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있는 곳에 신도 있다.
Lev. N. Tolstoy
초라한 어느 길가에 마르틴 아부제이치라는 구두장이가 살고 있었다. 창문이 하나밖에 없는 반지하의 작은 방이 그의 거처였다. 이 근처에는 구두때문에 두 번 마르틴의 손을 빌리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해도 좋을 정도다. 구두창을 갔다 댄 것도 있고 해진 데를 기운 것과 둘레를 다시 꿰맨 것도 있으며 그 중에는 가죽을 전체 새로 갈아 끼운 것도 있었다. 그래서 그는 창 너머로 기가 한 일감을 보는 때도 많았다. 주문은 많이 있었다. 그것은 마르틴이 정성스럽고, 재료도 좋은 것을 쓰며 삯이 싼데다가 약속을 꼬박꼬박 지켰기 때문이다. 손님이 원하는 기한 안에 될 일은 맡고 그렇지 못한 것은 겸손하게 거절했다. 이런 마르틴의 성격을 모두가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일이 끊일 사이가 없었다. 마르틴 아부제이치는 원래 착한 사람인데다가 나이를 먹으면서부터는 더욱 자신의 영혼을 생각하게 되어 한결 신께로 가까이 가고 있었다. 마르틴이 옛날 보조공으로 일하고 있을 때 아내가 죽었다. 그 후 세 살짜리 어린 아들을 두었을 뿐이다. 그들 부부에겐 어찌된 일인지 위에서부터 큰 아이들은 모두 죽어 버렸기 때문에 처음에 마르틴은 이 아들을 시골 누님에게 맡기려고 생각했으나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우리 아기 카피토시카를 남위 집에 맡기다니 마나 가엾은 일이냐, 차라리 내가 데리고 고생하자, 하고 생각을 고쳐먹었다.
마르틴은 주인 밑에서 떠나 아이와 둘이서 셋방살이를 했는데 마르틴의 운이랄까, 어렸던 카피토시카도 퍽 자라서 아버지의 심부름이라도 할 만해져 이젠 한결 안정되었다고 생각할 즈음에 병으로 앓아 눕더니 일주일가량 고열로 신음한 끝에 죽어 버렸다. 마르틴은 아들의 장례를 마치고 나자 완전히 실의에 빠졌다. 그런 나머지 하나님을 원망하게조차 되었다. 마르틴은 비참한 마음이 들어 제발 기를 죽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빈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리고 늙은 자기보다 어린 외동아들을 데려가신 하나님께 원망의 말을 하기도 했다. 마르틴은 교회에도 나가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트로이츠아에서 같은 고향의 노인이 마르틴을 찾아왔다. 이 사람은 벌써 팔 년째나 성지 순례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마르틴은 이 노인과 세상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자기 신상에 대한 푸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영감, 난 이제 산다는 게 싫어졌소. 그저 죽고 싶은 심정인데 심술궂은 하나님은 나를 데려가지도 않는다요.“
그러자 노인은 말했다.
"마르틴, 그건 잘못된 생각이야.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이러쿵저러쿵 비판할 수 없어. 무슨 일이건 우리의 생각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으로 결정되는 것이니까. 자네 아들은 죽었지만 자네는 살아야 하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네. 그것을 비관하는 것은 자네가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고려하기 때문이야."
"그럼 뭣 때문에 산다는 거요?"
하고 마르틴은 물었다. 그러자 노인은 말했다.
"하나님을 위해 살아야 해, 마르틴.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목숨이니까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이 도리가 아니겠나. 하나님을 위해서 살면 세상 걱정이 사라지고 모든 일이 편안하게만 생각되네."
마르틴은 잠자코 있다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하나님을 위해서 살다니, 도대체 어떻게 사는 거요?"
그러자 노인은 말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위해 살 수 있느냐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다 가르쳐 시네. 자네 글을 읽을 줄 알지? 성경을 사서 읽으라고. 그렇게 하면 하나님을 위해 산다는 일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될 거야. 성경엔 뭣이든 다 씌어 있으니까."
