이 제자에게 정해주는 것으로 되어 있다.

율곡이 금강산에 들어갈 때 명종실록의 기록처럼 어떤 중이 죽은 사람의 영혼을 위해서 복을 빈다는 이야기로 그를 유혹하였고또 그 중이 율곡을 데리고 함께 입산하였으므로 율곡에게 만법귀일(萬法歸一)’의 화두를 점지해준 사람은 아마도 율곡을 불교에 귀의케 하였던 이름모를 사승(師僧)이었을 것이다.

어쨌든 율곡은 금강산에서 계정(戒定)에 정진할 무렵 바로 이 난해한 화두를 붙들고 깊은 선정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모든 것이 하나로 돌아간다. 저 나무도, 저 구름도, 저 산도, 저 물도 하나로 돌아간다. 태어남도, 죽음도, 애욕도, 번뇌도 하나로 돌아간다. 그러하면 그 하나는 어디로 가는가. 모든 것이 하나로 돌아간다. 저 꽃도, 저 계곡도, 저 바람도, 저 나비도, 저 새도, 짐승도, 하찮은 미물인 벌레도 모두 하나로 돌아간다. 추위도, 더위도, 향기로운 냄새도, 악취도, 시고 매운맛도, 눈에 보이는 형상도, 귀에 들려오는 그 모든 소리도 하나로 돌아간다. 하나로 돌아간다. 명예도, 인간의 사치도, 칭찬도, 권세도, 임금도, 신하도 하나로 돌아간다. 사랑도, 미움도, 증오도, 원한도, 싫어하고 좋아하는 것도 모두 하나로 돌아간다. 그러하면 이 하나는 도대체 어디로 돌아가고 있는 것일까.

금강산을 이곳저곳 탐승(探勝)하면서도 율곡은 자나 깨나 밥을 먹으나 산길을 가나 항상 이 화두에 매어 달리고 있었다.

단발령에 올라 12000봉우리의 기기묘묘한 절경에 심취하면서도 율곡은 이 화두에 집중하고 있었고 마침내 금강산 최고봉인 비로봉에 오르면서도 율곡은 이 화두를 놓지 않았다.

율곡을 인도해 함께 올라가던 스님이 비로봉이 위험할 것이라고 등정을 만류하였지만 율곡은 하루 낮과 밤을 꼬박 새워 이른 새벽 동틀 무렵에 비로봉 정상에 다다라 그 풍경에 넋을 잃고 취해서 시를 읊기도 하였다.

동쪽에서는 붉은 아침 해가 솟아오르고 있는데, 서쪽바위 위에는 아직 달이 걸려 있는 그 장관을 바라보면서도 율곡은 만법귀일의 화두를 놓지 않았던 듯 비로봉에서 지은 시 중에 마음을 비우면 만사가 하나이고 기가 웅대하면 우주도 좁도다(心虛萬事一 氣大六合窄).’라는 구절이 있는 것을 보면 여러 스님들로부터 살아있는 부처로 불릴 만큼 선정의 세계에 깊이 빠져들었던 율곡의 모습을 미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시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율곡이 모든 것이 하나로 돌아가는 것(萬法歸一)은 바로 마음을 비우면 만사가 하나로 돌아가는 것(心虛萬事一)’과 같은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는 점이다. 즉 마음을 비우면 만법이 돌아가는 구경처(究竟處)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 율곡의 깨달음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율곡은 만법귀일의 화두를 타파하였음일까. 화두를 타파하여 만법이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 하나가 돌아가는 궁극처(窮極處)를 마침내 견성(見性)하였음일까.

일찍이 달마가 말하였다.

모든 지식을 버려야만 자성(自性:인간의 본마음)을 볼 수가 있다.”

그러나 율곡은 달마가 말하였던 대로 지식을 버리기에는 지나치게 머리가 좋은 천재. 따라서 율곡의 깨달음은 대오(大悟)가 아닌 해오(解悟)일 가능성이 높다.

대오(大悟)와 해오(解悟)는 둘 다 진리를 깨달았다.’는 뜻이지만 그 경계는 하늘과 땅의 천양지차(天壤之差)이다.

대오는 번뇌를 벗고 진리를 크게 깨달아 한 점의 의혹도 없는 대오각성을 뜻하지만 해오는 문자 그대로 머리로만 깨달음을 이해하고 깨달음의 경지를 머리로 체득한 일종의 철학적 사변에 불과한 것이다.

훗날 아홉 번이나 장원급제하여 구도장원(九度壯元)’이라고 불릴 정도로 영민하였던 율곡은 1년 반의 금강산행을 통하여 돈오(頓悟), 즉 한순간의 깨달음을 얻는 부처의 경지에 오르고 싶어 하였으나 부처가 되기에는 아는 것이 너무 많은 재기가 승한 지식인, 즉 엘리트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율곡은 마침내 불교에 대해 회의를 느끼게 된다.

살아있는 부처라는 평판을 받을 만큼 열심히 정진하였지만 기대만큼의 성취를 얻지 못하였을 만큼 화두라는 것에 가탁(假託)하여 모든 정신을 하나로 집중시키는 불교적 참선법도 허황한 가르침에 불과하다는 결론을 얻은 것이었다.

불교의 가르침에는 달리 기묘한 것이 없고, 함부로 마음이 요동치는 것을 끊어서 정신을 한곳에 집중시켜 허명(虛明)한 경지에 이르게 하는 참선이라는 것도 결국 사람들이 열심히 공부하는 생각을 금하게 하여 사람을 속이는 사술(邪術)이라고까지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율곡은 태생적으로 불인(佛人)이 아니라 유인(儒人)이었던 것처럼 보인다.

율곡의 이러한 태도는 율곡이 금강산의 작은 암자에 홀로 살고 있던 노승과 만났을 때 서로 나누었던 선문답에서도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풍악산에서 작은 암자에 있는 노승에게 시를 지어주다(楓岳贈小庵老僧)’라는 제목의 이 장시 속에는 율곡이 노승과 나누었던 선문답이 서사시 형태로 표현되고 있다.

이 장시는 마치 한편의 드라마를 보듯 생생하게 묘사되고 있는데, 율곡의 시를 통해 재구성한 이 극적인 장면은 다음과 같다.

내가 풍악산을 유람하며 하루는 혼자서 깊은 골짜기를 몇 리쯤 걸어 들어가다가 조그마한 암자 하나를 발견하였다. 암자 안에는 어떤 늙은 중이 가사를 걸친 채 단정히 앉아 있었는데, 나를 보고서도 일어나지도 않고 한마디의 말도 없었다.

암자 속을 두루 살펴보았으나 아무것도 다른 물건은 없고, 부엌살림은 밥을 지은 것도 며칠이나 된 듯 썰렁하였다. 내가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소.’하고 물었으나 그 중은 웃기만 할 뿐 대답하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다시 물었다.

여기서 무엇을 먹으며 굶주림을 면하고 있소이까.’

이에 노승은 소나무를 가리키며 말하였다.

저것이 나의 식량이라오.’”

소나무의 솔잎을 따먹음으로써 굶주림을 면하고 있다는 노승의 말을 듣자 율곡은 이 노승과 한바탕의 논전을 벌이고 싶은 투지가 불타올랐다. 이러한 심정을 율곡은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나는 문득 노승의 변론을 시험해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율곡은 노승에게 다음과 같이 묻는다.

공자와 석가는 그 누가 성인입니까.”

그러자 노승은 대답하였다.

젊은 선비는 나를 놀리지 마시오.”

노승은 처음부터 찾아온 율곡이 탐탁지 않았을 것이다.

처음부터 율곡을 보고서도 일어나지도 않고 한마디의 말도 없이침묵을 지키고 있던 노승이었으므로 느닷없이 암자를 찾아와 변론을 시작하는 불청객 젊은 선비가 마땅치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율곡은 물러서지 않고 다시 말을 잇는다.

부도(浮屠:본래 범어로는 탑이라는 의미이지만 여기서는 불타, 즉 불교를 일컫는다.)는 본래 오랑캐의 교의여서 중국에서는 이를 시행하지 않습니다.”

율곡의 말은 불교는 원래 서역, 즉 오랑캐의 교로서 이는 중국에서 이교로 생각하는 도인데, 어찌 이를 믿을 수 있겠습니까.’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음이었다. 그러자 노승이 대답하였다.

()은 동이(東夷) 사람이고, 문왕(文王)역시 서이(西夷) 사람이고 보면 이들 역시 오랑캐란 말이요.”

노승의 말은 율곡의 말을 정공법으로 반박한 대답이었다.

노승은 율곡을 본 순간 그가 불자가 아니라 유가를 믿는 젊은 선비임을 꿰뚫어 보았으므로 맹자에 나오는 구절을 인용하여 역습해온 것이었다. ‘이루하(離婁下)’편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순은 제풍(諸馮)에서 태어나 명조(鳴條)에서 죽었으니 동이의 사람이고, 문왕은 기주(岐周)에서 태어나 필영()에서 죽었으니 서이 사람이다.”

노승은 율곡이 유가를 믿는 선비이므로 짐짓 맹자의 구절을 들어 공자가 그토록 존경하고 있었던 순과 문왕도 동이와 서이의 오랑캐에 지나지 않는다고 역공하여 왔던 것이다. 이를 통해 암자에 살고 있던 노승의 학식도 대단하였음을 미뤄 짐작할 수 있음인 것이다.

한방 얻어맞은 율곡은 그러나 만만하게 물러서지 않았다. 율곡은 다시 치열한 법거량(法擧揚)을 시작한다.

불가의 묘한 곳이 우리 유가를 벗어나지 못하거늘 하필이면 유가를 버리고 불가를 찾아 들어가야 하겠습니까.”

율곡의 말을 들은 노승은 다시 말을 받아 후려쳤다.

그러하면 소승이 묻겠는데, 유가에서도 마음이 곧 부처다.’란 말이 있소이까.”

노승의 말은 불교의 골수를 가리키고 있음이었다.

심즉불(心卽佛)’, 마음이 곧 부처다.’라는 진리는 바로 선불교의 핵심을 가리키고 있음이었다.

이 진리를 처음으로 설법한 사람은 선의 검객(劍客)으로 불리던 마조(馬祖:709-788).

이른바 마조선(馬祖禪)의 선풍을 확립한 선승의 대명사였다.

마조선의 핵심인 마음이 곧 부처란 유명한 진리가 탄생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선화가 있다.

어느 날 마조의 제자였던 대매(大梅:752~835)는 마조를 친견하고 나서 다음과 같이 묻는다.

무엇이 부처입니까.”

그러자 마조는 대답한다.

자네의 마음이 곧 부처이다.”

대매가 다시 당돌하게 물었다.

그것을 어떻게 얻을 수 있겠습니까.”

빈틈없이 지켜나가야 한다.”

다시 대매가 물었다.

법이란 무엇입니까.”

자네의 마음이 바로 그것이다.”

달마가 동쪽으로 온 이유는 무엇입니까.”

자네의 마음이 바로 그것이다.”

어리둥절한 대매가 다시 물었다.

그럼 달마께오서 동쪽으로 온 아무런 의도가 없었단 말입니까.”

그러자 마조는 대답한다.

부족함이 아무것도 없는 그 마음을 간파하라.”

이 말에 대매는 마침내 심오한 뜻을 깨치고 학철대오하게 된다.

마조의 말은 부처이건, ‘불법이건, ‘달마건 모두 언구에 불과할 뿐 참다운 진아(眞我)는 즉 내 마음을 깨닫는 일에 있음을 설파하고 있는 것이다. 마조선의 골수는 마음이 곧 부처(心卽佛)’라는 진리와 평상심의 마음이 곧 도이다(平常心是道)’로 나누어지는데, 노승의 말을 미뤄보면 아마도 홀로 작은 암자에서 은둔하여 살면서 솔잎으로 생식하며 마음이 곧 부처라는 마조선의 화두를 결택하고 정진하고 있었던 선승처럼 보인다. 노승의 말에 율곡은 물러서지 않고 다시 대답한다.

일찍이 맹자께서 사람의 본성은 착하다(性善)’를 말씀하실 때마다 반드시 요순(堯舜)을 일컬었으니, 이것이 마음이 곧 부처라는 말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만, 단 우리 유가의 본 것이 그 실리(實理)를 얻었을 뿐입니다.”

율곡의 대답 역시 맹자의 등문공상(藤文公上)’ 편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문장을 인용한 것이었다.

등문공이 세자가 되었을 때 초나라로 가는 길에 송나라를 지나다가 맹자를 뵈었다. 맹자께서 마음의 선함을 말씀하시되, 말씀하실 때마다 반드시 요순을 칭하셨다. 세자가 초나라로부터 돌아와 다시 맹자를 뵙자 맹자께서 말씀하셨다.

세자는 내 말을 의심하십니까. 도는 하나일 뿐입니다.’”

맹자가 말하였던 요·순은 중국 역사상에 전설적인 성인. 요순의 마음이 선하듯 사람은 누구나 요순처럼 마음이 선해질 수 있다는 맹자의 성선설(性善說)에 등문공이 의심하자 맹자는 공자의 제자였던 안연의 순은 어떠한 사람이며, 나는 어떠한 사람인가. 누구든 도를 이룬 자는 또한 순과 같다.’라는 말을 들어 도는 하나일 뿐이라고 대답한 내용을 인용하였던 것이다.

이 말은 내 마음이 곧 부처라는 진리가 불법의 골수라면 요순의 선함 역시 나와 같다.’라는 맹자의 성선설 역시 유가의 골수임을 드러낸 말이었던 것이다.

첫 번째 노승에게 한 방 맞았던 율곡의 대답에 이번에는 노승이 한 방 맞았던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율곡의 시에는 노승의 태도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내 말에 노승은 긍정하지 않은 채 한참을 말이 없었다.”

침묵을 지키던 노승이 다시 화제를 바꾸어 율곡에게 묻는다.

“‘()도 아니고 공()도 아니다.’란 말이 있는데, 이를 어떻게 생각하시오.”

노승의 질문은 반야바라밀다심경에 나오는 색즉시공(色卽是空)’에서 인용하였던 말. 부처가 제자인 사리불에게 사리불이여, 물질()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물질과 다르지 않으니, 물질이 곧 공이요, 공이 곧 물질이다.’라고 설법한 내용에서 유래된 유명한 구절이었다.

즉 불가에서는 유형의 만물을 색이라 칭하고, 만물은 모두 인연에 의해서 생겨난 것이고, 본래 실재하는 것이 아니어서 공과 다름이 없다.’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음이었던 것이다.

이에 율곡은 대답한다.

이것 역시 앞의 경계일 뿐입니다.”

율곡의 대답은 색이니, 공이니 따지는 것도 앞에서 말하였던 실리(實利)가 아니라 공허한 말장난, 즉 경계를 따지는 일이라는 공격이었다.

율곡의 이 말을 들은 노승은 다만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그 웃음을 본 순간 젊은 율곡은 다시 투지를 불러일으켜 이렇게 물었다.

그러면 스님께 내가 묻겠습니다. ‘솔개는 날아서 하늘에 닿고, 물고기는 연못에서 뛰논다.’란 말이 있는데, 그렇다면 이것은 색입니까, 공입니까.”

율곡의 말은 시경에 나오는 솔개는 날아서 하늘에 닿고, 물고기는 연못에서 뛰노네(鳶飛戾天 魚躍于淵)’란 말에서 인용한 것.

이 시를 두고 공자의 제자인 자사(子思)는 중용에서 솔개는 하늘을 날고 있고, 물고기는 연못에서 뛰놀고 있지만 하늘과 연못의 상하는 결국 하나로 이것을 구분하는 것은 다만 말에 지나지 않는다.(言其上下察也)’고 설명하였던 것이다.

이 말을 들은 노승은 다시 묻는다.

색도 아니고 공도 아닌 것이 진여(眞如)의 본체라오. 이 오묘한 진리를 어찌 유교의 시경에 비교할 수 있겠소이까.”

노승이 말하였던 진여(眞如).

불교의 진실여상(眞實如常)에서 나온 말로 곧 우주만유(宇宙萬有)의 실체로서 평등하고 무차별한 절대 불교 진리를 감히 유가의 시경으로 설명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 노승의 준엄한 질책이었던 것이다.

즉 색은 형상과 색채를 가진 감각적이고 물질적인 현상계를 가리키고, 공은 일반적으로 현상계에서 서로 관계하며 변화하기 때문에 거기에는 불변의 어떤 실체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현상계란 모두 색과 공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참된 진리인 진여는 우리가 눈으로 보는 현상계를 초월해 있다.

그것은 색도 아니고 공도 아니어서 말이나 글로 경계 지어 표현할 수 없는 진여(眞如), 그 자체인 것이다.

