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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고 푸른 밤

깊고 푸른 밤

최인호

 

1

그는 약속대로 오전 여덟 시에 눈을 떴다. 눈을 뜨고 뻣뻣한 팔을 굽혀 팔목시계를 보았다. 정각 아침 여덟 시였다. 누가 깨워준 것도 아닐 텐데 그처럼 곤한 잠 속에서도 시간의 흐름을 예민하게 감지하고 있는 동물적인 본능이 그를 정확한 시간에 자명종 소리를 내어 깨워준 셈이었다.

낯선 방이었다.

그는 자기가 지금 어디서 잠들어 있는가를 아직 잠이 완전히 달아나지 않은 혼미한 의식 속에서 헤아려 보았다. 그는 눈이 몹시 나쁜 사람이 안경도 없이 사물을 바라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보이는 것은 모두 흐릿했고, 머리는 죽음과 같은 잠에도 불구하고 먼지가 갈피마다 낀 듯 복잡하고 어지러웠다.

집안은 조용하고 닫힌 커튼 사이로 눈부신 아침 햇살이 비비고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한 삼십 분 더 잠을 잘 수 있는 시간적 여유는 있었다.

준호와 그는 간밤에 여덟시쯤 일어나 세수를 하고 늦어도 정각 아홉 시에는 출발하기로 약속을 해두었던 것이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로스엔젤리스까지 줄곧 5번 도로로 달린다면 여섯 시간이면 닿을 수 있을 것이다. 101번 도로로 내려간다고 해도 일곱 시간에서 여덟 시간이면 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해안선을 따라 꼬불꼬불한 1번 도로로 내려가기로 합의를 봐두었으므로 1번 도로를 따라 로스앤젤리스까지 가는 길은 시간을 짐작할 수 없는 거리였었다. 쉬지 않고 달린다고 해도 열 시간은 넘어 걸릴 것이다. 아니다. 열 시간이라는 것도 막연한 추측일 따름이다.

1번 도로의 대부분은 바닷가의 가파른 해안선을 따라 형성된 이 차선의 관광도로에다 한여름의 우기에는 길가 벼랑에서 굴러떨어지는 낙석과 흙더미로 길이 종종 폐쇄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어쩌면 시간이 훨씬 더 걸릴지도 모른다. 최소한 아홉 시쯤에는 출발을 해야만 오늘 밤 안으로 로스앤젤리스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일주일 전 로스앤젤리스를 떠났다. 그들은 15번 도로를 따라 베이커에서 127번 도로로 갈라져 데드벨리(죽음의 계곡)를 거쳐 129번 도로를 따라 내려오다가 오랜차에서 395번 도로를 만났으며 그 길을 따라서 내려오다가 프리맨에서 178번 도로를 따라 베이커스필드에 도착했었다.

베이커스필드는 찰스 딕킨스의 소설에 나오는 남주인공 이름 같은 도시였었다. 베이커스필드에서 그들은 99번 도로를 타고 북상했었다.

그들은 프레스노에서 99번 도로를 버리고 41번 도로로 접어들었다. 41번 도로는 요세미티의 국립공원으로 들어가는 간선도로였다. 요세미티를 거쳐 그들은 120번 도로로 빠져나와 맨테카에서 일차로 90번 도로를 다시 만났다가 5번 도로를 만났으며, 205번 도로를 거쳐 마침내 그들은 580번 도로로 해서 샌프란시스코에 들어선 길이였었다.

그들은 지도 한 장만을 들고 로스앤젤리스를 떠났었다. 그들은 수없이 갈라지고 방사선으로 펼쳐진 거미의 줄과 같은 도로들을 따라 숨가쁘게 캘리포니아의 구석구석을 헤매며 온 것이었다.

그들은 사막과 눈[]의 계곡을 거쳐 바다를 향해 한꺼번에 달려왔다. 이제는 바다를 볼 계획이었다. 바다를 보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해안선을 끼고 달리는 1번 도로가 최고의 지름길이라는 사실은 지도만을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이제 일주일 동안 내내 쉬지 않고 강행군을 벌여온 그들로서는 어지간히 지치고 피로했으므로 빨리 로스앤젤리스로 돌아가고 싶은 욕망뿐이었다. 그리고 돈도 거의 바닥나 있었다. 가는 도중에 휘발유를 한 번쯤 가득 채워야만 불안하지 않을 것이며, 식사는 간이매점에서 싸구려 햄버거로 때운다 해도 모텔비는 아슬아슬하게 남을까 말까 하는 금액이 주머니에 들어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내처 이날 안으로 로스앤젤리스로 돌아가야만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최소한 아홉 시에는 출발을 강행해야 했다.

그는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잠시 그가 지나온 여정을 머릿속으로 더듬는 동안 잠기운은 서서히 가시고 있었으며, 그래서 그는 비로소 안경을 찾아 쓴 것 같은 명료한 의식을 되찾았다.

어젯밤 두 시까지 술을 마셨으므로 그는 겨우 여섯 시간 정도 눈을 붙인 셈이었다. 그러나 그는 비교적 일찍 잠이 든 셈이었고, 남은 사람들은 그가 잠이 든 뒤에도 더 많은 술을 마시고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더 많은 술에 취했을 것이 분명했으므로 아마도 날이 밝을 무렵에야 지쳐서 쓰러진 채 잠이 들었을 것이었다.

그는 깊은 잠 속에서도 간간이 귀를 찢는 듯한 음악 소리와 매캐한 담배연기 냄새, 두런거리는 사람들의 목소리들을 듣고 있었다. 그는 간밤에 엉망으로 취해 잠이 들었었다. 몸을 저미는 피로에 한꺼번에 너무나 많은 위스키를 마신 모양이었다. 몹시 취해서 누군가와 심한 말다툼을 했던 것도 어렴풋이 떠올랐다.

그를 떠밀어 부축해서 잠을 재우고 난 뒤에도 모처럼의 파티는 새벽까지 계속되었을 것이 분명했다. 그는 머리가 쏟아져 내릴 듯한 통증을 느꼈다. 그는 더듬거리며 일어섰다.

방문을 열고 나서자 채광이 좋은 거실로 은가루 같은 오전의 햇살이 한가득 흘러넘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거실은 난장판이었다. 탁자 위에는 마시다 남은 위스키병과 술잔, 엎질러진 술, 피우다 함부로 비벼 끈 담배꽁초 레코드판, 누군가 밟았는지 부서진 레코드판의 잔해들, 기타, 먹다 남은 빵부스러기들, 씹다 버린 치즈 조각, 그리고 탁자 위에는 마리후아나를 가득 담은 담배함이 놓여 있었고, 그것을 피우기 위한 파이프와 기구들이 내팽개쳐 놓여 있었다. 온 거실에 술냄새와 담배냄새 그리고 밤새워 피웠던 마리후아나의 독한 풀냄새가 뒤범벅이 되어 구역질나는 냄새로 가득 차 있었다.

대여섯 명의 사람들이 거실 바닥에 뒤엉켜져 잠들어 있었다. 유리창을 통해 들어온 햇살의 무차별한 공격에도 그들은 곯아떨어져 있었다. 그들은 서로 서로의 다리와 팔을 베고 잠들어 있었다. 안색이 몹시 나쁜 그들의 얼굴은 마치 물속에 가라앉은 익사해 죽은 시체를 끌어올린 형상을 하고 잠들어 있었다. 머리칼이 긴 여자는 커다란 곰 인형을 부둥켜안고 있었다. 그는 준호가 어디 있는가 둘러보았다.

준호는 소파 위에서 담요를 뒤집어쓰고 잠들어 있었다. 머리맡에 빵부스러기가 부서져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무엇인가 먹다가 잠이 들어 버린 것이 분명했으며 그것으로 그는 준호가 간밤에 몹시 마리후아나를 피웠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마리후아나를 피우면 자꾸 무엇이든 먹으려 했으므로, 그는 준호가 마리후아나를 피우면 자꾸 무엇이든 먹으려 했으므로. 그는 준호가 마리후아나를 피운 후 한 파운드의 빵과 햄, 샌드위치를 세개 꾸역꾸역 먹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그는 준호의 머리를 흔들었다. 그는 쉽사리 눈을 뜨지 않았다. 그는 조금 심하게 준호를 흔들었다. 준호는 간신히 눈을 떴다.

"일어나."

그는 낮은 소리로 말했다.

"아홉 시가 되었어."

"제발"

그는 돌아누우며 말했다.

"조금만 더 잡시다. 형 어제 다섯 시에야 잠이 들었었어."

"일어나 이 쌕끼야."

그는 준호의 머리칼을 움켜쥐었다. 그의 머리칼엔 여자용 헤어핀이 꽂혀있었다. 아마도 어떤 여자가 그의 머리칼을 정성들여 빗어준 후 자신의 헤어핀을 꽂아준 모양이었다. 헤어핀은 나비 모양으로 제법 아름다왔다.

"아아. 제발. 제발."

준호는 두 손으로 빌면서 중얼거렸다.

"한 시간만. 한 시간 후에 떠나도 늦진 않아."

"일어나야 해. 당장 떠나야 해."

"우라질 부지런을 떨고 있네. 여긴 한국이 아니야. 여긴 미국이야 형. 좋아 씨팔. 내 안경 어디 갔지. 내 안경 좀 찾아봐, ."

그는 준호의 안경을 찾기 위해서 난장판이 된 거실을 훑어보았다. 준호는 눈이 몹시 나빠 안경을 쓰지 않으면 한치의 앞을 구별하지 못한다. 준호의 안경은 그의 눈이었다. 그는 운전을 전혀 하지 못했고 오직 준호만이 운전을 할 줄 알았으므로 어제까지의 여행도 준호 혼자서 계속 해왔던 것이다. 안경이 없다면 그는 운전을 할 수 없게 된다.

그는 불타버린 잿더미 속에서 살림 도구를 챙기는 사람처럼 엉겨 붙어 잠들어버린 사람들을 헤치고 다녔다. 누군가 그의 발에 밟혔다. 잠결에 둔한 비명소리를 지르며 한 사내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미안합니다."

그는 웃으며 말했다. 전혀 낯선 얼굴이었다. 그들은 어젯밤 아홉 시쯤 이곳에 도착했었다. 샌프란시코에 도착한 것은 오전이었지만 둘이서 시내를 돌아다니다 저녁 무렵에야 이곳으로 찾아 떠나온 것이었다. 준호가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의 집이었다. 하지만 주소만 알고 있을 뿐 전화번호도 알고 있지 않았다. 주머니에 돈이 없었으므로 노상에서 잠을 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들이 무어라 하든, 싫어하든 좋아하든 준호가 알고 있는 주소에 적힌 집을 찾아 하룻밤 신세를 지지 않으면 안 될 만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대충 눈치로 보아 그들이 찾아가는 사람도 준호와 절친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고 그저 오다가다가 주소만 적어준 겨우 안면만 있는 사람처럼 보여졌었다. 그러나 어떤 사이라도 상관없었다. 하룻밤만 신세 지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쫓아내지만 않는다면 차고 속에서라도 하룻밤 자고 떠나면 그만이었다.

주소 하나만을 갖고 집을 찾는 것은 구름잡는 식이었다. 산 호세에 있는 사내의 집을 찾은 것은 아홉 시가 지날 무렵이었다. 집을 찾는 데만 세 시간이 넘어 걸린 셈이었다. 마침 집안에서 토요일을 맞아 파티가 벌어지고 있었는지 대여섯 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다, 그들을 맞아주었다 준호가 한때 노래를 부르는 제법 유명한 가수라는 사실을 그들은 모두 알고 있어 보였다. 그래서 그들은 기대했던 것보다는 훨씬 환대를 받을 수 있었다. 파티를 위해 아이들을 친척 집에 미리 맡겨두었다는 집주인은 그들에게 웃으며 말했었다.

"잘됐읍니다. 우리도 모처럼 파티를 벌일 참이었는데 실컷 노세요."

그들은 이미 전주가 있었는지 다들 눈이 풀어져 있었다. 그들은 악수를 나누었고, 서로 통성명을 하고 웃음을 나누었다. 그러나 그는 그들의 이름을 하나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밤 두시까지 그들은 떠들고 웃고 그리고 춤을 추었었다. 취한 여인 중의 하나가 풀장에 들어가 옷을 입은 채로 수영을 했다. 그는 취한 김에 그 여인을 따라 팬티만 입고 물속에 뛰어들었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그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아홉 시부터 밤 두 시까지 무려 다섯 시간을 그들과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누고, 무엇을 마시고 먹고 춤을 추고, 나중에는 몹시 다투기도 했지만 잠들어 있는 그들의 얼굴은 전혀 낯이 설었다. 그들이 누구인지 이름이 무엇인지 왜 그가 그들과 싸웠는지 옷을 입은 채 풀장에 뛰어든 여인은 누구인지 준호의 안경을 찾으며 거실을 샅샅이 돌아다니는 그의 마음은 전혀 두터운 암벽과도 같이 단절되어 있었다.

그는 간밤에 그토록 지리한 여행 끝에 마침내 이 집 앞에 다달았을 때 초인종을 누르자 불빛 아래에서 나타나는 얼굴들을 보며 이상한 충격을 받았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들은 모두 가면을 쓴 사람처럼 보였었다. 몸은 지치고 피로해서 쓰러질 것만 같았다. 그들은 이제 마악 임종을 한 뒤 영혼이 육신을 빠져나가 거칠고, 황량한 어두운 벌판을 이리저리 배회하다 우연히 만난 아직 이승에서 방황하는 죽은 자들의 혼령들처럼 보였었다.

이제 다시는 잠든 그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는 없는 것이며 또다시 그들을 만나지는 못할 것이다.

그는 여행을 떠나고 나서부터 아름다운 풍경이나 거대한 사막, 선인장, 눈 덮인 요세미티 공원의 절경을 볼 때면 언제나 그런 감상적인 비애를 느끼곤 했었다.

다시는 만나지 못할 것이다.

