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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승(1959~ )

가을 새벽

가을 아득한 사랑

강풍에 쓰레기

겨울 눈물

겨울 매장(埋葬)

겨울, 반투명(半透明)---

겨울 슬픈 겨울

고뇌의 극

고드름

괴로우냐?

구더기

권태

귀두는 나의 교감

그대 없어진 지

그 모든 사람을 사랑하며

그 여자 발

그냥 술집

그대 없어진 지

그리운 내 8번

그 여자 발

극빈

긁적긁적

깔때기

꿈과 별

꽃그늘 아래서

꽃잎 날개

꽃처럼 환하게

나쁜 놈의 사랑

나의 끝

나의 원조교제

나팔꽃

나팔꽃, 부추 파종(播種)

내가 돌았을 때

내 몸을 덜어가라

내 생각

내 척박한 가슴에 온 봄

내가 돌았을 때

너의 애인

너 있는 곳

눈이 오면

뉴스는 사극(史劇0

늙고 사오납게 내리는 비

늙은 호박

다 잊어버렸네

단맛

달빛 쏟아지는 집

닭똥집

당신은 아름다워요

더러운 그늘

두 나팔꽃

두 올빼미

등, 고찰(考察)

망미인곡(忘美人曲)

매달려, 늙어간다

모를 권리(權利)

몰래

몸 하나의 사랑

미친 개나리

바깥

반성

밤에 버릴 것

방음벽

뱀 훑듯

버섯 요리

벚꽃 잔치 국수

보지

봄, 희망

부메랑

부평시장역

북어(北魚)

비가 멈춰

비가 오니

비밀

비에 젖은 밥

비 오는 밤 술집에서

뻥튀기 장수

삐삐

살구는 성실하다

새벽 비

생각 없이 살지 말자

서울신탁은행귀신

선풍기를 발로 끄지 말자

술과 외로움

술 얘기

숲속에서

슬픈 국

신부(新婦)

신은 아름다워요

싱싱한 비

아는 놈

아름다운 폐인

아플 때...

어떻게 살까

어쩔거냐

엄마야 누나야

여름, 여름, 봄밤

오래간만이다 522번

오래된 게장

오우가(五友歌)

울어라 열풍아

월인천강(月印千江)

이방인

인생

'있음'에 대한 참회

잘못 쓴 시

재미있는 이야기

저 바닥에 누워

저항

정(情)든 여자(女子)

조금이었으므로 다였노라

죽을 때까지

처음이자 마지막

체포령

추운 날 밤

취객의 꿈

츄마

코리안 고딕

키스

태풍에 나무

통곡의 강

팬데믹

플랫폼에서 담배를

한여름 밤의 꿈은 한 컷

혼절하기 전에

화창

흐린 날 미사일

희망

Anti-Chiliasm?

G7

6개의 가로등 조명

 

 

 

가을 새벽 - 떠나간 아내의 생일에

김영승

 

새벽바람이 벌써

차다

 

라면을 사야할 돈으로

소주를 마셨던 지난날

 

포근한 아내의 품이

그립다

 

올해도 내 가슴엔 먼저

눈이 쌓였다.

 

교회당 톱밥 난로 같은

일하러 나가는 사람들

덜컹거리는 소리......

 

물에서 건진 듯

전기줄이 깨끗하다.

 

슬프도록 아늑한 게 뭘까

생각 안 날 땐

만나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

 

춥다.

 

 

 

가을 아득한 사람

김영승

 

손이 시려울 만큼

바람이 차다.

 

그 차가운 바람이 내 가까운 곳에서 맴돌다가

얼굴을 스치고 또 불어가고 있다.

왜 이리 아득하게만 보일까 오늘 부는 바람은

먼 옛날 아주 먼 옛날 같다.

 

얼마 안 되는 나날을 살아왔는데도

참 아득하다.

 

몇 해 몇 달을 산 사람이라면

그리하여 그의 얼굴과 손에

어깨와 가슴에

옛날이 나뭇잎처럼 곱게 쌓인 사람이라면

사람은 모두 아득하다

가까이 있어도 가물가물하다.

 

그가 너무나 많은 사람을 죽여버린

아주 나쁜 놈일지라도

게다가 그가 이슬처럼 맑은 눈물을 흘려본 사람이라면.

 

 

 

강풍에 쓰레기

김영승

 

별로 신나는 일은 아닌데도

쓰레기는

신난 것 같다

 

버려지다니

 

이 얼마나 신나는가 춤을

춘다

 

독립만세보다도 신나고

 

총 맞아

죽는 것보다도 신난다

 

너나 다 가져라

춤을 춘다

 

쓰레기 버리는 밤엔

나는 쓰레기 버리는 사람

 

가로등보다도 더 신나고

종이박스는, 폐지는 이 새벽

 

주차장 페이브먼트 위에 박빙

그 구천(九泉)의

 

실뿌리보다도

새싹보다도

 

신난다

 

시신(屍身)보다도!

 

 

 

겨울 눈물

김영승

 

내 오늘은 울리

그냥 울리

울면서 그냥

울리

 

얼어붙었는데

 

왜 울었냐 하면

모르네...

 

그저 TV에

어떤 불쌍한 아이들

 

아빠 없고

엄마 아픈

 

아파도 신장 이식해야 할 만큼 아픈

치료비도 없는

신장 떼어주려 해도

미성년자라서 안 되는

 

그 어린 세 자매보고

운다

 

나는 잘

운다

 

하나님 아버지

울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웃게도 하소서.

 

 

 

겨울 매장(埋葬)

김영승

 

내가 서부의 총잡이거나

무림의 최고의 천하제일의 검객이라면

그래도 감히

나한테 덤비다 죽은 자를

내 어찌 그냥 가리

 

언 땅을 팠을 것이다

 

그래도 감히

나한테 덤비려 따라온 자는

광야까지 골짜기까지

따라온 것이므로 나는

 

모닥불 지펴놓고

묻힌 자를

 

우리 동네 대형 마트

카트를

미끄러지듯 밀며

나는 바나나와 브로콜리와

장조림 캔, 깻잎장아찌 캔 등을 산다

 

거리는

담쟁이 잎과 플라타너스 잎과 단풍잎의 카페트

무빙워크 같다

 

 

 

겨울, 반투명(半透明)---

김영승

 

병원은 참 깨끗하다

반짝반짝, 유리알 같은 종합병원 복도는

얼굴이 비친다 예쁜

간호사들은 그 위를 바삐바삐

움직인다.

결빙한 운하처럼

 

신생아 중환자실 그 천형의 미숙아들이

일제히 일어나 청소를 한 것일까

 

그렇지 않고서는

이렇게 깨끗할 수가 없다

 

남녀혼욕 증기탕 같은

지하 영안실엔

섹스가 한창이고 열(熱)을

 

난생처음

반듯하게 누워있는

 

반납한 시체는 자신의 모든 추억을

분배한 채 조금씩 추억을

공유한 자들의 추억마저도 완전히 폐기한다

 

그렇게 감상적이었다니

창피하지 않았을까

도대체 자존심이 없다

 

벌떡 일어나

집으로 돌아간다.

 

 

 

겨울 슬픈 겨울

김영승

 

동창이 밝았느냐 동창이 밝았으렴

굶는 늙은이 우지진다 굶는 늙은이 우지지렴

개 잡는 아이는 상기 아니 일었느냐 개 잡는 아이는 푹 쉬렴

쓰레기 더미 속 야윈 똥개는 잡아 무삼 하리요

태평가를 부르거나 절명시를 쓰거나

세상은 제멋대로 웃고 울고 개판인데

길은 미끄럽고 눈발은 흩날리는데

보따리 든 내 어머니 뇌진탕 걸리시겠네

술 취한 젊은 시인 또 돌아가시겠네

동창이 하염없이 끝없이 천번 만번 밝았으렴.

 

 

 

고뇌의 극

김영승

 

고뇌의 극은

나팔꽃

 

그 덩굴손이라네 뇌(腦)는

 

극(極)의 뇌(腦)는

그렇게

 

피어 있고 또

고사리손처럼 하늘을

휘감고 올라간다네

 

날은 흐린데 이 가을

 

고뇌의 끝은

은전(銀錢)

 

쏟아지는 은전(銀錢)

 

폭포는

 

따르릉 따르릉 비켜나세요

빨간 자전거

 

그리고 이 겨울

 

봄.

 

 

 

고드름

김영승

 

이렇게 추운 날엔

나무가

자신이 털어버린

쏟아부은 낙엽이

강풍에 소용돌이 치는 걸

 

- 이런 나쁜 노래들은 왜 만들어 놓아갖고, 애국가

 

연주들을 하리라, 애국가

 

소리를 얼린 것이

고드름이라고

 

고드름 저편엔

풀이

 

고드름이라고

 

 

 

괴로우냐?

김영승

 

괴로우냐?

더 괴로워하여라.

 

소뿔에 낀 때처럼

알게 모르게 반질반질

닳다가 닳은 채로 반짝이다가

처음 같은 끝

 

얻은 것 다시 돌려 주고 땜땜

발 구르듯 애타는 거.

 

그 그림자 아쉬워라 무슨

까닭으로 내 눈매에 얼음에 물 번지듯

물그림자 엷게 엷게 지는 것이냐.

 

헤아릴 수 있는 건

헤아릴 수 있기에 섧다.

 

바닷속 깊은 건 깊다고만 해야 된다

들어가 보면 끝이 있는 밑바닥이 드러날 테지만

끝이 없는 것처럼 놔두어야 한다.

 

괴로우냐?

더 괴로워하여라.

 

 

 

구더기

김영승

 

너는 구더기를 보면

밟아 죽이고 싶으냐

나는 구더기를 보면

함께 기어 다니고 싶다.

 

너는 나하고는 놀지 않는 게 좋겠다.

 

외로움

그리고 이런 얘기 저런 얘기

그렇게 우리네 살림이 꾸며지고

우리네 살림이 이어지고

 

구더기

그 작은 살점이 내 살점과 똑같다고 생각될 때

나는 어느새 너를 사랑하고 있었다.

 

너는 이제 가까이 오는 게 좋겠다.

 

 

 

권태

김영승

 

72

남들 안 입는 그런 옷을 입었으면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왜 으스대는가.

왜 까부는가. 왜 어깨에 목에 힘이 들어가 있는가. 왜 꼭 그렇게 미련을 떨어야 하는가.

하얀 가운을 걸치고 까만 망토를 걸치고 만원 버스를 타봐라. 만원 전철을 타봐라.

얼마나 쳐다보겠냐. 얼마나 창피하겠냐.

수녀복을 입고, 죄수복을 입고, 별 넷 달린 군복을 입고……

 

왼쪽 손가락을 깊이 베어 며칠 병원을 다녔는데 어떤 파리 대가리같이 생긴 늙은,

늙지도 않은 의사 새끼가 어중간한 반말이다. 아니 반말이다. 그래서 나도 반말을 했다.

 

󰡒좀 어때?󰡓

󰡒응 괜찮어󰡓

 

그랬더니 존댓말을 한다. 그래서 나도 존댓말을 해줬다.

 

󰡒내일 또 오십시오.󰡓

󰡒그러지요.󰡓

 

 

78

나는 지금 골이 비었다. 골이 비었는데도 골이 아프다.

생전 하지 않던 이런 말장난까지 하고 있으니 나는 도대체 얼마나 골이 비었는가.

어쩌다가 이렇게 골이 비게 되었을까. 공두병 걸린 누에처럼 도대체가 껍데기다. 통 비었다. 골이 통통 비었다. 통통 튀긴다. 마음을 비우라고 하니까 겨우 마음을 비우겠다며 골을 비워 놓은 놈도 있지만 나는 내가 왜 이렇게 골이 비어져 갔는지 그 원인을 모르겠으니 나의 골빈 상태는 얼마나 심각한 것이냐.

나는 이제, 이런 골 빈 새끼, 저런 골 빈 년, 그렇게 욕할 수도 없게 되었고, 내가 골이 빈 놈이니까, 누가 골이 비었는지 안 비었는지 모른다. 이렇게까지 남의 골을 비워 놓아야 속이 후련한지 신문도 학교도 교회도 대통령도 자꾸 남의 골을 더 비게 만들고 골을 비게 만들다 만들다 못해 멀쩡한 남의 마누라 골까지 비게 만들고 남의 어머니까지 골 빈 할머니로 만들어 놓고 이 골 빈 세상을 만났으니 너희 희망이 무엇이냐 노래하는 골 빈 우국지사 새끼들 뭐라고 그러면 내가 골이 볐냐 새꺄 하고 팩 골을 내게 만들고 아이 똥 누기 싫어하는 골 빈 년에게 자기 빨리 눠라 응 아이 똥꼬 예쁘지 하며 쓰다듬으며 핥으며 혓바닥으로 싹싹 밑 씻어 주는 골빈 새끼들이 인구의 절반이 넘으니 신문은 이래야 한다는 둥 학교는 저래야 한다는 둥 교회는 대통령은 그래야 한다는 둥 지나가는 골빈 놈 붙들고 물어봐라 내 말이 옳으냐 그르냐 그렇게 말할 수도 없고, 십정동 도살장에 나가 갓 잡은 송아지 그 뜨거운 골이나 한 바가지 얻어다가 초간장에 찍어 먹으며 내 두개골을 깨고 비지나 한 바가지 채울까 누런 코나 가래나 고름이나 정액을 한 바가지 채울까. 말까. 골이 너무 비니까 도대체 골이 빈 것이 티가 안 나는 이점도 있으니.

아이, 골이 비니까 개운하다.

 

 

621

만원만 꼬조(꿔줘). 꼬조오, 응? 한참동안 조르더니 별안간 이

씹새꺄 씹새꺄 씹새꺄 씹새꺄 씹새꺄 씹새꺄 씹새꺄

무지무지 빨리 욕을 퍼붓고

가버렸다

씹쌔꺄 할 때마다 동시에 감자를

기관포처럼 먹이며

머리를 들이밀며

얼굴을

 

고개를

코끝을 반짝 쳐들고

씹 - 쌔 - 꺄 -

 

언덕 위에서

또 감자를 먹이며

 

붉은 저녁노을

은하수 펑펑 쏟아지는.

 

아침엔 보리밥

점심엔 라면.

 

나는 술을 잘 먹어서

욕도 많이 먹지만

그런데도 사람들이 나를 싫어하지 않는 건

내가 그래도 덕이 있어서이다.

 

 

 

귀두(龜頭)는 나의 귀감(龜鑑)

김영승

 

어떤 놈 하나는 되게 똑똑한데 심심하던 여자(女子)와 싸워 민망할 때가 많다.

그들은 꼭 문학평론가(文學評論家) 같다. 맨날 싸우면서도 불륜(不倫)도 참 잘한다.

            입술은 얼굴의 꽃

            이빨은 입 속의 보석

부부(夫婦) 관계도 결국은 <불륜(不倫)>이다

부부 관계니까 무슨 합법적(合法的)이고 합목적적(合目的的)인 줄 알고 어쩌구 하지만

팽팽하게 발기(勃起)했을 땐 내 얼굴이

그리고 여자(女子)의 얼굴이 비친다

 

그리고 길흉(吉凶)의

새벽에 일어나 <조로>를 들고

살구나무에 물을 주었다

 

그저께는 영원한 미소년(美少年) 노총각 범행(範行)이가 전화를 해서

집에 들어가 보니 노모(老母)께서 조기를 한 마리 구워 술상을 봐주셨단다

"우리의 독립(獨立)은 태극기만 흔든다고 되는 독림이 아닐세"

 

인테리어 시공업자인 목수(木手) 그 조범행(趙範行)은 그렇게 혼자서도 말 잘 달리고 있는데……

 

나는 여자(女子)와 싸우는 것이 참 재미있다.

부부유별(夫婦有別)도 결국은 잘 싸우라는 얘기리라.

 

치아 등 구강 건강에 대한 표어를 작성해 오라고 해서

아들과 함께 구수회의(鳩首會議), 탄생시킨 표언데

아들의 그 교대(敎大)를 갓 졸업한 여선생 왈

<이빨>은 비어(卑語)니

틀려먹었단다.

 

투명하게 작열하면

홍로점설(紅爐點雪),

 

점(占)치고

그리고 조국(祖國)을, 여자(女子)를

나는 감식(鑑識) 다 했다

 

 

 

그대 없어진 지

김영승

 

그대 없어진 지 한 해 하고도

이레가 또 지났어도

 

그대 반짝거리며

보드랍거나 까칠까칠한

날카로운 눈빛

내 얼굴에 고개 너머 검바위에

묻히고 바르고 하였다가

 

시냇가 봄날 졸음 오는

볕 드는 버들강아지 곁에

살얼음 둥둥 뜬 물살 바라보며

그 송사리

물 거슬러 올라가는 걸 바라보았던

그리 멀지 않은 옛날얘기에서도 슬그머니

웃음과 한숨과 낮은 목소리 챙겨

훌쩍 떠나버렸지

 

그대는 이제 없어졌지만

옛날 그곳 그때에도

자주 자주 없어지려 했었지

긴 얘기 거두고

그 눈빛 풀잎처럼

어느 들판에 돋아나리오

 

그대 없어진 지 한 해 하고도

이레가 또 지났어도

그것으로도 벌써

나는 너무 오래 살았나 싶네

두루두루 온 누리

온 누리 제 모습으로 있는 것

다 알겠네

 

 

 

그 모든 사람을 사랑하여

김영승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건 사랑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그 가슴속

깊은 곳에 미워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미워하는 사람에게는 미워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건 미워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미워하는 사람에게 미워한다고 말하는 것은 그 가슴속

깊은 곳에 사랑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에겐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지만

미워하는 사람에겐 미워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내 모습이 이렇습니다.

 

 

 

그 여자 발

김영승

 

말간 소주

놋쇠 대야에 부어 놓고

그 여자 발 하얀 그 발

조심스레 씻겨 주며

내 한 잔씩 떠 마시면

아름답기에 갖는 번뇌

내 혀에 와 닿겠네.

 

 

 

그냥 술집

김영승

 

나는 내 곁에 남아 있는

거대(巨大)하지만 외롭고

그림처럼 풀잎처럼 다만 있기 때문에

있을 뿐인

다수(多數)일 수 없는 나의 심우(心友)와

술집을 내고 싶다

 

나의 시(詩)처럼

제(題)하여 그냥 술집

인생(人生)을 그냥 살아가는 사람들이 모여서

그냥 술을 마시다가

일몰(日沒)처럼 그냥 또 돌아가 주었으면 좋겠다.

 

아쉬움이나 서러움이나

한때의 취흥(醉興)이나

모두 모두 그냥 가져가 주었으면 좋겠다.

 

 

 

그대 없어진 지

김영승

 

그대 없어진 지 한 해 하고도

이레가 또 지났어도

 

그대 반짝거리며

보드랍거나 까칠까칠한

날카로운 눈빛

내 얼굴에 고개 너머 검바위에

묻히고 바르고 하였다가

 

시냇가 봄날 졸음 오는

볕 드는 버들강아지 곁에

살얼음 둥둥 뜬 물속 바라보며

그 송사리

물 거슬러 올라가는 걸 바라보았던

그리 멀지 않은 옛날 얘기에서도 슬그머니

웃음과 한숨과 낮은 목소리 챙겨

훌쩍 떠나버렸지

 

그대는 이제 없어졌지만

옛날 그곳 그때에도

자꾸자꾸 없어지려 했었지

 

긴 얘기 거두고

그 눈빛 풀잎처럼

어느 들판에 돋아나리오

 

그대 없어진 지 한 해 하고도

이레가 또 지났어도

그것만으로도 벌써

나는 너무 오래 살았나 싶네

두루두루 온누리

온누리 제 모습으로 있는 것

다 알겠네.

 

 

 

그리운 내 8번

김영승

 

올 들어 가장 추운 날

 

플라타너스 큰 잎도

곱게 구르고

 

향기로와라 

 

장애인 복지회관 지나

송도로타리 

 

좋은 8번 버스

착한 8번 버스

 

나를 싣고 가네

 

히말라야시다는 바람에

어떻게 저렇게 떨 수 있을까

 

아스팔트는 온통

나뭇잎의 운하(運河)로 출렁이고

 

그리운 내 8번 버스……

중얼거리기도 전에

 

나는 어느새 집이고

8번 버스 종점

 

종점에서 종점으로

 

괜히 중학교 때 배운 노래

 

아침 바다 갈매기는 금빛을 싣고

고기잡이배들은 노래를 싣고

희망에 찬 아침 바다 노 저어 가요

희망에 찬 아침 바다 노 저어 가요

 

노래 부르며 걷는

 

인하대 앞길의

송내역의 

 

나를 싣고

 

가네 

 

내 가슴에서 내 뼈에서

문선공(文選工)처럼 한 자 한 자

활자(活字)를 뽑아

 

내 가슴에, 내 뼈에

가지런히 박아놓는

 

올 들어 가장 추운 날

플라타너스 큰 잎에 덮힌

 

내 착한 8번 버스는.

 

 

 

그 여자 발

김영승

 

말간 소주

놋쇠 대야에 부어 놓고

그 여자 발 하얀 그 발

조심스레 씻겨 주며

내 한 잔씩 떠 마시면

아름답기에 갖는 번뇌

내 혀에 와 닿겠네.      

 

 

 

극빈

김영승

 

극빈

극광 같은 극빈

국빈(國賓) 같은 극빈 극미한

절세가인의 효빈 같은

극빈

쾌락의 극치, 극, 극

태극, 태극 같은 극빈

 

이곳 임대아파트로 이사 온 지 내일이면 꼭 1년

월 175,300원 그 임대료가 벌써

두 달째 밀렸네

말렸네 나를 말렸네 피를

말렸네, 극빈

극빈

무소유보다도 찬란한 극빈

 

'쪽'도 많이 팔렸구나

그래서

쪽빛(顔色)이 쪽빛(藍色)이구나

 

이것은 pun이 아니라

정당한 진술이다 '언표'이다

극빈...

 

'명령'이다

극빈...

 

'반역'이다 극빈

'반역'이다 극빈

 

황원(荒原)의

body language,

 

극악한 극빈.

 

 

 

긁적긁적

김영승

 

하이 다이빙 선수도

긁는다

 

교수대, 단두대 밑

죄인도

 

가려우면

긁적긁적

 

긁다가

손가락이 뚝

떨어져 나간 한하운(韓河雲)이 있다는 건

내 기억(記憶)의 은총이다

 

그러한 기억(記憶)의 자긍(自矜)은

위로(慰勞)며

평화(平和)인 것이다

 

얼음에 박힌 유리 조각

그 깨진

거울 조각에

 

나는

산산조각 박살 난 나와

악수(握手)를 했다.

 

 

 

깔때기

김영승

 

아내는 보라색 나팔꽃을 좋아하고

나는 빨간 나팔꽃을 좋아한다.

 

그러나 우기지는 않는다.

 

보라색 나팔꽃은 베란다에

그리고 빨간 나팔꽃은 복도에

 

각각 화분.

 

"해설(解說)해서 뭐하냐....."

 

2001년 8월 20일(일) am 5시 45분 현재

그 화분에 핀 두 종(種)의

고성방가(高聲放歌)는 단지 나팔꽃...

부부(夫婦)는 모름지기

싸우지 않으면 된다 그 모든

남녀(男女)는.

폭우(暴雨) 속,

그 나팔꽃은

찢어지지도 않는다

 

 

 

꿈과 별

김영승

 

옳다 그르다

이것저것 따질 때가 좋을 때

 

세살박이

아들에게 가갸거겨를 가르치다 보니

우리나라 말 그 한글 닿소리 이름도 몇몇

잘못 알고 있는 게 있구나

 

기역 니은 디귿 리을 미음

비읍 시옷 이응 지읒 치읓 키읔

티긑 피읖 히읗

 

빨리빨리 그런 소리만 크게

꽥꽥대도

 

딴 나라 사람들은

다 도망(逃亡)가겠다

 

아야 어여 오요 우유

으이

 

그렇지만

그것들이 만나 짝을 이뤄 집을 지으면

 

그리워…

기다릴게…

 

그런 말도 있단다

 

어린 벗이여, 나그네여

사는 동안 님은

이걸 배워

어디다 쓰리…

 

깊은 산(山)

쪼갠 대나무 이어 만든 홈통엔

맑고 찬 계곡(溪谷)물이 졸졸

큰 돌 깎아 만든 수조(水槽)엔

은(銀)구슬처럼 또 찰랑찰랑

 

풀벌레 울음소리 도깨비불 같은 밤

푸른 대나무 엮어 만든 평상(平床)위에 올라앉아

 

아들아

송여빙표(誦如氷瓢)*, 풍경(風磬)소리

개구리 울음소리

언제 함께 들어보랴.

