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선한 사과
O Henry
빌닷 로우즈는, 낙원읍을 떠나 20리를 달리다가 마차를 세웠다. 일광읍까지 가려면 아직 15리나 남아 있었다. 하루 종일 눈이 퍼부어 여덟 치나 쌓였다. 나머지 길은 낮에도 무시무시한 깊은 산등성이를 기어올라야 하였다.
마부는 네 필의 억센 말을 세우고 손님들에게, 인제 눈도 많이 쌓이고 날이 저물었으니 더 간다는 것은 엄두도 못 낼 일이라고 말하였다.
승객들로부터 마치 백설 같은 은쟁반에 전권을 위임받은 듯한 메네피 판사는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그러자 일행인 다른 네 손님도 판사의 뒤를 따라 탐험하고, 싸우고, 항거하고, 정복하고 전진할 양으로 마차에서 내렸다. 그러나 다섯 번째 손님인 젊은 여자만은 마차 속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마부는 첫째 산마루에 마차를 세웠다. 길옆에 낡고 검은 나무 울타리가 둘려 있었다. 그리고 울타리 위에서 약 50야드쯤 되는 곳에 마치 흰 눈 속에 검은 점이 하나 박힌 듯한 조그마한 집 한채가 보였다. 판사와 그 일행은 이 집을 향해, 아이들처럼 씩씩거리며 험한 눈길을 올라갔다. 창문과 문을 두드리며 주인을 불렀다. 차디찬 침묵만이 계속될 뿐 아무 대답도 없었다. 일행은 얼마 후에 변변치 못한 문을 박차고 집안에 들어갔다.
쓸쓸한 그 집에서는 뭔가 쓰러지며 고함치는 소리가, 마차 속에 남아서 바라보는 사람의 귀에 들려왔다. 이어서 불빛이 번쩍하더니 그 불빛이 살아서 활활 높이 타올랐다. 이윽고 휘몰아치는 눈보라를 헤치고 탐험을 나섰던 일행은 뛰어서 되돌아왔다. 나팔 소리보다 더 우렁찬 무슨 오케스트라가 울리는 소리와 같은 메네피 판사의 음성이 들려왔다. 그는 산길을 찾기는 하였으나 고생이 막심한 것이라고 말하였다. 방 하나밖에 없는 그 집에는 사람이 살지 않고 가구도 없으며, 단지 커다란 벽난로 하나가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집 뒤의 광속에는 장작이 가득 쌓여 있었다. 아무튼 추운 밤에 따뜻이 몸을 녹일 곳은 마련된 셈이다. 마부는 집 곁에 외양간이 있고, 그 다락에 마른 풀이 쌓여 있다는 소식을 듣고 매우 반가워하였다. 그는 여러 겹의 옷을 껴입고 마부석에 앉은 채 말하였다.
"손님들, 저 울타리 나무 두 개만 치워 주세요. 마차를 몰고 들어가려고 그래요. 이것은 레드루스 영감의 오막살이랍니다. 영감은 지난 8월에 정신병원에 들어갔지요."
네 손님은 눈이 쌓인 울타리에 달려들어 나무를 치웠다. 마부는 말에 채찍질을 하여 산비탈을 올라가, 한여름에 미친 주인이 자취를 감춰 버린 그 집으로 향하였다. 마부와 손님 두 사람 멍에를 벗기고, 판사는 모자를 벗고 마차 문을 열며 말하였다.
"꽃다발씨! 일행은 부득이 지체하게 되었어요. 마부의 말에 의하면 밤중에 이 산길을 오르는 것은 위험하다고 해요. 그래 이 집에서 하룻밤을 묵어야겠어요. 내가 집안을 돌아보았는데 추위는 면할 수 있겠어요. 되도록 편히 지내도록 도와드리겠어요. 자 내리시죠."
이때 판사 옆에 다른 손님 하나가 서 있었다. 그의 직업은 허풍쟁이었다. 이름은 단우디―그러나 이름 같은 것은 몰라도 무방하다. 낙원읍에서 일광읍까지 가는데 이름 같은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러나 매디슨 엘 메네피 판사와 명예를 겨루는 사람은 사정이 다르다. 그는 이름이 있어야 영예의 면류관을 차지하였을 때 걸어줄 수 있는 것이다. 허풍쟁이는 커다란 소리로 명랑하게 말하였다.
"<먼 나라>부인! 아무래도 이 순례선에서 내리셔야겠습니다. 순례자의 숙소로서 이 오막살이가 변변치는 못하나마, 눈과 바람은 막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부인은 가방을 뒤져 숟가락 같은 것을 기념으로 훔쳐내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불을 피워 놨어요. 부인의 발을 녹여 드리지요. 적어도 쥐는 얼씬거리지 못하게 하겠어요."
말과 마구와 눈과 마부의 익살이 뒤섞인 가운데서, 자청해서 일을 하고 있는 두 여객 중에서 한 사람이 큰 소리로 말하였다.
"누가 <솔로몬> 양을 집안에 안내하게! 워, 워, 이놈의 말이 왜 이래."
