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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이 이층이 있는 집 - 어느 화가의 이야기

간이 이층이 있는 집 - 어느 화가의 이야기

Anton Pavlovich Chekhov

 

1

육칠 년 전 나는 T현에 있는 어떤 군()의 벨로끄로프라는 젊은 지주의 영지에서 살고 있었다. 이 지주는 새벽잠이 없어 대단히 일찍 일어나는 사람으로서 언제나 소매 없는 외투를 입고 서성거렸는데 저녁마다 맥주를 마시면서, 자기는 그 지방의 어느 누구와도 의기가 투합하지 않는다고 내게 투덜대곤 하는 것이었다. 이 사내는 뜰 저쪽 바깥채에 살고, 나는 원기둥들이 있는 낡은 안채의 넓은 방에 살고 있었다. 이 넓은 방에는 내가 침대 대신 사용하던 폭넓은 긴 의자와 트럼프 점을 치는 데 사용하던 테이블 외에는 가구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여기는 언제나 날씨가 좋은 때라도 낡은 아모스식 난로 속에서 웅웅 소리가 났고 비가 오거나 번개가 칠 적이면 집 전체가 진동하여 금시라도 무너질 것만 같았다. 특히 밤늦게 열 개라도 넘는 커다란 창문들이 번갯불을 받을 때면 약간 무서워지기도 하는 것이었다.

매일매일을 하릴없이 지내는 것이 운명처럼 되어 있는 나에게는 하는 일이 없었다. 몇 시간이나 창 너머 하늘이나 새, 나무가 늘어선 것을 바라보든가 우편물을 구석구석까지 읽거나 하는 외에는 잠을 잘 뿐이었다. 때로는 집을 나와 밤늦게까지 산책을 했다.

어느 날 나는 산책에서 돌아오다가 그만 누군가의 낯선 집으로 들어서고 말았다. 해는 이미 저물어가고 꽃 핀 호밀밭 위로는 석양의 그림자가 길게 뻗히고 있었다. 정성들여 심은 키 큰 왜전나무 노목이 흡사 두 개의 벽과도 같이 줄을 지어 서서 어둑어둑한 가로수 길을 아름답게 꾸며주고 있었다. 나는 어렵잖게 울타리를 타고넘어 땅에 4, 5센티가 깔려 있는 왜전나무 침엽에 발을 미끌어뜨리면서, 그 가로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주위는 어둑어둑하고 조용했다. 다만 높은 나뭇가지 저쪽에서 눈부신 황금빛 햇살이 비쳐 거미집을 무지개 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침엽수가 숨 막힐 정도로 강한 내음을 풍기고 있었다. 이윽고 나는 보리수가 늘어선 길로 접어들었다. 거기에는 손길이 가지 않아 어질러져 있었다. 지난해의 낙엽이 발밑에서 슬픈 소리를 냈고, 저쪽 나무 사이에는 갖가지 그림자가 깃들어 있었다. 오른쪽 옛 과수원에서는 꾀꼬리가 애처로운 듯 가냘프게 울고 있었는데 아마도 이 역시 늙은 새이리라. 마침내 보리수의 가로수길이 끝났다. 테라스와 간이이층이 있는 흰 집 앞을 지나노라니 문득 그 집의 가운데뜰과 큼직한 연못이 눈앞에 펼쳐졌다. 연못에는 수영장으로 꾸민 울타리가 있었고, 녹색 버드나무가 보였으며 그 저쪽 언덕은 마을로 이어져 있었다. 마을에는 가느다란 종루가 솟아 있었는데 그 꼭대기의 십자가가 저무는 석양빛을 받아 붉게 빛나고 있었다. 순간 나는 어릴 적에 이와 똑같은 광경을 본 일이 있는 듯한 기분이 들어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추억으로 황홀해졌다.

가운데뜰에서 들로 나가는 곳에 돌로 된 흰 문이 있었고, 사자를 조각한 옛스럽고 탄탄한 그 문 곁에는 두 처녀가 서 있었다. 약간 연상인 듯한 처녀는 흰 살갗을 가진 호리호리한 미인으로서 풍성한 밤색 머리를 드리우고 있었다. 자그마한 입은 의지에 넘쳤고 얼굴 표정은 근엄하여 내게는 거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있었다. 다른 한 처녀는 그야말로 어린 소녀로서- 열일곱이나 여덟은 넘지 않으리라- 역시 호리호리한 몸매에 흰 살결을 하고 있었으나 눈과 입이 모두 컸다. 그녀는 내가 곁으로 지나가자 깜짝 놀란 듯이 이쪽을 쳐다보며 영어로 무엇인가 중얼거리며 얼굴을 붉혔다. 이 두 처녀의 사랑스러운 모습도 또한 내게는 낯익은 것처럼 생각되었던 것이다. 즐거운 꿈이라도 꾼 기분으로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그 후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점심때, 나와 벨로끄로프가 집 근처를 산책하고 있노라니, 갑자기 전에 본 그 처녀 중 하나를 태운 마차가 풀을 헤치며 뜰로 달려왔다. 그것은 연상의 처녀였다. 화재로 피해를 입은 사람들을 위해 기부를 받으러 왔다는 것이다. 그녀는 우리의 얼굴을 쳐다보지도 않고 아주 근엄하고 또 자세히 설명하는 것이었다. 샤노보 마을에서 몇 채의 집이 불탔고, 몇 사람의 남녀와 아이들이 피해를 입었다는 것, 그리고 자기도 현재 그 위원의 한 사람인 피해자 구호위원회는 당면한 문제를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하는 것들을 이야기했다. 우리에게 서명을 시키고는 그 장부를 집어넣으며 작별 인사를 했다.

"저희들 일을 완전히 잊으셨군요, 뾰뜨르 뻬뜨로비치."

하고 그녀는 한 손을 내밀며 말했다.

"다시 놀러 오세요. 뮤슈......(하며 그녀는 내 이름을 불렀다) 선생님의 재능을 존경하고 있는 사람들이 어떤 생활을 하고 있는지 들여다보고 싶다면 꼭 오세요. 어머니나 저는 대환영이에요."

나는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처녀가 돌아가자 뾰뜨르 뻬뜨로비치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이 처녀는 명문 출신으로 이름은 리쟈 보르챠니노바라 했다. 어머니와 동생, 이렇게 세 사람이 살고 있는데 그 영지는 연못 저쪽의 마을 이름과 같은 세르꼬쁘까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그 옛날 모스크바의 고관으로서 죽을 때 계급은 삼등관이었다고 한다. 상당한 재산이 있다고 하는데도 그들은 여름이나 겨울이나 이 마을에 틀어박혀 있을 뿐이고, 리쟈는 세르꼬쁘까 마을의 초등학교 여교사를 지내며 월 25루블리의 봉급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 용돈을 제 것만으로 쓰며 자기 수입으로 생활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재미있는 집안이야."

