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에 대한 경의(敬意)
E. Hemingway
1부. 몽뜨레에 있는 휠러씨의 초상화
정거장 구내의 카페는 덥고 환하였다. 식탁들은 잘 닦아놓아 반들거리고, 윤기가 흘렀다. 그 위에는 기름기가 번지르르한 종이 포대에 든 플랫슬(비스킷의 1種) 상자들이 놓여 있었다. 의지에는 조각 무늬가 새겨져 있었으나, 안장은 낡고 헤어져 있었다. 그러나 앉으면 편하였다. 벽에는 조각된 목제(木製) 시계가 걸려 있었고, 방 한끝에는 술을 파는 바가 있었다. 창밖에서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벽에 걸린 시계 아래서 두 사람의 역부가 식탁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얼마 후 또 한 사람의 역부가 나타나더니, 심프른 오리엔트로 가는 급행열차가 세인트 모리스에서 한 시간이나 연착이 되었다고 말하고는 밖으로 나가버렸다.
여급이 휠러의 식탁으로 다가와서 말하였다.
"아저씨, 급행열차가 한 시간 연착이래요. 커피를 가져올까요?"
"수면 방해가 되지 않을까?"
"가져다드릴까요?" 하고 여급은 다그쳐 물었다.
"그렇게 하려무나." 휠러가 말하였다.
"감사해요."
그녀는 주방에서 커피를 가져왔다. 휠러는 플랫폼을 비추는 불빛 속에 눈이 펑펑 내리는 것을 창밖으로 내다보고 있었다.
"너 영어 말고도 다른 말을 할 줄 아냐?" 그는 여급에게 물었다.
"그럼은요. 독일 말도 알고 프랑스 말도 알아요. 그리고 그 밖의 지방 사투리도 할 줄 알고요."
"뭐 좀 마시련?"
"싫어요, 아저씨. 카페서는 손님과 함께 마시지 못하게 되어 있어요."
"담배도 피우지 않나?"
"담배도 안 피워요."
"그래. 좋이 좋아!" 하고 휠러는 말하였다. 그는 다시 창밖을 내다보면서 커피를 마시고 나서 담뱃불을 붙였다.
"아가씨." 하고 그는 불렀다. 여급이 그에게로 다가왔다.
"무얼 드실까요?"
"널 보고 싶어 그래."하고 그는 말하였다.
"농담하심 안 돼요."
"농담 아니야."
"그럼 그렇게 말씀하시지 마세요."
"난 인제 이야기할 시간도 없어." 휠러가 말하였다.
"40분 후엔 기차가 도착한단 말야. 너 나하고 2층으로 올라가련? 백 프랑 줄게."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역부를 불러드릴 테니 말동무를 삼으세요."
"내가 언제 역부를 불러달랬나?" 휠러가 말하였다.
"나는 아무도 싫어. 경관도, 담배 파는 녀석도 싫어. 나는 네가 필요해."
"이러실 테면 나가 주세요. 여기선 그런 말씀 마세요."
"왜 싫어? 싫음 네가 비켜 가려무나. 그러면 내가 너한테 말을 건네지 못할 게 아냐?"
여급은 가버렸다. 휠러는 그녀가 역부들에게 고해바치지 않나 해서 지켜보았으나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색시!"
그는 다시 불렀다. 여급이 다가왔다.
"씨은 한 병 갖다 줘!"
"네."
휠러는 그녀가 나가서 술을 들고 와서 식탁에 놓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벽시계를 바라보았다.
"내 200프랑을 너한테 줄게."
하고 그는 말하였다.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200프랑은 큰돈이야."
"쓸데없는 말씀 마시라니까요!"
여급은 영어에 익숙하지 못하였다. 휠러는 그녀를 흥미 있는 듯이 바라보았다.
"200프랑……"
"밉살스럽게 굴지 말아요."
"그럼 내 곁에 떠나지 그래. 네가 여기 없으면 너한테 말을 건네지 못할 게 아니야."
여급은 식탁을 떠나 카운터로 가버렸다. 휠러는 술을 마시며 혼자서 잠시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색시!" 그는 다시 불렀다.
그녀는 못들은 체 하였다.
"색시!" 그는 또다시 불렀다. 그녀가 그에게 왔다.
