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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부 군자유종(君子有終) 제2장 추로지향(鄒魯之鄕)

3부 군자유종(君子有終) 2장 추로지향(鄒魯之鄕)

 

명종 4(1548) 10.

48세의 이퇴계는 단양을 떠났다. 퇴계가 단양군수를 사직하고 이웃한 풍기의 군수로 전근한다는 소문을 듣고 수많은 백성들이 나와서 퇴계가 탄 가마를 막으며 울부짖으며 말하였다.

나으리, 가시면 아니 되옵니다.”

나으리, 오신 것이 어제와 같은데 벌써 가시다니요.”

단양군민에게 남긴 퇴계의 인상은 놀라운 것이었다. 불과 9개월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단양군민을 위해 이퇴계는 경이적인 노력을 기울였던 것이다.

퇴계가 군수로 부임할 무렵 단양은 오랜 가뭄으로 곳곳에 헐벗은 기민(飢民)들로 피폐해 있었다. 기록에 의하면 3년 동안 계속해서 한발이 들어 백성들은 초근목피로 간신히 연명해 가고 있었다고 한다.

퇴계로서는 그 이유를 전혀 알 수 없었다. 단양은 예부터 남한강과 단양천을 비롯하여 곳곳에 물이 풍부한데 어째서 해마다 가뭄으로 재앙을 입는다는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퇴계는 곧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단양에 강이 많기는 하지만 날이 가물면 흐르는 물도 곧 말라붙어 물을 농사에 이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 풍부한 양의 물을 농사에 이용하려면 보()를 쌓아 흐르는 물을 가둬서 저수지를 만드는 것이 급선무였던 것이다.

퇴계는 실제로 단양의 곳곳을 답사하여 마침내 탁오대 바위 옆 여울목이 가장 좁아 둑을 만들기에 적합하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마을 사람들을 총동원하여 복도소(復道沼)’란 저수지를 마련하였던 것이다.

아마도 퇴계가 만든 복도소는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만들어진 인공저수지인데, 그로부터 500여 년이 지난 최근에 이르러 남한강에 충주댐을 쌓고 거대한 인공호수가 생긴 것은 퇴계가 위대한 사상가였을 뿐 아니라 실학정신까지 갖춘 선각자였음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해 여름 퇴계는 복도소의 수중보(水中洑) 준공을 기념하여 큰 바위에 복도별업(復道別業)’이란 친필의 휘호를 새긴다.

아름답고 깨끗한 자연 속에서 도를 회복한다.’는 이 문장의 뜻을 통해 퇴계는 아름답고 깨끗한 환경은 자연 그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의지로 얼마든 개선될 수 있음을 드러내 보이고 있는 것이다.

퇴계가 건설하였던 수중보의 유구(遺構)19866월 충주인공댐의 조성으로 수몰되어버리고 퇴계의 친필휘호만 따로 보존되고 있을 뿐.

따라서 퇴계가 건설한 저수지로 고질적인 한발을 막고 홍수 때 내리는 물을 저장하여 범람까지 막을 수 있는 다목적용 댐을 갖게 된 단양군민들은 퇴계와의 이별을 못내 아쉬워하며 떼 지어 나와서 가마를 향해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던 것이다.

퇴계 자신도 단양의 빼어난 절경에 심취되어 이곳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실제로 짧은 재임기간이었지만 단양산수기란 책을 남길 만큼 이곳의 산수를 사랑하였고, 또한 오늘날까지 인구에 회자되는 단양팔경을 일일이 지정하여 스스로 이름까지 명명하지 않았던가.

퇴계가 얼마나 단양의 군민들에게 사랑을 받았던가는 이퇴계의 언행록’ 3권에 기록된 거관(居官)’편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거관이란 벼슬살이를 가리키는 것으로 퇴계의 제자 중의 한 사람이었던 우성전(禹性傳)은 어느 날 단양을 지나다가 한 노인을 만나서 다음과 같이 물었다고 한다.

지금까지의 이곳 고을의 태수로서 누가 정치를 잘하였소.”

그러자 노인은 황준량(黃俊良)’이라고 대답한다. 황준량은 퇴계보다 17년이나 어린 제자였는데 퇴계를 만나면서 근사록등 여러 글을 접하게 되고, 주자의 글을 읽게 됨으로써 성리학에 눈뜬 학자였다. 그는 고을을 다스림에 있어서도 밝은 지혜와 청렴한 자세로 한결같은 치적을 이루었는데, 특히 단양군수로 부임하였을 때에는 거의 쓰러질 상태의 고을을 다시 일으키고자 임금에게 상소문을 올려 부역을 면하게 하였다. 특히 4800자의 명문장은 임금을 크게 감동시킨 명태수였던 것이다.

그러자 우성전은 다시 묻는다.

그럼 황중량이 제일 잘한 사람인가요.”

노인은 머리를 흔들며 대답하였다.

아닙니다. 이 아무개(퇴계를 가리킴)가 제일 잘했습니다.”

이에 우성전이 다시 물었다.

그런데 어째서 아까는 황준량이라고 말하였소.”

노인이 다시 대답하였다.

황준량은 최근이요, 또 그는 나라에 글을 올려 부역을 면하게 한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공은 이곳에 와서 오래 있지 않았는데 비록 나라에 글을 올린 일은 없었으나 그의 모든 행동은 사람들의 마음을 감복시켜 사람들은 지금까지 그를 사모하여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언행록을 쓴 사람, 우성전은 본관이 단양으로 이퇴계의 문인이었다. 훗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기도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이를 추의군(秋義軍)이라 하고 의병장으로도 뛰어난 활약을 펼쳤던 사람인데, 그의 기록을 보면 알 수 있듯이 퇴계는 비록 9개월 동안만 단양에 머물러 있었지만 그의 빼어난 인격은 단양사람들의 마음을 감복시켜 두고두고 그를 사모하게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퇴계로서는 단양에 더 이상 머무를 수 없는 뜻밖의 사정이 생긴다.

그것은 그해 여름 퇴계의 형인 해가 충청감사로 부임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충청감사는 단양군수의 직속 상관으로 만약 퇴계가 그대로 단양에 머물러 있으면 형제가 나란히 한 지역에서 국록을 먹는 불합리한 일이 생기는 것이었다.

퇴계가 스스로 상소를 올려 단양의 군수에서 사직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퇴계는 차기 후임지로 풍기를 청하였는데, 이는 단양과 풍기가 죽령(竹嶺)을 사이에 둔 지척지간이었으나 단양은 충청도의 관할이고, 풍기는 경상도의 관할이므로 전혀 별개의 지역이었기 때문이었다.

조정에서는 소장을 받아들여 퇴계를 풍기의 군수로 임명하였는데, 이는 퇴계로서도 뜻하는 바였다.

퇴계는 자신이 이제 퇴사(退仕)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음을 알고 조금이라도 고향에서 가까운 곳으로 나아가려는 의지를 나타내 보인 것이었다.

단양군수의 외직을 자원하였던 것도 그러한 마음 때문인데 제자 김성일은 언행록에서 퇴계의 의지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그때 세상 형편이 한번 변하자 선생은 도를 펴는데 뜻이 없었다. 선생이 단양으로 내려온 것도 장차 고향으로 내려갈 계획에서였다. 공무 중에 틈만 있으면 책보기로써 스스로 즐겼고, 혹은 홀로 귀담이나 석문 사이에 가서 온종일 거닐다가 돌아왔다.

퇴계를 태운 가마가 죽령기슭에 이르렀을 때였다.

나으리, 나으리.”

퇴계를 쫓아온 관졸들이 손에 다발을 들고 뛰어오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

가마를 세우고 퇴계가 묻자 관졸들이 말하였다.

나으리, 이것은 삼베를 짜는 삼이옵니다. 이것은 아전(衙田)에서 거둔 것인데, 퇴임하는 사또께서 노자로 쓰기로 전례가 되어 있어 가져온 것이기에 바칩니다.”

아전이란 관청에 딸린 밭으로 동헌 근처에서 심은 삼이었던 것이다. 이것들은 국가의 소유로 대부분 관아에서 사용하는 비용이나 혹은 사또의 개인 사비로 충당하는 관례가 있었던 것이다. 특히 삼은 줄기 껍질로는 섬유를 짜서 삼베를 만들고 씨로는 기름을 짜는 대마(大麻)라 불리던 유용 식물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관례에 따라 군졸들이 삼베를 거두어 퇴임하는 퇴계에게 가져온 것은 당연한 일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퇴계는 이를 단호히 물리쳤다고 이덕홍(李德弘)은 퇴계언행록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그러자 선생은 내가 명령한 것도 아닌데 왜 그것을 가지고 왔느냐.’하고 이내 물리치셨다.”

이 일을 기록한 이덕홍은 이퇴계의 문인으로 임진왜란 때 선조를 의주까지 호종(扈從)하였고 성리학과 역학에 뛰어난 문인이었다. 이덕홍은 스승이 이 무렵 극심한 가난에 시달리고 있었음을 잘 알고 있었다.

퇴계가 단양의 군수에 재직하고 있을 무렵 아들 준에게 보낸 편지 중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대상 날짜가 임박해지는구나. 제상은 여기서 보낼 작정이다. 쌀과 면을 만들 감은 보낼 형편이 못 된다. 그러니 집에서 준비하여라. 다만 저축해둔 곡식이 없을까 걱정이다.”

편지 중에 나오는 대상이란 퇴계의 첫 번째 부인이었던 권씨의 장례를 말하는 것으로 이 무렵 퇴계의 집은 저축해둔 곡식이 없을 만큼 궁핍하였던 것이다.

그뿐인가.

아들 준에게 보내는 다음과 같은 편지도 바로 이 무렵 쓴 것이다.

내 갓과 신이 다 닳아서 새로 장만하여야 하겠다. 스무날께 베를 보내다오. 옷과 갓을 인편에 부치거라.”

옷을 만드는 베조차 부족하여 이를 보내달라는 퇴계의 청렴한 공복(公僕) 정신은 오늘날 공무원들이 반드시 본받아야 할 정신인 것이다. 따라서 전근하는 퇴계에게 군졸들이 삼을 가져온 것은 바로 이러한 사또의 딱한 처지를 헤아려 거두어 온 것인데, 퇴계는 단호히 이를 물리쳤던 것이다.

이때 퇴계의 처신을 제자였던 김성일은 언행록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선생이 단양을 떠나 돌아갈 때에는 선생의 행장에는 쓸쓸하게도 다만 괴이한 수석이 두 점 있었을 뿐이었다.”

단양은 예로부터 괴석과 수석이 유명한 곳. 단양을 떠나는 퇴계의 행장에는 괴석 두 개만 달랑 들어있었다는 것이 김성일의 기록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러하였음일까. 단양을 떠나는 퇴계의 짐 속에는 김성일의 표현대로 괴석 두 개만 들어 있었을까. 아니었다. 퇴계의 행장 속에는 매화분 하나가 남의 눈에 띌세라 깊숙이 보관되어 있었던 것이다.

퇴계는 평생 동안 특히 매화를 사랑하였다. 퇴계는 일찍이 북송(北宋)시대 때의 은사 임포(林逋)를 마음 깊이 사숙하고 있었다.

임포는 서호(西湖) 고산(孤山)에 은거하면서 20년간 산을 내려오지 않았고, 일생 동안 독신으로 지냈으며, 학을 사육하고 매화를 완성하며 살았다.

매화를 아내로 삼고 학을 자식같이 길렀으므로 매처학자(梅妻鶴子)라고 불리었다. 후세 사람들은 매처학자라는 말로 풍류생활을 비유하였는데, 퇴계는 임포의 매화와 일치된 삶을 본받고자 하면서 평생 동안 75107수에 달하는 매화시를 썼던 것이다. 평소에 매화를 매형(梅兄), 매군(梅君), 매선(梅仙)으로 의인화하며 부르면서 인격체로 대접할 정도로 매화를 사랑하였던 퇴계는 살아생전 매화시첩(梅花詩帖)’이란 시집도 편집하였다.

