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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도 내 입장이 되어 봐

당신도 내 입장이 되어 봐

Raymond Carver

 

전화벨이 울렸을 때, 그는 진공청소기를 돌리고 있었다. 아파트를 청소하고 있는 중이었는데, 청소기 끝에 조그만 구멍이 달린 작대기를 끼우고 거실의 쿠션 사이에 붙어있는 고양이 털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그는 잠시 동작을 멈추고 귀를 기울이다가 청소기의 스위치를 껐다. 그리고는 전화를 받으러 갔다.

여보세요?” 그는 수화기를 들었다. “마이어스입니다.”

마이어스?” 들뜬 여자 목소리였다. “잘 있었어? 뭘 하고 있어?”

아무것도.” 그가 대답했다. “잘 있었어, 파울라?”

지금 사무실에서 파티가 벌어졌어.” 여자가 말했다. “당신도 초대를 받았다구. 딕이 당신을 초대했어.”

글쎄, 갈 수 있을지 모르겠군.”

조금 전에 딕이 당신한테 전화를 걸어 보라고 하더군. 괜찮다면 여기와서 술이나 한 잔 하라고 말야. 잠깐 동안이라도 당신을 골방에서 끄집어내어 현실 세계로 나오게 하는 게 좋을 거라고 하더군. 딕은 술을 마시면 사람이 재미있어져. 마이어스?”

듣고 있어.” 마이어스가 대답했다.

마이어스는 한때 딕 밑에서 일을 한 적이 있었다. 딕은 틈만 나면 파리로 건너가서 소설을 쓰고 싶다고 말하곤 했다. 마이어스가 소설을 쓰기 위해 딕 밑에서 하던 일을 그만두었을 때, 딕은 마이어스의 이름을 베스트셀러 목록에서 발견하기를 기다리겠다고 했다.

아무튼 지금은 못 갈 것 같아.” 마이어스가 말했다.

우린 오늘 아침에 끔찍한 소식을 들었어.” 파울라는 마치 그의 이야기를 못 들었다는 듯이 계속 말을 이었다. “래리 구디나스라고 기억나? 당신이 여기로 일하러 왔을 때 그 사람도 있었잖아. 한동안 과학 서적 편집하는 일을 돕다가 현장으로 쫓겨났었지. 그러다가 결국은 해고를 당하고 말았잖아. 오늘 아침에 그가 자살했다는 소문을 들었어. 총을 입에 물고 방아쇠를 당겼대. 상상이 가? 마이어스?”

듣고 있어.” 마이어스는 래리 구디나스가 누구인지를 기억해 내려고 애쓰고 있었다. 이윽고 키가 크고 어깨가 구부정한, 철테 안경을 쓰고 밝은색 넥타이를 즐겨 맸으며 머리를 뒤로 빗어넘긴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어서 총알의 충격으로 머리가 홱 뒤로 젖혀지는 장면이 어른거렸다. “저런.” 마이어스가 짧게 중얼거렸다. “안타까운 소식이로군.”

사무실로 좀 나와 봐, 어때? 다들 모여서 크리스마스 캐롤을 들으며 술도 마시고 이야기도 나누고 있다구. 얼른 나와 봐.”

마이어스는 수화기를 타고 전해 오는 배경음들을 들을 수 있었다. “별로 그러고 싶은 마음이 없어.” 그는 낮고 약간 우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파울라?” 창 밖으로 눈발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마이어스는 유리에 대고 손가락으로 자기 이름을 쓰며 파울라의 목소리를 기다렸다.

뭐라구? , 듣고 있어.” 파울라가 말했다. “좋아, 정 그렇다면 보일스에서 술이나 한 잔 하는 건 어때? 마이어스?”

좋아.” 마이어스는 잠깐 생각을 하는 듯하더니 대답했다. “보일스라고 했지? 좋아."

당신이 안 온다고 하면 여기 모인 사람들이 모두 실망할 거야. 특히 딕의 실망이 클 거야. 당신도 알다시피 딕은 당신을 좋아하잖아. 정말이라구. 나한테 그런 말을 한 적도 있어. 그는 당신의 그 예민한 감수성을 존경한다구. 만약 자기가 당신 같은 예민한 감수성만 가졌다면 벌써 몇 년 전에 이 일을 때려치웠을 거래. 딕은 정말 일을 하려면 당신처럼 남다른 감수성이 필요하대. 마이어스?”

듣고 있다니까.” 마이어스가 대답했다. “우선 차에 시동이 걸리는지나 알아봐야겠어. 안 걸리면 내가 전화할게.”

알았어. 그럼 보일스에서 보자구. 당신한테서 전화가 없으면 오 분 있다가 여기서 출발할게.”

딕한테 안부나 전해 줘.”

알았어. 당신 이야기 많이 한다구.”

마이어스는 청소기를 치운 다음 아래층으로 내려가 하얗게 눈을 덮어쓴 채 제일 구석 자리에 서 있는 자기 차를 향해 다가갔다. 차에 올라탄 그는 가속 페달을 몇 번 밟은 다음 시동을 걸어 보았다. 다행히 시동이 걸렸다. 마이어스는 잠시 더 가속 페달을 밟고 있었다.

그는 운전을 하면서 쇼핑백을 든 채 바쁘게 인도를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희뿌연 하늘 가득 눈발이 흩날리고 있었고, 높은 빌딩들은 창턱마다 하얗게 눈을 안고 있었다. 마이어스는 훗날을 위해서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기억에 담아두려고 애썼다. 지금 쓰고 있는 소설들이 마음먹은 대로 잘 진행되지 않아서 스스로 한심한 기분을 느끼고 있는 참이었다. 길모퉁이 남성복 가게 옆에 자리한 조그만 술집, 보일스의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마이어스는 차를 건물 뒤편에 세우고 안으로 들어갔다. 처음에는 바에 걸터앉았다가, 조금 후 자기 잔을 들고 문 옆의 조그만 테이블로 옮겨 앉았다.

