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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 S. Maugham

 

잠자리에 들 시간이 거의 다 되었다. 내일 아침에 일어나면 육지가 보일 것이다. 탁터 맥페일은 파이프에 불을 붙이고 갑판 난간에 기대어 밤하늘에 반짝이는 남십자성(南十字星)을 바라보았다. 그는 일선에서 1년 동안 복무한 끝에 입은 상처를 치료하는데 예상 밖으로 시일이 오래 걸려, 앞으로 적어도 1년은 우풀루섬의 아피아에서 정양할 수 있게 된 것이 무엇보다도 기쁘기 한이 없었다. 하긴 지금까지의 여행만으로도 건강이 상당히 나아진 것 같았다. 선객들은 내일 아침에 튜투일라섬의 파고파고에서 내릴 사람이 몇 있었으므로, 저녁에 간단한 무도회를 개최하였다. 그의 귀에는 아직도 자동식 피아노의 거칠은 멜로디가 울리는 것 같았다. 이윽고 갑판 위는 조용해졌다.

그는 자기 아내가 좀 떨어진 곳에 있는 소파에 앉아서 데이빗슨 내외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보고, 그리로 천천히 걸어가서, 그녀의 곁에 걸터앉았다. 모자를 벗은 그의 머리를 불빛 아래 바라보니, 정수리에는 대머리가 벗겨지고, 머리털은 물론 주근깨가 섞인 피부에 난 잔털도 붉은빛을 하고 있었다. 나이는 사십 세쯤 되어 보이며, 메마른 몸집에 까다롭고 좀 현학적(衒學的)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스코틀랜드 말투에 목소리는 나지막하고 조용하였다.

닥터 맥페일 내외와 데이빗슨 선교사 부처는 이 배에서 처음 만났지만, 서로 매우 가까워졌다. 그것은 그들의 취미가 비슷하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접촉이 잦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을 가깝게 맺어준 큰 인연이라도 있다면, 그것은 밤낮 흡연실에 모여 앉아 포커니, 브릿지니 하는 노름과 술로 세월을 보내는 사람들을 한결같이 싫어하는 점이었다.

맥페일 부인은 이 배 안에서 데이빗슨 부처가 반가이 사귀기를 원하는 사람은 자기네 내외밖에 없다고 마음속으로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 말을 듣고, 좀 수줍어하는 성미이긴 하지만 결코 어리석지는 않은 닥터 맥페일도 거의 무의식적으로 흐뭇하게 생각하는 것이었다. 그가 가끔 배 안에서 남을 트집 잡는 것은 다만 따지기를 좋아하는 성미 때문이었다.

"데이빗슨 부인은 우리가 없었더라면 여행이 지루해서 어떻게 견디었을지 모르겠다고 하더군요." 맥페일 부인은 머리를 곱게 빗어내리면서 말을 이었다. "그 여자는 배에서 사귀고 싶은 사람은 우리밖에 없다는 거예요."

"내가 뭐 대단한 인물인가. 선교사의 신분으로 그렇게 잘난 척해서는 안 될 텐데."

"뭐 잘난체해선가요. 전 그 여자의 말치를 짐작했어요. 그분들이 흡연실에 모이는 사나운 축들과 어울리기가 싫다는 거예요."

"그들의 교조(敎祖) 예수는 그렇게 배타적인 이물이 아닌데……"하고 닥터 맥페일이 웃으면서 말하였다.

"제발 종교에 대해서는 농담 말아요. 제가 언제나 말하잖아요?"

그의 아내는 대답하였다.

"당신은 그 성미 좀 고쳐요. 당신은 남의 장점은 전혀 보려고 들지 않는군요."

그는 푸른 눈동자로 아내를 힐끗 쳐다보았으나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는 아내의 마지막 말에 침묵을 지키는 것이 가정의 평화를 위해 좋다는 것을 오랜 결혼생활을 통하여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아내보다 먼저 옷을 벗고 위층 침대에 기어올라가 책을 읽다가 잠이 들어 버렸다.

그가 이튿날 아침에 갑판에 나와 보니, 배는 어느새 육지에 가까이 와 있었다. 그는 탐스러운 눈으로 육지를 바라보았다. 은빛으로 가늘게 반짝이는 해변이 눈을 가로막는가 싶더니, 갑자기 나무가 무성한 언덕들이 솟아오르는 것이었다. 무성한 야자수는 해변 가까이 침범하고, 그 사이에 사모아인들의 초가집들이 모여 있고, 하얗게 빛나는 작은 교회가 보였다.

데이빗슨 부인은 남편의 옆에 와 나란히 섰다. 그녀는 검은 옷차림을 하고, 끝에 작은 십자가가 매달린 금목걸이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작달막한 키에 짙은 밤색 머리를 정성스럽게 빗어넘기고, 작은 코안경을 낀 푸른 눈이 튀어나와 있었다. 얼굴은 양처럼 길쭉하였으나 아둔한 인상을 주지 않고 오히려 날카롭게 보였다. 아닌 게 아니라 그녀는 새처럼 동작이 민활하였다. 그녀의 특징은 역시 목소리로, 높은 쇳소리를 내고 변화가 없이 단조롭게 들렸으며, 시끄러운 찬공기(鑽孔機)의 소리처럼 신경을 자극하였다.

"부인에겐 이곳이 고향 같겠군요."

닥터 맥페일은 억지로 가볍게 웃으면서 데이빗슨 부인에게 말하였다.

"우리 고향 섬들은 이 섬과는 달리 나지막해요. 산호(珊瑚)섬이니까요. 화산으로 되어 있지요. 그리로 가려면 아직도 열흘은 더 가야 해요."

"그만한 거리는 이 섬들 사이에서는 마치 욮 마을에 가는 거나 마찬가질 테지요."

닥터 맥페일은 익살스럽게 말하였다.

"글쎄요. 그건 좀 지나친 말씀 같은데요. 하긴 바다에서는 거리가 좀 달리 보이긴 해요. 그 점은 선생님 말씀이 옳아요."

닥터 맥페일은 가느다란 한숨을 내 쉬었다.

"전 우리가 이곳에 오래 머물지 않게 된 것이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어요."

하고 데이빗슨 부인은 말을 이었다.

"이곳은 일하기가 무척 어렵다고 하더군요. 기선이 들락거려 사람들의 마음을 온통 들뜨게 하구요. 거기다가 해군기지까지 있으니까요. 그것은 토인들에겐 고마울 것이 하나도 없어요. 우리의 고장은 그런 훼방이 되는 것은 없어요. 하긴 거기 한두 사람의 장사치가 있긴해요. 그렇지만 우리는 그들이 처신을 잘하도록 타이르지요. 만일 이르는 말을 듣지 않으면 그곳을 자진해서 떠나지 않고서는 배기지 못하게 하지요."

그녀는 코끝에 걸친 안경을 바로 잡으면서 푸른 섬을 날카롭게 내다보았다.

"이곳에서는 선교사업을 한다는 건 거의 가망이 없는 일이에요. 저는 이 섬을 뜨게 된 것을 하나님께 얼마나 감사하게 생각하는지 몰라요."

데이빗슨의 전도 구역은 북부 사모아에 있는 섬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게다가 그 섬들은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나무배로 자주 내왕해야 했다. 그런 때에는 아내가 본거지에 남아서 선교사업을 하였다. 닥터 맥페일은 그녀가 전도 사업을 하는 모습을 상상해 볼 때 한심스럽기 짝이 없었다. 그녀는 토인들의 타락에 대하여 핏대를 올리면서 그럴싸하게 늘어놓았다. 그녀의 감정은 매우 섬세하였다. 그녀는 서로 사귄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닥터 맥페일에게 말하였다.

"저희가 그 섬에 처음으로 왔을 때, 토인들의 결혼풍습이 얼마나 우스웠는지 알 수가 없어요. 제 입으로는 도저히 선생님께 말씀드릴 수 없어요. 부인께 말씀드리겠어요. 아마 부인께서 선생님에게 얘기하실 거예요."

그 후에 그는 데이빗슨 부인이 자기 아내와 갑판 의자에 나란히 앉아 두어 시간 동안이나 열심히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았다. 그는 운동하러 그녀들의 부근을 거닐 적에, 먼 청산의 유수처럼 속삭이는 데이빗슨 부인의 흥분한 목소리를 듣고, 아내의 벌린 입과 새파랗게 질린 얼굴을 보고, 무슨 놀라운 이야기를 듣고 있는 줄 알게 되었다. 밤에 선실에서 아내는 자기가 들은 이야기를 숨을 죽여 가면서 남편에게 털어놓았다.

"저 제가 말씀드린 게 어떠세요?"

이튿날 아침에 데이빗슨 부인은 의기양양해서 닥터 맥페일에게 물었다.

"그보다 더 무시무시한 얘기를 들은 적이 있으세요? 제가 직접 선생님께 말씀드릴 수 없는 까닭을 아셨죠? 선생님이 아무리 의사라도 말씀예요."

데이빗슨 부인은 닥터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녀는 끈덕지게 가지가 바라던 성과를 올렸는지 알아보고 싶었던 것이다.

"저희가 처음 그곳에 갔을 때,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는 말을 조금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으실 테지요. 어떤 마을에서도 성한 처녀는 한 사람도 찾아볼 수 없었다니까요. 아마 제 말을 얼른 곧이듣지 않으실 거예요."

그녀는 성하다는 말을 학술용어로 힘주어 강조하였다.

"저는 주인과 그 문제에 대해 여러 번 의논하고, 우선 춤부터 금하기로 했어요. 그들은 춤에 미쳐 있으니까요."

"저도 젊어서는 춤을 좋아했어요."

닥터가 말하였다.

"저도 선생님께서 어젯밤에 부인보고 한번 추자고 하시는 것을 보고 그렇게 생각했어요. 전 남자가 자기 아내와 춤추는 걸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그렇지만 부인께서 추지 않겠다고 하시는 걸 보고 한결 마음이 놓였어요. 그런 환경에서는 자기 자신을 마땅히 지켜야 하니까요."

"그런 환경이라니요?"

데이빗슨 부인은 코안경 너머로 그를 재빨리 쳐다보았으나 곧 대꾸는 하지 않았다.

"백인들 사이에서는 추는 경우와는 환경이 다르지요."

하고 그녀는 말을 계속하였다.

", 주인이 자기 아내가 다른 남자의 팔에 안겨 있는 것을 잠자코 바라보는 남편의 심경을 이해할 수 없다는 말에 동감이에요. 저는 결혼하고 나서 한 번도 춤을 춘 적이 없어요. 그러나 토인들의 춤은 전혀 달라요. 춤 자체가 고약할뿐더러 더 고약한 행동으로 이끌어가거든요. 그렇지만 우리는 그것을 막을 수 있었어요. 하나님의 덕분이지요. 우리 구역에서는 우리가 온 후로 8년 동안 아무도 춤을 추지 않았어요. 정말예요."

그들은 항구 입구에 들어와 있었다. 맥페일 부인이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배는 급히 방향을 바꾸어 천천히 증기를 뿜으며 가고 있었다. 항구는 크고 육지로 둘러싸여 군함과 많은 배가 넉넉히 들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주위에는 높고 험한 푸른 언덕이 솟아 있고, 항구의 입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정원에 둘러싸인 지사(知事)관저에는 바다에서 미풍이 불어오고 있었다. 그들은 두서너 채의 깨끗한 방갈로우와 테니스 코트를 지나 창고가 달려 있는 부두로 나왔다.

데이빗슨 부인은 옆으로 2, 3백 야드 떨어진 곳에 머물러 있는 작은 돛단배를 손가락질하였다. 그들을 아피아까지 태워다 줄 배였다. 섬의 사방에서 토인들이 몰려들었다. 그들은 저마다 극성스럽고 떠들썩하니 활기에 넘쳐 있었다. 어떤 사람은 호기심에서, 어떤 사람은 시드니로 떠나는 여객들과 상품을 매매하려고 모여든 것이다.

그들은 파인애플, 커다란 바나나 다발, 타파 옷감, 조개나 상아로 만든 목걸이, 카바, 나무 그릇, 전투형 통나무배의 모형 등을 갖고 왔다. 그리하여 말쑥하고 단정한 옷차람에 깨끗이 면도를 하고 정직하게 보이는 미국인 선원들은 그들 사이를 서성거리기 시작하였다. 그들 말고 공무원들도 몇 사람 눈에 띄었다. 맥페일 내외와 데이빗슨 부처는 짐을 육지에 운반하는 동안에 구중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닥터 맥페일은 아이들이며 젊은 남자 할 것 없이 거의 모두가 앓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궤양(潰瘍) 같은 흉한 상처를 남긴 피부병을 바라보았다. 그의 직업적인 눈은 처음으로 상피병(象皮病)을 보고 유난히 반짝였다. 사나이들은 이 상피병으로 말마암아 크고 무거운 팔과 흉한 다리를 질질 끌고 돌아다녔다. 그리고 토인들은 남녀를 막론하고 라바라바를 허리에 두르고 있었다.

"저건 보기에도 민망스러운 복장이에요."

하고 데이빗슨 부인이 말하였다.

"주인은 저걸 법으로 금지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지요. 사람들이 허리에 붉은 무명 한 조각밖에 두르지 않고 있을 때, 어찌 도덕적이기를 바랄 수 있겠어요?"

"저 옷은 이곳 기후에 매우 적합한 것처럼 보이는데요."

의사는 이마의 땀을 씻으면서 말하였다.

그들은 이른 아침에 상륙하였는데, 더워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파고파고는 언덕에 둘러싸여 있었으므로 바람은 한 점도 불어오지 않았다.

"저의 담당 구역의 섬에서는 말예요."

하고 데이빗슨 부인은 큰 목소리로 말하였다.

"아무도 라바라바를 입지 못하도록 금했어요. 그래서 늙은이 몇 사람만 아직도 그것을 걸치고 있을 뿐이에요. 여자들은 모두 옷자락이 길고 느슨한 웃옷을 입고, 남자들은 바지와 셔츠를 입도록 했어요. 저희가 온 지 며칠 안 되어 주인은 보고서에 이 섬에 살고 있는 열 살 이상의 소년들이 모두 바지를 입게 되기 전에는 훌륭한 신도가 될 수 없을 것이라고 썼지요."