거듭 말하거니와 낙원읍에서 일광읍으로 가는 길에서는 이름을 바른대로 댈 필요가 없는 것이다. 메네피 판사가 희끗희끗한 머리에 명성도 있고 하여 여자 손님에게 자기를 소개하였을 때, 그녀는 고운 목소리로 나지막하게 자기 이름을 대었다. 남자 손님들은 그것을 잘못 알아듣고 각각 정당히 해석하여, 시기하는 마음도 곁들여 자기가 내세우는 이름을 고집하는 것이었다. 만일 그녀가 자 이름을 다시 대거나 정정한다면 그것은 마치 남자 손님에게 우슨 훈계라도 하는 것 같고, 어느 한 사람에게 친절을 부리는 것으로 보일지 모른다. 그러므로 그녀는<꽃다발>이니 <먼 나라> 부인이니, <솔로몬> 양이니 하는 이름에 한 마디의 이의도 제기하지 않고 그들이 부르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낙원읍에서 일광읍까지의 거리는 35리였다. 유랑하는 유대인의 말을 빌자면 그 정도의 거리를 여행하는 데는 다만 <길동무>라는 이름으로 충분한 것이었다.
일행은 곧 장작이 타오르는 불 앞에 반달 모양으로 둘러앉아 떠들어대었다. 의복이나 방석, 그 밖에 마차에서 끄집어 올 수 있는 것은 모두 갖다가 깔고 앉았다. 여자 손님은 벽난로 가까이 반달 모양의 한쪽 끝에 자리를 잡았다. 그녀는 흡사 신하들이 마련한 보좌에 앉은 여왕처럼 방석을 깔고 빈 상자와 통에 기대어 앉았다. 옷을 둘러서 외풍을 막고, 폭신한 신발을 벗어 불길에 쪼이고 있었다. 장갑은 벗었으나 긴 털목도리는 그냥 감은 채였다. 목도리가 반쯤 아래로 미끄러져 내렸을 때, 타오르는 불꽃이 그녀의 얼굴을 환히 비췄다. 아름답고 말쑥하고 상냥한 젊은 여인의 얼굴이었다. 그리하여 남성의 신사도는 앞을 다투어 그녀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 위로하였다. 그런데 이들의 성의를 받아들이는 그녀의 태도는 사랑과 시종을 받는 여자처럼 새침한 것도 아니고, 지나친 영광 속에 묻혀 사는 여인들처럼 쌀쌀한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황소가 풀을 뜯는 것처럼 무관심한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마치 자연의 묘리에 따라 백합이 생기를 주는 이슬을 받아들이는 것과 같은 태도를 취하였다.
밖에서는 바람이 사납게 윙윙거리고, 문틈으로는 부드러운 눈이 날아들어, 여섯 사람의 등어리는 싸늘해 갔다. 메네피 판사는 마치 자기가 눈보라의 변호인이며, 날씨는 피고, 여섯 사람의 일행은 배심 판사나 되는 것처럼 그의 독특한 화술로, 일행에게 그들이 지금 이곳 장미동산에 지체하고 있지만, 온화한 봄바람이 불어온다는 것을 의식하게 하려고 애를 썼다.
그는 유머, 재담, 일화의 보자기를 풀었다. 이야기에 지나친 기교를 부리는 것 같기도 하였으나,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의 명랑성은 곧 다른 사람에게 옮아가 제각기 재미있는 이야기를 지껄여 좌중을 즐겁게 하였다. 그리하여 드디어는 여자 손님까지 입을 열게 되었다.
"참 재미있어요."
하고 그녀는 맑은 목소리로 천천히 말하였다.
때때로 일행 가운데서 한 사람씩 일어나 방안을 돌아보기도 하였다. 레드루스 영감이 살던 자취는 별로 눈에 뜨이지 않았다. 모두들 속세를 떠나 이곳에 와 살던 그 영감의 내력에 대하여 이야기하라고 졸라대었다. 말들도 외양간에서 편히 쉬고 있어 마부는 한결 마음이 놓였으므로, 좀 서투르지만 그 이야기를 꺼내었다.
"영감은 이 집에 아무도 얼씬거리지 못하게 하고 스무 해 동안이나 살았어요. 마차가 집을 향해 오는 것을 보기만 하면 목을 움츠리고 문을 닫아걸었지요. 이 집 다락에는 물레도 있었대요. 야채와 담배는 소니리에 있는 샘 티리의 상점에서 사다 먹었어요. 지난 8월 달에는 붉은 이불을 뒤집어쓰고 그리로 올라가서 샘더러 하는 말이 자기는 솔로몬 왕이며 시바의 여왕이 곧 온다고 했대요. 자루 속에 은전을 가득 넣어 갖고 샘네 가게에 가서 말이 먹는 물에 던져 넣으며 자기에게 돈이 있는 줄 알면 여왕이 오지 낳는다고 하더래요. 영감이 여자와 돈을 그렇게 생각하는 것으로 보아 미친 줄을 알고 정신병원에 집어넣은 거지요."
"그렇게 혼자서 살게 되기까지에는 무슨 심각한 사랑의 갈등이라도 있었나요?"
하고 무슨 대리점을 경영한다는 청년이 물었다.
마부는 대답하였다.
"듣지 못했어요. 그야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 아니겠어요. 아무튼 그 영감도 젊었을 때는 어떤 색시와 사랑을 하였는데 일이 잘 안되어 속을 썩인 일이 있었나 봐요. 그러니까 그는 붉은 이불을 뒤집어쓰고 재산을 마구 없애기 전이지요."
"그렇다면 그건 분명히 보답을 받지 못한 짝사랑이군요."
하고 메네피 판사가 위엄있는 어조로 말하였다.
마부는 대답하였다.
