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일간의 폭풍
E. Hemingway
닉크가 과수원을 빠져서 오르막길을 접어들었을 때 비가 멎었다. 과일은 다 따고 없었다. 가을바람이 잎이 다 떨어진 나뭇가지 사이를 지나갔다. 닉크는 발길을 멈추고 길가에 떨어진 와그너 사과 한 개를 주었다. 사과는 누렇게 나뭇잎 사이에서 비에 젖어 유난히 번들거렸다. 그는 사과를 코트 호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길은 과수원을 거쳐서 언덕 꼭대기에 이르고 있었으며, 그 꼭대기에는 작은 오두막집이 있었는데, 현관은 조용하고 굴뚝에서는 연기가 오르고 있었다. 집 뒤에는 창고와 닭장이 있고, 숲을 등지고 울타리 모양 나무가 우거지고 있었다.
가을 들어 처음으로 폭풍이 불어닥쳐 저쪽 커다란 나무들이 바람에 마구 흔들리고 있었다. 닉크가 과수원 위쪽의 넓은 밭을 질러갈 때 집 문이 열리더니 빌이 나타났다. 그는 현관 앞에 서서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여, 위미지.」
하고 그가 말하였다.
「어, 빌!」
닉크는 층계를 올라가면서 말하였다. 두 사람은 나란히 서서 눈 아래 과수원과 길 건너 저편을 그리고 그 아래 벌판과 곶(岬)의 나무숲에서 호수에 이르기까지 시골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바람은 호수 쪽으로 불고 있었다. 10 마일이나 되는 바닷가 물결이 이쪽으로 들이치고 있었다.
「바람이 꽤 세군.」 하고 닉크가 말하였다.
「이렇게 사흘을 계속해서 불어닥칠 거야.」
「아버님이 집에 계셔?」
닉크가 물었다.
「총 갖고 나가셨어. 어서 들어오게.」
닉크는 안으로 따라 들어갔다. 난로에서는 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바람에 불꽃이 요란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빌은 문을 닫았다.
「한잔할까?」
빌은 부엌에 나가 술잔 두 개와 물 한 주전자를 들고 들어왔다. 닉크는 난로 위의 선반에서 위스키병을 내렸다.
「괜찮지?」
닉크가 물었다.
「그럼.」
그들은 난로 옆에 앉아서 아일랜드산 위스키에 물을 타서 마셨다.
「그을음 냄새가 지독하군.」
닉크는 이렇게 말하면서 술잔을 들고 난롯불을 들여다보았다.
「토탄이야.」
빌이 말하였다.
「관계없어.」
「자네 토탄 파내는 걸 본 적이 있나?」
하고 닉크가 물었다.
「없어.」
「나도 없네.」
난로 옆에 쭉 뻗은 닉크의 신발에서 김이 오르기 시작하였다.
「신발을 벗게.」
빌이 말하였다.
「양말을 신지 않았네.」
「벗어서 말리게, 양말을 갖다줄 테니까.」
빌은 계단을 올라가 지붕 밑 방으로 갔다.
닉크는 머리 위에서 왔다갔다 하는 발자국 소리를 들었다. 2층이래야 바로 지붕 밑에 마련되어 있었으며, 닉크는 거기서 빌과, 그리고 그의 부친과 함께 몇 차례 자 본 적이 있었다. 뒤에는 화장실이 있었다. 빌은 비가 맞지 않는 곳에 침대를 옮겨놓고 두툼한 양말 한 켤레를 들고 내려왔다.
「양말도 신지 않고 돌아다녀서야 쓰나.」
빌이 말하였다.
「난 양말 신기가 질색이야.」
닉크는 양말을 신고 의자에 주저앉아, 두 발을 난로 앞 칸막이 틈에 올려놓았다.
「칸막이가 오그라드네.」
하고 빌이 말하였다. 닉크는 다시 발을 삥 돌려 난로 옆으로 가져왔다.
「뭐 읽을 만한 책이 없나?」
하고 그는 물었다.
「신문뿐이야.」
「카아트팀 어떻게 됐어?」
「자이언트팀에 더블 헤더를 하여 졌다네.」
「그럼 자이언트가 틀림없이 이기겠군.」
「물론이지.」
빌이 말하였다.