이 말이 마르틴의 마음을 사로잡아 그 날로 당장 커다란 활자로 찍힌 성서를 다가 읽기 시작했다. 처음에 마르틴은 일요일이나 축제일에만 읽을 셈이었으나 한 번 읽기 시작하니 완전히 끌려들어 날마다 읽게 되었다. 어떤 때는 너무나 골똘하게 읽은 나머지 램프의 석유가 죄다 닳았는데도 책에서 눈을 떼지 못할 정도였다.
이리하여 마르틴은 저녁마다 성경을 읽게 되었다. 읽으면 읽을수록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신을 위해서 산다는 게 어떤 것인지를 분명히 알게 되어 마음을 더욱더 가벼워지는 것이었다. 전에는 잠자리에 누워서도 꺼질 듯 한숨만 쉬며 줄곧 카피토시카의 일만을 생각했으나 지금은 오로지, "하나님이시여, 감사하옵니다! 감사하옵니다! 모든 일을 당신의 뜻에 맡기오니 주관하여 옵소서!"라고만 기도드릴 뿐이었다.
그 뒤 마르틴의 생활은 눈에 뛰게 달라졌다. 전에는 축제일 같은 때 빈둥빈둥 놀러나 다니고 음식점에 들어가 차를 마시며 보드카도 사양치 않았다. 아는 사람과 한 잔 들이켜고 나면 별로 취하지 않았는데도 공연히 쓸데없는 잔소리를 늘어놓거나 호통을 치곤했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런 일이 전혀 없었다.
조용하고 만족스런 나날이 흘러갔다. 아침부터 작업을 시작하여 정한 시간만큼 일하면 램프를 걸쇠에서 벗겨 테이블 위에 놓은 다음, 벽장에서 성경을 꺼내어 읽던 페이지를 펼쳐 놓고 앉아서 읽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읽으면 읽을수록 그 뜻을 알게 되어 그의 마음속은 더욱 밝아지고 즐거워져 갔다.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마르틴은 그 날 밤도 늦게 까지 골똘히 성경을 읽고 있었다. 침 누가가 전하는 복음서를 읽는 중이었다. 제6장의 '누가 네 뺨을 치거든 다른 뺨도 돌려 대며, 누가 네 겉옷을 빼앗거든 속옷까지도 거절하지 말라. 네게 구하는 사람에게는 주고 누가 네 것을 빼앗거든 도로 찾으려고 하지 말라. 너희는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라는 제29절을 읽은 다음, 다시 다음 구절을 읽었다. 거기서는 그리스도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면서 왜 내가 일러 주는 것은 행하지 않느냐. 내게서 내 말을 듣고 그대로 행하는 사람은 무엇과 같은지 보여 주마. 그는 마치 땅을 깊이 파고 반석 위에 주춧돌을 두고 집을 지은 사람과 같다. 큰 물이 나서 탁류가 그 집을 들이치더라고 그 집은 무너지지 않는다. 잘 지은 집이기 ㄸ문다. 그러나 내 말을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사람은 주춧돌 없이 땅 위에 집을 지은 사람과 같다. 물살이 들이치면 곧 집이 무너지고 그 무너짐이 대단할 것이다.'
이 말씀을 읽은 마르틴은 크게 감동해서 안경을 벗고 골똘한 생각에 잠기게 되었다. 그리고 자기가 이제까지 해 온 일들을 이 말씀에 견주면서 혼자 이렇게 생각하였다. '내 집은 어떤가. 반석 위에 서 있는가, 모래 위에 서 있는가? 반석 위에 서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렇게 혼자서 성경 말씀을 읽으면 모든 일을 하나님의 지시대로 할 것 같은 마음이 들지만 어쩌다 그만 죄를 짓게 되니, 참. 아니, 그래도 더욱 열심히 하자. 아아, 참으로 유쾌하다! 원하옵건대 하나님이시여, 제게 힘을 주시옵소서!'
