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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없음

박남희(1956~ )

가족

갈필(渴筆)을 잡다

감기의 고장

강이 나를 묶는다

개미

거울 위에 물구나무 서기

거울을 거부하는 거울

검은 비닐봉지

계요등(鷄尿藤)

고양이는 독서 중

고요에 울다

고이고이 드나들다

고장 난 아침

고집

골목길

곰팡이

구름으로 말하는 법

그 꽃병

그늘은 자라서 저녁이 되고

그러하냐? 사랑아

그림자 다이어트

그림자 일기

기린의 법칙

길에 관한 편견

깡통 미학

깡통 익투스

꼬리표

꽃에 집중하다

꽃을 통해 허공을 말하는 법

꽃이 괸다

꽃이 방전된다

꽃집

꿈꾸는 과녁

나는 가끔 주머니를 어머니로 읽는다

나는 그림자를 흘리는 버릇이 있다

나를 버릴 수 없어서

나무의 내력

나뭇가지의 질문법

나사

나의 라그랑주 2

나팔꽃의 경계

낮달

내 안쪽은

노숙자

노을을 끌고 간다

눈물

니벨롱

달력 산부인과

달빛의 구조

덤불에 이르는 길

돌멩이로 말하기

동굴의 기억

둘레를 지우는 일

로또 계시록

루빈의 잔

룩북

리듬의 묵시록

마음의 거리

머리카락의 자서전

멍요일

멱살만 남았어요

모노산달로스

몰입

몸살

못을 박으며

무성할 때는 초록을 몰랐다

묵은 수수께끼를 풀 듯

문득

물안경을 쓰고

물에게 말 걸기

물을 버리기 위해 꽃이 핀다

물을 세운다

물을 여미다

물이 아픈 이유

바깥이 안을 꺼내다

바닥이라는 나이

바벨의 언어로 시 쓰기

밤의 발성법

밥물 천사

방 구하기

백회라는 것

버릇

벽 속의 꽃

병풍에 들다

봄을 늙게 하는 법

, 55일 면허정지

불구

비문(碑文)

사람들은 x를 배꼽이라고 부른다

사람을 잊은 집

사랑

산해경 노래방

새는 위험하다

새에게

생일

소금꽃

수평선을 낳는 것들

순천만 갈대

시계 속의 사막

신발의 시간

실패 잔치

쓰러질 수 없는 다리

아름다운 매춘에 대하여

아름다운 전쟁

아침 햇빛을 가만히 보니

아픈 편지

안녕, 눈사람

야카모즈

양식

어둠으로 여는 세상

어름사니

어쩌다 시간여행

얼음의 존재 방식

역설의 꽃

()

오래된 지도

오후 한 시, 자갈치

올챙이

외로움의 전략

우두커니

울음의 고리

유리창의 심리학

은유의 길

이별의 속도

이상한 거울

이상한 독서

이상한 싸움

이장(移葬)

이제는

일몰의 배후

임종(臨終)

잉크

저녁에게는

저녁의 맛

저녁으로 가는 문장

저수지의 마음

적빈(赤貧)

절경이 된다는 것

종이의 세계

죽은 새를 바라보는 여름

중독

지울 수 없는 주소

지퍼를 이해하는 법

착시

창백한 푸른 점

창틀 안의 얇은 구름

처마 끝

청중을 들이는 시간

추상에서 구상에 이르는 길

태초에 신은 오독(誤讀)을 창조했다

터널들

테두리를 본다는 것

통증은 허공으로부터 온다

폐차장 근처

푸른 화살표

풍경의 저편

풍선 치어리더

해바라기

햇빛은 송곳이다

허공을 다른 말로 하면

혼자만의 약속

화분 꽃

화이트 노이즈

화조도(花鳥圖)

환유 악기점

()의 지느러미

환절기의 신호등

횡단보도의 날들

 

 

 

 

가족

박남희

 

날씨가 추워져서 옷을 여러 겹 껴입었다

맨 안의 옷을 가린 옷을 또 가리고

그 옷을 또 가린 옷이 외투라는 이름으로 걸어간다

외투 속에는 보이지 않는 많은 옷들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고 함께 어디론가 간다

너무 많은 옷을 껴입은 외투는 쉽게 낡는다

 

그러고 보니 멀리 산도 어디론가 가고 있다

그 안에 무수한 옷들이 겹쳐져서

산이 되었다 산은 어디론가 가면서 산맥을 이룬다

우리 집의 명물인 비키니 옷장이라는 것도 그렇다

가장의 외투 한 벌 속에 무수한 옷들이 겹쳐져 있다

추위가 풀리면 외투 속의 옷들은 저마다의 색을 드러낼 것이다

 

봄이 되어 꽃이 피는 것도

외투 속에 숨어있던 옷들이 색을 드러내는 것이다

봄꽃들을 자세히 보면

그 속에 겹쳐졌던 옷들의 그림자가 보인다

 

 

 

갈필(渴筆)을 잡다

박남희

 

이것은 나의 갈필로

세상의 모든 여백 위에 쓰고 싶은 이야기이다

 

나를 계절이라고 말한다면

나는 나를 버리겠다

나의 바람을 버리고 나의 이파리를 버리고

나를 바라보고 있던 모든 눈들을 버리겠다

 

나는 때때로 버림받을수록 단단해진다

나를 상처라고 말한다면

그 상처 속에 숨어있던 것들을 세상에

떠도는 이야기로 풀어놓아

이야기 속의 모든 목소리가 더 이상

상처를 말하지 않을 때까지

나를 버리고 버리고 버리겠다

 

나를 버리고 나면

그 맨 밑바닥에서 말없이 고여오는 것을

더 이상 눈물이라고 말하지 않겠다

 

그동안 갈피를 잡지 못하고 살아온 내 삶과 사랑에 대해

내 안을 드나들던 모든 바람과 꽃들에 대해

묵을 버리고 허공을 버리듯

 

더 이상 가엾지 않은 나를

무심코, 우연히 버리기 위해,

 

 

 

감기의 고향

박남희

 

그날 이후 몇 달 동안

감기는 콧구멍 속으로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애초부터 콧구멍은 감기의 고향이 아니었다

예부터 지금까지 병원이나 약국들은

감기의 고향을 찾아 헤매었으나

아무도 감기의 고향을 모른다 그런데도

감기는 왜 콧물과 기침을 여태껏 해방시켜주지 않는지

콧구멍에게 물어볼 수가 없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감기를 왜 고뿔이라고 불러서

불이 나는 코를 연상케 하는지 물어보기도 전에

감기는 다시 콧구멍 속으로 돌아왔다

 

매년 꽃들이 제 고향을 찾지 못하고 되돌아오듯이

감기도 끝내 제 고향을 찾지 못했나보다

 

감기가 노숙을 즐기는 것은 제 속의 불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박남희

 

저에게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아직

전하지 못한 편지가 있습니다

너무 길기 때문입니다

그 편지를 저는 아직도 쓰고 있습니다

 

 

 

강이 나를 묶는다

박남희

 

강은 나를 묶어서 흐른다 출렁이며 흐느끼며 휘돌아 흐른다

나는 때로 물거품이 된다 저 혼자 속삭인다

그러다 꽃을 피운다 그림자로 이미지로 꽃을 피운다

나는 강에게 묶인 채 세상을 본다

구름을 보고 바람을 보고 누군가의 눈빛을 본다

 

강이 나를 묶는 것은 몸을 묶는 것이 아니다

몸 밖의 어떤 것들과 몸 안의 어떤 것들을 묶는 것이다

몸은 강과 함께 출렁인다

몸은 강이 된다

 

강이 된 내가 나를 묶는다

세상의 모든 것들로부터 자유롭기 위해 나를 묶는다

세상의 모든 것과 소통하기 위해 나를 묶는다

출렁이며 흐느끼며 휘돌아 흐르며 나를 묶는다

 

그러면 그 곳 모래펄 너머로 갈대숲이 펼쳐진다

야윈 노모의 손길처럼 갈대가 나를 묶는다

제 몸의 바람 속으로 더 깊이 묶는다

휘어지며 흐느끼며 출렁이며 나를 묶는다

 

강은 출렁이며 수천 개의 몸을 흔들어댄다

흔들리는 갈대의 몸으로

흘러서 흘러서 묶인 내가 하얗게 꽃으로 피어난다

 

강이 나를 묶는 것은 몸을 묶는 것이 아니다

몸 밖의 어떤 것들과 몸 안의 어떤 것들을 묶는 것이다

사랑으로, 때로는 무정하게,

 

 

 

개미

박남희

 

풀잎 위에 개미 한 마리가 기어다닌다

가늘고 긴 발가락으로 잠시 꼬물거리다가

무엇엔가 골똘해 있다

 

나는 문득 풀잎이 되어본다

몸이 간질간질하다

개미가 내 몸에 발가락으로 써대는 글은 무얼까

 

개미는 자신이 걸어온 단단한 길을 버리고

풀잎 위에서 새로운 길을 연다

개미는 풀잎 위에 자서전을 쓰듯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며 가는 발을 꼬물거린다

 

, 한 차례 바람이 지나간다

풀잎을 따라 개미가 흔들린다

개미의 자서전이 그동안의 단조로움을 떨치고

바람과 함께 이리저리 흔들린다

 

개미의 자서전이 내 감각 속에서 점점 선명해진다

자서전 속의 내가 보인다

내가 누군가의 풀잎이 되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은

오래전의 일이다

 

 

 

거울 위에 물구나무 서기

박남희

 

다리 밑에 배꼽 있고 배꼽 밑에 가슴 있고 가슴 밑에 입 있고 입 밑에 눈이 있다 너는 너무 오래 물구나무서 있다

바닥이 거울이고 모두들 거울 위에 물구나무서 있어서 신기하고 재미있다

이목구비, 해와 달, 어쩌면 저것들은 모두 재개발지구에 있는 것들일 텐데 수십 년, 수백 년 수억 년 동안 자리바꿈도 하지 않고 헐리지는 더더욱 않고 용케도 모두 너무 오래 서 있다

이 세상에는 내가 헐어야 할 것과 누군가에 의해서 헐려야 할 것이 있는데, 내 몸에 있는 것들은 헐 생각도 헐릴 생각도 하지 않고 모두모두 안녕하다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언젠가 깨어질 거울 위에 너무 오래 물구나무서 있다

지금까지 내 기억을 버리고 간 것들은 나이를 버리고 과거를 버리고 끈마저 버린 것일까

 

버린다는 것, 떠난다는 것

지운다는 것 사이에 해와 달이 있어

해는 달을 지우고 달은 해를 지우며 숨바꼭질하는데,

 

세상에서 가장 큰 지우개는 거울이라는 것도 모른 채, 거울 밖에서

 

새삼, 지우고 버리고 떠난 것들을 불러 세워 사진을 찍고 동영상을 찍어대는 이 시대는 제 몸의 뿌리가 거울인 줄도 모르고 순간도 아니고 영원도 아닌 채로 너무 오래 물구나무서 있다

 

 

 

거울을 거부하는 거울

박남희

 

나를 믿지 마라 나는 고요가 아니라 바람이고 밝음이 아니라 어둠이다 내 뒤를 보지 마라 내 뒤는 늘 깜깜하다 그냥 벽이다 아름다움도 꿀꺽 삼키고 보여주지 않는다 나를 함부로 깨뜨리지 마라 나를 깨뜨리는 순간 너는 분해된다 너는 더 이상 네가 아니다 너는 하늘의 별처럼 흩어져 다양한 별자리로 말하겠지만 별자리의 목소리를 알아듣는 사람은 지상에는 없다

그러니 나를 더 이상 거울이라고 말하지 마라 그냥 보이는 대로 나무라고 새라고 꽃이라고 파도라고 말하라 나는 흔들리면서 거울을 거부한다 나는 흔들릴 때 거울이 아니다 나는 이미 거울이면서 거울을 버렸다 거울의 허공과 거짓과 살의를 깨뜨리고 거울 뒤에 숨어있던 말이 되어 너희에게 말한다

더 이상 나를 보지 말고 읽어라 들어라 스며라 나는 보면 볼수록 참으로 이상한 거울이다

 

 

 

검은 비닐봉지

박남희

 

번쩍이던 것들도 그 속에 들어가면 컴컴하다 누구는 그것을 말이라고 말하고 누구는 그것을 어둠이라고 말하지만 나는 그것이 구름인 것을 안다

구름은 그 안에 말을 가지고 있다 구름은 비어있을 때 더욱 부스럭거린다 그래서 텅 빈 구름은 위험하다 수시로 천둥과 번개를 부른다 자신의 몸에 반짝이는 것을 가두고 반짝여야 할 때를 엿본다

나는 지하도에 쪼그리고 앉아있는 구름을 본 적이 있다 얼굴이 쓸쓸했다 쓸쓸한 구름은 위험하다 쓸쓸한 것은 어둠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어둠 속이 본래 쓸쓸한 곳이라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아는지 지나가던 행인이 그녀에게 별을 안겨준다 짤랑, 별이 잠시 빛난다

검은 비닐봉지는 사실 예쁘다 그 안에 별을 감추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별은 때때로 불쌍한 쪽으로 짤랑거린다 이런 것도 검은 비닐봉지만의 독툭한 발성법이다

 

 

 

계요등(鷄尿藤)

박남희

 

그녀에게서는 오줌 냄새가 났다

그녀는 아담하고 너무 예뻤다

아름다움과 냄새 사이에 그녀가 있었다

 

그녀는 스스로를 오줌냄새로 치장했다

아름다움의 비법이라고 했다

그녀는 오줌냄새의 비밀을 알았으므로

바람의 손이 두려웠다

 

그녀는 오줌 냄새 속에서

예쁜 생식기 모양의 꽃을 피웠다

그녀는 오줌을 참는 법을 몰랐다

냄새가 늘 진동했다

 

그녀의 전생은 닭이라고 했다

목 아픈 지상의 새벽을 몇 번이고 날아오르다가

볕 비낀 저녁 숲에 내려 앉아 꽃이 되었다

몸이 무거운 날개보다 꽃이 좋았다

이상 야릇한 지상의 냄새가 좋았다

 

* 계요등(鷄尿藤) : 꼭두서니과의 여러해살이 덩굴성 식물로 구렁내덩굴· 계각등이라고도 한다. 7~9월에 흰색 바탕에 자줏빛의 꽃이 피는데 예쁜 꽃 모양과는 달리 닭 오줌 냄새가 난다 하여 계요등(鷄尿藤)이란 이름이 붙었다.

 

 

 

고양이는 독서 중

박남희

 

우리 집에는

수많은 도둑고양이들이 살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꽤 지적으로 생겨먹었다

 

가만히 보면

장자를 닮은 고양이

푸코를 닮은 고양이

김수영이나 이상을 닮은 고양이들이

전신주와 나팔꽃 사이의 중간쯤 계단에

웅크리고 있다

 

고양이는 가끔 계단 위에서 나를 발견하고는

화들짝 놀라

재빠르게 어디론가 몸을 숨기기도 한다

 

하지만 고양이가 두려워하는 것은 내가 아니다

고양이는 내가 밟고 온 계단 밑의

수많은 역사책들과 그 역사책 속에 숨어있는 이름들과

그림자들을 두려워한다

그리고 내가 밟고 올라가고 싶어하는

계단 위쪽의 정체불명의 빛과 발자국을 두려워한다

 

그리하여 고양이는 내가 없을 때 수시로 독서를 한다

침침한 계단 위를 오르내리며

그동안 인간이 거느리고 온 세상과

우리가 만나고 싶어하는 것들의 편차를 읽고 있다

 

고양이는 계단 위에서

내가 초등학교 자연시간에도 배울 수 없었던

나팔꽃과 전신주 사이의 간격과,

하늘을 나는 새와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는 쥐들의 표정을 읽고있다

 

고양이는 지금도 독서중이다

사람들이 미처 읽어내지 못한

빛과 어둠이 남겨 놓은 문장들을 읽고 있다

 

두근거리는 심장 근처에

날카로운 긴장의 발톱을 감추고,

 

 

 

고요에 울다

박남희

 

깊은 산 계곡을 흐르는 물이

제 안으로 눈물 훔치는 소리 가만히 듣고 있으면

그 울음이 고요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심지어 높은 계곡에서 떨어져 내리는 폭포수의

그 장엄한 울음조차

그 근원을 따라가 보면 아주 맑은 고요가

그렁그렁 눈물 맺힌 채 고여있다

 

일전에 백석의 시에 나오는 당나귀의 울음소리가

응앙응앙 너무 귀여워서 따라가 보았더니

뜻밖에도 흰 눈이 푹푹 나리는 외진 곳에

쓸쓸한 고요가 혼자 소주병을 비우며 앉아있었다

 

이담에 내 목소리 다 소진하여 고요만 남았을 때

누가 내 고요에 울어줄 것인가

 

둘러보면 여기저기 장례식장 같은 세상에서

고요가 울음을 낳은 것인지

울음이 고요를 덮어버린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밤마다 달이 우주를 떠돌며 어둠을 가르는

그 엄청난 속도의 울음을 제 안에 감추고

고요의 빛으로 세상을 글썽이듯이

 

나 이 땅에 있을 동안

아무도 가보지 않은 깊은 계곡의 어여쁜 고요를 만나

처음인 듯 마지막인 듯, 수천 년 내 안에 고여있던

폭포수 같은 울음소리를 들려주고 싶다

 

 

 

고이고 드나들다

박남희

 

호수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구름을 말하는 게 아니다

활화산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너를 말하는 것이다

너의 눈을 말하는 것이다

네 눈에 비친 나를 말하는 것이다

 

만물은 너를 향해 말하고

너는 대답 대신

고이고 드나든다

나를 향해 질문을 한 것이다

 

나를 향해 질문하는 것들은 모두 너다

고이고 드나든다

가령 내 안의 태풍 같은 것도 그렇다

 

비와 함께 오래 고이다가

바람과 함께 함께 드나들다가

나를 향해 끊임없이 질문을 한다

 

그 대답은 사랑이나 이별같이 단순하지 않다

그리하여 나는 자주 망설인다

나는 대답 대신

스스로 고이고 드나든다

 

도처에 내가 출렁이고 있다.

 

 

 

고장 난 아침

박남희

 

어쩐 일인지 나의 아침은 해가 뜨지 않고 해가 진다

그러므로 조금 전 내가 먹은 밥은 아침밥이 아니고 저녁밥인 모양이다

아침을 기다리듯 지금 내가 기다리는 여인은

손예진같이 생긴 젊은 애인이 아니고 마흔이 넘은 아내다

아내는 조금 전 내가 알지 못하는 길 쪽으로 걸어와

어둠보다 늦게 도착했다 그러나 다행히 새벽은 아니다

내가 읽은 책은 자꾸만 인생을 말하려고만 하고

나는 아침에 넘긴 책장 부근에서 자꾸 서쪽 하늘을 보게 된다

요즘은 거꾸로 나이를 먹는 파도가 반갑고

밀려왔다가 금방 다시 밀려가서

모래 위의 흔적을 지우는 것들의 단호함이 부럽다

동쪽 해가 하늘을 비껴 아름다울 때 내 그림자가 다른 그림자와

자주 겹쳐지는 것을 좋아하는 것을 보면 분명 아침은 아침인데,

한밤중이 다 되어서야 학교 갔다 돌아오는 고3 아들을 보니

내 아침은 참으로 고장 난 아침이다

 

 

 

고집

박남희

 

풀잎 위의 빗방울이 고집을 피우고 있다

아래로 뛰어내릴 마음이 없다는 듯

대롱대롱 매달려 화사한 햇빛을 끌어 모으고 있다

 

빗방울 속의 햇빛이 고집을 피우고 있다

언젠가 무지개를 피워 올리겠다는 듯

제 안의 색을 감추고 물방울 속에 꼭꼭 숨어있다

 

햇빛의 몸 속에 숨어있는 색이 고집을 피우고 있다

세상의 모든 것들에게 색을 나누어주겠다는 듯

햇빛을 뚫고 빗방울의 장력을 뚫기 위해 꿈틀거리고 있다

 

빗방울을 매달고 있던 풀잎이 고집을 피우고 있다

빗방울 투명한 눈망울이 제 것이나 되는 양

부릅뜬 눈 속에 빗방울을 끝끝내 눈물처럼 말아 쥐고 있다

 

그 아래

고집을 버린 것들이 풀잎의 뿌리를 키우고 있다

기꺼이 썩는 것과 스미는 것이 봄을 밀어 올리고 있다

 

고집은 늘 아래가 두렵고

고집을 버린 것들은 항상 위가 허전하다

 

 

 

골목길

박남희

 

우리 집 근처에는골목길이 많이 있다

골목길은 수많은 것을 이끌고 자꾸 막다른 곳으로만 간다

나는 막다른 곳에 끌려가서 우두커니 서있던

나무며, 리어카며, 세 발 자전거들을 기억한다

어떤 때는 꽃샘추위에 쫓겨 온 개나리꽃들을 본적도 있다

시궁쥐들은 골목길에 수많은 구멍을 뚫어 놓고

밤 낮 없이 빛을 물어 나른다

이곳에는 항상 빛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믐달과 함께 골목길을 걸어가며

연탄재며, 소주병이며, 폐휴지들이 기억하던

수많은 이름들이 슬슬 풀려 나와 또 다른 골목길을

만들며 웅성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그렇게 해서 우리동네는 수많은 골목길이 생겨났다

 

나는 이 복잡한 골목길을 걸어다니면서

저 혼자 자꾸 지하로 숨어 들어가고 싶어하던

작은 골목길 하나를 알게 되었다

그 막다른 골목길의 끝자리 주소는

독거노인과 함께 사는 강아지 한 마리가 알려주었다

지하로 움푹 들어가

이미 무덤이 되어버린 그곳에,

 

콜록콜록 기침을 하며

골목길이 이불을 덮고 누워있었다

 

 

 

곰팡이

박남희

 

내 기억은 맨홀 뚜껑 속에 있었네

살찐 어둠을 뜯어 먹으며

점점 희미해져 가는 불빛을 찾아 헤매고 있었네

맨홀뚜껑 밖의 길들은

문명의 빛에 쉽게 눈부셔 하면서도

맨홀뚜껑 속의 길들을 끝내 밝혀주지 않았네

앞이 잘 안 보이는 내 기억은 수시로 덜컹거리며

맨홀뚜껑 위에 찍힌 햇살 모양의 발자국들을

흔들어대고 있었네

조급한 맨홀뚜껑 밖의 길들은 거리를 질주하는

숨 가쁜 시간들을 따라 어디론가 가고 있었네

내 기억 속에 신호등은 없었네

다만 끊임없이 흐르는 기억의 물줄기 속에

자잘한 삶의 찌꺼기들이 드문드문 섞여 흐를 뿐

내 유년의 판자집을 흔들어대던 바람도 가난도

이미 어디론가 떠내려가고 없었네

그러나 이미 귀먹고 눈 멀은 내 기억은

끝끝내 맨홀뚜껑 속에 있었네

아련한 그리움에 취해 냄새나는 제 살의 어둠을

뜯어 먹으며,

 

 

 

구름으로 말하는 법

박남희

 

비가 올 때 천둥 번개가 치는 것은

하늘에서 누군가 구름으로 말하는 것이라는 것을 아니?

하늘이 말없이 눈물 흘리다가 북받쳐 올 때

탄식소리처럼 터져 나오는 말,

 

그 말은 구름의 말처럼 보이지만 사실

누군가 구름으로 말하는 것일 뿐이야

구름은 말이 쌓여서 된 것이라서

구름만의 방언을 가지고 있지

하지만 그 방언은 비유로 되어있어서

아무나 그 방언을 사용하지는 못하지

 

이 땅에서 구름의 방언을 사용할 수 있는 존재는

제 안에 구름의 허기를 가지고 있는 것들뿐이야

아무리 먹고 먹어도 배가 고픈 구름은

달콤한 팝콘이나 솜사탕의 계보를 가지고 있는지도 몰라

 

넌 구름에 중독된 사람을 본적이 있니?

한 순간 뭉게뭉게 피어나 하늘에 온갖 형상을 만들다가

한 순간 비가 되어 내리는 구름의 속성을 닮은

구름의 몽상가를 본적이 있니?

 

구름으로 꿈을 꾸다가 끝내 구름 때문에 배가 고픈

노숙자를 본적이 있니?

그들이 노숙을 즐기는 것은 구름이 식량이고 이불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지

 

그런데, 바람아 넌

구름으로 말하는 법을 아니?

 

 

 

그 꽃병

박남희

 

그 병에 꽃이 있어야 된다는 것은 관념이다 꽃병과 꽃은 별개이다 다만 그들이 우연히 만날 뿐이다 그 꽃병을 나는 여자라고 바꾸어 말해본다 꽃병이 갑자기 누드로 보인다 사실 꽃병은 늘 누드를 꿈꾸지만 실제로는 누드가 아니다 누드의 조건은 육체에 이목구비가 있어야 한다 꽃병은 단지 이목구비 아래의 허방일 뿐이다 꽃병과 꽃이 만나야 이목구비를 갖게된다

꽃 밑에 뿌리가 있어야 한다는 것도 관념이다 꽃병이 있으면 된다 꽃병은 뿌리이다 때로는 분리도 가능한 조립식 뿌리이다 요즘 세상엔 조립식이 편리 하다 신혼부부도 요즘은 결혼을 하고도 혼인신고를 하지 않는 다 조립식 신혼을 꿈꾼다 조립식은 이동이 편리하다 분해가 가능한 만큼 그 속을 속속들이 알 수 있다 꽃병의 속내는 그냥 캄캄한 것 같지만 사실 좀 음흉하다 때로는 죽은 꽃들도 오래 방치해둔다 종종 꽃과의 이혼을 꿈꾼다

나는 그 꽃병의 정체가 궁금하다 꽃병이 나비를 위한 것인지 세상의 눈()을 위한 것인지 궁금하다 꽃병에 꽃이 없을 때도 꽃병인지가 너무나 궁금하다 그래서 나는 꽃병에게 물어 보았다 너는 꽃이 없을 때도 꽃병이냐고, 근데 꽃병은 아무른 대답이 없다 그냥 뾰루퉁하다 그러다 갑자기 꽃병은 히히힝거리며 날개 달린 말이 되어 천마도 속으로 사라진다 세상의 움직이는 것들이 모두 꽃병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여기저기 꽃들이 웅성거리고 있다

 

 

 

그늘은 자라서 저녁이 되고

박남희

 

그늘은 꽃을 지나는 동안 꽃그늘이 된다

그늘은 꽃의 향기나 꽃의 아름다움보다

꽃의 몸짓에 민감하다

한떼의 그늘이 꽃을 지나

햇빛 속으로 사라진다

이 땅의 햇빛 속에서 가려져 보이지 않는

무수한 그늘들,

그들은 무언가 꿈틀거리는 것들 속으로 들어가

꿈틀거림 만으로 존재할 수 없는

울음이 되고, 생각이 되고, 바람이 된다

햇빛이 그늘을 하나씩 풀어놓으며

제 속의 어둠을 털어낸다

그늘 하나의 행복을 붙잡고

민들레 하나 기울어진다

민들레는

어디론가 날려보내야 할 것들을

미처 날려보내지 못하고

바람이 웅성거리는 산등성이 너머로

제 키 만큼 자라있던 울음을 숨긴다

그렇게 산은 자라서

밤마다 숲 속에 꽃을 피우고

햇빛 속에 숨겨져 있던 그늘은 자라서

제 몸뚱이만한 크기의 저녁이 된다

그늘은 천천히 저녁의 이름으로

숲 속의 꽃들을 하늘 위로 밀어올린다

 

비로소 저녁 하늘이 환해진다

 

 

 

그러하냐? 사랑아

박남희

 

나는 수업에 잘 빠지지 않는다

내 뱃살도 여전히 빠지지 않는다

그래서 그랬는지 물에 빠져 죽을 뻔한 적이 있다

그날 이후로 내 젖은 마음은 물이 쉽게 빠지지 않는다

 

비가 오는 것은 하늘에서 물이 빠지는 것인데

내 마음속에는 늘 비가 내려서 물이 잘 빠지지 않는다

 

그런데 나는 왜 뜻밖에도 그렇게 빠지는 것이 많을까?

