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동안의 이별
샤오ㅉ
솔개가 하늘을 맴돌고 있으나 땅에는 병아리 한 마리 얼씬거리지 않는다. 산등성이의 울창한 수풀 색깔은 어느새 울긋불긋하다. 어떤 것은 노랗게 변했고 산느릅나무와 산포도잎은 붉은 암녹색을 띠고 있다. 저 멀리 들판에는 아직도 가을걷이하는 사람 하나 보이지 않는다.
8월 말이니 예년 같으면 한창 추수할 때이다. 고개 숙인 곡식들마저 아무런 기쁨도 없는 듯 다 자라지 않았을 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논밭에서 자라고 있다. 소작인들은 왕산뚱 대감 댁에서 발생한 기적 같은 이야기들을 주고받기에 바빴다. 특히 그날 밤 왕산뚱 대감 댁에서 풀려난 농민들이 더욱 그랬다. 청년 농민들의 마음속에는 알 수 없는 기운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더 이상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낫을 소총 삼아 어깨에 메고 걸어도 보며, 입으로는 그날 밤에 배운 말을 흉내내어 보았다.
"총을 버려! 손들어!"
서로 짓궂게 장난을 쳤다. 때로는 뜻하지 않게 낫에 손을 베어 피를 흘리면서도 좋아라 소리치는 것이었다.
"동지들! 부상을 당했구먼!"
자신도 한번 혁명군이 되어 보겠다는 일념뿐이었다. 그들은 혁명군이 도대체 어떤 것인지는 모르지만 무슨 일을 하든 농사꾼보다는 낫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노인네들은 탄식만 할 뿐, 이 길들여지지 않은 젊은 야생마들에게 농기구를 씌워 지주들의 논밭을 갈며 지주들을 풍요하게 해줄 힘이 없었다. 노인들은 하루도 편할 날이 없는 자신들의 처지가 슬펐다. 평생을 질질 끌려다니다시피 한 자신들은 물론, 반평생을 무의미하게 보낸 자식들 역시 집은 커녕 한 뼘의 땅뙈기도 마련하지 못했다. 진흙과 이엉을 짓이겨 지은 허름한 집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희망은 절벽이었다. 눈앞에 곡식을 두고도 추수하지 못하고, 논밭을 가는 소와 말도 한 마리 두 마리 없어지더니 이젠 한 마리도 남지 않았다. 병아리도 오가던 관병들이 닥치는 대로 잡아먹어 씨를 말렸다. 노인네들은 한자리에 모이기만 하면 산등성이 아래 왕산뚱 대감 댁에 묵고 있는 사람들이 도대체 무얼 하는 사람들이냐고 의견이 분분하였다. 관군 같지도, 마적 같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젊은이들은 날이면 날마다 그곳으로 몰려갔다가 밤이 으슥해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돌아온 뒤에는 큰 소리로 웃으며 알아듣지 못할 노래를 소리쳐 불렀다.
"관에 알려야 하지 않을까?"
쑨싱 노인이 제의했다.
"관에 알리면 뭘 하나? 관군이라고 마적보다 나을 게 없어. 지금 관군 속에는 일본군이 있다네. 관에 알리는 놈부터 잡아 족칠걸."
누군가 그것을 반대했다.
"그러면 이일을 대체 어떻게 하면 좋은가? 곡식을 눈앞에 두고도 거두어들일 수 없고, 청년들은 날로 난폭하게 변해 가는데... 마을 청년들은 놈들의 꾐에 빠져 반란을 일으킬 거야. 구국이니 일본을 몰아내느니 하고 떠들어대면서 말야! 이 못난 놈들이 집에만 돌아오면 주둥이를 놀리니 이게 반란이 아니고 무엇이겠나? 남의 땅이 분명한데 우리땅이라고 우기는 거야. 그러면 오죽 좋겠냐마는 관가에 붙들려 가면 총살감이야. 보통 사람도 그런 말 했다간 총살당하는 판인데 하물며... 내 생각에는 관에 알리는 게 좋겠어. 우린 선량한 백성으로 족해. 우리 백성은 그저 누가 황제가 되든 세금만 제때 제때 바치면 그만이고, 누구네 논밭을 부치든 지주에게 도조(남의 논밭을 빌려서 부치고 그 세로 해마다 무는 벼)만 바치면 그만 아닌가. 밥이 없으면 굶기밖에 더하겠어? 중국이니 일본이니 하지만 지금 선통 황제가 즉위하지 않으셨는가. 진짜 천자가 섰으니 천하가 태평해질 걸세."
쑨싱은 자기네 집 앞마당에서 계속해서 자신의 소견을 이야기했다. 나이 든 농부들이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대부분 장성한 자식들을 둔 사람들이었지만 그 중에서도 쑨 노인이 자식을 가장 많이 두었다. 그는 관에 알릴 것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의 넷째 아들인 뚜사는 왕산뚱 대감 댁에서 집짐승을 치는 일을 하고 있었는데, 왕산뚱 대감 댁에서 관에 알리러 보낸 뒤로 지금까지 돌아오지 않고 있고, 또 관군도 몰려오지 않아 쑨 노인은 내심 초조해 하고 있었다.
"뚜사는 왕산뚠 대감 심부름으로 관에 알리러 가지 않았나? 며칠이 지났는데 왜 여태 돌아오지 않지?"
"여보게, 그런 소릴랑 입 밖에 내지도 말게."
쑨 노인은 두손을 비비며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허리를 구부리고 손을 바르르 떤다.
