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단을 내릴 때(The Moment of Decision)
Stanley Ellin
너무 철저하게 자신을 가진 사람은 남의 호감을 사지 못한다는 말이 있지만, 휴 로 저만은 예외였다. 우리는 누구나 그처럼 확신 있는 사람 - 감정을 억누르면서도 아주 투명한 목소리로 모여 앉은 여러 사람들을 꽉 누르고 급소를 찌르는 의견을 마치 쪽 곧은 둘째손가락처럼 상대방 가슴에 들이대고, 문제가 무엇이든 최후의 결정을 내리는 인물과 마주치는 일이 있다. 그런 인물에 대해서는 누구나 불쾌감과 선망이 뒤섞인 기분을 금치 못하는 것이 아닐까? 불쾌감을 느끼는 것은 누구나 다른 사람의 호통을 듣거나 가슴을 쿡쿡 쥐어박히기 싫기 때문이며, 선망을 갖는 것은 자신이 그처럼 자신만만하게 남을 호통치거나 들볶아대는 입장에 서고 싶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로서는 이 원자력 시대를 지배하는 것은 혼돈된 상태이며, 언제나 변함없이 자잘 한 정치적 논의만이 있는 곳에 몸담고 있으므로 절대적인 판단이란 좀처럼 내릴 수 없다고 생각될 뿐이다. 휴는 이 상태를 평하여, 자기가 다니는 관공서의 윗사람들이 같은 천으로 재단한 옷처럼 획일적이 아닌 것이 다행한 일이라고 말한 일이 있다. 만 일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어떻게 될 것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의견에 그다지 감탄한 것은 아니지만 - 여기서 나는 또다시 꺼림칙한 생각이 든다 - 과연 그러고 보니 그럴 듯한 말이라고 생각지 않을 수 없었다.
휴가 나의 매형이라는 사실 - 생각해 보면 기묘한 관계이긴 하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를 아는 다른 사람들이 다 그렇듯 몹시 그를 좋아했다. 혈색 좋은 얼굴에 밝고 파란 눈을 지닌 몸집이 크고 호감이 가는 사나이로, 다른 것에 의하지 않고 상대방이 내놓는 것을 올바르게 판단하려는 기민한 적극성을 갖추고 있었다. 또 그는 거만하고 남을 압도시킬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받아들이는 상대방으로 하여금 그에게 호의를 베풀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게 만드는 보기 드문 훌륭한 인물이었다.
나는 그런 인물이 특히 뛰어난 유머 감각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지는 않지만, 꾸밈없이 선량한 기질로 그것을 메우는 경우는 가끔씩 있는 것 같다. 휴의 경우가 바로 그러했다. 그의 격렬한 성격은 이를테면 누군가가 그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만 어쩌다 말할 기회를 놓친 것 같은 경우를 위해 잘 보존되어 있었다. 만일 휴가 누군가와 알 게 되어서 10분 뒤에 그 사람을 좋아하게 되었다면, 그는 휴에게 어떤 것이든 - 그가 제공할 수 있는 것인 한 - 요구해도 된다. 나의 누이 엘리자베드가 그와 결혼하여 한 달쯤 되었을 때, 누이는 내가 힐톱의 그의 저택 화랑에 걸려 있던 코프리의 명 작을 몹시 마음에 들어 한다고 그에게 말한 일이 있었다. 그리고 나는 소중하게 꾸린 그 그림과 그의 서명이 든 헌정 카드가 갑자기 나의 누추한 아파트로 보내져왔을 때 의 공포와도 비슷한 놀라움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상당히 힘들기는 했지 만, 결국 나는 그 그림이 내가 사는 건물보다 더 비쌀 것이라는 전제 아래, 내 방 벽에 걸어봐야 볼품이 없다는 구실을 붙여 가까스로 다시 되돌려 보낼 수 있었다. 아마 그는 내가 거짓말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러니저러니 나무랄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 또한 휴다운 점이었다. 물론 휴를 그런 인물로 만들어낸 데는 힐톱 저택과 2백 년에 걸친 로저 집안 전통의 힘이 컸다. 로저 집안의 조상을 강이 내려다보이는 고지에 장원을 만들고 고생을 거듭하여 대단한 번영을 가져왔다. 그 뒤 후손들이 재산을 늘리는 데 노력하여 마침 내 축적된 부와 지위는 힐톱 저택과 바깥 세계에 굉장한 벽을 쌓은 것 같은 인상을 주었다. 사실 휴는 본디 18세기 사람인데 잘못하여 우연히 20세기에 태어나 어쩔 수 없이 참고 있는 듯이 보였다.
힐톱 저택 그 자체는 저 이름 높은, 그러나 오랫동안 사는 사람이 없는 덴 저택을 그대로 본떠 놓은 듯한 것으로서 그 위용은 보는 이로 하여금 놀라움을 금치 못하게 했다. 저택은 오랫동안 눈서리 비바람을 겪은 석조 건물로, 그렇게 큰데도 불구하고 우아했으며, 강가에까지 뻗어나간 넓은 잔디밭은 오랜 세월에 걸쳐 거의 열광적으로 정성들여 잘 손질하여 약간의 바람에도 마술처럼 광택을 바꾸는 순수한 녹색의 융단을 이루고 있었다. 안채를 깨고 그 반대쪽에서 마굿간과 부속 건물을 반쯤 가리고 있는 숲에 이르기까지 정원이 펼쳐져 있고, 숲 저쪽에 시내로 통하는 가는 도로가 나 있었다. 이 도로는 그 일대 지주들이 각기 소유지에 접한 부분을 유지하기 위해 비용을 분담하여 만든 것으로, 휴는 거기에 돌을 깔아 책임 있게 관리해 왔지만, 그 도로를 사용하는 횟수는 이웃 사람 중에서 가장 적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휴의 생활은 힐톱 저택에 붙들어 매어져 있었다. 그가 그곳을 떠나는 경우는 아주 긴급한 일이 있을 때뿐이었다. 그런데 그런 상태에 있을 때 그를 만나보면 오로지 다시 그 저택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만일 적극성을 띠어 저택으로 돌아가는 그의 길동무가 되면 소중한 몇 주일을 허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그곳을 떠나지 못하는 자신을 깨닫게 될 것이다. 나도 그런 경험이 있다. 나도 누이 덕분에 휴와 친척에 된 뒤로 나의 아파트에서보다 이 힐톱 저택에서 보낸 시간이 더 많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엘리자베드가 결혼생활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나 의아해한 적이 있었다. - 왜냐하면 그녀가 휴를 만나기 전의 일을 생각해 보면, 아름답기는 하지만 잠시도 얌전히 있지 못하는 말괄량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이에게 직접 물어보자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주 멋지단다. 처음에 만났을 때, 결혼하면 이러리라고 예상했던 대로 말이야. "알고 보니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곳은 어느 미술 전람회에서였는데, 그것도 뭔가 초현대적인 작품만 잔뜩 늘어놓은 곳이었다고 한다. 그녀는 그중에서도 뭔지 알아볼 수 없는 작품을 자세히 바라보고 있었는데 키가 크고 멋진 사나이가 자기를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고 한다. 그래서 누이의 말에 의하면 <그 사나이를 타이르려고>하던 참이었는데, 그쪽에서 불쑥 말을 걸어왔다는 것이다.
" 당신은 그 그림에 감탄하고 있는 겁니까?" 너무도 뜻밖의 질문에 누이는 완전히 허를 찔리고 말았다.
"글쎄요" 하고 누이는 조그맣게 대답했다. "감탄해야 하나요?" "아니오" 하고 그 사나이는 말했다. "완전히 넌센스니까요. 나를 따라오십시오. 보아서 시간 낭비가 되지 않는 것을 보여드릴 테니까요." "그래서" 하고 엘리자베드는 나에게 말했다. "나는 강아지처럼 그 사람 되를 따라갔단다. 그 사람은 이리저리 나를 끌고 다니며 어느 작품은 어디가 좋고 어디가 나쁘다느니 하며 또렷한 목소리로 설명해 주었으므로,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모여들었을 정도였어. 어때, 그 모습을 상상할 수 있겠니?" "물론" 하고 나는 말했다. "상상할 수 있지요. "지금은 나도 그 비슷한 경우를 경험했으므로 무쇠 같은 그의 자신감은 어떤 것으로도 납작하게 만들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말이야" 하고 엘리자베드는 말을 계속했다. "나도 처음에는 좀 번거로운 생각이 들었는데, 그러나 차츰 그가 자신이 지껄이고 있는 일은 정확히 알고 있고, 굉장히 진지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거야. 자만심 같은 것은 조금도 없었어. 다만 여러 가지 사물을 자기가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나에게도 이해시키고 싶어 애쓰고 있을 뿐이었지. 이런 것은 어디에나 다 해당되는 일이지만. 다른 사람들은 언제나 무얼 하나 – 저녁 식사 때 무엇을 주문할 것인가,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 것인가, 누구에게 투표할 것인가 - 결단을 내리지 못한 채 망설이고 있지만, 휴는 언제나 다 알고 있단다. 신경이 초조하다든가, 콤플렉스로 괴로와한다든다 하는 일은 - 흔히 듣는 일이지만 - 모두 무지에서 오는 게 아닐까? 어쨌든 나는 휴 쪽을 택하겠어. 다른 사람들은 모두 정신병 의사에게 맡겨두면 돼. "모든 것이 이런 식이었다. - 얼룩 한 점 없는 잔디밭이 깔려 있고, 신경쇠약이나 콤플렉스와는 인연이 없으며, 사악한 뱀이 주위에 얼씬도 못 하는 에덴동산 - 즉 레이먼드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바로 그랬었다.