 

* 송여빙표(誦如氷瓢) : 얼음 위에 박 밀듯 왼다

 

 

 

꽃그늘 아래서

김영승

 

개나리꽃이 이렇게 예쁜데

사람들은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진달래꽃이 이렇게 고운데

일렁이는 꽃잎들 향기로운 봄바람

햇살은 벌써 조금씩 따갑구나

눈부시구나

늙으신 분

머리 하아얀 할머니 한 분

그 아래 와 앉으면

나는 좋아라

나는 몰래 하루 종일

숨어서 마시리

 

 

 

꽃잎 날개

김영승

 

밥을 먹어도 이 여름

얼음 띄운 맑은 물에 반듯하게 썬 오이지

그렇게 먹고 있는 한낮

 

채송화 노란 꽃 빨간 꽃

봉숭아 흰 꽃 빨간 꽃 이름 모를 란(蘭)

별같이 총총히 핀 작은 꽃 흰 꽃

양귀비 흰 꽃 빨간 꽃

분꽃 그 빨간 꽃 환한 호박꽃

주렁주렁 달린 파란 고추 빨간 고추

그 흰 꽃

 

피고 지고 또 피고 지고 또 피고 지는 걸 보니

노란 나비 흰 나비 큰멋쟁이나비

고추잠자리 실잠자리 밀잠자리 또 왕잠자리

말벌 호리병벌 풍이 풍뎅이

다 날아드는구나

 

인천에서도 배다리 그 도원 고개

그 기찻길 옆길 건너 대장간 철공소 붙어 있는 동네

 

초복(初伏) 지난 이 통쾌(痛快)한 날

닭 한 마리 사다가 놓고 아내는 마늘을 까고 있구나

 

어린 아들은 부엌에서 목욕을 하고

나는 어느 꽃잎 어느 날개 속에

이들을 포근히 뉠꼬

생각하는데

강풍(强風)에, 급류(急流)처럼

우리 집 그 좁은 골목으로 새까맣게 휘몰아쳐 들어온다.

 

 

 

꽃처럼 환하게

김영승

 

이 꽃은 무슨 꽃일까

저 꽃은 또 무슨 꽃

이 봄날 꽃 앞에 앉은 사람은

꽃이다 꽃은

이 산에 가득 피어있는 꽃은

하염없이 꽃잎을 떨어뜨리는 꽃은

내 하얀 얼굴에

올챙이 그림 그려주고 개구리 그림 그려주고

내 얼굴에 그려진 올챙이 그림 개구리 그림

나는 하루 종일 뛰어다녔다

꽃 속에 묻혀 사노라면

내 나이 이제 스물

꽃처럼 환하게 웃다가

꽃처럼 환하게

그렇게 스스럼없이 져버릴 수 있을 것 같다

 

 

 

나쁜 놈의 사랑

김영승

 

나는 참 나쁜 놈입니다

당신은 얼마나 나쁜 사람입니까

 

나는 사는 것을 싫어하는 나쁜 놈입니다.

 

나는 참 나쁜 놈입니다

당신은 얼마나 나쁜 사람입니까

 

당신은 사는 것을 싫어하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사람.

 

밥을 먹고 연탄재를 갖다 버리겠습니다

그리고

그런 당신을 물끄러미 바라보겠읍니다.

 

 

 

나의 끝

김영승

 

나는 끝이 없다

나는 버드나무 맨 끝 가지를 만져 본 일이 있다

그건 끝이 아니었다

 

나는 아낙네의 젖을 만져 본 일이 있다

그 젖에 입 맞춘 일도 있다

 

한 달이 지나고

그 젖이 그리워졌다

하얀 젖 까만 젖꼭지 그러다가 나는 그 아낙네를 갖고 싶어졌다

 

함께 별을 바라보다가

나는 문득 버드나무 맨 끝가지를 만져 보고 싶었다

그 뒤로 나는 아낙네를 떠나 버렸지만

그리워하다 보면

알 수 없던 그 끝을 만나게 된다

 

누군가가 나를 그리워한다면

그는 나의 끝을 볼 수 있으리라.

 

 

 

나의 원조교제

김영승

 

익모초(益母草) 끓인 물을 한 잔 마시고-

 

너무나 아름다운, 총명한, 심오하다 못해 유현(幽玄)한 지성과 마력의 소녀가 나한테 한눈에 반해,

그 어마어마한 재력(財力)으로 나를 도와주면서

교제를 하는 것

 

그것이 나의 꿈, 청운(靑雲)의 꿈이다.

 

자기 소유의 아파트에 가서 밥도 먹여주고

비디오도 찍어도 주고

 

그러면서도 철학(哲學) 얘기도 하고 불교(佛敎) 얘기도 하고

그러면 나는 그냥 벌거벗고 요염히

김용옥보다도 더 까불면서 말해주고

 

100% 열망(熱望)과 합의(合意)에 의한 그러한 교제를

못마땅해하는 놈들은 그 미성년자를 마치

다른 종(種)처럼 생각하는 놈들이니

청소년 보호법이 아니라 무슨

동물 학대 방지법 같은 법을 만들 것인지……

 

그렇게 벌거벗고

 

도가도(道可道)면 가도고, 명가명(名可名)이면 비정상적인 체위다

라고 말해도 좋고, 성상근 습 상원(性相近 習相遠)*인데

우리는 안 그래요……

그럴 수 있는 것이 노자(老子)의 말이니라 어저구 또

 

동물적인 섹스?

그렇게 섹스하는 동물이

어디 있냐?

변태적이라는 것은

인간적이라는 것이다 또 어쩌구 하다가

 

나는 이 여름

정신(精神)을 차리고

그리고 목표(目標)가

밥 먹는 것이다.

 

밥 먹다 말고

 

들여다보면

소녀(少女)들은 예쁘다

 

그리고 사랑을 하면 더

예뻐진다.

 

밥 먹다 말고

들여다보면.

 

* 「陽貨篇」, 『論語』 ; 타고난 본성은 서로 비슷하지만 습성에 따라 멀어지게 된다

 

 

 

나팔꽃

김영승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입술은

뒷뜰 나무담장에서도 보인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눈물은

밤새도록 하늘은 썩고

하늘은 물이 되고

물이 되어 맺힌다 눈물이 되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눈물이 되어

빨간 살점 위에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입술 위에

그리고 웃는다

찢어진 나뭇잎 새로

햇살은 방울방울 구비구비 흐르고

내가 입술을 대기 전에

벌써 떨린다

내가 입술을 대면

주르륵 흐르는 눈물

그러나 나는 먼저 울고 있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입술은

빨갛게 타오르다가

내가 입술을 떼기 전에

내 발에 밟힌다

그리고는 또 언제나 그랬던 여름을 보내 버린다

 

 

 

나팔꽃, 부추 파종(播種)

김영승

 

굳이 심지 않아도 되는데

심었다

굳이 받지 않아도 되는데

받았었고 굳이

 

가꾸지 않아도 되는데

가꿨고

보았다 굳이

보지 않아도 되는데

 

나팔꽃과 부추하고의 생활(生活)도 근(近) 30년

풍장(風葬)한 백골(白骨)이

괘장(掛葬)한 백골(白骨)이

사파이어가, 블루다이아몬드가

루비가

 

지석(誌石)이나

신도비(神道碑)

혹은 마애비(磨崖碑)의

 

그 음각(陰刻)된

자자구구(字字句句)의 에

수로(水路)에

 

쌓이듯

끼듯

 

나팔꽃과 부추의 씨는

내 손바닥에

 

천인단애(天?斷崖)의

창공(蒼空)에

 

꽃은

 

이 강풍(强風)에

 

그래도 지상(地上)에서

아파트 4층 높이까지는

지상(地上)에서

 

 

 

내가 돌았을 때

김영승 

 

내가 돌았을 때

 

어 너 돌았구나 참 잘 돌았다 도느라고

얼마나 애썼니

칭찬해 준 사람도 없었고, 위로해 준 사람도 없었고

아니 멀쩡한 새끼가 왜 돌아 지금이 돌 때야

욕해 주는 사람도 비판해 주는 사람도

없었다 다음부터는 돌지 말아라

 

개과천선할 기회를 주지도 않았고

왜 돌았을까 그 원인을 분석해가며

 

그래 네가 돈 것을 이해한다 수긍하는

사람도 그 예리한 지성 다 어디로 가고

이렇게 되었을까 끌어안고 흐느끼는 사람도

없었다 내가 돌았을 때

나를 돈 사람 취급 안 한 사람도 돈 사람이고

또 나를 참 비범하게 돈 사람이라고 추앙한 사람도

돈 사람이다 나는 내 아들이

구태여 돌지 않아도 되는 그런 환경을

만들어주도록 노력할 것이다 아들이

너무 많다…

 

자, 나는 또 <내가 돌았을 때>라는 시를 쓰다가 말았다.

쓰다가 말다니 얼마나 슬픈가, 죽다가 말다니.

 

겨울, 봄, 여름…

 

1996년 2월 2일(금)부터 1996년 8월 7일(수)까지의 일이다.

그 세월이 꼬박 '20년'이다.

 

이제 '가을'이다.

 

 

 

내 몸을 덜어가라

김영승

 

내 몸을 덜어가라

내 마음을 덜어가라

덜어갈 게 어디 있냐고 하지 말고

나는 자취도 없이 사라지려 한다

내 몸과 마음을 덜어가라

 

땅이나 돌이나

종이 위가 아닌

그대들 가슴 속 그 깊은 곳에

자취를 남기면

나는 그대들을 사랑했다고 말하여질 것이냐

 

내 몸을 덜어가라

내 마음을 덜어가라

내가 그대들을 사랑했다는

그 앙상한 말조차 나오지 않게

그대들 가슴 속 그 깊은 곳에조차

자취를 남기지 않게

 

그 더러운 몸과 마음을 덜어가서

무엇하겠냐는 말을 들을 수 있게

 

그리하여 나는

나를 이루고 있던

그 모든 몸과 마음을 다 버리고

자취 없이 산뜻하게 사라져야겠다

 

처음에는 모두들

갖고 있지 않았던 것들이다

 

나에게 얼마만큼의 거짓이 있어져야

그대들은 내 몸과 마음을 덜어갈 수 있단 말인가

다 내놓고 다니는

나의 몸과 마음을

 

아아, 얼마만큼 내가 그대들을 더 속여야

내가 그대들을 사랑하는 까닭으로

내 몸과 마음을

부서뜨리게 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아직도

그 아름답고 슬기로운 그대들의 몸과 마음을

서둘러서 바삐바삐

헐떡거리며 덜어가고 있다

 

웬만해선 보이지도 않는

그대들의 몸과 마음을

 

 

 

내 생각……

김영승

 

 

가엾어라, 내 생각……

 

이 세상에서 제일 가엾은 건

내 생각……

 

그것도 모르고 나는

내가, 내 몸이 제일

 

가엾다고 했었네, 가엾어라

내 생각……

 

내 몸도, 내 골격(骨格)도 다

날아간다 해도, 가엾은

 

내 생각은 가엾게

남으리……

 

태훙(颱風) 「루사」는 북상중(北上中)이고

나는 또

 

고추밭과 고추를

나팔꽃을 걱정한다 나팔꽃은

 

찢어질 것이고 고추는

떨어질 것이다, 고추는

 

떨어져 썩을 것이고 나팔꽃은

찢어져 펄럭일 것이다 내

 

생각은

 

폭우(暴雨)도 엄청 쏟아지겠지

폭우(暴雨)니까 폭력(暴力)도 폭언(暴言)도

폭력(暴力)이고 폭언(暴言)이니까

 

고견(高見)을 듣고 싶다고?

 

시인 김영승을 제일 좋아한다고 한*

박광수라는 만화가는 「광수생각」이라는

만화를 연재하기도 했는데

 

무념무상(無念無想)?

가엾은 생각과 가엾은 생각일 뿐이다 아니

가엾은 내 생각과 가엾은 내 생각일 뿐이다 그

 

모든 지상(地上)의, 우주공간(宇宙空間)의

무념무상(無念無想)이라는 무념무상(無念無想)은 다

 

그것도 모르고 doxa니 episteme니

김심(金心)이니 여심(女心)이니 어쩌구

농심(農心)이니

 

했으니 그게 다

가엾은 내 생각일 뿐이었는데……

 

코스모스는 또 내 생각

함박꽃은 또 내 가엾은 생각

 

가도 가도 함박꽃뿐인 그 함박꽃길은 내

가엾은 생각의 길

 

이 새벽

당당(堂堂)히 가엾은 내 생각은

빵을 한 개(箇) 먹고

 

잔다.

 

내 가엾은 생각을

끝까지 가엾은 생각으로 놔두자는

 

가을의 푸른 하늘 은하수는

그 자체(自體)가 내 가엾은 생각!

 

내 가엾은 생각의 극치(極致), 절정(絶頂)!

 

귀뚜라미는! 방울벌레는!

그 귀뚜라미 울음소리는! 방울벌레 울음소리는!

 

아아, 가을의 그 푸른 하늘 은하수는!

 

내 가엾은 생각…….

 

 

 

내 척박한 가슴에 온 봄

김영승

 

우리 동네 향긋한 들길 걸으면 두엄 냄새

상큼히 코끝 찌르고 학교에서 돌아오는 학동들

등에 맨 예쁜 가방 위에 쌓인

변두리 황토 흙먼지

과수원 나무 사이사이 쥐불은 검게 타고

목장 젖소들 음매음매 되새김질하는데

작은 교회 지붕에 숟가락처럼 걸린 십자가도

눈물겹고 이제 다시 돌아온 탕자의

무거운 발길 또 무섭다

무슨 변고가 또 있을까

나 같은 죄에 물든 미물도 다 살아가는데

새싹이 돋을 거라고 꽃이 또 필 거라고

그 무슨 못다 기다린 슬픈 사람이 남아 있다고

봄비가 내리듯 술로 적셔야겠다

썩은 고목에 버섯이라도 돋게 해야겠다.

 

 

 

내가 돌았을 때

김영승

 

내가 돌았을 때

어 너 돌았구나 참 잘 돌았다 도느라고

얼마나 애썼니

칭찬해 준 사람도 없었고, 위로해 준 사람도 없었고

아니 멀쩡한 새끼가 왜 돌아 지금이 돌 때야

욕해 주는 사람도 비판해 주는 사람도

없었다 다음부터는 돌지 말아라

개과천선할 기회를 주지도 않았고

왜 돌았을까 그 원인을 분석해가며

그래 네가 돈 것을 이해한다 수긍하는

사람도 그 예리한 지성 다 어디로 가고

이렇게 되었을까 끌어안고 흐느끼는 사람도

없었다 내가 돌았을 때

나를 돈 사람 취급 안 한 사람도 돈 사람이고

또 나를 참 비범하게 돈 사람이라고 추앙한 사람도

돈 사람이다 나는 내 아들이

구태여 돌지 않아도 되는 그런 환경을

만들어주도록 노력할 것이다 아들이

너무 많다…

 

자, 나는 또 <내가 돌았을 때>라는 시를 쓰다가 말았다.

쓰다가 말다니 얼마나 슬픈가, 죽다가 말다니.

 

겨울, 봄, 여름…

 

1996년 2월 2일(금)부터 1996년 8월 7일(수) 까지의 일이다.

그 세월이 꼬박 '20년'이다.

 

이제 '가을'이다.

 

 

 

너의 애인

김영승

 

바라볼 수 있는 건

그 애의 입술

그 애의 가슴

 

하염없이 그냥

넋 없이

바라볼 수 있는 건

 

그 애의 빨간 입술과

수줍은 가슴

 

바라볼 수 없는 건

그 애의 눈

그 애의 깊은 눈

 

어쩌다 한 번 보고 나서

괜히 나 혼자 술을 퍼마시게 하는

아름다운 눈

참 슬픈 눈

 

언제나 너만을 보고 있는

착한 그 눈.

 

 

 

너 있는 곳

김영승

 

어디냐 거기는

거기 그냥 있어라

하늘 끝 쯤은 내 눈에 와 닿는다

알 수 없는 어느

나무 열매 속이냐

쓰린 내 가슴 속이냐

코 끝 때리는 두엄

밀잠자리 엷은 날개 위냐 너는

아무 데나 다 있구나

나는 이 늦은 밤 추근거리는 비

술집에 앉아 있는 나는

아무 데나 있어야겠다

술이 내 가슴에 고이다 보면

아무 데나 있다가

너를 만난다

짧게 울고

너의 모습 꽃을 따듯

따서 담으리라.

 

 

 

눈이 오면

김영승

 

눈이 오면

 

눈이 오면 알리라

눈보다 더 흰 것은 어디에도 없음을

눈 만큼 흰 것은 곧 사라져감을

 

하양 종이 위에 하얀 물감으로

그대의 얼굴을 그릴 수 없듯이

밤하늘이 감깜하면 깜깜할수록 별빛이 밝듯이

 

눈이 오면 알리라

내리는 저 눈이 눈부신 것을

그리고 그것 때문에 눈물 흘리는 사람이 있음을

 

나무도 사랑도 하늘도

우리들의 마음도,

 

눈이 올 때

내리는 저 눈이 그 하얀 빛이

새롭지 않은 사람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노라

내 마음은 총천연색

그리하여 서럽고 죄많은 사람

 

나는 저 눈을 바라볼 수 없도다.

눈이 오면 알리라

나를 사랑하는 그대의 마음도

나를 용서하는 그대의 마음도

 

끝없이 하염없이 더러움을.

 

 

 

뉴스는 사극(史劇)

김영승

 

그들은

자기네들이 집단 휴거했음도

은폐하고 조작한다

 

뉴스는 이미

아득한 사극(史劇)

 

출연 배우들이

누가 감독이고 연출자인지

희상(衣裳)과 세트를 고증(考證)한다

대본(臺本)을 보며

 

번역하고 중역(重譯)하고

윤문(潤文)하다가 애드리브 한다

립싱크까지도 한다

 

자기네들이 집단 휴거했는데

어디서 그러고 있을까

 

진실은

완강하게 완벽하게

무오류(無誤謬)의 진실이 되고

 

억울한 사람들이

거대한 싱크홀

생매장(生埋葬)처럼 무수(無數)히

무수(無數)히 자살(自殺)을 한다

 

그러나

 

너의 진실은

내가 알고 있다

 

나는 그렇게 말한다

 

앉아서 보니

조금 찢어지고 구멍 난 호박잎 사이로

회색 구름과 햇빛과 먹구름과

푸른 하늘이 보인다

 

대추나무를 타고 올라간 오이 줄기가

대추나무에

늙은 오이를 매달아 놓았다

 

오이의 저 자발적(自發的)인 매달림이

이 흐린 날을 찬양한다

 

 

 

늙고 사오납게 내리는 비

김영승

 

주룩주룩

수직으로

어느 게 수직인지도

모르게

 

보도블록 위

대(大) 지렁이

 

물뱀처럼

대(大) 포르노 스타처럼

 

동방박사처럼

 

간다

 

 

 

늙은 호박

김영승

 

잠 좀 으스러지게

혓바닥이 쏙 빠지도록

자봤으면

여한이, 없겠다, 없겠지, 있겠냐, 이 미친

지긋지긋한

불면증 환자야

 

낮도깨비 같은

천사(天使)야……

 

아아아아아아아아

 

으앙

 

3시 10분

16번 버스

 

5˜6학년쯤 되었을까

영락원(永樂院)*에 봉사활동 가는 소녀들

 

송도(松島)**는 온통

활활(活活)***이다

活活活活活活活活活活活活活活活活活活活活活活活活……

活活活活活活活活活活活活活活活活活活活活活活活活……

活活活活活活活活活活活活活活活活活活活活活活活活……

活活活活活活活活活活活活活活活活活活活活活活活活……

 

그 '활(活)'이 온통

'설(舌)' 같다 물(水)과

혀(舌)뿐이다 '섬(銛)'**** 같다 돈(金)과

혀(舌)뿐이다

 

'활(活)'………………………………

 

'활(活)'이 질질질질질

샌다, 임리(淋?)한다

 

모퉁이 돌아 어느 골목

누군가가

썩은 늙은 호박 수십 개를 비닐봉지에 담아

대문 앞에 내다 놓았다

 

저 늙은 썩은 호박 수십 개에 가발을 뒤집어 씌우고

찍찍찍찍찍찍찍찍찍찍찍찍찍찍찍찍찍찍찍찍찍찍찍찍찍찍찍찍찍찍

사정(射精)을 하는 놈이나

 

도끼를 들고 미쳐 날뛰며

금방 딴 싱싱한 늙은 호박 수십 개를

뽀개고 돌아다니는 놈이나 ―

 

잠 좀 으스러지게

혓바닥이 쏙 빠지도록

자봤으면 하는 놈이나 다

 

혓바닥이 쏙 빠지기 전까지는

혓바닥 가지고 하는 일을

할 놈들이다, 다 ―

 

버스표 한 장을 꺼내든

내 앞에 앉았던 여대생 한 명이

고개를 갸우뚱 나를 의도적으로

유심히 들여다보다가 내린다

 

저녁을 먹고 누우면 속이 부대껴서 진저리치는

소위 나의 위장 심장 등 복벽 긴장으로 인한 발작

무슨 '죽(粥)'을 먹어야 하는데

 

'죽(粥)'은

내 몸에서 나온다

 

옛날엔

할머니는 죄다 여자(女子)할머니였는데

요즘은 남자(男子)할머니도 있고 반대로

여자(女子)할아버지도 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다

 

그 여대생이 나를

할아버지로 보는 것일까 할머니로

보는 것일까 차창 밖에서도 오랫동안

나를 쳐다보던 그 여대생을 나도 오랫동안

쳐다보았다 전생(前生)에

 

서로 69을 했던 사이였을까 영락원(永樂院)

영안실 입구에 매달린 조등(弔燈)이

'죽(粥)'같다 호박죽(粥)

 

송도의 밤은 식민지 시대 마카오의 밤

휘황한 네온사인 불빛,

 

그 조등(弔燈) 아래서 그 여대생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 보다가

 

혓바닥이 쏙

빠져버렸다 피차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하체(下體)를 질질 끌다가

 

- 한때는 기분 좋을 때도 있었구나

 

겨우 그 한마디를

전신(全身)으로 하고 있는 듯했다

 

그 조등(弔燈) 아래서 그 여대생

얼굴을, 그 젖은 두 눈을 찬찬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나의 유령(幽靈)은

혈안(血眼)이 되어 헥헥헥,

 

여전(如前)히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 인천시 연수구 동춘동 소재 유료 양로원.

** 인천시 연수구 옥련동 소재 송도유원지 일대를 말함. 음식점과 러브호텔 등이 밀집한 인천의 대표적인 유흥가의 하나가 되어버렸음.

*** 초고에 의하면 1998년 2월 4일 수요일에 쓰여진 졸시 ‘늙은 호박’의 이 부분은 공교롭게도 지난해 그러니까 서기 2000년의 어느 날 인천에 사는 인천 출신의 후배 시인 박종명한테 빌려서 처음 보게 된 황지우의 시집 ‘나는 너다’(풀빛, 1987)의 ‘後記/없는 길’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구절―왈, 󰡒사람들이 말하고 기록하는 모든 형식들에 관심이 몰려 있던 그 당시 나로서는 전문(電文)을 치듯, 화급(火急)하게 아무거나 시(詩)로 퍼담으려는 탐욕에 급급했던 것 같다. 지금 보니, 냉냉하다. 활활(活活) 타오르는 시를 언제 쯤 쓸 수 있을까󰡓 운운한.―과 그 용례가 비슷한 꼴이 된 듯 하니 참조할 것. '불길이 세게 타오르는 모양'을 나타내는 의태어인 '활활'을 그는 의도적으로 '活活'로 표기했으나 '活活'은 원래 그 音이 '괄괄'로 '물이 콸콸 흐르는 소리'를 나타내며 '活'의 '舌'(괄)은 원래 '굳은 맹세를 깨는 모양'인데 그처럼 '물이 둑을 부수고 멋대로 흐른다'의 뜻에서 전(轉)하여 '산다'의 뜻을 나타내었으므로 여기서는 '괄괄' 또는 '활활' 그 두 가지 중(中) 어떤 음(音)을 취(取)하여 읽어도 可하다.

