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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대지기

등대지기

Henryk (Adam Alexander Pius) Sienkiewicz

 

1

파나마 근처의 애스핀월이란 항구 도시에서 등대지기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일이 일어났다. 그날은 몹시 거센 폭풍우가 몰아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불운한 사람은 등대가 있는 작은 바위섬의 가장자리로 갔다가 거기서 폭풍우에 휩쓸렸을 것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했다. 다음날 바위틈에 매어놓곤 했던 그의 배가 없어진 것을 확인하고 나자 그 추측이 더욱 그럴 듯하게 여겨졌다. 그래서 등대지기의 자리는 비게 되었고 가능한 한 빠른 시일 내에 그 자리를 메워야 했다. 왜냐하면 등대가 그 지방의 길잡이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뉴욕과 파나마를 항해하는 선박들에게도 중요한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었다.

모스키토 만은 둑과 모래톱이 많아서 대낮에도 항해하기가 여간 수월치 않았다. 특히 밤에는 이런 습한 열대의 수면에 떠오르는 물안개 때문에 항해가 거의 불가능했다. 이럴 때 오직 등대불만이 오가는 선박들의 길잡이가 되어 주었다.

새 등대지기를 구하는 임무가 파나마 주재 미국 영사에게 맡겨졌다. 하지만 그 일은 여간 골칫거리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12시간 안에 후임자를 구해야 했으며 더욱이 그 사람은 매우 성실해야 했기 때문에 선발에 신중해야 했다. 그렇지만 그 자리를 원하는 지원자는 단 한 명도 없었던 것이다.

등대에서의 생활은 외롭고 고되어서, 태평스럽고 자유롭게 돌아다니기를 좋아하는 남쪽 지방의 사람들에게는 조금도 매력이 없는 일이었다.

등대지기는 일요일을 제외하고는 자신의 바위섬을 떠날 수 없는 죄수와도 같은 생활을 했다. 애스핀월에서 하루에 한 번씩 오는 배가 그에게 식량과 물을 주고 있다. 그러나 그 뱃사람마저 곧 그곳을 떠나고 나면, 손바닥만한 이 바위섬에서는 그나마 사람의 자취를 찾아볼 수 없었다.

등대지기는 낮에는 기압계가 가리키는 대로 여러 색깔의 깃발을 흔들어서 날씨를 알리고, 밤에는 등대에 불을 켜는 일을 했다. 사실 이 일은 그다지 힘든 것이 아니었다. 단지 400개가 넘는 나선형의 계단을 올라가서 탑 꼭대기에 불을 켜는 일-그렇지만 이 일은 하루에 수 차례씩 반복되는 때도 있었다-그런 일만 제외한다면. 하여간 이것은 수도원생활과 같은 것이었으며 은둔을 원하는 사람에게나 어울릴 법한 그런 것이었다.

그래서 아이작 팰콘브리지 영사가 진득하게 등대를 지킬만한 사람을 찾는 데에는 상당한 어려움이 따랐다. 그 어려움 중에 정말 뜻밖의 지원자가 나타나자 그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 지원자는 일흔 살 남짓 되어 보이는 노인이었지만 군인다운 풍채를 지니고 있었으며 등이 곧고 정정했다. 그리고 머리는 눈을 뒤집어쓴 것처럼 완전히 은빛이었고 마치 크레올 족처럼 검은 피부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푸른 눈빛을 보면 그가 남쪽 지방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의 표정은 우울해 보였지만 정직하고 선한 인상을 주었다. 팰콘브리지 영사는 첫눈에 그가 맘에 들었다. 나은 것은 그 노인과의 면접이었다.

그가 조심스럽게 노인에게 질문을 던졌다.

"출신지가 어디십니까?"

"폴란드입니다."

"지금까지 무슨 일을 하셨죠?"

"이곳저곳을 전전하며 여러 가지……."

"하지만 등대지기 일은 한곳에 머물러 있어야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저도 이제는 한 곳에서 쉬고픈 마음뿐입니다."

"노인께선 군대에서 복무한 적이라도 있습니까? 그리고 혹 정부에서 인정하는 어떤 증명서 같은 것을 가지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노인은 주머니를 여러 곳 더듬더니 가슴 쪽에 있는 주머니에서 낡고 빛바랜 비단 조각을 꺼내 펼쳐 놓으며 말했다.

"이것들은 증명서에 해당하는 것들입니다. 이 십자 훈장은 제가 1830년 폴란드 봉기 때 받은 것이고, 이것은 스페인의 칼리스트 전투에서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프랑스 군 시절에 받은 것이고 마지막으로 이것은 헝가리에서 받은 것입니다. 그 이후에도 미국에서 남군과 대항해 싸웠지만 그들은 제게 아무 훈장도 주지 않더군요. , 한번 확인해 보시죠."

팰콘브리지 영사는 그 증명서를 받아 천천히 훑어보기 시작했다.

", 스카빈스키……. 이것이 노인장의 이름입니까?"

노인은 고개를 약간 끄덕였다.

"육탄전서 단신으로 적군의 깃발 두 기를 빼앗았다……. ! 노인께선 아주 용감한 군인이었군요."

"등대지기 일도 잘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생각보다 훨씬 어려운 일입니다. 하루에도 수십 차례씩 탑 꼭대기까지 올라갈 일이 생기기도 하구요. 다리는 튼튼합니까?"