파울라가 메리 크리스마스.” 하는 인사와 함께 들어서자, 미어어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뺨에 입을 맞춘 다음 그녀가 앉을 의자를 뒤로 빼주었다.

마이어스가 물었다. “스카치?”

스카치, 좋지.” 파울라가 맞장구를 치며 웃었다. 아가씨가 주문을 받으러 오자, 그녀는 얼음 좀 띄워 주세요.” 하고 덧붙였다.

그리고는 마이어스의 잔을 집어 들고 한 모금에 쭉 마셔버리는 것이었다.

나도 한 잔 더 줘요.” 마이어스는 아가씨를 향해 말했다. 아가씨가 저쪽으로 사라지자, 그는 난 이곳이 별로 마음에 안 들어.” 하고 중얼거렸다.

여기가 어때서?” 파울라가 물었다. “우린 언제나 여기서 만났잖아.”

그냥 마음에 들지를 않아.” 마이어스가 고개를 저었다. “한 잔만 마시고 다른 데로 자리를 옮기자구.”

좋으실 대로.”

아가씨가 술잔 두 개를 갖다주자 마이어스는 계산을 한 다음 파울라와 건배를 했다.

마이어스는 문득 동작을 멈추고 파울라를 바라보았다.

딕이 안부 전해달래.” 그녀가 말했다.

마이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파울라가 자기 술을 한 모금 홀짝이며 오늘은 어땠어?” 하고 물었다.

마이어스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뭘 하고 있었는데?” 그녀가 물었다.

아무것도.” 마이어스가 대답했다. “청소를 하고 있었어.”

파울라가 그의 손을 잡았다. “다들 당신한테 안부를 전해 달라고 하더군.”

두 사람은 잔을 비웠다.

좋은 생각이 있어.” 파울라가 웃는 얼굴로 마이어스를 건너다봤다. “모간 씨네 잠시 들러보는 게 어떨까? 돌아온 지 벌써 몇 달이 지났는데 아직 한 번도 못 만나 봤잖아. 그냥 잠깐 들러서 안녕하세요, 우리가 마이어스 부부예요, 하고 나오면 된다구. 게다가 그들은 우리한테 카드까지 보냈잖아. 그렇지 않아도 크리스마스 때 꼭 한번 들리라고 했었어. 말하자면 초대를 받은 셈이라구. 그냥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아.” 파울라는 핸드백을 뒤져 담배를 꺼냈다.

마이어스는 집을 나오기 전에 불을 모두 끄고 난로도 꺼버렸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게다가 지금 창밖에는 눈발이 쏟아지고 있었다.

우리가 집 안에서 고양이를 키웠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그 모욕적인 편지는 어떡하고?” 마이어스가 되물었다.

지금쯤 그런 건 까맣게 잊어버렸을 거야. 어차피 그게 그렇게 심각한 문제도 아니잖아. , 가보는 거야, 마이어스. 어때?”

꼭 가겠다면 미리 전화라도 하는 게 좋을 거 아냐.”

아냐. 안 해도 괜찮아. 그냥 가면 된다구. 가서 문을 두드리고 우리가 이 집에 살던 사람들이에요, 하면 그만이라니까. 어때, 좋지?”

아무래도 전화를 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지금은 크리스마스 휴가철이야.” 파울라는 벌써 자리에서 일어나며 재촉했다. “얼른 가, 자기.”

파울라는 마이어스의 팔을 잡은 채 바깥으로 나왔다. 그의 차는 나중에 찾으러 오자며 지금은 자기 차를 타고 가자고 했다. 마이어스는 운전석 문을 열어 준 다음 차 앞으로 빙 돌아서 조수석에 올라탔다.

불 켜진 창문들, 지붕에 쌓인 눈, 진입로에 서 있는 스테이션 왜건 등을 바라보자, 마이어스는 묘한 감정이 북받쳐 오르는 것을 느꼈다. 커튼은 활짝 열려 있었고, 창문에 붙여 놓은 크리스마스 오색 전구가 그들을 향해 깜빡거리고 있었다.

그들은 차에서 내렸다. 현관을 향해 걸어가는 동안 마이어스는 줄곧 파울라의 팔꿈치를 꼭 잡고 있었다. 그들이 채 몇 발자국을 옮기기도 전에 차고 뒤에서 털이 북슬북슬한 커다란 개 한 마리가 마이어스를 향해 곧장 뛰어오는 것이었다.

맙소사.” 마이어스가 두 손을 치켜든 채 자세를 잔뜩 웅크리고 뒷걸음질을 치며 비명을 질렀다. 순간 그의 발이 미끄러지며 얼어붙은 잔디밭 위로 벌렁 자빠지고 말았다. 이제 꼼짝없이 저 개에게 목덜미를 물어뜯기겠구나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개는 몇 번 낑낑거리더니 마이어스의 코트에 대고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파울라는 눈을 한 뭉치 집어서는 개를 향해 집어던졌다. 현관의 전등이 켜지며 문이 열리는가 싶더니, 이내 남자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부지!” 마이어스는 간신히 몸을 일으키고 코트에 묻는 눈을 털어냈다.

무슨 일이오?” 남자가 현관 앞에 선 채 외쳤다. “거기 누구요? 부지, 이리 와!”

우린 마이어스 부부예요. 크리스마스 인사를 하려고 들렀죠.” 파울라가 말했다.

마이어스 부부?” 현관 앞의 남자가 되물었다. “저리 가! 차고 안으로 들어가란 말야. 마이어스 부부시래.” 끝 말은 자기 뒤에서 어깨 너머로 마당을 내다보고 있는 여인을 향해 한 말이었다.

마이어스 부부라구요?” 여인의 놀란 음성이 들렸다. “어서 들어오시라고 하세요. 세상에, 마이어스 부부가 왔군요, 어서 들어오시라고 하세요.” 곧 그녀는 얼른 현관 앞으로 뛰어나왔다. “어서 들어오세요. 날씨가 무척 추워요. 나는 힐다 모건이라고 해요. 이 양반은 에드가죠. 만나서 정말 반가워요. 어서 들어오세요.”

