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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어머니

W. S. Maugham

 

나는 아파트의 뜰 안에서 몇몇 사람이 다투는 소리를 듣고 방에서 나와 귀를 기울였다.

"새로 세 든 사람이 짐꾼하고 실랑이가 벌어졌어요."

어떤 여자가 말하였다.

그곳은 세빌에서도 가장 난잡한 구역인 라 마카레나 뒷골목에 있는 스페인식 정원 주위에 지어 놓은 2층 아파트 셋집이었다. 그 셋방에는 스페인에 남아 돌아가는 노동자와 하급 공무원, 우체부, 순경, 전차 운전수들이 세를 들었으며, 아이들이 온통 법석대고 있었다. 세대 수는 20가구쯤 되었는데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사소한 일로 곧잘 싸움을 하고, 또 쉽게 화해를 하곤 하였다. 그리고 고개를 돌리면서 신이 나서 지껄여대었다.

그런데 안달루시아인들은 성품이 상냥하여 서로 의좋게 지냈으며, 서로 기꺼이 도와주는 것이었다. 한때 방 하나가 오래 비어 있더니, 그날 아침에 어떤 여자가 세를 든 것이다. 그녀는 한 시간 후에 잡동사니 짐보따리들을 손수 들고 나머지는 갤리인() 한 사람에게 지워 가지고 이사해 왔다.

말다툼은 더욱 커져갔다. 위층에 있는 두 여인은 싸움 소리를 엿듣기 위해 발코니에 기대어 섰다. 그녀들은 서로 이사 온 여자가 욕설을 마구 퍼부으며 지르는 날카로운 목소리와 간간이 짐꾼이 대꾸하는 퉁명스러운 소리를 듣고 서로 팔꿈치를 쿡쿡 찔렀다.

"돈을 다 줄 때까진 못 가겠소."

짐꾼이 말하였다.

"아니 다 줬는데 왜 그래요? 댁에서 3리라에 해 준다고 말하지 않았어요?"

"천만에요! 4리라를 주기로 하고 단 소리를 해요?"

그들은 2펜스 반도 못되는 것을 가지고 깎아야 하느니, 깎을 수 없느니 하고 다투었다.

"그래 요까짓 걸 나르는데 4리라나 달라는 거요? 이 양반이 돌았구려!"

그녀는 짐꾼을 떼밀려고 하였다.

"다 줘야 가겠소."

그는 다시 버티었다.

"정 그럼 1페니만 더 줄테야요."

"안 돼요."

언쟁은 더욱 심해갔다. 그녀는 짐꾼에게 고래고래 욕설을 퍼부으면서 마구 삿대질을 하였다. 그러자 짐꾼은 참다 못해 말하였다.

"그럼 좋소. 1페니만 더 내요. 나는 가 봐야겠소. 세상에 당신 같은 얌체 여편네 때문에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소."

그녀는 짐꾼에게 돈을 주었다. 그는 침대 요를 내동댕이치고 가 버렸다. 그는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마구 퍼부었다. 그녀가 이사 보따리들을 끌어들일 때, 발코니에 서 있던 두 연인은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고 수군거리는 것이었다.

"어쩌면 얼굴이 저렇게 흉칙하게 생겼을까. 마귀 같네요."

그때 계집애 하나가 2층으로 올라온 것을 보고, 어머니가 물었다.

"로잘리아, 너 저 여자 봤니?"

"짐꾼한테 물었더니 트리아나에서 짐을 싣고 왔대요. 4리라 주겠다고 말해 놓고 딴 소릴 했다지 뭐예요."

"이름이 뭐라든?"

"잘은 모르지만 트리아나에서는 모두들 라 카치라라고 부르더래요."

그 깍쟁이 여자는 보따리를 운반하기 위해 다시 나타났다. 그녀는 발코니에서 자기를 바라보는 여자들을 쳐다보았다. 로자리아는 몸서리를 쳤다.

"저는 저 여자가 왜 그렇게 무서워요?"

라 카치라는 올해 갓 마흔이었다. 여윌 대로 여위어 손은 뼈마디가 까칠하고 손가락은 마치 독수리의 발톱처럼 보였다. 볼은 움푹 들어가고 살갗은 쭈굴쭈굴하니 누렇게 떠 있었다. 창백하고 두터운 입술로 입을 벌리면 맹수처럼 날카로운 이발을 드러내곤 하였다. 검은 머리칼의 매듭은 거칠게 어깨 위로 처녀 있었으며, 밋밋한 어릿단은 양쪽 귀밑까지 드리워 있었다. 눈꺼풀 속에 깊이 박힌 크고 검은 눈동자는 사납게 번쩍거려 아무도 감히 가까이하여 말을 건넬 엄두를 내지 못할 만큼 표독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아무하고도 사귀지 않았으므로 이웃 사람들의 의심은 더욱 높아졌다. 그들은 그녀의 초라한 옷차림에서 매우 가난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날마다 아침 여섯 시에 밖으로 나갔다가 밤이 되어서야 돌아왔다. 그러나 무슨 일을 해서 살아가는지 알 수 없었다. 이웃 사람들은 아파트에 함께 살고 있는 순경더러 좀 알아 달라고 부탁하기도 하였다.

