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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부 백화제방(百花齊放) 제2장 성선설(性善說)

4부 백화제방(百花齊放) 2장 성선설(性善說)

 

BC 311.

맹자는 마침내 고향인 추나라로 돌아온다.

이때 맹자의 나이는 61.(맹자의 생년월일은 분명치 않다. BC 37342일생이라는 설도 있고, BC 385년이라는 설도 있고, BC 372년이라는 설도 있다. 여기서는 가장 보편적으로 인용되는 372년으로 통일하려 한다.)

38세 무렵에 주유천하를 시작하였으므로 맹자는 거의 23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이후 BC28983세에 숨을 거둘 때까지 맹자는 또다시 고향을 떠난 적이 없었다. 오직 고향에서 제자들과 더불어 책을 저술하고 학문에만 정진하였다.

사기에도 이 무렵의 맹자를 물러와서 제자 만장들과 시경, 서경 등을 강술하고 공자의 뜻한 바를 펴서 맹자 7편을 저술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후한 때의 학자 조기(趙岐)는 맹자보다 400여 년 후대의 유학자인데, 그는 맹자제사(孟子題辭)’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물러나 평소에 제자들과 논의한 것을 모아 공손추, 만장 등의 뛰어난 제자들에게 주고 잘못된 것은 비판하고, 의문이 나는 것은 질문하게 하였으며, 법도의 말을 스스로 골라 7편을 저술하였다.”

이상의 기록을 종합해 보면 맹자는 20여년에 걸친 주유열국에서 돌아와 고향에서 죽을 때까지 책을 저술했으며, 그 일에는 맹자의 뛰어난 제자인 만장과 공손추가 참여했음이 밝혀진다. 특히 맹자는 문체의 기백이 호탕하고, 문맥이 일관되며, 사상의 전후가 일치되는 것으로 이는 선진(先秦)시기의 문헌으로는 거의 유일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청대의 고증학자 최술(崔述)맹자사실록(孟子事實錄)’에서 맹자는 맹자의 제자 만장, 공손추 등이 과거의 것을 기억하여 저술한 것이다. 그래서 두 제자의 문답이 7편 중에 유독 많으며, 두 제자는 이 책에서 자()라는 호칭을 쓰지 않았다.’라고 서술함으로써 뛰어난 제자 만장과 공손추의 영향에 힘입은 바 크다고 설명하고 있다.

맹자는 주유열국에서 돌아온 후 세상을 버리고 은둔하였다. 마치 스승 공자가 68세 때 13년간의 천하 주유를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와 6년 동안 학문에만 정진하였던 것처럼.

공자와 맹자는 이처럼 비슷한 생애를 보냈지만 어떤 면에서는 확연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공자의 말년은 제자들의 교육에 힘쓰는 한편 만인의 교과서라고 할 수 있는 시(), (), (), (), (), 춘추(春秋) 등 육경의 경서를 편찬하였다.

공자는 실제로 정치를 통하여 자신의 이상을 실현시킬 수 없는 현실 상황을 직시하며 그 이상의 실현을 후대에 기대하기 위해서 교육과 만인의 교과서인 경전에 몰두하였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공자는 위대한 교육자라고 부를 만하다.

이상의 실현을 후대에 기대한 공자의 예감대로 유가를 계승한 맹자는 공자의 왕도정치를 현실에 접목시키려고 천하를 주유한다.

원하는 것은 오직 공자를 배우는 것(願則學孔子也)’이라고 선언한 자신의 말처럼 맹자는 공자의 뒤를 쫓아 유가의 바통을 쥐고 계주(繼走)를 벌였던 릴레이 주자였던 것이다.

그러나 맹자의 사상은 공자의 경우와는 달리 20년이 넘는 주유열국에 의해서 오히려 발전되고 심화될 수 있었다.

공자의 경우 주유열국이 좌절과 고통의 연속이어서 마치 상갓집의 개와 같은 처량하고 피곤한 여정이었다면 맹자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좌절의 연속이었지만 그러나 맹자는 공자와 달리 당당하고 호연하였으며, 오히려 이러한 형극의 길로 인해 맹자의 철학은 완성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맹자의 주유열국이 공자와는 다른 성격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공자의 주유열국이 주로 각 제후국들의 군주와의 관계에서 소외되는 수직적 불화였다면 맹자는 군신 간의 불화는 물론 전국시대 때 각지에 팽배하였던 제자백가들과의 싸움까지 감행해야 하는 이중고(二重苦)의 여정이었던 것이다.

맹자가 제나라의 선왕과 벌였던 수직적 불화는 다른 제후국에서도 연속적으로 벌어지던 비극적 상황이었다.

양나라의 혜왕(惠王), 등나라의 문공(文公) 등 각 제후국들과의 관계에서도 맹자는 겉으로는 예우를 받는 것처럼 보이고 심지어 경이나 대부와 같은 관직에 오르기도 했으나 실제로 맹자는 무시를 당하거나 늘 현실정치 무대의 변두리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제후들에게 맹자는 정치적 장식품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하 관계의 수직적 대립보다 더 맹자를 괴롭힌 것은 제자백가들과 벌이는 수평적 혈전이었다.

이미 맹자와 동시대로 거친 베로 짠 옷을 입고, 멍석을 만들고, 자리를 짜는 일로 생업을 삼고, 자신이 먹을 음식은 반드시 스스로 지어서 자급자족해야 한다는 농가(農家)’와 설전을 벌인 것을 필두로 성은 선함도 없고 불선함도 없으니(性無善無不善也)’ 타고난 본성대로 사는 것이 인간의 본능이다. 음식을 좋아하고 색을 좋아하는 것은 인간의 자연적인 본능이니, 본능대로 사는 것이 옳다는 고자(告子)의 인성론을 정면으로 비판한 설전.

또한 순우곤과 같은 전국시대 최고의 세객과 그리고 공손연과 장의와 같은 종횡가들을 꺼꾸러트린 맹자의 통렬한 설전 등은 맹자야말로 강호 무림들을 찾아다니면서 꺼꾸러트리는 유가의 고수라는 사실을 연상시키는 장면인 것이다. 그뿐인가.

전국시대 때에는 맹자가 걱정하였던 대로 양주와 묵적의 언론이 천하에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양주와 묵적의 도가 없어지지 않으면 공자의 도는 드러나지 않으니, 맹자는 홀연히 이들 묵적과 양주의 요괴(?)들과도 한바탕 혈투를 벌이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이들 제자백가들과의 치열한 사투는 결국 맹자의 백전백승으로 판결이 났지만 그보다도 중요한 것은 이들과의 생사가 걸린 사투를 통해 맹자의 사상이 점점 심화되고 완성될 수 있었다는 점이었다.

이를테면 공자로부터 배우고 익힌 유가의 무술은 강호 무림들과의 실전(實戰)을 통해 보다 더 강화되고 체계화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고향으로 돌아올 때의 맹자는 대철학자로서의 기틀을 갖추고 있었던 동방불패(東方不敗)의 영웅이었던 것이다.

공자가 주유열국을 끝내고 돌아올 때 아홉굽이나 구부러진 진귀한 구슬을 품안에 간직하고 돌아왔다면, 맹자는 주유열국을 끝내고 돌아올 때 영롱한 진신사리의 결정체(結晶體) 하나를 가슴에 품고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이다.

맹자 사상의 결정체.

그것은 맹자의 사상 중에서 가장 핵심적인 성선설(性善說)이었다.

성선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선한 본성을 지니고 태어난다는 맹자의 인성론.

일찍이 공자는 중용 첫머리에서 사람의 본성은 하늘이 사람에게 부여한 것으로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하늘이 사람에게 준 성품을 갖고 태어났다 하여 하늘이 명()해준 것을 성()이라 하고, 성을 따르는 것을 도()라 하고 도를 닦는 것을 교()라고 한다.(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修道之謂敎)’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공자는 하늘이 내려준 천명을 인간의 본성이라고만 말하였지 무엇이 인간의 본성인가에 대해서는 자세히 언급한 바가 없었던 것이다.

이는 공자의 제자였던 자공(子貢)공야장(公冶長)’편에서 다음과 같이 불평하였던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선생님의 학문과 의표(儀表)에 대하여는 들을 수 있었지만 선생님의 본성과 천도(天道)에 관한 말씀은 듣고 배울 수가 없었다.”

자공의 다소 불평어린 내용을 보면 잘 알 수 있듯이 공자는 하늘의 길하늘의 명에 대해서는 말하였지만 그것의 본질에 대해서는 설명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공자의 가르침, 즉 유교는 종교적 성격이 결여되어 있는 것이 사실인 것이다. 공자의 위대한 사상과 행동의 밑바닥에는 하늘 또는 하느님(上帝)에 관한 확고한 믿음이 깔려 있으면서도 공자는 자공의 불평처럼 인간의 본성이나 천도와 같은 형이상학적 문제에는 천착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맹자는 공자가 던진 천명과 천도에 집중적으로 몰두하였다. 공자의 원시유교가 바로 학문적으로 체계화되고 발전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맹자 때문이었으니 이는 예수로부터 창시된 초기 기독교가 제3의 제자인 바울로에 의해서 체계화되고 발전된 것과 마찬가지 현상인 것이다.

따라서 유교는 공맹(孔孟) 사상으로까지 불리는데, 이는 맹자가 공자의 유가 사상을 형이상학으로 이끌어 올린 공적 때문인 것이다.

맹자는 공자가 말하였던 하늘로부터 물려받은 것을 성()’이라고 한다는 명제를 깊이 숙고하여 천성의 본질과 천성의 근본원리를 사유와 직관에 의해서 정립한 위대한 철학가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맹자는 그 유명한 성선설(性善說)’을 주창하게 된다.

맹자는 이 성선설을 자신의 말처럼 제자백가들과 부득이하게 싸우고 논쟁을 벌이면서 조금씩 조금씩 깨닫고 체계화하면서 마침내 20년이 넘는 주유열국을 끝내고 61세가 되는 노경에 이르러 고향으로 돌아올 때는 가슴 속에 결정체로서 갖고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

성선설은 맹자가 20여 년의 구도여행 끝에 깨달은 금강지(金剛智)였다. 이를 통해 맹자는 유가의 여래(如來)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맹자사상의 금강석인 성선설’.

이에 대한 실마리는 고자(告子)와의 논쟁에서 이미 엿볼 수 있다.

고자는 타고난 것을 성(生之謂性)”이라고 주장하고, 따라서 인간이 타고난 생리적 욕망인 음식과 색을 좋아하는 것은 본성이므로 본성이 시키는 대로 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사람의 본성은 선함도 불선함도 없으므로(性無善無不善也)’ 본성이 시키는 대로 사는 것은 마치 고여서 맴돌고 있는 물과 같다. 이 말은 동쪽으로 터놓으면 동쪽으로 흐르고 서쪽으로 터놓으면 서쪽으로 흐른다. 본성이 선과 불선함으로 나누어지는 것이 없는 것은 이처럼 물이 동서로 나누어짐이 없는 것과 같다.”라고 주장하였던 전국시대 최고의 쾌락주의자.

이에 대해 맹자는 다음과 같이 고자를 맹비난하고 있다.

물은 진실로 동서로 나누어짐이 없지만 어찌 상하로 나누어짐이 없다는 말인가. 인성이 선한 것은 물이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흘러가는 것과 같으니 사람은 선으로 나아가지 않음이 없으며 물은 아래로 내려가지 아니함이 없다. 물론 지금 물을 쳐서 튀어오르게 하면 이마보다 높이 올라가게 할 수 있으며, 거꾸로 쳐서 역류하게 하면 산에 머물게 할 수 있지만 이것이 어찌 물의 본성이겠는가. 다만 그 상황이 그렇게 만들 뿐인 것이다.

맹자는 다만 고여서 맴돌고 있는 정지된 호수의 물로 비유함으로써 물의 동서가 없음을 강조한 고자의 궤변을 질타하고, ‘물은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흐른다.’라는 본성을 강조함으로써 사람은 물처럼 아래로, 즉 선으로 내려가지 않음이 없다.’라는 경쾌한 논리로 자신의 성선설을 강조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서 맹자는 고자에게 다음과 같이 묻는다.

타고난 것을 성이라고 한다면 하얀 것을 희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인가.”

이에 고자는 대답한다.

그렇다.”

맹자는 다시 묻는다.

그렇다면 하얀 깃털의 흰 것이 하얀 눈()의 흰 것과 같은 것이며, 하얀 눈의 흰 것이 하얀 옥()의 흰 것과 같은 것인가.”

그렇다.”

그렇다면 개의 성과 소의 성이 같으며, 소의 성이 사람의 성과 같은 것인가.”

고자는 만물은 본질적으로 하나이니 존재의 본질이라는 시각에서 본다면 개의 본질이나 소의 본질이나 사람의 본질은 같다고 말한 것이고, 맹자는 개나 소의 본질과 사람의 본질은 다른 것이므로 그것을 동일시하는 것은 마치 말의 하얀 것을 희다고 하는 것은 사람의 하얀 것을 희다고 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지만 말이 늙은 것을 늙은 것으로 여기는 것이 사람의 나이 많은 것을 나이 많은 것으로 공경하는 것과 어찌 같을 수 있겠는가.’라고 질타함으로써 인간은 본질적으로 짐승과 다른 인의예지(仁義禮智)의 천명을 지닌 존재임을 웅변하고 있는 것이다.

, 동물에겐 본능이 있지만 인간에게는 본성이 있는데, 본능은 자신의 의지에 대한 자각이 없는 생리현상이므로 인의예지의 천명을 가진 인간과는 감히 비교될 수 없으며, 그것을 억지로 비교하려는 것은 사람과 금수의 구분(人禽之辨)’을 없애는 일이다. 금수에게는 없는 오직 사람만이 가진 내적 본질, 즉 인의(仁義)만이 진정한 사람의 본성이라고 맹자는 주장하였던 것이다.

그리고나서 맹자는 인간이 가진 본성을 다음과 같은 네 가지로 구분하고 있다.

측은지심(惻隱之心)은 사람이 다 가지고 있으며, 수오지심(羞惡之心)도 사람마다 다 가지고 있으며, 공경지심(恭敬之心)은 사람마다 다 가지고 있으며, 시비지심(是非之心) 역시 사람마다 다 가지고 있으니, 측은지심은 바로 인()이요, 수오지심은 의()이며, 공경지심은 예()이며, 시비지심은 지()이다. 인의예지는 마음 바깥에서부터 나에게 녹아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본시부터 가지고 있는 것이지만 그것을 생각하지 않을 뿐이다.”

이처럼 고자와의 논쟁을 통해 맹자는 그 유명한 사단론을 비로소 정립하게 된다.

사단론(四端論).

이는 맹자의 핵심사상 중 골수로서 맹자에 의하면 이 사단은 모든 인간이 다 가지고 있는 것으로 일종의 선천적인 도덕적 능력인 것이다.

이는 성선설의 근거가 되는 것으로 같은 맹자의 공손추 상편에는 공경하는 마음(恭敬之心)’사양지심(辭讓之心)’으로 바꾸어 부르는 것만 다를 뿐이다.

이에 대해서 맹자는 다음과 같이 부언하고 있다.

사람에게는 모두 남에게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이 있다. 남에게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을 가지고 남에게 차마 하지 못하는 정치를 하면 천하를 다스리는 것은 손바닥 위에서 움직일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에게 모두 남에게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이 있다고 말하는 근거가 되는 것은 지금 사람들이 갑자기 한 어린아이가 우물에 들어가려는 것을 보고는 모두 깜짝 놀라고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을 갖고 있는 것이니, 그렇게 함으로써 어린아이의 부모와 교분을 맺으려는 것도 아니며 그렇게 함으로써 널리 명예롭게 되기를 구하려는 것도 아니며, 그 비난하는 소리를 듣기 싫어서 그렇게 하는 것도 아니다. 이로 말미암아 살펴본다면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이 없다면 사람이 아니며, 부끄러워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없다면 사람이 아니며, 사양하는 마음이 없다면 사람이 아니며, 옳고 그름을 가리는 마음이 없다면 사람이 아닌 것이다.”

남에게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不忍人之心)’

이것이 바로 인간의 본성이며, 어린아이가 우물에 들어가는 것을 말리는 것은 명예나 이익이나 목적을 위한 것이 아니라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惻隱之心)’ 때문이니, 이러한 마음이 있다는 것은 사람의 본성이 태어날 때부터 선한 것임을 나타내는 증거라고 맹자는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나서 맹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은 인의 단서이고, 부끄러워하고 죄를 미워하는 마음은 의의 단서이고, 사양하는 마음은 예의 단서이고, 옳고 그름을 가리는 마음은 지의 단서이다. 사단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기는 할 수 없다고 하는 자는 자신을 해치는 자이고, 자기 임금은 할 수 없다고 하는 자는 자기의 임금을 해치는 자이다. 무릇 사단이 나에게 있는 것을 모두 넓혀서 채울 줄 알면 마치 불이 처음 타오르며, 샘물이 처음 솟아나는 것과 같은 것이니, 진실로 이것을 채울 수 있다면 사해(四海)를 보호할 수 있거니와 진실로 이것을 채우지 못하면 제 부모조차 섬길 수 없을 것이다.”

맹자의 이 유명한 사단론은 네 가지 마음은 각각 다른 종류의 다른 마음이 아니라 하나의 마음(一心)’임을 가리키고 있다. 맹자는 이 사단론을 통해 유가에서 처음으로 인애(仁愛), 즉 사랑에 대해서 형이상학적인 논리를 정립하였던 것이다.

기독교의 핵심 교리는 사랑이다.

하느님은 사랑이니 원수까지 사랑하여야 하며 하느님이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라는 것이 가르침의 핵심인 것이다.

기독교의 사랑은 불교에 있어 자비(慈悲)’로 나타난다. 자비심은 부처가 중생을 불쌍히 여겨 고통을 덜어주고 안락하게 해주려는 갸륵한 마음이다. 부처의 자비심은 부처가 전생에서 굶주린 사자에게 자신의 몸을 던져 보시하는 장면으로 극대화되고 있는데 불교에 있어 자비의 정신은 (), (), (), ()’의 네 가지 무량(無量)한 마음으로 나타난다.

이를 사무량심(四無量心)으로 표현한다.

그중 첫 번째인 자무량심은 선한 중생을 대상으로 하는 마음가짐으로 번뇌에 얽매여 괴로워하는 중생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마음이다. 두 번째인 비무량심은 악한 중생을 보고 슬퍼하며 그들의 괴로움을 없애 주려는 마음이며, ‘희무량심은 청정한 수도를 닦는 중생을 보고 기뻐하고 격려하는 마음으로 점차로 다른 사람에게 널리 퍼지도록 하는 마음이며, ‘사무량심은 모든 중생을 평등하게 보아 자타(自他) 애증(愛憎)을 초월하여 자신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들에게까지 차별을 없애는 마음을 뜻하는 것이다.

그러나 공자는 이러한 사랑자비심에 대해서 언급한 적이 없었다. 공자의 사상 중에 유일하게 사랑에 해당되는 것은 ()’으로 공자는 군자로서 지켜야 할 최고의 목표를 인()이란 덕의 실천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군자로서 인을 버리면 어찌 명성을 이룩하겠느냐. 군자는 밥 먹는 동안일지라도 인을 어기지 말고, 다급한 순간일지라도 반드시 인에 의지하고, 넘어지는 순간일지라도 반드시 인에 의지해야 한다.”

공자는 심지어 은 군자에게 있어서 생명보다 더 소중한 것이라 생각되어 다음과 같이 강조하기도 하였다.

지사(志士)와 어진 사람은 살기 위해서 인을 해치는 일은 없으며, 자신을 죽여 인을 이룩하기도 한다(志士仁人 無求生以害仁 有殺身以成仁).”

옳은 일을 위하여 자기 몸을 희생한다.’라는 뜻의 살신성인(殺身成仁)’이란 고사성어는 바로 이러한 공자의 말에서부터 비롯된 것.

그런 의미에서 유교의 핵심 교리는 ()’으로 압축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인의 마음을 인애(仁愛)’로 형이상학화시킨 사람이 바로 맹자였던 것이다. 맹자는 공자가 설법한 인의 철학을 인애로 승화시켰으며, 그러한 마음이야말로 측은지심(惻隱之心)’이라고 결론 내리고 있는 것이다.

맹자는 남에게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不忍人之心)’측은지심이라고 보았으며, 이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이야말로 인간이면 누구나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선한 마음이라고 주창하였던 것이다.

맹자의 사랑학 강좌.

맹자의 사랑학 강좌의 결정체인 성선설은 그러나 20여 년에 걸친 주유열국의 와중에서 제자백가들과의 치열한 논쟁의 실전을 통해 터득한 진리였으니, 그런 의미에서 맹자와 싸움을 벌였던 사상가들은 백가쟁명의 용광로 속에서 맹자의 사상을 불을 지펴 담금질함으로써 정제하였던 역설적인 스승들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중에서 맹자에게 가장 무서운 맞수는 바로 묵자(墨子)였다.

맹자가 대적하였던 수많은 무림고수들은 나름대로 필살기(必殺技)의 무술을 지닌 강적들이었다. 그러나 그중 최고의 상수는 맹자가 묵적이라고 부르던 묵자, 그 사람이었다.

맹자가 이미 대적하였던 고자를 비롯하여 농가, 순우곤과 같은 세객, 장의와 같은 종횡가들은 묵적에 비하면 그야말로 새발의 피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사상가라기보다는 세 치의 혓바닥으로 천하를 농락하였던 떠돌이 궤변론자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묵적은 달랐다.

맹자가 살았던 전국시대 때에는 유가의 사상보다 묵적의 사상, 묵가가 천하를 휩쓸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맹자가 어찌하여 스승께서는 사람들과 논쟁하기를 좋아하십니까.’라는 제자 공도자의 질문에 내가 어찌 논쟁하기를 좋아하겠느냐. 어쩔 수 없이 그런 것이다.양주와 묵적의 언론이 세상에 가득 차서 천하의 언론은 양주에게 돌아가지 않으면 묵적에게 돌아간다.양주와 묵적의 도가 없어지지 않으면 공자의 도는 드러내지 않으니 나는 이 때문에 두려워하여 돌아가신 성인(공자)의 도를 지키고, 양주와 묵적을 막으며, 방자한 말을 몰아내며, 사설을 내세우는 자가 나오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란 대답을 하였던 맹자의 단호한 의지를 보면 잘 알 수 있는 것이다.

맹자의 이러한 비장한 각오는 그 무렵 천하를 휩쓸고 있는 묵적과 양주의 도에 대해 사생결단의 싸움을 벌여 유가로서의 순교자가 되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엿보게 하는 장면인 것이다.

이를 통해 맹자가 가장 두려워했던 대상은 바로 묵적과 양주였음이 확연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묵적, 즉 묵자의 사상은 맹자가 공자에게 사제지간으로서 보은을 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거꾸러뜨려야 했던 당대 제일의 검객이었던 것이다.

묵자.

그의 생몰연도는 정확치 않으나 대충 BC 479년에서 BC 381년으로 알려져 있다. 이 시기는 공자의 탄생 시기보다는 70여 년 정도 늦고, 공자가 죽은 바로 그 무렵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묵자가 죽은 바로 그 무렵에 맹자가 태어났으니, 묵자는 공자와 맹자 사이의 1.5세대에 해당하는 과도기적 인물인 것이다.

이에 대해 사마천은 사기에서 다음과 같이 간단하게 언급하고 있다.

