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
가슴
가지볶음
갈매기 글씨
감
감자전 만들기
강 같은 슬픔
개복치
객수(客愁)
검정 고무신
겨울 꿈
겨울 소곡(小曲)
결혼사진
계집
고량주
고려(高麗)의 눈보라
고요의 무게
고향 바다
곤쟁이
구름
굴뚝 연기
궁남지 연꽃
궁상
귤
그리움
기사문리
김국
꽁치
꽃
꽈리 고추볶음
꿈
꿈의 꽃밭
나만 죽고 싶은 가을
낙엽
내 마지막 겨울은
냉이
네팔
노을
노인
눈
눈물 사리
늙은 사랑
다도해
달
대작
도다리쑥국
동지의 시
둘
때문에
또 바이칼 거대한 물
마라도에서
마추픽추
매화
먼지
먹 도적놈
명사산(鳴沙山)
목숨이 있어
묘비명
무심
물소리
바나나
바다
바람
바람 감각
바이칼 시편- 아내를 보내는 조시(弔詩)
배추
백운사(白雲寺) 딸기밭
뱀
베개
별
복어 요리
봄 기도
봄 잠
부끄러움
부부
부천 도당산 장미
북해 항로
불륜 시편
빗방울
뻘게
사과 껍질
사라짐에 대하여
사랑
사랑하는 사람아
사색
사행시초(四行詩抄)
산
산사
산수유
새소리
새집
생
생선 한 마리
서울 뻐꾸기
서정이 있어야재
선거 유세장에서
설야서정(雪夜抒情)
설연집(雪戀集)
세월
셋
송기
수장
술버릇
시래기를 삶으며
시인
실종
아내
아파트 1층
암향부동(暗香浮動)
어떤 임종
어머니
어머니의 물감 상자
어머니의 약손
엉겅퀴
연어 대가리
엽서
와불선사
우동을 먹으며
우문(愚問)
운주사 와불
융프라우의 소
이사
이화중선(李花中仙)
장맛비
장인 장모께
재래시장
적폐청산
전등사(傳燈寺) 추녀 밑 목각나녀상(木刻裸女像)
전어구이
젓가락
정
종이학
죽마고우(竹馬故友)
진달래
창(窓)
첫눈
초록 그늘
초록 나무
타는 사랑
탈춤고
페테르부르크의 백야
폭포
풀밭
풍경
하나님
한
항로
해물파전
흙
1998년 겨울 정동진
가난
강우식
가난했지만 옛날에는 모두 잘 견디고 살았다
불가촉천민처럼 가난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다
천지사방을 둘러봐도 돈 부자보다 다 마음 부자뿐이었다
하루살이 고달파도 잠이 잘 오던 판자 집이었다
가슴
강우식
심장에 여러 가지 이름이 많이 붙는 것은
그만큼 쓰임이 많고 요긴해서다
태아 때부터 어머니가 들은 박동의 내 심장소리.
그 감격의 피돌기로 나는 뼈를 굳히며
한그루의 나무가 되는 심정으로 자랐다.
심장은 나무처럼 기다리는 염원으로 자란다.
기다린다는 것은 참는다는 것이다.
살아가려고 참고 참다가 울 때는
세상 물바다가 되도록 우는 고동이 되고.
서리 내리는 가을이면 우수수 떨구는
눈물도 마르는 낙엽으로 떨어진다.
흰 눈이 내리는 겨울이면
봄 같은 여자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큰다.
그러다 보면 잠시 한때이지만 초록 잎 돋고
메트로놈처럼 심장의 추가 흔들리며 세월도 가겠지.
온갖 감고 신산 다 보고 겪으며 나이테도 매듭지겠지.
때로는 분노하고 좌절하고 스스로를 달래며
쉴 새 없이, 가슴으로 고동치며 살아가겠지.
가지볶음
강우식
가지(茄)는 그냥 나무 열매가 아니다.
이 열매는 스스로 미리 쓰일 곳을 알면서
튼실하게 자라는 것 같다.
가끔 남자가 그리운 여자들이 은밀한
몸풀이로 쓴다지만
누구의 부끄러움이겠는가.
가지 따 먹고 외수(外數)한다는 말도 그냥 생겼을까.
나는 남자로서 이놈처럼
거대하게 뽐낼 수 없어서 늘 기가 죽는다.
하지만 부러운 것과 요리는 다른 일.
가지 요리는 하기 쉽고 좋아해서
우선 여자도 잘 삶는 기술이 있어야
연애를 하듯이 이른 봄바람 일듯 살짝 삶고
손아귀로 물기를 짠다.
오래 두기 위한 이 단계는 무슨 핸플 같지만
물기가 없이 혼자 드는 식사란
눈물이 말라서 오히려 외로운 식사다.
어떤 때는 춥고 스산한 겨울 저녁의
혼자 하는 식사의 위안을 위해
가지 모양의 한 자루의 푸른 촛불을 켠다.
그저 물끄러미 보기만 하는
불 밝힌 촛불마저도 우는
그 축축한 물기.
거인은 가지를 주체할 수 없어서 외롭다.
갈매기 글씨
강우식
부두 거리의 속사정까지 밝은 갈매기가
그대가 탄 뱃전을 맴돌며 일자서신 새기듯
소금발로 바닷물 찍어 하늘 종이에 휙휙 일필히지 한다
갈매기야 누가 너에게 전하라고 했느냐
감
강우식
아궁이에 불을 지펴야 할 가을 저녁이다
벽옥 하늘에 여편네 안반짝 같은 감이 붉다
감자전 만들기
강우식
감자전에 대한 내 고집은
부침개만큼은 세상없어도
두껍게 부쳐야 되므로 손 큰 남자가
좀 무식하게 지져야 된다는 것은
나이가 들어서도 불변이다.
여름 한철 음식점 것보다
나름 집에서 손수하는 맛도 좋아서
전을 부칠 때면 아내를 제쳐놓고
통 알을 강판에 갈고 녹말을 내고 마무리까지
내가 나선다.
주먹서리만 한 감자를 갈아
번철에 기름을 두르고
뜨거운 한증막에 등을 눕힌 거인같이
두텁게, 두텁게 부쳐서는
조상절로 쩌억 쩍 찢어 먹는다.
그래야만 매년 여름 한철을 나는
기분이 드는 우리 부부다.
입맛과 습관은 참으로 무섭지.
영동 사투리가 배인 접혀진 여자로
내 가슴에 남아 있는 토종 씨알 한 톨
뭐니뭐니해도 감자는 강원도라는 여자.
내가 굳이 쫀득쫀득한 이 맛을
언제 어디서나 내세우며 암하노불(岩下老佛)로
감자전을 손수 부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강 같은 슬픔
강우식
살이 불타서 허물어져 내린
단풍나무 아래서 하늘을 보니
스무 살 적 사랑했던 까뜨린의 눈동자처럼
하늘은 서럽도록 슬프게 텅텅 비었고
아아, 어쩌면 좋아
서럽도록 텅텅 빈 것이 보이는
이 가슴을 어쩌면 좋아
땅바닥에는 흥건히 적셨던 핏물도
어느새 마른 핏자국
한 번은 양지바른 땅에 꼭 묻어주고 싶었던
까뜨린의 살점 같은
낙엽 단풍
살이 불타서 허물어져 내린
이 강산의 가을은
굽이굽이 강 같은 슬픔으로 흐른다.
개복치
강우식
여러분
개복치를 아시나요.
성은 하찮은 것의 대명사인 개씨에
속된 말인 치 사이에 복자는 왜들었는지.
개똥쇠처럼 이리리저리 구르며 잘살라고 지었는지?
바다의 항공모함처럼 생겼다.
바다 위에서도 헤엄친다기보다 둥둥 떠다닌다.
태어나면서부터 덩치는 아니었을 텐데
작은 것은 본 적이 없다.
그래서 나는 개복치가 새끼인지 어른인지 모른다.
곧잘 정박한 오징어잡이 배창에
슬그머니 와 잡아가라는 듯이 쉬어서
어부들이 부수입이 되어서 즐겁게 만든다.
내 어릴 적 어판장에서 개복치를 팔 때 보면
한 덩치씩 뭉청뭋어 떼어서는
어부의 인심만큼이나 큰 뭉치를 주면
새끼 끈에 꿰어서 지게에 매달고
큰 횡재나 만난 듯이 가던
진짜로 맛은 영락없이 밋밋한 묵이다.
바다에는 없는 게 없어서 고기 묵도 있다.
'바다 밑 2만리'는 그래서 내 시토피아다.
지난여름 주문진에서 였다. 잊고 산 이름
개복치 음식점 간판을 보고 들어갔다.
어릴 때 헤어진 허물없는 친구 부르듯
개복치 있어요 큰소리로 찾으니 없단다.
개복치는 주문진 바다를 떠나 어디로 갔을까요.
지금쯤 도토리 묵밥 먹고 쉬었다 가던
천동산 박달재 고갯마루를 넘고 있을까요.
여러분
개복치를 아시나요.
* 시토피아는 조어. 詩+topia. 또는 seatopia.
객수(客愁)
강우식
성도 이름도 모르는 여자와
가슴을 맞대고 잡니다.
낯설은 여자여서 더 좋습니다.
부둣거리의 가로등들이
비린내를 풍기며 하나둘씩
올가슴처럼 점등(點燈)됩니다.
살갗이 봄날처럼 따듯합니다.
동백꽃에 바다가 물듭니다.
여자는 바다가 되어 출렁입니다.
아예 파도를 가져와
세상사 구구절절한 사연일랑
비록 하룻밤이더라도
왕창 뒤집어엎어 버립니다.
검정 고무신
강우식
큰바늘에 실을 꿰어
여름 한철 신었던 검정 고무신을 깁는다
이 신발을 신어 본 것도
50년도 더 된 세월이다.
지난 세월에 대한 향수가 밀린다.
새삼 어머님 모습도 떠오른다.
어린시절 검정 고무신을 신고
나는 6.25 피난을 갔다.
먼 길이었다. 신발이 자주 망가졌다.
신발이 터지면 밤마다
흐릿한 등잔불 밑에서
촘촘히 꿰매주시던
어머니, 어머니는 지금
세상 저편의 사람이 되신지 오래다.
길을 가다가 망가진
어린 아들의 신발을 깁듯
생전의 어머니의
물새지 않는 살림살이의
경영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고무신 한 땀 한 땀을 이어가며
자식이
산을 넘고 강을 건너기를 빌었던
어머니, 어머니는
세상 저편의 사람이 되신지 오래다.
유년처럼 신어보고 싶었던
검정 고무신 한 짝을 들고
어머님 가신 서역 하늘을
노을이 고웁게 타는 하늘을 바라보며
눈물이 고인다.
겨울 꿈
강우식
눈보라 치는 날에 사랑을 하리
마른 살갗 비비듯
추녀 끝 무우청들은 서걱거려도
방안 난로 위 주전자는
궁둥이까지 달아서
더운 입김을 내뿜나니
줄 것을 다 준 후에
가진 것 없으면 어떠리
그녀의 흰 팔베개에 머리를 누이면
오히려 텅빈 넉넉함으로
깊고 아늑한 잠은 스며들고
어머니의 젖을 만지던
내 유년의 꿈같은 겨울로
눈보라가 데려가 주나니
나에게 이 세상의 다른 낮과 밤이
더 있어 무엇하랴
나는 어머니를 뵈러 가나니
나는 어머니를 뵈러 가나니
겨울 소곡(小曲)
강우식
내 머리카락 하나쯤
그늬 겨드랑 속
어디메
아직
끼어 있을 법한
세월인데
또 그해의 눈이 내린다.
김장독 묻듯
겨울 산 언 땅속에
두고 온
여자.
그늬 사랑
저승에서도
배추폭처럼, 배추폭처럼
잘 익어갈까.
결혼사진
강우식
세상이 변했다.
변해도 너무 변한 것은
나만 아니라
세상 사람이 다 알지만
할 말 없이 변했다.
여자 제자의 결혼식
주례를 섰다.
기념으로 결혼식
사진을 가져왔다.
그 사진 속의 한 장은
바로 보면 멀쩡한데
조금 비켜보면
신부의 비너스 같은
알몸이 그대로 드러났다.
좋긴 좋은데
이 사진 신혼부부 둘만이
보는 것이 아니라
늙으신 친정부모 시부모
다 갔다 드렸겠지.
이 사진도
아무나 찍는 게 아니고
몸매에 자신 있는
사람만이 찍는다고
양가집 부모에게
자랑하며 드렸겠지.
정말 세상이
아찔하게 변했다.
계집
강우식
바다 냄새가 너무 짙어서 고향을 물으니
주문진 나룻가 계집이란다. 그래 맛 좀 보자.
얼마나 비린지, 꽁치 좀 구워 와라.
고량주
강우식
솔 검불 지고 불 속을 들듯
한 잔의 술이 식도를 훑는 쾌감의
가속을 어이 여자에 비하랴.
술은
꽃 꺾어 산 놓고 부었던
내 인생.
스무 살 무렵은 술시가 되면
관수동 골목 중국인 잡화상 앞 노상에 앉아
마른 패주(貝柱)에 잔술이던 고량주.
깡술로 마시는 이 독한 술 속에
시가 녹아들고 시대의 아픔이 젖고
탈출구 없는 긴긴 통금의 휘슬과
어디든 정보요원이 깔려 있던 60년대였다.
팔이 아프도록 술잔을 꺽었건만
마셔도, 마셔도 충족되지 않는
술이 술을 마시는 갈증.
벙어리의 절규같이
내가 나를 다스리지 못하던 세월은 갔어도
나는 무슨 까닭으로 밤과 더불어
아프게 배운 술을 끊지 못하고 있는 걸까.
고려(高麗)의 눈보라 - 강설(降雪)
강우식
하늘에서 땅까지
막막한 공간을 덮으며
눈이 내린다.
잴 수 없는 거리와 폭이
이 나라의
역사를 보는 듯하다.
흙을 일구며 성(城)을 쌓으며
살다 간 수천억의
영혼들…….
그들의 일생이
한점 눈송이로 응결되어
점점 이어진다.
얼었던 마음도
눈물로 풀릴 줄밖에 모르던
이웃들의
분노도 절규도 없는
이 조용한
하강(下降).
지금 천지는
그저 오랜 잠.
역사도
잠 속에 빠져든 듯한
슬픔이
하늘에서 땅까지 내리는
눈발이 되어
내 가슴을 적신다.
고요의 무게
강우식
우렁 각시처럼 아내가 왔는지
부엌에서 그릇들이 덜그럭 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저승 간 아내는 그 먼 곳에서 올 리는 없고
어느 논두렁길에서
이 늙은 홀아비와 눈 맞춘 과부가 왔나.
혼자 해서 먹기가 죽기보다 싫은 밥
그 밥 동무라도 정답게 하려고 왔나.
그보다는, 그보다는 무엇보다
고요 아닌 고요를 깨뜨린 것이 반가워
부엌으로 가보면 아무도 없다.
세간들도 멀쩡하게 그대로다.
혼자 사는 이 정적 일순의 고요의 무게를
나 아니더라도 누가 감당할 것인가.
하다못해
창문을 흔들며 지나는 바람 소리도 반가운
차라리 나도 머리 풀고 저 바람이나 되었으면 하는
이 고요를 누가 감당할 것인가.
고향 바다
강우식
1
컴퓨터 바탕화면에 늘 고향 바다 사진을 깔아놓았다.
왜 그런가 생각해보니 그 바다에 아내가 살고 있었다
2
아내는 나하고는 살 비비며 살만큼 살았으니
이제는 혼자 있고 싶다며
십 오륙년 전에 주소를 고향 바다로 이전했다.
오늘은 분가한 그 바다 앞에서 어디선가
‘여보 나 여기 있어요.’ 하며 어제이련 듯
물속에서 맑은 얼굴을 쏘옥 내밀 것 같아
행여나 하는 심사로 속 터지도록
안동답답히 하염없이 서 기다린다.
그사이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만나면 마음속에 두고 못 피웠던
‘사랑해’란 말 한마디 간절히 하고 싶어
여태도, 여직까지도 기다린다.
곤쟁이
강우식
사는 터전인데 바다보다 더 넓은들 겁나랴.
구름
강우식
쳐다보기만 하는,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는
구름은 우리집 외양간의 황소가
한 바가지씩 뭉치로 내지른 배설물 같다.
그 속에 쇠똥벌레 있어서인지
그래도 쇠똥처럼 정이 간다.
스무 살 무렵에는 구름의 들러리 되어
한없는 낭만에 젖기도 하고
때로는 격정의 핵폭탄과
터너이도로 회오리치게 했던 구름.
나는 한갓 구름의 주변머리였을 뿐.
이미 옛 노래가 되었다.
그래도 스프링코트의 구름 곁에 머물러
비밀번호나 만지작거리며 살고 싶다.
아기의 소피자락 같이
촉촉이 새는 봄비에 보슬하게 젖고 싶다.
들녘의 풀잎들은 파릇파릇이 손을 들고
세례를 받는 신생아 되는 초록 싹들의
구름 냄새나 맡으며 흐르고 싶다.
굴뚝 연기
강우식
눈이 온 저물녘 피어오르는
굴뚝 연기는
어느 집에서 옥동자 낳았다고
하늘에 알리는 것 같아
너무나 경사스럽다.
가정집에서 하늘에 알리는 일로
연기 밖에 뭐가 있겠는가.
로마 바티칸 성당에서도
새 교황을 세웠을 때
하늘에 알리는 신호로
연기를 피워 올리지 않았는가.
아니 그런 성스러움이 아니더라도
가족끼리 저녁 한 끼를
오붓이 즐기기 위해
된장찌개라도 끓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피워 올리는
연기는 어떤가.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눈 내리는 저녁이면
어떤 연기든 다 받아줄 것 같다.
지금 같은 어스름으로 물들어가며 기우는
북녘땅 어느 산간에서 피워 올리는
한 끼조차 어려운 맥 풀린 굴뚝 연기조차
긍휼히 여기시며 받을 것 같다.
궁남지 연꽃
강우식
궁남지
호수는
부처님
불(佛)가마.
시궁창
밑바닥
아귀저승
불(火)가마.
쓰레기
누더기
일체중생
해탈구제
환골탈태
불(佛)가마.
연잎자리
초록방석.
부처님
염화미소
꽃 피운다.