"뭐 드시겠어요?"
"많이 먹지……내 300프랑을 줄게."
"싫어요."
"300프랑인데도?"
여급은 가버렸다. 휠러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역부 한 사람이 문을 열었다. 그는 휠러의 가방을 지켜 주는 사람이었다.
"아저씨, 기차가 와요!" 역부는 프랑스어로 말하였다. 휠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색시!" 그는 또 불렀다. 그녀는 그에게 다가왔다.
"술값이 얼마지?"
"7프랑이에요."
휠러는 8프랑을 세어서 식탁 위에 놓았다. 그는 웃저고리를 걸치고 역부를 따라 눈이 펑펑 내리는 플랫폼을 향해 나섰다.
"색시, 또 만나." 하고 그는 말하였다.
여급은 그가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는 무척 못생기고 밉살스러운 남자라고 생각하였다. 괜히 300프랑이나 낸다고! 나는 몇 번씩이나 돈을 받지 않았는데! 그리고 여기서 할 데나 있나. 만일 그 남자가 정신 나간 사람이 아니라면 장소가 없다는 것을 알 텐데……시간도 없고 장소도 없다는 것을. 그걸 하는데 300프랑이나 던져! 미국 사람이란 어떻게 생겨 먹은 거야!
휠러는 가방을 맡기고 콘크리이트로 된 플랫폼에 서서 눈 속을 달려오는 기차 조명등을 향해 철길을 내려다보면서, 그 장난도 비싼 것은 아니로구나 하고 생각하였다. 그는 식사 대를 치른 것 이외에는 술값으로 7프랑과 팁으로 1프랑을 썼을 뿐이다. 75 쌍팀(佛貨)이면 되었을 텐데, 팁으로 75 쌍팀만 주었더라면 더욱 좋았을 텐데, 하고 그는 생각하였다. 스위스의 1프랑은 프랑스의 5프랑에 해당되는 것이다. 휠러는 파리를 향해 가고 있었다. 그는 돈에 대하여 여간 깍쟁이가 아니었지만, 여자에게 쓰는 돈은 얼마가 들어도 개의치 않았다. 그는 전에도 그 정거장에 온 적이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2층에는 올라갈 곳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휠러는 일을 운수에 맡기고 마구 저지른 사람은 아니었다.
2부. 존슨은 뵈비에서 그것에 관하여 말한다.
정거장 구내에 있는 카페는 덥고 환하였다. 행주질을 한 식틱은 눈이 부시었다. 몇몇 식탁 위에는 붉고 흰 무늬가 아롱진 보가 덮여 있고, 나머지 식탁 위에는 남색과 흰색으로 무늬진 보가 덮여 있었다. 그리고 모든 식탁 위에는 기름기가 번지르르한 포대 속에 든 플랫슬 상자들이 놓여 있었다. 의자는 조각되어 있고, 그 안장은 낡아서 헤어졌지만 앉기에는 편하였다. 벽에는 시계가 걸려 있고, 방안 한끝에는 양철로 된 술 파는 카운터가 있었다. 창밖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벽에 걸린 시계 아래서는 두 사라의 역부가 식탁에 앉아 새 술을 마시고 있었다. 한 역부가 들어서더니, 심프른 오리엔트로 가는 급행열차가 세인트 모리스에서 한 시간 연착되었다고 말하였다. 여급이 존슨의 식탁으로 왔다.
"아저씨, 급행열차가 한 시간 연착이래요." 하고 그녀는 말하였다.
"커피를 드릴까요?"
"별로 괴로움을 주지 않는다면 마시지."
"가져올까요?" 하고 여급이 물었다.
"그래, 좀 갖다 줘."
"고마워."
그녀는 주방에서 커피를 가져왔다. 존슨은 정거장 플랫폼을 비추는 불빛 속에 눈이 내리는 것을 창밖으로 내다보았다.
"너, 영어 말고 다른 나라 말도 할 줄 아냐?" 그는 여급에게 물었다.
"그럼요, 아저씨. 전 독일 말도, 프랑스 말도 알아요. 지방 사투리도 알고요."
"뭐 마실 것 들겠어?"
"싫어요, 아저씨, 카페에서는 손님과 함께 마시지 못하게 되어 있어요."