묵적은 송나라의 대부로서 성을 잘 지키고 비용을 절약하였다. 어떤 사람은 그를 공자와 동시대라고 말하고, 어떤 사람은 공자 이후라고 말하고는 있지만 분명치는 않다.”

이처럼 묵자의 생존 시기는 사기의 기록처럼 불분명하지만 어쨌든 춘추시대의 말엽에서부터 전국시대에 이르는 그 시대적 격변기에 살았던 사람이라는 점은 분명한 사실인 것이다.

묵자가 태어난 것도 송나라 혹은 초나라라는 설도 있지만 대체로 공자가 태어난 노나라라는 것이 정설로 되어있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청말의 계몽사상가이자 문학가였던 대학자 양계초(梁啓超:18731929)가 묵자를 작은 예수(小基督)’라고 하고 사회적으로나 경제사상 면에서는 큰 마르크스(大馬克思)’라고 부르고 있다는 점이다.

양계초가 묵자를 작은 예수라고 비유하였던 것은 탁견이다. 실제로 묵자는 예수와 쌍둥이처럼 닮은 생애와 놀랍도록 똑같은 사상을 부르짖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묵자는 중국에서 태어난 2의 예수라고 부를 만하다.

우선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로서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났듯이 묵자도 비천한 집에서 태어났다. 공자와 맹자 등 뛰어난 사상가들 대부분이 비록 몰락하였다고는 하지만 명문가의 후손으로 태어난 것에 비하면 묵자는 천민 출신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초나라가 운제를 이용하여 송나라를 치려 하였을 때 묵자가 그 소문을 듣고 노나라로부터 열흘 밤 열흘 낮을 쉬지 않고 달려간다는 묵자공수(公輸) 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일화를 통해 여실히 드러난다.

묵자가 돌아가는 길에 송나라를 지났다. 마침 비가 와 그곳 마을 문안에 들어가 비를 피하려 하였으나 문지기가 그를 들여 보내주지 않았다.”

비를 피하려고 집안에 들어가려 하였으나 불가촉천민이라 하여 문전박대당했던 묵자.

실제로 묵자는 초나라의 왕을 만나보고는 이렇게 말한다.

저는 북방의 천한 사람입니다(臣北方之鄙人也). 듣건대 대왕께서 송나라를 공격하려 하신다는데 정말 그렇습니까.”

스스로를 비인(鄙人), 즉 천한 사람이라고 자칭하였던 묵자.

여씨춘추(呂氏春秋)’ ‘고의(高義) 에 보면 묵자 스스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저는 몸에 따라서 옷을 입고, 배나 채우려 음식을 먹으며, 떠돌아다니는 천한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고 있으니, 감히 벼슬을 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자신을 천한 사람들과 지내고 있는 천한 사람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묵자의 모습은 내가 이 세상에 죄인을 부르러 왔다.’라고 율법학자들에게 선언하고 일부러 병자, 죄인, 세리, 이방인들과 어울렸던 예수의 행동을 떠올리게 한다.

그뿐인가. 많은 학자들은 묵자의 성인 묵()이 형벌을 뜻하는 것으로 경형(), 즉 죄를 지으면 얼굴에 묵형(墨刑)을 하여 먹물로 문신하는 형벌에서 비롯되었으며, 따라서 묵자는 얼굴에 먹물문신을 하였던 죄인 출신이었을 것이라고까지 추정한다. 또 한편으로는 은 검정색을 의미하므로 그가 입던 검정색 옷과 그의 얼굴이 검은 데서 비롯돼 붙여진 이름으로 묵자는 인도에서 건너온 브라만교도이거나 회교도를 믿는 아랍사람일지도 모른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묵자의 사상이 전통적인 중화사상에서 보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교도(異敎徒)’적인 사상이자 태생적으로 불가능한 사상을 갖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만큼 묵자의 사상은 비중국적이며, 오히려 범신론(汎神論)에 가깝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한 것은 묵자가 처음에는 공자의 학문을 연구하였던 유가의 출신이었다는 점이다.

회남자(淮南子)는 묵자가 유가의 학문을 공부하고, 공자의 학술을 전수받았으며, 옛 성인의 학문을 닦고, 육예의 이론에 통달하도록유가 사상을 자신의 기초학문으로 삼았다고 전하고 있다. 이는 공자 사후 노나라에서는 개인적인 강학이 성행하였을 때였으므로 유가를 공부하였던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 묵자는 유학에 반기를 들고 유가를 박차고 뛰어나간다. 그것은 일종의 종교혁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종교개혁(Refomation).

기독교에 있어 본격적인 종교혁명은 마르틴 루터에 의해서 진행되었다. ‘금화가 현금 궤에 떨어지는 소리를 내는 순간 영혼은 연옥을 벗어나 하늘나라에 올라가리라.’ 하면서 가톨릭교회가 면죄부를 팔기 시작하자 루터는 15171031일 비텐베르크 성문에 우리의 주님이시며 선생이신 예수께서 회개하라고 하실 때 그는 신자들의 전 생애가 참회되어야 할 것을 요구하셨다.’라는 유명한 명제로 시작되는 95개의 논제를 내걺으로써 순식간에 전 유럽으로 퍼져나가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묵자는 비록 유교의 학문을 공부하고 공자의 학술을 전수받았던유자였으나 어느 순간 유가를 박차고 혁명을 일으킨 유교에 있어서의 마르틴 루터였던 것이다.

묵자가 공자에게 느낀 최초의 불만은 공자가 세상을 올바로 다스리는 데 애쓴 데 반하여 묵자는 그 자신이 천민의 출신으로 봉건제도가 지닌 모순으로 부당하게 고난을 겪어야 하는 백성들의 비참한 현실에 눈을 떴던 것이다. 특히 유가가 통치계급의 입장을 옹호하며 예악을 위주로 하여 서주(西周) 초기의 봉건사회를 재현하려고 노력한다는 사실에 대해서 큰 반감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어느 순간 묵자는 사람들의 친소(親疏)와 존비(尊卑) 관계를 엄격히 따져 봉건 계급제도를 확고히 하려는 유가의 태도와 예악이나 따지며 귀족이나 제후들에게 기생하는 유가의 비생산성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묵자의 사상을 전하는 묵자라는 책 전체가 유가의 모순에 대항하는 성격을 띠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유가에 대한 통렬한 비판은 제목 그대로 비유(非儒) 에 집중되어 등장하고 있다.

비유 편은 원래 상하 두 편으로 나누어져 있었으나 상편은 없어지고, 하편만이 남아 전하고 있다. 이 속에서 묵자는 유가의 비생산성을 다음과 같이 공격하고 있다.

또한 그들은 예의와 음악을 번거롭게 꾸미어 사람들을 어지럽히고, 오랫동안 상을 입고 거짓 슬퍼함으로써 부모님을 속인다. 운명을 믿어 가난에 빠져 있으면서도 고상하고 잘난 체하고, 근본을 어기고 할 일은 버리고서 태만하게 편안히 지내며, 먹고 마시기를 탐하면서 일을 하는 것은 게으르다. 그래서 굶주림과 헐벗음에 빠지거나 얼어 죽거나 굶어 죽을 위험에 놓여 있으면서도 이를 벗어나는 수가 없다. 이것은 마치 거지와도 같으니, 두더지처럼 음식을 저장하거나 하며 숫양처럼 먹을 것을 찾고, 발견되면 멧돼지처럼 튀어나온다. 군자들이 이것을 비웃으면 성을 내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형편없는 자들아, 너희들이 어찌 훌륭한 선비를 알겠는가.’

여름에는 보리나 벼를 동냥하다가 모든 곡식이 다 거둬 들여지면 큰 초상집만을 쫓아다니는데, 자식과 식구들도 모두 거느리고 가서 음식을 실컷 먹는다. 몇 집 초상만 치르고 나면 충분히 살아갈 수 있게 된다. 남의 집을 근거로 하여 살찌고, 남의 들을 의지하여 부를 쌓는다. 부잣집에 초상이 나면 곧 크게 기뻐하면서 말하기를 이것이야말로 입고 먹는 꼬투리이다.’라고 한다.”

이러한 유가에 대한 묵자의 비판은 마치 공자에 대한 안영의 비난과 흡사하다. 이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유가는 안영에서부터 묵자에 이르기까지 100여 년 이상 허례허식을 일삼는 말만 그럴듯하게 하는 유자의 무리로 비난받아왔음을 미뤄 짐작케 한다.

이러한 묵자의 태도는 공자의 제자 중 비교적 후학에 속하지만 유학의 전승과 발전에 가장 깊은 영향을 끼쳤던 자하(子夏)와의 설전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자하는 공자보다 44세 아래였고, 만년에는 서하(西河)에 살면서 제자들 교육에 힘썼는데, 공자가 죽을 무렵에 태어난 묵자는 자연 자하에게서 유학의 공부를 하기도 하고, 논쟁을 하기도 하였을 것이다. 특히 말년에 자하는 아들을 잃고 지나치게 애통한 나머지 너무 울어 눈이 먼 장님이 되었는데, 자하는 공자가 남기고 간 진귀한 구슬을 간직하고 있었던 수법제자(授法弟子)이기도 했다.

그러한 자하의 무리와 묵자는 어느 날 다음과 같이 논쟁을 벌이기 시작한다.

자하의 무리가 묵자에게 물었다.

군자도 싸우는 일이 있습니까.’

묵자가 대답하였다.

군자는 싸우는 일이 없습니다.’

그러자 자하의 무리가 말하였다.

개나 돼지도 싸우는 일이 있는데, 어찌 선비에게 싸우는 일이 없겠습니까.’

묵자가 대답하였다.

슬픈 일이군요. 말로는 탕임금과 문왕을 일컬으면서도 행동은 개나 돼지에 비유하다니, 슬픈 일이오.’”

이러한 유가에 대한 비난은 유학과 묵학을 함께 공부한 정자(程子)와의 대화에서도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이 장면은 묵자의 공맹(孔孟) 에 두 대목이나 실려 있다. 그중에서 묵자가 유가의 사상을 종합적으로 비판한 대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묵자가 정자에게 말하였다.

유가의 도에는 천하를 잃게 하기를 충분한 네 가지 주장이 있다. 유가에서는 하늘이 밝지 않고 귀신은 신령스럽지 않다고 하며, 하늘과 귀신에 대하여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데, 이는 천하를 잃기에 충분한 것이다. 또 후히 장사를 지내고 오래 복상을 하면서 관의 겉 관을 중후하게 하고 많은 수의(壽衣)를 마련하여 장사 지내는 일을 이사하듯 하며, 3년 동안 곡하고 울어서 부축해 준 뒤에야 일어날 수 있고 지팡이를 짚은 뒤에야 다닐 수 있으며, 귀로는 듣는 게 없고 눈으로는 보는 게 없는데, 이는 천하를 잃게 하기에 충분한 짓이다.

또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하고 춤추면서 가악(歌樂)을 즐기는데, 이것도 천하를 잃기에 충분한 짓이다. 또 운명이 있다고 하면서 가난함과 부함이나 오래 살고 일찍 죽는 것과 다스려지고 어지러워지는 것과 편안하고 위태로운 것은 정해진 바가 있어서 덜거나 더해 줄 수가 없는 것이라 하였는데, 윗사람이 된 자가 그렇게 행동하면 반드시 정사를 다스릴 수가 없을 것이고, 아랫사람들이 그렇게 행동하면 반드시 일에 종사하지 않게 될 것이니, 이것도 천하를 잃기에 충분한 것이다.’

스승의 말을 들은 정자가 말하였다.

너무 심하십니다. 선생님의 유가에 대한 공격은 지나치십니다.’

그러자 묵자가 대답하였다.

유가의 본시 이와 같은 네 가지 주장이 없는데도 내가 이렇게 말한다면 곧 그것은 공격하는 것이 된다. 지금 유가에서 본시 이러한 네 가지 주장이 있는 것인데, 내가 그것을 지적하여 말한다면 곧 이것은 공격이 아니라 모순된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그러나 유가에 대한 묵자의 공격은 이처럼 학문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어떨 때는 직접 한때 자신의 사부이기도 한 공자에게 직격탄을 날리기도 하였다. 이에 대한 장면을 두 가지만 들어보도록 한다.

공자가 그의 문하 제자들과 한가로이 앉아 있다가 말하였다.

()임금은 자기 아버지 고수를 만나면 불안해하였는데, 이때의 천하는 위태로웠다. 주공단(周公旦)은 훌륭한 사람이 못되지 않을까. 무엇 때문에 그의 가족을 버리고 객지에 머물러 살았는가.’

공자의 행한 짓은 이러한 마음씨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를 따르던 제자들은 모두 공자를 본떴다. 자공(子貢)과 계로(季路)는 공회(孔悝)를 도와 위()나라를 어지럽혔고, 양화(陽貨)는 노()나라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며, 불힐(佛肹)은 중모(中牟) 지방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칠조개(漆雕開)는 사형을 당하였으니, 어지러움은 이보다 더 클 수가 없다. 후생이 제자가 되면 스승을 목표로 하여 반드시 그의 말을 닦고 그의 행동을 본받으며, 힘이 모자라고 지혜가 미치지 않을 정도가 되어야만 그만둔다. 지금 공자의 행동이 이와 같으니, 유가 사람들은 의심받는 게 당연한 것이다.”

묵자는 공자가 평소에는 순임금과 주공을 마음속으로 존경하고 있으면서도 의심을 품고 있었던 것을 맹비난하고 있는 것이다.

공자가 의심을 품고 있었으니 그를 따르던 제자들 역시 의심을 품고 나라를 어지럽힐 수밖에 없으며 지금 공자의 행동이 이와 같으니 유가 사람들은 의심을 받게 되는 것이 당연한 것(今孔某之行如此 儒士則何以疑矣)’이라는 것이 묵자의 결론이었던 것이다.

그뿐인가.

공자에 대한 묵자의 비난은 이 정도면 약과라 할 수 있다.

다른 장면에서 묵자는 공자를 더럽고 사악하고 거짓된 사람이라고 집중폭격을 퍼붓고 있다. 그 장면은 다음과 같다.

공자는 노나라의 사구가 되고서도 노나라의 공실(公室)은 버려두고 계손(季孫)을 받들었다. 계손은 노나라의 재상 노릇을 하다가 도망을 치게 되었는데, 계손이 고을 사람들과 관문(關門)의 통과를 가지고 다투었을 때 공자는 관문 기둥을 들어 올려 그를 도망가게 하였다.

또 공자가 채나라와 진나라 사이에서 궁지에 빠져 명아주국만으로 싸라기도 없이 열흘을 지냈다. 제자인 자로(子路)가 돼지고기를 구하여다 삶아 주자 공자는 고기가 어디서 났는가를 물어보지도 않고 먹었다. 남의 옷을 벗기어 가지고서 술을 받아다 주자, 공자는 술이 어디서 났는가를 물어보지도 않고 마셨다.

마침내 노나라의 애공(哀公)이 공자를 맞아들이니, 그는 방석이 반듯하지 않아도 앉지 않았고, 고기가 바르게 썰려 있지 않아도 먹지 않았다. 이에 자로가 나아가 물었다.

어찌 스승께서는 진나라와 채나라의 사이에 계실 때와는 이처럼 반대가 되십니까.’

이에 공자가 대답하였다.

이리 오너라. 내가 너에게 이야기해주마. 전에는 그대와 함께 구차히 살아가기에 바빴지만 지금은 그대와 함께 구차히 의로움을 행하려 하고 있다.’”

그리고 나서 공자는 다음과 같이 자로에게 말을 이었다.

잘 들어 두어라. 무릇 굶주리고 곤궁할 때에는 함부로 취하여 자신을 살리는 일을 사양하지 않아야 할 것이며 풍부하고 배부르면 곧 거짓된 행동으로라도 스스로를 꾸며야 하는 것이다.’”

묵자는 이처럼 노나라의 왕실보다는 권력자인 계손에게 아부하였던 공자의 행실과 궁지에 빠져있을 때에는 어디서 났는지 묻지도 않고 돼지고기와 술을 넙죽 받아먹고, 이와는 달리 군주의 대접을 받게 되니 바르게 썰어있지 않으면 고기를 먹지도 않는 공자의 이중적이고 위선적인 모습을 일일이 열거한 후 마침내 다음과 같이 결정타를 날리는 것이다.

더럽고 사악하며 거짓되기가 이보다 더 큰 게 있겠는가(汚邪詐僞 孰大於此).”

평소에 세상에 사람이 생겨난 이후로 공자보다 더 빼어난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라고 선언하고 공자는 성인으로서 때를 알아서 해나간 사람이었다. 공자와 같은 분을 집대성했다는 것이다.’라고 말함으로써 집대성(集大成)’이란 고사성어를 탄생시켰으며, 오직 소망이라면 공자를 본받으며 살아가고 싶다.’라고 자신의 의견을 피력한 유가의 맹장 맹자에게는 참기 어려운 모욕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성인 공자를 더럽고 사악하고 거짓된 사기꾼이라고 맹비난한 묵자에 대해서 맹자는 하늘 아래서는 도저히 함께 살 수 없는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원수라고 생각하였음이 분명한 사실인 것이다.

맹자가 양주와 묵적의 도가 없어지지 않으면 공자의 도는 드러나지 않으니, 나는 양주와 묵적을 막으며, 방자한 말을 몰아내고, 사설을 없애고, 치우치는 행동을 막으려는 것이다.’라고 했던 말은 철천지원수인 묵자와 한바탕 성전(聖戰)을 벌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비장한 각오를 나타낸 출사표(出師表)와 같은 것이다.

실제로 한비자(韓非子)현학(顯學)’ 편에 보면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오고 있다.

세상에 두드러진 학파는 유가와 묵가인데, 유가의 정점은 공자이고, 묵가의 정점은 묵적이다.”

그러나 맹자가 살았을 전국시대 때에는 오히려 유가보다 묵가가 세상에 가득 차서 맹자의 표현대로 천하의 언론이 묵가 아니면 양주로 돌아가는 절대 위기에 봉착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묵자는 어째서 유가로부터 뛰쳐나와 종교개혁을 부르짖은 중국판 마르틴 루터가 될 수 있었던가.

또한 묵자는 유가라는 기초학문 바탕에서 어떻게 예수가 부르짖었던 사랑, 즉 겸애(兼愛)의 진리를 발견할 수 있었던가.

그뿐인가.

묵자는 공자가 미처 깨닫지 못한 하늘의 개념을 파악함으로써 하늘의 주재자인 인격적인 상제(上帝)의 존재를 터득한 사람이었다. 스스로를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자칭한 예수처럼 묵자 역시 만물의 창조자이며 인격적인 주재자인 하느님의 존재를 발견하고 동양사상 최초로 하느님을 부르짖은 중국에서 태어난 제2의 예수인 것이다.

오히려 묵자가 예수보다 훨씬 앞서 태어났으니 묵자가 그리스도라 불리는 예수보다 500여 년 앞서 태어난 전생적 예수라고 불릴 만하다.

묵자가 유가에서 벗어나게 된 결정적인 동기는 만물의 창조자이고, 주재자인 하늘(하느님)의 존재를 깨달은 후부터였다.

물론 공자 역시 하늘의 존재를 인식한 선지자였다. 그러한 사실은 일찍이 공자가 송나라를 지날 때 환퇴(桓魋)란 자에게 위협을 받았을 때 하늘이 내게 덕을 부여해주셨거늘, 환퇴가 나를 어찌하겠는가.’라고 말하였던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또한 공자는 하늘이야말로 이 우주 만물의 지배자이며, 올바른 도의 근원이라고 생각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하였다.

하늘에 죄를 지으면 빌 곳도 없게 된다(獲罪於天無所禱也).”

이러한 공자의 하늘에 대한 믿음은 가장 사랑했던 제자 안영이 죽었을 때 아아, 하늘이 나를 망치는구나. 하늘이 나를 망치는구나.’하고 애통해했던 것을 보아도 잘 알 수 있는데, 묵자는 그러한 공자의 운명(運命)으로서의 하늘관에 반기를 들었던 것이다.

예부터 중국인들은 하늘에 대한 개념을 대충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로 분류하고 있었다.

그 하나는 물질적인 하늘로 땅과 대비가 되는 것이며, 또 하나는 만물의 창조자이자 주재자로서의 하늘로 이른바 상제나 황천과 같은 인격적인 존재였다. 세 번째는 운명으로서의 하늘로, 사람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숙명론의 대상이었다. 네 번째는 자연으로서의 하늘로 천체의 운행을 가리키며, 다섯 번째는 의리(義理)로서의 하늘로 곧 우주 최고의 진리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중에서 공자의 하늘관은 세 번째인 운명론적인 것이었다.

공자는 하늘이나 하느님을 믿으라고 가르치거나 그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설법한 적은 없었다. 공자는 사람마다 갖고 태어나는 천명(天命)은 사람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타고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운명론자였다.

그러나 묵자는 공자의 이러한 하늘관에 대해 반기를 들었던 것이다. 이미 정자와의 대화에서 유가에서는 하늘에 대해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데, 이는 천하를 잃기에 충분한 것이다.’라고 말문을 열었던 묵자는 유가는 하늘만 믿고 노력을 하지 않는 게으른 운명론자들이라고 비난하면서 무소부재(無所不在)’하고 무소불명(無所不明)’한 하느님의 존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선포하고 있다.

또한 내가 하늘이 백성들을 두터이 사랑하고 계시다고 아는 근거가 있다. 곧 해와 달과 별들을 벌여놓음으로써 그들을 밝게 인도하시고 춘하추동의 사계절을 만들어 놓음으로써 그들의 기강(紀綱)이 되게 하셨고, 눈과 서리, , 이슬 등을 내려줌으로써 오곡과 삼베가 자라고 누에를 칠 수 있게 하여 백성들이 거기에서 재물과 이익을 얻게 하셨으며, 산천과 계곡을 벌여놓고 여러 가지 일들을 펼쳐놓음으로써 백성들의 착하고 악한 것을 살펴보시고 왕공(王公)과 후백(侯伯)들을 마련하여 그들로 하여금 현명한 이들에게는 상을 주고, 포악한 자에게는 벌을 주도록 하셨으며, 쇠와 나무와 새와 짐승들을 취하여 쓰고 오곡과 삼베를 기르고 누에를 길러 백성들이 입고 먹을 재물들을 마련토록 하신 것이다.”

묵자의 이러한 하늘나라의 선언은 놀랍게도 성경의 창세기 편을 연상시킨다.

한 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지어내셨다.’는 구절로 시작되는 구약성경은 창세기에서 하느님은 빛과 어둠을 나누고, 하늘과 바다와 대륙을 만들고, 곡식과 과일을 만들고, 해와 별을 만들고, 온갖 생물과 동물을 만드는 과정을 드라마틱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 과정을 통해 하느님은 만물의 창조주이며, 주재자로서 인격적인 대상임을 명백히 밝히고 있거니와 묵자가 선언한 하늘나라에 대한 선포도 놀랍게도 창세기를 베낀 듯 닮아 있는 것이다.

즉 하느님은 해와 달과 별을 만들었으며, 춘하추동의 사계절을 만들고, 눈과 비를 내려 오곡을 자라게 하며, 백성들이 그를 통해 일용할 양식을 얻고, 이익을 얻게 하셨다.

그뿐 아니라 하느님은 백성들의 착하고 악한 것을 살펴보시고 현명한 사람에게는 상을 주고, 포악한 자에게는 벌을 주는 전지전능하신 절대자인 것이다. 심지어 백성들을 지배하는 임금이나 귀족들도 하느님이 이를 허락한 결과에 불과한 것이다.

