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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 기다리는 동안(While the Auto Waits)

차가 기다리는 동안(While the Auto Waits)

O Henry

 

땅거미가 지기 시작할 무렵, 그 한적한 조그만 공원의 그 한적한 모퉁이에 회색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다시 모습을 나타냈다. 그녀는 벤치에 앉아 책을 읽었다. 아직도 30분쯤은 활자에 몰두할 수 있었다.

되풀이하지만, 그녀의 드레스는 회색이었다. 스타일도 바느질 솜씨도 어디 하나 흠잡을 데가 없었지만 너무 수수해서 두드러지게 눈에 띄지는 않았다. 얇은 베일이 터어반 형 모자와 함께 얼굴을 싸고 있었는데, 그 얼굴은 베일을 통해서 차분하고 얌전한 아름다움이 깃들어 빛나고 있었다. 그녀는 이제도 그제께도 같은 시각에 이곳에 나타났다. 그런데 이 사실을 아는 남자가 있었다.

그것을 알고 있는 청년은 근처를 서성거리면서 위대한 행운의 신에게 바친 희생의 효과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의 이 믿음은 보람이 있었다. 왜냐하면 그녀가 책장을 넘기는 동안 책이 손에서 미끄러져 벤치에서 1야드 저편에 굴러떨어졌기 때문이다.

청년은 때를 놓치지 않고 달려가 공원이나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 태도, 정중함과 기대와 순찰 중인 경관에 대한 세심한 주의 등이 뒤섞인 거동으로 그 책을 집어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그러고는 쾌활한 목소리로 날씨에 대한 아무 소용도 없는 인사를 건네 보았다. 실은 이런 화제야말로 이 세상의 불행 중의 매우 많은 부분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잠시 가만히 서서 자신의 운명을 기다렸다.

여자는 천천히 그를 훑어보았다. 평범하고 단정한 복장, 표정에도 이렇다 할 특징이 없는 것이 특징으로 되어 있는 용모였다.

"상관없으시다면 앉으셔도 괜찮아요." 하고 그녀는 차분한 알토의 음성으로 말했다. "사실은 앉아 주셨으면 좋겠어요. 책을 읽기에는 이제 너무 어두워서요. 얘기를 하는 편이 더 좋겠어요."

행운을 섬기는 하인은 좋아라고 그녀 곁에 앉았다.

"아시겠습니까."하고 그는 공원에서 열리는 집회의 의장이 개회사를 할 때 쓰는 그 형식적인 용어로 말했다. "저는 무척 많은 여성을 보아 왔습니다만, 부인만큼 정말로 황홀해지는 분은 일찍이 본 적이 없습니다. 전 어제도 부인에게 주의가 끌렸습니다. 부인의 그 아름다운 눈동자에 한 남자가 넋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당신은 아마 모르실 줄 압니다."

"어떤 분이신진 모르지만"하고 여자는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잊으시면 안 돼요, 제가 숙녀라는 것을. 하지만, 방금 선생님이 말씀하신 당신이라는 말씀은 관대히 봐 드리겠어요. 잘못이긴 해도 그리 부자연스런 잘못은 아닐 테니까요. 선생님 같은 분들 사이에선 말씀이에요. 앉으시라고 말씀은 드렸지만, 그 때문에 저에게 그렇게 친절한 말씀을 하신다면, 전 방금 그 권유를 취소하겠어요."

"진심으로 실례를 사과드립니다."하고 청년은 사과했다. 아까까지의 흐뭇한 표정은 후회와 수치의 표정으로 바뀌어 있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실은 말하자면, 공원에는 온갖 여자들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물론 부인께선 모르실 것입니다만..."

"그런 얘기는 제발 그만두세요. 물론 전 알고 있어요. 그보다는 저한테 좀 가르쳐 주세요. 여기저기 오솔길을 거니는 사람들에 대해서. 저 사람들, 대체 어딜 가는 거죠? 왜 저렇게 서둘러 가는 거죠? 저 사람들은 행복할까요?"

청년은 그때까지의 친절한 태도를 얼른 바꿨다. 이제 자기의 역할은 완전히 수동적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러나, 어떤 연기가 기대되고 있는지 짐작을 할 수가 없었다.

