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제1부 왕도(王道) 제1장 천인무간(天人無間)

1부 왕도(王道) 1장 천인무간(天人無間)

 

너릿재 터널을 지나자 흐린 하늘에서 희끗희끗한 벌레 같은 물건들이 흩날리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이 깊은 가을에 웬 하루살이 같은 날벌레들인가 하고 눈여겨보았더니 가늘디가는 세설이었다.

광주를 출발할 때부터 잔뜩 하늘이 찌푸려 있어 비라도 뿌릴 것 같다고 생각하고는 있었지만 가랑눈은 뜻밖이었다. 찾아가는 길이 초행길이라 눈이 계속 내리면 난처하다고 생각한 것도 잠시 가랑눈은 차창에 맺힌 순간 곧 녹아 버릴 정도의 분설(粉雪)이었다.

터널을 지나자 가을걷이를 끝낸 들판이 펼쳐졌다. 들판은 텅 비어 있었고, 죽은 허수아비들이 방치된 채 드문드문 서 있었다. 탈곡하여 낟알들을 털어낸 볏단들도 빈 들판에 이리저리 나뒹굴고 있었다.

11월 중순이라 깊은 가을이라기보다는 초겨울의 느낌이 드는 황량한 들판에는 이따금 일부러 불을 태워 검게 그슬린 흔적들이 늙은 노인의 얼굴위에 피어난 검버섯처럼 점점이 박혀 있었다.

평일이 되어서 그런지 다행스럽게도 국도에는 오가는 차량들이 드물었다.그래서 비교적 차의 속력을 낼 수 있었다.화순읍 네거리에서 미리 광주에서 사전 준비해 둔 대로 J병원 앞까지는 무사히 도착하였지만 병원 앞 사거리에서 나는 차를 멈췄다.사거리에서 우회전해야 하는지 좌회전해야 하는지 순간적으로 헷갈려 정확한 기억이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길을 안내해준 P형도 내게 이렇게 말을 했었다.

길이 좀 복잡해서 몇 번을 사람들에게 물어봐야 할 것입니다.”

좀 귀찮더라도 모르는 초행길은 현지 주민들에게 물어보는 것이 현명한 일이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으므로 차에서 내려 눈에 띄는 약방 안으로 들어갔다. 약방 주인은 TV 화면을 쳐다보고 있다가 들어서는 나를 맞았다.

길 좀 묻겠습니다. 적려유허비를 가려면 어느 쪽으로 가야 합니까.”

잘 모르겠는데요.”

약방 주인은 얼뜬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며 대답하였다.

그러면 능주로 가는 방향은 어느 쪽입니까.”

능주라면 사거리에서 우회전하세요. 29호 국도를 따라가다 보면 능주가 금방 나올 겁니다.”

능주로 가는 방향을 알았으므로 더 이상 망설일 필요는 없었다. 다시 차에 올라타서 주인이 가르쳐 준 대로 오른쪽으로 우회전을 하자 과연 능주로 가는 이정표가 나타났다.

적려유허비(謫廬遺墟碑).

내가 약방 주인에게 물었던 것은 내가 지금 찾아가고 있는 곳인 적려유허비인 것이다. ‘적려라 함은 귀양 또는 유배되어 가는 곳을 말하는 것으로 적려유허비는 문자 그대로 능주로 귀양 가서 죽었던 사람을 기념하는 비가 세워져 있는 곳인 것이다.

적려유허비의 원이름은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선생 적려유허비’. 그러므로 내가 지금 찾아가고 있는 곳은 조광조란 역사적 인물이 귀양 와서 비참하게 죽은 바로 그 장소인 곳이다.

조광조.

1519(중종 14) 11.이곳 능주로 유배되어 귀양 온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정치가. 이곳으로 유배되어 온 지 불과 한 달 만인 125일 조광조는 바로 이곳에서 사약을 먹고 죽는다.

그러므로 거의 500년 전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약방 주인이 자기 손바닥 안의 고장에 있는 유적의 이름을 모르고 있다고 해서 그의 무관심을 탓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아니다. 어찌 약방 주인만을 탓할 수 있을 것인가.

오늘을 사는 우리들, 미친 광기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속에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방향감각을 잃어버린 우리들 모두는 이미 조광조뿐 아니라 역사 그 자체를 잃어버린 이방인이 아닐 것인가.

 

# 儒林(유림)

작가 최인호씨의 연재소설의 제목의 (선비 유) 자는 사람 인()과 모름지기 수(=)의 결합이다. 사람들에게 모름지기 있어야 할 (도리 도)를 닦는 선비를 뜻한다.

라는 한자는 집단을 뜻하는 (수풀 림)자와 결합되어 공자 등 聖賢(성현:성인과 현인)의 가르침을 중심으로 하는 經典(경전:성인의 글이나 언행을 기록한 책)과 그에 관련된 학문을 연구·실천하고 국가사회에 구현하고자 했던 사람을 일컫는 말이 되었다.

이러한 구조의 어휘로는 선비의 무리를 뜻하는 士林(사림)道敎(도교)가 유행이었던 고려시대에 盲人(맹인)들이 (지팡이 장)을 짚고 무리를 지어 다니며 운수를 보아 주고 숙식을 해결했다고 해서 생긴 杖林(장림), 그리고 학자 또는 文人(문인)의 모임이라는 뜻의 翰林(한림) 등이 있다.

유림은 우리의 역사 속에서 본다면 유학이 삼국시대에 정착된 후 조선왕조 건국이념의 기반이자 주 학문 및 이념으로 정립되면서 특정 學者(학자) 또는 서원 및 향교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서원은 주세붕이 설립한 경북 영주에 있는 백운동서원(지금의 소수서원)을 시초로 각 지방마다 세워져 사립 교육기관의 역할을 담당해 왔으며, 향교는 국가가 관장하는 일종의 국립 교육기관이었다.

서원과 향교에서는 유학 경전과 유교의 儀禮(의례) 내지 행동지침을 공부하는 한편, 성현들을 기리는 祭享(제향)을 통해서도 그들의 가르침과 정신을 기르는 동시에 직접 교육을 맡아 참다운 유교인을 양성하였다.

중앙의 성균관은 文廟配享(문묘배향)과 함께 국립대학의 기능을 하면서 유교 교육의 중심이 되어 국가 동량을 길러냈다.

서원이나 향교를 중심으로 한 인맥이나 學風(학풍) 형성은 성현의 가르침을 배우고 덕을 쌓아 완전한 유교인으로서의 인격을 닦은 후 성현의 도를 국가사회에 구현한다는 면도 있었으나, 출세의 한 방법으로 활용되는 경우도 있었다.

고종 21(1884) 과거제도의 폐지로 儒者(유자)들의 一身榮達(일신영달)과 현실참여의 통로가 봉쇄되면서 향교와 서원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유림은 해체의 길로 접어들고, 일부 인사들에 의해 명맥만을 유지하였을 뿐이다.

그러나 儒學(유학)에서 중요시하는 (), (), (), (), 名分(명분), 淸廉(청렴) 등은 조선 시대 내내 선비정신의 중추를 이루었다. 이러한 선비정신은 丙子胡亂(병자호란:丙子年에 오랑캐가 우리나라를 침입해 일으킨 난)壬辰倭亂(임진왜란:壬辰年에 왜구, 즉 일본이 우리나라를 침입한 난)때에는 우리나라를 지키고자 했던 의병들의 정신적 기조가 되기도 했다.

()名分(명분), 正道(정도) 등을 중요시하다 보니 옳고 곧은 말을 서슴지 않아 유배 등의 벌을 받는 경우도 많았다.

조선 중종반정 이후 연산군의 폐정을 개혁하려다 반대파의 모함을 받고 전라남도로 유배(중종14년인 1519)된 후 1개월 만에 賜藥(사약:줄 사, 약 약, 임금이 죄인에게 먹고 죽을 독약을 내려 주는 것)을 받고 죽은 조광조도 그중의 하나였다.

 

능주로 가는 29번 국도로 접어들자 다시 세설이 흩날리기 시작하였다. 터널을 지날 때보다 조금 더 알이 굵어진 가랑눈이었다. 나는 윈도브러시를 작동시킨 후 히터를 틀었다.

문득 내 머릿속으로 불과 1개월간 머물고 있던 바로 이곳 능주에서 지은 조광조의 시 한 수가 기억되어 떠올랐다. 이곳 능주를 가리키는 옛 이름, ‘능성(綾城)에서 유배 중에 지은 시라는 능성적중시(綾城謫中詩)’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누가 활 맞은 새와 같다고 가련히 여기는가.

내 마음은 말 잃은 마부 같다고 쓴웃음을 짓네.

벗이 된 원숭이와 학이 돌아가라 재잘거려도 나는 돌아가지 않으리.

독 안에 들어있어 빠져나오기 어려운 줄을 어찌 누가 알리오.”

이곳에 유배되어 온 자신을 말 잃은 마부(失馬翁)’와 같아 독 안에 들어있어 빠져나오기 어렵다(難出覆盆中)’라고 자조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조광조.

그는 도대체 어떤 이유로 이곳에 유배를 와서 아까운 나이 37세의 젊은 나이에 왕 중종으로부터 역적의 죄명을 쓰고 사약을 받고 비참하게 죽게 되었는가.

화순에서 능주까지는 10분도 채 걸리지 않는 짧은 거리. 능주에서 나는 다시 차를 세우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유허비의 위치를 물어보았다. 경운기에 무엇인가를 잔뜩 싣고 가는 노인 하나가 잘 알고 있다는 듯 손가락을 들어 자세하게 가르쳐 주었다.

이제 거의 다 온 모양이었다. 노인이 가르쳐준 대로 주유소를 끼고 좁은 길로 들어서 500m쯤 나아가자 키 낮은 울타리로 둘러싸인 몇 채의 초라한 건물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작은 주차장까지 마련되어 있어 그곳에 차를 세우고 길을 건너 건물 앞으로 다가갔다. 정문 옆에는 적려유허비를 설명하는 안내문이 철판으로 만들어 세워져 있었는데, 영문과 더불어 한글로 다음과 같은 설명문이 새겨져 있었다.

정암 조광조 선생 적려유허비 전라남도 기념물 제41호 소재지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면 남정리

이 비는 조광조(1482~1519) 선생이 이곳에서 사사 당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선생은 조선 중기 성리학자로 중종 반정 이후 연산군의 폐정을 개혁하다가 반대파의 모함을 받아 중종 14(1519) 이곳 능주면 남정리에 유배되어 1개월 만에 사약을 받고 죽음을 당하였다. 그 후 현종 8(1667) 당시 능주 목사인 민여로(閔如老)가 우암 송시열(宋時烈)의 글을 받아 이 비를 세워 선생의 넋을 위로하고 그 뜻을 되새기게 하였다.”

매우 간단한 설명문이었다. 비록 37세의 짧은 인생을 살고 갔지만 파란만장한 생애를 보냈던 조광조의 일생을 요약하여 안내판에 축소시킨다는 것은 애당초 무리였던 것일까.

나는 천천히 활짝 문이 열려져 있는 정문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이 유허비가 있었던 곳은 능성현의 북문이 있었던 곳으로 원래는 비신과 이를 보호하는 비각 일원뿐이었으나 후대에 이르러 조광조가 유배하고 있던 초가집을 복원하고 영정을 모신 사당과 강당을 증축하여 이와 같은 건물군을 이루고 있는 것이었다. 정문을 들어서자 기념관이 보였다. 아마도 이 기념관의 소유자가 조광조의 후손인 한양 조씨의 문중으로 보면 누군가가 이 사당을 지키고 관리하고 있을 법도 하지만 그 어느 곳에서도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 대신 대청마루 입구에 방명록이 펼쳐진 채 바람에 흔들리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방명록에 쓰여진 사람들의 이름을 훑어보았다. 가장 최근에 가까운 중학교에서 단체로 이곳을 찾아와 견학했는지 개인의 이름이 아닌 학교의 이름이 맨 나중에 쓰여져 있었다.

나는 고무줄로 묶어놓은 볼펜을 들어 빈칸에 내 이름을 썼다.

최상욱(崔相旭)

방명록에는 직업과 주소도 명기하도록 빈칸이 따로 마련되어 있었지만 나는 이름만 쓴 후 신발을 벗고 마루 위로 올라가 보았다.강당의 천장 위에는 애우당(愛憂堂)이란 현판이 내걸려 있었다.

풀어 말하면 근심 걱정을 사랑하는 집이란 뜻인가. 이곳에 머물면서 조광조 스스로가 지은 적중시에 나오는 활 맞은 새처럼 나라 근심과 나라 걱정에 몸부림치던 곳이란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일까.

그 의혹이 풀린 곳은 건물 안벽 천장을 따라서 빙 둘러서 있는 현판들을 본 후였다. 그중에서 내 눈을 강하게 잡아당긴 것은 조광조의 절명시(絶命詩)였다. 절명시라 함은 말 그대로 죽기 직전에 쓴 시로 일종의 유언이라고 말할 수 있는 임종게(臨終偈)인 것이다.

전해 오는 기록에 의하면 조광조는 사약을 갖고 군사들이 내려오자 모든 것을 체념한 듯 무릎을 꿇고 주위를 불러 종이와 붓을 가져오라고 일렀다고 한다. 그러고 나서 조광조는 붓에 먹을 듬뿍 찍어 종이 위에 다음과 같은 절명시를 단숨에 써 내려가기 시작하였다.

임금 사랑하기를 아버지 사랑하듯 하였고

나라 걱정하기를 내 집 걱정하듯 하였노라

하늘이 이 땅을 굽어보시니

내 일편단심 충심을 밝게 밝게 비추리(愛君如愛父 憂國如憂家 白日臨下土 昭昭照丹衷)”

임금 사랑하기를 아버지처럼 하였다.’라는 문장에서 애()를 빌려 오고 나라 걱정하기를 내 집 걱정하듯 하였다.’라는 문장에서 우()를 빌려와 애우당이란 당호를 지었음일까.

절명시를 읽고 그 뜻을 음미하면서 다시 쪽문을 지나 유허비 쪽으로 걸어가는 내 마음은 몹시 무거웠다.

그것은 사실이다.