그들은 모두 현관 앞에서 번갈아가며 악수를 나누었다. 마이어스와 파울라가 안으로 들어서자, 에드가 모건이 문을 닫았다.

코트 벗어서 이리 주십시오.” 에드가 모건이 정중하게 말했다. “괜찮으십니까?” 그는 마이어스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마이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개가 제정신이 아니라는 건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이런 일은 한 번도 없었거든요. 나도 창문을 통해 처음부터 쭉 지켜보았답니다.”

마이어스는 그 말이 왠지 좀 이상하게 들려서 상대방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에드가 모건은 40대의 나이에 머리칼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고, 바지와 스웨터에 가죽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그 녀석 이름이 부지랍니다.” 힐다 모건은 그렇게 말하며 얼굴을 찌푸렸다. “에드가의 개지요. 난 원래 집 안에 동물을 들여놓는 성격이 아니거든요. 그런데 어느 날 이 양반이 그 개를 사 와서는 바깥에서만 키우겠다고 약속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었죠.”

그 녀석은 차고에서 잠을 자지요.” 에드가 모건이 덧붙여 설명했다. “집 안으로 들어오고 싶어서 안달이 나는 모양이지만, 우린 들여놓질 않아요.” 모건을 혀를 끌끌 찼다. “집이 좀 어수선하기는 하지만, 일단 좀 앉으십시오. 힐다, 마이어스 부부가 앉으시게 소파 위의 그 잡동사니들 좀 치워요.”

힐다 모건은 재빨리 소파 위에 널려 있던 선물 꾸러미와 포장지, 가위, 리본 따위를 모조리 마룻바닥 위에 내려놓았다.

마이어스는 에드가 모건이 다시금 자신을 바라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이번에는 그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라 있지 않았다.

파울라가 말했다. “마이어스, 당신 머리에 뭐가 붙었어요.”

마이어스가 뒤통수에 손을 대보니, 조그만 나무 가지 하나가 붙어 있었다. 마이어스는 그걸 떼 내어 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그 개 말입니다.” 모건이 말하며 다시금 혀를 찼다. “우린 막 뜨거운 차를 마시며 선물을 포장하고 있었지요. 당신도 뭘 좀 드시겠습니까? 어떤 게 좋을까요?”

아무거나 괜찮아요.” 파울라가 말했다.

, 아무거나 주십시오.” 마이어스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불쑥 찾아와서 방해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천만에요.” 모건이 손을 흔들었다. “사실 우린…… 당신들 부부에 대해 적잖은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답니다. 뜨거운 차를 드릴까요?”

좋습니다.” 마이어스가 대답했다.

부인도?” 모건이 물었다.

파울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뜨거운 차를 두 잔 준비해야겠군.” 그는 자기 아내를 돌아보며 말했다. “여보, 준비는 다 되어 있겠지? 이런 경우에 대비해서 말야.”

에드가 모건은 자기 아내의 찻잔을 들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마이어스는 찬장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었다. 이어서 에드가 모건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뭐라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는데, 아무래도 욕설이 아닌가 싶었다. 마이어스는 눈을 껌뻑이며 힐다 모건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소파 끝에 놓인 의자에 앉아 있었다.

두 분은 이쪽으로 앉으세요.” 힐다 모건이 소파 팔걸이를 툭툭 두들겼다. “이쪽, 불 옆으로 오세요. 모건 씨가 부엌에서 나오면 불을 좀더 지펴 달라고 해야겠네요.” 마이어스와 파울라는 소파에 걸터앉았다. 힐다 모건은 깍지 낀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은 채 몸을 약간 앞으로 숙이고 마이어스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거실은 마이어스가 기억하고 있는 것과 별로 달라진 게 없어 보였다. , 힐다 모건이 앉아 있는 의자 뒤의 벽에 붙어있는 조그만 액자 세 개는 물론 전에는 못 보던 것이었다. 그 가운데 하나는 조끼와 프록코트를 입은 남자가 파라솔을 들고 있는 두 명의 부인을 향해 모자에 가볍게 손을 대어 인사를 건네는 장면이 담겨있었다. 배경으로는 수많은 말과 마차들이 보였다.

독일은 어떻던가요?” 파울라가 물었다. 그녀는 소파 끝에 걸터앉아 핸드백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있었다.

우린 독일을 무척 좋아한답니다.” 에드가 모건이 큼직한 잔 네 개가 담긴 쟁반을 들고 부엌에서 나왔다. 마이어스는 그 컵들을 본 적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독일에 가보셨습니까, 마이어스 부인?” 모건이 물었다.

정말 꼭 한번 가보고 싶었어요.” 파울라가 말했다. “그렇죠, 마이어스? 아마 내년, 내년 여름쯤에는 가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아니면 내후년이라도 말이에요. 형편이 닿는 대로 꼭 가 볼 거에요. 마이어스의 작품이 팔리면 한결 나아지겠죠. 마이어스는 글을 쓰거든요.”

특히 작가에게는 유럽 여행이 상당히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에드가 모건은 그렇게 말하며 잔들을 접시받침 위에 내려놓았다. “어서 드세요.” 그는 자기 아내 맞은편에 놓인 의자에 걸터앉아 마이어스 부부를 바라보았다. “편지에 글을 쓰기 위해 직장을 그만둔다는 이야기가 있었던 것 같군요.”

, 그렇습니다.” 마이어스가 차를 한 모금 홀짝이며 대답했다.

이이는 거의 매일같이 글을 쓴답니다.” 파울라가 말했다.

정말입니까?” 모건이 되물었다. “상당히 인상적이군요. 혹시 오늘은 무얼 쓰셨는지 물어봐도 괜찮겠습니까?”

아무것도 안 썼습니다.” 마이어스가 대답하면서 겸연쩍은 웃음을 지었다.

휴일이잖아요.” 파울라가 한마디 거들었다.