그 진여를 어찌 유교로서 감히 설명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 노승이 갈긴 한 방망이였던 것이다.

그러나 율곡은 노승이 갈긴 한 방망이에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웃으면서 크게 할()하여 말하였다.

이미 말에 표현이 있으면 그것이 곧 대상의 경계가 되거늘 그것이 어찌 본체라 하겠습니까.”

율곡은 노승이 말하였던 색도 아니고 공도 아닌 것이 진여(眞如)의 본체라오.’라는 말을 붙들고 늘어진 것이었다.

즉 색이니 공이니 진여니 하는 것의 말의 표현은 결국 공허한 말장난의 경계에 지나지 않을 뿐이라는 것이 율곡의 반격이었다.

그러고 나서 율곡은 직격탄을 날린다.

만약 그렇다면 유가의 묘한 것은 말로써 전해질 수 없는데, 불가의 도는 문자의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문자 안에 있다는 것이 되지 않겠습니까.”

율곡의 직격탄은 부처가 남긴 말에서 비롯된다.

어느 날 부처는 영산에 앉아서 설법을 하고 있었다. 갑자기 허공에서 꽃잎이 눈처럼 흩어져 내렸다. 허공에서 흩어져 내린 꽃은 연꽃. 설법 도중에 부처는 갑자기 말을 끊고 한 송이 꽃을 주워들고 가만히 여러 대중들에게 그 꽃을 보일 뿐이었다.

이 장면은 영산회상거염화(靈山會上擧拈花)’라고 하여 이를 흔히 불가에서는 선의 시원점으로 삼고 있다.

그 자리에 모였던 수천의 대중들은 갑작스러운 부처의 침묵과 허공에서 떨어져 내린 꽃 한 송이를 들어 올린 부처의 뜻을 알 수 없어 어리둥절해 있었는데, 유독 가섭존자만이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가섭존자의 파안미소(破顔微笑)’를 본 순간 부처는 자신의 가르침이 문자나 교리로가 아닌 마음에서 마음으로 제자에게 전해졌음을 깨닫게 되었으며, 8만의 설법으로도 표현해낼 수 없는 진리, 즉 부처의 마음을 가섭존자가 그대로 이어받았음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마음에서 마음으로 뜻이 통한다.’라는 이심전심(以心傳心)’의 고사성어는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 말.

이때 부처는 다음과 같은 수수께끼의 말을 남기는 것이다.

나에게는 더할 수 없는 바른 진리의 가르침 정법안장(正法眼藏)’과 끝없는 진리의 자유로운 경계 열반묘심(涅槃妙心)’, 모든 것이 있으면서도 또한 모든 것이 없는 불변의 진리인 실상무상(實相無相)’과 오묘한 불법으로 들어가는 깊고 묘한 길 미묘법문(微妙法門)’, 그리고 문자나 경전의 가르침과 같은 글자로 표현될 수 없이 오직 마음과 마음으로 전해지는 오묘한 진리인 불립문자 교외별전(不立文字 敎外別傳)’이 있다. 이를 바로 마하가섭에게 전한다.”

부처의 이 말에서 부처의 가르침 이외에 심법(心法)이 따로 전해지게 되었으며, 이를 최초로 전해 받은 사람이 바로 마하가섭.

그러므로 불가에서는 마하가섭을 불조법맥(佛祖法脈)의 제1조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율곡은 바로 이러한 부처의 수수께끼의 말을 인용하여 노승을 향해 결정타를 날린 것이었다.

즉 부처는 자신의 마음을 문자나 경전의 가르침과 같은 글자를 통하지 아니하고 오직 마음과 마음으로 전해 오묘한 진리를 가르쳐 주셨는데, 만약 노승께서 진리의 본체를 색이니, 공이니, 진여니 하고 여러 가지 말이나 문자로 표현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불립문자(不立文字)의 범주에서 벗어나 문자 안에 있다는 모순을 범하게 되는 것이며, 마음과 마음으로 전하는 교외별전(敎外別傳)의 오묘한 진리가 아니라 경전 속에 들어있는 문구를 인용하는 것에 불과하지 않겠느냐는 통렬한 반격이었던 것이다.

율곡은 자신의 말에 대한 노승의 반응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노승은 깜짝 놀라 나의 손을 잡으며 말하였다. ‘당신은 세속 선비가 아니로군요.’”

율곡이 쓴 시의 내용을 종합해 보면 율곡은 노승의 변론을 시험해 봄으로써 자신이 노승의 어리석음을 깨우쳐주었을 뿐 아니라 자신이 세속 선비가 아닌 출중한 사람이라고 스스로 자화자찬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하기야 이 시를 쓸 무렵의 율곡은 19살의 청년이었으므로 객기(客氣)를 부릴 만큼 패기만만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풍악산 작은 암자에서 솔잎을 먹으며 생식하고 있는 노승쯤은 얼마든지 한 방망이 후려쳐서 쓰러트릴 수 있다는 자만심에 가득 차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율곡의 나르시시즘은 이 시에서 하이라이트로 장식된다.

즉 노승이 율곡에게 다음과 같이 부탁하였다고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젊은 선비는 나를 위해 시를 지어서 솔개가 하늘을 날고 물고기가 물속에서 뛰노는 그 글귀의 뜻을 해석해주시오.”

노승의 부탁에 율곡은 흔쾌히 이를 수락한다. 노승이 지필묵을 준비하자 율곡은 붓에 먹을 듬뿍 묻혀 종이 위에 칠언절구(七言絶句)를 일필휘지하기 시작하였다.

율곡이 노승을 위해 지은 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물고기가 뛰놀고 솔개 나는 것은 위아래가 한가지라(魚躍鳶飛上下同).

이것은 색도 아니고 공 또한 아니라네(這般非色亦非空).

무심결에 한 번 웃고 내 몸을 돌아보니(等閒一笑看身世).

석양의 나무 숲속에 홀로 서 있네(獨立斜陽萬木中).”

율곡이 써준 시를 읽어본 노승은 이 시를 접어서 자신의 소매 속에 집어넣는다. 그러고는 벽을 향해 돌아앉아 면벽을 하였다.

더 이상 율곡과 대화를 하지 않고 침묵속으로 들어가 수행하겠다는 자신의 뜻을 내보인 것이었다.

하는 수 없이 율곡은 그 암자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이때의 장면을 율곡은 시 속에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나는 그 골짜기를 나오며 노승이 어떤 사람인지 확실히 알 수 없었다. 사흘이나 지난 뒤에 다시 그 골짜기로 가서 본즉 조그마한 암자는 그대로 있는데, 노승은 이미 떠나 버려 암자는 텅 비어 있을 뿐이었다.”

금강산의 운수행각 중에 쓴 20여 편의 시중에서 이 풍악산에서 작은 암자에 있는 노승에게 시를 지어주다(楓岳贈小庵老僧)’라는 시야말로 1년 반에 걸친 율곡의 행장을 생생하게 드러내는 일종의 고해시(告解詩)인 것이다.

이 시를 보면 율곡은 어디까지나 자신을 불자가 아닌 유자로서의 자부심을 갖고 있었음을 알게 되며, 유가의 입장에서 불교를 비판하는 젊은 선비, 즉 유생임을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조그마한 암자에서 은둔하며 솔잎을 먹으며 참선하고 있던 노승과 한바탕 선문답을 벌여 자신이 노승을 거꾸러트리고 이겼음을 의기양양하게 드러내고 있는 듯한 이 시속에는 노승을 위해 써준 자신의 칠언절구를 마치 진리를 깨닫고 쓴 오도송(悟道頌)으로까지 인용하고 있어 이러한 율곡의 모습을 보면 1년여에 걸친 금강산에서 율곡은 결코 불법으로 자신의 목숨을 내어던진 궁극처를 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비록 율곡의 행색은 의암(義菴)’을 법명으로 하고, ‘만법이 하나로 돌아가는데 이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 하는 조주의 화두를 결택함으로써 겉으로는 완전히 불제자가 되었으나 실체는 여전히 유생의 모습을 벗어나고 있지 못함을 뜻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율곡은 돈오의 불법을 깨우치고는 싶어 하였지만 목숨을 내던질 곳(放身命處)’의 궁극처는 구하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일찍이 선의검객 마조는 제자 백장(百丈)이 와서 부처의 본뜻은 어느 곳에 있습니까.’하고 물었을 때 바로 자네의 목숨을 내던진 곳에 있다(正是汝放身命處)’라고 대답하였다.

또한 마조의 제자 중 출가하지 않았던 방() 거사는 마조의 문하에서 2년간 머물며 깨달아 온전히 깨달은 범부로 일생을 보냈는데, 어느 날 스승 마조에게 일체의 존재와 무관한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하고 물었을 때 마조는 서강의 물을 한입에 다 마셔버리면 그때 가르쳐주겠다.’라고 대답하였던 것이다.

자네의 목숨을 내던진 곳에 부처의 본뜻이 있고, ‘서강의 물을 한입에 다 마셔버린 그곳일체의 존재와 무관한 진인(眞人)이 있다.’는 마조의 대답은 불법을 통해 깨달음을 얻으려면 한마디로 죽으라라는 대답이었던 것이다.

율곡은 그러나 죽지 않았다.

아니 죽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율곡의 마음속에는 유가의 실리(實理)가 가득 들어있었으므로 율곡은 비록 겉은 불자와 같은 행장을 차리고 있었으나 불법을 향해 목숨을 내던질 수가 없었으며, 서강의 물을 한입에 다 마셔버릴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율곡은 금강산 입산과 동시에 예정되어 있었던 하산의 운명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뿐 아니라 똑똑한 세속의 선비였던 율곡을 만난 순간 그가 쓴 절구를 소맷자락에 집어넣은 후 자신만의 공간이 젊은 선비에게 노출되었음을 부끄럽게 여기고 오히려 더 깊은 산속으로 숨어 들어간 노승이 바로 부처의 현신임을 아마도 율곡은 평생 동안 알아차리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리하여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율곡의 마음속에는 불교에 대한 회의가 싹트기 시작한다.

금강산에서 남긴 20여 편의 시들은 주로 선시(禪詩)로 스님들과 나눈 내용들이 대부분이다. 그중에서 설의(雪衣) 스님에게 주다라는 시는 율곡이 남긴 대표적인 선시라 할 수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돌과 물이 서로 부딪치니/골짜기마다 맑은 우레 소리가 울려 퍼진다.

묻노니, 설의 스님이여./이것이 물소리인가 돌소리인가.

그대 만약 말 한마디 답변한다면/물아(物我)의 정을 알았다 하리.”

이 선시를 보면 율곡이 얼마나 육조혜능(六祖慧能)에 심취하고 있었던가를 미뤄 짐작할 수 있다.

육조혜능은 달마의 직계 제자로 특히 돈오법(頓悟法)의 시조였다.

일찍이 남쪽의 오랑캐 출신이었던 혜능은 오조 홍인(弘忍)을 찾아가 제자가 된다. 그러나 이때 홍인의 수제자는 신수(神秀)로 누구든 육조는 당연히 신수상좌가 물려받으리라고 인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부처의 바리때와 금관 가사를 물려받은 사람은 무지렁이 육조혜능. 겨우 23세의 어린 나이로 조사위(祖師位)를 물려받은 혜능은 부처로부터 내려온 바리때와 금관 가사를 빼앗으려는 무리에서 도망쳐 남방으로 흘러 들어가 사냥꾼 사이에서 숨어 지냈던 것이다. 육조혜능이 법상 위에 올라가 다시 설법을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15년 후 보림사(寶林寺)란 절에서였다.

그때 절에는 많은 대중들이 모여 있었는데, 바람에 흔들리는 깃발을 보고 한쪽은 바람에 흔들리는 것이라고 주장을 하고, 한쪽은 깃발이 흔들리는 것이라고 주장을 하여 일대 혼전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 육조혜능은 흔들리는 것은 깃발도 아니고 바람도 아니라 바로 그대의 마음이라고 최초의 설법을 펼쳐 보였던 것이다.

율곡이 설의 스님에게 돌과 물이 부딪쳐서 맑은 우레 소리가 나는데 이 소리가 물소리인가 아니면 돌소리인가.’하고 물었던 것은 육조 혜능에게 흔들리는 것은 깃발 때문인가 바람 때문인가.’하고 물었던 질문과 똑같은 의미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설의 스님에게 그 소리가 나는 곳(所從來)’을 묻는 율곡은 결국 자신의 목표가 육조혜능임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율곡은 금강산의 입산 출가를 통해 불세출의 선걸(禪傑) 혜능의 뒤를 이어 칠조(七祖)로 거듭 태어나기를 염원하고 있었으며, 혜능 이후로 행방불명되어 버린 부처의 금관 가사를 물려받음으로써 돈교(頓敎)의 법맥을 물려받고 싶었음을 드러내고 있음인 것이다.

그러나 율곡은 결코 칠조가 될 수 없음이었다. 혜능이 가난하여 나무 장사로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무지렁이였다면 율곡은 9번이나 장원급제하여 구도장원이라고 불릴 만큼 우리나라가 낳은 최고의 수재.

그러므로 1년 반에 걸친 참선에도 불구하고 결국 율곡이 얻은 것은 앵무새에 불과한 구두선(口頭禪)이었을 뿐. 마침내 20세 되던 해 가을, 율곡은 하산을 결심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율곡의 결심은 풍악산에서 본대로 기록하다(楓岳記所見)’라는 장시에 처음으로 드러나고 있다.

산 위에 올라가 이른 새벽 동방이 온통 붉은 비단 속으로 들어가 아침노을인지 바다 빛인지 분별할 수 없는찬란한 일출 광경을 바라보면서 읊은 시 구절에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율곡을 깨워 이 장관을 보게 하였던 스님이 여기선 이 경내가 가장 절호한 곳. 세간은 어찌 신선과 범부 그 격차뿐이랴.’라고 감탄하였으나 율곡은 다만 이렇게 탄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아, 나는 아직 세속의 인연 다하지 않아

이곳에 살면서도 나의 즐거움 온전하지 못하네.

후년에 이 승유를 계속하게 되거들랑,

산 신령은 꼭 기억해 두기 부탁하오(嗟余俗緣磨不盡 不能棲此全吾樂 他年勝遊如可續 奇語山靈須記憶).”

이 구절은 다시 환속을 결심하는 율곡의 마음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첫 장면이다.

하산을 결심한 이상 율곡은 지체 없이 이를 실행한다. 이때 율곡과 함께 동행한 사람은 보응(普應) 스님. 그가 어떤 스님이었던가는 알려진 바가 없지만 세속에 인연을 다하지 못한 율곡을 데리고 함께 산을 내려와 이광문(李廣文)이라는 사람의 초당(草堂)에서 하룻밤을 묵는다.

이날 밤 율곡은 이 초당에서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불교와의 결별을 정식으로 선언한다.

도를 배우니 곧 집착이 없구나(學道卽無著)

인연을 따라서 어디든지 유람하네(隨緣到處遊).

잠시 청학의 골짜기를 이별하고(暫辭靑鶴洞)

백구의 땅에 와서 구경하노라(來玩白鷗洲).

이내 몸 신세는 구름천리이고(身世雲千里)

하늘과 땅은 바다의 한구석일세(乾坤海一頭).

초당에서 하룻밤 묵어 가는데(草堂聊寄宿)

매화에 비친 달 이것이 풍유로구나(梅月是風流).”

이 시를 면밀히 검토해 보면 불과 1년여의 짧은 입산이었지만 불교에 심취하여 도를 추구함으로써 어느 정도 집착을 버리고 자유인이 될 수 있었음에 율곡이 스스로 자족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율곡은 이제 산에 있으나 저자거리에 있으나 별로 공간에 얽매이지 않는 초탈한 경지에 이르렀음을 고백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제 인연을 따라 어디든지 유람할 수 있다는 것이다. 몸은 비록 푸른 학이 머무는 청학동, 즉 금강산을 떠나지만 하얀 갈매기가 노니는 백구의 땅, 즉 강릉 외갓집에 있다 하여서 무엇이 다를 게 있겠는가. 자신의 몸은 떠돌기가 천리 길이요, 저 광활한 땅과 하늘도 결국 바다와 붙어 있지 않은가.

어쩌면 우리들의 인생이란 이처럼 낯선 초당에서 묵어가는 하룻밤과 같은 것. 그렇다고 해도 창밖에는 푸른 달 아래 매화꽃이 피어 있으니, 이것이야말로 풍류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라는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다.

율곡이 본격적으로 불교의 교리를 그 내용에 있어서 비판한 것은 먼 훗날의 일이다. 율곡의 나이 40세 되던 해 9. 율곡은 선조를 위해 성학집요(聖學輯要)’를 저서하여 올렸는데, 이 글속에서 율곡은 젊은 시절 자신이 심취하였던 달마의 선불교를 비판하고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신이 살피건대 부처의 말에는 정밀한 것도 있고, 조잡한 것도 있습니다. 조잡한 것은 다만 윤회나 인과응보의 말로써 죄와 복을 확산케 하고 어리석은 백성들을 유혹하고 협박하여 그들로 하여금 공양을 바치도록 시킬 뿐입니다.