오늘날에도 조광조란 역사적 인물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으로 엇갈리고 있다. 조광조를 현실 정치를 무시한 어리석은 이상주의자로 평가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조광조를 유교의 이념으로 지치(至治)하여 요순(堯舜)의 이상 국가를 실현하려 하였던 개혁 정치가로 높이 평가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는 것이다. 조광조의 이러한 평가중 어느 쪽이 옳은 것인가는 명명백백하게 판단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조광조가 그의 절명시처럼 임금 사랑하기를 아버지처럼 하였고, 나라 걱정하기를 자기 집 이상으로 하였다는 것을 부인하는 사람들은 없을 것이다.

그뿐인가.

조광조의 나라를 사랑하는 일편단심이 하늘의 태양이 이 땅을 내리쬐듯 오늘날에도 밝게 밝게 비추고 있다는 사실 역시 부인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오늘날 수많은 정치가들이 개혁, 개혁을 부르짖고 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그 첫 일성이 국가의 개혁이며, 사회의 일신이었다. 그러나 그 개혁은 결국 자신만의 권력을 위한 개혁이며, 자신을 반대하는 세력을 죽이기 위한 공허한 구호에 불과하였다. 개혁이 국민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 권력 집단의 독점을 위한 카르텔에 지나지 않았으며, 사회의 정화는 결국 그들이 가진 권력의 부패와 부정으로 스스로 몰락하고 말았다.

아니 그보다도

나는 소리를 내어 중얼거려 말하였다.

조광조처럼 개혁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걸고 내던진 정치가가 있었던가.

나는 본 적이 없다.

단 한 명의 정치가도 신념을 향해 목숨을 던진 사람을 본 적이 없다.아니다. 어찌 죽은 허수아비들에게 목숨까지 바랄 것인가. 그들에게서 목숨까지 바라지 않는다 하더라도 한 줌의 부끄러움이라도 볼 수 있다면 얼마나 다행일 것인가. 아아, 두꺼운 얼굴인 후안(厚顔)에 무치(無恥)이니, 그들을 지도자로 믿고 따르는 민초들만 불쌍하구나. 불쌍하고 가련하구나.

 

# 絶命(절명)

유림에는 絶命(절명)이 나오는데, (끊을,뛰어날 절)은 실()을 칼()로 자른다는 뜻으로 (목숨, 명령 명)과 결합되어 목숨을 끊다가 된다. 죽음에 다다른 것은 臨終(임할 림, 끝날 종)이라 한다. ‘죽는다를 은유적으로 북망산(北邙山)에 가다라고도 하는데, 이는 중국 하남성 낙양 북쪽의 북망산에 한나라 이후 역대 제후 등 귀족들의 무덤이 있었기 때문이다.

흔히 사람의 운명은 하늘에 있다 하여 人命(인명)在天(재천)’이라고 한다. 죽지 않고 오래 살기를 원함은 동서고금(東西古今:동양이나 서양, 옛날이나 지금을 통틀어 일컫는 말), 남녀노소(男女老少) 똑같다. 그러나 옛날에는 오늘날보다 일찍 죽었기에 두보의 시 곡강(曲江) 人生七十古來稀(인생칠십고래희, 드물 희) , 70세까지 산 경우는 예로부터 드물었다.’라고 했다. 그래서 오늘날 칠순 잔치(七十이 되는 날 하는 잔치) 축의금 봉투에 축 고희(祝 古稀)’라고 쓴다.

그리고 절친한 친구의 죽음을 뜻하는 말로 伯牙絶絃(맏 백, 어금니 아, 끊을 절, 줄 현)이 있다. 이는 중국 춘추시대에 백아라는 거문고 명수와 그가 어떠한 연주를 하더라도 무엇인지를 척척 알아맞히는 종자기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어느 날 종자기가 병으로 죽게 되자 백아는 더 이상 자기의 연주를 알아줄 수 있는 사람이 없다고 여겨 거문고 줄을 끊고 다시는 연주하지 않았다는 일에서 유래되었다.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자기를 알아주는 친구라는 뜻인 知音(알지, 소리 음)’도 여기서 유래된 것이다.

상용어 중에는 매우 급박한 경우를 뜻하는 절체절명(絶體絶命)이 있는데, 이를 절대절명(絶對絶命)으로 잘못 쓰는 사례가 있다.

 

쪽문을 지나자 비각이 나타났다. 정면 1, 측면 1칸의 맞배지붕으로 이루어진 작은 비각 안에 3m에 가까운 비신이 우뚝 서 있었다. 목책을 둘러 사람들이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도록 만들었지만 비교적 상세히 살펴볼 수 있었다. 비신의 앞면에는 정암조선생적려유허추모비(靜菴趙先生謫廬遺墟追慕碑)’란 총 12자의 글자가 해서(楷書)체로 반듯하게 새겨져 있었다. 비신의 뒷면 상단에는 정암조선생추모비라 전액하고 아래로는 조광조의 유배 내력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비신을 받치고 있는 귀부는 자연석에 가까운 암석으로 거북의 형태를 갖추고 있었고, 귀두도 형상만 다듬은 비교적 단순한 모습의 석비였다.

석비의 머리에는 정면으로는 두 마리의 용이 엉겨 있는 쌍룡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었고,배면에는 한 마리의 용이 구름을 타고 오르는 이수(螭首)가 반원형으로 얹혀져 있었다.

물끄러미 비신을 바라보고 있던 내 머릿속으로 문득 정문 옆에 세워진 안내판의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억되어 떠올랐다.

그 후 현종 8(1667) 당시 능주 목사인 민여로가 우암 송시열의 글을 받아 이 비를 세워 선생의 넋을 위로하고 그 뜻을 되새기게 하였다.”

안내문의 내용대로라면 이 적려유허비는 조광조가 이곳에서 사약을 받고 죽은 지 150여 년 후에 능주의 목사인 민여로에 의해서 세워진 것이다.

민여로(閔如老).

선조 31(1598)에 태어나 현종 12(1671)에 죽은 조선 중기의 문신.민여로는 자신이 능주의 목사로 재직하던 70세의 노년 때 마음속으로 흠모하던 조광조의 유허비를 건립하기로 결심하였던 것이다.

민여로의 부탁으로 비문을 지은 사람은 안내문에 나와 있는 대로 우암 송시열(宋時烈).

송시열은 조선후기 최고의 문신이자 학자로 흔히 노론(老論)의 영수(領袖)로 알려져 있는 대 유학자이다.

주자학의 대가로서 이율곡의 학통을 계승하여 기호학파(畿湖學派)의 주류를 이어왔던 빼어난 성리학자였다. 송시열 역시 말년에는 정계에서 은퇴하고 청주 화양동에서 은거하다가 1689년 왕세자가 책봉되자 이를 시기상조라 하여 반대하고 상소를 올린 후 제주로 유배되었는데, 이어 국문을 받기 위해서 서울로 올라오는 도중 정읍에서 사사되어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자신도 사약을 받고 죽는 비참한 운명을 예감하고 있었음일까. 송시열은 민여로의 부탁을 받자 망설임 없이 조광조의 비문을 짓는데, 비신의 뒷면에 새겨진 조광조의 유배 내력은 이러한 송시열의 강직한 성품을 드러내듯 힘찬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송시열의 화상은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초상화 중 최고의 걸작으로 국보 제239호로 지정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얼굴을 약간 오른쪽으로 돌려 왼쪽얼굴을 그린 모습으로 검은색 건을 쓰고,창의를 걸치고 있는 것이다.

짙은 눈썹과 얼굴을 덮은 흰 수염,약간 솟은 광대뼈,날카로운 눈매는 효종과 더불어 북벌계획을 강력히 추진하였던 강골로서의 그의 면모를 엿보이게 하고 있는 것이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송시열의 비문을 가다듬어 전서 한 사람은 민유중(閔維重).그 역시 송시열과 더불어 노론의 중신으로 경서에 밝아 사림(士林) 안에 명성이 높았던 대 유학자였다.

민유중은 숙종의 비()였던 인현왕후의 아버지로 자신의 문중인 민여로의 부탁을 받고 흔쾌히 송시열의 비문을 가다듬는 데 동참한 것이다.

당대 최고의 대 유학자인 송시열과 민유중의 합작품인 비문을 직접 글씨로 쓴 사람은 송준길(宋浚吉).그 역시 송시열과 같은 동종(同宗)으로 뛰어난 성리학자였는데,이율곡의 학통을 이어받은 당대 최고의 명필이기도 했던 것이다.

 

# 螭首(이수)

유림에는 螭首(이수)가 나온다. (뿔 없는 용 리)(벌레 충)(괘이름 리)가 결합된 한자로 가 들어간 한자의 음은 (유리 리), (떼놓을 리) 등과 같이 대부분 로 발음된다.

(벌레 충)은 머리를 바짝 치켜든, 머리가 큰 한 마리 독사를 본 떠 라고 발음했으나, 언제부터인가 몇 마리 벌레가 한 곳에서 오글거리는 모양인 의 약자로서 벌레 충이라 불리었다.

날아다니는 작은 곤충류(모기 문,벌 봉), 기어 다니는 지렁이와 뱀 종류(지렁이 인, 살무사 훼),갑각류(조개 합, 새우 하, 게 해) 등에는 대부분 자가 들어간다.

우리에게 익숙한 蛇足(사족, 뱀의 다리)이란 말에도 자가 들어간다.

蛇足은 초나라 재상인 소양이 위나라를 격파하고 이어서 제나라를 치려 하자, 제나라에 사신으로 와 있던 진()나라의 진진소양을 만나 다음과 같은 蛇足 일화를 들어 당신은 지금 재상이기에 더 이상 공을 쌓아도 필요 없으니 돌아가라.’고 회유하여 돌려보낸 일에서 유래되었다.

어떤 사람이 종들에게 한 사발의 술을 주었다. 그랬더니 조금씩 나눠 먹는 것보다는 땅바닥에 뱀을 제일 먼저 그린 사람이 모두 마시기로 합의하였다. 그런데 한 사람이 뱀의 다리까지 그리고는 술잔을 잡아 들고 으쓱거리자 다른 한 사람이 뱀은 다리가 없네, 자네의 그림은 틀렸어.’라고 하며 술잔을 빼앗아 마셨다.” 이는 史記(사기, 한나라 사마천이 지은 역사책)에 나오는 일화로 쓸데없는 일을 함을 뜻한다.

(머리 혈)과 그 위 머리털을 본뜬 글자로 신체 중 제일 윗부분이기에 머리, 먼저, 시초등을 뜻한다.

예를 들면 首尾(수미:머리와 꼬리), 首相(수상:내각의 우두머리), 首邱初心(수구초심:여우는 죽을 때 머리를 자기가 살던 굴 쪽을 향한다. 즉 고향을 그리워한다는 말로 예기라는 책에 나옴), (비석머리, 도장, 궁전의 돌 등에 뿔 없는 용의 모양을 새겨 장식한 것) 등이 있다.

 

나는 묵묵히 송준길에 의해서 쓰여진 유허비를 바라보면서 생각하였다.

조광조의 유허비는 이처럼 당대 최고의 성리학자들인 송시열과 민유중, 그리고 송준길에 의해서 완성된 것이다.

조광조가 복권이 되는 것은 그의 사후 26년 후인 인종 원년(1545), 그리고부터 23년 뒤인 선조 원년(1568)에는 문정(文正)이란 시호가 내려짐으로써 정식으로 복원이 되는데, 이렇듯 조광조는 후세에 이르러 대대로 뛰어난 성리학자들에 의해서 추앙을 받고 존경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 순간 내 머리 속으로 조광조가 29세 되던 해 진사시험에서 일등으로 합격되었던 춘부(春賦)의 내용이 떠올랐다. 시험관들이 모두 놀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은 것으로 알려진 조광조의 춘부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오고 있다.

샘물이 흘러서 끝까지 가려고 함이여

흙탕물이 섞이어 맑을 수가 없도다

위로는 하늘의 밝은 명을 더럽힘이여

아래로는 사람의 윤리와 기강이 게으르도다

즐거이 아래로 흐르면서 깨닫지 못함이여

수많은 악이 쌓이는 바로다.

(泉渭渭而欲達兮 被黃流而不淸 上褻天之明命兮 下慢人之倫紀 甘下流而不悟兮 羌衆惡之所委)”

조광조가 진사시험에서 일등으로 장원급제하였던 춘부의 한 구절을 떠올린 순간 나는 어떻게 해서든 샘물이 강물이 되어 바다에 도달할 때까지 맑음을 유지하려 애썼고, 하늘의 맑은 명(天之明命)을 깨끗이 하여 지키려고 생명을 바쳤던 조광조의 이상주의적 의지를 엿볼 수 있어 마음이 숙연해졌다.

조광조.

그는 어쨌든 자신의 의지를 개혁을 통해 관철시키려 혼신의 힘을 다하였다. 그러나 그의 이상주의적 개혁 정신은 흙탕물 황류(黃流)에 의해서 더럽혀졌으며, 윤리와 기강에 게으른 인간들의 무도에 의해서 무너지게 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사회악인 것이다.

그리고 나서 조광조는 다음과 같이 한탄하고 있다.

하늘에 있어서는 봄이요

사람에 있어서는 인이로다

모두가 태극을 근본으로 하여

다르면서도 같거니

이를 아는 사람 도대체 누구인가

(在天兮春 在人兮仁 皆本太極 異而同兮 識此何人)”

조광조는 과거시험의 제목인 봄을 노래함에서 하늘의 궁극적인 목표는 봄()이요, 사람의 궁극적인 도리는 인()으로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인은 공자(孔子)의 대표적인 사상. 그러므로 조광조는 하늘의 밝은 뜻이 완성되려면 무엇보다 사람이 도덕적으로 완성되어야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천인무간(天人無間)

조광조의 정치사상은 바로 이러한 지치주의(至治主義)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지치주의란 하늘과 사람이 하나로 연결되어있는 합일체로 보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이는 하늘의 뜻이 인간의 일과 분리되지 아니한다는 천리불리인사(天理不離人事)’로 발전하며, 사람에 의해서 다스려지는 세상이 하늘의 뜻이 실현되려는 이상사회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정치철학을 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하늘과 사람은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과 사람은 하나라는 천인무간의 정치사상이야말로 조광조가 펼친 개혁의 근본정신인 것이다.

