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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없음

김영미

가계도-아이러니를 중심으로

겨울 선유도

곡선의 현상학

관계자 외 출입금지

국화차 설화(說話)

그림자

그 먼지는

그물

그와의 다트

근대의 잠

꽃을 든 남자

끊어진 길의 마디를 찾고 있다

나의 바깥

나의 여름

남한산성

내 껍데기 내 알맹이

내 몸에는 별이 산다

누가 장미를 거울 속에 가두었을까

달팽이

담쟁이넝쿨

당신을 끄시오

당신을 흔들고 싶다

당신의 날씨는 어떤가요

대치

독백

두루마리

두부

리코더 - 너에 대해 말하기 위해

막차는 제 그림자를 잘라먹고

머리칼은 촉수다

모란꽃살문

모래내 9

모래시계

목련

목말을 타다

문진

믹서

밤하늘은 깨진 파일이다

별을 지나서

보타닉가든

봄이라고 써버렸다

북경소묘

비가 온다

비누

비눗방울

비단 끈

빗소리

사랑

사회적 또는 개인적 수건

산수유 필 무렵

석양의 식탁

세상이 알지 못하는

소한

수묵담채

스트로베리 필드

신들은 어디로

아지랑이 피는 땅에서 별이 보여요

아카시아 잎

애연, 담배 연기를 위한

애인의 문장

야외 풀장

약간의 지연방송

에스컬레이트

여름의 방에서

연필을 깎다가

예고편을 보다

오늘은 그대라 하겠네

이어

이제 빚을 갚아야 할 때

인디언 텐트

인연

입동(立冬)

재개발 아파트

저녁은 밥이다, 아니다

저물녘

5 문명기

차마고도

채송화가 한창입니다

철학 강사, P()의 적들

청첩

층층나무 아래

통제구역

파수(破水)

하늘로 걸어가는 나무

합정

허공

현수막

환절기

회전문

B

2월의 초승달

 

 

 

가계도 - 아이러니를 중심으로

김영미

 

늘 들락거렸는데 왠지 낯설다 국어사전에서 아이러니를 찾는다 아이러니-참다운 인식에 도달하기 위해 소크라테스와 그 제자들 간에 나눈 문답법에서 비롯된 말. 풍자, 반어, 비꼼, 모순, 부조화를 의미함. 소크라테스와 그 제자들이 아이러니의 조상이다 언어의 벽돌을 차곡차곡 쌓아 올려 만든 말의 사원 1,504페이지, 아이러니의 바로 위층에 아이라인이 살고 아래층엔 아이론이 산다 연이어 아이리스와 아이보리, 엉뚱한 부족의 동거.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를 낳은 것처럼 아이라인이 아이러니를 낳고 아이러니는 아이론을 낳고 아이론은 아이리스와 아이보리를 낳고, 그렇다면 아인슈타인 박사는 아이러니의 몇 대 손 쯤 될까 지난겨울 펑펑 쏟아진 함박눈의 아래층과 위층엔 지금 누가 머물고 있을까 시냇물은 누구를 낳았을까 인칭대명사 누구는 또 누구누구를 낳아 큰소리로 호명하고 있을까

 

 

 

겨울 선유도

김영미

 

민박집의 발목은

밀물에 젖어 있었다

헤집는 난로의 불씨로도

돌이킬 수 없는 어둠

아주머니는 우럭매운탕을 끓이며

까나리액젓에 겉절이를 무치며

허름한 등대가 되어간다

그녀는 오래된 버릇인 듯 생선을 손질한다

비린내 나는 일상은 비늘로 덮여있다

가시가 박혀 퍼득이는 그녀의 지느러미가 보인다.

먼데 섬의 집들이 젖은 눈을 껌벅인다

그녀의 목소리도 물너울에 잠겨간다

사는 일이란

막막한 시간을 소금 뿌려 절이며

가시조차 꾸욱 삼켜 보는 것

억류된 수평선

배들은 더 이상 길을 떠나지 않는다

등대는 이제 바닷길을

알려주지 못한다

 

누군가를 기다리며 담아둔

개조개가 갑갑한 듯 길게 혀를 내민다

 

 

 

곡선의 현상학

김영미

 

바람의 소문에 이끌려 온 것들은 등이 푸르다

구름이 더 낮은 발소리로

그곳을 지나치려 하는 것도

봄날 뻐꾸기의 울음이

그곳을 한달음에 가로지를 수 없기 때문이다

 

논두렁은 그러나 곡선이 아니다

내 아버지의 아버지 그 아버지의 아버지는

저 논두렁을 곡선의 사연으로 건너지 못했다

곡선의 혜택을 받지 못한 분들이다

 

풍요 속의 빈곤을 헤아리는

가문에서 태어난 봄날의 족보가

나를 더 오래 붙들어주지 않고

또 다른 가문의 곡선 속으로 떠나보낸 것도

어쩌면 곡선을 곡선으로 보지 않으려는

가훈의 영향일지 모른다

 

몇 걸음의 호흡만 갖고도 논두렁은 끝이 났다

짧다는 건 논두렁이 택한 마지막 유언이다

그리하여 논두렁을 찾는다는 건

비관주의자의 마지막 희망주의며

그 안 소작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씨앗들의 나지막한 대합실이다

 

논두렁을 걸을 때마다 책가방은

흐릿한 논물에서 일그러지기 일쑤였고

질경이가 먼저 건너가야

주린 배를 채우던 봄밤의 개구리 소리가

푸른 야광으로 빛나야 열리던 길이었다

 

욕망이 월담을 하면

투전판 승자의 몫으로 문서가 바뀌던

그 논두렁을 걷던 소녀는 지금

세상의 어떤 직선들을

곡선으로 바꾸고 있을까

 

 

 

관계자 외 출입금지

김영미

 

내 앞에 차단기가 내려졌다

철컥, 잘리는 기분

아니, 그게 아니고요

변명의 기회조차

묵살해 버리고는

 

지금 저 안에서는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 건가

 

서류를 복사하고

주요단서를 촬영하고

모처에서 알 수 없는 전화가 걸려오고

무슨 관계인가

몇 번이나 했는가

 

차갑게 뒷걸음치는 것들에 대해서라면

운명과 불행 그 뻔뻔하고

지긋지긋한 항목에 대해서라면

나는 대단히 관계가 깊다

 

출입금지의 문 앞에 서면

본능적으로

관계자이고 싶다

사건에 연루된 자이고 싶다

들어가고 싶다

 

 

 

국화차 설화(說話)

김영미

 

낮꿈처럼 짧은 생

운수행각하던 한 스님

오늘 입적하시다

 

바다가 보이는 산길

바다를 향해

마음 흐드러진 적 있었지

눈 시리게 바라보다

스스로 제 빛깔에 겨워 깊어진 죄,

촘촘한 바늘 같은 가을 햇살아래

말하고 말았어

차가운 이슬에 젖은 밤을

부르트게 걷고 나서야

마음을 다 해도 가질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는 걸 알았지

무릎을 꺾는 그 순간, 아찔한 향기의 죽비

내리친다

후드득 샛노란 말씀의 소나기

 

바다의 실핏줄이

훤히 드러난

그 산길 노오란 산국

오늘 한지 위에서 온몸을 내어 말린다

지상에서 가장 고요한 다비식

바스락, 적멸을 향해 간다

 

 

 

그림자

김영미

 

전봇대에 걸린 전등이

창가로 간다.

창을 깨우다 달아나고 있는

불빛을 따라갔는지

모퉁이에서 무엇을 지키는지

걸음을 멈춘 가슴

나보다 먼저 걸어간 발자국이

구부러진 길에서

저녁을 빨아먹고 있다.

떨고 있는 두 눈은

해바라기처럼

불 켜진 창문에 기대 생각한다.

불빛의 끝이 저 골목에 있다.

 

그 끝에서

푸른 별들이 놀고 있다.

 

 

 

그 먼지는

김영미

 

동질성에서인가? 그득 쌓인 책 위에 먼지가 그득 쌓여 있다 내용에 앞서 필연적일 수밖에 없는 제목에 대해 먼지는 며칠 또는 몇 달째 긴 묵상 중에 있다 햇빛보다는 그늘 쪽인 먼지는 컴컴한 구석을 주로 거닌다 십 년을 꿈쩍 않는 가구들의 해묵은 그림자를 걸치고 말하기보다 침묵을 좋아하는 먼지는 TV 브라운관 속이나 스피커 떨림판 속에 소복히 귀를 모으고 있다 정적(靜的)이나 급속히 동적(動的)으로 팽창하기도 하는 먼지는 이리저리 떠도는 마음을 따라 무작정 헤매기도 한다 이율배반적이기도 한 먼지는 장식장을 붙들고 있으면서도 장식이기를 거부하고 자유롭기 위해 무한궤도를 꿈꾸면서도 돌아가는 선풍기 날개를 죽어라 부여잡고 있기도 한다 그 먼지는

 

우주에서 보면 모든 것이 다 티끌인데

꽃도 별도 사람도 다 티끌인데

 

독자적이고자 하는 그 먼지는 보다 깊고 보다 높은 곳에 저만의 공간을 마련하고 마침내 없음에 이르고자 한다 그러면서도 올이 고운 보송보송한 옷과 향기로운 화장품 뚜껑에 한없이 집착하는 그 먼지는 한 칸짜리 집과 한 평짜리 사무실을 꽉 붙들고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한다 그 먼지는

 

 

 

그물

김영미

 

입으로 그물을 치는 사람

발로 그물을 엮는 사람

제 그물에 걸려 넘어진다

 

보고 싶고 울고 싶고 손목을 긋고 싶은

그물은

나로부터 시작된다

 

아스팔트 위에서

혼신을 다하여 사랑을 나누는 사마귀

오직 네가 있음에 내가 있고

우리는

서로의 감옥을 완성해 간다

 

눈을 감는다

키스면 키스

 

손을 뻗는다

주먹이면 주먹

 

초식과 육식을 지나

사람과 사람사이로 파고드는

먹이사슬의 고리

 

그녀가 운다

그가 소리친다

 

톱날을 삼키고

칼날을 뱉는다

 

서로가 서로에게 걸려든 우리, 평생토록

그물은

그물을 빠져나가지 못한다

 

 

 

그와의 다트

김영미

 

그가 등을 보이며

가시거리 밖으로 사라졌다

소실점을 향해 걸어가는 전봇대와 기찻길이

24시간,

그가 사라진 방향을 보고 있다

 

칼을 뽑아

날린다

날아가던 칼이 방향을 바꾸는 건 순식간이다

나는 칼을 안고 꼬꾸라진다

 

체념이나

단념

상처는

아직 내 몸의 성분이 아니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천천히

가슴에서 등으로

칼을 뽑아 올린다

칼날을 분석한다

 

가시거리 밖이라고 볼 수 없는 건 아니다

빛의 영역 밖이므로

내 안이다

 

머나먼 게임이다

 

 

 

근대의 잠

김영미

 

어디선가 짓무른 과일의 향기가

베어나는 봄날 오후

부산했던 시장 한 모퉁이

근대 한 바구니 시들어 간다

꾸역꾸역 몰려있는 좌판에 쭈그린 노모

허옇게 세어가는 머리가

쏟아지는 잠을

바구니에 꾸벅인다

시들어가는 근대와 지쳐가는 노모의 잠은

한 바구니 안에 얼크러져

서로의 볼을 부비며 위로한다

고단했던 무명의 시간들, 오래 걸었다

지나간 날은 먼지로 흐려지는

한 바구니 근대일 뿐

노모는 쭉정이만 남은 잠을

바구니에 넘치게 담는다

 

파장이다

처진 어깨를 늘어뜨리며

근대는 생의 마지막을 견디고 있다

한 뼘 남은 햇살이

노모의 등에 내려앉는다

 

 

 

꽃을 든 남자

김영미

 

빈 좌석에 자리를 정하고 나서

내 눈에 띈 것은 하얀꽃이었다

꽃을 든 남자에게 물었다

이게 무슨 꽃이예요?

