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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 주유열국(周遊列國) 제6장 공자천주(孔子穿珠)

2부 주유열국(周遊列國) 6장 공자천주(孔子穿珠)

 

노나라 애공 11, 기원전 484.

공자는 마침내 노나라로 돌아오게 된다. 이때 공자의 나이 68세였다. 일찍이 56세의 나이 때 주유열국을 시작하였으니 13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옛말에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하였으니 13년 만에 돌아오는 공자였으므로 모든 것은 급변하여 있었다. 우선 노나라의 임금이었던 정공이 죽고 그 뒤를 이어 애공이 왕 위에 올라 있었으며, 권신이었던 계환자도 죽고 계강자가 나라를 다스리고 있었다. 아내 올관씨도 별세하였으며, 국력은 기울어 황폐하여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변한 것은 공자 자신이었다.

떠날 때만 해도 56세 때였으므로 공자 스스로 말하였던 지천명(知天命)’의 나이였지만 돌아올 때는 귀에 듣는 대로 모든 것을 순조로이 이해하게 된 이순(耳順)’의 나이를 훌쩍 넘어섰다. 신체는 노쇠하였고, 제자들은 하나씩 둘씩 곁을 떠나고 있었다. 나이에 따른 신체 변화뿐 아니라 공자의 마음 역시 크게 변해 있었다. 13년에 걸친 혹독한 여정의 결과로 공자는 자신의 정치적 이상은 결코 현실적 정치에는 접목시킬 수 없음을 뼈저리게 느낀 것이었다.

공자는 비로소 깨달았던 것이다.

정치적 이상을 통해 국가를 바로잡으려는 외부적 노력보다 학문적 사상을 개발하여 내적 자아를 완성하려는 노력이 훨씬 더 값어치가 있다는 사실을.

고향으로 돌아온 공자가 73세 때 숨을 거둘 때까지 6년간 더 이상 노나라의 정치에 뛰어들지 아니하고 오로지 학문에 정진하였던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오늘날 산둥성 취푸(曲阜)에 있는 공자의 묘에는 다음과 같은 비문이 새겨져 있다.

위대한 완성자, 최고의 성인, 문화를 전파하는 왕

묘비에 새겨진 비문처럼 공자가 위대한 인격의 완성자이며 위대한 사상의 완성자라고 불린 것은 공자가 돌아온 후 죽을 때까지 6년 동안 펼쳐 보인 눈부신 가르침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한 가지 특기할 만한 것은 노나라로 돌아올 때 공자는 구슬 하나를 갖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이 구슬은 아홉 굽이나 구부러진 구멍이 있는 진귀한 물건이었는데, 이 구슬을 어디서 얻었는가는 알려진 바가 없다. 추측컨대 천하를 주유하기 시작할 무렵 위나라에서 얻은 보물인 듯 보여지는데, 줄곧 공자는 이것을 품속에 간직하고 다니고 있어 마치 공자의 부적과 같은 물건이었다.

어찌하여 그 구슬을 그토록 소중하게 갖고 다니시는 겁니까.”

어느 날 이를 궁금히 여긴 자로가 묻자 공자는 대답하였다.

이 구슬에는 아홉 개의 구멍이 있다. 나는 이 구멍에 실을 꿰려 한다.”

공자의 대답은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우리나라 속담처럼 진귀한 구슬이라 할지라도 그 구멍에 실을 꿰어야만 보배가 될 수 있음을 말함으로써 자신이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현명한 군주를 만나야만 정치적 이상을 펼쳐 보일 수 있음을 간접적으로 드러낸 표현이었던 것이다.

공자의 이 표현은 적절한 비유였다.

공자 스스로가 아무리 아홉 개의 구멍을 가진 진귀한 구슬이라 하더라도 이를 실로 꿰는 군자가 나오지 않는다면 쓸모없는 물건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한 구슬 속에 들어 있는 아홉 개의 구멍에 실을 꿸 수 있겠습니까. 이는 불가한 일일 것입니다.”

제자들은 공자의 말을 듣고 모두 머리를 흔들면서 대답하였다. 그러나 공자는 13년 동안 내내 구슬을 품속에 넣고 다니면서 이를 골똘히 궁리하였던 것이다.

실제로 공자는 실을 세워 요리조리 돌려서 구불구불한 구멍 속으로 밀어 넣었지만 도저히 실이 꿰어지지 않았다. 제자들은 한결같이 스승이 쓸데없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곳에서 공자는 그 방법을 터득할 수 있었다.

공자가 진()나라를 지날 때의 일이었으니 가장 고통스러운 시기였는데, 그 무렵 공자는 들판에서 포위되어 양식마저 떨어져 곤경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공자는 강송도 하고 악기를 타며 노래하는 일을 그치지 않아 자로로부터 군자도 곤경에 빠질 때가 있습니까.’하고 노골적인 비난을 받게 되는데, 어느 날 공자는 근처에서 누에를 치기 위해서 뽕을 따는 아낙네를 만나게 되었다. 그 아낙네라면 실을 꿰는 방법을 알고 있을 것 같아 공자가 직접 나서서 아낙네에게 그 비결을 물었다. 그러자 아낙네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조용히 생각하십시오. 생각을 조용히 하십시오.(密爾思之 思之密爾)”

아낙네의 대답은 공자에게 있어 벽력과도 같은 것이었다. 공자는 즉시 강송과 노래를 그치고 아낙네의 가르침대로 혼자서 조용히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그때 마침 공자의 눈앞으로 개미 떼의 모습이 보였다. 먹이를 운반하는 개미들의 모습을 조용히 생각하고, 또 생각을 조용히 하며 지켜보던 공자는 마침내 한 가지 방법을 깨달았다.

공자는 즉시 개미를 잡아다가 개미 허리에 실을 매었다. 그리고 개미를 구슬의 한쪽 구멍에 밀어 넣고 다른 출구 쪽 입구에 꿀을 발라 유인했다. 그러자 실을 매고 있던 개미가 꿀을 찾아 출구로 나옴으로써 실이 꿰어진 것이었다.

공자는 아낙네가 하였던 조용히 생각하십시오.(密爾思之)’라는 말 중 조용한 밀()’에서 꿀밀()’을 떠올렸으며, 개미를 본 순간 꿀을 연상함으로써 마침내 비결을 터득해 낼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유명한 고사는 그 상대가 어떤 신분이든 가리지 않고 스승으로 삼는 공자의 면학정신을 나타내는 장면으로 자주 인용되는 부분인데, 일찍이 세 사람이 길을 가면 그중에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三人行 必有我師)’라고 말하였던 공자의 가르침과 일치하고 있음인 것이다. 그러나 뽕밭의 여인으로부터도 가르침을 얻은 공자의 이 태도보다 더 주목할 것은 구슬을 꿰는 천주(穿珠)의 비결을 통해 언젠가는 자신도 현명한 군주를 만나서 실이 꿰어진 보배가 될 것을 확신하는 공자의 집념을 엿볼 수 있다는 점일 것이다.

그러나 공자의 집념과 열정은 결국 수포로 돌아가게 된다.

자신을 상인을 기다리는 아름다운 옥(美玉)’으로 비유했던 공자는 자신을 팔아 주는 상인을 만나지 못했으며 또한 자신을 아홉 개의 구멍을 가진 진귀한 구슬로 생각하고 있던 공자는 실을 꿰어 주는 군주를 만나지 못한 채 노나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공자는 실이 꿰어진 구슬을 자신의 부적처럼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었는데, 아이로니컬한 것은 13년의 천하주유가 아홉 개의 구멍에 실을 꿰어 주는 군주를 만나기 위한 순회였다면 노나라에 있어 공자의 말년기 6년은 아홉 개의 구멍에 학문과 사상을 실로 꿰는 대발분의 절정기였던 것이다.

공자천주(孔子穿珠).

문자 그대로 공자가 구슬을 꿰다.’라는 뜻의 이 말은 그런 의미에서 정반대의 양면성을 지닌 야누스적 교훈을 우리에게 던지고 있다. 공자는 뽕잎을 따는 여인이 말하였던 조용히 생각하십시오. 생각을 조용히 하십시오.’라는 가르침에서 개미를 통해 실을 꿰는 비결뿐 아니라 말년기의 삶을 정리할 수 있었으니 묘비에 새겨진 위대한 완성자란 칭송은 공자의 그런 통찰력을 기리고 있음인 것이다.

공자가 노나라로 돌아오자마자 애공은 공자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다.

정치란 과연 무엇입니까.”

이에 공자는 다음과 같이 짤막하게 대답하였다.

정치는 신하를 선임(選任)하는데 달려있습니다.”

공자의 대답은 인사(人事)가 만사(萬事)’라는 속설과 일치되는 내용이지만 현명한 사람을 널리 구하여 등용하기보다는 자기 비위에 맞는 주위 사람들을 등용하기 쉬운 정치의 속성을 바로잡으려는 충정에서 나온 대답이었을 것이다.

계강자가 공자에게 같은 질문을 하였을 때도 공자는 마찬가지로 짤막하게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을 뿐이다.

곧은 사람을 천거하여 그릇된 사람 위에 놓으면 그릇된 사람도 곧아집니다.”

많은 사람들은 고향에 돌아오자마자 행한 공자의 두 가지 대답이 자신의 위대한 경륜을 몰라준 노나라의 위정자에 대한 가시 돋친 대답이라고 설명하고 있지만 이미 고향에 돌아왔을 때부터 정치와는 절연 선고를 하였던 공자였으므로 공자 자신도 더 이상 벼슬에는 관심이 없었을 것이다.

또한 노나라의 조정에서도 비록 폐백을 갖추어 공자를 초빙하였지만 그에게 알맞은 벼슬을 주려하지 않았다. 설혹 정치에 관한 미련이 남아 있다고 하더라도 무능한 애공과 한층 더 무도해진 권신 계강자의 탐욕을 목격하고는 노나라의 정치 환경이야말로 자신의 이상을 실천해 볼 곳이 못 된다는 것을 공자는 뼈저리게 느꼈을 것이다.

사마천의 사기는 이러한 상황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노나라에서는 공자를 끝내 등용해 쓰지 아니하였다. 공자 또한 벼슬 구하는 것을 단념하고 있었다.”

특히 공자는 계강자의 탐욕과 부정에 대해서 크게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공자는 계강자의 아버지였던 계환자가 제나라로부터 보내온 예기들을 물리치지 않고 이에 탐닉하자 여자를 앞세워 나라를 망치려는 계략이라네. 나라의 기둥들이 저 꼴이라면 남은 것은 오직 파멸일 뿐, 모름지기 군자는 멀리 도망가서 한가로이 여생을 보낼 뿐이라고 노래 부르며 주유천하에 나섰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아들 계강자의 부정부패는 계환자를 훨씬 능가하는 것이었다. 계강자는 노나라 제일의 재상가였으면서도 권력을 이용하여 부를 축적하려 하였다.

그 무렵 노나라의 전세(田稅)는 구부(丘賦)를 따르고 있었다.

구부는 정나라의 재상 자산(子産)이 만든 세금 제도로 논밭 일구마다 전세로 군마 한 필과 소 세 마리나 그에 해당하는 곡식을 징수하는 제도였다.

그러나 이것으로도 성이 차지 않은 계강자는 새로운 세법으로 개정하여 일구마다 전세를 따로 받고 또 말 한 필과 소 세 마리를 겹쳐 받으려고 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기존의 전부(田賦)이외에 세금을 더 중과하는 악법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계강자는 이 악법을 시행하기 전 공자에게 사람을 보내어 의견을 물어보도록 하였다. 이는 공자로부터 개정되는 세법을 사전인증 받았음을 널리 알림으로써 백성들의 비난을 피해 보려는 교활한 수법이었다.

계강자는 공자의 제자인 염유를 보내어 의견을 물어보도록 하였다. 그러나 공자는 나는 모른다.’라고만 대답할 뿐이었다. 세 번째가 되었을 때 계강자는 몸소 공자를 찾아가 다음과 같이 묻는다.

당신은 국로(國老)로서 당신의 의견을 들어 정치를 행하려 하는데, 어찌하여 좋은 의견을 말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공자는 여전히 나는 모른다.’고만 대답할 뿐이었다. 자신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계강자의 교활한 속셈을 꿰뚫어 본 이상 굳이 입을 열어 대답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은 때문이었다. 계강자가 돌아간 후 공자는 자신의 제자이자 계강자의 가재인 염유를 불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가 너에게 말하는 것은 전혀 개인적인 사견이다.”

어디까지나 사적인 의견임을 전제한 후 공자는 다시 말을 이었다.

군자의 행동은 예법에 들어맞아야 하고, 베푸는 것은 되도록 후하게 하며, 일은 알맞은 방법으로 하며, 거두어들이는 것은 되도록 가벼이 하여야 한다. 그렇다면 구부로도 충분한 것이다. 만약 예법을 헤아리지 않고 끝없이 탐욕스럽다면 비록 전부를 모두 거두어들인다고 하더라도 또 부족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계강자가 법도대로 행한다고 하자면 주공의 법전이 있으니 그대로 따르면 될 것인데, 만약 구차히 행하고자 한다면 나를 무엇 때문에 찾아오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계강자는 다음 해인 기원전 480년 공자의 나이 69세 때부터 새로운 세법을 시행할 것을 결심한다. 이에 공자는 계강자에 대한 비난보다 그 밑에서 벼슬을 하고 있는 제자 염유에게 분노로써 표현하고 있는데, 논어에는 그러한 장면이 나오고 있다.

계씨는 주공보다 부유했는데, 염유는 그를 위해서 세금을 더 거두어들임으로써 그의 부를 더해 주었다.

이에 공자가 말씀하셨다.

그는 이제 내 제자가 아니다. 너희들은 이제 전고(戰鼓)를 울리며 그를 공격해도 좋다.’”

공자가 계강자를 정치가가 아니라 더러운 도둑으로 보고 있음은 논어의 안회편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장면을 통해서도 잘 알 수 있음이다.