데이빗슨 부인은 새 같은 눈으로 항구의 입구 위로 두세 차례 떠오른 무거운 잿빛 구름을 쳐다보았다.

빗방울이 후둑후둑 떨어지기 시작하였다.

"어서 비를 피할 데로 들어갑시다."

하고 그녀가 말하였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과 같이 양철지붕을 한 커다란 창고 속으로 들어갔다. 비는 억수같이 퍼붓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얼마 동안 그곳에 서 있었다. 이윽고 데이빗슨씨가 왔다. 그는 여행하는 동안에 언제나 맥페일 내외에게 공손하게 대해 왔었다. 그는 아내와는 달라 사교성은 없었다. 그리하여 대부분의 시간을 독서로 보내었다. 그는 말이 적고 좀 우울한 편이었다. 그의 외모는 특이하여, 키다리인데다 깡마르고, 길다란 사지는 동체에 헐렁하게 달려 있었으며, 볼이 푹 패이고, 광대뼈가 툭 튀어나와 있었다. 창백한 얼굴은 두툼한 관능적인 입술과 너무나 대조를 이루었으며, 머리를 길게 기르고, 코고 검은 눈에는 언제나 슬픔이 감돌고 있었다. 그리고 크고 긴 손가락을 가진 그의 손은, 그가 힘이 세다는 인상을 주었다. 그러나 그에게 가장 특이한 것은 누구에게나, 억눌린 정열의 소유자로 보이는 점이었다. 그것은 매우 돋보이고, 은연중에 상대방에게 불안감을 안겨 주는 것이었다.

이때 그는 반갑지 않은 소식을 전해왔다. 이 섬에 살고 있는 토인들 사이에 사망률이 높은 무서운 홍역이 돌고 있다는 것이었다. 환자들은 육지로 옮겨 검역소의 병원에 입원을 시켰다. 그런데 아피아의 항구에서 이 배는 선원 가운데 전염된 사람은 없다는 것이 분명히 밝혀질 때까지 항구에 들어오지 못한다는 지시가 왔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적어도 열흘은 이곳에 머물러 있어야 할 것 같소."

"나는 아피아에 급히 가봐야 할 텐데……"

닥터 맥페일이 말하였다.

"도리가 없어요. 만일 배에서 환자가 더 생기지 않으면 백인들만 태우고 가도록 되어 있어요. 그러나 토인과의 내왕은 석 달 동안 금한다는군요."

"이곳에 호텔이 있어요?"

맥페일 부인이 물었다.

"없는데요."

"그럼 우리는 어떡허죠?"

"내가 지사와 의논해 보았더니 바닷가에 방을 세놓는 상인이 있대요. 비가 그치면 곧 그리로 가서 알아보시죠. 편히 지내리라는 기대는 말구요. 침대와 비를 피할 지붕만 있으면 감지덕지해야죠."

비는 그칠 것 같지 않았다. 그들은 우비를 걸치고 다시 우산을 받쳐 들고 출발하였다. 그곳에는 마을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몇 채의 관청 건물과 가게가 한둘, 그리고 야자수와 바나나나무 사이에 토인들의 집이 몇 채 보일 뿐이었다.

그들이 찾아 떠난 집은 부두에서 5분쯤 걸리는 곳에 있었다. 2층 거물로 아래 위층에 넓은 베란다가 있었으며, 지붕은 양철로 되어 있었다. 주인은 호온이라는 혼혈인으로, 갈색 살결을 한 아이들이 주렁주렁 매달린 토인 아내와 함께 살면서 아래층에 가게를 내어 통조림과 면직물을 팔고 있었다.

그가 보여주는 방에는 가구가 별로 없었다. 맥페일 내외가 든 방에는 떨어진 모기장이 달린 초라한 낡은 침대와, 삐걱거리는 의자와 세면대밖에 없었다. 그들은 어처구니가 없어 주위를 돌아보았다. 비는 여전히 쏟아져 내렸다.

"당장 필요한 짐만 풀도록 해요." 맥페일 부인이 말하였다.

그녀가 여행용 가방을 끄르고 있을 때, 데이빗슨 부인이 방에 들어왔다. 우울한 환경도 그녀에게는 별로 영향을 끼치지 않는 듯 그녀는 매우 명랑하고 행동이 민첩하였다.

"바늘과 헝겊 조작을 꺼내어 바로 모기장을 고치도록 하셔야죠."

하고 그녀는 말하였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한잠도 주무시지 못할 테니까요."

"모기가 그렇게 사나운가요?"

닥터 맥페일이 물었다.

"요즈음은 한창 모기철이에요. 꽤 극성을 떨어요. 두분께서 아피아의 지사댁 파티에 초청을 받아 가보세요. 부인들마다 손발을 싸도록 덮개를 나눠 주는 걸 보실 거예요."

"비가 잠시 동안이라도 멈췄으면 좋으련만."

맥페일 부인이 말하였다.

"해가 나면 좀 기분이 달라져 니곳을 편히 꾸며 볼 생각도 날지 모르니까요."

"아니, 언제까지 해가 나기를 기다려요. 이 파고파고란 공장은 태평양에서 비가 많이 오기로 유명해요. 저 산들과 만()이 마냥 비를 끌어들이지요. 그리고 1년 중에 이맘때가 되면 누구나 비에 흠뻑 젖을 각오를 해요."

그녀는 얼빠진 사람처럼 방안에 서 있는 맥페일 내외를 번갈아 바라보고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자기가 그들을 인도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들이 너무나 무기력하여 짜증이 났으나, 모든 것을 챙기고 싶은 일종의 충동에서 손이 근질거릴 지경이었다.

"바늘과 헝겊 조각을 이리 좀 주세요. 댁에서 집을 푸는 동안에 제가 모기장을 고쳐 놓을게요. 식사는 한 시나 되어야 하게 될 거예요. 맥페일 선생님은 부두에 가서 댁의 짐짝들이 비를 맞지 않는지 돌아보고 오시는 게 좋을 거예요. 이곳 토인들을 아직 잘 모르시죠. 그들은 짐짝을 비 맞는 고에 내동댕이치고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해요."

의사는 우비를 다시 걸치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호온은 문깐에서 그들이 타고 온 배의 조타사(操舵士)와 의사가 2등 선객과 나란히 서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작달막한 키에 주름진 알굴을 하고 몸차림이 누추한 조타사는 의사가 자나가는 것을 보고 인사를 하였다.

"의사 선생님, 홍역 때문에 퍽 딱하게 되었습니다그려."

하고 그는 말을 꺼냈다.

"그렇지만 선생님께서는 벌써 자리를 잡으셨군요."

닥터 맥페일은 그가 지나치게 추근추근하게 구는 것이 못마땅하였으나, 워낙 온순한 사람이라 좀처럼 화를 내지 않았다.

", 우리는 위층에 방을 얻었어요."

"톰슨 양이 선생님들과 같은 배로 아피아로 가게 되어 제가 데리고 왔습죠."

조타사는 엄지손가락으로 옆에 서 있는 여자를 가리켰다. 나이는 스물일곱쯤 되어 보이고, 통통하여 좀 천해 보이기는 하였지만, 예쁘장하였다. 그녀는 흰옷을 입고 커다란 흰모자를 쓰고 있었다. 그리고 흰 무명 스타킹을 신은 살찐 아랫도리가 번들거리는 흰 가죽 장화 위로 불룩하게 드러나 보였다. 그녀는 닥터 맥페일을 보고 애교 있게 생글생글 웃었다.

"이 사람은 저에게 제일 작은 초라한 방을 주고 하루에 1달러 50센트나 내라지 뭐예요." 뚱뚱하고 유들유들한 호온이 조용히 웃으면서 말을 받았다.

"스원, 좋아. 자네가 정히 그렇게 말한다면 한번 생각해 봄세. 아내와 의논해서 좋도록 하지."

"그런 소리 말구, 지금 당장 결정을 짓도록 하세요. 하루에 1달러 외에는 동전 한 잎 더는 못 낼 테니까 그런 줄 알아요."

하고 톰슨 양이 말하였다.

닥터 맥페일은 빙그레 웃어 보였다. 그는 톰슨 양이 그렇게 뻔뻔스럽게 흥정을 하는 것을 보고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기는 언제나 부르는 대로 값을 치르는 성미였다. 아니 그는 흥정을 하여 값을 깎느니 더 내려고 하였던 것이다.

집주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좋아요. 스원의 얼굴을 봐서 그렇게 하지요."

"그야 물론 그래야지요." 톰슨 양이 말하였다.

"어서 들어와 한잔하세요. 스원씨, 내 가방을 갖다주세요. 그 속에 진짜 라이주()가 들어 있어요. 의사 선생님도 함께 오세요."

"감사합니다. 그러나 나는 그만두겠어요. 지금 짐짝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보러 가는 길입니다."

의사는 이렇게 말하고 빗속으로 나왔다. 항구 입구 쪽으로 빗줄기가 세차게 쏟아져 맞은편 바닷가는 희뿌옇게 보였다. 그는 라바라바만 걸친 채 커다란 우산을 쓰고 있는 몇몇 토인과 마주쳤다. 그들은 저마다 의젓이 몸을 꼿꼿이 세우고 걸어가면서 그에게 웃어 보이면서 괴상한 말로 인사를 건네었다.

그는 식사 때에 돌아왔다. 식사는 객실에 차려 놓았다. 그 객실은 사용하기 위해 꾸민 방이 아니라 체면상 달려 있었다. 곰팡내가 나고 기분이 언짢았다. 무늬가 있는 플러쉬 천으로 싼 깨끗한 응접세트가 벽 가까이에 한 벌 놓여 있고 천장 한복판에 파리가 앉지 못하도록 노란 셀로판종이로 싼 금박을 입힌 샨데리아가 걸려 있었다.

데이빗슨은 오지 않았다.

"그이는 지사를 만나러 갔나 봐요."하고 그 부인이 말하였다.

"그리고 필경 지사에게 붙잡혀 점심을 같이 할 거예요."

키가 작달막한 토인 소녀가 함박스테이크을 한 접시 가져왔다. 이윽고 집주인 호온이 모든 것이 잘 정돈되었는지 보러왔다.

"호온씨, 우리 말고도 또 숙박인이 있지요?"

닥터 맥페일이 물었다.

"여자 손님 한 분에게 방을 빌려주었어요. 자취를 해요."

하고 상인은 대꾸하였다. 그는 아첨하는 눈초리로 두 부인을 바라보았다.

"저는 그 여자가 손님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아래층 방을 줬어요. 그러므로 아무 말썽도 일으키지 않을 거예요."

"그분도 배에 탔던 사람이가요?"

하고 맥페일 부인이 물었다.

", 2등 선실에 타고 있었어요. 그 여자도 아피아로 간대요. 경리사원으로 취직이 되었다나요."

", 그래요?"

호온이 가 버리자 닥터 맥페일이 말하였다.

"혼자서 식사를 하는 건 별로 유쾌하지 않을걸."

"2등실 손님이라면 그렇게 하는 편이 낫겠지요." 데이빗슨 부인이 말하였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 통 짐작이 가지 않는군요."

"나는 조타사가 그 여자를 데리고 왔을 때, 가까이 있었는데, 이름은 톰슨이라고 한대요."

"그럼 어젯밤 조타사와 춤을 추던 그 여잔가요?"

데이빗슨 부인이 이렇게 맞장구를 쳤다.

이윽고 그들은 다른 일에 대하여 이야기하다가 점심을 먹고 나서, 낮잠들을 자러 갔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났기 때문에 피곤했던 것이다. 이윽고 그들은 잠에서 깨어났다. 잿빛 하늘에는 여전히 그름이 낮게 드리워 있었으나 비는 오지 않았다. 그들은 미국인들이 해안을 따라 만들어 놓은 한길을 산책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이 산책에서 돌아왔을 때, 데이빗슨도 방금 돌아와 있었다.

"우리는 이곳에서 두 주일은 더 머물러 있어야 할까 보오."

그는 얼굴을 찌푸리면서 말하였다.

"나는 그 문제로 지사와 의논했지만, 특별한 조처는 취할 수 없다는 거요."

"주인은 하루 빨리 일자리로 돌아가려고 성화예요."

데이빗슨 부인은 걱정스러운 듯이 남편을 바라보면서 말하였다.

"우리는 1년 동안이나 일터를 떠나 있었어요." 데이빗슨은 베란다를 거닐면서 말을 이었다. "선교사업을 토인 선교사들에게 맡겨 놓고 왔는데, 일을 제대로 하는지 여간 걱정이 되지 않는군요. 그들은 선량한 사람이지요. 나는 그들을 트집 잡으려는 생각은 없어요. 그들은 하나님이 두려운 줄 아는 독실한 교인이에요. 그들의 믿음은 본국의 많은 교인들을 무색하게 말 정도지요.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경험이 부족하단 말이오. 한두 번은 버티고 나가지만, 끝까지 참아내지 못해요. 그러므로 이 선교사업을 그들에게만 맡겨 두면, 그들이 아무리 착실하게 일하여도, 시간이 지나면 여러 가지 악덕이 침범하는 것을 그대로 방임한 사실이 드러나거든요."

데이빗슨은 말을 끊고 조용히 서 있었다. 메마르고 후리후리한 키에 창백한 얼굴을 하고 커다란 눈을 번쩍거리는 그의 모습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그의 열렬한 태도와 깊숙이 울려 퍼지는 듯한 목소리에서 그의 진지성을 찾아볼 수 있었다. 그는 말을 이었다.

"나는 할 일이 많소. 나는 일을 민첩하게 처리해 나갈 작정이오. 만일 썩은 나무가 있다면 잘라서 불구덩이 속에 넣어야 해요."

그들은 식사를 마치고 마지막으로 차를 들고 나서 초라한 응접실에 모여앉았다. 부인들은 일을 하고, 닥터 맥페일은 담배를 피웠다. 선교사는 섬에서 하고 있는 전도 사업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우리가 그곳에 가니까 토인들은 전혀 죄의식을 갖고 있지 않더군요."

하고 그는 말을 이었다.

"그들은 얼마든지 십계명(十戒銘)을 범하면서도 자기네가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줄 전혀 모르는 거예요. 그래 나는 그들에게 죄책감을 느끼게 하는 것이 가장 큰 두통거리라고 생각했지요."