어느덧 가랑눈은 알이 굵은 폭설로 변해지고 있었다. 비각주위로 유허비를 바라보며 깊은 상념에 잠겨 있는 동안 온 뜨락에 흰 눈이 쌓여 있었다. 기록에 의하면 조광조가 사약을 받은 125일에도 이와같이 흰 눈이 내렸다던가, 천지간에 흰 눈이 쌓여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산인지 분간할 수 없는 백설의 적막강산에서 조광조는 사약을 받고 붉은 피를 토하고 숨을 거뒀다고 전해지고 있다.

삽시간에 뒤덮인 눈빛이 조광조의 유허비로 하얗게 스며들고 있었다.

이것이 조광조의 교훈인 것이다.

나는 비각에서 떨어져 서서 그대로 눈을 맞으며 생각하였다.

후세의 우리들은 조광조를 실패한 정치개혁자로 평가하고 있다. 조광조의 이상은 훌륭하였으나 정치를 개혁하려던 그의 의지는 지나치게 성급하였던 것으로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이다. 심지어 조광조를 존경하였던 이율곡도 정암의 뜻은 훌륭하였으나 그의 행동은 지나치게 성급하였다.’라고 논하고 있을 정도인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조광조를 잘못 이해한 데서 비롯된다. 조광조는 어떤 제도나 체제를 개혁하려던 사람은 아니었다. 물론 조광조는 그런 제도와 체제의 개혁으로 수많은 정적들, 특히 수구세력으로부터 배척을 당하여 마침내는 사약을 받아 비참하게 최후를 맞은 정치가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조광조의 정치철학은 제도와 체제의 전복이 아니라 정치의 중심에 있는 지도자들의 도덕적인 천선(遷善)과 진덕(進德)으로 본 것이었다.

조광조의 정치철학을 보면 하늘은 언제나 밝고 진실하다. 사람 역시 하늘과 같아 하늘의 도리가 사람들의 이치와 어긋난 적은 없는 것이다. 임금과 백성들도 결국 근본은 하나여서 임금의 도가 백성들과 어긋난 적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하늘과 사람이 서로 어긋나게 되고 임금과 백성이 떨어지게 된 것은 사람이 도덕적으로 타락한 때문이며, 임금이 유교에서 도덕적 이상형인 군자(君子)가 되지 못한 이유 때문인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개혁은 사람이 어진 마음으로 수양을 하여 하늘에 가깝게 되고 임금이 먼저 군자가 되어 스스로의 허물을 고쳐야 하는 것이다.

조광조의 정치철학은 이렇듯 하늘과 사람이 둘이 아닌 하나천인무간(天人無間)’의 핵심사상인 것이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정치의 개혁과 사회의 정화를 체제의 전복과 제도의 개선으로 이해하고 있다.이는 절대로 불가한 것이다. 체제의 전복은 또 다른 반체제의 권력독점을 의미하며, 제도의 개혁은 또 다른 부패한 제도를 낳는다. 체제는 또 다른 체제를 낳으며, 제도는 또 다른 제도를 낳을 뿐이다. 진정한 개혁은 스스로의 개혁에 있는 것이다. 개혁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자신을 개혁하려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자신이 군자가 될 때 비로소 소인(小人)들은 사라지고 하늘과 사람이 하나이며, 임금과 백성이 하나인 이상국가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조광조의 정치철학은 바로 이러한 도덕주의에서 출발한 것이다. 그러므로 조광조를 제도 개선과 체제 개혁의 정치가로만 평가하는 것은 조광조를 두 번 죽이는 우를 범하는 것이다.

조광조도 춘부에서 그렇게 한탄하고 있지 않은가.

하늘에 봄이 오려면 사람들은 어질어야한다

이를 아는 사람은 도대체 누구일 것인가.”

하늘에 봄이 오려면 우선 사람들이 어짐()으로 수양되어야 하는데 아아, 이를 아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는 조광조의 한탄은 그가 죽은 지 500년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가슴에 공허하게 메아리치고만 있을 뿐이다.

눈발은 한층 거세어져 함박눈처럼 내리쏟고 있었다. 키 낮은 담장 너머로 초가지붕이 보였다.뜨락 앞에 웃자라고 있는 향나무에도, 초가집 지붕 위에도 눈이 덮여 삽시간에 은색 천지가 되었다. 초가집 지붕 위로는 낮은 산등성이가 어지러운 눈발에 흔들리고 있었다.

봉황이 날아가는 산이라 하여서 비봉산(飛鳳山)이라 했다던가.

나는 담장을 돌아서 초가집으로 다가가 보았다. 조광조가 한 달 동안 유배 중에 살았던 적중거가(謫中居家)는 최근에야 복원되었는데, 작은 부엌 하나에 사람이 겨우 누우면 발이 밖으로 뻗어 나갈 것같이 작은 방 두 개가 연이어 붙어 있는 초가집 마루 위로 바람이 들이쳐 쌓인 흰 눈이 참따랗게 고여 있었다.

나는 쌓인 눈을 털고 마루 위에 앉았다. 날씨가 따뜻하여 지붕 위에 쌓인 눈이 어느새 녹아 흐르는지 낙숫물이 틱, , , , 처마기슭으로 떨어져 흰 도포를 깔아 놓은 듯한 뜨락 위에 물 자국을 남기고 있었다.

나는 원칸살 방 안에 누가 살고 있는가,손으로 문고리를 잡아당겨 보았다. 그러나 한지를 바른 방문은 밖으로 굳게 자물쇠로 잠겨 있었다.

기념 문화재로 지정될 만큼 소문난 유적지였지만 내가 찾아와 어울려 있는 동안 단 한 사람의 방문객도 보이지 않는 적막강산이었다.

툇마루에 앉아서 묵묵히 뜨락 위에 내리는 눈발을 바라보고 있는 동안 문득 조광조의 편지 한 수가 기억되어 떠올랐다.

조선시대 저명한 성리학자들의 글씨를 모은 조선명현필첩(朝鮮明賢筆帖)’에는 운암주인(雲巖主人)이라는 사람에게 보낸 조광조의 편지가 수록되어 있다.

운암주인이 누구인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편지의 내용을 보면 대범하고 유머러스한 조광조의 성격이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부모님을 모시면서 요즘 어떻게 지내시는지요.또한 계씨(季氏)의 병세는 어떠한지요. 참으로 마음에 걸려 그립고 그립습니다.

귀댁의 채마밭에 있는 것을 얻어서 심고 싶은데, 나누어 주시겠습니까.

지난해 제가 보낸 작은 매화 값을 잊지는 않으셨겠지요. 껄껄, 우습습니다.

곤궁한 귀신이 이르지 않음이 없으니 또한 화초에 이르러서도 그대가 나에게 침해를 당하지 않은 것은 궁한 귀신 때문입니다. 또한 가소롭습니다.

우연히 중국산 해바라기 종자를 얻었습니다. 나누어 드리니 심어서 즐겨 감상하세요.

해바라기는 더러운 땅을 싫어한다고 하니 잘 살펴서 시행하십시오.

종이가 다해서 이 정도만 대강 써서 안부를 여쭙습니다.

상순일(上旬日) 정옹(靜翁) 올림

내용을 봐서 미루어 짐작하건대 아마도 조광조가 곤궁한 귀신에 홀려 곤경에 처해 있을 때 보낸 편지임에 틀림없으며 자신이 선물한 매화 값 대신 채마 씨를 얻어 텃밭이라도 가꾸고 싶어 하는 조광조의 유유자적한 심정이 잘 나타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중국산 해바라기 씨를 선물로 보내며 그것을 심어서 즐겨 감상하라는 조광조의 당부는 그가 지닌 풍류의 여유마저 느끼게 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해바라기는 더러운 땅을 싫어한다 하였으니 잘 살펴서 시행하십시오.’라고 당부한 조광조의 편지는 비록 자신은 더럽고 어지러운 정치의 소용돌이에 몸을 담고 있으면서도 뜻만은 태양을 따라 지조를 굽히지 않는 해바라기처럼 청천백일하게 펼치고 싶어하는 조광조의 강렬한 의지를 엿보게 하고 있는 것이다.

조광조가 만약 이곳에서 한겨울을 보내고 더 오랫동안 유배 생활을 했더라면 조광조는 저 하얗게 눈이 덮인 뜨락에 자신이 말하였던 대로 중국산 해바라기 씨를 심고 즐겨 감상하였을 것이다. 또한 채마 씨를 얻어 저 뜨락 한 쪽에 텃밭도 가꾸어 배추도 심고, 무도 심어 한가로이 적중생활을 즐겼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조광조는 이곳으로 귀양 온 지 불과 한 달여 만에 왕 중종으로부터 직접 어명을 받고 사사되는 것이다.

편지의 내용처럼 곤궁한 귀신의 장난으로 가소롭게도 사약을 받고 붉은 피를 토하며 바로 저 하얗게 눈이 덮인 뜨락 위에서 고통에 몸부림치다가 마침내 쓰러져 비참하게 숨을 거두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한 달여 동안 조광조는 이곳에서 혼자서 유배생활을 한 것은 아니었다.

집에서 데리고 온 노자(奴子) 하나와 고을 원에서 보내준 관동(官童)이 조광조를 수발하고 있었다. 특히 제자였던 장잠(張潛)은 조광조가 이곳으로 유배를 떠나자 함께 내려와 상주하고 있었던 것이다.

후에 스승 조광조를 위해 억울하게 씌워진 죄를 풀고자 하는 신원소(伸寃疏)를 올렸던 장잠은 이로써 본의 아니게 스승의 최후를 지켜보았던 산 증인이 되는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장잠뿐 아니라 조광조의 제자였던 성수침(成守琛)과 백인걸(白仁傑) 같은 사람들도 찾아와 스승에게 큰절을 드리면서 위로를 하였다고 하는 것을 보면, 조광조는 완전히 고립된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조광조의 곁을 지킨 수많은 사람 중에서 특히 양팽손(梁彭孫, 1488~1545)의 존재는 두드러진다. 양팽손은 조광조로부터 그와 더불어 이야기하면 지초(芝草)나 난초의 향기가 사람에게서 풍기는 것 같고 기상은 비 개인 후인 가을 하늘이요, 얕은 구름이 막 걷힌 뒤의 밝은 달과 같아 인욕(人慾)을 초월한 사람이라고 극찬을 받았던 평생의 지기였다.

두 사람의 나이 차는 여섯 살로 조광조가 25살 때 처음으로 만났으며, 사마시에 같은 해에 응시하여 조광조는 진사시에서, 양팽손은 생원시에서 장원 급제를 한 각별한 사이이기도 했다.

처음 양팽손이 성균관에 입학했을 때 유생들이 촌뜨기라고 놀리기도 했지만 유독 조광조만은 이를 말리고 그의 학식과 재능을 인정해 주었으며, 마침 양팽손도 조광조와 더불어 관직이 삭탈된 뒤 고향인 능성현 월곡리로 돌아와 학포당(學圃堂)을 짓고 서화에 잠심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특히 양팽손은 문인화가의 대가였는데, 그의 화풍은 한말의 허련(許鍊)에게 이어져 호남 남종화단의 선구자로 일컬어지며 파천황(破天荒)의 새로운 화풍을 이룩한 천재였던 것이다. 양팽손이 자신의 고향인 철감선사의 부도탑으로 유명한 쌍봉사(雙峰寺) 옆에 학포당을 짓고 외부와의 접촉을 끊고 있을 무렵 지은 시 한 수가 지금도 전해지고 있다.

맑은 강가에 집을 짓고 갠 날마다 창을 열어놓으니

산촌을 둘러싼 숲 그림자 그림 같고 강을 흐르는 물소리에 세상 일 전혀 못 듣네

나그네 타고 온 돛배 닻을 내리고

고기 잡던 배 낚시 거둬 돌아오니

저 멀리 소요하는 나그네는

응당 산천 구경을 나온 것이리라

강은 넓어 분분한 티끌 멀리할 수 있고

여울소리 요란하니 속된 사연 아니 들리네

고깃배야 오고가지 말아라

행여 세상과 통할까 두렵노라

이처럼 은둔생활을 하고 있던 양팽손에게 자신의 고향으로 유배돼 온 조광조야말로 하늘이 내려준 지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는 양팽손이 조광조에 있어 특별한 존재였던 것은 양팽손이 조광조의 최후를 직접 지켜보았던 증인이었을 뿐 아니라 조광조가 비참하게 죽자 그의 시신을 수습하였던 신의(信義)의 선비였던 것이다.

임금으로부터 어명을 받고 죽은 역적의 시신을 수습하는 일은 그 자체가 불법이었을 뿐 아니라 매우 위험한 반역행위였던 것이다.

양팽손은 조광조의 시신을 자신의 마을 골짜기에 파묻어 가묘(假墓)로 삼아두었다. 지금도 남아 있는 가묘터에는 역시 송시열이 쓴 정암조선생서원유지추모비(靜庵趙先生書院遺址追慕碑)’가 남아 있는데, 조광조의 시신은 한겨울 이곳에 가매장되었다가 이듬해 봄 용인의 묘소로 이장되는 것이다.

만약 양팽손이 없었더라면 조광조의 시신은 함부로 들판에 버려져 굶주린 들짐승에 뜯겨나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을지도 모를 것이다.

 

# 破天荒(파천황)

유림에 나오는 말로 破天荒(파천황)이 있다.

(깨뜨릴 파) 자는 (돌 석) 자와 (가죽 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갈 연), (바둑 기), (비석 비), (너럭바위 반) 등과 같이 자가 들어간 한자의 대부분은 돌과 관계된 뜻을 지니며, 나머지 부분이 음이 된다. 재미있는 것은 (돌 돌) 자는 자와 (새 을)이 합하여져 만들어진 우리나라 한자이다.

그리고 자가 들어간 경우는 (저 피), (피곤할 피), (덮을 피), (물결 파), (할머니 파) 등과 같이 거의 대부분이 또는 로 발음되며 나머지 부분은 뜻이 된다.

()자가 들어가는 말 중에는 요즘 안타깝게도 자주 듣는 파경(破鏡)이 있다. 이 말은 송나라 때의 설화집인 太平廣記(태평광기) 중 다음의 일화에서 비롯되었다.