"제발 그런 소릴랑 입 밖에 내지도 말게! 만약 그 사람들 귀에 들어 가면...우린 모두...총살이야! 그 사람들은 관에 알리러 간 사람이 있다는 것도 모르고 있는 것이 틀림없어...뚜사가 내 아들이라는 것도 모를 걸세. 멋모르고 날뛰는 청년들이 발설할까 그게 걱정이네. 읍내에 있는 얼뚱, 따뚱 댁이 세도깨나 쓰지 않나. 일본인 통역관을 아니까 관군을 끌고 올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그렇다고 관군이 꼭 이기리라는 보장도 없네. 관군이 마적을 치는 것을 여러 번 보았네만, 그때마다 마적에게 미리 귀뜀을 해서 마적이 다 철수한 다음에 올라오곤 했지 않나. 마적과 관군은 한통속이야. 관군이 치러 왔다가 그만두고 마적이 되기도 하고, 마적질 그만두고 관군이 되기도 하지 않는가. 그들은 부득이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맞부딪치는 일이 전혀 없네."
경험 많은 천씨가 하얀 수염을 부르르 떨며 말했다.
"지금은 전과 달라!"
쑨 노인은 관에 알리자는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곱사등을 두번 으쓱거렸다. 기승을 부리는 모기를 쫓기 위하여 그는 창포 부채를 마구 흔들어 댔다. 그의 수염은 희끗희끗했다.
"지금은 대동단결을 부르짖지 않는가! 전의 짱원수 시대 같지 않아! 선통을 황제로 다시 세운 건 일본놈들 짓이야. 일본 놈들은 그를 황제로 내세워 온 나라의 인력과 말을 동원해서 우리 관동성을 그들 손아귀에 넣으려는 게 아니겠나. 마적이니, 관군이니, 혁명군이니, 의용군이니, 무슨 무슨 회니...다 일본놈들이 동삼성에서 설치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거야. 그러니 그들이 일본군과 싸울 수밖에! 놈들은 중국군을 앞세워 싸우는데 중국군은 적을 보고도 싸울 생각은 않고 허공에다 총을 쏘는 거야. 싸운다고 하면서도 앞의 적과 농을 주고받는다네! 게다가 중국군은 툭하면 적에 붙어 버리니까 나중에는 일본 놈들도 교활해져서 중국군을 앞세우지 않고, 자기들이 앞장서고 중국군더러는 뒤에서 퇴로나 차단하라고 한다네. 지금 관에 알려 봐야 몰려오는 것은 일본군뿐이야."
"이 사람들을 쫓아낸다 해도 다른 사람들이 또 몰려올 걸세! 나중에 우리가 관에 알린 사실을 알게 되 면 그들이 우리들을 내버려 둘 것 같나? 그들을 가까이하지 못하도록 단속할 방법이나 생각하는 것이 상책일세."
쑨 노인은 앞이 캄캄해짐을 느꼈다. 어쩔 수 없다는 듯 마당의 토담을 둘러보았다. 커다란 곰이 사방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담장 밖에서는 수숫잎이 흔들리고, 담 아래에서는 귀뚜라미가 절박하게 울고 있었다. 산등성이 아래 왕 대감 댁에서 우렁찬 노랫소리와 웃음 소리가 들려 왔다. 노인들은 모두 벙어리가 되었다. 마당에서 웅크리고 있는 그들의 모습은 마치 추위를 타는 개가 몸을 사리며 꼬리로 코끝을 따뜻하게 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극성스런 모기들만이 이런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사람들 주위를 맴돌고 있다.
불꽃은 하늘로 타오르고 기울어진 달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간간이 바람은 불지만 사람들 성에는 차지 못하고 있다. 사람들이 느낄 수 있는 것은 활활 타오르는 모닥불뿐이었다. 노랫소리가 들리자 타오르는 모닥불도 이내 사그러들고, 노랫소리가 흥을 돋우는가 싶더니 이내 그것마저 시들해졌다. 오로지 모두의 마음을 꿰뚫으며 눈과 목구멍에 가득 치밀어 오르는 것은 불의 흐름이요, 눈물이요, 흔들리는 외침이었다.
샤오밍과 안나는 나란히 탁자 위에 올라섰다. 몸을 흔들며 박자에 맞추어 손뼉을 쳤다. 대원들도 따라서 손뼉을 쳤다. 마당 한가운데 모닥불이 피어있고 그 주위에 사람들이 빙 둘러서 있다. 부상자들도 지팡이에 의지하여 의자에 앉았다. 머리와 팔과 다리에 감긴 붕대가 보였다. 잠시 후에 그들은 지팡이를 내던졌다. 떠들썩한 고함 소리에 고통이 씻은 듯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순서에 따라 먼저 샤오밍과 안나가 노래를 불렀다. 샤오밍이 저음으로, 안나가 고음으로 선창을 하자 대원들이 따라 불렀다. 독수리 대장의 노랫소리는 왠지 침울하고 초조한 듯이 들렸고, 사령관의 눈은 거의 감겨 있었다.
"동지들, 다시 한번!"
샤오밍이 소리를 지르자 뒤이어 용조강의 청년 농부들이 따라 소리쳤다.
"동지들, 다시 한번!"
그들은 자신들이 용조강의 농부들임을 까마득히 잊은 채 어느덧 혁명군 대원 행세를 하고 있는 것이다. 노란 별이 달린 붉은 견장과 총만 없을 뿐이다. 그들은 모든 것이 낯설지 않게 느껴졌다. 모든 청년들의 마음은 발랄하고 신선하며 정열적인 사람들에게 이끌려 있었다. 청년들은 의논도 하고 토론도 하였다. 정말 한시도 잊을 수 없는, 잊혀지지 않는 토론이었다. 토론을 하며 그들은 생각했다.
'좋아, 내일 그들을 따라가야지. 하늘 아래 이 세상이 얼마나 큰지, 그리고 앞에 무엇이 감추어져 있는지 한번 보자!'
노인들의 만류는 이제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혁명대원들 속에서 그들은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왕산뚱 대감이 왜 총살당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가에 대해서도...
