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제2부 주유열국(周遊列國) 제3장 황금시대

2부 주유열국(周遊列國) 3장 황금시대

 

기원전 501, 노나라의 정공 9. 공자는 마침내 중도재(中都宰)란 벼슬로 그토록 오랫동안 꿈꿔왔던 정치에 뛰어들게 된다. 이때 공자의 나이 51세였다.

일찍이 젊은 시절이었던 19세 때 위리라는 벼슬에 있었고, 2년 후인 21세 때는 승전리가 되었던 것이 공자가 지금까지 했던 유일한 관직 생활이었다. 하나는 창고의 물건을 관리하는 낮은 벼슬이었고, 나머지 하나도 나라의 가축을 맡아 기르는 하찮은 벼슬이었지만 공자세가에서는 하나같이 공자가 위리를 맡자 창고의 물품 장부가 깨끗이 정리되었으며, 공자가 승전리를 맡자 가축이 크게 번식하고 잘 자랐다.’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그로부터 30년 동안 공자는 다른 벼슬은 하지 못하였다. 자신의 정치이념을 실현하기 위해서 일년 남짓 제나라로 망명하기도 했지만 재상 안영의 교묘한 제지로 아무런 소득 없이 고향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공자는 그러나 마침내 51세가 되어서야 중도재란 벼슬로 등용된 것이다.

중도재란 문자 그대로 노나라의 수도인 곡부가 아닌 제2의 도시였던 중도를 다스리는 직책으로 오늘날로 말하면 시장이나 도지사에 해당하는 벼슬이었던 것이다. 공자가 꿈꿔왔던 한 국가의 정치를 좌우할 수 있는 대부나 상경의 위치는 아니었으나 그래도 벼슬할 수 있는 계급 중 가장 낮은 신분인 사에 속했던 공자로서는 만족할 수 있는 벼슬이었던 것이다.

사기에 나와 있던 대로 공자가 주나라로 가서 노자를 만나고 온 뒤부터 제자들이 점차로 많아져 공자는 이미 사상가로서 전국에 이름을 떨치고 있었던 것이다.

일찍이 공자는 자신이 15세 때 배움에 뜻을 두었고, 30세 되어서는 익힌 바를 굳게 지켜 흔들림이 없었고(而立), 40세 이르러서는 일 처리와 도리를 이해함에 모르는 바가 없었고(不惑), 50세 이르러서는 하늘의 뜻을 깨달아 하늘과 사람을 원망치 않게 되었으며(知天命), 60세 때는 다른 사람의 한마디만 들어도 곧 시비의 판단은 물론 인품까지 알게 되었고(耳順), 70세에 달하니 말과 행동은 물론 사고함에 전혀 과오가 없었다(從心所欲)고 고백하였는데, 이렇듯 공자가 중도재에 등용된 것은 자신의 말처럼 하늘의 뜻을 깨달았던 지천명의 황금시절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공자는 하늘의 뜻을 깨달았던 51세 때에 중도재란 높지도 낮지도 않은 중간벼슬에 기꺼이 뛰어들었던가. 인류가 낳은 대사상가이자 성인이었던 공자가 어째서 그토록 현실정치에 많은 관심을 가질 수 있었던가. 노자로부터 직접 예를 빙자한 교만과 그리고 뭣도 없으면서도 잘난 체하는 병과 헛된 집념이라는 노골적인 비난을 받으면서 세속적인 욕망의 화신으로까지 비유되었던 공자. 그것을 공자가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심지어 공자는 자신의 제자였던 자로(子路)로부터도 못마땅한 핀잔을 받게 된다. 자로는 공자보다 9세가 연하인 제자로 이름은 중유(仲由)였으며, 성격이 과감하고 거칠었으나 한편 솔직하고 곧아서 스승에 대해서도 바른말을 잘했으므로 공자는 자로에 대해 늘 걱정을 하면서도 좋아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자로가 정치에 관심을 갖는 공자의 태도를 노골적으로 만류하는 장면이 사기에 나오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공산불뉴(公山不 )가 비() 땅을 근거로 계씨에 대하여 반란을 일으켰을 때 그는 사람을 보내어 공자를 초청한 일이 있었다. 공자는 오랫동안 학문을 닦아 원숙한 경지에 이르렀으나 실제로 활용해 보지도 못하였고 아무도 자기를 등용해 주지도 않았다고 괴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자로가 스승 공자를 만류한 사기의 내용은 다음과 같이 이어지고 있다.

그래서 공자는 공산불뉴의 초청을 받고 말하였다.

생각해보니 옛날 주나라의 문왕과 무왕은 소읍인 풍()과 호()에서 일어나 왕업을 이룩하여 천자가 되지 않았던가. 지금 비 땅도 작은 것이긴 하지만 나의 도를 실천하면 될 것이 아니겠는가.’

공자가 비로 떠나려 하자 제자 자로가 언짢게 여기면서 공자를 만류하였다.

그만 두십시오.스승답지 않습니다.’

공자가 말하였다.

그렇지 않다. 나를 부르는 사람이 어찌 공연히 부르겠느냐. 나를 통하여 새로운 동주(東周)를 이룩케 하려는 뜻인 것 같다.’”

이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공자는 아무도 자신을 등용해 주는 사람이 없어 괴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던 중 공산불뉴로부터 초청을 받자 그곳이 비록 작은 땅이지만 잘만 하면 문왕과 무왕처럼 왕업을 이룩할 수 있다고 자위하면서 소읍인 비로 가려 했던 것이다.

이러한 공자를 만류한 사람은 거침없이 바른말을 하던 제자 자로. 그는 공자가 듣기에 자존심이 상할 정도로 그만 두십시오, 스승님답지 않습니다.’라고까지 핀잔하면서 이를 말렸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공자보다 자로의 태도가 더 옳았던 것으로 곧 판명된다.

원래 공자를 초청한 공산불뉴는 반역자였다.

사기에 의하면 정공 8(기원전 502) 공자 나이 50세 때에 계씨의 가신으로 세력을 떨치고 있던 공산불뉴가 계씨와 사이가 벌어져 양호를 충동해 반란을 일으켰다고 한다. 그리하여 양호와 공산불뉴는 삼환(三桓)씨의 적자를 폐지하고 비교적 양호와 사이가 좋은 서자들로 하여금 그 뒤를 잇게 하려고 마침내 계환자를 잡아 가두었던 것이다. 그러나 계환자는 절대로 복수하지 않겠다는 맹약을 하는 속임수를 써서 감옥에서 간신히 벗어날 수 있었는데, 손아귀를 벗어나자 계환자는 삼환씨의 군대를 동원하여 양호를 반격하니 양호는 결국 패하여 제나라로 도망쳤던 것이다.

원래 공자는 노나라의 임금이었던 소공과 정공들을 무시하고 세력을 떨치던 삼환씨에 대해서도 깊은 불신감을 갖고 있었다. 삼환씨들은 환공(桓公)의 자손들인 맹손(孟孫), 숙손(叔孫), 계손(季孫)씨들을 말함인데, 이들은 자신들의 권세만을 믿고 임금을 허수아비로 만들어 천하의 권력을 자신들 맘대로 주무르던 대부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가신이었던 양호와 공산불뉴가 난을 일으켜 삼환씨들을 가두고 권력을 독점하자 노나라의 정치는 극도의 혼란에 빠지게 되었던 것이다.

양호는 일찍이 공자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 돼지를 선물로 보냈던 적신(賊臣). ‘나라를 잘 다스릴 보배를 지니고 있으면서 나라를 혼란한 채 내버려 둔다면 그것을 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하고 유혹하였던 반역자. 이때 공자는 양호의 노골적인 유혹을 좋습니다. 장차 나도 벼슬을 하겠습니다.’라는 대답으로 얼버무렸던 것이다.

그러나 공산불뉴라고 해서 양호와 다른 사람은 아닌 것이다. 오히려 공산불뉴는 양호를 충동질해서 반란을 일으킨 모사꾼이 아닌가. 아무리 자기를 등용해 주지 않는다고 괴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던 공자라 할지라도 그런 공산불뉴가 초청한다고 해서 어떻게 성큼 가려 했던 것일까. 결국 공자가 떠나려 하자 그만 두십시오. 스승님답지 않습니다.’라고 말렸던 자로의 태도가 더 현명했던 것이다.

자로의 말을 들었는지 아니면 방자하게 권력을 휘두르던 이들의 모습에 실망했는지 공자는 끝내 공산불뉴의 초청을 거절한다. 사기는 이를 다음과 같이 짤막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렇지만 공자는 끝내 비로 가지 않았다.”

 

# 三桓氏(삼환씨)

삼환씨란 孔子(공자)母國(모국) ()나라의 실세인 孟孫(맹손) · 叔孫(숙손) · 季孫(계손)을 말한다. 여기서 첫째’,셋째’,막내를 나타내고, 둘째를 가리킬 때는 자를 쓴다. 계절의 시작 무렵은 , 철이 한창일 때는 , 그리고 계절의 끝무렵은 를 쓴다는 점도 알아둘 필요가 있다.

(아들 자)’(그릇 명)’이 결합된 形聲(형성) 글자라는 설, ‘이 모두 의미 요소로 쓰인 會意(회의) 글자라는 설이 분분하다. 그런데 후자의 설에 따르면 자는 본디 중국 남방지역의 맏아들을 낳으면 태어날 자식들을 위해 잡아먹는 습속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자는 맏이외에도 우두머리’ ‘힘쓰다’ ‘맹랑하다의 뜻이 있다.

자는 형제자매 가운데 둘째를 나타내기 위해 만든 글자인데, ‘(사람 인)’은 의미 요소, ‘(가운데 중)’은 발음 요소이다. 자의 뜻에는 버금가다’‘가운데도 있다.

자는 손()으로 콩 꼬투리를 줍는 모습을 본 따 줍다’,또는 을 뜻했다. 후에 아버지의 아우’ ‘형제 가운데 셋째’ ‘시동생등으로 쓰이게 되자 이란 뜻을 위해 따로 (콩 숙)’자를 만들어냈다.

