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오지 않는다(No Comebacks)
Frederick Forsyth
마크 샌더슨은 여자를 좋아했다. 좋아하는 것을 말하자면, 애버딘앵거스(스코틀랜드산 뿔이 없는 식육용 검은 소)의 등심스테이크에다 상추의 싱싱한 속을 듬뿍 넣은 샐러드를 곁들여 먹는 것도 빼놓을 수 없었다. 그는 이 메뉴를 늘 즐겼다. 약간이라도 배가 고프면, 그는 언제라도 전화를 해서 빌딩 맨 위층에 있는 자신의 방으로 음식들을 배달시켰다. 그는 그럴만한 능력이 있는 부자였다. 파운드로 쳐도 백만장자라고 말할 수 있었다. 비록 요즘 값어치가 떨어졌다 하더라도 가치는 달러에 비해 두 배는 넘는 것이다. 대부분의 부유하고 성공한 사람들이 그렇듯이, 그에게도 세 종류의 생활이 있었다. 런던 실업계의 거물로서 공적인 생활과 사적인 생활-엄밀히 말해 세상의 주시 속에 살아가고 있는 샌더슨 같은 사람에게 문자 그대로의 사생활이란 의미 없는 말이겠지만- 과, 그리고 그의 숨겨진 생활이다. 첫 번째 생활은 주요 신문의 경제란이나 텔레비젼 프로그램에서 말해지는 그런 것들이었다. 1960년대 중반, 마크 샌더슨은 런던 웨스트엔드에 있는 한 부동산 회사에 취직하면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비록 제대로 교육 을 받지는 못했지만 그에게는 면도날같이 날카로운 머리가 있었다. 그곳에서 일한 지 이 년도 채 되기 전에 그는 처음으로 부동산 거래의 룰과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이지만, 그 룰을 합법적으로 깨뜨릴 수 있는 방법을 터득했다.
스물세 살 때 그는 세인트존스 우드에 있는 부동산을 단독으로 맡아, 단 24시간 만에 거래를 성사시켜 1만 파운드를 벌었다. 그는 그 돈을 자본으로 '해밀턴 부동산'이라는 회사를 설립했는데, 그 회사는 그 뒤 16년간 그가 쌓아 올린 부의 기초가 되어주었다. 회사의 이름은 첫 거래한 부동산 이 해밀턴 테라스에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붙였는데, 그것이 그가 마지막으로 한 센티멘탈한 행동이었다.
주택 사업으로 백만 파운드를 번 그는 70년대 초, 사무용 빌딩으로 사업 방향을 바꾸었다. 70년대 중반에 이르자 재산은 5백만 파운드에 달했고, 이때부터 사업은 다양해지기 시작했다. 세인트존스 우드에 있는 부동산을 최초로 거래할 때 이미 나타나기 시작한 그의 사업가적인 자질은 모든 것을 황금으로 바꾸었다는 마이다스 왕의 손처럼 금융, 은행, 화학공업, 지중해 의 레저산업 등에서 통찰력을 발휘했다. 신문들은 이를 떠들어댔고, 사람들은 '헤밀턴 부동산'이 산하에 십여 개의 계열사를 거느린 재벌그룹으로 착실하게 성장하고 있다고 믿게 되었다.
두 번째 생활인 샌더슨의 사생활도 같은 신문의 몇 페이지 앞에 마찬가지로 자주 등장했다. 리젠트 공원의 펜트하우스, 엘리자베스 왕조 풍의우 스터셔에 있는 전원별장, 루아르 계곡에 있는 성, 당디페 해안의 별장, 요트, 람보르기니 스포츠카, 롤스로이스, 그리고 회사에서나 집에서 지름 4미터짜리 원형 침대를 배경으로 젊고 매력적인 병아리 스타들과 찍은 사진들의 행렬.... 이런 것들은 신문 칼럼에 아주 좋은 가십거리를 제공하였다. 백만 불짜리 여배우와의 이혼에 관한 급보라든가 가무잡잡한 미스월드와의 친자 확인 소송에 관한 보도 같은 것들은 오십 년 전 같으면 그를 파멸로 밀어 넣었겠지만, 근래에 와서는 단지 그가 능력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입증 하는 증거 -만약 증거가 필요하다면, 그리고 요즘은 자주 그런 것이 필요 하지만- 에 불과할 뿐이었다. 실제로 그런 일들은 웨스트엔드 사교계에 서는 오히려 흥미 있고 감탄할 만한, 충분히 주목받을 만한 일로 여겨지고 있었다. 아무튼 그는 기록에 남을 인물인 것이다. 나머지 하나의 생활은 그의 숨겨진 생활인데, 모든 것이 한창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숨겨진 생활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권태'라고 밖에 말할 수 없었다. 마크 샌더슨은 모든 것에 싫증이 나 있었다. 왕년에 한때 그가 만들어냈던 '마크가 바라는 것을 마크는 얻는다. '라는 경구는 어느새 씁쓸한 농담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는 서른아홉 살에, 말론 브란도 같은 약간 찌푸린 듯한 인상과 탄탄한 육체의 매력까지 있었으나 고독했다.
샌더슨은 여자를 원하고 있었다. 수백 명의 여자가 아니라 오직 단 한 명의 여자, 그리고 그 여자가 낳은 아이, 그리고 가정이라 불려지는 한적한 시골의 보금자리를 원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여자를 만나기가 결코 쉽지 않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바르게 말하면 그는 10년간이나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나, 한 번도 그런 여자를 만난 적이 없었다. 대부분의 돈 많은 바람둥이들처럼, 샌더슨이 마음에 들어 하는 여자는 샌더슨을 좋아해 주지 않았다. 아니면 적어도 공적인 샌더슨 -돈과 힘과 명성을 가진- 에 게 흥미를 느끼지 않는 여자였다.
그러나 샌더슨은 대부분의 돈 많은 많은 바람둥이와는 다르게 그런 사실을 수긍할 수 있는 자기 분석력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이런 생각을 세상에 드러낸다면 웃음거리가 될 뿐이겠지만.
그 초여름날 밤 그녀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샌더슨은 자신이 원하는 여성을 결코 만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지루한 자선 파티에서 샌더슨은 그녀를 만났다. 경비를 제하고 난이익금을 -하다못해 한 잔의 우유까지도- 방글라데시로 보내자는 취지를 가진 자선 파티였다.
그녀는 샌더슨이 서 있는 파티장 맞은편에 서 있었다. 그녀는 작고 뚱뚱한 체구를 보완하기라도 하듯 커다란 시가를 물고 있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침착한 얼굴에 미소를 약간 머금은 그녀의 표정으로는, 그녀가 과연 그 남자의 이야기를 재미있게 듣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풍만한 그녀의 가슴을 엿보려고 애가 타 있는 남자의 익살스러운 모습에 실소를 금하 지 못하고 있는 것인지를 판단할 수가 없었다. 샌더슨은 사람들을 헤치고 두 사람에게로 다가가, 마침 고개를 끄덕여 인사하는 조그만 영화 제작업자에게 자신을 소개하도록 했다. 그녀의 이름은 안젤라 소머즈라 했다. 그가 잡은 그녀의 손은 싸늘한 감촉이었고 손가락은 가늘고 길었으며 완벽한 모양의 손톱을 가지고 있었다. 다른 한 손에는 진토닉으로 보이는 -나중에 그냥 토닉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술 한 잔을 들고 있었는데, 가운데 손가락에는 가는 금반지를 끼고 있었다. 샌더슨은 개의치 않았다. 결혼한 여자라 해도 다른 여자들에 비해 별로 어려울 것이 없었다.