"그 여자가 공공질서를 방해하지 않는 이상 무엇 때문에 성화들이오."하고 순경이 말하였다.

그러나 이곳 세빌에서는 남에 대한 험담이 금세 퍼지는 터이라, 2, 3일 후에 2층에 살고 있는 석공(石工)이 트리아나에 사는 자기 친구가 그녀의 내막을 알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그 말에 의하면 라 카치라는 살인죄로 7년 동안 감옥살이를 하다가 한 달 전에 풀려나왔다는 것이다. 그녀는 트리아나에서 살고 있었는데, 동네 아이들이 그 일을 알아내어 그녀에게 마구 돌을 던지며 욕을 퍼부으므로, 그녀는 아이들을 마구 쥐어박으며 한바탕 소동을 일으킨 끝에, 주인에게 쫓겨났다는 것이다. 그러자 그녀는 어느 날 아침에 집주인과 자기를 쫓아낸 모든 사람들에게 악담을 퍼붓고 갑자기 어디론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누구를 죽였어요?" 로자리아가 물었다.

"그 여자의 애인이란다." 석옹이 대답하였다.

"어머, 그런 여자에게도 애인이 있었나요?" 로자리아가 비웃는 어조로 말하였다.

"성모 마리아여!" 로자리아의 어머니 필라가 큰 소리로 말하였다.

"우리는 해치지 않게 해 주시옵소서! 내가 뭐라고 하던. 꼭 살인범같이 생겼다고 했지?"

로자리아는 몸을 떨면서 십자가를 그었다. 그때 러 카치라가 하루의 일을 마치고 막 돌아왔다. 수군거리던 사람들은 섬찟하여 한데 뭉치는 듯한 태도를 취하며, 두려운 얼굴로 그녀의 험상궂은 눈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들이 잠자코 있는데 어떤 불길한 생각이 들어 의아스러운 눈으로 힐끗 쳐다보았다. 순경이 <안녕하세요?>하고 말을 걸면서 인사를 하였다.

"안녕하시오!"

그녀는 얼굴을 찌푸리며 말하고, 그들의 앞을 재빨리 지나 자기 방에 들어가 문을 쾅 닫아 버렸다. 이어서 문을 잠그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흉칙하고 사나운 눈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사람들은 무슨 불길한 주문(呪文)에 홀리기나 한 것처럼 나지막한 소리로 수군거렸다.

"저 여자의 마음속에는 악마가 들어 있나 봐." 로자리아가 말하였다.

"마뉴엘, 당신이 마침 곁에 있어서 우리를 지켜 줄테니 다행이군요." 로자리아의 어머니가 순경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그러나 라 카치라는 말썽을 일으키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녀는 아무에게도 말 한마디 건네지 않고, 자기 일만 해나갔으며, 남과 가까워지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자기가 살인을 하여 오랫동안 감옥에 갇혀 있었던 자기의 비밀을 이웃 사람들이 알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었다. 그녀의 얼굴 주름살은 더욱 거칠어지고 깊숙이 박힌 눈망울은 한층 냉혹하게 보였다.

그러나 차츰 그녀에 대한 이웃 사람들의 두려움도 사라져 버렸다. 수다스러운 필라도, 때때로 뜰 안에 앉아 있는 사람들 사이를 말없이 지나가는 이 사나운 여인에 대하여 별로 관심을 갖지 않게 되었다.

"아마 감옥살이를 하다가 돌았나 봐. 곧잘 그렇게 되는가 보더군요."

그런데 하루는 그들을 다시 쑥덕공론으로 몰아넣은 하나의 사건이 생겼다. 아파트의 정문에 어떤 젊은 사나이가 나타나 아토니아 싼체즈라는 사람을 찾았다. 뜰 안에서 스커트를 꿰매고 있던 필라는 땅을 바라보면서 어깨를 움츠리고 말하였다.

"여기 그런분은 사지 않는데요."

"여기 살고 있을 텐데요."하고 청년은 대답하였다. 그리고 잠시 말을 멈추고 있다가,

"참 그 여자를 라 카치라라고들 부르더군요."

", 그러세요? 저 방이에요."

로자리아가 대문을 열고 방문을 가리키면서 말하였다.

"고맙습니다."

청년은 로자리아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녀는 혈색이 붉으레한 멋지고 큰 눈을 가진 아름다운 소녀였다. 윤기가 흐르는 검은 머리에는 붉은 카네이션이 꽃혀 있고, 풍만한 젖가슴에 젖꼭지가 블라우스 위로 볼록 솟아나 있었다.

"당신을 낳은 어머니에게 축복을 드립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받으시기를!"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그는 방문을 두들겼다. 모녀는 청년의 뒤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누굴까? 라 카치라를 찾는 사람은 통 볼 수 없었는데……." 필라가 말하였다.