마르틴은 그렇게 생각하고 그만 자려고 했으나 그래도 쉽사리 책을 놓을 수가 없어 다시 제 7장을 읽었다. 백부장의 이야기를 읽고, 과부 아들의 이야기를 읽고, 요한이 제자에게 대답한 대목을 읽고, 그리고 마침내 부자 바리새인이 그리스도를 자기 집에 초대한 데까지 읽었다. 그리고 다시 죄 지은 여자가 그리스도의 발에 향우를 바르고 그 위에 눈물을 뿌리고 그리스도가 죄를 용서했다는 이야기도 읽었다. 이렇게 제 44절까지 읽어 나가고 다시 다음 절을 읽기 시작했다. '여인을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여인을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왔을 때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 여인은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머리카락으로 닦았다. 너는 내게 입추지 않았으나 이 여인은 들어와서부터 끊임없이 내 발에 입 맞추었다. 거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않았으나 이 여인은 내 발에 향유를 발랐다.'
이 일 절을 일고 마르틴은 생각했다. '발 씻을 물도 주지 않고 입 맞추지 않고 머리에 기름도 발라 주지 않고....' 마르틴은 다시 안경을 벗고 책 위에 놓고 생각에 잠기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내가 그 바리새인과 같았던 모양이야... 오로지 나 자신만 생각해왔다. 차를 마시고 싶다든지 따스하고 깨끗한 옷을 걸치고 싶다는 따위의 일만 생각하고 손님을 위한 생각은 별로 하지 않았다. 오직 나만을 위주로 손님의 일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았었지,. 그런데 손님은 누군가? 다름 아닌 하나님이셔. 만약 하나님께서 나를 찾아오시면 나는 대체 어떻게 할 것인가?' 마르틴은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겨 있다가 어느 사이 깜박 잠이 들어 버렸다. "마르틴!" 문득 누군가가 등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르틴은 놀라며 저기 있는 사람이 누굴까 하고 생각했다. 고개를 돌려 문 쪽을 보았으나 아무도 없었다. 도로 몸을 굽혀 드러눕자 더욱 또렷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 왔다. "마르틴, 마르틴아! 내일 네가 사는 곳으로 내가 가겠다." 마르틴은 깜짝 놀라 눈을 떴다. 꿈결에서 그 말소리를 들었는지 깨어서 듣는 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등불을 끄고 잠자리에 들었다.
이튿날 아침, 마르틴은 아직 날이 새기도 전에 일어나서 하나님께 기도드리고 난로에 불을 지펴 국과 보리죽을 끊이고 사모바르(구리나 은으로 만든 러시아 특유의 주전자)를 준비하고 치마를 두르고 창가에 앉아 일을 시작했다. 마르틴은 일을 하면서도 마음속으로 어젯밤 일만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이 잘못 들었을 뿐일 거라고 생각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정말로 그런 목소리가 들렸다고 생각되기도 하였다. '뭐, 이런 일은 흔히 있는 일이니까'하고 그는 생각했다. 창가에 앉은 마르틴은 일을 하는 것보다 창 너머로 한실을 내다보는 편이 더 많았다. 낯선 구두를 신고 나가는 사람이 있으면 몸을 구부려 밖을 내다보면서 구두뿐 아니라 얼굴도 보려고 애썼다. 새로 지은 장화를 신은 정원지기가 지나가는가 하면 지게를 진 일꾼도 지나갔다. 그 뒤로 여기저기를 땜질한 낡은 장화를 신은 니콜라이 1세 시대의 늙은 병사가 삽을 손에 들고 창 앞으로 다가왔다. 마르틴은 그 장를 보고 곧 그라는 것을 알았다. 이 늙은 병사는 보통 스체파니치라고 불렀는데 옆집 상인이 인정상 데리고 있었다. 정원지기의 일을 도와주는 것이 그의 일이었다. 스체파니치는 마리틴의 바로 눈앞에서 길에 있는 눈을 치우기 작했다. 한참 동안 그 모양을 바로보고 있다가 마르틴은 다시 일을 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나도 이젠 늙어서 노망이 든 모양이야."
하고 마르틴은 혼자 웃었다.
"스체파니치가 눈을 치우고 있는데 나는 그리스도가 내게 오신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하니 말이야. 난 아주 정신이 나갔어."