"담배는 피우지?"
"안 피워요, 아저씨!" 그녀는 웃었다.
"저는 담배 안 피워요."
"나도 안 피워." 하고 그는 말하였다.
"좋지 않은 버릇이거든."
여급이 그곳을 떠나자, 그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 커피를 마셨다. 벽에 걸린 시계는 10시 5분 전이었다. 그의 시계는 좀 빠른 편이었다. 기차가 도착할 시간은 10시 30분이었다. 한 시간이 연착되면 11시 30분이라는 이야기다. 존슨은 여급을 불렀다.
"색시!"
"네, 뭔데요?"
"너, 나하고 놀지 않을래?" 하고 존슨이 물었다.
여급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안돼요, 아저씨!"
"뭐 언짢게 굴려는 게 아냐. 같이 어울려서 뵈비의 밤 구경이라도 하자는 거야. 안 갈래? 여자 친구 하나 데리구 와."
"난 일을 해야 돼요." 여급이 말하였다.
"여긴 저의 직장이에요."
"나도 알어." 존슨이 말했다.
"그럼, 너 대신 다른 여자를 하나 구할 수 있나? 밤북 정쟁 때에는 대리 여자를 불러왔는데 말이야."
"누굴 불러와요. 안돼요, 아저씨. 나는 여기 있어야 하는걸요."
"그런데 어디서 영어를 배웠지?"
"배루릴수 학교에서요."
"학교에 대한 얘길 좀 해 봐. 배루릴수 학교 학생들은 행동이 거친가? 이렇게 여자 목을 껴안고 키스하는 건 어때? 그 학교에도 나불거리는 치들이 있나? 넌 스코트 피츠제랄드(Scott Fitzgerald. 미국의 작가 1896~1940) 같은 것에 어울려 본 적이 있어?"
"내 말을 좀 들어보시겠어요?"
"너의 대학생 시절이 한평생 제일 행복했단 말이야? 지난가을에 배루릴수 학교에서 무슨 경기를 했지?"
"아저씨, 농담은 관두세요."
"수수한 농담인데 뭘." 존슨이 말하였다.
"넌 참으로 훌륭한 여자야. 그런데 나와 함께 놀지 않을래?"
"안돼요, 안돼요." 여급이 말하였다.
"뭐 갖다 드릴까요?"
"그래." 존슨이 말하였다.
"그럼 술값 전표를 갖다 주겠지?"
"그럼요."
존슨은 술값 전표를 갖고 세 사람의 역부가 앉아 있는 식탁으로 건너갔다. 그들은 그를 쳐다보았다. 그들은 모두 노인이었다.
"술 드시겠소?" 하고 그가 불었다.
역부의 한 사람이 머리를 끄덕이며 빙그레 웃었다.
"네, 들지요."
"프랑스 말을 하시오?"
"네."
"뭘 드실까요? 샴페인을 마셔 보셨어요?"
"못 마셨는데요." 하고 존슨이 말했다.
"색시!" 그는 여급을 불렀다.
"우리 샴페인을 마실 테니……"
"어떤 샴페인을 가져올까요, 아저씨?"
"제일 좋은 놈으로 가져와." 하고 존슨은 말하였다.
"어느 게 제일 좋을까요?" 하고 그는 역부들에게 물었다.
"제일 좋은 것 말씀이지요?" 먼저 이야기한 역부가 물었다.
"그래요."
그 역부는 윗주머니에서 금테안경을 꺼내어 술값 전표를 훑어보았다. 그는 타이프로 넉 줄로 찍은 이름과 값을 손가락으로 짚어 내려갔다.
"스포츠맨입니다." 하고 그는 말하였다.
"스포츠맨이 제일 좋아요."
"여러분, 그럴 다 찬성하십니까?" 존슨이 다른 역부에게 물어보았다. 역부 하나가 머리를 끄덕였다. 그리고 한 역부는 프랑스말로
"나는 샴페인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스포츠맨에 대해서는 종종 이야기를 들었어요. 찬성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스포츠맨 한 병!" 하고 존슨은 말하였다.
그는 술값 전표에 적힌 가격을 들여다보았다. 스위스 돈으로 2프랑이었다.