벨로끄로프가 말했다,

"언젠가 가보세. 자네가 가면 틀림없이 기뻐할 거야."

어느 제일(祭日) , 우리는 보르챠니노바네의 일을 생각하고 세르꼬쁘까 마을로 갔다. 어머니와 두 딸이 모두 집에 있었다. 어머니 에까체리나 빠브로브나는 옛날엔 미인이었을 터이지만, 지금은 그렇게 나이가 든 것도 아닌데 살이 찌고 천식을 앓고 있었다. 그녀는 어둡고 방심한 듯한 표정으로 그림 이야기에 화제를 집중시키려 하고 있었다. 딸에게 내가 세르꼬쁘까에 올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듣고 모스크바의 전람회에서 본 두세 점의 내 풍경화 생각을 급히 한 모양인지, 그 그림에서 무엇을 표현하려고 했는가를 질문하는 것이었다. 리쟈- 이 집에서 부르는 대로 하면 리이다-는 나보다는 오히려 벨로끄로프와 더 말을 많이 했다. 그녀는 웃는 낯을 보이지 않고 심각해져서 왜 군회(郡會)에 나오지 않는가, 어째서 한 번도 군회의 집회에 출석하지 않느냐고 그에게 다그치는 것이었다.

"좋지 않아요, 뾰뜨르 뻬뜨로비치."

하며 그녀는 나무라듯 말했다.

"나쁜 일이에요, 부끄러운 일이에요."

"정말이야, 리이다. 정말 그래."

하며 모친이 맞장구쳤다.

"나쁜 일이야."

"우리 군은 완전히 바라긴에게 농락을 당하고 있어요."

하고 리이다는 내게 말했다.

"바라긴은 자기가 참사회 의장이 되어 군의 요직을 모두 자기 조카나 사위에게 맡기고는 차차 몹쓸 짓을 하고 있어요. 싸울 필요가 있어요. 젊은이들은 스스로 강력한 그룹을 만들어야 하는데도 보시다시피 이 군의 젊은이들이란 모두 이렇지 않아요? 부끄러운 일이에요, 뾰뜨르 뻬뜨로비치."

동생인 제냐는 군회 이야기를 하는 동안 줄곧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이 처녀는 심각한 이야기에는 말참견을 하지 않았고, 이 집에서는 아직 어른 취급을 못받아 어린애처럼 미슈스라 불리고 있었다. 그것은 어릴 때 자기 가정교사를 미스라 부르지 못해 미슈스라 부른 데서 연유한 별명이라고 한다. 그녀는 시종 재미있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며, 내가 앨범을 뒤적이자 손가락으로 사진 하나하나를 짚어가며 '이것은 숙부님...... 이것은......' 하며 설명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어린애처럼 어깨를 기대어 오는 것인데, 그 때문에 아직 발육이 덜댄 연약한 가슴이나 살이 붙지 않은 어깨며 솜털이 가시지 않은 머리, 벨트로 꼭맨 가냘픈 육체가 몸 가까이에 느껴지는 것이었다.

우리는 크로케나 로온테니스를 하며 놀다가 뜰을 거닐고 차를 마시고 저녁을 먹느라고 긴 시간을 소비했다. 원기둥이 있는, 그저 넓기만 하고 텅 빈 방에서 살고 있는 나에게는, 이 아담하고 아기자기한 집이 어쩐지 마음에 들었다. 이곳에는 벽에 착색판화도 걸려 있지 않았고 하인에게도 '여보세요'라고 불렀으며, 아마도 리이다와 미슈스가 있는 탓이겠지만 어딘가 젊은 느낌이 들고 깨끗하고 고상했다. 저녁을 먹으면서 리이다는 다시금 벨로끄로프를 상대로 군회나 바라긴이나 학교 도서관 이야기를 끄집어냈다. 리이다는 생기가 있고 성실하며 신념에 찬 처녀로서 그 이야기를 듣는 것은 재미있으나, 어딘지 말이 많고 목소리라 큰 것이 흠이었는데 이것은 아마 학교에서 떠들던 버릇 때문일 것이다. 이에 비하여 우리 뾰뜨르 뻬뜨로비치는 어떤 이야기든 간에 논쟁으로 이끄는 학생 시절의 버릇이 아직 남아 있어서, 지루하고 생기없는 긴 이야기를 하기 일쑤고, 더구나 자기를 머리 좋은 진보적인 인간으로 보이려는 의도를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면서 크게 제스처를 쓰는 것이 그만 옷소매로 소스 병을 건드려 테이블 클로드에 큰 얼룩을 지게 했는데, 나 말고는 누구도 그것을 아는 체하려 하지 않았다.

집에 돌아올 때는 어두웠고 주위는 고요했다.

"예의 있다는 것은 소스를 테이블 클로드에 엎지르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누가 그렇게 하더라도 모르는 체하는 것일세."

벨로끄로프는 이렇게 말하면서 한숨을 쉬었다.

"정말 훌륭한 인텔리 집안이야. 저처럼 훌륭한 사람들에 비하면 나는 뒤떨어져 있어. 대단히 뒤떨어졌어! 언제나 일, 일이니까! !"

벨로끄로프는 모범적인 농장 경영자가 되기 위해선 얼마나 많은 일을 해야 하는지 나에게 이야기했다. 그러나 나는 속으로 이 게으른 자여! 하고 생각했었다. 이 사나이는 무엇이든 심각한 이야기를 할 때면 긴장하여 '에에-' 하고 말을 끄는 버릇이 있는데, 일하는 것도 말하는 것과 같이 느려서 언제나 기한을 넘기는 것이었다. 언젠가 내가 우체국에 부쳐 달라고 부탁한 편지를 이 친구는 몇 주일이나 주머니에 넣고 다닌 일이 있었는데, 이로부터 나는 이 사나이의 사무 능력을 거의 믿지 않고 있었다.

"제일 고통스러운 일은."

나와 나란히 걸으면서 그는 중얼거렸다.

"제일 고통스러운 것은 아무리 일을 해도 어느 누구와도 의기가 투합되지 않는다는 거야. 전혀 마음이 통하지 않아!"

 

2

나는 보르챠니노바네 집을 자주 찾아가게 되었다. 가서는 대개 테라스 밑의 계단에 걸터앉아 있곤 했다. 자기 자신에 대한 불만에 가득 차 있는 나는 이렇게도 빠르고 또 잿빛으로 흘러가는 자신의 생활이 애처롭기 그지없었고, 특히 최근에 고통스럽게 느껴지는 심장을 가슴에서 떼어버리면 얼마나 속시원할 것인가 하는 것들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동안 테라스에서는 이야기 소리와 옷이 스치는 소리, 책장 넘기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었다. 리이다는 낮에는 환자를 진찰하고 팜플렛을 돌리며 또는 모자도 쓰지 않고 양산만 들고 마을에 나가는 일도 간혹 있었고 밤에는 큰소리로 군회나 학교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는데, 나는 이제 이런 것에 익숙해졌다. 그 날씬하고 아름답고 항상 근엄한 이 처녀는 품위 있는 입술을 가졌지만, 실무적인 이야기가 시작되면 언제나 무뚝뚝하게 나더러 말하는 것이었다.

