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I. 위기, 그리고 과학 이론의 출현
VIII. 위기에 대한 반응
IX. 과학혁명의 성격과 필연성
X. 세계관의 변화로서의 혁명
VII. 위기, 그리고 과학 이론의 출현(Crisis and the Emergence of Scientific Theories)
VI절에서 살펴본 발견들은 모두 패러다임 변화의 원인이거나 또는 기여 요소였다. 더욱이 그 발견들이 암묵적으로 그 속에 내포되었던 변화들은 모두 건설적일 뿐만 아니라 파괴적인 것이기도 했다. 발견이 동화된 이후, 과학자들은 자연 현상의 보다 넓은 영역에 관해 설명할 수 있었거나 또는 이미 알려진 현상들의 일부에 관해 보 다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이득은 기존의 표준 이념이나 방법을 더러는 포기하거나, 동시에 이전 패러다임의 그런 구성 요소들을 다른 것으로 대치함으로써 성취되었다. 나는 이런 유형의 변천은 정상과학을 통해 성취된 모든 발견과 연관된다고 주장했다. 단 하나 예외는, 세부사항을 제외하고는 모두 예측되었던 놀라울 것 없는 발견들이다. 그러나 발견이 그러한 파괴적-건설적 패러다임 변화의 유일한 원천인 것은 아니다. 이 절에서 우리는 그와 비슷하면서 그러나 통상적으로 훨씬 대폭적인 새로운 이론들의 창안으로부터 비롯되는 변동에 대해 고찰하게 될 것이다.
이미 앞에서 과학에서의 사실과 이론, 발견돼 발명은 범주상으로 그리고 영속적으로 구별되는 것이 아님을 논의했던 바와 같이, 우리는 이 절과 앞 절의 내용이 중복되리라는 것을 예측할 수 있다 (프리스틀리가 처음에 산소를 발견하고, 라부아지에가 그 다음에 그것을 발명했다는 어이없는 발상은 나름대로 매력을 지니고 있다. 산소는 이미 발견으로서 다루었던 주제이다. 우리는 이제 곧 발명으로서 산소를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새로운 이론의 출현을 받아들이면서 우리는 필연적으로 발견에 대한 이해까지도 확장시키게 될 것이다. 그러나 중복된다고 동일한 것은 아니다. 앞 절에서 다룬 발견들의 유형은, 적어도 단독으로는, 코페르니쿠스 혁명, 뉴턴 혁명, 화학혁명, 그리고 아인슈타인 혁명에 버금가는 패러다임 변천을 일으킨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전문성이 보다 강하다는 이유 때문에, 빛의 파동 이론, 열의 역학이론, 또는 맥스웰의 전자기론에 의해 야기된 다소 소폭적인 패러다임에서의 변화들을 일으킨 것도 아니었다. 어떻게 이와 같은 이론들이 발견의 추구보다 오히려 그것들의 추구를 덜 지향하는 활동인 정상과학으로부터 생겨날 수 있는가?
이상(anomaly)에 대한 인식이 새로운 종류의 현상의 출현에 한몫을 한다면, 그와 유사하면서도 더욱 심오한 인식이 수긍할 만한 이론의 변화 모두에 선수 조건이라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닐 것이다. 나는 이 점에 관한 역사적 증거는 재론의 여지없이 확실하다고 생각한다.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의 상황은 코페르니쿠스의 선언 이전에 하나의 스캔들이었다.1) 운동 연구에서의 갈릴레오의 공헌은 스콜라 학파의 아리스토텔레스 이론 비판에서 나타난 난제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2) 뉴턴의 빛과 색깔에 대한 새로운 이론으로 말하자면, 기존의 패러다임-이전 이론들 중 그 어느 것도 스펙트럼의 길이를 설명하지 못했음을 발견한 것에서 비롯되었으며, 뉴턴의 이론을 대치한 파동 이론은 회절(diffraction)과 편광(polarization)효과를 뉴턴 이론에 관련지으면서 이상 현상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는 가운데 발표되었다.3) 열역학은 19세기의 두 기존 물리과학 이론의 충돌로부터 탄생하게 되었고, 양자 역학은 흑체 복사(black-body radiation), 비열(specific heats) 그리고 광전효과(photo-electric effect)를 둘러싼 갖가지 난제들로부터 탄생되었다.4) 더욱이 뉴턴 이론을 제외한 모든 경우에서 이상 현상에 대한 인식이 매우 오래 지속되었고 아주 깊숙이 침투되었기 때문에, 그 영향을 받은 분야들은 위기감이 고조되는 상태라 묘사하는 것이 어울리는 상황이 있다. 그것은 대규모의 패러다임 파괴와 정상과학의 문제 및 기술(techniques)에서의 주요변동을 요구하는 까닭에, 새로운 이론들의 출현은 대체로 전문분야의 불안정함이 현저해지는 선행 시기를 거치게 된다. 누구나 예측할 수 있듯이, 그런 불안정함은 정상과학의 수수께끼들이 좀처럼 제대로 풀리지 않는다는 데서 발생된다. 그리고 기존 규칙의 실패는 새로운 규칙에의 탐사를 향한 전조가 된다.
우선 패러다임 변화에서 특히 유명한 경우인 코페르니쿠스 천문학의 탄생을 살펴보자 그 전구체계인 프톨레마이오스의 지구중심체계가 최초로 기원전 2세기로부터 기원 후 2세기까지 걸쳐 전개되었을 때, 그것은 항성과 행성의 변화하는 위치를 예측하는 데 신통하리만치 성공적이었다. 고대의 체계로서 그렇게 잘 맞는 다른 이론은 없었다. 항성에 대해서는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은 오늘날까지도 공학의 근사법으로 널리 쓰이고 있으며, 행성에 대한 프톨레마이오스 체계의 예측은 코페르니쿠스의 것만큼 잘 맞았다. 그러나 하나의 과학 이론으로서, 놀랄 만큼 잘 맞는다는 것이 완벽하게 성공적이라는 뜻을 결코 아니다. 행성의 위치와 세차운동(precession of the equinoxes) 두 가지에 대해서는 프톨레마이오스 체계에 근거한 예측치는 당시에 얻어진 가장 훌륭한 관측과는 잘 들어맞지 않았다. 이러한 사소한 차이를 좀더 줄여 보자는 것이 프톨레마이오스의 후계자들이 수행한 정상 천문학 연구의 주요 과제로 등장하였고, 그런 양상은 천상 세계의 관측(celestial observation)과 뉴턴 이론을 일치시키려는 시도가 뉴턴의 18세기 계승자들에게 정규적인 연구 주제들을 제공했던 것과 흡사했다. 얼마 동안은 천문학자들에게 이러한 시도가 프톨레마이오스 체계로 유도했던 과거의 시도들 못지 않게 성공적인 것으로 간주할 만한 이유가 충분히 있었다. 어느 특정한 모순이 드러나면, 천문학자들은 조합된 원들로 이루어진 프톨레마이오스 체계에서 일부 특수 조정을 가함으로써 거침없이 모순점을 제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다수 천문학의 복잡성이 그 정확성보다 훨씬 빠르게 증대되고 있다는 것, 그리고 한 곳에서 보정된 모순이 다른 곳에서 나타나기가 예사라는 것을 간파할 수 있었다.5)
천문학적 전통은 외부로부터 끊임없이 방해를 받았으며, 인쇄술이 없는 상황에서 천문학자들 사이의 견해 교류가 한정되었었기 때문에 이들 어려움은 매우 느리게 인식되고 있었다. 그러나 드디어는 깨닫게 되었다. 13세기 무렵 알폰소10세(Alfonso X)는 신이 우주를 창조할 때 그에게 의논했었더라면, 신은 훌륭한 충고를 받았을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16세기 들어, 코페르니쿠스의 공동 연구자인 노바라(Domenico da Novara)는 프톨레마이오스 이론이 전개되었던 바와 같은 엉성하고 부정확한 체계가 자연에 대한 지리가 될 수는 없는 일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코페르니쿠스 자신은 [천구들의 회전에 관하여(De Revolutionibus)]의 서문에서 그가 계승한 천문학 전통은 결국 괴물을 창조했을 따름이라고 적었다. 16세기 초엽에는 유럽의 최고 천문학자들 중 차츰 더 많은 사람들이 천문학의 패러다임을 그 고유의 전통적 문제에 적용함에 있어 제 구실을 못 하고 있음을 깨닫고 되었다. 그러한 인식은 코페르니쿠스가 프톨레마이오스식 패러다임을 거부하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찾기 시작하는 데 요구되었던 선행 조건이었다. 그의 유명한 서문은 아직까지도 위기 상황에 관한 고전적 서술의 하나가 되고 있다.6)
물론 정상적인 기술상의 수수께끼-풀이 활동의 붕괴가 코페르니쿠스가 부닥친 천문학상 위기의 유일한 요소는 아니다. 이에 관한 논의를 확장시키면 달력 개혁에 대한 사회적 압력, 즉 세차 운동이라는 수수께끼를 특히 시급한 문제로 몰고 갔던 압력요인 역시 작용하고 있었다. 게다가 보다 완전한 설명을 하려면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 대한 중세의 비판, 르네상스기의 신플라톤주의(Neoplatonism)의 융성, 그리고 여타의 유의미한 역사적 요소들까지 고려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기술상의 붕괴가 여전히 위기의 핵심으로 자리할 것이다. 성숙한 과학(mature science)―천문학은 이미 고대로부터 그런 과학이 되었다―에서 위에 말한 것과 같은 외부적 요인들은 붕괴의 시기, 붕괴가 인지될 수 있는 용이도, 그리고 특별한 관심을 끎으로 해서 붕괴가 최초로 발생하는 영역을 결정하는 데 있어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렇게 중요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 같은 유형의 주제는 이 에세이에서는 다루지 못하고 있다.
코페르니쿠스 혁명의 경우에는 이런 점들이 분명하다면, 이제 방향을 돌려 두 번째 비교적 다른 사례, 즉 연소에 대한 라부아지에의 산소 이론의 탄생에 선행했던 위기(crisis)에 관해 살펴보자. 1770년대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복합되어 화학에서의 위기가 발생했고, 과학사학자들은 그런 요인들의 본질이라든가 상대적 중요성에 대하여 합의를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그 중 두 가지는 일반적으로 일급의 중요성을 띤 것으로 인정되고 있다. 기체 화학(pneumatic chemistry)의 융성과 질량 관계에 대한 의문이 그것이었다. 기체 화학의 역사는 17세기 공기 펌프의 개발 그리고 화학 실험법에서의 그 배치와 더불어 시작된다. 18세기 동안 공기 펌프와 여러 가지 기력장치를 사용하게 됨에 따라, 화학자들은 공기가 화학반응에서의 활성 성분임에 틀림없다는 것을 차츰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몇 가지 예외들―너무 애매해서 도대체 예외가 아닐는지도 모르는―을 제외하고 화학자들은 공기가 유일한 종류의 기체라는 믿음을 고수하고 있었다.
1756년에 이르러 블랙(Joseph Black)이 고정된 공기(fixed air: 이산화탄소)는 언제나 보통 공기와는 구별된다는 것을 보여 주었을 때, 두 가지 기체 시료는 오직 그 불순물에서만 차이가 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7) 블랙의 연구 이후, 기체에 관한 연구는 가장 뚜렷하게 카벤디쉬(Cavendish), 프리스틀리(Priestley), 셀레(Scheele)의 손에 급진전을 이루었던 바, 이들은 모두 기체의 시료들을 하나하나 구별해 낼 수 있는 여러 가지 새로운 기술을 전개시켰다. 블랙으로부터 셀레에 이르는 이들 학자들은 모두 플로지스톤 이론(Phlogiston theory)을 신봉하였고, 그들의 실험 장치와 결과 해석에서 자주 그것을 적용하였다. 셀레는 실제로 열로부터 플로지스톤을 제거하도록 고안된 일련의 정교한 실험을 통해 산소를 얻어냈던 최초의 인물이었다. 그렇긴 하더라도, 그 실험에서 얻어진 결과는 매우 까다로운 각양각색의 기체 시료와 기체 성질이었던 까닭에 플로지스톤 이론은 실험실 작업으로는 풀어 볼 가능성이 차츰 희박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들 화학자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플로지스톤 이론이 대치되어야 한다고 제안하지는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화학자들은 그 이론을 일관성 있게 적용시킬 수가 없었다. 1770년대 초 라부아지에가 공기에 대한 실험을 시작할 무렵까지는 기체 화학자 수효만큼이나 플로지스톤 이론의 수정안도 많았다고 할 정도였다.8) 어느 이론에 있어서 이처럼 수정안이 무성하게 되는 것은 위기 상태에서 매우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하나의 증상이다. 코페르니쿠스도 마찬가지로 그의 서언에서 그것에 관해 불평하고 있었다.
그러나 기체 화학에 대한 플로지스톤 이론의 점증하는 모호성과 감소되는 효용성이 라부아지에를 가로막았던 위기의 유일한 근원은 아니었다. 그는 대부분의 물체를 태우거나 구울 때 나타나는 무게의 증가에 관해 설명하는 문제에도 지대한 관심을 두었으며, 이것 역시 전부터 오랜 역사를 지닌 문제였다. 적어도 이슬람의 몇몇 화학자들은 어떤 금속은 가열될 때 무게가 늘어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17세기에 들어와 몇몇 연구자들은 바로 이 사실로부터 연소된 금속은 대기로부터 어떤 성분을 흡수하는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17세기에의 그러한 결론은 대부분의 화학자들에게 불필요한 것으로 보였다. 화학 반응이 모름지기 성분들의 부피 색깔 구조를 바꿀 수 있는 것이라면, 어째서 화학 반응에서 무게만 바뀌지 말아야 한다는 말인가? 무게는 항상 물질의 양의 척도로 취급되지는 않았다. 게다가 연소에 따르는 무게 증가는 별개의 현상으로 다루어지고 있었다. 자연적인 물체(예컨대 나무)는, 플로지스톤 이론이, 후에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설명하고 있었던 바와 같이, 대부분 태울 때 그 무게가 줄어들었다.
그러나 18세기를 거치면서, 무게-증가(weight-gain)의 문제에 대한 이러한 초기의 반응은 차츰 지탱하기가 어렵게 되어 갔다. 더러는 천평이 표준적 화학 기구로 많이 쓰이게 되었던 때문이었고, 더러는 기체 화학의 발달로 인해 반응의 기체 생성물을 보존하는 것이 가능하며 바람직한 일이 되었기 때문에, 화학자들은 연소에 의해 무게-증가가 일어나는 경우들을 점점 더 많이 발견하게 되었다. 동시에 뉴턴의 중력 이론에의 점진적인 동화는 화학자들로 하여금 무게-증가가 물질의 양에서의 증가를 의미함에 틀림없다고 주장하도록 만들었다. 그렇다고 그러한 결론들이 플로지스톤 이론의 포기를 초래하지는 않았는데, 왜냐하면 그 이론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조정될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플로지스톤은 마이너스의 무게를 가졌는지도 모를 일이었고, 또는 플로지스톤이 물체로부터 이탈할 때 불의 입자(fire particles) 또는 다른 무엇이 그 연소하는 물체로 들어가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 외에도 갖가지 설명들이 등장했다.
무게-증가의 문제가 플로지스톤 이론의 폐기로 이어지지는 않았으나, 그것은 이 문제가 큰 비중을 차지하는 특수 연구의 수효를 점점 늘어나게 만들었다. 그 중 하나로서, "무게를 지닌 실체로 간주되고, 그것이 결합하는 물체에서 일으키는 무게 변화에 의해서 [분석되는] 플로지스톤에 관하여"라는 논문이 1772년 초에 프랑스 아카데미에서 발표되었는데, 1772년은 바로 아카데미 원장에게 라부아지에가 그의 유명한 봉인된 노트를 전했던 해였다. 그 노트가 쓰여지기 이전에 다년간 화학자의 비상한 관심을 끌어 왔던 하나의 문제가 두드러진 미해결의 수수께끼로 부각되었다.9) 플로지스톤 이론은 그 문제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다양하게 여러 가지로 수정 변형되고 있었다. 기체 화학에서의 문제들과 마찬가지로, 무게-증가의 문제들도 플로지스톤 이론의 정체를 이해하는 것을 점점 더 어렵게 만들고 있었다. 그때까지는 잘 들어맞는 도구라 믿어졌고 존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18세기 화학의 패러다임은 점차 그 독보적 지위를 점진적으로 상실해 가고 있었다. 따라서 그 패러다임이 주도한 연구는 차츰 패러다임 이전 시대에 여러 학파들의 각축아래 수행되던 연구를 방불케 했는데, 이런 현상은 위기의 또 다른 전형적 광경이다.
이제 세 번째 마지막 실례로서, 상대성 이론(relativity theory)의 탄생으로의 길을 열어 주었던 물리학에서의 19세기 말의 위기에 대해 생각해 보자. 이 위기의 뿌리 하나는 17세기 말로 거슬러 오르는데, 이 시절 다수의 자연철학자(natural philosopher)들은, 그들 중에서도 라이프니츠(Leibniz)가 가장 심하게, 절대 공간의 고전적 개념을 새롭게 수정해서 고수하는 것에 대해 뉴턴을 비판하고 있었다.10) 그들은 아주 근사하게, 그렇다고 완전한 것은 아니었지만, 절대 위치와 절대 운동은 뉴턴의 체계에서는 전혀 아무런 구실을 하지 못한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공간과 운동에 대한 완벽한 상대적 개념이 후에 전개될 상당히 심미적인 매력을 암시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비판은 순전히 논리적인 것이었다. 지구의 부동성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증명을 비판했던 초기의 코페르니쿠스 학파처럼, 이들 자연철학자들은 상대론적 체계로의 전환이 관측에서의 새로운 결과를 주리라는 것을 상상하지도 못했다. 그들은 어느 시점에서도 뉴턴 이론이 자연에 적용될 때 야기되었던 어떤 문제에도 그들의 견해를 관련시키지 않았다. 그 결과, 그들의 견해는 18세기 초 몇 십 년 사이에 그들과 더불어 사라졌으며, 그 후 19세기 말 수십 년 동안 물리학의 실제에 전혀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될 때 비로소 부활되었던 것이다.
공간의 상대론적 철학이 궁극적으로 관계하게 되는 기술적 문제들은 1890년대까지 아무런 위기를 촉발시키지는 않았지만, 사실상 1815년 이후 빛의 파동 이론의 수영과 더불어 정상과학으로 도입되기 시작하였다. 만일 빛이 뉴턴 법칙의 지배를 받는 기계적 에테르(ether)를 통해 전파되는 파동 운동이라면, 천상계의 관측과 지상계의 실험에서 양쪽 모두 에테르를 통한 흐름을 검출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긴다. 천체 관측에 대해서는 오직 광행차의 관찰만이 관련 정보를 제공하기에 충분한 정확성을 기약할 수 있었고, 그에 따라 광행차 측정에 의한 에테르-흐름(ether-drift)의 검출은 정상과학 연구에서의 인식된 문제로 등장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매우 특수한 장치가 꾸며졌다. 그러나 그 장치로는 관찰에 잡힐 만한 흐름을 검출하지 못했으므로, 그 문제는 실험자들과 관찰자들로부터 이론학자들에게로 이전되기에 이르렀다. 19세기 중반 수십 년 도안 프레넬(Fresnel), 스톡스(Stokes) 등의 여러 학자들은 흐름을 관찰하는 데 실패한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꾸며진 에테르 이론(ether theory)에 대한 갖가지 명료화된 수정안을 내놓았다. 이들 명료화들은, 각각 움직이는 물체는 그것과 함께 에테르의 얼마만큼을 끌고 간다고 가정하였다. 그리고 이런 설명은 제각기 천상계의 관측뿐만 아니라 그 유명한 마이클슨(Michelson)과 몰리(Morley)의 실험을 비롯한 지상의 실험에서도 흐름이 검출되지 못했던 결과를 상당히 그럴듯하게 설명해 주었다.11) 다양한 수정 이론들 사이에서 빚어지는 것을 제외한다면, 거기에는 아직 아무런 모순이 없었다. 서로 관련되는 실험적 기술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그런 모순은 결코 예리하게 나타나지는 않았던 것이다.
상황은 19세기 말의 20년 사이에 맥스웰의 전자기 이론(electromagnetic theory) 의 점진적 수용과 더불어 바뀌게 되었다. 맥스웰 자신은 빛과 전자기(electromagnetism)는 일반적으로 기계적 에테를(mechanical ether)의 입자가 일정하지 않은 변위를 일으키기 때문에 생긴다고 믿었던 뉴턴주의자였다. 전기와 자기(magnetism)의 이론에 관한 맥스웰의 가장 초기의 견해는 그가 이 매질에 부여한 가설적 성질을 직접 이용하였다. 그 견해들은 그의 최종 수정안으로부터 탈락되었으나. 그는 아직도 자신의 전자기 이론이 뉴턴의 역학적 견해의 어떤 명료화와 양립된다고 믿고 있었다.12) 적절한 명료화를 전개시키는 작업은 그와 그의 계승자들에게 하나의 도전이었다. 그러나 과학의 발전에서 언제나 그래왔듯이, 실제에서 요구되는 명료화를 얻어내기가 엄청나게 힘든 것으로 밝혀졌다. 글쓴이의 낙관에도 불구하고, 코페르니쿠스의 천문학 이론의 제안이 운동에 관한 기존 이론들에 대해 고조되는 위기를 초래하게 되었듯이 맥스웰 이론도 뉴턴적 기원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그것이 파생되었던 패러다임을 향해 위기를 조성했던 것이다.13) 더욱이 위기가 가장 심각하게 고조되었던 초점은 우리가 방금 고려하고 있던 문제들, 즉 에테르에 대한 운동의 문제들에 집약되었다.
운동하는 물체의 전자기적 거동을 다룬 맥스웰의 논의에서 에테르 끌림(ether drag)에 대한 언급은 없었고, 그의 이론 속에 이런 끌림을 도입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임이 밝혀졌다. 따라서 에테르를 통한 흐름을 검출하기 위한 초기의 일련의 관찰들은 모두 이상 현상이 되었다. 그러므로 1890년 이후, 몇 해 동안 실험적, 이론적으로 에테르에 상대적인 움직임을 검출하고, 에테르 끌림을 맥스웰 이론에 도입하기 위해 길고 끈질긴 시도가 경주되었다. 몇몇 분석가들은 그들의 결과를 모호하다고 생각했으며, 흐름을 검출하는 실험의 경우도 한결같이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맥스웰 이론과 에테르 끌림을 연결시키려는 이론학자들의 경우는 여러 가지 고무적인 출발을 내디딤으로써 특히 로렌츠(Lorentz)와 피츠제럴드(Fitztgerald)의 연구가 두드러졌으나, 그들 역시 여전히 다른 부수적 현상인 것으로 발견했던 서로 경쟁하는 이론들의 난립을 낳게 되었다.14) 아인슈타인의 특수 상대성 이론이 1905년에 출현했던 것은 이러한 역사적인 흐름에 그 배경을 둔 것이었다.
이들 세 가지 실례는 거의 전적으로 전형적이다. 각 경우에서 새로운 이론은 정상적 문제풀이 활동에서의 현저한 실패를 본 후에야 비로소 출현했다. 더욱이 과학 외적 요인들이 특히 커다란 구실을 했던 코페르니쿠스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런 붕괴 및 그 징조가 되는 이론들의 양상은 새로운 이론 선언의 십 년 또는 이십 년 전에 벌어진 상황이었다. 새로운 이론은 위기의 직접적 반응인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그다지 전형적이지는 않을지 모르나, 붕괴가 일어났던 문제들이 모두 오랜 세월에 걸쳐 인식되어 왔던 형태라는 점을 또한 주목하라.
정상과학의 이전의 수행은 그런 문제들이 풀렸거나 또는 거의 풀렸다고 생각할 만한 충분한 이유를 주고도 남음이 있었고, 이것은 실패에 이르렀을 때 어째서 실패의 의미가 그렇게 심각한가를 설명하는 것을 돕는다. 새로운 유형의 문제를 다룰 때 실패하는 것은 흔히 실망스럽기는 하지만, 결코 놀라운 일은 아니다. 문제라든가 수수께끼는 그 어느 것도 처음 공격에 굴복하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마지막으로, 이런 실례들은 위기의 역할에 관한 사건을 인상적으로 만드는데 도움이 되는 또 하나의 특징을 띤다. 이들 각각의 실례에 대한 해답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해당 과학에서 위기가 없었던 시기 동안 예측되고 있었던 대로였다. 그리고 위기를 느끼지 못하던 상황에서 그 예상들은 무시되어 왔던 것이다.