「맥크로우가 야구연맹에서 좋은 선수를 다 매수해 가니 도리가 없지 않아.」
「다야 매수할 수 있을라고?」
닉크가 말하였다.
「매수하고 싶은 선수는 다 매수해 버리는 거야.」
하고 빌은 말을 계속하였다.
「그렇지 않으면 선수들에게 불만을 품게 하여 불가불 자기 팀과 손을 잡게 하거든.」
「해이니팀처럼 말이지.」
닉크가 말하였다.
「그 얼간이 녀석, 자이언트에게는 상당히 도움이 될 걸세.」
빌은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 녀석 명타자(明打者)거든.」
닉크의 말이었다. 난롯불이 뜨거워서 다리가 탈 지경이었다.
「외야수(外野手) 노롯도 잘하지.」
하고 빌이 말하였다.
「그런데 가끔 실수를 해서 탈이야.」
「맥크로우가 그를 노리고 있는 점이 바로 그거야.」
「그럴 테지.」
빌이 맞장구를 쳤다.
「세상에는 알고도 모를 일들이 많단 말이야.」
닉크가 말하였다.
「물론이야. 그런데 우리처럼 멀리 떨어져 있으니까 오히려 여러 가지 소식을 많이 얻어듣게 되네.」
「말(馬)을 보지 않는 편이 더 잘 맞출 수 있는 거나 마찬가지란 말이지?」
「그래, 맞았어.」
빌은 아래에 놓아둔 위스키병을 집어 들어 닉크의 잔에 술을 따랐다.
「물은 어느 정도 탈까?」
「술과 같은 분량으로 하게.」
그는 닉크의 의자 옆 방바닥에 앉았다.
「가을 폭풍이 불어오면 기분이 좋지?」
닉크가 물었다.
「그야 물론이지.」
「아무튼 1년 중에서 제일 기분 좋은 계절이야.」
닉크가 말하였다.
「읍에 살고 있으면 어림도 없지?」
빌이 말하였다.
「월드 시리즈는 보고 싶네.」
「언제나 뉴욕이 아니면 필라델피아에서 열리게 마련이야. 그러니 우리에게는 그림의 떡이지 뭐야.」
빌이 말하였다.
「카아드 팀은 한 번도 우승 못 할까?」
「아마 우리가 죽을 때까지는 안될 걸세.」
「미칠 노릇이군.」
하고 닉크가 말하였다.
「기차 사고를 당하기 전에 한번 이길 기회가 있었네. 기억하고 있나?」
「그래.」
닉크가 기억을 더듬으면서 대답하였다. 빌은 들창아래 놓인 책상에서 책을 집어 들었다. 아까 문깐에 나왔을 때 겉장을 거꾸로 한 채 놓아둔 책이었다. 그는 한 손에 잔을 또 한 손엔 책을 들고 닉크의 의자에 기대앉았다.
「자네 뭘 읽고 있나?」
「<리챠드 휘브렐>이야.」
「난 좀처럼 줄거리를 쫓아갈 수 없더군.」
「꽤 읽을만 하지.」 빌이 말하였다.
「결코 나쁜 책은 아니야.」
「내가 읽지 않은 딴 책은 없나?」
닉크가 물었다.
「<숲속의 애인들>을 읽었나?」
「암, 읽고말고. 밤마다 둘이서 잘 때면 가운데 칼을 빼놓는다는 이야기지.」
「무척 재미있는 책이야.」
「하긴 재미있데. 그런데 대체 칼이 무슨 소용이 있는지 모르겠어. 칼날을 위로해 놓아야지 눕혀 놓으면 그 위를 얼마든지 뒹굴 수 있을게 아냐.」
「이를테면 그것은 하나의 상징일 테지.」
하고 빌이 말하였다.
「그렇지만 실감이 안 나네.」
「<굽히지 않는 마음>은 읽은 적이 있어?」
「좋은 책이야. 그건 실감이 나데. 늙은이가 언제나 애들을 찾아다니는 이야기지. 윌풀이 쓴 것으로 딴 것 없어?」
「<어두운 숲>이 있네. 러시아에 대한 이야기야.」
빌이 대답하였다.