"이런 얘긴 당신에겐 재미가 없을 거예요."

나는 이 처녀의 호감을 얻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가 나를 좋아하지 않는 까닭은, 내가 풍경화가로서 민중의 고통을 표현하는 그림을 그리지 않는다는 것과, 그녀 자신이 깊이 믿고 있는 사실에 대해 내가 전혀 무관심하게 여긴다는 것 때문이었다. 언젠가 바이칼 호 부근을 여행하다가 푸른 면직 셔츠와 바지로 단장하고 말을 타는 불가리아 인의 젊은 처녀를 만났던 일이 생각난다. 나는 그 처녀가 갖고 있는 파이프를 사겠다고 했으나, 그녀는 나의 유럽적인 모습과 모자를 경멸하는 눈초리로 힐끔힐끔 쳐다보다가, 일분도 되지 않아 나와 이야기하는 것조차 귀찮다는 듯이 소리를 지르고 달려가 버렸다. 리이다도 그녀와 마찬가지로 나라는 이색분자를 경멸했던 것이다. 물론 리이다는 내게 대한 혐오감을 표면에는 나타내지 않았으나 나는 그것을 충분히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테라스 밑 계단에 앉아 있으면서도 어딘지 조급하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래서 의사도 아닌 것이 농부들을 치료하다니 이것 돌팔이가 아닌가라거나 2천 정보나 땅을 가지고 있으면 자선가가 되기도 쉬운 것이라는 둥 악담을 늘어놓는 것이었다.

한편 동생인 미슈스는 아무 일도 하는 것 없이 나와 마찬가지로 무위의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 처녀는 아침에 일어나면 곧 책을 한 권 손에 들고 테라스에 가서, 그 작은 발이 땅에 닿지 않을 정도로 팔걸이의자에 깊숙이 앉아 책을 읽기 시작하는 것이다. 또는 책을 들고 보리수의 가로수 길을 걷는다거나 들로 나가거나 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그녀는 하루 종일 책을 탐독하는 것이었는데 때때로 아주 피로한 듯이 멍한 표정에 얼굴이 창백해지는 일이 있었는데, 나는 이것으로 그 독서가 그녀의 두뇌를 몹시 혼란시킨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내가 찾아가면 그녀는 나를 보고는 약간 얼굴을 붉히며 책을 놓고는 커다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면서 생생한 목소리로 여러 가지 사건을 말해 주는 것이었다. 예컨대 하인방에서 연기가 났다거나 하인이 연못에서 커다란 고기를 낚았다거나 하는 이야기가 그것이다. 평소에 그녀는 언제나 밝은 색 블라우스와 짙은 곤색 스커트를 입고 있다. 우리는 둘이서 산보를 하고 잼을 만들기 위한 버찌를 따거나 보트를 젓거나 하는 것이었는데, 버찌를 따려고 손을 쳐들거나 노를 저을 때 그녀의 폭넓은 옷소매를 통해 가느다란 팔이 보이는 것이었다. 또 때로는 내가 스케치를 하고 그녀는 곁에 서서 감탄의 눈으로 이것을 지켜보는 것이었다.

7월 말의 어느 일요일, 나는 보르챠니노바네 집에 아침 아홉 시 경에 도착했다. 집에서 되도록 멀리 정원을 돌면서, 그해 여름엔 유달리 많았던 흰 버섯을 찾아놓고서는 뒤에 제냐와 함께 찾으러 올 때를 위해 표적을 해 놓았다. 따뜻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제냐와 그 모친이 모두 밝은 색 옷을 입고 교회에서 돌아오는 모습이 보였다. 제냐는 바람에 날릴까봐 모자에 손을 얹고 있었다. 이윽고 테라스에서 차를 마시는 기척이 났다.

나처럼 아무 잔걱정 없이 매일 같은 무위의 생활에서 구실을 찾는 인간에게는 이 장원에서의 여름 휴일 아침은 더없이 매력적인 것이다. 아직 이슬에 젖어 있는 녹색 정원이 햇살을 받아 빛나고 있을 때, 또 물푸레나무나 협죽도의 향기가 집주위에 가득차고 교회에서 돌아온 젊은이들이 뜰에서 차를 마시고 있을 때, 또는 누군가가 아름답게 치장하고 건강에 넘친 미인들과 긴 하루를 아무 일 없이 지낸다는 것을 생각할 때, 세상은 이래야 한다고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지금도 나는 이러한 것을 생각하면서 뜰을 거닐며, 이처럼 일도 목적도 없이 하루 종일, 한 여름내 걸어 다니고 싶은 기분이 드는 것이다.

제냐가 광주리를 들고 왔다. 나와 뜰에서 만난다는 것을 예감했다는 표정이었다. 우리는 버섯을 따면서 이야기했다. 제냐는 무엇을 말할 때 내 앞으로 돌아와 내 얼굴을 쳐다보곤 하는 것이었다.

"어제 우리 마을에서 기적이 일어났어요."

라고 그녀가 말했다.

"절름발이 뻬라게이야는 벌써 1년 동안이나 일어나지 못해 어느 의사나 약으로도 고치지 못했는데, 어제 어느 노파가 잠시 주문을 외우더니 씻은 듯이 낫지 뭐예요."

"그건 큰 문제가 아니지."

하며 내가 말했다.

"기적이란 것은 환자나 노파의 주위에서만 찾아서는 안 돼. 건강이란 것도 역시 기적이 아닐까. 인생 그 자체도 이해할 수 없는 것, 즉 이것이 기적이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무서운 게 아니었어요?"

"글쎄. 이해할 수 없는 현상에 나는 대담하게 접근하여 결코 그것에 굴복하거나 하진 않아. 그러한 현상보다 내가 상위에 있는 것이니까. 인간은 자기가 사자나 범이나 별보다 상위에 있고 자연계의 모든 것보다도 상위에 있으며, 이해할 수 없는 것이나 기적처럼 보이는 것보다도 상위에 있다는 생각을 버려서는 안 돼. 그렇지 않으면 인간이 아니라 무엇이나 무서워하는 쥐와 마찬가지니까."

