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오류
O Henry
<미네르바> 편집장
봄이 마치 유리알 같은 눈동자로 윙크를 보내오고 있었다. 잡지 <미네르바>의 편집장 웨스트부룩의 발걸음은 자기도 모르게 늘 다니는 길이 아닌 다른 길로 이끌렸다. 브로드웨이의 한 호텔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사무실로 가는 중에 그는 봄의 유혹에 사로잡혀 26번가 오른쪽을 돌고, 5번가 차량의 홍수를 지나 새싹이 움트는 메디슨 스퀘어 공원 쪽으로 향했다.
공원의 여유로운 분위기는 사뭇 전원적이었다. 그 색조는 초록색으로, 하느님이 인간과 초목을 처음 창조할 때 주로 사용했던 그런 색이었다. 보도블록 틈에 솟아난 어린 풀들은 짙은 녹색으로, 지난여름과 가을 흙에다 한숨을 내뿜은 세상의 실패자들에게 다시 한번 용기를 북돋우는 것 같았다. 나무에서 움트는 새싹들은 40센트짜리 저녁 식사 첫 번째 코스를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왠지 구미가 당기는 그런 것이었다. 그리고 머리 위의 하늘은 약간 흐린 남빛이었다. 외견상 단 하나의 거짓도 없어 보이는 자연의 색깔은 새로 페인트칠을 한 벤치의 초록색과도 잘 어울렸다. 그것은 지난해 유행했던 크래버넷 방수 코트의 바래지 않은 검정과 오이피클 중간쯤 되는 색이었지만, 도시에서 자란 웨스트부룩의 눈에는 그 모습이 빼어난 예술품처럼 느껴졌다.
이 스토리 속에 성급하게 뛰어든 독자든. 뛰어들기를 주저하는 성격의 소유자든, 이제부터 잠시 편집장 웨스트부룩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보기로 하자.
웨스트부룩의 마음은 만족스럽고도 평온하다. <미네르바> 봄호가 첫 달 10일 이 되기도 전에 다 매진되었고, 지방의 한 판매업자는 ‘여분이 있었다면 50부 정도는 더 팔았을 것이다.’라는 편지를 보내오기까지 했다. 사장이 월급을 인상해 주었고, 집에는 유독 경찰관을 두려워하지만 요리는 잘하는 외국인 요리사를 두게 되었으며, 출판업자들의 만찬에서 행한 연설문 전문이 조간신문에 실리게도 되었다. 또한 마음속에는 아침에 아파트를 떠나기 전 매력적인 아내가 불러준 멋진 노래의 환희에 찬 곡조가 메아리치고 있다. 아내는 최근 부쩍 음악과 춤에 관심을 보이며 아침 일찍부터 부지런히 노래와 춤을 연습해오고 있다. 목소리가 좋아졌다는 그의 칭찬에 그녀는 매우 기뻐하며 남편을 껴안았었다. 웨스트부룩은 봄이라는 친절한 간호사가 효과 좋은 강장제를 들고 회복기에 있는 도시의 병동으로 걸어 내려오고 있는 것 같은 분위기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라머시의 소설가>
편집장 웨스트부룩이 부랑자들이나 비행 청소년들의 후견인들이 자주 모이는 공원 벤치 사이를 천천히 산책하고 있을 때, 누군가 그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그는 구걸하는 사람인가 싶어 차가운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손길의 주인공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는 놀랍게도 더우··· 셱클포드 더우였다. 지저분한 그이 옷차림은 거의 누더기에 가까웠고, 초라한 행색의 깊은 주름에서 점잖은 점이라곤 찾아보기 힘들었다.
편집장이 놀라움을 수습하고 있는 동안, 그의 머릿속에는 더우의 이력이 주마등처럼 스쳐 갔다. 그는 소설가이고 웨스트부룩의 오랜 친구 중 하나이다. 한때는 서로 절친한 친구로 지냈었다. 그때는 더우에게도 돈이 좀 있어서 그는 웨스트부룩이 사는 집 가까운 곳에 깨끗한 아파트 한 채를 구입해서 살고 있었다. 두 가족은 종종 함께 저녁식사를 하거나 영화를 보러 가곤 했었다.
