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을 놓아두면 끄지 못한다
Lev. N. Tolstoy
그때 베드로가 예수께 와서 물었습니다.
"주님, 형제가 죄를 지을 때에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마태가 전한 복음서 제18장 제21절)"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일곱 번만이 아니라 일흔 씩 일곱 번까지라도 하라(제22절)."
그러므로 하늘나라는 마치 이와 같다. 어떤 왕이 자기 종들과 계산을 맞추게 되었다(제23절). 계산을 시작하자 1만 달란트 빚진 종 하나가 왕 앞에 나왔다(제25절). 그런데 그는 빚을 갚을 길이 없었으므로 주인은 그에게 명하여 그의 몸과 처자와 그밖에 있는 것을 모두 팔아 갚으라고 했다(제25절). 그래서 종이 엎드려 주인에게 절하며
"참아주십시오. 다 갚겠습니다."
하고 말하자(제26절), 주인은 그를 가엾게 여겨 놓아 보내며 빚을 탕감해 주었다(제27잘). 그런데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하나를 만나자 붙들어 멱살을 잡고
"네가 내게 빚진 것을 갚으라"
하고 말했다(제28절).
"참아 주게. 내가 갚겠네.(29절)."
그러나 그는 듣지 않고 그 동료를 끌고 가서 빚진 돈을 갚을 ㄸ까지 옥에 갇혀 있게 했다(제30절). 다른 종들이 이 광경을 보고 매우 유감스럽게 여겨 주인에게 가서 이 일을 낱낱이 고했다(제31절).
어떤 마을에 이반 시체르바코프라는 농부가 살고 있었다. 살림도 넉넉하고 건강하여 마을 제일의 일꾼이었으며 세 아들 또한 다 성장해 있었다. 큰아들은 벌써 결혼했고, 둘째 아들도 이제 결혼할 나이였으며, 셋째는 아직 한 사람 몫은 안 되었으나 짐도 지고 밭일도 슬슬 하기 시작하였다. 이반의 아내도 영리하여 알뜰하게 살림을 꾸려 나갔으며 며느리도 얌전하고 일 잘하는 여자가 들어왔다. 이반은 그들을 거느리고 유복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온 집안에서 일하지 못하는 사람이라곤 오직 고 병든 아버지뿐이었다(천식으로 벌써 7년째나 페치카 옆에 누워 있었다). 이반에게는 무엇이나 다 갖춰져 있었다. 말은 세필이나 되고 망아지도 있었다. 어미 소와 송아지, 양은 열세마리나 된다. 여자는 남자들의 신발도 만들고 옷도 꿰매고 틈틈이 밭일도 거들었으며 남자들은 열심히 농사를 지었다. 그래서 추수한 보리가 다음 해 새로 보리를 거둬들일 때까지도 남아 돌 정도였다. 그리고 세금과 그 밖의 비용은 귀리로 충당하도록 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반의 식구들은 항상 유복한 살림살이를 꾸려 나갈 수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이반은 이웃에 살고 있는 코르세이 이바노프의 아들 가브릴로 호로모이라는 사나이와 싸우게 되었다.
예전 코르세이 노인이 살아 있고, 이반의 아버지가 살림을 맡아서 했을 무렵, 두 집은 서로 정다운 이웃이었다. 여인들이 키나 물통이 필요하거나, 남자들이 곡식을 넣을 포대가 필요하거나, 또 갑자기 수레바퀴를 갈아야 된다든지 하면 서로 달려가 도와주곤 했던 것이다. 간혹 송아지가 탈곡장에 뛰어들거나 하면 그것을 몰아내고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송아지를 좀 단속해서 이리 못 오게 해 줘. 우린 아직 짚단을 그냥 걸어 놓았으니까."
그 송아지를 탈곡장에 가둬 두거나 서로 욕을 하거나 하는 일은 전혀 없었다. 노인들의 시절에는 그렇게 오손도손 살았는데 그 아들들이 농사일을 맡아 하게 되자 형편이 달라졌다. 일의 발단은 주로 하찮은 데서 일어났다. 이반의 며느리가 치는 닭이 겨우 알을 낳게 되었다. 젊은 며느리는 부활절에 쓰려고 그 달걀을 정성스레 모으고 있었다. 매일 같이 광 안에 있는 닭의 둥우리에 가서 알을 꺼내 보곤 했는데, 어느 날 암탉이 무엇에 놀랐는지 울바자를 넘어 이웃집 마당으로 들어가 거기에다 알을 낳았다. 젊은 며느리는 암탉이 꼬꼬댁거리는 소리를 들었으나, 마침 집안을 청소하는 중이었으므로 일을 마치고 가려고 생각했다. 저녁때가 되어 광 안의 둥우리에 가보니 달걀이 없었다. 젊은 며느리는 시어머니와 시동생에게 알을 꺼내지 않았느냐고 물어 보았으나 꺼내지 않았다는 대답이다. 그때, 막내 시동생 타라스카가
"형수님, 암탉은 이웃집 마당에서 알을 낳고 꼬꼬댁거리던데요.“
라고 했다. 젊은 며느리가 자기의 암탉을 보니 벌써 수탉과 나란히 홰에 올라앉아 이제 그만 자자고 하는 듯이 눈을 감고 있었다. 너 어디서 알을 낳았느냐고 물어 보려 했으나 어차피 대답은 없으리라는 것을 알고 젊은 며느리는 옆집으로 갔다. 그러자 그 집 할머니가 나와서 웬일이냐고 물었다.