맥페일 내외는 데이빗슨이 자기 아내와 처음 알기 전에 솔로몬 군도에서 5년 동안 전도 사업을 해 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무렵에 데이빗슨 부인도 중국에서 선교사로 있었던 것이다. 이들은 선교사 회의에 참석하였다가, 그 휴가의 일부를 보스턴에서 보낼 때 서로 알게 되었다. 두 사람은 결혼하지 곧 이 남양섬에 임명되어 계속 일을 해 왔었다. 데이빗슨 선교사와 이야기를 주고받는 가운데, 한 가지 사실이 분명히 드러났다. 그것은 그가 불굴의 용기를 갖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의료 선교사로 언제나 이 섬 저 섬으로 불려 다녔다.

폭풍우가 휘몰아치는 태평양에서는 포경선도 별로 안전한 수송기관이 되지 못하는 판에, 그는 통나무배를 타고 섬들을 찾아가는 경우가 많으며, 이때의 위험은 말로 형언할 수 없었다. 그러나 병자가 발생하였거나 사고가 났을 경우에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배를 저어 가곤 하였다. 그는 배에서 자기 목숨을 건지기 위해 밤을 새워 물을 퍼낸 적이 열 번도 더 되었다. 아내도 남편을 잃어 버린 것으로 단념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전 가지 말라고 애걸한 때도 있어요." 그의 아내가 말하였다.

"적어도 날씨가 좀 잠잠할 때까지 기다리라고 말예요. 그래도 이 양반은 영 무가내지 뭐예요. 고집이 어떻게 센지, 한번 마음을 정하면 끄떡도 하지 않아요."

"만일 내가 그럴 때 두려움이 앞선다면, 내가 어떻게 토인들보고 하나님을 믿으라고 말할 수 있겠어요?"

데이빗슨 선교사는 큰 소리로 말하였다.

"나는 두렵지가 않아요. 암 두렵지 않구말구요. 토인들은 자기네가 어려운 처지에서 나를 부르면, 내가 으레 찾아올 줄 알고 있어요. 그런데 당신은 내가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을 때, 주께서 나를 버릴 줄 알아요? 바람은 하나님의 뜻대로 불고, 파도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일어나는 거요."

닥터 맥페일은 겁이 많았다. 그는 도저히 참호 위에 쏟아지는 포탄에 익숙해질 수 없었다. 최전방의 구호소에서 수술을 할 때에는 떨리는 손을 진정시키며 이마에서 구슬땀이 흘러내려 번번이 안경을 흐려놓곤 하였다. 그는 선교사를 바라보며 약간 떨리는 음성으로 이렇게 말하였다. "저도 당신처럼 담대하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나는 당신이 하나님을 믿는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선교사가 응수하였다.

선교사는 자기와 아내가 섬에서 지내던 결혼 당초를 회상해 보며 말하였다.

"어떤 때는 아내와 얼굴을 마주 쳐다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기도 하였지요. 우리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하는데도 전혀 성과가 나지 않는 것처럼 느낄 적도 많았어요. 나는 그무렵에 아내가 없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지 몰라요. 내가 절망에 빠질 때마다 아내는 나에게 용기와 희망을 안겨 주었지요."

일감을 매만지던 데이빗슨 부인의 여윈 뺨이 불그스레 물들어 오고, 두 손은 약간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무어라고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선교사가 말을 이었다.

"우리를 도와줄 사람은 하나도 없었어요. 우리는 무척 고독했어요. 우리나라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고국에서 수천 마일이나 떨어진 암흑세계에 와 있었던 거요. 내가 낙심하거나 지쳤을 때면, 마치 어린애의 눈에 잠이 찾아오듯이, 내 마음속에 평화가 깃들 때까지 아내는 일손을 놓고 성경을 들고 와서 읽어주곤 했지요. 그리고 성경을 덮으면서 아내는 그들을 어떻게 해서든지 구원해줘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었어요. 그러면 나는 주님으로부터 새로운 용기를 받아,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그들을 구원하고야 말겠다고 다짐하는 것이었어요."

그는 테이블 앞에 섰다. 마치 성경을 낭독하기 위한 책상이라도 되는 듯이-.

"그들은 워낙 나면서부터 타락해 있었으므로, 죄가 죄인 줄 깨닫지 못하였어요. 그리하여 우리는 그들이 자연스러운 행동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 실상은 죄악임을 가르쳐 주어야 했어요. , 우리는 간통과 거짓말과 도둑질 같은 것이 죄악임을 가르쳐 주고, 나아가서는 몸을 노출시키고, 춤을 추며, 교회에 나오지 않는 것도 죄악임을 가르쳐 주어야 했어요. 여자가 젖가슴을 드러내놓거나, 남자가 바지를 입지 않고 나다니는 것도 죄가 된다고 말예요."

"어떻게 가르쳤어요?"

닥터 맥페일이 놀라운 얼굴을 하고 물었다.

"벌금제도를 만들었지요. 그들이 어떤 행동이 죄악임을 분명히 깨닫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만일 그들이 어떤 일을 범할 경우에 처벌을 하는 일이오. 나는 그들이 교회에 나오지 않을 경우는 물론, 춤을 추거나 풍기문란하게 옷을 입어도 벌금을 물렸지요. 일정한 벌금표를 정해 놓고, 죄를 지으면 돈을 내든지 노동을 하여 갚도록 하였어요. 이리하여 나는 그들의 죄의식을 눈뜨게 했지요."

"그들이 돈을 못 내겠다고 버티는 일은 없었어요?"

"어떻게 그럴 수 있겠어요?"

하고 선교사는 반문하였다.

"여간 용감한 사람이 아니고서는 감히 이 양반에게 대항하지 못할 거예요."

그의 아내가 말참견을 하였다.

닥터 맥페일은 언짢은 눈으로 선교사를 바라보았다. 그는 선교사의 이야기를 듣고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으나, 자기의 의사표시를 꺼렸다.

"나는 최후의 수단으로서 그들을 교회에서 추방하였지요."

"그래 그것을 그들이 두려워합니까?"

데이빗슨 선교사는 빙그레 웃고 나서 두 손을 문질렀다.

"그렇게 되면, 그들은 자기네 야자열매를 팔 수 없게 돼요. 물고기를 잡아도 자기 몫을 받지 못하게 되구요. 그것은 굶주림을 의미하는 거요. 그러므로 두려워할 밖에."

"의사 선생님한테 프레드·올슨의 이야기를 들려 드리세요."

데이빗슨 부인이 말하였다. 선교사는 닥터 맥페일을 사납게 노려보았다.

"이 섬에 상당히 오랫동안 살아온 프레드·올슨이라는 덴마크의 상인이 있었어요. 그는 큰 부자였어요. 그런데 그는 우리가 이 섬에 왔을 때 별로 달가워하지 않았어요. 그는 모든 일을 자기 마음대로 처리해 가고 있었어요. 토인들에게서 야자열매를 사들이고, 값은 자기 마음대로 정해서 치르는데, 자지 상품과 위스키로 돈을 대신하기도 하였어요. 그는 토인 아내를 여간 박대하지 않았어요. 또 그는 술고래였어요. 나는 그에게 생활 태도를 고치라고 충고하였으나, 내 말을 듣기는커녕 나를 비웃곤 하였소."

데이빗슨 선교사의 목소리는 나중에 나지막하게 가라앉더니, 얼마 후에 입을 다물어 버렸다. 침묵은 위협을 품고 무겁게 흐르고 있었다.

"그 후 두 해가 지나서 그는 파산하고 말았어요. 그가 25년 동안에 이루어 놓은 모든 것을 잃어버렸던 거예요. 내가 그를 파산하게 했던 거지요. 그는 결국 거지꼴을 하고 와서 시드니로 가는 배삯을 대어 달라고 애걸하게 되었어요."

"그때의 몰골을 선생님에게 보여 드렸더라면 좋을 걸 그랬어요."

하고 선교사의 아내가 말하였다.

"그는 뚱뚱하고 풍채가 좋은 건장한 사람으로 목소리도 매우 우렁찼어요. 그러나 그즈음엔 몸이 반으로 줄어들고 벌벌 떨고 있었어요. 그는 그 바람에 아주 늙어 버렸던 거예요."

선교사는 어둠 속을 멍하니 내다보고 있었다. 비는 다시 퍼부어대었다. 그때 아래층에서 갑자기 무슨 소리가 들려왔다. 데이빗슨은 이게 무슨 소리냐고 묻기라도 하는 듯이 아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축음기에서 흘러나오는 거칠은 재즈곡이었다.

"저게 뭐요?"

하고 그는 물었다.

데이빗슨 부인은 코안경을 바로잡고 말하였다.

"2등 선객 중에서 누가 이 집에 방을 얻었대요. 아마도 거기서 나는 소린가 봐요."

그들은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이윽고 춤추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음악이 그치고 병마개를 따는 소리와 함께 여러 사람들이 떠들썩하니 지껄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아마 그 여자가 배에서 사귄 친구들과의 이별 파티를 열었나 보군요."

닥터 맥페일이 말하였다.

"그 배는 열두 시에 떠나죠?"

선교사는 말없이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당신 준비가 다 되었소?"

하고 그는 아내에게 물었다.

아내는 일어나 바느질감을 치웠다.

", 다 되었어요."

"주무시기는 아직 이르지 않아요?"

의사가 물었다.

"저희는 읽을거리가 많거든요."하고 데이빗슨 부인이 설명하였다.

"저희는 어디 가든지 밤에 성경을 한 장 읽고 나서 주석을 보고 연구해 가며 철저히 토론하지요. 그것은 마음을 단속하는데 좋은 훈련이 되어요."

두 부부는 서로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단둘이 남은 맥페일 내외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트럼프나 해야 할까 봐."

닥터가 입을 열었다.

맥페일 부인은 남편을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녀는 데이빗슨 부처와 이야기를 나누고 약간 불안해졌다. 그러나 그녀는 그들 내외가 찾아올지도 모르므로 트럼프를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닥터 맥페일은 트럼프를 펴 놓았다. 그녀는 막연한 죄의식을 느끼면서 남편을 바라보았다. 아래층에서는 술을 마시며 떠드는 소리가 여전히 들려왔다.

이튿날은 날씨가 활짝 개었다. 파고파고에서 두 주일 동안이나 하는 일 없이 보내야 하는 맥페일 내외는 적어도 시간을 심심치 않게 보내려고 하였다.

그들은 부두에 내려가 짐짝을 풀고 책을 여러 권 꺼내었다.

그리고 닥터 맥페일은 해군병원 외과 과장을 찾아가 이야기를 하고, 함게 환자를 돌보기로 하였다. 그런가 하면 두 내외는 지사를 방문하고 명함을 두고 오기도 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톰슨 양을 만났다. 의사는 모자를 벗어들었다.

"안녕하세요?"

하고 톰슨 양은 유쾌한 목소리로 인사를 하였다.

그녀는 전날과 마찬가지로 흰 프록코트를 걸치고 있었다. 굽이 높은 번들거리는 흰 장화 위로 살찐 다리가 불쑥 내민 모양은, 이국적인 배경 아래서는 좀 이상하게 보였다.

"저 여자의 옷매무새는 어울리지 않는군요."하고 맥페일 부인이 말하였다.

"왜 저렇게 상스러울까."

그들이 집에 돌아왔을 때, 톰슨 양이 베란다에서 집주인의 검둥이 어린애와 놀고 있었다.

"말을 좀 걸어 보지 그래."

닥터 맥페일이 아내에게 나지막한 소리로 말하였다.

"저 여자는 여기서 혼자 있어요. 모르는 체하고 지나가기가 안 된 것 같군요."

맥페일 부인은 성격이 수줍은 편이었으나 남편이 시키는 일은 고분고분 순종하였다.

"우리는 한 지붕 밑에서 살고 있군요."

그녀는 약간 쑥스러운 듯이 톰슨 양에게 말을 건네었다.

"이같이 옹색한 곳에 갇혀 살자니, 기막힌 노릇이 아니에요?"

하고 톰슨 양이 대답하였다.

"남들은 제가 방을 얻게 되어 운수가 좋다지 뭐에요. 토인의 집에서 묵게 되는 신세를 면했으니 다행이라나요. 이 고장에는 왜 호텔이 없는지 모르겠어요."

두 여인은 몇 마디 더 이야기를 나누었다. 수다스럽고 목소리가 큰 톰슨 양은 좀 더 한담을 나누고 싶어 하는 눈치였으나, 맥페일 부인은 별로 할 이야기가 없었으므로 이렇게 말하였다.

"저 우리는 그만 올라가 봐야겠어요."

저녁에 이들 내외가 차를 마시고 있는데 데이빗슨 내외가 들어오면서 이야기를 하였다.

"아래층 여자가 선원 두 사람과 이야기를 하고 있군요. 어떻게 그들과 가깝게 사귀게 되었는지 알고도 모를 일이군그래."

"별로 성실한 여자가 못 되는 것 같아요."

하고 데이빗슨 부인이 말하였다.

그들은 저마다 아무 목적도 할 일도 없이 하루를 보낸 뒤라 약간 피로하였다.

"이런 식으로 만 두 주일을 보낸다면 나중에 기분이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군요."

하고 의사가 말하였다.

"하루를 여러 가지 일에 배당해야 해요."

하고 선교사가 대답하였다.

"나는 일정한 시간을 연구에 배당하고, 나머지 몇 시간은 운동에 소비하려고 해요. 날이 개이거나 말거나 여기에는 변동이 없어야 해요. 우기라 비를 맞을까 너무 신경을 쓸 수도 없는 처지니까요. 그리고 오락 시간도 정해 놓으려고 해요."

닥터 맥페일은 불안한 얼구을 하고 선교사를 바라보았다. 그의 일과표는 일종의 압박감을 주었던 것이다. 그들은 다시 함박스테이크를 먹었다. 그것은 이 집 요리사가 만들 줄 아는 유일한 요리인 듯하였다. 그때 아래층에서 다시 축음기 소리가 들려왔다. 선교사는 그 소리에 몹시 신경이 날카로와지고 놀라는 듯하였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남자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톰슨 양을 찾아온 손님들이 유행가를 합창하였던 것이다. 이윽고 거칠고 커다란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두들 굉장히 떠들며 시시덕거렸다.