이 놀랍고도 충격적인 묵자의 하늘나라 선언은 마치 세례를 받고 나서 정식으로 공생활을 시작한 예수가 첫마디로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다가왔다.’라고 외친 것과 매우 흡사한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묵자는 중국 철학사상 가장 특이하고 이질적인 사상가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묵자는 어떻게 해서 공자가 천명한 숙명론적 하늘을 뛰어넘어 절대자인 하느님의 현존을 깨닫게 되었는가.

그것은 자신이 비천한 천민으로 태어나 봉건사회의 계급을 뛰어넘을 수 없는 한계적 상황에서 절대자인 하느님의 존재를 절실히 갈망했기 때문에 가능하였을 것이다.

또한 자신이 신봉하는 유가가 오직 봉건사회를 재현하려는 왕도정치를 부르짖고, 때로는 전쟁까지 마다하지 않고, 때로는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향락에 젖는 것을 용서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천지를 창조한 창조주의 눈으로 보면 임금이나 제후나 선택된 사람은 없고 만백성이 모두 하늘의 자손인데, 어찌하여 권력은 세습되며, 몇 사람들에게 독점되며, 이러한 선택받은 소수만을 위해 예와 의와 도를 부르짖는다는 것은 결국 그들의 권력을 강화하는 통치수단이 아닐 것인가, 이러한 유가들의 모순된 모습들은 묵자의 눈으로 보면 더럽고 사악하고 거짓된 사기꾼의 행동이었던 것이다.

묵자는 숲이나 골짜기 속의 한적하고 아무도 없는 곳이라 할지라도 하늘은 아무것도 몰래 하도록 버려두지 않으니, 밝게 반드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천하의 군자들은 하늘에 대해 특히 서로 경계하는 마음을 모르고 있다. 이것이 내가 천하의 군자들은 작은 것을 알면서도 큰 것을 알지 못한다고 하는 까닭인 것이다.’라고 말함으로써 하늘은 계시지 않는 곳도 없을 뿐 아니라 보지 못하는 것도 없다, 따라서 하늘은 이 세상천지 만물 그 어느 곳에서도 널리 작용하며, 그 작용은 영원불변한 것이라 선언하였으며, 또 묵자는 하늘은 공평하고 사사로운 것이 없어 만백성 위에 평등한 진리라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하늘의 운행은 광대하고도 사사로움이 없으며, 그 베푸는 것은 두터우면서도 멈추는 일이 없고, 그 밝음은 오래되어도 어두워지지 않는 것이다(天之行廣而無私 其施厚而不息 其明久而不衰).”

그리하여 묵자가 사사로움이 없고 베푸는 것은 두터우면서도 멈추는 일이 없고 밝음은 오래되어도 꺼지지 않는 영원인 하늘로부터 깨달은 진리는 두 가지였다.

그 하나는 평화(平和)였고, 또 하나는 사랑이었다.

절대자인 하느님 앞에 만인은 평등하므로 굳이 남의 것을 빼앗기 위해서 전쟁을 벌여 사람을 죽이고 살상하는 행위는 하늘의 천도에 어긋나는 일이며, 또 하늘이 모든 것을 아울러 사랑하고 모든 것을 아울러 이롭게 하므로 사람들은 마땅히 서로 사랑하여야 한다는 것이 묵자가 하늘로부터 깨달은 진리의 근원이었던 것이다.

평화에 대한 묵자의 설법은 그가 지은 묵자의 비공(非攻) 에 상세히 실려 있다.

비공이란 제목이 암시하듯 묵자는 남을 공격해서 전쟁을 벌여서는 절대로 안 된다.’라는 신념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확고한 신념은 묵자를 말로만 전쟁을 반대하였던 다른 사상가들과는 달리 약소국이 강대국의 침입을 받으면 부하들을 직접 이끌고 대신 침입자를 격퇴시키는 강경책을 쓰도록 하였는데, 강대국 초나라가 약소국 송나라를 공격하려고 하였을 때 보인 묵자의 단호한 태도는 이러한 묵자의 결연한 의지를 엿보게 한다.

그때 강대국 초나라는 공수반(公輸盤)이라는 기술자를 고용해 운제(雲梯)라는 새로운 공격무기를 개발하여 시험 삼아 약소국 초나라를 공격하려 하였다.

운제는 높은 사닥다리로 지금까지는 속수무책이었던 성벽을 뛰어넘는 최신식 공성(攻城) 기계였던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묵자는 열흘 낮 열흘 밤을 쉬지도 않고 달려가서 초나라의 수도 영()에 도착한 후 먼저 기술자인 공수반을 찾아가 다음과 같이 물었다고 한다.

북쪽에 나를 모욕하는 자가 있는데, 그대가 나를 위해 그를 죽여줄 수가 있겠는가.”

느닷없는 질문에 공수반은 불쾌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나는 의리를 중시하기 때문에 살인 같은 일은 하지 않소이다.”

그러자 묵자는 곧 이렇게 따졌다.

한 명의 사람도 죽이지 않는 것이 의리라고 생각하면서 어째서 죄 없는 초나라 백성들을 한꺼번에 죽이려 하시오.”

고개를 꺾고 한참을 생각하던 공수반은 답변을 못한 채 묵자를 초왕에게 안내하였다.

묵자는 초왕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저는 북방의 천한 사람입니다. 듣건대 대왕께서 송나라를 공격하려 하신다는데, 정말 그렇습니까.”

초왕이 할 수 없이 그렇다고 대답하자 묵자가 말하였다.

새 수레를 가지고도 이웃집 헌 수레를 훔치려 하고, 비단옷을 입고서도 이웃집 누더기를 훔치려 하는 사람이 있다면 대왕께서는 그를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시겠습니까.”

그야 도벽이 있는 사람이겠지.”

초왕의 대답이 떨어지자마자 묵자는 정색을 하고 다시 물어 말하였다.

그렇다면 그것과 사방 5000리가 되는 넓은 영토에다 모든 것이 풍부한 초나라가 사방 500리밖에 안 되는 초라한 송나라를 치려고 하는 것은 무엇이 다릅니까.”

난처해진 초왕은 헛기침을 하면서 이렇게 얼버무렸다.

과인은 다만 공수반의 새 기계를 한번 시험해 보고 싶었을 뿐이다.”

초왕의 말을 들은 묵자는 이렇게 말하였다.

정히 그러하시다면 소인이 여기서 그 운제의 공격을 막아 보이겠습니다.”

이렇게 제의한 묵자는 초왕 앞에서 공수반과 모의 전쟁을 벌이게 되었다. 묵자는 허리띠를 풀어 성 모양을 만들고 나뭇조각으로 방패를 만들었다. 공수반 역시 모형 운제로 모두 아홉 번을 공격했지만 묵자는 모두 수비해 내었다. 결국 초왕은 송나라를 치겠다던 계획을 포기하고 말았다.

묵자의 공수반(公輸盤)에 나오는 이 고사를 통해 묵적지수(墨翟之守)’란 그 유명한 성어가 나온 것. 이 말의 뜻은 묵적의 지킴처럼 자기의 주장을 굳게 지켜나가는 것을 비유하는 고사성어인 것이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듯이 묵자는 말과 행동이 같은 사람이었으며, 생각한 것을 그대로 실천역행(實踐力行)하였던 행동가였다.

흥미로운 것은 맹자와 논쟁을 벌였던 쾌락주의자 고자(告子)와도 묵자는 논쟁을 벌였다는 점이다. 맹자가 고자의 궤변을 논리적으로 성토하였다면, 묵자는 다만 고자의 지행(知行) 불일치를 다음과 같이 꾸짖고 있었던 것이다.

정치란 것은 입으로 말한 것을 몸으로 반드시 실행하는 것입니다. 지금 당신은 입으로는 말하면서 몸으로는 실행하지 않고 있으니 이것은 당신의 몸이 어지러운 것입니다. 당신은 당신의 몸도 다스리지 못하고 있는데, 어찌 나라의 정사를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당신은 먼저 당신의 몸을 어지럽히지 않도록 하십시오.”

말과 행동의 일치를 중요시하는 묵가의 법도. 이에 대해 묵가는 귀의(貴義) 에서 다음과 같이 못 박고 있다.

말을 충분히 옮기어 실행할 수 있는 것이라면 늘 해도 되지만 실행으로 옮길 수 없는 것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된다. 실행으로 옮길 수 없는 것인데도 말을 늘 한다면 그것은 입만 닳게 하는 것이다(言足以遷行者常之 不足以遷行者而常 不足以遷行而常之 是蕩口也).”

이러한 실천역행의 묵가의 교리는 묵자를 따르는 제자들을 일사불란하게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종교집단으로 만들었다.

실제로 공수반과 모의 전쟁을 하여 모두 이긴 후 초왕은 자존심이 상해서 묵자를 죽이려 한다. 이때 묵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공수반의 뜻은 다만 저를 죽이려 하는 것이니 저를 죽이면 송나라는 수비할 수 없게 되어 공격해도 될 것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저의 제자 금골희 등 300명이 이미 제가 만든 수비하는 무기를 갖고서 송나라 성 위에서 초나라 군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비록 저를 죽인다 해도 그들을 쉽게 없앨 수는 없습니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묵자가 초나라의 공격을 막기 위해 열흘 낮 열흘 밤을 걸어 초나라의 수도 영에 도착하는 한편 금골희를 비롯한 300명의 결사대를 따로 송나라에 파견하여 여의치 않을 때에는 전쟁에 대비하고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금골희(禽滑釐).

그는 묵자를 따르던 수제자 중의 한 사람으로 묵자의 비제(備梯)’ 편에는 다음과 같이 그의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금골희가 묵자를 섬긴 지 3년이 되자 손발에 못이 박이고 얼굴은 새까맣게 되었다. 자기 몸을 부리어 일을 해주면서도 감히 자기가 바라는 일은 물어보지도 못하였다.”

금골희는 묵자의 제자이면서도 가장 두드러진 인물로, 묵자에는 그에 관한 기록이 가장 많이 등장하고 있다.

그런데 묵자를 따른 지 3년 만에 손발에 못이 박이고 얼굴이 새까맣게 되었다니, 묵자를 비롯하여 묵가의 사람들은 모두 직접 노동을 하던 사람들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묵가의 제자들은 이처럼 노동을 한 것만은 아니었다. 묵자가 초왕에게 금골희를 비롯한 300명의 결사대원들이 직접 송나라의 성 위에서 용병으로 참여하고 있다고 공언한 것처럼 묵자의 제자들은 묵자를 정점으로 일사불란하게 조직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묵자가 하늘로부터 깨달은 평화의 진리는 예수가 부르짖었던 평화의 진리와 일맥상통하지만 근본적으로는 다르다.

예수는 내가 너희에게 평화를 주고 간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라고 유언하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으로써 철저한 비폭력적 평화를 스스로 실천하였다. 그러나 묵자가 주장한 평화는 예수의 비폭력적 평화와는 달리 현실 참여적 평화였으므로 일종의 신앙으로 뭉쳐진 십자군이었다.

회남자에는 이러한 묵자의 종교집단을 설명하는 중요한 구절이 기록되어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묵자를 위하여 복역하는 사람이 180명이 있는데, 모두 불에 뛰어들고 칼날이라도 밟게 할 수 있었고, 죽는다고 해도 발길을 돌리지 아니하였는데, 이는 모두 교화(敎化)에 의해서 그렇게 된 것이다.”

이 내용은 묵자를 따르는 사람은 모두 묵자의 명령이나 자신의 신조를 위해서는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물불도 가리지 않는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묵자는 학문을 하다 보면 전쟁에 나가 죽게되는 것도 불가피한 일이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물론 그 전쟁은 침략을 위한 전쟁이 아니라 외국의 침입으로부터 자기 나라를 수호하는 방어적 전쟁이었다.

묵자의 이러한 주장은 노나라 사람 중에 묵자를 좇아 그의 아들을 공부시킨 사람이 있었는데, 그 아들이 결사대원으로 전쟁에 나아가 죽자 아버지가 묵자에게 따져 물었을 때 이에 대답한 묵자의 다음과 같은 내용에서 드러난다.

당신은 당신의 아들을 공부시키려 하였는데, 지금 그의 학업이 이루어지고 전쟁에 나가 죽었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성을 내고 있으니 이는 마치 물건을 팔려는 사람이 물건이 팔려버리자 성을 내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어찌 잘못된 일이 아니겠습니까.”

묵자의 이 대답은 비공(非功)’의 이론에 따라 침략전쟁은 죽어서라도 철저히 막아야 하는 것이며, 그러한 신념에 따라 행동하다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뉘우치지 않아야 한다는 주장을 담고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묵자의 종교적 집단에서는 영도자를 거자(鉅子)라고 불렀다.

여씨춘추상덕(上德) 편은 거자를 중심으로 한 묵자의 종교집단의 행동을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묵가의 지도자였던 거자 맹승(孟勝)은 초나라의 양성군(陽城君)과 특히 친하였다. 맹성은 양성군으로부터 자신이 국외로 여행하는 도중에 자기 영토를 지켜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그런데 양성군이 국외로 나아가 반란에 참가하게 되자 초나라는 양성군이 다스리던 나라를 점령해 버린다.

이때 맹승이 말하였다.

나는 남의 나라를 맡고 부신(符信)까지도 받아두었었는데, 힘으로 나라를 막지 못하였으니 죽을 수밖에 없구나.’

맹승이 양성군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 자책으로 자결을 하려 하자 제자 서약(徐弱)이 맹승을 만류하여 말하였다.

죽어서 양성군에게 이익이 된다면 죽어도 괜찮습니다만 아무런 이익도 없고 묵가만 세상에서 없어지게 될 것이니 이는 안 될 일입니다.’

그러자 맹승은 말하였다.

그렇지 않다. 나와 양성군 사이는 스승도 되고, 벗도 되는 한편 벗도 되고 신하도 된다. 내가 지금 자결하여 죽지 않는다면 이제부터는 엄격한 스승을 구하려는 사람을 반드시 묵가에서 찾지 않을 것이며, 현명한 벗을 구하려는 사람도 반드시 묵가에서 찾지 않을 것이고, 훌륭한 신하를 구하려는 사람도 반드시 묵가에서 찾지 않을 것이다. 죽는다는 것도 묵가의 의()를 행하고 그 업()을 계승케 하는 방법인 것이다. 나는 이제부터 거자의 지위를 송나라 전양자(田襄子)에게 물릴 것이다. 전양자는 현명한 사람으로 나의 뒤를 이어 거자 역할을 훌륭히 해낼 것이다. 그러니 어찌 묵가가 세상에서 없어질까 걱정하겠는가.’

스승의 말을 들은 서약이 말하였다.

선생님 말씀이 정히 그러하시다면 제가 먼저 죽어 길을 열어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맹승 앞에서 목을 잘라 죽었다. 맹승도 스스로 자결하여 죽자 그를 따라 함께 죽은 제자가 183명이나 되었다.”

종교지도자인 맹승을 따라 한꺼번에 183명이 집단자살을 할 만큼 묵자의 집단체제는 마치 오늘날의 맹신적인 사교(邪敎) 집단의 테러리즘을 연상시킬 정도이다.

이처럼 묵가는 자기희생을 두려워하지 않고 서로 단결하여 이념을 추구하던 광신도적 집단이었다.

따라서 묵자는 대취(大取)’ 편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손가락을 자르는 것과 팔을 자르는 것이 천하에 주는 이익이 같다면 선택의 여지도 없다. 그러나 죽고 사는 것에 이익이 똑같다면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이 아니다. 한 사람을 죽여 천하를 보존케 한다면 그것은 살인을 하는 것이지 천하를 이롭게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자기를 죽여 천하를 보존케 할 수 있다면 그것은 자기를 죽여 천하를 이롭게 하는 것이다.”

얼핏 보면 묵자의 이러한 주장은 목적한 바 의의를 위해서라면 자살폭탄이라도 감행해야 한다는 아나키스트의 행동을 본받은 것처럼 느껴진다.

자기를 죽여서라도 천하를 이롭게 하는 것이라면 마땅히 자기를 희생해야 한다는 평화론은 지배자들의 비위를 거스르고, 시대의 조류를 어기며, 낮은 백성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종교적 신념 없이는 불가능한 일인 것이다.

묵가는 묵자를 정점으로 받드는 조직적인 집단을 이루며, 그 집단의 조직을 위해서는 자기의 희생을 가볍게 여기며 일사불란하게 단결하였던 사교 집단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묵자는 단순한 사상가가 아니라 묵가라는 종교의 교주였고, 그의 사상은 종교적인 신앙을 바탕으로 한 단순한 학파가 아니라 당시의 모순된 사회를 개선하려고 노력하였던 지하조직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묵자가 하늘로부터 깨달은 불변의 진리는 바로 사랑이었다.

묵자는 사사로움이 없고 베푸는 것은 두터우면서도 멈추는 일이 없고, 밝음은 오래되어도 꺼지지 않는 영원인 하늘은 천하의 모든 나라도 하늘의 고을이요, 천하의 모든 사람도 하늘의 신하이니, 하늘은 모든 신하들인 만백성을 차별 없이 공평하게 사랑하고 있다.’라고 역설하고 있다.

묵자의 이러한 하늘의 사랑겸애(兼愛)’라는 사상으로 발전된다.

()’이란 자기와 남을 똑같이 사랑하는 것’,‘자기와 남의 구별이 없는 것’,‘사람들을 차등을 두지 않고 똑같이 대해주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묵자의 겸애론나와 너의 구별이 없는 절대적인 사랑을 뜻하는 것이다.

묵자의 겸애론은 하늘의 법도(法道)를 바탕으로 해서 발전되었는데, 묵자는 법의(法儀) 편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하늘의 운행(運行)은 광대하면서도 사사로움이 없고, 그 베푸는 것은 후덕하면서도 은덕으로 내세우지 않고, 그 밝음은 오래가면서도 쇠하여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성왕께서는 이것을 법도로 삼았던 것이다. 이미 하늘을 법도로 삼았다면 그의 행동과 하는 일은 반드시 하늘을 기준 삼게 될 것이다. 하늘이 바라는 것이면 행하고, 하늘이 바라지 않는 것이면 그만둔다. 그렇지만 하늘은 무엇을 바라고 무엇을 싫어하는 것일까. 결단코 하늘은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며, 서로 이롭게 할 것을 바라지, 사람들이 서로 미워하며 서로 해칠 것을 바라지 않는다. 무엇으로써 하늘이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며 서로 이롭게 해주는 것을 바라고, 사람들이 서로 미워하고 서로 해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가. 그것은 하늘은 모든 것을 아울러 사랑하고, 모든 것을 아울러 이롭게 해준다는 사실로 알 수 있다. 무엇으로써 하늘이 모든 것을 아울러 사랑하고, 모든 것을 아울러 이롭게 해주는 것을 알 수 있는가. 그것은 하늘이 모든 것을 아울러 보전하고 모든 사람들을 아울러 먹여 살리는 것을 보고 알 수 있다.

지금 천하의 크고 작은 나라를 막론하고 모두가 하늘의 고을인 것이다. 또 사람은 어리고, 나이 많고, 귀하고, 천한 구별 없이 모두가 하늘의 신하인 것이다. 이 때문에 모두가 말과 소를 기르고, 개와 돼지를 기른 다음 정결한 술과 단술과 젯밥을 담아놓고 공경하게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것이다. 이것은 하늘이 모든 것을 아울러 보전해주고, 모든 것을 아울러 먹여주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하늘은 이처럼 진실로 모든 것을 아울러 보전해주고 먹여주고 있는 것이다.”

하늘이 삼라만상을 아울러 보전해주고, 하늘 아래 만백성을 어리고, 나이 많고, 귀하고, 천한 구별 없이 아울러 먹여주는 것은 하늘이 천하의 백성을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묵자의 주장은 신기하게도 예수의 다음과 같은 설법과 공통점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분명히 말한다. 너희는 무엇을 먹고 마시며 살아갈까. 또 몸에는 무엇을 걸칠까 하고 걱정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하지 않으냐, 또 몸이 옷보다 소중하지 않으냐. 공중의 새들을 보아라. 그것들은 씨를 뿌리거나 거두거나 곳간에 모아들이지 않아도 하늘에 계신 너희의 아버지께서 먹여주신다.그러므로 너희들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하지 말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잘 알고 계시다.

물론 묵자는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 가족들을 사랑하고 있는 이기적 본능을 갖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너와 나의 구별이 없는 절대적 사랑겸애(兼愛)’와는 달리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 가까운 사람, 친근한 사람들만을 사랑하는 것은 별애(別愛)’라고 구별하고 이는 오히려 사회악이라고 단정 짓고 있었다.

묵자는 겸애별애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규정짓고 있다.

사회의 여러 가지 해악이 생겨나는 이유를 추구해본다면 그것은 어디서 생겨나고 있는가. 그것은 남을 사랑하고 남을 이롭게 해주려 하는 마음에서 생겨나겠는가.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반드시 남을 미워하고 남을 해치는 데서 생겨난다고 말할 것이다. 천하에 남을 미워하고 남을 해치는 자가 겸애하는 사람이겠는가, ‘별애하는 사람이겠는가. 반드시 별애하는 사람이라 말할 것이다. 그러니 서로 별애하는 사람이 과연 천하에 큰 해악을 낳게 하는 자인 것이다. 그러므로 별애란 그릇된 것이다.”

이처럼 묵자의 겸애론은 철저한 이타주의적 사랑이었다. 묵자는 이기주의적인 사랑인 별애는 오히려 사회를 해치는 악으로 보았으며, 사회의 혼란은 사랑의 부재에서 시작된다고 단정하였다.

이는 인간의 죄를 사랑의 결핍혹은 사랑의 부재로 규정하였던 가톨릭의 교리와도 완전 일치되는 것으로 따라서 청대 말의 대사상가였던 양계초(梁啓超)가 묵자를 작은 예수(小基督)’라고 단정한 것은 탁월한 해석인 것이다.

묵자는 전국시대 때의 정치 혼란과 사회악의 원인이야말로 바로 이타적 사랑인 겸애의 결핍 내지는 부재로 단정하고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는 일찍이 혼란이 어디에서 일어나는가, 살펴본 일이 있는데 그것은 서로 사랑하지 않은 데서 일어나고 있었다. 신하와 자식이 그의 임금이나 아버지에게 효성스럽지 않는 것이 바로 혼란의 원인인 것이다.

자식은 자신을 사랑하면서도 그의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는다. 그래서 아버지를 해치면서 자신을 이롭게 하는 것이다. 아우는 자신을 사랑하면서도 형을 사랑하지 않는다. 그래서 형을 해치면서 자신을 이롭게 하는 것이다. 신하는 자신을 사랑하면서도 임금을 사랑하지 않는다. 그래서 임금을 해치면서 자신을 이롭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혼란인 것이다.

또 아버지가 자식에게 자애롭지 않고, 형이 아우에게 자애롭지 않다 해도 이것 역시 이른바 혼란인 것이다. 이런 것은 모두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모두가 서로 사랑하지 않는 데서(皆起不相愛)’ 비롯되는 것이다.

또한 천하의 도둑들에 이르기까지 그러하다. 도적들도 그의 집은 사랑하면서도 다른 집은 사랑하지 않는다. 그래서 다른 집의 것을 훔치어 자신을 이롭게 하는 것이다. 도적들은 또 자신들의 것은 사랑하면서도 남을 사랑하지 않는다. 그래서 남을 해침으로써 그 자신을 이롭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어째서인가. 이것도 모두 서로가 사랑하지 않는 데서 일어나는 것이다.