"두 병으로 하지. 그런데 내가 여기 함께 앉아 있어도 괜찮을까요?" 그는 스포츠맨을 제의한 역부에게 이렇게 물었다.
"여기 앉으시죠." 그 역부는 그를 바라보고 빙긋이 웃었다. 그는 안경을 벗어서 집 속에 집어넣었다.
"오늘은 선생님의 생일입니까?"
"아뇨." 존슨이 말하였다.
"생일이 아닙니다. 마누라는 나하고 이혼하기로 결심했어요."
"그러세요." 그 역부가 말하였다.
"그렇게 되지 말아야 할 텐데요."
다른 역부들도 머리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세 번째 역부는 귀가 좀 먹은 듯하였다.
"그거야 치과의사에게 처음 가 보는 것과 같고, 어떤 처녀가 처음으로 월경을 하여 몸이 좀 불편한 것 같아서 흔히 있는 일이지 뭐." 하고 존슨이 말하였다.
"그러나 나는 좀 당황했어요."
"그건 이해할 수 있는 일이지요. 나도 물론 이해할 수 있어요." 하고 제일 늙은 역부가 말하였다.
"당신네들은 아무도 이혼을 하지 않았지요?" 존슨이 물었다.
그는 이제 농담을 집어치우고, 점잖은 프랑스 말로 한참 이야기를 계속했다.
"아무도 없어요." 스포츠맨을 주문한 역부가 말하였다.
"이 고장 사람들은 이혼을 별로 하지 않아요."
"이혼을 하는 사람들이야 신사 양반들이 아니겠어요. 그것도 별로 많지는 않지만."
"우리 고장에서는……" 하고 존슨이 말하였다.
"사정이 달라요. 실제로 저마다 이혼을 하고 있어요."
"참 그렇더군요." 역부가 말하였다.
"신문에서 늘 많이 보도하고 있더군요."
"나는 좀 늦은 편이지요." 존슨이 말을 이었다.
"이번이 내가 처음으로 하는 이혼인데요. 내 나이 서른다섯인데 말에요."
"그럼 또 젊어지시겠군." 그 역부가 말하였다. 그리고 동료들에게도 설명을 하였다.
"이분은 나이가 아직 서른다섯이 안 되었을걸."
다른 역부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꽤 젊어 보이는군." 한 역부가 말하였다.
"그럼 정말 처음으로 이혼하시게 된 거요?" 그 역부가 물었다.
"그럼요." 존슨이 말하였다.
"색시, 술을 좀 따라줘."
"꽤 비싸지요?"
"일만 프랑이지요."
"스위스 돈으로요?"
"아니, 프랑스 돈으로 말에요."
"그럼 스위스 돈으로 2,000프랑이야. 쌀 것도 없어."
"하긴 그래."
"그런데 이혼은 왜 해요?"
"할 수 없이 당하게 된 거지요."
"아니, 왜 이혼을 청하는 겁니까?"
"딴 놈과 결혼을 하기 위해 그러는 거지요."
"그렇다면 어리석은 짓이지요."
"누가 아니래요." 존슨이 말하였다. 여급은 네 개의 술잔에 술을 따랐다. 모두들 술잔을 들어 올렸다.
"자, 듭시다." 존슨이 말하였다.
"당신의 건강을 위해!" 그 역부가 말하였다. 이어서 그 밖에 두 사람의 역부도 말하였다.
"축복합니다."
샴페인은 핑크 사이다처럼 단맛이 났다.
"스위스에서 외국으로 의사가 통할 수 있게 되었어요?" 존슨이 물었다.
"아아뇨." 그 역부가 말하였다.
"프랑스 말이 더욱 교양이 있어 보여요. 그리고 스위스에서는 프랑스 말이 의젓하지요."
"당신은 독일 말을 해요?"
"물론이지요. 내가 살던 고장에서는 독일 말을 쓰거든요."
"그래요." 존슨이 말하였다.
"그런데 당신은 아직 이혼을 해 본 경험이 없다고 하셨지요?"
"그럼은요. 이혼을 하게 되면 비용이 많이 들어 견딜 수 있어야죠. 아니, 실은 아직 결혼도 하지 않았어요."
"아, 그래요." 존슨이 말하였다.