그날 우리- 휴와 엘리자베드와 나 -는 잔디 위에 나와 있었는데, 모두 다 8월의 햇빛에 축 늘어져 일종의 도취상태에 빠져서 말하는 것마저 귀찮은 생각이 들었다. 나는 린네르 모자를 얼굴에 올려놓고, 주위에서 들리는 여름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완전히 만족한 얼굴로 누워 있었다.
가까이 있는 백양나무 사이로 계속 미풍이 나직한 소리로 속삭였다. 아래쪽 강에서는 노 젓는 소리,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으며 잔디밭에서 노는 양이 울리는 구슬픈 방울 소리가 간간이 딸랑딸랑 들려오고 있었다. 그 양 떼를 기르는 일은 휴가 생각해 낸 것이었다. 몇 마리의 양들이 풀을 뜯는 모습만큼 잔디밭에 잘 어울리는 것은 없다는 것이 그의 단호한 의견이었다. 그리하여 해마다 여름이면 대여섯 마리의 살찌고 께느른해 보이는 암양을 이 목적을 위해, 그리고 아울러 풍경에 기분 좋은 목가 적인 분위기를 더해주기 위해 잔디에 놓아먹이고 있었다.
무언가 뜻하지 않은 일이 일어났다는 것은 우선 그 양들이 갑자기 방울 소리를 요란하게 울리며 마치 이리떼가 습격해 온 것처럼 울어댔으므로 알 수 있었다. 휴가 화 난 목소리로" 제기랄!" 하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나서 눈을 뜬 내가 본 것은 어떤 의미에서 이리보다 더 그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그것은 털을 아 주 우습게 깎인 데다 빨간 목걸이를 한 크고 검은 푸들 개였는데, 놀라 잔디밭을 도망치는 양을 흥분하여 정신없이 쫓아다니고 있는 중이었다. 그 개가 양을 어떻게 하려는 건 아닌 듯했다 - 아마도 굉장히 멋진 놀이 상대를 발견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공포에 질린 암양들이야 그런 사정을 알 까닭이 없다. 그 개의 진심이 양 들에게 전달되기 전에 모두 강물로 뛰어들어 빠져 죽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애가 한눈에 그것을 알아차린 순간 휴는 재빨리 낮은 잔디밭으로 달려 내려가 양들 사이로 뛰어들어 물가로 못 오게 쫓으며, 큰 소리로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개를 제지하고 있었다.
"앉아!" 하고 그는 외쳤다. "앉아!" 그는 마치 자기의 사냥개에게 명령하는 말투로 엄격하게 명령했다. "엎드려!" 막대기나 돌멩이라도 주워들고 위협하는 시늉을 하면 좀 더 쉬울 텐데 하고 나는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 개는 휴의 말을 전혀 들은 체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뿐만 아 니라 개는 여전히 재미있는 듯 짖어대면 다시 양들을 향해 덤벼들었으므로 휴도 그 뒤를 쫓아갔다. 잔디밭가에 있는 백양나무 사이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개가 얼어붙은 듯 딱 멈춰 선 것은 그로부터 한순간 뒤였다.
"앉아!" 그 목소리는 숨이 차서 말하는 프랑스어였다.
"앉아!" 이윽고 자그마하고 재빨라 보이는 사나이의 모습이 풀밭을 달려서 나타났다. 우리가 보고 있노라니 휴는 어두운 안색으로 서서 기다렸다.
엘리자베드가 나의 팔을 붙잡으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가자, 우리도. 휴는 남이 업신여기는 일은 참지 못하는 성질이니까." 가까이 다가가니 마침 휴가 화를 내고 있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든 자기가 기르는 동물을 제대로 단속하지 못한다면 키울 자격이 없소!" 상대방 사나이는 어디까지나 예의 바르게 듣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갸름하고 교양 있어 보이며 눈꼬리에 잔주름이 진 인상 좋아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 눈 속에는 완전히 숨길 수 없는 것 - 외계를 향해 열려진 카메라의 렌즈처럼 날카로운 지각의 번뜩임이라고나 할까 - 이 담겨 있었다. 휴와 같은 성격을 사람으로서는 알아차릴 수 없을 터이지만 그러나 그것이 분명 그의 눈 속에 있었다. 나는 곧 마음이 온화해짐을 느꼈다. 또한 이 새로 나타난 사나이의 얼굴, 튀어나온 이마, 성긴 백발 등에는 뭔가 사람을 초조하게 하는 친근감이 있어, 휴의 그럴싸한 긴 설교가 행해지고 있는 동안 나는 그것이 무엇인가 알아보려고 기억을 더듬어보았으나 아무래도 해답을 찾아낼 수가 없었다. 설교는 가장 훌륭한 개의 훈련법에 대한 이야기로 끝났으며, 그때는 이미 휴가 용서하려 한다는 것을 뚜렷이 알 수 있었다. 그는 말했다.
"어쨌든 아무 손해도 없었고 ……" 사나이는 정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새 이웃으로 알고 지내는 방법치고는 아무래도 좋지 않았던 것 같군요 -" 휴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웃으로 알고 지내다니요?" 하고 휴는 거의 무례하다고 여겨질 만한 말투로 물었다. "이 근처에 사신단 말씀입니까?" "저 숲 쪽입니다. "상대방은 백양나무 쪽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덴 저택인가요?" 휴에게 있어 덴 저택은 힐톱 저택이나 마찬가지로 신성한 것으로, 만일 누가 사지 않겠느냐는 이야기가 나오면 두말하지 않고 사들이겠다는 말을 언젠가 한 적이 있었을 정도였다. 휴의 말투에는 이제 기분이 상했다기보다 믿기 어렵다는 느낌이 더해 있었다.
"설마!" 하고 휴는 큰 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그게 사실입니다" 하고 상대방은 대답했다. "덴 저택입니다. 나는 여러 해 전 거기서 주최한 파티에 참석한 적이 있었는데, 언젠가 내 소유로 삼았으면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지요. "나에게 해명의 단서를 제공해 준 것은 <주최한다>라는 말 - 과 정확한 영어에 가끔 섞여 나오는 외국 사투리였다. 분명 그 사나이는 마르세이유에서 태어나 자랐으며 - 이 사실이 사투리의 유래도 설명해 주었다 - 내가 어른이 되기 훨씬 전에 이미 전설적인 존재가 되어버린 인물이었다.
"당신은 레이먼드 씨지요?" 하고 나는 말했다. "찰즈 레이먼드 씨." "그냥 레이먼드라고 불러주는 편이 좋습니다. "그는 자기의 조그마한 허영을 물리치듯이 미소 지었다. "어쨌든 나를 기억해 주시니 영광이군요. "나는 그가 정말 영광으로 생각했다고는 믿지 않았다. 마술사 레이먼드, 기술 왕 레이먼드라면 어디를 가나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잘 알려져 있을 테니까. 또 솜씨가 뛰어난 점에서는 새스튼의 영광을 압도하고, 탈출 기술가로서는 거의 푸디니를 능가한 레이먼드가 자기를 과소평가할 리도 없었다.
그는 대부분의 직업적인 마술사들이 레퍼토리로 삼는 표준적인 상연 종목을 가지고 시작했다. 그 뒤 그것들을 훨씬 넘어 지금은 우리들에게 잘 알려져 있는 - 물론 내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지만 - 탈출의 경지에까지 이른 것이다. 두껍게 얼어붙은 호수 밑바닥에 있는 납으로 된 관처럼 생긴 그릇, 강철로 용접된 옷, 잉글랜드 은행의 대금고, 무엇보다도 목과 두 다리에 고리를 걸어서 묶고 다리를 움직이면 목에 맨 끈이 그만큼 당겨지도록 장치한 교묘한 <자살 묶음> - 레이먼드는 이런 것들을 다 알고 있었으므로 거기서 탈출해 보인 것이다. 그리고 명성의 극치에 올랐을 때 갑자기 모습을 감춰, 그의 이름은 과거로 흘러가 버렸다.
