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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갈래 오솔길이 나 있는 정원

두 갈래 오솔길이 나 있는 정원

Jorge Luis Borges

 

리델 하트(Liddel Hart)의 유럽 전쟁사 24쪽에는 영국군 13개 사단이 1400문의 포 지원하에 1916724일 자로 세르-몽또반 국경선을 공격하기로 계획하였으나 29일 아침까지 연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리델 하트 대위의 주석에 따르면 그 계획은 폭우 때문에 연기되었던 것으로, 분명 별 의미가 없다. 그러나 한때 칭따오(靑道) 독일계 대학의 영어 교수였던 유춘 박사가 구술하고, 다시 읽게 한 다음, 서명을 한 다음의 진술서는 그 사건을 명확하게 밝혀준다. 이 글의 처음 두 페이지는 유실되었다. "..... 그리고 나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나는 독일어로 대답한 목소리를 즉시 알아차렸다. 리차드 마든 대위였다. 마든이 빅토르 루네베르그 방에 있다는 것은 우리들의 일뿐만 아니라, (이차적으로) 우리의 목숨조차도 끝장이 났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것은 루네베르그가 체포되었거나 살해당했음을 뜻했다. 그 날 해가 떨어지기 전에 나도 루네베르그와 같은 운명에 떨어질 수도 있는 처지였다. 마든은 무자비한 사람이었다. 무자비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영국의 명령을 받는 아일랜드인, 태도가 미심쩍고 반역의 소지가 있다고 의심받는 그가 독일 제국의 간첩 둘을 적발해서 이들을 체포하거나 죽일 수도 있는 절호의 기회를 어찌 마다하겠는가?

나는 내 방으로 올라갔다. 어리석게도 열쇠로 문을 잠근 후, 좁다란 철제 침대에 드러누웠다. 창문에는 눈에 익은 지붕과 구름에 반쯤 가린 여섯 시의 태양이 걸려 있었다. 아무런 사전 경고도 징조도 없던 날에 내가 무자비한 죽임을 당하리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내 아버지가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대칭적으로 꾸며진 하이펭의 정원에서 놀던 아이였는데도 불구하고 이제 내가 죽어야 한다는 말인가? 모든 사건들은 정확하게 말해서 현재에만, 그리고 한 사람에게만 일어난다고 생각했다.

세기에 세기가 거듭되어도 오직 현재에서만 사건은 발생하며, 하늘과 땅과 바다에 수많은 사람들이 있어도 실제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나에게만 일어나는 일이다... 말대가리 같은 마든의 얼굴이 아른거려서 이런 한가한 상념에만 젖어 있을 수는 없었다. 나는 증오와 공포(나는 리차드 마든을 골려먹었고, 지금은 목에 밧줄이 걸리기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공포에 대해 얘기해도 상관없다)를 느끼며, 틀림없이 행복감에 마음이 들떠 있을 저 대위 자식은 내가 일급비밀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앙크르 지방 부근에 재집결하는 영국 포병대의 정확한 집결지 지명이 바로 그 비밀이었다. 새 한 마리가 잿빛 하늘을 가로질러 갔다. 나는 그 새가 한 대의 비행기라고, 곧이어 (프랑스 하늘에 떠서) 폭탄을 투하해 포병 집결지를 초토화시키는 수많은 비행기라고 턱없는 상상을 했다. 한 발의 탄환이 내 목을 뚫기 전에 독일에서 그 지명을 들을 수 있도록 목청껏 소리지를 수만 있다면... 보잘것없는 한낱 인간의 목청으로 어떻게 '사령관'의 귀에 그 소리가 들리게 한단 말인가? 우리가 스태포드셔에 있다는 사실 외에는 루네베르그나 나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으며, 막연히 우리들의 소식을 기다리며 베를린의 삭막한 집무실에서 끊임없이 신문을 뒤적거리고 있을 저 가증스럽고 병적인 인간의 귀에 말이다.