궁상
강우식
마누라라고 돈 쓸 줄 몰랐을까마는
일생 한 푼 두 푼 모으기만 하다 숨졌다
아마 내 곁에서 자기가 사라진 뒤
어디서나 궁상 떨지 말라고 그랬나 보다
귤
강우식
처음 그녀의 껍질을 벗기던 달콤한 향내가 스몄다.
노오랗게 젖어 값싼 여인숙을 떠돌던 여자.
조금은 달고 슬픈 바다가 있는 살이 떠올랐다.
헤어지는 아픔도 귤쪽 같자던 여자가 떠올랐다.
그리움
강우식
몇 천 마디 말을 하고 싶어도
돌 같은 입이 되렵니다.
캄캄 먹중 말 벙어리 되면
살며시 그리움 하나 자라겠지요.
텅 빈 하늘 끝에 걸린 그리움이
물처럼 소리 죽여 흐르고 싶어 하면
발길 잇는 대로 보내렵니다.
그 강물 언젠가는 기진맥진해서라도
이 세상 어딘가에 사는 그대의
발 아래 닿아 그리웠노라 하겠지요.
예까지 오는 길이 오직 그대 있어
와야만 했던 길이라고 속삭이겠지요.
기사문리*
강우식
머리를 북쪽에 둔 국경은 더 춥고 슬프다.
바라보이는 바다는 철조망도 초병도 없이
일망무제 푸르고 넓고 넓은데
북위 38도 몇 분의 보이지 않는 선은
바다 밑바닥 심연까지 그어져 있고
남몰래 숨어 사는 사람처럼 들어와 살던
행복했던 작은 포구.
바다 갈매기만 남에서 북으로
북에서 남으로 짐꾼처럼 드나들던 곳.
그리운 사람이, 그리워할 사람이
애시당초 없는 듯이 세월을 묻고 사는 곳.
별을 보아도 북쪽에 뜬 별만 보던 하늘.
가까운 사람이 잠시 안 보여도
그리운 사람이 되는 국경의 나날이었다.
물에다 밥 말아 먹는 이데올로기도 아닌데
그 국경이 허물어지고 흔적조차 없는 데도
넘지 못할 사랑을 갖고 살았던 사람에게는
넘지 못할 사랑을 넘은 것처럼
마음대로 넘어 다닐 수 있는
지금이 슬프다. 국경을 지키듯
넘지 못할 사랑을 지켰던 하늘이 슬프다
* 기사문리 : 동해안 38선 인근의 작은 포구.
김국
강우식
가끔 사는 게 마르고 메말라서
그 바닥이 저 타클라마칸 사막 같거나
건너지 못할 고비사막 같아서
마른 혓바닥처럼 물기 사라지면
바다가 그리워집니다.
바다가 그리울 때 김국을 해 먹습니다.
불판 위에 바다를 태우듯
김을 노릇하게 굽습니다.
바다를 가두듯 국 냄비에 물을 채우고
파산한 인생처럼 파격으로
구운 김을 바스러뜨려 넣고 끓입니다.
바다가 변하여 뽕나무밭이 되는 건가요.
뽕나무밭이 바다가 되는 건가요.
일순에 바다 냄새가 진동하는 국이 되면
나는 그 위에 계란 한 알을 깨서 넣습니다.
바다에 해 솟듯 계란을 띄웁니다.
그 바다에 해를 가지고 해 없는 일본에 간
연오랑과 세오녀가 있습니다.
아니 연오랑의 아내로
매일 새벽닭이 울 때까지
남편을 기다리던 세오녀가 있습니다.
아니 세오녀 같던 어머니가 있습니다.
어머니가 그리울 때 김국을 해 먹습니다.
꽁치
강우식
이놈의 꽁치 굽는 냄새가
무슨 점령군의 최루탄 가스처럼
온통 덮어버린 초등학교 동창회다.
팔도 어디서나 흔히 먹는
어물 중에서는 그중 만만한 이놈을
초등학교 동창회에서는
ʻ고향의 맛 즐기기ʼ라고 내놓는다.
고향은 무슨 고향 빛 좋은 개살구지.
꽁치가 꽁지가 되어버린 자투리나이의
할배 할미들이 죽기 전에
일 년에 한 번 보는 만남이 너무 반가워
석쇠를 걸어놓고
그들의 늙다리 인생처럼 짠 막소금을
툭 툭 뿌려가며 구워서는
마수워 마수워 영동사투리 뱉으며
서로의 입에 넣어주기도 한다.
하긴 아카시아 꽃필 무렵에
고향 주문진 앞바다에서 건져 올리는
생물 꽁치 회에 굳이 침을 흘려가며
입맛 다실 필요 뭐 있으랴.
냉동이면 좀 어떠랴.
서로 한물간 팔자인데
그런대로 해동해 먹으면 되지.
우리 모두 한때는
산란기의 꽁치 떼처럼 사랑에 눈이 멀어
죽어도 좋아 온몸을 내던졌던
그러면서도 꽃바람속의 홍도를 닮은
푸르른 등을 가진
어물들이 아니었던가.
꽃
강우식
꽃피는 거 비록 한때지만 눈보라 비바람 쳐도
꽃도 그 시절이 있어 사람처럼 추억을 먹고 산다.
꽈리 고추볶음
강우식
엘리엇의 시처럼 난해하게 매운
꽈리고추를 볶기 위해서
무엇이든지 한 번에 되는 일이 없다는
당연한 과정을 거친다.
늙어가면서 나도 그렇고
내 친구들도 거의가 매운 것은 못 먹는
식성으로 변했듯이 일차적으로
맹물에 꽈리고추를 넣고 팔팔 끓여낸다,
그러면 모더니즘 초창기의
에즈라 파운드 시만한 매운 맛이 된다.
혀를 떼 내고 싶도록 안절부절못하는
매운 맛은 아니고 그렇다고
고추의 아주 매운 맛은 버릴 수 없는
그런 매운 맛이 되면 그 다음은 일사천리다.
끓인 꽈리고추에 기름을 붓고 볶으며
KTX처럼 천안쯤 가서 멸치를 넣고
단맛이 좋으면 매실청을 넣어도 좋고
싫으면 안 넣어도 상관없고
나는 어느 쪽인가 하면 넣는 쪽
달콤한 밀월처럼 충분히 넣고 또 넣고
대전쯤 가서는 간장을 넣어 간을 맞추고
달달 물기 줄어들도록
드라이한 서정시를 만들면 끝이다.
부산까지 완주할 필요가 없다.
꿈
강우식
눈이 내리는 날에는
겨울 바다엘 가서
키스를 하고 싶다.
키 쬐그마한 그녀를 껴안고
먼 수평선을 끌어와
마춤하게 등을 꾸부리고…….
그러면 내 입술을 받으러
그녀는 마음보다 먼저 발뒤꿈치를
들어주겠지.
사랑한다는 말보다
더 사랑한다는 속삭임이
되어내리는
‘눈이 오네요’라는 말도
그녀의 귓속에 낮게 불어넣어야지.
같이 입술 비비다
숨결이 밀물지는 한순간에는
블루스 같은 우리들의 포옹도 잠시 멈추고
아랫목이 유달리 따스한
민박집 뒷뜰의
감나무.
까치밥으로 남긴
마지막 홍시 하나도
자연으로 보여 줘야지.
눈이 내리는 날에는
겨울 바다엘 가서
시래기국 냄새가 나는 여자와
키스를 하고 싶다.
꿈의 꽃밭
강우식
지금도 하늘의 별을 보고 바다를 건너고 사막의 밤길을 가는 사람이 있다.
옛날 하던 방식대로 오래 길들여진 습관 때문이다. 만일 하늘에 별이 없다면
캄캄 칠흑의 깨지지 않는 벽 같은 그 절망을 인간은 어이 견디었으랴.
아주 큰 것이 도저히 가질 수 없는 작은 것으로 변하여 빛나는(이마저도 직접 못 본 맘모스와 같은 상상이지만),
사랑하는 사람처럼 멀리서 바라만 보아도 그저 좋은 이치를 너는 아느냐, 별나서 별이다.
지니지 않았어도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꿈을 주는 별이다. 그래서 밤마다 돋는 하늘의 별은 별꽃이다. 우리들이 황사 바람과 미세먼지의 재앙으로부터 맑게 가꿔야 할 꿈의 꽃밭같이다.
마치 신혼 이부자리 같이 펼쳐진 밤하늘의 별밭이다.
나만 죽고 싶은 가을
강우식
가을 햇볕이
챙 챙 풀벌레 소리를 내며 운다.
색계, 욕계, 색색욕계로
삼천대계가 다 떠나간다.
울울한 잡목림의 숲 틈으로
햇볕이 쏴아 쏴 바람 소리로 달려와
그 소리를 듣고 있다.
갑자기 자폭하듯이
한 여자 앞에서 내 떨리는 사랑은
폭포처럼 떨어진다.
풀벌레 소리 같기도 하고
바람 소리 같기도 한
내 사랑은 떨어진다.
간절한 나의 여자는 돈황석굴에서 만난
와불상처럼 돌베개를 하고
가을의 무념, 무상 속에 묵묵부답이다.
잠시 세상은 일순의 고요 속에 아득하고
예순 나이의 내 사랑탑은
무너진다, 무너진다
청명한 햇볕 한 가닥에
목매달아 죽고 싶도록 무너진다
낙엽
강우식
죽으면 밤하늘의 별이 되고 싶은 사람들은 많아도
낙엽처럼 살다 죽고 싶은 이는 없다
왜 그럴까, 낙엽은 바람에 휘불리어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게 사라지기 때문일까
내 마지막 겨울은
강우식
여자보다 더 끊기 어려운 것이 술이다.
이제 문득 다시 이 몸 생각하면
삼동 내내 바람과 함께 서걱이는
처마 끝 한 타래의 시래기 같을 뿐이다.
바람아, 내 만일 겨울에 죽게 된다면
마음속 계집처럼 너를 부를 터이니
그리운 임 만나러 가는 얼음 강판에
죽은 재나 날려서 미끄럼이나 막아다오.
냉이
강우식
봄 들녘에 서면
어머니가 캔 냉잇국 먹던
옛날 아지랑이로 피어오른다.
나물보다 봄철이 좋아
땅의 향기를 맡으려는 듯
무릎이 닳도록 헤매며
해동갑하던 처녀가
장대키의 총각 곁에 와
봄바람에 튼 손등 감추듯
평생 남루 있는 듯 없는 듯
둥글둥글 쪽진 머리에
세간 윤내며 야무지게 살았다.
가령 인생이 때로는
해일이 닥치는 재앙일지라도
늘 낮게, 낮게 몸 낮추고
겸손하게 살며
봄 들녘에
어느새 돋았는지 모르게
파릇파릇 잎 튼 냉이처럼
모진 세월을 이기시던
어머님.
그 냉잇국 먹고 자란
저가 간들 어디 가겠습니까.
다음 세상에서도
어머니의 아들이 되겠습니다.
네팔
강우식
공기 맑으니 사람이 달라진다
가난해도 왜 마음 부자인지 알겠다
나 스스로를 위로할 길 없는 땟국 줄줄 흐르던
60연대는 땡전 없는 빈 털털이 신세여도 행복했었다
노을
강우식
하늘 끝이 저물 때까지 가보자고 한 사랑이 있었다.
나는 어찌하여 그런 여자를 버리고 피빛 절규로
의지할 벽도 없이 함몰하는 외길을 가며
황홀한 몰락을 꿈꾸는 돌짐 진 죄수가 되었는지요.
노인
강우식
사람도 늙으면 새가 되어 간다.
머리도 깜박깜박 새대가리 되어 가고
팔다리도 새 졸가리가 된다.
저승길도 새처럼 가볍게 갈 수 있다는 거
슬프게도 잘된 일이다.
눈
강우식
2
아내가 저 겨울 바다에 외롭게 추운 가슴으로 살고 있다
오늘 그 바다에 성냥팔이 소녀처럼 떨지 말라고
목화솜 같은 목화솜 같은 구름 꽃이 살포시 내렸다
6
옛날 내가 봤던 영화 양산도의 망나니처럼 눈이 내린다
대명천지 어디든 천것으로 살지 마라라 하며 눈 내린다
쑥대머리 무릎 꿇고 토설치 못하고 사랑한 죄. 후회다.
눈물 사리
강우식
빈한한 신혼 시절에 남편 친구 발 들여놓으면
머리채를 잘라서 술을 사 오지는 않았을 테고
아내는 무슨 재주로 술을 받아 왔을까
소주잔 홀짝이며 지난날 떠올리니 눈물 사리 비치누나
늙은 사랑
강우식
오줌발 세면 색시 잘 얻는다고 귀띔해준 것도 아닌데
어려서 자지 꺼내 누가 더 멀리 가나 친구와 겨누었을까
사랑에는 젊고 늙은 나이가 없어 붉히는 낯색
늙은이에게는 늙은이 나름대로 피우는 꽃이 있으리
다도해
강우식
몇 점 다도해 같은 구름이 물 흐르듯 떠다닌다
그렇다, 나도 젊어 한때는 사랑에 푸른 물들어
다도해 크기의 꽃들을 달고 둥둥 떠다닌 적 있다
달
강우식
1
사랑하는 소녀에게
난생처음으로 밤새 쓴 기인 긴 연애편지를
수줍게 건네주던 스무 살 무렵
청년학도의 은근히 달 뜬 얼굴
2
밀물 썰물 할퀸 어머니의 배는 시달려 와서 성스럽다.
무엇이 되고 싶은 것도 없이 사신 당신을 뵐 때마다
속마음으로 울었던 것은 어떻게 평생을 자식들 보살피며
무명옷 행보로 살다 달처럼 기울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대작
강우식
사람이 아주 지독한 사람은
멸치같이 깡말라서 술 마시는 데도
깡다구로 퍼붓는 사람이다.
포차집 딱딱한 의자에 앉아
밤새도록 끄떡없이 마누라, 집,
사랑 같은 거는 입속에 들어가는
갯장어 한 젓가락도 안 된다는 듯이
무심히 탁 털어 넣어버리고
냉수처럼 소주를 벌컥대는 사람이다.
카아 소리 하나로 모든 것을 망각해버리는
어쩌다 이런 사람과 대작하면
절대로 비가 와서는 안 되는 사막에
비가 온 것처럼
가슴이 이상하게 철렁 내려앉는다.
술 한 잔 내밀어도
괜히 겁이 나서 꼬리 내린 개처럼
비실비실 뒤로 밀려나는 자세가 되고
집에는 어떻게 가나 걱정부터 생긴다.
집에는 주유소 텅 빈 탱크 같은 여자가
정품 주유기로 사랑을 공급해 주기를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고
귀신에 쓰인 듯 그에게 붙잡힌 나는
낙엽처럼 이슬이 말라가다
아무 데나 노상 방뇨해 버린다.
마침내는 세상을 포기하듯 나를 버린다.
술 취해 하는 죄는 죄가 아닌
죄가 되어 세상에 아무 것도 없는
백지 같은 상처를 핥듯
자네 한 잔, 내 한 잔
끝내는 술과 내가 앉아서 대작하며
침몰하는, 끝없이 침몰하는 배가 된다.
도다리쑥국
강우식
봄이면 통영땅 남도 천리로 가
갯 처녀의 비린 향기가 나는
도다리쑥국을 홀린 듯이 먹는다.
해수 쑥탕에 누워
목욕하고 있는
도다리 살맛이라니.
달거리가 그친 이튿날 깨끗이 씻어서
비린내가 사라진 듯하면서도
새 속옷갈이하고서도 냄새가 가지지 않은
조금은 멈칫한 걸음으로
그래서 더 바람 타는 나룻가 처녀들이여.
속절없이 흔들리지 말고
파도 타는 뱃머리께로 기울지 않으려면
저녁밥을 든든히 먹어야 한다.
항구에 와서 어정거리는 외지 사내들은
계절 맛으로 봄을 먹듯이 하며
도다리처럼 사랑에 사시가 된 놈들이다.
쑥처럼 만나지 말아야 한다.
아무리 도다리쑥국이 되자 해도
돌아서야 한다.
그러면 도다리쑥국은 누가 먹느냐.
사는 게 바다만큼 아파 봄 쑥 향기 따라
남도까지 흘러들어온 사내가 그 속풀이로
눈물 빼며 먹는 탕국이어야 한다.
동지의 시
강우식
큰 느티나무에
별이 새떼처럼 내려앉는
밤이다.
먹 흑의 밤에
부엉이도 눈을 뜰 수 없는
깊은 밤에
한 남자를 품은 여자의 문풍지가 운다
달 항아리 그득히 넘치는
막걸리
빛의 여자의 살이 떨린다
밤 트럭 지나는 소리에도
부르르 떨며 울던
문풍지
드디어
가야금 한 줄 튕기듯
부르르 떠는
대음순이다
여자의 겨울의 클라이막스다
오리무중으로 밤안개 번지듯
눈 오는 밤이 길어
사내는 더 늙는다.
둘
강우식
순이의 혓바닥만 한 잎새 하나
먼 세상이나 내다보듯
초록의 큰 물굽이를 넘어와
짝진 머슴애의 얼굴을 시퍼렇게 내다보네
때문에
강우식
죽어도 좋다던 옛사랑이
때문에, 때문에 입만 열면
그놈의 코로나 때문에 무서워서
언택트 하잔다. 때문에 라는
탓, 핑계거리가 마음이 짠하다.
안 만나고 안 보면 인지상정으로
있던 정도 멀어지니까
그러면 헤어지는 수밖에 없지.
그 말끝에 세상없는 돌림병이 창궐해도
산 사람이 내일 당장 죽어 나가더라도
움직일 동(動)해야지
어이 꼼짝 없이
방구석 귀신이 되느냐고 해주었다.
요즈음은 유튜브가 대세이니까
내 말도 좋으면 구독 싫으면 거부.
구독 거부 하려해도 아무 것도 없네.
그러니까 시(詩)지.
또 바이칼 거대한 물
강우식
바이칼에 처음이자 마지막인 배를 띄웠다.
아내의 뼛가루를 한 움큼 허공에 뿌렸다.
샤먼의 주술 같은 바람이 흰 이를 드러냈다.
수면은 삽시에 안개꽃 천지였다.
꿈. 안개. 꽃이다.
환상의 수천억 개 안개꽃이다.
만다라의 물로 낯색이 바뀌었다.