찔레꽃입니다.

- 찔레꽃! 그런데

꽃송이가 왜 이렇게 작아요 정말 찔레꽃 맞아요?

예 맞아요 '찔레꽃은 너무 슬퍼요'하는

장사익의 바로 그 찔레꽃요

나는 속으로 어 - 하면서 그를 살폈다

그의 손

'찔레꽃은 너무 슬퍼요'보다 더욱 더 슬픈 손

노동의 흠집이 가득했다

베이지색 운동모 아래 불그스름한 낯빛

찔레꽃은 향이 좋아요 향수 대신 방에 두면 -

- 어 하는 사이에 어린 찔레 두어 가지가 내 손에 건네졌다

우리는 그렇게 나란히 꽃을 들고 있었다

 

 

 

끊어진 길의 마디를 찾고 있다

김영미

 

버스를 놓치고

잠시 길이 끊어지고

그녀는 멈추었다

기대고 섰던 공간 몇 개

사각으로 비껴선다

순발력 있게 탑승해버린

그녀의 목적지가 멀어져가고 있다

길들이 망설이는 사이

도로변 윈도우,

환한 불빛을 들고 달려 나온다

그녀는 금새 진열되고 만다

바튼 발 사이

보도블록 한 칸이 주목받고 있다

세상의 각도를 실루엣으로 처리한 채

그녀는 천천히 인도로 올라선다

지나가던 바람이 길을 흔들어

그녀를 섞는다

아무 일도 없었다

공모를 시침 떼고 이제

그녀는 물러섰다

떠나는 자와

떠나려는 자를 보고 있다

정류소 노선 목록을 훑으며

가야 할 길 위에 놓인

자신의 목록을 읽고 있다

끊어진 길의 마디를 찾고 있다

 

 

 

나의 바깥

김영미

 

사는 일이

사람을 만나거나 이 길 저 길 걷는 길이지만

내가 만난 사람 내가 걸은 길은 빙산의 일각

 

나머지 빙산은

내가 만나지 않은 사람들 속에 있고

걷지 못할 길 위에 있고 북극에 있고 남극에 있어

나는 모른다

 

문득 발 앞을 막아서는

노란 민들레꽃

또한 가 닿을 수 없는

나의 바깥

 

 

 

나의 여름

김영미

 

올해 첫 맨발

 

푸른 핏줄과 작은 발톱들

먼 심장으로부터 흘러 내려온 것들

 

가로수의 잎은 날마다 두꺼워진다

 

여름엔 추운 나라의 음악을 들어야 한다

발등에 올려놓은 얼음은 참 여러 갈래로 길을 만든다

 

입과 입이 포개지면서 만들어지는 그늘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나의 여름은 차갑게 갈라지는 너의 뒷면

비밀을 전해들은 나무가 어떻게 시들어 가는지

 

떨어진 머리카락을 쓸어모으면 이미 지나간 사람을 보는 것 같아

뭉치고 뭉쳐

문지방에 가만히 올려두는 일

 

먼 심장으로부터

나의 맨발은 발끝을 오므린다

 

한여름의 수목 아래 낙엽이 쌓여간다

 

 

 

남한산성

김영미

 

남한산성에 든다

아직 연둣빛을 벗지 못한 오월의 소롯길에 든다

산성을 찾는다는 건

돌들의 혜안을 내 마음속으로 옮겨놓는 천형 같은 일

산벚꽃의 풍성함을 놓친 뻐꾸기울음과

산의 뿌리를 놓지 못하는 물소리가

계곡 하나를 붙들고 구부정 멀어지는 풍경 속을 오른다

그날 사직을 내던지고

너른 벌판을 가로질러 비루한 눈물을 흘렸을

한 군주의 오후는 어떠했을까

끝내 섬김의 질서를 놓지 못해 죽음을 택한

그 학사들은 지금 어느 구천을 떠돌고 있을까

남한산성에 오른다는 건

슬픔의 중력을 새들에게 넘겨주고

후련한 발길만 챙겨 망각 속으로 유배되는 일이다

나지막한 성곽들이 낸 허공마다

역사의 바깥을 기웃거리던 상투들이 보이고

! 지금은 갈 수 없는

아주 먼 날 누란의 풍경들

오월을 가로질러

궁벽한 연둣빛의 요새 남한산성을 오른다는 건

과거의 볼모가 되는 일이다

꽃과 꽃들이 격리되고 계절과 계절들이 격리되는

그 오랜 관습을 견디는 사이

벽돌들의 생애는 얼마나 많은 이끼로 가득 찼을까

남한산성은 성이 아니다

봄날의 뻐꾸기울음 하나도 숨기기에

목이 마른 슬픔의 은신처,

어쩌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어야 하는

천형의 요새일 뿐이다

그래서일까

한낮의 정적이 깊어질수록 아무도 돌아오지 않는

그 알 수 없는 내막의 페이지를 찾던 나는

내 안의 무엇인가에 부름이라도 받은 듯

서둘러 벽돌들의 바깥으로 발길을 옮긴다.

 

 

 

내 껍데기 내 알맹이

김영미

 

천 개의 손이 실로폰을 두드린다.

잘 두들기며 놀겠다고

목금과 철금으로 쳐서 내는 소리

공중에서 명을 다하면 어쩌려고,

떨어진 대추가 부식되는 동안

알맹이는 젖어 있었다.

 

하수에서 피어나는 냄새

꿈틀, 잔해물이 하얗게 올라오는데,

같은 하늘 아래 껍질도 목이 말라

아무 데나 꿈틀꿈틀

찌꺼기가 찌꺼기에 옮겨붙는데

 

알맹이를 필사하며

슬픔을 이겨내는 슬픔으로

서로 부딪치다 나란히 놓이다가

뒤바뀌다가 가라앉아버리다가 굳어버리는

찌꺼기들, 맨 밑바닥에 오래 있었다.

 

껍질 속에 살아온 알맹이

패자의 자리를 박차고 나오면 승자가 되는,

서로 번제물이 되는 딜레마

겨울 숲속의 나무들처럼 떨어져서

이질적인 세계를 걸어 들어간다.

 

 

 

내 몸에는 별이 산다

김영미

 

봉선화 필 때

내 몸에는 별이 뜬다.

내내 그 빛 아래서

꽃 지는 소리

그 소리 속에

수만 년의 강물이 흐르고

낮은 곳에 있는 난

볼 수 없는 꽃잎이 하나 둘

떨어질 때마다

조금씩

사위어 가던 그 별

봉선화 질 때

내 몸에서 떠난다.

 

 

 

누가 장미를 거울 속에 가두었을까

김영미

 

아름답다는 것은; 불안이 숨 쉬고

완전하다는 것은; 무너지는 다른 어깨를 보아야 한다는 거

 

여름 절정을 치닫는 장미 정원에 조경사는 왜 들어갔을까

팔뚝에 문신을 타고 기어오르는 넝쿨

손톱 밑으로 자라는 분홍색 장미

거울이 거울 속으로 들어가고 가시가 가시 속으로 파고든다

 

총성이 들렸다

줄기에 그어진 흰 선

잘려나가는 장미 송이가 거울 속으로 던져졌다

 

아름답다는 것은; 잘려나가는 순간에도 솟구치는 흰 ''

미련하다는 것은; 잘린 줄기에서 장미 ''을 내뿜는 거

 

희뿌연 낮달이

꽃 없는 정원을 기웃거린다

 

누가 장미를 거울 속에 가두었을까

 

 

 

달팽이

김영미

 

달팽이 한 마리 기어 나와

수저를 놓고 그릇에 밥을 담는다

말없는 가족이 젖은 잎사귀에 앉아

축축한 침묵을 나눈다

빈 그릇에 남긴 서늘한 더듬이의 흔적들

달팽이는 개수대에 물을 붓는다

견딜 수 없는 눅눅함을 씻어내려

그릇들은 부딪치며 서로에게 흔적을 남긴다

각기 제 집속으로 들어가 마음을 닫아 건 저녁

달팽이 한 마리 숨겨둔 촉수를 꺼내

숲을 찾아 나선다

거친 길을 엎디어 느리게 지나간 흔적

한 걸음 건너뛰는 법 없이 낮고 깊어지는 슬픔

단단한 껍질 때문에 서로를 안아줄 수 없는 삶

이제 누구도 그에게 말을 건네지 않는다

집을 벗어던진 달팽이는 쏟아지는 빗줄기를

온몸으로 받아낸다

집속에 감춰둔 말들이 하나 둘 기어 나온다

세상에서 가장 느린 문장을

고통스럽게 완성한다

 

 

 

담쟁이넝쿨

김영미

 

담쟁이가 푸른 길을 가꾸고 있다

학교 벽면에,

바람이 자꾸만 방해를 한다

그러나 담쟁이는 굳굳하다

묵묵히 자기의 갈 길을 간다

 

바람이 떠난 자리

담쟁이가 그린 초록지도가 눈부시다.

 

 

 

당신을 끄시오!

김영미

 

터널을 들어서는 순간 나는 압류된다

내 속에 나를 결박하는 말이 있다

웅크리고 있는 늪이 있다

흐르지 못한 피가 터널을 파고 있다

반달 모양의 출구가 사이렌을 울리며 달려온다

라이트를 끄시오!

당신을 끄시오!