"도망쳐야 해." 나는 큰 소리로 말했다. 진작부터 마든이 나를 정탐하고 있기라도 하듯이, 나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으려고 공연히 조심스럽게 일어났다. 나는 무언가를 -내가 의지할만한 수단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확인해보고 싶다는 괜한 생각 때문에 호주머니를 뒤져보았다. 이미 예상하고 있던 것들뿐이었다. 미제 시계, 니켈 줄이 달린 네모난 동전, 이제는 위험하기만 할 뿐 쓸모가 없는 루네베르그 방의 열쇠가 달린 열쇠꾸러미, 통장, 즉시 파기해야겠다는 생각이 든 (그러나 결국 파기하지 않은) 편지, 크라운 화() 한 개, 2실링하고 동전 몇 개, 빨강 파랑이 같이 든 색연필 한 자루, 손수건, 실탄 한 발이 장전된 권총이 전부였다.

나는 괜스레 권총을 손에 들고 무게를 가늠해 보았다. 용기를 얻기 위해 그렇게 해보았다. 한 발의 총성은 아주 먼 곳까지 들릴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이 떠올랐다. 10분 뒤, 나의 계획은 무르익었다. 전화번호부를 뒤적거려 그 정보를 전파해줄 유일한 사람의 이름을 찾아냈다. 그는 팬튼 교외에 살고 있었다. 기차로 30분도 채 안 되는 거리였다. 나는 비겁한 인간이다. 아무도 위험스럽게 여기지 않을 그 계획을 완수한 지금이니까 이렇게 말하지만 사실 그 계획을 실행에 옮기는 것은 겁나는 일이었다.

독일을 위해 그 일을 한 것은 아니다. 결코 그렇지 않다. 나에게 비열한 간첩 노릇을 하도록 강요했던 야만적인 국가는 조금치도 중요하지 않다. 게다가, 내가 보기에는 괴테 못지 않은 영국인 -그는 겸손한 사람이었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그와 한 시간 남짓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한 시간 동안에 그는 괴테였다. 내가 그 일을 한 것은 '사령관'이 내 종족을, 나를 낳아준 무수한 선조들을 얕잡아보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나는 황인종 하나가 그의 군대를 구원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싶었다. 더군다나 나는 대위에게서 도망치지 않으면 안되었다. 대위의 손과 목소리가 언제 내 방문을 두드릴지 몰랐다. 나는 조용히 옷을 입고,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고 작별 인사를 했다. 그리고 계단을 내려와 고요한 거리 여기저기를 살펴본 다음, 밖으로 나섰다.

기차역은 집에서 그다지 멀지 않았지만 자동차를 타는 편이 나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발각될 염려가 적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누군가가 인기척 없는 그 거리에서 끊임없이 나를 노려보고 있다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운전사에게 역 중앙 출입구 조금 못 미치는 곳에 차를 세워달라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나는 조급한 마음을 애써 누르며, 일부러 천천히 차에서 내렸다. 애쉬그로브 마을이 나의 목적지였으나 이보다 더 먼 곳에 있는 기차역 표를 끊었다. 기차는 불과 몇 분 안에, 그러니까 850분에 떠나는 것이었다. 나는 서둘렀다. 다음 기차는 930분이었다.

플랫폼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나는 기찻간을 훑어보았다. 노동자 몇 사람, 상복을 입은 여인, 타키투스의 역사책에 몰두한 청년, 부상을 입었으나 이를 다행스럽게 여기는 군인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드디어 기차가 출발했다. 내가 아는 자가 플랫폼 끝까지 뛰어 왔으나 소용없는 짓이었다. 그는 리차드 마든 대위였다. 혼비백산한 나는 부르르 떨면서 되도록이면 으스스한 유리창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통로 쪽에 앉아 몸을 움츠렸다. 처음에는 가슴이 철렁했으나 점차 조금은 비열한 행복을 느끼게 되었다. 결투는 이미 시작되었으며, 40분 때문에 그렇게 되었든 아니면 우연 덕분에 그렇게 되었든 간에 내 적수의 공격을 우습게 만듦으로써 첫 번째 접전에서 승리하게 되었다고 나는 중얼거렸다.

