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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

우수

Chekhov

 

이내 슬픔을 누구에게 하소연하리?……

황혼(黃昏). 크고 축축한 눈송이는 방금 불이 켜진 가로등 옆을 너울너울 춤추면서, 지붕이며 말 잔등이며 어깨며 모자 위로 떨어져서는 얄팍하고 포근한 층()을 이룬다. 마부(馬夫) 요나 뽀따뽀프는 유령(幽靈)처럼 전신이 새하얗다. 그는 살아 있는 육체가 굽힐 수 있는 데까지 최대 한도로 몸을 굽히고 마부대(馬夫臺)에 앉은 채, 꼼짝달싹 않고 있다. 만일 그 위에 눈사태가 떨어진다 해도, 그는 자기 몸에서 눈을 털어 버릴 필요성을 느끼진 않았으리라…… 그의 말도 역시 새하얗고 움직일 줄을 모른다. 그 부동성(不動性), 모가 난 형태, 말뚝처럼 꼿꼿한 다리로 해서 가까운 곳에서 보아도 1코페이카짜리 설탕과자 말과 흡사하다. 그 말은 어느 모로 보나, 무슨 생각에 잠겨 있는 것이 분명했다. 쟁기에서 벗어나고 낯익은 평범한 경치에서 떠나서, 괴물과 같은 불빛이며 멈출 줄 모르는 소음이며 부산스럽게 뛰어 다니는 사람들로 뒤덮인 이 도가니 속에 굴러 떨어졌으니, 어찌 생각에 잠기지 않을 수 있으랴…….

요나와 그의 말은 벌써 오랫동안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점심 전에 숙소에서 나온 것이지만, 아직껏 개시를 못 하고 있다. 그러나 거리에는 벌써 저녁의 어둠이 깃들기 시작했다. 파리하던 가로등 불빛은 그 자리를 생생한 빨간색에다 양보하고 거리의 혼잡은 점점 소란해진다.

"마부, 브이보르그스까야까지!"

요나는 이런 소리를 듣는다.

"마부!"

마부는 부르르 몸부림을 치고, 눈에 뒤덮인 속눈썹 너머로 두건(頭巾) 달린 털 외투의 군인을 본다.

"브리보르그스까야까지!"

하고 군인은 되풀이한다.

"아니, 넌 졸고 있냐? 브이보르그스까야까지!"

알아들었다는 표시로 요나는 말 고삐를 당긴다. 그러자 말 잔등과 그의 어깨에서 눈 층()이 허물어 떨어진다…… 군인은 썰매에 앉는다. 마부는 쯧쯧 입술을 빨고는 백조(白鳥)처럼 목을 빼고 몸을 일으키며, 필요해서라기보다는 오히려 습관에 의해 회초리를 흔든다. 말도 역시 길게 목을 빼고 그 말뚝처럼 꼿꼿한 다리를 굽히며 어슬렁어슬렁 걸음을 옮긴다…….

"어딜 가는 거야, 이 자식아!"

맨 처음 요나는 앞 뒤로 움직이고 있는 새까만 군중 속에서 이런 고함 소리를 듣는다.

"어딜 가는 거야? 좀 더 오른쪽으로 가!"

"넌 말을 몰 줄 모르냐! 오른쪽으로 가!"

군인도 화를 내서 외친다.

사륜마차(四輪馬車)의 마부가 욕설을 퍼붓는다. 길을 건너려다가 말 콧등에 어깨를 부딪친 통행인이 험상궂은 눈초리를 바라보고는 소매에 묻은 눈을 털어 버린다. 요나는 바늘 방석에라도 앉은 듯, 마부대에서 갈팡질팡하며 팔꿈치를 양쪽으로 내어밀고, 미친 사람 모양, 마치 자기가 어디에 있으며 어째서 이런 곳에 있는지조차 모르겠다는 듯 눈만 두리번거리고 있다.

"바보 녀석들 같으니!"

하고 군인은 투덜거린다.

"말에 부딪치려는 자가 없나, 말 밑으로 기어들려는 자가 없나, 모두 같은 놈들이 야."

요나는 손님 쪽을 돌아보고 입술을 오물거린다…… 분명히 무슨 말인지 하고 싶은 것 같았으나, 그의 목구멍에서는 코고는 듯한 목소리 외엔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는다.

"뭐라고?"

