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등불
O Henry
한편 루양은 세탁소에서 꽤 좋은 벌이를 할 수 있었다. 한 주일에 18달러 50센트를 벌어서 방값과 식비로 6달러를 지불하고 나머지는 주로 옷값에 소비하였다. 낸시양의 처지와는 달라서 취미와 예절을 길러 행동을 세련시킬 기회가 거의 없었다. 김이 자욱한 세탁소 안에서는 분주히 일을 하면서 저녁 한때를 어떻게 즐길 수 있을까 하는 생각뿐이었다. 값진 화려한 옷들이 그녀의 다림 밑을 계속해 스쳐갔다. 그리하여 그녀는 다리미라는 쇠붙이를 통하여 자기를 따뜻이 감싸주는 옷에 대하여는 날로 정이 더해가는 것 같았다.
그녀가 하루의 일과를 마치면 밖에서 으레 미스터 단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어느 등불 아래 서 있든지 그는 언제나 그녀의 충실한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것이었다.
그는 때때로 얼굴보다 더 화려해 가는 그녀의 옷을 바라보고는 순진하면서도 난처한 눈초리를 던지는 것이었다. 그것은 결코 그녀에 대한 충성심이 부족한 데서 오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거리에서 그녀가 남의 시선을 끄는 것이 싫었을 뿐이다.
루양도 자기의 보이프렌드 못지않게 충성을 다 하였다. 두 사람이 어디를 가든지 낸시 양은 이들과 행동을 같이하는 것이었다. 미스터 난은 언제나 기꺼이 이 군식구의 짐을 짊어지는 것이었다. 기분 전환을 위해 돌아다니는 이 세 사람 중에서 루양은 색깔을, 낸시 양은 품의를 미스터 단은 무게를 지니고 있다고 해도 무방하였다. 두 아가씨를 호위하는 미스터 단은, 산뜻하지만 분명히 기성복에 기성품 넥타이를 매고 언제나 즐거운 기성품 재담을 곧잘 늘어놓았으며, 어떤 일을 당하여도 놀라거나 허둥지둥하는 법이 없는 확고하면서도 온순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세 사람이 함께 있을 때에는 져 버리기 쉬운 존재였지만, 헤어지고 나면 곧 눈에 선히 떠오르는 그런 사람이었다.
낸시 양의 고급 취미에서 보면 이런 기성품 오락은 어딘가 입맛에 씁쓸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젊었다. 젊음이란 미식가(美食家)가 못 될 때에는 대식가(大食家)가 되는 법이다.
"미스터 단은 지금 당장이라도 나하고 결혼하고 싶다는 거야."
하고 언젠가 루양은 낸시에게 말하였다.
"그렇지만 난 결혼할 생각은 없어. 혼자서도 얼마든지 살 수 있으니까 말이야. 내가 번 돈으로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거든. 그리고 그인 결혼하면 내가 직장에 나가는 걸 원치 않는다는 거야. 낸시, 그런데 넌 잘 먹지도 못하고 입지도 못하면서 그따위 백화점에 붙어 있음 뭘 해? 너만 응한다면 당장이라도 너를 세탁소에 취직시킬 수 있어. 너두 돈을 좀 더 많이 벌 수만 있다면 그렇게 도도하진 않을 거야."
"루야. 내가 뭐 도도하니?"
하고 낸시양은 말을 이었다.
"난 변변치 않은 보수를 받고 있는 지금의 직장이 마음에 들어. 이젠 그런 생활이 몸에 배인 것 같애. 내가 바라는 건 단지 기회뿐이야. 언제까지나 진열장을 지키고 싶지는 않아. 나는 날마다 어떤 새로운 걸 배우고 있어. 언제나 세련되고 돈 많은 사람들을 대하니까 말이야.-난 그분들의 청에 응해 줄 뿐이지만, 귀담아들을 만한 이야기는 하나도 빼놓지 않아."
"너 아직도 그 백만장자를 못 잡았니?"
하고 루양은 놀려대며 물었다.
"흥, 아직 맘에 드는 백만장자가 없군 그래. 지금 찾는 중이야."
"얘, 사람 잡을라! 뭐, 맘에 드는 사람을 고르고 있다고? 차라리 한 사람이라도 도망가지 않게 해야 해. 상대방이 깎쟁이라도 말이야. 물론 네 말은 농담일 테지-백만장자는 우리 같은 여자를 거들떠보지도 않아."
"그들은 생각을 달리해야 할 거야. 우리들 중에는 그들에게 돈을 간수하는 법을 가르쳐 줄 수 있는 사람도 있으니까……"
낸시양은 냉정한 태도로 재치 있게 대답하였다.
