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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움에 처한 판 선생

어려움에 처한 판 선생

葉聖陶(Yeh Shengt'ao)

 

1

역 안에는 사람들이 붐비고 있는데, 사람마다 제각기 자신의 근심거리가 달라 모두 서로 다른 표정을 짓고 있다. 등에다 번호를 붙은 인력거꾼은 호주머니에 두 손을 쑤셔 넣고 잠든 듯 조용히 서 있다. 많은 수입을 올릴 시간이 되려면 아직 많이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그들은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너무 일찍 기력을 소모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공기가 아주 탁하여 사람들은 숨쉬는 것조차 힘들어 하고 있는데 비마저 곧 쏟아질 것 같다. 전등을 오랫동안 켜놓았는데도 평소보다 더 어두컴컴해서 서로 다른 얼굴 모양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마치 운무 속이나 꿈속에 잠겨 있는 것 같다.

게시판에는 서쪽에서 오는 급행열차가 적어도 4시까지 연착된다는 통지가 적혀 있다. 이 게시는 벌써 몇 시간 전부터 모두에게 익숙해진 것으로서, 마치 풍화된 희곡 프로그램처럼 더 이상 그것에 눈길을 돌리는 사람이 없다. 한 주일의 그 어느 날 어느 시각의 열차를 막론하고 거의가 이런 게시가 붙어 있기에 사람들은 기차가 연착되는 것쯤은 으레 있는 당연한 일로 여긴다. 많은 손님들의 마음을 졸이게 했던 기차가 역에는 당연한 일로 여긴다. 많은 손님들의 마음을 졸이게 했던 기차가 역에 들어섰다. 침울하던 대합실은 한순간에 사람들로 붐비게 되었다. 내리는 사람들의 흐뭇한 마음과 타는 사람들의 즐거운 마음, 인력거꾼의 작은 돈벌이 같은 것에 대해서는 여기서 말하지 않기로 한다. 양리에서 오는 판 선생에 대한 얘기만을 하기로 하자.

그는 열차가 플랫폼에 들어서기도 전에 식솔들을 이끌고 기차에서 내릴 때의 행동 절차를 주도면밀하게 짜놓았다. 그는 오른손에는 검은 가죽가방을 들고 왼손에는 일곱 살짜리 작은아들을 이끌기로 하고, 작은아들은 또 아홉 살짜리 큰아들을 이끌고, 큰아들은 그의 어머니를 이끌기로 약속하였다. 판 선생에 의하면 사람들이 많아서 다 돌볼 수가 없기 때문에 손에 손을 잡고 가면 머리와 꼬리가 한마음 한뜻이 되어 어떤 곳을 가든지 다 뚫고 지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서로 손을 꼭 잡고 가야지 손을 놓아서는 절대 안 된다고 타일렀다. 그들이 이 당부를 잊어버릴까 봐 또다시 몇 번이고 왼손을 흔들어 신호를 보낸다. 그 뜻은 전보를 치듯이 이 경고를 전달하라는 것이다.

머리와 꼬리가 한마음으로 움직인다는 것은 참 좋은 생각이지만, 전혀 폐단이 없는 것은 아니다. 기차가 멈춰 서려고 하는 순간 내리려는 모든 승객과 그들이 들고 간 짐 따위들이 다 문 쪽으로 몰려가는데 뱀처럼 이어진 판 선생네 일행은 꼬리가 너무 길어 빠져나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가방을 선봉대처럼 앞세우고 가슴과 배를 있는 힘껏 앞으로 내밀었는데 그럭저럭 문에서 두 번째 창문까지 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작은아들은 네 번째 창문에서 사람들과 의자 사이에 끼여서 꼼짝달싹도 못 하고 있었다. 한 팔은 앞으로, 한 팔은 뒤쪽으로 벌려졌는데 앞뒤에서 당기는 힘이 얼마나 세었던지 아이의 팔이 떨어져 나갈 지경이었다. 아이가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아야! 내 팔 떨어진다! 아야!"

몇몇 손님들은 울면서 고함을 지르는 소리를 듣고서야 비로소 어린아이가 끼어있는 것을 발견했다. 자세히 살펴보니 그들 네 사람이 손에 손을 잡고 있었다. 한 승객이 소리를 질렀다.

"손을 놓으시오! 그렇지 않으면 아이의 양손이 떨어져 나가겠소!"

"거 어디 될 말이오? 아이를 안지도 않다니!

다른 한 승객이 업신여기는 듯한 어조로 중얼거리면서도 자기는 앞으로 헤치고 나갈 기회를 노리고 있다.

"아니오!"

이렇게 말한 판 선생은 마음속으로 그들이 말한 것이 옳지 않다고 여겼다. 가족들의 손을 잡아 이끄는 방법의 좋은 점을 어찌 모든 사람들이 알겠냐고 여기면서 그들과 입씨름을 해봐야 입술과 혓바닥만 아플 것이니 뒷말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작은아들이 계속해서 팔이 아프다고 외쳐댔다. 판 선생은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고 뒤로 물러날 수도 없어서 그만 자기가 먼저 한 약속을 저버리고 손을 놓아 버렸다. 그는 당황한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너희들은 나만 보아라! 꼭 나만 쳐다보아라!"

기차 바퀴가 움찔하더니 이내 멈춰 섰다. 수많은 사람들이 쏜살같이 기차에서 뛰어내렸다. 이때 판선생은 앞이 넓다고 여겼지만 뒤에서 미는 힘이 너무 갑작스럽게 세어지는 바람에 남들에게 떠밀려 하는 수 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뒤를 돌아보고 자신의 가족들을 부른다는 것이 뜻대로 되지 않아서 그는 앞사람의 뒤통수에 대고 고함을 질렀다.

"너희들은 내 뒤를 따르거라! 알겠니?"

그는 이렇게 밀려서 기차에서 내렸다. 뒤를 돌아보니 아이들과 아내는 보이지 않았다. 아마 그들은 아직도 기차 안에서 복잡한 사람들 틈에 끼여 있을 것이므로 기차의 문을 지키는 것만이 가장 적당한 방법이라고 생각하였다. 그가 내린 후에 백여 명이 더 내렸을 무렵에야 승강대 위에 작은아들의 상반신이 사람들 틈에 나타났다. 전등불을 통해서야 비로소 울상이 된 아이의 얼굴을 겨우 볼 수 있었다. 그는 아이를 데리러 앞으로 걸어가려고 할 때마다 내리는 손님들에게 밀려서 제자리로 오곤 했다. 그러다가 가까스로 아이를 왼손으로 안고 내려왔다. 잠시 후에 아내도 아홉 살짜리 큰아들과 함께 차에서 내렸다. 그녀는 계속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연거푸 "아이고! 아이고!"라고 신음 소리를 냈다. 그러고는 처연한 눈길로 마치 어루만지며 위로해 줄 것을 바라는 아이들처럼 남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판 선생은 차분한 마음으로 기차에서 내린 자기의 대오를 향하여 다시 명령을 내렸다.