그는 영화 제작업자를 쫓아버리고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그녀를 데리고 파티장을 나와 다른 데로 갔다. 그녀는 그에게 깊은 육체적 감동을 주었으며 또한 유례없이 그를 흥분시켰다. 소머즈 부인은 큰 키에 평온하고도 고전적인 품위가 흐르는 자태가 매력적인 여성이었다. 그녀의 유행을 따르지 않는 침착하고 기품 있는 분위기는 아름다운 얼굴과도 보기 좋은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그녀는 커다란 가슴과 잘룩한 허리, 잘 퍼진 히프에 길게 뻗은 다리라는 식의 말라빠진 80년대 미인형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윤기가 흐르는 갈색 머리카락을 머리 뒤로 말아 올렸는데, 사치스런 느낌과는 다른 매우 신선하고 건강한 느낌을 주었다. 입고 있는 단순한 디자인의 흰색 드레스는 적당하게 황금색으로 탄 그녀의 피부와 잘 어울렸다. 보석류는 달지 않았고 단지 눈언저리에 가벼운 화장을 한 것뿐이었는데도, 그 모습은 다른 사교계 여인들과는 다른 매우 특별한 느낌을 주었다. 나이는 서른 살 정도로 보였으나 나중에 서른두 살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녀의 황금빛 피부를 보고 샌더슨은, 그녀가 지난겨울부터 사월까지 스키 휴가를 즐겼거나, 아니면 봄에 카리브해에서 순항을 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느 쪽이든 간에 파티장의 다른 여자들처럼 그녀나 그녀의 남편이 그런 생활을 즐길 수 있는 재력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그러나 두 가지 추측은 모두 빗나갔다. 소머즈 부부는 스페인 해안의 작은 별장에서 살고 있었다. 두 부부는 남편인 소머즈 씨가 새들에 대한 책을 써서 받는 약간의 인세와 그녀가 영어를 가르쳐 버는 돈으로 생활하고 있었 다. 처음에는 그녀의 갈색 머리카락과 눈동자, 몸매와 황금색 피부로 인해 스페인 계라는 생각을 했었으나, 그녀는 그와 마찬가지로 순수한 영국인이었다. 그녀는 미들랜드에 있는 그녀의 부모님을 찾아보기 위해 영국에 왔는데, 옛 학교 친구의 권유로 스페인에 돌아가기 전에 일주일쯤 런던에서 머무르기로 했다고 말했다. 그녀와는 어쩐지 대화가 잘 이루어졌다. 그에게 애교 떠는 일도 없었고 -이것이 특히 그의 마음에 들었다- 그가 부드럽게 농담을 하는데 크게 웃음을 터뜨리는 짓도 하지 않았다.
"웨스트엔드 사교계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샌더슨은 벽에 등을 기댄 채 파티를 바라보다가 물었다.
"상상했던 것과는 약간 다른 것 같군요."
생각에 잠긴 듯한 목소리로 그녀가 대답했다.
"잼 단지 속의 한 떼의 앵무새지요."
냉랭하게 샌더슨이 중얼거렸다. 그녀의 눈썹이 약간 치켜 올라갔다.
"제가 알고 있기로는 마크 샌더슨 씨도 그 중심인물의 한 사람인 것 같던 데요."
그녀는 아주 점잖게 그러나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우리들이 하는 짓이 스페인까지 흘러 들어갔소?"
"코스타 블랑카에서도 '데일리 익스프레스'정도는 볼 수 있습니다."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마크 샌더슨의 인생과 생활도 포함해서 말입니까?"
"물론 그것까지도. . . ."
"깊은 인상을 받으셨습니까?"
"반드시 받아야만 하나요?"
"아니오."
"그렇다면 받지 않았습니다."
이 대답이 그의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
"기쁘군요. 왜 그런지에 대해 물어도 좋겠습니까?"
잠시 생각한 후 그녀는 말했다.
"사실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가짜라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지요."
"저도 포함됩니까?" 샌더슨은 자기를 올려다보는 그녀의 가슴이 순백의 천 아래서 부드럽게 부풀어 오르다 가라앉는 모습을 슬며시 내려다보았다.
"글쎄요."
그녀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마, 절반의 기회만 주어졌더라도, 당신은 틀림없이 훌륭한 사람이되 셨을 거예요."
이 말에 그는 잠깐이나마 몸이 휘청하는 것 같았다.
"터무니없는 말이오."
그는 말꼬리를 잡아챘으나, 그녀는 토라진 작은 소년을 대하는 듯 너그러운 미소만 짓고 있을 뿐이었다. 몇 분 뒤 그녀의 친구가 오더니 한참을 지껄이다가 그녀와 함께 떠날 채비를 하였다. 그는 로비로 나오는 길에 내일 저녁 식사를 같이하자고 낮은 목소리로 청했다. 수년 동안 그가 이런 식으로 여자에게 데이트 신청을 하기는 처음이었다. 그녀는 샌더슨이 당연히 사진기자의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초대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구설수에 오르는 위험에 대해서는 굳이 언급하지 않았다. 잠깐 생각하고 나서 그녀는 대답했다.
"네, 좋아요."
그날 밤은 온통 그녀 생각뿐이었다. 샌더슨은 옆에 누워 있는, 이나벨의 가게에서 데려온 비쩍 마르고 무언가 열에 들떠있는 모델 아가씨를 무시한 채 천장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는 윤기 나는 갈색 머리가 자신의 옆 베개를 덮고 있으며, 부드러운 황금빛 살결이 자신의 손에 만져지는 듯한 환상에 젖어 들었다. 그녀가 보여준 다른 모습들로 미루어 볼 때, 그녀의 자는 모 습도 고요하고 평온할 것이라고 그는 내기라도 기꺼이 걸 수 있을 만큼 확신했다. 샌더슨은 어둠 속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나 만져지는 것은 다이어트로 비쩍 마른 풋내기 모델의 강아지 귀처럼 늘어진 젖과 흥분을 과장하려고 애쓰는 헐떡거림뿐이었다. 그는 일어나 부엌으로 가서 커피를 끓였다. 그리고 어두운 거실에 앉아 커피를 마셨다. 태양이 저 멀리 원스테드 소택지에서 떠오를 때까지 그는 그렇게 앉아서 창밖 공원에 있는 나무만 바라보고 있었다.
일주일은 로맨스를 만들기에는 그리 긴 시간이 아니다. 그러나 한사람의 인생이나 두 사람, 심지어는 셋의 인생을 바꾸어 놓기에는 충분한 시간이다. 다음날 밤 샌더슨은 자동차로 그녀를 데리러 갔고 그녀는 곧 내려와 차에 탔다. 그녀는 윤기가 흐르는 갈색 머리카락을 머리 위로 말아 올리고, 손목 부분이 레이스로 장식된 우아하고 아름다운 삼각형의 소매에 흰 깃이 달린 주름진 블라우스와 검은 맥시 치마를 입고, 허리에는 폭이 넓은 벨트를 묶고 있었다. 에드워드풍의 그런 모습에 그는 흥분을 느꼈는데, 전날 밤에 그가 상상했던 모습과는 너무도 대조적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겸손하면서도 지적인 태도로 말했다. 그가 여자에게는 거의 하지 않는 사업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에도 그녀는 경청해 주었다. 밤이 점점 깊어짐에 따라 샌더슨은 자기가 그녀에게 품고 있는 감정은 일시적인 끌림이 아니며 하물며 단순한 욕정 따위와는 전혀 다른, 어떤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녀에게는 내면의 고요함이나 자제심과 함께, 샌더슨으로 하여금 안식과 평화를 느끼게 하는 온화함이 있었다. 그는 점점 더 자유롭게 재정상의 업무나 혹은 평소에 간직하고 있던, 경멸하면서도 어울릴 수밖에 없는 어떤 사회에 대한 권태감 등을 이야기했다. 그녀는 단순히 알려고 하지 않고 이해하려는 태도를 보였다. 여자에게 있어서는 많이 아는 것보다 이해하려는 태도가 훨씬 중요한 것이다. 그들은 밤이 깊어 레스토랑이 문을 닫을 때까지 한구석에 앉아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수년 만에 처음으로 집에 들러 나이트캡을 한잔하지 않겠느냐는 청을 했으나 그녀는 가장 훌륭한 방법으로 거절했다. 그 주의 중반에 이르자 샌더슨은 마치 열일곱 소년처럼 그녀에게 완전히 빠져들었다. 그녀에게 제일 좋아하는 향수가 무어냐고 묻고, 그녀가 때때로 비행기 안에서 면세로 사는 사분의 일 온스짜리 '미스 디오르'라고 대답 하자, 그는 당장 사람을 본드 스트리트로 보내 런던에서 구할 수 있는 가장 큰 병의 '미스 디오르'를 구해 그날 밤으로 선물했다. 그녀는 천진하게 기뻐하며 받았으나 그 크기에 대해 당장 이의를 제기했다.