그리고 그러는 사이에 더우 부인과 웨스트부룩 부인도 절친한 친구 사이가 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문어발이 더우의 재산을 삼켜버렸고, 더우는 그라머시(市)의 공원 근처로 이사를 갔다. 그곳은 1주일에 얼마씩 주고, 구식 샹들리에 밑에서 그을린 벽난로를 바라보며 트렁크 위에 올라앉아 쥐가 마루 위를 기어 다니는 것을 바라보아야만 하는 그런 곳이었다.
그곳에 살면서 더우는 소설을 써서 생계를 꾸려갈 작정이었다. 가끔씩 소설이 팔리기도 했다. 그는 친구인 웨스트부룩에게 여러 편의 소설을 보내왔다. 한두 편은 (미네르바>에 실리고, 나머지는 반송되었다. 웨스트부룩은 원고를 반송할 때마다, 주의 깊고 양심적인 개인 서신을 동봉하여 그 원고가 부적합한 이유를 자세히 써서 보냈다. 편집장으로서 그는 좋은 소설이란 어떤 것인가에 대해 명확한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더우 또한 마찬가지였다.
더우 부인의 요즘 관심사는 그녀가 간신히 마련한, 얼마 안 되는 음식의 재료에 관한 것이었다. 하루는 더우가 그녀에게 몇몇 프랑스 작가들의 탁월함에 대하여 열변을 토했다. 그날 그들은 배고픈 남학생이 한 번에 꿀꺽 삼킬만한 양의 저녁 식사를 앞에 놓고 앉아 있었는데, 더우가 그런 얘기를 꺼낸 것이다. 그러자 그의 부인이 말했다.
“그것은 모파상 헤시(잘게 썬 고기요리)예요. 예술은 아니지만 마리온 크로포드(미국 작가)의 연재물 다섯 코스와 엘라 휠러 월콕스 (미국의 시인)의 소네트 디저트로 만족하시길 바래요. 지금 배가 고플 뿐이라구요.”
이만큼, 셱클포드 더우가 메디슨 스퀘어에서 웨스트부룩의 소매를 잡아당겼을 때. 그는 성공이라는 현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던 것이다.
<영혼의 각성>
편집장 웨스트부룩이 이렇게 공원에서 뜻밖에 더우를 만난 것은 몇 달 만의 일이다.
“여어 셱, 자넨가? 오랜만일세!”
라고 말하며 웨스트부룩은 약간 어색했다. 자신의 말투가 상대방의 달라진 차림새를 지적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더우가 그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말했다.
“여기가 내 사무실일세. 잠깐 앉으라구! 이런 꼴을 하고 내가 자네 사무실로 갈 수는 없지 않은가? 여기 앉는 것이 그렇게 창피한 일은 아닐세. 다른 벤치에 앉아 있는 애송이들은 자네를 대단한 도둑으로 알 거야. 유명한 편집장인지 모르고······.”
“한 대 피우겠나, 섹?”
편집장 웨스트부룩이 녹색 페인트칠을 한 벤치에 조심스럽게 앉으면서 말했다. 그는 청을 들어줄 때는 항상 이렇게 흔쾌히 들어주곤 했다.
더우는 마치 물총새가 농어에게 덤벼들 듯, 또는 여자아이가 초콜릿 크림에 달려들 듯 담배를 낚아챘다.
“나는 지금······,”
하고 편집장이 다시 말을 꺼냈다.
그러자 더우가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아, 말 안 해도 알아. 성냥이나 좀 주게. 자네는 지금 10분밖에 시간이 없다는 걸 말하려는 거지?”
“소설은 어떻게 돼가나?”
편집장이 물었다.
“나를 좀 보게.”