"아니죠. 그런 게 아니에요. 물론 그 색시가 영감에게 시집은 오지 않았어요. 저 낙원읍에 사는 마리간이라는 사람이 레두루스 영감의 고향 분을 만난 적이 있는데, 그분의 말에 의하면 영감은 젊었을 때 무척 좋은 사람이었대요. 그러나 재산이라고는 호주머니 속에 있는 단추와 열쇠밖에 없었대나 봐요. 애리스라나요. 이름은 다 잊었지만, 아무튼 이 여자와 약혼이 되어 있었대요. 그분의 말에 의하면 이 색시는 무척 예뻤던 모양이에요. 우리가 함께 마차라도 타면 차비를 내어 주고 싶을 정도였다니까요. 그런데 하루는 돈푼이나 있는 총각이 와서 마차니 광산 주권이니 하고 떵떵 울리며 자리를 잡더니, 애리스와 눈이 맞았대요. 그래 서로 왕래도 하고, 우체국에 갔던 길에 만난 체하기도 하면서 가까이 지내다가 드디어 약혼반지니 선물이니 다 레드루스에게 돌려보냈대요. 아무튼 남의 말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레드루스에겐 색시가 <그림의 떡> 같이 되어 버린 거죠. 어느 날 레드루스와 색시가 대문 앞에서 뭐라고 몇 마디 주고받더니 사나이는 꾸벅 인사를 하고 가 버리더래요. 그 후로는 사나이가 읍에서 자취를 감췄대요."
"색시는 어떻게 되었나요?"
대리점을 하는 청년이 물었다.
"못 들었어요. 제가 들은 이야기는 이제 다 말씀드렸어요."
"매우 섭섭한……"
하고 메네피 판사가 말하려는데 더 귀한 분이 가로막았다.
"참 재미있는 얘기군요."
여자 손님이 옥수와 같은 목소리로 말하였다.
남자들은 마루에 앉아 있었다. 떨어진 널판자를 이어서 만든 딱딱한 마루에 외투 바람으로 앉으니 좀 더 편하였다. 다만 허풍쟁이만은 얼어들어 오는 살점을 녹이려고 슬슬 걸어 다니다가 장한 듯이 별안간 큰 소리로 외치며, 어둠컴컴한 구석에서 무엇인가 주워들고 급히 돌아왔다. 그것은 보기만 해도 시원한 커다란 붉은 사과였다. 높다란 구석 선반 위에 얹어 둔 종이 봉지에 들어 있는 것을 찾아내었던 것이다. 그것은 결코 사랑에 실패한 레드루스 영감이 남겨 둔 것은 아닐 것이다. 매우 싱싱한 것으로 보아 지난 팔월부터 거기 있었다고 볼 수 없었다. 근자에 이 오막살이에 들린 사람이 점심이라도 먹다가 남겨 두고 간 것임에 틀림이 없었다.
단우디는(이렇게 공을 세웠으니 이 사람에게도 이름이 있어야죠)여러 사람들 눈앞에 사과를 번쩍거려 보이며 자랑스럽게 말하였다.
"<먼 나라>씨 제가 얻어온 걸 보세요."
불빛에 높이 쳐든 사과는 더욱 붉게 반짝였다. 여자 손님은 조용히 웃음을 지으며 명랑한 소리로 말하였다.
"정말 예쁜 사과군요."
이렇게 되자 매네피 판사는 한동안 코가 납작해지고 창피를 당하여 지위가 떨어진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분통이 상하였다. 왜 자기가 아니고, 이 떠버리 허풍쟁이가 운명의 은총을 받아 이 인기 있는 사과를 찾아내게 되었을까? 만일 자기가 찾아내었던들, 한바탕 즉흥 재담이나 희극을 연출하여 좌중의 주목을 한 몸에 끌었을 텐데-. 아닌 게 아니라, 여자 손님은 이 우스꽝스러운 단우디인가 웃단디인가 하는 사람이 마치 큰일이라도 한 것처럼 감탄하며 웃는 얼굴로 바라보았다.
허풍쟁이는 자기가 팔고 있는 상품의 견본이라도 되는 듯이, 인기를 독점하여 좌중의 감탄을 받고, 더욱 의기양양하여 떠벌이고 있었다.
단우디가 알 수 없는 사과를 갖고 사람들의 이목을 끌며 신이 나 하는 동안에, 꾀가 많은 판사는 자기의 명예를 회복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는 의젓한 얼굴을 하고 점잖게 웃으며 걸어오더니, 잠깐 보고 싶은 듯이 단우디의 손에서 사과를 빼앗았다. 이리하여 그가 손에 넣은 사과는 증거물 A호가 되었다. 그는 자기는 동감이라는 듯이 말하였다.
"아름다운 사과군요. 단우디씨가 먹는 것을 구하는 솜씨에는 감탄했어요. 한 가지 좋은 제의를 하겠습니다. 앞으로 이 사과는 미인이 가장 멋진 사람에게 자기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드리는 표증과 증거와 상징 및 상여로 삼읍시다."
그러자 한 사람만 빼놓고 모두 갈채를 하였다.
"거 훌륭한 정견 발표일세."
하고 한 사람이 대리점을 하는 청년에게 말하였다. 그는 바로 허풍쟁이었다.
그는 자기의 지위가 추락한 것을 깨닫게 되었다. 사과를 상징으로 삼자는 생각 같은 것은 그의 머리로는 감히 생각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사과를 나눠 먹고 나서 그 씨를 자기 이마에 붙이고 씨 하나하나에 자기가 아는 여자들의 이름을 붙이되, 그 가운데서 하나는 <먼 나라씨>라고 부르도록 할 심산이었다. 그리고 이마에서 제일 먼저 떨어지는 씨는- 그런데 인제는 다 틀렸다.