방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없었다. 그는 다시 문을 두들겼다.

"누구요?" 라 카치라의 앙칼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머니!"하고 그는 말하였다. 문이 삐걱거리더니 활짝 열렸다.

"큐리토!"

녀는 청년의 목을 껴안고 뜨거운 키스를 퍼부었다. 이어서 사랑에 넘치는 제스처로 아들을 쓰다듬고 얼굴을 받쳐 들었다. 이 광경을 바라보던 모녀는 그녀에게 그런 상냥한 데가 있는 줄은 생각조차 못 하였다. 그녀는 너무나 반가워 눈물을 글썽거리며 아들을 방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저 여자의 아들이구먼요."

로자리아가 놀라운 얼굴을 하고 말하였다.

"누가 저런 근사한 아들이 있는 줄 상상이나 하겠어요."

큐리토는 약간 마른 얼굴에 희고 고른 이빨을 갖고 있었다. 머리를 짧게 깍고 관자놀이 위를 면도질한 것으로 보아 안다루시아 사람임에 틀림이 없었다. 그는 어른다운 수염 자국이 갈색 피부에 푸르죽죽하게 보이는 멋쟁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그의 멋진 옷매무새는 사람들의 호감을 살 만하였다. 몸에 꼭 끼는 바지에 짧은 조끼하며, 가장자리에 주름이 잡힌 셔츠는 최신식이었으며, 머리에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있었다.

이윽고 라 카치라의 방문이 열리더니 그녀가 아들의 팔을 끼고 밖으로 나왔다.

"다음 주일에 또 오겠지?" 그녀가 물었다.

", 별일이 없으면 오지요."

청년은 로자리아를 힐끗 쳐다보고 나서 자기 어머니에게 인사를 하고, 로자리아에게도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하나님의 은총을 받으시기를!" 그녀가 말하였다.

로자리아는 그에게 눈웃음을 쳐 보였다. 그녀의 검은 눈은 아름답게 빛났다. 라 카치라는 이 광경을 훔쳐보고 얼굴에 넘치던 기쁨도 사라져 버린 듯 실쭉해지더니, 다시 갑자기 먹장구름처럼 어두워지는 것이었다. 그녀는 무섭게 얼굴을 찌푸리고 그 아름다운 소녀를 바라보았다.

"저 사람이 당신의 아들이에요?"

청년이 저만치 사라지자 필라가 물었다.

"그래요. 내 아들이라오."

라 카치라는 무뚝뚝하게 대답을 하고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녀의 마음은 그 무엇으로도 누그러지게 할 수 없었다. 그녀는 행복할 때에도 남들이 가까이 지내려는 것을 물리치곤 하였다.

<참 멋쟁이야!> 로자리아는 혼자서 중얼거렸다. 그녀는 그 후 며칠을 두고 천연의 생각을 하였다.

라 카치아의 아들에 대한 사랑은 끔찍하였다. 아들은 그녀가 이 세상에서 갖고 있는 전부였다. 그리하여 질투에 가득 찬 불같은 열정으로 아들을 사랑하였다. 그것은 아무리 극진한 효도로도 갚을 수 없는 사랑이었다. 그녀는 자기가 아들에게 가장 소중한 존재가 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아들의 직장 관계로 함께 살 수 없는 것이 한이었다. 떨어져 있는 동안에 아들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고 생각하면 괴롭기 짝이 없었다. 그녀는 아들이 어떤 처녀에게 청혼을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몸부림치며 괴로워하는 것이었다.

이곳 세빌에서는 귀가 솔깃한 처녀에게 총각이 달콤한 말을 소근거리며 밤중까지 창가에 앉아 있거나, 또는 쇠울타리나 대문깐에 서서 한 쌍의 남녀가 소근거리는 광경은 얼마든지 볼 수 있었다. 라 카치라는 멋진 청년은 뭇 여성들의 미소를 한 몸에 받게 마련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언제나 아들에게 애인이 있느냐고 물어보는 것이었다. 그러면 아들은 으레 저녁이면 일에 바빠서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한다고 대답하였다. 그녀는 아들이 거짓말을 하는 줄 알면서도, 그렇게 부정을 하면 기쁘기만 하였다.

그녀는 로자리아의 자극적인 시선에 미소로 대답하는 아들을 보자 분통이 치밀었다. 그녀는 전부터 이웃 사람들을 미워하고 있었다. 그들은 행복하지만 자기는 비참한데다가, 그 무서운 비밀까지 그들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는 모두들 한 패거리가 되어 아들을 자기에게서 빼앗아가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미칠 것 같은 환상에 더욱 그들을 미워하였다.

그녀는 다음 일요일 오후에 자기 방에서 나와 뜰 안을 가로질러 대문깐에 서 있었다. 이웃 사람들은 너무나 뜻밖의 일이라 저마다 한마디씩 하였다.

"저 여자가 왜 저기 서 있는지 아세요? 귀하신 아드님께서 오실 텐데, 우리에게 그를 보이고 싶지 않아서 그러는 거예요."

