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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의 길

고난의 길

Herman Hesse

 

나는 좁은 골짜기 입구의 어두운 바위문 곁에 서서 망설이다가 갑자기 몸을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녹색의 상쾌한 세계 위로 태양이 빛나고, 초원에는 암갈색 비슷한 풀꽃이 바람에 흔들리며 반짝이고 있었다.

그곳에는 아늑함과 상쾌함이 있었다. 따사함과 알맞은 쾌적함이 있었다.

향기로운 내음이 넘치는 영혼과 빛으로 가득 찬 산벌의 날개소리처럼 깊고 만족스러운 산들바람의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저런 모든 것들을 버리고 산 속으로 올라가려 하다니, 나는 필경 어리석은 자일 것이다.

안내인은 가만히 내 팔을 잡았다.

나는 상쾌한 목욕물에서 마지못해 나오듯이 기분좋은 경치에서 하는 수 없이 눈길을 돌렸다.

그러나 좁은 골짜기 햇살이 닿지 않는 암흑 속에 누워 있는 것이 보였다.

검은 한 줄기 개울물이 바위 틈 사이에서 새어나오고 있었다.

그 주위에는 빛 바랜 풀이 작은 묶음을 이루어 듬성듬성 돋아나 있었다.

개울물 밑바닥에는 온갖 빛깔의 물에 씻겨내린 암석이 전에는 싱싱했을 생물의 화석처럼 완연히 바래져 누워 있었다.

"잠시 쉬었다 갑시다." 나는 안내인에게 말했다.

그는 대범하게 미소를 지었다.

우리는 자리에 앉았다. 서늘하고 상쾌한 바위였다.

바위문에서 돌처럼 차가운 음산한 공기가 물줄기처럼 흘러나왔다.

안 돼, 안 돼. 이런 길을 가다니! 이런 불쾌한 바위문을 지나가야 하다니. 이렇게 차가운 시냇물을 건너서 좁고 험한 어둠 속을 기어 올라가야 하다니, 정말 싫다!

"길이 무척 험해 보이는군요."

나는 주저하면서 말했다. 나의 마음속에는 주저와 후회가 격렬하게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되돌아 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안내인을 설득할 수 있을지도, 이런 짓을 하지 않아도 될지 모른다.

그렇다, 대체 안 될 까닭이 무엇인가?

우리가 떠나온 그곳이 어두운 동굴 속보다 천 배나 아름답지 않았는가?

그곳에서는 생활이 보다 밝고 따사롭고 기분 좋게 흐르고 있지 않았던가?

그리고 나는 약간의 행복과 햇살을 막아주는 작은 그늘과 푸른 하늘과 꽃으로 가득 찬 자그마한 뜰만 가지면 만족하는 소박한 욕심을 지닌 인간, 덧없는 생명의 순진한 존재가 아니었던가?

그렇다. 나는 그곳에서 머물고 싶었다.

나는 영웅이나 순교자의 역할을 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골짜기에서 편안한 생활을 할 수 있다면 평생 만족할 작정이었다.

나는 어느새 온몸에 한기가 들었다. 이곳에서는 오래 있을 수가 없었다.

"추우신 모양이군요?"

안내인은 이렇게 말했다.

"걷는 편이 훨씬 낫지요."

그리고 그는 일어서서 잠시 기지개를 켜더니 웃으면서 나를 바라 보았다.

그 미소에는 비웃음도 동정도 엄격함도 보살핌도 없었다.

거기에는 오직 이해와 마음을 꿰뚫어보는 통찰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 미소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나는 당신을 알고 있소. 당신이 느끼고 있는 불안을 알고 있지요. 어제와 그저께 말한 당신의 큰소리를 나는 결코 두려워하고 있지 않아요. 지금 당신의 넋의 겁에 질린 절망적인 토끼뜀도, 저쪽의 아늑한 햇살로 보내고 있는 추파도 나는 모조리 알고 있다오. 당신이 그렇게 하기 훨씬 전부터 말이오.'

안내인은 이런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더니 어두운 바위 골짜기 안으로 첫걸음을 옮겨놓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를 미워하면서도 사랑했다.