계강자가 나라 안에 도적이 많은 것을 근심하고 공자에게 그 대책을 물었다. 이에 공자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셨다.

진실로 당신 자신이 탐욕하지 않다면 비록 상을 준다고 해도 백성들은 도적질을 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원래 계강자는 계환자의 아들이었으나 정실의 소생이 아니었다. 첩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권력을 세습받기 위해서 전처의 아들을 죽이고 후계자가 된 부정한 인물이었다. 그보다도 공자를 분노케 하였던 것은 계강자가 국왕인 애공보다 더 많은 부를 축적한 도적이라는 점이었다. 그러므로 큰 나라 도둑인 계강자가 도둑이 들끓어 그 대책을 묻자 솔선수범해야 한다고 공자는 따끔하게 일침을 가했던 것이다.

논어에는 이러한 계강자와 공자와의 대화가 여러 군데 실려 있는데, 대부분 계강자의 부정부패를 꾸짖는 내용이다. 그 장면들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계강자가 공자에게 정치에 대해서 물었다. 공자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정치(政治)의 정은 올바르다()의 뜻이니 당신께서 올바르게 솔선수범한다면 그 누가 감히 부정할 수 있겠습니까.’”

계강자가 정치에 대해서 공자에게 물었다.

만약 무도한 자를 죽임으로써 도를 지키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면 그를 죽여도 옳겠습니까.’

이에 공자는 대답하였다.

당신이 정치를 하는데 있어 어찌 살인을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당신이 선을 먼저 행하려 한다면 백성들도 선하게 되는 것입니다. 군사의 덕이 바람과 같다면 소인의 덕은 풀과 같은 것입니다. 풀 위에 바람이 불면 반드시 바람에 쏠리게 마련입니다(君子之德風 小人之德草 草上之風必偃).’”

공자는 이처럼 계강자를 도적으로 보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공자와 노자와의 사상이 물과 기름처럼 서로 유리(遊離)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느 부분에서는 일치되고 있는데, 일찍이 노자도 세도 부리는 도둑’, 즉 나라 도둑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경책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알 수가 있다.

들에 있는 논밭은 거칠어지고 여염집 광은 비어 있는데도 비단옷 차려입고, 날이 선 칼을 차고, 맛난 음식을 싫증 내며, 재물이 가득하면 이를 일러 세도 부리는 도둑이라 한다.”

노자의 말처럼 공자도 계강자를 세도 부리는 도둑으로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세도 부리는 나라 도둑일수록 입으로는 백성을 위한다는 공치사를 자주하는 법. 계강자는 다시 공자에게 묻는다.

백성들로 하여금 공경스럽고 충성되며 부지런히 할 수 있게 하려면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이에 공자는 대답한다.

백성들을 장중하게 대하면 자연 공경스러워지고, 효도와 자애로써 대하면 자연 충성스러워지고 선인들을 등용하고 무능한 사람을 가르쳐주면 자연 부지런히 힘쓰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공자는 계강자의 질문에 원칙적인 대답만 할 뿐 직접 정치에는 관심조차 없었다. 그러나 계강자가 공자에게 당신은 국로로서 어찌 의견을 말하지 않습니까.’하고 비난을 받을 정도로 나라의 원로(元老) 노릇은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비록 학문에 정진하고, 제자들을 가르치는 데 전념하고 있었지만 노나라의 중요한 국사에는 관여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논어의 계씨편에는 이에 관한 기록이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이때는 기원전 482년 공자의 나이 70세 때의 일이었다.

어느 날 계강자가 군사를 일으켜 전유()를 정벌하려 하였다. 전유는 오늘날 산둥성 페이현(費縣) 서북쪽에 있는 나라로 대대로 노나라의 속령이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계강자가 이를 정벌하려 하였던 것이다. 당황해진 염유와 자로가 공자를 찾아뵙고 아뢰었다.

계씨가 전유를 공격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 말을 들은 공자가 말하였다.

(:염유의 이름), 그것은 너의 잘못이 아니겠느냐. 전유는 옛날 선왕께서 동몽산의 제주로 삼고 그곳에 봉한 나라이며, 또한 노나라의 영역 안에 있는 나라이다. 노나라를 떠받드는 신하의 나라인데 어찌하여 그를 친다는 것이냐.”

공자의 말은 사실이었다.

동몽산(東蒙山)’은 지금의 산둥성 멍인현(蒙陰縣) 남쪽에 있는 산으로 다른 이름으로는 몽산이라고도 불린다.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내는 신령한 산으로 알려져 있는데, 선대로부터 노나라와 군신의 예를 갖춘 속령이었던 것이다. 공자의 질책에 염유가 변명하여 대답하였다.

계씨가 치려는 것이지 저희 두 사람은 모두 원치 않은 일입니다.”

그러자 공자가 대답하였다.

구야, 옛 사관이었던 주임(周任)은 이렇게 말하였다.‘자기 힘을 다하여 벼슬자리에 나아가되 만약 감당할 수 없게 되면 벼슬은 그만둔다.’는 것이다. 위태로운데도 붙잡아두지 못하고 넘어지려 하는데도 부축해 주지 못한다면 그런 신하는 어디에다 쓰겠느냐. 또한 너의 말도 잘못이다. 범과 들소가 우리 밖으로 나가거나 궤 속에 넣어둔 신귀(神龜)와 구슬이 깨어졌다면 그것은 누구의 잘못이겠느냐.”

공자의 질책은 평소에도 언짢게 생각하고 있던 염유에 대한 불만에서 비롯된다. 계강자를 도와 가렴주구에 나선 염유의 변명이 못마땅해서 신하된 도리로 계씨를 말리지 못한 불찰을 준엄하게 꾸짖고 있음인 것이다.

이는 공자가 평소에 염유에 대해 갖고 있던 선입견에서 비롯된 생각이었을 것이다.

공자도 염유가 뛰어난 정치적 재능을 갖고 있음을 인정하고 있었다. 이는 논어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보면 분명히 알 수 있다.

어느 날 계강자가 공자에게 묻는다.

염유는 정치에 종사케 할 만한 인물입니까.’

이에 공자는 대답한다.

염유는 재간이 많으니 정치에 종사하는 게 무슨 문제이겠습니까.’”

이처럼 공자는 염유가 정치적 재능은 갖고 있지만 학문에 정진하는 수법제자로서는 부적합함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것은 염유도 마찬가지였었다. 염유 자신도 스승 공자를 귀신을 동원해서 따진다 해도 결함을 찾을 수 없는 완전한 성인이라고 존경하면서도 자신이 유가의도를 실천하는 제자로서는 능력이 부족함을 스스로 인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염유가 공자에게 저는 선생님의 도를 좋아하지 않는 것은 아니나 힘이 모자랍니다.’라고 고백한 내용을 봐서도 알수 있는 것이다.

염유로부터 그런 고백을 듣자 공자는 염유를 다음과 같이 꾸짖고 있다.

힘이 모자라는 자는 중도에 그만두게 되어 있는데, 지금 자네는 스스로 움츠리고 있을 뿐이네.(力不足者 中道而廢 今女畵)”

공자의 대답은 준엄한 진리인 것이다.

최선을 다해 도를 향해 가는 구도자는 결코 멈추지 않는다. 마치 부처의 초기 경전에 나오는 숫타니파타속의 시경처럼 진리의 길을 가는 사람은 개 짖는 소리에도 멈추지 않는 나그네처럼 밤길을 혼자서 쉬지 않고 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도자는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흙탕물에 더럽혀지지 않는 연꽃과 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고 있는 존재인 것이다.

그러므로 구도자는 그 길을 가다가 쓰러질지언정 스스로 움츠려 되돌아보지는 않는 것이다. 따라서 염유가 힘이 모자랍니다.(力不足也)’라고 말하였을 때 힘이 모자란 것이 아니라 스스로 움츠리고 있다.’고 질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공자의 꾸짖음에도 불구하고 염유는 다시 변명하여 말하였다.

지금 전유는 성이 견고하고 또 계씨의 도성(都城)인 비읍(費邑)에 가까이 있습니다. 지금 빼앗지 않으면 반드시 후세에 자손들의 걱정거리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간곡히 말해도 자신의 말뜻을 전혀 헤아리지 못하고 여전히 변명에 몰두하고 있는 염유의 태도를 지켜본 후 공자는 착잡한 표정으로 다시 말을 이었다.

구야, 군자는 그가 바라는 것은 버려둔 채 말하지 아니하고, 또 그것을 변호하려드는 것을 미워한다. 내가 듣건대 국가를 다스리는 사람은 백성이 많고 적음을 걱정하지 않고 고르지 못함을 걱정하며, 가난함을 걱정하지 않고 불안함을 걱정한다고 하였다. 고르면 가난함이 없어지고, 화목하면 백성들의 숫자가 적지 않게 되고, 평안하면 기울어지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먼데 사람들이 복종하지 않으면 문화적인 덕을 닦아서 그들이 따라오도록 할 것이며, 따라오면 이들을 편안하게 해주는 것이다. 지금 유(:자로의 이름)와 구는 계씨를 돕고 있는데, 먼데 사람들이 복종하여 따라오도록 하지 못하였고, 나라의 민심이 이탈되어 서로 떨어져 나가게 되었는데도 이를 막고 지키지 못하고 있다. 그러고도 한 나라 안에서 전쟁을 일으킬 획책이나 하고 있으니 나는 계씨의 걱정이 전유에 있지 아니하고 바로 제 집안에 있을 것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공자가 이처럼 강경하게 제자인 염유를 꾸짖고 있는 것은 염유가 그럴듯한 궤변으로 신하로서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모두 자신의 상관인 계강자의 탓으로 돌리는 변명을 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평소에 공자는 말만 번지르르한 사람을 싫어하고 있었다. 특히 변명에 대해서는 극단적인 혐오감을 갖고 있었는데, 논어에 보면 자로가 나이어린 자고(子羔)를 정치에 나아가게 하자 공자는 아직 배움에 익숙지 못한 자고를 정치에 나아가게 한다고 자로를 심하게 꾸짖은 적이 있었다. 이때 자로가 백성을 다스리고 국가에 사직을 돌보는 것도 배움이 아닙니까.’하고 변명을 하자 공자는 자로를 책망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이 때문에 말재주꾼을 싫어한다.”

이와 같이 변명을 싫어한 공자의 극언은 변명이 교묘한 회피에 불가하며 자신의 게으름을 감추는 교묘한 말장난에 지나지 않음을 경책하는 가르침에서 비롯된 것이다.

20세기의 성자 슈바이처도 변명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경계하고 있다.

타인이나 사실에 변명을 찾지 말고 모든 사건에 있어서 자기 자신의 문제로 환원하여 사물의 궁극적인 원인을 자기 자신에게서 찾아야 한다.”

슈바이처의 말처럼 변명은 결국 자기 자신에게서 비롯된 본질의 문제를 남에게 전가함으로써 책임을 회피하는 거짓인 것이다.

따라서 공자는 전유를 공격하려는 계강자의 잘못을 그것은 너의 잘못이 아니겠느냐.’하고 일차로 꾸짖고 다시 염유가 그것은 계씨가 치르는 것이지 저희 두 사람은 원치 않은 일입니다.’라고 연이어 변명하자 너의 말은 분명히 잘못이다.’라는 말로 꾸짖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공자의 극언에도 염유는 다시 변명한다.‘지금 공격하여 빼앗지 않으면 반드시 후세에 화근이 될 것입니다.’

그러자 공자는 군자는 그가 바라는 것은 버려둔 채 말하지 아니하고 또 그것을 변명하려는 것을 미워한다.(君子疾夫舍曰欲之而必爲之辭)’라고 질책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공자는 말을 앞세우고 말만 번지르르한 사람을 싫어하고 있었다. 말재주로 다른 사람에게 아첨하는 것은 사리를 얻기 위해 자신을 속이는 행위이며, 본심의 덕을 해치는 위선이기 때문이었다. 아첨꾼과 말만 잘하는 말재주꾼에 대해서 공자는 논어의 곳곳에서 다음과 같이 경책하고 있다.

말을 좋게 하고 얼굴빛을 곱게 하는 사람은 어진 이가 적다.(巧言令色鮮矣仁)”

공자의 이 말에서 발라맞추는 말과 알랑거리는 낯빛이라는 뜻의 교언영색이란 고사성어가 나온 것. 이는 남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아첨하는 말과 보기 좋게 꾸미는 표정을 말하는 것이다.

또 공자는 말 잘하는 사람보다 어눌하나 말에 진실이 깃든 사람을 좋아하여 의지가 굳고 꾸밈이 없고 말수가 적은 사람만이 인()에 가깝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논어의 공야장편에는 이러한 공자의 사상을 나타내 보이는 중요한 장면이 나오고 있다.

공자의 제자 중에 중궁(仲弓)이란 사람이 있었다. 노나라 사람으로 공자보다 29세나 아래였는데, 일찍이 공자 자신이 염옹(:중궁의 이름)은 임금 노릇을 하게 할만하다.’라고 칭찬할 수 있을 만큼 덕망이 높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중궁은 말주변이 없었다. 따라서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곤 하였다. ‘염옹은 어질지만 말재주가 없습니다.’ 이에 대해 공자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도대체 말재주를 어디에 쓰겠는가.”

공자는 중궁을 다음과 같이 감싸고 있다.

약삭빠른 구변으로 남의 말을 막아서 자주 남에게 미움만 받을 뿐이니, 그가 어진지는 모르겠으나 말재주는 어디에다 쓰겠는가.”

그러고 나서 공자는 좌구명(左丘明)의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말을 잘하고 얼굴빛을 좋게 하고 공손을 지나치게 함을 옛날 좌구명이 부끄럽게 여겼는데, 나 또한 이를 부끄러워하노라. 원망을 감추고 그 사람과 사귀는 것을 좌구명이 부끄러워하였는데, 나또한 이를 부끄럽게 여기노라(巧言令色足恭 左丘明恥之 丘亦恥之 匿怨而友其人 左丘明恥之 丘亦恥之).”