**** 섬:포경선에서 발사하는 고래 잡는 작살.

 

 

 

다 잊어버렸네

김영승

 

다 잊어버렸네

그 아름다운 이름들

수많은 이름들, 여자 이름들

 

나를 만진 이름들, 나를 부른

이름들, 나를 때린

그 이름들

 

코피가 터지고 갈빗대가 부러지고

칠흑의 황원을 나 유리방황할 때

불렀던 노래, 외웠던 말씀

다 잊어버렸네, 영어도 독어도

 

그 모든 국민교육헌장도, 아니

생각해보니 오늘은 12월 5일

국민교육헌장 선포일

1968년 12월 5일이니까

30여 년 전, 그러니까 내가

초등학교 x학년 때

x학년 때 담임선생님은 XXX선생님

그 이름 기억이 나네

기분 나쁜 이름이니까 기억이 나네

무지막지, 잔혹했던 그 선생님

 

다 잊어버렸네 우연히

다시 읽은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솔, 1994)

죽은 기형도에 관한 책

기형도가 있었던가 기형도를 만났던

내가 유령 같네 그

많은 사람들 그

指紋들 내

어찌 기억하리

 

다 잊어버렸네

모았던 우표처럼

다 잃어버렸네 내가

 

우표가 되었네 빛바랜

편지 봉투에 붙은

 

관(棺) 같은

납작한

 

다 잊어버렸네

그 떨리는 이름들

 

잘 잊어버렸네.

 

 

 

단맛

김영승

 

이렇게 많은 당분을 축적했다니

이 겨울

고구마는 달고

추위는 숙연하다

 

밤은 깊으며

별빛은 밝다

 

고구마는 얼마나 아팠을까

 

내 몸에 무슨 단맛이 있겠는가

어두운가?

 

흙 묻은 고구마를 씻어

뚝 분지르니

 

나를 본다

 

 

 

달빛 쏟아지는 집

김영승

 

죽은 사람의 옷처럼

구름이 펄럭펄럭 흐른다

 

마른 나뭇잎이 옥수수 잎이

흔들리고 어디선가

그 어느 불빛 있는 곳에선가

젖먹이 어린애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개가 짖어대고 나는 이 황량한

구월동의 거친 길을 걸으며

내 발자국 소리에 귀를 기울여 짖고 있는

그 개를 만나고 싶어진다

 

아무래도 사향 냄새 같은

달빛 밟으며

달빛이 폭포처럼 쏟아지는 곳을 바라보면

그 달빛조차 시끄러워

귀를 틀어막아 보면

 

머나먼 곳

저곳은 어디냐

그리고 이곳은

 

음산하게 그려진

여인의 눈썹 위에

보글보글 된장찌개 끓는 소리

그 냄새가 겹쳐지면

하아 하아 하아아아

집으로 가서 있자

 

가보면

없는 내 집

 

 

 

닭똥집

김영승

 

포장마차에서 닭똥집 두 개를 안주로 해서 소주 한 병 마심.

 

퍼떡이고 꼬꼬댁거리던 닭 두 마리의 몸 속에서 끄집어낸 닭똥집 두 개

바닷물에서 끄집어낸 소금 몇 톨.

쌓이고 쌓인 사람들 속에서 끄집어낸 나라는 사람 한 마리

 

그 나라는 사람 한 마리에서 끄집어낸 현금 820원과 담배 및 성냥.

담뱃갑 속에서 끄집어낸 담배 세 가치.

성냥갑 속에서 끄집어낸 성냥 열두 개비.

 

소금 몇 톨, 현금 820원, 담배 및 성냥, 담배 세 가치, 성냥 열두 개비는

모두 제 자리로 다시 집어넣을 수 있음

 

제 자리로 다시 넣을 수 없는 건

닭똥집 두 개

퍼떡이고 꼬꼬댁거리던 닭 두 마리의 몸속으로

다시 집어넣을 수 없음.

 

쌓이고 쌓인 사람들 속으로 다시 집어넣을 수 없는

나라는 사람 한 마리.

쌓이고 쌓인 사람들 속에서 끄집어낸 나라는 사람 한 마리.

한때는 쌓이고 쌓인 사람들 속으로 다시 집어넣을 수 있었음.

 

그런데도

쌓이고 쌓인 사람들 속으로 다시 집어넣을 수 없는

나라는 사람 한 마리.

한 개의 닭똥집.

 

 

 

당신은 아름다워요

김영승

 

방바닥에 털푸덕 앉아 양말을 신는

당신은 아름다워요

 

거울을 들여다보며 크림을 바르는

당신은 아름다워요

 

나 때문에 웃고 나 때문에 우는

당신은 아름다워요

 

내 곁에 누워 곤히 잠든 당신.

아침에 부산히 일어나는

당신은 아름다워요.

 

술 취해 쓰러진 나에게

다음날 라면을 끓여주는

당신은 아름다워요.

 

욕하고 저주하고 떠난 당신은......

당신은 아름다워요.

 

 

 

더러운 그늘

김영승

 

더러운 그늘도

있을까 더러운

그림자도

 

즈믐 강(江)에 비친

만월(滿月)처럼

 

폭우(暴雨)에 건너편

아파트 5층 거대(巨大)한 느티나무 빽빽한 숲 사이로

물이 콸콸콸콸 날다람쥐처럼

이 가지 저 가지로 여자(女子) 타잔처럼

뛰어다니듯

쏟아지는 아침

 

 

 

두 나팔꽃

김영승

 

매미 소리를 통주저음(通奏低音)으로 들으며 이 새벽

두 나팔꽃을 딴다

빨간 큰 나팔꽃 한 송이

파란 작은 나팔꽃 한 송이

 

나와 함께 사반세기(四半世紀)를 함께 한 나팔꽃은

 

그만하면

신앙(信仰)이다

나는 그 나팔꽃의

 

저 산(山) 밑의 백합

빛나는 새벽별 같은

그 대상(對象)이다

 

기념(紀念)하기 위하여 나는

그 두 나팔꽃을

책갈피에 끼웠다

손길 고운 소녀(少女)처럼

어린 날 내 고모(姑母)가 그랬듯

 

나 죽으면

나팔꽃으로 장식해 다오

 

그럴 필요는 없다

 

 

 

두 올빼미

김영승

 

실제로, 진짜 올빼미 부자가 있다면, 없겠지만, 이 밤 함께

비 맞고 앉아 있을 것이다.

󰡒저리 가...󰡓

󰡒저리 가요...'

붙어있다가,

빗줄기는 더욱 더 거세어지고, 빨라지고, golden

아니,crystal

SHOWER고

 

뚝,

 

떨어졌다가,

 

꼬박꼬박

졸다가,

 

우리 부자

언제 텐트 한 번 쳐보나

 

감자조림에 소주를 마시고 있는

이 여름방학

 

꽈르르르릉

천둥 번개 치는

이 폭우의 밤,

 

내 방에 와 만화영화 대사를 중얼거리며

뛰고 연기하며 노는

 

아들을 바라보니,

 

 

 

등, 고찰(考察)

김영승

 

등을 고찰한다 등엔

조그만 종기(腫氣)가 나더니

2년 동안 어언

바둑알만큼 커졌다 커진 후론

더 이상 자라지 않고 1년 동안 그대로다

가려워서 어느 날 손으로 비틀어 보았더니 찍

하고 비지 같은 회백색 죽(粥)이 터져나온다

다시 수개월이 지난 후 연시처럼 말랑말랑해진

그 작고 납작한 혹을 아내더러 짜보랬더니 엄마야!

찍 하고 얼굴에 머리에 범벅이다 등으로

싸놓은 정액(精液) 같다 그 자리에 고약을 붙이고

나는 또 그대로 놔둔다

외과 의사인 친구 S, 친구 L, 그리고

역시 외과 의사인 종합병원 원장 L박사가

서로 그까짓 것 내가 해주지 했지만 나는

그 모습 그대로 그냥 또 놔둔다 왜냐하면

그것은 내 것이기 때문이다 내 몸에서 만들어진

나의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분명히

그 누구에게도 등을 돌리고 싶지 않고 등을 보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내 등 뒤엔

아무것도 없다 내 작고 넓적한 혹 달린

깡마른 등 뒤엔

서로 등을 맞대고 선 총잡이가 없다 약속하고

서너 걸음을 걸은 후 총을 뽑는

결투하는 자가 없다 내 손이 닿는다면

나는 내 등에 난 혹을 내 손으로

도려냈을 것이다 칼을 불에 달궈 소독하고

나무토막을 입에 문 채 나는

내 혹을 그렇게 간단히 도려냈을 것이다

거기다가 오징어뼈 가루를 바르고

내 손으로 아아 내 손으로

처리할 수 없는 나의 등이여 모가지와

어깨와 팔목 관절을 비틀어 내 손으로

내 눈으로 등이 아파온다 림프관을

타고 고름이 전신(全身)으로 퍼진다 해도

폐혈증으로 죽는다 해도 나는 내

손으로 아내는 겁이 많고 악수하는

친구들은 내 면전(面前)에 있다

 

이 얼어붙은 겨울밤 달빛을

뒤로 하고 걷는 내 등이

화끈거린다 아니면

그 어느 이끼 낀 바위에

등을 대고 문질러버리리라

등에는 나의 임시

정부가 있다 등에는

적(敵)들의 소굴이 있다

본부(本部)가 있다

쇠파리여 등에여 내 등을

빨아 먹어라 변태성욕자

여인이여 내 등의 혹을

잘근잘근 물어뜯어 씹어먹어

보아라 비지 같은

죽(粥)에 썩은 피에 그 맑은 피에

음부를 대고 음핵을 대고

문질러 보아라 짓이겨 보아라

무수한 자들이 달려와

내 등에 무수한 문신(文身)을 하였으나

그러나 내 등은 칼날을

여지없이 부러뜨렸을 뿐

내 등은 나의 방패

종기(腫氣)는 나의 영광(榮光)

 

난생처음 식음을 전폐하고

새끼 잃은 원숭이처럼 고민할 일이 있어 고민을 했더니

생긴 종기(腫氣) 내 육체의 지진이여

화산(火山)이여 마그마여 그 분화구(噴火口)여

화구호(火口湖)여 휴화산(休火山)이여 단장(斷腸)을

꿰매어가는 은총의 성흔(聖痕)이여

상처(傷處)여 그 향기(香氣)여 악취(惡臭)여

나는 이렇게 살았노라

그 낙인(烙印)이여 고백(告白)이여

위대한 할례(割禮)여

 

징표여 훈장(勳章)이여

아아, 그 모든 살아 있음의 인과(因果)를 초월한

우주적 사건(事件)이여

기적(奇蹟)이여

특수한 자의

특수한 사랑이여

 

아득히 반짝이는

가장 가까운

별이여!

 

불꽃놀이 유산탄(榴散彈)처럼 쏟아지는

나의

눈물이여!

 

 

 

망미인곡(忘美人曲)

김영승

 

상긔 님 그림자 아지 못하네

님이 계시기에 발뒤꿈치까지에 님이 계시기에

님이 계시지 아니하네 타버린 재 속에

님이 묻어 계시네 상긔 님 그림자 빛이 되어

너무너무 밝아서 그 그림자 뵈지 아니하네.

 

 

 

매달려, 늙어간다

김영승

 

별건 아니지만, 그래도, 생활비가 또, 똑, 다 떨어져

아내의 패물과 아들의 백일반지 돌반지를

팔았을 땐 조금은 그랬다, 그 모든 값나가는

기념품은 이제 사라지리라, 돈 들여 애써

부여했던 의미들은 옛날 어느 맹인 가수가 부른

노래의 가사처럼 그저 무지개 타고 온다

그 무슨 잉카의 찬란한 황금 문명이라고

총과 칼과 마약과 섹스를 앞세운 스페인 무적함대는

상륙해 와 약탈해 가는가 맞추피추 같은 이 아파트

아파트?

내가 사는 아파트는 동남아파트

아파트? 인디안 reservation 같은

친구여 그대는 무슨 인디안 reservation에 사는가

나는 동남 인디안 reservation에 산다네 정확한

명칭은 연수 동남 임대 인디안 reservation

그러나

빛을 타고 날아가면 세상이 어떻게 보일까?

의문을 품었던 14세의 아인슈타인처럼 우리 아파트

아니 우리 인디안 reservation 건너편엔 '무지개마을'이라는

새로운 아파트, 아니 인디안 reservation이 생겼다

그 무지개 너머엔 아내의 패물과 아들의 백일반지

돌반지를 팔고 으하하하하하하 매우 대견해하는

그런 인디안 같은 족속들이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고개를 끄덕거려 보는 것이다 가로등 밑 보도블럭을

기는 여치는 어느새 갈색(褐色)

겨울을 걱정한다는 것은 모든 짐승의 본분 아닌가

죽은 맨드라미처럼 빨간 내복*을 한 벌 마련하는

것은 나의 예절이고 또한 은총이라면

정말 별건 아니다, 오늘 아침 텃밭에서

빨갛게 익은 고추 여덟 개와 토마토 한 개를 땄다

아내여, 아직 매달려 늙어가는, 호박 여섯 개는 이제,

"아빠, 그럼 우리 부자네!" 하는 아들의 탄성처럼,

우리를 풍요롭게 할 것이다. 매달려

늙어가는 호박은, 끌려가지는 않는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문득, 이 아파트, 아니

이 인디안 reservation이 떠나가도록 도끼 들고 황홀하게

춤을 추고 싶지 아니 한가, 아내여.

 

 

 

모를 권리(權利)

김영승

 

블랙박스

그런 것을 다 기록하다니

신(神)의 영역(領域)이다

CCTV

신(神)의 영역(領域)이다

허상(虛像)을 만든 죄(罪)

죽으리라

지나간 시간을

복원하는 죄

역시 죽으리라

 

그 시공을

재생하는 자

 

죽으리라

 

모를 권리(權利)도 있고

모를 의무(義務)도 있다

 

지운 것은 지운 것이며

숨긴 것은 숨긴 것이다

 

그리고

사라진 것은 사라진 것이다

 

학교가

교회가

사금(沙金)과 금광석(金剛石)의 광산인가? 건물이

거리가 골목이

 

버스 안이

전철 안이

 

가령,

 

옛날

어떤 여자는 자기 자녀한테

매일 도시락에 편지를 넣어 도시락을

싸주고는

나중에 도시락 편지라는 책을 내기도 했는데

우리는 그 편지를

모를 권리와

의무가 있다

 

강(江) 건너 은행나무와

은행나무의

바람이 전해주는 이야기는

은행나무만 알고

 

연어는 알을 낳으러

모천(母川)을 거슬러 올라와서는

바다와 강(江)과 계곡의 이야기를

지운다

 

땅속의 감자를

너구리굴 속의 너구리 새끼를

촬영하고

 

화성(火星)의 표면을

촬영한다

 

태아(胎兒)를 촬영하고

정자(精子)의 이동을

촬영한다

 

그냥 운구차(運柩車)처럼

보는 게 낫다 책도

레일 근처(近處) 그림자도

 

빨판상어처럼

가마우지처럼

 

열심히

맛있는 것 잡아다가

바친다 그리고

 

돈을 벌고

작곡(作曲)도 한다 그리고

 

연기(煙氣)는 풍요롭게

피어오른다

 

 

 

몰래

김영승

 

몰래

살다 간다

 

그림자가 있었다고?

몰래다

 

병아리는

 

알에서 깨고 나온 한 방울

병아리 자신의 눈물이라고

 

저, 저 병아리, 병아리 어리 같은

그림자가 그림자에게

 

병아리같이

 

 

 

몸 하나의 사랑

김영승

 

몸 하나의 생김

몸 하나의 흔들림, 몸 하나의 쓰러짐

 

하늘로부터 굵게 꺾어진

꺾어져서 땅 위에 박힌

펄떡펄떡 뛰는 이 부드러운

빛나는

몸 하나의 나뉘어짐, 몸 하나의 흐트러짐

 

그 치솟는 힘에 짓눌리어

찢어져 가는

몸 하나의 노래

 

아무 까닭없이 꿈틀거리는

비비 꼬이다가 다 풀어질 때까지

그냥 그러기만 하는

몸 하나의 시뻘건 자국

 

땡볕 속에 모래 위에

바스듬히 누워있는

몸 하나의 그림자

 

몸 하나의 없어짐

 

 

 

미친 개나리

김영승

 

연수메디칼 빌딩 암반해수건강사우나 백두산랜드 옆 맥도날드 햄버거 앞

공영주차장 옆

공원,

 

미친 개나리인 줄 알았더니

개나리 비슷한 안 미친 식물이었다

그 식물께 미안했다

 

남녘 어딘가엔 개나리가 피었다는데

 

내 나이가 47인지 48인지 몰라

물어보았다

 

'환상적'이라는 말보다도 더

사악한 말이 있을 수 있을까

'환상적'이라는 말은

참 사악한 말이다

 

호흡곤란에 시달릴 때보다는 그래도 낫지 않은가

그때는 전화도 숨이 가빠

못 받았었다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너무 힘이

뻗쳐 문제다

 

그렇지 않다면

저 안 미친 식물이

어찌 거기 서 있을 수 있겠는가

 

나는 그 식물께 미안했다.

 

 

 

바깥

김영승

 

바깥은 너무 추워서 뺨을 마른

오징어 찢듯 찢는 것 같고

물오징어 가위로 쭉쭉 썰듯 써

는 것 같은데

 

집에 들어오니 따뜻하다

 

바깥은 네온사인에

마천루의 불빛에

해파리 같은데

 

 

 

반성

김영승

 

1

두엄더미가 된 빤스를 갈아입으려고

나는 바지를 벗었다.

그리고 새 빤스를 입었다.

나는 곧 바지를 다시 입고

그렇게 또 한 달을 돌아다녔다.

나는 두 개의 빤스를 입고

가보지 않은 곳이 없었다.

 

 

16

술에 취하여

나는 수첩에다가 뭐라고 써 놓았다.

술이 깨니까

나는 그 글씨를 알아볼 수가 없었다.

세 병쯤 소주를 마시니까

다시는 술 마시지 말자

고 써 있는 그 글씨가 보였다.

 

 

21

친구들이 나한테 모두 한마디씩 했다. 너는 이제 폐인이라고

규영이가 말했다. 너는 바보가 되었다고

준행이가 말했다. 네 얘기를 누가 믿을 수

있느냐고 현이가 말했다. 넌 다시

할 수 있다고 승기가 말했다.

모두들 한 일 년 술을 끊으면 혹시

사람이 될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술 먹자,

눈 온다, 삼용이가 말했다.

 

 

39

오랜만에 아내를 만나 함께 자고

아침에 여관에서 나왔다.

아내는 갈비탕을 먹자고 했고

그래서 우리는 갈비탕을 한 그릇씩 먹었다.

버스 안에서 아내는

아아 배불러

그렇게 중얼거렸다.

너는 두 그릇 먹어서 그렇지

그러자 아내는 나를 막 때리면서 웃었다.

하얗게 눈을 흘기며

킥킥 웃었다.

 

 

69

아르헨티나여 나를 위해 울지마라

그런 노래가 있었다.

구월동이여 나는 너를 위해 운다

나는 노래 부른다.

차별침식 당한 사막의 잔구처럼

전봇대가 박힌 곳만

원기둥처럼 흙이 남아 있다.

옮겨심을 가로수처럼 뿌리를 싸맨 전봇대

꼭 황음한 사내의 부랄 같다.

불도저와 포크레인이 쉬고 있는 밤

브래지어와 포크도 쉬고 있는 이 겨울밤

배고픈 사나이와 술 취한 사나이가

효수당한 이 밤

이건 밤이 아니라 그저

어둠이다.

 

 

71

건너 테이블엔 두 사나이가 앉아 있었다. 한 사람은 목에 힘을 준 채 나직이 말하고 있었고 한 사나이는 숙연히 듣고 있었다. 그들은 여자 하나를 놓고 폭력을 주고받은 선후배간이었다. 야 임마, 영국 수상까지 지낸 윈스턴 처칠이 왜 그 수많은 유태인을 죽였나? 선배는 그렇게 말했고 후배는, 예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말했다. 뚝배기 속의 순대와 돼지 허파를 젓가락으로 뒤척이며 그 여자를 생각했다. 영국과 독일과 윈스턴 처칠과 히틀러가 순대와 돼지 허파처럼 섞였어도 먹을 만하면 그냥 먹어 버리는 그 여자의 식성을 생각했다. 두리뭉실 배고프면 먹어 버리는 우리네를 생각했다. 맛있게 잘먹고 또 소주를 마시고 있는 배고픈 나를 생각했다.

 

 

72

나는 대변을 보는 게 아니라

밀어내기 하는 것 같다.

만루 때의 훠볼처럼

밀어내는 것 같다.

죽기는 싫어서 억지로 밥을 먹고

먹으면 먹자마자

조금 있으면 곧 대변이 나온다.

안 먹으면 안 나온다.

입학도 졸업도 결혼도 출산도

히히 밀어내는 것 같다.

먹고 배설해 버리는 것 같다.

사랑도 이별도

죽음도.

 

 

79

아내가 내 빤스를 입고 갔다.

 

나는 아내 빤스를 입어 본 적이 없다.

아내는 내 빤스를 입고 가버린 것이다.

 

 나는 빤스가 없다.

 

일주일 후에 아내는 내 빤스를 빨아서 갖고 왔다.

나는 빤스를 입었다.

 

 

80

지붕에서 쥐들이 100m 달리기를 하는 것처럼 말발굽 소리를 내며 뛰어다니고 있다

일제히 방향을 바꾸어 왔다갔다 에어로빅댄스를 하는 것인지 살빼기를 하는 것인지 밤새워 지

랄이다. 어머니가 쥐약을 사 오셨다. 쥐약 놓게? 그러자 어머니는 손가락을 입에다 대고 쉬--- 했다

쥐가 들으면 안 먹어. 조그만 소리로 어머니는 그렇게 말했고, 빨리 놔요, 나도 조그만 소리로 말

했다. 킥킥킥. 쥐들이 웃는 것 같았다

다음 날 아침 커다란 쥐 두 마리가 죽어 있었다

죽은 쥐를 보며 어머니와 나는 말이 없었고 쥐들도 예전처럼 쥐의 본분을 지켰다. 쌤통이다

 

 

83

예비군 편성 및 훈련 기피자 자수 기간이라고 쓴

자막이 화면에 나온다.

나는 훈련을 기피한 적이 없는데도

괜히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다.

내가 무슨 잘못을 또 저질렀을지도 모른다고

어제나 그저께의 일들을 생각해본다.

나 같은 놈을 예비해 두어서 무얼 하겠다고

어김없이 예비군 통지서는 또 날아오는가.

후줄그레한 개구리 옷을 입고

연탄불이나 갈고 있는 나 같은 놈을.

나는 문득 자수하고 싶다.

뭔가를 자수하고 싶다.

 

 

94

괘종시계가 네 번인가 울렸다. 에밀레종처럼 엄마--- 하고

울리는 것 같다. 그 여운이 뭉클 가슴을 또 울린다.

어디 종 만드는 데 있으면 나를 집어넣고 싶다. 술취한 나를

집어넣고 만든 그 종이 어디선가 울린다.

문법에 맞지도 않는 엉망진창의 여운이 비명처럼

신음소리처럼 울린다.

이 세상 사람들을 다 집어넣고 만든

이 세상만 한 종이 울린다.

재잘재잘, 쫑알쫑알, 씨팔싸팔, 미안해, 이놈,

여러분, 사랑해, 까불래? 죽여 버려, 여관 갈까 용서를, 어쩌구저쩌구……

영원히 그치지도 않는 긴 여운.

처음에는 그저 쿵--- 이었는데 왜 이렇게 길까.

자자.

 

 

97

어깨동무 개동무 미나리밭에 앉았다.

