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맹(流氓)
현경준
이것은 한 개의 보고문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작자는 이것을 제1회의 보고로 하고 앞으로 몇 차례고 이 부락의 소생 상황을 보고하려 한다.
그리고 여기에 기록된 것은 작금으로부터 이 년 전의 상황이라는 것을 말하여 둔다.
1. 최초의 탈주
1
찌는 듯한 푸낮.
보도소(輔導所) 소장은 씻어도 씻어도 멎을 줄 모르는 땀발이 거의 발광이라도 할 지경 단김을 후욱훅 내뿜으며 어제부터 시작한 성공서(省公署)에 보낼 제6회째의 부락민의 성적 보고서를 작성하기에 갖은 애를 다 쓰고 있다.
열어젖힌 뒤창으론 제법 쏴 하며 바람이 들어오긴 하나 그것은 화독에서 풍기는 화기와도 같은 뜨거운 바람이다.
쉴새 없이 씻는 수건에서는 물방울이 뚝뚝 흘러 떨어지고, 얼굴빛은 붉게 익어들다 못해 나중에는 시꺼멓게 독이 오른다. 출입문 어귀에서 그 모양을 바라보던 자위단(自衛團) 서기는 하도 민망스러워 그만 우쭐 일어나 밖으로 나가더니 얼마 안 되어 찬물이 넘쳐흐르는 세숫대야를 들고 들어온다.
“땀 좀 닦으시지요.”
“뭐? 세숫물인가? 아 고맙네.”
소장은 웃통을 벗어던지고 대야에 마구 머리를 잠근다.
“에― 씨언하다.”
전신의 땀줄은 일시에 선뜻 숨어든다.
“에― 좋다. 에― 씨언해라.”
연방 흑흑 느끼며 좋아하는 모양에 서기는 만족한 듯 빙긋이 미소를 띤다.
바로 그때.
누군지 더벅머리를 너펄거리면서 넋 없이 마당 안에 달려들더니 문어귀에 와 무춤 멈춰 서며,
“저 소장님 큰일 났어요.”
하고는 헐떡거리기만 할 뿐 뒷말을 잇지 못한다.
소장은 어인 영문을 몰라 한참 동안 머어니 상대편의 얼굴을 마주 보고만 있다가 눈에 흘러드는 물을 손등으로 썩 씻으며,
“뭐가 큰일 났단 말인가?”
다소 거칠게 어조를 높인다.
“저…… 성룡이 눔과 문삼이가 도망갔어요.”
“뭐?”
소장은 소스라치며 정신없이 문 어귀로 달려 나온다.
“성룡이허구 문삼이가 어쨌어?”
“저…… 도망갔어요.”
“응? 언제?”
“인제 방금 저 뒷산마루를 넘었어요.”
“누가…… 누가 봤는가? 자네가 봤는가?”
달려들어 모가지라도 틀어잡을 듯한 소장의 험악한 기세에 질려 상대편은 말을 못 하고 뒤로 물러선다.
“왜 대답을 못 하는가? 자네가 봤는가.”
“저, 지가 본 게 아니라요. 저…… 북문 보초 섰던 기호가 봤어요.”
“뭐? 기호가? 그럼 자네는 못 봤는가?”
소장은 한 걸음 더 다가서며 주먹까지 틀어쥔다.
“저두 보기는 봤는데.”
“봤는데 왜 놓쳤는가?”
“지가 본 땐 벌써 두 눔은 거진 마루턱을 넘어설 때였어요.”
“그럼 기호는 어디루 갔는가?”
“뒤를 쫓아 올라갔어요.”
소장은 입술을 찢어져라고 악물고 허공을 노려보다가, 갑자기 정신을 차린 듯 옆에 선 자위단 서기를 돌아보고,
“얼른 단장한테 가서 이르구 비상 소집 종을 때리게.”
한 다음 안쪽 구석으로 뛰어들어가다가 다시금 돌아서서,
“단장보다 먼저 종부텀 때려 주게.”
하고는 구석에 뛰어가더니 벽에 걸린 몽둥이 같은 지팡이를 쥔다.
벌써 누가 때리는 것인지 종루에서는 비상 경종 소리가 요란스레 뗑뗑뗑 울려 온다.
소장은 쏜살같이 밖으로 내달린다.
바로 낮밥 쉼 때라 자위단원들은 곧 모여든다. 모두들 서로 질서 없이 떠들어 대는 그 속에서 자위단 단장이자 겸 둔장(屯長:部落長)인 세준이는 면목 없어하며 죄송스레 보도소 소장 앞에 와 선다.
“소장님, 대할 낯이 없습니다.”
“그런 사과는 뒀다 이 담에 허구, 어서 뒤를 추격하기루 합시다.”
소장은 단장의 늘어진 듯한 행동에 발을 구르며 독촉이 아니라 역정을 쓴다.
“예.”
단장은 반발된 듯이 옆으로 비켜서더니 소장을 대할 때의 모양과는 딴판으로 소리를 버럭 지른다.
“일 분대 이 분대는 저 아랫마루를 넘어서 강역을 살피구, 삼 분대 사 분대는 위쪽 마루를 넘어서 큰 봉 안에 들지 못하두룩 하구, 그리구 오 분대는 내 뒤를 따라 도망 간 눔들의 뒤를 곧추 쫓아 보세.”
명령이 내리자 단원들은 일제히 토성(土城) 밖으로 무에라고 떠들며 내달린다. 그 뒤를 보도소 소장도 주먹을 틀어쥐고 달려간다.
2
해가 저물 때까지 뒤를 쫓으며 수풀 속을 샅샅이 뒤졌건만 두 탈주자의 행방은 묘연했다.
수색단은 하는 수 없이 풀기 없는 걸음으로 부락으로 돌아왔다. 부락에 돌아와서 보도소 앞마당에 제각기 되는 대로 주저앉은 그들은 모두 다 무거운 침묵에 사로잡혀 누구 하나 입을 여는 사람은 없다. 그중에서도 보도소 소장의 침묵은 더한층 무겁다.
그는 출입문 앞 마루 구광에 힘없이 걸터앉아 말할 수 없이 침통한 얼굴로 어느 때까지든지 입을 열 줄 모르고 그 무슨 생각에만 잠겨 있다.
그 모양을 보고, 자위단 단장은 비길 데 없는 송구스런 표정으로 쉴새 없이 소장의 동정에만 곁눈을 팔지만, 그러나 일체를 망각하여 버린 듯한 소장의 얼굴에서는 털끝만 한 표정의 움직임도 찾을 수가 없다.
해만 지면, 그렇게 모여들어서 떠들어 대던 아이들도 한쪽 구석에 몰켜 가서 기줄하니 어른들의 기색만 살피고 있다. 얼마나 한 오랜 시각이 무거운 공기 속에서 지나갔는지 소장의 입에서 땅이 꺼져라고 후유 긴 한숨이 흘러나오고 뒤이어,
“단장.”
하는 소리가 흘러나왔을 때는 벌써 컴컴하니 어둠이 밀려든 때다.
“예?”
단장은 고대하고 있던 터라 얼른 일어나 소장의 옆으로 돌아서며 뒷말을 기다린다.
“다들 해산을 시킵시다.”
“예.”
“그리구 단장은 좀 상의할 일이 있으니 사무실루 들어갑시다.”
“예.”
소장의 명령대로 단장은 선 자리에서 해산을 명한 후, 조심스레 소장의 뒤를 따라 사무실로 들어간다. 사무실에 들어간 소장과 단장은 책상을 사이에 놓고 조용히 마주 앉는다.
그러나 한동안이 지나도록 둘 사이에는 부자연한 공기만 오락가락 떠돌 뿐 아무런 말도 없다. 그러다가 마침내 소장은 서서히 고개를 쳐들며 나직이 입을 연다.
“상의라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이번 탈주 사건으로 말할 것 같으면 부락이 건설된 이후 처음으루 생긴 일인 것만큼 철저한 대책을 강구하자는 것인데, 단장의 의견은 어떠신지요.”
소장의 말씨는 전과 같이 정중하게 나온다.
“지당한 말씀입니다. 물론 그래야지요. 그냥 시무룩하게 내버려 두었다간 앞으루 자꾸 이런 일이 생길 것이니까, 아예 첫 번에 버릇을 고쳐 놓아야 합니다.”
소장은 고개를 끄떡이다가,
“오늘 밤으루 경찰서, 각 분주소(分駐所) 부락에다가 죄다 통기하여 수배를 하면 이삼 일 내루 붙잡기야 허겠지만, 그러나 이런 불상사가 외부에 알려지는 것은 참말 유감이란 말이오. 그리구 그보다두 이 담 성(省)이나 현(縣)에 이 말이 미쳤을 때 무슨 면목으루 그들을 대하겠소? 난 아무리 생각해 봐두 보고서 쓸 일이 기가 맥히오.”
하고 또다시 긴 한숨을 짓는다.
“전부가 저의 실책입니다. 단원들의 단속을 게을리한 탓이지요.”
단장은 진정으로 사죄하며 고개를 쳐들지 못한다.
“그런 말은 그만두시오. 다 한가지지요. 나는 별사람인가요? 단장이 평소에 단원 단속을 게을리한 게 탓이라면 나 역 보도자로서의 힘과 성의가 부족한 탓이 있었겠지요. 그런 말은 아예 입 밖에 내지를 말구, 금후의 대책이나 잘 강구합시다.”
“황송합니다.”
단장의 머리는 한층 더 숙여진다.
“헌데 첫째 오늘 저녁에 자위단 간부회의를 엽시다. 그런 다음 간부들을 잘 단속해 가지구, 내일 아침 일찍 집집마다 일제히 가택 수색들을 해봅시다. 그리구, 미안한 혐의자들을 붙잡아다가 오늘 탈주한 둘의 행방에 대해 추궁하면서, 서루 연락이 있었는가 없었는가 밝혀 봅시다. 나는 반드시 미리부터 눈치를 알구, 또 서루 연락이 있었으리라구 믿는데요. 단장은 어떻게 생각허십니까.”
“글쎄외다. 저두 아까부터 그걸 생각하구 있었습니다. 반드시 서루 연락이 있었으리라구 생각합니다.”
“그렇지요. 반드시 있었지요. 그럼 오늘 밤에 다시 모이두룩 헙시다.”
둘의 입가에는 똑같이 소리 없는 미소가 떠돈다.
3
이튿날 아침 네시를 기하여, 부락에는 일제 검색이 일어났다.
자위단 단장의 지휘하에 거행된, 이 일제 검색에 의하여 미리부터 의심되던 혐의자의 집에서는 여러 가지 증거가 나타났다.
무엇보다도 엄금물인 마약(아편)의 현품이 수처에서 발각되었음에는 새삼스레 놀라지 않을 수가 없고, 또 그 위에 남녀 간의 치정관계까지 발각되었다.
단장은 자기의 단원 단속 부주의로 하여 생긴 작일의 탈주 사건의 그 불명예를 이런 기회에 깨끗이 씻어 버리려고, 엄중한 취조를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또 평소부터 대강 눈치챈 강 건너 만주인 부락과의 비밀 연락 증거까지 이런 기회에 확실히 잡아내 가지고, 속으로 단단히 항의할 것까지 바수었다.
단장의 곁에서 보도소 소장은 무겁게 입을 다물고 피검자의 동정을 낱낱이 살피며 앞으로의 대책을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취조받는 피검자들의 태도는 어디까지든지 태연스럽고 무표정하다.
그들은 일체를 망각하여 버린 표정으로 단장의 말에는 귀도 기울이지 않고 얼빠진 양을 하고 앉아 있다. 그 중에서도 중독자들이 더하다. 단장은 참다못해 그중 젊어 뵈는 명우의 볼따구니를 철썩 후려갈긴다.
“이눔아, 귀머거리처럼 묻는 말에 잠자쿠 있으면 장수냐!”
이 불의의 일에 명우는 한동안 머엉하니 단장의 얼굴을 얼빠진 모양을 하고 쳐다보더니 그만 입술을 비꼬며,
“흥.”
하고 외마디 코방귀를 뀌고는 모로 고개를 돌려 버린다.
단장의 분노는 극도에 달했다.
그는 재차 명우의 뺨을 후려갈기며 의자에서 벌떡 일어선다.
“이눔아, 네눔의 입에서 대답을 못 들으면 성을 갈 테다.”
노오랗게 전 명우의 얼굴에 차츰 푸른 독기가 서린다. 입술에서 피가 날 지경 악물고 쳐다보던 그는 서서히 일어서며 두 주먹을 틀어쥔다.
그 모양에 단장은 다소 압기가 된 듯 주춤거리다가, 이내 제대로 돌아지며 한 걸음 앞으로 썩 다가선다.
“맞서면 어쩔 테냐?”
명우의 얼굴은 푸르다 못해 하얘진다. 말없는 시선과 시선의 싸움이 한동안 계속된 후,
“이눔아, 왜 때리는 거냐? 부락민에게 함부루 그런 버릇없는 손찌거리를 하라구 누가 시켰더냐?”
어디서 그런 위엄 있는 소리가 나오는 것인지 단장은 얼른 말을 못 한다.
“부락민에게 함부루 손을 대며, 제 자신의 무능과 무식을 폭로시키는 그런 부락장이나 단장이라면, 어서 곱게 손을 씻구 물러앉아라. 우리는 너한테 매맞을 아무런 의무두 가진 일 없구, 너에게 그런 권리를 준 일두 없다. 부락장이면 부락장답게, 단장이면 단장답게, 인격적으루 부락민에게 감화를 주며 지도를 해야 한다.”
유창한 말은 끊일 줄 모르고 다시 뒤를 잇는다.
“그야 물론 우리는 이 사회에서 인간의 취급을 받지 못하는 낙오의 무리인 것만은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사회의 온갖 박해라든지 조소에는 벙어리 노릇을 하여 왔고, 귀머거리 노릇을 하여 왔고, 천치의 노릇을 하여 오며 산송장의 생활을 하여 온 것이 아니냐? 그렇지만 너는 무에냐? 너는 우리들을…… 즉 지옥에서 헤매는 무리들을 개전(改悛)시켜서 다시금 참다운 사회인으로 맨들려구 자청을 하여 온 소위 지도자라는 것이 아니냐? 설마 우리들에게 매질을 하려구 온 눔이야 아니겠지? 만약 그런 목적으루서 왔다면 나는 여기서 단언한다. 너 같은 눔은 지도자는커녕 도리어 우리들의 근성을 더한층 삐뚤어지게만 할 눔이다. 대체 네가 우리들을 알기를 어떻게 아느냐? 아편쟁이는 밸이 없다더냐? 아직은 피두 있구, 눈물두 있구, 신경두 있는 눔이다. 너 같은 눔의 주먹에 그저 죽었소 하구 들여댈 눔은 아니다.”
단장은 참다못해 떨리는 두 팔을 와락 내밀고 달려든다.
그러나 그의 등덜미는 어느 틈엔가 소장의 손아귀에 단단히 잡혔다.
“단장 좀 참으시우.”
“아닙니다. 노세요. 내 오늘은 이눔들에게 버릇을 단단히 알으켜 주구야 말 텝니다.”
하며 씨근거리는 단장의 모양을 일종의 가엾어하는 듯한 눈으로 바라보는 명우의 입가에는 싸늘히 조소가 떠오른다.
“흥, 기껏하면 구류소(拘留所)지, 별수가 있냐?”
4
험악하게 벌어지려던 위급한 형세는 보도소 소장의 중재로 겨우 위기를 벗어났다.
그러나 장내의 험상한 공기는 좀체로 완화되지 않는다. 단장의 격분은 더 말할 것도 없지만 명우의 반항으로 하여 오랫동안 참아 오던 부락민의 울분은 비로소 기회를 얻어 가지고 바야흐로 한덩어리가 되어 폭발되려는 형세다.
만은 보도소 소장의 능란한 수완은 그 기회를 얼른 빼앗아 버릴 수가 있었다.
그는 씨근거리는 단장을 겨우 달래어 놓고는, 자기가 대신 나서서 벌써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설교를 또 시작하는 것이었다. 한번 시작만 하면 좀체로 끊일 줄 모르는 그의 설교에, 여럿의 이마에는 이내 주름살이 잡혀진다.
“언제나 하는 말이지만 우리 만주국에서 전만(全滿) 오 개소에다가 이러한 특수 부락을 설치한 것은 무슨 까닭인 줄 아시우?
비뚜루 인생의 행로에서 탈선하여 나간 여러분들을 바른 길루 다시금 인도하여 주려는 것이, 그 제일 본의라는 것은 자초부터 알 수 있는 일이 아니우? 왕도낙토(王道樂土)를 건설하려는 만주국이 아니고는 꿈에두 상상할 수 없는 이런 고마운 혜택을 모르구 여전히 비뚜루만 나가려는 여러분을 대할 때 나는 참말 세상사가 슬퍼나서 견딜 수가 없소.
여러분! 여러분은 모두 다 쓰라린 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렇게 여러분과 고락을 같이하며 여러분의 그 쓰라린 과거를, 여러분의 기억에서 흔적 없이 씻어 버리구 새로운 광명의 길을 밟게 하자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여러분! 여러분은 그것을 몰라주십니다. 아니 알고도 일부러 모르는 체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여러분께 장래의 은혜를 지워서 그 갚음을 받으려구 이러는 것두 아니구, 내 뱃속을 채우려는 것두 아닙니다. 만약 그런 속으루 온 것이라면 왜 하필 이런 곳으루 왔겠습니까?”
소장의 말소리는 떨리기까지 하며 점점 울음조로 변해 간다.
그러나 그것을 듣고 있는 군중의 표정은 너무나 평범하다.
그들은 제가끔 제멋대로 다리를 틀고 앉아서 혹은 담뱃대를 뻐금뻐금 빨기도 하고 혹은 곁사람과 수군거리기도 하고 혹은 먼 산봉우리 위를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보기도 하며, 그야말로 소장의 설교에는 오불관심이라는 격이다.