위층에 있는 네 사람은 이야기를 계속하기 위해, 유리잔이 부딪는 소리며, 의자를 끌어 잡아당기는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하면서도 자연히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사람들이 꽤 많이 모여든 것 같았다. 톰슨 양이 파티를 열었던 것이다.

"저 여자는 어떻게 저 많은 사람들을 불러들였을까요?"

하고 맥페일 부인이 선교사와 자기 남편 사이에 주고받던 의학에 관한 이야기를 가로막고 입을 열었다. 그것은 그녀의 생각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말이었다. 데이빗슨 선교사의 얼굴에서는 약간의 경련이 일어났다. 그것은 그가 과학의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도 마음은 역시 맥페일 부인과 같은 방향에 가 있다는 것을 입증해 주었다. 의사가 플랜더즈 전선에서 수술을 할 때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동안에, 선교사는 소리를 지르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여보, 이게 웬일이세요?"

데이빗슨 부인이 물었다.

"참 나는 그 생각을 미처 못했군. 그 여자는 뮬레이에서 왔을 거요."

"그게 사실이에요?"

"그 여자는 여기 와서도 그 짓을 하고 있는 거요. 여기 와서까지도 말이오."

그는 분노에 떠는 커다란 목소리로 말하였다.

"율레이가 뭔데요?"

하고 맥페일 부인이 물었다. 선교사는 그녀를 침울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두려움에 떠는 목소리로 말하였다.

"호놀룰루의 암흑지대지요. 즉 홍등가란 말예요. 인류 문명이 남긴 오점의 하나지요."

율레이는 호놀룰루의 한끝에 있었다. 항구 옆의 어두운 거리를 내려가다가 흔들거리는 다리를 건너, 온통 수레바퀴 자국과 웅덩이투성이로 된 쓸쓸한 길을 걸어가면, 얼마 안 되어 별안간 환한 곳이 나타난다. 거기에는 길 양편에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고, 집집마다 피아노 소리가 시끄럽게 들려오며, 봄빛이 휘황찬란한 술집들이 죽 늘어서 있었다. 이발소와 담뱃가게들도 보였다.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환락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한길이 이곳을 양편으로 갈라놓고 있었으므로, 그 어느 편으로든지 좁은 길목을 따라가면 이곳 홍등가에 이르는 것이었다. 거기에는 아담하고 깨끗하게 초록색으로 칠한 조그마한 방갈로가 쭉 늘어섰으며, 그 사이의 길은 넓은 일직선으로 되어 있었다. 그것은 언뜻 보기에 공원 도시와 같은 인상을 주었으며, 규모 있는 질서와 깨끗한 모습이 싸늘한 공포감마저 빚어내고 있었다. 색정이 그토록 짜임새 있고, 질서정연할 수 있을까? 길가에는 가로등이 드문드문 켜져 있었지만, 방갈로의 창문에서 흘러나오는 등빛이 없었던들 어둠컴컴하였을 것이다. 남자들은 이 창자에서 책을 읽거나 뜨개질을 하는 여자들을 넘겨다보면서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그녀들은 그러나 이러한 행인들을 별로 눈여겨보지 않았다.

그녀들과 마찬가지로 이곳을 드나드는 사람의 국적도 가지각색이었다. 미국인들-항구에 머물러 있는 배위 선원들, 군함에서 풀려나온 술에 취한 사병들, 그 섬에 주둔하고 있는 연대의 흑인이나 백인 병사들-둘씩 셋씩 짝을 지어 돌아다니는 일본인, 하와이인, 길다란 옷을 걸친 중국인 등등, 그들은 일종의 압박감이라도 느끼는 듯이 입을 다물고 있었다. 색정은 슬픈 것이다.

"이 고장은 태평양에서 가장 악명 높은 곳이었지요."

데이빗슨 선교사는 격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몇 해를 두고 선교사들이 반대 운동을 벌인 결과 나중에는 지방신문이 이걸 사회문제로 크게 다루었어요. 그러나 경찰은 좀처럼 움직이려고 들지 않았어요. 그들의 주장은 뻔한 것이었어요. 즉 세상에서 악은 불가피한 존재이므로, 한 지역에 몰아넣어서 통제를 하는 것이 상책이라는 거지요. 그러나 실은 그들이 뇌물을 받아먹었던 거예요. 그건 뻔한 속이지요. 그들은 술집주인과 깡패들은 물론 여자들에게서도 받아먹었던 거예요. 그렇지만 드디어 그들도 움직이지 않을 수 없었어요."

"나도 호놀룰루에서 배로 배달된 신문에 그런 기사가 난 것을 읽은 적이 있어요."

하고 닥터 맥페일이 발하였다.

"죄악과 수치로 가득 차 있던 율레이는 우리가 도착하자마자 면목을 일신했지요. 그 모든 사람들이 법의 심판을 받게 된 거요. 나는 왜 그 여자의 정체를 얼른 알아차리지 못하였는지 모르겠소."

"지금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배가 떠나기 몇 분 전에 그 여자가 배에 오르는 것을 본 기억이 나는군요. 저는 그때 그 여자가 무척 시간을 아끼는 분인 줄로만 알았어요."

맥페일 부인이 말하였다.

"어떻게 감히 이곳에 왔을까? 아무튼 나는 그냥 두지는 않을 테요."

선교사는 분개하며 이렇게 외치고 나서 문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어쩔려고 그러시는 거예요?"

의사가 물었다.

"내가 어떻게 조처를 취할 것 같소? 나는 못 하도록 막아야겠어요. 이 집이 그런. 그런……그런 장소가 되는 것을 그대로 둘 수는 없소."

여기까지 말하고 나서, 그는 부인들의 귀에 민망하지 않게 들릴 말을 찾느라고 애를 썼다. 그의 눈에서 불길이 이는 듯하였으며 얼굴은 격분으로 하여 더욱 창백하게 보였다.

"아래층에서는 몇 사람의 남자 소리가 들려와요. 지금 곧장 그리로 가는 것은 좀 무모하지 않을까요?"

의사가 말하였다.

선교사는 경멸하는 눈초리로 그를 힐끗 바라보고 말없이 밖으로 나가버렸다.

"선생님께서 사사로운 위험이 그의 의무수행을 중단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신다면, 그분을 잘못 보신 거예요."

데이빗슨 부인이 말하였다.

광대뼈가 불쑥 나온 그녀의 두 볼은 상기되어 있었다.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두 손을 맞잡고 앉아 아래층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려는지 엿듣기 위해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도 귀를 기울였다. 선교사가 나무계단을 쿵쿵거리며 내려가서 문을 열어젖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어서 선교사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무거운 것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음악 소리가 뚝 멈췄다. 선교사가 축음기를 마룻바닥에 집어 동댕이친 모양이었다. 이어서 잘 알아들을 수 없는 데이빗슨 선교사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여러 사람들이 뒤범벅이 되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것이 들려왔다.

데이빗슨 부인은 숨을 가늘게 몰아쉬며 두 손을 꼭 쥐었다. 닥터 맥페일은 불안한 마음으로 그녀와 자기 아내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는 그녀들이 자기가 아래층에 내려가 보기를 원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별로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그때 서로 치고받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더욱 분명하게 들려왔다. 사람들이 선교사를 들어 방문 밖으로 내던진 모양이었다. 꽝 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 잠잠해졌다. 이어서 선교사가 다시 층게를 올라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곧장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저 주인한테 가 봐야겠어요."

데이빗슨 부인은 이렇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만일 필요하거든 저를 부르세요."

맥페일 부인이 말하였다.

"다치지나 않았는지 모르겠어요."

"그 사람은 왜 남의 일에 참견을 하지?"

하고 의사가 말하였다.

그들은 다시 말없이 앉아 있다가 깜짝 놀라게 되었다. 갑자기 축음기가 무슨 반항이라도 하는 듯이 다시 울리기 시작하고 조롱하는 듯한 목소리로 떠들썩하게 추잡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이튿날 데이빗슨 부인은 얼굴이 한결 창백하고 피로해 보였다. 그녀가 맥페일 부인에게 한 말에 의하면, 선교사는 간밤에 한잠도 못 잤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에게 맥주를 마구 끼얹어 옷이 얼룩이 지고 술 냄새가 풍겨왔다고 하였다. 그리고 부인은 이글이글 불길이 타오르는 듯한 눈을 디룩거리며 톰슨 양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다.

"그 여자가 주인을 모욕한 것을 뼈저리게 뉘우칠 때가 올 거예요. 주인은 인정이 많은 사람이라 누구나 고민을 알고 그를 찾아오면 반드시 위로를 주곤 하였어요. 그러나 그는 결코 죄악을 용납하지 못하는 분이라 정의의 분노가 폭발하면 무서워요."

"아니 어떻게 하시려는 것일까요?"

하고 맥페일 부인이 물었다.

"나도 모르겠어요. 그러나 나는 이 세상에서 어떤 값진 것을 준다고 하여도 그 여자의 처지가 되고 싶지는 않아요."

맥페일 부인은 전신을 떨며 이 조그마한 부인의 승리감에 충만한 태도에는 분명히 놀라운 무엇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녀들은 그날 아침에 함께 나란히 계단을 내려와 외출하였다. 톰슨 양의 방문은 열려 있어, 그녀가 낡아빠진 실내 옷차림으로 풍로에서 요리를 하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안녕하세요?"

하고 그녀는 먼저 말을 걸어왔다.

"데이빗슨씨는 오늘 아침 몸이 좀 나으셨어요?"

두 부인은 그녀의 말을 묵살한 채, 콧등을 높이 쳐들고 지나쳐 버렸다. 그러자 그녀는 멸시하는 듯이 깔깔거리며, 크게 웃어내었다. 두 부인은 얼굴이 화끈거렸다. 데이빗슨 부인이 별안간 그녀에게 돌아서서 외쳤다.

"누구에게 대고 함부로 지껄이는 거야? 날 모욕하면 이 집에서 내쫓을 테야!"

"여보세요. 내가 데이빗슨 씨를 불러들였나요?"

"아무 대꾸도 하지 마세요."

맥페일 부인이 다급히 속삭였다.

그녀들은 톰슨 양의 말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까지 걸어 나왔다.

"참 뻔뻔스럽군요. 어쩌면 저렇게 뻔뻔스러워요."

데이빗슨 부인이 큰 소리로 말하였다.

그녀는 화가 치밀어 숨이 턱에 닿을 지경이었다.

두 부인은 집에 돌아오는 길에 부두로 산책을 가는 톰슨 양과 마주쳤다. 그녀는 성장을 하고 있었다. 화려한 꽃을 야하게 단 커다란 흰 모자가 정욕적이었다. 그녀는 두 부인과 지나칠 때 명랑하게 말을 건네었으나, 상대방에서는 얼음같이 싸늘한 눈초리로 그녀를 쏘아보는 것이었다. 근처에 있던 두 미국 소년이 이 광경을 보고 싱글벙글 웃어댔다. 그녀들은 황급히 집으로 돌아왔다. 빗방울이 다시 떨어지기 시작하였다.

"그 좋은 옷을 다 버렸을 테니 꼴 잘 되었군요."

하고 냉소를 머금은 데이빗슨 부인이 말을 하였다.

선교사는 그녀들이 점심을 반쯤 먹었을 때에야 돌아왔다. 그는 비에 옷이 흠뻑 젖어 있었으나 바꿔 입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식사도 드는 둥 마는 둥 하고 침울한 얼굴로 묵묵히 앉아 비가 내리치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부인이 톰슨 양을 두 번 만난 이야기를 전해 주어도 대답이 없었다. 그는 상을 찌푸리고 알아들었다는 표정을 할 뿐이었다.

"호온에게 말하여 그년을 여기서 내쫓아야 하지 않겠어요. 그년이 우리를 모욕하는 것을 이 이상 용서할 수는 없어요."

하고 데이빗슨 부인이 말하였다.

"그 여자가 다른 데 몸 붙일 곳이 없을 것 같던데요."

의사가 한마디 하였다.

"왜요? 토인 집에 가서 묵으면 되지 않아요."

"이런 날씨에 토인의 오막살이에 가서 어떻게 묵을 수 있겠어요."

"나도 그런 집에서 몇 해를 살았어요."

하고 선교사가 말하였다.

어린 토인 소녀가 그들이 날마다 과자 대신에 먹는 바나나튀김을 가져왔다. 선교사는 소녀에게 말하였다.

"톰슨 양보고 내가 언제 만나러 가는 것이 좋겠느냐고 물어보아라."

소녀는 수줍은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밖으로 나갔다.

"뭣하러 그 여잘 만나려고 하세요?"

그의 아내가 물었다.

"그 여자를 만나는 것이 나의 의무라는 것을 알아야 해. 나는 그 여자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고 나서 행동을 취하려는 거야."

"뭐요? 그년이 어떤 년인지 모르시나 보군요. 그년은 당신을 모욕할 거예요."

"모욕할 테면 하고 침을 뱉으려면 뱉으라지. 그 여자에게도 영혼이 있을 게 아니오. 나는 그 영혼을 구하기 위해 힘을 다해야 하는 거요."

데이빗슨 부인의 귀에는 아직도 그 창부의 조롱하는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그년은 타락할 대로 타락했어요."

"너무 타락하여 하나님의 자비를 받을 수도 없단 말이오?"

선교사의 눈에는 갑자기 광채가 나고 목소리는 한결 부드러웠다.

"결단코 그렇지 않소. 설사 죄인이 지옥보다 더 깊숙이 악에 물들어 있다고 하더라도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은 그를 능히 구하고도 남음이 있는 것이오."

소녀가 돌아와서 전하였다.

"톰슨 양이 안부를 전해달라고 해요. 그리고 업무시간만 아니라면 선교사님께서 언제 오셔도 무방하시대요."

주위에 앉아 있던 사람들은 이 말에 의해 무거운 침묵이 깨어졌다. 닥터 맥페일은 입가에 떠오르는 미소를 재빨리 지워 버렸다. 그는 자기가 톰슨 양의 뻔뻔스러운 태도를 재미있게 생각하는 줄 아내가 알면 경칠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말없이 식사를 끝냈다. 두 부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자기들의 일거리를 가져왔다. 맥페일 부인은 전쟁이 터진 이후로 수없이 만들어 온 목도리를 또 하나 만들고 있었으며, 닥터는 파이프에 불을 붙였다. 그러나 데이빗슨 선교사는 의자에 그냥 주저앉아 테이블을 멍하니 들여다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말없이 밖으로 나갔다. 그가 계단을 내려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문을 노크하자 톰슨 양이 <들어오세요!>하고 반사적으로 대답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톰슨 양의 방에 한 시간 동안이나 머물러 있었다.