 

 

 

당신을 흔들고 싶다

김영미

 

바람이 몹시 붑니다

 

바람도 가끔은

자신이 살아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저리도 열심히 나무들을 흔들어

뿌리째 뽑아가는데

 

순간마다 생각나는 이 있는

내 마음은 오죽할라구요

 

나는 태풍으로 불어가야지

 

그렇게 당신의 마음 온통 흔들어

후두둑 떨어지면, 그때는

내 방에 숨겨 두고

그동안 여린 빛으로 떠돌던

비밀 하나씩 털어놓아야지

 

아직은 빈 방 가득

대책 없는 바람만 듭니다만

 

 

 

당신의 날씨는 어떤가요

김영미

 

억새가 바람에게 몸을 맡기는

경주로 가을이 걷습니다

천마총 지나

소나무 숲 사잇길

슬그머니 비켜 가는 햇살 한 줌

천 년의 바람과 구름이 품은 설렘

갸우뚱거리는 첨성대 지나

계림으로 느릿느릿 향합니다

물푸레나무, 회화나무, 단풍나무

울창한 그늘에서 마시는 천 년의 숲

언덕길 오르면

반월성터에서 피어나는

무수한 별 무리

흐르는 강변 따라

푸른 풀꽃의 노래가 새겨 가는

나무의 나이테

천 년이 오고 가도

그곳에서 기다리는 당신에게

오늘의 날씨를 물어봅니다

 

 

 

대치

김영미

 

마당 그네에 앉아 다리를 흔든다

 

다리를 흔들 때마다 그네가 간지럽고 간지러움처럼

구름부터 비가 오기 시작한다

 

먼 산에서 시작한 비가 가까운 산으로 온다

천변으로 온다 멀리서 가까이로 비가 다가온다

담 너머까지 도착한다

 

그네 앞까지 오면 얼른 뛰어가야지

손을 머리에 얹고 찰박거리며 도망가야지

 

하지만 비는 담 너머에서부터 더 다가오지 않는다

 

이상한 비야

 

힘껏 구르면 발끝이 젖을 것도 같지만

비의 세계에 닿을 것도 같지만

비와 나는 마주 보고만 있다

 

 

 

독백

김영미

 

미친 영혼들의

적막한 노래

 

멍석 한 장 없이

읊조리는

모노배우의 탄식

 

술자리에서

내뱉는

허튼소리만도

못한 것

 

자신도 모르고

자신도 헷갈리는

생각 없이 내뱉는

한숨

 

그보다 못한

시인들의 곡조 없는

중얼거림

 

 

 

두루마리

김영미

 

너의 그림과 나의 그림을 두루루 말면

두루마리가 되지

두 마리가 한 마리가 되지

한 통속이 되어

집요하게

비밀문서를 집필하기 시작하지

 

온몸이 필기구이지

벼루이고 공책이고 물감이지

도대체 너의 항목과 나의 차례에 대해선

생각할 겨를이 없지

두루마리를 펼치면

구불텅구불텅 독 묻은 활자가 몽골초원을 가로질러

올리브향 대륙을 건너뛰지

 

황금 나침반의 바늘은 세계의 꽃나무를 향해 있고

두루마리의 역사는 새로운 기록들로 넘쳐나지

투두둑

브라우스 단추가 뜯기면서

리본으로 조인 두루마리 가슴이 헤쳐지면서

한 바구니 가득

비밀문서들이 붉은 삐라를 뿌리기 시작하지

 

하늘의 별자리판과 땅의 지형도를

두루루 말면

천지조화가 일어나지 꽃이 피기 시작하고

바람이 불기 시작하고 두루마리는 소용돌이를 집필하지

회오리를 일으키지

두루마리 문서의 필력은 끝이 없지

 

 

 

두부

김영미

 

1

그러니까 상고시대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의 총인구수를 알고 싶다면 두부를 먹어본 사람의 수를 세면 되리라

 

 

2

여기 두부가 있다

무색무취에다 자의식이 없는 두부는 돼지비계에 붙고 김치에 붙고 쓸개와도 어울린다 어떤 맛도 주장하지 않는 두부는 모든 맛과 거리를 두고 있어 어느 쪽으로도 기울지 않는다 두부는 그냥 두부일 뿐, 아마도 중용이란 낱말에 혀를 대어보면 십중팔구 두부맛이 나리라 네모였다가 네모가 아니다가 형이 으개져 동그랑땡이 되어도 그대로 무아무상이다 반야심경을 푹 우려낸 물에 간수를 넣어 굳힌다면 아마 두부가 되리라

 

 

3

두부쯤이야

단숨에 짓뭉개버릴 수도, 심장 깊숙이 칼을 꽂을 수도, 나는 두부 앞에서 당당하다 젓가락으로 모서리 한 점을 건드려 본다 기다렸다는 듯 두부는 스스로 제 살점을 뭉툭 떼어 젓가락 쪽으로 옮겨 앉는다 칼로 잘라본다 칼이 닿자마자 두부는 온몸으로 칼을 받아들여 칼의 길이 되어버린다 큰 육모, 작은 육모, 조각이 난 두부 어디에서도 칼의 흔적, 칼의 상처를 느낄 수 없다 어느 칼잡이가 칼을 받아내는 솜씨가 이러할까 고수 중에 상고수다

 

 

4

온두부에다

연두부

연두부에다 순두부

두부는 연하고 순하다 따듯하고 착하다 그래, 두부야, 그래서 두부야 그러니까 두부여 무엇이라고 이 두부놈아 아이구 두부님 어이구 두부시여 이제, 나의 화두는 두부이다

 

 

 

리코더 - 너에 대해 말하기 위해

김영미

 

불었지

사라져서 다행인 여기

입김에서 밤의 냄새가 나

 

구멍을 다 막고 나야 들리지 중저음의 숨결

가슴 아래서 진동벨이 울리는데

보면대 앞을 서성이는 말들은

 

부적합하지

내서는 안 되는 소리의 목록이지

밤은 흘러내리고 발목이 조여 오고

 

불지 마

발끝에서 자라난 뱀들이 목을 향해 오잖아

 

쇄골 깊숙이 턱을 묻고

밤은 그냥 밤에게 묻고

 

혀끝이 갈라질 때마다 달라지는 리듬이야

마룻바닥을 치는 슬리퍼야

 

너에게

너에 대해서

나는 더 이상

 

높은 도와 낮은 도

이런 도덕률의 사이에서

 

분리되는 몸통이지

온몸의 수분을 다 빼야 잠잠해지는

 

목의 소리지

 

 

 

막차는 제 그림자를 잘라먹고

김영미

 

빈 잔에 향기가 쓰러져 있다

그 잔에 우롱차를 마시고 술을 마시고

, 곡차, , 곡차 뒤풀이

웅크린 찻잎의 기억 더듬다가

천천히 입안으로 스며드는 차, 곡차

심장을 돌고 돌아 물소리로 몰고 온다

혀를 우롱해서 우롱차인가

마음 부르는 소리여서 곡차인가

느끼는 것을 믿을 수밖에

차가 술을 부르고 술이 차를 불러

입술에 다시 올 때

물로 만나 술이 되는 소리

막차는 뒤를 슬금슬금 감추며 차, 곡차

, 곡차, 곡 제 그림자를 밟고 간다

 

 

 

머리칼은 촉수다

김영미

 

머리를 감는다 젖은 머리카락 두 손으로 움켜쥐었다 수백 개의 촉수가 살아났다 헐렁한 몸 여기저기를 더듬거렸다 가늘고 긴 돌기가 찌푸리는 입 주변을 핥았다 수많은 촉수가 한꺼번에 섰다 이들이 내 머리채를 잡고 어두운 구멍으로 사라졌다

가난을 덮어쓴 찬물은 더 차가웠다 머리칼에 언 손끝이 베었다 엉킨 머리 위를 물방울이 굴러다녔다 내가 울음을 터뜨릴 때마다 새가 울며 날아갔다 물속에서 머리카락이 불쑥 돋았다

머리를 묶는다 머리칼에 매여 있는 나를 본다 달아날수록 머리채를 부여잡는 길목 내 손바닥의 감각을 자른다 바닥에 잘린 감각의 목록이 수북하다

 

 

 

모란꽃살문

김영미

 

선암사 원통전 모란꽃살문에

봄이 오네요

조계산 능선이 많이 가려운 듯

깊은 잠을 털어내면

모란꽃살문속의 새가 청명을 쪼아대네요

달그락 달그락

문틀이 흔들리며 모란이 열려요

시들어 가던 생이 잠시 걸음을 멈추네요

햇봄의 햇살은 나도 모르게 목이 메어요

사각사각 모란꽃을 조각하던 옛사람이

지그시 웃네요

묻고 싶어져요

울고 있는 바리공주가 보이는지

이곳은 거친 바다예요

가시밭길에서 나무를 해요, 불씨없는 불을 때고 있어요

가위눌린 꿈이어요, 다시 돌아갈게요

물을 길어 밥을 지을게요

조금만 기다려요, 아주 조금만

전 아직 한해살이 꽃이라도

한철 흐드러지게 피고 싶어요

어리석은 아픔을 조각해요

탁한 세상은

승선교를 지나고 머리를 떠나지 않아요

바람이 불어요

잠시만 기다려요 풍화하는 시간 속으로

봄을 건너갈게요

 

 

 

모래내 9

김영미

 

너는 문제가 어렵다고 했다

나는 네가 더 어렵다고 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독서신문에 찍힌 학교의 주소를 본다

모래내 9길 내가 지금 앉아 있는 곳

모래내 그 길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내 곁을

혹은 내 앞을 지나갔을까

길 위에서 흩어져버린 모래알들

창밖으로 경의선 열차가 지나갔다

백 년 전에도 서 있던 축구 골대처럼

나는 이끼 빛으로 녹슬어

내 기억은 어느 밤 저 열차를 탔던가

 

죽음을 예감해도 즐겁지 않은 저녁이 있다

나는 막 출발하려는 기차처럼 기침을 시작했다

 

너보다 더 어려운 무엇은 없었다

 

 

 

모래시계

김영미

 

사람들이 나를 모래시계라 했다

나는 모래일 뿐

나는 사우나실 유리깔대기 속에 갇혀 있다

벌거벗은 사람들이 들어와 나를 뒤집는다

흘러내리기 시작한 나는

아래로 옮겨져 모래산이 되었다

모래산을 허물고

다시 모래산을 만드는 것이

나의 일이다

주위를 둘러보니 풀 한 포기 없다

 

자욱한 안개 속

수건으로 머리를 감싼 여자가

다시 나를 뒤집는다

깨지기 쉬운 유리 깔대기 표면에 금이 가고

카운트다운은 시작되었다

예고도 없이

박씨 아저씨의 숨소리가 잦아들고

마당에 가득

붉은 꽃잎들이 떨어져 쌓이고

갸우뚱한 처마 밑에서

흙더미가 흘러내리기 시작한다

 

나는 모래일 뿐

바다는 시계를 걸지 않는다

사막은 시간을 가두지 않는다

 

 

 

목련

김영미

 