마이어스 부인, 남편이 무척 자랑스러우시겠어요.” 힐다 모건이 부러운 눈길로 마이어스를 쳐다봤다.

그건 사실이에요.”

와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힐다 모건이 다시 인사를 했다.

전번에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데, 문득 당신이 관심을 가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에드가 모건이 말했다. 그는 담배 봉지를 꺼내 파이프에 가루를 쑤셔넣기 시작했다. 마이어스도 담배에 불을 붙인 다음 재떨이를 찾아 주위를 둘러보다가, 성냥을 그냥 소파 뒤에 떨어뜨려 버렸다.

사실은 약간 끔찍한 이야기지요. 하지만 아마 어딘가 써먹을 데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마이어스 씨.” 모건은 파이프에 불을 붙여서 한 모금 길게 빨아들였다. “이런저런 얘길 많이 들어 놓는다고 해서 절대로 손해 볼 것은 없잖습니까.” 모건은 웃음을 터뜨리며 성냥불을 흔들어 껐다. “그 친구, 아마 내 나이 또래쯤 될 겁니다. 몇 년 동안 같은 직장에서 근무했지요. 우리는 서로를 전혀 모르는 상태는 아니었고, 같이 알고 지내는 친구들도 꽤 있었지요. 그러다가 그가 대학에 자리가 나는 바람에 이사를 가게 되었어요. 왜 가끔 가다 그런 일이 생기지 않습니까, 교수가 자기 제자하고 그렇고 그런 관계를 맺는 경우 말입니다.”

모건 부인이 듣고 있기 거북하다는 듯 혀를 약간 찼다. 그리고는 초록색 포장지로 싼 조그만 꾸러미 하나를 집어 들더니, 거기다 빨간 리본을 붙이기 시작했다.

여러 가지 정황들을 종합해 볼 때, 몇 달 동안 꽤 뜨거운 관계가 지속된 모양이에요.” 모건은 아내의 태도를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 말입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딱 일주일 전이군요. 그날 저녁, 그는 20년 동안 함께 결혼 생활을 해온 자기 아내한테 이혼을 하자고 선언했어요. 난데없이 그런 소리를 들은 그의 아내가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한바탕 소동이 일어났지요. 온 식구가 그 문제 때문에 법석을 떨었습니다. 그의 아내는 당장 이 집에서 나가라고 남편을 쫓아내 버렸지요. 하지만 그 친구가 집을 막 나오려 하는 순간, 그의 아들이 토마토 수프 통조림을 집어 던졌어요. 그게 하필이면 그의 이마에 정통으로 맞아 버린 겁니다. 그 바람에 그 친구는 뇌진탕 증세를 일으켜서 병원으로 실려 갔지요. 지금까지도 상태가 꽤 심각한 모양입니다.”

모건은 파이프에서 빨아들인 연기를 내뿜으며 마이어스를 바라보았다.

그런 이야기는 처음 듣네요.” 모건 부인이 말했다. “에드가, 역겨운 얘기예요.”

끔찍하네요.” 파울라도 한마디 거들었다.

마이어스는 그냥 싱긋 웃기만 했다.

, 그만하면 얘깃거리가 되지 않겠습니까, 마이어스 씨?” 에드가 모건은 미소를 지은 채 눈을 가늘게 떴다. “당신이 그 친구 입장이었다면 어땠을지 한 번 이야기를 만들어 보세요.”

아니면 그 여자 입장으로 봐도 괜찮겠네요.” 힐다 모건이 끼어들었다. “아내 입장 말이에요. 그 여자 입장에서 얘기를 만들어 보세요. 결혼 생활 이십 년 만에 그런 식으로 배신을 당하는 여인의 심정이 어떻겠어요? 그 기분을 생각해 보자구요.”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 아들 입장도 안타깝기는 마찬가지일 것 같아요.” 파울라가 그렇게 말하며 힐다 모건을 쳐다봤다. “하마터면 자기 아버지를 죽일 뻔한 아들 입장을 상상해 보자구요.”

그래요, 모두 다 맞는 말입니다.” 모건이 조용히 하라는 시늉으로 오른손을 들어 흔들었다. “하지만 아마 여러분 모두 이런 건 생각해 보지 못했을 겁니다. 이런 건 어떨까요? 마이어스 씨, 듣고 있지요? 이 문제에 대해서 한 번 선생 생각을 말해봐요. 만약 당신이 유부남과 사랑에 빠진 그 열여덟 살짜리 여학생이었다면 어땠을까요? 그 여학생 입장에서도 얼마든지 소설을 쓸 수 있는 가능성은 있을 겁니다.”

모건은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느긋하게 의자에 기대앉았다.

그 여학생한테는 전혀 동정의 여지가 없는 것 같은데요.” 힐다 모건이 수긍할 수 없다는 듯 머리를 가로저었다. “그 아이가 어떤 종류의 학생일지 충분히 짐작이 가거든요. 우린 모두 자기보다 나이가 훨씬 더 많은 남자의 상대가 되는 여학생들이 어떤 아이들인지 알고 있잖아요. 물론 난 남자 쪽도 측은하다는 생각을 하지도 않아요. 천만에, 어림 반푼어치도 없죠. 그런 경우에 나로서는 아내와 아들이 측은할 뿐이에요.”

아마 그 문제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해서 소설을 쓰려면 톨스토이가 다시 태어나야 할 겁니다. 아니, 톨스토이조차 그런 건 못할지도 모르죠. 마이어스 씨, 아직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어요.” 모건이 빙그레 웃었다.

이제 그만 가봐야겠군요.” 마이어스는 안색이 변했다. 약간 경직된 얼굴이었다.

마이어스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피우던 담배를 난로 속으로 집어던졌다.

잠깐만요.” 힐다 모건이 같이 일어섰다. “우린 아직 서로 친해지지도 않았잖아요. 당신은 우리가 당신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모를 거예요. 드디어 우리가 이렇게 마주 앉았으니, 조금만 더 있다 가세요. 정말이지 학수고대 하던 순간이잖아요.”