어릴 때 우리는 그렇게 노래 부르며 어깨동무하고 가다가

노래가 끝날 때마다 둘이서 함께 안았다.

그리고는 또 일어나서 노래를 부르며 갔고 노래가 끝날 때 또 앉곤 했다.

한 여나무 번쯤 앉았다 일어나면

우리는 집에 올 수 있었다.

이젠 어깨동무도 개동무도 미나리밭도 없다.

술에 취하여 하루종일 넘어졌다 일어나도

나는 집에 올 수도 없다.

 

 

99

집을 나서는데 옆집 새댁이 또 층계를 쓸고 있다.

다음엔 꼭 제가 한 번 쓸겠습니다.

괜찮아요, 집에 있는 사람이 쓸어야지요.

그럼 난 집에 없는 사람인가?

나는 늘 집에만 처박혀 있는 실업잔데

나는 문득 집에조차 없는 사람 같다.

나는 없어져 버렸다.

 

 

100

연탄장수 아저씨와 그의 두 딸이 리어카를 끌고 왔다.

아빠, 이 집은 백장이지? 금방이겠다, 머.

아직 소녀티를 못 벗은 그 아이들이 연탄을 날라다 쌓고 있다.

아빠처럼 얼굴에 껌정칠도 한 채 명랑하게 일을 하고 있다.

내가 딸을 낳으면 이 얘기를 해주리라.

니들은 두 장씩 날러

연탄장수 아저씨가 네 장씩 나르며 얘기했다.

 

 

108

나는 또 왜 이럴까

나는 또 어릴 적에 텔레비전에서 본 만화영화를

생각한다.

벰, 베라, 베로 그 요괴 인간을 생각한다.

빨리 사람이 되고 싶다.

그렇게 외친 그 주제가를 생각한다.

정의를 위해서 싸움을 한 그 흉칙한 얼굴들을 생각한다.

하필이면 왜 정의를 위해 싸웠을까

하필이면 왜 사람이 되고 싶었을까

빨리 요괴 인간이 되고 싶다 아무래도

그렇게 외치고 있는 것 같은

저 예절 바른 사람들을 생각한다.

 

 

156

그 누군가가 마지못해 사는 삶을 살고 있다고 할 때

그는 붕어나 참새같은 것들하고 친하게 살고 있음을 더러 본다.

마아고트 폰테인을 굳이 마곳 훤턴이라고 발음하는 여자 앞에서

그 사소한 발음 때문에도 나는 엄청나게 달리 취급된다.

그 누구를 사랑한다는 것도 사실 끔찍하게 서로 다르다.

한 사람을 용서한다는 것도

살벌할 만큼 다른 의미에서 거래된다.

그들에게 잘 보여야 살 수 있다.

 

 

163

코끼리들이 문득 가엾다.

코끼리 발바닥엔

어느 정도 두께의 굳은살이 박혔을까.

그 거대한 몸뚱이를 지탱하며 먹이를 찾아

뛰어다닌 벌판.

굳은살이라곤 입술과 유방과 성기밖에 없는

불행한 남녀들이 다투어 몰려온다.

귀족적이려고 매력적이려고 그리고

지성적이려고 무지무지 애를 쓰고 있다.

가엾다.

 

 

167

고야의 벌거벗은 마야를 마야의 벌거벗은 고아로 얘기하며

그 늙수그레한 술꾼은 술에 취해서 홍알홍알

대한민국 만세를 부르고 있었다.

어머 취하셨나 봐, 고야의 벌거벗은 마야예여

그걸 듣고 있던 여자는 그렇게 말했고

아니래두, 마야의 빨개벗은 고야라니까

술꾼은 짐짓 화가난 듯 혀꼬부라진 소리로 또 우기고 있다.

고야의 벌거벗은 마야와

마야의 벌거벗은 고야

그건 똑같은 말이다.

 

 

173

어릴 때 본 검객영화를 생각한다.

악당들이 미리 칼을 뽑고 삥 둘러싸도

주인공은 태연하다.

할 수 없이 끙 하며 술을 마셔 버리는

그 고독한 주인공을 생각한다.

악당들의 쫄개들이 하도 찝쩍대면

할 수 없이 젓가락을 집어던지는

그리하여 악당들의 눈에 가서 팍팍팍 박히게 하는

그 탁월한 솜씨의 주인공을 생각한다.

악당들의 두목이 나타나면

할 수 없이 술을 마시다가

할 수 없이 칼을 뽑는

정말 할 수 없는 그 주인공을 생각한다.

 

 

187

다도(茶道)니 주도(酒道)니 무릎 꿇고 정신 가다듬고

PT 체조한 뒤에 함 모금씩 꼴깍꼴깍 마신다.

차 한잔 술 한잔을 놓고

그렇게 부지런한 사람들이

나한테 그 무슨 오도방정을 또 떨까

잡념된다.

 

지겹다.

 

 

190

쓸쓸하다.

사생활이 걸레 같고 그 인간성이 개판인

어떤 유능한 탈렌트가 고결한 인품과

깊은 사랑의 성자의 역할을 할 때처럼

역겹다.

그리고 보통 살아가는 어리숙하고 착하고

가끔 벤댕이 소갈딱지 같기도 한 이런저런 모습의

평범한 서민 역할을 할 때처럼.

그보다 훨씬 똑똑하고 세련된 그가

그보다 훨씬 자극적이고 도색적인 그가

수줍어한다거나 이웃에 대해 작은

정을 베풀어 어쩌구저쩌구하는 역할을 할 때처럼.

각자 아버지고 어머니고 선생이고 아내고,

어쨌든 이 무수한 탈렌트들과

나는 살아야 한다.

 

 

193

동네 사람들과 함께 무너진 언덕길을 닦았다.

삽질을 하는데 회충만 한 지렁이가

삽날에 허리가 잘려 버둥거린다.

지렁이는 재수없이 당했다.

사람들은 다만 길을 닦았을 뿐이고

지렁이는 두 동강이 났을 뿐이다.

모두들 당연한 일을 하는데

땅속에 묻혀 보이지도 않는 지렁이.

모두들.

국토분단이 재미있다.

두 동강이 나고도 각자 살아가는 지렁이

붙을 생각 아예 없는 지렁이.

자웅동체, 자급자족

섹스 걱정 전혀 없는

지렁이

지렁이

재미보는 지렁이.

 

 

207

우리는 아주 배고픈 나라로 여행을 갔다

배고픔밖에 없는 나라가 그저 아득한

배고픔의 나라로 손잡고 갔다

비인도적인 처사도 야만적인 행위도 없는

황홀한 쾌락도 따분한 무료함도 없는

그곳에서 우리는 감사한 저녁을 먹었다

우리가 나눠먹은 저녁은

그날 저녁분의 배고픔이었다

 

 

517

예수에겐 당연한 일이고

다른 사람들에겐

엄청난 일

 

간음한 여인

킥킥

 

애써 웃음 참고

엄숙한 표정으로

너희 중에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 쳐라……

 

그리고 예수는 하꼬방에 달려가서

흐느꼈을 게다

 

돌절구도 밑 빠질 때가 있느니라……

(예수가 땅바닥에 끄적거린 낙서)

 

 

545

죽지 않고 살았으면

다행

재수 없이 죽으면

불행

재수 없이 죽어가면서도

나는 결코

불행이라고 생각지 않으리라

천우신조하여 살아남으면

나는 그걸 뭐라고 표현할까

그냥 <술>이라고 말해두자.

 

 

547

소리가 멀어져 간다

 

멀어져 가는 소리를 들어본 자는

이미 죄인이 아니다

 

이미.

 

 

563

형이상학적 사고 체계가 완벽한

나는 가끔 여자의 성기를 가리키는

우리나라 말 <보지>를 발음했을 때의

그 전무후무한 공명을 숙고해 본다.

 

생각해보았는가

아무도 몰래 묵묵히

<보지>를 발음해 보며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는

불타나 예수의 모습을

 

그대의 아버지나

대통령이나

 

그대의 스승을

 

생각해보았는가

마하트마 간디를.

 

 

564

알몸으로

커다란 선인장을 끌어안고

변태성욕자처럼

성교하듯 숨 막히는 애무를 하면

얼굴에 눈에 입술에 혀에

성기에 가슴에 무릎에 엉덩이에

피............

 

더는 꽃이 피지 않는 내 몸에

이 서러운 육신에 펑펑

수줍은 꽃 수천수만 송이

 

수줍은 꽃의

만개(滿開)

아 ---

주님.

 

 

569

술 마시면

가옥(家屋)으로 들어가고 싶다

 

내 소유(所有)의

가옥(家屋)으로 들어가고 싶다

 

정입방체(正立方體)가 아닌 구형(球形)의

내 가옥(家屋)으로

영원한 가옥(家屋)으로

 

보증금도 월세(月稅)도 없는

계약서도 영수증도 없는

문패도 번지수도 없는

수도 요금도 청소요금도 없는

무엇보다 전기요금 없는

완전 투명하고 완전 불투명한

완전 경계 없고 완전 독립된

담도 없고 문도 없는

 

마을 같고 도시 같고 국가 같은

쥐구멍 같은 집

자궁(子宮) 같은 집 질(膣) 같은 집

집게(蟹)의 집 같은 집

 

술 마시면

주인(主人)이 되고 싶다.

 

 

570

어머니는

나하고 단둘이뿐인 데도

들을 사람 아무도 없는 데도

남의 얘기를 할 땐

음성을 낮추어 쉰 목소리로 만들어 얘기한다

 

--뒷집 며느리 바람나서 도망갔대

--목사님네 쌀이 떨어졌대

--구멍가게집 땅개가 큰 개한테 물려 죽었대

 

당신은 아나운서요?

제물포고등학교 졸업하고 외대 스페인어과 나온

KBS 1TV의 이윤성 뉴스 캐스터요?

 

사랑한다는 말도

못돼먹었다는 말도

또박또박 발음하는 당신은.

 

 

602

나는 이제 <술>이라고 부르지 않겠다

<절제>라고 부르겠다.

 

어제는

<절제>를 무절제하게 마시고

뽀옹

입으로 방귀 뀌는 소리를 냈다

 

액체의 속성은 흐름이다

그리하여

액체는 다 무절제하다

 

물도 눈물도 땀도 정액도

그리고 술도 피도.

 

수도 꼭지처럼 자지(cock)를 달고

계량기를 달고

 

한 달에 한 번씩 검침하여

돈 받아 가라

 

눈물도 땀도

정액도.

 

 

606

마늘을 까다 보니

마늘은 어느새 알몸 같다

너무나 고운

천상의 여인의 알몸 같다

 

투박한 것에 싸여

숨겨진 것은

다 곱다

 

나는 이제 옷을 벗지 않으리라

나는 나를

까리라

 

 

608

어릴 적 어느 여름날

우연히 잡은 풍뎅이 껍질엔

못으로 긁힌 듯한

깊은 상처의 아문 자국이 있었다

 

징그러워서

나는 그 풍뎅이를 놓아주었다

 

나는 이제

만신창이가 된 인간

 

그리하여 주는

나를 놓아주신다

 

 

641

당신은 고독을

식후에 피우는 담배 정도로 생각합니까?

 

피곤해 뵌다고요?

그래서 좀 쉬어야겠다고요?

 

저에게 있어서

충분한 휴식은

충분한 고독을 의미합니다

 

충분치 못한 고독 때문에

욕구불만과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상한 갈대들을 혹

당신도 보셨는지요?

 

저 불공평한

불평과 불만 속에서

 

 

648

술을 마시며 고운 저음의

튜바 부는 소리 내다

수자폰 소리 내다

풀벌레 울음소리 같은

서러운 웃음을 먼지처럼

천상의 금 먼지 은 먼지처럼

찬란한 웃음을 날리다가

진흙같이 취해서 피콜로 소리를 내면

내 앞에 앉은 여인은 벌써

나를 경멸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술 마시면서

부드러운 목관악기

잉글리시 호른으로

신세계 교향곡을 연주하란 말인가

술이 들어가는 내 입의 입술을 오므려

베에토벤의 <환희>를

연주하란 말인가

<환희>있어요?

없는데요

<환희>있어요?

없는데요

100원짜리 <횐희>담배를 사러가니까

가는 곳마다 없다.

 

 

668

나 같은 지리멸렬한

술 태백이를 만난다고 제 딸을 두들겨 팼던

지난날 그 보디․빌더, 인․화이터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내 딸한테 금․판사 중매가

수두룩해, 이 미친 개 색꺄 !

 

누가 뭐랬나?

 

․․․․․․그리하여

제 갈 길로 가지 않았는가?

 

히히

내가 그들이 존숭하는

판․금사라면

그리하여 내가 그의 딸을 버렸다면

그들은 나를

혼인빙자 간음죄로 구속했겠지.

 

술?

 

인간은 참

나만도 못하다

 

'이런, 나만도 못한 인간들 같으니라구 ! '

 

 

689

아빠인 내가, 아니 '아빠'인지 '아비'인지 '아버지'인지 '엄부(嚴父)'인지 'papa', 'father', 'daddy'인지 잘 모르겠는, 여하튼 그를 이 세상에 생겨나게 한 공범, 남성측 피고로서의 내가 특별한 장난감을 사주지 않아서 그런지, 이제 19개월 된 내 아들 인겸이는, 부국사료주식회사 다니는 대머리가 지난 추석 선물로 갖다준 참치 세트의 참치 통조림을 갖고 노는데, 요즘은 그걸 아내의 화장대 위에 네 개씩 쌓아놓고는 박수를 치며 발을 구르며 그렇게 까르르까르르 좋아라 웃어서 나는 그것을 보고 예지왈(譽之曰),

"다왜당(多歪堂) 인성헌(吝醒軒) 혜이실(室) 주인시인(主人詩人)어인당(人堂) 김영승지자인겸천사보살사층(金榮承之子吝謙天使菩薩四層) 사조 로하이 참치깡통보탑(寶塔)"이라 명명(命名)하고 나도 역시 박수를 치며 발을 구르며 그렇게 까르르까르르 좋아라 웃어본다. 그리고 나서 '아 고년들 참 되게 이쁘다'하며 신문을 들여다보는데 으잉? 동아일보 1991년 11월 8일 금요일 자엔 '서울경찰청 여자 기동대는 7일 밤 이태원 등지의 <게이바> 3곳을 덮쳐 여장 남자 접대부 28명을 적발해 모두 즉심에 넘겼다 <석동율(石東律) 기자>'라는 설명과 함께, 늘씬한 다리에 하이힐 영락없는 여자 같은 호모새끼들이 죽 서 있는 사진이 나온다. 또 보니까 역시 동아일보 1991년 11월 일요일 자 사설엔 <12살짜리 접대부를 둔 사회>라는 제목의 사설이 나온다.

나는 딸이 없지만, 내 딸을 어떤 인신매매단이 납치해 갔다면, 나는 백사를 물리고, 나의 門徒 100만과 함께, 일제히 산타클로스 복장을 하고 기관단총과 수류탄, 석궁(石弓), 독침(毒針), 무반동포(砲) 등으로 무장을 해서, 기관단총과 실탄은 첼로 박스에 넣고 수류탄은 산타클로스 그 선물 보따리 자루에 넣고, 전국 방방곡곡의 영계 술집을 찾아 다니는 게 아니라, 청와대, 경찰청, 대법원, 검찰청, 대기업, 병원, 신문사, 백담사, 송광사, 조계사, 국회의사당, 명동성당, 여의도 순복음 교회, 독립기념관 등을 완전히 초토화시켜 아웅산을 만들어버릴 것이니, 찔리는 놈들, 그런 줄 알고 있어라.

 

 

673

우리 식구를 우연히 밖에서 만나면

서럽다

 

어머니를 보면, 형을 보면

밍키를 보면

서럽다

 

밖에서 보면

버스 간에서, 버스정류장에서

 

병원에서, 경찰서에서......

연기 피어오르는

동네 쓰레기통 옆에서

 

 

685

아무리 아득할 만한 고통이라도 결국

내 이 한 젓가락도 안 나가는

육신 안의 것이 아니냐

까무라칠 것 같은 황홀한 쾌락도

내 이 한 젓가락도 안 나가는

육신 안의 것이 아니냐

두 가지 다 참을 수 있는 게 아니냐

車에 치어 벌떡 일어나 뭐라고 뭐라고 뭐라고 몇 마디 한 뒤

금방 죽어 버린 그 머리통이 박살난 사나이처럼

교미가 끝나면 몰라몰라 하며 죽어 버리는 그 숫놈 거미처럼

고통과 쾌락

이 두 가지 때문에 나는

무수한 형용사끼리 박치기를 시키며

대가리 터져라.

대다수 열악한 영혼을 소유한

소설가들이 쓴 그 어설픈 소설처럼

무슨 얘기를 기록하고 무슨 세월을

만들어 내겠다고

<통쾌(痛快)>하다는 단어가 갖는

동물성 지방의 미끌거림만큼 선정적인

곰 털가죽 빤스 입은 털복숭이

원시인 여자가 본 부라자처럼

<삶>이라는 영계백숙처럼 삶아진

개념을 갖고 살고 있는

멍청한

지속적인 스트레스를 받은 흰쥐의 위장을

내시경으로 찍은 필름엔

충혈 충혈 충혈 뒤

팍!

모세 혈관 파열

출렁출렁

피범벅.

 

 

699

어떤 호협활달한 마애석불과

술을 마셨다 그는 릴리프처럼

그의 배경에 파묻혀 딱 붙어 있다

김형, 혹시 딸딸이 많이 쳐서 그런 것 아니요?

초췌하고 창백한 내 얼굴을 보며

그는 말했다

이 참혹한 시인에게 아랸야와 아미타 미인 군단을,

나무관세음보살 으하하하하하-

그는 웃었다 그리고

너무 과하지 마시오 그리고 그렇게 덧붙였다

오난존자처럼 나는 어디다 대고 찍찍 싸고 있는가

서서히 나의 어깨와 팔과 등과 머리가

벽에 잠긴다 반쯤 잠겨 나는

딱딱하게 굳는다 나의 표정도 은은한

미소로 굳는다 자기 자신에겐 엄격하고

타인에게 무한한 관용을 어쩌구저쩌구

미소 짓다 보면 꿈과 환상 속에

끊임없이 부드럽고 따뜻한 곳에 쏟지 못하는

나는.

나는 돌 속에 박힌 그 마애석불과

교대된다 감자탕집에 홀로 앉아

거울을 들여다보며 술을 마시다 보니

킥킥킥 웃고 있는 나를 보며 깔깔깔 보다 보다 할 수 없이

웃음을 터뜨린 젊은 주인 여자의 모습이 거울 속에 보인다

배를 쥐고 웃고 있는 허리 꺽인 모습이

온갖 번뇌의 환신 같은 요부처럼 간들간들

거울 속의 나를 녹인다 그러나......

결혼 안 하세요?

여자가 묻는다.

킥킥, 결혼?

나는 딸딸이에 도가 튼 놈이요.

 

 

702

국제 원유가 하락에 편승해

소주 1배럴에 20원 하는

요순시대가 도래한다면

소주는 죄지은 자에게 벌주는

액체가 될까

 

소주 40만 배럴에 처한다, 딱딱딱

판사는 선고하리라

 

유조선에 소주를 가득 싣고

교회의 성찬식엔 두당 소주 한 말로 하는 게 아니냐

 

숙제 안 해 간 땡땡이 국민학생들

벌주 마시고 집에 가며 한 많은 이 세상 농땡이 못 쳐서 못 살겠네

주정하는 게 아니냐

 

그런 요순시대에

소주를 마시고 토진(兎唇)이 되든 대음진(大陰唇)이 되든

일성호가(一聲胡笳)에 애를 끓이는 이순신 장군이 되어

거북선을 피우든

 

그러나 이런 요술시대(妖術時代)에도

술은 아직 벌이 아니냐

 

2홉들이 소주 한 병에 400원 하는

요즘도

 

피고 김영승에게

소주 5병을 선고한다, 짝짝짝

판사는 따귀를 때리고 있는 게 아니냐

 

검사는 7병을 구형하고

변호사는 한 잔도 부당하다고 우기고들 있는 게 아니냐

 

모범수로 네 병만 마시고 감형되어

다섯 병 형기 만료 전에 가석방되는 게 아니냐

 

그렇게 나는

쓰러지고 있는 게 아니냐

소주 같은 눈물 흘리며

 

그렇게 죽어 가고 있는 게 아니냐.

 

 

703

'고사행위(告祀行爲)에 대한 기독교적 비판'이라는

리포트 작성을 문의하러 온 서울신대(神大) 3년(年) 김진주(金珍珠)양에게

구약, 신약, 엘리아데, 탈레스

K. 융, 다신교, 범신론, 범심론, 범털, 범아가리(호구포(虎口浦)), 범행(範行)이(친구), 영어, 독어

라틴어, 희랍어 주저리 주저리 갖다붙이며

미친년처럼 잘났다까 봐

방언을 해주고 나니까, 어?

고사 행위는 나에 의해서 정말로 기독교적으로 비판되어 버렸다.

 

삶은 돼지 대가리처럼

세례 요한의 머리통처럼

제 머리통 잘라 올려 놓고

일생 동안

 

무엇이 되기를 바래 비는 마음은

늘 비굴하고 겸허하고

 

제일 신난다.

오줌을 누다 보니

Phallicism

 

무너진 어깨 위에

푹 삶은 자지 한 토막과

위험, 사고다발지역, 폭발물, 취급주의, 가위표 그려진 내 머리통

올려놓고 나도

신들려 춤을 췄지,

소주를 퍼마시고

무당(巫堂)처럼

 

꽝!

 

 

704

밍키가 아프다

네 마리 새끼가 하도 젖을 파먹어서 그런지

눈엔 눈물이 흐르고

까만 코가 푸석푸석 하얗게 말라붙어 있다

닭집에 가서 닭 내장을 얻어다

끓여도 주어보고

생선가게 아줌마한테 생선 대가리를 얻어다 끓여 줘 봐도

며칠째 잘 안 먹는다

부엌 바닥을 기어 다니며

여기저기 똥을 싸 놓은 강아지들을 보면

낑낑낑 밍키를 보며 칭얼대는

네 마리 귀여운 강아지를 보면

나는 꼭 밍키의 남편 같다.

 

 

740

어둠-컴컴한 골목

구멍가게 평상 위에 난짝 올라앉아 맥주를 마시는데

옛날 돈 2만 원 때문에

쫓아다니면서 내 따귀를 갈기던

그 할머니가

어떻게 나를 발견하고 뛰어와

내 손을 잡고 운다

 

머리가 홀랑 빠졌고 허리가 직각으로 굽었고......

 

나도 그 손을 잡고

하염없이 울었다

 

맥주까지 마시니 돈 좀 생겼나 보지 하면서

웃는다

 

이따가 다른 친구가 올 거예요 하면서

나도 웃었다

 

 

743

키 작은 선풍기 그 건반 같은 하얀 스위치를

나는 그냥 발로 눌러 끈다

 

그러다 보니 어느 날 문득

선풍기의 자존심을 무척 상하게 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로 나는 선풍기한테 미안했고

괴로웠다

 

- 너무나 착한 짐승의 앞이빨 같은

무릎 위에 놓인 가지런한 손 같은

 

형이 사다 준

예쁜 소녀 같은 선풍기가

고개를 수그리고 있다

 

어린이 동화극에 나오는 착한 소녀 인형처럼 초점 없는 눈으로

'아저씨 왜 그래요' '더우세요'

눈물겹도록 착하게 얘기하고 있는 것 같았다

 

무얼 도와줄 게 있다고 왼쪽엔

타임머까지 달고

좌우로 고개를 흔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 더운 여름

반지하의 내 방

그 잠수함을 움직이는 스크류는

선풍기

 

신축 교회 현장 그 공사판에서 그 머리 기름 바른 목사는

우리들 코에다 대고

까만 구두코로 이것저것 가리키며

지시하고 있었다

 

선풍기를 발로 눌러 끄지 말자

공손하게 엎드려 두 손으로 끄자

                       

인간이 만든 것은 인간을 닮았다

핵무기도 십자가도

콘돔도

 

이 비 오는 밤

열심히 공갈빵을 굽는 아저씨의

그 공갈빵 기계도.