그 작은 승리는 완전한 승리를 미리 나타내주는 것이었다. 생각건대, 그것은 작은 승리가 아니었다. 기차 출발 시간이 조금 늦어 그 황금 같은 시간차가 없었다고 한다면 나는 잡혀갔거나 죽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치사스런 행복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은 바로 그 일을 성공적으로 완수할 능력이 있는 인물임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이는 궤변이나 다름없다). 나는 차츰 무력감에서 벗어나 생기를 되찾았다. 예견하건대, 인간은 날이 갈수록 더 잔혹한 일에 몸을 내맡길 것이고, 따라서 이내 전사(戰士)들과 도적들밖에 남지 않을 것이므로 그들에게 다음과 같은 충고를 하고자 한다.

"잔혹한 일을 저지르는 자는 그런 일은 이미 완수되었다고 생각해야만 하며, 과거와 마찬가지로 미래도 돌이킬 수 없다고 믿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 이미 죽은 거나 다름없는 인간으로서의 나의 두 눈은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그 날이 흘러가는 모습, 어둠이 깔리는 광경을 유심히 새겼다. 기차는 물푸레나무 사이로 미끄러지듯이 달리고 있었다. 들판 한복판이나 다름없는 곳에서 기차가 멈추었다. 아무도 역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여기가 애쉬그로브지?" 나는 플랫폼에 있던 아이들에게 물어보았다. "애쉬그로브가 맞아요." 그들이 대답했다. 나는 기차에서 내렸다. 가로등이 플랫폼을 비추고 있기는 했으나 아이들의 얼굴은 어둠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그들 가운데 한 아이가 내게 물었다. "스테펀 앨버트 박사님 댁으로 가세요?" 내가 미처 대답할 겨를도 없이 다른 아이가 말했다.

"그 집은 여기서 멀어요. 하지만 아저씨가 왼쪽으로만 가시면 길을 잃지는 않으실 거에요. 갈림길이 나오면, 그때마다 왼쪽으로 꺾으세요." 나는 아이들에게 동전을 던져주고(마지막 남은 동전이었다) 돌계단을 내려와 한적한 길로 들어섰다. 완만한 내리막길이었다. 포장이 안 된 흙길이었고, 머리 위로는 나뭇가지들이 얽혀 있었다. 나지막하게 떠 있는 둥근 달이 나와 동행하는 것 같았다. 한순간, 나는 리차드 마든이 어떤 방식으로든 내 필사적인 계획을 간파하고 있다는 생각이 잠시 떠올랐다. 그러나 곧 그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항상 왼쪽으로 꺾어지라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그것이 몇몇 미로의 중심을 찾아가는 일반적인 방법이라는 것을 기억해냈다.

나는 미로에 대해서 조금은 알고 있었다. 내가 괜히 취팽의 증손자이겠는가. 운남성 성주였던 그분은 홍루몽보다도 더 많은 등장인물들이 나오는 소설을 쓰고, 또 어떤 사람이라도 길을 잃게 될 미로를 만들기 위해서 세속적인 권력을 버렸다. 이 두 이질적인 작업을 하느라고 13년이란 세월을 바쳤으나 낯선 사람의 손에 피살되고 말았다. 그분의 소설은 도대체 가닥을 잡을 수가 없었으며, 미로를 발견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영국 땅의 나무들 아래를 지나면서 아직 찾지 못한 미로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 미로는 아무도 모르는 어느 산 정상에 흠집도 없이 고스란히 남아 있을 것이라고 상상하기도 했고, 논밭에 묻혀버렸거나 물에 잠겨버렸을 것이라고 상상했으며, 또 무한하게 큰, 그러니까 팔각정이나 끼고 도는 오솔길 정도가 아니라 강과 성()과 왕국 등속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상상하기도 했다.