선고를 받은 자가 자기 목 위의 도끼날을 미워하면서도 사랑하듯이.

그러나 나는 무엇보다도 그의 모든 것을 아는 듯한 지식과 안내인의 신분과 냉정함과 그리고 인간적인 약함이 없는 것을 미워했다.

그리고 나 자신의 마음 속에서 그를 옳다고 여기고, 시인하고, 그와 동류가 되어 그를 따르려 하는 모든 것을 미워했다.

그는 벌써 몇 걸음 앞서서 걷고 있었다. 돌 위를, 검은 샘물을 건너, 그리고 처음 나타난 바위 모서리를 돌아 바야흐로 나의 시야에서 사라지려 하고 있었다.

"잠깐."

나는 불안에 가득 차서 소리질렀다.

잠에서 깨어나는 것처럼 이 가공스러운 일에서 벗어날 수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면서.

"잠깐 기다리라구요!"

나는 다시 외쳤다.

"나는 갈 수가 없어요. 아직 준비가 안 돼 있어요."

안내인은 멈춰서서 조용히 이쪽을 바라보았다.

비난은 담겨져 있지 않았으나 그 무서운 이해와 견디기 힘든 눈빛과 꿰뚫어보는 통찰과 예감으로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한 그런 표정이었다.

"되돌아가는 편이 좋단 말인가요?"

그는 물었다.

그가 마지막 말을 미처 끝내기도 전에 나는 벌써 내가 반감으로 가득 차서 아니라고 할 것을, 아니라고 말하지 않고는 못 견딜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동시에 나의 마음 속의 낡은 것, 익숙해진 것, 사랑한 것, 잊었던 것이 모조리 절망적으로 외치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말하라. 그렇다고 말해.'

온 세상과 고향이 저울의 추처럼 무겁게 나의 발에 매달려왔다.

그때 안내인이 손을 들어 뒤쪽 골짜기를 가리켰다.

나는 다시 한번 그리운 그 고장을 뒤돌아보았다.

그러자 내가 볼 수 있는 것 중의 가장 고통스러운 광경이 보였다.

그리운 골짜기와 평야는 피로한 태양 아래 빛이 바래 얼빠진 것처럼 누워 있었다. 숱한 빛깔이 야유하듯 떠들썩한 소리를 냈다.

그림자는 희미하고 검었으며, 이상하게도 힘을 잃고 있었다.

그 모든 것에서 심장이 잘리워져 나간 듯 매력도 향기도 없었다.

모든 것에서 이미 아득한 옛날에 구역질이 날만큼 잔뜩 먹어본 것 같은 냄새와 맛이 났다.

아아, 나는 그 얼마나 이것을 두려워하고 미워했었는가!

내가 사랑하는 상쾌한 것을 무가치한 것으로 만들고, 그 축축한 수분과 정신을 흘러나가게 하고, 향기를 불순하게 하고, 색채를 바래게 하는 안내인의 그 가공할 능력을!

아아, 나는 알고 있었다.

어제는 아직 포도주였던 것이 오늘은 시큼한 초로 변해 있음을.

그리고 그 초는 결코 다시는 포도주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결코 두 번 다시는.

나는 슬픔에 잠긴 채 말없이 안내인을 따라갔다.

그는 역시 옳았다.

여느 때처럼, 지금도 좋다.

그가 내 곁에, 내 시선이 닿는 곳에 있어주기만 하면 좋을 것이다.

늘 그랬던 것처럼 막상 중요한 고비에 갑자기 모습을 감추어 나를 외토리로, 그의 변신이기도 한 낯선 목소리만을 내 가슴 속에 남겨놓고 나를 외토리로 만들지만 않으면 좋은 것이다.

나는 잠자코 있었으나 마음은 열렬히 외치고 있었다.

'제발 나를 떼어놓지 말아주시오. 난 따라갈 테니까!'

냇물 속의 돌은 기분 나쁘게 뜨뜻미지근했다.

발바닥에서 미끄러지는 물 속의 자질구레한 돌 위를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는 것은 나를 무섭도록 피로하게 만들었고 현기증을 일으키게 했다.