 

 

744

너는 왜 그렇게 티를 내냐

너는 왜 그렇게 기어코 티를 내야 하냐

 

술 취하여 쓰러져 가는 나를

너는 왜 연탄집게로 때려야 하냐

왜 갈빗대를 부러뜨러야 하냐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던 날 밤

너는 왜 그 순결함을 더럽히게 했냐

왜 눈 위에 나의 핏방울로

술 취한 나의 핏방울로

너를 절대로 해치지 않는 나의 핏방울로

 

너의 그 고운 이름을 써 넣게 했느냐.

 

 

745

죽기 전에 자기 아들에게만

알았느냐? 하고 죽었다는

옛날 장인들의 비법처럼

나도 그런 거 하나쯤은 갖고 있는가

 

반 관에 450원

국수를 삶으며

고려청자의 비색 같은

내 아픔의 연원

그 아득한 고대 문명의 발상지를

생각해 보며

 

시계를 차고도 늘

지각을 하는

노예들과 

 

그리고 그렇게

입 다물고 오래 참을 순 없는가

 

당신을 사랑해요 혹시

텅 빈 구멍을 메꿀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결국 

음흉하고 비열한 고백 속에서

아름다운 여인이여 그대는

재림한다고 하지 말고 해결한다고 하라

재혼한다고 하지 말고 해결한다고 하라

글쎄 

사랑한다고 하지 말고 해결한다고 하라

 

이력서엔 

뒷간에 갖다 붙여 놓으면

왼갖 잡귀란 잡귀는 다 물러갈 것 같은

잡귀 쫓는 부적 같은

내 반명함판 사진

덜덜덜 떨리는 손으로 정성껏

결국 삐뚜로 붙여 놓고

 

자기소개서엔 '나는 천재다'

나는 왜 그렇게 쓸 수 없는가

신문에서 오린 사원 모집 광고 문안엔 왜

식욕 있는 남녀, 성욕 들끓는 남녀

라는 자격―

 

그 자식들은 왜 나에게

자기네들의 소개서를 써서 보내지 않는가

 

아니면 '나는 미친 놈이다 으하하하하―'

아니면 숫제 '나는 나는 갈 테야 연못으로 갈 테야

동그라미 그리러 연못으로 갈 테야……'

 

더러운 놈들.

 

 

782

한국말을 한답시고 열심히 한답시고

삼사 년간 배워 유창하답시고 하고 있는

서양인들을 보면

그들의 지성과 관계없이

병신 머저리 칠뜨기

팔푼이 얼간이

개콧구멍 같다.

 

그들이 한국어로 시조를 지어

읊고 다니면 어쩌나?

 

 

783

차라리 원시인들이 땀 삘삘 흘리며 굴리고 다니던

도나스 같이 생긴 그 커다란 돌덩어리를

돈으로 사용했으면

참 많은 게 탄로 날 텐데

 

간통도 개수작도

그대가 생각하는 사랑도

 

노동생산성 상승률과 실질임금 상승률이

하등의 관계없이 겉도는

그 모든 노예 시장,

인신매매조차도 독점한

1,2,3 ……n차 시험 합격자에 한하여

면접시험 치르는

부실한 유령 회사도

 

앗!

돈이 보이지 않는다.

 

부피도 질량도 없는

보혜사 성령 같은

관념이

 

모든 현상을 은폐시키고, 쉿 !

 

박 과장 최 부장

김 실업자

 

 다 굴리고 다닌다

 

 

793

TV의 프로그램도 제공하는 스폰서가 있는데

내가 보내드리는 나의 이 모든 이야기는 도대체

누가 제공하는 것이냐

 

그저 세상에 태어나 고통 받는

나의 출연료는

누가 주는 것이냐

 

그대가 그대를 사랑하듯

이 무조건 무기한 드라마를.

 

'선생님 지난 얘기 들려주세요'

턱을 괴고 앉아

스무 살짜리 어린 처녀가

방글방글 웃고 있다

 

그 깊고 은밀한 가슴속

핸드백 속엔 내 소주값 2~3천 원을

소중히 간직한 채.

 

그러나 소녀야

나는 내 얘기를 나한테만 들려준단다

네가 그러하듯 나도 그렇다

 

어쩌서 종생토록 우리의 그 모든 이야기는

무용담이냐

 

사랑도 추억도

눈 오는 밤

좇나게 맞은 기억도.

 

 

799

벨로드룸에서 사이클 경기를 하는데 한 놈은 오토바이를 타고 일등을 하면 일등을 하면 그래도 금메달 걸어 주는 새끼들도 있긴 있을라 인류의 역사 속엔 이 나라의 역사 속엔 지금도 그렇다. 피죽도 못 얻어먹은 핀급 중환자를 따귀 때려 일으켜 세워 트렁크 입히고 멕시칸 글로브 끼우고 고기에 계집에 다 쳐먹은 헤비급 고깃덩어리와 권투 시합을 시키듯 히히 너는 혼자 같지만 너는 집단이다. 천승만마를 거느린 수천수만의 사단 병력인 너와 나 한 개인의 싸움에서 나는 결국 나봇의 포도원 같은 내 아내를 뺏겨 버렸답니다욧, 호호호. 어린이 여러분 이 얘기는 딴 데 가서 하지 마세요. 절대 비밀이야요.

 

 

814

무슨 기자 하겠다는 놈들이 그렇게 많으냐 경쟁률로 치면 고시보다세다고 사시 행시처럼 그래서 기자 시험도 기시라고 그게 기자냐 기능 장애자냐 기자? 기어다니자고? 기자조선의 기자들

 

신문사 기자 시험 준비하는 준행이는

국어 영어 상식 작문 별에별 것 열심히 공부한다.

아침 8시부터 밤 10시까지 도시락 두 개씩

싸 갖고 가서 언론의 자유를 위해 투쟁할 대기자가

되기 위해서 술도 담배도 끊고 자기 자신과 대대적인 투쟁을

벌이고 있다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를 졸업한 지 벌써

오래됐으면서

연도별 기출제 문제집을 풀면서 신문 스크랩에

고사성어에 순우리말에

 

ㅇ명 ㅇㅇ명 뽑는 기자시험

ㅇ명은 몇 명이고 ㅇㅇ명은 또 몇 명인가

기자건 사람이건 죄다 ㅇ명이 되어

없어졌는데

 

그 무슨 비밀이 그렇게 많은가

대여섯 명 예닐곱 명 뽑는다고 쓰면 옳을 것을

그들은 왜 그러고 있을까

 

수백 대 일의 경쟁률?

그건 다 악마들이 만든 것이다

수백 수천 대 1의 경쟁을 뚫고 들어가면

수백 수천 배로 제 인간 값이 올라가는가?

아니면

수백 수천 분의 1로 제 인간 값이

똥값이 되는 것인가

 

아니

언론 운운 한답시고 그래도 쭈욱 해온

동아일보 조선일보 그 신문사에서 왜

선택의 칼자루를 저들이 쥐고 있으면서

한사코 <모집> 한다고 할까

왜 뽑는다고, 고르겠다고, 문장력이 뛰어난

당송팔대가, 소림사 주방장 같은 대인재를 몇 놈 골라 보겠다고

왜 쓰지 못 하는가

브레스트 웨이스트 히프 교양미 지성미 고유의상 수영복 차림 부랄 영근 미스터 누드코리아 미인 통부랄 선발대회를 한다고 쓰지 않는 건 아니지만 모두들

 

오병이어의 기적을 꿈꾸며

컵라면에 쥐고기로 점심 저녁 때우는

 

신문엔

 

     실업자군?

     메루치 떼냐?

 

면접?

거울 보고 제 얼굴을?

사람은 서로 비추는데?*

 

제일 좋은 면접은

키스?

그런데 면접이라고?

언론 운운하는 너희가?

 

<접견>이라고 하든가

<기자회견>이라고 해라

이 기자들아.

 

삼성을 갈까 금성을 갈까 아니면 아예 우주 밖

안드로메다 대성운 그 너머 우주 양조장 골목을 갈까 KBS로 갈까

각 신문마다 구인 광고 누구나 다 시켜 준다고

아가야 나오너라 포르노 구경 가자 노래 불러도

제 가고 싶은 데 저 편한 데 갈 수 없는 건

너도 알지?  나도 알지만

이 우글거리는 실업자들 1, 2, 3.... n차 시험 끝내고

자기 자신과의 면접 끝내고 언제쯤

인간이 될까

 

내가 찾는 책은 단 한 권도 없는

인천직할시 중앙도서관에 가면

한국어 영어 상식 논문 별에별 것 열심히 공부하는

외국인 한국인 몰상식한 비논리적 젊은이들이

ㅇㅇㅇ명 우글거린다

 

* 구약성서 <잠언> 27 : 19.

 

 

825

언제나 손이 떨렸던 나는

뜨거운 물을 옮길 땐

신중에 신중을 다 해 무척 조심스럽게 옮겼었다

그 물을 내가 끓인 것도 모르면서

 

나는 이제

주전자 정도는

한 손으로도 자유자재로 옮긴다

 

니나노집 찌그러진 주전자 같은

내 심장의 물도. 

 

 

826

아침에 일어나 보니

아래위 턱이 맞지 않는다

소위 아구통을 맞아서 그렇다

아래위짝이 꼭 맞아야 하는 게 또 뭐가 있을까

맞지 않는 윗니 아랫니로 깻잎을 씹다 보니

킥킥

맷돌 위짝에 맞아 죽은 놈

생각

나쁜 놈은 참 재미나게도 죽는데

나는......

살아야겠다는 일념만 있는

의지의 한국인처럼

천신만고 끝에 밥을 먹고 나서

극기 복례하여 오래간만에

연탄불 아래윗 구멍을정확히 맞춰 갈았다

요즘 사내들 제 아내하고

아래 위 잘 맞추고 사나

자기가 안 맞으니까 별참견 다 한다고

또 한 방 아구통을 맞을 것 같다

어제는 술 마시고

괜히 맞았다 괜히 아무나 때리고 싶다는 놈한테

그럼 한번 때려 보라니까

정말 때렸다

누구든지 네 오른편 아구통을 갈기면

왼편 아구통도 돌려 대라

킥킥

나는 웃고 있었는데

그는 글쎄 나를 붙들고 엉엉

울고 있었다.

 

 

827

한쪽 끈이 끊어진 슬리퍼를 끌고

변소에 들어가 조심조심 조심한답시고

살살 자세를 잡으려 돌아앉으려다가

에휴......

똥통 속에 한짝을 빠뜨렸다.

 

어머니도 신고 형도 신는 슬립펀데

나는 막대기를 들고 엎드려

꺼내 놓았다.

우주의 아득한 변방의 오지 같은

어느 깊고 깊은 썩은 사나이의 심오한 사상과 같은

재래식 변소

 

x자를 엮어 네 귀퉁이를 꿰맨 슬립퍼

그중 한 귀퉁이가 뜯어진 왼쪽 슬립퍼

 

그런데 내가 빠뜨린 것은

오른쪽 슬립퍼였다.

 

비누로 깨끗이 씻어 냄새 맡아보며

부뚜막에 세워 말리면서

그러면

뜯어진 걸 꿰맬까

아니면 한 짝마저 뜯어버릴까

 

그랬던 것 아니냐

떠나간 내 아내야,

 

잠시 생각했다.

 

 

828

TV엔 아시안 게임

110kg급 용상 역도 경기에 나와 195kg 들다

실패한 콧수염 기른 배불때기

이락 선수를 보더니

지랄하고 교만 떨더니 떨어뜨리네 하며

어머니는 또 깔깔깔 웃으신다

 

교만스럽게 생긴 것하고

무게를 못 드는 것하고는 무슨 관계가 있는지 모르지만

나도 깔깔깔 웃었다.

 

52kg에서 48kg에서 38kg까지 떨어졌던

나의 체중

 

나는 교만하고

그리고 우습다

깔깔깔. 

 

 

847

오래간만에

술을 한 잔 마시고 남은 돈으로

오래간만에 3,800원 짜리 <世界의 文學>지를

사봐야겠다고 책방에 들어가

4,000원을 내니까

코가 빨간 주인 영감

날더러 200원 없으시냐고 물으신다

예? 하며

주머니 뒤져 200원을 내미니까

1,000원짜리를 내 앞에 내밀고 열심히

책을 싼다 그러다가

히! 히히....히히히히!

나를 쳐다보며 하하하 호탕하게 웃는다

그걸 보고 있던

빵빵하게 꼭 끼는 청바지 입은

두 갈래로 땋은 머리가 귀여운

오동통 오목오목하게 생긴 동그란 안경 쓴

그의 여고생 딸이

깔깔깔깔 허리를 굽히고 몰라 몰라 몰라

웃는다

보아하니 벌써 한잔 걸친 것 같은

그 주인 영감과 그의 딸과 나는

별안간 눈물까지 흘리며 깔깔깔 웃었다

나는 이제 다시는 시고 뭐고 안 쓰겠다

이렇게 재미난데 이렇게 다들

살아간답시고 살아가고 있는데

셋 다 안경 쓴 우리가 안경까지 벗고

셋이서 어깨를 걸고 하하하하 웃으며

우리는 피차 중대한 비밀의 현장에서

발각되었다는 듯 한꺼번에 뭔가를 경멸

하자는 듯 200원을 거슬러 받고 나와보니

저녁 간석동 거리엔 아름다운 이슬비

다시 들어가 뒷통수 긁으며 놓고 온 책을 후다닥

큰일 날 뻔했다는 듯이

 

뒷통수에

킥킥킥 아저씨 아

아저씨 고만 웃겨요 하하핫

 

집에까지 걸어오다가 앗!

나는 다시 뛰어가

1,000원을 주고 왔다.

 

고개를 갸우뚱 이상하다는 듯

다시 200원을 받으러 갈

엄두가 안 나는.

 

 

895

남아수도오거서(男兒須讀五車書)--

킥킥

 

양다라에 담아 엿장수한테 내다 준

소주병을 생각ㅎ니

 

한우충동(汗牛充棟)의 에--

말하자면 나는

그렇다.

 

강냉이와 엿과

요즘 엿장수는 왜 빨랫비누까지 주는지

빨랫비누 4장을 받아 들고

현금 1, 000원을 받았다

 

그게 무슨 꼭

불로소득(不勞所得) 같아

기분 좋아 1. 000원 갖고

소주 두 병 사다 또 마시고

열심히 또 모으기로 했다.

 

어머니가 질(質)을 높이라고 해서

가느다란 100원짜리 소세지

두 개도 샀다.

 

히히.

 

 

902

하나님 아버지

저는 술을 너무 많이 먹어서 그런지

날이 갈수록 머리가 띨띨해져 갑니다

고맙습니다.

 

 

903

손등 위에 손등 위에 손등 위에 손등을 얹어놓고

주먹으로 때리면

때리면 샥 피한다

맨밑의 나만 맞는다

칼로 찍힌다.

 

 

 

버섯 요리

김영승

  

택배(宅配)로 온

천마총 천마도 중 비인(飛人) 같은

선인(善人)이 보낸

 

물론 직접 기른

무공해며

무(無)

 

버섯은 부드럽고

독버섯조차도 겸손하다

대지(大地)는

숲은

 

그 버섯을 찬양하고

경배(敬拜)를 한다

 

버섯을 겨우

귀두의 상징이라고

프로이트는 꿈의 해석을 했지만 인간의

무례(無禮)를

 

나는 버섯한테

사죄한다

 

그리고

감사한다

 

내가 마치

해삼(海蔘)과

말린 해삼(海蔘)에

 

그러했듯이.

   

송이 한 상자

호주산(産) 쇠고기

불고기전골

쇠고기 버섯전골인지

버섯은 실(實)하고 탐(貪)스럽다

 

콩을 밭에 나는 고기라고

버섯을 여하튼 고기라고

 

그렇다고 나는 이 버섯 요리를

승가기(勝佳妓)니

용봉탕(龍鳳湯)이니

신선로(神仙爐)니 하는

 

패역(悖逆)한 이름을 붙인 자들처럼

기롱(譏弄)을 하고 싶지는 않다

 

 인간이 없었다면 그저

어둡고 습(濕)한 곳에

함초롬히 피었다

질 텐데 산(山)

 

에는 꽃이 피네 꽃이

피네 할 것 없이 그늘엔

 

버섯이 피네

지네

 

갈 봄 여름 없이

그럴 텐데

 

느타리버섯

표고버섯

팽이버섯

 

먹는 것 너무 밝히는 여자(女子)들과

식탐(食貪)의 무리들은

나는 싫어

 

도마가

킬링필드며 게헨나며

 

입이

음호(陰戶)다

 

버섯도

삭망(朔望)을 알며*

 

일월성진(日月星辰)한테 가끔

손을 흔들기도 한다

 

버섯은

저항도 없어

 

낫을

톱을

사용하지 않아도 된다

 

송이버섯을 써니까

단면(斷面)이 해삼(海蔘) 같다

 

당신의 안구(眼球)도

삶아서 썰어놓으면

주꾸미 머리 같으리

 

오늘 하루

배고픔에 감사(感謝)했다

 

* 朝菌不知晦朔. 莊子, 逍遙遊篇을 參考할 것.

 

 

 

벚꽃 잔치 국수

김영승

 

나는 40년 이상 국수를 잘 먹어

 

벚꽃도 잔치 국수 벚꽃

잔치 국수도 벚꽃 잔치 국수

 

내가 직접 해 먹을 수 없으니

여기는 우리 동네

공릉동 원조 멸치국수 집

 

일금 3,500원에

잔치 국수를 먹는다 이 밤

나의 밤 벚꽃놀이는 장엄하다

스스로 외친다

 

대견하기에

국수 맛이 좋다

 

감사하기에

 

 

 

밤에 버릴 것

김영승

 

책(冊)들을 버리되

밤에 버린다

 

그것도

캄캄한 밤에

새벽에

 

태울 곳이 없다는 것은

비극(悲劇)이다

태울 곳을 독점(獨占)한다는 것은

 

그래서 도시(都市)는

지옥이다

 

누가 읽겠는가

내가 보던 책

 

읽어도

다 다르게 읽는 것

 

내 몸도

별도

 

그리고 읽지도 않는다

 

다 태울 수 있는 것들이다

나팔꽃 넝쿨도

마 줄기도

부추 꽃대도

 

나무 책상도

관(棺)도

 

전봇대가 나무였을 때가

침목(枕木)이 나무였을 때가

그래도 낫지 않았을까 싶다

전기(電氣)나 기차가 다니기도

 

십자가(十字架)도

 

 

 

방음벽

김영승

 

아들아, 불 밝혀라

찔레, 장미는

넋 나간 듯

깜빡거린다

 

방음벽은 소리를 블로킹할 수 있을까

풍경을 차단한 방음벽은

휴전선보다 더 비극적이다

 

미니스커트는 늘어가고

천국도 지옥도 들여다보고 사는데

저 수용소군도 같은 방음벽 너머엔

건강한 사람들이 사는 것 같다

 

아들아 세월은 가도

나는 너의 어린 시절의 모습들을 기억한다

전철은 가도

 

그렇지 않은가

소음을 발생한 자가

천민(賤民)이니까

전철도 비행기도

대포(大砲)도

 

그렇지 않은가

저 천둥도

낙뢰(落雷)도

 

레일 표면처럼

닳고 닳아도

이 세상에서의 업적(業績)은 누구나

다 혁혁(赫赫)하다

 

용광로도

베이컨 공장(工場)도

 

불꽃처럼

침목(枕木) 아래

자갈은

 

 

 

뱀 훑듯

김영승

 

뱀을 잡아

껍질을 벗겨본 적이 있는데 뱀을 들고

한 손으로 훑어 내리면

뱀은 그 갈빗대 같은 등뼈가 으스러져

늘어진다 한 손으로 들고

한 손으로 몇 번 쫙쫙

훑어 내리면

뱀은 축 늘어지는 것이다

 

나의 달리기는

뱀 훑기

 

수평의 길을 수직으로 세워

한 손으로 훑으며

나는 달린다 길은

 

내 손에 축

늘어지고

 

나는 그 길

껍질을 벗긴다

 

조심하라 여인이여

나는 너를

훑어 내릴 수 있다 가까이

 

오지 마라 적(敵)들이여

그 모든 위선(僞善(과

 

비리(非理)의 기생충들이여

 

보아 왕뱀도

아나콘다도

나는 훑어 내린다 뱀 훑듯

 

내가

내 그림자를 훑는다

 

작열하는 폭염에

유한(流汗)의 장강(長江)을!

폭포를!

 

 

 

김영승

 

우리는 이젠

그동안 우리가 썼던 말들을

쓰지 않을지 모른다

 

사랑한다는 말

외롭다는 말

 

그리고

그립다는 말.

 

 

 

보지

김영승

 

처음 읽었을 땐 무덤덤했는데, 오늘 오수에 들려고 침대에 누웠다 집어든 순간 글자가 눈알에 척척 처박히면서 안광(眼光)이 지배(紙背)를 철(綴)하는 집중감 속에서 삼두마차를 이끌고 달려오는 그 폭력적인 소요가 일면서 웃겨 죽는 줄 알았다.

 

 

 

봄, 희망

김영승

 

일곱 달째 신문대가 밀려

신문도 끊겼다

저녁이면 친구인 양 받아보던 신문도

이젠 오질 않는다

며칠 있으면 수도도 전기도 끊길 것이다.

며칠 있으면

이 생명도 이 몸에서 흘리던 핏줄기도

끊길 것이다

 

은행의 독촉장과 법원의 최고장

최후통첩장

수많은 통고장들이 수북히 쌓여 있다.

 

아내가 보낸 절교장도

그 위에 놓여 있다.

 

진달래가 피었노라고

아내에게 쓰던 편지 위에

핏방울이 떨어진다.

가장 빛나는 것을

나는 한 장 집어 들었다.

 

 

 

부메랑

김영승

 

부메랑이 왜 돌아오냐 부메랑은

짐승을 잡는 도구 짐승을 때려

잡는 도구다 던지면 즉사시킬 수 있는

그런 도구다 돌아오는 부메랑은

잘못 던진 부메랑

부메랑은 돌아오지 않는다 부메랑은

실수를 확인하고 자인하고

허탈히 집에 가기 위한

참회의 도구 실수를 대비한

도구가 아닌 포기의

도구 굴복의 도구 나의

 

부메랑은 돌아오지 않는다

단 한 번 단 한 발의

부메랑은 내 손을 떠나

일물일시(一物一矢)처럼 정확하게

 

즉사시킨다 돌아오는

부메랑은 잘못 던진

부메랑이면 부메랑이

부메랑처럼 돌아오기 바라는

마음은 이미

그리고 온통

다 잘못된 마음이다 부메랑은

 

최대의 겸손

자비

 

잘못 던진 부메랑은 돌아와

내 고환을

내 두개골을

관통시키리 파열시키리

박살 내리 그게

 

부메랑을 만든 뜻이며

자기가 만든 그 부메랑과의

약속이다 내가

 

던진 부메랑은

짐승을 관통하고 회전하여

우주로 날아간다

 

나는 그 짐승을 들쳐메고 돌아와

먹는다 은하수 펑펑 쏟아지는 밤

 

그 칭송과 찬양의 별빛이

그 부메랑이다

 

그러니

나로 하여금

내 부메랑을

던지게 하지

말게 하라

 

나는 단 한 번이다

 

 

 

부평시장역

김영승

 

뭐가 그렇게 우스워?

하고 물으면

더 웃는다 소녀들은

 

시체들도 그런다

그래서 화장터 너머

꽃이 피는 것이다

 

새(生)의 세계에서는

감상(感傷)도 많고

울분도 있지만

 

시체는 그 자체로

환골탈태(換骨奪胎)한 환영(幻影)

그저 법열(法悅)이다

 

썩거나 타면

그나마 없어지니

더 법열(法悅)인

법열(法悅)이다

 

그것도 모르고

벌벌 떨고

이런 저런 일에

더 벌벌 떤다

 

그래서

뭐가 우스워?