"다름이 아니구요. 우리 집 암탉이 댁의 마당으로 들어 와 알을 낳은 것 같아서요."
"원, 그런 건 통 보지 못했다우. 우리도 닭이 있어서 매일 아침 알을 낳기 때문에 남의 달걀 같은 건 필요 없지. 우리는 남의 집 마당을 어슬렁거리면서 달걀을 살피지는 않으니까."
젊은 아낙은 화가 나서 언짢은 소리를 내뱉었다. 그러자 이웃 할머니도 마주 덤벼들어 두 아낙은 서로 욕지거리를 했다. 이반의 아내도 물통을 메고 오다가 한몫 끼어 들었다. 가브릴로의 마누라도 나와 욕설을 하며 갖가지 일을 몽땅 들추어내는 것이었다. 거기서 큰 싸움이 벌어졌다. 모두가 한꺼번에 뒤떠들며 자기 말이 옳다고 지껄이는 형편이었다. 너는 이렇다, 아니 너야말로 그렇다, 너는 도둑놈이다, 너는 몹쓸 계집이다, 너는 어른 알기를 우습게 안다, 너는 깝죽거린다 등등.
"남의 키를 뚫어 놓고! 그리고 우리 집 멜대도 당신네가 훔쳐갔지? 어서 썩 이리 내놔!"
그렇게 말하고선 벨대를 와락 끌어 잡아당겼으므로 물은 엎질러지고, 머리에 두른 수건은 찢어지면서 이번에는 난투극이 벌어졌다. 거기에 들판에서 돌아오던 가브릴로가 달려들어 자기 마누라의 편을 들자 이반도 아들과 함께 뛰어와서 그야말로 치거니 받거니 큰 난장판이 벌어졌다. 이반은 건장한 사나이였으므로 사람들을 사방으로 밀어 젖히고 가브릴로의 턱수염을 한 줌이나 뽑아 버렸다. 거기에 동네 사람들이 여럿 몰려와 겨우 싸움을 말렸다.
이것이 긴 싸움의 시초였던 것이다. 가브릴로는 그 길로 턱수염을 진정서와 함께 읍사무소에 가지고 가서,
"내가 턱수염을 기른 것은 곰보딱지 바니카에게 뜯기기 위해서가 아니었소.“
라고 말했다. 그러자 마누라는 마누라대로 이웃을 돌아다니면서 머지않아 이반이 소송에 져서 시베리아로 유형을 가게 된다고 떠들어댔다. 이렇게 하여 두 집안은 원수처럼 되어 버렸던 것이다. 노인은 애당초에 아들을 타일렀으나 젊은 혈기는 그런 말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노인은 재차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은 보아하니 어줍잖은 짓들을 하고 있다. 공연한 일로 싸움을 벌이다니. 잘 생각해 보아라. 일의 시초는 달걀 한 개가 아니야? 옆집 어린아이가 알 하나 주웠다. 그게 뭐 나쁘냐? 달걀 하나에 값이 얼마나 나간단 말이냐?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이란다. 아니 치고받고 싸웠다 할지라도 죄 지은 인간끼리 한 짓이니 탓할 것 없다. 이제라도 가서 화해하도록 해라. 그러면 그만이지 언제까지나 고집을 부리고 있으면 점점 더 꼬이느리라."
젊은이들은 노인이 하는 말을 듣지 않고 쓸데없는 잔소리를 한다고 하면서 그것은 노망 들린 탓이라고 투덜댔다. 그러니 이반이 꺾일 리가 없지 않은가.
"나는 그놈의 턱수염을 뽑은 일은 없다구요! 놈이 제 손을 뜯어 놓구 거짓말하는 거예요. 게다가 녀석의 아들은 남의 머리카락을 마구 쥐어뜯고 루바시카도 찢었어요. 자, 이걸 좀 보세요!"
그렇게 말하고는 이반도 고소하러 갔다. 두 사람은 중재 재판소에서도, 마을 재판소에서도 다퉜다. 그 소송 소동이 벌어지고 있는 동안에 가브릴로 네 수레바퀴의 바퀴통이 없어졌다. 가브릴로의 어머니도 그의 아내도 이반의 짓이라고 주장했다.
"우리는 다 보고 있었어요. 그놈이 한밤중에 창문 앞을 지나서 짐수레 있는 데로 갔으니까. 그리고 이웃 할머니 말씀이 녀석이 훔친 바퀴통을 주막에 가서 돈으로 바꾸려고 했다잖아요."
그리하여 다시 소송이 벌어졌다. 날마다 입씨름 아니면 들러붙어 싸우기가 일쑤였다. 어린아이들까지 어른들이 하는 짓을 본떠서 서로 욕을 하고, 며느리들은 개울에서 만나며 빨랫방망이보다 혓바닥을 더 열심히 놀리는 형편이었다. 그래도 처음에는 서로 트집을 잡는 정도였으나 날이 갈수록 심해져서 나중에는 상대방의 것을 서로 훔치게까지 되었다. 아낙네들이 아이들에게 그렇게 시켰던 것이다. 두 집의 살림 형편은 자꾸만 기울어져 갈 뿐이다. 이반 시체르바코르와 가브릴로 흐로모이는 마을의 모임에서도, 마을 재판소에서도 중재 재판에서도 소송 사태를 벌여 왔으므로, 중재하는 쪽에서도 이젠 싫증을 냈다. 가브릴로가 이반에게 벌금을 물리든지 유치장살이를 시키든지 하면 다음에는 이반이 가브릴로를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두 사람이 서로 그러면 그럴수록 두 사람은 더욱 고집불통이 되어 갔다. 개들이 싸울 때는 몹시 사나워져서 한쪽 개를 건드리기만 해도 그 개는 상대방 개가 물었다, 생각하고 더욱 달려드는 법이다. 두 농부도 그와 마찬가지로 소송을 걸어 둘 중의 어느 쪽인가가 벌금이나 구류 처분 받으면 그 때문에 두 사람은 또다시 복수심에 불타는 것이다.