시속 칠십 마일의 빠른 속도로 스쳐 지나가는 차장에 잠시 머물다 스러지는 저 풍경은 또다시 만나지 못할 것이다. 한 번의 만남이 영원한 과거로 소멸되고 말 것이다 저 끝 간 데를 모르는 벌판 초록의 융단 위에 구름에 가리워진 빛의 그늘이 대지 위에 이따금 그림자놀이를 하고 있었다. 어린 날 우린 흐린 저녁불 아래에서 두 손으로 벽에 그림자를 만들어 보이곤 했었지. 여우와 토끼와 개의 그림자를 손가락을 구부려 벽에 만들어 보곤 했었지.

짓궂은 구름은 이따금씩 하늘의 햇빛을 가리워 지상에 그림자를 드리우곤 했었다. 어떤 때는 여우비를 뿌리고 어떤 때는 엉킨 대지의 머리칼을 빗질하듯 슬며시 쓰다듬고는 사라지곤 했었다. 그러한 것. 잠시 보이는 구름의 장난으로 여우비를 내리고 심심풀이 장난으로 서늘한 그림자를 드리우는 찰나적인 어둠도 그것으로 그만이었다.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것이다.

저 구름도 햇빛도, 먼 벌판에 민대머리로 빛나는 구름도, 가끔 거웃처럼 웃자라 있는 몇 그루의 나무도 다시는 만나지 못할 것이다

그가 지나온 5번 도로로, 101번 도로도, 죽음의 계곡도, 사막도, 베이커스필드도 다시는 만나지 못할 것이다. 잠들어 있는 사람들의 얼굴들. 이름을 기억할 수 없는 사람들. 그들의 목소리, 그들의 웃음소리는 영원히 기억되지 않을 것이며, 그들은 이제 이 한번만의 해후로 영원히 잊혀질 것이다.

그는 준호의 안경을 스피커 옆에서 찾아냈다. 다행히도 안경은 밟혀서 테가 몹시 구부러져 있었지만 안경알은 건재했다. 그는 안경을 들고 소파로 다가갔다. 안경을 찾느라고 시간을 지체하는 동안 준호는 다시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그는 준호의 머리를 거칠게 흔들었다. 신음소리를 내며 준호는 눈을 떴다. 그는 안경을 준호의 얼굴 위에 씌워주었다.

"일어나 벌써 아홉 시 반이야."

"아아."

준호는 하품을 하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유난히 부지런을 떠는 군 젠장. 형은 그래두 일찍 잠이 들었었잖아. 난 다섯 시가 넘어서 눈을 붙였단 말이야."

"떠나자, 떠나면 잠이 안 올 거야. 여기서 시간을 지체할 순 없어."

"씨팔."

그는 웃었다.

"외박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려는 사람 같애. 여긴 미국이야, . 로스앤젤리스로 돌아가 봤댔자 반겨줄 사람도 없어. 로스앤젤리스가 서울인 줄 아슈. 젠장할. 아이구 머리가 아파. 머리가 아파 죽겠어. 커피나 한잔 마셨으면 좋을 텐데."

순간 준호의 코에서 붉은 핏물이 맥없이 굴러떨어졌다. 그것은 코피였다.

"얼씨구 코피까지 나는군."

준호는 휴지를 찢어 동그랗게 만든 후 코를 틀어막고서 일어섰다.

"내 양말이 어디 있을 텐데."

그는 더듬거리며 소파 밑을 뒤졌다. 그는 한짝의 양말을 소파 밑에서 찾아내었고 다른 한 짝의 양말을 곤히 잠든 여인의 머리 쪽에서 찾아내었다. 준호는 낑낑거리며 양말을 신다 말고 물끄러미 잠든 여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 이 애의 이름이 뭐였지."

"몰라. 간밤에 난 엉망으로 취했었어."

"맞아."

준호는 낄낄거리며 웃었다.

"형은 미친 사람 같았어. 이 친구들이 깨어나면 형을 떼지어 죽일지도 몰라. 형은 간밤에 너무 심했어. 풀장에도 뛰어 들어갔었다구. 저 레코드판을 깬 사람이 누군 줄 알아. 형이야."

그는 유쾌하게 웃었다.

"형은 어젯밤 저 유리창도 부셨다구. 풀장 옆에 있는 돌멩이를 집어 던져 유리창을 깨었어. 내버려 두면 온 집안을 부셨을 거야. 웃겼어. 형은 미친 사람 같았어. 나중엔 온 집안에 불을 지른다구 설쳐댔었다구."

그는 부끄러웠다.

"그러니까 서두르자. 이 친구들이 깨기 전에."

"이 친구들은 얼굴에 오줌을 싸두 깨어나진 않을거야. 밤새 춤을 추구 마리후아나를 빨구, 술까지 쳐먹었으니까. 지독한 친구들이야."

어느 정도 코피가 멎었는지 준호는 틀어막았던 휴지 조각을 빼서 재떨이에 버렸다.

"갑시다. 젠장."

그는 한데 뭉쳐 잠든 사람들을 밟으며 거실을 가로질렀다. 준호는 냉장고를 열어 주스통과 우유, 그리고 빵조각을 비닐봉지 속에 가득 넣었다.

"커피를 마시면 정신이 날 텐데. , . 커피 좀 먹었으면."

준호는 거실 한 가장자리에 코를 처박고 잠든 사내를 흔들어 깨웠다.

"이봐, 친구. 이봐. 친구."

사내는 짜증 난 얼굴로 무어라고 중얼거리며 눈을 떴다.

"우린 떠나겠어, 친구. 고마웠어. 친구. 가만있자. 이 친구의 이름이 뭐였더라. . 이 집 주인 이름이 뭐였지."

"생각나지 않아."

"가만있어 봐. 어디 주소를 적어 둔 종이가 있을 텐데."

준호는 주머니를 뒤졌다. 그러나 메모지는 어디론가 달아나버린 모양이었다.

"어이 친구."

할 수 없다는 듯 간신히 눈을 떴다. 다시 눈을 감은 사내의 얼굴을 가볍게 두드리며 준호는 소리 질렀다.

"우린 가겠어. 고마웠어. 친구. 로스앤젤리스에 오면 연락하게."

"잘 가."

꿈에 잠긴 목소리로 그는 중얼거렸다.

"하룻밤 신세 졌어요. 우린 갑니다."

그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인삿말을 했다.

"안녕히 가세요. 안녕……"

"갑시다. ."

먹을 것이 든 비닐봉지를 들고 준호는 어느 정도 원기를 회복했는지 기분 좋게 소리 질렀다. 그들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무지막지한 햇빛의 광채가 수천 개의 프래시를 일제히 터트리듯 그들의 얼굴을 공격했다. 밤길을 달려왔으므로 집 앞의 돌연한 햇빛과 진초록의 나무와 장미와 숲들은 일제히 아우성을 치며 덤벼들었다. 새 떼들이 잔디밭 위에 앉아서 귀가 따갑도록 지저귀고 있었다. 집앞 정원에 세워 둔 준호의 검은 차가 없었다면 그들은 돌연히 다가온 이 정원 풍경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어리둥절한 기분이었을 것이다. 준호의 차는 해안에 정박한 낡은 폐선처럼 보였다. 수천 마일을 쉬지 않고 달려왔으므로 비와 눈과 먼지와 흙탕물에 뒤범벅이 되어 더럽고 불결해 보였다. 차장은 먼지로 반투명의 잿빛 유리처럼 더러웠으나 브러시가 만든 부채꼴의 반원만큼은 깨끗했다. 그 낡은 중고차로 일주일 동안 수천 마일을 쉴새없이 달려왔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멕시코 녀석에게 이천 불을 주고 샀다는 볼품없는 구형의 차는 그러나 의외로 견고하고 조그만 고통쯤에는 신음소리 하나 내지 않는 충직한 노예와도 같았다. 그 먼 길을 달려오는 동안 딱 한 번 죽음의 계곡 그 가파른 언덕길에서 왈칵 오바이트한 것을 빼놓고는 내내 건강하고 명랑했다.

그들은 차의 문을 열고 좌석에 앉았다. 차안은 난장판이었다. 여기저기 눌러 끈 담배와 먹다 흘린 빵 조각들. 낡은 옷. 팬트라하우스에서 잘라낸 여인들의 벌거벗은 사진들. 요세미티 공원에서 산 자동차 체인. 일주일 동안에 벌써 낡아 너덜거리는 캘리포니아의 도로망을 상세히 알려주고 있는 지도책. 그러나 막상 앉자 이상한 행복감과 안도감이 충만하기 시작했다.

남은 것은 이 집을 떠나는 일뿐이었다.

"잠깐."

운전대를 잡았던 준호가 깜빡 잊었다는 듯 운전대에서 손을 떼며 그를 보았다.

"큰일 날 뻔했었군. 잠깐만 기다려요. ."

그는 차의 문을 열고 정원을 되돌아 집안으로 사라졌다. 그는 시트 바닥에 굴러떨어져 있는 담뱃갑에서 담배를 한 대 꺼내 피워물었다. 입안이 깔깔해서 담배 맛이 나질 않았다. 그는 시트 바닥에서 간밤에 그들이 유일하게 구원의 메시지처럼 들고 물어물어 찾아왔던 주소가 적힌 메모지를 발견했다. 그는 메모지를 꺼내 보았다.

"정준혁"

그곳엔 그들이 하룻밤 묵었던 집의 주인 이름이 적혀 있었다. 알 것 같기도 모를 것 같기도 한 이름이었다.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사람의 이름이었다. 이곳을 떠난다면 이 지상에 이러한 집이 있었다는 것은 영원히 망각속에 묻혀 버리게 될 것이다. 이곳을 떠난다면 분명히 하룻밤 머물렀던 저 집안에서의 기억은 흔적도 남아있지 않게 될 것이다. 요세미티의 방갈로에서 하룻밤 자고 일어났을 때 아침에 문을 열고 나서자 문득 막아섰던 엄청난 전나무의 꼿꼿한 나무등걸처럼, 아아, 눈덮인 나무숲 너머로 햇살을 받고 빛나던 산봉우리들. 얼어붙은 폭포가 산봉우리에 손바닥에 그어진 손금처럼 흘러내리고 있었다. 푸르다 못해 창백하게 질린 벽고의 겨울 하늘을 등뒤로 하고 눈덮인 산봉우리들은 상아(象牙)의 탑처럼 백골로 우뚝 서 있었다. 그곳을 떠나와 이곳에 있듯이, 이곳을 떠난다면 그 기억들은 뒤범벅된 머리의 갈피 속에 끼어들어 더러는 금방 잊히고 더러는 생선의 가시처럼 틀어박혀 어쩌다 기억이 나곤 하겠지. 그들이 이 집을 떠난다 해도 이 집은 이 집대로 존재할 것이다. 그들이 눈 덮인 계곡을 떠나왔다 해도 그 전나무는 늘 그 자리에 존재하듯이. 그들이 180번 도로를 떠나왔다 해도 늘 그 자리에 그 도로는 놓여 있을 것이다. 프레스노는 언제나 그 자리에 존재할 것이며 샌프란시스코는 그곳에 있을 것이다. 마치 우리가 두터운 책을 읽어내릴 때 눈으로 훑어내리면 내용은 머릿속에 전이되어 기억되나, 페이지는 가차 없이 흩어져 나가버리듯. 책을 거꾸로 읽는 사람은 없듯이 우리는 일단 스쳐 지나온 길을 고스란히 거꾸로 되돌아갈 수는 없는 것이다.

준호가 집에서 나왔다.

그는 파이프와 마리후아나를 가득 담은 담배쌈지를 들고 있었다. 그럼 그렇지, 그가 그것을 그냥 놓고 나올 리는 없었다.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어. "

준호는 만족하게 웃으며 운전대에 앉았다.

"이건 아주 좋은 거야. 아주 비싼 거야. 이 정도면 육십 달러가 넘을 거야."

그는 그것을 소중하게 차 앞 캐비닛을 열고 그 속에 집어넣었다.

"이걸 전번처럼 버리면 그땐 형이고 뭐고 골통을 부셔버리겠어. 알겠수."

"알겠다."

준호는 주머니에서 자동차 키를 꺼내 들고 구멍 속에 집어넣고 비틀어 보았다. 차는 부드럽게 작동했다.

"멋있어. . 이 자식은 정말 멋진 놈이야."

준호는 기분이 좋은 듯 운전대를 쾅쾅 때렸다. 제풀에 클랙슨이 두어 번 크게 울렸다. 잔디밭에 떼지어 앉았던 새들이 놀라서 일제히 박수를 치며 일어섰다.

"갑시다. . 출발이야. 잘 있거라. 이 우라질 놈의 집. 잘 있거라. 덜 떨어진 암놈, 숫놈들아."

차는 일단 후진을 한 후 방향을 잡았다. 그리고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그는 고개를 젖혀서 그가 하루 묵었던 집을 돌아보았다. 회백색의 양옥집은 푸른 초목의 숲속에서 잠시 반짝이며 빛났다가 스러졌다. 뭔가 강렬한 인상을 머릿속에 접목(接木)시켜 두지 않으면 안 된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것은 여행을 떠나고 나서 줄곧 머릿속을 지배해 온 일관된 흐름이었다. 마치 책을 읽다 인상적인 구절이 나오면 귀찮더라도 붉은 색연필로 언더라인을 그어서 표시해 놓듯이. 그래야만 책을 다 읽은 후 책장을 펄럭펄럭이며 대충 훑어보아도 인상적인 장면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이 여행이 끝난 후 집으로 돌아가 먼 후일에라도 머릿속에 각인(刻印)시켜둔 풍경과 많은 기억을 떠올리려면 뭐든 집중력을 가지고 봐 두어야 할 것이다. 방향을 잃은 사람이 밤하늘에 빛나는 별과 나무등걸의 나이테를 보고 방향을 잡듯이.

그러나 그가 하루 머물렀던 집은 기억 속에 새겨놓기 전에 벌써 맹렬한 속도로 달려 나가는 차의 전진으로 아득히 멀어져갔다. 이제는 잊어버릴 의무만이 남아 있는 셈이었다. 그래서 그는 잊기로 했다.