그리고 미로들로 이루어진 미로에 대하여 생각해보기도 하고, 과거와 미래를 포괄해 나가면서 어떤 형태로든 천체까지도 포함하느라고 복잡하게 뻗어나가는 미로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이러한 환상적인 생각에 몰두한 나머지 내가 쫓기는 신세라는 것도 잊어버렸다. 문득, 내 자신이 세계를 추상적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살아 숨쉬는 막막한 들과 달과 그 밖의 것들이 나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조금도 피곤한 느낌을 주지 않는 내리막길도 마찬가지였다. 저녁은 다정하고, 무한했다. 길은 내려가다가 이제는 분간할 수도 없는 벌판에서 두 갈래로 갈라지곤 했다. 한 가닥 음악 소리가 바람에 실려 가까워졌다 멀어져가곤 했다. 높은 음정의 그 소리는 거리 때문에, 나뭇잎 때문에 아련하게 들렸다. 한 인간은 다른 사람들의 적이 될 수 있고, 적이 아니었을지라도 어떤 순간에 적이 될 수는 있어도 한 나라의 적이 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반딧불, 언어, 정원, 물줄기, 서풍과 적이 될 수 없듯이 말이다. 이런 생각에 잠기다보니 녹이 슨 커다란 대문에 다다랐다. 격자문 사이로 포플라 나무 오솔길과 정자 같은 건물이 보였다. 나는 그 음악이 정자 같은 곳에서 흘러나오고 있다는 사실과 아울러 그것이 중국 음악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처음 것이야 사소한 것이지만, 그 음악이 중국 음악이라는 사실은 선뜻 믿기 어려웠다. 그래서 별다른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는데도 그 음악이 가슴에 와 닿았던 것이다. 내가 초인종을 눌렀는지, 아니면 손으로 문을 두들겼는지는 기억에 없다. 쨍쨍거리는 음악소리는 계속됐다. 그런데 집의 뒤편에서 등불 하나가 다가오고 있었다.

이따금 나무둥치들을 비추었다가 가렸다가 하며 다가오는 북 모양의 등불은 달빛을 닮은 지등(紙燈)이었다. 키가 큰 한 남자가 그것을 들고 오고 있었다. 나는 눈이 부셔 그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그가 대문을 열었고, 나의 모국어인 중국어로 느릿느릿 말했다. "자비로운 시팽 씨가 나의 고독을 덜어주려고 이렇게 방문자들을 보내주시는군요. 선생께서도 정원을 보고 싶어 찾아오신 거겠지요?" 나는 우리 중국 영사들 중 한 사람의 이름이 시팽이라는 게 기억났다. 그러나 어리둥절해 되물었다. "정원이라뇨?"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오솔길의 정원 말입니다." 무엇인가가 내 기억 속을 헤집고 일어났다. 나는 스스로도 놀랄 만치 확신에 차서 말했다.