그러나 그 정밀한 것에 있어서는 마음(心性)을 지극하게 논하였는데, ()를 마음으로 여겨서 마음을 모든 법의 근본이라 하고 또한 마음을 본성이라 여겨서 본성을 견문(見聞)작용이라 하고, 적멸(寂滅)을 큰 취지로 하여 하늘과 땅, 만물을 헛된 것이라 하였습니다.

또한 세상을 벗어난 것을 도리라 하고 인륜과 도리를 질곡(桎梏)이라 하였습니다. 그 공부의 요점은 문자를 내세우지 않고 곧바로 인심을 가리키며 본성을 보면 부처님이 된다.’라고 하였습니다. 갑자기 깨달은 뒤에 바로 천천히 닦는 것을 돈오점수(頓悟漸修)라고 하였고, 만일 뛰어난 사람이면 곧바로 깨닫고 바로 수도한다 하여 돈오돈수(頓悟頓修)라고 하였습니다.

달마가 양나라의 무제(武帝) 때에 중국에 들어와 비로소 그 법을 전하였는데, 선학이라고 말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율곡이 금강산에 입산하였던 것은 명종 9(1554) 3, 성혼과 도의지교를 맺은 직후였다. 그리고 율곡이 금강산에서 하산하였던 것은 이듬해 가을이었으니, 율곡은 금강산에서 1년 반의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은둔생활을 보낸 것이었다.

강릉의 외갓집으로 돌아오는 길목에서도 율곡은 두 개의 시를 남긴다.

그 첫 번째는 우연히 시를 짓는다(偶成)’라는 짧은 시.

취미를 얻어선 저절로 근심을 잊는데, 시를 읊자니 글귀가 이루어지지 않네.

꿈길에 잠깐 고향 산천 돌다 보니, 가을 강 비에 낙엽만 지고 있네.”

고향으로 가는 도중에 지은 이 시의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율곡은 재빨리 불교에 대한 미련을 버린 것처럼 보인다.

마치 도가 깊은 고승처럼 현란한 선시들을 쉴 새 없이 쏟아내었던 금강산에서와는 달리 율곡은 시를 읊으려 해도 글귀가 이루어지지 않음(吟詩不成句)’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심정은 고향인 강릉의 옛 이름인 임영(臨瀛)으로 가는 도중에 지은 다른 시에서도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이 시의 제목은 임영으로 향하다가 상운정에서 쓰다(向臨瀛祥雲亭)’.

시속에 나오는 상운정(祥雲亭)은 고려 말의 문신 안축(安軸)이 관동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 노래하였던 관동별곡(關東別曲)’에 나오고 있는 설악산의 동쪽과 낙산의 서쪽 사이에 자리 잡고 있는 정자.

일찍이 안축이 자색 봉황 타고 붉은 난새를 탄 아름다운 신선 같은 사람들이 앞다투어 현을 뜯고 있다.’라고 관동별곡에서 노래할 만큼 관동의 명승지에 자리 잡고 있는 대표적인 누각인 것이다.

1년 반 만에 고향으로 돌아와 도중에 상운정에서 자신의 소회(所懷)를 털어놓은 율곡의 시는 다음과 같다.

가을바람에 풍악(금강산)을 떠나/ 석양 무렵 상운정에 당도하니, 모래 위에는 바위들 늘어섰고/소나무 사이에는 길이 하나 나 있구나.

파도소리 우르르 바다를 몰아가고/기러기 떼 듬성듬성 전자모양 형성했네. 말 죽 먹여 급히 길 떠나니/앞산에 벌써 저녁 안개 어둑어둑(秋風別楓岳 斜日到祥雲 沙上千巖列 松間一路分 殷雷波捲海 疎篆雁成 馬催程發 前山晩霧昏)”

이 무렵 율곡의 고향 임영에는 외할머니 이씨가 눈이 빠져라 율곡을 기다리고 있었다. 율곡의 생애를 말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외할머니 이씨.

흔히 율곡에게 큰 영향을 준 사람을 율곡의 어머니였던 신사임당 한 사람으로 압축하고 있으나 오히려 율곡의 천재성을 처음으로 꿰뚫어 본 사람은 외할머니 이씨였다. 이러한 사실은 세 살에 불과한 율곡에게 이씨가 석류를 들어 보이며 이것이 무엇과 같으냐.’고 묻는 장면에서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이때 율곡은 옛 고시를 인용하여 석류껍질이 부서진 붉은 구슬을 감싸고 있네(紅皮囊裏 碎紅珠)’라고 대답함으로써 주위 사람을 탄복시켰는데, 어쨌든 이 석류시가 율곡이 지은 최초의 절구이고 보면 율곡의 천재성을 제일 먼저 알아본 사람은 외할머니 이씨였던 것이다.

이 무렵 외할머니 이씨는 76세의 노인이었고, 특히 4년 전에 사랑하는 딸 신사임당을 여의고 시름에 잠겨있었으므로 간다 온다 일체의 흔적도 없이 홀연히 사라졌다 살아 돌아오는 율곡을 본 순간 미친 듯이 맨발로 뛰어가 율곡을 맞아들였을 것이다.

율곡은 이곳 강릉에서 한겨울을 지낸다.

이듬해 봄 또다시 강릉을 떠나 한성시에서 장원으로 뽑혔으니, 비록 한겨울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금강산에서 있었던 불자로서 생활을 정리하고 자신의 마음을 다잡은 암중모색(暗中摸索)의 의미 깊은 전환기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한겨울 동안 율곡은 자신이 나아가야 할 방향과 인간으로서 지향해야 할 목표를 곰곰이 생각한 후 그가 평생 동안 좌우명으로 삼아온 자경문(自警文)’을 지어 자신을 경책하는 지표로 삼았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스스로 경계하는 글이라는 뜻의 자경문은 불교와의 결별을 공식적으로 선언한 글이며, 또한 다시 청산을 버리고 세속으로 환속하여 복귀하기 위한 일종의 자기방어의 아폴로기(apology)였던 것이다.

한겨울 동안 율곡은 치열하게 외갓집에서 입산하기 전부터 계속해왔던 과거시험 공부를 계속하였던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이듬 해 봄 한성부에서 주관하는 한성시에 응모하기 위해서 율곡은 서둘러 한양으로 귀향하였으며, 결과적으로는 장원에 급제하여 화려하게 입신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금강산에서 환속하여 이듬해 봄 한성시에서 장원급제할 때까지의 한겨울은 율곡 생애에 있어 가장 중요한 터닝포인트였던 것이다.

이때 지은 율곡의 시 한 수가 남아 전해지고 있는데, ‘등불 아래서 글을 본다(燈下看書)’라는 제목의 이 짧은 시는 율곡의 마음을 헤아려 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열쇠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인간 어디에 진정한 광거(廣居)가 있단 말인가.

백년의 이 몸, 잠깐 쉬어 갈 뿐이로세.

모처럼 해외의 유산몽(遊山夢)에서 깨어나,

외로운 등불 아래 옛 책(古書)을 보누나(何處人間有廣居 百年身世是廬 初回海外遊山夢 一盞靑燈照古書).”

이 시 속에는 금강산에서의 유산몽에서 깨어나 또다시 미뤄 두었던 옛 책을 꺼내 들고 유학에 전념하는 율곡의 심정이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특히 주목할 것은 율곡이 광거(廣居)’, 광활한 집에 대해서 운위하였다는 점이다.

광거란 문구는 맹자의 등문공(藤文公) 하편2장에 나오는 유명한 말로서 맹자의 핵심사상을 드러내고 있는 명구 중의 하나이다.

즉 유세가였던 경춘(景春)이 맹자를 찾아와 공손연(公孫衍)과 장의(張儀)와 같은 당대의 종횡가(縱橫家)들을 그들이야말로 진실로 대장부가 아니겠습니까. 그들이 한번 화를 내면 제후들이 두려워하고 그들이 조용히 거처하면 천하가 잠잠합니다.’라고 말하자 맹자가 단호하게 그들이 어찌 대장부일 수 있겠는가.’하고 꾸짖은 데서 비롯된다. 맹자는 다음과 같이 훈계한다.

그대는 예를 배우지 않았는가. 장부가 관례를 행할 때에 아버지가 훈계를 하고, 여자가 시집을 갈 때 어머니가 훈계를 하는데,‘시집을 가거든 반드시 공경하고 조심하여 남편을 어기지 말라.’ 하니 순종함을 정도로 삼는 것이 첩부(妾婦)의 도가 아니겠는가.”

맹자는 공손연(公孫衍)’장의(張儀)’가 제후들을 설득하여 이쪽에 붙었다 저쪽에 붙었다 하는 변절을 반복하면서 서로 공격하고 정벌하게 하는 무도한 행위를 여염집의 여인에 비유하여 질타하였던 것이다. 그러고 나서 맹자는 진정한 의미의 대장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부르짖는다.

천하의 넓은 집에 거처하며, 천하의 바른 자리에 서며, 천하의 큰 도리를 행하여 뜻을 얻으면 백성과 함께 도를 행하고, 뜻을 얻지 못하면 홀로 그것을 행하여 부귀가 방탕하지 못하고, 빈천(貧賤)이 뜻을 바꾸지 못하게 하며, 위무가 절개를 굽히게 할 수 없는 것, 이것을 바로 대장부라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율곡의 시에 나오는 인간 어디에 진정 광거가 있단 말인가(何處人間有廣居).’하는 문장은 바로 맹자가 부르짖었던 천하의 넓은 집에 거처하며, 천하의 바른 자리에 서며, 천하의 바른 도리를 행한다(居天下之廣居 立天下之正位 行天下之大道).’라는 구절에서 인용하여 따온 것.

이를 통해 율곡은 완전히 불교와의 결별을 선언하고 옛 고서에서 읽었던 대로 맹자가 부르짖었던 유가의 넓은 집(廣居)’에서 바른 자리에 서며, 바른 천하의 도리를 행할 것을 새삼 결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율곡이 퇴계의 서당에 머물러 있었던 23일 동안 나누었던 이야기는 자연 율곡의 불교행적에 대한 고백과 그에 따른 퇴계의 답변이 주화제였을 것이다.

훗날 퇴계가 쓴 글에서 사람들이 말하기를 율곡이 불교서적을 읽고 거기에 깊이 중독되었다고 비난하고 있지만 오히려 그 실상을 감추려 하지 않고 그 잘못을 인정하고 있으니, 감히 도에 함께 나갈 만하다고 아니할 수 있겠는가.’하고 변호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아마도 23일의 짧은 만남 중에 율곡은 자신이 불교에 귀의하였던 실상을 감추려 하지 않고 충분히 그 잘못을 인정하고 있었던 듯 보인다.

더구나 금강산에서 하산한 이듬해 봄, 한성부에서 실시하는 알성시에 응시하였을 때 성균관에서 공부하던 유생들이 작당하여 율곡을 묘정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고 너는 한때 이단에 빠졌던 자이다. 그런 네가 어찌 공자를 위시해 여러 성인들을 모셔놓은 이곳에 감히 발을 들여놓을 수가 있겠느냐.’라는 공격의 수모를 당한 후였으므로 율곡은 그때 받았던 마음의 충격을 조심스럽게 퇴계에게 털어놓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율곡의 고백을 들은 퇴계는 어떤 태도를 보였음일까.

물론 퇴계는 불교를 이단시하고 있었다.

이단시하였을 뿐만 아니라 동방이단의 가장 심한 폐단은 불교라고까지 극언하고 있었던 것이다. 퇴계의 이러한 태도는 퇴계가 선조를 위해서 바친 무진육조소(戊辰六條疏)’에서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무진육조소는 퇴계가 선조로부터 부름을 받고 예순여덟 살의 나이에 한양에 올라와 숭정대부(崇政大夫)의 직책을 제수받고, 경연(經筵)에서 임금이 지켜야 할 여섯 가지 도리에 대해서 강론하였던 내용을 문장화한 일종의 제왕학(帝王學)이었다.

이듬해 12월에 퇴계가 죽었으니, 그런 의미에서 무진육조소는 퇴계가 공복으로서 국가에 봉사하면서 남긴 마지막 유조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퇴계에 대한 선조의 사랑은 남다른 것이었다.

임금위에 오르자마자 선조는 퇴계를 예조판서에 임명하고 한양으로 올라와 줄 것을 간곡히 청하였다.

그러나 퇴계가 칭병을 하고 올라오지 않자 선조는 직접 붓을 들어 친필로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써 내린다.

이공,

어진 임금은 어진 사람을 스승으로 삼아 성군이 되는 것이오. 그러나 짐은 갑자기 임금이 되어 어진 사람의 가르침을 받지 못하였소. 그대가 병중이지만 선왕의 은혜를 많이 입었다고 생각되는 바이오. 중국에서 제갈공명은 유비가 세상을 떠나고 그 아들 유선이 왕위에 오르자 유비 황제의 큰 은혜를 입었으나 아직 다 갚지 못했으니 새 황제인 유선에게도 은혜를 갚고자 한다, 하였소이다. 그러니 그대도 선왕을 생각하여 짐을 돌봐주어 짐의 어리석음을 일깨워주기 바라오.”

선조로부터 친서를 받은 퇴계는 어쩔 수 없이 그해 6월 한양으로 출발한다.

그러나 워낙 건강이 좋지 않았던 터라 도중에 쓰러진다. 이 소식을 들은 선조는 전의를 보내 치료토록 하였으며, 간신히 건강을 회복한 퇴계는 한양에 올라와 홍문관과 예문관에 대제학을 제수받는다.

그리고 경연에 나아가 선조에게 경서를 가르치기 시작하였는데, 이때 선조를 위해서 쓴 글이 바로 무진육조소인 것이다.

신 이황은 삼가 재배하고 두 손 모아 머리를 조아리며 주상전하께 아뢰나이다.’로 시작되는 이 무진육조소에는 선조가 임금으로서 반드시 지켜야 할 여섯 가지의 도리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상소하고 있다.

첫째, 임금으로서 계통(繼統)을 중요하게 여겨 어짐과 효도(仁孝)’를 잘 지켜나가야 합니다.

둘째, 간악한 말로 남을 모함하며 이간질시키는 것을 막아 양궁(兩宮:선조와 인순황후 심씨)이 친하게 지내야 합니다.

셋째, 성학(聖學:유교)을 돈독히 하여 임금으로서 학문을 충실히 닦아 정치에 근본을 세워나가야 합니다.

넷째, 바른 도덕으로써 인심을 바로 잡아야 합니다.

다섯째, 공정하고 능력 있는 사람들을 뽑아 널리 인재를 등용하는 한편 백성들의 소리를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여섯 번째, 수양과 반성을 성실히 함으로써 하늘의 권애(眷愛)를 받아야 할 것입니다.”

퇴계로부터 받은 무진육조소를 선조는 크게 기뻐하며 그림으로 그려 병풍으로 만들고 항상 나랏일을 살피는 지침으로 삼았는데, 퇴계는 바른 도덕으로써 민심을 바로잡아야 한다.’라는 넷째 조항의 세부사항으로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순자가 말하기를 임금은 그릇과 같으니 그릇이 모나면 그 속에 담긴 물도 모나고, 또 임금은 푯대와 같으니 푯대가 바르면 그림자도 곧다.’라고 하였습니다. 어찌 참으로 그렇지 않겠사옵니까. 비록 그러하오나 보잘것없는 신의 삿된 근심과 지나친 생각으로는 인심을 방황케 하고 미혹되게 하는 학설에 대하여 느낀 바가 있습니다.”

퇴계는 특히 인심을 방황케 하고 미혹되게 하는 학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상세하게 부연설명하고 있다.

신이 감히 보건대 동방 이단의 가장 심한 폐단은 불교이니, 고려는 이 때문에 나라가 망하는 데에까지 이르렀사옵니다. 비록 아조(我朝)의 융성한 다스림으로도 오히려 능히 그 불교의 밑뿌리를 끊지 못하여 때때로 틈타서 침투하여 퍼지니, 비록 선왕께서는 곧 불교의 그른 것을 깨달으시고 빨리 씻어버리실 것을 힘쓰셨으나 그 여파와 유산이 아직도 남아 있사옵니다. 그리고 노장학(老莊學)의 허망한 망발을 혹 깊이 숭상하여 성인을 업신여기고 예법을 멸시하는 풍습이 더러 일어나고 관중(管中)과 상앙()의 학술과 사업은 다행히 전술하는 자는 없으나 공리를 계획하고 이익을 꾀하는 폐단은 오히려 고질이 되고 있습니다.”