유일하고 완벽한 예상은 또한 가장 유명한 사례이기도 한데, 기원전 3세기에 아리스탈쿠스(Aristarchus)에 의해 코페르니쿠스 식의 태양중심 체계가 이미 제안되었던 경우이다. 만약 그리스 과학이 보다 덜 연역적이고 독단에 위해 덜 지배되었더라면, 태양중심의 천문학(heliocentric astronomy)은 실제 일어났던 것보다 18세기쯤 앞당겨 전개되기 시작했을지도 모를 일이라고 흔히 논의된다.15) 그러나 그것은 역사적 맥락을 완전히 무시하는 말이다.
아리스탈쿠스의 제안이 이루어졌을 당시에는 압도적으로 더 합리적이었던 더 합리적이었던 지구중심체계(geocentric system)는 태양중심 체계가 혹시라도 만족시켰을지도 모를 부족함을 갖고 있지 않았다.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의 전반적인 전개, 즉 그것의 승리와 몰락은 둘 다 아리스탈쿠스의 주장이 있은 뒤 몇 세기가 지나서 일어난다. 게다가 아리스탈쿠스를 심각하게 받아들일 만한 뚜렷한 이유도 존재하지 않았다. 보다 정교한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조차도 프톨레마이오스 체계에 비해 더 단순하거나 더 정확하지도 않았다. 그 당시로서 얻을 수 있었던 관측 시험은, 이제부터 더 확실히 보게 되겠지만, 그 두 이론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만한 근거를 제공하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 아래서 천문학자들을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설로 유도한 요인(그리고 천문학자들은 아리스탈쿠스설로 유도할 수 없었던 요인) 가운데 하나는 당초 혁신을 일으키는 첫째 이유가 되었던 위기의식이었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지구중심설은 천문학의 문제들을 푸는 데 실패했다. 시기가 무르익자 경쟁 이론에 기회가 주어지게 되었다. 앞에서 말한 두 가지 다른 실례는 이와 유사한 완벽한 예상을 가능케 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분명히 대기로부터의 흡수에 의한 연소의 이론들―17세기에 레이(Rey), 후크(Hooke), 메이요(Mayo)에 의해 진전된 이론들―이 충분히 관심을 끌지 못했던 한가지 이유는 정상과학의 실제에서 이미 인정된 논란점과의 접촉이 없었던 탓이었다.16) 그리고 18―19세기의 과학자들에 의한 뉴턴주의의 상대론적 비판에 대한 장기간의 무시는 대체로 이와 비슷한 문제의식의 미숙함 때문이었음에 틀림없다.
과학자들(philosophers of science)은 어느 주어진 수집에 의해 언제나 하나 이상의 이론이 성립될 수 있음을 꾸준히 증명해 왔다. 과학의 역사는, 특히 새로운 패러다임 이전의 단계를 제외하고는 과학자들이 거의 수행하지 않는 작업이며, 하나의 패러다임이 제공하는 도구들이 패러다임이 정의하는 문제들을 풀 수 있다고 증명되는 한, 과학은 최고의 속도로 활동하며 그들 도구들을 확신 있게 적용시키는 것을 통해 가장 심도 있게 침투한다. 그 이유는 명백하다. 생산활동에서처럼 과학의 연장을 만드는 일(science-retooling)도 그것을 요구하는 경우를 위해 준비되는 일종의 호사스러움이다. 위기들의 의미는 도구를 바꾸어야 할 계제에 도달했음을 가리키는 지표가 된다.
VIII. 위기에 대한 반응(The Response to Crisis)
그러면 위기(crisis)가 새로운 이론의 출현에 있어 필수적 선행조건이라 가정하고, 다음에는 과학자들이 위기의 존재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는가를 묻도록 하자. 그 대답의 일부는 그 중요성만큼이나 분명한 것으로서, 우선 과학자들이 심각하고 만연된 이상(anomaly) 현상에 부닥쳤을 때 결코 취하지 않는 행동이 무엇인가를 주목함으로써 찾아질 수 있다. 과학자들은 신념을 잃기 시작하고 이어서 다른 대안을 궁리하기 시작할지 모르나,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위기로 몰고 간 그 패러다임을 폐기하지는 않는다. 다시 말해서, 과학 철학적 어의상으로는 그 의미가 성립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상 현상들을 반증 예(counterinstance)로 여기지 않는다. 부분적으로 이런 일반화는 단순히 앞에서 근거하여, 역사적 사실로부터 얻어지는 서술이다. 이것들은 우리가 패러다임의 포기에 관해 후에 검토할 내용이 보다 완전히 드러낼 것이 무엇인가를 시사한다. 일단 하나의 과학 이론이 패러다임의 위치를 확보하게 되면, 그 이론은 그 지위를 차지할 만한 다른 후보의 이론이 나타날 경우에 한해서 쓸모 없는 것이 된다. 과학 발전에 관한 사적 고찰에 의해 드러난 과정은 그 어느 것도 자연과의 직접 비교에 의해 허위 증명을 하는 방법론적 틀을 닮은 적이 지금까지는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과학자들이 이론을 폐기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거나, 또는 과학자들이 이론을 폐기하는 과정에 그런 경험과 실험이 필수적이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궁극적으로 핵심적인 요점이 될 것인데―과학자로 하여금 기존의 수용된 이론을 거부하도록 이끄는 판단의 행위가, 항상 그 이론과 세계와의 비교 이상의 것에 근거를 둔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의 패러다임을 거부하는 결단은 언제나 그와 동시에 다른 것을 수용하는 결단이 되며, 그 결정까지로 이끌어 가는 판단은 패러다임과 자연의 비교 그리고 패러다임끼리의 비교 두 가지를 포함한다.
덧붙여, 과학자들이 이상 현상 또는 반대 예증에 부딪치는 까닭으로 인해 패러다임을 포기한다는 것에 대해서 의심하게 되는 두 번째 이유가 있다. 이 논의를 전개하면서 나의 논거는 그 자체로서 이 에세이의 다른 주요 주제들을 예시하게 될 것이다. 위에서 언급된 의심의 이유들은 순전히 사실적인 것이다. 즉 그런 이유들은 그 자체가 일반적으로 믿어지는 인식론에 대한 반증이다. 나의 이러한 관점이 옳은 것이라면, 그것들은 기껏해야 위기 형성을 조장하거나, 또는 보다 정확히 표현해서 이미 무르익은 위기를 심화시키게 될 따름이다. 그 자체로는 그것들은 그런 철학적 이론을 반증할 수도 없으며 반증하지도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패러다임의 옹호자들은 이상에 부닥쳤을 때, 우리가 이미 살핀 바와 같이, 과학자들이 하는 행동을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다양한 명료화를 궁리하고 분명히 드러난 모순을 제거하기 위해 그들의 이론을 이모저모로(ad hoc) 수정할 것이다.
이에 관련되는 수정과 자격의 다수는 실상 이미 문헌에 나타난 것들이다. 그러므로 만일 이들 인식론적 반증이 사소한 자극 이상의 구실을 하게 되다면, 그 까닭은 더 이상 말썽거리가 아닌 범위 내에서 과학의 새롭고 색다른 분석이 출현하도록 그 반증들이 작용하기 때문일 것이다. 더구나 우리가 과학혁명에서 나중에 관찰하게 될 전형적 양상이 여기에 적용된다면, 이들 이상 현상들은 더 이상 단순히 사실로서만 보이지 않을 것이다. 과학 지식의 새로운 이론의 관점으로부터 그런 것들은 오히려 그렇지 않았더라면 상상도 할 수 없었을 상황의 진술의 동어반복(tautology)처럼 보이게 될 것이다.
예컨대 뉴턴 운동의 제2법칙은, 그것을 얻기까지 수세기의 사실적, 이론적 연구의 험로를 거쳐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뉴턴 이론을 신봉하는 사람들에게는 아무리 많은 관찰로도 결코 논박할 수 없는 순전히 논리적 진술처럼 작용하는 것으로 흔히 여겨져 왔던 것이다.17) X절에서 우리는 돌턴(Dalton) 이전에는 지극히 애매한 일반성의 실험 결과였던 화학의 정비례 법칙(chemical law of fixed proportion)이, 돌턴의 연구 이후로는 어떤 실험 연구에 의해서도 교란시킬 수 없는, 화합물의 정의에서의 필수 요소가 되었음을 보게 될 것이다. 이상 현상이나 반증에 직면하게 될 때 과학자들이 패러다임을 거부하지 못한다는 일반화에 대해서도 역시 이와 비슷한 일들이 일어날 것이다. 과학자들은 패러다임을 거부할 수 없을 것이고, 그래도 여전히 과학자로 남을 것이다.
역사가 그들의 이름을 기록에 남길 리는 거의 없지만, 어떤 사람들은 분명히 위기를 수용할 수 없었다는 이유 때문에 과학을 포기하고 마는 일도 있었다. 예술가들과 마찬가지로, 창의적인 과학자들은 뒤죽박죽된 세계에서도 살 수 있어야 하는 경우가 꽤 있다. 다른 책에서 나는 그 필요성을 가리켜 과학 연구에 내재된 "본질적 긴장(the essential tension)"이라 표현한 바 있다.18) 그러나 과학을 포기하고 다른 직업을 택하는 것은, 내가 생각하기로는, 반증 사실들 그 자체가 유도할 수 있는 유일한 형태의 패러다임 폐기인 것 같다. 그것을 통해서 자연을 해석하게 될 최초의 패러다임이 일단 발견되면, 아무런 패러다임도 존재하지 않는 연구란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다. 그와 동시에 새로운 것을 대치하지 않은 채로 하나의 패러다임을 파기하는 것은 과학 자체를 포기하는 것이다. 그런 행위는 패러다임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친다. 어쩔 수 없이 그는 동료들에게 '자기 연장을 탓하는 목수(the carpenter who blames his tools)'로 보이게 될 것이다.
바로 이 점에 대해서는 적어도 똑같이 효과적으로 바꾸어 말할 수 있다. 반증 사례들이 부재하는 연구라는 것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정상과학을 위기에 처한 과학으로부터 구별하는 것은 무엇에 의해서인가? 정상과학이 반증에 부닥치지 않기 때문임은 분명히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앞에서 정상과학을 구성한 수수께끼라고 불렀던 것은 과학 연구의 기틀이 되는 어느 패러다임도 그 문제들을 모두 완전히 풀지 못했기 때문에 비로소 존재하는 것이다. 문제를 해결하는 것처럼 보였던 극소수(예컨대 기하광학)는 얼마 안 가서 완전히 연구 문제들의 산출을 중단하기에 이르렀고, 그 대신 공학 분야의 수단으로 바꾸어 버렸다. 전적으로 기기에 의존하는 것들을 제외하고, 정상과학이 수수께끼라고 보는 문제는 어느 것이나, 다른 관점에서 본다면 반증으로 볼 수 있으며, 따라서 위기의 근원으로 볼 수 있다.
코페르니쿠스는 프톨레마이오스의 다른 계승자들 대부분이 관찰과 이론 사이의 일치에서 수수께끼로 보았던 것들을 반증이라고 했으며, 라부아지에는 프리스틀리가 플로지스톤 이론의 명료화에서 성공적으로 해결된 수수께끼로 생각했던 것을 반증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아인슈타인은 로렌츠, 피츠제럴드 등이 뉴턴 이론과 맥스웰 이론의 명료화에서 수수께끼라고 보았던 것들을 반증이라고 생각했다. 더욱이 위기의 존재조차도 그 자체가 수수께끼를 반증이라 생각했다. 더욱이 위기의 존재조차도 그 자체가 수수께끼를 반증으로 변형시키지는 않는다. 거기에 어떤 선명한 분리선은 없다. 오히려 패러다임의 수정안이 분분해짐에 의해서 위기는 결국 새로운 패러다임의 출현을 허용하게 되는 방식으로 정규 수수께끼-풀이의 규칙을 완화시킨다. 난 이에 관해서는 두 가지의 길만이 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어느 과학 이론도 반증에 맞닥뜨리지 않거나, 그런 과학 이론들 모두가 언제나 반증들에 직면하는 것이다.
어떻게 상황이 달리 보여질 수 있는가? 이 질문은 철학의 역사적, 비판적 해명에까지 이르게 마련인데, 그러한 주제들은 여기서는 제외되고 있다. 그러나 과학이, 어째서 진실과 허위성이 사실과 진술의 대결에 의해 특이하고 확연하게 결정된다는 일반화의 예증을 제공하는 것으로 보이는가에 대해, 적어도 두 가지의 이유를 주목할 수 있다. 정상 과학은 이론과 사실이 보다 가깝게 일치되도록 끊임없이 온갖 노력을 기울이고 있고, 또 그래야만 하며, 그런 활동은 확증 또는 반증에 대한 시험이나 조사로써 쉽사리 보여질 수 있다. 그러나 그 목적은 바로 그 존재 때문에 패러다임의 타당성이 인정되어야 하는 수수께끼를 풀어내는 것이다. 해답을 얻어내지 못하는 것은 과학자의 탓일 뿐이지 과학 이론의 흠이 되지는 않는다. 이에 대해서 한 수위의 표현은 "자기 연장을 나무라는 사람은 변변치 못한 목수이다"라는 경구이다. 게다가 과학 교수법이 어느 이론의 논의와 그 실례 적용에 관한 언급을 서로 얽히게 하는 방식은, 주로 다른 자료로부터 끌어낸 확인-이론(confirmation-theory)을 강화시키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렇게 할 만한 티끌만큼의 이유라도 주어지면, 과학 교과서를 읽는 사람은 그 적용들을 그 이론에 대한 증거로서 쉽게 받아들인다. 즉 왜 그렇게 믿어야 되는가의 이유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나 과학도들은 증거 때문이 아니라 교사와 교재의 권위 때문에 이론들을 수용한다. 학생들에게 달리 무슨 방법 또는 무슨 능력이 있겠는가? 교과서에 주어진 적용 예들은 증거로서 거기에 실린 것이 아니라, 그런 것들을 배우는 것이 현재 활동의 기초에서 패러다임을 익히는 것의 일부이기 때문에 실린 것이다. 만일 적용 예제가 증거로서 서술된 것이라면, 과학자들이 패러다임 풀이를 얻는데 실패한 문제들에 대해서 교과서가 다른 방식의 해석을 제한하거나 논의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그 저자들을 극단적인 편견을 가진 것처럼 몰게 될 것이다. 그렇게 탓할 만한 이유는 조금도 없다.
그러면 이제 처음 물음으로 되돌아가서, 과학자는 이론과 자연 사이의 일치에서 이상(anomaly)을 인지하게 될 때 어떤 반응을 나타내게 되는가? 앞에서 방금 논의한 내용은 이론의 여러 적용 예에서 경험된 것에 비해 대단히 엄청난 차이가 나더라도 반드시 심각한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아님을 시사한다. 언제든지 어느 정도는 어긋나게 마련이다. 가장 완강한 차이조차도 결국에는 정상 연구의 실제에 순응하는 것이 보통이다. 아주 흔하게는 과학자들은 기꺼이 기다리려고 하는데, 특히 그 분야의 다른 영역에서 다룰 문제들이 많은 때 그러하다. 우리가 이미 주목했던 바와 같이, 예컨대 뉴턴의 원래 계산 이후 60년 동안 달이 지구에 가장 가까워지는 점(perigee)의 운동 예측치는 관찰된 값의 절반밖에 되지 않은 채 방치되고 있다. 유럽의 가장 뛰어난 수리 물리학자들(mathematical physicists)이 아무리 연구를 해도 그 확연한 오차를 해결할 수 없게 되자, 자연스럽게 뉴턴의 역제곱 법칙(inverse square law)의 수정에 관한 제안이 나오게 되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이들 제안에 아주 심각하게 여기지는 않았고, 실제로 주요 이상 현상에 대한 이런 인내는 옳았던 것으로 밝혀졌다. 1750년 크래로(Clairaut)는 적용에서의 수학만이 잘못되었을 뿐 뉴턴 이론은 여전히 성립된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었던 것이다.19) 사소한 실수도 있을 법하지 않은 경우에서도 (아마도 그 이유는 관련된 수학이 보다 간단하거나 친숙한 것이고, 다른 데서는 잘 맞는 종류이기 때문이다), 끈질기게 대두되고 인지된 이상현상이 반드시 위기를 초래하는 것은 아니다. 뉴턴 이론으로부터의 예측과 소리의 속도 및 수성(Mercury) 운동의 두 가지 관측이 서로 어긋난다는 것이 오랫동안 인식되었다는 이유로 뉴턴 이론에 대해 심각한 회의를 품었던 사람은 없었다. 음속에 대한 차이는 전혀 다른 목적으로 이루어진 열에 관한 실험들에 의해 결국 예기치 않게 풀리게 되었다. 수성의 운동에 대한 불일치는 그 이론이 그 조성에 아무런 구실도 하지 않았던 위기 이후에 일반 상대성 이론의 출현과 더불어 사라져 갔다.20) 둘 중 어느 것도 위기에 따른 불안정을 야기시킬 만큼 그렇게 근본적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그것들은 반증 예로서 인정될 수 있었고, 이후에 수행될 작업으로 여전히 미루어 둘 수 있었다.
만일 하나의 이상현상이 위기를 유발시킨다면, 그것은 보통 단순한 변칙 이상의 것이라야 한다. 패러다임-자연의 일치(paradigm-nature fit)에는 항상 어디엔가 난관이 도사리고 있다. 그중 대부분은 흔히 미리 예상치 못했을 과정들에 의해 생겨나는 시간 문제일 뿐, 곧바로 잡혀진다. 주목하는 이상 현상마다 검토하기 위해서 멈추는 과학자라면 일다운 일을 해내는 경우가 드물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이상 현상을 집중적으로 탐사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만드는 요인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제기해야 하는데, 이 질문에는 완벽하게 일반성을 지니는 해답이 없는 것 같다. 앞에서 이미 검토했던 사례들은 특성적이기는 하나 처방이 있는 경우는 드물었다. 때때로 이상 현상은, 에테르-끌림의 문제가 맥스웰 이론을 수용했던 사람들에게 했던 것처럼, 패러다임의 명시적이고 근본적인 일반화에 대해 문제삼게 될 것이다.21) 또는 코페르니쿠스 혁명에서처럼, 명백한 근본적 중요성이 없는 이상 현상이라도 그것이 방해하는 응용들이 특수한 실용적 중요성을 띠는 경우라면―여기서는 달력제작과 점성술에 대하여―위기를 촉발시킬 수 있다. 또는 18세기 화학에서처럼 정상과학의 전개가, 이전에는 그저 말썽거리였던 이상 현상을 위기의 근원으로 변형시킬 수도 있다. 무게 관계의 문제는 기체화학기술(pneumatic-chemical techniques)의 출현 이후에 전혀 다른 성격을 지니게 되었던 것이다. 이상 현상을 특별히 긴급한 문제로 만드는 상황은 이 밖에도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며, 보통 이들 가운데 여러 요인이 복합 될 것이다. 앞에서 이미 보았듯이, 예컨대 코페르니쿠스를 가로막았던 위기의 하나의 원천은 천문학자들이 프톨레마이오스의 지구중심체계에 잔재한 불일치를 감소시키느라 헛수고로 일관했던 세월의 기간이었다.
이런 이유 또는 그 비슷한 여타의 이유로 해서, 하나의 이상 현상이 정상과학의 또 다른 수수께끼 이상의 것으로 보이게 되는 때, 위기로 그리고 비상과학(extraordinary science)으로의 전이는 시작된 것이다. 이상현상은 그 자체로서 이제 전문분야에 의해 점점 일반적으로 수용되기에 이른다. 그 분야의 가장 탁월한 많은 학자들이 그것에 차츰 더 많은 주의를 쏟게 된다. 그렇지 않은 것이 일반적이지만, 만일 그것이 그래도 풀리지 않는 경우, 학자들 다수가 그 풀이를 그들 연구 분야의 제1주제로 삼게 된다. 이제 그들에게 있어서 그 분야는 더 이상 이전의 것과 같은 것으로 보이지 않게 될 것이다. 그렇게 다른 양상으로 보이는 것은 더러는 과학적 탐색에서의 새로운 정착점으로부터 초래되는 결과이다. 이보다 더 중요한 변화의 원천은 그 문제에 주의를 집중시킴으로써 가능케 되었던 다수의 부분적 풀이가 지닌 다양한 성격이다. 끈질기게 풀리지 않는 문제에 대한 초기의 공격은 매우 긴밀하게 패러다임 규칙을 따를 것이다. 그러나 문제가 여전히 잘 풀리지 않음에 따라, 그것에 대한 공격은 점차 사소한 또는 그리 사소하지 않은 패러다임의 명료화를 포함하게 될 것이며, 그런 것들은 제각기 서로 달라서, 어떤 것은 일부 성공적일 것이나, 그 그룹에 의해서 패러다임으로 수용될 만큼 만족스런 것은 없을 것이다. 이렇듯 여러 갈래의 명료화를 거치면서 '점점 자주 그런 것들은 되는 대로의(ad hoc)수정이라고 묘사되기에 이를 것이다', 정상과학의 규칙들은 점증적으로 모호해진다. 패러다임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아직까지도 실제로 연구에 종사하는 이들 가운데 그것에 관하여 전적으로 합의하는 사람은 극소수인 것으로 드러나게 된다. 이미 풀린 문제들의 표준 풀이조차도 의문의 대상이 되고 만다. 심각한 경우, 그런 상황은 관련되는 과학자들에 의해서 인식되는 때도 있다.
코페르니쿠스는 그 시대의 천문학자들이 "이들(천문학상의) 연구에서 일관성이 도무지 없어서.... 공전 주기의 일정한 길이를 설명조차 할 수 없거나 또는 관찰할 수가 없다"고 토로했다. 그는 계속해서 "그들은 마치 한 화가가 다양한 모델로부터 멋대로 손, 발, 머리 등의 부위를 합쳐서 화상을 구성하려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각 부분으로서는 뛰어나게 잘 그렸으나 단일한 신체로 서로 연결되지 못하고 각 부위가 서로 조화를 전혀 이루지 못하기 때문에, 그 결과는 사람이라기보다는 괴물에 가깝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아인슈타인은 당시의 비교적 수수한 표현에 국한시켜, "그것은 마치 바닥이 그 밑바닥으로부터 거덜나서, 그 위에 쌓아 올릴 수 있는 확고한 기초가 아무것도 없는 격이다"라고만 적었다.22) 그리고 파울리(Wolfgang Pauli)는 행렬 역학(matrix mechanics)에 관한 하이젠베르크(Heisenberg)의 논문이 새로운 양자론(quantum theory)에 이르는 길을 제시하기 몇 달 전에 친구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 "지금 현재 물리학은 다시 극심한 혼돈의 상태이다. 어떻든 간에 내게는 매우 힘든 일이며, 차라리 희극배우나 그 비슷한 무엇이 되어 물리학에 대해서는 듣지도 않았더라면 싶다." 그 후 다섯 달도 채 못 되어 파울리가 한 말과 비교한다면, 이 증언은 참으로 인상적이다. "하이젠베르크의 역학의 형태는 내게 다시금 생의 희망과 기쁨을 안겨 주었다. 분명히 그것은 수수께끼에 풀이를 제공하지는 못하고 있으나, 그러나 나는 다시 앞으로 전진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23)
붕괴를 그렇듯이 뚜렷하게 인지하는 일은 지극히 드물지만, 위기의 결과들은 그것의 의식적인 깨달음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과연 그들 영향이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들 가운데 두 가지만이 보편적인 것 같다. 모든 위기는 하나의 패러다임이 모호해짐과 더불어 그리고 그에 따라 정상과학의 규칙들이 해이해짐에 따라 시작된다. 이런 맥락에서 위기 기간의 연구는 패러다임-이전 시절의 연구와 매우 유사하게 되는데, 다만 위기의 연구에서는 견해 차이의 초점이 보다 적으며 보다 명확하게 정의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위기는 세 가지 방식 가운데 하나로서 종결된다. 위기를 기존 패러다임의 종말이라 여겼던 사람들의 절망감에도 불구하고, 정상과학은 궁극적으로 위기를 야기시키는 문제를 다루어 낼 수 있는 것으로 밝혀지는 경우들이 있다. 그런가 하면, 문제가 현저히 급진적인 새로운 접근에 대해서까지도 완강히 저항하는 경우가 있다. 그렇게 되면, 과학자들은 그들 분야의 현 상태로서는 아무런 해답이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그리하여 그 문제는 딱지가 붙고, 보다 진보된 도구들을 지닌 미래 세대의 몫으로 밀쳐지게 된다. 또는 마지막 방식으로서 가장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경우로, 패러다임의 새로운 후보 출현과 더불어, 그리고 그것의 수용에 관해 잇따른 투쟁이 전개됨에 따랄 위기는 종말을 거둘 수 있다. 위기에 종지부를 찍는 이 세 번째 양식에 대해서는 후에 자세히 다를 것이나, 위기 상태의 진화와 구조에 관한 이 부분의 언급을 마무리짓기 위해서는 다음 절에서 논의될 내용의 편린을 예상해야 한다.