"어디 두고 보자, 혼 구멍을 내줄테니.“
하고 서로 벼르는 형편이었다. 이리하여 소송은 계속되었다. 오직 노인만이 페치카 옆에서 언제나 같은 말을 되풀이하고 었다. 우선 이렇게 말머리를 연다.
"너희들은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느냐! 헛된 싸움 같은 것은 그만두고 이젠 버려두었던 일을 해라. 남을 곯릴 생각만 하다간 이쪽도 골탕 먹는다. 화를 내면 낼수록 점점 더 악화될 뿐이다."
그러나 아무도 노인이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7년째 되는 해, 이런 일이 일어났다. 어떤 혼인 잔치자리에서 이반의 아내가 가브릴로에게, 당신은 말을 훔치다가 들키지 않았느냐고 하여 여러 사람 앞에서 크게 망신을 주었다. 화가 치민 가브릴로는 술이 거나하게 오른 참이라 이반의 아내에게 덤벼들었는데 공교롭게도 이반의 마누라는 임신 중이었으므로 몹시 앓게 되었다. 이반은 신이 나서 당장에 고소장을 가지고 예심 판사에게 달려갔다. 이번에야말로 혼 좀 날걸, 시베리아 행은 어김없으렷다, 하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또다시 이반의 고소장은 아무런 일도 못했다. 예심 판사가 소송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의 아내의 몸을 조사 했던바 아무런 상처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반은 그곳에서 이리저리 쏘다니며 서기와 배심원들에게 술을 대접함으로써 끝내 가브릴로가 태형을 받도록 하였다. 가브릴로는 재판소에서 판결문을 낭독하는 것을 들었다. 서기는 다음과 같이 읽었던 것이다.
"당 재판소는 다음과 같이 판결을 내린다. 농부 가브릴로 호로모이에게 태형 2대를 선고한다."
이반은 그 판결을 들으면서 아주 즐거운 표정을 지으며 가브릴로가 있는 쪽을 흘끗 바라보았다. 가브릴로는 판결문 낭독이 끝나자 얼굴이 창백해지더니 홱 돌아서서 복도로 나가 버렸다. 이반도 그 뒤를 따라 밖으로 가 말이 묶여 있는 데로 가려고 할 때 가브릴로가 멀리서 외쳐대고 있었다.
"내 등에 매가 내려지게 하고도 너는 무사할 줄 아느냐? 네 등이나 불에 데지 않게 조심하라구."
이 말을 들은 이반은 그 길로 재판관에게 달려갔다.
"존경하옵는 판사님! 녀석은 내 집에 불을 지른다고 떠들어 댑니다. 잘 물어보아 주십시오. 증인들 앞에서 한 말이니까요."
판사는 가브릴로를 불러내어
"정말이냐, 자네가 했다는 말이?“
하고 물었다.
"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판사님이 권리가 있으시거든 어서 저를 때리시죠. 그놈은 죄도 없는 내게 매를 맞게 하고도 무슨 짓을 하든 상관없을 줄 아는 모양입니다."
가브릴로는 너무 분한 나머지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판사들도 그의 그러한 모양을 보고는 흠칫 놀랐다. 자칫 잘못하다간 옆집 사나이와 그들 자신에게 어떤 무모한 짓을 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나이 많은 판사가 말했다.
"어떤가, 자네들. 이제 이 자리에서 화해하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이봐, 가브릴로 자네도 그렇지, 임신한 아낙을 치다니. 그래서야 되겠나? 하나님 덕분에 무사했기 망정이지 어떤 큰 죄를 저질렀을지 모르지 않는가. 대체 이것이 좋은 일인가? 자네는 이반에게 사과하게. 이반도 용서해 주겠지. 그렇게 하면 나도 이 판결문을 다시 쓸 테니까."
그것을 듣고 서기가 말했다.
"그것은 안 됩니다. 형법 제 117조에 이한 쌍방의 시담이 성립되지 않고 재판의 판결이 성립되었으니 그 판결을 실행되어야 합니다."
그러자 판사는 화가 나서 말했다.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아는 일이다. 알겠는가?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화목하라고 하셨다."
그렇게 말하고 판사는 다시 그 두 사람을 타일렀으나 막무가내였다. 가브릴로는 숫제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저는 1년 뒤엔 쉰이 됩니다. 아들도 며느리도 있습니다. 저는 태어나서 아직 한 번도 남에게 매 맞은 일이 없는데, 이번에 이 곰보딱지 바니카 놈이 나를 채찍 아래 밀어 넣으려고 합니다. 그런데도 제가 저놈에게 빌어야 합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바니카, 너 이 녀석, 어디 두고 보자!"