하고 군인은 묻는다.

요나는 히죽이 웃으며 입을 찡그리고 목구멍에 힘을 주어 쉰 목소리로 말한다.

"저 말입니다, 나리…… 제 아들놈이 이번 주일에 죽었답니다."

"으흠!…… 어떻게 죽었지?"

요나는 온몸을 손님 쪽으로 돌리며 말한다.

"그건 걸 누가 압니까! 아마 열병인 것 같습니다…… 사흘 동안 병원에 누워 있다 가 죽었으니까요…… 모두 하느님의 뜻이겠죠."

"옆으로 비켜, 이 악마야!"

어둠 속에서 이런 소리가 들린다.

"뭘 꾸물거리고 있어, 이 늙은 개새끼야! 눈은 뒀다 뭘 하는 거야!"

", 좀 더 달려, 달려……."

하고 손님은 말한다.

"이래 가지곤 내일까지도 못 가겠다. 좀더 몰아봐!"

마부는 또다시 목을 빼고 몸을 일으키고는 아주 대견스러운 표정으로 회초리를 흔든다. 그 후에도 요나는 여러 번 손님 쪽을 돌아보지만, 손님은 눈을 감은 채 아무리 봐도 자기 말을 들어 줄 것 같은 표정이 아니다.

브이보르그스까야 거리에서 손님을 내리우자, 그는 음식점 옆에 말을 멈추고 마부대에 몸을 굽히고는 또다시 움직이지를 않는다…… 축축한 눈송이는 다시금 요나와 말을 새하얗게 뒤덮어 버린다. 한 시간, 두 시간, 시간은 흐른다.

요란스럽게 덧신을 두드리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세 사람의 젊은이가 인도를 지나간다. 그중 두 사람은 호리호리하게 크고, 한 사람은 난쟁이 꼽추다.

"마부, 경찰교(警察橋)까지!"

하고 째는 듯한 목소리로 꼽추가 외친다.

"세 사람에 20코페이카다!"

요나는 고삐를 당기고 쯧쯧 입술을 빤다. 20코페이카는 가격이 아니지만, 그는 가격 같은 것에 상관이 없다…… 루블이건, 5코페이카건 지금의 그에게는 마찬가지이다. 손님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청년들은 이리저리 떠밀고 욕설을 주고받으며 썰매 옆으로 다가온다. 세 사람이 함께 좌석으로 기어오른다. 그런데 두 사람은 앉고 한 사람은 서야 했는데, 이 때 누가 설것인가에 대해서 옥신각신 논쟁이 벌어진다. 한참 동안 욕설과 각자의 주장과 비난이 있은 다음, 가장 작다는 이유로 꼽추가 서게 됨으로써 일단락을 짓는다.

", 가자!"

꼽추는 자리를 잡고 서자, 요나의 뒤통수에 입김을 불어대며 찢어지는 소리로 외친다.

"내리 쳐! 도대체 영감, 그 모잔 뭔가! 뻬쩨르부르그를 모조리 훑어도 그보다 나 쁜 건 찾아내지 못할 거다……."

"흐흐……흐흐……."

하고 요나는 웃는다.

"어쨋든 내 모자니……."

"내 것이건 뭐건 빨리 달리기나 해! 이런 식으로 쭉 갈 참인가? ? 그럼 목덜미를 후려 갈길 테다!"

"머리가 깨지는 것 같군……."

키다리 중의 한 사람이 말한다.

"어제 두끄마쏘프의 집에서 바시까와 둘이 꼬냐크를 네 병이나 마셨으니 말야."

"왜 그런 거짓말을 하는 거야, 난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다!"

하고 또 한 사람의 키다리가 성을 낸다.

"거짓말을 해도 분수가 있지."

"벼락을 맞겠다, 거짓말이라면……."

"그런 말야, []가 기침을 한다는 것과 같은 진실이야."

"흐흐흐!"

하고 요나는 웃는다.

"재미있는 분들이셔!"

"아니, 임마……."

하고 꼽추가 화를 낸다.

"늙은 고릴라 같으니, 넌 말을 달리는 건가, 아닌가? 아니, 이게 가는 거야? 힘껏 회초리를 내리 쳐! 이 악마야! 임마! 좀 더 달려 봐!"