특히 퇴계는 매한불매향(梅寒不賣香)’이란 말을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았으며 매화는 죽더라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는 이 문장의 뜻을 통해 선비의 기개와 정신을 지켜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매화꽃을 꺾어 책상 위에 꽂아 두고 바라보기도 하고, 뜨락의 매화를 바라보며 매화와 서로 묻고 화답하는 시를 여러 차례 읊고 있다. 때로 매화 아래서 찾아온 문인들과 술잔을 나누기도 하고, 매화가 겨울 추위에 손상되었음을 개탄하는 시까지 읊었다.

예부터 조선의 선비들은 구구소한도(九九消寒圖)란 그림을 벽에 붙여 놓고 봄을 기다렸다.

동지로부터 날짜를 세기 시작하여 81일간이 구구(九九)에 해당하는 것이다. 흰 매화꽃 81개를 그려 놓고 매일 한 봉오리씩 붉은색을 칠해서 81개째가 되면 백매가 모두 홍매로 변하는 그림인데, 이때가 대충 312일 무렵이 되는 것이다.

퇴계는 평소에 솔, , 매화, 국화, ()의 다섯을 벗으로 삼아 자신까지 포함하여 여섯 벗이 한 뜰에 모인 육우원(六友園)을 꿈꾸었다.

61세 때는 도산서원 동쪽에 절우사(節友社)란 단을 쌓고 솔, , 매화, 국화를 심어 이들과 함께 절의를 맹세하는 결사(結社)를 이룬다. 이때 퇴계는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솔과 국화는 도현명 뜰에서 대와 함께 셋이더니

매화형(梅兄)은 어이하여서 참가 못했던가.

나는 이제 넷과 함께 풍상계를 맺었으니

곧은 절개 맑은 향기 가장 잘 알았다오.”

함께 바람과 서리를 견디는 결사를 맺은 이퇴계. 그는 이들 중에서 매화를 가장 사랑하며 매화를 형으로까지 부른다. 그리하여 임종에 가까운 68세 때에는 다음과 같이 매화를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내 벗은 다섯이니 솔, 국화, 매화, , 연꽃/사귀는 정이야 담담하여 싫지가 않네.

그중에 매화가 특히 날 좋아하여/절우사에 맞이할 제 가장 먼저 피었네.

내 맘에 일어나는 끝없는 매화 생각에/새벽이나 저녁이나 몇 번을 찾았던고.”

새벽 안개 속에서도 저녁 노을빛 아래에서도 달빛 머금은 어스름한 밤에도 매화 향기를 찾아가는 노년의 이퇴계.

이퇴계는 죽기 직전 매화꽃에 물을 주라고 유언한다.

이때의 기록이 연보에 다음과 같이 나오고 있다.

선조 3(1570) 128.

유시(酉時:저녁 6시경)에 숙소에서 종명(終命)하다. 이날 아침 시봉하는 사람을 시켜 분매(盆梅)에 물을 주라 명하다. 저녁 5시경에 와석(臥席)을 정돈하라고 명하고 부축하여 일으켜 앉히니 조용하고 편안하게 돌아가시다.”

연보의 기록대로라면 앉은 채 좌탈입망하여 숨을 거둔 이퇴계. 그는 죽기직전까지도 분매에 물을 주라 일렀을 만큼 매화를 사랑하였음일까.

매화에 물을 주라.’일렀던 이퇴계의 마지막 유언은 세기의 철인 소크라테스의 마지막 유언을 떠올리게 한다.

아테네의 청년을 부패시키고 새로운 신을 섬긴다.’는 죄명으로 독배를 마시며 죽게 된 소크라테스는 이 세상에서 저 세상의 편안한 여행을 기원하는 기도를 드린 다음 태연히 독약을 마신다. 이를 보던 제자들이 얼굴을 감싸고 통곡하자 소크라테스는 묻는다.

웬 곡소리들인가. 이런 창피한 꼴을 보게 될까봐 아낙네들을 먼저 보냈거늘, ‘사람은 마땅히 평화롭게 죽어야 한다(A man should die in peace)’고 들었었네. 조용히 하고 꿋꿋하게 행동하게

감각이 사라지고 온몸이 뻣뻣해지며 죽어가던 소크라테스는 얼굴을 덮었던 천을 벗기고 혼신의 힘을 다하여 이렇게 말한다.

이보게 크리톤, 아스클레오피스에게 닭 한 마리를 빚졌다네. 자네가 기억했다가 대신 갚아주게나.”

진리의 성인이었던 소크라테스의 마지막 유언은 의미심장하다. 아스클레오피스는 그리스인들의 의신(醫神). 뱀이 기어오르는 지팡이를 짚고 다녀서 오늘날에도 병원이나 약국에서는 뱀의 지팡이로 상징되는 아스클레오피스의 문장을 내걸고 있다.

죽어가는 소크라테스는 이승의 삶은 고통스러운 병이었으나 죽음으로써 병으로부터 치유되어 영혼의 자유와 해방을 얻었으니 직접 가서 아스클레오피스 신전에 감사의 제물을 바치지 못하므로 친구인 크리톤에게 대신 닭 한 마리의 제물을 바쳐달라는 내용이었던 것이다. 이는 죽기 전에 매화에 물을 주라는 이퇴계의 유언과 상통하고 있다.

이퇴계는 사람이 낳고, 병들고, 늙고, 죽어가는 일생이 매화에게 물을 주는 일상사와 다르지 않음을 보여준 후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마시듯 앉은 채 죽음을 조용히 하고 편안히 받아들인 것이다.

이렇듯 임종을 지켰던 매화분 하나가 단양을 떠나는 퇴계의 행장 속에 깊숙이 보관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 매화는 도대체 누가 주었던 것일까.

많은 사람들은 이 수수께끼의 매화가 선조의 소명을 받고 68세 때인 7월에 잠시 한성에 입조하였다가 69세 때인 3월에 귀향하기까지 8개월간의 체류기간 중 한성우사(漢城寓舍)에서 지낼 때 애완하던 분매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누가 이 분매를 퇴계에게 기증하였는지, 혹은 퇴계가 이 분매를 직접 구하였는지 알려진 바는 없지만 한양 객사에서 이 매화를 즐기다가 임금의 허락을 받고 다시 안동으로 내려갈 때 이 매화를 가져가지 못하는 슬픔을 퇴계는 분매답(盆梅答)’이란 시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었던 것이다.

듣건대 도선(陶仙)과 나 서늘하다 하셨으니,

임이 돌아간 뒤에 천향을 피우리라.

원컨대 님이시여, 마주앉아 생각할 때 청진한 옥설(玉雪) 그대로 함께 고이 간직해주오.”

매화의 이별을 퇴계는 마치 사랑하는 님과의 이별처럼 슬퍼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분매는 마침내 퇴계의 손자였던 이안도가 배로 운반하여 퇴계가 숨을 거두던 바로 그해 정월에 도산서원으로 옮겨지는데, 이때 퇴계는 어린아이처럼 기뻐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퇴계가 이 매화를 얼마나 사랑하였던가는 8개월의 체경을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갈 때 이 매화와의 이별을 슬퍼하면서 한성우사분매증답(漢城寓舍盆梅贈答)’이란 시까지 남기고 있음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이 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다행히 이 매선이 나와 함께 서늘하여

객창이 소쇄하여 꿈마저 향기로웠네.

동으로 돌아갈 제 그대와 함께 하지 못하니

서울티끌 이 속에서도 고이 간직하여다오.”

이 시를 보면 알 수 있듯이 퇴계는 이 매화를 유독 사랑하여 매화의 신선(梅仙)’으로까지 부르고 있었던 것이다.

고향으로 돌아온 이퇴계는 그 매선을 잊지 못하고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다.

이에 기억되는 것이 있으니 지난봄 서울에서 분매를 얻었는데, 매우 아름다웠다. 그런데 얼마 안 있어 집으로 돌아오고 보니 그 분매생각이 그치질 않는다.”

그러고 나서 퇴계는 다음과 같은 영매시를 짓는다.

잊혀지지 않는구나. 지난해 봄 서울에서

분매 두고 돌아오는 소매 신선바람에 스쳤더니

어찌 오늘에서야 시냇가 나의 서재 속에

황종률(黃鐘律)로 변했으니 그 조화무궁하여라.”

이퇴계가 그처럼 그 매선을 몽매에도 잊지 못하고 그리워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 나선 사람은 김취려(金就礪). 그는 퇴계가 한양에 머무르고 있을 무렵 가깝게 지내던 문인이었다. 그는 퇴계의 손자 이안도에게 부탁하여 이 분매를 배로 운반하여 안동으로 가져왔던 것이다.

이때가 경오년(1570) 정월.

퇴계가 숨을 거두던 바로 그해 초였던 것이다.

이 분매를 받자마자 퇴계는 기뻐서 한 구절을 읊다(來喜題一絶云)’라고 시제하고는 다음과 같은 시를 짓는다.

붉은 티끌 일만 겁을 초연히 벗어나 속세 아닌 이곳 찾아 이 늙은이와 벗하니

일을 좋아하는 그대가(김취려를 말함) 나를 생각하지 않았다면

빙설(氷雪) 같은 그 얼굴 어찌 볼 수 있었으리요.”

퇴계는 유독 그 매분만을 신선으로까지 부르고 있고, 매화의 모습을 빙설로 표현하고 있음인 것이다.

그리고 수명이 다해 임종을 앞두고 있던 퇴계는 이 고고한 능설청향(凌雪淸香)의 벗에게도 작별을 고했던 것이다. 평소 때와 같으면 마지막 고별의 인사로서 손수 물을 주고 싶었을 것이나 몸을 움직일 수 없으므로 시종하는 사람에게 매분에 물을 주라고 유언하였던 것이다. 이는 4일전 제자들을 불러 죽음과 삶이 갈라지는 마당에서 최후의 고별인사를 한 것과 같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연보는 퇴계가 죽기 전의 며칠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는데, 123일에는 퇴계가 자제들에게 명하여 남에게 빌려온 서적을 모두 반환하라 하고 책을 잃어버리지 말 것을 당부하였으며, 이때 아들 준이 봉화현감으로 있었는데, 감사에게 사직서를 내라고 명하였으며, 가족들에게는 기도하는 것을 금하게 하였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죽기 4일 전인 124일에는 조카 영()에게 유서를 쓸 것을 명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유서를 쓰고 난 후 정오에는 제자들을 만나보았는데, 몸이 편치 못하니 그만두라고 자제가 말렸으나 죽음과 삶이 갈라지는 이때에 마지막으로 만나보지 않을 수 없다.’고 한 후 상의를 벗고 의관을 정제한 후 제생들을 불러 모아 놓고 결별의 말을 다음과 같이 하였다.

평소에 잘 모르는 것을 가지고 제군들과 더불어 날이 저물도록 강론을 하게 된 것을 유감으로 생각한다.”

연보에 의하면 죽기 사흘 전 125일에는 죽은 후 자신이 묻힐 관을 미리 짜라고 명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분매에 물을 주라.’는 최후의 유언은 가족, 그리고 제자들과 차례로 작별의 인사를 나눈 후 마지막으로 자신의 관까지 짤 것을 명령한 후 임종하는 그날 아침에 행한 것이므로 실제로 퇴계의 입에서 나온 가장 마지막 일성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퇴계는 어찌하여 이 분매를 그토록 사랑하였을까. 물론 퇴계 스스로가 표현하였던 대로 이 분매가 매우 아름다웠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퇴계가 그 매화꽃을 빙설(氷雪)에 비유했던 것은 문자 그대로 눈처럼 깨끗하고 결백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빙설은 얼음과 눈이라는 뜻 이외에 청렴과 결백을 비유해서 이르는 말이 아닐 것인가.