"대평원을 걸어서 횡단한 적도 있습니다."

", 그래요. 그렇다면 뱃일에는 익숙합니까?"

"3년 동안 포경선에서 일한 경험이 있습니다."

"노인께선 꽤 여러 가지 일들을 경험하셨군요."

"제가 여지껏 해보지 않은 일이라곤 안식을 취하는 것뿐입니다."

"무슨 까닭이라도 있었습니까?"

노인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그게 제 팔자인가 봅니다."

"그렇지만 제가 보기에는…… 등대지기 일을 하시기에 노인장의 나이가 좀 많은 것 같군요."

"영사님!"

그 노인은 감정이 상한 듯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저는 몹시 지쳐 있습니다. 영사님께서도 아시다시피…… 저는 산전수전 다 겪은 늙은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그 누구보다도 그 자리를 원하고 있습니다. 저는 늙었고 이제는 쉬고 싶습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 이제 내가 쉴 곳은 이곳뿐이다! 이곳이야말로 나의 안식처이다!' 영사님, 제발 부탁드립니다. 이 일은 당신 한 분에게 달려있습니다. 제가 간절히 원하는 이런 자리가 제 일생 동안 다시는 오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제가 파나마에 있었던 것이 얼마나 다행스런 일이었는지…… 간청합니다. 저는 정박하지 못하면 곧 침몰하고 말 배와 같은 처지입니다. 제발, 이 늙은이를 위해서라도…… 하나님께 맹세코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이젠 떠돌이 생활에 진저리가 납니다."

노인의 푸른 눈빛이 너무 간절하게 보였기 때문에 소박하고 친절한 팰콘브리지 영사는 감동을 받았다.

"좋습니다. 노인장을 채용하겠습니다. 이제부터 노인장께서는 등대지기입니다."

노인이 얼굴은 이루 표현할 수 없는 기쁨으로 빛났다.

"정말 고맙습니다. 영사님."

"오늘 당장 등대로 가실 수 있겠습니까?"

", 물론입니다."

"그렇다면 안녕히 가십시오. 그리고 한가지…… 근무 중에는 어떤 실수도 용납할 수 없으며 실수는 곧 해고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시기 바랍니다."

", 잘 알겠습니다."

그날 저녁, 해가 서편으로 기울고 황혼도 없이 어둠이 바다를 뒤덮었을 때, 사람들은 이 섬에 새로운 등대지기가 왔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왜냐하면 평소와 다름없이 등대의 한 줄기 빛이 수면을 밝게 비추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밤은 완전한 정적 속으로 빠져들었다.

전형적인 열대의 밤이었다. 짙은 안개가 자욱히 끼어 무지개 빛으로 부드럽고 아련한 테두리를 이루었다. 바다에서는 파도가 거칠게 일어 밤새워 바위를 깎고 있었다.

스카빈스키 노인은 거대한 등대의 발코니에 서서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생각을 정리해 보려고 애썼으며 자신에게 주어진 새로운 상황을 파악해 보려 했다. 사실 그는 너무 긴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제대로 정신을 가다듬을 수 없었다.

노인은 자신이 추적자에게 쫓기다 쫓기다 겨우 바위 동굴을 찾아내어 그곳에 몸을 숨기게 된 짐승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내 그에게도 안식의 시간이 온 것이다. 알 수 없는 안도감이 그의 영혼을 기쁨으로 충만하게 했다.

이곳 이 바위섬에서 그는 자신의 오랜 방황과 오랜 불행과 실패에 대해 비웃음을 던질 수 있었다. 사실 그는 비바람에 돛대가 부러지고 밧줄이 끊어진 배와 같았다. 구름 꼭대기에서 바다 밑바닥까지 곤두박질치며 거친 파도에 부딪히고 소용돌이에 휘말리기도 했지만 결국 항구를 찾은 배였다. 폭풍우 속에서의 고통이 이제 막 시작되려는 평온한 미래와 대조되어 그의 머릿속에서 재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팰콘브리지 영사에게 말한 자신의 기구한 인생 역정은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았다. 말로 구구절절이 엮어낼 수 없는 수많은 모험들이 있었다. 그가 지친 몸을 이끌고 쉴 곳을 찾기 위해 천막을 치고 불을 지필 때마다 모질고 사나운 바람이 몰아닥쳤다. 그 바람은 천막의 말뚝을 뽑아 버리고 불을 꺼뜨려 그를 파멸로 몰고 갔다.

그는 등대 발코니에서 밝게 빛나는 수면을 바라보며 자신이 거쳐온 일들을 하나하나 되짚었다.

그는 대륙의 전투에 네 번이나 참전했다. 그리고 그 이후에 여러 곳을 떠돌며 거의 모든 일을 해보았다. 그는 성실하고 정직했기 때문에 상당한 돈을 벌었고 꽤 가능성 있는 인물로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아주 조심성 있고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여도 그는 항상 빈털터리가 되고 말았다.

그는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금광의 광부, 아프리카에서는 다이아몬드 채굴자, 동인도에서는 소총병이었다.

캘리포니아에서 농장을 시작했을 때는 가뭄으로 실패했으며, 브라질 내륙에서 야만인들과 무역을 할 때에는 그의 배가 아마존에서 침몰하였다. 그때 그는 아무 장비도 없이 헐벗은 상태에서, 야생 열매를 따먹고 맹수들의 습격으로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수주일 동안이나 밀림을 헤매기도 했다.