가브릴로의 입술은 다시 떨리기 시작했다. 더 이상 말도 계속하지 못했다. 돌아서더니 그대로 나가 버렸다. 마을 재판소에서 자기 집까지는 10베르스차 가량 되어 이반이 돌아왔을 때는 퍽 늦은 시각이었다. 벌써 여자들은 소와 말들의 마중을 나갔다. 이반은 말을 마차에서 떼고 뒤처리를 한 뒤 집 안으로 들어갔다. 집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들들은 들에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고, 아낙네들은 말과 소를 몰고 오는 중이다. 이반은 집 안으로 들어가서 위자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 가브릴로가 판결문을 듣고 낯빛이 변하면서 홱 벽을 향해 돌아앉던 일이 머리에 떠올랐다.
이반은 가슴이 아픈 듯한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만약에 자기가 태형 선고를 받으면 어떨까, 하고 처지를 바꾸어 생각해 보았다. 그러자 가브릴로가 측은해졌다. 문득 페치카 옆에서 늙은 아버지의 기침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몸을 움직여서 아래로 내려왔다. 간신히 내려오자 노인은 의자에 앉았다. 노인은 내려와 의자까지 오는 데도 힘이 들어서 기침을 했다. 이윽고 기침이 가라앉아 테이블에 손을 얹고 입을 열었다.
"어떻게 됐느냐, 판결이 났겠지?"
"태형 20대입니다."
라고 이반이 대답했다. 노인은 머리를 저으면서 말했다.
"이반아, 너는 좋지 못한 짓을 하고 있다. 그것은 죄야. 가블리로에게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말이다. 그래, 그 사람이 채찍을 맞아 등에 피라도 나면 네가 뭐 편안하게 되는 일이라도 있냐?"
"앞으로 그 자가 나쁜 짓을 안 하게 되겠죠."
"뭘 안 한다고? 도대체 그 사람이 뭘 내개 나쁘게 했다는 거냐?"
"아니, 그 녀석이 얼마나 행패를 부렸다구요!"
하고 이반은 말하기 시작했다.
"제 아내가 하마터면 죽을 뻔한데다가 이번에는 또 불을 지르겠다고 을러대는 형편이라니까요. 그런데도 가만히 있어야 하나요?"
노인은 한숨을 지으며 말했다.
"이반아, 너는 자유로이 세상을 돌아다니고 있고 나는 벌써 몇 년째나 페치카 옆에 누워 있으니까 너야말로 세상의 모든 일을 보아 알고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하겠지만 잘못된 생각이다. 네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있어. 네 눈은 증오심 때문에 흐려졌다. 남의 잘못은 눈앞에 환히 보여도 자기의 잘못은 못 보는 거지. 너는 지금 뭐라고 했지. 그가 나쁜 짓을 한다고? 그 사람 혼자만 나쁜 짓을 했다면 싸움이 벌어질 리가 없어. 싸움은 반드시 두 사람 사이에 벌어지는 거다. 상대방의 잘못은 작은 것도 들보처럼 보이지. 만약 그 사람만 심술궂고 너는 착한 사람이었다면 싸움 같은 건 일어나지 않았을 게 틀림없다. 그 사람의 턱수염을 뽑은 건 누구냐? 반타작할 느릅나무를 빼앗은 건 누구냐? 그 사람을 이 재판소에서 저 재판소로 끌고 다닌 자는 누구냐? 그런데도 너는 모든 걸 그 사람에게 돌리고 있다. 너의 참을성 없는 행동으로 만사가 이 지경이 되었다. 나는 말이다, 이반, 그런 짓을 해 오지 않았었고, 너희들에게도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다. 나나 그 사람의 아버지인 옆집 노인이나 그런 방식으로 살지 않았다. 우리들 사이는 어떠했는 줄 아느냐? 그야말로 진짜 이웃사촌이었지. 그 집에 밀가루가 떨어지면 아낙네가 와서 "프로르 아저씨, 밀가루가 떨어졌는데요.'했고 그럼 난 '광에 가 쓸 만큼 가져가시죠.'라고 했다. 옆집에 말을 몰고 나갈 사람이 없으면 '야, 브류트카야, 옆집 말을 좀 몰려마'했다. 그리고 우리가 부족한 것이 있으면 서슴지 않고 가서 '고르제이, 이러이러한 게 없는데 하면 '가져가요, 프로르'했지. 우리는 이렇게 지내 왔다. 우리가 그렇게 지낼 때에는 살림도 넉넉했는데 요즘 형편이 어떠냐? 바로 얼마 전에도 어떤 군인이 프레부나 (1877년의 발칸 전쟁에서 러시아 군이 터키 때문에 고전한 싸움터)의 이야기를 하는 걸 들었지만, 어떠냐, 지금 너희가 하는 싸움은 그 프레부나보다 한결 더 나쁘다고 생각지 않느냐. 도대체 이것도 인간의 생활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아니 그건 죄라고 할 수밖에 없어! 너는 이 집안의 가장이니 책임이 제일 크다. 아이들 교육에도 못된 영향을 주게 돼! 며칠 전에도 타라스카, 그 코흘리개 녀석이 아리나 아주머니에게 어처구니없는 말을 하고 있는데도 어미는 그걸 보고 웃고 있지 않겠니. 도대체 이래도 괜찮다고 생각하느냐? 네 책임이다! 영혼이란 것을 생각해야 하느니라. 그래, 그런 짓을 해도 좋겠니? 저쪽이 한 마디 하면 이쪽은 두 마디 내뱉는다. 저쪽이 한 대 때리면 이쪽은 두 대 때린다. 그래선 안 된다. 이반, 그리스도가 세상을 두루 다니면서 우리들 바보에게 가르쳐 주신 것은 그런 것이 아니다. 상대방이 뭐라 해도 잠자코 있으면 저쪽도 양심의 가책을 받는다고 그리스도는 가르쳐 주셨다. 상대방이 뺨을 때리면 한쪽 뺨도 마저 내밀고, 때릴 만한 이유가 있으면 이쪽 뺨도 때리시오, 해야 한다. 저도 양심이 있어 그렇게는 못할 게다.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것은 바로 이것이지 고집이 아니다. 왜 잠자코 있느냐, 내 말이 틀렸느냐?"