위기에 처한 패러다임으로부터 정상과학의 새로운 전통이 태동할 수 있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의 천이는 옛 패러다임의 명료화나 확장에 의해서 성취되는 과정, 즉 축적적 과정(cumulative process)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한 천이는 오히려 새로운 기반으로부터 그 분야를 다시 세우는 것으로서, 그 분야 패러다임의 많은 방법과 응용은 물론 가장 기본적인 이론적 일반화조차도 변화시키게 되는 재건 사업이다. 그 이행 시기에는 옛 패러다임과 새 패러다임에 의해서 풀릴 수 있는 문제들이 크게 중복될 것이나, 그렇다고 해서 결코 완전히 중복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풀이의 양식에도 역시 결정적인 차이가 생길 것이다. 그런 천이가 완결되는 때, 그 전문 분야는 그 영역에 대한 견해, 방법, 목적을 바꾸게 될 것이다. 통찰력 깊은 어느 과학사학자는 최근 패러다임 변화에 의한 과학의 재편성에서의 고전적 사례를 고찰하면서, 그런 천이는 "지팡이의 다른 쪽 끝을 집어 올리는 것"으로서, 그것은 "똑같은 자료 더미를 이전처럼 다루되 그것들에게 종전과는 다른 테두리를 부여함으로써 서로 서로 새로운 관련 체계 속에 놓이도록 함"이 포함되는 과정이라고 묘사한바 있다.24) 과학적 진보의 이런 측면에 주목했던 다른 이들은 그런 천이가 시각적 게슈탈트(visual gestalt)에서의 변화와 비슷하다고 강조했다. 처음에는 한 마리의 새로 보였던 종이 위의 표시가 이제는 영양으로 보인다든가 또는 그 반대로 되는 것이다.25) 그런 비유 관계는 자칫 잘못 이해되기 쉽다. 과학자들은 어떤 사물을 다른 그 무엇으로 보지는 않는다. 오히려 과학자들은 그것을 볼 따름이다. 우리는 이미 앞에서 보았다고 말하는 것에 의해서 야기된 문제들을 몇몇 검토했던 바 있다. 게가 과학자는 보는 방식에서 앞뒤로 오락가락하는 게슈탈트(gestalt) 피실험자의 자유를 누리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슈탈트 전환은, 특히 요즈음에는 매우 친숙한 까닭에, 전면적인 패러다임 변동에서 무엇이 일어나는가를 보여 주는 유용한 기본 원형이 된다.
앞서의 예상은 위기를 새로운 이론들의 출현에 대한 적절한 전주곡으로 인식하는데 도움이 되는데, 특히 이미 발견의 출현에 관한 논의에서 바로 그 동일한 과정의 소규모 수정을 검토한 바 있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출현은 과학 활동에서의 어느 전통과의 관계를 깨고 전혀 다른 규칙 하에서 그리고 전혀 다른 대화의 세계 속에서 행해지는 새로운 전통을 도입시킨다는 이유 때문에, 위기는 최초의 전통이 형편없이 어긋나게 되었다고 느껴질 때에 한해서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표식은 위기 상태의 고찰에 대한 서막 이상은 되지 않으며, 불행히도 그것이 유도하는 질문은 과학사학자의 능력보다도 오히려 심리학자의 재능을 요구한다. 비상적 연구(extraordinary research)란 대체 어떤 것인가? 어떻게 해서 이상은 법칙처럼 만들어지는가? 과학자들의 기존 훈련으로는 다룰 재간이 없는 수준에서 무언가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는 것만을 깨닫게 되는 때 과학자들은 어떻게 연구를 속행하는가? 이러한 질문들보다 심층적인 고찰을 필요로 하는데, 모두 역사적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앞으로 일어나는 것은 이전에 지나간 것에 비해 반드시 더 잠정적이고 덜 완벽한 것이다.
위기가 많이 진전되기 전이나 또는 뚜렷하게 인식되기 이전에 새로운 패러다임은, 적어도 발달이 덜 된 상태로는, 모습을 드러내는 수가 많다. 라부아지에의 연구는 이 점에서 하나의 사례를 제공한다. 그의 봉인된 비망록이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에 기탁된 것은 프롤지스톤 이론에서 무게 관계의 고찰이 처음으로 철저하게 이루어진 지 1년도 못 되어서였고, 또한 프리스틀리의 논문 출간으로 기체화학(pneumatic chemistry)에서의 위기가 완전히 드러나기 이전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예로서, 빛의 파동 이론(wave theory)에 대한 영(Thomas Young)의 최초의 설명은 광학(optics)에서 전개 중이던 위기의 맨 처음 단계에서 나타났던 바, 그것은 영으로부터의 도움이 없어, 그가 최초로 논문을 발표한 때로부터 10년 내에 국제적인 과학 사건으로 번졌던 것을 제외하고는 거의 알아차리지 못했을 위기였다. 이와 같은 경우에서, 우리는 패러다임의 사소한 붕괴 그리고 정상과학에 대한 패러다임 규칙의 최초 무기력화는 과학자로 하여금 그 분야를 새로운 방식으로 바라보도록 만들기에 충분했다는 것만을 말할 수 있다. 말썽거리에 대한 최초의 감지와 가능한 대안에 대한 인식 사이에 개재된 것은 주로 무의식적인 것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다른 경우들―이를테면 코페르니쿠스, 아인슈타인, 그리고 현대의 원자 이론 등―에서는 패러다임 붕괴에 대한 최초의 인식과 새로운 패러다임의 출현 사이에는 상당한 시간차가 벌어진다. 그런 것이 일어날 때, 과학사학자는 비상 과학이 어떤 것인가에 관해 적어도 몇 가지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이론에서의 뚜렷한 근본적 이상현상에 부닥치게 되면, 과학자는 흔히 우선 그것을 보다 정확하게 분리시켜 그것에 구조를 부여하고자 시도하게 된다. 이제 그것들이 꼭 옳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과학자는 어려움에 처한 영역의 어디에 그리고 어느 정도까지 그것들이 적용되도록 할 수 있는가를 알아보기 위해서 정상과학의 규칙들을 종전보다 더 강력하게 구사할 것이다 그와 동시에 과학자는 붕괴를 확대시키는 길, 그 결과를 미리 예측할 수 있는 실험들에서 드러난 것보다 한층 극적이고 또한 보다 시사적인 위기로 만드는 길을 찾게 될 것이다. 그리고 시도 속에서, 과학의 패러다임-이후 발전의 어느 다른 단계에서보다도, 그런 길을 찾는 그는 과학자 중의 가장 과학자다운 이미지로 비쳐질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는 흔히 아무것이나 무작위로 추구하며, 단지 무엇이 일어나는가를 보기 위해 실험을 하며, 본질을 제대로 추론할 수도 없는 결과를 찾아내려는 사람처럼 비쳐질 것이다. 그와 동시에, 어떤 실험도 이론을 갖는 모종의 유형이 없이는 이해될 수 없는 것이므로, 위기에 처한 과학자는 끊임없이 추론적인 가설들을 내세우려고 애쓸 것이며, 성공적인 경우 새로운 패러다임에 이르는 길을 열게 되고, 실패하는 경우 대수롭지 않게 포기할 수 있을 것이다.
케플러가 화성의 운행에 대한 그의 다년간의 투쟁을 설명한 것, 그리고 프리스틀리가 새로운 기체들이 이것저것 나타난 데 대한 그의 반응을 묘사한 것은 이상현상을 인식함으로써 야기된, 보다 무작위적인 연구 형태의 고전적 실례를 보여 준다.26)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잘 들어맞는 설명은 장(場)이론(field theory) 그리고 기본 입자(fundamental particles) 에 관한 현대의 연구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정상과학의 규칙들이 어느 정도까지 확장될 수 있는가를 아는 것을 필요로 했던 위기가 없었더라면, 과연 중성미자(neutrino)를 검출하는 데 요구되었던 막심한 노력이 정당화될 수 있었을까? 또는, 만약 정상과학의 규칙들이 어느 드러나지 않은 시점에서 확실하게 파괴되지 않았더라면, 균등 비보존(parity non-conservation)의 극단적 가설이 제시되었거나 또는 시험되었을까? 과거 10년간 물리학에서 이루어진 그 밖의 많은 연구에서처럼, 이들 실험은 어느 면으로는 아직도 산만한 일련이 이상 현상들의 원천을 찾고 정의하려는 시도였다.
이런 종류의 비상 연구는 통상적으로, 그렇다고 결코 일반적인 것은 아니지만, 또 다른 연구를 수반하게 된다. 나는, 특히 괄목할만한 위기 기간 중에는, 과학자들이 그들 분야의 수수께끼를 푸는 장치로서 철학적 분석으로 전향한다고 생각한다. 과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철학자일 필요도 없고 철학자가 되기를 원하지도 않는다. 참으로 정상과학은 독창적 철학을 경원하는 경향이며, 그럴 만한 충분한 이유도 있는 것 같다. 정상과학 연구 활동이 패러다임을 모델로 삼아 수행될 수 있는 정도에서는 규칙과 가정은 명시적으로 되지 않아도 괜찮다. 우리는 이미 V절에서 철학적 분석에 의해 주목했던 바 있다. 그러나 그것은, 가정들(존재하지 않는 것까지도)에 대한 탐색이 정신 작용에 대한 전통의 통제력을 약화시키고 새로운 전통의 기반을 제시하는 효율적 방법이 될 수 없음을 뜻하지는 않는다. 17세기의 뉴턴 물리학의 출현 그리고 20세기의 상대성 이론과 양자 역학의 탄생은 둘 다 당대의 연구 전통에 대한 근본적인 철학적 분석의 뒤를 따랐고 또한 수반돼야 했다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었다.27) 그리고 이들 두 시기에는 이른바 사고 실험(thought experiment)이 연구의 진보에서 그처럼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내가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갈릴레오, 아인슈타인, 보어(Bohr) 등의 저술에서 대부분을 차지하는 분석적 사고 실험법(analytical thought experimentation)은, 위기의 뿌리를 실험실에서는 얻어질 수 없는 명징성을 지니면서 분리시키는 방식으로 옛 패러다임을 기존 지식에 노출시키도록 완벽하게 계산된 것이다.28)
단독으로 또는 합동으로 이들 비상적과정들이 전개됨과 더불어 또 한 가지 일이 벌어진다. 문제가 생긴 좁은 영역에 과학적 관심을 집중시킴으로써, 그리고 과학 정신이 실험적 이상현상을 그 자체로서 인식하도록 대비함으로써, 위기는 흔히 새로운 발견들을 양산하게 된다. 우리는 이미 앞에서 위기의 인식이 산소에 관한 라부아지에의 연구를 프리스틀리의 연구로부터 어떻게 차이 나게 했는가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산소는 화학자들의 이상 현상에 대한 인식이 프리스틀리의 연구에서 발견할 수 있었던 유일한 새로운 기체는 아니었다. 또한 새로운 광학적인 발견들이 빛이 파동 이론 출현 이전에 그리고 그 기간 동안에 마구 쏟아져 나왔다. 반사에 의한 편광(polarization)처럼, 어떤 현상들은 문제가 생긴 영역에서의 집중적 연구가 빚어낸 우연한 사건들의 결과였다(이 발제인 이중 굴절(double refraction)에 관한 과학 아카데미의 현상 논문의 연구를 막 착수하고 있었다.) 다른 현상들은, 회전 디스크의 그림자 중심에 나타나는 밝은 점의 연구를 위한 패러다임으로 변형하는 것을 도왔던 것이었다. 또 어떤 것들은, 긁힌 자국의 색깔과 두꺼운 판유리의 색깔처럼, 흔히 보아 왔고 전에도 가끔 언급되었던 효과들이었는데, 그 현상들은, 프리스 방식으로 이미 잘 알려진 효과들에 동화되어 버렸다.29) 1895년경부터 양자 역학의 출현과 함께 일어났던 여러 가지 발견에 대해서도 이와 마찬가지로 설명될 수 있다.
비상 연구(extraordinary research)는 이 밖에도 다른 여러 형태와 영향을 나타냄에 틀림없으나, 이 방면에서 우리는 아직 제기되어야 할 필요가 있는 질문들의 발견에서 첫 걸음도 못 디딘 정도이다. 그러나 아마도 이 시점에서는 더 이상의 것이 필요 없을지도 모른다. 앞에서의 언급은 위기가 어떻게 상투적인 틀을 이완시킴과 동시에 근본적인 패러다임 변동에 필요한 증대분의 데이터를 제공하는 가를 증명하기에 충분한 것이다. 때로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형태는 비상연구가 이상 현상에 부여한 구조에서 그 징조를 드러내는 경우들도 있다. 아인슈타인은 고전역학(Classical mechanics)을 대치하는 어떤 것을 갖기 이전에, 자신은 흑체복사(black-body radiation), 광전 효과(photoelectronic effect), 그리고 비열이라는(specific heats)이라는 이미 알려진 이상 현상들 사이의 상호 관계를 볼 수 있었다고 적었다.30) 그러한 구조는 의식적으로 미리 예시되지 않는 일이 더 흔하다. 오히려 새로운 패러다임 또는 이후의 명료화를 허용하는 충분한 암시는 한꺼번에 쏟아져 나와, 때로는 한밤중에, 위기에 깊숙이 잠겨 버린 사람의 정신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그러한 최종 단계의 성격이 무엇인가는―어느 개인이 현재로서 모두 갖춰진 데이터에 질서를 부여하는 새로운 방법을 어떻게 고안하는가(또는 자기가 그것을 고안했다는 것을 발견하는가)는― 여기서 불가해의 문제로 남게 되며, 또 영원히 그렇게 남을 수도 있다. 이제 우리는 그것에 대해 한 가지만 살펴보자. 거의 예외 없이, 새로운 패러다임의 이러한 근본적 창출을 이루어낸 사람들은 아주 젊다든가 아니면 그들이 변형시키는 패러다임의 분야에 아주 새롭게 접한 사람들이다.31) 그리고 아마도 그런 점은 명시적으로 밝혀야 할 필요가 없는지도 모르겠는데, 그 이유는 확실히 이들은 이전의 활동들 때문에 정상과학의 전통적 규칙에 매이는 일은 거의 없고, 특히 이전의 규칙들이 해 볼 만한 게임을 더 이상 정의하지 못하게 된 것으로 보고 그것들을 대치할 다른 규칙들에 착상하기가 쉬운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에 따르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의 이행이 고학혁명으로서, 이제 드디어 우리가 곧바로 접근하도록 준비가 갖추어진 주제이다. 그러나 우선 바로 앞의 세 절의 내용이 그 길을 마련해 준, 겉보기에 포착하기 어려운 한 가지 마지막 성격에 주목하라. 이상(anomaly)의 개념이 처음으로 도입된 VI절까지는 '혁명(revolution)'과 '비상과학(extraordinary science)'이란 용어는 동격인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적어도 몇몇 독자들에게는 미심쩍어 보였을 순환성으로서, 그 중 어느 용어도 '비정상 과학(non-normal science)' 이상의 것을 뜻하지 않은 듯이 보였을 것이다. 실상 그것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우리는 이제 그와 유사한 순환성으로서, 그 중 어느 용어도 '비정상과학' 이상의 것을 뜻하지 않는 듯이 보였을 것이다. 실상 그것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우리는 이제 그와 유사한 순환성이 과학 이론들의 특성이라는 것을 발견할 시점에 이르렀다. 그러나 께름칙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그런 순환성은 이제 더 이상 부당한 것이 아니다. 이 책의 이 절과 앞의 두 절에서는 정상과학 활동의 붕괴에서의 다수의 한계 기준을 끌어냈는데, 그 기준은 붕괴 이후에 혁명이 일어났는가 하는 문제와는 전혀 무관하다 이상 현상이나 위기에 직면하는 경우, 과학자들은 현존 패러다임에 대해서 이전과는 다른 태도를 취하게 되면, 그들 연구의 성격도 그에 따라 바뀌게 된다. 경쟁적인 명료화의 남발, 무엇이든 해 보려는 의지, 명백한 불만의 표현, 철학에의 의존과 기본 요소에 관한 논쟁, 이 모든 것들은 정상 연구로부터 비상 연구로 옮아가는 증세들이다. 정상과학의 개념이 의존하는 것은 혁명의 존재라기보다는 이들 증상의 존재이다.
IX. 과학혁명의 성격과 필연성(The Nature and Necessity of Scientific Revolutions)
이렇게 살펴봄으로써 우리는 드디어 이 에세이에 제목을 부여한 그 문제들을 고려할 수 있게 되었다. 과학혁명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은 과학의 발전에서 어떤 기능을 하는가? 이들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앞에 다룬 절들에서 상당부분 예측되어 왔다. 특히 바로 앞 절의 논의에 따르면 여기서 과학혁명이란, 보다 옛 패러다임이 전반적이거나 부분적으로, 서로 양립되지 않는 새 것에 의해 대치되는 비축적적(non-cumulative)인 발전에서의 에피소드들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이외에 말해야 할 것이 더 있는데, 그 본질적 요소는 한 가지 물음을 제기함으로써 잡힐 수 있다. 패러다임의 변화는 어째서 혁명이라 불리어야 하는가? 정치적 발전과 과학의 발전 사이에는 엄청난 본질적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유비 관계가 양쪽에서 혁명을 발견하는 은유(metaphor)를 정당화시키는가?
그러한 유사 관계의 한 측면은 앞의 논의 과정에서 이미 뚜렷해졌음에 틀림없다. 정치적 혁명이란, 기존제도가 주위 상황에 의해 제기되는 문제들을 이제 더 이상 적절하게 해결할 수 없다는 의식이 흔히 정치적 사회의 집단에 편재되어 팽배하면서 시작된다. 이와 상당히 비슷한 방식으로, 과학혁명이란, 기존 패러다임이 자연현상에 대한 다각적인 탐사에서 이전에는 그 방법을 주도했으나 이제 더 이상 적절하게 구실을 하지 못한다는 의식이 과학자 사회의 좁은 분야에 국한되어 점차로 증대되면서 시작된다. 정치적, 과학적 발전의 양쪽에서 위기로 몰고 갈 수 있는 기능적 결함을 깨닫는 것은 혁명의 선행적 조건이다. 더욱이, 분명 그 은유를 제약하기는 하지만, 그런 유비 관계는 코페르니쿠스와 라부아지에의 경우와 같은 주요 패러다임 변화에 적용될 뿐만 아니라, 산소나 X선처럼 새로운 현상의 동화와 연관된 국부적인 패러다임 변화에서도 역시 성립된다. 과학혁명은, V절 끝에서 보았던 것처럼, 그들의 패러다임이 그 혁명들에 의해 영향을 받게 되는 사람들에게만 혁명 같아 보이면 된다. 그 밖의 무관한 사람들에게는, 20세기 초의 발칸 혁명과 같이, 발달 과정에서의 정상적인 일면으로 보일 것이다. 예컨대 천문학자들은 X선을 지식 더미에 단순히 하나 더 추가된 것으로 받아들였는데, 왜냐하면 그들의 패러다임은 새로운 복사선의 존재에 의해 달라질 게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연구과정에서 복사 이론 또는 음극선 관을 다루었던 켈빈(Kelvin), 크룩스(Crooks), 뢴트겐(Roentgen) 같은 학자들에게 있어서, X선의 출현은 새로운 다른 패러다임을 창출하게 되면서 하나의 패러다임을 위배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어째서 이들 복사선이 정상 연구에서 우선 무언가 잘못된 후에야 발견될 수 있었는가의 이유가 된다.
정치적 및 과학적 발전 사이의 이러한 원천적 유사성의 측면은 더 이상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 원천적 유사성의 제2의 보다 심오한 측면을 지니고 있다. 일반적으로 정치적 혁명은 기존 정치제도 자체가 금지하는 방식으로 그것들을 개혁하는 것을 겨냥한다. 그러므로 정치적 혁명의 성공은 다른 제도를 위하여 기존 제도의 일부를 파기하는 것을 필연적으로 연구하며, 그러는 동안 사회는 기종 제도에 의해 완전히 통제되지 못한다. 이미 앞에서 위기가 패러다임이 역할을 약화시키는 것을 보았듯이, 당초 정치적 제도의 역할을 약화시키는 것도 위기뿐이다. 수효가 늘어가면서 점차로 많은 사람들이 정치 생활로부터 소원해지고 그 속에서 점점 더 정상궤도를 벗어나데 행동한다. 다음, 위기가 심화됨에 따라, 이런 사람들의 대부분은 새로운 제도의 틀 속에서 사회를 재구성하는 어떤 구체적 대안을 밝히게 된다. 그 시점에 이르면 그 사회는 여러 갈래의 경쟁적 진영이나 당파로 나뉘게 되는데, 한 편은 구제도를 옹호하는 입장을 취하고, 다른 한편은 새로운 제도의 수립을 추구하게 된다. 그리고 일단 진영의 양극화가 발생하면, 정치에의 의존은 무너져 버린다.
그들 진영들은 그 속에서 정치적 혁명이 수행되고 평가되는 제도적 모형에 대해 의견을 달리하기 때문에 그리고 혁명에서의 차이를 조정하는 데 제도 이상의 골격(supra-institutional framework)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혁명의 투쟁에 나선 당파들은 결국 흔히들 무력을 포함한 대중 설득의 기술에 호소해야 하기에 이른다. 혁명은 정치 제도의 진보에서 결정적 역할을 해 왔지만, 그런 역할은 혁명이 부분적으로 정치 외적 또는 제도 외적인 사건들이라는 사실에 의존한다. 이 에세이의 나머지 부분은 패러다임 변화의 과학적 고찰이 과학의 진화에서 매우 유사한 특성을 드러낸다는 것을 증명함을 목표하고 있다. 서로 경쟁하는 정치적 제도들 사이의 선택과 마찬가지로, 경쟁하는 패러다임들 사이의 선택이라는 것이 밝혀진다. 그것이 그런 특성을 띠고 있는 까닭에, 선택은 단순히 정상과학에 대한 특성적인 평가방법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며 그렇게 결정될 수도 없다. 이유는 선택이 부분적으로 특정 패러다임에 의존하고 있으며 그 패러다임이 바로 논의의 주제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패러다임이, 반드시 그래야 하는 것처럼, 패러다임 선택에 관한 논쟁에 끼어들게 되면, 패러다임의 역할은 필연적으로 순환성을 띠게 된다. 그룹마다 제각기 그 패러다임을 옹호하는 논증에 그 고유의 패러다임을 이용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에 따르는 순환성이 논쟁들을 잘못된 것으로 또는 무력한 것으로까지는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패러다임의 방어 논쟁에서 그 패러다임을 전제로 삼들 사람은, 과학 활동이 자연의 새로운 견해를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어떤 모습일 것인가에 관해 명백한 증거를 제시할 수 있다. 그런 증거는 엄청나게 설득력이 클 수도 있으며, 흔히 그렇게 밀어붙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위력이 무엇이든 간에 순환적 논증의 상태는 다만 설득의 상태일 뿐이다. 그것은 논리적으로 또는 심지어 확률적으로 그 순환에 끼여들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을 억지로 끄어들일 수는 없다. 그렇게 하기에는 패러다임에 관한 논쟁의 두 파에 의해 공유되는 전제와 가치는 포괄성이 부족하다. 정치적 혁명에서처럼 패러다임 선택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해당 집단의 동의보다 상위인 기준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과학혁명이 어떻게 달성되는가를 알아내려면, 자연과 논리의 충격뿐만 아니라 과학자 사회를 구성하는 상당히 특이한 집단 내에서의 효과적 설득의 논증 기교를 검토해야 할 것이다.