"그놈은 여러분의 피를 빨아먹는 빈대 같은 놈이오!"
대장이나 단원들이나 하나같이 그들에게 그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잘 모르는 부분에 대해서 질문을 하기도 하였는데, 그들은 조금도 귀찮아하지 않았다.
쑨 노인의 두 아들은 부친을 생각해서인지 에워싼 사람들 뒤편에 서 있었다. 쑨 노인은 한평생을 '빈대'에게 시달린 어른이다. 그들도 '빈대'에게 물린 지가 어언 20년이다. 그런데도 부친은 그런 '빈대' 한 마리 죽이는 것을 가지고 그렇게 안쓰럽게 여길 뿐 아니라 뚜사를 시켜 완산뚱 대감 댁 변고를 관에 알려 일본군을 데려다 혁명군을 치려 하지 않는가. ...쑨 노인의 둘째 아들 쑨이는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심기가 불편하였다. 대포와 비행기를 가진 일본군이 밀려온다면 혁명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을 텐데! 그는 옆에 있던 형의 소매를 슬쩍 잡아당겨 슬그머니 마당을 빠져나왔다. 그들을 눈여겨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노랫소리는 여전히 흥이 끊일 줄 모르고, 모닥불은 탁탁 소리를 내며 신명나게 타올랐다. 샤오밍과 안나도 나란히 몸을 흔들며 손으로 박자를 맞추었다.
쑨이는 형 쑨따와 함께 바위에 앉았다. 쑨따가 아우에게 말했다.
"왜 날 불러냈니? 한참 재미있게 노래하고 있는데!"
"아니, 형님은 노래만 부르면 제일이에요? 막내 뚜사가 왕산뚱 대감 심부름으로 일본군을 데리러 갔잖아요."
"나도 알아. 그런데 왜 여태껏 아무 소식이 없지? 도중에 일본군에게 살해된 게 아닐까?"
쑨따는 의혹과 불안을 감추지 못했다.
"죽고 사는 건 둘ㅉ 문제고...정말 일본군이 몰려오면 어떻게 할 거예요?"
쑤이는 옷깃으로 얼굴을 훔쳤다. 사람들 틈에 끼여 앉아 삐질삐질 흘렸던 땀이 깨끗이 닦여졌다. 산들산들한 저녁 바람이 벌써 8월 말이 되었음을 실감나게 했다.
"별 도리가 있으려구? 혁명군이 곳곳에서 승리를 거두지 않니? 일본군도 그 사람들이 보기엔 아무것도 아닐 거야."
"그렇지 않아요, 형님..."
쑨이는 별빛 아래서 형의 무표정하고 가련하리만치 후덕하면서 어리숙한 얼굴을 보았다.
"아이, 형님! 어째 그렇게 주관이 없으세요? 평소에도 늘 그러니까 형님하고 상의하지 못하고 넷째하고만 상의하게 되잖아요. 막상 형님하고 상의하려니 지금 또 그러시는군요!"
쑨이는 초조한 마음에 화를 내며 말했다.
"그럼...네가 방법을 말해 봐! 나는 듣기만 할 테니까."
쑨따는 별다른 의견이 없음을 드러내며 아우를 보고 허탈하게 웃었다.
"형님은 혁명군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쑨이는 고무공을 던지듯 쑨따에게 이렇게 묻고는 조용히 대답을 기다렸다.
"좋겠지...난 잘 모르겠어!"
"이 사람들이 좋으세요, 아니면 왕산뚱 대감 같은 사람이 좋으세요?"
"너는 어떻게 생각하지? ...먼저 말해 봐."
"제가 먼저 물어 봤잖아요!"
쑨이가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쑨따는 생각에 잠겼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쑨이는 순따의 대답을 기다렸다. 이윽고 쑨따가 머리를 갸우뚱하며 대답했다.
"내 생각으로는...그래도 왕산뚱 대감 같은 분이 좋은 것 같아."
"왜요?"
"나도 모르겠어..."
"형님은 이 사람들하고 어울리고 싶으세요, 아니면 왕산뚱 대감 댁 사람들하고 지내고 싶으세요?"
"그야 물론 이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지! 서로 예절을 차릴 필요도 없구. 왕산뚱 대감 댁이야 재산 많고 세도 있는 사람들인 우리 같은 사람은 몇백 년이 가도 자리를 같이 하지 못할 거야."
쑨따는 가난한 자신은 물론 부친이 무척이나 원망스러웠다. 가난뱅이는 언제나 부자와 어울리지 못했다.
"형님은 '부자는 가난한 사람의 피를 빨아먹는 빈대'라고 한 사령관 말씀도 못 들으셨어요? 가난한 사람만이 가난한 사람의 친구가 될 수 있고,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 줄 수 있어요. 부자들은 언제나 가난한 사람들에게 눈독을 들이죠. 전에 왕산뚱 대감도 그러지 않았어요? 아쉬울 땐 억지웃음에 실눈을 뜨고는 꿈처럼 달콤한 말을 하지만, 도조를 거두어들일 때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태도가 돌변하곤 했지요. 조금이라도 모자라서는 안 되었어요. 하지만 우리 같은 가난뱅이는 마음이 약해서 원수를 기억할 줄도 몰라요. 그렇게 번번이 당하면서도 일이 있으면 가서 성심껏 도와 주죠. 이번만 해도 그래요..."
쑨이는 여기까지 말하다가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마당에서는 이제 노랫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누군가의 연설 소리와 사람들의 큰 웃음소리가 들리고 간간이 고함치는 소리도 들렸다. 연사는 음성을 낮췄다 높였다 하며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쑨따는 솔깃해져 마당에서 나는 말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는 상체를 꼿꼿이 세우고 앉으며 말했다.