천하를 어지럽히는 자들은 여기에 전부 원인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어디에서 일어났는가를 살펴보건대 모두가 서로 사랑하지 않는 데서 비롯되는 것이다.”

묵자는 이 세상의 모든 죄악인 불효와 불충, 도적질과 사기 등이 바로 이러한 사랑의 부재 때문이라고 규정짓고 마침내 전국시대 때의 대혼란을 약탈과 전쟁 때문이라고 다음과 같이 제후들을 향해 직격탄을 날린다.

그 무렵 절대 권력자들이었던 군주와 제후들의 심장을 향해 비수를 날리는 묵자의 사자후는 마치 이들에 대한 선전포고로 간주될 정도였다. 그런 의미에서 묵자는 언제든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던 묵가의 순교자였다.

묵자는 절대 권력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포효(咆哮)한다.

지금 제후들은 다만 자기 나라만 사랑할 줄 알지 남의 나라는 사랑하지 않는다. 그래서 자기 나라를 총동원하여 남의 나라를 공격하는 데 거리낌이 없다. 지금 집안의 가장은 다만 자기 집안만을 사랑할 줄 알지 남의 집안을 사랑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의 집안을 동원하여 남의 집안을 빼앗는 데 거리낌이 없는 것이다. 또한 사람들은 다만 자기 몸을 사랑할 줄만 알지 남의 몸을 사랑하지 않는다. 그래서 자기 몸을 써서 남의 몸을 해치는데 거리낌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후들이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곧 반드시 들판에서 전쟁을 하게 되고, 집안의 가장들이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곧 반드시 서로 빼앗게 되며, 사람과 사람이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곧 반드시 서로 해치게 되고, 임금과 신하가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곧 은혜롭거나 충성스럽게 되지 않으며, 아버지와 자식이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곧 자애롭거나 효도를 하지 않게 되며, 형과 아우가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곧 조화롭지 못하게 된다.

천하의 사람들이 모두 서로 사랑하지 않는다면 강한 자가 반드시 약한 자를 잡아 누르고, 가진 자가 반드시 가난한 사람들을 업신여기게 될 것이며, 귀한 자들은 반드시 천한 사람들에게 오만하고, 사기꾼은 반드시 어리석은 사람들을 속이게 될 것이다. 모든 천하의 재난과 찬탈과 원한이 일어나는 까닭은 이처럼 서로 사랑하지 않는 데서 생겨나는 것이다.”

사랑 예찬주의자 묵자.

사랑 지상주의자 묵자.

사랑 절대주의자 묵자.

그리하여 묵자는 묵자 곳곳에서 다음과 같은 잠언(箴言)을 토해낸다.

아울러 모두가 사랑하고 아울러 모두가 이롭게 해야 한다(兼而愛之兼而利之).”

서로 사랑하고 서로 이롭게 한다(相愛相利).”

남을 사랑하고 남을 이롭게 한다(愛人利人).”

전국시대 때, 약육강식의 물고 물리는 끊임없는 전쟁의 북새통 틈에서 박해와 고난과 가난 속에 하루하루를 연명해 가는 백성들에게 묵자의 겸애사상은 가히 혁명적인 이념이었다.

아무런 이익도 따르지 않는 정신적 사랑은 무용지물의 공염불이겠지만 묵자는 굶고 헐벗은 백성들에게 정신적 사랑과 함께 물질적 도움도 함께 베풀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므로 이 혁명적 겸애사상은 민중 속을 파고들어 가히 폭발적으로 번져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맹자가 살아 있을 때에는 묵자의 사상은 요원(燎原)의 불길과도 같이 중국의 전 대륙을 불태우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묵자의 사상이 전국시대 때 중국의 전 대륙을 휩쓸 수 있었던 것은 빈부와 귀천을 가리지 않는 만민평등의 겸애론때문이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원인은 묵가가 내건 내세관(來世觀)이었다.

내세관은 인간의 참다운 행복은 현세가 아닌 내세에 있다고 생각하는 종교의 중요한 사상 중의 하나로서 기독교를 비롯하여 불교 등 인류의 중요한 종교들은 반드시 내세를 통해 인간의 구원을 다루고 있다.

불교에서는 전세와 현세, 그리고 후세를 삼제(三際)로 나누고 있으며, 인간의 업보에 따라 죽은 뒤에 영혼이 다시 태어나는 미래의 세상에서는 극락정토에서 태어날 수도 있고 때로는 온갖 짐승이나 그런 짐승 같은 중생을 일컫는 축생계(畜生界)에서 태어날 수도 있고, 때로는 아비규환의 지옥에 떨어질 수도 있다는 내세관을 내세우고 있다.

기독교는 더욱 엄격하다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다가왔다.’라고 외치는 것으로 공생활을 시작하였던 예수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라고 산상수훈(山上垂訓)’ 함으로써 하늘나라, 즉 천국(天國)에 관한 희망을 선포한다.

예수는 비록 현세는 무거운 짐을 진 것처럼 고통스럽고 고달픈 것이지만 온유하고, 자비를 베풀고, 마음이 깨끗하고, 평화를 위해서 희생하고, 비록 박해를 받더라도 옳은 일을 하면, 하늘나라로부터 큰상을 받게 될 것이며, 죽더라도 영원히 죽지 않는 복락을 누리게 될 것이며, 그것이 바로 하늘나라, 즉 천국이라고 분명히 선언하는 것이다.

인류가 낳은 세 성인 중 유일하게 공자만이 내세관을 부르짖지 않았는데, 이것이 바로 유교가 세계적인 종교로 성장할 수 없었던 중요한 이유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유가에서 파생된 묵가에서는 놀랍게도 이러한 내세관을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하늘의 뜻을 따르는 사람은 모든 사람들을 아울러 사랑하고 모두가 서로 이롭게 하여 반드시 상을 받게 된다. 하늘의 뜻을 반하는 자들은 사람들을 분별하여 서로 미워하고 모두가 서로 해침으로써 반드시 벌을 받게 된다(順天意者 兼相愛 交相利 必得賞 反天意者 別相惡 交相賊 必得罰).”

묵자는 하늘은 그 뜻을 따르는 자(順天意者)’에게는 반드시 큰상을 주고, ‘하늘의 뜻을 어기는 자(反天意者)’에게는 반드시 벌을 내린다고 주장함으로써 그 무렵 박해와 고통과 가난 속에 살고 있던 백성들의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을 수 있었던 것이다. 묵자는 하늘이 주는 벌은 미래나 후세보다는 오히려 당대에 일어난다고 강조하고 그 벌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명기하고 있다.

그러나 하늘이 바라는 것을 행하지 않고, 하늘이 바라지 않는 것을 행하면 곧 하늘도 사람이 바라는 것을 해주지 않고, 사람들이 바라지 않는 것을 해주게 된다. 그렇다면 사람이 바라지 않는 것이 무엇인가. 바로 질병과 재난일 것이다. 만약 자기가 하늘이 바라는 것을 행하지 않고 하늘이 바라지 않는 짓을 하면 그것은 천하의 만백성을 이끌고서 환란 가운데 빠지는 일에 해당하는 셈인 것이다.”

묵가에 있어서 하늘은 인격신으로 임금이나 제후보다 더 엄위하고 그 뜻에 따르지 않는데 따라서 상과 벌을 내리는 두려운 존재이며 따라서 하늘은 공경히 받들며 정성껏 제사지내야만 하는 신앙의 대상이었으므로 백성들은 묵자에게 모두 열광적이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묵자의 사상은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한 후 불온사상(不穩思想)으로 낙인찍혀 강제적으로 소멸되고 그 후 다시는 중국에서 되살아나지 못하였는데, 맹자가 살았을 당시에는 어쨌든 맹자의 한탄처럼 묵적의 이론이 온 천하에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묵자는 근로(勤勞)하고, 절용(節用)한 생활을 스스로 실천하였었다. 자신이 말한 사상을 스스로 실행에 옮겼던 묵자의 실천주의자적 태도는 사마천이 태사공 자서(太史公自序)’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을 정도였다.

그가 사는 집의 높이는 석자였고, 세 계단의 흙섬돌에다 지붕을 이은 풀도 가지런히 자르지 않았고, 굽은 서까래도 가지런히 자르지 않았다. 흙으로 만든 밥그릇, 국그릇에 거친 곡식의 밥과 명아주와 콩잎국을 먹었다. 여름에는 칡으로 만든 베옷과 겨울에는 사슴 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었다. 장사를 지냄에 있어서는 세치 두께의 오동나무로 관을 만들었고 곡도 간략히 하였다.”

이로 인해 여씨춘추에 기록된 대로 공자와 묵자를 따르는 사람들이 더욱 많아지고 제자들도 더욱 늘어나 온 천하에 가득 차게 되었으며, 온 천하는 묵가와 유가로 양분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묵자는 맹자에게 있어 제1의 주적(主敵)이었다. 맹자가 제자 공도자에게 답변하였던 것처럼 묵적의 도가 없어지지 않으면 공자의 도가 드러나지 않으니 어쩔 수 없이 백성들을 속여 인의를 막아버리는 요사스러운 학설, 즉 묵자의 사설(邪說)’과 싸우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뿐인가.

맹자가 싸울 적은 묵자뿐이 아니었다. 2의 적도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양주, 즉 양자였다. 묵자의 사상뿐 아니라 양주의 학설도 온 천하에 가득 차서 천하의 언론은 양주에게 돌아가지 않으면 묵자에게 돌아가고 있었던 것이었다. 맹자는 요사스러운 양주와 묵적의 사설을 바로잡고 치우친 행동을 막고 방자한 말을 몰아내 돌아가신 성인들의 도를 지키기 위해서어쩔 수 없이 이 천적(天敵)들과 사생결단의 전투를 벌이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2의 천적 양주.

공교롭게도 묵자가 유가에서 파생되었다면 양주, 즉 양자는 노가에서 파생되었다. 그러므로 묵자가 유가의 모순을 예리하게 파헤치고 극대화시켰다면 양자는 노자의 사상을 더욱 심화시키고 극대화시켰다. 따라서 묵자와 양자는 심각한 양극단의 대립현상을 보이고 있었다.

양자는 우선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해야 한다.’라는 묵자의 겸애론을 실현 불가능한 공리공론(空理空論)으로 보고 이를 맹렬하게 비판하고 있었다. 양자는 실현될 수 없는 겸애론은 혹세무민의 미혹에 지나지 않는다고 냉소하고 있었다.

양자는 오히려 털 하나를 뽑아 천하가 이롭게 된다 하더라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拔一毛而利 天下不爲)’라고 부르짖음으로써 극단적인 이기주의를 부르짖었다.

이는 묵자의 겸애설과 극단적인 반대사상이었다. 묵자가 모든 사람을 이롭게 해주고 모든 사람들을 똑같이 사랑해야 한다.’는 곧 겸애를 부르짖자 양자남을 위해서는 터럭 하나도 뽑을 수는 없다.’고 부르짖음으로써 극단적인 개인주의를 천명하였다.

묵자는 극단적인 이타주의자였으나 양자는 극단적인 이기주의자였다. 묵자가 또한 집단주의자였다면 양자는 개인주의자였고, 묵자가 엄격한 율법주의자였다면 양자는 쾌락주의자이기도 하였다.

맹자의 제2의 천적 양주.

그에 대한 기록은 그 어디에도 또렷이 남아 있지 않다. 여기저기 드문드문 남아 있는 기록들을 종합해 보면 양자는 묵자와 거의 동시대에 태어나 동시대에 죽었던 것처럼 보인다.

묵자가 BC479년 무렵 태어나 BC381년경에 죽은 것으로 추정되고, 양자 역시 430년에 태어나 360년경에 죽은 것으로 추정되어 정확치는 않지만 사람은 거의 동시대인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위()나라 사람으로 양생(揚生), 혹은 양자거(揚子居)라고도 불렸다. 그는 중국의 사상사에서 철저한 개인주의자이자 쾌락주의자라는 비난을 받아왔으나 이는 맹자를 비롯한 후대의 집중적인 반대 받는 표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양주는 오히려 노자가 주창한 자연주의 옹호자로서 도가철학에 있어 가장 중요한 사상가라고 말할 수 있다.

삶을 대하는 유일한 방식은 인위적으로 방해하거나 바꾸려 하지 말고 삶을 있는 그대로 내버려 두는 것이다.’라고 주장함으로써 즐겁게 사는 것이 바로 자연스럽게 사는 것이며, 이는 남이 아닌 자신에게 달려있다고 말하였다. 지나친 집착과 탐닉은 지나친 자기 억제와 마찬가지로 자연을 거스르는 것이고, 남을 돕든 사랑하든 남의 일에 끼어드는 것은 무의미한 일로 따라서 터럭 한 올을 뽑아 천하가 이롭게 된다 하더라도 반드시 하지 않아야 한다.’라는 위아설(爲我說)’을 제창하였던 것이다.

여씨춘추는 따라서 양주를 자기를 귀하게 여기는 사람이라고 평가하고 있고, 한비자(韓非子)는 양자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위험한 성에는 들어가지 않았고, 군대에는 머무르지 않았고, 천하에는 큰 이익을 위해 자기 정강이의 털 한 올과도 바꾸지 않았다.그는 물()을 가볍게 여기고, 삶을 중히 여기는 경물중생의 선비다.”

경물중생(輕物重生).

물질을 가볍게 여기고 생을 중요히 여기는 자연주의자 양주. 이러한 양주의 모습을 회남자(淮南子)’는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생명을 온전하게 하여 그 진수를 보존하며 한갓 물질 때문에 누를 끼치지 않게 하는데, 이것이 양자가 수립한 학설이다.”

이러한 양자의 태도는 열자의 양주 편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통해 설명될 수 있다.

털 한 올은 피부보다 작고, 피부는 사지 하나보다 작다. 그러나 많은 털을 모으면 피부만큼 중요하고, 많은 피부를 합하면 사지만큼 중요하다. 털 한 올도 본래 몸의 만분의 일의 하나인데, 이를 어찌 가볍게 여길 것인가.” 그리고 양주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옛사람은 털 한 올을 뽑아 천하를 이롭게 할 수 있다 해도 결코 하지 않았고, 온 천하를 맡긴다 해도 받지 않았다. 모든 사람들이 털 한 올을 뽑지 않고, 또 사람마다 천하를 이롭게 하려 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천하는 안정될 것이다.”

양자 철학의 핵심인 털 하나를 뽑아 천하가 이롭게 된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라는 사상은 결국 노자의 무위(無爲)사상을 첨예화(尖銳化)시킨 것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무위야말로 실로 못하는 일 없이 다하고 있음(無爲無不爲)’의 노자적 무위사상에 양자는 비록 터럭 한 올이라도 뽑지 않고 철저하게 무위함을 더 첨가하였던 것이다.

일찍이 노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일부러 문에서 나가지 않더라도 천하의 일을 알 수 있으며, 창으로 엿보지 않아도 천도(天道)를 짐작할 수 있다. 도리어 멀리 나가면 나갈수록 아는 것은 더욱 적어지기 마련이다. 그러기에 성인은 가지 않고 알며 보지 않고도 차별을 이해하며 하지 않고도 이룬다.”

노자의 계승자였던 양주의 눈으로 보면 만인을 평등하게 이롭게 하고 만인을 평등하게 사랑하여야 한다.’라는 묵자의 겸애는 일부러 문밖에 나가고 창을 통해 세상을 엿보려는 어리석은 행동일 뿐 아니라 유위(有爲)의 극치였던 것이다.

부처도 노자가 말하였던 무위와 비슷한 설법을 보적경(寶積經)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마음이란 무엇입니까.’하고 묻는 제자 가섭(迦葉)에게 설법한 그 유명한 내용은 애욕에 물들고 분노에 떨고 어리석음으로 아득하게 되는 것은 어떠한 마음인가. 과거인가 미래인가, 현재인가. 과거의 마음이라면 그것은 이미 사라져버린 것이다. 미래의 마음이라면 아직 오지 않은 것이고, 현재의 마음이라면 머무는 일도 없다.’라는 금강석과 같은 진리의 서두로 시작된다.

그러고 나서 부처는 무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을 잇는다.

이와 같이 남김없이 관찰해봐도 마음의 정체는 알 수 없다. 즉 찾을 수 없는 것이다. 얻을 수 없는 그것은 과거에도 없고, 미래에도 없고, 현재에도 없다. 과거나 미래나 현재에 없는 것은 삼제를 초월해 있다. 삼제를 초월한 것은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니다.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닌 것은 생기는 일이 없다. 생기는 일이 없는 것에는 자성(自性)이 없다. 자성이 없는 것에는 일어나는 일이 없다. 일어나는 일이 없는 것은 사라지는 일이 없다. 사라지는 일이 없는 것에는 지나가 버리는 일이 없다. 지나가 버리지 않는다면 거기에는 가는 일도 없고 오는 일도 없다. 죽는 일도 없고 태어나는 일도 없다. 가고 오고 죽고 나는 일이 없는 곳에는 어떠한 인과(因果)의 생성도 없다. 인과의 생성이 없는 것에는 변화와 작위(作爲)가 없는 무위(無爲). 그것은 성인들이 지니고 있는 타고난 본성이다.”

함축적인 결론을 내린다면 부처는 무위보다는 무아(無我)를 더 강조하였고, 노자는 무위를 더 강조하였다. 따라서 부처는 천연(天然)의 청정한 마음을 진리의 궁극으로 보았고, 노자는 자연 그 자체를 무위의 골수로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무위야말로 모든 성인들이 지니고 있는 타고난 본성이라는 부처의 말은 노자에게 정확히 해당되는 공통분모였던 것이다.

이처럼 불교와 도교의 유사점은 결국 중국민족이 도교를 통해 불교를 이해하는 격의불교(格義佛敎)’라는 독특한 사상을 낳았으며, 중국민족의 가장 체질적으로 맞는 화려한 선종(禪宗)을 꽃피우게 하였는데, 양자의 첨예화된 극단주의는 노자의 무위사상이 꽃피운 도교에 있어서의 뛰어난 선풍(禪風)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맹자가 공자의 적자였다면 양자 역시 노자의 적자였다. 양자 역시 백가쟁명 시대에 있어 노자의 무위사상을 통해 난세를 구원하려던 치열한 선각자였던 것이다.

열자의 설부편(說符篇)’에는 이러한 양자의 사상가로서의 고뇌가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어느 날 양자가 사는 이웃집의 양 한 마리가 달아났다. 그래서 그 이웃 사람은 자기 집사람들을 다 동원하여 양을 찾으러 나서도록 한 후 양주에게도 찾아와 사람을 보내달라고 도움을 청하였다. 그러자 양주는 이렇게 물었다.

허허, 양 한 마리를 찾는데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필요하단 말이오.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웃 사람이 대답하였다.

양이 갈림길이 많은 길 쪽으로 달아났기 때문입니다.”

이 말을 들은 양자는 갑자기 근심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하루종일 말도 하지 않고 웃지도 않았다. 이때 제자 맹손양(孟孫陽)이 여쭈었다.

선생님, 양 한 마리는 그렇게 중요한 물건이 아닙니다. 또 선생님 소유의 양을 잃어버린 것도 아닌데 어찌 말도 않으시고 웃지도 않으십니까.”

하지만 양자는 여전히 가만히 있을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맹손양은 자신의 선배인 심도자(心都子)를 찾아가 앞서 있었던 일을 말하자 역시 궁금해진 심도자는 맹손양과 함께 다시 양자를 찾아와 다음과 같이 이야기를 하며 자문을 하였다.

선생님, 옛날에 삼형제가 제나라와 노나라에 유학 가서 같은 스승을 모시고 유가의 도를 배우고 돌아왔습니다. 아들들이 돌아오자 그 아버지는 너희들이 배운 것이 무엇이냐.’하고 물었습니다. 그때 삼형제는 인의에 대해서 배웠습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아버지가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무엇이 인의인가.’ 아버지의 질문에 큰아들은 자기 몸을 아끼고 명예를 뒤로 돌리는 것이라고 대답했고, 둘째 아들은 자기 몸을 죽여서 명예를 이루는 것이라고 했으며, 셋째아들은 자기의 몸과 명예를 다 보전하는 것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이처럼 세 사람의 대답은 각각 다르지만 모두 한 유가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옳고, 누가 그른 것입니까.”

제자 심도자의 질문을 받은 양자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옛날 바닷가에 사는 어떤 어부가 자맥질을 잘해서 많은 이익을 얻었다. 즉 바닷속으로 들어가 자맥질을 하여서 온갖 고기와 보물을 얻어 큰 부자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자 그에게 자맥질을 배우려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떼를 이루었다. 하지만 그 사람 중 태반이 자맥질을 배우다가 물에 빠져 죽었다. 그러면 내가 묻겠다.”

양자는 심도자에게 물었다.

그 사람들은 도대체 무엇을 배우기 위해서 그 어부를 찾아간 것이냐. 물에 빠져 죽는 것을 배우기 위함이었더냐. 아니면 자맥질하는 법을 배워 바닷속에 들어 있는 온갖 보물을 꺼내기 위함이었더냐.”

스승의 질문에 심도자가 대답하였다.

그야 물론 자맥질을 배워 바닷속에 들어있는 온갖 보물을 꺼내기 위함이었겠지요.”

심도자의 말을 들은 양자는 다시 말하였다.

그렇다. 본래 자맥질을 배우기 위해서 사람들이 모여든 것이지, 물에 빠져 죽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가 아니었는데도 그 결과의 차이는 이처럼 심하다. 그러니 그대가 물었던 유가를 배운 앞의 세 형제 중에 누가 옳고 그른지 어떻게 판단할 수 있겠는가.”

그 말을 듣고 심도자는 조용히 물러 나왔다.

그러자 함께 따라갔던 맹손양은 몹시 궁금해서 심도자에게 물었다.

저는 도대체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습니다. 또 선생님께서 자신의 것도 아닌 하찮은 양 때문에 왜 하루 종일 말도 안 하시고 그처럼 근심스러운 표정이 되셨는지 아직도 그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그러자 심도자가 한심한 얼굴로 후배를 쳐다보며 말하였다.

아직도 선생님의 속마음을 모르겠단 말인가.”

여전히 모르겠습니다.”

그러자 심도자가 대답하였다.

선생님은 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이라네. 큰길에는 갈림길이 많기 때문에 양을 잃어버린 것처럼 학문하는 사람들은 다방면으로 배우기 때문에 본성을 잃는다. 또 학문은 원래 근본은 하나인데, 그 말단(末端)에 와서 이처럼 달라지고만 것이다. 따라서 그 근본으로 돌아간다면 얻는 것도 잃는 것도 없다.’라고 생각하셨기 때문에 근심스러운 표정을 지은 것이라네. 자네는 선생님의 문하에서 자라나 선생님의 도를 익히 접하였으면서도 어째서 아직까지 그 비유의 뜻을 깨닫지 못했는가.”

그제서야 맹손양은 양자의 속마음을 깨닫고 부끄러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고 하는데, 어쨌든 이 고사에서 다기망양(多岐亡羊)’이란 성어가 태어난 것.

다기망양은 문자 그대로 여러 갈래 길에 이르러 양을 잃었다.’라는 뜻으로 달아난 양을 찾으려는데 길이 여러 갈래로 갈라져 있는 바람에 양을 놓치고 만다는 의미인 것이다.

원래 학문의 길은 하나인데, 너무 지엽적으로 갈라지고, 분파를 이뤄 그 본래의 진리가 다방면에 걸쳐 나뉘어져 오히려 그 말단적인 것에 구애될 수밖에 없어 학문의 목표인 진리를 잃어버리는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다는 맹자의 사상적 양심을 엿볼 수 있는 명장면인 것이다.