자는 (벼 화)’(아들 자)’가 결합되어 어린 벼를 나타낸다는 설, (어릴 치)의 생략형이기 때문에 나이가 어린 사람을 말한다는 설 등 다양하지만 본뜻이 어리다는 데에는 대체적으로 일치한다. 그 밖에도 막내’‘’‘등의 뜻이 있다.

자와 관련이 있는 故事(고사)하면 연상되는 것이 孟母三遷(맏 맹/어미 모/석 삼/옮길 천)이다. 맹자는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膝下(슬하)에서 자랐다. 처음에 묘지 부근에 살았는데 맹자가 葬禮(장례) 지내는 흉내를 내고 놀자 맹자의 어머니는 市場(시장) 가까운 곳으로 移徙(이사)하였다. 이번엔 장사치들의 흉내만 열심히 내는 것이었다. 맹자의 교육상 살 곳이 못 된다고 생각한 맹자 어머니는 書堂(서당) 부근으로 이사하였다. 이번에는 祭祀(제사) 지내는 흉내를 내거나 學童(학동)들의 글공부를 어깨너머로 배우는 것이었다. 맹자의 어머니는 이곳이야말로 아들을 키우는데 꼭 맞는다고 기뻐한 것으로 전한다.

이제 며칠 뒤면 민족 최대명절인 仲秋節(중추절)이다. 故鄕(고향)을 찾는 모든 이들의 마음이 계절만큼 넉넉하기를 바라는 한편으로 가족, 친지, 이웃에게 疏遠(소원)한 자신을 꾸짖는 마음으로 史記에 전하는 季札(계찰)信義(신의)를 되새겨 본다.

季札春秋時代(춘추시대) ()나라 사람이다. 그는 왕명을 받들어 上國(상국)에 가던 중 ()나라를 지날 때, 서나라 임금이 자신의 칼을 몹시 갖고 싶어하는 마음을 알아차리고 돌아오는 길에 꼭 주겠다고 다짐하였다. 자신과의 약속을 위해 다시 왔을 때는 이미 왕이 죽은 뒤였다. 왕의 무덤을 찾은 계찰은 무덤가의 나뭇가지에 칼을 걸어두면서 상대가 세상을 떠났다고 자신의 마음을 거스를 수는 없는 법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季札掛劍(끝 계/편지 찰/걸 괘/칼 검)’敎訓(교훈)이다.

사기에서는 공자를 중도재에 임명한 사람이 정공으로 되어 있으나 이때 정권은 완전히 계환자의 손에 장악되어 있었으므로 계환자에 의해서 공자가 중용되었다는 것이 옳을 것이다.

계환자는 반역자인 양호와 공산불뉴를 몰아내고 내란을 평정한 후 그들에게 협력하기를 거절했던 공자의 바르고 곧은 인격에 감화되었던 것 같다. 그보다도 계환자가 공자를 등용한 첫 번째 이유는 민심을 수습할 필요 때문이었다.

이 무렵 공자는 명망을 떨치고 있었다. 사마천은 이즈음의 공자를 사기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공자는 시, , , 악의 연구에 몰두하면서 제자들 가르치기에 열중하고 있었다. 제자들은 점차로 불어났다. 먼 곳으로부터 찾아와 공자의 문하에 드는 제자들도 많았다.”

계환자는 이러한 공자를 정치에 끌어들임으로써 민심을 수습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내란을 평정하는데 큰 공을 세운 맹의자(孟懿子)에게 알맞은 행상(行賞)까지 내릴 수 있었던 것이다. 맹의자는 공자의 제자였는데, 그의 이름은 논어에 단 한 번 나오고 있다.

맹의자가 효()에 대해서 물으니 공자께서는 대답하셨다.

효란 (부모의 뜻을)어기지 않는 것이다.’”

공자의 제자인 맹의자가 내란에서 전공을 세우자 계환자는 맹의자에게 벼슬을 내리려 했는데, 그는 자신보다 스승인 공자에게 내려줄 것을 간언하여 계환자는 일석이조의 호기회를 놓칠 필요가 없어 곧바로 공자를 중도재에 임명하였던 것이다.

공자의 이런 태도는 노자의 태도와 양극단을 이루고 있다. 노자와 공자가 서로 운명적인 상봉을 하고 난 후 노자는 적극적으로 소를 타고 함곡관을 지나 세상 밖으로 사라져 버린 것에 비해 공자는 오히려 적극적으로 세상 속으로 뛰어들어 중도재란 벼슬까지 맡게 되는 것이다. 이는 유가의 도와 도가의 도가 근본적으로 다른 극단적인 가치관을 지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노자의 유일한 저서인 도덕경이 그 첫머리에서부터 도에 대해서 시작하고 있다면 공자도 도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다. 심지어 공자는 논어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을 정도인 것이다.

아침에 도에 관해서 알게 된다면 저녁에 죽게 된다 해도 괜찮다(朝聞道夕死可矣).”

도를 깨달을 수 있다면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강조하고 있는 공자. 그렇다면 공자의 도와 노자의 도는 무엇이 다른가.

공자는 도에 대해서 논어의 곳곳에서 다음과 같이 말을 하고 있다.

이른바 대신이란 도로써 임금을 섬기다가 안 되면 물러가야 한다(所謂大臣 以道事君 不可則止).”

나라의 도가 행해지고 있으면 녹을 먹지만 나라의 도가 행해지지 않는데도 녹을 먹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다(邦有道穀 邦無道穀 恥也).”

군자가 도를 배우면 남을 사랑하게 되고 소인이 도를 배우면 부리기 쉽게 된다(君子學道則愛人 小人學道則易使).”

군자의 도는 세 가지가 있는데 나는 아직도 그것을 행하지 못하고 있다. 어진 사람은 근심하지 않고,지혜 있는 사람은 미혹되지 않고, 용감한 사람은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君子道者三 我無能焉 仁者不憂 知者不惑 勇者不懼).”

군자의 도를 엿볼 수 있는 결정적인 장면이 논어의 이인(里仁)’편에 나오고 있는데,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曾子)아 나의 도는 하나로 관통되어 있다.’

증자는 대답하였다.

그렇습니다.’

공자께서 나가자 다른 제자가 무슨 뜻입니까.’하고 물으니 증자가 말하였다.

선생님의 도는 충()과 서()일 뿐입니다.’”

결국 공자가 아침에 깨달을 수만 있다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말한 도는 이처럼 인, , , , 서와 같은 유가의 덕목이라고 할 수 있는 올바른 도리를 가리키고 있음인 것이다. 곧 공자가 생각하는 도란 인간이 마땅히 걸어가야 할 길이요, 인간이라면 마땅히 지켜야 할 당위법칙(當爲法則)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공자의 도사상을 극명하게 나타내 보이고 있는 문장이 역시 논어에 나오고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누가 나가는데 문을 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어찌하여 이 도를 따르지 않겠는가(誰能出不由戶 何莫由斯道).”

결국 공자에 있어 도란 사람이면 반드시 통과하여야 할 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노자에게 있어 도는 통과해야 할 문조차 없는 무문(無門)이었다. 이는 마치 불교에서 깨달음의 경지를 큰길에는 문이 없다.’대도무문(大道無門)’으로 표현한 것과 일맥상통하고 있음인 것이다.

노자에게 있어 도는 공자의 도에 비해서 더욱 절대적이며 근원적이었던 것이다.공자의 도가 인간으로서의 올바른 도리’,사람의 도(人之道)’를 전제로 한 것이라면 노자의 도는 인간존재 이전의 우주의 본원이며, 만물의 생성과 존재의 법칙인 것이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어떤 물건이 혼돈(渾沌)히 이루어져 있었는데 그것은 하늘과 땅의 생성보다 먼저 있었다. 아무 소리도 없고 아무 형체도 없지만 홀로 존재하여 바뀌어지지 않고 모든 것에 두루 행하여지면서도 위태롭지 않으니 천하의 모체(母體)라 할 만한 것이다. 나는 그 이름을 알지 못하므로 그것을 도라 이름 지었고, 억지로 그것을 대()라 부르도록 하였다.”

노자의 도는 이렇듯 인간의 당위법칙을 뛰어넘어 우주의 생성보다 앞선 천하의 모체가 되는 절대적인 것이다. 곧 우주의 모든 존재는 도를 바탕으로 이루어졌고 도로 말미암아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도란 인간 지성의 한계를 초월한 절대적인 것이어서 사람으로서는 그 존재를 정확히 파악하기가 어렵고 말로서 그것을 표현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이렇듯 노자의 도가 초월적인 것이라면 공자의 도는 현실 참여적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공자는 운명적으로 현실정치에 뛰어들어 51세의 황금 시절임에도 불구하고 중도재란 벼슬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것이 대 사상가이자 인류가 낳은 3대 성인이었던 공자가 지닌 한계이자 또한 위대한 장점이기도 한 것이다.

예수가 인류의 구원을 하늘나라에 목표를 두고 있고 부처도 깨달음의 궁극을 번뇌를 해탈하여 열반의 세계에 드는 피안(彼岸)’에 두고 있고, 노자도 도의 목표를 무위에 두어 결국 인간은 우주의 한 구성 요소이며 완전해방과 절대의 자유를 이룩하는 데 두었음에 반하여 공자는 하늘나라가 아닌 지상의 나라에서, 피안이 아닌 차안(此岸)에서, 우주가 아닌 바로 전국시대의 난세에서 인간으로서 올바르게 살아가야 한다고 외쳤던 단 하나의 예외적인 선각자였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공자는 사상가라기보다는 교육자였으며, 성인이라기보다는 철인이었다.

 

# 忠恕(충서)

忠恕(충성 충/용서할 서), 忠恕는 정성을 다하여 다른 사람을 이해한다는 뜻이다.

은 가운데 중()과 마음 심()을 합해 남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다 바치다.’라는 뜻을 나타냈다. 바람의 방향을 측정하기 위해 장대 가운데 부분에 달아 놓은 얇은 판의 상형, ‘()의 변형설 등 분분하지만 가운데를 가리키는 점에서 일치한다. 심장의 상형이다.