"내 조상 취팽의 정원이군요." "당신 조상이라구요? 그 고명하신 분이 당신의 조상이라구요? 들어오시지요." 축축한 오솔길은 마치 내가 어린 시절에 노닐곤 했던 그 오솔길들처럼 꾸불꾸불했다. 우리들은 동서양의 책들이 즐비하게 꽂혀 있는 한 서재에 이르렀다. 나는 노란 비단으로 장정한 몇 권의 책이 바로 명나라의 3대 황제가 편찬을 명했으나 한 번도 출판된 적이 없이 사라진 백과사전의 원고들임을 알아볼 수가 있었다. 구리 불사조 상 옆에 있는 축음기 위에서는 레코드판이 돌아가고 있었다. 나는 또한 주홍 자기 하나와, 우리의 장인들이 페르시아의 도공들로부터 배워온 옛 청자를 하나 보았던 기억이 난다... 스테펀 앨버트는 미소를 띤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이미 내가 말한 대로) 키가 아주 컸고, 예리한 인상의 얼굴에 잿빛 눈과 잿빛 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그는 약간 성직자 같은 풍모를 지니고 있었고, 한편으로는 선원 같은 느낌을 풍기기도 했다. 잠시 후 그는 내게 "중국학 학자가 되기 전" 자신이 한때는 텐진에서 선교사 생활을 했다는 것을 들려주었다. 우리는 앉았다. 나는 길고 낮은 소파에, 그는 창문과 키가 큰 원형 벽시계를 등진 채 앉았다. 나는 추적자인 리차든 마든이 한 시간 안에는 도착하지 못할 거라는 계산이 섰다. 나의 결심은 돌이킬 수 없었지만 기다릴 수는 있었다. 스테펀 앨버트가 말했다. "취팽의 운명은 놀랄만한 것이었습니다. 자기 고향인 운남성 성주였던 그 분은 점성술과 천문학에 밝았고, 왕성한 경전 주해자였으며, 장기의 명인이자 시와 서예로도 이름을 떨친 분이었지요. 하지만 그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책을 쓰고 미로를 만들기 위해서 말입니다. 호령하고 판결하는 즐거움, 그리고 수많은 연회와 침상의 쾌락뿐만 아니라 해박한 지식으로 누릴 수 있는 기쁨마저 버리고 13년 동안 청고정(淸孤停)에 은거한 것입니다. 그 분이 돌아가셨을 때 상속자들이 발견한 것이라고는 혼란스러운 원고 뭉치뿐이었습니다. 당신도 모르지는 않겠지만, 가족들은 그 원고를 불 속에 던져 버리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분의 유언 집행인 -도교나 불교의 승려였던 것 같은데-은 출판하자고 우겼습니다." "취팽의 피를 이어 받은 우리는 지금도 그 승려를 저주하고 있습니다."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 책을 출판한 것은 무모한 짓이었습니다. 그 책은 모순투성이의 초고들을 아무렇게나 모아놓은 것에 불과합니다.

저도 언젠가 그 책을 살펴본 적이 있습니다만, 3장에서 주인공이 죽었는데 4장에서는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선조 취팽의 다른 작업, 그러니까 미로에 관해서는..." "여기에 그 미로가 있습니다." 그는 라카칠을 한 높다란 책상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나는 그의 말에 놀라서 소리쳤다. "상아로 만든 미로군요! 아주 작은 미로..." "상징들의 미로이지요." 그는 이렇게 정정한 다음, 말을 이었다. "보이지 않는 시간의 미로랍니다. 그 자명한 신비가 영국 오랑캐인 나에게 모습을 드러낸 것입니다. 백 년도 더 지난 지금에 와서 상세한 내막을 밝혀내기란 힘들지만 사정이 어떻게 된 것인가를 추정해보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취팽은 처음에 "나는 책을 한 권 쓰려고 은퇴한다"고 말했을 것이고, 다음번에는 "나는 미로를 하나 만들려고 은퇴한다"고 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걸 두 가지 일로 생각한 것입니다. 미로와 책이 같은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것이지요. 청고정은 아마 복잡한 정원 한 가운데에 세워졌을 것입니다. 바로 이 사실 때문에 사람들은 물리적인 미로 같은 것이 있을 것이라고 짐작했을 것입니다. 취팽은 죽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그 분이 소유하고 있던 광활한 영지에서 미로를 찾아내지는 못했습니다. 나는 혼란스러운 그 소설을 보고 그 혼란스러움이 미로라는 암시를 받았습니다. 두 가지 단서 때문에 그 문제에 대한 바른 답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 하나는 취팽이 엄격한 의미로서의 무한한 미로를 만들려고 구상하고 있었다는 자못 흥미로운 전설이고, 또 하나는 제가 발견한 편지 조각입니다." 앨버트는 일어섰다. 그는 잠시 동안 내게 등을 돌리고 서 있었다. 광택이 나는 검정 색 책상 서랍을 열더니 종이를 한 장 꺼내들고 돌아섰다. 네모난 그 종이는 원래 진홍색이었으나 지금은 빛이 바래 분홍색으로 변하고 글씨도 흐릿했다. 취팽은 확실히 명필이었다. 나는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선조께서 세필로 적어놓은 글을 유심히 읽어보았다. 그 편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나는 끝없이 갈라지는 오솔길의 정원을 다양한 미래(모든 미래는 아니지만)에 남기노라." 나는 잠자코 그 종이쪽지를 돌려주었다.