좌구명은 공자와 같은 무렵에 살던 노나라의 대부였다. 공자의 선배로서 공자는 평소에 그를 마음속 깊이 존경하고 있었다. 말년엔 눈이 멀어 장님이 된 좌구명은 이로 인해 맹좌(盲左)라고도 불리었다. 좌구명이 말하였던 공손을 지나치게 한다.’는 주공(足恭)에는 두 가지의 해석이 있다. 하나는 그냥 추상적으로 지나치게 공손함을 말하는 것으로 이때는 주공이라 발음하고, 또 하나는 다리의 움직임을 지나치게 겸손하게 하는 모습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때는 족공으로 발음하는데, 이 두 가지의 해석 모두 겸손이란 미덕을 넘어선 허위인 것이다.

겸손의 본질은 내면적이며 공손한 마음에 있는 것이지, 외면적으로 겸손을 위장하면 그것은 차라리 교만에 가까운 것이다.

과공비례(過恭非禮).

지나치게 공손하면 예에 어긋난다.’는 뜻과 일맥상통하는 말. 공자는 지나치게 겸손함을 아첨으로 보았으며 상대방이 사귀기 싫은 저열한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싫어하는 원망의 감정을 감추고 그 사람과 사귀는 것은 위선이며 자기기만임을 분명하게 못 박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변명과 번지르르한 말만 앞세우는 말재주꾼을 혐오하는 공자는 특히 재여(宰予)에게 보인 공자의 태도를 보면 더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재여의 자는 자아(子我)로 공자의 제자 중 가장 말을 잘하는 사람으로 손꼽히고 있다. 그러나 이로 인해 공자는 재여가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었음에도 재여를 게으르고 말이나 화려하게 꾸미는 궤변론자로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다. 논어에도 이러한 재여를 꾸짖는 장면이 여러 번 나오고 있는데, 이들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애공이 재여에게 사()에 대해서 묻자 재여가 대답하였다.

하나라에서는 소나무를 심고, 은나라 사람들은 잣나무를 심었고, 주나라 사람들은 밤나무()를 심었습니다.’

어째서 밤나무를 심었을까.’

애공이 묻자 재여가 대답하였다.

백성들로 하여금 두려워 떨게() 하려는 뜻이겠지요.’

이 말을 듣고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다된 일을 얘기하지 말고, 끝난 일을 간하지 말고, 지난 일을 탓하지 말아야 한다.’”

애공이 땅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에 무슨 나무를 심는 게 좋겠는가 하고 물었을 때 재여는 주나라에서 밤나무를 심었던 이유를 설명하면서 백성들이 무서움에 떨도록 위압정치를 펴야 한다는 논리를 교묘한 변술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즉 밤나무()’자와 두려워 떤다는 뜻의 ()’자의 음이 같은 것을 이용한 교묘한 궤변으로 애공의 독재를 은근히 부추기고 있음인 것이다. 결국 재치 있는 수사는 되지만 독재자에게 아첨하는 교언이었던 것이었다.

논어의 공야장편에는 이러한 말재주꾼 재여에 대한 비난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 過恭非禮(과공비례)

過恭非禮(지나칠 과/공손할 공/아닐 비/예도 례)’, ‘지나치게 공손한 것은 예의가 아니다.’라는 말이니, 정도를 넘어선 恭遜(공손)은 오히려 남에게 폐가 됨을 뜻한다.

의 본래 뜻은 지나가다였으나 점차 지나치다’‘허물의 뜻으로 類推(유추)되었다. 用例(용례)로는 過渡期(과도기), 過讚(과찬), 過失(과실) 등이 있다.

은 의미 부분인 과 발음 부호에 해당하는 (함께 공)’을 합하여 공손하다는 뜻이 되었는데, ‘이 의미 요소로 쓰인 것으로 보아 공손하기 위해서는 마음이 우선해야 함을 알 수 있다. 用例에는 恭儉(공검)’ ‘恭敬(공경)’ ‘恭遜(공손)’ ‘恭容(공용)’ 등이 있다.

字源(자원)에 대해서는 새가 날개를 편 모양’, 새가 날기 위해서는 양 날개를 서로 등져야 하기 때문에 서로 어긋나다가 원래의 뜻이라는 등의 異說(이설)이 분분하다. ‘아니다’‘그르다’‘어기다등과 같은 否定的(부정적)인 뜻의 類推는 후자의 설과 관련이 깊다. ‘非難(비난)’ ‘非賣品(비매품)’ ‘非凡(비범)’ ‘今是昨非(금시작비)’ 등에 쓰인다.

는 본래 (보일 시)’가 없는 상태인 ()로 쓰였다. ‘는 옥을 담은 그릇이냐, 술잔이냐라는 異說(이설)이 있으나 신 앞에 바치는 제물이라는 점에는 의견이 일치한다. 제사에는 여러 예법과 예의를 지켜야 했으니, 후에 가 보태졌고, ‘예의’‘예절’‘예법등의 뜻이 類推(유추)되었다. ‘禮法(예법)’ ‘禮遇(예우)’ ‘無禮(무례)’ 등에 쓰인다.

분명 나를 낮추고 남을 높이는 謙讓(겸양)은 미덕이지만 지나치면 醜惡(추악)함으로 변한다. 일찍이 공자는 공교한 언변(巧言), 꾸민 얼굴빛(令色), 지나친 공손(足恭), 좌구명은 이것들을 부끄럽게 여겼는데, 나 또한 이를 부끄럽게 여긴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足恭은 두 가지 해석이 있다. 하나는 다리의 움직임을 지나치게 겸손하게 하는 作態(작태)’의 형용이요, 하나는 그냥 추상적으로 지나치게 공손함을 말한다. 전자의 경우는 족공으로, 후자의 경우는 주공이라 발음한다.

겉으로는 겸손하고 공손하게 보이는 사람도 내면은 自慢(자만)無視(무시)로 가득 차 있을 수 있다. 어디 그뿐이랴. 종종 가슴속에는 口蜜腹劍(구밀복검:입으로는 달콤한 말을 토해내면서 가슴속에는 비수를 품음)’凶計(흉계)를 품고 있는 경우도 있다.

예의를 갖추면 상대방이 사람으로서 인정받고 인간 대접을 받는다는 信賴感(신뢰감)을 갖는다. 그러나 지나치게 공손하거나 깍듯한 예절은 오히려 거북스럽다. 각종 放送(방송) 出演者(출연자)들의 무분별한 敬語(경어) 표현은 거북하다 못해 민망하다. ‘우리나라’ ‘저희 나라는 잘 알려진 사례임에도 계속된다. 이제는 過剩(과잉) 존대 표현이 습관화되면서 본인에게 경어를 쓰는 ()를 범하고 있다. 이것은 過恭非禮次元(차원)이 아니라 無禮(무례)라는 표현이 적합할 것이다. 공자는 巧言, 令色, 過恭을 부도덕한 행위로 정의하여 비판하였다.

이제는 이런 유형의 사람들조차 그리운 세상이다. 人面獸心(인면수심)凶暴(흉포)한 인간들의 跋扈(발호) 소식이 들리지 않을 날은 언제쯤일까.

어느 날 재여가 낮잠을 자고 있었다. 이를 본 공자가 말씀하셨다.

썩은 나무에는 조각할 수 없고 거름흙으로 쌓은 담장은 흙손으로 다듬을 수 없다(朽木不可雕也,糞土之牆不可 也). 그러니 내가 재여에게 뭐라고 꾸짖을 수 있겠느냐.”

이 대목은 논어 전편을 통해서 가장 신랄하고 준엄한 꾸짖음으로 낮잠 정도 잔 것으로 너무 심하게 제자를 몰아세우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해 볼 수 있지만 평소에는 말을 잘하면서도 행동은 못 미치며, 자신의 말재주만 믿고 게으름에 빠져 있는 제자를 질타하는 스승의 간절한 충정도 엿보게 하는 장면인 것이다.

그러고 나서 공자는 또 이렇게 말하였다.

전에 나는 남을 대함에 있어 그의 말을 듣고 그의 행실을 믿었지만 이제 나는 남을 대함에 있어 그의 말을 듣고서도 그의 행실을 살피게 되었는데, 재여로 인해 이렇게 태도가 바뀌게 된 것이다.”

언행일치(言行一致).

말과 행동이 서로 같음을 비로소 재여로 인해 믿지 않게 되었다는 공자의 선언은 공자가 얼마나 말을 앞세우는 말재주꾼을 싫어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산증거인 것이다.

이는 훗날 맹자가 재여에 대해 그들의 지혜가 성인을 알아보기에 충분하였고, 그들이 좋아하는 것에만 아첨하기에까지는 이르지 아니하였다.’라고 평가하고 재여가 스승 공자를 내가 선생님에 대해서 살펴본 것은 요임금, 순임금보다도 더 현명하시다는 것이다.’라고 존경하였던 예를 들어 재여를 공자의 제자 중 가장 뛰어난 인물로 평가했던 것과는 달리 공자는 유독 재여에 대해서만은 가장 엄격한 꾸중을 퍼붓고 있었던 것이다.

논어의 양화 편에는 이러한 재여와 공자 간의 열띤 대화의 한 장면이 나오고 있다. 이 장면을 보아도 제자들에게 항상 너그럽고 관대한 공자가 유독 재여에 대해서만큼은 냉정하였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어느 날 재여가 공자에게 여쭈었다.

스승님, 3년의 상은 기한이 너무 오래됩니다. 군자가 3년의 예를 지키지 못하면 예는 반드시 무너질 것이고, 3년 동안이나 음악을 못 하면 음악이 반드시 붕괴될 것입니다.”

공자에게 예에 대해서 따지는 재여의 태도는 거인 골리앗에게 감히 돌팔매질로 도전하는 양치기 소년 다윗을 연상시킨다. 왜냐하면 공자는 어려서부터 예를 갖추는 장난을 하며 성장할 만큼 예를 숭상하는 유의 신분 출신이었기 때문이었다.

사기에도 공자는 소싯적부터 놀이를 할 때는 언제나 제기를 벌여놓고 예를 갖추는 장난을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듯이 공자에 있어 예는 모든 인간의 규범과 행동의 기준이 되고 있었던 것이다.

살아 계시면 예로써 섬겨 드리고, 돌아가시면 예로써 장사지내고, 예로써 제사 지내드려야 한다.”

공자의 이 말은 예를 배우지 않으면 설 곳이 없게 된다(不學禮 無以立).’라고 자신의 아들 공리에게 가르쳐준 내용처럼 예를 인간행동의 절대가치로 본 공자에게 감히 재여가 정면 도전하고 있음인 것이다.

재여의 말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현란한 수사법의 제1인자답게 재여는 화려한 비유로 다음과 같이 말을 잇고 있는 것이다.

이는 이미 묵은 곡식이 없어지고 햇곡식이 나며, 불씨를 일으키기 위해서 수()나무를 비벼 뚫는데도 나무 종류가 완전히 바뀌는 기간이니 복상도 3년 상으로 계속할 것이 아니라 1년으로 끝낸다 하더라도 충분하리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재여의 말을 모두 듣고 나서 공자가 물었다.

그러면 너에게 묻겠다. 너는 일년만에 복상을 끝내고 쌀밥을 먹고, 비단옷을 입는 것이 네 마음에 편하겠느냐.”

스승의 질문에 재여는 망설이지 않고 단숨에 대답했다.

편하겠습니다.”

감히 공자 앞에서 편하다.’라고 대답한 재여를 통해 그 무렵 공자를 스승으로 하는 유가들이 얼마나 주위 사람들로부터 허례허식만을 숭상하는 비생산적인 형식주의자로 손가락질당하고 있었던가를 미뤄 짐작할 수 있음인 것이다.

실제로 훗날 묵자(墨子)’는 공자를 비롯한 유가들을 다음과 같이 공격하고 있을 정도였다.

유가들은 예와 음악을 번거로이 꾸미어 사람들을 어지럽히고, 오랜 기간 동안 상()을 입고 거짓 슬퍼함으로써 부모를 속인다. 운명을 믿고 가난에 빠져 있으면서도 고상하게 잘난 체하고, 근본을 어기고 할 일을 버리고서 편안하고 게으르게 지낸다. 먹고 마시기를 탓하면서 일하는 데는 태만히 하고, 헐벗고 굶주린 것에 빠지고 얼어 죽고 굶어 죽는 위협에 놓여도 이를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 이것은 마치 거지와도 같으니, 두더지처럼 숨어서 숫양처럼 찾다가 발견되면 멧돼지처럼 튀어나온다. 군자들이 이러한 행동을 비웃으면 성을 벌컥 내면서 시원치 않은 자들이 어찌 훌륭한 유를 알아보겠는가.’하고 무시한다. 그들은 여름에는 곡식을 구걸하다가 오곡이 다 거두어지면 대갓집 초상들을 찾아다니는데, 자식과 식구들을 모두 거느리고 가서 실컷 먹고 마신다. 몇 집 초상만을 치르고 나면 충분히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남의 집 재물을 근거로 하여 충분히 살고 남들에 의지하여 부를 쌓는다. 부잣집에 초상이 나면 곧 크게 기뻐하면서 이것이야말로 먹고 입는 꼬투리다.’라고 말한다.”

물론 묵자의 공격은 후대의 일이었지만 공자 당대에도 이러한 비난이 끊이지 않고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1년으로 복상을 끝내자는 재여의 제안은 지나치게 허례에 빠지기보다는 현실과 타협하자는 절충안이었던 것이다.

재여가 서슴지 않고 편합니다.’라고 반발하자 공자는 분노하며 말한다.

네가 편하거든 그렇게 하라. 원래 군자는 상중에는 맛있는 걸 먹어도 달지 않고, 음악을 들어도 즐겁지 않고, 편히 지내도 편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너는 그렇게 해도 마음이 편하다니 그렇게 하도록 하라.”