", 우리가 자기 이들을 잡아먹나?"

이윽고 아들이 도착하였다. 그러자 아닌 게 아니라 그녀는 아들을 재빨리 자기 방으로 데리고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 여자는 아들에 대하여 애인처럼 질투하는군." 필라가 말하였다.

로자리아는 다시 깔깔대면서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반짝이는 눈에는 짓궂은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큐리토와 말이라도 한마디 건네어 보면 무척 재미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라 카치라가 노발대발할 것을 생각하니 로자리아는 흰 이빨이 드러나 보이도록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그들 모자(母子)가 외출을 하려면 자기를 지나쳐가지 않을 수 없도록 하기 위해 대문깐에 나가 서 있었다. 그러나 라 카치라는 로자리아를 보자 아들과 시선을 교환할 수 없게 하기 위해 아들을 가로막는 것이었다. 로자리아는 어깨를 으쓱 치켜올렸다.

", 나를 그렇게 쉽사리 물리치지는 못할걸!"

그녀는 마음속으로 뇌까렸다.

다음 일요일 날 라 카치라가 대문깐에 나와서 기다릴 때, 로자리아는 멀찌감치 나가 그 청년이 오리라고 생각되는 곳에서 서성거렸다. 이윽고 큐리토가 나타났다. 그러나 그녀는 못 본 체하고 천천히 발길을 옮겨 놓았다.

"여봐요!"

그는 걸음을 멈추고 말을 건네었다.

"어머, 전 도 누구시라구! 당신은 저에게 말을 통 건네지 않을 줄 알았는데……두려울 테니까요."

"저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아요."

그는 으시대며 말하였다.

"당신의 어머님은 빼놓고 말이죠?"

그녀는 마치 그가 자기 곁에서 떠나주기라도 바라는 것처럼 마지못해 걸어갔다. 그러나 그가 결코 자기 곁을 떠나지 않으리라는 것은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어디로 가시는 길입니까?"하고 그는 물었다.

"큐리토, 당신이 그걸 알아서 무엇하겠어요? 빨리 어머니한테나 가보세요. 도련님! 그렇지 않다가는 매를 맞을 테니까요. 당신은 어머니하고 함께 있을 때는 무서워 내 얼굴도 쳐다보지 못하면서 뭘 그러세요."

"원 천만에 말씀입니다."

"그럼 안녕. 저는 볼일이 있어서 그만 가야겠어요."

로자리아는 점잖게 돌아가는 그를 뒤돌아보고 혼자서 깔깔 웃었다.

청년이 어머니와 함께 외출할 때 로자리아는 전과 같이 또 뜰 안에 있었다.

청년은 수줍어하면서도 용기를 내어 발을 멈추고서 인사를 하였다. 라 카치라는 발끈하여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큐리토, 이리와!" 그녀는 거친 목소리로 말하였다.

"너 거기서 뭘 기다리고 있는 거냐?"

그는 발길을 돌렸다. 로자리아에게 무슨 말을 건네려고 잠깐 멈칫하다가 자기를 억제하고 그냥 어둠컴컴하고 고요한 자기 방으로 되돌아갔다.

2, 3일 후에 이곳 세빌의 수호신 성 이시드로의 축제가 있었다. 그리하여 석공과 그 밖의 몇몇 사람들이 이 휴일을 경축하기 위해 아파트의 뜰에 초롱불을 한줄로 쭉 달아 놓았다. 그 초롱불은 맑게 개인 여름밤을 찬란히 밝히고 있었다. 하늘은 반짝이는 별들을 반가이 맞아주는 곳 같았다.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뜰 한복판의 의자에 모여앉아 있었다.

부인네들은 어린것에 젖을 빨리고 부채질을 하면서 수다를 떨다가는 좀 나이가 찬 애가 보채기라도 하면 마구 윽박지르는 것이었다. 이 저녁 한때의 시원한 공기는 숨 막힐 듯한 한낮의 더위에 비하면 매우 상쾌하였다. 투우 구경을 하고 돌아온 축들은 떠들어대면서 유명한 투우사 벨몬테의 재주를 정확하고 상세하게 재연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시시각각으로 다채롭게 변해 갔다. 그들은 생생한 상상력을 더듬어 가면서 일찍이 이곳 세빌의 역사상의 흔적이 없는 매우 훌륭한 연기를 하였다고 지껄여대었다. 뜰안에는 라 카치라만 빼놓고는 모든 사람들이 다 나와 있었다. 그녀의 방에는 촛불만이 외롭게 깜박거렸다.

"그런데 그 여자의 아들은 어디 갔어요?"

"방에 있어요."

피라가 말하였다.

"한 시간 전에 이리로 지나갔어요."

"아마 재미를 보고 있을 테지요." 로자리아가 웃으며 말하였다.

"로자리아! 라 카치라의 걱정은 작작하고 춤이나 한번 추어보지 그래."하고 옆에 있던 사람이 말하자,

"그래, 그래, 아가씨께서 한번 춰보지."하고 모두들 입을 모아 말하였다.

