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순례자
Lev. N. Tolstoy
그랬더니 그 여자는 "과연 선생님은 예언자이십니다. 그런데 우리 조상은 저 산에서 하느님께 예배드렸는데 선생님들은 예배드릴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 말을 믿어라. 사람들이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에 '이 산이다' 또는 '예루살렘이다' 하고 굳이 장소를 가리지 않아도 될 때가 올 것이다. 너희는 무엇인지도 모르고 예배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예배드리는 분을 잘 알고 있다. 구원은 유대인에게서 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실하게 예배하는 사람들이 영적으로 참되게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올 터인데 바로 지금이 그때이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하는 사람들을 찾고 계신다. 하느님은 영적인 분이시다. 그러므로 예배하는 사람들은 영적으로 참되게 하느님께 예배드려야 한다." (요한의 복음서, 4:19∼24)
1
두 노인이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떠나기로 했습니다. 한 사람은 예 따라시치 세벨료프라는 부자 농부였고 다른 한 사람은 엘리세이 보드로프라는 노인이었습니다.
예핌은 착실한 농부였으며, 술 담배를 입에 대지 않는 것은 물론 냄새조차 맡지 않았습니다. 욕이라곤 한 번도 해본 적이 없고 모든 일에 엄격하고 철저했습니다. 그는 두 차례나 이장을 지내면서 단 한 푼도 모자람이 없이 일을 마쳤습니다. 두 아들과 장가든 손자까지 있는 많은 식구였지만 모두가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아주 건강했으며 턱수염을 텁수룩하게 기르고 있었습니다. 일흔 살인데도 등도 구부러지지 않고 수염은 이제 겨우 희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엘리세이는 부자도 가난뱅이도 아닌 노인이었습니다. 젊었을 때에는 목수 일로 살아왔으나 나이가 들면서부터는 집에서 꿀벌을 치고 있었습니다. 큰아들은 먼 곳으로 돈벌이를 떠났고, 둘째아들이 집일을 돌보고 있었습니다.
엘리세이는 마음씨 좋고 명랑한 사람이었습니다. 술도 마시고 담배도 피우고 노래도 잘 불렀으나 워낙 사람이 착해서 집안 식구나 이웃하고도 사이가 좋았습니다. 그는 짤막한 키에 얼굴빛이 거무스름하고 허약한 몸집의 농부로서 곱슬곱슬한 턱수염을 기르고 있었는데, 그 모습은 마치 같은 이름을 가진 구약의 예언자 엘리세이와 흡사한 대머리였습니다.
두 노인이 함께 순례를 떠나자고 약속한 것은 아주 오래 전이었습니다. 그러나 예핌은 늘 바빠서 일이 끝나지를 않았습니다. 한 가지 일이 끝났는가 하면 또 뒤이어 다른 일이 생겼습니다. 손자의 결혼식을 치르고 나면 또 막내가 군에서 제대해 돌아오고, 거기다 이번엔 새 집을 지을 일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어느 명절날, 두 노인은 우연히 만나 통나무 위에 나란히 걸터앉았습니다.
"어때? 이젠 성지 순례를 떠날 때가 되지 않았나?" 하고 엘리세이가 말했습니다.
"아니, 좀더 기다려 주게. 올해는 모든 일이 제대로 되지를 않아. 집을 짓기 시작할 때는 그저 백 루블 정도로 충분할 줄 알았는데, 벌써 삼백 루블이나 들였는데도 아직 멀었어. 아무래도 여름까지 끌 것 같아. 글쎄 주님의 뜻이라면 요번 여름엔 떠날 수 있겠지."
"내 생각으로는,"하고 엘리세이가 말했습니다. "그렇게 자꾸 미루는 건 좋지 않다고 보네. 결심을 하고 떠나야지. 봄철이라 지금이 가장 좋을 때이고……"
"때는 좋지만 일단 시작한 일을 그냥 두고 떠날 수야 있나?"
"아니, 자네 집에는 일 맡길 사람이 그렇게도 없나? 아들이 다 알아서 할 텐데 뭘 그러나?"
"알긴 뭘 알아! 큰 자식 놈이라고 어디 믿을 수가 있어야지. 틀림없이 엉뚱한 일을 벌여 놓을 거야."
"아니야, 어차피 우리가 먼저 죽을 건데 우리가 떠나도 남은 자식이 모두 잘해 나간다구. 자네 아들도 그래. 일은 지금부터 배워서 익혀야지."
"그건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다 짓는 걸 내 눈으로 보고 싶단 말이야."
"아이구, 난 모르겠네! 이런저런 일들을 모두 끝내자면 한이 없지. 아무렴 한이 없고말고. 바로 조금 전에도 명절이 가까웠다고 우리 집 여자들이 빨래며 집안 치우기며 이런 일 저런 일로 아주 난리가 났었다네. 그런데 우리 큰며느리가 참 영리하게도 이런 말을 하더군. '명절날이 우리를 기다리지 않고 빨리 다가오니까 그래도 다행이지요. 그렇지 않으면 암만 일을 해도 다 끝내지 못할 건데요.'하고 말이야."
예핌은 이렇게 대꾸했습니다.
"그렇지만 집 짓는 일로 돈을 너무 써버렸어. 한 푼도 없이 먼 길을 떠날 수도 없고…… 한두 푼 가지곤 어림도 없을 테고…… 그래, 백 루블은 있어야 할 텐데."
엘리세이는 웃으며 말했습니다.
"벌 받을 소리 말게. 자네 재산은 나보다 열 배나 많으면서 돈 걱정을 하다니. 그런 걱정은 말고 언제 떠날지나 생각해 보게. 나는 돈이라곤 한 푼도 없지만 그래도 떠날 때면 어떻게 마련되겠지."
"거참, 대단한 부잔데. 어디서 어떻게 마련할 셈이지?"
예핌은 웃으며 물었습니다.
"난 집안에 있는 돈을 모두 긁어모을 작정이네. 그래도 모자라면 밖에 통나무 꿀벌 통을 열 개쯤 팔면 될 테지. 옆집에서 전부터 사려고 했으니까 말이야."
"팔고 난 뒤 그 벌통에서 꿀이 많이 나오면 속이 상할 텐데."
"속이 상한다고? 그런 말은 아예 말게. 이 세상에 속상할 일은 죄짓는 것밖에 없어. 영혼보다 귀중한 것이 어디 있겠나?"
"하긴 그래. 그래도 역시 집일을 잘 정리해 두지 않으면 아무래도 불안해서……"
"그런 일보다 더 불안한 것은 영혼을 바로잡지 못하는 일이라네. 어떻든 약속대로 떠나도록 하세."
2
엘리세이는 이렇게 친구를 설득하였습니다. 예핌은 밤새워 생각한 뒤, 다음날 아침 일찍 엘리세이를 찾아왔습니다.
"자네 말이 맞아. 사는 것도 죽는 것도 모두 하느님의 뜻일세. 살아서 기운 있을 때 순례를 떠나기로 하세." 하고 예핌은 말했습니다.
일주일 동안에 두 노인은 떠날 채비를 끝냈습니다.
예핌은 저축한 돈이 많았습니다. 그는 여비로 백 루블은 자기가 지니고, 늙은 아내에게 2백 루블을 맡겼습니다.
엘리세이도 채비를 했습니다. 밖에 늘어놓은 통나무 꿀통 중 열 개를 옆집에 팔고, 또 거기서 생기는 애벌도 함께 주기로 약속했습니다. 그래서 70루블의 돈을 마련했습니다. 부족한 30루블은 온 집안 식구들에게서 긁어모았습니다. 늙은 아내는 죽을 때를 위해 모아 둔 돈을 모두 털어놓았고, 며느리도 비상금을 내놓았습니다.
예핌 따라시치는 맏아들에게 집일을 모두 맡겼습니다. 풀은 어디서 얼마 정도를 베어야 하고, 거름은 어디로 나를 것이며, 새 집 일은 어떻게 끝내야 하고, 지붕은 어떤 모양으로 올릴 것인지, 집안 일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지시했습니다.