()나라 궁중 관리였던 서덕언은 수()나라가 쳐들어오자 자기 나라가 패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자기의 아내는 수나라 귀족의 노예가 될 것임을 알았다. 그래서 자신이 가지고 있던 거울을 두 쪽으로 깨뜨려 한쪽을 그의 아내에게 주면서 우리나라가 패하면 당신은 노예로 잡혀갈 것이오. 그러니 우리가 부부라는 증표로 이것을 나눠 가집시다. 그리고 당신은 내년 정월 대보름날 장안의 거리에서 (누구에게 시켜서라도)이 반쪽 거울을 팔도록 하오.”라고 말했다. 과연 그의 말대로 진나라는 패하고 그의 아내는 수나라 귀족 양소의 노예가 되었다.

다음 해 정월 대보름날 서덕언은 장안 길거리에 나가 보았는데, 거기서 한 노파가 팔려고 내놓은 깨진 거울을 발견하였다. 이에 자기가 가지고 있던 깨진 거울과 맞춰 보니 딱 맞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노파에게 사연을 말하고 그 깨진 거울의 뒷부분에다 자신의 애틋한 마음을 시로 적어 보냈다.

거울을 전해 받은 아내는 食飮(먹을 식,마실 음)을 전폐하고 울기만 함에, 그 주인인 양소가 사연을 알게 되어 매우 감동하고는 같이 살게 하였다. 이처럼 파경(破鏡)이란 원래 부부를 뜻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은 글자 그대로 깨어진 거울, 즉 부부간의 이별, 파탄(破綻)의 의미로 많이 쓰인다.

그런데 파탄 또한 중국 삼국시대 적벽대전 직전에 있었던 다음 일화에서 나온 말이다. ()나라의 주유조맹덕(조조)’의 백만대군(百萬大軍)과 맞서 싸우게 되었는데, 불리할 것 같아 詐降計(거짓 사, 항복할 항, 꾀 계)를 사용하기로 하고는, ‘함택을 시켜 詐降書(거짓 항복 문서)를 바치게 하였다.

그랬더니 조조가 그 사항서를 읽고 버럭 화를 내며 네놈들은 지금 꾀를 부리고 있구나. 내 네놈들의 綻露(터질 탄, 드러낼 로:허점)를 알려 주노니, 왜 항복시간을 명시하지 않았느냐?”하는 것이었다. 이에 함택이 主人(조조를 뜻함)을 배반하는데 어찌 시간을 정하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조조는 자신이 속았음을 깨달았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그사이에 주유는 군사 배치를 끝냈고 조조는 결국 주유에게 크게 (패할 패)하고 말았다.

이 사건은 실로 未曾有(미증유)라고 할 수 있을 만한 속임수 중의 하나였다. 未曾有일찍이 없었다.’는 말인데, 이와 같은 뜻으로 前代未聞(전대미문:예전에 미처 들어보지 못함)’ 또는 다음 일화에서 나온 파천황(破天荒)’ 등이 있다.

당나라 때 형주(荊州)라는 지방은 文人이 많은 고장임에도 불구하고 500년 동안이나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없었기에 天荒(천황:옛날부터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는 황무지를 뜻하는 말이기에 유명한 인물이 나오지 못한 편벽한 땅을 지칭함)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그러던 중 선종 4(850)유세라는 사람이 과거에 급제함에 따라 天荒을 깼다 하여 마침내 破天荒이라 불리게 되었다. 그래서 파천황은 전례(前例)가 없는 일을 처음으로 하다.’ 또는 최초등을 뜻한다.

전해오는 바에 의하면 조광조의 사사소식을 제일 먼저 안 사람이 바로 양팽손이라고 알려져 있다.

조광조는 설마 왕 중종이 자신에게 사사의 명을 내릴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다고 한다. 따라서 조광조는 왕이 자신을 다시 불러들일 것을 대기하기 위해서 항상 사립문을 열어놓고 있었으며, 아침저녁으로 임금이 있는 곳을 향해 문안 인사를 잊지 않았다고 전해오는 것이다. 또한 하루 종일 북쪽을 바라보고 앉아서 나라 걱정을 하였다고 하는데, 그러나 막상 왕은 조광조 등 네 명에게 마침내 사약의 어명을 내리는 것이다.

그때가 중종 14(1519) 1216.실록에 의하면 왕은 비현각(丕顯閣)에서 금부당상(禁府堂上) 심정(沈貞) 등을 불러서 조광조에게 사사할 것을 직접 명을 내리는 것이다.

그리하여 임금의 어명이 직접 조광조에게 전해진 것은 1220(125일이라 전기한 것을 바로 잡는다).임금이 하명한 지 나흘 뒤의 일인 것이다.

그러나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고 양팽손은 당사자인 조광조보다 하루 먼저 이 기막힌 소식을 들었다.

양팽손은 당장에 조광조에게 달려갔으나 정작 조광조는 자신에게 닥쳐올 운명에 대한 불길한 예감조차 느끼지 못한 듯 태연하기만 하였다. 차마 미구에 닥칠 불행에 대해서 귀띔하지 못하고 전전긍긍하고 있는 양팽손에게 오히려 조광조는 다음과 같이 위로하였다고 한다.

양공, 너무 서러워하지 마시오. 우리가 이처럼 화를 당하는 것은 시운(時運)이나 옛말에 이르기를 절함(折檻)이라 하였소. 양공은 절함의 뜻을 알고 있지 않소이까.”

물론 양팽손은 조광조의 말뜻을 알고 있었다.

절함이라 함은 난간을 부러뜨린다라는 뜻으로 한나라 성제(成帝)때의 인물인 주운(朱雲)이란 사람에게서 비롯된 말이었다. 당시 성제에게는 장우(張寓)란 정승이 있었다. 그는 성제가 황태자였을 때 공자의 논어를 가르친 인연으로 성제의 스승이 되어 존경을 받고 있었다. 그러니 자연히 천하의 권세가 그에게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주운은 이를 간하고자 조정으로 나아가 말하였다.

지금 조정의 대신들은 위로는 폐하를 바르게 인도하지 못하고, 아래로는 백성을 등쳐먹는 도둑들뿐입니다. 제게 참마검을 하사하신다면 폐하의 영신(佞臣:간사한 신하) 한 사람의 목을 베어 다른 대신들의 경계를 삼고자 합니다.”

조정에 모인 대신들이 이를 듣고 크게 놀라 술렁거렸다. 성제가 물었다.

그 영신이 누구더냐.”

장우이나이다.”

주운은 서슴없이 충고했다. 성제는 크게 노하여 소리쳤다.

일개 하급 관리가 임금의 스승을 모욕하다니 그대는 사형에 처해도 시원치 않으니, 당장 끌어내라.”

성제의 명령에 무관이 달려들어 주운을 끌어내려 하였으나 그는 어전의 난간에 매달려 붙잡고 늘어졌다. 그래도 그는 간언을 멈추지 않았다. 무관이 더욱 힘껏 그를 잡아끌었으나 그럴수록 주운은 난간을 더욱 힘껏 붙잡고 더욱 큰소리로 간언을 하였다. 그 바람에 난간이 부러지고 말았다.

훗날 부서진 난간을 수리하려고 하자 성제는 이렇게 말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새로 난간을 갈지는 말고, 부서진 조각을 모아서 이어두도록 하라. 직언을 간한 충절의 신표로 삼고 싶구나.”

조광조는 양팽손의 손을 잡고 다음과 같이 말을 하였다고 한다.

양공 우리는 지금 난간을 부여잡고 대왕마마께 간언을 하고 있는 것뿐이오. 난간이 부서진들 어찌 그것을 놓을 수가 있겠소이까. 하오나 양공.”

조광조는 눈물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대왕마마께오서는 신에게 다시 참마검을 내릴 것이오. 그러니 너무 심려치는 마시오.”

참마검(斬馬劍).

말의 목을 베어 신표로 삼는 검. 그러나 그 칼로 목이 베어지는 사람이 바로 자신이었음을 조광조는 이처럼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중종 14(1519) 1216.한 떼의 군사들이 조광조가 머물고 있는 적중거가로 쳐들어 왔다.

어명이오.”

앞장선 금부도사가 말에서 내려 큰소리로 소리쳐 말하였다. 이 말을 들은 조광조는 황망히 집에서 나와 뜰아래로 내려가 북쪽을 향하여 두 번을 절하고 꿇어앉았다.

대왕마마께오서는 전지(傳旨)를 내리셨소.”

금부도사가 무릎을 꿇은 조광조를 향하여 엄숙하게 말하였다. 처음에는 혹시나 조정으로부터,유배의 명을 거두는 희소식일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 들떠 있었으나 엄숙한 금부도사의 태도로 보아 좋지 않은 소식일 것이라는 예감으로 삽시간에 분위기가 가라앉고 있었다.

대왕마마께오서는 사사의 명을 내리셨소.”

금부도사의 이름은 유엄.그는 임금으로부터의 전지를 차근차근 전하기 시작하였다. 일순 꿇어앉았던 조광조의 자세가 휘청거렸다. 초가집 담에 몸을 숨기고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양팽손은 마침내 올 것이 오고야 말았구나 하는 충격으로 간신히 담을 짚고서야 몸의 균형을 바로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휘청거렸던 조광조의 몸이 잠시 후 다시 꼿꼿이 세워졌다.

이보시오.금부도사.”

조광조는 조용히 입을 열어 말했다.

어찌하여 도사께서는 신에게 죽음을 내린다는 명령만 전할 뿐 그 밖의 문서는 전하지 않는 것이오.”

며칠 전부터 내린 눈은 폭설이 되어 무릎을 꿇어앉은 조광조의 몸을 사납게 때리고 있었다. 그러나 유엄은 품속에서 흰 종이를 꺼내 보이며 말하였다.

죄인이 어찌하여 요사스럽게도 어명을 확인하려 드는가.”

준엄한 꾸짖음에 조광조가 다시 머리를 조아리며 말을 받았다.

물론 신은 죄인이오.하오나 신은 일찍 대부(大夫)의 자리에 있었는데, 사사에 이르렀음에도 어찌하여 종이쪽지만 주어 도사에게 죽음을 전하게 할 수 있는 것이오. 물론 도사의 말이니까 믿기는 하겠지만 나라에서 대신에 대한 대접이 어찌하여 이리 초라할 수 있는 것이오.”

조광조의 말은 사실이었다.

대부란 정1품부터 종4품까지의 고위대신을 가리키는 말로 예부터 사사의 형벌을 내리는 것은 왕족이나 또는 사대부들에게 그들의 사회적 신분을 고려하여 교살(絞殺)이나 참살(斬殺)하는 대신 사약을 마시게 함으로써 죽은 후에라도 신체를 보존케 하려는 특별한 배려가 담긴 사형제도였던 것이었다. 원래 사사는 임금이 내리는 사약을 마셔 사망하게 하는 사형제도였지만 형조에서 관장하는 법전인 형전(刑典)에는 규정되어 있지 않은 법외형 중의 하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조광조의 말처럼 왕명을 전하는 금부도사가 왕의 교지가 담긴 문서가 아닌 단순히 쪽지에 불과한 종이를 펼쳐 보이는 것은 법도에 어긋난 일이었던 것이다.

이는 조광조가 자신을 죽이려는 저의가 대왕마마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정적들로부터 비롯된 것이라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비난하였던 것이었다.

이런 폐단은 간사한 무리들이 사람을 마음대로 죽일 수 있을 뿐 아니라 사약을 받은 사람이 한마디의 변명조차 할 수 없도록 선수를 치는 수단이 아닐 것인가.”

조광조의 이런 탄식은 자기에게 내려진 사사가 어명임을 믿기는 하나 간사한 무리들의 농간으로 대왕마마도 모르게 죽이려는 간계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꼬집어 말한 것이었다.

그러고 나서 조광조는 대왕마마의 안부를 물었다고 기록은 전하고 있다. 유엄이 대왕마마의 안부를 전하자 조광조는 다시 입을 열어 물었다.

하오면 도사 내 한 가지만 묻겠으니 대답해 주시겠습니까.”

난데없는 조광조의 질문에 머뭇거리며 유엄이 대답하였다.

대답하겠소.”

하오면 도사, 지금의 정승은 누구며, 금부당상이 누군지 좀 가르쳐 주시겠소.”

약속대로 유엄은 대답하였다.

정승은 남곤(南袞) 나으리고, 당상께오서는

위엄은 잠시 말을 끊었다. 그도 그럴 것이 금부당상은 바로 유엄의 직속 상관이었기 때문이었다.

당상께오서는 심정대감이시오.”

도사 입에서 흘러나온 남곤과 심정 두 사람의 이름을 듣는 순간 조광조는 비로소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하였다.

그렇다면 신이 죽는 게 틀림이 없소이다. 신에게 사사의 명이 내린 것이 조금도 의심스러울 게 없소이다.”

남곤과 심정.이 두 사람은 훈구세력들의 거두들로서 바로 조광조를 제거하였던 정적들의 핵심인물이었던 것이다.

조광조가 능성으로 유배를 떠날 때만 해도 영의정은 정광필(鄭光弼)이었다. 그러나 정광필은 비교적 조광조에게 호의적이어서 조광조에게 내린 참형의 죄를 왕 앞에 나아가 극구 주장하여 감형시켰던 노대신이었다. 그뿐인가. 조광조에게 내린 장형(杖刑)도 그가 병약한 몸이라는 이유를 들어 감하여줄 것을 간청하였던 생명의 은인이었던 것이었다. 그런데 불과 한 달여 만에 정승이 정광필에서 남곤으로 바뀌어졌으며, 형을 집행하는 금부당상 역시 심정으로 바뀌어진 것이었다. 그러하면 자신에게 사사의 명이 내려진 것은 추호도 의심할 수 없는 명백한 사실이라는 것을 조광조는 비로소 깨달은 것이었다.

이보시오, 도사.”

조광조는 다시 입을 열어 말하였다.

한 가지만 더 묻겠소.조정에서는 신을 어떻게들 말하고 있소이까. 들은 대로만 전해주시오.”

한나라 때의 왕망과 같은 사람이라고 말들을 하고 있더이다.”

그 순간 기록에 의하면 조광조는 허공을 향해 큰 소리를 내어 웃었다고 전한다. 그 웃음소리가 너무 커서 주위 사람들을 모두 놀라게 했다고 전하고 있다.

왕망이라고.허허 헛 허허.”

조광조는 눈이 소복이 쌓인 뜰을 손으로 내리치며 웃었다.