"이건 지나친 낭비군요."
그는 난처했다.
"저는 어떤 특별한 것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꽤나 비쌌을 텐데요."
단정한 목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당신도 아시다시피 나는 그럴 능력이 있습니다."
"아마 그럴지도 모르겠지요. 이건 매우 마음에 들어요. 하지만 다시는 저를 위해 이런 식으로 물건을 사지 마세요. 낭비라는 생각이 자꾸 들어서요."
그녀는 단호하게 말했다. 주말이 되자 샌더슨은 우스터셔의 전원별장으로 전화를 걸어 풀장의 물을 따뜻하게 데우라고 지시하고, 토요일 내내 둘이서 수영을 즐겼다. 오월의 바람이 차가웠기 때문에 그는 풀장의 삼면을 바람막이용 유리로 둘러 수영을 즐길 수 있게 만들었다. 탈의실에서 나타난 그녀의 하얀 타올지로 만든 원피스 수영복을 입고 있었는데, 그 모습을 본 순간 샌더슨은 숨이 막혔다. 모든 면에서 정말 아름다운 여성이라고 그는 내심 다시 한번 경탄했다. 두 사람의 마지막 데이트는 그녀가 스페인으로 떠나기 전날 밤이었다. 그녀가 묵고 있는 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 세워놓은 롤스로이스의 어둠 속에서 두 사람은 긴 입맞춤을 나누었다. 그러나 그녀의 드레스 앞자락을 따라 그의 손이 점점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가자, 그녀는 그 손을 부드럽지만 그러나 단호하게 떼서 그의 무릎으로 되돌려 보냈다. 샌더슨은 그녀에게 남편을 떠나 자기와 결혼해 달라고 프로포즈했다. 그의 태도가 진지했기 때문에 그녀도 그 프로포즈를 진지하게 들었다. 그리고 고개를 저었다.
"저는 그렇게 할 수 없어요."
"당신을 사랑해요. 한때의 기분이 아닙니다. 당신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어요."
그녀는 자동차 창 너머로 어두운 거리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당신의 마음은 알고 있어요, 마크. 우리는 여기까지 오지 말았어야 했어요. 제가 좀 더 일찍 깨닫고 만나지 말았어야 했었는데."
"나를 사랑합니까? 조금이라도?"
"사랑을 말하기엔 너무 짧은 시간이었어요. 저는 그렇게 재빠르지 못해요."
"하지만 앞으로라도 나를 사랑할 수 있잖소?"
다시 한번 그녀는 여자로서 이 질문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수없 었다.
"그럴지도 모르죠. 아니 사랑했다고 말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지요. 제가 호감을 느낀 당신은 스스로가 이 세상에 보여주고 있는 당신도, 당신의 평판이 만들어낸 당신이 아닌, 어떤 다른 사람이에요. 당신의 냉소 밑에 숨겨져 있는 진짜 당신은 보다 상처받기 쉬운 사람이라는 게 제겐 아주 좋게 느껴졌어요."
"그렇다면 남편을 떠나 나와 결혼해 주시오."
"그렇게 할 수 없어요. 저는 아치와 결혼했고, 그리고 그를 떠날 수 없어요."
샌더슨은 지금 자기 앞을 가로막고 있는, 스페인에 있을 낯모르는 사내에 대한 분노가 거세게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내가 당신에게 줄 수 없는 무언가를 그가 갖고 있는 거요?"
슬픈 듯한 미소가 그녀를 스쳤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는 약한 남자입니다. 유능하지도 못하고..."
"왜 그를 떠나지 못하는 거요?"
"그가 나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지요."
그녀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나도 당신이 필요해요."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당신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원하고 있는 거에요. 당신은 나 없이도 살아갈 수 있지만 아치는 그렇지 못해요. 그는 그럴 힘이 없답니다."
"안젤라, 단순히 원하는 것만이 아니오. 사랑해요. 내 생애의 어떤 것보다도 사랑해요. 나는 당신을 열망하고, 바라는 거요."
"이해를 못 하시는군요."
잠시 침묵한 후 그녀가 다시 말했다.
"여자란 사랑받는 것 자체를 사랑해요. 열망 받는 것을 열망하고 바람의 대상이 되는 것을 바라지요. 그러나 그 모든 것보다 자신을 필요로 하는 것을 필요로 해요. 아치는 내가 필요해요. 마치 숨 쉴 때의 공기처럼요."
샌더슨은 피우던 담배를 재떨이로 가져갔다.
"그러니까 당신은 남편 곁에 있을 거군요...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그는 담배를 짓이겨 껐다. 그녀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단지 머리를 끄덕이고 몸을 돌려 그의 눈을 응시했다.
"그래요,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요. 미안해요, 마크. 그렇지만 이 길이 나의 길이에요. 우리가 훨씬 예전에 만났더라면, 그리고 내가 아치와 결혼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모든 게 달라졌겠지요. 그러나 나는 아치와 결혼했어요. 그리고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난 거예요."
다음날 그녀는 떠났다. 샌더슨은 자가용 운전사를 보내 발렌시아 항공을 탈 그녀를 공항까지 배웅했다.
사랑이 필요, 그리고 갈망과 욕망에는 매우 미묘한 차이와 단계가 있으며, 그 어느 것이나 남자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한 것들이다. 그러나 마크 샌더슨이 이 모든 것에 한꺼번에 사로잡혔다. 오월에서 유월로 접어 들자 그것들은 깊어가는 외로움과 함께 더욱 커져만 갔다. 이전의 샌더슨은 어떠한 일에도 방해를 받아 본 적이 없었다. 대부분의 힘을 가진 사람들이 그렇듯이 그도 한 십 년간을 그렇게 살다 보니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어떤 도덕적 결함을 지니게 되었다. 그는 어떤 것을 원하면 반드시 그 목적을 달성했다. 그는 세웠다 하면, 방법 구상, 계획 수립, 그리고 실행이라는 논리적이고 정확한 단계를 거쳐 마침내 반드시 획득하고 말았다.