그러나 이 매화가 한성에서 이별할 때 증답가(贈答歌)를 통해 매화의 입을 빌려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음은 의미심장한 것이다.

임이 돌아간 뒤에 천향(天香)을 피우리라.(待公歸去發天香)

원컨대 임이시여, 마주 앉아 생각할 때(願公相對相思處)

청진한 옥설 그대로 함께 고이 간직해주오(玉雪淸眞共善藏).”

노래에 나오는 임()이란 즉 퇴계 자신을 이르는 말.

그러므로 이미 떠난 뒤에도 천향’, 즉 천하제일의 향기를 피우겠다는 말은 바로 매화를 의인화시켜 매화가 퇴계에게 한 맹세였던 것이다. 또한 원컨대 임이시여, 마주 앉아 생각할 때라는 시 구에서 사용된 상사처(相思處)’란 말을 직역하면 문자 그대로 마주 앉아 생각할 때란 뜻이 되지만 원래 상사(相思)’라 함은 남녀 간의 사랑을 뜻하는 것으로 의역하면 다음과 같은 뜻을 지닌 것이다.

원컨대 임이시여, 우리 서로 사랑할 때

또한 천향이란 말도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원래 천향국색천하제일의 향기와 자색으로 모란꽃을 가리키는 말도 되지만 절세의 미인을 가리킨다.

특히 삼국지에 나오는 왕윤의 가기(歌妓)였던 초선(貂蟬)천향국색으로 불렀던 것이다. 왕윤은 간신 동탁을 죽이기 위해서 초선을 동탁에게 진상하는 한편 동탁의 호위대장이었던 여포에게도 추파를 보임으로써 삼각관계를 만들어 미인계를 통하여 동탁을 제거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로써 천향이라함은 삼국지에 나오는 초선과 같은 절세미인을 가리키는 말로 퇴계가 그 분매를 마치 절세미인처럼 사랑하고 있었음을 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것뿐이었을까.

퇴계가 그 분매를 상사하고 그리워하였던 것은 다만 그 매화가 아름답고 향기로웠기 때문이었을까. 그 매화에 얽힌 사연 때문이 아니었을까.

임과 이별을 한 뒤에도 천향을 피우는 것은 매화가 아니라 어떤 여인의 향기가 아니었을까.

여인의 향기. 그것은 두향의 향기였던 것이다.

임이 돌아간 뒤에도 천향을 피우리라.’ 하고 맹세하였던 것은 두향의 맹세였으며, ‘원컨대 임이시여, 우리 서로 사랑할 때의 청진한 옥설 그대로 함께 고이 간직해주오.’란 말은 단양군수를 끝내고 이별할 때 두향이가 했던 별곡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단양군수를 끝내고 돌아갈 때 퇴계의 행장 속에 깊이 간직되어 있던 매화는 두향이가 퇴계에게 주었던 별루(別淚)의 정표였던 것이다. 두향은 매화를 사랑하였던 퇴계처럼 매화를 사랑하였다고 한다. 이는 두향의 묘비에 새겨진 다음과 같은 비문을 통해서도 잘 알 수 있다.

성명은 두향. 중종조 시대의 사람이며, 단양 태생. 특히 거문고에 능하고 난과 매화를 사랑했으며, 퇴계 이황을 사모하였다.”

매화를 인격화하여 분신처럼 애중하였던 퇴계와 매화를 사랑하여 양매(養梅)하는 데 탁월한 솜씨를 지녔던 두향은 이처럼 취미에서부터 우선 서로 통하였다. 퇴계에게 정표로 준 것은 두향이 키우던 노매(老梅).

단양에 있는 9개월 동안 두향이가 준 노매를 유독 사랑하였던 퇴계는 떠나기 전날 두향에게 그 분매를 되돌려 주려고 하였으나 두향은 머리를 흔들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으리, 이 분매는 나으리께 드리는 신표이나이다. 어딜 가시더라도 나를 본 듯 있는 그대로 간직하여 주소서.”

퇴계에게 있어 두향은 특별한 인연이었다.

일찍이 이율곡이 아내와 동침할 때 의관을 정제하고 들어가 지극히 근엄하게 교접하였다는 말을 듣고 만물이 제대로 생성하려면 비도 오고 바람도 불어야 하는 법인데, 율곡이 그토록 범방시에 근엄하다면 자식이 없겠는걸.’ 하고 걱정하였다는 말이 있듯이 퇴계는 남녀 간의 상사를 비가 오고 바람이 부는 만물의 자연스러운 생성현상으로 보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퇴계에게 있어 여인들과의 인연은 이상하게 박복하여 가정적으로 행복한 사람은 아니었다. 이미 퇴계는 두 번이나 결혼하였으나 두 여인 모두 사별하였다. 두 번째 부인이었던 권씨가 죽은 것은 46세 때의 일. 단양에 군수로 있을 무렵에는 아내를 잃고 독수공방한 지 어느덧 2년이 흘러가 버린 뒤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퇴계가 두향을 만나 그의 인생에서 비도 오고 바람이 부는 운우지정의 자연스러운 생성현상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맛보았던 것은 전혀 비도덕적인 행위는 아니었던 것이다.

특히 퇴계는 평소에 처가향념(妻家向念)을 제가(齊家)의 중요한 덕목으로 가르치고 이를 몸소 실천하였다.

지금도 퇴계의 가문에서는 첫째 부모에게 불효한 사람과는 대화를 나누지 말 것, 둘째 처가에 향념이 없는 사람은 교제하지 말 것, 셋째 아내를 쫓아낸 사람과는 사업을 같이 하지 말라는 가규를 시행하고 있을 정도인 것이다.

퇴계는 21세 때인 중종 16년 김해 허씨와 첫 번째 결혼을 하였다. 가락국 수로왕의 부인이었던 허황옥(許黃玉)의 후손이었던 허씨 부인은 4남매 중의 한 사람이었는데, 퇴계와의 사이에 준, , 그리고 적() 세 아들을 두고 불과 6년 만에 숨을 거두고 만다.

비교적 늦은 나이인 21세 때 진사였던 허찬(許瓚)의 딸과 혼인하였던 것은 퇴계의 노모 박씨의 성화 때문이었다. 퇴계는 공부에 전념하느라 세상사에 관심이 없었는데, 박씨는 아들 퇴계가 빨리 혼인하여 후손을 잇는 것을 보고 싶어 하였으며, 또한 과거를 보아 벼슬길에 오를 것을 강요했기 때문이었다.

퇴계는 비록 6년 동안밖에 함께 살지 못하였으나 첫 아내 허씨를 사랑했던 것처럼 보인다. 지금도 퇴계의 첫 부인 허씨의 무덤은 의령에 보존되어있는데, 이곳에는 퇴계가 직접 쓴 가례동천(嘉禮洞天)’이란 유필이 남아 있을 정도인 것이다.

퇴계는 아내 허씨가 죽은 후에도 장모 문씨 부인을 지극히 봉양하였다. ‘하루에도 열두 번씩이나 백발이신 장모님 생각 때문에 한양 벼슬길을 향해 차마 발을 못 옮긴다.’라는 말을 문집 속에 남길 정도로 처가에 대한 상념이 지극하였다.

지금도 가례동천의 기념문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새겨져 있다.

가례동천은 우리나라 성리학의 태두요, 동국부자(東國夫子)로 추앙 받고 있는 퇴계 이황 선생의 유묵 금속문이며, 유서 깊은 유허지이다. 가례동은 선생의 처가가 있는 곳이다. 문무사백들과 시문 강론으로 소요하시는 한편 후진 양성에 전념하신 사적과 더불어 향당의 표준이 되고, 국가문화유적으로서 소중한 곳이다.”

이러한 퇴계의 마음은 손자가 장가갈 때 보낸 퇴계의 편지 속에 자세히 드러나고 있다.

부부는 남녀가 처음 만나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다. 그래서 가장 친밀한 관계를 이룬다. 또 한편 가장 바르게 해야 하고, 가장 조심해야 하는 처지이다. 그렇기 때문에 군자의 도가 부부에서 발단이 된다고 한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모두 예와 존경함을 잊어버리고 서로 버릇없이 칭하여 마침내 모욕하고 거만하고 인격을 멸시해 버린다. 이런 일은 서로 손님처럼 공경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정을 바르게 다스리려면 처음부터 조심해야 한다.”

이 편지는 퇴계의 부부간의 근본이념을 요약한 가르침이다.

부부는 지극히 친밀하기 때문에 지극히 조심하고 정직해야 한다는 말은 부부 사이의 예절을 가리키는 말이고, 가정을 바로잡고자 하면 출발부터 조심해야 한다는 말은 근신이 치가의 법도임을 가리키는 말인 것이다.

그러나 손님처럼 공경하였던 첫 번째 부인 허씨는 퇴계의 나이 27세 때 병사해 버리고 만다.

아내가 죽은 후 퇴계는 향시에 응시하여 2위에 합격하고, 진사에도 합격하는 등 승승장구하였으나 그 후 3년 동안 줄곧 광부(曠夫)로 지냈다.

3년 후 퇴계는 권씨 부인과 재혼하였는데, 이 결혼은 불행한 비극의 시작이었다. 권씨 부인과 16년간의 결혼생활을 퇴계 자신도 참으로 불행했었다.’라고 고백하고 있음인 것이다.

이는 권씨 부인이 칠거지악을 일삼던 악처이기 때문이 아니라 정신이 맑지 않은 실성한 여인이었기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어릴 적 충격으로 인해 미쳐 버린 여인이었던 것이다.

권씨 부인은 본래 신라 왕족의 후손이었다. 그런데 나말여초(羅末麗初), 안동을 지키던 김행(金行)이 후백제 왕 견훤에게 몰린 왕건을 패망의 순간에 도와 고려 건국을 튼튼히 하자 김행을 태사로 모시고 안동을 식읍으로 내렸다. 그리고 김행에게는 집권에 따라 판단을 잘하였다고 해서 권()씨를 성으로 쓰게 하는 사성개명(賜姓改名)을 내렸던 안동에서 대대로 살아온 명문가의 집안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권씨 부인의 집안은 할아버지인 권주(權柱)가 연산군의 갑자사화 때 평해로 유배되었다가 사약을 받고 별세한 후부터 기울기 시작했다.

벼슬이 참판에까지 올랐으며 문명이 뛰어나 당시 최고의 문인으로 손꼽히던 권주가 사약을 받고 별세하게 되자 부인 이씨는 남편이 죽었다는 기별을 받고 자살을 하여 부군의 뒤를 따름으로써 관비를 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로 인해 권씨 부인의 집안은 쑥대밭이 되었다.

권씨 부인의 부친인 권질(權瓆)은 거제도로 유배를 가 위리안치(圍籬安置)의 귀양을 살게 되었는데, 바로 이곳에서 딸 권씨 부인을 낳았던 것이다.

그 후 연산군이 중종반정으로 물러나 억울하게 화를 입은 신하들의 자손에게 벼슬을 주는 녹용(錄用)의 대우를 받아 연산군에게 빼앗긴 황구방(皇口坊:오늘의 필동) 집을 되찾고 서울 생활을 할 수 있었는데, 또 다른 비극의 파도가 덮친 것은 조광조의 사림파를 숙청한 기묘사화 때문이었다. 이때 숙부였던 권전(權碘)은 매를 맞다가 현장에서 비참하게 죽었으며, 숙모는 하루아침에 관비로 끌려가고, 아버지 권질은 또다시 예안으로 귀양을 가버린 것이었다.

권씨 부인은 어린 시절 이 모든 비극을 황구방 집에서 직접 눈으로 목격하였다. 집을 지킨 사람은 어머니 전씨와 어린 딸인 권씨뿐이었는데, 이 엄청난 비극을 본 어린 소녀는 이때의 충격으로 정신이 혼미해지면서 정신착란이 온 것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예안에서 귀양살이를 하던 권질은 어느 날 퇴계를 조용히 불러들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고 한다.