보내주신 카드는 잘 받아보았어요.” 파울라가 말했다.

카드?” 힐다 모건이 되물었다.

마이어스는 하는 수 없이 도로 주저앉았다.

우린 금년에는 카드를 한 장도 보내지 않기로 했거든요.” 파울라가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미리 준비를 못 했더니 마지막 순간에 허둥거리는 것보다는 차라리 포기하는 게 나을 것 같더라구요.”

한 잔 더 드시겠습니까, 마이어스 부인?” 에드가 모건이 파울라 앞에 버티고 서서 그녀의 잔에 손을 댄 채 말했다. “아무래도 부인께서 남편에게 본보기를 좀 보여 주셔야 할 것 같군요.”

차가 아주 맛있어요.” 파울라가 웃었다. “몸이 따뜻해지는 기분이네요.”

그래요. 한 잔 마시면 몸이 따뜻해지지요. 맞는 말입니다. 마이어스 씨, 부인 말씀 들었지요? 몸이 따뜻해진다구요. 아주 좋은 차지요. 어떻습니까?” 모건은 잠시 마이어스의 반응을 기다리면서 한마디 덧붙였다. “한 잔 더 하시지요?”

좋습니다.” 마이어스는 모건이 자기 잔을 집어가도록 내버려 두었다.

개가 바깥에서 낑낑거리며 문을 긁어대기 시작했다.

또 저 녀석이로군. 도대체 저 녀석 뱃속에는 뭐가 들었나 몰라.” 모건은 부엌으로 들어갔다. 마이어스는 이번에도 모건이 주전자를 불에 올려놓으며 또다시 욕설을 중얼거리는 것을 분명히 들었다.

힐다 모건은 콧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반쯤 포장하다 만 선물 꾸러미를 집어들고 테이프를 잘라서 종이에 붙였다.

마이어스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이번에는 성냥을 잔 받침 접시에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모건 부인이 고개를 들었다. “노랫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데요?” 그녀는 귀를 기울였다. 그녀는 급기야 의자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노래를 부르고 있어요, 에드가!” 힐다 모건이 소리쳤다.

마이어스와 파울라도 창가로 다가갔다.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부르는 캐롤 소리는 정말 오랜만이에요.” 힐다 모건이 말했다.

뭔데 그래?” 모건이 쟁반과 찻잔을 들고나왔다. “무슨 일이야? 뭐가 잘못됐어?”

잘못된 건 아무것도 없어요. 사람들이 캐롤을 부르고 있어요. 바로 길 건너편이라구요.” 힐다 모건이 말하며 쟁반을 든 남편을 뒤돌아봤다.

마이어스 부인.” 모건이 찻잔을 내밀었다. “마이어스 부인, 드세요.”

고맙습니다.” 파울라가 고개를 약간 숙였다.

무차스 그라시아스(Thank you very much의 스페인 말)” 마이어스가 외쳤다.

모건은 쟁반을 내려놓고 자기 잔을 든 채 창가로 다가왔다. 길 건너편에 젊은이들이 모여 있었다. 약간 나이가 들어 보이는 소년이 머플러를 두르고 가벼운 외투를 걸친 모습이 유난히 두드러져 보였다. 마이어스는 유리창을 통해 길 건너편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오드리네 집 앞이었다. 노래가 끝나자 잭 오드리가 현관 앞에 나와 나이 들어 보이는 소년에게 무언가를 건네주었다. 일행은 손전등을 밝힌 채 인도를 걸어 다음 집 앞에서 멈춰 섰다.

우리 집에는 오지 않을 거예요.” 힐다 모건이 잠시 후에 중얼거렸다.

뭐라고? 우리 집에는 오지 않는다구?” 에드가 모건은 자기 아내를 향해 되물었다. “왜 그런 뚱딴지같은 소릴 하는 거요? 왜 우리 집에는 오지 않는다는 거지?”

그냥 알 수 있어요.” 힐다 모건이 짧게 대답했다.

그렇다면 나는 우리 집에도 꼭 온다는 쪽에 내기를 걸지.” 모건이 말했다. “마이어스 부인, 저 친구들이 우리 집에 올 것 같습니까, 안 올 것 같습니까? 우리 집에는 축복을 해주지 않을까요? 어디 부인 이야기를 한 번 들어봅시다.”

파울라는 한 걸음 더 창문 쪽으로 다가섰다. 그러나 캐롤을 부르는 사람들은 이미 저쪽으로 꽤 멀리까지 내려가 있었다. 파울라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 이제 흥분이 가라앉을 때가 된 모양이군.” 모건은 자기 의자로 돌아갔다. 그는 자리에 앉아서는 잔뜩 얼굴을 찌푸린 채 파이프에 담배를 쑤셔 넣기 시작했다.

마이어스와 파울라도 소파로 돌아왔다. 이윽고 모건 부인도 창가에서 떨어졌다. 그녀는 자리에 앉아서 미소를 지은 채 자기 찻잔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그녀는 잔을 내려놓고 눈물을 흘리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모건은 손수건을 아내에게 건네주었다. 이어서 그의 눈길이 마이어스 부부를 향했다. 그가 의자 팔걸이를 톡톡 두드리기 시작하자, 마이어스는 괜히 발을 꼼지락거렸다. 파울라도 담배를 찾는 척하며 핸드백을 뒤졌다. “, 일이 어떻게 되는지 아시겠습니까?” 모건은 마이어스 신발 근처의 카펫을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마이어스는 다시 한번 일어날 준비를 했다.

에드가, 손님들에게 차를 한 잔 더 갖다 드리지 그러세요.” 힐다 모건이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이어서 손수건으로 콧물을 닦으며 한마디 덧붙였다. “저 분들에게 아텐바로 부인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 드리고 싶어요. 마이어스 씨는 작가니까요. 아마 상당히 유용한 이야기가 될 거예요. 당신이 차를 가지고 오면 이야기를 시작할게요.”