앨버트는 말을 이었다. "이 편지를 발견하기 전에 한 권의 책이 무한해질 수 있는 방법은 어떤 것일까? 하고 자문해 보았습니다. 주기적으로 순환하는 책을 쓰는 것 이외의 다른 방법은 생각할 수 없었지요. 마지막 페이지와 첫 페이지 동일한 책 말입니다. 이런 책이라면 무한히 계속될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천일야화}에 나오는 어느 날 밤의 이야기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세헤라자드 왕비가 천일야화의 이야기를 문자 그대로 반복하기 시작하는 밤의 이야기(어쩐 일인지 필경사가 정신이 없어서 그랬지만) 말입니다. 이는 그 이야기를 했던 밤으로 다시 돌아갈 위험이 있으며, 그렇게 되면 끝이 없게 됩니다.

그리고 이상적이기는 하지만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세습되면서 새 세대들이 각기 한 장씩을 덧붙이거나, 효성스럽게 조상들이 쓴 부분들을 수정하는 작품도 상상해보았습니다. 이러한 추측들은 재미난 것이지만 그 중 어느 것도 앞뒤가 안 맞는 장들로 구성된 취팽의 소설과 부합되기는커녕 엇비슷하게 맞지도 않았습니다. 그처럼 쩔쩔매고 있는데 옥스퍼드에서 당신이 방금 본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 당연하지만 저는 그 구절, "나는 끝없이 갈라지는 오솔길의 정원을 다양한 미래(모든 미래는 아니지만)에 남기노라"에서 머뭇거렸지요. "끝없이 갈라지는 오솔길의 정원"이 그 혼란스러운 소설이라는 사실을 즉각 알아차렸습니다. 그리고 "다양한 미래(모든 미래는 아니지만)"에서는 그것이 공간상의 분기가 아니라 시간상의 분기라는 착상을 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작품을 재차 통독함으로써 이 이론을 확인하였습니다. 모든 소설이 그렇지만 작가들은 매번 여러 가지 가능성과 마주치게 되는데, 그는 하나를 선택하고 다른 나머지들은 버리게 됩니다. 그러나 취팽의 소설 속에서는 모든 것이 -동시에- 선택됩니다. 이렇게 해서 그는 끝없이 증식하고 갈라지는 다양한 미래들, 다양한 시간들을 '창조'하는 것입니다. 그 소설의 수많은 모순은 바로 여기서 기인하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황이라는 사람은 어떤 비밀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낯모르는 사람이 문을 두드립니다. 그래서 황은 그를 죽이기로 결심했습니다. 물론, 여러 가지 결말이 가능하지요. 황이 침입자를 죽일 수도 있고, 침입자가 황을 죽일 수도 있으며, 양자 모두 살 수도 있고, 또 양자가 모두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 밖의 가능성도 있지요. 아무튼 취팽의 작품에서는 모든 결말이 다 일어나며, 각각의 결말들은 또 다른 갈림길의 출발점이 됩니다. 때때로 그 미로의 갈림길들은 한 곳에 모아지기도 합니다.

예컨대, 당신은 우리 집에 와 있지만 가능한 과거들 중 어느 한 과거에 당신은 저의 적이고 또 다른 과거에서는 저의 친구입니다. 제 발음이 좋지는 않지만 당신이 양해하여 주신다면 몇 페이지를 읽어보도록 하지요." 밝은 등불 아래로 드러난 그의 얼굴은 분명 노인의 얼굴이었으나 쉽게 깨뜨릴 수 없고 또 결코 죽지 않을 무언가가 있었다. 그는 서사시로 이루어진 장에서 두 이야기를 골라 또박또박 읽어나갔다. 처음 이야기는 어떤 군대가 황폐한 산을 넘어 전장으로 진군한다. 그런데 바위와 유령 때문에 공포에 질린 병사들은 생명을 가볍게 여기게 되어 전투에서 쉽게 승리한다는 내용이고, 두 번째 이야기는 같은 군대가 축제가 열리고 있는 궁성을 지나가게 되는데, 병사들은 불꽃 튀는 전쟁을 축제의 연장으로 생각해 승리를 거둔다는 내용이다.