이보게, 자네 연전에 상처를 하고 난 뒤 속현(續絃)을 하였는가.”

속현이라 하면 아내가 죽고 처녀에게 새장가를 가는 혼인을 뜻하는 말로 3년 전 상처하고 재혼을 했는가 하고 단도직입으로 묻는 질문이었던 것이다. 물론 퇴계의 사정을 모르고 묻는 말은 아니었다.

퇴계는 권질의 아버지였던 화산(花山) 권주를 마음 깊이 존경하고 있었고, 또 그 아들인 권정과 같은 현량과 출신의 사림을 흠모하고 있었으므로 예안에 귀양 온 권질을 이따금 찾아와 문안 인사드리고 있었는데, 대뜸 그렇게 묻자 난처하여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고 문집은 기록하고 있다.

아직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자 권질은 느닷없이 딸을 불러 찾아온 손님인 퇴계 앞에 차 한 잔을 대접하라고 이른다. 이때 권질의 부인 전씨는 실성한 딸을 거둬서 남편이 귀양 와 있는 적소에서 함께 생활하고 있었던 것이다. 외간 남자 앞에 과년한 딸을 불러 차 대접하는 일은 매우 드문 일이었으나 권질과 퇴계는 묵묵히 처녀가 차를 올리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딸이 돌아간 후 권질이 말하였다.

내가 자네에게 묻는 것은 바로 자네가 아직 속현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물었던 것이네. 자네는 내 집에서 일어난 일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양대에 입은 사화로 내 여식은 보다시피 혼이 나가 온전치가 못하네. 그러니 어디 누가 데리고 가겠는가. 내가 적소에 온 지도 이미 9년째 들어섰고 언제 풀려날지 기약도 없는 터에 혼기를 넘겨 버린 저 여식을 두고 죽을 수는 없네.”

여기까지 말을 하고 난 뒤 권질은 길게 한숨을 쉬고 다음과 같이 말을 이었다.

내가 오늘 자네에게 부탁하는 것은 내 딸을 데려가 달라는 것이네. 아무리 생각하고 이치를 따져 봐도 자네밖에는 믿고 맡길 사람이 없으니, 자네가 내 딸의 처녀를 면케 하여 부디 이 죄인의 원을 풀어주시게나.”

자신의 혼미한 딸을 맡기는 권질의 말에 퇴계는 오랫동안 침묵한 후 이렇게 대답하였다고 문집은 기록하고 있다.

, 고맙습니다. 제가 맡도록 하겠습니다. 어머니께 아뢰어 승낙을 받고 곧 예를 갖추어 혼인을 치르겠습니다. 하오니 마음을 놓으시고 기력을 잘 보존하옵소서.”

이렇게 즉석에서 혼약을 맺은 퇴계는 이 사실을 어머니 박씨에게 알리고 나서 권씨 부인을 맡아 양곡(暘谷)에 지산와사(芝山蝸舍)를 짓고 신접살림을 차렸다. 말 그대로 달팽이껍질을 엎어놓은 듯 겨우 몸을 감출 만한 작은 집이었다. 34세 때의 봄부터는 벼슬하여 한양의 서소문집에서 13년간을 동거하였다.

지금도 남아 있는 권씨 부인의 많은 일화는 퇴계의 마음고생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정신이 흐리고 집중력이 떨어진 실성한 권씨 부인은 생전에 퇴계에게 많은 고통을 주었던 것이다.

퇴계의 관복 깃 끝과 그 맞은편에 매달아야 할 옷고름을 느닷없이 뒤쪽에 달음으로써 등청하는 퇴계를 망신시켰던 일은 작은 에피소드에 지나지 않는다.

할아버지의 제삿날이라 모든 식구들이 큰형의 집에 모였을 때 있었던 일화는 퇴계와 권씨 부인과의 관계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제사상을 차리느라 온 식구가 다 정신이 없는 가운데 상위에서 배가 하나 떨어졌다. 그러자 권씨 부인은 얼른 배를 치마 속에 숨겼다. 이를 본 큰형수가 말하였다.

이보게, 동서. 제사상을 차리는데 과일이 떨어진 것은 우리들의 정성이 부족했기 때문이라네. 그런데 그것을 치마 속에 감추면 어떻게 하겠단 말인가.”

이 광경을 지켜보던 여인들은 차마 뭐라고 할 수 없어 입을 손으로 가리고 웃고 있었는데, 밖이 소란스럽자 퇴계는 방안에서 밖으로 나와 사태의 전말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부인의 잘못을 대신하여 큰형수에게 정중하게 사과하였다.

형수님, 죄송합니다. 앞으로 제가 잘 가르치겠습니다. 그리고 손자며느리의 잘못이니, 돌아가신 할아버지께서도 귀엽게 보시고 화를 내시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부디 용서하여 주십시오.”

퇴계의 말에 동서를 꾸짖던 큰형수는 입가에 미소를 띠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고 한다.

참으로 동서는 행복한 사람이야. 서방님같이 좋은 분을 만났으니.”

퇴계는 남몰래 아내 권씨를 불러 치마 속에 배를 숨긴 이유를 묻고, 아내가 먹고 싶어 숨겼다고 하자 배를 꺼내게 한 후 손수 배의 껍질을 깎아 아내에게 먹으라고 잘라주었다고 전해오고 있다.

퇴계는 권씨 부인을 하늘이 자기에게 주는 극기의 시험, 또는 자기 자신과 싸워 이기는 성덕의 체인(體認)으로 간주하고 이를 극복한 것이었다.

퇴계는 인간윤리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부의 도리를 실천하여 가정의 화평을 유지하고, 남편으로서의 신의를 다하는 한편 비록 모자란 아내였으나 존엄성을 지닌 인간으로서 대접을 받으며 인생을 마칠 수 있게 함으로써 완덕의 길로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오늘을 사는 우리들이 반드시 본받아야 할 이러한 퇴계의 부부유별(夫婦有別)아내를 손님처럼 공경하는 퇴계의 법도때문이었을 것이다.

퇴계의 이러한 마음을 엿볼 수 있는 감동적인 편지 하나가 오늘날까지 전해오고 있다. 이는 제자였던 이함형(李咸亨)에게 준 편지였다.

이함형의 자는 평숙(平叔), 호는 산천재(山天齋)로 전라도 순천 사람이었다. 멀리 안동으로까지 와서 퇴계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던 수제자였다. 그러나 그는 부부간에 화합하지 못하여 고민하고 있었다.

마침내 고향으로 돌아가는 제자에게 퇴계는 편지 한 장을 써주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 사람 평숙, 내가 집에 가서 읽으라고 편지 한 장을 썼네.”

스승으로부터 뜻밖의 편지를 받은 이함형은 두 손으로 이를 받으며 말하였다.

황공무지로소이다.”

그러나 한 가지 조건이 있네.”

그것이 무엇이나이까.”

집에 가는 길 도중에 이 편지를 읽지 말고 도착한 후 집에서도 읽지 말게.”

하오면.”

이함형은 당황하였다. 길가는 도중에서도 읽지 말고, 집에서도 읽지 말라면 언제 그 편지를 읽으란 말인가. 이함형의 난처한 표정을 본 퇴계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반드시 집에 도착하여 들어가기 직전인 집 사립문 앞에서 읽어보기를 바라네.”

이함형은 스승과의 약속을 지켰다. 열흘가량 걸리는, 안동에서 순천까지 먼길을 가는 동안 이함형은 스승이 쓴 편지를 소중히 간직하였을 뿐 읽지 아니하였다. 집에 도착하였을 때 이함형은 사립문 앞에서 편지를 꺼내 비로소 읽기 시작하였다. 퇴계가 이함형에게 준 편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천지가 있은 후에 만물이 있고, 만물이 있은 후에 부부가 있고, 부부가 있은 후에 군신이 있고, 군신이 있은 후에 예의가 있다.’ 하였으며, 자사(子思)는 말하기를 군자의 도는 부부에서 시작되나 그 궁극적인 경지에서는 천지의 모든 원리와 직결된다.’라고 하였다. 또 시()에서 말하기를 처자와 잘 화합하되 마치 거문고와 비파가 조화되듯 하라.’ 하였으며, 또 공자가 말씀하시기를 부모란 자식이 화합하면 그저 따를 뿐이로다.’고 하셨으니, 부부의 윤리란 이처럼 중대한 것이니 어찌 마음이 서로 맞지 아니한다고 소박할 수 있겠는가.

대학에 말하기를 그 근본이 어지러운 자로서 끝을 다스린 자가 없으며, 후하게 대접하여야 할 자리를 박하게 대하면서 박하게 대해도 좋은 곳에 후하게 대하는 법은 없느니라.’ 이에 맹자께서 거듭하여 또 말하기를 후하게 대해야 할 자리에 있는 사람을 박하게 대하는 사람은 어떠한 일에서나 박하게 대한다.’라고 하였다. 슬프도다. 사람됨이 이미 각박하다면 어찌 부모를 섬길 것이며, 어찌 형제와 일가친척과 고을 사람과 잘 지낼 것이며, 어찌 임금을 섬기고 남들을 부리는 근본적인 일을 할 수 있으리오.”

퇴계의 문집에는 이함형의 질문에 대답한 두 통의 서신과 귀향하는 이함형에게 준 사신(私信) 한 통이 실려 있는데, 그 편지는 다음과 같이 이어지고 있다.

들으니 그대가 부부간에 화합하지 못한다고 하는데, 무슨 이유로 그러한 불행이 있는지 알지 못하겠네. 살펴보건대 세상에는 이러한 불행을 겪는 사람들이 적지 않으니, 그 가운데에는 부인의 성품이 악덕해서 고치기 어려운 경우와 모양이 못 나거나 지혜롭지 못한 경우도 있고, 반대로 그 남편이 방탕하고 취미가 별달라서 그렇게 되는 등 여러 경우가 있는 것이나, 그러나 대체로 성품이 악덕해서 고치기 어려운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든 남편이 항상 반성하여 잘 대해줌으로써 부부의 도리를 잃지 아니하면 가정이 파괴되고 자신이 더 말할 수 없는 각박한 인간으로 전락되는 지경에는 이르지 않는 법일세.”

이함형에 대한 퇴계의 사신은 다음과 같이 이어지고 있다.

아내의 성품이 악덕하여 고치기 어렵다는 사람도 그 정도가 아주 심하지 아니하면 또한 상황에 따라 잘 처리하여 마침내 서로 헤어지는 지경에는 이르지 않도록 해야 하며, 옛날에는 아내를 내쫓으면 딴 사람에게 시집을 갈 수 있었으므로 칠거지악의 이유로 아내를 내쫓을 수도 있었으나 지금은 여자는 한번 시집가면 평생 한 남자를 따라야 하는데, 어찌 마음이 맞지 아니한다고 아무런 관계없는 사람처럼 또는 원수 보듯 하여 자기 아내를 허무하게 천리 밖으로 내쳐서 가정을 다스리는 도리를 망가뜨리고 자손을 끊기게 하는 불행을 저지를 수가 있겠는가. 대학에 말하기를 자기에게 잘못이 없는 연후에 남의 잘못을 나무란다(無諸己而后非諸仁)’고 하였는데, 이 점에 있어서 내 경우를 들어 말하겠네.”

퇴계가 말하였던 자기 잘못이 없는 연후에 남의 잘못을 나무란다.’는 말은 대학의 제9장에 나오는 말로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요순이 천하를 다스림에 인으로 하니 백성들이 그를 따랐고, 걸주(桀紂)가 천하를 다스림에 포악함으로 하니 백성들도 따라서 악해졌느니라. 지도자가 명령하는 것이 그 자신의 행동과 반대되는 것이면, 백성들이 따라 하지 아니하는 법이다. 그러므로 군자는 자기 자신에게 선함이 있은 연후에 남에게 선을 권하고 자기 자신에게 악함이 없는 연후에 남의 잘못을 나무라는 법이다. 자기 자신에게 남을 용납하고 남과 함께 선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이 남을 가르칠 수는 없는 법이다.”