하고 물으면

더 웃는다

 

 

 

북어(北魚)

김영승

 

옛날

아주 먼 옛날

유동(柳洞) 살 때

7, 8년 전

결혼 초기

 

출산하고 난 후였을까

남들은 그게 뭐 그렇게

오랜 옛날이냐고 할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옛날

아주 먼 옛날

아득한

 

술 취해서 자고 있을 때

부엌에서 퍽, 퍽, 퍽, 퍽, 퍽, 퍽, 퍽, 퍽, 퍽, 퍽, 퍽

두들기는 소리가 들려 가보니

 

"뭐 씹는 게 먹고 싶어서요……"

 

다락에 두었던

먼지 쌓인

어머니가 갖다주신

북어를 방망이로 두들겨

뜯어먹고 있었다

 

이제 아내는

나와 함께 늙어

몸도 아프고―

 

"그럼 오징어라도 사다 먹지……"

말이 없었다

 

"돈이 없어요……"

 

그 유동(柳洞) 집

열 평 남짓한 무허가 2층 슬라브 건물의

아래층을 빌려 살 때

 

방보다 낮은 부엌

그 연탄보일러 옆

쌓인 연탄이

 

아주 환했다

 

흑인들같이

아내를 윤간하고 있는 것 같았다.

 

 

 

비가 멈춰

김영승

 

이 새벽

이 얼음처럼 푸르스름 맑고

시커먼 하늘을 직박구리 한 마리

고래 헤엄하듯

까가가각 찢어지는 고음(高音)으로

포물선을 그리며 순간

공중에 정지되어

순간 추락하는 듯

 

마치

이 새벽의 공중(空中)이

심해(深海)나 되는 양

발광(發光) 오징어처럼 그렇게

쭉쭉

 

그런 비행법(飛行法)으로

마치 누가 직박구리를 탄환으로

대포(大砲)를 쏜 듯

총으로 쏜 듯

 

엄청 아프고

엄청 경악(驚愕)스러운

엄청 공포에 질린 것 같고

엄청 황홀한 것도 같이

그저 혼(魂)이 다 나간 듯

아니 그 자신이

혼(魂)인 듯

 

이 도심(都心)에 뱀딸기는 이

짙푸른 잔디, 질경이, 머위, 부추 등등(等等)

사이에서 자신은 현재

최고조(最高潮)의 맹독(猛毒) 상태라는 양 최고

절정이라는 양

 

그냥

자신의 현재

최고의 자기 자신이라는 양

 

역시 그 색깔로 발광(發光)하며

 

이 장마

앞으로도 300쯐 이상

폭우가 며칠

더 쏟아진다는 이

장마

 

생(生)과 사(死)

차안(此岸)과 피안(彼岸) 

 

나는

이미 싹이 나서

내가 매어놓은 줄을 타고 오르는 그

마 줄기 잘 있나

한 번 나가보았을 뿐인데

 

마는 아마도

다섯 군데서 싹이 나

다섯 군데 줄을 타고

싱싱히, 윤택(潤澤)하게

 

잘 올라가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은 콩을 심어야겠다고 생각했고

 

우산 쓰고

콩을 심지 않는 게

좋겠다고도 생각했다 오늘은

 

가령

후쿠시마 원전(原電) 및 그 이전(以前)

미국 쓰리마일, 체르노빌 원전 사태를

전후해서 생겨난

원전 반대론자들의 주장(主張) 역시

 

가령

쇼펜하우어의 독서무용론(無用論)처럼

그 원전(原電)으로 인한 총체적인

혜택과 피해가 이미

원폭(原爆) 투하 전(前)부터

밀물처럼 서서히

밀려오게 되니까 생긴

 

그 반응(反應)이며

자각(自覺)이며

현상(現象)이라고 생각하니

 

이 순(順)하고 겁(怯)먹은 눈의

인류(人類)들

 

아인슈타인도

닐스 보아도

하이젠베르크도 또

 

그 누구도

사하로프도

 

다들

 

에피메테우스들

 

전체주의자 히틀러 및

히틀러 일반(一般)들

 

마더 테레사들

마틴 루터 킹 목사들 그저

 

이 새벽

 

직박구리와

뱀딸기 사이에서

 

찬란하고 장엄하고 허무한

맹목적(盲目的) 생(生)의 의지(意志)의 대(大)전환

 

아하,

 

그러니까

아인슈타인도, 히틀러도 그

 

사이

 

그 사이는

미노스 섬의 미궁(迷宮)

 

 

직박구리와

뱀딸기 사이에 무한천공(無限天空)

그 미궁(迷宮)에 갇혀

 

잡아먹거나

먹을 걸 달래거나

 

여하튼

그러다가 슬피 울거나

웃는

 

그런

괴물(怪物)들이었구나!

 

하는

 

건전(健全)한 생각을

 

나는 잠깐

해 보았던 것이다.

 

그러니

걱정 말라.

 

 

 

비가 오니

김영승

 

비가 오니

먼 데가 없어서 좋구나

 

가까운 데가 없어서 좋구나

 

먼 데도

가까운 데도

없어서 좋구나

 

먼 데는 어디고

가까운 데는 또

어딘가 비가 오니

 

하늘도 멀거나

가깝고

땅도 그렇다 하늘에서

 

그 밑에 앉아

비를 피하는

 

사람들은

 

머윗잎에건

호박잎에건

 

 

 

비밀

김영승

 

한 사람이 먹고 있다

또 다른 한 사람이 보고 있다.

먹고 있는 사람이 보고 싶거나

보고 있는 사람이 먹고 싶거나

그건 아무래도 좋다.

그저 먹고 있고 보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도 거기엔 숨 막히는

비밀이 있는 것 같다.

 

나를 보고 웃고 있는

당신의 얼굴엔.

 

 

 

비에 젖은 밥

김영승

 

식당에서 남은 밥을 보따리에

싸서 가져오신 어머니

이 태풍 부는 밤 빗물에

흥건히 젖은 밥을

마른 번개가 나를 비웃던 여자의

미소처럼 스쳐가는 하늘 나는

도구를 사용할 줄 아는 고등동물답게

숟가락을 쥐고

어머니 퍼렇게 삭은 육신

그 무덤을 삽질하듯 푹 떠 본다

 

빗물에 말은 밥을 감사하게

밑으로만 깔리는 어둠을

감사하게.

 

 

 

비 오는 밤 술집에서

김영승

 

어둠 속에 전등불 불빛 적시며 튀기며

비가 내리고 있다.

소줏잔만큼만 그 비를 받아

조금씩 마시고도 싶은

마시면서 아무 표정도 짓고 싶지 않은

이 밤

흐린 눈빛으로 무심(無心)히

의자 뒤로 한쪽 팔을 늘어뜨린

목이 긴 여자(女子)를 바라본다.

내 어머니의 웃음이나

그와 비슷하게 슬픈

그 밖의 모습이 눈에 어리거나

꽹가리 치는 사람들

가만히 보면 출렁이는

긴 눈썹.

순대와 삶은 돼지대가리가 널려 있는

원색(原色)의 적나라(赤裸裸)한 술집에서

나는 술을 마시고 있다.

비가 더 오기 전에 가야 하는데

비는 더 올 것만 같은데

미아리에서 서울역까지

발검음도 强하게

도장처럼 낙인처럼 꽝꽝꽝꽝

젖은 땅을 찍으며 가야 하는데

나보다도 옹졸하게

누군가가 울고 있다.

빗물에 발을 담그고 비를 맞고 싶은 이 밤

울고 있는 그 사나이

나는 결국 그를 만나고 싶어진다.

 

 

 

뻥튀기 장수

김영승

 

돈 많이 벌어서

아름다운 여비서도 하나 두고

심심하면 가끔씩 하고

그러고 싶은데

어느 하시절에 그 많은 돈을 버나

뻥튀기 장사해서---

 

"클린턴은 자지도 클거야

대통령이니까, 그치?"

 

나는

뻥튀기 장수,

 

시(詩)를 쓴다네

밀짚모자 하나 쓰고

함박눈이 쏟아져도

뻥튀기 기계

돌리고 앉아 있다네

 

내 아내

일명(一名) 멀러리 여사(女史)는

점심을 이고 나오고

 

전국 방방곡곡에서

구름처럼 몰려든 사람들이

아무리 줄을 서도

내 뻥튀기는 쌀 한 줌뿐

그만큼만 판다네

 

뻥튀기 떨어지면

만나처럼

한 알씩 주워 먹기도 한다네

사리(舍利)처럼

 

sack을 맨 소녀(少女)는

아름다워라

그 sack에도 하나 가득

뻥튀기 넣어준다네

 

소녀(少女)는 나팔꽃처럼 입덧을 하고

 

그리고

또 한 계절을 보내버린다네

 

내 뻥튀기는 좋은 뻥튀기,

 

비법(秘法)을 물을 사람

아무도 없다네.

 

 

 

삐삐

김영승

 

삐삐 차고 다니던 애덜이

다 정년(停年)을 했다

 

신기하기도 했고 부럽기도 하고 불쌍하기도 했었는데

 

삐삐의 그 신호음은

시신(屍身)에서도 나리라

 

그런데

그런 걸 차고 다니던 애덜은 이미

시신(屍身)도 없다

 

삐삐 같은

그런 신호음 들리던 애덜은

영원히

 

영육(靈肉)이 삐삐

그 신호음으로 전환되어 이미

천지간(天地間)에 은하수 너머

우주로 아득히

전송(電送)되었기 때문

 

소리로는 바뀌지 말자

 

영승아 하고 부르는

그 영승아 소리로도

 

봄이 막 오려는데

쓸데없는 말을 했다.

 

그런데

 

봄이라는 말보다

더 쓸데없는 말이

있을까?

 

 

 

살구는 성실하다

김영승

 

인간이 만든 관념과 관념어를

돌려준다 살구는 성실하다

살구에게서 추상하여 표상한 관념은

살구에게

 

살구에게서는 사악하다거나

야비하다거나 하는

관념은 추상되지 않는다

살구는 성실하다

 

살구는 성실하고 근면하고

 

비 온 뒤 적당히 갠 아침

살구나무는 가령

강의목눌(剛毅木訥)*이라는 말을

주렁주렁 달고 있었는데

 

그런 생각조차도 성실한 살구에겐

따면, 아니 털면

한 가마는 나올 듯한

우렁찬 파도소리 같은 살구나무

 

일단 늘어진 가지에서

네 개를 따 주머니에 넣고

나는 또 하염없이 살구가 없는 길을

돌아서 돌아왔다

 

* 《논어》, 子路篇 27장.

 

 

 

새벽 비

김영승

 

오늘 새벽도 뻐꾸기 울음은

들린다

닭장 속의 수탉도 여러 차례

목청 큰 울음을 울었고

참새떼가 날아와 소나기처럼

시원한 울음을 부어놓고 갔다.

 

아닌 게 아니라

새벽 비가 후득후득 듣고 있다.

 

언제였던가 그 어느 때였던가

그 새벽 비처럼

그렇게 맑은 눈물을 흘릴 수 있다면,

 

그렇다면

나는 아직 살아있어도 되리라.

 

창문으로

빗방울이 들이친다.

 

 

 

생각 없이 살지 말자

김영승

 

주체(酒滯)엔

사과와 파를 함께 달인 물이 좋다 하여

사과 한 개와 파 몇 뿌리를 달여

마셨다

 

주체(酒滯)엔

금주(禁酒)가 최곤데 애꿏은

사과와 파를 함께 달인 물이나 마시고

누워있다 보니

 

생각 없이 산 세월이

자랑스럽기도 하고 그럭저럭

후회되기도 한다

 

아무리 술을 마셨기로서니

생각 없이야 살았겠냐만

 

모든 일을 주마간산(走馬看山)

그 어떤 절경(絶景)도 그렇게

미인(美人)의 속눈썹도 그렇게

그 무슨 금석과안록(金石過眼錄)이라고

그렇게

 

다 보내 놓고 보니 문득

정색을 하고 유심히

들여다보고 싶은 것도

있어진다

 

주체(酒滯)엔

사과도, 사과의 그 부드러운 곡선도

파뿌리도 그렇게

함께 들여다보고 싶어진다

 

이 깊은 가을

주체(酒滯)엔,

 

사과와 파를 함께 달인 물을 마시고 누워있는

나 자신(自身)까지도 정말

보고 싶어지는 것이다

 

이번 주체(酒滯)엔

사과와 파를 함께 달인 물이 좋다 하여

사과 한 개와 파 몇 뿌리를 달여주는

당신이 가장 보고 싶었었다.

 

이번 주체(酒滯)엔......  ,

 

 

 

서울신탁은행귀신

김영승

 

귀신이 있다 별의별 귀신이

다 있지만 나는 이제 서울신탁은행귀신

내가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개설한

온라인 계좌 만 원도 오고 삼만 원도 오고

오만 원도 오는 원고료를 갖고 도장 갖고

찾아가는 곳 버스를 타고 가다가도

서울신탁은행 지점을 보면 우리 은행야

나는 중얼거리네 우리

은행야 아내에게도 말한다 내가

세상에 태어나 가난한 것은

당연한 일 우리 은행야

 

 

 

선풍기를 발로 끄지 말자

김영승

 

키 작은 선풍기 그 건반 같은 하얀 스위치를 나는 그냥 발로 눌러 끈다.

그러다 보니 어느 날 문득

"선풍기의 자존심을 무척 상하게 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로 나는 선풍기한테 미안했고 괴로웠다.

너무나 착한 짐승의 앞이빨 같은 무릎 위에 놓인 가지런한 손 같은

형이 사준 예쁜 소녀같은 선풍기가 고개를 수그리고 있다.

어린이 동화극에 나오는 착한 소녀인형처럼 초점없는 눈으로

'아저씨 왜 그래요?' '더우세요?'

눈물겹도록 착하게 얘기하고 있는 것 같았다. 무얼 도와줄 게 있다고

왼쪽엔 타이머까지 달고 좌우로 고개를 흔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 더운 여름, 반지하의 내 방, 그 잠수함을 움직이는 스크루는 선풍기.

신축교회 현장 그 공사판에서 그 머리 기름 바른 목사는 우리들 코에다

대고 구두코로 이것저것 가리키며 지시하고 있었다.

선풍기를 발로 눌러 끄지 말자

공손하게 엎드려 두 손으로 끄지 ... 

 

 

 

술과 외로움

김영승

 

나는 외롭기 때문에

너무나 외롭기 때문에

술을 마심으로써 내 자신에 대한 인기를

유지하려 하나 보다

내 자신에 대한 인기

두려운 건

너무나 아름다운 내 눈매

내 몸 붉은 피로 녹아날 때까지 술을 마시다가

그대의 조용한 사랑 같은 황혼이

내 눈매쯤에 그림자 지면

내 외로움도 또 끝이 나겠지.

 

 

 

술 얘기

김영승

 

제 버릇 개 주랴만

술이 좋아 좋구도 남지 좋아서 마신다

술은 그냥 술이로되

술 속에 사는 사람에게 있어서

술은 그냥 술이 아니다

술은 액체로 된 꿈

떠올리고 싶을 때 떠올려지는

잃어버린 것들

사라져버린 것들 그런 것들

흐르고 흘러서 모여진

강의 하류와도 같은 것

 

흰 돛을 단 작은 배가

술잔 속에 어우러지면

 

여자들이 어머 너 예뻐졌다 하는 말처럼

지나가는 말로 흘려버리듯

자네 취했구먼

그럴 수 있어서 좋다

 

 

 

숲속에서

김영승 

 

작은 새 한 마리가 또 내 곁을 떠났다.

나는 그 새가 앉았던 빈 가지에

날아가 버린 그 새를 앉혀 놓았다.

 

많은 사람이 내 곁을 떠났다.

떠나간 사람

죽은 사람

나는 아직도 그들이 앉았던 빈자리에

그들을 앉혀 놓고 있다.

 

그들이 없는 텅 빈 거리를

주머니에 손을 찌르고 말없이 걷는다

거리는 조용하지만

떠들썩하다.

그들이 웃으며 나를 부르고 있다.

 

나를 알고 있는 사람들 곁을

내가 떠나게 되었을 때

내가 없는 술집 그 구석진 자리에

나를 앉혀 놓을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작은 새 한 마리가

아직도 슬픈 노래를 부르고 있다.

 

 

 

슬픈 국

김영승

 

모든 국은 어쩐지

괜히 슬프다

 

왜 슬프냐 하면

모른다 무조건

 

슬프다

 

냉이국이건 쑥국이건

너무 슬퍼서

 

고깃국은 발음도 못하겠다.

 

고깃국은.....

 

봄이다. 고깃국이.

 

 

 

신부(新婦)

김영승

 

다 망가졌지만

나는 그래도

그래도 당대(當代)의 선비․․․

 

나는 순수했었다

시인(詩人)으로서도 순수했고

조인(罪人)으로서도 순수했다

그리고 당당했었다

 

당당했었다?

널널한 추리닝을 입고 왔다 갔다 하는

예쁜 여고생을 보면

뒤에서 확 바지를 까 내리고 도망가고 싶다

도망가면서

약 오르지,

 

놀려주고 싶다

 

나는 왜 그러지 못하는가

나는 왜 그러지 못하는가

나는 왜 그러지 못하는가

 

세상이 온통 깡패 같은 새끼들뿐이기 때문이다

세상이 온통 깡패 같은 새끼들뿐이기 때문이다

세상이 온통 깡패 같은 새끼들뿐이기 때문이다

 

나는 곧 파렴치한 인간으로 몰릴 것이고

그 부모들한테 좆나게 맞을 것이고

사회에서 매장될 것이다

 

한 소녀가

내 앞에서 그렇게 지나간다

이 아름다운 가을

 

큰 기대 없었으므로

배신감도 실망도 없다

 

그저 내 앞을

그렇게 널널히

걸어가고 있는 것이

좀 서글플 뿐이지만․․․

 

오늘은 일요일

박문여고 옆 도화동 성당에서 주운

등(藤)나무 씨,

 

등(藤)나무 꼬투리가

벨벳같이 부드러웠다.

 

 

 

신은 아름다워요

김영승

 

방바닥에 털푸덕 앉아 양말을 신는

당신은 아름다워요.

거울을 들여다보며 크림을 바르는

당신은 아름다워요.

나 때문에 웃고 나 때문에 우는

당신은 아름다워요.

 

내 곁에 누워 곤히 잠든 당신,

아침엔 부산히 일어나는

당신은 아름다워요.

술 취해 쓰러진 나에게

다음 날 라면을 끓여주는

당신은 아름다워요..

욕하고 저주하고 떠난 당신은....

당신은 아름다워요.

 

 

 

싱싱한 비

김영승

 

비가

벌벌벌 떠는 싱싱한 꽃게 마냥

아니 참게 마냥

쏟아진다 아니

 

비는 그

벌벌벌 떠는 싱싱한 꽃게를

참게를 상냥하게 위로하듯 그 자체로

대자대비(大慈大悲)하게

 

내린다 비가

 

버들붕어 마냥 아니

돌돌돌 개울물 거슬러 올라가는

송사리 떼 마냥 아니

 

알몸으로 즐비櫛比하게

처형되었던 그 모든

남녀노소(男女老少)들의 그

알몸 마냥

 

시신(屍身) 마냥

 

그냥 내린다

 

어깨를 툭 치며

󰡒오우, 이 시신(屍身) 괜찮은 시신(屍身)인데?󰡓

 

어던 미남(美男)과 미녀(美女)를 놓고

그렇게 찬탄을 하면

 

비는 결국은

저 영육(靈肉)의

상하(上下)와 전후좌우(前後左右)를

뒤흔든다

 

우연(雨煙)을 음(吟)했지만

 

이 도심(都心)에서도 이

아침부터

우비(雨備)를 입은 사람은 다

그 우비(雨備)로 폭우(暴雨)에

경의(敬意)를 표하는 사람들이다

 

아프냐?

아직 넝쿨장미 만발한

이 새벽

 

꽃게 같은 비가 쭈우욱

부우욱

 

살갗을 찢으니

 

아프냐?

 

 

 

김영승

 

아 소리는

누가 꼬집었든가

칼로 찔렸을 때밖에

내본 적 없는데

 

나는 보고 싶다는 말을 하고 있었군

 

각목으로

당구 마세 찍뜻 찍혔을 때는

욱 소리를 냈었다

얼굴뼈가 무너졌었다

 

철갑(鐵甲) 같은 살구나무가 알았어 알았어

수피(樹皮)를 뚫고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는 것 같다

 

아 다음엔

이어지는 소리가 없어

좋긴 좋다

 

아 소리

낼 데 없으면

그냥 내보내면 된다

 

죽은 이들이

미소 짓는다 하여도

 

 

 

아는 놈

김영승

 

"아는 놈야?"

"모르는 놈인데?"

턱 끝으로 가리키며 그들은 그렇게 주고

받고 있었다

부평역 플랫폼엔 비가 내리는데

겨울인데

화장실에서 나오며

그들은

나는 그들한테도

모르는 놈이다

 

 

 

아름다운 폐인

김영승

 

나는 폐인입니다

세상이 아직 좋아서

나 같은 놈을 살게 내버려둡니다

착하디 착한 나는

오히려 너무나 뛰어나기에 못미치는 나를

그 놀랍도록 아름다운 나를

그리하여 온통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나를

살아가게 합니다

나는 늘 아름답습니다

자신 있게 나는 늘 아름답습니다

그러기에 슬픈 사람일 뿐이지만

그렇지만 난 갖다 버려도

주워 갈 사람 없는 폐인입니다

 

 

 

아플 때...

김영승

 

아플 땐

기형도(奇亨度)처럼 열무 삼십단 이고 장에 간

엄마 생각을 하든가 아니면

바람나서 도망간 엄마라도 있으면 그런 엄마 생각이라도 해야 하는데

'엄마'는 없고……

 

'퇴행(退行)'하고 싶어라

 

퇴행(退行)하면

나는 겨우 퇴계(退溪)나 율곡(栗谷)이나

버트란드 러쎌 정도니

 

성교시(性交時)

'엄마 엄마' 하며 젖꼭지를 빨아야

흥분이 된다는 어떤 칠뜨기처럼

 

지나가는 여자들이나 붙들고

엄마 엄마 해야만 하나

 

나는,

 

나는 온갖 못된 짓 때문에

와병중(臥病中)이지만

 

고열(高熱)의 어린 아들은

단호(斷乎)하게

 

즈이 엄마조차도 부르지 않는다

 

도대체 입맛이 없어 아무것도 안 먹던 아들이 별안간

매운탕이 먹고 싶다고 하여 호전(好轉)된 두 부자(父子)

병원 갔다 오는 길에 대구탕 일금 5,000원짜리를

한 그릇씩 시켜 먹고 왔다 아내는

내가 어디서 주워 온 것인지 바꿔온 것인지 한

커다란 우산을 쓰고 또 타박타박

아들과 나 사이에서

차분히 걸었고

 

아플 때는 다들

순하고 선한

퀭한 짐승의 눈

 

아픈 짐승을 약 올리는 짐승은

인간이라는 짐승뿐

 

"엄마, 우산 접어도 되겠다!"

 

굵은 빗줄기는 어느새

이슬비로 바뀌어 아물거리고

 

빨간불 초록불

초저녁 신호등 불빛이 아름다운

 

시간(時間)의 흐름은 특고압 전류처럼

아플 때

전신(全身)이 감내하는

'엄마'라는 이미지의 과부하(過負荷)

 

새빨갛게 작열(灼熱)하여

 

발광(發光)

섬광(閃光)

 

비등(沸騰)

증발(蒸發),

 

기화(氣化)!

 

생명체로서

우주의 핵(核)을

직관할 수 있는 순간은

 

아프지 말자 아프면

돈 없고 서럽고

약올림당해서 늙는다

 

생각해보라

의사는 아픈 사람

약 올리지 않는가

 

어머니도 아픈 제 자식

조롱하고 경멸하는 것을

나는 무수히 보았다

 

빨간불 초록불

신호등은 하나의 약속이다

 

한참 서 있다가

길을 건넜다.

 

 

 

어떻게 살까

김영승

 

어떻게 할까

설겆이하면서 생각해보니

찬물에 손이 시려운 것처럼

참아낼 수 있는 것이라면......

 

어떻게 살까.

눈물이 흐르는데

눈물이 왜 눈물이냐고 또 묻고 있는데

아무리 추워도

얼어붙는 눈물은 보지 못했는데

 

눈물은 우리 몸에서 나오는게 아닌데

눈물이 흐른 내 눈가가

또 시렵다.