“여러분의 두뇌 속에는 아직두 일확천금의 그 꿈이 그냥 남어 있구, 마약 기운이 남아 있습니다. 그 비현실적이구, 내 몸을 망치구, 국가와 사회를 망치는 악몽에서 깨어나기를…….”
하며 일단 목소리를 높이려는데 갑자기 한쪽 구석에서,
“소장님! 그 뻔뻔스런 거짓말을 인젠 그만헙시다. 귓구멍에 못이 백혔수다.”
하는 퉁명스런 소리가 불쑥 나온다.
소장은 머춤하고 그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질서 없이 떠들어 대던 군중들도 이 불의의 폭언에 일제히 긴장을 띠며 그쪽으로 시선을 보낸다.
폭언의 임자는 밀수업자로서 한때는 국경지대에서는 그 이름을 모르는 자가 없던 병철이다. 그는 일제히 쏠리는 군중의 시선에는 눈도 팔지 않고 정면으로 빤히 소장의 얼굴을 마주 보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든지 겨뤄 보려고 노리는 도전의 태세를 취한다.
소장은 한동안은 말문이 막혀 덤덤히 선 채 병철의 거무테테한 얼굴만 얼빠진 양으로 바라보다가,
“어째서……? 어째서 거짓말인가?”
질문이 아니라 괴롬을 못 이겨 부르짖는 신음 소리다.
“거짓말이 아니구요. 일확천금이 어째서 비현실적이구 꿈이라는 말이우?”
병철의 태도는 더한층 퉁명스러워진다.
소장은 또 한동안이나 말없이 내려다보다가 이번에는 확 내뿜듯이 노기를 잔뜩 띠고 반문한다.
“그럼 그것이 현실적이라는 것을 증명해 보게.”
“얼마든지 하지요. 현재, 지금 누구니 누구니 하며 돈푼씩이나 지니구 뽐내는 그들 중, 자초부터 한푼 두푼씩 바른 노릇을 해서 모은 것을 가지구 부자라는 이름을 띤 자가 그래 몇이나 됩니까? 전부가 일확천금을 한 것이라구 해두 틀리진 않겠지요.”
“그렇지만 자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부정업을 해서 얻은 것이야 아니지.”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들의 사업은 전부가 밀수가 아니면 브로커 노릇이었지요. 그두 대낮에 공공연하게 한 축이랍니다. 멀리를 생각지 마시구 전번에두 목단강에서 소장님을 찾아왔지만, 그 무슨 회사 사장인지 한 그 양반이 자초에는 무슨 업을 해서 그렇게 돈을 쥐었는지 아십니까? 자초에는 도문(圖們) 개척시에 밀수를 굉장히 해서 돈푼이나 쥐었으니까 아쥐 지금 회사두 그때에 얻은 것으루 된 것임에 틀림없겠지요.”
소장의 낯색은 새파랗게 질려 간다. 그는 무에라고 말하려고 씨근거리기는 하나 입술만 푸들푸들 떨릴 뿐 종시 입은 열지 못한다.
모두들 킥킥거리며 조소하는 그 속에서 병철은 자못 통쾌한 듯 빙글거리기까지 하며 옆채기에서 천천히 담뱃갑을 꺼내는 것이었다.
2. 부락 점묘
1
최초의 탈주 사건이 생긴 이튿날 아침 부락 전체에 긍한 일제 검색이 있은 다음, 그날 오후 보도소에서는 중독자 명우 이외에 남자 사 명, 여자 이 명 도합 칠 명을 ×××구류소로 요양을 보냈다. 요양이란 구류를 말함이다.
그런 다음 자위단에서는 일층더 경계를 엄중히 하고 부락민의 외부 출입의 자유는 당분간 절대 금하기로 했다.
그리고 보도소에서는 제6회째의 보고서에다가 새로 생긴 탈주사건의 보고까지 첨부하여 성공서로 보냈다.
그 보고서의 줄거리를 대강 숫자로만 훑어보면 다음과 같다.
△부락 호수
중독자 | 26호 |
밀수업자 | 23호 |
도박 상습범 | 9호 |
사기 횡령범 | 6호 |
기타 | 7호 |
합계 | 71호 |
(이상 초기 입식 호수)
△개전자 수
완전 개전자
중독자 | 12명 |
밀수업자 | 7명 |
도박 상습범 | 7명 |
사기 횡령범 | 6명 |
기타 | 7명 |
합계 | 39명 |
2 불완전 개전자
중독자 | 8명 |
밀수업자 | 10명 |
도박 상습범 | 2명 |
사기 상습범 | |
기타 | |
합계 | 20명 |
△계속 범행자
중독자 | 6명 |
밀수업자 | 6명 |
합계 | 12명 |
(밀수업자와 계속 범행이란 중독자들에게 제공할 마약을 외부와의 비밀 연락에서 밀매하여 들이는 것을 말함이다.)
△구류소 송치자
1 남자
중독자 | 3명 |
밀수업자 | 2명 |
합계 | 5명 |
2 여자
중독자 | 1명 |
밀수업자 | 1명 |
합계 | 2명 |
△증감수(이동)
1 | |
2 | |
병사자 | 5명 |
탈주자 | 2명 |
계 | 7명 |
(이상-강덕(康德) ×년 ×월 ××일 현재)
보도소 소장은 비로소 숨을 돌려 쉬며 늘어지게 기지개를 켠다. 그는 하품 때문에 어린 눈물을 땀 밴 손수건으로 닦은 다음, 피곤한 머리도 식힐 겸 밖으로 나왔다.
전날보다는 다소 더위가 풀린 듯 시원한 바람이 땀에 젖은 이맛전을 가볍게 스치고 지나간다.
길가에서는 웃통을 벗은 아이들이 숨바꼭질을 하느라고 더운 줄도 모르고 뛰어다닌다.
소장은 그 모양을 한동안이나 우두머니 서서 보다가 문득 그 무엇을 생각한 듯, 큰길을 건너더니 맞은편 골목으로 들어간다.
지저분한 좁은 골목에서는 무슨 냄새인지 썩은 냄새가 후끈하고 콧구멍을 찌른다. 소장은 잠시 콧마루를 씰룩거리며 어지러운 주위의 광경을 두루 살펴보다가 어떤 움막 같은 집 앞으로 들어선다.
열어 젖힌 부엌문으로부터 들여다뵈는 정주간 구들바닥에는 얼굴빛이 노오랗게 기름에 전 듯한 중년 사내가 누워서 희멀끔히 뜬 눈으로 내다보기는 하나 깁떠 일어날 줄은 모른다. 소장은 이맛살을 찌푸리고는 잠시 들여다보다가 건너편 오막살이로 발길을 옮긴다.
그 속에도 똑같은 얼굴빛의 중년 사내가, 그도 한모양으로 번드러져서 거슴츠레 뜬 눈으로 멀거니 내다보고만 있다. 그곳서도 한동안 소장은 침통한 빛을 띠고 들여다보다가 나직이 한숨지은 다음 또 다음으로 옮겨 간다.
그 다음 집에는 속옷만 아랫도리에 걸쳤는데 한쪽 엉덩이는 환히 드러내논 채 자빠져 있는 계집이 침을 괴죄죄 흘리며 자는지 어쩌는지 두 눈을 감고 있다. 소장은 못 볼 것이나 본 듯 이내 외면하며 또 다음으로 옮겨 간다.
이리하여 그가 칠십일 호나 되는 집을 죄다 돌고 보도소 마당 응달진 툇마루에 와서 힘없이 주저앉은 때는 해가 벌써 훨씬 기운 때다. 그는 손수건을 꺼내 땀에 젖은 이맛전을 닦은 후 담배 한 가치를 꺼내 성냥을 드윽 그어 붙여 물고 조용히 지나간 팔 개월 동안의 가지가지 복잡한 기억을 더듬기 시작했다.
일 년도 못 되는 짧은 동안이라지만, 일생에 있어서 가장 잊지 못할 감개무량한 동안이다. 가지가지 부류에 속하는 빛을 등진 그 낙오의 무리들 속에서, 그들의 명일을 위하여, 온갖 애를 다 써왔다는 것은 결코 평이하고 단조로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그 결과 자기의 애쓴 보람이 나타난 것은 대체 어떠한 곳인가? 생각하니 나오는 것은 한숨뿐이다.
2
부락이 건설된 것은 팔 개월 전 소화(昭和) 12년-만주국의 연호로는 강덕(康德) 4년 11월 ××일이니까 바로 그 역사적 치외법권 철폐 이후다.
전반적으로 일제히 검거한 부정업자와 중독자들을 영사관 경찰서의 손을 거쳐서 전만 오 개소에 배치한 다음, 집단 부락을 조직하고, 빛을 잃은 그들에게 다시금 새로운 희망의 빛을 비춰 주려는 그것은 결코 앉아서 따온 과일 먹듯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극도로 낙오된 폐인들과, 극단의 이기주의의 전형인 부정업자들과, 양심과 의리는 벌써 한 옛날에 매장하여 버린 사기, 도박, 횡령범 등-사회의 밑구덩은 헤매어 볼 대로 본 그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을 다시금 그 밑 구렁텅에서 건져내 보려는 설계가 세워졌을 때, 그 무모한 계획에 당국에서도 일부는 극력 반대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당국은 초지를 일관시켜서 끝내 착수했던 것이다. 한 사람의 국민이라도 좋다. 신흥국가에서는 한 사람이라도 건져내서 바른 국민을 만들려고 이를 악물고 달려들었다.
더구나 그 빛을 잃고 밑구렁에서 헤매는 그들에게는 무엇보다도 아까운 것이 있다.
그 아까운 보물 때문에 위정 당국도 번연히 무모에 가까운 일인 줄 알면서도 과감하게 실지 시험에 착수하게 된 것으로서,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그들의 지식과 인재였다. 비록 낙오는 되었을까망정 한때는 모두 다 이상을 품고 혁혁한 앞날을 바라고 매진하던 그들이다.
그들 속에는 기술자도 있고, 정치운동자도 있고, 예술가도 있고, 종교가도 있고, 의술가도 있고, 교육자도 있고, 각층을 망라하여 있다.
지식 정도는 전부가 소학 정도 이상으로서 중학 정도 전문 정도도 수두룩하다. 어학도 국어와 만주어도 말할 것도 없거니와, 영어, 노어, 독일어에까지 능통한 자가 있다.
이러므로 위정 당국이 그 인재를 아끼게 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한번 인생의 노선에서 탈선한 그들을 다시금 정궤로 끌어들이는 것은 참말로 어려운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아편 중독자가 문제다. 다른 무리들과 달라서 이 아편 중독자들은 마약과 격절시킨다는 것은 사형을 선고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 마약과 격절된 그들은 하루의 대부분의 시간을 혼몽상태에 빠져서 지낸다. 그리고 더구나 문제되는 것은, 이때까지 마약의 힘으로 눌리어 있던 연래의 숙아(宿痾)가 머리를 치밀게 되는 그것이다. 이 때문에 당국은 골머리를 앓으며 여러 가지로 애를 썼으나, 결국은 하는 수가 없이 된다. 만은 그러한 희생쯤은 미리부터 각오한 일이라, 결국은 처음 계획대로 뻗대어 나갔다.
그 결과 팔 개월 이후의 현재에 와서는 훌륭한 성적을 거두게 되어서, 마약과의 격절로 하여 희생을 보게 되는 일은 전연 없이 되었다.
그러나 마약의 힘이란 어디까지든지 집요하다. 중독자들의 머릿속에는 언제나 오색 무지개의 그 꿈이 사라질 줄을 모르고, 기회만 있으면 마의 유혹에 빠지려고 하는 것이고, 또 악착한 환경은 자꾸만 그들을 유혹하려고 하는 것으로서, 이 외부와의 비밀 연락 때문에 당국은 가장 골머리를 앓게 되는 것이다.
또 한 가지 두통거리는 밀수업자들의 일확천금의 꿈이다. 그 꿈 때문에 그들은 짬만 있으며 탈주하려고 기회만 엿보고 있는 것으로서 작일의 두 탈주자도 이 부류에 속하는 자들이다.
이 때문에 자위단은 주야로 사면에 뻗쳐 서서 경계를 엄중히 하게 된다. 자위단원들은 전부가 젊은이들이다. 아버지나 형들의 타락 때문에 쓰라린 맛은 볼 대로 본 자들이다. 그러므로 만약에 그 아버지나 형들의 죄가 적발될 때에는 속으로는 눈물을 머금어 가면서도 절대 용서가 없다.
이러한 색다른 윤리와 도덕과 조직 아래에서 피투성이의 싸움은 쉴새없이 계속되어 간다.
“후―”
막혔던 단김이 일시에 터져나가는 듯 그득하던 가슴속은 후련해진다. 그는 두 번째의 담배를 꺼내 붙여 물고 이번에는 보초막을 돌아볼 양으로 우쭐 일어났다.
3
보초막의 경비는 여전 엄중하다. 찌는 듯한 대륙의 혹서임에도 불구하고 보초들은 자기의 직무를 충실히 지키고 있다.
소장은 여러 가지 격려와 치하의 말을 진정으로 아낌없이 쏟아 놓으면서 남문 보초막에서 동문 보초막을 거쳐 북문 보초막에 이르렀다. 그런데 웬일인지, 거기에는 반드시 있어야 할 보초가 안 보인다.
소장은 잠시 보초막을 들여다보다가 혹시 사면(斜面)으로 바로 마주 쪼여드는 햇볕을 피해 응달을 찾지나 않았는가 하여, 포대 뒤를 살펴보았으나 거기에도 없다. 수상하여 사방을 두루 살피는데 아래편 냇가 버들 방축 속에서 웬 목소리가 거칠게 들려 온다.
소장의 머릿속에는 이내 그 어떤 생각이 떠오른다. 그래 그는 옥수수밭 옆을 끼고 조심스레 발자취를 죽여 가며 방축 쪽으로 나가 보았다.
가까이 이르니 목소리는 똑똑히 들리는데, 보초막에 있어야 할 순동의 목소리다. 그리고 또 하나 굵은 목소리의 임자는 틀림없이 그의 아버지 명보다.
소장은 대번에 부자간의 싸움인 줄 알고 옥수수 그늘 밑에 살짝 들어섰다.
그런 줄을 모르고, 둘은 점점 언성을 높인다.
“이 새끼, 얼른 좀 댕겨오겠다는데 못 할 건 뭬냐?”
“안 돼요. 보초의 책임상, 부락민의 외부 출입은 절대 허락할 수가 없어요.”
“책임이란 게 대체 뭬냐? 책임만 내세우면 장수냐? 그눔 옘병할 책임 때문에 비틀어지는 일은 어쩔 테냐?”
“비틀어지는 일은 무슨 일이우? 그렇게 틀어지는 일이라문, 좀 있다, 교대 시간이 지나문 내가 갔다 오지요.”
“안 된다. 너 같은 새끼가 참견할 일은 아냐.”
“아니문 그만두지요.”
“그래 정 못 헌단 말이냐?”
아비의 음성은 한층 험악해진다.
“글쎄 안 된다는데 왜 이리 딱하게 구세요? 부락 규정을 뻔히 아시면서.”
“규정이 다 뭬냐? 그 우라질놈의 규정 지키다간 앉은 자리에서 똥 싸겠다.”
“안 됩니다. 부락의 규정을 보초루서 위반할 수는 없습니다. 대체 건넌 마을에는 뭣 허러 가세요? 어서 그러지 마시구 도루 들어가세요.”
“못 하겠다.”
“못 하겠으문 맘대루 하세요. 나두 못 하겠습니다.”
“뭐 어째?”
명보는 아들의 앞에 성큼 다가들더니 두말없이 철썩 아들의 뺨을 후려갈긴다.
“이 새끼 나는 네 애비다. 애비보구 그런 말 따위가 어디 있느냐? 응? 이 새끼 애비는 애비구, 보초는 보초지.”
순동이는 얻어맞은 뺨을 붙잡고 한동안 말을 못 한다.
그러다가 아비의 주먹이 다시금 날아들 때에야 비로소 선뜻 옆으로 비켜서며,
“뭐요?”
하고 버럭 소리를 지른다.
“애비? 애비? 흥, 대체 그런 말이 어디서 나와요? 애비라구 하기가 부끄럽지 않아요? 걸핏하면 애비라구 하면서, 이때까지 자식들에게 애비의 노릇을 한 게 뭬요? 난 이때까지 스무 살이나 먹는 동안 애비의 신세를 져본 일은 한 번두 없소. 되레 어린것이 푼푼이 얻어 오는 돈으루 양관(아편 흡연소)에나 댕기면서 아편만 빤 건 누구요? 애비라구 자칭하면서 자식들에게 옷 한 벌 지어 줬소? 언제 한번 먹구 싶어하는 음식을 멕여 본 일이 있소? 그러구 또 내 어미를 되눔한테 팔아버리구 어린 자식들을 길가에 헤매게 한 건 누구요? 애비? 애비……? 그런 뻔뻔스런 말이 어디서 그렇게 나오? 내가 못생긴 놈이라문 애비구 뭐구 벌써 개굴창에라두 차버린 지가 오랬을 거요.”
“뭐……? 엑 개자식.”
명보는 참다가 못해 아들의 모가지를 와락 틀어잡는다.
소장은 잠시 망설이다가 슬며시 둘의 앞으로 나간다. 소장의 불의의 출현으로 부자간의 싸움은 부득이 중단되고 만다.
그러나 그 대신 순동의 눈에서는 그만 참고 참았던 눈물이 일시에 왈칵 쏟아져 나온다. 소장은 보다못해 조용히 고개를 돌려 버린다.
3. 천국도(天國圖)
1
아침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는 낮밥 때가 겨워도 그냥 구질구질 내리며 끊일 줄을 모른다.