퇴계가 이함형에게 주는 편지 속에서 대학에 나오는 이 문장을 인용하였던 것은 부부유별의 어려운 윤리를 실천하였던 자신의 처지를 감히 말함으로써 이함형도 자신을 본받아 옛 성현의 말을 마음에 새기고 이를 실천해 주기를 바라는 충정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러고 나서 퇴계는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않았던 권씨 부인과의 결혼생활을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다.

나는 일찍이 재혼하였으나 한결같이 불행이 심하였네. 그러나 나는 스스로 각박하게 대하지 아니하고 애써 잘 대하기를 수십 년이나 했다네. 그간에 더러는 마음이 뒤틀리고, 생각이 산란하여 고뇌를 견디기 어려운 적도 없지는 않았으나 그렇다고 어찌 내 생각대로 인간의 근본도리를 소홀히 하여 홀로 계시는 어머니의 근심을 사게 하겠는가. 옛날 후한(後漢) 때의 사람 질운()아내와 부부의 도리를 어기어 자식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자는 실로 진리를 어지럽히는 사특한 자이다.’라고 말한 바가 있는데, 내가 이 말을 빌려 자네에게 충고하노니, 자네는 마땅히 거듭 깊이 생각하여 고치도록 힘쓰도록 하게. 이 점에 있어서 끝내 고치는 바가 없으면 굳이 학문을 해서 무엇을 할 것이며, 무엇을 실천한단 말인가.”

이함형에게 준 사신을 통해 알 수 있듯이 권씨 부인과의 16년에 걸친 결혼생활은 한결같이 불행이 심하였던불우한 시절이었다. 오죽하면 퇴계 스스로가 더러는 마음이 뒤틀리고 생각이 산란하여 고뇌를 견디기 어려운 적도 없지 않았다.’고 고백하고 있었음일까.

그러나 퇴계는 아내 권씨를 자신의 덕을 쌓는 수양의 화두로 삼았음이니, 일찍이 세기의 철인 소크라테스는 악처 크산티페를 두었는데, 사람들이 소크라테스에게 왜 그런 악처와 사느냐 물었을 때, ‘훌륭한 기수일수록 성질이 사나운 말을 타는 법이오. 왜냐하면 그런 말을 잘 달래서 탈 수 있는 사람이라면 어떤 말이라도 다 탈 수 있기 때문이오. 내가 크산티페를 잘 다룰 수 있다면 어떤 악한 성질을 가진 사람이라도 잘 달랠 수 있기 때문이오.’라고 말한 것과 비교할 수 있음이다.

어느날 부부간에 말다툼을 벌이다 아내 크산티페가 소크라테스에게 욕설과 고함을 지르고 그래도 분을 삭이지 못하고 옆에 있던 구정물이 담긴 양동이를 들어 소크라테스에게 퍼붓자 졸지에 구정물을 뒤집어 쓴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말한다.

천둥이 친 뒤에는 비가 오는 법이지.”

그러고 나서 다음과 같이 말을 이었다.

아무튼 결혼을 하는 게 좋다. 양처를 만나면 행복해질 테고, 악처를 만나면 철학자가 될 테니까.”

물론 퇴계의 아내 권씨는 크산티페처럼 악처는 아니었다. 다만 정신이 흐리고 지혜롭지 못한 모자란 여인이었는데, 어쨌든 소크라테스의 말처럼 아내 권씨를 통하여 퇴계의 철학은 한결 심오해지고 완숙할 수 있었던 것일까.

실제로 권씨 부인의 일화는 한 가지 더 전해 내려오는 것이 있다. 한번은 퇴계가 상가에 조문을 가려다가 흰색 도포자락이 해진 것을 보고 아내에게 그것을 꿰매달라고 하자 권씨는 흰 도포에 빨간 헝겊을 대어 기워왔다고 한다. 퇴계가 그것을 그냥 입고 갔더니 사람들이 놀라며 흰 도포는 반드시 빨간 헝겊으로 기워야 하는 것입니까.’하고 물었다고 한다. 예악에 정통한 퇴계가 그런 옷을 입고 오자 그것이 예법에 맞는 것인지 확인하였던 것이다.

퇴계는 그냥 빙그레 웃었다고 전해 내려오고 있는데, 그 미소 뒤에 숨겨진 그의 속마음은 과연 어떠하였을까.

퇴계가 이처럼 권씨를 소중히 대하고 부족한 부인의 말을 일일이 들어주는 행동은 제자들에게도 좋은 본보기가 되었다. 제자 중에 부인과 사이가 좋지 못한 사람이 있었는데, 문안 인사를 왔다가 권씨 부인을 보고 나는 학문이나 인격, 모든 면에서 선생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나 내 아내는 매무시나 음식솜씨, 손님을 대하는 모습 등이 월등하게 낫지 않은가. 그런데도 나는 아내를 십 년이나 박대하여 아직 자식조차 없으니.’하고 반성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퇴계는 권씨 부인을 손님처럼 공경하고 손님처럼 섬겼다.

퇴계의 편지를 사립문 앞에서 읽은 이함형은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 집으로 들어간 뒤부터 아내를 손님처럼 대하게 되었으며, 가정이 화목하게 되어 부인은 퇴계가 죽자 너무 고마워서 친부모가 돌아가신 것처럼 3년 동안 상복을 입고 상례를 갖추었다고 한다.

그러하면 퇴계는 어째서 이함형에게 편지를 써서 주고는 길가는 도중에서도 읽지 말고 집안에서도 읽지 말고 반드시 사립문 앞에서 읽으라.’고 엄명하였던 것일까. 그곳에는 심오한 뜻이 담겨져 있는 것이다.

무릇 바깥세상과 가정의 경계선이 바로 사립문 앞인 것이다. 이것은 감히 바깥세상의 거센 물결이 신성한 가정으로까지 침범할 수 없는 최후의 방어선인 것이다.

집안으로 들어설 때는 사람들은 반드시 말에서 내리고(下馬), 무장해제를 해야 한다. 말을 타고 그대로 집안으로 들어가는 사람도 없고, 칼을 찬 채 가정으로 들어가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세상의 모든 권세와 위엄은 일단 사립문 앞에서는 버려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에 일어나고 있는 모든 가정의 붕괴와 해체는 많은 사람들이 욕망의 말과 증오의 칼을 그대로 찬 채 신성한 집안으로 들어가기 때문인 것이다. 바깥세상의 갈등은 사립문 앞에서는 과감하게 정리해 버려야 하는 것이다. 가정은 폭탄을 가득 싣고 자살공격을 단행하는 테러 현장도 아니고, 술을 마시고 쾌락을 좇는 연회장도 아닌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가정은 수도장과 흡사하다.

퇴계는 가정을 외부의 세력이 감히 침범할 수 없는 성지(聖地)인 소도(蘇塗)로 보았던 것이다.

퇴계의 이 교훈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이 반드시 본받아야 할 덕목이다.

가정은 평화와 화해를 실천하는 수도장이며, 따라서 가정에서 일어나는 분쟁의 고함소리도 울타리 밖에까지 들려서는 안 되는 것이며 또한 바깥세상의 추악한 욕망은 사립문 앞에서는 해제되어야 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비무장지대의 경계점이 바로 사립문이었던 것이다.

예수도 그러므로 내일 일을 걱정하지 말아라. 내일 걱정은 내일에 맡겨라. 하루의 괴로움은 그날에 겪는 것만으로 족하다.’고 말하였다. 예수의 말처럼 사립문 안으로까지 내일의 걱정을 끌어들여서는 안 되는 것이다.

퇴계는 권씨 부인을 살아생전에는 손님처럼 공경하였을 뿐 아니라 죽은 후에도 정성을 다하였다.

명종 원년(1546) 72.

권씨 부인이 죽자 한양의 서소문집에서 죽은 부인을 두 아들을 시켜 분상(奔喪)하였을 뿐 아니라 계모를 대접하지 않던 당시의 풍속을 바르게 고쳐 친생모와 같이 적모복(嫡母服)을 입히는 한편 시묘도 시켰던 것이다.

남한강의 수로를 거슬러 단양까지 운구하고 퇴계가 단양군수를 끝내고 풍기로 가고 있는 바로 그 죽령에 빈소를 차려 영구가 되어 돌아오는 부인을 맞았다. 장례는 장차 자신이 죽어 묻힐 건지산 기슭의 앞산인 영지산(靈芝山)에 묘를 썼다.

지금도 산등성 하나 전체를 권씨 부인의 묘가 차지하고 있다. 퇴계가 좋아하던 철쭉이 해마다 봄이면 산 일대를 온통 뒤덮어 흡사 분홍치마를 두른 듯 붉은 꽃동산이 되는데, 퇴계는 산기슭에 여막을 지어 아들에게 시묘를 살게 하고, 자신은 건너편 바위 곁에 암자를 짓고 1년 넘게 권씨 부인의 무덤을 지켰던 것이다.

그뿐인가.

자신에게 불민한 딸을 맡겨준 장인 권질에게도 극심한 효성을 보였다.

적소에서 풀려난 후 장인 권질이 경치 좋고 한적한 냇가에 초당 하나를 짓고 건강을 회복하게 되었는데, 퇴계는 해마다 정초에 세배를 드리고 회갑 잔치까지 열어준다. 이때 권질이 초당의 이름을 사위에게 지어달라고 하자 퇴계는 사락정(四樂亭)이라고 지어주었으며, 권질은 이를 자신의 아호(雅號)로 삼았던 것이다.

아들이 없어 대가 끊긴 장인이 죽자 비문에 큰 집에 뒤가 끊기므로 내가 이 돌에 적어 새기노니 영원토록 잘 전할지어다.’라고 손수 비문을 짓고 묘비를 세운다. 16년의 긴 각고 끝에 수양과 극복으로 금슬 좋은 부부생활을 끝냄으로써 길사고풍(吉士孤風)의 인격을 지녔던 장인에게 자신의 소임을 무사히 끝마친 후 장인의 묘소를 찾아가 다음과 같은 시를 짓는다.

옛날 그땐 참사람을 몰라보고

까닭 없이 저승으로 이분을 데려갔네.

고향에 돌아와서 묘사를 지낸 후

매화 피는 모습을 보고 장인 생각하옵니다.”

이처럼 두 아내와 사별함으로써 불우한 결혼생활을 보냈던 퇴계. 비록 이함형에게 스스로 고백하였듯 한결같이 불행한 결혼생활이었으나 이를 참고 견디어 처가향념(妻家向念)을 완성한 이퇴계.

퇴계가 단양의 군수로 있을 때에는 바로 권씨 부인과 사별한 뒤 2년이 흐른 뒤였고, 그 적요한 공방(空房)에서 바로 명기 두향을 만났던 것이다. 그러므로 두향은 퇴계에게 있어 고독하고 적적한 인동(忍冬)의 긴 세월 끝에 맞은 설중매(雪中梅)였던 것이다.

설중매.

흰눈이 내리는 엄동설한에 피는 매화꽃. 예부터 섣달에 피는 매화는 기우(奇友)’라고 불렀고, 봄에 피는 매화는 고우(古友)’라고 불렀는데, 그런 의미에서 두향은 퇴계에 있어 설중매이자 기우였던 것이다.

퇴계는 두향을 통해 처음으로 매화의 향기와 같은 여인의 향기를 알았다. 더구나 이 무렵 퇴계의 나이는 48, 두향의 나이는 18. 딸보다 어린 두향이었으나 남녀간의 상사는 나이를 초월하는 것일까. 퇴계는 두향을 통해 비 오고, 바람 부는 운우의 열락(悅樂)을 알았다.