마침내 재여가 나가자 공자는 한탄하여 말하였다.

어질지 못하구나, 재여는. 자식은 3년이 되어야 부모의 품을 벗어난다. 따라서 3년의 상은 천하에 통용되는 상례인 것이다. 재여도 자기 부모로부터 3년 동안은 품속에서 사랑을 받았을 터인데.”

이상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공자는 변명이나 말을 번지르르하게 잘하는 말재주꾼을 몹시 싫어함을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공자의 언변에 대해서 사기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공자가 향리에 있을 때에는 부형장로(父兄長老)들에게 너무나 공손했던 나머지 말을 잘 못하는 바보처럼 보였으나 종묘나 조정에 있을 때에는 달변으로 사리를 따지고 조목조목 시비를 가렸다. 그러나 결코 함부로 말하는 법은 없었다.”

말을 함부로 하지 않고 아꼈던 공자. 너무나 공손한 나머지 말을 잘 못하는 바보로 보였던 공자. 이것이 바로 공자가 지닌 위대한 덕목인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이처럼 명분 없는 전쟁에는 극구 반대하던 공자였지만 부정한 방법으로 권력을 찬탈한 불법자에게는 가차 없이 전쟁을 통해 응징하려 하였다. 그 어떤 폭력도 반대하던 공자로서는 매우 이례적인 일로 논어에 나오는 이 기록은 공자가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국가의 원로로서 정치에 관여하였던 마지막 장면인 것이다.

이때가 기원전 481년 노나라의 애공 14, 공자의 나이 71세 때의 일이었으니 죽기 불과 2년 전의 일이었다.

이 무렵 이웃 제나라에서는 정변이 일어났다.

진항(陳恒)이라는 권신이 임금이었던 간공(簡公)을 시해하는 사건이 일어났던 것이다. 진항은 진성자(陳成子), 또는 전상(田常)이라고도 불리던 제나라의 대부였는데, 그는 암암리에 사병을 훈련시켜 왕위를 찬탈하고자 하였다.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진항은 어느 날 간공을 시해하고는 백성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 자연서(子淵棲)란 선비를 찾아간다.

자연서는 제나라의 백성과 관리들이 존경해 마지않던 학식이 높던 군자였는데, 진항은 기골이 장대하고 무섭게 생긴 중무장한 병사들을 대동하고 자연서에게 찾아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가 왕을 죽인 것은 썩은 사직을 바로잡고 나라를 부흥시키려는 일념이었소. 그러니 나를 지지하여 주시오.” 이에 자연서는 동요하지 않고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당신은 나에게 무엇을 바라는가. 나를 지혜롭다고 생각하는가. 신하가 그 임금을 시해하는 것을 지혜로운 사람은 지지하지 않는다. 또 당신은 나를 어질다고 생각하는가. 자신의 이익을 챙기기 위해서 그 임금을 배반하는 것을 어진 사람은 싫어한다. 당신은 내가 용감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가. 무력으로 나를 위협하고 겁주어서 내가 두려워 당신에게 굴복한다면 나는 용감한 자가 아니다. 나에게 지인용(智仁勇)의 세 가지 덕목이 없다면 내가 당신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반면에 내가 이 세 가지의 덕목을 가졌다면 내가 어찌 당신을 따를 수가 있겠는가.”

이에 진항은 할 말을 잃고 물러서 돌아올 수밖에 없었는데, 이 소문을 들은 공자도 역시 몹시 분개하였다. 지인용의 덕이라면 하늘 아래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공자가 아니겠는가.

논어의 헌문 편에는 이 소식을 듣고 보인 공자의 결연한 태도가 다음과 같이 나오고 있다.

어느 날 공자는 목욕하고 입조하여 애공에게 고하였다.

진항이 그의 임금을 죽였으니 청컨대 그를 토벌하여 주십시오.’

그러나 이 말을 들은 애공은 이렇게 대답할 뿐이었다.

나에게 고하지 말고 세 집안 사람들에게 가서 말하여라.’

애공이 이처럼 미루자 공자는 실망하여 말하였다.

나는 대부의 말석에 있던 몸이라 감히 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임금은 세 집안 사람들에게 말하라고만 하셨다.’

임금의 어명이었으므로 공자는 어쩔 수 없이 삼환씨를 찾아가 똑같이 말하였다.

진항이 그의 임금을 죽였으니 이는 무도한 짓입니다. 청컨대 진항을 토벌하여 주십시오.’

그러나 공자의 말을 들은 세 집안 사람들도 선뜻 나서려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제나라는 노나라보다 강국이었으므로 함부로 공격할 수 없는 입장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공자는 다시 말하였다.

나는 대부의 말석에 있는 몸이니 감히 고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以吾從大夫之後不敢不告也).’”

공자가 보인 마지막 정치적 참여라고 할 수 있는 이 장면은 좌전(左傳)’에도 실려 있다. 좌전은 이름이 가리키듯 공자가 존경하였던 좌구명이 공자의 춘추를 해설한 책으로 따라서 좌씨춘추라고도 불리는 고전이다. 독립된 역사적 이야기와 문장의 교묘함과 인물묘사의 정확함으로 특히 고전문학의 규범이라는 평을 듣고 있는 명저인데, 이 책 속에는 공자의 행동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애공 146월 갑오에 제나라의 진항이 그의 임금 임()을 서주(舒州)에서 모살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공자는 사흘 동안 재계(齋戒)를 한 후 입궐한 다음 애공을 찾아가 제나라를 토벌할 것을 세 번이나 요청하였다. 이에 애공이 말하였다.

노나라는 제나라보다 약해진 지 이미 오래되었는데, 당신이 그들을 정벌하라고 하니 도대체 어떻게 하란 말이오.’

공자가 대답하였다.

그것은 걱정할 바가 못 됩니다. 진항이 그의 임금을 죽였으니 백성들 중에 그를 지지하지 않는 자들이 반 이상 넘을 것입니다. 따라서 노나라 백성들에다가 제나라 백성의 반을 더 보태면 반드시 승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을 들은 애공은 시선을 피하며 말하였다.

계씨들에게 가서 얘기해보시오.’

공자는 물러나와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나는 대부의 말석에 있는 몸이라 감히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신하가 임금을 죽이는 불의를 보고도 말하지 않음은 불충이었으므로 말석이긴 하지만 신하된 도리로서 고하긴 한다.

그러나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주군과 실권자인 계씨들일 뿐 자신과는 상관없다는 말로 더 이상 정치에 관심이 없다는 뜻을 극명하게 드러내 보인 태도인 것이다. 공자는 이처럼 오직 남은 여생을 학문에 전념하면서 제자들을 위한 교육과 인류의 영원한 교과서라고 할 수 있는 경전의 편찬에 전념하였을 뿐 더 이상 정치적 문제는 도외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대신 공자의 뒤를 이어 그의 제자들은 하나씩 둘씩 본격적으로 정계에 뛰어든다. 그뿐 아니라 공자는 자신의 제자들을 적극적으로 추천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논어에는 제자들을 추천하는 공자의 행동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어느 날 계강자가 공자에게 물었다.

중유(仲由:자로의 자)는 정치에 종사케 할 만한 인물입니까.’

공자는 대답하였다.

유는 과감성이 있으니 정치에 종사하는 게 무슨 문제이겠습니까.’

계강자가 다시 물었다.

(:자공의 이름)는 정치에 종사케 할 만한 인물입니까.’

사는 통달한 사람이니 정치에 종사케 하는 것이 무슨 문제이겠습니까.’ ‘(:염유의 이름)는 정치에 종사케 할 만한 인물입니까.’

그러자 공자는 대답하였다.

구는 재간이 많으니 정치에 종사케 하는 게 무슨 문제이겠습니까.’”

공자의 대답처럼 이들은 곧 정치 일선에서 눈부신 활약을 보이게 된다.

이미 계강자의 가신으로 뛰어난 정치적 능력을 발휘하고 있던 염유를 필두로 자공은 노나라의 외교관으로 불과 10년 사이에 다섯 나라의 형세를 자신의 손아귀에 집어넣고 마음 놓고 조종하였던 불세출의 정치가였다. 공자는 제나라의 임금을 죽인 진항이 노나라를 정벌하려 하자 자공을 파견하여 정벌의 대상을 노나라에서 오나라로 바꾸는 데 성공하였던 것이다.

또한 자로 역시 공자의 추천으로 벼슬을 하다가 위나라로 가서 공회()의 읍재가 된다. 평소 공자는 자신에게 곧잘 정면으로 덤벼들고 따지는 자로에 대해서 깊은 신임을 갖고 있었다.

도가 행하여지지 않아 뗏목을 타고 바다 속으로 들어가게 될 때 나를 따르는 사람은 오직 중유뿐일 것이다.”

공자의 자로에 대한 이런 평가는 마치 예수를 잡으러온 로마군사의 귀를 칼로 베어버리는 베드로를 연상시키고 있을 정도이다.

이처럼 자로는 성격이 무사답게 용감했을 뿐 아니라 군사에도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었다. 본시 그는 공자보다 아홉살 정도밖에 어리지 않았는데, 어렸을 때부터 백리 넘는 길에 쌀을 날라다 부모를 봉양할 정도로 가난한 집안 출신이었다. 그러나 공자의 문하로 들어온 뒤로는 거친 성품을 누르고 꾸준히 공자를 좇아 수양을 쌓았다.

공자는 자로의 이러한 성급하고도 용감한 기질을 사랑하였다. 그래서 평소에 다음과 같이 칭찬하고 있었다.

한마디로써 송사에 판결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은 중유일 것이다. 그는 승낙한 일을 미뤄 두는 일이 없다.”

자로는 가르침을 듣고 그것을 미처 실천하지 못했으면 또 다른 가르침을 듣게 될까 두려워하였다.”

다 떨어진 형편없는 옷을 입고서도 여우나 담비털옷을 입은 사람과 함께 서 있으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을 사람은 오직 중유뿐이다.”

스승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으면 곧바로 이를 고치려고 반성하고 가난해도 부끄러워하지 않을 뿐 아니라 용감하고 곧은 자로의 성격을 칭찬하면서도 또한 공자는 자로의 이런 성급한 성격을 몇 번씩 경책하고 있다. 그것은 논어에 나오는 공자의 다음과 같은 말을 통해 잘 알 수가 있다.

중유는 용맹하기로는 나보다 더하지만 사리를 재량할 줄을 모른다.”

심지어 공자는 자로의 운명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예언까지 하고 있다.

중유 같은 사람은 제명에 죽지 못할 것이다.”

실제로 노나라 애공 15(기원전 480). 공자의 나이 72세 되던 해 위나라에서 내란이 일어난다. 자로가 모시고 있는 공회가 내란에 휩쓸렸다는 말을 듣고 공자는 걱정하여 다음과 같이 부르짖는다.

자고는 돌아오겠지만 자로는 죽을 것이다.”

자고는 나이가 어렸음에도 불구하고 자로가 데리고 위나라로 들어가 함께 벼슬에 올랐던 사람이었는데, 이로 인해 공자로부터 꾸중을 들었던 바로 그 제자. 실제로 자로는 위기에 처한 공회를 구하기 위해서 단신으로 적중에 뛰어들어 싸우다가 비참한 최후를 마쳤던 것이다. 마침내 자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공자는 아아, 하늘이 나를 끊어버리는구나.’하고 애통해한다. 수제자였던 안회가 죽었을 때 하늘이 나를 망치는구나.’하고 탄식을 하였던 것보다 더 절망하였던 것을 보면 공자가 얼마나 자로를 사랑하였던가를 미뤄 짐작할 수 있음인 것이다.

공자의 또 다른 제자 자유(子游)는 무성(武城)에서 읍재(邑宰)를 지내게 되는데, 그의 이름은 언언(言偃)이고 오나라 사람이었다. 공자보다 45세나 아래로 공자가 노나라로 돌아올 때 24세의 청년이었고, 공자가 죽을 때에도 29세에 불과하였으니 젊은 나이에 그런 벼슬을 하였던 것처럼 보인다.

공자는 특히 이 젊은 자유를 사랑하였다. 자유는 특히 문학에 뛰어나고 젊은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행동도 방정하고 모든 면에서 올바른 인물이었다. 논어에는 공자가 자유를 사랑하였던 두 장면이 나오고 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자유가 무성의 읍재가 되었는데, 공자가 말씀하셨다.

그대는 쓸 만한 사람을 구했는가.’

자유가 대답하였다.

담대멸명(澹臺滅明)이란 사람을 구했습니다.’

그가 어째서 쓸 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러자 자유가 대답하였다.

그는 좁은 지름길을 다니지 않고 공무가 아니면 제 방에 찾아오는 일이 없습니다.’”

20대의 젊은 나이에 벌써 이처럼 사람을 보는 안목을 가졌던 자유에 대해 공자는 각별한 애정을 나타내 보인다. 그것은 공자가 자유에게 유머가 섞인 농담을 하였다는 것을 보면 잘 알 수가 있다. 공자의 모든 어록을 집대성한 논어나 공자의 일생을 기록한 사기의 공자세가를 봐도 그 어디에도 공자가 농담을 하는 장면은 보이지 않는다. 근엄한 스승으로서 가르침을 펴야했던 공자는 제자들에게 함부로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거나 실없는 농지거리를 건네지 않았을 것이다.

이는 공자를 비롯한 세계 3대성인들이었던 예수와 석가도 마찬가지였다. 모든 사실을 비유로써 설명하고 풍부한 휴머니티가 넘쳤던 예수도 농담을 하거나 재미를 위한 빈말을 삼가고 있다. 심지어 성경 어디에도 예수가 웃었다는 기록이 없으므로 중세까지 수도원에서는 웃음을 터부시하고 있을 정도였다. 물론 성서에 보면 예수가 울었던 기록은 다음과 같이 나오고 있다.