산산이 녹으면서 바이칼이 되고 있었다.
바이칼, 풍요로운 물로
대지 위에서는 나를 먹이고 살 찌웠듯이
그대는 온갖 물고기의 친구로서
이제부터는 그것들의 피와 숨결이 되어서
밤낮으로 호흡하며 떠돌리라.
아니, 바이칼이 되어, 바이칼이 되어
이 지상이 갈증 나 타들어 가고 목마를 때
석유보다 더 비싼 거대한 물로 남으리라.
세상이 다 입을 대는 젖줄인
어머니의 호수여
너는 갈릴리의 어부처럼 배를 띄우게 하리라.
지상에서는 늘 가난한 식솔들의 일용할
따뜻한 마유주가 되었듯이
그대는 죽어서도 그리 살리라.
이 세상 물먹지 않는 자 어디 있으랴.
그 물로 그대는 살리라.
마라도에서
강우식
물빛이 하도 맑고 푸르러서
두 발을 가만히 담그어 봅니다
여기 와서 마라도도 그 그리움을
끝내 간직하며 가지 못하고
그만 주저앉고 말았듯이, 주저앉아서는
이 땅의 마지막 그리워하는 외로움이 되었듯이
내 짝사랑도 발이 시리고 외로워서
이제 그만 섬이 되고 싶습니다.
마추픽추
강우식
1. 서시 콘도르의 큰 날개가
콘도르의 큰 날개가 칠흑을 밀어내고
안데스의 하늘이 열렸다.
태양의 햇살을 부채날개에 가득 실은
콘도르는 자신의 형상을 닮은
마추픽추의 하늘 위를 순찰하듯 유유히 돈다.
지금 마추픽추는 텅텅 비어 있다.
산은 늘 비어 있고 빈 마음이다.
그 옛날 융융했던 마추픽추는
태양신의 명을 받은
콘도르가 날카로운 발 갈퀴로
몽땅 채어 어디론가 사라지고
페루드란스* 독사 같은 우루밤바 강*의 급류가 흰 이를 드러내고
밤낮으로 물어뜯는 그 위에
마추픽추는 텅 빈 적막 속에 의연하다.
역사는 늘 페루드란스처럼
음흉한 독을 품고 뒤에서 공격했지만
마추픽추는 폐허가 되어
오히려 신비한 공중도시로 살아났다.
마추픽추는 통제된 땅이었다.
산이 문을 열어주지 않으면
아무도 들어갈 수 없는 땅이고 산이었다.
선택된 사람만이 들어가 살다
신의 부름을 받아 태양신에 헌신하는
산 속의 땅이었다.
그래서 더 비밀의 문을 열어보고 싶듯이
소문은 무성하고 자자했다.
산의 미로와 같은 신비를 때로는
사람들이 만들어 왔듯이
돌로써 황금을 만든 도시였다.
보는 사람에 따라 돌이 황금이 되고
황금이 돌이 되는 도시였다.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말씀을 따른 사람들에게는
돌이 황금으로 보였다,
안데스를 비추는 황금빛 햇살이
돌에 스미어 황금이 되는 신비를
콘도르킨가*의 백성들은 자연에서 알았다.
잉카들의 삶은 자연연금술이었다.
산이 있어, 거기 산 하나가 있어
돌로써 황금도시, 황금보다 더 아름다운
공중도시 마추픽추를 만들었다
2. 스스로 안데스의 하늘 아래
스스로 안데스의 하늘 아래 어딘가에
돌처럼 황금이 지천으로 쌓인
눈부신 샹그릴라가 있다고 믿는
잉카들이 아직도 많듯이
소문은 숲의 초록 잎처럼 일렁이고
자고 일어나면 꿈같은 말이 구름으로 퍼져
발을 달고 바다를 건너고 산을 넘었다.
소문은 날개를 활짝 편 콘도르,
황금에 눈이 뒤집힌 침탈자들이
울울창창한 숲을 헤치고 기어들었다.
마추픽추는 그런 도시였다.
나는 천만년을 잠자는 돌 틈에 돋은 쪽 풀의
강인한 생명력도 보지만
숲의 비명소리도 듣는다.
안데스의 새벽 고요를 깨치고
쓰러지는 교목과 잡목의 비명도 듣는다.
역사의 옛 자취도 없이 사라진 도시에 번진
잔인한 피 얼룩과
슬프고도 처절한 사랑의 무늬도 예감한다.
태양을 위하여
돌로써 태양의 신전이 세워지고
태양과 하나 되기 위하여 해시계를 만들고
하늘이 무너져도 끄떡없는 움직이지 않는 돌로써
움직이는 태양을 잡아두고자 한 잉카였다.
인띠와따나, 태양을 잡는 천문관측소가 있던
신의 도시 마추픽추였다.
도시의 한쪽 콘도르킨가의 황금 소문은
안데스의 바람을 타고 흘러, 흘러
바다 건너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산을 무너뜨리고 밤잠을 설치게 했다.
갈증은 참을 수 없는 욕망이다.
물을 찾아 사막을 헤매는 나그네처럼
황금 물에 눈이 뒤집히고 먼 자들은
소경의 지팡이로 이리저리 땅을 더듬으며
천 만길 황야를 휩쓰는 바람이 되어
마추픽추를 싹쓸이로 비질했다.
황금은 어디 갔을까.
잉카들이 아무리 머리를 흔들고 손을 저어도
황금이 돌이고 돌이 황금이라 해도
감쪽같이 숨겼다고 믿을 수밖에 없는
침탈자들의 숙명.
황금이 아닌 것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
슬픈 무리들이었다.
돌은 아무 쓸모없는 돌일 뿐이었다.
끝없는 고문과 피의 살육이 시작되었다.
황금으로 온몸을 휘감듯이 잉카의
피로 매대기 하는 밤과 낮의 연속이었다.
내던져진 인육들의 피 냄새는
안데스의 굶주린 콘도르들을 꾀게 하고
마추픽추는 텅 빈 바람의 공간이 되어 갔다.
숲의 장막이 드리워진
바람처럼 텅 빈 듯이 있는
밀림 속 신비한 도시로 변해 갔다.
그리고 세월이라는 망각의 긴 시간이 흘렀다.
피의 황금이 다 사라진 그 자리에
태양의 황금인 돌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마추픽추의 산처럼 쌓인 돌들은
오랜 바람의 시간과 눈보라의 공간 속에서
피의 얼룩들을 다 씻고 닦아낸
구도자의 뼈처럼 정화되어
다시 시작하는 사역의 역사였다.
모든 삶과 죽음은 태양을 따라
밤과 낮으로 순회하고
하늘의 돌인 별의 운행을 아는 황제 콘도르킨가는
하늘에서도 제일 아름다운 별자리를 본떠
마추픽추의 돌집들을 만들었다.
별들의 울타리를 만들어 갔다.
모든 슬픔을 가슴에 품고도 내색이 없는
망각 속의 백치였던 잉카의 돌들이
별처럼 산의 어둠을 뚫고 부활했다.
돌은 황금이면서 때로는 폭력의 공포였다.
콘도르킨가는 새 한 마리도
그의 명령이 아니면 날지 못하도록
신의 목소리와 계율로 돌의 제국을 만들었다.
잉카들은 모두 지상에 얽매인 돌이었다.
돌이어서 신의 도시를 만들 수 있었다.
가끔 안데스의 돌들은 꿈을 꾸었다.
하늘의 별자리에 떠 있듯이
신 앞에 매인 몸들인 잉카의 꿈.
돌들은 한자리 박혀 오래 살기보다는
우루밤바강에 춤추며 떨어지는 꿈을 꿨다.
꿈꾸는 돌들은 자유를 희망했다.
하늘의 별들이 우박처럼 떨어지는
낙하는 비상의 다른 의미다.
누가 하늘 높이 꿈을 싸서 돌로 던진 것일까.
그 안데스산맥 위로 잉카의 꿈이 날았다.
돌이 새가 되었다. 자유를 사랑하는 새가 되었다.
유성 같은 새가 하늘로 솟구쳤다.
유유히 안데스를 지배하듯 나는 콘도르였다.
우주전함 같은 콘도르.
돌의 눈이자 하늘의 눈을 가진,
하늘을 날 수 있는 돌은 콘도르뿐이었다.
콘도르가 없는 잉카를 어찌 노래할 수 있으랴.
돌이 떨어지거나 솟구치거나 하는 것 같은 새.
콘도르는 안데스의 하늘이고 돌의 날개다.
어찌 콘도르가 하늘을 그냥 날겠는가.
털끝만치 미세한 바람의 흐름도 다 감지하고
그 느낌대로 호흡하며 기류를 타는
콘도르를 사랑한다는 것은 신을 사랑하는 것이다.
신이 사는 산을 사랑하는 것이고
페루를 사랑하는 것이다. 숲과 나무와
피리와 노래의 숨결을 사랑하는 것이다.
신 앞에 자유로웠던 콘도르의 심장 잉카의 꿈.
비상하는 돌이여 숨을 쉬자.
돌 속에 사는 잉카의 후손들은
늙은 마누라와 오래 해로해 왔듯이
누구나 늙은 돌산 봉우리 마추픽추를 가지고 산다.
돌산이 바로 신비한 신의 도시이고 집이다.
아케이드 프로젝트 같은 안데스다.
* 페루드란스 ; 사물을 뒤에서부터 공격하는 독사.
* 우루밤바 강 ; 마추픽추 산 아래로 흐르는 강.
* 콘도르킨가 ; 독수리 황제. 잉카제국의 모든 황제를 총칭하는 의미로 씀.
매화
강우식
돌연변이로
남들보다 먼저 핀
매화 한 송이
오래도록
눈 마주하다
다른 봄날
수천 송이 꽃 앞에서
잃고 말았네.
이승에서의 틈은
찰나이거늘
찾으면 무엇하리.
먼지
강우식
먼지들은 구석이 편안하다.
살아가면서
힘없이 밀리고 밀리다
막다른 벽에 부딪혀
동서남북 어디고 갈 곳 없는
퇴출당한 나처럼
소리 없이 구석진 곳만 찾는다.
먼지들은 힘이 없다.
가난한 사람끼리 모여 살다
하룻밤 새에 소리소문없이
야반도주하는
산동네 판자촌 인생처럼
바람만 좀 불어도
어디로 휘불리는지 모르게
증발한다.
하지만 먼지들은 스스로가
생태적으로
어디 가서 살면 되는지를 안다
세상 어디에도 쓸데없는
미미한 티끌이지만
어느새 구석진 자리에 모여
힘없는 것들끼리
서로 의지가지하며 기대 살 줄 안다.
먹 도적놈
강우식
술에 취해서 오월의 보리밭에 누워
하늘에 뜬 구름을 이블 삼아 잔 적이 있지
무슨 꿈을 꾸었는지 몰라, 먹 도적놈이 되었던가
갑자기 다이아몬드 같은 별을 한 아름 안고 있으니
명사산(鳴沙山)
강우식
어떤 여배우는 예까지 와서
타클라마칸 사막의 구름을 닮은
궁둥이를 발기고
뜨겁게 누드사진을 찍었다.
생발톱이 빠지도록
타박타박 낙타걸음으로 이어져온
실크로드여, 지금은
고행도 누드사진이다.
주먹만 한 다이아몬드의
꽃비가 내린다 한들 숨이 막혀서
이 땅을 다시 밟겠느냐,
모래가 운다.
모래들이 모여서
밤새도록 울음의 산을 만들고
깎아지른 절벽의 막고굴은 울음을
죄처럼 업고 산다.
모래가 우는데
사람이 어이 눈물조차 없을소냐,
눈물 속에 들어가 절을 짓고
문진의 보살상 하나 잘 다듬어
마음을 누르려 했으나
마른 혓바닥으로
모래알 쓸리어 가듯 우는
저 산 울음소리로는
이 세상 풀잎 하나도 적시지 못함을
나는 안다.
업보다. 그러면서도 서역 하늘 전체가
천년을 두고 운다.
목숨이 있어
강우식
목숨이 있어 정관, 담석, 치질, 위암 수술 째고 자르고 꿰매고도 끈질기게 살아왔다. 목숨이 있어 일, 경, 현, 숙, 옥, 문, 분, 등의 여자를 사랑하고 헤어지는 것도 살 아프게 살아왔다. 목숨이 있어 하늘만큼 바다만큼 살아온 모든 업 내가 안고 죽는다. 목숨 다한다는 것, 끈끈한 삼복더위에 을지로 통 강서연옥에서 냉면 한 그릇 먹는 것처럼 시원하다.
묘비명
강우식
어머니가 그리워서 한잔 술에 취하면
수없는 꽃들의 손목을 잡고
하룻밤 같이 자자던 사내.
한 그루 나무처럼 끝없이 홀홀했던 인생.
여기 고향 바다에서 한 줄의 시가 되어 잠들다.
만세! 만세!
무심
강우식
바람의 순리대로 쏠리는 풀잎이듯
잠결에도 아내 곁으로 돌아눕는다.
무심으로 하는 이 하찮은 일들이
오늘은 내 미처 몰랐던 사랑이 된다.
물소리
강우식
바위같이 견고한 얼음장 속으로 물이 흐른다
들어서 아는 소리와 안 듣고도 아는 소리가 있다
그 소리는 들어서 아는 소리가 아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소리가 없어도
마음으로 들어서 아는 견고한 물소리가 있다
바나나
강우식
아침에 제일 먼저 일어나는 이 살덩어리를
당신이 제일 부르기 좋은 이름으로 불러주세요.
아침에 제일 먼저 일어나는 이 살덩어리를
당신이 제일 미끄럼질하기 좋은 곳으로 인도 하세요
바다
강우식
일생 내조를 해왔어도 아내의 고마움을 모르듯이
바다를 끼고 살면서도 내 마음에 있는 줄 몰랐다
어느 날 파도가 몽땅 인생을 다 보따리 싸 가버리자
늘 술 취한 듯 비틀대던 마음이 바다임을 알게 되었다.
바람
강우식
바람이 흐르면 강물은 닿은 만큼 물결친다
나뭇잎도 바람이 오신 줄 알고 살랑댄다
사람이라고 어이 안 흔들릴 수 있겠는가
태극기가 바람에 펄럭입니다
촛불은 바람 앞에 꺼집니다. 누군가 외친다
바람은 우리들 인생처럼 그저 왔다 갈 뿐이다
바람 감각
강우식
몸만이 아니라 감정도 늙는다는 걸
시를 써 보면서 알았다. 젊은 날로 돌아가려 하나
옛날처럼 감각이 따라주지 않는구나
황포 돛대 끝에 휘휘 말려오는 바람이 될 수 없구나
바이칼 시편- 아내를 보내는 조시(弔詩)
강우식
서시
아내는 살아 숨쉬는 돌이고 흙이다.
나와 한평생을
하늘의 별똥별로 흐르다
갑자기 귀환하는 스타트랙처럼 떨어져
바이칼의 물이 되었다.
1. 바이칼을 가며
아내는 바이칼의 딸이었다.
바이칼의 물에서 태어나서
우랄알타이산맥의 바람을 먹고
푸른 초원을 가르며 자란
피의 내력이 있는 여자였다.
바이칼의 여자여
너는 죽었다. 딴 세상 사람이 되었다.
영원히, 나와 헤어져야 한다.
지리산 칠선계곡에서 만났던 바위처럼
일생을 한 사내를 만나
거센 물살 속에서도 뒤집히지 않던,
죽어서도
천만년 살듯이 시시콜콜 볶아대던
따개비 같은 여자여.
너는 유목민의 딸이었다.
마음에서 비우기 전에 떠나야 옳았다.
떠나라.
몽골의 나담 축제처럼
샤먼의 바람을 불러들이고
고비사막을 휩쓰는 바람의 신과
칭기스칸 골드 보드카를 들이키며
토네이도 모양을 취해서
나는 그대를 보내기로 했다.
축제처럼 흥겹게 춤을 추며
어떤 대목에서 하늘을 우러러
그냥, 그냥 목 놓아 통곡하며
바이칼의 물로 살아라, 살아라
빌며 작별하기로 했다.
나는 이제 더 가진 것이 없다.
줄 것도 없다. 못 다한 사랑이
너무 한스러워 줄 것이 없다.
그대의 모든 것 다 품고 살다가 죽으련다.
떠나라. 바람의 순리에 따라서
어느 곳에도 머물지 말고
머리를 올 하나라도 남김없이
그대를 따뜻이 지운다. 그만 떠나거라.
2. 몽골 항공 기내에서
올란바토르로 가는 몽골 항공은
한 마리의 독수리였다.
몽골의 푸른 하늘을 가르며
유유자적 날았다.
구름 그림자는 낮게 지상에 드리워
호수 마냥 뜸 뜸 그늘 져 있고
몽골 항공은
비포장도로를 달리는 짚처럼 툴툴대며
기류를 기르다가
훌쩍 한 마리 독수리로 흐르고 있었다.
나는 몽골반점이 있는 초원의 아들이다.
그 땅의 끝자락 한반도에서 그녀와 정분이 나
한 채의 게르도 없이 이 세상을 시작했으니
굳이 무엇을 탐하랴.
아내가 없자 세상은 모두 다
정거장 없이 떠도는 바람이었다.
빈자의 가벼움이 찾아왔다.
다시 새처럼 홀가분해졌다.
이제 나는 그대의 유골을 품고
고향으로 간다.
백화나무가 우거진 정다운 숲과
어머니의 품 바이칼로
몽골 항공을 독수리처럼 타고 간다.
3. 국립공원 테르지
올란바토르에 내렸다. 하루라도
이 무질서한 온갖 매연의 분지에
아내의 혼백을 눕힐 수 없었다.
블루베리가 풀숲마다 잘 익어가는
국립공원 테르지로 갔다. 테르지에 오자
나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아내가 숨 쉬는 것을 느꼈다.
어디선가 마두금(馬頭琴) 소리가 들리고
초원을 흐르는 그 음조에 따라 그녀가
나에게로 오고 있었다.
낙타 위에 앉으면 하늘이 더 가까워진다는
몽골 속담처럼 낙타를 타고
별들이 더 가깝게 내려앉는
흑요석의 신비한 대륙의 밤이 왔다.
하늘이 마련해 준
마지막 별리의 밤이었다
별들은 그동안 어디에 숨었다가 오는지
우박 떨어지듯 우루룩 우룩 쏟아졌다.
