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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희(1952~ )

가까운 사람을 멀리 사랑하기 위하여

가로등 아래서

갑자기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는 말이 들렸다

객석에 앉은 여자

검은 오선지

결혼의 세계

고요한 밤 거룩한 밤

공포영화

그래도라는 섬이 있다

그림 속의 물

금수와 같이

기억 상실은 따뜻하다

기적

길이 없는 길 위에서

꿈과 상처

꿈꾸는 병

나는 밤마다 거울 속에 물을 준다

나는 쇼핑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나의 마차(馬車)엔 고갱의 푸른 말[馬]을

낙화암 벼랑 위의 태양의 바라의 춤

난폭

남도창(唱)

남자들은 모른다

내가 없는 한국 문학사

내가 찾는 별은

넝마의 운율

누가 나의 슬픔을 놀아주랴

눈물의 노래

눈부신 유언 한 채

달걀 속의 생(生)

딸꾹질

땅에 떨어진 눈썹

떠도는 환유

뚱뚱한 모나리자

만파식적(萬波息笛)

매혹된 길

모기에게 대포를

모든 신발이 불편하다

목 없는 마녀

무궁동(無窮動)

물이 수증기로 바뀌는 순간

미완성을 위한 연가 – 경주 남산의 새기다 만 마애불 앞에서

바늘 뗏목

밥과 잠과 그리고 사랑

배꼽을 위한 연가

백조의 호수

백조의 호수 옆에서

법 아래서

벽을 느낄 때

벽지 바꾸는 시대

보리수나무 아래로

부엉부엉

부패, 농담, 허무

붙들린 여자

비 내리는 날

비 오는 날의 그리움

빗자루를 타고 달리는 웃음

뻐꾸기 둥지를 못 날아간 새

사랑

사랑은 ㅇ을 타고

사랑을 위한 노래

사라의 전당

사련(邪戀)

사유재산

산타 첼로

새벽밥

생의 가장자리

서울의 우울

성녀와 마녀 사이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싸움

솟구쳐 오르기

수의 디자이너

순정만화

슬픈 적도(赤道)

슬픔과 놀며

시간

시계풀의 편지

시의 응급실에서

시작을 위한 난생설화

신이 감춰둔 사랑

심장딴곳증

쌍봉낙타

아네모네꽃이 핀 날부터

아프락사스

안전벨트를 맨 사람

알지 못하는 혀

애총가 – 보길도 산정에서

양수리에 가서

어두운 계단을 내려가며

어머니가 나에게 가르쳐주신 말

엄마의 발

없는 사람

엘리베이터 문이 닫힐 때

여기와 저기

여보

여왕의 날씨

여인 등신불

오사마 부시 라덴

외할머니 나비

우리 속의 짜라투스트라

울부짖음

유령과 함께

유목을 위하여

유서를 쓰며

응시

이런 사람이 살고 있다

이카루스의 잠

일회용 시대

자살자의 노래

자연사

잔인한 편집

장미와 가시

저 산을 옮겨야겠다

절망은 기교를 낳는다

제목 없는 사랑

죽도록 사랑해서

죽은 말의 꿈

진주 기르기

집 나간 개를 위한 명상

창문을 닫고 블라인드를 내리고 커튼을 치고 이불 속에 누워봐도

천왕성의 생각

첫눈

치자꽃

치정의 시대

콩나물의 물음표

타조알을 낳는 여자 – 은은 씨에게

탕탕 - 몽타주

태양 미사

태양 성서

태양의 면죄부

태양의 형식

텅텅

토끼와 주민등록증

평화 일기

푸른 상치들이 있는 풍경

피아노 포르테를 위한 연습곡

하나를 위하여

하늘빛 달걀

하루살이

햇님을 좋아하는 얼음 나라

햇님의 사냥꾼

호텔 자유로

황혼이면

흑장미가 있는 연가

희망에는 신의 물방울이 들어 있다

흰 여름의 포장마차

13월 13일의 사랑

80년대의 이름으로 촛불에게 묻노니

 

 

 

가까운 사람을 멀리 사랑하기 위하여

김승희

 

관계와 관계 사이에서

내가 온통 벌거숭이로 피를 칠하고 있을 때

난 알 것 같았어.

왜 별이 아름다운지를.

난 알아질 것 같았어.

만일 구름의 너울이 없다면

어떻게 감히 태양을

사랑---이라고 부르겠는가를.

 

밤에 마지막 외침처럼 황량한 마음으로

지붕 위에 서 있으면

먼 데 있는 사람아, 말하려무나

내가 평화처럼 혹은 구원처럼

금빛이더라고.

신비한 금선이 아득히 흘러

우리가 어떻게 서로를 꿈꾸게 되는지를,

 

관계와 관계 사이에서

내가 울부짖는 하나의 욕설처럼 추악해질 때

난 알고 말았어

별과 神(신)은 왜 그토록 멀리 있어야 하는지를.

모든 성당의 창문에는

왜 천연색의 색유리가 끼어 있는지를.

 

오늘 내가 여기 천벌의 화형으로

지새우는 불이

어디엔가--- 먼 사람에겐---

아마도 위안처럼 정다우리니

생각해 보아,

멀리 있어서 아름다운 별은, 하느님은---

우리가 더 잘 이해하기 위하여

왜 우리에겐 그토록 간격의 탐닉이

필요한 것인가를---

 

 

 

가로등 아래서

김승희

 

누가 이렇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가지를

효수해 걸었을까?

 

목을 매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는

이렇게 목을 매는구나

 

울먹이는 마음

나 돌아가는 길에

어느 어둠의 모서리에

부딪쳐 쓰러지지 말라고……

 

그런데 어두운 골목 옆

환한 담벼락 안에서 동화 같은 이런 말이

소근소근 들려오는 것도 같다.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이쁘니?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지?

전원에 줄만 꽂으면

꾸벅꾸벅 절하는 각시와 신랑 인형의

전기줄을 꽂아놓고

어여쁜 한국인형의 절을 받으며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이쁘니?

거울 앞에서 웃는 사람들의

담소의 목소리.

 

요즘에는 묻는 사람에게마다

네가 제일 예쁘다고 말해주는

요술 거울이 나왔나 보다.

백설공주의 기억을 잊어버린

그런 거울 하나씩을 갖고

동그라미--요술 물방울--천연색 기포(氣泡)

속에 갇혀

후욱, 불면 날아갈 듯이 조마조마

행복한 사람들의 이야기.

그들은 결코 가로등 불빛을 원하는

삶을 살지는 않겠지.

 

그러니 무엇을 울고 있는가?

그들이 저 가로등의 이름이 누구인지를

모른다고 해서?

 

 

 

갑자기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말이 들렸다

김승희

 

폭설의 밭 속에서 살고 있는 것들!

백설을 뻗치고 올라가는 푸른 청보리들!

폭설의 밭 속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들!

시퍼런 마늘과 꿈틀대는 양파들!

다른 색은 말고 그런 색들!

다른 말은 말고 그런 소리들!

 

하루를 살더라도 그렇게

사흘이나 나흘을 살더라도 그렇게!

 

 

 

객석에 앉은 여자

김승희

 

그녀는 늘 어딘가가 아프다네.

이런 데가 저런 데가

늘 어느 곳인가가.

 

아프기 때문에

삶을 열심히 살 수가 없노라고

그녀는 늘상 자신에게 중얼거리고 있지.

 

지연된 꿈, 지연된 사랑

유보된 인생

이 모든 것은 아프다는 이름으로 용서되고

그녀는 아픔의 최면술을

항상 자기에게 걸고 있네.

 

난 아파,

난 아프기 때문에

난 너무나 아파서

 

그러나 그녀는 아마도 병을 기르고

있는 것만 같애.

 

삶을 피하기 위해서

삶을 피하는 자신을 용서해주기 위해서

살지 못했던 삶에 대한 하나의 변명을

마련하기 위해서

꿈이 상실에 대한 알리바이를 주장하기 위해서!

 

그녀는 늘 어딘가가 아프다네.

이런 데가 저런 데가

늘 그저 그런 어떤 곳이.

 

 

 

검은 오선지

김승희

 

인광(燐光)의 부호들이 찍히어 있습니다……

베토벤

모짜르트

바하보다도 더 아름다운 음표들이

내막을 알 길 없는 밤하늘의

흉곽 위에

형광처럼 반짝이며 날아다닙니다……

 

우리는 악보를 알지 못합니다

단지 음악을 들을 뿐

누구도 악보를 보지 못합니다

 

살아 있다는 것이 무서워집니다

희랍극의 배우들처럼

저항도 해보고

수수께끼와 맞서보기도 하면서

슬픔 혹은 원한으로

인생을 배워나가야 합니다

 

철도 길에 나와앉아 생각해봅니다……

근심처럼 절실하게

사랑하는 사람들을,

인연의 십자가에 못박혀 가면서도

내 너를 알지 못한다고

말할 순 없습니다……

 

인광(燐光)의 부호들이 긴 선을 그으며

흘러 떨어집니다……

누군가 지금

죽고 있는 모양입니다

근조(謹弔) - 등불이

돌아오는 나의 길을 밝혀 줍니다……

그리하여 짧은 우리의 사랑은

절망 속에 더욱 결속됩니다

 

 

 

결혼의 세계 - 뉴욕의 희규에게

김승희

 

[결혼한 지 일 년이 되니까

이런 생각이 들어.

미혼의 세계는 FM 같고

기혼의 세계는 AM 같고

언니는 지금도 FM 방송을 더 많이 듣지? ]

 

AIR MAIL 봉투를 뜯고

뉴욕 맨하튼에서 온 희규의 절망을 듣는다.

사실을 말하자면, 사실을 말해 버릴까, 사실을

말해버릴 수 있을까, 난......

도무지 FM도 AM도 들을 시간이 없고

(나의 뇌에는 음악을 위한 자리도 상식을 위한

자리도 없기는 없다마는)

그보다도, 난, 스스로 AM 방송국이 되어

하루종일 상투적인 전파를 송신하고

퍼뜨리는 너절한 주부생활 방송국 국장이 되어

 

그런데. 희규에게.

[결혼한 여자라고 해서 FM을 안 듣는다는 건

잘못 유포된 미신이야. 결혼한 여자는 AM의 세게에만

머물렀으면 하는 건, 남자중심주의가 만든

민속신앙이야. 이상하지, 우리의 속신은 남자를 위해,

남자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더 많은데

여자들이 더 열렬하게 옹호하고 전파한다는 것은.

난 마음의 지하실에 무수한 FM방송국을 세우고

또 허물어. 물론 낮에는 AM방송국에 근무하지.

다만 왼손과 오른손의 세게 어느 것 하나 잃어버리고

싶진 않아서.]

 

우리 집 마당귀에 서 있는 라일락 한 그루.

구름처럼 퍼져가는 보라빛 향기.

저 불쌍한 땅을 데리고

향기의 초현실을 만드는 그녀를 닮기 위해

결혼의 세계엔 때로 살육과 뼈가 튀었다.

 

 

 

고요한 밤 거룩한 밤

김승희

 

요즈음 겨울밤에는 귀뚜라미가 울지

않는다.

참으로 이상하다. 귀뚜라미들조차 안 움직이는

역사 앞에서 기진한 것인가.

절필한 귀뚜라미들. 아무것도 울지 않는

겨울밤이 아무래도 이상한 것 같다.

이런 행복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런데 친구여, 나는 삶이 무섭구나.

아침마다 욕실에 들어가면

물을 받아놓은 욕조 안에

둥둥 떠 있는 귀뚜라미들의 시체.

누가 나더러 귀뚜라미 의문사를

물어보지 않는데도

나는 왜 하얀 배를 위로 뒤집고

둥둥 떠 있는

귀뚜라미 시체들이 시대의 비밀처럼

못 견딜 정도로 무서워 오느냐.

 

나는 자식들에게 가르칠 것이

아무것도 없다.

결국 이 죄 많은 세상에 죄짓지 말고

살라는 말도 자신 있게 할 수가 없다.

80년대식 귀뚜라미는 그렇다.

순정의 말이 아직 남아 있어

떳떳이 죽지도 못하고

공개적으로 의문사를 남긴다. 공개적

의문사보다 더 많은 말이 세상에 존재하는가.

 

그래도 밤은 고요하다.

고요한 밤 거룩한 밤

그래서 침묵이 돋보인다.

침묵의 무늬만 빙빙 물음표를 감싸며

벽지 위를 돌고 있다.

 

 

 

공포영화

김승희

 

나는 언제나 쫓기고 있지,

공포영화 속의 주인공 배우처럼

나는 끝까지 쫓기고 있지,

막연한 액운의 별 아래

영문 모르고 살다가

어느날 갑자기 쫓기기 시작한다는

진부한 줄거리로

지치지도 않고 계속 돌아가는

오늘도, 잠 속의 낡은 영사기……

 

이제 자막에서 비는 내리고

비를 맞으며

하염없이 쫓겨 가는 희미한 뒷모습……

무슨 범죄를 저질렀을까?

무성의 자막 위에

암호처럼 쏟아지는 희미한 외국어들,

왜 범인이 되었을까?

의문마저도 잊어버린 정박의 꽃처럼

온통 사위엔 쫓겨가는 움직임뿐……

 

바라건대 악몽은 악몽일지라도

한평생 깨지 않는 악몽이라면

그건 좋은 거야,

그건 오 케이야 -

오, 그런데, 나는 참 찬란한 애정영화가

한 편 보고 싶다,

그리고 무섭도록 사치스런 예술영화도

한편……

 

 

 

그래도라는 섬이 있다

김승희

 

가장 낮은 곳에

젖은 낙엽보다 더 낮은 곳에

그래도(島)라는 섬이 있다

그래도 살아가는 사람들

그래도 사랑의 불을 꺼트리지 않는 사람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움 섬, 그래도(島)

어떤 일이 있더라도

목숨을 끊지 말고 살아야 한다고

천사 같은 사람 김종삼, 박재삼

그런 착한 마음을 버려선 못쓴다고

 

부도가 나서 길거리로 쫒겨나고

인기 여배우가 골방에서 목을 매고

뇌출혈로 쓰러져

말 한마디 못 해도 가족을 만나면 반가운 마음

중환자실 환자 옆에서도

힘을 내어 웃으며 살아가는 가족들의 마음 속

 

그런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섬, 그래도(島)

그런 마음들이 모여 사는 섬 그래도(島)

그 가장 아름다운 것 속에

더 아름다운 피 묻은 이름

그 가장 서러운 것 속에 더 타오르는 찬란한 꿈

 

누구나 다 그런 섬에 살면서도

세상의 어느 지도에도 알려지지 않은 섬

그래서 더 신비한 섬

그래서 더 가꾸고 싶은 섬 그래도(島)

그대 가슴 속의 따스한 미소와 장밋빛 체온

이글이글 사랑과 눈이 부신 영광의 함성

 

그래도(島) 라는 섬에서

그래도 부둥켜안고

그대도 손만 놓지 않는다면

언젠가 강을 다 건너 빛의 뗏목에 올라서리라

어디엔가 걱정 근심 다 내려놓은 평화로운

그래도 거기에서 만날 수 있으리라

 

 

 

그림 속의 물

김승희

 

사랑스런 프랑다스의 소년과 함께

벨지움의 들판에서

나는 藝術(예술)의 말을 타고

알 수 없는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림은 손을 들어

내가 그린 그림의 얼굴을

찢고 또 찢고

울고 있었고,

 

나는 당황한 現代(현대)의 이마를 바로잡으며

캔버스에

물빛 물감을 칠하고, 칠하고

 

나의 의학 상식으로서는

그림은 아름답기만 하면 되었다.

그림은 거칠어서도 안되고

또 주제넘게 말을 해서도 안되었다.

 

소년은 앞머리를 날리며

귀엽게, 귀엽게

나무피리를 깍고

그의 귀는 바람에 날리는

銀(은)잎삭.

그는 내가 그리는 그림을 쳐다보며

하늘의 물감이 부족하다고,

화폭 아래에는

반드시 江(강)이 흘러야 하고

또 꽃을 길러야 한다고 노래했다.

 

그는 나를 탓하지는 않았다.

現代(현대)의 고장 난 수신기와 목마름.

그것이 어찌 내 罪(죄)일 것인가.

그러나 그것은 내 罪(죄)라고

소년은 조용히

칸나를 내밀며 말했다.

 

칸나 위에 사과가 돋고

사과의 튼튼한 과육이

왠일인지 힘없이

툭, 하고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소년은 나에게 江(강)을 그려달라고 부탁했다.

江(강)은 깊이 깊이 흘러가

떨어진 사과를 붙이고

싺트고

꽃피게 하였다.

그리고 그림엔 노래가 돋아나고

울려 퍼져

그것은 벨지움을 넘어

멀리멀리 아시아로까지 가는 게 보였다.

소년은 江(강)을 불러

내 그림에 다시 들어가라고 말했다.

화폭 아래엔 강이 흐르고

금새 금새

환한 이마의 꽃들이 웃으며 일어났다.

 

피어난 몇 송이 꽃대를 꺾어

나는 잃어버린 내 친구에게로 간다.

그리고 江(강)이 되어

스며들어

친구가 그리는 그림

그곳을 꽃피우는 물이 되려고 한다.

물이 되어 친구의 꽃을 꽃피우고

그리고 우리의 죽은 그림들을 꽃피우는

넓고 따스한 바다가 되려고 한다.

 

 

 

 

금수와 같이

김승희

 

1

나는 개같이 살 거야,

개같이 먹고 개 같은 이빨로

그들을 갈기갈기 찢어 죽일 거야.

이것은 천사의 친형제 같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가

말,

 

개 같은 세상 속에서

개 같은 사람들에게

개같이 희롱당하다가

개처럼

비 내리는 어떤 날

이름도 없는 어떤 흙구덩이 속에

쳐박혀진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가

남긴

말,

 

하느님의

궁정 악장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지옥의 하수구 잡역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천재는 신의 사생활을 폭로하고

신의 사유재산을 범하지,

그리고 신은 그에게

옐로우 카드를 보낸다,

빚쟁이와 모략꾼과 협잡꾼과 암살꾼들을,

끝나지 않는 질병처럼

몬순지방의 기나긴 장마처럼

지치지도 않고

끈질기게,

 

그는 이미 떠내려가고 없는

다리를 향해

별을 쳐다보면서

걷고 있는 사람이었을까,

쓸개즙을 달게 먹으며 유레카

유레카 외쳤을까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아기의 시체를 종이에 싸서

가슴에 안고

세 번이나 새벽길을 걸어본 사람

 

성체배령을 하기 위해

그는 불행에 물든 손을

높이 쳐든다,

천벌처럼 아름다운 음악이 흐를 때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개같이 살겠다던 그는

개같이 죽고

 

개같이 살고 싶다고 언제부턴가 자살을

단념한 뒤로

더욱 염세적이 된 나는

그의 진혼곡 뒤에서 언제나 낄낄거리는

우단후장의 웃음소릴 듣는다,

낄낄낄 – 가발을 잊지 말라고

낄낄낄 – 동물로 돌아가라고

 

지상의 모든 관제탑에선

갑자기 이륙 금지의 하얀 백기를

모조리 올리고 있다

 

 

2

모태신앙과도 같은

한 어둠이 있어

나는 일찌기 태어났는지도 모른다,

금수와 같이

금소와 같이

질기게 괴로워하라고

나는 어쩌면 선택받은 어느 별의

이름으로

이렇게 질기게 기어 다녀야만

하는지도 모른다

 

형제들아, 친구들아,

지렁이들아

배암들아

진드리들아

 

모태신앙과도 같은

한 어둠이 있어

우리는 일찍기 태어났는지도 모른다,

금수와 같이

 

금수와 같이

질기게 짓밟혀야 한다고

우리는 어쩌면 선택받은 어느 저주의

이름으로

이렇게 바닥으로 바닥으로

기어 다녀야만

하는지도 모른다

 

 

 

기억 상실은 따뜻하다

김승희

 

기억 상실은 따뜻하다.

지난 시대를 생각하면

광선이 너무 많이 들어간 사진처럼

그저 표정이 증발된

하얀 홑이불 같은 것이 나타난다.

(80년대는 피의 다큐멘타리의 시대

라고 했는데, 얼룩 하나 다큐의 활자

하나 안 나타난다)

 

무인 판매대에서 신문을 팔고 있다.

신문마다 90년대여! 안녕!

허어연 스크린이 내걸리고

환등기로부터 빛이 콸콸 쏟아지고 있다.

토스트 기계에서

갓 구워진 빵조각들이 탁 하고

일시에 튀어 나오듯이

마침표와 느낌표들의 눈보라처럼

나라는 과녁을 향해 쳐들어오고 있다.

 

나는 점점 눈이 침침해진다.

내가 실명하려 하는 중일까, 아니면

세계가 점점 어두워지고 있는 것일까.

어디선가

시동장치가 고장난 자동차 소리가

부르릉 부르릉

각혈 기침을 감추려는 것 같다.

(버스 정거장까지 가려면

두 구간쯤을 더 걸어야 한다)

 

두 구간쯤 걷기가

피로해서

고장난 자동차 안에 그냥 계속 머무른다.

기억상실증은 따뜻하고

또한 우리들 중의 많은 남자와 여자들이

요즈음 점점 더 석녀가 되어가는 것을

나는 가까이에서 느낀다.

그리고 우리는 이민 고아처럼

시간 속에 남겨진 채

아아, 자신의 매몰을 감추려는

섬처럼…… 서로를 바라본다.

 

 

 

기적

김승희

 

일당 만 원이 적다고

데모를 한다.

일당 만 원

비 오는 날 쉬고 일요일 날 빼고

무엇으로 어떻게 사느냐고

 

일당 만 원

참 적다.

그것으로 어떻게 사느냐고

싸워야지

암 싸워서 올려야 하고 말고

 

그런데 그 여자

하루종일 세끼 밥 부엌일에 두 아이 기르고

빨래 청소 층층시하 시어른 봉양에

비 오는 날도 안 쉬고 일요일 날도 못 쉬고

일당 만 원은 커녕

무료라네.

그저 한푼도 품삯은 없지.

무료라네

-정말?

-정말.

-어떻게 사람을 무료로 종신 부려먹을 수 있나?

-원죄의 판결 같은 것이 있었을까?

-사랑의 수의계약?

 

그 여자

구타에 욕설, 때로는 한없는 모독 속에서

무료로 품삯 한푼 없이

사랑의 고독에 팔려온 결혼의 세계.

-아니, 그럼, 결혼이

TV프로 <내딸을 돌려주세요>에 나오는

인신매매단의 생리와 닮았다는 말인가???

 

 

 

 

길이 없는 길 위에서

김승희

 

역촌동 - 상도동 구간을 오늘도 내일도 달리는

저 시내 버스는

어쩌면 나보다 더 행복한 것인지도 모른다

승객들이 오르고 나면

재빨리 문이 닫히고

시간이 없다고 갈 길이 멀다고

오늘도 내일도

의심 없이 그 길을 달려가는

저 노선 버스는

나보다 더 고뇌가 없는 씩씩한

길을 가진 것이라 해도 좋다

 

매일매일

떠나야 할 분명한 시점과 닿아야 할 분명한

종점을 가진 것이

부럽다 해도

난 벌써 서른다섯 살.

아스팔트 위를 먼지와 함께 불어 가는

가을바람

처럼

그 바람에 흩어져 날아가는

어제 저녁의 구겨진 신문지 조각

처럼

나에겐 떠나야 할 곳도 닿아야 할 곳도

언제나처럼 분명치가 않다는 느낌이다

 

행복한 길을 가지기 위하여

행복한 사람이 되어야 할까.

행복한 사람이 되기 위하여

행복한 길을 가져야 할까

나는 아직도 아마 모른다.

다만 아침저녁으로 종점에서 닿고

떠나는

행복한 시내 버스들을 바라다보며

다만 나에겐 길이 없다는 절망과

길을 원하는 갈증이

우울증같이 멀미같이

환상의 외침이 되어 다가든다는 것뿐이다

 

 

 

꿈과 상처

김승희

 

나대로 살고싶다

나대로 살고싶다

어린 시절 그것은 꿈이었는데

 

나대로 살 수밖에 없다

나대로 살 수밖에 없다

나이 드니 그것이 절망이구나

 

 

 

꿈꾸는 병

김승희

 

병이 있구나

나는 그냥 가만히 있는데

병이 혼자

세상을 만들었다가

부수었다가 하는구나,

 

늑골 속엔

푸른 장미가 피어 있구나,

늑골 속에 푸른 꽃이 피니까

나는 다만 푸른 꽃을 담은 화병 같이

위태해지는 구나,

꽃병 속에도 강물이 흐르는지

물을막아놓은 제방 위에

하얀 시계풀꽃들이

식혜밥알처럼 흐드러지게 부풀어 있구나,

물이 넘칠 듯

물이 넘칠 듯

내 몸은 간신히 꿈의 범람을

막고 있구나,

그 물 위에 뜬

투명한 별들은

모두 모조리

환자복을 입고 있구나,

 

누가 별들의 옷을 벗기고

환자복을 입혔을까,

누가 푸른 장미꽃잎의 방대한 손가락에

화염의 벌(罰)과 같은

죽음의 약혼반지를 끼웠을까,

 

병이 있구나

나는 그저 차일피일 살고 싶은데

병이 혼자

화병 같은 바이올린 케이스 속에다

총을 넣어가지고 다니는구나,

가짜 낙원과

진짜 지옥 사이

빵-빵- 슬픈 총놀이를 멈추지 않는구나,

 

병이 있어

바람 같은 이 병이 있어

나는 자꾸만 세상에서 쫓겨나고

세상은 한세상 활동사진 같은 세상

나는 환자복을 입고

세상에게도 환자복을 입혀

둘이 서로 마주보는 별들이 지는 밤.

 

둘은 서로 맹렬하게

병을 옮기는 입맞춤을 나누며

그것을 사랑이라고

혹은 운명이라고 부르고 있구나

죽음처럼 달디달게

흡혈의 입맞춤을 탐하고 있구나,

 

누가 먼저 쓰러지나

누가 먼저 쓰러지나

그 저주로운 입맞춤 속에

천지가 모두 병자가 되는구나.

 

 

 

나는 밤마다 거울 속에 물을 준다

김승희

 

나는 밤마다 거울 속에 물을 준다,

거울 속에, 아니 아니,

화분 속에

나는 밤마다 화분 속에 나를 심고

거울 속에 물을 준다,

내가 죽어 있을 동안이라도

더욱 더욱 자라야 한다고,

환상이란 상심이지만

내가 잠들어 있을 동안이라도

몰래 몰래 자라야 한다고

나는 밤마다

화분 속에 나를 묻고

거울 속에 물을 준다,

 

도괴된 복도 속에 통조림 깡통이 하나 파묻혀 있다, 돌더미를 헤치고 통조림 깡통을 들여다보면 인스턴트 평화라고 뚜껑에 대문자로 적히어 있다, 통조림 깡통 속에 장조림된 나, 통조림 깡통 속에 장조림된 너, 평화는 불사신과 같이 방부처리되어 있어서 당신이 통조림 깡통을 땄을 때는 화두처럼 목 없는 닭 한 마리 평화롭게 온 세상 그지없이 평화롭게 누워 있었으니

 

나는 밤마다 거울 속에 물을 준다,

거울 속에, 아니 아니,

화분 속에

나는 밤마다 화분 속에 나를 심고

거울 속에 물을 준다,

환상이란 천벌 같은 거지만

화분 속에는 사막식물이라는

선인장 화초가 심겨져 있고

화초인지 아닌지

그 선인장은 백년 동안에 한 번만

꽃피울 수 있다는 약속이 있다,

선인장 몸 위엔

갈퀴쇠 같은 물음표만 녹색으로 가시 돋쳐

왜? 왜? 왜? 라고

눈동자를 찌를 듯이 거울면으로

육박한다,

 

난수표 같은 절망은 자금회전이 안 됩니다, 이곳에선 희망만이 현금 유통되고 있어요, 희망을 환불하려고 거울 창구 앞으로 다가서면 희망이란 얼마나 하잘것없는 잔돈푼인지, 거대한 절망의 허물 수 없는 어음에 비한다면 희망이란 얼마나 소소한 푼돈인지, 나는 밤마다 화분 속에 물을 준다, 이 생에선 그 꽃을 볼 수 없다 하여도, 나는 밤마다 거울 속에 물을 주고, 절망에 죽음을 보탠 그 몸짓으로밖에 나는 그 선인장꽃을 가꿀 줄을 모르니

 

 

 

나는 쇼핑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김승희

 

페르시아 만에서 전쟁이 터지자마자

TV들은 모조리 전쟁 생방송 체제로

돌입하였다.

올림픽보다도 세계 권투 헤비급 타이틀

매치보다도

더 많은 시청률을 올려주며

시청자들은 사막 위 폭풍을 바라보았다.

 

한밤중에 이루어진 다국적군의 바그다드

시가 공습에 대해 한 기자는

<미국 독립기념일의 불꽃놀이를 일백 배 확대한 것 같다>

고 말했고,

미 ABC TV의 앵커맨 피터 제닝스는

<이것은 멋대로 진행되는 쇼>라고

토를 달았다.

한국의 한 증권사 객장에서는

<막상 전쟁이 터지고 나니 후련합니다.

전쟁이 단기간에 끝날 것이라는 확신 때문인지

주가가 폭동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어요>

라면서 투자자들은 오히려 전쟁을

즐기는 것 같았다. (1991년 1월 19일 자 동아일보 중에서)

 

엄청난 인명의 살상이라는

대학살의 느낌은 없고

불꽃놀이 생방송과 주가의 폭등과

앵커맨이 영웅이 되는

찬란한 쇼가 있을 뿐이었다.

 

나는 인간의 모습을 딱 두 번 보았다.

방독 마스크를 쓴 엄마가

우주인 같은 모습으로

병원의 비닐 보호막 속에 누워 있는 환자 아기를

들여다보는 장면이었다.

슬퍼하는 여인과 아픈 아기의 눈동자는

서로 부딪치며 이런 최후의 암호를

주고받는 듯했다.

--인간은 이제 이 세계의 중심명제가 아니지요,

그렇지요? 호모 사피엔스 여러분?

 

그리고 쇼핑을 하려고 세계각국의

백화점마다 슈퍼마켓마다 벼룩시장마다

현찰을 든 손들이

달려가고 있었다.

비싸게 팔리고자 하는 욕망과

값싸게 사들이고자 하는 욕망 사이에서

헐리우드 쇼보다 더 재미있는 쇼는

시시각각 진행되고

비닐 위에 사진 실크스크린 된 것 같은

인간의 형체 비슷한 몽그러진 모습들이

이리저리

나는 쇼핑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욕망의 질주로 부윰하게 떠오르고 있는

몽중보행이여.

 

 

 

나의 마차(馬車)엔 고갱의 푸른 말[馬]을

김승희

 

아이들, 맨발의 아이들이 튼튼한 팔뚝으로

흰 도화지 가득히 그림을 그리고 있다.

나는 저 나이의 아이들은 무엇을 그리나

보고 싶어

분홍빛 모래 들판을 파란 풀을 밟으며

다가가 보았다.

 

아이들은 태양을 그리고 있었다.

황금빛 태양을 화판 가득히 넘쳐나게 하고

그리고 파란 크레용으로 그린

저 푸른 들의 들판.

그곳에 말[馬]들은 뛰놀고

바닷물은 금빛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아이들은 푸르고 생생(生生)한 말들을 많이 그렸다.

크레용이 타오르는 야생의 금빛 말.

흰색 말. 검은 말.

 

나는 이 분홍 말[馬]을 가질래.

금빛 이마를 한 사내아이가 크레용을

좀 더 칠하면서 말했다.

그럼 나는 이 흰색 말.

 

가래 머리를 땋은 계집아이가

꼭 꽃처럼 웃으면서 나를 쳐다보았다.

아저씨는 무슨 말을 가질래요?

여기 우리의 말 나라에서?

 

정말 나는 무슨 말을 가지면 좋을까.

일상의 칸막이를 뛰어넘기 위하여

부서진 마차(馬車)를 날개 달기 위하여

내 생의 비본질을 살해하기 위하여

정말

나는 무슨 말을 가지면 좋을까.

아저씨는 여기에서 무슨 말을 가질래요.

 

도시에서 거리에서

찻집에서 책방에서

나는 때때로 그 아이의 태양이 넘치는 음성과

부딪친다.

 

내가 죽어 있을 때

내가 가장 죽어 있을 때

가령 나는 아이들의 말 나라로 가고 싶어서

해안을 걷는다.

 

해안 속에서 아이들은 죽고

도화지 속에서 태양만 빛나는 우리들의 일상.

나는 장갑을 벗고 모자를 벗고

그리고 나의 스틱을 버렸다.

타오르는 크레용을 들어

나는 나의 마차(馬車)를 그리고

포장이 없는 마차 뒤엔 무질서의 열병을

가득 그렸다.

나는 울고 있었다.

자꾸만 눈물이 흘렀다.

 

그때 탄색 모래 저편에서

머리칼을 날리며

한 사람의 청년이 나에게 다가왔다.

그는 나에게 인사도 하지 않고

푸른 크레용을 들어

거칠게 한 마리의 말을 나의 마차에 매었다.

푸르고 푸른 말.

나의 마차(馬車)는 강(江)과 강(江), 들과 들을 건너

하늘 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모래가 빛나기 시작했다.

해안이 춤추었다.

 

아이들, 맨발의 아이들이 튼튼한 웃음으로

페이브먼트 가득히 말[馬]들을 그리고 있다.

그리고 파란 크레용으로 그린

저 푸른 들의 들판

그곳에 말들은 뛰놀고

바닷물은 금빛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타오르며 있었다.

 

 

 

낙화암 벼랑 위의 태양의 바라의 춤

김승희

 

울고 있구나, 불아, 너는 왜 항상 벼랑 위에 서 있니? 말해봐, 촛불아, 바람은 부는데......

가장 푸른 자오선을 목에 걸고 여자들이 벼랑 위에 서 있다. 말해봐, 불아, 누가 나를 벼랑으로 부르는지...... 어둠이 가득 찬 내 척추의 흰뼈에 누가 자꾸만 한 덩어리 촛불을 당기는지......