을 합친 글자로 남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한다.’는 뜻이다. 에서 는 일반적으로 다소곳이 앉아 있는 여자의 상형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실은 묶인 채 꿇어앉은 전쟁 포로의 상형이며, 그 옆의 는 신문 당하는 포로가 털어놓아야만 하는 實情(실정)에 비추어 秋毫(추호)加減(가감)도 없는 말을 의미한다.

忠恕라는 말의 語源(어원)孔子(공자)나의 ()는 하나로 꿰어 있다.”라고 말하자 弟子(제자)曾參(흔히 증자라고 일컬음)선생님의 도는 忠恕일 따름이다.”라고 해석한 데서 비롯되었다. 여기서 본래의 마음속으로부터 우러나 자기를 극진히 한다.’라는 뜻이며 자기 마음을 미루어 가는 것이라는 뜻이다. 自己啓發(자기계발)自我完成(자아완성)을 위한 노력에 충실하여 자기를 속이지 않는 경지에 이르렀을 때가 이며, 그 같은 인격과 人間像(인간상)이 다른 사람에게까지 미치어서 자기와 같이 타인을 容恕(용서)할 줄 아는 경지가 忠恕인 것이다.

忠恕他人(타인)에 대한 지극한 配慮(배려)이며 사회생활에서 인간관계를 보다 원만하게 지속시키는 데 필요한 實踐倫理(실천윤리)인 것이다. 그러므로 공자는 자기가 하고자 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베풀지 말아야 한다(己所不欲 勿施於人)”고 하고, “무릇 어진 사람은 자신이 서고자 하면 남도 서게 하고, 자신이 통달하고자 하면 남도 통달하게 한다(夫仁者,己欲立而立人 己欲達而達人)”고 하였다.

내가 주변 사람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잠깐만이라도 立場(입장)을 바꾸어 생각해보는 餘裕(여유)가 필요하다.

大學에서는 이것을 矩之道’(헤아릴 혈/곱자 구/어조사 지/도리 도)라고 하였다. ‘혈구지도란 윗사람이 나를 대할 때 싫었던 것을 가지고 아랫사람을 대하지 않고, 아랫사람이 내게 대할 때 싫었던 것을 가지고 윗사람을 대하지 않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옆 사람이 이렇게 하면 싫었던 것을 가지고 내가 다시 내 옆 사람에게 대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내 앞이나 뒷사람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누가 나의 權益(권익)侵害(침해)하면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對抗(대항)하려 한다. 그러나 정작 그런 자신들이 남의 권익을 침해하는 일에 대해서는 관심조차 없는 極端的(극단적) 利己主義(이기주의)도 흔히 볼 수 있는 세상이다. 그렇다고 이런 世態(세태)袖手傍觀(수수방관)하거나 批判(비판)만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우선 나부터 남을 배려하는 忠恕의 정신과 진솔한 자기 성찰을 통해 ()은 남에게 돌리고 ()는 자기 것으로 삼는다면 葛藤(갈등)反目(반목)이 없는 질서가 정연한 세상, 大同(대동)사회가 실현될 수 있지 않을까.

과연 가능한 일일까.

오늘날에도 뛰어나게 학문을 연구했던 대학자와 명교수들이 정치에 뛰어들면 갑자기 무능해지고 비굴해지며 권력에 오염되어 타락하는 모습을 익히 보아왔던 우리들로서는 인류의 스승인 공자가 과연 현실정치에 뛰어들어 어떤 모습을 보였는가를 살펴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일 것이다.

어쨌든 공자는 중도재란 벼슬로 본격적으로 정치무대에 데뷔하게 되는데 이 첫 무대를 공자는 성공적으로 수행하게 된다.

공자가어에 의하면 공자가 중도를 다스린 1년 만에 다른 고을이 모두 본받을 정도로 질서가 잡혔으며 다음과 같이 변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러 가지 예의와 기틀이 잡히고, 길에 물건이 떨어져 있어도 자기 것이 아니면 주워가지 아니하고 허례허식을 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다음해인 노나라 정공 10(기원전 500). 공자의 나이 52세 되던 해에 정치가로서의 공자의 역량을 시험해 볼 수 있는 절호의 찬스가 찾아온다.

이듬해 봄 이웃 제나라와 회맹(會盟)을 하였는데, 갑자기 여름이 되었을 때 제나라의 경공이 정공에게 협곡(夾谷)이란 곳에서 회견할 것을 요청해 온 것이었다. 이미 공자는 경공과는 구면이었고, 17년 전 나이 35세 때 공자가 첫 번째로 출국하여 1년 남짓 망명 생활을 하는 동안 서너 차례 만나 서로 호감을 갖고 있던 사이였던 것이다. 공자를 여러 번 등용하려 했지만 안영을 비롯한 여러 대부들의 반대에 부딪혀 공자를 그냥 돌려보낼 수밖에 없었던 경공은 공자가 마침내 일선에 나서 정치 활동을 펼친다는 소식을 듣자 이를 예의주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는 늙고 병든 안영 대신 대부 여서()가 국정을 맡고 있었는데, 여서는 공자의 뛰어난 정치 활동을 염탐한 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고 사기는 기록하고 있다.

걱정입니다. 지금 노나라에서는 공구를 등용하더니 그 세력이 막강해져서 우리 제나라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그러고 나서 여서는 공자에 의해서 국력이 더욱 강력해지기 전에 허수아비 임금인 노나라의 정공을 위협하여 초기에 기를 꺾어 버리자고 경공에게 권유하였던 것이다. 이 권유가 받아들여져 경공은 노나라에 사신을 보내 오늘날의 산둥성 지난(濟南)인 협곡에서 회맹을 하자고 일방적인 통보를 하였던 것이다.

즉시 노나라에서는 이 회맹의 주재를 맡을 사람을 결정하기 위해서 어전회의를 열었는데, 마침내 발탁된 사람이 공자였다. 그것은 경공과의 오랜 인연으로 공자 이상 적임자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노의 정공은 단순히 이 회맹을 우호적인 것이라 생각하고 평상시처럼 수레를 타고 떠나려 하였는데, 제나라의 음모를 꿰뚫어 본 공자는 정공에게 이렇게 말하였다고 사기는 기록하고 있다.

이는 불가합니다. 제가 듣건대 문사(文事)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무비(武備)가 있어야 하며, 무사(武事)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문비(文備)가 있어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예부터 제후들이 국경을 넘을 때는 반드시 문무의 관을 갖추어서 뒤를 따르도록 하였습니다.

따라서 전하께오서는 방심하지 마시고 좌우에 사마(司馬)를 갖추고 떠나시기 바랍니다. ”공자가 말하였던 사마는 육경(六卿) 중의 한 사람으로 군대의 최고 실력자를 가리키는 직책인데, 곧 무술이 뛰어난 무관을 말함이었다.

정공은 공자의 진언을 받아들여 좌사마 우사마를 거느리고 회맹장소인 협곡으로 떠나는데, 이로써 공자는 일약 정치가에서 외교가로 변신, 눈부신 외교술을 펼치게 되는 것이다.

공자의 불길한 예감은 그대로 적중된다.

정공이 좌사마와 우사마의 무장이 이끄는 군사를 거느리고 협곡에 이르자 갑자기 제나라 소속인 내() 땅의 오랑캐들이 경공의 지시에 따라 북을 울리며 정공을 공격해 왔다. 이는 모두 제나라의 대부 여서가 꾸민 책략이었다.여서는 정공을 사로잡거나 죽일 생각으로 군사를 동원한 것이 아니라 다만 겁을 주기 위해서 오랑캐들을 동원했던 것이다.

춘추전국시대 때는 사방에 강력한 오랑캐 민족들이 산재해 있었다. 남쪽에는 만(), 북쪽에는 적()과 맥(), 동쪽에는 이(), 서쪽에는 융()이라 불리던 오랑캐 종족들이 있었는데, 여서가 동원한 군사는 제나라의 소속인 이적(夷狄)들이었던 것이다. 여서가 오랑캐들을 동원했던 것은 정예군을 동원함으로써 어쩌면 일어날지 모르는 외교상의 분쟁에서 도망갈 길을 마련해두려는 교묘한 계산 때문이었던 것이다.

공자는 즉시 군사들로 하여금 정공을 호위하여 일시 퇴장케 하고는 자신이 직접 경공 앞에 나아가 오랑캐를 이용하여 노나라를 협박하려던 비열한 수법을 준엄하게 꾸짖었다고 한다.

이때 공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제나라의 그러한 행동은 귀신에게도 상서롭지 못한 짓이고, 도덕에도 어긋난 일이며, 사람으로서의 예에도 벗어나는 일입니다.”

이 말을 들은 경공은 꼼짝 못 하고 즉시 오랑캐들을 철수시킬 수밖에 없었다.

공자의 뛰어난 외교술은 이처럼 초기에 제나라의 계략을 꺾어 버림으로써 빛나는 성과를 얻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제나라의 대부 여서도 만만한 사람은 아니었다.여서의 술수는 더욱 교묘하게 더욱 지능적으로 진행되었는데 이 장면을 사마천은 사기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정공은 공자의 진언을 받아들여 군대를 이끌고서 회맹장소인 협곡으로 갔다.

회장은 흙으로 만든 3단의 계단으로 되어 있었고, 양군주가 그 위로 올라가 회우(會遇)의 예식을 치르도록 되어 있었다.두 군주는 서로 읍한 후 단상으로 올라가 술잔을 주고받았다. 그때 여서의 밀명을 받은 제나라의 관리 하나가 종종걸음을 치며 달려 나와서 소리쳐 말하였다. ‘이토록 경하스러운 날에 청하옵나니, 사방(四方)의 악을 연주하여 축하의 자리가 되게 하여주십시오.’

여기서 말한 사방의 악이란 공자가 심취하여 석 달 동안이나 고기 맛을 잊었던 제나라의 음악인 소()가 아니라 오랑캐인 이적들의 음악이었던 것이다. 그러자 경공은 짐짓 고개를 끄덕이고, 순간 무기를 든 군사들이 떠들썩하게 몰려나왔다. 그러고 나서 춤을 추기 시작했는데 이것은 경사스러운 날에 행하는 춤이 아니라 일종의 검무였다.