부락은 길가에 개새끼 한 마리 어른거리는 양 없이 잠든 듯이 고요하다느니보다 몹시 피곤해 보인다.
명보는 으슥한 방구석에 지친 듯이 드러누워서 멍하니 밖을 내다보며, 걷잡을 수 없는 생각에만 사로잡혀 있다.
부엌간에서는 딸 순녀가 순동의 것인지 누덕누덕 떠붙인 코르덴 양복 바지 가랑이를 꿰매고 있고 그 옆에서 바로 전에 보초막에서 돌아온 순동이는 무슨 책인지 잡지 같은 것을 펼쳐 들고 신이 나서 읽는다. 명보는 그 모양을 잔뜩 지르뜬 눈으로 이슥히 내다보다가 그만 벽에다 가래침을 탁 뱉으며 등을 지고 돌아누워 버린다.
그러나 순동이는 무관심한 태도로 보던 책을 집어 들고 방으로 들어가더니,
“이게 무슨 자나요?”
하고 아비의 눈앞에다가 불쑥 책을 들이댄다.
명보는 빠르지 못한 눈으로 아들의 얼굴을 흘깃 쳐다보고는 하는 수 없이 볼멘 소리로 대준다.
“큰 덕(德) 자다.”
“그럼 일덕일심(一德一心)이란 무엡니까?”
“내가 아니? 나더러 묻지 말구, 그런 건 소장한테나 가 물어라.”
명보는 버럭 화를 내며 아들의 들이댄 책을 팔굽으로 밀쳐 버린다.
순동이는 아무 말 없이 아비의 얼굴을 슬픈 표정을 띠고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슬며시 제자리로 돌아온다. 그러나 보던 책을 다시 볼 생각은 안 나는 듯 문전에 기대 앉아 조용히 두 눈을 감는다.
순녀는 오라비의 그 모양을 보고 그도 꿰매던 일감을 살며시 무릎 아래에 내려놓으며 나직이 한숨짓는다. 아버지의 일로 하여 항상 속을 썩이는 오빠의 심중을 생각하면 그의 좁은 가슴속은 미어지는 것 같다.
어떻게 하면 그 아버지를 바른 길로 이끌어서, 남과 같이 단란한 가정을 이루어 볼까? 이것은 자나깨나 언제든지 그의 오빠 순동의 가슴속에 서려 있는 갸륵한 심정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 오빠의 마음을 털끝만큼도 알아 못 준다. 뿐만 아니라 짬만 있으면, 기회만 생기면 그 오빠를 멀리하려고 악독한 생각을 품고 있으며, 남의 눈과 법만 아니라면 영영 없애 버리려고 생각을 바수고 있는 줄까지 순녀는 잘 안다. 그리고 그 오빠만 없다면 자기는 벌써 어떠한 되놈에게 팔려 버렸을는지 모른다.
그런 것을 생각하면-더구나 그 위에 아무리 잊으려고 애써도 잊을 수 없는 어머니의 일을 생각하면 열 번 물어뜯어도 시원치 않을 그 아버지다.
어머니, 얼마나 불쌍한 어머닌가? 무도한 남편 때문에 되놈에게 팔려 가서 결국은 빠질 수 없는 신세를 비관하고 목을 매어 버린 어머니.
만약 그때 두 남매 중에서 누구든지 조금이라도 눈치를 챌 수가 있었던들. 어머니를 잃은 후의 두 남매는 그 얼마나 길가에서 울며 헤매었던가? 길가에서 길가로 전전유리하며 떠돌아다니던 그때 일은 생각하기에도 가슴이 터지는 것 같다.
결국 오빠 순동이가 겨우 열두 살 된 어린 몸으로 세탁소 심부름꾼으로 들어가기까지, 두 남매에게는 진종일 식은밥 한 숟가락도 얻어먹지 못하고 주림에 시달리게 되는 것은 거의 하루 건너씩 있은 일이 아니었던가? 그러한 자식들을 두고도 밤낮 양관에만 가서 틀어박혀 있던 그 아버지를 그래도 아비라고 이렇게 따라와서, 어떻게 하면 바른 길로 끌어들일까고 애쓰는 오빠의 그 모양을 생각하면 눈물이 아니라 피가 나는 것이다.
그는 소리 없이 괴어 넘치는 눈물을 치마끈으로 살짝 씻은 후,
“오빠, 뭘 그렇게 생각하우? 시장하실 텐데 점심이나 잡수.”
하고 비길 데 없는 다정스런 웃음까지 지어 보인다.
“아직 먹구 싶잖다. 아버지한테나 차려 드려라.”
순동이는 힘없는 어조로 말하고는 다시금 접어 논 책을 집어 든다.
그러는데, 밖에서 신발 소리가 나더니 동문 어귀 득수가 터덜터덜 들어온다.
“명보, 있나?”
2
득수의 부르는 소리에 명보는 기다리고 있기나 한 것처럼 갑자기 정신을 차려 벌떡 일어난다.
“왜 그러나? 어서 들어오게.”
“뭘 허는가? 낮잠인가?”
“아닐세, 하는 일 없이 그저 누워 있었네.”
“심심허문 마슬돌이래두 할 거지. 누워 있으문 별수가 있나? 나『삼국지』한 책 얻어 가지구 왔는데 뒷말 성오네게 가서 좀 구수하게 봐주게.”
하면서 득수는 무엇을 의미함인지 한쪽 눈을 찔끔 감아 놓는다.
그 모양을 보고 명보는 더 두말없이 우쭐 일어난다.
“그러세. 갑갑해 못 견디겠네.”
마당 밖을 나서자 득수는 명보의 옆구리를 꾹 찌르며 뜻모를 웃음을 씽글 웃어 보인다.
명보는 호기심에 번뜩이는 눈으로 마주 보며 숨소리를 높인다.
“자네 요즘 한번 빨어 봤는가?”
“빨어 본 게 다 뭔가? 냄새두 못 맡아 봤네.”
명보의 입술에는 대번에 침이 흘러내리며 사지가 후들후들 떨린다.
그 모양을 보고 득수는 의기양양해서,
“한풍 쳐볼까?”
하고 다시금 씽긋 웃는다.
“땄나(있나)?”
“따잔쿠.”
“어디서 땄나?”
“어디서 못 따겠는가?”
“좀 보세.”
“이 사람, 정신이 있는가? 여기가 어디라구 길가에서 이러는 건가?”
득수의 핀잔에 명보는 그만 하는 수 없이 마른침만 꿀꺽 삼키고는 잠자코 그의 옆을 따른다. 둘은 한동안 말없이 가다가 보도소가 보이자, 약속이나 한 듯이 아래편 골목으로 빠져들어간다.
“그런데 이 사람아, 어디루 가는 셈인가.”
명보는 갑갑해나서 또 말을 꺼낸다.
“어디가 졸까?”
“가자는 자네가 모르문 누가 아는가.”
“글쎄 말이네. 어디든지 조용한 데라야 될 텐데.”
“조용한 집이 뉘 집인가?”
“성오네 집이 어떤가?”
“성오네 집?”
“응, 거기가 조용할 것 같네.”
명보는 수상해하는 눈치로 이슥히 득수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그리루 가문 성오란 놈두 같이 얼려야지.”
하고 못마땅해하는 어투로 불평스레 말한다.
“그건 그렇지만, 머 넉넉하니까 괜찮으네.”
득수는 말끝을 선명치 못하게 우물쭈물 맺어 버린다.
“넉넉하문 얼마나 되는가?”
“글쎄 잔소리 말구 따라만 오게. 정 부족하다문 내 몫까지 줄 테니까.”
득수의 이 말에서 명보는 비로소 그의 속을 엿보았다. 중독자도 아닌 그가 왜 이렇게 모험을 하는 것인지, 그리고 왜 하필 성오의 집을 찾아가려는 것인지, 그 까닭을 명보는 알아채고 속으로 고소를 했다. 그는 아무 말도 없이 묵묵히 뒤를 따르며 생각했다.
‘어쨌든 제가 찾아 먹을 것만 찾아 먹으면 그만이지 무슨 상관이냐? 득수란 놈이 성오를 아편으로 자빠뜨려 놓고, 그의 계집을 다치든 찢든 내 무슨 아랑곳할 것이 있느냐? 나는 나대로 득수의 주머니 속에 있는 그것만 받아 먹으면 그만이다. 굿이란 그저 구경이나 잘 하구 떡만 얻어 먹으면 되는 것이 아닌가.’
둘이 마당 안에 들어서는 것을 보고, 먼저 대가리를 내미는 것은 성오의 아내다. 언제 보든지 밉지 않은 얼굴이다. 몸집도 호리호리하고 게다가 이상하게 사람을 끌어 낚는 웃음까지 얄궂게 웃을 때에는 막 통째로 깨물어 주고 싶은 충동까지 인다.
“성오 있나요.”
득수의 입가에는 벌써부터 음탕한 웃음이 떠오른다.
“있어요.”
“뭘 허구 있나요?”
“모르지요. 뭘 허구 밤낮 자빠져 있는지.”
그러자 방 안에서는 푸수수한 머리를 떠이고 얼굴 가죽이 딱 말라 붙어서 해골같이 된 성오가 우멍한 눈으로 퀘―니 내다본다.
“뭘 하는가? 낮잠인가?”
성오는 반쯤 몸을 일으키며,
“아무것두 하는 일 없네.”
하고 겨우 마지못해 하는 듯이 대답한다.
3
잔잔히 내리던 이슬비는 갑자기 억수로 퍼붓기 시작하고, 비밀 공작에는 둘도 없을 좋은 기회다.
하긴 주머니 속이 빤히 들여다뵈는 성호네 집이라, 누구 하나 찾아올 건 없지만, 그래도 세상일이란 앞을 가릴 수가 없는 것으로서, 어느 때 누가 불의에 달려들는지 모르는 것이고, 또 그의 아내의 용모에 침을 흘리는 건달패가 없는 것도 아니고 해서 사실은 은근히 근심했던 것인데, 이렇게 줄기찬 비가 내리쏟고는 조금도 개의할 필요가 없다.
득수는 아무 꺼리는 양 없이 바지춤에 단단히 낑겨 가지고 온 수건 뭉텅이를 꺼내서 성오와 명보의 앞에 펼쳐 놓는다. 성오는 보기만 해도 생기가 도는 듯 앉은 자리에서 펄쩍 뛴다.
손수건에 싸온 것은 성냥갑 절반은 넉넉히 됨직한 검정떡(아편)덩이다.
득수는 벌쭉 웃으며 손바닥에 들고 다루어 본다.
“어떤가, 흐뭇한가?”
“아하.”
성오의 입에서는 뜻모를 웃음이 나오고, 명보는 앉은 자리에서 진정을 못 하며 자꾸 군침만 삼킨다.
“아니 그건 뭐요? 구류소에 또 가구들 싶수?”
하는 소리에야, 셋은 비로소 성오의 처의 존재를 생각하고 서로 얼굴을 마주 쳐다본다.
“먹구서 가는 거야 누가 아나? 못 먹구 가야 탈이지.”
하고 득수는 슬쩍 한마디 넘기며,
“어떻수? 아주머니두 한 포 빨아 보지요.”
하고 벌씬 웃는다.
“집어치워요. 그런 건 보기만 해두 신물이 돌아요.”
팩 쏘듯 말하긴 하나 눈가엔 얄궂은 웃음이 떠오른다. 성오는 기다리기가 바쁜 듯 득수의 앞에 바짝 다가앉으며,
“여보게, 잔수작 말구 나 좀 먼첨 떼주게.”
하고 졸라 댄다.
“그렇게두 바쁜가? 어서 준비나 허게.”
“준비는 무슨 준빈가? 난 그냥 먹겠네.”
하며 성오는 득수의 손에 매달리더니 어느 틈엔가 물에 퍼진 콩알만큼 뚝 잘라 그냥 닁큼 입에 집어넣는다.
“이 사람 생걸세.”
“생거구 머구, 위선 먹구 봐야지.”
하며 입을 다시는 성오의 얼굴에는 비로소 웃음이 떠오른다.
그 모양을 보고 명보도 손을 불쑥 내민다.
“나두 그냥 먹겠네. 좀 주게나.”
“허 이거 큰일났군. 이렇게들 다 주구 난 뭘 먹는가?”
하며 투덜거리면서도 득수는 그에게도 콩알만큼 뚝 잘라 준다.
앉은 자리에서 둘의 눈길은 거슴츠레 흐려져 간다.
“어떤가?”
득수는 벌쭉 웃으며 둘의 모양을 번갈아 본다.
“말 말게. 이런 좋은 걸 못 먹다니.”
“아아, 오늘은 생일이다.”
둘은 세상없이 만족해하며 한쪽 팔을 괴짚어 베개하고 비스듬히 드러눕는다.
“난 제 식으루 빨겠네.”
하고 득수는 역시 바지춤에 낑겨 가지고 온 붓자루 같은 것을 꺼낸다.
“아주머니, 촛그루가 있으문 좀 주시우. 그러구 돗바늘 같은 것이 있거들랑 그것두 좀 빕시다.”
“돗바늘 같은 거문 어떤 거란 말이오?”
“아니 돗바늘이문 돼요.”
“그럼 진작 돗바늘이랄 거지 같은 건 또 뭐요?”
“잘못했수다.”
“괜히 사람을 놀리기만 하면서.”
꽤 놀아먹은 행티다.
득수는 쓰러진 둘을 힐끔 돌아다보고는 저 혼자 벙글거리며, 자기도 콩알만큼 떼어 쥔다. 계집은 마치 준비나 해두었던 것처럼 촛그루와 돗바늘을 가져온다.
“미안합니다.”
여자는 조용히 웃어만 보일 뿐 말이 없다.
득수는 검정 콩알 같은 것을 돗바늘 끝에 꿰어 들고 촛불에다 대고 굽기 시작한다. 바질바질 기름이 끓어 나고 파아란 연기가 구수한 냄새를 피우며 몰싹몰싹 솟아오른다.
계집은 사내의 앞에 이마가 맞닿을 지경 바싹 가까이 조여 앉는다.
4
꿈을 실은 고무 풍선은 사뭇 상승한다. 어디를 둘러보든지 주위는 노오랗게 혼돈된 빛깔이다. 풍선은 자꾸만 상승하는데 이 어인 일인가?
몸은 자꾸만 아래로 아래로 침전되어 가며 손가락 하나 까딱할 기운조차 없이 하여 버린다. 머릿속은 보오야니 흐려져 가며 허릿심은 오뉴월 엿가락 녹듯 나긋해나서 숨쉬기도 귀찮아난다. 바람도 없고, 비도 없고, 시끄러운 세상사는 더구나 있을 리 없다.
그런데 무엇일까?
아득한 저쪽, 수평선인지 지평선인지 안개 낀 선명치 못한 그 아득한 곳에선 무엇인지 아지랑이 같은 것이 자꾸만 어른거리면서 이쪽으로 이쪽으로 가까이 온다.
‘눈을 바로 뜨고 보자.’
그러나 나릿해진 눈가죽은 환히 열릴 줄을 모른다. 그렇다고 영 감을 수는 더구나 없다. 감지도 뜨지도 못하는 아스름해진 눈앞으로 아지랑이는 점점 가까이 떠오며 어른거린다.
바로 그런 때다.
성오는 무엇인가 앞에서 어른하는 것을 보았다. 흐릿한 의식으로서도 그는 그것이 자기의 아내의 치마꼬리가 너펄하는 것인 줄을 알 수가 있었다.
뒤이어 또 무엇인지 우뚝한 것이 눈앞을 스친다. 그것도 무엇인가를 그는 알 수가 있었다. 사내와 계집의 그림자가 잇달아 부엌간 방으로 넘어가자, 성오는 머리를 쳐들려고 했다.
그러나 천근보다도 더 무거워지고 물먹은 솜보다도 더 흐느러진 머릿속은 생각만 해도 아욱해진다. 그러면서도 눈앞에는 계집과 사내의 음탕한 장면의 환영이 자꾸만 떠오르고 그와 동시에 시시덕거리는 웃음 소리까지 보는 듯이 들려 온다.
얼마나 분한 일이냐? 생각과 같아서는 당장에 뛰어나가 두 연놈을 단매에 처치해 버릴 것이건만. 그러나 그것은 일순간의 발작과도 같은 것으로서 사실은 그러한 생각을 하는 것조차 게을러지며 귀찮아진다.
그저 머어니 허공만 바라보고 싶다. 허공은 그야말로 끝이 없는 허공이고 자꾸 아득해만 간다. 그 허공을 향해 생각은 끝없이 떠오르고, 육신은 점점 밑으로 밑으로 가라앉아 간다.
그러다가 갑자기 머릿속이 아득해지는 것 같더니 노오랗던 그 허공이 차츰 푸른빛으로 물들어 간다. 그러자 그 푸른빛 속에서는 무엇인가 반짝이기 시작한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그 수효가 차츰 불어 감을 따라 빛깔도 선명해진다.
무엇일까?
아, 별이다. 푸른 하늘에 수없이 반짝이는 별이다.
남북으로 허어옇게 가로 뻗친 것은 은하수.
북두칠성을 더듬어서 북극성의 위치도 딱히 알 수가 있다.
아내의 웃음 소리가 그 속에서 들려 오는 것 같다. 어찌 들으면 첫사랑을 속삭일 때 듣던 그 음성과도 같은데…… 옳다. 그렇다. 그 냇가에서-갈밭 속에서 첫사랑을 속삭일 때 듣던 그 웃음 소리다. 그러나 모양은 안 보인다. 그저 흑흑 느끼는 것 같은 웃음 소리뿐이다. 만은 아내의 그 웃음 소리에 첫사랑의 옛 꿈을 그린 것도 잠시 동안이고, 별빛은 다시금 찬란하게 황홀하게 비쳐 온다.