그러나 엘리세이는 팔아 버린 통나무 꿀통에서 깐 애벌은 따로 모아서 그대로 옆집 주인에게 주라고 아내에게 말했을 뿐입니다. 집일에 관한 것은 아무 지시도 내리지 않았습니다. 일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그 일을 맡게 되면 저절로 알게 될 것이며, 너희들도 주인이니 자기가 할 일은 자기가 알아서 하라는 식이었습니다.
두 노인은 채비를 끝냈습니다. 식구들은 과자도 굽고 자루도 만들고, 다리싸개를 새로 마름질하고 농부화도 새로 만들었습니다. 갈아 신을 나막신까지도 준비한 노인들은 드디어 길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식구들이 동구 밖까지 나와 전송하고 두 노인은 여행을 시작했습니다.
엘리세이는 마음이 들떠서 첫걸음을 내디뎠습니다. 그는 마을에서 점점 멀어지자 집일 따위는 까마득히 잊어버렸습니다. 그는 그저 여행하는 동안 친구와 잘 지내자, 아무에게도 싫은 말은 하지 말자, 아무 사고 없이 기분 좋게 목적지에 도착하고 또 집을 돌아오자, 이런 생각으로만 꽉 차 있었습니다. 엘리세이는 입 속으로 기도문을 외거나 자기가 알고 있는 성인의 일생을 생각하며 길을 걸었습니다. 도중에서 만나는 동행에게나 여인숙에 들어서도 남에게 친절히 대하기로 마음먹고 항상 하느님의 뜻에 맞는 말만을 하기로 작정했습니다. 걸어가면서도 아주 기분이 좋았는데, 오직 한 가지만은 엘리세이로서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코담배를 끊겠다고 굳게 결심하여 쌈지를 집에 두고 떠났는데 그 생각이
더욱 간절해졌습니다. 마침 도중에 어느 사람한테서 얻은 것이 있어 친구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이따금 슬그머니 뒤쳐져 코담배 냄새를 맡곤 했습니다.
예핌 따라시치도 기분이 좋은 듯 활기차게 걸었습니다. 나쁜 짓이라곤 전혀 하지 않았으며 한마디도 쓸데없이 지껄이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편안하지 못했습니다. 집일이 항상 마음에 걸렸습니다. 집안 일은 어떻게 되어 가나 그 생각뿐이었습니다. 뭔가 아들에게 지시할 것을 빠뜨리지는 않았는지, 아들은 저렇게 하고 있는지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만 당장 집에 돌아가 자기 손으로 모든 일을 해 버렸으면 하는 충동이 일어나는 것이었습니다.
3
두 노인은 계속 다섯 주일을 걸었습니다. 집에서 신고 온 나막신도 다 떨어져서 새로 사야만 하게 되었습니다. 이 무렵 그들은 소러시아 지방까지 갔습니다. 집을 떠나니 잠자는 것도 먹는 것도 모두 돈을 내야 했는데, 이 지방에 들어서니 모두들 다투어 두 노인을 자기 집에 초대했습니다. 재워 주고 잘 먹여 준 뒤 돈도 받지 않았고, 거기다 가는 도중 먹으라고 빵과 과자를 자루 속에 넣어 주기도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두 노인은 별 어려움 없이 7백 베르스따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다시 고을을 지나서 흉년이 든 지방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 지방에서는 잠은 그냥 재워 줬지만 먹을 것은 하나도 주지 않았습니다. 어디 가도 빵은 주지 않았고 어떤 때는 돈을 주고도 빵을 살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지난해에 심한 흉년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부자는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가진 물건들을 팔아 버리고, 중류층은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었으며, 가난한 사람은 딴 지방으로 떠나든지 구걸을 하든지, 아니면 마을에서 근근이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형편이라고 했습니다. 밀기울과 명아주로 끼니를 이으면서 겨울을 보냈다는 것입니다.
어느 날 두 노인은 작은 마을에서 빵을 열 다섯 근쯤 사고 하룻밤을 묵은 뒤, 새벽 일찍이 길을 떠났습니다. 더워지기 전에 조금이라도 더 많이 가려는 생각이었습니다.
10베르스따쯤 걸은 뒤에 어떤 시냇가에 도착했습니다. 그곳에서 다리를 펴고 앉아 컵으로 물을 떠서 빵을 축여 가며 배부르게 먹은 뒤 나막신을 갈아 신었습니다. 한참 동안 앉아서 쉬는 사이에 엘리세이는 담배쌈지를 꺼냈습니다. 그것을 보고 예핌은 머리를 저으며 말했습니다.
"어째서 그 나쁜 버릇을 모 버리나!"
엘리세이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한 손을 저으며 대답했습니다.
"나는 죄에 빠져 버렸네. 어쩔 수가 없어."
두 사람은 다시 걷기 시작했습니다. 그곳에서 10베르스따 정도 더 가자 큼 마을이 앞에 나타났습니다.
그 마을을 다 지났을 때는 벌써 햇볕이 너무나 뜨거워져 있었습니다. 엘리세이는 너무나 피곤하여 잠깐 쉬면서 물이라도 한 그릇 마시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예핌은 쉬려 하지 않았습니다. 예핌은 잘 걸었습니다. 그래서 엘리세이는 그와 함께 걷는 일이 무척 힘들었습니다.
"물 좀 마셨으면 좋겠어."
"마시게. 나는 괜찮아."
"그럼 자네 먼저 가게. 나는 저 집에 가서 물 좀 얻어 마시고 뒤쫓아 갈 테니."하고 엘리세이는 발길을 멈추고 예핌에게 말했습니다.
"그렇게 하게."
예핌은 혼자 신작로를 걸어가고, 엘리세이는 농가 쪽으로 돌아섰습니다.
엘리세이가 농가 가까이 가보니 석회칠을 한 작은 집이 있었습니다. 위쪽은 희고 아래쪽은 검은 집이었는데 칠도 벗겨지고 지붕도 한쪽이 허물어지고 없었습니다. 아마 오랫동안 집을 손보지 못한 모양입니다. 뒷문 쪽에 입구가 나 있어 엘리세이는 뒷문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때 담장 밑에 쓰러져 있는 한 남자가 보였습니다. 턱수염도 없는 바싹 마른 사나이는 소러시아식으로 셔츠 자락을 바지 속에 넣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아마 처음엔 시원한 그늘 밑을 찾아 누웠던 것으로 짐작이 되는데, 지금은 햇볕이 바로 위에서 내리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누운 채 잠들어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엘리세이는 물 좀 마실 수 없느냐고 물었으나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습니다.
병에라도 걸렸든지 아니면 꽤 무뚝뚝한 사람인 모양이다, 엘리세이는 그렇게 생각하며 문 쪽으로 다가갔습니다.
그때 집안에서 어린애 울음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엘리세이는 문고리쇠로 덜컹덜컹 소리를 내면서 "실례합니다."하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아무 대답이 없었습니다. "안녕하십니까!" 하고 말해도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안 계십니까!" 그래도 역시 목소리조차 들리지 않았습니다. 엘리세이가 막 돌아서려 할 때 문 앞에서 누군가의 신음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무슨 불행한 일이라도 생긴 것이 아닐까? 한번 알아보고 떠나야지.'
엘리세이는 집 안으로 들어섰습니다.
4
엘리세이가 손잡이를 돌려 보니 문은 잠겨 있지 않았습니다. 문을 열고 복도에 들어서니 방으로 통한 문이 열려 있었습니다. 오른쪽에 난로가 있었고, 곧바로 보이는 쪽이 상좌였습니다. 그 구석에는 성상과 탁자가 놓여 있고 탁자 맞은편에 걸상이 있었습니다. 걸상에는 속옷만 입은 할머니가 머리에 두건도 쓰지 않고 앉아서 머리를 탁자 위에 올려놓고 있었습니다. 그 옆에는 너무 말라서 배만 커다랗고 얼굴이 밀랍처럼 창백한 남자애가 앉아서 할머니의 옷소매를 잡아당기며 무언가 조르고 있었습니다.