얼굴도 몸매도 빠지고 성적도 빠지고 성적인 매력도 빠지고

어느새 젊음도 다 빠지고 나이마저 어느새 50줄 너머로 빠져버렸으니

 

새들은 제 가벼움에 빠져 어디론가 나아가고

아름다운 여자들은 제 매력에 빠져 하이힐을 신고

정치인들은 돈과 권력에 빠져 감방에 가고

 

나는 지금 무엇에 빠져있나? 삐져있나?

내 마음은 점 하나가 모자라

무엇엔가 빠져있지 못하고 삐져있는 것은 아닌지

나는 요즘 정답에 삐져있다 나는 정답을 좋아하지 않으므로

세상의 모든 답안지에 삐져있다 정답을 요구하는 시에도 삐져있다

 

내 눈은 이미 노안이므로

참으로 편리하게도

빠지다와 삐지다를 구별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나는 이제 무엇이든 이별을 원한다

고독에 빠져있는 나를 원한다

저 혼자 낯선 숨소리에 빠져

빠지는 것이 많은 나를 버리고 가버린 시에게 삐져있다

그러므로 나는 앞으로도 종종 빠지거나 삐져야 한다

언젠가 너에게 제대로 한번 삐져야 한다

 

 

 

그림자 다이어트

박남희

 

그림자가 나를 뜯어먹고 있다 나는 그림자 곁에서 야윈다 나인 듯하면서도 내가 아닌 그림자가 나는 무섭다 나를 감시하는 걸까 나를 무시하는 걸까 나를 졸졸 따라다니다가도 돌연 어디론가 사라지는 그림자, 그러다가 갑자기 나타나서 내 키를 늘여 눕혀놓기도 하고 내 형상을 온통 흑백의 자화상인 듯 세상에 불쑥 내미는 그림자,

그런데 그림자를 자세히 보니 어딘가에 붙어서 떨어질 줄 모른다 그림자의 저 놀라운 집착력에 나는 잠시 아찔해진다 내 몸과 바닥에 몸을 걸치고 떨어질 줄 모르는 저 양다리 생존법이 나는 겁난다 그러고 보면 내 몸이 야위는 것은 그림자의 양다리 생존법 때문이다 내 몸의 양분을 나 몰래 바닥에게 전해주는 저 음흉한 자태를 보라,

나는 그림자가 무섭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림자가 고맙다 세상의 온갖 색깔에 물들어가면서 점점 비대해지는 내 몸을 한 순간 얇은 흑백의 과거로 되돌려주는 저 놀라운 흑백 다이어트, 고맙고도 놀라운 그림자에게 오늘도 나는 감사히 내 몸을 맡긴다

내 몸은 이미 전 생애를 저 하늘의 빛에게 투시당했다 빛은 엑스레이를 찍듯 내 몸을 찍어 하루 분량의 동영상 필름 한 통을 또 남길 것이다 저 필름 속에 내 병명이 들어있다 야위어가는 내 몸의 비밀을 그림자는 알고 있다

 

 

 

그림자 일기

박남희

 

나는 그림자로 일기를 쓴다

언제나 나를 따라다니는 그림자는 나의 연필

해가 있을 때는 선명히, 해가 없을 때는 숨어서

나에게 자꾸만 말을 거는 이상한 연필,

 

그림자 연필은 나를 따라다니며

내 몸이 중얼거리는 것을 받아적는다

내 일기장은 밤낮없이 늘 빼곡하다

그 일기장 속엔 내 속내까지 빠짐없이 적혀있지만

그 속의 글자를 읽어내는 일은 쉽지 않다

 

내 일기장은 그림자로 읽어야 해독이 가능하다

3차원의 공간을 2차원의 평면으로 읽는 일은

그림자만이 가능하다

 

세상의 오색찬란한 색도 지우고

세상이 원하는 모든 광택도 지우고

그림자는 스스로를 내려놓아 가난해진다

가난한 그늘의 언어로 세상을 이야기한다

 

나는 오늘도 그림자 일기를 쓴다

그늘이 감추어두었던 풀꽃 같은 세상을

그림자로 만나

그림자의 언어로 이야기한다

 

나는 일기를 쓰면서

그림자 속으로 나를 초대한다

 

 

 

기린의 법칙

박남희

 

질문이 기린을 낳고 대답은 점점 키가 자란다 다리가 긴 대답이 어디론가 성큼성큼 걸어간다 눈이 쳐다보는 곳을 발은 모른다 발이 눈에게 질문한다 너는 어떤 물음표냐고 눈이 발에게 대답한다 우리는 서로 관심사가 다르다고 그게 기린의 법칙이라고,

기린의 목과 발이 길어진 것을 기린의 법칙으로 다 설명할 순 없다 그래서 질문이 물을 마실 때는 대답이 다리를 벌려 주어야 한다 높은 산에 크레바스가 많은 것도 다 이유가 있다 성큼성큼 시간의 발이 보이지 않는 것도 시간의 목이 너무 길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러므로 기린은 이유 없이 법칙을 만들지 않는다 기린의 키에는 이유가 없다 세상을 향한 물음이 너무 긴 것과도 상관이 없다 다만 어떤 질문도 대답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키가 자라고 한 순간 우연한 한 쌍이 되어 어디론가 성큼성큼 걸어갈 뿐이다

 

 

 

 

 

 

 

길에 관한 편견

박남희

 

길을 외롭다고 함부로 말하지 말라

길 위에는 하늘이 있고

바람이 있고

낙엽이 있다

 

더구나 그의 몸속에는

그를 사랑했던 것들이 다녀간

둥글고 아늑한 어둠이 있다

 

육체를 지나 마음으로 향해있던 그 길은

살랑이던 낙엽의 언어와

출렁이던 바람의 춤과

하늘의 깊은 눈매까지를 잘 기억하고 있다

 

길이 외롭게 느껴지는 건

언젠가 그 길을 사랑하고 싶기 때문이다

 

 

 

깡통 미학

박남희

 

깡통은 비어 있으므로 행복해진다

그 안에 소리를 더 많이 가둘 수 있으므로

소리의 아빠와 소리의 엄마가 사랑을 해서

소리를 낳고……

마음대로 찌그러질 수 있으므로, 찌그러져도

흉보지 않으므로 행복하다

무엇보다도 깡통은

비어 있을 때 비로소 깡통이 된다

그 속에서 깡통의 자의식이 무럭무럭 자라고

자라서 모든 쓸데없는 것들의 비어 있음을

자유롭게 확인하고 손뼉을 치며

마음껏 소리 지르는 깡통 곁에 서 있는 나는

왠지 귀가 멍멍하다

 

 

 

깡통 익투스*

박남희

 

통조림을 열다가 물고기의 새로운 음모를 발견한다 머리를 버리고 꼬리도 버리고 몸통 하나로 헤엄치는 법, 그것도 헤엄쳐서 사람들의 몸을 온통 바다로 만드는 법

그렇게 그렇게 머리와 꼬리는 생각나지 않게 하는 법

나는 통조림을 따서 먹다가 창세기와 요한계시록이 없는 성서를 가둔 깡통의 부패하지 않는 율법을 생각하다가 물고기의 새로운 별을 발견한다 그 별의 이름은 깡통 익투스(ΙΧΘΥΣ)

물고기가 수만 킬로의 길을 헤엄쳐 온 바다가 우리의 몸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 홀연히 다가와, 내 몸 어딘가에 있을 수많은 깡통이 느껴졌다

머리와 꼬리는 잃어버리고 몸통의 달콤한 육질만으로 가득 찬 세계

어느 순간, 텅 비어버릴 깡통들로 가득 찬 내 몸이 문득, 깜깜한 남쪽 밤하늘의 오래된 물고기자리로 꿈틀거린다

 

*익투스(ΙΧΘΥΣ)는 그리스어로 물고기라는 뜻이다. 초기 기독교 신자들이 비밀스럽게 사용했다고 전해지는 기독교의 상징으로 두 개의 곡선을 겹쳐 만든 물고기 모양을 하고 있다.

 

 

 

꼬리표

박남희

 

내 양복의 안쪽에는 꼬리표가 붙어있다

신미영이라는 아내의 이름이 나를

한나절 넘게 따라다녔다

 

아내가 세탁소에 맡겼던 양복에 꼬리표가 붙은 줄도 모르고

나는 아름다운 스타킹을 따라서 계단을 오르기도 하고

가슴골이 훤히 보이는, 덜컹거리는 브래지어 옆 좌석에 앉아서

책을 읽기도 했다

아마도 아내는 내 은밀한 심장 박동소리를 들으며

시장을 가고 밥을 짓고 빨래를 했을 것이다

 

나는 꼬리표를 발견하고 곧 떼어버렸지만

그 후 그 꼬리표는

유성처럼 환하게 불을 밝히며 나를 따라다녔다

 

제 몸을 산화해서 만든 유성의 꼬리표

언젠가는 없어질 제 몸을 꼬리표로 만들기 위해

온몸을 허공에 불사르는 별똥별이 보였다

 

나는 한때, 별똥별 같은 시인이 되리라 마음먹었지만

그동안 내 몸을 산화한 불같은 시를 한 편도 쓰지 못했다

 

그래도 나는 참 다행이다

쉰이 넘은 어둑한 나이까지

별똥별처럼 제 몸을 불사르며 나를 따라와

내 앞길을 환하게 비춰주는 꼬리표 하나 있으니,

 

 

 

꽃에 집중하다

박남희

 

몸보다, 이파리보다, 꽃에 집중하는 나무

거멓게 말라 터진 몸뚱이는 내버려두고,

오로지 꽃 피우는 데만 몰입하는 벚나무

 

푸른 잎 생략하고, 치장도 생략하고

꽃에만 전념하는 선택과 집중으로

수만 개, 방울을 맺고,

보듬어 키우다가

 

팡팡팡 펑펑펑 절정에서 터트린

저 함성, 저 폭발, 저 만개, 저 아수라,

마침내 두둥실 떠오른

 

 

 

꽃을 통해 허공을 말하는 법

박남희

 

나는 어느 날

당신이 말하는 것이 허공을 말하는 것 같아

당신이 문득 꽃으로 느껴지기 시작했지

 

꽃은 자신이 허공에 있다는 것을 모르지

자신의 안에 허공이 있다는 것도

 

하지만 뿌리는 꽃을 통해 허공을 말하는 법을 알고 있지

그런데 한차례 꽃이 피어나고 시드는 허공의 이치를

뿌리는 왜 끝내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는 것인지

 

그러면서 실뿌리는 점점 땅 속 깊이 뻗어가

낯선 돌을 만지고 샘을 더듬다가

어둠의 차디찬 깊이를 만나고 끝내 꽃을 떨구게 되지

 

아름다움은 모두 한차례의 흔들림으로 기억되는 것인지

허공은 자꾸만 꽃을 흔들고 꽃은 점점 외로워지지

그렇게 꽃은 떨어져 시들어가지

 

꽃이 외롭게 흔들리다가 만들어낸 흔적이

다시 허공이 된다는 것을 바람은 알고 있지

그렇게 만들어진 텅 빈 커다란 꽃이 허공이라는 것을

아무도 가르쳐주는 이가 없어도

허공은 텅 빈 꽃으로 날마다 새롭게 피어나지

 

당신과 내가 마주 보며 흔들려서 만들어낸

바람의 빛깔, 저 허공의 언어가

꽃이라는 것은 영원히 당신과 나만이 알지

 

 

 

꽃이 괸다

박남희

 

시집을 읽다가 나는 무심코

꽃이 핀다꽃이 괸다로 읽는다

꽃이 괸다? 아마 그럴 것이다

우리가 눈으로 보이는 것은 꽃이 핀 것이지만

꽃은 누군가의 눈물이, 어딘가로 흐르던 강물이

무엇을 향해 철썩이던 바닷물이 고여서 피는 것이다

 

내가 사랑한 그녀가 내 앞에 꽃처럼 피어

바람에 흔들리고 있을 때면, 나는 돌연

그녀가 어디론가 흘러갈 것만 같아 불안하다

 

고인다는 것은 스미고 싶다는 것

어디론가 흘러가고 싶다는 말의 동의어다

 

옛사람들이 사랑한다는 말을 괴다라고 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괸다는 말속에

사랑이 있고 눈물이 있고 강물, 바닷물이 있다

어디론가 출렁이고 싶은 것들이 그 안에 다 들어있다

 

지금 내 안에 꽃이 괸다

 

 

 

꽃이 방전된다

박남희

 

세상의 꽃이 너무 아름다울 때 나는 졸립다

눈부터 피곤해져 오고

이내 눈이 스르르 감긴다

 

아름다운 꽃은 번개처럼 위험하다

수만 볼트의 전압을 가지고 있다

내 안의 꽃은 수만 볼트의 전압에 눌려서

점점 무거워진다

 

아름다운 꽃 속에 숨어있던 전류는

졸음을 몰고와 나를 혼수상태에 빠뜨린다

이럴 땐 성냥개비를 눈꺼풀에 끼워도 소용이 없다

최상의 방법은 아름다운 꽃이 내 안의 꽃과 만나

즐겁게 방전되는 일이다

 

나는 나를 이기기 위해 안간힘을 쓰다가

순간 깜박 존다

몸 밖의 꽃과 안의 꽃이 만나 방전된다

그런데 뜻밖에도 정신이 점점 맑아져 온다

희미하던 것들이 맑게 보이기 시작한다

 

몸 밖의 꽃과 안의 꽃의 주소가 같다는 것을

내 안의 졸음은 이미 알고 있다

꽃이 방전되는 것이 하루이고 역사이고

사랑이라는 것을.

 

 

 

꽃집

박남희

 

그 꽃은 들판으로 나가 들꽃이 되었다

속으로 무슨 말을 혼자 중얼거리고

걸음은 너무 느렸으므로

꽃이 들판으로 느린 걸음을 옮기는 줄 아무도 몰랐다

사춘기도 지나는 줄 모르고

꽃은 그곳에서 느린 속도로 꽃을 피웠다

 

사람들은 시골 처녀같은 그 꽃을 들꽃이라 불렀다

느리게 피어 들판을 느리게 걸어 다니는 꽃

하지만 그 꽃은 들꽃이 아니었다

그곳이 자신의 집이었으므로

꽃은 스스로 꽃집이라고 불렀다

 

세상의 모든 꽃은 날이 저물기 전에 집에 이르기를 원한다

집에 이르러 그 집을 제 몸 속에 들이기를 원한다

집이 있어야 제 몸속에

꽃이 피고 웅숭깊은 소리가 살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꽃이 수천년 동안 느린 걸음으로 들판에 이른 것은

들판에 그들만이 볼 수 있는 아름다운 집이 있기 때문이다

그 집을 그들은 꽃집이라고 불렀다

 

들판에는 꽃들 사이, 혹은 꽃의 안 여기저기

말을 키우며 사는 아름다운 꽃집이 있다

들판을 느릿느릿 걸으며 제 안에 바람과 소리를 들여도

아무도 무어라고 하지 않는,

그들의 눈에만 보이는 그들만의 은밀한 집이 있다

 

 

 

꿈꾸는 과녁

박남희

 

안개 속에 과녁이 있다

과녁은 꿈꾸고 있다

온몸으로 화살을 받는 꿈도 꿈이지만

안개는 좀 난해하다

 

그것을 해석하면 이렇다

과녁을 단지 둥근 원들의 모임 정도로

판단해서는 안된다 과녁은

안개를 먹는 꽃이다 그래서 향기가 있다 과녁은

난해할 때 가장 아름답다

 

뿌연 안개는 꿈꾸는데 유리하다

안개꽃 속의 장미처럼

안개 속의 꽃이야말로 진짜 과녁이다

너무나 황홀해서

맞출 듯 잘 맞춰지지 않는 과녁이다

 

꽃이 안개를 흔드는 것은

화살을 그리워한다는 몸짓이다

햇빛화살을 온 몸에 받으면서 꽃은 비로소

온전한 과녁이 된다

 

화살이 과녁에 와 박히면

안개는 두근두근

꽃 안에 들어 즐거운 비명을 잉태한다

 

 

 

나는 가끔 주머니를 어머니로 읽는다

박남희

 

어머니를 뒤지니 동전 몇 개가 나온다

오래된 먼지도 나오고

시간을 측량할 수 없는 체온의 흔적과

오래 씹다가 다시 싸둔

눅눅한 껌도 나온다

 

어쩌다, 오래 전 구석에 처박혀 있던

어머니를 뒤지면

달도 나오고 별도 나온다

옛날 이야기가 줄줄이 끌려나온다

 

심심할 때 어머니를 훌러덩 뒤집어보면

온갖 잡동사니 사랑을 한꺼번에 다 토해낸다

 

뒤집힌 어머니의 안쪽이 뜯어져

저녁 햇빛에

너덜너덜 환하게 웃고 있다

 

 

 

나는 그림자를 흘리는 버릇이 있다

박남희

 

주제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

백색 어둠을 읽고 나서

나는 그림자를 실실 흘리는 버릇이 생겼다

그림자가 자꾸만 나를 따라오기 때문이다

나는 그림자가 무섭다

 

그림자는 자세히 보면 그림자가 아니다

그것은 상처이고 칼이고 죽음이고 불안이다

그러다 어떤 때는 돌연, 기쁨이고 눈부심이고

달콤함이고 매혹이다

자세히 보면 그림자는 겹의 언어다

백색 어둠이다

 

호박넝쿨이 호박을 잡아당기듯

백색 어둠이 돌연 나를 잡아당기다가

, 던져버린다

나는 결박 속에서 해방된다

나는 어둑해진다 온몸이 그림자가 된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그 그림자의 주인이 된다

 

나는 그동안 아버지가 내 그림자인줄로만 알았다

아버지와 나와의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그림자를 멀리 두고 보면

그림자 속에 아버지가 보인다

그림자인 내가 보인다

 

나는 그림자를 슬슬 흘리는 버릇이 있다

아무도 모르게

나를 흘리는 버릇이 있다

 

하루해도 서산에 이르면 눈이 멀 것이다

 

 

 

나를 버릴 수 없어서

박남희

 

내 몸에서 옷을 버린다

구두를 버린다

머리카락을 버린다

 

한 차례 비가 내리고 나를 버릴 수 없어서

 

여름을 버리고

뒤집힌 우산을 버리고

무너진 담벼락을 버린다

 

내가 버린 것들이 혹시 나일까 생각하다가

 

복잡한 생각을 버리고

저 혼자 외연을 넓히는 상상력을 버리고

 

혹시 내가 버린 것들로부터 내가 버려진 것은 아닐까

생각하면서

 

벽에 걸린 뾰족한 초침의 눈빛을 버리고

그 초침에 찔리고 싶어 하는 시간을 버리고

그 시간 속에 갇혀 있던 조바심을 버리고

그러고도 나를 끝끝내 버릴 수 없어서

어디론가 뻗어가고 싶어 하는 강 하나 남겨둔다

 

그 강의 출렁이는 물살을 버리면

나를 아주 다 버리는 것 같아서.

 

 

 

나무의 내력

박남희

 

신은 흙을 창조하고 그 위에 나무를 창조하였다

나무는 흙 속에 뿌리를 박고 흙이 전해주는

육체의 소리를 들었다

흙은 나무에게 나무가 알지 못하는 나무의 내력을 이야기해주었다

 

본래 나무는 종이었다

밖으로 나오려는 울음을 감추기 위해

무수한 고통의 이파리들을 푸드덕거리던 종이었다

 

그러다가 종은 제 안의 울음을 견디지 못하고

역사책이 되었다 그 때부터 나무는

흘러가는 모든 것들을 몸 안에 가두고

시간의 물관부 사이에

나란히 배열시키는 습관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책 속의 역사는 수시로 요동했다

그리하여 나무는

모든 흔들리는 것들의 아버지가 되었다

흔들리는 모든 것들을

이 땅의 중심에 붙잡아 놓기 위해

흙 속에 뿌리를 내렸다

 

나무의 뿌리는 본질적으로 불온했다

뿌리는 흙 밖으로 제 몸을 뻗어

흙이 들려주었던 제 안의 이야기들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나무와 나무 사이를 오가는 메아리는

그렇게 생겨났다

 

 

 

나뭇가지의 질문법

박남희

 

세상이 온통 의문으로 가득 찰 때

뾰족한 것으로 허공을 찔러대기보다는

조용히 이파리를 매달 것

 

그 이파리로 얼굴 붉히고

그 이파리가 울다가

그 이파리로 어디론가 굴러가

다보록한 흙에게 썩는 법을 배울것

 

그리하여 제 이파리 모두 떨구고

허공이 온통 맑은 날

공중에 오래된 바람소리 풀어놓고

눈물같이 여린 초승달 하나 낳아놓을 것

 

그리고는 안으로 안으로

의문의 강을 풀어내어

나이테의 두께를 늘려갈 것

 

그런 후에는

바람 밑에 숨겨두었던 뿌리에게 넌지시

물의 안부를 물어볼 것

 

 

 

나사

박남희

 

내 기억은 나사 모양으로 되어있다

그리하여 무언가를 감고 수 없이 돌아서

그것을 단단히 조이려는 성향이 있다

 

나사의 원조는 똬리를 틀고 있는 뱀인데

뱀이 지시하는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이브를 만날 수 있다

 

그 옛날 이브는 결국 뱀 모양의 볼트의 꼬임에 빠져

스스로를 너트로 만들었던 것인데

그때부터 해와 달은 보이지 않는 볼트와 너트의

궤도를 따라 쉬지 않고 돌기 시작했던 것인데

한번 너트에 든 볼트는 궤도를 따라 돌면서

한 몸이 되어갔던 것인데

 

너트와 한 몸이 되어있는 볼트는

아담이 아니라 뱀이라는 게 문제여서

결국 나사를 따라가다 보면 죄와 만나게 된다

 

그때부터 내 기억 속에는 수많은 뱀이 살기 시작했고

뱀은 날마다 이브를 그리워했다

원초적인 나사의 숙명이 시작되었다

 

 

 

나의 라그랑주 2

박남희

 

아무래도 이곳에 머무는 시간은

좀 더 길어질 것 같아

 

내가 믿는 신을 태양이라고 하고

너를 달이라고 하면 나는 당연히 지구

그 사이에 중력이

같아지는 곳이 존재한다는 게 참 신기해

 

어쩌면 L2라고 불리는 이곳은

사각지대인지도 몰라

서로가 서로에게 무관심하거나

서로가 서로의 존재를

한순간에 지워버려도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갈 수 있는 지점

 

그런데 신을 지워버린다는 건

지극히 송구스러운 일

이럴 땐 잠시

망각이 다녀갔다고 말하는 게 더 낫지

 

태양이 지구를 놓아줄 수 없듯이

나는 너를 놓아줄 수 없어서 오래 괴로웠지

서로 궤도가 다른 것들이

서로를 놓아줄 수 없을 때

중력은 생겨나지

 

중력과 중력이 만나서

원심력과 구심력을 만들고

몇 해 동안 서로를 이끄는 구심의 품안이 좋아

구심 속에서 까무룩히 저물다가

아득히 먼 곳의 목소리가 들려올 때 문득

바깥의 힘을 깨닫게 되지

 

눈부시고 뜨거운 줄로만 알았던 태양이

때가되면 저녁 너머로 슬그머니

제 모습을 감추었던 그 속내를 비로소 알게 되지

그제야 지구는 자신의 몸속에 있던 중력에

태양과 달의 지분이 숨어있었다는 것을 깨닫지

 

하지만 너를 떠나보내고도 한참 동안 난

내가 머물던 이곳을 L2로 기억했었지

내 몸이 빛을 가려서

네 몸이 캄캄해지던 바로 그 지점

 

많이 그리울 거야

그 땐 그림자도 뜨거웠지

 

* 라그랑주 점(Lagrangian point) : 칭동점(秤動點)이라고도 불리는 이곳은 공전하는 두 세 개의 천체 사이에서 중력과 원심력이 상쇄되어 실질적으로 중력의 영향을 받지 않게 되는 평형점을 말한다. 이 점은 여러 개인데 위치에 따라 L1, L2, L3, L4, L5로 불린다.