이반은 조용히 듣고 있었다. 노인은 한참 콜록거리다가 간신히 기침을 멈추고 말을 이었다.
"너는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셨다고 생각하느냐? 남을 먼저 생각하는 마음이지. 지금 현재의 네 살림살이를 생각해 보아라. 그 싸움이 시작된 이래로 살림 형편이 좋아졌는지 나빠졌는지. 소송으로 돈을 얼마나 버렸는지, 마차 삯, 음식 값은 또 어떻고, 아들들이 자라 일을 하게 되었으니 오히려 형편이 차차 나아져 재산도 불어나야 할 터인데 되려 줄어들지 않느냐. 원인이 뭐라고 생각하냐? 이도저도 다 그것 때문이야. 네 고집 때문이다. 너는 자식들과 함께 밭을 갈고 씨를 뿌려야 할 때에 악마의 부추김에 넘어가 재판소다, 예심... 뭣이다, 하고 돌아다니기만 하니... 밭을 가는 것도 씨를 뿌리는 것도 때를 맞추지 못하면 아무 것도 낳아 주지 않아. 왜 올해는 귀리가 흉작이지? 네가 도대체 귀리를 언제 갈았느냐? 거리에서 돌아와서였다. 그래 재판에 이겨서 무슨 덕을 보았느냐. 쓸데없는 짐만 짊어졌을 뿐이 아닌가 말이다. 자기의 생업을 잊어서는 안 된다. 들일도 집안일도 아이들과 같이 땀흘려가며 하고, 혹시 누가 화나는 소리를 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용서해 주어라. 그렇게 하면 일은 순조롭게 잘 돼 나가고 마음도 편안하기 그지없을 것이다."
이반은 잠자코 있었다.
"자 어떠냐, 바니카! 이 늙은 아비의 말을 들어 주지 않겠니! 지금 곧 마차를 몰아 이제 돌아온 길을 되돌아 가서 소송을 취하하고 오너라. 그리고 내일 아침에는 가브릴로에게 가서 하나님의 가르침대로 화해하고 집으로 데리고 오너라. 내일은 마침 부활절이니까 보드카라도 마시면서 이제까지의 잘못을 말끔하게 씻어 버리는 게 좋겠다. 이제 앞으로는 그런 일이 없도록 며느리들에게나 젊은 아이들에게도 잘 타일러 주고 말이다."
이반도 긴 한숨을 내쉬면서 과연 아버님이 하시는 말씀이 옳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가슴 속의 무거운 짐이 금방 거뜬해지는 것 같았다. 한데 어떻게 화해해야 좋을지 망설여졌다. 그러자 노인은 아들의 마음을 알아차렸다는 듯이 이렇게 말했다.
"바니키야, 어서 가거라. 미뤄서는 안 된다. 불은 시초에 잡지 않으면 커진 뒤에는 손을 쓸 수가 없게 되느니라."
노인은 아직도 할 말이 남아 있었으나 때마침 아낙네들이 돌아와 떠들어대기 시작했으므로 말을 멈춰야 했다. 아낙네들은 가브릴로에게 태형 판결이 내렸다는 것도, 가브릴로가 불을 지르겠다고 한 것도 모두 들어 알고 있었다. 게다가 그녀들은 저 혼자 생각해낸 일까지 덧붙여서 벌써 목장에서 옆집 여인네들과 입씨름까지 벌이고 오는 참이었다. 가브릴로의 아내가, 예심 판사에게 뭔가를 쳐들며 협박까지 했다는 말도 나왔다. 분명치는 않으나 예심 판사가 가브릴로의 역성을 들고 있으므로 머지않아 사태가 바뀐다든가, 게다가 학교 선생님도 직접 황제 폐하에게 이반의 일로 소장을 냈는데, 소장에는 바퀴총에 관한 일도, 채마밭 일도 낱낱이 썼기 때문에 이반의 토지는 이제 금방 옆집 차지가 돼 버린다는 것이었다. 그 이야기를 듣는 동안 이반의 마음은 다시 돌같이 굳어져 가브릴로와 화해하려던 마음은 사라져 버렸다. 농가의 주인은 언제나 밖에서 돌보아야 할 일이 많은 법이다. 이반은 아낙네들을 상대로 이야기할 생각이 없어 훌쩍 일어나 밖으로 나가 탈곡장을 지나 곳간 쪽으로 갔다. 그쪽을 대강 치우고 뒷마당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봄 보리씨를 뿌리기 위해 둘이서 밭을 갈았던 것이다. 이반은 그들에게 들일에 관해 이것저것 물어 보고 그들의 일을 거들어 주려고 했으나 이미 날은 저물었다. 이반은 통나무는 다음날 아침까지 놓아두기로 하고, 마소에 짚을 주고 마구간에 가 타라스카가 밤일을 하러 가도록 말을 밖으로 끌고 나온 다음, 마구간의 문을 닫고 밑에 판대기를 대어 틈을 막았다.
'이제 저녁을 먹고 자야겠군.'