메네피 판사는 여러 사람 앞에서 말하였다.
"사과는 불가불 오늘에 와서는 낮은 죄를 차지하고 있어요. 그것은 한껏 식사나 장사에만 관련될 뿐 고귀한 과실로 간주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옛날에는 그렇지 않았어요. 성경과 사서와 신화에 보면, 사과는 과일 중에서 귀족 행세를 한 것이 사실입니다. 오늘에 와서도 우리는 매우 귀중한 물건을 <눈의 사과(눈동자)>라고 하며, 속담에도 <은사과>라는 비유가 있어요. 희랍 신화에 나오는 <금사과 동산>이야기를 듣고 부러워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예날의 사과의 위엄을 말해 주는 가장 중요한 예로써, 우리 시조가 사과를 먹고 선하고 완벽한 인간의 지위에서 추락된 이야기는 더 말할 필요도 없겠지요."
허풍쟁이는 사과를 바라보며 말하였다.
"저런 사과는 시카고 시장에서 한 궤짝에 3달러 반씩 하지요."
메네피 판사는 너그럽게 미소를 지으며 자기 말을 중단한 이삼을 향해 말하였다.
"여러분에게 제의할게 있어요. 우리는 내일 아침까지 이곳에 머물게 될 것 같아요. 몸을 따뜻이 녹힐 나무는 얼마든지 있어요. 우리가 앞으로 할 일은 시간이 가는 것이 지루하지 않도록 재미있게 지내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이 사과를 <꽃다발>씨에게 맡길 것을 제안하고 싶어요. 그렇게 하면 이 사과는 이미 과일이 아니고 아까 말한 바와 같이 인간의 위대한 관념을 내포한 하나의 상품이 돌테지요." <꽃다발>씨로 말하면 한낱 사인(私人)이 아니고-이것은 물론 잠시 그렇다는 말이지요. (그는 정중히 인사를 하고 나서) 모든 여성의 대표입니다. 다시 말하면 뭇 여성의 화신이요, 본보기요, 하나님의 최고 작품의 성화가 됩니다. 이러한 위치에서 <꽃다발>씨는 다음의 문제에 대하여 결정을 내리기를 바랍니다.
방금 로우즈씨가 이집에 전에 살던 분에 대하여 재미있는 그러나 단편적인 이야기를 대강 해 주었어요. 우리가 들은 몇가지 사실들은 인간의 마음을 연구하여 상상력을 자극하는 재미있는 추리(推理)의 세계를 보여 줄 듯 해요. 다시 말하면 즉 이야기를 지어내자는 겁니다. 여러분이 이 기회에 각자 로우즈씨의 이야기가 끝나는 데서 즉 애인끼리 대문깐에서 마지막 작별을 하는 장면에서 시작하여 속세를떠나 살게 될 레드루스씨의 이야기를 지어내 봅시다. 그런데 그가 정신이상을 일으키고, 염세관에서 은자가 된 것은, 그 여자의 탓만이 아니라는 것만은 하나의 가정으로서 인정하기로 합시다. 그리고 우리의 이야기가 다 끝나는 대로<꽃다발>씨가 여성의 입장에서 판정을 내리도록 합시다. 즉 그가 대표하는 여성의 심령의 자격으로서 어느 이야기가 가장 훌륭하며, 가장 인간과 인생을 진실하게 표현하고, 가장 충실하게 레드루스의 약혼자의 성격과 행동을 나타내었는가를 결정지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사과는 이런 판정을 받은 사람에게 주기로 해요. 여러분들이 다 찬성한다면 우선 딘우디씨의 이야기부터 먼저 듣기로 하겠어요."
이 마지막 말이 허풍쟁이 맘에 들었다. 그는 그래도 침울한 얼굴을 하고 있는 성질이 아니었다.
"멋진 제안이군요. 판사님, 그러니까 단편소설대회를 열자 이 말씀이지요. 저는 스프링필드에서 신문기자 노릇을 한 적이 있어요. 그때 뉴우스가 없으면 곧잘 지어낸 경험이 있으니 내 몫은 감당할 듯해요."
하고 그는 말하였다.
"재미있는 생각이군요. 내기가 신이 나겠어요."
여자 손님도 밝은 얼굴을 하고 말하였다.
메네피 판사는 앞으로 걸어나와, 위엄있는 태도로 여자 손님의 손에 사과를 얹어 놓으며 의미심장하게 말하였다.
"옛날 트로이왕 파리스는 가장 아름다운 여신에게 황금사과를 주었습니다."
허풍쟁이는 더욱 명랑하게 떠들었다.
"나는 전에 박람회 구경을 할 때 기계 전시장에는 한 번도 가지 않고 흥행부만 돌아다녔지만 그런 이야기는 금시초문인데요."
판사는 말을 계속하였다.
"이제부터 사과는 여성의 마음에 깃들어 있는 신비와 지혜를 보여 줄 겁니다. <꽃다발>씨 사과를 받으세요. 이제부터 우리들이 하는 변변치 못한 이야기를 들으시고 뜻대로 공정하게 상을 주기를 바랍니다."
여자 손님은 방긋이 웃어 부였다. 사과는 그녀의 무릎 위의 치마 와 외투 사이에 놓여 있었다. 그녀는 추위를 막은 장소에 명랑한 얼굴을 하고 비스듬히 앉아 있었다. 바람과 말 소리가 들려오지 않으면, 조는 소리가 들리것 같았다. 누가 불에 장작을 던졌다. 메네피 판사는 고개를 들고 부탁하였다.