 

 

 

나팔꽃의 경계

박남희

 

나팔꽃이

오래된 담장을 타고 기어올라간다

흘끗, 태양을 쳐다보다가

말을 아끼고

꽃봉오리 하나를 새로 피웠다

 

흙과 담장 사이, 담장과 하늘 사이

나팔꽃은 문득

나팔을 불어대고 싶은 마음, 꾹 누르고

꽃을 하나씩 피운다

 

새가 흔들고 간 쥐똥나무 아래

거미가 새롭게 경계를 세운다

 

끝없이 흔들리고 싶은

나팔꽃의 경계는 어디인가

 

바람이 나팔꽃을 흔드는 것은

너무 오랜 습관 같아 불안하고

새가 나팔꽃을 흔드는 것은 돌연,

나팔꽃의 경계를 허물어뜨리는 것 같아

불안하다

 

새와 바람 사이,

바람과 쥐똥나무 사이에서

나팔꽃은 문득,

말을 아낀다

 

 

 

낮달

박남희

 

기억의 반대쪽으로 나를 버려줘

기억이 나를 아주 잊어버리게

 

희미한 게 나는 좋아

빛으로 빛을 지우는 법을 알고 부터

희미한 게 좋아졌어

 

어둠에 들어서야 내가 밝아지는

알 수 없는 나의 정체성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었어

 

밝은 빛으로 나를 지우지만

아주 지워질 수 없는 내가 남아있다는 것이

난 너무 좋아

 

어둠의 눈으로 보든 빛의 눈으로 보든

나는 나니까

내 곁에 눈이 밝은 새 한 마리 띄워놓아도

나는 두렵지 않아

 

난 이미 광활한 우주 속에서 아주 밝은 빛을

견디고 살아남은 어둠의 사생아이니까

 

눈부신 빛들을 내 주위에서 지우고

그곳에 다시 짙은 어둠을 깔아놓아도

내가 그곳에서 밝게 빛나는 것이

내 몫이 아닌 것을 이미 난 알아

 

빛에서든 어둠에서든 희미하든 또렷하든

변할 수 없는 것은

어떤 손이 나를 붙들고 있다는 사실이야

 

빛으로부터 탈출해 어둠에 들었던 나를

또 다시 빛의 손으로 잡아당기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저 손의 아이러니가 궁금해

 

내 모습은 비록 희미해도 지금 내 몸에는

보헤미안 랩소디가 흐르고 있어

프레디가 죽어서도 목청껏 부르던

저 공중의 노래

 

바람이 어디를 향하건, 그건 내게 아무 상관이 없어*

외로울 땐 빛의 반대쪽으로 나를 버려줘

어둠이 나를 아주 잊을 수 없게

 

* 퀸의 리드보컬 프레디 머큐리가 부른 노래 <보헤미안 렙소디>의 가사 “Any way the wind blows doesn't really matter to me”를 인용.

 

 

 

내 안쪽은

박남희

 

섬을 만들 수 없어 집이 되었다

밖이 잘 보이지 않았다

집 밖에 집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꾸만 섬을 만들고 싶어했다

 

나만이 있는 섬

수많은 내가 와글거리다

갈매기가 되고

바위가 되는 이상한 섬

 

나를 방목하고 싶었다

내 안쪽에 바람을 들이고 싶었다

집과 섬 사이에

출렁이는 파도를 놓고 달을 놓아

그리운 이름 하나

내 안에 방목하고 싶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자꾸만

집이 나를 거역했다

집은 내게 습기 속에 들어있는 말을 골라내어

수많은 섬의 형상을 만드는 법을 가르쳤다

이따금 섬과 집 사이에

희뿌연 달무리를 풀어놓을 뿐

달의 뒤편은 끝내 보여주지 않았다

 

그때 내가 만든 것은 섬이 아니었다

바람은 그것을

섬의 형상을 하고 있는 집이라고 했다

섬 속에 살고 있던 것들이

와글거리며 파도를 만들고 달을 만드는

그런 내 안 쪽엔 언제부턴가

 

섬의 오래된 이끼처럼, 혹은

집의 깊은 그늘처럼

짙푸르고 은밀한 이야기가 살기 시작했다

 

 

 

노숙자

박남희

 

그리움도 저렇듯 웅크리고 있으면

어두워질까

 

온몸으로 신문지의 글자를 읽고 있으면

잠이 올까

 

그리하여

수많은 발자국 소리 속에

먼 발자국 소리 하나 아주 지워질까

 

누군가가 몹시 그리울 때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들어와

내 안에 웅크리고 있는,

 

 

 

노을을 끌고 간다

박남희

 

둥근 것이 노을을 끌고 간다

노인은 자전거에 누런 호박을 싣고

저무는 뚝방길을 간다

 

익어가는 아침은 눈부시지만

익은 저녁은 슬프다

익은 것은 때때로 노을이 된다

 

노을에 호박이 익고

호박 속에 든 여자가 익는다

얼마 전에 주민등록증이 말소된 여자

비로소 둥근 여자가 익는다

 

노인은 노을을 매달고 달린다

생의 굴절이 때로는 저토록 아름다운 것인지

슬픈 것인지, 저문다는 것은

꺾여진 빛을 온몸에 매다는 것이라는 것을

자전거는 아는지

 

몸 밖의 굴절과 몸 안의 굴절이 만나서

노을이 된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노인은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저녁 어스름 길을 가고 있다

 

 

 

눈물

박남희

 

고이는 것과 흘러가는 것 사이에 내가 있다

나는 그동안 버려야 할 것들을 너무 많이 데리고 살았다

고여 있다는 것은 흘러가고 싶다는 것이고

흘러간다는 것은 고이고 싶다는 것인 줄도 모르고

나는 그동안 때 없이 고이고 때 없이 흘러가고자 했다

그리하여 나는 어느새 자꾸만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옛 웅덩이에 고여 있던 하늘을 우러르는 버릇이 생겼다

그러면 하늘은 금세 흐려져 오래 고여 있던 것들을

지상으로 흘려보냈다 태고 적 나를 흘려보냈다

그렇게 하늘은 태고 적 나와 지금의 나를 만나게 해주었다

수천 년을 내려오는 동안 내가 거쳐했던 수많은 집들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나는 지금 그 집들을 함부로 아비라 어미라 부를 수 없다

집은 다만 무언가를 담고 흘려보내는 것일 뿐

고이는 것과 흘러가는 것 사이에 내가 있다

 

 

 

니벨룽*

박남희

 

너에게 다녀가지 않기 위해 나는 걷는다

우산이 필요 없는 안개를 등에 지고

끝내는 온몸에 안개를 입고 걷는다

 

구름도 비도 되지 못하고

불확실한 것들로 이루어진 몸

해가 중천에 떠도 안개는 사라지지 않았다

 

나를 규정하려드는 길,

나에게 상표를 붙이려드는 이상한 빛,

내 무게를 궁금해 하는 숫자 혹은 바늘,

 

너로부터 나를 보호하기 위해

나는 늘 꿈꾼다

길을 걸어가다 길이 사라지는 꿈

낭떠러지 끝에서 다시 길이 나타나는 꿈

이걸 나는 악몽이라고 말하지 않고

안개라고 말을 한다

 

너에게 보이지 않기 위해 나는 걷는다

이따금 구름의 말을 하고

구름의 말을 버린다

나는 백지가 되기 위해 걷는다

찢어지기 위해 하늘을 보고

내 몸에서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까지

걷고 또 걷는다

 

내가 등 뒤에 버린, 찢어진 백지가 말을 할 때까지

 

* 니벨룽(Nebelung) : ‘안개의 피조물이라는 뜻을 지닌 러시안 블루의 다른 종 고양이.

 

 

 

달력 산부인과

박남희

 

달력에는 네모난 문이 여러 개 있다

바람이 불면 펄럭이는 문과 문 사이

우리네 근대사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는

달력 산부인과,

그 문을 열고 들어가면 아기 울음소리가 들린다

 

우리네 어머니들은 6.25 근처에서

죽은 아이들을 낳고

4.195.18 근처에서

손에 돌멩이를 움켜쥔

이상한 아이들을 낳았다

 

달력이 한 번씩 바람에 펄럭일 때마다

사생아를 낳고, 기형아가 태어나는

이상한 산부인과

누구는 그 애들의 아버지가 가난이라고도 하고

미친 별이라고도 하지만, 나는 모른다

 

네모난 문을 열고 들어가면

영화가 시작되기 전 을숙도에서

부러진 갈대들 사이로 새들이 세상을 뜨고*

또 하나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아직 세상을 뜰 수 없는 아이들이

자궁 속 비디오 방에서 서로를 끌어안고

웅크리고 있다, 출생을 기다리고 있다

 

요즘도 그 산부인과는 성업 중이다

최신 정보에 의하면

앞으로 태어날 복제아기부터

사이버 아기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곳을 알고 있다고 한다

 

나는 오늘 달력 한 장을 떼어냈다

떨어져 나간 달력 속에서

아기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 황지우의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에서 인용

 

 

 

달빛의 구조

박남희

 

달이 둥글다고 달빛도 둥근 것이 아니야

실타래가 실을 술술 풀어내듯

달이 제 몸을 풀어내는 것이 달빛이 아니야

 

달빛은 달의 것이 아니야

달 뒤에 숨은 어둠의 것이야

동백 이파리에 깃든 저 달빛 좀 봐

멀리 멀리

달의 그늘을 끌어당기고 있는 것 좀 봐

 

빛을 떼어낸 자리에 어둠이 있다는 거

이미 온몸으로 체듯하였다는 듯이

먼 어둠을 향해 빛을 퉁겨내고 있는 것 좀 봐

 

빛을 떼어낸 자리에 어둠이 있다는 것

이미 온몸으로 체득하였다는 듯이

먼 어둠을 향해 빛을 퉁겨내고 있는 것 좀 봐

 

달빛을 끌어당겨 활짝 꽃 피우고

다시 빛을 놓아주는 저 동백의 모가지 좀 봐

달빛이 어떻게 생겨나 어디로 흘러가는지

언제 흘러와 어떻게 꽃피고 열매 맺는지

삼라만상에 출렁이는 꽃과 나무,

강물과 바닷물을 보고 있으면

달빛의 구조를 알 수 있어

 

그러므로 달빛은 달의 것이 아니야

달이 밝다고 달빛도 밝은 것이 아니야

달빛을 보려면

삼라만상에 그득한 생명들의 표정을 보면 돼

 

, 이제 내 얼굴에서 달빛을 찾아봐

 

 

 

덤불에 이르는 길

박남희

 

그녀는 불이다 성격이 불같은 게 아니라 몸이 불이다 그녀의 고향은 덤불이다 덤불은 이스탄불 옆에 있는 지명이 아니다 그녀는 뜨겁고도 차갑다 그녀는 아직 자신의 존재를 모른다 수시로 꿈틀거리면서 뜨거워졌다가 차가워지고, 오래 생각에 잠겨 있다가 돌연 어디론가 막 달려 나가기도 한다 그녀는 속도에 얽매이지 않는다 그녀가 느리게 걸어갈 때도 그녀의 속도는 우주의 속도를 가지고 있다

그녀는 자신의 고향인 덤불을 그리워한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뜨거워지는 덤불의 형식에 매혹되어 있다 단번에 확 타오를 듯 타오르지 않고, 처음과 끝을 알 수 없이 엉겨 있으면서도 나름대로의 길을 가지고 있는 덤불, 그 안에 가시를 숨기고 있지만 순식간에 아름다운 꽃을 피워내는 덤불, 그녀는 그런 덤불의 형식을 운명의 형식이라고 부른다

덤불은 종종 눈물을, 고통을 몸 밖으로 밀어내어 꽃을 피운다 그녀는 자신과 덤불이 한 몸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다 그러므로 제 몸이 덤불에 이르러 화사한 불꽃으로 타오르는 환상은 그녀에게 더 이상 꿈이 아니다 아침은 그녀의 몸에서 눈물의 형식인 이슬의 옷을 벗겨주며 한밤의 캄캄한 꿈에서 깨어나 덤불에 이르라고 말한다

그런데 나는 지금 깨닫는다 그녀의 고향은 내 몸이다 나는 불을 가두었다가 순식간에 사라지게 하는 형식이고 운명이다 아아, 내 몸의 가시가, 꽃이 느껴진다 어서 내게로 오라, 내 사랑! 내 몸이 덤불이다 내 몸이 점점 뜨거워지고 있다

 

 

 

박남희

 

저 꽃을 보니 덫에 걸려 있다

바람을 쉽게 놓아주지 못한다

무엇보다도 벌이나 나비 생각으로

끊임없이 흔들리고 있다

 

꽃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따금씩 벌이나 나비가 찾아온다

그들은 꽃의 아름다움보다는

꽃이 품고 있는 생각에 취해 있다

꽃의 생각은 늘 향긋하다

바람을 타고 멀리 떠돌아다닌다

 

꽃은 바람의 덫에 걸렸다

바람은 꽃 속의 생각을 풀어내어

동네방네 소문을 내고 다닌다

생각이 다 풀리면 꽃이 시든다는 것을

바람은 알고 있다

그런데 꽃은 바람과 벌과 나비가

제 덫에 걸려던 것이라 생각하고

방실방실 웃고 있다

 

꽃이 아름다운 것은 덫 때문이다

아름다운 것은 늘 조금씩 위험하다

 

 

 

돌멩이로 말하기

박남희

 

한 낮을 뜨겁게 태우던 저녁 강이

해에게 말하듯

불이 물에게, 물이 불에게 작별 인사할 때는

물같이도 불같이도 말하지 말기

꼭 돌멩이처럼만 말하기

 

바람을 버리고 떠나는 쓸쓸한 계절을 향해

작별인사 하는 법을 몰라 눈물이 날 때

말하지 않아도 단단한 말,

듣지 않아도 외롭지 않은 말

꼭 돌멩이처럼 말하기

 

돌멩이는 몸 전체가 입이라서

하루 종일 떠들어댈 것 같지만

입 하나 있는 것이, 그것도 벙어리라서

하루 종일 아무 말도 안하고 다만

무겁게 안으로만 말을 한다는데,

 

사랑아, 네가 나에게 마지막 말을 할 때는

그립고 보고 싶어

자꾸만 목이 메여와도

,

돌멩이처럼만 말하기

 

아니, 아니,

왈칵, 눈물이 나도

그냥,

돌멩이로 말하기

 

 

 

동굴의 기억

박남희

 

달았어 내 몸이 야위어가며 단내를 풍겼어

혀가 그리운 것들에게는 늘

동굴의 기억이 있다는 것을 몰랐어

 

동굴 속 종유석과 침 사이로 시간이 흘렀어

시간은 몽롱한 것, 어둠이 반짝거렸어

내 몸은 어둠 속에서 점점 녹고 있었어

내 안의 이상한 비밀이 끈적거렸어

 

나를 단지 단내만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단내 뒤에 또 다른 내가 있었어, 그것은

한꺼번에 와삭 부서지고 싶은 몸의 언어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았어

내 몸이 녹아 사라진 뒤에 남는 것

그것이 진짜 나라는 생각이 들었어

나를 녹여 나를 만드는 누군가가 있다면

내 몸이 왜 평생 이렇게 달콤한지 묻고 싶었어

 

내가 없어진 자리에 피어나는 꽃의 이름과

그 꽃이 사라진 자리에 피어나는

별의 이름 불러보고 싶었어

수억 년 전부터 내 몸이 숨겨온 비밀이 단지

꽃이나 별자리로 설명이 가능한 것인지

하늘에 우주라는 이름으로 떠다니는

무수한 나에게 묻고 싶었어

 

달콤한 것들은 왜 자꾸만 반짝거리고 싶어하는지

반짝일수록 왜 자꾸만 어둠의 혀가 그리워지는 건지

하늘의 커다란 동굴에게 묻고 싶었어

 

내 몸이 왜 끝끝내 그 속에 꽃을 숨기고 있는지

 

 

 

둘레를 지우는 일

박남희

 

반짝인다는 것은 둘레를 지우는 일일까

 

눈물은 글썽여 제 둘레를 지우고

바람은 반짝이는 것들의 몸 속 빛을 풀어

그 둘레를 지운다

 

너를 처음 본 순간,

세상의 둘레가 온통 허물어져

모든 것이 캄캄하게 보이던 그 날,

 

내 눈의 둘레는 한없이 허물어져

너는 한 떨기 백합이었다가, 돌연

제 속살에 마음 번지는 능소화였다가

그 자리에 덩그러니 한 채

글썽이는 속 깊은 우물을 남겨놓았다

 

글썽이는 우물과

그 속에서 깊어지는 별 사이의 거리가

내가 너를 바라보던 아득한 사랑의 거리였을까

 

사랑은 종종 완강한 꽃의 둘레를 헐어

새벽하늘 개밥바라기별보다 더 크게 글썽이는

우물 한 채를 보여준다

 

 

 

로또 계시록

박남희

 

세상이 아주 끝나기 전에 너무 젊은 꽃들은 바다에게로 가라, <로또> 너무 울어서 아픈 꽃들도 바다에게로 가라, <로또> 가서 맨몸으로도 넉넉한 파도가 되어라 <로또>

끝끝내 파도도 되지 못하는 세상의 뼈와 살이여, <로또> 그대들은 세상이 더 싱거워지기 전에 산으로 가라, <로또> 가서 누군가 단단한 바위무덤 속에 감추어둔 복권의 꿈이나, 말 없는 주문(呪文)이라도 되어라 <로또>

새가 날아와 오래 앉았다 떠난 가지의 알 수 없는 리듬이여 <로또> 파도가 흔들수록 더욱 단단해지던 기억의 대책 없는 침묵이여 <로또> 그래, 이 땅의 아픈 가지도 기억도 기억이 차고 있던 손목시계도 너무 졸릴 때는 여관으로 가라, <로또> 가서 끝끝내 잠들지 않고 점점 뜨거워지는 싱싱한 물이 되어라 <로또>

말세가 가까이 왔느니라 <로또>

 

 

 

루빈의 잔

박남희

 

너와 나 사이에 잔이 있다

그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알지 못한다

다만 잔과 우리 사이에는 명암이 존재한다

 

누군가 잔에 무엇인가를 채우고 간다

잔을 볼 수 없고 우리만 보인다

명과 암, 전경과 배경의 이중성이

우리의 눈을 속이고 있다

 

우리를 버릴 때 잔은 보인다

잔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잔 속에 든 것은 우리의 것인가

잔은 캄캄하고 때로는 환하다

잔의 윤곽 속에 우리가 있다

 

우리를 자세히 보니

너와 나는 이목구비가 똑같다

너는 나이고 나는 너인가

너와 나 사이에 보이지 않는 거울이 존재하는가

잔 속에 가득 채워진 것은 거울인가

 

누군가 거울 속의 너를 시인이라고 부른다

그러면 나도 시인이 된다

누군가 너와 나의 윤곽을 보고 있다

잔의 이미지를 읽고 있다

 

지금까지 우리가 소망하던 것은 잔인가

우리가 마주 보아야 존재하는 저 잔,

어쩌면 신비스러운 말이 가득 들어있을지도 모르는

저 잔을 들어 마실 손이 보이지 않는다

 

 

 

룩북

박남희

 

봄은 겨울을 벗고 여름을 입고

누에는 고치를 벗고 날개를 입는다

 

그러므로 벗자

 

시냇물이여, 강물에 이르면 얇은 옷을 벗고

흘러흘러 바다에 이르면 속옷마저 모두 벗어버리자

 

그리하여 먼 수평선을 악보로 만드는 몸의 춤을 입자

춤은 멀어진 것들을 끌어당기는 힘,

 

낮에는 마음속 깊이 잔잔해지는 달의 옷을 입고

밤에는 대지를 뜨겁게 달구는 해의 옷을 입자

 

벌써 나를 잊은 그대여

망각을 벗자 그리고 망각을 입자

뱀이 허물을 벗으면

어엿한 한 벌의 망각이 홀로 빛날 수 있다

 

몸은 몸을 위한 것, 그리고 옷은 옷을 위한 것

옷을 벗으면 몸이 빛나고

몸을 벗으면 옷이 남아서 오롯한 한 벌을 이루는 것

 

그러므로 벗자, 그리고 입자

뜨거운 여름을 벗고 선선한 가을을 입자

 

나를 잊은 그대가 아주 잊혀져

붉은 단풍이 제 몸의 흔적을 지우며 떨어져내려

구르고 구르다가

얇디얇은 바람의 옷을 입을 때까지

 

 

 

리듬의 묵시록

박남희

 

어쩐 일인지 미래보다는 자꾸 과거로만 달려가는 강물을 따라 나는 여기까지 왔다 오래된 리듬의 묵시라고 했다 나는 강물을 따라 오면서 무수한 꽃을 보았다 강물을 따라가는 일이 꽃을 보기 위한 일이라는 것을 물위에서 반짝이는 햇빛이 일러주었다

내가 지금껏 강물을 따라 온 것은 내 몸에 강물의 피가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어디론가 격정적으로 흐르다가도 격랑을 제 몸속으로 가라앉히는 강물, 강물은 격랑이 꽃이 된다는 것을 온 몸으로 보여주었다

강물 속에는 무수한 꽃이 피었다 진다 유유히 흐르면서 제 속의 격랑을 다스리는 강물, 격랑은 강물을 동적인 꽃이라고 부른다 꽃 속에는 무수한 강물이 흐른다 아름답게 피어서 바람에 흔들리고 있는 꽃, 바람은 꽃을 정적인 강물이라고 부른다

사람들은 그것을 보면서 꽃이 피어있고 강물이 흐른다고 말하지만 나는 꽃이 흐르고 강물이 핀다고 말하고 싶어진다 강물이 흘러가는 일이 꽃을 피우는 일인 것처럼 꽃이 피는 일도 강물이 흘러가게 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나는 그동안의 내 여행이 꽃과 강물을 위한 헌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의 거리

박남희

 

흘러내리는 것은 흘러내리게 그냥 둔다

잠시 노을이라고 생각했다가 눈물이라고 생각했다가

폭포라고 생각했다가 꽃이라고 생각했다가

분주한 것들은 분주한 대로 그냥 둔다

이곳은 마음의 거리이므로,

 

무엇이면 어떠랴

잠시 글썽이며 중력이 보여주는 마술

꽃이 그랬다, 잠시 허리가 휘었다

 

닥쳐올 이별이래도

구름이 흘러내리면 비가 된다

비는 지상이 숨겨놓은 모든 싹들을

불온한 손으로 적발한다,

적발해서 위태로운 쪽으로 풀어놓는다

 

그리움도 이왕이면 강이 되거라

철없이 지느러미를 거슬러 오르는 강

 

한때 내 사춘기도 이곳으로 흘러내린 적이 있다

까만 머리 깃 분홍 볼을 타고

어디론가 까닭 없이 뛰어가던 햇빛을 본 적이 있다

그러다 종종 구름이 되고 바람이 되었다

이곳에는 늘 햇빛이 눈부셨으므로

 

나는 또 어느새 너를 생각하며 이곳에 와 있다

오래 붙잡혀 있던 마음 하나 놓아주려

가만히 들꽃을 만진다 새를 풀어놓는다

너는 내게 너무 눈부셨으므로,

 

네가 없는 그곳으로

반짝이며 강이 흘러간 적이 있다

 

 

 

머리카락의 자서전

박남희

 

머리카락은 수시로 자서전을 쓴다

바람에 흩날리면서 이리저리 헝클어지면서

자서전을 쓴다 머리를 감을 땐

한 뭉치씩 빠지면서, 가려움을 토해놓으면서

자서전을 쓴다

 

내 마음 가까이에 사는 여자는 얼마 전에 긴 머리를 잘랐다

사람들은 산뜻하고 젊어졌다고 말하지만 난 그녀가

자신의 자서전에 변화를 주기 위한 것이라는 걸 안다

 

갈대들도 가을이면

허리를 굽혀 한 계절의 마지막 자서전을 쓴다

갈대의 머리가 흰 것은

이제 더 이상 먹물을 찍을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가을 능선에 점점 흰 머리가 늘어간다

무덤에 들었던 아버지가 바람과 함께 출렁이며 일어나

못다 쓴 흰 머리카락의 자서전을 쓰고 있다

 

 

 

멍요일

박남희

 

오늘은 멍요일이다

어젯밤 말 안 듣는 아들을 심하게 때리고

내 가슴에도 멍이 들었다

오늘 아침 아들 종아리에 난 멍자국을 들고

파주 낙원공원묘지 아버지 산소를 찾아간다

그동안 나를 키우시며 멍들었을

아버지의 멍자국을 만져보러 간다

 

무덤 위에는 어느새 풀들이 무성하다

바람은 무덤 위의 풀을 흔들고

자꾸 내 마음을 흔들어 댄다

 

바람 속에 까칠한 멍자국이 보인다

세상에서 흔들리는 너무 많은 것들에게

더 이상 흔들리지 말라고 붙잡다가 생긴

멍자국을 가지고, 저 바람은 또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아버지의 무덤은

당신의 멍을 하늘로 밀어올리며

푸르게 푸르게 무성하다

 

나는 가지고 간 아들의 멍자국을

아버지 무덤에 가만히 대어본다

할아버지와 손자의 푸른 멍이

반갑다고 반갑다고 서로 몸을 비비는지

감촉이 까실까실하다

 

 

 

멱살만 남았어요

박남희

 

그해 겨울 강물은 구름 밑 산자락에

멱살만 남겨놓고

어디론가 흘러갔어요

 

쌀 독 깊이 파고들던 쌀벌레들이

몸이 추워, 쌀독 밖으로 기어 나오고

사춘기를 갓 지나던 내 청춘은

찬바람이 정의하던 시대를 거슬러

마당가 붉은 흙을 녹이던

햇살 한줌으로 머물고 싶었어요

 

무언가 멱살이 필요하던 시대

나무들은 바람에게 멱살을 잡혀

사정없이 흔들리다

우수수 이파리들을 모두 떨구며

제 뿌리를 아파했어요

 

거리마다 말들은 무성했으나

그것은 단지 행방을 알 수 없는 낙엽이거나

휴지조각이 되어가던 채권일 뿐

좀처럼 멱살의 정체를 알 수 없었어요

 

겨울바람은 그 때 나에게

구름의 멱살을 잡는 법을 가르쳐 주었어요

어느 순간 하얀 쌀밥이 되었다가 돌연

글썽글썽 눈물이 되어 떨어지던 구름은

한순간, 바람에게 멱살이 잡혀 끌려 다니다가

끝내 멱살만 남곤 했어요

 

그 때부터 일기장을 채워가던 내 안의 말들은

스스로 알 수 없는 행렬을 갖추더니

번지를 알 수 없는 멱살이 되었어요

시가 되었어요

 

내 청춘의 일기장엔 끝내

멱살만 남았어요

 

 

 

모노산달로스

박남희

 

신발 한 짝을 잃어버린 꿈을 꾸었다

신발을 찾지 못하고 잠을 깨고 나니

신발의 상징이 더욱 궁금해졌다

 

신이 발을 버린 것이 신발이다

신은 버려져서 버려진 것들을 좇는다

 

버려진 신발의 문제는

쓰레기통의 문제가 아니다

길의 문제이고 몸의 문제이고 생각의 문제이다

 

신발이 길을 버리는 것은 몸을 버리는 것이다

버려진 신발은 버려진 생각이다

신발이 생각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은 오래된 비밀이다

신발이 길의 운명을 만든다

 

나는 그 다음 날도 꿈속을 뒤졌지만

잃어버린 신발 한 짝을 끝내 찾지 못했다

내 신은 이미 짝짝이이다

 

잃어버린 길과 잃어버린 몸이 욱신욱신 아파왔다

잃어버린 생각이 신을 찾아 나선다

 

생각해 보면

지금까지 너무 많은 발이 신을 버렸다

 

 

 

몰입

박남희

 

내 유년의 풀밭은 개구리와 뱀과 메뚜기와 가끔은 갓 태어난 참새 새끼의 노란 부리와 뱀딸기와 지렁이와 땅강아지가 뛰놀던 풀밭이었는데

 

톨스토이는 돌연 그의 소설 속 풀밭에 낫을 등장시킨다

"레빈이 저절로 풀을 베었다낫 그 자체가 생명으로 가득찬 육체를 움직이기라도 하듯이"*

몰입을 이야기한다

 

톨스토이가 낫을 생명으로 가득 찬 육체의 움직임으로 본다면

낫이 풀을 베는 행위는 사랑의 몰입에 대한 은유가 아닌가

 

내 유년의 풀밭은 낫 대신 갓 태어난 참새 새끼의 노란 부리의 놀이터였다

어미 참새가 물어온 커다란 메뚜기를 날개 째 꾸역꾸역 삼키던

어린 참새의 여리고 노란 낫,

 

몰입은 모두 풀밭에서 이루어진다

풀밭은 알을 깨고 그 곁으로 뱀이 지나가게 하고 종종 낫을 불러들인다

 

풀은 자라다가 한 순간 낫에게 제 몸을 맡긴다

황홀한 죽음에의 몰입이다

 

수직을 말하던 풀들이 허공을 버리고

비로소 수평을 말하기 시작하면서

향기롭게 썩는 흙의 원리를 터득한다

 

풀은 낫보다 먼저 눕고 낫보다 먼저 일어난다**

 

*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카레니나의 하 구절.