"들어 봐! 그 처녀가 연설하는 것 같지? 그 처녀는 조선 사람이라는데, 믿기지 않아. 조선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중국말을 잘 하지? 조선 사람들은 흰옷을 입고 갓을 쓰잖아? 그런데 저 처년 전혀 그렇지 않거든."
쑨따는 조선 처녀가 흰옷을 입거나 갓을 쓰지 않은 것이 무척 궁금했다. 아우가 '부자는 가난한 사람의 피를 빨아먹는 빈대'라고 한 말을 아무런 저항 없이 받아들였지만, 그는 '빈대'를 어떻게 처치해야 하는가는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는 다시 쑨이에게 물었다.
"너는 저 처녀가 조선 여잔지 아닌지 알겠구나? 저 처녀와 여러 번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던데..."
쑨따는 잔잔한 희열을 느끼며 아우를 바라보았다.
"조선 여자든 아니든, 흰옷을 입든 말든,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혁명만 알면 됐지! 그 여잔 열여덟 살 난 처녀인데 모르는 게 없어요. 대원들치고 그녀를 좋지 않게 말하는 사람이 없어요. 총상도 치료하고, 병구완도 하고, 사령관을 도와 명령도 내리죠. 어디를 가든 틈만 나면 대원들에게 혁명의 도리를 들려 준답니다. 까막눈에게는 글을 깨우쳐 주고, 노래도 가르쳐 주죠. 패망한 조선에 저런 여걸이 있다는 게 신기할 정도예요. 이곳도 일본 놈들에게 점령당했잖아요? 우리도 조만간 조선처럼 될 거예요. 조선이 먼저 망했으니 우리 선배지요! 그 처녀는 지금 우리가 혁명하지 않으면 앞으로는 조선 사람보다 더 참혹하게 될 거라고 했어요. 일본 놈들은 복종하지 않는 조선 사람들을 붙잡아 산 채로 묻었대요! 형님도 산 채로 묻히고 싶으세요? 네?"
"혁명이란 게 도대체 뭐지?"
쑨따는 아우가 '혁명'이니 뭐니 떠벌이는 말을 여러 번 들었지만 한번도 그 뜻을 물어 본 적이 없었다. 그는 지금 그 아름다운 조선 처녀도 '혁명'이란 말을 한다는 말에 '혁명'이 틀림없이 무슨 오묘한 것일 거라고만 짐작했다.
쑨이는 교활하게 한쪽 눈을 감으며 어리숙한 형을 훔쳐보았다. 그는 정말 다른 사람을 분통터지게 하고, 어딘가 우스꽝그러운 데가 있었다.
"혁명요? 혁명은 조상 때부터 우릴 못살게 군 '빈대'들을 죽이고, 지금 동삼성에 있는 일본군을 모조리 내쫓아 버리고서 우리의 땅을 스스로 일구는 거예요. 다시는 빈둥빈둥 놀고 먹기만 하는 '빈대'들에게 곡식이나 세금을 바칠 필요가 없는 거죠. 아시겠어요? 지금까지 부자들은 첩을 서넛, 많으면 열까지도 두었지만 형님은 서른이 훨씬 넘었는데도 마누라 하나 얻지 못했어요. 하지만 혁명 후엔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장가도 들 수 있어요. 그리고 자기 땅이 있으니 남의 땅을 부칠 필요도 없구요. 아시겠어요? 이것이 바로 혁명이라구요! 바로 그 조선 처녀가 한 말이죠. 다른 동지들도 모두 그렇게 말하던데요."
"조선 처녀가 정말 그렇게 말했어? 그 처녀가 정말...마, 마누라 얻는 얘기도하더란 말이지? 수줍어하는 기색도 없이?"
쑨따는 엄청난 놀라움과 흥분으로 턱 밑이 화끈 달아옴을 느꼈다. 쑨이가 한 마디 더 덧붙였다.
"믿지 못하겠거든 직접 물어 보세요! 그 조선 처녀는 누가 물어도 친절하게 대답해 줘요. 왕산뚱 대감 댁 처녀들하곤 딴판이라니까요! 대원들은 다 그녀를 존경하죠. 그녀를 나쁘게 말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어요...제가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무슨 소리를 하는지 가서 들어 보세요. 돌아와서 다시 형님과 의논하지요. 가 보세요..."
쑨이가 형을 부추겼다.
"아냐, 가지 않겠어..."
"그러시다면 본론을 말하지요! ...도대체 형님은 혁명이 좋은 거예요, 싫은 거예요?"
"나 말이야? 혁명이 정말로 조선 처녀가 말한 대로라면야 혁명이 좋지!"
"그렇다면 혁명을 하시겠어요, 안 하시겠어요?"
쑨이는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한 마리의 토끼를 쫓는 사냥개처럼 틈을 주지 않고 형에게 다그쳐 물었다.
"아버지가 반대하실 거야! 그 연세에 우리를 싸우라고 보내시겠니?"
"우리를 보내지 않으시겠다면 앞으로도 계속 '빈대'들에게 피를 빨려도 괜찮다는 건가요?...난 가겠어요. 의논이구 뭐구 다 필요 없어요. 지금 가겠어요. 요즘 같은 세월에 언제까지 태평하게 기다리고만 있어야 하죠? 형님, 싸우러 가지 않으면 언제 일본놈들 손에 죽게 될지 몰라요. 설사 살아 있다 해도 평생 '빈대'들에게 피를 빨리게 될 거예요."
"내가?...흥!"
쑨따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일어서며 말했다.
"이젠 돌아가자. 안에서는 아직 끝나지 않았나 보다. 아직도 조선 처녀가 이야기하고 있니?"
그는 귀를 기울였다. 고요한 밤의 공기를 타고 말소리가 멀리서도 잘 들렸다. 모닥불은 아직 사그라지지 않았다. 지금 들리는 건 조선 처녀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굵직하고 침울한 음성이었다.