모건이 찻잔을 거둬 갔다. 그가 찻잔을 들고 부엌으로 들어가자, 마이어스는 접시가 달그락거리는 소리, 찬장문이 거칠게 여닫히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힐다 모건은 마이어스를 바라보며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우린 그만 가봐야 합니다.” 마이어스가 일어섰다. “정말이에요. 파울라, 코트를 입어요.”

아니, 조금만 더 계세요, 마이어스 씨.” 힐다 모건이 또다시 말렸다. “아텡바로 부인에 대한 이야기를 꼭 들려 드리고 싶어요. 정말이지 가련한 여인이지요. 마이어스 부인, 아마 부인도 이 이야기를 듣고 나면 절대로 후회는 하지 않을 거예요. 남편께서 이야기를 재료를 어떻게 가공하는지 알아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니까요.”

모건이 거실로 돌아와서 뜨거운 차를 돌린 다음, 얼른 자리에 앉았다.

이분들에게 아텐바로 부인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 드리세요, 여보.” 힐다 모건이 남편을 보았다.

그 개가 하마터면 내 다리를 온통 찢어놓을 뻔했습니다.” 마이어스는 자기도 모르게 불쑥 그런 말을 해놓고는 스스로도 깜짝 놀랐다. 그는 들고 있던 잔을 내려놓았다.

, 저런. 하지만 그렇게까지 심각한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나도 봤거든요.”

당신도 작가들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아시겠군요.” 모건 부인이 파울라를 향해 물었다. “과장하기를 좋아하지요.”

펜의 힘이 어쩌고 하는 얘기도 있잖소.” 모건이 손으로 글을 쓰는 시늉을 했다.

그래요. 당신 펜을 쟁기로 만들어라 하는 말도 들은 적이 있어요.” 힐다 모건이 거들었다.

, 아텐바로 부인에 대한 이야기는 모건 부인의 입으로 듣는 게 낫겠군요.” 모건은 그 시점에서 다시금 몸을 일으킨 마이어스를 무시하고 그렇게 말했다. “모건 부인은 그 일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으니까 말입니다. 통조림에 얻어맞고 쓰러진 친구에 대해서는 이미 다들 들으셨지요?” 모건이 혀를 끌끌 차며 덧붙였다. “이번 이야기는 모건 부인이 하도록 합시다.”

당신이 얘기해요, 여보. 마이어스 씨, 잘 들어보세요.”

우린 정말 가야 합니다.” 마이어스는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파울라, 가자구.”

정직이란 게 얼마나 중요한지 얘기해 봐요.” 힐다 모건이 재촉했다.

그래요, 정직하게 얘기하지요.” 마이어스가 말했다. “파울라, 당신 안 갈 거야?”

난 당신에게 꼭 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습니다.” 에드가 모건이 약간 목소리를 높였다. “만약 당신이 그냥 가버린다면, 모건 부인은 물론 나까지 모욕하는 처사가 될 겁니다.” 모건은 그렇게 말한 다음 파이프를 힘주어 움켜쥐었다.

마이어스, 부탁이에요.” 파울라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마이어스를 올려다봤다. “난 들어보고 싶어요. 그리고 나서 가면 되잖아요. 마이어스? 여보, 제발 잠깐만 더 앉아 봐요.”

마이어스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마치 무슨 신호라도 보내듯 손가락을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마이어스는 잠깐 망설이다가 하는 수 없이 도로 주저앉았다.

이내 모건 부인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뮌헨에서 어느 날 오후에 있었던 일이에요. 에드가와 나는 도르트문트 박물관으로 구경을 갔지요. 마침 그때 바우하우스작품들이 전시되고 있었는데, 에드가는 그 작품들이 정말 굉장한 것들이라며 하루 일을 빼먹고 구경을 가자고 하더군요. 아시다시피 그때 이이는 조사 작업을 하고 있었거든요. 우리는 전차를 타고 뮌헨에서 박물관으로 갔어요. 박물관에서 몇 시간 구경을 한 다음,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대가들을 그냥 지나칠 수 없어서 화랑 몇 군데를 더 들러보았지요. 돌아오기 직전에 나는 화장실에 들렀는데, 그만 지갑을 놓고 왔지 뭐예요? 그 지갑 안에는 한 달에 한 번씩 에드가에게 입금되는 수표가 들어 있었어요. 현금도 백이십 달러가 있었구요. 나는 틈이 나는 대로 그 돈과 수표를 은행에 넣을 생각이었어요. 물론 그 지갑 안에는 내 신분증도 들어 있었지요. 그런데 집에 돌아와서야 지갑을 놓고 왔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지 뭐예요? 에드가가 즉시 박물관에 전화를 걸었어요. 그런데 이이가 전화 통화를 하고 있는 동안, 우리 집 앞에 택시가 한 대 멈춰 서는 것이었어요. 우아하게 차려입은 은발 머리 여자가 택시에서 내리더군요. 몸집이 땅딸막한 여자였는데, 가만히 보니 지갑을 두 개나 가지고 있었어요. 나는 당장 에드가를 불러서 현관 앞으로 나가 보았죠. 그 여자는 자신을 아텐바로 부인이라고 소개하면서 내 지갑을 내놓는 것이었어요. 자기도 그날 오후에 그 박물관에 갔었는데, 화장실의 쓰레기통 옆에서 내 지갑을 발견했노라고 하면서 말이에요. 그녀는 주인이 누군지 알아보기 위해 지갑을 열어 보니, 내 신분증에 우리 집 주소가 나와 있더래요. 그래서 그 길로 택시를 집어 타고 자기 손으로 직접 지갑을 전해 주려고 달려왔다는 것이었어요. 내가 지갑을 확인해 보니, 에드가의 수표는 그대로 있었지만 현금 백이십 달러는 사라지고 없는 거예요. 그래도 나는 지갑을 찾은 것만으로 얼마든지 만족할 수 있었어요. 그때가 오후 네 시경이었는데, 우리는 그 여인에게 잠시 들어와서 차라도 한잔하고 가라고 권했죠. 집에 들어와 잠시 앉아 있더니, 그녀는 이내 자기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하더군요. 자기는 호주에서 태어나 거기서 자랐는데, 어린 나이에 결혼을 해서 아들만 셋을 낳았다는 거예요. 그러다가 남편을 잃고 지금은 역시 호주에서 아들 둘과 함께 살고 있다고 하더군요. 호주에서 양을 키우는데, 땅만 해도 이만 에이커가 넘는다는 둥, 계절에 따라서 중간 상인이나 털 깎는 인부들도 드나든다는 둥, 뭐 그렇고 그런 얘기였어요. 그때 자기는 영국에서 변호사로 일하는 막내아들을 만나러 왔다가 호주로 돌아가는 길이었는데, 중간에 잠시 뮌헨에 들렀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그녀를 만났을 때는 호주로 돌아가는 길이었어요.” 모건 부인이 잠시 말을 멈췄다. 그리고는 덧붙였다. “말하자면 장기적인 목표를 세우고 세계 여행을 하고 있는 셈이었는데, 아직도 못 가본 곳이 많다고 하더군요.”