그는 또 알칸사스의 헬레나에서 대장간을 차려 보았지만 그것 역시 도시의 대화재로 불타 없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나서는 록키 산맥을 지나다가 그곳의 인디언들에게 포로가 되기도 했고 그러다 얼마 후 어느 사냥꾼에 의해 구출되기도 했다.

그는 바히아와 보르도 사이를 정기적으로 운항하는 배에서 선원으로 일했고, 이 이후에는 포경선의 작살잡이로 먼 바다까지 나갔었다. 그러나 그가 탄 배들은 모두 난파되었다.

그는 아바나에서 동업자와 함께 담배 공장을 차렸으나 그가 열병으로 누어 있는 사이 동업자가 사기를 치고 달아나 버렸다.

급기야 그는 애스핀월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곳이 그의 불운한 인생 역정의 종착역이 될 것이다. 이 외진 곳의 바위섬까지 어떤 불행이 그를 찾아오겠는가! 물도, 불도, 그 어느 누구도……. 사실 스카빈스키는 사람 때문에 해를 입거나 고통을 당한 적은 별로 없었다. 도리어 그의 주위에는 나쁜 사람보다는 착한 사람들이 더 많았다.

세상의 그 모든 것이 그의 편이 아닌 것만 같았다. 그를 아는 사람들은, 그에게 운이 없었던 것이라고 위로를 하면서 모든 것을 운의 탓으로 돌렸다. 그도 얼마간 자신의 운명을 비관하며 반미치광이가 되어 날뛰기도 했다. 어떤 거대한 그것이 계속 그를 따라다니며 그의 앞길을 막거나 발을 걸어 넘어뜨리고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는 이것에 대해 말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가끔씩 '거대한 그것'이 과연 무엇일 것 같냐는 질문을 받을 때면 손을 들어 북극성을 가리키며 '바로 저기에서 모든 것이 비롯된다오'하고 농담조로 대답했다. 사실 그의 역경은 끝도 없이 무시무시하게 계속되었다. 아마 그 누구라도 그런 역경에 빠지게 된다면 쉽게 좌절하고 자포자기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스카빈스키 노인은 인내와 성실함으로 역경을 잘 견뎌 나갔다.

젊은 날 헝가리 전투에서 그는 여러 차례 부상을 입었는데 그것은 그가 등자를 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렇듯 그는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려고 굳이 애쓰지 않았다. 그와 같은 일에 있어서 그는 불운에 굴복하지 않았다.

그는 마치 개미처럼 꾸준하게 산을 기어올랐다. 백 번을 오르다 백 번째마저 실패하면 다시 백 한 번째 여정을 침착하게 시작하곤 했다. 그는 삶의 자세에 있어서 독특한 데가 있었다. 뜨겁게 달궈지고 연마되어 단단해지고 역경에 수없이 부딪혀 온 이 노인의 마음은 어린아이 같은 마음씨를 갖고 있었다. 쿠바에 유행병이 돌 때, 그는 자신이 갖고 있던 상당량의 키니네(말라리아의 특효약, 해열, 진통, 강장제 등으로 쓰임-역주)를 한 알도 남기지 않고 다른 환자에게 나누어 주었기 때문에 정작 자신은 열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기도 했다.

그에게는 또 하나의 특별한 점이 있었는데, 그렇게도 많은 좌절 후에도 그는 항상 자신감에 넘쳐 있었고 모든 것이 잘 되리라는 희망을 결코 버리지 않았다. 겨울이 되면 그는 더욱 생기가 돌아서 많은 일들을 예견했다. 그는 그것들을 애타게 기다렸으며, 그런 생각들이 여지껏 그를 지탱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또다시 겨울이 지나면서 머리카락만 희게 빛바랠 뿐이었다. 마침내 그는 늙었고 점점 기운도 없어졌다. 그의 인내심과 강인함은 차츰 운명 앞에 길들여져 갔다.

그는 나이를 먹으면서 점점 감상적으로 변해갔다. 그래서 이 용감하고 강인한 군인은 사소한 일에도 눈물을 주르륵 흘릴 만큼 약해졌다. 또 노인은 언제나 진한 향수에 빠져 주위의 모든 상황들을 고향의 모습과 연결시켰다. 제비의 모습에서도, 참새를 닮은 잿빛 새들에게서도, 산 위에 쌓인 눈에서도, 오래 전에 들었던 어떤 노래의 가사에서도……. 결국 노인은 고향의 따사로움과 안락함을 그리면서 쉬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것은 모든 희망과 욕망을 압도하여 삼켜 버렸다. 이 외로운 방랑자는 자신이 편안히 쉴 수 있고 평화로운 죽음을 맞을 수 있는 조용하고 구석진 곳 외에는 그 어떤 것도 바라지 않았다.

운명의 장난이 그의 목을 바싹 죄며 육지와 바다의 곳곳으로 그를 내몰았기 때문에, 노인은 인간의 가장 큰 행복은 방랑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지금 노인은 소박하고 당연한 행복을 꿈꾸고 있었지만, 누구에게나 익숙한 이런 행복이 그에게는 여전히 불안하게 느껴졌다. 워낙 불행이란 것에 익숙해 있던 터라 이번에도 행복은 미꾸라지처럼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 버릴 것 같았다.