"그럼 여기 있는 다른 분들도 다 미혼인가요?"
"아니지요. 이들은 결혼했어요."
"그럼 당신은 결혼하고 싶어요?" 존슨이 한 사람의 역부에게 물었다.
"뭐리구요?"
"결혼생활을 좋아하느냐구요."
"그거야 누구나 다 마찬가지가 아니겠어요."
"물론 그러시겠지요." 존슨이 말하였다.
"그런데 여보, 당신은 어때요?"
"저도 괜찮아요." 다른 역부가 대답하였다.
"그러나 나는," 존슨은 말하였다.
"나로서는 결혼생활이 별로 좋은 줄 무로겠어요."
"그래서 선생님은 이혼하실 생각인가요?" 처음의 역부가 물었다.
"오, 그러군 그래." 둘째 역부가 말하였다.
"하하하……" 셋째 역부가 웃었다.
"이제 이혼 이야기는 싱거워지는군요. 당신들은 내 괴로움에 관심을 갖고 있지 않으니까." 그는 처음 역부에게 말하였다.
"뭘요, 관심은 갖고 있어요." 그 역부가 말하였다.
"우리 화제를 바꿉시다."
"그렇게 하시지요."
"뭘 이야기할까요?"
"운동하세요?"
"안 해요." 존슨이 말하였다.
"그렇지만 내 아내는 해요."
"그럼 무얼 오락 삼아 하세요?"
"나는 문필가에요."
"돈벌이가 좋아요?"
"그렇지도 않아요. 나중에 이름이 나면 벌이가 나아지죠."
"재미있군요."
"아니지요." 존슨이 말하였다.
"재미랄 것도 없어요. 여러분들 실례해요. 저는 그만 떠나가야겠어요. 잔에 남은 술을 마저 드시지요."
"그렇지만 기차는 아직 25분이나 더 기다려야 올 텐데요."
"그런 줄은 알고 있어요." 존슨이 말하였다.
그는 여급이 왔을 때 술과 식사를 마쳤다.
"선생님, 나가실래요?" 여급이 물었다.
"산책을 좀 하려고 해. 그리고 가방은 여기 두고 갈 거야."
존슨이 말하였다. 그는 목도리를 두르고 웃저고리를 걸치고 모자를 썼다. 밖에서는 눈이 펑펑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그는 창문을 통하여 세 사람의 역부를 뒤돌아보았다. 여급은 병마개를 뽑은 병에 남은 술을 그들의 술잔에 따라주고, 따지 않은 술병은 도로 들여보냈다.
존슨은 한 사람 앞에 3프랑 정도의 술값을 지불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돌아서서 플랫폼을 걸어 내려갔다. 그는 술집에서 결혼 문제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 귀찮은 이문제가 가실 줄로 믿었으나, 실은 오히려 더 기분이 상할 뿐이었다.
3부. 대리댕에 있는 동지의 아들
대리댕의 정거장 구내에 있는 카페는 덥고 밝았다. 행주질을 잘하여 바들거리는 식탁 위에는 플랫슬이 유리병에 든 채 놓여 있다. 물에 젖은 술잔들은 식탁 위에 자국을 내지 않도록 마분지로 받쳐졌고, 조각 무늬를 아로새긴 나무 의자는 안장이 낡고 해졌지만 앉기에는 편하였다. 벽에 시계가 걸려 있고, 바아의 저쪽 구석에는 술 파는 카운터가 있었다.
밖에는 눈이 내리고 있다. 한 노인이 시계 아래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신문을 보면서 커피를 마시고 있다. 그때 역부 한 사람이 바로 들어서면서, 오리엔트에서 오던 급행열차가 세인트 모리스에서 한 시간 연착되었다고 알렸다. 해리스가 앉아 있는 식탁 앞으로 여급이 다가왔다. 그때 해리스는 식사가 막 끝날 무렵이었다.
"선생님, 기차가 한 시간 연착됐어요. 커피라도 갖다 드려요?"
"그래, 가져와."
"네, 고마워요." 하고 여급은 말하였다. 그리고는 카운터에서 커피를 가져왔다.
해리스는 숟갈로 커피에 설탕을 넣었다. 그리고 설탕 덩어리를 뭉갰다. 창밖에 쏟아지는 눈이 정거장 불빛을 받아 빛나고 있었다.