왕망(王莽).

금부도사의 말처럼 한()나라 때의 정치가. 권모술수의 야심가로서 역사상 최초로 선양혁명(禪讓革命)에 의해서 황제의 권력을 빼앗은 독재자.

불우하게 자랐으나 유학을 배웠고 어른을 잘 챙겼으므로 큰아버지 왕봉(王鳳)의 신임을 받았던 왕망은 마침내 반역에 성공하여 재상인 대사마(大司馬)가 되었다가 9세의 평제(平帝)를 옹립하여 자신의 딸을 왕후로 삼음으로써 천하의 권세를 움켜잡는다. 나중에는 황제를 독살한 후 오행참위설(五行讖緯說)을 교묘히 이용하여 안한공 왕망은 황제가 되라라는 붉은 글씨가 쓰여진 흰 돌이 나타나게 함으로써 인간에게 표시되는 하늘의 명령을 부명(符命)으로 이용하여 황제를 몰아내고 스스로 황제위에 올랐었다. 그러나 왕망은 마침내 한나라 왕족의 한사람인 유수(劉秀)의 군대에 쫓겨 장안의 미앙궁(未央宮)에서 부하의 칼에 찔려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되는 것이다.

이보시오, 도사.”

허공을 향해 큰소리로 껄껄 웃고 나서 조광조는 다시 유엄을 쳐다보며 말하였다.

왕망이라면 사사로운 욕심으로 왕을 죽이고 스스로 황제에 올라 자신을 가황제(假皇帝)라 칭하고 신하들에게는 섭황제(攝皇帝)라 부르게 하였는데, 그렇다면 도사, 신이 대역을 꿈꿔 대왕의 위를 노려 반정이라도 꿈꿔 왔단 말이오. 헛허허.”

순간 조광조는 다시 껄껄 소리 내어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내 이제야 어찌하여 그들이 신을 왕망이라고 일컬었는지 그 이유를 알겠소.”

다시 조광조가 땅을 치며 웃었다. 모습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행여 조광조가 실성이라도 한 것이 아닐까 염려할 정도로.

그렇지, 그들의 눈으로 보면 나야말로 왕망이지. 왕망임에 틀림이 없지.” 조광조의 말에는 깊은 의미가 담겨져 있었다.

일찍이 왕망은 황제의 권력을 빼앗는 혁명을 일으킬 때 당시 유행하던 참위설을 교묘히 이용하였던 것이다.

왕망은 안한공 왕망은 황제가 돼라.’라는 붉은 글씨가 쓰여진 흰 돌이 나타나게 하고 왕망이 황제가 돼라.’라는 하늘의 표시로 간주되는 새 우물을 출현시키는 연극을 꾸몄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조광조도 왕망처럼 하늘의 명을 교묘히 이용하였다는 소문이 온 장안에 가득히 퍼져 나갔던 것이었다.

조광조 역시 그 소문을 알고 있었다.

즉 대궐 안 동산에서 벌레들이 나뭇잎을 긁어먹었는데, 그 나뭇잎에 다음과 같은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는 것이었다.

주초위왕(走肖爲王)”

기록에 의하면 궁녀가 이 벌레 먹은 나뭇잎을 따다가 왕비에게 보였다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말하는 주초(走肖)’는 곧 ()’이니, 조광조가 왕이 되려 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 소문을 들은 조광조는 이를 일소에 부쳐 버렸으나 내심으로는 이것이 자신을 제거하려는 남곤과 심정 일파의 음모임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었다.

후세에 밝혀진 것이었지만 남곤과 심정은 조광조를 숙청하기 위해서 궁궐 안 나뭇잎에 벌레들이 잘 긁어먹는 과일즙으로 주초위왕이란 글자를 미리 써 놓고 이를 벌레들이 파먹도록 한 후에 일부러 궁녀로 하여금 왕의 후궁인 희빈(熙嬪)에게 건네어지도록 흉계를 꾸몄던 것이었다.

그러므로 조정에서는 자신을 왕망과 같은 사람이라고 평하고 있다는 유엄의 말을 듣는 순간 조광조는 그들의 속셈을 비로소 간파할 수 있었으며 그래서 크게 소리를 내어 웃었던 것이었다.

어쨌든 알겠소이다. 이처럼 사사의 명이 있었으니 오래 지체하면 불가하지 않겠소. 하오나 내게 잠시 시간을 주시오. 죽기 전에 몇 가지 처리할 일을 마치는 것이 어떻겠소이까.”

유엄이 이를 허락하자 조광조는 우선 방에 들어가 제자 장잠으로 하여금 물을 끓이게 한 후 깨끗이 몸을 씻었다.

원래 사약을 마시기 전에도 죄인으로서 해야 할 예가 있었다. 우선 몸을 깨끗이 하고 의관을 정제한 후 임금이 있는 궁궐을 향해 네 번 절한 후 사약을 마시는 것이 순서였던 것이었다. 조광조는 몸을 깨끗이 씻은 후 의관을 갖추고 장잠에게 지필묵을 준비토록 하였다고 기록은 전하고 있다. 장잠이 이를 가져오자 조광조는 무릎을 꿇고 우선 자신의 부인 이씨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두 어린 아들들에게도 일일이 편지를 쓴 후에 조광조는 잠시 붓을 놓고 긴 상념에 잠겼다.

열린 문밖으로는 바람에 실린 눈발이 난분분 난분분 흩날리고 있었고 사형을 집행하러 온 군사들이 초조하게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오랜 침묵 끝에 조광조는 다시 붓을 들고 그 유명한 절명시를 쓰기 시작한다.

임금 사랑하기를 아버지 사랑하듯 하였고

나라 걱정하기를 내 집 걱정하듯 하였노라.

하늘이 이 땅을 굽어보시니

내 일편단심 충심을 밝게 밝게 비추리.”

절명시를 다 쓰고 나서 조광조는 다시 장잠을 불러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고 기록은 전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부탁이 있으니, 꼭 이를 실행하여 다오. 내가 죽거든 관은 얇은 것으로 한다. 무겁고 두꺼운 것은 절대로 쓰지를 말라. 행여 무거운 것을 쓰면 먼길에 돌아가기가 어려울 것이므로 아주 얇은 것으로 장만해야 한다.”

문밖에서는 한 떼의 군사들이 초조하게 조광조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들의 임무는 한시라도 빨리 조광조에게 사약을 내리고 그의 죽음을 확인한 후 귀환하는 것이었으므로 비록 입을 열어 채근하지는 않았으나 보이지 않게 조광조를 압박하고 있었다.

기록에 의하면 조광조는 자주 문틈으로 밖을 살펴보았다고 하는데, 이는 아마도 기다리다 지친 군사들이 자신을 해치려고 변을 일으키지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이었을 것이다.

제자 장잠에게 마지막 유언을 내리고 나서 조광조는 집주인을 불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동안 많은 신세를 지었다. 내가 너희 집에 붙어 있었으니 그것으로 큰 보답을 하리라 굳게 결심하고 있었는데, 마침내 보답을 보지 못하고 오히려 너로 하여금 흉변을 보게 하는구나.”

이 말을 들은 집주인은 눈물을 쏟으며 차마 말을 하지 못하였다. 조광조는 슬피 우는 집주인의 손을 잡고 말을 이었다.

뿐만 아니라 내가 죽어 너희 집을 더럽히게 되었으니 이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사람들은 너희 집을 흉가라고 하지 않겠느냐.”

조광조보다 약간 후대를 살았던 허봉(許峰)은 조선조 전기의 야사(野史)를 묶은 해동야언(海東野言)’이란 책을 펴내었다.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許筠)의 형으로, 관계에 들어왔다가 이율곡의 과실을 탄핵한 후 유배되자 이후 벼슬을 버리고 평생 방랑 생활을 했던 기인인데, 허봉은 그의 책 속에서 조광조의 최후를 다음과 같이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이 말을 들은 집주인과 관동들은 슬픔을 견디지 못하여 눈물이 쏟아져 옷깃을 적셨고, 이후로 오랫동안 고기를 먹지 아니하였다. 그리고 매양 말이 선생에게 미치면 목이 메었다고 한다.”

모든 유언을 남기고 나서 조광조는 주위를 돌아보며 말하였다.

양공은 어디 갔느냐. 어찌하여 양공이 보이지 않는 게냐. 차마 내 죽는 것을 보지 못하여 어디론가 가버린 게냐.”

아닙니다.”

제자 장잠이 울면서 대답하였다.

문밖에 계십니다.”

양공을 들라 이르라.”

장잠의 말대로 양팽손은 차마 집안에 들지 못하고 벽에 기대어 서 있었다. 장잠이 찾으러 갔을 때는 오랜 시간 서 있었으므로 쏟아지는 눈발을 그대로 맞아 마치 눈사람처럼 보였다.

양팽손이 방안으로 들어가자 조광조가 노래를 부르듯 천천히 말하였다.

양공, 어째 이토록 늦게야 오셨소이까.

태산이 무너지는가

양주(梁柱)는 꺾이는가

철인(哲人)은 시드는가.”

양팽손은 조광조가 부르는 노래의 내용을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사기(史記)에 나오는 공자의 마지막 노래였던 것이다.

공자가 깊은 병에 들었을 때 제자 자공(子貢)이 병문안을 가자 때마침 공자가 지팡이를 짚고서 마당을 거닐고 있다가 눈물을 흘리며 부른 노래였던 것이었다. 그러고 나서 공자는 이렇게 탄식을 하였던 것이었다.

아아, 천하에는 오랫동안 도()가 없구나.”

그 말을 들은 양팽손은 왈칵 눈물을 쏟기 시작하였다. 양팽손은 비로소 조광조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음이었다. 두 사람이 처음으로 알게 된 것은 조광조가 25세 때, 양팽손이 19세 때였으므로 벌써 14년에 이른 오랜 우정이었는데, 강산이 변하는 10여 년 동안 조광조는 무엇보다 공자의 사상을 통하여 세상을 바꾸려고 노력한 정치가였던 것이다.

평생 공자를 존경하고 공자의 사상을 통해 철인정치를 펴 공자가 꿈꾸었던 이상국가를 이룩하려던 조광조. 그러한 조광조가 마침내 공자의 마지막 유언처럼 태산이 무너지듯 기둥이 꺾이듯 시들어 가고 있는 것이다.

 

# 梁柱(양주)

유림에 梁柱가 나오는데 (들보 량)(기둥 주)의 공통점은 자가 들어있다는 것이다.

자가 들어간 한자는 그 뜻이 나무와 연계되어 나왔으며 (뿌리 본), (끝 말) 등과 같이 자를 이용하여 추상적으로 만든 일부 한자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마디 촌), (재목 재), (마를 고), (매화 매), (마룻대 동)과 같이 자를 제외한 부분이 음이 된다.

자도 마찬가지인데 (주인 주) 자가 들어간 한자는 거의가 (거처할 주), (물댈 주), (머무를 주) 등과 같이 로 발음된다.

梁柱()들보와 기둥으로 집을 지탱하는 핵심 목재(木材)들이기에 국가나 사회의 중요한 인물을 뜻하기도 한다.

이와 같은 의미의 한자어로는 柱石(柱石之臣의 준말)棟梁(마룻대와 들보)도 있다.

마룻대는 서까래를 지탱하며 집 중앙을 가로로 버텨 주는 가로 막대이며, 들보는 집의 상단부를 받쳐 주는 기둥과 기둥 사이에 얹히는 굵은 나무인데, 들보 중에서도 가장 굵고 강한 것이 대들보이다.

우리는 대들보 하면 보통 두 가지 일화를 떠올린다.

하나는 대들보가 이처럼 중요하기에 집을 지을 때 간혹 행하는 대들보 올리는 행사인 上梁式이다.

이는 家家戶戶(가가호호:집집마다) 그 집을 보호하는 (귀신 신)이 있는데, 그 중에서 제일 높은 신인 상량신(上梁神) 또는 성조(成造)라고도 하는 성주신을 맞이하는 행사로 성주맞이 굿을 하기도 한다.

성주신(상량신)이 가신(家神)으로 모셔지게 된 사연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하늘의 천궁대왕과 옥진부인은 39세가 되도록 자식이 없다가 불공(佛供)을 드려 아들을 낳았는데, 이름을 안심국(安心國)이요, 별호(別號:별도의 호칭)를 성조씨(成造氏)라 했다. 성조가 15세 되었을 때 인간들이 집이 없어 고생하는 것을 보고는 땅에 내려와 나무를 이용하여 집 짓는 것을 가르쳐주려 했다. 그러나 산신(山神)의 반대로 솔씨 서말 닷되를 산에다 심고 다시 하늘로 올라갔다. 그 후 그가 74세였던 어느 날 그가 심었던 소나무가 생각나서 10명의 子女를 거느리고 땅에 내려왔다가 연장을 만들어 인간들에게 집을 지어 주었다. 즉 성조가 인간에게 집 짓는 방법을 처음 가르쳐 준 셈이다. 그래서 입주신(入住神)인 성주신으로 모셔지게 된 것이라 한다.

또 하나의 일화는 후한서(後漢書)에 전하는 양상군자(梁上君子)’이다.

후한(後漢) 진식이라는 사람이 태구현의 관리로 있을 때였다. 흉년이 든 어느 해에 진식이 방에서 책을 읽는 중에 마침 도둑질하러 방안에 들어왔다가 미처 나가지 못하고 대들보 위에 숨어 있던 도둑을 발견했다.

그러나 진식은 모르는 척하며 아들과 손주들을 불러 무릇 사람은 스스로 힘써야 하느니라. 나쁜 사람도 본성(本性)이 나쁜 것은 아니고, 나쁜 행실이 습관이 되어 나쁜 일을 하게 되는 것이야. 예를 들면 지금 저 대들보 위에 있는 군자(梁上君子)처럼 말이다.”라고 훈계했다.

그러자 이 말에 마음이 찔린 도둑이 내려와 진심으로 사죄했고, 진식은 그를 가엽게 여겨 비단 두 필을 주었다는데, 그 후로 그 현에는 도둑이 없었다고 한다.

이로부터 도둑을 미화하여 양상군자라 부르게 된 것이다.

유림에 나오는 禁府堂上(금부당상:의금부 당상관)의 직책을 맡은 사람도 棟梁 중의 한 사람이라 생각된다.