하고 더우가 말했다.
“그렇게 다정하면서도 솔직한 얼굴로, 소설은 집어치우고 택시 운전이라도 하지 그러느냐고 말하지 말게. 나는 끝까지 해볼 작정일세. 나는 내가 좋은 작품을 쓸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고, 또 자네가 그걸 인정하게끔 만들고 말 거야.”:
편집장 웨스트부룩은 걱정스러우면서도 슬픈,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듯한, 동정적이면서도 회의에 찬 표정을 하고 안경 너머로 더우를 응시했다. 그러나 저작권을 얻을 만큼이나 독특한 그 표정은 곧 도움 안 되는 기고가의 공격을 받았다.
“내가 최근에 보낸 소설 읽어 봤나? <영혼의 각성> 말이야.”
하고 더우가 물었다.
“주의 깊게 읽어봤지. 그 소설을 두고 많이 망설였네. 정말일세. 몇 가지 장점이 눈에 띄더군, 원고를 반송할 때 편지를 동봉하려고 했었네만······유감일세.”
“유감 같은 것에 신경 쓸 거 없어.”
더우가 말했다.
“유감이라는 말은 더 이상 위안도 고통도 주질 않네. 내가 알고 싶은 건 반송 이유일세, 자, 말해보게, 먼저 장점부터······.”
웨스트부룩은 한숨을 쉬고 나서 신중하게 대답했다.
“그 소설의 구성은 비교적 독창적이었네, 인물은 여태까지 자네가 쓴 소설 중에서 가장 훌륭했고, 짜임새도 괜찮았어, 몇몇 부분의 연결이 약한 게 흠이긴 하지만 그런 건 바꾸고 손질해서 보강할 수 있을 거야. 좋은 작품이었네, 다만······.”
“다만 뭔가? 자넨 내가 모국어를 제대로 구사할 줄 안다고 생각하나, 제대로 구사할 줄 모른다고 생각하나?”
하고 더우가 말을 가로막았다.
“내가 자네한테 늘 말해왔지, 구상은 좋다고 말이야.”
하고 편집장이 말했다.
“그렇다면 문제는······?”
“늘 같은 거지, 자네는 클라이 맥스까지는 예술가답게 잘 끌고 가네. 그런데 그 다음부터는 사진사가 되어 버린다는 거야, 나는 정말이지 자네가 왜 그렇게 고집스러운지 모르겠네, 자네가 쓰는 작품마다 다 그렇거든, 아니, 사진사에 비유한 것은 철회하겠네, 때때로 사진사도 찰나의 진실은 포착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자제는 항상 평범하고, 단조롭고, 효과를 약화시키는 묘사로 결말을 망쳐놓고 만단 말이야! 내가 늘 그 부분에 대해서 불평하지 않던가? 만일 자네가 소설의 극적인 장면에서 더욱 문학성을 살리고자 한다면, 그래서 예술이 요구하는 화려한 빛깔로 그 장면들을 채색하려 한다면, 그러면 우체국 반송 도장이 찍힌 두꺼운 봉투가 자네 집 앞에 놓이는 일도 줄어들 걸세!”
“아, 깡깡이와 무대 조명 말이로군!”
더우가 비웃듯이 소리쳤다.
“자네 머릿속에는 아직도 옛날 순회극단의 왕이 남아있나 보군그래, 옛날 순회극단에서는 까만 수염의 남자가 금발 머리 베시를 유괴하면, 유괴된 아이의 어머니가 조명 속에서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높이 쳐들어 이렇게 말하는 거지, ‘하늘에 맹세컨대, 베시를 빼앗아간 냉혹한 악당들에 대한 어미의 복수는 그들을 짓뭉갤 때까지 밤낮으로 쉬지 않으리라!’하고 말이야.”
웨스트부룩은 둔감한 자기만족의 미소를 띠면서 말했다.
“소설에서 실제로 아이 엄마가 그렇게 말했나? 내 기억에는 그렇게 말하지 않은 것 같은데······?”