"우리는 여전히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손을 잡고 떨어지지 말아야 한다. 저기를 봐라. 플랫폼에 사람이 이렇게 많으니 개찰구는 더 엄청날 것이다. 서로 손을 꼭 잡지 않으면 우리는 흩어져서 서로 찾지 못할 것이다."

작은아들은 그 말에 겁을 집어먹고 아버지의 무릎을 붙잡고 애원하였다.

"아버지, 날 안고 가."

"쓸모없는 물건 같으니라구!"

판 선생은 부아가 치밀었으나 이내 마음을 가다듬고 몸을 구부려 작은아들을 덥석 끌어안았다. 그런 후에 큰애더러 자기의 와이셔츠 뒷자락을 쥐게 하고 다른 손으로는 어머니의 손을 꽉 잡도록 타일렀다. 왜냐하면 자기의 두 손은 벌써 임자가 있어서 아내를 잡아끌 손이 더는 없었기 때문이다.

판 선생의 아내는 여태까지 이런 괴로움을 겪은 적이 없었던 터라, 기차에서 겨우 내리고도 또 무서운 고비가 아직도 앞에 남아 있으니 저절로 넋두리가 터져 나왔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예 집에서 죽을지언정 이렇게 피난하러 떠돌지는 않았을걸!"

"후회는 무슨 후회란 말이오?"

판 선생은 속에서 부아가 치밀었으나, 한편으로는 측은한 마음도 없지 않았다.

"여기까지 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다고 그래. 그래도 생명만은 안전하지 않소? 어서 갑시다. 길을 잘 보고 걸어요."

이리하여 그들 네 사람은 갈팡질팡 사람들 속으로 사라졌다. 개찰구의 비좁은 문을 나선 판 선생은 마치 꿈속에서 허덕이는 것 같았다. 그는 급류 속에서 흐르는 물처럼 옆을 돌아볼 새도 없이 많은 사람들의 기세에 떠밀려 걸었다. 잠시 후 역의 기찻길을 지나선 그들은 시멘트로 포장한 인도에 들어섰다. 황급히 뒤를 돌아보니 불빛에 비쳐서 새하얗게 된 수많은 얼굴들과 보따리 등이 다 자기를 향해 꾸러미 채로 밀려오고 있었다. 그제서야 비로소 그는 와이셔츠 뒷자락을 지고 있던 작은 손이 언제 없어졌는지도 몰랐음을 깨달았다. 그는 너무 어처구니없이 무의식중에 몸을 마구 뒤틀었다.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았지만 그들의 그림자조차 찾을 수 없었다. 패가망신한다는 불길한 예감이 그의 심장을 짓누르는 바람에 그의 눈에서는 닭똥 같은 눈물이 몇 방울 굴러떨어졌다. 그의 눈에 비친 전등 빛이나 사람들이 전부 다 몽롱해 보였다.

다행히도 안고 있는 아이의 눈이 밝아서 어머니의 이마에 드리운 성긴 머리카락을 이내 알아보고는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소리쳤다.

"저기에 엄마가 있어!"

이 말에 기뻤으나 조금은 믿기 어려워 아이의 옷에다 눈을 비벼 닦은 후 한참이나 살펴보고서야 자기의 아내가 멍청한 쥐처럼 사람들 속에서 목적없이 떠돌며 아이를 앞세우고 헤매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들은 기찻길을 채 넘어서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그들을 인도로 데리고 갔다. 그는 안고 있던 아이를 내려놓고 안도의 숨을 내쉬고는 이마의 땀을 훔치면서 중얼거렸다.

"이젠 됐구나!"

실로 제대로 된 셈이다. 이제 저 철난간을 벗어나면 자신들이 생명은 보호를 받게 될 것이니 그때는 전쟁 때문에 속태우거나 약탈당할 위험도 전혀 없는 것이다. 게다가 헤어질 뻔했던 아내와 아이까지도 제때에 찾았으니 이만하면 네 생명과 가죽가방 하나가 모든 위험 속에서 안전해진 것이 아닌가? 그러니 실로 "이제 됐구나!"라고 말할 만하지 않은가!

"인력거!"

판 선생은 아주 그럴듯한 목소리로 불렀다. 이 소리에 인력거꾼들이 일시에 몰려와 목적지를 물었다. 그는 고개를 한동안 쳐들고 위엄스러운 자세로 손가락 두 개를 펴며 말했다.

"두 대면 돼. 두 대..."

그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10문에 사마루까지 가려면 가고 그렇지 않으면 그만둬!"

이 몇 마디 말을 통해 그가 상해 토박이임을 충분히 알 수 있다.

한 대에 12문을 내기로 하고 흥정을 끝냈다. 판 선생의 부인은 큰아들과 같은 인력거에 타고 판 선생은 작은아들과 검정 가죽가방을 가지고 다른 인력거에 올랐다. 인력거꾼이 속도를 내어 막 달리려는 순간 총을 맨 인도 순사가 길을 막아서자 인력거가 움츠리듯 섰다. 작은아들은 이 순사의 생김새와 차림새가 무서워서 아버지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아이의 이런 눈치를 알아차린 판 선생이 아이에게 말했다.

"겁낼 것 없어. 그 사람은 인도 순사야. 우리 고장엔 저런 순사가 없어서 우리가 이쪽으로 피난 온 거야. 그 사람이 총을 둘러메고 우릴 보호해 줄 거야. 수염이 정말 굉장하지! 마치 라한의 수염과 다를 바 없거든..."

아이는 겁을 잔뜩 집어먹고 순사의 수염이 라한의 수염과 같다고 해도 보려 하지 않다가 인력거의 방울 소리가 딸랑딸랑 울렸을 때에야 살금살금 곁눈으로 거리를 훔쳐보았다. 불빛이 휘황찬란한 가게들이 퍼뜩퍼뜩 스쳐 지나갔다. 길 건너편에 있는 집들에는 휘황찬란한 등불이 켜져 있었다. 그제야 아이는 비로소 아버지의 가슴에서 얼굴을 떼었다.

사마루에 이르러 줄곧 여덟아홉 개나 되는 여관을 찾아다니며 물어봤지만 모두 '만원'이라고 쓴 팻말이 걸려 있었다. 사정해 봐도 안 될 것은 뻔하였다. 손님 접대실까지 침실로 임시 개조한 형편인데 사정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맨 마지막 여관도 '만원'이라고 팻말을 내걸고 있었다. 이때 한 심부름꾼이 느릿느릿 말을 건넸다.

"유숙하실 겁니까?"

"그렇소! 아직 빈방이 있소?"

일말의 희망이 보이자 판 선생의 전신에 안도의 기운이 쪽 퍼졌다.

"방 하나가 금방 났어요. 손님이 방금 셋방을 얻어 옮겨 갔거든요. 선생께서 조금만 더 늦게 왔더라면 이 방도 없었을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 방을 쓰겠어요."