무진육조소에 나오는 불교에 대한 퇴계의 태도는 확고부동하다. 불교는 노자와 장자보다, 심지어 관중과 상앙이 부르짖었던 법가(法家)보다도 더 동방 이단의 가장 심한 폐단이라고까지 못 박은 것이었다.

퇴계의 이러한 불교에 대한 적대 감정은 물론 선왕 명종대에 있었던 문정황후와 보우 스님과의 유착관계에 따른 폐단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퇴계는 비록 선왕(명종)께서는 곧 불교의 그른 것을 깨달으시고 빨리 씻어버릴 것을 힘쓰셨으나 그 여파와 유산이 아직도 남아 있사옵니다.’라고 표현함으로써 아직도 그 후유증이 광범위하게 남아 있음을 경계하는 내용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퇴계는 불교를 이처럼 동방의 가장 심한 폐단으로 생각하고 있었음일까.

아이러니컬한 것은 퇴계도 한때 짧은 기간이었으나 선사에 머무르면서 불교의 선 공부를 하였다는 점이었다.

이때 퇴계의 나이는 47.

퇴계가 머물렀던 암자는 월란암(月瀾菴)이라고 불리던 작은 선찰이었다.

퇴계는 이 암자에서 주자가 쓴 심경(心經)’을 읽고 크게 감명을 받은 바 있었다. 이때의 심정을 퇴계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심경을 얻은 뒤로 비로소 심학(心學)의 근원과 심법(心法)의 정밀하고 미묘함을 알았다. 그러므로 나는 평생에 이 책을 신명(神明)과 같이 받들고 섬기고, 이 책을 엄한 아버지같이 공경하였다.”

퇴계는 노년에도 새벽에 닭이 울면 일어나서 반드시 엄격하게 심경부주(心經附註)’를 한 번씩 읽었다고 하니, 작은 암자에서 깨달았던 심경의 영향은 실로 퇴계의 전생애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웠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퇴계가 월란암의 암자에 은거하였던 것은 주자를 스승으로 삼고 주자학에 전념하기 위해 모든 관직에서 물러나기를 결심하였던 은퇴시기 직전이었으니, 그런 의미에서 월란암은 퇴계에 있어 적멸궁(寂滅宮)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퇴계는 어째서 주자학에 전념하기 위한 결심을 불교의 선림(禪林)에서 하였음일까. 율곡처럼 비록 1년 반 이상을 금강산에서 입산수도하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퇴계는 어째서 불교가 동방 이단의 가장 심한 폐단이라고까지 극언하고 있으면서도 불교의 선사 속에서 주자를 스승으로 삼기 위한 초발심을 단행하였던 것일까.

이때 퇴계는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자신의 심정을 노래한다.

주자를 스승으로 삼아 도를 배우러 암자(禪林)에 들렀더니

서림사 벽에 붙였던 그 시가 감개 깊어라.

천 년 뒤 우리나라 도가 없어 적막하니

여산 비추던 그 달빛 나의 침실 비춰다오(從師學道寓禪林 壁上題詩感慨深 寂寞海東千載後 自燐山月映孤衾).”

서림사(西林寺)는 여산(廬山)에 있던 사찰로 한때 주자가 머물면서 학문에 정진하던 곳. 따라서 시 속에 나오는 주자를 스승으로 삼아 도를 배우러 암자(禪林)에 들렀다.’라는 내용은 퇴계 자신도 스승 주자의 도를 배우기 위해서 불교의 선림에 들었음을 암시하고 있음인 것이다.

그렇다면 주자는 어째서 불교적 사찰에 머물면서 자신의 도를 이루었음일까.

실제로 퇴계가 스승으로 삼고자 하였던 주자는 한때 불교에 심취한 적이 있었다.

연보에 의하면 처음 선생(주자)이 배울 때 일정한 스승이 없이 경전에 드나들었고, 노자와 석가를 두루 넘나든 것도 이미 여러 해가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주자 자신도 직접 내 나이 15, 16세 때 일찍이 선에 마음을 두었었다.’라고 고백하고 있을 정도였던 것이다.

주자가 살았던 송대에는 불교의 교의는 모두 쇠퇴하고 오직 선종만이 성행하고 있었다. 반야(般若), 유식(唯識) 같은 인도의 교의와 천태(天台), 화엄(華嚴) 등 중국불교의 교의는 모두 쇠퇴하고 중국인의 사유방식에 맞게 중국화된 선종만이 전성기를 누리고 있는 시기였으므로 높은 벼슬아치와 모든 지식인들 중 선학에 물들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였던 것이다. 따라서 연보에 기록된 대로 뚜렷한 스승이 없었던 주자도 한때 선에 마음을 두어 불교에 정진하였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주자는 15세의 어린 나이 때부터 선학에 심취하여 그 도리를 강구하였으며, 선학에 대한 이해와 자부심은 하늘을 찌를 듯이 비상하였다.

이러한 주자의 선에 대한 이해수준은 당대 최고의 선걸이었던 도겸(道謙)으로부터 선문답을 주고받은 후 다음과 같은 인증을 받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주자의 선은 소소명명(昭昭明明)하다.”

소소명명.

모든 것이 밝게 드러나 한 치의 의혹도 없이 명백함을 나타내는 말. 당대 최고의 선사였던 도겸으로부터 소소명명하다고 인증을 받았다면 이미 주자의 깨달음의 경지는 상당한 경지에 이르렀음을 입증하는 것이었다.

그뿐인가.

주자는 도겸의 의견으로 유학의 교리를 불교적으로 풀이함으로써 과거시험에까지 합격하는 영광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이때 주자의 나이는 19.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청년 시절 주자는 가히 선의 천재였다는 점인 것이다.

주자의 선학에 대한 탐구는 주자의 나이 24세 때 이연평(李延平:10881158)을 만나 가르침을 받을 때까지 거의 10년을 넘게 지속되고 있었다.

그러나 마침내 이연평을 만나게 된 이후로 주자의 학문의 방향은 불교적 선학에서부터 유학으로 방향을 전환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주자의 사상형성 과정에서 이연평과의 만남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이연평의 가르침을 통하여 젊은 시절 불교를 넘나들던 사상적 방향에 종지부를 찍고 유학에 관한 연구로 자신의 학문 방향을 설정할 수 있게 되었으니, 이연평은 주자에 있어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어준 참스승이었던 것이다.

주자는 자신의 참스승이었던 이연평을 처음 만났을 때의 장면을 다음과 같이 주자어류(朱子語類)’를 통해 표현하고 있다.

그 뒤에 동안(同安)에 부임하였을 때 내 나이 24, 5세였다. 처음 연평 선생을 뵙고 선에 관해서 말씀을 드렸다. 연평 선생은 다만 (그것이) 옳지 않다고 말했을 뿐이다. 나는 도리어 연평 선생이 아직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의심을 품고 재삼 질문을 드렸다. 연평 선생은 사람됨이 간명하고 중후했으나, 말씀은 그다지 잘하지 못하셨고, 단지 성현의 말씀을 보라고만 하셨다. 나는 마침내 저 선을 잠시 놓아두고자 했다. 마음속으로 선을 또한 그대로 있다고 생각하면서 성인의 책을 읽어나갔다. 읽고 또 읽기를 하루하루 더해가면서 성현의 말이 점점 맛이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문득 머리를 돌려 석씨(석가)의 설을 살펴보니 점점 파탄이 일어나고 갖가지 결함이 드러났다.”

이글은 주자가 이연평을 처음 찾아뵈었을 때 선학과 유학 사이에 사상적 갈등이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율곡이 퇴계를 만나 23일의 짧은 기간을 보내고 있을 때 율곡의 마음속에 일어나고 있었던 불교와 유교의 사상적 대립과도 일맥상통하고 있는 것이다.

주자가 선에 대해서 말씀드리자 연평 선생이 다만 옳지 않다고 대답하였으므로 도리어 연평 선생이 아직도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하고 의심하였던 것처럼 율곡도 자신의 해박한 선학적 지식으로 유가의 교의를 접근함으로써 유·불을 통합해 보려는 관점에 퇴계가 다만 옳지 않다.’라고만 대답한 것을 의심으로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

이연평이 주자가 선학에 깊이 빠져 불교와 유교의 교의를 구분하지 못하는 것을 보았으면서도 그 문제점을 구체적으로 지적하지 않고 다만 성현의 글을 보라.’고 짤막하게 충고하였던 것처럼 퇴계도 율곡에게 별다른 충고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퇴계는 율곡의 천재성을 이미 꿰뚫어 보고 있었으므로 율곡의 학문적 모순점을 구체적으로 지적하여 율곡의 자존심에 상처를 주는 방법보다는 스스로 체득하여 주자로 하여금 유·불의 차이를 자각하도록 만드는 일이 급선무라고 본 이연평처럼 퇴계도 율곡이 직접 성현의 글을 읽어가는 과정에서 성현의 말에 맛을 느끼고, 불교의 학설이 점점 파탄을 일으키고 이치에 맞지 않음을 스스로 깨닫게 함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율곡에게 큰 용기가 되었던 것은 주자도 한때 불교에 심취하여 선에 몰두하였다는 전력이었을 것이다.

주자는 10년 이상을 선에 몰두하였다가 마침내 31세 때부터 이연평을 정식으로 스승으로 모시고 본격적으로 유학에 정진하여 유학에 있어 종주(宗主)가 될 수 있었으니, 그에 비하면 율곡은 1년 반의 짧은 기간동안만 선에 몰두하였을 뿐으로 이에 대해 너무 상심하지 말라는 것이 퇴계가 율곡을 위해 던진 따뜻한 위로와 격려의 말이었을 것이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주자가 이연평을 통해 학문적 방향을 바꿔 유학으로 나가는 계기를 얻은 것처럼 율곡도 퇴계와의 만남을 통해 불교적 방황에 마침표를 찍고 유학으로 학문의 방향을 급선회하는 결정적인 계기를 얻었다는 점일 것이다.

지난 이틀 동안 계속 내린 봄비로 계당 앞의 시냇물은 성난 뱀의 모가지처럼 부풀어 있었다. 봄이라곤 하지만 아직 춘삼월이어서 계상 앞 뜨락에 심은 매화나무의 철골(鐵骨)처럼 묵은 등골은 기고(奇古)한 검붉은 용틀임으로 굽이쳐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이틀 내린 봄비로 그 싸늘한 가지 끝에도 어느덧 꽃망울이 부풀고 있어 꿈결 같은 향기를 내뿜고 있었다.

퇴계와 율곡은 좁은 계상의 방안에서 마주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의 짧은 만남은 이제 날이 밝아 내일 아침이면 끝이 날 판이었다. 퇴계는 율곡에게 며칠을 더 묵어가라고 권유하였지만 강릉으로 먼 길을 가야 하는 율곡으로서는 서둘러 길을 재촉할 수밖에 없음이었다.

두 사람이 마주 앉은 계상은 이미 낡아 양이 적은 봄비에도 지붕에서 물이 새고 있었다. 물이 새는 곳에는 종지 하나를 놓아두고 물이 가득 고이면 뜨락으로 물을 던져버릴 만큼 초라한 초당이었다.

퇴계는 51세 때 지은 계상서당에서 10년 동안 학문에 정진하면서 제자들을 가르쳤지만 계상서당은 좁고 허술하고 비바람이 잠자리에 밀려들 만큼 누옥(陋屋)이었다. 퇴계는 계당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을 정도였다.

처음 내가 계상의 터를 가려 시내에 다다라 두어 칸의 초가집을 얽어 책을 저장하고 못난 마음을 기르는 곳으로 정하였는데, 이윽고 그곳에서 세 번이나 이사를 하게 되자 갑자기 비바람에 무너지게 되었고, 또 계상이 너무 막히고 적적하여 가슴을 열어주기에는 부적당하였다.”

퇴계 자신이 표현하였던 대로 계상은 비바람을 피할 수 없을 만큼 초라한 초가집이었고, 막히고 적적하여 가슴을 열어주기에는 부적당한 곳이었다. 그러나 바로 이곳에서 23세의 청년 율곡과 58세의 노학자 퇴계는 운명적인 지우(知遇)를 하게 되었으니, 이로 인해 이 초라한 장소야말로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뛰어난 두 철인(哲人)들이 운명적인 만남을 펼친 성지라 불릴만한 것이다.

두 사람은 서로 말을 끊고 쉴 새 없이 내리는 봄비가 소록소록 매화꽃잎 사이로 스며드는 적요(寂寥)한 정적을 귀 기울여 듣고 있었다.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청년 율곡이었다.

한 가지 묻겠습니다, 스승님.”

지난 이틀 동안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율곡은 쉴 새 없이 퇴계에게 묻고 또 물었다. 그러할 때마다 퇴계는 율곡의 말을 신중하게 경청하였고, 그리고 율곡의 질문에 성의를 다하여 대답해 주었었다.

처음 퇴계를 찾아 왔을 때에는 율곡의 표정은 어둡고 상심에 가득 차 있었다. 퇴계는 율곡을 만나기 전부터 이미 율곡의 명성을 잘 알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 퇴계가 지은 화답시에 높은 명성에 헛된 선비 없음을 이제 알겠구려. 지난날의 공경치 못한 몸가짐 부끄럽구려.(始知名下無虛士 堪愧年前闕敬身)’라는 구절이 나오고 있음을 통해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명성에도 불구하고 뜻밖에도 처음 만난 율곡의 모습은 의기소침하고 염세적이었다. 그것이 어디에서 기인되는 것일까, 퇴계는 예리하게 율곡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였다.

마침내 퇴계는 율곡의 상심이 한때 금강산에 입산하였던 불교적 방황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닫고 그러한 마음속의 어둠을 율곡 스스로 털어놓도록 짐짓 유도했던 것이다.

퇴계는 잘 알고 있었다.

무거운 마음의 짐은 오직 고백으로 가벼워지고 고백이야말로 진정한 용기임을. 그뿐인가. 고백이야말로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최고의 묘약임을. 따라서 율곡이 퇴계를 찾아온 것이 자신의 마음을 짓누르는 죄의식의 형량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백할만한 상대를 발견하기 위해서였음을 비로소 퇴계는 깨달았던 것이다.

과연 율곡은 찾아온 첫날 하루 종일 자신의 사상적 갈등을 고백하고 이를 하소하였다.

그러나 퇴계는 이에 대해 가타부타 그 어떤 견해도 제시하지 않았다.

마치 주자가 스승 이연평을 처음 만났을 때 이연평이 그것(주자가 선에 몰두하는 것)이 옳지 않다.’라고만 짤막하게 대답하고 다만 성현의 말씀을 보라.’고만 훈계하였던 것처럼 퇴계도 율곡에게 다만 그것이 옳지 않다.’라고만 대답하였을 뿐이었다.

율곡으로부터 모든 고백을 전해 들은 퇴계는 마침내 율곡의 마음을 달래고 격려하기 시작한다. 율곡의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서 퇴계가 선택한 방법은 주자 역시 10년 이상 율곡처럼 불교적 선에 몰두하였다는 내용이었다.

주자 역시 불교적인 사상 갈등으로 고뇌하고 있었으나 마침내 학문적 오류에서 벗어나 유가의 종지로 나아갈 수 있었으니, 한때 율곡의 불교적 방황은 오히려 약이 될 수 있다는 것이 퇴계의 따뜻한 격려내용이었던 것이다.

그 순간.

율곡의 표정은 눈에 띄게 달라졌다. 껍질을 찢고 무거운 허물을 벗은 듯 율곡의 표정은 밝아지고 자신감을 회복한 모습이었다.

이제 남은 것은 그 무거운 짐을 벗어버리고 앞으로 정진해 나가야할 학문의 방향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율곡이 머물렀던 23일의 짧은 기간은 실로 절묘하게 구성된 전3막의 연극무대와 같은 것이었다.

1막이 율곡의 고백을 통한 기()였다면, 2막은 주자와 간접적으로 비유함으로써 치유의 승()과 그리고 심기일전의 반전(反轉)이었다. 이제 남은 마지막 제3막은 마무리의 결().

이 모든 드라마를 연출한 사람은 바로 퇴계.

퇴계는 23일의 짧은 만남을 통해 율곡의 전 일생을 기승전결(起承轉結)의 마무리로 완성시킨 위대한 연출자이자 참스승이었으니, 율곡이 이처럼 젊은 시절 퇴계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율곡은 불교와 유교 사이에서 사상적 방황을 거듭하다가 마침내 자포자기하여 역사의 뒤안길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을지도 모르는 일일 것이다.

이제 남은 마무리는 율곡이 미래지향적으로 취해야 할 학문의 방향. 마침내 떠나기 전날 밤 두 사람은 계당에 마주앉아 이에 대해 집중적으로 논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감히 스승님께 묻겠습니다.”