자신을 따르던 마리아의 오빠 나자로가 죽었다는 말을 듣자 비통한 마음으로 무덤에 가서 나자로야 나오너라.’하고 외침으로써 부활시킨 예수는 눈물을 흘리며 운다. 이 장면을 요한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눈물을 흘리셨다. 그래서 유다인들은 저것 보시오. 나자로를 무척 사랑하셨던가 봅니다.’하고 말하였다.”

이처럼 눈물을 흘렸던 예수가 웃지 않았을 리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성서 그 어디에도 예수가 웃었다는 기록이 없으므로 성서는 신의 말을 전하는 것으로 절대시하였던 스콜라철학에서는 수도원에서 웃음을 금지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는 석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생전에 팔만사천의 설법을 하였던 부처의 경우에도 부처의 농담은 엿보이지 않고 있다. 이는 예수와 부처를 교조로 하는 종교의 권위 때문일 가능성이 높지만 자칫하면 두 사람의 성인을 인간과 달리 신격시하려는 의도적인 형식주의일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스스로 사람의 아들이라고 못박은 예수가 웃지 않았을 리는 없을 것이며, 누구보다 생로병사의 인간적 고통을 꿰뚫어보았던 석가가 따뜻한 웃음을 보이지 않았을 리는 없는 것이다.

공자도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준엄한 스승이었지만 인간미 넘쳤던 공자였으므로 그 역시 자주 웃고 자주 농담을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공자가 자신의 입으로 아까 한 말은 농담이었다.(前言戱也)’라고 말한 것은 공자가 어린 제자 자유에게 했던 농담이 유일한 것이었다.

공자의 유일한 농담의 배경은 다음과 같다.

어느 날 공자는 무성이라는 고을로 찾아갔다. 그곳은 공자의 어린 제자 자유가 읍재로 있는 곳이었다.

공자는 거리에서 현악(絃樂)에 맞춰 부르는 노래 소리를 들었다. 현악은 거문고와 비파의 음악으로, 자유가 그 고을을 예와 악으로 다스렸기 때문에 고을사람들이 모두 현악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고 있었던 것이었다. 공자는 자유가 자신의 가르침대로 예악의 정치를 펴는 것을 보고 내심 흐뭇하였다. 그래서 빙그레 웃으며 이렇게 말하였다.

너는 어찌하여 닭을 잡는 데 소 잡는 칼을 쓰느냐.”

이 말은 작은 고을을 다스리는 데 어찌 큰 나라를 다스리는 대도(大道)가 필요한가라고 묻는 것이었다. 물론 이 말은 공자가 농담으로 한 것이었다. 비록 다스리는 데는 크고 작은 차이가 있지만 그 다스림에 있어서는 반드시 예악을 써서 교화해야 한다는 것이 공자의 지론이었다. 당시 대부분이 예악의 방법을 사용치 않고 있는데, 오직 자유만이 스승의 뜻을 받들어 그 가르침을 실천하고 있었기 때문에 공자가 예악으로 민풍(民風)을 교화하고 있는 것을 보고는 매우 대견하고 기뻐서 그렇게 말했던 것이었다.

그런데 자유는 스승이 농담을 하고 있다는 것을 미처 눈치채지 못하고 정중하게 변명을 한다.

저는 예전에 스승님께서 군자가 도를 배우면 사람을 사랑하고, 소인이 도를 배우면 부리기 쉽다(君子學道則愛人 小人學道則易使也)’라고 하신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는 지위가 낮고 높고 간에 모두 배워야 하므로 비록 작은 고을이기는 하지만 정도인 예악으로써 다스려야 한다는 공자의 말을 인용한 것이다. 자유는 이처럼 가르침을 그대로 따랐을 뿐이라고 자기변명을 한 것이었다.

실제로 공자는 예와 악을 가장 중요시하였다. 사람에게 예가 겉이라면 악은 속과 같아 서로 표리(表裏)를 이루는 동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으로서 어질지 못하다면 예는 무엇 할 것이며, 사람으로서 어질지 못하다면 음악은 무엇 하겠는가.”

공자의 경전 중에서 예기(禮記)’에는 위대한 음악은 천지와 같은 조화를 이루며, 위대한 예는 천지와 같은 절조를 이룬다.’라고 설법하고 있으며, 따라서 음악이란 천지의 조화이며, 예란 천지의 질서이다.(樂者 天地之和也 禮者 天地之序也)’라고까지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자유는 스승의 가르침을 좇아서 비록 작은 고을이었지만 예악으로 백성들을 다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칭찬은커녕 할계언용우도(割鷄焉用牛刀)’, 닭 잡는 데 어찌 소 잡는 칼을 쓰겠는가.’하는 스승의 핀잔을 듣자 자유는 당황해서 변명하였던 것이다.

이 말은 작은 목적을 위해 너무 거창한 준비나 과대한 노력을 들이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었는데, 자신의 농담에도 불구하고 자유가 당황해하자 공자는 곧 태도를 바꾸어 정색을 하고 다음과 같이 말을 하는 것이다.

얘들아, 자유의 말이 옳다.”

공자는 자신을 수행하고 있는 제자들을 돌아보며 말하였다. 공자는 제자들에게 자신의 가르침을 그대로 실천하고 있는 자유의 태도를 그대로 본받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렇게 말한 다음 말을 덧붙이고 있다.

방금 내가 한 말은 농담이었느니라.”

이 장면은 논어에 나오는 유일한 공자의 농담이다. 비록 20대의 청년이었지만 대견한 애제자에게 흐뭇한 마음을 농담으로 표현하고 있는 공자의 인간미가 돋보이는 명장면인 것이다.

 

# 割鷄牛刀(할계우도)

割鷄牛刀(벨 할/닭 계/소 우/칼 도)’. 이 말의 出典(출전)論語(논어) 陽貨(양화) 편의 割鷄焉用牛刀(할계언용우도)’이다. 이 말은 작은 일에 어울리지 않게 큰 대책을 쓰는 어리석음을 뜻한다.

後漢(후한)의 사상가 王充(왕충)의 저서인 論衡(논형)에는 소 잡는 칼로 닭을 잡을 수는 있으나, 닭 잡는 칼로 소를 잡기는 어렵다.’(牛刀可以割鷄,鷄刀難以屠牛:우도가이할계, 계도난이도우)라는 유사한 文句(문구)가 보인다.

가르다’‘자르다라는 뜻으로 用例(용례)에는 割股啖腹(벨 할/넓적다리 고/먹을 담/배 복:눈앞의 이익만을 꾀하다가 신세를 망침)’ ‘割愛(할애:소중한 시간, , 공간 따위를 아깝게 여기지 아니하고 선뜻 내어줌)’ ‘割引(할인:일정한 값에서 얼마를 뺌)’ 등이 있다.

는 원래 을 나타내기 위한 글자로 鷄口牛後(계구우후:큰 단체의 꼴찌보다는 작은 단체의 우두머리가 되는 것이 오히려 나음)’‘鷄鳴狗盜(계명구도:비굴하게 남을 속이는 하찮은 재주)’ ‘群鷄一鶴(군계일학:많은 사람 가운데서 뛰어난 인물)’ 등에 쓰인다.

를 뜻하기 위해 뿔을 포함한 소의 머리 모양만을 본뜬 글자이다. 소의 뿔은 모두 위쪽을 향한다는 데에서 着眼(착안)한 것이 異彩(이채)롭다.

用例로는 牛耳讀經(우이독경:아무리 가르치고 일러 주어도 알아듣지 못함을 이르는 말)’‘蝸牛(와우:달팽이)’‘馬行處牛亦去(마행처우역거:남이 하면 나도 할 수 있다는 말)’‘九牛一毛(구우일모:매우 많은 것 가운데 극히 적은 수를 이름)’ 등을 들 수 있다.

는 한쪽만 날이 선 의 상형이다. 칼의 각종 용도에 따른 의미를 나타내는 글자들의 의미 요소로 널리 쓰였다. 用例에는 刀山劍水(도산검수:몹시 험준한 지경의 비유)’ ‘刀折矢盡(도절시진:기진맥진하여 더 이상 싸울 기력이 없음)’ ‘刀尺(도척:사람의 進退(진퇴), 任免(임면)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등이 있다.

割鷄牛刀는 공자가 제자인 子游(자유)가 책임자로 있는 武城(무성) 지방을 방문하였을 때 음악이 演奏(연주)되는 광경을 목격하면서 남긴 말로 전한다.

당시 자유는 而立(이립)에도 이르지 못한 젊은 청년이었다. 출세가도를 걷고 있는 젊은 제자가 대견하면서도 젊은 血氣(혈기)가 걱정스럽기도 하였다. 그러나 공자의 우려와 달리 武城 지방에서는 자신의 평소 가르침인 禮樂(예악)의 정치가 펼쳐지고 있었다. 공자는 이런 제자를 향해 닭 잡는 데 소 잡는 칼을 쓰는 것이 아닌가?’라는 조금은 의외의 말을 던진다. 하지만 자유는 스승인 공자의 이전 가르침을 들어 禮樂當爲性(당위성)披瀝(피력)한다.

전통적인 해석에 의하면 論語의 이 대목은 단순한 弄談(농담)이 아니다. 한 나라를 다스릴 만한 인재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작은 고을에서 묵묵히 자신의 責務(책무)를 성실히 遂行(수행)하는 제자를 향한 讚辭(찬사)인 것이다. 그러나 요즘은 이와 달리 작은 일을 처리하는 데 큰 인물의 손을 빌릴 필요가 없다는 의미로 쓰인다.

이처럼 공자의 제자들은 하나씩 둘씩 공자의 곁을 떠나 정치일선으로 나아간다.

사기의 중니제자열전(仲尼弟子列傳)’에는 이들 말고도 다른 제자들의 활약상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자하(子夏)는 거보의 읍재가 되었으며, 자화(子華)는 노나라의 사신으로 제나라에 나갔었고, 재여는 제나라에서 벼슬을 하고 있었다.”

이는 공자의 수제자 중 대부분이 학문의 길을 버리고 정치의 길로 나선 것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사기에는 공자는 시···악을 가지고 가르쳤는데, 제자는 대략 3000명이나 되었으며, 육예(六藝)에 통달한 사람들만도 72명이나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물론 3000명이라는 숫자는 공자에게 한 번이라도 가르침을 받았던 사람들의 총 숫자일 것이며, 실제로 공자를 스승으로 모시고 공부했던 제자는 70여 명이었을 것이다. 공자 자신은 논어에서 자기 제자들을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

덕행에는 안회, 민자건, 염백우, 중궁이 있고, 언어에는 재아와 자공이 있고, 정사에는 염유와 계로가 있고, 문학에는 자유와 자하가 있다.”

공자 스스로가 열명의 제자들을 거론하였다 해서 흔히 이들을 공문십철(孔門十哲)이라 부르고 덕행’,‘언어’,‘정사(政事)’,‘문학을 공문사과(孔門四科)라고 부르고 있었던 것이다. 공문십철 중 염백우는 나환자가 되어 학문의 길에서 탈락되었으며, 나머지 대부분의 제자들은 이처럼 학문을 버리고 정치로 나아갔던 것이다. 끝까지 스승을 좇아 공문에 남아 있던 제자들은 안회, 민자건(閔子蹇), 자하 등 서너 사람에 불과하였다. 그중 공자가 가장 사랑하여 자신의 후계자로 삼았던 안회가 공자보다 3년이나 앞서 단명하여 죽었다.

자신보다 30여 세나 적었던 안회를 공자는 특히 아끼고 사랑하고 있었다. 공자 스스로 평한 공문십철 가운데에서도 첫 번째로 꼽힐 정도로 덕행이 뛰어났던 안회에 대해서 공자는 안회는 그의 마음이 석 달을 두고 인을 어기지 않으나 나머지 사람들은 하루나 한 달에 한 번 인에 이를 따름이다.’라고까지 극찬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기 학문의 후계자로 지목하고 있던 안회가 자기보다 먼저 죽자 공자는 하늘이 나를 망치는구나. 하늘이 나를 망치는구나(天喪予 天喪予)’하고 두 번이나 탄식하면서 성대하게 장사를 치러주었다.

자신의 감정을 좀처럼 드러내지 않던 공자는 안회의 장사를 치를 때 자기 친자식 이상으로 장사를 치르는 태도로 임하였는데, 논어에는 이 장면이 다음과 같이 나오고 있다.

안회가 죽자 문인들이 성대하게 장사를 지내고자 하였다. 그러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안 된다.’

그러나 문인들은 성대하게 장사를 치렀다. 이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안회는 나를 친아버지처럼 생각했었는데, 나는 그를 친자식처럼 대해주지 못하였다. 그것은 나 때문이 아니고 너희들 때문이다.’”

공자의 이 말은 안회가 자신을 친아버지처럼 섬기고 있어 자신도 안회를 친자식처럼 대해주고 싶었지만 어느 한 사람만 편애하는 스승으로서의 모습을 차마 보여줄 수 없어 공평하게 사랑을 나누어주느라 각별한 애정을 주지 못하였다는 인간적인 탄식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공문십철 중에 공자의 뒤를 좇아 학문에 정진했던 사람은 오직 민자건과 자하뿐이었다.

물론 민자건에게도 정계로부터 유혹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민자건은 이름이 민손(閔損)으로 공자보다 15살 아래의 제자였는데 특히 효행에 뛰어난 사람이었다.

일찍이 공자는 민자건의 효행을 칭찬하여 다음과 같이 말을 남기고 있었다.

효성스럽다, 민자건이여. 그의 부모형제들이 칭찬하는 말에 다른 사람들도 감히 이의를 제기하지 못한다.”

