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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만남(Brick dust Row)

어떤 만남(Brick dust Row)

O Henry

 

연기된 여행

블링커는 기분이 몹시 상했다. 만일 교양과 자제력과 재산이 없는 사람이었다면 마구 욕을 해대며 투덜거렸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자기가 언제나 신사라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래서 마음 내키지 않는 곳으로 마차를 타고 가면서도 그저 지겹다는 듯이 냉소적인 표정만 지었다. 그가 가기 싫어하는 곳이란 브로드웨이에 있는 법률사무소였다. 거기 있는 올드포트 변호사는 블링커의 재산 관리인이다.

저는 이제······.”

하고 젊은 블링커가 말했다.

이렇게 밀린 서류에 서명하는 일이 지겨워요. 오늘 아침에 노스우즈로 떠날 예정이었는데 오늘은 다 틀렸습니다. 내일로 연기하는 수밖에 별 도리가 없겠어요. 변호사님도 아시다시피 전 밤차 타는 걸 싫어해요. 면도기가 어느 트렁크에 들어 있는지 알 수도 없고, 결국 서툰 이발사의 손에 얼굴을 내맡겨야 하는데. 혼자 중얼거리며 싸구려 향수나 발라대는 그런 이발사는 딱 질색이라구요. 서류에 서명할 테니 오늘은 긁히지 않는 펜으로 주세요.”

아무튼 서두르지 말고 좀 앉기나 하게.”

이중 턱에 머리가 하얗게 센 올드포트 변호사가 말했다.

자네 말대로 부자인 것이 때로는 지겨울 때도 있지. 그렇지만 아직 해야 할 얘기의 본론은 꺼내지도 않았네. 서류는 준비되어 있지 않네, 내일 오전 11시 쯤이나 되어야 서명할 수 있을 걸세. 여행 떠나는 건 하루 더 연기하는 게 좋겠어.”

저는.”

하고 블링커가 말했다.

서류 뭉치를 꾸미고 챙겨야 하는 성가신 일이 아니었다면, 변호사님께 재산관리를 맡기지도 않았을 겁니다.”

나는.”

하고 이번엔 올드포트 변호사가 말했다.

자네가 옛친구의 외아들만 아니었다면, 자네 재산이 상어 밥이 되든지 좀도둑의 유흥비가 되든지 상관 않고 벌써 자네 손에 넘겼을 걸세. 이봐, 블링커! 불평은 그만하고 내일은 30건쯤 되는 서류에 서명하는 일 외에 또 다른 사무적인 일이 있네. 아니, 사무적인 일이기도 하고 굳이 말한다면 인도주의적인 일이기도 하지. 이에 대해서 5년 전에 자네에게 말한 적이 있었네만, 자넨 귀담아듣지 않더군, 그때도 자넨 여행을 떠난다면서 무척 바빴었지. 하지만 이젠 기간이 되어서 그 문제를 더 미룰 수가 없네. 오늘 대충 개요를 말하면 그 부동산은······.”

또 부동산 얘깁니까?”

하고 블링커는 올드포트 변호사의 말을 가로막았다.

변호사님, 아까 내일이라고 하셨지요? 그 지긋지긋한 부동산 얘기도 내일 한꺼번에 하시면 안 될까요? 인도적인 일이고, 서명이고, 토지고, 건물이고 뭐건 간에 내일 한꺼번에 다 하기로 해요. 내일 점심 식사도 저랑 함께 하시는 거죠? 그럼 내일 오전 11시에 다시 오겠습니다. 내일 뵐게요.”

 

귀공자 블링커

블링커에게 상속된 재산은 주로 토지와 건물이었다. 그가 유일한 상속인이었기 때문에 올드포트 변호사는 전에 한 번 블링커을 자기 차에 태워 이 도시에 있는 그의 상가건물과 연립주택 등을 보여준 적이 있었다. 그때 블링커는 호기심을 가지기는 했지만, 올드포트 변호사가 자기를 위해 은행에 예금하고 있는 막대한 돈이 그 건물들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었다.