오랜 침묵 끝에 율곡이 입을 열었다.

주자가 말씀하시기를 정함()’고요함()’,‘편안함()’들은 비록 절차는 나누어져 있으나 이 모두가 학문에 대한 공부가 용이하게 진전되게 하는 필수적 요소라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주자는 마음이 편안한 이후라야 능히 생각할 수 있다.’라고 말하셨습니다. 이에 대해 주자는 공자의 수제자인 오직 안회만이 이것을 실천할 수 있다 하였습니다. 하오면 소인과 같은 사람은 학문에 정진할 수 없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율곡은 유교의 4대 경전 중의 하나인 대학(大學)’에 나오는 구절을 인용하여 질문을 던진 것이었다. 대학의 제1장은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대학의 도는 인간의 밝은 덕(明德)’을 밝힘에 있으며, 백성을 새롭게 함에 있으며, ‘지극한 선(至善)’에 이름에 있다. 이를 안 뒤에 뜻의 정함()이 있으니, 뜻이 정하여진 뒤에는 마음이 능히 고요하고, 마음이 고요하여진 뒤에는 그 처한 바에 능히 편안하고, 편안함 뒤에 능히 사려가 깊고, 사려가 깊은 뒤에 능히 얻은 바가 있다.”

따라서 율곡의 질문은 대학에는 마음이 편안한 이후라야 능히 사려할 수 있다(安而後能慮)’라는 말이 있는데, 그렇다면 자신은 지금까지 한때 불교와 같은 외도에 마음이 빼앗기기도 하고 아직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하여 평안하지 못하고 불안정한 상태에 있으므로 과연 학문에 정진해 나갈 수 있겠느냐는 내용을 담고 있음이었던 것이다.

율곡의 질문을 들은 순간 퇴계는 곧바로 율곡의 마음을 꿰뚫어 보았다.

퇴계는 율곡이 아직도 자신의 마음을 평안(平安)하다고 느끼지 못하고 불안(不安)하게 여기고 있음을 직감한 것이었다. 이에 대해 퇴계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주자께서 평안한 뒤에 능히 사려하는 것은 실로 안회가 아니면 이것을 할 수 없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진실로 그대가 의심한 바와 같소. 그러나 주자의 말씀은 위아래로 모두 통하고 정밀한 것과 조잡한 것이 다 갖추어져 있어서 어떤 사람의 학문이 낮고 깊은 정도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두루 평안한 뒤에 능히 사려할 수 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오. 즉 조잡한 쪽으로 말하면 보통 사람이라도 힘써 나아갈 수 있고, 그 정밀한 것의 극치로 말한다면 큰 선비가 아니고서는 진실로 얻은 바가 있을 수 없다는 이야기인 것이오. 주자의 말씀은 그 극치를 말씀하신 것뿐이오. 만약 공자의 수제자인 안회가 아니면 명덕(明德)을 밝힐 수 없다는 주자의 말씀이 사실이라면 나와 같은 노마(駑馬)는 어찌 학문에 정진할 수 있겠소. 아니 그렇소이까. 허허 허허허허.”

퇴계는 손을 들어 자신의 가슴을 가리키면서 크게 웃었다. 좀처럼 희언을 하지 않던 근엄한 스승 퇴계가 자신을 가리키어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말하였으므로 율곡도 따라 웃으며 말을 이었다.

스승께서 노마시라니요. 지나친 겸손의 말씀이시나이다.”

그러나

퇴계는 한바탕의 웃음이 사라진 후 정색을 하며 말하였다.

내가 비록 노마와 같은 둔지(鈍智)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안회처럼 사리를 깊이 탐구하여 나아갈 수는 있지 아니하겠소이까. 이치를 탐구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이니, 한 가지 방법에만 얽매일 수는 없소이다. 한 가지 일을 깊이 탐구하다가 되지 않으면 곧바로 싫증을 내어 다시는 사리를 깊이 탐구하는 것을 실천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실로 미적미적 허송세월을 보내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오. 그러나 이렇게 탐구하고 또 탐구하여 나가면 쌓이고 깊이 익숙해져서 자연 마음이 밝아지고 명덕의 실체가 눈앞에 확연히 나타나게 될 것이 아니겠소.”

퇴계의 대답은 실로 명언이다.

율곡은 결벽증을 가진 완벽주의자처럼 보인다.

그가 던진 질문은 주자가 대학에서 말하였던 대로 마음이 편안해진 이후라야 능히 사려할 수 있음(安而後能慮)’인데, 이를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은 유일하게 공자의 수제자였던 안회. 그렇다면 안회처럼 모든 마음의 근심과 번뇌와 집착을 끊어버린 사람만이 인간의 밝은 덕(明德)’을 밝힐 자격이 있다면 쓸데없이 한 곳에 매어 달린 조롱박과 같은 자신이 과연 대학의 도를 밝힐 수 있겠느냐는 내용이었다.

순간 퇴계는 율곡의 질문이 과공비례(過恭非禮)임을 꿰뚫어 본 것이었다. 율곡의 질문은 일종의 허언(虛言)이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퇴계는 율곡이 지나치게 사장(詞章)을 숭상하고 있다.’라고 제자 조목(趙穆)에게 편지를 써 보낼 정도로 율곡의 수사학적 문장과 화려한 말솜씨에 대해서 경계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퇴계가 자신을 노마(駑馬), 즉 걸음이 느린 말로 재능이 모자라는 사람으로 표현하고 한바탕 크게 웃었던 것은 율곡에게 충격을 주기 위한 일종의 할()이었던 것이다.

일찍이 율곡이 금강산에 있을 무렵 암자에 숨어 살던 노승과 한바탕 선문답을 벌인 것처럼 이번에는 퇴계를 상대로 유교적 법거량을 펼쳐 보인 것을 깨닫고 퇴계는 한 방망이 후려갈긴 것이었다.

퇴계의 이러한 모습은 아이로니컬하게도 중국에 있어 달마의 첫 번째 제자였던 혜가(慧可)와의 대화를 연상시킨다.

밤새 큰 눈이 내렸는데도 달마를 찾아온 신광은 자신을 제자로 받아들일 것을 간청하여 눈 속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이에 달마가 부처의 위없는 묘한 도는 부지런히 정진하여 행하기 어려운 일을 행하고 참기 어려운 일을 참아야 하거늘 네 어찌 작은 공덕과 작은 지혜와 교만한 마음으로 참법을 배우겠는가. 이는 헛수고만 할 뿐이다.’라고 거절하자 신광은 칼을 뽑아 왼쪽 팔을 끊는다. 순간 이 끊어진 왼쪽 팔을 달마에게 내어 들자 잘린 왼쪽 팔에서 흘러나온 선혈이 무릎을 지나도록 쌓인 눈을 붉게 물들이는 것을 본 달마는 마침내 신광의 이름을 혜가라고 고쳐주고 정식 제자로 맞아들인다.

이때 혜가는 스승에게 첫마디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스님 제 마음이 편안치 못합니다. 스님께서 평안하게 해주소서.”

자신의 마음을 편안케 해 달라.’는 혜가의 첫마디를 들은 순간 달마는 대답한다.

그 마음을 가져오너라. 그리하면 내가 평안케 해주리라.”

혜가는 한참을 생각한 후에 대답한다.

아무리 찾아도 그 마음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자 달마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가 이미 네 마음을 평안케 하였다.”

달마와 첫 제자였던 혜가와의 대화에서 그 유명한 안심법문(安心法門)이 탄생된 것.

퇴계와 율곡과의 마음이 편안한 이후라야 능히 사려할 수 있다(安而後能慮)’의 토론은 그런 의미에서 달마와 혜가 사이에 오간 안심법문과 상통하는 것이었다. 혜가가 제 마음이 편치 못합니다. 스님께서 평안하게 해주소서.’하고 호소하였을 때 그 마음을 가져오너라. 내가 평안케 해주리라.’라고 대답함으로써 아무리 찾아봐도 그 마음은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 달마처럼 퇴계는 율곡이 편안한 마음을 얻지 못하겠다.’라고 하소하자 그 마음은 탐구하고 또 탐구하여 나가면 쌓이고, 깊이 익숙해져서 점점 밝아지고 사리의 실체가 나타나게 돼 자연 얻을 수 있는 것이지, 처음부터 인간의 마음속에 깃들어 있는 본성이 아님을 가르쳐 준 것이었다.

결국 퇴계는 마음속에 깃들어 있는 본성이야말로 이()임을 설법해준 것이었다. 이는 주자사상의 핵심인 성즉리(性卽理)’, 본성이 곧 이임을 가르쳐준 것이었다.

실제로 달마의 소림사 앞뜰에서 신광이 왼쪽 어깨를 벤 그날 밤 밤새도록 큰 눈이 내린 것처럼 율곡이 머물렀던 계당에서의 마지막 밤에는 이틀 연속 내리던 봄비는 어느새 진눈깨비로 변해 있었다.

기록에 의하면 율곡이 강릉으로 떠나가던 날 아침에는 밤새 내리던 진눈깨비가 함박눈으로 변하여 온 강산에 흰 눈이 쌓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간신히 꽃망울을 터트리던 매화꽃잎에 참따랗게 눈이 쌓여 설중매의 장관을 연출하고 있었다. 가지 위마다 눈부신 설화를 피어나게 하고 있었지만 매화꽃은 여전히 꿈결 같은 향기를 내뿜고 있었다.

하오면 스승님.”

크게 깨달음을 얻은 율곡이 다시 퇴계에게 물었다.

스승님 말씀대로 주자가 말한 편안한 뒤에 능히 사려 깊은 것사려가 깊은 것에 능히 얻는 것의 가장 나아가기 어려운 것은 과연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

단호하게 퇴계가 대답하였다.

().

열두 살이 되었을 무렵 작은아버지 이우로부터 유교의 경전인 사서삼경을 배울 무렵 논어를 배우던 퇴계는 문득 이해할 수 없는 글자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은 이()라는 글자였다. 숙부에게 이의 뜻을 물었더니 숙부가 머뭇거리자 퇴계는 이렇게 자신의 생각을 말하지 않았던가.

모든 사물에서 마땅히 그래야 할 시()가 이()가 아닐까요.”

이때 숙부는 감탄하여 퇴계에게 말하였었다.

너의 학문은 이로써 문리(文理)를 얻은 것이다.”

이처럼 12살에 황홀하게 깨달았던 이()의 의혹은 평생 동안 참구하는 퇴계의 화두가 되었던 것이다.

하오면

율곡이 얼굴을 들어 물어 말하였다.

어떻게 하면 이()를 터득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퇴계는 대답대신 잔에 술을 따라 율곡에게 내어주며 마시기를 권유하였다. 두 사람의 마지막 밤에는 간단하게 주안상이 마련되어 있었던 듯 보인다. 이는 헤어질 무렵 퇴계가 율곡에게 주었던 전별시(餞別詩) 중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오는 것을 통해 알 수 있다.

한잔 술을 다시 권하며 내 어찌 만날 날들을 짧다 하겠는가.”

몸이 허약했으나 퇴계는 반가운 사람을 만나면 다정하게 술을 나눠 마시는 즐거움을 누리고 있었다. 심지어 해마다 99일이면 구월고사(九月故事)라 하여 높은 산에 올라 고향을 바라보며 술을 마시는 풍속을 따라서 가을 국화 한 다발을 꺾어 들고 취미산(翠微山)에 올라 술을 마시는 풍류까지 즐기고 있었던 것이다.

스승이 건네주는 술잔을 받아 율곡은 얼굴을 돌려 술을 마셨다. 율곡이 술을 마시자 퇴계는 대답하였다.

그대가 어떻게 하면 이를 깨칠 수 있느냐고 물었으니, 내가 대답하겠소. 그것은 바로 주일무적인 것이오.”

주일무적(主一無適).

이를 직역하면 마음이 한 가지 일에 집중하여 흩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을 의미한다. 순간 율곡은 마음속에서 크게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왜냐하면 금강산에 머무르던 1년 반 동안 율곡은 자나 깨나 모든 것은 하나로 돌아간다. 그러면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萬法歸一 一歸何處)’라는 조주의 화두에 전념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율곡은 이 난해한 화두를 붙들고 깊은 선정에 빠져 들었던 것이다.

모든 것이 하나로 돌아간다. 저 나무도, 저 구름도, 저 산도, 저 물도 하나로 돌아간다. 태어남도, 죽음도, 번뇌도, 하나로 돌아간다. 그러하면 이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

그런데 퇴계는 유교에 있어서도 같은 의미를 지닌 주일무적’, 마음이 한 가지 일에 집중하여 흩어지지 않는다.’라는 심법(心法)에 대해서 말하고 있음이 아닌가.

이미 불교적 화두에 익숙해져 있는 율곡이었으므로 퇴계가 던진 말을 직관에 의해서 재빠르게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하오면 스승님

율곡이 다시 물었다.

마음이 주일무적하려면 몸은 어떻게 가져야 합니까.”

그러자 퇴계는 다시 빈 잔에 술을 따라 율곡에게 주었다. 율곡이 잔을 비우기를 기다려 퇴계가 대답하였다.

마음이 주일무적하기 위해서는 오직 몸이 경()에 머무르고 있어야 하오.”

().

퇴계가 말하였던 대로 성리학은 이()를 깨닫는 것이고, 그 이를 깨닫기 위해서는 마음이 한 가지 일에 집중되어 흩어지지 않는 주일무적(主一無適)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주일무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경() 속에서 정제엄숙(整齊嚴肅)해야 한다는 것이 퇴계의 가르침이었던 것이다.

()은 문자 그대로 사물을 공경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지극히 섬기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퇴계가 12살에 터득하였던 이()의 화두를 46년간 참구한 끝에 깨달은 진리의 골수였던 것이다.

퇴계는 죽기 2년 전 나이 어린 임금 선조를 위해 10가지 글과 그림의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써서 올린다.

이 성학십도는 퇴계의 대표적인 저술로 손꼽히고 있는데, 그 저술의 핵심은 성학은 오직 경을 통해서만 그 근본정신을 체득할 수 있다.’라고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퇴계는 성학은 경학(敬學)이라고까지 결론을 내리고 경이야말로 일심(一心)의 주재이며, 만사의 근본이다.’라고 선언하고 있다. 또한 퇴계는 지극한 섬김’, 즉 지경(至敬)을 통하여 인()을 구함으로써 성인에 도달할 수 있다고 말하고 경이야말로 성학의 처음이자 끝이라고까지 단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퇴계는 다시 말을 이었다.

잘 들으시오. 움직이지 않는() 가운데서 주일무적한 것은 경()의 체(), 움직이는() 가운데에서도 온갖 변화에 대응하지 않고서 그 주재자(主宰者)를 잃지 아니하는 것은 경()의 쓰임새()인 것입니다. 오로지 경이 아니면 지선(至善)에 머무를 수 없고, 경 가운데에 반드시 지선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정()은 마른 나무나 죽은 재가 아니며, ()은 분분(紛紛)하고 소란(優優)스러운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동정(動靜)이 한결같고 체용(體用)이 서로 떠나지 않는 바로 그것이 지선인 것입니다.”

퇴계의 말은 율곡의 심장에 비수처럼 내리꽂혔다. 그로서는 마침내 학문의 방향이 결정되는 운명적인 순간이었다.

훗날 율곡이 내가 학문의 길을 잃고 방황하고 있을 때 사나운 말처럼 이리저리 뛰고 하며 가시밭길의 거친 들에 있다가 방향을 고쳐서 옛길로 돌아오게 되었으니, 이는 실로 퇴계 선생의 계발에 힘입은 것이다.’라고 술회하였던 것처럼 가시밭의 거친 들에서 학문의 본길로 돌아오는 엄숙한 순간이었던 것이다.

머물러 있거나, 움직이거나, 잠들거나, 깨어 있거나, 말을 하거나, 밥을 먹거나, 공부를 하거나 마음은 시종여일하게 지경에 머물러 있어야만 마침내 마음의 근본이 이성(理性)을 깨달을 수 있음을 느낀 것이었다.

그러므로 율곡이 금강산에서 의심하였던 모든 것은 하나로 돌아가는데 이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의 불교적 화두는 스승 퇴계의 가르침에 의해서 유교식으로 다음과 같이 타파되는 것이었다.

모든 것은 하나로 돌아가는데 이 하나는 바로 이(). 그렇다면 이 하나는 어디로 가는가. 그것은 바로 경()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퇴계가 율곡에게 가르쳤던 모든 것이 하나로 돌아가는데 이것이 바로 이()’란 말 중의 이는 서양철학에서는 이성(理性:reason)이라고 불린다.

이성이란 인간의 논증적 사고능력을 가리키며, 직관적 능력을 가리킨다.