하지만 몇 바늘 꿰매다가 마르틴은 다시 창밖을 내다보았다. 스체파니치가 삽을 세워놓고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이제 늙어서 눈을 치울 만한 기력도 없는 모양이다. 마르틴은, 저 삶에게 차라도 대접할까? 마침 사모바르의 물도 끓었으니, 하고 생각하고 바늘을 일감에 찌르고 일어났다. 사모바르를 테이블 위에 올려 놓고 차를 준비한 다음 손가락으로 창문 유리를 똑똑 두드렸다. 스체파니치가 돌아보더니 창가로 다가왔다. 마르틴은 마주 손짓을 하면서 문을 열러 갔다.
"들어와 몸 좀 녹이지그래.“
마르틴은 말했다.
"몸이 꽤 얼었겠네."
"아이고 고맙네, 온 몸의 뼈마디가 쑤시는구먼."
스체파니치는 대답했다. 스체파니치는 들어오자 눈을 털고 마룻바닥에 자국이 나지 않도록 장화에 묻은 눈을 털어 내고 있었는데 그 몸은 떨리고 있었다.
"닦지 않아도 되네. 이리 주게나. 내가 털 테니, 나야 늘 하는 일이니까, 자, 어서 이쪽으로 와서 앉게나."
마르틴은 말했다.
"자, 차나 마시게."
마르틴은 두 개의 잔에 차를 따라서 하나를 그에게 주고 나서 자기 찻잔을 들어 후후 불며 마시기 시작했다. 스체파니치는 다 마셔 버리자 잔을 엎어 놓고 그 위에 먹던 설탕을 올려놓고는 잘 마셨다고 고마워했다. 그런데도 아직 추어 보였다.
"한 잔 더 합시다."
마르틴은 자기 전에도 그의 잔에도 다시 차를 가득히 따랐다. 한데 차를 마시면서도 눈길을 자주 한길로 쏠리기가 일쑤였다. 그러자 그가 물었다.
"자네, 기다리는 사람이라도 있나 ?"
"누굴 기다리느냐고? 누굴 기다리는지는 부끄러워서 말을 못하겠구먼. 기다리는 것도 아니고 기다리지 않는 것도 아니지만 무슨 소리를 들었지만 꿈인지 생시인지 잘 모르겠는데, 어젯저녁에 나는 성서를 읽었지. 그리스도가 이 세상 여러 곳을 다니며 고생한 이야기를 말이야. 자네도 물론 읽었거나 들었거나 했겠지만."
"듣기는 들었어. 하나 원래 나야 배우지 못해서 글을 읽을 줄 모르잖아."
"신약 성서 중에서 나는 그리스도가 이 세상을 두루 다니신 이야기를 읽었지. 잘 들어봐. 바리새인들이 말이야. 그리스도를 변변히 대접도 하지 않았다, 라는 대목을 읽었거든, 한데 나는 엊저녁에 그 구절을 일고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어. 그리스도를 대접하지 않다니 뭘 말인가! 그렇지만 혹시 만에 하나라도 게든가 또 다른 누구에게 오신 일이 있다면 어떤 대접을 했을지 알 게 뭐야. 그 바리새인은 대접다운 대접을 하지 않았어! 이런 일을 생각하는 동안에 나는 가물가물 잠이 들었지. 그렇게 졸고 있는데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리지 않겠나? 깜짝 놀라 일어나니 분명히 누군가가 조금한 목소리로 내일 내가 가겠다, 하지 않겠나. 그것도 두 번이나 되풀이해서 말야. 하도 그 말이 생생하게 되살아나서 나는 정말로 그리스도의 방문이 기다려지네 그려."
스체파니치는 머리를 저을 뿐 아무 말 않고 잔에 남은 차를 마저 마시고 잔을 놓았다. 마르틴은 다시 그 잔에 가득 차를 따랐다.
"자, 기운 나게 한 잔 더 마시게나! 내가 생각하건대 그리스도가 이 세상을 두루 돌아다니셨을 때는 이런 사람 저런 사람 가리지 않고, 신분이 낮은 사람들을 오히려 더 보살펴 주셨을 것이 틀림없어. 언제나 가난한 사람들을 상대하시고 제자도 우리네 같은 사람, 우리네와 같이 죄 많은 기술자 가운데서 취하셨지. 마음이 교만한 자는 오히려 아래로 떨어지며 마음이 가난한 자는 오히려 위로 올라간다고 말씀하셨으니까, 너희들은 나를 주님이시여 하고 부르지만 나는 너희들의 발을 씻어 주겠다, 우두머리가 되고 싶은 자는 모든 사의 하인이 되라, 그도 말씀하셨네, 마음이 가난하고 겸손하며 인정이 있는 자는 행복할지니, 라고 말씀하셨거든,"
스체파니치는 차 마시는 것도 잊었다. 가만히 앉아 듣고 있는 그의 불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한 잔 더 들고 가게나."