 

2

날씨는 기가 막히게 좋았다. 미국에서도 가장 좋은 캘리포니아의 날씨였다. 비록 겨울이긴 했지만 햇볕은 귤과 오렌지와 그 풍성한 캘리포니아의 채소를 익히는 부드러운 입김을 갖고 있었다. 햇볕은 작은 미립자로 형성된 분말가루 같았다. 습기가 깃들어 있지 않은 햇볕이었으므로 쥐면 바삭 부서져버릴 것처럼 햇볕은 건조해 있었다. 햇볕은 그늘 속에서도 빛나고 있었으며, 야자수의 열매 위에서도 빛나고 있었다. 그늘은 햇볕이 눈부신만큼 짙었지만 금박의 햇볕 가루가 생선 비늘처럼 모여 있었다.

산 호세를 지나 1번 도로를 접어들기 위해서는 우선 101번 도로를 거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살리나스"라는 도시에서 갈라져야만 해안으로 나갈 수 있었다.

운전은 준호의 차지였고, 지도를 읽고 판독하는 것은 그의 몫이었다. 지난 일주일 내내 그들은 그렇게 여행을 해 왔었다. 길이 갈라지는 두어 마일 전방이면 도로 표지판이 우뚝 서서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어쩌다 잠깐 한눈을 팔면 갈라지는 교차점을 놓치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방향감각을 잃어버리게 된다. 무시무시한 속도로 달려가는 고속도로에서 일단 잃어버린 방향을 되찾아가는 것은 최초의 단추를 잘못 채운 외투를 벗고 다시 입을 때처럼 짜증스러운 일이었다.

고속도로에서는 모든 것이 맹렬한 속도로 굴러가고 있었다. 차가 굴러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도로 자체가 무서운 속도로 움직이고 있는 착각에 빠져들게 된다. 그들은 운전대를 잡고 가만히 앉아 있는 느낌을 받는다. 도로는 미친 듯이 질주하고 도로 양옆에 키 큰 농구선수들처럼 서있는 야자수 나무들은 휙휙 스쳐 지나간다. 모든 차들은 일정한 골을 향해 볼을 쥐고 달려가는 운동선수처럼 대시하고 있으며 야자수나무들은 그 공을 방해하는 농구선수들처럼 막아서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거대한 에스컬레이터 속에 갇혀 있는 환상을 불러일으킨다. 그런 맹렬한 속도감에서 잠시 한눈을 팔면 간선도로를 알리는 도로 표지판을 잃어버리게 되는데 일단 방향을 잃어버리면 자동기계 속에서 스스로 조립되고, 절단되고, 포장되는 상품처럼 조잡한 불합격품이 되고 마는 것이다.

도로는 거대한 이동 벨트이며 그 위를 굴러가는 차들은 빠르게 조립되는 상품들처럼 보인다. 운전을 하는 준호나 쉴새 없이 방향을 잡고 주의를 환각시키는 그나 무시무시한 메커니즘에 이기는 길은 살인과도 같은 전쟁에서 쓰러지지 않는 길이었다. 지도는 그들의 유일한 나침반이었다.

"어떻게 된 거야. 나올 때가 되었어. "

산호세를 출발해 101번 도로를 따라 미친 듯이 달려오던 준호는 삼십 분쯤 지나자 숨 가쁜 소리를 질렀다.

"잘봐. 씨팔. 한눈팔지 말어. 살리나스야."

"알구 있어. 줄곧 지켜보구 있다니까."

그는 충혈된 눈으로 소리 질러 말을 받았다.

모간 힐. 길로이. 프런데일에서 156번 간선도로가 갈려 나간다. 차는 방금 프런데일을 지났다. 프런데일을 지나면 산타리타다. 산타리타를 지나야만 살리나스다. 산타리타를 지나야만 1번 도로를 빠져나가는 간선도로 표지판이 고속도로에 서 있을 것이다.

"살리나스, 살리나스"

그는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중얼거린다. 살리나스는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샌프란시스코와 로스앤젤리스로 가는 도로 위에 위치한 작은 도시에 지나지 않는다. 미국의 도시는 어느 도시건 같다. 크고 작은 차이만 있을 뿐, 같은 빌딩과 같은 고속도로와, 같은 수퍼마킷, 동일한 이름의 햄버거집, 거대한 체인스토아. 같은 얼굴, 같은 말, 같은 문화를 갖고 있다. 도시는 의례 검둥이들의 세계이며, 도시의 다운타운은 무질서한 낙서와 더러운 휴지 조각들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그는 늘 배반당하면서도 다가올 "살리나스"란 도시는 뭔가 다를 것 같은 희망을 갖고 있다.

"살리나스, 살리나스"

그는 간이역을 알리는 역원의 목소리처럼 장난스레 중얼거렸다.

"다음 역은 살리나스입니다. 살리나스에 내리실 분은 미리 미리 준비해 주십시요."

살리나스 salinas. 에스. 에이, . 아이. . 에이. 에스. 살리나스.

그곳엔 무엇이 있는가. 공룡이 있을까. 아직 발견되지 않은 유인원의 두개골이 햄버거집 계단에 묻혀 있을지도 모른다. 금광을 캐기 위해 서부로 달려 들어오던 백인을 죽이던 독 묻은 화살촉이 마당에 묻혀 있을지도 모른다. 살리나스, 살리나스 어디서 많이 듣던 이름이다. 존 스타인벡의 소설, 에덴의 동쪽의 무대가 살리나스였었지, 아마, 그 자식은 살리나스를 에덴동산으로 비유했었어.

그는 수천 마일을 여행해 오면서 때가 되면 미국 어느 도시에서나 볼 수 있는 동일한 간이음식점에 들어가서 식사를 하곤 했었다. 똑같은 구조와, 똑같은 가격, 똑같은 양, 똑같은 메뉴의 간이음식점 의자에 앉아 핫도그를 먹고, 아이스크림을 먹을 때면 음식점 한구석에 비치해 둔 전자오락 기계 앞에서 그 도시 젊은이들이 열중해서 우주에서 쳐들어온 외계인을 죽이는 모습을 보곤 했었다.

그는 식사하는 동안만 그 도시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곳에서 태어났으며, 그곳에서 자라고 때가 되면 사타구니에 털이 돋아날 것이며, 열애를 할 것이며, 그리고 결혼을 하고 늙어갈 것이다. 태어난 곳에서 죽을 것이다. 때로는 태어난 고향을 떠나겠지. 운이 나쁜 녀석은 이미 한국전쟁에서, 월남 정글 속에서 죽었을지도 모른다. 그들의 전 인생이 그에게는 삼십 분에 불과했다. 그가 빵을 먹고 아이스크림을 먹는 동안 그들은 전 인생을 그곳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그가 이제 식사를 끝내고 그 낯선 음식점과, 낯선 도시를 떠난다면 그들은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살리나스.

그곳에 무엇이 있을까. 그 똑같은 음식점 구석에 서서 애꿎은 외계인을 죽이는 젊은이들이 태어나서, 자라고, 사랑하고, 애를 낳고, 죽어가는 우스꽝스러운 곡예를 변함없이 펼치고 있겠지.

"뭐 하구 있어. 살리나스야. 뭘 하는 거야."

그는 옆좌석에서 벼락같이 소리 지르는 준호의 외친 소리에 정신이 번쩍 정신이 들었다.

"형은 좀 이상해. 넋이 나간 사람 같아. 미친 거야. 씨팔. 어떻게 된 거야. 깜빡 졸았어."

차선을 바꾸기 위해서 회전등을 켜고 쉴새 없이 차의 뒤쪽을 바라보며 준호는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1번 도로를 알리는 마지막 표지판이 고가 다리 위에 붙여져 있었다. 도로 표지판은 의례 서너 개의 간선 진입로 전부터 씌어있기 마련이었다. 도로 표지판은 앞으로 있을 세 개의 간선 도로망을 안내해주고 있는데 차례가 되면 맨 밑 부분에 씌어진 도로 이름이 윗부분으로 올라가게 된다. 그것은 그 도로가 임박했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는 신호이기도 했다.

차는 아슬아슬하게 1번 도로로 빠져들었다. 겨우 안심했다는 듯 준호가 그를 보며 말했다.

"배가 고프슈, 그럼 빵을 먹어. 어떻게 된 거야. 길 안내조차 제대로 할 줄 모르니."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배도 고프지 않았다.

차는 "살리나스" 도시 옆을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그곳엔 유인원의 두개골도 인디언의 화살촉도 남아 있지 않았다. 고속도로 양옆으로 똑같은 야자수와 집들과 거리가 스쳐 지나가고 있을 뿐이었다.

이젠 곧장 1번 도로를 따라 내려가면 되었으므로 어느 정도 심리적 안정감을 느꼈는지 준호가 라디오의 음악을 틀었다. 그는 음악을 몹시 크게 듣는 버릇을 갖고 있었다. 차 속에서 음악을 듣기 위해서 실내 앰프까지 설치해 둔 그는 있는 대로 볼륨을 높이는 나쁜 버릇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음악을 감상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음악의 비()속에 갇혀 있는 기분이었다. 차안은 굳게 닫혀 있으므로 작은 밀도 같다. 달리는 작은 밀실 속에서 스테레오의 음향이 귀를 찢을 듯이 들려온다는 것은 차라리 고통이었다. 그러나 그는 될 수 있는 대로 내색을 하지 않기로 마음을 굳게 먹었다.

준호는 그의 고등학교 이년 후배였다. 그의 동생과 같은 나이 또래고 또한 절친한 친구였으므로 보통 이상의 친밀감을 갖고 있었다. 그가 로스앤젤리스에서 준호 그를 만난 것은 전혀 우연이었다.

그는 여행을 떠나온 길이었고, 준호 역시 여행을 떠나온 길이었지만 목적하는 바는 달랐다. 준호는 여행을 떠나온 김에 아예 미국에서 눌러살려고 작정을 하고 있었다. 준호는 한때 제법 이름이 알려진 가수였고, 그의 노래 가사말을 그가 몇 개 써준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인기 절정에서 소위 대마초를 피운 죄로 지난 4년간 무대를 빼앗긴 불운한 과거를 가지고 있었다. 노래를 부르지 못하는 동안 그는 이것저것 사업에 손을 대어 제법 돈도 모았지만 결국 끝내는 빈털터리가 되고 말았다.

그는 CM도 작곡하고 양복점도 하고 나중에는 제주도에서 밀감농장을 경영하기도 했었지만 그의 방랑벽이 그를 빈털터리로 만들어버렸다. 결국 대마초 가수들을 구제한다는 발표가 난 후에도 그는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노래를 부르기엔 너무 늙었으며, 좋지 않은 목소리를 갖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두 아이와 아내를 갖고 있는 가장이었는데 우연히 미국을 여행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으며 이 기회를 이용해서 일단 해외로 빠져나왔지만 이미 돌아갈 시간은 초과되어 있었다. 그는 내친김에 미국에 눌러앉겠다고 말했었다.

그가 준호에게 왜 돌아가지 않느냐고 묻자 그는 대답했었다.

"무서운 나라야. 난 악몽에서 깨어난 것 같아. 씨팔, 난 미국에서 살 거야."

그는 지난 4년간 어쩔 수 없이 낭인(浪人)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던 쓰라린 과거가 준호를 그렇게 만들었다고 애써 생각하려 했었다. 그는 알고 있었다. 준호를 위시해서 많은 젊은 가수들이 만약 중독자로 몰려 두들겨 맞았으며, 정신병원에 수용되기도 했었으며, 끝내는 사회의 도덕적 패륜아로 지탄받고 격리되어 있었던 쓰라린 과거를. 그들을 마약 범법자로 다루었다면 길어야 일 년 집행유예 정도로 끝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사회적 여론으로 두들겨 맞았으며, 그리고 언제까지라고 정해지지 않은 이상한 압력으로 재갈을 물리고, 격리되었던 것이다. 그것이 그에게 우연히 해외로 나온 여행을 밀입국자의 신세로 전락시키게 한 동기가 되었을 것이다.

그는 빈털터리였다. 여행을 할 때 갖고 나온 돈은 바닥이 났으며 더구나 그 돈에서 나머지 부분을 모두 중고차 한 대 사는 데 써버린 것이었다. 차가 없으면 로스앤젤리스에서는 꼼짝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불과 이 개월 동안 머물면서 뼈저리게 느낀 모양이었다. 그는 뉴욕과 시카고를 걸쳐 로스앤젤리스로 숨어들어온 길이었다. 준호는 방 하나를 빌려주는 다운타운의 싸구려 하숙방에서 지내고 있었다. 한달에 백불만 내면 방을 빌려주는 유령과 같은 집이었다. 빅토리아풍의 거대한 저택은 한때는 꽤 화려한 고급저택이었지만 할렘가에 위치하고 있었으므로 더럽고 타락한 멋대가리없이 크기만 한 집이었다.

준호는 그 방에서 아무런 대책 없이 지내고 있었다. 여행 기간은 이미 만료되었으며 일차로 연장한 여권 기간도 며칠 있으면 끝날 판이었다. 처음엔 그를 반겨주던 친구들도 하루 이틀이 지날수록 그를 경원하게 되었으며 그가 돌아가지 아니하고 어떻게 해서든 이곳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려는 계획을 안 순간부터 그를 만류하고 그를 비웃고 마침내는 상대할 수 없는 인물로 백안시하고 있었다. 준호는 자기가 여권 기간을 더 이상 연장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한국 영사관 측이 납득할 만한 다른 이유를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미 한국을 떠난 지 반년이 넘어가고 있었으며, 그는 상대적으로 미국 생활에는 익숙해져 가고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여행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정식으로 이민해 온 사람도 아닌 어정쩡한 이방인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는 단돈 이십 달러면 놓을 수 있는 전화를 가설하고 밤이나 낮이나 받는 사람이 부담으로 하는 국제전화만 걸어대었다. 며칠 동안 준호의 싸구려 하숙방 침대에서 함께 자 본 일이 있는 그로서는 밤이건 낮이건 때도 없이 국제전화를 거는 준호의 고함소리를 꿈결 속에서 듣곤 했었다.