"서두르실 것 없어요. 형님과 의논할 일이 있어요. 넷째가 관에 알리고 돌아오면 어떻게 하실 거죠? 제 생각으로는...오늘은 꼭 돌아올 것 같은데. 돌아오면 어떻게 하실 생각이죠?"
"어떻게 할 거냐구?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문을 지키던 대원이 뚜벅뚜벅 문 앞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소총에 꽂혀 있는 대검이 문 안의 모닥불에 비쳐 번쩍번쩍 빛났다.
"넷째가 돌아오면 데려다가...혁명군 사령관에게 보일 생각이에요?"
"뭐라구? 네가 미쳤구나? 어떻게 친동기를 총살당하게 한단 말이냐?"
깜짝 놀란 쑨따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건너편에서 보초를 서고 있던 대원이 어깨에 소총을 멘 채 이쪽을 향해 몸을 꼿꼿이 세웠다.
"사령관은 그 애를 총살하지 않을 거예요. 그 애가 자의로 알린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테니까요."
"그래도 넷째를 사령관에게 보일 수는 없어! 그들은 사람 하나 죽이는 것쯤은 문제도 아닐 텐데. 그날 왕산뚱 대감도 사령관의 명령에 의해 순식간에 처형당했잖니. 왕산뚱과 그의 마누라가 그렇게 애걸복걸했는데도 가엾게 여기기는커녕 그 자리에서 총살시켰어! 우리 넷째가 관에 알리러 갔으니..."
쑨이는 주먹으로 형의 입을 막았다. 건너편에 있던 한 대원이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어깨에 메고 있던 총을 어느새 손에 쥐고 있었다.
그들은 입을 다물었다.
신이 난 청년 농부들은 무리를 이루어 줄지어 걸어갔다. 대원들도 흥분 뒤의 나른함에 젖어 제각기 숙소로 돌아가 취침 준비를 했다. 잠자리에서도 토론을 좋아하는 양싱이나 얼산 같은 젊은 대원들은 언제나 말꼬투리를 잡고 늘어졌다. 그때마다 뒤얽힌 실타래처럼 실마리를 찾지 못해 토막토막 끊어지기 일쑤였다. 그런 일은 밤마다 늘 있곤 했다. 홍옌은 창 밖 의자에 앉아 언제나처럼 곰방대를 입에 물었다. 그는 짱더산과 쓸쓸히 옛 동료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추이짱청 노인, 꺽다리 리우씨, 그리고 노상에서 죽은 두 동지... 조용히 그들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이제 그들은 멀게만 느껴졌다. 홍옌은 곰방대에 담배 잎을 채우는 대신, 다 타고 남은 재를 의자 다리에 탁탁 쳐서 깨끗이 털어 냈다.
"짱씨 우리가 올 때는 아홉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몇 명 남지 않았구먼. 불과 며칠 사이에...추이 노인과 꺽다리가 죽었어."
"말하면 무엇 하나! 누가 우리더러 이 길을 가라던가? 요즘 같아서는 어디 있으나 마찬가지야!"
짱더산은 먼 곳을 응시하였다. 모양 없이 어지러진 8월 그믐달은 이미 먼 산꼭대기 너머로 내려가고 있었다. 담장 밖에서 어슴푸레한 나뭇가지들이 살랑살랑 흔들리며 서늘한 가을 기운을 드러내 보였다. 그는 이제까지 죽음을 경멸해 왔다. 그것은 여름날의 들오리나 겨울의 꿩, 노루처럼...실수 없는 총부리에 너무 많은 사람이 죽은 까닭인지도 모른다. 그는 인간의 죽음에 대해 담담했다. 한 인간의 죽음을 재수 없는 짐승이 운 좋은 사냥꾼의 총에 걸려든 것처럼 평범하게 생각했다.
"양싱 그 녀석 요즈음 미쳤나 봐! 쓸데없는 소리나 지껄이고 다니고!"
홍옌이 탄식하며 말했다.
"아, 샤오밍과 안나에 대한 소문 말이지? 그 친구가 멋대로 지껄이는 거야! 사령관이 아시면 시정할 걸세. 걱정할 것 없어! 젊은이들은 언제나 과장이 심하지...그런데 샤오밍은?"
"저기 있네..."
짱더산은 홍옌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다. 섬돌 위 사랑방 창문에 등불과 사람 그림자가 보였다. 그러나 말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회의중인가?"
"아냐, 두 사람을 심문하고 있네!"
홍옌이 짱더산의 귀에 대고 말했다.
"두 사람을 심문하다니, 누구? 비밀인가?"
"문 지키던 우 동지한테서 들은 걸세. 부대에서 나밖에 아는 사람이 없지. 비밀이구말구."
"누군지 아나?"
짱더산도 목소리를 낮추었다. 방안에 아직 잠들지 않은 사람들이 듣고 법석댈까 염려해서였다. 방안에는 드르렁드르렁 코 고는 소리, 잠꼬대, 이 가는 소리로 절정을 이루고 있었다.
"매일 밤마다 연설을 들으러 와서는 노래도 부르곤 하던 쑨가 형제 말일세."
"그들이? 그들이 첩자란 말인가? 그들은 우리와 함께 혁명을 하고 싶어하던 사람들 아닌가? 아주 똑똑한 젊은 농부들 같던데?"
홍옌은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우리 가서 들어 볼까?"
짱더산이 제의했다.
"들으러 가자고? 그런데 방해가 되진 않을까? 방해가 되지 않는다면 가서 들어 보자고..."
홍옌은 곰방대를 호주머니에 집어 넣고 짱더산의 뒤를 따랐다.