게다가 냇물을 따라 뻗어 있는 길이 갑자기 오르막 언덕이 되고 있었다.

어두운 암벽은 더 한층 좁아져 심술궂게 다가섰다.

그 모퉁이 하나하나가 우리를 가두어 영원히 되돌아가지 못하게 하겠다는 음흉한 속마음을 나타내는 듯했다.

우툴두툴한 누런 바위 위로 엷은 물의 막이 미끈미끈하게 덮여 있었다.

머리 위에는 이미 하늘이 안 보이게 된지 오래였다. 구름도 파란 빛깔도....

나는 안내인을 따라 걷고 또 걸었다.

불안과 반감으로 자주 눈을 감았다.

그러자 길바닥에 한 송이의 어두운 꽃이 피어 있는 것이 보였다.

그 꽃은 비로드처럼 검고, 슬픈 눈길을 하고 있었다.

꽃은 아름답게 내게 말을 걸었다.

그러나 안내인은 한층 빠르게 걸어갔다.

나는 한 순간이라도 멈춰서서 단 한 번만이라도 다시 이 슬픈 비로드의 눈길을 들여다본다면 비애와 절망적인 우울은 한층 무겁고 견딜 수 없게 되리라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나의 정신은 무의미와 광기로 이 굴욕적인 지역에 단단히 묶이고 말 것이라는 것도.

나는 몸을 적시고 더럽히면서 계속 기듯이 앞으로 나아갔다.

젖은 암벽이 우리의 머리 위에 더욱 가까이 다가왔을 때 안내인은 그의 해묵은 위로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맑고 힘찬 젊은 목소리로 그는 걸음마다 박자를 맞추어, "나 바라노니, 나 바라노니"라는 노래를 불렀다.

그가 나에게 격려를 하고 힘을 주려고 하며 이 지옥 같은 방랑의 어두운 고통과 절망을 몰아내주려 하고 있다는 것은 나도 잘 알 수가 있었다.

내가 그 노래를 같이 따라 불러주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도.

그러나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런 승리를 그에게 허용하고 싶진 않았다.

내가 노래를 할 마음이 생기겠는가?

나는 어쩌다가 신도 요구할 수 없는 일과 행위 속에 끌려들어간, 한마디로 가엾은 단순한 사나이가 아닌가?

패랭이꽃도 물망초도 그것이 피어 있던 시냇물가에 머물러 있으면서 그 본성대로 피고 지고 하지 않는가!

"나 바라노니, 나 바라노니! 나 바라노니."

안내인은 여전히 노래하고 있었다.

아아, 되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러나 나는 안내인의 야릇한 도움으로 이 미 암벽과 벼랑을 기어올라 넘어서 있었다.

그것을 넘어 되돌아갈 방법은 없었다.

나는 울음이 터질 것처럼 목이 꽉 막혔다.

그러나 울어서는 안 되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울어서는 안 되었다.

그래서 나는 고집을 부려 큰 소리로 안내인의 노래에 맞추어 노래를 불렀다.

같은 박자와 같은 음조로, 하지만 그와 똑같은 가사가 아니고,

"나 피할 수 없노니, 나 피할 수 없노니, 나 피할 수 없노니."

하고 가사를 바꾸어서 소리쳤다.

그러나 힘겹게 벼랑을 기어오르면서 노래를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이내 숨이 가빠져서 헐떡거리며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는 피곤함도 보이지 않고 여전히 힘차게 노래했다.

"나 바라노니, 나 바라노니, 나 바라노니."

시간이 갈수록 그는 나를 압박해왔다.

마침내 나는 그의 노래를 같이 불렀다.

이제는 기어오르는 것도 훨씬 편해졌다.

이젠 피할 수 없노니가 아니라 나 자신이 실제로 그러기를 원하게 되는 것이었다.

노래를 하는 것이 힘들다는 생각이 차츰 사라져갔다.