왜 그런 일을 했느냐고 내가 묻자, 그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사람은 돈이나, 아니면 일에 대한 애정 때문에 일하는 것이오. 필요한 만큼 돈을 손에 넣었고 이미 일에 대한 애정도 없어졌다면, 어떻게 더 이상 일을 계속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위대한 경력을 아무렇게나 내동댕이치면서까지 -" 하고 나는 반론을 내 세웠다.
"여기 이 저택이 나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도망쳐 나올 수가 있었지요." "그러면 당신은" 하고 엘리자베드가 말했다. "여기 말고는 아무 데서도 살 생각이 없었나요?" "네, 전혀 - 벌써 몇 년 동안이나. "레이먼드는 코에 손가락을 대고 허풍스럽게 눈을 찡긋해 보였다. "물론 나는 이 사실을 덴 저택의 소유주에게 숨기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이윽고 집을 팔게 되었을 때도 나에게만 그 사실을 이야기해 준 것이지요." "당신은 일단 무슨 일이 생각나면 좀처럼 단념하지 않는 성격인 모양이군요" 하고 휴가 험악한 목소리로 말했다.
레이먼드는 소리 내어 웃었다.
"<생각나면>이라고요? 생각나면이 아니라 이제 집념이 되어버렸습니다. 몇 년 동안 나는 세계 여러 곳을 두루 여행하여왔지만, 아무리 아름다운 곳이라 해도 발밑으로 강을 굽어보고 저만큼 언덕을 짊어지고 있는 저 숲가의 덴 저택만큼 아름답지는 못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언젠가 여행이 끝나면 틀림없이 이곳으로 돌아와 간디드처럼 내 정원을 가져야겠다고 스스로 맹세했지요." 그는 무의식적으로 푸들 개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굉장히 만족스러운 태도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이제 보시다시피 나는 여기에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그가 그곳으로 찾아온 것은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가 찾아온 일이 힐톱 저택에 어떤 변화를 가져오려 한다는 사실도 얼마 안되어서 명백해졌다. 아니, 힐톱 저택은 완전히 휴의 반영이었으므로 휴에게 어떤 변화가 미치려 하고 있다고 하는 편이 옳을지도 모른다. 휴는 초조하여 침착성을 잃고, 과거의 어느 때보다도 자신을 과시하게 되었다. 부드러움과 좋은 마음씨는 아직도 남아 있었다. - 그런 특성은 거만함과 마찬가지로 그의 피의 일부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 그러나 그것을 유지하는 데 전보다 더 애를 쓰고 노력해야만 했다. 그는 눈에 들어간 작은 먼지 때문에 괴로와하면서도 그것을 찾아내어 제거할 수가 없어서 그냥 넣어둔 채 참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상태에 있는 사나이처럼 보였다.
물론 그 먼지란 레이먼드였다. 그러나 그쪽에서는 오히려 얼마쯤 이 먼지의 역할을 즐기고 있는 것 같은 인상을 주었다. 레이먼드로서는 자기 저택에 들어앉아 정원을 손질하거나, 앨범을 정리하거나, 그밖에 무사히 은퇴한 예능인이 하는 것 같은 일을 하며 지내기는 쉬운 일이었을 텐데, 그런 일들은 하고 있을 수 없다고 거부한 듯한 인상이었다. 그는 곧잘 갑작스럽게 불쑥 힐톱 저택을 찾아왔다. 그리고 휴 쪽에서도 역시 그와 반대로 – 휴 답지 않게 일부러 - 덴 저택으로 재미도 없는 긴 이야기를 하러 찾아가는 것이었다.
둘 다 자기들의 성격이며 견해가 아주 달라서, 안전하고 논리적인 해결은 다만 서로 가까와지지 않도록 하는 수밖에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에는 말하자면 정과 반 에너지의 친화력이라 할 수 있는 관계가 있어 둘이 한방에 있을 때 저항하는 힘의 흐름이 두 사람 사이에 불꽃을 튀기며 격돌하는 것이 거의 눈에 보이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어떤 문제든 두 사람 사이에서는 논쟁의 원인이 되었고, 둘 다 그 문제를 놓고 크게 다퉜다. 휴는 그의 절대적인 확신을 갑옷과 무기로 삼아 무섭게 덤벼들었다. 그러면 레이먼드는 가느다란 칼을 손에 들고서 재빨리 몸을 날려 상대방의 갑옷에 칼로 찌를 틈이 있는지 어떤지 살핀다. 레이먼드를 가장 초조하게 만든 것은 그 갑옷에 틈이 전혀 없었다는 사실이었을 것이다. 모든 문제를 여러 각도에서 자세히 조사하고, 동기며 원인을 깊이 살피려는 열정을 품은 사람으로서 레이먼드는 끊임없이 자기의 법 을 가지고 군림하려고 열중하는 휴의 방법에서 격분을 느꼈다.
또한 이 사실을 휴에게 알리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당신은 아무리 보아도 중세기적이군요" 하고 레이먼드는 말했다. "그런데 중세기 이후에 인간이 배운 일 가운데 가장 뛰어나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어떤 문제에 대해서나 마치 손가락을 탁 퉁기는 것처럼 간단한 해결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나로서는 다만 당신이 언젠가 완전한 딜레마, 대답할 수 없는 의문에 다다르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것은 당신에게 무언가를 계시해 줄 것입니다. 그때 당신은 일찌기 꿈도 꾼 일이 없을 정도로 많은 일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휴는 이 말에 대해 다음과 같은 식으로 차갑게 대답했다.
"그러면 나도 말하겠는데, 정상적인 두뇌를 가지고 그것을 사용하는 용기를 가진 사람에게는 완전한 딜레마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나중에 일어난 사건을 예언해 준 삽화였는지도 모른다. 또는 레이먼드로서는 다만 아무 사심 없이 순수한 동기에서 그렇게 말했을 뿐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동기야 어찌되었든 결과는 피할 길 없는 위험한 것으로 나타났다.
직접적인 동기가 된 것은 어느 날 레이먼드가 우리에게 들려준 어떤 계획이었다. 그는 자기가 덴 저택에 살아보니 집이 너무 커서 지나치게 음울하다고 말했던 것이다. "마치 박물관 같습니다." 하고 그는 설명했다. "나는 내가 유령이 되어 끝없이 계속되는 진열실을 헤매 다니는 듯한 기분이 들곤 합니다." 부지에도 손을 대어 조망을 좋게 할 필요가 있으며, 해묵은 큰 나무는 분명히 아름답기는 하지만 레이먼드의 말을 빌면 좀 너무 많다는 것이었다.
"과장이 아니라 나무 때문에 강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나는 물의 흐름을 바라보는 것이 더없는 즐거움이거든요." 아무튼 눈 딱 감고 손을 대야만 한다 - 저택에 달아내 지은 두 곳의 튀어나온 부분을 부숴버리고, 강가로 널따란 길이 뚫리도록 나무를 베어내어 전체적으로 활기를 띠게 한다 - 그렇게 하면 저택은 이미 박물관이 아니라 그가 몇 년 전부터 꿈꾸어 오던 그런 집이 될 것이라고.
이 노래하는 듯한 투의 설명이 시작되자 휴는 약간 고개를 숙인 자세로 편하게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레이먼드가 앞으로 뜯어고칠 저택의 구조를 생생하게 전개해 보이자 휴는 차츰 자세를 똑바로 하였으며, 마침내는 안장 위에 올라탄 기병 같은 자세로 바뀌었다. 입이 꽉 다물어져 있고 얼굴을 핏빛처럼 불그레한 기를 띠고 있었다. 두 손은 완만하지만 강한 리듬을 타고 쥐어졌다 펴졌다했다. 그가 갑자기 폭발하지 않은 것은 기적과도 같았다. 그러나 이 기적도 물론 오래 유지될 성질의 것은 아니었다. 나는 엘리자베드의 표정에서, 그녀 역시 이 사실을 눈치채고 있지만 나와 마찬가지로 어떻게 손쓸 도리가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윽고 레이먼드가 그 묘사를 화려하게 장식하여 최후의 손질을 끝내고 자못 만족스러운 듯이"자아, 여러분의 감상은 어떻습니까?" 하고 물었을 때, 이미 휴는 자신을 억제할 수가 없게 되었다.
휴는 천천히 몸을 앞으로 내밀고 말했다.
"당신은 정말 내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알고 싶습니까?" "여보, 휴!" 하고 엘리자베드가 당황해서 말했다. "부탁이에요, 여보 -" 휴는 그 말에는 귀도 기울이지 않았다. 그는 레이먼드에게 다그쳐 물었다.
"정말 알고 싶습니까?" 레이먼드는 눈살을 찌푸렸다.