그 별들은 살아생전에 내게 보여준
아내의 말똥말똥한 눈동자였다.
청순하고 영롱하게 빛났다.
아마존의 숲속 롯지에서도
마추피추의 정상에서도
아프리카의 끝자락 케이프타운에서도
못 보았던 별이다.
나는 마른 쇠똥 냄새가 풍기는 풀밭에 누워
그 별들을 다 가슴에 받으며
그래 그래 너는 내 마음의 하늘자리에서
밤마다 눈물어린 별빛으로 돋아나서
타는 소금밭, 쓰린 형벌로
내 아린 가슴을 더 아프게 하여 다오.
이대로는 도저히 빈손으로 떠나는
너와 작별할 수 없으니 그리하여 다오.
블루베리에 소주를 칵테일 해 마시며
밤새도록 아내의 영혼을 불러
넋 놓고 앉아 푸념을 했다. 술주정을 했다.
4. 울란바토르-이르쿠츠크행 국제열차
너를 떠나보내기로 한 바이칼은 아득타.
울란바토르- 이르쿠츠크행 국제열차는
그 옛날 칭기즈칸의 기마병처럼
초원의 한 자락에서 한끝으로 내달렸다.
나는 열차 속에서 어느 해의
서울에서 해남까지 남도 여행을 떠올렸다.
파릇한 보리 싹들이 초원의 빛으로 짙푸른
그 길에서 그대가 부르던 허밍코러스를 떠올렸다.
언제 다시 그 노래를 들을 수 있으랴.
이제는 더 들을 수 없는 목소리가
국제열차의 바퀴처럼
내 가슴을 덜컥덜컥 흔들리게 했다.
이르쿠츠크행 국제열차는 노마처럼 갔다.
끝에서 끝으로 달리기만 했다.
아, 그 초원에서 평화롭던
양과 염소와 말들과 수많은 소떼와 낙타들이여.
내 사랑하는 여자는 늬들과도 이별이구나.
초원의 풀숲에 있던 블루베리와 산딸기와
이름 모를 버섯들과도 이별이구나
온갖 야생화들과도 끝이구나.
내 여자는 이미 저승에 간 사람이지만
아직도 살아 있는 꽃과 식물들,
초록을 본다고 심었던 아파트 베란다의
풀들과 관음죽과 안스러움 등속이
초원을 스치며 아련히 떠오른다.
풀꽃들은 살아 있고 주인 없는 슬픔이 물컥 인다.
이르쿠츠크행 야간국제열차는
나를 과거와 현재를 오가게 하며 가기만 한다.
국경의 밤은 멀고 더디게 밝는다. 하지만
바이칼은 네 넋의 고향이다.
올란바토르-이르쿠츠크행 국제열차야
가자. 그저 노새처럼 슬프게 바이칼로 가기만 하자.
5. 백화나무
밤 열차 속에서 마치 흰 옷을 걸쳐 입은
무당으로 보이던 백화나무 숲들이
날이 밝자 끝없이 이어졌다.
백화나무들은 흰 피와 불꽃이었다.
나무가 아니라 신성한 빛이자 불길이었다.
샤먼의 혼이 깃들어 있었다.
저 나무의 껍질을 벗겨
나는 이 세상 마지막 마지막 편지를 쓴다.
내 가슴 속에 있던 하늘이 무너졌다.
머리카락을 쥐어뜯고
바람벽에 피 터지도록
이마를 박고 또 박는 후회가 앞질렀다.
내 가슴 속에 있던 땅이 하루아침에 사라졌다.
천만 길 지옥으로 떨어지는 번뇌였다.
이를 악물어도 슬픔이 새는 불면이 왔다.
자고 일어나도 이 세상 입맛은 쓰디썼다.
여자가 곁에 없으므로 해서 겪는
이 막막한 심정을
나에게 깨우쳐 주려고 너는 죽은 것 같다.
그 슬픔을 잊기 위해
살아있는 날까지, 살아 있는 날까지
그대를 더욱 사랑하기로 한 이 징역살이를
어찌하란 말인가.
백화나무들은 그대의 영혼을 전송하려는
이웃들처럼 도열해 있었다.
나는 거기서 흰 옷을 입은 백성들을 보았다.
같은 핏줄, 민족의 동질감을 느꼈다.
그렇다. 내가 아버지의 땅인
이 머나먼 이츠쿠츠크 바이칼까지 가는 것은
정화된 불꽃 백화나무로 그대를 확장해‘
뱃가루들을 바이칼에 뿌리려 함이다.
백화나무여 너는 내 여자의 헌신목이다.
6. 백화나무 차가버섯
5년 전이었다.
내 몸속에 독버섯만 한 종양이 돋았다
위암이었다. 죽음이 찾아왔다.
내 탑은 하루아침에 무너지고 말았다.
공기 좋고 물 좋은 계곡을 찾는다고
백담사에 들어갔다.
죽음 앞에서 불탑이 무슨 소용이랴.
밤마다 몸은 천만근 늪으로 빠져들고
검은 피를 울컥울컥 쏟는
내 마음을 잠재울 부처는 없었다.
여린 나무에 와 더 요란한 바람이듯
잔가지 같은 실핏줄들이 파랗게 죽어 있었다;
하루하루 세상이 젖어만 갔다.
거기에 오직 흔들리지 않는
한 그루 백화나무 닮은 여자가 있었다.
하늘에서 사천왕상처럼 번개가 눈을 부릅떠도
시베리아의 혹독한 눈보라가 휘덮어도
끝내 살아남던 백화나무인 그녀가 있었다.
아내는 백화나무 숲속에서 자란
차가버섯으로 삼백예순날 차를 달였다.
그 물로 위를 다스리고
내 몸속에 바이칼의 정기를 불어넣었다.
실로 차가버섯보다 더한 정성이 나를 살렸다.
그리고 그녀는 백화나무마냥
검은 머리칼이 하얗게 세고, 진이 빠져
나보다 먼저 이승을 떴다.
삶은 우랄알타이 산맥의 눈사태였다.
순식간에 풍비박산 났다.
운명은 왜 이리 모질기만 한가.
7. 이르쿠츠크-예까제리나
이르쿠츠크의 예까제리나를 아시나요.
아내가 예까제리나였다.
백화나무 옹이로 옹공진 여자였다.
문신이었다. 사랑에 미친 샤먼이었다.
예까제리나, 백계 러시아를 휩쓴 혁명의 물결 속에서
유형지의 남편을 좇아 시베리아까지 왔다.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눈감았다.
그녀의 사랑은 혁명보다 강했다.
귀족도 신분도 팽개쳤다. 차갑고 힘들더라도
흰 눈의 사랑을 택했다.
막막한 백치미가 있는 여자였다.
부러울 게 없는 삶의 유혹도 뿌리치고
남편을 따라 이 서릿발 무지개 서는
유형지의 땅 이르쿠츠크로 와 살다 죽었다.
기도하게 하소서, 기도하소서.
그녀가 흰 눈의 예까제리나였다.
혁명가의 아내도 아무것도 아니지만
시베리아 동토보다도 더 황량한 사내에게,
풀 한 포기 돋지 않는
유형지의 땅 같은 가난한 사내와
평생을 헌신하며 산 여자였다.
나 먼저 그대를 저승으로 보냈으니
무슨 할 말이 더 있으랴.
내 가난과 못난 어리석음을
하늘이여 불쌍히 여기시어 한평생
기도하게 하소서. 기도하게 하소서.
이 이르쿠츠크 거리에는
세상 여느 곳보다도 먼저 겨울이 와
소리 없이 우리들 사랑처럼 눈이 내리리라.
나는 그대와 더불어 예까제리나처럼
페치카 옆에 앉아 음악학교에서 들려오는
천사의 목소리 같은 코러스를 들으며
눈이 쌓이는 정교회의 종탑을 보고 싶구나.
단 한 번만이라도 손잡고
털외투 속으로 매서운 바람이 스미는
이 눈보라의 시베리아 앙가라 강변을
둘이서 사박사박 걷고 싶구나.
8. 바이칼 수장(水葬)
바이칼은 대지의 자궁이다.
여러 강물들이 한곳에 모이어
호수를 이루고
앙가라 강은 흘러 북해로 간다.
아내는 바이칼의 물이었다.
어머니의 자궁에서 태어나
푸르고 깨끗이 순순한 물로 살다
죽어서는 다시 어머니의 고향으로 간다.
먼저 세상을 떠난 것에 대한
한량없는 서운함이 남아있지만
나에게는 퉁구스의 초원처럼
끝없이 넓고 큰 은혜의 땅이었던
그대의 죽음이 최선의 終天임을 안다.
이제 이 거울의 호수에
한 점 부끄러움 없이 그대를 뿌리마.
내 이 물녘서 육신의 꽃 흩어지게 함은
너를 잊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 사랑이 바이칼의 신화로 남아
영원하기를 바람이니
바이칼 신의 딸 앙가라 전설 서린
샤먼 바위로 남기 위함이니.
아내여 이제부터는 울더라도
바이칼의 잔물결처럼 잔잔히 울고
햇살 아래 반짝이는 웃음 결로 살아라.
9. 또 바이칼 거대한 물
바이칼에 배 띄웠다.
아내의 뼛가루를 한 웅큼 허공에 뿌렸다.
샤먼의 주술 같은 바람이 흰 이를 드러냈다.
수면은 삽시에 안개꽃 천지였다.
꿈, 안개. 꽃이다.
환상의 수천억 개의 안개꽃이다.
만다라의 물로 낯색이 바뀌었다.
산산이 녹으면서 바이칼이 되고 있었다.
바이칼, 풍요로운 물로
대지 위에서는 나를 먹이고 살 찌웠듯이
그대는 온갖 물고기의 친구로서
이제부터는 그것들의 피와 숨결이 되어서
밤낮으로 호흡하며 떠돌리라.
아니, 바이칼이 되어, 바이칼이 되어
이 지상이 갈증 나 타들어 가고 목마를 때
석유보다 더 비싼 거대한 물로 남으리라.
세상이 다 입을 대는 젖줄인
어머니의 호수여
너는 갈릴리의 어부처럼 배를 띄우게 하리라.
지상에서는 늘 가난한 식솔의 일용할
따뜻한 마유주가 되었듯이
그대는 죽어서도 그리 살리라.
10. 다시 바이칼 수상
아내를 바이칼에 수장하자
푸르른 물결이 눈높이로 부풀어 올랐다.
마치 그것은 첫 데이트 때의 바람에 부풀어 오르던 치마폭이었다.
작두날 타듯 파도는 일어나고
나는 그 위에서 일렁일렁 춤을 추는
백화나무의 그녀를 보았다.
물이 없으면 내 어찌 예까지 왔으리.
앙가라와 바이칼 두 개의 물줄기가 만나
북해로 흐르는 영원한 사랑이 되듯
물 없으면 내 어찌 여기까지 왔으리.
그대는 한 그루 백화나무 되어
물속으로 침잠하며 팔랑팔랑 잎 손짓으로
나를 오라하고 있었다.
내 눈물 글썽이며 다짐하는 말
그래 가마, 그래 가마.
한 마리 산양처럼 살다 내가 가마.
산양은 늙어 죽을 때 되면
하늘이 맞닿는 까마득한 산정에 올라
아무것도 안 먹고 굶주리다가
떨어져 고결한 죽음을 맞이하듯이
떨어져 고결한 죽음을 맞이하듯이
바이칼 물에 스스로 빠져 나도 죽으마.
나 죽어서라도 세상 모든 것 다 버리고
그대에게 기어이 가고야 말리니
석 달 열흘을 가난한 육신 이끌고
오체투지 하듯 무릎 끌며 가고야 말리니
물이 없으면 내 예까지 어찌 왔으리.
11. 앙가라 강변
저물녘 앙가라 강변에 앉아
북극으로 서서히 떨어지는 석양을 본다.
가을이 오고 있다.
벌써 9월의 백화나무들은 노랗게 단풍든다.
눈이 오기 전 러시아의 연인들은
이 강변에 나와 결혼을 하고
눈보라가 쳐도 끄덕없는 집을 가진다.
나는 이미 늙었다.
집이 있고 먹을 양식이 쌓였더라도 춥다.
아내가 없는 것이 이리 삭신이 저린 줄은 몰랐었다.
이제 얼마 안 있으면
내 인생에도 겨울이 와
앙가라 강처럼 두껍게 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오늘 앙가라 강변에서
아내가 했듯이 네 잎 클로버를 줍는다.
살아 있는 날까지는 앙가라 강줄기로 흐르며
그대를 추억해야 될 목숨이 있기 때문이다.
오늘도 러시아정교회 종탑이 있는
앙가라 강변에서
그대를 찾듯이 네 잎 클로버를 찾는다.
12. 자연사 박물관 운석
바이칼에 유골을 뿌리고 와서
새까맣게 타들어 간 마음으로
울란바토르 자연사 박물관에 들렀다.
거기서 운석 하나를 만났다.
그대와 나 별똥별을 찾아 들녘을 헤매던
유년의 꿈들이 어제 같았다.
우주 허공 수천 광년의 길을 떠나
몽골초원에 떨어질 때까지
저 운석의 본디 모습은
지구보다도 더 큰 돌이었는지 모른다.
돌의 살점이 불타고 떨어져서
찌들고 찌들어서 예까지 와 있었다.
아내가 없는 이 허전한 마음을
바람이 불면 어디론가 휘불려 갈
가랑잎 마음을
저 운석 문진으로 누르며 살려 한다.
살다 이 세상 뜨는 날
그대 이 지상에서 별 하나로 떨어져
다른 별로 몇천 광년의 긴 저승길을 떠났듯이
나 또한 가슴속 운석을 나침반 삼아
수천 광년의 우주 공간 속 미로를 누비며
별똥별이 되어 그대 사랑에
까맣게 인이 배도록 떠나려 한다.
나는 죽어서도
바이칼의 여자여
그대를 찾아 사랑하고 싶구나.
에필로그
하지만 나는 두 번 다시 이승에서는
그대와 이별을 할 수 없듯이
살아서는 바이칼에 가지 않으리.
이 세상에서의 그대와 맺어진
인연의 끈을 하늘이 이미 끊어놨으니
나 어찌할 줄 모르겠노라.
세월이 아픔을 잊게 한다는
이웃들의 말의 잔치 속에서 나는
내 마음을 의심하고 있노라.
살아있는 자는 살아야 한다는
너무도 당연한 인간적인 위로 앞에서
오늘도 나는 고백하건대
햄릿처럼 끝없이 갈등하고 있노라.
나는 다시는 바이칼에 가지 않으리.
배추
강우식
잎새는 겹살로 뭉친 게집의 궁둥이다
밑동엔 남근처럼 처박힌 뿌리
어디선가 이런 접촉 본 듯하여
속배기를 들추던 손이 부끄러워진다
백운사(白雲寺) 딸기밭
강우식
푸성귀나 산채를
제아무리 즐겨 먹는 중질이라 하지만
산사에 딸기밭이 있는 것은
좀 야릇하다.
봄밤에는
경 읽기도 힘들지만
자꾸 여자 생각하는 하초(下焦) 간수하기도
여간 일 아니어서
잘 익은 딸기 알들을 보노라면
환속한 소설가 김성동(金聖東)이
절에 들던 나이 또래의 스님들이
탱탱해진 불알 두 쪽을
쑥쑥 뽑아서는 내던진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보라. 가랭이를 알맞춤 벌리고
딸기밭에 와서는
뭐 하드키
지긋이 내리누르는 구름.
어떤 것들은
아이스크림 핥는 아이들의
혓바닥처럼 낼름대고 있어서
딸기밭에서
나는 그만 혼절하고 마느니.
뱀
강우식
백담사 승방에서 요양하면서 피가 들끓어
천리 먼 길 애인을 불러서는 날밤을 세운 날 아침에
나는 한 마리 뱀이 소리도 없이 스르륵 기어서는
바위 속에 들어가 부처님 바위가 되는 것을 보았다.
베개
강우식
그녀가 보내준 스칸디나비아반도를 닮은 베개를 베고
나는 밤마다 울창한 자작나무 숲과 송네 피요르를 꿈꾸며
푸르른 북극의 바다를 떠도는 외로운 고등어 한 마리.
별
강우식
아무리 진흙탕 막살이로 살아왔어도 밤하늘에는
언제나 먼지 하나 묻지 않은 내 유년의 별사탕이 있다
복어 요리
강우식
어쩌다 부산에 내려가서
바다 한번 휘잉 돌아 인사 끝내고
초원복국이나 할미복집이 아니더라도
복어를 안 먹으면
부산 갔다 온 것이 아니다.
참복, 은복, 가시복, 밀복, 졸복 등을 입맛대로
매운탕, 지리, 수육, 구이, 회로 먹는다
그중 종잇장처럼 얇게 저며 나오는 회는
독에 따라 1도, 2도, 3도 하며 나오는 회는
이건 예술의 예수다.
몸이 전율하는 칼 가진 자의 예술이다.
내 고향 주문진에는
복어 전문 음식점도 따로 없지만
칼 든 사람은 아무나 복을 다루어서
복어회를 떠 달라 주문해도 저들의 칼질에는
산 밑 집에 방앗공이 놀듯이
도저히 종잇장처럼 나오질 못한다.
같은 갯가 사람들인데 물색이 달라서인지
좀 과장하자면
혹시 종잇장처럼 떠지면 먹을 게 없다고
잘못 되어 큰일 난 줄 안다.
그거 다 어딜 가나 후한 인심 탓이리라.
하지만 예술 같은 회 뜨는 얘기는 그만 접고
내 고향이나 서울보다 부산이 다른 것은
복지리를 시키면 부산식 아니면
남도 스타일인지 국에 식초를 넣는 것이다.
부산 가서는 왜 이렇게 먹는지도 모르면서
뜨물 먹고 술주정하는 스타일로
나도 무조건 부산 가면 부산식대로 논다.
봄 기도
강우식
하찮은 풀잎이라도 새싹들은
지뢰 밟듯 조심스럽다
담장 포도나무들은
차 스푼보다 작은 송이 송이 속에
좁쌀알만한 꿈들을 달고
바람 속에, 햇볕 속에 녹아 있고
사과나무는 하얗게 꽃 피어
벌들의 날개 짓에도 얼굴 붉혀라.