제냐는 내가 예술가로서 대단히 박식하고, 알지 못하는 것도 정확히 추측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영원이라거나 아름다움이라는 영역으로, 즉 나라면 알 듯한 그 고상한 세계에 인도받고 싶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리하여 나와 만날 때는 열심히 신이나 영원한 생명이나 기적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나로서도 자신이나 자신의 상상력이 죽음과 동시에 영원히 사라져버리는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싫었기 때문에, '그렇지, 인간은 불멸이야'라거나 '그렇지,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은 영원한 생명이야' 하는 식으로 대답하는 것이었다. 제냐는 귀를 기울여 이를 솔직히 믿었고, 증거를 구하거나 하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오려다가 갑자기 그녀는 멈춰 서서 말했다.

"리이다 언니는 훌륭한 사람이에요, 그렇지 않아요? 나는 언니가 참 좋아요. 언니를 위해서라면 언제나 목숨을 바칠 수 있어요. 하지만 어째서."

하고는 내 옷소매에 손을 갖다 대었다.

"어째서 당신은 언제나 언니와 논쟁을 하시는 거예요? 어째서 항상 노하고 계시는 거예요?"

"그건 언니가 잘못했으니까 그렇지."

제냐는 부정하듯이 고개를 저었는데 그 눈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모를 일뿐이군요!"

그녀는 중얼거렸다.

그때 리이다는 외출했다가 마악 돌아오는 길이어서, 말채찍을 손에 들고 현관에 서서 그 균형 잡힌 아름다운 몸에 햇빛을 받으며 하인에게 무엇인가 지시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는 바쁜 듯이 큰소리로 이야기하면서 두세 사람의 환자를 진찰하고 이것이 끝나자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는지 심각한 얼굴을 하고 이방 저방 돌아다니며 벽장문을 열어보고는 간이이층으로 올라가버렸다. 점심때가 되어 모두들 오랫동안 리이다를 찾거나 기다리거나 했으나 그녀가 식탁에 나타난 것은 우리가 수프를 끝낼 무렵이었다. 이러한 사소한 일들을, 왜 그런지 나는 낱낱이 기억하고 또 그것을 추억하고 있다. 특별히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왜 그런지 그날의 일은 지금도 확실히 기억한다. 점심이 끝나자 제냐는 깊숙한 팔걸이의자에 파묻혀 책을 읽고 있었고 나는 테라스 밑의 층계에 걸터앉았다. 우리는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하늘에는 구름이 덮이고 가랑비가 내리기 시작하였다. 바람도 그쳐 찌는 듯이 더운데, 이러한 날씨가 하루 종일 계속될 것 같았다. 졸린 듯한 얼굴을 한 에까체리나 빠블로브나가 부채를 들고 우리가 있는 테라스로 나왔다.

"아아, 엄마."

제냐는 어머니 손에 키스하면서 말했다.

"낮잠은 몸에 해로워요."

이 모녀는 서로 깊이 사랑하고 있었다. 한 사람이 뜰에 나가면 다른 한 사람은 곧 테라스에 나와 정원수를 바라보면서 "제냐!"라거나 "엄마, 어디 계세요?" 하고 부르는 것이었다. 둘은 언제나 함께 기도하고 같은 신을 섬기며 가만히 있을 적에도 서로를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사람을 대하는 태도도 꼭 같았다. 에까체리나 빠블로브나도 곧 나와 친숙해져서, 내가 2, 3일 얼굴을 내밀지 않으면 사람을 보내 안부를 묻는 것이었다. 내가 그린 스케치를 보고 감탄하는 방법도 딸과 같아서, 미슈스와 마찬가지로 장광설을 늘어놓으며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고 때로는 가정의 비밀을 털어놓았다.

그리고 이 어머니는 자기 큰딸을 깊이 존경하고 있었다. 리이다는 결코 어머니에게 아양을 떨지 않고 언제나 진지한 이야기밖에 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 큰딸은 자기만의 독특한 생활을 하기 때문에 모친이나 작은 딸에게는 신성하고 어쩌면 수수께끼 같은 존재였다. 마치 언제나 자기 선실에 틀어박혀 있는 해군 제독이 수병에게 그렇게 보이는 것과도 같았다.

"우리 리이다는 훌륭한 사람이에요."

어머니는 곧잘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세요?"

보슬비가 내리고 있는 지금도 우리는 리이다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 애는 훌륭한 사람이에요."

어머니는 이렇게 말하면서 겁먹은 듯이 주위를 살피며, 마치 비밀이라도 털어놓듯이 목소리를 죽여 말하기 시작했다.

"그런 애는 북을 치며 찾을래야 찾지 못할 사람이지만 사실은 걱정이 없지도 않아요. 학교나 구급상자나 팜플렛도 중요하지만 일에는 정도라는 것이 있지 않겠어요? 그 애도 벌써 스물넷이니 지금쯤은 자기 일도 생각해야 될 처지인데, 팜플렛이나 구급상자에 열을 올리고 있으면 나이 먹은 것을 잊기 쉽지요...... 역시 시집을 가야 할 텐데."

독서에 열중하여 머리가 흐트러지고 얼굴이 창백해진 제냐가 문득 고개를 들어 어머니를 바라보고는 혼자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엄마,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이에요."

그리고는 다시 독서에 열중했다.

벨로끄로프가 소매 없는 외투에 수놓은 셔츠를 입고 나타났다. 우리들은 크로케와 로온테니스를 즐긴 후 어두워져서야 오랫동안에 걸쳐 저녁식사를 하였다. 리이다는 학교나 군 전체를 농락하고 있다는 바라긴의 이야기를 다시 끄집어냈다. 그날 저녁 보르챠니노바네 집을 떠나면서 나는 길고 무위한 하루라는 인상을 마음에 품으면서, 또한 얼마나 길던지 이 세상은 언젠가는 끝난다는 것을 슬프게도 의식하고 있었다. 제냐가 우리를 문께까지 바래다 주었으나, 이 처녀와 아침부터 밤까지 함께 지냈던 탓인지 막상 헤어지자니 어딘지 모르게 적적한 것 같아, 이 사랑스러운 집안이 나에게는 아주 가까운 존재가 된 것같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여름에 들어서서 처음으로 작품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보게, 한 가지 묻겠는데 어째서 자네는 그토록 지리하고 정기가 없는 생활을 하고 있는가"고 나는 돌아오면서 벨로끄로프에게 물었다.

"그야 내 생활도 지리하고 뜻없고 단조하지만, 그건 내가 환장이이기 때문이야. 나는 비정상적인 사람으로 젊어서부터 질투나 자기 불만, 또는 자기 일에 대한 불만으로 가득 차 있어서 언제나 가난하고 부랑자같이 보이지만 자네는 다르지 않은가. 자네는 건강하고 정상적인 사람인 동시에 지주이며 귀족이 아닌가. 그러한 자네가 어째서 이같이 쓸모없는 생활을 하고 있나. 어째서 인생의 희열을 맛보려고 하지 않나. 가령 말일세. 어째서 지금껏 리이다나 제냐 같은 처녀에게 연정을 느끼지 않는 것인가?"