그는 작은아들을 내려놓고 돌아서서 아내와 큰아들을 부축하면서 말했다.

"우리의 운수도 이만하면 괜찮은 셈이오!"

그러고는 인력거꾼에게 선심을 베풀어 원래의 차비에 1문을 더 주었다. 그는 재수가 좋을 때 남들에게 선심을 쓰면 계속해서 운이 좋아진다는 것을 믿고 있었다. 하지만 인력거꾼은 만족하기는커녕 여관을 찾느라 이곳저곳을 오랫동안 돌아다녔다고 하면서 5문을 더 줘야 한다고 했다. 결국 4문을 더 주고 보내었다.

판 선생네 일가 네 식구가 여관의 심부름꾼을 따라 들어간 방은 아래층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침대 하나와 전등 하나, 밥상 하나와 두 개의 걸상을 제외하고는 연기와 다름없는 공기가 방안에 가득할 뿐이었다. 방에 들어서자 기름 냄새와 오줌 냄새가 섞인 듯한 고약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냄새가 꽤나 고약한걸!"

판 선생은 불쾌한 듯 중얼거렸다. 옆방에서는 음식물 튀기는 소리가 줄곧 들리는 것으로 보아 거기가 취사칸인 것 같았다. 생각해 보니 냄새는 좀 지독하지만 탄알밥이 되거나 길바닥에서 자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여유 있게 의자에 걸터앉았다.

"저녁 식사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심부름꾼이 가방을 내려놓고는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난 고기 국밥을 먹을래!"

작은놈이 손가락을 깨물며 말했다. 그러자 판 선생의 부인이 눈을 부릅뜨고 엄하게 꾸짖었다.

"고기 국밥이 다 뭐냐! 피난 온 신세에 굶지나 않으면 다행인데 어디 고기 국밥 타령을 하며 떼질이냐?"

큰놈도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고 두리번거리더니 아버지를 힐끔 쳐다보며 속삭였다.

"아버지, 상해에 왔으니 서양 음식 좀 먹어 봐요!"

판 선생의 부인은 하도 기막혀서 성을 내며 욕을 퍼부었다.

"양심이라곤 전혀 없는 놈들 같으니라구. 너희들은 아무것도 먹어서는 안 될 분수도 모르는 것들이다. 산 채로 굶겨서..."

난처한 판 선생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넌지시 참견을 했다.

"아이들이 무얼 안다고 그렇게 노발대발하오?"

그러고는 심부름꾼에게 주문을 했다.

", 우린 이미 차에서 요기를 하고 왔으니 닭알 볶음밥 두 그릇만 갖다주시오."

심부름꾼이 시큰둥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문을 나서려 할 때, 판 선생이 그를 다시 불러 세웠다.

"... 그리고 소홍황주하고 10문 어치의 물고기 안주도 함께 갖다 주시오."

심부름꾼의 발소리가 멀어지자 판 선생은 모든 걱정이 사라진 사람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아내에게 일장 연설을 늘어놓았다.

"지금이야말로 기뻐해야 할 때요. 그러니 술 한잔 마셔야지. 여보, 생각해 보오. 전쟁으로 수라장이 된 어수선한 곳에서 이처럼 안전한 곳으로 왔으니 이것이 첫번째 기쁨이요, 아까 둘째 녀석이 눈치가 빨라(이때 그는 작은아들을 끌어당겨서 손으로 아이의 어깨를 다독거리며 말한다.) 다시 모였으니 이것이 바로 두 번째 기쁨이 아니겠소? , 참 즐겁구나! 한잔 가득 흘러 넘치도록 부어 마셔 보자."

그는 손으로 빈 술잔을 들어 마시는 시늉을 하면서 낄낄거리며 웃었댔다.

판 선생의 부인은 부인대로 잠자코 앉아서 집 생각을 골똘히 하고 있었다. 입을 만한 옷가지들은 다 트렁크에 넣어 우편을 통해 이미 교회로 보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남겨둔 물건들이 적지 않았다. 그런데 왕어멈도 믿음직한 사람인지 모를 일이다. 그리고 우리가 왕어멈에게 집을 떠맡기고 피난온 줄 알면 어떻게 나올까? 왕어멈이 밤에 문이나 창문을 걸지 않고 자지나 않을까? 또 뜰에 있는 씨암닭 세마리와 미처 짓지 못한 둘째 아이의 바지, 그리고 주방에 있는 구운 통오리가 생각났다. 잠깐 사이에 여러 가지 일들이 새삼스레 떠오르며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러기에 그녀는 근심 어린 투로 한탄을 했다.

"어떻게 될지 누가 알겠어요?"

두 아이는 상해가 평소에 부모님이 말한 것처럼 놀기 좋고 재미있는 곳이 아님을 알고 실망하고 있었다.

이따금 빗방울이 한 두 방울 집안에 떨어졌다. 판 선생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 쪽으로 가서 중얼거렸다.

"과연 비가 내리는군. 지금 내려서 다행이야."

그러고는 창문을 닫아 버렸다. 이때 그는 갑자기 창문에 가리워져 있던 '손님이 마땅히 알아야 할 일'이라는 벽광고를 보고는 한 가지 매우 중요한 일이 생각났다. 그는 눈을 크게 뜨고 그 광고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숙박료는 에누리 없이 2만 원이라!"

그는 놀란 나머지 부르짖었다. 그리고 뒤를 돌아 놀란 눈으로 아내를 바라보면서 기가 막힌 듯 혀를 내둘렀다.

 

2

다음 날 아침 행랑에서는 여관집 심부름꾼들이 허리를 쭈그리고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너무나 비좁은 곳이라 천장에는 한 갈래 아침 햇빛만이 스며들어 있을 뿐이었다. 몇몇 침실에는 아직도 희끄무레한 전등불이 켜져 있었다. 판 선생네 내외는 벌써 잠에서 깨어나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두 아이들도 깨어나 오늘의 상해는 어제보다 더 좋으리라는 희망을 품고 속삭였다. 한잠 더 자라는 부모들의 호령에 못 이겨 침대에 누운 채로 저희들끼리 몰래 깔깔거리며 장난질에 한창이었다.

"여보, 당신은 어쨌든 집으로 돌아가지 말아야 해요. 이 신문만 보아도 그런 소식을 믿어야 하는지, 믿지 말아야 하는지 알 수 있잖아요? 천신만고 끝에 이곳까지 피난 왔는데 당장 돌아가야 한다니요?"

판 선생의 아내가 초조한 듯이 말했다.

"사실은 내가 다 알고 있다니까. 교육국장의 성미는 조금도 소홀히 할 문제가 아니라서. '아직 이곳은 전쟁의 불길이 타오르지 않았으니까, 학교는 예전과 마찬가지로 수업을 하여야 하오!' 이 말은 틀림없는 그의 주장이라니까. 그 통신원에 대해선 나도 어느 정도 아는데 비록 교육국장의 직원에 불과하지만 어찌 믿지 않을 수 있겠소? 그러니 난 어쨌든 가봐야 하겠소."