"나야 나, 뭘 하니. 여긴 미국이야. 여긴 로스앤젤리스야. 거긴 어떠냐. 눈이 오니, 눈이 많이 온다구. 거리가 막혔겠구나. 여기야 눈이 올 리가 없지. 여긴 언제나 여름이니까 말야. 뭐 재미있는 일 없니, 너 목소리가 왜 그래 감기 걸렸구나. 여편네하구 잘 땐 이불 덮구 자라구. 이 새끼야 하루에 몇 탕 뛰니. 몸조심해. 우라질 새끼야, 가끔 내 마누라 좀 만나니. 가끔 불러내서 밥이라두 사줘라. 그렇다구 데리고 자란 소리는 아냐."

준호의 수첩에는 그가 알고 있는 모든 친구, 모든 사람, 방송국, 회사, 한때 알고 지내던 여자 친구들의 전화번호가 깨알같이 적혀 있었다. 그는 하룻밤에도 몇 차례씩 받는 사람 부담으로 하는 국제전화를 걸곤 했었다. 그는 그런 전화가 되풀이될수록 상대편이 싫어하리라는 것을 모르는 어리석은 녀석이었다. 처음에 한두 번은 의례적으로 전화를 받아주지만 그 통화료가 엄청나는 것을 안 뒤부터는 그의 전화를 기피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듯 무턱대고 전화를 걸곤 했었다.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준호가 마침내는 아무에게도 전화를 걸 수 없게 될 것이며 그 누구도 통화를 할 수 없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준호는 나머지 돈 중에서 상당 부분을 마리후아나를 사는 데 써버리고 있었다. 지난 사 년간 바로 그 마()의 풀잎으로 쓰라린 경험을 맛보았는데도 불구하고 준호는 피와 같은 돈을 아낌없이 마리후아나를 사는데 써버렸으며 그는 밤이건 낮이건 그 독()에 취해 있었다. 그는 한 개의 빵보다도 마리후아나를 피웠으며 마리후아나는 그의 모든 것이었다. 마리후아나는 그의 빵이었으며, 술이었으며, 물이었으며, 그의 피였다. 그는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그것을 피웠으며, 차를 타고 가면서도 그것을 피웠다.

그가 그것을 다시 피운다는 사실은 로스앤젤리스 한국 사람들에게 파다하게 소문이 번져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구제할 수 없는 녀석, 도덕심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놈, 염치없는 새끼로 취급하고 있었다. 마리후아나를 사기 위해서 친구들에게 돈을 구걸하는 놈이라고 준호를 인간쓰레기 취급하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로스앤젤리스에서 생활한 지 석 달 만에 그는 철저한 거렁뱅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아무도 그를 찾아가지 않았다. 그는 서서히 죽기를 작정하고 날마다 마시고 먹는 술과 밥 속에 일정한 미량의 독()을 넣어두는 자살자와도 같았다.

그가 우연히 준호를 만났을 때 준호는 그에게 말했었다.

"잘 됐어, . 나하고 함께 이곳에서 눌러삽시다."

그에게는 아무런 대책도 없었다. 뭘 어쩌자는 것인지, 이렇게 살다 보면 남아 있는 그의 가족들은 어떻게 할 것인지, 구체적인 대안이나 계획도 없이 그는 마리후아나에 젖어 풀린 눈으로 킬킬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씨팔, 아이들은 고아원 보내고 아내는 돈 많은 홀애비한테 시집이나 가라지 뭐, 언젠가는 만나게 되겠지요. 씨팔."

준호와 여행을 떠난 후부터 그는 될 수 있는 대로 신경을 가라앉히려고 마음 굳히고 있었다. 아무리 절친한 사이라도 여행을 하다 보면 서로의 단점만 극명하게 드러나 보이기 마련이었다. 그래서 하찮은 일에도 언성을 높이고, 으르렁거리고, 증오하고, 폭력을 휘두르게 되는 법이다.

이미 요세미티 공원 입구에서 그들은 대판 싸웠다. 요세미티가 고산지대이고 겨울철이기 때문에 눈이 덮여 있으리라는 것쯤은 상식적인 일이었다. 그런데도 두 사람은 자동차 체인을 준비하지 않았었다. 진입로 입구에 선 교통안전 순시원이 체인을 감지 않은 그들을 통과시켜 주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별 수 없이 체인을 사기 위해서 오십 불이라는 거액을 예기치 않게 쓸 수밖에 없었다. 준호도 그도 자동차의 바퀴에 체인을 달아본 적은 없었다.

체인을 파는 주유소의 늙은 주인이 수수료를 주면 체인을 달아준다고 했는데 그 값은 삼십 불이었다. 삼십 불을 주고 체인을 다는 것은 미친 짓이었다. 그들은 눈이 쌓인 주유소 뒤뜰에서 체인을 감기 위해서 악전고투를 했었다. 눈발이 시야를 가릴 정도로 몰아치고 있었다.

그는 차바퀴에 체인의 끝부분을 가지런히 얽어매어 들고 있었고 차는 한바퀴 구를 정도만 전진시키도록 약속했었다. 그러나 그것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하마터면 거친 차의 반동으로 체인을 든 그의 손이 차바퀴 속으로 말려들어갈 뻔했다.

"주의해. 하마터면 손이 으스러질 뻔했어."

그는 구르는 차의 바퀴에서 손을 급히 빼려다가 차체의 날카로운 금속 부분에 긁혀서 피가 나오는 손을 들여다보며 으르렁거렸었다. 손은 얼어붙은 눈에 얼음처럼 굳어 있었다.

"그걸 놓으면 어떻게 해."

운전대에 앉은 준호도 지지 않고 맞받아 소리질렀다.

"체인이 겨우 감아지는 판인데 그걸 놓치면 어떡하냐구, 씨팔."

"손이 부러질 뻔했어 이 쌕기야. 손이 바퀴에 들어가 으스러질 뻔했다구."

그는 피가 흐르는 손을 준호에게 내어 밀었다. 순간 준호는 그의 손을 뿌리치며 소리질렀다.

"겁 좀 내지 말어, 무서워 좀 하지 마. 손이 부러지진 않으니까."

그는 그때 아직 남아 있는 자동차의 체인을 보았다. 그는 거친 동작으로 자동차의 체인을 집어 들었다. 그는 감당할 수 없는 살의를 느꼈다.

"차에서 내려 이 쌔끼야."

준호가 무어라고 중얼거리며 달래듯 웃었다.

"체인이 필요한 건 자동차 바퀴지 내 얼굴이 아니야."

그는 준호의 머리칼을 움켜쥐고 자동차의 시트에 함부로 쥐어박았다. 준호는 의외로 얌전하게 그의 폭력을 감수하고 있었다. 갑자기 준호의 양순한 비폭력이 그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필요 이상으로 신경질을 부린 자신에 대해서 그는 침이라도 뱉고 싶은 모멸감을 느꼈다. 그러나 새삼스레 준호에게 사과를 하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었다. 어쨌든 두 사람은 하나의 공동운명체라는 사실이 가라앉은 분노 뒤끝에 참담하게 스며들고 있었다.

준호의 골통을 자동차 체인으로 부셔버린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어떻게 해서 저 눈 덮인 산을 넘을 수 있을 것인가. 애초부터 끓어오르는 분노와 적의는 그 준호의 탓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의 마음에 가득히 있는 일관된 흐름이 있었다.

지난가을 김포 비행장을 떠났을 때부터 그의 마음속에는 절박한 분노와 자포자기적 울분이 용암처럼 끓어오르고 있었다. 그는 그런 의미에서 여행을 떠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도망쳐 온 셈이었다. 그는 디즈닐랜드에서도, 유니버셜 스튜디오에서도, 허리우드에서도, 한국인 식당에서도, 허리우드의 싸구려 창녀 아파트에서도, 그녀의 금발 음모 위에 입을 맞추면서도, 내내 가슴속에서 분노의 붉은 혀가 쉴새 없이 낼름거리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자동차의 체인이 그를 화나게 한 것은 아니었다. 준호의 버릇없는 말대꾸가 그를 분노케 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모든 것, 보고, 듣고, 말하고, 느끼는 그 모든 것에 분노하고 있었다. 그는 김포 공항을 떠나면서 줄곧 분노하고 있었다. 그를 전송하기 위해 따라 나온 아내의 눈과 두 아이의 고사리 같은 손에도 분노하고 있었으며, 짐을 체크하는 세관원의 손끝에도 분노하고 있었다. 그즈음 결혼한 뒤 처음으로 부부싸움 끝에 아내를 때렸다. 아내는 그에게 울면서 말했다. 당신은 변했어요. 당신은 이상해졌어요. 한 회분씩 쓰는 신문 소설에도 분노하고 있었으며, 그가 쓰는 모든 소설에도 분노하고 있었다. 활자화된 문장을 보면서도 분노하고 있었다. 분노를 참을 만한 절제는 나사가 풀려 그의 용솟음치는 분노의 힘을 감당치 못하고 있었다. 그는 그의 작품이 영화화된 극장 앞에 쭈그리고 앉아서 늘 상한 짐승처럼 이를 악물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분노에 겁을 집어먹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 피로해진 탓이라고 생각했다. 신경쇠약이 재발된 모양이라고 그는 스스로 심리분석을 해보기도 했었다. 지난 십여 년 동안 한시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혹사한 탓으로 신경이 팽팽한 바이올린의 현처럼 끊어져 버린 모양이라고 자위해 보기도 했었다. 그런 참을 수 없는 분노는 더 이상 긴장과 자제로서도 눌러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분노는 그의 입을 뛰쳐나오고, 그의 손끝을 불수의(不隨意) 근육처럼 움직였다. 술좌석에서 그는 술만 마시면 마주앉은 사람들과 싸웠고 어떤 때는 병을 깨고 술상을 뒤집어 엎어버리기도 했었다. 그가 여행을 떠나온 것은 그런 모든 분노의 일상생활에서 도망쳐 온 것이었다.

밤늦게 로스앤젤리스의 공항에 내려서 긴 복도를 걸어가며 그는 자신이 도망쳐왔다기보다는 망명(亡命)해 온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바았다. 그렇다, 그건 여행도 아니었고, 까닭 없이 치미는 분노의 일상에서부터 탈출해 온 것도 아니었고 망명의 길을 떠나온 것이었다. 그는 정치가가 아니었으므로 정치적인 망명을 해 온 것은 아니었다. 그는 음악가가 아니었으므로 예술의 자유를 획득하기 위해서 망명해 온 것은 아니었다. 그는 그렇게 비유하는 것이 감히 허용된다면 그저 하나의 평범한 지식인에 불과할 따름이었다. 그는 언젠가 소련에서부터 음악의 자유를 얻기 위해 서방으로 망명했던 유명한 파아니스트 아쉬케나지오 인터뷰를 한 적이 있었다. 그에게 왜 조국 소련을 버렸느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말했었다. 난 피아노 앞에 내가 원할 때 언제라도 앉을 수 있는 자유를 얻기 위해서 망명을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원하지 않을 때 언제라도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자유를 얻기 위해서도 망명을 했읍니다.

그러면 나는 무엇인가, 무엇을 위해서 망명을 한 것일까. 보다 큰 자유를 위해서 망명을 떠나온 것일까, 분노로부터의 망명인가, 숨 막히는 일상으로부터의 망명인가.

"어젯밤 일이 생각나우."

여전히 귀를 찢을 듯한 요란한 음악의 홍수 속에 갇혀 반은 음악감상과 반은 운전에 몰입한 꿈꾸는 듯한 미소를 띠며 준호가 그를 돌아보았다.

길은 팔 차선의 고속도로부터 사 차선의 간선도로로 한결 좁아져 있었다. 바다는 아직 어느 곳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차는 유명한 피서지인 몬트리올 해안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형은 어젯밤 미친 사람 같았어."

"그 음악 좀 낮춰라."

그는 될 수 있는 대로 감정을 나타내지 않는 낮은 목소리로 말을 뱉았다. 준호는 볼륨을 죽였다.

"지금쯤 그 새끼들은 모두 잠에서 깨어났을 거야. 어쩌면 형을 찾아나선지도 몰라. 왜냐하면 형은 어젯밤 완전히 미쳤으니까."

"난 기억나지 않아. 아무것도 기억할 수 없어."

"형은 어젯밤 위스키를 반병이나 나발 불었어. 첨엔 잘 나갔지. 인사도 하고, 악수도 하고, 춤을 추었어. 그때까진 좋았어. 그런데 갑자기 발광하기 시작했었어. 그 쌕끼들이 형과 말다툼을 하기 시작했어. 그들이 형에게 말했어. 우리는 미국 시민이다. 한국은 더 이상 우리들의 조국이 아니다. 그러자 형은 갑자기 날뛰기 시작했어. 어떻게 된 거야. 형은 애국잔가. 정말 웃겼어. 난 형이 그토록 애국자인지 몰랐어. 형은 소리를 버럭버럭 질렀어. 함부로 말하지 마, 이 쌕끼들아. 너희들은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는 놈들이야, 하구 말이야. 정말이지 큰 실수였어. 형은 뭐야. 민족주의잔가. 형은 레코드판을 부수고 유리창을 깨었어. 우리가 말리지 않았다면 모든 유리창을 다 깨었을 거야. 생각나?"

"생각나지 않아."

그는 침통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것은 거짓말이었다. 자욱한 아침 안개 속에 드문드문 드러나 나무의 등걸처럼 어렴풋이 간밤의 기억이 연결되지 않고 고립된 섬처럼 떠오르고 있었다.

"난 그렇게 화를 내는 모습은 본 적이 없었어. 형은 깡패 같았어. 미친 사람 같았어."

드디어 폭발했다.