마르틴이 다시 말했으나 스체파니치는 가슴에 성호를 긋고 인사말을 한 다음 잔을 밀어 놓으며 일어섰다.
"고맙네, 마르틴 아부제이치. 정말 잘 마셨네. 덕분에 몸도 마음도 훈훈하게 되었네."
"종종 들러 주게나. 나는 손님이 찾아오는 걸 좋아하니까."
스체파니치가 나갔다. 마르틴은 남은 차를 따라 마시고 찻잔을 치운 다음 가 일터로 돌아가 구두의 뒤꿈치를 꿰매기 시작했다. 꿰매면서도 역시 창밖을 바라보며 연방 그리스도의 왕림을 고대하고 그리스도의 일, 그리스도의 행적만을 생각하는 것이었다. 머릿속에는 그리스도가 말씀하신 여러 가지 일들이 꽉 들어차 사라지지 않았다.
창밖으로 두 병사가 지나가고 있었다. 한 사람은 군화를, 다른 산 사람은 사화를 신고 있었다. 그 뒤로 이웃집에 살고 있는 주인이 반짝반짝 운이 나는 방한용 덧신을 신고 지나가고, 또 바구니를 옆에 낀 빵가게 사람이 지나갔다. 모두가 지나가 버리는데, 이 때 털실로 짠 긴 양말에 낡은 신발을 신은 여자가창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창 옆 바로 벽께에 발을 멈췄다. 마르틴이 창 너머로 내다니 다른 마을 사람인 듯한 허술한 차림새로 아기까지 데리고 있었다. 그녀는 바람을 등지고 벽과 마주 서서 아기가 춥지 않도록 감싸 주려 하는 모양이었으나 감싸 줄 덮개 하나 없었다. 여자가 입고 있는 옷은 얇은 여름옷이었다. 마틴이 방 안에서 듣고 있으려니 여자가 우는 아기를 달래려고 애쓰는 모양이었으나 아기는 울음을 그치지 않고 있었다. 마르틴은 일어나서 밖으로 나가 돌층계 위에서,
"아주머니! 아주머니!"
하고 커다란 소리로 불렀다. 여자가 소리를 듣고 뒤돌아보았다.
"여보시오, 이런 추위에 왜 거기서 아기를 울리고 있소 방으로 들어오시오. 따뜻한 방 안이 어린애 달래기에 더욱 좋겠소. 어서 이리로 들어오시오!"
여자는 낯선 구두장이 노인의 친절에 어쩔 줄 모르며 고마워했다.
"고맙습니다! 할아버지."
돌층계를 내려가 방 안으로 들어가자 노인은 넓은 의자를 꺼냈다.
"자, 아주머니, 여기 앉아요. 난로 가까운 쪽으로, 몸을 녹이면서 아기에게 젖을 주도록 해요."
"젖이 나오지 않아요. 아침부터 아무것도 먹지를 못해서요."
여자는 말하면서 그래도 아기에게 젖을 물렸다. 마르틴은 딱한 듯 혀를 차며 식탁으로 가서 빵과 그릇을 꺼내더니 난로 뚜껑을 열어 수프를 꺼내 그것을 그릇에 따랐다. 보리죽이 든 항아리를 꺼내 보았으나 아직 덜 물러 있었다. 그래서 스프만 따라 식탁 위에 놓았다.
"아주머니, 여기 앉아서 어서 먹어요. 아기는 내가 안고 있을 테니까. 나도 예전에는 아기를 키워 봐서 아기는 볼 줄 알죠."