"저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참 재미있습니다." 그는 여자의 기분을 슬쩍 탐색하면서 대답했다. "이거야말로 참으로 근사한 인생극입니다. 저녁 식사를 하러 가는 사람들도 있고, ... ...어디 다른 곳에 가는 사람도 있지요. 저 사람들은 대체 어떤 과거를 갖고 있을까요?"

"번 그런 건 생각하지 않아요. 저는 남의 일을 꼬치꼬치 파헤치는 걸 좋아하지 않거든요. 제가 여기 와서 이렇게 앉아 있는 것은 인간의 위대하고 공통적인 싱싱한 마음에 그런대로 적으나마 접촉할 수 있는 것은 여기뿐이기 때문이에요. 제게 배정된 인생극의 역할은 그런 싱싱한 움직임을 조금도 느낄 수 없는 곳에 있거든요. 어째서 제가 선생님께 말씀을 건넸는지 그 까닭을 아시겠어요, 저어..."

"파큰스태커입니다." 청년은 그 뒤에 자기 이름을 덧붙였다. 여기서 그는 열렬한 희망이 넘치는 표정이 되었다.

"모르시죠?" 여자는 가는 손가락을 한 개 세우고 가냘프게 웃었다. "하지만 곧 아시게 될 거예요. 신문이나 잡지에 이름이 나지 않게 해 둘 순 도저히 없으니까요. 사진도 그렇구요. 이렇게 하녀의 베일과 모자를 쓰고 있기에 그럭저럭 신분을 감추고 외출할 수 있는 거예요. 선생님께 보여 드리고 싶네요. 우리 집 운전사가 내가 모르는 줄 알고 이렇게 미복(지위가 높은 사람이 무엇을 몰래 살피러 다닐 때 남루한 옷을 입음)하여 외출하는 모습을 놀란 듯이 쳐다보던 표정을 말씀이에요. 사실을 말씀드리면 가장 고귀한 가문을 나타내는 성이 대여섯 있는데 제 성은 태어날 때부터 그중의 하나랍니다. 제가 말을 건넨 것도 스타크퍼트 씨... "

"파큰스태커입니다." 하고 청년은 망설이는 듯 정정했다.

"파큰스태커 씨, 하다못해 한 번이라도 자연 그대로의 인간과... 천한 재물의 허식이나 덧없는 사회적 우월 따위에 더럽혀지지 않는 사람과 얘기를 나누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아아! 제가 얼마나 따분해하고 있는지 아만 모르실 거예요. , , ! 정말 지긋지긋해요. 게다가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만 해도 모두가 똑같은 형으로 만들어진 하찮은 꼭두각시 인형이 춤추고 있는 거나 다름없어요. 오락도, 보석도, 여행도, 사교도 모든 사치가 이젠 정말 지긋지긋하고 진절머리가 나요."

"저는 언제나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청년은 망설이면서도 용기를 내어 말했다. "돈이란 아마 근사한 것이겠지 하고 말입니다."

"과부족 없는 재산, 그것이 제일 바람직스럽다고 생각해요. 몇백만 달러가 있어 보세요, 그러면..." 그녀는 절망적인 몸짓으로 결론을 내렸다. "그야말로 단조로움, 바로 그것이랍니다." 그리고 그녀는 다시 말을 이었다. "정말로 진절머리가 나요. 드라이브, 정찬회, 연극, 무도회, 만찬회, 더욱이 그게 모두 넘치도록 많은 돈으로 장식되어있거든요. 샴페인 글라스 속에서 울리는 얼음 소리만 들어도 머리가 다 이상해질 때가 있답니다."

파큰스태커 씨는 무척 천진난만한 얼굴로 흥미를 나타내 보이고 있었다.

"저는 언제나 돈 많은 상류계급 분들의 생활에 대해 책에서 읽거나 얘기를 듣거나 하기를 좋아했습니다만, 이제 보니 제 지식은 아직 어중간한 것이었나 봅니다. 그래서 제 지식을 정확하게 만들기 위해 여쭤보고 싶습니다만, 저는 여태까지 샴페인을 병째로 차게 하는 것이지, 글라스에 얼음을 넣어서 차게 하는 것이 아닌 줄 알고 있었는데, 어떻습니까?"