꿈 속에 꿈꾸던 내 사람아
이제는 혼수의, 인사불성의 긴 잠에서
죽이는 꽃들의 빛깔로, 향기로, 하늘거림으로
아픈 데서부터 깨어나
한 치 밖에 있는 봄 구경을 제발 좀 하여라.
단 하루만이라도 봄빛으로 눈 떠 보아라.
하늘빛이 시리도록 맑고 흰 눈동자를......
펑, 펑, 펑 꽃 터지듯 떠보아라
봄 잠
강우식
눈 감고 누워 물소리를 듣습니다
온몸이 물이 되어 흘러갑니다
까마득히, 아득히 너울너울 일렁입니다
그 끝에 스르르 꿈같은 봄 잠이 옵니다
부끄러움
강우식
생전에 아내를 의심힌 적이 많았다
사랑하는 마음도 아내와 함께 재가 되어버리지
저 세상에서도 다른 사내 만날 것 같은
이 질투는 무슨 얄궂은 장난인가
부부
강우식
어리석어도, 어리석은 줄 알면서도
그 어리석음을 철석같이 믿고 사는 게 부부다
종내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이 해일처럼 닥칠 것을 알면서도
하루를 살지라도 모든 것을 나누고 싶은
이 어쩔 수 없는 사랑의 끈을
천년, 만년 살듯이 주고 있는 사람들이다
부천 도당산 장미
강우식
가짜꽃이 많은 세상에
이 도시의 백만송이 장미는 모두 진짜다
어디를 걷든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장미향 냄새가 난다
장미, 늘 생화인 내 사랑하는 여인의 이름
너무나 아름다워 차라리
심연 깊이 떨어지는 황홀한 절망이다
나는 향내 나는 여자의 산장미 꽃잎의 입술과
백장미 빛의 흰 치아를 보고 싶다
북해 항로
강우식
먹고 살기 위하여 유민이 되어 식솔들을 이끌고
이 항로를 따라 블라디보스토크로 갔던 아버지처럼
오늘 나는 한 마리 회유어로 북해 항로의
짙고 푸르른 막막한 바다 위 선단에 떠 있다.
북으로 오를수록 파고는 높푸르게 하늘과 맞닿고
나는 어이하여 학업도 작파하고
유빙이 칼끝 같은 바다의 끝자락에 떠 흐르는가.
표류하는 내 청춘의 꿈처럼 바다 물빛은 푸르른데
대학노트의 표지마냥 펄럭이는 물결 위에서
예측할 수 없는 인생이란 부표에 매달려 흔들리는가.
가끔 어디서 왔는지 갈매기조차 고적해 보이는
선창에 기대 휘파람을 호이- 호이 휘- 불면
괜히 젖 뗀 아이처럼 늙으신 어머니가 그리워져서
메마른 가슴에도 어쩔 수 없이 글썽 눈물이 고이고
어머니께 그립다는 편지를 길게, 길게 쓰고 싶어도
북해 항로의 어느 바다 위에도 우체국은 없구나.
이 항로에 서면 잃어버린 사랑도 더욱 그리워지는구나.
무슨 일이 있어도 여자는 떠나보내지 말았어야지…
지난 여자의 눈 그리메도 선히 떠올려지는구나.
까닭 없이 내 주체할 수 없는 외로움일랑
무조건 여자에게 보상 받아야겠다는 생각이 들고
소맷자락이 허옇게 소금기에 절은 오랜 뱃사람답게
나는 여자가 너무 너무 그리워서 다음 기항지에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아무 여자나 만나 회포를 풀어야 하겠다는
기대를 가져보며 바위 같은 가슴을 탁탁 쳐본다.
북해 항로여, 나는 어느 산모롱이를 돌다
느티나무 그늘 아래서 갑자기 터져 나온 울음을 쏟듯이
모든 것을 털어낼 그늘이 없어 서럽구나.
갓 서른도 못 넘긴 나이가 괜히 억울하고 서럽구나.
이 바다 때문에 바다에 갇히어 사는 거 같아 서럽구나.
불륜 시편
강우식
2 - 회춘(回春)
봄이 오듯이 그 여자가 왔다
꽃이 피고 새가 울었다
자연처럼 내가 초록 물들었다
늙마 인생에 그 여자가 봄으로 왔다
몸속 깊이에서
개울물 흐르는 소리가 맑았다
사람은 사람으로 하여
봄이 되고 겨울이 됨을 알았다
너는 몸의 피란 피가 잉잉 돌도록
한 사내를 흔들어놓는 돌개바람이었다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은 십리 밖 등불로 아득하고
이 봄날에 나는 계집에 캄캄 눈멀었다
다른 여자가 있어
이발소에서 막 나와 봄볕 속에 선 듯
멀쑥하게 키가 커졌었다
젊어지는 어떤 처방도 하지 않았다
여자만 있었다 드디어 불륜 같은
봄이 내습하여 죄가 되었다
빗방울
강우식
마른 가슴이 타다 못해
쩍쩍 갈라진 수천만 평의
남도의 논바닥처럼
타는 사랑 때문에
갈증의 혓바닥을
달싹거려 본 적이 있으신가.
한 석달 열흘쯤 억수 장마비에
스스로 외로운 섬 하나 되어서
내가 해일에 갇혀 있음도 모르고
아니 오시는 사람을
그리워하며
젖은 어깨를 들썩인 적이 있으신가.
타는 사랑이거나
젖은 사랑이거나
간절한 것은 다 같은 것이어서
기다리는 사람에게만 들리는
쇼팽의 피아노 전주곡
빗방울
하 나 하 나 가
세계를 이루고 있다.
뻘게
강우식
썰물이 지자
토정(土亭) 이지함의 도굴 당한
무덤, 개펄에는
구멍이 뚫렸다.
뻘게들이 나와서 집게 하나로
제 덩치의 천 배쯤
제 영혼의 억만 배쯤 되는
나를 집으려 했다.
살점인지 영혼인지 모르지만
누구도 가져가려 않는
내 몸과 마음을
차라리 저들에게나 주고 싶어졌다.
아침 바다에는
뻘게들이 옆으로 기니까
햇님도
이놈의 세상
나도 게걸음이나 한번 해보자는 듯이
옆으로 기면서 떠올랐다.
사과 껍질
강우식
껍질이 없다. 부끄럽게도 어느새 다 벗겨진 채
우리 내외는 세상모르고 청등벌거숭이로 살았다.
땡볕에 쪽박신세로 나앉은 비탈길
아내에게 시집 올 때 껍질 몇 개 부탁할 걸 그랬다.
내외여, 우리들의 방은 한 알의 사과 속 같다.
아기의 손톱 끝인 듯 해맑은 햇볕 속
누가 이 순수한 외계의 안쪽에서
은밀하게 짜 올린 속살 속의 우리를 알리.
사라짐에 대하여
강우식
가을이면 낙엽송 되어 내 육신도 어김없이 계절을 탄다
여름의 폭염처럼 늘 상승기류이던 불씨가 사라졌다
같이 동거하던 눈물도 물기 하나 없이 깨끗이 증발했다
늙은이의 걸음으로 내 몸의 노을이 빠져 나갔다
밤마다 가슴을 물어 피 칠갑하던 여자였다
가진 것 별로 없는데 사라지는 것은 왜 이리 많은지
가난한 자여 세상이, 사는 것이 가벼워졌다 하지 마라
그대는 피도 안 마른 이마로 세상을 나선 구도자가 아니다
죽는 날까지 아무것도 쥐거나 가지지 못한 손은 슬프리라
지키는 이 없이 홀로 떠나는 임종을 슬퍼하라.
사랑
강우식
1
내 유전에는 모하비사막의 떡갈나무 같은
1만 년 수령의 사랑이 내장되어 있다
2
바람의 순리대로 쓸리는 풀잎이듯
잠결에도 아내 곁으로 돌아눕는다.
무심으로 하는 이 하찮은 일들이
오늘은 내 미처 몰랐던 사랑이 된다
3
바다 속 땅속 몇천 만자 깊이 유전은 발견하면서도
몸속 유전은 왜 모를까. 유전이다.
내 가슴 속사랑의 샘이 터졌다. 기름값 좀 받겠다.
사랑하는 사람아
강우식
사랑하는 사람아, 눈이 풋풋한 해 질 녘이면
마른 솔가지 한 단쯤 져다놓고
그대 방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싶었다
저 소리 없는 눈발들이 그칠 때까지...
사색
강우식
골고다의 보혈로 날 씻어주소서
노을 앞에 서는 것은 너무 장렬한 비극 같다
모든 사람들이 저녁미사를 드리듯 경건하고 고요타
내 이마가 어찌 깊어지지 않겠느냐
사행시초(四行詩抄)
강우식
하나
내외여, 우리들의 방(房)은 한 알의 사과 속 같다.
아기의 손톱 끝에련듯 해맑은 햇볕 속
누가 이 순수한 외계(外界)의 안쪽에서
은밀하게 짜올린 속살 속의 우리를 알리.
둘
순이의 혓바닥만 한 잎새 하나
먼 세상이나 내다보듯
초록의 큰 물구비를 넘어와
짝진 머슴애의 얼굴을 파랗게 쳐다보네.
셋
화사한 잔치로 한 마을을
온통 불길로 휩쓸 것 같은 노을이 타면
그 옛날 순이가 자주 얼굴을 묻던
내 왼쪽 가슴팍에 새삼 괴어오르는 쓰린 눈물이여.
넷
계집년들의 뱃때기라도 올라타듯
달이 뜬다. 젖물같이 젖어 오는
저 빛살들은 내 어머님의 사랑방 같은 데서
얼마나 묵었다 시방 오는가.
다섯
낙엽(落葉)은, 한 여자가 생리일(生理日)에 꾸겨버린 색종이로
나무가지 끝에 매달려 있다. 가을날
무덤 속같이 생각이 깊어 버린 여자 곁에서
사랑이여, 우리가 할 일이라곤 하나도 없다.
여섯
밤마다 배꼽 위에 쑥 한 점 떼어놓고
오뉴월 땡볕 같은 젊음을 뜸들였거늘
꽃피는 것 다 큰물 맞듯이 겪고 나면
넋이야 괴로울 거 하나 없는 황토(黃土)되겠네.
일곱
저승에 가서도 신방(新房) 꾸밀 줄 아는 이
참으로 몇이나 될까마는, 전생(前生)의
내 꿈의 전부는 마음속 깊은 시름까지
다 주어버릴 여자를 만나는 일이었네.
여덟
친구여, 물먹은 관(棺)속에 누워 있듯이
계집 때문에 계집 때문에
마음 괴로운 날엔 바다엘 가자.
가서는 초록의 물잎새되어 떠다니자.
아홉
달뜨는 밤마다 뼈속에 사무친 정(情)이사
보리밭 이랑을 매고도 남아
계집은 있어도 집이 없는 나이에
사내녀석들은 보리밭에서 살았네.
열
오동나무 잎사귀만큼이나 많은
여자를 사귀어 본 사람들은 알리.
낙엽 지듯 떠나간 여자들로 하여
텅 빈 가슴에 가을이 오고 있음을.
열하나
온 날을 죄(罪)처럼 끓어오르는
지야의 웃음결 같은 햇살일래
우리가 살아서 남아있던 눈물일랑
귓속말하듯 다 풀어버릴 봄날일래
열둘
미친년들의 엉덩짝만큼이나 흔들리는
꽃나무 가지마다 바람이 불어오면은
열댓살씩 되는 처녀애들
속가랑이 벌리듯 꽃이 피네.
열셋
사내 녀석들은 모두 골패짝 만지듯
한평생을 여자와 살아가네.
삘기속 같은 자식을 낳아 기르며
꽃 보듯이 꽃 보듯이 살아가네.
열넷
춘삼월(春三月) 버들개지 같은 가시내의
하이얀 발가락 속 틈 사이로
간지럽게 핥고 있는 아지랭이는
울 서방님 환장한 입김 같으이.
열다섯
한 줄의 시(詩)도 없이
배암처럼 동면(冬眠)하는 십이월(十二月)이여.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일들은
내 동저고릿속같이 따스하다.
열여섯
텅 빈 가을 산성(山城)을 돌아오는 메아리같이
늙으신 우리 어머님의 말씀은
모두 눈물로 트이어서
낭랑히 국화꽃 줄거리 같은
목청으로 오르내리고……
열일곱
세상의 모든 일들은 술잔 엎듯이 쉽지 않고
살아가다 살아가다 아주 어렵게 되면
황포(黃布) 돛대 끝에 휘휘 말려오는 바람이나 되어
이 물녘에서 나도 한번 울어 봤으면, 지야여.
열여덟
초록 같은 거, 잠 안 와 뒤척이며 앓아쌓는
잎새 같은 거, 곱게 모두어 살풀이하듯
하늘 위에 바람 위에 다 주어버리면
뉘가 사랑 때문에 또 병든다 하리오.
열아홉
틀이 같은 초승달이 한개만 떠서
한돈이나 한돈 반쯤이면 맑게 웃을
초하루나 이튿날의 내 가난한 계집의 꿈은
긴긴 겨울밤을 뜬눈으로 새우네.
스물
칠월의 초록 하늘을 곱게 짝하여
한 닷새쯤, 처가댁이라도 댕겨오는가.
교미(交尾)하며 나르는 날개를 지닌 잠자리여
저승 사는 이의 놀음을 보는 것 같다.
스물하나
십오야 둥두럿이 달 뜬 날 밤에
젖물나듯 잦은 눈물로 살은 가시내.
봄 풀잎 하나라도 藥될 것 같애
주인도 없이 아기를 낳네.
스물둘
내 가슴속 찰거머리 같은 계집아이여.
너마저 낙엽 지듯 떠나버리면
내사 잠 아니 오는 가을빛 세상을
더러는 아무 생각 없이 살다 가겠다.
스물셋
스물 난 더운 핏줄로 계집을 꼬여
보리밭 속서 히히대듯이
오월 바람은 달싹거리는 혓바닥으로 핥는 것 같애.
배암처럼 비비 꼬이는 알몸이여.
스물넷
햇살도 내려오다 젖어드는 가락이 되듯
가야금 중머리나 중중머리의 산조(散調)가 되듯
서리 묻은 내 계집의 다박솔 눈썹.
그 그늘은 하눌님도 알으시어 볕 들리듯 하네.
스물다섯
바다여, 때 묻히며 질들이던 오지그릇처럼
우리 내외의 살결은 팔월 땡볕에 타다 익네.
이 물녘선 살아가다 찌들은 사연도 박하잎처럼 싱그럽고,
난 그대 얼굴을 새사람 보듯 했네.
스물여섯
봄날 풀잎 햇살 쬐듯, 내 꿈은 젖어
연초록색 그늘로 덮이네.
새삼 늙어서야 쬐꼼 사랑을 알듯한
몇 송이 꽃으로 피고픈 마음 위에…….
스물일곱
춘삼월 새살돋이 하는 잎사귀처럼
밤새도록 내 곁에서 뒤척이는 가시내.
그대 살결은 초록빛 향유로 젖어 있고
난 사랑 때문에 조금 앓고 있었다.
스물여덟
못 앓아본 속병이란 하나도 없는
마음 잃어 실성한 때의 나의 바다여.
상가집 뜨락에서 술맛 배우듯
우리들의 영혼은 푸른 하늘
그 뜻대로 살아왔느니.
스물아홉
느릅나무 향나무 이깔나무들 계집같이
안 잊히는 때는 어느 때인가.
백일홍 복숭아 꽃숭어리들
가슴결에 피어나는 때는
어느 때인가.
서른
꿈에서 뵈옵는 연꽃 같은 부인의 살내음과
내 아내도 똑 같을 때가 있읍니다만
꿈과 생시의 정을 주고받는 일들에서
어느 것이 참 마음인지 모르겠습니다.
서른하나
수세미처럼 얼크러진 머리를 가진 나무여,
낙엽 지듯 삭발하고 속세를 떠난 계집 때문에
나도 가을 내내 가슴 아픈 적이 있었다
서른둘
천년 묵은 능구렁이처럼 돋은
내 서러운 핏줄 위에는
한약 냄새가 나는 계집의 손이
죽엄과 같이 남아서 내 손맥을 짚고 있느니.
서른셋
이승에 살아서 우리가 꿈꾸어 본 거
한 잎 연잎 자리 위에서 인양 참말로
모다 인연의 큰 물구비로 삼기까지는
어느 머리 올 하나에라도 매듭지지 않고…….
서른넷
성기(性器) 속으로 들어갔다 나오며
한숨 한번 놓고 침 한번 뱉고
이러한 맺음만이 이별인 줄 알던
칠월 홍싸리 밑의 묏대지던 스물이여
서른다섯
짚신발로 달려간 높푸른 하늘 아래의
사람의 살다 가는 뜬세상엔
바람으로 풀어볼 넋두리밖에
내 마음에 병 있으면 우성 있으리
서른여섯
수척한 겨울 산으로 병들어 앓던
계집애들도 겨울 지나면
첩약 달이는 약탕기처럼 끓는 가슴이거나
봄물 녹아내리는 산골 같아라
서른일곱
친구여, 흰 머리카락을 꽃술로 달고
꽃피는 거 다 꿈으로 치면
세월은 이웃 과부댁 넘보듯 하다 가버리고
텅 빈 골방을 지키는 마음이어라
서른여덟
스물다섯 살 고비에 내 계집의 숨결은
어쩌면 괴로운 바다였을까
꿈으로 절인 가슴도 푸른 물보라 날리는
남빛으로 젖다 말은 바다였을까
서른아홉
지애비 있는 계집의 손을 잡고
파계승처럼 관악산 밤길을 내려온다.
집도 아내도 십 리 밖 등불로 묻히고
어쩌자고 가슴은 한점 눈물도 없이 달디단가.
마흔
눈이 내려도 가려줄 초록 하나 없는
상수리 나무 위에 내 집이 보인다
오늘은 하루의 끼니를 찾아서
몇십 리 길을 날다날다 오는 길이다
마흔하나
하찮은 물푸레나무 목령자(木岺字)를 삼십 년이나
마음속에 두고 괴로워하다 쓴 추사(秋史)여
그 햇수쯤이나 사랑해 오던 여자와의 이별이
오늘은 그대 희열만큼 아프다
마흔둘
두 집을 만들 수 없어 죽는다
사석(死石)으로 만드는 무서운 강설(降雪)
첩살림이 아닌 다음에야
어찌 사내로서 태어나 한 집뿐이랴
마흔셋
봄 되어 내 고향 산자락에 녹는 눈처럼
살아가다 살아가다 쌓인 한(恨)들도
다 녹아버리게 한잔 술로나
내 몸에 사리(舍利)를 만들며 살아갈거나.