요나는 자기 등에서 꼽추의 몸놀림과 떨리는 음성을 느낀다. 그는 자기에게 퍼붓는 욕설을 듣던가, 사람들을 보고 있노라면 자기 가슴 속에 점점 고독감(孤獨感)이 사라져 감을 느끼는 것이다. 꼽추는 아무 실속 없이 떠드는 욕설에 목이 잠겨, 쿨룩쿨룩 기침을 할 때까지 욕설을 계속한다. 두 사람의 키다리는 나제쥬다 뻬뜨로브나라는 어떤 여자에 대해서 말을 시작한다.

요나는 가끔 그들을 돌아본다. 잠시 말이 끊어진 틈을 타서, 그는 다시 뒤돌아보며 중얼거린다.

"이번 주일에…… 제 아들놈이 죽었습니다!" "사람은 모두 죽게 마련이야……." 하고 꼽추는 기침을 한 다음, 입술을 닦으면서 헐떡이는 소리로 말한다.

", 달려, 달려! 여보게, 이렇게 간다면, 난 도저히 참질 못하겠어! 도대체 언제까 지 갈 생각인가!"

"영감, 좀더 기운을 내라…… 목덜미를 후려 갈겨!"

"아니, 이 영감이 말을 듣나, 먹나? 모가지를 비틀어야 알겠어…… 점잔을 빼고 가만 있으니까, 걷는 것보다 난 것이 뭐야! …… 영감, 듣고 있는 거야, 즈메이 고 르이느이치? 그렇잖으면 우리들의 말을 무시할 작정인가?"

그리고 요나는 뒤통수를 때리는 느낌보다는 오히려 그 소리를 듣는다.

"흐흐흐……."

하고 그는 웃는다.

"재미있는 분들이군…… 제발 건강들 하슈!"

"마부, 자네에겐 마누라가 있나?"

하고 키다리 중의 한 사람이 묻는다.

"저 말이요? 흐흐흐…… 재미있는 분들이셔! 지금 제겐 마누라가 하나 있지요. 축축한 땅 덩어리…… 히히히 …… 즉 무덤이란 말요! …… 아들놈도 죽었는데 저는 살고 있습니다. 이상한 일도 있어요. 염라대왕께서 문을 잘못 들었습죠…… 저한테 올 것이 아들놈한테 갔으니 말입니다."

그리고 요나는 아들이 어떻게 죽었는가를 설명하려고 뒤돌아보지만, 이 때 꼽추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겨우 목적지에 닿았다는 것을 선언한다. 20코페이카를 받아 쥔 다음에도 요나는 한참 동안 어두운 통로로 사라져 간 주정뱅이들의 뒤를 전송하고 있었다. 다시금 그는 외톨이가 된다. 그리고 다시금 그에게 정적이 다가온다…… 한동안 잠잠했던 우수(憂愁)가 다시 휩쓸어, 한층 강력한 힘으로 가슴을 씹는다. 불안하고 고통스러운 요나의 눈초리는 양쪽 인도를 오가는 군중 위를 달린다. 이렇게 많은 수천 명의 군중 속에서 단 한 사람이라도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줄 사람은 없을까 하고. 그러나 군중은, 그와 그의 우수에는 아랑곳도 없다는 듯, 무심히 달리기만 한다…… 우수는 한없이 크기만 한다. 요나의 가슴을 쪼개서 그 안에서 우수를 흘려 버린다면 그것은 온 세상에 철철 넘치고 말리라. 그러나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우수는 눈에 보이지는 않는다. 그것은, 대낮에 불빛을 들이대고도 볼 수 없는 그러한 하잘것 없는 껍질 속에라도 들어박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요나는 가마니를 든 머슴을 보고 그 사나이한테 말을 걸어 보리라 생각한다.

"여보게, 지금 몇 시나 됐지?"

하고 그는 묻는다.

"아홉 시 지났어…… 뭣 때문에 이런 데 서 있는 거야? 빨리 가도록 해!"

요나는 거기서 몇 걸음 지나가서, 등을 굽히고 우수에 온 몸을 내맡긴다…… 그는 사람에게 말을 건다는 것이 이미 소용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5분도 채 지나지 않았을 무렵, 그는 몸을 곧게 세우고, 마치 날카로운 아픔이라도 느낀 듯 머리를 흔들고는 고삐를 잡아당긴다…… 그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숙소로 돌아가자.' 하고 그는 생각한다. '숙소로!'