“이봐 친구, 600일 동안 공연이 계속되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무대일 뿐이야. 실제 상황이라면 아이 엄마가 어떤 말을 할지 내가 말해주지, 아마 이렇게 말할 걸세, ‘뭐라고? 낮선 남자가 베시를 데리고 갔다고? 하느님 맙소사! 하루도 편할 날이 없네. 내 모자 어딨어? 당장 경찰서에 가봐야겠어. 다들 그 애를 돌보지 않고 뭘 했단 말이야. 틀림없이 베시가 제정신이 아니었던 게야. 그렇게 낯을 가리는 애가 처음 본 사람을 따라가다니······!’ 이렇게 말이야. 실제로 사람들은 정서적 위기에 내몰렸을 때 과장된 표현이나 미사여구를 사용하지 않아. 그런 경우 그들은 그냥 평상시 말투에 감정을 섞어서 다급하게 내뱉을 뿐이라구!”
“셱!”
하고 웨스트부룩이 엄숙하게 말했다.
“자네는 차의 범퍼 밑에서 형체도 없이 짓이겨진 어린아이의 시신을 들어 올려 자네 팔에 안고, 몸부림치는 아이의 어머니에게 가서 그 앞에 내려 놓아본 적이 있나? 과연 그래본 적이 있어? 그리고 그 어머니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슬픔과 절망의 울부짖음을 들어본 적이 있어?”
“그래본 적은 없지, 그럼 자네는?”
하고 더우가 되물었다.
“물론 나도 없지.”
편집장 웨스트부룩이 약간 얼굴을 찌푸리면서 말을 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그 아이 어머니가 무슨 말을 할지 상상은 할 수 있네.”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하고 더우가 말했다.
<서로 다른 견해>
이제 편집장 웨스트부룩은 신탁(申託 여러 번 되풀이하여 간곡하게 하는 부탁)을 내려, 완고한 기고가의 입을 다물게 할 적당한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미네르바> 잡지에 실릴 소설의 남녀 주인공 입에서 나올 말이 아직 수준에 이르지 못한 소설가에 의해 씌어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말했다.
“여보게 셱, 내가 인생에 대해 무언가를 안다고 하는 것은, 인간의 마음속에 닥친 모든 갑작스럽고, 깊고, 비극적인 감정은 오히려 그 반대의 조화롭고, 편안하고, 균형 잡힌 감정 표현 형태로 나타난다는 것일세. 감정과 표현 사이의 이 불가사의한 조화의 어디까지가 자연적이고, 인위적인지는 말하기 어렵지만 말일세. 리어왕의 당당하고 초탈(세속적인 것이나 일반적인 한계를 벗어남)한 발언이 한 늙은이의 허풍과는 다르듯. 새끼를 빼앗긴 암사자의 숭고하리만큼 끔찍한 포효는 으르렁대는 목 울림이나 일상적인 울음소리보다는 훨씬 더 극적이라 할 수 있네. 모든 남녀에게는 잠재된 연극적 기질이라는 것이 있어서, 이것이 문학이나 연극을 통해 드러나거나. 또는 깊고 강한 정서에 의해 일깨워진다는 것일세. 그리고 문학과 연극을 통해 무의식적으로 습득된 이러한 감각들은 사람들이 감정을 표현할 때 그 감정의 중요도와 극적인 가치에 걸맞은 언어로 표현할 수 있게 해 준다는 말일세. 알겠나?”
“그래? 그렇다면 연극이나 문학은 어디서 자극을 받지?”
더우가 물었다.
“인생으로부터······.”
편집장 웨스트부룩이 의기양양하게 대답했다. 소설가는 벤치에 앉아 말없이 어깨를 으쓱하며 웅변 투의 몸짓을 했다. 말로서는 반대 의견을 적절히 표현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자 가까운 벤치에 앉았던 지저분한 노숙자 한 사람이 핏발 선 눈을 뜨더니, 짓밟힌 형제를 지지해 주어야겠다고 생각한 듯 쉰목소리로 더우에게 소리쳤다.