"지금 돌아가면 위험할 거예요."

판 선생의 부인은 매우 가슴 아픈 듯이 말했다.

"이삼 일 후면 그들이 우리 고장에 쳐들어올 텐데 당신이 가서 개학한다 한들 어느 학생이 공부하러 온다구 그래요? 또 설사 그들이 쳐들어오지 않더라도 교육국장이 당신더러 왜 개학하지 않았느냐고 나무란다면 당신도 대답할 말이 있지 않아요? 당신은 그저 그에게 이렇게만 반문하세요. '생명이 중한가요 학교가 중한가요?'라고 말이에요. 그도 목숨 가진 사람인 이상 결코 당신을 억울하게는 하지 않을 거예요."

"당신이 뭘 안다고 그래?'

판 선생은 어느 정도 아내를 얕보는 듯한 말투로 꾸짖었다.

"그런 말은 집에 숨어서 침대에 마음 편히 누워 있는 당신과 같은 아낙네들이나 외칠 소리요. 어떻게 우리 같은 사람들이 그런 말을 할 수 있겠소? 당신은 나를 말리지 마시오. 나는 나대로 나를 보호할 대책이 있으니까."

그는 스스로 자신의 지혜에 만족해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당신은 집에 두고 온 물건을 걱정하고 있지 않소? 내가 돌아가면 그것들을 어련히 잘 돌보겠소. 그러니 당신은 걱정일랑 말고 여기서 기다려요. 시국이 조용해지면 내가 당장 당신과 아이들을 데리러 올 테니 그리 아시오."

판 선생의 부인은 남편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가 돌아가서 두고 온 물건들을 살핀다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가 돌아간다는 것은 마치 구슬을 바다에 던지는 것과 다름없는데 누가 그것을 꼭 건질 수 있다고 보장하겠는가? 불현듯 생이별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가슴에 울컥 치밀자 그녀는 감히 남편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눈가에서 곧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그녀는 아직까지 어떤 풍파도 생기지 않았는데 이런 때에 눈물을 흘린다는 것은 상서롭지 못한 행실이라고 생각하고 흐르는 눈물을 가까스로 참으며 남편에게 말했다.

"그렇다면 가서 형편이나 보세요. 교육국장이 개학해야 한다는 말이 없으면 오늘 오후 차를 타고 오시든지 그렇지 않으면 내일 아침 차를 타고 오세요."

그녀는 끝내 참지 못하고 눈물 한 방울을 손등에 떨구었는데, 곧 팔소매로 닦으면서 말했다.

"난 절대 마음을 놓지 못하겠어요!"

사실상 판 선생도 산란한 마음과 번민에 심히 부대끼고 있다. 국장이 전과 다름없이 개학하라고 한다면 자기로서는 그것을 조금이라도 지체시킨다는 것은 천부당만부당한 일이다. 그러하기에 돌아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여기에 남아 있는 가족들을 어찌 내버려 두겠는가! 아내의 이 같은 연민의 정을 홱 뿌리치고 떠난다는 것은 너무도 인정 없는 행동이 아닐 수 없다. 아내와 두 아이는 모두 연약한데다가 의지할 만한 곳도 전혀 없이 외지에서 기숙하는 형편이니 어찌 돌발적인 일이 생기지 않는다고 단언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생각하니 가슴속에서 증오의 불길이 저도 모르게 활활 타올랐다. 그는 군사를 이동시켜 전쟁을 준비하는 망나니들을 증오했으며, 이전대로 개학하라는 교육국장을 증오했다. 그리고 자기에게는 아직도 이런 때에 자신의 든든한 한 팔이 되어 일을 도울 만한 큰 자식이 없는 것을 한탄했다.

그러나 그는 여자들과는 달리 이해득실을 타산하여 그래도 돌아가는 것이 하늘이 내린 법도라고 생각하고는 불평불만을 잠시 한쪽에 밀어 놓고 얼굴에는 조그마한 내색도 보이지 않으면서 아내의 의견에 머리를 끄떡이며 대답했다.

"만약 국장이 그럴 의향이 없다는 것을 똑똑히 알아본 후 사실이 확실히 그렇다면 당신 말대로 오후 차로 돌아오겠소."

고향 마을에 갔다 온다는 말을 대충 엿들은 둘째 녀석이 따라가겠다고 떼를 썼다. 그러자 큰놈이 낯을 찡그리고 눈을 끔벅거리며 동생을 곯려 주었다.

"내가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돌아가고 너 혼자만 여기에 있거라!"

둘째 녀석은 이 말을 듣더니 째지는 듯한 목소리로 고함지르며 우는 시늉을 했다. 작은 손으로 눈가를 닦고 있어도 눈물 없는 마른 울음만 울었다.

"너희들은 여기에 어머니와 함께 있거라."

판 선생은 목청을 돋우어 말했다.

"이제 일어나 아침 먹을 채비나 하시오."

말을 마친 그는 아내에게 몇 마디 당부를 남기고는 인력거를 타고 역전으로 나갔다.

길에서 사람들로부터 철길이 이미 끊어져서 기차가 다니지 않는다는 말을 어렴풋이 들은 판 선생은 생각에 잠겼다.

"만약 기차가 다니지 않는다면 좋은 생각일랑 하지 말아야지. 당장 나를 면직시키는 것도 그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거이니까."

기차가 다니지 않는다는 이 소식은 사실상 그를 크게 실망케 했다. 만약 운수가 좋을 것 같으면 이런 재수 없는 일에 봉착하지도 않았을 텐데. 그러나 행인들의 말이 꼭 믿음직한 것이 아닐 수도 있지 않는가? 이 문제를 풀려면 오직 인력거꾼에게 희망을 걸어야 한다. 그것은 그가 빨리 달려 역전에 당도해야 알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운수는 그래도 좋은 편이었다. 역 앞에 당도하여 보니 기차가 다니지 않는다는 통고가 없었다. 기차가 들어올 때까지는 아직도 시간이 얼마쯤 남아 있었다. 매표구는 그리 복잡하지 않았고 이따금 한 두 사람이 표를 사고 있었다. 역 안은 그래도 사람이 적지 않았는데, 일부는 손님을 마중하러 나온 사람들이었고, 또 일부는 구경꾼들이었는데 그중에는 사진기를 지닌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기차가 당도한 다음 사람들이 붐비며 밀어닥치는 장면을 렌즈에 담아 "풍운변환사"의 한 페이지를 엮으려는 목적에서 여기에 온 것이었다. 화물취급소 안에는 각양각색의 상자와 이부자리 따위들이 양철 천장까지 닿을 정도로 쌓여져 있었다.

그의 마음은 평안한 것 같기도 하고 석연치 않은 것 같기도 하였다. 그는 머뭇거리다가 삼등 차표를 산 후 기차에 올랐다. 맑은 햇빛은 기차 안에 가득 찼으나 그다지 무덥지 않았다. 자리도 널찍하여 누워서라도 갈 수 있었다. 그는 생각에 잠겼다.