「그 사람 러시아에 대해서 뭘 알어?」
「나는 몰라. 그 녀석들에 대해서는 알 도리 럾지 않아. 아마 어려서 그곳에서 살았는지 모르지. 아무튼 내막은 잘 알고 있더군그래.」
「그 사람 좀 만나 봤으면 하는데!」
「난 최스타튼을 만나보고 싶어.」
빌이 말하였다.
「그 사람도 여기 함께 있으면 얼마나 좋겠어? 그러면 내일쯤 보오와로 낚시질하려 모시고 갈 텐테!」
「낚시질을 좋아할까?」
「암 좋아하고말고.」
닉크는 말하였다.
「무척 좋은 사람이야. 자네<날으는 여관>이라는 노래를 알어?」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와
마실 것을 주거든
그의 뜻에 사의를 표하고
다 수채 구멍에 부어 넣어라!
「그래, 그래. 윌풀보다는 멋진 친구야.」
하고 닉크가 말하였다.
「물론이지.」하고 빌이 말하였다.
「그러나 작가로서는 윌풀이 더 나을 거야.」
「글쎄!」닉크가 말하였다.
「체스타트는 고전주의 작가야.」
「윌풀도 마찬가지였네.」
빌이 고집을 부렸다.
「두 사람 다 여기 함께 있으면 좋을 텐데.」
하고 닉크가 말하였다.
「그러면 내일 보아와로 낚시질하러 모시고 갈 수 있지 않아.」
「한바탕 취해 보세.」
빌이 말하였다.
「좋아.」
닉크가 맞장구를 쳤다.
「우리 아버지는 괜찮아.」
「정말이야?」
「그럼.」
「좀 취해오네 그려.」
닉크가 말 하였다.
「아직 멀었어.」
빌은 방바닥에서 일어나 위스키 병을 손에 들었다. 그러자 닉크가 잔을 내밀었다. 그는 빌이 술을 따르는 동안에 잔을 바라보고 있었다. 빌은 위스키를 반쯤 따랐다.
「물은 자네 마음대로 타게. 이제 꼭 한 잔만 남았어.」
「더는 없어?」 닉크가 물었다.
「아직 많지만 아버지가 터뜨린 것만 마시라는 거야.」
「그래!」 닉크가 말하였다.
「아버지는 병을 자꾸 새로 터뜨리면 으레 주정뱅이가 된다는 거야.」
「옳은 말씀이야.」
닉크는 감동하는 어조로 말하였다. 그렇게 생각해 본 일은 없었다. 그는 혼자서 술을 마시면 으레 주정뱅이가 되는 줄로 알고 있었다.
「자네 아버지는 성미가 어떤가?」
닉크는 점잖게 물었다.
「오만한 편이야. 간혹 사납게 구는 때도 있지만 말이야.」
「좋은 어른이시군.」
닉크는 이렇게 말하고 주전자 물을 술잔에 부었다. 물은 서서히 술과 섞였다. 물보다 술이 더 많았다.
「사실이야.」 하고 빌이 말하였다.
「하긴 우리바버지도 원만한 분이야.」
「그야 더 말할 나위가 없지.」 빌이 말하였다.
「우리아버지는 생잔에 술을 한잔도 입애 대지 않았다는 거야.」
닉크는 마치 어떤 과학적인 진리라도 말하는 듯한 어투였다.
「다만 자네 아버지는 의사고, 우리 아버지는 화가인 것이 다를 뿐이야.」
「우리 아버지는 손해를 꽤 많이 보았다네.」
닉크는 유감스러운둣이 말하였다.
「괜찮아, 다 보상받게 될 테니까.」
「아무튼 아버지 말에 의하면 손해를 톡톡히 봤다는 거야.」
「우리 아버지도 공생 많이 했어.」
하고 빌이 말하였다.
「괜찮아. 고생은 다 사라지게 마련이야.」
하고 닉크가 말하였다. 그들은 난롯불을 들여다보면서 이런 심각한 말들을 하고 있었다.
「뒷마루에 가서 장작을 더 가져올 테야.」
하고 빌이 말하였다. 난롯불을 들여다보니 꺼져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술을 아무리 많이 마셔도 밀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한편 닉크는 아버지가 비록 술을 한잔도 입에 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자기가 빌보다 먼저 취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커다란 밤나무 장작을 하나 가져올게.」
하고 빌이 말하였다. 그는 또한 의식적으로 자기 침착성을 상대방에게 보여 주려고 하였다.