"너 영어 말고도 다른 나라 말을 할 줄 아니?" 해리스가 여급에게 물었다.
"그럼요, 독일 말도 하고 프랑스 말도 알아요. 그리고 사투리도 알구요."
"그중에서 어떤 말을 제일 잘하나?"
"다 비슷비슷해요."
"너도 커피나 뭐 좀 마시려무나."
"아녜요, 바에서는 손님들과 같이 마실 수 없게 돼 있어요."
"그럼 담배라도!"
"저는 못 피워요." 여급은 빙긋이 웃었다.
"나도 안 피워." 해리스가 말하였다.
"난 데이비비드 밸라스코와는 종류가 다르니까."
"누구 말씀인데요?"
"데이비드 밸라스코 말이야. 그는 언제나 칼라를 거꿍로 달고 다녔거든. 그래서 누구나 잘 알아볼 수 있었지. 그런데 난 그 사람과는 견해가 달라. 한데 그 사람은 죽었어."
"선생님, 저 좀 실례하겠어요." 여급이 말했다.
"좋도록 해." 해리스가 말하였다.
그는 몸을 굽혀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때까지 맞은편에서 신문을 보면 노인이 신문을 접었다. 그는 해리스를 바라보더니 마시던 커피잔과 쟁반을 들고, 해리스의 식탁에 와서 영어로
"실례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보아하니 선생님은 국립 지질학회의 회원 같은데."
"어서 앉으시지요."
해리스가 자리를 권하였다. 노인은 권하는 대로 자리에 앉았다.
"커피나 혼성주(混成酒) 같은 거나 한잔 드시지요."
"고마워요." 노인이 대답했다.
"그럼 저하고 커취(술의 일종)나 드실까요?"
"좋지요.“
해리스는 여급을 불렀다.
늙은이는 호주머니에서 가죽 수첩을 꺼내어 동여맨 고무줄을 끄르고 속에서 몇 장의 서류를 꺼내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 한 장을 골라 집더니 해리스에게 내보였다.
"이게 제 회원증입니다." 노인이 말했다.
"당신은 미국에 있는 프레데릭 J 류셀을 아세요?"
"잘 모르겠는데……"
"매우 유명한 사람인데요."
"그분이 미국 어느 주 출신인지 아세요?"
"그야 물론 워싱턴이지요. 그곳에 학회의 본부가 있지 않아요?"
"그야 그렇지요."
"그건 사실입니다."
"나는 그곳을 떠나온 지가 오래돼서요." 해리스가 말했다.
"그럼 당신은 회원이 아닌가요?"
"아니지요. 그러나 저의 부친은 회원입니다. 부친께서는 오랫동안 회원으로 계셨어요."
"그럼 류셀을 아실 텐데요. 그분은 학회의 한 직원이거든요. 나도 그 사람 덕에 학회에 추천되었어요."
"반가운 일이군요."
"당신이 회원이 아니라니 섭섭해요. 당신도 부친을 통해 추천을 받으시면 좋으실 텐데요."
"그야 그렇지요." 해리스가 대답하였다.
"집에 돌아가면 꼭 추천을 받도록 운동해야겠어요."
"나도 그렇게 하기를 권하고 싶어요." 노인이 말하였다.
"회지(會誌)는 물론 보시겠지요?"
"그럼은요."
"북미 동물에 관한 논문의 유색 표찰(有色標札)이 붙은 책을 본 적이 있어요?"
"네, 파리에서 봤어요."
"그리고 알래스카의 화산 전경(全景)을 실은 책도 보셨지요?"
"네, 거 참 신기하더군요."
"나도 조오지 쉬라스의 셋째놈이 가진 양생동물 사진첩을 매우 재미있게 보았어요."
"참 훌륭하더군요."
"네? 뭐라구요?"
"참으로 훌륭하더라구요. 그놈의 쉬라스가."
"아니, 그놈이라니?"
"우리는 옛날부터 사이가 좋았거든요." 해리스가 말했다.
"그러세요. 그럼 조오지 쉬라스의 셋째도 잘 아시겠군요. 굉장한 익살꾸러기지요."
"정말 그래요, 적어도 내가 알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는 제일 익살맞더군요."