큰 깃발을 든 정모()에서부터 꿩의 털로 장식한 우불(), 세모로 된 긴 창을 든 모(), 갈래창을 든 극(), 양날의 칼을 든 검(), 긴 방패를 든 발()등 검무사들이 일제히 북을 치면서 몰려나와 춤을 추면서 삽시간에 연회장 분위기를 싸늘하게 냉각시키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주군의 위험을 느낀 공자는 순식간에 2층 계단까지 뛰어올라 소매를 모으며 소리쳤다. ‘이 무슨 불경스러운 짓입니까. 지금 두 나라의 군주는 우호의 모임을 갖고 있습니다. 이런 경하스러운 자리에서 어찌 오랑캐의 음악을 연주하는 것입니까. 관계자들에게 명하여 당장 중지시켜주십시오.’

무기를 든 무용수들은 물러가는 대신 경공과 안영을 번갈아 보면서 하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경공은 난처하고 또한 부끄러웠다. 그래서 마침내 소리쳐 명령하였다. ‘어서 물러들 가라.’”

그러나 여서는 그대로 물러서지 않았다.여기서는 세 번째로 준비해 두고 있던 술수를 집요하게 고집하였다.이때 장면을 사기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얼마 후 다시 제나라의 관리가 나와서 소리쳐 말하였다.

그렇다면 궁중음악을 들려 드리겠습니다.’

경공이 짐짓 고개를 끄덕이자 이번에는 광대인 우창(優倡)과 난쟁이들인 주유(侏儒)들이 서로 희롱하면서 달려 나왔다. 이쪽의 주군이 위험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공자는 다시 계단의 2단까지 급히 뛰어올라 급히 소리쳤다.

이 무슨 불공스러운 장면입니까. 천한 자들로서 제후를 우롱하는 일은 마땅히 주살되어야 하는 죄에 해당됩니다. 청하오니 관계자들에게 명하여 그렇게 선처해 주십시오.’

경공은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조처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광대와 난쟁이들의 손과 발을 절단하도록 명령했던 것이다.”

이처럼 노나라의 정공을 위협하여 사전에 기를 꺾어 놓으려던 여서의 계략은 보기 좋게 공자에 의해서 꺾여 버린 것이다. 그러나 진짜의 외교는 연회가 끝나고 본회담인 맹약의 예가 진행되고 난 후부터였다.

원래 제나라는 강대국이었고, 노나라는 약소국이었으므로 항상 노나라는 제나라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는데, 맹약을 하기 전에 제나라에서는 맹약서(盟約書)에 다음과 같은 조항을 써넣을 것을 강요하였던 것이다.

제나라의 군대가 외국으로 전쟁을 하러 나갈 때는 노나라는 반드시 전차 300()을 내어 제나라의 작전을 돕기로 한다.”

우월한 힘으로 몰아붙이는 강제조항이었으나 노나라의 정공은 어쩔 수 없이 이를 받아들여 서명을 하려는 순간 공자가 나서서 이를 막았다.

이는 불가합니다.”

공자의 태도는 의외로 강경하였다. 언짢은 표정으로 노려보고 있는 경공을 향해 공자는 말하였다.

그 조항에 서명하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먼저 제나라에서부터 맹약에 성의를 보여주십시오.”

그것이 무엇인가.”

경공이 묻자 공자가 대답하였다.

원래 문수(汶水) 이북의 땅은 노나라의 것입니다. 그것을 돌려주십시오. 성의를 보여주신다면 회맹은 더욱 돈독해질 것입니다.”

공자의 말은 사실이었다. 원래 문수 이북의 땅은 노나라의 것이었다. 그런데 제나라가 자신들의 강대한 힘을 믿고 강제로 이를 점령하여 자신들의 영토로 병합하였던 것이다. 이 말을 들은 경공은 어쩔 수 없이 노나라로부터 빼앗았던 오늘날의 산둥성 동임도(山東省 東臨道)에 해당하는 운(), 문양(汶陽), 귀음(龜陰) 등의 땅을 다시 노나라에 돌려주었던 것이다.

이처럼 정치가로 갓 데뷔한 공자는 네 번이나 제나라의 음모를 물리침으로써 외교가로서 눈부신 활동을 펼쳐 보였던 것이다.

맹약을 하기 전에 자국의 실리를 구한 공자의 태도야말로 오늘날 우왕좌왕하는 외교담당자들이 명심해야 할 교훈일 것이다.

외교의 목적은 단 한 가지뿐, 상대국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직 자국의 이익을 위하는 것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확고한 원칙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보다 큰 실리를 얻기 위해서는 작은 손실은 감수해야 하며, 힘으로 밀어붙이는 외교술보다는 명분을 중시하는 외교에 더욱 전념해야 하는 것이다.

어쨌든 회맹을 마친 후 경공은 제나라로 돌아온 후에도 공자를 아낌없이 칭찬하였다고 사기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경공은 공자가 두려웠다. 또 그 의리에 감동되었다. 회맹을 마치고 귀국한 후에도 부끄러움은 가시지 않았다. 그래서 신하들을 모아 놓고 꾸짖어 말하였다. ‘노나라에서는 신하들이 군자의 도로서 그 임금을 보좌하는데, 어찌 그대들은 과인에게 오랑캐의 도로서 가르치려 하는가. 지금 과인은 노나라 군주에게 과실을 범했으니 이를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공자가 보인 외교가로서의 눈부신 활약은 공자를 더 높은 벼슬로 중용시키는 계기가 된다.

이로써 오늘날 산둥성 제령도의 문상현(汶上縣)을 가리키는 중도의 지방 장관으로 있던 공자는 다음 해에 곧장 사공(司空)이란 높은 벼슬로 영전된다. 사공은 육경 중의 하나로 국토를 다스리는 일을 맡는 중요한 자리였다. 비로소 중앙의 행정장관으로 임명된 셈이었는데, ‘공자가어에 의하면 공자가 사공이 된 뒤로는 노나라의 삼림과 강물, 호수와 고지대와 저지대의 평야가 모두 제대로 잘 다스려져 각각 그곳에 맞는 식물과 동물들이 잘 자랐다고 한다.

그러나 정치가로서의 공자는 원대한 포부를 갖고 있었다.

그것은 대부들인 계환자를 비롯한 삼환씨의 횡포를 제거하고 정권을 노나라의 임금인 정공에게 되돌려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아야겠다는 사명감 같은 것이었다.

공자는 이상주의 국가의 표본을 주나라에서 찾고 있었는데, 이는 논어에서 말하였던 공자의 다음과 같은 내용에서 미뤄 짐작할 수 있다. “주나라는 하()와 은()나라를 본떴으므로 문물제도가 빛났다. 나는 마땅히 주나라를 따르겠다.”

노나라를 주나라로 만들고 싶은 것이 공자의 정치이념이었고, 정치가로서 공자가 꿈꿨던 이상적인 인물은 주나라 건국의 일등 공신이었던 주공이었던 것이다.

말년에 심히 내가 노쇠하였구나. 오랫동안 나는 주공을 다시 꿈속에서 보지 못하고 있으니.’하고 한탄한 공자의 말이 논어에 나오고 있는 것을 보면 공자는 종주국이었던 주나라를 건국한 주공을 본떠 한갓 신하에 불과한 삼환씨의 전횡을 거세하고, 왕권을 정공에게 되돌려야만 천하의 도가 바로잡힐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공자의 정치철학은 논어의 계씨편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말에서 분명하게 엿볼 수 있다.

천하의 도가 있으면 예악과 정벌이 천자로부터 나오고 천하의 도가 없으면 예악과 정벌이 제후들로부터 나온다. 그것이 제후들로부터 나오게 되면 대략 10대에 나라가 망하지 않는 일이 드물고, 대부들로부터 나오게 되면 5대에 망하지 않는 일이 드물고, 가신들이 국권을 잡으면 3대에 망하지 않는 일이 드물게 된다. 천하의 도가 있으면 정권이 대부들에게 있지 아니하고 천하의 도가 있으면 백성들이 혼란하지 않다.”

예악과 정벌이란 고대 국가에 있어서 대권(大權)을 뜻하는 것이다. 공자가 정치가로서 활약한 무렵에는 대권이 제후인 정공에게 있지 아니하고 대부인 계환자에게 있었고, 또 한때는 그들의 가신이었던 양호와 공산불뉴까지 권력을 휘두르는 난세 중의 난세였으므로 이대로 나아가다가는 노나라는 공자의 예언대로 3대에 망할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다. 따라서 공자가 천하의 도를 바로잡으려 필사적인 노력을 했던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물론 공자는 서두르지 않았다. 개혁이라는 이름 하에 이루어지는 정치변화도 알맞은 때를 기다려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한 공자는 기회를 엿보고 때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마침내 공자가 사공이란 높은 벼슬에 이르렀을 때 그 개혁을 시작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가 찾아왔다.

그것은 계씨들에 의해서 쫓겨나 제나라로 망명했다가 7년 만에 객사한 소공의 시신을 이장하여 노나라의 선공(先公)들의 묘소에 합장시키는 장례가 벌어지게 된 것이었다.

이때 계환자는 소공을 탐탁하게 여기고 있지는 않았지만 백성들의 눈총도 있으니 이 기회에 소공의 장례를 치러주자고 생각하여 성대한 예식을 치르면서도 한 가지 조건을 내걸고 있었다. 그것은 선공들의 묘소와 소공의 묘 사이에 도랑을 내어 소공의 묘를 격리시키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계환자의 술수도 대부 영가아(榮駕)의 반대로 실행되지 못하였다. 영가아는 도랑을 내어 소공의 묘를 격리할 것이 아니라 아예 소공의 묘를 묘도(墓道)의 남쪽에 만들 것을 주장하여 그대로 외딴곳에 파묻어 버린 것이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공자는 마침 자신의 직책이 국토를 관장하는 사공임을 기화로 계환자를 찾아가 다음과 같이 항의하였다고 공자가어는 기록하고 있다.

임금을 내침으로써 자기 죄를 드러내는 것은 예가 아닙니다. 지금 소공의 무덤을 선공들 무덤 곁에 합치려 하는데, 그것은 계씨의 신하 노릇을 잘못한 행위를 덮어 주려는 뜻에서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임금의 묘를 감히 묘도에 장사 지낼 수 있겠습니까.”