유월 초 그는 안젤라 소머즈를 획득하기로 결정했다. 그 방법을 구상하는 과정에서 계속 그의 뇌리를 맴돈 '기도서'의 한 구절이 있었다.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그녀가 다른 종류의 여자, 다시 말해 서재 산이나 권력, 사치나 사회적 명성을 쫓아다니는 여자였다면 아무런 문제도 없었을 것이다. 가지고 있는 돈과 권력으로 쉽게 함락시킬 수 있을 터이니까.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그런 여자라면 그토록 자신이 사로잡히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고심해도 생각은 돌고 돌아 제자리를 벗어나지 못했고, 그 끝은 광기로 이어지고 있었다. 오직 하나의 방법은 그 돌고 도는 사슬을 깨뜨리는 것뿐이었다. 그는 임대 중개소에 전화를 걸어 마이클 존슨이란 이름으로 조그만 아파트를 하나 빌리고, 한 달 치의 집세와 그에 따르는 보증금을 현금으로 우송했다. 그리고 새벽에 런던에 닿게 되니까 열쇠를 현관문 앞 깔개 밑에 넣어 놓으라고 부탁했다. 그 아파트를 거점으로 삼아 그는 런던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합법적인 일이라면 아무것도 묻지 않겠습니다.'라고 선전하는 사설 조사기관에 전화를 걸었고 용건을 설명했다. 조사하려는 쪽의 익명을 요구한다는 말을 듣자 그곳에서는 선금을 불렀고 그는 현금으로 5백 파운드를 속달로 보냈다. 일주일 후 한 통의 편지가 도착했다. 일이 완료되었으므로 잔금 250파운드를 우송하라는 내용이었다. 기다리던 것은 삼일 뒤에 왔다. 봉투를 열어보니 먼저 간단한 약력이 나왔다. 그는 대충 훑어보았다. 수십 권밖에 팔지 못하고 오래 전에 절판이 된 지중해에 사는 새들의 생태에 대해 쓴 책에서 복사한 한 장의 인물 사진, 그리고 망원렌즈로 찍은 몇 장의 사진도 들어있었다. 사진에는 칫솔 같은 수염을 단 빈약한 턱에 작고 좁은 어깨를 가진 사나이가 찍혀 있었다. 아치볼드 크레이런스 소머즈 소령 -'그는 소령이란 타이틀을 지키고 싶어 하겠군.' 하고 샌더슨이 차갑게 말한- 은 본국을 떠나 알리칸테와 발렌시아의 중간쯤에 위치한 스페인의 알리칸테주 해변에서 반마일쯤 떨어진 곳에 있는 작은 별장에서 살고 있었다. 별장을 찍은 사진도 몇 장 들어있었다. 마지막으로 한 장의 종이에 그 별장에 사는 부부의 생활 일정이 정리되어 있었다. 아침에 부부가 나란히 작은 앞뜰 에서 모닝커피를 마시고, 콘덴사네 세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기 위해 부인은 카스티요를 방문한다. 오후 세 시에서 네 시 사이에 소령이 별장의 서재에서 코스타 블랑카 지역의 새들에 관한 자료를 정리할 동안 그의 아내는 해안에서 수영과 일광욕을 즐긴다. 그는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측근에게는 집에 있겠다고 알리고, 대신 자신이 매일같이 회사에 전화로 연락을 주기로 했다. 이제 외모를 바꿀 차례였다. 이 일에는 '게이 뉴스'에 나오는 조그만 이발소 광고가 가장 쓸 만했다. 그는 긴 머리를 바짝 깎아 버리고 짙은 밤색의 머리카락을 금발로 염색했다. 이 작업은 모두 한 시간 남짓 걸렸는데, 이발사는 이 머리 모양이 2주일 정도는 충분히 갈 거라고 떠벌렸다. 이발을 한 다음 샌더슨은 곧장 아파트의 지하 주차장으로 차를 몰고 들어갔다. 그리고 로비에 있는 짐꾼을 피해 엘리베이터를 이용해서 자신의 아파트로 들어간 그는 전화로 근래의 사건들을 전문적으로 기록 보관하는 런던에서 제일가는 보관소의 이름과 주소를 알아냈다. 그곳에는 조회만 전담하는 부서가 따로 있었으며 풍부한 신문, 잡지들이 훌륭하게 스크랩되어 있었다. 삼일 후 그는 마이클 존슨이란 이름으로 그곳의 열람권을 끊었다. 그는 '용병'이라는 제목이 붙은 자료집부터 뒤져나가기 시작했다. 자료집은 다시 작은 자료집으로 나뉘어져 있었고, '마이크 호래', '존 피터즈', '자크 슈마레', '로베르 드나르' 같은 용병부대의 이름들로 표제를 삼고 있었다. 또 다른 작은 자료집들은 카탕가, 나이지리아, 비아프라, 로디자아, 앙골라 등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그것들을 모조리 읽었다. 자료집의 내용은 뉴스 리포트, 잡지의 기사들, 촌평, 서평, 그리고 인터뷰 기사로 채워져 있었다. 샌더슨은 책이름이 나오면 그 이름을 적어 두었다가 일반 도서관에 가서 찾아 읽었다. 예를 들면 안토니 모클러의 '용병의 역사', 마이크 호래의 '콩고의 용병', 그리고 앙골라에서 사용되었던 '병기의 화력' 같은 것들이었다. 일주일이 지나자 스크랩의 잡동사니로부터 한 사내의 이름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 사내는 세 번이나 실전에 참가한 경력이 있었는데, 가장 유명한 책의 저자들도 그에 대해서는 신중한 기술을 하고 있었다. 그는 인터뷰를 한 일이 없었고 따라서 문서철 속에도 그의 사진은 없었다. 그리고 그는 영국인이었다. 샌더슨은 그가 런던의 어딘가에 살고 있을 것이라는 가정 하에서 그를 찾아보기로 작정했다.
몇 해 전 우량주식을 보유하고 있는 회사를 인수한 적이 있는데 그때 샌더슨은 소규모의 담배상회, 필름 현상소, 저작 대행 출판사를 함께 인수했었다. 샌더슨은 쉽게 그 일을 생각해 냈다. 그가 도서관에서 읽은 용병에 대한 회상기 가운데 하나가 바로 그 출판사에서 출판된 것이었기 때문에, 샌더슨은 용병 출신으로 책을 쓴 한 사람을 쉽게 찾아낼 수 있었다. 아주 적은 인세지만 분명히 낸 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 저자가 의심할 이유도 없었고, 주소도 마찬가지로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샌더슨이 찾아갔을 때 사내는 언덕 꼭대기에 있는 낡은 집에서 이미 오래전에 한물 간 꼴을 하고 술과 추억에 잠겨 살고 있었다. 샌더슨은 용건이 자기 책을 다시 찍거나 인세에 관한 계약 건이 아니라는 걸 알자 그는 잔뜩 실망하는 눈치더니, 소개비라는 말이 나오자 다시 얼굴이 환해졌다. 존슨이라고 자기소개를 한 샌더슨은 말했다. 전에 용병이었던 어떤 사람이 우리 출판사에서 자신의 자서전을 내려는 의사를 갖고 있다는 것을 들었는데 소재지를 몰라서 곤란을 받고 있다. 다른 회사에서 그러한 권리를 갖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오직 하나의 문제는 그의 주소...
옛 용병은 그 이름을 듣더니 그렁거리며 말했다.
"그자가 이제 깨끗하게 털어놓는다 이거지. 놀라운 일인걸."
그는 여섯 병의 위스키를 마시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그는 헌 노트 뭉치를 뒤적이더니, 종이쪽지에 술집 이름을 휘갈겼다. 그리고 샌더슨의 손에 쪽지를 쥐어주었다.
"그 자식 시내에 나오면 늘 거기서 마시지요."
그날 저녁 샌더슨은 그 곳을 찾아갔다. 얼스 코트 뒤에 있는 조용한 술집이었다. 다음날 밤 그 사내가 나타났다. 사내의 사진은 본 적이 없지만 용병 기록에서 그에 대한 묘사를 읽은 적은 있었다. 턱에 있는 흉터와 바텐에게 인사하는 소리로 미루어 그가 틀림없었다. 후리후리한 키에 넓은 어깨, 적당한 체격이었다. 바의 뒤쪽에 걸린 거울을 통해 샌더슨은 맥주 한 잔을 앞에 놓고 앉아 있는 사내의 내리깐 눈과 침울한 입을 훔쳐볼 수 있었다. 샌더슨은 그날 밤 그곳에서 사백 야드쯤 떨어진 그의 아파트까지 따라갔다. 거리에서 불이 켜지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가, 십 분쯤이 지난 후 그는 아파트를 노크했다. 용병은 헐거운 검은 바지에 내의 차림이었다. 샌더슨은 용병이 실내의 불을 끄고 어둠 속에서 문을 여는 것에 주목했다. 복도의 조명은 방문자를 비추었다.
"휴즈씨지요?"
샌더슨이 물었다. 사내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찾고 있는 사람이 누구요?"
"나는 마이클 존슨이라고 합니다."
휴즈가 단호하게 말했다.
"영장을 보여주시오."
"그런 건 없소, 경찰 따위는 아니니까. 들어가도 좋소?"
샌더슨의 질문을 무시하고 휴즈가 물었다.
"여기 가면 나를 찾을 수 있다고 누가 가르쳐 주었소?"
샌더슨은 가르쳐준 사람의 이름을 대고는 이렇게 덧붙였다.
"그 사람 당신 이름을 기억해 내는데 24시간이나 걸리더군. 하도 퍼마셔서 이제 자기 이름도 기억하기 어려울 지경이었소."
휴즈의 입가에 씁쓸한 웃음이 나타났다. 별로 기분 내키는 웃음은 아니었다.
"그래, 그 자식이었군."
그는 턱으로 실내를 가리켰다. 샌더슨은 그의 앞을 지나서 거실로 들어갔다. 런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초라한 가구가 드문드문 놓여 있는 그런 거실이었다. 마루 한가운데 테이블이 하나 놓여 있었다. 뒤따라온 휴즈는 샌더슨에게 거기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샌더슨이 앉자 휴즈도 의자를 가져와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자아, 그런데?"
"일을 하나 해주시오. 청부지. '한 방 먹인다'고 부른다지요."
휴즈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빤히 노려보았다.
"음악을 좋아하시오?"