빌은 장작을 갖고 부엌을 지나오다가 식탁 위에 놓아둔 냄비를 밀어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는 장작을 내려놓고 냄비를 집어서 올려놓았다. 냄비 속에는 말린 살구를 물에 담가 놓고 있었다. 그는 땅바닥에 떨어진 살구를 하나도 빼놓지 않고 주워 담았다. 날로 밑에 굴러간 것까지 또 주워 담았다. 식탁 옆에 놓아둔 물통에서 물을 퍼서 냄비에 부었다. 그는 이러한 자기 자신이 자랑스러웠다. 그는 끝까지 침착성을 잃지 않았다. 그가 장작을 갖고 들어오자, 닉크는 자리에서 일어나 함께 장작을 난로에 집어넣었다.
「좋은 장작이군.」
닉크가 말하였다.
「추울 때 때려고 준비해 두었던 거야. 이런 나무는 밤새도록 탈 거야.」
「숯불이 남아서 아침에도 쉬 불을 피울 수 있을 걸세.」
「그렇지.」
두 사람은 기분이 좋아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한 잔 더 해.」
닉크가 말하였다.
「찬장 속에 터뜨린 병이 하나 더 있을 거야.」
빌은 무릎을 꿇고 찬장 한구석에서 네모난 술병을 하나 더 꺼내었다.
「스카치 위스키야.」 하고 빌이 말하였다.
「물 좀 가져오게.」 닉크의 말이었다.
빌은 다시 부엌으로 나갔다. 그는 국자로 물통에서 시원한 냉수를 퍼서 주전자에 가득 담았다. 방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식당에 걸려 있는 거울 앞을 지나면서 그 속을 들여다보았다. 얼굴이 이상하게 보였다. 거울 속의 자기 얼굴에 빙그레 웃어 보였더니, 거울에서 도로 싱긋 웃어 주었다. 그는 거울에 대고 슬쩍 눈짓을 하고 지나갔다. 그것은 자기 얼굴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래도 무방하였다.
빌은 술 두 잔을 따라 놓았다.
「너무 많이 따랐군.」
하고 닉크가 말하였다.
「많을 것도 없어.」
「누구한테 축배를 올릴 거야?」
닉크는 술잔을 쳐들면서 물었다.
「우리 낚시질을 위해 축배를 올리세.」
빌이 말하였다.
「좋아. 자 낚시질을 위해!」
하고 닉크가 말하였다.
「야구보다야 낫지 않나.」
「여부가 있나. 대체 야구 이야기는 어떻게 해서 나왔었나?」
「화제가 잘못된 거야. 야구란 얼치들의 장난이거든.」
하고 빌이 말하였다.
그들은 단번에 술잔을 비웠다.
「자, 이번에는 최스타튼을 위해 축배를 올리세.」
「그리고 윌풀을 위해서도!」
하고 닉크가 말하였다. 그는 술을 따르고 빌이 물을 탔다. 그들은 서로 지켜보았다. 기분이 매우 좋았다.
「최스타튼과 윌풀을 위해 축배를 들세.」
빌이 말하였다.
「자, 축배를 들세.」
닉크가 말하였다.
그들은 술을 마셨다. 빌이 다시 술을 가득 따랐다. 그들은 난로 앞 커다란 의자에 앉아 있었다.
「자네 참 잘했네.」
하고 빌이 말하였다.
「뭐 말인가?」
「마아디 문제를 딱 잘라 버린 것 말이야.」
「하긴 그래.」 닉크가 말하였다.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일이야. 그 여자에게서 손을 떼지 않았던들, 지금쯤은 집에 돌아가 결혼비용을 마련하느라고 죽도록 일을 해야 했을 걸세.」
하고 빌이 말하였다.
닉크는 잠자코 있었다.
「남자란 인단 결혼하면 망하는 거야.」
하고 빌은 말을 이었다.
「아무런 소득도 없거든. 그야말로 무(無)란 말이야. 그렇게 되면 볼장 다 보는 거야. 결혼한 놈들의 꼴을 보게.」
닉크는 여전히 잠자코 있었다.
「결혼한 놈들은……다 몸을 망친 거야. 볼장 다 봤거든.」
빌이 말하였다.