이제 그만 본론으로 들어가지, 여보.” 모건이 끼어들었다.

그러죠. 그때 무슨 일이 일어났느냐 하면 말이에요, 마이어스 씨, 작가들이 흔히 말하는 것처럼 곧장 클라이막스로 넘어갈게요. 한 시간가량 그 여인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이야기를 늘어놓더니, 그만 가봐야겠다며 일어서는 거예요. 그녀가 일어나서 자기 컵을 나에게 건네 주는 순간이었어요. 갑자기 자기 입을 쩍 벌리더니 컵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리더군요. 그 여인은 우리 소파에 쓰러지더니, 그대로 죽어 버리고 말았어요. 정말이에요. 우리 집 거실에서 숨이 끊어져 버렸다니까요. 지금까지 우린 그렇게 충격적인 일을 당해 본 적이 없어요.”

모건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맙소사.” 파울라가 중얼거렸다.

운명이 그녀를 독일의 우리 집 거실 소파에서 죽도록 보낸 거예요.” 모건 부인이 약간 슬픈 목소리로 결론을 내렸다.

난데없이 마이어스가 웃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운명이…… 그녀를…… 독일의…… 당신네…… 거실 소파에서…… 죽도록…… 보냈다고?” 그는 웃느라고 몇 번이나 쉬어 가며 간신히 그렇게 말했다.

그게 그렇게 재미있습니까?” 모건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마이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도 웃음을 그치지 못하고 있었다. 셔츠 소매로 눈물을 훔치기까지 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그는 그러면서도 계속해서 웃었다. “도저히 진정이 안 되는군요. ‘운명이 그녀를 독일의 당신에 거실 소파에서 죽도록 보냈다정말 죄송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마이어스는 간신히 말을 이어갔다. “그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궁금하군요.”

우린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더군요, 마이어스 씨.” 모건 부인이 그런 그를 힐끔거렸다. “정말이지 엄청난 충격을 받았거든요. 에드가는 서둘러 그녀의 맥박을 짚어 보았지만, 조금도 뛰지를 않았어요. 순식간에 피부색이 변하기 시작하더군요. 얼굴과 손이 회색으로 변하는 거예요. 에드가는 전화통을 붙잡고 여기저기 전화를 걸었지요. 그리고는 지갑을 열어 봐. 어디에 묵고 있는지 알아보라구소리치더군요. 나는 넋을 잃은 채 물끄러미 소파에 누워있는 그 여인을 바라보다가, 간신히 지갑을 살펴보았어요. 그때 내가 얼마나 놀라고 당황했을지 한번 상상을 해보세요. 하지만 나는 그녀의 지갑 안에서 아직 종이 클립도 채 풀지 않은 내 돈 백이십 달러가 들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하마터면 기절할 뻔했어요. 지금까지 그때처럼 놀란 적은 한 번도 없을 거예요.”

놀라운 건 둘째치고 실망감이 더 컸지요.” 에드가 모건이 말했다. “그걸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정말이지 그렇게 실망스러울 수가 없더라구요.”

마이어스는 다시 킬킬거렸다.

만약 당신이 당신 입으로 한 말처럼 진정한 작가라면 말이요, 마이어스 씨, 그렇게 웃을 수는 없을 겁니다.” 모건은 벌떡 일어섰다. “어떻게 그런 이야기를 듣고 감히 웃을 수가 있소? 이해를 하려고 노력해 봐요. 그 불쌍한 영혼의 심장 속에 무엇이 숨겨져 있었는지 이해하려고 조금이라도 노력해 보란 말이요. 이제 보니 당신, 작가라는 것도 새빨간 거짓말 아니오?”

마이어스는 계속 킬킬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모건이 주먹으로 커피 테이블을 힘껏 내려쳤다. 컵들이 펄쩍 뛰었다 떨어졌다. “진짜 이야기는 바로 여기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아시오? 바로 이 집, 바로 이 거실에서 말이오. 이제부터 그 이야기를 한 번 해봐야겠군. 진짜 이야기를 이러하오, 마이어스 씨.” 모건은 화려한 색깔의 포장지들이 카펫 위에 나뒹굴고 있는 거실 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아직도 이마를 감싸쥐고 몸을 떨어가며 웃어대고 있는 마이어스를 똑바로 쳐다보는 것이었다.