이반은 말의 망가진 목걸이를 들고 집 쪽을 항하여 걸음을 옮겼다. 그러는 동안에 가브릴로의 일도, 아버지가 하신 말씀도 다 잊을 수 있었다. 그런데 문고리를 잡아당겨 입구의 복도로 들어선 순간 저쪽에서 옆집 주인의 욕설하는 목 쉰 소리가 들려왔다.
"빌어먹을 녀석, 그런 녀석은 실컷 두들겨 줘야 해!"
가브릴로는 누군가를 욕하고 있었다. 이것을 들은 이반의 마음속에는 또다시 옆집 주인에 대한 증오심이 불길같이 일어났다. 가브릴로가 욕지거리를 하는 동안 이반은 몇 번이나 주먹을 불끈 쥐었다. 가브릴로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자 이반은 방 안으로 들어갔는데 젊은 며느리는 등불 아래서 물레를 돌려 실을 잣고, 아내는 저녁준비를 하고, 장남은 목피 구두 가장자리를 꿰매고 있고, 둘째 아들은 테이블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타스카는 밤일 나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집안은 평온하여 옆집의 가브릴로만 아니며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할 듯싶었다. 이반은 화난 듯한 얼굴로 안에 들어가 의자에 도사리고 앉은 고양이를 집어 던지고 대야를 놓아 둔 자리가 다르다고 여자들을 꾸짖었다. 한바탕 그러고 나자 이반은 어쩐지 모든 것이 시들해졌다. 자리에 앉아 씁쓰레한 얼굴로 말의 목걸이를 손보기 시작했으나 가브릴로가 하던 말이 아무래도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재판소에서 하던 얘기, 그리고 방금 누구를 욕하는 소리인지, "실컷 두들겨 줘야 해...." 하던 목쉰 소리 등이 말이다. 늙은 아내는 타라스카에게 저녁밥을 주고 있었다. 타라스카는 식사를 마치자 짧은 겉옷 위에 긴 외투를 걸치고 허리띠로 질끈 동여맨 다음 빵을 가지고 말들이 기다리고 있는 한길로 나갔다. 아들이 아우를 배웅하려고 했으나 이반은 자기가 일어나 입구 층계로 나갔다. 이반은 입구 층계로 내려가 아들을 말에 태우고 뒤에 있는 망아지를 몰아세운 다음 한참 거기 머물러 서서 주위를 바라봤다. 타라스카는 마을의 큰길로 데려가다 동행하는 젊은이들과 만난 모앙이었으나 그런 뒤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반은 문간에서 언제까지나 서 있었다. "너도 조심해야 할 걸. 언제 무엇이 홀랑 타 버릴지 누가 알아." 하던 가브릴로의 말이 머리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고약한 놈이라 자기 몸이 다친다는 생각은 하지도 않을 거야.' 하고 이반은 생각했다. '죽 가물었겠다, 게다가 바람도 있겠다, 울타리 뒤로 슬쩍 기어 들어와서 불을 지르고 그냥 도망쳐 버리면, 그렇게 되면 남의 집을 불사르고도 아무 죄에 걸리지 않을게 아닌가! 어떻게 해서라도 현장에서 놈을 붙잡아야지. 아무렴 놓쳐서는 안 돼!'
이런 생각이 떠오르자 이반은 입구 층계 쪽으로 되돌아가려하지 않고 곧장 도로 나가 대문 뒤에서 모퉁이로 돌아왔다. 놈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르겠다고 생각한 이반은 마당을 한 바퀴 돌아보기로 작정하고 살금살금 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모퉁이를 돌아 울바자에 붙어서 들려다보니 저쪽 모퉁이에서 무엇이 움직인 것같이 느껴졌다. 마치 누군가가 엿보다가 울바자 모퉁이에 도로 숨어 버린 것 같았다. 이반은 발길을 멈추고 숨을 죽였다. 온 정신을 모았으나 주위는 쥐죽은 듯이 고요했다. 다만 바람이 버드나무 가지를 떨게 하고 밀짚을 바스락거리게 할 뿐, 눈을 뽑아가도 모를 정도로 온통 캄캄하기만 했다. 차차 눈이 어둠에 익숙해졌다. 이반의 눈에 기둥과 추녀, 그 밖의 것이 하나씩 보이게 되었다. 한참 서서 보았으나 아무도 없었다. '내가 잘못 봤을까?'