패러다임 선택이라는 이 주제가 논리와 실험만으로 확고하게 풀릴 수 없는 이유가 무엇인가를 찾기 위해서, 우리는 곧 전통적 패러다임의 지지자들을 혁명적인 후계자들과 구별짓는 차이들의 성격에 관해 살펴보아야 한다. 그러한 검토를 하는 것이 이 절과 다음 절의 주요 목표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앞에서 그런 상이점에 관한 여러 가지 실례를 보았으며, 어느 누구도 역사가 다른 사례들을 다수 제공할 것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그런 예증의 존재보다 실로 미심쩍은―그리고 우선 고려되어야 할―것은 그러한 사례들이 자연의 본질에 대한 결정적 정보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패러다임의 폐기가 역사적 사실이었다는 점을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인간이 쉽게 믿어 버리는 경향과 혼돈 이상의 것을 밝혀 주는 것인가? 새로운 종류의 현상이나 새로운 과학 이론의 동화가 그것들보다 구식인 패러다임의 폐기를 강요해야만 하는 본연적 이유가 존재하는 것인가?
우선 만일 그런 이유들이 존재한다면, 그것들은 과학적 지식의 논리적 구조로부터 유도되지 않는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원칙적으로 새로운 현상은 과거의 과학 활동의 어느 부분에도 파괴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으면서 출현할 수 있다. 달에서 생명체를 발견하는 것은 오늘날 현존 패러다임에는 파괴적이겠지만(이들 패러다임은 달에서의 생명체의 존재와 모순되어 보이는 것들을 우리에게 말해 준다), 은하계의 보다 미지의 장소에서 생명체를 발견한다면 그렇지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 이치로, 새로운 이론은 그것에 선행했던 다른 것과 모순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양자이론이 20세기 이전에는 알려지지 않았던 원자를 이루는 입자들의 현상(subatomic phenomena)을 다룬(그러나 유의미하게 다룬다는 것이지 완벽하게 다룬다는 뜻은 아니다) 것에서처럼, 새로운 이론은 예전에는 알려지지 않았던 현상을 전적으로 다룰 수도 있다. 또는 새로운 이론은 이전에 알려졌던 것들보다 단순히 수준을 좀더 높인 이론일 수도 있는데, 그것은 보다 낮은 차원의 이론들의 전체집합을 별다른 변형이 없이 한데 연결시킨 이론이다. 오늘날 에너지 보존 이론(theory do energy conservation)은 역학, 화학, 전기학, 광학, 열 이론 등 사이에서 바로 그런 연결을 맺어주고 있다. 이런 것말고도, 옛 이론과 새로운 이론사이에는 서로 양립될 수 있는 관계들이 얻어질 수 있다. 그런 관계들은 전부 과학이 전개되어 온 역사적 과정들에 의해서 예시될는지도 모른다. 만일 그러하다면, 과학의 발전은 원천적으로 축적적일 것이다. 새로운 종류의 현상이란, 이전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던 자연의 한 측면에서 규칙성을 노출시키는 것일 따름이다. 과학의 진화에서 새로운 지식은 다른 모순되는 종류의 지식을 대치하기보다는 무지를 대치하게 될 것이다.
물론 과학(또는 아마도 보다 덜 효과적인 다른 학문 활동)은 그렇게 완전히 축적적인 양식으로 발전했는지 도 모른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발전했다고 믿어 왔고, 대부분은 여전히 그런 축적성은 적어도 역사적 발전이 그렇게 자주 인간에 의해 왜곡되지 않았더라면 드러내었을 이상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이렇게 믿는 데에는 그럴 만한 중요한 이유들이 있다. X절에서는 축적으로서의 과학관(view do science-as-cumulation)이, 지식을 가공되지 않은 데이터 위에 정신에 의해 직접 세워진 구조물인 것으로 여기는 지배적인 인식론과 얼마나 밀접하게 얽히는가를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XI절에서는 효과적 과학 교수 기법에 의해 뒷받침되는 바로 그런 발달사관에 대한 강력한 지원에 관해 검토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이상적 이미지의 강렬한 지원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과학의 이미지가 될 수 있는가의 여부를 의심할 만한 이유가 점증되고 있다. 패러다임-이전 시기 후에, 모든 새로운 이론의 동화, 그리고 거의 모든 새로운 종류의 형상의 동화는 실상 이전의 패러다임 파괴와 과학사상(scientific thought)의 여러 경쟁 학파 사이에서의 갈등을 초래하게 되었다. 예기치 못했던 새로움을 축적적으로 쌓는 일은 과학적 발전의 규칙에 거의 실제 하지 않는 예외라는 것이 밝혀진다. 역사적 사실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과학이 그 축적성이라는 우리의 이미지가 제시한 이상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아마도 과학은 그것과는 다른 종류의 활동일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저항적인 사실들이 우리를 쉽사리 믿기지 않게 한다면, 이미 살펴본 근거를 다시 생각해 봄으로써 새로움의 누적적 축적은 실제로 드물 뿐만 아니라 원칙적으로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축적되는 성격인 정상과학이 그 성공을 거두는 것은, 과학자들이 규칙적으로 이미 존재하는 것들에 근사한 개념적 및 기기적 기술로 풀 수 있는 문제들을 선정하는 능력 덕분이다(이것은 기존 지식이나 기술에 대한 관계에 상관없이, 유용한 문제들에 지나친 관심을 두는 것이 과학적 발전을 쉽사리 방해할 수 있는 이유가 된다). 그러나 기존 지식과 기술에 의해 정의된 문제를 풀고자 애쓰는 사람은 단순히 둘러보는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은 자신이 성취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자신의 도구를 고안하려 거기에 맞게 그의 사고를 끌고 간다. 예기치 못했던 새로움 즉 새로운 발견은 자연에 대한 그의 예측과 그의 도구가 틀린 것임이 밝혀진 경우에만 출현할 수 있다. 그로부터 유래되는 발견의 중요성은, 흔히 그 자체로서 발견의 징후를 보이는 이상(anomaly) 현상의 정도와 완강함에 비례할 것이다. 그 다음에는 분명히 이변을 드러내는 패러다임과 후에 이상 현상을 법칙처럼 만들어 줄 패러다임 사이에 갈등이 생길 것이다. Ⅵ절에서 검토한 패러다임 파괴를 거치는 발견의 사례는 우리를 단순한 역사적 우발 사건에 부딪치게 한 것이 아니었다. 발견이 생겨날 수 있는 이 밖의 효과적인 다른 방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와 똑같은 논거는 새로운 이론들의 창안에 보다 분명하게 들어맞는다. 원칙적으로 새로운 이론이 전재되는 데 있어서는 오로지 세 가지 종류의 현상만이 있을 뿐이다 첫 번째 것은 기존 패러다임에 의해서 이미 잘 설명된 현상들로 이루어지며, 이것들이 이론 구축에 대한 동기라든가 새 출발의 시점을 제공하는 일은 거의 없다. VII절의 마지막에서 논의한 세 가지 유명한 예측에서처럼, 그런 현상들이 동기나 출발점을 부여할 때에는 그 결과로 나타나는 이론들이 수용되는 일이 드물다. 그 이유는 자연은 판별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하지 않기 때문이다. 두 번째 부류의 현상은 기존 패러다임에 의해 그 본질은 지시되지만 상세한 냉용은 이론의 보다 진전된 명료화를 통해서만 이해될 수 있은 것들로 구성된다. 이것들은 과학자들이 많은 시간을 연구에 집중하는 현상들이지만, 그런 연구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창안을 겨냥하기보다는 기존 패러다임의 명료화에 목표를 둔다. 명료화를 위한 이들 시도가 실패하는 경우에 한해서 과학자들은 세 번째 형태의 현상과 마주치게 되는데, 이것들은 인식된 이상 현상들로서 그 특성적 성격은 기존 패러다임에 동화되기를 강경히 거부한다는 점이다. 이 세 번째 형태의 현상만이 새로운 이론들의 작인이 된다. 패러다임은 이상 현상을 제외한 무든 현상에 대해 과학자의 시각에서의 이론-결정적(theory-determined)인 위치를 부여한다.
그러나 만일 자연 현상에 대한 기존 이론의 관계에서 이상 현상을 해결하기 위해 새로운 이론을 환기시키게 하려면, 성공적인 새 이론은 어딘가 그 이전의 것으로부터 유도된 것들과는 다른 예측들을 줄 수 있어야 한다. 만약 두 가지가 논리적으로 양립될 수 있는 경우라면 그 차이는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동화되고 있는 과정에서, 두 번째 이론은 첫 번째 것을 대치 시켜야 한다. 오늘날, 독립적으로 확립된 이론들을 통해서만 자연에 관계를 맺는 논리적 체계로 보이는 에너지 보존(energy conservation)과 같은 이론조차도, 역사적으로 보면 패러다임 파괴가 없이 전개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뉴턴의 역학과 열의 칼로리 이론(caloric theory of heat)의 최근 공식화된 어떤 결과 사이의 상충이 핵심 요소였던 위기의 국면으로부터 출현한 것이었다. 칼로리 이론이 폐기된 후에야 에너지 보존 법칙은 과학의 한 부분이 될 수 있었다.32) 그리고 그것은 얼마동안 과학의 일부로 머문 뒤에 그 이전 것들과 모순되지 않는 논리적으로 보다 차원 높은 형태의 이론으로 보일 수 있게 되었다, 어떻게 해서 새로운 이론이 자연에 관한 믿음에서의 이러한 파괴적 변화 없이도 나타날 수 있는가를 이해하기는 힘들다. 논리적 포괄성은, 잇달아 나타나는 과학 이론들 사이의 연관성에 관한 허용될 만한 관점으로 자리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역사적으로는 개연성이 없다.
1세기 전이었다면 나는 아마 과학혁명의 필연성에 관한 경우를 이 점에 머물게 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위에서 전개된 주재의 견해는 과학 이론의 성격과 기능을 설명하는 현대의 가장 유력한 해석이 인정받는 경우에는 유지될 수가 없기 때문에 오늘날은 불행히도 그렇게 될 수가 없다. 초기의 논리 실증주의(logical positivism)와 밀접하게 관련되었고 그 후계자들에 의해 범주 상으로 폐기되지 않았던 그런 해석은 수용된 이론의 범위와 의미를 제한시킬 것이기 때문에, 어느 똑같은 자연 형상에 대해 예측해 낸 그 후의 다른 이론과 아마도 모순될 수는 없을 것이다. 과학 이론에 대한 이런 제한된 관념을 보여 주는 경우로서 가장 잘 알려지고 분명한 것은 현대의 아인슈타인 역학과 뉴턴의 "프린키피아(Principia)"로부터 파생된 보다 오랜 역학의 관계식 사이의 이론 연구 이론은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체계와 프톨레마이오스의 지구중심체계에 대한 관계에서 설명된 것과 마찬가지로 근본적으로 서로 모순된다. 아인슈타인의 이론은 뉴턴의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식함으로써만 수용될 수 있다. 그러나 요즈음에 이것은 소수의 견해로 머물고 있다.33) 그러므로 우리는 이에 대한 가장 유력한 반대 의견에 대해 검토해야만 한다.
이들 이견의 요점은 다음과 같이 전개될 수 있다. 상대론적 역학은 뉴턴 역학이 잘못된 것임을 증명해 낼 수 없다,. 뉴턴의 역학은 아직도 대부분의 공학자들에 의해서 매우 성공적으로 이용되고 있으며, 다수의 물리학자들에 의해서도 선별적으로 적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보다 옛 이론의 이러한 이용의 타당성은 여타의 응용에서 옛 이론을 대치한 바로 그 이론으로부터 증명될 수가 있다. 아인슈타인의 이론은, 소수의 제한 조건이 충족된 모든 적용에서 뉴턴 방정식의 예측들은 우리의 측정 기기만큼 훌륭한 구실을 할 것임을 증명하는 데 이용될 수 있다. 예컨대 만약 뉴턴 이론이 그럴듯한 근사적 해를 제공하게 되려면, 고려되는 물체들의 상대 속도는 빛의 속도에 비해 작아야만 한다. 이 조건과 그 밖의 몇 가지 조건이 만족된다면, 뉴턴 이론은 아인슈타인 이론으로부터 유도될 수 있는 것으로 보이므로, 따라서 뉴턴 이론은 아인슈타인 이론의 특수 경우가 된다.
그러나 반대 의견은 계속되어서, 어떤 이론도 그것은 특수 경우들 중의 하나와 모순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만일 아인슈타인의 과학이 뉴턴 역학을 틀리게 만드는 것으로 보인다면, 그것은 뉴턴주의자들의 일부가 뉴턴 이론이 완벽하게 정확한 결과를 준다거나 또는 상대 속도가 매우 빠른 경우에도 뉴턴 이론이 잘 맞는다고 경솔하게 주장했던 까닭에 한 해서였을 뿐이다. 뉴턴 학파의 그 사람들은 그런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어떤 증거도 갖출 수 없었으므로, 그런 주장을 했을 때 그들은 과학의 규범을 벗어나 버렸던 것이다. 뉴턴 이론이 타당한 증거에 의해 뒤받침 되는 참으로 과학적인 이론이 되는 범위에서의 주장은 여전히 성립된다. 그 이론에 행한 엉뚱한 주장들만이―정통 과학의 일부가 되지 못했던 주장들―아인슈타인에 의해서 잘못된 것을 밝혀질 수 있었다. 이들 원초적 인간성의 무모함을 배제한다면, 뉴턴 이론의 도전 받았던 적도 없었으며 또한 도전 받을 수도 없는 것이다.
이런 논의의 어떤 변형은 유능한 과학자의 유력한 그룹에 의해 사용된 어느 이론이든지 공격을 면하도록 만들기에 꽤 충분하다. 이를테면, 결함투성이의 플로지스톤 이론도 여러 가지 물리적, 화학적 현상에 규칙성을 부여하였다. 플로지스톤 이론도 물체가 왜 타는지를 설명했고―그 물체에는 플로지스톤이 풍부하기 때문이라고―금속들은 왜 광석 상태보다 공통성을 훨씬 많이 지니고 있는가를 설명했다. 금속은 모두 상이한 원소성 토류(earths)가 플로지스톤과 결합된 복합성 물질 이였으며, 플로지스톤은 모든 금속에 공통으로 있으므로 그들에게 공통되는 성질을 부여하는 것이 였다. 덧붙여, 플로지스톤 이론은 탄소와 황 같은 물질의 연소에 의하나 산 (acid)이 생성되는 여러 반응에 대해서도 설명해 주었다. 또한 플로지스톤 이론은 한정된 부피의 공기 중에서 연소가 일어날 때 부피가 감소되는 현상을 설명하였다. 연소에 의해 방출되는 플로지스톤은 마치 불꽃이 철사줄의 탄성을 '망치는(spoils)'것처럼, 그것을 흡수한 공기의 신축성을 '손상시킨다(spoils)'.34) 만약 이런 것들이 플로지스톤 이론가들이 그들의 이론을 옹호하는 데 쓰였던 유일한 현상들이었다면, 그 이론은 결코 도전을 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와 비슷한 식의 논의는 어떤 영역의 현상에서는 성공적으로 적용되어온 어느 이론에 대해서나 충분히 성립될 것이다.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 이론들을 구제하려면 그것들의 적용 범위는 손안에 든 실험적 증거가 이미 다루었던 현상들에, 그리고 그런 관측의 정확성에까지 제한되어야 한다.35) 여기서 한 단계만 더 나아가면(그리고 그 단계는 일단 첫걸음을 내디딘 뒤에는 어쩔 수 없이 따라오게 마련인데), 그러한 제약은 과학자로 하여금 이미 관찰되지 않는 현상에 관해 '과학적으로' 얘기한다고 주장하지 못하도록 만든다. 현재의 형태로서도 그 제약은 그런 연구가 이론에 바탕한 근거의 과학 활동에서 아무런 전례를 제공하지 않은 분야로 들어가거나 또는 정확도를 추구하는 때에는 언제나, 과학자로 하여금 그 자신의 연구에서 이론에 의존하지 못하도록 막는다. 이러한 금지는 논리상 예외적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들을 수용한 결과는 과학이 그것을 통해 더욱 발전할 수 있는 연구 전통의 종말이 될 것이다.
이쯤 되면 이 요점 역시 사실상 동어반복(tautology)이다. 어느 패러다임에 매이지 않고는 정상과학이란 있을 수 없다. 더욱이 그런 공약은 완벽한 전례가 없는 분야들에까지, 그리고 전례가 없는 정확도까지 확장되어야 한다.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그 패러다임은 일찍이 풀리지 않았던 수수께끼를 전혀 제공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패러다임에의 공약에 의존하는 것은 정상과학뿐만이 아니다. 만일 현존 이론이 과학자를 기존 응용해 대한 관계에만 묶고 있다면, 거기에는 놀라움도 이상 현상도 또는 위기도 존재할 수가 없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바로 비상(非常)과학을 향한 조정을 가리키는 표지가 된다. 어느 이론의 합법적인 응용범위에 대한 실증적 제약(positivistic restrictions)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과학자 사회에서 어떤 문제들이 근본적 변혁에 이르게 하는가를 말해 주는 메커니즘은 그 기능을 멈춰야 한다. 그리고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되면, 그 과학자 사회는 패러다임-이전 상태와 흡사한 어떤 것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모든 구성원이 과학을 수행하기는 하나 그들의 총체적 산물은 도대체 과학을 닮은 경우가 드물게 되어 버리는 상황이다. 유의미한 과학적 진보의 대가는 잘못되어 가는 위험을 무릅쓰는 책임이라는 것이 정말 이상한 일인가?
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를 곧바로 혁명적 변화의 성격으로 다시 안내할 실증주의자(positivist)의 논증에는 논리적 허점이 뚜렷이 드러난다. 뉴턴의 역학은 참으로 상대론적 역학(relativistic dynamics)으로부터 유도될 수 있는가? 그러한 유도는 과연 무엇처럼 보일 것인가? 한데 모여 상대성 이론의 법칙들을 구체적으로 구현하는, ^6 15 2^ ^6 15 23^, ... ^6 15 56 1345^으로 표시되는 한 벌의 서술 형태에 대해 상상해 보라, 이러한 서술에는 공간적 위치, 시간, 정지 질량(rest mass) 등을 나타내는 변수(variables)와 파라미터(parameters)가 포함된다. 논리 및 수학의 장비와 더불어, 그것들로부터 어떤 것들은 관찰에 의해서 검증될 수 있는 온전한 한 벌의 서술형이 더 유도될 수 있다. 뉴턴의 역학이 하나의 특수 경우로서 성립됨의 적절함을 증명하려면, 파라미터와 변수의 범위를 제한하게 되는 (u/c)^3456 126^<<1 과 같은 것을 ^6 15 56 24^의 부가적 진술에 첨가시켜야 한다. 그 다음 이렇게 확장된 한 별의 서술은, 뉴턴의 운동 법칙, 중력의 법칙 등과 형태가 같은 새로운 한 벌의 ^6 1345 2^ ^6 1345 23^, ... ^6 1345 56 134^로 계산되기에 이른다. 뉴턴의 역학은, 거기에 몇 가지의 제약 조건을 붙임으로써 아인슈타인 이론으로부터 유도된 것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도는 적어도 이 시점까지의 논의에서 보기에는 눈속임으로 보인다. ^6 1345 56 24^는 상대론적 역학의 법칙들(law of relativistic mechanics)의 특수 경우이지만, 그것들은 뉴턴의 법칙들은 아니다. 또는 적어도 그것들은 아인슈타인의 연구 이전까지는 불가능했을 방식으로 그들 법칙들이 재해석되지 않은 한, 뉴턴의 법칙들은 아니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6 15 56 24^ 묶음에서 공간적 위치, 시간, 질량 등을 나타냈던 변수와 파라미터는 ^6 1345 56 24^조에서도 여전히 나타난다. 그리고 그것들은 거기서 여전히 아인슈타인의 공간, 시간, 질량을 표시한다. 그러나 이들 아인슈타인 개념의 물리적 지시 대상은 동일한 이론을 지닌 뉴턴 개념의 그것들과 결코 같지 않다(뉴턴의 질량은 보존된다. 아인슈타인의 질량은 에너지로 변화될 수 있다. 상대 속도가 느린 경우라 할지라도 그 둘을 똑같은 것으로 보아서는 안된다). ^6 1345 56 24^ 묶음에서의 변수들에 대한 정의를 변화시키지 않는 한, 우리가 유도한 진술은 뉴턴의 법칙이 되지 않는다. 만일 그들 정의를 바꾼다면 적어도 요즈음 일반적으로 받아들이는 '유도(derive)'의 의미에서는, 뉴턴의 법칙을 유도했다고 말하기가 곤란하다. 우리의 논증은 물론 뉴턴 법칙들이 어째서 잘 맞는 것처럼 보였던 가의 이유를 설명하였다. 그렇게 함에 있어서, 이를테면 자동차 운전자가 마치 그가 뉴턴의 우주에 사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을 합리화시켰다. 이와 동류의 논증은 천체 관측자들에게 지구중심의 천문학을 가르치는 것을 정당화하는 데에도 이용된다. 그러나 그 논증은 아직까지 정작 해야 할 것을 증명하지 못하였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뉴턴의 법칙들이 아인슈타인 법칙의 하나의 한정된 경우라는 것을 증명하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그 제약에 이르는 경로에서 변화를 겪은 것은 법칙의 형태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형태 변화와 동시에 우리는 그 법칙들이 적용되는 우주가 구성하고 있는 기본적인 구조적 요소들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이미 확립된 친숙한 개념들이 의미하는 바를 뜯어고쳐야 하는 이런 필요성은 아인슈타인 이론의 혁명적 충격에 핵심 되는 요소이다. 지구중심설(geocentrism)로부터 태양중심설(heliocentrism)로, 플로지스톤으로부터 산소로, 또는 입자로부터 파동으로 변화보다도 더 미묘함에도 불구하고, 그 결과로 나타나는 개념적 변환은 이전에 확립된 패러다임의 파괴 못지 않게 결정적으로 파괴적이다. 우리는 그것을 과학에서의 혁명적 재배치(reorientations)의 원형으로 보아도 좋을 것 같다. 그것이 사물 또는 개념을 추가적으로 도입하지 않았다는 이유 때문에, 뉴턴으로부터 아인슈타인 역학으로의 전이는 특히 명징적으로 개념적 조직망(conceptual network)―과학자들이 그것을 통해 세계를 보는―의 변화로서 과학혁명을 기술한다.