여자는 식탁에 앉더니 가슴에 성호를 긋고는 먹기 시작했다. 마르틴은 아기가 있는 침상에 걸터앉았다. 열심히 입술을 오무려 소리를 내려고 했으나 잘 되지 않는다. 이가 없기 때문이다. 가고픈지 아기는 자꾸만 울어댔다. 마르틴은 아교가 묻은 손가락을 아기의 볼에 닿지 않도록 조심하며 아기를 달랬다. 그러자 아기는 울음을 그치도 이윽고 웃게 되었다. 마르틴도 좋아서 웃었다. 여자는 식사를 하면서 자기의 신세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저의 남편은 병사로 여덟 달 전에 어디론가 멀리 전속되었는데 그런 뒤로 통 소식이 없습니다. 저는 남의 집 하녀로 들어갔는데 얼마 안 돼 이 아이를 낳았지요. 하지만 아기가 있어서는 일을 하지 못 한다고 일을 안 줘서 벌써 석 달째나 일 없이 지내고 있답니다. 입고 있던 옷까지도 다 팔아 이젠 유모로라도 들어갔으면 싶지만 그런 자리도 없군요. 말라서 젖이 잘 나지 않을 거라는 거예요. 지금은 어느 잘 사는 집의 아주머니에게 갔다 오는 길이에요. 그 집에 저희 마을 여자가 들어가 사는데 써 주겠다고 약속했거든요. 그래서 저는 이야기가 다 된 줄 알고 갔더니 다음 주에 다시 오라는군요. 그 집이 어찌나 먼지, 저도 지쳐서 쓰러질 지경이지만 갓난아이도 여간 혼이 나지 않았어요.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주인아주머니가 하나님을 믿고 우리 모자를 불쌍하게 여겨 주시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살아갈 뻔했는지."
마르틴은 긴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따뜻한 옷이 없소?"
"이제 따뜻한 옷을 입어야 할 때가 되었는데, 바로 어제도 하나밖에 없는 목도리를 20코페니카 받고 저당 잡힌 형편이지요."
그녀는 마르틴에게서 아기를 받아 안았다. 마르틴은 일어나 벽께로 가더니 참을 무엇인가 부스럭거리며 찾는 모양이다. 이윽고 소매 없는 낡은 외투를 들고 왔다.
"이걸로 어떻게 안 되겠소? 다 낡았지만 그래도 아기를 감쌀 만은 할 거요."
여자는 소매 없는 외투와 노인을 번갈아 보다가 그만 울음을 터뜨렸다. 마틴도 얼굴을 돌렸다. 그리고 침상 밑으로 들어가 옷궤를 끌어내 놓고 그 속을 뒤졌다. 그녀가 말했다.
"할아버지 고맙습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내려 주실 겁니다. 아무래도 주님께서 저를 할아버지의 창 앞으로 보내신 모양입니다. 정말 하마터면 이 아이를 얼어 죽일 뻔했어요. 집을 나올 때는 따뜻했는데 갑자기 추워지는군요. 이것은 필시 주님께서 할아버지를 창가에 앉게 하셔서 저의 가엾은 모습을 보여 측은히 여기도록 만드신 게 틀림없어요."
마르틴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과연 그리스도가 나를 저기 앉아 있게 하셨소. 사실 내가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던 것은 아주머니, 공연히 그랬던 것이 아니었지요."
마르틴은 병사의 아내에게도 주님께서 오늘 자기에게로 오겠다고 약속한 일을 들려주었다.
"정말 신기한 일이로군요."
이렇게 말하며 여자는 일어나 소매 없는 외투를 입고 그 속에 아기를 감싸 안고 다시 허리를 굽혀 마르틴에게 인사했다.
"자,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것을 받으시오."
마르틴은 여자에게 20코페이카를 주었다.