"그럼 먼저 이야기를 들려 주세요."
허풍쟁이는 외풍을 막기 위해 모자를 비스듬히 젖혀 스고 토이기 사람처럼 앉아서 조금도 당황한 기색 없이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내가 보기에는 일이 이렇게 된 것 같아요. 그래서 레드루스는 새로 등장한 사나이로 말마암아 상당히 당황하게 되었어요. 이 사나이는 난봉을 피울 돈이 얼마든지 있어 그의 애인을 빼앗으려고 했으니까요. 그래서 그는 여자를 찾아가 자기들의 사이가 정과 다름이 없느냐고 물었어요. 그래서 결국 여자를 다시 손에 넣었는데, 난데없이 웬 놈이 나타나 마차며 황금동전을 갖고 와서 빼앗으려고 드니 누가 좋아하겠어요. 그래서 여자를 만나러 찾아 갈 밖에요. 그래서 그는 성화가 치밀어 마치 여자의 주인이나 되는 것처럼 으르딱딱거렸어요. 그는 약혼이라는 것이 쇠로 만든 상자처럼 그다지 튼튼한 것이 못됨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어요. 그래서 약혼이라는 가느다란 레스에 매여 있던 여자는 볼멘소리로 날카롭게 쏘아붙였어요. 그래서 남자는……"
이때 아직 이름도 알 수 없는 한 손님이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여보시오. 당신이 번번이 <그래서>, <그래서>하는 대목마다 바람개비라도 세워서 방앗간을 낸다면 돈을 벌어 오래지 않아 은퇴해서 편안히 살 수 있겠구려."
허풍쟁이는 비위좋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나는 모파상은 못돼요. 그래서 여자는 이렇게 말해요. <황금증권씨는 단지 친구에게 부과해요. 그런데 그이는 저를 마차에 태워 주기도 하고 극장 표도 곧잘 서주지만, 당신은 한번도 그런 일이 없었어요. 그러니 당신하곤 평생 같이 살아봐야 도무지 재미있게 살 것 같지 않아요>
그래서 레두루스가 그녀에게 이렇게 대답했어요. <쓸데적은 소리 말아요. 그 사람하고 손을 끊어요. 그렇지 않으면 내집에 와서 살지 못해요.>
이따위 압력이 제밥 먹고 자란 여자에게 통할 리가 만무해요. 그래서 여자는 여전히 그 애인을 사랑하고 있었을 거예요. 어느 아가씨나 그렇듯이, 남자들과 어울려 즐겁게 놀고 과자도 배불리 먹어본 후에 남편을 정하고, 그 남편이 벗어놓은 양말 짝이라도 기우며 좋은 아내가 되려고 했던 거지요. 그런데 사내는 콧대가 높아서 좀처럼 자기 앞에 머리를 수그리려고 들지 않아요. 그래서 여자는 약혼반지를 돌려주고 말아요. 당연한 결과지요. 그래서 그 사내는 술독에 빠져요. 암, 정녕 그렇게 된 거예요. 여자는 착실한 그가 떠나고 나서 이틀 후에 멋진 조끼를 입은 그 후보자 녀석을 보기 좋게 차 버렸을 거예요. 한편 레드루스는 화물차를 타고 낯선 고장에 가서 심화를 억누르고 살아가요. 여러해 동안 술독에 빠져서 말입니다. 이윽고 아니린과 초산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어요. 그래서<속세를 멀리 떠난 오막살이에서 수염을 길게 늘어뜨리고 땅속에 묻어 둔 돈 궤짝이나 지키며 살자>고 이 산에 들어온 거지요.
그렇지만 애리스는 지조가 있는 여자였어요. 시집을 가지 않았거든요. 얼굴에 잔주름이 잡히기 시작하자 타이프 기술을 배웠어요. 그리고 고양이를 벗 삼고 살았지요. <위니, 위니, 위니>하고 고양이를 부르면 곧 옆으로 걸어와요. 나는 착한 여자를 의심할 수 없어요. 그러므로 여자란 돈 많은 사람이 나타나면 사랑하는 사람을 버린다고 생각지 않아요."
허풍쟁이는 이야기를 마쳤다.
여자 손님은 앉아 있던 보좌에서 약간 몸을 흔들며 말하였다.
"거 참 재……"
"<꽃다발>씨!"
메네피 판사는 손을 내저으며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다.
"죄송하지만 평은 나중에 하십시오. 다른 사람들에게 공평치 못하니까요. 다음 순서를 에-씨, 맡이 주시겠어요?"
판사는 대리점을 하는 젊은 청년에게 말하였다.
청년은 송구스러운 듯한 얼굴로 두 손을 마주 잡고 이야기하기 시작하였다.
"두 사람은 헤어질 때 다투지 않았어요. 레드루스씨는 애인과 작별을 하고, 자기 자신의 운명의 별을 찾아 나섰어요. 그는 애인이 끝까지 자기에게 진실할 것을 믿고 있었어요. 그토록 자기를 사랑하며 극진히 대해주던 애인의 마음에 결코 연적은 그림자도 건지지 못하리라고 웃어넘겼어요. 레드루스씨는 금광을 찾아 와이오밍에 있는 록키산으로 들어갔어요. 하루는 해적 한 떼가 상륙하더니 일하고 있던 그를 붙잡아 갔어요. 그리고……"
이름 없는 여객이 쏘아붙였다.
