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보트

보트

요시토모 바나나

 

"그럼, 기억나는 것 중에서 마음에 걸리는 거 한 가지만 얘기할게요. , 공원에 가서 죽 늘어선 보트를 보면 늘 견딜 수 없는 기분인데, 군데군데 생각이 안 나요."

나는 말했다.

"그 견딜 수 없다는 기분, 느낌이 무겁거나 고통스러운가요? 그렇다면 가볍게 다룰 수 없으니까 얘기만 듣고."

"아니요. 신나고 애틋한 느낌이에요. 할 수만 있다면 기억하고 싶을 정도로. 대충 짐작은 가는데, 작지만 중요한 일이 있었던 것 같아요. 어려서 엄마하고 헤어졌을 때 일인 것 같은데, 하지만 우리 시골에서는 대개 그 공원에서 행사를 치렀으니까 여러 가지 일이 뒤섞여서, 시간도 앞뒤로 뒤죽박죽이고 그래서 기억이 잘 안 나요."

"그럼 눈을 감아보세요. 그리고 호흡을 가다듬고. 의식은 분명하지만 조금씩 과거로 돌아가도록 합니다."

선생님이 말했다.

나는 구직 활동에 지쳐 가벼운 노이로제 증상을 보이는 친구를 따라 최면 요법을 시술하는 선생님을 찾았다. 친구가 갈 때마다 나와 같이 가고 싶어 해서, 몇 달 동안 대기실에서 기다리다 보니 나까지 단골이 되고 말았다. 친구가 늘 늦은 시간을 잡아 예약을 하는 데다 그 중년의 여선생님이 친구 엄마의 친구인 덕분에, 끝나면 같이 차를 마시며 잡담을 나눴다. 그러다 내가 불쑥 최면 요법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묻는 바람에, 자리를 한번 마련해서 내 기억을 더듬어보기로 한 것이다.

차례차례 나이를 거슬러 올라가, 여섯 살 내가 되었다. 몸이 무겁고 내 목소리가 멀리서 웅얼거리듯 들렸다.

"당신은 여섯 살입니다. 지금 보트와 관계된 무슨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습니까? 보트가 보이나요?"

눈을 감고 잠이 든 듯이 멍한 상태에서, 나는 우선 밤의 수면에 떠 있는 보트와 끼익끼익, 보트가 흔들리면서 내는 소리를 떠올렸다. 잠시 후 예기치 못한 속도로 내 눈꺼풀 속 어둠에 느닷없이 이 세상 같지 않은 아름다운 풍경이 나타났다.

갖가지 불빛이 비친 수면호수다. 호숫가에 보트들이 줄지어 산들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물가는 연꽃으로 덮여 있고, 어둠 속에서 커다란 연분홍 꽃이 입을 활짝 벌리고 있었다. 저 건너 기슭까지 무수한 연꽃이 보였다. 하늘에는 조그만 달이 빛나고 있었다. 연분홍 연꽃의 아름다움이 눈 속에 각인되어 시야가 부옇게 보였다.

"천국이 아마 이런 데일 거야."

나는 누구와 손을 잡고 있었고, 그 사람을 올려다보았다. 거의 잊어버렸던 그 얼굴을 나는 또렷하게 기억해 냈다. 강한 의지가 담긴 커다란 눈망울, 외국 사람처럼 높은 코, 알록달록 신기한 옷, 피어스. 늘 달짝지근한 술 냄새가 났다.

그리고 선생님의 유도에 따라 화면이 줄줄이 전개되었고. 내 안에서 그때의 기분을 아플 정도로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나는 그 밤의 모든 것을 기억해 냈다.

최면이 끝났을 때 나는 심장이 두근거렸고, 울먹이고 있었다.

왜 잊어버렸을까, 하고 생각했다. 없었던 일처럼 까맣게 잊고 있었다.

"기억나게 해줘서 고마워요. 정말 소중한 기억인데."

꽤 긴 침묵에 잠겨 선생님과 친구를 걱정하게 한 후에야 나는 간신히 그렇게 말했다.