스페인 사람들은 춤을 추기 좋아하지만, 남의 춤추는 것을 구경하는 것도 좋아한다. 옛말에도 스페인 여자치고 춤추기 위해 태어나지 않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고 한다. 모두들 재빨리 삥 둘러앉았다. 석공과 전차 차장이 기타를 가지고 나왔다. 로자리아는 케스타네츠(춤출 때 손에 쥐고 소리를 내는 악기의 일종)를 손에 쥐고, 자기 또래의 소냐와 함께 춤을 추기 시작하였다. 큐리토는 음악 소리가 들려오자 비좁은 방 안에서 귀를 기울였다.

<춤들을 추는군.> 그는 혼자 중얼거렸다.

그는 금세 사지가 근질근질하였다.

그는 커튼 사이로 초롱불이 환히 비치는 가운데 웅성거리는 사람들을 내다보았다. 두 소녀가 춤을 추고 있었다. 로자리아는 나들이옷을 입고 풍속대로 짙은 화장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머리에 꽂힌 한 송이 아름다운 카네이션이 유난히 빛나고 있었다. 그는 가슴이 울렁거리기 시작하였다.

스페인에서는 사랑이 급속도로 움트고 자랐다. 그는 처음 로자리아에게 말을 걸던 날부터 줄창 그 아름다운 아가씨의 생각을 해 왔었다. 그는 창문에 가까이 다가갔다.

"너 거기서 뭘하고 있니?" 어머니가 물었다.

"춤추는 걸 구경하고 있어요. 어머니는 내가 즐겁게 노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시나 보군요."

"로자리아가 보고 싶어서 그러지?"

어머니는 가로막으려고 하였다. 그러자 아들은 어머니를 밀치고 밖에 나가 춤 구경을 하였다. 어머니는 한두 발짝 따라가다가 그만두고 어둠컴컴한 곳에서 골이 잔뜩 나 애를 태우고 있었다. 로자리아는 그를 보았다.

"저를 보고 놀라셨지요?"

그녀는 그의 앞을 지나가면서 말하였다. 춤은 소녀의 마음을 미치게 하였으므로 라 카치라는 전혀 두렵지 않았다. 한차례의 춤이 끝나자, 그녀의 파트너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녀는 서슴치 않고 큐리토에게 가서 머리를 쳐들고 가슴을 쑥 내밀며 다가섰다.

"당신은 물론 못 추지요?" 그녀가 말하였다.

"천만에, 출줄 알아요."

"그럼 오세요."

그녀는 애교 있게 눈웃음을 쳐 보였으나, 그는 망설이고 있었다. 어깨너머로 어머니를 뒤돌아본 것이 아니라, 어둠 속에서 혼자 갇혀 있는 어머니의 심정을 헤아려 보았던 것이다. 로자리아는 그의 시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차렸다.

"두려우세요?"

"두려울 게 뭐요?"

청년은 어깨를 으쓱 치켜올리며 말하였다.

그는 사람들이 빙 둘러앉은 한 가운데로 걸어 나왔다. 기타를 치는 사람들의 솜씨가 서툴렀으므로 구경꾼들은 때때로 <헤잇> <헤잇>하고 소리를 질러 박자를 맞춰가면서 율동적으로 손뼉을 쳤다. 로자리아가 큐리토에게 캐스터네츠를 주었다. 그리고 두 남녀는 춤을 추기 시작하였다. 그들의 귀에는 어둠 속에서 뭐가 독사처럼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이제 로자리아는 춤에 도취되어 앞뒤를 헤아리지 않게 되었다. 그녀는 깔깔대며 어둠 속에 희미하게 나타난 무섭도록 창백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라 카치라는 춤추는 동작하며 좌우로 흔들어대는 몸집과 뒤얽힌 발걸음새를 잠자코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아들이 캐스터네츠를 치며 로자리아를 껴안았을 때, 그녀가 멋있게 제스처를 부리며 몸을 뒤로 젖히고 아들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생글생글 웃는 것이 눈에 띄었다. 그러자, 그녀의 두 눈은 불타는 석탑처럼 이글거려 눈동자가 활활 타오르는 것 같았다. 그러나 아무도 그녀에게 관심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격분한 나머지 신음소리를 질렀다. 춤이 끝나자 주위의 사람들은 박수갈채를 하였다. 로자리아는 이에 응답하면서 생글생글 웃으며 큐리토에게 그가 그처럼 춤을 잘 추는 줄은 미처 몰랐다고 말하였다.

라 카치라는 자기 방에 들어가 문을 잠가 버렸다. 아들이 와서 문을 열어달라고 하였지만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럼 가보겠어요."하고 아들은 말하였다.