마흔넷
가을날 빈 도시락을 들고 집으로 간다
그 속에 찬그릇이 터엉텅 비어서
내 아내의 위장 마냥 터엉텅 비어서
하루 끼니 때문에 간 내려앉으며 운다
마흔다섯
누님에게나 물어볼 세월이 가더라도
수양버들처럼 머리를 풀고 미치게
미쳐서도 억울한 바닥으로 흐르는
강물이나 보듯이 초록으로 내려오게
마흔여섯
별들도 시앗을 보는 오월이 오면
십구(十九)세기 화차 같은 걸음으로 장가를 가리
사랑도 세상 물정만큼 어둡은
고향 대관령 참숯덩이 순네와 살리
마흔일곱
미안한 일 아니라면 내 푼수론
(내 것이라고) 한 칸 집이라도 있을 때까지 (그게 언젤까)
아내여, 나는 무정자였으면 한다
마흔여덟
서른 살 나이의 내 언어(言語 )는 늘 이마에서부터 심각했다
뒷간에서이듯 힘도 제법 줘 보지만
늘 세 살박이들의 설사빛처럼 파랬다
마흔아홉
이웃 과부댁 여섯 살 난 어린 딸 미영이가 그리는 가을 산색(山色)은 붉게
그 위에 달덩이로 떠 눈짓 주는 그녀의 속에
짐작도 꿈 아니게 붉게 붉게
쉰 꽃샘바람에 시달리며 꽃은 피고 또 시달리며
초록잎 싹트듯 아내여 세끼 밥줄에 명을 잇는 세상이야
늘 그대 등쌀에 시달려 온 바람이다
쉰하나
산사에 봄비 내리듯 시를 쓰던
서른 살 가슴에 여자가 생겼다.
살아가는 거 넉줄시보다 더 어렵고
아, 나는 어느새 이승밖에 더 볼 줄 몰라라.
쉰일곱
마음도 텅 비어 빈 집터일 때
내 속셈까지도 다 짚어주시듯
항시 말갛게 떠오르는 햇살을 지닌
부처님 같은 계집애를 모셔오리.
일흔셋
눈 내리는 탄실리 주막집 구들목에
바깥양반은 거문고로 앉아서
또 한해를 흥타령으로 보내는지
산창엔 박가분처럼 쌓이는 정이여
일흔넷
기쁨 같은 걸 나누자고 한다면 사람들아
명절날 떡 돌리듯 몇 집이야 아니 될까만
늘 내 가슴에 가을꽃 하나로 남는 건
한번 웃고 흘려버리지 않은 시름뿐이네.
일흔여덟
어디 내 핏줄로써 자식이나 키우듯
세상 살아가는 것만이 다이랴.
부처님 어깨너머 후광이듯이
이승을 닷곱장님처럼 보고 가는 이도 있네
여든셋
빛살도 들어오다 곯은 물길로 빠지고
황금의 씨앗들도 다 물러 주저앉은
자궁을 가진 황참외 같은 계집과
살림난 세상이라도 속 없이야 살으리.
아흔아홉
바람의 순리대로 쓸리는 풀잎이듯
잠결에도 아내 쪽으로 돌아눕는다.
무심으로 하는 이 하찮은 일들이
오늘은 내 미처 몰랐던 사랑이 된다
백
계집을 만나 한 십년을 살아오듯이
하찮은 일에도 내 살 섞어온 탓일라.
연줄 같은 목숨에도 인이 박혀서
마약도 아닌데 못 끊으며 사는 요즘.
백서른둘
고향의 땅뙈기도 다 팔아먹고
막판에 계집을 조선호텔 근처로 내보냈다.
병들어 길게 누워 있는 내 몸뚱어리
그대 버릴 수 없는 국토(國土) 같으냐.
산
강우식
경전(經典) 읽듯 산길을 조석으로 다녔으면서도
스님이라고 다 산을 아는 것은 아니다.
안다면 마음보다 발이 먼저 알 것이다.
산은 그렇게 어렵다.
산사
강우식
암자는 산을 닮아 늘 고요 적적하다.
그 적막을 깨우려고 풍경 하나를 매달았다.
오늘은 가슴에 산처럼 사연 많은 여인이
말없이 와서 부처님께 매달려 풍경처럼 울다 갔다.
산수유
강우식
고사목이 다된 산수유가 어디서 물이 올랐나
봄의 온 기별은 용케도 귀신처럼 잘 알아서
(살아온 세월이 있으니까)
꽃 피고 열매 맺고 새잎도 돋았다.
늙었어도 할 짓은 다했다.
주책 망령이라고 누가 혀를 차랴.
산수유야 늬가 봐도 늬가 예쁘고 기특하냐.
그래서 몸 가득 꽃으로 치장하고 열매를 달았느냐.
늙은 내가 있는 그대로 너를 보아도
이 봄이 너에게는 마지막으로
꽃을 다는 봄이더라도
죽을 때까지 너무나 곱게 늙어서 고맙구나.
새소리
강우식
문득 들리는 새소리 너무 아름다워서
좀 더 몇 마디 더 들으려고 멈추니
그 마음 어찌 눈치 챘는지 일순 딱 끊겼다
저들의 노래에는 그들만이 내통하고 즐기는
나 같은 사람이 인기척 내며 들어서는 않되는
비의(秘意)가 숨어 있는 것인가
야박한 거 사람인 줄 알았더니 새도 그렇구나
우리들이 하는 말 중 새소리 하지 말라는
저 나무의 새소리가 아닌 것은 분명해.
새집
강우식
전지(剪枝)한 겨울 가로수 꼭대기에
철거되지 않은 무허가 건물 같은 새집들이 있다
얼기설기 엮었지만 빈틈없이 공들여 지은 집
새끼 치고 한철 편히 나라고 남겨둔 인심(人心).
변두리에선 바람에 뜬 쓰레기들이
비둘기 떼처럼 날아가다 앉는다
살아갈수록 하찮은 일들에 새로운
뜻이 주어진다. 집이 무엇이란 걸 알겠다
생
강우식
죽기 살기로 한사코 붙잡고 늘어지고 싶다.
아무리 하나님이 회초리를 든다 하여도,
죽어라 말 안 듣는 초등학교 생도가 되고 싶다.
생선 한 마리
강우식
어디서 인연이 닿았는지
부두에서 만난
뒷짐 진 스님의 손에는
생선 한 마리가 쥐어져 있었다.
죄가 업이라면
아예 줍지를 말지.
부라퀴같이 움키고는
왜 뒤로 감추는 걸까.
(…)
시정 바닥의 비린내
죄 있어 사는 스님이구나.
죄 없으면
어이 도를 닦을 수 있으랴.
오늘 스님은 생선 한 마리 들고
온몸을 던져
죄의 바다로 나가려나 보다.
서울 뻐꾸기
강우식
새벽 4시에 일어나
그 옛날처럼 평범하게 우는
서울 뻐꾸기 소리를 듣는다.
내 집 근처에도
숲과 산이 있음을
새삼 일깨워준다.
창을 여니 새벽별들은
내 막내딸의 초롱한 눈빛되어
가슴을 뚫고
내 인생에 있어
잊고 산 귀중한 것들은
이렇게 평범한 것들이었구나.
서정이 있어야쟤
강우식
경주 황성공원 데이트의 클라이막스에서
경상도 가시내의 무령왕릉을 만졌더니
살이 아파얘애-, 살이 아파얘애-
가시내사 가시내사 무지스럽기로
살이 아픈기사 살이 아픈기사 봄 탓 아이가
경상도 계집애를 만나서는 경상도 사투리로
좀 어떻게 해보려고 하니 도시 힘만 들고
땀이 나는 때에 하늘을 보니, 강군 보래이
서정이 있어야쟤, 서정이 있어야쟤
까까머리 때 읽던 목월(木月)의 산도화(山桃花) 페이지처럼
나뭇잎들이 파르라랑, 파르라랑 흔들렸다. 그리고 또
어디선가 산새 한 마리 경상도 사투리로 울었다.
선거 유세장에서
강우식
사람은 어디 가고
잘 먹고 잘 입고 잘사는 것만이
민주주의가 되어 있다.
유령에 홀렸는가.
일백만이 살지 않는 도시에
일백만 이상의 인파가 모인다.
상상은 상식이 아니다
현실은 상상을 초월하여
기적을 낳는다.
피켓에, 풍선에 그려진
유령들의 모습이 뚜렷하다
부적처럼 들고 흔들며
신명이 나서
굿풀이도 한다.
정오에 나는 내 돈으로
소주 한 잔을 사먹었다.
마치 하느님 같은 선심 속에서
나는 억울했다.
인생은 유령들의 잔치인가
떠드는 자의 말의 성찬이
듣는 자보다 더 무책임하다
떠들고 나면
대학 강단에서의 내 시론처럼
괴로울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지지자와 함께
자폭하려 한다.
가까울수록 거리를 두고
사랑해야 한다.
설야서정(雪夜抒情)
강우식
저승과 이승을 건네이는
얕은 기침 소리 하나 없이
눈이 내린다.
오랜 기다림 속에 견디어 오던
사랑도
한(恨)으로 남고
우리가 젊어서 눈물로 흘려 버린 유서 한 장만큼 한
죽음같이 가벼운 부피로
하이얀 눈이 내린다.
아!
눈 내리는 밤이면
시렁만큼 높은 곳에 마련되었을
관 속으로 나들이 갈
무명옷 한 벌과
저승의 어느 길목에 가더라도
하얗게 살
내 가시내의 모습이 떠오른다.
설연집(雪戀集)
강우식
(한 수)
눈은 내리면서도 내리는 줄도, 눈일 줄도 모른다.
섭섭함이 그리고, 그래서, 그렇지마는
사라아, 내 마음도 그렇게 가리라. 별 하나
초롱히 씨로 받아 질 속에 넣고 싶은 여자 곁으로...
(두 수)
내 가려운 맨살등을 긁어내리는 빗금,
그대의 흰 손톱만큼 한 눈송이들이 내린다.
눈안개 퍼지는 저녁이면 가슴에 구멍을 뚫고
그녀의 사랑말이냥 마구 담고 싶었다.
(세 수)
사랑하는 사람아, 눈이 풋풋한 해 질 녘이면
마른 솔가지 한 단쯤 져다 놓고
그대 방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싶었다.
저 소리 없는 눈발들이 그칠 때까지...
(네 수)
누이 내리면 음독하듯이 한 잔 술을 혀끝에 햝는다.
마흔다섯 살의 쓸쓸한 폐선. 그가
겨울 바다로 훌쩍이며 십 리 밖 바닷가에 살고 있어...
오늘도 눈길을 따라 이우도 없이 갔다 왔다.
(다섯 수)
그리운 사람을 생각할 때는 기억기억 눈이 내리고
외로와서 외로와서 목이 젖으며
겨울 강에 빠져 죽고 싶은 사람들에겐
백두루미로 백두루미로 눈이 내린다.
(쉰일곱 수)
마음도 텅 비어 빈 절터일 때
내 속셈까지도 다 짚어주시듯
항시 말갛게 떠오르는 햇살을 지닌
부처님 같은 계집애를 모셔 오리
(아흔아홉 수)
바람의 순리대로 쓸리는 풀잎이듯
잠결에도 아내 쪽으로 돌아눕는다.
무심으로 하는 이 하찮은 일들이
오늘은 내 미처 몰랐던 사랑이 된다
(일백일곱 수)
산 하나를 온통 젖게 만드는
소쩍새 울음 같은 목청 한 자락도 틔우고 싶으나
서산의 반달로도 떠올릴 수 없는 그대 눈썹이여.
눈바람 소리에 쓸쓸히 쓸리는 아릿한 목젖.
세월
강우식
아내를 잃고 나서 생피 몇 됫박을 쏟았다. 그러나
따라 죽지는 못했다. 무정한 약 같은 세월 탓이다
셋
강우식
화사한 잔치로 한 마을을
온통 불길로 휩쓸 것 같은 노을이 타면
그 옛날 순이가 자주 얼굴을 묻던
내 왼쪽 가슴팍에 새삼 고여 오르는 쓰린 눈물이여,
송기
강우식
여든 가까운 나이쯤 살았으면 잊힐 법도 한데
초록잎 돋는 봄이면
아직도 새록새록 솟아오르는 말, 송기.
이런 말 나만 알고 있는지,
하도 어릴 적 먹었던 일이라 정말 있을까?
사전을 뒤적이니 송기떡, 송기죽이랑 같이 있다
송기떡, 송기죽 단어에
나도 모르게 피씩 웃어어버렸다.
궁기든 사람에게 무슨 떡?
그건 있는 사람끼리 맛으로 먹는 호사가 아닌가.
누가 가르쳐 준 것도 아닌데
나는 하늘이 노래지는 봄이면 뒷산에 올라
굶주린 허기를 가셔보려고 송기를 갉아먹었다.
어린 솔 꺼풀이 벗겨지고
뼈마디가 드러나도록 속살 발리는 아픔.
사람이 할 짓이 아닌 줄 알면서도 저질렀던
송기를 뜯다 맥이 풀리어 쓰러져 하늘을 보면
참 희한하게도 언제 쌕쌕이가 지나며 흘리었는지
굶주린 내 창자같이 꿈틀꿈틀 피어오르는
한 줄기 흰 구름, 그 어찔한 비행운 비행운.
울려고 해도 힘이 없어 마른 눈물만 피는 봄날에
피란살이 와 익힌 경상도 사투리로
어무이 배고푸요
겨우겨우 내뱉는 그 말 한마디가
먹어도 먹은 것 같지 않은 송기와 같았다.
수장
강우식
아이들에게 나 죽으면 바다에 수장하라고 일렀다.
그녀 다시 만나 물처럼 춤추며 살고 싶어서였다.
술버릇
강우식
바닷가에서 바다를 친구 삼아 한 잔 꺾으면
아무리 마셔도 계엄령처럼 안 취한다고 큰소리치다
죽을 뻔한 적이 한두 번 아니어도
나는 바다에 오면 울분처럼 그 술버릇을 못 고친다
시래기를 삶으며
강우식
아내는 김장을 하면서
남은 채소들을 모아 엮어
아파트 베란다에 매달았다.
시래기 타래들이 20층
허공에 있는 것이 신기해선지
겨울 햇살도 씨익 웃다 가고
바람도 장난꾸러기처럼
그 몸체를 마구 뒤흔들었다.
오늘은 고요히 눈이 내리고
왠지 어릴 때 어머니가 끓여 주던
시래깃국 생각이 간절하여
배추잎, 무청들을
푹 삶아서 푸르게 살아난
잎새들의 겉껍질을 벗긴다.
겨울 해는 내 인생처럼
짧기만 한데
나이 들수록 돌아가고픈
옛날이 있다.
시인
강우식
항구에 작은 전마선이라고 떠있는 것을 보면
왠지 출항할 내일의 꿈에 부풀 듯이
아무리 하찮은 시라도 내가 쓴 자식 같은 시니까
언젠가 일확천금의 명시도 쓰겠지
자기 꿈을 버리지 못한 선주가 시인이다.
농부가 밭 갈듯이 바다에서 해녀가 물질하듯이
시인도 돈 안 되는 시지만 천직처럼 시를 써야 한다.
기약 없는 믿음 하나만으로 사는
사람으로는 시인을 따라갈 자가 없다
실종
강우식
죽음에의 존재로서의 나는
죽음도 이웃들에게는
실종으로 알려지고 싶다.
겨울나기 요량으로서
스스로 철새처럼 한 철을
따뜻한 남국으로 여행가
슬며시 사라져버린 죽음이고 싶다.
내 고향 바닷가 같은 데로
내 고향 주문진 바닷가 같은 데로···
그리하면 나는 죽은 것이 아니라 실종된
어딘가에 아직도 살아있을지도 모르는
신비한 고향의 시인으로 남으리라.
아내
강우식
지야여, 오늘은 눈이 내리고 참으로 오랜만에
연애 시절처럼 이름을 불러본다.
그대 저승에 있어도 부부는 닮아가는 것인가.
아내가 잘 빨던 눈 맛 나는 박하사탕 내 입에도 넣어본다.
* 아내의 이름은 金一枝인데 나는 그녀를 호처럼 꿑자를 따 知野라 불렀다.
아파트 1층
강우식
온갖 들고나는 잡소리가 다 들려서 괴롭지만
가끔 고층에서 새처럼 날지도 못하면서
물먹은 솜뭉치 되어 떨어져 자살하는 사람이
가족 일이 없다는 데 안주한다.
뻐꾸기도 목청 틔어 우는 여름 아침에
사람이라고는 부모만 알던 아기가 죽었다
하나님의 얼굴을 무척 닮은 벽시계도
일 분쯤 뚜우뚝 울며 지나갔다.
암향부동(暗香浮動)
강우식
비뇨기과는 여섯 달에 1번
새로 다니는 신장내과는 매달마다 1번
혈액종양과는 일 년 걸쳐 1전
진료 때마다 채혈실에 들러 피를 뺀다.
그밖에 종합검진에서 뽑는 피도 있다.
피가 아까워 적게 뽑으려고
시도도 해 보았지만 말짱 도루묵이다.
내 병의 경과는 피검사로 끝난다. 쉽다.
피검사 차트만 볼 줄 알면 의사도 되겠네.
병을 고치기보다
점점 몸에 피가 말라서 죽겠다.
피는 내 몸의 향기다.
내가 가진 사람냄새를 풍기는 향기다.
향기가 사라지면 죽는다.
어젯밤 꿈에는 14,5년 전에 사별한 아내가
그동안 홀로 살아 갸륵해선지
머나먼 길을 암향부동으로 와서
그 향기를 내 몸에 수혈해 주고 갔다.
이승에서 내가 아내를 그리워하듯이
저승 간 아내도 나를 못 잊어
같은 형의 피가 되었다고 한다.
서로 달라야 살맛이 있을 텐데 하면서도
감격해 아내를 부르며 울다 깼다.
저승에서라도 나를 생시처럼
찾아주는 아내가 있다니
나는 정말 모처럼 그냥 흐느꼈다.