두 사람은 주로 강선대 위에서 거문고를 타고 함께 선경을 즐겼다. 또한 두향에게 있어 퇴계는 첫 남자이기도 하였다. 비록 관기라 하여도 조()가 있어 아무리 상대방이 높은 관직에 있다 하더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수청을 허락하지 않았는데, 이때까지도 두향은 숫처녀였다.

원래 단양에 속한 관기였던 두향은 각 지방 고을 수령의 수청을 들기 위해서 두었던 기생으로 대체로 중앙에서 임명된 관리들이 가족을 떼어놓고 부임하는 경우가 많아 이들을 위한 위안부 노릇을 전문으로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두향은 관기였으되 몸을 함부로 굴리는 은군자(隱君子)’가 아니었다.

은군자는 내놓고 몸을 팔지는 않지만 은밀히 매음을 하는 천기를 가리키고 있는데, 이를 비꼬아 은근짜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두향은 절개가 깊고 자존심이 강한 여인이었다. 대부분의 관기들이 부임하는 군수의 마음에 들어 첩이 됨으로써 기생 팔자를 면하는 것을 꿈꾸고 있었다. 이를 대속(代贖)이라 하였는데, 그렇게 되면 비록 기첩(妓妾)이라 할지라도 일단은 관기의 천민은 면할 수 있음이었던 것이다.

퇴계는 두향에게 있어 머리를 얹어준 첫 남자였다. 원래 기생에게는 초야권(初夜權)’이라는 것이 있어 동기는 초야권을 통해 처녀성을 파괴함으로써 성인이 될 수 있었다. 동기의 초야권을 사는 사람은 금침(衾枕)과 의복, 그리고 상당한 재산을 줌으로써 하룻밤을 치를 수 있었는데, 이는 원래 미개사회에서 널리 볼 수 있는 풍속이었던 것이다.

두 사람이 함께 있었던 것은 불과 9개월. 그러나 함께 한 짧은 세월이 무슨 소용이 있으랴. 두 사람의 만남은 일장춘몽(一場春夢)처럼 짧았으나 두 사람의 정은 무산지몽(巫山之夢)처럼 깊었다.

물론 퇴계가 두향을 소첩으로 삼아 단양을 함께 떠난다 해도 부도덕한 일은 아니었다. 이미 두 아내와 사별한 뒤였으므로 또 한 명의 여부인(如夫人)을 둔다고 해도 흉잡힐 일은 없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두향은 퇴계가 단양을 떠남으로써 그대로 생이별이 될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또한 자신이 퇴계를 졸라 함께 단양을 떠나게 된다면 그것이 퇴계에게 치명적인 누()가 될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단양과 풍기는 지척지간이니, 보고 싶을 때는 사람을 보내어 연락을 취할 터이니 안심토록 하여라.”

떠나기 전날 밤 두향에게 퇴계는 약속의 말을 하였으나 두향이는 그 말이 다시는 만날 수 없는 몌별(袂別)의 말임을 잘 알고 있었다.

나으리.”

두향은 그러나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으리께 마지막으로 드릴 말씀은 나으리를 모신 몸으로 더 이상 기적에 올라 있을 수는 없사오니 일부종신할 수 있도록 면천하여 주소서.”

기생에 있어 면천(免賤)이란 기적에서 이름을 빼어 양민을 만들어 주는 일을 뜻하는 것이다. 그 일은 어렵지 않은 것이었으나 문제는 자신이 떠난 뒤 홀로 남아 있을 두향의 처지였다.

때는 9.

반쯤 열린 창밖으로 만월의 달빛이 은장도를 들이댄 듯 눈부시게 흘러들어오고 있었으나 술잔을 마주하고 앉은 두 사람은 정작 말이 없었다. 가타부타 침묵을 지키고 있던 퇴계가 천천히 입을 열어 말하였다.

오래간만에 네 거문고 소리를 듣고 싶구나.”

두향은 묘비에 새겨있듯 거문고에 능한 명인이었다. 거문고는 원래 소리가 깊고 장중하여 예로부터 백악지장(百樂之丈)’이라 일컬어졌는데, 퇴계 또한 율객(律客)이었으므로 거문고를 연주하는 두향이나 이를 감상하는 퇴계가 서로 호흡이 맞았다.

두향은 거문고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 오른손으로는 슬대를 잡아 힘차게 현을 내치면서 연주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윽고 거문고 연주에 맞춰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였다.

즐겁도다. 산속에 숨어 사는 삶은 큰 사람의 너그러운 모습일러라.

홀로 잠자고 홀로 말하니

그 깊은 뜻 길이 잊지 말거라.”

그 노래는 평소 이퇴계가 좋아하던 노래였다.

원래 공자가 편찬한 시경(詩經)’속에 나오는 고반(考槃)’이란 시였다. ‘시경은 중국 최초의 시가집으로 공자세가에서는 옛날에는 시 3000편이 있었는데, 공자 때에 이르러 중복되는 것을 빼어내고 합당한 것만을 취하여 305편의 시경을 편찬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공자는 특히 시는 본래 노래의 가사로서 무엇보다도 민심을 솔직하게 반영하여 가장 올바른 정치의 득실을 알 수 있게 하고 사람뿐만 아니라 천지와 귀신까지도 감동시킬 수가 있어 그 효용이 심히 막대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공자는 이런 말을 했을 정도였다.

그대들은 왜 시경을 공부하지 않는가. 시는 사람의 감흥을 일으켜주고 사물을 올바로 보게 하여 사람들과 잘 어울리게 한다. 가깝게는 어버이를 섬기고, 멀리는 임금을 섬기게 한다. 또한 새나 짐승, , 나무 등의 이름들도 많이 알게 한다.”

그중에서도 고반이란 시는 산속에 은둔 생활하는 군자의 즐거움을 노래한 시가로서 평소에 탄금대에서 퇴계가 즐겨 듣던 노래였던 것이다. 두향은 청아한 목소리로 노래를 계속 불러나갔다.

즐겁도다. 언덕에 숨어 사는 삶은/큰사람의 한가로운 마음일러라.

홀로 잠자고 홀로 노래하니/그 기쁨 이에서 지나침이 없으리.

즐겁도다. 물가에 숨어 사는 삶은/큰사람의 유연한 모습일러라.

홀로 잠자고 홀로 밤을 새니/그 즐거움 남에게 알려 무엇하리.”

철저하게 산과 언덕, 그리고 물가에 숨어 사는 군자의 은둔 생활을 찬미하고 있는 이 노래는 단양에 있을 무렵 앞으로의 마음을 다짐하는 이퇴계의 애창곡이기도 했던 것이다.

고반(考槃).

이는 은둔할 곳을 마련하여 유유자적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또 한편으론 쟁반을 두드리면서 노래에 장단을 맞추는 행위를 말함이다. 퇴계는 이를 은둔하는 높은 선비가 강의하는 곳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퇴계는 단양에 군수를 하고 있을 무렵 바로 고반을 꿈꾸고 이를 계획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2년 뒤 환향하여 도산서원을 짓기 시작하였던 것은 바로 자신의 손으로 고반을 완성하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퇴계가 도산서원을 고반으로 보고 있었던 것은 10년에 걸쳐 60세에 도산서원을 완성하고 나서 다음과 같은 시를 짓는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바위벼랑에 꽃은 피어 봄날은 고요하고

새는 시냇가 나무 위에서 울고 물결은 잠잠하구나.

우연히 젊은 제자들과 산 뒤를 돌아서 한가로이 산 밑에 이르러 고반을 찾노라.”

퇴계에 있어 성현, 특히 공자의 가르침은 인생의 교훈이었다. 따라서 퇴계는 항상 다음과 같이 말하곤 하였다.

성인이 가르침을 줄 때에는 반드시 사람들이 알 수 있고 실천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 말씀하셨을 터인데, 성인의 말씀은 저와 같고 나의 생각은 이와 같다면 이것은 곧 나의 노력이 투철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퇴계는 이처럼 성현의 말씀을 실천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자신을 반성하고 욕망을 경계하였으며, 내면의 마음을 바로잡고 개선하는데 노력을 기울였던 것이다.

퇴계는 옛 성현의 가르침을 실천하고 또한 이를 제자들에게 가르칠 수 있는 고반을 꿈꾸고 있었으며, 바로 이러한 이상향(理想鄕)이 바로 도산서원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퇴계의 마음을 도향은 눈치채고 있었다. 두향은 퇴계가 풍기의 군수를 마치면 고향으로 돌아가 고반을 짓고 은둔 생활을 할 것임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두향은 또 다른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였다. 그것 역시 시경에 나오는 다른 노래였으나 이는 먼저 번의 노래보다 더 애절하고 애틋한 사랑노래였다.

즐겁게 산골짜기에 숨어 지내니, 큰사람의 너그러움이라./갈대는 우거지고 흰 이슬 서리되었네. 사랑하는 우리 님은 강 건너에 산다네./님의 마음 너그러워라. 물굽이를 건너자니

험한 길 멀기도 하여라. 넓은 여울로 건너자니,/강 가운데 멎겠구나. 홀로 잠들고 홀로 말하니,

이 뜻을 영원히 잊지 않으리라. 이 뜻을 영원히 잊지 않으리라.

(考槃在澗碩人之寬 兼假蒼蒼白露爲霜 所謂伊人在水一方 碩人之寬遡廻從之 道阻且長遡遊從之 宛在水中央獨寐寤言 永矢勿暄永矢勿暄)”

노래를 부르던 두향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기 시작하더니 이내 멈췄다. 그 대신 가녀린 어깨가 흔들리고 있었다.

두향의 노래는 상사별곡이었다. 사랑하는 님이 지척지간인 강 건너로 떠나간다 하여도 찾아가려면 험한 길이 멀기도 하고 여울을 건넌다고 하더라도 강 가운데서 멎을 수밖에 없음을 탄식하는 이별가였던 것이다.

두 사람의 인연은 이 한 번의 별리로 영원히 끊어지게 될 것이며, 이제는 홀로 잠들고, 홀로 말할 수밖에 없는 가혹한 운명이라 할지라도 영원히 잊지 않음을 맹세하는 단심가(丹心歌)이기도 했던 것이다.

두향은 흐느낌을 애써 자제하고 있었다. 퇴계 역시 입을 열어 두향의 슬픔을 달래지 아니하였으나 퇴계에 있어서도 이별은 살을 찢는 고통이었다.

그날 밤.

퇴계와 두향은 마지막 밤을 보낸다. 불은 껐으나 워낙 달이 밝아 문을 통해 들어오는 달빛으로 방안은 초롱을 밝힌 듯 환하였다.

옛 중국의 시인 맹교(孟郊)는 이렇게 노래하였느니라.”

두향을 팔베개하여 곁에 누이고 나서 퇴계가 말하였다.

“‘이제 늙고 마른 몸이 이별마저 하게 되니, 두려운 생각이 든다.’ 두향아, 이제 기약 없이 헤어진다고 생각하니 나 역시 두려운 생각마저 드는구나.”

그러자 퇴계의 가슴을 파고든 두향이 말하였다.

기생 일지홍(一枝紅)은 님과 헤어질 때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나이다.

이별이 하도 설워 잔들고 슬피울제 어느덧 술 다하고 님마저 가는구나. 꽃 지고 새 우는 봄을 어이할까 하노라.’”

일지홍은 유명한 성천의 기생. 갑자기 두향은 몸을 일으켜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 두향은 머리맡에 놓인 문갑에서 지필묵을 꺼내들었다.

성천의 기생 일지홍이 사랑하는 님과 이별할 때 그리 노래하였다면 단양의 천기 두향이도 님과 노래할 때 상사곡 한 곡 짓겠나이다.”

두향은 투명한 달빛 아래에서 듬뿍 붓에 먹을 묻힌 다음 종이 위에 시 한 수를 쓰기 시작하였다. 퇴계는 묵묵히 두향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轉輾寒衾夜眠 鏡中憔悴只堪憐 何須相別何須苦 從古人生未百年

두향이가 단숨에 쓴 즉흥시는 한마디로 절창이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찬 자리 팔베개에 어느 잠 하마 오리. 무심히 거울 드니 얼굴만 야윗고야. 백 년을 못 사는 인생 이별 더욱 설워라.”