며칠 발길이 떠돌고

잊힌 사연들과 후회로 묶였던

현기증이 하얗게 인화된다

 

고요의 길이 새겨져야

제 행색을 열어주는 꽃

 

누군가는 흑백의 영혼이라 했고

누군가는 봄날의 종언이라고 했다

 

한동안 세상의 운명들은

목련을 찾아내느라

밤새 불면으로 헤매거나

한낮은 실어증에 빠지기도 한다

 

봄이 왔고 목련들이 왔다

낙화라는 독백을 남기기 위해

빈자리마다 빛나는 계절의 소실점

 

봄날의 칠판을 빠져나온 목련이

바람의 곡선을 부수며

사막을 넘어온 푸른 기억의 지렛대를

나뭇가지마다 걸치고 있다

 

 

 

목말을 타다

김영미

 

아버지 산소에 벌초를 갔다

살았을 적에는

한 번도 아버지와 얼굴을

마주해보지 못했는데

돌아가시니 무릎을 맞대고 앉았다

황소 같던 어깨를 내리고 누운 자리에

고단한 수염처럼 돋아 오른 풀을 베어내다

아버지 몸 위에

터억 주저앉았다

뜨겁다, 아버지의 목 언저리가 뜨겁다

아버지 나이가 된 내가

두 다리를 쭉 뻗고 앉아

아버지의 머리를 움켜잡았다

손가락 사이로 잡히는 아버지의

헛헛한 웃음소리

적막한 묘지마을 속으로 스며들어

들리는 듯 마는 듯

두 눈에 담긴 먼 하늘은

자꾸만 흐려져 가물거리는데

 

작열하던 태양도 지친 오후

아버지와 어린아이가 되어 놀다가

아버지만 남겨두고

흥건해진 몸으로 돌아섰다

그림자도 없는 아버지의 배웅이

오늘따라 길다

 

 

 

문진

김영미

 

돌 속에 꽃무늬가 보인다.

문을 닫아버린 수행자에게

여독을 풀어달라는 말 남긴

은빛 잠이 누워있다.

매화꽃이 하얗게 흩날리던

그 강변에서 마주쳤을까

돌멩이 하나에 맴도는 길

바람이 가만있어 주면

내게로 걸어 올 것만 같은

흰 돌에 왕관을 씌운

향기로운 잠

어느 날

어디선가 날아와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하고

앉은 꽃잎

기다림을 완성한 돌 하나

책장이 넘어가지 않게 눌러 놓았다.

바람이 웅크려 있는 창턱을

나는 아련히 바라보고 있다.

 

 

 

믹서

김영미

 

원산지에 따라 생육사가 다른

각양각색의

과일들

믹서에 넣는다

 

스위치와 함께 눈 깜짝할 사이

격동의 한 세기가 몰려온다

굉음을 울리며

칼날의 검은 회오리 속으로 빨려든다

꿈결처럼

빨강과 초록, 극좌와 극우가 손을 잡고

주황과 연두,

중도와 보수가 섞인다

과육 속 붉게 영근 따가운 햇살이 섞이고

지중해의 염분과

아열대를 적시는 오후의 소낙비

몬순의 당도가 섞인다

기적처럼

껍질과 알맹이의 근원적 대립이 몸을 풀고

열 번의 만남과

스무 번의 헤어짐

마침내 모든 입자가 하나로 어우러진다

꿈결같은

탁자 위, 한 잔의 코스모 폴리탄!

 

원심분리 되지 않는

그대와 나

믹서에 넣는다

뼈와 몸뚱이

비극처럼 회오리처럼

 

ON OFF ON OFF

 

 

 

밤하늘은 깨진 파일이다

김영미

 

밤 하늘은 난감하다

별이 닫히고

누군가의 은전이

불행을 지불할 능력이 없을 때

밤하늘을 바라본다

지난 저녁

노새를 끌고 왔던 그 사내도

어느 도시의 소문을

끝내 마구간에 매어놓지 못했다

어차피 밤하늘은

사치스런 여인의 계단 벽에서도

그림이 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풀들이 제빛을 잃을 때마다

별들이 가까워지는 이유를 알 때까지

베니스의 상인들과 거래를 할 수 없었다

나는 운명을 믿지 않는다

밤하늘도 거들떠보려 하지 않았다

상인이 되지 못한 죄책감

나는 고흐다

아직 한 번도 가난 속에다

밤하늘을 완성하지 못한 미지의 영혼이다

한낮이 끝나기를 오후의 끝까지 헤매기도 하는

밤 하늘의 불청객이다

 

 

 

별을 지나서

김영미

 

최면 의자에 앉는다

백 년 전 당신은 무엇이었습니까

다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신은 무엇이었습니까

 

최근에 나는 이 세상에 사람이 되어 왔다

밝혀지지 않은 어떤 프로그램에 의해

테마가 있는 여행을 하고 있는 중이다

나의 취미는

원조 찾기이다

 

미래의 꿈은

기록 이전의 시대를 거슬러 올라

나무와 풀, 풀과 바람, 최초의 구름이 자리 잡기 전

나의 맨 처음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최면술이 아니더라도

나의 과거는 밝혀져 있다

우리는 모두 별에서 왔다

 

!

제 온기 하나만으로도 한없이 빛나는

그러나 미심쩍다

아무래도 내가 반짝이는 고유명사의

안주하려 드는 것 같다

 

다시 최면 의자에 앉는다

별을 지나

당신은 어디에서 왔습니까

 

이기 전에

이기 전에

당신은 무엇이었습니까

 

 

 

보타닉가든

김영미

 

암탉의 배를 가르니

달걀이 크기 순서대로 정렬해 있다

 

알들은 줄을 서 자라나던 중이었다

껍질이 단단해지는 순서였다

 

내장을 들어내고 벽을 훑어내고

뱃속은 다른 곡식과 열매와 뿌리로 채워졌다

밑은 이쑤시개로 막혔다 엎드린 등에 버터가 발렸다 그리고

 

껍질이 바삭해지는 중이었다

 

접시는 정원의 잎사귀로 가득했다 무화과와 한련과 저녁의 단풍

언제나 부드러운 들꽃들의 몸

 

포크가 두 개씩 시옷자로 놓여 있다

닭들이 머리를 맞대고 물을 마시던 각도다

 

더는 못 먹겠어, ‘달걀처럼 배가 꼭 찼어

사람들은 배를 두드렸다 두드릴 때마다 배에 금이 번졌다

금은 금마다 구근을 달고

 

빈 접시는 여전히 부드러운 들꽃들의 몸

식탁이 부풀어오르고 오븐이 식어 가는 사이였다

 

정원에 뼈다귀를 묻고

아이들은 병아리가 피어나기를 기다렸다

 

보타닉가든 : 도자기 회사의 식기 컬렉션 이름.

 

 

 

봄이라고 써버렸다

김영미

 

그대를 감싸러 오는 것은 무엇인가

풀잎들이 부드러운 아침을 사랑하고

밤은 낮을 껴안는다

아무도 잎들을 멈추게 할 수 없나니

이제부터 새벽은

꽃잎을 포개지게 할 것인데

어찌 서둘러 입을 맞추었는가

바람이 서로 껴안으러 가는 중에

내 연필 한끝이

그만 ''이라고 써 버렸다

 

 

 

북경소묘

김영미

 

북경의 후퉁

겨울 안개가 또아리를 튼 골목 안

인력거에 올랐다

우리는 사람들을 지나치고

그들은 이방인을 구경했다

끼니를 위해 푸성귀를 사는 이

무표정하게 눈길을 건네는 이

좁고 내장처럼 얽힌 길

골목은 더 이상 낯설지가 않다

노란 모자를 쓴 아이가 소리 내어 울고

남루한 옷가지들이 빨랫줄에 지친 듯 걸쳐져 있다

늘어진 피부의 여인이 식어버린 두부를 산다

인력거가 삐걱인다 연탄이 쌓인 집을 지나

가파른 언덕을 오른다

골목이 희미해지며

인력거꾼의 등만 보인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일몰을 향해 휘어지는

그의 등은 핍진한 하루를 녹여

상형문자를 그린다

 

안개는 골목의 모든 시간을 가라앉게 한다

다리를 덮은 때 묻은 담요에 깃든 마지막 햇살

허물어져 가는 풍경 속에서도

인력거꾼은

죽을힘을 다해

생의 바퀴를 굴린다

 

* 후퉁 : ‘좁은 골목이란 뜻으로 베이징의 과거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비가 온다

김영미

 

내 시는 시 아니며

나는 시인 아니다

또한

나는 나 아니며 내게서

너무 멀다

 

내리는 비가 이 말을 지운다

 

 

 

비누

김영미

 

몽땅 형용사 덩어리죠

술술 술어로 풀어지기 전까지는

문제는 주어가 될 만한 주체가 없다는 거죠

 

물거품이 아니죠

날개이기도 하고 지느러미이기도 하고

미끈미끈한 파충류의 질감!

 

라벤다 쟈스민 로즈향이 퍼져요

얼굴을 씻고 손을 씻고

흰 도마뱀의 꼬리

우글우글 목욕탕 바닥을 기어다녀요

 

가장 솔직한 부위는 촉각이죠

부비기만 하면 주술처럼 풀려나오는 복화술

과거를 낱낱이 고백하죠

미래를 예언하죠

 

지느러미가 떨어져나가고

간과 심장이 조각나고 애간장이 녹아버리면

나머지 반도 사라지고 말죠

 

손바닥 위에 희생양 한 마리가

놓여 있어요

 

눈앞에 뻔히 보이는데도 붙잡을 수 없는

말씀의 화두

미끈미끈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고 있어요

 

 

 

비눗방울

김영미

 

나는 지금 막 독립한 바람

나의 방엔 모서리가 없다

투명한 벽지를 따라

바람이 바람을 실어나르는 바깥의 시간

디딜 수 없는 아름다움을 건너

어느 눈동자에서 나는 가장 아프게 터질 것인가

 

 

 

비단 끈

김영미

 

삶보다는 죽음

죽음보다는 자살이란 말이

더 솔깃한 내게

누군가 비단끈이 없어 못 죽는다고 했다

 

나일론끈이면 어때서요 그냥 살고 싶다 그러지요

비아냥거리면서

비아냥거리면서

나는 그만 비단끈의 마력에 걸려들었다

 

우선 지도를 펼치고

머나먼 사마르칸트를 향해 길을 떠난다

구도의 길이었건

교역의 길이었건

목숨을 걸었던 꿈이면서 끈이었던

실크로드를 따라간다 터벅터벅 다리를 끌며 절며

 

비단길 비단천 비단꿈 비단끈

한 곡의 노래

한 줄의 싯구

 

때론 한 줄기 햇빛과 바람으로

삶과 죽음이 손바닥처럼 명쾌해질 때

순간, 내 눈앞에서 목을 조르고 달아나던

붉고 푸른 비단끈들

 