또한 사물을 판단하는 힘을 의미하며 참과 거짓, 선과 악을 구별하는 능력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선과 진리를 가늠케 하는 이성은 욕망과 감정으로부터 해방되고 인간을 인간답게 하고 동물과 구별 짓게 하는 순수한 정신 능력인 것이다.

이로써 인간은 이성적인 동물이다.’라는 인간에 대한 고전적인 명제가 성립된다.

특히 이퇴계보다 약 100년 후에 태어난 데카르트(15961650)는 처음에는 수학과 과학을 연구하여 빛의 굴절법칙을 발견한 당대 최고의 과학자였으나 점점 학문에서 확실한 기초를 세우려 하면 적어도 조금이라도 불확실한 것은 모두 의심해 보아야 하는데, 모든 사물의 존재를 의심스러운 것으로 치더라도 이런 생각, 이런 의심을 하는 자신의 존재만은 의심할 수 없으므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cogito,ergo sum)’라는 근본원리를 확립한 근대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던 대사상가였던 것이다.

데카르트는 만인이 태어날 때부터 평등하게 갖고 있는 이성능력을 양식(良識)’ 또는 자연의 빛이라고 표현하였으며, 이성은 어둠을 밝히는 빛으로 정의해 왔다.

이성으로 우주의 여러 사상(事象)을 어떤 비례적, 조화적 관계로 바라볼 때 어두운 혼돈(카오스) 속에서 일정한 법칙에 놓여있는 조화로운 우주가 나타난다.

따라서 본래 그리스어인 로고스(logos:이성), 또는 라틴어인 라티오(ratio:이성)에는 조화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밝은 빛으로서의 이성에 대비해서 말하면 감정적 욕망이나 정념(情念)은 어둡고 맹목적인 힘이다.

기쁨, 슬픔, 노여움, 욕망, 불만들의 감정은 어둡고 비합리적인 힘으로 내부에서 폭발한다. 이것을 이성적인 의지로 통제할 수 없다면 정신의 자율성은 유지될 수 없다.

우리 마음 속에는 자율적으로 자신의 의지를 결정하는 이성적 능력이 있는데, 그것에 의해서 도덕적 행위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이런 서양철학의 이성론(理性論)’은 퇴계의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과 다르지 않음이니, 퇴계가 12살 때 황홀하게 깨달았던 모든 사물에서 마땅히 그래야 할 시()가 바로 이라는 명제는 바로 데카르트가 주장하였던 이성론과 완전한 일치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퇴계는 서양철학에 있어 근대철학의 아버지인 데카르트보다 100여 년 앞서 이기론(理氣論)’을 주장한 동양철학의 아버지라고 불릴 만한 것이다.

바로 이것이 이퇴계의 위대한 점이며, 바로 이러한 점 때문에 원효를 불교에 있어 우리 민족이 낳은 대사상가라면 퇴계는 유교에 있어 우리 민족이 낳은 대사상가이며, 해동공자(海東孔子)로 불리는 유가의 완성자이자 공자의 현신인 것이다.

마침내 23일의 운명적인 해후가 끝나고 예안을 떠나던 아침에는 밤새도록 내리던 흰 눈이 쌓여 온 강산은 수묵화처럼 변해 있었다. 봄을 재촉하는 춘설(春雪)이었다. 스승과 제자로서의 삼배를 올리고 율곡이 길을 떠나려 하자 퇴계는 율곡에게 시를 한 수 지어준다.

율곡이 계상에 머무르고 있는 동안 퇴계는 율곡을 위해 두 수의 시를 짓는다. 첫 번째 시는 율곡이 처음으로 찾아왔을 때 지은 만남의 시, 두 번째 시는 율곡이 떠날 때 지은 전별시였다. 두 시의 제목은 비속에 삼일동안 계상을 방문한 이율곡에게(李秀才見訪溪上雨留三日)’인데, 흥미로운 것은 이 시 속에서 율곡을 수재(秀才)’ 재능이 뛰어난 사람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첫 번째 시는 다음과 같다.

젊은 나이 큰 명성에 그대는 서울에 살고/늙은 나이 병 많은 이 몸은 황폐한 촌구석에 사니 어찌 알았으리,/이날 그대 찾아올 줄을./지난날의 그윽한 회포를 다정히 이야기해 보세(早歲盛名君上國 暮年多病我荒村 那知此日來相訪 宿昔幽懷可款言).”

23일의 상봉을 끝내고 헤어질 무렵 퇴계가 율곡에게 지은 전별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재덕 지닌 그대를 이월 봄날 만나니 기쁘기 한량없어 삼일 동안 붙들어 놓으니 서로 마음 통하는 듯하네.

비는 늘어진 은죽처럼(소낙비의 비유) 시내 기슭 가볍게 두드리고 눈은 구슬 같은 꽃이 되어 나무 몸을 덮어 싸네.

말은 진흙길에 빠져 가다가 허덕거리는데 날 개어 지저귀는 새소리에 풍경 비로소 새롭네.

한 잔 술 다시 권하며 내 어찌 만난 날 짧다 하리.

지금부터 망년지교의 의를 더욱 친해보세(才子欣逢二月春 挽留三日若通神 雨垂銀竹溪足 雪作瓊花樹身 沒馬泥融行尙阻 喚晴禽語景新 一杯再屬吾何淺 從此忘年義更親).”

기록에 의하면 율곡이 계상을 떠나려할때 퇴계는 율곡에게 시를 지어보도록 차운(次韻)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러자 율곡은 의마지재(倚馬之才)로 즉석에서 두 편의 즉흥시를 읊는다.

의마지재.

이 말은 말에 잠깐 기대어 있는 동안 만언(萬言)의 글을 지었다는 중국 진()나라의 원호(袁虎)의 고사에서 유래된 말로 조조의 맏아들이었던 조비가 자신의 동생이었던 조식에게 일곱 걸음을 옮기어 놓는 사이에 시를 짓도록 하는 칠보시(七步詩)’의 명령을 내린 것과 흡사한 동의어인 것이다.

이를 통해 율곡은 말에 기대어 있는 잠깐 동안 두 수의 시를 지을 만큼 뛰어난 문재를 갖고 있던 듯 보인다.

율곡전집(율곡전집)’에도 삼가 퇴계 선생이 보인 운에 차운하다(奉次退溪先生寄示韻二首)’라는 시의 제목은 분명히 보이고 있지만 그 시의 내용은 그 어떤 기록에도 보이지 않는 것은 실로 유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훗날 퇴계가 제자 조목에게 보낸 편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와 있을 뿐이다.

일전에 서울에 사는 선비 이이가 성주로부터 나를 찾아왔었네. 비 때문에 사흘을 머물고 떠났는데, 그 사람됨이 명랑하고 시원스러우며 지식과 견문도 많고 또 우리 학문에 뜻이 있으니, 후생가외(後生可畏)라는 전성(前聖:공자)의 말이 참으로 나를 속이지 않았네. 다만 그가 사장(詞章)을 너무 숭상한다는 소문을 일찍이 들었기에 이를 억제하려고 시를 짓지 말도록 하였네. 떠나던 날 아침에는 마침 눈이 내렸기에 시험 삼아 시를 지으라고 차운하였더니, 즉석에서 두 편의 시를 지었네.”

그러고나서 퇴계는 조심스럽게 율곡의 시를 평가하고 있다.

그런데 이 시를 평가하자면 그 사람만 못하다 하겠네. 그러나 역시 볼 만해 지금 여기에 동봉하니 읽은 후에 다시 돌려보내 주었으면 좋겠네.”

편지의 내용으로 보면 율곡이 지은 시는 퇴계가 간직하고 있었던 듯 보인다.

율곡의 전집에는 이 시가 실려 있지 않고 돌려보는 과정에서 시의 행방이 묘연하게 사라져 버린 것처럼 보인다.

어쨌든 말을 타고 작별인사를 나누는 율곡에게 퇴계가 다가가 말하였다.

마지막으로 족하(足下)에게 드릴 물건이 하나 있네.”

족하(足下)’는 비슷한 연배에서 상대방을 높여 부르는 말로 흔히 편지글 같은 데서 상대방을 높여 부르는 존칭이나 퇴계는 이제 막 헤어지는 율곡이 자신과 나이를 따지지 않고 사귀는 우정’, 망년지교(忘年之交)’를 맺을 수 있는 상대임을 인정하고 그렇게 높여 불렀던 것이다.

퇴계는 손에 들린 물건을 율곡에게 내어 밀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반드시 동구 밖에 나간 후에야 이것을 펼쳐 보시게나.”

알겠습니다.”

율곡은 스승과의 약속을 지켰다.

어느덧 음산하던 하늘은 말짱하게 개어 양광이 흘러넘치고 있었다. 밤새도록 내린 눈은 온 누리에 적막강산이 되어 천 리에 뻗친 수수깡 밭 위를 하얗게 휩싸 안았고, 그 위에 눈부신 봄볕이 눈빛을 반사하며 눈부시게 반짝이고 있었다.

퇴계의 시처럼 따뜻한 봄볕에 녹은 길은 진흙밭이 되어 말은 허덕이며 걸어가고 있었고 날 개어 지저귀는 새들은 눈밭 위를 떼 지어 나르고 있었다.

종자를 앞세우고 느릿느릿 말을 타고 가는 율곡의 마음도 그 찬란한 봄볕으로 말짱하게 개어 있었다.

생각해보면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해 번민하고 방황하던 끝에 찾은 예안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불과 사흘 만에 율곡의 어두웠던 마음에는 광명이 비치고 새삼스레 잊어버린 옛길에 대한 열정이 끓어오르는 것을 율곡은 느끼고 있었다.

나는 이제 길을 잃은 미친 말이 아니다.”

마상에서 율곡은 소리 내어 중얼거렸다.

나는 이제 더 이상 길을 잃고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사나운 말은 아닌 것이다.”

말 위에서 천천히 읍성을 빠져나가고 있는 동안 해는 더욱 더 떠올라 온통 옥양목처럼 흰눈이 깔린 설원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욱일(旭日)이었다.

사흘 동안 계속 내렸던 비와 눈이 마침내 그치고 아침 해의 승천(昇天)을 마상 위에서 보면서 율곡은 줄곧 가슴 속에 드리웠던 미망(迷妄)의 어두움이 한꺼번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그 순간 율곡은 하늘과 땅 사이에 충만한 지극히 크고 지극히 강한 원기(元氣)를 느꼈다.

호연지기(浩然之氣)였다.

호연지기는 일찍이 맹자가 제자였던 공손추와 대화를 나누다가 공손추가 감히 묻겠습니다만 스승님께서는 어디에 장점이 있으십니까.’하고 물었을 때 나는 말을 알며(知言), 나는 나의 호연지기를 잘 기르노라.’라고 대답하였던 데서 나온, 맹자가 남긴 유명한 성어였던 것이다. 이에 공손추가 다시 감히 묻겠습니다. 무엇을 호연지기라고 합니까.’하고 묻자 맹자는 대답한다.

그 호연지기라는 것은 지극히 크고 또한 강하니, 정직으로서 잘 기르고 해침이 없으면 온 천지 사이에 꽉 차게 된다. 그 호연지기는 의()와 도()에 배합되니, 이것이 없으면 굶주리게 된다(결핍하게 된다). 이 호연지기는 의리(義理)를 많이 축적하여 생겨나는 것이다.”

호연지기.

율곡은 욱일승천하는 아침 해를 바라보면서 하늘과 땅 사이에 정기(精氣)가 충만한 것을 느꼈다.

그 순간 율곡은 크게 깨달았다. 그동안 자신이 줄곧 방황하였던 것은 내 몸 속에 스스로 깃들어 있는 호연(浩然)을 깨닫지 못하고 그릇된 방법으로 수양하였기 때문인 것을.

주자도 이에 대해 말하지 않았던가.

()란 본래 몸에 충만되어 있어 스스로 호연한 것이지만 수양을 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부족하게 되는 것이다.

맹자께서 호연지기하다고 말씀하신 것은 이것을 잘 길러 그 본래상태를 회복한 것이다. 말을 알게 되면(知言) 도의에 밝아서 천하의 일에 의심스러운 바가 없고, 기를 잘 기르면 도의에 잘 배합되어서 천하의 일에 두려운 바가 없게 되니, 이 때문에 큰일을 당하여도 부동심(不動心)하게 되는 것이다.”

부동심.

그 어떤 외계의 충동을 받아도 움직이지 않는 한결같은 마음.

그렇다.

율곡은 떠오르는 아침 해를 바라보면서 중얼거렸다.

내가 지금까지 사나운 말처럼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천하의 일에 의심하고 천하의 일을 두려워하였던 것은 그릇된 학문의 길을 통해 도의에 밝지 못하였기 때문인 것이다.

이때의 심정을 율곡은 말 위에서 시를 읊어 노래한다.

이 시는 퇴계와 율곡이 나눈 편지에 실려 있다.

23일의 짧은 만남이었지만 퇴계로부터 큰 깨달음을 얻었던 율곡은 평생을 통해 총 5통의 편지를 보내고 있다. 율곡이 편지를 보낼 때마다 퇴계 역시 꼬박꼬박 답장을 씀으로써 두 사람 사이에 오간 서신은 모두 10통이 넘고 있다.

그중 마지막으로 서신이 교환된 것은 퇴계가 70세의 나이로 별세하던 1570년이었다. 이때 율곡의 나이는 35. 만약 퇴계가 더 오래 살았더라면 아마도 율곡은 더 많은 편지를 통해 스승으로부터 학문에 대한 편달(鞭撻)을 받았을 것이다.

율곡이 강릉에 머무르고 있을 무렵 퇴계가 사람을 시켜 서찰과 시를 보내오자 율곡은 계상에서 작별인사를 나누고 읍성을 빠져나올 때 마상에서 읊은 시를 스승에게 바쳐 올린다. 그 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공부에 그 누가 의심이 없으리오.

병의 뿌리는 바로 아집을 벗어나지 못함에 있네.

필경 한계(寒溪)의 물을 마시고 심간(心肝)을 밝히면 스스로 알리로다.

젊어서는 양식을 찧노라 사방을 달리시고 인마 주리고 여윈 뒤에야 빛을 돌이키셨네.

비낀 해는 본래 서산 위에 있나니 고향 길 먼 걸 어찌 근심하리까.”

시의 중간은 스승께서 찬물을 마시며 마음을 청량쇄락(淸灑落)하게 하였으므로 스스로 알게 된 경지에 이른 것을 찬양하였고, 스승도 초년에 방황하시다 그것을 깨달아 반조(返照)하심으로써 자아를 되찾았음을 칭송하고 있다.

끝에서는 나이가 많고 적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석양은 본래 서산에 없는 것인데 나그네의 인생이 세상에 나온 지 오래되어 고향이 멀어진 것만을 어찌 근심하리까.’ 하는 스승에 대한 후학으로서의 존경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다.

초반의 내용은 공부에 그 누가 의심이 없겠는가. 다만 자신의 병근(病根)은 아집에서 벗어나지 못함에 있네(學道何人到不疑 病根嗟我未全離)’를 크게 깨닫고 이러한 사실을 후회하며 가르쳐 준 스승에 대한 고마움을 노래하고 있음인 것이다.

말이 읍성을 벗어난 것은 해가 중천에 떠 있는 정오 무렵이었다.

퇴계가 살고 있는 예안은 안동이 거느리고 있는 8개의 현() 중의 하나로서 안동은 예부터 대도호부(大都護府)’라고 불릴 정도로 큰 읍성이었다. 세조 때에는 진을 두고 부사로서 병마절도사를 겸임하게 할 만큼 웅번(雄藩)이기도 하였다.

율곡은 읍성을 벗어나자마자 문득 퇴계로부터 받은 물건을 떠올렸다.

퇴계는 헤어질 무렵 율곡에게 물건을 내어주며 반드시 동구 밖을 벗어난 후에야 이것을 펼쳐 보시게나.’하고 이르지 않았던가.

약속을 지켜 마침 도읍의 읍성을 벗어났으므로 율곡은 행랑에서 그 물건을 꺼내 들고 말 위에서 내렸다. 스승이 주신 물건이었으므로 불경하게 말 위에서 그것을 펼쳐 볼 수 없음이었기 때문이었다.

율곡은 조심스레 그 물건을 들여다보았다. 종이였다.

종이는 네 겹으로 반듯하게 접혀 있었다. 농선지(籠扇紙)라고 불리는 고급종이였다. 이른바 사고지(四古紙)라고 불리던 옥판선지(玉板宣紙) 중의 하나였다.

전라도의 특산물인 농선지를 보자 율곡은 생각하였다.

어째서 스승께서는 이처럼 네 겹으로 접힌 고급종이를 자신에게 내렸음일까. 이 종이에는 도대체 무엇이 담겨 있음일까.