실제로 당대 최고의 서예가로 아버지가 반역자로 처형된 데다가 어릴 때부터 키가 작고 못생겨서 남의 업신여김을 받았던 구양순(歐陽詢·557641)은 당고조의 칙령을 받들어 예문유취(藝文類聚)’ 백 권을 편찬하였다. 이 책의 설원(說苑)편에서 민자건의 효행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민자건은 두 형제였는데, 그의 어머니가 죽자 아버지는 다른 여인을 들여 재취하였다. 그리하여 또 두 아들을 낳았다. 어느 날 민자건의 아버지가 관가에 가려고 외출을 하는데 마침 마부가 없었다. 그래서 아들 민자건을 불러 수레를 끌도록 하였다. 그날은 몹시 추운 한겨울이었는데 추위에 떨고 있던 민자건이 수레를 끌자 수레도 저절로 떨렸다. 이상히 여긴 아버지가 민자건에게 물었다.

네가 어디 아픈 거냐. 아니면 추워서 떨고 있는 거냐.’

그러자 민자건이 손을 내저으며 말하였다.

아닙니다. 춥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말고삐를 놓치는 것이 아닌가. 그때 아버지가 그의 팔을 잡아주다가 문득 그의 옷이 매우 얇다는 것을 알았다. 아버지는 집으로 돌아와서 그의 계모가 낳은 아이들을 불러 팔을 만져보았는데 그들의 옷은 매우 두툼하였다. 그러자 아버지는 계모를 불러 꾸짖었다.

내가 당신에게 장가를 든 것은 무엇보다 어미를 잃은 두 자식 때문이었소. 그런데 당신은 나를 속이고 있으니 당장 집을 나가시오.’

이로써 후처는 집을 쫓겨나가게 되었는데, 민자건이 이를 막아 세우고 난 뒤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말하였다.

어머니가 계시면 한 아들만 옷이 얇지만 어머니가 떠나가시면 네 아들이 모두 헐벗게 됩니다.’”

민자건의 말을 들은 아버지는 차마 말을 하지 못하고 계모를 불러들이는 한편 계모도 더 이상 차별을 하지 못하여 화평하였다는 얘기인데, 후세에 민간에는 민자건의 계모가 자기자식에게는 솜을 두어 입히고 민자건에게는 갈대꽃(蘆花)을 두어 입히다가 아버지에게 발각되었다는 것으로 얘기가 바뀌어 진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덕행과 효행이 뛰어난 민자건을 세도가들이 그대로 둘 리가 없었을 것이다.

그 무렵 계강자는 자신의 채읍인 비를 다스릴 적임자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비는 대대로 계손씨의 도성이었는데 이미 전유로부터 배신을 당해 정벌까지 하였던 계강자는 충성스럽고 덕행이 뛰어난 후임자를 고르고 있었던 것이다. 계강자는 민자건의 소문을 듣자 아버지에게 효성이 깊은 민자건이야말로 자신의 도성을 다스릴 충분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사람을 보내어 민자건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는 그대를 비땅의 읍재로 삼으려 한다. 그러니 이를 사양하지 말고 받아들여 주기를 바란다.”

효행이 뛰어난 의인이었을 뿐 아니라 권세에도 굴하지 않는 의기를 지녔던 민자건은 단숨에 이렇게 거절하였다고 논어는 기록하고 있다.

제발 저를 위해 사절하여 주십시오. 만약 다시 저를 부르신다면 저는 반드시 문수(汶水)가에 나아가 숨을 것입니다.”

 

# 繼母(계모)

繼母(이을 계/어미 모), 繼母正室(정실) 자식의 입장에서 아버지의 後娶(후취)의붓어머니를 일컫는다.

자는 잇다.’라는 뜻을 나타내기 위해서 실을 이어 놓은 모습을 본뜬 象形(상형)에 속한다. 후에 그 의미를 더욱 확실하게 나타내기 위해 ‘(실 사)’를 첨가하였고, ‘이어받다.’ ‘이어지다.’의 뜻이 派生(파생)되었다.

자는 (계집 녀)’를 기본으로 가운데 두 점이 있는데, 는 여성의 뜻이며 두 점은 두 팔로 아들을 안고 있는 모습, 혹은 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모양이라고도 한다. 두 점(乳頭·유두)은 아이를 낳아 기르는 사람의 象徵(상징)이라는 데에서 어머니의 뜻을 類推(유추)한 것이다.

어머니 하면 우선 떠오르는 것이 사랑이다. 중국 南朝(남조) ()나라의 劉義慶(유의경:AD 403444)이 편찬한 世說新語(세설신어)에는 애끊는 母性愛(모성애)를 그린 斷腸(끊을 단/창자 장)’이라는 故事(고사)가 전한다.

제나라의 桓公(환공)()나라로 들어가는 길에 三峽(삼협)이라는 곳에 당도할 무렵 어떤 병사가 원숭이 새끼를 한 마리 사로잡았다. 어미 원숭이가 구슬피 울며 배가 지나가는 沿岸(연안)을 따라 백여 리를 쫓아왔다. 배가 협곡에 이르자 그 원숭이는 몸을 날려 배 위로 뛰어올랐다. 자식을 구하려는 일념으로 애태우며 달려온 원숭이는 배에 오르자마자 죽고 말았다. 병사들이 죽은 원숭이의 배를 가르자 창자가 토막토막 끊어져 있었다. 자식을 잃은 슬픔이 창자를 끊은 것이다.

동아시아 문화적 특성인 ()恭敬(공경)配慮(배려)의 마음을 ()()라는 방법으로 發顯(발현)함으로써 사회적 질서를 유지하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服喪(복상)의 문제 가운데 이른바 八母(팔모)’를 구분하여 설명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팔모 가운데 繼母正室(정실)의 아들이 아버지의 後娶(후취)를 일컬을 때 쓰는 말이다.

중국 고대의 三皇五帝(삼황오제) 가운데 한 분인 () 임금의 繼母는 콩쥐의 繼母凌駕(능가)하는 표독한 여인이었다.

숯을 굽던 無名(무명)의 시골 청년이 () 임금의 後繼者(후계자)로 발탁된 것은 불우한 가정환경에도 불구하고 지극한 효성을 발휘한 인간성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우둔한 性品(성품)을 지닌 장님, 일찍 돌아가신 어머니를 대신한 여인은 모진 성품의 繼母, 매우 심술궂은 異腹(이복) 동생 ()이 가족의 일원이었다.

계모는 나날이 멋진 청년으로 성장하는 순을 猜忌(시기)하여 없애기로 마음먹었다. 생각이 짧은 아버지는 이미 계모와 한통속이었다. 어느 날 아버지 고수는 순으로 하여금 지붕에 올라가 비가 새는 곳을 수리하라 해놓고는 사다리를 치우고 불을 질렀다. 그러나 순은 機智(기지)를 발휘하여 위기를 謀免(모면)하였다.

계모의 陰謀(음모)는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이 청소를 위해 우물 속으로 들어가자 남편을 부추겨 우물 뚜껑을 닫아버렸다. 다행히 순은 손에 들려 있는 삽으로 통로를 만들어 탈출에 성공하였다. 그 후로도 가족이 모질게 대할수록 순의 孝誠(효성)은 더욱 지극해질 뿐이었다. 이러한 순의 孝誠(효성)友愛(우애)는 단절된 가족 간의 信賴(신뢰) 회복을 넘어 세상의 어둠을 밝히는 등불이기에 충분하였다.

이처럼 공자 스스로 정하였던 공문십철의 십대제자 중 민자건과 자하(子夏) 두 사람만 빼놓고는 모두 학문을 버리고 정계로 나아가거나 질병으로 중도하차하는 운명을 맞게 된다. 이는 예수의 경우와는 정반대현상인 것이다.

예수도 산에 들어가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한 후 12명의 제자를 뽑는다. 이들 중 예수를 단돈 은전 서른잎에 팔아넘긴 배신자 가롯 유다를 빼놓으면 모든 제자들은 스승이었던 예수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순교하였는데, 이에 비하면 공자의 제자들은 대부분 학문의 길을 버리고 벼슬을 하였던 것이다.

석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석가의 제자들도 스승이 열반하자 제1대 수법제자인 마하가섭(摩詞迦葉)의 사회로 왕사성 밖에 있는 필발라굴에서 500여 성승(聖僧)이 모여 경전을 결집하는 작업에 정진하였던 일과도 대비되는 일인 것이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예수와 석가는 인간을 구원하고, 인간의 미망을 깨우치기 위해 사바세계로 뛰어든 천지창조 이전부터 준비된 영원의 빛이라면 공자는 철저하게 인간 그 자체였던 위대한 인격의 완성자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공자는 기독교와 불교를 창시한 교주인 예수와 석가와는 달리 철학자이자 사상가였으며, 성인이라기보다는 철인이었던 것이다. 바로 이 점이 공자가 예수와 석가와 더불어 세계 3대 성인으로 추앙받으면서도 공자가 창시한 유교가 종교나 신앙으로 발전되지 못하고 후대의 양명학이나 성리학 같은 인간학의 학문으로 발전된 중요한 이유일 것이다.

공자가 스스로 제정한 10대제자 중 말년에 공자가 편저한 경전과 고대문화 연구의 성과를 다시 해석하고 또 후세에 전하여 공자의 학문을 계승하는데 공헌하였던 사람은 복상(卜商)이라고 불리었던 제자가 유일하다. 그의 자는 자하로 위나라 사람이었다.

자하는 공자보다 마흔네 살이나 아래였으니, 마흔다섯 살이나 아래였던 자유와 더불어 공자의 제자 중에서 가장 막내였다. 다른 제자들이 모두 정계로 나아가 벼슬을 하였던 것에 비해 자하는 주유열국을 끝내고 노나라로 돌아와 73세에 죽을 때까지 6년간 학문에 정진하였던 스승의 곁에서 경전의 편저를 도왔을 뿐 아니라 중국의 옛 문헌 및 고대문화에 대해서 깊은 연구를 하였던 수제자였다.

불교의 경전이 25년간 시자로 있었고, 석가의 사촌 아우로 뛰어난 미모와 빼어난 총기로 항상 석가의 곁에서 총애를 받았던 10대 제자 중의 한 사람이었던 아난다가 마침내 법상위에 올라 비구의 여러 권속들이/부처님을 떠나서는/넓고 넓은 허공에 퍼진 별들이 /()을 여윈 것처럼 광범치 못하노라.”하고 노래 부른 후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오서 아무 곳에 계시면서 아무것을 말씀하셨고 이 말씀을 인간과 하늘이 받들어 행하였다.”라고 말함으로써 경전을 기록하는 제1성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초기 경전의 시작은 아난다가 기억하는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如是我聞)”라는 문장으로 시작되고 있음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공자의 말씀을 기록한 논어의 편찬도 자하의 작품이라는 설이 유력하게 전해오고 있다.

전해오는 전설에 의하면 중요한 유가의 경전들은 모두 그 전승에 있어 자하와 관련이 있다고 한다. 이러한 전설들은 그대로 믿을 수는 없지만 자하가 시, , , 춘추와 같은 경전에 누구보다 깊이 연구하고 박학하였다는 것은 이미 증명된 사실인 것이다.

모택동이 애독했던 책으로 전쟁 중에도, 외지로 출장 갈 때도 항상 곁에 두었던 고전 중에 용재수필(容齋隨筆)’이란 책이 있다. 이 책은 송대의 홍매(洪邁)가 지은 책인데, 그는 남송의 사대부 가정에서 태어나 4대에 걸쳐 재상에 이르렀던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었다.

안질 때문에 눈이 나빠졌을 때에도 특별히 읽기 편하게 글씨를 확대해서까지 탐독하였던 이 책은 모택동이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읽고 싶어 했을 정도였다.

이 책에 나오는 할 말과 못할 말을 가리지 못하면 곧 화를 당한다.’,‘재앙은 혀에서 비롯된다.’,‘경솔한 말 한마디에 7백 리의 국토를 잃는다.’라는 구절 등은 오늘날에도 정치가들이 명심해야 할 구절이며, ‘종기는 그대로 두었다간 끝내 곪아 터지고 만다.’,‘공을 이룬 사람은 시기하는 무리를 조심하라.’,‘천하에 쓸모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위기상황에서는 전례 없는 진급도 필요한 법이다.’라는 구절들은 오늘날에도 경제난국을 헤쳐가는 경세지략(經世之略)인 것이다.

일찍이 명조의 감찰어사였던 이한(李翰)으로부터 이 책은 사람들에게 선을 권하고 악을 버리도록 경계하고 있으며, 사람들을 기쁘게도 하고 경악하게도 한다. 이 책은 사람들의 견문을 넓혀 주고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도록 일깨워 주며 의심을 해소하고 사리를 밝게 한다. 이 책은 세속을 교화시키는 데도 도움을 준다.’라고 극찬을 받았던 송나라의 대표적 서적인데, 홍매는 자하경학(子夏經學)에서 공자의 제자인 자하를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공자의 제자 중 오직 자하만이 여러 경전에 관해서 홀로 저서가 있다. 비록 그러한 전기(傳記)나 잡언을 다 믿을 수는 없다고 하지만 요컨대 그는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것이다(중략)춘추(春秋)에 있어서는 자하가 단 한마디도 더 보탤 수가 없다고 하였으니 일찍이 그것에 대해서 자하가 연구한 일을 뜻하는 것이다. ‘공양전(公羊傳)’을 쓴 공양고(公羊高)도 그것을 자하로부터 전수받은 것이며, 논어에 있어서는 정현(鄭玄)이 자하가 편찬한 것이라 하였다. 후한 서방(徐防)이 상소문에서 , , , 악은 공자가 편정(編定)하였으나 그 장구의 뜻을 밝히는 일은 자하에서부터 비롯된 일이다.’라고 말한 것도 이를 증명해 주고 있는 것이다.”

물론 자하가 여러 유가의 경전들을 전수하였다는 말은 대부분이 한대의 이야기여서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 그러나 대부분 경전의 전수근원을 자하에게 두었던 것은 그가 공자의 제자들 중에서 학문에는 가장 뛰어난 인물이었음을 알려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자하는 예수의 제자 중 예수의 어머니였던 마리아를 모시며 유일하게 천수를 누렸고 4대 복음 중에서 가장 핵심적인 요한복음계시록(啓示錄)’을 쓴 요한을 연상시킨다.