“셱, 한 대 먹여! 저 작자는 왜 광장에 앉아 사색하는 신사들 속에 와서 시끄럽게 떠드는 거야?”
편집장 웨스트부룩은 주머니에서 시계를 꺼내 들여다보며 노숙자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그러자 불안해진 더우가 공격적으로 물어왔다.
“말해보게, 구체적으로 어디가 잘못됐기에 <영혼의 각성>을 반송했는지?”
웨스트부룩이 말했다.
“가브리엘 머레이가 전화를 받고 약혼자가 강도의 총에 맞았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그는 이렇게 말하는 걸로 되어 있을 거야. 단어는 잘 생각나지 않지만 아마······.”
“내가 말해주지”
더우가 말했다.
“메레이는 ‘제기랄, 그녀는 항상 나를 따돌린단 말이야!’하고 말하는 걸로 되어 있지. 그리고 친구에게 이르기를 ‘타미, 32구경에 맞으면 구멍이 클까? 운이 없었던 게야! 거기 찬장에서 술이나 한 병 꺼내주게. 아니 거기 말고······ 그 옆에는 아무것도 없어,’라고 말이야.”
편집장은 더 이상 토론하지 않겠다는 투로 그 뒤를 이었다.
“그리고 또 베레니스가 남편이 보낸 편지를 읽고, 그가 미장원 여자와 함께 도망갔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녀는 이렇게 말하지. 그러니까······.”
소설가가 또 끼어들었다.
“그녀는 ‘얼씨구, 이건 또 뭐야?’라고 말하지.”
“그것 봐, 터무니없지 뭔가!”
웨스트부룩이 말했다.
“심각한 상황에서 평범한 말이 나옴으로써 소설이 용두사미가 되어 버린 거야. 작품을 망쳐 놓았다구! 더욱 나쁜 건 자네 작품이 인생을 제대로 반영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야. 난 아직 갑작스런 비극을 당했을 때 평범한 일상어투로 말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어!”
“그렇지 않아!”
더우가 면도하지 않은 턱을 고집스럽게 당기면서 말했다.
“나는 어떤 남녀도 감정의 클라이맥스에서는 화려한 수사를 늘어놓지 않는다고 단언할 수 있어. 그들은 오히려 평상시 말을 쓰거나 더듬거리지!”
<더우의 제안>
편집장은 알면서도 관대하게 봐준다는 듯 벤치에서 일어났다.
더우가 편집장의 옷자락을 잡으며 말했다.
“좋아, 웨스트부룩, 방금 우리가 토론했던 그 부분에서 등장인물들의 말과 행동이 실제로 내 말 대로라는 걸 자네가 알고 있었다면, <영혼의 각성>을 받아 주었겠나?”
“아마 그랬을 걸세. 내가 자네 말 대로라는 걸 알고 있었다면······.”
하고 편집장이 말을 이었다.
“그렇지만 난 절대 그렇지 않을 거라고 설명했잖은가?”
“만일 내 말이 옳다는 걸 자네에게 증명해 보인다면······?”
“미안하네. 셱, 지금은 더 이상 토론할 시간이 없어.”
“토론이 아니라, 실제 사건에서 보여주려는 것일세. 내 말이 옳다는 것을······!”
“그게 가능할 거 같은가?”
웨스트부룩이 다소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내 말을 들어보게.”
하고 소설가는 진지하게 말했다.
“한 가지 방법을 생각했네, 실제 상황을 충실히 반영하는 소설이 좋은 소설이란 내 지론을 잡지사가 제대로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것은 내게 무척 중요한 일일세.”
“<미네르바>에 실을 소설을 선정함에 있어서.”
하고 편집장이 말했다.
“나는 자네와는 반대되는 이론을 적용해 왔네. 발행 부수가 9만 부를 넘어······.”