얼마나 아름다운 그림인가?
세상에서는 일생을 가도 볼 수 없는 그림.
손만 쳐들면 만져질 것 같은 푸른 별, 빨간 별, 흰 별.
대체 누가 그린 그림일까?
이 그림 속에 싸여 있는 자기는 그 얼마나 행복스러운 인간인가?
아니다. 인간이 아니다.
인간으로서는 절대로 볼 수 없는 그림이다.
그러면, 자기는 과연 무엇인가?
자기는 신선 사람이 아닌가?
그렇다. 신선 사람이다. 그리고 이 그림은 천국의 그림이다.
‘대체 아내의 음행이 나에게 무슨 상관이냐? 나는 나대로 이 천국의 그림만 보고 있으면 그만이 아니냐.’
거기에서는 다시금 유창한 음악까지 들려 오기 시작한다. 그 음악 소리를 들으면서 성오는 마치 어머니의 품에 안겨 자장가에 잠들어 버리는 어린애처럼 고요히 두 눈을 감아 버리는 것이었다.
4. 양심의 잔편(殘片)
1
×××구류소에서 이 주일간의 요양기간을 마친 명우네는 부락으로 돌아오자 또 장시간에 긍한 보도소 소장의 훈계를 받았다.
그리고는 모두 다 제 집으로 흩어져 갔다. 그러나 득수네 집 곁방을 얻어 가지고 홀아비생활을 하는 명우는 집이라고 찾아간댔자, 반가이 맞아 줄 사람도 없는 판이라 그대로 보도소 뒷마당 버드나무 그늘 밑에 앉아서 땀을 들이며, 이생각 저생각 생각나는 대로 머릿속을 뒤번지고 있었다.
그러는데 북문 파수막에서 교대시간이 되어 들어온 것은 순동이다. 그는 명우를 보자 싱글벙글 악의 없는 웃음을 띠고 앞으로 오며,
“형님, 어떻수? 피서 잘 했수?”
하고 명우의 옆에 털썩 주저앉는다.
명우는 그도 악의 없는 웃음을 지어 보이며, 그러나 몹시 지친 모양으로,
“네놈 신세에 정양 잘 허구 왔다.”
하며 순동의 어깨를 툭 친다.
“하하하…… 정양하구 온 이가 우멍눈이 됐군요. 그런데 나 때문에 정양이란 건 억설이래두 너무 심한 억설인데요.”
“뭐가 억설이냐? 늬눔들 다 그런 놈들이지.”
“하하하…….”
순동이는 또 한바탕 호활스레 웃고 나서,
“그런데 형님, 오늘 저녁은 어떻게 하실라우?”
하고 갑자기 정색으로 돌아선다.
“저녁을 어떻게 할 거 있니? 집에 가 먹지.”
“집은 덜 좋을걸요.”
“왜?”
“김서방네가 오늘 왼종일 내외쌈을 했다우.”
김서방이란 득수를 말함이다.
“무슨 일루?”
“무슨 까닭이 있어서 언제는 했나요? 사내가 그런데다가 계집까지 그 따위니까, 자연 그런 게죠.”
명우는 잠시 득수네 부부를 눈앞에 그려 보았다. 말할 수 없이 가슴속이 불쾌해진다.
“형님, 그러지 말구 오늘 저녁은 우리집에 가서 잡수십시다. 나 오늘 낮밥 때 개울에 나가서 물고기를 두어 되 떠왔어요. 그걸 애호박이나 넣구 고추장에다 지지문 아주 맛이 있죠. 그러구 어저께 거리에 갔다가, 오늘 형님 오실 줄 알구, 호주두 이십 전 어치나 받어다 뒀어요.”
명우는 아무 말도 못 하고 한동안이나 응결된 듯한 표정으로 순동의 얼굴만 마주 보다가,
“형님, 그렇게 하지요, 네.”
하고 재차 따지며 묻는 순동이의 말에야 겨우 고개만 끄덕여 보인다.
“그럼 갑시다. 냇가에 나가 땀이나 씻구 들어갑시다.”
하고 순동이는 우쭐 일어서 앞을 선다.
명우는 여전 말없이 뒤를 따른다.
냇가에 나가 몸을 닦으면서도, 순동이는 연방 무어라고 명랑하게 지껄이지만 명우는 그냥 입을 봉한 채 묵묵히 지나간다. 이윽하여 몸을 닦은 후 순동이네 집으로 그를 따라 들어오니, 벌써 미리부터 이야기가 있은 듯 순녀는 저녁상까지 죄다 차려 놓고 기다리다가 반가이 맞아 준다. 그러나 부끄러워 말은 못 하고 이내 얼굴을 붉히며 모로 돌아서 버린다.
명우는 무에라고 말을 하려다가 거북한 생각이 들며 쑥스런 것 같아서 그만 방마루 앞에 슬쩍 비켜 섰다. 방 안에는 아무도 없다.
순동이는 주저거리는 명우의 앞에서,
“어서 들어가세요. 어째 패거리가 없어서 서운한가요.”
하고 또 농을 건다. 그 말에야 비로소 명우는 기회를 얻은 듯 씽긋 웃으며 입을 연다.
“예끼 녀석, 이 상어른을 너무 놀리면 천벌을 입는 법이다.”
“하하하…… 형님 정양 갔다 오더니 아주 점잖어졌수다.”
“이 녀석 또 그런 소리냐?”
명우는 하는 수 없이 웃어 버린다.
“그런데 아버진 어디 가셨니?”
“모르지요. 왼종일 뉘 집에 가 낮잠인지, 요즘은 왼통 집에라구 붙어 있지를 않아요.”
순동의 얼굴빛은 이내 흐려든다.
2
오랫동안의 밑바닥생활에서 따뜻한 세상의 온정과는 벌써 한 옛날에 절연된 명우는 오래간만에, 참으로 오래간만에 순동이네 남매의 눈물겨운 심정에서 다시금 인생의 정을 느끼게 되었다.
다 꺼져 간 줄 알았던 정열의 폐허 속에는 그래도 아직 식지 않은 재나마 남아 있었던가? 자꾸만 뜨거워나는 눈시울은 어두운 속에서도 순동의 눈치를 끄는 것 같아, 명우는 굳이 말리는 것을 그냥 뿌리치고 밖으로 나왔다. 밖으로 나오니 참고 참았던 뜨거운 것은 일시에 왈칵 두 볼에 쏟아져 내린다.
그래 그는 자기의 기거처인 득수네 집과는 딴 방향으로 발길을 돌려서 보도소 뒷마당 버드나무 밑으로 갔다. 생각은 북문 밖 냇가로 나가고 싶었지만, 거기에는 보초막이 있어서 출입을 금하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그리로 간 것이다.
그러나 보도소 뒷마당도 조용하다. 더구나 낮에는 그렇게도 뜨거웠지만 밤이 되면 대륙의 밤이라 한결 서늘하다.
으슥한 버들 그늘 밑에 힘없이 주저앉아 두 팔로 턱을 괴니, 순동의 권에 겨워 반주로 두어 잔 마신 호주 기운에 머릿속은 이상스레도 부풀어오른다.
어디서인가, 앞마을 쪽에서는 피리 소리가 들려 오며, 귀뚜라미 울음 소리도 제법 구성지다. 그 소리에 심취된 것은 아니지만, 가만히 귀를 기울이니 문득 생각나는 것은 고향의 기억이다. 고향에는 여러 가지 전설도 많았다. 모두 다 슬픈 전설들이었다.
어머니는 그러한 전설들을 이야기해 주실 때마다 눈물을 지으시더니, 지금은 어떻게 하고 계신지?
집을 버리고 떠나온 지가, 지금 바로 서른 살이니까, 인제는 팔 년이나 된다. 팔 년이나 되는 그 동안에 어머니는 얼마나 속을 태우시고 늙으셨을까?
백부님의 댁에 가서 계시다니, 의식에는 그다지 괴로움을 느끼지 않으시겠지만 그러나, 단 하나밖에 없는 불효막심한 외아들 때문에 얼마나 애를 말리실 것인가?
명우의 눈앞에는 남몰래 그늘을 찾아가서는 소리 없이 눈물짓는 어머니의 그 모양이 보는 듯이 선하게 떠오른다.
그것은 참말로 보기 어려운 정경이다. 그래 그는 마치 보지 못할 것이나 본 듯 얼른 두 눈을 감아 버리며, 기억조차 떨쳐 버리려고 머리를 흔들어 보았다.
그리고는 후 하고 긴 한숨을 뽑고 나서 담배를 꺼내 붙여 물었다. 후욱훅 내뿜은 담배 연기는 어둠 속에서도 선명히 보인다.
그것을 한동안 시름없이 바라보다가 그만 자리를 일려는데 무언지 눈앞에서 어른하는 것 같더니 섬광처럼 사라져 간다. 핫 하고 놀라며 다시 눈여겨보려는데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지며, 그 대신 이번에는 머릿속에 또렷이 떠오르는 것이 있다. 틀림없는 그 계집- 몇 해를 내리 잊으려고 애써 온 그 계집의 환영이다. 그 순간 그는 울컥 치미는 격정에 그만 벌떡 일어섰다. 그러고는 성난 보조로 씨근거리기까지 하며 보도소 뒷마당을 나와 큰길에 나섰다.
갈 곳은 없다.
어두운 길바닥에 우두커니 서서 갈 곳을 생각하는데, 눈앞에는 또 그 계집의 환영이 잡을 듯이 떠오른다. 그는 한동안이나 눈앞에 떠오르는 그 얼굴을 분노에 불타는 눈으로 노려보다가 밑 속까지 뱉어 버리듯 탁 하고 가래침을 뱉어 버린 후 되는 대로 지향없이 터벅터벅 걸었다.
여름밤은 벌써 깊었다.
부락은 무덤 속에 든 듯 고요하다. 명우는 공연히 개만 짖기다가 하는 수 없이 득수네 집으로 찾아들었다.
곤히 든 잠을 깨울까 봐 조심스레 발자취를 죽여서 마당 안에 들어서는데, 어디서인지 수군거리는 말소리가 귓결에 들려 온다. 명우는 수상스러워 발자취를 죽여 가며 툇마루 앞에 들어서니 이야기 소리는 굴뚝 뒤에서 난다.
그리고 낮게 쏘곤거리는 소리지만 그는 그것이 틀림없는 득수와 명보의 목소리인 것을 알 수가 있었다. 명우는 바싹 벽에 붙어 섰다. 그런 줄도 모르고 둘은 마음놓고 쑤군덕거리며 무언지 약속까지 단단히 한다.
“그럼 그날루 실수 없이 해야 허네.”
하는 것은 득수의 소리고,
“응, 염려 말게.”
하는 것은 명보의 음성이다.
이러한 속에서 밤은 시름없이 깊어 가고, 하늘에 별들은 더한층 빛난다.
3
언약을 짜놓은 예정의 날, 기대한 대로 순동이는 보도소의 용무를 띠고 현공서(縣公署)로 갔다. 돌아오는 것은 이튿날 저녁 무렵이다. 계획한 것을 수행함에는 두번 없을 기회다.
순동이가 조반을 일찍 지어 먹고 보도소를 거쳐 떠난 후, 명보는 실없이 들떠오르는 마음을 걷잡지 못하고 초조하게 지냈다.
그러나 딸은 아비의 그 속을 알 리가 없다. 여전히 바지런히 재빠르게 몸을 놀리며 잔손질에 쉴 줄을 모른다.
점심때가 되자 명보는 끝끝내 견디지 못해 득수를 찾아갔다. 득수는 명보의 기줄해하는 표정을 보고 귀찮다는 듯이 짐짓 미간을 찌푸리며,
“명본가? 들어오게.”
열적은 어조로 겨우 맞는 양을 한다.
“갑갑해나서 견딜 수가 있어야지.”
명보는 더욱 비굴하게 어색한 웃음까지 지어 보이며 득수의 눈치만 힐끔힐끔 살피다가,
“그런데 밤 몇 시루 거사를 할까?”
하고 조심스레 목소리를 낮추어 묻는다.
“열두시나 새루 한시쯤으루 하지.”
“응, 그때문 죄다 잘 때니까, 좋겠지.”
하고 명보는 또 한동안이나 주뭇거리며 득수의 눈치를 살피다가,
“그리구 여보게, 너무 여러 번 물어서 안됐네만, 그놈들이 약속한 대루 어김없이 거기까지 올까?”
“아, 그 사람, 잔걱정두 팔자네. 어김없이 온다니까 왜 이리 성환가?”
득수는 역정스레 말한 후 모로 돌아앉기까지 한다.
명보는 더한층 낮게 돌아져서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뒷머리를 긁적긁적 긁는다.
“미안하네. 그리구 삼백 원 돈두 틀림없겠지?”
“그렇게 의심되거들랑 그만두게나.”
“아니, 자네를 의심해서 그런 게 아닐세. 어째 그렇게 곡해를 하는가? 되눔들 일이 돼서 어쩐지 미안해서 그러네.”
“글쎄 이 사람아, 그런 잔걱정은 말래두 그래. 만주 땅 이십 년에 되눔은 주물러 볼 대루 주물러 본 놈일세.”
득수의 어조는 얼마간 풀려진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명보는 또 묻는다.
“이 사람 삼백 원만 쥐면 어떻게 할까? 난 자네 하나만 믿는 거니까, 어디든지 같이 가야 허네.”
득수는 하는 수 없다는 듯이 웃어 버린다.
“아, 참 그 사람 씨만이두 캐구 드네.”
그 바람에 명보도 씩하고 웃는다. 그러나 그 웃음은 말할 수 없이 비굴한 웃음이다. 그는 또 한동안 상대편의 눈치를 살피다가, 몹시 거북한 양으로 말을 꺼낸다.
“여보게 좀 없나?”
“뭐가?”
“그것 말일세, 있으문 조끔만 주게나.”
하고 입술을 감빨며 침을 삼키는 그 모양을 득수는 이슥히 바라보다가,
“낮에 먹구 어떡허겠는가?”
하고 핀잔을 주면서도 주머니를 뒤지더니 수건에 싼 것을 꺼내 팥알만큼 잘라 준다.
“고맙네.”
명보의 입가에는 대번에 침이 흐른다.
그런 때에 뜻밖에도 공동농장에 나갔던 명우가 호미를 둘러메고 들어온다. 둘은 깜짝 놀라 서로 색없이 얼굴을 마주 쳐다보는데, 명우는 벌써 눈치를 알아채고,
“뭐유? 나두 좀 줘요.”
하면서 문 앞에다가 호미를 동댕이친 후 성큼 방 안에 들어선다.
하는 수가 없다. 현장을 들키고 같은 패거리를 거절할 수는 없다. 싫은 대로 다시금 팥알만큼 잘라 주니 명우는 단입에 훌떡 삼켜 버린다.
“어디서 생겼는가요?”
“지난번에 얻어 뒀던 걸세.”
득수는 내키지 않는 말조로 대답한 후 슬며시 밖으로 나간다.
명우는 씽긋 뜻모를 웃음으로 돌아다보고는 부엌에 나가 냉수 한 그릇을 떠서 꿀꺽꿀꺽 맛스레 들이켠 후 다시 방으로 들어와서 털썩 들어앉더니 이내 목침을 끌어다가 베고 헌뜻 누워 버린다. 잇달아 명보도 드러눕는다.
차츰 몽롱하여져 가는 의식 속에서 둘은 제각기 제 생각을 벌여 가며 꿈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4
그날 밤-
자정이 훨씬 지났을 때, 부락은 죄다 잠들었고 사면 보초막에서도 피로에 견디지 못해 모두 다 쓰러진 때였다.
득수는 아랫목에서 꾸미적거리는 명보를 발길로 쿡 찼다.
명보는 아무 말도 없이 슬그머니 일어난다. 잇달아 득수도 일어난다.
정주간에서는 순녀가 진종일의 시역에 지쳐서 혼곤히 잠들고 있다. 그는 당장에 무서운 운명의 마수가 뻗쳐들려는 것도 모르고 무슨 꿈을 꾸는 것인지 잠꼬대까지 하고 있다.
득수는 언제인가 성오의 집에서 아편을 빨 때, 갖추어 가지고 갔던 그 붓자루 같은 것을 옆채기에서 또 꺼내더니 촛그루에다가 불을 단 후, 전과 같은 공작을 시작하는 것이었다. 명보는 잠자코 구경만 하고 있다.
바늘 끝에 찔린 검정 콩알은 촛불에 이내 바질바질 끓며 구수한 냄새를 풍긴다. 명보는 벌써 몇 번이나 군침을 삼켰는지 모른다.
그러나 득수는 왼 눈으로도 안 보고, 구워서는 성냥갑에 대고 부비고, 부비고는 또 굽고, 몇 번을 그렇게 한 다음에야, 기름하게 된 검정 약을 붓자루 같은 대〔管〕의 중간 구멍에다가 살짝 낑겨서 명보의 앞에 넌지시 내밀며,
“인젠 됐네. 자넨 삼켜선 안 되네.”
하고 따진다.
대를 받아 드는 명보의 손길은 가느다랗게 떨린다. 그는 그것을 받아 들고도 한동안이나 파리한 얼굴로 무슨 생각엔지 잠겨서 움직일 줄을 모른다.
“얼른 그래야지, 뭘 그렇게 생각하구 있는가?”
득수의 이 말에 명보는 그만 결심한 듯 우쭐 일어나서 촛불을 들고 정주간으로 나간다. 문턱을 넘어서는 두 다리는 경련을 일으킨 듯 몹시 후들거린다.
그러나 그는 입술을 악물고 딸의 머리맡에 자빠지듯 주저앉는다. 만은 딸의 얼굴을 들여다본 그 순간 그는 그 무엇에 질린 듯이 얼른 고개를 돌려 외면해 버린다. 그리고는 가슴속이 꺼져 나오는 듯한 한숨을 후 하고 내뿜는다.