집 근처로 돌아온 블링커는 식사를 하려고 그가 즐겨 찾는 클럽으로 갔다. 아직 점심 식사를 하기에는 좀 이른 시간이었는데. 그곳에는 할 일 없는 노신사들이 모여 카드놀이를 하고 있었다. 돈 있고 활동적인 젊은이들치고 이런 시즌에 이 도시에 남아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블링커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도대체 나는 뭔가? 나는 마치 학교에 남아서 종이 위에 몇 번이고 계속해서 이름을 써야 하는 초등학생처럼 이 도시에 붙들려 있는 것이 아닌가?”

블링커는, 신선한 연어알에 대한 농담이라도 하려는 듯 반갑게 다가오는 종업원에게 말을 걸었다.

이봐, 사이먼즈, 나 노스우즈로 휴가 가는 건 포기하고 가까운 코리아일랜드에나 다녀와야겠어.”

그 어조는 종업원에게는 마치 이제 모든 게 끝났어. 난 강물로 뛰어들 거야.’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그래서 그런 말투가 그를 기쁘게 만들었다. 종업원 사이먼즈는 실례가 되지 않을 정도로 !’하고 웃으며 블링커에게 말했다.

하지만 선생님 같은 귀공자가 어디 코니아일랜드에 어울리기나 하겠어요?”

 

만남

식사를 마치고 난 블링커는 신문을 집어 들어 여객선 시간을 찾아보았다. 그리고 첫 번째 길모퉁이에 서 있는 전세 마차를 발견하고는 뛰어가, 노스리버의 선창으로 달리게 했다.

그는 서민 승객과 똑같이 민주적으로 줄을 서서 표를 사고는, 밀리고 밟히면서 간신히 여객선 갑판 위에 올라가 한숨을 돌렸다.

그러다가 자신이 간이 의자에 혼자 앉아 있는 어떤 아가씨를 체면도 없이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기야 그는 예의에 어긋난 행동을 할 생각은 없었다. 그 아가씨가 너무나 아름다웠으므로 자기가 서민적 복장의 귀공자라는 것과 남에게 늘 사교계의 품위 있는 행동을 보여야 한다는 사실을 그만 깜빡 잊어버린 것뿐이었다.

아가씨도 블링커를 쳐다보았는데, 비난하는 눈빛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때 바람이 확 불어 블링커의 모자가 날아갈 뻔 했다. 그는 얼른 모자를 눌러 머리 위에 붙어 있게 했는데. 그 동작이 마치 인사하는 모습처럼 보였다. 아가씨는 고개를 끄덕이고 미소를 지었다.

블링커는 점잖게 그녀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녀의 곁에 앉았다. 그녀는 하얀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그가 여태까지 보아온 낮은 신분의 여자들한테서 느꼈던 그런 모습이 아니었다. 다소 창백한 얼굴에 벚꽃처럼 청초하고 화사한 앳된 눈동자가 그녀의 마음 깊숙한 곳으로부터 대담하게 바깥을 내다보고 있었다.

선생님은 저를 아시나요? 왜 먼저 인사를 한 거죠?”

그녀는 좀 낮설어 하면서도 담담한 말투로 물었다.

아니, 저는 모자가······.”

하고 말하려다 블링커는 얼른 말을 바꾸어 그녀의 착각을 얼버무렸다.

, 저는 눈이 마주쳤기에 인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도 저는 정식으로 자기를 소개하지 않은 남자분과는 나란히 앉을 수 없어요.”

그녀는 갑자기 오만한 태도를 보이면서 말했다.

블링커는 그 말에 밀려 유감스러운 듯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곧 그녀의 밝고 놀리는 듯한 웃음소리가 다시 그 자리에 엉덩이를 내려놓게 만들었다.

호호, 선생님은 무례하게 행동을 하실 분 같지는 않네요.”

그녀는 미인 특유의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

아가씨도 코니아일랜드에 놀러 가는 중인가요?”

놀러라고 했나요?”

하고 그녀는 장난기와 놀라움이 어린 눈을 크게 뜨고 블링커를 쳐다보았다.

어머, 제가 공원에서 자전거를 타고 있는 모습이 안 보이세요?”

“······, 제가 망루에서 내려다보니 자전거를 타고 있네요.”