 

 

 

어쩔거냐

김영승

 

문지르거나 긁거나 비틀거나

빨거나 핥거나 꺾거나 조르거나

누르거나 찌르거나 쑤시거나

움켜쥐거나 후비거나 하는 게 좋아졌다.

 

어쩔 거냐 살아가는 일

몸뚱아리 살덩어리 남들처럼 이루고

소 갈 데 말 갈 데 질질 끌면서

목숨 붙이고 살아가는 일

 

그리고 사랑

그 모든 걸 죄다 어쩔거냐.

 

 

 

엄마야 누나야

김영승

 

 

엄마야 누나야 는

내가 부르는 노래

 

아니 내가 썼어야 할

시(詩) 엄마야

 

누나야,

 

어떤 부드러움이 그리워

울고 다녔구나

 

강변(江邊) 살자, 강변(江邊)엔

엄마야 누나야, 엄마야

 

누나야가 있다

 

조폭(組暴) 수준(水準)의 아해(兒孩)들만 쇠파이프 들고

사시미칼 들고

 

창녀((娼女)에게서도 요부(妖婦)에게서도

그리고 소녀(少女)에게서도 나는

그저 그저 엄마야

 

누나야만을 찾았구나 그 모든

 

여자(女子)에게서 '여성(女性)'에게서, 엄마야

누나야 이 가을 엄마는

 

누나는 나의 상(賞),

 

놀라운 은총과 축복의 나의

영광(榮光), 나는

 

그 우등상장을 들고

달려간다네

 

플라타너스 낙엽이 뒹구는 이 추운 저녁

8번 버스 정류장 나무 벤치 밑

떨어져 있는 면도날 하나가

 

눈물겹다, 아주

 

따뜻해 보였다 내

 

가슴에 품고 싶었다 엄마야

누나야…….

 

 

 

여름, 여름, 봄밤

김영승

 

여름엔 또

파리님이 오시겠지

오, 모기님도 오시겠네

 

오,

파리님, 모기님

 

내 영혼의 등불이시여

오소서!

 

파리님은

썩은 생선의 눈알 위에도

널려진

소녀(少女)의

 

시신(屍身)의 음부(陰部) 위에도

눈썹 위에도

 

물론 

맹모(孟母)의 모기님은

 

오오, 여름은

파리님 떼, 모기님 떼의

피처링

자기현현(自己顯現)

광란(狂亂)의 삼바 축제 같은

아니

다오니소스 Orgie 같은

 

그래도

생명(生命)의

대합창(大合唱)!

 

그 피겨스케이트 신은 채

목발이 잘린

 

 

 

오래간만이다 522번

김영승

 

오래간만이다 522번

이 겨울비 내리는 밤

나는 실내(室內)에서

밖의 너를 본다

비 맞는 마을버스를

 

오래간만이다 522번

우중(雨中) 마을버스는

비행기 같고

 

포장마차 같고

선술집 같고

선실(船室) 같다

 

17년 전에 처음 타봤지만

이번엔 정말 오래간만이다 522번

마을버스야

 

입김에

성에에

착하게만 흘러내리는

네온 간판

명성치과도 김재준 약국도 안녕?

 

나는

고공(高空) 비행기 객실 같은

실내에 앉아

 

몇 년 전

어느 벚꽃 만발한 날

벚꽃 사이를 뚫고 달리는 너에게

손짓을 한다

 

오래간만이다

나의 522번 마을버스야

 

 

 

오래된 게장

김영승

 

오래된 간장게장

껍데기 속이

홍보석 황보석이

오글오글 한 말이다

아해(兒孩)들이

알몸의 여인(女人)이

 

그 겨울의

간장게장

그 간장 속 꽃게는

간장에서 기어 나와 바다로 갔다

 

내가

그렇게 만들었다

 

그 간장게장 집 마당엔

징검다리 같은 박석(薄石)이 깔려 있었는데

 

꽃게 껍데기가

내 관(棺)뚜껑이라도

참 포근하겠다

 

꽃게나 소라나

 

자기(自己) 몸 밖의

유골(遺骨)이여

 

몸 안의 유골(遺骨)을 꺼내

바치고 울라

몸은 기어 다니고

 

 

 

오우가(五友歌)

김영승

 

내 벗이 몇인고 하니

수석(水石)과 송죽(松竹)이라......

 

내 벗이 몇인고 하니

중얼거려 보니

 

내 친구들은

다 좋은 친구들

 

그러나 내가 그들의

좋은 친구가 되질 못하네

 

수석(水石)과 송죽월(松竹月)도

나의 친구로는

과분(過分)하고

불가(不可)한 친구들

 

반달 뜬

가을밤

내 무슨 염치로

수석(水石)과 송죽월(松竹月)을

내 친구라 하리

 

관(棺)도

화장터 화구(火口)도

 

나는 감(敢)히

내 친구라 할 수 없는데

 

달빛은 교교(皎皎)하고

나를 감싸네

 

풀벌레 울음소리는

 

마치

수석(水石)과 송죽월(松竹月)처럼

 

내 그림자는

 

 

 

김영승

 

내 최후의 정장은, 아니 최초이자 최후의, 황금빛 찬란한

초호화판 정장은, 이다음에 어머니 돌아가시면 입을

삼베 상복, 행전에 굴건을 쓰고, 새끼로 요질(腰?)*하고

짚신에 죽장 든, 내 일생일대의 정장

그러다가 나 죽으면 그 상복 그대로 수의 대신 입혀다오

스무 살 이후로 나는 상복만 입고 살았구나

죄수복 같은, 환자복 같은, 아무도 모르는, 그저 평범한

내가 입은 옷은 상복 단 한 벌 뿐

누더기 상복 한 벌만 입고 살았구나

얼핏 보면, 넓은 도포자락 펄럭이며, 고개 숙이고 타박타박

곡(哭)하며 걷는 내 모습을 볼 수도 있었건만

상복을 입고 목욕탕 갔고, 상복을 입고 여관 갔고

아아, 나는 상복을 입고 결혼식을 치렀네

상복을 입고 술집 갔고, 상복을 입고 전철을 탔으며

상복을 입고 수음을 했네, 그렇게 젊음은 갔구나

나는 죄인이었으므로, 그렇게 돌아다녔네, 굵은 삼베 상복

서걱이며 출근을 했고,

사람들은 그러한 나를 전혀 몰랐구나

꽃잎이 진다, 폭죽(爆竹)처럼, 함박눈처럼 하얀 꽃잎이

펑펑펑펑펑 쏟아진다, 흩날린다, 아득하게 폭설(暴雪)처럼

상복이 진다, 찢어져 흩날린다, 내 몸이, 내가, 흩날린다, 그때까진

죽지 말자, 먼저 죽지 말자, 그 천상(天上)의 예복(禮服)을

벗지 말자, 강풍(强風)이

내 야윈 알몸을, 휘감는다

강철(鋼鐵) 채찍처럼.

 

* 요질 : 상복의 허리에 띠는 띠.

 

 

 

울어라 열풍아

김영승

 

열풍(熱風)아

 

노래를 부르며 나는

나팔꽃씨를 까네

 

나는

슬픔이 많은 사람

 

겸손해진다네

 

흰 종이에 비벼 깐 나팔꽃씨는

 

후후 불면

껍데기는 날아간다네

내 껍데기 같다네

 

나는

슬픔이 많은 사람

 

바람에 나는 겨처럼

 

나는 경쾌히

날아간다네

 

감사하고 이 봄날

나는 진정 기쁘다네

 

못 견디게 괴로워도

울지 못하고

가는 님을

웃음으로 보내는 마음*은

내 마음

 

태어나서 지금까지

내 마음은 그랬다네

 

그 열풍에

 

나팔꽃 그 까만 씨가

나팔꽃이 된 거라네.

 

* 이미자의 노래 <울어라 열풍(熱風)아>의 가사를 참조할 것.

 

 

 

이 혹한(酷寒)을 견디면

김영승

 

이 혹한(酷寒)을 견디면

 

고드름처럼

추위에 오돌오돌 떠는

어린 아들의 모습이 주렁주렁

 

이 혹한을 견딜

힘을 주면

 

고드름 하나하나

뚝뚝 분질러

와드득 와드득 씹어먹으며

 

그 힘으로 이 혹한을 견디면

 

아무렇지도 않게 강풍(强風)에

1,000원짜리 한 장

아득히 날라간 하늘

 

버스비 꺼내려다

발을 동동 구르며 우는

어진 아내의 모습이

 

성에처럼 해장국집

유리창에 소주병에

부드럽게 극광(極光)처럼 서리면

스치면

 

나는 또 암각화(岩刻畵)처럼 손톱 끝으로 북북

긁어,

 

쩌렁쩌렁

수정(水晶)처럼 눈부시게,

 

이 혹한을 견디면.

 

 

 

월인천강(月印千江)

김영승

 

대보름날, 

 

망치를 들고

 

호두는 까기 전엔 몇 개인가 알았는데

까고 나니 모르겠다

 

보름달도 그럴까?

 

다들 올려다보며

엉덩이를 깐다

 

호두 속에는

쭈글쭈글 찌그러진 보름달

 

뇌(腦) 같다

 

금동미륵반가사유상을 박살낸 것

같지는 않지만

 

많은 생각이

터져 나왔다

 

 

 

이방인

김영승

 

버스비 900원

버스 타서 죄송하다고

백배사죄(百拜謝罪)하며 내는 돈

 

화장실 100원

오줌 눠서 죄송하다고

백배사죄하며 내는 돈

 

아들 고등학교 신입생 등록금 사십오만 구천오백팔십 원

학교 다녀 죄송하다고

백배사죄하며 내는 돈

 

상갓집 부조금 3만 원

살아 있어 죄송하다고

백배사죄하며 내는 돈

 

공중전화 100원

말 전해서 죄송하다고

백배사죄하며 내는 돈

 

돼지고기 한 斤 8,000원

처먹어서 죄송하다고

백배사죄하며 내는 돈

 

서러움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죽을 수 있는 것이다

한(恨)이 있기 때문에

 

함소입지(含笑入地)할 수

있는 것이다

 

 

 

인생

김영승

 

송알송알 싸리잎에 은구---

술만 잔뜩 퍼마시고---

오래간만에---

 

"죽여버릴 거야---"

십 년 공부가 와르르르르르르르---

무너지는 순간이다

주저앉아 흐느껴 운다

 

이제 초등학교 1학년 짜리 어린 아들이

무슨 죄가 있는가 있다면 내 아내

진짜 있다면 나한테 있는 걸

 

약이 올라 새빨갛게 독이 올라

폭팔 직전, 자살 직전까지

본노가 '만(滿)tank' 되어

참고 또 참고 또 참았다가

 

질질질질질질질질 육신이

내장이 녹아 항문으로

요도로 흘러내리다가

 

누가 갖다준 386 고물 컴퓨터

잘못 만졌다고, '또 그러면

죽여버릴 거야!' 아들에게 꽥!

소리를 지르다니 아아아아아아

 

갈 데까지 갔구나 위험하구나 나

그래도 그런 극언은 그 누구한테도

안 하고 살았는데 아들한테

그런 폭언을 하다니 아내

들으라고 한 소리지만 아내는---

 

'내가 낳았으니 내가 끝내버릴 거야 또

그러면---' 실성한 사람처럼

중얼거렸다니 하루종일

쉬지 않고 노래 부르는 아들이

움찔, 일순 경계의 몸짓

 

아빠 이상하다 재빨리

자전거 탄다고 나가버리고

아내는---

아내야 그 말이 옳다

그래도 진자리 마른자리

가려 밟을 것은 가려 밟아야 한다

이 가을

바람 거세고 몹시 추운 날

 

내가 겨우 그따위 곳에나 나가

돈을 벌어온다는 사실이

영 실망이고 불쾌한지---

 

쌓이고 또 쌓이고 쌓여

와르르르르르르르르르---

 

그 말이 옳다 소위 '가난'

하지 않았다면 우리 사이에 무슨

싸울 일이 있겠느냐 치욕에 치욕에

또 치욕

나도 치욕을 느낄 줄 아는

사람이다 그 스트레스는

나를

쭈글쭈글 오그려뜨렸다

난롯불에 오그라진

플라스틱 그릇처럼 다시

 

원상복구될 수 있을까 나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내 자신이

가난하다고 생각해본 적은 한 번도 없는 놈

또한 가난해서 불편한 것이

부끄러웠던 적도 없었다 나는

 

'변형'되지 않는다 그것이

나의 '모순'이지만 내 안엔

이 세상의 그 어떤 방패라도

막아낼 수 없는 '창'과 이 세상의

그 어떤 창도 뚫을 수 없는 '방패'가

함께 있다 그것이

나의 비극이고 또한---

 

밭에 갔다온 아내여

밭엔 무와 배추

잘 자라고 있더냐 옆옆집 110호

가난한 선원(船員) 현이네 아빠

일하다 다친 손가락 두 개

절단해야 한다고 어제는

연안부두에서 술 마시고 뻗은 걸

옆집 109호 주영이 아빠가

살어왔다고?

 

불가사리나 도마뱀이여

그 모든 무형무색무취의

유령이여

영혼이여

 

그게 아니었던들

내가 생굴에

소주 한 병을 마시고

돌아올 수 있었겠느냐---

 

내일이면 잊으리 립스틱

짙게 바르고 아들에게

사과하리

 

"학교에 다녀오겠습니다---"

인사하는 아들에게

꺼내 보이며

 

나는 내 시뻘건 귀두(龜頭)에

광(光)낸.

 

 

 

'있음'에 대한 참회

김영승

 

그저 곁에 함께 있는다는 것, 그

'있음'이 대류하는 스트레스, 폭력을

참회합니다 그저

마주 보고 있다는 것

그 자체가 가공할만한 불안,

 

긴장, 초조, 폭력일 수 있었음을

참회합니다 저는

 

그저 함께 있다는 것, 그

'있음' 자체가 가호입니다

 

만경창파 그 해변의

묵송도 그러할진대 너무

 

가까이 그렇게 지속적으로

있었다니

 

함께 밥 먹는 것도, TV보는 것도

섹스도 그저

 

상처투성이 피범벅의

공인된 고문일 수

있었음을

 

이 겨울

산꼭대기 암벽을 타고 넘으며

냉이는, 달래는 저

아득한 지상에서 뾰족뾰족

돋고 있겠거니

 

생각하며

 

나, 사정하듯 쏟아지는 달빛, 별빛

허공중에 산화하니

 

그저 죄송합니다, 나와 함께 있었던, 있는, 있을

여인이여,

 

그 종신형의

나의 아내여,

그 푸른 하늘 은하수, 산꼭대기에서

 

일생을 전광처럼, 파바박!

참회 다 해버렸습니다.

 

 

 

잘못 쓴 시

김영승

 

내일은 한로

아름다운 날

또 보름 있으면 상강

검은 돌에 낟가리에

찬 이슬 내리겠네

하얀 서리 포근하겠네

 

단풍 들고 눈 내리고

온누리 수레바퀴마저 꽝꽝

얼어붙으면

 

불 지피리 부지깽이 들고, 생솔가지 마른 장작

보릿짚 볏짚 마른 삭정이 탁탁

아궁이 앞에 앉아 고즈넉이

아랫목 화롯가에 앉아 그림자처럼

 

썰매 타러 나간 아들

기다리겠네

 

보글보글 된장국 뚝배기 올려놓고 귀신처럼

손끝 매운 고운 아내

 

바느질하겠네 뜨개질하겠네 쌩쌩 부는

겨울바람

 

고구마 깎고 국수 삶고

 

얼음 깨고 얼개미*를 뜨면

새까맣게 튀는 새뱅이**

 

초가지붕 처마 밑엔

고운 솜털 한 줌 참새,

 

밤은 깊겠네.

 

* '어레미'의 사투리

** '생이'의 사투리

 

 

 

재미있는 이야기

김영승

 

재미있는 이야기는

그가 그 말을 하면서 먼저 웃어서

더 재미있는 것이다

 

가도 가도 칸나꽃이 만발한 길에서도

황금 들녘에서도

재미있는 이야기는 끝이 없다

 

인동초꽃이

흰 꽃에서 노란 꽃으로 바뀔 때도

 

그리고 나도

재미있는 사람으로 되어간다

 

죽어가면서도

그의 그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으며

죽어가면

나는 아주 평화로울 것 같다

 

그가

나이므로

 

나의 슬픈 이야기도

그가 말을 하면

재미있는 이야기로 될 것이다

 

재미있는 이야기로

메아리쳐 울린다

뻐꾹새 울음처럼

 

나 이 세상에 태어나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으니

여한은 없다

 

그리고 그런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으므로

그 모든 비참한 이야기도

맑은 시냇물처럼 흐른다

맑은 눈물처럼

 

가장 재미있는 이야기는 나의 죽음인데

그 이야기를 들을 수 없으므로

미리 듣는다

 

내가 죽었다니

얼마나 재미있는 이야기인가

 

재미있는 이야기는

끝이 없다

 

 

 

저 바닥에 누워

김영승

 

저 바다에 누워 외로운 물새 될까 어쩌구

딥디딥 딥디비디비딥 어쩌구 하는 노래도 있었지만 저

바닥에 누워 외로운 양아치 될까

딥디딥 딥디비디비딥

나는 노래 부른다 저 바닥에 누워

 

저 바닥은 무엇인가......

 

냉기(冷氣) 올라오는 시멘트 바닥일까 보루박스

깔고 누운 서울역 대합실일까 저

 

바닥에 누운 자는

노숙자일까 취객(醉客)일까 바닥에

 

누운 자는

쾌락(快樂)에 대한 욕망이 없다 최고의 쾌락은

그저 생존(生存)하는 것

 

나의 바닥

나의 영광(榮光)

 

바닥에

육(肉) 병풍을 깔고

육(肉) 병풍을 치고 누워

고기를 구워 먹어도?

 

나의 바닥

나만의 바닥

 

그 바닥에서

 

그 바닥은

더는 -도 아니고

더는 -도 아닌

 

완전한 수평(水平)

완전한 밑

 

거기에 내가 누웠다가

일어나 정좌(正坐)하여

하늘을 올려다본다

 

 

 

저항

김영승

 

풀도 고운 풀이면

먹었던 사람들

 

고비나물도 구기자 筍도

먹었던 사람들

 

식량(食糧)으로

먹었던 사람들

 

구(舊) 소련 핵(核)발전소 건설에

강제 동원됐던

강제 노동했던 조선인(朝鮮人)들

 

느릅나무 껍질을 먹었던

바보 온달(溫達)

 

화단(花壇) 나팔꽃 밑동이

예초기에 잘리고

 

죽은 병사(兵士)의 워커를 삶아

먹었던 사람들

 

순자(荀子)도 태워

먹었던 사람들

잤던 사람들

 

하늘 밑이고

코스모스 대평원(大平原)인

대지(大地)의

내 그림자 위이다

 

쓰레기통 뒤져

복어 알 끓여먹고 죽는

친구사이 몇 명

사람들

 

참 추운 날의

곱은 손

 

사람들

 

 

 

정(情)든 여자(女子)

김영승

 

곰보 여자(女子)와 살아도

오랜 세월(歲月) 함께 지내다 보면

곰보 그 구멍 구멍마다 정(情)이 담뿍 담겨

모든 게 다 아름답고 사랑스럽게만

보인다던데

 

머리털을 태워

따뜻하게 해주고 싶을 만큼

내 마음은 안타까왔는데

 

떠나간 사람.

 

나는 왜 술만 마셨을까

아아, 나는 왜 그토록 술만 마셨을까

울어야 하는데

이리처럼 새끼 잃은 야수(野獸)처럼

밤새도록 울어야 하는데

 

잔(盞)을 쥐고 또 히죽히죽

나는 웃고 있다.

 

 

 

조금이었으므로 다였노라

김영승

 

이렇게 풍성히, 풍만히, 탐스럽게,

나팔꽃이 수십, 수백 송이 활짝 피었으니

 

좋은 일이 있으려나 보다

 

아니 이렇게 나팔꽃이 활짝 핀 게 좋은 일

 

이렇게 좋은 일이 있으려고

그 이전(以前)도

 

 

 

죽을 때까지

김영승

 

나는 이미

도립(倒立) 금동미륵반가사유상이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발길로 툭툭 치면

옆으로도 그러고

있다

 

아직

추워서 그런

것이다

 

죽을 때까지

사랑하겠다 기다리겠다 공부하겠다

하지 말고

그것도 좋지만

죽을 때까지는 일단 죽어가야 하는 것이다

 

그밖에 생각은 다

잡념(雜念)인데

 

생각은

잘 때나 하는 것

무슨 심사숙고며

천사(天思) 만려인가

 

생각은 잘 때나

죽을 때

잠깐 하면 된다

 

금동미륵반가사유상이나

 

다들 뭔가를

궁리(窮理)하는 거겠지

가슴이 아프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다

 

사형(死刑) 직전도

다 그런 표정과 자세며

성교중(性交中)에도 그렇다.

 

 

 

처음이자 마지막

김영승

 

누가 내 옆구리를 곡괭이로 콱 찍었다고 해보자

갈빗대 서너 대가 부러져서 근육을 뚫고 삐져나오고

한때는 죽은 짐승의 시체와 죽은 식물의 잎새로 채워졌던

나의 내장이 주르르 흘러나왔다고 해보자

그리하여 시뻘겋게 부릅뜬 내 두 눈은 튀어나올 듯이 이글거리고 태어나서

한 번도 내보지 못한, 아니 내 볼 수 없었던 처음이자 마지막인 괴로운

비명을 지르고 고통에 이글거리던 두 눈이 서서히 풀어져 갈 때

너를 쳐다보거나 죽은 이웃을 바라보는 아아, 부드럽거나 서러운

그 나름대로의 명백한 눈빛이 아닌 또한 처음이자 마지막인

나의 눈빛이 지어질 테고 너를 내 가슴에 안아 입을 맞추거나

허무와 절망에 찌들려서 내뱉던 신음소리가 아니 그 또한

처음이자 마지막인 신음소리를 낼 것이고

그리고 나는 처음이자 마지막인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누가 내 옆구리를 곡괭이로 콱 찍기 전까지는

나는 결코 곡괭이로 찍혔을 때의 내 모습을 만들어 낼 수 없다

그런 것이다 너에 대한 나의 사랑은.

 

 

 

체포령

김영승

 

아쟁(牙箏)의 소리로

나는 내 웃음을 웃을까

 

오른손

좌우(左右) 발바닥

왼쪽 귀

 

국수 삶는

국수 삶아 채반에 얹는

그런 소리로

나는 내 웃음을 웃을까

 

내 웃음은

비교 대상이 없구나 가령

기명야애(其鳴也哀) 중얼거려도 그게

그거고

 

어젯밤

우리 동네 롤러스케이트장 공원 갔더니

가로등 불빛에

나무들이 춥지만

 

봄이네

 

속삭이고 있었다

 

뭐 해금(奚琴)의 소리라도

좋고

 

 

 

추운 날 밤

김영승

 

여태까지 안 잤니

얘는 참

알았다 알았어

내가 있어야겠구나

너한테 내가 필요(必要)한 건

사랑이다

 

춥니

그런 초로인생(草露人生) 덧없다 생각되니

그렇게 생각될 때

고요한 눈매의 한 사람을 만나면

 

질긴 힘줄 질겅질겅 씹으며

인생 짧은 게

하늘의 영광(榮光)이며

땅 위의 지복(至福)임을

둘이서 함께 느껴간다

 

내 몸 부서지어

흐른다

 

사랑할 때

사람은 그 한때에

사는 거다

 

그밖의 덧없음

들춰내어 서글퍼지면

서글프기에 즐겁게

그래도 죽을 때까지

우리는 곧잘 살아간다 배고플 때 밥 먹고

그리고 너는

여기저기 밥 먹음의

비리(非理)와도 싸운다

 

그래서 외로울 때

아직 자지 않고 있었구나

시(詩)를 쓰고 있었구나

잘 살자.

 

 

 

취객의 꿈

김영승

 

댁은 뉘시요?