「하긴 거래.」 닉크가 대꾸하였다.
「어쩌면 그 여자와 헤어진 것이 불행일지도 몰라. 그러나 또 다른 여자한테 곧 반하게 될 걸세. 그편이 좋아. 여자한테 반하는 것은 좋지만 자신을 망쳐서는 안 되는 거야.」
하고 빌이 말하였다.
「자네 말이 옳네.」
「자네가 만일 그 여자하고 결혼했더라면, 그 여자의 전 가족하고 결혼을 하게 되는 걸세. 그 여자의 어머니와 그 여자의 남편인 자네를 생각해 보란 말이야.」
닉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언제나 서로 내왕할 게 아닌가. 주일마다 만찬에 불리어가기도 하고 모셔오기도 할 걸세. 그리고 장모가 자네 아내더러 어제나 이래라저래라 하고 잔소리를 할 테지.」
닉크는 잠자코 앉아 있었다.
「자네, 참 잘 빠져나왔네. 그 여자는 지금이라도 자기 마음에 맞는 남자와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 겋세. 이봐, 기름과 물이 합께 어울릴 수 있나? 내가 스타라톤에 고용되어있는 아이다와 결혼하는 것도 역시 무리한 일이야. 그 여자도 그렇게 된 것을 오히려 다행스럽게 생각할 걸세.」
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에겐 이미 취기가 사라져 버렸다. 빌은 보이지 않고 그만 혼자 남게 되었다. 그는 난로 옆에 앉아 있기도 싫고, 내일 빌과 그의 부친 또는 그 밖의 누구 구구하고 낚시질하러 갈 마음도 없었다. 그는 취하지 않았다. 약간의 취기도 완전히 가셔 버렸다. 그의 생각은 한때 마조리가 자기의 사람이었지만, 지금은 그녀를 잃었다는 사실에 집중되어 있었다.
여자는 떠나가 버렸다. 그가 여자를 떼어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것뿐이었다. 다시는 그녀와 만나지 못할 것이다. 아마 영원토록 만날 수 없을 것이다. 이미 모두가 다 사라져 버리고 끝장이 났던 것이다.
「한잔 더 드세.」
닉크가 말하였다. 빌이 술을 따르고 닉크가 물을 조금 탔다.
「만일 자네가 그 여자와 관게를 계속 끌어나갔더라면, 우리는 지금 이렇게 마주 앉아서 즐겁게 노닥거리지 못할 걸세.」
하고 빌이 말하였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그는 처음에 집에 내려가 일자리를 구할 계획이었다. 겨우내 살레보와에 머물러 있으면서 마조리와 함께 있을 심산이었다. 지금 그는 어떻게 하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아마 우리는 내일 낚시질도 갈 수 없을 걸세.」
하고 빌이 말하였다.
「역시, 자네는 선견지명(先見之明)이 있어.」
「어찌할 도리가 없었네.」
닉크가 말하였다 .
「나도 그건 알고 있네. 으레 그렇게 되는 법일세.」
「모든 것이 순식간에 다 끝나버렸네.」
닉크가 말하였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 알 수 없네. 정말 모를 일이야. 사흘 동안 폭풍이 불어닥치자 나무 잎사귀들이 다 떨어져 버리는 거와 마찬가지야.」
「아무튼 인제는 끝장을 보았네. 그것이 중요한 거야.」
하고 빌이 말하였다.
「그건 내 잘못이었어.」
「누구의 잘못이건 마찬가지야.」
「마찬가지가 아니야.」
닉크가 말하였다. 그로서는 마조리가 가버린 지금에 와서, 다시는 그녀를 만나볼 수 없으리라는 것이 커다란 문제가 되어 있었다. 그는 전에 그녀에게 이탈리아로 같이 가서 재미있게 지나자고 말한 적이 있었다. 둘이서 가기로 작정한 어러 곳이 다 허사가 되고 말았다.
「인제 일이 다 끝났네. 그때는 걱정도 했지만 자네는 잘해 치웠네. 그 여자의 어머니는 아마 몹시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을 걸세. 자네들이 만나는 사람마다 약혼을 했다고 퍼뜨리고 다녔으니 말이야.」
하고 빌이 말하였다.