그는 뜻밖에도, 세상의 모든 직업 중에서 오직 자신만을 위해서 있는 것 같은 일자리를 발견하고 그곳에 취직했다. 그래서 그가 처음으로 등대에 불을 붙이게 되었을 때 얼떨떨해서 꿈인지 생시인지 의심을 했다. 그리고 감히 생시라고 말하기를 주저할 수밖에 없었다. 그 동안 현실은 부인할 수 없을 만큼 확실한 증거로 남아 끊임없이 그를 괴롭히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노인은 발코니에 서서 그렇게 시간을 보냈다. 모든 것에 황홀하고 사랑스런 눈빛을 던지면서 이 모든 것이 꿈이 아님을 자신에게 확인시켰다. 그는 생전 처음으로 바다를 보는 사람 같았다.

등대의 불빛은 노인의 눈길을 따라 칠흑같이 어둡고 신비스런 암흑 속에서 빛나고 있었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도리어 어둠이 빛을 향해 몰려오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배보다 더 큰 파도가 어둠 속에서 굽이치며 등대의 불빛 아래 장밋빛으로 빛났다.

점점 밀물이 밀려와 모래사장이 거의 잠기었다. 바다는 깊은 곳에서부터 힘있고 우렁차게 솟아올랐다. 어느 때는 대포의 폭음 같기도 했고, 어느 때는 숲 속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 같기도 했으며, 또 어느 때는 먼 곳에서 여러 사람들이 몰려 서서 웅성대는 소리 같기도 했다. 바다가 잠시 숨을 죽이고 있을 때 그는 깊은 한숨 소리와 흐느낌을 들었고, 그 소리는 다시 결렬한 통곡 소리로 바뀌었다. 가끔 불어오는 바람이 안개를 어지럽히고 짙은 먹구름은 달빛을 전부 삼키기도 했다.

바람이 서쪽에서부터 점점 거세게 불어오기 시작했다. 파도는 사납게 바위섬의 절벽을 철썩거리고 거품을 일으키면서 그 밑둥을 핥고 있었다.

멀리서 폭풍우가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먼 바다 어둠 속에서 배의 돛에 거는 푸른 전등이 보였다. 그 전등은 높이 올라갔다가 파도 속으로 사라지고 다시 솟아올라 좌우로 흔들리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스카빈스키 노인은 자기 방으로 내려갔다. 지금 밖에서는 배에 탄 사람들이 밤과 어둠과 파도와 싸우고 있었지만, 방안에서는 평화와 고요가 노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폭풍우 소리조차도 이 두꺼운 벽을 뚫지 못했다. 노인의 머리맡에 놓인 시게의 초침 소리가 지친 노인을 깊은 잠 속으로 이끌었다.

 

 

2

많은 시간이 흐르고 많은 날들이 거듭되었다.

뱃사람들은 바다가 미친 듯이 날뛸 때 종종 바다 깊숙한 곳에서 자신들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만일 정말 바다가 말을 할 수 있고 종종 누군가를 부를 수 있다면, 아마도 늙은 사람들에게는 그 소리가 더 어둡고 신비스럽게 들렸을 것이다. 그리고 인생살이에 지친 사람일수록 이 부름을 더욱 반길 것이다. 그렇지만 이 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충분한 안식이 필요하다. 마치 나이든 사람이 죽음을 예견하고 고독을 즐기는 것처럼.

등대는 스카빈스키 노인에게 무덤과도 같은 곳이었다. 등대에서의 생활만큼 단조로운 것도 없을 것이다. 만약 젊은 사람에게 그 일을 맡긴다면 얼마 안 가서 줄행랑을 치고 말 것이다. 그래서 등대지기를 보면 대개가 젊은 사람들이 아니었으며 우울하고 자의식에 사로잡힌, 나이 먹은 사람들이 많았다.

만일 등대지기가 자신의 등대를 떠나 보통 세상으로 돌아간다면 그는 아마도 혼란 속에서 오랫동안 고생을 하게 될 것이다. 이제 막 깊은 잠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사람들 사이를 헤매고 다닐 것이다.

등대지기가 접하는 모든 것은 뚜렷한 형태를 갖고 있지도 않았고 한눈에 다 볼 수 없을 만큼 거대한 것들이었다. 고독한 인간의 영혼은 끝없이 펼쳐진 하늘과 바다 그 어느 곳에서나 편하게 머물 수 있었다. 그것은 끊임없는 명상의 연속이었으며 아무것도, 심지어는 그의 일조차도 등대지기를 이 명상에서 깨어나지 못하게 했다.

반복되는 하루하루는 쌍둥이처럼 똑같았으며 유일한 변화라곤 날씨의 바뀜뿐이었다. 그러나 스카빈스키 노인은 자신의 생애 중 그 어느 때보다도 행복했다.

노인은 새벽에 일어나 식사를 하고 등대의 렌즈를 공들여 닦는 일로 하루를 시작하였다. 그 일이 끝나면 노인은 등대의 발코니에 서서 먼 바다를 바라보곤 했는데 그 눈은 자기 앞에 펼쳐진 광경에 심취한 듯했다.

거대한 하늘을 배경으로 바람에 부푼 돛을 단 배들이 그림처럼 떠 있었는데 그것들은 햇빛을 받아 밝게 빛나고 있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눈부시던지 그는 제대로 눈을 뜰 수조차 없었다. 때때로 배들은 차례로 긴 줄을 그으며 지나가곤 했는데 그것은 마치 갈매기나 앨버트로스(글라이더처럼 하늘을 날며 대양에 많이 서식하는 새-역주)의 대열 같았다.