그저 일개 초개와 같은 과객이지만 그래도 그냥 지나치기가 또 아쉬워 예서제서 숨을 찾는 뿌려진 꽃잎 같은 취객이올시다. 내 앞에서 흐르는 이제는 슬픈 한 여인을 바라보며 바닷가에 앉아 모래처럼 부서진 내 영혼을 세며 기나긴 세월 쉽게쉽게 보내지요. 하얀 조가비 그걸 집어 내 몸 어디부터 가릴까요? 하얀 조가비 그 예쁜 잔에 맑은 술을 따라 출렁이는 바닷물 같은 이 식은 대지를 마셔 버리고 그리고 스스로 설 땅을 없애 버렸습니다.

그래서 댁은 무얼 하십니까?

남들처럼 외롭고 마셔 버리고 싶어도 마실 수 없는 저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아득한 생각에 잠겨 있지요. 내 손이 닿아보지 않은 그리고 노형의 손도 닿아보지 않은 저 하늘을 처녀막처럼 찢고 그리고 피를 흘리겠습니다. 하늘의 푸른 빛 그건 바로 내 핏줄 속을 흐르는 내 피의 빛이고 싶습니다. 모자를 벗고 인사하는 신사처럼 내 머리에 쓰고 다녔던 저 하늘을 벗고 그리고 정중히 죽어야지요. 죽음은 이 무례한 놈의 처음이자 마지막인 인사입니다.

 

 

 

츄마

김영승

 

영등(永等)해야 한다……

永等해야 한다……

永等해야 한다……

永等해야 한다……

永等해야 한다……

永等해야 한다……

永等해야 한다……*

 

뭐 하냐?

뭐 한다

 

뭐 할래?

뭐 안 한다.

 

뭐 하자

뭐 하자.

 

정각(正覺) 후(後)의

이레 동안, 하루도 아니고 이틀도 아니고 그래, 일주일 동안, 해탈의 즐거움을 맛보면서

이 놀라운 즐거움, 음, 이건 내거다, 나만의

즐거움, 도홍유록(桃紅柳綠)…… 하면서 아무도 모를거야 어쩌구

라면을 끓여 먹으면서

그 다 쓰러져가는

보리수 밑에 앉아 있던

불타(佛陀)처럼

 

아름다운 집

 

쓰레기

앞마당에 갖다 묻는다고

생각해야 한다

 

혀가 굳었는지 입이 삐뚤어졌는지

술 때문에 돈 때문에 느닷없이 츄마**

그렇게 발음(發音)이 되어

그렇게 발음(發音)해 보았더니

츄마는 좋은 츄마였다 나는 이제

특별한 여인을 '츄마'라고 부르겠다 나는 이제

너를 츄마라고 부른다 츄마가 된 너는

츄마를 벗고 내가 뭐 하냐? 하고

물으면 뭐 한다 그렇게 대답해야 한다 내가 또

뭐 할래? 하고 물으면 뭐 안 한다 하고 대답해야

한다 다시 내가 또 뭐 하자 하고 제의하면

뭐 하자 하고 화답해야 한다 너는

츄마다 츄마는

 

치마가 츄마가 되었으니

바지는 봐쥐가 되야 되겠다

보X와 자지도 붜쥐와

좌쥐로 해야 되겠다

얼마나 좋으냐 우리가 어찌

시공에 속(屬)한……

 

몸에 좋다는걸

이렇게 많이 먹으니

내가 좋아질 리 있겠냐

 

개소주, 비타민C, 비타민E, 늙은 호박 곤 물

살찌는 약(藥)……

(이건 실제로, '여자'들이 하도 갖다줘서, 내가 먹고 있는 것들이다.)

 

그 성화(盛火)에.

 

고(苦) · 집(集) · 멸(滅) ·도 (道)의 사성제(四聖諦) 그거

다시 걔한테 줘야겠다 걔는

아직도 그

 

다 쓰러져가는 보리수 밑에서

열심히 실실 쪼개고 있다 보리수

밑에서 나무 밑에서 혼자

앉아 있다는 것은 보리수

 

보리수는 어디 갔나 엄마야

보리수는 어디

 

갔나 음악

교과서에 있었는데 그런데

그 보리수는 독일

 

보리수 그

노래는 독일 노래 사람

잡아먹는

 

보리수는

시공을 초월하는구나

 

서른여섯 살짜리 싯달타를

거꾸로 묻고 보리수가

정각(正覺)해 있구나 깨달은 건

언제나 보리수 깨달은 건

주인에게 잡혀 먹힌 똥개

수간(獸姦) 당한 염소

 

깨달은 건

성폭행당한 소녀, 자살(自殺)한

중소기업 사장, 그밖에

 

깨달은 건

그 모두 당(當)한 것들

 

튀김통닭이 되어버린

영계, 뭐 그저

그런 먹거리들 They call

the rising sun***!

 

신음하는

짐승들,

 

전권(全權)을 장악하고 푹, 또 푹 ―

쑤셔박는

haruspex****들이여,

 

'남자(男子)'가,

 

없어져,

 

버렸다!

 

찍 ―.

 

* 필자가 만든, 필자 자신도 무슨 뜻인지 잘 모르는 불가해한, 무의미한 주문(呪文).

** '치마'의 고어(古語).

*** the Animals가 부른 pop-song ‘The House Of The Rising Sun’의 가사를 참조할 것.

**** 창자 점쟁이. 고대 로마의, 제물로 바친 짐승의 창자로 점을 치던 점쟁이.

 

 

 

코리안 고딕

김영승

 

복(伏)날이라고 개들이

아이 좋아, 아이 좋아……

 

토막 난 생(生)낙지처럼

꿈틀대면서도 아이 좋아, 아이 좋아……

 

old Adam이여,

 

미녀(美女)와 귀부인(貴夫人)과

수간(獸姦)을, 아이 좋아, 아이 좋아……

 

긴 혀

더 길게 빼물고 헥헥헥헥헥……

 

'나'처럼 헥헥헥헥헥……

 

흙, 모래

묻힌 자지 길게

질질질질질 더 길게 끌며, 쓸며

 

아이 좋아, 아이 좋아……

 

love hotel에서

'확(鑊)'*에서

나팔꽃처럼, 능소화처럼

불타며, 불야성(不夜城)을 이루며

하늘 높이 하늘을 타고 휘감고 올라가는

 

만개(滿開)한,

 

만개(滿開)하여 구만리(九萬里)

해저(海底),

 

초대형(超大型) 전기 발광(發光) 가오리처럼 펄럭이는,

 

여음(女陰)들, 그 여음(女陰)의 대소(大小)

음순(陰脣)들

 

바라보며 이

이 중복(中伏) 날

 

복중복(伏中伏)의 이

 

복지부동(伏地不動)의 이

폭염(暴炎)의 이, 쥐

 

개 죽은 듯

 

조용한 이

복(伏)날,

 

아이 좋아, 아이 좋아……

 

앵고개** 군치리***엔

암캐, 수캐들이

 

아이 좋아, 아이 좋아……

 

* 팽형(烹刑)을 집행할 때 쓰는 큰 가마솥.

** 필자가 사는 인천의 연수구, 그 송도에서 동춘동으로 넘어가는 고개.

*** 개고기를 안주로 하여 술을 파는 집.

 

 

 

키스

김영승

 

부부간에 키스가 있어야 하는데, 우리 부부는 키스가 없다. 옛날엔 많은 여자들과 키스를 해서 그런지, 하체(下體)만 집어넣고 그저 고진감래겠거니 생각한다.

결혼 지 어언 8년차, 나는 단 한 번도 아내와 키스를 해본 적이 없다.

무슨 놈의 주둥아리가 그저 먹고 중얼중얼 기도나 하는 주둥아린 도대체가 '철무유성(毋流聲)'*이다.

 

"아, 키스나 성교합니다으~"

트림하듯, 옛날 채권 장수마냥, 그렇게 가방 하나 들고 걸어다닐까

굴뚝청소하는 사람처럼, 아, 뚫어~

'징'하나 들고

이 골목 저 골목

역시 옛날

아이스께끼 장수처럼

꽝꽝 얼어붙은 겨울밤

 

메밀묵 장수처럼

찹쌀떡 장수처럼

 

"아저씨, 성교 한 번 해주세요"

드르륵 드르륵

창문을 열고 여자들은 말하리라

 

"2인분(人分)요…"

돈을 건네며 발을 동동 구르리라

 

그런데…

그런데 그까짓 키스 안 하고 살면 안 되냐

내가 언제부터 키스를 하고 살았다고 무슨

키스키스, 이 늦은 밤, 아니 새벽

주접을 떨고 있느냐

 

그렇다면

cunninlingus?

 

석모(釋某) 스님은 수구암(守口庵)이라는 암자에 기거하고 있었는데

가서 보니까 어쩌면 내 방(房)도 수구암(守口庵)

 

입을 벌리면

사자후(獅子吼)같은 천지간(天地間)의 형형색색 만뢰(萬?)가

단조(短調)의 화음(和音)을 이룬다.

 

버스를 기다리는데

무슨 화장품 가방 같은 네모난 가방을 든

독일군 여장교 같은 복장의

글래머가 음험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본다

입을 벌리고 싶어서일까

 

하긴…

 

똥개들이 길거리에서

흘레나 붙을 일이지

서로 키스를 하고 자빠졌다면

그건 또 얼마나 징그러운 일인가

 

잡종(雜種) 개 한 쌍이

거꾸로 붙어

이리 갔다가 저리 갔다가

결국 길을 건너간다

 

아주

'장엄(莊嚴)'해 보였다.

 

* '철毋流聲' 물을 빨아 마실 때에 목구멍을 지나가는 소리를 내지 아니함 - 박지원 <양반전>

 

 

 

태풍(颱風)에 나무......

김영승

 

쏟아붓는 것인지

두레박으로 물을 길어 올리는 것인지

밤새워 두레박

다 때려 부수는 소리

폭우(暴雨) 그치고 이 새벽

비는 더는 안 오고 바람만

분다 태풍(颱風)에 나무는

특히 치솟은 거목(巨木)과 거목(巨木)의 저 숲은 일제(一齊)히

하늘로 빨려 올라가거나 한

방향으로 활처럼 휘면서

나무는

바람과 비의

소리를 낸다

 

나무는

바람과 햇빛과 비

속에서

흙 속에서

나무라는 듯

태풍에

이 태풍(颱風)에 나무는 저

 

숲은 거목(巨木)들은 하늘 향해 오른쪽 70 각도로

한 방향으로 쏠려

하늘이 나무를 다

빨아올리는 것인지 나무들이 일제(一齊)히 자신을

뻗어

물방울을, 빗방울을 터는 것인지 역시 거대(巨大)한

 

탈곡기가 나무들의 대갈통을 손목쟁이를

다 터는 것인지 콸콸 아니면 아예

역시 거대한 빨랫방망이로 펑펑 때리며

빨래를 하는 것인지 이 도심(都心)의

 

나무들이

나무들의 급류(急流)가 결국

천인단애 폭포로

직하(直下)하는 것인지

이 태풍 부는 새벽의

나무들의 만뢰(萬籟)는 풍뢰(風籟)는, 그

악다구니며, 함성(喊聲)이며 구호(口號)며 연호(連呼)며 자기네들끼리의

진언(眞言)이며

그 지상(地上) 최대(最大) 최저(最低) 저음(低音)의

숨소리는

숨소리를,

 

 

 

통곡의 강

김영승

 

꽃이 더는 피지 않는 계절이 나에게도 다시 오면

나는 나가리라

어둠이 걷히지 않은 새벽

하얀 서리가 반짝이는

강의 상류 그 모난 자갈이 있는 곳

게서 무릎을 꿇고

찢어진 무릎에서 핏물이 흘러 그 강 하류를 물들일 때까지

감읍을 지나 통곡하리라

나는 죄인이올시다 나는 죄인이올시다

퇴폐의 이방인이 아닌

찌들은 염세주의자가 아닌 감상주의자가 아닌

나는 구체적이고 명백한 죄인이올시다

사랑하는 사람의 가슴을 난도질했고

그래도 좋다고 그래도 헐레벌떡 독주나 푸고

그의 가슴에 한이 될 엄청난 죄를 지었소이다

다시 살게 하소서

당신은 나를 다시 살게 하소서

내 가슴의 심연에 들어와 가시 철책을 치고

뒤돌아볼 때마다 기웃거릴 때마다

깊숙이 깊숙이 찔리우게 하소서

피 흘리게 하소서

당신은 어디 계십니까

반도의 경기도 또 성남시 그 어느 범부의 딸입니까

당신은 어디 계십니까

팔레스타인의 유대땅 그 어느 목수의 아들입니까

당신은 어디 계십니까

앞에 있어 바라보면 홀연 내 뒤에 있네

내 너덜거리는 가슴 속 그 떨리는 곳에 있네

거대한 강으로 흘러 하얀 돛단배 하나 띄우고 있네

당신은 나를 싣고 어디로 그 어디로 흐르십니까.

 

 

 

팬데믹

김영승

 

원래가

 

공룡한테 물어봤는데

걔들 때도 다

팬데믹이 있었다는데

 

그런데

그러면 다들 그냥

죽으면 되는 거래

 

그래서

다 죽었대

 

그 공룡은 누군데?

 

화석이지

 

오빠는 화석 공룡하고도 대화해?

그럼

 

오빠는 벚꽃하고도 대화해?

그럼

 

오빠는

코로나 바이러스들하고도 대화해?

그럼

 

뭐라고 그랬어?

가라고 그랬지

 

간대?

그럼

 

안 가면?

 

뭐라고 하니까 간대?

뭐라고 안 했어

 

그럼 왜?

오빠 눈빛이 너무 슬프대

 

슬퍼서 간대?

그럼

 

몸은

애초의 원소로 돌아가려는 듯

 

H, Na, C, O, He

Ca, Fe, Mn, Pb

Zn, Cu

 

이런 것들이 소근소근

깔깔깔깔

 

웃겨

웃겨 죽겠어

 

나를 보고

 

경배한다

 

 

 

플랫폼에서 담배를

김영승

 

그게 기차의 건강에 좋다

전동차의

 

기차가 건강해야

사람도 건강한 것이다

 

이 겨울 봄비 내리는 날 밤

용산역 동인천 급행 플랫폼엔

담배보다 해로운 입김들

스마트폰들

지문들

눈빛들

유방들

입술들

혀들

항문(肛門)들

 

거친 숨결들

물들

선혈(鮮血)들

민들레꽃들

음모(陰毛)들

영문(英文)들

 

 

 

한여름 밤의 꿈은 한 컷

김영승

 

나사렛국제병원 앞 공원은

둥그런 공원

느티나무 숲의 이 저녁엔

환자복 입은 여자 환자들이

죄다 나와 산책을 하는데

흐린 장마철인데도 해설피

죽음의 미소가

삶의 찬가가

슬리퍼마다

휠체어마다

그리고 하복(夏服) 입은 소녀들

하얀 블라우스마다

란도셀마다

노인(老人)들, 처녀들

보행(步行)과 율동(律動)마다

빠드뒤처럼

돈 걱정과

장래의 희망처럼

 

그 가운데

지붕 낮은 팔각정처럼

칼레의 시민(市民)처럼

 

나는

삼성 플라자에 가서 아들 MP3 A/S 수리 맡긴 것

찾고

국민은행 현금인출기에 가 10만 원 찾고

750원 짜리 생수(生水) 한 통 사서

바지 오른쪽 뒷주머니에 꽂고

자판기에 가 커피 한 잔 뽑아

벤치에 앉아 있다

 

지겨운가?

이 작은 공원은

건물로 둘러싸인

완전 분지(盆地)

 

북미(北美) 인디언들은

남미(南美) 잉카인들은

나를 찾기

어려우리

󰡒어딨냐?󰡓

외치다가

해가 저문다.

 

 

 

혼절하기 전에

김영승

 

혼절하기 전에

술을 끊자 비구름 바람

거느리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술을 끊자 위경련에

호흡곤란에 진전섬망

석간수(石間水)처럼 하늘의

가장 깊은 곳에서 솟아오르는

술을 끊자 술 마시면

외롭고 그리고

발광(發狂)하게 된다 흐느끼게

된다 혼절하기 직전까지

육체와 영혼을 번갈아

환퇴(幻退)하게 된다

 

― ↑ 바보 김영승의 낙서(落書)

 

'힘'도 없는 놈이 무슨

술은, 무장기갱(無腸嗜羹)도

유분수(有分數)지 무슨

유부녀(有夫女, 아내)를

탐(貪)하느냐 내가

 

바로 내가, 내 자신이

그,

 

유부녀(有夫女)닷!

 

有(多)夫女다…… 나는

 

운다. 혼절도 못 하고, 더는

 

낙서(落書)도 못 하고…… 운다! 혼절하기 전에

술을 끊었으므로.

 

 

 

화창

김영승

 

폭우 쏟아진 뒤

이 화창,

 

그게 죽음이리라

나의 죽음이리라.

 

고추잠자리는

 

첩첩(疊疊) 열두 폭 치마 찢어질 듯 짓푸른

얼음 같은 깊은 하늘과

1:1로 동등(同等)하고

자체로 침묵(沈黙)이다

 

- 적졸(赤卒)*아, 너 산타클로스냐?

나한테도 크리스마스

선물을 주는구나

 

신(神)의 음성이다.

 

* 적의사자(赤衣使者). 고추잠자리의 별칭. 小而赤者曰赤卒 一白絳 - 合今. 註

 

 

 

흐린 날 미사일

김영승

 

나는 이제

느릿느릿 걷고 힘이 세다

 

비 온 뒤

부드러운 폐곡선 보도블록에 떨어진 등꽃이

나를 올려다보게 한다 나는

등나무 페르골라 아래

벤치에 앉아 있다

자랑스러운 일이다

 

등꽃이 상하(上下)로

발을 쳤고

그 휘장(揮帳)에 가리워

나는

비로소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

 

미사일 날아갔던 봉재산엔

보리밭은 없어졌고

애기똥풀 군락지(群落地)를 지나

 

롤러스케이트장 공원

계단 밑 노인(老人)들 아지트는

멀리서 보면 경회루(慶會樓) 같은데

내가 그 앞에 있다

 

명자꽃과 등꽃과

가로등 쌍(雙) 수은등은

그 향기를

바닥에 깐다

 

등꽃은

바닥에서부터 지붕까지

수직(垂直)으로 이어져

꼿꼿한 것이다

 

허공(虛空)의 등나무 덩굴이

반달을 휘감는다

 

급(急)한 일?

그런 게 어딨냐

 

 

 

희망

김영승   

 

164

이 겨울, 허옇게 얼어붙은, 청송감호소라는 지상(地上)의 지옥(地獄), 같은 천국(天國), 같은 대도장(大道場)에서는 오후 3시 30분에 저녁을 먹는단다. 무얼 먹을까.

허옇게 얼어붙은 밥에 펄펄 끓는 뜨거운 물을 부어 소금에 절인 굵은, 검은 왕소금 서걱이는, 시커먼 주먹만 한 무조각과 함께 먹고 있으려니, 마음이 든든하다.

 

 

939

아버지와 단둘이 살던 아이는

아버지의 주검을 곁에 두고

라면을 끓여 먹으며 며칠을 지냈다고 한다.

고아원으로 보내지는 게 싫었기 때문에

아무에게도 아버지의 죽음을 알리지 않았다고 한다.

오, 죽음보다 더 무서운 외로움.

외로움이 죽음보다 무섭다는 사실을

아이는 너무 일찍 깨달아버렸구나.

아버지의 몸 썩는 냄새가

오히려 정겹고

그 곁에 누워 오히려 행복했을

아이의 고요한 밤이 깊어가고 있다.

  

외로움,

죽음보다 무서운

 

 

976

남들이 다듬고 버린

발에 밟혀 질척질척 으깨어지기도 한

김장 배추 무우

억세고 질긴 잎을

어머니는 허락받고 주워와

쭉쭉 손으로 길게 찢어 먹게

익으니까 노르스름 빛깔도 고운

별미의 김치를

얌전히 담궈 놓으셨다

 

나는

정신일도 만사불성인 놈-

 

이 추운 밤

감기 들어 머리가 띵하고

막걸리도 한 잔 마셨으니

뭔가 될 듯도 하다.

 

 

980

007 영화의 손 코네리, 그 병신 같은 새끼도 늙었다. 늙은 새끼는 다 병신

같다. 왜냐하면 늙었으니까.

`칼튼 힐'이라는 스카치위스키 전속 모델이 되었다. 신문광고에서 보았다.

그 글래머 본드 걸들도 다 병신 같은 년들이 되었을 것이다.

 

오늘은 1996년 12월 24일 화요일, 크리스마스 이브.

새벽에 할 일이 없어 가스렌지 후드 그 박스를 분해해서 닦았다. 역시 옥반

가효는 만성고다.

어제는 아내에게 극언을 했다.

 

󰡒이혼이냐 자살이냐……"

또는

󰡒자살이냐 이혼이냐……"

 

아내는 나보다 세 살 병신 같은 년인데, 내년에 마흔세 살이 된다.

나는 `불혹'이다.

 

󰡒기쁘다 구주 오셨네……"

 

오늘은 산타클로스, 그 병신 같은 새끼들이 설칠 것이다.

 

 

989

과일을 잘 먹는 당신

과일을 잘 먹어서, 고맙습니다

 

낮잠을 잘 자는 당신

낮잠을 잘 자서, 고맙습니다

 

옷을 공산당여맹위원장같이 입고 다니는 당신

옷을 공산당여맹위원장같이 입고 다녀서,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아픈 당신,

 

아파서, 고맙습니다.

 

 

991

요즈음 성형수술도 아무나 하는데

얼굴에 긴 칼자국을

그대로 갖고 다니는 사나이는

가난한 사나이다

 

가슴속 깊은 곳에 있는 칼자국을.

 

이 가을

그 사나이의 긴 칼자국만큼의 가난을.

 

얼어붙은.

 

만경창파(萬頃蒼波)

수천억(數千億) 묘 사래 긴 밭을

 

나는

언제 갈려 하나니,

 

눈물이 난다.

 

 

 

Anti-Chiliasm?

김영승

 

그동안 여러 가지로 참

징그러웠소

그럼, 아듀

 

아내는 주말의 명화 <까미유 끌로델>을 보고 있다

참 한심하다 인간은 까미유

 

끌로델이나 보고 있으니 아니

까미유 끌로델을

반복하고

있으니

없으니 더

한심하다 사연도

something도

없으니 돈도

없으니

 

 

 

G7

김영승

 

이 추운 밤 전기도 나가

촛불 세 개를 켜놓고 덜덜, 덜덜덜 떨고 앉아

지금보다 더 덜덜, 덜덜덜덜 떨었던 지난날의 나만을 생각하다가

촛불 한 개를 더 켜놓고 촛불 네 개에 손을 쬐며

'si-la-mi-re'

길이가 다른 양초 도막에 음계를 붙여 놓고

 

시시각각 낮아지는 이상한 악보의

노래를 작곡해놓은 나는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목이 팍 쉬었다,

새벽이 오기 전에

 

도망치자

이 흉측한 <언어의 세계>를 탈출해

도대체 말이 필요 없는 곳으로

 

양초 도막 같은 네 개의

거대한 석주(石柱)만 남아 있는

바람 한 점 없고 고요한

무지무지 밝은 눈부신 곳으로

그 무슨 신비한 문명의 유적 같은

따뜻한 곳으로

 

가서

부지런히 <투표>나 하자

나는 나만을 지지한다고

내가 최고라고

나만이 나의 영도자라고

 

나만이 나의 '노예'라고.

 

 

 

6개의 가로등 조명

김영승

 

여섯 개의 가로등 조명은

나의 형설지공(螢雪之功)

 

작은 목재 단(壇) 같은

직사각형 위에 또 직사각형 이단(二段) 평상(平床)

평상은

작은 실내극

나무 일인극 무대며

평상이고 의자

 

아파트와 아파트 사이

풍림어린이공원 샛길은

 

나목(裸木)들 사이 여섯 개

일곱 개

수십 개

 

상하좌우(上下左右)

멀리서 가까이서

 

쏟아지는 수은등

불빛에

 

이 광야(曠野)의 독방(獨房)에서

나는

 

똑바로 앉아

펜을 들고

경청을 한다

 

종이를 꺼내

무얼 쓰려 해도

쓸 게 없다

 

공부가 다 끝났으니

나는 그저 일어나

집으로 갈 뿐이다

 

그리고 잠깐

나한테 많은 것을 배운

 

가로등이 나무가

인사를 한다

 

일제히

그 빛과

그림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