어떤 임종
강우식
주인이 몰라보는 개처럼
치매에 걸려
똥인지 된장인지 모르는 그를
하나님은 어디로 가는지 모르게
데려가 버렸다.
우리나라에서
예수를 제일 잘 믿으시는 분의
종천.
믿는 것도 다 살아 있을 때
부산 떨며 할 일이지
죽으면 뭐든지 소용없다.
사람 사는 게 다 이렇다
어머니
강우식
삯일로 생선 배를 째는 칼끝은 늘 햇볕 속에 빛났다.
달거리보다 더 비릿한 삶에 목을 맨 일생이지만
어머니의 항구엔 자식들이 꿈을 싣고 정착해 있었다
어머니의 물감 상자
강우식
어머니는 시장에서 물감 장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물감 장사를 산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온갖 색깔이 다 모여 있는 물감 상자를 앞에 놓고 진달래꽃 빛 필요한 사람들에게는 진달래 꽃물을, 연초록 잎새들처럼 가슴에 싱그러운 그리움을 담고 싶은 이들에게는 초록 꽃물을, 시집갈 나이의 처녀들에게는 쪽두리 모양의 노란 국화 꽃물을 꿈을 나눠주듯이 물감 봉지에 싸서 주었습니다. 눈빛처럼 흰 맑고 고운 마음씨도 곁들여 주었습니다. 어머니는 해종일 물감 장사를 하다보면 콧물마저도 무지개빛이 되는 많은 날들을 세상에서 제일 예쁜 색동저고리 입히는 마음으로 나를 키우기 위해 물감 장사를 하였습니다. 이제 어머니는 이 지상에 아니 계십니다. 물감 상자 속의 물감들이 놓아주는 가장 아름다운 꽃길을 따라 저세상으로 가셨습니다. 나에게는 물감 상자 하나만 남겨두고 떠났습니다 내가 어른이 되었을 때 어머니가 그러했듯이 아이들에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고운 색깔들만 가슴에 물들이라고 물감 상자 하나만 남겨두고 떠났습니다.
어머니의 약손
강우식
외지에서 의지가지도 없이 떠돌다 병들어
죽을 것 같은 신음으로 어머니를 부르는 것은
짐승도 죽을 때가 되면 고향 쪽으로
머리를 두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회귀본능이다.
어머니의 품속에서 태어나 살다 죽으면
어머니의 자궁 모양의 옹관(甕棺)에 눕는 것은
짐승이나 사람이 별반 다르지 않은
수구초심 수구초심이 있기 때문이다.
고향에는 내 마음속 고향에는
죽어서도 살아계시는 어머니가 있다.
어머니라고 부르기만 해도 신통하게도
무슨 병이든 한 번쯤은 낫는
만병통치약의 어머니가 있다.
무슨 큰 죄 지은 것도 없는데
정화수 떠놓고 가족들 안위를 그저 빌고 있던
그 손으로 자식들 배탈이라도 나면
내 손이 약손이다 하며 배를 문지르던
세상에서 가장 간절하고
따뜻한 지극정성의 어머니의 약손이
내 마음에 아직도 그립게 있다.
엉겅퀴
강우식
수천의 아기를 뱃속에서 지우며
우리 어머니들이 달여 먹던 풀입니다.
제 살에 돋은 가시로 제 가슴을 찌르는 아픔.
오늘 네 힘으로 못 지운 생명이 있어 너의 시를 쓴다
연어 대가리
강우식
아내가 없어서인지 매끼 식사가
남들만큼은 돈 들여 먹고 사는데도
늘 속이 허하게 비어서
겨울나기에 뭔가 모자란 듯하고 겁이 난다.
여자가 없이 홀몸인 것이 이리 어렵다.
사람에게는 어쩔 수 없이
자연으로 타고난 동물의 본성이 있는 건가.
시베리아의 곰들은
한 해 겨울을 나려고 강가에 나가
모천회귀 하는 연어들을 기다리다 잡아서는
가장 기름진 대가리만 먹고 버리면
사람들이 기다렸다가
몰래 몸뚱이를 가져다 먹는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 나는 가을만 되면
겨울나기로 시장에서 연어 대가리를 사다
곰도 아닌데 뼈째로 으적으적 씹어가며
그 비린 기름을 질리도록 먹는다.
보신이 되는 거와는 좀 거리가 먼
아내 있을 때부터 내내 해오던 습관이다.
엽서
강우식
늘 파도 처럼 부서지는
생활이라던
내 친구여.
삼패였던 여자면
어떤가.
자네 마누라 배도 지금쯤은
바다에 뜨는
해, 그만큼은 하겠네.
그래 어떤가.
입덧은
밀물만 하지 않은지.
십이월 어드란 강추위에도
얼지 않을
바다.
그녀 배나
한번 구경하게
같이 오게나.
와불선사
강우식
공절밥을 얻어먹는 땜으로
아이들에게
경의 글귀를 짚어준 적이 있다.
우연히 마주친 불당 밖
산도화는 그 가진 도색만으로도
능히 한 목숨 미치고야말
봄날이라.
에잇 못 참겠다.
떠억 드러누워서
경을 하늘에다 받쳐 들고
봄철 한때를 보내노라니
이 짓도 중된 마음에서 가늠하면
여간 무례하고 경칠 일 아니라
“경을 누워서 짚는 일 어딨소”
주지승 일갈에
“여자 사처야 내려다보며 뚫지만
경의 글귀는 하늘처럼 우러러야
뚫리는 법이네."
우동을 먹으며
강우식
염소의 입을 가진 항구가 비속에서 애애-,애,애애- 울고 있다. 바다가 비에 젖는다. 떠난 남자의 수염이 하얗게 바래져 빗줄기로 떨어진다. 갑자기 살갗이 감정인양 얼룩진다. 파도는 가슴에서 평소보다 4미터나 높다. 4층 아파트 때문이다. 창문을 열어놓고 비를 보며 바다를 보며 우동을 한입한입 씹는다. 비의 줄기도 추억의 실낱도 끊어져 나간다. 씹는 입속에 바다의 한쪽이 물컹 터진다. 마지막 슬픔이듯 후르르륵, 후르후르륵 바다를 들이켠다.
우문(愚問)
강우식
애인이여, 그대 날 버리고 한발 먼저
저승길 떠나 속 시원한가.
운주사 와불
강우식
부처님도 남녀가 같이 누우니
아름다웠다.
온돌방 같은
돌판 위의 운주사 와불.
사랑이었다.
캄캄 눈먼 사랑이었다.
사랑도 눈먼 사랑이 좋았다.
부처님도 중생도 같았다.
나는 천리 먼 길을
이 와불 한 쌍을 보기 위해
그녀와 왔다.
사랑이 돌이 되어 변치 않고
그저 남녀가 누워 있는 것을 보기 위해
사랑이 돌이 되어 변치 않고
그저 일심동체면 되는 것을 보기 위해
사랑이 돌이 되어 변치 않고
그저 부처님도 남녀인 것을 보기 위해
사랑은 비움으로써 환해지는 것이 아니라
있음으로써 없음을 채우는
물상임을 보기 위해 예까지 왔다.
사랑은 둘이어야 됨을
부처님은 묵언하고
행실로 보여주고 있었다.
우리 죽어서도 저 와불처럼
천만년 남아 있으리.
내 마음속 소망을 그녀에게
말없이 보여주기 위해 왔다.
그녀가 내 손을 가만히 잡았다.
융프라우의 소
강우식
소도 삼복더위를 타서
일하다 지치면 땀을 철철 흘리지만
톱니바퀴의 산악열차도 아닌데 오르고 올라
하나님의 교회보다 더 높은 곳에 사는
스위스의 소들은 목걸이로
자기 머리만 한 방울을 달고서
쟁그랑 재그랑 하는 소리가 아니라
소의 그 느린 행보만 한
소의 그 느리디느린 울음소리로
천천히 덩그렁 천천히 덩그렁 댄다.
마치 그 소리를 듣노라면
스위스의 산과 나무와 풀들과도 잘 어울리는
큰 파이프오르간의 한 소절처럼
은은히 퍼지는 여운이 마음을 씻는다.
지상이 낙원이라는 것을
소만큼 일러주는 사람도 없는 것 같다.
이사
강우식
내 사는 아파트 단지에
이삿짐 나르느라 오르내리는
지게 소리가 들린다.
설한풍 삼동, 이 추위에
소문도 없이 잘 살고 있더니
갑자기 어디로 옮기는 걸까.
을씨년스럽다.
사연이 많은 이삿짐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이나
들어보면 구구절절하겠지.
모른 체 귀를 막자.
나도 사연이 많게 이웃마을 아닌
서역 땅으로 이사 와서
산 섧고 물 섧고 낯설어도
물가에 내놓은 자식 같은
불안한 삶을 접고
이사 안 한 듯 살고 있다.
어디서나 쑥쑥 자라고 잘 견디는
미나리로 초록을 만들고 있다.
이화중선(李花中仙)
강우식
식민지 시대를 입에 달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는 구한말 무렵이었습니다.이화중선이라는 노랫가락이나 뽑아 사대들의 애간장 깨나 녹이던 명창이 있었나 봅니다. 얼음 위에 박 밀듯이 춥고 추운 겨울날, 젓가락 장단은 그만 접고 주막집 주모라도 품고 싶은 쓸쓸한 날, 절색인지 박색인지 내가 본 적도 없고 난생 처음 들어보는 그녀의 창唱을 미당 서정주는 용케도 기억해서는 한 대목을 뽑는 것이었습니다. 아마 스승도 다 알지는 못하는 거 같고 그 가락 중에 본인이 제일 마음에 두었던 대목만 시늉하듯이 "오늘 밤은 뉘와 할꼬"인지 "오늘 밤은 뉘와 같이 잘꼬"인지를 목이 쉬도록 뽑았습니다. 무슨 가락인들 다 알 필요가 있나요. 알고 싶은 거만 알면 된다는 것을 저는 그때 알았습니다. 나도 술상 머리에 북채잡이로 앉아 바람처럼 얼씨구 좋다 맞장구치며 장단을 맞추었습니다. 이만하면 우리 둘이는 어떻습니까. 어느 따뜻한 동백꽃 핀 선운사 인근의 탁주집 목이 쉰 주모와도 짝하여 너끈히 한 판 잘 놀 수도 있겠지요.
장맛비
강우식
그토록 바라던 남자에게
시집갔으면 잘 살기나 하지
누님은 비처럼 살다 갔다.
언젠가는 남세스럽다고
이웃집 몰래 발소리도 없이
봄비처럼 왔다 간 줄 모르게 오더니
그 사이 별별 일 다 겪으셨나
미친년처럼 산발한 머리채를 휘두르며
챙긴 보따리도 없이 달랑
눈물 콧물 물이란 물 다 짜면서
참 소란스럽게 시집간 누님이
대문을 박차고 들어섰다.
그리고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천연스럽게 간다는 기별도 없이
주구장창 집에 내처 앉아서는
온 가족이 다 따라 젖도록 만들었다.
그 누님이 죽자 장마도 떠나고
그동안 겪은 사연일랑 다 묻으며
무심히 낙엽 떨어지는 가을이 왔다.
장인 장모께
강우식
저 이승에서 살기 어려워 집사람을 먼저 보냅니다.
죄인입니다. 이승 일 경험 삼아 저승서는 잘 살겠습니다.
재래시장
강우식
나는 거의 일주일에 한 번씩은
재래시장에 간다.
시장은 수많은 먹거리들이 널려 있는
바다와 같다.
홀아비 신세라 먹고 살기 위하여 들르는
시장이긴 하지만
사람이 그리운 나는
사람 냄새 맡으러 가기도 하고
먹고 싶은 과일, 생선, 야채 등속을 사서
날로 먹거나 직접 음식을 해먹는 맛에 간다.
이것은 마치 고기를 잡아
선상(船上)에서 해먹는 식사 같거나
어릴 때 천렵 가서 해먹는 어죽 맛이다.
매끼를 다 둘이 먹다 하나 죽어도 모르는
맛으로 먹는 것은 아니지만
가능하면 마음만은 그런 맛을 내고자 한다.
식탁에 가까운 친구나
젊은 날에 사랑했던 수많은 여자 중에
한 명을 불러 앉혀놓은 듯이
(이러려고 내다보고 일생 많은 여자들을 사귀었었나.)
혼자 사는 몸이 외롭지 않게 먹는다.
죽기 살기로 억지로 먹는 것보다
어차피 악다구니를 써가며 사는 인생
나나 그대나 다 콩나물 통의
고만고만한 콩나물 대가리가 아닌가.
시장에 들러 활기차게 먹거리를 고르며
나도 이 사람 저 사람들 사이에 섞이는
이 작은 행보가 부대끼며 살아가는
내 삶의 삼동에도 내가 가지는
나만의 봄날의 초록 싹 같은 숨결이다.
적폐청산
강우식
우리 몸의 때 같은 것 좀 끼어 더럽다고
병적으로 하루 종일 매달려 닦아내는 사람은 없다.
살면서 다른 일하다 생각날 때 닦으면 되는 것이다.
전등사(傳燈寺) 추녀 밑 목각나녀상(木刻裸女像)
강우식
전등사 추녀 밑 목각나녀상
맞바로
산문(山門)의 추녀 밑인 데도
동서남북 어디에나
알몸의 여자가 쪼그리고 있었다.
저 여자는 전등사 밖 주모라고 했다.
비데가 없던 시절에
뒷물대야로 황해 바닷물을 퍼다가
밑을 씻거나
아니면 은밀하고 깊은
그녀의 사처를 보았다고 좋아라 춤추던
수억천만겹의 물결이 증발하면서
비로 내릴 때
추녀 밑 비 뜯는 소리에 미쳐
살던 여자.
사역(寺役)하러 온 목수쟁이의
자귀같이 찍어대는 육보시가 그리워서
비오는 날은 그짓하는 날
하며 젓가락 장단을 치던 여자.
역시 부처님은
부처님.
젊은 날 내 탁발행자의 길에서
팔도에 저런 피접붙이 하나씩 두자고 했던
못다 이룬 아쉬움이
저 전등사 추녀 밑에 살아 있도다.
<게(偈)>
번뇌를 끊는 일은
번뇌를 가지는 일.
경 읽다 심심하고
가슴 막힐 때에는
하늘 우러르는 체하고
추녀 밑 나녀상도
사알짝 눈요기하라신
부처님의 지혜여.
전어구이
강우식
연기란 무조건 나쁜 것인가요.
독특한 향미의 훈제품도 있잖아요.
오늘은 맛보다는 굽는 그 냄새가 좋아
집 나간 며느리도 돌아온다는
전어를 석쇠에 올리고 굽다보니
고기보다는 그 냄새에 취해
서해바다 밀물이 차오르듯 배부르고 말았다.
다른 연기는 마시면 안 되는데
전어 굽는 연기는 괜찮은 건가요.
혹시 이것도 타면서 생기는 냄새고 연기니
배이고 절어 암에 걸리지는 않는지요.
답은 지나친 걱정도 탈인
과유불급이라. 이미 나와 있는 건가요.
젓가락
강우식
젓가락으로 산인들 못 집으랴, 안 들려서 그렇지
정
강우식
내 사랑의 마술이 다 풀렸는지 아내는 그만 목숨 줄 놓았다
천 만 길 벼랑 끝으로 동백꽃 내 심장도 떨어졌다
죽음은 인력으로 붙잡아서 될 일이 아니지만
이리도 아늑한 봄날인 것은 우리네 사는 정 때문이다
종이학
강우식
오대산 월정사에서 상원사 사이
전나무들은 부처님의 허리처럼 곧추 서 있고
월정사 석탑과 상원사 동종 사이
하늘을 찌르다 비스듬히 휘어진 탑 끝과
천년 묵은 놋쇠자궁의 동종 사이
방한암 선사의 결가부좌 비슷한 한길과
경 읽다 다 닳은 팔꿈치의 굽이 길 사이
한 순간 개명(開明)하듯 눈 내려 환하다.
사이사이 산들은 모조지로 접은 종이학이다.
그대가 곁에 있어 옛날에는 마음을 모아
밤새도록 정갈히 접고 만들었던 종이학.
지금은 종이학 접어 빌어 줄 그리운 사람도,
사람도 아주, 아주 소식줄 끊겨
만드는 법도 까마득히 잊은 무명(無明)같이
칠흑의 흰 바탕뿐인 마음눈이 내린다.
오대산 월정사에서 상원사 사이
유리병 안에 천 마리 학이 갇혔구나.
그저 하얗게 저무는 경전의 말씀.
하실 말씀 더 없으신 눈이 기막히게 내린다.
내린 눈보다 내가 더 조용히 깊고 하얗게 젖는다.
죽마고우(竹馬故友)
강우식
젊었을 때는 곁에 말 걸 상대라도 없으면
세상 혼자 떨어져 사는 거 같아 싫었다.
그것보다는 늙으면 더 외롭다 하는데
딱히 그렇지는 않다.
늘 곁에 누군가 있는 것 같다.
둘러보니 없긴 없는데 있는 것 같다.
가만히 보니 죽음이다.
당연히 죽음이 날 데려갈 테니
외톨이로 살아 고독하여도 두렵지 않다.
왜 그런가 생각해보니 미리미리
죽마고우처럼
죽음에 대한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어서다.
사람이니까 죽음도 죽마고우라 부른다.
진달래
강우식
시집올 때 아내가 해온 일곱 채의 이불 중에
아직도 한 채의 진솔 이불이 남아 있습니다.
살아가다 어렵거나 아내와 다툰 날이면
우리는 이 진달랫빛 이불을 덮고 신혼 때처럼 잡니다.
창(窓)
강우식
한쪽 창에는
한 여자를 물이 되어 흐르게 녹여준
한 사내의 알몸 반신이 훤히 보이고
(인생이란 그런 게 아니지)
안 보이는 창틀 밑 절벽에서는
숯덩어리 같은
사내의 하체를 붙잡고 늘어진
여자의 절망이 춤을 추고 있다.
(인생이란 그렇기도 한 것이지)
또 한쪽 창은
문 열어둔 채 모두가 외출이다.
풍경은 없다.
하늘을 너무 닮은 바다만이
큰 몸을 자유자재로 출입하다
때로는 파랗게 기절한다.