양자는 백가쟁명의 전국시대를 여러 갈래의 길로 나누어진 다기(多岐)의 난세로 보았으며, 진리를 잃어버린 양으로 비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예수 역시 자신을 아흔아홉 마리의 양보다도 한 마리의 길 잃은 양을 찾으러 왔다.’라고 선언하고 제자를 부를 때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어주겠다.’라고 비유함으로써 양자의 고사에 나오는 잃어버린 양자맥질하는 어부의 비유와 신기하게도 일치하고 있다는 점이다.

어쨌든 이러한 고사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양자가 극단적인 개인주의자 혹은 쾌락주의자라는 후대의 평가는 결코 옳은 것이 아니며, 여러 갈래의 길로 사라진 잃어버린 양, 즉 학문의 진리를 찾으려고 치열하게 노력하였던 백가쟁명의 난세 속에 타오르던 또 하나의 횃불이라는 점일 것이다.

이처럼 묵자와 양자는 양극의 극단주의적 사상가였다. 같은 상황이라도 엄격한 율법주의로 재단하는 묵자와 자연주의로 낙관적으로 보는 양자와의 가치관은 그야말로 극과 극이었던 것이다.

같은 상황을 어떤 시각에서 바라보고 어떻게 가르침을 펴고 있는가 하는가는 다음과 같은 고사를 통해 명백히 드러나고 있다.

양자에게는 양포(楊布)라는 동생이 있었다.

어느 날 양포는 아침에 집을 나설 때 흰옷을 입고 외출하였는데 집에 돌아올 때는 비가 오기 때문에 흰옷이 더럽혀질까 검정 옷으로 갈아입고 돌아왔다. 그러자 집에서 기르고 있던 개가 양포를 낯선 사람으로 알고 마구 짖어대기 시작하였다.

양포가 화가 나서 지니고 있던 지팡이로 개를 때리려 하자 형 양자가 그것을 보고 동생 양포에게 이렇게 타일렀다.

개를 탓하지 마라, 너도 마찬가지가 아니겠느냐. 만일 네 개가 조금 전에 희게 하고 있다가 까맣게 해 가지고 돌아오면 너 역시 이상하게 생각지 않겠느냐.”

한비자(韓非子)에 나오는 이 이야기는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보려는 양자의 낙관주의적 무위주의를 엿보게 하는 장면인 것이다. 즉 겉모양이 달라졌다고 해서 속까지 달라진 것으로 아는 것은 다만 형상에만 집착하는 어리석음으로 이처럼 겉모양은 쉼 없이 변화하지만 그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는 심오한 뜻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나갈 때는 희었는데, 돌아올 때는 검다는 뜻백왕흑귀(白往黑歸)’란 성어가 태어나고 같은 동의어로 겉이 달라졌다고 해서 속까지 달라진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을 가리켜 양포지구(楊布之狗)’란 성어가 태어났던 것이다.

그러나 비슷한 상황이라도 묵자에게 가면 그 뜻은 정반대로 달라진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어느 날 묵자는 실에 물들이는 사람을 유심히 보고 있었다.

그 자신이 목공(木工) 출신이어서 나무로 솔개를 만들어 날릴 수 있을 만큼의 손재주가 있었고, ‘잠깐 사이에 세 치의 나무를 깎아 수레바퀴 빗장을 만들 만큼의 솜씨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을 정도였던 묵자.

이처럼 스스로의 손재주와 솜씨로서 자급자족하던 묵자였으므로 자연 저잣거리에서 물감의 실을 염색하는 기술자의 모습을 유심히 관찰하였던 일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이 염색하는 모습을 바라본 후 묵자는 탄식하며 슬퍼하였다. 스승의 그런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던 제자 하나가 어찌하여 실에 물들이는 모습을 보면서 그처럼 슬퍼하십니까.’하고 물으니, 묵자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내가 탄식한 것은 처음에는 아무런 색도 없는 실이 파란 물감에 물들이면 파란색이 되고, 노란 물감에 물들이면 노란색이 된다는 사실 때문이다. 이렇게 물감에 따라 실의 색깔도 변하여 매번 다른 색깔을 만드니, 물들이는 일이란 참으로 조심해야 할 일이다. 마찬가지로 사람이나 나라도 이와 같아 물들이는 방법에 따라 흥하기도 하고, 망하기도 하는 것이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고 나서 묵자는 물들이는 일이 실에만 국한된 일이 아님을 알고 사람이나 나라도 물들임에 따라 흥하기도 하고 망하기도 한다고 역설하면서 그 예를 다음과 같이 들고 있었다.

옛날 순임금은 그 당시에 현인이었던 허유(許由)와 백양(伯陽)의 착함에 물들어 천하를 태평하게 다스렸고, 우임금은 그 당시에 현인이었던 고요(皐燿)와 백익(伯益)의 가르침을, 은나라의 탕왕은 이윤(伊尹)과 중훼()의 가르침에, 그리고 주나라의 무왕은 태공망(太公望)과 주공단(周公旦)의 가르침에 물들어 천하의 제왕이 되었으며, 그 공명이 천하를 뒤덮었다. 그러므로 후세 사람들은 천하에서 인의를 행한 임금을 뽑으라면 반드시 이상의 네 제왕을 들어 말한다.”

그러고 나서 묵자는 사악한 행동에 물든 폭군의 예를 다시 다음과 같이 열거하고 있다.

한편 하의 걸왕(桀王)은 간신 추치()의 사악함에 물들어 폭군이 되었고, 은나라의 주왕(紂王)은 숭후(崇候), 오래(惡來) 등의 사악함에, 주나라 여왕(勵王)은 괵공 장보(長父)와 영이종(榮夷終)의 사악함에, 유왕(幽王)은 부공이(傅公夷)와 채공곡(蔡公穀)의 사악함에 물들어 음탕하고 잔악무도한 짓을 하다가 결국 나라를 잃고 자기 목숨마저 끊는 치욕을 당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천하에 불의를 행하여 가장 악명 높은 임금을 뽑으라면 반드시 이들을 들어 말하는 것이다.” 묵자의 이 내용은 소염(所染) 에 나오는 것으로 이 장면에서 묵자비염(墨子悲染)’이란 고사성어가 태어난 것.

그 뜻은 묵자가 물들이는 것을 슬퍼한다는 말로서 사람은 습관에 따라 그 성품이 결정되고, 평소에 사소한 것이라고 생각되는 작은 일까지라도 그것이 계속되면 습관화되어 생각과 태도가 길들여지는 것이니, 나쁜 습관이 들지 않도록 경계하라는 것이 묵자의 가르침이었던 것이다.

묵자의 이러한 비염(悲染)’에 관한 가르침이 부처에게는 무염(無染)’의 설법으로 나타나고 있다.

부처가 설법한 무염은 즉 물들지 말라는 가르침으로 법구경 쌍서품(雙敍品)에는 무염에 관한 그 유명한 부처의 가르침이 다음과 같이 나오고 있다.

어느 때 부처는 기사굴산에서 정사(精舍)로 돌아오시다가 길에 떨어진 묵은 종이를 보시고는 비구를 시켜 그것을 줍게 하셨다. 그러고 나서 비구에게 그것은 어떤 종이냐.’하고 물으셨다.

종이의 냄새를 맡아본 비구는 대답하였다.

이것은 향을 쌌던 종이입니다. 향기가 아직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잘 알 수 있습니다.’

부처는 다시 가시다가 이번에는 길에 떨어져 있는 새끼를 보고 줍게 하여 그것은 어떤 새끼냐고 물으셨다. 제자는 다시 대답하였다.

이것은 생선을 꿰었던 새끼입니다.’

부처가 다시 물었다.

그것을 너는 어떻게 알 수 있었느냐.’

그러자 제자는 대답하였다.

냄새를 맡아보니 비린내가 아직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잘 알 수 있습니다.’

이에 부처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람은 원래 깨끗하지만 모든 인연에 따라 죄와 복을 부른다. 어진 이를 가까이하면 곧 도덕과 의리가 높아지고, 어리석은 이를 친구로 하면 곧 재앙과 죄에 이르게 된다.’

부처의 설법은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저 종이는 향을 가까이해서 향기가 나고 저 새끼는 생선을 꿰어 비린내가 나는 것과 같다. 사람은 조금씩 물들어 그것을 익히지만 스스로 그렇게 되는 줄을 모를 뿐이니라.”

그리고나서 부처는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모든 것은 마음을 다스리고

마음에서 나와 마음으로 이루어진다.

나쁜 마음을 가지고 말하거나/행하면 괴로움이 따르리니

마치 소와 말 거름에 수레바퀴가 따르는 것처럼

어리석은 사람이 사람을 물들이는 것은

마치 상한 고기를 가까이 하는 것과 같아서

미혹에 빠지고 허물을 되풀이해서/어느새 더러운 사람이 되게 한다.

말과 행동은 숨길 수가 없나니

수레바퀴 자취는 수레를 따르고/말과 행동은 마음을 따른다.

이렇듯 법구경에 나오는 부처의 그 유명한 설법,‘향을 쌌던 종이에서는 향기가 나고, 생선을 꿰었던 새끼에서는 비린내가 나는 법이니 그렇게 물들지 말라는 부처의 무염에 관한 가르침은 묵자의 비염(悲染)의 가르침과 신기하게도 일치하고 있음인 것이다.

그러나 이런 무염이나 비염에 대한 경계는 양자에 있어서는 일말의 가치도 없는 하나의 궤변에 지나지 않음인 것이다.

즉 푸른 물감에 들어간 실이 파란색이 된다고 해서 실 자체는 변화하지 않고, 실의 본질은 여전히 실일 뿐인 것이다. 또한 향을 싸았던 종이에서 향기가 난다고 해서 그 종이 자체는 바꾸어지지 않고 여전히 종이이며, 생선을 꿴 새끼에서 비린내가 난다고 해도 그것은 다만 냄새일 뿐이니 새끼의 본질은 변화시키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양자의 사상은 검은 옷을 입었든 흰옷을 입었든 그것은 다만 형상의 변화일 뿐이지 사람의 변화는 아니라는 양포지구(楊布之狗)’의 고사성어를 통해 명백히 드러내고 있음인 것이다.

그러나 맹자에게 있어서 이 묵자와 양자의 사상은 똑같이 쳐부셔야 할 공적(公敵)이었다. 1의 적 묵자와 제2의 적 양자를 어느 쪽이 더 주적인가를 따질 필요가 없는 똑같은 공공(公共)의 적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맹자의 태도는 양자와의 사상과 묵자의 사상을 통칭하여 양묵지도(楊墨之道)’라고 부르고 있는 표현을 보면 정확히 알 수 있다. 맹자는 제자 공도자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하고 있는 것이다.

양주와 묵적의 도가 없어지지 않으면 공자의 도는 드러나지 않는다(楊墨之道不息 孔子之道不著)양주와 묵적을 막으며 방자한 말을 몰아내고 사설을 내세우는 자가 나오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距楊墨 放淫辭 邪說者 不得作)

그리하여 드디어 맹자는 양자와 묵자를 향해 선전포고를 선언한다. 선전포고의 시작은 다음과 같다.

양자는 자기만을 위하니 이는 임금을 무시하는 것이고, 묵자는 사람을 똑같이 하니 이는 아버지를 무시하는 것이다. 아버지를 무시하고 임금을 무시하는 것은 바로 금수(禽獸)들이 하는 짓이다.”

그러고 나서 맹자는 공명의(公明儀)의 말을 인용한다.

공명의는 노나라 사람으로 증자(曾子)의 문인이라고도 하고 자장(子長)의 학인이라고도 하는데, 어쨌든 유가에서 태어난 현인 중의 한 사람인 것이다.

일찍이 공명의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임금의 푸줏간에 살진 고기가 있고, 마굿간에 살진 말이 있는데도 백성들에게 굶주린 기색이 있으며, 들에 굶어 죽은 시체가 있으면 이는 짐승을 몰아 사람을 잡아먹게 하는 짓이다.’

마찬가지로 양주와 묵자의 도가 없어지지 않으면 공자의 도는 드러나지 않는 것이니, 이는 사악한 이론이요 백성을 속이는 것이며, 인의를 꽉 막아버리는 것이다. 인의가 꽉 막힌다면 짐승을 거느리고 사람들을 잡아먹게 될 것이며, 사람들도 서로 잡아먹게 될 것이다.(중략)사악한 이론이 마음에 작용하게 되면 그는 일에 해를 끼치게 될 것이고, 그것이 일에 작용하게 되면 그 정치에도 해를 끼치게 될 것이다. 성인이 다시 나오신다고 해도 내 이 말은 절대 고쳐지지 않을 것이다.

묵자와 양자에 대한 맹자의 공격의 키포인트는 두 사상 모두 임금도 없고, 아비도 없는 금수, 즉 짐승의 논리라는 것이었다.

특히 맹자는 묵자가 주장한 박장(薄葬)을 집중공격하였다.

묵가는 자신이 유가에서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특히 유가의 사치스럽고 과도한 장례를 비난하였다.

묵자는 절검(節儉)이야말로 나라를 다스리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주장하고 누구든 부지런히 일하고 서로 돕는 한편 물자를 절약하고 검소하게 지낼 것을 강조하기 위해 묵자의 책 속에 절검이란 항목을 따로 만들어 이를 묵가의 중요한 교리로 가르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청말의 대사상가였던 양계초가 묵자를 작은 예수(小基督)’로 지칭하는 한편 경제사상 면에서는 큰 마르크스(大馬克思)’라고 부른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던 것이다.

공맹(公孟) 에 보면 묵자가 정자(程子)라는 사람에게 천하를 망치게 하는 유가의 도 네 가지가 있다.’라고 하면서 그 네 가지를 하늘과 귀신을 믿지 않는 것, 악무(樂舞)를 즐기는 것, 운명이 있다고 믿는 것과 함께 지나치게 사치스럽고 번잡한 장례의 폐해를 열거하면서 특히 장례의 폐해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부연 설명하고 있다.

또 후하게 장사를 지내고 오랫동안 복상하여 관을 무겁게 하고 많은 수의를 마련하여 장사를 지내는 것을 이사가듯 한다. 3년 동안 곡하고 울어서 부축해 준 다음에야 일어설 수 있고, 지팡이를 짚은 뒤에야 다닐 수 있으며, 귀로 들은 것도 없고, 눈으로 보는 것도 없게 된다. 이것은 실로 천하를 망치기에 충분한 것이다.”

맹자는 묵자의 이러한 장례에 대한 공격을 오히려 역이용하고 있었다.

이러한 맹자의 모습은 등문공 상편에 나오는 이지(夷之)와의 대화에서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이지는 묵자를 쫓는 묵가였는데, 맹자의 제자인 서벽을 통해서 맹자를 뵙기를 요청하여 왔다. 이때 맹자가 말하였다.

나는 정말 만나고 싶으나 지금 나는 병중이오. 병이 나으면 내가 가서 만날 것이니 이지가 오지 않도록 하는 것이 좋겠소.”

훗날 맹자가 병이 났을 때 이지가 또다시 맹자에게 뵙기를 청해오자 맹자가 말하였다.

나는 이제 만날 수 있소. 그를 바로잡아 주지 않는다면 올바른 도가 드러나지 않을 것이니, 내가 그를 바로잡아 주어야겠소. 내가 듣건대 이지는 묵자라 하였소. 묵자들은 상사(喪事)를 치름에 있어서는 박하게 하는 것으로 정도로 삼고 있다는 말을 들었소. 그러니 이지도 그것으로 천하의 풍속을 바꾸어 놓으려 할 것이니, 어찌 그 도가 옳지 않다고 해서 그 뜻마저 귀하지 않다고 생각하겠소. 그런데 이지는 그의 어버이를 후하게 장사지냈으니, 곧 그것은 자기가 천히 여기는 방법으로 그의 어버이를 섬긴 셈이오.”

이지는 묵자였으나 특이하게도 묵자의 가르침과는 달리 그의 어버이가 죽었을 때는 장사를 후하게 지낸 것으로 보인다.

바로 이점 때문에 맹자는 흡족한 마음으로 이지와의 만남을 흔쾌히 허락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서벽으로부터 맹자의 말을 전해 들은 이지는 이렇게 반문하였다.

유자들의 도는 사람들을 대함에 있어 옛날 사람들이 갓난아이를 돌봐주듯 해야 한다는 것인데, 이 말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나는 사랑에는 차등이 없어야 하고 사랑을 베푸는 일은 어버이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지의 말은 서경(書經)에 나오는 약보적자(若保赤子)’를 가리키고 있다. 적자는 갓난아이를 뜻하는 말로 예부터 나라의 임금은 백성을 갓난아이처럼 사랑하고 돌본다고 하여서 적자라고 불렀는데, 이지는 유가에서도 백성들을 갓난아이처럼 돌보고 사랑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펴고 있다면 이는 묵가에서 말하는 백성들을 두루 사랑하고 백성들을 두루 이롭게 한다.’라는 겸애와 다름이 없지 않겠느냐는 질문이었던 것이다. 오히려 묵가에서 말하는 사랑에는 차등이 없어야 한다.’라는 겸애가 유가보다 더 발전된 사상이 아니겠느냐는 것이 이지의 주장이었던 것이다.

또한 이지는 맹자를 은근히 비난하고 있었다. 그것은 사랑에는 본래 차등이 없으나 그 사랑을 실천하는 순서가 어버이로부터 시작되는 것일 뿐 맹자가 주장한 사랑의 단계적 실천론은 본래의 유가학설에 위배되는 것이 아니겠느냐는 것이 이지의 질문이었던 것이다.

이 말을 서벽으로부터 전해 듣자 맹자는 다시 말하였다.

이지는 정말로 사람들이 형의 아들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 사람의 아기를 사랑하는 것을 똑같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서경의 말은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이니 곧 갓난아기가 기어가서 우물에 들어가려 하는 것을 보고 한 말이며, 그것은 갓난아이의 죄가 아니라는 것이다. 또 하늘이 만물생성을 한 가지 근본으로 이루어진 것인데, 이지는 두 가지 근본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맹자의 대답은 자기 조카와 이웃의 아이를 똑같이 사랑할 수 없는 비현실성을 근거로 겸애설의 모순을 비판하였던 것이다.

즉 서경에 나오는 약보적자란 말은 어린아이가 우물에 기어들어 가는 것은 어린아이의 죄가 아니라 어린아이가 우물에 들어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든 어른들의 잘못이듯이 백성들이 죄를 짓는 것은 백성들의 죄가 아니라 죄를 짓는 환경을 만드는 정치가의 잘못이라는 뜻으로 쓰인 말로 유가의 말을 인용한 이지의 말은 잘못된 것임을 지적한 내용이었던 것이다.

또한 하늘의 만물생성은 각각 하나의 모체에서 분리 생성되어 그 모체를 근본으로 삼아 삶을 연장해 나감으로써 전체적인 조화를 이루는 것이 이치이다.

그런데 묵자의 논리는 남의 부모와 자기의 부모를 똑같이 사랑해야 하는 것이므로 이는 구체적인 삶에 있어서 남과 구별되는 자기의 고유 역할을 포기하는 것이므로 전체적인 조화를 이룰 수 없는 행위라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즉 이지는 사랑에는 차등이 없다.’라는 묵가의 원칙을 지키고 있으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로는 사랑의 베풂은 어버이로부터 시작한다.’라고 하여 어버이의 장례를 후하게 치렀으므로 맹자의 눈으로 보면 이지는 묵가였으면서도 유자의 도를 따른 두 가지 근본의 모순을 행하고 있음을 지적하였던 것이다.

그러고 나서 맹자는 다음과 같이 말을 잇는다.

아주 옛날에 그의 어버이를 장사지내지 않는 사람이 있었소. 그는 어버이가 죽자 들어다가 도랑에다 버렸소. 훗날 그곳을 지나다 보니 여우와 살쾡이가 시체를 뜯어먹고, 파리와 등애, 땅강아지 등이 시체를 빨아먹고 있었소. 그는 이마에 진땀이 솟아났고, 눈길을 피하며 이를 바로 보지를 못하였소. 진땀이 솟은 것은 다른 사람 때문이 아니라 속마음이 얼굴에까지 전해졌기 때문이오. 곧 그는 돌아가 삼태기와 삽을 가지고 와서 시체를 흙으로 덮었다오. 그것을 덮는 일이 정말로 옳은 일이라면 곧 효자와 어진 사람들이 그들을 장사지내는 데에도 반드시 방법이 있게 될 것이오.”

어버이를 장사지내는 유래에 대해서 이처럼 설명한 맹자는 그러한 설법을 통해 인간은 짐승과 달리 차마 자신의 옳지 못함을 부끄러워하고 진땀이 솟아나는 수오지심(羞惡之心)의 속마음을 가지고 있음을 드러내 보였던 것이다.

따라서 어버이를 풍족하게 장사지내는 것은 인간의 본마음에서 드러난 도리임을 강조함으로써 묵자의 박장을 비난하였던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묵자였으면서도 어버이를 후하게 장사지냈던 이지는 맹자의 그러한 말을 서벽으로부터 전해 듣자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다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고 맹자는 전하고 있다.

나를 잘 깨우쳐주셨습니다.”

이렇듯 양자와 묵자의 양묵지도(楊墨之道)’와 일대 이의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었던 맹자였지만 맹자는 묵자보다 양자를 더 적대시하고 있었다.

맹자의 이러한 태도는 진심상(盡心上) 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말을 통해 잘 알 수 있다.

양자는 나만을 위한다는 이론을 취하여 한 개의 털을 뽑아서 천하를 이롭게 한다.’ 하더라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러나 묵자는 모두를 아울러 사랑할 것을 주장하여 머리 꼭대기부터 발꿈치까지 털이 다 닳아 없어진다 하더라도 천하를 이롭게 하는 일이라면 반드시 하였다. 자막(子莫)은 그 중간 방법을 주장하였는데, 그 중간 방법을 지킨다 하더라도 앞뒤를 잘 헤아리지 않으면 그것은 한편을 고집하는 것과 같다. 한편을 고집하는 것을 미워하는 까닭은 그것이 정도를 해치고 한 가지만을 내걸고 백 가지를 모두 배척하기 때문이다.”

양자와 묵자를 동시에 한 가지만을 내걸고 백 가지를 모두 배척하는(擧一而廢百也)’ 극단주의로 비난하는 맹자였지만 맹자는 그래도 양자보다는 묵자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관대하였다. 이러한 맹자의 태도는 묵자는 머리 꼭대기에서부터 발꿈치까지 털이 다 닳아 없어진다 하더라도 천하를 이롭게 하는 일이면 하였다.’라고 말함으로써 사람들을 두루 사랑하고 사람들을 두루 이롭게 하려고분골쇄신하였던 묵자의 치열한 구도정신은 인정하고 있었다.

묵자가 비록 이처럼 극단적이고 비현실적인 사상가였지만 만인을 똑같이 사랑하고 서로 이롭게 하며, 근면하게 더불어 살기 위해서 죽음마저 가볍게 여기는 묵자의 순교 정신만은 맹자가 인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맹자는 이기주의자인 양자나 이타주의자인 묵자 두 사람 모두 한편만을 고집하는 극단주의자이고, 한 가지만을 내걸고 백 가지를 배척하는 독선주의자이지만 그래도 양자보다는 묵자가 훨씬 낫다는 의견을 펼쳐 보인 것이다.

맹자의 이 말에서 이마를 갈아 발꿈치에 이른다.’라는 마정방종(摩頂放踵)’이란 고사성어가 나온 것.