** 김수영의 시 에서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는 구절을 패러디함.

 

 

 

몸살

박남희

 

하늘이 아픈 것은 땅이 먼저 안다

천둥 번개가 치면 비가 내리는 이치를

내 몸은 안다

 

밀물과 썰물이 오고 가는 것이

하늘에 떠 있는 달의 전언이라는 것을

노을은 저렇듯 붉게 말하고 싶어한다

 

노을이 끌고 오는 것이 어둠이라면

하늘의 별은 한 번 쯤 어둠을 입어보고

어둠이 내려치는 회초리를 맞아보아야 한다

 

이 땅에는 어두워서 아픈 것들이 있다는 것을

온 몸으로 어두워지던 하루는

눈물 글썽여 별의 발성법으로 말해야 한다

 

이유도 없이 몸이 아픈 날

누군가 내 몸으로 말하는 소리를 듣는다

 

 

 

못을 박으며

박남희

 

어쩌면 성수대교와 세계무역쎈타는 스스로 무너지고 싶어서 무너졌는지도 모른다 무너지고 싶어도 무너질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은 세상에서 무너지는 것도 행복이다.

그런데 무너지는 모든 것들은 구멍을 통해서 무너진다 구멍 속으로 드나드는 바람과 흐느낌과 역사와 온갖 소문들까지 무너짐에 봉사한다 언젠가 한번은 무너져 본 것이라야 구멍의 공포와 허전함과 무너짐의 짜릿한 스릴을 느낄 수 있다 따지고 보면 세상은 무너지는 것의 역사다 그렇게도 강성했던 바벨론과 로마의 벽에 나 있던 무수한 화살 구멍들, 그렇게 바벨론과 로마는 무너졌다 그 역사는 지금도 구멍을 통해 이야기되고 세상의 무수한 구명 속으로 퍼져나간다 역사의 총탄은 케네디를 관통하고, 클린턴도 구멍 근처에서 무너졌다

하지만 구멍은 스스로의 몸을 구멍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들은 스스로의 이름을 사랑이라고, 역사라고, 때로는 천재지변이라고 명명한다 구멍의 이름은 수시로 바뀐다

나는 벽에 못을 박으며 못 끝에서 확장되는 구멍을, 구멍의 역사를 생각한다 아니 사랑을, 절망을, 위선을, 아니 아니, 망치가 내려칠 내 손가락을, 그 아픔을……

 

 

 

무성할 때는 초록을 몰랐다

박남희

 

초록이 성글어질 때에서야 초록이 보였다

초록 사이의 세상도 보였다

잔잔한 바람의 흔들림이 느껴졌다

뿌리의 깊이가 느껴졌다

잎으로도 꽃을 만드는 법을 알게 되었다

 

비로소 초록의 밑이 보였다

그늘에 놓인 낮은 하늘이 보였다

하늘 속 구름이 보였다

 

무성할 때는 뿌리를 몰랐다

흙도 몰랐다

뜻밖에 하늘도 몰랐다

모르는 것이 너무 많은 채 몸만 무성했다

몸이 소문인 줄도 몰랐다

 

그 소문은 수시로

바람이 되어 나를 흔들었다

 

 

 

묵은 수수께끼를 풀 듯

박남희

 

물이 불에게 말하는 사이에

꽃이 피었다

물도 불도 모르게

물불을 가리지 않고 꽃이 피었다

 

그 꽃은

불인 듯 타올랐지만

그때마다 물의 말로 중얼거렸다

 

꽃이 화상을 입지 않는 비결은

물과 불 사이의 거리를 알고

자신을 그 거리의 색으로

기꺼이 물들이는 것이다

 

불이 물에게 말하는 사이에

꽃이 졌다

물과 불 사이의 팽팽했던 거리가

그 긴장감이, 한순간 한 송이로

, 떨어졌다

흙이 말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허공의 공기는 더욱 가벼워지고

불이 물에게, 물이 불에게

미처 말하지 못한 것들을 드디어

묵은 수수께끼를 풀듯

흙이 말하기 시작한 것이다

 

 

 

문득

박남희

 

길을 가다가 문득 발을 멈추네

길을 끌고 우주 속을 달려가던 태양이 문득 멈출 것 같아

내 발걸음은 다급히 그 한 점으로 달려가네

 

무언가를 하려고 생각하다가 문득 생각을 멈추네

생각을 끌고 바다로 달리던 강물이 문득 멈출 것 같아

내 생각은 다시 그 한 점으로 달려가네

 

어쩌면 꿈틀거리던 내 삶이 고스란히 들어있는

그 한 점,

몇 번이고 잊으려고 해도 자꾸만 나타나던 그 한 점

어쩌면 나를 온통 사랑한 그 한 점이

제 속에 꽃을 숨기고 내게로 달려오는 모양이네

 

문득 문득 시를 쓸 때도 보이던 그 한 점

잡힐 듯 잘 잡히지 않던 그 한 점

어느 날엔가 회오리바람으로 내 안에 들어

온통 나를 흔들어놓던 그 한 점

 

내 인생의 쉼표인지 마침표인지

아니면 물음표의 밑점인지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던 그 한 점

 

그 한 점 속에 문득,

가물거리던 내 문장이 보이네

 

 

 

물안경을 쓰고

박남희

 

아내의 발명은 물안경을 쓰고 양파를 써는 것이다

나의 발명은 그런 아내를 보고 웃는 것이다

그러다 문득 깨닫는다

아내가 썬 양파가 물고기라는 것을,

 

갇힌 물고기는 본래 저렇듯 매운 것이다

그래서 물고기를 만질 때는 물안경을 써야 한다

양파를 썰면

그 안에서 무수한 물고기가 튀어나오는

이상한 칼을 아내는 사용한다

 

물고기는 본래 물속에서 자유로워야 하는데

양파라는 물고기는 제 안에 너무 많은 물고기를 가두고

자유롭지 못해서 저렇듯 매운 것이다

 

아내는 그런 물고기를 볼 때마다 운다

여러 겹의 매운 자신을 본 것이다

그때부터 아내는 양파를 썰 때 물안경을 쓰고 썬다

 

그걸 옆에서 지켜보며 웃는 내 눈도, 맵긴 맵다

 

 

 

물에게 말 걸기

박남희

 

심심할 땐 물에게 말을 걸어보는 거야

물의 깊음과 얕음에게

물의 변덕과 자유에게

그녀가 감추어둔, 내가 갈망하는 물에게

소낙비가 강물에게 엉겨 붙듯 말을 걸어 보는거야

 

만물의 근원이 물이라는 탈레스의 말은

생각해볼 필요도 없어

물은 그냥 물이면 되는 거야

흐를 때 흐르고 증발할 때 증발하고

얼 때 얼어버리는 물이면 돼

아니, 그런 것 모두 까먹어버리고

시장 바닥에서 악취를 풍기고 있는 물도 괜찮아

 

울고 싶을 땐 물에게 말을 걸어보는 거야

변덕이 심한 말보다는

과격하고 허풍스러운 몸짓보다는

눈물, 콧물, 오줌물, 땀물

더 은밀한 곳에 감추어진 물도 괜찮아

그냥 네 안에 감추어져 있던 물로

다른 물에게 말을 걸어보는 거야

 

그러면 물은

증발하면서, 스미면서, 출렁이면서

딱딱하게 얼어가면서

4개 국어로, 5개 국어로 아니

물만의 방언으로 말하겠지?

 

지금까지 자신을 세상에 대여해준 자가 치루어야 할

비용의 총 액수에 대하여

 

바닷물에 대하여

은하수에 대하여

하리수에 대하여

 

은하수가, 하리수가 어떤 성분의 물인지도 모른 채

점점 모호해지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하여

 

 

 

물을 세운다

박남희

 

참으로 수수께끼 같은 얘기지만

물을 공중에 비스듬히 누이면 무지개가 된다

무지개를 누이는 자 누구인가 아무리 쳐다보아도 보이지 않는다

누인 자가 누군지는 누워본 자만 안다 강물의 마음은 지평선이 안다

산을 누이고 구름을 누이고 바람을 누이다보면 지평선이 보인다

무지개를 걸어두는 것도 지평선이다

오늘은 지평선 위에 누군가 물을 세우고 있다

 

세워진 것은 반듯이 눕는다 누운 것은 결국 흘러간다

머지않아 흘러간 것들은 다시 제 몸을 세우리라

세우고 눕고 세우고 눕는 것이 물의 본능이다

참으로 알 수 없는 얘기지만 물을 세우면 폭풍이 달려온다

폭풍은 누운 물 보다는 세워진 물을 좋아하나보다

 

무지개와 폭풍 사이, 들판에 살아있는 것들은

눕고 세우고 눕고 세우고를 반복한다

물은 지하의 깊은 웅덩이에 제 몸을 가두기 전까지는

출렁거린다

내 안에서 물이 일어선다 누군가 자꾸만

 

물을 세운다

나는 강처럼 눕고 싶어진다

 

 

 

물을 여미다

박남희

 

그녀는 나에게 사랑을 보여 달라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물을 보여주었다

 

물은 예측할 수 없는 사랑의 지도이다

나는 종종 물로 사랑을 그린다

물은 디오니소스의 불온한 상상력이다

N극과 S극의 팽팽한 긴장이다

그래서 물로 그린 사랑은 늘 출렁인다

물이 테두리를 얻어 형태를 이루는 일은

물을 가두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빛을 담는 것이다

 

그녀는 내게 빛이다 물이다

어떤 때는 눈부시게 반짝이다가

어떤 때는 사정없이 출렁인다

물은 흐를 때보다

고여서 출렁일 때가 신비롭다

 

고인다는 것은 생각이 깊어진다는 것이고

생각이 깊어진다는 것은 물이 스스로를 여미는 일이다

여미는 것은 물이 물을 가두어 두는 것이 아니라

한쪽으로 생각을 모으는 것이다

 

봄 나무에 꽃이 피는 것도

나무가 제 안의 물을 여미었기 때문이다

물은 흐르기 위해 있지만

여미는 곳에서 물은 깊다

 

누군가 물에 돌을 던져도

물은 아파하지 않고

제 마음 깊은 곳을 열어 선뜻 꽃을 피운다

 

사랑은 물을 여미어 꽃을 피우는 일이다

 

 

 

물이 아픈 이유

박남희

 

오늘은 아버지 기일이다

임진강변에 와보니, 물을 박차고 새가 날아간다

물이 상처를 입고 어디론가 흘러간다

물을 벗어나는 일이 상처 입는 일이라는 것도 모른 채

새는 울면서 어디론가 날아간다

날개 달린 상처도 날아가다가 어느 마을엔가 깃들 것이다

오랜 시간이 지나면

날개는 다시 물을 찾아가서 제 상처의 근원을 어루만질 것이다

하지만 날개는 상처가 아문 물 위를 평화롭게 헤엄치다가

어느 날 또다시 새로운 발톱 자국을 물에 새길 것이다

 

 

 

바깥이 안을 꺼내다

박남희

 

이 세상에는 손이 괄호 쳐둔 것들이 너무 많다

( )는 바깥에 있는 것들을 안에 가두는 기표 같지만

자세히 보면 바깥이 안에 있는 것들을 꺼내려는 기표다

 

나는 총각시절 아내를 괄호쳐두고

몇날며칠을 생각하다가

아내를 괄호 밖으로 꺼내서 결혼을 하였다

소중한 것일수록

한번은 괄호 쳐두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인데

어쩐 일인지 괄호 밖에 있는 것들은

괄호 안에 있는 것들을 이상한 눈으로 쳐다본다

 

신은 우주에 해와 달을 띄워놓고

그 안에 너무 많은 것들을 괄호 쳐 놓았다

사람들은 음양오행이나 사주로

괄호 안에 갇힌 것들의 비밀을 알고 싶어 하지만

지평선이나 수평선은 신이 쳐놓은 한쪽 괄호만

슬쩍슬쩍 보여줄 뿐

그 안에 갇힌 것들의 실체를 좀처럼 보여주지 않는다

 

나는 신혼 시절 아내를 괄호로 느끼면서

아내의 괄호 속에 있는 것들을 꺼내보려고

해와 달이 여러 번 떴다 지는 것을 바라보았지만

아내의 괄호는 끝내 열리지 않았다

 

나는 그 이유를 한참 세상을 더 살고서야 알았다

아내는 한쪽 괄호밖에 가지고 있지 않아서

다른 한쪽 괄호는 끝내 열리지 않는다는 것을

 

그리하여 사랑이란

한쪽 괄호가 또 다른 쪽 괄호를 만나

스스로 그 안에 은밀한 것들을 가두고

괄호 밖의 손에게 해와 달 모양의 열쇠를

훌쩍, 넘겨주는 일이라는 것을

 

 

 

바닥이라는 나이

박남희

 

물속 깊이에서 별을 볼 수 없듯이

내 바닥이 안 보여

내 바닥이 아파 자꾸만 무언가 출렁거려

내 바닥이 불안해 그래서 종종 행복해

 

쉰이 넘은 나이를 바닥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바닥아, 나를 말할 수 있니

바닥만의 생각으로 바닥만의 몸으로

나를 지탱할 수 있니

 

내 그림자를 질질 끌고 어디론가 향하던 바닥이

태양이라면, 너무 뜨거운 태양이라면

나는 태양에게 말해야겠네

식은 내 사랑도 종종 데워달라고,

 

내 바닥 위에 네가 서있네

누군가 너를 꽃이라고 말하네

언젠가 스러질 꽃, 그래서 슬픈 꽃,

그러나 영원히 스러지지 않을 꽃

 

그래서 내 바닥은 불안해

내 바닥은 아마

내 바닥이 안 보여

 

세상에 흙이 없는 바닥이 또 어디에 있을까

내 바닥은 때로 너무 물렁물렁해

 

 

 

바벨의 언어로 시 쓰기

박남희

 

여기서는 하늘을 바다라고 말해도 된다

새가 물속을 날아다니고 어둠이 밀가루처럼

뭉쳐져서 달이 되었다고 말해도 된다

 

어차피 공중의 언어는 시와 산문에 구별이 없으니까

끝내 모래처럼 부서질 말의 탑이니까

말의 형식에 너무 신경 쓰지 말고

와르르 무너져 내릴 때를 대비해서

스스로가 모래의 상상력을 가지고 있으면 된다

 

여기서는 구름처럼 말이 가벼울수록 좋다

한꺼번에 와르르 무너져 내리면 아프니까

사랑도 빨간 풍선처럼 가볍게 불어

적당히 말랑말랑해지면 공중으로 날려버리는 게 좋다

 

풍선의 형식은 둥글지만

어차피 터져 버릴 말의 형식은 자유로운 것이므로

호흡에 너무 힘을 주어 핏대를 세울 필요는 없다

순식간에 부풀어 오르는 풍선을

아름다운 상상력이라고 착각할 필요도 없다

 

때로 바닥에서 물이 나고 꽃이 벙글지만

무너지는 말이 너무 무거우면 비딕이 아프다

공중에 무너져 내릴 것들이 너무 많아

바닥은 늘 불안하다

바닥은 늘 폐허를 준비한다

 

높이 쌓았던 바벨탑이 무너질 때 시는 탄생한다

시는 폐허의 자식이다 말은 공중의 형식을 버리고

지상으로 무너져 내릴 때 시가 된다

낯설던 말과 말의 새로운 소통이 이루어진다

 

 

 

밤의 발성법

박남희

 

수억 년의 시간을 달려와

밤에 구멍을 뚫는 일이 별빛의 발성법일까

나무들은 별빛 구멍 속에 열매를 매달기 위해

가지를 뻗는다 가지가 감지하는 낮과 밤,

칼라보다는 흑백을 더 선호하는 저 이상한 발성법

 

하루를 흑백으로 물들이는 법을 뿌리는 모를까

뿌리는 어둠을 먹고 자꾸만 초록을 토해놓는다

지하를 함부로 밤이라고 말할 수 없지만

흑백 속에는 칼라가 숨어있다

낮이 밤을 자꾸만 발음하고 싶어할 때부터

흑백과 칼라의 경계가 모호해졌다

 

그리하여 요즘은 칼라가 낮의 전유물이 아니다

밤에 구멍을 뚫는 것도 별빛의 전유물이 아니다

단지 그것은 발성법의 문제일 뿐,

 

요즘은 낮에도 별이 뜨고 밤에도 꽃이 핀다

밤과 낮의 발성법이 유사한 이 이상한 도시에

수억 년을 달려온 별빛 하나가 밤을 버리고

화사한 꽃 근처를 배회하고 있다

 

 

 

밥물 천사

박남희

 

나는 혼자 있을 때 종종 밥을 지어먹는다 밥물을 붓고 가만히 냄비 속을 들여다보면 물에 잠긴 쌀들의 표정이 진지하다 그들은 무언가 은밀한 뜨거움을 꿈꾸고 있다.

물이 끓고 밥이 익는다 냄비 속이 뜨거워질 때를 기다려 하얀 것들이 하늘로 날아오른다 나는 그것들을 밥물천사라고 이름 붙인다 밥물 천사는 한바탕 냄비를 흔들다가 공중으로 날아올라 순식간에 어디론가 사라진다.

나는 그들이 거의 다 사라질 때를 기다려 냄비 뚜껑을 열고 밥알들을 본다 천사가 사라지고 나면 밥알들은 더욱 또렷해진다 자세히 보면 천사가 사라진 시대에도 천사와 한바탕 은밀한 사랑을 꿈꾼 흔적을 밥알들은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세상의 모든 살아있는 것들은 뜨거움을 꿈꾸고 뜨거움은 제 몸을 꿈틀거려 천사를 만든다 하지만 천사는 곧 뜨거움을 떠난다 그리하여 뜨거움이 식어지면 그곳에 각자의 밥이 남는다 밥은 곧 어두워질 것이다

천사가 사라졌으므로,

 

 

 

방 구하기

박남희

 

나는 방을 얻기 위해 반평생을 힘썼지만

내 소유의 온전한 방 하나 갖지 못했다

 

나는 생각다 못해

생각의 방이라도 하나 마련하겠다고 가만히 눈을 감는다

하긴, 생각 속에선 꽃의 씨방도 나의 방이고

허공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나방도 나의 방이고

심지어는 천지사방이 모두 나의 방인 것을

 

신혼 시절에 방값이 올라서 서울 외각으로 떠돌던 그 마음으로

나는 생각 속에서 정처 없이 떠돌며 내 방의 주소를 확인한다

지금도 어딘가에서 나를 잡아당기는 방이 있을 것 같아

오래전 어머니의 자궁에 다시 든 듯, 그만 아늑해진다

 

나를 나이게 만든 방이 어디 어머니의 자궁뿐일까

어찌 보면 지금 나를 잡아당기는 모든 것이 방이다

나를 잡아당겨 둥글거나 각진 어둠 속에

가두려 드는 것은 모두 방이다 순간도, 생각도, 추억도

죽음도, 사랑도, 절망, 시도

 

그렇다면 나를 자꾸만 잡아당기는 저 방들을 가둘 방은 없는 것일까

지금 무언가 내 생각을 자꾸만 잡아당기고 있다, 어떤 방일까?

 

 

 

백회라는 것

박남희

 

인간의 신체 중에 백가지 기운이 모여드는 정수리를 백회(百會)라고 한다는데, 그곳은 몸의 기운이 들고 나는 급소로서 아주 중요한 곳이라고 하는데, 사실 수만 갈래의 힘이 모여들어 정수리를 이루는 것이라면 사랑이 아닌가, 백 번째 사랑이든 백회에 이르는 사랑이든 백이라는 숫자는 수만 갈래의 길이 모여 하나의 길이 되는 정점에 있다

백회를 사랑의 정수리로 본다면 그 사랑은 육체적인 사랑만이 아닌 것, 백회란 백번의 생각과 백번의 고백과 백번의 두근거림이 백번의 망설임과 백번의 약속과 백번의 감동과 만나 백가지의 꽃을 피우는 자리이다 백회는 하늘의 정수리에 해가 뜨고 달이 떠서 세상을 환하게 환하게 밝히는 것, 그러다 해와 달이 만나 일식이라는 깊은 어둠을 낳기도 하는 것, 일식이 아름다운 건 해와 달의 정수리가 정수리만의 것이 아니라 그 아래 흐르는 아득한 숨소리까지를 넉넉하게 아울러 한송이 꽃으로 피우기 때문이다

백회는 빛이 어둠을, 어둠이 빛을 온전히 품는 충일한 아름다움이다 어둠 속에 숨어있던 보이지 않던 세계를 이끌어 올려 정수리에 환하게 빛나게 하는 별이다 너와 내가 수억 년 전에 만나 백번의 사랑을 하고 낳은 아름다운 한 편의 시이다

 

 

 

버릇

박나희

 

개구리는 공중으로 뛰어오르며 오줌을 싸는 버릇이 있다

그것은 원래 개구리가 동화 속의 로케트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개구리는 끝끝내 제 몸을 우주 속으로 쏘아 올리지 못하고

철퍼덕, 논 속으로 다시 처박히는 버릇이 있다

물이 개구리를 좋아하는 버릇이 있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물도 버릇을 가지고 있다

물은 제 근원을 거슬러 올라

태초의 시간으로 향하는 버릇이 있다

태초에게는 처음과 끝이 만나는 비밀스런 버릇이 있기 때문이다

 

물은 제 몸을 쉼 없이 아래로 흘려보내면서도

끝없이 제 기억의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

돌연 아찔한 절벽 아래로 뛰어내리던

폭포의 한 때를 기억해내는 버릇이 있다

 

처음으로 제 몸을 산산이 부수고

제 몸의 어딘가에서 알 수 없는 물방울들을

무수히 방출하던 그 아득한

무지개의 때를 기억하는 버릇이 있다

 

그리하여 물은 꿈의 저쪽에서 들려오던

에누마 엘리쉬*의 목소리를 따라가

티아마트*의 두 눈 사이에서 흘러내리던

눈물을 기억하는 버릇이 있다

 

물의 본능은 뛰어내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 에누마 엘리쉬(Enuma Ellish)는 고대 바빌론의 창조 서사시로 태초에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 신화에 따르면 대모신인 티아마트(Tiamat)'는 자신의 아들인 마르둑(Marduk)'에 의해 피살되고 그녀의 몸은 나누어져서 두 눈은 해와 달로, 피는 하수와 바다가 되는 등 천지창조의 재료가 되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벽 속의 꽃

박남희

 

벽에 못을 박는다

단단한 벽은 못을 자꾸만 밀어낸다

다시 더욱 힘차게 못을 박는다

못은 박힐 듯 벽을 뚫고 들어가다가

, 하고 어디론가 튀어 달아난다

 

깜짝 놀라 불꽃 튀긴 벽을 쳐다보니

벽에 꽃이 피어있다, 벽 속에 뿌리를 둔 듯

움푹 패인 꽃자국이 선명하다

저 단단한 벽속에 꽃이 숨어있었다니?

벽에 못을 박는 일이 때로는 꽃을 피우는 일이라는 것을

망치는 알고 있었을까?

 

생각해보면 그녀도 때로는 벽이었다

햇빛과 바람이 잘 통하지 않았다

그때마다 나는 벽에 못을 박곤 했다

못이 벽 저쪽의 세계를 보여줄 리 만무했지만

나는 꽃이 보고 싶었다 그녀는

울리는 벽의 틈새에서 꽃을 보여주었다

 

그 후 나는 종종 벽에 못을 박았다

내가 박은 못은 자꾸 어디론가 튕겨 나갔지만

그곳엔 꽃 이름을 알 듯 모를 듯

잘 지워지지 않는 꽃자국이 남아있다

 

 

 

병풍에 들다

박남희

 

할아버지는 부채와 곰방대 뒤에 바람을 거느리고 계셨다 할아버지가 거느린 바람은 그 속에 대숲을 헤집고 나오는 호랑이나 소나무 위를 날고 있는 학을 나란히 품고 있는 것이어서 이승과 저승, 기쁨과 슬픔 사이에 놓여있던 담장도 접으면 얇게 접힌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평생을 병풍과 함께 사셨다 바람을 나란히 늘어놓는 것이 좋아, 할아버지는 할머니를 여의고 새 할머니를 들였다 바람을 나란히 늘어놓다 보면 한해가 금방 간다는 것을 할아버지는 몰랐을까 그 후 할아버지는 병풍에 들었다

나는 흰떡 뒤에 쳐진 병풍을 바라보았다 흰떡이 무어라고 말하는지 병풍 뒤의 할아버지가 연신 곰방대를 빨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자신이 평생에 늘어놓은 바람의 뒤편에 무엇이 있는지 궁금하셨던 것일까 병풍은 세워둘 때만 아름답다는 것을 아는지 병풍 앞에 세워둔 촛불이 바람에 흔들린다

흔들리는 촛불 너머로, 가물가물 먼 산이 병풍에 들고 있다

 

 

 

봄을 늙게 하는 법

박남희

봄은 잘 늙지 않는다

그 이유는 잘 모른다

햇빛은 넌지시 가을에게

봄이 늙지 않는 이유를 알려준다

잘 들키지 않기 때문이란다

여름, 가을, 겨울의 몸에 숨어서

봄은 여전히 푸르다

가을 단풍이나 겨울의 눈발이 말하려는 것도

가을이나 겨울이 아니라 봄이다

가을이나 겨울의 발자국 속에는

어딘가로 향한 뒷걸음의 흔적이 있다

뒷걸음 쪽에는 늘 봄이 있다

그러므로 봄을 늙게 하기 위해서는

가을과 겨울을 먼저 늙게 해야 한다

가을과 겨울의 끝에 봄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게 해야 한다

제비는 강남에만 있는 것이라고

철모르는 뒷걸음에게 넌지시 일러주어야 한다

그런 다음 일찌감치 항복해야 한다

제 나이를 전혀 생각하고 있지도 않은

봄에게,

 

 

 

, 55일 면허정지

박남희

 

신호위반 과태료를 못냈다고

면허정지 고지서가 날아왔다

55일 면허정지,

하루 5시간 교육필 시 20일 감면

 

나는 망연히 창밖의 나무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겨울 햇빛이 나뭇가지 사이를 무수히 들락거리고 있었다

저 햇빛도 때로는 돈이 없어 면허정지를 당할까?