거울을 당긴다

그 속에 내가 걸어온 길이 보인다

붉은 올가미

그가 점찍어 놓았다는 소나무도 보인다

꿈틀거리는 목줄기를 어루만지며

 

비단길 비단천 비단꿈 비단끈

 

내가 목매달았던 나무들

강가에 걸린 한 그루 미루나무였을지도

그저 한 그루 신기루였을지도

두 연인이 사랑을 속삭이고 있다

죽도록 사랑해요

서로의 팔을 목에다 두르고

바싹, 비단끈을 조으고 있다

 

붉은 노을이 그림을 그리는 그녀의 흰바지

피의 파도가 그녀의 안팎에서 철썩댄다

심해어들은 죽어서야 발이 땅에서 떨어진다

 

 

 

빗소리

김영미

 

토닥 토닥 고분을 캐는 소리

늑골을 파는 소리

흙을 떨궈내고 빗방울 모양이 곡옥(曲玉)을 가려

머리에 귀에 팔에 온몸이 찰랑이는 빗방울 여자를 거느리고

 

박물관 지나 토성(土城)을 지나 힌두사원 너머 몽골고원 그 남자 청동빛 부푼 근육을 지나,

북아프리카 그 여자 검은 유두를 지나 지구가 걸어가는 발자국 소리,

멀리 주술사가 두드리는 여음의 북소리를 따라

 

밤 내내 걸어가는 신라적 처녀를 따라 그녀가 채우는 놋쇠 요강의 질긴 가락을 따라,

백제 마을을 지나 백수 광부를 부르는 여옥의 노래 소리를 따라,

열두 줄 빗줄기로 두드리는 고구려적 그 여자 분첩 소리를 따라,

여덟 구멍 강물로 이어지는 피리의 궁음(宮音)을 따라

흐르고 흘러 여기 내 몸속으로

 

토닥토닥 고분을 파는 소리

내 몸을 캐는 소리

고생대적부터 나의 그리움이

잠인 듯 꿈인 듯 무덤인 듯

, 봉분처럼 둥근 그대 늑골 속으로

 

 

 

사랑

김영미

 

꽃이 목을 매고 잎이 목을 매고 목숨 붙든 것들의 상사 상사!

사랑은 무죄 꿈도 무죄, 이 아름답고 불온한 무죄의 성역에서

성전을 치르고 싶다 십자가 못박히고 싶다 그리하여

 

내가

당신의

무덤이고 신전이기를

파라오이고 피라밋이기를

옥새이고 족쇄이기를

사원의 벽돌에 아로새겨진 상형문자

영원히 풀 수 없는 암호이기를

갈증이기를

사막이기를

수상한 바람

해가 지지 않는 백야(白夜)이기를

모래 속에 엎드린 검은

전갈이기를

 

당신은

나의

구원이고 종교이기를

목숨이기를

천둥과 번개

하늘의 언명이기를

십자가를 지고 죽음에 이르는

상사이기를

시작과 끝이기를

순간이고 영원이기를

 

 

 

사회적 또는 개인적 수건

김영미

 

아침이다

보송보송한 섬유 올 사이로 코를 박으면

여기는 지극히 비밀스러운

감각의 제국

 

턱선으로 흐르는 이목구비가 숨어있고

섬섬옥수가 있고

삼겹 뱃살로 굳어지기 전

물방울을 타고 흐르던

s라인의 누드가 굽이친다

 

수건을 펼치면

사회적 학연과 지연이 있고

가족적 체취가 잔뜩 베여있다 피는 진하고

학연과 지연은 질겨 세탁기에 빠뜨려도

빠지지 않는다

 

빨랫줄에 흰 수건이 널려 있다

바람에게 내 줄 건 다 내 주면서

햇빛과의 당찬 야합

온몸이 빳빳한 미라가 될 때까지

사흘 만에 새롭게 부활하는

단합회 친목회 총동창회

 

짧고 길고 뭉툭하고 뾰족한 세상의 모든 인연들이

개업일과 기념일이

내 얼굴의 물기를 꼽꼽하게 닦아 준다

사회적 수건이

개인적 내 몸을 부드럽게 감싸 준다

 

 

 

산수유 필 무렵

김영미

 

겨울은 시계수리공처럼 집요하게

창밖의 시간을 응시했다

누군가 겨울의 웅크린 어깨를 흔들었을 때

구례 산동 상위 마을에 산수유가 피기 시작했다

그 것은 핀 다기 보다

번진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시계 수리공은 완고한 시간의 나사못 하나를 풀어

충만한 빛의 물결을 마을로 보냈다

그는 나무의 부름켜 속에

숨어 있던 물 소리를 끌어 낸 것이다

나무의 우듬지에 돋아 나서는

끝없이 소곤거리며

저 먼 숲

고치 속의 벌레들을 깨우는 것이다

 

창문 밖 해빙의 시간이 내게 걸어왔다

꽃의 얼굴, 나무의 얼굴이

지상의 어떤 기운으로도 메울 수 없는

겨울과 봄 사이의 균열과 간극을

쓸어내린다

 

 

 

석양의 식탁

김영미

 

해는 꼭

주방 창문에 와서

떨어진다

 

그때는

내가 칼질에 몰두할 때다

 

토마토를 얇게 저미고

당근을 채 치고

김치전을 마름모꼴로

썰어낼 때다

 

그때마다 해는 꼭

내 칼질에 걸려들 뿐이다

 

나의 칼질에는

명분이 있어

똑 똑 소리나지만

 

눈동자를 향하는

칼끝은 막을 수 없어

나는 촛대에 해를 꽂는다

 

어떤 나라에선

초경을 축하하기 위해

팥밥을 지어 먹는다지

 

흰 냅킨을 펼치며

나는 칼처럼 반듯해진다

 

 

 

김영미

 

누가 물속에 잠기다 만

작은 뭍을

섬이라 그랬을까

마그마처럼 끓어오르던

외로움이 뭉쳐서

화산탄처럼

시커멓게 굳어지면고립이란

중죄인의 이름을 차마 붙이지 못해

가슴 아프고, 가슴저린

외마디 비명과 같은 이름

섬에 사는 모든 것들

다 같은 이름으로 불린다

 

 

 

세상이 알지 못하는

김영미

 

그 어떤 것이 되려고

별이 온다.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어둠 속에서

발소리 한 번 내지 않고 온다.

별을 끼워 넣으려

어둠은 아팠을 것이다.

삶을 끌어안기 위해

어두운 밤하늘은

별이 더 반짝거려야 하는데

밝은 창안에 있는 나는

부끄럽기만 하다.

나무에는 초록 물이 들기 시작하는데

나는 그 무엇에도

속하거나, 속해 있지 않으면서

저 어두운 하늘을 막막하게

바라보고 있는 것일까.

 

별을 만드는 건 어두움일지도 모른다.

 

 

 

소한

김영미

 

저녁이 열리자

가마솥 하나가 어머니의 훈계를 들으며

바빠지기 시작한다

사랑채에선 할아버지 헛기침 소리가 쿵쿵 울리고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맛의 안쪽을 상상한 군침 한 모금을 삼켰다

세상의 모든 호기심은 함부로 숯이 되어선 안 되는 일

소한을 만나

어머니가 푸른 연기 속에서 엿을 고고 있다

며칠 게으름에 빠진 방학숙제는 어떻게 줄여야 할까

한낮에 구멍 낸 스폰지 잠바의 비밀은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아무리 줄이려 해도 줄여지지 않던 걱정 너머에서

어머니의 훈계는 점점 더 분주해지고

앙금이 되지 않고는

더 이상 단맛이 되지 못하던 한겨울 풍경

그 시절

겨울의 한복판에 들어설 때마다

나는 거대한 가마솥과 만난다

고민의 반대쪽 치아 하나가 다 넘어갈 쯤이면

증조할아버지의 제사가 지나치는

그 알 수 없는 풍습과

뒤란 댓잎들이

흰눈에게 푸른 상처를 그어주던

한낮의 풍경 사이에서

어머니가 겨울의 끝

더는 숯이 되어선 안 될

단맛의 안쪽을 뒤적이는 것이다

할아버지 헛기침은

한겨울 고요와 떨어지지 않았고

엿은 한겨울을 위로하는 아교였다.

 

 

 

수묵담채

김영미

 

고랑고랑 콧소리 내며 잠든

늙은 어미 손톱 밑이 검다

볕드는 현관에 바람 벗 삼아 앉아

굽은 등 수십 번 펴고 두드리며

고구마줄기를 벗기다 들었을

풀빛이 검다

잠이 든 어미 곁에 놓인

검은 비닐봉지 셋

희었다가 푸르다가 검어지던

가슴 아린 줄기들이 얼기설기

소복이 들어있다

진종일 어미는

고구마 줄기를 익은 된장에 무쳐내던

가을 밥상을 그렸을 것이다

보름밤을 하얗게 도려낸

가을 달빛이

고구마줄기처럼 휘었던

어미의 등을 주무르고 간다.

 

 

 

김영미

 

나는 곤충들의 심장을 그리고 있었다

 

작게 헐떡이는 호흡을 가랑잎 아래 숨겨두었다

바람에 머리카락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가끔씩 나뭇가지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수목 아래 잘 개어놓은 옷가지가 보였다

누름돌처럼 검은 구두 한 켤레가 올려져 있었다

 

바스러지며 심장이 부풀어 올랐다

밟고 지나가면 사라질 소리였다

 

책을 덮으며 아이는 마음속에 숲이 하나 생겼다고 했다

지나온 숲을 버리지 못해 나는

 

숨을 쉴 때마다 가슴이 뻐근했다

 

 

 

스트로베리 필드

김영미

 

아이들이 어디서 오는지 알게 되었어요

참 촘촘한 배열이지요

 

웃을 때마다 피어오르는 씨앗들이지요

붉은 철문 너머 여기저기 박혀 노는 아이들

 

나는 별명이 딸기였어요

딸기 씨 이것 좀 먹어봐

딸기 씨 여기 좀 봐봐

어리고 작은 나의 주근깨들

 

마취에서 깨어났을 때 나는 의사를 붙잡고 떠들었어요

어머, 술 취한 거 같아요

 

일찍 자기의 토대를 알아버린 아이들은 심지가 차요

아무리 불을 붙여도 일렁이지 않아요

 

단단하게 물렁한 볼 여기저기를 기습하는 뽀뽀

하지 마 너무 떨리잖아 나를 다 빨아먹을 것처럼

 

한철 앞선 과일만 탐내던 나의 식욕은 곧 사그라들 것입니다

 

입 안에서 사라지는 나의 씨앗들

비 내리는 스트로베리 필드*입니다 나는 너무 젖어

그만 무릎을 잃어요

 

발목을 스치는 작은 꽃들은 언제 열매를 배게 될까요

아이들이 어디서 오는지 알게 되었어요

 

하지만 어디로 사라지는지는 아직 잘 모르겠어요

 

* Strawberry Field : 리버풀의 구세군 고아원. 2005년에 문을 닫음.