그는 팔짱을 끼고 묵묵히 생각했다. 기어코 잠재되어 있던 분노가 방아쇠를 당긴 총알처럼 뛰쳐나갔다. 극심한 피로 끝에 마신 술기운이 그의 억눌린 분노의 용수철을 잡아당긴 모양이었다.

"그들은 형과 골치 아픈 정치 얘기를 하자는 것은 아니었어. 그들은 그저 즐기기 위해서 정치 얘기를 꺼낸 것뿐이었어. 그건 즐거운 일이니까 말야. 그들은 모이기만 하면 궁정동 파티때 여배우 누구누구가 앉아있었다는 화제를 꺼내고 그걸 즐기기 위해서 되풀이하는 것뿐이야. 고의적인 것은 아니었어. 그런데 형이 지나치게 오버 액션한 거야. 그들은, 그들은 고마운 놈들이야. 그들은 우리를 재워줬어. 술도 주고, 빵도 주었어. 그리고 우린 그 집에서 주스와 빵과, 우유와 마리후아나를 훔쳐 나왔어. 나두 그놈들이 뭘 하는 놈들인지 몰라. LA 한국음식점에서 만난 것뿐이야. 샌프란시스코에 오면 한 번 들려달라고 주소를 적어주더군. 그 뿐이야. 그런데 형이 그들의 파티를 망쳤어. . 바다야. 저것 봐, 바다야. 태평양이야."

준호는 갑자기 탄성을 울리며 클랙슨을 울렸다. 그는 차장 밖을 목을 빼어 바라보았다. 몬트리올 관광지대로 넘어가는 언덕 위로 바다가 보였다.

해안선을 따라 수많은 요트와 배들이 부두에 매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바람을 타고 바다 냄새가 비릿하게 풍겨왔다. 인근 도시에서 차를 타고 온 주민들이 바닷가 부두에 차를 세우고 해바라기를 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아직 본격적인 바다는 시작되지 않고 있었다. 갈매기들이 종이연처럼 바람에 쓸려 날리며, 부둣가에 세워진 요트의 돛과 보트의 마스트 위로 솟구치고 있었다. 제방둑에서 나이 든 할아버지 하나가 갈매기들에게 먹이를 주고 있었다. 수많은 갈매기들이 노인의 주의를 새카맣게 모여들고 있었다.

갈매기들은 인간에게 익숙해 있는 것처럼 보였다. 노인의 머리 위에도, 손바닥 위에도 갈매기들은 서슴지 않고 앉아서 그가 나눠주는 먹이를 날카로운 부리로 쪼아대고 있었다. 도시로 흘러 들어온 바닷물은 파도도 없이 잔잔해서 거대한 호수처럼 보였다. 정오의 햇살이 프라이팬 위에서 끓는 기름처럼 부서지고 있었다.

"몬트리올이야. 세계에서 돈 많은 놈들이 모여 산다는 유명한 별장지대야."

길 양옆으로 울창한 수풀이 전개되었다. 숲속에는 고급 주택이 고성(古城)처럼 솟아있었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막기 위한 방풍림이 병풍처럼 둘러서 있는 숲 사이로 파란 잔디가 보였다. 잔디밭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떼지어 몰려 있었다. 그것은 골프장처럼 보였고 마치 대회라도 벌이고 있는 것일까. 많은 사람들이 한 사람의 뒤를 쫓아 느릿느릿 걷고 있었다.

"영화 속에 나오는 바닷가의 풍경은 모두 이곳에서 찍는다구. 저 집들 좀 봐. 도대체 저 집엔 어떤 놈들이 살고 있을까. 어떤 새끼들이 저런 엄청난 집에서 살고 있을까. 몬트리올 일대를 좀 보겠어. 여긴 유명한 관광지대라구."

준호는 흥분한 사람처럼 쉴새 없이 떠들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아무런 흥미도 느끼질 않고 있었다.

로스앤젤리스에서 단지 고급 주택이 밀집해 있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비버리 힐을 샅샅이 누비며 소위 집구경 한 적도 있었다. 비버리 힐은 과연 소문대로 엄청나게 좋은 저택들이 열대지방의 울창한 숲속에 펼쳐져 있었다. 그것은 집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성()들이었다.

"난 저런 집에서 살 거야. , 백인 관리인을 두고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영화에 나오는 뚱뚱한 흑인 같은 하인을 두고 저린 집에서 살 거야. . 놀라지 말어. 저 집들 중에는 우리나라 사람도 살고 있어. 난 소문을 들었어. 우리나라에서 몇백만 불 재산을 해외 도피시켜 가지고 나온 전직 고관들이 저 안에서 숨어 살고 있다고 그러는 거야. 그 사람들은 개인 경호원까지 두고 있다는 거야. 웃기는 놈들이야. 우리들 세금으로 재산 만들어 해외로 도망쳐 나온 놈들이야. . 내 재산을 팔아 모두 해외로 가져온다면 얼마나 될까. 아파트가 하나 있어. 그걸 팔면 십만 불은 되겠지. 제주도에 있는 감귤 농장을 팔면 글쎄 오만쯤 받을 수 있을까. 십만 불은 받을까. 가지고 있는 가구, 텔레비전, 냉장고, 전축, 모든 것을 팔면 오만 불은 챙길 수 있을까. 그럼 이십 오만 불은 되는 셈이군. 이만하면 어때. 형 나도 부자야. 미국에서 캐쉬로 이십오만 불을 가진 놈이 누가 있을라구."

그는 준호가 허세를 부리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준호가 겨우 작은 아파트 한 채만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제주도의 감귤 농장은 이미 경영실패로 남에게 넘어간 지 오래라고 자기 입으로 이야기하지 않았던가. 준호는 모래성을 쌓는 어린아이처럼 멋대로 상상하고 멋대로 꿈을 부풀리는 유치한 게임을 즐기고 있는 것뿐이었다.

그는 비버리 힐의 엄청난 저택에서도, 디즈닐랜드의 정교한 인형에서도, 유령의 집에서도, 죽음의 계곡의 그 황량한 벌판 속에서도, 라스베가스의 불야성 같은 밤의 야경 속에서도, 요세미티의 눈 덮인 설경 속에서도 아무런 충격도, 감동도 받지 않았었다.

그는 철저한 불감증 환자였었다. 그것은 "크다"는 느낌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는 호기심 때문에 여행을 떠나온 것은 아니었다.

비버리 힐을 보기 위해서, 허리우드에서 목구멍 깊숙이라는 섹스 영화를 보기 위해서, 디즈닐랜드의 병정 인형을 보기 위해서 여행을 떠나온 것은 아니었다.

그는 아무것도 보지 않기 위해서 여행을 떠나온 것뿐이었다. 그는 장님과 다름없었다.

미국으로의 여행은 그가 스스로 선택한 유배지(流配地)로의 여행이었다. 미국의 풍요한 문명과, 엄청난 자연 풍경은 그에게 아무런 무서움도 열등의식도 불러일으키지 못하였다. 그는 아주 작은 하나의 섬에서부터 배를 타고 대륙의 뭍으로 귀양온 죄인에 불과했다.

대륙에서 본다면 그가 태어나고, 자라고, 사랑하고, 교미를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늙어 죽어갈 그의 섬은 조그만 촌락에 지나지 않았다. 나뭇가지 위에 열린 나무 열매 하나 때문에 이웃과 싸우고, 동리를 가로지르는 냇물 하나 때문에 전쟁을 일으킨 가엾고도 어리석은 원주민들의 섬이었다. 그가 자신은 지성인이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은 기껏해야 닭은 다리가 두 개이며, 개는 다리가 네 개라는 사실을 구별할 줄 아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는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셀 수 있는 사람이었으므로 지성인이었으며 그는 태양이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진다는 것쯤은 물론 알고 있었다. 그는 그가 아는 모든 것을 원주민들에게 가르쳐 주는 것만이 지성인의 역할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아직 다섯까지의 숫자밖에 모르는 원주민들에게 여섯과 일곱과 여덟을 알려 주었으며, 그가 알고 있는 모든 지식은 어느 날 명령에 의해서 불법으로 인정되었다.

미국의 풍요가 내개 무엇이란 말인가. 미국의 자유가 내게 무엇이란 말인가. 미국의 병정 인형과 아름다운 정원이, 웅장한 저택과 핫도그와 아이스크림이, 사막과 설원이 내게 무엇이란 말인가. 그의 가슴속에는 터질 듯한 분노 이상의 아무런 감정도 존재하지 않고 있었다.

준호의 말대로 그 역시 가지고 있는 집과 그가 소유하고 있는 가구와 지금껏 고생해서 벌은 그 모든 것을 팔아버린다면 그는 겨우 이 거대한 미국의 거리 한 모퉁이에 자그마한 빵가게 정도는 낼 수 있을 것이다.

"."

갑자기 준호가 소리를 질렀다.

"바다야. . 바다야."

바다가 활짝 젖혀진 커튼 뒤에 나타나는 무대 위의 풍경처럼 돌연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것은 예기치 않았던 풍경의 전개였다.

바다는 푸르다 못해 검었으며 거친 파도가 벼랑을 할퀴고 있었다.

시야는 막힌 데 없이 투명했다. 이미 도로는 이 차선으로 좁아졌으며 길 아래로 칼로 베인 것 같은 벼랑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태양은 이글이글 불타고 있었으며 바다의 수평선은 좀더 하늘로 밀착되려는 욕망으로 팽팽히 긴장되고 있었다. 벼랑 아래는 분노에 뒤틀린 바윗덩어리들과 붉은 황토흙이 입을 벌리고 아우성치고 있었고 거센 파도가 산기슭을 질타하고 있었다.

우와와――와와와――거센 바닷바람이 열린 차창 틈으로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으며 하늘로는 바람에 쓸려가는 갈매기들이 목쉰 소리로 울며 날고 있었다. 그들이 가야 할 도로는 바다로 흘러내린 벼랑과 깎아 지른 듯 붉은 단애(斷崖)의 산기슭 사이로 도망치고 있었다. 바닷가로 흘러내린 벼랑에는 쓸모없는 풀더미들이 웅크리고 웃자라고 있었다.

준호는 바다가 잘 보이는 지점에 차를 세웠다. 그는 차의 캐비닛을 열어 파이프와 마리후아나를 꺼내었다. 그는 부스러기 하나도 흘리지 않으려고 주의하며 마리후아나를 손끝으로 딱딱하게 짓이겨서 파이프 속에 집어넣었다. 파이프 속엔 얇은 섬유망이 그물처럼 떠받치고 있었다.

그는 준호의 버릇을 잘 알고 있었다. 무엇이건, 아름다운 풍경을 보면 준호는 버릇처럼 파이프를 꺼내 들곤 했었다.

그것을 피우면 아름다운 풍경이 더욱 광채를 띠고 강조되어 빛나오는 것일까. 아니면 대자연의 경관 속에서 느껴오는 밑도 끝도 없는 고독감과 절망감을 달래기 위해서 환각이 필요하게 되는 것일까. 잠을 자기 위해 침대 위에 누우면 으레 준호는 마리후아나를 볼이 메이도록 빨곤 했었다.

그것을 피우면 모든 풍경이 그가 원하는 대로 변질되는 것일까. 무엇이 그를 쓰라린 지난 사 년간의 고통 뒤끝에도 그것을 피우게 하는가. 그것은 아무도 간섭하지 않는 미국의 자유 때문인가. 그 자유를 만끽하고 싶다는 쾌락 때문인가.

준호는 불을 붙이고 서둘러 연기를 들여 마셨다. 목젖이 튕기도록 기침을 했다. 그러나 아까운 연기는 흘러나오지 않았다.

연기가 이미 그의 폐부 속에서 모조리 연소되었기 때문이었다.

쓴 풀잎 냄새가 차 안을 가득히 메웠다. 한꺼번에 많은 양을 들여 마시는 심호흡으로 짓이겨진 풀잎은 벌겋게 달아오르고 그 연기를 들여 마시는 바람소리가 풀무소리처럼 건조하게 들려왔다. 그는 한가득 연기를 들여 마시고 될 수 있는 대로 오래 참기 위해서 숨을 끊었다.

그의 눈이 튀어나올 듯이 충혈되고 그의 목이 뱀의 그것처럼 부풀어 올랐다.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만큼 참았다가 그는 발작적으로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저것 봐."

그의 눈이 서서히 풀려 가고 있었다. 그의 눈은 이 지상의 아무것도 보지 않고 있었다. 준호는 가까운 곳과 먼 곳을 동시에 응시하는 듯한 초점 없는 눈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그의 눈은 꿈에 잠겨있는 것 같았다. 황홀한 미소가 그의 얼굴에 번져 나갔다.

"저것 봐, . 하늘 좀 봐. 얼마나 아름다워. 무지개 같아. 저 파도 좀 봐. 저 파도 좀 봐."

그는 넋 나간 목소리로 킬킬거리며 웃었다. 그가 이유 없이 웃는다는 것은 그가 서서히 황홀경에 빠져들어 가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는 신호였다.

"한 모금 빨아 봐. ."

준호는 그에게 파이프를 내어밀었다. 그는 머리를 흔들었다.

"괜찮아. 무서워하지 말어. 한 번만 빨아 봐. 형의 얼굴이 예뻐졌어."

킬킬 그는 계속 웃었다.

"아아, 저 갈매기 좀 봐. 저 갈매기 좀 봐, 종이학 같아."

남아 있는 풀잎의 연기를 그대로 낭비하는 것이 아까운 듯 그는 볼이 메이도록 연기를 들이마셨다. 풀은 완전히 타버려 검은 재밖에 남지 않았다. 그는 파이프를 털어 재를 버렸다.

". 왜 우리가 이곳에 있을까. 우린 왜 이곳에 있지. 그건 참 이상한 일이야."

준호는 비닐봉지를 뒤져 식빵을 게걸스럽게 먹기 시작했다. 준호가 너무 행복하게 보였으므로 그는 말없이 준호의 옆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는 꿈을 꾸고 있는 몽유병 환자처럼 보였다. 그래서 그의 꿈을 소리를 내거나 흔들어 깨우는 것으로 방해해서는 안 될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내버려 둬."