오늘, 여기에선, 가장 숨죽인 소리들이 들려온다, 상여소리 바라소리 피리소리 요령소리...... 오늘, 여기에서, 벼랑은 태양의 갈기를 달고...... 해는 하늘에도 있고 강물에도 있어서......천지의 맞닿음이여, 바라의 부딪침이여...... 햇덩어리 물덩어리 마음덩어리들이 부딪쳐......피톨 속에 피어나는 일만 덩이의 바라의 태양꽃들을 너는 보았느냐......목숨이여......핏속으로 부풀면서 터지는 희디흰 두견의 피여......

삶이 시작되는 곳에는 늘 언제나 벼랑이 있지, 눈먼 사랑, 치렁치렁 흘러가는 유황의 죽음의 물......말해봐, 촛불아, 누가 저 태양의 바라를 흔드는지, 삶이 시작되는 곳에는 왜 늘 벼랑이 있고, 벼랑에서 추는 춤만이 왜 홀로 아름다움의 갈기를 가졌는가를......

 

 

 

난폭

김승희

 

운신할 기운조차 없다

꿈처럼 방이 무너져 내리고

선반 위의 살림살이들이 쓰러져

내 몸을 붙들고

아프게 때린다

 

죽을 힘을 다해

나는 돌아눕는다

허공에서 거울이 깨어지며

나의 모가지를 병마개처럼 따고

한 송이 조화(弔花)를 꽂고 있다.

 

순간 피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고

울기 시작한다

나의 골에서 찬란한 단두대의

밧줄이 뻗어나와

나의 모가지를 향해 달려나간다

 

온몸이 찢기며

나는 웃는다

찬란한 미소가 뜨거운 찻물처럼

끼얹히는 것을 느끼며

나의 심장은, 그러나,

아무것도 원망하지 않는다

 

열파가 나의 두 눈을 감긴다

용암불에 성냥이 닿은 것처럼

나의 뼈 퉁소와 같은

나의 긴 뼈엔 향기로운 신이 가득하여

누에고치의 얇은 막처럼

가벼이 나의 피부가 터지는 것을

나는 알 수 있다

 

그렇게 죽어라

아니, 아니, 그렇게 삶을

맛보거라

삶이여-너- 아름다운 흉성이여

기꺼운 치욕이여-

 

 

 

남도창(唱)

김승희

 

동녘은 많지만

나의 태양은 다만 무등 위에서 떠올라라

 

나는 남도의 딸,

문둥이처럼, 어차피, 난,

가난과 태양의 혼혈인 걸,

 

만장 펄럭이는 꽃상여길 따라따라

넋을 잃고

망연자실 따라가다가

무등에 서서---

무등에 서서---

 

가난한 사람들의 얼굴 위에

요화(妖花)처럼

이글거리며 피어나던

붉은 햇덩어리를 보았더니라,

모두들 사당패가 되자 함인가,

백팔번뇌 이 띵을 용서하자 함인가,

 

신명지퍼 신명피어

벌레 같은 한평생

가난도 아니고

죄도 아닌 사람들,

나는 남도의 딸,

징채잡이처럼, 어차피, 난,

가락과 신명의 혼혈인 걸,

 

무등의 가락으로 해가 질 때만

노을은 원한이 되는 것이니---

천치도 아니고

부처도 아닌

내 고향 사람들의 울음을 모아

지는 해

굽이굽이

서러운 목청

 

돌아가--- 돌아가서---

내 썩은 오장육부를 징채삼아

한바탕 노을을 두들겨보노니

붉은 햇덩이는 業果처럼 둥글다가

문득 스러지면서

가장 진한 남도창(唱)을

철천지에--- 뿌리더라---

 

 

 

남자들은 모른다.

김승희

 

남자들은 그런다.

헤어질 때 눈물을 참는 것이 진정 멋진 남자라고~

그러나, 남자들은 모른다.

참는 것보다 우는 것이 더욱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말이다.

참고 또 참아도 터져 나오는 눈물을 흘리는 여자는

자신의 나약함에 절망하기도 한다.

 

그런 절망을 맛보면서까지 우는 여자들은

끝까지 그 사람을 잡고 싶음에 그러는 것이다.

그 눈물에는 큰 뜻이 있는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남자들은 그런다.

표현하는 사랑이 전부임은 아니라고,

나 원래 표현 같은 것 못 한다고~

그러나, 남자들은 모른다.

여자는 표현해야 그게 사랑임을 알고, 그대로 믿는다는 것을.

말에 현혹되는 바보들이 여자이지만,

그런 말에 가슴을 여는 여자를 한 번쯤은 보듬어줘라.

 

남자는 여자가 삶의 한 부분이지만,

여자에게 있어 남자는 그저 삶이다.

그런 여자가 그대들이 보기에는 무척 바보 같고, 한심하겠지만

사랑하는 이가 생기면 그 사람밖에 보이지 않는 장님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여자의 본능이다.

 

남자들이 그럴지도 모른다.

여자는 사랑 없으면 못사냐고 말이다.

남자 없고 사랑 없으면 못사는 것이 아니라,

벽에 못을 박듯 여자는 남자를 가슴에 박는다.

 

그것이 여자의 사랑의 시초다.

쉽게 떠나가는 여자가 있다면,

그것은 당신을 깊이 사랑하지 않았다는 것을

꼭 알아야 할 것이다.

 

여자는 정말 사랑하게 되면

이해의 이해를 거듭하게 되므로

그 당시에는 미워해도 끝에는 당신이 한 일에 대해

눈을 감게 된다.

 

지금 그대들 곁에 사랑앞에

냉정해진 여자가 있다면,

진심으로 사죄해야 할 것이다.

그 여자는 자신이 겪었던, 아니면

주변에서 보았던 남자들의

이기심에 심각하게 실망하고

마음의 문을 닫은 것일지도 모르니까.

조금만 자신을 낮춰라, 그 낮춤에 여자는 웃는다.

 

여자는 단순하다.

단순한 여자는 쉽게 사랑하고, 쉽게 잊기도 한다.

때로는 또 다른 사랑을 하는 것이

잊는 것보다 쉽기 때문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여자는 잊는 것에 서툴기 때문이다.

 

남자들은 모른다.

괴로운 건 지울 수 없는 기억이 아니라,

더 이상 다른 기억이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을~

 

 

 

내가 없는 한국 문학사

김승희

 

나는 무의미시 순수시의 시대에

순수시를 쓰지 않았고

 

참여시의 시대에도

참여시를 쓰지 않았다.(쓰지 못했다)

나는 80년대 한국시사의

알 라 모드

해체시의 시대에도

 

해체시를 쓰지 않았고(못했고)

상업주의적 사랑시의 시대에

사랑시를 쓰지 못했으며(않았으며)

민중시의 시대에도

민중시를 쓰지 않았다.(쓰지 못했다) 

 

요즈음 말로 한다면

독재 지배 이데올로기를 방조해온

매판미학의 일부

흉칙한...

(오, 맙소사, 난 내 죄가 그렇게

추한지 몰랐고

다른 죄도 많기 때문에

난 정말 상처와 피고름으로 인각된

거북이 등처럼 균열된 무늬

혼비백산을 움켜잡고

언제나 임종전야 언어에

목을 매달고)

아뭏든, 언어가 나의 아멘이었었지.

 

어느 날 산사에서

하얀 벽지 위에 쥐벼룩이 기어가는

것을 보았다.

손톱으로 막 누르니까

일점 피를 남겼다.

우향좌, 좌향우 같은

어중간 나에게서도

그런 일점 피가 나올까.

깨끗이 도배된 벽지처럼 무늬맞춰 발라진

한국문학사 앞에서

나 오늘 한 마리 쥐벼룩

여류 쥐벼룩(이곳에서 방점은 매우 중요하다)

구원은 없더라도

아멘을! 멈출 줄 모르는 아멘을!

멈출 수가 없으니...

[출처] 내가 없는 한국 문학사 - 김승희|작성자 곧장배기

 

 

 

내가 찾는 별은

김승희

 

나는 별을 찾고 있다

고운 것이 아름다운 별을

나는

별을

찾고 있다

반창고를 붙인 미소밖에

나는 가진 것이

없지만

나는 별을 찾고 있다,

그대들의 슬픈 가슴 속에서

 

언젠가

내가

별을 잃어버린 곳은

어딘가 아득한 하늘가에서였지만

오늘도 내일도

하늘은 너무 멀어

나는 지금 여기에서

그대들의 별을 찾고 있다

 

내가 어느 날

그 고운 별을

부디 찾으면 나는 나의 별에게 주고 싶다

반창고를 붙인 미소밖에

나는 가진 것이 없지만

세상에서 가장 고운 것은

하얀 반창고로 만신창이로

붙인

내 사랑

 

영화가 끝난 극장의 문 밖 무렵에서

나는 사람들의 별을

찾고 있다

그들은 모두가 꿈처럼 아름다운

푸른 도시락 같은

슬픔에 밀봉되어

아직 개봉되지 않은 편지봉투처럼 외로와져서

차가운 달빛에게 手話로써 묻고 있다,

꿈은 끝났다

영원토록 내 뒤를 따라오는

것은

내 발자욱과 그림자뿐인가?

……뿐? ……뿐? ……뿐! ……

 

나는 별을 찾고 있다,

우리가 서 있는

이 영원한 객지 위에서

내가 별을 찾고 있으면

그대들은 하나 하나

하얀 비밀 같은 면사포를 쓴

머나먼 고향의

잊을 수 없는 제목이 된다

 

내가 찾는 별은

녹색의 실핏줄이 흐르는

걸어 다니는 별……

어제도 오늘도 아니고

내일 작별했던 그대처럼

가슴으로 가슴으로

오고만 있는……

…………

한 사람의 별

벙어리

별……

 

 

 

넝마의 운율

김승희

 

벽을 보아도 이젠 목을 매달 생각을 하지 않는다. 예전엔 벽 앞에 오래 앉아 있으면 어디에 못 박고 목을 매달까 그런 생각을 했는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그런 류의 길을 가는 사람을 부러워한다. 그런 사람에겐 시간이 무척 따스하고 행복할 것 같다. 어느 시간을 열어야 못 자욱 없는 벽을 만날 수 있을까?

 *

배추흰나비 한 마리가

엉겅퀴꽃 뒤에서

날아간다

이 세상 어딘가에 행복이 있을 것만 같은

소식이다

가슴에 눈물을 많이 모은

알들만이

그런 엄청난 시위를 할 수 있다

한 신문지 같은

지상의 누더기들을 슬고

저렇게 눈부신 人肉의 퇴원을 해보았으면!

 *

세탁기 속에서

탈수된 빨래들을 정리하다가

양말과 손수건이 부둥켜안고 있는 것을

보면 죽고 싶다고 넌 나에게 말했지.

넌 그러니? 아, 어쩌면, 넌, 정말……

 

난, 글쎄, 난, 말이야,

그런 것을 보면

이 세상 어딘가에 아직 사랑이 남아 있는

것을 믿게 되고,

쓰레기가 쓰레기에게 친절하게 굴듯이

삶에게 마구 달려들어

삐약삐약거리고 싶구나, 글쎄……

 *

벽 위에 남은 희미한 못 자욱들. 지워지지 않는다. 별똥무늬 달려와 박힌 누전의 뜸처럼. 그렇게 별들과 사랑을 나누었던 사람도 있구나. 못을 박으며 그리움의 벼락에 구멍 숭숭 뚫린 넝마 한 장의 모습으로 별들의 수로를 이곳에 내려던 사람아. 그러니까 넌 지금껏 벽에 의해 살아온 것이다. 그러므로 넌 지금껏 별에 의해 살아온 것이다. 오 그렇지 않은가?

 

 

 

누가 나의 슬픔을 놀아주랴

김승희

 

나는 병신입니다

우리는 병신입니다

이 슬픈 몸을 움직여

이 절뚝거리고 비비적대는

우스운 몸뚱아리를 움직여

한판 춤을 추다가

서리맞은 이 목숨이 허, 허, 웃을

진한 춤을 추다가 가야 합니다

 

어디까지 놀아야

어디까지 놀아야

우리는 가는 것인가

 

춤이란 뭐냐 하면

곱게 가다듬어서 되는 것이 아니고

오장육부가 움직여 줘야

징그럽게 이뻐지는 것입니다,

당신의 오장육부가 건드리는 대로

춤을 추시오,

팔자병신은 팔자병신대로

문둥병신은 문둥병신대로

육갑이 풀리는 대로 춤을 추시오,

뒤엉키는 살아 있음의

신명나는 곡선대로 -

 

생즉원(生卽願)이요

생즉원(生卽怨)이니,

여기는 아쟁과 장고가 부르는

미친 살풀이판이요

히, 히 -

 

 

 

눈물의 노래

김승희

 

네 눈물은 아름답구나, 다이아몬드 같다.

밤의 검은 이파리가 너울거리는

나무 아래서

나는 너에게 말했다.

 

이 눈물은 다이아몬드가 아니에요.

석탄입니다.

나는 고통으로 초췌한 얼굴을 들어

나에게 말했다.

석탄만한 절망이 없었다면

다이아몬드가 나올 리 없이, 이런 말을

너에게 했는지 안했는지

어렴풋한 기억의 모서리가 지워져 있다.

 

조그만 빨래집게 두 개가

물먹은 솜 같은 커다란 빨래를

가냘픈 손가락으로 꽉 잡고 있다.

하나 둘 셋 넷

앙상한 네 개의 손가락이 바들바들 떨면서

빨래를 떨어뜨리지 않으려고

혼신을 다하고 있는 것 같다.

무슨 벌을 받고 있는 중일까.

 

그때 나는 너의 눈물을 기억해 낸 거야.

다이아몬드 두 방울이

석탄덩어리를 꽉 붙잡고

떨어뜨리지 않으려고

그렁그렁 눈가에 매달려 있던

눈물 두 방울.

눈물은 꿈을 닮는다는데

네 눈물은 탄광 속에 이글거리는 생명의 불꽃

다이아몬드 날개를 가진 것 같다.

 

 

 

눈부신 유언 한 채

김승희

 

100층 화염의 하늘에서 떨어지면서

여자는 한점 화엄같이 전화기를 껴안고

목숨은 그냥 두고 전화기를 그보다 더 껴안고

사랑했다, 사랑한다고 하며

110층에서 떨어지는 여자는

두 신발에 오렌지 색 물이 붙은 것도 모른 채

너를 사랑했다, 너를 사랑한다고 말하며

110층에서 떨어지는 여자는

꼭두서니 빛 불타오르는 화염에 치마를 물들이면서

너를 사랑했으며 너를 사랑한다, 영원히 사랑한다고

한 잎 화엄 잎사귀에 매달려

110층에서 떨어지는 여자는

엉덩이를 다 먹고

허리 한복판을 너울너울 화염에 베어먹는 것을 느끼면서

110층에서 떨어지는 여자는

이 불타는 허리 이 불타는 척추 이 불타는 모가지

110층에서 떨어지는 여자는

불꽃이 머리 쪽으로 진군하는 것을 느끼며

너를 사랑했다고

말하는 여는

불타는 머리카락 난포포한 두 귀가 갈기처럼 일어서는 것을 느끼며

110층에서 떨어지는 여자는

펄럭거리는 화염이 얼굴을 와락 베어먹히는 것을 느끼며

여자는

일생을, 그 한 마디,

사랑한다는

그 말 속에

묻으며

여자는

그 한 마디에

결혼식고 장례식고 묘지명을

순식간에 다 쓰고

 

 

 

달걀 속의 생(生)

김승희

 

1

우리는 꿈꾸지,

삶을 위하여

좀 더 강해졌으면 하고,

보다 견고한 집을 짓고 싶고

더욱 안전한 껍질을 원하네,

마치 몰락이 없이

차갑게 버티고 있는

벽처럼

진짜로 강해질 수 있다면,

우리는 스스로 철교처럼

결코 폭파될 수 없는

어떤 희망을 구하지,

전혀 희망이 없이

 

그리고 또한 우린 알고 있어,

우주에 내버려진

하나의 달걀

과도 같이

그대와 나는

어둠 속에 둥둥 떠 있는

버림받은 허술한 알〔卵〕이라는 것을,

수문이 열리면

제목도 없이 무너져 내리는

저녁 물결 속에 고요히 으깨지는

조그만 수포

그리도 꿈 같은 고통

 

하얀 달걀이 하나

뜨거운 물 속에서 펄펄 끓고 있네,

찐 달걀 속에선 어떤 부화의 깃도

돋아나질 않아,

무섭도록 고요한 침묵들의 비명,

(달걀 꾸러미 속에 얌전히 누워 있는 하얀 찐 계란들의

꽉찬 평화)

무섭게 달궈진 프라이팬 위에서

성녀처럼 와들와들 해체되는

스크램블드 에그,

어떤 꿈도 그 고통을 구할 순 없지

 

우주에 둥둥 떠돌고 있는 독방

처럼

헐벗고, 외로운,

달걀 속에서

우린 한 번밖에 없는 자신의 삶을

꾸리고 있네,

뿌리가 없어 무엇보다도 뿌리가 없어 슬프지만

이름 없는 운동

뒤에

하얀 결말,

 

모든 달걀은 와삭와삭 깨어져

무참히 와해되고 말지만

그 안에 방이 있어

방이 하나 있어

내 얼굴을 닮은 조그만 양초 하나가

고요히 빛을 뿌리며 타오르고 있지,

눈물과 함께

입술연지로

환한 미소로 은은히 뿌리면서

 

 

2

냉장고 문을 열면 달걀 한 줄이

온순히 꽂혀있지,

차고 희고 순결한 것들

아무리 배가 고파도

난 그것들을 쉽게 먹을 수 없을것 같애

 

교외선을 타고 갈 곳이 없이 방황하던 무렵,

어느 시골 국민학교 앞에서 초라한 행상 아줌마가 팔고 있던

수십 마리의 그 노란 병아리들,

마분지 갑 속에서 바글바글 끓다가

마분지 갑 위로 보글보글 기어오르던

그런 노란 것들이

(생명의 중심은 그렇게 따스한것)

살아서 즐겁다고 꼬물거리던 모습이

살아서 불행하다고 늘상 암송하고 있던

나의 눈에 문득 눈물처럼 다가와 고이고

 

그렇다면 나는 여태 부화를 기다리고 있던 중이었을까

아아, 얼마나 슬픈가,

중풍으로 쓰러진 아버지 병실에서

입원비 걱정을 하고 있는 우리 가난한 형제들처럼

흰자위와 노른자위도

무슨 그런 절망의 의논들을 하고 있는 것인가

 

사계절 전천후 냉장고

하얀 문을 조용히 열면

추운 달걀들의 속삭임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엄마 엄마 안아줘요 따스한 품속에

어미 닭에 안기지 못하고 만 달걀들처럼

희망 소비자 가격보다 더 싸게 팔려 온

너희들처럼

나도 역시 여권이 분실된 사람

희망 온도가 차츰 내려갈 때

오히려 절망은 조용하고 초연해지는 것 같지,

 

절망과 체념의 목소리

 

 

3

달걀 석 줄

삼십 개를 엊그제 사와서

한 개만 남기고

다 먹어치웠는데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래도 되는 것일까.

이럴 수가 있는 것일까.

 

모든 사랑은 벌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 사람도 있지만

유리창 하나 없는

이 봉사 사랑.

가나다라 말문 하나 못 여는

이 벙어리 사랑

속에서 

넌 또 마지막 하나 남은 달걀껍질 속에 웅크려 앉아

무슨 난생설화를 꿈꾼다는 것이냐.

아니 무슨 난생신화를

기다린다는 것이냐.

 

난, 그렇게, 12월의 흐린 지평선 아래

웅크리고 앉아

병아리들 종종거리는 어느 봄날의

파란 미나리밭을,

꼬꼬댁 꼬꼬---- 금빛 닭들이 홰를 치는

어느 태초의 푸른 새벽을

마치 금시조를 기다리듯

꿈꾸고 있거늘

 

그대, 푸른 접시 위에,

내일 아침

금빛 계란 후라이 하나가

담겼는가. 지붕 위로 푸득거리며 날아가는

황금빛 금시조 한 마리를 보았는가

 

 

5

달걀을 보면

알 수 있지,

아, 저렇게 해방을 기다리는 사람도

있구나.

 

조그맣게 차갑게

두 눈을 감고

아, 어찌해,

저리도 못다 한

벙어리 사랑을.

 

외치고 싶고

깨지고 싶어도

시간의 실금이 온몸에 강물처럼 퍼지기를

기다려. 배꼽 같은 씨눈이

노른자위를 먹어치워

흰자위를 먹어치워

아, 그 안에서 원무처럼 일어서는

열애 같은 혁명을 기다려.

 

달걀을 보면

눈물이 어리지.

아, 저렇게 미해방의 절벽 위에서

꿈꾸는 사람!

 

7

네? 저, 이번에도 삼송 냉장고 샀어요,

네? 냉장고…… 도어 타입은 양문형이고요,

문 색깔은 루비에 하얀 펄이 반짝이는 것인데요,

아름다워요, 요즈음 냉장고 문은 모네의 캔버스 같아요,

문이 많다고 도망갈 길이 많은 건 아니죠,

피 묻은 캔버스에 하얀 눈이 펄펄 내리는 것 같죠,

양쪽으로 여니까 편리해요,

내부도 깨끗하고 넓게 보이고요,

냉장고 속이 아니라 환한 무대 같다니까요,

헤밍웨이의 '깨끗하고 불빛 밝은 곳'이라는 단편을 읽은 적이 있죠,

한 노인이 너무 외로워서 밤늦도록

깨끗하고 불빛이 밝은 카페를 찾는 이야기,

노인은 엊그제 밧줄로 목을 맸는데 조카딸이 풀어줬다죠,

젊은 웨이터는 노인이 귀찮아

당신은 지난주에 자살을 했었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늙은 노인은 귀머거리라 알아듣지 못하죠,

뭘 드릴까요? 바텐더가 묻자

허무

하고 대답해요,

바텐더는 생각해요,

또 미친 사람이군……

허무가 두려워

깨끗하고 불빛이 밝은 곳을 찾는 사람들

 

"허무에 계신 우리들의 허무이시여, 그대 이름은 허무이시다.”*

 

밝고 깨끗한 곳으로 말하자면 냉장고만큼

밝고 깨끗한 곳은 없죠,

냉장고는 가급적 싱싱한 현재를 지향하죠,

허무가 두려운

세상의 여름과 야채는 냉장고 속으로 다 들어가죠,

삼송 냉장고 안에 당신의 갈구의 모든 것이 들어가요,

목이 마르고

목이 마르고

목이 마를수록 냉장고는 점점 더 커가고

가난하고

가난하고

가난할수록 사람들은 더 깨끗하고 밝은 불빛에 의존적이 되죠,

썩어서 허무가 되는 것이 두려워서요,

캄캄한 육체의 밤이 두려워서요,

 

민들레 한 단을 신문지에 싸서 냉장고에 두었어요,

삼송 냉장고 안에 민들레가 가득 피고

하얀 민들레 씨앗은 만발하여 흩어져 어디로 갈 줄을 몰라

야채 칸 속에 하얀 곰팡이 홑씨로 맺혀 있어요,

냉장고 문을 열 때마다

신문지 아래서 민들레 한 단이 썩어 남긴 하얀 홑씨들이 조금씩 새 나와

거실 바닥으로 밀려다녀요,

거실 바닥 발바닥에 밟히며

미친 민들레

아무리 발버둥 쳐도 냉장고 안을 벗어나지 못하는 시간이 있죠.

 

*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깨끗하고 불빛 밝은 곳」이란 단편 속의 한 구절.

 

8

달걀을 던지지 마라

오히려 달걀이 돌이 되어가는 시간을 기다려라

 

달걀이 돌이 되어가는 시간이 있다

달걀이 물이 되어가는 시간도 있다

돌보다 작은 다윗의 조약돌이 되어가는 시간이 잇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삼송 냉장고 안을 벗어나지 못하는 시간이 있다

돌이 달걀의 안에서 팽창해가는 시간이 있다

수축해가는 시간도 있다

 

그러저러한 어느 봄날, 부활의 날을 기다려서

 

세상의 모든 달걀들아, 궐기하라,

양계장에서 도매상 창고에서 슈퍼마켓 진열대에서 집집마다 냉장고에서

세상의 모든 달걀들아

궐기하라……

깃발이 없어도

노오란 봄에 불현듯 피어나는

방향이 없어도 우후죽순같이

노오란 개나리처럼 궐기하라

잠옷을 입은 채로라도 광화문 네거리에서 만나

노란 털이 조금 보이는 피 묻은 이마로라도

서로 꿈을 훔쳐보며

날아가는 달걀은 어차피 허무주의적 깃발!

 

 

 

딸꾹질

김승희

 

나의 시,

그것이 세상의 유창한 변설을

막으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나의 시, 그것이

오지 않은 시대의 새벽을 잡아당기리라고도

나는 생각할 수 없다.

적어도 세상은 나보다는 유창하고

적어도 나는 오는 새벽을 막으려고

자기 옷소매 속에 수탉을 감추는

사람들보다 힘이 없다는 것은

사실이다, 아, 그것은 정말

사실이다. 슬프지만, 어찌해 볼 수가

없다는 어김없는 사실은

정말 사실인 것이다. (난 슬픈 꾸르륵거림이

내 몸 속에 휘달려 다니도록

내버려 둔다.

어느 사이엔지 식도에 안전차단장치가

뚜껑마개처럼 생겨났음을

나는 알게 되었다)

 

아라비안나이트 속의

호리병.

그 호리병 속에 갇혀 있는 거인이

반만년 동안이나

내 몸 속 천지를 밀면서

꿈틀대고 있음을 난 알고 있다.

이제 세상은 사악한 선이 오래토록

지배해 왔음을 난 알고 있기에

호리병 속의 거인이

쥐고 있는 깃발을

난 두려워하진 않는다.

난 다만 그것의 뚜껑 마개를 열어줄

힘을 가지지 못했을 뿐이다.

 

호리병 속의 거인이

내 목구멍까지 치받쳐 올라와

식도 속의 안전 마개를 딸그락거린다.

뚜껑 마개는 딸그락 딸그락

나는 그래도 그 회오리의 말을

참는다.

세상엔 으르렁 말과 가르릉 말이 존재한다고

언어시학자 제프리 리취는 쓰고 있다.

으르렁 말이 검둥이새끼라고 말하면

가르렁 말은 흑인으로 고친다.

그래서 후진국 저개발국(으르렁)은 개발도상국

신생국(가르릉)이 되고

파시즘(으르릉)은 민주 애국 등등의

가르렁 연상망을 거느리게 된다.

 

으르렁 말과 가르렁 말 사이

나의 시는 딸꾹거린다.

이 딸꾹질로 세상을 어떻게 해볼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이 고통의, 딸꾹질,

이 생리의, 참을 수 없는 딸꾹질이

보다 정직하다는 것을 난 느끼고 있다.

딸꾹 딸꾹

그것은 병든 뻐꾸기의 실패한 노래

같지만,

이 딸꾹질로, 난 다만, 홀로 완결되어

가려는 이 시대의 문장이 홀로 완결되는 것을

잠시 방해할 수는 있다는 생각이다.

 

딸꾹 딸꾹,

그것은 병든 뻐꾸기의 실패한 노래가 아니라

딸꾹 딸꾹,

이 시대의 뻐꾸기는 그렇게 운다.

 

 

 

땅에 떨어진 눈썹

김승희

 

밤중인데

창 밖이 환해요.

눈이 온 것일까

나는 창문 밖을 기웃거려요.

땅 위에 무엇이 떨어져 쌓여 있어요.

옛날 반달빛 같은 것,

인간의 높은음자리표 같은 것,

반동강 반지의 반원을

신이 인간의 얼굴 위에 반쪽씩

약속으로 박아놓으신

것 같은 것.

 

그것이 무엇인 줄 모른 채

난 다시 잠들었다 일어났어요.

아침에 거리광장에 나가자

눈썹 없는 사람들이 모여 있어요.

눈썹 없는 사람들이라기보다

눈썹 없는 얼굴들이겠지요.

민둥산 위의 하룻밤

그런 고통스런 음악이 떠올랐고

그 음악이 무척 미치광스런 소음이었던

기억이 나요.

 

우리는 어느 한 사람의 자서전 속에

출연하려고 이 시대 광장 속에

모여 줄을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밀짚을 뭉쳐 형상을 만들 때

아무도 눈썹에 유의하지 않듯이

톱밥인형도 누가 자기 몸을 흔들면

싫어하지요.

맥없이 흔들리는 사지를 부끄러워하는 듯.

 

눈썹이 없는 당신이

눈썹이 없는 나를 사랑한다면

그것을 나는 거절해야 하지만

혹시 모르지요, 그것을 통해, 우리는,

서로 땅 위에 떨어진 눈썹을,

동강나 헤어진 신의 반지를

땅 위에서 줍게 되는 약속의 꿈을

다시 한번 꿀 수 있게 될지도.

 

 

 

떠도는 환유

김승희

 

1

몇 마장인지 알지 못할

장마비가 연일연일 내리고 있다,

창이 좁아서인지

세상이 위태하리만치 어두워진다,

어둡고 긴, 무슨 포식의,

동물 창자 속으로

끌려 들어가는 듯.

---여보세요, 여보세요,

여긴 너무 어두워요, 말 좀 해봐요,

---말하면 뭘하니? 넌 날 볼 수가 없잖아.

---그래도 괜찮아요, 말하면 밝아질 테니까요.

 *

세상엔 벽이 되려는 창과 싸우는 사람과

창이 되려는 벽과 싸우는 사람,

그렇게 두 진영의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모두 세상을 자택인 듯이

살고 있는 것 같다,

나, 나, 나라는 나가비는

영구 임대주택인 듯이, 아니, 아니,

임시 임대주택인 듯이 生을 대하며

조만간 흘러가 버리고 말 것 같다,

너무 쉽게 흘러가 주는 것은 아닐까?

 

가끔씩 조명이 너무 어둡다고

투덜대기나 하면서……

위조 여권같은 말을 따라서

출렁출렁…………글썽글썽……

 

 

2

여보세요,385의 2053입니다,지금 전화를 받을 수 없어 대단히 죄송합니다, 전화 거신 분의 성함과 연락처를 말씀하시면 제가 곧 연락드리겠어요, 그럼 삐----하는 소리가 난 후 말씀을 시작해 주세요…… 여보세요, 김 선생님, 저 문학상사 김명순인데요, 「시녀」 후기 원고 어떻게 되셨나 해서요, 마감날이 사흘이나 지났는데……외출하셨나 보군요. 빨리 연락주세요!…… 여보세요, 박석규 씨? 저 김승흰데요, 물론 열심히 하고 있어요, 그것만 하느라고 다른 원고는 하나도 손도 못 대고, 네, 그런데 원고 일주일만 더 연기해 주면 안 될까요? 물론, 책상 옆을 한치도 안 떠나고 있어요, 지하도 계단 위의 끈덕진 롯데껌처럼, 염려 마세요, 미안해요……

 

승희 언니, 응, 나, 수연이야, 또 외출했나 보지? 지난번 가져간 돈, 월말에 갚는다고 하고 연락이 없어서, 나 며칠 있다가 유럽 갈 거야, 응, 스키장에 피서 삼아 가는 거지, 인생은 바다 돈은 뱃머리라고 하잖아……돌아오면 연락주세요!

 

여보세요, 지금 전화를 받을 수 없어 죄송……아니, 최선씨 아녜요, 하도 정신이 없어서 자동응답기를 누른 채로 전화를 받았지 뭐예요, 「넝마로 만든 푸른꽃」 나왔다구요? 아니, 바쁘지 않아요, 그럼 방금 나가지요, 인사동쯤에서, 평화 만들기……4시……

 

여보세요, 속셈학원이지요? 저 해인이 엄만데요, 해인이에게 엄마가 급히 외출하니까 여섯 시쯤 집으로 오라고, 네네, 고맙습니다……여보세요, 이화 바이올린음악원이죠? 저 왕인이 엄만데요, 왕인이더러 엄마가 급히 외출하니까 누나에게 갔다가 여섯 시쯤 집으로 오라고……

 

인사동 그 영원한 거리를 걷는다

천년의 시간을 뚫고

오직 뭉치려는 힘 하나로 자신을 지켜온

자그만 고분 출토 토우들이

유리창 안에서 조용히 날 바라보고 있다,

얼마나 뭉치는 힘이 강했으면

죽음의 세계에서조차

고스란히 자기를 지켜올 수 있었을까?

 

나에게 그만한 힘이 아직 있을까.

나에게 나라는 것이 여직 남아 있을까.

나 비슷한 것

그런 것들이 잠시 만나 삐걱대며

술렁거리는

이 입 속 가득한 먼지, 먼지, 먼지의

삐긋거리는 가장행렬 속에서

한없이 연기된 나.

한없이 미루어지기만 했던 나는

(이미 없어진 지 오래이기에)

나 비슷한 것들만 끝없이 술렁술렁

이렇게 연기의 놀음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우---하고 도시의 지붕 가득히

걸린 노을이

엎질러진 머큐롬 통처럼

나에게 달려들어

전신에 빨간 약을 칠해 줄 것 같은

황혼.

 

 

3 - 이웃집 여자들

가슴 속에 꽃잎이 지고 있다,

꽃잎이 지고 있다,

지는 꽃잎은 지려므나,

누가 그 안에서 울고 있는지도 모른다,

 

가슴 속으로 불나방이 뛰어들고 있다,

불나방이 뛰어들고 있다,

불이 그리운 불나방아

내 가슴 속에 아직도 무슨 촛불이 타고 있다고

그러느냐, 그러느냐

 

가슴 속에 지붕이 흔들리고 있다,

지붕이 흔들리고 있다,

누가 그 천장 위에서 드르렁 드르렁

코를 골며 아직도 자고 있는지도

모른다,

 

산다는 것은 언제나

그렇게도 많은 나를 데리고

선인장이 양쪽으로 빽빽하게 심겨진

가시통로의 좁은 길을

우왕좌왕 찔리면서 걸어간다는 것이었다,

다만 피를 보고싶지는 않다는

심정뿐이었다, 뿐이었다.