내 고향 집이 있는 동네는 이렇다 할 명소는 없지만, 조그만 성이 있고 그 주위 공원에 커다란 호수가 있다. 호수에 비친 성의 그림자를 바라보다 보면 시대를 가늠할 수 없어 재미있었다. 호수에는 네온사인의 불빛이 반짝이는데, 저 너머로는 달빛에 아른히 천수각(天守閣)이 보인다. 그리고 크레이프를 파는 포장마차도 있다.

기억 속의 호수는 그 호수였다.

새엄마가 왔을 때의 일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나는 그 사람을 무척 좋아했다. 힘들 때면 마음속으로 그 사람 이름을 불렀을 정도였다. 늘 그 사람이 친엄마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바람이 현실이 되었던 날도 잘 기억하고 있다. 아빠와 나는 그 호수가 보이는 벤치에서 기다렸다. 무척 추운 겨울날이였다. 코트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고 다리를 덜렁덜렁 흔들며 일곱 살 나는 기다렸다. 아빠는 그런 나에게 신경을 쓰면서 조마조마했다. 그런데도 강한 척, 겉으로는 태연했다. 기다리는 동안 감주를 마셨다. 아주 뜨겁고 하얗고, 걸쭉하고 달콤했다. 맛있네하고 나는 생각했다. 하늘은 당장이라도 눈이 내릴 듯이 무섭고 탁하고 빛나고, 얼굴은 차가웠다.

새엄마는, 뛰어왔다. 역 쪽에서 오렌지 코트를 입고 허둥지둥 뛰어왔다. 아빠는 몹시 긴장하고 있었다. 호수에는 보트가 한 척도 없고 수면은 잔잔했다. 빛나는 회색 하늘이 건물 유리창에 갖가지 묘한 색깔로 반사되었다. 비둘기가 날아왔다, 날아갔다.

아빠와 새엄마는 서로 인사를 나눴다.

그리고 새엄마는 내 차가운 손을 꼭 잡고 말했다.

"정말 미요코 엄마가 되는 거야. 이번에는 진짜야."

그전에 진짜 엄마가 되어주지 않으면 싫다고 칭얼거려 그 사람을 난감하게 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그렇게 말한 것이리라. 그리고 그때 새엄마의 눈에 한가득 고인 눈물을 보고 나도 그만 울고 말았다. 둘은 그 자리에서 꽤 오래도록 울었다. 머리가 띵하도록 눈물이 그치지 않았다. 그 싸늘한 공기 속에서, 눈물과 우리 둘이 꼭 잡은 손만 따스했다. 울면 풍경이 가깝게 느껴진다. 그때는 비둘기도 성도 호수도 보트도 모두 내 것이었다. 발치에 뒹구는 조그만 돌멩이까지 친근하게 느껴졌다. 모든 것이 더 이상 힘들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가슴이 벅차올랐다.

"같이 행복해지는 거야?"

"그래, 행복하게 살자."

검연쩍게 서서, 그렇게 맹세하는 어린 자식과 새 아내를 보면서 안 보는 척했던 아빠의 갈색 코트까지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같은 장소에서 헤어진 엄마는 까맣게 잊어버렸다.

나는 며칠동안 엄마에게 납치당한 적이 있다.

알코올 중독이었던 엄마는 딸을 맡을 자격이 없다는 판결에, 나를 데리고 도망쳤던 것이다.

그때 일도 잘 기억하고 있다. 엄마는 나를 데리고 지방의 어느 최고급 온천 여관에 가서 사흘 밤낮을 먹고 마시고 목욕했다. 매일 밤 엄마는, 이렇게 살게 해 줄 테니까 엄마랑 같이 있자며 울었다. 나는 이렇게 안 살아도 좋으니까 엄마 옆에 있을게, 라고 말했다.