어머니의 가슴은 괴로움으로 하여 피를 토할 지경이었지만,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아들이 자기가 갖고 있은 전부였으며, 이 세상에서 자기가 사랑하는 전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아들이 미웠다. 그녀는 그날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사람들이 자기 아들을 빼앗아가려고 한다고 생각하니 미칠 지경이었다. 이튿날 아침에 그녀는 일하러 가지도 않고 로자리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로자이라는 어젯밤에 그 황홀한 춤으로 하여 약간 구겨진 옷차림을 하고 나타났다. 라 카치라가 별안간 소녀의 앞을 가로막아 섰다. 소녀는 질겁을 하였다.

"내 아들을 어떻게 할 심산이야?"

"무슨 말씀이세요?"

로자리아는 놀라운 얼굴을 하고 대답하였다.

라 카치라는 격분한 나머지 몸을 와들와들 떨었다. 그러더니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손을 깨물었다.

", 넌 내 말을 뻔히 알아들으면서도 시치미를 떼는구나. 너는 내 아들을 나한테서 빼앗아가려는 거야?"

"내가 당신의 아들을 원하는 줄 아세요? 제발 나한테 가까이 오지 않게 해 주세요. 그런데 내가 가는 곳마다 뒤따라오니 어쩌면 좋아요?"

"거짓말 말아!"

"그럼 아들에게 물어보세요?"

로자리아의 목소리가 하도 앙칼져 라 카치라는 거의 참을 수 없었다.

"저를 만나기 위해 거리에서 한 시간씩이나 기다리고 있어요. 왜 당신이 이들을 붙잡아 두지 못하세요?"

"거짓말 말아! 네가 그러면서 뭘 그래!"

"제가 원한다면 애인쯤은 얼마든지 구할 수 있어요. 제가 왜 하필 살인범의 아들을 원하겠어요."

라 카치라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피가 머리끝까지 치솟고 눈앞이 캄캄하였다. 그녀는 그만 로자리아에게 덤벼들어 머리칼을 와락 잡아 흔들었다. 소녀는 비명을 지르면서 몸을 피하려고 하였다. 마침 지나가던 웬 사람이 달려들어 그들을 떼어 놓았다.

"큐리토에게서 손을 떼지 않으면 죽여 버릴 테다." 라 카치라는 외쳤다.

"그럼 누가 겁을 낼 줄 알아요? 떼어놓을 수 있으면 떼어놓아 봐요. 아들은 나를 자기 눈동자보다 더 사랑하고 있다는 걸 알아야 해요."

"이제 그만 이리가요."하고 그 남자가 말하였다.

"로자리아, 말대꾸를 말어!"

라 카치라는 격분한 나머지 마치 먹이를 빼앗긴 맹수처럼 으르렁거리면서 거리로 뛰어나갔다.

그날 밤의 춤은 큐리토를 미치게 하였다. 그는 로자리아와 깊숙이 사람에 빠졌던 것이다. 이튿날 그는 종일 그녀의 붉은 입술만 생각하였다. 그녀의 눈동자는 그의 마음속에서 빛났으며, 그를 황홀케 하였다. 그는 열렬히 그녀를 요구하였다. 저녁이면 마카레나 방향으로 어슬렁어슬렁 걸어가다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어느덧 로자리아의 집 앞에 가 닿는 것이다. 그러면 그녀가 뜰 안에 나타날 때까지 그는 어두운 현관 앞에서 기다리곤 하였다. 맞은편 끝에 있는 그의 어머니 방에서는 불길이 외롭게 비치고 있었다.

<로자리아!> 그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불러 보았다.

그녀는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르며 뒤돌아보았다.

"오늘은 웬일로 여기까지 오셨어요?"

그녀는 그에게로 가까이 다가오며 속삭이는 것이었다.

"나는 당신과 한시도 덜어질 수 없어."

"왜요?"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당신을 사랑하니까."

"오늘 아침에 당신의 어머니가 나를 죽이려고 한 걸 아세요?"

그녀는 안타루시아인 특유의 과장된 말씨로 사건의 전말을 이야기하였다. 다만 그의 어머니를 크게 격분시킨 자기의 마지막 모욕만은 빼놓았다.

"어머니는 악마의 성격을 갖고 있어요."

하고 그가 말하였다. 그는 허세를 부리며 말을 이었다.

"내가 어머니께 말씀드리지요. 당신은 나의 애인이라고……"

"퍽 반가워 하실 테지요."

하고 로자리아는 비꼬아 주었다.

"내 아파트 문 앞까지 와 주겠어요?"

"글쎄요."

청년은 킬킬거리며 웃었다. 왜냐하면 그녀의 말투로 보아 그렇게 나올 줄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집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씨엘페스를 지나갈 때 전에 없이 신이 났다.

이튿날 그가 와 보니 그녀가 먼저 가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세빌 지방의 전통적인 연애방식에 따라서 철문을 사이에 두고 오랫동안 소근거렸다. 그래도 큐리토에게는 그 철문이 장해물이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그가 로자리아에게 "나를 사랑해 주시겠어요?"하고 물었을 때, 그녀는 대답 대신에 좀 요염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은 피차의 눈 속에서 활활 타오르는 정렬의 불꽃을 찾아보려고 애썼다. 그는 밤마다 그녀를 찾아갔다.