 

 

 

신들은 어디로

김영미

 

흙보다 돌이 많은 땅에서

일만 팔천의 신의 힘을 빌려서라도

씨감자 같은 새끼들과 숨비소리로 하루를 사는 여자와

어떡하든 살아야겠기에

발밑에 엎더져 숨죽여 조아리며 연명한 죄밖에 없는데

그날

그 많던 섬의 신들은 다 어디로 가버리고

어미의 손톱 밑에 잡히던 서늘한 핏방울 닮은

붉은 동백 혼자 흐느끼다 정수리로 땅을 치며

온 섬을 적시던

그날

신들은 섬의 절규하는 어떠한 질문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물오른 사월에도 세차고 마른 바람 불 수 있다는 것을

섬은 앓으면서 알았다

신들도 무서워 눈을 감아버렸던 이념을

무자년, 신들이 부재였던 섬

한라산 흰 사슴도 핏빛 홍역을 앓았던

그날

 

신들이 떠나버렸던

그 해

그리고 다시 그 해

일만 팔천의 신들은

여기에 와 있는가

 

 

 

아지랑이 피는 땅에서 별이 보여요

김영미

 

아지랑이 피는 땅에서 별이 보여요.

그 땅에 매달려서 올려다보는 하늘

바람이 오른쪽 눈을 감게 하는데

어느새 꽃잎 사이로 들어오는 빛

 

어떻게 별은

물을 적시지 않고 꽃으로 온 걸까요?

 

누가 흔들고 있을까

매일 조금씩 내려오는 하늘

그 속에는 별이 가득 차 있습니다.

별 하나

제비꽃을 잊으려 애쓰다가

늘 저 아래로 내려갑니다.

 

꽃을 별이라 부르는 날

이제 안부를 물을 수 없게

더 작아지는 꽃

나는 별 보며 하늘에 잠기고

꽃은 별 속에서 가만히 눈뜨고

 

 

 

아카시아 잎

김영미

 

나는,

너를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

사랑한다

 

마지막 남은 잎 하나

사랑하지 않는다

 

그렇다, 사랑하지 않았다

너를,

내가 너를 지금 이렇게 가슴이 에이도록

그 때도 사랑했다면

사월, 그 차디찬 봄 바다가

너를 그렇게 지워버릴 때까지

무참히 그냥 버려두었을 리 없다

아카시아꽃만 흐드러지던

사월, 봄날에 말이지

 

 

 

애연, 담배연기를 위한

김영미

 

원래 여자와 불은

장난을 치는 게 아니랬지

남자가 라이터를 켠다

남자의 입술에서 파란 불꽃이 피기 시작한다

격렬하면서도 적막한

무료하면서도 쓸쓸한

남자의 입속에서

남자가 내뿜는 담배연기 속에서

움츠리고 있던 그녀의 육체가 쏟아져 나온다 되살아나는

그녀의 선,

그녀의 굴곡,

그녀의 협곡,

감았던 눈을 뜨고 지그시

마초의 시선이 따라간다

허공이 그려내는

그녀의

sixnine sexline

운명을 거부하는 것들은 가끔 이변을 일으키기도 하지

깊숙이 그녀를 빨아들인다

아래로 아래로

허리가 타내려가는 여자

점점 다급해지는 여자

짧아지는 여자

결국은

검은

음부로 남는 여자

 

 

 

애인의 문장

김영미

 

하얀 사막에 찍힌

하얀 토끼의

하얀 발자국이다

 

당신이 하는 말은

당신의 마음을 잘 숨겨준다

 

당신의 반짝이는 손이

당신의 마음이다

 

당신의 말을 바라보면

 

또박또박

또각또각

 

대형 점자책이다

 

하얀 토끼는

당근을 먹는다

백지 속에서

붉음이 짧아진다

 

짧아지다 사라지는

혀다

가늘고 붉게 다문

입술이다

 

더듬거리다 말

당신이다

 

 

 

야외 풀장

김영미

 

유리잔을 튕기면 손끝에 투명 매니큐어가 칠해진다

펼쳐진 손가락 끝마다 입김을 불어 넣으며

 

처음을 말린다

빛이 났던가

 

잔을 부딪치며

치아가 다 드러났던가

 

타일 바닥에 버려진 일회용 렌즈가 말라간다

감은 눈이

 

떠지길 기다리며

 

투명이 우리를 가려준다는 믿음

안에서

 

 

 

약간의 지연방송

김영미

 

스위치를 내리고

나는 안으로 들어왔다

내가 나를 임신한 듯 여기가 어디일까?

 

창문 너머로 보이는

바깥이라는 커다란 덩어리

진열장 속 케이크 같아

나이 수만큼 꽂힌 가로수와 가로등

전봇대에 걸린 분홍구름의 꽃장식

 

나는 약간의 외계인 / 약간의 비행접시

 

버스에서 내려 그를 마중 가는 길

평행이동 하는

건물과 자동차들

지하도 계단을 내려갈 때

 

나는 약간의 회오리 바람 / 약간의 유체이탈

 

컴컴한 머릿속

웅크리고 앉은 물음표 위로 반짝,

30촉 백열등이 켜질 것도 같은데

 

나는 약간의 수면제 / 약간의 졸음 / 약간의 무지몽매

 

서로의 거리가 너무 좁혀졌거나

모르는 사이

서로를 통과해 버렸거나

 

레일을 따라

기차가 들어오길 기다리면서

나는 약간의 플랫폼

약간의 나무 의자

 

 

 

에스컬레이트

김영미

 

중력은 믿을만한가

지구 표면에 수십억의 사람이 붙어있다

 

백화점 에스컬레이트에

사람이 붙어있다

23,5

천천히 지축의 기울기로 움직인다

 

못할 것도 없지

백화점 한 조각 포크로 찍어 음미한다

야금야금 사회구조학적인 시선으로

 

봐라, 계단이 아니다가

 

즉석에서 생산 가동되는

계단이 있다

두 발을 모으고 꼼짝 말고 서 있을 것

복종을 명령하는

 

계단이 있다

지하 4층이 지하 3층을 밀어올린다

당신을 밀어 올린다

백화점의 뜻을 깊이 헤아릴 것

789

높이는 믿을만한가

 

봐라 빤히 눈앞에서

 

한순간에

삭제되어버리는

눈 깜박할 사이 사라져버리는

계단 위

 

허둥대는 당신의 두 발을

두 발 아래 허공을

 

 

 

여름의 방에서

김영미

 

겨울로

피크닉을 떠난다

찬 음료와 푸른 과일

 

은빛 파도 같은

겨울의 햇살이 돗자리에 꽂힌다

손바닥을 내밀면 손바닥에 꽂힌다

 

정수리에서도 빛난다

여름의 방에서 나온 겨울의 빛

 

어쩌다 여름은 이 지경에 이르렀나

겨울은 어쩌다 이 경지에 이르렀나

 

기류를 타고 셔틀콕은 철새가 된다

무리에서 벗어난 고무공은 통통

 

겨울의 피크닉에서

여름의 방으로

 

빛은

앞보다

뒤에서 더 강해

 

돗자리의 접힌 네 귓속으로 들어가는 시간들

 

여름의 방에서 곧

 

어두워진다

 

 

 

연필을 깎다가

김영미

 

집안의 저문 일들은 아버지의 몫이었다

안방의 불빛이 먼저 뛰쳐나왔고

첫째의 호기심 어린 눈길에 그어진

성냥개비 하나가 마루의 유리 등잔을 깨우고야

밤의 첫 관습이 열리곤 했다

 

구석구석 허기진 어둠들이

등잔 가까이 고개를 디밀었지만

곧 내 졸음의 뒤란으로 밀려나는

그 깊고 푸른 지상의 날들 속에서

세월의 남루한 그늘을 밝히던 아버지는

존재만으로도 든든한 등불이었다

 

어쩌면 내 지문에 갇힌 햇살의 파편들은

막장 속에서 태양을 등지고 살아온

아버지 삶의 역광일지 모른다

 

저녁이면 묵묵한 사랑으로 깎아

가지런히 필통에 넣어주던

그 단단함 속 푸른 연필심은

내 삶의 모퉁이마다

연둣빛 방점이 되어주곤 했다

 

오늘도 오래전 향나무 연필을 만난다

아버지의 칼끝이 찾아내던

따듯한 우리들의 하루와

녹슨 등잔불 밑의 가족사

 

나는 조용히 기억의 한편에서

연필 하나 꺼내어

주소 불명의 아버지께 편지를 쓴다

 

 

 

예고편을 보다

김영미

 

잠에서 깨어나는 시간

나는 부유하는 물질이거나 펼쳐진 종이

 

모서리와 꼭짓점이 맞물려

하나의 물체가 되기까지

여기는 누구도 아닌 공간

 

감긴 눈꺼풀 속

사건도 배경도 없이 독립영화가 상영된다

아내가 밥을 하고 애인이 거들고

나는 주인공이고 관객이고

현실과 비현실

지극히 양다리이고

어디까지나 제 삼자이고

 

이제 그만 일어나야지

네 귀퉁이를 뚫고

팔다리가 나오고 얼굴이 피어나는 동안

마침내 목발을 던져버린

눈부신 햇살,

세트장 지붕을 활짝 열어젖힌다

 

일일드라마가 펼쳐지지 직전

고가도로가 날개를 펼친다

 

살아 봐

뚫어 봐

10초 간격으로

맨홀 뚜껑이 도전장을 던지는

아침이다

 

 

 

오늘은 그대라 하겠네

김영미

 

창가를 지나는 모든 것들은

오늘은 다 그대라 부르겠다

 

시간이 기움에 따라

벽 쪽으로 기대가는 햇살의 그림자를

저녁이 옴에 따라

가슴 가까이로 젖어드는 소쩍새 소리를

어둠이란 이름으로 물들어가는 붉은 하늘을

아무도 몰래 내뱉는 뜨거운 숨처럼

잔잔히 퍼져가는 저녁의 무늬들을

 

오늘은 다 그대라 하겠다

 

 

 

이어

김영미

 

먹고 남은 과일 씨를 묻어둔다

단단한 껍질을 쪼개며 연한 잎이 고개를 들이민다

 

연한 것들이 연한 채로 돌진하던 연하지 않은 세계의 끝

너는 앉아

 

스웨터를 뜨고 귀마개를 뜨고 물수제비를 뜨고

다시 풀어 실뭉치를 만들고 달려가던 돌멩이는 검은 물에 가라앉고

 

너는 앉아

 