율곡은 천천히 종이를 펼쳐보았다.

그러나 종이 속에는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았다. 다만 다음과 같은 넉자의 문장이 적혀있을 뿐이었다.

居敬窮理

그 문장을 쓴 사람은 퇴계 선생. 이미 스승의 필체에 낯이 익어 있던 율곡은 그 글씨가 다름 아닌 퇴계 선생이 직접 쓴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순간 율곡은 그것이 퇴계 선생이 자신에게 내려준 유가의 화두임을 깨달았다. 불가에서는 스승이 제자에게 화두를 결택하여 준다. 제자는 스승이 내려준 화두를 타파함으로써 마침내 스승을 만나면 스승을 죽이고,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는 성불(性佛)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퇴계 선생은 먼 길을 떠나 다시는 못 만나게 될지도 모르는 율곡을 위해 공안(公案) 하나를 점지해준 것이다.

거경궁리.

물론 율곡은 그 말의 뜻을 잘 알고 있었다.

거경궁리는 송학의 완성자라고 일컬어지는 주자가 학문의 방법으로 주장하였던 정신통일의 수단이었다. 성리학의 요체는 한마디로 거경궁리’.‘거경(居敬)’이란 문자 그대로 경에 머무른다.’라는 뜻이요, ‘궁리(窮理)’사물의 이치를 탐구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경에 머무른다.’는 것은 유학자에게 있어 수양론이요, ‘궁리는 유학자에 있어 지식론에 해당하는 것이다.

().

원래 공자가 주장하였던 이 도는 공경(恭敬)을 의미한다. 이는 남을 대할 때 몸가짐을 공손히 하고 마음속으로는 상대방을 존경하는 태도를 뜻하는 것인데, 공자는 일찍이 정나라의 대부였던 자산(子産)을 평가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공자께서 자산을 평해 말씀하셨다.

그에게는 군자의 도가 네 가지가 있으니, 그 자신의 행동이 공손하였고, 윗사람을 섬김에 공경스러웠고, 백성들을 다스림에 은혜로웠고, 백성을 부림에 있어 의로웠다(有君子之道四焉 其行已也恭 其事上也敬 其養民也惠 其使民也義).’”

자산은 정나라의 재상으로 정나라를 잘 다스린 정치가 중의 한 사람이었는데, 공자의 이러한 평가에 의해서 행동이 공손하고, 섬김에 있어 공경스럽고, 은혜롭고, 의로운 행동을 경이라고 부르고 반드시 군자가 갖추어야 할 덕목으로 강조하였던 것이다.

예수도 제자들 사이에서 누가 제일 높으냐.’는 문제로 옥신각신하며 다투자 이렇게 말한다.

이 세상에 왕들은 강제로 백성을 다스린다. 그리고 백성들에게 권력을 휘두르는 사람들은 백성들의 은인으로 행세한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오히려 너희들 중에 제일 높은 사람은 제일 낮은 사람처럼 처신해야 하고, 지배하는 사람은 섬기는 사람처럼 처신해야 한다.(중략)그러나 나는 심부름하는 사람으로 여기에 와 있다.”

스스로를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선언하였던 예수가 자신을 심부름하는 사람’, 섬기는 사람이라고 표현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실제로 예수는 자신이 이 세상에 섬기러 온 심부름꾼임을 보여주기 위해서 최후의 만찬을 끝내고 나서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들을 씻겨 주고 허리에 둘렀던 수건으로 직접 닦아 주는 본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렇듯 인류가 낳은 3대 성인들이었던 예수와 공자가 약속이나 한 것처럼 동시에 경, 섬김에 대해서 설법한 것은 진리란 그 이르는 방법은 달라도 결국 하나임을 드러낸 구경(究竟)인 것이다.

공자가 군자가 반드시 갖추어야 할 도를 가르친 경은 초기 유가에서는 공경, 외경의 뜻으로 사용되어 예()의 근본을 무불경(無不敬)’이라고까지 표현하였으나 주자가 살던 송대에 이르러서는 오히려 주일무적(主一無適)’의 뜻으로 널리 사용되었다.

마음이 한 가지 일에 집중하여 흩어지지 않도록 하는 일종의 정신통일의 방법으로서 ()’이 유학자적인 몸가짐과 학문의 태도로 강조되어 사용되었던 것이다.

이후부터 경()은 불가에 있어 선()처럼 유가에 있어 정각도량(正覺道場)을 이루는 방편으로 널리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원래 거경궁리란 용어는 대학(大學)’에 나오는 격물치지(格物致知)’라는 말에서 발전되었다.

유교의 기본 경전은 사서오경으로, 그중 대학은 유교의 교의를 설명하고 대학의 도를 실현하기 위한 8가지 단계적 방법인 팔조목(八條目)’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옛날에 명덕(明德:천부에 밝은 덕)을 천하에 밝히고자 하는 자는 먼저 그 나라를 다스리고, 그 나라를 다스리는 자는 먼저 그 집안을 가지런히 하고, 그 집안을 가지런히 하는 자는 먼저 그 몸을 닦고, 그 몸을 닦고자 하는 자는 먼저 그 마음을 바르게 하고, 그 마음을 바르게 하고자 하는 자는 먼저 그 뜻을 성실히 하고, 그 뜻을 성실히 하고자 하는 자는 먼저 그 지식을 지극히 하였으니, ‘지식을 지극히 함은 사물의 이치를 궁구함에 있다.’”

격물치지란 말은 지식을 지극히 함은 사물의 이치를 궁구함에 있다(致知在格物)’에서 나온 것.

사물이나 현상 속에 내재하고 있는 이치를 탐구하여 나의 지식을 완전히 이룬다.’라는 뜻의 격물치지에서 격물(格物)’사물에 나아간다.’라는 뜻이고, ‘치지(致知)’앎을 완성한다.’라는 뜻인데, 그 구체적인 방법으로 주자는 격물에 이르기 위해서는 거경(居敬)’에 머물러 있어야 하며, ‘치지를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궁리(窮理)’, 사물의 이치를 궁구하여야 한다.’라고 구체적인 학설을 주장함으로써 신유학(neo-confucianism)을 주창하였던 것이다.

주자는 대학의 내용을 설명한 그의 저서 대학장구(大學章句)’에서 격물치지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격물은 사물에 이르러 그 이치를 궁구하는 것이고, 치지는 이미 내가 가지고 있는 지식을 더욱 끝까지 이루어 궁리하는 것이다.”

주자의 해설은 사물의 이치를 하나하나 철저히 궁구하여 그 극처(極處)에 다다르게 되면 궁극적으로 내가 갖고 있는 지식이 천하의 이치와 활연관통(豁然貫通)하게 됨으로써 그렇게 되면 내가 본래 가지고 있는 심지(心知)를 밝힐 수 있고, 그 작용에 의해 정심(正心)을 이룰 수 있다.’라는 뜻인 것이다.

그러므로 주자가 주장한 격물치지를 통한 활연관통은 마치 불교에 있어 화두를 타파하여 활연대오(豁然大悟)를 이룬다.’라는 뜻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거경궁리격물치지를 이루는 유가의 선법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퇴계 선생이 써준 거경궁리의 문장을 본 순간 율곡은 그러한 스승의 깊은 뜻을 헤아릴 수가 있었던 것이다.

지난밤 두 사람이 나눈 대화에서 율곡이 사려가 깊은 뒤에 능히 얻을 수 있는 가장 나가기 어려운 것이 무엇입니까.’하고 물었을 때 퇴계 선생으로부터 그것은 이().’란 대답을 들었고, ‘어떻게 하면 그 이를 터득할 수 있겠습니까.’하고 다시 물었을 때 주일무적이란 답변을 들었던 것이다.

율곡이 마음이 주일무적하기 위해서는 몸을 어떻게 가져야 합니까.’하고 다시 물었을 때 스승은 오직 몸이 경()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라고 대답하였던 것이다.

이를 통해 율곡은 마침내 금강산에서부터 갖고 있었던 만법귀일 일귀하처(萬法歸一 一歸何處)’의 불교적 화두를 모든 것은 하나로 돌아가는데, 이 하나는 바로 이(), 이 하나는 바로 경()으로 돌아가고 있다.’라고 유교식으로 타파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율곡은 스승이 써준 넉자의 활구(活句)를 쳐다보며 생각하였다.

이 글은 퇴계 선생이 내게 준 촌철(寸鐵)인 것이다. 평생 동안 지켜나가야 할 나의 화두인 것이다.

실제로 율곡은 훗날 퇴계와 나눈 열통이 넘는 편지에서 상세하게 ()’에 대해서 묻고 있다.

이에 대해 퇴계는 경이란 알기보다 행하기 어렵고, 일시적으로 행하는 것보다 오랫동안 지속하기가 더 어렵다.’라고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하는 자신도 경을 제대로 행하지 못하고 있으니 율곡은 각별히 유념해서 실천해 옮겨야 한다고 당부하면서 자신의 부끄러움을 솔직히 드러내고 있다.

그러고나서 퇴계는 거경궁리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부언한다.

아무 일이 없이 고요히 있을 때는 존양성성하고 강습을 하거나 사물을 대할 때에는 마땅한 이치를 궁리하여야만 한다. 그래야만 경의 공부는 움직임과 조용히 있을 때를 두루 통관(洞貫)하여 거의 어긋남이 없을 것이다.” 존양성성(存養惺惺).

마음을 모아 항상 깨어있음을 뜻하는 말.

항상 깨어있기 위해서는 반드시 경()에 머물러 있음을 강조하는 내용이었으니, 퇴계의 성리학은 오로지 경을 통해서만 사물의 이치를 깨달을 수 있는 경학(敬學)’이라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거경궁리.

스승 퇴계가 내려준 화두를 마음에 새기면서 율곡은 결심하였다.

나는 이제 오로지 이 공안에 대해서 간절한 마음으로 참구할 것이다. 마치 닭이 알을 품은 것처럼, 고양이가 쥐를 잡을 때처럼 굶주린 사람이 밥을 생각하고, 목마른 사람이 물을 생각하듯이 어린애가 어머니를 생각하듯이 거경궁리에 대해서 큰 신심과 분심, 그리고 의심을 품고 고구(考究)할 것이다. 그리고 평생 동안 퇴계 선생을 나의 선지식으로 삼을 것이다.

선지식(善知識).

불법을 설하여 사람을 불도로 들게 하는 덕이 높은 스님을 가리키는 말로 흔히 화두를 타파하였을 때 이를 인증하여 주는 살아있는 부처를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스승 퇴계를 유가의 선지식으로 삼아 두고두고 가르침을 얻을 것이다.

율곡의 결심은 그대로 실행에 옮겨진다.

율곡은 의심이 들 때마다 퇴계가 세상을 뜰 때까지 줄곧 편지를 통해 자신의 의문점을 전하고 이에 대한 가르침을 청하고 있다. ‘율곡전서에 의하면 모두 5. ‘퇴계문집을 보면 모두 7편의 서신이 교환되고 있는데, 총 네 차례 왕복한 서신의 내용을 비교해 보면 35세에 보낸 마지막 편지에 이르기까지 율곡의 학문은 점점 더 원숙해지고, 학문적 성숙도는 점차 깊어지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를 통해 율곡은 평생 동안 실제로 퇴계를 유가에 있어 선지식으로 생각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첫 번째 서신은 상퇴계선생별지(上退溪先生別紙)’라고 불리며 주로 거경궁리에 대해서 묻고 있는데, 두 사람 사이에 오간 문답은 율곡의 학문적 방향을 결정짓는 중요한 내용으로 손꼽히고 있다.

율곡은 퇴계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내어 자문을 구하고 있다.

율곡은 먼저 주자와 함께 거경궁리를 주창한 송대의 유학자 정자(程子:1037-1107)에 대해서 묻고 있다.

정자는 송나라의 유학을 완성한 주자에게 큰 영향을 준 사람으로 호는 이천(伊川)이다. 초기유학을 흔히 공자와 맹자의 이름을 합쳐서 공맹사상으로 부르듯 송대의 유학, 즉 성리학은 정자와 주자의 이름을 따 정주학(程朱學)으로도 불리는 것이다. 형이었던 정명도(程明道)와 함께 송학의 대가였는데, 불가에 있어 참선을 할 때 좌선법을 사용하듯 유가에 있어 거경궁리란 말을 사용함으로써 성리학의 학문론과 수양론의 골수를 이룬 진보적인 유학자들이었다.

정이천은 평소에 불가에서처럼 정좌를 잘하는 유학자들을 보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정이천은 ()이라고 말하기만 하면 문득 석씨(釋氏:부처)의 말에 끌려 들어가는 것이다. 그리하여 정자는 쓰지 않고 다만 경()자를 썼으니, 정의 편법됨을 염려했기 때문이다.’라고 말하고, ()이건, ()이건 한결같은 거경이야말로 유가의 요체임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송 대의 성리학이 불학(佛學)을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신유학 운동이었으므로 정자가 불교의 선법에 대항하기 위해서 거경의 유교적 선법을 주장하였던 것은 실로 혁명적인 발상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율곡은 퇴계에게 보낸 첫 번째 서신에서 정자가 주장하였던 거경궁리의 방법에 대해서 묻고 있는 것이다.

특히 율곡은 정자에 대해서 열등의식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정이천의 형이었던 정명도는 도기론(道器論)’을 강조하였다. 정명도는 도()와 기()의 개념을 엄격히 구분하면서도 항상 도()와 기()는 서로 분리될 수 없음을 강조하여 형이상자를 도라 하고, 형이하자를 기라 하였던 것이다. ‘원래 이대로가 도인 것(元來只此是道)인데, 사람이 그것을 깨달으면 도와 기는 둘이 아닌 것이며, 깨닫지 못하면 도와 기는 둘인 것이다라고 주장함으로써 도기론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동생의 이기론(理氣論)’과 더불어 성리학의 근간을 이룬 이 사상에서 다음과 같은 말이 고려 말부터 크게 유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정자는 도를 닦는 그릇을 실었고(마음이 근본이고), 문장은 외적인 것이요, 사장은 지엽적인 기예인 것이다(程子載道器 文章外也 詞章末藝).”

이 말은 율곡에 있어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율곡은 3세 때부터 시를 지을 만큼 문장의 천재였고, 화려한 사화(詞華)를 즐겨 짓는 시인이었던 것이다. 바로 이것을 퇴계는 경계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퇴계가 조목에게 보낸 편지에서 일찍이 그가 아름답게 수식한 사장을 지나치게 숭상한다는 소리를 들었기에 억제하려고 시를 짓지 말도록 당부하였네.’ 하고 쓴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는 것이다. 편지의 내용대로라면 23일의 짧은 만남 동안에 퇴계는 직접 율곡에게 외적인 문장에 치우치지 말고 지엽적인 사화에 매어달리지 말라.’고 충고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퇴계는 율곡이 공자의 말처럼 후생이 두려워할 만한 큰 인물(後生可畏)’이지만 다만 지나치게 꾸미고 아름답게 장식하는 사장(詞章)에 치우침으로써 자칫 도를 잃어버리고 기()에 머물게 될 것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퇴계 선생으로부터 그런 뼈아픈 충고를 직접 들었던 율곡이었으므로 첫 번째 편지에서 정자의 거경궁리 방법에 대해서 물었던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또한 율곡은 이렇게 묻고 있다.

일찍이 사마광(司馬光:10191086)아직 형상이 있지 않았던 이전부터 사달무궁(四達無窮)한 그밖에 이르기까지 사물의 이치가 다 눈앞에 펼쳐있으니 옳은 것은 배워야 한다.’라고 말하였는데, 세상의 이치란 본래 지선(至善)한 것인데, 어찌 옳지 않은 것이 있겠습니까.”

사마광은 유학자이자 공자가 편찬한 춘추에 필적하는 자치통감(資治通鑑)을 펴낸 사람.

율곡은 정자와 사마광의 말을 빌려 퇴계에게 거경궁리의 방법에 대한 가르침을 청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퇴계는 우선 궁리에 대한 설명을 다음과 같이 펼치고 있다.

궁리의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으니, 한 방법에 구애될 수는 없다. 만약 한 가지 일을 궁리하다가 터득하지 못하면 곧 싫증과 권태가 생겨 마침내 다시 궁리하는 것을 일삼지 못하는 것을 천연(遷延) 또는 도피(逃避)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궁리하는 일이 혹 여러 가지가 뒤섞이어 그 요긴한 점을 힘써 찾아도 통할 수 없게 하고, 억지로 밝혀 살피기 어렵기도 할 것이니, 이럴 때는 마땅히 이 일을 잠시 버려두고 따로 다른 일에 대하여 궁리해야 할 것이다.”