나는 그 오래된 허구적 이야기를 제법 경건하게 경청했다. 아마 나는 그 이야기 자체보다 그것이 나와 피를 나눈 사람에 의해 쓰여졌고, 서구의 어느 섬나라에서 필사적인 모험을 하고 있는 나에게 중국에서 멀리 떨어진 어느 제국의 사람에 의해 내게 다시 복원되고 있다는 것에 더욱 감동을 하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매 이야기의 마지막에서 암호처럼 반복되던 구절이 생각난다. "이와 같이 영웅들은 싸웠다. 감탄스러우리만치 그들의 가슴은 평온했고, 칼날은 격렬했다. 그들은 죽고 죽이는 일에 체념했던 것이다." 그 순간부터 내 주변에서, 내 몸 어느 구석에서, 보이지도 않고 만질 수도 없는 어떤 우글거림을 느꼈다.

그것은 갈라졌다가 나란히 가고 종래에는 하나로 합쳐지는 군인들의 우글거림이 아니라 그보다는 훨씬 파악하기 어렵고 훨씬 내면적이며, 그 군인들이 어떤 형태로든 감지하고 있었던 일종의 동요 같은 것이었다. 스테펀 앨버트는 말을 이었다. "당신의 고명하신 선조께서 심심파적으로 갖가지 변주 놀이를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한 가지 수사학적 실험을 무한히 되풀이하는 데 13년이라는 세월을 바쳤으리라는 것도 설득력 있는 견해는 아닙니다. 당신 나라에서는 지금도 소설이 하급 장르입니다만 그 시절에 있어서 소설은 천하게 여기는 장르였지요. 취팽은 천재적인 소설가였으나 단순히 소설가라고만 할 수 없는, 학자이기도 했습니다. 동시대 사람들의 증언을 살펴보면 선생이 형이상학적이고 신비적인 취향을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또 선생의 삶이 그런 점을 잘 보여주고 있기도 합니다. 철학적 논쟁이 소설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데, 여러 가지 문제들 가운데서도 시간이라는 심오한 문제만큼 그가 고심하고 파고든 문제는 없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아무튼 이것이 {정원}의 어느 페이지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유일한' 문제입니다. 그는 '시간'을 의미하는 단어조차 사용하지 않고 있습니다. 당신은 이러한 고의적인 누락을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나는 여러 가지 해답을 제시했으나 그 어느 것도 불충분한 대답이었다. 우리는 토론을 했다. 마침내, 스테펀 앨버트는 이렇게 말했다. "장기에 관한 수수께끼에서 금하는 유일한 낱말은 무엇이겠습니까?" 나는 잠시 생각한 다음 대답했다. "장기라는 단어입니다." "맞습니다." 앨버트가 말했다. "{끝없이 갈라지는 오솔길의 정원}은 거대한 수수께끼, 즉 비유담이며, 그 주제는 시간입니다.

바로 이와 같은 중대한 의미가 숨어 있기 때문에 그 소설에서는 이 명사가 언급될 수 없었던 것이지요. 언제나 하나의 낱말을 생략하고 부적절한 은유와 자명한 부연 설명을 사용하는 것은 아마 이 낱말을 지칭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일 것입니다. 이것은 완곡한 성격을 가진 취팽이 자신의 끝없는 소설에서 두서없는 일화마다 애용한 에둘러 말하기 방법이기도 합니다. 나는 수많은 필사본을 대조해서 필경사의 부주의로 생겨난 오류를 바로잡았습니다. 그리고 그 무질서의 원안을 추정해보았습니다. 이런 식으로 애초의 순서를 복원하여 -복원했다고 믿습니다- 작품 전체를 해석해보니 그분이 시간이라는 단어를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이 분명하게 드러났습니다.