공자의 말은 준엄한 질책이었다. 임금을 내친 신하로서 잘못한 행위를 꾸짖고 이 기회에 명분을 바로잡으려는 공자의 결의가 번득이는 대목인 것이다.

이 말을 들은 계환자는 어쩔 수 없이 공자의 말을 받아들여 소공의 무덤을 다시 이장하여 선공들의 무덤 곁에 합쳐 주었으며, 그 대신 도랑을 내어 구별하는 차선책을 사용하였던 것이다.

이로써 공자의 위상은 더욱더 높아져 갔다. 그리하여 다음 해인 기원전 498년 공자 나이 54세 때에 다시 사구(司寇)라는 더 중요한 벼슬에 등용되었는데, 정치에 입문한 지 불과 3년 만에 형옥을 다스리는 관리인 사구라는 직책으로 발탁되었음은 공자의 황금시대를 의미하는 것이다.

더구나 사구라는 벼슬은 지금의 대법원장 겸 법무부장관의 직책에 해당하는 중요한 자리로서 사구가 된 공자는 옥송(獄訟)의 판결을 내리기에 앞서 항상 많은 사람들의 의견을 경청하였다고 한다.

공자가 사구 벼슬을 하는 동안에 있었던 여러 잡사들이 공자가어에 조목조목 기록되어 있는데 그 내용들을 훑어보면 흥미로운 장면이 많이 있다.

즉 공자가 사구가 된 뒤로는 노나라에서 양에게 물을 억지로 먹여 체중을 늘려 팔았던 양 장수 심유(沈猶)씨는 다시는 물을 억지로 양에게 먹이지 않게 되었고, 음탕한 처를 두었던 공신(公愼)씨는 즉시 처를 내쫓았고, 사치하고 방자하게 굴던 심궤(愼潰)씨는 곧 국외로 이사를 갔고, 에누리가 많던 가축 장수들은 다시는 바가지 씌우는 값을 부르는 일이 없게 되었다고 한다. 그 결과 노나라 사람들은 남녀를 구별할 줄 알게 되고, 길가에 떨어져 있는 물건들도 자기 것이 아니면 줍지 아니하게 되고, 남자는 충성과 신용을 숭상하게 되고, 여자는 정절과 순종을 숭상하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25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가축의 체중을 불리려 억지로 물을 먹이는 부정식품 행위와 극심한 성매매가 판치는 음탕한 풍토와 물질 만능의 사치와 허영이, 이익을 위해서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부정한 상도의가 횡행하고 있으니, 그렇다면 인류의 역사는 공자의 시대에서 한 발자국도 진화하지 못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다. 부정과 성에 대한 쾌락과 퇴폐와 사회악이 더욱더 만연되고 있으니, 인류의 역사는 오히려 퇴보되어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공자가 사구의 지위에 있을 때 정치가로서의 면모를 엿볼 수 있는 에피소드가 하나 전해 내려오고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번은 어떤 부자가 맞고소한 사건이 일어났다. 공자는 아버지와 아들을 한 감방에 석 달 동안 가두어 놓을 것을 명령하였다. 석 달이 지나자 아버지 편에서 먼저 뉘우치고 고소를 취하하니 공자는 이들을 모두 풀어 주었다. 이를 알게 된 계환자는 성을 내면서 말하였다.

사구가 나를 속였구나. 전에 그는 내게 말하기를 국가를 다스리는 데 있어서는 반드시 효도를 앞세워야 한다고 하였다. 나는 지금 불효자를 처벌하여 백성들에게 효도를 가르쳐 주는 좋은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용서를 해주다니.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계환자의 불평을 들은 제자 염유()는 공자를 찾아가 그대로 말을 전하였다. 염유의 자는 자유(子有)로서 공자보다 29세나 아래였는데, 특히 정치적 재능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특히 염유는 권신인 계씨편에 밀착하여 공자의 제자일 뿐 아니라 계씨의 가신까지 겸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태도를 공자는 내심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훗날 염유가 계씨의 편에 서서 가렴주구를 돕는 사실을 알게 되자 공자는 불같이 노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고 논어는 기록하고 있다.

계씨는 주공보다도 부유했는데 염유는 그를 위하여 세금을 거둬들임으로써 그의 부를 더해 주었다. 이에 공자는 말씀하셨다.

그는 나의 제자가 아니다.너희들은 북을 울리며 그를 공격해도 괜찮다.’”

염유에 대한 공자의 애증은 논어의 다른 장면에서도 엿볼 수 있다.

염유가 공자에게 저는 선생님의 도를 좋아하지 않는 것은 아니나 힘이 모자랍니다.’라고 말하였을 때 공자께서는 말씀하셨다.

힘이 모자라는 자는 중도에 그만두게 되어 있는데, 지금 자네는 스스로 움츠리고 있네.’”

이러한 예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염유는 권신 계환자의 불만을 공자에게 그대로 전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염유로부터 이 말을 전해 들은 공자는 탄식하여 말하였다.

아아, 윗사람은 자기 도리를 지키지 못하면서 아랫사람을 죽인다는 것은 이치에 어긋나는 일이다. 효도는 가르치지도 않고 오직 그 죄만을 다스린다는 것은 무구한 사람을 죽이는 일이다. 삼군(三軍)이 크게 패했다 하더라도 군사들을 처형해서는 안 되며 재판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형벌을 가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윗사람의 교화가 행하여지지 않는 것은 그 죄가 백성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자는 이처럼 백성들의 죄에 대해서는 너그러웠지만 백성들에게 모범을 보여야 할 높은 자와 가진 자의 죄를 묻는 데는 엄격하였다.

그것은 공자의 정치철학에서 비롯되는데, 공자는 위정자 자신이 올바르면 명령을 내리지 않아도 제대로 되고 위정자 자신이 올바르지 못하면 명령을 내려도 백성들이 따르지 않는다(其身正 不令而行 其身不正 雖令不後).’라고 말함으로써 언제나 다스리는 자의 모범이야말로 백성 다스리는 척도임을 강조하고 있었던 것이다.

공자는 이처럼 아버지와 아들 간의 다툼에는 너그러웠지만 벼슬이 높은 권신의 위법에는 추상과 같이 엄격하였다.

1년 뒤 공자가 나라를 다스리는 재상인 대사구(大司寇)의 벼슬에 있었을 때 정치를 어지럽힌다는 애매한 이유로 대부인 소정묘(少正卯)를 죽여 그 시체를 사흘 동안 저잣거리에 내건 적이 있었다.

이때 제자인 자공이 소정묘는 노나라의 명사인데,지금 선생님께서 처형해 버린 것은 잘못하신 일이 아닐까요.’하고 묻자 공자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앉거라. 내가 그 까닭을 설명해 주마. 천하에는 대악(大惡)이 다섯 가지가 있는데, 도적질은 그곳에 들지도 않는다. 첫째는 마음이 반역적이고 음흉한 것이다. 둘째는 행동이 편벽되면서도 고집 센 것이다. 셋째는 말이 거짓되면서도 번지르르하게 꾸며대는 것이다. 넷째는 아는 것이 없어 추하면서도 넓은 것이다. 다섯째는 그릇된 부정한 길을 따르면서도 윤택하게 지내는 것이다. 이 다섯 가지는 어떤 사람이든 한 가지만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처형을 면할 수가 없는 법인데, 소정묘는 이것을 모두 지니고 있다. 그의 일상생활은 무리를 모아 도당(徒黨)을 이루기에 족하였고, 그의 말은 사악함을 꾸미어 사람들을 미혹시키기에 족하였고, 그의 권세는 옳지 않은 것에 반하여 지나치게 높았다. 이는 곧 간악한 간웅이니, 마땅히 없애 버리지 않을 수가 없는 법이다.”

 

# 苛斂誅求(가렴주구)

苛斂誅求(가혹할 가/거둘 렴/꾸짖을 주/구할 구), ‘가혹하게 세금을 거두거나 백성들의 재물을 강제로 빼앗는다.’는 말이다.

자는 본래 (풀 초)(옳을 가)를 합하여 애기풀의 싹을 나타내었다. 자는 ‘(상대방의 말을) 들어주다라는 뜻의 글자. 자는 본래의 이외에도 독하다’‘까다롭다’‘무겁다’‘꾸짖다등의 뜻이 있다. 苛責(가책:엄중한 꾸지람), 苛虐(가학:가혹하게 학대함) 등에 쓰인다.

자는 모으다라는 뜻이었는데 후에 감추다’‘넣어 두다등으로 확대 사용되었으며, 대표적 用例(용례)斂容(염용:몸가짐을 조심하고 용모를 단정히 함), 收斂(수렴:돈이나 물건 따위를 거두어들임)을 들 수 있다.

자는 (말씀 언)(붉을 주)를 합쳐 죄를 추궁하기 위해 토벌하다.’라는 뜻을 나타내었다. 그밖에도 자의 뜻은 베다’‘책망하다’‘덜다’‘죽이다등으로 확대되었다. 誅戮(주륙:죄인을 죽임)誅責(주책:깊이 책망함)은 흔히 쓰인다.

자의 원래 의미는 짐승의 털가죽으로 만든 옷인데, ‘’(찾을 구)자와 발음이 같아 구하다’‘찾다라는 뜻으로 더 널리 쓰이자 본래의 뜻을 살리기 위해 (갖옷 구)자를 만들어 썼다. 흔히 접할 수 있는 의 용례에는 求乞(구걸:남에게 곡식 따위를 거저 달라고 청함), 渴求(갈구:애가 타도록 찾음) 등이 있다.