텅 빈 것과
있는 것의
보이는 절망과
안 보이는 사물의
틈에 주저앉은
이미 창을 열 수도
닫을 수도 없게
밑창 드러난
그리고 끝이 없는
이 마지막 한 줄의 시와 같은
그저 아카시아꽃의
비릿한 바람 냄새만 맡는,
한줄기 비가 느닷없이 습격해서
잎새들의
샤워 소리를 듣고 싶은....
첫눈
강우식
별들도 총명하게 떠는 시베리아처럼 푸르게 차다
모처럼 부전지를 붙이고 싶지 않은 산뜻한 하루다
온갖 역사의 회한으로 결빙된 머리통
대포 맞은 듯 시원하게 뻥 뚫렸다. 신의 축복이다.
어둠을 송두리째 뒤집어엎는 시간이
이 국토에 조용히 진행되고 있다
지난 역사의 회한을 희뜩희뜩 불러일으키며
체제도 없이 하이얀 눈이 내리고 있다.
초록 그늘
강우식
서방님, 초록 그늘 아래 그네를 매주세요
바람 치마를 타고 그대 품속까지 가고 싶어요
저승길이라도 날아가서는 손목을 잡고 오고 싶어요
봄바람에 실린 가슴에도 마마자국 같은 꽃 돋았으니까요
초록 나무
강우식
바람이 많이 부는 제주에서는
네 것과 내 것이라는 경계로 돌담을 쌓기도 하지만
그 돌담이 바람을 막아주어 농작물을 보호하듯이
우리네 사는 집과 집 사이에는 담이 있어
서로의 경계를 이루며 살아가듯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 아내와 나 사이에,
같은 핏줄이 흐른다는 자식과 나 사이에도
벽 같은 담이 있다.
비록 금이 간 사이처럼 보이는 경계이지만
때로는 그것으로 서로 다른 벽을 쌓고
그 차이로 보다 나은 데로 가기도 하나니.
그 구별을 어찌 나쁘다고만 하랴.
나는 그 모든 경계 사이에 돌 대신
나무를 심고 살고 싶다.
나무들의 뿌리처럼 지상에 터 잡고
초록으로 경계의 담을 만들어
그 잎과 잎 사이로 바람이 소통하게 하고
때로는 다투는 소리조차도 초록 노래가 되는
내 가난한 경계는 한 그루의 나무를 심어
초록으로 흔들리며 살고 싶다.
타는 사랑
강우식
태양에 그을린 살갗이
하루나 이틀쯤 쓰려오는
팔월이면 별이 박히듯
떠오르는 여자들이 있어
아파라.
살뭉치로 와서 살뭉치로 와서
타는 사랑은
물집마다 올리브 향유나 바르며
온 밤을 뒤척이게 하고
아내 몰래 창가에서
그 옛날 여자들의 이름을 죄처럼 쓰고,
때로는 그리움으로
아픔으로 지우나니
팔월이면 어이하여 살이든지,
마음이든지
이리 불타고
살아 있다는 것이
가만히 가만히 그리운 이름들을
하나씩 떠올리듯
행복하기만 하냐
탈춤고
강우식
서시
꽃 하나로 피워 보내는
세월이야
한줌 잿더미로 사그러지리니
천년을 산 늙은 나무의
푸르른 운직임같이
산대에 올라 춤추리라.
<하나>
잠재우다 잠재우다
더러는
잠 깨어 보면서
사람이 살다 가는
저세상에도
바다만큼 한 아픔은 있어라.
마음 쓰는 그릇이야
크고 작은 건
내사 모르지마는
이 땅에도 바다만큼 출렁이는
주문을 욀 줄 아는 이
있어라.
분 바른 얼굴의 애사당같이
즈믄 봄날에 흐느끼지 않은 이
몇이오며
제삿날 차례 지내듯
제 할 일 다스리고 산 이
몇이나 되리
죽어도
이 세상 한 말씀 지킬 줄 아는 이
있어라.
<둘>
한 칸 집도 없이
사당년의 피를 받은
한 생명이 태어난
새벽에
조그마한 꽃이 피기 시작한
아픔을 들으며
쌍놈의 고전
춘향전의 한 대목을 읽었다.
그대 생애는
사랑에 맡겨지고
그대의
영원함은
죽음 속에 있으리.
신들만이 아는 새로운
시간이
모든 이웃들과 함께 떠나가네.
취발이도 왜장녀도
마당발이도
또 내가 받은
햇볕과
풀잎마저도
모든 이웃들과 함께 떠나가네.
<셋>
누가 유랑이라 하리.
내가 살고
늬가 죽고....
살아가면서 살아가면서
깨고 나면 우리는
한 줄만 탔느니.
바람을
두 손으로 가누고
무우장다리 꽃밭 옆에서나
포장을 친 잔치집 마당께에서
판을 벌이면
집이었거니.
사람들아, 사람들아
큰 상덩어리로 무너지는
한이 있으면
큰 산 덩어리 같은
장을 쳐서
흐트려주고
그대 가슴에
못다 핀 꽃이 있으면
가만히 가만히
얘기해다오.
창 잘하고
꽃 잘 피우는
남사당을 내보내마.
고을마다
장을 두고 가느니
누가
유랑이라 가느니.
<넷>
탈 난 것 있으면
춤으로 다스려 가리.
<다섯>
그러나 어이하리.
더벅머리 남사당의
괴춤에 흐르는
땀이야
어이하리.
동해나 울산 바닷가에선
제 마음 하나 다스리지 못하여
퍼렇게 멍들도록
등을 비비대는 해일을 보았거니.
허구헌 날
연약한 풀잎에도 깃든
괴로움을 보았거니.
어느 깊은 물의 줄기에서
거듭 태어난대도
남도의 봉건이여.
어느 계집이
나에게 눈을 맞추리.
그저 외딴 섬처럼
파랗게 질려 있거나
천겹 만만겹으로 찢기는
파도의 아픔
비늘 돋친 한 마리 배암이나 되어
그저 꿈틀댈 수밖에 없는
이 서러운 피를
어이하리.
<여섯>
한잔 술로서 취하고 싶은 건
어이 꽃 두고 태우는
가슴뿐이랴.
동지나 섣달 날 새우듯
그렇게
세월을 보내왔거니.
화냥기 있는 계집의 몸매처럼
휘휘 늘어진
수양버들 사이
각시방 영창마다
달이사 떠서
몸도 마음도 어지러이 떠다니다
산 덩어리 같은 괴로움으로
밀물짓거든
취발이, 취발이여
어느 꿈길에 가더라도
들려오도록
한순으로 한순으로
날라릴 불어라.
<일곱>
도화 도화
도화살이 끼인 가슴은
육자배기로 풀어보리라.
내 가슴 속 넓은 벌판에 심어진
꽃나무에 피는
수억만 개의
복사꽃.
크기로 치면
처녀애들 젖꼭지만큼 한
내 전생으로는 지울 수 없는
마약이여.
저승에 가서나
어떨지 몰라.
이녘의 밤일랑 다 자고 깨고 나야
어떨지 몰라.
육자배기로 풀어보리라.
무릎을 치며
내 도화살 낀
사랑을 풀어보리라.
<여덟>
줄타기하듯
딴 계집에게 정주는
서방 만난 거
이것 다 타고난 팔자거니.
잘 체념하던 가슴의
아내도
다스릴 수 없는 게 있어라.
몇억만 자의 깊이에서 떨어지는
햇볕을 불러들이고
뜨거운 바람으로 문질러가며
어드런 계집도 볼 수 없는 데서
만들어지던
탈이 있어라.
이 어찌할 수 없는 타고난
피가 있어라.
<아홉>
탈을 만들다 지쳐
잠든 밤이면
꿈결에서 이빨을 간다.
이 탈만 만들면 보자.
뜬 눈으로는 못 갈던
이빨을 간다.
잠자면서 가는
이빨 소리
이젠 괜찮겠지.
마음 놓고, 마음 놓고
정신병원에 갇힌 놈씨 되어
히히대며
제정신이 아니게
이빨을 간다.
양반집 담을 헐어 뜯는
쥐소리를 내며
이빨을 간다.
탈을 만들다 잠든 밤에
이빨도 다 갈리고
붉은 잇몸만 남아
웃는 녀석을
꿈속에 본다.
그런 녀석을
꿈의 현몽으로나 알아
탈로써 만든다.
<열>
스무 명쯤의
첩을
거느리지 않은 이 없는
이씨 왕조여.
그건 다 시녀라는 건가.
밤마다
연등에 불 밝혀 가며
계집을 불러들이던
절터여.
양반에게
아내를 빼앗긴
머슴의
말 아니라도
세끼 밥줄에 명을 잇는
세상은
구중궁궐
높드란 돌담 같다만,
캄캄한 가슴 갖고도
한바탕 웃고 싶구나.
눈끔적이처럼
먹중처럼
옴처럼
어느 탈이나
하나 쓰고
눈물 나는 때는
질탕하게 웃어보고 싶구나.
<열하나>
육신도 제 뜻대로
못 죽는
세상이지만
말음만은 남아서
저승엘 가
아프게 꽃져 보고 싶으이.
처녀 귀신도
목매달지 않는다는
남사당의 댕기 옷고름.
열아홉 씨알 같은
사랑을 묻어버리면
시뻘건 혓바닥도 가로누워서
이승의 숱한 모래알
하나 씹지 아니하고
뼈다귀도 뼈다귀도
그대로 있는
생피에 생살로
아직도 있는
가을 산에 올라
목이나 놓아가며
울고 싶으이.
<열둘>
탈을 잡지 말라고
내리치는 태장으로
이 천한 살점을 달라 하면
주어버리고
무슨
탈이 그렇게도 많냐고
장죽을 문 서슬 푸른
호령 앞에서도
이 세상 그저 무심코련 듯
지나치는 바람 소리로
웃어버리고
탈 하나때문에
계집을 빼앗기고, 자식을 잃어도
그저 허허 웃어버리고
탈이야 늬놈들이 잡는
탈.
그것도 말로는 못하고
몸짓으로만
그저 시늉해 버리고
탈 하나 때문에
그렇게 살다 간
탈 많은 사람들....
<열셋>
탈들은 다 어디 갔을까.
한도 없이
산다는 게 겁이 나네.
뜬 눈으로
밤새운다 해도
대웅전 그 넓은 뜨락도
여자도 보이는 게
하나 없고
마음에 짐 될 것도 없이
세월을 가는
끝없는 바람 소리뿐이다.
내 귀신의
뒷바래질이나 하듯이
이어온 가락뿐이다.
황촛불처럼
찌르르 녹아지던
구곡간장.
목 조아리며 살아온
이 세상을
내 대신 침 뱉어 줄
탈들은 다 어디 갔을까
페테르부르크의 백야
강우식
여름궁전 분수의 화려한 물줄기도 끊어졌다.
한 여자의 날카로운 비수에 찔려
이제는 삼류가 되어버린 오페라의 한 장면처럼
가슴이 찢어져 피를 철철 흘리며 죽고 싶은
꿈에 잠긴 한 사내가 백야의 거리를 걷는다.
수많은 종교문답은 있었으나 무엇 하나 구원은 없고
죄 아닌 것이 죄가 되는
카라마조프의 형제들같이 이해할 수 없는 백야다.
먹장 신비 속의 별들도 다 사라진 페테르부르크의 백야다.
푸시킨은 바람난 아내 때문에 결투를 신청하고
격정의 생을 마감하였다. 어리석도다.
삶이 그대를 속였구나.
항구의 골목에는 결투를 신청할 필요도 없는
밤의 꽃들도 더러 눈에 띠나
나는 사랑할 수가 없다.
낮과 밤의 경계도 없는 미망인데
사랑에 무슨 만남과 이별인들 있겠는가.
러시아여, 러시아여, 러시아워처럼 분주한 러시아여!
나는 망명한 백계러시아의 여자처럼
눈 덮인 고향의 벌판을 못 잊어
이국의 어둡고 침침한 복도에 달린
백열등 알전구의 얇은 유리를 손톱으로 으깨며
뼈가 저리도록 흰 눈길을 걷듯
향수를 달래던 소리를 듣고 싶구나.
고향을 떠난 망국의 백성들은 그저 허무를 안고
눈동자가 없이 희부옇게 눈을 뜨는 밤이다.
혁명은 이 도시에 와 화려함을 맛본
톨스토이나 레닌에게서 싹텄다.
혁명 때문에 망한 사람도 있고
깃발처럼 펄럭이는 사람도 있다.
혁명은 낮인가 밤인가.
혁명은 곧장 선동을 앞세우지만 음모의 밤이다.
밀약과 같은 음모가 없이
어찌 선동 선전이 이루어지겠는가.
나는 이런 날에는 어쩔 수 없이
에미르타쥬 겨울궁전에 가서
역대 러시아 황제들의 초상화를 본다.
잘 다듬은 콧수염의 사내들과
한결같이 풍만한 가슴의 황비들을 본다.
그 속에는 남편을 죽이고 여제가 되어
스물두 명인가 세 명의 남자를 품에 안은
에까제리나 여제도 있다. 슬프지만
어머니의 품에 안길 수 없는 나는
남자를 에까제리나보다 더 잘 아는 창녀의 품에 안기리라.
러시아여, 러시아여, 마야코프스키만이 혁명아이더냐.
백야의 밤일수록 오로라를 꿈꾸는 사람들은
오로라의 꿈에 젖은 창녀들처럼 혁명은
빵을 베개로 삼고 자더라도
페테르부르크 항구에서 꽃을 피우리라.
하지만 밤은 밤답게 오지 않았고
새벽은 밝지 않았다.
새벽은 알에서 깨어나듯 밝지 않았다.
죄 없이 돌아서는 사람 누가 있으랴.
써도 써도 남는 죄 같은 백야만이 있구나.
이해할 수 없는 백야와 같이
이해할 수 없는 아름다움으로 세워진
페테르부르크다. 봄이 와 꽃 피듯이
아름다움은 때로는 한 치의 오차도 없는
무자비한 노동의 착취에서부터 오고
혁명은 그 판을 뒤집는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
어김없이 찾아오는 백야와 같다.
미망의 깨우침이다. 깨우침의 미망이다.
늪지는 늪지대로 그냥 두는 것이 낫다.
저편 어디에는 아직도 뒤척이며 잠들지 못하는,
잠들지 못하는 사람들의 뜬눈의 괴로움이
오늘도 잠들지 못하는 정교회 예수와 같이 있도다.
폭포
강우식
폭포는 높은 단계의 수평에서
그 아래 낮은 단계의
수평으로 흐르기 위해 떨어지며
죽음의 찰나에도 온통 포말을 날려
환희의 기쁨으로 넘친다.
물처럼 몸을 바꾸며
어디든 적응 잘하는 게 없다지만
물처럼 한 번 길이 정해지면 길대로 가는
결단력을 보이는 것도 흔치 않으리.
폭포는 경천동지하도록 끝장내고자 하는,
끝장내고자 하는 산화의 몸짓.
그리하여 얻게 되는 희디흰 포말의 경구
죽고자 하면 살게 되고
살고자 하면 죽게 될 것이다.
햄릿의 죽느냐 사느냐 이것이 문제로다 보다
더 결단 있는 소리로 힘차게 살아서
높으면 높은 대로 낮으면 낮은 대로
깊고 얕음을 가리지 않고
굽이치고 휘돌아 유유히 흐르는
상선약수 율(律)의 맥을 보느니.
물은 스스로가 사즉생 생즉사하며
비류직하 삼천 척의 몸짓으로
어떻게 살다 가야 할지를 아는 것 같다.
풀밭
강우식
고향에 오니 비로소 풀밭이 보인다.
여관방 이부자리 같지 않게
돈 안주고 잘 수 있는 풀밭이 보인다.
내 눈에 아직 이런 것 보이는 게 즐거워라.
풍경
강우식
하늘이 너무 많이 보이는
대흥사 추녀 끝
바다가 너무 많이 보이는
낙산사 추녀 끝
하늘도 바다도 고색 창연한
물결이랑에서
어린 고기 한 마리
천연히 놀고 있다.
새순 돋듯 한 낡은 기와의
파릇한 이끼라도 입질하는 듯……
하나님
강우식
아내를 사랑할 때는 당신을 찾지 않습니다.
아내를 잃으니 하늘에 닿는 슬픔에 당신을 부릅니다.
한
강우식
지난 세월 아내에게 넘치고 차도록 받기만 했다.
이제 그 사랑, 되돌려 주려 하니 줄 임자가 없다.
항로
강우식
여자라는 무거운 짐을 싣고서
난바다를 가는 듯 안 가는 듯 가는
컨테이너 화물선 같은 사내.
사랑 때문에 가끔 뱃고동 소리처럼
목젖 떨려도 묵묵히 가야 할 항로가 있다.
해물파전
강우식
철퍼덕 뜨거운 번철에 퍼질러 누워서 그도 저도 나도 모르겠노라 속까지 다 까발린 누울 댁이 해물파전밖에 더 있는가. 눈 오는 크리스마스이브 날이었다. 천리 먼 길을 온 여자가 내 곁에 바다가 보고 싶다며 해물파전처럼 누웠다. 내가 바다였던가. 유부녀였다. 유부녀라는 발음에는 유부두부 같은 아니 번철에 기름 두르고 굽는 파전 냄새가 난다. 그녀는 목욕탕에서 갓 나온 김이 무럭무럭 나는 알몸에 팩을 하고서 이리 뜨겁게 타고 있는데 이리저리 뒤집다가 한 판 안 먹을 수 있는지 보자며 나보다 한 수 더 뜬 바다가 되어 누워 있었다.
흙
강우식
일생 땅 한 뙈기 가진 것 없어도
내 죽어 누군가의 흙이 되다니 고맙다.
1998년 겨울 정동진
강우식
밤새 달려온 새벽 열차의 불빛이
이 조그마한 간이역을
파도보다 먼저 깨운다.
해돋이 보러 온 사람들은
펭귄의 무리처럼
바닷가에 일렬횡대로 서 있다.
라면발처럼 발 아래 휘말려오는
파도 위에
떠오르는 해를 얹어서
아침 허기를 달래기 위해서다.
군데군데 있는
미명의 포장마차에서는
훈훈한 김이 인정스레 피어오르고 있으나
늘 개점휴업이다.
‘역사(驛舍) 같은 그녀’라며
이 정동진역을 누구보다 사랑했던
시인 김영남만이
북새통이 되어버린
바닷가를 등진 채 앉아
소주잔을 외롭게 기울이고 있다.