발을 내린 틈 사이로 안이 환히 들여다보였다. 방 천장과 사방 벽은 온통 하얗고 내부는 각양각색으로 꾸며져 있었는데, 그들에게는 낯선 것이었다.
사령관은 탁자 옆에 앉아 있었다. 탁자 위에는 큰 석유등이 타오르고 있었다. 불꽃은 가볍게 떨리고 있었고, 탁자 너머로 두 농부가 긴 의자에 나란히 앉아 있다. 양 옆으로 안나와 각 부대장이 서 있었고, 샤오밍은 안나의 맞은편 구석에 앉아 있었다.
"자네들, 혁명군에 가담한다는 게 정말인가?"
다짐하듯 묻는 사령관의 말에는 힘이 있었다.
"정말입니다..."
상대방은 최면술에나 걸린 듯 대답했다.
"좋아, 그래야지!"
사령관은 크지 않은 체구를 일으키며 기쁨의 눈웃음을 보냈다. 방안을 두 번 돌던 사령관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지만 자리에 앉을 생각은 하지 않고, 한 손은 허리의 혁대를 쥐고 다른 한 손으로는 탁자를 탁탁 차며 호루라기를 불듯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오므렸다. 그는 방안에 있는 사람들을 빙 둘러보았으나 쥐죽은듯 조용했다. 일부는 피곤한 빛이 역력했다. 창 밖의 홍옌과 짱더산은 발각된 듯한 착각을 일으켰다. 안에서는 창 밖에 있는 그들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들은 까맣게 잊고 있었다. 사령관은 생각에 잠긴 듯 가물가물 흔들리는 등불을 보면서 자리에 앉아 눈썹을 치켜 올리며 물었다.
"쑨 동지, 이번 임무는 여기 두 동지가 해야겠소. 내일 안으로 뚜사를 찾아내시오. 그에게는 아무런 처벌도 내리지 않을 것이오. 우리는 그가 왕산뚱의 지시를 받아 행동한 것을 잘 알고 있소. 그러나 관에 알림으로 해서 그의 신변이 매우 위험하오. 그들은 그를 우리의 첩자로 무고하여 함정을 만들지도 모르오. 그를 가만두지는 않을 것이오. 왕산뚱이 아무리 세도가 있다지만 거기선 통하지 않아요. 간단히 말해서 부득이한 경우를 제외하고서는 그들은 우리와 싸우려 들지 않을 거이오. 우리와 싸우는 것은 그들에게 매우 불리하기 때문이오. 일본군도 마찬가지오. 그들도 산이나 숲에서는 전술이니, 비행기니 하는 것이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쯤은 알고 있소. 우리는 곳곳에 주둔해 있는 빈곤한 형제들의 동정을 받고 있소. 우리를 동정하지 않는 것은 왕산뚱 같은 놈들이오. 그들은 빈곤한 형제들의 적이오. 사람의 피를 빨아먹는 '빈대'인 것이오. 우리는 도처에서 그런 놈들을 닥치는 대로 제거해야 하오! 앞으로 토지는 바로 우리 모두의 것이 되며, 형제들에게 공평하게 분배될 것이오. 당신들은 반드시 뚜사를 찾아 이 임무를 완수하시오!"
비밀스런 대화를 엿듣고 있던 홍옌과 짱더산은 두 농민이 방을 나올 때에야 황망히 그 자리를 피했다.
좁고 기다란 길 양쪽으로 온통 곡식이 출렁이고 있다. 쑨씨 형제는 자신들이 항상 다니던 그 길을 따라 걸어가며 유쾌하게 이야기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쑨따의 흥미를 끈 것은 안나였는지, 몇 마디 하다 보면 안나 얘기로 돌아오곤 했다.
"아, 글쎄 다 큰 처녀가 밤낮 저렇게 남자들과 같이 어울리니... 말 좀 해봐. 그러고도 정조를 지킬 수 있을까? 젠장, 내가 보기엔 담에 기대어 있던 그 젊은 놈...같이 노래했던 그놈하고...모르긴 몰라도 뭐가 있었을 거야."
쑨이 앞에서 걸어가던 쑨따는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겸연쩍게 웃으며 말했다. 쑨이는 형의 우스꽝스러운 말을 반박하지 않았다. 형은 여자 생각에 골똘하여 여자 이외에 다른 것은 생각할 줄 몰랐다. 그러면서도 형은 왜 자신이 못생긴 색시 하나 얻지 못하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쑨이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조선 처녀가 마음에 들어요? 어때요, 내일 중매쟁이를 시켜 형수님으로 맞아들이는 게?"
쑨따는 아우가 자신을 놀리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화내지 않고 속으로 웃었다. 잠시 침묵을 지킴으로써 아우의 짓궂은 질문에 넌지시 불만을 표시했다.
"형님이 혁명군에 가담하지 않는 건 상관하지 않겠어요. 형님이 하든 안 하든 내일 난 꼭 해내고 말 거예요. 혹시 누가 알아요, 그 조선 처녀가...내가 공작을 잘 하는 걸 보고 나를 좋아하게 될지..."
"네가? 네까짓 게?"
쑨따는 이번에는 숭복할 수 없다는 듯 반박해 왔다. 그는 앞에서 몸을 흔들며 손 닿는 대로 수숫잎을 훑어 휙 던져 버렸다.
"네까짓 게? 너보다 일 잘하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어! 거 대장들 좀봐. 독수리 대장이란 사람, 생긴 것부터가 영웅 같지 않아! 샤오밍인가 하는 사람은 그 조선 처녀에게 딱 어울려. 그런데 네가? 네가 혁명군에 들어가 봤자 졸개밖에 더 하니? 그 처녀가 너 같은 졸개를 좋아할 것 같아?"
"난 형님하고 이런 얘긴 더 하고 싶지 않아요. 도대체 할 거예요, 안 할 거예요?"
"하다니 뭘?"