이런 가정을 한 번 해봅시다, 마이어스 씨!” 모건이 비명을 지르듯 소리쳤다. “X라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이런 말이오. X라는 사람은 Y부부와 친구 사이요. Z부부와 친구 사이이기도 하고 말이오. 그러나 불행히도 Y부부와 Z부부는 서로를 알지 못합니다. 내가 여기서 불행히도라고 말하는 것은, 만약 그들이 전부터 서로 아는 사이였다면 애당초 이런 이야기가 성립이 안 되기 때문이오. 아무튼 XY부부가 일년 동안 독일에 가 있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소. 그러니 그들은 그 동안 자기네가 살던 집을 누군가에게 빌려 주어야 하는 처지였소. 그런데 마침 Z부부가 적당한 집을 찾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X는 좋은 집이 있다고 소개를 하게 되었소. 그러나 XZ부부를 Y부부에게 소개해 주기도 전에, Y부부는 예정보다 일찍 독일로 떠나야 하게 되었소. 그러자 그들은 친구 사이인 X에게 당신이 알아서 집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부탁한 거요. 물론 그중에는 Y부부도 포함되어 있었지요. 아니 참, Y부부가 아니라 Z부부로군. 아무튼 그래서 Z부부는 그 집으로 이사를 왔는데, Y부부는 나중에 X에게서 편지를 받고서야 그들이 고양이를 데리고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소. 원래 계약서는 Y부인의 천식 때문에 고양이는 물론 어떤 동물도 집 안에서 키울 수 없다고 분명히 명시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오. 지금까지 내가 묘사한 상황은 사실과 조금도 다름없는 실화요, 마이어스 씨. Z부부, 아니 그러니까 Y부부는 그렇게 해서 Z부부의 집으로 이사를 오게 된 것인데, 이건 그냥 이사를 온 게 아니라 솔직하게 말하면 침입했다고 하는 게 더 나을 겁니다. 그들이 Z부부의 침대에서 잠을 잔 건 그렇다 치더라도, Z의 벽장을 열어 이불까지 마음대로 꺼내 썼다 이런 말이오. 그건 공공시설을 고의로 파괴하는 행동과 조금도 다를 바 없으며, 계약서에도 정면으로 위배되는 것이었소. 바로 그 부부, 그러니까 Z부부는 열지 마십시오라고 쓰여 있던 부엌의 선반까지 열어 젖혔소. 그 바람에 안에 들어 있던 접시들이 쏟아져 깨졌지요. 그 순간 그들은 Z부부의 개인적인-나는 이 개인적이라는 단어를 가능한 한 강조하고 싶소-할 수 없다고 하는 계약을 위반한 거요.”

모건의 입술을 하얗게 질려 있었다. 쉴새없이 바닥에 떨어진 포장지를 밟으며 거실 안을 오가던 그는 가끔 걸음을 멈추고 마이어스를 바라보곤 했다.

욕실 물건도 있잖아요, 여보. 그 이야기도 빠뜨리지 마세요.” 모건 부인이 거들었다. “그들이 Z의 이불과 담요를 무단으로 사용한 것도 나쁘지만, 욕실에 보관되어 있던 물건들까지 마음대로 손을 대고 심지어는 다락방에 넣어둔 사적인 물건들까지 뒤졌다면 한층 더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어요.”

다시 말하지만 이건 틀림없는 실화요, 마이어스 씨.” 모건이 다시 한 번 더 강조했다. 그는 파이프에 담배를 채우려고 애쓰고 있었는데, 손이 부들부들 떨려서 자꾸만 담뱃가루가 카펫 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나는 누군가가 이 실화를 소설로 써주기를 기다리고 있소.”

그런 이야기를 쓰는 데는 톨스토이가 필요하지도 않을 거예요.” 모건 부인이 토를 달 듯 덧붙였다.

아무렴, 톨스토이는 필요 없지.” 모건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이어스는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마이어스와 파울라는 동시에 소파에서 일어나 현관을 향해 걸어갔다. “안녕히 계십시오.” 마이어스가 쾌활한 목소리로 말했다.

모건이 그의 등에 대고 소리쳤다. “만약 당신이 진정한 작가라면, 사실을 조금도 왜곡시키지 말고 있는 그대로 이 이야기를 써야 할 거요.”

마이어스는 그저 웃음을 지으며 현관문 손잡이를 잡았다.

한 가지 더 얘기할 게 있소.” 모건이 뒤따라가며 말을 계속했다. “난 이 이야기까지 꺼낼 마음은 조금도 없었소. 하지만 오늘 밤 당신이 이곳에서 보여 준 행동 때문에 갑자기 얘기를 하고 싶어졌소. 나는 필하모니의 재즈라는 제목의 두 장짜리 레코드를 잃어버렸소. 그건 내가 1955년도에 산 아주 귀한 레코드요. 그 레코드가 어디로 사라져 버렸는지 한 번 얘기해 보시오.”

에드가, 그건 좀 지나친 것 아니에요?” 모건 부인이 파울라의 코트를 잡아 주며 말했다. “전번에 마지막으로 그 레코드를 본 게 언제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었잖아요.”

하지만 이제 분명히 생각이 났어.” 모건은 확신에 찬 목소리였다. “우리가 독일로 떠나기 직전에 그 레코드를 봤어.”

얘길 해보시오!” 모건이 소리쳤다. “기다리고 있겠소!”

마이어스는 파울라를 차에 태우고 시동을 걸었다. 현관 쪽을 바라보니, 모건 부인이 손을 흔들어 보인 후 에드가 모건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이내 문이 닫혔다.

마이어스는 그 집의 진입로를 빠져 나왔다.

미친 사람들이잖아.” 파울라가 중얼거렸다.

마이어스는 그녀의 손등을 두들겼다.

잔뜩 겁을 먹은 사람들 같아.” 파울라가 다시 말했다.

마이어스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파울라의 목소리가 저 멀리서 들려 오는 아득한 메아리처럼 들릴 뿐이었다. 마이어스는 신중하게 차를 몰았다. 눈송이가 앞유리에 달라 붙었다. 마이어스는 입을 꾹 다물고 길을 바라보았다. 그는 이미 하나의 이야기를 거의 완성시켜 가고 있었다.

코드의 행방에 대해서 물어보고 있는 거야. 마이어스 씨, 어떻게 생각하오?”

그러나 마이어스는 이미 현관 바깥에 나가 있었다. 자기 아내의 손을 잡고 서둘러 차를 세워 둔 곳으로 달려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 바람에 부지가 놀라서 뛰어나왔다. 그러나 개는 무언가 다급한 분위기를 짓눌렸는지 낑낑거리며 한쪽 옆으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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