"이것으로 목도리를 찾아 두르도록 해요. 여자는 성호를 그었다. 마르틴도 성호를 그으며 여자를 배웅했다. 여자가 가버리자 마르틴은 스튜를 먹고 설거지를 한 다음 다시 일감을 붙잡았다. 일을 하면서도 창밖을 내다보는 일을 잊지는 않았다. 창문이 그늘지며 얼른 고개를 들어 누가 지나가나 하고 보는 것이다. 아는 사람도 지나가고 모르는 사람도 지나갔으나 별달리 이렇다 할 일은 없었다. 잠시 후 마르틴의 창문 바로 앞에 멈춰 선 할머니가 있었다. 할머니는 사과 바구니를 들고 있었는데, 거의 다 판 모양으로 나머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그 대신 나무 부스러기가 든 자루를 깨에 메고 있었다. 아마 어딘가의 공사장에서 주워 집으로 가지고 돌아가는 모양이다. 그런데 어깨가 아파서 다른 쪽 어깨에 바꿔 메려고 자루를 한길 위에 내려놓고 사과 바구니를 말뚝에 걸어 놓은 채 자루 속의 나무 부스러기를 추스르려는 참이었다. 바로 자루를 들어 올리려는 순간 어디서 나타났는지 찢어진 모자를 쓴 사내아이가 불쑥 튀어나와 바구니의 사과 한 개를 훔쳐 가지고 그대로 내빼려고 했다. 한데 할머니는 재빨리 눈치를 채고 곧 돌아서서 개구쟁이의 옷소매를 꽉 움켜잡았다. 개구쟁이는 마구 발버둥 치며 할머니의 손을 뿌리치려고 했으나 할머니는 두 손을 꽉 잡고 사내아이의 모자를 벗기더니 머리채를 움켜잡았다. 사내아이는 마구 소리를 지르며 욕을 하고 있었다. 마르틴은 바늘을 어디다 찔러 놓을 겨를도 없이 마룻바닥에 내동댕이치고 문 밖으로 뛰나갔다. 층계에 발이 걸려 안경을 떨어뜨렸을 정도였다. 마르틴이 한길로 뛰어나갔을 때 할머니는 사내아이의 머리채를 잡고 욕을 하면서 경찰서에 가자고 하는 참이었다. 사내아이는 죽을힘을 다하여 발버둥 치며,
"난 훔치지 않았어요. 왜 때려요, 이거 놔요!"
라고 외쳤다. 마르틴이 말렸다. 사내아이의 손을 잡고
"할머니, 놓아 주십시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용서해 주십시오!"
라고 했다.
"참견하지 말아요. 이런 애는 다신 이런 짓 못하게 경찰서에 끌고 가서 혼을 좀 내야지!"
마르틴은 할머니를 달랬다.
"그만 놓아 주시구려. 다신 그러지 않겠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놓아 주십시오!"
할머니는 손을 놓았다. 사내아이가 도망치려 하는 것을 마르틴이 얼른 붙잡아 세우며 말했다.
"할머니께 잘못했다고 빌어라. 이제 다시 나쁜 짓을 해선 안 돼! 네가 사과 꺼내는 걸 나도 다 보았으니까."
사내아이는 훌쩍훌쩍 울면서 말했다.
"음, 이제 됐다. 자, 이 사과는 가지고 가거라."
하고 마르틴은 바구니에서 사과 하나를 집어 사내아이에게 주었다.
"할머니, 값은 내가 치르지요."
하고 할머니에게 말했다.
"공연한 짓을 해서 아이의 버릇을 그르치지 말아요. 저런 애는 붙잡아다 혼 구멍을 내줘야 정신을 차린다니까요."
할머니는 말했다.
"아니에요, 할머니. 그거야 물론 우리네들의 생각이지만 주님의 뜻은 그게 아니거든요. 사과 한개 때문에 이 아이를 때려야 한다면 이 죄 많은 우리는 도대체 어떤 벌을 받아야 하나요?"
노파는 잠자코 아무 대답이 없었다. 마르틴은 할머니에게, 주인이 마름에게 큰 빚을 받지 않겠다고 하자, 그 마름은 그 길로 가서 자기에게 빚을 진 사나이를 괴롭히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할머니는 가만히 듣고 있었다. 사내아이도 거기 서서 듣고 있었다.
"주님께서는 죄를 용서하라고 말씀하셨지요. 그렇지 않으면 우리도 죄를 용서받을 수 없잖겠소? 어떤 사람이라도 용서해 주어야 하거늘, 하물며 철없는 어린아이는 더욱 그렇지요."
마르틴은 열심히 말했다.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야 그렇지만 이렇게 못돼먹은 아이는...."
"그러니까 우리들 늙은이가 가르쳐야 하지 않겠소."
"그래요."