이들 언급은 또 다른 철학적 배경에서는 당연하게 여겨질 수 있는 무엇을 보여 주기에 충분할 것이다. 적어도 과학자들에게는 폐기된 과학이론과 그 후속 이론 사이의 명백한 차이는 대부분 실제적인 것들이다. 시대에 뒤진 이론은 항상 그 최신의 후속 이론의 특수한 경우로 간주될 수 있지만, 그렇게 되려면 그 목적에 맞게 변형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변형은 뒷궁리의 이익, 즉 보다 최신 이론의 명시적인 지시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더욱이 그런 변형이 옛 이론을 해석하는 데 적용되는 합법적 도구였다고 할 지라도, 그 응용의 결과는 크게 제약받는 이론이 될 것이므로 이미 알려진 것을 재서술할 수 있을 따름일 것이다. 그 경제성으로 해서 그런 재설명은 유용성을 지니겠지만, 연구의 지침으로서 충분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여기서 잇달아 나타나는 패러다임 사이의 차이는 필연적이며 동시에 양립불가능하다는 것을 당연하다고 받아들이기로 하자, 그렇다면 그런 차이들이 어떤 유형의 것인가에 대해 보다 명시적으로 말할 수 있는가? 가장 뚜렷한 형태의 차이는 이미 앞에서 누차 설명한 바 있었다. 계속 이어지는 패러다임은 우리에게 우주의 구성 요소에 대하여 그리고 그것들의 특징적 거동에 관하여 서로 다른 사항들을 일러준다. 다시 말하면, 원자의 하부 입자들 (subatomic particles)의 존재, 빛의 물질성(materiality of light), 그리고 열 또는 에너지의 보존 등과 같은 물음에 관해서 그들 패러다임은 서로 다른 얘기를 한다. 이런 것들은 계승되는 패러다임들 사이의 상당한 차이이며, 그것들은 더 이상의 예증(例證)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나 패러다임은 물질 이상의 것에서 차이를 보이는데, 그 까닭은 패러다임이 자연에만 관련된 것이 아니라 그 패러다임을 생산한 과학을 지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패러다임은 방법들의 원천이요, 문제 영역(problem field)이며, 어느 주어진 시대의 어느 성숙한 과학자 사회에 의해 수용된 문제풀이의 표준이다. 따라서 새로운 패러다임의 승인이 필연적으로 상응하는 과학을 재정의 하도록 만드는 경우가 많다. 옛날 문제들은 더러 다른 과학 분야로 이관되거나 또는 완전히 '비과학적 (unscientific)'인 것이라 선언된다.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거나 또는 사고해 보였던 여러 문제들이 새로운 패러다임의 등장과 더불어 유의미한 과학적 성취의 원형 바로 그것이 될 수도 있다. 그리고 문제들이 바뀜에 따라서 단순한 형이상학적 추론, 용어 놀음, 또는 수학적 조작으로부터 참된 과학적 해답을 구별짓는 기준도 바뀌는 일이 흔하다. 과학혁명으로부터 출현하는 정상과학적 전통은 앞서 간 것과는 양립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실상 동일 표준상의 비교 불능이다(incommensurable).
과학의 실제에서 17세기의 정상과학 전통에 미친 뉴턴 연구의 영향은 패러다임 변동의 미묘한 효과를 보여 주는 사례 중 걸작이라 하겠다. 뉴턴이 태어나기 이전, 그 16세기의 '새로운 과학(new science)'은 물체의 에센스(essences of material bodies)로서 표현되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 및 스콜라 학파의 설명을 거부한 채 드디어 성공을 거두었다. 돌멩이가 땅으로 떨어지는 것은 그 "본성(nature)"이 그 돌을 우주 중심을 향해 떨어지게 만들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은 하찮은 유어반복의 말놀이-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던 것-로 보이도록 만들어 버렸다.
그 이후로는 색깔, 맛, 그리고 심지어 무게까지를 포함하는 감각적 외양의 전체 현상은 모두 크기, 모양, 위치, 그리고 바탕 물질의 기본 입자들의 운동이라는 개념을 써서 설명하도록 되었다. 여러 성질들을 기본원자들 탓으로 돌리는 것은 마술적 요소에 의지한 것이었으며, 따라서 과학의 경계를 벗어난 것이었다. 몰리에르(Moliere)는, 아편의 효력은 잠이 오게 하는 효능 때문에 최면제로 작용한다고 설명하는 의사를 비웃었을 때, 정확하게 새로운 영감을 얻었다고 했다. 17세기 후반에 많은 과학자들은 아편 입자의 둥그런 모양이 그 입자들로 하여금 그 알갱이들이 움직이는 주위의 신경을 진정시킬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고 설명하는 것을 선호했다.36)
그보다 이전의 시대에는 신비적 성질에 의한 사물의 설명이 생산적인 과학 연구의 불가분의 요소였다. 그렇기는 했지만, 17세기의 역학적-입자적 설명(mechanico-corpuscular explanation)에의 새로운 공약은 많은 과학 분야에 대해 막강한 성과를 나타냄으로써, 과학으로부터 널리 인정받는 풀이를 거부해 왔던 문제들을 제거시키고 그 대신 다른 문제들을 제안하게 되었다. 역학에서는, 예컨대 뉴턴 운동의 세 가지 법칙은 신기한 새 실험들의 산물이라기보다는, 잘 알려진 관찰 결과를 일차적인 중성의 입자들의 운동과 상호 작용이 맥락에서 다시 설명하는 시도의 결과였다. 구체적인 설명을 한 가지만 들어 보자. 자연에 대한 역학적-입자적 견해는 과학적 관심을 충돌에 의한 입자의 운동의 변화라는 전혀 새로운 연구 주제로 향하도록 만들었다. 데카르트는 이 문제를 선언하였고, 최초의 추정적 풀이를 제안하였다. 호이겐스(Hoyghens), 렌(Wren), 그리고 월리스(Wallis)는 그것을 더욱 확장시켰는데, 일부는 충돌하는 추의 움직임에 관한 실험에 의해서였으나, 대부분은 이미 잘 알려졌던 운동의 특성을 새로운 문제에 적용시킨 것이었다. 그리고 뉴턴은 이들이 얻은 결과를 그의 우돈 법칙에 내재화했다. 제 3법칙에서의 동일한 '작용(action)'과 반작용(reaction)'은 충돌에 의해 양쪽이 겪게 되는 운동량(quantity of motion)의 변화들이다. 그것과 똑같은 운동의 변화가 제 2 법칙에 내포된 역학적 힘의 정의를 제공한다. 이것은 17세기 다수의 여러 경우에서처럼, 입자적 패러다임(corpuscular paradigm)은 새로운 문제를 야기시키고 또한 그 문제 해결에서의 큰 부분을 담당했던 것이다.37)
그러나 뉴턴의 연구는 많은 부분 역학적-입자적 세계관으로부터 유도된 구체화된 표준들과 문제들을 지향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연구로부터 파생된 패러다임의 영향은 과학에 합당한 문제와 표준에서의 심층적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파괴적인 변화를 나타났다. 중력은 물질의 매 입자쌍 사이의 본유적 인력이라고 풀이되면서, 스콜라 학파의 '떨어지려는 경향(tendency to fall)'이란 용어가 그러했던 것과 같은 의미의 신비적 성질이었다. 그러므로 입자설의 규범이 영향을 발휘하는 반면에, 중력에 대한 역학적 설명에의 추구는 "프린키피아(principia)"를 패러다임으로 인정한 사람들에게 가장 심각한 도전을 제기하는 문제의 하나가 되었다. 뉴턴은 이 문제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으며, 18세기 그의 후계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단 하나의 명백한 대안이란 중력을 설명하는 데 실패한 것으로 인해 뉴턴 이론을 배격하는 것이었으며, 그 대안 역시 널리 채택되었다. 그러나 이들 견해 중 어느 것도 궁극적으로 성공하지 못했다. "프린키피아"가 없이 과학을 수행하는 것이 불가능하거나 또는 그 연구를 17세기 입자설의 규범에 따르게 할 수 없는 상황에서, 과학자들은 점차로 중력은 참으로 '본유적인(innate)'것이라는 견해를 받아 들였다. 18세기 중엽에 이르러는 그런 해석이 거의 보편적으로 인정되었으며, 그 결과는 스콜라 철학의 규범으로의 진짜 복귀(퇴보와 똑같은 것은 아니)였다. 물질에 본래 내재하는 인력과 반발력은 물리적으로 비환원성인 물질의 일차적 성질(primary properties)로의 크기, 모양, 위치, 그리고 운동과 함께 자리하게 되었던 것이다.38)
그 결과로 물리과학의 규범과 문제 영역에서 나타나게 된 변화는 다시 한 번 필연적이었다. 1740년대까지, 예컨대 전기학자들은 1세기 이전에 몰리에르의 상대로서 의사 선생이 겪었던 조롱을 당하지 않으면서 전기적 유체의 끌어당기는 '힘(Virtue)'에 관하여 얘기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함에 따라서 전기적 현상은, 점차 오로지 접촉에 의해서만 작용을 나타낼 수 있는 역학적 전기소(mechanical effluvium)의 영향이라고 간주했던 것과는 다른 규칙성을 나타나게 되었다. 특히 서로 떨어진 위치에서의 전기적 작용(electrical action-at-a-distance)이 그 자체의 중요성 때문에 연구의 주제가 되었을 때는, 오늘날 이른바 유도에 충전이라고 하는 현상이 그 효과 중의 하나로서 인식될 수 있었다. 그 이전에는 이런 현상이 어쩌다 관찰되는 경우, 전기적'대기(atmospheres)'의 직접 작용 때문이라거나 또는 어느 전기 실험실에서나 있게 마련인 누전의 탓으로 돌려졌다. 유도 전류 효과에 대한 새로운 견해는 이어서 라이덴 병(Leyden jar)에 관한 프랭클린(Franklin)의 분석에 관건이 되었고, 따라서 전기에 대한 새로운 뉴턴식의 패러다임 출현에 관건이 되었다. 물질의 본유적 힘에 대한 탐사의 정당화에 의해 자극된 과학 분야는 역학과 전기학만이 아니었다. 화학적 친화력(chemixal affinities)과 치환 계열(replacement series)에 관한 18세기 문헌의 대부분도 역시 뉴턴주의(Newtonianism)의 이런 초역학적(supramechanical) 관점으로부터 유도된다. 다양한 화학종 사이에서의 이렇게 구별되는 인력을 믿었던 화학자들은 이전에는 상상하지 못했던 실험들을 꾸몄고, 새로운 종류의 반응을 찾아내려고 했다. 그 데이터와 그런 과정에서 전개된 화학적 개념이 없었더라면, 라부아지에의 후기의 연구 그리고 더욱이 돌턴의 연구는 이해될 수가 없었을 것이다.39) 허용되는 문제, 개념, 그리고 설명을 다스리는 기준에서의 변화는 과학을 변형시킬 수 있다. 다음절에서 그런 기준들이 세계를 변화시킨다는 의미에 대해서 제안할 것이다.
이어지는 패러다임들 사이에 이처럼 사소한 차이를 보이는 다른 실례들은 과학의 발전에 있어서 거의 어느 시대의 어느 과학의 역사에서든지 찾아낼 수 있다. 여기서는 우선 두 가지의 간단한 실례만으로 만족하기로 하자. 화학혁명 이전에 화학이 안고 있던 과제들 가운데 하나는 화학 물질의 성질에 관해 설명하고, 화학 반응을 거쳐 일어나는 이들 성질들의 변화에 관해 설명하는 일이었다. 소수의 기본적 '원리(principles)'-그 중 플로지스톤 이론도 하나였다-의 도움으로 화학자는 왜 어떤 물질은 산성이며, 또 어떤 것은 금속성, 연소성 등등인가에 대해 그 이유를 설명하려고 했다. 이 방향에도 어느 정도 성공한 바도 있었다.
이미 앞에서 플로지스톤설을 이야기하면서 왜 금속들은 서로 그렇게 비슷한가를 알 수 있었다. 우리는 산에 대해서도 그와 비슷한 논의를 전개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라부아지에의 개혁은 결국 화학적 '원리들(principles)'로부터 벗어났고. 따라서 화학으로부터 약간의 사실적 그리고 상당한 잠재적 설명 능력을 박탈함으로써 마무리하게 되었다. 이런 손실을 보상하기 위해서 기준의 변화가 요구되었다. 19세기의 상당 기간 동안 화합물의 성질을 설명하는 데 실패한 것은 화학 이론에 대한 유죄 판결은 아니었다.40)
또한 다시, 맥스웰(Clerk Maxwell)은 19세기 빛의 파동 이론의 지지자들과 뜻을 같이 함으로써, 빛의 파동이 물질 에테르를 통해 전파되는 것임에 틀림없다고 확신했다. 빛의 파동성을 뒷받침하는 역학적 매질(mechanical medium)을 고안하는 것은 당대의 가장 우수한 학자들 다수에게 하나의 표준문제가 되었다. 그러나 맥스웰 자신의 이론인 빛의 잔자기 이론(electromagnetic theory)은 빛의 파동성을 뒷받침할 수 있는 매질에 대하여 전혀 고려하지 않았으며, 그 이론은 분명히 예전에 여겨졌던 것보다 설명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이런 이유로 해서, 초기에는 맥스웰 이론이 널리 배격되었다. 그러나 뉴턴 이론과 마찬가지로, 맥스웰 이론은 버리기 어려운 것으로 밝혀졌고, 패러다임의 지위로 올라서게 됨에 따라서 그것에 대한 과학자 사회의 태도가 바뀌었던 것이다. 20세기 초 몇 십 년 간은 역학적 에테르가 존재한다는 맥스웰의 주장이, 물론 단호한 것은 아니었으나, 점점 더 말뿐인 허구로 들리게 되었고, 그런 에테르 매질을 고안하려는 노력은 포기되었다. 과학자들은 이제, 대치되고 있었던 것을 밝히지 않은 채 전기적 '변위(displacement)'에 대해 논하는 것을 더 이상 비과학적이라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그 결과는 또 다시 새로운 문제와 기준의 출현이었으며, 이것은 결국에 가서는 상대성 이론의 탄생에 커다란 구실을 했던 것이다.41)
과학자 사회의 합법적 문제와 기준에 대한 관념에서의 이들 특성적 변동은, 그것들이 항상 방법론적으로 낮은 차원으로부터 보다 높은 어떤 형태로 일어난다고 가정할 수 있다며, 이 에세이의 주제에 대해서는 별로 중요한 의미가 없을 것이다. 그 경우 그것들의 결과는 역시 축적적인 것으로 보일 것이다. 일부 과학사들이 과학사(history of science)는 과학의 성격에 대한 인간의 관념을 꾸준히 성숙시키고, 갈고 닦는 것의 끊임없는 기록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42)
그렇기는 하지만, 과학에서의 문제와 기준의 축적적 발전의 경우는 이론 축적에서의 경우보다 그 달성이 더욱 힘들다. 18세기의 대부분 과학자들에 의해서 포기되었다, 중력에 대해 설명하려는 시도는 본질적으로 합당치 않은 문제로 지향한 것은 아니었다. 본유적 힘에 대한 반대는 그리 비과학적인 것도 아니요, 어떤 경멸의 의미에서 형이상학적인 것도 아니었다. 그런 종류의 판단을 허용하는 외적인 규범이 존재하지 않는다. 실제로 발생했던 것은 기준의 몰락도 아니요 기준의 제기도 아니라, 단순히 새로운 패러다임의 채택에 의해서 요구되는 변화였던 것이다. 더욱이 그런 변화는 그 이후 다시 역전되었고, 또 다시 역전될 수 있었다.
20세기에 아인슈타인은 중력에 의한 인력을 설명하는 데 성공하였으며, 이런 특정 관점에서 과학을 볼 때, 그 설명은 아인슈타인의 계승자들의 관점보다는 뉴턴의 전임자들의 관점과 더 비슷한 기준과 문제로 과학을 되돌려 놓았다. 그리고 다시 제기된 양자 역학의 전개는 화학혁명에서 유래했던 방법론적 금기를 뒤엎었다. 화학자들은 지금 그들의 실험실에서 사용하고 만들어 낸 물질에 대해 색깔, 상태, 기타 성질을 설명하려고 하며, 그것은 크게 성공적이다. 이와 비슷한 역전은 전자기 이론에서까지도 일어날 수 있다.
현대 물리학에서 공간은 뉴턴 이론과 맥스웰 이론의 양쪽에서 도입된 비활성이며 균질인 바탕(substratum)이 아니다. 공간의 새로운 성질 가운데 일부는 한때 에테르의 탓으로 돌렸던 것들과
다르지 않다. 우리는 언젠가 전기적 변위가 무엇인가를 알게 될 것이다. 패러다임의 인식적 기능으로부터 규범적인 기능으로 옮겨 강조한다면, 앞의 사례들은 패러다임이 과학적 활동에 형태를 부여하는 방식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확장시킨다. 앞에서 우리는 주로 과학 이론에 대한 매체로서의 패러다임의 역할을 검토하였다. 그런 역할에서 패러다임은 과학자에게 자연이 내포한 그리고 내포하지 않은 실체에 대해 일러주고, 그들 실체가 작용하는 방식에 관해 알려주는 기능을 한다. 그런 정보는 그 상세한 내용이 성숙한 과학적 연구에 의해 밝혀지게 되는 하나의 지도를 제공한다. 그리고 자연은 무작위로 그 베일이 벗겨지기에는 너무 복잡하고 다양한 까닭에, 그러한 지도는 과학의 끊임없는 발전에 대해 관찰이나 실험 못지 않게 필수적인 요소가 된다. 그것들이 구체화하는 이론을 통해서 패러다임은 연구 활동을 형성하는 구성 요소임을 밝혀진다. 그렇지만, 그들은 또한 다른 관점에서도 과학의 구성 부분이 되는데, 그것이 여기서는 바로 요점이다. 특히 우리가 마지막에 든 실례는 패러다임이 과학자들에게 지도뿐만 아니라 지도를 만드는 데 필수적인 방향을 어느 정도 제시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패러다임을 익히면서 과학자는 이론적 방법과 기준을 모두 획득하게 되는데, 이것은 보통 한데 뒤엉킨 혼합체로 얻어진다. 그러므로 패러다임이 변화하데 되면, 통상적으로 문제 그리고 제안된 풀이 등 양쪽이 타당성을 결정짓는 기준에도 상당한 변동이 일어나게 된다.
이런 관찰은 우리를 이 IX절이 출발했던 요점으로 되돌리게 되는데, 왜냐하면 서로 겨루는 패러다임 사이의 선택이 정상과학의 준거가 해결할 수 없는 질문들을 규칙적으로 제기하는 이유에 대해 최초의, 명시적 증거를 제시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과학의 두 학파가 무엇이 문제이고 무엇이 해결인가에 관하여, 불완전한 것에 못지 않게 의미 깊게 의견을 달리하는 한에서는, 그들은 각각의 패러다임이 지닌 상대적 장점을 논의하면서 서로서로 얘기를 나눌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규칙적으로 나타나는 부분적 순환 논쟁이자 각 패러다임은 그것이 자체로서 지령하는 기준을 어느 정도 만족시키는 것으로 나타날 것이며, 그 적수에 의해 지령되는 기준을 몇 가지 갖추지 못한 것도 드러날 것이다. 어느 경우나 패러다임 논쟁을 특징짓는 논리적 접근의 불완전성에 대해서는 다른 이 문제를 풀어 낸 적이 없었던 것과 그리고 두 가지 패러다임이 풀어 내지 못한 문제들이 모두 같은 것도 아닌 까닭에, 패러다임 논쟁에서 항상 다음 질문이 개입된다. 어느 문제들을 해결한 것이 보다 의미가 있는가? 서로 겨루는 기준의 주제와 마찬가지로, 가치관에 대한 이런 질문은 총괄적으로 정상과학의 외곽에 위치한 기준에 의해서만 답해질 수 있으며, 그리고 그것은 패러다임 논쟁을 가장 확실하게 혁명적으로 만드는 외부적 기준에 의지하는 것이다. 그러나 기준과 가치보다 더욱더 근본적인 그 무엇이 또한 문제거리가 된다. 나는 지금까지 패러다임들이 과학을 구성한다는 것만을 논하였다. 이제부터 나는 패러다임이 그 뿐만 아니라 자연을 구성한다는 것의 의미를 밝히고자 한다.
X. 세계관의 변화로서의 혁명(Revolutions as changes of World View)
현대적인 사료 해석의 관점으로부터 과거 연구의 기록을 훑어본다면, 과학사들은 패러다임의 변화할 때 세계 그 자체의 패러다임의 변화와 더불어 변화한다고 주장하고 싶어질 것이다. 새로운 패러다임에 의해 유도되어서 과학자들은 새로운 도구를 채택하고 새로운 영역을 들여다보게 된다. 보다 더 중요한 것은 혁명기간 동안에 과학자들은 이전에 연구했던 곳에서 친숙한 기기를 써서 관측하면서 새롭고 색다른 것들을 보게 된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마치 전문가 사회가 돌연, 이전의 친숙한 대상들도 달리 보이고 미지의 것들과도 섞여 있는, 다른 행성으로 옮겨지는 것과 흡사하다. 물론 꼭 이런 형태의 일일 실제로 일어나는 것은 아니면, 지역적인 이동은 없다. 연구실 바깥에서의 일상 생활은 예나 마찬가지로 지속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패러다임의 변화들은 과학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연구 활동의 세계를 다르게 보도록 만든다. 과학자들이 그런 세계를 다루는 일은 오직 그들이 보고 행하는 것을 통해서이다. 우리는 하나의 혁명이 있은 후의 과학자들은 새로운 세계에 대해 반응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하게 된다.
과학자 세계에서의 이러한 변형에 대한 기본 원형으로서, 시각 게슈탈트(visual gestalt)에서의 친숙한 전환의 증거들은 매우 시사적인 것으로 밝혀진다. 혁명 이전의 과학자 세계에서 오리였던 것이 혁명 이후에는 토끼로 둔갑한다. 처음에는 위쪽에서 상자의 외부로 내려다보았던 사람이 나중에는 아래쪽으로부터 그 내부를 들여다보게 된다. 이와 같은 변형들은 대체로 보다 점진적이고 거의 어김없이 비가역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과학적 훈련에 공통되는 부수물이다. 등고선 지도를 보면서 학생은 종이 위에 그려진 선들을 보지만, 지도 제작자는 지형에 관한 그림을 본다. 기포상자(bubble-chamber) 사진을 보면서 학생은 혼란스럽게 끊어진 선들을 보지만, 물리학자는 낯익은 원자 핵 내부의 사건들의 기록을 읽어 낸다. 그러한 시각적 변형은 숱하게 거친 뒤에서야 학생은 과학자 세계의 일원이 되어 과학자가 보는 것을 보고 과학자가 반응하듯이 반응하게 된다. 그러나 학생이 그렇게 해서 들어간 세계는 한편으로는 환경의 본질에 의해서, 다른 한편으로는 과학의 본질에 의해서 단번에 고정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환경, 그리고 학생이 추구하도록 훈련받았던 특정 정상과학의 전통에 의해 연합적으로 결정된다. 따라서, 정상과학의 전통이 변화하는 혁명의 시기에는 과학자 자신의 환경에 대한 지각 작용은 재교육되어야 한다. 과학자는 어떤 친숙한 상황에서 새로운 게슈탈트를 보는 것을 배워야 한다. 그렇게 한 후의 그의 연구 세계는 여러 가지 형태에서 이전에 그가 살아왔던 세계와 같은 표준으로 비교할 수 없게(incommensurable)보일 것이다. 상이한 패러다임에 의해 주도되는 학파들이 항상 서로 얼마간 엇갈리게 마련인 또 다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물론 가장 일반적인 유형에 있어서 게슈탈트 실험은 지각 작용 변형의 본질만을 설명해 줄 따름이다. 게슈탈트 실험들은, 패러다임의 역할 또는 지각 작용의 과정에서 이미 동화되었던 경험의 역할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알려주는 것이 없다. 그러나 이 점에 대해서는 심리학 문헌들이 풍부하게 갖추어져 있고, 그 중 많은 부분이 하노버 연구서(Hanover Instituter)의 선구적 업적에서 유래되고 있다. 상을 거꾸로 만드는 렌즈의 안경을 쓴 피실험자는 처음에는 온 세상을 거꾸로 보게 된다. 초기에는 그의 감각 기관은 안경 없이 기능하도록 훈련되었던 때처럼 작용하게 되고, 따라서 극도의 방향 상실에 이르러 당사자는 심각한 위기에 부딪친다. 그러나 피실험자가 대개 시각이 몹시 혼란해지는 과도기를 거친 뒤, 새로운 세계를 다룰 줄 알기 시작한 후에야, 그의 시야 전체는 거꾸로 뒤집어진다. 그 뒤에는 물체들이 다시 안경을 쓰기 전에 있었던 것처럼 보여진다. 이전의 이상 시야가 그 장에 동화 작용하여 시야 자체를 변화시킨 것이다.43) 비유적일 뿐만 아니라 문자 그대로, 이 거꾸로 보이는 렌즈에 익숙해진 사람은 시작에서의 혁명적인 변형을 거친 것이다.