그는 자신에게 준엄하게 명령했다.

"그의 꿈을 깨어서는 안 돼. 그를 방해하지 마."

준호는 식빵을 먹다 말고 기운이 빠진 듯 눈을 감았다. 입가에 씹다 흘린 빵부스러기가 묻어 있었다. 목이 마른 듯 그는 벌컥벌컥 주스를 들이마셨다.

"여기가 어디지. 여기가 어디일까. . 우리는 지금 어디에 앉아 있지."

그는 꿈을 꾸듯 몽롱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갈매기 서너 마리가 지친 날개를 쉬기 위해서 차창 밖 차체 위에 맥없이 주저앉았다. 준호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한꺼번에 너무 많은 연기를 들이마신 모양이었다. 얼굴은 밀랍처럼 희었지만 눈가만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그는 준호가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릴 때까지는 길을 떠날 수 없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는 준호 이상으로 깊은 꿈속에 잠겨있었다. 요세미티의 눈길을 달리면서 준호는 온통 흰 설경의 눈부신 아름다운 풍경을 보자 버릇처럼 파이프를 꺼내 들었었다. 그것은 남아 있는 단 한 줌의 마리후아나였다. 그가 운전 중에도 한 모금씩 마리후아나를 빨고 있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지만 얼어붙은 눈길을 운전하면서 마리후아나를 빤다는 것은 미친 짓이었다.

"불안해하지 마. ."

운전 중에 그것을 피울 때면 그는 준호에게 노골적으로 못마땅한 표정을 짓곤 했었다. 그런 낌새를 눈치채고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서 준호는 짐짓 밝게 웃어 보이곤 했었다.

"한 모금만 빨면 오히려 운전이 잘 돼. 걱정하지 않아두 돼."

그의 말대로 지난 일주일 동안 내내 준호는 조금씩 꿈에 젖어 있었다. 그러나 그의 운전 솜씨는 나무랄 데가 없었다. 그의 말대로 미량의 마리후아나는 오히려 긴장을 풀어주고, 피로를 없애주는 윤활유 역할을 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얼어붙은 급커브의 요세미티 절벽길 위해서 그것을 피운다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였다. 그것은 자살행위였다. 그가 겨우 세 모금 정도 남아 있는 파이프 속의 마리후아나를 강제로 빼앗아 차창 밖으로 털어버렸을 때 준호는 그에게 핏대를 올리며 덤벼들었었다.

"아끼던 마지막 한 모금의 마리후아나였어. 왜 그걸 버린 거야. 멕시칸 놈들에게 육십 달러 주고 산 마지막 물건이야. 미친 것은 내가 아니야. 미친 것은 형이야."

"난 죽고 싶지 않아. 이 새끼야, 난 죽기 위해서 여행을 떠나온 건 아니야."

그는 냉정하게 대답했었다.

"난 그걸 피우지 않으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아. 씨팔. 더 이상 아름다운 경치는 눈에 들어오지 않을 거야."

"그렇다면 넌 이걸 네 마음대로 피우기 위해서 미국에 불법 체류자로 남겠다는 것이냐."

"이건 마약이 아니야. 이건 술보다도 해독이 적어."

할 수 없이 체념한 준호는 그러나 요세미티를 거쳐 샌프란시스코를 오는 동안 내내 우울하고 말이 없었다. 그는 지독한 우울증에 빠진 환자처럼 보였다. 그때 그는 준호에게 소리내어 말은 하지는 않았지만 그에게 내내 미안한 마음을 느끼고 있었다. 준호의 말대로 그것은 술보다 더 해독이 적은 단순한 풀잎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한번도 그것을 피워본 적이 없는 그로서는 그것은 단지 조그만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풀잎같은 것으로 우울하거나, 절실하게 고독할 때, 심리적인 위안을 만족시켜주는 약의 효능을 지닌 순한 약초와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그의 공포를 달래주는 유일한 풀잎이었다. 왜 그것을 빼앗았을까. 무엇엔가 조금이라도 마취되어 있지 않으면 견디어낼 수 없는 저 엄청난 고독 속에서 그가 가질 수 있는 심리적 위안을 내가 무슨 자격으로 빼앗을 수 있을 것인가.

눈을 감고 있던 준호가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그는 벼랑 끝에 서서 구역질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방금 전에 먹은 주스와 빵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이런 일이 없었어. 너무 심하게 빨았나 봐."

그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을 들고 준호를 돌아보았다.

그의 눈가엔 눈물이 맺혀 있었다.

"갑시다. . 미안해."

 

3

그들은 카멜 해안과, 울창한 해안가의 산림지대인 빅서를 지나, 루치아와 고르다를 지났다. 도로는 줄곧 바닷가의 해안을 끼고 뻗어나가 있었다. 이 차선이었지만 오가는 차는 거의 없었으므로 일방통행이나 다름없었다. 가도가도 끝없는 바다뿐이었다. 간혹 길 왼편으로 구릉지대가 지나고 목초지대가 펼쳐지기도 했었다. 바닷가 벼랑 위에 아슬아슬하게 세워진 별장들이 새둥우리처럼 숨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차는 수천 마일을 쉴새 없이 달려왔으므로 장거리 경주를 달려온 운동선수처럼 지치고 헐떡이고 있었지만 아직 원기는 왕성했다. 오랫동안 빠른 속도로 달려 나가다 보면 차체와 인간이 한 덩어리가 된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있었다. 비록 경사진 벼랑을 따라 구불구불 펼쳐진 1번 도로를 달려간다고는 해도 어느 순간부터 두 사람의 의식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 가수(假睡) 상태에 들어가게 된다. 운전대를 잡은 손은 무의식적으로 커브를 따라 때로는 원만하게 때로는 급하게 회전을 하고 있었지만 눈은 차창 너머로의 먼 불확실한 길목에 머물러 있으며, 머리는 백지처럼 단순해지기 마련이다. 그것은 일종의 무아지경 속에 반사동작일 뿐이었다.

자연 두 사람의 입에서는 말이 없어진다. 스위치를 눌러 음악을 듣는 일도 귀찮아진다.

납과 같은 무거운 침묵이 두 사람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차츰 주위의 풍경도, 바다도, 기울어져 가는 태양도, 핏빛 황혼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시간개념과 공간 개념이 마비가 되기 시작한다.

차는 오직 한 곳의 목표만을 향해 달려가도록 양 눈 옆을 안대로 가린 경주용 말처럼 오직 끊임없이 펼쳐진 하나의 선, 도로망을 따라서 질주하고 있다.

캠브리아와 모로베이를 지나기 시작한다. 때로는 우연히 추월해서 달려가는 스포츠카 한 대를 따라 속도경쟁을 벌여보기도 한다. 그러나 중고차가 성능이 좋다고는 하지만 오직 속도를 내기 위해 만들어진 스포츠카를 따라잡을 수는 없는 것이다. 어느 정도 따라붙던 차는 다시 적막한 도로 위에 홀로 달리는 장거리 주자처럼 낙오되기 마련이다. 마주 달려오는 차도 오후가 되자 거의 보이지 않는다. 뒤따라오는 차도 보이지 않는다. 이따금씩 벼랑 위에 서 있는 별장집들을 발견하기는 하지만 인기척이 느껴지지는 않는다.

바닷가도 쓰레기 하치장처럼 버려져 있을 뿐이다. 도시에 인접한 바닷가에서 만날 수 있는 파도를 타는 젊은이들도 보이지 않고 바다는 변방지대의 기슭을 핥고만 있을 뿐이다.

움직이는 것은 갈매기아 정직한 태양뿐이다. 태양빛은 시간에 따라 때로는 눈부시게 때로는 황홀하게 때로는 지치고 병든 얼굴로 시시각각 변하고 있다. 어떤 때는 긴 띠와 같은 구름이 태양을 가리기도 한다. 그럴 때면 태양은 어디론가 유괴당해 가는 사람처럼 보인다. 구름의 검은 띠가 태양을 납치해 가며 어디로 끌려가는가 상상할 수 없게 태양의 눈을 가리고 입에 자갈을 물리고 있다. 바람이 불기도 하고, 거짓말처럼 잔잔하게 가라앉는다.

삐죽삐죽 돋아난 곶()들이 함부로 찢은 은박지처럼 구겨져서 바다 속에 침몰하고 있다. 원래는 바다와 육지가 한덩어리였던 것은 분노한 신이 두 조각으로 찢어낸 것 같은 거친 경계선은 벼랑과 절벽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어디에 있는가 구태여 지도를 볼 필요는 없다. 로스앤젤리스까지 아직 멀었다. 쉴새 없이 달리고 있지만 워낙 경사가 심한 도로이므로 한껏 속력을 낼 수는 없다. 이 밤 안으로 로스앤젤리스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밤을 새워서라도 달려야 할 것이다. 도로변의 모텔에서 하룻밤을 자고 달릴 만큼 여유가 있지 않다. 오늘 밤에 도착하지 못한다면 내일 아침에라도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가야 할 목적이 있다는 것은 어쨌든 고마운 일이다. 로스앤젤리스에 돌아간다 해도 그들을 반겨줄 사람은 없다. 그들이 떠날 때 아무도 전송해주지 않았듯 그들이 도착한다 해도 아무도 그들을 반겨주지 않을 것이다.

요세미티 절벽 위에서 굴러떨어져 죽는다 해도 그들의 시체는 봄이 되어서야 발견될 것이다. 아무도 그들의 신원을 확인하지 못할 것이다. 어쩌면 그들이 가졌던 여권 조각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들은 죽음의 계곡에서도 요세미티에서도 99번 도로 위에서도 죽을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죽지 않았다. 99번 도로 위에서 달려가는 차와 부딪혀 산산조각으로 죽어간다 해도 아무도 그들이 누구인지, 어딜 가는 길이었는지, 왜 그 도로 위를 달려가고 있었는지 모를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돌아가고 있는 로스앤젤리스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침대 위에서 죽는다 해도 그들의 시체는 한달 뒤에나 발견될 것이다.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악취의 냄새에 옆방에서 얼굴을 알 수 없는 멕시코인이 문을 부수고 들어오기 전에는, 그러나 죽음을 생각할 이유는 없다. 분노를 끓어오르는 용암처럼 가슴깊이 간직하고 있다고 하지만 아직 죽음을 생각할 나이는 아니다. 그는 죽기 위해서 여행을 떠나온 것은 아니었다. 그는 다만 분노했으므로 여행을 떠나왔다. 무엇 때문일까. 그의 분노는 무엇 때문일까. 무엇이 그를 분노케 했는가. 무엇이 준호를 두렵게 하며 무엇이 준호에게 끊었던 마리후아나를 피우게 했는가. 무엇이 그에게 가족을 버리고 불법체류자로 남게 한 것일까.

차는 점점 속력이 빨라진다. 모로베이에서 잠시 바다를 버리고 1번 도로는 101번 도로와 만난다. 101번 도로는 성난 짐승과 같은 차량들로 만원을 이루고 있다. 차들은 탈곡기에서 떨어져 내리는 낱알처럼 구르고 있다. 휘이잉 소리가 난다. 차는 그 흐름에 섞여든다. 그들이 탄 차를 앞질러, 옆을 따라붙으며 달려가는 각양각색의 차 속에 앉은 사람들은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다. 속력을 빨리할 때마다 고속도로의 표면과 바퀴 부분이 맞닿아 입을 맞추는 소리가 난다. 차체의 미세한 진동이 피부에 느껴진다. 아직 날이 저물지 않았지만 어떤 차들은 불을 밝히고 있다. 차들은 아프리카의 초원지대를 달리는 동물들처럼 아스팔트의 정글 속을 돌진하고 있다. 누군가가 추적해오는 것 같은 놀라움 속에 한 마리가 내닫기 시작하자 온 야생동물이 내쳐 뛰어 달리듯. 기린과 무소와 하마와 타조와 온갖 동물이 도망치듯 차들은 미친 듯이 달려 나간다. 달려 나가는 속도감 이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차는 101번 도로를 버리고 다시 1번 도로로 접어들자 이상한 고독감이 스며든다. 마침 해가 지기 시작한다. 한낮을 지배했던 태양의 제왕(帝王)은 왕좌에게 물러나기 시작한다. 빛을 모반하는 저녁노을이 혁명을 일으켜 피와 같은 붉은 노을을 깃발처럼 드리운다. 파도가 한결 높아진다. 헤드라이트 불빛이 점점 뚜렷해진다. 태양은 마침내 임종을 맞았지만 그의 후광은 온누리에 떨치고 있다. 하늘은 저문 태양의 마지막 각혈로 붉게 물들어 있다. 어둠이 새앙쥐처럼 빛의 문턱을 갉아 내리고 있는 것이 보인다. 초조(初潮)와 같은 피의 여광을 갉아 내리는 어둠의 구멍으로 수술대 위에 올라선 마취 환자의 잃어 가는 의식처럼 점점 사라져간다. 그것은 처절한 아름다움으로 승화된다. 태양은 완전히 사라졌지만 황금의 빛과 노을은 한데 섞여서 거대한 불꽃놀이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바다의 군대들이 몰락해 가는 하늘의 왕국을 향해 집중적으로 포화를 쏘아 올리고 있다. 터진 포탄의 불꽃이 하늘의 어둠 속에 점화되어 폭발하고 있다. 빛의 파편이 깨어져 흩어진다.

차는 필사적으로 달려 나간다. 헤드라이트가 빛의 기둥이 되어 심해어(深海魚)의 눈처럼 밝아온다. 차선에 박힌 붉은 형광 표시등이 반딧불처럼 떠오른다. 빛은 완전히 사라지고 사방은 칠흑같은 어둠뿐이다. 달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도 밤하늘엔 무수한 별들이 붙박혀 있는 것이 보인다. 시야는 온통 차단되었다. 바다는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바다는 보다 검은 빛으로 음흉한 짐승처럼 웅크리고 있다. 벼랑도 보이지 않는다. 이따금씩 벼랑에 선 집들에서 내비친 불빛들만이 깜박일 뿐이다. 머리가 맑아진다. 의식이 물처럼 투명해진다. 차는 어둠의 두터운 벽을 뚫는 나사못처럼 달려 나간다. 나가도 나가도 어둠의 벽은 끝을 보이지 않는다. 헤드라이트가 눈먼 곤충의 더듬이처럼 재빨리 달려 나가는 차의 한 치 앞을 더듬어 감지한다.