갑자기 그가 물었다. 샌더슨은 어리둥절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음악을 좀 들읍시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는 일어서더니 방구석의 침대 옆 테이블 위에 있는 라디오로 걸어가더니 라디오를 켜는 것과 동시에 베개 밑에 손을 넣어 콜트 45자동 권총을 꺼내서 샌더슨 쪽으로 돌아섰다. 샌더슨은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침을 꿀꺽 삼켰다. 휴즈는 음악이 흘러나오는 라디오의 볼륨을 한껏 올렸다. 용병은 총구 너머로 계속 샌더슨을 응시하며 옆 서랍에서 종이와 연필을 꺼내 들었다.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옷을 벗어.' 샌더슨은 속이 뒤틀려 올랐다. 이런 종류의 사내들이 지독하다는 것은 들어서 이미 알고 있었다. 휴즈가 총 끝으로 테이블에서 물러나라는 지시를 했으므로 그는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샌더슨을 윗도리와 넥타이, 셔츠를 벗어 바닥에 놓았다. 조끼는 입고 있지 않았다. 다시 총 끝이 아래를 가리켰다. 샌더슨은 지퍼를 내리고 바지가 흘러내리도록 했다.
"좋아, 옷을 입지."
총구를 아래로 내렸지만 여전히 손에 쥔 채, 그는 방을 가로질러 라디오의 볼륨을 줄이고 다시 테이블로 돌아왔다.
"상의를 이리 던지시지."
샌더슨은 바지와 셔츠를 다시 입고 상의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휴즈는 늘어진 옷을 아래위로 흔들어 털어보았다.
"입으시오."
샌더슨은 그렇게 했다. 그리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휴즈는 그의 맞은편에 앉아서 자기 오른손 가까이에 권총을 내려놓고 프랑스제 시가를 피워 물었다.
"이게 모두 무슨 짓이오? 내가 무기를 가졌다고 생각했소?"
휴즈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지. 하지만 당신이 도청기를 갖고 있었다면, 마이크 줄로 당신 불알을 동여매서 소리를 녹음하려고, 당신을 고용한 자에게 되돌려 보낼 작정이었지."
"알겠소, 하지만 무기도, 도청기도 날 고용한 사람도 없소. 말하자면 내가 날 고용한 셈이지. 물론 다른 때라면 사람을 고용하는 편에 속하지만... 진심으로 말하는 거요. 일을 하나 맡아주시오. 충분한 보수를 주겠소. 나 역시 신중을 기하고 있는 일이오. 그렇게 해야만 하고."
"나는 적당한 인물이 아니오."
휴즈가 입을 열었다.
"파크 허스트(영국 와이트 섬에 있는 기결수 형무소)에 가면 능력보다 입이 더 발달한 청부 패거리들이 가득 차 있소."
"당신을 원하는 것이 아니오."
샌더슨은 침착하게 말했다. 휴즈의 눈썹이 다시 한번 치켜 올라갔다.
"내가 원하는 사람은 이 영국 땅에 살거나 이곳에 뿌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니오. 나 자신이 여기 살고 있거든. 그걸로 충분하지 않겠소. 나는 외국인을 원해요. 일도 외국에서 처리해야 될 일이고, 내가 원하는 건 그런 사람의 이름이오. 그리고 그 이름에 대한 사례는 이렇게 준비했소."
샌더슨은 안주머니에서 20파운드짜리 빳빳한 지폐가 50장 묶여있는 돈뭉치 다발을 꺼내서 테이블 위에 놓았다. 휴즈는 무표정하게 바라보았다. 샌더슨은 돈 다발을 조심스럽게 둘로 갈랐다. 그 한쪽을 휴즈 쪽으로 밀어놓고 나머지 반은 주머니에 도로 집어넣었다.
"처음 5백 파운드는 착수금이오. 나머지는 일이 성공했을 때 지불할 거요. 내가 말한 '이름'의 의미는 그가 나를 만날 것부터 일에 동의할 것까지요. 걱정할 것 없소. 복잡한 일도 아니고 대상은 이름이 알려진 사람도 아니오. 그는 아주 보잘것없는 인물이오."
휴즈는 앞에 놓인 5백 파운드를 바라보았지만 집으려고 하지는 않았다.
"한 친구가 있긴 한데, 몇 년 전에 같이 일하던 친구지요. 지금도 일을 하고 있는지 알아보려면 찾으러 가 봐야 해요."
"전화를 걸 수도 있지 않소."
휴즈는 고개를 흔들었다.
"국제전화는 좋아하지 않아요. 도청이 심하거든, 요즘은 유럽 쪽이 특히 심해요. 내가 직접 가서 찾아봐야겠는데, 그럴려면 2백 파운드 더 들 거요."
"좋소, 이름을 알아주는 조건으로."
"그런데 속임수가 아니라는 걸 증명할 수 있소?"
휴즈가 물었다.
"없소. 그러나 나도 마찬가지요. 만약 그런 생각이 들면 나를 뒤따라오면 되겠지만, 내가 7백 파운드나 들여서 당신을 속일 필요는 없지 않겠소?"
"물론 그것도 역시 알 수 없지. 그렇게 되면 사람 하나를 더 고용해서 그걸 막아야겠지. 그럴 만큼의 돈은 가지고 있으니까. 그리고 나는 속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으니까."
약 10초 동안 두 사나이는 서로 노려보고 있었다. 샌더슨은 좀 지나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휴즈의 표정에 웃음이 돌아왔다. 샌더슨의 말에 거짓이 없다는 것을 인정한 듯했다. 그는 샌더슨이 갈라놓은 5백 파운드를 움켜잡았다.
"당신에게 이름을 알려주고 만나도록 해주겠소. 그 친구를 만나서 동의를 얻게 되면 나머지 반과 비용 2백 파운드를 우송해 주시오. 얼스코트 우체국 하그리브 송금환으로, 봉투에 잘 봉해서 보통 우편물로 보내시오. 등기가 아니오. 당신이 일주일 안으로 송금을 하지 않으면 내 친구는 당신 이 계약을 어긴 것으로 간주하고 약속을 파기할 거요."
샌더슨은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 그 이름을 알게 되겠소?"
"일주일 안에. 당신과는 어떻게 접촉할 수 있소?"
"당신이 아니오. 내가 하겠소."
샌더슨이 말을 잘랐지만 휴즈는 개의치 않았다.
"아까 그 술집으로 전화하시오. 밤 열 시에."
일주일 후 샌더슨은 약속한 시간에 전화했다. 바텐더가 전화를 받더니 곧 휴즈가 나왔다.
"파리의 미올랭 거리에 있는 까페에 가면 당신이 친하고 싶은 사람이 있을 거요. 다음 주 월요일 정오에 그곳에 있으면 그 친구가 당신을 알아볼 거요. 그 날짜 '피가로'지를 제목이 바깥으로 가게 해서 읽고 있으면 될 거요. 만약 당신이 월요일에 나타나지 않으면 그 친구는 화요일과 수요일 정오까지는 거기에 갈 거요. 그 뒤에는 바람에 날아가 버리는 거요. 그리고 현찰을 가지고 갈 것."
"얼마나?"
샌더슨이 물었다.
"5천 파운드쯤. 잘 간수해야 할 거요."
"그게 강탈하려는 짓이 아니라는 걸 어떻게 알 수 있나?"
"알 수 없지. 하지만 그 친구도 역시 카페 어디에다 보디가드를 숨겨 놓았는지 알 수 없을 거요."
찰칵 하고 끊어진 수화기는 윙하는 소리를 내며 그의 손에 들려 있었다.
다음 주 월요일에 그는 미올랭 거리에 있는 카페에서 벽을 등지고 앉아 '피가로'지의 뒤페이지를 읽고 있었다. 12시 5분이 되자 앞자리 의자가 당겨지며 한 사나이가 앉았다. 그는 아까부터 바 안에 있었던 사람들 중의 하 나였다.
"존슨 선생?"