그러자 말도 그의 마음을 짐작이라고 한 듯 민첩히 달리기 시작한다. 한 시간 반 가량 지난 후, 요나는 벌써 크고 더러운 난롯가에 앉아 있다. 난로 위에도, 마루 위에도, 벤치 위에도, 사람들이 코를 골며 자고 있다. 공기는 숨이 막힐 정도로 답답하다…… 요나는 잠자는 사람들을 둘러보고 몸을 긁으면서, 이렇게 빨리 숙소로 돌아온 것을 후회한다.

'귀리 값도 못 벌었어.' 하고 그는 생각한다. '그러니까 이렇게 마음이 우울하지. 자기 일을 잘하는 사람은…… 배를 곯지도 않고, 말에게도 배 고픈 맛을 보이지 않으니, 언제나 마음이 편할 수밖에…….'

한쪽 구석에서 젊은 마부 한 사람이 일어나서, 졸린 듯이 중얼거리며 물통쪽으로 허둥지둥 걸어간다.

"마시고 싶으냐?"

하고 요나는 묻는다.

"그래 마시고 싶어!"

"그럼, 실컷 마셔…… 그런데 말야, 젊은이 내 아들놈이 죽었다네…… 자네 들었나? 이번 주일에 병원에서 말야…… 세상이란!"

요나는 젊은이에게 자기 말이 어떤 효과를 일으켰는가를 보려고 하지만, 아무것도 볼 수가 없다. 젊은이는 머리부터 푹 이불을 뒤집어쓰고 벌써 잠들고 말았다. 노인은 한숨을 몰아쉬고 몸을 긁는다. 젊은이가 물을 마시고 싶었던 것처럼, 그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아들이 죽은 지 한 주일이 되어 오지만, 그는 아직껏 누구에게나 아들의 말을 한 적이 없었다…… 말하려면, 요령 있게 자세히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떻게 돼서 병에 걸렸는가, 어떻게 고통당했는가, 죽기 전에 뭐라고 말했는가, 죽을 때는 어떠했는가, 이것을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장례의 광경이며, 죽은 아들의 옷을 찾으러 병원에 갔을 때의 일까지 말해야 한다. 시골에는 딸 아니씨야가 남아 있었다…… 그 딸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다, 지금 그가 해야 할 말은 얼마나 많은가? 이 말을 듣는 사람은 감동한 나머지, 한숨을 몰아쉬며 가슴아프게 생각할 것임에 틀림없다. 상대편이 여자라면 더욱 그렇다. 여자라면, 가령 아무리 바보라 해도 단 두 마디에 벌써 울음을 터뜨리고 말리라.

'말이라도 가서 볼까.' 요나는 생각한다. '언제라도 잘 수는 있다. 얼마든지 잘 순 있어.'

그는 옷을 걸치고 자기 말이 매여 있는 마구간으로 간다. 그는 귀리며, 건초(乾草), 날씨에 대해서 생각한다…… 혼자 있을 때는 아들에 대해서 생각할 수가 없다. 누구든지 말을 들어 주는 사람이 있으면 몰라도 혼자서 외로이 생각에 잠겨 아들의 모습을 상기한다는 것은 참을 수 없이 괴로운 것이다…….

"먹느냐?"

요나는 반짝반짝 빛나는 말의 눈을 바라보며 물어 본다.

", 먹어, 먹어…… 귀리 값을 못 벌면 건초라도 먹어야지…… 그래…… 마차를 끌자니 이미 몸은 늙어 버렸고…… 아들놈이 끌어야 해, 내가 아니라…… 그앤 참 훌륭한 마부였어. 그놈만 살아 있다면……."

요나는 잠시 가만 있다가 다시 말을 잇는다.

"그렇다, 얘야…… 꾸지마 요느이치는 이 세상에 없다…… 먼 곳으로 떠나갔어. 아무 산 보람도 없이 죽고 말았다…… , 네게 새끼 말이 있고, 넌 그 새끼 말의 엄마라고 하자…… 그런데 갑자기 그 새끼 말이 어딘지 먼 곳으로 가 버렸단 말이다…… 그런데도 넌 슬프지 않니?"

말은 먹이를 씹으며, 귀를 기울이기도 하고, 주인의 손에 입김을 불기도 한다…… 요나는 흥분한 어조로 자기의 자초지종(自初至終)을 말에게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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