"혁명 말이에요. 혁명군이 되어서 일본군을 치러 가야죠."
"난 안 가..."
"정말 안 가실 거예요?"
"정말 안 간다니까..."
쑨따가 계속 말했다.
"진짜 안 간다는 게 아니야! 나에게 색시 하나만 얻어 주면 가지. 죽더라도 원망하지 않을 거야!"
쑨이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생각해 보았다. 형은 지금 훼방을 놓으려 하는 것이 분명하다. 집으로 돌아가면 이 일을 아버지에게 일러바칠 것이다. 넷째가 돌아오면 도망시킬 것이 뻔하고, 그래서 사령관에게서 부여받은 임무를 달성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좋아요! 저도 그만두겠어요! 우린 전처럼 농사나 짓는 거예요. 해가 바뀌면 우리에게도 땅이 생길 거고, 그러면 그때 가서 색시 하나 얻어 살면 되겠지요! 아버지도 연세가 많으신데..."
"아우야, 그 말 정말이지? 그래, 혁명은 무슨 혁명이냐? 우리가 어떻게 일본군을 물리쳐? 잠시 피했다가 일본군이 와서 놈들을 모두 쫓아 내거든 다시 나오면 되지 않겠니? 우린 그저 속 편하게 농부나 되는 게 제일이야!"
"그래요! 하지만 집에 가거든 아버지에게라도 오늘 밤 일을 절대로 얘기해선 안 돼요!"
"그래! 얘기하지 않으마..."
"믿을 수 없어요. 맹세를 하세요!"
"맹세를 하라구?...좋아! 내가 말을 하면 네 손에 죽겠다고 맹세하지!"
"제 손에 죽겠다구요?"
"그렇게 해둬. 동생이 친형을 살해하는 법은 없으니까."
"그럼 그렇게 해두죠."
쑨이는 말없이 형의 뒷모습을 훑어보았다. 다부진 어깨, 힘찬 발걸음... 이따금 길 위의 흙덩이나 풀뿌리를 걷어찼다. 쑨이는 형과 함께 혁명대에 가담할 방법을 생각할 수가 없었다. 색시에 미친 가련한 형에게 혁명이란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다. 가까워오자 검둥이가 짖어 댔다. 주인의 발소리를 알아듣기라도 한 양 요란스럽게 짖어 댔다. 방안에서 불빛이 흘러 나왔다. 개가 두 형제의 주위를 맴돌며 달려들어 주인의 손을 핥았다. 쑨이는 언제나처럼 검둥이의 목덜미를 쓰다듬어 주었다. 내일이면 이 귀여운 검둥이를 보지 못하게 될 것이다. 튼튼하게 생긴 검둥이는 머리 위에만 하얀 털이 조금 나 있다.
"왜 아직도 불이 켜져 있을까?"
넷째가 돌아온 것이 아닐까? 쑨이는 꼬리를 치며 반기는 검둥이를 밀쳐 냈다. 방안에서 넷째의 말소리가 들려 왔다.
"너희들, 왜 이제야 돌아오냐?"
쑨 노인이 물었다.
"넷째가 돌아왔습니까?"
방안에는 쑨 노인이 한쪽에 누워 가쁜 숨을 내쉬고 있었다. 관자놀이가 유난히 움푹 들어간 노인은 더욱 연로해 보였다. 기름등잔 불빛은 평소처럼 어둡고 가물가물한데 이따금씩 섬광처럼 번뜩였다. 셋째는 바쁘게 밥을 짓고 있다. 넷째의 얼굴은 몇 군데 상처와 함께 부어 있었다. 제일 먼저 그것을 발견한 것은 쑨이였다. 그는 넷째에게 다가앉으며 그의 얼굴을 매만졌다.
"어떻게 된 거냐?"
"일본군놈들한테 맞았어요."
넷째는 자신에 대해 아무런 안타까움도 없는지,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말했다.
"젠장, 일본놈들은 무자비해요! 하마터면 총살당할 뻔했다니까요! 놈들은 싸우고 싶지 않은 거예요."
"무얼 물어 보더냐?"
"이것저것 다 물어 보는 바람에 혼났어요. 일본군관들이 나더러 무릎을 꿇으라고 하길래 가만 있었더니 구둣발로 내 정강이를 걸어 차는 거예요. 이 다리 좀 보세요."
넷째는 바짓가랑이를 걷어 올렸다. 드러난 정강이는 시커먼 멍으로 얼룩져 있었다.
"이게 다 발로 차인 거냐?"
쑨이가 상처를 어루만지며 분해서 소리쳤다.
"아니에요, 개머리판으로 찍기도 했어요. 그것뿐인 줄 아세요?"
넷째는 이번 읍내에 다녀오면서 생긴 상처를 일일이 형에게 보여 주었다. 방 한쪽에 누워 있던 쑨 노인이 가까스로 일어나 손을 휘저었다. 그 서슬에 기름등잔 불빛이 흔들거렸다. 아들들은 그가 무슨 말을 하려나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그는 다시 누워 눈을 감고 답답한 듯 숨을 내쉬었다. 방안은 다시 조용해졌다. 밖에서 밥을 짓던 셋째가 들어와 형제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놈들이 뭘 물었지? 그놈의 새끼들! 사람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다니!"
쑨따는 넷째가 맞았다는 소리에 평소와는 달리 걷잡을 수 없는 분노에 사로잡혔다. 쑨이는 넷째의 부어 오른 얼굴을 바라보며, 아무 말 없이 생각에 잠겼다.
'왕산뚱 그놈은 죽어 가면서도 자신을 위해 남을 두들겨 맞게 하는구나.'