 

피를 보고싶지는 않아서

와글와글, 바글바글, 드르렁 드르렁

엉엉, 흑흑……

이런 시끄러운 나를 데리고

<짜집기 전문> 이런 간판이 붙은

옷 수선소 앞을 지나가면

꼭 나를 닮은 엉성한 얼굴의 여자 하나가

들들들 들들들……

손재봉틀을 열심히 돌리며

얼굴을 숙이고 부지런히, 이런 어수선한

넝마 누더기를 꿰어맞추는 모습도 보인다

 

 

4 - 몽유병의 나들이

어느 해변가의 재래식 변소 안에서였어,

부글부글 끓어넘칠 듯한 분뇨통 위에

열기설기 걸쳐놓은 널판지 위로

옷을 추스리며 일어나자

눈 앞에 푸른 옷소매의 바다가

금방이라도 이마를 적시올 듯

다가오고 있었어,

----아아, 아름다워라

아마 내생(來生)은 저런 빛깔일 거야

 

그때 나는, 찜통 같은 똥통 위의

더러운 벽에 붙은

몽타주 사진이 있는 벽보 한 장을 보았네,

----이 자는 1952년 3월 1일

정신병원을 탈출한 자로서 위험은 없으나

몽유병이 있어 하릴없이 천지사방을……

----엄마, 돌아와 주세요, 모든 것을 용서하고

기다리고 있어요

----K, 돌아오너라, 아버지가 위독하시다

----선생님, 어서 돌아오세요, 모든 일이

잘 되었어요, 그리고 도서관에서 1989년

여름에 대출해 간 라킹책 반납하라는

최후 경고문이 붙었어요.

 

어디서 본 듯한 저 얼굴……

어디서 만난 듯한 저 얼굴……

어디서 잃어버린 듯한

저 얼굴……

 

찜통 같은 똥통 위의 좁다란 현세

그 두 널판지에

간신히 양다리를 걸치고 서서

박꽃처럼 뿌우옇게 꽃피어 오르며

희미한 벽보 속에서

나를 찾는

몽타주된 전생의 소리를

듣는다

----이 몽유병 환자의 나들이

----왜 나는 평생 환자복을 입고

다녀야만 했는지

 

이 환자복을 벗고

똥통 속에 반짝이는 금빛 구더기처럼

기어서라도

기어서라도

푸르게 넘실대는 바닷속으로

모가지까지 모가지까지 잠수해 들어가고만 싶었다.

 

 

5 - 무어라고 불러야 좋을까

사랑도, 눈물도, 진짜가 아닌 것 같애,

사랑 비슷한

눈물 비슷한

흔적 비슷한

분노 비슷한

그런 비슷한 것들이 나 비슷한 것들을

감싸고

한 줄기 햇빛의 선 속에 우우 우우

갇혀 떠도는 먼지처럼

생 비슷한 것들을 이루고 있어

 

나 비슷한 것들아

시대 비슷한

나라 비슷한

지식인 비슷한

외침 비슷한

절망도 낙천도 아닌

어스름 비슷한

이 향방의 묘혈 속에서

죽음 비슷한 生(생)이 있어

살지도 죽지도 못하고

엄마 비슷한

아내 비슷한

자식 비슷한

교수 비슷한

시인 비슷한 것들을

배우 비슷하게

은막 비슷한 곳에서

 

너, 참, 정말, 무엇에 널 걸 거니?, 응?, 말해봐,

참, 무엇에든 널 걸어야 할 거 아냐?

이런 닦달 속에서도, 아무 데도 날 걸지 않는,

 

아무 데도 걸 수가 없는, 걸 것이 없는, 파쇄된

나를, 아니 나 비슷한 것들을 데리고,

사전꾼처럼 사기꾼, 아니 무한히 높은 곳에서

밀어버려 무한낙하로 산산이 엎어지고 있는

사닥다리의 행방처럼……

 

 

 

뚱뚱한 모나리자

김승희

 

어마어마한 살덩어리

막을 수 없는 증식의 반죽 덩어리

물속에서 퉁퉁 불은 듯한

부풀어 오른 얼굴에 손가락을 넣어봐

밀가루의 무저갱으로 아득히 빨려들어가는 손가락

야식증후군일 거야

몽유의 발걸음은 냉장고 속으로 출렁출렁 빨려들어 가고

해적선, 밤의 약탈로 메워지는 입,

통닭 한마리를 밤에 혼자 다 먹었다니까

먹은 기억은 못하지만, 아침에 쟁반에 수북한 닭뼈들,

그것과 출렁거리는 뱃살만이 유일한 증거,

낮이면 하얀 실그에 십자수를 놓는 얌전한 수예가인지도 몰라

한밤중엔 머리를 풀고 먹을 것을 찾아다니는 폭식증의 여자

미소, 어두운 심해의 우울증에서 뻗어나오는 방만한 미소,

무시무시한 살덩어리가 움직이는 출렁거리는 비만의 미소,

몸을 증오하고 먹음직스런 세상의 모든 것을 증오해야 하는,

파묻히고 싶은 매몰의 죽음 충동을 일으키는,

뚱뚱한 여인의 환상의 끝은 매몰,

함께 죽자고 할 수는 없을 거야,

함께 죽을 순 없을 거야,

뚱뚱한 매몰의 끝은 천국인지, 지옥인지,

나는 숨쉬고 싶다,

뚱뚱한 턱과 산맥만큼 부풀어오른 가슴에 파묻혀

숨이 턱밑까지 차오르고 다리가 후들거리는 모나리자,

야식증의 어마어마한 모나리자,

간신히 숨 쉬는 모나리자

 

비만 진료소 벤치에 앉아 있는 미소의 어머니

 

 

 

만파식적(萬波息笛)

김승희

 

더불어 살면서도

아닌 것같이

외따로 살면서도

더불음같이

그렇게 사는 것이 가능할까?

 

간격을 지키면서

외롭지 않게

외롭지 않으면서

방해받지 않고,

그렇게 사는 것이 아름답지 않은가? ……

 

두 개의 대나무가 묶이어 있다

서로간에 기댐이 없기에

이음과 이음 사이엔

투명한 빈 자리가 생기지

그 빈 자리에서만

불멸의 금빛 음악이 태어난다

 

그 음악이 없다면

결혼이란 악천후,

영원한 원생동물들처럼

서로 돌기를 뻗쳐

자기의 근심으로 서로 목을 조르는 것

 

더불어 살면서도

아닌 것같이

우리 사이엔 투명한 빈 자리가 놓이고

풍금의 내부처럼 그 사이로는

바람이 흐르고

별들이 나부껴

 

그대여 저 신비로운 대나무 피리의

전설을 들은 적이 있는가?……

외따로 살면서도

더불음같이

죽순처럼 광명한 아이는 자라고

악보를 모르는 오선지 위로는

자비처럼 서러운 음악이 흘러라……

 

 

 

매혹된 길

김승희

 

한밤중에 목이 말라

문득 불을 켜고 부엌으로 나가지,

너절한 부엌바닥 위로

무언가 반짝이는 것들이 기어가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어

난 문득 맨발을 움츠리며

부엌바닥을 응시하네.

 

검저어콩 한 개, 파 반 쪽, 멸치 반 동강들이

떨어져 있는 모노륨 바닥 위로

열심히 손발을 바들바들 저으며

기어가고 있는 것들.

모세를 따라가는 엑소더스처럼

반짝반짝 귀기(鬼氣)를 발하며

무엇을 구해 기어가고 있네,

내 발을 무서워하지도 않고

어디로 가는가, 너희들.

 

부엌 귀퉁이

싱크대 바닥에 감추어 둔

바퀴 오라오라 향기를 향해

열심히 손발을 저으며 기어가는 것들

바들바들 떨면서

어서 가자 가자고 나에게 손짓하는 듯하네.

 

 

 

김승희

 

비닐하우스에서 생산되어 팔려 온

시금치는

그렇게 푸르지가 않다.

무언가가 크게 잘못되어

심하게 멍든 것 같은 표정을 줄 뿐이다.

 

바람이 되다만 사랑이

희망이 되다만 낙망이

새벽이 되다만 절벽이

혁명이 되다만 울부짖음이

저런 정박의 멍이 된 것일까?

 

푸른 멍이 자신의 상처를 이길 수

없을 때

멍은 멍에가 되어

한밤을 개집 속에서 슬프게 울부짖어야 한다.

멍.멍

멍.멍.멍.

멍멍멍 울부짖는 엄을 나는 기르고

싶지는 않았다.

사랑이 되다만 멍들이

새벽이 되다만 절벽들이

개벽이 되다만 희망들이

다른 언어로 꽃피어남(울기)을

찾을 때까지

 

나는 더 멍들의 멍에를 걸머지고

이 토막난 변시체 같은

희망의 빈민굴을 좀더 사랑할

작정이다.

멍들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를 멍들게

하는 것들을 좀 더 질기게

비웃어 주어야만 하기 때문에

멍이 멍.멍을 초월하는

그 어떤 아름다운 반동을 낳을 때까지.

 

 

 

모든 신발이 불편하다

김승희

 

모든 신발이 불편하다 나는 신발장을 연다

모든 신발이 가혹하다 나는 신발장을 닫는다

 

신발을 신고 나설 때마다 난 어떤 본능을 다치는 것만 같아,

골절, 뼈 뼈 뼈가 어긋 물린 것 같고

어떤 때는 도에 지나쳐 피 피 피가

길 위에 흘러내려 나의 길을 모가지로 감고 엉겨 저지하는 것 같아,

신발에서 길을 갈라내지 못하면

미친 듯이 신발의 길에 먹힐지도 모른다

신발에서 발을 추려내지 못하면

어쩌면 신발에서 발목을 잘라내야 할지도 모른다

거기다 또 신발의 중독에서 깨어난 발

발가죽의 중독에서 깨어난 뼈들조차

더 시끄러운 이 내란의 길목에 서서

 

꿈이여, 잠시 잠시만 더, 그래도, 이 가죽 부대 같은 신발 안에 뭉쳐 있지 않겠니?

신발을 들고 날아가는 저 눈부신 태고의 날개가

하얀 자갈밭에서 알을 깨치고 날아가는

태양빛의 뜨거운 새처럼

고요히 중심의 원시 신화 속으로 솟구쳐 오를 때까지

나의 발은 아직 할 일이 많고

나의 발은 아직 더 가고 싶은 길이 있단다

 

 

그리하여 엘칸토 금강 에스콰이어 비제바노 브랑누아를 넘어

레스모아 미스미스터 엘레강스 허쉬파피 랜드로바를 지나갔습니다

구두 대(大) 바겐에 가면 나에게 맞는 신발을 어쩌면 구할 수 있으리라~

 

모두 신발이 뼈에 마치고 근육은 구두에 대들고

발톱은 구두 가죽을 찢고 한 발 가득 무성한 털은

솟구쳐 나와

한 걸음 걸을 때마다

범주를 벗어난 모래와 엉긴 피가

나의 신발 너머 길 가득 수북이 넘치고 있으니

모든 신발이 수상하다 나는 신발장을 연다

모든 신발은 천적이다 나는 신발장을 닫는다

 

 

 

목 없는 마녀

김승희

 

왜, 웬일이지?, 뿌리가 느껴지지 않는데도,

전혀 무섭지가 않아,

왜, 웬일이지?, 자각증세가 없는 것이

90년대적 병리의 특성이라고

그런 말을 어디서 본 것 같기도 해,

 

아니라고? 읽지 못했다고?

그렇다면 그 말을 처음 한 것은

나란 말이 되는가?

그런 말이 되는가?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물고기가 있으라 하시니

……있었던 것처럼?

그 말의 처녀성을 믿어도 좋으냐?

정말 좋으냐?

 

무한의 흰빛 국물 안에

둥둥 떠 있는 하얀 수제비

건데기들처럼

작별의 규칙으로 잠시 만남을 삼는

손발이 잘려진 죽지,

실패한 날개들의 피웅덩이 같은

그런 푸들푸들 떨리는 배밀이의 사랑으로

 

목 없는 미녀는 목 없는 미녀의

사랑법을 가지면

그뿐이다,

목 없는 미남처럼 목 있는 추남처럼

살려고 할 필요가 없다는

자각증세를 주며

가을밤 중천에 보름달이 어엿이

떠가고 있다,

 

왜, 웬일이지?, 내 모가지가 하늘에

떠 있는데도, 조금도 어색하지가 않아,

왜, 웬일이지?, 오프너로 멱살을 따고

하늘에 꽃꽂이 해놓은 모가지들이

저리 많은데도

비명 소리 하나 없으니

이제 너도 나도 모두 자멸파의 정상에

올랐다는 말이 되는가?

 

 

 

무궁동(無窮動)

김승희

 

4 나누기 3은

영원히 1.33333……

333……

이듯이,

영원히 세월이 흘러도

무궁한 세상이 바뀌어도

작게

그보다 고요하게 1.33333……

333……

이듯이,

끝날 수 없고

끝나지 않아서

잠시 잊어버리기도 하는

피아니시모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는

요술 글자처럼

영원히 누군가 오고 있고

영원히 누군가 가고 있는데

 

미안합니다만 불을 좀 빌려 주시겠어요?

불을

불을

허리를 구부리고

성냥 한 개피의 적선을 바라는

거지처럼

1.333333……으로

영원히 심령세계의 반딧불처럼

작게

그보다 정처없이

인도차이나의 검은 밤바다를

오늘도 어제도 보우트 피플로

떠돌고 있는 것은

어디선가 오고 있는 것은

어디론가 가고 있는 것은

 

보다 확실한 꿈 속에선

보석을 단 일각수(一角獸)가

우리의 금빛 상여를 느릿느릿 끌고 가고

4 나누기 3은

영원히 1.333333……

이라고

작은 개미는 더 조그만 개미알을 무궁히

낳고

나의 고통은 단추처럼 단단한

고통의 하얀 알들을

우주수(宇宙水)의 밑바닥에 딸라이자처럼

수북히

그보다 영겁으로 쌓아놓고 있는데……

 

이 불확실성의 시대에

단 하나 확실함으로

나보다 더 오래 살 것이 확실한,

4 나누기 3은

영원히 1.33333……(천년)……

333……(수만년)……

이라고……

 

 

 

물이 수증기로 바뀌는 순간

김승희

 

그 뜨거운 홀연

순간

그 미끄러운 순간

날씨처럼 항상 변하고 있는

천연,

어디에도 밑줄을 그을 수 없는

그 순간

아낌없는 순간

죽어도 좋은 순간

 

[냄비는 둥둥]

 

 

 

미완성을 위한 연가 - 경주 남산의 새기다만 마애불 앞에서

김승희

 

하나의 아름다움이 익어가기 위해서는

하나의 슬픔이

시작되어야 하리

하나의 슬픔이 시작되려는

저물 무렵 단애 위에 서서

이제 우리는 연옥보다 더 아름다운 것을

꿈꾸어서는 안 된다고

서로에게 깊이 말하고 있었네

 

하나의 손과 손이

어둠 속을 헤매어

서로 만나지 못하고 스치기만 할 때

그 외로운 손목이 할 수 있는 일은

다만 무엇인지 알아?

하나의 밀알이 비로소 썩을 때

별들의 씨앗이

우주의 맥박 가득히 새처럼

깃을 쳐오르는 것을

그대는 알아?

 

하늘과 강물은 말없이 수천년을 두고

그렇게 서로를 쳐다보고 있었네

쳐다보는 마음이 나무를 만들고

쳐다보는 마음이 별빛을 만들었네

우리는 몹시 빨리 더욱 빨리

재가 되고 싶은 마음뿐이었기에

어디에선가, 분명,

멈추지 않으면 안 되었네,

수갑을 찬 손목들끼리

성좌에 묶인 사람들끼리

 

하나의 아름다움이 익어가기 위해서는

하나의 그리움이 시작되어야 하리,

하나의 긴 그리움이 시작되려는

깊은 밤 단애 위에 서서

우리는 이제 연옥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필요치가 않다고

각자 제 어둠을 향하여 조용히 헤어지고 있었네……

 

 

 

바늘 뗏목

김승희

 

바늘 하나로 만든 뗏목이다

바늘 하나의 뗏목을 타고

반도가 흔들린다

바늘 하나의 뗏목에 오천만이 매어달려

우르르 출렁거린다

바늘 하나의 뗏목으로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바늘 하나의 뗏목으로 내일에 도착할 수 있을까

나팔꽃 모가지같이 시든 오천만 나팔꽃 내 모가지가

바늘 하나의 뗏목에 매어달려 표류하고 있다

모가지까지 물이 차오르는 시간

누가 나를 세기말의 홍수 위에 꽃꽂이를 했는가

 

 

 

밥과 잠과 그리고 사랑

김승희

 

오늘도 밥을 먹었습니다.

빈곤한 밥상이긴 하지만

하루 세 끼를.

오늘도 잠을 잤습니다.

지렁이처럼 게으른

하루 온종일의 잠을.

그리고 사랑도 생각했습니다.

어느덧 식은 숭늉처럼 미지근해져 버린

그런 서운한

사랑을.

 

인생이

삶이

사랑이

이렇게 서운하게 달아나는 것이

못내 쓸쓸해져서

치약 튜브를 마지막까지 힘껏 짜서

이빨을 닦아 보고

그리고 목욕탕 거울 앞에

우두커니 서서 바라봅니다.

 

자신이 가을처럼 느껴집니다.

참을 수 없이 허전한

가을 사랑

하나로.

 

그래도 우리는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영원의 색인을 찾듯이

사랑하는 사람 그 마음의 제목을 찾아

절망의 목차를 한 장 한 장

넘겨 보아야

따름이

아닌가요.

 

 

 

배꼽을 위한 연가

김승희

 

1

그대여, 당신이 누구든지 간에, 당신의 배꼽을 보여준다면은, 나 그대를 사랑하겠습니다. 더럽게 뒤엉긴 자그만 동그람이 굽이굽이 꼬불쳐진 그대의 서러운 배꼽도 나의 배꼽과 똑같이 부끄러운 죄와 어리석은 욕망이 고불고불 서리서리 끼어 있을 테지요, 그대여, 어둠의 태속에서 영문 모르고 튀어나와 정처 없이 죄를 짓고 죽어 가는 그대여, 그대여,

 

우리는 배꼽 위에서 평등하다

그것은 생일날의 흉터,

고아들의 패찰,

인광을 칠한 백골의 주황색 입술이

아삭아삭 제일 먼저 뜯어먹는

온순한 육체의 이삭,

우리는 배꼽 위에서 너무나 평등하다

 

그대여, 당신이 누구든지 간에, 당신의 배꼽을 버리지만 않았다면은, 나 그대를 열렬히 용서하겠습니다, 봄이 되어 메마른 나뭇가지에서 새싹이 트는 것을 바라보거나 푸드득--- 새들이 날아오르는 것을 볼 때마다 나는 습진처럼 나의 배꼽이 가려워지는 것을 느낍니다, 이제 배꼽은 과거완료가 아니라 언제나 현재진행형으로 나의 삶 속에 움터 오르고, 어머니--- 아, 어머니--- 라고 불러 보면 바닷가를 울면서 걸어가는 한 여인이 떠오릅니다, 그녀의 슬픔 그녀의 사랑 그녀의 절망을 따라 나의 배꼽은 또 하염없이 시원의 태 속으로 적셔 들어가고, 어머니--- 자비와 저주의 비밀구좌이신 어머니--- 나의 어머니시여......

 

 

2

어머니가 말이 없으면

나는 무서워집니다

어머니는 우울한 것 같습니다

무섭게 불행한 것 같습니다

 

말이 없는 어머니보다는

잔소리를 하는 어머니가 더 좋습니다

싫은 소리를 하더라도

몇 마디 말을 하는 어머니가

덜 우울할 것 같아서

어머니 — 하고 치마폭을 붙잡고

달려가 어리광을 부리고 싶어집니다

 

그러나 제일 좋은 것은

등꽃나무 아래 평상을 내놓고 앉아

어머니가 완두콩을 까면서

느릿느릿 노래를 부르실 때입니다

어머니의 노랫소리는

뉘엿뉘엿 지나가는 해를 붙잡아

우리 집 꽃밭에

옥잠화처럼 앉혀놓는 것 같습니다

그런 때는 어머니가 행복하신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습니다

 

어머니의 손을 잡고

서커스단 구경을 갔습니다

공중곡예를 하는 어린 소녀가 줄을 놓고

잠시 허공에 떠 있다가

가벼이 그네를 박차며, 마치 전류처럼,

소년의 손을 붙잡을 때

어머니는 아편을 마신 듯이 황홀하신 것 같습니다

어머니의 검은 눈동자 속엔 신비한

스파크가 떨며 지나갔습니다

 

이제 어머니는 말하지 않습니다

잔소리도 하지 않고

푸른 완두콩도 까지 않습니다

나는 어머니의 막혀버린 노래가

어느 날, 지진처럼, 발광하지 않을까

겁이 납니다

어머니의 얼굴은 전점 슬픔의 얼굴처럼 굳어갑니다

 

5

삶을 사랑하고 싶다

결코 길지 않을 시간의 흐름 속에 있는 우리네 삶을 소중하게 보내고 싶은데 잘 안된다. 살아가면서 결코 혼자일 수 없는 공간 속에 우리는 놓여 있다. 관게의 얽힘 속에 그리고 거대한 조각 속에 우리는.

어디엔가 기대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휘청거릴 자세로 서 있는 모양새가 우리네 모습이 아닐까.

그러나 우리는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이 있다.

인당수에 빠질 수는 없습니다.

어머니,

저는 살아서 시를 짓겠습니다.

 

공양미 삼백 석을 구하지 못하여

당신이 평생 어둡더라도

결코 인당수에는 빠지지 않겠습니다.

어머니,

저는 여기 남아 책을 보겠습니다.

 

나비여,

나비여,

애벌레가 나비로 나르기 위하여

누에고치를 버리는 것이

죄입니까?

그대신 점자책을 사드리겠습니다

어머니,

점자 읽는 법도 가르쳐 드리지요.

 

우리의 삶은 모두 이와 같습니다.

우리들 각자가 배우지 않으면 안되는

외국어와 같은 것-

어디에도 인당수는 없습니다.

어머니,

우리는 스스로 눈을 떠야 합니다.

 

 

 

백조의 호수

김승희

 

깨끗한 새 옷 입은 사람들 사이로

꼭 빨래를 걸친 것 같은

내가 걸어가고 있다.

 

혹시 그들의 눈에는

내 자신 전체가 빨랫감으로

보일는지도 모른다.

 

진주목걸이를 걸친 눈물과

눈물 목걸이를 걸친 진주에 대해

아직도 ? ? ?를 던지며

정처 없이 걷는

이 불혹의 부적응증에

(잠시 주목해줄 수 있는가?)

 

백조의 호수 속에

잘못 떨어진

미운 오리 새끼처럼

 

누덕누덕 기운 희망의 옷소매를 펄렁이며

그래도 아직

할 일이 많은 사람이라는 듯이

 

 

 

백조의 호수 옆에서

김승희

 

고독은 아무리 고독해도

충분하지가 않다

가난은 아무리 가난해도

다 가난하지가 않다

고독한 사람은 주소가 없는 신전에

시간도 없는 신전에 산다

천장에 형광등 하나가 빛을 발하고 있다

고독이 울타리 안에 무럭무럭 자라서

흙의 성분에 따라 여기저기서 다른 색깔로 피어나는 수국처럼

파란 꽃송이 연분홍 꽃송이 하늘색 꽃송이 결국은 하얀 꽃송이로 되어가며

고독은 도도한 명패를 걸어둔다

어처구니 없게도 고독은 가난조차도 도도하다

춤추며 몸을 떠는 백조처럼 차고 도도하다

닫힌 방에 꽃이 너무 만발하면

꽃이 공기를 다 먹어치워 캄캄한 폐에 당도한다

고독은 그런 방을 가졌다

벌레도 꿀벌도 없는 꽃이 되어가는 병이다

닫힌 문의 고독은 그렇게 질식의 경지에서 만발한다

고독은 그렇게 고독사가 된다

 

 

 

법 아래서

김승희

 

가시오

서시오

대기하시오

일단 멈춤

우회

직진

비보호 좌회전

U턴

U턴 금지

 

口 속에서 사는 囚

口 속에서 쉬는 숨

 

 

 

벽을 느낄 때

김승희

 

벽에 기대지 마시오!

벽을 마주보시오!

이런 말이 등뒤에서 들려오는 것 같다.

그러나 나는 벽에 기댄 사람.

기대고 있으면

벽이 참 편하다는 느낌이 든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던 날

한 청년이

이미 열려진 브란덴부르그 벽에 매달려

작은 망치로 끌을 내려치고

있었다.

장벽은 무너졌는데

당신은 왜 벽에 구멍을 뚫고 있나요?

그 청년은 대답하였다.

이 장벽에 나의 구멍을

내고 싶기 때문이오.

모든 사람이 자기 구멍을 가지려고

할 때

벽이 무너지는 것이라는 걸

세계에 보여 주고 싶기 때문이오.

 

나는 너무 오랫동안 벽에 기대어

있었기에

이 벽이 내 육체의 일부라는 느낌을

수정하기가 어렵다.

우리는 나란히 벽에 기대어

길 건너 가로수 길에

희미한 휴지들이 날아다니는 것을

바라본다.

등뼈가 물렁물렁해진다.

뼈에 구멍이 뚫리려는 것인가?

 

벽의 의존 속에 빠져드는

나날의 장벽 앞에서

벽에 등을 대고 있으니

벽이 안 보인다.

벽이 먼 데 있는 것 같다.

아니 벽이 없는 것 같다.

 

 

 

벽지 바꾸는 시대

김승희

 

지금은 벽을 부수는 시대가 아니다

벽을 부수는 시대가 아니다

기울어진 벽을 부수고

새벽을 짓는 그런 시대가 아니다

벽을 부수려는 시대는

지나갔다

 

상복을 입은 여인들이 울고 있다

4월에도 울었고

5월에도 울었고

6월에도 울었고

상복을 입은 여인들이 일년 내내 달력

속에서 울고 있는 울먹임의 역사

이런 역사를 만장과 더불어

벽장 속에 깊이 올리고

 

지금은 새로운 벽지를 바꾸려고

도배집 앞에 줄지어 서서

새로운 무늬 벽지를 고르는 시대

어떤 아름다운 무늬의 벽지가

벽의 결함을

감취줄 것인가

(벽의 파손을 막아줄 것인가)

그런 것을 꿈꾸는

넋 나간 시대

 

그런데, 너, 너,

너는 또 뭐냐?

충치로 구멍 숭숭 뚫린 썩은 이빨과

풍치로 화농 흘러 뭉그러진

검은 잇몸(구강의 총체적 난국)

위에

아침 낮 저녁으로

치석 방지 치약

니코틴 제거 치약

딸기향을 첨가한 향긋한 후르츠 향의

온갖 치약 거품들을

쓰러질 듯 갸우뚱 걸린 벽 거울 앞에서 서서

황홀하게 황홀하게 도배하고 있는 너는?

 

 

 

김승희

 

에서

ㄹ이

떨어져서

무릎 같은 ㄹ이 떨어져서

땅에 내려와서

논에 들어가

벼가

되어서

벼로 패어서

 

일하는 농부의 다리

힘들어서

꺽어져서

주저앉아서

겹친 다리

꺽인 무릎

ㄹ이 되어서

 

벼를 모시고 쉬는데

그런 때

벼가

별이 되어서

 

 

 

보리수나무 아래로

김승희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

나무 아래 길이 있을까,

난 그런 것을 잊어버렸어,

아니, 차라리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는 것이

더욱 정직하겠지,

잊어버린 사람은 잃어버린 사람

잃어버린 것을 쉽게 되찾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나는 한밤중에 일어나

시간 속에 종종 성냥불을 그어보지,

내가 잃어버린 무슨 나무 아래 길이

혹여 나타나지 않을까 하고.

혹시 장미나무 아래로 가는 길이

물푸레나무 아래 휘어진 히아신스 꽃길이

어디 어둠의 담 저 너머

흔적 같은 향기로

날 부르러 오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 보면 난 청춘을 졸업한 게

아니라

청춘을 중퇴한 듯해.

청춘에서 휴학하고 있는듯한

그래서 곧 청춘에 복학해야 할 듯한

그런 위태로운 아편길 위에서

난 정말 미친 듯이 뛰었지. 아, 그래

정말이야, 꼭 미친 듯이 뛰는 것,

그것이 나의 인생이었어.

 

그래서 난 새해같은 것이 오면

더욱 피로해지는 것 같아.

그런 시간에는 문득 멈춰서서

자신을 봐야 하니까.

누구의 삶에나 실수는 있는 법이고

갑자기 자신을 본다는 건

누구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지.

 

「쓰러질 것 같아요」

「용기를 내」

「아직도 멀었을까?……」

쓰러질 것 같아서

시간의 문지방을 베고 누우면

그래, 그래, 그런 착한 깨달음이 오지.

쓰러질 때까지 사랑했던 사람

쓰러질 때까지 일했던 사람은

그가 어느 나무 아래 길을 걸었다

하더라도

결국은

보리수 아래 길을 걸은 것이라고.

 

이제야 비로소 난

모든 사람의 길과 나 자신의 길을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을 듯하다.

모든 길이란, 아마도, 나,

자신의 보리수나무 아래로 가는

길이므로.

 

 

 

부엉부엉

김승희

 

숲도 없는데 부엉이가 울고 있다.

숲도 없는데

부엉부엉 부엉이는 울고 있는데

그렇다면 나의 귀막 속 어디인가에

부엉이를 위한 숲이 설치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부엉부엉

신은 죽었다고

저 세기말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가

말한 것은

1883년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속에서였는데

신이 죽고

드디어 인간이 죽기까지

꼭 백 년이 걸렸다는 것을

1991년 한국 서울

에서 우리는 확인할 수 있다.

 

우리를 한없이 시궁창 아래로 처박아버릴

수 있는 인신매매(에 대한 공포와)

어느 골목에선가 꼭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만 같은(복면의 성폭행과)

네 살 먹은 여아의 강간 변사체,

화성 연쇄 성폭행 살인사건에 이르기까지

개인의 부음란은 이제 따로 필요치 않다는

느낌이다.

 

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에서부터

말세가 왔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세요,

말세가 왔습니다……

외치는 맹인선지자의 손목을 잡고

자, 나는 이렇게 말해보고 싶은 것이다.

부엉부엉

부엉새 우는 숲을 가진

나의 부엌구석에 쳐박아둔 채 잊어버린

썩은 감자푸대 속에서 어느 날 문득

보랏빛 꽃이 피었어요, 그 연보랏빛은,

무어랄까, 태초의 이슬을 머금은,

금강초롱 같은

그런 빛이 었어요……

 

말세란 감자꽃의 발생과 같은 것인가?

아니면 텅 빈 향수병에서부터 백 년은

흘러나올 수 있는

사망의 향내와도 같은 인간의 여운이란

말인가?

 

 

 

부패, 농담, 허무

김승희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참 골고루 썩은 세상이야, 아, 참, 어쩌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이리도 골고루 잘 썩을 수 있었을까.

불만이 있느냐구? 아니, 참, 없어.

나야 항상 평등을 부르짖어 온 사람인걸 뭐, 소망이 있다면,

아, 참, 나같은 미물에게도 소망이 허락된다면

한시바삐 썩고 싶다는 느낌뿐이야,

이 부패의 사회학 부패의 평등 속에 동참하기 위하여

어서빨리 썩어야지! 하는 이 초조한 느낌)

 

지하철 1호선

2호선

3호선 4호선 안에 이런 의식의 흐름,

이런 내적 독백이 외설처럼 농담처럼

배설처럼 가득차 흐르며 수송된다.

개인이란 한 사회 한 시대 안에서

어떻게 해야 살아남을 수 있느냐를

알기 위해

항상 도제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되니까

 

부패를 연구하며 실려가는 출근길

집의 세탁기 안에 벗어두고 온

양말처럼 텅 빈 머리통들은

서로 냄새를 풍기며 농담하며

더욱 깊어진 허무의 구덩이 안에

동아리로 칭칭 묶여

오늘 속으로 바겐 대 매출 된다.

 

 

 

붙들린 여자

김승희

 

원고는 안 써지고

안써지는 원고를 쓴다고

학교에서 막 돌아온 딸과 어린 아들을

외갓집으로 내쫓고

북한산이 바라보이는

이층 공부방에 앉아 하염없이 바깥을

내다본다.

어떻게 내가 나를 좀 나가볼 수는

없을까? ? ?

누가 잠궈 놓은 문인지

나는 안 열리고

외출하고 싶어! 아아, 나는, 한번만,

외출하고 싶어!

유리창 밖의 아름다운 구름을 멍하니

바라본다. (구름은 미칠 듯이 아름답다)

 

친구여, 나 너에게 전화를 했지

(나처럼 게으른 인간이 어떻게 다이얼을

돌렸을까) 꿈처럼 생각이 안나고

너는 집에 없었어.

아마도 텅 빈 네 아파트를 윙윙 울려댈

전화벨 소리는, 너를 울리지 못하고

되돌아와, 두통으로 꽉 찬 내 두개골을

나찌의 가죽채찍처럼 후려대고 있었고

거미줄을 지키고 앉은 거미가

답답하고 배고프면 무엇하는 줄 아니?

자기 몸을 좀 열어 보려고

자기 몸을 뜯어먹어 본다는구나, 글쎄

 

회충도 녹아버렸을

이 캄캄한 몸

 

 

 

비 내리는 날

김승희

 

오늘은 내가 조용히 견디려고 하는데

비가 내리고 있어.

주룩주룩 유리창으로 쏟아져 내리는 빗물을 좀 봐.

빗물마다 손이 있어.

손마다 귀신이 있어.

유리창이 마구 문지르며 손은 유리를 부여잡으려고 해.

나팔꽃, 칡꽃, 넝쿨 장미,

위로 위로 올라 가려는 세상의 모든 손들이 떠올라.

그런데 유리창은 그 손을 미끄러 뜨리려고 해.

그리고 비가 오고 있어.

아무것도 붙잡지 못한 빗물의 손들은

하염없이 유리창에 손을 비비며

무언가를 호소해. 그 손들이 모두 송이 송이 혀로 보여.