발코니에 서서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면 크고 작은 집들이 모여 있는 마을과 항구가 보였다. 등대 위에서 보면 집들은 작은 새의 둥지 같았고 배는 딱정벌레처럼 보였으며 사람들은 하얀 석조 선창에 붙은 점들 같았다.

아침에는 가벼운 바람을 따라서 마을의 왁자지껄한 소리가 간간이 들려오기도 했다. 오후에는 낮잠을 잤다. 항구에 오가는 배들의 왕래도 끝나고 갈매기도 바위틈 속으로 숨어 버렸다. 그리고 바다도 때맞춰 소리를 죽이고 편하게 드러누웠다. 햇빛은 하늘에서 바다로 다시 모래사장으로, 절벽으로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이쯤이면 노인은 나른함과 더할 나위 없는 달콤함에 빠져 있었다. 자신이 누리는 이 안식이 완전한 것이며 또한 이런 생활이 영원히 계속될 것이라고 믿는 순간에는 아무것도 부러울 것이 없었다.

노인은 이 행복이 꿈이라면 영원히 깨지 말기를 바랐다. 인간은 더 나은 운명에 쉽게 적응해 갔다. 그도 점차 믿음과 자신감을 얻게 되었다. 사람들도 불쌍한 사람을 위해 집을 짓고 보살피는데 하물며 하나님께서 왜 당신이 창조한 불쌍한 사람을 외면하겠는가. 시간이 흐름에 따라 노인의 믿음은 더 확실해져 갔다.

노인은 탑과 등대와 절벽과 모래사장과 고독에 차츰 익숙해졌다. 또 바위틈에 알을 낳고 등대 지붕에 모여드는 갈매기들과도 친해졌다. 그가 가끔씩 밖으로 나가서 음식 찌꺼기들을 주었기 때문에 새들과 친해지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가 새들에게 먹이를 줄 때에는 갈매기 날개의 폭풍우 속에 휩싸이게 되어 마치 한때의 양들을 몰고 나선 목동처럼 보이기도 했다.

썰물이 되면 노인은 나지막한 모래톱에 나가서 대합조개와 아름다운 진주색 껍데기의 앵무조개를 줍기도 했다. 밤에는 달빛과 등대의 불빛을 이용해서 물고기가 많은 바위틈을 찾아 밤낚시를 즐겼다.

마침내 노인은 절벽과 땅딸막한 나무들만 자라는 작은 이 바위섬을 사랑하게 되었다.

공기가 점점 투명해지는 오후에는 무수한 나무들로 뒤덮인 태평양 아래의 모든 지협들을 다 볼 수 있었다. 그때 스카빈스키 노인은 마치 하나의 거대한 정원을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커다란 코코넛과 바나나 송이들은 애스핀월의 집들 뒤에서 화사한 부케처럼 수풀을 일고 있었다.

애스핀월과 파나마 사이에는 광대한 숲이 있었는데 아침저녁으로 불그스레한 물안개가 끼어 전형적인 열대의 숲임을 실감하게 했다. 숲의 바닥은 항상 물이 흥건하게 괴어 있었고 라이아나(열대산 덩굴 식물-역주)로 뒤얽혀 자칫 발을 헛딛기가 십상이었다. 그것은 마치 거대한 난초, 종려나무, 우유나무, 철나무, 껌나무의 웅웅거리는 물결 같았다.

나무들뿐만 아니라 원숭이 무리와 커다란 두루미, 숲 위에 걸쳐진 무지개처럼 갑자기 하늘로 치솟는 앵무새들의 모습도 노인에게는 큰 구경거리였다. 노인에게는 이런 모습이 그리 낯설지 않았다. 아마존에서 배가 난파되었을 때 그와 비슷한 하늘을 보며 수풀 사이를 여러 날 동안 헤매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의 온화한 미소 속에는 그때 겪었던 고통과 위험 그리고 죽음이 감추어져 있었다. 이런 숲에서 밤을 보낼 때는 짐승들의 울음소리와 근처에 도사리고 있는 퓨마의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더욱 가깝고 크게 느껴졌다. 또 나무에 매달려 있는 사람 몸통 굵기의 무시무시한 뱀을 보기도 했다. 그는 마법에 걸린 것 같은 이 숲 속의 호수들에 수많은 전기가오리와 악어들이 득실거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또 이런 미지의 열대 숲 속 - 사람을 감싸고도 남을 만큼 커다란 나뭇잎, 피를 빨아먹는 왕모기, 나무 거머리, 독을 품고 있는 수많은 독거미들로 가득 찬 - 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어떠한 지도 알고 있었다. 노인이 알고 있는 이 모든 것들은 직접 체험하고 고통받으면서 얻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숲 속에서의 위험을 느끼지 않는 지금, 자신이 처한 현재의 상황에서 바라보는 그 숲은 아름다움으로 가득 차 있어 경탄해 마지않을 수 없었다.

그 섬은 모든 악으로부터 노인을 포근하게 감싸고 보호해 주었다. 그는 일요일에나 가끔씩 교회에 가기 위해 자신의 섬을 떠나곤 했다. 그때는 은단추가 달린 등대지기의 제복을 입고 가슴에 메달을 달았다. 노인이 교회를 나설 때는 크레올 족이 자기들끼리 뒤에서 수군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저 등대지기는 꽤 괜찮아 보이는군. 양키이기는 해도 이교도는 아니잖아."