그녀를 찾아가는 것을 어머니가 알까 봐 두려워, 다음 일요일에는 어머니를 만나러 가지 않았다. 불쌍한 어머니는 아들이 오기를 가슴을 태우며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무릎을 꿇다시피하고 아들의 용서를 빌 심산이었다. 그래도 아들은 오지 않았다. 그녀는 아들이 미웠다. 차라리 발로 밟아 죽이고 싶을 지경이었다. 아들을 만나 볼 희망조차 없이 또 한 주일이 지나간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막혔다.

아들은 주 주일이 지나도록 오지 않았다. 그녀는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괴로웠다. 무척 괴로웠다. 그녀는 어떤 애인도 따르지 못할 만큼 아들을 사랑하였다. 그녀는 아들이 오지 않는 것은 필경 로자리아의 탓이라고 혼자서 중얼거렸다. 그 소녀의 생각을 하니 화가 치밀었다.

드디어 큐리토는 용기를 내어 어머니를 찾아보러 갔었다. 어머니는 기다리다 지쳐 버렸다. 사랑이 식어 버린 것 같았다. 그녀는 키스를 하려는 아들을 떠밀었다.

"그동안 왜 안 왔니?"

"어머니는 제가 못 들어가게 문을 잠가 놓으셨더군요. 그래 싫어하는 줄 알았지 뭐예요."

"그뿐이야, 다른 이유는 없어?"

"무척 바빴어요." 그는 어깨를 움추리며 말하였다.

"뭐 바빴다고? 너 같은 게으름뱅이가 그동안에 뭘 하고 있었던 거야? 로자리아를 만나러 갈 때는 바쁜 일이 없었을 테지."

"어머니는 왜 그 여자를 때렸어요?"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그녀를 만났구나!"

어머니는 아들에게 성큼 다가갔다. 그녀의 두 눈에선 불길이 번쩍였다.

"그년이 날보고 살인범이라고 하더라."

"거 무슨 말씀이세요."

"무슨 말아냐구?"

그녀는 뜰 안에서도 들을 만큼 큰 소리로 떠들어대었다.

"재가 살인을 한 것도 다 너 때문이야, 그렇지 뭐니, 난 폐피 싼티이를 죽였다. 그자가 너를 때렸기 때문이다. 그래 나는 7년 동안이나 감옥살이를 하였다. 이것도 다 너를 위해서였다. 7년이라는 세월은……, 어리석은 녀석 같으니……넌 그년이 너를 사랑하고 있는 줄 아는구나, 그년은 밤마다 대문에 서서 세월을 보낸다."

"다 알고 있어요."

아들은 싱긋 웃으면서 대답하였다.

어머니는 화가 치밀었다. 그리하여 어쩔 줄을 모르는 시선으로 아들을 쏘아보았다. 그리고는 모든 것을 알아차렸다. 그녀는 고통과 분노를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괴로움이 극도에 달하여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그래 밤마다 대문까지 오면서 나한테 안 들리다니. 아 그렇게 야속한 데가 어디 있느냐. 나는 이날 이때까지 너를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지 사양치 않았다. 내가 폐피 씩티이를 사랑한 줄 아니? 난 너한테 빵을 얻어 먹이기 위해 그자의 주먹질도 참아 온 거야. 그자가 너를 때릴 때 나는 그만 그자를 죽여 버린 거야. , 하느님 맙소사! 나는 너를 위해 살았을 뿐이다. 네가 아니었던들 나는 그처럼 오랜 감옥살이를 하느니 차라리 죽어 버렸을 거야."

"어머니 이성을 되찾으세요. 나는 스무 살이에요, 어머니에게 어떻게 해 달라는 거예요? 로자리아가 아니더라도 저는 딴 여자를 사랑했을 거예요."

"에잇, 짐승만도 못한 놈! 보기 싫다. 저리 썩 나가!"

그녀는 아들을 문 쪽으로 난폭하게 떠밀었다. 아들은 어깨를 움츠렸다.

"내가 여기 있고 싶어서 있는 줄 아세요?"

아들은 뜰 안을 사뿐사뿐 지나 철문을 탁 닫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어머니는 비좁은 방 안을 왔다 갔다 하였다. 시간이 무척 지루하였다. 그녀는 오랫동안 들창가에 서서 마치 금세 덤벼들 듯한 맹수처럼 사나운 기세로 가슴을 뜯는 듯한 안타까움을 억제하면서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대문에서 누가 밖에 있다는 신호로 손뼉을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숨을 헐떡이면서 신경을 곤두세우고 밖을 응시하였다. 그것은 석공이었다. 그녀는 좀 더 기다려 보았다. 이번에는 로자리아의 어머니 필라가 나타나 계단을 천천히 걸어 올라가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라 카치라는 숨이 막히는 것을 참고 여전히 기다렸다. 가끔 사지가 떨려왔다.

이윽고 대문에서 가볍게 손벽을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어서 <누구에요?>라는 소리가 났다.