득수는 보다가 못해 벌떡 일어나 나오더니 명보의 손에 것을 홱 빼앗아 가지고는, 아무 주저도 없이 촛불에 들이대고 흠떡 빨아들인다.
그 다음 순간 명보는 그만 보다가 못해 네 발걸음으로 정신없이 방으로 들어간다. 득수의 입 안에 가득 물렸던 연기는 모옥목 순녀의 콧구멍으로 새어 들어간다. 몇 번을 빨아서는 뿜고 뿜고를 하는 동안 명보는 방 안에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어쩔 줄을 몰라한다.
그러자 순녀의 자던 얼굴이 갑자기 찡그려지는 것 같더니 두어 번 밭은 기침을 캑캑 하고는 다시는 숨도 쉬는 것 같지 않게 조용해진다. 득수는 씽글 웃으며 명보를 들여다본다. 만은 명보는 어둠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앉아서 그 표정을 볼 수가 없다. 그 모양을 보고 득수는 잠시 입술을 깨물며 무엇인지 생각하다가, 우쭐 일어나 방으로 들어온다.
“이 사람 어쩔 텐가? 이러구 앉았을 텐가.”
명보는 백랍처럼 된 얼굴을 쳐들고 머어니 바라보다가 그림자처럼 서글프게 일어선다.
“자네 맘대루 하게.”
그 소리가 떨어지자, 득수는 촛불을 훅 불어 꺼버린 후 정주로 나가더니, 마치 공깃돌이나 다루듯 순녀의 자는 몸을 가볍게 둘러업고 앞장을 서서 나온다. 그 뒤를 명보는 얼빠진 것처럼 정신없는 걸음으로 따라간다.
둘은 골목을 빠져서 동문 위 토성을 넘어, 미리 끊어 논 철조망을 제치고 아무에게도 발각되지 않고 경계망을 빠져나왔다.
철조망을 빠져서 얼마쯤 나오면 조그마한 도랑이 있다. 도랑을 건너 앞산 밑에 이르러서 득수는 비로소 숨을 돌려 쉬며 뒤에 따르는 명보를 돌아다본다.
“여보게, 인젠 반은 성공일세.”
그러나 명보는 땅만 내려다보며 고개를 쳐들지 못한다.
득수는 옷소매로 이마에 흘러내리는 땀을 썩 씻은 후,
“여보게, 이거 무거워서 혼자는 못 허겠네. 자네 좀 도와 주게.”
그래도 명보는 말이 없다.
득수는 잔뜩 지릅뜨고 그의 거동을 노려보다가,
“여보게, 그럼 먼첨 요 위 마루턱에 넘어가서 사람 좀 보내 주게. 그리 가문 왕서방네 패거리가 벌써 와서 기다릴 거니까.”
하고 털썩 주저앉아 버린다.
5
득수가 시키는 대로 명보는 아무 말도 없이 산발을 올라탄다.
산은 그다지 높은 산은 아니다. 어느 편이냐 하면 언덕에 가까운 편으로서 명보의 그림자는 이내 눈앞에서 사라진다.
그가 산마루턱을 넘었겠다 할 무렵. 득수는 주위를 한 바퀴 휘둘러 살핀 후 벌쭉 웃으며 땅에 내려논 순녀를 내려다본다.
득수는 넋을 잃고 한동안이나 내려다보다가 군침을 꿀꺽 삼키며 펑덩 주저앉는다.
그 순간 순녀의 몸은 불의에 움칫한다. 득수는 깜짝 놀라며 우선 주위부터 살핀 후 순녀의 몸에 팍 엎어진다.
그러자, 이때까지 의식을 잃었던 순녀는 갑자기 발딱 일어나 앉으며, 몸을 오싹 떤다.
“앗.”
그 무엇에 찔린 듯한 외마디 소리가 나자, 득수는 목에 걸쳤던 수건을 순녀의 입에 틀어막는다.
“누구요? 앗.”
죽을 힘을 다해 떠다밀치는 두 팔을 부러져라 비틀어 잡으며 득수는 순녀의 입을 막기에 필사의 노력을 다한다.
바로 그때다.
득수는 바른 뺨에서 벼락치듯 불이 번쩍함을 느끼고 모로 나가자빠졌다. 그러나 그는 이내 반발적으로 벌떡 일어난다.
“누구냐?”
방비의 자세로 한쪽에 비켜서는 득수의 눈앞에 우뚝히 선 그림자. 득수는 뒤로 물러서려는 제 몸을 가까스로 지탱하여 뻗쳐 서며,
“누구냐?”
하고 재차 외쳤지만, 그러나 그것은 필사적으로 떨려 나오는 소리다.
“내다.”
“내라는 건 누구냐?”
“명우다.”
“머? 명우?”
“그렇다. 명우다.”
득수는 너무나 뜻밖인지라 한참 동안이나 덤덤히 선 채 입을 열질 못한다. 그 틈을 타서 순녀는 겨우 정신을 가다듬어 가지고 입에 물린 수건을 뽑아 버린 후 발딱 일어난다.
그러자 득수는 비로소 자기의 할 일을 깨달은 듯 순녀의 팔을 덥석 틀어잡는다.
“아, 오빠 아버지.”
순녀는 기절할 듯 질겁을 하며 팔을 뿌리친다.
그러나 득수의 억센 손아귀가 그것을 놓아 줄 리 없다. 그는 다시금 순녀의 목을 틀어잡고 입을 막으려 한다.
그때, 득수의 볼따구니에서는 두 번째의 불이 또 번쩍이었다.
“앗…… 너 이 자식, 방해냐?”
“방해다.”
둘의 몸은 대번에 한곳에 어울린다. 어두운 속에서 서로 붙안고 뒹구는 그 모양은 완연 황소의 싸움이다. 순녀는 무엇이 무엇인지 까닭을 모르고 서서 오돌오돌 떨기만 한다.
싸움은 한동안이 지나도 승패가 없더니, 불의에 갑자기 ‘응’ 소리가 나며 누군지 언덕 아래로 굴러 떨어지고 그와 동시에 마치 땅 속에서 불쑥 솟아나듯 검은 그림자가 우뚝 일어선다.
순녀는 소리껏 질러 보려고 애를 쓰나 소리는 목구멍에 꽉 막혀 나오질 않는다.
“갑시다.”
너무나 뜻밖에 일이다. 순녀는 한순간 숨쉬는 것도 잊었다.
“아무 의심두 말구 집으루 갑시다.”
명우는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극히 평정한 태도로 나직이 말하고는 순녀의 등에다가 손을 대려다 말고 걷기를 기다린다. 순녀는 자꾸만 머릿속이 아찔거리며 주저앉고 싶어 그만 명우의 가슴에 팍 쓰러졌다.
그러는데 갑자기 부락에서는 비상 경종이 울려 온다. 잠들었던 부락은 졸지에 소란해지며 이골목 저골목에서 초롱불이 내달린다.
그러나 명우는 아무것도 의식에 없는 듯 시름없는 태도로 한 팔로 순녀의 몸을 부축하여 가며 뚜벅뚜벅 부락으로 내려온다.
6
자위단의 총동원으로 수색은 이튿날 오전까지 계속되었고 고개 넘어 다른 부락에서까지 응원 출동을 했다.
그 결과 득수와 명보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물 건너 마을 만주인 부락 왕가네의 일당도 일망타진으로 죄다 체포했다.
보도소 앞마당에서는 또 준열한 심문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부락 전체에 긍한 가택 수색이 일어났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전부 모인 그 속에서 피검자들은 엄중한 심문을 받아 간다. 그 중에는 득수의 고발로 명우도 어저께 아편 먹은 죄로 끼여 있다.
그는 자꾸만 집중되는 장내의 시선을 무관심하게 받으며, 태연한 태도로 아까부터 담배만 연거푸 태우고 있다. 심문 순서가 돌아오자 그는 조금도 숨기지 않고 자기의 죄상을 고백한 후,
“이번 정양은 며칠이나 되나요?”
하고 넌지시 묻는다.
“가만있게. 아직 다 조사해 본 담에야 결정을 짓게 되겠네.”
보도소 소장은 엄숙한 태도로 말하고는 다음 차례로 넘어간다. 심문이 다 끝난 다음, 보도소 소장은 또 한바탕 일장 연설을 한 다음, 차례차례로 구류 기간을 언도한다.
그러나 명우에게 대하여는 아무런 언도도 없이 다음으로만 자꾸 넘어가다가 마지막에야,
“명우, 자네는 사무실루 좀 들어와 주게.”
하고는 우쭐 자리를 일어 사무실로 들어가 버린다.
그가 자리를 일자, 장내도 죄다 일며 한참 동안 훤소하게 떠들다가 제각기 흩어져 가버린다.
그러나 명우는 그냥 앉은 자리에서 일어설 줄을 모르고 걷잡을 수 없는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가 소장의 부르는 소리에야 비로소 주위를 둘러보고 힘없이 일어선다.
사무실에는 자위단 간부들이 좌우로 어마어마하게 주욱 둘러앉고, 가운데에 소장은 단장과 같이 마주 앉아 있다. 그는 단장과 무슨 이야긴지 주고받다가, 명우를 보자 다정스런 웃음까지 지어 보이며 눈짓으로 가까이 오기를 청한다. 명우는 천천히 그의 앞으로 갔다. 장내의 공기는 응결된 듯 조용하다.
명우는 전신이 긴장됨을 느끼고 태연한 표정을 가지기에 애썼다. 소장은 잠시 밖을 내다보다가 갑자기 명우의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자넨 이번엔 특별히 용서하네.”
하고 너그럽게 웃어 보인다.
“네? 어째서요.”
명우는 제 귀를 의심하며 반문했다.
“별다른 까닭은 없네. 그저 자넨 아직 양심이란 그걸 비록 쪼박지라두 가지구 있기 때문일세.”
“네? 양심이오?”
명우는 너무나 뜻하지 않은 말에 한동안이나 굳어진 표정을 풀지 못하고 소장의 얼굴을 뻔히 쳐다만 본다.
“양심이오? 양심…… 양심이라니요?”
그는 도무지 믿을 수가 없다는 듯이 두번 세번 뇌까린다.
소장은 자애로운 어조로 조용히 타일러 말한다.
“자네는 아직 양심의 쪼박지나마 지니구 있네. 그것을 곱게 키워서 다시금 이전과 같이 훌륭히 소생하여 주기를 나는 진정으로 바라네. 자넨 한 사람이라두 소생만 된다면 나는 누가 내 한편 팔다리를 달라구 해두 아낌없이 뚝 잘러 주려네.”
명우는 입술이 굳어지고 숨이 치받쳐올라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아직 소장의 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정신없는 걸음으로 밖으로 나오고 말았다. 나와서는 그저 발길이 돌아지는 대로 몽유병자처럼 걸어갔다.
“양심…… 양심의 쪼박지.”
소장의 말을 기계적으로 외며 걸어가는 그의 눈앞에 의젓이 떠오르는 것은 어린 시절의 가지가지 일과, 중학시대의 그리운 생활, 첫사랑의 그림 같던 장면, 어머니의 인자스런 얼굴, 어느 것 하나 희망에 빛나지 않는 것은 없다.
“아―햐.”
명우는 그만 참다못해 두 손으로 머리를 움켜잡고 그냥 길바닥에 쓰러져 느끼고 만다.
5. 마음의 금선(琴線)
1
뉘엿한 들판에서는 제법 소리까지 내며 선들바람이 쉴새없이 불어온다. 이삭이 팬 옥수수는 벌써 노오랗게 익어 든다.
장마 때문에 김을 바로 매지 못해 잡초는 웅성하지만 조는 거무죽죽하게 독이 올라 싱싱하기 비길 데 없고, 더구나 금년 처음 번져 넣은 앞개 논판은 내다보기만 해도 흐뭇해난다.
부락의 농군들은 모두 다 일밭에 나덮였다. 그리고 마을 뒤편 공동농장에는 보도소 소장까지 전두에 나와 서서 직접 지도에 애쓰고 있다. 그러나 농군들이라야 오랫동안 흙에서 시달린 일이 없고, 난생 처음 호미 자루를 잡아 본 그들의 일은 좀처럼 진척될 줄을 모른다.
논바닥에 들어서서 두어 번 철렁거리고는, 이내 허리를 짚고 일어서며 죽을 상을 하는 패들이다. 그리고 가끔 거머리 같은 것이 다릿발에 붙기만 하면 그 논바닥은 에누리 없이 욕장을 보고 만다. 다리에 붙은 거머리를 털어 버릴 생각은 안 하고 질겁을 하며 흙탕 속에서 미친 것처럼 이리 뛰고 저리 뛰고 그러다가도 자빠져서 뒹굴기만 하면 그만 사방 몇 간씩은 볼 나위도 없이 되어 버린다. 그런 다음에는 그들은 다시 논바닥으로 들어갈 생각은 염두에도 안 둔다.
보도소 소장은 그렇기 때문에 개인농장보다도 이 집단농장에는 거의 하루의 반 이상을 나와 있게 된다. 그러나 전부가 독신자뿐인 그들은 도무지 농사에 대한 관념은 안 두고 그저 앉아서 대주는 것만 먹을 생각을 하며 일체 탐탁해하지 않는다. 매일 농장에 나오는 것은 ×××구류소로 정양 가는 것을 피하려 함과 또 어쩌다가 기회만 생기면 탈주나 하려고 하는 그러한 맘에서 나오게 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자위단은 조금도 등한히 살피지 못하고 공동농장 작업 때에는 특별 경계까지 하게 된다. 이들에게 비하면 가족을 거느리고 집 잡고 사는 패들은 아무런 근심도 없다. 그야 속으로는 언제든지 딴생각을 베풀며 탈주를 꿈꾸고 있지만, 그러나 그들에게는 가족들이 달려 있다. 그 가족들의 눈이 언제든지 감시를 게을리하지 않고 그들의 일거일동을 낱낱이 살피는 바람에 그들은 하는 수 없이 얽매여 있게 된다.
그러던 것이 팔 개월이나 경과하는 동안 인제는 그들 쪽에서 도리어 가족들에게 대한 애착을 느끼게 된 것으로서 보도소 소장이 자기의 애쓴 보람을 느끼고 자못 만족해하는 것도 무리는 아닌 것이다. 공동농장에서는 바로 점심시간이 됐다. 일꾼들은 제각기 무에라고 떠들어 대면서 그늘로 흩어져 간다.
명우는 득수네의 사건 이후 어쩐지 사람을 대하기가 싫어져서 노혼자만 도는 판이라, 일터에 나와서도 한쪽 구석으로만 자꾸 피해 가며 일하다가, 점심시간이 되자 이내 아래편 언덕 밑 외딴 곳에 가서 시름없이 드러누웠다. 거기에 최초의 탈주사건 때 구류소에 가서 한방에 같이 있게 된 것이 인연이 되어, 그 후부터는 각별히 친하게 지내는 규선이가 건너편 개인농장에서 찾아왔다. 그는 명우의 앞에 와서 제 몸을 내던지듯 철썩 자빠지며,
“혼자서 뭘 하는가?”
하고 명우의 얼굴을 뻔히 들여다본다. 명우는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일하기 재미나는가.”
하고 딴말을 묻는다.
“재미가 나서 큰일났네. 제기랄, 이놈에 세상 한번 벌컥 뒤집어지는 법은 없나.”
“뒤집어지면 별수 있을 줄 아는가?”
“별수는 없지만 속은 한번 시원히 풀릴 것 같어.”
“객쩍은 소릴 말게. 골수까지 썩은 놈들에게 시원한 일이 생긴다면 얼마나 시원스럽겠는가?”
“그래두 난 한번 그런 걸 보구 죽었으면 한이 없을 것 같아.”
한때는 정치운동의 선봉에 나서서 불타는 정열로 날뛰었다는 이 중독자는 지금도 옛날의 그 꿈은 잊을 수가 없는 듯 머어니 창공을 바라보며 저 혼자 중얼거린다.
“두 번두 싫다. 단 한 번만이라두.”
2
규선의 그 모양에서 명우는 문뜩 자기의 과거 중에서 그 가장 빛나던 아름다운 시절을 회상하게 되는 것이었다. 처음으로 출품한 그 어머니의 초상화가 영예스러운 입선을 했을 때 종일해를 진정을 못 하고 우에노(上野)를 헤매어 다니던 일. 그 입선된 그림을 보고, 비로소 자기의 존재를 발견하고 찾아왔던 그 여자.
무사시노(武藏野)의 가을 햇볕 아래에서 캔버스를 나란히하고 첫사랑을 속삭이던 그날. 꽃은 필 대로 피어나고, 향기는 풍길 대로 풍기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 뒤의 일에 생각이 미쳤을 때, 그는 갑자기 전신을 떨며,
“여보게 좀 없는가! 가진 게 있으면 좀 주게나.”
하고 규선의 팔을 살스레 들어 닥친다.
머어니 창공을 바라보며 사라진 꿈의 추억에 함뿍 잠겼던 규선이는 조금도 놀라는 양 없이 물끄러미 명우의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슬며시 옆채기를 뒤지더니 꽁꽁 신문지쪽에 싼 예의 그것을 꺼내 팥알만한 것을 두 알로 갈라서, 한 알은 자기의 입에 닁큼 집어넣고, 한 알은 명우의 손바닥에 올려놓는다.
명우는 역정스레 홱 빼앗듯 받아 쥐고 입에 넣더니 꿀꺽 삼켜 버린다. 그리고는 무겁게 입을 다문 채 먼산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노려본다.
규선이는 다시금 하늘로 시선을 보내며,
“어째, 옛날이 치미는가?”
하고 빈정거리듯 말한다.
“미친놈.”
“그럼 왜 급작스레 발작인가.”