'만약 마음에 꺼림칙한 걱정만 없다면 실로 경험하기 어려운 유쾌한 여행이 되었을 텐데.'

이 가차는 달리면서 군용차가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등 줄곧 이곳저곳에서 시간을 지체하다 보니 양리에 도착한 때는 벌써 오후 5시였다. 판 선생은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급히 집으로 돌아가 문이 꽁꽁 잠겨 있는 것을 보고서야 한시름 놓았다. 그가 어저께 왕어멈에게 재삼 당부한 것이 바로 이 일이었기 때문이다.

대문을 여남은 번이나 두드리고 나서야 왕어멈이 비로소 문을 열었다. 그녀는 판 선생이 돌아온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이게 어찌된 일이에요? 선생님께서 돌아오셨구만! 피난 가지 않아도 되나요?"

판 선생은 두루뭉실하게 얼버무려 대답해 주고는 집 안으로 들어갔다. 방문의 자물쇠를 열어 제치고 방안의 이 구석 저 구석을 샅샅이 살펴보았는데 아무런 변화나 움직임이 없이 어제와 똑같았다. 걱정스러웠던 그의 마음은 한 절반쯤 안심이 되긴 했지만 나머지 절반은 여전히 안심이 되질 않아 그는 방문을 잠그고 나서면서 왕어멈에게 다시 당부하는 것이었다.

"어멈, 어멈은 대문을 꼭 잠그고 계세요."

어멈은 갈피를 잡지 못한 채 대문을 잠그고 들어가서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그는 주인들이 결코 멀리 피난을 간 것이 아니라 이곳에 있으면서도 그가 따라갈 것 같아 상해로 피난 간다고 속인 것이 틀림없다고 여겼다.

'그렇지 않으면 왜 선생이 또 돌아왔는가? 마님은 두 아이들을 데리고 함께 오지 않았으니 지금 어디에 숨어 있을까? 그런데 그들은 왜 나를 데려가지 않았을까? 그건 틀림없이 사람이 많으면 좋지 않으니깐 그런 것일 거야. 그들은 저 양코배개들의 붉은 집 안에 있을 거야. 싸움이 일어나도 그 집만은 다치지 않는다고 병정들도 말하지 않았나? 사실 나더러 함께 가지고 해도 난 그리 달갑지 않거든. 설령 싸움이 여기서 멀어진다고 한들 내가 입을 평상복은 이미 마련한 지도 오래되었으니까 여기에 그냥 남아 있은들 무엇이 겁나겠는가?'

여기까지 생각한 그녀는 생질딸이 그녀에게 선물한 수놓은 헝겁신이 머리에 떠오르자 그걸 신고 황천에 간다면 염라대왕도 자기를 다르게 대해줄거라고 믿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매우 야릇한 행복감을 느끼면서 주인들이 어디에 숨어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선 더 이상 생각하지 않았다.

판 선생은 집은 나서자 곧 교육국 통신원을 찾아가 국장이 여전히 개학할 의향인가를 물었더니 그가 대답했다.

"그래요. 그분께서는 또 지금 교원들은 저마다 피난 가는 데만 골몰하다 보니 직무에 태만한데 이는 바로 그들이 교육사업에 종사할 자격이 없다는 것을 표명하는 것이니 이 기회에 그들을 도태해 버리는 것도 좋은 일이라고 하더구만요."

판 선생은 이 말을 듣고 몸서리를 쳤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래도 이처럼 상해에서 부랴부랴 돌아온 것이 선견지명 있는 행동이라고 스스로 느꼈다. 그는 헐레벌떡거리며 학교로 달려가 학생들 집에 보낼 통고문을 작성하였다. 통고문 가운데는 이런 구절이 씌어 있었다. '지금 병란으로 비록 염려는 되지만 자식들에 대한 교육은 옷이나 양식과 마찬가지로 하루 한 시각이라도 늦출 수 없다. 방학도 이미 끝났으므로 학교는 예전대로 개학한다. 그전에 있었던 구라파 대전 때에 남들은 전쟁의 혼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방어벽을 세워 놓고 그 아래에서 공부를 하였는데, 이와 같은 비상한 정신을 그들만 독차지하게 해서는 안 된다. 바라건대 가장들은 이 참된 뜻을 터득하고 전쟁이 없을 때와 마찬가지로 자식들을 학교에 보내야 한다. 이는 가정과 학교에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지방과 국가의 영예이기도 하다.'

그는 초고를 다 쓴 다음 세 번이나 훑어보았으나 별로 고칠 만한 곳이 없다고 여겼다. 만약 국장이 이 통고문을 보신다면 적어도 "그 사람은 언제나 제일 내 마음에 든다니까."라는 말 한 마디쯤은 꼭 하리라 믿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등사용지를 올려 놓고 직접 100여 장 정도 찍은 후 학교의 공무원을 시켜 학생들 집에 보냈다. 이렇게 해서 공무는 대충 마무리한 셈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문제를 다시 생각하기 시작했다. 개학한 이상 상해에는 다시 갈 수 없다. 그렇다면 아내와 아이들은 여관에서 힘든 나날을 보낼 것이다. 하지만 다른 방법은 없고, 오직 그들이 주의하면서 견디어 내는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아까 쓰던 필묵이 마르기 전에 부인에게 편지를 써서 부쳤다.

이튿날 그는 찻집에서 확실히 철로가 막혔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의 마음은 침울했다. 마치 그의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이 홀연히 바람을 타고 아득한 곳으로 사라지는 듯하였다. 우울한 기분으로 학교까지 걸어와 보니 학교 공무원이 어제 맡았던 임무 수행 상황을 보고했다. "어저께 통고문을 가지고 돌아다녔는데, 20여 호도 넘는 집들이 문을 잠궈서 문틈으로 겨우 통고문을 넣었습니다. 30여 호는 심부름꾼들만 남아 있고 주인들은 아이들을 데리고 죄다 상해로 피난 갔는데, 언제 돌아올지 모른다고 하더군요. 나머지 사람들은 그저 알았다고 하였습니다. 몇몇 사람들은 목숨이 위태로운 긴박한 상황이니 공부하는 문제는 뒤로 미루어 생각해 보자고 했습니다."

", 됐소."

판 선생은 그의 보고 내용에 마음을 쓰지 않았다. 그는 담배 한 대를 피우고 나서 자기가 가야 할 길을 결정한 후, 곧바로 적십자 사무소를 갔다. 그는 회비를 내고 회원 자격을 신청하였다. 또 학교는 널찍하여 부녀자 수용소로 쓸 수 있다며 만일의 경우 부녀자들을 수용하겠다고 말했다. 그의 이런 자선적인 행동은 뜨거운 환영을 받았다. 게다가 판 선생은 워낙 위신 있는 인물로 누구에게나 잘 알려져 있던 터였다. 사무소에서는 그에게 적십자 깃발을 주어 교문에 걸도록 하였고, 또 그에게 적십자 휘장을 주어 적십자회원임을 나타내게 하였다.