엘리세이가 방안으로 들어가자 숨이 막힐 듯 고약한 냄새가 코를 찔렀습니다. 난로 저쪽 마룻바닥 위에 한 여자가 쓰러져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이쪽을 보려고도 하지 않고 엎어져서 단지 가래 끓는 소리만 내며 한쪽 다리를 폈다 오므렸다 하고 있었습니다. 몸에서는 코를 찌르는 듯한 악취를 풍기며 이리저리 뒤척이며 괴로워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여자는 대소변을 못 가리는 모양인데 아마도 뒤처리를 해줄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 같았습니다. 할머니가 문득 눈을 뜨고 이 낯선 사람을 바라보았습니다.
"당신은 누구요? 무슨 일로 왔어요? 무엇이 필요해서 왔어요? 무엇이 필요해서 왔어요? 누군지 모르지만 우리 집엔 아무것도 없다오……"
엘리세이는 그 옆으로 다가서며 말했습니다.
"할머니, 물을 좀 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아무것도 없다고 했잖소. 물 떠올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직접 가서 떠 마시도록 해요"
"할머니, 어찌된 일입니까? 이 집엔 건강한 사람이 한 명도 없는 모양이지요? 이 아주머니를 돌볼 사람도?"하고 엘리세이가 물었습니다.
"아무도, 아무도 없소. 뒷문 쪽으로 한 사람이 죽어가고 우리도 여기서 이렇게……"
낯선 사람을 보자 잠시 동안 입을 다물고 있던 사내아이는 할머니가 말하는 것을 보고는 다시 소매를 집적거리며 울기 시작했습니다.
"빵 줘. 할머니, 빵 줘!"
엘리세이가 할머니에게 또 말을 물으려고 하는데 밖에 있던 남자가 비틀거리며 집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는 벽을 짚고 걸어가 의자에 앉으려 했으나 그러지도 못하고 문 근처의 한 구석에 기대듯이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말 한마디하고는 쉬고, 또 한마디하고는 숨을 몰아쉬면서 말을 이었습니다.
"전염병에 걸렸어요. 거기다 흉년까지 들어서…… 저 애도 배가 고파 다 죽게 됐어요!" 하고 그는 턱으로 사내아이를 가리키며 울기 시작했습니다.
엘리세이는 등에 지고 있는 자루를 치켜 올려 멜빵에서 두 팔을 뽑았습니다. 그리고 자루를 내려서 걸상 위에 올려놓고 그것을 끌렀습니다. 그리고 자루를 열고 빵과 나이프를 꺼내서 농부에게 한 조각 잘라 주었습니다. 그 사람은 빵을 받지 않고 사내아이와 여자 쪽을 가리켰습니다. 그들에게 주라는 뜻입니다. 엘리세이는 사내아이에게 주었습니다. 빵을 본 사내아이는 몸을 뻗쳐 두 손으로 빵을 움켜쥐고는 거기에 코와 입을 처박았습니다.
그러자 난로 구석에서 한 계집애가 기어 나와 빵을 뚫어지듯이 쳐다보았습니다. 엘리세이는 그 애한테도 한 조각을 줬습니다. 그리고 할머니에게도 한 조각 잘라 주었습니다. 할머니는 그것을 받아 들고는 정신없이 먹었습니다.
"물을 한 그릇 떠다 주면 고맙겠는데, 우린 목이 말라 죽을 지경이라오. 어젠지 오늘인지 내가 물을 길러 갔었지요. 그런데 떠오지도 못하고 쓰러져 버렸다오. 누가 가져가지 않았다면, 물통이 거기 그냥 있을 텐데……" 하고 할머니는 말했습니다.
엘리세이는 우물이 어딘지를 물었습니다. 할머니가 자세히 일러준 대로 가자 물통이 있었습니다. 물을 길어서 모두에게 마시도록 하였습니다. 할머니와 아이들은 물과 빵을 먹였지만 남자는 먹으려 하지 않고 "속이 영 좋지를 않다,"고 말했습니다. 여자는 몸을 일으키려고도 않고 정신없이 그냥 그 자리에 쓰러져 몸부림만 치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엘리세이는 마을의 가게로 가서 옥수수와 소금, 밀가루, 버터를 사왔습니다. 그리고 도끼로 장작을 패 난로에 불을 지폈습니다. 계집아이가 도와주었습니다. 그리하여 엘리세이는 수프와 죽을 끓여 모두에게 먹였습니다.
5
주인 남자도 조금 먹었고 할머니도 먹었습니다. 계집아이와 사내아이는 그릇 바닥까지 깨끗이 핥아먹고 난 뒤 서로 껴안고 잠들어 버렸습니다. 농부와 할머니는 이렇게 된 사정을 이야기 했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가난하기는 했지만 그럭저럭 살아왔어요. 그런데 지난 흉년으로 추수한 것이 없어서 가을부터는 남았던 양식으로 연명했지요. 나중엔 그것도 떨어져 이웃과 친절한 분들의 도움을 받았답니다. 처음엔 더러 꾸어 주기도 했지만 차차 거절을 당하게 됐지요. 어떤 사람은 꾸어 주고 싶긴 하지만 아무것도 없어서 어쩔 수 없다고 하더군요. 한두 번도 아니고 저희도 자꾸 그러기가 너무 민망스러웠어요., 이곳 저곳에서 돈과 밀가루, 빵을 꾸었으니 말입니다. "
농부는 계속해서 말했습니다.
"나는 일을 찾아 나섰지만 어디 일자리가 있어야 하지요. 생계를 위해 모두들 일자리를 찾아다니는 형편이었습니다. 어쩌다 하루 일하면 그 다음 이틀은 일자리를 찾아 헤매고 다녀야 했어요. 그래서 할머니와 계집애가 이웃마을로 동냥을 갔지만 누구나 다 빵이 없으니 제대로 먹을 걸 얻을 수가 있겠어요? 그래도 굶어 죽지는 않을 정도로 입에 풀칠을 했습니다. 그런 대로 햇보리가 날 때까지 견뎌 보자고 생각했었지요. 그런데 봄이 되자 아무도 동냥을 주지 않았어요. 거기다 이렇게 열병까지 번지더군요. 점점 더 형편이 나빠져 하루 먹으면 이틀은 굶게끔 됐습니다. 나중에는 풀까지 뜯어먹게 되었지요. 그 풀이 잘못인지 아니면 무슨 다른 이유가 있었는지 아내가 병에 걸려 쓰러졌어요. 아내는 앓아 누웠고 나도 힘이 다 빠져 버렸으니 앞일이 암담합니다. "
농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자 할머니가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나도 먹고살려고 안간힘을 다해봤어요. 이젠 힘도 없고 너무 지쳐서 주저앉아 버렸지요. 손녀딸도 몸이 너무 약해졌고 거기다 겁까지 먹어 가까운 데 심부름을 시켜도 가질 않으려 해요. 꼼짝도 않고 구석에만 박혀 있지요. 엊그제 무슨 볼일이 있는지 이웃 아주머니가 찾아 왔다가 모두 굶주려 쓰러져 있는 것을 보고는 깜짝 놀라 도로 나가 버리더군요. 그럴 만도 하지요. 그 아주머니도 남편은 도망쳐 버리고 어린아이들과 도망쳐 버리고 어린아이들과 굶는 형편이니까요. 그래서 이렇게 죽을 날만 기다리며 누워 있는 참이라오."