오늘은 내가 조용히 견디려고 하는데

빗줄기마다 수천수만 송이 귀신의 혀가 피어나고 있어.

빗줄기마다 흐린 혀의 꽃다발이야.

시냇물 같은 혀의 꽃송이들이 유리창에 죽죽 흘러.

오늘은 내가 견디려고 하는데

유리창 속 얼굴 속으로

빗물이 번개를 그으며 급류처럼 흘러가.

번개의 급류에 맞아 내 얼굴이 쪼개진 석류가 되었어.

쪼개진 석류 이빨 사이로

소용돌이치듯 뜨거운 피가 흘러.

그러나

비는 또 오고

유리창엔 수천수만의 꽃송이가 지고

구름 같은 귀면이 흐르고

유리창은 야간열차처럼 검은 거울이 되고

거울 속에는 얼굴이 있고

그녀의 얼굴은 비바람에 부딪쳐 파열하는 석류가 돼.

핏물 흐르는 파열된 석류가 점점 부어오르고 있어.

점 점 점 점 석류는 커져서 드디어

이 방보다도 커진 석류.

지평선보다 더 부어오른 석류의 쪼개진 두개골이 하염없이

비바람을 맞고 있는 거야.

흐린 나무들은 미친 듯이 머리를 풀고 회오리치고

푸른 곰팡이 먹은 얼굴의 오필리아가 몇번이고 다시 또 다시

부풀어오른 늪 속으로 걸어들어가는

그런 날.

 

 

 

비 오는 날의 그리움

김승희    

 

반짝하고 맑았던 구름이

어느새 어둔 먹구름으로 변하며

그리움으로 살금 거리더니

 

하루에도 몇 번씩

오락가락하는 내 마음에

갑자기 쏟아 내리는 빗줄기가

덜컥 외로움으로 안긴다

 

잊어버렸던 잊고 살았던 아니 몰랐었던

사랑은 이미 내 마음에 간절한

그리움으로 들썩이고 빗방울이 되어

사랑이란 행복 위에 가슴 위에

마냥 떨어지고 싶고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싶고

자꾸만 사랑에 기대고만 싶다.

 

 

 

빗자루를 타고 달리는 웃음

김승희

 

웃음이란 상징적 사과 속에 들어 있는

수많은 씨앗 중의 하나---보들레르

 

바보 산수

정자에서 네 팔을 벌리고 낮잠을 즐기는

바보 산수

빨래하는 여인을 훔쳐보는 동네 영감이 있는

바보 산수

엿장수를 반기는 즐거운 아이들의 웃는

바보 산수

 

중력의 악마를 뿌리 채 뽑아내려는 듯

질질 끌고 가다가

휘두른 듯이 내려친 자루 걸레

그 봉 걸레에 먹을 듬뿍 찍어

병풍 위로 질질 끌고 다니며

불굴의 한 획으로

웃고 달려가는

잇달아 파고들며 웃고 달려가는

달아날수록 웃고 덤벼드는 뭉클뭉클한 천千의 산맥을

그린

걸레 수묵

 

후려치는 봉 걸레

빗자루를 타고 달려가는

웃는 웃음

그 웃음의 산맥을 타고 달려가는

꿈틀대는 웃는 웃음

그 웃음

빗자루가 휘갈리는 그 웃음

바보 웃음

 

 

 

뻐꾸기 둥지를 못 날아간 새

김승희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를

찾으려면

뻐꾸기 둥지 안을 찾으면 안되겠지,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를

만나려면

뻐꾸기 둥지 밖으로

날아가야 하지 않을까?

 

백화점 공중변소

흐릿한 벽거울 위에

진홍빛 입술연지로 막 휘갈겨 써놓은

이런 글씨.

입을 틀어막고 우는 토막시체들의

킬킬거림 같은 이런 글씨.

(때때로 희망은 얼마나

음란하기조차 한 것인가?)

 

그렇다,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를

찾으려면

뻐꾸기 둥지 안을 찾으면 안되겠지만

뻐꾸기 둥지 밖으로 날아가기 위해선

먼저 뻐꾸기 둥지 안에

고치를 틀지 않으면 안된다는

이 미칠 것 같은 인간조건 안에 생포되어

 

항상 음모는 시시각각 진행되고 있는

느낌이다.

흰 모자를 쓴 간호원과 의사, 백화점

지배인과 상냥한 여점원들,

안보이는 곳에서 쉴틈없이 돌아가고

있는 고객감시용 카메라와

삼십만 원짜리 투명 고급 란제리를 걸친

반누드의 마네킹에게 까지

나는 지배받고 조종되며 순하게 교화되어 가는

느낌이다.

 

모두다 행복하게 미치자는 이 화려한

음모 속에서

미치지 않기를 바란다면

그들보다 더 미치는 수밖에 없지 않느냐고

구구 구구구구

워리워리 멍멍

짹짹 쩍쩍쩍……

 

 

 

사랑

김승희

 

1

가장 좋은 인디언은 죽은 인디언

가장 좋은 어머니는 죽은 어머니

  

가장 좋은 하느님은 돈의 하느님

가장 좋은 아내는 매장된 아내

 

 

2

멕시코인들은 말하지

우리에게 하느님은 너무 멀리 있고

미국은 너무나 가까이 있다

 

세상의 여자들은 말하네

우리에게 하느님은 너무 멀리 있고

남자는 너무나 가까이 있다

 

 

3 - 고엽제 이야기

나르키서스는 자신만을 사랑하는 남자

에코는 그만을 사랑하는 여자

 

그가 말한다

왜 너는 나를 사랑하는 거야?

에코는 따라서 말한다

사랑해줘요.

 

그가 말한다

제발 나에게 가까이 오지 말아!

그녀는 말한다

가까이 오세요!

 

나르키서스는 자기 말을 할 줄 아는 남자

에코는 그의 말을 (잘못) 따라하는 여자

 

모든 사랑에는 혀의 고엽제가 들어 있다

혀를 말리는 하얀 약이 키스할 때마다 배급된다

 

 

4 - 눈보라 속에는

눈보라 속에는 손이 들어 있다 하얗게 나부끼며

다가오는 손 누가 추워하나 누가 아파하나

하얀 눈보라 속에는 따스한 손들이 들어 있다

눈보라 속에는 눈들이 들어 있다 환부를 읽으려고

다가오는 눈 누가 아파하나 누가 다쳤는가

하얀 눈보라 속에는 고요한 눈들이 들어 있다

눈보라 속에는 귀들이 들어 있다 하얗게 나부끼며

달려오는 귀 누가 울고 있나 누가 빌고 있나

눈보라 속에는 따스한 귀들이 들어 있다

천 개의 손과 천 개의 눈을 가진 천수천안관세음

숭숭 구멍 뚫린 가슴에서 하얀 눈보라 깃털 같은

붕대가 화안히 화안히 흩어져 나오는.....

 

 

5 - 결혼식의 사랑

성채를 흔들며 신부가 가고

그 뒤에 칼을 든 군인이 따라가면서

제국주의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부케를 흔들며 신부가 가고

그 뒤에 흰 장갑을 낀 신랑이 따라가면서

결혼 예식은 끝난다고 한다

 

모든 결혼에는 흰 장갑을 낀 제국주의가 있다

그렇지 않은가?

 

 

 

6 - 결혼식의 사랑

성채를 흔들며 신부가 가고

그 뒤에 칼을 든 군인이 따라가면서

제국주의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부케를 흔들며 신부가 가고

그 뒤에 흰 장갑을 낀 신랑이 따라가면서

결혼 예식은 끝난다고 한다

 

모든 결혼에는 흰 장갑을 낀 제국주의가 있다

그렇지 않은가?

 

 

7

이층 사람이여

제발 부탁입니다

당신은 지금 나의 하늘을 밟고 계십니다

 

제발 내 머리통 위로 의자를 질질 끌고 다니지 말아주시옵고

도끼로 사자나 호랑이나 닭 같은 것을 도살하지 말아주시옵고

사람 人(인)이 주인 主(주)인 곳이 주거 住(주)임을 너무 신봉하여

바스 오븐 속에 제 식구를 구워 먹지 말아주시옵고

보이지 않는 거울을 비추지 말아주시오며

사서삼경을 장전하여 말아주시옵고

진리의 이름으로 사람의 피부를

벗기거나 사지를 절단하거나

눈알을 파내지 말아주시며

변기의 물이 넘치지

않도록 항시 유념

하여

 

 

8 - 프라이 데이가 로빈손 크루소우를 만난 날

당신은 날 금요일에 구해 주셨지요

식인종들로부터

그래서 주인님은 나의 이름을 프라이데이라고 붙이셨지요

 

주인님을 만난 날이

내 이름이 되었어요

주인님을 만나기 전엔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기에

그날이 나의 이름이고 출생이고

영광이었어요

 

이제 나는 프라이데이예요

맨발에는 가죽 신발이 덮히었고

순진무구한 눈동자에는 벌레 같은 글씨들이

기어들어 왔어요

내 이름은 프라이데이

그날이 나의 이름이고 출생이고

저주였어요

 

그날부터 나는 애도 중입니다

뉴멕시코 광활한 땅, 망망 대지에 푸에블로 인디언

그날부터 나는 애도 중이에요

보호 구역에서 애도 중인 사람 자기를 애도하는……

애도 중……

 

 

9

오랜만에

아버지 묘소에

가 본다

풀들이 누렇게 시들어

확실히 가을이 왔다고

선포한다

 

땅에 누운 노숙자 아버지

 

이렇게 아버지를 버리고 산다

 

더 이상 두려울 것이 없다

 

 

10

헨리는 오늘 비디오 테이프를 본다

 

모스크바 결혼 상담소에서 보내온 신부감들을

보며 소파에 누워 복숭아 파이를 먹는다

저 여자 나타샤는 명문 페테르부르그대 영문학과 졸업

교사 생활을 했고 취미는 시 낭독과 음악 감상

무소르그스키와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할 수 있다는 여자

푸슈킨의 시 백 편 정도는 암송할 수 있다는 여자

금발에 날씬한 스물여섯 살의 여자는

제법 좋은 영어 발음으로 말한다

LA는 얼마나 아름다울까요

나는 따스한 산타모니카의 신부가 되고 싶어요

 

헨리는 비디오테이프를 바꾸며 생각한다

저 여자는 너무 문학적이다, 러시아 여자들은 대개 문학적인가?

다른 여자들을 봐야지

미화 오천 달러, 한 웅큼의 푸른 교황으로

마음만 먹으면 데려올 수 있는 여자

그러나 금발의 나타샤는 여기저기 나이트에도

카지노에도 많은데

 

또다른 금발의 나타샤

조금 체격이 우람하지만 젖가슴이 큰 게 괜찮아

난 젖가슴 큰 여자가 좋아

젖무덤 사이에 턱을 박으면 얼굴이 푸욱 파묻히는 것이

취미는 수영과 승마, 테니스, 요트 타기를 좋아하고

잘하는 것은 요리, 산책

저 여자 괜찮은데 그러나 나이 들어 너무 살이 찌면

어떻게 될까

흑인 여자들처럼 드럼통 같은 허리에 새 다리

쇼핑 봉지도 못 들고 나더러 들고 다니라고 하면?

 

헨리는 하루 종일 비디오테이프를 본다

산타모니카에 집 한 채

푸른 교황이 그려진 오천 달러면

어떤 나타샤도 데려올 수 있어

나타샤가 아닌 여자들은 다 데려올 수 있어

이 아름다운 축복 받은 해변가 산타모니카

난 지상 최고의 남자

 

 

11

붉은 신호등을 바라보며

한 여자가 횡단보도 건너 저편에

핸들을 잡고 멈추어 있다,

나도 붉은 신호등을 바라보며

횡단보도 이편에 핸들을 잡고 멈추어 앉아 있다,

붉은 신호등이 이렇게 모르는 두 여자를

잠잠히 마주보게 만든 그 고유의 순간

 

초침이 두 여자의 얼굴 위로 사각사각 지나가며

사과 껍질을 얇게 벗겨내듯

과도 칼의 저미는 움직임이 얼굴 위에 느껴진다

유의해야 보아야 할 아무 특이한 점이 없는데도

무언가에 끌려서

벙어리 지뢰처럼 서로를 긴장에 차서 바라본 그 순간

 

붉은 신호등이 푸른 신호등으로 바뀌고

급히 전진을 해야 할 시간이 왔다

모든 인연을 끊고 질주해 나가야 할 이 진군의 시간

얼핏 스치며 나는 움직이지 않는 그녀를 이상하게 바라본다

그녀의 차는 움직이지 않는다

뒷차들은 빵빵 경적을 울려대며

일 분 일 초에 일생을 건 사람들처럼 미친 늑대의 소리를 내지른다

사실 맞는 말이다

우리는 일 분 일 초에 목숨을 건 미친 늑대들인 것이다

그녀의 차는 그래도 움직이지 않는다

 

스치면서 그녀의 얼굴을 흘깃 들여다본다

백합처럼 하얗게 굳은 얼굴,

왼쪽 콧구멍에서 붉은 피가 줄줄 흘러내리고 있다

붉은 피는 아까 전부터 흘러냈는지

미색 가을 정장 윗도리 가슴 편에

아름다운 꽃다발이 뭉클뭉클 피어올라 있다

급성 뇌출혈,

가슴에서 뭉게뭉게 꽃피어 올라가는 꽃다발 헌정의 순간

 

그녀도 집에 닦지 못한 식기를 한아름 싱크대 위에

버려두고 도망치듯 나온 여자였을까,

강의 준비를 못하여 발을 동동 구르며

아홉시 수업에 늦지 않게 당도하려고

미친 듯 페달을 밟던 여자였을까,

더 이상 경쟁력이 없다는 말을 그저께 들었던,

시부모로부터 네가 인간이냐는 말을 어저깨 들었던,

친정어머니로부터 전세 값이 올랐는데

이사 날짜는 다가오고 어쩌면 좋으냐는 말을

아침에 들었던

그 여자였을까,

당신의 사랑은 거기서 더 기어갈 수가 없었을까

 

사람들은 모두 다 끝나지 않는 사랑의 이야기를 가진다

내 차는 그녀의 차를 스쳐 지나가며

소리쳐 물어본다

왜 그렇게 핸들을 꽉 잡고 있는 거냐고,

당신의 사랑은 더 갈 수 없었던 거냐고,

거기서 멈추어버린 어떤 피로, 어떤 갈망,

미친 코다에 대한 그리움이

또 내 차를 미친 듯이 몰아간다

 

 

12

먼저 접시도 부수고

찻잔도 내던지고

냄비를 우그러뜨리고

밥통, 그 아까운 전기 밥통을 날려 던진다

칼을 던져

화장대 거울을 문갑을 장롱을

찍은 다음

유리창을 깨고

안방의 벽, 벽, 네 벽을 두 팔로

흔들어 급기야 쓰러뜨리고 만다

천장이 무너지고

옥상이 내려앉는다

아슬아슬 걸린 지붕 사이로

지혈 붕대를 가슴에 감은 하늘이 물끄러미 내려다본다

너리칼을 휘어잡으며

모가지를 누른다

심장이 헉헉 거칠게 펌프질을 해대고

백록담이 다시 발화하고

후지산이 흰 김을 내뿜고

베스비우스도 폼페이도

아득히 역사를 거슬러

활화산 활동을 기어이

다시 시작한다

아이들을 착착 접어 자궁 속에 넣는다

이제 지구에 남은 사람은 하나도 없다

우리가 다 살해해버렸다

만족스럽게 다 없앤 다음

뜨거운 용암 속에 허우적허우적

끌려들어 가면서

화산재가 펄펄 날려

흰 머리 흰 눈썹으로 급속 쪼그라 늙은

서로의 얼둘을 아주 처음인 듯

물끄러미 서로 바라본다

여보 -

여보 -

인류와 문명의 잔혹한 잔해 위에 남은

최후의

아니 최초의

온몸에 금빛 용암을 칠하고 나타난

여와 남

그런 나날의 결혼과

나날의 재혼

 

 

 

사랑은 ㅇ을 타고

김승희

 

사랑은 움직인다

사랑이 동그란 바퀴를 타고 있기 때문에,

당신밖에 할 수 없는 일,

사람에서 ㅁ을 깎아 ㅇ을 만들어서

……ㅇ…ㅇ…ㅇ……ㅇ……ㅇ……

동그란 바퀴는 구르고 움직이며 때로 미끄러지기도 한다.

ㅇ…굴렁쇠…사랑은 누군가의 목을 조이기도 하고

들판 밖으로 나가 굴러 널브러지기도 하고

정착을 모르고 여기저기 쓰러지기도 하지만

깊고 찬 우물, 광야에서 발견한 우물의 ㅇ

 

아리랑……쓰리랑…이란 말도 그렇다.

그런 말이다,

마음에 바퀴를 달고 있다는 것이다,

시베리아 남부지역, 바이칼 호숫가에 살고 있는 에벤키족의 언어에서

아리랑(arirang)은 ‘맞이하다’는 뜻을,

쓰리랑(serereng)은 ‘느껴서 알다’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영혼을 맞이해봐라

이별의 슬픔을 참아봐라,

아리랑 쓰리랑 두 개의 바퀴를 타고 가서. 나아가서,

찬 새벽 사막에서 우물 ㅇ을 만나봐라

 

마음을

……ㅇ…ㅇ…ㅇ……ㅇ……ㅇ……에 올려두고

일평생 미끄러져봐라

앉아 있는 사람에서 ㅁ이 ㅇ이 될 때까지

둥글게 둥글게 모서리 뼈를 깎아봐라,

ㅁ이 ㅇ이 될 때 까지 아리 아리게 쓰리 쓰리게

뼈를 깎는 그 고통이 지나야만

웃는 웃음 ㅇ이 바퀴를 굴려 나가리니

깊고 찬 우물, 광야에서 발견한 우물의 ㅇ

당신밖에 할 수 없는 일,

어떤 사막에서도 멈출 줄 모른다.

사랑은 ㅇ을 타고 있기에

 

 

 

사랑을 위한 노래

김승희

 

만일 네가 생각한다면

나의 불행한 마차가 그래도 가장 좋은 것이라고

만일 네가 생각한다면

너는 나와 함께 금색 태양을 위한

추운 싸움의 길 떠나야 한다.

 

만일 네가 생각한다면

암초 때문에 더욱더 빛나는 것이

사랑이라고 만일 네가 생각한다면

우리의 생의 다른 조명등들을

아낌없이 모두 꺼벼려야 한다.

 

숲들은 슬픈 안개에 아주 덮여 있었다.

비가 내리고 고요한 산정.

하늘 속에선 새들이

그들의 고독한 장난을 다시 시작하고

바람이 불었다.

 

그때 나는 꿈꾸었다, 너와 함께,

그리고나서 우리의 발걸음은

지상의 지평선을 모두 잊어버리었다.

 

온갖 무장한 죽음이 나를 기다릴지라도

너 몰래 끊임없이 나를 괴롭힐지라도

만일 네가 생각한다면

나의 싸움이 용감하였다고

만일 네가 생각한다면

나의 죽음의 검은 도화지 위에

금칠한 천사를 그리겠다,

너의 얼굴과.

 

 

 

사랑의 전당

김승희

 

사랑한다는 것은

엄청나게 으리으리한 것이다

회색 소금 지하 셋방 고구마 푸대 속 그런 데에 살아도

사랑한다는 것은

얼굴이 썩어들어가면서도 보랏빛 꽃과 푸른 덩굴을 피워올리는

고구마 속처럼 으리으리한 것이다

 

능소화 빛깔같은

무등산 수박을 막 쪼갯을 때

그 속의 바다, 의으리한 궁전,

이제 흘린 피도 아니고 오늘 흘린 피도 아니고

그저께쯤 흘린 피 같은,

그 환부가 키운 환상같은,,,,,,

 

분명 저 아래 보이는 것은 절벽이다

절벽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절벽까지 왔다

절벽에 닿았다

 

절벽인데

절벽인데

한 걸음 더 나아가려는 마음이 있다

 

절벽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려는 마음

낭떠러지 사랑의 전당

그것은 구도도 아니고 연애도 아니고

사랑은 꼭 그만큼

썩은 고구마, 으리으리한 낭떠러지 전당이면 된다

 

 

 

사련(邪戀)

김승희

 

낙화암에 갔지, 귀신 들린

태양의 벼랑,

귀를 막아도 자꾸만

부르는 소리가

들렸어, 한계를 모르는

향수의 폭포처럼

 

오장육부에 갇힌 태양이

그러면 울부짖었지,

갑갑하다고,

아무래도 나는 몸 속에

짐승을 기르고 있는 것 같아

문득 머리를 풀르고

두려워지지

 

두려움은 오히려 헛된 것이어서

확 트인 벼랑 아래

녹음의 물결들은

너무나 찬연한 거야

반짝반짝 요령소리를 흔들면서

굴렁쇠놀이를 하자고 하지

 

태양의 굴렁쇠들은

그러면 나의 모가지를 칭칭 감아오지,

그리웁다고,

그리고 목을 조르기 시작해

미친 듯이 미친 듯이

살고 싶어질 때까지만,

 

나의 모가지에 시퍼렇게 박힌

손자욱을 보았니?

태양의 암시, 아니 한없이

현란하게만 보이는 어느 간통의

혐의 같은……

 

 

 

사유재산

김승희

 

이 모든 사유재산들을 다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든다.

일부일처의 결혼

아들 하나 딸 하나의 사랑과 고뇌

다 쓰러져 가는 이층 슬라브집

쥐꼬리만한 명성

직업상 이윤에 부합되는(자동응답기가 부착된)

전화기 한 대와 36개월 할부로 사들인

대우 유니팩스 팩시밀리 한 대,

결국 이런 것들을 지키려고

빼앗기지 않으려고

이런 것들에 점령돼서 바둥거리는 것이

절망이었다.

희망이었다.

 

그 모든 희노애락들 난동과 파장이

점령군이었다.

껍데기가 텅 비어 버린 누에고치처럼

아무리 기다려도 기다려도 가출한

나비는 돌아오지 않았다.

사유재산적인 희망

사유재산적인 절망

사유재산으로서의 사랑 같은 것엔

정말 넌더리가 난다.

사실, 이것조차, 실은, 내가 그것을 지킬

힘이 없다는 것을 알기에 하는

교묘한 언술에 지나지 않는다.

 

죽음은 어떤 사유재산도 인정하지 않지,

최후의 사유재산인 육체마저도

알몸뚱이로 벗겨져

생전에 한번 마주치지도 못했던

염하는 사람에게 맨손으로 염을 당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난, 정말, 죽기조차도 끔찍하게 싫어진다,

사후의 <사랑의 장기기증>운동에

서명할 것인가 말 것인가?

 

우리는 저마다 매달리고 있다.

거미줄을 생산하는 것은

거미인데

왜 구태여 매달릴 필요가 있는가?

장미의 골반은 쩍하고 갈라지면서

유혈처럼 터져 날으는

나비 나비 흰나비가 되고 싶다,

사유재산의 폐쇄증후군 폐쇄공포증

그 안에 갇혀 엉엉 우는 나비 나비 떼!

 

 

 

산타 첼로

김승희

 

이른 아침 신촌의 뒷골목

어젯밤이 아직 길거리에 많이 남아 있다

차도인지 모르고 차도에 웅크리고 앉아

잠을 자고 있는 하얀 풍선

어깨가 가느다랗다

 

누군가 질겅질겅 불어 흰 실로 간신히 매놓은 하얀 풍선

가출한 조카가 있기에

차에서 내려 난 하얀 풍선의 몸을 마구 흔들었지

날이 밝았구나, 얘야, 출근 차량이 밀리는데, 너는 이제 일어나

이 자리를 떠나야겠다,

하얀 풍선은 웅크림을 풀지 않고 차도에 계속 앉아

옆에 어젯밤의 소주병과

자그만 여행 가방을 사직서처럼 당당히 내놓고

 

얘야, 소녀야, 얼굴을 들고 싶지 않은,

얼굴을 들어 바라보고 싶은 생각이

조금치도 들지 않는 이 개떡 같은 세상,

소녀야, 집 나간 내 조카, 명주야,응?, 명주야,

 

어제에서 아직도 빠져나오지 못하여

오늘의 차도를 가로막고 있는 저 하얀 풍선

언제 차도로 뛰어들지 모르는

속옷만 입은 저 하얀 풍선

어제 끊긴 가락국수 같은 머리카락에

하염없이 꿈결 같은 햇빛이 내리고

졸려서 죽겠다는 하얀 풍선

햇빛을 꾸려 집 나간 이후 만나지 못한 몇 해

이제야 햇빛으로 된 제대로의 집에서

오늘이 온 지도 모르고 잠들어 있는 저 하얀 풍선

 

 

 

새벽밥

김승희

 

새벽에 너무 어두워

밥솥을 열어 봅니다

하얀 별들이 밥이 되어

으스러져라 껴안고 있습니다

별이 쌀이 될 때까지

쌀이 밥이 될 때까지 살아야 합니다

그런 사랑 무르익고 있습니다

 

 

 

생의 가장자리

김승희

 

가슴이 뻥 뚫린

도우넛들이

환한 상점의 쇼윈도우 앞에

앉아 있다.

심장이 뭉개진 너.

심장이 도려내진 너.

고통의 가장자리만 남아

그 사이로 한없이 조용하게 나를 바라보는

앙상한 너.

 

나는 말이야,

성냥갑에 누운 성냥알들이

나에게 쳐들어올까봐

성냥갑을 제대로 열지도 못하는

사람이야,

 

나는 실험증에 빠진 것 같기도 해,

날개가 떨어진 파리는

얼마동안 붕붕거리는가,

붕붕거리다가 날아 보려고 맴도는가,

아니면 날아 보려는 생각 없이

맴돌기만 하는가,

붕붕거림은 언제 으르렁거림으로

바뀌는가,

혹시 머무름과 함께

제자리 걸음으로 맴돌면서

행여라도 전진하는 것은 없는가,

언제 우울증이 나타나는가,

그리고 어떻게 격한 정신이상으로

발전하는가 등등......

 

도우넛 가게의 유리창 안에서

혼자, 조용히, 심장이 도려진.

우주적 심장절개의

무한대의 깊은 나락의

투명한 구멍.

생의 한가운데는 어디 있는가?

그런 질문은 좀 앳된 것 같다.

우리는 단지 조용히

고통의 가장자리만을

지뢰 검사반처럼

조심스레 맴돌며 돌고 있을 뿐.

 

 

 

서울의 우울

김승희

 

1

쇼팽은 쇼팽이 무거워 고개를 숙이고 있고

조르쥬 상드는 조르쥬 상드가 무거워

고개를 숙이고 있고

환자는 환자가 무거워

도둑은 도둑이 무거워

노동자는 노동자 무거워

의사는 의사가 무거워 고개를 숙이고 있고

아버지는 아버지가 무거워

어머니는 어머니가 무거워

딸은 딸이 무거워 고개를 숙이고 있고

해바라기는 해바라기가 무거워

달개비는 달개비가 무거워

민들레는 민들레가

자운영은 자운영이

칸나는 칸나가 무거워 고개를 숙이고 있는데

 

힘들어라

내가 내 이름으로 사는 것이 힘들어라

달빛으로 햇빛으로 고발장을 두르고

마음에 들지 않어라

마음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숙이고 사는 것은

 

 

3 – 캔버스 위에 연탄재

나는 시인이다

서울의 시인이다

서울의 아름다움은 마의 두려움

이곳과 저곳의 불가능한 거리에서 육모초 같은 시는 자라고

시인처럼 격렬한 경험을 하는 이가 있는가

하루 종일 마늘만 깐다

나는 공기다

하루 종일 흘러다니다가 퇴근후 하수구 속에 들어온다

쥐의 시선들이 반짝인다

나를 노린다

백 년 전 버클리 대학교 박물관 쇼 케이스에

전시되어 있던

<나는 인디언이다>라는 제목의 그 사람 같다

보여지는 괴로움과 보는 눈의 괴로움

우울을 버리려다 더 우울만 창창하다

나는 책장수다

가르칠 무엇도 없는데

가방을 들고 학교에 나간다

나는 하수인

나는 심부름꾼

쇄빙의 아침이아

오늘 하루도 얼음장을 깨고 쇄빙의 시간 속으로 나간다

갈비껴 있는 데서 피가 흐는다

쇄빙의 칼날 밑에 오늘도 네 사람의 학생과

한 사람의 교수가 자살했다

면류관 같은 얼음칼이 쇄골에 쿡쿡 박힌다

속이 차디찬 사과의 반쪽이 떨어져 있다

차바퀴가 하얀 사과의 속살을 뭉개고 지나간다

반쪽 가슴의 사과는 아프다

조간신문이 내 골 속에 떨어진다

돈 돈 돈 --- 하고 우르르 몰려간다

나는 시인이다

연탄재를 버리려고

연탄집게를 들고 영동대로에 서 있다

버릴 곳이 없다

얼어붙은 입이 자꾸 구겨지며 피가 터진다

 

 

4

타살이라고 할 증거가 없으면 자살로 본다

법의 말씀이다

 

어느 자살도 깊이 들여다보면 타살이라고 할 증거가 너무 많다

심지어는 내가 죽인 사람도 아주 많을 것이다

 

자기 손으로 밧줄을 목에 걸었다 할지라도

모든 죽음을 잘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안다

 

자살도 타살도

금환일식이다

 

 

5

오늘의 날씨,

모기가 힘이 없어요

 

우리는 일회용 건전지가 아니다

우리는 크리넥스 티슈가 아니다

우리는 편의점 나무젓가락이 아니다

우리는 당일치기 풍선이 아니다

말할수록 야위어가는 메아리가 아니다

 

모기에게 대포를 쏘지 말아달라

 

왜 우리는 불안한가

밥을 먹고 있어도 불안하고

약을 먹고 있어도 불안하고

일을 하고 있어도 불안하고

일이 없어 놀고 있어도 불안하고

아침에도 불안하고

저녁에도 불안하고

죄라면 열심히 일한 죄밖엔.....

유능해도 불안하고

무능해도 불안하고

낮에도 불안하고 밤에도 불안하고

왜 우리는 쥐새끼처럼 늘 불안한가

 

왜 이 도시엔 이렇게

골목마다 어린 소녀를 따라가는 성추행범이 많은가

성폭행하고 손목까지 잘라 유리컵에 꽂아놓는 미친 놈이 많은가

왜 이 도시엔 이렇게 손바닥 뒤집는 거짓말이 많으며

왜 손바닥 뒤집는 그 손바닥들로 하늘이 자욱한가

왜 나의 하늘을 누가 가리고 누가 뒤집는가

왜 이 도시엔 이렇게 법이 허전한가

 

정녕  모기에게 대포를 쏘지 말아달라

 

 

6

그래 언제부터인가 산다는 것은

칼날을 부여잡고 사는 것이었지.

칼날을 잡은 쪽은 언제나 나였다.

그러니까 그 피는 나의 피였다

 

칼날 능선이 있는 곳은 히말라야 낭가파르바트.

칼날 능선은 서울에 더 많이 있다.

칼날 능선에서 추락사한 사람 수도 서울이 더 많을게다.

서울은 칼날로 이루어진

칼날 능선이다

 

더 이상 갈 데가 없다

손이 붙잡을 것이 없다.

 

 

9 – 앵무새 기르기

영혼 없는 새

남의 말을 따라 하는 새

고장 난 녹음기보다 더 나쁜 새

내 영혼을 들킬까봐 남의 말 뒤로 숨는 새

세상은 그런 새를 기르기를 원한다

그런 새를 만들려고

학교를 만들었고 입시를 만들었고

사법고시를, 언론고시를 만들었다

앵무새를 길러놓으니 참 편해, 내 말을 다 해주잖아……

한 번도 아니고 두 번도 아니고 매번 그렇게……

참 고마워라,

숲에서 우는 소쩍새여, 꾀꼬리여, 부엉이여,

놀라워라

제 소리로 제 슬픔을 애통하며

에레미아 선지자처럼

세세년년

남의 슬픔을 관통하는 새

앵무새는 죽어도 못 따라갈

영혼 고운

 

 

10 - 장자연의 꽃송이

꽃이다

꽃송이다

핏빛 지장(指章) 찍어

꽃송이를 남겼다

유서를 쓰려거든 똑 이렇게 쓰렸다!

원수여, 내가 너를 단죄하러 가는 길,

원수의 이름도 모르고

원수의 집도 모르고

원수의 눈 코 입 면상도 모른 채

원수여, 사는 자와 파는 자, 먹는 자와 먹히는 자,

매매된 자와 매매한 자 사이에 원수가 성립이 될까?

어쨌든, 서울이 소비한 여자, 나보다 빠르고

언제나 나보다 고상하고

언제나 나보다 힘센......

너는 여기에도 있고

거기에도 있고

너는 여기에도 없고 거기에도 없고

나의 말을 나보다 더 많이 갖고 있고

나의 눈동자를 솔개보다 더 빨리 파먹고

악수를 하며 복수를 하고 복수를 하며 악수를 하는

원수여,

원수는 언제나 벅차다

너를 찾아 단도를 품고 가는 길

집도 모르고 코도 몰라

 

하얀, 흰, 허어연

광목에 동백처럼, 광목에 양귀비, 광목에 목단처럼

붉은 지장을 찍고

꽃송이 몇 송이 목숨 다해 친필로 흩뿌렸나니

유서를 쓰려면 똑 이렇게 쓰렸다!

유서 한 장 남기고

오늘도 원수를 찾아 오월 만발 초록 길을 걷나니

찢어진 옷고름

피 묻은 흰 치마

그러면 그럴수록 하늘만 푸르르고

그러면 그럴수록 깨끗이 면도한

아침 서울의 면상

 

 

13 – 위층 사람

당신은 지금 나의 하늘을 밟고 서 계십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하지 마시고

천상천하 유타공존 하십시오.

 

당신의 하늘을 밟고 서 계시나

소리 내지 않는 그분을 상기하십시오.

 

당신의 머리통 위의 발바닥을

당신의 발바닥 아래의 머리통을

그렇게 그윽이 생각하면서

함께 물망초 꽃으로 피어나자는 것입니다--

 

아니요

아니요

물망초 꽃이 아니라 아예 나를 잊으라는 망초

꽃으로

조용한 망초꽃으로

너영나영 아득히 피어나자는 것입니다.