그러자 내 마음이 밝아졌고, 그에 따라 미끈거리던 바위도 건조해 져서 오르기가 한결 수월하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암벽에 흐르는 물기가 적어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머리 위로 엷은 파란 빛깔의 하늘이 차츰 나타나더니, 이윽고 작은 호수처럼 시방으로 펼쳐지는 것이었다.

나는 좀더 강해지고 좀 더 참을성을 지니려고 했다.

이렇게 마음을 먹자 하늘의 호수는 더욱 넓어지고, 비탈길은 한결 걷기 쉽게 되었다.

나는 웬만한 거리를 전혀 힘을 안 들이고 안내인과 같이 달리기도 했다.

그러자 갑자기 험준한 산마루가 태양의 대기 속에서 불쑥 솟아올라 머리 위에서 번쩍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우리는 산마루 바로 아래쪽의 좁은 틈으로 기어나갔다.

강한 햇살이 나의 눈을 부시게 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숨막히는 현상에 무릎이 떨렸다.

왜냐하면 내가 끝없는 하늘과 푸른 심연에 둘러싸여 깎아지른 산등성이에 잡을 것도 하나 없이 아슬아슬하게 서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산 아래를 내려다보니 다만 좁은 산마루가 마치 사다리처럼 가늘게 솟아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또 다시 하늘과 태양이 나타났으므로 우리는 마지막 숨 막히는 험준한 길을 입술을 깨물고 이마에 주름을 잔뜩 잡으며 올라갔다.

마침내 좁은 꼭대기, 타는 것 같은 바위 위에 올라 엄하면서도 비웃는 듯한 희박한 대기 속에 서 있게 되었다.

그것은 기묘한 산, 기묘한 꼭대기였다.

그렇듯 끝없이 벌거벗은 암벽을 넘어 기어오른 이 산마루에는 바위 틈을 비집고 한 그루의 나무가 몇 가닥 짧으면서도 강한 가지를 뻗고 돋아나 있었다.

그 나무는 바위 속에서 이상할 정도로 엄한 느낌이 들도록 꼼짝도 하지 않은 채 가지 사이로 차디찬 푸른 하늘을 보이며 서 있었다.

그리고 그 나무 끝에는 한 마리의 검은 새가 앉아 목쉰 소리로 울어대고 있었다.

높은 곳에서의 짧은 휴식.

그 고요한 꿈.

태양은 벌겋게 타오르고, 바위는 녹을 듯이 이글거렸다.

나무는 꼼짝하지 않았으며 새는 찢어지는 목소리로 노래하고 있었다.

그 쉰 목소리에 찢어지는 노래는 영원! 영원을 노래하고 있었다.

검은 새는 계속 노래했다.

검은 수정처럼 번쩍번쩍 빛나는 무정한 눈은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 눈길을 견뎌내기 힘들었고, 그 노래를 더 이상 들을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도 그 장소의 적적함과 공허함과 눈이 부시도록 넓은 하늘의 황량함이 무서웠다.

죽는다는 것은 오히려 생각조차 할 수 없는 환희였다.

이곳에 머문다는 것은 말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무슨 일이든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 당장 우리도, 이 세상도 공포스런 돌로 변해버릴 것만 같았다.

나는 그 일이 폭풍이 몰아치기 전의 회오리바람처럼 무겁게 짓누르고, 타는 듯이 소용돌이치고 있음을 느꼈다.

나는 그것이 타오르는 불꽃의 열기처럼 몸과 마음에 떠도는 것을 의식했다.

그것은 위협적으로 다가오더니 마침내 나타났다.

새가 허둥지둥 가지에서 뛰어내리더니 아래쪽 허공으로 급강하 했다.

그러자 나의 안내인도 한달음에 몸을 날려 푸른 하늘로 뛰어들었고, 이내 경련하는 하늘 속에 빠져 흩날렸다.

! 운명의 물결은 그 절정에 이르러, 나의 심장을 떼어내더니 소리없이 갈갈이 찢었다.

그리고 나는 이미 떨어져 버둥거리며, 뛰며 날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차가운 대기의 광란에 짓눌려 행복하게 환희의 괴로움에 경련하면서 무한한 공간을 누비다 급강하했다.

어머니의 가슴을 향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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