"놈들이 곧 올 거예요! 이삼 일이면 도착할 거예요. 그들은 나를 데리고 같이 오려고 했지만 내가 혁명군의 첩자로, 그들을 속이지 않나 하는 눈치였어요. 놈들은 혁명군을 잡지 못하면 날 총살하겠다고 했어요. 그러면서 나더러 길잡이가 되라고 하더군요. 나중에 왕얼뚱 대감이 사람을 보내 날 빼내 주었어요."
넷째는 밥을 먹으면서도 피로한 줄 모르고 여전히 어린아이처럼 이야기하고 있었다.
고통이 쑨 노인을 엄습해 왔다. 그는 아무 말 않고 아들들의 의견을 듣고 있었다. 그는 설마 아들이 맞고 돌아올 죽은 생각도 못했었다. 처음에 그는 주인댁에 대한 충성이라고 생각했다. 태평한 시절이 되면 왕얼뚱 대감 댁도 그들의 충성을 잊지 않으리라. 쑨 노인은 아직도 태평세월을 꿈꾸고 있었으나 날이 갈수록 태평해지지 않았다. 지주들은 혁명군에게 살해되고, 포대는 불타고, 청년들은 모조리 혁명군에 가담했다. 이젠 아들도 믿을 수가 없게 되었다. 노인의 운명은 바야흐로 도량에 처박힌 신세가 되어 버렸다. 거기다가 일본군은 넷째를 저 지경으로 두들겨 팼으니!
"아버지! 일어나세요. 대책을 세우셔야죠!"
쑨이가 노인의 어깨를 흔들었다. 노인은 기력을 잃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너희들끼리 상의하거라! 난 그저 듣고만 있겠다. 너희가 나를 버리지만 않는다면야...너희 어머니 무덤이 여기에 있다는 걸 잊지 마라. 이젠 다 끝났어!"
쑨 노인은 아무런 희망이 없다는 듯 하소연했다. 이윽고 그의 눈에서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그는 시종 자리에 누워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아버지! 이러시면 안 됩니다! 지금은 우리가 새롭게 변신해야 할 때예요. 이 기회를 그냥 지나쳐 버릴 수는 없어요. 넷째가 이 지경이 된게 다 누구 때문입니까? 우린 모두 이렇게 젊습니다. 그들은 혁명군을 치지 못하면 우리 머리라도 베어 갈 놈들입니다. 지난번에도 마적을 친답시고 그러지 않았습니까! 마적을 못 잡으니까 애매한 사람들만 잡아다가 공을 세운 척하는 거예요! 삼와 마을의 곰보 이씨와 그 형제들이 그렇게 해서 모두 몰살당했잖아요. 일본놈들은 더 흉악하다구요. 말도 알아듣지 못하고 통역관을 매수할 돈도 없으니, 일본놈들더러 내 머리 베어 가라고 모가지 디미는 수밖에 별 도리 있겠어요? ...아무튼 저희들은 병아리처럼 놈들 손에 죽기를 기다릴 수는 없어요."
"모두 가겠단 말이냐? 하나도 남지 않고? 하나도...나, 남지...않고?"
"가요! 우리 모두 가요. 하나도 남지 말고!"
쑨이의 주장에 쑨 노인이 일어나 앉으며 눈을 부릅떴다.
"너희는 젊어서 데려간다지만 나처럼 늙은 노인네가 가서 뭘 한단 말이냐? 뛰기를 하겠냐, 총을 쏘겠냐? 가라! 다 가 버려! 나는 죽어도 이 집을 못 떠난다. 너희 젊은놈들이나 가서 혁명을 하든지 말든지 해라. 대신 얼른 돌아와서 내가 죽을 때...내 뼈를 네 어머니 산소 옆에 묻어 주면 족하겠다. 개가 물어뜯도록 내버려두지 말고..."
노인은 비통한 심정을 억누르지 못했다. 아들들은 무슨 괴물에게 붙잡혀 가는 듯 자신들을 바라보는 침통한 아버지의 얼굴을 보고 더욱 서둘렀다.
"둘째, 셋째 너희나 가거라! 난 가지 않겠다. 난 혁명군이 마음에 안 들어. 나는 아버지를 모시겠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다시 너희를 찾으마!"
쑨따가 우직하게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너도 가거라! 한 놈도 남지 마라. 일본놈들이 와서 잡아가기 전에! 넷째도 가라. 일본군이라도 나 같은 늙은이를 어떻게 하지는 못할 게다. 죽인다 해도 할 수 없지. 난 살 만큼 살았으니까!"
창 밖에 저 멀리서 닭 우는 소리가 들렸다. 검둥이도 덩달아 짖어 댔다. 창호지에 회백색 빛이 드리워지면서 기름등잔의 불이 점점 꺼져 가고 있었다. 젊은이들은 신발과 양말, 그리고 지난 겨울에 입던 낡은 속옷을 챙겼다. 쑨이는 그의 속옷을 쳐다보다가 너무 낡아서 그대로 내던졌다.
"큰형, 집에서 아버지를 잘 돌봐 주세요!"
아들들은 나란히 무릎을 꿇고서 아버지에게 세 번 큰절을 올리고 큰형에게도 큰절을 올렸다. 쑨 노인은 무감각하게 손을 내밀었다. 마당의 검둥이는 평소에 주인이 나가거나 귀가할 때처럼, 주위를 맴돌며 설쳐댔다. 쑨이는 검둥이의 코를 손가락으로 튀겼다. 검둥이는 반 리나 따라왔다. 쑨이는 그제서야 흙덩이를 집어 던지며 검둥이를 쫓아 보냈다. 그러나 검둥이는 마지못한 듯 여전히 그곳에 꿈쩍 않고 서 혓바닥을 내밀고 쳐다보다가 쑨이 형제들의 뒷모습이 수숫대에 가려서 보이지 않게 되자 그제서야 자신의 오줌 냄새를 더듬으며 집으로 돌아갔다.
(1935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