“개수작 말게. 자네야말루 미쳐나는 모양일세.”
“내가? 허허허…… 그럼 여북 좋겠기에. 차라리 그렇게 미쳐만 난다면, 난 세상에서 가장 행복자가 될 것이네.”
“미친놈.”
명우는 보낼 곳 없는 울화에 씨근거리며 주먹을 틀어쥔다.
“여보게, 명우. 자넨 아직 흥분되는 걸 보면 멀었나 보네그려.”
“뭐가?”
“녹스는 것 말야.”
“녹? 녹이라니? 무슨 녹이라는 말인가?”
“이 사람아, 예술가가 그런 걸 모르구 어떡허는가? 왜 거 어느 시인인가 부른 노래가 있지 않나? 심금(心琴)인지 뭔지 한 걸 노래하면서 마음의 거문고 줄이니 뭐니 한 게.”
명우는 규선의 그 말에 오랫동안 침묵을 지키며 무슨 생각엔지 잠겨 있다가,
“미친 자식, 개수작 말어라.”
하고는 그만 저쪽으로 훌쩍 돌아누워 버린다. 그러나 규선이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지껄일 대로 지껄인다.
“나두 한때는 시두 써보느라구 했건만, 어디 생각나는 대로 심금이란 그 시나 읊어 볼까? 에― 뭐더라. 첨이 생각나야지.”
하고 그는 잠시 기억을 더듬다가,
“엑, 첨은 집어치구, 되는 대루 불러 보자.”
얼마나 오랜 세월이 흘렀느냐
녹슨 일곱 줄에 서리인 슬픈 전설
나는 고요히 눈감고 기억을 더듬다
첫줄에 서린 첫사랑의 고담은
어째서 어머니의 죽음보다 더 슬플까
마음에 깃들인 검은 상장은
찢어도 찢어도 찢길 줄 모르고
거기 내 청춘은 오늘도
조문(吊文) 쥔 채 엎드려 느끼다
“에― 또 다음은 뭐더라.”
“듣기 싫다. 좀 지껄이지 말구 잠자쿠 있거라.”
명우는 견딜 수가 없는 듯 왈칵 내뿜듯 말하고는 두 손으로 얼굴을 덮는다. 그래도 규선이는 멈추질 않고 그냥 지껄여 댄다.
어디로 날아갔느냐? 파랑새여!
녹슨 줄 위에 서리서리 얽힌 거미줄
너는 선율할 줄 모르는 부호 없는 보표
네 퇴색한 낡은 그 줄을 탄식하며
내 슬픈 꿈은 몇 번이나 얽혔던가?
마음의 녹슨 줄아!
너는 언제나 그 보표에 맞추어
내 청춘을 다시 울어 주려느냐?
여기까지 읊은 다음, 규선이는 나직이 한숨을 짓는다. 명우는 잠든 듯이 두 눈을 꼬옥 감고 어느 때까지든지 움직이지 않는다.
3
규선이의 실없는 수작에서 명우는 진종일 무거운 생각에 짓눌려 우울하게 지냈다. 그는 사뭇 치밀어오르는 옛 생각을 떨쳐 버리려고, 남보다 더 기운을 내어 일손을 놀렸으나 그러나 한번 치밀기 시작한 옛날의 환상은 그 기세를 꺾일 줄 모른다. 그래 그는 마지막에는 될 대로 돼라 하고 논둑에 나와 풀숲에 드러누워 버렸다. 그 모양을 보고 보도소 소장은 이내 가까이 온다.
“어디가 불편한가?”
“예.”
명우는 간단하게 대답하고는 두 눈을 슬며시 감는다.
“어디가 불편한가? 속인가? 머린가?”
“머리가 좀 무거워요.”
명우는 말하기도 귀찮다는 듯이 미간을 찡기며 가까스로 대답한다.
소장은 매우 염려스러워하는 빛으로 명우의 모양을 이슥히 내려다보다가,
“정 괴로우면 집으루 들어가지.”
하고 부드럽게 말한다.
“괜찮어요.”
그러나 소장의 잔걱정은 멈추질 않는다.
“이 사람아 들어가야지, 이런 폭양 밑에 누워서 쓰는가? 어서 들어가게.”
명우는 노골적으로 귀찮아하는 빛을 띠고 벌떡 일어나더니, 아무 말도 없이 논둑을 뚜벅뚜벅 걸어나간다. 논둑을 벗어나서 큰길에 나서니 마치 그 무슨 우리에서 풀려난 듯 가슴속이 활짝 열리는 것 같다. 그는 길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후 하고 내뿜은 다음 부락을 향해 발길을 옮겨 놓으며 어디든지 조용한 데 가서 한숨 흐무지게 쉴 것을 생각하는데, 뒤에서 신발 소리가 들린다.
무심코 돌아다보니 순동이와 그 뒤에는 순녀도 무엇인지 이고 따라온다.
“형님, 왜 벌써 들어가요.”
순동이는 나란히 따라와 걸으며 목에 걸쳤던 수건으로 땀을 씻는다.
“넌 왜 벌써 들어가니?”
“할 걸 다 했으니 들어가지요.”
“다 하다니, 벌써 논두 다 맸냐?”
“논은 낼부터 시작하겠어요.”
“무밭은 다 맸냐?”
“다 맸어요. 인젠 가을에 걷어만 들이면 돼요.”
순동의 얼굴에는 명랑한 웃음이 떠오른다.
“그런데 형님은 어째 벌써 들어가우.”
“골머리가 좀 아퍼서.”
순동의 눈가엔 또 심술궂은 웃음이 악의 없이 떠오른다.
“뭐, 싫여나니까, 아퍼나는 골머리쯤이야.”
“이 녀석 또 놀리기냐?”
“하하하…….”
순동이는 유쾌한 듯이 웃고 나서,
“형님, 그렇게 보니까, 요즘 얼굴색이 아주 좋지 못한걸요.”
하고 이번에는 정색으로 말한다.
“망할놈, 어쨌든 놀리기구나.”
“아니, 정말이유. 아주 전보담 나뻐요.”
“이 녀석, 잔수작 말구, 저리 비켜라. 더워 죽겠다.”
“아니오, 참말 안색이 나뻐요. 무슨 근심이나 있잖어요?”
그러나 명우는 순동의 말을 바로 담아 듣지 않고,
“이 녀석 너무 그러면 매를 맞는다.”
하고 흘겨보는 시늉을 하다가 씽긋이 또 웃는다. 순동이도 하는 수 없이 따라 웃는다.
부락에 들어와서 순동이네와 갈린 후 명우는 잠시 갈 곳을 궁리해 보다가 그냥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는 아무도 없다. 방 안에 들어가서 뒷문을 열어 젖히니 제법 시원한 바람이 소리를 치며 들어온다. 그는 웃통을 벗어 버리고 큰대자로 목침도 없이 번듯이 드러누웠다. 전신에 추근히 내배었던 땀은 일시에 건뜻 숨어든다. 말할 수 없는 상쾌한 기분에 두 눈을 슬며시 감고 잠든 듯이 하고 있는데 누군지 문 앞을 들어오는 자취 소리가 난다.
득수의 처의 발자취인 줄 알고 그냥 모른 체하고 있는데,
“저…… 주무세요?”
하는 여자의 목소리가 득수 처의 탁한 목소리와는 다르게 조심스레 들려 온다. 번쩍 눈을 뜨고 내다보니 문 앞에는 순녀가 와서 귀밑까지 붉히고 있다. 명우는 반발된 듯이 벌떡 일어나 앉았다.
4
순녀는 무엇인가 보자기로 싼 것을 옆에 끼고 왔는데 종시 고개를 쳐들지 못하고 망설이기만 한다. 명우는 무슨 영문을 몰라 머엉하니 내다보기만 한다. 그러다가 자기의 웃통 벗은 것에 생각이 돌자, 그는 당황하게 서둘며 윗목에 벗어던진 적삼을 집어다가 입는다. 그 모양을 보고 순녀는 더한층 고개를 숙이며 모로 돌아서 버린다. 명우는 겸연쩍어 한동안이나 어물거리다가 큰맘으로 입을 열었다.
“무슨 일루 왔나요?”
순녀는 비로소 살며시 고개를 돌린다. 그러나 바로 쳐다보지는 못하고,
“저, 이걸 가져왔어요.”
애련한 음성은 갈청 울듯 떨려 나온다.
“그게 뭔데?”
“저, 속옷을 빨아 왔어요.”
“에? 속옷을?”
명우는 깜짝 놀라 그제야 벽을 쳐다보니 이때까지 그냥 걸려 있는 줄로만 알았던 속적삼과 잠뱅이가 없다.
“그건 언제 가져갔나요.”
“요전번 오빠가 가져다주면서 빨라구 하시기에…… 저…… 잘 빨리지 않았어요.”
하고 순녀는 몇 번 주저거리다가 가지고 온 것을 사뿟 문턱 안에 들여논 다음 그만 도망질치듯 종종걸음으로 바삐바삐 마당 밖으로 나간다.
그가 마당 밖에 나가 버린 다음에도 명우는 오랫동안 얼빠진 것처럼 한자리에 앉아 움직일 줄을 몰랐다. 도무지 꿈같으며 골 속이 띵 하여 생각을 바로 가다듬을 수가 없다. 그는 무심하니 순녀가 놓고 간 것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면서 그가 하던 말을 어렴풋이 생각해 보았다. 꼬옥 꿈속에 들은 듯 기억이 희미하다.
그는 다시금 밖을 얼없이 내다보다가 보자기를 풀어 보았다. 알맞게 풀발을 받은 그것은, 방금 다리미를 뗀 듯 따스하게 온기까지 숨어 있다. 명우는 또 한동안 채견히 개킨 것을 들여다보다가, 슬쩍 적삼을 젖혀 보았다. 무엇인지 접어 논 사이에서 살짝 구들바닥에 떨어진다. 집어 볼 것도 없이 비록 인조견이긴 하나 제법 선까지 정성껏 떠넣은 손수건이다.
명우는 비로소 정신을 차린 듯 얼른 제대로 도로 싸서 뒤로 밀쳐놓았다가 다시 찬 옆구석 이불장을 들고 밀어 넣는다. 그날 저녁 명우는 말쑥하게 새옷을 털어 입고 어두운 골목을 되는 대로 헤매어 다니다가 북문 어귀로 나갔다. 보초막에는 마침 순동이가 서 있다.
“형님, 어디루 가시우?”
“산보다.”
“특별 허락을 할 테니까, 도망질하면 안 됩니다.”
“망할 녀석.”
명우는 싱글거리는 순동의 앞을 지나려니 제 몸에 걸친 옷이 자꾸 얼굴을 붉혀 준다. 그는 얼른 순동의 앞을 지나 냇가로 나갔다.
냇가로 나가니 돌돌 흘러내리는 물소리는 말할 수 없이 잔조롭다. 그에 따라 마음속은 못 견디게끔 안타까워난다. 그리고 이상스레도 이야기가 하고 싶어나고 그 누구의 가슴에 포근히 안겨서 밤새도록 울어 봤으면 싶어난다. 그것이 무슨 까닭인지 저로서도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는 실없이 들떠오르는 마음을 가누지 못해 조그마한 돌을 집어 웅덩이 속에 집어던졌다.
‘출렁’하는 물소리에 벌레 소리들은 딱 멈춘다.
그 순간, 그는 문득 아까 낮에 규선이가 읊던 시를 생각했다.
“심금! 마음의 녹슨 줄!”
그는 한동안이나 생각나지 않는 기억을 더듬다가 그만 규선이를 찾아가서 물을 작정을 하고 조급히 돌쳐섰다.
6. 지옥으로 가는 길
1
칠월이 가고 팔월이 왔다. 팔월을 잡자 며칠 안 되어 부락에서는 만척(滿拓)의 제5회째의 대부배급(貸付配給)을 받게 되었다. 그 때문에 둔장은 현에 갔다 오고, 이튿날은 보도소 앞마당에서 진종일 양미 배급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삐 지냈다.
부락민들은 저마다 내켜하지 않는 얼굴로 배당된 쌀을 둘러메고 각각 제 집으로 흩어져 가서는, 우선 앞으로의 예산부터 세운다. 어떻게 해서든지 이번 것을 가지고, 신곡 날 때까지 견디어 나가야 할 텐데, 아무리 손가락을 꼽아 가며 날짜와 됫수를 따져 보아야 어림도 없는 일이다. 그래 마지막에는 손가락을 꼽아 보다가 못해, 그만 역정스레 쌀푸대에다 침을 탁 뱉고는,
“제길 이러구 살면 뭘 하는가.”
하며 보낼 곳 없는 울분에 저 혼자 씨근거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중독자들은 그러한 쌀보다도 비록 콩알만한 것이라도 새까만 그놈을 주는 편이 얼마나 낫겠는가고, 몇 번이고 군침을 삼켜 본다.
그러므로 그들은 밤이면 자위단의 경비망을 교묘히 뚫고 외부와 연락을 취해서는 배급된 쌀을 가정의 눈을 속여 가며 아편과 바꾸어 들이는 것이다. 그러나 이때까지 그 공작에 있어서 두목격이던 득수를 구류소에 빼앗긴 관계로, 그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헤매다가 결국은 다시 새로운 두목을 선택하게 되었는데, 그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규선이었다. 규선이는 자초에는 그들의 청을 거절했으나, 아편 밀수의 길이 전연 절단되고는 첫째로 자기부터 곤란을 느끼게 되는 것이고, 또 다른 사람을 시키느니보다 자기 자신이 직접 관여하게 되면, 남의 손을 비느니보다 마음놓고 만족을 채울 수가 있겠기에 과감히 그 책임을 맡은 것이다. 그리하여 밤이 되면 비밀 공작은 자꾸 계속되어 간다. 그러다가 꼬리가 길면 밟힌다고, 어느 날 밤, 그들은 끝끝내 보초의 눈에 띄고 말았다.
요란스런 경종은 부락의 정적을 졸지에 뒤집어 놓았다. 규선이네는 걸머졌던 쌀푸대를 성 밖에 내던진 후 그냥 앞산으로 올리달렸다. 추격대는 삽시간에 산을 둘러싼다. 탈주자의 일행은 셋이다. 그들은 죽을 힘을 다해서 앞산 첫마루턱에 오르자, 숨을 돌려 쉰 다음 다시금 마루턱을 타고 위쪽으로 빠졌다. 추격대는 그냥 곧게 마루턱을 넘어 골짜기로 떨어져 간다. 규선이네는 적이 맘을 놓고 속력을 늦추었다. 그리고는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어떻게 할 것을 상의했다. 그러나 그 무슨 묘안이 떠오를 리가 없다. 생각다 못해 마지막에 규선이는 자포가 되어 혼자말하듯 중얼거린다.
“될 대루 돼라. 아무 때 죽으면 바루 죽을 신세냐?”
그 말을 듣자 성오는 병철의 얼굴을 돌아다보았다. 그러나 병철의 표정은 조금도 변하는 것 같지 않다. 그저 묵묵히 발길만 옮겨 놓는다. 성오는 겁이 덜컥 났다. 평소의 행동으로 보아서 규선의 그 말은 웬일인지 사실을 예언한 것 같은 불길한 생각을 일으켜 주고, 그리고 병철의 태도는 둘도 없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냥 이대로 어디든지 탈주해 버릴 태도다. 그러나 자기는 그렇게 죽음을 각오한다거나 탈주를 꿈꿀 용기는 갖지 못했다. 그래 그는 은근히 속을 태우며 둘의 거동만 흘끔흘끔 엿보았지만, 둘은 조금도 주저거리는 양 없이 그저 발길만 옮겨 놓는다.
성오는 세 번째 마루턱을 넘었을 때 참다못해 규선의 얼굴을 조심스레 돌아다보며 물었다.
“그런데, 여보게, 대체 지금 어디루 가는 셈인가?”
규선이는 들은 체도 않고 걸음만 옮겨 놓는다.
“여보게, 규선이, 이게 지금 어디루 가는 길인가?”
“지옥으루 가는 길이라네.”
규선이는 웃지도 않고 평범한 양으로 말한다.
“에?”
성오는 깜짝 놀라며 한동안이나 규선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다가,
“여보게, 길두 모르구 어디를 이렇게 가는 건가?”
거의 울상이 되어 묻는다. 그 모양을 보고 버럭 소리를 높여 역정스레 핀잔을 주는 것은 병철이다.
“어딘지 알 게 뭔가? 그저 가는 대루 갈 판이지.”
성오는 하는 수 없이 입을 다물었다가 얼마 못 가서 또 입을 연다.
“가는 대로 갈 판이라니…… 이런 심산에 들어서 어디로 간단 말인가?”
그러나 둘은 응대도 없이 어둠 속만 자꾸 더듬어 간다.
2
날 밝을 무렵, 하도 지쳐서 나무 그늘에 아무렇게나 쓰러져 잠시 눈을 붙였다가 일어난다는 것이, 눈을 떴을 때는 늦은 아침때도 훨씬 지난 듯 산은 째듯이 밝다. 그런데 사방에는 뜻하지 않은 안개가 자욱이 껴돌아 방향을 분간할 수가 없다.
셋은 무거운 표정으로 서로 말없이 담배만 빨며 안개가 사라지기를 기다린다. 만은 아무리 기다려야 사라지는 양은 없고 그냥 자욱하다. 셋은 차츰 불안을 느끼기 시작했다.
“여보게, 규선이. 이러구 앉아만 있으면 어떡헐 텐가?”
하고 먼저 입을 여는 것은 성오다.
“그럼 어디 별수가 있는가?”
“별수가 있는가라니? 어디든지 가야지, 그냥 이대루 있다가 시장기가 돌면 어떡허겠는가?”