"물론이지요." "그럼, 말하겠습니다." 하고 휴는 말하고 나서 숨을 깊숙이 들이마셨다. "웬만한 파괴주의자가 아닌 이상 당신이 하려고 하는 그런 무모한 짓은 생각해 내지도 못할 겁니다. 당신은 전통이나 불변의 각인이 새겨진 것을 다름 아닌 바로 자신이 산산조각으로 부숴버리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인 것 같군요. 가능하면 이 세계를 떠받치고 있는 지구까지 걷어차 버리고 싶겠지요!" "실례지만" 하고 레이먼드가 말했다. 그는 분노로 아주 새파래져 있었다. "당신은 변화와 파괴를 혼동하고 계시는 것 같군요. 뭐 당연한 일이지만 나는 아무것도 파괴할 생각은 없으며, 약간 필요한 변화를 주려하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이해해주시지 않으면 -" "필요?"하고 휴는 비웃었다. "몇백 년이나 자라온 훌륭한 나무들을 뿌리째 뽑아 버리다니! 바위처럼 든든한 저택을 조각조각 부숴버리다니! 그것은 내가 생각하기에 그야말로 무모한 파괴 행위요!" "글쎄요, 이해가 안 가는군요. 다만 풍경에 활기를 불어넣고 그것을 다시 구성하여 -" "더 이상 이야기하고 싶지 않소" 하고 휴는 말을 가로막았다. "나는 다만 당신 같은 사람이 그 저택에 함부로 손을 댈 권리가 있을 수 있는가를 생각할 뿐이요!" 두 사람은 이미 자리에서 일어나 험악한 기세로 마주 보고 있었다. 그래도 그때 내가 겁을 먹지 않았던 것은 휴가 설마 폭력을 쓰지는 않을 테고, 레이먼드 역시 이성을 잃기에는 너무도 분별 있는 사람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위험스러운 순간이 마술처럼 지나갔다. 레이먼드의 입술이 갑자기 재미있는 듯이 벌어지더니, 그는 예의에 벗어나지 않는 한 흥미를 보이며 휴를 관찰했다.
"과연 곧 알아차렸어야 할 일을 내가 어리석게도 소홀히 했나 봅니다. 그러니까 당신은 저 박물관과 비슷한 저택을 그대로 보존하고 나는 그곳을 관리하는 관리인으로 만족하라, 그 말씀이지요? - 말하자면 과거의 문지기, 아니면 그 유물을 지키는 관리자로서 말입니다. "레이먼드는 미소 지으며 머리를 내저었다.
"그러나 아무래도 나에게는 그 역할이 적당치 않은 것 같습니다. 하기야 나도 과거에 경의를 표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보다는 현재에 봉사하는 편이 더 나의 취미에 맞습니다. 따라서 나는 내 계획을 그대로 추진할 생각입니다. 그로 인해 우리들의 우정에 금이 가지 않기를 바랍니다."
다음날이면 나는 덥고 긴 일주일 동안을 책상 앞에 앉아서 지내야 할 시내로 돌아가야 할 텐데, 레이먼드가 아주 재치 있게 일을 처리한 덕분에 그럭저럭 그 정도로 수습되어서 우선은 마음이 놓여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러므로 그 주말에 엘리자베드로부터 걸려온 전화에 대해서는 전혀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었다.
"큰일 났어!" 하고 그녀는 말했다.
물론 휴와 레이먼드와 덴 저택에 관계된 일이었는데, 전에 없이 상황이 험악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다음날 곧 힐톱 저택으로 와주기 바란다고 그녀는 말했다 - 사정이 어떻든 꼭 와야 한다고, 그녀에게 일을 해결할 한 가지 계획이 있는데, 반드시 내가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휴는 내 말이라면 들어주니까 나만 믿겠다는 것이었다.
"믿겠다고? 어떻게 -?" 하고 나는 말했다. 나로서는 가 말이 아무래도 위험한 이야기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휴가 내 말을 듣다니, 그건 지나치게 과장된 말이 아니오? 그가 자기의 사사로운 일에 나의 충고를 받아들일 것 같소?" "좋아, 그렇게 애를 먹일 작정이라면 -" "그런 게 아니라" 하고 나는 얼른 말했다. "다만 나는 그런 말썽 속에 끌려 들어가고 싶지 않을 뿐이오. 휴에게는 자신의 일을 자신이 처리할 만한 지각이 있으니까 ……" "남을 만큼 있을지도 모르지." "그렇다면 ……?" "- 지금은 설명할 수 없어." 그녀는 우는 소리로 말했다. "내일 모든 것을 털어놓을게. 그러니 제발 부탁이다. 만일 조금이라도 나를 누이라고 생각한다면 내일 아침 열차로 꼭 와다오. 꼭 …… 정말 큰일 났어." 아침 열차로 도착한 나의 기분은 무거웠다. 나는 아주 사소한 일로도 우주가 금방 망할 것 같은 재액을 상상하는 성격이었으므로, 힐톱 저택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모든 일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갖추어져 있었다.
그러나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모든 것이 평온무사했다. 휴는 나를 따듯하게 맞아주었고, 엘리자베드로 기뻐했다. 우리는 즐겁게 점심을 같이 들었다. 레이먼드며 덴 저택에 대해서는 일체 입 밖에도 내지 않았다. 나는 엘리자베드가 전화한 일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지만, 가까스로 그녀와 둘이 있게 될 때까지 마음속에서는 줄곧 화가 치밀어 오르고 있었다.
"자아 -" 하고 나는 말했다. "이 수수께끼를 모두 설명해 줘요.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하고 얼마나 걱정했는지 압니까? 그런데 지금까지 내가 본 바로는 아무 일도 없는 것 같군요. 뭐라고 설명해줘 봐요. 그 전화가 걸려온 뒤로 걱정했던 일이 풀렸나요?" "좋아"하고 그녀는 엄격하게 말했다. "설명해 주마. 날 따라와." 그녀는 정원을 빠져나가 마구간과 광을 지난 다음 한참 동안 걸어갔다. 그리하여 숲 저쪽을 치닫고 있는 개인 도로 가까이까지 오자 누이가 불쑥 말했다.
"저택까지 차를 타고 올 때 이 도로에 이상한 데가 있는 길을 알아차리지 못했니?"
"아니오, 전혀." "그렇겠지. 차를 돌리는 길은 여기까지 오기 훨씬 이전에 갈라져 있으니까. 하지만 지금 네 눈으로 직접 보면 될 거다." 나는 보았다. 의자 하나가 길 한가운데에 놓여 있었는데, 그 의자에 아주 건장해 보이는 사나이가 혼자 앉아 정신없이 잡지를 보고 있었다. 누구인지 나는 곧 알아볼 수 있었다. 그 사나이는 누이네 마구간을 지키는 사람인데, 지금까지도 꽤 오랜 시간을 앉아 있었으며 앞으로도 상당히 오랫동안 앉아 있을 작정인 듯 참을성 있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무엇 때문에 그런데 앉아 있는지 나는 이해할 수 있었지만, 엘리자베드는 무엇 하나 나의 추리력에 맡기려 하지 않았다. 우리가 가까이 가자 그 사나이는 일어서며 싱긋 웃었다.
"윌리엄"하고 엘리자베드가 말했다. "로저 씨가 당신에게 무슨 일을 시켰는지 동생에게 가르쳐주겠어요?" "좋습니다." 하고 사나이는 쾌활하게 대답했다. "로저 씨는 늘 우리들 가운데 누구 한 사람이 여기 앉아서 덴 저택의 공사 재료 같은 것을 실은 트럭이 지나가거든 세워서 쫓아 보내라고 하셨습니다. - 우리는 다만 상대방에게 여기는 사유지니까 불법침입이라고 말해 주면 됩니다. 만일 상대방이 우리의 손가락 하나라도 건드리게 되면 우리는 곧 경찰에 알리면 되는 거지요. 그뿐입니다." "그래, 지금까지 쫓아버린 트럭이 있었나요?" 하고 엘리자베드는 나에게 들려주기 위해 물었다.
사나이는 놀란 표정을 지으며 설명해 주었다.
"아니, 아직 모르고 계셨습니까? 우리가 여기서 지키고 있기 시작한 그 날에 두 대를 쫓아 보냈습니다. 말썽이 생긴 일은 없습니다. 운전수들도 모두 불법침입에 걸려들기는 싫어하니까요." 다시 되돌아오며 나는 이마에 손을 대었다.