요한은 다른 사가들과는 달리 예수의 행적을 처음부터 끝까지 따라다녔고, 예수로부터 가장 많이 사랑받는 제자였으나 복음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다만 사랑받은 제자라는 익명으로 숨기고 있다. 이는 자하도 마찬가지여서 유가의 성전(聖典)이라고 할 수 있으며 공자의 가르침을 전하는 가장 확실한 근본 문헌인 논어를 편찬하면서도 자신의 존재를 가능하면 최소한으로 인용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

자하의 이름이 직접 거론되고 있는 것은 공자의 제자들인 자하, 자공, 증자 등의 말을 간추려 놓은 자장(子張)’ 편에 집중되고 있을 뿐인데, 그 내용을 추려보면 대충 다음과 같다.

자하가 말하였다.

“ ‘널리 배우되 독실하게 뜻을 가지고, 간절히 묻고 가까운 것으로부터 생각하면 인은 그 가운데 있는 것이다.’”

자하가 말하였다.

“‘모든 장인은 공장에 있으면서 자기 일을 완성하고, 군자는 학문을 통해 자기의 도를 이룬다.’”

자장편에 나오는 자하의 어록은 다음과 같이 이어지고 있다.

자하가 말했다.

소인은 잘못을 저지르면 반드시 꾸며댄다.’”

자하가 말했다.

군자는 신뢰를 얻은 뒤에 백성을 부릴 수가 있다. 신뢰가 없으면 자기들을 학대한다고 여긴다. 또한 신뢰를 얻은 뒤에 임금에게 간해야 한다. 신뢰가 없으면 자기를 비방한다고 여긴다.(君子 信而後 勞其民 未信則以爲己也 信而後 諫 未信則以謗己也)’ ”

자하가 말했다.

큰 덕은 한계를 넘어서는 안 되지만 작은 덕은 약간의 한계를 넘겨도 괜찮다.”

자하가 말했다.

어진 이를 어진 이로 대하되 낯빛을 좋게 하며, 부모를 섬기되 능히 그 힘을 다하며, 임금을 섬기되 능히 그 몸을 다하며, 친구를 사귀되 말함에 신의가 있으면 누가 아직 학문하지 않았다고 말하더라도 나는 필히 그가 학문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것이다.”

일찍이 공자로부터 자장은 지나치고 자하는 미치지 못한다.’라는 말을 들음으로써 독실하게 이를 삼갔으나 규모가 협소하였으므로 미치지 못하는 단점을 가졌다는 평가를 가졌던 자하였지만 자하는 이처럼 결국 스승 공자의 사상을 후세에까지 전파시킨 1등 공신이었던 것이다.

사기의 중니제자열전에 의하면 자하는 말년에 아들을 잃고 지나치게 애통해한 나머지 너무 울어 눈이 멀었다고 한다.

눈이 먼 자하.

비록 눈이 멀어 육안(肉眼)은 장님이 되었으나 그로 인해 심안(心眼)은 더욱 밝아졌기 때문일까, 사람들이 찾아와 자하에게 당신의 스승 공자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라고 물으면 앞을 못 보는 자하는 기쁜 얼굴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고 한다.

군자는 세 가지 변함이 있습니다. 멀리서 바라보면 엄숙하고, 가까이서 보면 온화하고, 말을 들어 보면 정확합니다(君子 有三變 望之儼然 則之也溫 聽其言也). 내가 아는 스승께서는 이처럼 세 가지의 변함을 모두 갖고 계시던 분이셨습니다.”

만약 맹인 자하가 없었더라면 공자의 사상은 맥이 끊겼을지도 모른다.

이에 대해 사기는 유림전(儒林傳)’에서 공자가 죽은 뒤의 시대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공자가 죽은 뒤에 70여 명의 제자들은 각각 제후의 나라로 흩어져 큰 자는 사부(師傅)나 경상(卿相)이 되었고, 작은 자는 사대부(士大夫)를 가르치거나 나머지 사람들은 숨어서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므로 자로는 위나라에, 자장은 진나라에, 담대(澹臺)와 자우(子羽)는 초나라에, 자하는 서하에 살면서 벼슬을 했고, 자공은 제나라에서 인생을 마쳤던 것이다. 그리고 전자방(田子方), 단간목(段干木), 오기(吳起), 금골희(禽滑釐)의 무리들이 모두 자하 같은 이에게 공부를 하여 임금의 스승이 되었었다. 이때 오직 위나라의 문후만이 학문을 좋아했었고, 이 뒤로 쇠퇴하여 마침내 진나라 시황(始皇)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전국 시대에는 온 천하가 서로 다투었던 시대이니 이로 인해 유술(儒術)은 이미 사라져 버린 셈이었다. 그러나 제(), () 지방에서만은 유학자(儒學者)들이 끊이지 않았다. 그리고 제()나라 위왕(威王)과 선왕(宣王) 시대(기원전 357~기원전 299)에 맹자(孟子)와 순경(荀卿)의 무리가 모두 공자의 학문을 계승하여 윤색(潤色)함으로써 학문으로 그 시대에 드러났었다.”

사기에 나오는 마침내 진나라 시황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전국시대에는 온천하가 다투었던 시대이니 이로 인해 유술(儒術)은 이미 사라져버린 셈이었다.’라는 구절은 이른바 천하통일을 한 진나라의 시황제가 저지른 분서갱유(焚書坑儒)’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 사건의 배경은 다음과 같다.

기원전 222년 제나라를 끝으로 6국을 평정하고 전국시대를 마감한 시황제는 주왕조 때의 봉건제도를 폐지하고 사상처음으로 중앙집권제를 채택하였다.

그리하여 중앙집권제인 군현제를 실시한 지 8년째 되던 해 BC 213, 시황제가 베푼 함양궁(咸陽宮)의 잔치에서 순우월(淳于越)이란 박사가 현행 군현제도 하에서는 황실의 무궁한 안녕을 기하기가 어렵다.’고 봉건제도로 환원할 것을 진언하였다. 시황제가 신하들에게 순우월의 의견에 대해 가부를 묻자 중앙집권제의 입안자인 승상 이사(李斯)가 대답하였다.

봉건시대에는 제후들 간의 침략전이 그치지 않아 천하가 어지러웠으나 이제는 통일되어 안정을 찾았사오며 법령도 모두 한곳에서 발령(發令)되고 있습니다. 하오나 옛 책을 배운 선비 중에는 그것만을 옳게 여겨 새로운 법령이나 정책에 대해 비난하는 선비들이 있습니다. 하오니 차제에 그런 선비들을 엄단하심과 더불어 아울러 백성들에게 꼭 필요한 의약(醫藥), 복서(卜筮), 종수(種樹:농업)에 관한 책과 진나라 역사서 외에는 모두 수거하여 불태워 없애소서.”

시황제가 이사의 진언을 받아들여 관청에 제출된 무수한 책들을 속속 불태웠는데, 이 일을 가리켜 분서(焚書)’라 한다. 당시는 종이가 발명되기 전이었으므로 책은 모두 글자를 적은 댓조각을 엮어서 만든 죽간(竹簡)이었다. 그래서 한번 잃으면 복원할 수 없는 귀중한 것들이었다.

또한 이듬 해 아방궁(阿房宮)이 완성되자 시황제는 불로장수의 신선술법을 닦는 방사(方士)들을 불러들여 후대했다. 그들 중에는 특히 노생(盧生)을 신임하였으나 그는 많은 재물을 사취한 후 시황제의 부덕을 비난하면서 종적을 감추어버렸다. 시황제는 크게 진노하였는데, 이번에는 시중에 염탐꾼을 감독하는 관리들로부터 황제를 비방하는 선비들을 잡아가뒀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노여움이 극도에 달한 시황제는 엄중히 심문한 끝에 460명의 유생들을 산 채로 구덩이에 파묻어 죽였는데, 이 일을 가리켜 갱유(坑儒)’라 하였던 것이다.

책을 불사르고 선비를 산 채로 구덩이에 파묻어 죽인다.’분서갱유는 바로 여기서 비롯된 말. 이로 인해 사기에 기록된 대로 유술은 이미 사라져버린 셈이었던 것이다.

만약 맹인이었던 자하가 논어를 저술하지 않았더라면 공자의 사상은 이처럼 불타고 생매장되어버림으로써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행히 공자의 고향이었던 노나라와 제나라에서는 유학자가 그치지 않았고, 마침내 공자의 사후 100년 후에 태어난 유교의 중시조라고 할 수 있는 맹자(孟子)’에게 바통터치를 함으로써 비로소 공자의 유가사상은 공맹사상으로 계승발전 될 수 있었는데, 만약 맹인 자하가 없었더라면 유교의 파도는 맹자에까지 이르지 못하였을지도 모른다.

여기에는 맹인 자하와 더불어 또 한 사람의 일등공신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증삼(曾參)으로 자는 자여(子輿)라 불린 제자이다.

그는 노나라 사람으로 공자보다 46세가 아래로 자하와 더불어 막내 제자였는데, 따라서 맹인 자하와 증삼은 흔히 공자의 사상을 전파한 두 사람의 쌍두마차라고 불리고 있다.

증삼은 비록 공자 스스로 선정하였던 10대 제자 중에 들지는 않았지만 공자의 사상을 후세에까지 전파하는 데 앞장서고 후배나 제자들로부터 큰 존경을 받았으므로 증자(曾子)’라는 존칭으로 불렸던 인물이었다.

따라서 증자는 예수 스스로 뽑았던 12제자가 아니었으면서도 기독교를 유대인뿐 아니라 이방인들에게까지 전파하는 데 뛰어난 역할을 하였던 바오로를 연상시킨다.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었던 바오로에 의해서 초기 기독교는 사상적 체계를 갖출 수 있었는데, 증자 역시 공자의 손자였던 공급(孔伋:子思)에게 공자의 사상을 전수하고, 자사는 그것을 맹자에게 전수함으로써 마침내 유가의 도통은 공자에게서 증자를 통해, 서양철학에서 공자가 소크라테스라면 플라톤과 같은 존재인, 맹자에게로까지 전해질 수 있었던 것이다. 그 때문에 유가에서는 흔히 증자를 종성(宗聖)’이라고까지 떠받들기도 한다.

증삼은 그의 아버지 증석(曾晳)과 함께 공자에게서 배웠는데, 공자의 제자 중 특히 효행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따라서 공자가 지은 효경(孝經)’도 공자가 증삼을 위해서 효도를 설명한 내용이라고 알려져 있다.

논어에도 증삼의 언행이 몇 군데 기록되어 있다. 특히 다음과 같은 내용을 보면 증자가 다른 제자들보다도 공자의 사상을 깊이 꿰뚫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어느 날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증자의 이름), 나의 도는 하나로 관통되어 있다.’

증자가 대답하였다.

그렇습니다.’

공자께서 나가시자 다른 제자가 물었다.

무슨 뜻입니다.’

증자가 말하였다.

선생님의 도는 충()과 서()일 따름이다.’”

이처럼 스승의 학문을 깊이 이해하고 있던 증자는 매일 하루 세 가지에 대해서 깊이 반성하는 것으로 유명하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는 매일 내 자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세 가지를 반성한다. 남과 일을 꾀함에 있어 불충실하지는 않았는가. 친구들과 사귐에 있어 신의를 잃지는 않았는가. 스승에게서 배운 것을 익히지 않은 바가 없었는가.”

이렇게 스승의 가르침을 이행하는 데 철두철미한 증자였으므로 그는 특히 후배들로부터 큰 존경을 받았다. 특히 그는 공자의 손자인 공급에게 할아버지의 사상을 전수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고 한다.

선비는 뜻이 넓고 꿋꿋해야만 하는 것이니, 그 임무는 무겁고 갈 길이 멀기 때문이다. ()을 자기 임무로 삼고 있으니 어찌 무겁지 않겠느냐. 죽은 뒤에라야 갈 길을 멈추니 또한 갈 길이 먼 것이 아니겠느냐.”

맹자는 공자의 손자인 공급에게서 유교를 전수받았으므로 엄밀히 따지면 증자는 맹자의 직계 스승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맹자는 공자의 제자이면서 특히 증자를 각별히 존경하고 있었는데, 공자의 제자 중에서 유일하게 증삼이 증자라는 존칭으로 불리게 된 것은 맹자의 강력한 영향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맹자는 이루(離婁) 상편에서 증자의 효행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증자는 아버지 증석에게 끼니 때마다 반드시 술과 고기를 올렸고, 아버지가 다 먹고 난 뒤 그 음식이 또 남아 있는가 물으면 언제나 또 있다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이는 증자가 부모님의 몸을 봉양하였을 뿐 아니라 부모님의 정신까지도 봉양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또한 맹자는 진심(盡心) 하편에도 증자의 효행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아버지 증석은 생전에 고욤(小枾)을 즐겨 먹었다. 증자는 차마 아버지 생각에 고욤을 먹을 수 없었다.”

논어에도 증자의 효행을 기록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증자가 병이 나자 제자들을 불러놓고 말하였다.

내 발을 펴보아라. 내 손을 펴보아라. 시경에 (전전긍긍하며 깊은 못가에 서 있듯, 얇은 얼음판을 밟고 가는 듯하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내 걱정을 면하게 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얘들아.”