3품인 통정대부 이상을 당상관, 3품인 통훈대부 이하 관리를 당하관이라 했는데, 당하관들은 망건(網巾)에 까막 관 자를 붙인 반면, 당상관들은 옥관자(玉貫子:옥으로 만든 관자)를 붙였다.

그런데 당상관들의 옥관자는 망건에서 떼어 놓아도 좀이 먹거나 변색되거나 또는 전국에 몇 개 되지 않아 잃어버릴 염려도 없었다.

그래서 일이 확실하여 조금도 틀림없다.’라는 의미로 떼어 놓은 당상(망건에서 떼어 놓은 옥관자)’이라 하는데, 이를 따 놓은 당상이라 하여 이미 따놓은 벼슬자리를 뜻한 것처럼 잘못 사용되기도 한다.

 

조광조는 양팽손을 향해 다음과 같이 말을 이었다.

이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소이다. ‘예를 잃으면 혼란해지고, 명분을 잃으면 죄과가 된다. 심지(心志)를 잃는 것을 혼란이라 하고 정당한 지위를 잃는 것도 죄과라 한다.’ 내가 이미 명분을 잃고, 심지를 잃었으므로 죽기에 마땅한 죄과를 지었소이다.”

조광조가 말한 이보(尼父), 그것은 공자를 말함이었다. 공자를 가리켜 아버지()’라고 부름으로써 조광조는 자신의 육신은 아버지로부터 왔으나 자신의 혼백은 공자로부터 왔음을 간접적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양공, 신이 먼저 갑니다.”

그러고 나서 조광조는 마침내 방문을 나와 뜨락에 서서 북쪽을 향해 네 번을 절하고 도사 앞에서 무릎을 꿇어 군신의 예를 다하였다.

그는 유엄으로부터 사약을 받고 이를 단숨에 들이켰다.

원래 사약은 비석을 태워 만든 비소(砒素)를 주재료로 해서 생금(生金)과 생청(生淸)과 같은 제련되지 않은 황금가루와 독이 든 꿀을 섞고 부자(附子)나 게의 알(蟹卵) 등을 합쳐서 만든 독약인데, 그 치명적인 독성에 비해서 마신 사람은 즉사하지 못하고 오랫동안 고통 속에서 신음하다가 서서히 죽음에 이르게 되는 약점을 갖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를 정암집(靜庵集)’에서는 독이 짙은 소주(重燒毒酒)’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아마도 이런 독약을 술에 타서 마시게 했던 모양이었다.

마찬가지로 조광조는 사약을 마셨으나 쉽게 숨이 끊어지지 않았다. 눈이 쌓인 뜨락에서 고통에 몸부림치며 피를 토하였지만 아직 숨이 남아 있었다. 보다 못한 유엄이 제자 장잠을 불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아궁이에 불을 지펴 방안이 절절 끓어오도록 덥히거라. 그리하여 죄인을 방안에서 죽게 하여라.”

이는 방안이 아닌 한데에서 객사(客死)하는 조광조에게 마지막으로 시은(施恩)하려는 호의 때문은 아니었다. 사약을 받은 후 온돌방에 집어넣어 문을 걸어 잠그고 아궁이에 불을 지피면 강렬한 독성이 뜨거운 외부 기온 때문에 온몸에 퍼져 빨리 죽음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이 말을 들은 조광조가 머리를 흔들어 말하였다.

아니다. 방안에서 편히 죽기보다는 이곳에서 죽겠다. 주상이 계신 북쪽을 향해 머리를 두고 죽을 것이다.”

참다못한 군사 하나가 밧줄을 들고 달려들었다. 조광조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서 그의 목을 졸라 교사시키기 위함이었다.

이를 본 조광조가 혼신의 힘을 다해 소리쳐 말하였다.

무엇을 하려 드느냐. 네놈은 내 몸에 손끝 하나 대지 못한다.”

조광조는 헐떡이며 말하였다.

성상께서 나의 몸을 보존하고자 사사의 명을 내리신 것인데, 어찌하여 너희들이 감히 내 몸에 손을 대려 하느냐.”

조광조의 호통으로 군사들이 물러섰다.

고통에 몸부림치던 조광조가 필사적으로 몸을 일으켜 유엄을 바라보며 말하였다.

이보시오, 도사.차라리 사약이 남아 있으면 더 주시오.”

유엄이 이를 허락하자 조광조는 남아 있는 사약을 한꺼번에 들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곧 조광조의 눈과 코, 귀와 입, 모든 곳에서 붉은 피가 쏟아지기 시작하였으며, 마침내 조광조는 고통으로 몸부림치다가 일순간 숨을 거뒀다고 전해지고 있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조광조의 얼굴에는 이승에서의 참을 차마 끊지 못하겠다는 듯 부릅뜬 눈이 활짝 열려져 있었다.

 

# 報恩(보은)

유림에는 報恩(갚을 보,은혜 은)과는 상대 개념인 施恩(베풀 시)이 나온다. 은혜라는 말이 나오면 보통 다음 일화를 인용하게 된다.

중국 춘추전국(春秋戰國) 시대에 진()나라의 위무자(魏武子)에게는 첩()이 있었다. 그런데 위무자가 병들어 눕게 되자 아들인 위과(魏顆)에게 내가 죽거든 내 첩을 改嫁(고칠 개, 시집 갈 가)시켜라.’라고 유언했다. 그러나 병이 심해지자 마음이 바뀌어 내가 죽거든 내 첩을 殉葬(따라 죽을 순, 장사 지낼 장),즉 나와 함께 묻어다오.’라고 말을 바꾸었다.

그 후 위무자가 죽자 아들은 아버지의 마지막 유언에 따르지 않고, 서모(庶母)를 개가(改嫁)시켰다.

훗날 위과가 진()나라의 장군으로서 진()나라의 장군 두희(杜喜)와 싸우게 되었다. 그때 격전이 벌어질 곳에서 한 노인이 앉아 풀을 엮어 놓고는 사라졌다. 그런데 그 엮어 놓은 풀에 적군의 장수 두희가 탄 말의 다리가 걸려 넘어졌으며, 이로 인해 위과는 두희를 생포하여 승리하였다.

그날 밤 위과의 꿈에 그 노인이 나타나 나는 당신 서모의 아버지로 당신이 내 딸을 순장시키지 않고 개가시켜 주었기에, 그 은혜에 보답하고자 풀을 엮어 적군의 장군을 생포할 수 있게 한 것이었습니다.’라고 말하고는 사라졌다.

즉 그 노인은 혼령이었지만 자기 딸에게 베풀어 준 사람의 은혜에 보답한 것이다.

이로 인해 나온 말이 ()을 엮어(맺을 결) 은혜()에 보답()했다.’해서 결초보은(結草報恩)이다.

오늘날은 재가(再嫁)와 개가(改嫁)가 의미상 차이 없이 쓰이고 있으나, 조선시대에는 再嫁란 남편이 살아 있을 때 다른 남자에게 시집가는 것이요, 改嫁란 남편이 죽은 다음에 다른 남자에게 시집가는 것으로 사용되었다.

요즘 젊은 여성들은 마음 수양(修養)보다는 외모 꾸미기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 그러나 다음 장자(莊子)의 일화에서 보듯이 주체성 없이 미모만을 추구하다 보면 오히려 주변인들한테 나쁜 인상만 줄 수 있다.

중국 월()나라에 서시(西施)라는 대단한 미녀(美女)가 살았는데, 그녀는 심장질환이 있어 고통스럽기에 가슴을 움켜쥐고 미간(眉間:눈썹과 눈썹 사이)을 찡그리고 다녔다.

그런데 같은 동네에 사는 한 추녀(醜女:못생긴 여자)가 서시(西施)의 아름다움에 반하여 저렇게 해야 미인이라는 말을 듣나 보구나.’라고 생각했는지 자신도 서시와 마찬가지로 가슴을 움켜쥐고 미간을 찡그리고 다녔다.

동네 부자(富者)들은 생김새도 못생긴 그녀가 추한 행동까지 하고 다니니 그 모습을 보지 않으려고 아예 문밖에 나오지를 않았으며, 가난한 사람들은 이 동네에 사나 다른 동네에 사나 가난한 생활이야 마찬가지이므로 아예 그런 모습을 보지 않으려고 다른 동네로 이사들을 하였다고 한다.

여기서 유래하여 주체성 없이 무조건 남의 흉내만 내는 것을 뜻하는 (본받을 효, 찡그릴 빈)’이라는 말이 나왔다. 주체성을 상실하면 이것도 저것도 될 수 없음은 역시 장자의 한 일화에서도 볼 수 있다.

수릉(북경 근처 마을)의 여자(余子)라는 사나이는 어느 날 조()나라 도읍인 한단(邯鄲)에 갔다가, 그곳 사람들의 걸음걸이가 어찌나 멋지고 보기 좋았는지 매우 부러웠다.

그래서 자기도 그렇게 걸으려고 계속 흉내를 내보았다. 그러나 그 걸음걸이를 배우기도 전에 본래 자기의 걸음걸이까지 잊어버리고는 엉금엉금 기어서 자기 고향에 돌아왔다고 한다.

참으로 흉내 내기의 비극이라 아니할 수 없다. 요즘 특정 인기인을 모방하여 그 사람과 같아지려고 하는 여성들에게는 좋은 교훈이 아닐까 싶다.

 

숨이 끊어진 조광조의 시신을 확인한 후 유엄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죄인 조광조의 시신은 함부로 수습하거나 장례를 치르지 못한다. 반드시 들판에 내어버려 들짐승의 먹이가 되도록 방치해야 할 것이다. 이를 어기는 사람은 국법으로 다스려질 것이다.”

말을 마친 유엄을 필두로 한 떼의 군사들은 곧 사라졌다. 남은 사람들은 통곡을 하며 조광조의 시신 주위로 몰려들었다. 양팽손이 울면서 부릅뜬 조광조의 눈을 감겨주었다.

이로써 조광조는 눈을 감게 되었으니, 그의 나이 37. 정치개혁의 웅대한 뜻을 품고 관계로 나선 지 불과 4년 만의 일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양팽손은 우차에 조광조의 시신을 실어 그날 밤 자신의 고향인 쌍봉마을 골짜기에 가매장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 임시 초분에서 한겨울을 난 조광조의 시신은 이듬해 봄 그의 고향 땅 용인으로 운구되어 재매장된다. 만약 위험을 무릅쓴 양팽손이 없었다면 조광조의 시신은 유엄의 엄명대로 들짐승의 먹이가 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을 것이다.

잠시 상념에 잠겨 있던 나는 집 뒤 얕은 야산 쪽에서 들려오는 새소리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헐벗은 나뭇가지 위에서 까치 한 마리가 깍깍, 소리를 내어 울고 있었다.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내리던 눈발은 어느덧 그쳐있었다. 나는 주머니를 뒤져 담배를 피워 물었다.

그것이 500여 년 전.

조광조가 집주인에게 마지막으로 죽어 너희 집을 더럽히게 되었으니 그것이 한스러울 뿐이다.’라고 유언을 남긴 이 초가집은 그러나 오히려 이렇게 후세에 교훈을 전하는 기념관으로 복원되어 있다. 또한 사람들은 너희 집을 흉가라고 하지 않겠느냐.’고 염려하였던 초가집은 조광조의 넋을 기리는 장소로 보존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툇마루에서 일어서며 중얼거렸다. 더럽혀진 것은 조광조의 이름이 아니라 오히려 조광조를 죽인 역사의 이름이며, 흉가가 되어버린 것은 조광조가 피를 토하고 죽은 이 장소가 아니라 그런 오욕의 역사를 만들어낸 조선왕조인 것이다. 아아, 흉가와 같은 왕조는 사라졌어도 조광조의 이름은 이렇게 남아 전하고 있음이여.

나는 천천히 초가집 앞에 있는 다른 건물로 다가갔다.

문득 내 머릿속으로 기묘사화에 의해서 옥에 갇혔을 때 조광조가 남긴 말이 떠올랐다. 기묘년의 당적보(黨籍補)에는 죄수로서 조광조가 남긴 최후의 진술이 남겨져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제 신의 나이는 서른여덟입니다. 선비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믿는 바는 오직 군상(君上)의 마음뿐입니다. 국가의 병통(病痛)이 이익을 추구하려는 마음과 권력에의 망령된 욕망에 근원이 있다고 생각한 까닭으로 국맥(國脈)을 새롭게 하여 무궁케 하고자 할 따름이었습니다. 돈연(頓然) 다른 뜻은 없었습니다.”

자신을 국문하려는 수령에게 정식으로 제출하는 공장(供狀)으로,‘옥중에서 진술한 말이라 이름 지어진 이 내용을 통해 자신의 죄는 오직 사사로운 이익만을 추구하는 세력들권력만을 잡으려는 집단의 야욕에 맞서서 국맥을 바로잡으려 했을 뿐, 단연코 다른 뜻은 없었다는 조광조의 육성이 문득 떠올라 나는 가슴이 뭉클하였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나는 소리를 내어 중얼거렸다.

적어도 조광조에게는 사사로운 이익을 추구하거나 개인적인 영달을 추구하려는 욕망은 없었다. 그것은 바로 역사가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만약 조광조에게 사욕이 있었더라면 이곳은 흉가가 되어 폐허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곳은 이렇게 성지(聖地)가 되었다. 500년이 흐른 뒤에 내가 이곳을 찾아와 순례를 할 만큼 성스러운 땅이 되어버린 것이다.

 

# 頓然(돈연)

유림에 돈연(頓然)이 나오는데 (조아릴 돈, 갑자기 돈)새싹이 땅을 뚫고 나오는 모양을 본 뜬 ()을 음으로 하고, ‘큰 머리를 강조해서 그린 사람 모양()을 뜻으로 하여 이루어졌다. 이 두 글자가 합해 이루어진 머리를 땅바닥에 닿도록 절하다.’가 본래의 뜻이다.

(그러할 연)자는 본래 개고기()를 불에 태운다라는 뜻에서 추출된 태우다가 본 뜻이다. 그러나 이 한자가 그러하다라는 뜻으로도 쓰이자 자를 덧붙인 (불탈 연) 자를 만들어 오늘날 그러하다’,불타다라는 뜻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자가 들어가는 말은 흔하지 않은데, 그중 사돈(査頓:혼인으로 맺어진 두 집안 사이)이라는 말이 있다. 고려 예종 때에 여진족 정벌에 공이 컸던 도원수(都元帥:장수) 윤관과 부원수(副元帥:부장수) 오연총은 서로의 자녀를 부부로 맺어준 후 작은 냇물을 사이에 두고 가끔 만나 술을 마셨다.