"나 같은 건 백만장자가 말 한마디만 걸어와도 기겁을 해서 어쩔 줄을 모를 거야."
하고 류양은 웃으며 말하였다.
"그건 그들을 아직 모르고 하는 소리야. 부자는 다만 이편에서 다른 사람보다 조심해야 하는 것이 다를 뿐이야. 루야, 그 빨간 명주 안 천이 그 양복에는 너무 환하지?"
루양은 상대방의 단조롭고 흐린 올리브 색깔의 재킷을 바라보았다.
"얘, 내 눈엔 그렇게 보이지 않아. 그렇지만 네가 입은 빛이 바랜 옷에 비하면 그렇게 뵐지도 몰라."
"이 재킷 말이냐?"
하고 낸시양은 자못 만족스러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전에 피셔 부인이 입고 있던 것과 똑같은 식이야. 천값만 해도 얼마인데 그래. 3달러 98센트란 말이야. 그 부인 것은 100달러도 더 들었을 거야."
"그래?"
하고 루양은 가볍게 받아넘겼다.
"내 눈에는 그것이 백만장자를 낚는 미끼로는 뵈지 않는구나. 아무튼 내가 너보다 먼저 낚아질지 몰라."
이 두 친구가 각각 지닌 견해의 가치를 측정하려면 철학자라도 데려와야 할지 모르겠다. 루에게는, 상점이나 사무실에서 최소한도의 생활을 위해 일하는 직업여성들의 자존심이나 결벽(潔癖) 같은 것이 없었다. 그녀는 소란스럽고 숨 막힐 듯한 세탁소에서 언제나 즐거운 마음으로 다림질을 하였다. 그녀의 수입은 평안한 생활을 보장하고도 남았었다. 그러므로 그녀의 옷차림은, 때로는 깨끗은 하지만 화려하지 못한 단의 옷을 보고 비록 그가 성실하고 변함이 없는 믿음직스러운 청년이기는 하여도, 한심하다는 듯이 눈을 흘기기에 부족함이 없기도 하였다.
낸시양과 같은 여자는 보기드문 것이다. 수만 명 중에서 한 명꼴이라고나 할까. 훌륭한 가정의 교양과 취미를 가진 상류층의 명주, 보석, 레스, 장식품, 향수, 음악―이 모든 것은 여성을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녀로서는 마땅히 소유해야 할 값진 몫이었다. 그녀에게 그런 것들은 생활의 일부로, 원하기만 하면 으레 갖게 되어야만 하였다. 그녀는 에서(구약 성경에 나오는 이삭의 장남)처럼 자기 자신을 배반하지는 않는다. 그녀는 자기 삶의 권리를 간직하고, 자기가 일한 대가를 적어도 이겨나갔던 것이다.
낸시양은 이런 분위기 속에서 생활을 잘 꾸려나갔다. 마음을 굳게 먹고 값싼 음식을 만족스럽게 먹고 공을 들여 검소하게 옷을 지어 입었다. 그녀는 여성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현재 남성이라는 동물이 어떤 습성과 감정을 갖고 있는지 연구하는 중이었다. 언젠가는 바라는 사냥을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 노획물은 조금도 손색없는 최상의 것이라야 한다고 스스로 다짐하고 있었다.
그런 신랑을 맞아들이기 위해 그녀는 이미 등불의 심지에 불을 붙여 놓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무의식중에 하나의 새로운 교육을 배우게 되었다. 그녀의 가치 기준이 흔들리고 변하여 가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가치의 정가표가 마음속에서 뿌옇게 흐려져 <진실>이니, <명예>이니, 또는 <친절>이니 하고 바뀌어지기도 하였다. 이를테면 사냥꾼이 어느 깊숙한 산림 속에서 큰 사슴이나 고라니를 사냥하는 격이었다. 사냥꾼은 이끼가 끼고 나무들이 무성한 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개울을 보고 위안을 얻게 된다. 이런 때에는 저 유명한 사냥꾼 닌로드의 창날이라도 무디어지게 마련이다.
아무튼 낸시양으로 말하면 페르시아의 양피 가죽도 그것을 입고 싶어 하는 사람에 따라서 반드시 시세대로 매매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어느 목요일 날 저녁이었다. 낸시양은 백화점에서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6가(街)를 지나 서쪽을 향해 친구의 세탁소를 찾아갔다. 루양과 미스터 단과 함께 음악회에 가기로 되어 있었다.