엘리세이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난 뒤, 친구를 따라갈 생각을 치우고 그 날부터 그 집에 머물렀습니다. 다음날 아침 자리에서 일어나자, 엘리세이는 자기가 이집 주인이나 되듯 집안 일을 돌보기 시작했습니다. 할머니와 함께 밀가루 반죽을 하고 난로에 불을 지폈습니다. 또 계집아이와 함께 근처를 돌아다니며 쓸 만한 물건을 찾아보았습니다. 이것저것 골라 보아도 쓸 만한 것이라곤 하나도 없었습니다. 모두 먹을 것과 바꾸어 버렸던 것입니다. 연장도 없고 걸칠 옷마저도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래서 엘리세이는 꼭 필요한 물건을 마련하기 시작했습니다. 자기가 직접 만들기도 하였고 밖에 나가 사온 것도 있었습니다.
이리하여 엘리세이는 하루, 이틀, 사흘을 보냈습니다. 사내아이는 건강을 회복하여 가게로 심부름도 다니며 엘리세이를 무척 따랐습니다. 계집아이도 퍽 명랑해졌습니다. 무슨 일이나 거들려고 하였고 항상"할아버지, 할아버지!" 하며 엘리세이의 뒤를 따라 다녔습니다. 할머니도 일어나 이웃집으로 나다닐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주인남자도 벽을 짚고 걸음을 옮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직 그의 아내만은 아직도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 여인도 사흘째가 되자 정신을 차리고 뭔가 좀 먹고 싶어 했습니다. 엘리세이는 그제야 비로소 '이렇게 오래 걸릴 줄은 몰랐는걸. 이젠 그만 길을 떠나야겠군.'하고 생각하였습니다.
6
나흘째 되는 날은 바로 축제일 하루 전이었습니다. 그래서 엘리세이는 그들과 같이 전야를 축하하고 선물을 좀 사준 뒤, 저녁나절에 떠나도록 하자고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엘리세이는 다시 마을에 가서 우유와 밀가루와 기름을 사가지고 왔습니다. 그리고 할머니와 함께 요리를 만들었습니다.
다음날 아침엔 교회의 기도식에 참례하였습니다. 그 다음에 집으로 돌아와서 그들과 같이 음식을 맛있게 먹었습니다. 이날은 여자도 자리에서 일어나 집안을 슬슬 거닐기 시작했습니다. 주인 남자도 수염을 깎고, 할머니가 빨아 준 셔츠로 깨끗이 갈아입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마을의 잘사는 농부를 찾아갔습니다. 이 농부에게 밭과 풀밭을 저당 잡혔기 때문에 햇보리가 날 때까지 그 밭과 풀밭을 좀 쓰게 해 달라고 간청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저녁 무렵에 어깨가 축 처져서 돌아온 남자는 눈물을 흘렀습니다. 잘사는 농부가 사정도 봐주지 않고 돈을 가지고 오라 했다는 것입니다.
엘리세이는 다시 생각에 잠기며 중얼거렸습니다. '이 사람들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딴 사람들이 모두 풀 베러 갈 때 이 사람들은 멍하니 그냥 있어야 한다. 풀밭이 저당 잡혔으니까. 남들은 쌀보리가 익을 때면 추수를 할 텐데(정말 잘 영글었더군 ! ) 이 사람들에겐 아무 기쁨도 없겠구나. 밭을 부잣집에 팔아 버렸으니. 내가 이대로 가버린다면 이 사람들은 다시 전처럼 길에서 헤매게 될 것이다. '엘리세이는 여러 가지 생각이 뒤엉켜 그날 저녁때도 출발을 못하고 다음날 아침에 길을 떠나기로 했습니다. 밖에서 기도를 드린 뒤 자리에 누웠지만 잠이 오지를 않았습니다. 그 동안 돈도 시간도 너무 써버려 이제는 그만 떠나야 하는데도 이 집 사람들이 불쌍해서 그럴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을 도울 수는 없을 것 같다. 처음엔 물이나 떠 주고 빵이나 한 조각씩 주고 떠날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돼 버렸구나. 이제는 풀밭과 밭을 찾아 주어야만 하게 되었다. 밭을 찾아 주고나면 그 다음엔 애들에게 먹일 우유를 위해 젖소를 사주어야 된다. 그리고 주인 남자한테는 보릿단을 나를 말을 사주어야 된다. 그리고 주인 남자한테는 보릿단을 나를 말을 사주어야 될 것이다. 이봐, 엘리세이, 너는 아주 호되게 걸렸구나. 일을 벌여 놓고는 아주 뒤죽박죽이 됐구!'
엘리세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베개로 썼던 긴 외투를 더듬어 담배쌈지를 꺼냈습니다. 머릿속을 맑게 하려고 담배를 한줌 쥐었지만 어쩐 일인지 아무리 생각하고 또 생각해 보아도 신통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떠나긴 떠나야 할 텐데 이 사람들이 불쌍해서 그럴 수가 없습니다. 그는 다시 긴 외투를 둘둘 말아서 베개로 만들어 드러누웠습니다.
그렇게 가만히 누워 있는 동안 어느새 닭이 울고 마침내 깊이 잠들어 버렸습니다. 그때 갑자기 누군가 엘리세이를 부르는 듯했습니다. 어느 틈에 자기가 떠날 채비를 차리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자루를 등에 지고 손에는 지팡이를 짚었습니다. 그는 문 밖으로 나가려 했습니다. 문은 활짝 열려 있어 바로 나가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그가 막 문 밖으로 나가려 하는데 이쪽 울타리에 자루가 걸렸습니다. 그걸 떼려니까 이번엔 저쪽 울타리에 다리 싸개가 걸려 다 풀어질 형편이었습니다. 그것을 다시 감으려고 내려다보니 아니 이게 웬일입니까. 그것을 다시 감으려고 내려다보니 아니 이게 웬일입니까. 그것은 울타리에 걸린 것이 아니라 계집아이가 다리를 붙잡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빵 좀 줘요!"하고 외치고 있었습니다. 또 발에는 사내아이가 다리싸개를 계속 붙잡고 있었습니다. 할머니와 주인 남자는 창문에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엘리세이는 잠에서 깨어나 혼자 중얼거렸습니다.
"내일은 밭과 풀밭을 찾아 주어야지 또 말도 사주고 먹을 밀가루도 사고 아이들에게 우유를 먹일 젖소도 사주자.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힘들여 바다를 건너 그리스도를 찾아간다 해도 내 안에 있는 그리스도를 잃게 될 것이다. 살기 어려운 사람을 돕도록 하자!"
그러고 나서 엘리세이는 아침까지 푹 잤습니다. 아침 일직 일어나서 잘사는 농부를 찾아갔습니다. 돈을 치르고 밭을 도로 찾아 주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낫을 사왔습니다. (그것까지도 팔아먹었던 것입니다. ) 주인 남자는 풀을 베도록 풀밭에 보냈습니다. 엘리세이는 마을 농가를 돌아보다가 주막집 주인이 파는 수레와 말을 흥정해서 샀습니다. 짐수레에 밀가루 한 부대를 사서 싣고, 이번에는 젖소를 사러 갔습니다. 가는 동안 소러시아 지방의 두 여인들이 뒤를 따라가게 되었습니다. 그 여인들은 열심히 이야기를 하면서 걷고 있었습니다. 소러시아어로 이야기했지만 엘리세이는 알아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엘리세이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엔 그가 누군지 전혀 몰랐대요. 그저 순례자거니 했답니다. 물을 얻어 마시러 왔다가 그냥 눌러 앉았다는 거예요. 오늘도 그분이 주막집에[서 짐수레와 말을 사가는 것을 봤어요. 이 세상에 그렇게 착한 사람이 있다니, 우리 거기 구경 가지 않겠어요?"
엘리세이는 자기를 칭찬하는 말을 듣고는 젖소를 사지 않기로 하고 주막으로 돌아가서 말 값을 치렀습니다. 수레에 말을 맨 뒤 밀가루를 싣고 돌아왔습니다. 집에 도착해서 말을 세우고 마차에서 내렸습니다.