이제 그 작품에 대한 설명은 명확해졌습니다. 다시 말해서 {끝없이 갈라지는 오솔길의 정원}은 우주에 대한 취팽의 인식을 그대로 보여주는, 불완전해도 그릇되지는 않은 하나의 우주관입니다. 당신의 선조께서는 뉴튼이나 쇼펜하우어와는 달리 절대적이고 등질적인 시간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는 무수한 시간의 연속체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갈라지고 모아지고 나란히 가는 시간들이 어지럽게 얽혀 퍼져가는 그물 같은 것이죠.서로 가까워지기도 하고, 나누어지기도 하고, 단절되기도 하며, 때로는 오랜 세월을 두고 서로 무관하기도 한 시간의 그물은 '모든' 가능성을 담고 있습니다. 그 대부분의 시간들에서 우리는 존재하지 않으며, 다른 시간들에 있어서 나는 존재하고 당신은 존재하지 않으며, 또 다른 시간들에 있어서 우리는 둘 다 존재합니다.

지금 이 시간에, 나에게 바람직스런 우연이 닥친 이 시간에, 당신은 우리 집에 오셨지만 다른 시간에, 당신이 정원을 지나갔을 때 당신은 죽어 있는 나를 발견하였습니다. 그리고 다른 시간에서 나는 지금과 똑같은 말을 하고 있지만 그러한 나는 하나의 실수, 즉 하나의 환영입니다." "모든 것에 대해 감사를 드리고, 취팽의 정원을 복원하신 것에 대해 경의와 감사를 표합니다." 내가 이 말을 할 때 떨리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는 미소를 머금은 채 낮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모든 것에서가 아니지요. 시간은 수없는 미래들을 향해 영원히 갈라져 나갑니다. 그 중 어느 시간에서 나는 당신의 적입니다." 나는 다시금 앞서 말한 우글거림을 느꼈다. 그 집을 둘러싸고 있는 축축한 정원에는 보이지 않는 무수한 사람들이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사람들이란 바로 다른 차원의 시간들에서 여러 가지 모습으로 은밀하고 분주하게 움직이는 앨버트와 나였다. 나는 눈을 들었다. 그러자 그 어렴풋한 악몽이 사라졌다. 노랗고 거므스름한 정원에 한 남자가 있었다.

그 사람은 단단한 동상 같았다. 그러나 그는 오솔길을 따라 걸어오고 있었다. 리차드 마든 대위였다. 나는 대답했다. "그 미래는 이미 존재합니다. 하지만 저는 당신의 친구입니다. 그 편지를 다시 볼 수 있을까요?" 앨버트는 일어섰다. 우뚝 선 채 그는 높다란 책상 서랍을 여느라고 잠시 내게 등을 돌렸다. 나는 준비해 온 권총을 조심스럽게 당겼다. 앨버트는 비명을 지를 겨를도 없이 쓰러졌다. 단언하지만 그는 즉사했다. 섬광 같은 죽음이었다. 그 밖의 것들은 비현실적이며, 또 중요하지도 않다. 마든이 뛰어들어와 나를 체포했다. 나는 교수형을 언도 받았다. 혐오스럽지만 나는 승리했다.

베를린에다 독일군이 공격해야 할 지명을 알려주었던 것이다. 어제 그 도시는 폭격을 받았다. 유춘이라는 정체불명의 인물이 중국학 학자 스테펀 앨버트를 암살한 수수께끼 같은 사건을 보도한 바로 그 신문에서 이 폭격 기사를 읽었다. 사령관은 그 수수께끼를 풀었던 것이다. 사령관은 내가 앨버트라는 지명을 (전쟁의 와중에서) 알려야 했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그런 이름을 가진 사람을 죽이는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는 나의 끝없는 회한과 피로를 모른다(그 누구도 알 수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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