하고 블링커가 맞장구를 치며 말을 이었다.

아무튼 저와 함께 코니아일랜드를 구경하지 않으실래요? 저는 아직 코니아일랜드에 가본 적이 없거든요.”

그건.”

하고 그녀는 말했다.

선생님이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달렸어요. 배가 저쪽에 닿을 때까지 선생님 제의를 생각해 보겠어요.”

 

이상한 힘

배를 타고 가는 동안, 블링커는 자신의 제의가 아가씨에게 거절당하지 않도록 여러모로 마음을 썼다. 망루 위에 서서 그녀의 자전거 타는 모습을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자전거를 타는 그녀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지에 신경을 쓰면 긍정적인 대답을 얻어내려 애를 썼다.

그러나 상류 사교계의 예의범절이란 결국 단순성에 귀착되는데, 이 아가씨가 또한 천성은 소박했으므로 두 사람은 차츰 터놓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블링커는 아가씨의 나이가 스무 살이고 이름은 플로렌스이며, 어느 모자점에서 모자에 장식을 다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과 우유 한 잔과 머리를 매만지는 동안에 익는 달걀 한 개면 아침 식사가 충분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반면 플로렌스는 자기보다 대여섯 살쯤 더 많아 보이는 청년의 이름이 블링커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순간 웃음을 터뜨렸다.

어머나!”

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 이름만 들어도 선생님이 공상가라는 걸 알 수 있어요. 그런 그럴듯한 가명을 쓰는 동안 스미스니 뭐니 하는 진짜 이름은 잠시 휴식을 취할 수 있을 테니까. 기분 나빠하진 않겠어요.”

이윽고 두 사람은 코니아일랜드에 도착하여 배에서 내렸다. 그리고 관광객의 인파에 휩쓸려 큰길로 밀려 나갔다. 관광지 곳곳은 사람들로 넘쳐났다. 그래서 블링커는 도시락 바구니를 들고 다니는 사람들과 부딪치기도 했다. 없는 돈을 털어 유행 옷을 사서 입고, 쉽게 사귄 여자와 팔짱을 낀 채 노점 사이를 걸어 다니는 건방진 젊은이들은 싸구려 엽궐련 연기를 훅훅 뿜어댔다. 메가폰을 든 공원의 노점상들은 저마다 자기의 알량한 상품 앞에 서서 나이아가라 폭포 같은 우렁찬 소리를 울려댔고, 금관악기, 피리, , 현악기 등의 쥐어짜는 듯한 온갖 소리가 공중에서 서로 경쟁상대를 굴복시키려고 윙윙거렸다.

그런 와중에 블링커는 호기심에 찬 눈과 비평적인 마음으로 신중하게 코니아일랜드의 사원과 탑과 정자 같은 것들을 감상했다. 그런데 블링커의 마음을 건드리는 것은 고색창연한 시설물이 아니라, 비명을 지르고, 재촉해대고, 몸부림치며 체면도 예의도 없이 잔뜩 흥분해서 왁자지껄한 군중, 그 서민 계급들의 행태였다. 그들의 행태는 블링커가 속한 상류사회의 인내의 미덕이나 고상한 취미 같은 것들을 예사로이 짓밟았다. 이러한 서민들의 행태에 대해 심한 불쾌감을 느끼면서 블링커는 고개를 돌려 나란히 걷고 있는 플로렌스를 보았다. 그녀는 얼른 방긋 미소를 지어보이면서 송어가 뛰노는 냇물처럼 맑고 밝은 눈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 눈은 행복에 빛날 권리가 있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왜냐하면 그 눈의 임자는 적어도 지금 당장은 자기만의 남자이자 친구이며 재미있는 환상의 세계에 들어가는 열쇠를 쥔 사람과 함께 걸어가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블링커는 그녀의 색깔을 정확히 파악할 수는 없었지만, 그녀의 어떤 이상한 힘으로 인해 갑자기 코니아일랜드가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저속한 환락을 찾는 속물들의 무리도 더 이상은 야비하게 보이지 않았다. 지금은 또렷이 그들이 이상주의자들로 보이기 시작했다. 불쾌하던 마음도 깨끗이 사라졌다. 번쩍번쩍하게 장식된 전당의 화려한 환락은, 겉보기에는 가짜이지만 그 도금한 표면 속 깊숙이에서는 그것이 삶에 찌들고 장래가 불안한 사람들의 마음에 위안과 만족감을 주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거기에는 어렴풋하기는 하지만 어떤 로맨스의 잔재, 즉 옛날 동화 속 풍경과 같은 일면도 남아 있었다. 공중에 솟아오르고 물속에 뛰어내리고 하는 아찔아찔한 모험이 사람들을 흥분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그곳으로 가는 길은 불과 몇 야드밖에 되지 않았지만, 마음 속에는 그들을 동화의 나라로 데려다주는 마법의 양탄자가 있었다.