그 집사람들은 말을 보고 놀랐습니다. 자기들을 위해서 말을 샀을 것이라는 짐작은 했지만 자기네들 입으로 그걸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남자는 문을 열고 "아니, 이 말은 웬 것입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샀다네, 마침 싼 게 있어서. 오늘 밤 잘 먹도록 풀을 좀 넣어 주게. 그리고 이 자루도 좀 내려 주게나."
주인 남자는 말을 풀고 밀가루 부대를 창고에 갖다 넣었습니다. 그리고 풀을 한 아름 베어서 구유에 넣어 주었습니다. 이윽고 모두들 잠을 자러 갔습니다. 엘리세이는 집 밖에서 자기로 했습니다. 저녁 전에 벌써 자기의 짐을 밖에서 자기로 했습니다. 저녁 전에 벌써 자기의 짐을 밖에서다 내 놓았던 것입니다.
모두가 잠들자, 엘리세이는 자기의 자루를 짊어지고 나막신을 신은 뒤 긴 외투를 걸치고 예핌의 뒤를 따라 길을 나섰습니다.
7
엘리세이가 5베르스따쯤 깠을 때 날이 밝아 왔습니다. 그는 나무 밑에 앉아 자루를 열고 남은 돈을 세어 보았습니다. 17루블 20까뻬이까가 남아 있었습니다.
'가만있자, 이 돈으로는 바다를 건너 긴 여행을 할 수가 없다. 그렇다고 주님의 이름을 팔아 돈을 구걸하기는 싫다. 그러다가 잘못 죄라도 지으면 큰일이야. 예핌이 내 몫까지 촛불을 밝혀 주겠지. 나는 이제 죽을 때까지 다시는 성지 순례를 떠날 수 없을 것 같군. 그러나 자비로우신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살펴보시니까 틀림없이 용서해 주실거야.'
엘리세이는 자리에서 일어서자 자루를 짊어지고 오던 길을 되돌아갔습니다. 그 마을을 지날 때는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게 멀리 돌아서 갔습니다. 이리하여 얼마 후에 엘리세이는 집에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예루살렘을 향해 갈대는 걷기가 무척 힘들어 예핌을 따라가기가 어려웠는데 돌아올 때는 마치 하느님이 돕기라도 하듯 암만 걸어도 지치지를 않았습니다. 그는 나들이라도 가는 듯 지팡이를 휘두르며 걸었습니다. 그래도 하루에 70베르스따씩이나 걸을 수 있었습니다.
엘리세이가 집에 도착했을 때, 마침 식구들은 들일을 끝내고 돌아왔습니다. 집 식구들은 노인이 돌아온 것을 무척 기뻐했습니다. 모두들 이것저것 물어 왔습니다. 구경은 잘했는지 왜 예핌과 헤어지게 됐으며, 왜 목적지까지 가지 않았느냐고 물어 왔습니다. 그러나 엘리세이는 별로 자세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주님이 인도해 주시지 않았어. 도중에 돈을 잃어버리고, 놓쳐 버렸지. 그래저래 갈 수가 없었어. 어떻든 내 잘못이니 너무 나무라지는 마라!"
그는 남은 돈을 할멈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 엘리세이는 집안 형편을 이것저것 물어 보았습니다. 모든 일이 다 잘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일은 밀리지 않고 처리되었고, 식구들도 모두 화목하게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날 예핌의 가족들이 엘리세이가 돌아왔다는 말을 듣고 자기네 노인의 소식을 물으러 왔습니다. 엘리세이는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 노인은 무사히 잘 갔네. 나하고 베드로 축제일 사흘 전에 헤어졌지. 나는 뒤쫓아 갈 생각이었는데 일이 이상하게 되어 돈을 잃어버렸다네. 그래 돈이 모자랄 것 같아서 그냥 돌아온 거지."
모두들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 어리석지도 않은 성실한 사람이 성지 순례를 떠났다가 중간에 돈을 잃어버리고 돌아오다니, 왜 그렇게 바보짓을 했을까? 하고 의문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그 일은 차차 잊혀지게 됐습니다. 엘리세이 자신도 잊어버리고 다시 일을 시작했습니다. 아들과 함께 겨울을 지낼 땔나무를 장만하고 아낙네들과 같이 밀을 빻기도 했습니다. 창고에 지붕을 새로 올리기도 하고 꿀벌의 월동 준비도 해주었습니다. 꿀벌 통나무 열 개는 새로 깐 애벌과 함께 옆집으로 보냈습니다. 아내는 이미 돈을 받은 통나무에서 애벌이 얼마나 깠는지 속이려 했습니다. 그러나 엘리세이는 어떤 통이 쓸모없는지, 어떤 통에서 새끼를 깠는지 모두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열 무더기가 아니라 열일곱 무더기를 옆집에 줬습니다. 가을일을 다 끝내고 엘리세이는 아들들을 일하러 보냈습니다. 자기는 겨우내 집에서 나막신을 만들거나 꿀통으로 쓸 통나무를 파내면서 나날을 보냈습니다.
8
엘리세이가 아픈 사람이 있는 농가에 들르던 날, 예핌은 온종일 친구가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는 조금 가다가 길가에 앉아서 한참 기다렸습니다. 그러다가 깜박 잠이 들었습니다. 한참 푹 자고 나서 다시 친구를 기다렸지만 오지 않았습니다. 눈을 크게 뜨고 주위를 보니 벌써 해는 기울어졌습니다. 그러나 엘리세이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내가 깜박 잠든 새 모르고 그냥 지나친 게 아닐까? 다리가 아파서 남의 짐수레를 얻어 타고 나를 못 본 체 여기를 지나간 게 아닐까? 그렇지만 못 볼 리가 없는데…… 넓은 벌판이라 눈앞이 훤한걸. 내가 다시 되돌아가면 영감은 앞서 가 버려 더 크게 어긋날 수도 있지. 나도 앞으로 가는 것이 옳아. 여인숙에서 만날 수 있을 거야.'
다음 마을에 이르자, 그는 이장에게 이러이러한 할아버지가 여기 오면 내가 있는 여인숙으로 보내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러나 엘리세이는 그 여인숙에도 끝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예핌은 다시 앞을 향해 길을 떠났습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이러이러한 대머리 영감을 보지 못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보았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예핌은 어처구니없어 하며 혼자서 계속 길을 갔습니다.
'그래, 오뎃사 근처에 가면 만나게 될 거야. 배 안에서 만나든지.'
그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가는 도중 한 순례자를 만나 동행이 되었습니다. 그는 보통의 법복을 입고 법모를 썼으며, 머리가 길게 자라 있었습니다. 아토스에 간 적도 있고, 이번이 예루살렘에 두 번째로 가는 길이라고 말했습니다. 어떤 여인숙에서 만나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눈 뒤 동행이 된 것입니다.
그들은 오뎃사까지는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두 사람은 꼬박 사흘 동안 배를 기다렸습니다. 순례자들이 세계 곳곳에서 숱하게 모여들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거기서 예핌은 다시 엘리세이에 대해 물어 보았습니다. 그러나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예핌은 5루블을 내고 외국의 여행 허가장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왕복 뱃삯 40루블을 지불한 뒤 도중에 먹을 빵과 청어를 샀습니다.
이윽고 배는 짐을 싣고 순례자들을 본선에 태웠습니다. 예핌도 그 순례자와 함께 탔습니다.
닻을 끌어올리고 배는 해안을 벗어나 큰 바다로 나갔습니다. 그날의 항해는 무사했습니다. 그러나 저녁때부터 바람이 일고 비가 쏟아졌습니다. 배는 몹시 흔들리기 시작했고 바닷물이 갑판을 휩쓸었습니다. 배 안이 시끄러워지더니 어떤 여자가 큰 소리로 울부짖었습니다. 남자 중에도 겁이 많은 사람은 배 안에서 허둥대며 안전한 장소를 찾느라 야단이었습니다. 예핌도 두렵긴 했지만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습니다. 배에 오르자마자 담보프의 농부들과 함께 마룻바닥에 앉아 있었습니다.