 

 

15

나는 지금 웃을 기분이 아니야,

이렇게 목줄을 매놓고

웃으라고 하면 당신의 입을 찢어놓을지도 몰라,

포자(胞子)들은 서울을 홀로 날아다닌다

다른 것과 합체하는 일 없이

단독으로 발아하여 새 개체가 된다,

 

받는 것 없이 웃기만 하라는

무리한 세상의 주문에 부대껴

목줄을 잡아당기는 서울을 떠나

난민이나 이재민이 되었나

아무 데나 어두운 어느 구석에 기어들어 가

양치류, 이끼류, 곰팡이균류가 된 포자들

쓰러져 번식하고 널브러져 병들고 병을 옮기는

넘치는 어둠의 농락

 

포자들은 어느 순간

페스트, 탄저, 살모넬라, 콜레라 같은 칼을 든 살인마가

되어 카메라 플래시 앞에 나타나기도 하고

숨진 지 몇 달 후에나

고스란히 홀로 남은 고독사의 주인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포자는 말하려는 듯하다,

미안하다,

마음에 들지 않는 데스마스크여,

외설에 가까운 희망이여,

너무 고독해서 고독의 품위를 지키지 못했구나

 

 

17

돌아와 옥중일기 같은 밤의 일기를 쓴다

“내일의 빵으로 나는 살 수가 없다”는

랭스톤 휴즈의 말도 쓴다

언제 오늘의 빵만으로 살아온 사람이

있었던가

 

언제나 내일의 빵이었다고 쓴다

고치는 것보다 허물어버리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은

오늘에

 

내일의 방이 모든 희망의 할머니였다고 쓴다

 

서울이여, 서울이여,

희망도 스펙이라고 쓴다, 지우고

희망은 오늘

차마 입에 담기 어려운 외설이 되었다고 쓴다

 

 

 

성녀와 마녀 사이

김승희

 

엄마, 엄마,

그대는 성모가 되어 주세요,

한국 전래동화 속의 착한 엄마들처럼

참, 아니, 사임당 신씨

신사임당 엄마처럼 완벽한 여인이 되어

나에게 한평생 변함없는 모성의 모유를

주셔야 해요,

이 험한 세상

엄마마저, 엄마마저... 난 어떻게...

 

여보, 여보,

당신은 성녀가 되어 주오,

간호부처럼 약을 주고 매춘부처럼

꽃을 주고 튼튼실실한 가정부도 되어

나에게 변함없이 행복한 안방을

보여 주어야 하오,

이 험한 세상

당신마저, 당신마저... 난 어떻게...

 

여자는 액자가 되어간다,

액자 속의 정물화처럼

고요하고 평화롭게,

액자 속의 가훈(家訓)처럼

평화롭고 의젓하게,

여자는 조용히 넋을 팔아 넘기고

남자들의 꿈으로 미화되어

도배되어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 액자 하나로

조용히 표구되어

안방의 벽에 희미하게 매달려 있다

 

모나리자의 미소는 웃는 것인가

우는 것인가,

그녀의 미소는 용서인가

배신인가.

난 알 수 없지만

난 그녀의 그림자 망사 옷 같은

검은 가슴 속에서

무서운 화산의 힘을 두근두근 느낄 수 있지,

남자들의 꿈으로 미화될 수 없는

박제될 수 없는

마녀의 부엌 같은 뜨거운 화산이

그녀의 미소를

영원한 무서움으로 낯설게 만들고 있는데,

 

그녀는 애매하다,

성녀와 마녀 사이

엄마만으로도

아내만으로도

표구될 수 없는, 정복될 수 없는,

저 영원한 회오리의 명화는,

여인에게 사랑은 벌 같은 것이지만

그러나 여인은 사랑을 통해

여신이 되도록 벌받고 있는 거라고

그녀는 스스로 영원을 표구하면서

세상을 배경으로 거느리고

늠름하게 서 있지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싸움

김승희

 

1

[이 문은 자동 도어이오니

개폐를 운전자에게 맡겨주십시오]

 

누군가 나에게 넥타이를 입힌다

그리고 질질 끌고 간다

 

질질질.... 운명에 끌려가는, 시간에 끌려가는,

내겐 무거움이 아니 무서운 싸움,

 

 

2

아침에 눈을 뜨면 세계가 있다.

아침에 눈뜨면 당연의 세계가 있다.

당연의 세계는 당연히 있다.

당연의 세계는 당연히 거기에 있다.

 

당연의 세계는 왜, 거기에,

당연히 있어야 할 곳에 있는 것처럼,

왜, 맨날, 당연히, 거기에 있는 것일까,

당연의 세계는 거기에 너무도 당연히 있어서

그 두꺼운 껍질을 벗겨보지도 못하고

당연히 거기에 존재하고 있다

 

당연의 세계는 누가 만들었을까,

당연의 세계는 당연히 당연한 사람이 만들었겠지,

당연히 그것을 만들 만한 사람,

그것을 만들어도 당연한 사람,

 

그러므로, 당연의 세계는 물론 옳다,

당연은 언제나 물론 옳기 때문에

당연의 세계의 껍질을 벗기려다가는

물론의 손에 맞고 쫓겨난다.

당연한 손은 보이지 않는 손이면서

왜 그렇게 당연한 물론의 손일까,

 

당연의 세계에서 나만 당연하지 못하여

당연의 세계가 항상 낯선 나는

물론의 세계의 말을 또한 믿을 수가 없다,

물론의 세계 또한

정녕 나를 좋아하진 않겠지

 

당연의 세계는 물론의 세계를 길들이고

물론의 세계는 우리의 세계를 길들이고 있다.

당연의 세계에 소송을 걸어라

물론의 세계에 소송을 걸어라

나날이 다가오는 모래의 점령군,

하루종일 발이 푹푹, 빠지는 당연의 세계를

생사불명, 힘들여 걸어오면서,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싸움은

 

그와의 싸움임을 알았다.

물론의 모래가 콘크리트로 굳기 전에

당연의 감옥이 온 세상 끝까지 먹어치우기 전에

당연과 물론을 양손에 들고

아삭아삭 내가 먼저 뜯어먹었으면.

 

 

 

솟구쳐 오르기

김승희

 

1

억압을 뚫지 않으면

억압을

억압을

억압을

 

악업이 되어

악업이

악업이

악업이

 

두려우리라

 

절벽 모서리에 뜀틀을 짓고

내 옆구리를 찌른 창을 장대로 삼아

하늘 높이

장대높이뛰기를 해보았으면

 

눈썹이 푸른 하늘에 닿을 때까지

푸른 하늘에 속눈썹이 젖을 때까지

 

아, 삶이란 그런 장대높이뛰기의 날개를

원하는 것이 아닐까,

상처의 그물을 피할 수도 없지만

상처의 그물 아래 갇혀 살 수도 없어

 

내 옆구리를 찌른 창을 장대로 삼아

장대높이뛰기를 해보았으면

억압을 악업을

그렇게 솟아올라

아, 한 번 푸르게 물리칠 수 있다면

 

 

2

상처의 용수철

그것이 우리를 날게 하지 않으면

 

상처의 용수철

그것이 우리를 솟구쳐 오르게 하지 않으면

파란 싹이 검은 땅에서 솟아오르는 것이나

 

무섭도록 붉은 황토밭 속에서 파아란 보리가

씩씩하게 솟아올라 봄바람에 출렁출렁 흔들리는 것이나

 

힘없는 개구리가 바위 밑에서

자그만 폭약처럼 튀어나가는 것이나

 

빨간 넝쿨장미가 아파아파 가시를 딛고

불타는 듯이 담벼락을 기어 올라가는 것이나

 

민들레가 엉엉 울며 시멘트 조각을 밀어내는

것이나

 

검은 나뭇가지 어느새 봄이 와

그렁그렁 눈물 같은 녹색의 바다를 일으키는 것이나

 

상처의 용수철이 없다면

삶은 무게에 짓뭉그러진 나비알

 

상처의 용수철이 없다면

존재는

 

무서운 사과 한 알의 원죄의 감금일 뿐

죄와 벌의 화농일 뿐

 

 

3

당연의 제국이 있다.

당연의 제국은 생각보다 넓고 단단하다

-이런 세계에서 시는 무엇일까,

고통의 스트립쇼 같은 게 아닐까

 

오장육부에 가득 찬 어둠은 이 시대의 쇼윈도에

너무 어울리지 않는다,

너무도 투명한 것들에 대한

두려움, 어둠 귀신에 사로잡힌

시인은 이제

우리 시대의 진정한 3D가 아닌가

 

통조림된 울음들이 슈퍼마켓에 가득 차 있다

통조림된 분노들이 격납고 안에 가득 서 있다

통조림된 하늘들이 향수병 속에 가득 잡혀 있다

통조림된 눈물들이 사제폭탄을 들고

핏줄 속에 일렬로 서 있다

 

내 속의 검둥이가 말한다,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혼혈이다,

검둥이가 있고 그것을 누르는 흰둥이가 또 있다)

금고 같은 삶을 원했느냐고

롯데 월드 같은 집을 원했느냐고

고속도로를 신나게 질주하는

관광버스 같은 삶을 살고 싶었느냐고

 

눈을 씻고 돌아보면

어디든지 유곽의 냄새가 나는데

유곽의 문법에 능통하지 않으면

어느 안으로도 들어갈 수 없는데

바깥에 서 있는 것들은

집 잃은 개들과 택시 운전사들, 외판사원과

신문배달 아저씨, 시간강사들과

우유배달 손수레들

 

당연의 제국이 있다,

돈이 돈을 끌어당기듯

힘이 힘을 끌어당기고

행복이 행복을 끌어당겨

당연의 제국에 해는 지지 않는다,

 

아직 없는 것을 위하여

지금 있는 것과 싸우는 사람,

당연의 모욕을 받으며

세계의 낯짝에다 신생의 무엇을 그리는 사람

 

상처의 더없이 감미로운 힘을 깨닫기 위해

나는 허리를 넘는 내 긴 머리에

성냥불을 당긴다,

화형식장의 마녀처럼 펄펄 뒷면서

환희의 장르를 찾아 껑충껑충 뛰어본다,

내 속의 검둥이는 말한다,

바, 로, 그,

고통의 스트립쇼 같은 게

이, 시, 대, 의, 예, 술, 이, 아니겠느냐고

 

 

5

진실로 무서운 것은

우리 머리 위의 그물이 아니다

밖에 있는 그물이 아니다

현대인의 핏속에 DNA처럼 입력되어 있는

무기력, 망각, 순응의 지문들

 

그 그물의 식민통치를 뿌리치지 않고

어떻게 솟아오르기를 바랄 것인가?

가장 야만스러운 열정이여

나에게 와다오

가장 야만스러운 정열

잔혹한 그 검은 웃음이 없다면

누가 우리를 그물에서 해방시킬 것인가?

 

누군가는 그 학살에 책임을 져야한다

누가 그 뺑소니 차량을 보신 분이 있습니까?

1980년 5월 18일 연희동 네거리에서

수백 명의 어린아이들이 뺑소니차에 치여 숨졌습니다

그, 극악무도한, 가증스러운

뺑소니 차량 목격하신 분 안 계십니까?

이런 현수막이 쳐진 거리

시간이 가도 현수막이

내려지지 않는 거리

 

잘못이라는 단어는 언제나

나의 뇌리에 틀어박혀 있다

죄라는 단어도 언제나

나의 뇌리에 틀어박혀 있다

심판이라는 단어도 언제나

나의 뇌리에 틀어박혀 있다

 

우리는 모두 목격을 하였다, 목격을 하긴

한 것이다,

목격자의 원죄, 목격자의 비굴, 목격자의 공포가

지상의 인간들의 날개를 찢고 있다,

깃털을 흩트리고 있다,

 

목격이 원죄를 형성해 버린 이 땅에서

우리 모두 원죄를 벗기 위해서는

보내라, 보내라,

가야 할 것들을 종말처리장으로 보내고,

죄가 경미한 사람들은 시청 앞 광장 분수대에서

공개목욕을 시키자

공개목욕을 시키자

 

메아리 없는 거리에선

오렌지가 주렁주렁 익어가고

사이비가 사바사바 자라나고

성수대교가 무너진다, 무너진다, 무너진다.

 

 

6

국도만이 길이 아니야

국도 위에 길을 내려고 할 때

너는 불가피하게 묶이는 것을

 

고독의 전망만이 길을 내나니

때로는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절대

용서하지 않는 순수의 전망도 길을 내고

슬픔보다 더 큰 빛나는 용기도

길을 내고

모두 예-예-토끼기 될 때

아니오-새가 되는 것도 길을 내나니

 

지평선에 우글거리는 드라큘라

세상에! 원, 이럴수가!

가짜의사 가짜지도자 가짜 영웅들의 드라큘라

제도의 정착의 조직의 사교클럽의 비겁의 굴종의 통제의 드라큘라

빅 브라더와 스몰 브라더

빅 마더와 스몰 마더들의 드라쿨라를 넘어서

국도만이 길은 아니야

국도 위에 길을 내려고 할 때

너는 불가피하게 그 많은 드라쿨라들의

결박당한 사람

 

 

7

국도를 넘어서 가는 길을

생각해 보네

이 배부름의 시대에 참답게 배고팠던 사람

이 자본주의 화사한 청량음료의 시대에

참으로 참답게 목말랐던 사람

배고픔과 목마름, 시대는 끝없이

그런 욕구들을 재생산하여

영원한 바퀴 속에 빙빙 갇히게 하네

 

우리의 시대정신은 위장 속에 있다

혹은 엉덩이와 목구멍

생식기 속에 있는지도 모른다

 

니체가 말했었지, 초인은 uber- mench라고,

Uber란 위에 라는 뜻이지,

인간의 위로 솟구치는 존재가 초인이라면

어떻게 인간의 위에 서 있는 것이

가능할 것인가

 

우리의 시대정신이 위장 속에, 엉덩이와

생식기, 목구멍 같은데 있다면

초인은 바로 그 목구멍과 엉덩이 같은 것을

위장과 생식기 같은 것을

욕망의 국도들을 뛰어넘어 있다는 것이

아닐까

 

국도 너머의 길을 생각해 본다

 

암세포를 이기는 방법은

밥을 굶고 배가 고프게 해서

암세포 스스로가 배가 고파 못살겠다고

모체를 떠나 파멸하기를

기다리는 것이듯이

가자 가자

모든 욕망의 국도를 넘어!

눈썹이 긴 낙타의 등에 올라

황금의 별빛 벼락처럼 쏟아지는 허허막막한 광막의 길로

 

 

10

황금의 별을 나는 배웠다,

어린 시절의 별자리여,

마음속 어느 혼 속에

고통의 상처가 있어

그 혼돈 속에서 태어나는 별,

혼돈과 함께 태어나는 황금의 별이 있다고

나는 배웠고

그 말은 나를 매혹하였다

 

혼 속에 상처를 간직하지 않으면

무엇이 나를 별이게 하겠는가?

나는 고요히, 울면서,

인생이 나에게 주는 모든 쓰디쓴 혼돈

모든 쓰디쓴 상처

그 상처의 악령들을 나는 사랑하였다,

인생을 구제하는 건

상처의 옆구리에서 흘러나오는 상처의

오케스트라,

그 상처의 오케스트라 속에서만 터져나오는

황금의 별들의 찬란한 음악

 

상처는 우리를 인간답게 만드는 데

봉사하지 않으면 안된다

상처의 장대 높이뛰기를 하는

존재의 곡예만큼

장엄한 것이 있을까?

불의 운명을 피하니 물의 운명이 나오고

물의 운명을 피하니

가시덤불 언덕을 구르는 형벌이 나왔던

옛날이야기가 있지 않았던가?

그러므로 처음 만난 운명을 피하지 말라던

황금의 별의 잉태를 믿으라던

 

가끔은 운명의 길이 텅 비고

아무것도 광채나는 것은 없어

공허가 길을 메우고

허공이 길 위에 내려와

내 길을 지우니

어디로 갈까

갈 곳도 없는 지평선이 나를 가두더라

 

사랑도 나침반을 잃고

슬픔은 바다의 파도와도 같고

기억은 곪은 상처와도 같이

무거운 독거미의 액을 뿌리고 있으니

무엇을 보고 존재의 황금의 별을 믿어야

할 것인가,

홀로 고통으로만 가득 차 있을 때

모든 것은 아프고 아프다

모든 존재는 아프고

아픈 것은 나쁜 것을 뛰어넘지 못할 때

꿈은 사악해지기도 하더라

 

내 옆구리를 찌른 장대창을 나에게

다오,

그것을 쥐고 하늘 높이

뛰어올라

황금의 별을 만지리라,

혼 속에 있는 고통이여

혼돈 속에 있는 황금의 별이여

 

 

12

허우적대다

허우적대다

허우적대다

허우적대다

허우적대다

죽었는가

이젠  정말 죽었는가

했을 때

나는

있었다.

 

지상의 가장 끝에서

혼자 본

아침

 

백경의 장엄한 숨쉬기처럼

물방울 분수를 조용히 내뿜으며

수면 위로

머리를 내밀러

고통의 신의 하사품을 받는 것처럼

 

가라앉는 행복조차 빼앗기고

아아, 또 살아났구나

휴유---하고 말하려는 것처럼

솟구치는

 

 

 

수의 디자이너

김승희

 

누군가 나에게 아직도 남아 있는 꿈이 무어냐고

물었을 때

난,

사람들을 위한 수의 디자이너가 되고 싶다고

대답했다

 

이제, 시인이란, 남의 삶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개입할 수가 없다는 것을 안

나의 쓸쓸함이

그런 꿈을 나에게 꾸게 했던가

 

모든 TV 연속극이 코미디를 닮아가기 시작한

그 무렵부터였을 거야,

사람들의 유형이 단순해지기 시작했지,

코미디의 시녀, 야합의 시녀

자기 의자와 자기 도장의 시녀

욕망의 시녀

광고의 시녀

스마트 폰의 시녀

 

그리고 몇 개 더 있다고 해도

그리 유의할 것은 없으리라

남의 삶을 위해 개입할 것이 없어

이제, 시인은, 수의 디자이너로

재취업하려고 하노라,

 

죽음에도 제도권이 있어

제도권적 저승이 서로들 나뉘어져 있는데

나뉘어진 제도권의 저승이 아닌

순수한 자기를 위한 수의를 원하는

사람의

꿈을 위한 디자인이

정녕, 필요하지 않겠느냐고,

 

 

 

순정만화

김승희 

 

폭력 만화 섹스 만화 요설 만화

속에

순정만화 하나

멍청히 꽂혀있습니다

 

시를 쓴다고

새벽 세 시까지 엎드려 있는

너는

커피잔만큼 코피를 쏟고도

종이 위에 다시 엎드리는

백치 같은

너는

세상은 온통 관절이 잘못되었다고

그래서 시를 써서

세상의 관절염을 모조리 고쳐 주겠노라고

되뇌이는 머리가 살짝 돈

너는

빈혈엔 연애를 하세요

건강에 좋아요

식욕 성욕이 모두 좋게 생긴 의사가 미워

에잇 연애보다는 애연을 하겠소

 

발악적으로 담배를 한 대 더 피워 무는

한심스런

너는

천추에 잊지 못할 슬픔 때문에

천추에 씻지 못할 사랑 때문에

단 하나 가진 밑천

제 몸뚱이만 괴롭히는

병신 같은

너는

그래도 시 한 줄 못 쓰는

그래도 시 한 줄 안 써지는

천치 같은 너는

 

공포 만화 외설 만화 스포츠 만화

속에

순정만화 하나

시대착오적으로 수절합니다

 

 

 

슬픈 적도(赤道)

김승희

 

운명이 나에게 불의 옷을 입혔을 때

나는 손쉽게 쓰러지고 말았지.

더 이상 깊을 수 없는 불의 병(病) 속에

나는 오래 서 있었네.

 

운명으로서의 기하학. 저 모퉁이를 돌아오지도 않고

불어왔던 바람.

그 시험 속에

나는 조각조각 심장을 내바쳤네.

촛불의 복습을 하기 위한

가장 슬픈 칸나꽃의 십자형(十字形) 하프를.

 

백 개(個)의 죽음 속에 도사린

저 백 개(個)의 탄생.

백 개(個)의 겨냥 속에 있는

저 백 개(個)의 눈물 사냥.

그리고도 그것의 또 영원한 복습.

 

기하학의 운명이 나에게 왔을 때

나는 모든 것을 주고 말았네.

화려한 사랑. 스펙트럼의 꿈.

안전한 통행증 옛 계보마저도.

 

그리고 나도 싸움을 걸었다.

치료법으로서의 전쟁, 촛불의 천국에로 이르를

그 영원한 피의 복습을.

나도 조각조각 불을 가지고서

태양경(鏡)을 만들었네.

 

나도 조각조각 심장을 가지고서

저 유명한 십자로(十字路)에 있어서의 운명.

오이디푸스와 함께 울지 않고 조용히

그를 비추면서 건너가려고 하네.

 

 

 

슬픔과 놀며

김승희

 

나는 조용히 골방 속에 앉아 있다,

한 사람만 수용된

우주의 고아원처럼

골방은 언제나 힘겹고 쓸쓸하고,

인생이란 오직

내 방문 밖에만 있는 듯

아무래도 조만간 옥사해 버릴 것만 같다.

 

나는 조용히 벽을 바라본다,

벽 위엔 오죽하면

못 하나 박혀 있지 않다,

내 호주머니 속엔 오죽하면

끈 하나 들어 있지 않다,

끈도 없고

못도 없다면

그렇군, 밀교신도처럼, 오직 나에겐

자가발전 밖에 남은 것이 없어

 

무릎을 꿇은 채로 앞으로 쓰러지면

부드러운 무슨 막이 나를 받아

안아 주는 것만 같다,

계란껍질 안에 고요히 잠들어 있는

노른자위처럼

누군가 나를 포태하고 있는 것만 같다,

 

누구에겐듯 어머니, 어머니, 부르면서

부드러운 양수막을

손길로 만져보면

모든 육체가 잿빛 눈동자로 되어 있다는

아아 그건 슬픔이라는

어머니,

슬픔이 나를 임신하고 있으니

 

나는 슬픔과 단둘이

오손도손 소꼽놀이를 시작한다,

슬픔에게 어머니, 어머니 부르면서

아가와 엄마가 병원놀이를 하듯이

침대에 엎드린 시늉으로 아프다고

울고 있으면

어머니는 하얀 붕대와 청진기를 가지고 와

의사시늉으로 도란도란 놀아 준다,

어디가 아픈가요? 어디가요?

그리고 의사선생님은 약을 준다,

마늘과 쑥을

백 일 동안만 복용하라고

 

나는 조용히 그렇게 견디고 있다,

나 혼자만 수용된

우주의 보육원처럼

골방은 언제나 무섭고 쓸쓸하지만

봉제공장의 여직공처럼

난 그렇게 숨어서

성불하고 싶다,

 

슬픔의 어머니가 날 임신하였으니

마늘과 쑥을 항용 먹고 있으니

 

 

 

시간(時間)

김승희

 

어둠의 아이들과 햇빛의 아이들이

흑색 금색 창을 들고

사유의 들판에서 싸움을 시작한다.

 

그러나 나는 어느 것을 편들지는 않으리.

죽음과 생(生)을

모조리 나의 심장 속에 놓아 먹이리.

 

그러나 그때에는 달랐었다.

내가 아직 내 말[馬]의

고삐 쥔 손을 느끼지 않았을

그때에는,

 

더 이상 생각지 말아라.

지금은 빛나고 휘날리는 금(金)색의 깃발.

그러나 곧

정적이 와 버리는 것을.

 

 

시계풀의 편지

김승희

 

1

푸른 것은 늘 아름답다.

멍은 푸르다.

그러므로 멍은 아름답다.

그러니까 멍든 것은 늘 아름답다.

 

 

2

이 땅 위에 나는

무기징역으로 서 있습니다.

이 땅 위에 누가 나를

무기징역으로 심었습니까.

 

지울 수 없는 꿈처럼

무기징역으로 뜨는 별.

잊을 수 없는 욕망처럼

무기징역으로 헤매는 바람.

 

이 땅 위에 나는

앉은뱅이 사랑.

네가 필름처럼 검고 어두운 뿌리

하나의 자유를 가졌습니다.

 

고통이여, 

그대와 나는 부부가 되고 싶습니다.

이러한 그대와 나이기에

산다는 것은 자꾸만 범죄의 욕망을

닮아가지 않습니까.

 

 

3

세상에서 제일 큰 것은 하늘이라고

말한 사람은 누구일까.

그는 얼마나 철이 없었을까.

그는 얼마나 아름다웠을까.

 

어떤 사람에겐 하늘이 액자만 하다는 것을

액자보다 더 작은 하늘이

있다는 것을

그는 몰랐을까.

그는 정말 몰랐을까.

 

상처 안에 또 하나의 상처.

그 안에 골목 같은 상처. 그 안에

창살만한 상처.

그 아래 몽고반점만 한 사랑.

 

하늘이 푸른 것은 아직도 꿈꾸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 사람은 누구일까.

그는 얼마나 철이 없었을까.

그는 얼마나 아름다웠을까.

 

어떤 하늘은 때때로 몽고반점처럼

푸르르고

죽고 싶도록 멍든 사람들이

멍든 빛깔로만

사랑을 칠하고 있는

살고 싶도록 푸르른 하늘.

 

하늘이 푸르른 것은

그런 멍든 사람들이

하늘을 등지고

푸른 언덕 위에 가슴을 대고

아아 가만가만

자신의 파아란 상처를 울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4

사랑이여. 

나는 그대의 하얀 손발에 박힌

못을 빼주고 싶다.

그러나 

 

못 박힌 사람은 못 박힌 사람에게로

갈 수가 없다.

 

 

5

사바(娑婆)란 말

참 예쁘지.

삶이 아무리 괴로워도

괴로움으로 이 몸이 참으로 멍들어도

사바란 말

참 예쁘지.

 

그만큼의 아름다움으로

우리 괴로움은 지상에 서 있는 거야

그만큼의 아름다움으로

우리 괴로움은 지상을

차 버리지 못하는 거야.

 

사바란 괴로운 말

참 예쁘지.

그 말이 예쁜 그만큼만

인생은 그리운 거야.

그 말이 예쁜 그만큼만

인생은 잔인한 친절이라는 거야.

 

 

 

시의 응급실에서

김승희

 

시는 응급실, 시는 산소 텐트, 시는 시린 사과 속의 빨간

피,

슬픔은 비료와 같아

시의 이곳저곳에 뿌려둬야지,

시는 임산부의 날

언제가 해산의 날인지 아무도 알지 못하는 날,

시는 폭탄을 안고 달린다,

구름 위로 달린다,

그런데 다랑논 하나만한 논에서

누런 벼들이 익어가고 있다,

밥 한 공기만한 논, 삿갓으로 덮어도 될 만큼

작은 한 공기의 삿갓논,

죽그릇, 밥그릇 하나만한 죽배미, 밥배미,

삿갓배미여,

무릇 환자는 죽 한 그릇으로 원기소성하노니

가을 다랑논 한 배미의 힘으로

나를 살리고 너를 살려

다시 논에 엎드려 언어의 이삭을 줍고

언어의 씨앗을 심게 하나니

층층이 겹쳐진 황금빛 다랑논

당신의 시 한 편

김이 펄펄 나는 밥 한 공기 당신의 서정시 전집

 

 

 

시작을 위한 난생설화

김승희

 

 ……승희야, 빨리 좀 와줘, 나 분해서 못살겠어……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56평짜리 강변 구역, 미국에서 문학박사 사회학박사 박사 학위를 두 개나 받고 귀국해서 모 사립대학 교수인 언니의 집으로 아직 잠이 덜 깬 서걱서걱하는 새벽강변을 지나 달려간다, 언니의 집 앞 아파트 광장엔 르망 프레스토 그렌저 머큐리 콩코드 자동차들이 즐비하게 서서 새벽부터 아무 대책 없이 남의 이혼 싸움 속으로나 꼬리를 물고 빙빙 뛰어다니는 나의 길을 비웃는 것도 같다.

 

나는 언니에게 얼음처럼 차가운

새벽 달걀을 내민다.

냉장도 아닌데 달걀이 몹시 차갑구나,

언니는 나의 하얀 달걀을 받아

멍든 얼굴 한복판을 문지른다.

녹색식물도 아닌데 온통 시퍼렇게 멍든

육체의 세계 위로

달걀은 잉크에 입술을 대는 스펀지처럼

부들부들 떨리는 언니의 화염으로

따스해진 달걀이

후라이팬 위에서 껍질이 쪼개지며

오를이 되는 순간에

사방으로 흩어지며 도망치는

달걀껍데기들처럼

사방으로 깃털을 흐트리며

파랑 병아리가 알을 박차고 날아가는

것이 보인다.

어긋나고 거슬러오고 미끄러지는

파랑 병아리를 쫓아 이리저리 다니다가

부엌 식탁 밑에서

언니와 나의 머리가 쾅하고 만난다.

 

언니의 눈동자 속엔

윤심덕의 수평선보다도 훨씬 더 검은

장미 꽃이파리가 가득 넘실대고 있다.

아무도 훼손할 수 없는 불꽃의 난자(卵子)

와도 같은 그녀의 홍채는

나에게 슬피 묻고 있는 듯하다.

어차피 돌아갈 근원 같은 것이 없다면

우리는 매번 시작하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라고……

 

 

 

신이 감춰둔 사랑

김승희

 

심장은 하루종일 일을 한다고 한다

심장이 하루 뛰는 것이

10만 8천 6백 39번이라고 한다

내뿜는 피는 하루 몇천만 톤이나 되는지 모른다고 한다

지구에서 태양까지의 거리가 1억 4천 9백 6십만Km인데

하루 혈액이 뛰는 거리가

2억 7천 31만 2천Km라고 한다

지구에서 태양까지 두번 갔다올 거리만큼

당신의 혈액이 오늘 하루에 뛰고 있는 것이다

바로 너, 너, 너! 그대!

 

그렇게 당신은 파도를 뿜는다

그렇게 당신은 꺼졌다 살아난다

그렇게 당신은 달빛 아래 둥근 꽃봉오리의 속삭임이다

은환의 질주다

 

그대가 하는 일에 나도 참가하게 해다오

이 사업은 하느님과의 동업이다

그 속에서 나는 사랑을 발견하겠다

 

 

 

심장딴곳증

김승희

 

인어가 물 밖으로 나와 걸어 가는 것처럼

우리가 땅 위를 걸어갈 때

물 밖으로 나와 방울방울 피를 뿌리며 걸어가는 모든 해저의 것들에 대해

안에 있지 못하고 밖으로 쫓겨 나올 수 밖에 없었던

기막히게 아픔 심장같은 것에 대하여

나는 노래하고 싶다

심장은 결국 하트 모양이 아니었고

차라리 피투성이 근육 덩어리였다

어딘지 정육의 냄새가 풍겼다

 

터널처럼 내 육체는 그만 아픈 심장을 견디다 못해 방출하였고

밖으로 쫓겨난 심장은

이제 비밀한 단 한사람조차 숨겨 졸 수 없게 되었을 때

구태여 물 밖으로 나와 걸어가는 인어라든가

샤갈의 그림 밖으로 끌려 나와 바위에 머리를 박고

여지없이 중력에 추락하는 푸른 신부라든가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척추를 뚫고 지나간 쇠파이프를 지닌

프리다 칼로의 철철 흘러 내리는 피의 성찬식이라든가

그런 어처구니 없이 아름다운 것들에 대하여

안에 있지 않고

바깥으로 나와

아무나 손가락으로 쿡쿡 찔러보며 아파? 아프겠지?

놀림 받아 정신없이 걷는 심장의 여자라든가

그래도 기도하며 걷는 여자라든가

맨발이 땅에 닿을 때마다 한땀 한땀 핏방울 뜨며 걸어가는

으리으리한 인어공주,

그런 벙어리, 피의 자수가(刺繡家) 이야기라든가

 

 

 

쌍봉낙타

김승희

 

해인이와 왕인이가

내 등 위에 올라타 앉아 있다

엄마는 낙타.

목이 말라도 몸이 아파도

뜨거운 모래 위를

무거운 짐을 지고도 걸어가야만 한다.

 

"낙타의 등에는 큰 혹인 육봉(肉峰)이 있는데

거기에는 수일 동안 먹지 않아도 견딜 수 있는

지방과 영양분이 저장되어 있답니다. 이 혹이 하나 있는 것은 단봉낙타라고

하며 두 개 있는 것은 쌍봉낙타라고 합니다.

쌍봉낙타는 단봉낙타보다 힘이 세서 250kg 정도의

짐을 지고도 시속 4km로 하루에 40km를 갈 수 있답니다."

 

우울증에 신경질에 죄악망상

파라노이아 증상까지 겹쳤어도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죽지 않고 가는 것은

내 등 위에 짐 지워진

두 개의 육봉 때문일까.

오, 라후라라고

부처님께서 부르신,

부처님께서 버리신 피의 인연으로

 

나는 힘센 쌍봉낙타가 되어

뜨거운 사막 속을 가고 있다.

다락처럼 무거워도

야근처럼 피로해도

엄마는 낙타.

쌍봉낙타는 더 힘이 세다.

 

 

 

아네모네꽃이 핀 날부터

김승희

 

죽도록 사랑하면

죽도록 사랑하면

그렇게 神氣(신기)가 오릅니까?

 

죽도록 사랑하면

죽도록 사랑하면

그토록 검은 질료에서 주황빛 신이 불려 나옵니까?

 

옛날부터 늘 그래 왔습니까?

목숨을 지나서도 타오르는

무슨 한 덩어리 불이 있겠습니까?

 

너무 모욕받았는데 너무 큰 모욕이 내려왔는데

울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이렇게 괴로운데 이렇게 괴로워도

토막 난 늑대의 이글거리는 횃불처럼

뭉쳐서 뭉쳐서 화려하게 꿈을 꿔도 되겠습니까?

 

 

 

아프락사스

김승희

 

1

-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새는 신을 향해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 (데미안)

 

냉동실 선반 안에

메추라기 알들.

 

내 자서전 같다.