그런 말을 들을 때면 노인은 어떤 자부심을 느끼며 백발이 성성한 머리를 더욱 꼿꼿이 세우고 걸었다.

그러나 노인은 예배가 끝나자마자 부리나케 자신의 섬으로 돌아왔다. 노인에게는 여전히 육지에 대한 신뢰가 없었기 때문에 그것이 훨씬 마음 편했다. 또 일요일에는 마을에서 사온 스페인 신문이나 팰콘브리지 영사에게서 빌어 온 뉴욕 헤럴드 지를 읽었다.

그는 유럽에 대한 기사는 하나도 빼놓지 않고 읽었다. 이 불쌍한 늙은이의 심정을 누가 이해할 수 있겠는가! 지구 정반대쪽 작은 섬의 등대지기로 있으면서도 여전히 자신의 조국을 그리워하고 있었으니…….

하루치 식량과 물을 섬으로 가져다주는 배가 도착하면 가끔 아래로 내려와서 경비원 존과 잡담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점차로 노인은 사람들 앞에 나서는 일을 꺼려했다. 그는 마을을 방문하는 일도, 신문을 읽는 일도, 존과 잡담을 하러 내려오는 일도 그만두었다. 이렇게 노인이 누구를 만난다거나 누군가 노인을 보는 일도 없이 하루하루가 지나갔다. 이 노인이 살아 있다는 유일한 증거는, 해안 기슭에 두고 간 식량과 물이 없어진다는 것과 아침이면 해가 떠오르는 것처럼 밤이면 어김없이 등대의 불빛이 바다를 비춘다는 것이었다.

노인은 세상일에 대해 무관심해졌다. 처음에는 진한 향수 때문이었지만 나중에는 향수조차도 느끼지 못하는 체념 상태에 빠져 버렸다.

노인에게는 현실의 모든 세계가 이 섬에 국한되어 있었다. 그는 자기가 죽을 때까지 이 등대를 떠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젖어들었으며 그 외의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쉽게 잊어 갔다. 동시에 노인은 신비주의자가 되었다. 노인의 부드럽고 서글서글한 푸른 눈은 아이들의 눈처럼 변했고 항상 무언가를 주의 깊게 바라보았다. 고립된 그의 생활과 단순하고 거대한 주위의 환경은 노인에게 자신의 존재를 망각하게 했다. 그는 더 이상 한 개인이 아니며 바다였고, 하늘이었고, 숲 속의 가지 많은 나무였다.

그런 신비감에 빠져 잠잠하게 가라앉는 영혼을 느끼고 있는 동안 그는 바위에 짓눌리듯 갇혀서 점차 모든 것을 잊어가고 있었다. 그는 반쯤 잠자는 의식 상태에서 이 평화로움이 너무나 가슴 벅차게 느껴졌다.

 

 

3

그러나 그 꿈은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어느 날 배가 물과 식량을 두고 가는 것을 등대에서 지켜보던 노인은 천천히 길을 따라 내려왔다. 그는 그곳에서 평상시의 짐말고도 작은 꾸러미 하나가 더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소포에는 미국 소인이 찍혀 있었으며 분명 "스카빈스키 귀하"하는 글이 거친 헝겊에 씌어 있었다.

노인은 호기심에 가득 차서 꾸러미를 풀기 시작했다. 그 안에는 한 권의 책이 들어 있었다. 그는 천천히 책을 들어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첫 장을 펼쳤다.

갑자기 노인의 손이 심하게 떨렸다. 그는 자신의 눈을 의심하는 것처럼 눈을 꼭 감았다가 다시 떴다.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책은 폴란드 책이었다! 도대체 이것이 어찌된 일인가? 누가 그에게 이 책을 보낼 수 있었단 말인가?

처음에는 그도, 자기가 등대지기를 시작하던 초기 어느 때인가 영사에게서 빌려온 뉴욕 헤럴드 지에서 뉴욕에 있는 '폴란드 작가 협회'에 관한 기사를 읽고, 자신에게는 별로 쓸모없는 월급의 반을 즉시 그 협회에 보냈던 것을 기억해 내지 못했다. 그 협회에서는 노인에게 책을 보내어 답례를 한 것이었다. 그 책은 어김없이 노인의 손에 들어왔다. 그러나 노인은 처음부터 이 사실을 연관시킬 수 없었던 것이다.

낯선 땅 애스핀월에, 그것도 작은 이 바위섬의 등대에, 자신의 깊은 고독 속으로 던져진 이 한 권의 책은 그에게 있어 너무나도 특별한 것이었다. 그것은 마치 고향에서 불어온 바람 같았고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기적이었다. 긴 그리움 속에서 거의 잊어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와서 너무나도 소중한 음성으로 자기의 이름을 부르는 그 무엇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노인은 책을 가슴에 꼭 안고 한동안 눈을 감은 채 뜰 수가 없었다. 자기가 눈을 뜨게 되면 분명 이 꿈이 사라져 버릴 것이라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그는 살며시 눈을 떴다. 그러나 자신의 두 손위에서 햇살을 받아 선명한 책 한 권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노인의 심장이 온몸에서 고동쳤다.