성오의 이 말을 듣고 보니, 사실 규선이나 병철의 뱃속은 벌써 시장해난 지가 오래다. 그렇기 때문에 둘의 표정은 더욱 어두워진다. 성오는 이슥히 잠자코 둘의 얼굴을 번갈아 살피며 대답을 기다리다가 또 입을 연다.
“여보게 병철이, 자넨 혹 이 근방 산발을 타본 일이 없는가?”
“없네.”
“여기가 아니라두 다른 곳에서 타본 일두 없는가?”
“한 번두 없네.”
성오는 후 하고 긴 한숨을 뽑은 다음 이번에는 규선의 편으로 또 돌아앉는다.
“어젯밤에 온 길을 알 수 있는가?”
“어디던지 잘 모르겠네.”
“우뚝한 산봉우리 같은 것을 왼편에 끼구 온 것 같은데, 그게 어느걸까?”
“글쎄 나두 그걸 자꾸 찾아보는데 어느 게던지 도무지 알 수가 없네그려.”
“나무 같은 건 없었지?”
“글쎄, 그냥 풀숲으루만 온 것 같은데 웬 대목들이 이렇게 꽉 들어찼는가?”
서로 말할수록 마음은 어두워 간다. 그러다가 아래편을 내려다보니 자욱이 껴돌았던 안개 속에서 산등어리가 어수룸하니 드러나보인다.
“아 저걸세. 간밤에 왼편에 끼구 올라온 건 저걸세.”
규선이는 반가움에 벌떡 일어나며 아래편 안개 속을 가리킨다. 안개 속에서 차츰 선명하게 보이는 산등어리를 내다보고, 성오와 병철이는 기운이 나는 듯 허리띠를 졸라매며 일어난다.
“그런 것 같네.”
“인젠 어떻게 떠나 보세.”
셋은 아까보다는 훨씬 삭아져 간 안갯발을 내다보며 방향을 따진 다음, 동으로 향해 이슬밭을 헤치고 나간다. 그런데 어째서 동으로 방향을 잡았는지는 셋이 다 서로 모른다. 그러나 그 까닭을 캐려고는 아무도 안 한다. 그것은 그들에게 더욱 심한 불안을 가져다주기 때문인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저 어디든지 방향을 잡고 감으로써 잠시라도 무겁게 머릿속을 엄습하는 불안을 떨쳐 버리려는 것이 셋의 공통된 심리다. 얼마 못 가서 셋은 깊숙한 골짝에 떨어졌다. 골짝에는 맑은 물이 촐촐하니 흘러내리고 이름 모를 꽃들이 조촐한 빛으로 수줍게 피어 있다. 얼음같이 찬 물을 셋은 양껏 들이켰다.
홀쪽하던 뱃속이 얼마간 불러나는 것 같다. 안개는 거진 거두어지고 그 대신 뜨거운 햇볕이 곧게 내리쪼인다. 아무것도 얹힌 것 없는 꼭대기는 익어들듯 뜨거워지고 등허리에서는 도랑물처럼 땀방울이 흘러내린다. 이슬기가 차츰 말라들자 풀숲에선 단내가 후끈후끈 풍겨 오르기 시작한다. 한 마루턱을 넘고 두 번째 마루턱을 넘었을 때엔 벌써 한 발자국도 옮겨 놓을 수 없게끔 뱃가죽이 딱 들어붙었다. 그런데 아무리 내다보아야 방향은 알 수가 없다. 모두 다 낯선 산봉우리뿐이고, 갈수록 숲은 거무죽죽하다.
마침내 성오는 탑숙한 피나무 밑에 털썩 주저앉으며,
“난 못 걷겠네.”
하고 둘을 쳐다본다.
병철이와 규선이도 아무 말 없이 성오의 옆에 서로 등을 지고 주저앉는다. 머릿속이 뽀오야니 흐려드는 것 같다. 눈을 감고 비스듬히 드러누우니 나릿한 피곤은 전신을 꼼짝못하게 사로잡아 버린다. 셋은 그냥 기진한 채 깁뜨지 못하고 혼곤한 잠 속에 들어 버렸다.
3
얼마나 한 시간이 어지러운 꿈속에서 흘러갔던지 병철이가 겨우 눈을 떴을 때는 점심때도 훨씬 기울었다. 규선이와 성오는 그냥 깁뜨지 못하고 잔다. 노오랗게 시든 얼굴은 조금도 숨이 붙어 있는 산 사람의 얼굴 같지 않다. 그래 병철은 조심스레 둘을 흔들어 깨웠다. 대여섯 번이나 흔든 다음에야 겨우 정신을 차려서 고개를 쳐들고, 머어니 쳐다보는 둘의 눈은 똑같이 빛을 잃었다.
“좀 정신들 차리게. 이렇게 잠만 자군 어쩔 텐가?”
병철은 거의 울상으로 저무는 해를 바라보며 말하고는 떨리는 다리에 힘을 주어 일어선다. 만은 규선이와 성오는 그냥 누운 자리에서 일어날 줄을 모르고 우두머니 허공만 바라본다.
“여보게 규선이, 좀 정신 차려 어디든지 가보세. 인젠 해가 저무네.”
“어디루 가겠는가? 난 배가 고퍼 꼼짝못허겠네.”
규선이는 말도 겨우 이어 놓는다.
“그래두 가야지, 앉아서 죽을 텐가? 요 아래 골짜기루 내려가 보세. 물이라두 있으면 배를 채워 가지구 어디든지 가야지, 그냥 이대루 있다간 그저 앉아서 호랑이 밥이나 됐지 별수가 있는가?”
병철의 소리에 성오와 규선이는 넋없이 일어난다. 둘은 마치 뒷숲에서 호랑이가 숨어 있다가 달려나오기나 하는 것처럼 뒤를 둘러 살피며 병철의 앞에 나선다. 그러나 말은 한마디도 없다. 골짜기로 내려가는 동안, 성오와 규선이는 절반은 기다시피 하며 몇 번을 굴렀는지 모른다. 병철의 예측대로 거기에는 과연 맑은 물이 흐르고 있다. 셋은 정신없이 들이켰다. 뱃속이 찌잉 저려들더니 갑자기 가슴속이 울컥 치밀어오른다. 참다못해 성오와 규선이는 왈칵 토하기 시작한다. 병철은 이를 악물고 참기에 애를 쓴다.
그러나 성오와 규선의 구역은 멈출 줄을 모른다.
“아이구― 여보게, 사람 살려 주게.”
하고 마침내 성오는 뒤로 나가 번드러진다. 그러자 규선이도 옆에 있는 바위에 마구 엎드린다.
“여보게, 자네까지 이러면 어떡허겠는가.”
하고 병철은 규선의 팔을 와락 끌어당긴다.
“여보게, 조금만…… 조금만 이대루 둬주게. 뱃속이 뒤집혀지는 것 같네.”
규선이는 거의거의 숨줄이 끊기는 것 같은 음성으로 애원한다. 그러나 병철은 사정을 보아 안 준다.
“안 되네. 여기서 드러눕기만 하면 끝장이 나네. 괴롭더라두 좀더 가보세. 이 물줄기를 따라가 보세. 내 생각에는 꼭 인가가 있을 것 같네.”
하고 그는 그냥 규선의 팔을 당기어 일으킨다. 규선이는 하는 수 없이 일어서기는 하나 두 어깨는 축 처져 다 죽은 송장 같다. 병철은 다시 이번에는 성오를 안아 일으킨다.
“아하, 난 죽네.”
성오는 벌써 눈살이 다 풀리고 신음 소리도 선명치 못하다.
“제길.”
병철은 두덜거리면서도 성오의 한쪽 팔을 자기의 어깨에다가 걸쳐 놓고 다른 한쪽 팔로 그의 겨드랑을 껴안은 후,
“어서 걷게.”
하고 발길을 떼어놓는다. 그러나 얼마를 못 가서 규선이는 나무그루를 걷어차고 나가자빠지더니,
“아이구 모르겠다. 될 대로 돼라.”
하고는 다시 깁떠 일지 못한다.
병철은 하는 수 없이 성오의 겨드랑을 놓아 버린다. 그리고는 자기도 그 자리에 펑덩 주저앉는다. 셋은 다시금 혼수상태에 빠졌다. 그러자 해는 서산 너머 기울고, 골짝에는 어둠이 슬며시 밀려들기 시작한다. 건너편 마루턱에서는 까마귀의 울음 소리가 청승맞게 들려 오며 뒷산 어깨로는 바람 소리조차 음산하게 들려 온다.
4
자위단의 필사적 노력에 의하여 병철이네가 수색망에 걸려든 것은 그 이튿날 낮밥 때였다. 셋은 멀리로 도망한다는 것이 결국은 개미가 쳇바퀴 돌듯 제 구비를 자꾸 끼고 돌아서 사실 그들이 마지막으로 쓰러진 곳은 부락에서 십 리도 되나마나 한 곳이다. 자위단은 이날도 조반을 먹고 마지막 수색으로 사방에 흩어졌던 것인데, 앞산 마루턱을 넘어 다음 마루턱에 올라서니 얼마 멀지 않은 건너편 골짜기 쪽에서 까마귀들의 울음 소리가 소란하게 들려 오기에 수상하여 그 소리를 따라가 보니, 뜻밖에도 거기에 탈주자들이 쓰러져 있었던 것이다.
단원들은 너무나 반가움에 고생하던 것도 잊어버리고 앞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그들은 너무나 참혹한 모양에 넋없이 뒤로 물러서지 않을 수가 없었다. 콧구멍을 쿡 찌르는 취기(臭氣)보다도, 바위 밑에 엉거주춤하니 앉아서 쏘는 듯한 눈으로 이쪽을 노려보고 있는 한 마리의 늑대.
“앗 저게 뭐냐?”
앞에 섰던 자보다도 먼저 소리를 지른 것은 뒤에 선 단장이다.
“아, 승냥이다.”
여럿은 서로 뒤로 물러서며 색을 잃는다. 그 모양을 보고 단장은 용기를 내어 앞에 썩 나서며 어깨에 메었던 총을 내려 겨누어 댄다. 그것을 본 짐승은 번갯빛이 되어 바위 틈으로 빠져 달아난다.
“탕.”
뒤이어 연방 두 방이나 요란하게 산골짝을 울렸건만 짐승의 몸은 쏜살같이 숲속으로 빠져 버린다. 그제야 여럿은 쓰러진 셋의 곁으로 조심스레 가보았다. 비길 데 없이 추악한 냄새가 콧구멍을 쿡 찌른다. 쉬파리가 윙윙거리는 위쪽을 살펴보고 그들은 일제히 얼굴을 돌려 버린다. 여겨 볼 것 없이 옆구리에 커다란 구멍이 뚫어지고, 창자가 비죽이 내민 것은 성오다. 단장은 눈앞이 아찔하여 두 손으로 얼굴을 덮는다. 그는 눈을 가린 채 신음에 가까운 소리로,
“둘을 봐라. 둘두 그렇게 됐나?”
하고는 단원들의 대답을 기다린다. 단원들은 몇 번이나 주저거리다가 하는 수 없이 규선이와 병철의 곁으로 조심스레 가본다. 조금도 상한데가 없다. 그저 잠든 듯하다. 그러나 바짝 가까이 다가들어 만져 보지는 못한다. 단장은 기다리다 못해 덮었던 손을 떼고 허둥지둥 둘의 옆으로 가더니, 이슥히 들여다보다가 갑자기 소스라치며 외친다.
“숨이 있다. 아직 살았다.”
“예?”
여럿은 넋없이 달려든다. 단장은 한쪽 손에 들었던 총을 집어던지고 와락 달려들어 옷섶을 제친 후 가슴을 짚어 보며 콧구멍에다가 귀를 기울여 본다.
“앗, 숨이 있다. 이놈은 살었다. 그쪽 규선이란 놈을 봐라, 어떠냐? 살었냐?”
단장의 모양으로 가슴을 젖히고 만져 보던 단원의 입에서,
“아, 숨이 있습니다.”
하는 소리가 나오자, 단장은 그리로도 넋없이 달려간다. 확실히 왼쪽 가슴에서 심장이 뛰는 소리가 난다.
“이놈두 살었다. 심장이 친다.”
단장은 벌떡 일어나더니 어쩔 줄을 모르고 단원들의 얼굴만 번갈아 본다. 그러나 바른편 성오의 쪽으로 시선이 돌아지자, 그의 얼굴빛은 다시금 새파랗게 질려진다.
그들이 부락으로 돌아온 것은 그로부터 한 시간도 못 되어서였다. 그런데 그 동안 부락에서는 또 한 가지 변사가 생겼다. 그것은 다른게 아니라 규선의 처의 자살 소동이었다. 그는 남편의 탈주 후 이틀 동안이나 수색단에 끼여서 산속을 헤매다가 결국은 모든 것을 죄다 단념하고 뒷강변 버드나무에 목을 매고 늘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행이랄지 불행이랄지 마을 사람의 눈에 띄어서 목적은 달치 못하고 그저 정신만 어리쳐서 집으로 들려 왔던 것이었다.
7. 빛과 어둠
1
한번 떨리기 시작한 녹슬었던 마음의 금선은, 날이 가면 갈수록 점점 잊었던 옛날의 노래를 그리게 되는 것이었고 향수의 보표만 찾아내려고 하는 것이었다.
날아간 파랑새! 그것은 한 번 놓치면 다시는 영원히 붙잡을 수가 없는 것인가? 잔인스레도 부첩된 청춘의 상장! 그것은 영원히 찢을 수 없는 운명의 상장인가? 장구한 시일을 어둠의 나락에 침전되었던 명우는 순녀의 존재로 말미암아 몇 날을 진정을 못 하고 고민했다.
다시금 울려는 마음의 금선. 규선의 말과 같이 사실 자기의 마음의 금선에는 아직도 녹슬지 않은 부분이 남아 있었던가? 그는 몇 번이나 부질없는 꿈으로 돌려 버리려고 제 마음을 비웃고 마지막에는 증오까지 느꼈다. 그러나 그는 결국 그렇게 비웃고 증오를 느끼는 것이 도리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고 타기할 일인 것인가를 깨달았다. 그래 그는 나중에는 순동이네 남매간의 친절과 호의에 대하여 조금도 괴롬을 느끼지 않게 되었고, 한편 속으로는 은근히 그 어떤 희망까지 지니게 되었다.
그러한 어느 날 그는 보도소 소장의 호출을 받게 되었다. 이전 버릇으로 소장의 호출을 받고 명우는 속으로 곰곰이 생각해 보았으나 자기의 지은 죄라고는 며칠 전 밭머리에서 규선이와 같이 아편을 먹은 그것밖에는 없다. 하지만 규선의 입에서 그 비밀이 탄로됐을 리는 절대로 없다. 그렇다면 무슨 일로 부르는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까닭을 알 수 없다. 생각다 못해 하여튼 가보기로 작정하고 집을 나섰는데 저쪽에서 헐떡거리며 오는 것은 순동이다.
그는 명우의 앞에 오자 대뜸,
“보도소루 가시우?”
하고는 무슨 까닭이 있는 듯이 벙긋 웃는다.
“응, 소장이 불러서 간다.”
명우는 내켜하지 않는 어조로 대답하고는 순동의 웃는 얼굴을 수상스레 들여다보았다.
“무슨 일루 부른답디까.”
“내가 아니?”
“왜 불리는 이가 몰라요?”
“무슨 일루 부르는지 남의 속을 어떻게 아니?”
“그런 것두 몰라요? 난 벌써 다 알구 있는데.”
하며 연방 웃음을 걷지 못하는 그 모양은 아무리 보아도 수상스럽다.
“알면 좀 대주렴.”
“대주면 한턱낼 테유?”
“응, 한턱내지.”
명우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순동의 입만 주시했다.
“뭘 낼 테유?”
“아무거나 네 요구대루.”
“정말?”
“정말 아니구, 애들보구 거짓말하겠느냐.”
“애들이라뇨?”
“그럼 아직 장가두 못 간 놈이 애들이 아니구 어른이란 말이냐?”
“아니 그럼 형님은 총각이 아니구 서방님이시우?”
“이 녀석아, 난 총각이래두 늙은 총각이 돼서 어른 축에 든다.”
“무슨 소리? 총각이면 늙어두 총각이지 상투쟁인가? 쥐면, 큰 쥐두 쥐구, 새끼 쥐두 쥐지.”
“엑기 녀석 말버릇 고약하다.”
“하하하…… 총각 어른께 죄송합니다.”
“이 녀석아, 농담 좀 그만 부리구, 어서 허자던 말이나 하렴.”
“하지요. 그 대신 턱을 잊으면 안 돼요.”
“글쎄 안 잊으마. 뭐가 요구냐?”
순동이는 잠시 생각하는 양을 하다가 갑자기 정색으로 돌아서더니,
“저 형님, 고향 본댁에서 왔어요.”
“뭐?”
명우는 깜짝 놀라 한참 동안이나 입을 다물지 못하고 마주 보기만 하다가, 마치 무서운 것이나 묻는 것처럼 조심스레 말을 꺼낸다.
“오다니? 누가…… 누가 왔단 말이냐.”
“편지가 왔단 말예요.”
순동이는 웃지도 않고 시침까지 뚝 딴다. 명우는 무거운 쇠마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처럼 골 속이 띵하여 선 자리에서 움직일 줄을 몰랐다.
2
보도소 소장의 앞으로 들어가는 명우의 다리는 가느다랗게 떨린다. 그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소장의 입만 주시한다. 소장은 자애로운 웃음을 만면에 띠고 부드러이 바라보면서,
“명운가.”
하고 조용히 입을 연다. 그러나 명우는 대리석을 깎아 세운 듯 빳빳이 서서 대답을 못 한다.
“명철이라구 누군가?”
명우는 한동안이나 지나서야 겨우 입을 연다.
“사촌형입니다.”
“아, 그렇군. 자네 백부 되시는 이는 준자, 식자를 쓰시던가?”
“네.”