닥터 맥페일은 비가 오는 것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비는 그의 신경을 날카롭게 자극하였다. 그 비는 땅을 기름지게 하는 영국의 보슬비 같지 않고, 무자비하고 어딘가 모르게 무시무시하게 생각될 뿐만 아니라, 자연히 원시적인 악의를 느끼게 하였다. 그 비는 내리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쏟아진다고 말해야 옳을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그 비는 하늘에서 홍수가 쏟아지는 것처럼 미칠 듯이 양철 지붕을 두들겼다. 그 비는 분노를 품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비가 하도 멎지 않아, 소리를 냅다 지르고 싶은 충동을 느끼기도 하고 갑자기 뼈대가 녹아드는 것처럼 기운이 빠진 것 같은 비참하고 절망적인 기분이기도 하였다.

선교사가 돌아왔다. 의사는 고개를 들려 그와 두 여인을 쳐다보았다.

"나는 그 여자에게 회개하기를 타이르고 기회를 주었소. 그 여자는 막에 젖어 있소."

하고 데이빗슨 선교사는 말하였다. 의사는 그의 눈이 흐려지고 창백한 얼굴이 굳어져 한결 엄숙하게 보였다.

"이제 나는 주님께 성전으로부터 고리대금업자와 장사꾼들을 몰아내시던 채찍을 들어야겠소."

그는 방안을 왔다 갔다 하였다. 입을 꼭 다물고 검은 눈썹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 여자가 세상 끝까지 도망친다고 해도 나는 그 뒤를 쫓아가겠소."

그는 이렇게 말하고 갑자기 홱 돌아서서 밖으로 나가 버렸다. 그가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떡하려고 저러시는 거지요?"

하고 맥페일 부인은 말하였다.

"나도 몰라요."

데이빗슨 부인은 코안경을 벗어서 닦으면서 말을 이었다.

"그이가 주님의 일을 보실 때에는 난 곁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하고 있어요."

그녀는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왜 그러세요?"

"그이는 저러다가 지쳐 버릴 거예요. 자기 몸은 통 아낄 줄 모르는 분이에요."

닥터 맥페일은 선교사가 취한 행동을 집주인으로부터 들어서 멀게 되었다. 그 혼혈인은 의사 가게를 지나갈 때 불로 세워 놓고, 현관 앞 계단에 나와서 이야기를 하였다. 그의 뚱뚱한 얼굴은 걱정스러운 듯이 보였다.

"글세 데이빗슨 선교사가 저더러 톰슨 양에게 방을 빌려줬다고 공박하지 않겠어요. 제가 방을 빌려줄 때, 그 여자가 어떤 여잔지 알게 뭐예요. 누가 와서 방을 빌려달라고 할 때, 제가 알고 싶은 것은 세를 제대로 낼 수 있는 사람이냐, 하는 것뿐이지요. 그 여자는 한 일주일 치를 거뜬히 선불해 주었어요."

닥터 맥페일은 그에게 무슨 언질을 주고 싶지 않았다.

"뭐니 뭐니 해도 당신은 집주인이 아니겠소? 우리는 당신이 방을 빌려준 것만 해도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

호온은 의아스러운 얼굴로 의사를 쳐다보았다. 그는 의사가 어느 정도까지 선교사의 편인지 잘 알 수 없었다.

"선교사들은 모두 똑같더군요."하고 주인은 주저하면서 말을 이었다.

"그들은 저와 같은 장사꾼에게 적의를 품으면 어떻게 해요? 가게를 집어치우고 떠나는 수밖에 없지 않아요."

"그분은 당신더러 뭐라고 해요? 그 여자를 내보내라는 거요?"

"아니지요. 그 여자가 점잖게만 굴면 괜찮다는 거요. 그분이 하는 말이 저한테는 공평하게 처사를 하겠다고 하시더군요. 그래 저는 앞으로 그 여자가 손님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단속하겠다고 약속했지요. 방금 그 여자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고 난 참이에요."

"그래 그 여자는 뭐라고 합디까."

"전 아주 혼났어요."

돛폭의 낡은 천으로 바지를 지어 입은 호온은 이렇게 말하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톰슨 양이 만만치 않은 손님이라는 것을 처음 발견했던 것이다.

"그 여자는 아마도 이 집에서 나갈 거예요. 손님을 받을 수 없다면 뭣 하러 여기 머물려고 하겠어요." 그는 다시 이렇게 말하였다.

"그 여자는 토인들의 집에 갈 수밖에 없을 거예요. 그런데 선교사들이 그 여자를 내쫓았다면 어떤 토인도 받아주려고 하지 않을 거예요."

닥터 맥페일은 쏟아지는 비를 내다보고 있었다.

"비가 개어지기를 기다려 보아야 소용없을 것 같군요."

그들은 저녁때 응접실에 앉아 있었다. 선교사는 대학 시절의 이야기를 하였다. 학비가 없어 방학이면 별별 일을 다 했다고 하였다. 아래층은 잠잠하였다. 톰슨 양은 비좁은 자기 방에 혼자 앉아 있었다. 이윽고 별안간 축음기 소리가 울려왔다. 그녀는 고독을 달래기 위해 반발적으로 축음기를 튼 모양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노래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 곡조는 우울하기 짝이 없었다. 그 멜로디는 마치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슬픈 호소처럼 들려왔다.

선교사는 무관심한 얼굴을 하였다. 그는 자기의 긴 경험담을 이야기하는 중이었다. 그리하여 얼굴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이야기를 계속하였다. 톰슨 양은 한 곡조 한 곡조씩 판을 갈아 대었다. 한밤의 고요가 그녀의 신경을 자극하는 모양이었다. 날씨는 무더워 숨이 막힐 듯하였다. 맥페일 내외는 침대에 누운 체 좀처럼 잠들 수 없었다. 그들은 눔을 붙이지 못하고 모기장 밖에서 앵앵거리는 모시 소리를 들으며 나란히 누워 있었다.

"이게 무슨 소리예요?"

부인이 나지막한 소리로 물었다.

나무 칸막이를 통하여 어떤 목소리가 그들의 귀에 들려왔던 것이다. 그것은 선교사의 음성이었다. 그 목소리는 단조롭고 열렬하고 끈기 있게 계속하여 들려왔다. 선교사는 큰소리로 기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톰슨 양의 영혼을 위해 드리는 기도였다.

그 후 이삼일이 지났다. 이제는 그들이 길에서 톰슨 양과 마주쳐도, 그녀는 전과 같이 빈정대는 친절한 태도로 미소를 띠고 인사를 하지 않았다. 그녀는 짙은 화장을 한 얼굴을 무뚝뚝하게 찌푸리며 고개를 쳐든 채 못 본 체하고 지나가는 것이었다.

집주인은 의사에게, 그녀는 다른데 거처를 얻으려고 하였으나 안되었다고 말하였다. 저녁이면 그녀는 으레 축음기에 여러 가지 곡조를 틀곤 하였다. 그녀에게는 아마도 그것이 가장 큰 즐거움임에 틀림이 없었다. 그러나 재즈곡도 절망감을 주는 원스템 곡처럼 거칠고 구슬프게 들려왔다. 일요일에도 그녀는 축음기를 틀었다. 그러자 선교사는 주인을 시켜 주일날이니 곧 중지하라고 당부하였다. 축음기 소리가 멎었다. 집안에서는 양철 지붕을 끈덕지게 뚜드리는 빗소리 밖에는 아무것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 여자는 차츰 불안한 생각이 드나 봐요."

하고 집주인은 이튿날 의사에게 말하였다.

"선교사가 자기한테 무슨 일을 하려고 할지 몰라 겁이 나는 모양이지요."

의사는 그날 아침에 그녀를 힐끔 쳐다보고 그 거만한 표정이 싹 가신 것을 보고 저으기 놀랐다. 그녀의 얼굴에는 쫓기는 사람의 표정이 역력히 나타나 있었다.

집주인은 의사를 곁눈질해 보았다.

"선생님께서는 선교사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모르시지요?"

하고 그는 용기를 내어 물었다.

"네 몰라요."

그가 의사에게 그 런말을 묻는 것은 저으기 이상스러운 일이었다. 실은 그도 선교사의 행동을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선교사가 톰슨 양의 주위에 조심스럽게 그물을 치고 만반의 준비가 다 되었을 때, 갑자기 그 둘을 잡아당길 것이라는 인상을 받게 되었다. 호온은 말하였다.

"선교사가 저더러 그 여자에게 전하라고 하시더군요. 언제든지 필요할 때 부르기만 하면, 그 여자 방으로 가시겠다고요."

"그래 그 말을 전해 듣고 그 여자가 뭐라고 합디까?"

"아무 말도 하지 않아요. 저는 금방 전할 말만 전하고 밖으로 나와 버렸어요. 그 여자는 울상을 하고 있었어요."

"너무 적적하여 신경이 약해졌나 보군요."

"게다가 비가 이렇게 줄창 퍼부으니 신경질이 안 날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하고 의사가 말하였다. 그는 짜증을 섞어가며 말을 이었다.

"이놈의 섬에서는 어제쯤이나 비가 그쳐요?"

"장마철에는 꽤 지루하게 퍼붓지요. 1년 동안에 아무튼 3백 인치쯤이나 내려요. 그건 이 의 지형 때문이지요. 아마도 태평양 전역에서 비를 끌어들이는가 봐요."

"거참 고약한 지형이로군"

의사는 이렇게 말하고 나서 모기에 물린 자리를 북북 긁었다. 그는 꽤 신경질이 나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비가 그치고 날이 개이면 마치 온실 속 같았다. 찌는 듯이 무덥고 숨이 막힐 지경이었으며, 만물이 야만적인 기세로 무럭무럭 자라는 것처럼 보였다. 그럴 때는 명랑하고 어린애 같다고 흔히 알려진 토인들이 문신을 하고 머리를 물들인 모습이 어쩐지 징그럽게 보여 맨발로 터벅터벅 쫓아오면 본능적으로 뒤돌아보게 되는 것이었다. 그들이 갑자기 뒤에서 달려와 긴칼로 어깨라도 찌를 것 같은 생각이 들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커다란 눈망울 뒤에 어떤 음흉한 계책이 숨어 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그들에게는, 사원(寺院) 벽에 그려 있는 고대 이집트인의 표정과 비슷한 데가 있었으며, 그 주위에서는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오랜 공포가 감돌고 있었다.

선교사는 어딘지 분주히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러나 맥페일 내외는 그가 무엇을 하고 다니는지 알 수 없었다. 집주인은 의사에게 그가 날마다 지사를 만난다고 말하였다. 아닌 게 아니라 선교사도 한번은 지사의 말을 꺼내었다.

"지사는 결단력이 강해 보이지만……"

하고 선교사는 못마땅한 듯이 말을 이었다.

"막상 어떤 문제에 부닥치면 줏대가 없어요."

"그는 당신이 원하는 대로 일을 처리하지 않나 보군요."

의사는 익살스럽게 퉁겨주었다.

"나는 정당한 일을 요구하기 위해 그를 찾아갔던 거요. 그런 일은 구태여 여러 말을 하여 설복시킬 필요가 없을 텐데."

"그러나 무엇이 정당한가에 대하여는 사람에 따라서 견해가 다를 수 있지 않겠어요."

"만일 괴달병에 걸린 다리를 잘라내기를 주저하는 사람이 있다면 당신은 그를 어떻게 생각하겠소?"

"괴달병이야 당장 눈앞에 닿은 문제가 아니겠소?"

"그러면 당신은 악에 대한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소?"

선교사가 그동안에 무슨 일을 하였는지 곧 드러났다. 그들 네 사람이 점심을 먹고 더위에 쫓겨 낮잠을 자려고 의사가 두 부인과 헤어지기 직전이었다(선교사는 그런 게으른 습성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였다). 별안간 문이 덜컥 열리더니 톰슨 양이 나타났다. 그녀는 방안을 한번 둘러보고 선교사에게로 다가갔다.

"이 못난 벽창호야! 지사에게 가서 뭐라고 했어?"

그녀는 바락바락 악을 썼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선교사가 의자를 앞으로 끌어당기며 말하였다.

"이리 앉으시오. 톰슨 양! 그러지 않아도 당신과 한 번 더 이야기를 하려던 참이었소."

"이 빌어먹을 작자야! 무엇이 어쩌고 어째?"

그녀는 무례한 모욕적인 언사를 마구 퍼부어대었다. 선교사는 엄숙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톰슨 양, 당신이 나한테 퍼붓는 욕설을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오. 그러나 부인들의 앞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되오."

그녀는 이제 분노보다도 눈물이 앞서는 모양이었다. 얼굴은 주홍빛을 띠고 숨이 막힐 듯이 보였다.

"무슨 일이 있었나요?"하고 의사가 물었다.

"어떤 사람이 와서 그러는데 다음 배를 타고 이 섬을 떠나야 한다지 뭐예요."

선교사의 눈에서는 광채가 나는 듯하였으나 얼굴은 무표정하였다. 그는 말하였다.

"형편이 이렇게 되었는데 지사가 어떻게 당신을 머물러 있으라고 하겠소."

"네놈이 그렇게 만들어 놓고 무슨 수작이야."

그녀는 소리를 버럭 질렀다.

"나를 속이지는 못해. 정년 네놈이 그랬지?"

"나는 거짓말을 하려고 하지 않소. 지사더러 자기의 의무에 알맞은 적절한 방도를 취하라고 말했을 뿐이오."

"왜 나를 가만두지 못하는 거야. 내가 당신을 못살게 군 것이 뭐야?"

"설사 나를 못살게 군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때문에 남을 원망할 내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해요."

"내가 이 거지 같은 고장에 오래 머물고 싶은 줄 알아? 그래 내가 그렇게 껄렁해 보여?"

"그렇다면 이 고장을 떠나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할 것이 없지 않소?"

선교사는 그녀의 말을 이렇게 받아넘겼다.