그래서 블링커의 눈에 비친 사람들은 이제 거친 군중이 아니라. 꿈과 이상을 찾는 동포들로 보였다. 비록 시나 예술의 고상한 매력은 없었지만, 그들의 공상의 마력은 거친 면직물을 비단으로 바꾸고, 시끄러운 메가폰을 은 나팔로 바꾸어 놓고 있었다.

블링커는 상류 계급의 오만한 마음의 예복을 벗어던지고 이상가들 속에 뛰어들었다.

플로렌스.”

하고 그가 밝은 표정으로 물었다.

이 유쾌한 동화의 나라를 어디서부터 어떻게 구경하면 좋을까요.”

저기서부터 시작해서 마음에 드는 곳을 하나씩 구경하기로 해요.”

플로렌스는 호기심 많은 어린아이처럼 저만치 서 있는 기묘한 모양의 탑을 가리켰다.

 

여객선

두 사람은 오후 5시에 섬을 떠나는 여객선을 탔다. 그들은 뱃머리의 난간에 기대어 이탈리아인이 켜는 바이올린과 하프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흐뭇한 피로감에 젖었다. 블링커는 모든 근심을 벗어던졌다. 한적한 노스우즈 따위는 인간이 살 수 없는 황량한 광야처럼 여겨졌다. 왜 거기를 가지 못해 그렇게 안달을 했는지 어이가 없다.

플로렌스······.”

블링커는 이 아름다운 이름을 몇 번이나 마음속으로 중얼거려보았다.

여객선이 노스리버의 선창 가까이 다다랐을 때, 굴뚝이 두 개 있고 원양 항로의 외국 배로 보이는 갈색 배 한 척이 만을 향해 강을 따라 내려왔다. 관광객을 태운 여객선은 부두 쪽으로 뱃머리를 돌렸다. 외국 배는 강 가운데로 나가려는 듯이 방향을 바꾸었으나, 곧 항로에서 벗어나 속력이 가중되면서 뱃머리로 코니아일랜드를 왕래하는 여객선의 후미 옆구리를 들이받았다. 무서운 파괴음과 함께 심한 충격이 일어나면서 여객선의 옆구리가 뚫어졌다.

배에 탄 수백 명의 승객들이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지르며 갑판 위를 우왕좌왕하고 있는 동안, 선장은 외국 배를 향해 물러서면 부서진 틈으로 물이 들어오니 잠시 그대로 있으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하지만 외국 배는 사나운 톱상어처럼 난폭하게 뱃머리를 정기선의 옆구리에서 떼어냈다. 그리고는 몰인정하게 파도를 일으키며 전속력으로 달아나 버렸다. 여객선은 후미에서부터 조금씩 가라앉기 시작했다. 배는 마치 다친 짐승처럼 후미를 이끌고 느릿느릿 선창을 향해 움직여 갔다. 승객들은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해 미친 군중으로 돌변해 있었다.

블링커는 배가 비스듬해 질 때까지 플로렌스를 꼭 껴안고 있었다. 그녀는 소리를 지르지 않았으며 공포의 빛도 보이지 않았다. 블링커는 접는 의자에 올라가서 머리 위의 얇은 널빤지를 뜯어내고 구명조끼 꾸러미를 끌어내렸다. 그리고 그 중 하나를 플로렌스의 몸에 두르고 버클을 죄기 시작하자. 머리 위의 캔버스 천이 찢어지면서 그 안의 바스러진 모조 코르크 가루가 쏟아져 내렸다. 플로렌스는 그것을 한 줌 쥐고는 블링커를 향해 웃어 보였다.