VI절에서 논의된 이상한 카드 실험에서의 피실험자들은 이와 매우 흡사한 변형을 경험하였다. 카드를 오래 살펴보고 그 세계에서 이상야릇한 카드들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까지는, 그들은 이전의 경험이 마련해 주었던 카드 형태만을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일단 부가적인 범주를 경험하게 되자, 피실험자들은 카드를 식별해 낼 만한 충분한 시간만 주어지면 첫눈에 이상스런 카드를 모두 알아볼 수 있었다. 또 다른 여러 실험에서도 실험용으로 제시된 물체들의 크기, 색깔들이 피실험자가 이전에 받은 훈련과 경험에 따라 달리 지각된다는 것이 증명되었다.44) 이러한 사례들이 실린 풍부한 시험 문헌을 훑어보면, 패러다임과 같은 그 무엇이 지각 작용 자체의 우선 조건이라는 느낌이 들게 된다. 사람이 무엇을 보게 되는가는 그가 바라보는 대상에도 달려 있지만 이전의 시각-개념상의 경험(visual-conceptual experience)이 그에게 무엇을 보도록 가르쳤는가에도 달려 있다. 그러한 훈령이 없는 상태에서는,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의 표현처럼 "꽃이 피고 벌이 윙윙거리는 혼동(a blooming 'buzzing' confusion)"만이 존재할 수 있을 뿐이다.
최근 들어서 과학사에 관심을 가진 여러 사람들을 앞서 말한 유형의 실험들이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특히 핸슨(H.R. Hanson)은 형태에 관한 실물 시범을 이용함으로써, 여기서의 나의 관심사인 과학적 신념에서와 똑같은 결과를 일부 밝혀 내었다.45) 다른 동료들은, 만일 과학자들이 앞서 말한 바와 같은 지각 작용의 변동을 자주 경험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면, 과학사는 보다 훌륭하고 논리 정연한 의미를 지닐 수 있으리라는 점에 되풀이하여 주목해 왔다. 그러나 심리학적 실험들이 시사적이기는 하지만, 그 실험들은 그 상황의 성격상 그 이상의 것은 될 수 없다. 심리학적 실험들은 과학의 발전에 핵심이 될 수 있는 지각 작용(perception)의 특성들을 드러내지만, 그러나 그것들이 과학 연구자들이 행하는 세심하고 조절된 관찰에 그러한 특성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지 못한다. 더욱이 이들 실험들의 본질 자체가 그러한 요점의 직접적인 논증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역사적인 사례가 이들 심리학적 실험들과 연관되는 것으로 보이게 하려면, 우리는 우선 역사가 제시하거나 제시하지 않는 증거의 유형들에 주목해야 한다.
게슈탈트 시범의 피실험자는 똑같은 책이나 종이를 손에 쥐고 있는 동안 계속해서 자신의 지각을 되풀이해서 바꾸어 볼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이 바뀌고 있다는 것을 안다 환경에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는 것을 알고, 그는 점점 그 주의를 형체(오리나 토끼)로가 아니라 자기가 보고 있는 종이의 선들에 집중시키게 된다. 마침내 그는 어떤 형체를 보지 않고도 그 선들만을 볼 수 있게 될 것이며, 그가 정말로 보는 것은 이 선들이지만 그것들을 번갈아 가며 오리로도 보이고 토끼로도 보인다고 말할 것이다. (이것은 그가 이전에는 확실히 말할 수 없었던 이야기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상한 카드 실험의 피실험자는 자신의 지각이 바뀌었음이 틀림없다는 것을 느끼게 되는데(또는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설득 당하게 되는데), 왜냐하면 외부의 권위자로서 실험자는, 그가 무엇을 지각했든 지간에 상관없이, 그에게 내내 검정색 하트 5를 보고 있었다고 확신시켜 주기 때문이다. 이와 비슷한 형태의 모든 심리학적 실험에서처럼, 양쪽의 실험에서 모두 시범의 효과는 이런 방식으로 분석 가능한 것에 의존한다. 시각의 전환이 증명될 수 있는 그 어떤 외적인 기준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 대신의 지각 작용의 가능성에 대한 결론은 내려질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과학적 관찰의 경우에서는 상황이 완전히 역전된다. 과학자는 자신의 눈과 기기를 통해 본 것 이외에는 의존할 수 가 없다. 만일 그의 시각이 바뀌었음을 보여 줄 수 있는 보다 높은 권위의 근거가 존재한다면, 곧 그 권위는 그 자체가 과학자에게는 데이터의 원천이 될 것이고, 과학자의 시각 작용은 문제들의 원천이 될 것이다(피실험자의 행동이 심리학자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과학자가 게슈탈트 실험의 피실험자처럼 자신의 지각을 되풀이하여 바꾸어 볼 수 있다면, 똑같은 유형의 문제들이 발생할 것이다. 빛이 '때로는 파동이고 때로는 입자'였던 시대는 위기의 시대―무언가 잘못되어 있던 시대―였고, 그 위기는 파동 역학이 개발되고 빛은 파동과 입자와는 다른 자체로서의 실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비로소 종지부를 찍었다. 그러므로 과학에 있어서 지각 작용의 전환이 패러다임 변화를 수반한다면, 우리는 과학자들이 직접 이러한 변화들을 입증하는 것을 기대하지 않아도 된다. 코페르니쿠스 주의로 전향한 사람은 달을 쳐다보면서 "나는 이제까지는 행성을 보고 있었으나 지금은 위성을 보고 있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이런 말투에는 한때는 프톨레마이오스 체계가 옳았었다는 의미가 내포될 수도 있다. 새로운 천문학으로의 전향자는 그런 말 대신 "나는 한때 달을 행성이라고 생각했지만(또는 달을 그렇게 보았지만) 그것은 내 잘못이었다"라고 말한다. 이런 유형의 진술은 과학 혁명이 발생한 후 되풀이되어 나타난다. 만일 이것이 통상적으로 과학적 시각의 변환 또는 그 같은 효과를 지닌 여러 정신적 변형을 위장시킨다면, 우리는 그 변환에 대한 직접적인 증거를 기대하지 못하게 된다. 오히려 우리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가진 과학자가 종래에 보았던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보고 있다는 간접적인 행동 상의 증거를 찾아야 한다.
그러면 이제는 데이터로 돌아가서 그러한 변화를 믿고 있는 과학사 학자가 과학자의 세계 속에서 어떤 유형의 변형들을 발견할 수 있겠는가 알아보자. 윌리엄 허쉘 경(Sir William Herschel)의 천왕성(Uranus) 발견은 그 첫 번째 예로서, 이상한 카드 실험과 아주 비슷한 사례이다 1690년부터 1781년 사이에 적어도 17회에 걸쳐 유럽 최고의 몇몇 관측자를 비롯한 많은 천문학자들이 지금의 천왕성 궤도 자리에서 별 하나를 보았다. 이 그룹에서 가장 뛰어난 한 관측자는 실제로 1769년에 나흘 밤을 연달아 그 별을 보았으나, 그 정체를 알려줄 수도 있었을 별의 운행에 대해서는 알아내지 못했다. 12년이 지난 뒤 바로 그 물체를 처음 관측하면서, 허쉘은 자신이 손수 만든 훨씬 개량된 망원경을 사용하였다. 그 결과 적어도 별 모양으로서는 상당히 보기 드문 뚜렷한 원반 체를 알아 볼 수 있었다. 무언가 잘못된 것이었으므로, 그는 판정을 미루고 더 자세히 조사하게 되었다. 조사한 결과, 별들 가운데서의 천왕성의 운행을 밝혀 내게 되었고, 따라서 허쉘은 자기가 새로운 혜성(comet)을 보았다고 공표 하였다! 관측된 운행을 혜성 궤도에 맞추려는 부질없는 시도 끝에, 얼마 지나지 않아 렉셀(Lexell)은 그 궤도가 행성인 것 같다고 제안하는 사태가 벌어졌다.46) 그 주장이 수용되다, 천문학자의 세계에는 몇 개 줄어든 항성과 하나가 늘어난 행성이 존재하게 되었다. 거의 한 세기 동안 관측되었다 말았다 했던 천체가 1781년 이후에는 달리 보여지게되었다. 그 이유는 이상한 카드 실험과 마찬가지로, 그것이 종래의 패러다임에 의해 제공되는 지각 작용의 범주(항성 또는 혜성)에 더 이상 들어맞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천문학자들로 하여금 행성인 천왕성을 볼 수 있도록 한 시각의 변환은 이미 관측된 이 물체의 지각에만 영향을 미쳤던 것 같지는 않다. 그에 따르는 결과는 보다 광범위했다. 증거가 모호하기는 하지만, 허쉘에 의해 야기된 소규모의 패러다임 변화는 1801년 이후 천문학자들이 여러 소행성들(minor planets, 또는 asteroids)을 급속히 발견하도록 하는 데 도움이 됐던 것 같다. 그 크기가 작았던 까닭에 소행성들은 허쉘을 놀라게 했던 이상 현상으로의 확대는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성을 더 찾아낼 준비가 된 천문학자들은 표준 기구를 써서 19세기의 전반 50년 동안 20개의 행성을 확인 할 수가 있었다.47) 천문학사에는 과학적 지각에서 패러다임이 유발한 변화에 대한 각기 다른 사례들이 많이 있으며, 그 중 몇 가지는 좀더 확실해 보인다. 예를 들면 코페르니쿠스의 새로운 패러다임이 처음 제안된 후 반 세기 동안 서구 천문학자들이 종래에는 불변이라 여겼던 천상 세계에서 변화를 처음 목격했던 것이 우연일 수 있을까? 그들의 우주관에서 천상 세계의 변화를 배제하지 않았던 중국인들은 훨씬 앞서서 이미 하늘에서의 많은 신성(new stars)들의 출현을 기록해 놓았다. 또한 망원경의 도움 없이도 중국인들은 갈릴레오와 당대의 학자들이 발견하기 수세기 이전에, 태양 흑점의 출현을 체계적으로 기록해 놓았다.48) 단지 태양 흑점과 신성만이, 코페르니쿠스 직후의 서구 천문 학계에서 파악한 천상계 변화의 유일한 사례들은 아니다. 실오라기같이 단순한 것을 비롯한 전통적인 천문 기구를 사용하면서, 16세기 말기의 천문학자들은 그 이전에는 불변의 행성과 항성에게만 허용되던 공간에서 멋대로 떠돌아다니는 혜성들을 계속 발견하고 있었다.49) 옛 대상을 옛 기기로 관측하면서 천문학자들이 그토록 쉽고 빠르게 새로운 것들을 보았다는 사실은, 코페르니쿠스 이후의 천문학자들이 전과는 다른 세계에 살게 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어쨌든 그들의 연구는 마치 그런 경우였던 것처럼 반응했다.
앞서 말한 사례들은 천문학으로부터 선택되었는데, 왜냐하면 천체 관측 기록들은 흔히 비교적 순수한 관측 용어로 쓰인 어휘로 기록되기 때문이다. 그런 기록에서라야만 과학자들의 관찰과 심리학자들의 피실험자 관찰 사이에 완전한 유사성 같은 어떤 것을 찾아낼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완벽한 유사성(parallelism)을 크게 강조할 필요는 없으며, 우리의 기준을 이완시킴으로써 많은 것을 얻게 된다. 우리가 '보다'라는 동사의 일상적 용법에 만족할 수 있다면, 패러다임의 변화를 수반하는 과학적 지각 변화에 대한 많은 사례에 이미 접했다는 것을 곧 깨닫게 될 것이다. '지각(perception)'과 보기(seeing)'의 용도를 확장하는 것은 즉각적으로 명시적 방어를 요구하게 될 것이나, 우선 과학 활동에서의 그 응용을 살펴보기로 하자.
전기학의 역사로부터 나온 앞서 말한 두 가지의 사례를 잠깐 다시 살펴보자. 17세기에 걸쳐 이런저런 자기소(effluvium) 이론에 따라 연구가 진행되던 시절에, 전기 학자들은 그것들을 끌어당기는 대전체(electrified bodies)로부터 알갱이들이 튀어 오르고 떨어지고 하는 것을 거듭 관찰하고 있었다. 적어도 이것은 17세기의 관측자들이 보았다고 말한 것이었는데, 우리가 우리 자신의 것보다 그들의 지각 작용의 기록을 더 의심해야 할 이유는 없다. 같은 실험 장치 앞에 앉아서 현대의 관측자는 정전기적 반발(역학적이거나 인력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을 보게 될 것이지만, 역사적으로 보통 무시되는 한 가지 예외를 제외하고는, 혹스비(Hauksbee)의 대규모 장치로 그 효과가 크게 확대되기까지는 정전기적 반발이 그 자체로 관찰되지 못했다. 그러나 접촉 대전 뒤의 반발은 혹스비가 보았던 여러 가지 새로운 반발 효과 중의 하나에 불과했다. 형태 변화에서와 상당히 비슷하게도, 그의 연구를 거침으로써 반발은 갑자기 전기 작용의 가장 기본되는 특질로 자리하게 되었던 것이며, 이때 설명되어야 할 것은 인력이었다.50) 18세기 초반에 볼 수 있었던 전기적 현상들은 17세기에서보다 더 미묘하고 다양한 것이었다. 또는 다시, 프랭클린의 패러다임에로의 동화 이후, 라이덴 병을 바라보고 있던 전기학자는 전에 보았던 것과는 다른 어떤 것을 보게 되었다. 이때의 장치는 콘덴서(condenser)였는데, 콘덴서로서는 병 모양도 또는 유리도 필요하지 않았다. 그 대신 두 개의 전도성 피막―그 중 하나는 원래의 장치에는 없었던 것―이 흔한 것이 되었다. 글로 논의되고 또 그림 설명으로 점차 입증되고 있듯이, 그 사이에 비전도체를 끼우지 않은 두 개의 금속판이 이런 부류의 원형이 되었다.51) 동시에 다른 유도 효과에 대해서도 새로운 설명이 이루어졌으며, 그밖에 다른 효과들도 처음으로 주목받게 되었다.
이런 유형의 변환은 천문학과 전기학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미 화학사로부터 이끌어 낼 수 있는 이와 비슷한 시각 변형을 일부 살핀 바 있다. 라부아지에는 프리스틀 리가 플로지스톤이 빠진 공기(dephlogisticated air)를 보았던 곳,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전혀 아무것도 보지 못했던 곳에서 산소를 보았다. 그러나 산소를 보는 것을 깨닫는 데 있어서, 라부아지에는 또한 여타의 다른 친숙한 물질들에 대한 그의 견해의 변화를 거쳐야 했다. 예를 들면 프리스틀리와 당대의 학자들이 원소성의 흙을 보았던 곳에서 그는 화합물의 광물을 보아야 했으며, 이러한 변화들은 이 밖에도 다수이다. 산소를 발견한 결과로서 최소한 라부아지에는 자연을 달리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가 '달리 보았던(saw differently)' 가설적인 고정된 자연에 의지하지 않을 때, 자연계의 경제성의 원칙(principle of economy)은 우리로 하여금, 산소를 발견한 후 라부아지에는 전혀 다른 세계에서 연구를 했다고 말하도록 만들 것이다.
이런 생소한 표현을 피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이제 곧 다루겠지만, 우리에게는 우선 그런 용도에 부합되는 사례가 더 필요한데, 그것은 갈릴레오 연구의 가장 유명한 부분으로부터 끌어낼 수 있다. 아득한 옛날부터 대부분의 사람들은 줄이나 사슬에 매달린 이런저런 무거운 물체가 완전히 멈추어 설 때까지 앞뒤로 흔들리는 것을 보아 왔다.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은 무거운 물체는 그 자체의 본성에 의해 높은 곳으로부터 보다 낮은 곳의 자연스런 정지 상태로 운동하는 것이라고 믿었던 터였으므로, 흔들리는 물체란 그들에게는 단지 어려움을 겪으며 떨어지는 것일 따름이었다. 그 물체는 사슬에 묶인 상태이므로 만곡선의 동작을 거쳐 상당히 시간이 걸려서야 비로소 낮은 위치의 제자리에 멈출 것이었다. 그 반면에 갈릴레오는 흔들리는 물체(swinging body)를 바라보면서 진자(pendulum)를 생각했는데, 그것은 거의 무한하게 거듭해서 같은 움직임을 되풀이하는 물체였다. 이 진자의 움직임을 본 갈릴레오는 진자의 다른 성질들을 중심으로 다수 구축해 냈다. 예컨대, 진자의 성질들로부터 갈릴레오는, 빗면을 따라 내려오는 운동에서의 수직 높이와 최종 속도 사이의 상관 관계에 관해서 뿐만 아니라, 무게와 낙하 속도 사이의 무관성에 대한 그의 유일하게 완벽하고 확고한 이론을 이끌어 냈다.52) 이들 모든 자연의 현상을 그는 이전에 그것들이 보여져 왔던 방식과는 상이하게 보았던 것이다.
왜 그런 시각의 변환이 일어났을까? 물론 그것은 갈릴레오라는 개인의 천재성을 통해서였다. 그러나 여기서의 그런 천재성은 흔들리는 물체를 보다 정확하게 또는 객관적으로 관찰함에 있어 발현된 것이 아님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기술상으로는 아리스토텔레스 적인 지각 작용도 갈릴레오 못지 않게 정확하다. 갈릴레오가 90도에 이르기까지의 진폭(amplitude)에서는 진자의 주기(pendulum`s period)가 진폭에 무관하다고 보고했을 때, 진자에 대한 그의 견해는 그로 하여금 지금 거기서 우리들이 볼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큰 규칙성을 보도록 이끌었다.53) 오히려 그의 시각 변환에 관련됐던 것으로 보이는 것은 중세의 패러다임 변환에 의해 주어진 지각 작용의 가능성을 천재가 이용한 것이었다. 갈릴레오는 완벽하게 아리스토텔레스 주의자로서 길러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는 임페투스 이론(impetus theory)의 관점에서 운동을 분석하도록 훈련을 받았으며, 그 이론은 무거운 물체가 지속적으로 운동하는 까닭은 그 운동을 시작하게 한 투사자(projector)에 의해서 그 속에 내부적인 힘이 불어넣어진 까닭이라고 설명하고 있었던 중세 후기의 패러다임이었다. 임페투스 이론에 가장 완전한 체계를 부여해 준 것은 14세기 스콜라 학파의 장 뷔리당(Jean Burodan)과 니콜 오렘(Nicole Oresme)으로서, 이들은 진동 운동(oscillatory motions)에 대한 갈릴레오의 관측 일부를 앞서 관측했던 것으로 알려진 최초의 인물들이다. 뷔리당은 진동하는 줄의 운동을 줄에 충격이 가해질 때 임페투스가 최초로 주입되는 것으로서 설명한다. 그 다음에 임페투스는 줄의 장력(tension)의 저항과 맞서 줄의 위치를 변환시키는 데 소모된다. 그 다음 장력이 줄을 되튕겨 놓으면서, 운동의 중간 점에 이를 때까지 점점 더 임페투스를 불어넣는다. 그런 후에 임페투스는 다시 장력에 맞서 줄을 반대 방향으로 변위시키며, 무한히 지속될 수 있는 대칭적 과정으로 그렇게 계속된다. 14세기의 더 나중에 가서 오렘은 흔들리는 돌에 대해서 이와 비슷한 분석을 도식화했으며, 이는 이제 보면 진자에 대한 최초의 논의인 것으로 보인다.54) 그의 이 같은 견해는 분명히 갈릴레오가 처음 진자에 접근했던 방식과 아주 비슷하다. 적어도 오렘 그리고 갈릴레오의 경우에도 거의 확실하다고 생각되는데, 그것은 원래 아리스토텔레스 주의자로부터 운동에 대한 스콜라 학파의 임페투스 패러다임이 창안되기까지는 과학자들은 진자를 보았던 것이 아니라 단지 흔들리는 돌을 보았을 따름이었다. 진자는 패러다임에 의해 유발된 게슈탈트 전환(paradogm-induced gestalt switch)과 매우 유사한 어떤 것에 의해 실체를 갖추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갈릴레오를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또 라부아지에를 프리스틀리로부터 구별시켜 주는 것을 시각 변환이라고 표현할 필요가 있을까? 같은 종류의 물체를 바라보면서 그 사람들은 참으로 서로 다른 것들을 보았던 것일까? 그들이 서로 다른 세계에서 연구를 수행했다고 말할 수 있는 어떤 타당한 의미가 있는가? 이러한 질문들은 더 이상 미루어 둘 수가 없는데, 왜냐하면 앞에서 개관한 역사적 사례들을 모두 설명해 주는 또 다른 훨씬 통상적인 방식이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다수의 독자들은 분명 패러다임과 더불어 변화하는 것은, 그 자체가 환경 및 지각 장치의 성격에 따라 영속적으로 고정되는 관찰에 대한 과학자의 해석일 뿐이라고 말하고 싶을 것이다. 이러한 견해에 따르면, 프리스틀리와 라부아지에는 둘 다 산소를 보았던 것이나 그들은 관찰들을 달리 해석했던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와 갈릴레오는 둘 다 진자를 보았으나, 서로가 보았던 것에 대한 해석에서 차이가 났던 것이다.
우선, 과학자들이 기본적인 주제들에 관한 그들의 생각을 변화시킬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에 대한 이런 지극히 통상적인 견해에 대해서는 전혀 잘못되었다던가 또는 순전히 실수라고 할 수가 없다. 오히려 그것은 데카르트에 의해 창안되고, 동시에 뉴턴 역학으로서 전개되었던 철학적 패러다임의 요체가 된다. 그 패러다임은 과학과 철학의 양쪽에 크게 기여하였다. 역학 자체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이 패러다임의 철저한 이용은 달리는 성취되지 못했을 근본적인 이해를 가능케 했다. 그러나 뉴턴 역학의 사례가 역시 예시하듯이, 과거의 가장 놀라운 성공조차도 위기가 무한히 뒤로 지연될 수 있음을 보장하지는 못한다. 오늘날 철학, 심리학, 언어학, 그리고 심지어 예술사 영역에서의 연구는 모두가 한결같이 전통적 패러다임이 다소 빗나간 것이었음을 시사함을 일러준다. 적응에 대한 그런 실패는 여기서 우리들의 주의가 대부분 필연적으로 집중되어 있는 과학의 역사적 연구에 의해서도 갈수록 뚜렷해지고 있다.
이들 위기를 조장하는 주제 가운데 어느 것도 지금까지 전통적 인식론적 패러다임(epistemological paradigm)에 대한 유효한 대안을 내놓지 못했으나, 그 주제들은 그런 패러다임의 일부 특성들이 무엇이 될 것인가를 제시하기 시작하고 있다. 예컨대 아리스토텔레스와 갈릴레오가 흔들리는 돌을 보았을 때, 거기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속박 상태의 낙하 현상을 보았고 갈릴레오는 진자를 보았다 라고 말함으로써 야기되는 곤란한 점들에 대해서 나는 잘 알고 있다. 이 절의 서두에서는 바로 그런 어려움이 보다 더 근본적인 형태로 나타나 있다. 세계가 패러다임의 변화와 더불어 변화하지는 않지만, 그 이후의 과학자들은 이전과는 다른 세계에서 연구 활동을 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시 우리는 적어도 이것들과 유사한 진술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을 배워야 하리라는 것이 나의 확신이다. 과학 혁명 동안에 일어나는 일은, 개별적인 안정된 데이터의 재해석으로 완전히 환원되지 못한다. 무엇보다도 우선 데이터들이 양론의 여지없이 안정되지는 못한 상태다. 진자는 떨어지는 돌이 아니며 산소는 플로지스톤이 빠진 공기가 아니다. 결과적으로, 이제 곧 보게 되겠지만, 과학자들이 이들 다양한 대상으로부터 수집한 데이터는 그 자체가 서로 다른 것들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어느 과학자 개인 또는 과학자 사회가, 속박된 낙하 운동으로부터 진자로, 또는 플로지스톤이 빠진 공기로부터 산소로의 이행을 성취한 과정은 해석과 흡사한 과정이 아니다. 해석할 수 있는 고정된 데이터가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과학자가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 새로운 패러다임을 채택한 과학자는 해석 자이기보다는 차라리 거꾸로 보이는 렌즈를 낀 사람과 비슷하다. 이전과 똑같은 무수한 대상들을 마주 대하면서 그리고 그렇게 변함 없는 대상을 보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과학자는 대상들의 세부적인 것의 여기저기에서 속속들이 그 대상들이 변형되었음을 깨닫게 된다.