샌더슨은 신문을 내렸다. 그리고 접어서 옆에 놓았다. 사내는 키가 크고 호리호리한 편이었고, 검은 눈과 머리카락에 턱이 갸름하고 뾰죽한 코르시카인이었다. 이야기는 삼십 분쯤 걸렸다. 코르시카 인은 자신을 칼비 라고 소개했지만, 실은 그것은 그가 태어난 고향의 지명이었다. 20분이 지났을 때 두 장의 사진이 칼비에게로 넘어갔다. 한 장은 한 남자의 인물사진이었는데 뒷면에는 다음과 같이 타이핑되어 있었다. '아치 소머즈 소령, 알리칸테, 온다라, 플라야 칼데라, 산 크리스핀 별장'. 다른 한 장은 카나리아 노랑색의 덧문이 달린 하얀 색의 작은 별장 사진이었다. 코르시카인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반드시 오후 세 시에서 네 시 사이에 해치워야 합니다."
코르시카인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문제없어요."
그로부터 10분 동안 두 사람은 돈 문제를 이야기했다. 외국에서의 일은 비용이 많이 들고 특히 스페인 경찰은 어떤 종류의 여행자에게는 극도로 까다롭다고 코르시카 인은 말했다. 10분 뒤 마침내 샌더슨은 다섯 개의 5백파운드 뭉치를 상대에게 건네주었다. 그리고 자리를 뜨기 위해 일어섰다.
"얼마나 걸리겠소."
코르시카인은 그를 쳐다보고는 어깨를 으쓱했다.
"아마 일주일이나 이 주일, 삼 주 정도 걸릴지도 모르지요."
"일이 끝나는 시간을 알고 싶소. 이해할 수 있겠소?"
"그럴려면 당신과 접촉할 수 있는 어떤 통로를 열어놓아야 할 거요."
총잡이가 대답했다. 영국인은 종이에다 전화번호를 갈겨썼다.
"지금부터 3주 동안 런던의 이 전화번호로 통화할 수 있을 거요. 아침 일곱 시 반부터 여덟 시 사이에, 번호를 추적할 생각 같은 것은 아예 하지 말고 그리고 일은 실수 없도록 하시오."
코르시카인은 희미하게 웃었다.
"나는 실패하지 않을 거요. 나머지 돈을 받아야 하니까."
"마지막으로...."
의뢰인이 말했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이쪽에 혐의가 돌아오지 않도록 해야 돼요. 반드시 그 근처 강도가 저지른 일처럼 보여야 한단 말이오."
코르시카인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당신도 물론 자신의 입장이라는 것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되겠지만, 존슨 선생, 이쪽엔 목숨이 걸려있단 말이오. 목숨이 아니라도 적어도 토레도 형무소에서 최소한 30년은 썩어야 할 거요.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을 거요. 당신한테 아무것도 돌아오지 않을 거란 말이오."
영국인이 떠난 후 칼비는 카페를 나와 미행 여부를 살핀 뒤 파리 중심가의 다른 카페로 갔다. 그는 7월 초 싱싱한 햇살 아래 앉아 새로운 일에 대 해 곰곰이 생각했다.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얼간이 하나를 저격하는 일 자체는 아무 문제도 아니다. 문제는 안전하게 총을 스페인으로 가지고 들어가는 방법이었다. 총을 지닌 채 기차를 타고 파리에서 바르셀로나까지 직행으로 달려가 세관의 검사와 부딪혀 보는 방법이 우선 생각났다. 그러나 만일 발각되어 잡히게 된다면, 잡는 쪽이 프랑스 경찰이 아니라 스페인 경찰이라는 데 문제가 있었다. 스페인 경찰은 전통적으로 직업적인 총잡이들한테 아주 가혹한 조치를 취하고 있었다. 만약 잡힌다면 무사할 리가 없는 것이다. 비행기는 고려할 필요조차 없었다. 국제 테러리스트 덕분에 올리 공항에서 출발하는 모든 비행기는 모두 철저하고 정밀하게 총기의 유무를 검사받고 있었다. 옛날 OAS 시절의 동료 중에서 프랑스로 귀국하는 위험을 피해 알리칸테와 발렌시아 사이의 지중해 연안에 눌러앉은 친구들과는 아직 연락이 가능했었다. 그들과 접촉해서 총을 빌릴 수는 있겠지만 그 방법은 피하기로 했다. 그들과 접촉하는 일은 입에 오르내리기 십상이었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코르시카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계산을 하고 쇼핑을 하러 갔다. 그는 스페인 여행사 사무실에서 문의를 위해 30분을 쓰고 다시 이베리아 항공 사무실에서 10분을 지체했다. 그리고 리볼리 거리에 있는 서점과 문구점에서 쇼핑을 마치고 교외에 있는 그의 싸구려 아파트로 돌아왔다.
그날 밤 그는 발렌시아에서 가장 좋은 호텔인 메트로폴 호텔에 전화를 걸었다. 하나는 칼비의 이름으로, 다른 하나는 자신의 여권에 기재되어 있는 이름으로 두 개의 싱글 룸을 예약했다. 전화로 자신을 칼비라고 소개하고 2주일 후 하루 저녁을 묵기로 했다. 그는 또 호텔 측의 요구대로 예약을 확인하는 편지를 보내기로 했다. 그리고 그는 호텔을 예약한 밤에 발렌시아에 도착하여 다음 날 밤 파리로 돌아오는 파리-발렌시아 왕복 비행기 표를 예매했다. 발렌시아로의 국제통화 연결을 기다리고 있을 때 이미 그는 호텔에 보내는 예약 확인 편지를 써 놓았었다. 칼비의 사인을 서명한 후, 서명자인 칼비는 발렌시아에 도착할 때까지 다른 곳을 두루 여행할 예정이며 파리에서 스페인의 역사에 관한 책을 한권 호텔로 우송하도록 지시하였으니 호텔에서는 그 책을 받아 자신이 도착할 때까지 보관해주면 고맙겠다는 내용이었다.
만일 그 책이 의심받아 개봉되었다면, 호텔에서 여권 이름으로 그 책을 요구하는 순간 프론트데스크의 표정 변화가 있을 것이고 자신은 곧장 사태를 파악하고 도망칠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을 해 둔 것이다. 만약 체포된다 하더라도 자기는 단지 친구 칼비의 부탁으로 그 책을 찾으려 했을 뿐이지 그 비밀스런 내막을 전혀 모른다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이다. 왼손으로 칼비라고 서명한 편지를 봉하고 우표를 붙였다. 그리고 그날 오후에 산 책을 가공하는 작업을 시작하였다. 그것은 진짜 스페인 역사책이었다. 고급 종이에 쓴 비싸고 커다란 책으로서 사진이 많이 삽입되어 있어 상당한 무게가 나갔다. 우선 단단한 표지를 책 등 쪽으로 구부려 고무 밴드로 묶고 4백 페이지에 알맹이를 식탁의 가장자리에 맞추어 놓고 두 개의 목공용 조이개로 단단히 고정했다. 총잡이는 그날 오후에 구입한 얇고 예리한 외과용 메스를 들고 이 종이 덩어리에다 작업을 시작하였다. 한 시간에 걸쳐서 책 가장자리에서 1인치 반 안쪽의 종이를 잘라내자 가로 6인치, 세로 7인치, 깊이 3인치의 상자 같은 구멍이 파졌다. 파낸 구멍 안쪽에는 진득진득한 아교가 두껍게 발라졌다. 아교가 마를 동안 그는 담배를 두 대나 피웠다. 접착제가 굳어버리자 4백 페이지의 종이 덩어리는 다시 펼쳐질 수 없게 되었다.