柳宗元(유종원)捕蛇者說(포사자설)에는 苛斂誅求의 단면을 보여주는 逸話(일화)가 전한다. 永州(영주) 고을에는 猛毒(맹독)을 품고 있는 뱀이 棲息(서식)하고 있어 인명 피해가 잇따랐다. 毒蛇(독사)에 한 번 물리면 곧바로 목숨을 잃지만, 반면에 惡性(악성) 疾患(질환)의 치료약으로도 쓰였다. 朝廷(조정)에서는 이 뱀을 약으로 쓰기 위해 1년에 2마리를 進上(진상)하는 사람에게는 租稅(조세) 減免(감면)의 혜택을 부여하였기 때문에 목숨을 걸고 이 일에 從事(종사)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蔣氏(장씨) 성을 가진 사람은 삼대째 이 일을 하다가 결국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목숨을 잃고 말았으나 장씨는 아버지를 이어 뱀 잡는 일을 하였다. 주위에서 이유를 묻자, “가혹한 세금에 시달려 生活苦(생활고)로 죽든, 뱀에 물려 죽든 마찬가지이나, 2마리면 해결되기 때문에 위험을 무릅쓰고 뱀을 찾아 나선다.”라고 하였다.

禮記(예기) 檀弓篇(단궁편)에는 苛政猛於虎(가혹할 가/정사 정/사나울 맹/어조사 어/범 호)라는 말이 나온다. 춘추시대 말엽 ()나라 백성들의 삶은 爲政者(위정자)虐政(학정)과 심한 收奪(수탈)로 몹시 어려웠다. 공자는 이러한 정치에 환멸을 느껴 제나라로 가던 중 허름한 무덤 곁에 앉아 구슬피 우는 여인을 만났다. 사연인즉 시아버지, 남편, 아들을 모두 호랑이가 잡아먹었다는 것이었다.

이에 공자가 그렇다면 이 곳을 떠나서 사는 것이 어떠냐.”고 묻자 여인은 여기서 사는 것이 차라리 괜찮습니다. 다른 곳으로 가면 무거운 세금 때문에 그나마 살 수도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공자는 제자들을 향해 가혹한 정치는 호랑이보다 더 무섭다.”라고 하여 善政(선정)重要性(중요성)을 일깨웠다.

이처럼 정치가로서 뛰어난 역량을 펼친 공자는 마침내 오래전부터 꿈꿔왔던 대로 삼환씨의 세력을 제거하고 노나라의 임금인 정공을 중심으로 한 정권의 회복과 군사력의 통일을 꾀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삼환씨의 도성인 세 성을 허물기로 결단을 내린 것이었다. 세 성이란 계손씨의 도성인 비()와 숙손씨의 도성인 후(), 맹손씨의 도성인 성()을 가리키는데, 이것들은 모두 삼환씨들에게는 군사상 중심을 이루는 요새로, 만약 이 도성들을 허물 수가 있다면 자연적으로 왕권이 강화될 수 있었던 것이다.

먼저 공자는 정공에게 다음과 같이 건의하였다고 사기는 기록하고 있다.

신하된 자는 무장된 병사를 개인적으로 소유해서는 안 되며, 대부의 도성이라도 높이가 백치(百雉)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정공은 공자의 건의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삼환씨의 도성을 허물어 버릴 수만 있다면 왕권이 강화되는 것은 분명한 일이었으나 문제는 권신들인 삼환씨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었던 입장이었다. 그러나 의외로 삼환씨와 이해가 맞아떨어지게 되었는데, 그것은 삼환씨들도 자신들의 가신들인 양호와 공산불뉴가 이 도성들을 근거로 반란을 일으켜 이곳에 대해 위협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내란을 일으켰던 양호는 삼환씨들이 힘을 합쳐 제나라로 쫓아버렸지만 공산불뉴는 아직도 비의 도성을 근거지로 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정공의 윤허를 받은 공자는 즉시 이를 결행하였다. 정공과 삼환씨,그리고 공자 이처럼 삼자의 이해가 맞아떨어지는 절호의 찬스는 그야말로 천재일우(千載一遇)였던 것이다.

공자는 자신의 제자 중에서 가장 용감하고 무예가 뛰어난 자로를 계환자의 가재(家宰)로 임명하고 가장 세력이 약했던 숙손씨의 후 고을을 먼저 점령하였다. 고을을 점령하자마자 공자는 성을 허물고 사병들을 해체하였다.

두 번째로 계손씨의 도성인 비 고을을 공격하였는데, 이곳에서 반란을 꿈꾸고 있던 공산불뉴는 공자의 군사가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자 불과 같이 노하여 말하였다.

머리가 움푹 들어간 공구가 감히 내 도성을 넘보다니, 이 기회에 공구의 목을 베어 저잣거리에 내걸어 들짐승의 밥이 되게 하리라.”

과연 공산불뉴의 반격도 만만치가 않았다. 오히려 관군을 물리치고 노나라의 왕도인 곡부를 공격하니 정공을 비롯한 공자는 임시로 계환자의 집으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공산불뉴가 이끄는 반군의 기세는 등등하여 정공과 삼환씨가 피신한 계씨궁의 무자(武子)의 대()에 이르렀다. ‘무자의 대는 곡부의 동문에 있는 계환자의 선조인 계무자(系武子)가 쌓은 누대였는데, 공산불뉴의 반군은 이곳을 포위 공격하여 풍전등화의 위기였으나 공자는 태연하여 눈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반란군의 공격이 뜸해지기를 기다려 공자는 신구수(申句須)와 악기()라는 두 장수로 하여금 정예군을 거느리고 나아가 반군을 급습하게 하였다. 이 싸움에서 크게 패한 반군은 고멸(姑蔑)이란 고장으로 물러났는데, 공자는 이 기회에 아예 공산불뉴를 섬멸시켜야 한다고 결심하고는 끝까지 공격하였다.

마침내 전쟁에서 패한 공산불뉴는 제나라로 도망칠 수밖에 없었는데, 이로써 삼환씨의 세 도읍 중 가장 강력한 세력을 떨치던 비 땅이 점령되어 공자의 오랜 숙원대로 성읍을 완전히 파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제 남은 성은 단하나.

맹손씨의 성읍인 성()이었다. 오늘날 산둥성 제령도의 영양현(寧陽縣)인 이곳을 파괴한다면 공자의 오랜 숙원대로 삼환씨의 근거지인 세 읍이 모두 파괴되어, 그들의 권력을 약화시키려는 공자의 정치개혁은 완성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막상 마지막 본거지인 맹손씨의 성읍을 파괴하려 하자 읍장인 공렴처보(公斂處父)가 맹손씨에게 반대하여 말하였다.

성 땅을 파괴하면 제나라 사람들은 반드시 노나라의 북문을 급습할 것입니다. 또 성 땅은 대대로 맹손씨의 요새입니다. 성 땅이 없어진다는 것은 맹손씨는 결사적으로 싸우다 전멸한다는 뜻과 같은 것입니다. 부디 이곳을 허물지 말아주십시오. 심각한 후유증이 피차에 남을 것입니다.”

공렴처보의 말이 삼환씨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들은 반란군을 이끄는 공산불뉴를 쳐부수기 위해 공자의 말에 일단 동의하였지만 공산불뉴를 제나라로 쫓아 버린 이상 자신들의 요새를 더 이상 파괴할 필요는 없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또한 그들은 자신들의 요새를 끝까지 파괴하려는 공자의 속셈이 어디에 있는가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공자는 초기의 결심대로 군사를 이끌고 성 땅을 포위 공격하였으나 삼환씨의 도움을 받지 못하였으므로 성공을 거두지는 못하였다. 비록 세 고을의 성을 허무는 완전한 성공을 거두지는 못하였지만 후와 비의 두 성읍을 허물었고, 양호와 한 패거리였던 역신 공산불뉴를 국외로 추방하였으므로 모처럼 노나라에는 평화가 찾아왔다.

이 평화는 모두 공자의 정치적 역량에 힘입은 것이었다. 정치가로서의 공자는 이처럼 외교적 활동은 물론 문과 무에 있어 눈부신 활동을 펼쳐 정계에 입문한 뒤 불과 4년 만에 어지러운 난세를 태평성대로 바꿔놓은 것이었다.

그리하여 공자는 이듬해인 기원전 497,55세의 나이에 이르러 대사구(大司寇)라는 벼슬에 등용된다.

대사구란 직책은 나라의 재상을 겸하는 최고의 벼슬인데, 사기에 의하면 대사구란 지위에 오르자 공자는 기뻐하는 빛을 보였다고 한다. 이에 자로가 다음과 같이 물어 말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제가 듣건대 군자는 화가 닥쳐도 두려워하지 않고, 복이 닥쳐도 기뻐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선생님께서는 벼슬을 얻고는 크게 기뻐하고 계시니 어째서입니까.”

이에 공자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그대의 말이 맞긴 하다.그러나 존귀한 몸으로 실력을 발휘하면서 아랫사람을 돌본다는 것도 즐거운 일 중의 하나인 것 같다.”

그러나 51세에 중도재가 된 이래 55세에 대사구로서 재상의 일을 겸직하는 5년 동안의 황금시대는 전혀 뜻밖의 일로 끝나게 된다.

그렇지 않아도 공자가 정치를 맡은 이래 노나라의 국력이 막강해지는 모습을 예의 주시하고 있던 제나라의 경공은 차츰 이를 두려워하게 되었던 것이다.이에 대해 사기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대사구가 된 공자는 노나라의 대부이면서도 정치를 어지럽힌 소정묘를 처형하고, 정공을 적극적으로 정사에 참여토록 하였다. 3개월이 지나자 새끼 양과 돼지를 팔고 사는 장사치들은 폭리를 취하지 않게 되었고, 보행하는 남녀가 길을 따로따로 걸었으며, 물건이 땅에 떨어져도 줍는 사람들이 없었다.

또한 노나라를 방문하는 외국인이 일일이 관리들에게 방문사유서를 제출하지 않아도 필수품을 사서 돌아갈 수 있도록 했다. 노나라의 이러한 융성함을 들은 경공은 갑자기 불안감에 사로잡혀 말하였다.

공자가 정치를 맡게 되면 노나라는 반드시 패자가 될 것이다. 패자가 되면 노나라에서 가장 가까운 우리 제나라는 가장 먼저 노나라에 합병될 것이다. 차라리 그렇게 되기 전에 먼저 땅을 떼어 주는 게 어떨까.

그러나 경공의 이런 말을 들은 대부 여서는 생각이 달랐다.