"참, 어처구니없는 일이군! 휴 같은 사람이라면 이런 일을 하고 그대로 무사하지 못하리라는 것쯤 잘 알 텐데. 저 길은 덴 저택으로 가는 단 하나의 길로서 오랫동안 공공도로처럼 쓰여왔는데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개인 도로라니, 말도 안 돼!" 엘리자베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2, 3일 전에 그 사람이 휴에게 말한 것도 바로 그거야. 화가 머리끝까지 나 가지고 찾아와 둘이서 상당히 심한 말들을 주고받았지. 그 사람이 휴를 법정으로 끌어내겠다고 말하지, 휴는 이 문제를 소송한다면 기꺼이 여생을 바치겠다고 대답하지 않겠니.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은 끝으로 폭력은 다만 폭력을 불러일으킬 뿐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고 협박 비슷한 말을 하고 돌아갔어. 그 뒤로 나는 언제 싸움이 터질지 몰라 제정신이 아니란다. 생각해 봐, 안 그렇겠니? 저렇게 보란 듯이 사람을 길 가운데 앉혀놓고 길을 가로막는 것은 언제든지 올 테면 오라고 싸움을 거는 거나 마찬가지 아니니. 나는 걱정이 되어서 ……" 그 심정은 나도 알 수 있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더욱 더 위험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하지만 나에게 한 가지 계획이 있어" 하고 엘리자베드는 열띠게 말했다. "그래서 너에게 와달라고 부탁할 거야. 나는 오늘 밤 디너파티를 열 작정이야 - 아주 간단하게 아는 사람만 모여서. 말하자면 일종을 강화회의라고 할 수 있겠지. 참석자는 너하고 와이넌트 박사 - 둘 다 휴가 좋아하는 사람이지 - 그리고 ……" 그녀는 잠깐 망설이더니 덧붙여 말했다. "레이먼드 씨야." "설마!" 나는 말했다. "진심으로 말하는 거요. 그건?" "나는 어제 그 사람을 찾아가서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누었어. 나는 사정을 잘 설명했어 - 이웃이니까 서로 마음을 털어놓고 이야기하면 안 될 일이 어디 있겠느냐고. 그런 게 동포애가 아니겠느냐고 – 보나 마나 설교조의 재미없는 이야기였지만 아무튼 그런대로 성공적이었어. 그가 오겠다고 약속해 주었거든." 나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휴가 그 사실을 알고 있나요?" "파티 말이냐? 응, 알고 있어." "아니, 내가 묻고 있는 것은 레이먼드 씨가 온다는 사실 말입니다." "아니, 몰라." 그 대답을 듣고 내가 뚫어지게 쳐다보는 걸 알아차리고 그녀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하지만 누가 어떻게 하지 않고는 안 될 것 같아서 내가 그 역할을 떠맡았을 뿐이야! 우두커니 앉아서 구경만 하고 있는 것보다야 낫지 않겠니?" 그날 밤 모두들이 식장 테이블에 자리 잡고 앉을 때까지는 나도 그 말이 옳다고 인정하고 있었다. 휴는 레이먼드가 찾아온 것을 보고 분명 놀란 표정을 보였으나, 그 뒤로는 다만 글로 쓰면 몇 권의 책이 될 것 같은 뜻이 담긴 눈길로 엘리자베드를 쳐다보았을 뿐 감쪽같이 자기감정을 감췄다. 그는 모인 사람들은 예의에 벗어나지 않게 소개하고, 자기에게 던져진 대화에는 서슴없이 대답하는 등 대체적으로 그날 밤 파티의 주인 역할을 훌륭히 해냈다.
아이어니컬하게도 엘리자베드의 계획은 어찌 되었든 성공했다고 볼 수 있었으니, 결국 실패로 돌아가고 만 것은 와이넌트 박사 때문이었다. 박사는 땅딸막한 몸집에 머리가 이미 백발이 된 이름난 외과 의사였는데, 아주 솔직하고 붙임성이 있었다. 그는 자기 신분도 생각지 않고 레이먼드를 만나자 초등학교 학생처럼 기뻐했으며, 두 사람은 금방 백년지기나 된 것처럼 친해졌다.
휴가 가장하고 있던 <좋은 주인 역>의 껍질이 벗겨져서 엘리자베드의 계획에 치명적인 실수가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식사 중에 거의 모두들의 주의가 레이먼드에게로 집중되고 자기는 거의 도외시 당하고 있다는 걸 그가 알아차렸을 때였다. 세상에는 인기 있는 이를 우대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스스로 기쁨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지만, 휴는 결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휴는 박사를 자기와 가장 친한 사람으로 여겨왔었다. 더우기 나는 가장 자신 있는 인물은 우정에 관해서도 가장 질투심이 강하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귀중한 우정이 자기가 가장 싫어하는 인물에 의해 침해되려 한다면 과연 사태가 어떻게 될 것인가! 이것저것 종합하여 휴의 입장에 서서 생각해 보고, 동시에 테이블 저쪽에서 즐겁게 지껄이고 있는 레이먼드를 바라보면서 나는 최악의 사태를 각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침 레이먼드가 탈출 기술에 쓰이는 여러 가지 도구에 대해 열심히 이야기하고 있는데 휴가 끼어들었다. 도구는 얼마든지 있다고 레이먼드는 말했다. 근처에 있는 물건은 무엇이든지 도구로 이용할 수 있으며 철사 토막, 금속 조각, 종이쪽지까지도 한 번쯤은 이용해 보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 하고 레이먼드는 갑자기 무게 있는 어조로 말했다. "내가 마음 놓고 목숨을 맡길 수 있는 도구는 꼭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좀 묘하긴 하지만 그것은 보이지도 않고 손으로 잡을 수도 없으며 - 실제로 많은 사람들에게는 전혀 존재하지조차 않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것을 지금까지 가장 빈번하게 사용했으며, 그것 역시 나를 한 번도 배신한 적이 없습니다." 와이넌트 박사는 흥미로운 눈을 반짝이며 몸을 내밀었다.
"그것이 뭡니까?" "인간에 대한 지식입니다. 아니, 이렇게 바꿔 말해도 될 것 같군요 - 인간의 성질에 대한 지식이라고. 나에게는 이것이야말로 당신에게 있어 메스와 다름없이 없어서는 안 될 도구입니다." "그래요?" 하고 휴가 말했다.
그 목소리가 너무도 날카로왔으므로 모두들의 눈이 일시에 그에게로 쏠렸다.
"마치 그 기술이 심리학의 한 부분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씀하시는군요." "그러나" 하고 레이먼드는 이야기를 계속했는데, 자세히 보니 그는 휴를 감정이라도 하듯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그 일에 대단한 비밀을 없습니다. 내 직업은 - 나는 그것을 하나의 기술로 생각하기를 좋아합니다만 - 착오 유도의 기술에 지나지 않습니다. 나는 그 기술을 전문으로 하는 수많은 기술자 중 한 사람일 뿐이지요." "그러나 요즈음은 탈출 전문의 기술자가 그다지 많다고 할 수 없지요."하고 와이넌트 박사가 말참견을 했다.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하고 레이먼드가 말했다. "그러나 내가 착오 유도의 기술이라고 말씀드린 것을 알고 계시겠지요? 요술 박사 - 탈출 기술사는 이 기술 중에서도 가장 색다른 기술을 가진 전문가입니다. 그러나 정치나 광고나 세일즈 들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그는 여느 때의 버릇대로 손가락을 코에 대고 눈을 찡긋해 보였다.
"모두 나와 똑같이 기술을 직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와이넌트 박사는 미소 지었다.
"의학을 그 속에 집어넣지 않았으니까 우선은 찬성한다고 해둘까요. 그러나 내가 알고 싶은 것은 그 <인간의 성징에 대한 지식>을 당신의 직업에 어떻게 응용하는가 - 바로 그것입니다." "그건 이렇습니다." 하고 레이먼드는 설명했다. "우선 상대방 인간을 신중히 살펴봅니다. 그리하여 만일 그 사람에게서 특정한 약점을 발견할 수 있으면 그것을 바탕으로 하여 그에게 문제없이 받아들여질 수 있는 어떤 속임수를 납득시킬 수 있습니다. 그 일만 할 수 있으면 그다음은 간단하지요. 이렇게 되면 그 상대방은 이미 요술쟁이가 그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만 보고서 지정해 주는 정치가에게 투표하고, 광고에 이끌려 상품을 사게 됩니다."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요컨대 이것이 모두 다입니다." "그래요?" 휴가 말했다. 그러나 약간이라도 지능이 있어서 당신의 속임수를 받아들이지 않는 상대방을 만나게 되면 어떻게 합니까? 그런 경우에는 어떤 트릭을 꾸밉니까? 당신의 트릭은 말하자면 야만인에게 유리구슬을 파는 정도의 속임수밖에 안 됩니까?" "그것은 트집이오, 휴" 하고 와이넌트 박사가 말했다. "이분은 다만 자기 생각을 말하고 있을 뿐이오. 그것을 일일이 탓할 수야 없잖소." "아니, 그렇지 않습니다." 하고 휴는 레이먼드를 노려보며 말했다. "내가 보기에 이 사람은 여러 가지 흥미 있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 같으니까요. 따라서 나는 그 생각을 어디까지 고집할는지 걱정이 됩니다." 레이먼드는 빈틈없이 세밀한 동작으로 냅킨으로 닦은 다음 살짝 자기 앞 테이블에 놓았다. 그는 똑바로 휴를 쳐다보며 말했다.