판 선생은 깃발과 휘장을 받고는 마치 구명부를 얻은 것처럼 맘속에서 신비스러운 쾌감과 위안을 찾았다.

"이젠 전부 안전하게 됐다! 그러나..."

여기까지 생각한 그는 웃는 얼굴로 사무원에게 말했다.

"저에게 깃발 하나와 휘장 몇 개를 더 주십시오."

그 이유인즉 깃발은 교문 양쪽에 걸 것이고, 휘장은 너무 작아서 혹시 잃어버릴 것을 고려하여 몇 개 더 갖춰 두자는 것이었다.

사무원은 이에 회원 휘장은 맛좋은 음식도 아니고 장난감도 아니니 한 사람이 여러 개를 가진다 해도 회원은 결국 한 사람이므로 적게 갖는 것이 오히려 좋다고 익살조로 말했다. 그러나 결국 판 선생의 요구대로 몇 개 더 주고 말았다.

두 개의 적십자 깃발은 첫가을의 산들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은 교문의 양쪽이 아니라 판 선생네 대문에서 펄럭이고 있었다. 적십자회원 휘장 하나는 판 선생의 가슴에서 장엄한 빛을 뿌리고 있었고, 나머지는 포장지로 겹겹이 싸여진 채 판 선생의 조끼 주머니 속으로 들어갔다. 그는 아내와 두 아이들에게 각기 하나씩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비록 먼 상해에 떨어져 있지만, 이 휘장만 있으면 그들에게 아무리 큰 위험이 닥쳐온다고 해도 구출될 수 있고, 또 일종의 새로운 용기를 북돋워 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3

벽장이라는 곳에서 양쪽 군대가 마주쳤다. 양리 마을은 집집마다 문을 걸어 잠그고 있었고 가게는 말할 것도 없었다. 거리에는 이따금 병사들이 무리를 지어 오가고 있을 뿐이었다. 그들은 전선으로 떠날 태세를 하고 있었는데, 마치 그들의 몸과 마음에 그 어떤 절대적 권위가 부여된 듯 안하무인격이었다. 그들은 얼굴에 살기가 잔뜩 올라서 마음에 내키기만 하면 모든 것을 발로 짓이겨 박살낼 듯한 기세였다. 시국이 어지러우니 강제 징병하는 것이 문제가 되었다. 강제 징병되어 가는 사람이 행여나 틈을 타서 달아날까 염려되어 잡아온 병사들을 긴 밧줄로 하나하나 묶어서 끌고 가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었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밖으로 나가는 것을 두려워하고 부득이한 경우에만 좁은 골목으로 다니곤 했다. 심지어 판 선생처럼 적십자 휘장을 단 사람들도 밖으로 나가는 것을 두려워하여 감히 활개 치며 돌아다니지 못했다. 그 때문에 양리의 거리는 물 뿌린 듯 조용하고 한결 더 널찍해 보였다.

상해의 신문들이 오지 않은 지도 벌써 여러 날 되었다. 본 지방의 군사기관에서는 자주 전선의 소식을 알렸는데 어느 공고에나 '적군은 대패하고 아군은 몇 리 진군' 따위의 소식뿐이었다. 거리에나 골목 입구에 새로운 전투 소식 뒤에 숨겨진 사실을 얘기하면서, 갈피를 잡지 못한 채 실망한 듯 미간을 찌푸리고 각기 헤어졌다.

이 며칠째 판 선생은 너무나 무료하였다. 가장 난감한 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처자와 멀리 떨어져 소식조차 전할 길 없는 막막한 처지와 나아가 어쩌면 영원히 소식을 전할 수 없을지도 모르는 심상치 않은 조짐이 다소 엿보이는 점이었다. 그 다음은 역시 자신의 안전 문제였다.

'벽장은 100여 리 밖의 거리에 있다. 이 적십자 휘장이 비록 쓸모가 있기는 하지만 그 누구도 아직 그렇게 써보지 않았으니 만약 이 휘장이 쓸모 없다고 한다면 누구와 시비할 것인가? 탄알, 폭탄, 약탈, 방화 같은 것은 실제 일어나는 일이지 결코 장난이 아닌 이상 어쨌든 여러 곳에 알아보고 여러 방면으로 살아갈 방도를 찾지 않으면 안 되겠군.'

이렇게 생각하고 그는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전선의 소식을 염탐하였는데, 이런 소식들이 항간에 떠도는 소문과 다르기만 하면 그 소식이 더 믿음성 있는 것 같아서 거기에 근거하여 자신의 이해득실을 가늠하여 보았다.

어떤 사람이 당황하여 급히 길을 가는 것을 보기만 해도 그는 깜짝 놀란 나머지 그가 틀림없이 무시무시한 소식을 알고 있는 것으로 여겼다. 무슨 소식이냐고 당장 묻고 싶었지만 초면이기에 물어볼 수도 없었다.

적십자 모임에서는 전선에 사람을 파견하여 부상병들의 구호사업을 하였는데, 군용차를 타고 돌아오는 사람들이 늘 있었다. 전선의 소식을 알려면 이들의 말이 그래도 가장 믿을 만하였다. 판 선생은 비록 회원이긴 하지만 사무소에 자주 들러 소식을 알아보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이렇게 하는 것은 여러 사람들 앞에 자기가 겁쟁이라고 알리는 것이 되기 때문이며 또 이런 행동은 매우 어색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적십자 모임은 진실한 소식을 얻어들을 수 있는 기관인 이상 이 좋은 기관을 이용하지 않고 다른 것을 의거한다는 것은 타당하지 못한 생각이라 여겼다. 그는 매일 해질녘이면 사무원 오씨를 찾아가서 전선의 소식을 듣곤 했다. 오씨가 그에게 별일 없다거나 혹은 아군이 전선에서 적을 견지하고 있는 중이라고 알려 주면 그제야 마음 놓고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이날 저녁에도 판 선생은 오씨네 집으로 갔다. 오래 기다린 후에야 그 사람이 돌아왔다.

"아무런 일 없지요?"

판 선생이 다급히 물었다.

"포고에 따르면 어저께 아군은 적들을 향하여 총공격을 시작했다더군요. 다 망쳤습니다."

오씨는 수심에 잠겨 말하다가 뒷말을 얼버무리고 얼마 안 되는 짧은 콧수염만 계속 꼬았다.

"뭐라구요?"

판 선생은 깜짝 놀라며 온몸이 굳어지는 듯한 부자유스런 표정을 지었다.

오씨는 남들이 엿들을세라 귓속말로 중얼거렸다.

"믿을 만한 소식통에 따르면 오늘 아침 정안(벽장에서 8리 떨어진 작은 도시)이 적들에게 넘어갔답니다."

", 큰일났네!"