겨울을 견딘 밀싹과 북극의 얼음물

증류주를 마시던 밤들이었다

 

묻어줘

아무것도 묻지 말고

가장 무서운 심장이 되어

가장 작은 입김에도 흔들리는

 

돌이 되도록

 

너는 앉아

 

밤이 와도 불을 켜지 않는다 밤이 충분히 들어올 수 있도록 밤에게 밥을 차려주고 밤이 깊어지는 것을 바라본다 밥을 먹을수록 밤은 따뜻해지고 고요해진다 밤 속에서, 흐르는 물속에서, 함께 흘러가지 않는 물풀처럼, 미끄러운 몸으로, 너는 앉아

 

연하고 연한 것들의 팽창을

단단히 채워지는 근육을

 

이어를

이어 쓰며

 

손금이 연해지도록

혀를 묻고

 

너는 앉아

 

 

 

이제 빚을 갚아야 할 때

김영미

 

꽃들의 이름을 자꾸 부르다 보면

그들에게 반드시 무언가를

해 주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생각도 나지 않는 머나먼 과거에 저들에게

엄청난 빚을 져야만 했던 절박한 사연이 있는 것 같아

이제 그 갚음을 꼭 해야만 하는 날이

내게 온 게 아닐까 하는 조급한 마음이 든다

내가 그 옛날에

저들의 품속을 드나들면서 향유를 누렸던 꽃등에였거나

부지런은 하나 제 것만 챙겼던 말벌이었거나

노느라 제 삶도 힘에 부쳤던 나비의 족속이었거나

꽃 피는 날에 무정하게 약속을 잊어버린 꿀벌이었거나

분명 나는 자유혼을 사칭한 방랑자였으리

그래서 꼭 갚아야 하는 빚만 남아

꽃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명치끝이 아려오는 것일 게다

 

아픔에는 언제나 이유가 있었다

 

 

 

인디언 텐트

김영미

 

모서리만 모아 집을 짓습니다

뾰족한 그늘에서 당신의 잠은 불편합니다

 

봄의 피크닉

나뭇잎은 이제 막 피어나

햇빛은 단단하게 두꺼워집니다

 

꽃을 보고 나무의 이름을 압니다

열매를 보고 씨앗의 방향을 깨닫습니다

당신은 나의 무엇으로 나를 짐작합니까

 

끝을 향할수록 좁아지는 우리의 지붕

나의 머리카락은 한쪽으로만 묶입니다

 

세계의 지붕은 서로 닮았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모서리로 만납니다

 

모서리와 모서리가 어긋나

붉은 리본이 팔랑거립니다

 

저것은 무슨 꽃입니까

당신에게 나는 묻습니다

 

 

 

인연

김영미

 

어쩌면 그 사내의 행방도 지상엔

디딜 틈이 없었을지 몰라

 

한순간 내 엄지발톱으로 몰려든

낯선 생애의 무게

그가 자신의 균형 속으로 돌아가자

내 안을 비집는 검은 하중의 통증들

 

도대체 어떤 뒷굽이 보낸 느닷없는 기별이었을까

아픔의 진원지를 허용해 주지 않는 행방의 밀도 속에서

단말마와 머릿속의 비명이 초면의 시간을 보내는 동안

 

통증은 또 다른 역에 도착하고

 

혹시 남몰래 주고받는

미필적 고의의 하중에도

전생의 소인이 찍힌 건 아닐까

 

 

 

입동(立冬)

김영미

 

아버지가 돌아왔다. 쥐색 바바리가 추워 보였다. 늦겨울의 외출에서 돌아온 아버지 덕에 집에서는 따뜻한 밥 냄새가 났다. 콩비지에 돼지고기를 넣는 어머니의 입가에선 실실 바람이 흘러나왔다. 사람이건 짐승이건 그저 추워지면 집에 들어오기 마련이지.

밥상 가득 비지 냄새가 났다. 아버지의 봄과 여름과 가을이 궁금했지만 아버지는 말없이 뜬내만 풍기고 있었다. 인제 김장도 담아야 할 텐데. 묵묵한 숟가락질. 사람이 무정하기는 연락도 없이. 노라리도 아니고 애가 몇 살인데. , 아버지 등 기댄 벽 틈에서 함부로 연탄가스가 새나왔다.

슬레트 지붕 밑 제비집이 텅 비었다. 아버지는 집이 남쪽 나라인가 봐. 쥐색 바바리에서는 바람 냄새가 났다. 어머니는 힘껏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냈다. 맨드라미 빛 담요 위에 너겁처럼 흐트러져 자는 아버지, 노루잠 사이로 언뜻 그의 봄과 여름과 가을이 보였다.

이젠 어머니가 떠나세요. 그저 습성이 다른 철새들이 사는 집이라 생각하면 돼요.

창밖으로 비꽃이 비치는가 싶더니 이내 굵은 빗줄기가 내렸다. 반짝반짝 바늘 같은 비가 어머니 등에 꽂혔다. 날이 더 추워지겠구나. 탄불 가는 어머니의 얼굴이 붉어졌다.

 

 

 

재개발 아파트

김영미

 

날마다

옥수수 이 빠지듯

불 꺼진 창이 늘어간다

 

관리실 아저씨는

떠나간 집마다

커다랗게 검은색으로

×를 그린다

 

이제 통로엔

, 우리 집

하나 남았는데

 

갈 곳을 정하지 못해

날마다

조바심하는 엄마

 

처음으로

나는 커다란 ×

받고 싶었다.

 

 

 

저녁은 밥이다, 아니다

김영미

 

기린처럼 걷는 저녁

목을 쭉 내밀었다

와르르 무너지는 빛 무더기

저녁이 왜 오는지

 

저녁 있는 날은 늘 혼자다

책을 읽다

혼술로

배달의 민족에게

저항할 수 없이 이끌려 갈 때

종일 서늘한 손가락

 

추녀 끝, 땅거미

흙과 술과 바람 속에서

시간으로부터 달아나고 싶다

 

내 삶은, 늘 햇빛이 덜 필요했다

 

 

 

저물녘

김영미

 

1

아버지는 언제부턴가 저녁상을 물리고 나면

뒤란으로 걸어갔다

처음엔 아버지가 싸리꽃을 좋아하시던지

달이 지나가는 구름을 잡아두고 얘기하는 것을

몰래 들으시는가 했다

어둠이 성큼 마당을 기웃거릴 때

가을비속에 뒤란에 서 있는 나를 발견했다

잔잔한 빗줄기가 오리나무를

성글게 빗질하는 모습이 보였다

얼레빗은 수그린 머리와

잔등을 쓸어내리며

네 사는 건 어떤가 묻는 것이었다

나무는 잔기침을 하며

오소소 떨 뿐이었다

외등으로는 자꾸만 낡아 허물어지는 담벼락을

타고 오르는 어둠을, 물리치지 못했으므로

저물어간다는 것이

왠지 두려웠고 내 얘길 들어줄

사람이 필요했다

마음이 텅 비어버려서

아무 생각 없는 생각을 했다

 

싸리꽃은 내 그림자 위에

붉게붉게 꽃을 토해내고 달그림자는

세상과 화해하지 못한

늙은 나무를 오래 바라보았다

 

 

2

그 여자 꽃분홍 시폰 블라우스 사이로

삐져나오는 살을 가까스로 당기며

하이힐에 온 몸을 싣고

흘러가네 출렁이네

담장 위 막 지기 시작한 배롱꽃

바람에 부스스 몸을 떨고

지는 빛을 감추려

여자의 화장도 짙어진 것일까

삼거리 곱창집, 소주 잔 기울이던 남정네들

측은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네

아무도 부르지 않아도 자꾸

돌아다보게 되는 저물 무렵의 골목길

그녀는 삐져나오는 공허함을

허리춤에 잘도 숨기고

오래된 전파사 앞 트로트로 꺽인 내리막을

엇박자로 걸어가네

 

어쩐 일인지

꽃분홍은 서글프게 흔들리고

하이힐에 지탱한 그녀의 하루가

이제 막 저무네

사그라든 배롱나무 가지에 걸린

석양빛을 보다가

그녀, 무작정 걸음을 멈추네

 

 

 

5 문명기

김영미

 

여름

도시의 야자나무 숲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른다

19층 베란다에 원숭이처럼 매달려

아랫동네를 내려다본다

 

문명의 발상

그 시원은 물이다

언제부터인가 우리의 젖줄

옥상에서 시작되고

도시의 사막을 건너기 위해 기르기 시작한

우리시대의 낙타

지붕마다 파랑 노랑 원색의 물통들

 

물을 마시기 위해 우리가 허리를 굽혔던 적이 언제인가?

조약돌 시냇가 허리를 굽혔을 때

문득 파란 하늘이 있고

흰 구름이 떠가고

동심원동심원 냇물이 즐거이 손을 잡던

 

목을 축이기 위해 고개를 숙일 필요가 없는 시대

나는 낙타의 발자국을 따라간다

벽산오아시스, 엘지오아시스, 고가도로에서 잠시 끊어진다

산비탈을 오르기 시작한다 오를수록 많아지는

낙타의 발자국

 

목이 마르다 무한 갈증의 시대

문을 걸어 잠근 도시 위로

쏟아지는 햇빛이

칼처럼 번뜩인다

 

 

 

차마고도*

김영미

 

티베트에서 윈난까지

마방들의 행렬이 이어진다

말이나 사람이나 말린 옥수수를 먹으며

길을 간다

우기에 접어든 차마고도

말들은 젖은 짐을 등에 싣고 고원을 지난다

길이 없으면 길을 만들며 협곡을 지나간다

하늘과 가까운길 차마고도

순례에 지친 어둠이 깃든다

엔젠가 하나둘 하늘에 올라

별자리가 되고 마는 마방의 운명

하늘 한 귀퉁이 끌어덮고 잠을 청한다

 

소금 계곡을 간다 소금 한 줌 되지 못한 생

늙고 비루한 말이 되어

부스럼 그득한 몸을 이끌고

끊어질듯 이어지는 길을 간다

삶에서 죽음까지는 지난한 길

들판의 꽃을 따라 걷던 노새였던 짧은 순간과

남은 목숨을 바꾸러 간다

한 덩이의 차를 구하러 간다

길은 내게 남은 시간을 내어 놓으라 한다

도정의 끝에 바람보다 가벼운 죽음

걸음은 더디고 길이 흐려진다

 

* 차마고도(茶馬古道) : 차와 말을 교역하던 중국의 옛길

 

 

 

채송화가 한창입니다

김영미

 

눈길이 멀면 명길 짧다

할머니 말씀이 피었다

노랑 저고리 분홍 치마 입으신 할머니

어린 눈에 할미가 하늘만큼 이뻤다

낮은 곳에 산 채송화 하늘이 멀었다

여름 속을 뛰어든 꽃씨

저 세상으로 든 그 저녁

씨 뿌리지 않은 마당에

안티푸라민 냄새가 나를 업었다

 