그는 책을 펴고 재빠르게 훑어보았다. 시집이었다. 겉장에는 시집의 제목과 작가의 이름이 있었는데 그 작가는 노인에게도 낯선 사람이 아니었다. 그 작가는 위대한 시인이었으며 1830년 이후에 파리에서 그의 작품을 읽은 적이 있었다. 그 후 알제리와 스페인에서 참전했을 때 동료들로부터 이 위대한 시인의 명성이 점점 높아지고 있음을 전해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총대를 쥐고 싸움에 열중해야 했던 그에게는 거의 책을 손에 잡아볼 시간조차 없었다. 1849년 미국으로 건너가 험난한 인생을 겪고 있을 때도 노인은 폴란드 사람을 거의 만나볼 수 없었으며 책은 생각도 못할 정도였다. 그렇기 때문에 더 큰 기대와 설레임으로 그 책을 마주대하고 있는 것이다.

애스핀월의 시계가 오후 다섯 시를 알리고 있었다. 구름도 찬란한 창공을 가리지 못하고 드문드문 떠다녔다. 다만 거대한 정적만이 바다를 짓누르고 있었다. 애스핀월의 하얀 집들 뒤에 서 있는 종려나무도 미소를 짓고 있었다. 진정 공기 중에는 엄숙하고 고요하며 예사롭지 않은 그 무엇이 서려 있었다.

노인은 책의 어느 한 페이지를 펴서 들고 떨리는 목소리로 크게 읽기 시작했다.

 

, 리투아니아, 나의 조국이여!

그대는 건강과도 같이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네

그대를 잃어본 자만이 소중함을 알 것이니

이제서야 비로소 나 또한 알았네

그대의 빛나는 아름다움을

그 영롱한 모든 것들 속에서

나는 그대를 갈구했네

 

스카빈스키 노인은 더 이상 읽어 내려갈 수가 없었다. 글자가 그의 눈 속에서 일렁이기 시작했다. 그의 가슴속에서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고 격정의 파도가 더욱 높아갔다. 자꾸만 목이 메었다.

노인은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다시 시를 읽어 나갔다.

 

, 성녀여, 그대는 빛나는

첸스트호바를 지키고, 빌노에서는

오스트라 게이트에 화려한 빛을 던지네

그곳의 성실한 민중과 함께, 그대는

노보그로데크를 지키고 있네

어린 시절, 죽음 앞에 선 나를 기적처럼 소생시켜 준 그대

눈물 가득한 어머니 곁에서

나를 감싸고 어머니를 감싸고

나는 위태로운 목숨을 끌고

그대의 성전 문턱에 이르러서 기도했네

생명을 소생시켜준 하나님께

똑같은 기적으로

이제, 우리를 조국으로 돌려보내 주오.

 

파도처럼 밀려오는 감동이 노인의 의지를 마비시켜 버렸다. 그는 울음을 터뜨리며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의 흰 머리카락이 모래사장 위로 흘러내렸다.

그가 마지막으로 조국을 본 것이 40년 전이었으며, 모국어를 들은 지 얼마나 되었던가는 오직 하나님만이 알 것이다. 그런데 지금 그 모국어가 홀로 그에게로 왔다. 지구 정반대편에 있는 그를 찾아내어 바다를 건너서 왔다. 너무도 아름다운 그것이! 노인의 어깨를 흔드는 것은 근심이나 슬픔이 아니라 가슴 깊은 곳에서 솟아오르는 무한한 사랑, 바로 그것이었다.

그는 엎드린 채로 흐느끼면서 사랑하는 조국에게 용서를 빌었다. 자신이 너무나 무기력하게 늙어버린 것에 대해, 바위섬에 너무나 많은 애착을 느끼고 있었던 것에 대해, 그리고 향수마저 사그라뜨린 것에 대해서.

오랫동안 노인은 자리에서 움직일 줄을 몰랐다. 갈매기들이 등대 위로 날면서 자신들의 늙은 친구를 걱정하듯 끼룩끼룩 울어댔다. 노인이 새들에게 먹이를 줄 시간이 되었던 것이다. 높은 바위에 앉아 먹이를 기다리던 몇몇의 새들이 후두둑거리며 노인의 주위로 내려앉았다. 그러자 점점 더 많은 새들이 다가와 노인을 쪼거나 머리 위에서 날개를 퍼덕이기 시작했다.

새들의 부산한 날갯짓이 노인을 깨웠다. 실컷 울고 난 노인의 얼굴에는 평화로움이 빛나고 있었다.

노인은 법석을 떨고 있는 새들에게 자신의 음식을 전부 나눠주었다. 그리고 다시 책을 집어들었다.

태양은 파나마의 원시림 뒤로 고개를 수그리고 있었고 나무들은 긴 그림자를 비스듬히 뉘었다. 그러나 대서양은 여전히 밝았으며 아직도 글을 읽을 수 있을 만큼 충분히 환했기에 노인은 다시 시집을 읽기 시작했다.

 

, 사랑하는 그대여

깊은 절망 속에 빠진 애수를 건져

숲이 우거진 그때의 언덕으로

푸르디푸른 그때의 초원으로 가져다 주오

 

마침내 땅거미가 글자들을 지워 버렸다. 눈 깜짝할 사이의 짧은 황혼이었다. 노인은 바위에 머리를 기대고 앉아 눈을 감았다. 그러자 '첸스토호바를 지키는 빛나는 그대'는 노인의 영혼을 '숲이 우거진 언덕과 푸른 초원'으로 인도했다.