판 선생은 미친 듯이 부르짖었다. 그러고는 한참 동안 머뭇거리다가 돌아서서 "난 갑니다!"라고 소리지르며 걸음을 재촉했다.

거리의 전등은 유난히 흐릿했고 등 뒤에서는 마치 낯선 사람이 뒤쫓아오는 듯했다. 그는 허겁지겁 집으로 달려와 왕어멈에게 당부했다.

"문을 닫아 걸고 편안히 쉬어요. 난 오늘 저녁에 일이 있어서 들어오지 못할 것 같소."

그는 옷장에서 강연사 직물로 지은 낡은 솜옷을 발견하고는 먼젓번에 우편으로 부쳐 보내지 못한 것을 못내 아쉬워했다. 아이들의 몇 가지 옷도 살펴보니 아직 입을 만하였다. 또 아내의 다 낡은 비단 치마도 버리기엔 너무 아까웠다. 그는 이런 것들을 와락 끌어안고 문을 나섰다.

"인력거! 인력거! 북성가 붉은 집까지 10문 주겠소!"

"지금 10문 받고 거기까지 갈 사람이 어디 있다고 그러시오?"

인력거꾼이 빈정댔다.

"당신도 보다시피 요즈음 거리에 인력거가 몇 대나 있는 것 같소? 죽기살기로 목숨 걸고 끼니나 잇자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다들 숨어 버렸소. 30문에 가겠다면 가고, 그렇잖으면 그만두시오."

"좋소! 30문 드리지."

판 선생은 달려가 인력거에 편히 앉은 다음에 조건을 달았다.

"그 대신 내가 시키는 대로 해야 하오. 좀 빨리 달려 주시오!"

"판 선생, 어디로 가시오?"

학교에서 일하는 황씨라는 일꾼이 도중에서 그를 보고 멈춰서서 말을 건넸다.

"! 나 저리로...'

판 선생은 그에게 묻는 사람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당황하여 나오는 대로 대꾸하다가 제삼자에게 솔직히 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대답을 얼버무려 버렸다. 인력거가 나는 듯이 질주했기 때문에 그 사람이 다시 달려와 물어 볼 가능성도 없었다.

붉은 벽돌집은 몹시 붐비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열흘 전에 이쪽으로 왔다. 아이들의 울음소리에 어른들의 말소리가 섞여 있고 이곳저곳에는 전등이 밝게 켜져 있어 흥청거리는 잔칫집 같았다. 주인이 판 선생에게 말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이곳에는 빈방이 없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이 이미 이곳으로 물건을 부치고 찾아왔으니 거절하기도 난처한 입장입니다. 조금 전에 몇 분이 찾아왔는데 거절하려니 안쓰러워서 밥 짓는 겉채를 내주며 쉬게 했습니다. 그들과 상의하면 선생 한 분쯤은 끼여서 잘 수 있을 것입니다.

판 선생은 마치 자신의 집에 온 것처럼 평안하였다.

"상의하면 되겠지요. 하물며 이런 시국에 말입니다. 나도 거기에서 잠 잘 생각은 아닙니다. 그저 되는 대로 앉아 있으면 되지요."

그가 짐꾸러미를 들고 그 곁채에 들어서려는 순간, 그는 너무도 놀란 나머지 전에 앓았던 눈의 각막염 증세처럼 앞이 잘 안 보이고 착시현상이 생겼다. 그는 눈을 몇 번이나 끔뻑거리고 다시 보았지만 좀 전과 달라진 것이 없었다. 창가에 기대어 앉아 대화를 나누고 있는 짙은 팔자수염을 기른 사람은 바로 교육국장이 아닌가?

잠깐 망설이던 끝에 이미 방안에 들여놓은 발을 돌이키려 하니 그것도 난감한 일이었다. 국장도 그를 알아보고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판 선생도 오셨구만. 어서 이리 와 앉으시오."

주인은 그제야 그들이 이미 아는 사이임을 알아차리고 돌아갔다.

"국장님께서 먼저 들어와 계셨군요. 한 사람이 더 끼여도 괜찮겠습니까?"

"우린 이렇게 세 사람뿐이니 물론 당신 한 명쯤은 같이 지낼 수 있소. 우리는 바닥에 깔 자리를 가지고 왔는데 윤번으로 휴식할 수도 있소."

오늘 저녁 따라 국장이 특별히 자기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것이 여느 때와는 달랐다. 판 선생은 성큼 방안으로 들어서면서 말했다.

"그렇다면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오늘 저녁에 국장님을 모시고 하룻밤 지내겠습니다."

이 곁채는 그다지 넓지는 않았다. 바닥에는 안경을 낀 중년 사나이가 자리를 깔고 앉아 있었다. 그는 좀 피곤한 것 같았지만 결코 잠잘 생각을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물건들은 한쪽 벽에 기대어 놓았고 창문가에는 3개의 걸상이 나란히 놓여져 있었는데 첫 번째 걸상에는 국장이 앉아 있었다. 두 번째 걸상에는 머리를 쭉 빗어 넘긴 약 이십 세가량 되어 보이는 국장의 사촌 동생이 앉았고, 나머지 하나는 비어 있었다. 저쪽 구석에는 버들상자가 있었는데 거기에 놓여진 세 개의 옷꾸러미는 아마 이 세 선생의 것이리라. 이런 것만으로도 이 방은 가득 차서 빈자리라곤 하나도 없다. 전등은 워낙 낮게 달려 있고 먼지가 자욱해서 방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거무칙칙해 보였다.

판 선생도 옷꾸러미를 세 선생의 옷꾸러미와 함께 구석에 있는 버들상자 위에 놓은 다음 빈 걸상에 앉았다. 국장은 자기의 동반자들을 그에게 소개하면서 그에게 물었다.

"당신도 정안 소식을 들었소?"

"들었습니다. 정안이 함락되었으니 벽장을 지킬 수 있다고 누가 보장하겠습니까?"

"아마 우리 군대들이 남쪽 노선을 허술하게 수비한 것 같소. 정안을 잃은 것이 바로 이 점을 똑똑히 보여 주고 있잖아요. 그쪽 군사들이 벽장을 습격하고 공격하기에는 정안이 전략요충지인데... 아마 지금쯤 그들의 손에 들어갔는지도 모를 일이오. 만약 그렇다면 아군이 상당히 어려울 것이오."

"그렇게 되면 이곳은 수습하기 어려울 정도로 난장판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쪽 두 총사령이 용병에 능하니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든지 적들의 진격을 막을 것이오. 그리고 파죽지세로 적들의 소굴로 쳐들어가 놈들을 여지없이 쳐죽일 것이오."

"말씀대로 그렇게만 된다면 전쟁도 끝날 것이니 얼마나 좋겠습니까? 우리같이 학교를 경영하는 사람들은 다시 학교 문을 열고 들어가 예전처럼 수업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국장은 학교를 꾸린다는 말을 듣자 차츰 자신의 존엄을 느끼며 팔자수염을 비비꼬면서 한탄을 금치 못했다.