"내가 다른 여자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네가 잊고 있는 탓이지."

하고 벨로끄로프가 대답했다.

그것은 별채에서 동거하고 있는 여자 친구 류보삐이 이바노바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먹이를 잘 먹어 살찐 거위처럼 볼품없이 생긴 그 부인이 비이즈를 배합한 러시아 옷을 입고 언제나 양산을 받고 들을 산보하는 모습이나, 하녀가 늘상 식사요, 차요, 하고 이 부인을 부르고 있는 꼬락서니를 나는 매일같이 보고 있었다. 서너 해 전 별채의 한 방을 별장으로 빌린 이후 이 부인은 그대로 벨로끄로프네 집에 영원히 눌러 있을 작정인 것 같았다. 십 년이나 손위인 부인에게 잔뜩 덜미를 잡히고 있었기 때문에 벨로끄로프는 외출하는 데도 일일이 허가를 받지 않으면 안 되었다. 때때로 이 부인은 남자와 같은 음성으로 울어대곤 하는 것이었다. 이럴 때 나는 곧 사람을 보내어 울기를 그치지 않으면 내가 이 집을 나가겠다고 엄포를 놓는데, 이렇게 하면 그녀는 곧 울기를 그치는 것이었다.

집에 올라오자 벨로끄로프는 소파에 걸터앉아 심각한 얼굴로 생각에 잠겼는데, 반대로 나는 마치 사랑을 하고 있는 사람처럼 가벼운 흥분을 느끼면서 방안을 왔다 갔다 하기 시작했다. 보르챠비노바네 집 이야기를 하고 싶어 못 견디었기 때문이다.

"리이다가 좋아할 사람은 자기와 마찬가지로 병원이나 학교에 열중하고 있는 군회원뿐이겠지."

하고 내가 말했다.

"저런, 저런 여자를 위해서라면 군회의원이 되는 것만이 아니라, 옛날이야기에 나오는 쇠신발을 신고 다녀도 괜찮을 것 같은데. 그런데 미슈스는? 너무나 매력이 있지 않은가, 그 미슈스가 말일세!"

벨로끄로프는 '-' 소리를 섞어가며 길게 이 시대의 병폐- 즉 페시니즘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나와 논쟁이라도 하고 있는 듯한 확신 있는 말투였다. 몇 천리나 계속되는 황량하고 단조로운 벌판도 이처럼 언제까지나 돌아갈 줄 모르고 지껄여대는 우울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페시미즘도 아니고, 그렇다고 옵티미즘도 아닐세."

하고 나는 앙탈이 나서 말했다.

"백 사람 가운데 아흔아홉 사람이 바보라는 것이 문제일세."

벨로끄로프는 자기를 두고 하는 말임을 깨닫고 화가 나서 나가 버렸다.

 

3

"말로죠모비 마을에 공작님이 손님으로 오셔서 어머니께 문안드리더군요."

어디 갔다 돌아온 리이다가 장갑을 벗으면서 어머니께 말했다.

"여러 가지 재미있는 말씀을 하셨어요...... 말로죠모비에 진료소를 세우는 일을 한 번 더 현회에 제안하겠다고 약속하셨으나, 그다지 기대는 하지 말라고 그러시더군요."

그리고는 나에게 시선을 돌리며 리이다가 말했다.

"미안합니다. 이런 말을 끄집어내서. 당신에게는 그다지 흥미가 없으실 테죠."

나는 은근히 화가 치밀었다.

"왜 재미가 없겠어요."

이렇게 되물으면서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내 의견 같은 것은 듣고 싶지 않겠지만, 분명히 말해선 나는 그 문제에 대단한 관심을 갖고 있지요."

"정말 그런가요?"

"정말이지요. 내 생각으로는 말로죠모비에 진료소를 세울 필요가 전혀 없다고 봅니다."

내 저의가 전해졌는지, 리이다는 눈을 가늘게 떠 나를 바라보면서 물었다.

"그럼 뭐가 필요할까요. 풍경화일까요?"

"풍경화도 필요 없소. 거기에는 아무것도 필요한 게 없어요."

리이다는 장갑을 다 벗더니 금방 배달된 신문을 펼쳤다. 조금 있다가 분명히 자기 감정을 억제하면서 조용히 말했다.

"지난 주 안나가 난산을 해서 죽었는데 만일 근처에 진료소가 있었더라면 살았을 거예요. 풍경화가 여러분도 이런 일에 대해서는 어떤 신념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그 점에 대해서는 나에게도 명확한 신념이 있어요. 정말입니다."

하고 내가 대답하자 리이다는 듣기도 싫다는 듯이 신문으로 얼굴을 가렸다.

"내가 보기엔 진료소나 학교나 도서관, 또 구급상자 같은 것은 현재의 체제 밑에서는 인간의 노예화에 도움을 줄 뿐이지요. 민중은 커다란 쇠사슬로 꼭 묶여 있는데, 당신은 그 쇠사슬을 끊으려고는 않고 새로운 쇠사슬의 고리를 끼우고 있는데 지나지 않는다- 이것이 내 생각이오."

리이다는 눈을 들어 나를 바라보며 조롱하듯 미소 지었으나, 나는 내 생각의 요점을 잡으려고 노력하면서 말을 계속했다.

"중요한 것은 안나가 난산으로 죽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 안나라거나 마아브라라거나 뻬라게이야라거나 하는 사람이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허리를 구부리고 과로에 시달리며, 굶주리고 병든 자기 자식을 평생 생각하고, 죽음과 질병에 떨면서, 시들고 늙고 불결과 악취 속에서 죽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자녀도 어른이 되면 그와 꼭 같은 일을 되풀이하며, 그렇게 해서 몇 백 년이 지나도 몇 억의 인구가 단 한 조각의 빵을 위해 끊임없이 공포를 느껴가며 동물보다도 못한 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경우 가장 무서운 것은 뭔지 압니까? 영혼에 관해 생각할 여유가 없다는 것, 자기가 신의 모습과 같이 창조되었다는 것을 생각할 여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굶주림과 추위와 동물적인 공포, 끝없는 노동이 마치 눈사태처럼 정신활동에의 길을 막는 것입니다. 인간을 동물과 구별시키고 인간에게 있어서 삶의 보람을 느끼게 하는 유일한 길을 막아버리는 것입니다. 당신은 병원이나 학교를 세워 그들을 돕겠다고 나섰지만 그러한 방법으론 그들을 구속에서 해방시키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더욱 노예화하는 일이 됩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생활에 새로운 편견을 불어넣음으로써 그들의 필요물을 더하게 하기 때문이죠. 그들은 고약이나 팜플렛의 대금을 군에 납부해야 하고, 그렇게 되면 더욱 더 일을 많이 해야 한다는 것은 새삼 말하지 않아도 되겠지요."

"당신과 논쟁할 기분이 나지 않아요."