이 언급은, 과학자들에게 관찰 결과와 데이터를 해석하는 특성이 있지 않다는 것을 가리키는 의도에서 말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갈릴레오는 진자에 대한 관찰 결과를, 아리스토텔레스는 떨어지는 돌에 대한 관찰 결과를, 뮈센브뢰크(musschenbroek)는 충전된 병에 대한 관찰 결과를, 그리고 프랭클린은 콘덴서에 대한 관찰 결과를 해석하였다. 그러나 이들 해석은 각기 어떤 패러다임을 전제로 하는 것이었다. 또한 이것들은, 우리가 앞에서 보았듯이, 이미 존재하는 하나의 패러다임을 정련하고, 확대하고, 명료화하는 것을 겨냥하는 작업인 정상 과학의 부분들이었다. Ⅲ절에서는 해석이 핵심적 역할을 했던 여러 사례들이 제시되었다. 그러한 사례들은 과학 연구에서 압도적인 다수를 차지하는 전형이다. 그 사례들의 각각에서 과학자는 수용된 패러다임에 바탕 해서 데이터가 무엇인가, 그것을 얻기 위해서는 어떤 기기를 써야 하는가, 그리고 그 해석에는 어떤 개념이 관련되는가를 알게 되었다. 하나의 패러다임이 주어지면, 데이터의 해석은 패러다임을 탐사하는 작업에서의 핵심을 이루게 된다.
그러나 이런 해석 작업은 ―그리고 이것은 앞앞 단락에서 다루었는데― 패러다임을 정련시켜 줄 수 있을 뿐 수정하지는 못한다. 패러다임들은 도대체 정상 과학에 의해 고쳐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우리가 이미 보았듯이, 정상 과학은 궁극적으로 이상 현상들의 인지 그리고 위기로 인도할 따름이다. 그리고 이것들은 심사숙고와 해석에 의해서가 아니라 게슈탈트 전환과 같은 비교적 돌발적이고 비구조적인 사건에 의해 끝을 맺게 된다. 그러면 과학자들은 "눈에서 비늘이 걷혔다(scales falling from the eyes;잘못을 깨달았다)"고 말하거나, 또는 전에는 모호하던 수수께끼에 '넘쳐 드는(inundates)'그런 '번득이는 섬광(lightning flash)'에 관해 자주 말하게 되며, 그리하여 수수께끼의 구성 요소들을 최초로 해결 가능한 새로운 방식으로 보일 수 있게 만든다. 다른 예에서는, 관련되는 깨달음이 꿈속에서 얻어진다.55) '해석(interpretation)'이라는 용어의 어떤 일반적인 의미는, 그것을 통해 새로운 패러다임이 탄생되는 이들 직관이라는 섬광과는 부합되지 않는다. 그러한 직관은 옛 패러다임과 더불어 얻어지는 변칙적이고 또한 통합적인 경험에 의존하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직관들이, 해석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런 경험의 특정 항목들에 논리적 또는 단편적으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직관은 그런 경험의 많은 부분을 모아서, 그 이후 그것들을 하나 하나씩 옛 패러다임이 아닌 새 패러다임에 연결시키게 될, 꽤 다른 경험의 한 묶음으로 변형시킨다.
이러한 경험상의 차이가 무엇이 되는가를 자세히 이해하기 위해서 잠시 아리스토텔레스, 갈릴레오, 그리고 진자의 얘기로 되돌아가자. 그들의 상이한 패러다임과 그들의 공통된 환경 사이의 상호 작용은 그들 각자에게 무슨 데이터를 접근 가능한 것으로 만들어 주었는가? 속박된 낙하 운동(constrained fall)을 관측하면서, 아리스토텔레스 주의자는 돌의 무게와 운동에서 그것이 올려진 수직 높이, 그리고 그것이 떨어져 정지하기까지 걸린 시간 등을 측정할 것이다(아니면 적어도 논의할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주의자들은 측정을 거의 하지 않았다). 매질의 저항과 더불어 이런 것들은, 낙하 체를 다룸에 있어 아리스토텔레스 주의 과학에 의해 사용되는 개념적 범주들이었다.56) 그것들에 의해 인도된 정상 연구는 갈릴레오가 발견했던 법칙들을 생산해 냈을 리가 없다. 그것은 다만 흔들리는 돌(swinging stone)에 대한 갈릴레오의 생각을 낳게 한 일련의 위기 국면으로 인도할 수 있을 뿐이었으며 다른 경로를 따라 실제로 그렇게 했다. 그러한 위기들과 그 밖의 지적인 변화의 결과로서, 갈릴레오는 흔들리는 돌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보게 되었다. 부유하는 물체에 관한 아르키메데스의 연구는 매질을 필수적이 아닌 것으로 만들었다. 임페투스 이론은 운동을 대칭적이고 지속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신플라톤주의는 갈릴레오의 관심을 운동 원형의 형태 쪽으로 돌려놓았다.57) 그런고로 그는 무게, 반지름, 이동 각도 그리고 흔들리는 주기만을 측정했는데 이것들은 바로 진자에 관한 갈릴레오의 법칙을 낳도록 해석될 수 있는 데이터들이었다. 사실 해석은 거의 불필요했던 것으로 판명되었다. 갈릴레오의 패러다임이 주어지면 진자와 같은 규칙적인 운동은 접근하기가 매우 쉬웠다. 진자의 주기가 진폭과 전혀 무관하다는 갈릴레오의 발견에 대해 어떻게 달리 설명할 수 있겠는가? 그 발견은 갈릴레오로부터 비롯된 정상 과학이 뿌리뽑아야 했던 것이며, 우리가 오늘날 자세히 기록하기가 꽤 힘이 드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주의에게는 존재할 수 없었던(그리고 사실상 자연에 의해 어디에서도 정확히 예증되지 못하는)규칙적 현상들이, 갈릴레오가 했던 것처럼 흔들리는 돌을 보았던 사람에게는 즉각적 체험의 결과들이었던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주의들은 흔들리는 돌에 대한 논의를 기록했던 적이 없으므로, 아마도 그런 실례는 너무 환상적일지도 모른다. 그들의 패러다임상으로는 그것은 엄청나게 복잡한 현상이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 주의들은, 보다 간단한 경우, 즉 특별한 속박 없이 낙하는 돌에 대하여 논의했는데, 여기서도 똑같은 시각 차이가 드러난다. 낙하하는 돌을 관찰하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하나의 과정(process)보다는 오히려 상태의 변화(change of state)를 보았다. 따라서 그에게는 운동의 의미 있는 척도들은 움직인 전체 거리와 경과한 전체 시간이었으며, 이것들은 우리가 오늘날 속도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라 평균 속도라고 불러야 할 것을 제공하는 파라미터들이었다.58) 이와 마찬가지로 아리스토텔레스는, 돌은 그 본성에 의해 그 최종의 정지 위치에 이르도록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운동이 일어나는 도중의 어느 시점에서의 의미 있는 거리 파라미터를 운동의 시발점으로부터의 거리가 아니라 운동의 최종 지점까지의 거리로 보았다.59) 그러한 개념적 파라미터들은 그의 유명한 '운동의 법칙(laws of motion)'대부분에 내포되어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그러나 일부는 임페투스 패러다임을 통해서, 그리고 일부는 형상의 강도(latitude of forms)라고 알려진 이론을 통해서, 스콜라주의적 비판은 운동을 다루는 이런 사고 방식을 변화시켰다. 임페투스에 의해 움직여지는 돌은 그 시발점으로부터 멀어질수록 점점 더 임페투스를 획득했다. 따라서 정지 점까지의 거리가 아니라 시발점으로부터의 거리가 의미 있는 파라미터가 되었다. 덧붙여 아리스토텔레스의 속도 관념은 스콜라 학파에 의해 두 갈래로 분화되어 갈릴레오 이후에 곧 오늘날의 평균 속도와 순간 속도의 개념으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이들 개념이, 그 일부를 이루었던 패러다임을 통해서 고찰될 때, 떨어지는 돌은 진자와 마찬가지로 거의 한 눈에 그것을 지배하는 법칙들을 들어내 보였다. 돌들이 균일하게 가속되는 운동에 의해 떨어진다는 사실은 갈릴레오가 최초로 주장한 것이 아니었다.60) 더욱이 그는 빗면(inclined plane)에서의 실험을 행하기 이전에, 이 주제에 관한 그의 정리를 그 결과들의 여러 가지와 함께 이미 전개시킨 바 있었다. 그 정리는, 자연에 의해서 그리고 갈릴레오와 당대의 학자들을 길러낸 패러다임에 의해서 결정 지워진 세계 속에서, 천재가 깨닫게 되는 새로운 규칙성의 틀 가운데 또 다른 하나였던 것이다. 그러한 세계에 살면서도 갈릴레오는, 그가 원한다면, 왜 아리스토텔레스가 운동에 관해 그렇게 보았었던가를 설명할 수는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떨어지는 돌에 대한 갈릴레오가 경험한 직접적 내용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그것과는 달랐던 것이다.
물론 우리가 '직접적 경험(immediate experience)'에 대해서 ―즉 패러다임이 일시에 그들의 규칙성을 드러내는 것을 부각시키는 지각 형태들(perceptual features)에 대해서― 그토록 관심을 둘 필요가 있는가는 전혀 확실하지 않다. 그들 형태들은 분명히 패러다임에 대한 과학자의 공약에 따라 변화할 것임에 틀림없으나, 그것들은 과학 연구를 진전시키는 것으로 평가되는, 있는 그대로의 데이터 또는 맹목적 경험에 대해 논할 때 우리가 일반적으로 연상하게 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아마도 직접적 경험은 유동적인 것으로서 미루어 두어야만 할 것 같고, 그 대신 우리는 과학자가 그의 실험실에서 수행하는 구체적인 조작과 측정에 관해 논의해야 할 것이다. 또는 아마도 분석은 즉각적으로 주어진 것으로부터 더욱 심층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예를 들면, 어떤 중립적 관찰-언어(observation-language) 견지에서 행해질 수도 있겠는데, 그런 관찰 언어는 과학자가 보는 것을 전달하는 망막 영상에 일치하도록 고안된 것일 수도 있다. 이런 방식들의 하나를 통해서 비로소 우리는 다시금 경험이 영구적으로 안정화되는 영역을 되찾기를 기대할 수 있다. 그러한 영역에서 진자와 속박된 낙하 현상은 서로 다른 지각 작용인 것이 아니라 흔들리는 돌의 관찰에 의해 얻어진 명확한 데이터를 서로 달리 해석한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감각적 경험이 확고하고 중립적인 것일까? 이론이란 주어진 데이터에 대해 인간이 붙여 놓은 해석에 불과한 것일까? 지난 3세기 동안 서양 철학을 거의 주도하다시피 한 인식론적인 관점은 즉각적으로 분명히 그렇다라고 못박는다. 나는 진전된 대안이 없는 상태에서는 그러한 관점을 완전히 철회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런 관점은 더 이상 효과적으로 기능하지 못하며, 중립적인 관찰 언어를 도입함으로써 그것을 기능하도록 만들려는 시도들은 현재 내가 보기에는 전망이 없는 것 같다.
과학자가 실험실에서 행하는 조작과 측정들은 경험에서 '주어지는 것(the given)'이라기 보다는 '공들여 수집한 것(the collected with difficulty)'들이다. 그것들은 과학자가 보는 그 무엇이 아니다__적어도 그의 연구가 상당한 수준으로 진전되고 그의 주의가 초점을 맞추기 전까지는 그렇지 못하다. 오히려 그것들은 보다 기본적인 지각 작용의 의미에 대한 구체적인 지표들이며, 그것들은 오로지 수용된 패러다임의 유익한 정련화의 기회를 기약한다는 이유에 의해서만 정상 연구의 엄밀한 탐사 대상으로 선정된다. 조작과 측정은 부분적으로 그것들을 유도해 내는 직관적 경험에 비해 훨씬 더 패러다임을 신봉하는 과학자들은 서로 다른 구체적인 실험 조작들을 수행한다. 진자에 관해 실행되어야 할 측정은 속박된 낙하 운동의 경우에 관련되는 측정들과는 달라지게 마련이다. 산소의 성질을 구명하는 데 필요한 실험들은, 플로지스톤이 빠진 공기의 특성을 고찰함에 있어 요구되는 조작과는 같을 수가 없다.
순수한 관찰-언어에 관해 말하자면, 아마 앞으로는 그러한 경우를 기대하는 우리의 희망은 여전히 지각과 정신의 이론에만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그리고 현대의 심리학 실험은 그러한 이론으로는 거의 다룰 수 없는 현상들을 급격히 증식시키고 있다. 그리고 현대의 심리학 실험은 그러한 이론으로는 거의 다룰 수 없는 현상들을 급격히 증식시키고 있다.
오리-토끼 (duck-rabbit)실험은 동일한 망막 영상을 받은 두 사람이 서로 다른 것들을 볼 수 있음을 입증한다. 거꾸로 보이는 렌즈는 서로 다른 망막 인상을 받은 두 사람이 똑같은 것을 볼 수 있음을 보여 준다. 심리학에는 이와 동일한 효과를 보여 주는 증거들이 대단히 많으며, 그로부터 제기되는 의구심은 실제적인 관찰-언어를 제시하려는 어떤 시도도 아직 일반적으로 적용될 수 잇는 순수한 지각 용어에 근접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가장 가까이 접근한 그러한 시도들을 살펴보면, 이 에세이의 주요 주제의 몇 가지를 크게 강화시키는 하나의 공통되는 특성이 드러난다. 그런 시도들은 처음부터 현행 과학이론이나 일상적인 의견 교환으로부터 취합되는 하나의 패러다임을 가정하며, 그 다음에는 그 패러다임으로부터 비논리적이고 비지각적인 용어들을 모두 제거하기 위해 노력한다. 의견교환의 몇몇 영역에서는 이러한 노력이 상당한 정도로 수행되어 훌륭한 성과를 거두었다. 이런 유형의 노력이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것들의 결과는 자연에 관한 수많은 예측을 구체화시키기는 하지만, 이들 예측이 빗나갈 경우에는 기능하지 못하는 언어―과학에서 사용되는 언어들과 마찬가지인―가 된다. 넬슨 굿먼(Nelson Goodman)은 그의 저서 "외관의 구조(Structure of Appearance)"의 저술 의도를 진술하면서 바로 이 점을 언명했다.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진 현상들 이외의' 아무것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은 다행한 일이다. 왜냐하면 '가능한'경우 즉 실제로 존재하지는 않지만 존재했을는지도 모르는 경우의 개념은 지극히 불확실한 것이기 때문이다."61) 이렇듯이 이미 완전히 알려진 세계를 표현하는 데 국한된 언어는 어느 것도 '주어진 것 (the given)에 대한 순수한 중립적, 객관적 기록을 완수 해 낼 수 없다. 철학적 고찰은 그런 사명을 다할 수 있는 언어가 어떤 것이 될 것인가의 힌트조차도 아직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 아래서 우리는, 과학자들이 산소와 진자(그리고 아마도 원자와 전자)를 그들의 직접적 경험의 기본 요소로서 다루고 있을 때, 그들은 과학의 실제에서 뿐 아니라 원리에 있어서도 옳은가를 적어도 의심은 해 볼 수 있다. 패러다임이 구현된 종족적, 문화적 그리고 마지막으로 전문적 경험의 결과로서 과학자의 세계는 행성과 진자, 콘덴서와 화합물 광물, 기타 다른 여러 대상들로 충만하게 되었다. 이들 지각 대상에 비하면, 미터 자 측정과 망막 영상은 둘 다 과학자가 자신이 하는 연구의 특수 목적을 위해 누군가가 그렇게 하도록 정할 때에 한해서 경험이 직접 접근할 수 있는 정교한 구성 개념들이다. 이것은 예컨대 과학자가 흔들리는 돌을 바라보면서 볼 수 있는 유일한 것들이 진자들이라는 것을 시사하지는 않는다(우리는 이미 다른 과학자 사회의 구성원들도 속박된 낙하 현상을 볼 수 있었음을 주목한 바 있다). 그것은 흔들리는 돌을 바라보는 과학자가 진자를 보는 것보다 원리상 더 기본적인 성격의 경험을 할 수 없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그 대안은 어떤 가설적인 '고정된(fixed)'시각이 아니라, 다른 패러다임을 통하여 흔들리는 돌을 다른 그 무엇으로 만들어 준 시각이었던 것이다.
과학자이거나 일반인이거나 세계를 단편적으로 또는 요소 하나하나로 보도록 익히는 것이 아님을 우리가 다시 한 번 상기한다면, 이 모든 것은 보다 그럴듯하게 보일 것이다. 모든 개념적 그리고 조작상의 범주들이 미리 구비되어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예컨대 초우라늄 원소를 더 발견한다거나 또는 새로운 집이 눈에 띄는 경우 등― 과학자와 일반인은 모두 경험의 흐름으로부터 전체 영역을 분류해 낸다. 어린아이가 '엄마(mama)'라는 단어를 처음에는 모든 사람으로부터 모든 여성에게로, 그 다음에 드디어 자기 어머니에게로 옮겨가는 것은 단순히 '엄마'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또는 자기 엄마가 누구인지를 배우고 있는 것만이 아니다. 그와 동시에, 그 아이는 한 여자를 제외한 다른 모두가 자기에게 어떻게 행동하는가에 대해 무엇인가를 알게 될 뿐만이 아니라, 남자와 여자의 차이에 대해서도 배우고 있는 것이다. 아기의 반응과 기대와 믿음―사실상 그에게 지각된 세계의 많은 부분―이 거기에 따라 변화한다. 마찬가지 얘기로, 태양에 대해 그 전통적 명칭인 '행성(planet)'이라 부르기를 거부했던 코페르니쿠스주의자들은 '행성'이 무엇을 뜻하는가 또는 태양은 무엇인가만을 깨우치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태양뿐 아니라 모든 천체가 종전의 방식과는 전혀 달리 보이게 되는 세계 속에서 유용한 구별을 해내는 것이 지속될 수 있게끔 '행성'의 의미를 변화시키고 있었다. 앞서 제시된 다른 실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얘기가 성립될 수 있을 것이다. 플로지스톤이 빠진 공기 대신 산소를, 리이덴병 대신 콘덴서를, 또는 속박된 낙하 운동 대신 진자를 보았던 것은, 관련된 숱하게 많은 화학적, 전기적, 역학적 현상들에 대한 과학자들의 전체적인 시각 변환에서 단지 한 부분에 불과하였다. 패러다임은 일시에 경험의 광대한 영역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러나 조작적 정의 또는 순수한 관찰 -언어에 대한 탐색이 시작 될 수 있는 것은, 경험이 이처럼 결정되어진 이후의 일이다. 어떤 측정 또는 어떤 망막 인상이 진자를 진자로 만드는가를 묻는 과학자나 철학자는 이미 그것을 봄과 동시에 진자임을 인지할 수 있어야 한다. 만일 진자 대신 속박된 낙하 운동을 보았다면, 그의 질문은 제기될 수조차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진자를 보았으나, 소리굽쇠(turning fork)나 진동 저울(oscillation balance)을 보았던 방식으로 그것을 보았더라면, 그의 질문은 대답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항상 그 질문들이 정당하고 때로는 놀랄 만큼 유익하기는 하지만, 망막 인상이나 특수한 실험조작의 결과에 대한 질문들은 지각상 그리고 개념상 이미 일정한 방식으로 세분화된 세계를 전제로 한다. 어떤 의미에서 그러한 질문들이 정상과학의 일부가 되는 것은, 그것들이 패러다임의 존재에 의존하며 패러다임 변화의 결과로서 다른 대답들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이 절을 마무리하기 위해, 망막 영상 문제는 여기서 접어 두고, 다시 과학자에게 그가 이미 보아왔던 단편적이지만 구체적인 지표들을 제공하는 연구실 작업으로 주의를 국한시키자. 그러한 연구실 작업이 패러다임과 더불어 변화되는 한 가지 방식은 이미 앞에서 여러 번 관찰되었다. 과학혁명 이후에는 많은 과거의 측정과 기작이 무의미하게 되고 다른 것들에 의해 대체된다. 과학자는 플로지스톤이 빠진 공기에 적용했던 것과 동일한 시험들을 모두 산소에 적용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런 유형의 변화들은 총체적인 것이 아니다. 그가 그때 무엇을 지각하게 되든 간에, 혁명 이후의 과학자는 여전히 똑같은 세계를 보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혁명 이전에는 그것들을 달리 사용하였다고 하더라도, 그의 언어의 많은 부분과 실험 기구들의 대부분은 역시 이전의 것들과 동일하다. 그 결과로서, 혁명 이후의 과학은 혁명 이전의 과학이나 마찬가지로 똑같은 기기로 행해지고 같은 용어로 기술되는 똑같은 기작을 변함없이 다수 포함하게 된다 만일 이렇듯 지속되는 기작들이 어딘가 변화했다면, 그 변화는 그것들의 패러다임에 대한 관계에서든가 또는 그것들의 구체적인 결과들에서 일어나야 한다. 이제 나는 새로운 예를 하난 마지막으로 소개하면서, 이들 두 가지 유형의 변화가 둘 다 일어난다는 것을 제안하고자 한다. 돌턴(Dalton)과 그 당시 학자들의 연구를 살펴보면, 우리는 하나의 동일한 조작이 다른 패러다임을 통해서 자연에 연결될 때에는 자연의 규칙성의 전혀 다른 측면에 대한 지표가 될 수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덧붙여 우리는 때때로 낡은 조작 방법이 그 새로운 역할에 의해서 상이한 구체적인 결과를 낳게 됨을 알게 될 것이다.
18세기 대부분의 기간 동안, 그리고 19세기에 들어서까지도 유럽의 화학자들은, 거의 보편적으로 모든 화학종(chemical species)을 이루는 기본 원자들은 상호간의 친화력(forces of mutual affinity)에 의해 결합된다고 믿었다. 그런고로 은 덩어리는 은의 입자(corpuscles)사이의 친화력 때문에 한데 뭉친 것이었다(라부아지에 이후까지 이러한 입자들은 그 자체가 그것보다 더 기본적인 알갱이들로부터 결합되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바로 이 이론에 의하면, 은이 산(acid)에 녹는 (또는 소금이 물에 녹는) 이유는 산의 입자들이 은의 입자들을 (또는 물의 입자들이 소금의 입자들을) 이들 용질 입자 상호간에 잡아끄는 것보다 더 강하게 끌어당기기 때문이었다. 또한 구리와 산 사이의 인력(copper-acid affinity)은 은에 대한 산의 친화력보다 컸기 때문에, 구리는 은용액에 녹아서 은을 침전시킨다고 믿었다. 그 밖의 다수의 현상들이 이와 같은 방식으로 설명되었다. 18세기 동안, 선택적 친화력(elective affinity)의 이론은 훌륭한 화학 패러다임으로서, 화학 실험법의 설계와 분석에 널리 그리고 때로는 성공적으로 적용되었다.62)
그러나 친화력 이론은, 돌턴 연구의 동화 이래로는 이상스럽게 보이는 방식으로 물리적 혼합물과 화학적 화합물을 구분하고 있었다. 18세기의 화학자들은 두 종류의 과정을 인식하고 있었다. 혼합에 의해서 열, 빛, 발산 그리고 그 비슷한 무엇인가가 일어날 때, 화학적 결합이 일어나는 것으로 보고 있었다. 다른 한편, 혼합물의 입자들이 육안으로 또는 기구를 써서 분리, 구분될 수 있는 경우, 그것은 단지 물리적인 혼합물이라 여겨졌다.