"즉 그 기술을 한 번 직접 해보라는 말씀이지요?" "물건 나름이지요." 하고 휴는 말했다. "담배 케이스를 쓰거나 모자에서 토끼를 꺼내거나 하는 장난 같은 넌센스는 거절합니다. 볼 만한 것이 아니라면 ……" "볼 만한 것!" 레이먼드는 되풀이 말했다.
그는 방 안을 둘러보며 잘 관찰한 다음 휴 쪽으로 돌아앉더니 식당과 우리가 식사 전에 모였던 거실 사이의 경계인 커다란 떡갈나무 문을 가리켰다.
"저 문은 잠겨 있지 않지요?" "네, 잠겨 있지 않습니다." 하고 휴는 대답했다. "벌써 몇 년째 잠근 일이 없습니다." "열쇠가 있습니까?" 휴는 열쇠를 다발로 묶은 사슬 줄을 하나 빼냈다.
"여기 있습니다. 식기실에서 쓰고 있는 것과 같은 열쇠지요." 휴는 자신도 모르게 흥미를 느끼기 시작한 듯했다.
"됐습니다. 아니, 나에게 주지 말고 와이넌트 박사에게 주십시오. 물론 당신은 이분 의 명예심을 믿고 계시겠지요?" "물론" 하고 휴는 냉담하게 말했다. "믿고 있습니다." "좋습니다. 그럼, 와이넌트 박사님, 저 문 앞으로 가셔서 문을 잠가주십시오." 와이넌트 박사는 뚜벅뚜벅 걸어가 열쇠를 열쇠 구멍에 꽂고 돌렸다. 짤깍 문이 잠기는 소리가 방 안의 정적을 깨뜨리고 뚜렷이 들렸다. 박사가 그 열쇠를 내밀며 테이블 앞으로 돌아오자 레이먼드는 손을 내저어 열쇠는 필요 없다는 뜻을 나타냈다.
"그것은 당신이 잘 가지고 계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모든 것이 다 깨지고 마니까요. 그럼 -" 하고 레이먼드는 말했다. "마지막 절차로써 나는 문 앞으로 다가가 여기에다 손수건을 대고 -" 그는 손수건으로 살짝 열쇠 구멍을 가렸다. "자아, 문이 열렸습니다." 와이넌트 박사가 다가가서 의심스러운 듯이 문손잡이를 잡고 비틀자 문이 소리도 없이 열렸다. 그는 놀라운 눈으로 바라보며 소리쳤다.
"야아, 이거 놀라운 데요!" "어떻게 된 거예요?" 엘리자베드가 웃었다. "속임수의 전제는 굴이 미끈하게 목구멍 속으로 넘어간 것 같군요." 오직 휴만이 분노의 감정을 나타내고 있었다. " 좋습니다." 하고 휴는 말했으나, 조금도 좋지 않은 말투였다. "어떻게 했습니까? 어떤 방법을 쓴 겁니까?" "내가요?" 레이먼드는 비난하는 듯 말하고, 분명히 즐기고 있는 미소를 우리 모두 에게 던졌다. "이 일은 해낸 것은 바로 여러분들입니다. 나는 다만 인간의 성질에 대한 약간의 지식을 이용하여 여러분들이 그렇게 하도록 했을 뿐입니다." 나는 말했다.
"나도 조금은 알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문은 처음부터 잠겨 있었다, 그리고 와이넌트 박사께서 문을 잠근 줄 알지만 실은 그렇지 않았다, 사실 박사는 잠긴 문을 연 것이다 - 안 그렇습니까?" 레이먼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렇습니다. 문은 미리 잠가두었습니다. 그 점은 확신을 기했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밤에 틀림없이 이런 도전을 받지 않을까 하는 예감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대항하려면 이것이 가장 간단한 방법이었으니까요. 다만 나는 여러분이 다 들어온 다음 맨 나중에 들어오도록 신경을 썼고, 들어오면서 이것을 사용했을 뿐입니다. "그는 손을 들어 올려 손가락으로 집어 든 금속 조각을 하나 우리 눈앞에 내보였다. "말할 것도 없이 흔히 볼 수 있는 만능열쇠인데, 간단하게 생긴 낡은 자물쇠에는 잘 맞지요. " 한순간 레이먼드의 얼굴표정이 어두워졌으나 그는 곧 밝은 어조로 말을 계속했다. "문은 잠겨 있지 않다는 잘못된 전제를 한 것은 다름 아닌 이 집 주인이었습니다. 자신을 너무 믿은 나머지 그렇게 뻔한 일을 다시 한번 확인해 볼 생각도 하지 않은 거지요. 그리고 와이넌트 박사께서도 의심하지 않는 분이므로 같은 함정에 빠진 겁니다. 즉 언제나 너무 지나친 확신을 갖는다는 것은 좀 위험한 일입니다." "그 점은 인정하지요" 하고 와이넌트 박사는 분한 듯이 말했다. "- 나 같은 직업을 가진 자로서는 사실 이단적인 일입니다만." 박사는 그때까지 가지고 있던 열쇠를 장난하듯 테이블 너머로 휙 던졌다. 그리고 그것이 자기 앞으로 떨어졌는데도 주울 생각도 하지 않았다.
"어쨌든 휴, 이분이 자기 자신의 논점을 증명해 보인 것만은 당신도 인정해야 하오." "그럴까요?" 하고 휴는 조그맣게 말했다.
그는 싱긋 웃으며 앉아 있었으나, 머릿속으로는 무슨 생각을 되풀이 음미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이제 적당히 해두오, 휴" 하고 박사는 조금 지루한 듯한 어조로 말했다. "당신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트집을 잡는 말투가 아니오 - 자신도 그것을 알고 있겠지만." "그래요, 여보!" 엘리자베드가 찬동했다.
아아, 오늘 밤 파티를 연 목적은 강화회담 쪽으로 이야기를 끌고 갈 모양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그렇다면 실패라고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휴의 눈에는 내 마음 에 들지 않는 표정 - 여느 때의 그답지 않은 저의를 감춘 표정 - 이 떠올라 있었다. 그는 정말 화가 날 때는 우뢰와 같이 무섭게 터지지만, 일단 발작이 지나가면 진심으로 사과하는 태도로 바뀌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가 않았다. 그의 행동에는 어딘가 졸린 듯한 느낌이 있어 그것이 나의 경계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한쪽 팔을 의자 뒤에 걸치고 또 한쪽 팔은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채 눈을 레이먼드에게서 떼지 않기 위해 몸을 거의 그쪽으로 돌리고 앉아 있었다. "아무래도 나는 단 한 사람의 소수파인 것 같군요" 하고 휴는 말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지금 당신이 한 잔재주에는 실망했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잘 못했다는 건 아닙니다. - 그 점은 인정하지요 - 그러나 요컨대 솜씨 좋은 대장장이가 심심풀이로 하는 정도밖에 안 된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아무래도 억지를 부리는 것 같군" 하고 와이넌트 박사가 놀렸다.
휴는 머리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아니, 나는 다만 잠근 문을 여는 열쇠가 수중에 있다면 그 문을 여는 일쯤은 대단한 기술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당신의 명성을 생각한다면 좀 더 나은 것을 보여주리라고 기대했었는데 ……" "나는 여러분들의 흥을 돋우기 위해서 그런 일을 한 것입니다만" 레이먼드는 눈살을 찌푸리면 말했다. "기대에 어긋났다면 사과를 드려야겠군요." "아니, 흥을 돋우기 위한 것이었다면 불평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러나 진짜 테스트라면 -" "진짜 테스트요?" "그렇습니다. 그러면 사정이 좀 달라지겠지요. 이를테면 자물쇠도, 거기에 맞는 열쇠도 없는 문이 있다고 합시다. 손가락으로 살짝 만지면 열리는 문인데, 그래도 열리지 않는다. - 그렇게 되면 어떨까요?"
레이먼드는 자기 앞으로 내민 것이 무슨 그림인지 생각하는 것처럼 눈을 가늘게 떴다.
그는 가까스로 말했다. "그거 참, 재미있겠군요. 좀 더 설명해 보십시오." "아니"하고 휴가 말했다.
그 목소리에서 갑자기 힘을 느끼고 나는 이것이야말로 그가 노리고 있던 순간이구나 하는 생각이 직감적으로 들렸다.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있습니다. 실물을 보여드리지요." 휴는 벌떡 일어났다. 우리도 모두 일어났다. 그러나 엘리자베드만은 그대로 자리에 앉아 있었다. 함께 가서 보지 않겠느냐고 내가 권해도 그녀는 머리를 내저을 뿐, 방을 나가는 우리를 절망적인 눈길로 바라보고 앉아 있었다.