어느 봄날 윤관이 오연총과 한잔하기 위해 하인에게 술동이를 지게하고 개울을 건너려고 하는데 때마침 냇물 건너 쪽의 오연총도 술을 준비해 왔다. 그날따라 간밤의 소낙비로 냇물이 넘쳐흘러 건널 수가 없었다. 이에 두 사람은 냇가에 줄기를 잘라낸 나무의 밑동인 나뭇등걸(뗏목 사)에 앉아 이쪽에서 한잔 드시죠하며 머리를 숙이면() 저쪽에서도 한잔 드시죠.”라고 하며 머리를 숙이며 술을 마셨다고 한다.

이래서 이후 서로 자녀를 부부로 맺어주고자 할 때 우리도 사돈(査頓)을 해볼까?’라 하였는데, 이것이 명사화하여 오늘날 사돈이 된 것이라 한다.

, 사돈은 술의 對酌(마주할 대,따를 작) 문화에서 나왔다는 것인데, 주인이 손님에게 술잔을 주는 것이 (잔 돌릴 수), 손님이 주인에게 술잔을 주는 것이 (따를 작)이기에 수작은 술잔을 서로 주고받는 것으로 응대를 의미한다.

그러나 오늘날의 수작은 다른 사람의 말이나 행동을 업신여겨 하는 말로 쓰이는데, ‘설익다 또는 참 것이나 좋은 것이 아니다.’라는 의미의 접두사 자를 붙여 酬酌(이치에 어긋나는 말이나 행동)한다.’라는 표현도 한다.

술잔을 주고받다 보면 상대방 술잔을 살펴 술잔이 비었으면 술을 따르는데(따를 작), 이때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도록 헤아려(헤아릴 참) 가며 적당히 따라 주어야 한다. 이것이 참작(參酌)인데, 여기서 유래되어 오늘날 참고하여 알맞게 헤아린다.’의 의미로 ‘~을 참작하여라고 할 때 사용한다.

사돈과 관련한 재미있는 일화가 하나 있다. 중국 제나라에 혼기(婚期:혼인할 나이)에 찬 딸을 둔 사람이 있었는데, 동시에 두 곳에서 혼담(婚談:혼인에 관한 이야기)이 들어왔다. 그런데 동쪽에 사는 한 남자는 집안은 넉넉하나 못생겼고, 서쪽에 사는 한 남자는 잘 생겼으나 재산은 없었다. 이에 부모는 딸의 생각을 알아보기 위해 네가 동쪽 남자에게 시집가고 싶으면 왼손을 들고, 서쪽 남자에게 시집가고 싶으면 오른손을 들거라.’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그 딸은 두 손을 번쩍 들며 밥은 동쪽에 가서 먹고, 잠은 서쪽에 가서 잘래요.’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바로 東家食西家宿(동가식서가숙)’이라는 말이 나왔는데, 오늘날은 이 말은 떠돌아 다니며 얻어먹고 지내는 걸식(乞食)’의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붉은 기둥으로 받쳐진 건물 천장에는 검은 바탕에 흰 글씨로 다음과 같은 현판이 내걸려 있었다.

영정각(影幀閣)”

영정각이라면.

나는 소리를 내어 중얼거렸다.

죽은 조광조의 화상이 모셔져 있는 건물이 아닌가.

건물 앞 중앙에는 격자무늬가 교차된 방문이 푸른 빛깔을 하고 굳게 닫혀져 있었다. 나는 천천히 손잡이를 당겨 보았다.

문이 열리자 정면으로 족자로 된 그림이 보였다. 바로 조광조의 화상이었다. 나는 신발을 벗고 건물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밖은 눈이 내리는 포근한 날씨인데도 건물 안은 싸늘한 냉기가 흐르고 있었다. 벽 어딘가에 방안을 밝히는 조명 스위치가 있을 법도 하다. 하지만 활짝 열린 문밖에 쌓인 눈빛이 어두운 방안으로까지 반사되어 굳이 불을 밝힐 필요까지는 없었다. 유리로 만든 족자 속에는 검은 오사모(烏紗帽)를 쓴 조광조의 전신상이 우뚝 서 있었다. 최근에 그려진 것이 분명한 조광조의 영정은 두 손을 관복 소매로 가린 모습으로 정면을 노려보고 있었다. 사모관대의 정식 예장을 하고 흰 버선까지 신고서 허공을 쏘아보는 조광조의 눈빛은 마치 살아 움직이고 있는 듯 형형하였다.

화상 앞 양쪽에 촛대가 놓여 있었고 향을 살라 분향할 수 있도록 조촐한 제상이 마련되어 있었다. 한가운데의 화병 속에는 조광조의 충절을 기리듯 흰 국화가 몇 송이 꽂혀 있었다. 국화꽃들이 시들지 아니하고 생생한 것으로 보아 이곳을 지키는 관리인이 날마다 생화를 갈아 꽂아 두는 모양이었다. 오가는 사람들의 분향도 그치지 아니하는 듯 향로에는 타다 남은 향이 몇 개 꽂혀 있었다.

나는 조광조의 화상을 바라보면서 가볍게 후회를 하였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오는 길에 소주 한 병을 사오는 것인데. 조광조의 영정 앞에 술을 따라 올렸어야 하는 것인데.

생전에 조광조는 술을 좋아하였으나 절제하여 여간해서는 술을 들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기록에 의하면 조광조는 갑자기 한밤중에 구속되자 엉망으로 술에 취한 상태에 있었다고 하지 않았던가. 자신을 심문하던 이장곤(李長坤)에게 그의 자를 부르며 이보게, 희강(希剛)이 자네야말로 용가(龍哥)일세하고 술주정하지 않았던가. ‘용가라면,‘ 어리석은 못난이를 가리키는 비속어. 심지어 홍숙(洪叔)이 심문할 때엔 더욱더 만취하여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당상으로 뛰어오르려 하였고, 자신이 답변한 공초(供草)에 서명하기를 거부하기도 하였다고 하지 않았던가.

순간 내 머릿속으로 조광조가 유배를 떠나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올린 상소문의 내용이 떠올랐다.

조광조를 비롯하여 김식, 김구 등 8인이 공동으로 작성하여 올린 상소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신들은 모두 뜻만 높고 꼼꼼치 못하여 어리석은 자들로서 성스러운 때를 만나 경악(經幄)에 출입하면서 경광(耿光:밝은 덕이 훌륭한 임금을 가리킴)을 가까이해서 믿을 것은 임금의 밝음뿐이었습니다. 어리석은 충정을 모조리 말씀드리오면서 많은 사람들의 시기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으나 오직 임금이 계신 것만 알았을 뿐, 다른 것은 헤아리지 않은 채 우리 임금님이 요순과 같이 되고자 할 따름이니, 이것이 어찌 우리의 일신을 위하는 꾀였을 것입니까. 하늘의 해가 내려다보는데 정말로 다른 사사로운 마음은 없었습니다. 신들의 죄는 만 번 죽어도 마땅하겠으나 선비들의 참화가 한번 발생하면 나라의 명맥이 장차 염려되지 않겠습니까. 천문(天門:대궐을 말함)이 멀어서 생각을 전달할 길이 없으나 길게 말하고 싶은 말을 굳게 입 다문 채 하지 않는 것도 진실로 참을 수 없는 바이니, 행여 궁문(躬問)을 허락하여 주신다면 만 번 죽어도 한이 없겠나이다. 뜻은 넘치지만 말은 부족해서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겠나이다.”

자신들의 사사로운 영달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직 임금을 태평시대의 요순으로 만들고자 하였다는 조광조 일당의 마지막 상소는 그러나 중종에 의해서 기각된다.

스스로도 뜻만 높아 꼼꼼치 못하고 어리석어 많은 사람들의 시기심을 불러일으켰다.’라는 조광조의 한탄은 후세의 대학자였던 이퇴계에 의해서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이퇴계는 퇴도언행록(退陶言行錄)’에서 조광조를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요순시대와 같은 이상정치 시대는 환경과 역경이 없으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다. 기묘(己卯)의 실패도 이와 같은 것이다. 당시 공은 실패할 것을 이미 알고 자제를 하였지만 그 동료들이 탄핵하여 오히려 공을 탄핵하려 하였으니 그도 어찌할 수 없었다.”

이후 선조 원년(1568).

조광조가 죽은 지 50년 후에 당시 대사간이었던 백인걸(白仁傑)을 비롯하여 태학생 홍인헌(洪仁憲) 등이 조광조를 문묘에 배향할 것을 주장하고 부제학이었던 박대립(朴大立)이 그에게 관작을 증수하고 시호를 내릴 것을 주장하자 선조는 경연에서 이퇴계에게 조광조의 학문과 행적을 물었다.이에 이퇴계는 조광조에 대해 날카로운 촌평을 내리고 있다.

조광조는 천품이 빼어났으며, 일찍 학문에 뜻을 두고 집에서는 효도와 우애를, 조정에서는 충직을 다하였으며 여러 사람들과 서로 협력하고 옳은 정치를 하였습니다.다만 그를 둘러싼 젊은 사람들이 너무 과격하여 구신들을 물리치려 함으로써 화를 입게 된 것입니다.”

그뿐인가.

평생 조광조를 존경한 나머지 자신이 세운 사당에 조광조의 석상을 세워놓을 정도였던 이율곡은 석담일기(石潭日記)’에서 조광조의 실패를 다음과 같이 안타까워하고 있는 것이다.

옛사람들은 반드시 학문이 이루어진 후에 이론을 실천하였으며, 이론을 실천하는 목적은 임금의 잘못을 시정하는 데 있었다. 아깝다! 공은 어질고 밝은 성정과 나라를 다스릴 재주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학문이 채 이루어지기도 전에 정치계로 나아가 위로는 잘못을 시정하지 못하고 아래로는 수구세력의 비방을 막지 못하였으니, 비록 임금에게 간청을 하기는 하였지만 공을 비방하는 입이 한 번 열림에 결국 몸을 죽이고 나라를 어지럽히게 하였으며, 후세 사람들에게까지 그의 행적이 경계가 되었다. 하늘이 그의 이상을 실현하지 못하게 하였으면서도 어찌 그와 같은 사람을 내었던 것일까.”

그러나 과연 그러하였음일까.

조광조는 이퇴계의 평가대로 천품이 뛰어나고 옳은 정치를 하였으나 주위 사람들을 다스리지 못한실패한 개혁가였을까 아니면 이율곡의 평가처럼 학문이 채 이루어지기 전에 성급하게 정치에 뛰어든아마추어 정치가였던 것일까.

아니다. 나는 머리를 흔들면서 조광조의 영정 앞에 무릎을 꿇었다. 주머니를 뒤져 라이터를 꺼내 제상 위에 놓여진 두 개의 초에 불을 밝혔다.

어차피 하늘 아래에는 요순시대와 같은 태평성대의 이상국가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이퇴계가 말하였던 것처럼 요순시대와 같은 이상국가는 환경과 역경이 없으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치가는 때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때를 만들어 가야 하는 것이다.

조광조는 스스로 때를 만들었다. 스스로 원칙을 세우고 명분을 만들었다. 일찍 제나라의 경공(景公)이 공자에게 정치하는 법을 물었을 때 공자가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며, 아버지는 아버지다워야 하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합니다(君君 臣臣 父父 子子).’라고 대답하였던 것처럼 정명(正名)을 꿈꿨던 이상주의자였던 것이다.

순간 내 머릿속으로 최근에 인도를 여행하였을 때 뉴델리에 있는 간디의 무덤에서 본 기억이 떠올랐다. 인도의 국부 간디의 묘소에는 간디가 20세기 초에 젊은 인도라는 책 속에서 쓴 일곱 가지 사회적인 죄가 새겨져 있다.

국가가 멸망할 때 나타나는 징조를 간디는 다음과 같은 일곱 가지로 나누고 있는 것이다.

원칙 없는 정치, 노동 없는 부, 양심 없는 쾌락, 인격 없는 교육, 도덕 없는 경제, 인간성 없는 과학, 희생 없는 신앙

20세기가 낳은 최고의 성인 간디의 예언처럼 원칙 없는 정치(Politics Without Principle)’야말로 국가가 멸망으로 나아가는 최고의 조건인 것이다.

조광조는 정치에 있어 원칙과 명분을 강조하였던 정명주의자(正名主義者)였던 것이다. 이는 조광조가 평생 동안 사숙하였던 공자의 다음과 같은 가르침에서 비롯된다.

자로(子路)가 공자에게 위나라의 임금이 선생님을 모셔다가 정치를 부탁드린다면 선생님께선 무엇부터 먼저 하시겠습니까.”하고 묻자 공자는 반드시 명분을 바로잡겠다.”라고 대답한다. 그러자 자로는 다음과 같이 반문한다.

그런 게 어디 있습니까. 선생님은 우원(迂遠)하십니다. 어째서 그것을 바로잡겠다 하시는 것입니까.”

이에 공자는 대답한다.

어리석구나, 너는. 군자는 자기가 모르는 일에는 입을 다물고 있는 법이다. 명분이 바로 서지 못하면 일이 이루어지지 않고,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예악(禮樂)이 일어나지 못하고, 예악이 일어나지 않으면 형벌이 적중하지 못하고, 형벌이 적중하지 못하면 백성들은 손발 둘 곳이 없게 된다. 그러므로 사물의 이름을 군자가 붙일 때에는 반드시 말로서 전달할 수 있어야만 하며, 말로서 전달되면 반드시 이는 실행되어야 한다. 군자는 말에 있어 구차스러운 바가 없어야 한다.”

반드시 명분을 바로잡겠다(必也正名乎).’라는 공자의 말에서 나온 정명주의. 직역으로는 사물의 명칭을 바로잡는다는 뜻이지만 모든 사물과 사람들이 자기의 주어진 직분이나 명분에 맞는 원칙,즉 질서의 극치를 구하고 이를 반드시 실행하려 하였던 개혁주의자로서의 면모를 보여준 조광조였던 것이었다.

그러므로.