꼭 저녁 요리 때 쓰는 밀가루 같아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이런 때 이런 건 아무 소용이 없어요.”

하면서 그녀는 자기 손으로 버클을 풀러 구명조끼를 갑판 위에 던졌다. 그리고는 블링커를 자리에 앉히고 자기도 그 옆에 앉아 그의 손을 꼭 쥐었다.

이 배가 무사히 선창에 닿을 수 있을까요?”

이렇게 말하고는 입속으로 나직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위기의 순간

선장은 분주하게 승객들 사이를 뛰어다니면서 진정하라고 외치고 있었다.

이 배는 무사히 부둣가에 닿습니다. 여자분들과 어린아이들은 먼저 상륙할 수 있도록 할 테니, 배 앞쪽으로 가 있으십시오!”

배는 후미를 물속에 담근 채 선장의 약속을 지키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플로렌스.”

블링커는 그녀가 자신의 팔에 꼭 매달렸을 때 나직이 말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하게 됐어요.”

남자들은 다 그렇게 말하죠.”

그녀는 가볍게 받아넘겼다.

나는 그 중의 한 사람이 아니오.”

블링커는 그녀에게 틈을 주지 않고 말을 이었다.

나는 지금까지 내가 사랑할 만한 여자를 만나지 못했어요. 평생을 당신과 함께 하면 행복할 것 같아요. 나는 재산도 있고 당신이 원하는 건 뭐든지 해 줄 수 있어요.”

남자들은 다 그렇게 말하죠.”

플로렌스는 똑 같은 말을 다시 한 번 되풀이 했다.

다시는 그런 말 하면 안 돼요!”

블링커의 어조가 뜻밖에 진지했으므로 플로렌스는 놀라는 빛을 띠고 그를 돌아보며 목소리를 낮추어 물었다.

그런 말을 하면 안 되나요? 그런데 남자들은 다 그런 말을 하잖아요.”

남자라니, 누굴 말하는 거죠?”

블링커는 난생 처음으로 질투를 느끼면서 되물었다.

제가 아는 남자들이죠 뭐.”

그렇게 많은 남자들을 알고 있나요?”

저는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그림 속의 꽃이 아니에요.”

플로렌스는 약간 만족스러운 듯한 투로 대답했다.

어디서 그런 남자들과 만나죠? 집에서요?”

그렇게 보지 마세요. 난 선생님과 만나듯 남자들을 밖에서 만나요. 배에서 만나는 수도 있고, 공원에서 만나는 수도 있고. 길거리에서 만나는 수도 있어요. 이래 뵈도 남자들 보는 눈은 있어요. 첫눈에 그 사람이 이상한 짓을 하는 사람인지 아닌지 금방 알아봐요.”

이상한 짓이라니요?”

아이 참, 입 맞추고 싶어 하는 거 말예요.”

입맞춤하려 드는 사람이 있었나요?”

블링커는 자신도 모르게 이를 악물고 있었다.

그럼요. 남자들은 모두 그래요. , 아시면서······.”

그래서 입맞춤을 했나요?”

안 했다고 말할 순 없어요. 하지만 많진 않아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아무데도 절 데려다주질 않기 때문이에요.”

그녀는 고개를 돌려 표정을 살피듯 블링커를 쳐다보았다. 그 눈은 어린아이처럼 순수했고, 거기에는 상대편의 속셈을 알 수 없어 하는 당황의 빛이 감춰져 있었다.

남자와 만나는 게 나쁜가요?”

플로렌스는 여전히 천진한 투로 물었다.

뭐든지 나빠요!”

하고 블링커는 거의 골이 난 어조로 말했다.

왜 아무하고나 만나요? 그리고 왜 집에서 손님을 접대하지 않아요? 길거리에서 만날 필요가 뭐가 있느냐 말입니다.”