이미 3대에 걸쳐 제나라를 다스리던 안영은 수년 전에 이미 죽었고, 그 뒤를 이어 제나라를 다스리던 여서는 이 기회에 공자를 제거할 수 있는 묘계를 짤 것을 계획하고,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땅을 먼저 떼어주기 전에 우선 노나라를 정치적으로 흔들어 봅시다. 땅의 양도는 그 이후에 생각해도 늦지 않습니다.”

여서가 생각했던 노나라의 정치를 흔들어보는 계략. 그것은 미인계였다. 여서는 노나라의 임금인 정공과 계환자가 가무를 즐기고, 여색을 좋아하고 있음을 꿰뚫어 보고 이 기회에 미인계를 써서 공자와 정공의 사이를 이간질시켜 보려고 계획했던 것이다.

여서는 자신이 직접 아름다운 여인 80명을 골라 뽑았다. 자고로 경국지색(傾國之色)이라 함은 나라를 위태롭게 할 정도의 미색이란 뜻으로 여서는 노나라를 위태롭게 하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미인계뿐이라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여서는 자신이 뽑은 80명의 미녀들에게 화려한 옷을 입힌 후 모두 강락무(康樂舞)를 익히도록 훈련시켰다. 몇 개월이 지난 후 여서는 호화롭게 차려입은 미인들이 추는 강락무를 직접 열람하고 나서 이렇게 탄식한다.

옛 노래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북방에 한 가인이 있어 절세의 미인이로다. 눈길 한번 돌아보면 성이 기울고 두 번 돌아보면 나라가 기울어진다.’

그대들의 눈길 한 번에 반드시 노나라의 성이 기울어지고, 두 번 돌아보면 노나라가 기울어질 것이다.”

여서는 즉시 80명의 미인과 함께 좋은 말 120필을 골라 노나라 임금인 정공에게 선물로 보냈는데 과연 여서의 예언은 그대로 적중한다.

이들은 먼저 입궐하기 전에 제나라에서 온 문화 사절로서 도성인 곡부의 남쪽 문인 고문(高門) 밖에서 말과 예기들의 춤을 공개하였다.

소문을 들은 계환자는 남의 눈도 있고 대부의 체면도 있었으므로 평복으로 갈아입고 자신의 신분을 숨긴 후 사람들 사이에 끼어 이 공연을 며칠 동안이나 구경한다.

며칠 동안의 구경 끝에 계환자는 이를 받아들일 것을 결심한다. 그렇지 않아도 정치가로서 공자의 위세가 하루가 다르게 막강해지는 것에 대해 일말의 불안감을 느끼고 있던 계환자는 틀림없이 평소에 음란한 노래를 증오하고 있던 공자의 태도로 보아 단숨에 이를 물리칠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공자 몰래 정공을 데리고 가 구경시킨 후 이에 맛을 들이도록 하면 자연 공자와의 관계를 악화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실제로 공자는 노래를 좋아하여 음악이란 천지의 조화이며 예는 천지의 질서다.’라고 말하고 있지만 음란하고 퇴폐적인 노래에 대해서는 경계심을 갖고 있었다.

논어에 보면 공자가 음란한 노래를 미워한 사실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을 정도다.

정나라의 노래는 음란하다. 음란한 정나라의 노래가 아악(雅樂)을 어지럽힘을 미워한다.”

정나라의 노래는 주로 음란한 연애시였다. 따라서 정풍(鄭風)이란 말은 천박하고 음란한 음악의 별칭으로 불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제나라에서 온 미녀 80명이 부르는 퇴폐적인 여악(女樂)을 공자가 받아들이지 않을 것은 명백한 일이었던 것이다.

계환자는 정공에게 이를 아뢰고 교외시찰이란 명목으로 함께 변복을 한 후 몰래 찾아가 이를 구경하였다. 이들은 하루종일 춤과 노래를 구경하는 데 정신이 팔려 정사를 돌보지 않게 되었다.

마침내 제나라의 대부인 여서가 획책한 미인계가 적중하는 위기의 순간이 다가온 것이었다.

 

# 美人計(미인계), 傾國之色(경국지색)

美人計’(아름다울 미/사람 인/꾀 계), ‘傾國之色’(기울 경/나라 국/어조사 지/색 색).

姜太公(강태공)이 집필하였다는 六韜’(육도)에서는 이른바 美人計(미인계)를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무기를 써야만 상대방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먼저 상대방 신하들을 포섭해 군주의 눈과 귀를 막아버리고, 美人(미인)을 바쳐 군주를 유혹하라.”

적군의 위세가 강하고 장수의 통솔력이 출중하다면 전면전보다 적의 힘을 분산시킬 수 있는 전략이 필요하다. 이럴 때는 미리 알아서 땅을 떼어 주거나 은밀하게 뇌물을 바치거나 美人計로 상대방 장수의 넋을 빼는 등의 방법이 있다. 이 가운데 미인계는 별다른 밑천 없이 상대방의 체질을 약화시키고 自中之亂(자중지란)에 빠져들도록 하는 妙策(묘책)이다.

傾國之色혹하여 나라가 기울어져도 모를 정도의 미인이라는 뜻이다.

자는 (사람 인)(기울 경)을 조합하여 기울다.’라는 뜻을 나타내었다. 발음 요소에 해당하는 자는 본래 머리가 기울어지다.’는 뜻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었다. 후에 잠시등으로 쓰이는 예가 빈번하자 (기울 경)자를 새로 만들었다. 기울다.’란 뜻 외에도 다투다.’, ‘다치다.’ 등이 있다. 用例(용례)로는 傾斜(경사:기울어짐), 傾聽(경청:귀를 기울여 들음), 左傾(좌경:공산주의나 사회주의 따위의 좌익 사상으로 기울어짐) 등을 들 수 있다.

자는 원래 으로 썼으나 점차 혹시라는 뜻으로 많이 쓰이자 본래의 뜻을 보존하기 위하여 을 새로 만들었다. 자는 특정 지역을 나타내는 긴 창의 상형인 ’, 그리고 외부의 침입을 막기 위한 시설물인 을 합하여 방책을 설치하고 삼엄하게 경계하는 구역을 의미하였다. 후대로 오면서 점차 그 의미가 확대되어 나라를 뜻하게 되었다. 이 쓰인 단어에는 國紀(국기:나라의 기강), 國旗(국기:나라를 상징하여 정한 깃발), 國事(국사:국정), 國史(국사:자기 나라의 역사) 등이 있다.

()()을 합친 글자이다. 는 본래 발을 뜻하였으나 점차 그치다라는 뜻으로 쓰였다. 이렇게 발을 나타내는 아래에 출발선 또는 지면을 가리키는 을 넣어 어디론가 가다.’라는 뜻을 나타낸 것이다.

자는 사람 인’()병부 절’( )의 변형이 합쳐진 글자인데, ‘얼굴 빛이 본래의 뜻이라는 설과 성행위를 나타낸 것이라는 설이 있다. 에는 ’,‘’,‘여색’,‘갈래’,‘색칠하다.’ 등의 뜻이 있다. 몇 가지 용례를 들어보면 脚色(각색:희곡이나 시나리오로 고쳐 쓰는 일), 巧言令色(교언영색:아첨하는 말과 알랑거리는 태도), 色狂(색광:색에 미친 사람) 등이 있다.

傾國이라는 말의 유래는 한무제(漢武帝) 때의 歌客(가객) 李延年(이연년)이 자기 누이동생을 가리켜 한번 돌아봄에 ()이 무너지고 다시 돌아봄에 나라가 기울도다.”(一顧傾人城 再顧傾人國)라고 읊은 데에서 찾을 수 있다. 李白(이백)淸平調(청평조)’에서 모란꽃과 미인이 서로 반긴다.”(名花傾國兩相歡)라고 읊은 구절과 白居易(백거이)長恨歌(장한가)’에서 한나라 황제는 여색을 즐겨 절세의 미인을 찾는구나.”(漢皇重色思傾國)라고 한데서도 확인할 수 있다.

()나라의 마지막 왕 ()酒池肉林(주지육림)烙之刑(포락지형)을 일삼는 暴君(폭군)으로 만든 稀代(희대)毒婦(독부) (달기), ()나라의 勾踐(구천)()나라의 夫差(부차)에게 西施(서시)라는 미녀를 보내 나라를 破滅(파멸)시킨 일, 중국 封建社會(봉건사회)의 황금시대라 일컬어졌던 () 왕조를 기울게 한 楊貴妃(양귀비) 등은 역사 속에 등장하는 대표적 傾國之色이다.

논어의 미자(微子)편에는 이 장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제나라 사람들이 여악을 보내왔다. 노나라의 계환자가 이를 받아들여 즐기느라 사흘 동안이나 조회(朝會)를 하지 않았다. 공자께서는 이에 노나라를 떠났다.”

논어에는 공자가 5년 동안 정치가로서의 황금시대를 스스로 마감한 장면을 이렇게 간략하게 기록하고 있지만 실제 내용은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노나라의 임금인 정공과 계환자는 의기투합하여 제나라의 예기들과 말을 받아들인 다음 이를 즐기느라 정신이 팔려 정사를 돌보지 않게 되자 이를 지켜본 성미 급한 제자 자로가 분노하여 공자에게 말하였다.

형편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선생님은 마땅히 사직하셔야 하겠습니다. 일찍이 은나라의 마지막 왕 주왕(紂王)도 처음에는 총명하고 뛰어난 왕이었으나 달기()에게 빠져 포락지형이라는 형벌을 즐기다가 마침내 주나라의 무왕에게 토벌되어 멸망 당하고 말았습니다. 지금 노나라의 임금과 권신이 모두 여색에 빠져 있으니 노나라의 사직도 은나라의 운명과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달기.

중국 역사상 가장 뛰어난 미인이면서 음란하고 잔인한 대표적인 독부의 상징.

여러 가지 꽃잎을 짜서 그 액을 얼굴에 바르는 화장법. 즉 오늘날의 연지(燕脂)를 제일 먼저 사용하였던 전설속의 여인. 전해 내려오는 말에 의하면 달기는 은행알과 같은 눈에 복숭아 같은 뺨, 하얀 피부를 가졌으며, 도화장(桃花)이란 연지를 바르고 주왕을 미혹시켰다고 한다.