면허정지 세 번이면 면허취소,

꽃들도 이런 규칙 속에서 피었다 질까?

 

지난겨울, 너무 일찍 찾아온 봄에

옆집 담장 개나리꽃이 활짝 피었다, 철없이

철없이 봄바람이 불고, 봄은 속도위반에

신호위반, 겨울 속의 꽃들은 주정차 위반에 걸려

한순간 단칼에 목을 떨구었다

 

철없는 봄이 잠시 왔다 사라져간 자리에

노란 꽃들이 쪼르르 모여 앉아

교통안전 교육을 받고 있었고, 그 옆의 개미들은

고장 난 노란 신호등을 피해 어디론가 기어가고 있었고,

 

나는 문득, 창밖에서 바람과 함께 어디론가 굴러가는,

나무들이 떨군 무수한 면허증들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불구

박남희

 

불구가 나를 호명하고 있다 나의 온전하지 못함은 뜨거움에서 비롯된 것, 물이 끓을 때 안절부절 바닥이 요동치듯 내 생각은 뜨거울 때 다리를 전다 절뚝이며 어디론가 걸어가는 내 생각을 따라가다 보면 이름을 알 수 없는 호수에 이를 때가 많다 종종 커다란 거울이었다가 때로는 오묘한 악기가 되는 호수는 불구가 호명해낸 판도라의 이름이다

호수는 특히 바람이 심한 날 더 크게 다리를 전다 불구에게 제 몸이 온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들켜버린 것이다 호수는 제 주변에 너무 많은 길을 품고 있어서 아프다 밤새 길을 따라 흘러들어온 소리들은 호수의 신음이다 온전히 고여있지 못하고 흘러가야만 한다는 것, 제 안에 너무 많은 주소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수시로 통증을 유발한다

불구는 뜨거운 분화구이다 나의 부족함과 너의 부족함을 분화구 속에 넣고 끓어 넘치게 해 부족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것, 그런 불구가 나를 시 쓰게 한다 나는 절뚝이며 생각하고 현기증을 앓으며 사물을 보다가 불현듯 나를 버릴 수 없음에 절망한다 그동안 제 몸이 불구인 줄도 모르고 철없이 끓어 넘치던 말의 청춘을 생각한다 그러다 마지막 남은 온전한 불구, 너를 생각한다 내 몸을 끝끝내 떠날 수 없는 너,

나는 절뚝절뚝, 오늘도 너를 쓴다

 

 

 

비문(碑文)

박남희

 

봉긋한 가슴 옆에 서있는 거

그게 비문이야

가슴으로 읽어도 잘 읽히지 않는 게 비문이야

제 몸에 말을 새기고

온 몸으로 말을 하려는 것이 비문이야

비문은 편지 같은 게 아니야

바람 같은 거야

상징 같은 거야

구름을 보고 웃는 듯 마는 듯 잠자는 듯 깨어있는 듯

그렇게 백년을 살아 제 몸의 목소리 희미해져도

제 곁에 풀 베는 소리 아주 안 들려도

봉긋하던 가슴이 평지가 되어도

끝끝내 우뚝 서서

스스로가 경전인 거야, 비문은

 

 

 

사람들은 X를 배꼽이라고 부른다

박남희

 

어느 날 들판에 나가 이름 모를 꽃을 보았지요

인터넷에서 그 꽃을 찾아 검색을 해보니

X라는 배꼽 기호가 보였지요

나는 꽃의 이름을 알 수 없어 그냥 X라고 불렀지요

그 후 그 꽃의 영상은 지워지고 X만 남았지요

그때부터 X는 수많은 이름들을 거느리게 되었지요

 

자세히 보면 X는 제 윤곽을 감추고 있죠

하지만 X는 미지의 기호가 아니에요.

언젠가 들판에서 보았을지도 모를 꽃인 당신이

나를 X라고 부르는 순간,

나는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로 순간이동을 하지요

 

가령 X를 달이라고 부르면

X 속의 무수한 상상력이 달을 밝혀요

달 모양을 한 X의 윤곽이 차츰 선명해져요

이번엔 내가 걸어가고 있는 길을 X라고 불러볼까요

길은 X로 불리우는 순간 수만 갈래로 갈라져요

누군가 태양을 X라고 부른 후 햇빛이 저렇듯

수만 갈래의 길을 갖게 되었다는 것은 아무도 모를 거예요

 

X의 윤곽은 선명할수록 그 내면은 단조로워요

단조로움을 피하기 위해서 우리 사랑도 X라고 불러보면 어떨까요

그러면 그대와 나 사이에 수많은 얼굴들이 꽃처럼 피어나고

머지않아 세상은 온통 꽃밭으로 변하겠지요

 

꽃들이 안개처럼 피었다 사라지는 꽃밭,

저마다 윤곽으로만 피어있는 꽃들,

문득 X를 자본주의가 피운 꽃이라고 말하고 싶군요

자본의 수많은 속내를 내비치는 X의 유리창들은

꽃을 담고 있으면서도 언제든지 부서질 준비가 되어있어요

 

하지만 X의 유리창을 부수는 것보다

그 속에 비친 것들에게 X의 정체를 물어보는 게 더 나을 거예요

X는 제 윤곽 속에 또 다른 X를 감추고 있으니까요

 

 

 

사람을 잊은 집

박남희

 

아무도 간섭하지 않으므로

꽃을 더 잘 볼 수 있다

구름에게 은밀히 말을 걸 수 있다

 

바람에게 대여료를 받지 않고도

넉넉히 빌려줄 수 있는 어둠

고요가 친구라는 것도 너무 좋다

더 이상 자물쇠가 필요 없으므로

느닷없는 바람의 방문이 낯설지 않다

 

새로운 길은 지워지고 어디론가 오래된 길이

꿈틀거리며 무성히 자라 올라

오래 지워져 있던 수직의 길을 복원한다

길이 두근거린다

 

수천 년 전의 너를 만날 수 있으므로

너의 촉촉한 앙가슴이 깃들던

토굴의 쌔끈거리던 숨소리가 자라

송이꽃 밀어올리던 흙 내음도 더 잘 맡을 수 있다

 

그러니 누구도 나를 버리지 못한다

나는 열려있으므로 잡초를 말할 수 있다

오랜 세월 나를 조금씩 헐어

벌레들의 방언을 완성시킬 수 있다

벌레들은 수평의 말을 수직으로 꿈틀거린다

 

그것은 일종의 춤이다

꽃들의 몸속에 숨어있던 오래된 리듬이다

꽃을 더 잘 볼 수 있으므로

이제 나는 나를 연주할 수 있다

 

 

 

사랑

박남희

 

꽃과 무덤 사이에 길이 있다

길은 끈적끈적하다

달빛이 묻어있기 때문이다

 

그가 길을 간다

끈적끈적한 길을

끈적끈적하지 않게 간다

그는 결국 아무데도 달라붙지 않고

길은 저 혼자 끈적끈적 하다

달빛이 묻어있기 때문이다

 

그는 꽃과 무덤 사이

흔들리는 것들을 향하여

달빛을 향하여 간다

길은 흔들리는 것들에게

늘 끈적끈적하다, 치명적이다

달빛이 묻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지금껏

그의 얼굴을 한번도 본 적이 없다

나는 늘 내가 갈망하는

그의 먹이이므로

내 머리에는 항상

노릇한 달빛이 묻어있으므로

그래서 늘 어지러우므로,

 

 

 

산해경 노래방

박남희

 

요즘은 길거리에 온통 노래방 천지이지만

옛날 중국에는 산해경山海經이라는 노래방이 있었다고 한다

산과 물로 만들어진 노래가 가득한,

새도 쉽게 해독할 수 없는 꽃을 지상에

무수히 풀어내는 노래방이 있었다고 한다

 

산이 허리띠를 풀면 길이 되었다고 한다

강이 되었다고 한다

길고 긴 문장이 되었다고 한다

 

새 몇 마리로는 해독할 수 없는

가로수 몇 그루로는 그 끝을 형언할 수 없는

천상의 울음을

지긋이 세상에 풀어주었다고 한다

 

그 길은 땅 속에 불을 숨기고 강을 따라 흘렀다고 한다

바다에 이르면서

불이 꽃이 되는 이치를 보여주었다고 한다

 

그곳의 관흉국(貫胸國) 사람들은

제 뜨거운 가슴을 뚫어 불을 꽃으로 말하는 법을

굽이굽이 노래로 일러주었다고 한다

 

 

 

새는 위험하다

박남희

 

새장에 갇힌 새는 위험하다

새장의 질서에 이미 길들어 있으므로 위험하다

하늘을 보지 않고도 잘 사는 것이 위험하다

점점 무거워지는 날개가 위험하다

 

새장에 갇히지 않은 새는 더욱 위험하다

새장의 존재를 전혀 모르고

새장에 갇힌 새를 새로 여기지 않으므로 위험하다

거대한 우주가 새장이라는 사실도 모른 채

점점 가벼워지는 날개가 위험하다

 

요즘처럼

새장을 팔고 사는 새는 더욱 위험하다

우주를 팔고 사는 신이 있다면

그 안의 햇살과 어둠과 온갖 소리들을

얼마로 환산하여 팔아넘길까를 생각하며

날개보다 머리가 무거워진 새는 더욱 위험하다

 

아니, 모든 새는 위험하지 않다

새는 이미 거울 속에 들어가

가짜 날개로 파닥거리고 있으므로

이 지상의 모든 새들은 더 이상 새가 아니므로.

 

 

 

새에게

박남희

 

너는 날개가 있다고 했지?

너는 울음이 있다고 했지?

너는 똥이 있다고 했지?

 

그런데 새야,

아침에 일어나 보니

내 자동차 유리에 똥만 남겨놓고

어디론가 가버렸더구나

 

나는 네가 남기고 간 똥을 긁으려고

호주머니에서 500원짜리 동전을 꺼내는데

아불싸!

네가 거기 있더구나

 

삐익~삐익~

동전으로 똥을 긁을 때 네가 울더구나

동전을 떠메고 울며 어디론가 날아가더구나

 

너는 날개가 있다고 했지?

너는 울음이 있다고 했지?

너는 똥이 있다고 했지?

 

 

 

생일

박남희

 

매달리는 것이다

그리고 떼어내는 것이다

흔적만 남는 것이다

잊는 것이다

 

태어난 날은 하루가 아니다

꽃나무는 수없이 많은 꽃을 벙근다

어느 날을 꽃의 생일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생일을 생각하는 꽃은 생일을 버린다

그리고 툭,

뛰어내릴 준비를 한다

뛰어내리는 것도 생일의 신호이다

 

뛰어내릴 때마다 새것이 태어난다

붙어있던 곳과 떨어져 내린 곳이

서로를 바라보고 까닭 없이 웃는다

생일의 의미를 아는 모양이다

 

생일은,

나를 잊는 것이다

꽃의 흔적만 남는 것이다

그리고 바람을 떼어내는 것이다

허공에 매달리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어디론가 뛰어내리는 것이다

 

 

 

소금꽃

박남희

 

몸 끝이 탱탱한 저녁이었어요

부안 채석강에 붉은 꽃이 지고 있었어요

꽃에 물든 새 몇 마리 어둠 쪽으로 날아가고

나는 바닷물 출렁이는 바위틈에 오줌을 누고 있었지요

오줌에 섞여 있던 소금이 바다로 돌아가는 제의의 순간을

당신은 어디선가 보고 있었겠지요?

 

새가 되었던 것은 저렇듯 틈으로 돌아가는 법이에요

소금이 그래요 소금은 새와 틈의 산물이에요

그래서 늘 몸이 짜지요 버석거리지요

시간의 틈에서 새가 날아오르고

공간의 새가 틈으로 드는 원리를 이제 아셨겠지요?

 

새와 틈 사이에서 즐거웠나요, 당신

새의 문법은 늘 날개를 필요로 하고

틈의 문법은 늘 벌어지는 게 문제여서

모래처럼 온몸에 구멍 숭숭 뚫어 놓고

날개를 달아 볼까요?

 

꽃 피는 봄에 모래바람이 거세게 부는 것이

무슨 뜻이었는지 이제 아시겠지요?

꽃을 피우려면 어차피 새가 필요해요

나무들이 자꾸만 날개를 퍼득이는 것은

제 몸에 숨겨 둔 꽃이 아프기 때문이지요

 

꽃이 지면 새들이 날아가고

계절이 지나면 수시로 바뀌는 당신의 이름들

그 이름들 사이에서 새가 날개를 퍼득이고

틈이 오므라졌다가 벌어지는 것이 꽃이고 사랑이라는 것을

나는 왜 여태 몰랐을까요?

 

부안 채석강에 다시 꽃들이 출렁이고 있어요

틈과 틈 사이에 숨어있던 것들이 새가 되어

눈부신 몸빛으로 날아오르고 있어요

 

 

 

수평선을 낳는 것들

박남희

 

출렁이는 파도가 수평선을 낳는다

알 수 없는 물의 핏줄들이 모여서 수평선을 낳는다

그 아래

깊이 모를 수심이 모여서 수평선을 낳는다

 

멀리 보면 수평선

가까이 보면 파도

 

잊혀졌던 아버지도 끝없이 밀려와

아버지의 아버지가 되고 끝내 수평선을 낳는다

아버지의 주름 속에 감추어진 것은 역사가 아니라 수평선이다

 

밤마다 수평선은 요동치며 아이를 잉태하고

그 아이들은 자라나 수평선이 된다

 

시인이 시를 낳고 시가 다시 시인을 낳듯이

자세히 보면 세상의 모든 것은 끝과 끝이 맞닿은 수평선이고

신기하게도 수평선은 출렁이며 끝없이 수평선을 낳는다

 

 

 

순천만 갈대

박남희

 

안녕, 너를 어떤 바람에게 맡길 수 있겠니? 너무 쉽게 뒤집히는 계절, 뒤집혀서 또 뒤집히고 싶어 하는 바람의 계절, 강이 스스로 물든다고 누가 말했니? 울어서 저 혼자 붉어지는 저녁 강

꽃이 식어서 열매가 되는 것보다 열매 없이 떨어지는 뜨거운 꽃이 좋아, 제 형체를 공기에게 주고도 끝끝내 뜨겁게 타오르는 꽃, 가벼운 재의 마음으로도 너를 뜨겁게 보낼 수 있어서 좋아

누가 함부로 계절을 정의할 수 있을까? 계절과 계절 사이에 어디서도 들어본 적이 없는 계절이 들어와 끼어드는 이 수상한 저녁에, 비발디의 사계 속을 떠돌던 음표들이 어디론가 망명을 떠나는데,

아직 나는 너를 놓을 수 없어, 구름이 비를 선뜻 버리지 못하고 어디론가 떠도는 것처럼, 목이 쉬어 무성하게 자라는, 꿈꾸는 소리의 무덤을 버릴 순 없어

온전한 꽃도 되지 못하고, 일탈을 꿈꾸는 바람이나 안개도 되지 못하고, 끝없는 허기에 제 몸의 소리를 갉아먹는, 누구도 감당할 수 없는 이 갈대를 또 누구에게 맡길 수 있겠니?

 

 

 

시계 속의 사막

박남희

 

이곳에서는 형이상학과 형이하학이 따로 없다

모래가 지배하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모래는 늘 구체적인 형상을 거부하고

어디론가 끝없는 탈주를 꿈꾼다

 

하지만 모래가 탈출하려는 문은 너무 좁다

투명한 시간의 억압이 모래를 가두고 있기 때문이다

모래에게서 자유를 탐하는 것은 중력이다

모래들은 중력에 이끌려 구멍으로 몰려든다

구멍이 점점 분주해진다

 

이곳에서는 중력이 모래의 길을 규정하지만

길을 다 걸으면 뒤통수가 텅 빈다

억압과 자유가 수시로 뒤집고 뒤집히는 세계

그 속에서는 시간도 사각거린다

 

모래는 일시적으로 길이 되었다가 산을 이룬다

길과 산으로 시간을 말하는 법을 모래는 알고 있다

길이 다 끝나 산에 이르면

세상은 또 한 차례 뒤집힐 것이다

새롭게 모래들의 아우성이 시작될 것이다

 

모래의 창세기를 지나 묵시록에 이르도록

물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바삭바삭

모래의 눈시울이 마르고 있다

 

 

 

신발의 시간

박남희

 

내가 한 송이 꽃대궁으로 서있을 때 신발은 꽃병이 된다는 걸 알았습니다 꽃이 활짝 피기 위해서는 꽃병에 물이 흥건해야 한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신발이 자꾸 어디론가 가려는 것이 발에게는 피곤한 일이라고 생각할 때도 있었지만 하느님도 구름신발을 신고 다닌다는 것을 알고부터 신발이 친근해졌습니다. 무엇보다도 발이 움직일 때 신발이 너무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나서 신발이 발을 떠나지 못하는 속사정을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신발을 너무 오래 신고 있으면 냄새가 납니다 냄새의 근원을 살펴보니 발의 집착 때문이었습니다 신발은 종종 벗어주어야 한다는 것과 신발에게도 자유가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더군다나 발이 신발을 신는 줄 알았는데 신발이 발을 품어주는 것이고, 발보다는 신발이 더 헌신적이라는 것도 알았습니다 신발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다보니 신화 속 이아손의 잃어버린 신발이 왜 물에 떠내려갔는지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였을까요 언젠가 한강에 나가서 강물을 보는데 한강이 거대한 신발로 보였습니다 강물은 흐르는 발이 되어 어디론가 가고 있었습니다 신발은 강물뿐 아니라 강 주변의 수목에서부터 저녁노을이나 초저녁별에 이르기까지 넉넉하게 품어주고 있었습니다 나는 새삼 내 신발이 귀하게 느껴져 물끄러미 신발을 내려다보았습니다 어둑어둑 어두워진 신발이 강물처럼 흘러 나를 어디론가 인도해주리라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내 발이 언젠가는 신발을 벗어서 세상에 영원히 되돌려 주겠지만 내가 신발을 신고 있는 지금 이 시간이 얼마나 행복한지 모릅니다

지금까지 내가 신은 신발은 여러 켤레입니다 신발의 모양과 색깔은 달랐지만 수많은 물방울이 모여서 강물이 되듯 그것들이 모여 커다란 신발이 된다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너무 큰 신발은 더 이상 신발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주이고 신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여전히 작은 신발들이 많습니다 신발이 많은 이 세상은 신발가게입니다 나는 날마다 신발가게 옆을 지나면서 황홀합니다 저는 지금도 스스로 신화 속을 뛰쳐나온 모노산달로스가 되어 지상에서 잃어버린 작은 신발을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실패 잔치

박남희

 

오늘은 잔칫날이다

실패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아 기쁜 날이다

누가 왔을까 나의 잔칫날에,

호기심을 아무리 길게 늘여도

낯익은 표정이 보이지 않아서 기쁜 날이다

 

내가 누군가의 관심을 끌려는 목적은

실패하면 실패할수록 좋다

그럴수록 내 신경줄을 어딘가에 가두어 두려는

누군가의 노력도 실패로 돌아간다

실패는 늘 즐겁다

 

어릴 때 연날리기를 좋아해서

덩달아 바람이 좋아졌던 기억이 있다

아버지도 나처럼 바람을 좋아했다

실패에 실을 감고

실 끝에 실패로부터 해방되고 싶어하는 것들을 묶고

아버지와 함께 바람 부는 능선으로 올라갔다

 

연은 실패를 떠나 거센 바람에

실패에 감겼던 기억을 흉내내듯 공중을 몇 바퀴 돌다가

전깃줄에 아주 감기거나 나뭇가지에 걸려서

빈 실패만 들고 저녁 언덕을 터덜거리며 내려왔었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이

연실 같은 것이라는 걸 그 때 비로소 알았다

실패에는 잔치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것이어서

십대를 자주 실패라고 읽었다

 

내가 시를 쓰게 된 것도

고교 입시에 낙방을 하고 검정고시를 하면서부터이다

그때부터 내 생각에도 실패가 풍성해졌다

진정한 잔치의 기분을 알게 되었다

 

 

 

쓰러질 수 없는 다리

박남준

 

무너지지도 않은 다리를 본 적이 있다

오랜 가뭄 끝에 바닥을 드러낸 화순 근처의 저수지

물에 잠겼던 옛 마을에 발을 내렸던 날이 있었다

한때 밭둑을 이루었을 키 작은 돌담의 경계들과

죽은 나무의 잔재들 저 만큼에 실개천 가로지르는

그 다리, 저문 하루의 일손을 놓고 집으로 돌아가며

발목을 적시지 않고 건넜을 앉은뱅이 다리 하나

아직 저 눈곱만한 다리는

길을 되짚어 와야 할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저렇게 오랜 날들 물속에 잠겨서도 견디고 있었던 것이다

어디선가 나를 위해 거두지 않은 사랑도 하마 늙어가고 있을까

 

다리가 기억하고 있을 세상의 일들을 떠올렸다

다리를 건너 돌아오고 떠나갔을

어느 덧없고 잊혀진 것들에 대해

아마 나는 오래 묻고 또 물었을 것이다

 

 

 

아름다운 매춘에 대하여

박남희

 

벌레의 꿈틀거림에 관한 기억을 난 알고 있어 내 몸을 갉아 먹고 내 몸의 뚫린 구멍 속으로 하늘을 보는 벌레, 그래 나는 분명히 벌레 먹은 이파리였어 그런데 너는 누구니? 벌레 먹은 나를 쳐다보다가 내 존재의 밑에서 나를 떠받치고 있으면서 나에게 살아있느냐고, 살아있느냐고 수없이 나를 흔들어대는 너는,

그날 이후 햇빛은 나에게 선물을 주었어 벌레의 이빨에 갉아 먹힌 만큼의 상처와 누군가에게 흔들린 만큼의 시련을 얹어 내 살갗 속에, 녹색의 길 속에 다독이며 별빛의 하늘에 이르는 눈빛을 선사해주었어

그래 이제 벌레에 대해서 말해주지, 벌레의 끊임없는 꿈틀거림에 관해서, 그 순수한 생의 몸부림에 관해서, 벌레와 함께 해온

내 아름다운 매춘에 대해서, 이미 벌레에게 바친 이 한 몸 나를 갉아 먹어도 나는 그가 좋아 난 지금도 밤마다 내 사랑 벌레에게 편지를 쓰고 있어 내 몸의 뚫린 구멍 속으로 바라보이는 하늘에 대해, 한순간 반짝이다 사라지는 아름다운 소멸에 대해, 벌레 먹은 채로도 아름다운 내 몸에 대해,

그런데 지금도 자꾸만 내 몸을 흔들어대는 너는 누구니?

 

 

 

아름다운 전쟁

박남희

 

꽃이 붉다, 누가 피흘리나

누가 저리 붉은 피를 아름답다고 말했나

피가 나도록 싸우는 저

아름다운 싸움을

누가 꽃이라고 말했나

 

꽃이 지면

아름다운 싸움도 끝나고

세상의 날개들은

저마다의 속도로 사라지겠지만

 

피 흘리는 그대여

아름다움을 위해

피가 나도록 싸우는 그대여

아름다움이 다하면 전쟁도 끝나겠지만

 

지금은 피가 황홀한 계절

 

내 몸속,

꽃이 붉다

 

 

 

아침 햇빛을 가만히 보니

박남희

 

아침 햇빛을 가만히 보니 저녁이네

노래인 듯 저녁이네

아침과 저녁 사이가 긴 줄 알았더니

순간이네, 바람인 듯 순간이네

 

꽃들은 아침에 피어서 저녁을 느끼고

저녁에 피어서 아침을 살아가는데

 

개미들은 아침을 저녁처럼

저녁을 아침처럼 천천히 기어서

제 집의 마지막 어둠에 이르는데

 

아침 햇빛을 가만히 보니 눈물이네

눈물 글썽이는 웃음이네

 

웃음과 울음 사이가 먼 줄 알았는데

웃음인 듯 울음이네

 

아침 햇빛을 가만히 보니

그 속에 내가 울고 있네

나인 듯 그대가 웃고 있네

 

 

 

아픈 편지

박남희

 

원래부터 저는 미움을 받아왔습니다

저를 편지라고 해두세요

봉투에서 저를 꺼내는 자는 미워요

제 비밀을 지켜주세요

저는 19금으로 봉인된 책과는 친하지 않습니다

비밀을 팔아 돈을 벌 생각은 없으니까요

 

가령 외모가 닮았다는 이유로

능소화가 나팔꽃에게 편지를 쓸 때

능소화는 온몸이 편지가 되어 나팔꽃에게로 갑니다

편지는 편지를 미워하기 때문이지요

 

봉인된 자는 봉인된 자를 미워합니다

편지의 본능은 미움입니다

미움으로 찢기고 미움을 읽힙니다

 

이제 이스라엘과 아랍의 싸움이 계속되는 이유를 알겠지요

전쟁은 세상에서 가장 아픈 편지입니다

 

 

 

안녕, 눈사람

박남희

 

겨울의 한복판에

너를 세워두고

그냥 왔다

 

네 눈물이 글썽이며 자꾸

흘러내릴까 봐

울음이 점점 커져 강물이 될까 봐

 

어쩌면 네 눈물이 점점 뜨거워져

겨울마저

몽땅 녹여버릴 것 같아서

 

그냥 왔다

겨울 한복판에

나를 세워두고

 

 

 

야카모즈*

박남희

 

하늘에 떠 있는 달보다

물속에 비친 달빛이 더 아름답다

흔들리기 때문이다

 

물속의 달빛을 바라보는 건

제 마음을 흔드는 일이다

사랑하는 일이다

 

물 위의 달보다도

물속의 달빛이 아름답게 느껴지는 건

이미 사랑에 빠졌다는 증거이다

 

이미 사랑에 빠진 눈으로 보면

하늘에 떠 있는 달도

물속에 비친 달빛처럼 출렁인다

세상의 모든 것이 이미 물속에 있다

 

사랑은 또렷한 세계를 지나

출렁이는 세계에 이르는 것이다

출렁이는 물의 거울로 세상을 바라보는 일이다

 

* 야카모즈(yakamoz) : `물속에 비친 달빛'이라는 뜻의 터키말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단어로 뽑힌 바 있다.