그녀는 격분한 나머지 분명히 알아들을 수 없는 악을 쓰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한동안 모두들 입을 다물고 있었다.

"마침내 지사가 조처를 취한 줄 알고 있으니 한결 마음이 놓이오."

이윽고 선교사가 입을 열었다.

"그는 마음이 약하고 결단성이 없는 사람이오. 그는 그 여자가 이곳에 단지 두 주일 동안밖에 머물러 있지 않을 테고. 만일 아피아로 간다면 그곳은 영국의 관할 구역으로 자기와는 아무 관계도 없다는 거요."

산교사는 이렇게 말하고 나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방을 가로질러 가더니 말을 계속하였다.

"당국에서 담당자들이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취하는 방법은 기막힐 지경이오. 그들은 눈앞에 실지로 보이지 않는 악은 악이 아닌 것처럼 말하고 있는 거요. 그 여자의 존재 자체가 추악한 것이라면, 다른 섬으로 옮겨간다고 해서 좋을 것이 없어요. 그래 나는 따끔하게 한마디 해 주었지요."

선교사는 얼굴을 찌푸리며 완강한 인상을 주는 턱을 앞으로 내밀고 엄숙하고 단호한 태도를 취해 보였다.

"거 무슨 말씀이세요?"

하고 의사가 물었다.

"우리의 선교사업은 워실턴 정부에 때하여 대하여 영향력이 아주 없는 건 아니오. 나는 지사에게, 그가 이곳에서 일을 처리하는 방법에 잘못이 있다면 신상에 조금도 이로울 것이 없음을 지적해서 말했어요."

"그 여자는 언제 떠나야 해요?"

의사는 다시 물었다.

"다음 화요일에 샌프란시스코로 가는 배가 시드니에서 이곳에 오도록 되어 있어요. 그 여자는 그 배를 타고 가야 해요."

그때까지는 닷새가 남아 있었다. 이튿날 닥터 맥페일은 오전 시간의 대부분을 보내고 있는 병원에서 돌아와 위층으로 올라가려는데 갑자기 집주인이 불러세웠다.

"의사 선생님, 죄송하지만 톰슨 양이 병이 났는데 한번 가봐 주시겠어요?"

"그렇게 하지요."

주인은 의사를 그녀의 방으로 안내하였다. 흰옷을 걸치고 꽃이 달린 커다란 모자를 쓴 그녀는 시름없이 의자에 앉아 책도 읽지 않고, 바느질도 하지 않으면서, 멍하니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의사는 분을 발랐는데도 그녀의 피부가 누런 흙빛이고 눈이 흐리멍텅한 것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편찮으시다니 안됐군요."

하고 그는 말하였다.

"저는 정말 아픈 건 아니에요. 선생님을 좀 뵐 일이 있어서 그렇게 말했을 뿐이에요. 저는 샌프란시스코로 가는 배를 타고 이곳을 떠나야 해요."

그녀는 의사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러자 그녀의 눈이 갑자기 놀라는 빛이 어려 있음을 의사는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발작적으로 두 손을 쥐었다 폈다 하였다. 주인은 문깐에 서서 두 사람의 말을 엿듣고 있었다.

"네 알겠습니다."

의사가 말하였다. 그녀는 침을 꿀꺽 삼키고 나서 입을 열었다.

"저는 할 수 없이 샌프란시스코로 가게 되었어요. 그것은 아무래도 부당한 일이라고 생각되기에, 어제 오후에 지사를 만나러 갔지만 뵙지 못했어요. 비서가 하는 말이 저는 그 배를 타야지 달리 도리가 없다는 거예요. 저는 지사를 만나기 위해 오늘 아침에 관저 앞에서 기다렸다가 지사가 나왔을 때 이야기를 했어요. 그는 저와 이야기를 하지 않으려고 하더군요. 그래 붙들고 늘어졌지요. 그러나 그는 데이빗슨 선교사가 찬동한다면 다음에 시드니로 떠나는 배가 올 때까지 제게 이곳에 머물러 있는 것을 반대하지 않겠다는 거예요."

그녀는 일단 말을 멈추고 걱정스러운 듯이 의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나더러 무슨 일을 해 달라는 거요?"

하고 의사는 물었다.

"선생님께서 선교사에게 제 일을 좀 부탁해 주십사 하구요. 그분이 만일 제가 이곳에 한동안 눌러있는 것을 허락해 주시면, 저는 조금도 말썽을 부리지 않겠노라고 맹세하겠어요. 그분이 만을 저더러 집밖에 조금도 나가지 않기를 원한다면, 그렇게 하겠어요. 시드니로 떠날 때까지 두 주일도 안 남았어요."

"그럼 내가 어디 한번 부탁해 보지요."

"그분은 창성하지 않을 거예요."하고 호온이 말을 참견하였다.

"그분은 오는 화요일에 당신을 떠나보내려고 할거요. 그러니까 그렇게 하는 것이 좋을 것 같군요."

"저는 시드니에서 일자를 구할 자신이 있다고 전해 주세요. 그것도 점잖은 직업 말에요. 제가 뭐 지나친 요구를 하는 건 아니지 않아요?"

"할 수 있는 데까지 해 봅시다."

"그럼 곧 저한테 결과를 알려 주세요. 저는 그 소식을 알 때까지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그 심부름은 의사로서는 그다지 달가운 것이 못되었다. 그리하여 그의 성격의 탓도 있겠지만 그는 그 일에 직접 나서지 않기로 하였다. 즉 그는 자기 아내에게 톰슨 양이 한 말을 데이빗슨 부인에게 전하라고 일렀다. 그가 보기에는 선교사의 태도가 지나친 것 같았다. 그 여자가 두 주일 동안 이곳에 더 머물러 있다고 해서 크게 해로울 것이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교섭의 결과에 대하여 별로 기대하지 않았다. 이윽고 선교사가 그에게 찾아왔다.

"아내가 그러는데 톰슨 양이 당신에게 뭐라고 했다지요?"

의사는 이렇게 직접 맞서게 되니, 마치 수줍은 사람이 억지로 공개석상에 끌려 나왔을 때 느끼는 분노를 금할 수 없었다. 그는 화가 치밀어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었다.

"그 여자가 샌프란시스코에 가는 대신에 시드니로 간다고 해서 바쁠 것이 없지 않아요. 이곳에 있는 동안에 얌전하게 행동하겠다고 약속한 이상 그녀를 괴롭히는 것은 너무하지 않아요?" 선교사는 엄숙한 눈으로 의사를 바라보았다.

"그 여자는 왜 샌프란시스코에 가기를 싫어하지요?"

"그건 물어보지 않았어요."

의사는 좀 퉁명스러운 어조로 대답하였다.

"저는 남의 일에 참견하기를 좋아하지 않아요."

이것은 그다지 재치 있는 대답은 못되었다.

"지사는 그 여자에게 이 섬을 떠나는 첫 번째 배편으로 가도록 명령을 내렸어요. 그는 다만 자기 의무를 수행했을 뿐이고, 나는 아무 간섭도 하지 않았어요. 그 여자가 이곳에 머물러 있다는 것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일이오."

"당신은 너무 가혹하구려. 그것은 폭군적인 태도로밖에는 생각되지 않소."

두 부인은 깜짝 놀라 의사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녀들은 싸움이 일어날까봐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선교사가 점잖게 비소를 지어 보였기 때문이다.

"맥페일 선생, 저를 그렇게 생각하세요. 참 유감 천만입니다. 저를 믿어 주시오. 그 불행한 여인 때문에 내 마음도 쓰리고 아프지만 나는 나대로의 의무를 다하려고 노력하는 것뿐이오."

의사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우울한 마음으로 창밖을 내다보았다. 잠시 비가 멈췄다. 건너편 나무들 사이에 토인들의 오막살이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비가 오지 않는 동안에 나가봐야겠어요."

하고 그는 말하였다.

"당신의 소원대로 해 드리지 못한다고 해서 과히 바쁘게 생각지 마시오."

산교사는 어두운 미소를 지으면서 말을 계속하였다.

"의사 선생님, 나는 당신을 존경하고 있소. 나를 좋지 않게 생각한다면 섭섭하오."

"나는 당신이 내 권유를 너그럽게 받아들일 만한 아량을 갖고 있을 줄 믿었어요."

의사는 이렇게 응수하였다.

"당연한 말씀입니다."

선교사는 웃어 보였다.

의사는 자기가 신사답지 않게 괜히 핏대를 올린 것이 은근히 화가 나서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톰슨 양은 자기 방문을 열어놓고 그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말씀해 보셨어요?"

하고 그녀가 불었다.

", 그는 여전히 고집불통이군요."

그는 창피하여 그녀를 바라보지도 못하고 대답하였다.

그녀는 흐느껴 울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그는 그녀를 힐끗 쳐다보았다. 그녀는 걱정이 되어 얼굴이 종잇장처럼 하얗게 보였다. 그는 충격을 받아 마음이 질렸다. 그때 그에게 한 생각이 떠올랐다.

"그러나 아직 실망할 때가 아니오. 그들이 당신을 그렇게 박대하는 것은 부당하기 짝이 없는 일이오. 내가 직접 지사를 만나 보지요."

"지금요?"

그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녀는 얼굴을 붉혔다.

"고마와요. 선생님께서 저를 위해 말씀해 주신다면, 지사는 저를 그냥 있게 허락해 주실 거예요. 저는 이곳에 머물러 있는 동안에, 하지 말라는 일은 하나도 않겠어요."

닥터 맥페일은 자기가 뭣 때문에 지사를 만나 부탁하려고 마음먹었는지 잘 알 수 없었다. 그는 톰슨 양의 일에 대하여 별로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선교사의 처사에 화가 났으며, 불쾌한 감정이 점점 쌓여 갔다.

지사는 집에 있었다. 그는 키가 늘씬하고 신수가 좋은 사나이로, 전에 해군에 근무했으며, 빳빳한 잿빛 콧수염을 기르고 말쑥한 흰 제복을 입고 있었다.

"저는 같은 집에 묵고 있는 여자 일로 말씀드리려고 왔습니다. 이름은 톰슨이라고 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맥페일 선생, 나는 그 여자에 대해서는 진저리날 만큼 이야기를 많이 듣고 있습니다."

지사는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나는 그 여자에게 오는 화요일에 이곳을 떠나라고 명령을 하였어요. 나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어요."

"당신이 조금만 아량을 베풀어, 그 여자가 시드니로 갈 수 있게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샌프란시스코에서 배가 올 때까지 머물게 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그 여자의 행실에 대해서는 제가 보장을 하겠어요."

지사는 여전히 웃어 보였으나 눈을 가늘게 뜨고 얼굴은 자못 심각하였다.

"맥페일 선생, 말씀대로 배 드리고 싶지만, 일단 내린 명령이라 취소할 수는 없습니다."

의사는 되도록 조리 있게 자기 용건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그러나 지사는 인제 미소도 짓지 않았다. 그는 수째 의사를 외면하고 어두운 얼굴로 의사의 말을 듣고 있었다. 의사는 자기 말이 상대방에게 시가 먹히지 않는 것을 알아차렸다.

"여자를 불편하게 해 준다는 것은 안 됐지만, 그 여자는 역시 화요일에 떠나야 합니다. 달리 방도가 없는걸요."

"꼭 그렇게 해야만 하겠습니까?"

"선생님, 미안합니다. 거는 상사이외의 분에게 공무에 대하여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않고 있어요."

의사는 날카로운 눈초리로 지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는 선교사가 지사에게 위협을 했다는 말을 상기하였다. 지사의 태도에서 좀 당황한 빛이 떠돌고 있었다.

"데이빗슨은 왜 함부로 남의 일에 참견하는 모르겠군요."

지사는 노기를 띠고 말하였다.

"선생님한테만 말씀드리지만, 나는 데이빗슨 씨의 권고는 별로 달갑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톰슨 양과 같은 부류의 여자가, 토인들 사이에 군인이 많이 주둔하고 있는 이런 고장에 머물러 있는 것이 좋지 않다고 나에게 건의하는 것은 그분의 권한에 속하는 문제입니다."

지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닥터 맥페일도 따라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다.

"실례하겠습니다. 약속이 있어서요. 부인에게 안부를 전해 주세요."

지사가 말하였다.

닥터 맥페일은 낙심하여 지사와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그는 톰슨 양이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으나 차마 교섭에 실패했다는 말을 하기가 싫어, 뒷문으로 들어가 무슨 숨긴 것이라도 있는 듯이 살금살금 층계를 올라갔다.

그는 저녁 식사를 들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기분이 언짢았던 것이다. 그러나 선교사는 명랑하고 생기가 있어 보였다. 닥터 맥페일에게는, 그가 의기양양하여 자기를 쳐다보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때 그는 자기가 지사를 찾아간 일이 성공을 거두지 못한 것을 선교사가 알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었다. 그런데 어떻게 그는 그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을까. 데이빗슨이라는 사나이의 힘엔 어딘가 음흉한 데가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저녁 식사를 마치고 호온이 베란다에 있는 것을 보자 잡담이라도 하려고 그리로 나갔다.

"그 여자는 선생님이 지사를 만났는지 알고 싶어 합니다."

호온이 갑자기 말하였다.

", 만났지요. 그 뜻을 변경하려고 하지 않아요.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나로서는 이 이상 더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저는 그럴 줄 알았어요. 지사는 감히 선교사들에게 대항하지 못하니까요."

"무슨 이야기를 하고 계시는 거요?"

데이빗슨 선교사가 이렇게 친절하게 말하면서, 그들이 있는 데로 가까이 다가갔다.

"적어도 앞으로 한 주일 안으로 선생님들이 아피아로 가시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호온이 재치 있게 말을 받았다.

호온이 가 버리자 두 사람은 응접실로 돌아왔다. 데이빗슨 선교사는 식사를 마치고 한 시간쯤 쉬고 있었다. 이윽고 누가 조용히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세요."

데이빗슨 부인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하였다.

문은 열리지 않았다. 데이빗슨 선교사가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어 주었다. 톰슨 양이 문깐에 서 있었다.

그녀의 외모에는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 그녀는 이제, 길가에서 그들에게 곧잘 야유를 퍼붓던 버릇없는 말괄량이가 아니라, 기죽고 겁이 많은 여인이었다. 정성스럽게 빗어 올리던 머리는 아무렇게나 목 언저리에 흩어지고, 슬리퍼를 신고 낡은 스커트에 블라우스 차림이었다. 그녀는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면서 안으로 들어오려고도 하지 않았다.