이 말의 뜻은 자기를 돌보지 아니하고 남을 깊이 사랑하여 희생하는 모습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묵자의 외곬정신을 천하제일의 독설가이자 해학가인 장자가 그대로 넘겨 버렸을 리는 없다. 그렇지 않아도 묵자가 장자가 철천지원수로 생각하고 있던 유가에서 나왔으므로 묵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특유의 직격탄을 날리고 있는 것이다.

장자의 천하 편에는 묵자에 대한 장자의 독설이 두 가지나 나오고 있다. 그 내용을 압축하면 대충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후세에 사치하지 않게 하고 만물을 꾸며대지 않게 하고, 법도를 밝히지 아니하며 어짊()과 의로움()의 제도로 스스로를 격려하며, 재물을 저축하여 세상의 환란에 대비한다. 옛날의 도술을 닦은 사람들 중에도 이러한 경향을 띤 사람들이 있었다. 묵자와 금골희는 그런 가르침을 듣고서 기뻐하였다. 그러나 그것을 행하는 게 너무나 지나쳤고, 자기 위주로 지나치게 행동하였다.

묵자는 음악을 부정하는 이론을 세우고, 또 절용(節用)이란 명분을 내세웠으며, 살아서는 노래도 부르지 않고, 죽어도 상복을 입지 아니하였다. 묵자는 널리 사람들을 아울러 사랑하고 모든 사람을 이롭게 해주어야 하며, 싸워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도는 노여워하지 않고, 또 널리 배우기를 좋아하며, 남과의 구별을 부정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옛 임금들의 법도와 같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옛날의 예의와 음악을 파괴하는 것이었다.

황제(黃帝)에게는 함지(咸池)란 음악이 있었고, 요임금에게는 대장(大章)이란 음악이 있었고, 순임금에게는 대소(大韶)란 음악이 있었다.또 무왕과 주공은 무()라는 음악을 만들었다.지금 묵자는 홀로 살아서도 노래하지 않고, 죽어도 상복을 입지 않겠다고 한다. 그들은 세 치 두께의 오동나무 관에 겉 관도 쓰지 않는 것을 법도로 삼는다. 이런 방식대로 사람들을 가르치고 보면 오히려 사람들은 남을 사랑하지 않게 될 것이며, 이런 방식으로 자신이 행동하다 보면 틀림없이 자기도 사랑하지 않게 될 것이다.”

묵자에 대한 장자의 독설은 날카롭다.

특히 이런 방식으로 사람들을 가르치고 보면 오히려 사람들은 남을 사랑하지 않게 될 것이며, 이런 방식으로 행동하다 보면 틀림없이 자기 자신도 사랑하지 않게 될 것이다(以此敎人 恐不愛人 以此自行 固不愛己)’란 구절은 촌철(寸鐵)의 진리다.

장자는 진심으로 자기를 사랑할 줄 아는 사람만이 비로소 남을 사랑할 수 있다.’라는 뜻의 애기애타정신을 부르짖고 있는 것이다.

애기애타(愛己愛他).

자기 자신을 아끼고 소중히 여기는 자애정신이 있어야만 비로소 남을 사랑하고 이롭게 할 수 있다는 장자의 이 말은 도산(島山) 안창호가 이기(利己)가 아닌 애기(愛己)로서 애타보다 우선하라.’라고 말함으로써 금언이 되었는데, 장자는 묵자에 대해 다시 다음과 같이 꾸짖고 있는 것이다.

묵자의 도를 일부러 파괴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노래를 해야 할 때에 노래를 하지 않고, 곡을 해야 할 때에도 곡하지 않고, 즐겨야 할 때에도 즐기지 않는다면 이것을 과연 인정에 가까운 일이라 할 수 있겠는가. 그들은 살아서는 부지런히 일만 하고, 죽어서는 박대를 받게 되니, 그들의 도란 너무나 각박한 것이며, 사람들로 하여금 근심이나 하게 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슬프게만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실행하기도 어려운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성인의 도라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천하 사람들의 마음을 배반하는 것이므로 천하 사람들은 감당할 수가 없을 것이다. 묵자가 비록 홀로 그것을 실행할 수 있다 하더라도 천하 사람들은 어찌할 수 있는 것인가. 온 천하로부터 떨어져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왕도(王道)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다.”

금욕주의(禁慾主義:Asceticism).

일체의 정신적, 육체적 욕구나 욕망을 억제함으로써 종교 또는 도덕적인 이상을 성취하려는 묵자의 엄격한 금욕주의 사상은 그 자신이 사람들을 두루 사랑하라.’라고 부르짖고 있다 하더라도 결국 남을 사랑하지 못하고 사람들을 근심이나 하게 하고, 슬프게만 만들 뿐 아니라 자기 자신도 사랑하지 않는 사각지대에 빠트리는 결과를 초래할 뿐이라는 장자의 지적은 광신적 속죄(贖罪)에 빠졌던 스토아주의적 학파들의 모순을 연상시킬 정도이다.

이런 묵자의 금욕주의적 사상은 전에도 볼 수 없었고, 앞으로도 볼 수 없는 비중국적인 특이한 사상이므로 금욕의 도가 지나쳐 자학(自虐)으로까지 느껴질 정도였던 것이다.

그러나 천하제일의 독설가도 묵자에 대해서만큼은 마음속으로 존경의 염을 갖고 있었다. 그러한 장자의 태도는 천하(天下) 에 나오는 묵자에 대한 다음과 같은 결론을 통해 명백히 드러나고 있다.

묵자와 금골희의 생각은 옳은지는 모르지만 그들의 행동은 옳지 못하다. 후세의 묵가들도 반드시 스스로를 괴롭힘으로써 넓적다리에는 살이 없고 정강이에는 털이 없도록 만들어 주고 있을 따름인 것이다. 이것은 천하를 어지럽히기는 하여도 다스려지게는 할 수 없는 것이다.

비록 그렇기는 하지만 묵자는 진실로 천하를 사랑하기는 하였다. 올바른 도를 구하여 얻지 못한다면 비록 몸이 깡마르게 되는 한이 있더라도 그만두지 않을 사람이었으니, 묵자야말로 재사(才士)임엔 틀림이 없을 것이다.”

이렇듯 맹자는 묵자는 머리 꼭대기에서부터 발꿈치까지 털이 다 닳아 없어진다 하더라도 천하를 이롭게 하는 일이면 하였다.’라고 묵자를 칭찬하였고, 천하의 독설가였던 장자 역시 비록 그렇기는 하지만 묵자는 진실로 천하를 사랑하기는 하였다.’라고 칭찬하여 두 사람 다 묵자가 위대하고 공경할 만한 인격을 갖추고 있었다고 평가는 했지만 그의 겸애사상은 내재적이든 초월적이든 간에 가능성이 있는 이론적 근거를 제공하지 못하였고, 또한 겸애를 실천하는 방법조차 제시하지 못한 매우 원시적인 사상이라고 이를 일축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맹자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맹자의 진심하 편에 나오는 이 구절은 맹자가 뛰어난 유가의 투장일 뿐 아니라 시대를 앞질러보는 예언적 선지자라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맹자께서 말씀하셨다.

묵자의 학문에서 도망하면 반드시 양자의 학문에 귀의하고, 양자의 학문에서 벗어나면 반드시 유학으로 돌아온다. 돌아오거든 곧 받아들일 따름이다.’”

맹자의 이 말은 묵자의 겸애설은 일견 그럴듯하게 보이기 때문에 관심을 가지다가도 자기를 희생하고 남을 위한다는 것이 본질적인 것이 아니어서 실현가능성이 적은 것임을 깨닫고 절망하게 된다. 그러다가 양자의 자기만을 위하는 이론은 오히려 더 본질적인 것 같아서 양자의 학설에 심취하게 되는데, 그의 학설은 자기만을 위하고 남을 추호도 배려하지 않는 것이므로 그것도 본질적인 것이 아님을 알게 되어 회의하게 된다. 그러므로 가장 본질적인 유학, 내가 서고자 하면 남도 서게 하고(己立立人)’, ‘나를 완성하고 만물을 완성하는(成己成物)’ ‘유학의 도에 들어오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맹자는 다시 다음과 같이 결론을 맺고 있다.

지금 양자와 묵자의 무리들과 논쟁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뛰쳐나간 돼지를 쫓는 것과 같으니, 이미 그들은 우리에 들어왔는데도 그만두지 않고 또 이어서 발을 묶어놓는구나.”

맹자는 시대정신에 역행하는 묵자와 양자의 양묵지도뛰쳐나간 돼지와 같아서 언젠가는 반드시 우리 안으로 들어올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다. 그렇게 돌아오거든 받아들일 뿐’, 즉 반갑게 맞아들이고 포용할 뿐이지 이들을 다시 도망가지 못하게 발을 묶어 얽어매는 것은 학문의 자유를 구속하는 폭력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맹자는 어떻게 해서 뛰쳐나간 돼지로 비유한 양자와 묵자가 언젠가는 반드시 유가의 우리 안으로 되돌아올 것인가를 자신하고 있었던 것인가.

그것은 유학이 이타적인 묵자의 겸애사상이나 이기적인 양자의 사상과는 달리 자기를 위하면서도 남을 위하는 중용(中庸)을 내세우고 있음에 대한 자신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유가에서 말하는 사랑은 차별성을 유지하며, 또한 보편성을 이뤄낸 것이다. 이것은 인간 본성에 근거하여 인성을 따르며 인도에 부합하여 만천하에 구체적으로 실현될 수 있는 것이다.

인륜 관계는 반드시 친소(親疎)와 원근이 있는 것처럼 사랑을 펴는 데도 또한 선후의 순서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 유가의 논리였던 것이다.

유가에도 묵자의 겸애론과 같은 사랑론이 다음과 같이 나오고 있다.

예기(禮記)’에 나오는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자식이 부모만을 친애할 수 없고, 자기 자식만을 사랑할 수는 없다(不獨親其親不獨子其子).”

맹자는 전국시대를 휩쓸고 있던 묵자의 극단적인 겸애론의 대유행에 대해 대항하기 위해서 이러한 유가의 사랑론을 더욱 발전시킨다.

노인을 노인으로 섬기고, 어린이는 어린이로 사랑하며, 친척을 친히하고, 백성을 어질게 하며, 만물을 사랑한다(老老 幼幼 親親 仁民 愛物).”

맹자는 이러한 말들을 통해 천리의 자연스러움과 인간의 본성을 바탕으로 하는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의 진리를 드러낸다. 또 이와 같을 때만이 천하에 사랑을 펼 수 있고 진정한 인류애를 실행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진정한 인류애를 실현할 수 있는 유가의 사랑. 그것이 바로 맹자 사상의 결정체인 성선지설(性善之說)’이었던 것이다.

성선설은 이렇듯 20여 년에 걸친 주유열국에서 수많은 제자백가 사상가들과 생사가 걸린 사투를 벌임으로써 실전을 통해 체계화된 맹자 사상의 금강지였으니, 성선설이야말로 맹자가 남긴 진신사리인 것이다.

무조건 사랑하라는 묵자의 겸애론에 대항하기 위해서 맹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사람에게는 배우지 않고도 능한 것이 있는데 이것이 양능이요, 생각하지 않고도 아는 것이 있는데 이것이 양지이다(人之所不學而能者 其良能也 所不慮而知者 其良知也).

어려서 손을 잡고 가는 아이는 그 어버이를 사랑할 줄 모르는 법이 없으며, 자라서는 그 형을 공경할 줄 모르는 사람이 없다. 이처럼 어버이와 하나 되는 것은 인()이요, 자기보다 나이 많은 사람을 공경하는 것은 의()이니, 다름이 아니라 천하에 두루 통하는 것이다.”

이처럼 육친을 사랑하고 어른을 공경하며, 이웃을 측은하게 여기는 양지와 양능은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어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고, 배우지 않아도 할 수 있는 선천적인 것으로 사람은 본래 태어날 때부터 선한 것이라는 성선지설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맹자는 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인의와 충절을 행하고 선을 즐거워하며, 게을리하지 않는 것이 천작이다.”

천작(天爵).

하늘이 준 자리란 뜻으로 남에게 존경을 받을 만한 탁월한 덕행이나 미덕을 이르는 말로 맹자는 이처럼 인의와 충절을 행하고 선을 즐거워하는 마음은 하늘이 준 벼슬이자 사람이 본래부터 갖고 있는 양귀(良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인간이면 누구나 지닌 본연의 마음(本然之心)’이며, 사람의 생명 속에 내재된 선천적인 선의 뿌리(善根)’이다.

이것은 묵자의 경우처럼 공허한 겸애가 아닌 실제 인간의 마음속에 깃들어 있는 사랑이다. 그러므로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는 것을 보면 누구나 자연스럽게 그 어린아이를 구하려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 마음이 바로 측은지심(惻隱之心). 맹자는 인간이 지닌 사단지심(四端之心) 가운데 측은지심을 그 첫 번째로 손꼽음으로써 자신이 주장한 성선설의 핵심이 바로 인()의 단서인 남을 불쌍히 여기는 측은지심임을 명백히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맹자가 주장한 본연의 마음(本然之心)’ 속에 들어있는 배우지 않고도 아는 양능(良能)’생각하지 않아도 아는 양지(良知)’인의와 충절을 행하고 선을 즐거워하며 게으르지 않는 양귀(良貴)’는 서양철학에서 나타나는 양심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양심(良心).

함께 알다를 의미하는 라틴어의 conscientia에서 파생된 conscience.

한 개인이 자기 자신의 행위, 의도, 성격의 도덕적 의미를 올바르고 선하게 유지해야 된다는 의무감과 관련지어 파악하는 전인격적인 도덕의식.

중세철학에서는 선에 대한 긍정적 태도와 악에 대한 부정적 태도를 직접적으로 나타내는, 인간이 태어나면서 갖고 있는 도덕의식을 양심이라 일컬었으며, 주로 기독교의 프로테스탄티즘에 의해서 계승 발전되어 왔다.

그러나 이러한 양심은 기독교뿐 아니라 거의 모든 종교에서도 그 존재를 인정하는데, 예를 들면 고대 이집트인들은 양심이 인도를 벗어나면 반드시 두려움을 느끼게 되기 때문에 양심의 명령을 어기는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고 역설하였으며, 힌두교 신자들은 양심을 우리 내부에 살고 있는 보이지 않는 신으로 생각하고 있어, 이를 어겨서는 안 된다고 행동지침의 기준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맹자가 양능과 양지, 그리고 양귀, 양심론을 주장하였던 것은 묵자의 겸애론의 모순점을 지적하기 위함이었다.

맹자는 굳이 묵자처럼 머리 꼭대기에서부터 발꿈치의 털까지 다 닳아 없어질 만큼 사람을 두루 사랑하고, 사람을 두루 이롭게 하기 위해서 분골쇄신하지 않아도 심즉리(心卽理), 즉 인간의 심성 속에는 이성이 있는데, 이 이성이 바로 인간이면 누구나 본연적으로 갖고 있는 배우지 않고도, 생각하지 않고도 사람의 생명 속에 내재되어 있는 선천적인 선의 뿌리인 선근(善根:양심)이며, 바로 이러한 선한 마음이 성선지설이라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맹자는 그 유명한 사단론을 정립하게 된다.

사단지심(四端之心).

이는 맹자의 핵심사상인 성선지설의 골수로서 맹자에 의하면 이 사단은 모든 인간이면 다 가지고 있는 일종의 선천적인 도덕적 능력인 것이다. 맹자는 이 사단지심에서 성선설이 드러난다고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측은지심(惻隱之心), 수오지심(羞惡之心), 공경지심(恭敬之心), 시비지심(是非之心)은 모든 사람들이 다 가지고 있다. 측은지심은 인()이요, 수오지심은 의()이며, 공경지심은 예()이고, 시비지심은 지()이다. 인의예지가 외부에서 나에게 녹아드는 것이 아니요, 내가 본래부터 갖고 있는 것인데, 사람들이 생각하지 않을 뿐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구하면 얻고 버리면 잃는다. 사단지심을 얻거나 혹은 잃어서 선과 악의 거리가 서로 두 배가 되고, 다섯 배가 되어 계산할 수 없는 정도가 되는 것은 이러한 재질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했기 때문인 것이다. 시경(詩經)하늘이 백성을 내시니 사물이 있으면 법칙이 있다. 사람들은 떳떳한 본성을 갖고 있어서 아름다운 덕을 좋아한다.’라고 했는데, 공자는 이 시를 지은 사람은 사람의 본성을 아는 사람일 것이다.’라고 했다. 그러므로 사물이 있으면 반드시 법칙이 있으니, 사람은 떳떳한 본성을 갖고 있으므로 선한 덕을 좋아하는 것이다.

그뿐인가.

맹자가 주장한 성선지설의 위대함은 인간이면 누구나 행할 수 있고 도달할 수 있는 실천 가능한 목표라는 점이었다.

묵자의 겸애가 맹자가 말하였던 대로 머리 꼭대기부터 발꿈치까지 털이 다 닳아 없어지도록 노력한다.’라고 해도, 혹은 장자가 비평하였던 대로 넓적다리에 살이 없고 정강이의 털이 다 없어지도록 노력한다.’라고 해도 실천 불가능한 가치관이라면 맹자의 성선지설은 인간이면 누구나 마음이 똑같이 옳게 여기는 것(心之同然)’을 갖고 있으므로 누구든지 노력하면 성인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 주고 있는 것이다.

맹자는 요순도 보통 사람과 같다(堯舜與人同耳)’라고 말함으로써 사람은 누구나 노력하면 요순과 같은 성인이 될 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성인은 인륜의 극치이며, 순수한 선의 표상이다. 그러나 성인 또한 사람이 이룬 것이다. 그러므로 성인은 나와 똑같은 부류인 것이다(聖人與我同類者).’

맹자는 발을 알지 못하고 신을 만들더라도 나는 그것이 삼태기가 되지 않음을 안다.’라고 비유함으로써 성인과 나의 공통점을 설명하고 있다.

즉 모든 사람의 발은 비슷비슷하기 때문에 굳이 그 발을 보지 않더라도 신기료장수는 신을 만들 수 있는데, 마찬가지로 성인이나 나나 모두 태어날 때부터 똑같은 발, 즉 성선지설을 갖고 있기 때문에 본연지선(本然之善)을 충분히 발휘한다면 성인과 똑같은 신을 신을 수 있음을 드러내 보인 것이었다.

그러고 나서 맹자는 다음과 같이 부언하고 있다.

입이 맛을 느끼는데 있어서 똑같이 즐김이 있으며, 귀가 소리를 듣는데 있어서 똑같이 들음이 있으며, 눈이 색깔을 보는데 있어서 똑같이 아름답게 여김이 있다. 그러니 유독 마음에 있어서 똑같이 그러한 것이 없겠는가. 마음이 똑같이 그러한 것은 무엇을 말함인가. ()와 의()를 말함이다. 성인은 자기의 마음이 남과 다 같다는 것을 먼저 터득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이와 의가 나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은 마치 고기가 내 입을 기쁘게 하는 것과 같다.”

이러한 맹자의 태도는 등나라의 문공(文公)과 나눈 대화에서도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등문공은 20여 년에 걸친 맹자의 주유열국 때 가장 맹자를 믿고 의지하였던 현군중의 한 사람이었다.

문공은 세자 때부터 맹자를 존경하여 아버지 정공(定公)이 세상을 뜬 후에도 추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맹자에게 장례를 치르는 법을 물었을 뿐 아니라 자신의 등나라로 와 달라고 세 번이나 간청하였던 임금이었다.

이때 맹자는 예순의 나이를 넘긴 노인이었으나 마침내 왕도정치를 펼 기회를 잡은 듯한 희망을 갖고 등나라로 들어가 마지막 순회를 단행한다.

결국 강대국 제나라와 초나라 사이에 놓인 약소국 등나라의 입지적 여건에서는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실현할 수 없음을 깨달은 맹자는 고향으로 돌아옴으로써 마침내 주유천하의 대단원을 맞게 되는데, 어쨌든 문공은 자신이 세자 시절 맹자로부터 들었던 말을 평생 잊지 않고 항상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맹자께서 송나라에서 일찍이 내게 해주신 말은 마음에 사무쳐 잊혀지지 아니한다(孟子嘗與我言於宋 於心終不忘).”

그렇다면 문공은 맹자에게 무슨 말을 들었던가.

어떤 인상 깊은 말을 들었기 때문에 마음에 끝내 잊히지 않는다고 말하고 평생 동안 맹자를 존경했던 것일까.

그것은 바로 맹자사상의 골수인 성선지설이었다.

그 무렵, 문공은 아직 세자로서 이웃 강대국인 초나라에 사신으로 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말이 사신이지 약소국이 강대국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떠나는 진사(陳謝) 사절이었던 것이다.

초나라로 가는 길에 송나라를 지나게 되었는데, 그때 마침 송나라에는 맹자가 머무르고 있었다. 송나라도 등나라처럼 규모가 작고 땅은 협소하여 인구가 적었지만 송나라의 임금은 술과 여자에만 빠져 있을 뿐 분발하지 않았으므로 맹자 역시 우울한 식객노릇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 세자는 강대국 초나라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진사로 나가는 자신의 입장을 한탄하자 맹자는 말끝마다 요순(堯舜)임금을 칭하면서 인간 본성의 선함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맹자에는 맹자가 문공에게 말하였던 구체적인 내용이 나와 있지는 않지만 전후의 문맥으로 보면 맹자는 인간은 누구나 선한 마음을 갖고 있다. 천하의 성군 요순도 성선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그대도 그 성선을 확장시킬 수만 있다면 반드시 요순과 같은 성군이 될 수 있을 것이다.’라는 내용으로 설법하였을 것이다.

처음에는 맹자의 말을 그대로 흘려들었던 세자는 초나라에 가서 굴욕적인 외교를 끝내고 돌아올 무렵에 다시 맹자를 만난다.

이때 세자는 자신이 아무리 노력해도 요순과 같은 성군이 될 수 없는데 어째서 자신에게 그런 듣기 좋은 말을 하였는가 하고 따져 물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러자 맹자는 대답하였다. 의심하는 세자에 대한 맹자의 명답이 등문공 상편에 다음과 같이 나오고 있다.

세자는 내 말을 의심하십니까. 도는 하나일 뿐입니다. 일찍이 성간(成覵)이 제경공에 대해서 말하기를 그대도 장부이고 나도 장부이니 내가 그대에게 무엇을 두려워하겠습니까.’ 하였으며, 안연(顔淵)이 말하기를 ()은 어떤 사람이며 나는 어떠한 사람인가. 도를 이룬 자는 또한 이 순과 같다.’라고 하였으며, 공명의(公明儀)가 말하기를 문왕은 나의 스승이니 주공(周公)이라도 어찌 나를 속이겠는가.’ 하였습니다. 지금 등나라는 비록 작다고 해도 국토의 긴 곳을 잘라 짧은 것을 보충하면 오십 리가 되니, 그래도 그것을 가지면 좋은 나라로 만들 수가 있습니다.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만약 약이 몸을 어지럽게 하지 아니하면 그 병은 낫지 아니한다.’라고 하였습니다.”

맹자의 이 대답은 인간의 마음속에는 누구나 성선지심이 있는데, 그 마음을 닦아 도를 이루면 반드시 누구나 요순과 같은 성군이 될 수 있음을 분명하게 못 박고 있는 것이다.