 

 

 

양식*

박남희

 

예로부터 양식은 고통의 서사이다

역사는 양식 없는 사람들의 역사이고

예술은 양식의 부정에서 새로운 길을 찾았다

 

아내는 식탐이 있는 나를 전직남이라고 부른다

전쟁 직후에 태어난 사람

양식이 없어 삶의 양식을 모르던 시절

그때는 배고픔이 양식이었다

 

요즘은 서양식이 동양식이 되고

동양식이 서양식이 되는

퓨전이 양식화되어 전통 위에 군림한다

그래서 양식은 늘 고통스럽다

 

세상의 모든 양식은 컴퓨터로 수렴되고

모든 새로운 양식이 컴퓨터에서 나온다

컴퓨터는 세상을 양식화하고

어느새 컴퓨터는 세상의 일용할 양식이 되었다

 

웹디자이너인 딸은 날마다 컴퓨터 속으로 출근한다

딸에게는 디자인이 양식이다

양식을 수정하고 양식과 대화를 한다

종종 양식에게 퇴짜를 맞기도 한다

 

아내는 날마다 부엌에서 양식을 양식화한다

아내는 가끔 양식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외식을 외친다

외식하지 말라는 성경말씀도 모르는 모양이다

 

나는 참 양식도 없이

하루 세끼 삼식이가 되어 양식을 축낸다

그러다 아내가 새로운 언어로 양식화한 메굴남이 되어

식탁 아래로 메추리알을 굴린다

 

예로부터 양식은 고통의 서사이다

 

* 양식 속에 침전되는 전통과의 대결 말고는 달리 고통을 위한 표현을 발견할 길이 예술에는 없다(아도르노, 호르크하이머, '계몽의 변증법')

 

 

 

어둠으로 여는 세상

박남희

 

누구는 시로 여는 세상을 말하고

누구는 빛으로 여는 세상을 꿈꾸지만

무엇보다도

어둠으로 여는 세상은 아름답다

 

아무리 하늘을 뒤집고 흔들어 털어내도

별빛, 달빛만 쏟아질 뿐

 

시로 여는 세상이 보여주던

어둠을 가리기 위한 은유도 상징도,

빛으로 여는 세상이 보여주던

와글거리는 소음도,

너무 높은 것들이 뱉어내던 어지러움도

아무것도 더 이상 쏟아내지 않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어둠은 초라한 내 모습을 어둠 밖으로

퉁겨내지 않는다 세상의 온갖 흠 있는 것들을

넉넉하게 품어준다

어둠은 그저 깊고 신비스러울 뿐

아무리 맨 눈으로 쳐다보아도 눈이 부시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어둠은 제 몸을 열어

빛을 가두지 않고

죄를 구별하지 않고

부끄러워하는 것들을 모두 덮어준다

자꾸만 어디론가 제각각 흩어지려는 것들에게

크고 넉넉한 보자기가 되어준다

 

 

 

어름사니

박남희

 

위험한 노래 위를 걷다 보면 너를 만날까

네 뒤에 숨어 출렁이는 기억을 만날까

너의 그림자를 만날까

 

반짝이는 아침 햇살을 타고 오르는 거미처럼

바람이 두고 온 길을 걷다 보면

뜻밖에도 지워진 기억을 만날까

 

노을 위를 걷다 보면 나를 만날까

얽히고설킨 노을 밖의 길을 만날까

길이 놓친 달빛을 만날까

달빛이 버린 꽃을 만날까

 

기다리고 기다려도 아무도 오지 않는데

기억의 들판이 자꾸 낯선 길을 새로 만들고

기억이 버린 것들이 무심히 너를 기다리는데

네가 떠나보낸 나를 기다리는데

 

구름아

바람 위를 걷다 보면 너를 만날까

너와 함께 무심히 흘러온 나를 만날까

출렁이는 밧줄이 붙잡고 있는 바람을 따라

아득한 벼랑 위를 걷다 보면,

 

 

 

어쩌다 시간여행

박남희

 

내가 너에게 가기까지가 시간이다

너는 감자, 어쩌다 무지개

그러다 바람, 이럴 땐 적당히 꽃이라고 해두자

 

네가 나를 규정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나를 모른다

그러므로 네가 내게 오기까지가 시간이다

 

나는 날마다 너를 찾아 시간 여행을 떠난다

 

나는 여행을 떠나면서 누군지도 모르는 너에게

소크라테스를 사랑하는 자들이

소크라테스에게 붙여준 이름을 붙여준다

 

아토포스,

아마도 이것은 너의 이름이 아닐지도 모른다

내가 너에게 가는 길을 알지 못하므로,

 

도처에 길이 너무 많다

아무 길이나 들어서서 너를 찾다가

깜박, 나를 잊는다

 

시간여행을 하면 할수록

시간의 한가운데가 비어 있다는 걸 알았다

그 안에

생각이 없어서 아름다운 것들이 있다는 것도 알았다

 

빈 것이 아름다운 것이라는 진리가 나를 깨웠다

빈 꽃병이 꽃을 유혹하듯

그 빈자리가 너를 꽃피게 했다는 걸 알았다

 

 

 

얼음의 존재방식

박남희

 

얼음은 0도에서 생겨난다고 했다

아버지는 돌아가신 후에도 0을 좋아하지 않으셨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마지막 길에

얼지 않은 몸을 얼리기 위해 냉동실에 들어가 계셨다

부패를 방지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생명이 없어지는 것이 부패라는 것을 알려주려는 듯

마지막 가는 길에 냉동실에서 다시 나오셨다

 

영원히 썩지 않는 것은 끔찍한 일이라고

미라처럼 끔찍한 방식으로 시간의 힘을

거스르는 일은 죄악이라고,

결국 인간은 자궁에서 냉동고를 거쳐

무덤으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아버지는 순순히 수의를 입으셨다

 

나는 눈물이 났다

흐르는 것들을 멈추게 할 수는 없을까?

얼음은 그 해답을 보여주지는 못한다

얼음은 단지 출렁이던 것들을 잠시 진정시켜

유예시키는 것일 뿐,

 

내 몸의 존재방식이 0에 있다는 것은

얼음의 존재방식과 같았지만

그것은 단지 온도의 문제가 아니었다

 

몸의 마지막 소실점이 0이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내 안에서 얼어있던 물은 스스로를 뜨겁게 녹여

눈 밖으로 쉴 새 없이 흘려보냈다

 

나는 그렇게 아버지를 용서했다

나를 용서했다

 

 

 

역설의 꽃

박남희

 

사람들은 누구나 제 몸에 봄의 유적지 하나씩은 가지고 있지

봄이 왔다가 떠나간 자리,

 

바람은 봄의 유적지를 따라 끝없이 유랑하다 바람이 되었지

꽃은 봄의 유적지에 떠도는 바람을 위로하기 위해 꽃이 되었지

 

그렇게 바람으로 꽃피는 법을 배워

 

봄은 없고 봄의 유적지만 있는 것들은

봄의 유적지에 남아있는 꽃을 보면서 봄을 말하지

 

그 꽃이 시들어 봄의 유적지마저 떠나고 있는 줄도 모르고

봄을 찬양하지

 

어느새 봄의 신전이 된 유적지에서

꽃 대신 신을 만나지

 

꽃을 버려 신이 된, 역설의 꽃을 만나지

 

 

 

()

박남희

 

바람이 부는 아침에 눈을 뜬다 이불로부터

나는 버려진다 고향으로부터,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이불을 걷고

 

밥을 먹는다 이윽고 밥그릇으로부터

나는 버려진다 가난으로부터, 노동으로부터

물려받은 밥그릇 위에

 

해가 뜬다 그림자에 끌려가다

나는 버려진다 밝은 것, 눈부신 것들로부터

물려받은 그림자를 끌고

 

나는 달린다 속도에게 끌려가다

나는 버려진다 문명으로부터, 욕망으로부터

물려받은 속도 위로

 

해가 진다 광활한 것들로부터

나는 버려진다 기우는 것, 어두워지는 것들로부터

물려받은 노을 근처에서

 

나는 자꾸 느슨해진다

사금파리에 줄이 끊겼나?

 

아아, 그런데 무언가 다시 나를 끌어당긴다

변덕스러운 노을을 입고,뚱딴지 같은 속도로

끈질긴 그림자와 허기진 밥그릇을 거느리고

별로 따뜻하지도 않은 이불 근처에서

나는 당겨진다

 

연줄을 잡아당기고 있는 무덤 속의 노인은

아주 힘이 세다

 

 

 

오래된 지도

박남희

 

우크라이나 전쟁에 참여했다 포로가 된 러시아 병사에게

우크라인 남성이 했다는 말

"이 젊은이들의 잘못이 아니야.

그들은 이곳에 무슨 일로 왜 온지도 모르고

그저 오래된 지도를 따라서 오다가

길을 잃은 것뿐이야"

무방비상태인 내게 불쑥 들어온 '오래된 지도'

어쩌면 오래전부터

내 마음을 먼저 읽고 있었을지도 모를

저 지도를 따라가면 필연적으로 길을 잃게 될 텐데

왠지 본능적으로 지도를 따라가고 싶은

내 구름의 신발들

어쩌면 영영 버릴 수 없는, 처음에 누가

만들었는지도 모르는 저 지도를 따라가는 것은

어떤 그림자의 습성일까

지금 내가 서 있는 이곳은 이미 전쟁터이고

이미 누군가의 포로가 되어

어떤 손이 건넨 따뜻한 홍차와 빵을 눈물을 흘리며

허겁지겁 받아먹고 있을 나,

문득 만화경 속인 듯

이럴 때 나는 도처에 왜 이렇게 많을까

오래된 나와 새로운 나, 익숙한 나와 낯선 나

지도를 펼치듯 나를 펼치면 한쪽은 여전히 접혀있다

온전히 펼칠 수 없는 건 지도가 아니지

누군가 중얼거리고

지도를 온전히 펼칠 수 없는 건 잘못이 아니라고

온전함은 단지 영원히 길을 잃은 것뿐이라고

누군가 빛이 가루가 되어 뿌려저 있는 밤하늘 지도를 가리킨다

빛을 가루로 말하는 방식에 밤하늘은 이미 익숙해져 있다

 

 

 

오후 한 시, 자갈치

박남희

 

자갈치시장과 바다가 등을 문지르고 있다

등줄기 사이로 햇볕이 유리 조각처럼 잘게 부서졌다

바다와 부두에 유리 조각이 쏟아져 내렸다

눈빛이 살아 있는 유리 조각들을 건져 올렸다

빛을 잃은 유리 조각들은 검게 드러누웠다

눈빛을 따라 사람들이 우루루 몰려다녔다

날카로운 이빨 사이로

내뱉은 말들이 유리 조각들처럼 잘려 나갔다

잘려 나간 말들이 바다를 토막 내고 있었다

토막들이 부딪치며 찰랑찰랑 바닷소리를 냈다

토막 난 바다는 지느러미를 흔들고 있다

사람들은 유리 조각들이 단단하게 박힌

지느러미를 한 조각씩 떼어 담는다

유리 조각들이 사각거렸다

 

 

 

올챙이

박남희

 

요즘 아이들의 오글거린다는 말을 들으면

문득 올챙이 생각이 난다

나의 올챙이 시절 잡풀 우거진 논배미 맑은 물 속

다소곳이 옹그린 내 손안에서 오글거리던 올챙이들

 

그런데 오늘은 문득 시 속에도 올챙이가 산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쓰는 시 첫 줄에 이미 올챙이들이 오글거리고 있다

그 올챙이들이 오글거리며 헤엄쳐 나가는 곳에 내 시상(詩想)이 있다

 

어떤 시인은 시를 쓸 때

시의 첫 행 끝부분에 특히 신경을 쓴다는데

아마도 그 시인은 올챙이 꼬리 시학을 갖고 있는 모양이다

사실 올챙이에게는 꼬리가 생명이다

올챙이가 꼬리로 헤엄쳐 나가는 곳에 시가 있다

 

생각해 보면 내 몸에도 올챙이가 산다

터질 듯한 열정으로 사랑을 할 때

내 몸 깊은 곳에서 용암처럼 터져 나와

오글오글 제 사랑의 길을 찾아가는 올챙이들

 

아이들의 오글거린다는 말속에도

시를 부르는 내 생각 속에도

사랑이 꿈틀거리는 내 몸 깊은 곳에도

오글오글 올챙이들이 산다

 

오늘은 올챙이들이 오글거리며 어디론가 헤엄쳐나가

들녘 소리 깊은 작달비를 불러왔는지

울 밖에 추적추적 비가 내린다

멀리 개구리 울음소리가 들린다

 

시가 참 깊고 아늑하다

 

 

 

외로움의 전략

박남희

 

이제 모처럼 외로워 볼까 근원을 잃어버린 강물처럼 최초의 물방울 소리도 잊어버리고 어디론가 혼자 흘러가 볼까 그동안 내가 만났던 외로움은 외로움이 아니야 먼 우주를 바라봐 망망한 우주를 혼자 떠도는 무수한 별들을 좀 봐 북두칠성이나 오리온자리처럼 별자리를 이루고 있는 별들도 서로 수십 광년씩 떨어져 있어서 여전히 외로운 거야

외로움이 별자리를 만드는 거야 외로움은 쉽게 해소해버리는 것이 아니야 외로움으로 반짝이는 별자리가 아름다운거야 강물도 별들도 저만의 외로움이 있어 유구한 거야 외로움이 오롯한 존재를 만드는 거야 풀잎 위에 맺혀있는 이슬방울도 외로워서 아름다운 거야

외로움에도 전략이 필요해 북두칠성처럼 서로에게 자유를 주고 스스로의 내면을 향하여 무섭게 반짝이는 전략, 강물처럼 어디론가 끝없이 흘러가는 것도 전략이야 머물러 스며들지 않게 속도에 몸을 맡기고 출렁출렁 흘러가다 바다에 이르러 외로움의 방향을 아주 놓아버리는 전략, 바다가 깊은 건 외로움에 방향이 없기 때문이야 망망한 눈빛으로 바라보아도 알 수 없는 외로움의 방향 대신 스스로 깊어지는 법을 터득했기 때문이야

이제 나도 모처럼 외로워볼까,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 백석의 시 흰 바람벽이 있어에서 인용.

 

 

 

우두커니

박남희

 

무 밭에 이르러

나를 우두커니 세워두고 무가 되었다

이파리만 푸르고 희디흰 몸은 맵거나 달았다

무는 뿌리로 말하는 것이라고 누군가 말했으므로

나는 뿌리를 키웠다

 

이상하게도 뿌리 위로 이파리가 무성해져갔다

이파리에 무꽃이 달리고 나비가 날아들었을 때에야

그리운 허공이 나비가 된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오래전부터 허공이 무를 키우고

무의 이파리들이 허공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무꽃이 피고 나비가 날아다닌다는 것도 알았다

 

그때까지 무의 속살은 연하고 부드러웠지만

무꽃에 씨앗이 영글고 나비가 사라질 때쯤이면

무의 속살에 단단한 심지가 박힌다는 것은

무 자신도 잘 모르고 있었다

 

나는 요즘 나를 우두커니 세워두고

연하게 해방시키곤 한다

그러면 날아갔던 나비가 다시 날아오고

사그라졌던 꽃대궁이 푸르게 피어난다

침묵하던 허공이 다시 무에게 말을 걸기 시작한다

 

무는 뿌리가 온몸이라고 허공이 말해주었으므로

처음으로 부끄럽던 뿌리가 자랑스럽다는 것도 느끼게 되었다

나를 우두커니 세워두고서야 나는 비로소 온전한 무가 되었다

그동안 내 뿌리를 감싸고 있었던 것이

흙의 커다란 자궁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하늘에는 태양이 우두커니 서서

때 없이 굵어지고 달달해지는 무의 속살을 지켜보고 있었다

 

 

 

울음의 고리

박남희

 

저녁에 이르면 하늘과 바다가 충혈된다

하늘은 바다를 보고 울고

바다는 하늘을 보고 운다

 

그것은 하늘과 바다가 운 것이 아니다

하늘 속의 구름이 울고 새가 운 것이고

바다 속의 물이 울고 물고기가 운 것이다

 

그 울음은 한밤을 지나 아침까지 계속된다

울음은 전염성이 강하다

저녁이 아침을 향해 밤새 우는 바람에

아침 하늘이 충혈된 것이다

 

그러므로 아이가 태어날 때 우는 것과

 

사람이 죽을 때 우는 것은 같은 것이다

아이는 태어날 때 전 생애를 울어줄

저만의 하늘과 바다를 가지고 태어난다

 

아이가 평생을 살아가는 동안

하늘은 바다를 보고 울고 바다는 하늘을 보고 운다

눈물은 하늘에서 바다로 바다에서 하늘로

끝없이 순환한다

 

눈물은 그러는 동안

제 속에 수많은 울음의 고리를 갖게 된다

 

 

 

유리창의 심리학

박남희

 

깨지고 싶지 않은 유리창은 없다

 

유리가 창틀을 붙잡고 있는 건

깨어지지 않으려는 것이 아니다

삼손이 자신을 지탱하던 마지막 기둥을 허물어

장렬하게 전사했듯이

 

유리에는 늘

제 몸을 부수려는 욕망이 숨어있다

부서진 유리는 천개의 눈을 갖는다

천개의 세상을 다르게 보고 싶은 것이다

 

유리는 세상의 수많은 창틀이 붙잡고 있던

무관심과 안일과 위선을 버리고

제 안에 감추어둔 목소리를 꺼내어

쨍그랑,

관습의 오랜 잠을 깨우고 싶은 것이다

 

유리창은 깨어지고 싶은 날

눈먼 새를 부르며 자유로운 길의 기운을 느낀다

자신을 향하여 전 속력으로 달려오는 새에게

날개를 버리고 바람이 되라고 주문을 외운다

 

유리창은 자신의 몸을 불사르며 대기권으로 뛰어드는

별똥별처럼, 불안한 허공에 한 획을 그어

스스로 반짝이는 목소리를 얻고 싶은 것이다

 

 

 

은유의 길

박남희

 

그땐 굴렁쇠를 굴리는 일이 하루를 굴리는 일이었다 구부러진 철사에 감겨서 골목길을 돌고 신작로로 나가면 굴렁쇠는 더욱 신나게 소리를 내며 길을 가로막는 돌멩이도 곧 잘 뛰어넘어 비틀거리다가 남은 하루를 마저 달려가곤 했다 어떤 날은 굴렁쇠를 따라 오던 해가 달로 변해서 뒷산을 어둑어둑 검게 색칠을 해놓아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잘 보이지 않았다

나는 내가 굴렁쇠를 굴릴 때 따라오던 해도 굴렁쇠라는 사실을 과학시간에야 알았다 달도 굴렁쇠이기는 마찬가지여서 날마다 커다란 궤도를 돌아온다는 것을 알았다 넘말, 성사리, 수역이 마을로 돌아오는 엄마의 옷 보따리도 굴렁쇠라는 것을 철이 들어서야 알았다 그런데 굴렁쇠들은 한결같이 커다란 굴렁쇠 속을 돌아오고 그 커다란 굴렁쇠는 더 큰 굴렁쇠 속을 돌고 있다는 것을, 그때는 몰라도 되었다 다만 내 앞에 경쾌한 쇠소리가 있고 그 뒤에 나의 신나는 발자국이 따라가면 그만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유년시절에 이미 굴렁쇠였다 은빛 내 몸은 누군가의 철사 굽이에 조종되어 어디론가 신나게 달려가고 있었다 뒤돌아보면 내가 걸어온 길도 커다란 굴렁쇠였다 어릴 때 내가 굴렁쇠를 굴리던 것은 어디를 가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다만 내 앞에 굴렁쇠가 있었고 그 뒤에 내가 있었다 굴렁쇠를 굴리다 보면 어느새 내가 굴렁쇠가 되고 내 뒤에 누군가 나를 놓칠까 봐 급하게 따라오고 있었다 그때마다 나는 신이 나서 어디론가 굴러다녔다 그렇게 내 뒤에 은빛 소리가 남았다 내 은유의 길은 그렇게 생겨났다

 

 

 

이별의 속도

박남희

 

구름과 이별한 빗방울이 전속력으로 뛰어내려

제 몸을 부수는 것은 목마른 땅의 간절한 눈빛이

빗방울을 전속력으로 잡아당기기 때문이다

이렇듯 이별의 속도는 마음이다

마음이 버리고 마음이 잡아당긴다

언뜻 보면 지구는 태양이 버린 마음이고

달은 지구가 버린 마음이다

멀어져 가는 지구와 달을 끝내 버릴 수 없어

다시 끌어당기는

태양과 지구의 마음을 어쩔 것인가

사람들은 그것을 인력이라고 부르는 모양이지만

그것은 사실 사랑이다

멀어지려는 것을 끌어당기다 보면 어느새 둥근 사랑이 된다

이별의 속도가 제로가 된다

 

 

 

이상한 거울

박남희

 

나는 봄 들판에 거울이 숨어있다는 것을 안다

땅속 깊은 곳에 숨어있는 이야기들을

빛인 듯 튕겨내는 마술 거울은

그 이야기들을 직선으로 튕겨내지 않고

가물가물 미세한 떨림의 곡선으로 뿜어 올린다

 

그렇게 마술 거울이 퉁겨낸 이야기들은

세상의 온갖 풍경들을 굴절시킨다

사람들은 그것을 아지랑이라고 말하는데

아지랑이 속으로 세상을 보면

세상은 온통 춤이고 노래이다

 

춤은 들판을 흔들어서 꽃을 피게 하고

꽃은 피어서 다만 세상에 향기를 뿌릴 뿐

다시 찾아올 겨울을 두려워하거나

시드는 것을 걱정하지 않는다

 

겨우내 얼어붙었던 들판을 흔들어 깨운 건 사랑이다

사랑의 열병을 앓아본 사람은 안다

봄마다 들판에 아지랑이가 왜 피어나는지를,

 

 

 

이상한 독서

박남희

 

1

이 땅엔 이상한 풀들이 돋아난다

어떠한 계절과도 어떠한 내력과도 상관 없이

이상한 나무가 자라고 이상한 바위가 솟아오른다

우리가 우리들이 길들 위에 펼쳐 놓았던 것

우리의 눈물과 우리의 땀과 우리의 힘줄 가까이

풀어 놓았던 것, 그 것은 어쩌면 구름같은 것인지 모른다

내 주위에서 이따금씩 나를 흔드는 것들

그 것이 바람이래도 천둥이래도

나는 그 것들이 왜 나를 자꾸만 흔드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알고 싶다

나를 둘러싼 모든 것과 더불어 나의 생명을

생명이게 하면서 절망을 때로는 희망이라고 해독하고

기쁨을 슬픔이라고 읽고 있는 내 배후의 신비스런 정체를

 

 

2

그는 그때

구름의 가장 부드러운 부분을 뚫고

터져 흐르는 상처, 따가운 햇살같은 상처를

아름다움이라고 해독했다

아름다움의 가장 처절한 結晶

단단한 바위 속의 어둠을 깨기 위해

천년을 기다려서 터지는 샘물

차가우면서 때로는 따사롭게 느껴지는 그것을

그는 눈물이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이 땅의 도처에 살아 움직이는

눈물의 내력을 모른다

눈물의 가장 단단한 부분과 부드러운 부분이

어떻게 만나서 어둠 속에 함께 녹아 흐르는지

알지 못한다

내 주위의 싱싱한 풀들이며 바위며 샘물들

그가 이 땅에 풀어놓은 온갖 언표들을

나는 쉽게 해독할 수가 없다

무지한 내 생각과 의지와는 상관 없이

오늘도 이 땅의 책들 위엔 이상한 꽃이 피고

이상한 열매가 맺히고 이상한 향기들이

춤을 추고 있다

 

지금도 누군가 나를 읽고 있다

 

 

 

이상한 싸움

박남희

 

나는 밥이 왜 늘

수많은 반찬에 둘러 싸여 혈혈단신인지

그 이유를 알지 못한다

 

그들은 한데 엉겨서 싸우다가

끝내는 왜 하나로 섞이고 마는지

그 이유는 더더욱 모른다

 

아니, 알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나는

 

입이니까

 

 

 

이장(移葬)

박남희

 

혀가 빠져나간 입

 

무언가

말할 듯 말하지 못한

구름

 

그 아래

어디서 한없이 헤매다 돌아온 것 같은

뼈 하나, 뼈 둘

 

이사를 간다

바람을 버리고

살을 버리고

 

또 다른 바람을 찾아 살을 찾아

물을 찾아

소리를 찾아

봉긋한 이정표 하나 세운다

 

새가 울고

뼈가 울고

 

물이 흐르고,

 

새로 생긴 둥근 어둠이

혀를 생각한다

 

 

 

이제는

박남희

 

석양을 팔아야겠습니다

기우는 것은 빨리 파는 것이 남는 것이지요

술잔을 생각하면

저녁 하늘이 붉어지는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누가 술에 조금씩 어둠을 섞어 하늘에 버렸을까요

이제는 별을 팔아야겠습니다

벌을 받아야겠습니다

술 취한 별이 모여서 막걸리처럼 흐르는 것을 사이에 두고

영영 벌 받기 위해

견우와 직녀가 서로를 그리워하는

하늘을 팔아야겠습니다

 

죽어서 말이 없는 자와

살아서 눈물 흘리는 자가 흘려보낸 시간 속

자꾸만 기울어지던 중심을

바다 깊숙이 가라앉힌 채 인양할 줄 모르는

저 석양을 팔아야겠습니다

 

 

 

일몰의 배후

박남희

 

갈대는 배후가 없다*는 것도 옛말이다

모든 어두워지는 것들에게는 배후가 있다

 

신은 아프리카를 왜 어둠의 대륙으로 만들었을까

처음부터 어두워서

표정조차 함부로 저물 수도 없는 종족,

잠베지강은 알고 있다 흘러흘러 물로 말을 해도

아무도 들으려 하지 않는 막힌 귀의 배후를,

 

그즈음에 태양은 제 빛의 무거움을 느낀다

우기에 무성한 것들은 빛에 한없이 약하다

말라리아를 풍토병이라고 말하는 이들은 모른다

풍토병의 배후에 어둠이 있다는 것을, 그리하여

모든 어두워지는 것들에게는 배후가 있다

 

병풍의 배후에 숨어 있는 죽음을 다만

십장생도가 가리고 있을 뿐이다

 

죽음을 생각하면 불현듯 등이 가렵다

나이가 먹을수록 등이 가려운 이유를

효자손은 모른다

효자는 없고 손만 남은 시대에

등은 긁을수록 더 가려워지는 법이어서

가려움의 배후가 점점 궁금해진다

 

내 등은 나이 먹을수록 아프리카가 되어간다

팔이 짧아 처음부터 손이 닿지 않는 대륙

긁어도 긁어도 가려움의 배후를 알 수 없다

 

다만 나도 모르는 사이에 태양은 떠서

한 차례 가려움을 대륙에 뿌리고 어디론가 사라진다

 

* 갈대는 배후가 없다-임영조 시인의 시 제목.