“40만 부겠지.”
하고 더우가 말을 가로챘다.
“아니, 실은 100만은 되어야 할 테지.”
“자네가 조금 전에, 자네의 지론을 증명해 보이겠다고 말했나?”
웨스트부룩이 물었다.
“그러네! 자네가 30분만 시간을 내준다면, 내 말이 옳다는 것을 자네한테 증명해 보이겠네. 루이즈를 통해서······.”
“자네 부인 말인가?”
웨스트부룩이 외쳤다.
“어떻게······?”
“정확히 말하면, 루이즈를 통해 증명해 보이겠다는 것이 아니라. 루이즈와 함께 증명해 보인다고 해야겠지.”
하고 더우가 말을 이었다.
“자네는 루이즈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고, 또 얼마나 헌신적인지 알 걸세. 그녀는 나만이 까다로운 심사를 통과한 우수작품이라고 생각하네. 내가 무시당한 천재의 역을 맞게 된 뒤로는 더욱 진실해지고 다정해졌어.”
“그렇고말고, 자네 부인은 매력 넘치고 감탄할 만한 자네의 인생의 동반자라고 생각해.”
편집장이 동의했다.
“자네 부인과 우리 집사람이 한때는 떼놓을 수 없는 친구 사이였다는 것도 잘 기억하네. 그런 아내들을 두었으니 우리 두 사람은 복 받은 사람일세. 셱. 조만간 가족이 함께 저녁 식사나 한번 하자구, 전에 즐겨 먹던 냄비 요리 중 하나를 대접하겠네.”
“식사 같은 건 나중에, 내가 새 셔츠를 산 뒤에 하고······. 그보다 이제 내 계획을 말해주겠네. 아침에 내가 집을 나서려는데 루이즈가 89번가에 있는 숙모님 댁을 방문한다고 했거든, 3시에 돌아온다고 했어. 루이즈는 항상 시간을 정확히 지키는 사람이니까 지금쯤은 아마······.”
더우는 편집장의 주머니 속 시계가 들어있는 곳을 슬쩍 건너다보았다.
“2시 33분일세.”
웨스트부룩이 시계를 꺼내 들여다보면서 말했다.
“딱 적당하군!”
더우가 말했다.
“지금 우리 집으로 가세. 내가 루이즈한테 쪽지를 써서 그걸 탁자 위에 놓아두면, 그녀는 집에 돌아와 문을 열면서 그것을 보게 될 거야. 자네하고 나는 주방 커튼 뒤에 숨어있는 거지, 쪽지에다 이렇게 쓰려고 하네. ‘나는 이제, 당신이 이해하지 못했던 내 예술혼을 잘 이해해 주는 여자와 함께 이곳을 떠나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작정이요!’라고 말이야, 그걸 본 루이즈가 어떤 말과 행동을 보일지. 그걸 지켜보기로 하세. 그러면 누구 말이 옳은지 분명해질 걸세.”
“아, 그럴 수는 없네!”
편집장이 고개를 저으면서 말했다.
“그건 한마디로 잔인한 일일세. 나는 자네 부인의 감정을 가지고 그런 식으로 장난치는 일에 동참할 수가 없네.”
“여보게!”
소설가가 말했다.
“나도 자네만큼이나 루이즈를 끔찍이 생각한다구, 이건 나뿐만 아니라 그녀를 위한 일이기도 한 거야. 어떻게든 내 소설이 팔려야 하지 않겠나? 이렇게 한다고 해서 루이즈에게 크게 해될 것은 없어, 그녀는 건강하고 건전해. 그녀의 마음은 98센트짜리 시계만큼이나 단단하다고, 딱 1분이야. 1분 동안만 루이즈가 어떤 말과 행동을 보이는지 지켜보고 그 후엔 내가 그녀 앞에 나가서 자초지종을 설명하겠네. 내게 기회를 한 번 줘봐. 그러면 결코 자네 배려를 잊지 않겠네.”