잘라져서 부엌의 저울에 올라가 있는 1.5파운드의 종이 대신 그 크기에 맞게 잘라낸 고무 쿠션이 그 자리를 채웠다. 그리고 그는 두 달 전 벨기에 여행 때 구입한 브로닝 8밀리 자동 권총을 분해하기 시작했다. 먼저 사용한 콜트 38을 알베르 운하에 버리고 새로 산 것이다. 그는 조심성이 많아서 같은 총을 두 번 사용하는 일이 없었다. 브로닝의 총신 끝은 반 인치 정도 되는 소음기를 부착시킬 수 있도록 세공되어 있었다. 자동권총의 소음기라는 것은 소리를 완전히 죽이지 못한다. 텔레비젼 스릴러에 나오는 소음기는 음향효과 담당자의 조작으로 그렇게 작은 소리를 내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 이 총은 탄환이 총구를 떠날 때 탄피는 뒤로 밀려 밖으로 튀어나오면서 동시에 새로운 탄환이 장전되는 방식으 로 만들어졌다. 그래서 자동 권총이라는 말이 붙은 것이다. 총이 발사되는 순간, 사용된 탄피가 뒤로 튕겨 나오는 소리가 나기 때문에, 총구에 붙은 소음기로는 전체 발사음의 50밖에 죽이지 못한다. 칼비는 뒤가 막힌 리볼버를 쓰고 싶었으나 책의 파낸 부분에 맞추기 위해 할 수 없이 납작한 쪽을 택한 것이다. 부로닝 부분품 곁에 놓인 소음기는 그 부품들 중 가장 길었다. 전문가인 그는 텔레비젼에 자주 등장하는 샴페인 꼭지 코르크만 한 소음기로 소리를 죽이려는 짓은, 마치 휴대용 소화기로 베수비오 화산의 불을 끄려는 시도와 마찬가지로 전혀 효과 없는 짓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거품고무 쿠션 위에 소음기와 탄창을 포함한 무기의 다섯 부분이 나란히 놓였다. 아무래도 제대로 들어가지 않을 것 같았다. 그는 탄창을 총자루 옆 남은 공간에 겨우 집어넣었다. 그런 다음 각 부분의 형상을 모전 펜으로 쿠션 위에다 그렸다. 그리고 새 외과용 메스로 그려진 선을 따라 거품고무를 자르기 시작했다. 한밤중이 돼서야 총의 각 부분들은 고무 거품 쿠션 침대에 평화롭게 누울 수 있었다. 긴 소음기는 책 길이대로 수직으로 누웠고, 총신과 손잡이 그리고 노리쇠 등은 위에서부터 아래로 차례로 수평으로 누웠다.
그는 그들 위에 얇은 거품 고무판을 덮었다. 그리고 책 앞뒤 표지에아 교를 잔뜩 바른 다음 덮어버렸다. 그런 다음 그는 책을 부엌 바닥에 놓고 식탁을 들어 꺼꾸로 눌러놓았다. 한 시간 후 책은 단단한 덩어리가 되어 칼을 사용하지 않고는 열 수 없게 되었다. 그는 책을 다시 저울에 달아 보았다. 원래보다 꼭 반 온스가 무거웠다. 마지막으로 그는 출판업자들이 고가본이 더렵혀지거나 긁히는 것을 막기위해 사용하는 튼튼한 폴리틴 봉투에 스페인 역사책을 넣었다. 모든 것이 적당했다. 스위치 나이프의 칼날을 가스렌지로 달구어 봉투를 봉했다. 그는 우송 봉투가 개봉되는 상황을 맞더라도 이 투명한 폴리틴 커버를 통해 보이는 내용을 보고 그냥 통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책을 서적 우송에 사용되는 대형 봉투에 넣고 클립으로 봉투를 봉했다. 봉투가 접힌 곳에 뚫린 구멍에다 클립을 끼워서 봉했기 때문에 그 구멍을 통해 나와 있는 연한 금속 클립을 살짝 구부리기만 해도 내용물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가정용 프린트기를 사용해 유명 서점의 라벨을 만들어 붙였다. 라벨에는 수신인의 성명과 주소를 타이프라이터로 찍어 넣었다.
'알프레드 칼비 씨, 메트로폴 호텔, 칼레 드 자티바, 발렌시아, 스페인' 다시 그는 프린트 세트로 스탬프를 만들어 소포에다 찍었다. 'LIBROS-IMPRESOS-LIVERS(서적-인쇄물-서적)' 다음 날 아침 편지는 항공우편으로, 소포는 육상우편으로 부쳐졌다. 기차로 가는 것은 열흘 늦다.
이베리아 항공의 칼라벨 여객기는 나니세스 캠프로 진입해서 해가 지듯 활주로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낮의 더위가 식지 않아 찌는 듯이 더웠다. 6주간의 휴가를 즐기기 위해 파리에서 온 별장 소유자들인 대부분 30여 명의 승객들은, 세관 창고에서 늘상 그렇듯이 늦어지는 수화물에 대해 투덜거리고 있었다. 칼비는 손가방으로 중형 슈트케이스 하나만 들고 왔을 뿐이다. 가방을 열어야 하는 신중한 검사가 끝나자 그는 공항 건물을 빠져나와 서늘한 대기 속으로 걸어 나왔다. 우선 그는 공항 주차장으로 어슬렁거리며 걸어갔다. 주차장 대부분이 큰 나무들로 인해 공항 건물로부터 차단되어 있는 것을 보고 그는 만족했다. 차들은 나무 그늘 밑에서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내일 아침 이곳에 와서 차를 마련하기로 마음먹고 그는 택시를 타고 시내로 들어갔다.
호텔 종업원은 생각했던 것보다 협조적이었다. 프론트의 종업원은 코르시카인이 자신을 밝히고 여권을 제출하자, 즉시 칼비 씨가 보낸 예약 확인 편지를 기억해 냈다. 그리고 안쪽 사무실로 뛰어 들어가 소포를 가지고 나왔다. 코르시카인은 친구인 칼비 씨는 운이 나빠서 같이 올 수 없게 되었으나, 예약한 방 요금은 내일 아침 출발 때 전액 지불하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자신에게 책을 대신 주라고 쓴 칼비의 편지를 꺼내주었다. 프론트 종업원은 그 편지를 한번 훑어보고, 두 방의 요금을 모두 지불해 주신다는 데 대한 감사의 인사를 한 다음 소포를 건네주었다. 자기 방으로 들어간 칼비는 소포를 검사해 보았다. 누군가가 열어 보았던 것이 분명했다. 금속 클립을 폈다가 다시 접은 흔적이 있었다. 클립 한 귀퉁이를 붙여놓았던 접착제가 떨어져 나가고 없었다. 그러나 봉투 안의 폴리틴 커버에는 손댄 흔적이 없었다. 폴리틴 봉투는 찢지 않는 한 열어볼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는 커버를 찢고 칼로 표지를 벗긴 후에 총의 부분품들을 꺼냈다. 총을 조립한 뒤 소음기를 끼우고 탄창 속의 탄환을 점검했다. 모두가 좋았다. 특별히 그가 만든 이 탄환은 작약을 반만 넣었기 때문에 폭발할 때 소리를 줄여줄 것이었다. 폭발력이 반만 돼도 9밀리 탄환은 10피트 거리 안에 있는 인간의 머리는 뚫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칼비는 10피트 이상의 거리에서는 쏘지 않았다. 그는 옷장 바닥에 권총을 숨기고 옷장 문을 잠근 다음 열쇠를 호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발코니로 나와 담배를 물고 호텔 앞에 있는 투우장을 바라보았다. 앞으로 해야 할 일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아홉 시가 되자 그는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그는 여전히 회색 양복을 입고 있었는데 -파리의 고급 양복점에서 맞춘 것이다- 그런 유서 깊은 고급호텔과 잘 어울리는 복장이었다. 그는 '테레사텔 리알토'에서 저녁을 먹었고 자정 무렵 잠자리에 들었다. 그는 잠자리에 들기 전에 프론트 계원을 통해 다음 날 아침 여덟 시에 마드리드행 비행기가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여섯 시에 깨워달라고 부탁해 두었다. 다음 날 아침 일곱 시에 그는 숙박비를 계산하고 호텔을 나와 택시로 공항을 향해 떠났다. 잠시 후 그는 공항 건물 앞의 주차장 문 옆에 서서 들어 오는 자가용들을 눈여겨보고 있었다. 그는 차종과 번호뿐만 아니라 운전자의 모습도 눈여겨보았다. 그중 일곱 대가 비지니스맨 복장의 운전사가 동행 없이 물고 온 차였다. 잠시 후 그는 공항 빌딩의 테라스에서 마드리드행 비행기를 타러 나가는 승객의 흐름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까주차장에서 눈여겨본 네 명의 운전자가 그 속에 섞여 있었다. 그는 손에 들린 봉투 뒷면에 적힌 것을 보았다. 차는 심카, 메르세데스, 쟈카, 그리고 피아트 600을 스페인식으로 개조 생산한 작은 스페인 세아트였다. 마드리드행 비행기가 떠난 뒤 그는 화장실로 가서 양복을 벗고 크림색 진과 하늘색 스포츠 셔츠, 그리고 앞에 푸른색 지퍼가 달린 나일론 윈드 브레이크를 입었다. 총을 타올로 싸서 슈트케이스에서 꺼낸 부드러운 항공 회사 백에다 집어넣었다. 그리고 슈트케이스를 수화물 예치소에 맡기고 파리행 저녁 비행기를 확인한 다음 주차장으로 되돌아갔다.