"여보게, 거 무슨 소리야? 해적 한 떼가 록키산에 상륙하다니 그래 무슨 배를 타고 왔지?"
이야기하던 청년은 미리 대비라도 하고 있었던 듯이 태연스럽게 말하였다.
"기차로 상륙하였죠. 놈들은 몇 달 동안 그를 동굴 속에 가둬 놓았어요. 그러다가 나중에 몇 백리 떨어진 알라스카의 산림 속으로 데리고 갔어요. 거기서 그는 한 아름다운 토인 처녀를 사랑하게 되었어요. 그렇지만 애리스에 대한 사랑은 변함이 없어요. 그는 1년 동안이나 그 숲속을 헤매다가 그 다이어몬드를 갖고 고향을 향해 길을 떠났어요."
"무슨 다이어몬드요?"
이름이 없는 한 사람이 날카로운 어조로 물었다.
"페로이 성전에서 안장을 만드는 사람이 보여주던 다이어몬드지요."
청년은 영문 모를 소리를 하고 나서 이야기를 계속하였다.
"집에 돌아오니, 애리스의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그를 무덤으로 안내했어요. <자네가 떠나자 그 애는 상심하던 끝에 그만 죽어 버렸다네>하고 말했어요.
<저의 연적이던 체스터 매킨토시는 어떻게 되었어요?>
그는 애리스의 무덤 앞에 앉아 슬픈 얼굴을 하고 물었어요. 어머니가 대답하였어요.
<그 사람은 집 아이의 마음이 자네한테만 쏠리는 것을 알자 날로 상심하더니 드디어 그랜드 래피드에 가서 가구점을 열었다네. 근자에 들은 바에 의하면 인디애나주의 사웃벤드 근처에서 사나운 사슴에게 물려 죽었다네. 그리로 간 것은 속세를 잊기 위해서였다네.>
이 말을 듣고 레드루스씨는 인간들의 얼굴이 보기 싫어 은자가 되었어요."
대리점을 하는 사람은 결론을 지어 이렇게 말하였다.
"제 이야기에는 문학적인 향취는 없을지 모르지만, 그 처녀는 끝까지 진실했어요. 진실한 사랑에 견주어 볼 때, 그녀가 재물에 대하여 전혀 관심이 없었던 것만은 사실이에요. 저는 여성을 진심으로 찬양하며, 또 믿고 있어요. 이러한 저의 생각에는 언제나 변함이 없어요."
그는 이야기를 마치고 나서 여자 손님이 앉아 있는 쪽을 곁눈질해 보았다.
판사는 다음으로 마부 빌라드 로우즈에게 사과를 타기 위한 시합에 이야기를 해줄 것을 부탁하였다. 마부는 간단히 이야기하였다.
"저는 세상의 재앙을 모조리 여자에게 돌리는 그런 고약한 인간이 아닙니다. 판사께서 청하시는 저의 이야기는 대강 이러합니다. 래드루스는 다만 게으른 것이 탈이었습니다. 만일 그가 화를 내어 자기를 밀어내려는 이 귀공자를 한 대 먹여 주고, 애리스를 포도 넝쿨 그네에라도 앉혀 잘 타일렀던들 일은 잘되었을 것입니다. 자기가 손에 넣고 싶은 여자를 위해서는 무던히 애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레드루스는
<내가 보고 싶거든 불러 줘> 하고 모자를 집어쓰고 나가 버렸습니다. 그것이 자부심을 살리는 건 줄 알고. 그러나 실은 게으름에 불과하며, 세상에 사내 녀석의 꽁무니를 쫓아다니기를 좋아하는 처녀가 어디 있겠어요.
<제 발로 걸어올 일이지.> 여자는 태연스럽게 이렇게 말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하긴 말인즉 이렇게 하였지만, 그녀는 돈지갑이 비어 있기가 일쑤인 콧수염을 단 그 사나이가 돌아오기를 은근히 기다리면서 언제나 창 너머로 내다보면서 세월을 보냈었지요. 그런데 레드루스는 여자 편에서 검둥이 하인을 시켜서 용서를 청해 올 것을 9년 동안이나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러나 여자는 용서를 빌지 않았어요.
<이래서는 안 되나 보다. 그렇다면 나도 잠자코 있지.>하고 사나이는 세상을 등지고 수염을 길렀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게으르고, 수염을 기른 것이 사고였지요. 이들은 실상 마음만은 서로 떨어져 있지 않았습니다. 세상에서 수염과 머리털이 긴 사람치고 부자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일이 있습니까? 없을 겁니다. 말보로 공(公)이나 스탠더드 석유회사의 주인을 보세요. 머리와 수염이 길어요? 그렇지만 애리스는 결코 시집을 가지 않았어요. 암, 안 가고 말고요. 하긴 레드루스가 다른 여자에게 장가라도 들었으면 모르죠. 그렇지만 사내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어요. 한데 이 색시는 세상에서 흔히 말하는 사랑의 선물이라든가, 머리털 한 줌이나 또는 사내가 부서뜨린 콜셋트를 소중히 간직하고 있었어요. 이러한 물건들은 여자에 따라서는 남편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 여자는 한평생 독신으로 살았을 겁니다. 레드루스 영감이 이발소를 등지고 내의 한번 입어보지 못하고 살았다고 해서 결단코 여자의 잘못은 아닙니다."