신문을 내려놓으며 리이다가 말했다.

"그런 이야기는 전에도 들은 일이 있어요. 그러나 한 가지 말씀드릴 것은 팔짱을 끼고 그냥 앉아 있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류 전체를 구할 수는 없어요. 물론 잘못이 많겠지만 할 수 있는 것은 하는 것이 옳아요. 교양 있는 인간에게 가장 거룩하고 신성한 일은 이웃에 봉사하는 일이므로 우리도 가능한 한 봉사하려고 하고 있어요. 그것이 당신에게는 못마땅한 일이겠지만 모든 인간에게 마음에 들 일은 할 수 없는 것이에요."

"정말 그래, 리이다. 정말이야."

하고 어머니가 말했다.

리이다 앞에서 이 부인은 언제나 어려워하고, 이야기할 적에도 무언가 잘못된 말을 하지 않았나 하고 걱정스럽게 딸의 안색을 살피는 것이었다. 그리고 절대로 딸의 의견에 거역하지 않고 언제나 정말이야, 리이다, 정말 그래, 하고 맞장구를 치는 것이었다.

"농부에게 글을 가르치거나 되지 못한 교훈이나 격언을 쓴 팜플렛이나 진료소 같은 것은 무지나 사망률을 낮추지 못합니다. 이 집의 창문에서 흘러나가는 빛이 넓은 정원 전체를 비추지 못하는 것과 한가지죠."

하고 내가 말했다.

"당신은 무엇 하나도 주지 못하고 있어요. 그들의 생활을 간섭함으로써 새로운 욕구와 새로운 노동의 필요성을 낳고 있을 뿐입니다."

"원 저런! 하지만 무언가 일을 할 필요는 있잖아요?"

하고 리이다는 앙탈이 나서 말했다. 그 어투에서 그녀가 내 생각을 저속한 것으로 보고 경멸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필요한 것은 인간을 고통스러운 육체노동으로부터 해방시키는 일입니다."

하고 내가 말했다.

"인간이 한평생 부뚜막이나 외양간이나 밭에서 지내지 않아도 살 수 있도록, 영혼이나 신에 관해 생각할 만한 시간을 갖도록, 그리고 각자의 정신적 능력을 가능한 한 광범위하게 발휘시킬 수 있도록, 인간의 짐을 가볍게 하고 숨 쉬게 할 수 있도록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의 사명을 정신활동에- 생활의 진실과 의미를 끊임없이 찾아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잡스런 동물적 노동을 불필요한 것으로 만들고 사람들에게 자유를 느낄 수 있도록 해보세요. 그러면 팜플렛이나 구급상자가 본질적으로 얼마나 불필요한 것이란 것을 알게 될 거예요. 자신의 참된 사명을 자각한 인간을 만족시키는 것은 종교나 과학이나 예술뿐이지, 그같이 구접스러운 것은 아니에요."

"노동으로부터 해방시킨다고요!"

하며 리이다는 크게 웃었다.

"그런 일이 가능할지 모르겠네."

"가능합니다. 그들의 노동을 몇 분의 일이건 맡으면 됩니다. 만약 도시나 농촌에 살고 있는 사람이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인류 전체가 육체적 노동을 하기 위해 소비하는 노동을 서로 균등히 분배한다고 하면, 아마 우리는 하루에 많아야 두세 시간 일하면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부자나 가난뱅이가 모두 하루에 단 세 시간 일하고 나머지는 자유로운 시간을 갖는다고 상상해 보세요. 나아가서 우리가 될수록 자기 육체에 의존하는 일을 줄이고 노동을 감소시키기 위해 노동을 대신할 기계를 발명하고 우리의 필요물을 최소한 줄였을 경우를 생각해 보세요. 그리고 자기 자신을 단련하고 굶주림이나 추위를 무서워하지 않도록 자식들을 단련시키면, 그때는 이미 안나나 마아브라나 뺄라게이야와 같은 자식의 건강을 염려하고 끊임없이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지지 않겠어요. 우리가 의사의 신세를 지지 않고 약방이나 담배공장이나 주정 공장을 갖지 않을 경우를 상상해 보세요- 결국 얼마나 많은 자유 시간이 우리에게 돌아올 것인가요. 우리는 모두 그 여가를 과학이나 예술에 바치게 되지 않겠어요? 농부들이 가끔 공동으로 도로 수리를 하는 것처럼, 우리도 모두 힘을 합쳐 생활의 의미와 진실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나는 확신합니다마는- 곧 진실이 발견되어 인간은 끝없이 마음을 괴롭히는 죽음의 공포로부터, 아니 죽음 그 자체로부터도 도피할 수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당신의 말에는 모순이 있어요."

하고 리이다가 말했다.

"과학, 과학 하시면서 한편으로는 글 가르치는 것을 부정하고 계시는군요."

"술집의 간판이나 하찮은 팜플렛을 읽을 가능성밖에 없는 그런 가르침 말입니까. 그 정도의 능력이라면 우리나라에선 저 류리크 때부터 있었고, 고골리의 뻬뜨르쉬까조차 글을 압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 농촌은 류리크 시대 그대로인 걸요. 필요한 것은 읽고 쓰는 능력이 아니라 정신적 능력을 충분히 발휘하기 위한 자유입니다. 초등학교가 아니라 대학이 필요합니다."

"당신은 또 의학도 부정하셨지요?"

"그렇소. 의학이란 것은 자연현상으로서의 질병을 연구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지 질병의 치료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치료하려면 질병을 치료할 것이 아니라 그 원인을 고쳐야 합니다. 근본원인인 육체노동을 제거해 보세요, 질병은 저절로 없어질 것입니다. 치료를 위한 과학 같은 것을 나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나는 흥분하여 계속 떠들었다.

"과학이나 예술이 참된 것이 되려면 일시적 개별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하고 일반적인 목적을 가져야 합니다. 생활의 진실이나 의미를 탐구하고 신이나 영혼을 탐구해야 할 과학과 예술이 그때그때의 필요에 따라 약방이나 도서관에 처박혀 있게 된다면, 그것은 오직 인생을 복잡하게 하고 번뇌를 가중시켜 줄 뿐이지요. 우리나라에는 의사나 약제사나 법률가가 많이 있고, 글을 아는 사람도 늘어가고 있지만, 생물학자나 수학자나 철학자나 시인은 전혀 없어요. 지성의 모든 게, 정신적 에너지의 모든 것이 일시적인 순간적인 필요를 위해 허비되고 만다...... 학자나 작가나 예술가는 일에 바쁘고, 그들 덕으로 생활은 날마다 편해지고 육체적인 요구가 증대되는 한편 진실에의 길은 여전히 멀고, 인간은 여전히 잔인하고 불결한 동물의 경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모든 인류의 대다수는 퇴화하여 영원히 생활능력을 상실하게끔 되어 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예술가의 생활이란 아무 의미도 없어요. 재능이 있으면 있을수록 예술가가 하는 역할은 기묘한 것, 불가사의한 것이 되고 말지요. 잘 생각해 보면 알겠지만, 예술가는 현재의 체제를 지지하면서 잔인하고 불결한 동물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 일을 하고 있어요. 그래서 나는 일을 하기 싫어하는 것이고 앞으로도 하지 않을 거예요......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어요. 이따위 세상은 지옥에나 떨어졌으면 좋겠는데!"