"그럼 당신은 조오지 쉬라스의 둘째도 잘 아시겠군요. 둘째도 재미있는 사람인가요?"
"둘째는 그다지 재미있는 사람이 못돼요."
"그래도 내가 보기에는 매우 재미있는 사람처럼 보이더군요."
"글쎄요, 하긴 내게도 때때로 그런 생각이 들기는 하더군요. 웬일인지 알 수 없지만……"
"아, 당신도 그래요?" 늙은이가 말했다.
"그 집안은 모두를 재미있는 사람인 모양인데."
"사하라 사막의 전경을 기억하고 계세요?" 해리스가 물었다.
"사하라 사막이요? 그건 벌써 5년 전 일인데요."
"정말 그렇군요. 그건 저의 부친이 매우 좋아하신 거지요."
"그럼 부친께서는 근대판을 싫어하신 모양이군요."
"아뇨, 아무튼 사하라 전경(全景)은 좋아하셨지요."
"그야 누구나 좋아하지요. 훌륭하거든요. 그리고 난 과학적인 이치보다 예술적인 가치를 높이 평가해요."
"글쎄, 나로서는 좀 어려운 문제군요." 해리스가 말하였다.
"막막한 사하라 사막을 몰아치는 광풍과 메카를 향해 낙타가 무릎을 꿇는 모습과 또한 아랍 사람……"
"내가 기억하기로는 아랍 사람들은 낙타를 키우고 있었던 모양인데요."
"네 옳은 말씀이오." 해리스가 말하였다.
"로렌스 대령의 책을 생각하고 있었어요."
"로렌스의 책은 아랍 국가를 전제로 삼고 있지요."
"그래요." 해리스가 말했다.
"아랍 사람들을 생각하면 로렌스의 책을 연상하게 되는군요."
"로렌스는 참으로 재미있는 사람이지요."
"동감입니다."
"그 사람 지금 뭘하고 있는지 아세요?"
"지금 영국 공군에 들어가 있어요."
"왜 그런 데 들어갔을까요?"
"성미에 맞으니까 그럴 테죠."
"그 사람 혹시 국립 지리학회원이 아닌가요?"
"글쎄요."
"그 사람은 훌륭한 회원 자격이 있고도 남지요. 그리고 모두들 회원이 되어 주기를 바라고 있는데……"
"회원이 되면 저마다 환영할 테지요."
"나는 뵈비에서 온 한 과학자와 로산나에서 온 동료를 추천했는데, 두 사람 다 선출되었어요. 이런 전례에 비추어 보더라도 내가 만일 로렌스 대령을 추천하면 그들은 매우 좋아할 테지요.“
"옳은 말씀입니다." 해리스가 말하였다.
"이 카페에 가끔 들르나요?"
"식사 후에 커피 마시러 가끔 오지요."
"대학에 나가나요?"
"벌써 다 마쳤어요." 해리스가 말하였다.
"파리의 하브라로 가서, 다시 배를 타고 본국으로 돌아가려고 해요."
"난 미국에 한 번도 가 보지 못했어요. 한번 가 봤으면 해요. 불원에 학회에 참석하게 되면 가야죠. 그때에는 선생님의 부친도 찾아볼 기회를 갖고 싶어요."
"부친은 선생님을 만나면 퍽 기뻐하실 테지요. 그렇지만 애석하게도 작년에 세상을 떠났어요. 자살하셨지요."
"거 참 유감천만이군요. 부친께서 세상을 떠나셨다니, 비단 가족뿐만 아니라 과학계에 큰 비극을 안겨 준 셈이군요."
"이제 제 명함입니다."
해리스가 말하였다.
"부친 성함의 첫 글자는 E · D가 아니라 E · J였어요. 부친께서 선생님을 진작 알게 되었던들 얼마나 반가워했겠어요. 매우 유감스럽군요."
"정말 그렇군요. 서로 알고 지냈더라면 좋았을 텐데."
늙은이는 술집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내어 해리스에게 넘겨주었다. 거기에는 이렇게 씌어 있었다.
철학박사 시기스번드 위예름
미국 와싱턴 D·C
국립 지리학회 회원
"소중히 보관하겠어요." 해리스가 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