다음에는 이름이 없는 손님이 이야기할 차례였다. 우리가 이름도 모르는 이 사나이는 낙원읍에서 일광읍으로 동행하는 길손에 불과하였다. 불빛이 어두워서 그가 판사의 청에 응하는 것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는 여윈 몸집에 마치 녹이라도 쓴 것 같은 누런 옷을 입고 두 팔로 다리를 안고 턱을 무릎 위에 대고는 가구리처럼 앉아 있었다. 그는 한 번씩 웃고 나더니 입에서 말이 흘러나왔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분들은 다 엉터리였어요. 결혼식을 올리지 않은 로맨스가 세상에 어디 있어요. 허, 허! 그 부자는 나비넥타이를 하고 호주머니 속에 보증수표를 넣고 다닌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두 사람이 대문간에서 헤어진 데서부터 시작하라는 거죠. 좋아요.
<당신은 나를 사랑하지 않앗군요. 나를 사랑한다면 누가 아이스크림이나 사준다고 해서 다정스레 이야기할 리가 없어요>하고 레드루스는 거친 목소리로 말하자,
<저는 그 녀석을 미워해요. 그 녀석의 마차도 저주해요. 진짜 레스로 싼 금박을 칠한 상자에 넣어서 보내 주는 예쁘장한 그림 과자도 우습게 봐요. 그 녀석이 청보석이나 진주 가장자리에 두른 순금 메달 로케트를 선사할 때는 녀석의 심장이라도 푹 찔러 죽이고 싶었어요. 그런 녀석은 꺼져버리라지. 저는 당신만을 사랑해요.> 하고 여자는 말합니다.
래드루스가 대답합니다.
<당신의 사랑의 보금자리로 돌아가십시요. 나는 뭐 당신에게만 매어 사는 줄 아세요? 정신적인 사랑을 하시구려. 나는 행운을 모르고 사는 사람이랍니다. 당신은 그 친구한테로 가시오. 나는 B가 사는 닉커슨씨 딸과 함께 껌이나 씹으면서 전차라도 타고 돌아다니지요.>
그날 밤에 저쪽 남자가 찾아와서 진주 넥타이핀을 매만지면서 말합니다."
<허, 우셨군!>
애리스가 흐느끼면서 대답합니다.
<당신 때문에 그이가 가 버렸어요. 당신 같은 건 보기도 싫어요.>
남자는 고급 담배를 붙여 물고 말합니다.
<거럼 나하고 결혼합시다.>
여자는 화를 버럭 내면서 소리를 지릅니다.
<뭐라구요. 당신하고 결혼요? 안 해요, 이 일이 해결될 때까지는-그런 연후에 저는 장이나 볼 테니 당신은 결혼 허가장이나 맡아 오세요. 군청 직원을 부르실 테면 옆집에 전화가 있어요.>
그는 여기까지 말하고 나서 픽픽 쓴웃음을 지었습니다.
"그들은 결혼했을까요? 그 오리는 철모르는 버러지를 삼켜 버렸을까요? 이제는 레드루스 영감의 이야기를 할 차례가 되었어요. 여러분이 저와 견해를 달리하는 점이 바로 여기 있습니다. 무엇이 그가 세상을 등지고 살게 했을까요? 한 분은 <게으름>이라고 말하시고 한 분은 <뉘우침>이라고 말하시고 또 한 분은 <술>이라고 말하셨어요. 저는 여자가 그렇게 만들었다고 봅니다. 그 영감이 올해 몇 살이죠?"
그는 마부에게 물었다.
"예순다섯쯤 될 겁니다."
"좋습니다. 그는 이곳에서 20년 동안이나 혼자서 살았습니다. 대문간에서 그 여자와 헤어진 것이 스물다섯 살 때라고 합시다. 그러면 20년을 어떻게 보냈을까요? 이 동안은 어디서 살았을까요? 말씀드리죠. 이중 결혼을 하고 있었어요. 센트 죠에 통통한 금발여자가 살고 있었으며, 스키렛리지에 담백색 노랑머리가 살고 있었고, 코오 계곡에는 금니를 한 색시가 살고 있었는데, 그는 이 여러 색시들을 모두 건드렸기 때문에 나중에는 쫓겨난 겁니다. 그는 여자들에게 채인 뒤에 그 고장을 떠났지요. 그는 말했어요.
<이제 치마와는 인연을 끊는다. 세상을 등지고 살아간다는 것은 해볼 만한 장사이다. 거기에는 여사무원이 취직하러 오는 일도 없으니 나는 걱정 없는 은자의 생활을 하련다. 내 빗에 길다란 머리칼이 끼어 있다든지, 또는 재떨이에 머리핀이 놓여 있는 따위의 생활은 싫증이 났다.>
레드루스 영감이 솔로몬 왕으로 자처하기 때문에 정신병원에 가둬 버렸다고 하셨지요? 허, 과연 솔로몬이었구려! 제 이야기는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사과는 타지 못할 줄 압니다. 그러나 낙선이 되면 제 이야기는 돌려주셔야겠어요. 상을 탈 만한 그런 작품이 아니니까요."
메네피 판사가 이야기에 대한 평은 보류하라고 일렀기 때문에, 이 말을 존중하여, 이름 없는 사람이 이야기를 마쳤을 때, 별로 말이 없었다.
다음은 이 이야기 시합을 제의한 현명한 판사가 마지막으로 출전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마룻바닥에 불편하게 앉아 있을망정, 메네피 판사는 조금도 위엄을 잃지 않았다. 꺼져가는 불길은 옛날 새긴 로마 황제처럼, 특이하게 생긴 그의 얼굴과 흰 머리칼 위에 부드럽게 반사되었다.