나는 향에 불을 붙여 향로에 꽂으면서 머리를 숙여 말하였다.

조광조는 이퇴계나 이율곡의 평가대로 때를 기다리지 못한 실패자가 아니다. 조광조의 실패는 오히려 우리에게 위대한 유산으로 남겨져 왔다. 그 교훈의 뜻을 새겨 명분있는 정치’,간디의 말처럼 원칙 있는 정치를 완성해가는 것은 바로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몫인 것이다.

바람도 없는데 향불은 머리를 풀어헤치면서 타올라 온 방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분향을 마치고 일어서서 조광조의 영정을 본 순간 문득 초나라의 미치광이였던 접여(接與)가 공자 곁을 지나면서 외치던 노랫소리가 떠올랐다.

봉새야 봉새야

어찌하여 덕은 그토록 쇠하였는가

지난 일은 탓해서 소용없지만

앞일은 바로잡을 수 있는 것

아서라 아서라

지금 정치를 한다는 것은 위태로운 짓이니라.”

자신의 왕도정치를 실현하기 위해서 13년 동안 70여 나라의 임금을 유세하고 열국을 주유하였으나 그 어느 나라에서도 인정을 받지 못하였던 공자. 마침내 68세의 공자가 정치가로서의 야망을 꺾고 고향으로 돌아가려 하였을 때 미치광이 접여가 공자가 탄 수레 곁을 지나면서 그처럼 노래를 하였던 것이다.

그렇다.

나는 조광조의 영정을 바라보면서 생각하였다.

정치란 어차피 2000년 전 접여의 노래처럼 위태롭고 어리석은 미친 짓인지도 모른다.

정치가 위태롭고 어리석은 미친 짓이란 미치광이 접여의 말은 굳이 2000년 전의 노래만이 아니다.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윈스턴 처칠은 다음과 같이 말하지 않았던가.

정치라는 것은 전쟁 못지않게 사람들을 흥분시키는 것이며, 똑같이 위험하기도 한 것입니다. 전쟁에서는 단 한 번 죽으면 되지만 정치에서는 여러 번 죽어야 하는 것이 다를 뿐입니다.”

그뿐인가.

공자와 거의 동시대를 살았던 고대 그리스의 희극시인이었던 아리스토파네스는 BC 427년에 쓴 최초의 작품 연회의 사람들속에서 선동정치가들이었던 데마고그들을 풍자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오늘날 정치를 하는 이들은 이미 학식이 있는 사람이나 성품이 바른 사람들은 아니다. 불학무식한 깡패들에게나 알맞은 직업이 바로 정치인 것이다.”

그러나 공자는 내가 만약 등용이 된다면 단 몇 개월이라도 가능하지만 적어도 3년이면 정치를 통하여 이상국가를 이룰 수 있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이율곡의 표현대로 조광조가 학문이 이루어지기도 전에 성급하게 정치로 나아가 위로는 잘못을 시정하지 못하였고, 아래로는 수구세력의 비방을 막지 못하였다.’는 평가가 옳은 것이라면, 예수, 석가와 더불어 세계 3대 성현인 공자도 학문이 이루어지기 전에 정치로 나아가 주유열국(周遊列國)하였다는 말인가. 그리하여 70여 나라의 임금으로부터 백안시 당하였단 말인가. 그렇다면 공자의 위대한 학문과 경륜도 현실 정치에는 소용이 닿지 않는 공염불이었단 말인가.

공자의 13년 동안의 정치적 순회에도 불구하고 단 한 곳에서도 공자를 등용한 나라는 없었다.

회남자(淮南子)’에는 다음과 같이 공자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다.

공자는 왕도(王道)를 실행하고자 하여 동서남북으로 다니며 70명의 임금에게 유세(遊說)하였으나 아무도 그를 알아주지 않았다.”

알아주지 않았을 뿐 아니라 생명의 위협을 받을 정도로 곤경에 빠지기도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공자를 비웃는 사람은 미치광이 접여말고도 두 사람이 더 있었다.

한 사람은 숨어사는 노인으로, 제자 자로가 공자를 수행하다 뒤처졌는데, 막대기에 대바구니를 매달아 메고 가는 노인을 만났었다. 자로가 그에게 물었다.

노인께서는 저의 선생님을 못 보셨습니까.”

이에 노인은 대답하였다.

사지를 움직이지도 않고 오곡도 분별하지 못하는데, 누가 선생이란 말이오.”

그리고 노인은 땅에 지팡이를 꽂아놓고 풀을 뽑았다. 자로는 손을 모아 잡고 공손히 서 있었다. 노인은 자로를 집에 데리고 가서 묵게 하고는 닭을 잡고 기장밥을 지어 대접하고, 또 자기의 두 아들을 만나게 하였다.

다음날 자로가 공자에게 사연을 얘기하자 공자는 숨어 사는 사람이다.’라 말하고는 자로로 하여금 되돌아가 그 노인을 찾아보도록 하였다. 자로가 가보니 노인은 이미 어디론가 떠나버리고 없었다.

공자를 사지를 움직이지 않고 오곡도 분별치 못하는 선비’,노동은 전혀 하지 않고 실제 생활과 현실에는 무능한 백면서생으로 표현한 노인의 풍자는 이상국가를 구현하려고 자신을 등용하는 임금을 만나기 위해서 전국을 주유하고 있는 공자의 어리석음을 질타하고 있는 것이다.

향로 속에 꽂힌 향은 향긋한 냄새를 풍기며, 온 방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나는 물끄러미 조광조의 영정을 바라보면서 생각하였다.

조광조 역시 공자처럼 사지를 움직이지 않고 오곡도 분별치 못하는 선비에 불과한 서생이 아니었던가.

그러한 조광조가 정치에 뛰어들어 이상국가를 이루려 했던 것은 과연 접여의 말대로 위태롭고 어리석은 미친 짓이었음일까.

공자의 정치적 주유를 질타한 또 다른 사람이 있었는데, 그들은 장저(長沮)와 걸닉(桀溺)이었다. 논어에 의하면 이 두 사람이 나란히 밭을 갈고 있었는데, 공자는 그들의 곁을 지나다가 자로를 시켜 그들에게 나루터가 있는 곳을 물어보도록 하였다. 자로가 가까이 가니 장저가 나서 말하였다.

저 수레의 말고삐를 잡고 있는 사람은 누구요.”

공구(孔丘)라는 분입니다.”

노나라의 공구말이오.”

그렇습니다.”

그는 나루터 있는 곳을 알고 있소이까.”

이번엔 걸닉에게 물으니 걸닉이 말하였다.

당신은 뉘시오.”

중유(仲由)라는 사람입니다.”

그럼 당신은 노나라 공구의 제자요.”

그렇습니다.”

그러자 걸닉이 말하였다.

지금 세상은 온통 물이 도도히 흐르는 것과 같은데,그 누가 방향을 바꿀 수 있겠소. 또한 당신도 사람을 피해 다니는 사람(공자)을 따르기보다는 차라리 세상을 피해 사는 선비를 따르는 게 어떻겠소.”

그러면서도 밭갈이를 멈추지 않았다.

자로가 돌아와서 이 사실을 고하자 공자는 언짢은 듯이 말하였다.

새나 짐승과 같이 어울려 살 수는 없는 일이다.내 천하의 사람들과 어울려 살지 않고 그 누구와 더불어 살겠느냐. 천하에 도가 있다면 나는 그것을 개혁하려 들지는 않을 것이다.”

공자의 정치적 주유를 비웃는 노인과 장저와 걸닉, 두 사람은 각각 밭을 갈고 풀을 뽑는다. 노인은 자로에게 닭을 잡고 기장밥을 지어 대접한다. 이들의 이런 행동은 정치란 밭을 갈고 풀을 뽑고 백성들에게 밥을 먹이는 현실적 행실이며, ‘도도하게 흘러가는 강물과 같은 것임을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비웃음에 공자는 이렇게 항변하고 있지 않은가.

천하에 도가 있다면 나는 그것을 개혁하려 들지는 않을 것이다.(天下有道 丘不與易也)”

자신을 나루터가 있는 곳도 모르고 밭을 갈 줄도 모르고, 도도히 흘러가는 강물의 방향을 바꾸려 하는 어리석은 사람으로 비웃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정치로 나아가려고 하는 것은 무도한 천하를 바로잡아 개혁함이 목적이라는 공자의 웅변은 조광조에게도 적용되는 사자후인 것이다.

실제로 조광조는 오늘날 그가 남긴 문장 중에서 가장 체계적이고 명문으로 알려져 있는 알성문과 시험답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공자의 도는 천지의 도이며, 공자의 마음은 천지의 마음입니다. 천지의 도와 만물의 많음은 모두 이 공자의 도를 따라서 이루어지지 않음이 없으며 천지의 마음과 음양의 감응도 역시 공자의 마음으로 말미암아 조화되지 않음이 없을 것입니다(중략)공자가 비록 살아 계실 때에는 세상을 다스릴 지위에 나가지 못하였지만 만세(萬世)가 공자의 가르침을 의지하고 본받아 나라를 다스리게 되었으니, 실로 공자의 공로는 요순의 공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후세에 진실로 공자의 가르침이 천하에 우뚝 서지 못하였더라면 요순의 도도 영원히 전하여지지 아니하였을 것이며 요순의 정치도 다시 회복되지 아니하였을 것입니다.”

스스로 공자의 도는 천지의 도이며 공자의 마음은 천지의 마음(夫子之道 天地之道也 夫子之心 天地之心也)’이라고 역설한 조광조. 그는 어쨌든 공자의 도를 좇아 정치를 하였으며, 공자의 마음을 쫓아 개혁을 하다가 마침내 사약을 받고 이렇게 비참하게 피를 토하고 죽게 되었음이니.

나는 조광조의 영정에 머리 숙여 작별의 인사를 하고 영정각을 나섰다.

조광조의 영정이시여, 편히 잠드소서.

건물 안에 들어가 있는 동안에 더 많은 눈이 내려 쌓였는지 온 세상이 일제히 환호성을 올리듯 눈부시게 설화(雪花)로 만발하고 있었다.

적막강산이었다.

한 시간 남짓 이곳에 머물러 있었지만 누구 한 사람도 찾아오지 않는 여전한 유형의 땅이었다. 평소에도 외진 곳에 있어 참배객이 드물었는데, 이처럼 함박눈이 내리고 보니 찾아오는 사람조차 끊긴 모양이었다.

나는 사람의 발자국이라고는 전혀 없는 미답(未踏)의 뜨락을 걸어가면서 생각하였다.

이로써 오랫동안 꿈꿔오던 대로 조광조의 유허지를 찾아와 직접 내 눈으로 모든 역사적 사실을 되새겨 보게 된 것이다.그러나 이것은 끝이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시작이 아닐 것인가.

조광조는 과연 어떤 인물이었던 것일까.

조광조는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고민하였던 실천적 지성인이었던 것일까, 아니면 실패한 정치가였던 것일까.

역사적으로도 조광조는 극과 극의 상반된 평가를 받고 있다. 조광조를 복권하려는 움직임이 생겨나자 홍문관 직제학의 허흡 등은 조광조는 나라를 어지럽힌 괴수라고 단정하고 맹렬하게 비난하였는가 하면 선조는 죽은 대사헌 조광조는 세상에 없는 순수하고 깨끗한 성품을 지녔으며, 도학을 이 세상에 드러내어 대유(大儒)가 되었다.’는 전교를 내렸을 정도이다. 율곡은 조광조를 학문이 채 이루어지기도 전에 정치에 뛰어들었다.’라고 부정적인 평가를 하였으면서도 조광조,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이언적(李彦迪)’ 등을 동방사현(東方四賢)’이라 칭송하였다. 후세에 학자들은 그가 죽은 이곳에 죽수서원(竹樹書院)을 세운 것을 시작으로 전국 곳곳에 수많은 서원을 세워 그의 학문과 넋을 기리고 본받았으니, 조광조 그는 과연 공자의 왕도를 실행하려 하였던 이상주의자였던가, 아니면 미치광이 접여의 노래처럼 위태로운 정치에 뛰어든 어리석은 몽상가였던가. 그가 남긴 교훈은 무엇이고, 그가 남긴 허물은 무엇인가.

정문을 나오자 맞은편 주차장에 세워둔 차가 보였다. 차는 내리는 눈을 고스란히 맞아 가라앉아 있었다. 미끄러지지 않도록 조심해서 걸으며 나는 천천히 주차장으로 걸어갔다.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문을 열고 올라탄 후 차창에 쌓인 눈을 털어내기 위해서 윈도브러시의 스위치를 올렸다. 그러자 브러시가 작동되면서 차창에 부채꼴 모양의 빈 공간이 드러났다. 차 안을 덥힐 수 있도록 히터를 켠 후 나는 담배를 피워 물었다.

더 이상 늦기 전에 광주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다행히 눈은 내려 쌓였지만 날씨가 포근하여 아직 결빙이 생기지 않아 도로는 미끄럽지 않을 것이다. 주의해서 돌아간다면 저물기 전에 광주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어느 정도 차가 더워져 실내가 훈훈해지자 나는 사이드브레이크를 풀었다. 출발하기 전 나는 다시 한번 눈이 덮인 유허지를 바라보았다.

순간 머릿속으로 조광조가 남긴 편지의 한 문장이 떠올랐다. 조광조가 남긴 유문 중 유일하게 한글로 쓰여진 이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었다.

지난해 제가 보낸 작은 매화 값을 잊지는 않으셨겠지요. 껄껄, 우습습니다. 곤궁한 귀신이 이르지 않음이 없으니 또 가소롭습니다.”

가소롭구나, 그대여.

나는 천천히 차를 몰아 나아가면서 중얼거렸다.

곤궁한 귀신에 이르러 비명횡사하였으니, 껄껄 우습기도 하구나. 그대, 조광조여.

나는 벨트를 빼어 상체를 묶고 고정한 후 큰 거리로 빠져나오면서 중얼거려 말하였다.

가자.

가소로운 조광조를 찾아 떠나자. 시대와 공간을 초월한 타임머신을 타고 그대가 과연 무엇을 하였는지, 어떠한 생을 살았는지 그 현장을 찾아 여의봉을 든 손오공이 되어 천축으로 가는 신서유기(新西遊記)의 여행을 떠나보기로 하자.



목차로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