 

 

 

임종(臨終)

박남희

 

터널 속으로 기차가 기적을 울리며 지나간다

수평의 어둠이 뚫어놓은 무수한 터널들,

그 위에 석양이 빛의 임종을 예고하고

기차는 터널과 터널들 사이를 달리며 숨이 차다

 

달려야 한다는 것이 터널을 만든다

터널을 지날 때의 캄캄함은 막막함을 견디는 힘이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수평은 쉽게 안식을 허락하지 않는다

수평은 숨이 찰 때 수직을 꿈꾼다

 

철길 옆에 대나무가 자란다

지친 수평이 세우고 싶어하던 마음이다

수직으로 뚫린 길은 마디가 있어서 쉬어갈 수 있다

대나무는 푸른 마음속에 소리를 가두고 새를 부른다

수직 터널 속으로 달려가는 것은 숨찬 기차가 아니라

한 칸씩의 악보가 그려내는 잔잔한 리듬이거나 침묵이다

 

대나무의 직립은 인간의 마지막 숨소리를 닮아 있다

수평의 길을 일으켜 세워 납골묘처럼 칸칸이 나누어놓은

저 어둠의 속내를 누가 알까

 

어둠이 외롭지 않은 건

캄캄한 밤하늘의 별을 볼 수 있다는 것,

오늘도 터널 속으로 기차는 숨차게 달려간다

 

임종하실 때 병원 침대 위에 누운 채

마지막 숨 몰아쉬시던 아버지의 기적소리가 들린다

 

 

 

잉크

박남희

 

잉크는 강이다 이따금씩 아름다운 산이나 들판을 끼고 휘어져 흐르거나 거대한 모래산을 만나 미세하게 갈라져 흐르기도 하지만 그런 것들의 세목에 집착하지 않는다 잉크의 심연에는 이름을 알 수 없는 수많은 물고기들과 돌들과 수초들이 어우러져 춤을 추고 있다 잉크는 가끔씩 그것들의 이름을 자유롭게 부른다

잉크는 건너야 할 강이다 배를 타고 건너거나 수영을 하거나 다리를 놓아 건너는 방식으로는 건널 수 없는 강이다 잉크는 눈 깜짝 할 사이에도 건널 수 있지만 평생을 걸려도 건널 수 없는 난해한 강이다 잉크는 날개로도 건널 수 있고 빛으로도 건널 수 있다 물론 어둠으로도 건널 수 있다 그런데 건널 수 있고 없고는 주체의 찰나가 결정한다

내가 너를 함부로 건널 수 없고 네가 나를 함부로 건널 수 없듯이 잉크도 그렇다 잉크를 건널 수 있는 방식은 관계이다 새의 날개가 좌우 양쪽에 있는 것은 관계 때문이다 빛과 어둠도 수많은 것들과 관계되어 있다 관계가 부력을 낳고 속도를 결정한다 그것이 명확한 것인지 은밀한 것인지를 결정하는 건 빛과 어둠의 몫이다

잉크는 건너지 않아도 되는 강이다 그냥 신비한 관계 속에 들어 출렁이면 족한 강이다 그래서 잉크는 마르지 않는 강이다

 

 

 

저녁에게는

박남희

 

저녁에게는 말을 아끼자 그 대신 빛을 풀어놓자 내 안에 꽁꽁 묶여있던 빛, 어둠이라고 말을 할 수도 없고 달이나 해를 떠올릴 수도 없는, 어떤 말의 모습을 한 저녁에게는 넓은 백지를 하나 던져주자 그러면 백지의 옷을 입고 수많은 빛을 퉁겨내겠지 퉁겨낸 빛이 어떤 말을 하겠지

저녁에게는 한 번쯤 울어주자 그 대신 사소한 질문은 하지 말자 저녁이 저녁답게 어두워지도록 그냥 내버려 두자 저녁을 향해 뒷산의 갈대들을 조금씩 흔들어주자 갈대를 흔들어 붉게 충혈된 산자락의 눈시울을 달래주자

저녁에게는 한밤중이나 새벽을 물어보지 말자 새벽이 감추어둔 것들의 일기장을 궁금해 하지 말자 저녁 하늘을 날아갈 새들의 행방을 미리 예측하지 말자 저녁이 그냥 저녁의 보폭으로 은은하게 걸어갈 수 있도록 하늘에 징검다리 별빛 몇 개 놓아두자

그리고 세상의 모든 불빛에게 스스럼없이 제 몸을 내어주는 저녁에게는 더 이상 도처에서 깜박이는 불빛의 주소를 묻지 말자 그 불빛들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궁금해하지 말자

 

 

 

저녁의 맛

박남희

 

노을 속에서 저녁을 더듬어 찾았다 저녁이 없었다 그 대신 어둑한 고양이 같은 걱정이 웅크리고 있었다 걱정이 저녁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녁이 되면 어둠이 뻑뻑한데 왠지 노을은 달콤했다 신기한 저녁의 맛이라고 했다 노을이 어둠에 쏟아놓은 것들이 이렇게 달콤한 맛을 내는 줄은 몰랐다

어디선가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노을 냄새를 아는 고양이라고 했다 노을 주변에는 어둠이 엷어져 있었다 고양이의 짓이라고 했다 어둠을 훔쳐 먹는 일이 노을을 키우는 일이라는 것을 고양이는 아는지 냄새는 밤마다 분주했다

노을이 제일 두려워하는 것이 저녁의 맛을 누설하는 일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그동안 아무도 저녁의 맛을 이야기해주지 않았으므로 노을 근처에서 저물 줄만 알았다 저물면서 그림자가 길어질 때면 고양이 소리가 들렸다 고양이는 노을 속에서 쥐 대신 저녁을 뒤적이고 있었다 저녁은 쥐처럼 숨을 구멍이 없다 구멍이 누설한 비밀의 맛, 고양이의 탈을 쓴 걱정은 그 맛을 너무 잘 안다

 

 

 

저녁으로 가는 문장

박남희

 

어느 날 나는 노을이 물든 저녁 들판을 바라보다가 문득 저녁이라는 말에 사무쳤어

저녁이라는 말속에는 온 우주를 아우르는 메타포가 들어있을 것 같아,

해도 달도 별도 저녁에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고 빛과 어둠이 만나서 한 몸이 되는 곳이 저녁이라는 것과 이 땅의 모든 길들이 서울로 향하듯 이 땅의 모든 문장이 저녁으로 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어

경부선 고속도로를 달려 저녁에 이르는 것들이나 하루의 노동 끝에서 저녁에 이르는 것들은 모두 하나의 문장 속 이미지이거나 목소리들이라는 사실이 전율처럼 내 가슴을 파고 들었어

 

그래서 나는 뉘엿뉘엿 기우는 저녁노을을 황홀한 눈으로 바라보았지 그것은 한 장의 아름다운 문장이었어

그런데 저녁은 어쩌면 미로 같은 곳이라는 것도 알았어 저녁으로 가는 문장들은 저녁 속의 마침표를 찾아서 가지만 그들은 마침표 뒤에 숨어 있는 또 다른 문장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어

심지어 문장이 끝난 곳에 있는 여백도 하나의 문장이라는 것과, 저녁 끝에 저녁이 있고 그 끝에 다시 문장이 이어져 있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어 사람의 몸이 저녁으로 가는 수많은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도,

 

저녁은 뜨겁지도 않고 환하지도 않지만 지친 것들에게 잠을 준비해주고

둥지를 마련해 주기도 하는 아름다운 마음씨를 가진 문장이라는 것과,

저녁노을이 왜 그렇게 아름다운지를 알 수 있다는 듯,

눈이 어둑한 새 한 마리 유서 같은 울음 한 마디 남겨 놓고 어디론가 날아갔어

 

그런데 난 읽으면 읽을수록 저녁이라는 문장이 난해했어

가령 우리 몸에서 입이 아침이고 항문이 저녁 같은 거라면 아침을 지나온 것들이 저녁에 이르러 왜 냄새가 나는지 난 냄새의 메타포를 알 수가 없었어

저녁에 이르면 왜 수많은 것들이 냄새를 피우는지 냄새가 마침표를 지우려고 하는 건지 마침표가 썩어서 냄새가 나는 건지 알 수 없었어 아기가 아장아장 기어서 저녁에 이르는 동안 발에 왜 무좀이 걸리고 냄새가 나는지 왜 지구는 불순한 가스들로 가득 차 있는지 그러면서 왜 점점 뜨거워지는지 나는 어느 날 문득 저녁을 향한 난독의 내 표정을 읽고 있었어

 

저녁 하늘을 흐르는 달빛문장과 그 끝에 찍혀진 수많은 별들의 마침표들이 어울려 반짝이며 새로운 새벽을 찾아가고 있는 줄도 모르고,

 

 

 

저수지의 마음

박남희

 

물을 가두어두려는 것이 아니다

그 속에 물고기를 기르려는 것이 아니다

그 위에

산을 드리우고 하늘을 드리우고

한 시절을 풍미하려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다만

갇혀서 아우성치는 것들에게

오래오래 숨죽여 온 것들에게

힘겨웠던 과거보다도

꿈 같은 미래보다도

스스로 출렁이고 싶어 하는 잔잔한 물살의 춤을

그 영원한 현재를 그대로 보여주고 싶을 뿐이다

 

다만 그것뿐이다

 

 

 

적빈(赤貧)

박남희

 

겨울을 비우기가 쉽지 않다

봄빛 화사한 꽃잎 다 털어내고

여름의 더운 말씀까지 다 비워내고

바람결 우듬지에 매달려있던 가을까지

탈탈 털어내고

환절(換節)의 발목으로 예까지 왔는데

 

계절의 마음이 먼저 꽁꽁 얼고

함박눈이 온통 마을을 덮어버려

겨울을 비우기가 쉽지 않다

 

갑작스러운 한파 주의보에

털신에 방한복까지 걸치고도 몸이 떨려와

온 몸의 들판이 온통 한겨울인데

 

눈 덮힌 산자락 비집고 나오는

얼음새꽃 한송이, 그 맑은 미소에

 

, 여름, 가을보다 더 깊은 가난의

겨울을 비우기가 쉽지 않다

 

 

 

절경이 된다는 것

박남희

 

버리고 온 것은 다 절경이지요

등으로 읽어내던 파도소리

버리고

어쩌다 떠나온 것은 모두 절경이지요

 

절경은 왜 모두 절벽을 숨기고 있는지

아찔한 순간이 구름처럼 부풀어 오를 때

어디선가 날아드는 날개가 보이나요

 

절경은 동굴의 언어를 가졌어요

날렵한 것들만 드나들 수 있는

바람의 언어

그 사이로 낯선 어둠이 들면

노을 진 파도는 점점 위험해지지요

 

절경은 절경 끼리 동굴의 언어로 말해요

햇빛을 버리고 수평선을 버려도

끝내 버릴 수 없는 것이 동굴의 언어에요

절벽과 절벽 사이에서 유난히 황홀한 것이

파도소리에요

 

동굴에도 낮과 밤이 있어요

동굴은 우주에요

여기선 해를 밤의 무덤

달을 낮의 무덤이라고 불러요

 

동굴이 절경이 된 것은

두 개의 무덤 때문이에요

 

두 개의 무덤이 유난히 아름다워

해와 달이 번갈아 뜨고 지는

다도해가 있다는 거 아세요

 

그곳에 가보면

그곳이 왜 절경인지 알 거에요

 

 

 

종이의 세계

박남희

 

찢어지는 기억으로 과거를 만들 수 있을까

시간은 어쩌면 종이의 세계

 

찢었다가 붙이고 낙서를 했다가 지우고

타이레놀을 내장에 심으면

종이꽃이 피어날까

 

종이를 접었다가 피면 흔적이 남는다

흔적과 흔적이 만나는 곳을 모서리라고 하면

모서리가 모여서 기억이 된다

 

종이의 세계에서

평면과 입체는 같은 것이다

마천루를 걸으면서 야생의 들판을 상상하는 일은

종이의 세계에서 훨씬 용이하다

 

마천루의 어느 구석을 살펴보아도

종이의 세계가 있다

라면박스를 세워 벽을 만들고

그 안에서 새우가 된 시간이 있다

 

얇은 종이로 두꺼운 벽을 떠받치는 일은

그늘이 하는 일이다

그늘에게는 종이벽이 때때로 노마드 글램핑이다

 

허리 굽은 수레에 실려 언덕을 넘어가는 종이들은

스스로 빛을 접어서

영원의 그늘을 만들기도 한다

 

영원의 그늘은 더 이상 찢어지지 않는다

 

 

 

죽은 새를 바라보는 여름

박남희

 

내 앞에 죽은 새가 하나 놓여있다 나는 여름이다 죽은 새를 바라보고 있다 내 눈은 뜨겁고도 불온하다 수시로 부패를 꿈꾼다 썩기 위해, 썩어서 냄새의 날개를 펼치기 위해, 썩은 냄새로 날개가 버린 공중에게 새롭게 말을 걸기 위해, 썩은 냄새로 말하기 위해, 개미처럼 들끓는 말의 미래를 창조하기 위해, 내 몸은 점점 뜨거워진다

죽은 새가 꿈틀거린다 부패의 힘으로 냄새는 점점 가벼워진다 나는 봄을 버린 여름이다 봄을 기억하지 않기 위해 죽은 새를 바라본다 그러면 내 눈은 더욱 더 불온해진다 나는 가을과 겨울을 한꺼번에 껴입은 여름이다 그래서 죽은 새가 필요하다 죽은 새를 꿈틀거리게 하는 일이 중요하다

당신들은 지금 이상한 여름을 바라보고 있다 가을과 겨울을 한꺼번에 껴입고 죽은 새의 죽음을 거부하고 있는,

 

 

 

중독

박남희

 

참새가 날아가다 나무에 앉는다

나무는 참새를 아주 붙잡지 못한다

참새는 선뜻 구름위로 날아가

그 위에 앉지 않고

다시 땅으로 내려 앉는다

무게에 중독되어 있다

 

생각해보면

나무가 기억하는 건 참새가 아니라 흙이다

나무는 제 몸에 무수한 빛의 전율을 느끼며

흙에 오래오래 뿌리를 박고 있다

흙은 나무가 온 몸으로 느끼는

짜릿한 감촉을 즐기고 있다

 

나무가 흙에 중독되어 있는 동안

참새가 구름까지 갔다가 땅으로 내려앉는 동안

지구는 참새와 나무와 흙을 떠메고

자신이 중독된 것들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어디론가 쏜살같이 달려간다

 

지구는 1년에 태양 주위를 어김없이

한 바퀴 돌면서 제 몸에 피톨처럼 숨어있는

문명에 중독된 문자들이

왜 수많은 나무들 사이를 오가는지

그 때마다 근질근질 제 몸이 왜 자꾸 가려운지

곰곰이 생각한다

 

태양이 지구를 쉽게 떠나지 못하는 건

지구가 가려운 제 몸을 북북 긁고 있는 것이

애처롭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지울 수 없는 주소

박남희

 

길을 지우면서 눈이 내린다

눈은 내리면서

오랜 시간 떠다니던

공중의 기억도 지워버린다

 

길에도 주소가 있다

시작이라는 주소 혹은

끝이라는 주소,

그리움이라는 주소 혹은

아픔이라는 주소,

 

그런 주소들은 문득

길가의 풀이나 나무로 자라나

자신만의 표정으로 흔들리고 있다

 

누군가 그리운 날,

그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추억이라는 주소가 어른거리기도 한다

 

지금 눈은

길을 지우고

제 마음의 상처를 지우기 위해서 내리지만

눈이 녹으면

오랜 그리움의 길을 걸어갔던

낯익은 주소들이

꼬물거리며 아지랑이로 되살아날 것이다.

 

 

 

지퍼를 이해하는 법

박남희

 

나는 단추세대이지만 지퍼를 이해하는 법을 배웠다

어린 시절 노는데 미쳐있던 나는

하루가 멀다 하고 단추를 잃어버렸다

단추는 나를 버리고 어디론가 물방개처럼 돌아다녔다

처음에는 잃어버린 단추가

무척 궁금했지만 차츰 단추를 잊었다

그 후 어머니는 단추 대신 지퍼가 달린 바지를 사주셨다

지퍼는 기차 철로 같아서 금방 칙칙폭폭 무언가 소리치며

어디론가 달려갈 것만 같았다

내 젊은 밑천도 그 속에 갇히면 조용했다

그런데 나이 들면서 지퍼가 나를 부끄럽게 했다

지퍼는 내 사춘기를 가두고 나를 팽팽하게 심문했다

내 사춘기는 지퍼 밖의 세상이 그리웠지만

나갈 수가 없었다 그렇게 칙칙폭폭 봄이 가고 있었다

어느 날 문득, 지퍼는 내 나이를 가지런히 채우고 있었다

내 나이는 지퍼 속에 갇혀서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지퍼 한쪽이 툭, 터졌다 그 속으로 어둑어둑 내 나이가 보였다

나는 갑자기 단추가 그리워졌다

단추가 드나들던 구멍이 더욱 다정하게 느껴졌다

지퍼를 진정으로 이해하는 법은

단추를 이해하는 것이라는 걸 알았다

그동안 내가 잃어버렸던 단추들이

지퍼의 어긋난 이빨들과 내통하고 있었다는 것을 안 것은

지퍼가 아주 망가져 바지를 통째로 버린 후이다

 

 

 

착시

박남희

 

나는 그녀를 만나기 위해 부산행 열차를 타고 가며

쌀을 살로 발음하는 그녀가 왜

스트레스를 받을 때 생쌀을 먹는지

나는 어린 시절 배고플 때 왜 가끔 꽃을 먹었는지

쌀과 꽃을 바라보는 그녀와 나의 눈은

왜 가끔 서로 겹쳐지는지, 그러다

배고픈 쌀과 뚱뚱한 꽃들은 왜 서로를 경멸하는지

 

도대체 시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쌀에서 왔다가 꽃으로 가는 건지

그 반대인지

꽃과 쌀의 종착역은 어디인지...

 

(나는 잠깐 졸았었나 보다)

 

나는 그녀를 만나고 돌아오면서

내가 타고 있는 열차와

그녀가 타고 갔을 버스 위에 떠가던 구름이

솜다리꽃인지, 쌀밥인지

 

내가 어릴 때 배고팠던 햇빛들에게

왜 쌀 한줌, 꽃 한 송이도

던져주지 못했을까를 생각하다가

 

(나는 또 잠깐 졸았었나 보다)

 

내가 꾸벅꾸벅 조는 사이에 시가 되어 버린

부산발 서울행 시는 쌀을 살로 발음하며 달릴까

배고플 때 꽃을 먹어본 경험을 기억해내고 있을까

그녀의 살은 지금쯤 집에 도착해서 밥통 안에서

쌀밥으로 다시 태어나고 있을까를 생각하다가

 

(또 잠깐 졸았었나 보다...나는 늘 졸음이 문제다)

 

쌀과 꽃이 모두 어두워진 망상 속에서

왜 꽃과 쌀이 가끔은

같은 것으로 보이는지를 곰곰이 생각하며

부산발 서울행 가 덜컹거리며 달리고 있었다

 

 

 

창백한 푸른 점

박남희

 

모든 것은 점 안에 있다

 

63 빌딩도,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도

진시황도 광개토대왕도 크레오파트라도 제우스도

빌게이츠의 모든 재산도 마릴린 먼로의 누드도

동성애자들의 메카 샌프란시스코도, 시드니도

결국엔 점으로 수렴된다

 

점은 마침표다 점은 먼지다 점은

피부과에서 레이저로 간단히 뺄 수 있다

창백한 것일수록 빨리 빼버려야 한다

 

마침표 속으로 먼지 속으로 몰려드는

유태인 학살, 광주학살, 911테러

화성 연쇄 살인사건의 토막 난 비밀들

 

명왕성 근처에서 보면 지구가

창백한 푸른 점으로 보이는 것은

작은 점에 불과한 지구가

어느 별에게도 말할 수 없는 큰 비밀을 가지고

덜덜 떨고 있기 때문이다

 

악몽이 멈추지 않고 반복되듯

마침표이면서도 쉽게 마쳐지지 않는

먼지이면서도 아주 사라지지 않는

견딜 수 없이 뼈아픈,

 

저 작은 점은

 

과연 누가 써 놓은 어떤 문장의 마침표일까?

 

 

 

창틀 안의 얇은 구름

박남희

 

나는 깨어지기 쉽다

그래서 내 시간은 얇다

내 생각은 금이 가기 쉽다

불안은 나를 쉽게 보여주지 못한다

 

나는 무언가로 압축되어 있다

그 속에 예리한 칼을 숨기고 있다

내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누군가 나에게 충격을 가하면

나는 수많은 나로 나뉘어진다

 

나는 안개의 혈통에서 태어났다

투명할 수도 불투명 할 수도 없는

내 속내를 아는 것은 무모하다

나는 벽도 아니고 문도 아니다

 

강물도 압축하면 내가 될 수 있고

나를 풀어내면 강물도 될 수 있다

흐르는 것과 멈춰있는 것은

동전의 양면처럼 한 몸이기 때문이다

 

나를 붙잡아 주는 것은 틀이 아니다

틀은 나를 가두어 강요하거나

잠시 장소를 바꾸어줄 뿐

나를 수시로 불안하게 한다

 

나는 보이지 않는 것들 사이에

고정되어 있다

숨 쉬는 것과 숨 쉬지 못하는 것

깨어지는 것과 깨어지지 않는 것

사라지는 것과 사라지지 않는 것

그 사이에 내가 있다

 

불안이라는 이름으로 나는

바람을 흔들고

소리를 흔들고 침묵을 흔든다

불안이 나를 고정시켜준다

무언가 심하게 흔들고 싶어하는 나는

창문틀을 흔들고

집을 흔들고 지구를 흔들다가

한 순간 쨍, 하고 깨어지는 특권이 있다

 

나를 함부로 건들거나 들여다보지 마라

나는 극히 불친절한 짐승이다

구름 속에 메두사의 얼굴이 있다

 

 

 

처마 끝

박남희

 

사랑의 말은 지상에 있고

이별의 말은 공중에 있다

 

지상이 뜨겁게 밀어 올린 말이 구름이 될 때

구름이 식어져서 비를 내린다

 

그대여

이별을 생각할 때 처마 끝을 보아라

마른 처마 끝으로 물이 고이고

이내 글썽해질 때

물이 아득하게 지나온 공중을 보라

 

이별의 말은 공중에 있다

공중은 어디도 길이고

어느 곳도 절벽이다

공중은 글썽해질 때 뛰어내린다

 

무언가 다 말을 하지 못한 공중은

지상에 닿지 않고 처마 끝에 매달린다

그리곤 한 방울씩 아프게

수직의 말을 한다

 

수직의 말은 글썽이며 처마 끝에 있고

그 아래

지느러미를 단

수평의 말이 멀리 허방을 보고 있다

 

구릿빛 지느러미는 비린내가 나지 않는다

 

 

 

청중을 들이는 시간

박남희

 

비가 온다 사위가 소란스럽다 비는 습기와 함께 이야기를 몰고 다닌다 이야기는 때때로 굵고 가늘다 그 이야기를 누군가 듣고 있다 이야기 속에 청중이 숨어 있다 청중은 이야기를 담는 그릇이다 그 그릇은 종종 흘러넘치거나 깨어지기도 하지만 그릇은 때로는 우주처럼 커져서 우주의 온갖 소리들을 담아내기도 한다

하지만 청중은 종종 귀찮거나 무서울 때가 있다 내밀한 이야기를 엿듣고 싶어 하는 청중은 확실히 부담스럽다 소리가 있는 곳에는 늘 청중이 있다 청중에게는 소리가 생명이다 비밀스러운 이야기는 청중을 원하지 않지만 청중은 귀찮게도 소리들을 따라다닌다 이럴 때 소리와 청중의 미묘한 숨바꼭질이 시작된다

내가 시를 쓰는 시간은 청중을 들이는 시간이다 그때는 내 속의 내밀한 이야기까지 청중에게 들려준다 그러면 청중은 뜻밖에도 내 속의 은밀한 이야기를 은유의 목소리로 도란도란 이야기 한다 내 안에 오래 숨어있던 목소리들도 청중의 입을 통해서 나오면 시가 된다 청중은 메아리처럼 겹의 목소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을 하는 시간도 청중을 들이는 시간이다 사랑을 할 때는 제 안의 소리들이 터져나가 스스로 청중을 찾아간다 이 때 청중은 사랑을 담는 그릇이다 그 그릇은 사랑의 소리를 듬뿍 담아 팝콘처럼 그 소리를 뜨겁게 달구어 꽃을 터트린다 봄의 들판에 꽃들이 피어나는 것은 나무들이 스스로 제 안에 청중을 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때 나무들은 꽃을 피우면서 제 안에 수많은 이야기를 거느리게 된다

 

 

 

추상에서 구상에 이르는 길

박남희

 

구름이 추상이라면

창밖의 저 비는 구상에 이르는 몸짓

빗물이 닿아 싹이 트고 꽃이 피는

오래된 습관의 힘이 아니고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저 구상의 꿈틀거림

 

어린아이가 엄마 뱃속에서 나와

터뜨리는 울음이

추상과 구상을 가르는 경계의 기호라면

어린 아이가 무럭무럭 자라

노년에 이르는 길은

오히려 구상에서 추상에 이르는 길

 

아마도 신은 멀리서 미술관 같은 세상을 바라보며

하루에도 몇 번씩 추상과 구상 사이의

운필법과 바람의 꿈틀거림을 말없이 읽고

구상에서 차츰 추상으로 향하는 지구의 모습을

흘끗 쳐다보았으리

 

늙는다는 것은

구상에서 추상에 이르는 것

그것을 거스르는 일은

거울 속에 숨어있던 세상을 들추어내는 것뿐,

 