여행의 마지막 날 저녁, 연일 술을 마셔댄 엄마는 목욕탕에서 쓰러졌다. 아빠에게 연락이 갔고 우리는 어이없이 발각되고 말았다. 언제든 만나게 해 줄 테니까전화 저편에서 그렇게 말하는 아빠에게, 응응 하고 어린애처럼 고개를 끄덕이는 엄마의 뒷모습을 푹신푹신한 이불 속에서 애처롭게 바라보았던 일도 기억한다. 엄마는 내 이불 속으로 파고들어 엉엉 울었다. 한시도 떨어져 있고 싶지 않아, 넌 내 몸의 일부야, 그만큼 사랑한다고. 같이 있고 싶단 말이야, 라고 몇 번이나 말했다. 엄마의 술 냄새 풍기는 숨결과 젖은 머리카락이 성가셨지만, 지금 이렇게 가까이 있으면서 손을 뻗으면 만질 수 있고 같이 목욕하면서 몸을 씻겨주고 아까까지만 해도 서로 반찬을 주고받았는데 이제는 만날 수도 없고 같이 살 수 없다니, 나라가 그런 것을 결정하고 자상한 우리 할머니가 그 일에 찬성하다니, 모든 것이 내게는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밤 그 공원에서, 푸릇푸릇 잎이 무성한 벚나무 아래서 엄마와 나는 헤어졌다. 물 냄새가 났다. 조금은 바다 냄새 같았다.

"미요코, 이리 와."

어둠 속에서 엄마가 말했다.

엄마의 그림자가 녹음 속에 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엄마는 내 손을 잡았다가 나를 들어 안았다가 하면서, 이어져 있는 보트를 몇 척 건너 호수 중간쯤에 있는 보트까지 나를 데리고 갔다.

보트들이 이어져 있어 노는 저을 수 없지만, 둘이 마주 앉아 있자니 마치 배가 나아가는 느낌이었다. 우리 무게 때문에 보트가 살랑살랑 흔들릴 때마다 수면에 잔물결이 퍼졌다. 연꽃이 끝없이 피어 있었다. 연꽃잎이 마치 하늘을 향해 손바닥을 벌리고 있는 듯 환상적인 풍경이었다. 지금 이 이어짐 속에서 그냥 이대로 사라지고 싶은 기분이었다. 어린 마음에 상처를 주는 이별의 풍경이 미웠다.

밤이 아름다워 그만큼 슬픔도 더했다.

끼익끼익 배가 흔들렸다. 여름 바람이 조용하게 수면을 햝듯이 지나갔다.

"엄마, 좋아하는 사람한테 갈 거야. 그 사람은 말이지, 총을 좋아해."

엄마가 말했다. 한 손에 위스키병을 들고 있었다. 엄마가 늘 마시는 술이었다. 좀 색다른 그림이 그려져 있는 라벨을 기억하고 있다. 엄마가 늘 그 위스키를 병째 들이마셨다는 것을, 어른이 되어 알았다.

"총이라면, 피스톨?"

안 되겠어, 나는 어린 마음에도 그렇게 생각했다.

엄마는 미소 지었다.

"사람을 죽이려는 건 아니고, 그냥 사격만 하는 거야. 손에 총을 들면 그 무게 때문에 순간적으로 생명을 생각하게 되니까, 그래서 좋아한대. 총을 쏘면 엄청난 충격이 느껴지면서 자기 생명도 다른 사람의 생명도 이해하게 된대. 그리고 그 감각을 한시도 잊지 않고 살고 싶대. 엄마는 생명을 그렇게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처음 봤어. 얼마나 멋있던지, 다른 사람은 다들 살아 있는 건지 죽은 건지 모르겠는걸 뭐, 엄마가 보기엔 말이야."

"이제 엄마 못 만나는 거야?"

"그 사람하고 같이 하와이에 가서 크레이프 장사 할거야. 어른이 되면 언제든지 놀러 와. 달콤한 크레이프 공짜로 구워줄 테니까. 동네 사람들한테는 내 딸이라고 자랑하고. 그리고 엄마는 너 말고는 절대 아이 안 낳을거야. 마음먹었어. 엄마 아이는 너뿐이야."

크레이프에 관해서는, 눈앞에 '크레이프'라고 쓰인 어둑어둑한 포장마차가 보여서 그냥 말이 나왔는지도 모르겠지만 아이에 대한 말은 진심이었다. 엄마의 눈이 빛나서 무서웠다. 그런 때 엄마는 늘 진심이었다. 아빠를 부엌칼로 찔렀을 때도, 엄마에게 거짓말한 나를 코피가 터지도록 때렸을 때도, 같은 눈빛이었다.