앉은 자세 그대로 그날 밤과 다음날 하루 종일 보냈습니다. 오직 자기 자루만 움켜 쥔 채,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사흘째가 되자 겨우 폭풍이 멎었습니다. 닷새째 되는 날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했습니다. 어떤 순례자들은 땅으로 올라가, 지금은 터키에 점령되어 있는 성 소피아 대성당을 구경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예핌은 땅에 오르지 않고 그대로 배에 남아 있었습니다. 그저 흰 빵만 조금 샀을 뿐입니다.
만 하루를 항구에 머무른 뒤 다시 넓은 바다로 나갔습니다. 그리고 스미르나 항과 알렉산드리아 항구에 머무른 뒤에 마침내 야파에 도착했습니다.
순례자들은 모두 야퍄에서 내렸습니다. 여기서 70베르스따쯤 걸으면 예루살렘입니다. 배에서 내릴 때도 위험한 일이 있었습니다. 보트는 계속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조금만 잘못해도 바다 속에 떨어질 위험이 있었습니다. 두 사람이 물에 빠져서 건져냈지만, 어쨌든 무사히 내렸습니다.
배에서 내리자 모두들 걸어서 떠났습니다. 사흘째 되는 날 점심 녘에 예루살렘에 도착했습니다. 그들은 변두리에 있는 러시아인 숙소에 여장을 풀고, 여권 뒷면에 도장을 받았습니다. 그 다음 식사를 하고 순례자와 둘이서 성지 순례를 갔습니다. 제일 중요한 그리스도의 관을 아직 보지 못했기 때문에 대주교 수도원을 참배했습니다. 참배자들은 모두 안으로 안내되었습니다.
남자와 여자의 자리는 따로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신을 벗은 뒤 둥글게 둘러앉았습니다. 그때 한 신부가 수건을 들고 나왔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발을 닦아주기 시작했습니다. 발을 닦아 준 뒤 입을 맞추고 하면서 그런 식으로 쭉 한바퀴를 돌았습니다. 예핌의 발도 닦아준 다음 입을 맞춰 주었습니다. 밤 기도와 아침 기도로 예배에 참석하였고, 죽은 부모님을 위해 촛불을 올려 미사를 드렸습니다. 그때 성찬과 포도주가 나와서 먹었습니다.
이튿날 아침 이집트의 마리아가 목숨을 건졌다는 암자로 가서 촛불을 바치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거기서 아브라함 수도원으로 갔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신을 위해 아들을 찔러 죽이려 했던 사베크의 동산을 보았습니다. 다음엔 그리스도가 막달라 마리아 앞에 나타났던 성지와, 주의 형제 야곱의 교회에도 가 보았습니다. 순례자는 여러 곳을 안내하며 여기선 얼마, 저기선 얼마 하고 돈을 얼마 정도 바쳐야 하는지 일일이 가르쳐 주었습니다.
한낮이 됐을 때 숙소로 돌아와서 식사를 했습니다. 막 잠자리에 들려고 준비를 하는데 순례자가 앗 하고 놀라며 자기 옷을 여기저기 뒤지기 시작했습니다.
"지갑을 도둑맞았다. 틀림없이 23루블 있었는데…… 10루블짜리 두 장하고 잔돈이 3루블……"
순례자는 화가 나서 떠들어댔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모두들 잠자리에 누웠습니다.
9
예핌도 자리에 누웠지만, 문득 의심스러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 순례자는 돈을 도둑맞았을 리가 없다. 틀림없이 처음부터 돈을 가지고 있지 않았어. 어느 곳에서도 돈을 바치지 않았으니까. 나한테만 내라고 하고 자기는 한 번도 낸 적이 없어 오히려 내 돈 1루블을 빌려 갔는데.'
이렇게 생각하면서 예핌은 자기 자신을 꾸짖었습니다.
'내가 왜 남을 의심하고 이러지. 남을 의심하는 것은 죄를 짓는 일이야. 이런 쓸데없는 생각은 다시 하지 말자.'
마음을 겨우 진정시키고 있으려니, 다시 순례자가 돈에만 관심을 두고 있는 것과 돈지갑을 도둑맞았다고 야단스레 떠들어대던 모습이 자꾸만 떠올랐습니다.
'아니야, 돈은 정말 없었어. 사람들을 속이기 위한 연극일 거야.'
이튿날 아침 사람들이 부활 대성당에서 거행되는 새벽 미사에 참석하였습니다. 그곳에는 그리스도의 관이 있었습니다. 순례자는 예핌의 곁에서 잠시도 떠나지 않고 줄곧 따라다녔습니다.
그들은 성당에 도착했습니다. 러시아인 외에서 그리스인, 아르메니아인, 터키인, 시리아인, 이렇게 여러 나라에서 순례자들이 모였습니다. 예핌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문안으로 들어갔습니다. 한 신부가 안내를 해주는 것이었습니다. 터키 군인이 지키고 있는 옆을 지나서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내려져서 기름을 발랐다는 자리에 이르렀습니다. 그곳에는 굵은 촛불이 아홉 개 켜져 있었습니다. 신부는 하나하나 설명을 하며 보여 주었습니다. 예핌은 여기서도 촛불을 바쳤습니다.
다음에는 안내하는 신부의 인도대로 오른쪽 계단으로 올라갔습니다. 십자가에 못이 박혀 세워졌던 골고다로 예핌을 안내한 것입니다. 예핌은 거기서도 잠시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는 땅이 지옥까지 갈라졌다는 곳과, 그리스도의 손발이 십자가에 못 박혀졌다는 곳도 가 보았습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피가 아담의 뼈를 적시었다는 아담의 관도 보았습니다.
그 다음엔 그리스도가 가시관을 쓸 때 앉았다는 바위와, 그리스도가 채찍질 당할 때 묶여졌던 기둥에도 가 보았습니다. 끝으로 그리스도의 발에 채워졌던 구멍이 두 개 뚫린 돌도 보았습니다. 안내하는 신부는 그 외의 다른 곳도 보여 주려 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의 재촉을 받아 그리스도의 무덤이 있는 동굴로 따라 갔습니다. 그곳에서는 지금 다른 교파의 의식이 끝나고, 러시아 정교의 기도식이 막 시작되려는 때였습니다.
예핌은 어떻게 하든지 순례자와 헤어지고 싶었습니다. 줄곧 죄가 되는 의심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순례자는 좀처럼 곁에서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 관 앞에서 드리는 기도식에도 함께 참석했습니다. 두 사람은 조금이라도 관 가까이에 서려 했지만 때가 너무 늦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꽉 차 있어서 앞으로든 뒤로든 꼼짝할 수가 없었습니다.
예핌은 가만히 선 채로 앞을 보며 기도드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때때로 지갑에 신경이 쓰여 더듬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예핌은 마음이 두 갈래였습니다. 하나는 순례자가 자기를 속이고 있다는 생각이고, 또 하나는 만약 정말 도둑맞았다면 제발 자기는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습니다.
10
예핌은 이렇게 선 채로 기도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의 관이 있는 회당 앞에서 타고 있는 36개의 성화를 바라보았습니다. 예핌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사람들의 머리 너머로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때 이상스러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성화가 타고 있는 등불 바로 밑 맨 앞자리에, 값싼 농부의 작업 외투를 입고 몸집이 작은 노인이 보였습니다. 그 노인은 엘리세이를 꼭 닮은 대머리였습니다.