하늘은 여전히 금빛 실타래를 늘어뜨리며 빛나고 있었다. 노인은 그 빛을 타고 고향의 오솔길을 밟으며 걸었다. 소나무 숲이 귓가에서 술렁거리고 시냇물이 졸졸 흘러갔다.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고향의 그 모든 것들이 그에게 묻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을 잊지는 않았겠지요?"

노인은 물론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하나도 빼놓지 않고, 넓은 들판과 대강 다듬은 목재들, 초원과 숲과 낮은 마을들…….

밤이었다. 이즈음이면 등대가 바다를 밝히고 있어야 했지만 노인은 이미 고향을 찾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노인은 머리를 가슴에 파묻은 채 꿈을 꾸고 있었다.

수많은 영상들이 그의 눈앞에서 재빠르게, 약간은 혼란스럽게 움직이며 지나가고 있었다. 노인은 자신의 집을 찾을 수 없었다. 이미 불타 없어졌던 것이다. 또 아버지와 어머니의 모습도 볼 수 없었다. 그분들은 그가 어렸을 때 이미 돌아가셨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마을은 어제 떠나온 것처럼 그대로 선명했다. 창에 불을 켜둔 집들이 줄을 서 있었고 도랑이며 방앗간, 마주보고 있는 두 개의 연못, 밤새워 들려 오는 개구리 울음소리며 그 모든 것들이.

그는 언젠가 마을에서 밤새워 보초를 선 일이 있었다. 멀리 보이던 선술집의 등불이 타오르는 눈동자처럼 보였고, 그곳에서 바이올린과 베이스 비올라의 소리가 시끌벅적하게 들려 왔다.

"히요! !"

사람들이 가락에 맞춰 발을 굴렀다.

그는 말 등에 앉아 외로움을 느끼고 있었다. 시간을 느릿느릿 흘러갔다.

이윽고 희미한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자욱한 안개가 끼어 모든 것이 선명하지 못했다. 서리가 초원을 뒤덮은 모양이었다. 아마 누군가가 이것을 바다라고 우길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아니다. 이것은 초원이었다. 곧 어둠 속에서 뜸부기 소리가 들려 올 테고 갈대밭에서는 해오라기가 날아오를 것이다. 밤은 차갑고 고요해서 여느 폴란드의 밤과 다름없었다. 멀리서 소나무 숲이 바람도 없는데 윙윙거리고……. 마치 바다의 파도처럼.

곧 새벽이 창백한 빛을 동쪽에 던질 것이다. 이미 마당에서 홰를 치는 수탉의 소리가 들렸다. 홰를 치는 소리는 집집마다 이어졌다. 높은 나무의 꼭대기에서는 학이 떠들어댔다.

상쾌함이 가슴 뿌듯하게 밀려왔다. 사람들이 내일 전투에 대해 무어라고 말하고 있었다.

"이쪽이오!"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그도 소리를 치고 깃발을 흔들며 전쟁터로 갈 것이다. 그의 젊은 피가 나팔 소리같이 샘솟았다.

새벽이었다. 새벽이 밝아온 것이었다. 밤은 점점 희미해졌고 나무와 늘어선 집들과 방앗간과 시냇물이 다시 태어났다. 탑 위의 풍향계가 돌고 우물의 두레박이 삐걱거렸다. 장밋빛 태양 아래 이 얼마나 소중한 땅이며 이 얼마나 아름다운 곳인가! , 나의 하나뿐인 땅, 나의 하나뿐인 조국이여!

"!"

누군가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아마도 보초 근무를 교대하러 온 병사일 것이다.

갑자기 스카빈스키 노인의 머리 위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노인장, 노인장 일어나시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요?"

등대지기 노인은 부시시 고개를 들다 말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조금 전까지의 환영이 현실과 싸우고 있었다. 마침내 환영은 현실 앞에서 차츰 사그라들었다. 항구 경비원인 존이 그의 앞에 우뚝 서 있었다.

"무슨 일이오? 어디 아프신가요?"

", 아니오."

"어젯밤에 등대불을 켜지 않으셨더군요. 그래서 노인장께선 등대지기의 자리에서 해고되었습니다. 세인트 제로모에서 오던 배 한 척이 근해에서 침몰했답니다. 다행히 인명 피해는 없었지만, 만일 그러기라도 했더라면 노인장께서는 재판을 받아야 했을 거요. , 함께 배를 타시죠. 나머지는 영사님께 듣도록 하시구요."

노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의 푸른 눈 속에는 아직도 고향의 잔영이 남아 있는데…….

며칠 후 사람들은 애스핀월을 떠나 뉴욕으로 가는 증기선에서 스카빈스키 노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 불쌍한 노인은 결국 일자리를 잃고 만 것이었다.

그의 앞에는 새로운 방랑의 길이 펼쳐졌다. 모진 바람은 이 늙은 사람을 낚아채어 다시 한번 육지와 바다 사이에서 뒤흔들어 놓을 것이다.

노인은 며칠 새 더 늙고 구부정해 보였다. 그러나 그의 눈만은 여전히 햇살처럼 빛나고 있었다. 그의 품안에는 새로운 인생길의 동반자가 될 책 한 권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그는 때때로 그것을 손으로 눌러 보며 존재를 확인하였다. 마치 그것마저도 잃어버릴까 봐 두려운 듯이, 다시는 잃지 않으려는 다짐이라도 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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