 

 

철학 강사, P()의 적들

김영미

 

철학적, 현실적, 사회적, 이성적, 정신적, 육체적, 본능적, 이율배반적-

 

적이 많구나

세 놈은 특히 나와 가깝구나 나머지 놈들도 조금씩은 걸리는구나 어울리기힘든 놈들이 한집에 살다 보니 편할 날이 없구나 변명이 많구나

 

도식적 도덕적 악마적 세기적 사랑이라

헌신적 이기적 세속적 무의식적 인간이라

 

결국은 사람이고 사랑이구나 운명이구나

적과 손잡고, 적을 만들고, 적의 적이 되고

 

인간을 파헤치다가

연구실 의자를 밀고 당기며 적을 파헤치다가

k는 발탁되고 s는 쓰러지고

깊은 밤, 도서관병동만이 불야성이구나

 

쌓이고 쌓이는구나

소심한 막막한 울적한 과민한 한심한 처절한- 피와 살이 굳는

내 안의

 

쓸쓸한 적들이구나

 

 

 

청첩

김영미

 

설레고 기쁜 얼굴로 당신은 우울합니다

약속 같은 것은 하지 않기로 우리는 약속했지만

그것은 다른 사람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한 다짐이었습니다

 

당신의 잉크는 여전히 푸르고 나의 입술은 오직 파랗습니다

돌고 돌아 만신창이로 당도한 소식처럼 나는 이미 오해입니다

 

다행입니다 복수로 살게 되어서

4인용 식탁과 식기세트로 당신의 현관은 북적이겠습니다

용도를 알 수 없는 물건들 사이에 섞여 당신은

복잡하게 안도하겠습니다

 

편지봉투는 웃고 있습니다 보철한 이를 가리지도 않고

설레고 기쁘고 우울한 당신 고맙습니다

 

당신의 지문에서 나의 반지가 빠져나오는 속도였습니다

도무지 끝날 것 같지 않아 우리는 더 긴 시작을 선택하기도 합니다

 

 

 

층층나무 아래

김영미

 

입술과 입술이 닿자 물이 멈췄다

 

오래 고여 있던 여름이었다 우리는 인사를 위해

층층나무 아래 누웠다 엽선 사이로 환한 햇살

발끝이 저려왔다 못생긴 음악처럼 아이들은 시끄럽고 지루했다

플라스틱 와인 잔을 들며 너는 붉어졌다

드디어 여름이 가고 있어

가로로

혹은

세로로

층층이 그어놓은 칼자국, 여름은 또 오겠지

층층나무는 시간의 순서를 통째로 외워 이파리를 내밀었다

알아, 드디어 여름이 가고 있어

가로로

혹은

세로로

저무는 층층계였다

 

입술과 입술이 멀어지자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다

 

 

 

통제구역

김영미

 

나는 민간인

민간 신앙이 나를 통제한다.

 

나무와 바위 속

영원히 누설되지 않는 기밀이 나를

둥둥 북을 치며 태양을 숭배하던 원시성이

나의 시작이며

최초의 빗줄기가 나의 근원이다

 

역마살이 도져

萬神의 대나무 내 안에서 흔들릴 때면

나는 금줄을 치고 순금의 구역 안으로 들어간다

내 몸에 붙은 잡귀와 싸우며

일간신문을 폁쳐

십이지신의 근황을 두루 살핀다

하루의 운세를 짚어 보고

말뚝을 박고

염소의 행동반경을 따라 돈다

 

어머닝를 믿듯 정화수를 믿으며

천둥과 벼락

하늘의 뿔을 믿으며

역신의 뿔을 믿으며

본 적 없으나 역귀의 역습을 두려워한다

품은 적 없으나 붉은 부적이 나를 금하고

간밤의 꿈자리가 엄중히

나를 경고한다

 

그러나

나는 넘어간다 역신의 뿔을 넘어

철책이 없으므로 울타리를 넘어간다

땅의 경고를 무시하고

하늘의 금기를 무시하고

 

내 안에

통제할 수 없는 통제구역이 있다

 

 

 

파수(破水)

김영미

 

일찍이 나는 물의 파수꾼

 

운동화를 적시며 여름이 오고 있었다

우리들의 여름은 지킬 게 많았다

지킬 게 많다는 건 어길 게 많다는 것

계절은 지겹도록 오래될 텐데

우리들의 여름은 처음처럼 위험했다

아직 채워지지 않은 풀장에 다이빙하고 싶어

수박을 던지면 젖살 같은 과육이 흩어졌다

어기면서 지킬 것들을 만들어가는

우리들은 매번 덜 익은 계절

물에서도 지워지지 않는 화장법을 배우며

눈물을 다듬었다

 

경계할수록 너는 더 빠르게 흘러갔다

 

 

 

하늘로 걸어가는 나무

김영미

 

버스를 기다리다가

하늘로 걸어가는 나무들을 보았다

약속이나 한 듯 어두워지는 하늘 아래

나뭇잎이 누렇게 떨어지고 있는 늦가을

고양이 울음소리

아버지 구둣발 소리가 골목 안으로 접어들었다.

목이 골목을 업고 갈 때

등에 진 짐 나누어질 등이 없을 때

나무 아래 풀잎도 몸을 떨며

느릿느릿

뒤돌아보면 어둠으로도 되돌리지 못하는

그 길을

아버지와 함께 지친 발걸음으로

하늘로 걸어가는 나무들을 보았다.

 

 

 

합정

김영미

 

막대 아이스크림을 빨았다 외인묘지 길을 걸었다

 

이국의 언어로 쓰인 비명이었지만 아치형의 돌문은 쉽게 열렸다

무릎을 세우고 앉았다 허벅지에 모르는 사람의 생몰연도가 새겨졌다

 

당신이란 세계가 열리던 순간은 나라는 세계가 닫히던 순간

나는 입술이 없어지고 없는 것을 핥다 보면 없는 것을 낳을 것도 같아

혀를 세우고 말을 눕혔다

 

한 사람에게 입술이 여러 개일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하나의 입술을 열자 여러 개의 비석이 보였다

 

아이스크림 막대를 잔디에 꽂았다

개미들이 비문을 완성해 나갔다

 

아름다운 정원이었지만 출구를 찾을 수 없었다

 

 

 

허공

김영미

 

어디를 들이받는지 옷을 벗다보면

늘상 여기저기 피멍이다

통증이 피었다

진자리

떨어진 동백 서너 송이

 

어디에 심하게 받쳤는지

석달 열흘 내내 정신이 멍하다

장산역을 내렸을 때

필히 들고 와야 할 전화번호를

탁자 위에 두고 왔음을 깨달았다

 

멍청은 허공의 다른 말

멍청해진다는 것은

몸에

허공의 개수가 늘어난다는 말

 

내가 지금 나온 곳이 9번 출구 던가

오락가락 헤매기를 한참

7번 출구 밖 다리를 쉬었던 돌부리에

거적때기로 버려져 있다

 

그 속에

팔다리가 없는

몸뚱이 하나가 누워 있다

 

허공을 올려다보니

머리와 가슴이 없다

내가, 허공이다

 

 

 

현수막

김영미

 

앞만 보고 있다

그러나 시선은 없다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일정한 높이를 고집하면서

그가 걸려있다

객관적으로 걸려있다

사람이 사람 속으로 걸어 들어와

깃발로 꽂히기까지

펄럭이기까지

그리고 빠르게 철거되기까지

거리에

허공에

아무 내용이 없는 그가

마지막 요식행위만 남은 그가

바람에 펄럭이고 있다

 

 

 

환절기

김영미

 

일교차가 다녀간 새벽

저 흰 무리들은 불면의 자객이었을까

창과 밖의 거리는 지워지고

구름 위 하늘만 푸르다

 

몇 개의 아파트와 건너편 숲이

흰 통증 속에서 벗어나고

무겁게 멈춰있던 은행나무 잎들이

노란 전설을 찾지 못한 채

하나씩의 가로등을 풀어 주고 있다

 

순간 내가 신선인 듯 몽환의 길에 든다

불면으로 휘청이던 새벽

구름 속 37층은 공중부양 중이다

 

어둠은 그늘조차 파종할 수 없는 것

달빛에 감긴 간밤 꿈이

계절을 염탐한 안개와 함께 가로등 안으로 사라진다

더 깊은 곳으로의 은신과 묵정의 날들을 견디는 동안

1층에서 37층을 오르던 세월의 간극도 사라졌다

 

안개 속에서 여름날의 단서를 찾는 동안

태양은 때늦은 나의 독백을

공중으로 밀어내고

창밖 풍경을 말끔히 펼쳐놓는다

 

태양의 울타리 안에서 서성이면서

스스로에겐 보이지 않는 오랜 불청객

나는 침묵으로 더 깊이 은신해야 할

하얀 충고 속으로 잠행하는 안개다

 

 

 

회전문

김영미

 

황소자리와

물병자리 근처

달빛을 밀고 당기며

 

돌아가는 문이 있다

송별사에서 환영사로

기도문에서 추도문으로

식순과 차례가 뒤바뀌는 문이 있다

아무도 문이라 부르지 않는

문이 있다

회오리치는 꽃들에 대해

회전하는 별들에 대해

무감각한 문이 있다

상처를 주고받으며 톱니와 톱니 사이

으깨어지는 사랑에 대해

피 흘리는 이별에 대해

무신경한 문이 있다

가치판단을 하지 않는

자비롭지도 잔인하지도 않는

문을 열고

계절과 계절이 넘나들고

꽃과 나무가 우거지고

모래바람이 피어오르고

아무도

그 입구와 출구를 본 적이 없는

문이 있다

 

며칠 전,

갑자기 그가 떠난

문이 있다

 

 

 

B

김영미

 

비주류, A급에 못 미치는

그저 그런 아웃사이더의 거리

적당히 게으르게 참여

손가락질 받지 않을 만큼 타락하자

호기심을 즐기는 무덤덤함이 상책

밤길에서 듣는 래퍼의 프리스타일 랩

길 한가운데로 쏠리듯 들어와 있는 멜랑콜리

여유 있는 박자로 흐르는 비, B 주류

설레지도 위로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

눈물이 번져 하지 못한 말

세상에 착불로 도착해

소설처럼 쓰인,

빈 탁자를 오래 바라보는 이 저녁

누군가의 배경이 되어야 하는

그런 생각,

그만두길 잘한 서투른 짓

 

 

 

2월의 초승달

김영미

 

헐벗은 나뭇가지에 꼼짝없이 걸려

비비적거리지도

못하고 있는

시퍼렇게

날 선 칼날

나무는 저 날 선 칼을

무엇에 쓰려고

가슴에 품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