이반은 나막신을 신고 있었으므로 천천히 걷자 마치 맨발로 걷는 것처럼 조용했다. 곳간 쪽으로 왔을 때 저쪽 끄트머리 기둥 곁에서 무엇인가 번쩍 빛났다가 다시 꺼졌다. 이반은 자기도 모르게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걸음을 멈췄다. 그런데 걸음을 멈출 겨를도 없이 다시금 같은 자리에서 먼저보다 밝은 빛이 타올랐다. 모자를 쓴 한 사나이가 이쪽으로 등을 꾸부정하게 돌린 채 손에 든 짚단에 불을 붙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반의 가슴은 무섭게 뛰기 시작했다. 이반은 아랫배에 힘을 주고 성큼성큼 걸음을 떼어 놓았으나 발이 땅을 밟는지 허공을 나는지 모를 정도였다. 그는 속으로 좋아서, 이번에야말로 놓치지 않는다. 현장을 붙잡을 테다! 하고 생각했다. 이반이 두 개의 차양이 마주 닿은 데까지 채 가기도 전에, 갑자기 그 언저리가 눈부실 정도로 밝아지면서 이제 그 자리에는 조그만 불이 아니라 차양 밑의 밀짚이 확 타올라 지붕으로 뻗치고 있었다. 거기에 가브릴도 서 있어 그의 전신이 완전히 불빛에 드러나 보였다. 종달새를 덮치는 매처럼 이반은 흐로모이에게 다려들었다. '이놈, 이번엔 안 놓친다.'고 생각했다. 그 때 호르모이는 발소리를 들었던 모양으로 홱 뒤를 돌아보자 어디서 그러 힘이 나왔는지 절름거리는 (흐로모이는 절름발이란 뜻으로 가브릴로의 별명이다) 다리를 용케 끌며 토끼처럼 깡충깡충 도망쳤다. "게 섰거라!" 하고 이반은 외치며 가브릴로를 뒤쫓았다. 이반이 그의 멱살을 잡으려고 하는 순간에 가브릴로는 그 손아귀에서 빠져 나갔다. 이반이 외투자락을 붙잡았으나 찢어지는 바람에 넘어지고 말았다. 이반은 벌떡 뛰어 일어나 "야아! 저놈 잡아라!" 하고 크게 외치며 다시 뛰기 시작했다. 이반이 넘어지는 바람에 가브릴로는 재빨리 자기 집 마당으로 들어갔는데 거기까지 이반이 쫓아갔다. 와락 붙잡았다고 생각한 순간, 이반은 무엇인가로 머리를 세게 맞았다. 아무래도 돌로 맞은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은 돌이 아니라 가브릴로가 마당에 뒹구는 떡갈나무 막대기를 주워 들고 이반이 달려들었을 때 힘껏 그 머리에 내리쳤던 것이다. 이반은 눈에서 불이 번쩍 났다고 생각하자 이내 정신이 몽롱해지고 또 주위가 캄캄해져 버렸다. 정신이 아찔하며 머리가 핑 돌았다. 겨우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가브릴로는 없었다. 온 누리는 대낮같이 환하고, 자기 집 쪽으로부터는 마치 기계라도 운전하는 것 같은 덜커덩거리는 소리가 나고, 무엇인가 탁탁 퉁기는 소리도 났다. 이반이 돌아다보니 뒷마당의 곳간이 온통 불덩이가 되어 그 저쪽 곳간으로 옮겨 붙는 중이었다. 불티랑 불붙은 짚단이 안채 쪽으로 날아갔다.
"아니, 이게 어떻게 된일일까? 아이구"
하고 외치며 이반은 양 주먹을 쳐들어 가슴을 마구 쳤다.
"아아, 그 때 차양 밑에서 불붙는 짚단을 끌어내어 껐으면 괜찮았을 텐데! 아니 이게 웬 날벼락이냐!"
그는 이 말만 되풀이하였다. 힘껏 소리를 질렀다고 자기는 생각하나 숨이 차고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다가가려고 해도 다리가 말을 듣지 않고 얽혀들 뿐이다. 천천히 걸음을 떼어 놓았는데 이리 비틀 저리 비틀 하더니 다시 숨이 막혔다. 한찬 멈춰 서서 숨을 돌리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겨우 곳간을 한 바퀴 돌아 불난 것에 닿을 때는 불이 옮겨 붙은 곳간은 온통 불바다가 되었고, 안채와 대문에까지 불이 붙어서 불길이 뿜어 나오는 바람에 마당은 걸을 수도 없는 형편이다. 숱한 사람이 모여 들었으나 손을 쓸 방도가 없었다. 근처 마을 사람들은 자기네의 가재도구를 끌어내기도 하고 가축들은 딴 데로 몰아내기도 하는 것이다. 집채도 타기 시작했다. 게다가 바람까지 불어오기 때문에 한길 건너까지 옮겨 붙어 마을이 절반이나 타 버렸다. 이반의 집은 겨우 식구들이 옷만 입은 채 튀어나왔을 뿐 몽땅 타고 말았다. 가축들도 밤일을 나간 말을 빼놓고는 전부 찜이 되고, 닭도 홰에 앉은 채 타 죽었으며, 마차도, 가래도, 써래도, 여자들의 옷궤도, 뒤주에 간수한 곡식도 모조리 타 버렸다. 가브릴로의 집에서는 그래도 가축들을 몰아냈고 이것저것 더러 꺼낼 수도 있었다. 불은 밤새도록 타올랐다. 이반은 한쪽 구석에 서서 멀거니 자기 집 쪽을 바라보면서,
"아, 이게 웬일이란 말이나가! 그냥 짚단을 끌어내어 비벼 껐더라면 됐을 텐데.“
하고 혼자 중얼거릴 뿐이었다. 그러나 안채의 천장이 무너져 내려앉을 때 이반은 그곳 한가운데로 뛰어들어 온통 그을은 재목을 모아 끌어내려고 했다. 마누라가 그것을 보고 불러내려고 했으나 이반은 보따리 하나를 끌어내고 또다시 들어가 하나를 끌어안으려고 했다. 하나 그대로 비틀비틀 몸을 가누지 못하고 불더미 속에 쓰러졌다. 그 때 아들이 뛰어 들어가 쓰러진 아버지를 구했다. 이반은 턱수염과 머리칼이 타고 옷까지 타서 여기저기 구멍이 나고 두 손에는 화상을 입었으나 자기 자신은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쯧쯧, 아주 정신 나간 거 아냐?“
하고 사람들은 저마다 말했다. 불길은 차차로 사그라들었으나 이반은 희미한 정신으로,
"여보시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요! 그냥 끌어내기만 했으면 됐을 텐데.“
하고 중얼거릴 뿐이었다. 아침이 되어 마을 반장이 이반을 부르러 아들을 보냈다.