평소에 두향이가 거문고에 능하고 매화를 키우는 데 명인이라는 사실은 익히 알 수 있었으나 문장 또한 뛰어나다는 것은 처음 보는 사실이었다.

이제 보니 네가 못 하는 것이 없구나. 어느새 글을 배워 이처럼 시까지 쓸 수 있단 말이냐.”

퇴계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두향을 통해 여인의 향기를 알았고 살아있는 매화를 보았다. 두향을 통해 운우의 열락을 알았고 말하는 해어화(解語花)를 보았다. 그러나 마침내 두향이가 시에도 뛰어난 가인(歌人)임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러자 두향이가 무릎을 꿇고 말하였다.

나으리, 나으리께 묻겠나이다. 나으리께오서는 상원사의 동종을 아시나이까.”

알고 있다.”

상원사의 동종이 죽령고개를 넘을 때의 고사를 알고 계시나이까.”

들은 바가 있다.”

상원사의 동종. 그것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종으로 경주의 에밀레종보다 100년도 더 앞서 주조된 종으로 알려져 있다. , , , 주석을 녹여 만든 것으로 높이 1.4m, 직경 1.2m로 용신을 틀로 하여 사방을 구분할 수 있는 비천선녀의 무늬가 있는 천하제일의 명종이었던 것이다.

우리나라 제일의 범종인 상원사 동종은 죽령과 깊은 인연을 갖고 있는데, 그것은 세조 때문이었다.

세조는 왕자의 난으로 왕위를 찬탈한 후부터 병명을 알 수 없는 괴질에 걸린다. 그것은 전신에 종기가 생기고, 고름이 나오는 견디기 어려운 난치병이었다. 명의와 백약이 모두 효험이 없자 세조는 신라 이래의 문수도량이었던 오대산에서 기도하여 불력으로 병을 고치고자 상원사를 찾아갔던 것이다.

월정사에서 참배를 올리고 상원사로 가던 중 세조는 산간계곡에서 흘러내려 오는 맑은 물에 발을 담그고 쉬어가기로 하였다. 주위 시종들에게 자신의 추한 꼴을 보이기 싫어 평소에도 어의를 풀지 않았던 세조였지만 그날은 하도 경치가 좋아 모든 근신들을 물리치고 혼자서 목욕을 시작하였다.

그때 동자승 하나가 숲 사이에서 노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세조는 그 동자승을 불러 자신의 등을 밀어 달라고 부탁하였다. 동자승은 천진하게 세조의 명에 따라 온몸을 구석구석 씻어 주었다. 목욕을 마친 세조가 동자승에게 말하였다.

어디 가든지 임금의 옥체를 씻었다는 말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된다.”

그러자 동자승도 말하였다.

임금도 어디 가든지 문수보살을 친견했다는 말을 함부로 하지 말지어다.” 말을 마친 동자승은 홀연히 사라져버리고 세조는 놀라서 주위를 살펴보았는데, 어느새 자신의 몸에 난 종기가 씻은 듯이 나았음을 발견했던 것이다. 크게 감동한 세조는 자신의 기억을 더듬어 화공에게 문수보살의 초상을 그리도록 하였고, 몇 번의 교정 끝에 자신이 친견한 문수보살의 모습을 나무 조각으로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세조는 이 동자상을 상원사에 안치하는 한편 상원사를 중창하였으며, 이를 원찰로 삼는다. 그리고 전국에 어명을 내려 천하제일의 종을 상원사에 봉안하도록 하였는데, 이때 선택된 종이 바로 동종이었던 것이다.

원래 이 종은 이름이 알려져 있지 않은 사찰의 범종이었으나 조선조의 억불정책으로 절이 쇠퇴하자 안동 호부의 남문루에서 시간을 알리는 관가의 부속품으로 전락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세조가 등극한 지 12년 후인 1469년 강원도 오대산의 상원사를 확장하고 원당 사찰로 지정하면서 전국에서 가장 소리 좋은 종을 찾기 위해 상원사 운종도감이라는 부서까지 신설하고 전국을 수소문하다가 마침내 이 종이 간택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500여 명의 호송 요원과 일백 필의 말이 동원되어 안동에서 상원사로 운반되었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동종의 무게는 자그마치 3300. 이 무거운 종을 상원사로 옮기던 중 마침내 죽령고개에 이르게 되었다.

이때 그 동종과 죽령은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유명한 고사를 남기게 되는데, 바로 그 이야기에 대해서 두향이가 물었던 것이다.

하오면 나으리.”

두향이가 무릎을 꿇고 앉은 채 낮은 목소리로 물어 말하였다.

상원사의 동종이 죽령고개를 넘을 때 산기슭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알고 계시나이까.”

알고 있다.”

자그마치 닷새 동안이나 500명이나 되는 장정들과 말 백 필이 끌어당겨도 제자리에서 꼼짝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들은 적이 있으시나이까.”

들은 적이 있다고 내 말하지 않았더냐.”

퇴계가 머리를 끄덕이며 대답하였다.

퇴계도 상원사의 동종에 대해서는 익히 들은 바가 있었다.

우리나라에 전하고 있는 동종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한국 특유의 형식을 갖고 있으며, 뛰어난 주조 기술과 조각 수법을 보여주는 명종이었다.

통일신라 시대 때인 성덕왕(聖德王) 24(725)에 만들어진 범종으로 용뉴() 좌우에 종명(鐘銘)이 새겨져 있어 조성 연대가 확실하게 알려져 있다. 종신에는 서로 마주 보는 두 곳에 구름 위에 서서 무릎을 세우고 공후와 생()을 연주하는 비천상(飛天像)이 양각되어 있다. 바로 이 동종이 죽령에 이르렀을 때 5백 명의 장정들과 말 백 필이 끌어당겨도 제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음인 것이다.

하오면 나으리,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자 운종도감이 처음에는 고개를 넘느라 힘이 빠져서 그렇겠지 하고 생각하였으나 닷새가 지나도 움직이지 않자 묘책을 강구했다 하나이다. 그 이야기에 대해서도 알고 계시나이까.”

글쎄, 그 이야기는 들은 것 같기도 하다만 하도 옛 기억이라 가물가물하니 네 입으로 말해 보도록 하여라.”

나으리.”

무릎을 꿇고 앉은 두향이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갖가지 묘책을 찾았으나 방안이 없어 초조해하던 중 마을의 촌로 하나가 찾아와 이렇게 말하였다고 하나이다.

백 살을 못 사는 사람도 생이별을 서러워하거늘 하물며 800살이 넘어 숱한 애환을 지닌 범종이 이 죽령을 넘으면 다시는 못 볼 고향이 아쉬워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는 것입니다.’라고 말입니다.”

퇴계는 묵묵히 두향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순간 퇴계는 두향이가 방금 전에 쓴 백 년을 못 사는 인생 이별 더욱 설워라.(何須相別何須苦 從古人生未百年)’란 송별시의 한 구절이 바로 동종에 얽힌 고사에서 인용하여온 문장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제자리에서 꼼짝하지 않은 것은 이처럼 상원사의 동종뿐이 아니나이다. 나으리, 나으리께오서는 송도 기생 황진이에 대해서 들은 적이 있으시나이까.”

들은 바 있다.”

퇴계는 머리를 끄덕여 대답하였다.

황진이(黃眞伊).

서경덕, 박연폭포와 더불어 송도삼절(松都三絶)로까지 불리었던 황진이는 전 임금이었던 중종 때의 기생으로 10년 동안이나 수도하여 생불이라 칭송받던 지족 선사를 유혹하여 파계시키고, 당대의 성리학자 서경덕을 유혹하려다가 실패하여 스승과 제자를 맺은 소문이 자자하였던 명기였다.

나으리, 황진이는 15세 무렵에 동네 머슴이 연모하여 상사병으로 죽자 그 길로 기계에 투신하였다고 하나이다. 그런데 황진이 집 앞을 지나는데, 상여는 그 자리에 멈춰 꼼짝도 하지 않았다고 하더이다. 마치 죽령고개에 닷새간이나 멎어 꼼짝하지 않았던 동종처럼 옴짝달싹하지 않았다고 하더이다. 그 상여가 어찌하여 움직였는지 그 소문은 알고 계시나이까.”

퇴계는 묵묵부답이었다.

소첩이 대신 말씀드리겠나이다. 황진이가 자신이 입던 속치마와 저고리를 벗어 관위를 덮자 비로소 상여가 움직이기 시작하였다고 하는데, 이는 황진이의 속곳이 머슴의 넋을 달래 주었기 때문이나이다.”

두향은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백 년도 못 사는 인생에서 생이별을 슬퍼하는 머슴의 넋을 달래기 위해서 황진이가 입고 있던 속곳을 벗어 관을 덮어 주어 상여를 움직이게 하였다면 800살이 된 범종은 어떻게 하여 움직였는지 그 이야기를 알고 계시나이까.”

퇴계는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역시 소첩이 대신하여 말씀드리겠나이다. 동종에 있는 젖꼭지 하나를 잘라내었다 하더이다.”

두향의 말은 사실이었다.

상원사 동종에는 36개의 젖꼭지가 있었다. 이를 뉴()라고 부르는데, 사방에 각각 가로세로 세 개씩 불교식으로 배열된 유두(乳頭)36개나 돌출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는 종의 울림을 끊어질 듯 끊어질 듯 은은하게 백 리 밖으로까지 울려 퍼지게 하는 독특한 음향장치였다. 상원사의 동종이 국보 36호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범종일 뿐 아니라 그 소리가 아름답기로도 제일인 것은 동종 꼭대기에 있는 용통(甬筒)의 음관(音管) 때문이기도 하지만 바로 36개의 젖꼭지 때문에 그 소리 울림이 독특하고 청아하였던 것이었다. 그런데 이 36개의 젖꼭지 중 하나를 잘라내었던 것이다.

젖꼭지 하나를 잘라낸 운종도감은 이를 종이 있었던 안동 도호부의 남문루 밑에 파묻고 정성껏 제를 올렸다고 하더이다. 그러고 나서 다시 죽령에 돌아와서 범종에게 이렇게 말을 하였다고 하더이다.

이제는 미련을 버리시고 먼 길을 떠나시지요.’”

두향은 일단 말을 끊었다.

밤이 깊자 달은 공중제비를 돌 듯 중천을 거꾸로 돌아 휘영청 밝은 달빛을 방안으로 되쏘고 있었다.

그러자.”

두향이가 긴 침묵 끝에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자 동종이 다시 움직였다 하더이다. 나으리, 이로써 동종은 죽령을 넘어 제천, 원주, 진부령을 거쳐 오대산에 안치되었다고 하더이다. 나으리.”

두향의 눈에서 맑은 이슬이 굴러떨어지기 시작하였다.

나으리께오서는 날이 밝으면 단양을 떠나시나이다. 단양을 떠나시면 상원사의 동종처럼 죽령고개를 넘으실 것이나이다. 나으리께오서는 지척지간이라 마음만 먹으면 불원간 또다시 만날 수 있다 기약하셨사오나 소첩이 보기에는 이제 한번 가오시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것임을 잘 알고 있나이다. 나으리, 죽령고개가 아무리 높다 하여도 나으리를 향한 소첩의 그리움은 구름이 되어 단숨에 뛰어오를 수 있고, 동종의 무게가 3300근이나 되어 무겁다고는 하지만 나으리를 향한 소첩의 마음에 비하면 한갓 검불에 불과하나이다. 장정 500명과 말 일백 필이 끈다 하면 상원사의 동종을 움직일 수 있사오나 소첩의 마음은 절대 끌지 못할 것이나이다. 나으리, 나으리를 향한 내 단심은 그 무엇으로도 끌 수도, 당길 수도, 밀 수도 없는 요지부동이나이다. 상원사의 동종이 800년이나 되었다고는 하지만 나으리를 향한 내 상사는 전생으로부터 이어진 천겁의 업이오며, 하늘과 땅이 갈라지기 전부터 맺어온 숙연이나이다. 하오니 나으리, 이제 정히 가시겠다면 나으리께오서 소첩의 젖꼭지 하나를 칼로 베어내고 떠나시오소서.”