블링커의 진지한 말투에도 플로렌스는 순수하고 솔직한 눈으로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제가 사는 집을 보면 선생님도 그런 말을 못하실 거예요. 저는 벽돌가루 연립주택에 살고 있거든요. 온 집안에 뻘건 벽돌가루가 떨어져서 사람들은 그렇게 불러요. 저는 벌써 4년째 거기 살고 있어요. 그러니 누굴 초대할 여건이 안 되는 거죠.”

그런 줄은 몰랐어요. 그렇다면야 뭐······.”

하고 블링커는 볼멘소리로 말했다.

처음 길거리에서 모르는 남자가 말을 걸어왔을 때는.”

하고 그녀는 말을 이었다.

저는 막 집으로 달려가서 밤새도록 울었어요, 하지만 사람이란 금방 길이 나나 봅니다. 저는 주로 교회에서 남자들과 사귀었어요. 비 오는 날 교회 입구에 서서 우산을 든 남자가 오기를 기다린 적도 있어요. ······지금이라도 우리 집에 응접실이 있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선생님한테 우리 집에 가자고 말할 수도 있을 텐데······ 선생님은 아직도 본인이 스미스가 아니라 블링커라고 우기실 참인가요?”

 

골목길

놀랍게도 배는 무사히 선창에 닿았다. 블링커는 배에서 내려 플로렌스와 함께 한적한 골목길을 걸어가면서 왠지 곤혹스러움을 느꼈다. 뭔가 마무리져지지 않은 채 골목길 모퉁이에 이르렀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손을 내밀었다.

제가 사는 집은 여기서 조금만 더 가면 돼요.”

하고 그녀는 말을 이었다.

선생님 덕분에 오늘 아주 즐거웠어요. 고마워요.”

블링커는 플로렌스와 헤어지고 나서, 무언가 입속으로 중얼거리면서 큰길쪽으로 뛰어가다가 겨우 전세마차를 발견하고는 얼른 올라탔다. 길 오른쪽 낮은 건물 너머로 커다란 회색 교회가 보였다. 블링커는 마차 안에서 그 교회를 주먹으로 휘두르며 중얼거렸다.

, 지난주에 네놈한테 천 달러나 기부했다구! 그런데 플로렌스는 네놈의 문간에서 남자들과 만났단 말이야. 우습지 않나?”

 

응접실

이튿날 아침 11, 블링커는 올드포트 변호사가 건네주는 펜으로 30건 쯤 되는 서류에 일일이 서명을 했다.

그럼 이제 노스우즈로 떠나도 되는 거죠?”

펜을 놓으면서 블링커가 시무룩하게 말했다.

안색이 별로 안 좋아 보이는군.”

올드포트 변호사가 안경 너머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여행은 좋은 거지, 미안하네만 어제도 말했고, 5년 전에도 말 한 적이 있는 그 일에 대해서 잠시 귀를 기울여 주게나. 실은 열다섯 동의 건물이 있는데. 그 중 몇 동은 올해로 5년간의 임대기간이 만료되었네. 자네 부친은 그 계약 조항을 변경할 생각이었네만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돌아가셨어. 자네 아버지가 생각한 것은 그 가옥의 방들 중 하나씩은 재 임대하지 않고 세입자들이 응접실로 쓸 수 있도록 수리해서 무상으로 사용하도록 하려는 것이었네. 그 건물은 주로 상가의 가난한 여점원들이 세들어 사는데 부친은 인도주의적인 견지에서 그 붉은 벽돌로 지은 연립주택을······”

블링커는 별안간 큰 소리로 웃으면서 변호사의 말을 가로막았다.

벽돌 가루 연립주택 말이죠?”

하고 그는 큰소리로 외쳤다.

그리고 그곳은 내 것이죠? 맞습니까?”

세입자들이 뭐 그런 이름으로 부른다더군.”

하고 올드포트 변호사가 대답했다.

블링커는 자리에서 일어나 모자를 푹 눌러썼다. 그리고 골이 난 어조로 말했다.

변호사님 좋을 대로 하세요. 새로 수리를 하든지. 불살라 없애든지, 두들겨 부수든지 맘대로 하세요. 이젠 늦었어요. 그 응접실은 진작에 만들었어야 했다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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