<!>라 카치라는 로자리아의 목소리임을 확인하자 일종의 승리감으로 하여 숨을 거칠게 내쉬었다. 위로 문이 열리더니 로자리아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마당을 가로질러 갔다. 그녀의 거동 속에는 삶의 환희가 넘쳐흘렀다. 그녀가 막 층계에 발을 올려놓으려고 할 때였다. 라 카치라는 쏜살같이 뛰어나가 그녀를 가로막고 팔을 꽉 잡았다. 그녀는 뿌리려고 하였으나 몸을 뺄 수 없었다.

"어떡할 셈이에요? 어서 놔요!"하고 로자리아는 말하였다.

"그동안 내 아들과 어떻게 지내왔니?"

"이거 놓지 못해요. 소리를 지를 테에요."

"너희들이 대문에서 밤마다 만난다는 게 정말이냐?"

"엄마, 사람 살려요! 안토니오!" 로자리아는 날카롭게 소리를 질렀다.

"대답해 봐!"

"정 알고 싶다면 말하겠어요. 당신의 아드님은 나와 결혼하려고 해요. 나를 사랑하고 있어요……, 나도 진심으로 그를 사랑해요."

그녀는 악독한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애쓰면서 라 카치라에게 대들었다.

"당신이 우리 사이를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당신의 아들이 당신을 무서워하는 줄 아세요? 나보고 당신을 미워한다고 했어요. 그리고 당신이 감옥에서 나오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 애가 너한테 그렇게 말하던?"

라 카치라는 한 발짝 뒤로 물러서고 로자리아는 우위(優位)에 서게 되었다.

"그래요, 나한테 그렇게 말했어요. 그리고 또 있어요. 당신의 페피 싼티이를 죽이고, 7년 징역살이를 했다는 이야기도 했어요. 그리고 당신이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다고도 했어요."

로자리아는 이 비참한 여자가 호되게 얻어맞기라도 한 것처럼 몸을 움츠리는 것을 보고, 깔깔대며 표독스럽게 꾸짖듯이 말하였다.

"그러니까 당신은 내가 살인자의 아들과 결혼하기를 거부하지 않는 것을 대견스럽게 여겨야 해요."

그녀는 이렇게 말하고 나서 라 카치라를 떠다밀고 나서 층계를 뛰어 올라갔다. 그러자 라 카치라는 다시 정신을 차리고 이 모욕에 눈이 뒤집힐 지경이었다. 그녀는 격분에 떠는 짐승 같은 소리를 지르면서 로자리아에게로 달려들어 어깨를 잡고 층계 아래로 끌어내렸다. 로자리아는 홱 돌아서며 그녀의 뺨을 후려갈겼다. 그러자 그녀는 가슴에 품고 있던 칼을 꺼내어 저주에 찬 말을 한마디 지르고, 로자리아의 목에 콱 꽂았다. 로자리아는 비명을 질렀다.

"엄마! 나 죽어요!"하며 그녀는 충계 아래로 떨어져 돌바닥 위에 쓰러졌다. 피가 바닥에 흥건히 고였다.

이 절망적인 비명 소리에 놀라 대여섯 개의 방문이 일제히 화닥닥 열렸다. 사람들이 뛰어 나와 라 카치라를 잡으려고 하였다. 그녀는 벽 쪽으로 뒷걸음을 치며 아무도 감히 접근할 수 없는 흉악한 얼굴을 하고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잠시 머뭇거렸다. 이때 필라가 비명을 지르며 발코니 사이에서 뛰어나왔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의 이목이 그리로 쏠렸다. 라 카치라는 이틈을 타서 도망쳐 버렸다. 그녀는 자기 방에 들어가 문을 잠그고 빗장을 질렀다.

마당은 삽시간에 사람들로 득실거렸다. 필라는 대성통곡을 하며 딸을 부둥켜안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의사를 부르러 가고, 어떤 사람은 경찰관을 데리러 갔다. 거리에서 구경꾼들이 몰려와 방문을 둘러쌌다.

의사가 검은 가방을 들고 급히 들어왔다. 이어서 경찰이 달려오자, 십여 명의 사람들이 흥분된 어조로 사건의 경위를 설명하고 라 카치라의 방문을 기리켰다.

경찰관들은 그녀의 방문을 부수고 안으로 들어갔다. 난투가 벌어졌다. 그러자 경찰관들은 그녀에게 수갑을 채워 가지고 밖으로 나왔다. 사람들이 와 밖으로 나왔다. 경관들은 그녀를 에워싸고 있는 사람들을 칼집으로 마구 때려서 흩어지게 하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주먹을 내 휘두르면서 라 카치라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그녀는 멸시하는 듯한 눈초리로 그들을 바라볼 뿐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눈은 승리감으로 하여 빛났다. 경관들은 그녀를 끌고 뜰 안을 거쳐 죽은 로자리아의 곁을 지나갔다.

"죽었어요?"하고 라 카치라가 물었다.

"그렇소." 의사가 심통한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그녀는 이렇게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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