두향의 얼굴은 흘러내린 눈물로 젖어있었다. 두향은 천천히 저고리를 벗기 시작하였다. 고름을 풀어 내리고 가슴을 헤쳤다.

나으리, 젖꼭지 하나를 베어내소서. 그래야만 나으리를 향한 소첩의 미련이 끊어질 것이나이다. 하늘과 땅이 갈라지기 전부터 이어진 나으리와의 천 겁의 인연이 끊어질 것이나이다.”

천천히 저고리를 다 벗은 두향이 은장도 하나를 꺼내어 방바닥 위에 놓았다. 흘러들어온 달빛이 두향의 가녀린 어깨를 감싸고 있었고, 풀어헤친 긴 머리카락 사이로 두향의 젖가슴이 흔들리고 있었다.

정녕 가슴 하나를 베어 달라는 것이냐.”

침묵을 지키던 퇴계가 마침내 입을 열어 물었다.

베어주소서.”

결연한 목소리로 두향이 대답하였다. 그러자 퇴계는 천천히 손을 뻗어 은장도를 집어 들었다. 비록 노리개로 갖고 다니는 작은 칼이었으나 시퍼렇게 날이 서 있었다. 퇴계는 칼을 들어 곁에 벗어둔 두향의 저고리를 펼쳤다. 저고리는 갑사저고리였는데, 퇴계는 망설임 없이 칼을 들어 저고리의 깃을 잘라내었다.

이른바 할급휴서(割給休書)였다.

할급이란 말의 뜻은 가위로 옷을 베어서 준다.’라는 뜻으로 당시 양반사회에서는 내외가 갈라서는 이혼이 국법으로 엄중하게 금지되어 있었으나 일반 서민사회에서는 할급, 저고리의 옷섶을 잘라줌으로써 남편은 아내에게 이혼을 증빙할 수 있는 수세를 줄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세모꼴의 옷섶을 받으면 그 순간 여인은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었다. 따라서 나비라고 불리는 이 세모꼴의 옷섶을 가진 여인들은 등에 이불보를 진 채 이른 새벽 마을 어귀나 성황당 앞에서 새로운 남자를 만나기 위해서 서성거렸으며, 그 여인을 처음으로 본 남자는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데리고 함께 살아야 했던 것이다.

여인은 그 남자에게 나비를 보여줌으로써 자신이 그 어딘가에 매이지 않고 나비처럼 날아다닐 수 있는 자유의 몸임을 증명할 수 있었고, 남자는 그 순간 여인이 등에 진 이불보로 보쌈하여 집으로 데리고 감으로써 새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퇴계가 은장도로 저고리의 깃을 베어낸 것은 두 사람의 연분을 끊어내는 일종의 이연장(離緣狀)이었던 것이다.

이로서.”

퇴계가 나비 모양으로 베어진 세모꼴의 저고리 깃을 두향에게 주면서 말하였다.

상원사의 동종이 죽령의 고개를 넘어가듯 내 몸도 죽령을 무사히 넘을 수 있겠느냐.”

말없이 울고 있던 두향이 퇴계가 내민 세모꼴의 저고리 깃을 두 손으로 받으며 말하였다.

나으리께오서 저고리의 깃을 자르시니 이것으로 인연이 다된 것을 알겠나이다. 상원사의 동종에서 잘라낸 젖꼭지를 남문루에 파묻고 제사를 지냈듯 소첩이 이 저고리를 나으리와 함께 지내던 강선대 바위 밑에 파묻으오리다. 그리하여 마침내 다북쑥 우거진 무덤에 함께 묻히겠나이다. 나으리.”

두향은 마침내 강선대 바위 옆에 움막을 짓고 평생 퇴계를 생각하며 종신 수절할 것을 결심하였음일까. 또한 퇴계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순간 남한강 물속에 뛰어들어 자살할 운명임을 이때 벌써 꿰뚫어 보았음일까.

그뿐인가.

자신이 죽은 후에도 바로 그 자리, 쑥대가 우거진 다북쑥 속에서 임자 없는 무덤으로 세세연년 퇴계만을 기리는 초분이 남아 있을 것을 예견하였음일까.

다북쑥 우거진 무덤.

이는 모죽지랑가(慕竹旨郎歌)에 나오는 한 구절이었다. 퇴계도 잘 알고 있는 신라시대 때의 대표적인 향가였다.

신라 효소왕(孝昭王) 때에 득오곡(得烏谷)이란 화랑이 지은 8구체의 향가로서 지금까지 제대로 해독되어지지 않은 난해한 노래인데, ‘삼국유사에는 이 노래의 배경에 대해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죽지랑(竹旨郞)’이란 화랑은 김유신을 도와 삼국통일을 완성하였던 위대한 인물이었는데, ‘죽지랑의 부하 중에 득오곡이란 낭도가 있었고, 화랑도의 명부에 이름을 올려놓고 매일 출근을 하더니 한 열흘 동안 보이지 않았다. 죽지랑이 그의 어미를 불러 아들이 어디 갔느냐고 묻자 어머니는 당전(幢典:오늘날의 부대장에 해당하는 군직) 익선아간(益宣阿干)이 내 아들을 창고지기로 임명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급히 가느라고 낭께 말씀드리지 못하였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죽지랑은 그 말을 듣고 그대의 아들이 만일 사사로운 일로 그곳에 갔다면 찾아볼 필요가 없지만 공사로 갔으니 마땅히 가서 위로하고 대접해야겠소.”하고 낭도 137인을 거느리고 떡과 술을 가지고 위로하러 가서는 밭에서 일을 하고 있는 득오곡을 불러 술을 먹이고 상관인 익선에게 휴가를 주어 득오곡을 집으로 돌아가 그리운 어머니를 만날 수 있도록 허가를 내줄 것을 청원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고지식한 익선은 이를 거절한다. 먼 훗날 자신을 그토록 사랑하였던 죽지랑의 인품을 사모하여 득오곡은 이미 죽은 죽지랑을 위해 모죽지랑가란 향가를 지었던 것이다.

다북쑥 우거진 무덤에 함께 묻힐 것이나이다. 나으리.”하고 울며 말하였던 두향의 별사는 바로 모죽지랑가에 나오는 내용을 한 소절 인용하였던 것이다.

그 향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간 봄을 그리워함에/모든 것이 서러워 시름하는구나.

아름다움 나타내신/(그대의) 얼굴에 주름살을 지려고 하는구나.

눈 깜박할 사이에/만나 뵈올 기회를 지으리이다.

님이여, 그리운 마음이 가는 길에

다북쑥 우거진 마을에 함께 잘 밤인들 있으리까.”

두향은 퇴계를 떠나보내는 마음을 죽지랑을 사모하여 노래하였던 득오곡의 향가를 빗대어 나타내 보였던 것이다.

두 사람의 9개월의 사랑은 비록 짧았으나 아득히 깊어 이를 지나간 봄이 그리워서 모든 것이 울며 시름하는구나.”라고 비유하였으며, “눈 깜짝할 사이나마 다시 만나 뵙고 싶지만 그러나 그리운 마음이 가는 길 그 어디에도 다북쑥이 우거진 마을에 함께 잘 수 있는 밤이 있겠는가.” 하는 탄식을 통해 다북쑥 마을이 상징하는 이 지상에서의 황촌(荒村)에서는 영원히 또다시 만날 수 없음을 암시하고 있음이었던 것이다.

두향의 불길한 예감은 그대로 적중된다.

퇴계와 두향은 그 후 20여 년간 지척지간에 있어 눈 깜짝할 사이에 만날 수 있는 기회는 있었으나 이 지상에서는 더 이상 함께할 인연이 닿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날 밤이 퇴계와 두향이가 다북쑥 우거진 마을에서 함께 잠든 마지막 밤이었던 것이다.

퇴계는 두향이가 입던 치마폭에 정표로 다음과 같은 시를 한 수 적어 주었다고 한다.

死別已呑聲 生別常惻惻

퇴계는 평소에 두보의 시를 좋아했었다.

두향의 이름이 비록 기명이었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두보의 성과 같음을 기억하고 있다가 헤어지는 별리의 정표로 두보의 시를 한 수 적어 두었던 것이다.

그 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죽어 이별은 소리조차 나오지 않고 살아 이별은 슬프기 그지없더라.”

그로부터 20여년 뒤.

두향은 치마폭으로 얼굴을 가린 채 강선대 위에서 몸을 던져 남한강 푸른 물에 낙화하여 숨을 거뒀으니, 이때 두향의 얼굴을 가렸던 치마에 적혀 있던 시가 바로 퇴계가 써준 송별시였을까. 또한 두향이가 말하였던 대로 오늘날 남아 있는 다북쑥이 우거져 있는 무덤 속에는 두향의 시신과 더불어 퇴계가 베어준 저고리 깃의 나비가 함께 묻혀 있음일까.

두향이가 퇴계에게 정표로 준 물건은 매분. 양매에 탁월한 재능이 있었던 두향이가 10년 이상 가꾸어 오던 분매였다.

퇴계가 언행록에 기록되어 있는 것처럼 단양군수를 떠날 때에 행장 속에 다만 괴이한 괴석 두 개만 들어있었고, 관졸들이 삼다발을 가지고 와 이것은 아전에서 키운 것이온데, 노자로 주는 전례가 있기에 삼가 바칩니다.’ 하자 내가 명령한 것이 아닌데 왜 지고 왔느냐.’고 이내 물리쳤다고 하였는데, 그러나 퇴계의 행장 속에는 두향이가 준 분매 하나가 남의 눈에 띌세라 깊숙이 보관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후부터 퇴계는 숨을 거둘 때까지 20여 년간 이 분매를 애지중지한다. 이로써 퇴계가 한양의 우사에 머무르고 있을 때 잠시 두고 왔다가 못내 그리워하여 손자 이안도를 시켜 이 분매를 배로 운반해서까지 도산서원으로 가지고 오게 한 그 수수께끼의 비밀이 풀리게 되는 것이다.

퇴계는 자신의 제자인 김취려(金就礪)에게 이 분매를 손자를 통해 가지고 오도록 부탁을 한 후 마침내 이 분매가 오자 빙설 같은 얼굴(氷雪容)’을 보게 되었음을 기뻐하는 시를 짓게 된다. 여기서 빙설 같은 얼굴이란 오랜만에 만나는 매화꽃을 말함이지만 실은 꽃으로 의인화된 두향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퇴계는 이 분매를 통해 두고두고 두향이의 향기를 떠올릴 수 있었고, 두향의 모습을 그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매분을 두고 노래한 원컨대 님이시여, 우리 서로 사랑할 때 청진한 옥설 그대로 고이 간직해 주오(願公相對相思處 玉雪淸眞共善藏)’란 구절은 두향을 그리워하고 두향에게 바치는 헌사였던 것이다.

퇴계가 죽는 날 아침 시봉하는 사람을 시켜서 분매에 물을 주라.’라는 최후의 유언을 남기고, 마침내 저녁 5시경에 와석을 정돈하라고 명하고 부축하여 일으켜 앉히니 조용하고 편안하게 돌아가시다.’라는 연보의 기록은 그러한 퇴계의 마음을 엿볼 수 있는 극적인 장면이 아닐 것인가.

아마도 퇴계는 그 분매를 바라보기 위해서 자신을 부축하라고 이른 다음 이 지상에서의 마지막 눈빛으로 매화를 보고 그리고 조용하고 편안하게 눈을 감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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