그는 세아트로 결정했다. 왜냐하면 이 차는 스페인에서 제일 흔했고, 더구나 자동차 도둑에게는 아주 적합한 부드러운 문손잡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기회를 노리는 동안 자동차 두 대가 더 들어왔다. 두 운전자가 사라지기를 기다려 그는 작은 빨간 딱정벌레차로 다가갔다. 그는 소매에서 쇠 파이프를 꺼내 문손잡이의 틈새에 꽂은 다음 힘껏 아래로 눌렀다. 부드러운 소리가 났다. 재빠르게 차에 탄 다음 그는 안쪽의 후드를 열어 배터리의 +단자와 모터의 단자를 전선으로 연결했다. 단 한 번의 작동으로 차는 출발했다. 그는 주차장을 나와 발렌시아로 뻗어 있는 도로로 차를 몰았다.
마침내 차는 알리칸테로 나있는 332번 새 해안 고속도로로 접어들었다. 발렌시아에서 온다라까지는 92킬로, 마일로는 55마일쯤 되었다. 간디아와 올리바에 걸쳐 있는 오렌지 재배 단지 사이를 지나 그는 두 시간 가량을 느긋하게 운전했다. 아침 햇살 아래 따분하게 해안선이 펼쳐져 있었다. 리본같이 길게 뻗은 황금색 모래밭에는 갈색 피부로 수영을 즐기는 사람들이 점점이 흩어져 있었다. 공기는 뜨거웠고 바람 한 점 없는 가운데 수평선 위로 안개 같은 아지랑이가 아른거리고 있었다. 온다라로 들어온 그는 팔메라 호텔을 지났다. 그는 그곳에서 한때 OSA의 리더였던 라울 살랑 국장의 부관이 추억과 더불어 조용히 살고 있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는 시내 중심가에서 친절한 사람의 도움으로 플라야칼데라 마을로 가는 길을 쉽게 알아냈다. 시내에서 2마일 떨어진 곳이라는 것이었다. 주로 망명자들이 살고 있다는 그 별장지로 차를 몰고 들어간 것은 정오가 되기 조금 전이었다. 그는 오래전에 찢어버린 사진 속에 있는 산 크리스핀 별장을 머릿속에서 그려내고는 근처를 맴돌았다. 해변으로 가는 길을 묻는 것은 별문제가 없겠지만 별장의 위치를 묻는 것은 기억에 남을 짓이기 때문이었다. 그가 노란 덧문과 하얀 칠을 한 테라코타 벽의 별장을 찾아낸 것은 오후 한 시가 되기 약간 전이었다. 정문 옆 기둥에 붙어있는 타일 문패에 페인트로 쓰인 이름을 확인하자, 200야드가량 지나쳐 차를 세웠다. 그리고 백을 어깨에 메고 해안으로 향하는 관광객인 것처럼 어슬렁거리며 집 뒤쪽을 살폈다. 쉬운 일이었다. 별장 옆의 작은 오솔길은 저만치 떨어져 있는 흙길로 이어져 집들이 늘어서 있는 언덕 뒤쪽의 오렌지 농장을 향해 뻗어 있었다.
오렌지 나무 뒤에서 그는 과수원의 붉은 흙과 노란색 덧문 별장의 정원에 세워져 있는 낮은 울타리를 볼 수 있었다. 바로 그 남자가 정원에 물을 주고 있었다. 별장 뒤쪽 정원에는 앞의 현관을 향해 나 있는 프랑스식 문이 한 점의 바람이라도 더 받아들이려는 듯 활짝 열려 있었다. 그는 시계를 보았다. 점심시간이었다. 그는 온다라로 되돌아갔다. 그는 칼레닥터 플레밍에 있는 '바 발렌시아'에서 식사를 했다. 그는 세 시까지 천천히 시간을 보내며 커다란 보리새우구이를 들고 그 지방 특유의 약한 백포도주 두 잔을 마셨다. 세 시에 그는 계산을 하고 그곳을 떠났다. 플라야 마을을 향해 차를 몰고 있을 때, 먼바다로부터 비구름이 몰려오더니 고요하고 잔잔한 바다 위로 천둥소리가 울렸다. 7월 중순의 코스타블랑카에서는 매우 드문 일이었다. 그는 오렌지 과수원으로 통하는 작은 길옆에 자동차를 바짝 붙여 세웠다. 소음기를 장치한 브로닝 권총을 허리 벨트에 끼우고 윈드 브레이크 지퍼를 목까지 채운 다음 그는 과수원 숲으로 들어갔다. 숲 저쪽으로 다시 나왔을 때 사방은 몹시 조용했다. 그 지방 사람들은 더위 때문에 시에스터를 즐기고 있을 것이다. 그는 낮은 울타리를 넘어 별장 뒤뜰로 들어갔다. 오렌지 나뭇잎에 비 몇 방울이 떨어졌다. 그가 프랑스식 문에 다다랐을 때 드디어 소나기가 지붕의 핑크색 타일을 마구 때리기 시작했다. 그는 만족스럽게 빙그레 웃었다. 이런 빗소리 속에서는 웬만한 소리도 들리지 않기 때문이었다. 거실 왼편에 있는 방으로부터 타자기 소리가 몇 번 들려왔다. 그는 거실의 한복판에 우뚝 서서 총을 뽑아 들고 안전장치를 발사로 바꾸었다. 그리고 등심초로 만든 깔개를 밟고 열려있는 서재의 문 쪽으로 다가갔다. 소머즈 소령은 무엇이 왜 일어났는지 결코 알 수 없었다. 그는 낯선 사내가 서재 입구에 서 있는 것을 발견하고 무슨 일인가를 묻기 위해 반쯤 일어섰고, 그 남자의 손에 쥐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역시 반쯤 입을 벌렸다. 부드럽고 짧은 소리가 두 번 났고 곧이어 빗소리 속으로 사라져 갔다. 두 발은 모두 소령의 가슴에 박혔다. 세 번째 총알은 2피트 거리에서 수직으로 날아가 관자놀이에 명중했지만, 그는 이미 그 충격을 느끼지 못했다. 쭈그리고 앉은 자세로 그는 거실문 쪽으로 빙그르르 얼굴을 돌렸다...
다음날 밤 두 사람은 미롤랭 거리에 있는 바에서 살인자와 의뢰인으로 만났다. 칼비가 전날 밤 발렌시아에서 파리로 돌아와 다음 날 아침 영국인에 게 연락을 한 것이다. 샌더슨은 당장 파리로 달려왔다. 의뢰인은 초조한 모습으로 잔금 2천 5백 파운드를 건네주었다.
"아무 문제 없었겠지요?"
그가 다시 묻자 코르시카 인은 웃으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간단했소. 그 소령은 죽었어요. 두 방은 심장에, 그리고 한 방은 머리를 뚫었소."
"아무도 본 사람은 없었겠지요?"
영국인은 다시 물었다.
"어떤 목격자도?"
"없어요."
코르시카인은 돈뭉치를 안주머니에다 툭툭 밀어 넣고 일어섰다.
"하긴 마지막에 방해받을 뻔한 일이 있기는 했지요. 비가 몹시 퍼붓는 바람에 몰랐지만 누군가가 들어와서 내가 시체 옆에 있는 것을 보고 말았지요."
영국인은 공포로 사로잡혀 그를 노려보았다.
"누가?"
"어떤 여자였소."
"키가 크고 갈색 머리의?"
"그래요. 아주 미인이었소."
살인자는 의뢰인의 얼굴에 떠오르는 경악에 찬 표정을 내려다보고는 툭하고 그의 어깨를 쳤다.
"걱정할 것 없어요, 선생."
그는 안심시키듯 말했다.
"아무것도 돌아오지 않을 거요. 그 여자도 역시 쏘아버렸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