"다른 건 그만두더라도 이번 전쟁으로 수많은 학생들이 당한 손해는 이루 다 말할 수 없소."

이렇게 말하는 그는 이같이 좁은 방안에서 느끼는 불편함을 깡그리 잊고 마치 교육국장의 으리으리한 사무실에라도 앉아 있는 것같이 느껴졌다.

자리를 깔고 앉아 있는 중년의 사나이는 고개를 들고 원한에 찬 욕심을 퍼부었다.

"저쪽의 총사령은 정말 밉살스럽기 짝이 없단 말이야! 이쪽에서 쳐들어가면 어떻게 견뎌 내려고 그러는지. 끝내는 패전하고 말 텐데. 그가 만약 체면을 지키면서 양보했다면 전쟁은 벌써 종말 지었을걸."

"그는 멍텅구리라니깐."

국장의 사촌동생이 뇌까렸다.

"끝장을 보지 않고는 물러설 사람이 아니야. 그러고 보면 우리가 중간에서 이처럼 어둡고 비좁은 방에 쭈그리고 앉아 헛고생만 하는 거라구."

그는 이렇게 익살조로 말했다. 하지만 판 선생은 머나먼 상해에 있는 처자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그는 그들이 무사한지, 무슨 일이 생기지나 않았는지, 그리고 이 시각에 그들이 잠이나 제대로 자고 있는지를 알 길이 없었다. 이러한 그의 염려와 상상은 손으로 잡아 보려 해도 잡을 수 없는 것이며 모호하기 그지없는 것에 불과했다. 그러하기에 그는 지금 자기가 받고 있는 시달림이야말로 힘겨운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묵묵히 앉아 있었다.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그는 다시 그 무시무시한 소식과 예상할 수 있는 위험에 대해 생각하면서 부지중에 이런 말을 끄집어내었다.

"짐작하기 어렵소."

국장은 경험이 풍부한 듯이 말했다.

"용병은 전적으로 기회를 타서 하는 일이고, 기회는 시시각각 변하는 것이니... 혹시 우리의 예상과 달리 이 시각에 벌써... 그러므로 우리들은..."

그는 중년 사나이를 보고 히죽 웃어 보였다.

중년 사나이와 국장의 사촌동생, 그리고 판 선생은 모두 국장의 웃음이 의미하는 뜻을 다 알고 있었다. 모두들 여기 앉아 있으면 아무런 사고도 생기지 않으리라 생각하고 각자 안심하며 웃고 있었다.

이 작은 뜰은 풀이 무성하게 자라 모기와 기타 곤충들이 안식하는 훌륭한 낙원이었다. 곁채에 전등이 켜지면 벌레들이 일제히 날아들어 당황한 네 선생들에게 성가시게 달려들었다. 머리와 얼굴에 마구 붙고 이따금 따끔따끔하게 물기도 해서 사람들은 앉은 채로 몸을 비틀었다. 그러다가도 밖에서 총소리나 사람들의 아우성 소리가 들리지 않는지 귀를 기울이곤 했다. 잠을 잔다는 것은 도저히 희망이 없는 일로서 실로 국장이 말한 것처럼 돌아가면서 누워서 잠깐씩 휴식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튿날 아침 판 선생의 눈엔 핏발이 섰다. 싸늘한 바람이 불어와서 몸이 오싹해졌다. 그는 바깥 소식을 알아보기 위해 조용히 대문밖으로 나왔다. 거리는 평상시의 아침과 마찬가지였다. 개들은 꼬리를 빳빳이 세우고 두리번거리며 주위를 살펴보았다. 이따금 잠에서 채 깨어나지 못한 사람 한둘이 부석부석한 눈을 해가지고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그는 다시 다른 골목으로 들어가 살펴보았지만 별로 특별한 소식을 듣지 못했다. 그는 간밤에 호들갑을 떨던 상황을 생각하니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다시 돌이켜 생각하니 별로 웃을 일도 아니었다. 조심하는 것은 어쨌든 모험하는 것보다 나으니까.

20여 일이 지난 다음 전쟁은 끝났다.

"이젠 됐구나! 싸움만 없다면 무엇이나 다 평안하다니깐!"

사람들은 머리를 끄덕이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러나 판 선생만은 그다지 흡족해하지 않았다. 철로가 아직 통하지 않아 상해로 피난 간 처자를 데려올 수도 없었고, 편지는 두 번이나 왔지만 어찌도 간단하게 썼던지 더욱더 그들이 그리웠다. 그는 자신이 선견지명이 없었음을 자책하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억울하게도 피난에 그렇게 많은 돈을 쓰지 않아도 될 것이며 또 몇십 일 동안이나 고독하게 살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그는 교육부에서 개학해야 한다고 주장할 것을 짐작하고 그 일을 알아보려고 길을 나섰다. 접대실에 들러 보니 교육부의 몇몇 직원들이 종이를 마르고 먹을 갈고 있었는데, 마치 경사스런 일을 치르는 것 같았다.

이때 한 직원이 소리친다.

"마침 잘 오셨소! 당신은 대문이나 액자 같은 데 글을 잘 쓰는 명필이니 이 일을 좀 맡아 주셔야 되겠소."

"이처럼 굉장한 글은 판 선생이 쓰지 않으면 안 됩니다."

몇몇 사람이 부추겼다.

"무엇을 쓰라는 거요? 난 전혀 막막한데..."

"우린 여기에다 두 총사령의 개선을 환영하는 사업을 준비하고 있소. 두 총사령의 꽃차가 지나가는 역전광장 양쪽에 네 개의 팻말을 세우려 하는데, 지금 그 팻말에 붙일 글을 쓰려던 중이었소."

"나 같은 사람이 어디 그런 글을 쓸 자격이나 있소?"

"사양하지 마시고..."

"만장일치로 추천합니다."

몇 사람이 함께 부추겼다. 드디어 붓이 판 선생의 손에 쥐어졌다.

판 선생은 이 순간에 이 일은 그 어떤 의미가 있음을 느끼고 붓을 먹물에 적셨다. 잠시 명상에 잠겨 있다가 붓을 들어 밀랍을 먹인 종이에다가 한 줄로 "공훈은 악목보다 더 높다."라고 크게 쓰고, 두 번째 장에는 "위엄이 동남을 누른다."라고 썼다. 세 번째로 "품덕이 숭고하고 은혜가 넓도다."라고 썼는데, 그가 넓다는 글자를 썼을 때 영화 필름을 보는 듯 강제 징병, 대포의 울부짖음, 불에 타는 가옥, 부녀를 간음하는 장면, 변질된 남녀의 시체들이 눈앞에 스쳐 지나갔다.

구경하던 사람이 찬탄을 금치 못했다.

"이 구절은 더욱 간절해 보입니다. 글씨도 쓰면 쓸수록 더 잘 쓰시네요."

"그가 대구를 어떻게 쓰는가 봅시다."

다른 한 사람이 옆에서 말을 거들었다.

(193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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