준호는 말없이 운전대를 잡고 있다. 그는 벌써 오후 내내 말 한마디를 않고 있다. 그 역시 한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함께 앉아 있을 뿐 절대의 고독 속에 앉아 있다. 차는 제 스스로 자전(自傳)하는 지구처럼 굴러간다. 어둠속에 헤드라이트 불빛을 받은 도로 표지판이 이따금씩 척후병처럼 떠오른다. 그것은 무한대의 우주 속을 스쳐 가다 마주치는 이름 모를 운석(隕石)처럼 보인다. 도로 표지판이 "그러버시티"를 가리키고 재빨리 물러간다. 차의 계기가 칠십 마일을 가리키고 있는 바늘은 칠십 마일을 오버하기도 하고 못 미치는 분기점에서 경련을 하고 있다. 오일게이지는 거의 바닥이 나 있다. 로스앤젤리스까지 가려면 한 번쯤 기름을 풀로 채워야 할 것이다. 한밤중에 이 적막한 도로에서 기름이 떨어진다면 속수무책이 될 것이다. 그런데도 입을 열어 말하기조차 귀찮아진다. 기름이 떨어지기 전에 조그마한 동리가 나타나겠지, 저 정도의 기름이라면 앞으로 사십 마일은 더 달릴 수 있을 것이다. 기름이 떨어지면 탱크에 오줌을 쌀 것이다. 그러면 오줌에 떠오르는 기름으로 십 마일은 더 달릴 수 있을 것이다.

차는 한곳에 정지되어있는 것처럼 보인다. 흘러가는 것은 도로다. 그들은 탄광의 마지막 막장에 들어선 탄광부 같은 느낌을 받는다. 어쩌다 저 먼 도로 끝에서부터 달리며 달려오는 차의 헤드라이트가 보인다. 이쪽을 향해 달려오는 불빛은 조금씩 더 분명해진다. 그러다가 어느 틈에 얼굴을 맞대고 스쳐 지나간다. 스쳐 사라지는 차는 그들이 달려온 길을 되풀이 가고 있을 것이다. 건전지 불빛을 밝혀 들고 들판을 헤매이는 어린아이처럼. 핸들을 잡은 손이 저리고 아픈지 이따금 준호는 운전대에서 손을 떼고 손을 흔든다. 바다는 보이지 않았지만 바위에 부딪히고 으깨어지는 파도의 포말은 환각 조명을 받은 무희의 스타킹처럼 번득인다. 파도는 입맛을 찝찝 다시고 있다. 길 가운데 그어진 도로의 경계선이 미친 듯이 차 앞으로 달려 붙고 있다. 그것은 날이 선 작두의 칼날처럼 보인다. 차는 맨발로 서서 그 시퍼런 칼날 위를 춤추며 달려가고 있는 맹렬한 속도감으로 차는 사정 직전의 동물처럼 몸을 떨고 있다. 이따금 급커브의 도로를 따라 차가 회전할 때마다 바퀴가 무디어진 칼날을 숫돌에 갈 때처럼 불꽃을 튀기며 비명을 지른다. 어둠은 달려가는 속도만큼 뒷걸음질 치고 있는 차의 속도계기가 팔십 마일을 가리키고 있다. 이건 위험한 속도다. 그는 그러나 입을 여러 주의하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내버려 두기로 한다.

벼랑길을 따라 커브를 도는 순간 차의 속력은 줄어든다. 격렬한 고통으로 차는 울부짖는다. 오후 내내 굶었지만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다. 배가 고픈 듯도 싶지만 참을 만하다. 말라빠진 식빵을 씹는 것은 모래를 씹는 느낌일 것이다. 지도를 펼쳐보아 지금 그들이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가 알아 보고 싶은 생각조차 일지 않는다. 지도를 보기 위해서는 실내등을 켜야 한다. 실내등을 켠다면 그들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게 될 것이다. 흐린 불빛 아래에서 서로의 어둔 모습을 마주본다는 것은 우울한 일이다. 내버려 두기로 한다. 이대로 1번 도로를 따라가면 도착할 것이다. 그것뿐이다. 긴 여정의 반은 분명히 넘어왔을 것이다. 어쩌면 더 많이 왔을지도 모른다. 아주 짧은 시간 안에 로스앤젤리스에 도착할지도 모른다. 아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희망일 뿐이다. 그들은 영원히 그곳에 도착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들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어떤 환상의 도시를 찾아 맹목적으로 질주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로스앤젤리스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는 가공의 지명이다. 가공의 도시를 향해서 수천 마일을 달려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상관없는 일이다. 1번 도로 끝에 무엇이 있는가 미리 점쳐볼 필요는 없다. 분명한 것은 달려가는 속도감만 느껴진다면 살아있다는 느낌을 확인할 수 있으므로. 달려가는 차창 앞 불빛 속에 황급히 뛰어 어둠 속으로 숨는 동물의 모습이 흘낏 보인다.

집을 잃은 개일까. 아니면 무리에서 떨어져나와 길을 잃은 늑대일까.

이따금 벼랑에서 굴러떨어진 흙더미들이 도로 가장자리에 산재되어 있는 것이 보인다. 그러나 사람의 모습은 어느 곳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울창한 숲에서 부러져 내린 나뭇가지들이 도로 위에, 살은 뜯기고 남은 몇 점의 뼈처럼 떨어져 있는 것도 보인다. 이상하게도 하늘은 투명하게 맑았지만 달빛은 찾아볼 수 없다. 하늘엔 무수한 별들이 크리스머스트리의 색전구처럼 일제히 빛나고 있다. 그중에는 이제야 막 수억 광년의 우주공간을 거쳐 갓 도착한 새로 형성된 별들도 있었으며 숨이 끊어져 막 죽어가는 별들도 있었다. 어쩌다 제 무게를 못 이겨 하늘에 굵은 획을 그리며 추락하는 별똥별도 보인다.

그때였다.

잠자코 침묵을 지키던 준호가 캐비닛을 열어 녹음테이프를 꺼낸다. 그는 그것을 카트리지 속에 집어 넣고 스위치를 누른다. 그는 그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 그것은 준호의 아내가 보내준 녹음테이프였다. 여행 중에 그들은 그 녹음테이프를 수십 번도 넘게 들었었다. 그래서 삼십 분짜리 카세트에 녹음 내용을 처음부터 끝까지 욀 수 있을 정도였다.

"오랜만이야. 전번에 당신의 편지를 받았어요. 당신이 이 편지에 부탁했던 대로 아이들 목소리를 녹음해서 보내 드리려고 준비를 하고 있어……(잠시 침묵) 요즈음 어떻게 지내시는지요……나는 아이들 돌보는 것으로 하루해를 보내요. 편지에 씌어져 있는 대로 몸은 건강하다니 안심은 되지만 어떻게 먹고, 어떻게 자고, 옷은 어떻게 갈아입는지 그게 제일 염려스러워……당신의 게으른 성격을 잘 알고 있는 나로서는 옷도 되는 대로 입고 다녀 냄새를 풀풀 풍기고 세수도 일주일 이상하지 않고 이빨도 닦지 않고 다녀서 거지 꼬락서니가 될 것 같아서 늘 마음에 걸려. 발은 적어도 이틀에 한 번은 닦아요. 머리도 이틀에 한 번은 감구요. 그리고 제발 콧수염은 기르지 말어……(잠시 침묵)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 평소에 우리가 얼굴을 맞대고는 정다운 이야기를 나눠본 적이 없는데 녹음기로 당신 본 듯하고 이야기를 하려니 쑥스럽구 어색하기만 해요……(잠시 침묵)……당신에 관한 신문 기사가 주간지 같은 데 나오고 있어. 당신이 미국에서 주저앉았다고 그러는 거야. 좀 빈정대고 있는 투의 기사가 나오더니 지금은 오히려 잠잠해요……(잠시 침묵)……준겸이가 요즈음 아빠를 찾고 있어요. 하루에도 수십 번씩 아빠가 어디 갔느냐고 찾고 있어……(잠시 침묵) 그럴 때면 나는 아빠가 미국에 갔다고 이야기해 줘. 준겸이는 로봇 타고 우주인 만나러 갔는지 알고 있어. 그 애는 미국이 만화영화에 나오는 안드로메타라는 별인 줄로만 알고 있어. 지구를 공격하는 외계인을 물리치기 위해서 마징가 제트라는 로봇을 타고 우주로 떠났다고 믿고 있어……은경이는 새 학기에 이학년이 되니까 그 애는 준겸이보다 아빠를 덜 찾고 있지. 하지만 철이 들어서 입 밖으로 말하지 않을 뿐이지 며칠 전에 학교에 제출하는 일기장을 본 적이 있었어. 그 일기장엔 아빠 이야기뿐이었지……(잠시 침묵)……아빠가 왜 돌아오지 않는지 그게 이상하다고 썼었어요. 하나님 아빠를 돌아오게 해 주세요 라고 썼었어요……(전화벨 소리)잠깐 기다려, 전화 왔나 봐. 조금있다 다시 녹음할께……(잠시 침묵) 다시 이야기를 계속하겠어. 아까 내가 어디까지 이야기 했었지……(잠시 침묵)……준겸아 준겸아 이리와 봐. 이리 와서 아빠에게 말해 봐……(잠시 침묵)……아빠가 어데 있는데, 아빠가 없잖아. 아빠는 녹음기 속에 들어 있어 바보야. 거짓말 말아. 누나, 아빠가 어떻게 저렇게 조그마한 녹음기 속에 들어갈 수 있단 말야. 누나는 거짓말쟁이야……(먼곳에서)……아빠한테 이야기해 봐라……(가까운 곳에서)……아빠야, 나 준겸이야. 아빠 어디 있어. 마징가 제트를 타고 나쁜 외계인을 쳐부수고 있는 거야. 언제 올 거야. 나두 아빠하고 같이 로봇을 타고 싶어. 나도 이담에 크면 우주비행사가 될 거야. 그래서 초록별 지구를 공격하는 나쁜 우주인을 쳐부술 거야……아빠 심심해……엄마는 가끔 울어……(녹음 스위치 꺼지는 소리)……(잠시 침묵)……(먼곳에서)준겸아 노래 한 곡 불러 봐라. 싫어. 아이 착하지 노래 한번 불러봐, 아빠 앞에서. 아빠가 어디 있는데, 아빠가 있어야 노래를 부르지……우리 준겸이 착하지……자 일어서노래를 불러 봐요……(잠시 침묵)……(느닷없이 힘차게)……우우우 따다다 우우우 다다다 번개보다 날쌔게 날아가는 우리의 용감한 정의의 용사 우리가 아니면 누가 지키랴. 우우우 다다다 우우우 따다다 올 테면 와라 겁내지 말고 쳐부셔야지 정의의 용사 마징가 마징가 제트 우우우 다다다 우우우 따다다……(박수 소리)……(먼곳에서)……잘 불렀어요. 그럼 은경이가 한곡 불러야지. 은경이는 요즘 앞니가 모두 빠졌대요. 앞니 빠진 새앙쥐 우물 곁에 가지 마라……(잠시 침묵)……아빠……(잠시 침묵)……아빠……(다시침묵)……(노래소리)……아빠하고 나하고 만든 꽃밭에 채송화도 봉숭화도 한창입니다. 아빠가 매어놓은 새끼줄 따라 나팔꽃도 어울리게 피었습니다……(박수소리)……자 이번에는 둘이서 합창을 해봐라. 똑바로 서야지 아빠한테 인사를 하고…… (잠시 침묵)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울긋불긋 꽃대궐 차리인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박수소리)……(잠시 침묵)……따로 할 말은 없는 것 같아요. 여긴 무지무지하게 추워요. 몇십년 만의 추위라고 야단들이야. 아파트 내에서는 난방이 되어 있지만 따로 석유난로를 피워야만 견딜만 해요……어쩌자는 것인지……(긴 침묵) 당신이 어쩌자는 것인지 모르겠어……아무런 대책도 없이 무엇을 어떻게 하라는 것인지 이해가……"

순간 준호는 스위치를 눌러 카세트를 꺼버렸다. 차 안은 침묵으로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는 그러나 그 녹음테이프를 수십번 들어왔으므로 더 이어지는 준호 아내의 녹음 내용을 거의 외고 있었다.

생명력이 결여된 단조로운 목소리가 끊겨버린 후부터 어둠을 뚫고 달려가는 차의 엔진소리가 해소병에 걸린 환자의 헐덕이는 가래소리처럼 상대적으로 크게 높아졌다.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달려온 차는 이제 더 이상 버틸 힘도 없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차체는 간절이 부서지는 소리를 내며 심하게 요동을 치고 있었다. 쇳덩어리들이 끊임없이 가열되는 열로 불덩이처럼 뜨거워지고 좀체로 불평하지 않던 과묵한 차는 부서질 듯 흔들리고 있었다.

과열된 온도를 알리는 계기에 붉은 불이 켜져 있었다. 위험을 알리는 비상신호였다. 더 이상 견디어 나갈 수 없는 극한점에 이른 차는 비등하는 물처럼 끓어오르고 있었다.

그런데도 준호는 차의 속력을 줄이지 않았다. 차의 엔진을 끄고 오랜 휴식시간을 줘서 과열된 열기를 식히지 않으면 안될 만큼 절박한 상황에 맞닿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준호는 속력을 줄이지 않았다. 오히려 차의 속력은 더 빨라지기 시작했다.

속력을 알리는 계기의 바늘이 칠십오 마일을 초과하고 있었다. 바늘은 팔십 마일을 향해 육박해 들어가고 있었다.