"이반 아저씨, 아저씨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게 됐어요. 아저씨를 좀 보시겠대요, 어서 가세요!"
이반은 아버지의 일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어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아버지라고? 누가 누굴 부른다고?"
"아저씨를 부르고 있어요. 죽기 전에 한번 보신다구요. 할아버진 우리 집에서 지금 돌아가시려고 그래요. 자, 가세요, 이반 아저씨."
반장 아들은 그의 팔을 끌었다. 이반은 반장 아들의 뒤를 따랐다. 노인은 업혀서 대피할 때 불이 붙은 짚이 떨어져 화상을 입었다. 그래서 멀리 떨어진 마을 반장 집으로 떠메어져 갔던 것이다. 이반이 아버지에게로 갔을 때 집 안에는 늙은 반장의 아내와 페치카 옆의 아이들밖에 아무도 없었다. 모두 불구경하러 갔던 것이다. 노인은 촛불을 손에 들고 침대에 누워 문가 쪽을 보고 있었다. 아들이 들어왔을 때 노인은 조금 몸을 움직였다. 노파가 다가가 아들이 왔다고 하자 곁으로 가까이 오도록 해달라고 부탁했다. 이반이 곁으로 다가가자 노인은 말했다.
"어떠냐, 브뉴트카? 내가 네게 말하지 않았더냐? 누가 이 마을을 태웠느냐?"
"그놈이에요, 아버지."
하고 이반은 말했다.
"그놈이에요. 내가 이 눈으로 보았거든요. 내가 보는 앞에서 불이 붙은 짚을 지붕 밑에 밀어 넣었어요. 나는 그냥 불붙은 짚단을 끌어내어 비벼 껐으면 됐어요. 그렇게 했더라면 아무 일 없었을 걸 그랬어요."
"이반아!“
하고 노인은 말했다.
"나는 이제 죽을 때가 왔지만 너도 역시 언젠가는 죽는다. 도대체 이건 누구의 죄냐?"
이반은 멀거니 아버지에게 눈길을 쏟은 채 잠자코 있었다. 한 마디도 할 말이 없는 모양이었다.
"하나님 앞에 섰다고 생각하고 말을 해라. 도대체 누구의 죄냐? 내가 네게 뭐라고 하더냐?"
그 때 비로소 이반은 잠에서 깨어난 듯한 느낌이 들면서 모든 일에 납득이 갔다.
"이건 제 잘못입니다. 아버지!"
이반은 이렇게 외치며 아버지 앞에 쓰러져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아버지, 용서해 주십시오. 저는 아버님에 대해서도 하나님께 대해서도 할 말이 없습니다!"
노인은 양손을 움직여 촛불을 왼손에 들고 오른손을 이마로 올려 성호를 그리려고 했으나 거기까지 손이 닿지 않아 단념했다.
"주께 영광 있으라! 주께 영광 있으라!“
고 외치며 다시 아들을 바라보았다.
"바니카, 얘, 바니카야!"
"뭡니까, 아버지?"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이냐?"
이반은 눈물을 흘렸다.
"모르겠어요. 아버지 이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아버지?"
노인은 잠시 깊은 생각에 잠기더니 이윽고 천천히 말했다.
"살아갈 수 있다. 하나님과 같이 산다면 능히 살아간다."
노인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빙그레 웃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알았느냐, 바니카야, 누가 불을 질렀는지 말해서는 안 돼. 남의 죄를 하나 감싸 주면 하나님께서는 죄를 둘 용서해 주신다."
노인은 촛불을 양손으로 받쳐 들고 그것을 가슴에다 갖다 대면서 후욱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대로 세상을 떠났다. 이반은 아버지의 유언대로 가브릴로의 소행을 발설하지 않았으므로 어떻게 하여 불이 일어났는지 끝내 아무도 몰랐다.
이반에게서 가브릴로를 미워하는 마음은 사라져 버렸다. 한편 가브릴로는 어찌하여 이반이 자기의 악행을 남에게 말하지 않는가, 은근히 놀라고 있었다. 그래서 한동안 가브릴로는 이반을 두려워했으나 차차로 그런 마음이 없어지고 미안한 마음이 생겨났다. 양쪽 주인들이 싸움을 하지 않게 되었으므로 식구들도 서로 싸우지 않게 되었다. 집들을 다 지을 때까지 두 집 가족은 한 지붕 밑에서 살았다. 그리고 온 마을의 집이 새로 지어졌을 때 이반과 가브릴로는 다시 그 전 자리로 돌아가 이웃이 되었다. 이반과 가브릴로는 아버지 대에서와 마찬가지로 이웃끼리 정답게 지냈다. 이반 시체르바코프는 노부의 교훈이기도 하고 하나님의 가르침이기도 한 불을 애초에 끄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일을 마음 속 깊이 새겨 두고 잊지 않았다. 혹시 누가 자기에게 나쁜 장난을 걸어와도 맞서서 싸우려 하지 않고 오히려 좋은 방향으로 이끌려고 애썼다. 또 혹시 누가 자기를 욕해도 마주 욕하려 하지 않고 그런 나쁜 말을 하지 않게 일깨워 주려고 노력했다. 이반 시체르바코프는 새로운 사람이 되어 자기 집 아낙네들이나 아이들에게도 그렇게 가르쳤으므로 전보다 더 풍족한 가정을 이루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