「약혼은 하지 않았네.」
「다들 약혼한 것으로 알고 있었네.」
「그래도 할 수 없지. 우린 약혼은 하지 않았으니까.」
「결혼하려고 하지 않았나?」
「결혼하려고는 했지만 약혼은 하지 않았네.」
「그럼 약혼한 거나 마찬가지가 아닌가?」
하고 빌이 따지고 들었다.
「그래도 다르지.」
「그건 이해할 수 없는 일이야. 좋아, 인제 우리 술이나 진탕 마시세.」
하고 빌이 말하였다.
「술을 마시고 나서 헤엄치러나 가지.」
닉크는 술잔을 들이켰다.
「사실 그 여자한테는 안됐지만 나도 별도리가 없었네.」
하고 그는 말하였다.
「자네, 그 여자의 어머니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지?」
「무서운 여자야.」
「별안간 다 끝장을 내고 말았네.」
「이런 말을 되풀이해서는 안 될 거야.」
하고 빌이 말하였다.
「암 그렇지. 앞에서도 내 가 말했지만 인제 다 알게 된 일이니 다시 이런 말은 입 밖에 내지 않도록 하세. 그리고 자네도 인제 곰곰히 생각하지 말게. 다시 그 생각 속에 휩쓸려 들 테니까.」
닉크는 거기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하였다. 다만 일은 이미 결정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곧 다른 생각이 머리 위에 떠 올랐다. 그리하여 그것이 닉크의 마음을 즐겁게 해 주었다.
「그럼 그렇게 될 위험성은 언제나 있는 거야.」
하고 닉크는 말하였다. 그는 인제 행복감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모든 희망이 다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는 토요일 밤에는 읍에 들어갈 수 있었다. 오늘은 목요일이었다.
「기회는 언제나 있는 거야.」
하고 그는 말하였다.
「자중해야 해.」
빌이 말하였다.
「암 자중해야지.」
닉크는 행복감을 느꼈다. 일이 다끝난 것은 아니었다.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 것도 아니었다. 그는 토요일에 읍에 가보고 싶었다. 빌에게 마아디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기 전과 마찬가지로 그는 마음이 가벼웠다. 언제나 솟아날 구멍은 있는 법이다.
「자, 인제 총을 갖고 호숫가에 가서 자네 부친이나 찾아보기로 하세.」
하고 닉크가 말하였다.
「그렇게 하지.」
빌은 선반에서 엽총 두 자루를 내리고 탄약통을 열렀다. 닉크는 메키노 코트를 입고 신방을 신었다. 신은 말라서 빳빳하였다. 그는 아직도 몹시 취해 있었지만 정신은 멀쩡하였다.
「기분이 어때?」
하고 닉크가 물었다.
「기분이 근사해. 술이 꼭 알맞군.」
빌은 스웨터의 단추를 채우면서 대답하였다.
「취해 곯아떨어지면 뭘 해?」
「그럼, 밖에 나가 활동할 수 있어야 해.」
그들은 밖으로 나왔다. 바람이 심하였다.
「날씨가 이러면 생들은 풀 속에 숨어있을 거야.」
하고 닉크가 말하였다. 그들은 과수원 쪽으로 내려갔다.
「오늘 아침에 멧돼지를 한 마리 보았네.」
빌이 말하였다.
「그놈을 쫓아가세.」
닉크가 말하였다.
「바람이 세어서 총이나 제대로 쏘겠나?」
밖에 나오니 마조리에 대한 문제 같은 것은 조금도 슬픈 일이 아니었다. 별로 대수로울 것이 없었다. 그런 것은 다 바람에 날아가 버렸다.
「바람이 넓은 호수를 넘어서 불어오는군.」
니크가 말하였다.
바람이 불어오는 쪽에서 꽝! 하고 총소리가 들여왔다.
「아버지의 총소리군.」 하고 빌이 말하였다.
「저 아래 숲속에 계신가 봐.」
「그리로 가 보세.」
니크가 말하였다.
「이왕이면 풀밭을 거쳐서 가세. 사냥할 것이 발견될지 모르니까.」
빌의 말이었다.
「그래.」
인제 여자에 대한 문제 따위는 조금도 안중에 없었다. 바람이 그의 머릿속에서 다 휘몰아 갔던 것이다. 토요일 밤이면 언제든지 읍에 갈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은 좋은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