 

나 항상 A.D.를 꿈꾸어 왔었는데

 

 

2

검정 보자기 아래

콩나물 시루 안에선

언제나 울음 우는 소리가 들린다.

 

검정 보자기를 벗겨

가만히 들여다보면

어두운 콩깍지를 뚫고

금빛 콩나물들이

부활처럼 힘차게 뻗어가는 것이 보인다.

 

똑똑똑… 떨어지고 있는

물방울 소리

속에

찢어진 콩깍지는 울음을 묻고

 

새 떼처럼 화려한 콩나물들의

하얀 하강은

하얀 하강 노란 비약 하얀 하강 노란 비약은

어느 뿌리의 멈출 수 없는 저항이었을까.

 

 

3

참을 수 없이

좋았던 어느

나날들.

거실에 놓인 화분에 금이 가기 시작하면서

나무뿌리가 막 화분 밖으로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죄와 희망으로 되섞인

빅뱅의 상처 이후

 

크리스마스 양말처럼 크고 풍성한

꿈속에서

우리는 고통의 선물처럼

훨훨 날개 치는 뿌리를 갖고 싶다고 원했던

것이었을까?

 

 

4

아버지의 중풍은

나에게 말하려 하고 있다.

그 시대가 그만큼 어려웠다는 것을.

누구나

모자라는 것을 꿈꾸지만

그러나 결국 한 사람은 것은

‘나 + 나의 환경’이었다고

 

아버지의 중풍과 함께

비틀거리면서

엄마의 심장병은

나에게 말하려 하고 있다.

그 사랑이 그만큼 벅찼다는 것을

누구나 만유인력처럼 사랑을 느끼지만

그러나 결국 사랑이라는 것은

고통이 고통을 끌어당기듯

재난을 모으는 것이었다고

 

이 좁은

골목에서

하늘을 본다.

베르누이의 법칙처럼

좀은 골짜기의 수력(水力)이 세다.

남몰래 하늘 속으로 뛰어들면서

손바닥을 펴서 새처럼 날아간다.

압력은 부력(浮力)이라고

가난한 동전들도 날개를 타고 따라온다.

 

 

5

창세기의 현기증처럼

나, 언제나,

어지러웠어.

 

고운 줄무늬가 그려진

파자마 바람으로 잠든 채 누워 있는

산새알을 보았을 때

가슴이 찢어질 듯한 사랑으로

품 안에 꼭 안아 주었지.

 

드라이아이스. 드라이아이스가

궤짝에 하나 가득 꽉 차 있어서

난 쉽게 움직일 수도 없었어.

그래서 발가락 하나

손가락 하나가 움직일 때마다

그리도 기쁜 탄성을 지르곤 했었지.

 

비상을 위해선

어느 정도 결박이 필요하다고

아니

난다는 것은 아주 특별한 결박 속에서만

가능하다고

일제 아이힝거는 ‘결박된 남자’ 속에서 말했어.

 

결박이 아무 데서도 방해가 되지 않는다면

어찌하여

새는 알[卵] 속에 머무르지 못하는가?

아니

알의 결박이 없었다면

새는 어찌하여 날개를 만들 수 있었겠는가.

 

 

6

양초가 타오를 때

나는 고조선의 하늘이 열리던 날의

신단수를

생각한다.

 

제 몸을 허물고서야

비로소

빛이 열리는 양초불 속에서

나는 또 처형 예수를,

성불 비로자나를

느끼고 싶다,

 

부질없음을 버리기 보다

부질없음에 더욱 매어달려

달걀은 지금 시장의 구루마 위에

줄줄이 나와 앉아 있다

따스한 햇빛이

방파제도 없는 바다처럼 밀려들어

출렁출렁 고운 알들을 밀어주고 있다,

 

한 알의 달걀 속에 얼마나 많은 길들이 잠들어 있는가, 한 알의 새알 속에는 또 얼마나 큰 하늘이 기다리고 있는가?

 

 

 

안전벨트를 맨 사람

김승희

 

너무 오랫동안 안전벨트를 묶고 있어서인가

뼈가 펴지지 않는다.

이 몸은 나의 몸이 아니다.

안전벨트의 안전 속에

구속당한 몸.

안전의 골방 속에 너무 깊이 묶여 있으면

안전의 골병이 생긴다.

 

어떤 격랑 속에서도 안전벨트를 묶고 앉아 있는

오너드라이브. 그가 묶은 것은 무엇이고

그에게 묶인 것은 무엇인가?

 

 

 

알지 못하는 혀

김승희

 

새알 하나가 숲길에 떨어져 있다

그것에서 날개가 나온다는 걸 믿을 수 없다

두 손으로 가슴에 꼭 안아본다

 

새날개야, 나와라, 쇠창살 둘러쳐진

내 가슴의 흉부, 가슴 가득 무슨 죄수들이 우글거리는

이 흉악한 갈비뼈 창살을 열고

그 안에 뭉쳐 뭉쳐진

피 묻은 솜과 붕대들을 좀 꺼내어 다오

 

이윽고

앙상한 내 가슴 속에서부터 새 한 마리가 솟구쳐 올라  땅끝에서부터 하늘까지

하얀 비행운을 그리며 날아가는

알 수 없는 점보 비행기 한 대가 있다

 

하얗게 고운 비행운을 그리며

저렇게 기나긴 붕대가 땅과 하늘 사이

내 가슴 속 뭉쳐 뭉쳐진 피묻은 혀들을 풀며

올라간다 올라간다……

 

태평양을 지나 한반도로 갔다가

다시 돌아 돌아올 때까지도

하얀 붕대를 하늘 높이 풀며 풀며 다시 오는 비행기

 

무슨 붕대들을 그렇게도 많이 가슴 속에

넣고 살았다는 것인가

또는 나를 찾아 헤매는 어머니의 긴 혀처럼

너,아,직,도,왜,먼,데,서,돌,아,다,니,고,있,느,냐,고

 

 

 

애총가 - 보길도 산정에서

김승희

 

전설처럼 화려한 다도해의 물이랑을

굽이굽이 모두 삼켜

한줄기 아득히 분수로 뿜어낸다면

 

그 명멸하는 마지막 물보라의 끝의

끄트머리 같은 곳에

잠시 영롱한 신기루 같은 것이

서리우기라도 한다면

 

혹시, 거기, 어디인가에

나의 고향 같은 것은 아마 있었을까?

 

아니, 행여, 그런 것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고인돌처럼 서 있는 섬들 너머로

몽롱한 함박꽃의 덩어리 같은 낮별들의 유희,

자, 이제, 우리는 이 극광의 계단에서

눈을 뜬 채로 잠에 빠지자

 

길이 없는 지도 위에서

기다림이란 진실로 길고도 험하니

천 년을 극광에 젖어 떨며, 독 속에서,

진실로 진실로 온화한 부화를

우리 꼭 기다리자

 

 

 

양수리에 가서

김승희

 

가을이면

양수리에 닿고 싶어라

가을보다 늦게 도착했을지라도

양수리에 가면

가을보다 먼저

물과 물이 만나는 것을

볼 수 있으니

 

가장 차갑고

가장 순결한

물과 물이 만나

그저 뼈끝까지 가난하기만 한

물과 물이 만나

외로운 이불 서로 덮어주며

서러운 따스함 하나를 이루어

다둑다둑

흘러가는 것을 볼 수 있으니

 

가난한 것을

왜 그저 외롭다고만 하랴

외로운 것을

왜 그저 서럽다고만 하랴

 

양수리에 가면

가을보다 늦게 도착했을지라도

가을보다 먼저

물과 물이 만나는 것을

볼 수 있으니

헐벗은 가을나무들

제 유언을 풀듯

조용히 물그림자 비추어

스스로 깊어지는 혼자 외로움

거울같이 전신으로 대면하고 있으니

 

가을이면

양수리에 가고 싶어라

어디선가 나뉘였던

물과 물이 합하여

물빛 가을 이불 더욱 풍성해지고

가을 나무 물 그림자

마침내 이불 덮어 추위롭지 않으니

 

홀로 서 있다 하여

어찌 외롭다 하랴

하늘 아래 헐벗었다 하여

어찌 가난하다고만 하랴

 

 

 

어두운 계단을 내려가며

김승희

 

나는 어두운 계단 위에 서 있다.

어두운 계단 위에 서 있는 것은

한사코 어두운 계단을 내려가라는

무슨 신호인지도 모른다

 

처음인 양 나는 계단을 바라본다

아무런 장식이 없는 콘크리트 계단

무덤 속처럼 깊고 하얗고 불길한

무표정의 무한

층계 위에서

나는 장의사집의 장롱같은

영원하고 모호하고도 단호한

하나의 절벽을 느낀다

 

바닥엔 방이 있을까

내려가고 또 내려가는 것이

평화라면

나는 언제까지라도 내려가는 계단을

내려가고 싶다

내려가고 또 내려가는 것이

사랑이라면

나는 언제까지라도 내려가는 계단으로

그대에게 닿고 싶다

 

나는 어두운 계단을 내려간다

남보다 늦게 가는 시계처럼

나의 슬픔은 천천히 용기와 닿는다

바닥엔 방이 있을까

콜타르이나 잉크, 구두약이나 흑연처럼

검은 진짜로 검은

바닥의 방이 있을까

꿈이 있을까

 

나는 생각한다

천왕성 해왕성 명왕성 다음에도 별은 있을까

그 별의 이름은 무엇일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천연자원은

슬픔뿐이라고

강해지기 위해선 석탄보다도 더

검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고

 

나는 천천히 계단을 내려간다

나의 발이 막장의 층계 속으로

한 발 아득히 닿고 있을 때

나는 그제서야 엄청나 그 무엇이

떠오르는 것을 느낀다,

천왕성․해왕성․명왕성 다음에도

별은 있다고,

그 별의 이름은 미완성이라고,

나의 발은 조용히 어두운 계단을

내려가고

나의 손은 조용히 슬픔의 채탄을 하기 위해

바닥의 하늘을

부드러이 껴안는다

 

 

 

어머니가 나에게 가르쳐주신 말

김승희

 

인연은 재앙이니라-

내가 너무 배가 고파

어두움 속에

달덩이 같이 삭발한 그리움을

하나 걸어두었더니

꿈인 듯 생시인 듯

이상한 향기 나는 白馬(백마)가 날아와

내가 하늘을 타고 갔느니라-

오색구름 속에 황금 궤가 홀연히

걸려 있는데

너무 곱고 너무 신령하여

내가 그만 외상으로 너희들을

사오고 말았더니라-

 

인연은 재앙이니라-

뭉게뭉게 퍼져가는 암세포처럼

시시각각 외상값은 계속 불어나

강아지같이 불쌍한 내 새끼들아,

너희가 갚아야 하느니라,

맷돌을 목에 걸고 여기저기 쏘다니다

광견병 든 개처럼 맞아서 죽더라도

잔인한 것은 내가 아니다

흡혈귀는-나는-아니다

 

고문처럼 질긴

철천지의 사랑-

이 무슨 원한의 달콤한

피 냄새-나는-

아니다-내 착한 새끼들아

사랑은 우환이니라-

인연은 우환이니라-

 

 

 

엄마의 발

김승희

 

딸아, 보아라,

엄마의 발은 크지,

대지의 입구처럼

지붕 아래 대들보처럼

엄마의 발은 크지.

 

엄마의 발은 크지만

사랑의 노동처럼 크고 넓지만

딸아, 보았니,

엄마의 발은 안쪽으로 안쪽으로

근육이 밀려 꼽추의 혹처럼

문둥이의 콧잔등처럼

밉게 비틀려 뭉그러진 전족의

기형의 발

 

신발 속에선 다섯 발가락

아니 열 개의 발가락들이

도화선처럼 불꽃을 튕기며

아파아파 울고

부엉부엉 후진국처럼 짓밟히어

평생을 몸살로 시름시름 앓고

 

엄마의 신발 속엔

우주에서 길을 잃은

하얀 야생별들의 신비한 날개들이

감옥창살처럼 종신수로 갇히어

창백하게 메마른 쇠스랑꽃 몇 포기를

조화처럼

우두커니 걸어놓고 있으니

 

딸아, 보아라,

가고 싶었던 길들과

가보지 못했던 길들과

잊을 수 없는 길들이

오늘밤 꿈에도 분명 살아 있어

인두로 다리미로 오늘밤에도 정녕

떠도는 길들을 꿈속에서 꾹꾹 다림질해 주어야 하느니

네 키가 점점 커지면서

그림자도 점점 커지는 것처럼

그것은 점점 커지는 슬픔의 입구,

 

세상의 딸들은

하늘을 박차는 날개를 가졌으나

세상의 여자들은 아무도 날지를 못하는구나,

세상의 어머니는 모두 착하신데

세상의 여자들은 아무도 행복하지 않구나…

 

 

 

없는 사람

김승희

 

문밖엔 아무도 없는데

자꾸만 초인종 소리가 울린다-

아무도-없다-

없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아무도-보이지 않는다-

 

별들의 저울은

생사(生死)의 두 세계를 뚫고서

수심의 흰 피를 달아보고 있다-

구천으로 뻗은 어둠을 뚫고

그리움의 근(根)은

하염없이-가고-있다-

 

인광(燐光) 묻힌 날개를 단 새들이

문 밖에서-날고 있다-

하염없이 부풀어 터지는 백혈구처럼

영원한 극광(極光)들의 나라로 가는

흰 길-위엔-죄악 같은 추억들이-

하나씩-서-있었다-

 

문 밖엔 아무도 없는데

자꾸만 초인종소리가 울린다-

아무도-없을까-

아무도-없는데-그리움의 근(根)은

또 어디서-한없이-오고 있을까……

 

 

 

엘리베이터 문이 닫힐 때

김승희

 

하얀 문이

관뚜껑처럼 닫혀 버린다

아직, 얼굴 위에서

미처 미소가 지워지기도 전에,

일방적인 해고통고와도 같이

하얀 문이

관뚜껑처럼

닫혀 버린다

아, 아, 안녕……하고

말을 맺기도 전에,

 

사랑하는 이여,

이것이 마지막 인사라면

정녕 그럴 수는 없다,

우린 좀 더 사랑했어야 하고

우린 좀 더 진지한 고통을

나누어야 했지,

사랑하는 이여, 그대와 나,

우린 좀더 불을 통과하는 뜨거운

길들을 함께

다녀보았어야 했다

 

언젠가 하얀 문이

그렇게 닫혀지고 말겠지,

불가사의하고도 불가항력적인 - 하얀 -

단절이 - 우리의 -

얼굴 위에 수면 마스크처럼

조용히 드리워지고,

비단끈으로 된 하얀 망사처럼

보슬보슬한 음악이

엘리베이터 천정 위에서

세뇌라도 하듯이, 자근자근 소근소근

속삭여대겠지,

잊어버려, 이젠 다 끝장이 났어,

잊어버리라구, 낄, 낄, 낄……

 

사랑하는 이여,

그대와 나, 이것이 마지막 인사라면

정녕 나는 받아들일 수가 없는데

언제나 마지막 문은

그렇게 닫혀지고 마는 법,

언제나 지고 있는 노름패처럼

열쇠도 없다,

열쇠도 없이

그렇게 우리 홀로 승천의 문 안에 갇혀져야 하는가,

그렇게 홀로 갇혀

멍청히 승천의 길로 올라가야 하는가……

 

 

 

여기와 저기

김승희

 

누군가

어디 다른 곳에서

밥을 굶고 있다고 한다.

밥을 굶고 있다기보다는

그는 옥중 단식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이 세상 밖으로

한 걸음이라도 더 나아가려고

하는 것일까,

아니면 이 세상을 한 걸음이라도 더

저 너머로 움직여 보려고

하는 것일까.

 

냉장고 문을 열자

시든 시금치밖에는

먹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

세상에 태어나

세 끼 밥을 꼬박꼬박 다 먹었다고는

할 수 없어도

그래도 우적우적 참치 통조림을 까먹고

있는 나.

나는 그만큼 정착된 것이다.

애완동물화해 버린 것이다.

에덴 가축원이 언제 그리 넓어졌지?

그 안에 강제수용(아니 자발적 거주)

돼 있는 것이다.

 

금붕어 사세요!

어항 사세요!

아니 이 한밤중에

누가 도대체 우리를 팔러 다니는 거야?

나는 두려워한다.

아아, 어쩌면 90년대 시들은

점점 더 내방문학화되어 갈는지도

모른다.

 

 

 

여보

김승희

 

사랑한다는 것

미워한다는 것

같이 살자는 것

같이 죽자는 것

 

손금이요

지문이다

같이 사는 동안

손금과 지문이 닮아졌네

 

배와 배가 만나야만 잉걸불이 탈 수 있는

배밀이 불새

 

 

 

여왕의 날씨

김승희

 

날씨에도 살결이 있다면

오늘은 여왕의 살결 같은 날씨

엘리자베스 여왕이 안동 하회 마을에 갔다고

73세, 전통 법도에 따른 (조선의) 생일 상을 받았다고

눈물이 살풋 유리구슬 같은 파아란

눈동자에 비쳤다고

여왕이 해외에서 생일날을 보낸 것은

비상한, 드문 예외적인 일에 속한다고

이 영광을

이 열광

이 열강

신이여 여왕을 축복하소서!

 

일본 대사관 앞 수요 집회에 할머니들과

수녀님들이 서있네

참 그런데 오늘 훈 할머니는 어디 있나?

의기 논개 적장 게야무라 로쿠스케와 영혼 결혼

'영혼을 돌려 달라'

'영정은 반환할 수 있지만 영혼은 안돼'

 

윌리엄 코언은 말했다

'한반도 비무장 지대의 경우

탱크를 저지할 수 있는 대체 무기가 개발될 때까지

지뢰 사용은 계속 될

것이다'

클린턴은 말했다

'한반도에는 민간인 지뢰 피해자가 없다'

다이애나는 좀 빨리 죽은 감이 있다

 

여왕의 날씨는 양잠의 풍요처럼 따뜻하고

우아하고 아름답다

버스를 타고 집에 가는데

운전 기사가 핸들을 거꾸로 돌리며 라디오 다이얼을

마구 돌린다

무슨 심술이 난 것일까?

차가 그만 인도로 올라 갔다

 

 

 

여인 등신불

김승희

 

한 남자를 사랑했다고 하여

이런 고통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한 남자와 잠깐 쾌락을 같이했다 하여

이런 원통한 아픔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여인들이여, 울고 찢기고 흐느끼며 발광하는

여인들이여,

이 성스러운 하얀 굴 속에서

한 남자란 이제 지극히 사소한 우연에

지나지 않습니다

짐승처럼 짐승처럼 지금 우리가

온몸을 물어 뜯으며 울부짖는 것은

스님이 영혼을 구하기 위하여

다비의 불바다 속으로 들어감과 같습니다

하얀 도자기를 구워내기 위하여

불가마 속에 천하무비의 큰 불을

지피는 것과 같습니다

 

도살장에서 젊은 도수가 하염없이

나의 정수리에 도끼를 내려치는

것 같습니다

도끼날이 나의 숨골에 박힐 때마다

흰 불의 꽃송이가 하염없이 튀어 올라

흩어지고 있습니다

만다라의 꽃잎입니다

자비의 세례입니다

 

그대 - 죄가 있었으면

죄를 태우십시오

그대 - 업이 남았으면

업을 태우십시오

 

여인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어찌

범패보다 아름답지 않습니까?

범패보다 더 진한 막다른 소리들이

관처럼 하얀 방을 자욱히 메웁니다

오뇌와 비원의 처절한 촉수들이

찢어지는 살점을 쥐고 흔듭니다

쾌락처럼 그렇게 실신하면서

나는 천지 아득히 터지는 범종 소리를

들은 것 같습니다

아가의 울음소리 - 갓난동이의 첫울음소리가

문득 하나의 태허(太虛)를 울리고

신탁처럼 장렬한 핏덩이 하나가

이제 삶 속에 우뚝 섭니다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

하얀 잠이 가득히 와서

내 육체의 모든 문을 꼭꼭 여며주고 있습니다

 

 

 

오사마 부시 라덴

김승희

 

간혹 카운터 테너와 소프라노의 차이에 대해 생각한다.

카운터 테너의 목소리와 소프라노를 잘 구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맑고 높고 신성이 깃들어져 있지만

카운터 테너의 목소리엔 마리아 칼라스 같은 정염과

요염과 포근한 풍요가 없는 것 같기도 하다.

자궁에서만 나오는 소리가 있는 것일까.

그런데도 난 가끔 카운터 테너의 목소리와

소프라노를 구별하지 못하는 흑점을 가지고 있다.

 

가을 여행 캘리포니아, 버클리 시티, 텔레그라프 거리,

긴 머리를 뒤로 묶은 늙은 히피들이

구루마 상점에서 팔고 있던

수배 전단이 잊혀지지 않는다.

긴급수배- 오사마 부시 라덴을 찾습니다.

참 잘 아는 이름이라고 생각했는데

동 서 남 북, 밤과 낮이 뒤바뀐 탓일까?

참 잘 아는 이름들이라고 생각했는데

 

부러진 손톱과 손톱, 찢어진 명함과 명함을 붙여 놓았지만

어딘지 참 잘 아는 사람 이름 같다고

다이애나 왕세자비와 마더 테레사는 같은 주간에 죽었고

다이애나와 카밀라 파커 볼스는 어쩌면 같은 운명의 별 아래

태어난 다른 이름뿐인지도 모른다고

카운터 테너와 소프라노의 차이를 알기 위해

-오사마 부시 라덴도-

음악을 듣거나 신문을 보아도

 

 

 

외할머니 나비

김승희

 

저 나비는

이승의 소식이 몹시 궁금하여

오늘, 봄날의 이곳으로

나들이 나온 것이다.

영산홍 철쭉꽃 피어

온 세상 화촉을 밝힌 듯 이상하게 환하던 날,

하얀 양초처럼 조금 어두운

흰빛 초상(初喪) 나비는

이승에 올해에도 봄이 왔느냐

몹시 궁금하여

지금 이 시간 죽음의 고치를 뚫고

하얀 쪽지 편지처럼

이렇게 이승으로 날아온 것이다.

 

그러니까 저 나비와 나는

오랫동안 알아 온 것이다.

오랫동안 그리워해 온 것이다.

저승과 이승에서

얼마나 떨리도록 연모해온 것이다.

아무도 하품하듯이 죽을 수는 없는데

왜 이리 하품 하듯이

生이 졸리운가?

나비와 함께

아직 더 가야 할

꽃가마의 먼 길이 나에게 있는데……

 

 

 

우리 속의 짜라투스트라

김승희

 

시사 풍자만화

그 조그만 네 칸 속에

갇혀서, 언제나 모래알 삼킨듯,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것은

바로 너야, 바로 나야, 아아, 시장에 내려온

짜라투스트라

 

미주알씨 노고지리씨

나대로씨 고바우씨

언제부터 이렇게 시사만화 주인공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사람들이

살고 있는 세상이

우리 새장이 되었나

우리 우리가 되었나

 

조그만 뇌옥의 칸살 속에 갇혀

조롱하고 비웃고 비분강개

컹컹컹 흑흑흑 엉엉 히히

(우리 시대의 사자후) 짹짹 찍찍 해보아도

해는 늘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고

조간은 아침에 석간은 저녁에

나오는 것일 뿐

 

나는 탈영하고 싶다

나는 입산하고 싶다

네모난 네 칸 속에 줄줄이 앉아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일금 이백 원의

눈물 한 쌍이여,

조롱조롱 눈물가에 맺힌 햇빛

한 조롱이여,

일금 이백 원의

작은 손거울 속의 반체제여……

 

 

 

울부짖음

김승희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이런 말을 난 우울하게 바라보았다.

그렇지, 현대적인 너무나도 현대적인

H백화점에 가면

지하 2층 음악분수 광장에서부터

지상 6층에 이르기까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위해

없는 것이 없이 다 있었다.

행복의 합리성을 완벽하게(상업적으로)

증거하고 있는

그 숨막히는 공간이 나는 싫었지만

  

부글부글 끓어넘치는

행복의 거품들을 피한다는 것이

자동 에스컬레이터에 자꾸 떠밀려

지상 6층으로 자연 올라가게 되었다.

 

모피 가게와 벨지움산 양탄자, 첨단 테크노피아,

악기상점 옆에 문학코너가 있고

(문학 코너라니? 문학이 코너로 될 일이야?)

베스트셀러 시집들이

스낵 코너 진열장에 내놓인 김밥이나 국수 모형처럼

팔리기를 기다리며

앉아 있다.

고급 패션과 최첨단 헤어아트로 꾸민

초현실 미래파 같은

젊은 여자들이

소유와 소비 사이로 유유히 지나가고

아, 이 도시에선

문학조차도 애완용 문학으로 보인다.

아니아니, 애완용 문학이 되어야 할 것 같다.

애완용 문학이 안되면 안될 것 같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에 떠밀려

급행 에스컬레이터에 압송된 채

굿바이 미스터 오웰!

굿바이 미스터 살리에리!

굿바이 미스(미시즈) 캔디다!

오두둑 나는 실족사처럼 지하 3층

주차장으로 찌그러져 떨어진다.

나에게로 가는 귀향.

오오, 이토록 파산을 닮은

나에게로 가는 귀향.

 

아, 이런 곳에서

어떻게 병자의 문학을 안 할 수 있단 말인가?

 

 

 

유령과 함께

김승희

 

어느덧 밥그릇에 붙어 있는 유령들

그렇게 우물 속에 숨어 사는 유령들

머리칼 갈피마다 비 내리는 유령들

삼류 극장 거울에서 노려보던 유령들

 

(어디로 갈까 어디로 가도 하얀 밥그릇 속에

다 감겨진 코닥 필름 한 통이 들어 있었다

누구의 촬영이 다 끝났다는 것일까?

 

어디로 갈까 어디로 간다 해도 하얀 김이 무럭무럭 오르는

밥그릇 속에 뒤로 다 감겨진 코닥 필름 한 통

 

하얀 밥그릇 속에

 

하얀 밥그릇 속에

 

하얀 밥그릇 속에

 

엄숙한 코닥 필름 한 통이)

 

질척한 폐혈관에 홍등을 켜든 유령들

빠진 이빨 틈에서 노려보던 유령들

한 벌의 검은 그림자처럼

늘상 발밑으로 줄줄 흘러내리고 있는 유령들

흰색 브라운관에 흰색 비 내릴 때

소스라치듯 노려보며 달려오는 유령들

명멸하는 유령들 명중하는 유령들

 

 

 

유목을 위하여

김승희

 

1 - 누군가 토끼를 몰고 있다

누군가 토끼를 몰고 있다,

나는 신문을 던져 버린다,

누군가 토끼를 몰고 있다,

나는 TV를 꺼버린다,

신문도 안보고 TV도 꺼버린다면

나에겐 정말 할일이 없어진 기분이다,

아이들에게 공부나 좀 하라고

잔소리나 퍼붓는 일밖에는.

(나도 토끼를 몰고 있다. 나같은 토끼에게 또 몰릴 토끼가

있다는 게 먹이사슬의 이해할 수 없는 변주 같지만)

 

어느 사이엔가

우리는

누군지 모를 토끼를 몰고 있는

몰이꾼이거나

누군지 모를 토끼에게 몰리고 있는

몰리는 토끼이거나 하는 것이다,

(十三人의 兒孩는 무서운 兒孩와무서워하는兒孩그렇게뿐이

모였소.<다른事情은없는것이차라리나았소>)처럼

지평의 속도 위에서는

단지 몰리는 불안과 모든 갈증이

있을 뿐,

그리하여 멈출 수 없는

파시스트적 질주만이 있을 뿐

  

누군가 오늘도 토끼를 몰고 있다,

몰리는 토끼는 모는 토끼가 되고

모는 토끼는 또 몰리는 토끼가 되는

알 수 없는 공포의 수동태적 빙빙거림 속에서

밖으로 나가려는 토끼는

어디로 빠져가야 하나?

몰리는 토끼로 살고싶지 않은 그만치

모는 토끼로도 살고싶지 않은

그는

어디로부터 욕망의 회로를 끊어

이 무서운 지평의 마수를 빠져나가는 구멍을

발견할(만들어낼) 것인가?

  

신문 속의 진저리나는 특호활자가

TV속의 위장된 뉴스특보가

백화점의 바겐세일 광고가

세금고지서 미납자동차세 독촉증서가

점점 떨어지는 아이의 성적표가

더욱더 대담해지는 여성지의 욕망들이

우리로 하여금 그것에 복종하게 하고,

우리들을 지배하고 착취하는

그것을

더욱더 욕구하게끔 몰고 있지 않은가?

  

불쌍한 토끼는

지붕 위에 올라가 울고 있다,

울면서 피우는 하얀 담배 연기는

화장터의 무슨 손수건 같기도 하고

도주를 도와달라고

먼 곳으로 보내는

하나의 봉화의 애소 같기도 하다.

 

 

2 - 길의 파시즘

내가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길이 나를 가고 있다,

배차시간이 촉박하여

사람을 치어죽여도 모르고 질주 한다는

저 무서운

시내버스 아저씨처럼

우리에게도 혹시 촉박한 배차시간이

이미 나를 매겨져 있어서인지도 모른다,

 

흉악한 질주

누가 나 때문에 치어죽었다 해도 무슨 큰 의미가 있겠는가,

배차시간에 쫒겨서

다만 서로그러는 것뿐이니

 

전생과 내세가 없어져서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현세만 가지고

배차쪽지를 배당해 나누어주고 있으니

이 작은 길은 너무 좁고

이 좁은 길은 너무 붐비는 것이다,

 

현세의 담 밖으로

지금의 담 밖으로

이곳의 담 밖으로

나를 이륙시키는 마음,

 

전생의 이름으로

내세의 이름으로

현세의 담을 터서(생의 탈영토화)

느리게 한없이 느리게

길의 파시즘을 표류시키는 마음,

 

유리관 속의 탈지면 위에 표본된

아름다운 나비의 가슴에 꽂힌

제도의 황금 핀을 뽑고서……

 

 

3 - 소문 속의 삶

뼈도 못추리는 내가 싫어,

소문 속으로 그냥 녹아버리는

하루하루가 난 정말 싫어,

나를 그냥 갖다가 막 내다버리는

소극적 주둔자(수동태적 주둔)

그런 내가 정말 난 싫어,

국회의원 뇌물 외유사건

서울음대 입시부정사건(예능계 온통 부정)

한국의 수서게이트

6공최대의 정경유착 미스테리

수서택지 특혜분양사건,

공명선거 해치는 부정행위 엄중처벌

이런 제목들이 하루하루

나를 살아주고

산[生] 것도 없는데 그냥 막 사라지는

피접령

속령화의 그물 속으로

아무렇게나 녹아서 없어지는

피, 탕진되는 피, 단 한번밖에 없는,

나의 피가 난 정말 싫어

신문만 보고 TV만 켜면

인생은 뭐 그리 살 필요도 없어,

그냥 하루하루 제목이 정해지고

그것들이 몽땅 다 나를 살아주는

기분이야,

그렇게 기권하는 내가 싫어,

모든 제도는 우리의 넋을 뺏으려고 하고

전능한 자신의 괴물들을 복사하여

우리의 뼈를 추려

이미 유유히 떠나고난 후인데

 

조간에서 본 것을

석간이 나올 때까지만 분노하고

석간이 나오면 또다른 분노에

목을 매야하는

이런 자살의 혈통이 난 싫어,

미묘한 매장이 나는 정말 싫어,

 

연기로 만든 양말 같은

나,

생식을 차단하느라고 투명비닐막을 입힌

콘돔 주머니 같은 것에

제각기 소리 없이 갇혀 있는 나

 

 

4 - 괄호 안의 삶

외줄의 끈 위에 올라 있는

곡예사와도 같이

너는 산다,

아침일찍 나갔다 저녁늦게 돌아오는

지평 위의 너의 보행이라 해도

공중곡예의 외줄과도 같은

땅 이외의

다른 어떤 땅을 밟아본 적이 없다,

(선을 넘기는 그렇게 어려우니)

 

아침일찍 나가서

선 위의 상자곽 속으로 들어 갔다

저녁늦게 나와서

선 위의 또다른 상자곽 속으로 들어가는

사람들, (고객감시 카메라 자동작동중)

아직까지 금 밖으로 나가본 적은

없다, (실탄휴대청경 비상근무중)

어떤 금일지라도

금을 위반한다는 것은 배제되고 밀려나고

추방되고 벗어나는 것이니

(선 위에서 네 발로 기어다니기)

 

그런데 너는 가끔

어제 오후에도 불쑥 이렇게 묻는다,

꼭 이렇게 살아야만 되는 건가?

산다는 것이 꼭 이것뿐인가?

그러자

갑자기 괄호가 열리면서

금 밖의 바깥이

이름 붙일 수 없는

하얀 조명을 콸콸 쏟고 있는 느낌이 들면서

바깥--미지--미래로 연결되는 결렬한

아름다운 밀물이

괄호 안의 세상을 수몰시키며

나를 괄호 밖으로

밖으로 둥둥 방류시키는 것이었다,

 

무엇이 이 괄호 안에

나를 유폐시키고 있는가?

이 괄호 안에 내가 있어야만

안전한 사람들은 누구인가?

괄호에 의해 전적으로 유지되는

이 낡은 지평선

밑에 있는

그것, 그이, 그분의 욕망의 파시즘은 무엇인가?

 

 

5 - 줄어드는 나

나는 점점 줄어든다,

어제 입었던 옷이 헐렁거린다,

나는 늘 줄어든다,

어제 살았던 괄호가

오늘은 너무 커서

허수아비 누더기처럼 펄렁거린다,

 

내가 줄어드는 그만큼

세상은 늘 넓어져 간다,

나는 늘 보잘것없이 줄어들고

세상은 점령지가 늘 그렇게

늘어만 가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세계의 내면화에

실패했다는 것이 아닌가?

릴케는 내면 말고는 어느 곳에도

세상은 없노니…… 라고

말했는데)

 

나날이 줄어드느라

입을 옷이 없어진다,

대학 때 입던 옷은

곡두귀신이 뒤집어쓰는 푸새자루처럼

제일 헐렁하고

여학교 때 입던 옷

국민학교 일학년 때 입던 옷도

적어도 지금은 나보다는 컸던 것이다.