'아니, 엘리세이가 아닌가? 그렇지만 그럴 리가 없어. 저 영감이 나보다 먼저 여기 왔을 리가 없지. 앞의 배는 일주일 먼저 떠났는데, 저 친구가 나를 앞서 왔을 리가 없어. 또 우리가 탔던 배에도 없었는데. 난 순례자들을 샅샅이 살펴보았으니까.' 하고 그는 생각했습니다. 예핌이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에 작은 노인은 기도를 시작했고 머리를 세 번 숙였습니다. 한 번은 맞은 편의 상단을 향해 절하고, 다음엔 양옆에 있는 러시아 정교 사람들을 향하여 절하는 것이었습니다. 노인이 오른쪽으로 얼굴을 돌렸습니다. 그때 예핌은 분명하게 그 얼굴을 알아보았습니다. 역시 그였습니다. 틀림없는 엘리세이였습니다. 가무스름하고 곱슬한 턱수염, 희끗희끗한 구레나룻, 눈썹, 눈, 코, 모든 모습이 꼭 엘리세이였습니다. 엘리세이 보드로프가 틀림없었습니다.
예핌은 친구를 찾아서 너무나 기뻤습니다. 그러나 그가 어떻게 자기보다 먼저 여기에 왔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보드로프 이 친구, 어떻게 앞으로 잘도 나갔군! 아마 어떤 재주 있는 사람을 만나 안내를 받았을 게다. 그렇지. 나가는 곳에서 저 영감을 만나야지. 법복 입은 순례자를 따돌리고 난 뒤, 이제 저 친구와 함께 다니면 되겠군. 그렇게 된다면 아마 나도 앞자리로 갈 수 있을 것이다.'하고 그는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핌이 혹시 엘리세이를 놓칠까 봐 줄곧 그쪽만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기도식이 끝나고 사람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십자가에 입 맞추기 위해 밀고 당기고 하다가, 예핌은 옆으로 밀려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갑자기 잘못하면 지갑을 도둑맞게 될 것 같은 걱정이 와락 생겼습니다. 예핌은 지갑을 한 손으로 꽉 잡고 사람들이 좀 적은 곳으로 헤치고 나갔습니다.
겨우 덜 복잡한 곳으로 나와서 엘리세이를 찾으려고 그 부근을 마구 돌아다녔습니다. 대성당 안에 이쪽저쪽으로 있는 암실에는 여러 나라 사람들이 많이 보였습니다. 그냥 그 자리에서 도시락도 먹고 마실 것도 마시며 책을 읽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엘리세이는 어떤 곳에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예핌은 숙소에 돌아가 보았지만 그곳에도 엘리세이는 없었습니다. 그날 밤 동행했던 순례자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는 끝내 1루블을 돌려주지 않고 어디론가 달아나 버리고 말았습니다. 예핌은 외톨이가 된 것입니다.
다음날 예핌은 담보프에서 온 노인과 함께 다시 그리스도의 관에 경배 드리러 갔습니다. 그 노인은 배 안에서 동행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또 앞쪽으로 나가려 했지만 이번에도 사람들에게 밀려나 버렸습니다. 그는 기둥 옆에 서서 기도를 드렸습니다. 문득 앞쪽을 보니까 이번에도 역시 제일 앞인, 성화 밑의 그리스도 관 옆에 엘리세이가 서 있었습니다. 그는 제단 옆에서 신부처럼 두 팔을 벌리고 서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머리가 빛나고 있었습니다.
'좋아, 이번엔 절대 놓치지 말아야지.'하고 예핌은 생각했습니다.
그는 사람들을 막 헤치고 앞으로 나갔습니다. 그러나 겨우 앞자리에 이르고 보니 벌써 엘리세이의 모습은 사라져 버렸습니다.
셋째 날에도 눈에 제일 잘 띄는 그리스도 관 옆의 특별 상좌에 엘리세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두 팔을 벌리고 머리 위에 무엇이 보이는 듯 위를 우러러보고 서 있었습니다. 그의 머리는 여전히 빛나고 있었습니다.
'됐어.'하고 예핌은 생각했습니다.
'이번엔 정말 놓치지 말자. 출구에서 지켜 서 있어야지. 거기라면 놓칠 리 없어.'
예핌은 밖에서 오랫동안 지키고 서 있었습니다. 반나절을 쭉 서 있었지만 끝내 나오는 사람들 중에는 엘리세이가 없었습니다.
예핌은 여섯 주일 동안 베들레헴에 머물며 성지를 두루 돌아봤습니다. 베들레헴에도 갔고, 베다니에도, 요단강에도, 그 외 여러 곳을 순례했습니다. 또 그리스도 관 옆에서 죽은 뒤에 입는 수의에 도장을 찍었습니다. 그 다음엔 요단강의 물을 작은 병에 담기도 했습니다. 예루살렘의 흙을 담고, 성화를 태웠던 초를 얻기도 했습니다. 여덟 곳에서 연미사에 이름을 써넣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돈을 다 써 버리고 간신히 집으로 돌아갈 노자만 남겼습니다. 예핌은 귀로에 올랐습니다. 야파에 도착해서 기선을 타고 오뎃사까지 왔습니다. 거기서부터는 집까지 줄곧 걸어갔습니다.
11
예핌은 올 때와 꼭 같은 길을 되돌아갔습니다. 집이 점점 가까워지면서 또다시 자기가 집을 떠난 뒤에 집에선 어떻게 지내는지 걱정이 되살아났습니다.
'일년이나 지났으니 많이 변했겠지. 한 집안을 일으키는 데는 평생이 걸리지만, 재산을 없애는 것은 잠깐 사이의 일이야. 내가 집을 비운 사이에 아들 녀석은 집일을 어떻게 처리했을까? 농사는 봄에 시작했는지? 겨울 동안 소와 말은 무사히 지냈는지? 내가 시킨 대로 새집은 다 지었는지?' 하고 그는 생각하였습니다.
한참 만에 예핌은 지난해 엘리세이와 헤어진 마을 가까이에 왔습니다. 그 마을 사람들은 지난해와는 전혀 다르게 변해 있었습니다. 그때는 아주 형편이 어려웠던 사람들이 지금은 모두 여유 있는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밭에는 곡식이 무르익었습니다. 사람들은 넉넉한 생활을 누리며 지난해의 어려움을 잊고 있었습니다. 저녁 무렵 예핌은 지난해에 엘리세이가 물을 얻으러 갔던 마을에 닿았습니다. 그가 마을에 들어섰을 때 어떤 집에서 흰 셔츠를 입은 소녀가 달려 나왔습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우리 집에서 쉬고 가셔요!"
예핌은 그대로 지나쳐 가려 했지만 소녀는 소매를 붙들고 생글거리며 마구 집으로 끌었습니다.
문의 계단에서 남자애를 데리고 서 있던 여자도 역시 오라고 손짓하고 있었습니다.
"할아버지, 오셔서 저녁을 드시고 주무시고 가셔요."
예핌은 마지못해 집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안에 들어왔으니 엘리세이에 대해 물어 보자. 그 영감이 그때 물을 얻으러 들른 집이 아마 여기쯤 될 텐데.'
예핌이 방안에 들어가니까 여자는 그의 어깨에서 자루를 내려 주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몸 씻을 물까지 떠다 주었고, 식탁으로 안내했습니다. 우유와 보리 단지를 내놓고 식탁 위에 죽을 올려놓았습니다. 예핌은 그 가족들이 순례자에게 이렇게 친절히 대해 주어 고맙다고 인사하며 칭찬했습니다. 그러자 여자는 머리를 저으며 말했습니다.
"우리는 순례하시는 분들을 친절히 대접할 수밖에 없답니다. 어떤 순례자 덕분에 참되게 사는 법을 배웠으니까요. 예전에 우리는 하느님을 잊고 제멋대로 살았답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벌을 내려, 우리는 거의 다 죽을 지경이었지요. 끝내 지난해 여름엔 식구들 모두가 병에 걸리고, 먹을 것도 다 떨어지고 말았답니다. 만약 그때 하느님께서 손님과 비슷한 할아버지를 우리 집에 보내 주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벌써 오래 전에 죽었을 거예요. 한낮에 물을 얻어 마시러 들어오셨더군요. 그때 우리들을 보시고 불쌍히 여겨 그대로 우리 집에 머물렀지요. 병들고 굶주려 쓰러져 있는 우리들에게 마실 것과 먹을 것을 주셨고, 건강도 되찾게 해주셨습니다. 또 논밭을 찾아 주셨고, 짐수레와 말까지도 사주셨지요. 그 뒤
그분은 암말 없이 떠나 버리고 말았답니다. "
그때 할머니가 들어오며 여자가 하는 말을 가로챘습니다.