“어머니께선 지금두 큰댁에 계시겠지.”
명우는 고개를 푹 숙여 버린다.
“어머니의 연세는 금년 얼마나 높으신가?”
명우는 입술이 찢어져라고 악물며 여전 말을 못 한다.
“환갑은 지나지 않으셨겠지?”
소장의 질문은 집요하게 계속된다.
명우는 참다못해 고개를 번쩍 쳐든다.
“소장님, 왜 그런 말씀을 자꾸 물으십니까? 제발 그런 말씀은 묻지 말어 주십시오.”
소장은 조용히 바라보다가 자못 측은한 듯 나직이 한숨을 짓고 나서,
“명우, 잘못했네. 다시는 안 물을 테니 과히 섭섭하게는 생각 말게.”
한 다음 책상 서랍을 당기더니 편지 한 장을 꺼내 놓는다.
“사촌형님께서 편지가 왔네. 나한테는 자네 백부님께서 왔네만 위선 자네 편지부텀 먼저 읽어 보게. 여기 규정대루 먼저 봉을 찢어 검열을 한 다음에 내주겠지만 군한테루 온 거니까 그냥 내주는 걸세. 거기 걸상을 갖다 놓구 앉아서 천천히 읽어 보게나.”
명우는 오랫동안 책상 위에 놓인 편지를 응시하다가, 마침내 떨리는 손을 내민다. 눈에 익은 사촌형의 필적이다. 무슨 말을 써넣었는지 우표는 팔 전이나 붙어 있다. 명우는 몇 번을 주저거리며 망설이다가 그만 큰맘으로 부욱 봉을 찢었다.
그리운 동생아!
이 첫머리에서 벌써 명우는 목구멍이 꺽 막히었다.
오늘은 8월 ××일. 음력으로는 7월 ×××일.
기억하고 있느냐? 내 가장 사랑하는 아우 명우야!
너의 생일날- 아주머님 눈물이 진종일 그칠 줄 모르는 날이다.
여기까지 내려 읽다가 명우는 그만 편지 위에 얼굴을 파묻어 버렸다. 소장은 슬며시 자리를 일어나 밖으로 나간다. 막혔던 봇물 터지듯 왈칵 쏟아진 눈물은 한동안이 지나도 멈출 줄을 모른다. 마지막에는 흑흑 소리까지 내어 느꼈다. 그러다가 그는 그냥 느끼면서 편지에서 얼굴을 떼고 다시 들여다보았다.
수천리 타국 낯선 곳에서 남달리 고난을 겪는 너도 오늘만은 불쌍한 어머님의 생각과 고향 생각을 하리라. 지금 아주머니는 네가 처음으로 입선의 영을 얻었을 때의 그 그림을 벽에서 내려놓으시고 보시다가 못해 와락 끌어안으시고 소리를 죽여 가시며 우시는 중이다.
옆방에서 그 모양을 엿보며 너에게 보내는 이 편지를 적는 나에겐들 어찌 눈물이 없을쏘냐?
그리운 아우야!
벌써 몇십 번이나 되풀이하여 썼는지는 모르겠다만, 나는 결코 너를 원망치도 않고 미워도 안 한다.
이 내 맘을 누구보다도 너는 잘 알고 있을 것이 아니냐? 나는 조금도 너를 비난하지는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야속한 세상에 대한 원망은 더욱더 깊어 가는 것이다. 네 맘을 잘 알고 진정으로 슬퍼하는 나로서 어떻게 너를 원망할쏘냐?
그렇지만 사랑하는 아우야?
내 불쌍한 아주머니의 그 눈물을 볼 때면-
네가 옛날과 같이 다시 제 길로 들어서지 않는 한 절대로 만나 보시지 않으시겠다는 그 아주머님께서, 우리들의 눈만 없으면 언제든지 으슥한 구석을 찾아가서는 혼자서 소리 없이 눈물 지으시는 모양을 조금이라도 아우야, 네가 상상하여 본다면-
명우는 이 이상 더 볼 수가 없었다. 그는 보던 편지에 다시금 얼굴을 묻어 버렸다.
3
그날 밤 소장은 간단하나마 상을 차려 놓고 명우를 청한 다음 순동이까지 불렀다. 명우는 사촌형의 편지에서 흥분된 머릿속이 아직도 식지 않은 탓으로 소장의 권하는 술을 그저 되는 대로 받아 마시었다. 소장은 자못 만족한 듯 뻘겋게 상기된 얼굴에서 웃음을 걷지 못한다.
“뒤늦어 새는 생일 맛이 어떤가?”
명우는 자꾸 울고 싶어나서 견디기 어려웠다. 소장은 명우의 속을 죄다 엿보고 또 한잔 쭈욱 마신 다음 잔을 넘긴다.
“그런데 난 명우한테 헐 말이 좀 있는데, 들어줄는지.”
명우는 들었던 술잔을 도로 내려놓고 빠안히 소장의 얼굴을 건너다본다.
“꼬옥 해야만 될 말인데.”
“무슨 말씀인데요?”
“꼬옥 세 가지 청이 있는데 들어주려나.”
“제 힘으로써 들어 헐 만한 일이라면 들어드리지요.”
“그야 헐 수 있는 일이지. 아니 자네가 아니군 못 헐 일이지.”
“그러시다면 들어드리지요.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런데 먼첨 한마디 물은 다음에 꺼내야 할 텐데, 그것부터 묻기루 허지. 노하거나 오해해서는 안 되네.”
“천만에 말씀입니다.”
“그럼 묻겠네. 에, 군은 어째서 처음 아편을 붙이게 됐는지 그것부터 말해 줄 수가 없는가?”
명우는 너무도 의외의 질문에 가장 아픈 데를 다친 듯 대번에 얼굴빛이 흐려든다.
“이런 것을 묻는 건 대단히 안 된 일이지만 좀 특별히 너그러운 맘으루 들려 주게나.”
그러나 명우는 숨소리가 괴롭게 되어져 가며 외면한 고개를 바로 돌리지 못한다.
“영사관서 넘어온 서류에는 그저 간단하게 첫사랑에 실패하구 만주와 돈을 벌려다가.”
“소장님, 그것만은…… 그것만은 묻지 말어 주십시오. 다른 것은 다 물으셔두 그것만은 묻지 말어 주십시오.”
소장은 한참 동안이나 건너다보다가,
“그러지, 자네 청대루 취소하겠네.”
하고 어색하게 되어 버린 좌석을 이내 뇌락한 웃음으로 가다듬어 놓은 후,
“그럼, 세 가지 청으루 들어가지. 첫째, 인제 규선이허구 병철의 피로두 회복된 듯해서 내일 아침이면 구류소루 보낼까 하는데, 그런데 난 첨부터 그렇게 봤지만, 군과 규선이만은 달리 봐왔네. 다행히 내 눈이 틀리지 않아서 군에게선 애써 온 보람을 느꼈지만, 아직 규선이만은 잘 넘어가지 않는단 말야. 그래 생각다 못해 군의 공작을 좀 빌려 볼까 하는데, 어떻게 묘한 방책이 없을까?”
그 소리에 명우는 그렇지 않아도 붉어진 얼굴을 더한층 붉혔다. 그는 오랫동안 고개를 쳐들지 못했다. 그러다가 겨우 굳어진 입술을 놀려서 신음하다시피 자기의 죄상을 자백했다.
“소장님, 대할 낯이 없습니다. 전 아직두 죄인입니다. 요 얼마 전에두 규선이와 같이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소장의 눈은 여전히 부드럽게 웃는다.
“과거는 문제가 아닐세. 이제부터 결심하구 다시는 절대 가까이하지 않으면 되는 것이 아닌가? 이 복잡한 세상에서 어떻게 과거까지 들춰 가며 산단 말인가? 그렇잖은가?”
명우는 소장의 얼굴에서 응결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소장은 다시금 다음을 이어 간다.
“나는 이 부락민의 과거를 들춰 내려구 온 사람은 아닐세. 나는 그들의 장래에다가 내 전 희망을 걸구 온 사람일세. 그렇기 때문에 나는 군이 바루 한 시간 전에 죄를 지었대두 그걸 가지구 문제를 삼으려군 안 하네. 요는 인제부터 개심을 하는가 안 하는가 하는 그것일세. 그 점 난 군의 앞날을 굳게 믿는 사람이네. 어떤가? 내 말이 틀리는가? 틀리면 틀리다구 말해 보게.”
명우는 자꾸만 가슴속에서 돌멩이 같은 것이 치밀어올라 대답할 수가 없다.
“그런 점으로 보아서 규선의 부탁을 군한테 하는 거니까, 오늘 밤에라두 찾어가서 군의 최선을 다해 주기를 나는 간절히 부탁하네.”
“네 가보지요. 꼭 가보겠어요.”
명우는 거의 무의식하게 입술을 놀렸다.
4
“다음 둘째는 에― 좀 말하기가 거북하지만 에―”
하고 소장은 웬일인지 주저거리며 얼른 꺼내지 못하다가, 명우의 옆에 앉아 동정만 살피는 순동의 얼굴을 흘낏 돌아다본 후,
“다른 것이 아니라, 나한테 수양딸이 하나 있는데, 인젠 나이두 차구 해서 적당한 사람이 있으면 떠맡기려구 하던 찬데 에―”
하고 소장은 또 중단한다.
명우는 웬일인지 가슴속이 울렁거려남을 느끼고 얼굴을 숙였다. 소장은 술기운을 빌려 용기를 내려는 듯이 앞에 놓인 빈 잔에다가 그득 술을 따라 마신 후,
“이 사람 명우, 보잘것없는 딸자식이지만 난 자네를 믿네. 어쩔 텐가? 내 사우가 되어 주려나!”
하고 명우의 대답을 기다린다.
그러나 명우는 대답은 고사하고 어떻게 자세를 가졌으면 될지를 몰랐다. 그 모양을 보더니 소장은 저 혼자 뜻모를 웃음을 벌쭉 웃고 나서 이번에는 은근하게 입을 연다.
“양딸이라니, 어째 거짓말같이 생각되는가? 그럼 이름을 대줄까? 다른 애가 아니라, 자네 옆에 지금 앉아 있는 순동의 여동생 순녀 말일세.”
“네?”
명우는 제 귀를 의심하며 소장의 얼굴을 뚫어져라고 바라보았다.
“순동의 여동생을 모르는가? 그 순녀를. 오늘부터 내가 자청해서 자네를 내 양사우로 삼으려는데 어떤가? 의의가 없는가? 의의가 있으면 있다구 이 자리에서 시원스레 말해야 허네.”
소장은 술기운 때문에 점점 수다스럽게 되어져 가며 마지막에는 술상까지 옆으로 밀어 놓고 명우의 앞으로 다가앉는다. 그러나 상대편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는 말할 수 없는 진정이 서려 있다. 그는 그냥 계속하여 다음을 잇는다.
“다음 셋째는, 이 두 번째 문제에 관련된 것인데, 다른 게 아니라 둘째 조건에 대해서 군이 승낙만 헌다면 난 내일 전보를 쳐서라두 군의 어머님을 오시두룩 허겠네. 군의 백부님 편지에 군의 어머님께선, 군의 개심을 보지 않구는 돌아가시는 한이 있더라두 안 만나신다구 하신다는데, 인제 군이 내 사우가 된다면 난 장담허구 전보를 치려네.”
명우는 조용히 두 눈을 감았다. 무엇이라고 어떻게 그득 차오르는 자기의 심중을 말하였으면 좋을지 몰랐다. 그는 속으로 소장의 말을 다시 한번 외어 보았다. 도무지 믿을 수가 없는 일 같다. 꼬옥 취담을 들은 것 같다. 더구나 순녀를 양딸이라니, 언제 그런 인연을 맺었단 말인가? 하지만 자기의 옆에 앉아 순동이는 소장의 일언일구를 죄다 듣고 있지 않은가? 만약에 소장의 말이 취담이고 객쩍은 농담이라면 순동이가 그저 앉아 있을 리 없는 것이 아닌가? 틀림없이 순동의 청이다. 순동의 청을 들어서 소장은 길게 말한 것이다. 자기 자신이 직접 말하기는 면구스러워서 소장을 내세운 그 갸륵한 심사를 생각하니, 명우는 눈물까지 솟구친다. 소장은 기다리다 못해,
“어째 의의가 있는가? 의의가 있으면 있다구 해야지 가만있으면 어떡허는가.”
하고 재촉한다. 명우는 감던 때와 같이 조용히 눈을 떴다. 그리고는 무엇이 되든지 말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말은 목구멍에 걸려서 나오질 않고 얼굴만 달아오른다.
“이 사람아, 그만 나이에 어째 부끄러운가. 정 그렇게 대답하기가 거북하다면 내일 아침 편지루래두 대답하게나.”
소장의 이 말에 명우는 그만 결심한 듯 고개를 벌쩍 쳐든다.
“아닙니다. 예서 말하지요. 소장님, 미안합니다만 어머니한테 전보를 쳐주십시오.”
“응? 정말인가?”
소장은 너무나 반가움에 어쩔 줄을 모르고 얼굴 가죽만 씰룩거린다.
그 이튿날 새벽. 부락에서는 또 일제 검색이 일어났다. 그 결과, 그물에 걸려든 자는 여섯 명이나 되는데 거진 중독자들이었다. 판에 박은 듯한 단장의 취조와 보도소 소장의 훈화가 있은 다음, 그들은 미리부터 작정되었던 규선이, 병철이네와 함께 ×××구류소로 요양을 가게 되었다.
명우는 밤새도록 흥분되어 잠들지 못하다가 새벽녘에야 겨우 어렴풋이 얕은 잠에 들었다. 만은 얼마 못 가서 그 무슨 꿈 때문에 놀라깬 다음, 그는 문득 지난밤의 소장의 말을 생각하고 규선이를 찾아 갔다. 무슨 말을 어떻게 꾸며서 할까를 궁리하며 마당 안에 들어서는데 집 안에서는 벌써 눈을 뜬 듯 규선의 말소리가 들려 나온다. 명우는 문 앞에 서서 잠시 망설이며 귀를 기울였다.
“이런 말을 하는 건 결코 당신을 미워서 하는 건 아니우. 그 점을 잘 이해한다면 굳이 나한테 매달려서 이런 고생을 하진 않으리라구 생각하오.”
규선의 말은 틀림없이 그의 아내를 보고 하는 말이다. 명우는 갑자기 긴장되어서 귀를 기울였다. 그의 아내의 말소리는 없다.
“나두 당신이 고생한 건 잘 알구 있소. 시집을 와서 처음엔 내 나이가 어려서 속을 썩구, 다음엔 내가 사회객인지 뭐인지 되어 가지구 지랄을 부리는 바람에 속을 썩구, 또 지금에 와선 요 모양이 됐기 때문에 자살까지 하려구 한 당신의 그 속을 난 잘 알구 있소. 그렇기 때문에 난 이번에두 요 며칠 동안 어떻게 좀 바른 길루 들어서 볼까구 골독히 생각해 봤소만, 여보오, 난 아무리 해두 제 길루 바루 들어설 수는 없소.”
갑자기 규선의 처의 흑흑 느끼는 소리가 들려 나온다. 명우는 아무소리도 없이 문을 열었다. 둘은 불의의 일에 깜짝 놀라며 내다본다. 그러나 명우인 줄 알고 규선이는 이내 제대로 평범하게 돌아서며,
“명운가? 어서 들어오게.”
하고 어색한 웃음을 힘없이 지어 보인다. 명우는 잠자코 들어가서 규선의 앞에 조용히 앉았다. 한동안 부자연한 침묵이 계속된 후,
“명우, 난 지금 아내한테 내 심중을 고백하던 중일세.”
하고 규선이는 싱긋이 웃기는 하나, 그러나 그것은 말할 수 없이 슬픈 웃음이다. 명우는 나직이 한숨을 쉰 다음,
“밖에서 다 들었네.”
하고 규선의 처의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규선의 처는 수그린 고개를 쳐들지 못하고 느낀다.
“그런가? 그렇다면 더 긴 말을 외지는 않겠네. 자네두 아다시피 난 이번에 가면, 반년이 걸릴지, 일년이 걸릴지 모를 텐데, 한 가지 딱한 것은 아내의 문제란 말일세.”
“그야 문제지만, 그러나 자네가 개심하구 나와서 금후의 코스만 바루 잡으면 쉽사리 해결될 문제가 아닌가?”
“뭐? 개심?”
규선이는 쓸쓸하게 웃은 다음,
“그건 그러이. 허지만 여보게 명우. 저로서도 알지 못할 건 제 맘일세. 개심 개심 하지만 나한텐 그게 제일 문젤세. 자네는 다행히 잃었던 옛 꿈을 다시 찾아서 앞날에 희망을 걸게 되었다지만, 나한테야 뭐가 있단 말인가? 앞날에 대한 아무런 희망도 가지지 못한 나로서는 결국 과거의 꿈밖에야 회상할 것이 무엇이 있단 말인가? 한포 먹으면 자욱이 흐려드는 머릿속에 그림같이 떠오르는 그 잃어버린 꿈- 자네 머릿속에도 그 기억은 잘 남아 있겠지?”
명우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만약에 나한테서 그것마저 빼앗어 버린다면, 난 벌써 내 손으루 이 헛껍데기만 남은 송장을 처치해 버린 지두 오랬겠네. 그러니까 명우 자네두 내 아내 모양으루 부질없는 충고는 일체 말어 주게. 간절히 부탁하네.”
조반 후-규선이, 병철이, 그리고 새벽에 검색망에 걸려든 여섯 명은 부락의 법규에 의하여 ×××구류소로 요양을 떠났다.
그들이 떠난 지 약 두어 시간 지나서 규선의 처는 끝끝내 서른아홉 살을 일기로 뒷강 버드나무 가지에 목을 매어 버렸다. 출전:인문평론10~11(1940.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