낸시양이 가자 미스터 단은 마침 세탁소를 나오고 있었는데 그 얼굴이 매우 긴장되어 있었다.
"무슨 소식이 있나 해서 들렸지요."
하고 그는 말하였다.
"누구한테서 말예요?"
하고 낸시양이 물었다.
"거기 루가 없어요?"
"저는 댁에서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했는데요."
하고 미스터 단은 말하였다.
"지난 월요일부터 그 사람은 여기에 안 나와요. 하숙집에도 없구요. 짐을 다 갖고 나갔대요. 세탁소 여자의 말에 의하면 루는 유럽으로 갈지 모른다고 하더래요."
"그 애를 어디서 본 사람은 없어요?"
하고 낸시양은 물었다. 미스터 단은 냉정하게 턱을 내밀며 침착한 잿빛 눈으로 강철같이 날카롭게 낸시양을 바라보았다.
"세탁소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하고 그는 거친 목소리로 말하였다.
"어제 루가 자동차로 이 앞을 지나가는 것을 보았대요. 당신과 루가 언제나 꿈꾸던 백만장자의 한 사람과 함께 타고 갔을 테지요."
낸시양은 난생처음으로 남자 앞에서 기가 죽었다. 그녀는 약간 떨리는 손을 미스터 단의 손목에 얹었다.
"미스터 단, 저한테 그런 말씀을 마세요. 저도 마치 그 일에 관련이 있는 듯이 들리는군요."
"그런 의미에서 말한 것은 아니에요."
하고 미스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고 나서 조끼 주머니를 더듬었다.
"오늘 밤 입장권이 있는데요……"
하고 그는 남자답게 쾌활한 얼굴로 말하였다.
"만일 당신이라도!"
낸시양은 언제나 용기를 높이 평가하였다.
"미스터 단, 그럼 함게 가세요."
하고 그녀는 대답하였다.
낸시양이 루양을 다시 만나게 된 것은 석 달 후의 일이었다.
어느 날 저녁에 그녀는 공원 담장을 끼고 집으로 바삐 걸어가고 있었다. 그때 어디서 자기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하여 뒤를 돌아보는 순간 루양이 그녀의 팔에 뛰어들었다.
천 번 포옹이 끝났다. 그녀들은 혀끝에 감도는 수 많는 의문을 지닌 채 마치 뱀이 상대방을 공격하거나 자신을 보호하려고 할 때처럼 머리를 빳빳이 추켜세웠다. 이윽고 낸시양은 루양에게 좋은 수가 생긴 것을 알아차렸다. 값진 모피하며 눈부신 보석, 재봉사가 정성껏 지은 옷 등이 그것을 입증하고 있었다.
"넌 벽창호야!"
하고 루양은 큰소리로 정답게 말하였다.
"너 아직도 그 백화점엘 나가니? 그러니까 그 꼴이지 뭐야. 그런데 네가 낚으려던 그 사냥감은 어떻게 된 거야? 아직도 안 걸렸어?"
그러자 루양은 그야말로 좋은 수보다 더 좋은 무엇이 낸시양에게 생긴 것을 알아차렸다.
낸시양의 눈은 보석보다 더 찬란히 빛나고 있었으므로, 두 볼은 장미보다 더 붉게 물들어, 루양에게서 한시바삐 떠나려고 애쓰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그래, 난 아직도 그 백화점에 나가."
하고 낸시양은 말하였다.
"그러나 다음 주일에는 그만두려고 해. 나두 사냥감을 잡았어. 세상에서 제일 큰 것 말이야. 루, 너 인제는 말해도 괜찮겠지……나 미스터 단하고 결혼하게 됐어! 이제 그 사람은 내 거야……루야!"
좀 더 참을성이 있는 경관이 되고자 하는-적어도 그렇게 보였다-새로 채용된 선량해 보이는 젊은 순경 하나가 공원 모퉁이를 지나 순찰을 돌고 있었다. 그때 그의 눈에는, 갑진 모피 코트를 걸치고 다이아몬드 반지를 번쩍이는 웬 여자가 공원 쇠 울타리에 기대어 흐느껴 울고 있으며 옆에는 몸이 호리호리하고 매무새가 수수한 어떤 직업여성이 울고 있는 상대방을 위로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혼혈인(混血人) 순경은 새 세대의 사람이라, 모른 체하고 그냥 지나가 버렸다. 그가 야경봉(夜警棒)으로 보도를 두들기면 설사 그 소리가 멀리 별나라에까지 들린다고 하더라도, 한 경찰관으로서 그가 갖고 있는 권한으로서는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아무런 힘도 발휘할 수 없다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