차가 고통을 호소하며 몸을 떨었다. 바늘은 팔십 마일에서 팔십오 마일로 치닫고 있었다. 차체는 수전증에 걸린 알코올 중독자의 손처럼 와들와들 떨고 있었고 좁은 도로를 비상하기 시작했다. 도로 경계선의 일정한 선을 따라 달려가는 차는 맹렬한 속도감으로 추락해버릴 것처럼 휘청거렸다. 차는 날기 위해서 활주로를 굴러가는 비행기처럼 달려나갔다.

위험하다는 본능적인 직감의 그의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그러나 그는 입을 열지 않았다.

내버려 둬. 내버려 둬.

그는 자신에게 준엄하게 명령했다.

그가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 둬.

갑자기 차 안에서 뭔가 타고 있는 듯한 기분 나쁜 냄새가 난 듯싶더니 차창 앞 차체에서 연기가 뭉게뭉게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연막탄을 뿌린 듯 시야가 흐려졌다. 차가 돌연 도로를 벗어나 경치를 구경하기 위해서 벼랑 위에 만들어둔 공터의 난간을 향해 미끄러져 들어갔다. 견고한 쇠 난간과 차의 앞부분이 날카로운 파열음을 내며 부딪쳤다. 차는 가까스로 멈춰 섰다. 조금만 더 가속도의 충격으로 전진했다면 차는 쇠 난간을 부수고 벼랑 아래로 굴러떨어졌을 것이다. 헤드라이트 한쪽이 쇠 난간과의 충돌로 산산조각으로 깨어지며 꺼졌다. 그들은 넋나간 사람들처럼 좌석에 앉아 꼼짝도 하지 않았다. 굳게 닫혀진 차체에서는 끊임없이 연기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과열된 엔진이 타오르고 있는 모양이었다. 빨리 보니트를 열러 엔진을 식히고 순환펌프 속에 차가운 물을 부어주지 않으면 엔진은 완전히 연소되어 타버 릴 것이다.

그런데도 준호는 운전대를 잡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는 준호의 옆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는 거짓말처럼 울고 있었다. 쇠 난간과의 충돌로 한쪽 눈을 실명당한 헤드라이트의 흐린 불빛은 간신히 차의 내부를 밝히고 있었는데 그의 얼굴에서는 눈물이 굴러떨어지고 있었다.

"난 가겠어."

젖은 목소리로 준호는 중얼거렸다.

"난 돌아가겠어. 로스앤젤리스에 도착하는 즉시 비행기 좌석을 예약하겠어. 다행히 떠나올 때 왕복 티킷을 사두었기 때문에 문제는 없어. 형 난 돌아가겠어. 난 결심했어."

준호는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손등으로 연신 씻어 내리고 있었다.

"우리가 왜 이곳에 앉아 있지. 이곳은 남의 땅이야. 왜 우리가 이곳에 있지. 왜 우리가 이곳에 있는 지난 그 이유를 모르겠어. 난 아무것도 얻을 수 없고 구할 수도 없어."

그는 묵묵히 흐느끼는 준호의 말을 듣고 있었다. 준호는 자기 얼굴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을 몹시 창피하게 여기는 사람처럼 난폭하게 닦아 내리며 짐짓 볼멘소리로 물었다.

"로스앤젤리스는 아직도 멀었어. 씨팔. 도대체 얼마나 남은 거야."

"우린 지금까지 사천 마일을 줄곧 달려왔어. 그런데도 아직 멀었다구. 어떻게 된 거야. 우린 달릴 만큼 달려왔어. 우린 1번 도로를 달렸어야 했어. 그런데 우린 엉뚱한 길을 달려온 것 같아. 형은 미쳤어. 형은 지도 하나 제대로 볼 줄 모르는 미친놈이야. 형은 정신이 나갔어. 저걸 봐."

준호는 헤드라이트를 껐다 다시 켰다. 난간 옆에는 도로 표지판이 서 있었다. 일단 껐다가 켜진 불빛 속에 그들이 지금껏 달려온 도로의 명칭을 가리키는 고유 번호가 씌어져 있었다.

246West

"저걸 봐. 어떻게 된 거야. 우린 지금까지 246번 도로를 달려온 거야. 1번 도로는 어떻게 된 거야. 1번 도로는 어디로 사라진 거야. 우리는 1South 쪽으로 가야만 한다구. 그래야만 로스앤젤리스에 갈 수가 있는 거야. 제발 지도 좀 봐. 가만히 있지만 말고."

준호는 실내등을 켰다. 그는 미친 듯이 지도를 펼쳐 들었다.

"우리가 있는 곳이 어디쯤이야. 말해 봐. 1번 도로는 보이지도 않아. 어떻게 된 거야. 우린 알래스카 쪽으로 가고 있었을까. 아아 우라질."

준호는 난감한 듯 운전대를 후려쳤다. 짧은 클랙슨 소리가 났다. 지금껏 조용히 앉아있던 그가 갑자기 킬킬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그의 입에서 거품과 같은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 지도는 엉터리야. 우린 속았어. 우린 엉뚱한 길을 지금까지 달려온 거야."

"그럴 리가 없어. 지금 농담하는 거야" 우린 분명히 로스앤젤리스 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구. 왔던 길을 되돌아 나가면 1번 도로와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야. 우린 간선도로로 잘못 빠져들어 온 것뿐이야."

"로스앤젤리스에는 영원히 도착할 수 없을걸."

그는 여전히 킬킬거리며 말을 이었다.

"난 알구 있어. 처음부터 1번 도로는 로스앤젤리스로 가는 도로는 아니었어. 로스앤젤레스는 2번 도로로 3번 도로로 달려간다 해도 영원히 도착할 수 없을 거야. 왜냐하면 로스앤젤리스란 도시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으니까. 그건 지도 위에만 씌어 있는 가공의 도시 이름일 뿐이야. 되돌아가 봐. 1번 도로를 영원히 만날 수 없을 테니까."

"난 가겠어. 돌아가겠어."

준호는 시동을 걸기 시작했다. 그러나 차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차는 이미 싸늘하게 식어 있었지만 기능이 마비되어 있었다. 열심히 스위치를 내려도 차는 미세한 반응조차 보이지 않았다. 준호는 쉽사리 액셀레이터를 밟고 점화스위치를 넣었다. 그는 이미 숨을 거둔 익사체의 입에 인공호흡을 계속하는 어리석은 인명 구조원에 지나지 않았다.

"엔진이 타버렸어. 아니면 기름이 떨어졌든지. 우린 꼼짝도 할 수 없어. 차는 망가졌어. 날이 샐 때까지 기다리지 않으면 안 돼."

"마치 이렇게 되기를 바란 사람처럼 말을 하는군. 난 갈 수 있어. 이 차를 움직일 수 있어. 난 이 차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 헤드라이트가 켜지는 것은 엔진이 완전히 타버리지 않았다는 증거야. 차는 멀쩡해. 차는 다만 지쳐버린 것뿐이야."

준호는 결사적으로 운전대를 부여잡았다. 그의 얼굴은 눈물과 땀으로 뒤범벅되어 있었다.

"이곳에서 꼼짝하지 못하면 우린 죽을 거야. 새벽이 오면 기온이 내려갈 거야. 시동이 걸리지 않으면 히터도 나오지 않아. 우린 얼어죽을 거야. 여긴 벌판이야. 수십 킬로미터 이내에 인가가 없을지도 몰라. 온갖 야생동물들이 우릴 보고 덤벼들지도 몰라. 대답해 봐. 내 말을 듣고 있는 거야" 뭐라고 말 좀 해 봐."

그는 대답 대신 캐비닛을 열어 한 줌의 마리후아나와 파이프를 꺼내어 밀었다. 준호는 불가사의한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무서워하지 마. 이걸 피워. 그러면 행복해질 거야. 잠이 올 거야. 꿈도 꿀 수 있겠지. 우린 절대로 죽지 않아. 봐라 저 꿈틀거리는 검은 것이 무엇인지 아니. 그건 바다야. 태평양이야. 저 바다는 네가 돌아가려는 나라의 기슭과 맞닿아 있지. 우린 틀림없이 돌아가게 돼. 길을 찾을 수 있을 거야. 날이 밝으면 우린 돌아갈 수 있게 돼. 로스앤젤리스는 멀지 않아. 그곳에서 비행기를 타고 당장에라도 저 바다를 건너갈 수 있을 거야."

"."

준호는 긴장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도대체 뭘 하는 거야."

"네가 원치 않으면 내가 피우겠어."

그는 준호가 늘 하던 짓을 봐둔 대로 마리후아나의 풀잎을 손끝으로 이겨서 조금만 덩어리를 만들어 파이프르이 얇은 섬유망 위에 띄워 올렸다.

"양이 너무 많아. 제발 유치한 짓 좀 하지 말어. 이건 독한 거야. 형같이 처음 피우는 사람에겐 이건 너무 독해."

그는 성냥을 꺼내 풀잎에 불을 붙이고 깊게 빨아들였다. 마른 풀잎이 빨아들이는 호흡으로 한순간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는 입안에 가득한 연기를 가슴 깊이 들이마셨다. 가슴이 터질 것처럼 방망이질해댔다. 발작적인 기침이 나올 것 같았지만 그는 물속에서 코를 막고 숨을 오래참기 내기하듯 숨을 끊고 가슴속에 들이마신 연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들기를 기다렸다. 눈알이 튀어나올 듯이 팽창되었다. 더 이 상 참는 것은 무리였다. 그는 밭은 기침을 했다.

다시 연기를 빨아들이며 그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머리 부분까지 연기가 스며든 것 같은 느낌이었다. 오래 저장하기 위해서 연기로 소독하는 훈제(燻製)의 고깃덩어리처럼 그의 머리는 독한 풀잎의 연기로 그을려지고 있었다.

순간 몸을 가눌 수 없을 만큼 극심한 현기증이 일었다. 그는 헐떡이며 차장에 머리를 대고 몸을 바로 잡았다. 눈이 극도로 예민해져서 야생동물의 그것처럼 밝아졌다. 가슴이 쪼개질 것 같은 압박감이 다가왔다. 누군가 목을 조르고 있는 듯한 질식감이 그를 몸부림치게 했다. 숨을 들이마셨지만 호흡 기도가 파열된 듯 들이마시는 공기의 저항이 느껴지질 않았다. 그의 몸속에서 뭔가 가볍게 빠져나와 떠오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의 온몸에서 완전히 힘이 빠져나갔다.

". 괜찮아, 정말 괜찮겠어."

아득히 먼 곳에서 아련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그 목소리가 날아온 방향을 보았다. 그곳에는 어리둥절한 표정 하나가 돌연변이를 일으킨 채소처럼 기괴한 모습으로 뒤틀리고 있었다.

"괜찮아."

그는 자신있게 대답했다. 그는 자신이 말을 하지 않고 그의 입을 빌어 누군가 대신 말해 주는 것 같은 착각을 느꼈다. 그는 천천히 일어섰다. 그는 비틀거리며 차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어딜 가는 거야. ."

"바람 좀 쐬겠어."

"안 돼. 위험해. 나가지 말어. 돌아와. 안 돼. 제발. 도대체 뭘하는 거야."

그는 난간을 붙들고 벼랑 아래를 노려보았다. 그곳에는 미친 말갈기와 같은 바람이 몰아치고 있었다. 지축을 흔드는 파도 소리가 후퇴를 모르는 군대의 발자국처럼 진군해 들어오고 있었다. 어디선가 큰 북을 두드리는 듯한 타격음이 둥둥 울리고 있었다.

벼랑은 가파르지 않았다. 그것은 제법 급하게 바다 쪽으로 뿌리내린 작은 곳에 불과했다. 벼랑을 따라 샛길이 뻗어 내리고 있었다. 그는 그 샛길로 굴러 내렸다.

그는 헛발을 디뎌 넘어졌으나 곧 일어났다. 그는 구르고 뒤며 달리며 넘어지면서 샛길을 뒤었다. 균형을 잃은 그의 발길은 바닷가의 돌더미 위에 와서 멎었다. 무수한 돌들이 해변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달빛은 없었지만 다행히도 하늘의 무성한 별들이 합심해서 거둬준 빛의 동냥으로 그의 눈은 밝고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볼 수 있었다.

성난 파도의 포말이 비가 되어 그의 몸을 적시고 있었다. 그는 무릎을 꿇고 돌 위에 주저앉았다. 그는 즐겁고 유쾌하고 그리고 슬펐다.

그는 거센 파도에 의해서 바다를 건너 밀려온 죽은 시체처럼 바위 위에 쓰러져 누웠다. 그를 낯선 땅으로 유배시켜 온 파도들은 서둘러 물러가고 갓 도착한 빈손의 파도들만 그를 사로잡기 위해서 그물을 던지고 있었다.

그제서야 줄곧 그의 마음속에 끓어오르던 분노의 불길이 서서히 꺼져 가는 것을 보았다. 파도에 의해서 밀려온 낯선 뭍으로의 망명이 그의 분노를 잠재운 것은 아니었다. 그는 그가 살아온 모든 인생, 그가 보고 듣고 느꼈던 모든 삶들, 그가 소유하고 잃어버리고 허비했던 명예와 허영, 그가 옳다고 믿었던 정의와 법(), 때로는 성공하고 때로는 배반당했던 그의 욕망, 끊임없이 추구하던 쾌락과 성욕, 그가 한때 가지고 버렸던 숱한 여인들, 그 모든 것들로부터 무참하게 얻어맞고 마침내 처절하게 패배당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처절하게 패배당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그의 분노는 참다랗게 재를 보이며 소멸되었다.

이제는 원한도, 증오도, 적의도, 미움도, 아무것도 가질 이유가 없었다. 그는 딱딱한 바위의 표면 위에 입을 맞추며 그를 굴복시킨 모든 승리자들에게 용서를 빌었다. 그리고 이젠 정말 돌아가야 한다고 다짐했다. 그는 너무 지쳐 있었으므로 그 누구에게든 위로받고 싶었다.

文藝中央(198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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