"무슨 일로 왔어요?"

데이빗슨 부인이 퉁명스럽게 물었다.

"선교사님께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그녀는 목 메인 소리로 대꾸하였다.

선교사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들어오시오. 톰슨 양!"하고 그는 친절하게 말하였다.

"무슨 일로 오셨소?"

그녀는 방에 들어왔다.

", 요전에 제가 실례의 말씀을 드린 거랑 그리고 그동안에 제가 저지른 모든 잘못을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아마도 정신이 좀 나갔는가 봐요. 용서해 주세요."

그녀는 몹시 겸손한 태도로 말하였다.

"제가 졌어요. 저는 인제 완전히 지쳐버렸어요. 저를 샌프란시스코로 돌려보내지는 않으시겠지요?"

선교사는 온화한 태도를 버리고 거친 목소리로 엄격하게 반문하였다.

"왜 그리로 돌아가기를 원치 않는 거요?"

그녀는 움찔하였다.

"그곳에 친척들이 살고 있어요. 그들에게 어떻게 이런 꼴을 보일 수 있어요. 다른데라면 어디든지 말씀대로 가겠어요."

"샌프란시스코가 뭣 때문에 그렇게 싫어요?"

"지금 말씀드린 그대로예요."

선교사는 몸을 앞으로 구부리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이 윤기 있는 커다란 눈은 그녀의 영혼까지 꿰뚫어 보는 것 같았다. 갑자기 놀라며 물었다.

"창부 교도소가 무서워서 그러지?"

그녀는 비명을 지르며 선교사의 발밑에 쓰러져 다리에 매달렸다.

"제발 저를 그곳에 돌려보내지 말아 주세요. 착한 여자가 될 것을 하나님께 맹세하겠어요. 인제 그 짓은 깨끗이 그만두겠어요."

그녀는 두서없이 애원하였다. 분 바른 그녀의 볼에서는 눈물이 끝없이 흘러내렸다. 데이빗슨 선교사는 몸을 굽혀 그녀의 얼굴을 받쳐 들고 자기를 똑바로 바라보게 하였다.

"그 때문이지? 창녀 교도소 때문이지?"

", 저는 그들이 저를 잡으러 오기 전에 미리 도망쳐버렸어요."

그녀는 숨을 헐떡이며 말을 이었다.

"경찰에 붙잡히면 3년은 그곳에서 지내야 해요."

선교사는 그녀를 놓아주었다. 그러자 그녀는 방바닥에 쓰러져 비통하게 흐느껴 울었다. 그때 닥터 맥페일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하였다.

"이것으로 사정은 달라졌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서야 어찌 그리로 보낼 수 있겠어요. 새사람이 되려고 하니-한 번 더 기회를 주는 것이 어떻겠어요?"

"나는 이 여자에게 일찍이 가져보지 못한 가장 좋은 기회를 주려는 거요. 뉘우친다면 벌을 받도록 해야 해요."

그녀는 이 말을 잘못 알아듣고 선교사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무거운 눈에 희망의 빛이 감돌았다.

"저를 용서해 주시는 거지요?"

"아니야. 당신은 오는 화요일에 샌프란시스코로 가는 배를 타야 해요."

그녀는 두려움에 가득 찬 신음소리를 내더니 거의 사람의 음성이라고는 할 수 없는 나지막하고 거친 비명을 지르며 방바닥에 머리를 마구 부딪치는 것이었다. 닥터 맥페일이 달려가서 그녀를 잡아 일으켰다.

"이봐요. 이러면 못써요. 어서 당신 방에 가서 조용히 누워 있어요. 약을 갖다줄 테니까."

그는 그녀를 일으켜 세우고 반은 끌며 반은 들어서 아래층으로 데리고 갔다. 데이빗슨 부인과 자기 아내는 조금도 도우려고 들지 않았다. 그는 그만 화가 치밀었다. 그는 층계 위에서 있던 집주인의 도움을 받아 그녀를 간신히 침대위에 눕혔다. 그녀는 울고불고하며 정신을 차리지 못하였다. 의사는 피하주사를 한 대 놓았다. 그가 다시 2층에 올라왔을 때에는 상당히 흥분하고 지쳐 있었다.

"침대에 눕혀 놓았어요."

두 여인과 선교사는 그가 나간 때와 같은 장소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그들은 그가 방에서 나간 뒤로 자리를 옮길 수도 없고, 뭐라고 말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

"나는 선생님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소."

선교사는 이상하고 냉정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 함께 길을 잘못 든 죄 많은 여동생의 영혼을 위해 기도를 올립시다."

그는 책상에서 성경을 집어 들고 저녁을 먹을 식탁에 가서 마주 앉았다. 식탁은 아직 치워져 있지 않았다. 그는 찻그릇을 한쪽으로 빌어 놓고, 우렁차고 무게 있는 목소리로 예수가 간음한 장면을 기록한 대목을 읽어주었다.

"자 우리 무릎을 꿇고 귀중한 여동생 톰슨의 영혼을 구제하기 위해 기도를 드립시다."

그는 길고 정열적인 기도를 드리며, 하나님께 죄 많은 여자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사 하고 간청하였다. 두 사람은 눈을 감은 채 무릎을 꿇고 있었다.

의사는 이처럼 기습을 당하여 언짢고 창피하였으나 역시 무릎을 꿇었다. 선교사의 기도는 매우 웅변조였다. 그는 유난히 감격한 어조로 기도를 드리면서 줄창 눈물을 흘렸다. 창밖에서는 비가 억수로 무자비하게 쏟아져 내렸다. 마치 인간적인 억센 악의라도 품고 있는 것 같았다.

이윽고 선교사는 기도를 그쳤다. 그는 잠깐 쉬고 나서 입을 열었다.

"이제 주기도문을 봉창합시다."

그들은 기도문을 외우고 선교사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데이빗슨 부인의 얼굴은 엄숙해 보였으나 평온하였다. 그녀는 기도에서 위안을 받고 마음이 한결 홀가분한 것 같았다. 그러나 맥페일 내외는 갑자기 창피스러워 어디다 시선을 두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내려가 경과를 좀 보아야겠어요."

하고 의사가 말하였다.

그는 톰슨 양의 방문을 노크하였다. 집주인이 문을 열어 주었다. 톰슨 양은 의자에 앉아서 흐느껴 울고 있었다.

"왜 그러고 있는 거요?"

의사는 큰 소리로 말하였다.

"누워 있으라고 이르지 않았어요?"

"잠자코 있을 수가 없어요. 선교사님을 만나 뵈어야겠어요."

"참 따도 합니다. 만나보들 뾰족한 수가 있을 것 같소? 그의 마음은 절대로 움직일 수 없을걸요."

"제가 오시라고 하면 언제든지 와 주시겠다고 약속했어요."

의사는 호온에게 손짓을 해 보이며 말하였다.

"가서 선교사를 불러오시오."

그는 호온이 2층에 올라간 동안에 그녀와 함께 조용히 선교사가 오기를 기다렸다. 선교사가 들어왔다.

"오시라고 해서 죄송합니다."

그녀는 우울한 얼굴하고 선교사를 바라보며 말하였다.

"나를 부를 줄 알고 있었소. 나는 하나님께서 내 기도에 응답하여 주시리라 믿고 있었거든요."

그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 쳐다보았다. 이윽고 톰슨 양이 눈길을 돌리 말하였다.

"저는 고약한 여자였어요. 회개하고 있어요."

"하나님, 저희들의 기도에 응답해 주셔서 감사하고 또 감사합니다."

선교사는 이렇게 말하고 두 사나이를 바라보며 말하였다.

"우리 둘만 남겨놓고 방에서 잠깐 나가 주시오. 그리고 하나님께 우리 기도를 들어 주셨다고 저의 아내에게 전해 주시오."

두 사람은 밖으로 나와 문을 닫아버렸다.

<내 원 참!> 집주인이 말하였다.

그날 밤 닥터 맥페일은 늦게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선교사가 2층에 올라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시계를 보니 2시였다.

선교사는 바로 잠자리에 들지 않았다. 칸막이를 통하여 큰 소리로 기도하는 선교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의사는 드디어 지쳐서 잠이 들었다. 이튿날 아침에 그는 선교사의 모습을 보고 놀랐다. 그의 얼굴은 전보다 더욱 창백하고 피로해 보였으나 눈에서는 불길이 이는 듯하였다. 그것은 그의 인간의 눈 같지 않았다. 그는 희열에 넘쳐흐르는 것 같이 보였던 것이다.

"지금 아래 내려가서 톰슨 양을 만나 보시오."

그는 말하였다.

"그 여자의 육신은 나아졌다 볼 수 없지만,……영혼은 많이 변했소."

의사는 얼굴이 핼쑥해지면서 신경질이 났다.

"어젯밤에는 그 여자의 방에 꽤 오래 계시더군요."

"그렇소. 그 여자는 내가 옆에 없으면 못 견디겠다지 않아요."

"기분이 무척 좋아 보이십니다, 그려."

의사는 야유조로 말하였다.

아닌 게 아니라 선교사의 눈은 황홀한 듯이 빛났다.

"위대하신 하나님의 자비가 저한테 임하셨소. 어젯밤 저는 길 잃은 영혼을 주님의 자비로운 품 안으로 인도하는 영광을 누릴 수 있었던 저요."

톰슨 양은 이번에도 앞뒤로 흔들거리는 의자에 앉아 있었다. 잠자리는 개지 않은 채, 방안은 지저분하게 어질러져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귀찮아선지 옷도 갈아입지 않는 모양이었다. 더러운 실내 옷을 그대로 걸치고 머리는 아무렇게나 땋아 올리고 있었다. 얼굴은 젖은 수건으로 닦은 듯이 보였으나 울어서 온통 부숭부숭하고 주름이 잡혀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녀는 정말 창녀 같았다. 의사가 방에 들어가자 그녀는 생기 없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녀는 불안에 싸여 지쳐 있었다.

"선교사님은 어디 계세요?"하고 그녀는 물었다.

"부르면 곧 오실 겁니다."의사는 약간 불만인 듯한 어조로 말하였다.

"경과가 좀 어떤지 보러 왔어요."

"괜찮을 것 같아요. 그건 별로 염려할 것이 없어요."

"뭐 좀 드셨나요?"

"집주인이 커피를 갖다주었어요."

그녀는 초조한 얼굴로 문 쪽을 바라보았다.

"그분이 곧 내려오실까요? 그분이 곁에 와 계시면 별로 무서운 줄 모르겠군요."

"화요일 날 떠나실 예정에는 변함이 없어요?"

"네 그날에 떠나야 한다는군요. 지금 저를 도울 수 있는 건 그분밖에 없어요."

"잘 알아들었소."

의사가 말하였다.

그 후 선교사는 사흘 동안 줄창 톰슨 양의 곁에서 보내다시피 하였다. 그는 식사 때에만 다른 사람들과 어울렸다. 의사는 그가 아무것도 먹지 못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이는 저러다가 기진맥진해 버릴 거예요."

데이빗슨 부인이 걱정이 되는 듯이 말하였다.

"조심하지 않으면 쓰러지고 말 텐데 몸을 조금도 돌보려고 하지 않는군요."

하기는 그녀의 얼굴도 창백하기 짝이 없었다. 그녀는 맥페일 부인에게 한 말에 의하면 간밤에 잠을 통 자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선교사는 톰슨 양의 방에서 2층에 돌아오면 기진맥진할 때까지 기도를 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기도를 마치고 나서도 좀처럼 잠들지 못하였다. 한두 시간 지나면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주워입고 해변으로 산책하러 나갔다. 그는 신기한 꿈을 꾸었다는 것이다.

"오늘 아침에는 꿈에 네브라스카주의 산들을 보셨다지 않아요."

데이빗슨 부인이 이렇게 말하였다.

"그 참 희한한 일이군요."

"의사가 대꾸하였다."

그는 미국을 횡단할 때에 기차에서 그 산들을 바라보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그 산들은 둥그스럼하여 마치 커다란 두더지 잔등처럼 벌판에 불쑥 솟아 있었다. 그는 그것이 흡사 여자의 젖통처럼 보이던 것을 회상하였다.

한편 데이빗슨 선교사의 초조감은 자기 자신도 걷잡을 길이 없는 것 같았다. 그러나 말로 이루 형용할 수 없는 희열이 그를 끝없이 고무해주었다. 그는 가엾은 여자의 마음 한구석에 도사린 죄악을 마지막 자취까지 송두리째 뽑기 위해 그녀와 함께 성경을 읽고 기도를 드리곤 하였다.

"참 신기한 일이거든."

그는 어느 날 저녁에 식사를 하면서 주위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이거야말로 진정한 중생이야. 어두운 한밤처럼 시커멓던 그 여자의 영혼이 이제 갓 내린 흰 눈과 같이 깨끗해졌소. 나는 놀라움을 금할 수 없소. 그 여자가 자기의 모든 죄악에 대하여 참회하는 모습은 아름답기 그지없소. 나는 그 여자의 옷자락을 스치는 것도 두렵소."

"이제는 차마 그 여자를 샌프란시스코로 돌려보낼 수는 없겠지요?"

하고 의사가 말을 계속하였다.

"미국 감옥에서 3년을 보내야 한다지요? 그것쯤 구해 주실 수는 있지 않겠어요."

"아직도 모르시는 말씀을 하시는군요. 그건 필요합니다. 그 여자 때문에 이 가슴이 얼마나 쓰라린지 아시오? 나는 그 여자를 내 아내나 누이동생과 다름없이 사랑하고 있소. 그 여자가 감옥에서 당하는 모든 고통을 나도 줄창 받게 될 거요."

"거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시오!"

의사는 참을 수 없다는 듯이 화를 버럭 내며 큰 소리로 말하였다.

"당신은 눈이 어두워 잘 모르는구려. 톰슨 양은 죄를 지었으므로 그만큼 고통을 받아야 하오. 나도 그 여자가 큰 고통을 당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소. 그 여자는 굶주림을 견디어야 하고 고문을 받아야 하며, 모욕을 당해야 할거요. 나는 인간이 주는 이러한 형벌을 그 여자가 하나님에 대한 속죄로 받아들이기를 바라고 있소. 그 여자는 우리에게는 좀처럼 주어지지 않는 기회를 갖게 될 거요. 하나님은 선하시고 자비롭기가 그지없어요."