달기야말로 진짜 여자다. 지금까지 많은 여자들을 겪어봤지만 달기에 비하면 목석에 불과하다. 정말 하늘이 내려다준 여자다.”

오랑캐나라인 유소씨국(有蘇氏國)에서 공물로 보내온 달기에 빠진 주왕은 그렇게 찬탄하면서 하루종일 달기를 끼고 술을 마시며 즐기기만을 일삼았던 것이다.

이른바 술로 연못을 만들고 고기 덩어리를 걸어 숲을 이루게 한 후 많은 젊은 남녀로 하여금 벌거벗고, 서로 희롱하고, 음탕한 음악과 음란한 춤을 추게 하는 주지육림(酒池肉林)이란 말도 달기에서 비롯되었으며, 구리기둥에 기름을 바르고 그 아래 이글거리는 숯불을 피워 놓은 후 기둥 위로 죄인들로 하여금 맨발로 걸어가게 함으로써 절박한 갈림길에서 발버둥 치는 죄인의 모습을 보면서 즐기는 포락지형(烙之刑)도 모두 달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러므로 제나라에서 보내 온 여인들의 춤과 노래에 빠져 정사를 게을리하는 정공과 계환자의 모습은 머지않아 노나라의 비극적인 운명을 암시하는 불길한 전조였던 것이다.

그러나 자로의 이 말을 들은 공자는 그래도 신중하였다.그래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고 사기는 기록하고 있다.

얼마 안 있어 성밖에서 교제(郊祭)를 지내게 되어 있다. 만약 그 제사를 지내고 군주께서 제육(祭肉)을 대부들에게 나누어주기만 한다면 아직도 희망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먼저 서두를 필요는 없는 것이다.”

공자의 이 말은 끝까지 자신의 모국인 노나라에 대해서 희망을 잃지 않는 공자의 애국심을 엿보게 한다. 비록 군주가 여색에 빠져 있다 하더라도 군주로서의 예를 잃지 않는다면 일말의 가능성이 있다고 본 것이었다.

교제란 하늘에 지내는 제사로 동지에는 하늘을 남교(南郊)에 모시고, 하지에는 땅을 북교(北郊)에 모신다.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낸 후 군주는 그 제물을 신하에게 하사하는 것이 통례인데,이는 모든 신하를 공동체의 일원으로 존중하기 때문인 것이다. 공자는 조바심을 갖고 초조하게 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공자의 희망은 철저하게 무산되고 만다.이에 대해 사기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한편 계환자는 제나라의 선물인 여악을 받아들인 후 이를 즐기느라 사흘 동안이나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교제를 지내고 나서도 제기에 담았던 제육 역시 여러 대부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예를 중요시 여겨 모든 인간행동의 기준을 예로 삼았던 공자는 예를 알지 못하면 사람으로서 설 근거가 없게 된다(不知禮無以立也).’라는 가르침으로 유가의 사상을 펼쳐나가는데 공자는 더 이상 이러한 무례를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심지어 공자는 예를 인간행동의 기준뿐 아니라 백성을 다스리는 정치기능으로까지 가치관을 확산시켜 생각하고 있었다.

이는 공자가 논어에서 임금은 신하를 부리기를 예로서 하고 신하는 임금을 섬기기를 충으로 한다(君使臣以禮 臣事君以忠).’라고 말하고, ‘예와 사양으로서 나라를 다스릴 수 없다면 예를 무엇에 쓰겠는가(不能以禮讓爲國 如禮何).’라는 말을 한 것을 보면 얼마만큼 예를 중요시하였는가는 미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마침내 공자는 정공과 계환자가 군주로서의 예를 잃어버린 사실을 깨닫게 되자 미련 없이 노나라를 떠날 것을 결심한다. 그리하여 곡부를 떠나 남쪽인 둔()으로 갔을 때 기()란 사람이 공자를 전송하면서 말하였다.

선생께서는 아무런 죄도 지은 것이 아닌데 어째서 노나라를 떠나려 하십니까.”

이 말을 듣고 공자는 물끄러미 마을 앞을 흐르는 강물을 쳐다 본 후 말하였다.

내가 노래로 대답하려는데 괜찮겠소이까.”

공자가 노래로 대답하겠다는 뜻을 밝힌 것은 자신을 전송하는 기가 음악관인 태사(太師)의 신분이었기 때문이었다.

마음대로 하십시오.”

기가 고개를 끄덕이자 공자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였다.

여인들을 앞세워 나라를 망치려는 계략이라네.

나라의 기둥들이 저 꼴이라면 남은 것은 오로지 파멸일 뿐.

모름지기 군자는 멀리 도망가서 여생을 한가로이 지낼 뿐.”

공자도 군자는 마땅히 여색을 멀리해야 함을 경계하고 있었다.

부처는 여색을 구도의 가장 큰 장애물로 보고 너희들은 차라리 너의 남근을 독사의 아가리에 넣을지언정 여자의 몸에는 넣지 말라.’고 극언하고 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사람들이 재물과 색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마치 칼날에 묻은 꿀을 핥는 것과 같다. 한번 입에 대는 것도 못할 일인데 어린아이들처럼 그것을 핥다가 혀를 상한다. 모든 욕망 가운데 성욕만큼 더 한 것은 없다. 성욕의 크기는 한계가 없는 것이다. 다행히 그것이 하나뿐이었기에 망정이지 둘만 되었어도 도를 이루어 부처가 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애욕을 지닌 사람은 마치 횃불을 들고 거슬러 가는 것과 같아 반드시 횃불에 화를 입게 될 것이다.”

석가모니의 극단적인 이 말과 비교가 안 될 정도지만 공자도 여색에 대해서는 분명히 경계하고 있다.

훗날의 일이지만 공자는 위나라의 영공(靈公)이 그의 음탕한 부인인 남자(南子)와 함께 수레를 타고 거리를 쏘다니는 모습을 보고는 다음과 같이 한탄하였다고 논어는 기록하고 있다.

나는 덕을 좋아하기를 여색을 좋아하듯 하는 사람은 아직 보지 못하였다(吾未見好德如好色者也).”

논어의 양화(陽貨) 편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구절도 공자의 여성관을 짐작케 하는 것이다.

유독 여인과 소인은 다루기 어렵다. 가까이하면 공손치 않게 되고, 멀리하면 원망하게 된다(唯女子與小人 爲難養也 近之則不孫 遠之則怨).”

어쨌든 이로서 공자는 5년 동안에 걸친 정치가로서의 황금시대를 스스로 마감하고 노나라를 떠나 열국을 순회하는 고난시대로 들어서게 된다.

대사구의 재상 직을 버린 것은 55세 때였고, 자기의 이상을 정치적으로 실현할 나라와 임금을 찾아 국외로 여행길에 오른 것은 56세 때였다. 그 뒤 다시 노나라로 돌아온 것은 기원전 484, 노나라의 애공 11. 공자의 나이 68세 때였으니, 공자는 실로 13년 동안이나 열국을 주유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13년 동안의 세월은 공자의 황금시절과는 전혀 다른 문자 그대로 가시밭길이었다. 대 사상가 공자가 어째서 13년 동안이나 훗날 자신의 신세를 상갓집의 개상가지구(喪家之狗)’로 표현할 만큼 초라한 신세로 주유천하를 하였던가는 실로 미스터릭한 일로 느껴진다.

노나라를 떠나면서 태사 기에게는 모름지기 군자는 멀리 (속세를 떠나) 도망가서 여생을 한가롭게 지낼 뿐이라고 노래하면서도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세상의 바닷속에 뛰어들어 모진 고초를 받았던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수수께끼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굳이 말하자면 화광동진(和光同塵)’,빛을 부드럽게 하여 속세의 티끌과 함께한다는 뜻이 아니었을까.

마치 부처가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서 그 본색을 숨기고 인간계에 나타나고 예수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사람의 아들이 되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가 다시 부활하여 인간이 죽음을 물리칠 수 있음을 보여주었듯이 공자가 13년 동안의 가시밭길을 주유열국 하였던 것은 속세의 티끌과 같이하려는 구법행위가 아니었을까.

아이로니컬하게도 화광동진이란 말은 공자 당대의 최고의 라이벌인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말.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고, 말하는 사람은 알지 못한다. 그 이목구비를 막고 그 문을 닫아서 날카로운 기운을 꺾고 혼란함을 풀고 지혜의 빛을 감추고(和其光), 속세의 티끌과 함께하니(同其塵) 이것을 현동(玄同)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친해질 수도 없고 멀어지지도 않는다. 이롭게 하지도 않으며 해롭게 하지도 못한다. 귀하게 할 수도 없고 천하게 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천하에 가장 귀한 것이 된다.”

무릇 성인들은 인간으로서의 한계를 뛰어넘는 형극(荊棘)의 가시밭길 끝에 완성되는 것.

13년에 걸친 주유열국의 고난시절은 공자의 사상을 완성시킨 부처의 설산(雪山) 고행과 예수의 무거운 십자가와 같은 것이 아닐까.

노나라를 떠나 홀연히 자취를 감춘 공자의 마지막 모습에 대해서 사기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공자를 전송하였던 태사 기가 돌아오자 계환자가 물었다.

어떻게 되었는가.’

이에 기가 대답하였다.

떠나지 말라고 말렸는데도 기어이 떠나가고 말았습니다.’

그래 뭐라고 하던가.’

그러자 태사 기는 공자와 있었던 일을 사실대로 말했다. 자초지종을 들은 계환자는 한숨을 쉬면서 중얼거렸다.

역시 선생은 예기들의 문제를 걸어서 나를 질책하신 것이다.’”

공자가 떠난 후 노나라는 공자의 예언대로 기울어진다.이것을 상징하듯 사기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그 여름에 노의 환공(桓公), 이공(釐公)의 무덤에서 불이 났다. 남궁경숙이 그 불을 껐다.”

남궁경숙은 공자와 함께 노자를 만나러 간 사람. 공자의 노래 나라의 기둥들이 저 꼴이라면 남은 것은 오로지 파멸일 뿐이라는 구절처럼 노나라는 마침내 파멸의 길로 접어들게 되는 것이다.



목차로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