편집장 웨스트부룩은 반쯤은 내켜 하지 않으면서도 결국은 양보하고 말았다. 그로 하여금 잔인한 일에 동의하게 한 그 절반의 마음, 생체해부학자의 기질은 우리 모두의 기질 안에도 숨어있는 것이리라, 메스를 사용해 본 경험이 없는 사람들은 모두 일어나 주방 커튼 뒤에 가서 지켜보라, 우리 주위에 실험용 토끼나 기니아 피그가 충분히 많지 않은 것이 유감일 뿐이다.
<슬픈 오류>
이제 두 예술 실험가는 광장을 떠나 서둘러 동쪽으로 걷다가 남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그라머시(市)의 한 동네에 이르렀다. 높다란 철책 안의 작은 공원이 연둣빛 봄옷을 두르고 연못에 자신의 모습을 비쳐 보며 감탄하고 있었다. 철책 바깥으로는 옛 상류 계급의 껍질인 다 허물어져 가는 집들이 비스듬히 서 있어서, 그 모습은 마치 유령들이 머리를 맞대고 사라진 상류사회의 일들에 대해 서로 이야기하는 것만 같았다. 언제나 도시의 영광은 변해 가는 것이다.
그들은 공원에서 한두 블록쯤 북쪽으로 올라간 곳까지 걸어갔다. 그리고 더우는 다시 편집장을 이끌고 동쪽으로 조금 더 올라가, 건물의 정면 장식이 조잡한 공동주택으로 데리고 갔다. 그들은 5층까지 걸어 올라갔다. 더우는 숨을 헐떡이며 앞쪽 문들 중 한 문에 열쇠를 꽂았다. 문이 열리자 방 안에 있는 변변치 않은 가구 몇 가지가 눈에 들어왔다. 웨스트부룩은 왠지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우가 말했다.
“저쪽에 있는 의자를 가져오게, 나는 펜과 잉크를 찾아올 테니······ 어라? 이게 뭐지······? 루이즈 편지잖아! 아침에 나갈 때 써놓고 나간 모양이네.”
더우는 탁자 가운데 놓인 봉투에서 편지를 꺼내 읽기 시작했다. 한번 소리 내어 읽기 시작했으므로 그는 끝까지 소리 내어 읽어 내려갔다. 편집장 웨스트부룩이 들은 편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사랑하는 셱 클포드 더우에게
당신이 이 편지를 읽을 때쯤이면 나는 100마일 밖에서 갈 길을 재촉하고 있을 거예요. 순회 오페라단에 코러스 자리를 얻었어요. 오늘 12시에 공연을 떠난답니다. 굶어 죽고 싶지는 않았어요. 그래서 자립하기로 했어요. 돌아오지 않을 거예요. 웨스트부룩 부인도 함께 가요. 전축과 사전과 빙산을 합쳐놓은 것 같은 사람과 사는 게 지겹데요. 그녀도 돌아오지 않을 거예요. 우리는 2개월 동안 몰래 노래와 춤을 연습했어요. 당신도 꼭 성공하길 바래요. 그래서 잘 살기를······ 안녕.
- 루이즈 -
더우는 힘없이 편지를 떨어뜨리고 떨리는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내면으로부터 올라오는 음성으로 부르짖었다.
“오, 하느님! 왜 이 쓴 잔을 저에게 주시나이까? 왜 그녀가 잘못 판단하도록 하여, 아버지의 천국에 선물인 믿음과 사랑을 배반의 무리와 마귀들의 조롱거리가 되게 하려 하시나이까!”
편집장 웨스트부룩의 안경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한쪽 손의 손가락이 코트의 단추를 푸는 동안 그의 창백한 입술에서는 다음과 같은 말이 흘러나왔다.
“끔찍한 편지일세! 셱, 뭐라고 말 좀 해보게. 일순간에 가정이 무너지는군, 지옥이 따로 없네 그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