"우리 자신도 그분이 사람이었는지 천사였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 식구들을 끔찍이 사랑했고 불쌍히 여겼는데, 아무 말도 없이 떠나 버렸지요. 그분의 이름조차 모르니 누굴 위해 하느님께 기도드릴지 모르겠군요. 지금도 눈앞에 보이는 듯합니다. 나는 쓰러져 죽을 때만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별로 특이하지도 않은 대머리 할아버지가 물을 얻으러 들어오지 않았겠어요? 그때도 이 죄 많은 늙은이는 누가 절에 들어와서 어물거리나 하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그분은 방금 말했던 그런 일을 해주셨던 것입니다! 우리들을 보자 서슴치 않고 등에 짊어졌던 자루를 내려놓고, 그래 이 자리예요, 바로 이 자리에다 놓고 끈을 풀었답니다."
그러니까 소녀도 말을 거들었습니다.
"아니에요, 할머니. 처음엔 자루를 방 복판에 내려놓았다가 다시 걸상 위로 올렸잖아요."
이렇게 그들은 서로 다투어 가며, 그 노인이 한 말과 한 일들을 자세히 이야기해 주셨습니다. 어디에 앉았고 어디에서 잤고, 무슨 일을 어떻게 했고 누구에게 어떤 말을 했다는 것을, 그들은 끝도 없이 들려주었습니다.
밤이 되자 주인 남자가 말을 타고 돌아왔습니다. 그도 역시 엘리세이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엘리세이가 자기 집에 있으면서 어떻게 도와주며 지냈는지 들려주기 시작했습니다.
"만약 그분이 오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모두 죄 많은 채 죽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절망에 빠져 하느님과 사람들을 원망하며 죽을 때만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분이 오셔서 우리를 살려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하느님도 알게 됐고, 친절한 사람을 알게 되었지요. 하늘의 예수 그리스도여, 부디 그분을 보호하여 주소서! 예전엔 짐승과 다를 바 없이 살았는데, 그분이 우리를 사람답게 만들어 주셨으니까요."
그들은 예핌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었고 잠자리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그 다음에 그들도 자러 갔습니다.
예핌은 자리에 누웠지만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세 번씩이나 엘리세이를 앞자리에서 본 일이 머리에서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렇다, 엘리세이는 여기서 나를 앞질렀구나…… 내 예배를 하느님께서 받아들이셨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그 친구의 예비가 받아들여진 것만은 틀림없다.'
다음날 아침, 그 집 식구들은 예핌에게 이별의 인사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가는 도중 먹을 고기만두를 그의 자루 속에 넣어 준 다음 일터로 나갔습니다. 그리하여 예핌은 다시 집을 향해 길을 떠났습니다.
12
예핌은 꼭 1년 만인 봄에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집에 이른 것은 저녁때였습니다. 아들은 집에 없었습니다. 술집에 있었던 것입니다. 늦게야 아들은 술이 잔뜩 취해서 돌아왔습니다. 예핌은 아들에게 여러 가지 일을 물어 보았습니다. 그가 집에 없는 동안에 아들이 쓸데없이 낭비했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습니다. 예핌은 아들을 꾸짖었습니다. 그러자 아들도 말대꾸를 했습니다.
"아버지께서 집을 떠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 아닙니까. 아버지는 돈을 잔뜩 가지고 성지 순례를 갔잖아요. 나는 조금밖에 쓰지 않았는데……"
노인은 화가 나서 아들을 때렸습니다.
다음날 아침, 예핌 따라시치는 이장에게 아들의 일로 의논하러 가는 도중 엘리세이의 집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그때 엘리세이의 아내가 문 앞 계단에 서서 인사를 했습니다.
"안녕하셔요! 영감님, 무사히 돌아오셨군요!"
예핌은 걸음을 멈추고 말했습니다.
"걱정해 주신 덕택입니다. 가는 도중에 엘리세이와 헤어졌는데, 먼저 돌아와 있다면서요?"
그러자 좀 수다스러운 편인 할머니는 이야기를 마구 늘어놓았습니다.
"벌써 오래 전에 돌아 오신걸요, 영감님. 성모승천제가 지난 뒤 곧장 왔답니다. 하느님께서 돌봐 주셔서 무사히 돌아왔지요. 그래서 온 식구가 아주 기뻐했어요. 그분이 계시지 않으면 집안이 허전하답니다. 이젠 나이가 많아서 큰일은 못하지만 그래도 한 집안의 가장이니 모두들 의지하는 거지요. 글쎄 아들이 얼마나 반기는지 워! 아버지가 계시지 않을 땐 눈빛까지 꺼지는 것 같다면서 말입니다. 그분이 집에 없으면 정말 허전해요. 우리 식구들은 모두 그를 의지하고 소중하게 생각한답니다. "
"그럼 지금 집에 계신가요?"
"계셔요, 영감님. 꿀벌집의 애벌을 나누고 있지요. 금년에 깐 애벌은 정말 아주 좋은 것이라는군요. 모든 것이 하느님의 보살핌이지요. 그이도 그렇게 기운 좋은 벌은 처음 봤다고 했어요. 우리가 죄를 짓지 않고 사니까 하느님께서 돌보시나 봐요. 영감님, 어서 들어오세요. 무척 반가워하실 겁니다. "
예핌은 복도를 통해서 뒷문으로 나가 엘리세이가 있는 꿀벌 집으로 갔습니다. 꿀벌 집에서 엘리세이는 그물도 쓰지 않고, 장갑도 끼지 않고 있었습니다. 긴 회색 외투를 입고 자작나무 밑에 서서 두 팔을 벌리고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그 대머리는 예루살렘의 그리스도 관 옆에서처럼 환히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 머리 위에서는 역시 예루살렘에서 본 대로 자작나무 잎 사이로 햇빛이 타는 듯이 빛을 뿜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머리 둘레에는 금빛 꿀벌이 관처럼 동그라미를 그리며 날고 있었지만 쏘지는 않았습니다.
엘리세이의 아내가 그를 불렀습니다.
"예핌 영감님이 오셨어요."
엘리세이는 뒤돌아보고 반가워서 친구에게로 달려왔습니다. 턱수염 속에 기어든 꿀벌을 살며시 집어내면서 "어서 오게. 그래 잘 갔다 왔네. 자네한테 주려고 요단강물을 가지고 왔지. 좀 있다 우리 집에서 가져가게. 그런데 하느님께서 내 예배를 받아 주셨는지……"
"어쨌든 기쁜 일이야. 하느님, 자비를 베푸소서!"
예핌은 한참 입을 다물고 있다가 "몸만은 갔다 왔지만, 아무래도 영혼은 모르겠어. 그보다도 누군가 딴사람이 갔다 왔는지도 모르지." 하고 말했습니다.
"어떤 일이든 모두 하느님의 뜻이지. 예핌 영감, 하느님의 뜻이야."
"돌아오는 길에 자네가 물 마시러 갔던 집엘 들렀었다네."
엘리세이는 깜짝 놀라며 손을 휘저었습니다.
"모든 일들이 하느님의 뜻이야, 예핌 영감. 하느님의 뜻이지. 아무렴, 자, 집안으로 들어가세. 내가 꿀을 떠 갈 테니까……"
엘리세이는 살림살이 이야기로 말을 바꾸면서 그 이야기를 더 이상 못하게 했습니다.
예핌은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그리고 그 농가에서 들은 이야기나 예루살렘에서 본 사실에 대해선 한마디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제가끔 얘 세상에서 살아 있는 동안에 사랑과 착한 일로써 자기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