하고 할머니는 대꾸했다.
"나도 일곱이나 아이들은 낳았지만 지금은 딸 하나밖에 남지 않았어요."
그리고는 어느 마을에서 그 딸과 같이 살고 있는지, 외손자가 몇인지 등등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나도 이젠 기운이 없지만 그래도 일을 하지요. 어린 손자들이 가엾어서 말이에요. 그것들이 모두 어찌나 착한지 돌아가면 쭉 나와서 마중해 준답니다. 글쎄, 아크슈트 그놈은 내 곁을 떠나지 않으려고 졸졸 따라다니지 뭡니까. '할머니, 우리 할머니가 난 젤 좋아!' 하면서 말이에요...."
할머니는 완전히 마음이 풀어졌다.
"너도 물론 철없는 생각에 그런 짓을 했겠지?"
하고 할머니는 사내아이를 보며 말했다. 노파가 자루를 들어 올리려고 하자, 사내아이가 재빨리 나서며 말했다.
"제가 들어다 드릴게요."
노파는 뭐라고 인지 중얼거리면서 자루를 사내아이의 어깨에 올려 주었다. 그렇게 하여 두 사람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음을 걷기 시작했다. 노파는 마르틴에게서 사과 값 받는 것을 잊어버렸을 정도였다. 마르틴은 우두커니 서서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둘이서 걸으면서 연방 무엇인지 이야기하는 것에 귀를 기울였다.
두 사람이 보이지 않게 되자 마르틴은 집 안으로 되돌아왔다. 층계에 떨어져 있는 안경을 주웠는데 깨진 데는 없었다. 마르틴이 다시 일감을 잡고 부지런히 손을 움직이는 사이에 어느 덧날이 저물어 바늘구멍이 잘 보이지 않게 되었다. 벌써 점등부가 가스등을 켜느라고 돌아다니고 있었다. 마르틴은 '아무래도 불을 켜야겠군' 하고 생각했다. 램프에 불을 당겨 고리에 걸고 다시 일을 시작했다. 한 쪽 장화 일을 끝내고 이리저리 살펴보니 상당히 잘 꿰매졌다. 도구를 치우고 가죽 부스러기를 어 낸 다음 실과 바늘을 간수하고 램프를 떼어 테이블 위에 놓고는 벽장에서 성서를 꺼냈다. 어젯저녁에 가죽 조각을 끼워 놓은 데를 펼치려고 했는데 다른 페이지가 펼쳐졌다. 마르틴은 성서를 펼치자 어젯저녁의 꿈이 생각났다. 꿈이 되살아나는 동시에 무엇인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귀에 들려왔다. 마르틴이 뒤를 돌아다보니 어두컴컴한 사람이 서 있었다. 확실히 사람은 사람인데 누군지 알 수 없었다. 다만 마르틴의 귀밑에서 소곤대는 것이었다.
"마르틴, 마르틴, 너는 나를 알아보지 못했지?"
"누구를요?"
하고 마르틴은 말했다.
"날 말이다. 아까는 나였어."
목소리가 말했다. 그러자 어두운 한구석에서 스체파티치가 앞으로 나오더니 빙그레 웃으면서 형체도 그림자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것도 나였어."
하고 말했다. 그러자 어두운 한구석에서 아기를 안은 여자가 나타났다. 여자가 미소 짓고 아이가 활짝 웃었다고 생각하자 이내 사라져 버렸다.
"이것도 나였지."
하고 목소리가 말했다. 그러자 할머니와 사과를 가진 사내아이가 나와서 둘이 같이 정답게 웃으며 찬 가지로 사라져 버렸다. 마르틴은 기쁨에 들떠 성호를 긋고 안경을 끼고 성서의 펼쳐진 페이지를 읽기 시작했다. 페이지의 첫머리에 이렇게 씌어 있었다.
'너희는 내가 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나그네 외었을 때에 영접했고,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거....'
그리고 같은 페이지 아래쪽에는, 또한 이렇게 씌어 있었다. '내 형제 중에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태가 전한 복음서 제25장)' 마르틴을 곧 깨달았다. 어젯밤 꿈의 약속대로 그리스도는 그에게로 왔고 마르틴은 그를 대접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