그동안 지구는 알고 있었을까

지구의 거울인 달이 저토록 환한 것은

지구가 잃어버린

추상에서 구상에 이르는 길을

지구에게 일깨워주기 위한

거울의 눈물겨운 몸부림이었다는 것을,

 

 

 

태초에 신은 오독을 창조했다

박남희

 

그래서 인간은 태초부터 세상을 제각각 다르게 읽는다 세상뿐만 아니라 스스로의 몸조차 오독한다 오독은 인간생존의 필수 조건이다 그리하여 어둠은 어둠끼리 물방울은 물방울끼리 책을 읽듯 서로의 몸을 섞어 신이 만들어 놓은 세상의 질서와 경계를 허물고 그들만의 새로운 질서를 창조했다. 그들에게는 오독이야말로 빛나는 창조성이다 그들의 문법은 세상에서 새롭게 빛났으며 모든 피조물들이 오독을 통해 새롭게 신이 되었다

비가 온다 태초에도 그렇게 비는 내렸으리라 그때도 개굴개굴 개구리는 또 논배미에서 그렇게 울었으리라 그러나 이 땅의 창세기는 갔다 그리고 창세기는 또 이렇게 왔다 물질이 물질을 만들고 그 물질이 또 다른 물질을 만드는 끝없는 자기증식의 법칙이야말로 창조의 제일원리이다 오독을 통한 자기 증식, 오독을 통해서 논바닥의 벼는 자라고 세상은 시끄럽고 그래서 살만하고 행복하고, 행복이 불행이고 불행이 행복일 수 있는 오독의 법칙 아래서

우리 모두는 오독의 주인이다 이 땅의 모든 길들은 누군가 읽고 간 문장이다 그래선 날 밝으면 새로운 길이 뚫리고 길로 갖가지 옷을 걸쳐 입은 단어들이 오독의 표지판 쪽으로 달려간다 지금 빗방울 후둑이며 나를 읽고 세상을 읽고 있는 저것들, 나는 그들에게 내 몸을 맡긴다 이 땅의 새로운 창세기를 맡긴다 태초에 오늘 또 그렇게 시작됐다

 

 

 

터널들

박남희

 

뚫려 있는 것이 어둠인 것들이 있다

나를 뚫고 너를 뚫고 하늘을 뚫고 바다를 뚫고

바람은, 새들은, 물고기들은 그렇게 돌아다녔을 것이다

 

그들이라는 것들의 세계는, 뚫려 있으나 어둡다

터널을 뚫는 일이 어둠을 만드는 일임을

천성산의 도롱뇽들은 알고 있었을까

속도를 위해 기꺼이 몸을 내어주는 것들,

어둠으로 숭숭 뚫린

흙과 공기와 물들의 표정을 읽는 일이

언제부턴가 내 일처럼 느껴졌다

 

내 몸에는 얼마나 많은 터널이 존재할까

뚫려 있어서 어두운 것들의 역설로 인해

내 마음은 늘 불편하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불편한 마음이 터널을 만든다

나는 사랑하면 할수록 내가 사랑한 것들이 불편하다

그들 속에 내가 그동안 무수한 터널을 뚫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 터널들로 인해서 시인이 되었다

불편했던 터널의 은유를 알게 되었다

 

어렴풋이 나는 느낀다

내 불편한 마음이 여전히 사랑해야 할 것은

무수한 터널을 뚫으며 어두워지는 것들이라는 것을,

 

멀리 새 한 마리, 터널을 뚫고 어디론가 날아간다

 

 

 

테두리를 본다는 것

박남희

 

그는 알이 없는 안경을 끼고 세상을 본다

 

멋을 위한 것일까

무슨 의미가 있을까를 생각해보면

희뿌연 달무리가 떠오른다

달에게 달무리는 왜 필요할까를 생각해보면

안경 테두리의 효용을 이해할 수 있다

 

테두리로 본다는 것

 

눈과 세상 사이가 너무 황홀해

그 사이에 유리는 빼고 그냥 테두리로

세상을 보고 눈을 본다는 것

 

그냥 맨눈으로 보는 것이 너무 죄송해서

테두리로 보는 것의 속내를 이해할 수 있다

 

눈부신 세상을 바라볼 때

까만 테두리가 있어 세상이 또렷이 보이는

그런 당위성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

테두리로 본다는 것

 

그것에는 왜 유리가 없느냐고 나무랄 수 없는

유한의 광활한 바깥이 있어

달보다 달무리가 아름다운 것이라고

 

토성이 천왕성을 보듯

그는 알이 없는 안경을 끼고 세상의 바깥을 본다

 

 

 

통증은 허공으로부터 온다

박남희

 

어깨와 허리가 결리기 시작한 것은

사고가 난 후 며칠 만의 일이다

큰 차와 작은 차의 충돌이나

피해자와 가해자라는 입장만으로는

통증이 잘 설명되지 않는다

 

통증은 허공으로부터 온다

허공끼리의 충돌이 통증을 불러온다

허공은 무수한 통증을 숨기고 있다가

딱딱한 물체끼리 충돌하는 순간

딱딱한 감촉 속으로 스며들어온다

 

공중에 떠돌아다니는 통증은

이전에 누군가 버린 것들이다 통증은

스스로가 있던 몸의 부위를 잘도 기억해낸다

허공과 허공이 부딪히는 순간

본래의 자리를 찾아가는 기억합금처럼

통증은 딱딱한 몸으로 스민다

 

딱딱해진다는 게 문제다

몸은 어떤 물체와 충돌하는 순간 딱딱해진다

부드러움을 잃는다는 것이 사실은 통증이다

사고가 난 후 며칠만에 찾아온 통증은

이전 누군가의 상처와 이별하느라고

무척이나 힘들었을 것이다

 

내 안에서 와글와글

통증이 새로운 언어를 찾는 소리가 들린다

시가 써질 모양이다

 

 

 

박남희

 

, 너는 내 몸의 일부이고 전부이다 내 몸에는 수많은 또 다른 네가 존재하지만 너와 나는 하나이다 너는 내 몸 속에서 어디론가 이동하며 충돌하고 요동친다 그러면 내 몸 속에서 지진이나 해일이 생기고 나는 언뜻언뜻 내 안의 불을 본다 너는 내 몸 속에서 너만의 판을 짠다 너는 내 몸에 은밀한 불의 지도를 그리고 있다

, 사람들은 너를 아무것도 씌어있지 않은 종이라고 말한다 스티븐 핑거는 네 이름을 빈 서판이라고 명명했지만 너의 본성은 비어있는 것이 아니다 고상한 야만인들이 살아있다 해도, 기계 속의 유령이 존재한다 해도 너는 빈 것이 아니다 판, 나는 너를 안다 이미 네 안에 그려져 있는 지도를 안다 판, 내가 너를 사랑하는 한 너는 더 이상 빈 종이가 아니다 나는 네 몸에 숨겨져 있는 사랑 시 한 편을 순식간에 읽어낼 수 있다

, 너는 재래시장을 좋아한다 너는 네 몸 위에 올려진 것들이 비린내를 풍겨도 상관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수많은 너를 사이에 두고 이리 저리 돌아다니지만 다양한 물건 밑에 숨겨진 네 본성을 읽어내지 못한다 가난을 가난으로 여기지 않고 묵묵히 떠받치고 있는 네 시간의 의미를 모른다 하지만 나는 안다 애호박 몇 개와 풋고추 몇 개로도 한나절의 시장 바닥을 넉넉히 견디던 노모의 쪼글쪼글한 손금이 네 몸에 새겨져 있다는 것을,

, 사람들은 너를 고지식하다고, 무언가와 아주 닮았다고도 말하지만 네 낱개의 숨소리는 한 송이 꽃으로 피어나 세상을 밝힌다 사람들은 종종 너를 난장판이라고 놀려대지만 자세히 보면 너는 꽃판이다 너는 한때 그리스 신화 속에서 반인반수의 목신(牧神)의 이름으로 사람들을 공포에 몰아넣기도 했지만, 그것은 모두 네 안에 숨어있던 꽃의 본성에서 비롯된 일이라는 것을 나는 안다

, 이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네 이름이 단 하나의 내 이름이라는 것을 나는 믿는다 수많은 생각과 편견 속에 감추어져 있는 네 이름은 이제 영원한 내 이름이다 내가 너무나 사랑해서 이제는 내 몸과 하나가 된 판, 너는 영원히 내 삶의 꽃판이다

 

 

 

폐차장 근처

박남희

 

이곳에 있는 바퀴들은 이미 속도를 잃었다

나는 이곳에서 비로소 자유롭다

나를 속박하던 이름도 광택도

이곳에는 없다

졸리워도 눈감을 수 없는 내 눈꺼풀

지금 내 눈꺼풀은

꿈꾸기 위해 있다

나는 비로소 지상의 화려한 불을 끄고

내 옆의 해바라기는

꿈같은 지하의 불을 길어 올린다

비로소 자유로운 내 오장육부

내 육체 위에 풀들이 자란다

내 육체가 키우는 풀들은

내가 꿈꾸는 공기의 질량만큼 무성하다

풀들은 말이 없다

말 없음의 풀들 위에서

풀벌레들이 운다

풀벌레들은 울면서

내가 떠나온 도시의 소음과 무작정의 질주를

하나씩 지운다

이제 내 속의 공기는 자유롭다

그 공기 속의 내 꿈도 자유롭다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은 저 흙들처럼

죽음은 결국

또 다른 삶을 기약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이곳에서 모처럼 맑은 햇살에게 인사한다

햇살은 나에게

세상의 어떤 무게도 짐 지우지 않고

바람은 내 속에

절망하지 않는 새로운 씨앗을 묻는다.

 

 

 

푸른 화살표

박남희

 

사과나무 위에서 푸른 화살표가 기어간다

과녁을 향하여

과녁 너머의 세상을 향하여 기어간다

화살표가 구불구불 기어간다

허리를 접었다 펴며 과녁을 지우며 기어간다

 

신은 왜 그 많은 벌레들을 화살표로 만들었을까

화살표가 화살보다 느리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화살표 끝에 과녁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오산이다

화살표가 된 벌레들은 종종

이파리가 화살인지 과녁인지도 모르고 갉아먹어버린다

그런 다음 배부른 화살표는 느리게 느리게 기어간다

 

화살표는 화살을 꿈꾸지 않는다

화살표가 된 벌레는 속도를 의식하지 않는다

푸른 화살표의 행방은 빌헬름 텔도 카프카도 모른다

화살표에게는 도처가 과녁이고 과녁이 아니다

 

하늘에 화살표가 뚫고 지나간 구멍이 보인다

화살표는 구멍을 통과할 때마다 살이 찐다

그때 구멍도 살이 쪄서

하늘로 둥둥 환하게 떠오르기도 한다

살찐 구멍은 벌레가 어둠을 갉아먹은 흔적이다

 

화살표는 어둠 속 뻥 뚫린 구멍을 지나

환하게 환하게 광활한 우주의 어디론가 가고 있다

어둠은 화살표의 속도도 행방도 모른 채

제 살을 기꺼이 화살표에게 내어준다

 

세상의 눈들은 그동안 수없이 화살표를 따라다녔지만

캄캄한 어둠이 자라서 탐스러운 과일이 된다는 것을 모른다

화살표가 화살을 꿈꾸지 않는 것은

그 속에 벌레의 생각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풍경의 저편

박남준

 

저기 좀 보아 두 손을 꼭 잡고 길을 가는 백발의 부부

서로의 지팡이가 되어 걸어가는 저 노을의 길을 보아

먼 길을 걸어온 사람들이 비로소 은빛 강물을 이뤄 흐르는 시간

굽이치던 물길도 이제 도란거리며 잦아들고

길섶에 흰 억새꽃들

푸른 숲을 지나온 바람의 노래로 노 저어갈 때

나도 알고 있다고 산 그림자 내려와 어깨 두르고 가네

 

 

 

풍선 치어리더

박남희

 

무슨 경기가 시작된 것일까 사거리 자동차들의 행렬

와글거리는 군중들의 물결, 빌딩들은 저마다 고개를 빼고

신기한 듯 치어리더를 쳐다보고 있다

 

개업식 때마다 등장하는

배꼽 내놓은 미니스커트 치어리더처럼

제 중심을 드러내지도 않으면서

리트미컬하게 추어대는 춤이 일품이다

 

뼈가 없기 때문일까

바람이 뼈인 저 치어리더는

광우병소고기 촛불집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연신 춤을 추며 저 혼자 신이 나 있다

 

광우병소뿐만 아니라 인간도 뼈가 늘 문제다

내 목이 곧은 것도 뼈 때문이고

하루 종일 일을 하다가 밤늦게야 몸을 누일 수 있는 것도

자고 일어나면 목이 아픈 것도 모두

뼈 때문이다 직립의 뼈는 함부로 눕지도 못한다

 

저 치어리더는 뼈있는 동물이 지니고 있는 비애를 아는지

바람으로 전 생애를 세우고 바람 따라 춤을 춘다

 

제 몸을 세워주는 바람이 언젠가 멈출 수밖에 없는

인공의 바람인 줄도 모르고

뼈있는 것들의 부자유를 향해 자유를 힘차게 흔들어댄다

 

저것은 어딘가 제 몸의 심지를 바람에 태우면서

잘못된 살과 뼈를 재협상하라고

등뼈도 없이 밤거리에서 흔들리고 있는 촛불을 닮아있다

 

 

 

해바라기

박남희

 

아름다움만으로는 모자라

너는 그토록 많은 씨앗을 품고 있었구나

 

나는 너를 볼 때마다 난해하다

 

신은 왜

태양을 지상으로 끌어내려

저렇듯 욕심 많은 여자로 만들어 놓았는지

 

해설핏한 가을날

아름다움으로도

열매로도 온전히 주목 받지 못하고

쓸쓸한 논둑길을 혼자 걷고 있는 아내여

미안하다

 

약속인 듯 네 몸에 심어두었던

촘촘한 말들이 미안하다

 

 

 

허공을 다른 말로 말하면

박남희

 

시는 완성되었을 때 시인을 떠나지

자신이 얼마나 불완전한 존재인지도 모르고

시인을 버리지

 

시인의 고정관념을 버리고

시인의 논리를 버리고

시인의 눈물을 버리지

 

버리고 버리고 더 이상 버릴 것이 남아 있지 않을 때

 

시는 바람에게 구름에게 새로운 말을 걸지

아무도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으로

잊힌 시인을 호명하듯

새들에게 절벽에게 말을 걸지

 

시인이 아주 보이지 않을 때

시는 비로소 자신의 불완전함을 깨닫고

스스로 시인을 찾아 나서지

시인의 눈물이나 논리의 반대방향으로

새로운 말의 질서를 찾아 나서지

 

거꾸로 말해도 바로 들을 수 있는 귀와

그림자로 말해도 실체를 볼 수 있는 눈과

점자로도 눈물을 읽어낼 수 있는 손톱을

이리저리 찾아 나서지

 

그게 허공이라는 거야

종종 환청이 혼잣말을 하지만

 

날개는 완성되었다고 생각될 때 나무를 떠나지

자신이 얼마나 불완전한 존재인지도 모르고

나무의 둥지를 버리지

둥지가 자라서 왜 울음이 되는지

새 속에 왜 시가 들어있는지도 모른 채

허공에 뾰족한 생각의 부리를 묻지

 

 

 

햇빛은 송곳이다

박남희

 

지상에는 뚫을 것이 너무 많다

 

꽃도 뚫고

바람도 뚫고

이슬도 뚫고

흙도 뚫고

 

뚫고

뚫고

뚫고

 

더 뚫을 것이 없이 모조리 뚫고

다 뚫었다고 생각되었을 때

그 생각까지도 뚫고 뚫는 것은

 

송곳이다

 

그런데 사실

송곳이 뚫은 건

 

흙도 아니고

이슬도 아니고

바람도 아니고

꽃도 아니고

 

꽃대궁이 버리고 간 허공이다

허공이 송곳에 뚫릴 때마다

 

없는 꽃이, 아프다

 

 

 

혼자만의 약속

박남희

 

연못가에서 물속을 가만히 들여다 본다

물이 흐려서 물속을 알 수가 없다

그때 갑자기 물 위에 파문이 인다

 

무슨 약속일까

 

물속과 물 밖이 내통하는 방식이 저런 것이라면

저것도 일종의 약속을 위한 시그널일 것이다

 

한때의 마음도 그렇다

파문은 안의 것이든 밖의 것이든

출렁이는 물살의 결을 느끼며

그것 그대로 간절한 한 때인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 그 시그널을 감지하고 반응하지 않는 한

파문은 저 혼자 둥글게 퍼져나가다가 이내 사그라진다

 

아무도 그 파문에 질문하지 않는다

혼자만의 약속이다

 

물 위로 낙엽이 하나 떨어진다

잉어라도 한 마리 물속에서 올라와

낙엽을 툭, 건드리기라도 해야 할 것 같은데

물속이 조용하다

 

낙엽은 조용히 혼자 물 위에 떠서

흘러가는 구름을 본다

 

그러나 낙엽은 혼자만의 약속이 아니라는 듯

꽃처럼 물 위에

온몸으로 물의 지문을 새긴다

 

 

 

화분 꽃

박남희

 

이름을 심은 게 아니었다 뿌리를 심었다

명분을 심은 게 아니었다 줄기를 심었다

배경을 심은 게 아니었다 꽃을 심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깜박 잊고 물을 주지 않았다

 

꽃이 시들고 꽃의 배경만 남았다

줄기가 마르고 대궁의 명분만 남았다

뿌리가 의식을 잃고 화초의 이름만 남았다

 

꽃 대신 화분이 아름다웠다

물을 주지 않은 손이 고왔다

물 주는 것을 깜박 잊은 생각이

뽀송한 가을 같았다

 

화분 속 흙의 명분은 충분했다

화분을 꽃으로 만들기 위해

흙은 화분을 끝내 이탈하지 않았다

 

화분꽃은 물을 주지 않아도 죽지 않았다

꽃이 없어도 꽃이 되는 법을 알고 있었다

뿌리와 줄기가 없어도

꽃 대신 배경만으로도 충분히 꽃이 되었다

 

 

 

화이트 노이즈

박남희

 

잠이 오지 않아 저 소리가 자장가로 들려

이쪽 소리를 놓으면 저 쪽 소리가 들리는

소리의 원근법

이 땅의 소리들이 혼자 살고 있지 않다는 걸

 

너에게 이야기 하면

불면이 올까

 

저 소리를 듣고 있으면

스르르 잠이 올까, 잠은 소리를 지우는 지우개

소리가 지워진 잠 속으로 들어가면

소리와 함께 아주 지워질까봐 불안해져

화들짝 또 다시 지워진 소리를 찾아 나서지

 

보라색 안 쪽의 소리들이

나를 흔들어 깨워 스르르 눈을 뜨면

세상의 온갖 소리들이 모여

하얗게 춤을 추는 거리가 보여

 

자동차들이 버리고 간 소리를

보도블럭이 먹고

내 구두는 보도블럭 속에 숨은 소리를 깨워

또각또각 걸어가고

그 소리를 잡기 위해 내 뒤에서

누군가 나를 따라오고

 

내 불안은 나보다 먼저 내 앞을 가로질러

어디론가 쏜살같이 달려가고

 

나는 불안이 버린 쓰레기

기억만 무성해 그 안에

주소를 알 수 없는 소리들을 키우지

 

 

 

화조도(花鳥圖)

박남희

 

꽃은 날개 없이 날아다니는 새이고

새는 날개로 춤추는 꽃이다

네가 나를 사랑했다면 너는 새이고 꽃이다

 

꽃을 품은 새는 향기로 날아서 천년을 산다

내가 너를 생각할 때마다

길가에 핀 작은 꽃잎들이 흔들리고

그 위에 앉았던 새는

천년을 날아서 너에게로 간다

 

너는 나에게 새의 울음소리를 내는 꽃이다

내가 너에게 날개를 이야기 했을 때

너는 꽃으로 붉게 울었다

그 때 꽃대가 흔들리고 새가 날아왔다

 

나는 지금 꿈꾸듯 한 필의 붓으로 너에게 간다

나의 몸짓이 농담(濃淡)이 없어 백묘법으로 너를 말하고

때로는 윤곽을 보여주지 않는 몰골법으로 너를 그려도

붓의 뒤에 숨은 나의 말은 여전히 한 편의 화조도여서

잠시 새가 꽃을 떠나거나 꽃이 새를 버리는 일이

영원한 이별이 아님을 나는 안다

 

너를 그릴 때 너는 내게 영원한 날개이고 꽃이지만

네가 울 때 내 몸은 너와 함께 흔들려

네 윤곽을 잃어버리기도 한다

그럴 때 나는 너를 달래듯

구륵법으로 네 윤곽을 먼저 그린다

그리고 비로소 그 안에 너를 색칠할 수 있다

 

네가 꽃의 향기와 날개의 몸짓으로 내게 온 것을

한 편의 그림으로 어찌 다 말할 수 있으랴만

내가 붓이 되어 너를 꿈꿀 때 몸은 여전히 황홀한 춤이다

 

 

 

환유 악기점

박남희

 

새를 말하려 하는 것이 아니다

시냇물을 말하려는 것도 아니다

 

새가 날아간 자리

시냇물이 흘러간 자리에 핀

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꽃이 시들어 떨어진 자리에 기어가는

개미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개미의 행렬을 따라가다가 만나는

노을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새가 날아가고 꽃이 진자리에도 끝끝내 남아

소리의 행방을 찾고 있는 그늘을 말하려는 것이다

조금 더 솔직히 말하면

그 그늘의 주인을 말하려는 것이다

 

이곳의 악기점엔 주인이 따로 없다 주인이 악기이고 악기점이다

온몸에 소리를 숨기고 울음을 참아온 구름에게도 동무가 있다면

그 동무도 악기점이다

 

푸름을 떠받치는 것이 그늘이다

그늘이 자라야 푸름이 무성해진다

악기를 켜는 일은 그늘 속의 소리를 찾는 일이다

그늘 속에서 오랫동안 잊고 산

어머니의 울음소리를 찾는 일이다

 

푸르다는 것은 그늘의 울음을 잊지 않는 것이다

그늘 속의 환유를 찾아 그 울음을 키우는 일이다

그리하여 울음 속으로 끝없이 미끄러지는 일이다

 

 

 

()의 지느러미

박남희

 

모처럼 교외 냇가에 나가 송사리 떼가 놀고 있는 것을 보았다

송사리 떼는 물살을 거슬러 오르다가 돌연 풀숲으로 숨었다

()을 본 것일까?

 

물고기들은 물살의 힘을 몸으로 느끼면서 물속을 헤엄친다

물살이 흘러드는 쪽에 무언가 있을 것이라는 환상이

물고기로 하여금 헤엄을 치게 한다, 물살이 환()을 불러온다

정자와 난자가 만나는 일도 아마 그럴 것이다

 

물고기들은 물속을 헤엄치다가 이따금씩 물 위로 뛰어오른다

물고기들도 가끔은 물 위의 세계가 그리운 것이다

하지만 환()이 거느리고 있는 것은 생보다는 죽음인 경우가 많다

물 밖의 세계가 그렇다, 쏘가리나 꺽지 같은

어비산(漁飛山)* 민물고기들은

물 밖의 생을 그리며 공중으로 날아오르려고 몸부림치지만

그들이 날아오른 곳은 종종 죽음의 땅이다

 

나는 오늘도 밤하늘을 보며

물고기자리 근처에 있는 환()의 지느러미를 본다

지상에서 을 꿈꾸다 죽은 것들로 이루어진 저 별들은

 

또 무엇을 향해 헤엄치고 있는 것일까

 

()의 지느러미가 수놓은 반짝이는 물살이

어두운 밤하늘을 이끌고 어디론가 가고 있다

 

* 어비산(漁飛山) : 가평과 양평 경계선에 있는 산으로 장마철에 고기들이 날아다녔다는 전설이 있다.

 

 

 

환절기의 신호등

박남희

 

너무 많은 눈빛 속에 내가 있다

행인 하나가 나를 보며 기침을 한다

내 몸의 빛깔은 수시로 변하면서

그가 지닌 감기의 종류를 진단한다

사람들은 곧잘

공기의 온도에 적응하지 못하고 감기에 걸린다

그렇지만 요즘 감기는

온도보다는 빛깔에 더 민감하다

 

사람들은 모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붉은 빛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있다

그들은 기침을 하면서 거리에 욕설을 내뱉는다

어디론가 건너가야 할 시간에

건널 수 없는 횡단보도를 향해 가래침을 뱉는다

 

나는 재빨리 내 마음의 표정을 녹색으로 바꾼다

사람들은 내 표정을 따라 횡단보도를 건너서

극장으로, 약국으로, 여관으로 같다

내 눈빛도 끌려간다

 

그들이 사라진 뒤

내 앞에 급정거해 있는 유리창들,

나는 재빨리 그 안을 들여다본다

내장도 욕설도 그 안에 있다

나는 그 동안

무모한 햇빛 속에 너무 아팠으므로

나를 환자로 깨닫는다

 

환절기의 사랑이란 결국

스스로를 거리에 세워 놓고

스스로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병이다

 

 

 

횡단보도의 날들

박남희

 

신발들은 어느새 횡단보도 앞에 서 있다

 

얼룩말을 키우는 횡단보도는

금방이라도 어디론가 달려갈 듯 하지만

신호는 자꾸만 바뀌고

신발들이 끝없이 밀려왔으므로

계속 주춤거리고 있다

 

신발이 횡단보도 앞에서 횡단을 하지 못하는 이유는

단지 신호등 때문은 아니다

신발은 횡단보도가 키우는 얼룩말을 본 것이다

어디론가 달려가다가 추춤거리고 누워있는 얼룩말

그 얼룩말의 미래를 본 것이다

 

신호등은 늘 바뀔 것이고

신호등을 무시하고 길을 건너던 신발이

얼룩말의 뒷발에 차여

얼룩말 울음의 반대 쪽으로 날아가고

얼룩말의 울음에 새로 상처 하나 생기고

 

신발들이 걸어가는 길에는 횡단보도가 너무 많다

그 옆의 가로수들은 여전히

횡단보도를 횡단하지 못하고 우두커니 서있다

 

신발이 없기 때문만은 아니다

나무들도 횡단보도가 키우는 얼룩말을 본 것이다

그 얼룩말이 달려왔을 수많은 울음의 시간과

그 위를 달려가는 굉음의 속도를 본 것이다

 

횡단보도는 속도를 어쩌지 못해서

제 안에 말을 키워

날마다 중얼거리며 스스로를 횡단한다

그러면서 너무 자주 바뀌는 신호등과

그 곁에서 추춤거리는 신발들을 본다

 

말은 흰색과 검은 색이 섞여있는

얼룩말일 때가 가장 위험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