(역사 이래로 이렇게 좁은 절망의 궁지만이

자신의 유일한 둥지인

그런 동물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강보에 싸여있던 배냇저고리의

영토 속으로 들어가 본다,

아무것도 가리지 못했던

배꼽만한 옷,

바람과 비누방울의 영혼들과 짝을 이룬 포근포근한

숨결,

나에서 당신으로의 한이 없는

따스한 향기,

봄 여름 가을 겨울

나는 누더기들을 버린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누더기를 버리는 날은

누더기 같은 온갖 나를 버리고 싶은 날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누더기 같은 나를 버리는 날은

나를 점령하고 있는 세상의

피억류자들을 풀어버리고

저기 저 날아가는 나비,

구름처럼 사라지는

장미꽃 위의 이슬 속으로

가벼이 아주 가벼이

작게 아주 작게 환생하고 싶은

끝나지 않은 꿈 때문인지도 모른다.

 

 

6 - 상복을 입은 나비

하얀 배추흰나비 한 마리가

개집 지붕위로

고요히 날아간다,

루키는 놀라서 멍멍 짖어본다,

멍멍 짖다가 도둑 같은 건 아니군

하는 듯

앞발을 들고

허공에 반원을 그리면서

그것을 잡아보려고 한다,

아마 먹을 것인 줄 알고

잡아먹으려고 하는 것인가……?

끈에 묶인 루키의 앞발이

허공 중에 잠시 멈춰

미세하게 떨고 있다,

(짐승의 앞발이 그만큼 대지에서

멀리 떨어진 것을

나는 처음 보았다)

 

눈부신 햇살 속에서

멍멍하게 깨어난 나는

방금 무언가 경이로운 것을 본 것 같다,

루키야, 너는 지금 도를

행한 것이다,

아름다우 무한에 닿으려고 할 때

우리는 그런 난생 처음 해보는

무상의 무용에

잠시 자신의 모든것을 고요히 내맡기게

되는 것이다.

(나비 한 마리보다 더 큰

도둑이 어디 있으리)

 

그런 때 우리는 말뚝을 잊어버린다,

중력의 말뚝,

무거운 땅 속으로 우리를 캄캄하게

끌어당기는

뿌리혹박테리아처럼 주렁주렁 매달리는

죽음의 인력을

우리는 잠시 잊어버리며

네 옆에 놓인 밥그릇과

모가지의 패찰과 쇠사슬들을

고요히 놓아주고 만다,

 

하얀 배추흰나비 한 마리가 날아간다,

이런 아름다운 나비가

우리의 생 속에 있는 것은

가두어진 담을 허물고

바깥으로 나가는 길이 어디엔가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신이 너를 바깥에서

무한히 들어올려주려고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하루 속에

하늘을 누각하는 나비,

막힌 창호를 뚫고

나를 구명하려고

번쩍이는 깜박이는

조용한 대형나비들

 

 

7 - 라파라파

말레이 사람들은 대부분 나비를

쿠푸쿠푸나 라파라파라고

부른다고 하네.

라는 라파라파가 좋아.

무언가 음악처럼 생생한 움직임이

바람 속에 팔락이는

무한의 악보가 그려진 날갯짓이

미소처럼 느껴지지,

두 조각으로 나뉘어진

날것 그대로의 생명,

녹색이 많이 묻은 화려한 무용

 

쿠푸쿠푸는 무언가 기침하는 것 같은

느낌을 주지,

다리 부러진 탈주병이

감기에 걸려 기침하다가

각혈에 이르른 것 같은, 그런

패주의 고통스런 호흡곤란을

쿠푸쿠푸는 가지고 있네,

난 라파라파가 좋아

바깥으로 나가려는 격렬한 욕망과

안으로 가두어두려는

지평의 마수적 욕망 상이에서도

라파라파는 절름거리지 않지,

라파라파는 나처럼 질질 끌려다니지도 않아,

라파라파는

부드러운 탈주이면서

물과 풀만 있으면 행복한 채로

어디로든 떠돌아 다니는

그런 유목의 무상한 숨결을

지녔네,

 

라파라파

우리는 어찌하여 열차의 선로 같은

삶을 택하였는지,

(선로 위에서는 가든가 아니면

멈추든가,

두 가지의 생사밖에는 없으니)

(선로이탈, 그런 것도 있긴

있으나)

생활이 생각의 열차라면

우리는 칸칸이 끊어진 열차를

매달고 가는 (어디까지?)

부서진 골절상의 행진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른다,

 

라파라파,

안에서 바깥으로 나가려는

산바수론 갈망에 대한 상형문자,

리파라파

너는 무엇보다도

빛나는 변신의 능동태가 아니냐?

 

능·동·태·로·줌·쉬·기!

 

 

 

유서를 쓰며

김승희

 

내 뼈에 가득 찬

죄악을 비우기 위하여

나는 유서를 씁니다,

독한 청산가리 같은 잉크에

내 넋의 붓을 적셔

한 자 한 자 공들여 적어 봅니다,

 

선언합니다,

내 몸의 모든 세포들에게,

시시한 추억들,

못 잊을 가족들에게

이것저것 유품을 나누어놓고

이것이 최후라고

단호히 선언합니다,

 

그리고 부엌으로 들어가

문틈을 샅샅이 레이스로 봉합니다,

그리고 가스마개를 틀고

더러운 부엌바닥에

냉정히 드러눕습니다,

 

그리고 아직 너무나 젊기에

더 살고 싶다는 푸르른 나의 육신에

못을 탕- 탕- 박고

망치를 허공으로 던져 버립니다,

살점이 튀고

아까운 피가 양수처럼 따뜻이 고입니다,

 

이제야 생각납니다.

기역- 니은- 디귿! - 하고

어머님께 매를 맞으면서

처음 글씨를 배웠던 일이,

첫애를 낳을 때의

그 무시무시한 고통과

현란을 극한 사랑의 고마움이,

 

번개처럼 일어나

창문을 열어 봅니다,

달빛이 초설(初雪)처럼 흘러내립니다,

나의 해골을 집어들고

달빛을 한 바가지 가득 떠서 마십니다,

 

고해를 하고 성찬을 받은 것처럼

목숨이 더없이 맑아진 것 같습니다

 

 

 

응시

김승희

 

사슬에 매인 루키를 한없이 바라보고

있다.

불쌍한 밥그릇 옆에

하염없이 목줄이 매여 묶여 있는 루키

----루키야, 너는 왜 개로 태어났니?

 

하늘이 비치는 순한 눈동자를 들어

루키는 하염없이 나를 바라보고 있다.

흰 옷 입고 걸어가던

어머니처럼 인자하게 한 번 더 나를 바라보는 루키.

----그런데, 너는 왜 사람으로 태어났니?

 

루키와 나.

그렇게.

 

 

 

이런 사람이 살고 있다

김승희

  

껍데기가 무거워

껍데기가 무거워

껍데기가 무거워

몸 밖으로 못 나오는 사람

 

껍데기가 무서워

껍데기가 무서워

껍데기가 무서워

만세도 말세도 못 부르는 사람

 

껍데기가 무거워

안으로 안으로 피흘리는 사람

껍데기가 무서워

안으로 안으로 도망치는 사람

 

너 이 세상에 왜 왔니?

외과로 갈 생각 하지 말고

내과로 가서

네 속에 밝음 같은 진주를 기르렴.

안으로 안으로 너를 열어서

상처의 한복판

하얀 진주 같은

피범벅 눈물범벅 밝의 탄생을 기르렴.

 

 

 

이카루스의 잠

김승희

 

어느 날

새들의 임금님이

우리의 땅에 내려왔다.

황금빛 햇살을 맞으며

우리에게 말했다.

 

「자, 누가 이카루스인가.

모두들 한번 날아 보아라」

태양 가까이 날아

날개가 불태워져 버린 아이에게만

불멸의 날개를 주겠다.

납이 아니고

뼈와 뼈의 날개,

녹을 수 없고 썩지도 않는 날개.

 

그러나 지상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어느 아이가 귀가 있어

그것을 듣겠으며

어느 날개가 천재가 있어

태양까지 날겠는가.

 

우리들은 모두 가만히 있었다.

「이카루스만이 영원하다.

그것을 모르고 사는 자(者)는

이 지상에서 아무것도 모른다」

 

그러나 오, 지금은

시인도 청년도

사슴도 독수리도 아무도 날을 수 없음을

우리는 아무도 날지 않는 것을

그는 모르는 것일까?

그는 정말 모르는 것일까?

 

하늘 속에서 태양은 아름답고

태양 속에서 생명은 불타지만

그러나 이카루스,

이카루스는 잠을 자네.

파도와 회색 바위 위에서

이카루스,

모든 이카루스는 아무도 잠깨지 않네.

아무도.

 

 

 

일회용 시대

김승희

 

사발면을 후루룩 마시고

일회용 종이컵을 딱 구겨서 버리는 것처럼,

상처가 아물면

일회용 반창고를 딱 떼어서 던져 넣는 것처럼

 

이 시대에

내가 누구를 버린다 해도

누구에게서 내가

버림받는다 해도

 

한 번 입고 태워 버리는 종이옷처럼,

한 번 사용하고 팽개쳐야 하는

콘돔처럼,

커피 자동판매기 안에서

눈을 감고 주루룩 쏟아져 내리는

희게 질린 종이컵처럼

껌종이처럼

일회용 설탕 포장지처럼

 

그렇게

내가 나를 버릴 수 있을까

그렇게

나도 나를 버릴 수 있을까

 

어느 으슥한 호텔 욕실에서

잠깐 쓰고 버려지는

슬픈 향내의

일회용 종이비누처럼……

 

 

 

자살자의 노래

김승희

 

떠나는 건 쉬워 -

 

처음엔 왼발을,

그 다음엔

오른발,

그리고 슬쩍 몸을 날리는 거야,

애욕처럼 진하게

두 눈을 감고 -

 

그런데

아직

유서를 못 썼어,

나의 사인(死因)을 포장해 줄

극비의

설형문자를,

 

그때까지는 살려고 해 -

 

하하 -

이건 변명이

아니라

소명이라오!

 

 

 

자연사

김승희

 

길을 가면서 언제나 무엇인가 찾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은 아마 그대였는지도 모른다,

신호등 앞에 서서 언제나 무엇인가 기다리고 있다고 느꼈던 것은 아마 그대였는지도 모른다,

가을 국화 꽃잎 위에 한 갈피 애잔한 불의 숨결을 느꼈을 때 보았는가,

하늘의 담배는 한 가치뿐이었고 그래서 들녘의 재떨이 위엔 북망(北邙)이 고요로이 제 슬픈 회색의 관구(棺柩)들을 묵묵히 늘어놓고 있던 것을

 

북망,

북망,

 

골목을 걸어가면서 언제나 무엇인가 쫓기고 있다고 생각한 것은 아마 그대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골목 속에 저벅저벅 울리는 제 발자국 소리에 놀라 빨리 더 빨리 달려갔던 것은 아마 어쩌면 그대의 미행보다 먼저 도달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지상의 성냥은 한 개피 뿐이었고 그리하여 내 목숨의 하늘 담배 위에 조용히 단 한 번의 불을 놓아주신 그대여,

 

북망,

북망,

 

그대를 멀리서 찾는 동안 나의 괴로움은 너무도 외로왔지만 외로운 동안 내 탁자의 재떨이 위에선 단 한 번의 수의를 입은 모습으로 그렇게 한 가치 신상(神像)의 담뱃재가 고요로이 제 슬픈 종말의 리허설을 묵묵히 연기하고 있음이여, 혼은 위로 올라가고 백은 아래로 떨어지듯 연기는 허공으로 올라가고 재는 지옥의 다리 밑으로 떨어져 혼백이 고요로이 나뉘이고 있음이여

 

 

 

잔인한 편집

김승희

 

이디오피아 여인의 절벽같은 검은 젖가슴에

매달려, 연필처럼 앙상한

이디오피아의 검은 아이가 죽고 있다,

죽고 있다,

소말리아의 자갈처럼 메마른 아이가,

사라예보의 귀신처럼 배고픈 아이가

(그 사진 바로 아래 이런 광고문)

날씬한 아름다움은 여인의 꿈이자 자존심,

아름다움은 절식으로 만들 수 있다,

절식을 위한 기적의 천연식물 엑기스, 다이어트 효모를 마시고

기적의 날씬한 미를.

 

나 원래는 그리 몰인정하고 무자비한 인간은 아니었다.

이런 편집의 틀 속에 오래 살다 보니

무자비한 망각의 학습이 계속되었을 뿐, 뿐, 뿐.

 

 

 

장미와 가시

김승희

 

눈먼 손으로

나는 삶을 만져보았네.

그건 가시투성이였어.

 

가시투성이 삶의 온몸을 만지며

나는 미소 지었지.

이토록 가시가 많으니

곧 장미꽃이 피겠구나 하고.

 

장미꽃이 피어난다 해도

어찌 가시의 고통을 잊을 수 있을까

해도

장미꽃이 피기만 한다면

어찌 가시의 고통을 버리지 못하리요.

 

눈먼 손으로

삶을 어루만지며

나는 가시투성이를 지나

장미꽃을 기다렸네.

 

그의 몸에는 많은 가시가

돋아 있었지만, 그러나,

나는 한 송이의 장미꽃도 보지 못하였네.

 

그러니, 그대, 이제 말해주오,

삶은 가시 장미인가 장미 가시인가

아니면 장미의 가시인가, 또는

장미와 가시인가를.

 

 

 

저 산을 옮겨야겠다

김승희

 

저 산을 옮겨야겠다

저 산을 내가 옮겨야겠다

오늘 저 산을 내가 옮겨야겠다

 

먼저 산에서 ㄴ을 빼고

ㅏㅏㅏㅏ

목 놓아 바깥으로 아를 풀어놓으면

산은 마침내 ㅅ만 남게 된다

두 사람 비스듬히 몸 맞대고 걸어가는 모습이 보인다

 

ㅅ......ㅅ......ㅅ......ㅅ......

저 산이 움직인다

ㅅ......ㅅ......ㅅ......ㅅ......

저 산이 걸어간다

ㅅ......ㅅ......ㅅ......ㅅ......

산을 움직이는 두 사람

ㅅ......ㅅ......ㅅ......ㅅ......

사랑하는 두 사람이다

 

 

 

절망은 기교를 낳는다는데

김승희

 

절망은 기교를 낳는다는데

나의 절망은 아무것도 낳지 않는다

기교는 절망을 낳는다는데

나의 기교는 정말 아무것도 낳지 못한다

 

천치 같은 마리아가

홀로 별들을 바라보며

악몽 같은 성령을 수태하고 있을 때

보았는가

청순해서 너무나 청순해서 슬픈

천체의 오물 같은 별들은 으스스-으스스-

화장터의 뼈마디처럼

공해 같은 희망을 비웃으며

천치 같은 마리아를 저주했더니라,

왜 또 희망을 뱄더냐고,

왜 또 희망을 못박아 죽이려 하느냐고,

 

절망은 기교를 낳는다는데

나의 절망은 기교를 낳지 못한다,

기교는 희망을 낳는다는데

나의 기교는 정말 아무것도 낳지 않는다,

 

똥도 안눈다

젠장,대변은 커녕 따스한 오줌 한 번

눈 적도 없다.....

 

 

 

제목없는 사랑

김승희

 

죽어 버릴까.

아니면 이 불행한 삶을

계속해야 하나,

해질 무렵이면

언제나 화두처럼 떠오르는 이 질문을

가슴에 안고

아가를 업은 나는 골목을 서성인다.

 

이혼을 할까.

아니면 우울한 결혼을

계속할 것인가,

가령 이 질문은 언제나 그 질문과 같아서

서울에서 가장 붐비는

롯데 백화점 앞 네거리 스타트라인 위에서

갑자기 시동이 꺼져 버린 중고차처럼

사방에서 경음기 소리 들려오는데

혼자서 울고만 싶은 백치성이 있다

 

절망 때문에 결혼을 하여

그 절망을 두 배로 만들고

허무 때문에 자식을 낳아

그 허무를 두 배로 만들었으니

자꾸만 약효가 안 듣는 약을

자가처방하고 있는

너를 무엇이라고 불러야 하나

해질 무렵이면

약방의 진열대 뒤에 서서

자꾸만 이름모를 약을 조제하고 있는

하얀 슬픔의 가운을 걸친

너를.

약효를 남먼저 시험해 보느라고

두 눈을 감고 자꾸만 쓰디쓴 약을

삼켜보고 있는 너를.

 

아가를 업고

서성이는 골목길 안에서

나는 너 때문에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네가 만든 영화 속에

나는 몹시 아픈 환자의 역할을 맡은

약물 시음용 배우인 것만 같다.

 

 

 

죽도록 사랑해서

김승희

 

죽도록 사랑해서

죽도록 사랑해서

정말로 죽어버렸다는 이야기는

이제 듣기가 싫다.

 

죽도록 사랑해서

가을 나뭇가지에 매달려 익고 있는

붉은 감이 되었다는 이야기며

옥상 정원에서 까맣게 여물고 있는

분꽃 씨앗이 되었다는 이야기며

한계령 천길 낭떠러지 아래 서서

머나먼 하늘까지 불지르고 있는

타오르는 단풍나무가 되었다는

그런 이야기로

이제 가을은 남고 싶다.

 

죽도록 사랑해서

죽도록 사랑해서

핏방울 하나하나까지 남김없이

셀 수 있을 것만 같은

이 투명한 가을햇살 아래 앉아

 

사랑의 창세기를 다시 쓰고 싶다.

또다시 사랑의 빅뱅으로 돌아가고만 싶다.

 

 

 

죽은 말의 꿈

김승희

 

니콜로 파가니니의 난간에서

속병이 깊은 말[馬]은

세계를 짧게 만나고 있다.

 

꽃이 핀다.

꽃의 입술에 열리는

흰 무도장.

 

거만한 말[言]은 시간을 쉬고

은빛 현이

활짝 일어난다.

 

빠른 핀세트.

청동빛 숲과 꽃은

상치(相値)되고

또한 위태히 해체된다.

 

 

 

진주 기르기

김승희

 

1

심야에, 멍청히,

제시카의 추리극장을 보며

누워 있는데

긴급한 파발마 글씨로

하얀 자락이 달려간다.

RH마이너스 B형 혈액을 급히 찾습니다 신촌 세브란스 병원 392의 0161 응급실로 빨리……

 

나는 RH마이너스 혈액이

없어서

그냥 누워서 양파링을 바삭바삭

먹으며

TV를 본다.

 

누가 나를 불렀나?

유리창에 가득 찬 밤이

내 얼굴을 쳐다보는 것 같아

등을 돌리고 누우며

홀로 한 번 더 말해본다

나․는․R․H․마․이․너․스․피․가․아․닌․데․뭘……

 

그렇게

80년대는 저물고

피 한 방울 손해보지 않은 나는

그 시대에 피 한 방울 보태지 않은 나는

양파링처럼 너무도 유순하게

누군가의 깊은 목구멍 속으로

자꾸만 녹아 들어가고 있는 느낌이다.

 

이렇게 녹아 버려도 좋은 것일까

이렇게 삼켜져도 되는 것일까

몸속에 자꾸만 돌이 쌓여가는 기분으로

잠들었다가

(목구멍까지 돌이 차오르면

우린 행복하게도 잠수성공 익사성공을

이룰 수도 있었을 텐데)

 

아, 안 돼, 잠옷 같은 수의를 떨치고

바람 같은 신발을 신고

어둠의 눈물 묻은 대문을 나서며

나는 신촌 세브란스 병원이 있다는

새벽의 방향으로

푸르게 푸르게 달리기 시작한다.

내 비록

R․H․마․이․너․스․B․형․피․는․없․지․만……

 

 

2

오선지의 악보는 굳어버린 듯하였다.

저공비행의 헬기 위에서

화염방사기로 하얀 폭양을

무차별 난사하고 있는 듯한

여름날 오후,

도 레 미 파 솔 라 시......

도 레 미 파 솔 라 시......

그 불안한 [시]에 걸려

아무것도 올라가지 못하고 있었다.

 

뜨거운 아스팔트 위에서

노점상 아줌마는 구루마 위에

화덕 두 개를 올려놓고

하얀 김이 펄펄 날리는 옥수수를

찌고 있었다.

한 화덕 위에선 홍합조개 국물을 끓이는

흰 수증기가 부들부들 떨면서

아줌마의 얼굴과 목을 마구 조이고 있었다.

 

사람마다 자기 아우슈비츠를 갖고 있다고

말한 사람이 있었지,

아우슈비츠,

아우슈비츠,

양계장의 닭들이 삼천 마리나 떼죽음을

당하던 시간,

사천 마리의 돼지 떼들이 폭염 때문에

한꺼번에 몰살당하던 시간,

대체 저 여인은 누구를 사랑하기에

이 뜨거운 아스팔트 위에서

화덕을 두 개나 껴안고도

지상에서 유일하게 움직이는 생물이

될 수 있었을까,

도 레 미 파 솔 라 시......

도 레 미 파 솔 라 시.....

그 뜨거운 [시]에 걸려

아무것도 움직이지 못하고 있을 때

 

화덕을 껴안은 그녀의 사랑은

그 불안한 [시]의 목울대를 성큼

뛰어넘어

니그로의 멜로디처럼

니그로의 멜로디처럼

푸른 옷소매의 높은 生의 옥타브를

푸르게 푸르게 탄주하고 있는 것이었다.

 

 

 

집 나간 개를 위한 명상

김승희

 

드디어 며칠 전 루키가 집을 버리고

나갔다

언제나 살기 싫다는 표정으로

밥그릇을 노려보며 앉아 있던

아니, 도대체, 왜 이렇게 시시해?……하고

항상 나를 노려보던

하얀 털복숭이

쇼펜하우어의 제자 같던 루키가

목줄을 끊고 열린 대문 틈새로

나를 박차고 나가버린 것이다.

 

식구들이 온통 나를 비난하는 것 같다

네 탓이지,

너 때문에,

네가 루키를 버렸지……

남편의 시선 속에서

왜 저것이 안나가고 루키가 나갔나 하는

의아한 질문이

감출 수 없도록 너울대는 것 같다

엄마, 엄마, 엄마가 루키를……

 

그랬을까, 내가 정말 그랬을까

언제나 탈영하고 싶다고 꿈꾸었던

그의 마음을 이해하고 있었던 건

사실이지만

은밀한 소망으로 루키의 도망을

방조했다고는,

탈영시켰다는 건

말도 안된다

아무렴, 말도 안되고 말……(까?)

 

루키가 하얀 쇠사슬을 끊고

내가 모르는 미지의 길목 위를

달리는 꿈을 꾼다

루키가 버린 나 속에

갇혀 있는 나는

꿈과 생시를 통틀어 질투의 끈에

매어달려

루키를 따라 질질 끌려다니고 있는

피 묻은 몽상의 바람 같다

 

 

 

창문을 닫고 블라인드를 내리고 커튼을 치고 이불 속에 누워봐도

김승희

 

어떻게든 세상은 쳐들어온다.

 

제목만 길고 내용은 없는 이 시처럼

 

세상이 다 나를 살아주고

나는 종속절처럼 점령된 몇 마디 말을

그저 덧붙일 수 있을 뿐이다.

 

이미 녹즙기 스위치 ON이 눌러져

혼비백산의 회전이 상당히 진행되어온 것이다.

 

어디에 가서 이 생을 구하리오.

삭발처럼 이 세상을 잘라내버리고

어디에 가서 피랍의 문을 어떻게 쳐부수리오?

 

 

 

천왕성의 생각

김승희

 

나는 천왕성을 생각한다.

때문에 천왕성은 나를 생각한다.

천왕성은 얼음이다.

그래서 나는 얼음으로 도피한다.

얼음은 우리를 구제할 수 있을까?

때문에 나는 별 속에 한 예수를 심는다.

 

예수는 태양을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태양을 바라본다.

태양은 우리의 식물을 키운다.

때문에 나도 땅을 사랑한다.

땅은 더럽고 부패했다.

그리고 나는 천왕성을 생각한다.

땅은 순수가 되고

영사막처럼 우리는 그것을 긍정한다.

 

-그러나 많은 것들이 우울하다.

-이곳은 혹시 타지마할이 아닐까?

-고통과 숙명(宿命)과 산고(産苦)가 있다.

 

한 남자가 천왕성에 탯줄을 대고 있네.

한 여자가 심야에 꿈의 베틀북을 짜고 있네.

 

그들이 이 타지마할을 살게 하네.

산소와 태양과 꿈의 자오선이

가볍고 큼직하며 쓸쓸하고 격렬하게.

이곳이 곧 천왕성이 되고

천왕성은 또 타지마할이 되고.

 

 

 

첫눈

김승희

 

어젯밤 꿈에 너를 보았는데

오늘 첫눈이 내리는구나……

네 무덤에 오래 가 보지 않았는데

눈으로 내리니 반갑다……

저승 천사의 흰 옷깃이

네 마지막 뺨처럼 희구나

지상에 내리다 말고

잠시 겁이 나는 듯

얘야, 여기 네 어미의 꽃밭에

눕거라

우리는 꿈결처럼 만나자 헤어졌으니

오늘 첫눈이 강물 위에

네 생일(生日)을 긋는구나……

너처럼 잠시 있다 말고

호적(戶籍)도 없이

날아가리니

저 가벼운 어린 저승 새

흰 다리 쉴 곳 없어……

 

 

 

치자꽃

김승희

 

어딘지 살결에서 죄의 기척이 느껴진다

어느덧 향기는 그렇게 어두운 죄와 의혹 사이에서 나오는 것

천리향 근처에 삼베옷 입은 여인들의 서성임이 있다

 

 

 

치정의 시대

김승희

 

이렇게 사는 것도

저렇게 사는 것도

이 시대엔 모두 다 치정 같다.

모든 말이 치정관계에 얽힌 비화 같고

(90년대가 되자 얼마나 많은 말들이 부끄러운 유령이 되었

는가, 말들이여

울어라,

얼굴을 가리고, 말들이여 울어라,

네 살 속의 흰 뼈가 모락모락

김을 내며 빨갛게 솟구칠 때까지)

잘 사는 사람은

잘 사는 게 치정 같고

못 사는 사람은

못 사는 것이 꼭 치정만 같다.

 

주택은행 융자금 납부이자와 미상환금이

계속 밀려

사흘 후면 집달리 경매처분이 쳐들어온다는

엄마 아버지 옆에서

희망을 갖는다는 것보다

더 우스운 치정이 있는가?

희망을 가지라는 것보다

더 사치한 치정이 어디에 있겠는가?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조차

없으면서

 

나의 양심은 항상 기회주의적 양심이어서

일찍이 파란만장한 둔주밖에 엮은

것이 없다.

이 말을 해도 치정 같고

저 말을 해도 치정 같아서

한밤을 컹컹 끌려다니며

말들의, 물밑바닥을 맴돌며 헤매다닌다.

 

지금 여기 이곳에

치정 아닌 인생이 어디 있는가?

희망도 치정 같고 절망도 치정 같아서

치정의 기교나 생각하면서

그대처럼 이곳에서 성공해볼까?

아니면 치정에 실패하여

멸망한 사람의 모습으로

지하도 가장 낮은 계단바닥에 엎드려

눈물처럼 쨍그랑 떨어지는 한푼의 은전을

기다려 보겠는가?

 

 

 

콩나물의 물음표

김승희

 

콩에 햇빛을 주지 않아야 콩에서 콩나물이 나온다

 

콩에서 콩나물로 가는 그 긴 기간 동안

밑 빠진 어둠으로 된 집, 짚을 깐 시루 안에서

비를 맞으며 콩이 생각했을 어둠에 대하여

보자기 아래 감추어진 콩의 얼굴에 대하여

수분을 함유한 고온다습의 이마가 일그러지면서

하나씩 금빛으로 터져 나오는 노오란 쇠갈고리 모양의

콩나물 새싹,

그 아름다운 금빛 첫 싹이 왜 물음표를 닮았는지에 대하여

금빛 물음표 같은 목을 갸웃 내밀고

금빛 물음표 같은 손목들을 위로 위로 향하여

검은 보자기 천장을 조금 들어 올려보는

그 천지개벽

 

콩에서 콩나물로 가는 그 어두운 기간 동안

꼭 감은 내 눈 속에 꼭 감은 네 눈 속에

쑥쑥 한 시루의 음악의 보름달이 벅차게 빨리

 

검은 보자기 아래― 우리는 그렇게 뜨거운 사이였다

 

 

 

타조알을 낳는 여자-은은 씨에게

김승희

 

내 친구, 타조 농장의 주인이네,

캘리포니아 언덕

신문도 오지 않는 먼 곳에 사네,

아침이면 보름달만 한 둥근 타조알을

두 팔로 가슴에 안고 초원을 내려오네,

신문은 오후에 우편으로

저 아래 호숫가까지 배달되네,

 

그녀를 안으려면 언제나 타조 알을 먼저 안게 되네,

타조 알이 내 가슴을 콕 콕 노크하는 것 같아,

내 친구, 키 큰 타조처럼 사네,

보름달만 한 둥근 타조알에 그림을 그리네

세계의 신화를 그리고 성서 이야기를 그리고

인디언 민담을 그리고 삼국유사를 그리고

천수천안관세음을 그리네

 

내 친구, 타조 농장의 주인이네,

캘리포니아 언덕

전화도 없이 먼 곳에 사네,

저녁이면 보름달만 한 둥근 타조알을

두 팔로 가슴에 안고 초원을 올라가네,

저자 사인 같은 달의 입맞춤을

채색한 타조알에 받아 넣으려는 듯

 

 

 

김승희

 

소방서 앞길에 떨어진

성냥 한 개비처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무슨 큰일이 일어난 것보다도

훨씬 더 큰 조마조마함으로

불안의 일상병리 같은 시대만

쥐 죽은 듯 깊어가고 있었다

 

(너무나 겁을 먹었기 때문에)

아직도 미치지 않은 그대여,

미치지 않고서

이 미친 시대를 바라보고만 있는다는 것은

얼마나 큰 처형인가, 얼마나

조마조마한 배덕인가?

 

관자놀이에 권총구멍이 나버린

달걀

그런 행복한 폭발을 해방이라고 불러선

안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탕!

난 다만 그 팽팽한 침묵의 물이

찢어지는지 아닌지

다만, 그것을, 한번 알아보고 싶었을

뿐이라고……

 

 

 

탕탕 - 몽타주 시대

김승희

 

플롯은 없고

줄거리만 잔뜩 늘어놓은

너저분한 삼류소설

같은

우리 시대 속에서

 

너와 나는

(끈 떨어진 진주목걸이처럼

알알이, 분단된, 핏기 잃은 진주알 같은)

너와 나는

 

빨랫줄도 없이

허공에 널려 있는

빨래들처럼

우리 하고 있음이여.

 

 

 

태양 미사

김승희

 

어둠이 태양을 선행하니까

태양은 어둠을 살해한다.

현실이 꿈을 선행하니까

그리고 꿈은 현실을 살해한다.

구름의 벽 뒤에서

이제는 태양을 산책하는 독수리여,

나는 감히

신비스런 미립자의 햇빛 파장이

나의 생(生)을 태양에 연결시킬 것을

꿈꾸도다.

나의 생(生)이 재떨이가 되지 않기 위하여

나의 생(生)이 가면의 얼음집이

되지 않기 위하여

나는 감히 상상하도다.

영원한 궤도 위에서 나의 불이

태양으로 회귀하는 것을.

언제나, 그리고 영원토록.

 

나의 생명(生命)과 저 방대한 생명(生命)을

연결해 달라,

어떤 방적기계

어떤 안개의 무(無) 속에서

우리의 실은 풀려지는 것인가?

어떤 증발

어떤 채무자인가, 우리들은?

 

나는 감히 상상하도다,

어둠이 태양을 선행하니까

그리하여 태양이 어둠을 살해하듯,

현실이 꿈을 선행하니까

그리하여 꿈이 현실을 살해하기를.

나는 감히

꿈꾸도다,

나의 생(生)이 안개의 먹이로 환원되는 것을

나는 바라지 않기에

살기 위해 더 많이 사랑할 것을

오직 나는 바라기에

나는 감히 상상하도다,

영원의 궤도 위에서 나의 불이

태양으로 회귀하는 것을.

 

그리하여 존재의 실[絲]패를 태양에 감으며

신비스런 미립자의 햇빛 파장이

나의 생(生)을 태양에 귀의시킬 것을.

 

 

 

태양성서

김승희

 

타오르지 못하면

죄를 느끼는 -

나는 하나의 양초입니다

이제 제물은 준비되었으니,

부디 나의 심지 위에

고운 불을 놓으십시오 -

 

촛불이 이 세상을 만드는

어둠의 공백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모든 벽은 문(門)이 되고,

이해할 수 없게도

고문의 노래는

황홀한 불 속에 작열합니다

 

누가 나의 운명의 검은 자오선을

저 하얀 불 속에

휘어 넣을 수 있을까요,

나 스스로 몸을 굽혀

저 가혹한 불꽃의 먹이가 되지 않는다면

나는 대체 어디에서

삶의 젖을 빨아야 하나요?