"미슈스야, 저쪽에 가 있어."

하고 리이다가 동생에게 말했다. 내 이야기가 젊은 처녀에겐 해롭다고 느꼈기 때문이리라.

제냐는 슬픈 듯이 어머니와 언니를 바라보면서 나가버렸다.

"그처럼 훌륭한 말씀을 하는 경우는 대개 자기 무관심에 대해 변명할 경우예요."

하고 리이다가 말했다.

"병원이나 학교를 부정하기란 치료하거나 가르치는 것보다는 쉬운 일이예요."

"정말이야, 리이다. 정말 그래."

하며 어머니가 맞장구를 쳤다.

"일을 하지 않겠다고 강조하시는 걸 보면."

하면서 리이다는 계속했다.

"아마 자기 능력을 높이 평가하고 계시는 모양이군요. 자아 그 이상 논쟁을 그만두기로 해요. 언제까지나 의견이 일치하지 못할 테니까요. 왜냐하면 지금 당신이 그토록 저주하고 있는 도서관이나 약국 가운데서 가장 하찮은 것이라도, 세계의 어느 풍경화보다도 가치가 있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죠."

그리고는 어머니를 바라보며 전혀 다른 어투로 말을 하는 것이었다.

"공작님은 아주 마르셨어요. 집에 오셨을 적과는 전혀 달라지셨어요. 이번에 비시로 가신다더군요."

어머니에게 공작 이야기를 한 것은 나와 말다툼을 하기 싫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리이다의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다. 그 흥분을 감추려고 그녀는 마치 근시라도 되는 듯이 테이블에 이마를 바짝 갖다 대고 신문을 읽는 척했다. 내 존재가 불쾌한 것이다. 나는 작별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4

밖은 고요했다. 연못 저쪽 마을은 모두 잠들어 등불 하나 보이지 않고 다만 연못 위에 푸르스름한 별빛이 비치고 있을 뿐이었다. 사자를 조각한 문 곁에 제냐가 꼼짝도 않고 서 있었다. 나를 전송하려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잠들었나보군,"

나는 어둠 속에서 그녀의 얼굴을 확인하려 하면서 말했다. 나를 자세히 쳐다보고 있는 슬픈 듯한 눈이 보였다.

"술집 아저씨도 말도둑도 모두 잠자고 있는데, 우리들처럼 기품 있는 인간은 서로 상대를 노하게 하거나 논쟁이나 하고 있으니."

쓸쓸한 8월의 밤이었다. 그것은 이미 가을을 느끼게 하는 데서 오는 쓸쓸함이었다. 달은 검붉은 구름에 싸인 채 떠오르기 시작하여, 길과 길 양쪽에 심은 가을 채소밭을 비추고 있었다. 유성이 한없이 흐르고 있었다. 제냐는 나와 함께 걸으면서 애써 하늘을 보지 않으려 했다. 어쩐지 유성이 무섭게 여겨져 그것을 보기 싫다고 했다.

"당신의 말씀이 옳다고 저는 생각해요."

그녀는 습기 찬 밤공기로 인해 몸을 떨면서 말하는 것이었다.

"모두 힘을 합쳐 정신적인 활동을 시작한다면 어떤 일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물론이지. 우리는 최고의 동물이니까. 만일 참으로 인간이 가진 모든 재능의 힘을 의식하여 최고의 목적을 위해서만 산다면 우리는 신의 경지에까지 이르게 되겠지. 그러나 그런 일은 절대로 없을 거야- 인간은 퇴화되어 재능이란 것은 흔적도 없이 될 테지."

문이 보이지 않게 되자 제냐는 멈춰 서서 가만히 악수를 청했다.

"안녕히 주무세요."

하고 그녀는 떨면서 말했다. 어깨를 덮고 있는 것은 블라우스 한 장뿐으로 추위에 몸을 움츠리고 있었다.

"내일도 또 오세요."

자신에게나 남에게나 모두 만족은 느끼지 못하고 이렇게 답답한 기분으로 혼자 남아 있자니 나 자신도 무서움을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나도 유성을 보지 않으려 했다.

"좀 더 함께 있었으면."

하고 나는 말했다.

"제발 부탁이야."

나는 제냐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녀는 언제나 나를 바래다주었고 귀여운 눈으로 따뜻하게 대해 주었기 때문에 사랑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얼마나 감동적이고 멋있는 것일까. 그녀의 창백한 얼굴, 가느다란 목덜미, 가는 팔, 그 연약함, 무위의 나날, 그리고 탐독하는 책! 그렇다면 지성은? 이 쳐녀에게는 보통이 아닌 지성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남몰래 생각하며 그 넓은 시야에 감탄하곤 하는 것이었는데, 그것은 아마도 그녀의 사고방식이 나를 싫어하는 근엄하고 아름다운 리이다의 사고방식과 다르기 때문일 것이리라. 나는 화가로서 제냐의 호감을 받고 있으며 또 내 재능으로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나는 이 처녀만을 위해 그림을 그리겠다고 깊이 생각했다. 그리고 이 처녀가 내 작은 여왕이 되어 나와 함께 이들 수목이나 들이나 안개나 저녁놀을, 이 기적같이 매력 있는 자연 그 자체를 지배하는 모습을 공상하는 것이었다. 이 자연 속에서 이때까지 나는 절망적으로 고독한 국외자로서만 자기를 느낄 뿐이었는데.

"조금만 더 함께 있어줘."

하고 나는 부탁했다.

"제발 소원이니......"

나는 외투를 벗어 그녀의 싸늘한 어깨에 걸쳐 주었다. 그녀는 남자의 외투를 입어 우습게 보일까봐 웃으면서 이것을 벗어 버렸다. 그때 나는 그녀를 끌어안고 얼굴과 어깨와 손에 키스의 비를 퍼부었다.

"내일 다시 오세요!"

그녀는 이렇게 속삭이며 밤의 고요를 깨뜨리기가 무섭다는 듯이 가만히 나를 포옹했다.

"우리 집에서는 서로 비밀이 없으니 곧 어머니와 언니께 이야기해야 해요...... 그런데 무서워요. 엄마는 괜찮아요. 엄마는 당신을 좋아하니까. 하지만 리이다 언니는!"

그녀는 문으로 달려갔다.

"안녕!"

둘은 한꺼번에 소리쳤다.