나는 휴가 도중에서 회중전등을 준비하는 것을 보고 지하실로 간다는 것을 깨달았다. 더우기 그는 아직 내가 들어가 보지 않은 지하실을 향해 가고 있었다. 나는 선반에서 포도주병을 고르는 것을 거들기 위해 여러 번 지하실에 내려간 적이 있었다. 우리는 포도주 지하실을 지나 그 안쪽에 있는 어두컴컴하게 불이 켜진 길다란 방으로 들어갔다. 거친 돌바닥을 딛는 발자국 소리가 크게 들리고, 벽에는 물이 새어 묻은 얼굴이 있었다. 바깥의 밤공기와 비슷한 온도였으나 나는 가슴께에 소름 끼치는 듯한 축축한 냉기를 느꼈다.
"이건 꼭 아틀란티스의 묘지가 있는 곳 같군." 하고 와이넌트 박사가 몸을 부르르 떨며 얼빠진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그러한 기분을 나 혼자만 느끼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약간 위안을 받았다.
우리는 그 방의 막다른 곳 - 바닥에서 천장까지 벽면을 차지한 돌 벽장이라고 할 수 있는 곳에서 발길을 멈추었다. 너비가 약 4피트이고 높이는 그 두 배쯤 되어 보였으며, 문이 열려져 있고 그 안은 캄캄했다. 휴는 어둠 속에서 손을 내밀어 무거운 문을 닫았다. "이겁니다." 휴는 당돌하게 말했다. "두께 4인치의 튼튼한 나무 문으로 닫으면 거의 공기가 통하지 않을 만큼 딱 들어맞게 되어 있지요. 2백 년 전 목수의 솜씨를 과시하는 훌륭한 작품이기도 합니다. 자물쇠도 빗장도 없습니다. 다만 양쪽에 손잡이 대신 고리가 하나씩 달려 있을 뿐이지요." 그가 그 문을 살짝 밀자 곧 소리도 없이 열렸다.
"보셨습니까? 완전히 무게의 균형이 잡혀 경첩에 걸려 있으므로 마치 깃털처럼 가 볍게 움직입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이런 걸 만들었을까요?" 하고 내가 물었다. "무슨 이유가 있어서 만들었을 게 아닙니까?" 휴는 짧은 웃음소리를 내었다.
"물론 이유가 있고말고. 심한 일이 예사롭게 이루어지던 옛날에 하인이 죄를 저지르면 - 죄라야 뭐 로저 집안의 조상들에게 말대답한 정도였겠지만 - 그 하인은 회개를 하기 위해 이 속에 갇혔던 걸세. 이 안의 공기는 기껏해야 두세 시간밖에 못 가기 때문에 곧 회개를 하든가 아니면 회개하지 않은 채 이 세상을 떠나게 되었던 거지." "그래, 그 무서운 문은" 와이넌트 박사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조금만 건드려도 곧 열려 얼마든지 공기를 들여보낼 수 있었을 텐데, 어째서 하인들은 그 문을 열지 못했소?" "보십시오." 휴는 회중전등으로 그 안을 비췄으며, 우리는 그의 등 뒤에서 안을 들여다보았다 불빛은 둥글게 밀실을 막다른 벽을 비춰 머리보다도 조금 높은 곳에 늘어진 짧은 사슬과 불 밑의 고리에 연결된 U자형 칼을 보여주었다.
"과연!" 레이먼드는 식당은 나온 뒤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참으로 교묘하군요. 형을 받는 사람은 벽 쪽에 들을 대고 문을 향해 선다, 칼을 쓰고 - 잠그게 되어 있지 않은 것은 분명하므로 - U자의 두 정점을 서로 맞춰 굳게 해머로 묶는다, 문이 닫히고 사나이는 아무리 애써도 절대로 손이 닿지 않는 문고리를 발로 더듬으며 눈에 보이지 않는 고문대에 올라선 상태로 몇 시간을 보낸다, 다행히도 미끄러져 무쇠 칼이 옥죄어 죽지 않으면 누구든 문을 열어주는 자비심을 베풀어 줄 때까지 어떻게든 살아 있을 수 있다 - 는 거지요?" "거참!"하고 와이넌트 박사가 말했다. "당신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까 내가 지금 그런 벌을 받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군요." 레이먼드는 빙긋 웃었다.
"나는 몇 차례나 그런 일을 당해왔습니다. 게다가 거짓말도 에누리도 없이, 현실은 반드시 최악의 예상을 약간 웃돌게 마련입니다. 언제고 반드시 공포와 당황의 극한 상황이 찾아오기 마련입니다. 그럴 때면 반드시 심장은 늑골을 부수로 튀어나오는 게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거칠게 뛰고, 한 번 숨 쉬는 동안에 몸속이 텅 빌 정도로 식은땀이 흐릅니다. 그때야말로 자기라는 것을 수중에 꽉 쥐고 모든 나약함을 쫓아낸 다음, 그때까지 자기가 익힌 모든 것을 생각해 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못하면 -" 그는 손으로 목을 자르는 시늉을 했다. "어쩌다 이런 도구에 걸려 죽어가는 희생자에겐 잔혹한 이야기겠지만, 결국 자기를 구해낼 용기와 지식이 없어서 죽게 되는 겁니다." "그러나 당신 같으면 그렇지 않겠지요?" 휴가 말했다. "그렇게 된다고 생각할 이유가 없으니까요." "그렇다면 -" 휴의 목소리에는 또 그 열띤 기운이 그 어느 때보다도 강하게 파고들어 있었다.
"당신은 2백 년 전 이곳에 묶여 있던 사람과 똑같은 상황에 놓여도 이 문 앞까지 올 수 있다는 말이지요?" 그 말에 깃들어 있는 도전적인 감정을 가볍게 주고받기에는 너무도 강했다. 레이먼드는 정신집중으로 얼굴을 긴장시키면서 잠시, 그러나 몹시 길게 느껴지는 침묵의 시간을 보낸 다음 대답했다.
"그렇소. 쉽지는 않겠지요. - 문제는 아주 단순한 대신 가마우지의 깃털로 찌른 정도의 틈도 없습니다. - 그러나 열 수는 있을 겁니다." "시간이 얼마나 걸립니까?" "많이 잡아서 한 시간." 여기에 다다르기 위해 휴는 먼 길을 에둘러 온 것이다. 그는 천천히 되씹으며 소중히 간직해 둔 질문을 했다.
"내기를 포기하시겠습니까?" "잠깐"하고 와이넌트 박사가 말했다. "이런 내기는 도무지 마음에 안 드는군." "나 역시 여기서 중지하고, 한잔하자는데 한 표를 던지겠습니다." 하고 나도 끼어들었다. "놀이는 놀이고, 아무튼 이런 곳에 있다간 모두 폐렴에 걸리겠습니다." 휴도 레이먼드도 이런 말을 전혀 귀에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 노려보고 - 휴는 자극에 못 견뎌하고 레이먼드는 필사적으로 생각하며 - 서 있었다.
"무엇을 걸겠소?" 이윽고 레이먼드가 입을 열었다.
"이렇게 하지요. 만일 당신이 지면 당신은 한 달 이내에 나에게 덴 저택을 팔 것." "그리고 만일 내가 이기면?" 휴로서는 그 대답을 하기가 쉬운 일이 아니었으나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때는 내가 이곳을 떠나지요. 그리고 만일 당신이 힐톱 저택을 살 마음이 없다면 맨 처음 사겠다고 나서는 사람에게 팔아넘길 수속을 밟겠습니다." 휴를 알고 있는 한 그의 입에서 나온 말로서는 너무도 비현실적인 거짓말이었으므로 갑자기 아무도 할 말을 찾지 못했다. 맨 먼저 일어선 사람은 와이넌트 박사였다.
"당신 혼자서 그런 말을 해도 괜찮겠소, 휴?" 하고 박사는 타일렀다. "당신에게는 부인이 있소. 엘리자베드가 어떻게 생각할는지도 생각해 봐야지." "내기는 이루어진 겁니까?" 휴는 레이먼드에게 다그쳐 물었다. "하실 작정입니까?" "먼저 대답하기 전에 좀 설명해 둘 일이 있습니다." 레이먼드는 잠시 말을 끊고 다시 천천히 말을 계속했다. "나는 여러분에게 내가 일에서 물러난 것은 지리하고 흥미를 잃었기 때문이라는 인상을 - 아마 허영심에서겠지요 - 주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실은 몇 년 전에 의사의 진단을 받을 필요가 생겨서 의사를 찾아가 진찰을 받은 뒤로 갑자기 심장이 나의 최대 관심사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고백하는 것은, 당신의 도전이 이웃끼리의 불화를 해결하는 방법으로서 좀처럼 없는 기발한 착상이라고 감탄하면서도 건강상의 이유로 거절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까까지는 건강했는데" 하고 휴가 힘찬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그렇게 생각하고 싶겠지요, 아마." " 다시 말하자면 -" 하고 휴는 신랄하게 말했다. "옆에 조수도 없고 주머니 속에 열쇠도 없으니, 실제로는 없는 것을 누구에게 보일 속임수도 쓸 수 없기 때문이라는 말입니까? 그래서 패배를 인정하겠단 말이지요?" 레이먼드는 화가 치밀었다.