 

오, 그러나, 잠깐만,

나에게 모짜르트를 들을 시간을 주세요,

산 채로 번제를 지피기 위해서는

약간의 마취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슬로우 비디오처럼, 천천히,

나는 나의 나체를 불의 제단에

눕힙니다

 

인육의 촛불이 꽃처럼 타오릅니다

신이여, 이것이 나의 경배,

나의 포만인 것입니다

나의 박애인 것입니다

 

심령이 불태워진 자는 복이 있나니

뼈에서 새가 솟을 것이오 -

심령을 불태우는 자는 무궁하리니

태양이 저의 것이라 -

누군가 내 긴 뼈의 맥을 짚으며

건반을 누르듯 - 하염없이 -

화음의 우주를 쓰다듬고 있습니다 -

 

 

 

태양의 면죄부

김승희

 

희디흰 폭양 속에선

어디선가 사물놀이패들 노는 소리,

징, 바라, 장고, 북 -

징, 바라, 장고, 북 -

어디엔가 원한의 무지개를 세우는 소리,

들립니다,

 

신비로와라,

삶의 무늬와 태양의 무늬가

어느 허공 중에 가벼이 부딪쳐

저리도 찬란한

색채의 거울을 세움이여 -

 

누가 내 몸 속에 꼭꼭 채운 지푸라기들을

꺼내고

신을 가득 채우니 -

오늘 같은 날은

언제나 원수 같았던 거울 속의 저 사람도

썩어가는 죄업으로 인해

더욱 진하게 보입니다

더욱 향기로와 보입니다

 

내 뼈의 잔가지들을 훑어서

척추의 둥근 고리뼈를 중심으로

누가 피리구멍을 내주세요,

오장육부 굽이치는 원한의 강물에

입술을 대고

누가 저 목숨의 피리를 불어서

내 뼈를 신의 맥(脈)으로

가득 채워 주세요,

 

호화로와라,

원한의 무늬와 폭양의 무늬가

어느 허공 중에 진하게 부딪쳐

저리도 잔인한

뼈의 향유를 부음이여 -

 

 

 

태양의 형식

김승희

 

시퍼런 수박의 냉혹한 살결이

그 아래 이글거리는 숫사자 머리의

붉은 태양을 감추고 있었다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정말이지 무서운 일이다

 

아무도 없는 벌판길을 가다가

무심코 가다가

아무도 없는 과수원 숲길에서

푸른 잎사귀 아래 무시무시한 황금빛 사과가

숨어서, 아무도 몰래 숨어서,

태양처럼 불타는 표정으로 익고 있는 것을

마주친다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정말이지 무서운 일이다

 

그렇게 사는 것이다,

어느 곳에 숨어 있든지 버려져 있든지

죄 짓지 말고

나에게 알맞은 생명의 제목을 하나 골라

그렇게 태양의 형식으로

익어가는 것이다,

남몰래 익고 있는 것이다

 

 

 

텅텅

김승희

 

가슴 위 숭숭 바람이 든 무우는

먹을 수가 없다.

나는 바람이 든 무우를 버린다.

까만 쓰레기 봉지 안에 반으로 뚝 자른

바람 든 무우를 버리다가

나는 잠시

손이 흠칫 놀라는 것을 느낀다.

네가 너를 버리다니!

 

무우 속에 든 바람을 가만히 살펴본다.

바람과 울혈이 만나서

숭숭 골수가 빠진 것 같다.

우연이 축성한

이 무의 망사천 같은 너덜거림의

거미줄 뼈다귀의

애잔한 너울거림,

동물은 무의식이 없다는데

무우는 무의식이 있었나 보다,

밖은 썩지 않았는데

안은 텅텅 썩었구나,

 

도마위에 처음 무우의 몸을 올려놓았을

때를 생각해 본다.

무우는 창백했지만 무슨 미소를 머금고

있었던 듯하다,

미소를? ……그래 그건 미소가

아니었던가? 그렇지 않았던가?

무우청이여?

 

까만 쓰레기 봉지를 뒤져

반동강난 무우를 찾아

양지 바른 창가 물컵 위에 올려놓고

난 애써 미소를 재배하는 비밀을

참관한다.

숭숭 바람이 든 무우의 몸 위로

뿌리가 너울대며 위로 올라간다,

이런 맥락의 텅텅 빈골 속에서도

위로 올라가는 뿌리가 있다니!

 

비닐하우스에서 생산되어 팔려온

시금치는

그렇게 푸르지가 않다,

무언가가 크게 잘못 되어

심하게 멍든 것 같은 표정을 줄 뿐이다.

 

바람이 되다만 사랑이

희망이 되다만 낙망이

새벽이 되다만 절벽이

혁명이 되다만 울부짖음이

저런 정박의 멍이 된 것일까?

 

푸른 멍이 자신의 상처를 이길 수

얿을 때

멍은 멍에가 되어

한밤을 개집 속에서 슬프게 울부짖어야 한다.

멍·멍

멍·멍·멍

 

멍멍멍 울부짖는 멍을 나는 기르고

싶지는 않았다,

사람이 되다만 멍들이

새벽이 되다만 절벽들이

개벽이 되다만 희망들이

다른 언어로 꽃피어남(울기)을

찾을 때까지

 

나는 더 멍들의 멍에를 걸머지고

이 토막난 변시체 같은

희망의 빈민굴을 좀 더 사랑할

작정이다,

멍들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를 멍들게

하는 것들을 좀 더 질기게

비웃어 주어야만 하기 때문에

멍이 멍·멍을 초월하는

그 어떤 아름다운 반동을 낳을 때까지

 

 

 

토끼와 주민등록증

김승희

 

이 시대엔 아무리 멀리 꿈을

꾼다 해도

주민등록증 안에서 꿈꾸는 것 같아.

검은 먹으로

뭉개진 지문들,

왼손가락과 오른손가락들이

토끼장만한 금 안에

생과 사처럼 나란히 누워서

언제나 좌우로

서로 검사하고 감시하고 있지.

 

도란도란 하는 말이

아무리 멀리 도망치려고 해도

돈키호테는 꼭 산초 판자와 같이 다녀야

한다고,

아무리 높이 도망치려고 해도

날으려고 할 때는 꼭 미리

낙하산을 준비해야 한다고.

언제나 중얼중얼, 연역법으로 면역이

되어가는 인생.

 

외출할 때면 꼭 주민등록증을 수첩 속에

수첩은 가방 속에

가방은 모가지에 쇠목걸이처럼 걸고

달려라 토끼! 달려라 토끼!

존 업다이크가 아무리 외친다 해도

토끼는 토끼장 근처에서

얼씬대며 달그락걸 뿐.

 

난 이 도시에 토끼장이 이렇게 많으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주민등록증이 든 가방을

식권처럼 목에 걸고

하루종일 총총 돌아다니다

집으로 돌아오면

아, 인생이란 얼마나 긴

제자리 걸음의 장거리 여행인가

입맛 없는 토끼풀을 입에 대다가

입을 막고 달려가

수돗물을 틀어놓고

남몰래 목욕탕에서 우는 토끼들.

 

 

 

평화 일기

김승희

 

1

인생이란 그런 것일까.

저녁을 먹고, 조립식 의자에 엉성하게 앉아

양파껍질을 벗기고 있을 때

미운 일곱 살 말 안 듣는 딸아이가

tv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고 있다.

 

찰칵찰칵 화면은 신속히 돌아가면서

한쪽에선 청순가련형 미모의 여배우가

알지 못할 대사를 읊조리면서

우산 아래서 울고 있는데

다른 한쪽에선 수사반장

살인추리극을 하고

또다른 채널에선 젊음의 록 콘서트

우주인 복장의 젊은 남녀 가수가

오 팔레스타인 팔레스타인 하면서

시야 가득히 환상적인 광물로 가득찬

우주의 무대를 둥둥 펼치고 있다.

 

오, 모가지가 없는 나의 몸뚱이

오, 몸뚱이가 없는 나위 모가지.

위로.

저벅저벅 날은 저물고

아무도 나를 구원하러 오지 않는 것처럼

나도 누구를 구원하러 떠나지 않으며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화면을 바라보면서

양파껍질을 벗기는

손을 부지런히 움직이다가

누가 범인이고 누가 착한 사람인지조차

알 수가 없어서

다시 수사반장을 보려고 하는데

그 채널에선 이제 막 아방궁 같은

욕조에서 빠져나온 알몸의 여인이

아름다운 머리를 감는

향긋한 샴푸 선전이 흘러나오고 있다.

 

인생이란 정말 그런 것일까.

양파껍질을 부지런히 벗기다가

문득 손을 멈추고

가만히 양파를 더듬어 찾았을 때

양파는 아주 없어져 버리고

양파껍질만 희미한 희억의 넝마처럼

무릎 위에 수북이 쌓여있는 것

이 엉성한 조립이 나의 삶을 이끌어가고

그렇듯이 tv 밖으로 세상 밖으로

괄호 밖으로, 둥실둥실 떠내려 가면서,

모가지가 없는 나의 몸뚱이와

몸뚱이가 없는 나의 모가지가

잠시 기구한 인연처럼 스치기도 하는

이 사악한 평화.

 

 

2

가출을 할까

출가를 할까

이것은 나의 영원한 테마이다.

누군가도 그러하리라.

가출을 하든지

출가를 하든지

어딘가에 평화를 구하러 가고 싶은 심정으로

밤은 저문다.

 

신촌로터리에서 지하철 구멍 속으로 들어가면

삼분 자동 칼라 사진실이 있지.

시든 베이지색 커튼을 밀치고

들어가면

관 속같이 하얀 네모난 방.

나는 주섬주섬 주머니 속의 동전들을

모조리 꺼내 놓고

일금 이천오백 원이 될 때까지

동전들을 고백처럼 밀어 넣으며

플래시가 번쩍 하는 동안의

그 작은 재회를 사고 싶다.

 

동전이 찰칵찰칵 들어가 액수가 차면

관 속의 실내등은 저절로 꺼지고

어둠 속에 갇힌 채로

웃을까 말까 망설이는 동안

나의 인생은 그 일 초 동안의

찬란한 자동 마그네슘 불꽃 안에

영원한 우주의 중심으로 환생하게 된다.

 

따끈따끈 인화되어 나오는

나의 사진을 기다리며

나는 지하철 정류장을 오고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바라본다.

모두 다 어딘가로 떠나고 있고

모두 다 어딘가로 닿고 싶은 사람들.

 

자동칼라 사진실의 출납창구 아래로

내 사진이 덜컥 하고 완성되어 떨어질 때

나는 행복하다.

어제보다 더 늙었다든지

점점 더 괴상한 추녀가 되어간다고 해도

(추함만큼 우리에게 일상적인 게 또 있으랴)

나는 정말 관심이 없다.

다만 나는 나와 만나는

그 짧은 순간의 영원. 어머니. 자궁.

고향같은 따스한 어둠을 기억할 뿐.

아무도 이제 내가 안 보인다고

말하지는 못하겠지.

 

나처럼

자기 스스로와 면회하고 싶은 객지의 사람들이

먼 길을 걸어와

관 같은 자동사진실 근처를

어슬렁거리고 있다.

호적이 없는 부랑자들처럼

니코틴에 물든 입술이 파랗다.

 

 

3

오정희씨 주인공처럼

살고 있어요.

나는 편지를 쓴다.

아이가 잠들면

골방으로 들어가 줄담배를 피워요.

눈물이 떨어져

행간 위에 잉크자욱이 번진다.

 

일반노선으로 안 가면서 평화를 얻는 법과 독자노선으로 안 가면서 평화를 얻는 법

두 가지를 다 고려해야 한다고 어디선가 본듯한 글귀를 백지 위에 썼을 때

 

낱말들이 나를 비웃는 것 같다.

아니 모든 낱말들이

스스로를 비웃는 것 같아

나는 글씨들 속에서

비틀거리며

더이상 시인으로 살 수 없을 것 같은

절벽을 느낀다.

 

절벽에서 새벽으로

언제나 시계의 길은 열리고 있지만

아침이 오면

나는 거미줄에 매어달린 이슬방울처럼

또다시

절벽에서 벽으로 추락하는

녹슨 물방울의 두려운 표정으로

삶에 간뎅간뎅 매어달려 있을 것이다.

 

오정희씨 소설의 주인공처럼

살고 있어요.

나보다 먼저 상투어들이 나를 설명하고

백화점에서 새로운 디자인의 영원한

넝마들을 골라 사입듯이

나의 인생은 영원히

기성복 가게를 기웃거리듯 너덜거리는 단어들을 맴돈다.

상투어 속에 갇힌 나

관용구와 함께 썩어가는

수초에 목이 감겨 가느다랗게

죽은

 

나의 생명 속에는

중고 꽃의

중고 곤충의

중고 새의

완결되지 않은 중고 슬픔이

다용도실처럼 가득 차 있다.

 

이것을 해결하지도 않고

이것을 외면하지도 못하는

나는

바야흐로 제3인간형이다.

이것도 상투어다, 복사판 인덱스,

어제 본 거울이다.

자기 암살이다.

 

 

4

모두들 나에게 숙제를 내주고 있다.

이별하는 사람은 이별의 숙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미움의 숙제를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의 숙제를.

 

아버지 약이 떨어졌는데 내일은 꼭

다시…… 내일까지 ……

…… (엄마는 말을 잇지 못한다)

창밖으로 새들이 날아가는데

나는 수화기를 든 채로

저 새는 무슨 숙제가 남아

밤길을 저리 급히 날아가야 하나……

바람도 구름도 피어나는 꽃도

요즈음 나에겐 꼭 업보적으로 보인다.

전생의 무슨 숙제가 남아

여기 이 자리로 꼭 와야했다는 듯이.

 

사랑, 사랑을 생각하면

정다운 지붕도 따스한 밥상도 생각나지 않고

내 복부를 흘러가고 있는

제왕절개 수술자욱이 생각난다.

화상 입은 듯한, 다림질한 듯한

상처의 메마른 흉터 속으론

언제나 은하수 같은 아픔의 사연이

반짝반작

우주의 서정시를 쓰고 있다.

 

나는 다만 엎드려 서사적으로 숙제를 한다.

죽은 듯이 엎드려 숙제를 하고 있는

나는

그러나 아마 몹시 행복하다고 해야 하리라.

숙제를 하고 있는 동안만은

아무리 바닥에서일망정

화사 구렁이철넘

칭칭 인생을 붙잡고 있는 느낌이 든다.

 

뚝뚝 애원하며

타오르는 촛불 같이

분노와 연민으로 희게 질린

양초 같이 ……

 

 

5

팝콘을 만드는 오후 시간이면

난 아마 질리도록 지루하다고 해야 하리라

동쪽의 지평선에서부터

서쪽의 지평선에 이르기까지

꽉 차 있는 빨래 같은 하늘 한 벌.

어는 실업의 대낮에

캄캄한 극장의 후문으로 걸어 나왔을 때

햇빛은 무수한 살육의 바늘처럼

동시다발적으로 내 온몸을 찌르고 있었지.

히로시마 직후처럼

고요한 파산.

 

「남비 또는 깊이가 잇는 요리용 그릇(특히 코팅이 되어 있는 남비)을 바닥에 맛소금 T스푼 1/2과 쇼트닝 또는 식용유(약1/4컵)로 채우십시오.」

나는 커다란 튀김남비를 꺼내 가스렌지의 불꽃을 최고치로 높인 후 마아가린을 듬뿍듬뿍 던져 넣는다. 마아가린은 부들부들 떨다가 희게 머리를 풀어헤치고 조용해 숨을 거둔다.

「식용유에서 김이 날 때가지 가열하다가 두 알의 시험용 팝콘을 넣어 펑펑 튈 때까지 가열하십시오.」

지시에 순응하여 나는 시험용 팝콘 두 알을 뜨겁게 달궈진 남비 속으로 집어 던진다. 13월의 죽음처럼 단단한 옥수수 알이 백옥 같은 미소를 띄우며 펑펑 만개한다. 훨훨 부화한다. 서울의 지붕 밑에 반짝이는 나비들을 더욱 점화하기 위하여

「팝콘 낱알 1개 깊이로 바닥을 채우시고 팝콘 약 1/3컵 정도 부우시고 저어주거나 흔들어 주십시오.」

급히 옥수수 봉지를 뒤집어 남비 속에 부은 다음 투명뚜껑을 꽉 닫고 난 조용히 요리의 세계를 들여다본다. 요리책의 지시대로 요리하는 즐거움을 평화라고 부른 건 여류작가 김지원이었지. 책임질 필요가 없으니 행복하다고. 투명유리의 뚜껑에 온몸을 부딪치며 하얀 꽃 같은 팝콘이 백화만발로 일어서는 것이 보인다. 온누리 사랑 같다. 성불 같다. 해방 같다.

「튀는 것이 완료될 때까지 흔드신후 가열을 중단하십시오.」

 

뚜껑을 열고 나는 에테르처럼 가벼운

따끈한 팝콘 꽃송이들을, 꽃다발들을

주걱으로 휘휘 저어

커다란 푸른 칠 쟁반에 퍼담기 시작한다.

탐스런 꽃잎들의 달콤한 냄새 속으로

분홍빛 부력을 지닌 연등행렬이

부처님 오신 날처럼

둥둥 스쳐간다.

 

커다란 남비 맴 밑바닥엔

기어이 팝콘이 못 된 옥수수 몇 알이

우울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나른한 오후의 깊은 시간 속으로

그의 절망과 나의 절망은

사악한 밀애처럼

잠시 얽힌다

 

뜨거운 숨결을 식히려고

고개를 들면

빨래 같은 서울의 한 벌 하늘

나의 해초 일기가

다큐멘터리 버섯구름처럼 둥둥 떠간다.

아아, 내일은 꼭 비가 왔으면!

 

 

 

푸른 상치들이 있는 풍경

김승희

 

도시의 창가에 유리창 가에 상치들이 상치들이 상치들이

푸른 귀를 맛대고 푸른 뺨을 맞대고 푸른 숨 맞대고

푸른 입을 맞대고 팔 하얗게 드러난 팔 파랗게 드러난 힘줄 팔

하얗게 드러난 팔꿈치들을 맞대고 뺨 한곳엔 흙이 묻어

뺨 한곳엔 물이 묻어 뺨 한곳엔 햇살이 묻어.....

무언가 옹알이 내 귀가 아알지 못할 옹알이

나른한 말들 숨결들 꿈결들인 양......

상치 밭에서 깜박 잠들었네

내 뺨에 절 한 채 지어놓고 내가 도망갔네

도망간 나를 찾아 굳이 길을 떠나야 할 것은 뭔가?

 

 

 

피아노 포르테를 위한 연습곡*

김승희

 

냄비 속에 콩을 볶을 때

운명을 다하여 콩을 볶을 때

"푸르스름한 녹두, 푸릇푸릇 완두, 조랑조랑 땅콩, 새까만 서리태,

알록달록 강낭콩,

노릇노릇 콩나물콩, 올망졸망 쥐눈이콩, 불그죽죽 팥,

삐죽삐죽 까치콩, 둥글둥글 메주콩"**

냄비 속에 콩을 볶을 때

넥타이를 참으며 불꽃을 견딜 때

"푸르스름 푸릇푸릇 조랑조랑 알록달록 노릇노릇

올망졸망 불그죽죽 삐죽삐죽"**

냄비 속에 콩을 볶을 때

운명을 다하여 불꽃을 높일 때

넥타이를 풀어 모가지를 놓아달라고

"밥에 넣는 밥밑콩, 메주 쑤는 메주콩, 콩나물 내는 나물콩,

검다고 검정콩, 푸르다고 푸른 콩, 누렇다고 누런 콩, 네 눈 같은 쥐눈이 콩"**

냄비 속에 콩을 볶을 때

땅을 치고 울고 싶을 때

배꼽을 빼고 웃고 싶을 때

콩, 콩, 콩, 펄펄 튀며 무대 아래로 날아가고 싶을 때

다 콩이야, 다 콩,

콩, 콩, 콩

그중 나는 튀면서 날아가는 메주콩이 될 테야

냄비 속에 콩을 볶을 때

맨발이 화상 입은 온몸이 되어 아파, 아파!

넥타이를 자르며

아파서 무대 밖으로 튀어 나가는 콩! 콩! 콩! 콩!

 

* 이것은 백남준의 1960년대 발표작으로 무대 아래로 내려가 넥타이를 자르는 등의 소동으로 잘 알려진 파격적인 작품의 제목

 

 

 

하나를 위하여

김승희

 

나는 많은 것을 원하지 않는다.

단지 하나가 되고 싶을 뿐이다.

살았던 것들 중

그 중 아름다운 하나가,

슬펐던 것들 중

그 중 화사한 하나가,

괴로웠던 것들 중

그 중 순결한 하나가 되고 싶을 뿐이다.

 

나는 많은 길을 원하지 않는다.

오히려 더 많은 길을 버리고 싶고

더 많은 꿈을 지우고 싶고

다만 하나의 길과

다만 하나의 꿈을 통하여

물방울이 물이 되고

불꽃들이 불이 되는

그 하나의 비밀을 알고 싶을 뿐이다.

 

하나를 이루기 위하여

그 하나에 닿기 위하여

나는, 하나 하나, 소등 연습을 해야 할는지도

모른다.

가로등이 다 꺼진 어둠 속으로

솜처럼 착하게 다 적셔져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게 타오르는

하나의 봉화가 되고 싶은지도 모른다.

 

 

 

하늘빛 달걀

김승희

 

아이들이 수채화를 그리고 있는 방 귀퉁이에서

나는 냉장고의 달걀들을 몽땅 꺼내와

달걀 위에 하늘빛을 칠하네.

울면서, 오, 나는 울면서,

내가 가진 모든 달걀 여섯 개 위에

하늘빛 물감

원죄가 있기 전의

원초의 하늘빛 같은

그런 빛깔을 붓으로 칠하네, 부들부들

떨면서

 

엄마, 내 물감 쓰지 마, 파란색이 다

없어졌잖아, 엄마물감 쓰면 되잖아……

왕인이는 나에게서 물감 튜브를 빼앗고

엄마물감이 어디 있니, 더군다나

파랑색이……

나에겐 실천할 사랑이 없고 갈망만

있네, 갈망만 있고

사랑의 빛은 죄의 먼지와 원진으로

죄다 막혀 버렸네.

칠하다 만 달걀들을 바라보네.

아직 색칠하지 못한 달걀들은 자학에

빠져, 몹시 추위를 타는 듯하네.

추위를 탄다는 것과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다른 것일까?

같은 것일까?

 

색칠을 해보아도 해보지 않아도

달걀은 무정란이었다는 생각이 드네.

다만 색칠한 달걀이 좀더 커보이고

무궁해 보이는 것은

어느 부활절인가 봄의 부활날에

이해인 수녀님이 주신

따스한 하늘빛 달걀에 대한 기억 때문일 거야.

그 달걀엔 채광창 같은

눈부신 창문이

꼭대기에 환히 매달려 있었는데……

 

 

 

하루살이

김승희

 

인생은 짧고

하루는 길지

 

밥도 먹고

시내도 나가고

싫은 사람 만나서 히히호호 떠들다가

먼지 같은 그 소음을 미워하기도 하면서

차도 나누고

거짓말도 나누고

아아 그러나 그리운 사람

끝끝내 못 만나고

그리운 일 아무래도 일어나지 않는

심심한

하루

 

오만한 클레오파트라가 식초물통 속에

잔인하게 진주 귀걸이을 풀어 담굴 때

진주 귀걸이는 거품 하나

남기지 못하고

녹아서 사라져 버렸지,

그렇듯이

가로수 그림자들

어둠 속에 말없이 용해되고 있을 때

 

막차에서 내린

조그만 한 사람이

길 모퉁이 구멍가게에서

말없이 풍선껌 한통을 집어드는

무렵

 

수은등 등갓에 고운 얼굴 파묻고

창백하게 죽어있는

지천명을 보는가,

외로운 담배연기 허공 속에

목도리처럼 희게 풀어지고

 

어제의 후회와

내일의 불안 사이

오늘이란

참 어슬픈 허구가 있으니

 

하루는 길어도

인생은 짧고

 

 

 

햇님을 좋아하는 얼음 나라

김승희

 

석탄을 사야겠네요.

바람 때문에

자꾸만 꽃잎이 떨어져요.

 

내 마부(馬夫)여.

가장 좋은 장작집으로 가요.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인간(人間)의 낱말도 남기지 않으려고

지금은 찬 바람이 너무나 불어요.

 

불을 지피려고 아궁이로 가니

금빛 침이 가득 고여 있고요.

불씨를 얻으려고 남쪽으로 가니

희랍 아저씨는 옛날에 죽었대요.

 

나는 머릴 흔들어

아니라고 했어요.

미래의 형태를 위하여

변소 속의 살얼음을 사랑하고 말까요?

 

오, 사소한 것들.

당신들은 너무나 사소한 것들을

덮고 있어요.

 

나는 덮지 않을래요.

내 마부(馬夫)여.

이 슬픈 바닷가를 뛰어 넘어가요.

내 드디어 햇님 속에 누울 수 있도록.

다를 수 있도록.

 

 

 

햇님의 사냥꾼

김승희

 

다이아나 언니.

마차(馬車)를 매요.

바람이 좋으니 사냥 나가지.

요정 1․ 요정 2․ 요정 3․ 요정 4

그리고 어린 모짤트도 불러

사슴과 거미와 토끼와 나비를

표범과 매와 태양과 절망을

언니는 쫓고 나는 잡고.

언니는 활 쏘고 나는 겨누고.

 

영혼의 마차(馬車)에는

네 개의 바퀴가 반짝이고 있다.

숲의 정(精)․별의 정(精)․꿈의 정(精)․활의 정(精)

우리는 정비하여

해 가까이 나가는데

지금 누런 들에서는

엑스레이빛, 엑스레이빛으로

마른 개들이 죽고 있다.

죽고 있다.

 

나는 알지.

긴 어둠의 창작을 내가 할 때

흰 물결․검은 물결․파랑 물결 사이에서

언제나 다시 시작되는 황야를.

메마른 의식의 침엽수 이파리와

필생(畢生)의 든든한 그 어둠 소리를

나는 알고 나는 견디리

나는 활 쏘고 나는 밝히리.

 

돌아오는 마차(馬車)엔

햇님의 머리칼.

눈부시게 타오르는 요정들의 옷자락.

어둠은 이제 말을 몰고 돌아가고

밝아지는 뼛속과 태양 취한 일 센티.

다이아나 언니.

햇님을 매요.

반짝이는 사냥 노래 나의 노래를.

 

 

 

호텔 자유로

김승희

 

자유로는 이제 호텔이 되었다

자유로에서 자유는 이렇게도 많이 밀리고 있다.

싱싱한 브로커리 같은 아침의 얼굴이여

누가 이 아침 얼굴을 식물인간으로 눌러 놓았나

자유로에서 밀리는 것은 정말 자유만이 아니다

 

때묻은 얼굴에 머리카락을 풀어헤친 맨발로

조그만 베개를 가슴에 안고

아가야, 아가야, 젖 줄까, 베개를 토닥이며 돌다니던

그 미친년의 마음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붉은 그리움을 상상할 수 있는가,

그리움이 앞으로 더 나아갈 수 없을 때

그리움이 앞으로도 뒤로도 다 막혀 있을 때

나도 얼마든지 그렇게 미칠 수 있을 것 같다

 

미치거나 식물인간이 되어서 반쯤 졸거나 반쯤 자는 길.

서울로 가는 전봉준도 그랬으리라. 깃발은 들었고

자유는 밀리고. 황토재 떠나 황룡촌 지나

첩첩 그리움은 막혀가고. 보은 지나 금강이여.

서울로 가는 길목마다 그렇게도 어려웠으리라

자유로에 점점 떨어진 푸른 알들이여

녹두 꽃잎들이여.....

 

호텔 자유로. 인디언 담요를 몸에 두르고

김밥과 샌드위치를 찬합에 놓고 먹으며

그렇게도 싫어했던 실려가는 삶에 대해

실려 갈 수밖에 없는 삶에 대해

밀려있는 자유에 대해

밀고 가는 자유에 대해

그리고 또다시 언젠가 피어날 녹두꽃에 대해

피기도 전에 공습 탄환에 스러진

카불 소녀의 녹슨 녹두빛 눈동자에 대해.......

 

 

 

황혼이면

김승희

 

황혼이면

밥상을 부수고 어디론가 떠나가고 싶다던

한 여류작가가 생각나지,

언제부턴가 하루하루란 사는 것이 아니었고

힘껏 견뎌야만 하는 무엇이었지,

 

푸른 목숨의 그리움

있는 대로 선혈처럼 다 배어나오는

저 미친 하늘

일그러진 얼굴을 원흉처럼 거느린 채

 

치마폭일랑은 치렁치렁

난파의 깃발처럼 펄럭이며

아아, 머리칼은 욱조아 묶은 채로

그대로 두고 말까,

괴물의 마수처럼 훨훨 이글거리며

제 슬픔의 또아리를

힘껏 틀고 있으라고,

 

밤은 모르는 남자로부터 매일 오는

연서처럼

상냥하고도 은밀한 것,

두근거리며 드럼, 드럼, 드럼,

위험하기 때문에 행복한 것인가

행복하기 때문에 위험한 것인가

 

나는

더 이상 산이 안 보이는

그런 산 위에 서 있고 싶다.

 

가라, 가서

루마니아 폴카를

피가 절이도록 루마니아 폴카를

추며 잊으며 돌라오지 말까,

음악이 공범이 될 때까지

춤이 정사가 될 때까지

 

나는 더 이상

절벽이 안 보이는 그런 절벽 위에

춤추는 사람의 마음을 생각하며

오래 서 있었다,

춤을 추지는 않고

별빛이 내내 뼈에 시릴 때까지-

 

 

 

흑장미가 있는 연가

김승희

 

사랑하는 사람아, 한 치 피부 아래 그대의 아픔을 내가 알지 못하니 사랑이란 어디에 쓸데있으랴 병마(病魔) 홀로 신이 들어 우리의 지붕 위엔 해골들의 춤이 바삭거리고 오는가 이렇게 얼굴 가리고 돌아서 우는 사랑의 야윈 어깨가 부끄러워라 달빛 묻은 꽃잎만 홀로 입술 달삭여 길게 노래하니, 오, 밤이면 천지 아득한 수마(睡魔)가 있을 뿐,

사랑하는 사람아, 불붙은 도화선처럼 타들어가면서 두 손을 내뻗는 나의 가난함이 부끄러워라 방아쇠가 벌써 당겨진 시한의 폭약처럼 누군들 이제 시간은 없으려니 가는가 이렇게 흐득이는 목숨의 파편들을 한 줌 두 줌 열렬히 움켜서 남은 자(者)여 목을 놓아 풍선처럼 조용히 터지는 어느 태양의 혈통 속에 고이 나를 묻어다오,

사랑하는 사람아, 우리의 방에는 거울이 많고 거울 속으로는 언제나 꽃잎 같은 살별이 지고 있었지 꼬리를 끌고 떨어지는 별들은 낙화암 - 낙화암으로 가는 피 묻은 삼천의 목숨의 꿈, 스스로 꽃이 되고자 하는 별 같은 목숨들이 있어 조용히 스러지라 조용히 오래된 검은 장미만이 홀로 일어서 무궁히 바다를 다스리니 오 매일 나누는 밥그릇의 무심한 정다움이 참혹하여 사랑이여-

 

 

 

희망에는 신의 물방울이 들어 있다

김승희

 

꽃들이 반짝반짝했는데

그 자리에 가을이 앉아 있다

 

꽃이 피어 있을 땐 보지 못했던

검붉은 씨가 눈망울처럼 맺혀 있다

 

희망이라고…

희망은 직진하진 않지만

희망에는 신의 물방울이 들어 있다

 

 

 

흰 여름의 포장마차

김승희

 

나에게는 집이 없어.

반짝이는 먼지와 햇빛 속의 창(槍)대가,

훨, 훨, 타오르는 포플린 모자.

작은 잎사귀 속의 그늘이

나의 집이야.

조약돌이 타오르는 흰 들판.

그 들판 속의 자주색 입술.

 

나에게는 방도 없고

테라스 가득한 만족도 없네.

식탁가의 귀여운 아이들.

아이들의 목마는 오직 강(江)으로 가고

나는 촛불이 탈 만큼의

짧은 시간 동안

그 아이들이 부를 노래를 지었지.

내 마차(馬車)의 푸른 속력 속에서

날리는 머리카락.

머리카락으로

서투른 음악을 켜며.

 

하루의 들판을 무섭게 달리는 나의 마차(馬車)는

시간보다도 더욱 빠르고 강하여

나는 밤이 오기 전에

생각의 천막들을 다 걷어 버렸네.

그리고 또한 나의 몇 형제들은

동화의 무덤 곁에 집을 지었으나

오. 나는 그들을 경멸했지.

그럼으로써 낯선 풍경들을 잃고 싶지 않아서.

 

나에게는 꿈이 없어.

해가 다 죽어버린 바다 속의 밤이

별이 다 죽어버린 밤 속의 정오(正午)가

그리고 여름이 다 죽어 버린

국화 속의 가을이

나의 꿈이야.

콜탈이 눈물처럼 젖어 있는 가을 들판.

 

 

 

13월 13일의 사랑

김승희

 

그런 사랑

13월 13일 같은 그런 사랑

토끼와 거북이가 뒤로 달리는 경주를 하고

싱그러운 초원 위에 뒹굴고 노는 그런 사랑

동서남북 어디인지 알 수 없게

방향을 지우고 놀다가

끝내는 이름도 얼굴도 잃어버리는

낙원 같은 그런 사랑

토마토 한복판을 가운데로 잘라내

똑똑 떨어지는 붉은 태양혈을 배꼽에 칠하고

응애 놀이를 하며 다시 태어나는 그런 사랑

우리는 세계와 국가의 요구에 부응해야 합니다

당신은 세계와 국가의 요구에 부응……

안하는 그런 사랑

인디언 추장을 만나 손을 잡고

바람의 질주를 그리며 달리는 그런 사랑

세상의 달력을 잊어버리는

총, 성경, 질병을 잊어버리는 그런 사랑

탈주하는 사랑

탈주를 웃는 사랑

탈주조차 잊어버리는 사랑

눈보라처럼 부응할 방향 자체가 없는 그런 사랑

반대로 달려가면서도 웃을 수 있는

즐거운 즐거워서 원기 왕성해지는

13월 13일만 같은 그런 사랑

 

 

 

80년대의 이름으로 촛불에게 묻노니

김승희

 

촛불은 소승불교인가?

아니면 대승적인 것인가?

 

나 어느 조용한 시간에

그대 바라보며 물어 보고 싶었네.

 

촛불 아래 고요히 머리 숙이고

환한 빛 아우라처럼 받으며

글씨 숨쉬며 쓰고 있는

나(민중)에게

 

촛불은 대승불교처럼

높은 데서부터 낮은 곳에 이르기까지

나를 굽어보며

은은히 그 빛

긍휼히 나누어주느니

 

그렇다면 촛불은

대승적인 것이기만 해야 하나.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인가?

소리없이 물으면서 온몸에 울음 심지

하나 뜨겁게 박고(허무의 척추로)

 

화려한 아우라 불꽃놀이

촛불처럼 취해서

홀로 타고 있다고 생각하면 안 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