이는 좋은 약을 먹었을 때 약 기운으로 말미암아 잠시 어지러운 증상이 있겠지만 참고 기다리면 곧 좋은 결과가 찾아와 쾌유되는 것처럼 비록 지금 등나라는 사방 50리밖에 안 되는 작은 나라이지만 인의로써 다스린다면 반드시 요순과 같은 성군들의 태평성대를 이룰 수 있음을 확신하는 맹자의 사자후였던 것이다.

맹자의 대답 중 안연의 말을 인용한 순은 어떤 사람이며, 나는 어떤 사람인가. 도를 아는 사람은 또한 순과 같다.(舜何人也 予何人也 有爲者亦若是)’라는 문장은 누구든 성선지심으로 도를 닦으면 순과 같은 성군이 될 수 있음을 드러낸 명언이었던 것이다.

놀랍게도 맹자의 이런 성선지설은 서양철학에 있어서도 중요한 사상으로 발전되었다.

스토아학파는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의 자연에 근거하여 공동의 이성법칙을 추구하였는데, 자연의 이성법칙에 따라서 행하기만 하면 이것이 바로 지선(至善)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성선설은 키케로(Cicero), 세네카(Ceneca)에서부터 루소에 이르기까지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루소는 인간의 본성은 본래 선한 것인데, 문명과 사회제도에 영향을 받아 악하게 되었다고 생각하였다. 루소는 자연이 만든 사물은 모두 선하지만 일단 인위(人爲)를 거치면 악으로 변한다. 그러므로 선은 천성에 속하고 악은 인위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라고 말했던 것이다. 서양철학에서 루소가 사람은 원래 선하지만 문명과 사회제도와 같은 인위를 거치면 악으로 변한다.’라고 주장하였다면 동양철학에서 최초로 성선설을 주창한 맹자 역시 사람은 선천적으로 선을 가지고 있지만 후천적인 환경과 감정의 제약 때문에 불선(不善)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라고 부르짖었던 것이다.

맹자는 사람이 불선하게 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들고 있다.

그 첫 번째는 함닉(陷溺)’으로, 주위환경의 제약에 따라 사람의 마음이 그 속에 빠짐으로써 성선의 기초가 허물어져 드러나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맹자가 말하는 주위환경이란 천재지변과 같은 자연환경과 혼란한 사회악과 같은 외부적 상황을 뜻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맹자는 다음과 같이 비유하고 있다.

넉넉한 해에는 자제들이 풍년에 힘입어 온순해지는 것이 많고, 흉년에는 자제들이 포악해지는 것이 많으니, 이것은 선천적으로 자질이 다른 것이 아니라 마음을 빠뜨리는 것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이 문장에 나오는 그 마음을 빠뜨리는 것’, 함닉이 인간의 성선을 불선으로 만드는 요인 중의 하나라는 것이다.

그 두 번째는 곡망(梏亡)’이다.

곡망이란 인의지심(仁義之心)이 일어나지만 사리사욕의 훼방으로 성선의 마음을 잘 보존하여 기르지 못하고 오히려 소멸되는 것이다.

이에 대해 맹자는 우산(牛山)의 나무를 들어 곡망을 다음과 같이 쉽게 설명하고 있다.

우산의 나무는 원래부터 아름다웠다. 그러나 큰 도시에 인접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땔감으로 쓰거나 목재로 사용하기 위해 찾아가 도끼로 베니, 어찌 아름다울 수 있겠는가. 또한 하늘은 비와 이슬을 내려주어 나무를 아름답게 자라나게 하지만 사람들은 소와 양을 방목하여 나무의 잎을 뜯어먹음으로써 반질반질하여진다. 이것을 보고 사람들은 원래부터 우산에 나무가 없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이것이 어찌 산의 본래 모습이겠는가.”

이러한 맹자의 설명은 맹자야말로 비유의 천재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아름다운 우산의 나무를 땔감으로 쓰거나 목재로 사용하기 위해서 도끼로 베는 것은 사욕을 채우려는 인간의 욕망 때문이며, 소나 양을 방목시켜 풀을 뜯게 함으로써 나무를 반질반질하게 고사시키는 것은 인간의 양심이 아닌 금수와 같은 욕망에 맡기는 어리석은 행위라고 비유함으로써 이러한 사리사욕의 탐욕이야말로 성선을 불선으로 바꾸는 곡망(梏亡), 두 손을 꼭 묶는 수갑이라고 말한 다음,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리고 있다.

이러한 소행이 양심을 꽁꽁 묶어서 없애버리니, 꽁꽁 묶어서 없애는 것을 반복하면 양심을 보존할 수 없다. 양심을 보존할 수 없다면 짐승과 다름이 없다. 사람들은 그 짐승과 같은 모습만을 보고 일찍부터 높은 재질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니, 이것이 어찌 사람의 본래 모습이겠는가.공자께서 붙잡으면 보존되고 놓아두면 없어지고 나가고 들어가는 것에 일정한 때가 없어서 그 방향을 알 수 없는 것은 오직 마음뿐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이를 두고 하신 것이다.”

맹자가 지적하였던 사람이 불손하게 되는 세 번째 이유는 방실(放失)’이었다.

방실이란 반성할 줄 몰라 마음을 보존하지 못함으로써 결국 양심이 작용하지 못하는 타락한 상태를 가리키는 것으로 어리석음, 게으름과 같은 놓아버린 마음(放心)’을 의미하는 것이다.

놓아버린 마음이야말로 사람이면 누구나 타고난 성선을 파괴하는 최고의 악행인 것이다. 이에 대해 맹자는 다음과 같이 열변하고 있다.

맹자께서 말씀하셨다.

인은 사람의 마음이요, 의는 사람의 길이다. 그 길을 버리고 따르지 아니하며 그 마음을 놓아버리고 찾을 줄 모르니, 아아, 슬프도다. 사람은 개나 닭이 나간 것이 있으면 찾을 줄을 알지만 마음을 놓아버린 것이 있으면 찾을 줄을 모른다. 학문의 길이란 다른 것이 없다. 바로 그런 놓아버린 마음을 찾는 것일 뿐이다.’”

맹자의 이 말은 금과옥조이다.

학문의 길이란 놓아버린 마음을 찾는 것일 뿐(學問之道 求其放心而已矣)’이라는 맹자의 말은 맹자 사상의 골수 중의 골수이다.

그 놓아버린 마음을 찾으면 천연적으로 본래부터 사람들이 갖고 있던 어질고 선한 성선지심이 드러난다고 맹자는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비유의 천재였던 맹자가 이 놓아버린 마음(放心)’에 대해서도 적절한 예를 들지 않았을 리가 없을 것이다.

맹자는 이 놓아버린 마음을 무명지(無名指)에 비유하였다.

무명지는 다섯 개의 손가락 중에서 네 번째에 해당되는 손가락으로 이름이 없다. 다른 손가락들과는 달리 별로 쓰임새가 없기 때문인 것이다.

굳이 사용할 때에는 탕약을 저을 때나 쓴다고 해서 약지(藥指)라고도 불리는데, 하지만 별로 쓸모가 없어 이름 없는 손가락’, 무명지라고 불렸던 손가락이었던 것이다.

이 무명지를 놓아버린 마음에 비유하여 가르친 맹자의 설법은 과연 맹자를 유가에 있어서 불세출의 투장이라고 부르게 할 만한 탁월한 것이었다.

놓아버린 마음(放心)’무명지에 비유한 맹자의 말은 다음과 같다.

지금 무명지가 구부러져서 펴지지 않을 경우 당장 아프거나 일을 해치는 것이 아니고서도 만약 이것을 펼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진나라나 초나라까지 이르는 길을 멀다 여기지 않을 것이다. 이는 내 손가락이 남들의 손가락과 같지 않기 때문이다. 내 손가락이 남들과 같지 않아 구부러져 펴지지 않으면 먼 길을 마다않고 의사를 찾아가지만 놓아버린 마음을 찾기 위해서는 이를 바로잡으려 하지 않으니, 이는 분별력이 없기 때문인 것이다.”

놓아버린 마음의 회복(救放心)’, 즉 잃어버린 마음의 회복이 바로 학문의 길이자 인간의 길이며, 바로 본심의 선을 보존하는 것이 도덕의 근원이라는 것이 맹자가 주장하였던 성선지설의 골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맹자의 성선설에 정면으로 대적해 온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순자(荀子)였다. 순자의 생몰연일도 맹자처럼 불분명하지만 대략 맹자보다 50년 후에 태어난 또 하나의 유가적 위대한 사상가였다.

본디 공자의 가르침에는 어짐과 의로움, 또는 충성과 믿음과 같은 덕을 숭상하는 내면적인 정신주의와 실행과 예의를 존중하는 외면적인 형식주의라는 두 가지의 양면이 있었다.

정신주의적인 면은 증자(曾子)를 거쳐 맹자에게서 크게 발전되었는데 비해 형식주의적인 면은 자유와 자하를 거쳐 순자에게로 계승되었다. 따라서 맹자가 주관적이고 이상적이었다면 순자는 객관적이고 현실적이었다.

공자의 사상은 맹자와 순자에 의해서 이처럼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더욱 발전되고 이론적으로 체계화되어 마침내 제자백가들의 사상들을 압도하고 수천 년 동안 중국 사람들의 마음을 지배해왔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한 것은 순자가 이처럼 맹자와 더불어 거의 동시대적인 선각자로 유가를 발전시키고, 공자의 사상을 이어받은 위대한 유가였음에도 불구하고 유학자들 사이에서는 이단자로 취급되어왔다는 점일 것이다.

순자가 유가의 이단자로 취급을 받고 소외되었던 것은 공교롭게도 맹자의 성선지설에 정면으로 도전하여 사람의 본성은 본래부터 악하다.’라는 성악지설(性惡之說)’을 주장하였기 때문인 것이다.

순자의 생에 대해서는 사마천이 사기에서 맹자순경열전(孟子荀卿列傳)’을 기록한 것이 유일한데, 이 열전을 지으면서 사마천은 다음과 같이 맹자와 순자를 평가하고 있다.

맹자는 유가와 묵가의 유문(遺文)을 섭렵하고, 예의와 통기(統紀)를 밝혀 혜왕의 욕심을 단절시켰다. 또한 순경(荀卿:순자)은 과거의 유가, 묵가, 도가의 성쇠를 함께 논했다. 따라서 이처럼 맹자순경열전을 짓는다.”

사마천의 이 짤막한 촌평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순자가 맹자와 달리 도가(道家)까지도 공부하였음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이처럼 순자는 오히려 사물의 일부분만을 아는 곡지(曲知)의 제자백가들을 비판하기 위해서 당대의 거의 모든 학파들을 널리 공부하였던 유가에 있어서 또 하나의 맹장이었던 것이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순자의 생애를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순경(荀卿:순자)은 조나라(지금의 산시성) 사람이다. 50세에 이르러 비로소 제나라에 유학하였다. 그때 제나라에는 추연(騶衍)이 있어 그 학술은 허하고 크면서도 넓었으며, 추석(騶奭)의 문장은 실용성이 없었으나 훌륭하였으며, 또 순우곤(淳于)은 오래 함께 있으면 명언을 쏟아놓는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제나라 사람들은 이 세 사람을 칭찬하기를 하늘의 일을 얘기하여 탕탕망망한 추연, 용을 새기는 것과 같이 실용에 맞지 않는 추석, 수레의 심대를 불에 그슬려서 기름이 다함이 없이 흐르는 것과 같은 지혜가 많은 순우곤이라 하였다. 이들 전병(田餠)의 무리는 이미 제양왕 때 모두 죽었다. 그중에 순경이 가장 연장인 늙은 선생이었다.

제나라는 열대부에 결원을 보충하였는데, 순경은 세 번이나 좨주(祭酒:열대부의 최장로)가 되었다. 누군가 순경을 무고한 자가 있었으므로 순경은 초나라로 갔다. 초나라 춘신군(春申君)은 순경을 난릉(蘭陵)의 현령으로 앉혔는데, 춘신군이 죽자 면직되고 내쳐져 난릉에서 살았다.

이사(李斯)는 일찍이 순경의 제자였는데, 그 뒤에 진나라의 재상이 되었다. 순경은 혼탁한 세상의 정치와 나라를 망치는 문란한 임금이 계속해 나오고, 왕도가 행해지지 않고, 무당, 점쟁이에 미혹되어 길흉화복을 믿고, 되지 못한 선비들이 작은 일에 구애하며, 장자의 무리가 고담방론하며 풍속을 어지럽히는 것을 꺼려하였다. 그리하여 유가, 묵가의 도덕의 행실과 흥패를 연구하여 수만 언을 저술하였다. 죽어서 난릉에 장사되었다.”

순자의 생애를 기록해 놓은 유일한 사기의 맹자순경열전을 통해 순자가 대략 기원전 323년경에 태어났음이 추정된다. 왜냐하면 사기에 기록된 순우곤은 맹자와 동시대 사람으로 두 번이나 맹자와 설전을 벌였던 당대 최고의 세객이었으므로 순경이 ‘50세에 비로소 제나라에 유학하였고, 그 무렵에는 그들이 이미 다 죽어 순경이 세 번이나 좨주에 뽑혔다.’라는 사기의 기록이 사실이라면 대략 순자는 맹자보다 50년 뒤에 태어난 인물임에 틀림이 없기 때문인 것이다.

순자의 원이름은 황()이며, 열다섯 살 때부터 수재라 일컬어졌다 한다.

제나라의 직하학궁에는 사기에 기록된 대로 추연, 전병, 순우곤 등 이름난 천하의 선비들이 몰려들어 학문을 연구하였으므로 맹자도 이곳에 빈객으로 추대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순자도 50세 때인 제나라 민왕() 말년에 그곳으로 가서 학문에 정진하였던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마천의 기록을 통해 순자가 어째서 유가의 법통을 이은 대유학자임에도 불구하고 유학으로부터 이단자 취급을 받게 되었는가 하는 그 이유가 명백하게 암시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문장에서 비롯된다.

이사는 일찍이 순경의 제자였는데, 그 뒤에 진나라의 재상이 되었다.”

이사(李斯).

중국 역사상 최고의 악역. 이 악역의 주인공이 순자의 제자라는 것은 스승인 순자에 대한 모독(冒瀆)이었던 것이다.

이사(李斯).

그는 진나라의 재상으로 시황제를 도와 천하를 통일하였던 일등공신이었다.

그는 천하를 통일한 후에는 분서갱유(焚書坑儒)를 단행하였고, 시황제가 죽은 후 환관 조고(趙高)와 공모하여 막내아들 호해(胡亥)를 황제로 옹립하는 한편 태자 부소(扶蘇)를 자살케 한 간신이었다.

통일 국가 진나라의 15년의 짧은 수명은 전적으로 승상 이사에 대한 책임으로 중국의 역사는 이사를 절대적 악인으로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그 자신이 순자로부터 유학을 배웠으면서도 유학자들을 구덩이에 산 채로 매장한 분서갱유 사건은 이사를 용서받지 못할 사람(the Untouchable)’의 불가촉 악인으로 규정하고 그의 스승인 순자마저 이단아로 몰기에 충분한 구실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사는 순자로부터 학문을 배웠으나 그 자신은 유가보다는 법가(法家)에 가까웠다.

법가(法家:Legalism).

중국 고대철학의 한 학파로서 전국시대에 노예들의 끊임없는 폭동과 신흥 봉건 지주계급의 발흥으로 인하여 기존의 유가적 예치(禮治)가 점점 붕괴되어 효력을 상실하자 엄격한 법으로써 나라를 다스리자는 법치사상이 등장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법가였던 것이다.

아이로니컬한 것은 법가를 부르짖은 한비자(韓非子)와 인간의 모든 활동은 통치자와 국가권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고 강조함으로써 오직 국가의 강력한 통제와 황제에 대한 절대복종을 통해서만 사회적 화합을 이룰 수 있으니, 엄격하게 상벌을 내리는 법률체계로서 통일제국 진나라를 다스려야 한다는 철혈(鐵血)정책을 쓴 이사 모두 순자의 제자라는 점이었다.

그러나 한비자나 가혹하게 이 정책을 실행함으로써 진나라를 15년 만에 멸망시켜 영원히 중국에서 법가 철학을 불신받게 한 악역의 대명사, 이사라는 제자가 순자에게서 나온 것은 결코 돌연변이는 아니었다. 오히려 청출어람(靑出於藍)이었다.

우선 순자는 공자, 맹자로 이어지는 전통적인 유가에서 하늘이 사람들의 도덕적인 권위의 기초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부정하였다. ‘하늘은 사람 위에서 자연과 함께 이 세상 모든 것을 지배하는 섭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노자와 장자도 다르지 않아 이들 도가 역시 사람은 자연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중국 사람들은 자연과 사람을 지배하는 것은 하늘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순자는 하늘과 사람의 관계를 분리시켰다.

자연에는 자연의 법칙이 있고, 사람에게는 사람의 법칙이 있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순자는 하늘에는 자각과 뜻이 있어 착하고 악함에 따라 사람들에게 복을 내리기도 하고, 화를 내리기도 한다는 기존의 하늘에 대한 신앙을 전적으로 부정하였다.

순자는 그래서 다음과 같이 말을 하고 있다.

하늘은 만물을 생성하게는 하지만 만물을 분별하지는 못하며, 땅은 사람들을 그 위에 살아가게는 하지만 사람들을 다스리지는 못한다.”

이는 스승 공자의 가르침과는 정반대의 사상이었다. 공자는 중용(中庸)’에서 정성이란 하늘의 도요, 정성 되게 사는 것은 사람의 도이다.’라고 말함으로써 하늘이야말로 이 우주 만물의 지배자이며, 올바른 도의 근원으로서 사람들의 도덕적 행위의 원천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공자의 하늘에 대한 신앙은 논어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하늘에 죄를 지으면 빌 곳도 없게 된다(獲罪於天 無所禱也)’란 구절에서부터 공자가 위나라 영공의 부인이며 음탕하기로 유명한 남자를 만나보았을 때 자로가 불평하자 공자는 자신의 결백함을 주장하기 위해서 하늘에 두고 다음과 같은 맹세까지 하고 있는 것이다.

내게 잘못이 있었다면 하늘이 버리실 것이다. 하늘이 버리실 것이다.”

이는 공자가 가장 사랑하였던 제자 안연이 죽었을 때 아아, 하늘이 나를 망치는구나, 하늘이 나를 망치는구나.’하고 두 번이나 애통해한 것을 봐도 잘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순자는 공자의 이러한 하늘에 대한 형이상학을 완전히 거부하고 있다.

심지어 중국에서 내려오는 일식·월식이 생기거나 혜성이 나타나고, 이상한 기후변화가 생기면 모든 사람들이 옳지 못한 일을 해 경고하는 뜻으로 일으키는 하늘의 징조라는 전통사상까지 부정하였다. 그래서 순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일식과 월식이 생기고, 철에 맞지 않는 비바람이 일고, 이상한 기운이 나타나는 것은 어느 세상에서나 늘 있었던 일이다.별이 떨어지고, 나무가 우는 소리를 내는 것은 천하의 변화이자 음양의 변화로 드물게 생기는 일이다. 이상하게 여기는 것은 괜찮지만 이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이처럼 하늘과 인간의 관계를 분리시킨 순자의 혁명적 사상은 긍정적인 사회현상을 일으키기도 했는데, 그것은 사마천이 쓴 기록처럼 무당·점쟁이에 현혹되어 길흉화복을 믿는미신행위에 결정타를 날릴 수 있었다.

왜냐하면 무당이나 점쟁이 같은 미신들은 맹목적으로 하늘의 권위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순자는 하늘에는 일정한 도가 있고, 땅에는 일정한 법칙이 있으니, 따라서 하늘이 사람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사람이 하늘을 다스려야 한다.’라고 주장한다.

순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하늘과 땅은 군자를 낳았고, 군자는 하늘과 땅을 다스린다.”

순자의 가르침대로라면 하늘과 땅을 다스리는 군자는 일정한 법칙에 따라 땅을 다스리고 백성들을 다스려야 하는데, 이 일정한 법칙이 바로 법()인 것이다.

법은 인간끼리 만든 약속이며, 계율이며, 다스리는 기준이며, 조화하는 법칙인 것이다. 따라서 순자는 법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소청을 처리하는 대원칙은 선한 일을 가지고 온 자는 예로써 대접하고, 선하지 못한 일을 가지고 온 자는 형벌로써 대접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를 잘 분별하면 어진 이와 못난 이가 섞이지 않게 되고, 옳고 그름이 혼돈되지 않는 것이다.그러므로 공평하다는 것은 일을 하는 기준이 되고, 알맞게 조화된다는 것은 일을 하는 법칙이 된다. 법에 있는 일들은 법에 따라 처리하고, 법에 없는 일들은 전의 일들을 비추어 결정하면 소청은 바르게 처리될 것이다. 그러므로 좋은 법이 있어도 어지러워지는 일은 있으나 군자가 있으면서도 어지러워진다는 말은 예로부터 지금까지 들어본 일이 없다. 옛말에 다스림은 군자에게서 나오고 혼란은 소인에게서 생겨난다(治生乎君子 亂生乎小人)’라고 한 것은 이것을 두고 한 말이다.”

순자는 이처럼 좋은 법이 있어도 어지러워지는 일은 있으나 군자가 있으면서도 어지러워진다는 말은 예로부터 지금까지 들어본 일이 없다(故有良法而亂者有之矣 有君子而亂者自古及今未嘗聞也)’라는 결론을 통해 좋은 법(良法)’보다는 좋은 사람(君子)’이 더 중요하다고 주장함으로써 유가의 테두리를 벗어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순자는 세상을 다스리는 방법으로 ()’을 매우 중요시하였던 특징을 갖고 있었다. 이렇게 예의법정(禮儀法正)을 강조하는 순자는 세상은 군자에 의해서 다스려지는 것이 최선이지만 어차피 군자가 세상을 다스리는 것이 불가하므로 인간이 만든 법으로 세상을 다스리는 것이 차선이라는 인식에서부터 출발하였던 현실적 사상가였던 것이다.

순자는 군도(君道)’ 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법은 다스림의 시작이고, 군자는 법의 근원이다(法者治之端也 君子者法之原也).”

따라서 국가에는 다스림의 기준이 되는 법이 반드시 있어야 되며, 형벌을 엄히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법의 중시가 그의 제자인 한비자에게서 극도로 발전해 법가를 이루었으며, 시황제를 도와 천하를 통일하였던 순자의 제자 이사는 시황제가 말더듬이 한비자를 총애하자 참언하여 독살시키는 한편 한비자의 법가를 한층 더 심화시켜 형명법술(刑名法術)’을 주로 하는 철혈 통치를 단행함으로써 중국 역사상 최고의 악인으로 낙인찍혀 그 자신은 물론 스승인 순자까지도 이단자로 몰아버리는 우를 범하였던 것이다.

순자가 이렇듯 맹자와 더불어 유가의 정통을 이은 대사상가였으나 이단자 취급을 받게 되는 것은 공자의 주관적이고 이상적인 형이상학을 계승한 맹자에 대해 준엄한 비판을 가하면서 특히 맹자가 부르짖었던 성선지설에 직격탄을 날렸기 때문이었다.