죽기 직전 제자들을 불러놓고 자신의 손과 발을 보여준 증자의 태도는 생전에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신체발부를 손상시키지 않으려고 깊은 못가에 서 있듯 전전긍긍하며, 얇은 얼음판을 밟고 가듯 아슬아슬하게, 무척 조심하며 살아온 그의 모습을 엿보게 한다. 죽기 직전에 자기 몸에 아무런 손상도 받지 않았음을 확인받고 자기 몸을 조금도 손상시키지 않으려는 평생의 걱정을 덜게 되었다고 고백하였던 것이다. 증자의 이런 태도는 효경(孝經)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우리의 몸은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니, 다치지 않는 것이 효도의 시작이며, 출세하여 후세에 이름을 날려 부모를 드러내는 것이 효도의 끝이다(身體髮膚 受之父母 不敢毁傷 孝之始也 立身行道 揚名於後世 以顯父母 孝之終也).”

효경은 공자가 증자를 위해서 진술한 것이며, ‘공자는 뜻은 춘추에 실었고, 행실은 효경에 실었다.’라는 통설이 있는 것을 보면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증자는 이처럼 효행에 있어 제1인자였을 뿐 아니라 공자의 사상을 맹자에게까지 전수시킨 유교에 있어 종성(宗聖)인 것이다.

이처럼 공자의 제자들의 다양한 활약상을 기술해 보면 알 수 있듯이 정작 스승인 공자는 68세에 노나라로 돌아와 73세의 나이에 숨을 거둘 때까지의 6년간 제자들과는 달리 오로지 교육과 인류의 영원한 교과서라고 할 수 있는 경전의 편저에만 여생을 바치게 되는 것이다.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현실정치에 펼쳐 보이기 위해서 13년간이나 천하를 주유하면서 만약 나를 등용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 나라를 동쪽의 주나라로 만들겠다(如有用我者 吾其爲東周乎).’라고 선언하였던 공자가 고향으로 돌아온 뒤부터는 한순간 그 이상을 끊어버리고 오직 교육과 학문에만 정진하였던 것이다.

논어에는 바로 이 무렵 공자의 심경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어떤 사람이 공자에게 물었다.

선생님께서는 왜 정치를 하지 않습니까.’

이에 공자께서 대답하셨다.

서경에 말하기를 (효도하라, 오로지 효도하고 형제에게 우애로움으로써 그것을 시정(施政)에 반영시켜라)하였소. 이것도 정치를 하는 것이거늘 어찌 따로 정치를 하는 법이겠소.’”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에게 우애로움을 가르쳐 시정에 반영시키는 것도 훌륭한 정치라고 말한 공자의 태도는 진실로 나를 써주는 사람이 있다면 1년이면 그 나라를 바로잡을 수 있고, 3년이면 완전한 정치의 결과를 올릴 수 있건만하고 상갓집 개처럼 천하를 순회하였던 주유열국시대 때의 공자와 전혀 판이한 정반대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 施政(시정)

施政(베풀 시/다스릴 정) 이 말은 정치자체, 혹은 정치를 시행함을 뜻한다.

는 본래 넘실거리며 펄럭이는 깃발의 모양의 뜻으로 쓰였으나 점차 옮다’‘베풀다의 뜻이 派生(파생)되었다. ‘施賞(시상:상장이나 상품, 상금 따위를 줌)’ ‘博施濟衆(박시제중:널리 사랑과 은혜를 베풀어서 뭇사람을 구제함)’등에 쓰인다.

자의 본래 의미는 정벌이었다. ‘바로잡다’ ‘바르다는 파생된 뜻이며, 본래의 뜻을 보존하기 위해 새로 만든 글자가 (정벌할 정)’이다. 用例에는 政見(정견:정치상의 의견이나 식견)’‘政黨(정당:정치적인 주의나 주장이 같은 사람들이 정권을 잡고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하여 조직한 단체)’‘政策(정책:정치적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방책)’이 있다.

政治(정치)成立(성립)되기 위한 三要素(삼요소)國民(국민), 國家組織(국가조직), 그리고 조직의 支配權(지배권) 행사이다.

일찍이 孟子(맹자)백성이 가장 귀중하고, 사직이 그다음이며, 군주는 중요하지 않다(民爲貴,社稷次之,君爲輕:민위귀, 사직차지, 군위경).”고 하였다. 임금은 權力(권력)이며, 사직은 국가, 백성은 국민이다.

동양적 관점에서 최상의 정치는 無爲之治(무위지치)’, 즉 애써 통치를 하지 않아도 천하가 저절로 잘 다스려지는 境地(경지). 이러한 이상사회를 堯舜時代(요순시대)’ 혹은 堯舜之治(요순지치)’라고 한다. ()임금은 중국 문화사에서 가장 이상적인 爲政者(위정자)推仰(추앙)받는다.

그가 천하를 다스린 지 50년이 되었을 때, 천하가 잘 다스려지고 백성들이 즐거운 생활을 하는지 직접 확인하고자 평민 차림으로 거리에 나섰다. 넓고 번화한 네거리를 지나 한적한 시골길에 접어들었을 때, 한 노인이 길가에 두 다리를 쭉 뻗고 앉아 손바닥 장단에 맞추어 부르는 노래를 들을 수 있었다.

해가 뜨면 일하고(日出而作:일출이작), 해가 지면 쉬고(日入而息:일입이식), 우물 파서 마시고(鑿井而飮:착정이음), 밭 갈아 식량을 얻으니(耕田而食:경전이식), 임금의 덕이 내게 무슨 소용이 있으랴(帝力于我何有哉:제력우아하유재).”

이는 정치의 고마움을 알게 하는 정치보다는 그것을 전혀 느끼지조차 못하게 하는 정치가 진실로 위대한 정치라는 것이다.

禮記(예기) 禮運篇(예운편)에서는 이보다 한 차원 더 높은 이상적 사회를 大同社會(대동사회)”라고 하였다. 이러한 세상에 이르면 큰 도(大道)가 행해지고 어진 사람과 능력 있는 자가 버려지지 않으며, 가족주의에 얽매이지 않고, 노인은 생을 편히 마치고, 젊은이는 모두 일할 수 있으며, 노약자·병자·불쌍한 자들이 버려지지 않고, 길에 재물이 떨어져도 줍지 않는다.

大同思想은 역대 제왕들의 이상적 통치형태일 뿐 아니라 근대 중국의 혁명가인 孫文(쑨원)도 최고의 이상사회로 삼았으며, 毛澤東(마오쩌둥)蔣介石(장제스)도 다 같이 실천해야 할 이상사회로 보았다.

우리나라의 栗谷(율곡) 李珥(이이)聖學輯要에서 정치적 功效(공효)理想型(이상형)으로 대동세계를 말하였다.

노나라로 돌아온 후 공자는 그의 정치적 이상의 실천인 벼슬살이보다도 그의 학문적 이상인 전승(傳承)을 위한 교육에 전념하였고, 또한 정치보다도 교육을 통하여 전인으로서의 그의 인생이 완성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공자의 마음을 엿볼 수 있는 에피소드 하나가 오늘날 전해오고 있다.

공자의 제자 중 가장 막내였던 자하가 아들을 잃고 애통한 나머지 너무 울어 장님이 되었다는 구절은 이미 상기한 바가 있는데, 그는 만년에 서하(西河)에 살면서 제자들 교육에 힘쓰고 위나라 문후의 스승이 되는 한편 자연과 벗 삼아 유유자적하며 노후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자하는 항상 강가에 앉아 눈이 멀었음에도 강 위에 저무는 핏빛 노을을 즐기곤 하였는데, 그럴 때면 항상 손에 구슬을 들고 있었다. 아홉 굽이나 구부러진 구멍이 있는 진귀한 구슬이었다. 사람들이 그 구슬에 대해 물으면 자하는 이렇게 대답하곤 하였다.

스승으로부터 물려받은 구슬입니다.”

공자가 가졌던 진귀한 구슬이 어떻게 해서 자하에게 건너갔는지 그 경위는 불분명하였지만 어쨌든 그 구슬은 공자가 조용히 생각하십시오, 생각을 조용히 하십시오(密爾思之 思之密爾).’란 말을 뽕을 따고 있던 아낙네로부터 전해 듣고 개미의 허리에 실을 매어 구멍 속에 밀어 넣고 다른 쪽 출구가 되는 곳에 꿀을 발라 아홉 굽이나 구부러진 구멍에 실을 꿸 수 있었던 바로 공자천주의 그 구슬이었던 것이다.‘조용히 생각하라.’()’자에서 꿀밀()’자를 떠올린 공자의 행동은 상대가 그 어떤 신분이든 가리지 않고 배웠던 공자의 면학정신을 상징하는 구슬이었던 것이다.

이미 그 소문을 알고 있던 사람들은 그 진귀한 구슬을 확인한 후 말하였다.

그런데 어찌하여 구멍에 꿰었던 실은 보이지 않습니까.”

사람들은 공자가 갖고 있던 그 진귀한 구슬뿐 아니라 그 아홉 굽이나 구부러진 구멍에 개미를 통해 실을 꿰었던 그 실제의 모습을 보기 원했던 것이다. 그러나 진귀한 구슬에는 빈 구멍만이 있을 뿐 실을 꿴 흔적은 남아 있지 않았다. 사람들이 의아해서 물으면 자하는 구슬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을 하곤 하였다.

스승께서는 주유열국을 끝내고 노나라로 돌아오실 때 구멍에 꿰었던 실을 뽑으셨습니다. 그때 제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스승님, 어찌하여 실을 뽑으시나이까.’

그러자 공자께서는 대답하셨습니다.

고향으로 돌아와 이제 새로운 실로 아홉 굽이의 구멍에 꿰려고 한다.’”

그러면 사람들은 한층 더 궁금해진 얼굴로 이렇게 묻곤 하였다.

그래서 공자께서 새로운 실을 꿰셨나요.”

사람들이 질문하면 항상 자하는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끄덕이곤 하였다.

꿰셨지요. 오색의 황금실로 꿰셨지요.”

그런데 어찌하여 저희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입니까.”

사람들이 의아한 얼굴로 물으면 자하는 스승이 물려준 진귀한 구슬을 손으로 어루만지면서 대답하곤 하였다.

보이지 않으시다니요. 앞을 못 보는 저의 눈에도 잘 보이고 있는데요. 자세히 보세요. 그러면 반드시 보일 것입니다.”

장님인 자하의 눈에도 잘 보이는 황금의 실. 그것이 어째서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고 있는 것일까.

자하의 말은 여러 가지 뜻을 함축하고 있음이었다. 13년 동안 펼친 공자의 주유열국은 아홉 굽이의 구멍에 맨손으로 실을 꿰려는 어리석은 행위와 일치하는 것이었다.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펼칠 수 있는 군주를 찾아서 때로는 상인을 기다리는 옥처럼, ‘나무를 선택하는 새처럼 끊임없이 순회했으나 공자는 마침내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현실정치에는 접목시킬 수 없는 불가능한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따라서 공자가 자하에게 말하였던 새로운 실로 아홉 굽이의 구멍을 꿰려 한다.’라는 말의 뜻은 고향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는 교육과 경전 편찬에 여생을 바치겠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사기에는 이러한 공자의 결심을 나타내 보이는 장면이 다음과 같이 나오고 있다.

고향에서 또한 공자는 벼슬 구하는 일을 포기했다. 공자의 시대에는 이미 주실(周室)은 쇠미해져 있었고, 예악은 황폐해졌으며, 시서(詩書)는 흩어져 없어졌다.

그래서 공자는 이를 안타깝게 여겨 하, , 3대의 예를 주석하고, 고서 전기 등을 정리했으며, 위로는 요임금의 당, 순임금의 우시대로부터 진의 목공에 이르기까지 순서에 따라 정리 편찬하였다.”

따라서 공자는 인류의 교과서가 될 경서의 편저에 온 힘을 기울였던 것이다. 그의 교과서는 육경이라고 불리는 시, , (), , , 춘추의 6가지가 중심을 이룬다.

이 육경이 유가의 경전으로 후세 중국뿐 아니라 동양문화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는 것이다.

이처럼 공자가 남긴 육경과 중국 최초의 시가집인 시경, 서경, 예기, 악경, 역경, 춘추, 논어, 효경 등 9가지의 경전을 정리 편찬하였던 것은 마치 아홉 굽이의 구멍에 새로운 실을 꿰어 넣으려는 공자의 의지를 암시하고 있음인 것이었다.

그러므로 일반 사람들이 공자가 갖고 다니던 진귀한 구슬에 꿰어져 있는 황금의 실을 보지 못하였으나 맹인이었던 자하가 장님인 제 눈에도 잘 보이는데요.’하고 감탄하였던 것은 스승의 학문적 업적을 찬탄하는 존경과 칭송의 말이었던 것이다.

그렇다.

비록 육안은 멀어 장님이 되었으나 오히려 심안이 밝아진 자하의 눈에는 스승 공자가 꿴 황금의 실이 또렷이 보였을 것이다. 공자의 묘에 새겨진 비문처럼 위대한 학문의 완성자로서의 공자, ‘최고 성인으로서의 공자, ‘문화를 전파하는 왕으로서의 공자가 진선미의 삼색으로 엮은 찬란한 실이 분명히 보였을 것이다.

물론 2500년이 지나간 지금 공자의 진귀한 구슬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구슬은 전해지지 않더라도 공자가 남긴 진신사리(眞身舍利)의 구슬들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영원한 삶의 귀감과 생활의 지혜로서 전해 오고 있는 것이다.

공자가 남긴 진신사리, 그것이 바로 2500년 동안 동양인들의 마음속에 살아 움직이고 있는 유가사상이며 그런 의미에서 동양의 정신문화를 일컬어 유림(儒林), 즉 유교의 숲이라고 부르는 것은 공자가 심은 묘목 하나가 울창한 정신의 숲을 이뤘기 때문일 것이다.

공자천주. 문자 그대로 공자가 구슬을 꿰다.’라는 고사성어는 공자가 과연 우리들 가슴의 빈 구멍을 무엇으로 메우고 무엇으로 꿰려고 하였는지를 그의 생애와 학문을 통해 여실히 보여 주고 있음인 것이다.

따라서 사람들이 공자를 두고 만세사표(萬世師表)’라고 일컫는 것은 바로 이런 위대함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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