여자는 참으로 우습다는 듯이 음악적인 웃음소리를 내었다.

"그건."하고 그녀는 차분한 어조로 설명했다. "우리 유한계급 사람들은, 통례적인 습관을 깨는 것이 유쾌하기 때문이랍니다. 요즘은 괴상하게도 샴페인 글라스에 얼음을 넣는 게 유행이죠. 그건 지금 이곳에 와 계시는 타타르 왕자님이 윌도프 호텔에서 만찬회를 베푸셨을 때 착안하신 것이 시작이에요. 하지만 이것도 곧 다른 변덕으로 바뀌겠죠. 사실 이번 주에도 매디슨 애미뉴에서 베풀어진 만찬회에서 손님들의 쟁반 옆에 각각 초록빛 키드 장갑이 놓여 있었고, 그것을 낀 손으로 올리브를 먹는 취향이 생기고 있으니까요."

"아 그렇습니까." 청년은 겸허한 태도로 말했다. "그건 사교계 깊숙이에서 일어나고 있는 특수한 풍류사는 서민들이 전혀 알지 못하지요."

"이따금 저는."하고 여자는 그가 잘못을 인정한 데 대해서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 말을 이었다. "만일 내가 사랑을 하게 된다면 상대는 신분이 낮은 남자분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는 일이 있어요. 빈들빈들 놀고먹는 사람이 아니라 노동하는 사람 말씀이에요. 하지만, 결국은 저의 희망보다 신분이나 재산이 요구하는 것이 승리하게 될지도 몰라요. 지금도 저는 두 사람에게 청혼을 받고 있죠. 한 분은 독일 어느 공국의 대공이시죠. 그분에게는 대공의 주정 때문에 머리가 돌아버린 부인이 어디 살고 있지 않는가, 혹은 있지 않았는가 하는 그런 생각이 들어요. 또 한 분은 영국의 후작님인데, 매우 박정하고 돈에 추잡스러워서 오히려 대고의 악마주의 쪽을 택하고 싶을 정도예요. 제가 어째서 이런 말을 선생님께 하지 않을 수 없는지 아시겠어요, 피큰스태커 씨?"

"파큰스태컵니다." 청년은 조그만 소리로 정정했다. "정말 제가 부인의 신뢰를 얼마나 고맙게 생각하고 있는지 아마 부인은 모르실 것입니다."

여자는 자못 두 사람의 신분의 차이를 나타내는 데 적합한 침착하고 비인간적인 눈초리로 살피듯이 그를 쳐다보았다.

"어떤 일을 하고 계세요, 파큰스태커 씨?" 그녀가 물었다.

"매우 천한 직업이죠. 그렇지만, 저는 출세를 바라고 있습니다. 아까 부인께서는 신분이 낮은 남자라도 사랑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만, 그건 진정으로 하신 말씀입니까?"

"그러믄요. 하지만 저는 <할지도 모른다>고 말한 거예요. 그럴 수밖에는 없는 것이 지금은 대공도 계시고 후작도 계시거든요. 그러나 무슨 직업이든지 결코 너무 천할 수는 없는 거예요. 제 이상에만 맞는 분이라면."

"저는 지금 식당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파큰스태커 씨는 똑똑히 말했다.

여자는 좀 당황하는 것 같았다.

"웨이터는 아니실 테죠?" 그녀는 다소 애원하듯이 말했다. "노동은 신성해요, 하지만... 하인이라든가... 웨이터라든가..."

"...웨이터는 아닙니다. 경리를 맡아보고 있지요." 맞은편의 공원 반대쪽에 나 있는 큰 거리에 <레스토랑>이라는 철자의 화려한 전광판이 번쩍거리고 있었다. "저기 보이는 저 식당에서 경리를 맡아 보고 있습니다."

"여자는 왼쪽 팔목의 고운 장식이 달린 팔찌에 새겨진 조그만 시계를 들여다보더니 바쁘게 일어섰다. 그리고 허리 언저리에서, 손에 들고 있는 화려한 핸드백에 읽던 책을 쑤셔 넣었다. 그 핸드백에는 책이 너무 컸다.