퇴계의 답장은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이와 같이 궁리에 궁리를 거듭하여 자꾸 쌓아 올리고 깊이 생각해서 자연히 심지(心知)가 차츰 밝아지고 의리의 실상도 차츰 눈앞에 나타날 때에 다시 그 전에 궁리하여 터득하지 못하였던 것을 가지고 상세히 궁구하여 이미 터득한 도리와 참험(參驗)하고 대조해 나가면 부지불식간에 앞에서 미처 궁리되지 못했던 것까지도 일시에 서로 깨닫게 된다. 이것이 바로 궁리의 활법(活法)이다.”

그러고 나서 퇴계는 율곡이 물었던 사마광의 지선(至善)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대답하고 있다.

또 사물의 이치는 본질에서는 물론 지선이 아닌 것이 없지만 그러나 선()이 있으면 반드시 악()이 있고 시()가 있으면 비()가 있는 것이 필연이니, 그러므로 무릇 격물궁리(格物窮理)하는 것은 그 시비와 선악을 밝혀 취사 선택을 잘하고자 하는데 까닭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남달리 엘리트의식이 강했던 율곡이 다만 스승으로부터 받은 유가적 화두인 거경궁리에 맹목적으로 집중할 리는 없었다.

율곡은 퇴계와 달리 사람들과의 인화 관계는 썩 좋지 않았고, 벼슬길에 올랐던 젊은 시절에도 원로대신 이준경(李俊慶)에게 당돌하게 도전하였을 만큼 평생 동안 필요 이상 많은 정적을 만들었던 트러블 메이커이기도 했었다.

이러한 사실은 율곡이 불의를 참지 못하고 바른 말을 잘 하는 선비기질 탓이기도 하지만 남다른 선량의식 때문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율곡이 유가의 시조인 공자와 맹자가 평소에는 ()’을 덕목으로 주장하였으면서도 막상 자신들은 경에 위배되는 오만한 태도를 취한 불합리한 행동을 묵과하였을 리는 없을 것이다.

율곡이 정자사마광을 빌려서 거경궁리의 방법을 퇴계에게 묻는 한편 실제로는 거경에 위배된 행동을 하였던 공자와 맹자의 모순된 행동에 대해 의문을 가졌던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율곡이 퇴계에게 보낸 첫 편지 말문에서 이러한 사실에 대해서 신랄한 질문을 던진 것은 몹시 흥미롭고 재미있는 사실이다.

실제로 경을 부르짖은 공자도 오만하고 무례한 태도를 보인 적이 있었다.

논어의 양화편에 나오는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어느 날 노나라 사람 유비(孺悲)가 공자에게 예를 배우러 온다. 공자를 만나기를 청원하였으나 공자는 신병을 이유로 거절한다. 그러고 심부름꾼을 보내어 이 사실을 통보한다. 그러고는 곧 바로 거문고를 뜯으며 노래를 불러 제친다. 유비가 들으라고.”

공자의 이러한 오만한 태도는 가르침에 있어서는 유별이 없다.(有敎無類)’ 또는 속수의 예 이상을 갖춘 사람에게 나는 일찍이 가르치지 않은 일이 없다(自行束修以上 吾未嘗無誨焉)’라고 말한 공자의 신념과 위배되는, 실로 미스테릭한 장면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공자가 말하였던 속수(束修)’란 한 묶음의 건육(乾肉)을 말하는 것으로 옛사람들이 처음으로 서로 만날 때 예물로 가져가던 폐백으로서는 가장 간단한 것이었다.

이처럼 가르침을 청할 때는 그 누구라도 물리치지 않았던 공자가 오직 유비가 찾아와 예를 물었을 때는 아프지도 않았는데 칭병을 하고 심부름꾼을 보내어 거절하고 있는 것이다.

그뿐인가.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유비가 들으라고 일부러 거문고를 끌어당겨 노래까지 하는 것이다. 이때의 장면을 논어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거문고를 가져가 노래를 부르며 일부러 듣게 하였다(取瑟而歌 使之聞之).”

공자의 이러한 모습은 병주고 약주는 식의 약올리는 오만한 태도였던 것이다.

아프다는 사람이 문밖에 서 있는 유비가 일부러 들으라고 거문고를 연주한다는 것은 성인의 태도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뜻밖의 행동이었던 것이다.

공자의 이러한 몰상식(?)한 행동은 슬경유비(瑟儆孺悲)’란 고사성어로 널리 알려진 유명한 장면 중의 하나인데, 공자의 이러한 모순된 행동은 논어 중에서도 손꼽히는 수수께끼로 남아 전하고 있다.

그뿐이 아니다.

논어의 헌문편에는 또 한 가지 이해할 수 없는 공자의 태도가 묘사되고 있다.

원양(原壤)이 가랑이를 벌리고 공자를 맞이했다. 공자는 말하기를 어려서는 말썽만 피우고, 나이 들어서는 뭐하나 아는 것도 없는 주제에 늙어서는 죽지도 않는군. 늙어서도 죽지 않는 것은 나이 도둑질이다(幼而不孫弟 長而無述焉 老而不死 是爲賊)’하고는 들고 있던 지팡이로 원양의 정강이를 후려쳤다.”

아무리 원양이 무례하게 가랑이를 벌리고 공자를 맞이하는 불손한 태도를 취했다고 하더라도 들고 있던 지팡이로 그의 정강이를 후려친다는 공자의 태도는 성인의 모습으로는 어울리지 않는 장면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취한 것은 공자뿐이 아니었다.

맹자 역시 성인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오만한 태도를 보인 것이었다.

이 장면 역시 공자의 거문고로 유비를 경계하다.’라는 뜻의 슬경유비와 함께 유가에 있어 대표적인 수수께끼에 속하는 장면인데, 맹자의 공손추 장구하(公孫丑 章句下)’편에 나오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맹자는 오랫동안 선왕(宣王)의 객경으로 제나라에 머물며 자신의 왕도정치를 펴려 했었다. 그러나 뜻대로 되지 않자 제나라를 떠나면서 잠시 획()이라는 땅에 머물고 있었다.

이때 맹자의 발걸음을 멈추고 출국을 만류하기 위해서 신하 하나가 찾아온다.

그 신하는 선왕으로 하여금 맹자가 보기보다는 돈을 좋아하고 있으므로 돈을 주면 맹자를 붙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여 제나라의 수도인 임치의 서남쪽에 있는 작은 마을인 획으로 찾아온 것이었다.

그러나 맹자는 찾아온 그 신하를 철저히 무시하고 일절 응대하지 않고 안석에 기대어 비스듬히 누워버리는 것이다.

찾아온 동기가 불순하다고 해도 일체의 말에 불응하고 비스듬히 안석 위에 기대어 눕는 은궤이와(隱而臥)’의 태도를 취한 것은 법도에 지나친 것이었다.

그러자 찾아온 사람이 이렇게 불평하였다고 맹자는 기록하고 있다.

제가 제숙(齊宿)한 뒤에 감히 말씀드렸는데, 선생께서는 비스듬히 누우시고 들어주지 않으시니 다시는 감히 뵙지 않겠습니다.”

남을 겸손히 공경하고 섬겨야 한다.’라는 경()을 유가의 중요한 덕목으로 설법한 공자와 맹자가 그 이유야 어떻든 꾀병을 하고 일부러 들으라고 거문고를 연주한 것과 비스듬히 누워서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는 두 행동은 어쨌든 거경(居敬)’과는 위배된 행동이었던 것이다.

이것을 놓칠 율곡이 아니었다.

엘리트의식이 남달랐던 율곡으로서는 이것을 간과할 수 없었던 것이다.

거경의 반대말은 오타(敖惰)’.

오타란 말은 오만하고 남을 업신여기는 태도를 뜻하는 것으로 두 성인이 취했던 오타 행위를 율곡으로서는 그 원인을 해명하기 전에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율곡은 첫 번째 편지 말미에서 그 부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따져 묻고 있다.

대학(大學) 8장에서 주자는 말하였습니다.

사람이 오만한 데서 오만을 부리는 것은 상정(常情)으로서 이것은 마땅히 있을 수 있는 일이요, 사리에 합당한 일이다.’

이 말에서 공자가 비파를 가지고 노래한 것과 맹자가 안석에 기대어 비스듬히 누웠던 일을 증명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호씨(胡氏:중국 원나라의 학자. 이름은 炳文, 호는 雲峯)는 말하기를 오타는 군자에 대한 말이 아니요, 중인(衆人)에 대한 말이다. 중인들 가운데에는 본래 스스로 오타에 치우치는 자가 있다.’라고 해설하였습니다.

이 두 구절을 어떻게 절충해야 하겠습니까. 만약 저 사람은 오만하게 대할 만하다 하여 마침내 오만하게 대하면 병통이 없겠습니까.

공자와 맹자가 한 것은 곧 가르치기를 달갑게 여기지 않은 것이니, 어찌 두 성인께 오만한 마음이 있겠습니까만 이 점에 있어서 의문이 없을 수 없습니다.

실제로 주자는 율곡이 평가하였던 대로 이러한 공자의 태도를 공자는 위선자를 싫어했기 때문에 일부러 그런 행동을 취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리에 당연한 일이다.’라고 변호하고 있다.

맹자 역시 왕에게 돈을 얻으려면 자신에게 잘 보여야 한다는 불순한 목적을 갖고 찾아온 신하가 출국을 만류하는 것은 맹자의 참된 뜻을 받들어 왕에게 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거드름을 피우고 있으니 현명한 사람을 받드는 도리가 아니므로 무시하고 비스듬히 누워버린 것이다.’라고 스스로 변명하고 있다.

그러나 율곡으로서는 그러한 수수께끼를 퇴계에게 묻고 스승의 대답을 듣기 전에는 절대 물러서지 않고 두 성인께서 오만한 마음이 어찌 있겠습니까만 이 점에 있어서는 의문이 없을 수 없습니다.’라고 단호한 태도를 보이고 있음인 것이다. 그 의문이 풀리기 전에는 스승이 내리는 거경궁리의 화두라도 결코 결택할 수 없음을 드러내 보이는 무언의 시위이기도 한 것이었다.

아무리 성인의 일이라곤 하지만 의심이 있으면 결코 용납할 수 없다는 율곡의 태도는 물론 엘리트의식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 가지 사물을 대립된 두 가지 규정의 통일로 파악하는 서양철학에서의 변증법(辨證法:dialectic)을 연상시킨다.

인식이나 사물은 정(), (), ()의 삼 단계를 거쳐야만 발전될 수 있고 진리에 이를 수 있다는 서양철학의 철학적 진리이자 그 방법론인 변증법처럼 율곡은 스승 퇴계가 점지해준 거경궁리의 화두를 일단 받아들이()지만 어느 순간 의심하고 부정한다(). 이러한 모순구조를 극복해야만 마침내 거경궁리의 화두가 절대적 진리로서 마음속에 자리 잡을 수() 있었기 때문에 집요하게 율곡은 스승에게 따져 물었을 것이다.

퇴계는 편지를 통해 이러한 율곡의 치열한 구도정신을 짐작하게 된다. 그리하여 퇴계는 다음과 같은 답장을 율곡에게 써 보낸다.

호씨가 말한 오타는 군자에 대한 말이 아니요, 중인들 가운데에는 본래 스스로 오타에 치우치는 자가 있다.’란 말은 사실이다. 주자가 또한 이를 해석해서 사람은 중인(衆人)을 가리키는 것이다.’하였고, ‘상인(常人:일반 사람)의 감정은 오직 구하는 바에 치우칠 뿐 성찰(省察)에는 이르지 못한다.’하였으니, 그러한 공자와 맹자와 같은 성인들의 행동은 그런 가운데서 행해진 오만한 행동은 아닌 것이다.”

퇴계의 대답은 공자와 맹자가 얼핏 보면 오만하고 남을 업신여기는 듯한 행동을 한 것은 공자를 대했던 유비나 맹자를 찾아왔던 선왕의 신하가 오만하고 남을 업신여기는 오타의 행위에 치우친 상인들이었으므로 짐짓 그러한 행위를 취하였을 뿐인 것이다.

공자와 맹자와 같은 성인들은 한쪽으로 치우치는 생각에 빠지는 일이 없어 중정(中正)하고, 화평(和平)한 기상이 자재하기 때문에 실제로 오타하였던 사람은 공자와 맹자와 같은 성인이 아니라 유비나 선왕의 신하들이라고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주자가 공자가 비파를 가지고 노래한 것과 맹자가 안석 위에 기대어 누웠던 일을 끌어다가 증명한 것은 공자와 맹자가 오타했다는 말이 아니라 오타하는 행위에 대해서 성인들이 취한 행동이 이와 같다는 것뿐이라는 사실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고나서 퇴계는 율곡에게 다음과 같이 충고하고 있다.

그러므로 두 성인이 오타한 것처럼 보이는 것에 대해서 어찌 더 이상 의심할 것이 있겠으며 또한 배우는 이가 사물을 오만하고 세상을 가볍게 업신여기는 것에 대해서도 어찌 근심할 수 있겠는가.”

퇴계의 결론은 깨끗하여 한 점의 누()를 띠고서 한쪽으로 치우치는 생각에 빠지는 일이 없이 혼후(渾厚)하고, 간측(懇惻)하고, 항상 화평한 기상이 자재한 공자와 맹자 두 성인을 온전히 믿고 거경궁리의 화두를 통해 불가에 있어 성불(成佛)을 이루듯 유가에 있어서 성유(成儒)를 이루라는 스승으로서의 간절한 염원을 담고 있음인 것이다.

얼핏 보면 퇴계의 이런 답장은 모범이 되어야 할 성인들의 실체를 유지하려는 구차스러운 변명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남을 비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비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말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용서하여라.’라고 설법하였던 예수도 율법학자들을 향해 이 뱀 같은 위선자들아, 이 독사의 족속들아. 너희가 지옥의 형벌을 어떻게 피하랴.’라고 질타한 것처럼 유비나 선왕의 신하들과 같은 위선자들에게 오만한 태도를 보인 듯한 두 성인 공자와 맹자의 모습 역시 퇴계의 설명처럼 짐짓 그런 행동을 보인 것이었을 뿐, 더 이상 의심할 필요가 없이 성인의 실체는 거경(居敬)에 머무르고 있는 것이다.

이 편지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율곡이 유가 사상을 오직 주자를 통해 배우고 익히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사실은 퇴계가 주자전서(朱子全書)를 구하여 문을 닫고 한여름에도 열독하자 주위 사람들이 더위로 몸을 상할까 경계하면 이 글을 읽으면 가슴 속에서 문득 시원한 기운이 생겨나는 것을 깨닫게 되어 저절로 더위를 모르게 되는데, 무슨 병이 생기겠는가.’하고 대답하였던 것처럼 율곡도 퇴계의 영향을 받아 주로 주자라는 문()을 통해 공자와 맹자의 사상으로 들어가고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율곡에 있어 성리학은 바로 주자학(朱子學)이었으며, 주자는 스승과 마찬가지로 율곡에 있어서 유가로 들어가는 염궁문(念弓門)이었던 것이다.

스승 퇴계가 결택해준 거경궁리의 문장을 확인한 순간 율곡의 가슴 속에는 형언할 수 없는 뜨거운 감동의 물결이 용솟음치기 시작하였다.

율곡은 그 자리에서 떠나온 온계 쪽을 향해 무릎을 꿇었다. 차가운 눈밭 위에 무릎을 꿇은 주인의 모습을 보자 당황한 종자가 만류하여 말하였다.

나으리, 아니 되십니다. 눈이 차갑습니다.”

율곡은 대답도 하지 않고 의관을 정제한 후 갓을 벗었다.

정히 그러하시다면 쇤네가 자리를 깔겠나이다.”

그러나 율곡은 들은 체도 하지 아니하고 그 자리에서 스승이 있는 곳을 향하여 삼배를 올리기 시작하였다. 스승과 제자로서 예의를 갖추기 위함이었으나 원래 삼배는 몸()과 말()과 뜻()의 삼업(三業)에 경의를 표하여 올리는 불교적 배례.

스승님

삼배를 올리고 나서 율곡은 눈밭 위에 꿇어앉은 채 소리를 내어 중얼거려 말하였다.

스승님께서 내려주신 거경궁리의 요체를 몸을 다하고, 말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궁구하겠나이다. 반드시 궁극의 구경을 이루어 결초보은(結草報恩)하겠나이다.”

배를 올리고 나서 율곡은 일어서서 다시 말 위에 올랐다.

, 가자.”

말머리에 내걸린 방울이 쩔렁이며 울었다.

종자를 앞세우고 율곡은 강릉을 향해 발길을 재촉하였다.

방울 소리에 놀란 까치들이 눈 내린 나뭇가지 위에 앉아 있다가 후드득날개를 퍼덕이며 날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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