"그런 것은 인정하지 않겠습니다. 비록 지금 내놓은 이런 테스트일지라도 착수하는데 필요한 도구는 완전히 갖추어져 있습니다. 거짓말은 하지 않습니다. 도구가 부족하지는 않습니다." 휴는 큰 소리로 웃었다. 그 목소리는 우리 등 뒤의 복도에 특히 크게 메아리쳤다. 생각건대 그 목소리가 - 우리 주위의 벽에서 벽으로 메아리쳐 오는 그 목소리에 담긴 생생한 모욕이 레이먼드로 하여금 그 밀실에 들어가게 만든 것 같다.
휴는 손잡이는 짧지만 묵직한 큰 쇠망치를 휘둘러 벽의 모루에 대어진 칼(쇠고리)을 힘이 고루 미치도록 쳐서 레이먼드의 목을 옥죄게 했다. 그 일이 끝나자 칠흑처럼 캄캄한 어둠 속에서 레이먼드의 손목시계의 야광 숫자가 파랗게 나의 눈에 들어왔다.
"지금은 11시입니다. "휴는 조용히 말했다. "내기는 정각 12시까지 이 문을 열 것 - 무슨 수단을 써도 좋습니다. 조건은 그뿐이고, 이 두 사람이 증인이 됩니다." 그리고 문이 닫히자 우리는 걷기 시작했다.
우리 세 사람은 마치 발자국으로 그 돌바닥에 여러 가지 기하학무늬를 그리도록 강요받은 사람들처럼 - 박사는 자꾸만 옮겨 딛는 성급한 발걸음으로, 나는 성큼성큼 걷는 휴의 발걸음에 맞추어 - 계속 둘레를 왔다 갔다 했다. 우리는 자신의 그림자를 밟고 앞으로 뒤로 일 초 일 초를 세며, 더구나 서로 손목시계를 먼저 들여다보려고 하지 않으며 어리석고 무의미한 행진을 계속했다.
한동안 우리의 발자국 소리에 대답하는 듯한 소리가 밀실 안에서 들려왔다. 그것은 짧고 규칙적인 간격을 두고 거의 들릴락말락하게 들리는 사슬이 맞부딪치는 소리였다.
이윽고 한동안 긴 정적이 흐른 뒤 다시 같은 소리가 계속되었다. 두 번째로 그 소리가 멎었을 때, 나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나는 머리 위에 켜진 노란 불빛에 손목시계를 비춰보고 아직 20분밖에 지나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는 그만 실망했다.
그 뒤로 다른 두 사람도 시간 보기를 주저하지 않았으나, 그 나름대로 시간을 보지 않으면서 다만 의혹에 사로잡혀 있을 때보다도 오히려 견디기 힘들었다. 내가 보고 있자니 박사는 서둘러 손목시계의 태엽을 감아주고 또 몇 분 안 되어 다시 시계에 손을 댔다가는 이제 금방 태엽을 감아준 일이 생각났는지 지겨운 듯 급히 손을 내렸다. 휴는 마치 열심히 노려보면 달팽이처럼 느릿느릿 문자판을 기어가고 있는 분침의 움직임을 그만큼 빠르게 할 수 있기라도 한 듯이 손목시계를 바로 눈앞에 들이댄 채 돌아다녔다.
30분이 지났다.
40분.
45분.
나는 시계를 보고 앞으로 15분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하며, 짧은 시간이지만 과연 내가 견디어낼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던 일을 기억하고 있다. 냉기가 몸속에까지 스며들어와 아픔을 느끼게 했다. 휴의 얼굴이 땀으로 흠뻑 젖더니 삽시간에 그것이 땀방울이 되어 뚝뚝 떨어졌다. 그것을 보고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 일도 이처럼 내가 무엇에 홀린 사람처럼 그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는 동안에 일어난 것이었다. 그 소리는 멀리서 들려오는 고통의 절규처럼 밀실의 벽을 뚫고 나와, 뭔가 뜻이 있는 말을 하려고 애쓰듯 떨리면서 우리 귀에 들려왔다.
"박사님!"하고 목소리는 외치고 있었다. "공기를!" 그것은 레이먼드의 목소리였는데, 사이를 막은 벽의 두께 때문에 높고 가느다랗게 들려왔다. 그러나 확실히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은 순수한 공포 그리고 그 공포에서 나오는 애원하는 듯한 어조였다.
"공기를!" 하고 그것은 찢어지는 듯한 목소리로 애원하는가 하면, 금방 거품처럼 부글부글 끓어올라 아무 뜻도 없이 길게 꼬리를 끄는 소리가 되어 사라졌다.
그러고 나서 정적이 흘렀다.
우리는 문을 향해 달려갔으나, 휴가 얼른 돌아서서 우리 두 사람의 앞을 가로막아 섰다. 들어 올린 그 손에는 레이먼드의 목에 씌운 칼을 죄는 데 사용했던 해머가 쥐어져 있었다. 그는 소리쳤다.
"저만큼 물러서 있으시오! 더 이상 가까이 오지 마시오, 알겠소!" 무서운 흉기에서 생생히 느낄 수 있는 그의 분노가 우리의 발을 멈추게 했다.
"휴!" 박사가 설득하려고 했다. "당신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는 알고 있소. 그러나 이제 그런 것은 잊어버리시오. 내기는 그만두구려. 나는 나 자신의 책임으로 그 문을 열겠소. 당신은 내 말을 믿어도 좋소." "통용됩니까, 그게? 내기를 건 조건을 기억하십니까? 문은 한 시간 이내에 열 것, 단 어떤 수단을 써도 괜찮다 - 아시겠습니까? 저 사나이는 당신들을 속이려는 겁니다. 죽어가는 시늉을 하여 당신들에게 문을 열게 해서 내기에 이기려는 속셈이오! 그러나 이것은 내가 하는 내기지, 당신이 하는 내기가 아닙니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이것뿐입니다!" 그의 목소리는 긴장되어 떨리고 있었으나 그는 조금도 이성을 잃지 않고 있었다. 바로 이 점이 사태를 보다 악화시키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알아차렸다.
"어떻게 저것을 속임수라고 봅니까?" 하고 나는 다그쳐 물었다. "그 사람은 심장 상태가 나쁘다고 했소. 이런 경우에 처하게 되면 반드시 한동안 공포와 싸워야 할 거라고 말했습니다. 그 긴장을 견뎌낼 수 있느냐가 걱정이라고 했지요. 당신은 무슨 권리고 그 사람의 생명까지 내기의 재료로 삼습니까?" "그런 소리 말게. 내기라는 말이 나오기까지 그 사람은 단 한 번도 심장이 나쁘다고 말한 적이 없잖은가. 그는 식당에 들어가기 전에 그 문을 잠갔던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함정을 파놓은 걸세. 그것을 자네는 모르겠나? 그러나 이번만은 누구에게도 그 함정에 걸려들지 못하게 할 걸세 - 누구에게도!" "내 말을 들어보오!" 와이넌트 박사의 목소리는 무섭게 채찍질하는 것처럼 울렸다. "당신은 저 사람이 이 속에서 죽었든가, 아니면 죽어갈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지 않소?" "그렇게도 생각합니다. 가능성이라고 한다면 - 무슨 일이든 가능하니까요." "지금 그런 이치를 따지고 있을 때요! 만일 저 사람이 심장마비를 일으켰다면 1초 가 중요하오. - 그 귀중한 1초를 당신은 저 사나이에게서 빼앗고 있는 거요. 만일 사실이 그렇다면 신을 두고 맹세하겠는데, 나는 당신의 공판 증언대에서 당신이 저 사람을 죽였다고 증언할 것이오! 그렇게 하기를 바라고 있소, 당신은?" 휴는 머리를 푹 숙였으나, 손은 여전히 해머를 꽉 쥐고 있었다. 나는 그가 거칠게 헐떡이는 숨소리를 들었다. 머리를 든 그의 얼굴을 잿빛으로 핼쑥해졌다. 땀에 젖은 주름 하나하나에 결단을 내리지 못하여 괴로와하는 심정이 스며 나와 있었다.
그때 나는 갑자기 그날 레이먼드가 휴에게 한 말의 참뜻을 깨달았다. 완전한 딜레마에 빠졌을 때 사람을 비로소 계시를 알 수 있다는 말을. 그것은 사람이 좋든 싫든 깊이 자기에게로 눈을 돌릴 때 자신에 대해 배우게 될지도 모르는 계시였다. 그리고 마침내 휴도 그것을 알게 된 것이다.
어두컴컴한 지하실에서 높이 울리는 가차 없는 초침 소리를 들으며 우리는 휴가 어떻게 결단 내릴 것인가 지켜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