순자는 맹자와 달리 사람의 본성은 태어날 때부터 악하다.’라는 성악지설(性惡之說)’을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순자는 성악(性惡) 의 첫 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사람의 본성은 악한 것이니 그것이 선하다고 하는 것은 거짓이다(人之性惡 其善者僞也). 지금 사람들의 본성은 나면서부터 이익을 좋아하는데, 이것을 따르기 때문에 쟁탈이 생기고, 사양함이 없어진다. 사람은 나면서부터 질투하고 미워하는데, 이것을 따르기 때문에 남을 해치고 상하게 하는 일이 생기며, 충성과 믿음이 없어진다. 사람은 나면서부터 귀와 눈이 욕망이 있어 아름다운 소리와 빛깔을 좋아하는데, 이것을 따르기 때문에 지나친 혼란이 생기고, 예의와 아름다운 형식이 없어진다. 그러니 사람의 본성을 따르고 사람의 감정을 좇는다면 반드시 다투고 뺏게 되어 분수를 어기고, 이치를 어지럽히게 되어 난폭함으로 귀결될 것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스승과 법도에 따른 교화와 예의와 법도가 있어야 하며, 그런 뒤에야 서로 사양하게 되고 아름다운 형식을 갖게 되어 다스림으로 귀결될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사람의 본성은 악한 것이 분명하며, 그것이 선하다는 것은 거짓이다.”

순자는 사람의 본성이 태어날 때부터 악하여 본성이 선하다는 것은 거짓이므로 반드시 스승과 법도에 따른 교화와 예의의 교도가 있어야 하는데, 그 교화와 교도의 수단이 바로 ()’이라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순자는 다음과 같은 비유를 들어 법도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굽은 나무는 반드시 댈 나무를 대고 쪄서 바로잡은 뒤에라야 곧아지며, 무딘 쇠는 반드시 숫돌에 간 뒤에야만 날카로워지듯이 지금 사람의 본성이 악한 것은 반드시 스승과 법도의 가르침이 있은 뒤에야 다스려지는 것이다.”

이렇게 포문을 연 순자는 마침내 맹자를 향해 정조준하여 직격탄을 날린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맹자는 사람이 배우는 것은 그의 본성이 선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하였다. 내 생각은 그렇지 않다. 그것은 사람의 본성을 제대로 알지 못해 본성과 작위의 구분을 잘 살피지 못한 때문이다. 본성이란 하늘로부터 타고난 것이어서 배워서 행하게 될 수 없는 것이며, 노력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예의란 성인이 만들어 낸 것이어서 배우면 행할 수 있는 것이며, 노력하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배워서 행할 수 없고 노력해 이루어질 수 없는데도 사람에게 있는 것은 본성이라 하고, 배우면 행할 수 있고 노력하면 이루어질 수 있는 사람에게 있는 것을 작위라 한다. 이것이 본성과 작위의 구분이다.

지금 사람의 본성으로 눈은 볼 수가 있고 귀는 들을 수가 있다. 모든 볼 수 있는 시력은 눈을 떠나지 않으며, 들을 수 있는 청력은 귀를 떠나지 않는다. 눈은 시력이 있고 귀는 청력이 있는데, 이것은 배워서 될 수가 없는 것들이다.

맹자는 사람의 본성은 선한데, 모두 그 본성을 잃기 때문에 악한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나는 그것은 잘못된 말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은 본성대로 내버려두면 그의 절박함이 떠나고 그의 자질도 떠나 버려 선한 것을 반드시 잃어버리고 말 것이다. 이로써 본다면 사람의 본성은 악한 것이 분명하다.”

우선 순자는 맹자의 사단설의 모순을 통렬히 비판한다.

맹자는 사람은 누구나 선천적 도덕적 능력을 갖고 있는데, 그 도덕적 능력이 바로 남을 불쌍히 여기는 측은지심과 부끄러워하며 죄를 미워하는 수오지심과 남을 섬기고 사양하는 공경지심과 옳고 그름을 가리는 시비지심이라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순자는 그러한 사단은 선천적으로 갖고 태어나는 도덕 능력이 아니라 반드시 스승과 법도의 가르침에 의해서 고쳐지는 후천적 작위라는 것이었다.

작위(作爲).

이는 순자가 주창한 성악지설의 골수이다.

사람의 본성은 태어날 때부터 선한 것이라는 맹자의 주장은 양심(良心)’에서부터 기인된 것이지만 사람의 본성은 태어날 때부터 악한 것이라는 순자의 주장은 본능(本能)’에서부터 기인된 것이었다. 이 본능은 나면서부터 이익을 좋아하고, 아름다운 소리와 좋은 빛깔을 추구하는 욕망으로, 이를 절제하고 다스리는 유일한 방법이 바로 작위라는 것이 순자의 학설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작위인가.

인위(人爲)라고도 부를 수 있는 작위에 대해 순자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어떤 사람은 사람의 본성이 악하다면 곧 예의는 어떻게 생겨났는가.’하고 물었다. 여기에 나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무릇 예의라는 것은 성인의 작위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지 본디 사람의 본성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옹기장이가 진흙을 쪄서 질그릇을 만드는데 질그릇은 옹기장이의 작위에서 생겨난 것이지 본디 사람의 본성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또 목수가 나무를 깎아 그릇을 만드는데 그릇은 목수의 작위에 의해서 생겨나는 것이지 본디 사람의 본성에서부터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주장한 성악지설의 골수인 작위에 대해 순자는 다음과 같은 명쾌한 논리로 결론을 내리고 있다.

성인이 생각을 쌓고 작위를 오랫동안 익혀 예의를 만들어내고 법도를 제정한다. 그러니 예의와 법도는 성인의 작위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지 본디 사람의 본성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눈이 색깔을 좋아하고 귀가 소리를 좋아하고 입이 맛을 좋아하고 마음이 이익을 좋아하고 몸은 상쾌하고 편안함을 좋아하는데, 이것은 모두 사람의 감정과 본성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이다. 느껴서 스스로 그러한 것이니 어떤 일이 있은 뒤에야 생기는 것이 아니다. 느껴도 그러하지 못하고 반드시 또한 어떤 일이 있은 뒤에야 그렇게 되는 것을 일컬어 작위에서 생겨난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본성과 작위가 생겨나게 하는 것들이 같지 않다는 증거이다.

그러므로 성인께서는 사람들의 본성을 교화시켜 작위를 일으키고, 작위를 일으켜 예의를 만들어내고, 예의를 만들어 내어 법도를 제정한다. 그러니 예의와 법도는 성인이 생겨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인이 여러 사람들과 같은 것, 곧 성인이 여러 사람들과 다름이 없는 것이 본성이고, 여러 사람들과는 다르고 훨씬 뛰어난 것이 작위이다.”

물론 순자가 주창한 성악지설은 어디까지나 그보다 50년 전에 살았던 위대한 유가의 맹장 맹자의 성선지설에 대한 대립 사상이다.

이 점은 서양에서의 철학사상사와는 정반대적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즉 서양에서는 성악설이 먼저 생기고 난 뒤에 성선설이 이에 대한 반대급부로 탄생되었던 것이다.

서양에서 성악설이 대두된 것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원죄라는 개념 때문이었다.

원죄(原罪:Original sin). 이는 기독교의 교리중의 하나로서 처음부터 죄와 죽음이 인간에게 들어왔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에 의해서 속죄되고 회복되어야 한다는 인류 타락의 교의(敎義)’를 말함이다.

인류의 시초인 아담이 하느님의 명령을 어기고 이브의 유혹에 빠져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써 하느님처럼 눈이 밝아져 선과 악을 아는 자가 됨으로써 하느님의 저주를 받아 에덴동산에서 영원히 추방당하는 것이 바로 원죄의 출발인 것이다.

인류의 시조인 아담이 하느님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은 원죄는 그 이후부터 전 인류에게 성교에 의해서 유전된다는 일종의 생물학적 사상으로까지 결부되어 온다.

따라서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원죄를 갖고 태어나는데, 바로 이것이 성악설의 근원이라는 것이었다.

유일하게 원죄 없이 아기를 낳은 사람은 예수의 어머니인 마리아.

마리아는 천사 가브리엘에 의해서 성령이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감싸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나실 그 거룩한 아기를 하느님의 아들이라 부르게 될 것이다.’라는 점지를 받고 예수를 낳는다.

그러므로 마리아는 성령에 의해서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를 낳았으므로 원죄 중의 아이를 잉태하지 않은 유일한 동정녀(童貞女)인 것이다.

원죄설을 신학적으로 심화시킨 사람은 기독교에 있어서 맹자라고 불릴 만한 바오로. 바오로는 로마서에서 다음과 같이 원죄설의 근거를 제시하였다.

한 사람(아담)이 죄를 지어 이 세상에 죄가 들어왔고, 죄는 또한 죽음을 불러들인 것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죽음이 온 인류에게 미치게 되었습니다.그러므로 한 사람이 죄를 지어 모든 사람이 유죄판결을 받은 것과는 달리 한 사람(예수)의 올바른 행위로 모든 사람이 무죄판결을 받고 길이 살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된 것과는 달리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된 것입니다.그래서 죄는 세상에 군림하여 죽음을 가져다주었지만 은총은 군림하여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게 하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합니다.”

이러한 바오로의 원죄설은 은혜의 박사라고 불리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해서 한층 더 구체화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연과 은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인간의 자연적 본성은 분명히 처음에는 죄와 더러움이 없이 만들어졌다.그러나 그 자연적인 선한 능력을 어둡게 하고 약하게 만든 죄악에는 빛과 치유가 필요한데, 그것은 죄 없는 창조자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자유의지에 의해서 범한 원죄에서부터 생긴 것이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도 단 한 사람 아담의 단 한 번의 범죄에 의해서 우리들 모두가 죄와 형벌 밑에 놓여있을 때 우리 모두가 죄가 되지도 않고 벌 받지도 않을 그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하고 말함으로써 원죄의 교의를 굳게 지지하였다.

주로 신학자들에 의해서 주장되었던 원죄설은 그 후 많은 철학자들에 의해서 성악설로 발전되어 간다.

마키아벨리는 당시 이탈리아 사회의 부정부패를 직접 보고 인간의 본성은 악하다고 단정하였고, 홉스(Hobbes:1588~1679)는 자연 상태를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로 가상하여 인간의 본성이 악함을 추론하였으며, 쇼펜하우어(1788~1860)죄악이 인간 본성 가운데 뿌리 깊게 박혀 있기 때문에 이를 제거할 방법이 없다는 극단적인 성악설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서양 철학사에서는 이처럼 원죄설의 뿌리를 둔 성악설이 주류였지만 극소수의 철학자와 교육자 사이에서는 이에 대항하여 성선설이 주장되기도 했었다.

주로 시세로, 세네카 등 철학자라기보다는 웅변가, 정치가들이었던 그들은 인간이 인간다운 까닭은 올바른 이성이 있기 때문이며, 유일한 지선인 덕을 목적으로 행동하기 때문이다.’라는 명제를 통해 성선설을 제기하였다.

이들이 이처럼 성선설을 주장할 수 있었던 것은 바오로나 성 아우구스티누스와는 달리 기독교인들이 아니었으며, 오히려 그리스철학, 즉 헬레니즘에 입각한 인본주의자이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처음부터 기독교 교리 중의 하나인 원죄설을 접할 기회조차 없었던 사상가들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극소수에 의해서 명맥을 유지하던 성선설에 획기적인 이론을 제시한 사람은 바로 장자크 루소(17121778).

자연으로 돌아가라.’라는 유명한 금언을 남긴 루소는 평생 동안 인간의 본성을 자연 상태 속에서 파악하려고 노력하였으며, ‘인간은 자연 상태에서는 자유롭고 행복하고 선량하였으나 자신의 손으로 만든 사회제도나 문명에 의해서 부자연스럽고 불행한 상태로 빠져 사악한 존재가 되었기 때문에 다시 참된 인간의 모습을 발견하여 인간성을 회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는 주장을 하였던 것이다.

루소는 자연이 만든 사물은 모두가 선하지만 일단 인위(人爲)를 거치면 악으로 변한다.’라고 주장하였는데, 이는 아이로니컬하게도 순자의 성악설과 극단적으로 위배된다.

순자는 인간은 본래 태어날 때부터 악하지만 인위(작위)를 거쳐야만 바르게 교화될 수 있다.’라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서양철학이 원죄설에 뿌리를 둔 성악지설이 주류를 이루고 있고, 그에 대항하여 뒤늦게 성선지설이 대두되었다면 동양철학에서는 정반대로 맹자의 성선지설이 먼저 제기된 이후 50년 뒤에 태어난 순자에 의해서 성악지설이 대두됨으로써 비로소 인간의 본성을 규명하는 선과 악의 양 날개가 성립될 수 있었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성선설과 성악설을 대립된 사상으로 오해하고 있다.

그러나 두 사상은 어느 쪽이 절대 진리이고, 다른 쪽이 절대 오류라는 식으로 나뉘어질 수는 없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성선설과 성악설은 둘 다 절대 진리인 것이다.

따라서 성선설과 성악설은 대립적 사상이 아니라 오히려 병립적(竝立的) 동위개념인 것이다.

양익(兩翼).

새는 한 날개로는 절대로 날 수 없는 것이다.

양 날개가 있을 때 비로소 새는 하늘을 박차고 날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맹자가 성선지설을 주장함으로써 유가사상에 오른쪽 날개를 달았다면 순자는 성악지설을 주장함으로써 왼쪽 날개를 달아 비로소 유가는 힘찬 날갯짓을 하면서 2000년 이상 동양사상의 중심에 서서 획기적인 비상을 펼칠 수가 있었던 것이다.

맹자와 더불어 또 하나의 날개였던 순자.

그러나 이처럼 순자는 유가에 있어서 뛰어난 대사상가였으나 이단자로 불린 것은 두 가지의 오해 때문이었다.

그것은 순자의 제자로 일컬어지는 이사와 한비자가 법가를 부르짖음으로써 엄격한 형명주의(刑名主義)를 통치술로 제창한 장본인이라는 오해와 맹자의 성선지설에 대항하여 인간의 본성은 태어날 때부터 악하다.’라는 성악지설을 주장함으로써 마치 악마의 화신으로까지 느껴지는 선입견 때문이었던 것이다.

순자는 BC238년경에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순자가 죽은 지 불과 10여 년 후인 BC221. 마침내 진나라의 황제가 천하통일을 함으로써 춘추전국시대는 종말을 고하는 것이다.

춘추전국시대.

주왕실이 낙양으로 천거한 기원전 770년대부터 시작된 춘추전국시대는 시황제가 천하통일을 완수함으로써 550여 년 만에 그 막을 내리게 되는 것이다.

순자는 총 189종의 사상적 자유시장이 열렸던 제자백가중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탄생된 사상가였으며, 통일 전야(前夜)에 살았던 유자(遺子)였다. 공자와 노자로부터 시작된 백가쟁명의 치열한 경주는 마침내 순자라는 마지막 유복자에 의해서 천하통일의 골인 지점에 도착하여 테이프를 끊게 되는 것이다. 순자는 550년에 걸친 대역전 경주의 마지막 릴레이 주자였던 것이다.

곽말약(郭沫若).

20세기 중국이 낳은 뛰어난 시인이자 사학자였던 그는 순자적비판(荀子的批判)’에서 다음과 같이 순자를 평하고 있다.

순자는 제자백가 가운데 최후를 장식한 위대한 스승이다. 그는 유가를 집대성하였을 뿐 아니라 제자백가를 집대성했다고 말할 수 있다.그러나 공정하게 말하면 순자는 사실상 잡가(雜家)의 시조로서 제자백가의 학설을 총망라하였다. 선진의 제자백가 가운데 그의 비판을 받지 않은 이는 거의 없다.이러한 점은 진실로 순자가 제자백가에 대해서 초월적인 태도를 보였음을 드러내지만 우리는 그의 학설과 사상에서 제자백가의 영향을 분명히 발견할 수 있다. 다만 어떤 경우에는 정면에서의 수용과 발전이고, 어떤 경우에는 이면에서의 공격과 대립이며, 때로는 종합적인 통일과 변화라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순자가 맹자의 성선지설에 공격과 대립양상을 보여 성악지설을 주장하였던 것은 곽말약의 말처럼 제자백가를 집대성하기 위해서였으며, 이로써 인간의 본성은 악함으로 성인의 예의법도에 의해 변화시켜야 한다.’라는 화성기위(化性起僞)’의 신학설이 나온 것이다.

맹자가 성선지설을 주장하였다면 순자는 성악지설을 주장하였고, 맹자가 그 성선지설을 지켜내는 방법으로 인간사회의 타락은 인간의 욕심과 두려움 때문이며 그러므로 참된 용기를 함양하여 이를 없앨 수 있다.’라는 호연지기(浩然之氣)’를 주장하였다면 순자는 성인은 본성을 변화시켜 인위를 일으킴으로써 나쁜 악을 교정할 수 있다.’라는 화성기위를 주장하였던 것이다.

현존하는 중국의 대표적 계몽철학자 이택후(李澤厚)중국고대사상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맹자는 분명히 빛나는 일면을 지니고 있지만 만일 유가가 완전히 맹자의 노선을 따라서 발전해왔다면 일찍이 신비주의의 종교로 빠져들었을 것이다. 바로 순자가 강조한 인위와 그것으로써 자연을 개조하는 성악설이 맹자가 추구한 선험적 성선지설과 선명하게 대립하면서 비로소 이러한 신비주의적 경향을 극복하고 투명해질 수 있었다.

동시에 묵가, 도가, 법가 가운데 냉철한 이지와 실제 경험을 중시하는 역사적 요소를 흡수한 것은 유학에서 인위와 사회를 중시하는 전통으로 하여금 더 내실을 기하게 하고 따라서 유가의 적극적 · 낙관적인 이상을 천지와 함께하는 세계관의 형이상학으로까지 발전시킨 것이다.”

이처럼 맹자가 공자의 인의(仁義) 사상을 보다 구체화시켰다면 순자는 예악(禮樂) 사상을 구체화시켰으며, 또한 맹자가 내성(內聖)의 측면에 주안점을 두었다면 순자는 외왕(外王)의 측면에 주안점을 둠으로써 결국 유학의 종지인 수기치인(修己治人)’이라는 새에 맹자는 수기의 한쪽 날개를 달았으며, 순자는 치인의 또 다른 한쪽 날개를 달았던 것이다.

이로써 유가는 비로소 양 날개를 가진 동양의 중심사상으로 완성될 수 있었으며, 공자를 서양철학에 있어 소크라테스에 비유한다면 맹자는 플라톤, 순자는 아리스토텔레스에 비길 만한 성격의 쌍두마차였던 것이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총 189종의 제자백가들이 난무하였던 춘추전국시대 때 이들 백가들과 치열한 전투를 벌임으로써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았던 동방불패의 대사상가는 단 한 사람, 바로 맹자인 것이다.

맹자가 없었더라면 공자는 역사의 수면 아래로 가라앉아버렸을 것이며, 순자 역시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공자가 만든 새에 날개를 달아준 사람은 바로 맹자였으며, 따라서 맹자가 아성(亞聖)으로까지 불려지는 까닭은 지극히 당연한 일인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위대한 맹자가 어떻게 생을 끝마쳤는가는 자세히 알려진 바가 없다.

사기는 다만 맹자의 생애를 다음과 같이 짤막하게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맹자는 오직 요순과 삼대(三代) 제왕의 덕을 부르짖어 시세의 요구에 멀었기 때문에 어디에 가서 말을 하여도 받아들여지질 않았다. 물러 나와 제자 만장들과 시경, 서경 등을 강술하고 공자의 뜻한 바를 펴서 맹자 7편을 저술하였다.”

정확한 맹자의 연보가 없으므로 대략 그의 생애를 종합해 보면 맹자가 주유열국을 모두 끝내고 고향인 추나라로 돌아온 것은 그의 나이 62세 때인 BC311년경.

그로부터 84세 때인 BC289년 죽을 때까지 20여 년간 오직 사기의 기록처럼 제자들에게 시경과 서경을 강술하는 한편 불후의 명저인 맹자를 저술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바라는 바는 공자를 배우는 것이다(乃所願則 學孔子也)’라고 공언하였던 맹자는 바로 이 무렵 20여 년 동안 오직 공자의 뜻을 조술(祖述)하고 공자의 가르침을 선양하기 위해서 필생의 작업에 심혈을 기울였던 것이다.

맹자는 평소 자신에게 엄격하였다. 맹자의 엄격한 이상주의를 엿볼 수 있는 것은 그가 남긴 다음과 같은 말을 통해 잘 알 수 있는 것이다.

아무리 구인()의 깊이까지 우물을 팠다 해도 샘물이 솟아나는 곳까지 파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물을 포기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掘井九 而不及泉 猶爲棄井也).”

즉 우물을 깊이 파 들어가더라도 수맥에 도달하기 전에 끝이 나면 그것은 우물을 포기한 것과 마찬가지라는 뜻인 것이다.

일찍이 그만두어서는 안 될 때 그만두어버리는 사람은 그만두지 않는 일이라고는 없을 것이다(於不可已而已者 無所不已)’라고 말하였던 맹자였으므로 말년에 맹자는 고향에서 제자들과 함께 수맥이 나올 때까지 우물을 파고 또 파는 학문의 길에 정진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맹자는 유가의 우물에서 수천 년 동안 마르지 않는 수맥을 파헤쳐 동양 정신의 갈증을 채워주는 영원한 샘물을 퍼 올리게 하였으니, 맹자야말로 인류가 낳은 참스승인 것이다.

그리하여 맹자는 BC289115일 마침내 고향에서 숨을 거두게 된다. 이때 맹자의 나이는 84. 그러나 맹자의 마지막 모습은 전혀 알려진 바가 없다. 역설적으로 그가 죽은 후에 무덤도 알려진 바가 없고 그 후 1300여 년이 흐를 때까지 망각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맹자가 이처럼 아성이었으면서도 1300여 년 동안 역사의 뒤안길에서 잊혀진 존재로 망각되어질 수 있었던 것은 맹자가 항상 공자와 더불어 역사의 부침 속에 때로는 각광을 받고, 때로는 몰락하였던 운명을 함께하였기 때문이었다.

맹자의 무덤이 처음으로 발견된 것은 북송(北宋)의 초기시절이었던 1037.

그것은 송대에 이르렀을 때야 유학은 다시 큰 변전을 일으켜 성리학(性理學)으로 거듭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송대 이후에 일어난 새로운 방법의 유학은 성리학. 따라서 이때의 유학을 신유학(Neo-confucianism)이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인 것이다.

송대로 들어오면서 많은 학자들이 도교와 불교에 영향을 받은 인간의 이성과 논리에 한계를 느끼기 시작했으며, 이제껏 유가들이 기울여 온 인간의 문제에서 한 차원 더 높은 형이상학적 문제에까지 시선을 돌리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신유학자들은 앞을 다투어 그들의 학문적 지주인 맹자의 무덤을 찾기 시작하였다.

그들이 처음으로 발견한 것은 맹모지(孟母池)라는 연못. 맹자를 위해 세 번이나 이사를 하였던 어머니 급씨의 이름을 딴 맹모지라는 연못이 있으면 그곳 어딘가에 맹자의 무덤이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였던 유학자들은 마침내 산둥성 추현 북쪽 30리 사기산(四基山)에 묻혀 있던 맹자의 무덤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 산둥 추현시 동북쪽 12.5지점인 사기산 서쪽 기슭에 위치한 맹자의 무덤 이름은 맹림(孟林).

맹자의 무덤이 발견됨과 동시에 명묘를 건설하고, 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내기 시작함으로써 맹자는 역사적으로 복원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이후 원나라 문종은 서기 1330, 맹자에게 추국아성공(鄒國亞聖公)’이란 칭호를 내림으로써 맹자는 불멸의 스승으로 부활하게 되었으니, 맹자야말로 온갖 사상의 꽃들이 한꺼번에 피어난 백화제방(百花齊放)에서 단연 돋보이던 만세일화(萬世一花)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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