그러나 중간적 성격의 수많은 경우 ―물에 녹은 소금, 합금, 유리, 대기 중의 산소, 기타 등등― 이런 어설픈 기준은 거의 쓸모가 없었다. 그들의 패러다임에 의해 인도되면서, 대부분의 화학자들은 이 모든 중간 영역을 화학적이라 간주했는데, 이는 그것을 구성하는 과정들이 모두 같은 종류의 힘에 의해 지배된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물 속의 소금이나 질소 중에 섞인 산소는 구리를 산화시켜 얻는 결합과 마찬가지의 화학적 결합의 한 실례로 여겨졌다. 이처럼 용액(solution)을 화학물(compounds)로 간주하는 견해는 매우 완강했다. 게다가 화합물의 생성은 용액에서 관찰되는 균질성을 설명해 주었다. 예를 들어, 만일 산소와 질소가 공기 중에서 결합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섞여 있기만 한 것이라면 보다 무거운 기체, 즉 산소가 바닥으로 가라앉아야 할 것이다. 공기를 혼합물이라고 보았던 돌턴은 산소가 바닥으로 가라앉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해 만족스럽게 설명할 수가 없었다. 그의 원자론의 동화는 궁극적으로 이전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던 곳에서 이상(anomaly)을 탄생시킨 것이었다.63)
사람에 따라서는 용액을 화합물이라고 보았던 화학자들이 그들의 후계자들과 달랐던 점은 단지 정의에 관한 문제였을 뿐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랬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의미는 정의를 단순히 관례적인 편의로 만들어 버리는 그런 것은 아니다. 18세기에는 혼합물(mixture)과 화합물(compound)이 조작상의 실험에 의해서 완전히 구별되지 않았으며, 아마도 그럴 수도 없었을 것이다. 화학자가 그러한 검증을 모색했었다 하더라도, 그들은 용액을 화합물로 만드는 기준을 추구했을 것이다. 혼합물-화합물의 구분은 그들의 패러다임의 일부 ―그들이 연구 영역 전체를 보았던 방식의 일부― 였고, 그것은 전반적으로 화학의 축적된 경험보다 우선하지는 않았으나, 어느 특정 실험적 검증보다도 선행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화학이 이런 방식으로 생각되었던 다른 한편에서, 화학적 현상들은 돌턴의 새로운 패러다임의 동화로부터 출현된 것들과는 상이한 법칙을 예시하고 있었다. 특히 용액이 여전히 화합물이라고 생각되었던 동안, 그렇게 많았던 화학 실험은 그 자체로서 일정 성분비의 법칙(law of fixed proportions)을 내놓을 수가 없었다. 18세기 말에는 몇몇 화합물들이 그 구성 성분들의 무게로 볼 때 성분비가 통상적으로 일정하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몇 가지 종류의 반응에 대해서 독일 화학자 리히터(Richter)는 현재의 화학 당량의 법칙(law of chemical equivalents)에 포함되는 보다 진전된 규칙성까지도 주목하고 있었다.64) 그러나 제조법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어떤 화학자도 이들 규칙성을 제대로 활용하지는 못했으며, 거의 18세기 말 이전까지는 아무도 그 규칙성을 일반화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유리나 소금 수용액에서처럼 확실한 반대 실례들이 주어진 상황에서, 친화력 이론을 폐기하지 않고서는 그리고 화학자 영역의 범위를 재개념화하지 않고서는 일반화란 도대체 불가능한 것이었다. 18세기 말에 이르러 프랑스 화학자 프루스트(Proust)와 베르톨레(Berthollet) 사이의 유명한 논쟁에서 그 결과는 뚜렷하게 드러났다. 전자는 모든 화학 반응이 일정 성분비로 일어난다고 주장한 반면, 후자는 그렇지 않다고 맞섰다. 두 사람 모두 자신의 견해에 대한 설득력 있는 실험적 증거를 수합해 놓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의 주장의 서로 엇갈릴 수밖에 없었고, 그들의 논쟁은 전혀 결론이 날 전망이 없었다. 베르톨레가 성분비에 있어 달라질 수 있는 하나의 화합물을 보았던 곳에서, 프루스트는 단지 물리적인 혼합물만을 보았기 때문이다.65) 이 논쟁에는 실험도 정의상 관례의 변화도 아무 의미가 없었다. 갈릴레오와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러했던 것처럼, 두 사람은 서로 근본적으로 엇갈려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존 돌턴이 끝내 그의 유명한 화학적 원자론(chemical atomic theory)으로 이끌게 된 연구를 수행하던 시절의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런 연구의 최후 단계에 이르기까지, 돌턴은 화학자도 아니었고 화학에 관심도 없었다. 오히려 그는 물에 의한 기체의 흡수와 대기에 의한 수분의 흡수라는 물리적인 문제들을 다루고 있었던 기상학자였다. 다른 전공 분야에서 훈련을 받으면서 더러는 그 전공에 대해 스스로 한 연구 때문에, 그는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당시의 화학자들과는 상이한 패러다임을 갖고 접근했던 것이다. 특히 그는 기체의 혼합물이나 또는 물에서의 기체의 흡수를 친화력이 전혀 작용하지 않는 물리적 과정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그에게 용액의 관찰된 균질성(homogeneity)은 하나의 문제거리였으나, 그는 그의 실험 혼합물 속의 다양한 원자들의 상대적 크기와 무게를 결정할 수 있다면 그 문제가 풀릴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돌턴이 결국 화학으로 돌아선 것은 이들 크기와 무게를 결정하기 위해서였고, 그는 처음부터 그가 화학이라 여겼던 반응들의 제한된 영역에서, 원자는 1대1 또는 다른 간단한 정수비로만 결합될 수 있다고 가정했다.66)
이 자연스런 가정은 그로 하여금 기본 입자들의 크기와 무게를 결정하는 것을 가능케 했으나, 또한 일정 성분비의 법칙을 동어반복으로 만들었다. 돌턴에게는 성분들이 일정한 비율로 대입되지 않는 반응은 그 어느 것도 사실상(ipso facto)순수한 화학적 과정이 아니었다. 일단 돌턴의 연구가 받아들여지자, 그의 연구 이전에 실험으로는 확립될 수 없었던 법칙이, 어떠한 한 벌의 화학적 측정으로도 뒤엎을 수 없는 기본적인 원칙이 되었다. 어쩌면 과학혁명의 가장 완벽한 사례가 될지도 모르는 이 사건의 결과로서, 동일한 화학적 조작이 화학적 일반화에 대해서 종전의 것과는 전혀 다른 관련을 맺게 되었던 것이다.
말할 나위도 없이, 돌턴의 결론들은 처음 발표되었을 때 여기저기서 공격을 받았다. 특히 비르톨레는 결코 설득되지가 않았다. 이 주제의 성격을 고려하건대, 그가 설득돼야 할 이유도 없었다. 그러나 대다수의 화학자들에게 있어, 돌턴의 새로운 패러다임은 프루스트의 패러다임이 미흡했던 부분에서 설득력 있는 것으로 판명되었는데, 그 이유는 돌턴의 패러다임은 혼합물과 화합물을 구분하는 새로운 기준 이상의 보다 광범위하고 보다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를테면, 만약 원자가 간단한 정수비로만 화학적으로 결합하는 것이라면, 기존의 화학 데이터의 재검토는 일정 성분비 법칙뿐만 아니라 배수 비례법칙의 예증까지고 드러내 줄 것이다. 화학자들은 예컨대 탄소의 두 가지 산화물은 무게로 각각 산소 56%와 72%를 포함한다고 말하지 않게 되었다. 그 대신 그들은 탄소 무게 1이 산소 무게 1.3이나 2.6과 결합한다고 표현하게 되었다. 과거의 실험조작의 결과들이 이런 방식으로 기록되자, 2:1이라는 비율이 눈에 곧 띄게 되었다. 잘 알려졌던 여러 반응들과 그 밖의 새로운 반응들의 분석에서도 이런 관계가 나타났다. 게다가 돌턴의 패러다임은 피히터의 연구를 동화시키고, 완전히 일반화시키는 것을 가능케 했다. 또한 그것은 특히 결합 부피(combining volumes)에 대한 게이-뤼삭(Gay-Lussam)의 실험을 비롯한 새로운 실험을 제안해 주었고, 그런 실험들은 화학자들이 이전에는 꿈도 꾸지 못했던 다른 규칙들도 내놓게 되었다. 돌턴으로부터 화학자들이 취했던 것은 새로운 실험적 법칙이 아니라 화학을 수행하는 새로운 방식이었고(그 자신은 그것을 '화학 철학의 새로운 체계(new system of chemical philosophy))라고 불렀다.', 이것이 유용하다는 것이 매우 급속히 판명됨으로써 프랑스와 영국의 구식 화학자들 중 소수만이 그것에 저항할 수 있었을 따름이었다.67) 그 결과 화학자들은 화학 반응이 이전의 것들과는 전혀 다르게 행동하는 세계에서 살게 된 것이었다.
이 모든 일들이 진행됨에 따라 한 가지 전형적이고도 매우 중요한 다른 변화가 발생했다. 여기저기서 화학의 숫자상 데이터 바로 그것이 변동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돌턴이 처음에 그의 물리 이론을 뒷받침할 데이터를 찾아서 화학 문헌을 처음 뒤적였을 때, 그것에 적합한 몇 가지 반응 기록을 발견해 냈으나, 그것에 적합하지 않았던 다른 기록들을 발견하는 것도 피할 수는 없었다. 예컨대 구리의 두 가지 산화물에 대한 프루스트 자신의 측정은 원자론에 의해 정해지는 2대 1이 아니라 1.47대 1이라는 산소 무게비를 얻고 있었다. 프루스트는 돌턴의 비율을 얻어낼 수 있었을 만한 바로 그러한 인물이었다.68) 말하자면, 그는 훌륭한 실험학자였으며, 혼합물과 화합물의 관계에 대한 그의 견해는 돌턴의 것에 상당히 가까웠다.
그러나 자연을 하나의 패러다임에 맞추기는 어려운 일이다. 이것이 바로 정상과학의 수수께끼들이 왜 그렇게 도전적인가, 그리고 패러다임이 없이 수행된 측정이 왜 그렇게 어떤 결론에 이르는 경우가 드문가를 말해 주는 이유이다. 그러므로 화학자들은 증거를 바탕으로 간단히 돌턴의 이론을 수용할 수는 없었는데, 그 이유는 그 증거의 많은 부분이 여전히 부정적이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들은 그 이론을 받아들인 이후까지도, 결국 그 후 거의 한 세대에 걸쳐 자연을 조화시키는 과정을 밟아야 했다. 이 작업이 이루어졌을 때에는 잘 알려진 화합물들의 백분율 조성비까지도 달라졌으며, 데이터 자체도 변화되었다. 이것이 혁명 이후 과학자들이 상이한 세계에서 일하게 된다고 말하게 되는 마지막 의미이다.
1) A. R. Hall, The Scientific Revolution, 1500~1800(London, 1954), p.16.
2) Marshall Clagett, The Science of Mechanics in the Middle Ages(Madison, Wis., 1959), Parts II-III. A. Koyre는 그의 저서 Etudes Galieennes (Paris, 1939), 특히 I권에서 갈릴레오의 사상에서의 중세적인 요소를 여러 가지로 제시하고 있다.
3) 뉴턴에 대해서는 T. S Kuhn, "Newtons`s Optical Papers", Issac Newton`s Papers and Letters in Natural Philosophy, ed. I. B. Cohen (Cambridge, Mass., 1958), pp.27~45를 보라. 파동 이론의 서막에 대해서는 E. T. Whittaker, A History of the theories of Aether and Electricity, I(2d ed.;London, 1951), 94~109를 보라;W. Whewell, History of the Inductive Sciences(rev. ed.;London, 1847), II, 396~466.
4) 열역학에 대해서는, Silvanus P. Thompson, Life of William Thomson Baron Kelvin of Largs(London, 1910), I, 266~81을 보라. 양자 이론에 대해서는 Fritz Reiche, Theory, trans. H. S. Hatfield and H. L. Brose(London, 1922), chaps. i~ii을 보라.
5) J. L. E. Dreyer, A History of Astronomy from Thales to Kepler(2nd ed.; New York, 1953), chaps. xi-xii.
6) T. S. Kuhn, The Copernican Revolution(Cambridge, Mass., 1957), pp.135~43.
7) J. R. Partington, A Short History of Chemistry(2nd ed.;London, 1951), pp.48~51, 73~85, 90~120.
8) 그들의 주된 관심은 약간 더 후기에 있긴 하지만, 많은 관련자료가 다음에 실려 있다; J. R. Partington and Douglas McKie, "Historical Studies on the Phlogiston Theory", Annals of Science, II(1937), 361~404;III(1938), 1~58, 337~71;IV(1937), 337~71.
9) H. Guerlac, Lvoisier-the Crucial Year (Ithaca, N. Y., 1961).이 책 전체가 위기의 출현과 최초의 인식에 대한 자료를 담고 있다. 라부아지에에 관하여 상황을 명확하게 기술한 부분에 대해서는 pp.35를 보라.
10) Max Jammer, Concepts of Space: The History of Theories of Space in Physics (Cambridge, Mass., 1954), pp114~24.
11) Joseph Larmor, Aether and Matter...INcluding a Discussion of the Influence of the Earth`s Motion on Optical Phenomena(Cambridge, 1900), pp.6~20, 320~22.
12) R. T. Glazebrook, James Clerk Maxwell and Modern Physics (London, 1896), chap. ix. 맥스웰의 최종 태도에 관해서는 그의 저서, A Treatise on Electricity and Magnetism (3rd ed.;Oxford, 1892), pp. 470 참조.
13) 역학의 진전에서의 천문학의 역할에 관해서는 Kuhn, op. cit., chap. vii를 보라.
14) Whittaker, op. cit., I, 386~410; II(London, 1953), 27~40.
15) Aristarchus의 연구에 대해서는 T. L. Heath, Aristarchus of Samos: The Ancient Copernicus(Oxford, 1913), Part II를 보라. Aristarchus의 업적을 무시해 버린 전통적 입장을 극단적으로 서술한 내용에 대해서는, Arthur Koestler, The Sleepwalkers: A History of Man`s Changing Vision of the Universe(London, 1959), pp.50을 보라.
16) Partington, op. cit., pp.78~85.
17) 특히 N. R. Hanson, Patterns of Discovery (Cambridge, 1958), pp.99~105를 보라.
18) T. S. Kuhn, "The Essential Tension: Tradition and Innovation in Scientific Research", The Third (1959) University of Utah Research Conference on the Identification of Creative Scientific Talent, ed. Calvin W. Taylor(Salt Lake City,1959), pp. 162-77.예술가들 사이에서의 비교할 만한 현상에 관해서는, Frank Barron, "The Psychology of Imagination", Scientific American, CXCIX(September,1958), 151~66, 특히 p.160 참조.
19) W. Whewell, History of the Inductive Sciences (rev. ed. ; London, 1847), II, 220~21.
20) 음속에 관해서는 T. S. Kuhn. "The Caloric Theory of Adiabatic Compression", Isis, XLIV(1958), 136~137 참조. 수성의 근일점 (Mercury`s perihelion)의 변동에 대해서는 E. T. Whittaker, A History of the Theories of Aether and Electricity, II, (London 1953), 151, 179 참조.
21) T. S. Kuhn, The Copernican Revolution(Cambridge, Mass., 1957), p.138에서 인용.
22) Albert Einstein, "Autobiographical Note", in Albert Einstein: Philosopher-Scientist, ed. P. A Schilpp(Evanston, III.,1949), p.45.
23) Ralph Kronig, "The Turning Point", in Theoretical Physics in the Twentieth Century: A Memorial Volume to Wolfgang Pauli, ed. M. Fierz and V. F. Weisskopf(New York, 1960), pp.22, 25~26. 이 논문의 많은 대부분이 1925 년 직전 몇 해 동안의 양자 역학의 위기를 묘사하고 있다.
24) Herbert Butterfield, The Origins of Modern Science, 1300-1800(London, 1949), pp.1~7
25) Hanson, op. cit, chap. i.
26) 화성에 대한 케플러의 연구를 설명한 것은, J. L. E. Dreyer, A History of Astronomy from Thales to Kepler(2d ed.; New York, 1953), pp.380~93. Dreyer의 요약에는 간혹 정확하지 못한 데가 있으나 여기서 필요한 자료로는 손색이 없다. 프리스틀리에 관해서는 그 자신의 저서, 특히 Experiments and Observations on Different Kinds of Air(London,1774~75)를 보라.
27) 17세기 역학에 수반되었던 철학적인 대응 관계에 관해서는 Rene Dugas, La mecanique au XVII siecle(Neuchatel,1054), 특히 xi장 참조. 이와 비슷한 19세기 에피소드에 대해서는, 같은 저자의 앞선 연구인 Histoire de la mecnaique(Neuchatel, 1950), pp. 419~43을 보라.
28) T. S. Kuhn, "A Function for Thought Experiments", in Melanges Alexandre Koyre, ed. R. Taton and I. B. Cohen, 1963, Hermann(Paris).
29) 새로운 광학적 발견 일반에 대하여는 V. Ronchi, Historie de la lumiere(Paris,1956), chap. vii을 보라. 이러한 영향 가운데 하나에 대한 초기의 설명은 J. Priestley, The History and Present State of Discoveries Relating to Vision, Light and Colours(London, 1772), pp.498~520을 보라.
30) Einstein, op. cit.
31) 근본적인 과학적 연구에서의 젊은 과학자들의 역할에 대한 이러한 일반론은 cliche라 할만큼 흔한 얘기이다. 더구나 과학 이론에 미친 근본적인 공헌들을 기록한 어떤 리스트를 한번 훑어보아도 인상 깊게 확인된다. 그렇기는 하지만, 그 일반화는 반드시 체계적인 고찰을 필요로 한다. Harvey C. Lehman(Age and Achievement [Princeton, 1953])은 유용한 데이터를 많이 제공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연구에서는 근본적인 재개념화를 포함하는 공헌들을 따로 추려 내려는 노력은 보이지 않는다. 또한 그의 연구는 과학에서의 비교적 늦게 나타난 생산성에 수반될 수 있는 특수 상황들―만약 그런 것이 있다면―에 대해서도 고찰하지 않았다.
32) Silvanus P. Thompson, Life of William Thomson Baron Kelvin of Largs(London, 1910).
33) 예컨대 Philosophy of Science XXV(1958), 298 에 실린 P. P. Wiener의 논평을 참조.
34) James B. Conant, Overthrow of the Phlogiston Therory(Cambridge, 1950), pp.13-16;J. R. Partington, A Short History of Chemistry(2nd ed.; London,1951), pp.85-88. 플로지스톤 이론에 기여에 관해 가장 완벽하고도 공감적으로 설명한 것은 H. Metzger, Newton, Stahl, Boerhaave et la dectrine chimique(Paris, 1930), part II이다.
35) 전혀 다른 유형의 분석을 거쳐 얻어낸 결론인 R. B. Braithwaite, Scientific Explanation (Cambridge, 1953), pp.50~87. 특히 p.76과 비교하라.
36) 일반적인 입자론(corpuscularism)에 대해서는 Marie Boas, "The Establishment of the Mechanical Philosophy", Osiris, X(1952), 412~431을 보라. 맛에 입자 모양이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해서는 위의 문헌의 p.493 참조.
37) R. Dugs, Ls mecanique au XVIP siecle(Neuchatel, 1954), pp.177~85, 284~98, 345~56.
38) I. B. C, Franklin and Newton: An Inquiry into Speculative Newtonian Experimental Science and Franklin`s Work in Electricity as an Example There of(Philadelphia, 1956), chaps. vi-vii.
39) 전기에 관해서는 주 7)의 viii-ix장 참조. 화학에 대해서는 Metzger, op. cit., part I 참조.
40) E. Meyerson, Identity and Reality (New York, 1930), chap. X.
41) E. T. Whittaker, A History of the Theories of Aether and Electricity, Ⅱ(London, 1953), 28~39.
42) 과학의 발전을 이런 프로크루테스(Procrustes)의 침대에 맞추려는 기발하고 지극히 최신식의 시도에 대해서는 C. C. Gillispie, The Edge of Objectivity: And Essay in the History Scientific Ideas (Princeton, 1960)를 보라.
43) 그 원래의 실험은 George M. Stratton, "Vision without Inversion of the Retinal Image", Psychological Review, IV(1897), 341-60, 463-81이었다. 보다 최신의 총설은 Harvey A. Carr, An Introduction to Space Perception (New York, 1935),pp.18-57에 실려 있다.
44) 예를 들어 다음의 Albert H. Hastorf, "The Influence of Suggestion on the Relationship between Stimulus Size and Perceived Distance", Journal of Psychology, XXIX(1950), 195-217; Jerome S. Bruner, Leo Postman, and John Rodrigues, "Exceptions and the Perception of Color", American Journal of Psychology, LXIV(1951), 216-27 을 참조하라.
45) N. R. Hanson, Patterns of Discovery (Cambridge, 1958), chap. i.
46) Peter Doig, A Concise History of Astronomy (London, 1950),pp.115~16.
47) Rudolph Wolf, Geschichte der Astronomie (Munich, 1877), pp. 513~15, 683~93. 특히 주목할 것은 Wolf 의 해석이 이런 발견들을 Bode 법칙이 결과로서 설명하는 것을 얼마나 어렵게 만들었는가이다.
48) Joseph Needham, Science and Civilization in China, III(Cambridge, 1959), 423~29, 434~36.
49) T. S. Kuhn, The Copernican Revolution (Cambridge, Mass., 1957), pp. 206~9.
50) Duane Roller and Duane H. D. Rolle, The Development of the Concept of Electric Charge(Cambridge, Mass., 1954), pp.21-29.
51) VII절의 논의, 그리고 주 9)에 인용된 참고 문헌이 지시하는 서적 참조.
52) Galileo Galilei, Dialogues concerning Two New Sciences, trans. H. Crew and A. de Salvio (Evanston, Ill., 1946), pp. 80~81, 162~66.
53) Ibid, pp. 91~94, 244.
54) M. Clagett, The Science of Mechanics in the Middle Ages(Madison, Wis.,1959), pp. 537~38, 570.
55) [Jacques] Hadamard, Subconscient intuition, et logique dans la recherche scientifique (Conference faite au Palais de la Devouverte le 8 December 1945[Alencon, n,d.}), pp.7~9. 수학적인 새로운 창안에만 국한되기는 했으나, 훨씬 더 자세히 설명한 것은, 같은 저자가 쓴 The Psychology of Invention in the Mathematical Field (Princeton, 1949)이다.
56) T. S. Kuhn, "A Function for Thought Experiments", in Melanges Alexander Koyre, ed. R. Taton and I. B. Cohen, Herman(Paris).
57) A. Koyre, Etudes Galileennes (Paris, 1939), I, 46-51; "Galileo and Plato", Journal of the History of Ideas, IV(1943), 400~428.
58) Kuhn, "A Function for Thought Experiments", in Melages Alexandre Koyre 주 14)의 인용문 참조.
59) Koyre Etudes...., II, 7-11.
60) Clagett, op. cit., chaps. iv, vi, and ix.
61) N. Goodman, The Structure of Appearance (Cambridge, Mass. 1951), pp. 4~5. 이 문구는 더 자세하게 인용할 필요가 있다.:"가령 1947년도 월밍턴(Wilmington)의 거주자 가운데 체중 175-180파운드인 사람들만이 그리고 그들 모두가 붉은 머리 색깔을 갖는다면, '월밍턴의 붉은 머리, 1947년 거주자'는 '175-180파운드 사이의 월밍톤의 1947년 거주자'와 구조상의 정의에서 결합될 수 있다..... 이들 서술부의 어느 하나만이 적용될 어떤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문은 이 문제에 아무 관계가 없다....일단 우리가 거기에는 그런 사람이 없다는 것을 결정하고 나면.. 그 이상 아무것도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 다행이다. 왜냐하면 '가능한' 경우, 실제로 존재하지 않지만 존재할는지도 모르는 경우라는 개념은 아주 불확실한 것이기 때문이다."
62) H. Metzger, Newton, Stahl, Borehaave et la doctrine chimique(Paris, 1930), pp.34~68.
63) Ibid., pp. 124-29, 139-48. 돌턴에 대해서는 다음 참조:Leonard K. Nash, The Atomic-Molecular Theory("Harvard Case Histories in Experimental Science", Case4; Cambridge, Mass., 1950),pp. 14~21.
64) J. R. Partington, A Short History of Chemistry (2d ed. ; London, 1951), pp.161~63.
65) A. N. Meldrum, "The Development of the Atomic Theory;(1)Berthollet`s Doctrine of Variable Proportions", Manchester Memoirs, LIV (1910), pp. 1~16.
66) L. K. Nash, "The Origin of Dalton`s Chemical Atomic Theory", Isis XLVII(1956), 101~16.
67) A. N. Meldrum, "The Development of the Atomic Theory: (6) The Reception Accorded to the Theory Advocated by Dalton", Manchester Memoirs, LV(1911), 1~10.
68) 프루스트에 대해서는 "Berthollet`s Doctrine of Variable Proportions", Manchester Memoirs, LIV(1910), 8 참조. 화학적 조성과 원자량 측정에서의 점진적 변화에 대한 상세한 역사는 아직 씌어져야 할 상태이지만, 거기에 이르는데 도움이 되는 것은 Partington, op. cit.에 실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