선교사의 목소리는 흥분으로 하여 떨고 있었다. 그리하여 자기 입수에서 쏟아져나오는 말을 분명히 발음할 수도 없었다.

"나는 진종일 그 여자와 함께 기도를 하고, 또 그 여자의 곁을 떠나서도 기도를 해요. 내 모든 심령을 다 기울여 기도를 하면서 주님께서 그 여자에게 이와 같은 큰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을 바라는 거요. 나는 그 여자의 마음속에 벌을 기꺼이 받으려는 열망을 불어넣어, 설사 내가 처벌을 면케 해 주겠다고 하더라도 그 여자 편에서 거절하기를 바라는 거요. 나는 그 여자가 감옥에서 받는 괴로운 형벌을, 자기를 위해 목숨을 바치신 주님의 발밑에 드리는 감사의 제물이라고 생각해 주시를 바라고 있소."

날짜는 하루하루 지나갔다. 온 집안사람들이 아래층에 있는 비참하고 가엾은 여자에게 이목을 집중시켜 부자연스러운 흥분상태 속에서 살아왔다. 그녀는 마치 야만인들의 비린내가 나는 우상숭배의 의식을 위해 마련된 제물처럼 생각되었다. 그녀는 곁에 데이빗슨 선교사가 없으면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그가 곁에 있어야만 비로소 용기를 가질 수 있었다. 그녀는 눈물도 무척 흘렸다. 정성껏 성경을 읽고 기도를 드렸다. 그리하여 때때로 기진맥진해서 허탈 상태에 빠지기도 하였다.

그녀는 정말로 자기가 받게 될 시련을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은 그녀가 당하고 있는 고통에서 벗어나는 직접적이고도 구체적인 도피처를 제공해 줄 듯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는 현재 당하고 있는 막연한 두려움을 오래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녀는 자기가 저질러 온 죄악과 함께 모든 허영심까지도 버리기로 하였다. 심지어 나흘씩이나 잠옷 바람으로 지내며 양말도 신지 않았다. 방안은 어지럽고 지저분한 채로 내버려 두었다.

그동안 비는 잔인할 정도로 줄기차게 쏟아져 내렸다. 이제는 하늘에도 물이 동이 났을 것 같은데 비는 여전히 단조롭게, 그러나 미칠 듯이 양철지붕을 두드리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모든 것이 눅눅하고 끈적끈적하였다. 벽이며 마루에 놓아둔 장화에 곰팡이가 가득 피었다. 좀처럼 잠을 이룰 수 없는 밤이면 모기떼가 줄창 성난 듯이 앵앵거렸다.

"단 하루라도 비가 멎어 주었으면 이렇게까지 기분이 우울하지 않을 텐데……"

하고 의사가 말하였다.

모두들 샌프란시스코로 떠나는 배가 도착하는 화요일이 하루속히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긴장된 마음은 견디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닥터 맥페일의 연민과 분노는 이제 그 가엾은 여자를 하루속히 보내 버리고 싶은 욕망으로 하여 사라지고 말았다. 피할 길 없는 운명은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배가 떠나 버리면 차라리 한결 자유롭게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톰슨 양은 지사의 비서가 배까지 호위해 가기로 되어 있었다. 그 사람은 월요일 저녁에 톰슨 양을 찾아와 이튿날 열한 시까지 떠날 분비를 해 놓으라고 일렀다. 그때에도 선교사는 그녀와 함께 있었다.

"내가 모든 차비를 하도록 돕겠소. 그리고 나도 배까지 전송하겠소."

톰슨 양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닥터 맥페일은 촛불을 끄고 조심조심 모기장에 기어들어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드디어 끝장을 보게 되는군그래. 내일 이맘때면 그 여자는 떠나고 말 테지."

"데이빗슨 부인도 기뻐할 거예요. 주인이 유령처럼 말라간다고 걱정하더군요."

하고 맥페일 부인이 말하였다.

"그 여자는 아주 딴사람이 되었더군요."

"누구 말이오?"

"톰슨 양 말예요. 그는 그렇게 되리라고는 상상조차 못 했어요.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는군요."

의사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는 이윽고 잠이 들어 버렸다. 여느 때보다 피로하였으므로 한결 깊숙이 잠이 들었던 것이다.

이튿날 아침에 그는 자리에서 누가 말을 붙잡는 것을 느끼고 눈을 떴다. 깜짝 놀라 쳐다보았더니 집주인 호온이 침대 옆에 서 있었다. 그는 의사에게 아무 소리 말라고 손가락을 입에 대고 자기를 따라오라는 시늉을 하였다. 그는 여느 때에는 돛폭 천으로 만든 초라한 옷을 입고 다녔는데, 오늘은 맨발에 라바라바를 걸치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하여 난데없이 야만인처럼 보였다. 의사는 침대에서 일어나면서 그의 몸이 문신투성이가 되어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의사에게 베란다로 나오라고 손짓을 하였다. 의사는 침대에서 일어나 그의 뒤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아무 소리도 내서는 안 돼요."하고 그는 소근거렸다.

"의사 선생님이 계셔야 합니다. 어서 코트를 입고 신을 신으세요."

의사는 톰슨 양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으리라고 생각하였다.

"무슨 일이 일어났소? 진찰 가방을 갖고 갈까요?"

"빨리하세요!"

의사는 바로 침실에 들어가 파자마 위에 비옷을 걸치고 고무로 바닥을 댄 신을 신었다. 그는 호온과 함께 조용히 계단을 내려갔다. 한길로 나간 문이 열려 있고 문깐에는 5, 6명의 토인이 서 있었다.

"무슨 일이오?"

의사는 다시 물었다.

"저만 따라오세요."

호온이 말하였다.

그는 문밖으로 걸어 나가고 의사가 그 뒤를 따랐다. 그러자 토인들도 한데 몰려 그들의 뒤를 따르는 것이었다.

일행은 길을 건너 바닷가로 갔다. 거기에는 많은 토인들이 삥 둘러 서 있었다. 그들은 이 삼십 야드쯤 되는 거리를 바삐 걸었다. 토인들은 의사에게 길을 네 주었다. 그러자 호온은 의사를 앞으로 밀어내었다.

그때 반은 물속에 잠겨 있고 반은 육지에 드러나 있는 소름 끼치는 물체가 의사의 눈에 띄었다. 그것은 데이빗슨 선교사의 시체였다. 의사는 몸을 굽혀 시체를 뒤집어 보았다. 그는 아무리 다급한 일을 당하여도 제정신을 잃는 법이 없었다. 시체는 목이 귀밑에서 다른 쪽 귀밑까지 잘려있었으며, 바른손에는 면도칼을 그저 쥐고 있었다.

"싸늘하군요. 죽은 지 꽤 오래되었을 거요."

의사가 말하였다.

"어떤 아이가 얼마 전에 일하러 가던 길에 이것을 보고 나한테 뛰어와서 알려 주었어요. 자기 손으로 저지른 일일까요?"

"그런 것 같소. 누가 가서 경관을 불러오도록 해요."

호온이 토인 말로 뭐라고 하더니, 두 사람의 젊은 토인이 경관을 데리러 떠났다.

"경찰관이 올 때까지 그냥 두어야 하오."하고 의사가 말하였다.

"우리 집에 옮겨 놓을 수는 없어요. 저는 시체를 집에는 들여놓지 못하겠어요."

"당국에서 하라는 대로 잠자코 해야 돼요."

의사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대답을 하였다.

"그러나 시체는 아마 시체실로 옮기게 될 거요."

그들은 그 자리에 서서 경찰관이 오기를 기다렸다. 호온은 라바라바의 허리춤에서 담배를 한 대 꺼내어 의사에게 권하였다. 그들은 시체를 바라보면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의사는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알 수 없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하고 호온이 물었다.

의사는 어깨를 으쓱 치켜올렸다. 얼마 후에 해병의 인도를 받아 토인 경관이 들것을 들고 왔다. 그리고 곧 뒤이어서 두 명의 해군 장교와 한 사람의 군의관이 나타났다. 그들은 모든 일을 사무적으로 처리하였다.

"부인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고 한 장교가 물었다.

"여러분께서 오셨으니 이제 저는 집에 가서 뭘 좀 껴입어야겠어요. 제가 부인에게 알리지요. 일이 좀 수습될 때까지 부인께서 보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군요."

"나도 동감입니다."

하고 군의관이 말하였다.

닥터 맥페일이 집에 돌아왔을 때, 아내는 옷을 거의 다 입고 있었다.

"여보, 데이빗슨 부인이 남편 때문에 몹시 걱정하고 있어요."

아내는 그가 나타나자 이렇게 말하였다.

"두 분은 밤새도록 자리에 들지 않았대요. 부인은 그분이 새벽 두 시에 톰슨 양의 방에서 나오는 소리를 들었지만, 그분은 곧장 밖으로 나가더래요. 그 후 지금까지 어디를 줄곧 돌아다녔다면 아마 지쳐서 쓰러졌을 거래요."

의사는 아내에게 사실대로 말해 주고 데이빗슨 부인에게 전하라고 일렀다.

"아니, 그분이 왜 그런 일을 저질렀을까요?"

그녀는 불안한 마음으로 물었다.

"그건 나도 모르겠소."

"이 말을 내가 어떻게 전해요. 난 못해요."

"당신밖에 전할 사람이 없지 않소."

그녀는 두려움에 질린 얼굴로 남편을 쳐다보고 나서, 밖으로 나가 버렸다. 그녀가 데이빗슨 부인의 방으로 들어가는 소리가 의사의 귀에 들려왔다. 잠시 후 그는 마음을 진정시켜 면도를 하고 세수를 하고 나서, 옷을 갈아입고 침대에 걸터앉아 아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아내가 나타났다.

"시체를 보고 싶대요."

하고 그녀가 말하였다.

"시체를 옮겼을 거요. 우리가 같이 가보는 게 좋겠군. 그래 부인은 어떤 얼굴을 합디까?"

"기절을 할 것만 같았어요. 울지 않고 온몸을 벌벌 떨더군요."

"어서 가보도록 해요."

두 내외가 문을 노크하자 부인이 나타났다. 얼굴은 매우 창백하였으나, 눈물을 흘린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의사의 눈에는 그녀가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침착해 보였다. 그들은 서로 아무 말도 주고받지 않고 조용히 발길을 옮겨 놓았다.

시체실에 이르자 부인은 말하였다.

"저 혼자만 들어가게 해 주셔요."

다른 사람들은 뒤로 비켜섰다. 토인 한 사람이 그녀에게 문을 열어 주었다. 사람들은 그 자리에 앉아서 부인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백인 한두 사람이 찾아와서 그들과 뭐라고 나지막한 소리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의사는 그들에게 자기가 알고 있는 범위에서 이 비극에 대하여 이야기해 주었다. 이윽고 문이 조용히 열리더니 데이빗슨 부인이 밖으로 나왔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전 이제 집으로 돌아가겠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야무지고 침착하였다. 의사는 그녀의 표정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의 창백한 얼굴은 무척 딱딱해 보였다. 사람들은 아무 말도 없이 천천히 발길을 돌렸다.

그들이 구부러진 한길을 돌아서니 맞은편에 그들의 집이 보였다. 그때 데이빗슨 부인은 깜짝 놀라 멈춰 섰다. 그들 일행은 한동안 꼼짝도 하지 않고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는 소리가 그들에게 들려왔던 것이다. 그것은 오랫동안 듣지 못했던 축음기 소리로 재즈곡이 거칠고 우렁차게 울려 퍼지는 것이었다.

"저게 무슨 소리예요?"

맥페일 부인은 불안한 얼굴을 하고 물었다.

"어디 가봐요."

데이빗슨 부인이 말하였다.

그들은 현관 계단을 올라가 마루에 들어섰다. 톰슨 양이 자기의 방문 앞에서 선원들과 뭐라고 지껄이고 있었다. 그녀의 태도는 다시 돌변해 있었다. 이제는 전과 같이 기가 죽은 노예가 아니었다. 그녀는 아름다운 옷을 모두 꺼내 몸에 걸치고 있었다. 흰옷에 굽이 높은 번들거리는 장화를 신고, 그 장화 위로 목양말을 신은 살찐 아랫다리가 불룩하니 드러나 보였다. 머리도 정성스럽게 공들여 빗고 흰 꽃이 달린 커다란 모자를 쓰고 있었다. 얼굴에는 분을 하얗게 바르고 눈썹은 새까맣게 칠하였으며, 입술은 주홍빛 루즈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녀는 허리를 꼿꼿이 펴고 서 있었으며, 그들이 처음 만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교만한 여왕처럼 행세하였다. 일행을 보자, 그녀는 조롱하는 듯이 크게 깔깔거리며 웃어내었다.

데이빗슨 부인은 무의식중에 멈춰 섰다. 그러자 톰슨 양은 침을 탁 뱉았다. 데이빗슨 부인은 몸을 움칫하면서 양쪽 볼이 갑자기 붉어졌다. 그러자 그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일행들 사이에서 빠져나와 다급히 2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닥터 맥페일은 그만 화가 치밀어 그녀의 방안으로 떠밀며 들어갔다.

"이 무슨 짓이야!"하고 의사는 큰소리로 외쳤다.

"이 망할 축음기는 저리 집어치워!"

그는 다짜고짜로 축음기판을 빼어 버렸다. 그녀는 의사에게 돌아서서 말하였다.

"의사 양반, 이봐요. 누구에게 대고 하는 수작이야? 내 방에서 행패를 부릴 작정이야?"

"? 대관절 무슨 수작이냐 말이야?"

톰슨 양은 기가 났다. 그리하여 그녀가 마구 쏘아붙일 때, 그녀의 얼굴에 나타난 비웃음과 그 말에 깃들어 있는 경멸과 증오는 이루 형언할 수 없었다.

"이 사내놈들아! 더럽고 치사스러운 돼지 같으니, 너희들은 어느 놈이나 다 마찬가지야. 모두가 돼지야, 돼지!"

닥터 맥페일은 어처구니없어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그는 비로소 모든 곡절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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