그는 긴장미가 있는 고른 어조로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여자의 마음은 무척 깊습니다. 누가 그 깊이를 알겠어요. 인간이 하는 일과 소망은 여러 가지입니다. 그러나 모든 여성의 가슴은 한가지의 박자에 맞춰서 즉 옛날부터 사랑에 맞춰서, 울렁거리는 법입니다. 사랑이란 여자에게 있어서는 희생을 뜻합니다. 여자다운 여자라면 돈이나 지위보다 진정한 사랑에서 우러난 섬김을 더욱 존중합니다. 여러 신사들, 아니……에……친구분들! 나는 이제 레드루스와 그 사랑의 공판을 하겠습니다. 그런데 누가 재판을 받는지 아시겠어요. 그는 레드루스가 아닙니다. 그는 이미 벌을 받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인간의 생활에 천국의 기쁨을 안겨 주는 영원한 사랑도 아닙니다. 그럼 누구일까요? 우리가 각자 오늘 밤에 피고석에 서서, 자기의 가슴속에 기사의 정신과 악마 중에서 어느 것이 들어 있는지 대답하려는 것입니다. 우리를 심판하기 위해 여기 모든 여성을 대표하여 가장 아름다운 분이 앉아 계십니다. 손에 갖고 계신 살품은 설사 그 값어치는 얼마 되지 않더라도 우리의 고귀한 노력의 보수로서는 손색이 없습니다. 그것은 모든 여성의 견해와 취미를 대변하여 주시는 상입니다.
레드루스와 그에게 마음을 허락한 아름다운 여인의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우선 여자는 이기심이나 부정이나, 사치가 그 남자에게 세상을 버리게 하였다는 부당한 말을 극구 반대하고자 합니다.
여자란 돈으로 좌우되리만큼 그렇게 정신력이 약하진 않습니다. 따라서 그 원인은 다른데, 즉 남자의 거친 본성과 저속한 취미에서 찾아야 합니다.
두 사람에겐 잊지 못할 그 날에, 대문간에서 사랑의 싸움을 한 것은 분명합니다. 질투에서 오는 괴로움에서, 젊은 레드루스는 고향을 등진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정당한 태도일까요? 이것을 가릴 수 있는 증거는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더욱 소중한 것이 있습니다. 여성의 선량함이나 유혹에 대한 지조, 돈에 굴하지 않는 절개에 대한 거룩한 나의 신념이 그것입니다.
나는 경솔한 청년이 스스로 사들인 마음의 상처로 하여 세상을 헤매며 돌아다니는 모습이 눈앞에 선합니다. 그가 차츰 영락의 길을 더듬어 가다가 나중에는 완전히 절망에 빠져, 인생이 그에게 보낸 가장 귀중한 선물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과정을 머릿속에 그릴 수가 있습니다. 이어서 그는 비극이 충만한 세상을 버리기로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정신도 점점 이상하게 되어 갔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어떤 현상이 일어났습니까?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서 한 여인이 외로이 시들어 갔습니다. 아직도 영영 돌아오지 않을 발자국 소리를 기다리면서, 혹시나 해서 귀를 기울이고 밖을 내다보곤 하던 그녀는 이제 늙어 버렸습니다. 흰 머리를 이고 날마다 문 앞에 앉아서 먼지 나는 한길을 그리움에 충만한 눈으로 내다보고 있습니다. 마음은 여전히 남자가 버리고 간 그대로 문간에 남아, 언제까지나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지상에서 기다리는 건 아닙니다. 여성에 대한 나의 믿음은 그러한 모습을 마음속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이 지상에서는 영원히 헤어졌으니 기다리고 있는 거지요. 여자는 천국에서 피차에 만날 것을 기약하고 있어요. 그러나 남자는 절망의 구렁이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어요."
"남자는 정신병원에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하고 이름 없는 사나이가 말하였다.
메네피 판사는 좀 부화가 나는 듯이 보였다.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은 괴상한 몰골을 하고 고개를 숙인 채 앉아 있었다. 세차게 몰아치던 바람은 가라앉고, 이제는 때때로 불어닥칠 뿐 불길은 꺼져 붉은 숯덩어리만이 남아서 방안을 희미하게 비칠 뿐이었다.
한구석에 편안히 앉아 있던 여자 손님은 마치 무슨 어둠의 덩어리나 되는 것처럼 보였다. 곱슬머리를 이고 졸라맨 목도리 위에 이마만 희끄스름하게 보일 뿐이었다.
메네피 판사는 뻣뻣한 다리를 펴고 자리에서 일어나 말하였다.
"이제 이야기들은 모두 끝났습니다. <꽃다발>씨, 여성들의 견해를 대표하여 당신의 마음에 가장 맞는 이야기를 한 사람에게 시상할 차례가 되었습니다."
여자 손님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메네피 판사는 점잖게 허리를 굽히고 바라보았다. 이름 없는 사나이가 실례를 무릅쓰고 나지막하게 웃어내었다. 여자는 곤히 잠들어 있었던 것이다.
판사는 손을 잡아 그녀를 깨우려고 하다가, 여자의 무릎 위에서 차고 희끄무레하게 보이는 울통불퉁한 물건을 발견하였다. 판사는 사과를 집어 들고 좌중의 여러 사람에게 보이면서 놀란 듯이 말하였다.
"이분이 사과를 먹어버렸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