"왜 오늘은 근무 안 하세요?" 그녀가 물었다.

"오늘은 야간 근무입니다. 근무 시간까지는 아직 한 시간이 있습니다. 다시 뵐 수 있을까요?"

"모르겠어요, 아마 뵐 수 있겠죠. 하지만 다시는 이런 변덕을 일으키지 않을지도 몰라요. 아무튼 얼른 가 봐야겠어요. 만찬회도 있고 연극도 가 봐야 하거든요. 아아, 날마다 똑같은 일의 되풀이에요! 아마 선생님은 여기 오실 때 공원 저편 입구에 세워 놓은 자동차를 보셨을 거예요. 차체가 흰 자동차죠."

"바퀴가 빨간 자동차 말씀이군요." 청년은 무엇을 생각하는 듯이 미간을 찌푸리면 되물었다.

"그래요, 전 언제나 그걸 타고 오지요. 거기서 운전사 피에르가 기다리고 있어요. 피에르는 내가 광장 저편의 백화점에서 물건을 사고 있는 줄 알 거예요. 자기 운전사까지 속여야 할 만큼 속박된 생활을 상상해 주세요. 그럼, 안녕히 계세요."

"이제 꽤 어두워졌습니다. 공원에는 불량배들이 많은데 상관없으시다면, 제가..."

"제 기분을 조금이라도 존중해 주실 생각이 있으시면."하고 여자는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제가 떠난 뒤 10분만 이 벤치에서 떠나지 말아 주세요. 선생님을 언짢게 할 생각은 없지만, 자동차에는 대개 소유자의 이름을 새긴 글자가 붙어 있잖아요? 그럼 다시 한번 안녕히 계세요."

총총걸음으로 뽐내면서 그녀는 저녁의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갔다. 청년이 그 아름다운 모습을 황홀히 바라보고 있으니, 그녀는 공원 끝의 포도까지 가서 포도를 따라 자동차가 서 있는 모퉁이로 걸어갔다. 그는 그녀와의 약속을 어기고 주저 없이 공원의 나무숲과 관목 사이로 그녀가 걸어가는 방향과 평행하여 그 모습을 놓치지 않도록 뒤를 밟기 시작했다.

그녀는 모퉁이까지 가더니 힐끔 자동차를 일별하고, 그대로 자동차 옆을 지나 성큼성큼 거리를 건너갔다. 마침 서 있던 자동차 뒤에 숨어서 청년은 가만히 그녀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공원 저편의 보도를 아래로 걸어간 그녀는 화려하게 전광판이 번쩍이고 있는 식당 앞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이 근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번들번들한 식당의 하나로 안에는 마구 흰 페인트를 칠했고 거울이 붙어 있었으며 싸게 그리고 약간은 사치스러운 기분으로 식사할 수 있는 곳이었다. 여자는 식당 안쪽 구석에 있는 방으로 들어가더니 곧 모자와 베일을 벗어놓고 나타났다.

경리의 책상은 입구 옆에 있었다. 그때까지 그 자리에 앉아 있던 붉은 머리의 여자가 의자에서 내려오며 보라는 듯이 힐끔 벽시계를 쳐다보았다. 그 뒤에 앉은 것이 회색 드레스를 입은 여자였다.

청년은 두 손을 호주머니에 찌르고 천천히 보도를 되돌아갔다. 길모퉁이에서 그의 발이 떨어져 있는 종이 표지의 조그만 책을 걷어찼다. 책은 잔디밭으로 지나갔다. 표지의 그림으로 아까 그 여자가 읽던 책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무심코 집어서 들여다보았다. 제목은 <신 아라비아 야화>. 작자는 스티븐슨이라는 이름이었다. 그는 책을 다시 풀 위에 던져 버리고 잠시 어떻게 할까 망설이듯 근처를 어슬렁거렸다. 이윽고 그 자리에 서 있는 자동차에 올라타고 깊숙이 의자에 기대앉으며 운전사에게 두 마디만 말했다. "앤리, 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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