그로부터 2분가량 그녀가 달려가는 발소리가 들렸다. 나는 집에 돌아갈 기분이 나지 않았고 또 급히 돌아가야 할 이유도 없었다. 그래서 잠시 동안 생각하다가 그녀가 살고 있는 집을 다시 한 번 보려고 몰래 되돌아섰다. 소박하고 고풍스런 이 옛집이 간이이층의 창을 눈처럼 빛내어 나를 쳐다보며 모든 것을 이해해 주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나는 테라스 앞을 지나 테니스 코트 곁의 어둑한 데에 있는 느릅나무 그늘에 앉아, 거기서 집을 바라다보았다. 미슈스의 방이 있는 간이이층의 창에 밝은 불빛이 켜지더니 그것이 부드러운 녹색으로 변했다. 램프에 갓을 씌운 것이리라. 그림자가 움직였다...... 내 마음은 부드러움과 안락과 만족감에 가득찼다. 나도 사랑을 느끼고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는 만족감이었다. 그와 동시에 지금 같은 이 시간에 나에게서 몇 십 발자국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그 집의 한 방에, 나를 싫어하고 미워하고 있을지조차 모르는 리이다가 있다는 것을 생각하니 어딘지 모르게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이었다. 나는 계속 거기 앉아서 제냐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간이이층에서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한 시간 가량 지났다. 녹색 불빛도 꺼지고 사람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달은 이미 중천에 떠서 잠든 뜰과 오솔길을 비추고 있었다. 집 앞 화단에 핀 다알리아나 장미가 모두 같은 빛으로 보였다. 제법 추워지기 시작했다. 나는 뜰을 나와 길에 떨어져 있던 외투를 주워 입고, 천천히 집으로 돌아갔다.

이튿날 점심을 마치고 보르챠니노바네 집에 가보니 뜰에 면한 유리문이 열려 있었다. 금시라도 화단 저쪽의 테니스 코트라거나 가로수길 어딘가에서 제냐가 모습을 나타내지나 않을까, 아니면 어느 방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지나 않을까 하고 기다리면서 나는 잠시 테라스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는 객실과 식당에 가보았다. 어디에나 사람 그림자조차 없었다. 나는 식당에서 긴 복도를 지나 현관까지 갔다가 다시 되돌아가 보았다. 복도에는 몇 개의 도어가 있었는데 그 하나에서 리이다의 목소리가 들렸다.

"옛날 옛적 어느 곳에서...... 신령님이 까마귀에게......"

하면서 리이다는 큰소리로 천천히 낭독하고 있었다. 아마도 필기를 시키는 모양이었다.

"신령님이 까마귀에게...... 치즈를 한 조각...... 주었습니다...... 옛날 옛적에...... 누구세요?"

하고 내 발자국 소리를 듣고는 갑자기 소리 질렀다.

"접니다."

"아아, 미안해요. 지금 나갈 수 없어요. 다샤의 공부를 지도하고 있는 중이어서."

"에까체리나 빠블로브나는 뜰에 있습니까?"

"아뇨. 오늘 아침 동생을 데리고 빠자 현에 있는 백모네 집에 갔어요. 겨울에는 아마 외국에 갈 것이라 여겨집니다마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 리이다는 다시 낭독을 계속했다.

"옛날 옛적 어느 곳에서...... 신령님이 까마귀에게...... 치즈를 한 조각 주었습니다...... 다 썼나요?"

나는 현관으로 나와 거기에 선 채 아무 생각도 없이 연못과 마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리이다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치즈를 한 조각...... 옛날 옛적 어느 곳에서 신령님이 까마귀에게......"

여기 처음 왔을 때의 길을 거꾸로 더듬으면서 나는 이 집을 뒤로 하였다. 앞뜰에서 정원으로, 다시 집 앞을 거쳐 보리수의 가로수 길을...... 그때 한 소년이 나를 뒤쫓아 와서 편지를 내밀었다.

'모든 것을 언니에게 말했더니 어떻게 해서라도 헤어져야 한다고 말했어요'라고 그 편지에는 씌어 있었다.

'제멋대로 놀아나 언니를 슬프게 만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제발 행복하게 살아 주세요. 저를 용서해 주세요. 저와 어머니가 얼마나 고통스럽게 생각하는지 이해하실 수 있겠어요?'

그리고 나서 어두운 느릅나무의 가로수 길, 무너진 담...... 그 무렵 호밀 꽃이 피고 메추라기가 울고 있던 들에는, 지금 소와 발이 묶인 말들이 방목되고 있었다. 언덕 여기저기에는 가을에 파종한 보리로 파랗게 물들어 있었다. 나는 취했다. 깨어난 것 같은 인상적인 기분에 사로잡혀, 보르챠니노바네 집에서 떠들어댄 것이 부끄러워지고 산다는 것이 그전처럼 지리하게 느껴졌다. 집에 돌아오자 나는 짐을 꾸리고 그날 밤 뻬쩨르부르그로 떠났다.

그 이후 보르챠니노바네 집 사람들과는 만나지 못했다. 다만 최근 크리미아로 가는 기차 안에서 벨로끄로프와 우연히 만난 일이 있다. 그는 여전히 소매 없는 외투에 수놓은 셔츠를 입고 있었다. 그는 '재미 좋습니까' 하고 묻고는 내가 안부를 묻자 '덕택으로' 하며 대답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여러 가지 세상 이야기를 했다. 벨로끄로프는 자기 영지를 팔아 좀 작은 땅을 류보삐이 이바노브나의 명의로 샀다고 했다. 보르챠니노바네 집 소식은 단편적이었다. 벨로끄로프의 말에 따르면 리이다는 여전히 세르꼬쁘까 마을에 살면서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친다고 한다. 그리고 자기에게 공명하는 사람들로 서서히 서클을 만들어 드디어 강력한 조직을 이루고는, 최근 군회선거에서 그때까지 군 전체를 주름잡고 있던 바라긴을 내몰았다고 한다. 제냐에 대해서 벨로끄로프가 가르쳐준 것은, 집에는 없고 어디에 사는지도 모른다는 것뿐이었다.

지금 나는 간이이층이 있는 집에 관해 거의 잊고 있으나 가끔 그림을 그릴 때나 책을 읽을 때 갑자기 그 집 창에 비친 녹색 등불이나 연심(戀心)을 품고, 추위에 손을 비비면서 밤늦게 들판을 걸어 집에 돌아올 때의 발걸음 소리 같은 것을 문득 생각하곤 한다. 그리고 이것은 더욱 드문 일이지만 고독에 빠져 적적함을 참지 못할 때 멍하니 추억에 잠겨 있노라면, 어쩐지 그녀도 나를 생각하고 나를 기다리며, 이윽고 우리는 다시 재회하지나 않나 하는 생각이 조금씩 떠오르는 것이다......

미슈스, 그대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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