"."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둘은 오래도록 아무 말 없이 보트를 탔다. 오줌이 마려워 참을 수 없을 때까지. 그렇게 아무 말도 않고서 아름다운 밤을, 일부러 자신을 학대하듯 깊이 만끽했다. 이 모든 것을 기억해야 한다고, 어째서인지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때 내 눈 역시 엄마와 똑같이 빛나고 있었으리라.

"엄마 잊어버리면 절대 안 돼. 하지만 과거는 절대 뒤돌아보지 마."

엄마가 말했다. 엄마의 또렷한 옆얼굴 너머로 연꽃과 성이 보였다. 이 좁은 동네에 엄마 같은 사람이 있을 곳은 이미 없다. 나는 알고 있었다. 이어져 있는 배처럼 썩어 죽을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엄마는 울면서 아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둠 속에서 공중전화가 빛났다. 울고 있는 엄마의 등이 둥글둥글했다. 호수, 연꽃, 검은 물, 빛나는 수면, 네온사인, 성의 윤곽너무 아름답고, 세계는 너무 크다. 내 가슴은 터질 것 같았다.

"아빠가 데리러 온대, 엉엉."

엄마는 통곡하며 나를 안았다. 볼과 볼이 마주 닿아 뜨거웠다. 후덥지근한 밤, 셔츠가 땀에 젖어 있었다. 그리고 물 냄새 풀 내음이 사방에 진동했다. 그래도 엄마는 나를 꼭 껴안지 않고 커다란 원으로 감싸듯 살며시 안았다.

그리고 엄마는 울면서 공원 출구를 향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비틀비틀 달려갔다. 따라가고 싶어!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총을 좋아하는 남자와 하와이에 가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차분하게 살고 싶었다. 나도 사실은 아빠와 마찬가지로 엄마에게 지쳐 있었다. 하지만 따라가고 싶었다. 모든 것을 뿌리치고 엄마와 꼭 껴안고 있고 싶었다. 소리치고 싶었다.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달이 떠 있었다. 달이 기울고 아침이 오면, 모두 지나가 버린다! 하고 나는 생각했따. 하느님, 아무쪼록 시간을 멈춰주세요. 아직도 엄마 냄새가 어둠속에 남아 있다. 아직 피지 않은 연꽃 봉오리가 어둠 속에 떠 있다. 지금 이대로, 아무쪼록.

데리러 온 아빠에게 업혀. 울면서 돌아갔다.

그 다음부터는 도무지 기억나지 않았다.

나는 그 불안하고 강렬한 체험 때문에 한동안 말을 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입원도 하고 약도 먹었던 것 같다.

기억을 떠올리고, 친구와 선생님 집을 나서자 벌써 밤이었다.

"기억해 내길 잘한 일이니?"

주택가에서 자신의 노이로제는 까맣게 잊은 친구가 내게 물었다. 호기심 절반, 책임감 절반이었다. 하지만 눈은 부드러웠다.

", 어렸을 때 헤어진 엄마의 추억이었어. 사소한 거지만."

"지금은 뭘 하시는데?"

"잘 몰라"

"어떤 분이셨어?"

"아무튼 굉장히 예쁜 사람이었어."

"그러니, 난 지금 엄마가 미요코 친엄마인 줄 알았는데."

"친구처럼 지내니까. 학교 때문에 여기 온 지 벌써 사 년인데, 매일 전화로 얘기하고 아빠하고 싸우면 우리 집으로 자러 오고 그래."

"그런 일도 있는 거구나."

"다들 사람이 좋으니까."

나는 말했다. 나는 자연 속에 있을 때 어어? 무슨 보드라운 것에 감싸인 것 같네, 하고 종종 생각하곤 했다. 계란처럼 살며시 안겨 있는 듯한 느낌, 하고 생각했다. 그 이유를 알았다. 기억이 되살아나고부터는, 세계가 지금까지보다 한결 더 가깝고 생생하게 느껴진다.

어두운 수면에 떠 있는 보트, 계란을 안듯 나를 조심스럽게 안아준 어떤 여자의 기억이.

 



목차로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